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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날로 커지는 산불… 낡은 산불헬기부터 바꿔야

의성산불이 발생한지 닷새째 되던 26일 낮 12시 51분쯤 의성군 신평면 교안리 야산에서 진화작업에 투입된 헬기가 추락하면서 조종사 1명이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헬기는 강원도 인제군 소속의 S-76B 기종으로 의성산불을 지원하러 왔다가 사고를 당했다. 헬기는 사고 현장에서 소화수를 담는 과정에 추락한 것으로 전해지나 정확한 사고 원인은 조사해 봐야 알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사고헬기의 기령이다. 이 헬기는 1995년에 생산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노후헬기 교체 문제가 또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통상 헬기는 운항기간이 20년이 넘으면 경년 항공기로 분류해 국토부가 특별관리를 한다. 당국이 안전관리를 강화하고 있지만 노후문제가 여전히 논란이 된다. 2000년 이후 국내에서 산불을 진화하던 헬기가 추락한 사고는 12건이며 25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회 신정훈 의원(민주당)이 산림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의하면 2023년 기준 산림청 보유 헬기의 가동률은 67%다. 각종 고장과 정비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산림청 보유 헬기 48대 중 31대는 20년을 초과한 헬기로 밝혀졌다. 기후변화로 산불 발생은 빈도가 잦고 대형화 추세를 보이나 산림헬기의 노후화와 기체 결함 등으로 산불진화 작전이 효율적으로 수행되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일부 지자체가 임대한 헬기 가운데는 기령이 50년이 넘은 것도 있어 노후 헬기교체를 위한 정부의 종합적인 대책이 있어야 한다. 또 차제에 소형 헬기를 대형 헬기로 점진적으로 바꿔 진화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지난 중앙재난대책본부 회의에서 “작은 헬기로는 초기진화가 어렵다”며 대형 살수가 가능한 2∼3만리터의 선진형 수송기 도입을 요청한 바 있다. 산불이 대형화되면서 피해액도 천문학적으로 커졌다. 피해금액을 생각하면 신형헬기 도입이 오히려 경제적이다. 산불 진화에 대한 패러다임부터 바꿔 효율성을 높일 때다. 그래야 노후 헬기사고도 줄일 수 있다.

2025-03-27

기우제

우정구 논설위원 기우제는 가뭄이 오래가면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비는 국가나 마을 단위의 제례 의식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왕이 몸소 기우제를 올렸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나 하면 조선왕조실록에는 음력 매년 4월에서 7월 사이에 기우제를 거행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에는 기우제가 중요한 의식의 하나로 여겨졌다. 기우제 기간에는 국왕과 백관들은 근신을 했다. 국왕은 정전이 아닌 바깥에서 정무를 보고, 임금의 수라상 반찬 가짓수도 줄였다고 한다. 도룡뇽 기우제라는 게 있었다. 도룡뇽을 비바람을 일으키는 용의 일종으로 보고 그를 향해 기도 드리는 방식이다. 단지에 도룡뇽을 담아놓고 아이들에게 “비를 내리게 해주면 풀어준다”는 식의 주문을 하게 하는 의식이다. 벼농사를 주업으로 살아가는 우리나라는 기우제를 어떤 제례의식보다 중시했다. 그 종류도 많고 제사 대상의 신도 많다. 묘파기, 디딜방아 훔치기, 물병 거꾸로 달기 등이 기우제에 동원된 풍속물이다. 디딜방아는 곡식을 찧는데 쓰는 농기구지만 사람의 힘이 가장 많이 축적된 기구란 뜻에서 의식의 도구로 잘 활용된다. 마을에 따라서는 훔친 디딜방아를 마을 입구에 거꾸로 세워두고 악귀와 질병을 쫓았다고 한다. 미국 인디언들이 지내는 기우제는 반드시 비가 온다는 속설이 있다.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게 아니고 기우제를 한번 시작하면 비가 올 때까지 하기 때문이다. 의성에서 시작한 산불이 경북 북동부 산간 농촌마을을 초토화 시켰다. 비가 와야 불길을 잡을 것 같은데 온 국민이 기우제라도 지내야 할 형편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3-27

의대생 제적 임박… 醫協이 나서서 해결하라

지난 21일 경북대에 이어 영남대와 서울대, 부산대 의대 등이 27일까지 의대생들에게 1학기 등록을 하도록 했다. 계명대, 대구가톨릭대, 동국대 와이즈캠퍼스 등 이 지역 다른 의대들은 이달말까지가 복학신청 마감 시한이다. 현재까진 전국 모든 의대의 학생 복귀가 순조롭지 않은 모양이다. 이미 등록시한을 넘긴 경북대와 고려대, 연세대 등은 절반 정도가 복귀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경북대는 지난 21일까지 복학원을 제출하지 않은 의대생들에게 최근 제적 예정 통보를 했다. 학교측은 해당학생들에게 문자메시지를 통해 “오는 4월 8일까지 등록을 하지 않거나, 수업일수 4분의 3선(5월 26일)까지 질병·육아·군휴학을 신청하지 않으면 제적에 관한 행정 절차가 진행된다”고 통보했다. 경북대는 현재 복학원을 제출한 학생수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연세대도 전체 의대생(881명) 중 398명에게 제적 예정 통보서를 보냈으며, 고려대는 오늘(28일) 제적처리를 할 방침이지만, 학부모들의 복귀문의가 쏟아져 복학신청을 한시적으로 받아줄지를 검토하고 있다. 서울대 의대생들은 지난 26일 복귀 여부를 놓고 투표를 진행했는데, 65.7%의 ‘등록찬성’ 결과가 나와 다른 대학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의대 학장단이 최근 학생들에게 보낸 편지처럼, 전국 모든 의대가 이달말까지 복학신청을 하지 않으면 학교 측은 학생들의 제적을 막고 싶어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정부방침과 학칙, 학사운영 규정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의료계 요구사항이 모두 관철되진 않았지만, 정부가 내년에는 의대증원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만큼 학생들도 이제 강의실에 복귀하는 것이 맞다. 특히 의대생 집단행동을 이끄는 의사협회와 전공의 협의회도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학생들을 도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의사협회 내에서도 “의협회장과 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이 아무것도 안하면서 ‘탕핑(드러눕기)’만 한다”는 비판이 나오지 않는가. 자기 자식이 의대생이라면 이러한 무책임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2025-03-27

‘괴물 산불’에 당하고 보니

윤영대전 포항대 교수 예기치 않았던 대형 산불이 영남지방을 불태우고 있다. 지난 21일 경남 산청에서 발생한 산불은 지리산 기슭까지 파고들었고, 22일 경북 의성에서 성묘객의 실화로 시작된 대형 산불은 6일째 강풍을 타고 안동 청송 영덕까지 산과 마을을 까맣게 태우고 있으며, 25일 울산 울주군에서 일어난 2건의 산불은 거의 진화된 상태이다. 이들 산불로 인한 인명 피해는 진화 대원을 포함한 사상자가 50명을 넘었고 피해 면적 또한 역대 최고로 기록되었다. 산불을 진화하던 헬기가 추락하여 기장이 순직한 안타까운 일도 있다. 지난주에는 폭설이 쏟아져 붉은 설중매가 아름다운 봄날을 노래했었는데 이번 주에는 강풍을 타고 ‘괴물 산불’이 영남지역을 할퀴고 있으니 이 무슨 난리인가! 산불은 70% 이상이 소소한 실수로 인한 화재이다. 이번 산불도 비가 적게 내린 3월에 바싹 마른 낙엽이 쌓인 숲을 태풍급 바람을 타고 넘어 마을을 덮쳐 인명 피해도 엄청나다. 산림청은 산불 재난 위기경보 ‘심각’ 단계를 발령하고, 정부는 해당 지역에 ‘재난 사태’를 선포하여 헬기 130여 대와 진화인력 4600여 명을 투입하여 산불 끄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불길은 커졌다 줄었다하며 마음을 태운다. 가장 심한 곳은 경북지방,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은 고운사의 가운루 등을 전소시키고 강한 남서풍을 타고 안동까지 타들어 가서 하회마을과 문화유산을 화재 위험에 빠트리며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문화유산 대피작전’을 펴게 했다. 산청 산불은 하동의 900년 된 은행나무를 불태웠고 영양 답곡리 산불에 400년생 만지송은 무사했지만 국가 자연유산 피해도 크다. 의성 산불이 안동까지 번지는 데는 이틀밖에 걸리지 않는 등 불붙은 나뭇가지나 솔방울 같은 도깨비불 비화(飛火)에 대한 행정 당국의 대응이 미숙했을 수도 있다. 수시로 안내문자를 보내어 주민 대피를 유도했지만 대피 장소의 알림이 확실하지 않고 주로 학교, 경로당, 마을회관이지만 먼 곳일 수도 있어 인명 피해가 큰 듯하고 거의 기동이 힘든 7080대 노인들이다. 이웃을 구하려던 영양군 이장 부부, 영덕 매정리 실버타운 입소자 3명이 이동 중 화염에 차량이 폭발하여 사망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약 2만8000명의 주민들이 대피소에서 어려운 날들을 보내고 있으며 안동과 영덕은 전 주민에 대피명령이 내려져 있고, 건물도 300동 이상이 타버렸다. NASA 위성 관측 사진에도 우리나라 3곳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가 선명하고 산불 현장 항공 사진에는 산이 온통 새까맣다. 이렇게 산불이 확산하는 이유를 건조한 기후, 숲의 발화성, 지형적 요인들을 꼽을 수 있겠지만 숲 가까운 건축물의 난연성 구조도 고려해 봐야 될 것이다. 또 주민들이 고통을 겪는 정전과 단수(斷水), 휴교, 철도와 고속도로 운행 중단에 대한 신속한 대응 지침도 마련되어야 한다. 산불 발생을 막아주는 큰비 소식은 거의 없고 다음 주부터는 맑은 날들이 계속된다니 반갑지만은 않다. 곳곳에 예정된 봄꽃 축제도 이번 대형 산불로 마냥 힘을 잃을 것만 같아서 좀 섭섭한 마음이다. 하늘이시여, 봄비를 흠뻑 내려주소서….

2025-03-27

불 켜진 창

윤명희 수필가 안막커튼까지 쳤다. 옅은 빛마저 사라지자, 시간의 소리도 멈추었는지 고요하다. 새벽 2시가 지나갔는데도 감은 눈이 아프다 못해 시릴 뿐이다. 잠이 들어야 할 자리에 뜬금없이 그녀가 들어온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프로필에서 만났던 앳된 모습도, 그녀가 쓴 소설의 제목 또한 기억에 없다. 단지 조금은 특이했던, 아니 내 취향과는 다른 디자인의 책 표지만 생각날 뿐이다.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불을 켜자 싸늘한 기운이 덮친다. 겨우내 난방을 하지 않은 그 방은 서재라기보다 창고에 가깝다. 책장 앞에 놓인 잡동사니들을 치우고 그 표지를 찾아 책 사이를 더듬었다. 그녀는 30년도 더 전, 대학생이었던 막냇동생의 동기생이었다. 얼굴 한 번 마주 한 적이 없었지만, 동생이 건네준 책의 저자라는 이유로 꽂아두었다. 다 읽었는지,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책이 아니라 그녀의 열정이었던가 보다. 대학생이 장편소설책을 낼 만큼 뜨거웠던 그녀를 내 마음만큼이나 차가운 방에서 찾고 있다. 찾는 것은 보이지 않고, 손끝에 낡은 책 세권이 걸린다. 여고 때, 해마다 받아 둔 문예지다. 표지가 세월에 끌려 다니느라 나달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 책을 펼쳤다. 빛바랜 책장이 누렇다 못해 짙은 갈색으로 가고 있다. 간신히 붙어있는 책갈피가 흩어질까 조심스레 넘기다 문득 한 친구가 생각났다. 걔가 문예부였던가. 갈래머리 여고생이었던 우리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가을 산은 나무마다 꽃불이 난 것 같았다. 온 산을 뒤덮은 붉은 색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탄을 쏟아냈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함성이 단풍을 타고 산을 올라갔다. 나의 언어는 너무나 빈약했다. “아!”라는 단발마적인 감탄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을 뿐, 다른 어떤 표현도 하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친구가 눈물을 퍽 쏟았다. 나는 발까지 동동 구르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깊은 곳에 있던 감성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서러워 울음이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말보다도 더 명확한 감정 표현이었다.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설악산과는 뗄 수 없는 존재로 남아있다. 책 세권을 다 훑어봐도 그녀의 이름이 없다. 그녀가 문예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는 아니었더라도 지금은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인터넷을 뒤졌다.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소설책이나마 꼭 찾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다시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맨 아래 한 귀퉁이에 기억속의 표지가 보였다. 프로필의 사진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인터넷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 헤맸다. 지금도 소설을 쓰고 있는지, 단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설 외에 더 이상의 책은 없었다. 내가 이 시간에 그들을 찾는 이유를 생각했다. 매년마다 찾아오는 봄이 올해는 유난히 더 어지럽기 때문일까. 이 밤, 훅 치고 들어오는 봄을 감당하기가 힘들다는 게 이유였을까. 나이 든다는 게 익어간다고들 하지만, 내겐 그 홍시 같은 말랑함이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 같다. 설악산에서 울었던 그녀가 생각나는 건 내 속에서 꺼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어서일까. 쳇바퀴 도는 일상 속에서, 퇴근하면 소파에 누워 자반뒤집기나 하는 내게 무슨 열정이 찾아들겠는가. 그나마 있었던 것도 시나브로 빠져나가 찌그러진 동그라미가 된 것 같다. 지금 나는 그 동그라미로 세상을 참 힘겹게 굴러가고 있다. 책장 앞에 있는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청소기 소리를 내지 않으려 걸레를 빨아 책장을 닦는다. 엎드려 방을 닦다 문득 그녀들도 나처럼 사그라져가는 것들을 아쉬워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멈췄다. 감성과 열정의 그녀들을 나와 동격화 시켜 놓으니 왠지 미소가 지어졌다. 책상을 닦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밤, 불이 오래 켜져 있었다. 짙은 어둠이 골목 사이로 물러날 때까지.

2025-03-26

송도 방파제

파도를 탓할 수 없으니 아울러 바다도 탓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경계가 아니라 이어짐이다 다만 본질에 충실하면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송도바다 방파제 잠방잠방 윤슬과 대화하며 가장 독한 소주로 가장 황홀한 해산물을 얻어먹던 놀이터가 없어졌다 생업에 충실하며 눈매가 선한 그 아지매는 공부하라고 눈 흘기며 그래도 늘 다독여 주었다 아마 세상의 다른 곳에서 여전히 생선을 썰고 있을 것이다 죽도록 반성해야 할 일이다 포항제철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송도는 송도인데 송도 아님이 상심스럽다, 그리운 송도. 스무 살 무렵 송도 방파제에는 포장마차가 많았다. 방학 때마다 각지에서 모인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를 마셨다. 가난한 주머니를 우려한 단골집 아지매는 넘치게 해산물을 썰어주셨다.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많이 베풀며 살라 하셨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이다. 매운 칼질 솜씨며 선한 눈매가 가끔 그립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3-26

좀비, 괴물, 악마로 변한 산불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사실 관계를 다루는 신문 사회면 기사는 어지간해선 은유나 상징, 비유의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 게 묵시적인 불문율이다. 그럼에도 발생한 사고나 사건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하게 큰 피해를 야기하는 경우엔 간혹 그 약속이 깨지기도 한다. 5일 넘게 경상북도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는 ‘의성 산불’은 산림 파괴와 주택 소실이라는 재산 피해와 함께 적지 않은 인명 피해까지 낳았다. 인간의 목숨은 무엇보다 귀한 가치다. 화마에 희생된 사람의 가족들 심정을 떠올리면 참담한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의성에서 시작돼 인근 안동시와 청송군, 거기에 영양군과 영덕군까지 위협한 이번 산불을 신문과 방송에선 ‘괴물’ ‘악마’ ‘좀비’ 등으로 지칭하고 있다. 기자들이 의인화(擬人化·사람이 아닌 걸 사람에 빗대 표현하는 것)된 문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참혹한 상황이 짧지 않은 시간 계속됐다. 불이 난 지역의 주민들은 물론, 어려움 속에서 화재 진압에 나선 소방대원과 공무원을 무시로 겁박하고 있었으니 경북 일대를 공포와 공황 속에 빠뜨린 이번 산불을 좀비, 악마, 괴물로 부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화재로 인한 매캐한 연기와 살인적인 열기는 피어나는 화사한 꽃들 속에서 내일의 희망을 설계해야 할 경북민들의 봄까지 빼앗아갔다. 주저앉아 울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히 지속되는 고통은 없는 법. 조속한 진화와 철저한 재발 방지책의 수립으로 다시는 이런 절망과 피폐의 시간이 오지 않길 바라는 게 우리 모두의 간절한 바람이 아닐까.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3-26

이재명 항소심 무죄… ‘정치적 날개’ 달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형사6-2부는 26일 오후 2시 이 대표의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해 11월 15일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지 131일 만이다. 이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인용되고 조기대선이 치러질 경우 이제 홀가분한 상태에서 선거를 치를 수 있게 됐다. 이날 항소심 재판부는 1심에서 유죄로 인정한 이 대표의 발언 모두를 무죄로 봤다. 1심과 마찬가지로 항소심에서 검찰이 허위사실 공표혐의로 기소한 이 대표의 발언은 3가지로 요약된다. 2021년 10월 국정감사장에서 국토교통부 협박으로 백현동 부지용도를 상향조정했다고 한 부분, 2021년 12월 방송에 출연해 ‘고 김문기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처장을 성남시장시절 몰랐다’ ‘2015년 호주출장때 김씨와 골프친적 없다’고 말한 부분이다. 법원은 이날 3가지 모두에 대해, ‘허위사실 공표죄가 아니다’ ‘단순한 의견표명’ ‘사진이 조작됐을 수 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1심 재판에서는 정치인의 거짓말은 사소한 것이라도 선거의 공정성을 해칠 수 있고, 특히 국정감사장에서 한 거짓말을 법원이 허용한다면 삼권분립의 원칙을 흔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높은 형량을 선고했지만, 항소심에서는 이를 모두 무죄로 판단한 것이다. 이 대표에 대한 선고결과는 앞으로 윤 대통령 탄핵사건과 맞물려 정국에 큰 파장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날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음에 따라 이 대표는 이제 ‘정치적 날개’를 달게 됐다. 윤 대통령 탄핵안이 인용돼 조기대선이 치러질 경우 사법리스크 없이 선거를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선거법 사건 외에도 대장동, 쌍방울 불법 대북 송금 등 8개 사건 12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지만, 조기대선 후보자격과는 무관하다. 특히 그는 ‘일극체제’라 불릴 정도로 당을 장악하고 있어, 이번 재판결과로 당내 다른 대선주자들이 동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2025-03-26

상식이 무너진 나라, 누가 구해야 하나

장규열 고문 법관이 법을 구부려 판결을 내렸다. 국민이 법을 믿을 수 있을까. 검사가 본분을 저버리고 범죄를 외면했다. 그 검사가 지킨다는 정의를 신뢰할 수 있을까. 관료가 법률을 위반하고도 파면되지 않는다. 나라의 일머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헌법수호를 선서한 대통령이 헌법을 가벼이 보고 국민을 힘들게 한다.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을까. 나라가 휘청인다. 법과 정의가 무너지면 국민은 절망과 불안의 나락에 떨어진다. 공인이 사익을 위해 법을 어기는 순간, 법은 더 이상 법이 아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제멋대로 법을 해석하고 운용하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국민을 주권자라 적었던 헌법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린다. 법은 나라의 기둥이지만 상식의 최소한이다.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져야 하고,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법관이 권력이나 사익에 따라 판결을 달리한다면, 법을 지키는 것이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특정 세력에 유리한 판결이 계속된다면, 법이 신뢰를 잃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닐까. 검사는 범죄를 단죄하는 자리다. 본분을 저버리고 불법에 눈을 감으면 정의와 상식은 설 자리를 잃는다. 검사가 권력의 비리를 덮고 특정세력에게만 법의 칼을 휘두른다면 국민이 공정을 기대할 수 없다. 검찰이 정치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국민이 바라는 법치는 무너져 내린다. 관료들도 마찬가지다. 법과 제도를 따라야 할 행정기관이 오히려 법을 왜곡한다면, 나라의 행정이 온당하게 돌아갈 수가 없다. 편법과 일탈이 용인되면서 그릇된 관행이 자리를 잡고 결국 법치행정은 허울만 남는다. 헌법재판소의 최종판결을 따르지 않으면서 국민에게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르라면, 누가 귀담아 듣겠는가. 정점에 선 대통령이 헌법을 어겼다면 어찌 되는가. 국민 앞에서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엄숙히 선서했던 대통령이 헌법을 무시하고 법 위에 군림하려 했다면 나라가 어디로 향하게 될까. 민주공화국의 뿌리가 흔들리고, 국정운영의 원칙이 무너지지 않을까. 대통령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누구에게 법을 지키라 요청할 수 있을까. 이런 일들이 중첩되면서 국민은 좌절과 체념을 겪는다. 냉소가 퍼지고, 불법과 비상식 일상이 되어간다. 공정한 사회를 기대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되면서 국민도 점차 불법을 용인하고 불공정을 감내하게 된다. 헌법과 법률이 있지만 작동은 멈춘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산천에 불길이 솟는다. 국민의 분노가 불길처럼 솟구쳐 오른다. 비정상이 계속되면서 상식이 사라지고 공정한 세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몰아치는 산불에는 비라도 기다린다. 불공정과 비상식에는 비마저 기대할 수가 없다. 국민이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부정과 불법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국가와 사회가 정상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면 주권자 국민이 깨쳐야 한다. 불법과 비리를 용인하지 않고 법과 정의를 지키려는 국민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나라를 지켜낸 위인들을 역사에서 찾지만, 실은 이름없는 국민들이 스스로 지켰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다시 갈림길에 선 대한민국의 역사를 구해야 한다. 나라가 역대급 기로에 섰다. 국민이 편안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국민이 깨어야 나라가 산다.

2025-03-26

의성산불 총력 대응해 인명 피해 막아야

의성에서 발생한 산불이 5일째 이어지면서 안동과 청송, 영양, 영덕, 봉화까지 불길이 번지면서 핼기 조종사를 포함 경북도내서만 16명이 사망하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26일 중앙재해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경북에서 16명, 경남에서 4명 등 이번 영남지역 산불로 모두 20명이 사망했다. 부상자는 현재 19명으로 파악되나 시간이 지나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작은 부주의에서 시작한 산불은 건조한 날씨에 강한 바람을 타고 빠르게 번져 26일 오전 경북 북동부지역에서만 주민 2만7000여 명이 대피하는 대혼란이 벌어졌다. 인구 2만3000명의 청송군은 1만여 명의 주민이 대피해 군민의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집을 빠져 나왔다. 그 밖에도 영덕, 안동, 의성, 영양 등에서도 수천 명이 대피소를 찾는 바람에 수용 시설이 부족할 지경이다. 이번 산불로 의성의 천년고찰 고운사가 전소되고 영덕의 천연기념물 소나무 만지송도 전소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6일 오전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안동 하회마을 앞 5㎞ 지점까지 화선이 도달해 당국이 비상 대기 중이라 한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불길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와 천연자원들이 마구잡이 파괴되고 있다. 지금이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 특히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 대피 등 당국의 신속하고 세밀한 대응이 필요하다. 한덕수 대통령 대행 국무총리는 26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산불 피해가 우려된다”며 “이번 주 남은 기간 산불진화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불법 소각 등은 법령에 따라 엄벌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당국은 그동안 헬기 100여 대와 1만명 이상의 인력을 동원해 산불 진화에 나서고 있으나 의성 산불의 진화율은 아직도 60% 정도에 그치고 있다. 27일 약간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고돼 이날 완전 진화할 수 있도록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사망자 대부분이 고령의 노인들이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은 문자를 받더라도 자력으로 대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노인들의 안전관리에 특별한 신경을 써야 한다.

2025-03-26

길을 잃을 용기

어른이 된 후로는 지도를 보며 길을 찾을 일이 별로 없다. 내비게이션이 알아서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을 안내해 주기 때문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늦을 일도, 위험한 일도 없다. 하지만 어쩌면 머릿속 지도는 점점 길을 잃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교회 수련회가 있던 날이다. 겨울 수련회였기 때문에 바깥의 날씨는 매서웠다. 찬바람이 뺨을 스치고 숨을 들이마시면 폐속까지 시린 기운이 퍼졌다. 하지만 고등학생 아이들은 세상의 방향과 늘 반대인 듯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생각과 어긋나고 가야 할 길 위에선 되돌아가기가 일쑤고 자기만의 셈법으로 어른들과의 갈등을 자아내는 아이들과의 수련회 날이었다, 도착지에 와야 할 4명의 아이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단체로 이동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온다는 아이들이었다. 잠시 후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경찰이었다. 아이들은 교회 선생님도, 부모님도 속이고 30km가 넘는 길을 자전거를 타고 온 것이다. 추위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주라는 듯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고 낄낄대며 출발했다. 목적지만을 보고 열심히 달렸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며 완벽한 일탈을 즐기며 젊음의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은 ‘안전한 길’이 아닌 ‘빠른 길’을 가르쳐 주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고속도로에 들어서 있었다.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 위에서 아이들은 한껏 내려간 수은주만큼 꽁꽁 얼어붙었다. 한편으로는 마치 어른들만의 전유물인 도로를 자신들이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짜릿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야, 여기 맞아?” “모르겠어! 근데 지금 돌아갈 수도 없어.” 순식간에 사태는 심각해졌다. 차들은 경적을 울려대고 아이들은 겁에 질려 앞만 보고 달렸다. 어딘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났다. 경찰이 출동했다. 아이들은 갓길에서 붙잡혔다. 지나가는 차들은 경악했고 경찰은 잔뜩 굳은 얼굴로 아이들을 쏘아봤다.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희 무슨 생각으로 여기로 들어온 거야?” 녀석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수련회 가려고요….” 경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다행히 경찰의 에스코트 덕분으로 아이들은 큰 사고 없이 상황이 잘 정리되었고 녀석들은 무사히 도착하여 교회 목사님과 선생님들, 부모님들의 폭풍 같은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생각해 보면 무모한 일이다.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의 그 무모함이 부러웠다. 어른이 된 나는 어느새 익숙한 길로만 다니고 확실한 길만을 선택한다. 실수하지 않으려 조심하고,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안전을 택한다. 내비게이션이 인도하는 길 위에선 길을 잃어버릴 기회마저 잃어버린다. 길도 모르면서 페달을 밟고 어른들에게 혼날지언정 목적지에 닿고 싶다는 마음을 앞세우는 저 무모한 아이들의 젊음이 닮고 싶었다. 김경아 작가 아이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 길이 위험한지도, 잘못된 선택이었는지도.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될 것이다. 이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 기억이고 가슴 뛰는 순간이었는지. 그리고 어쩌면 또 한 번 무모한 도전을 해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 순간의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떠올리며 어른이 된 그들은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용기가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결국, 삶이란 크고 작은 모험들의 연속이니까. 언젠가 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그 날을 기억하며 가끔은 길을 잃을 용기를 내보기를 바란다.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것을, 때로는 그 길에서 소중한 순간들이 탄생한다는 것을 이 겨울날의 기억이 그들에게 오래도록 가르쳐 주기를 바란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길을 잃는 법을 잊는다. 길을 잃지 않는다면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마주할 일도 없다. 때때로 길을 잘못 들어서야만 진짜 나아가고 싶은 길이 보이기도 한다. 길을 잃을 용기가 점점 사라져 가는 나는 새로운 길을 향해 페달을 밟고 가는 저 아이들의 무모함에 박수를 보낸다. /김경아 작가

2025-03-25

오스만제국 치하 그리스 독립 ①식민시대와 그리스 정교

1453년 5월, 비잔티움이 오스만투르크 메메트 2세에 의해 함락되면서 그리스는 물론 발칸반도에 오스만투르크 통치시대가 도래했다. 그리스는 로마 500년에 이어 400년 가까이 침묵의 역사를 경험해야 했다. 오스만투르크는 합스부르크왕가 지배에 들어 있던 발칸반도 북쪽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을 기독교 교권에서 이슬람 교권으로 탈바꿈시켰다. 발칸반도 내 이슬람 압제하의 기독교는 대내외적으로 몸을 사리거나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만, 몸은 통제할 수 있어도 믿음과 사상만은 어쩔 수 없었다. 식민지인 마지막 자존심이 종교였고, 목숨을 건 신앙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은 여느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이민족 종교를 인정하면서 관대함을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슬람화 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식민지 백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은 이상은 무거운 세금과 신분차별은 감수해야 했다. 제국 내 교회 건물 역시 이슬람 사원보다 더 크게 지을 수 없었다. 이교도에 대해 굴욕감을 주기 위해 교회 출입문은 지상에서 높이 1m이상 만들 수 없다는 조항까지 달았다. 식민지배 종교인만큼 기어서 들어가고 기어서 나오란 뜻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지면을 1m 낮춰 교회를 올리면서 드나드는 문을 2m 높이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오스만제국은 군인이라면 무슬림이든 기독교인이든 공평하게 땅으로 보상을 해주었다. 그렇게 되자 시간이 지날수록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리스는 물론 세르비아 명문가들조차 개종에 동참한다. 토착종교와 뒤섞인 느슨한 기독교였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특히 이슬람으로 개종이 많이 이루어졌다. 같은 민족이지만 종교가 달랐고, 이웃 간에도 종교가 달랐으며, 같은 핏줄을 가진 친족 간에도 종교가 뒤엉키는 상황으로 변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훗날 가공할만한 아비규환의 판이 깔리고 있었다. 발칸반도 오스만투르크 식민지 중 이슬람으로 개종하든 안하든 병역의 의무는 공평하게 졌다. 침략전쟁에는 식민지 백성이라도 피해갈 수 없었다. 어쩌면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자원이었을 법했다. 오스만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변모시킨 여세를 몰아 동쪽 페르시아와 아랍세계를, 남쪽으로는 북부 아프리카와 이집트를 평정한 후 본격적으로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유럽은 합스부르크왕가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가 크고 작게 치고받으며 유럽세계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진실, ‘영원한 제국’은 없다. 오스만제국은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과 계속된 전쟁에서 귀족의 힘이 막강해지자 반대로 술탄 권력은 초라해져갔다. 더구나 러시아마저 오스만제국 등에 칼을 들이대는 형국으로 변하고, 1571년 스페인 함대를 중심으로 베네치아공국-신성로마제국의 연합군과 ‘레판토 해전’에서 맞붙어 궤멸되면서 오스만제국은 종이호랑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귀족들은 손에 쥔 권력을 유지하는데 정신이 팔려 르네상스를 경험한 서유럽의 경제발전과 가공할 무기에는 애써 눈을 감았다. 특히 오스만 직업군인 에니체리 횡포가 날로 심해지는 와중에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개신교도들 반란을 돕기 위해 오스트리아 공격에 나선 것이 결정적 패착이었다. 난공불락 빈을 포위했지만, 위기를 느낀 인근 폴란드를 중심으로 가톨릭국가 연합군 8만 명이 빈을 돕기 위해 출정했다. 1683년 칼렌베르크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오스만제국은 결정타를 맞고 말았다. 이 승리를 계기로 연합세력은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대 이슬람전선을 펼치게 된다. 오스만제국은 안간힘을 썼지만, 뒤이어 1798년 나폴레옹과 한 판 전투에서 단 일주일 만에 이집트를 통째로 내줘야 했으니 꼴이 말이 아니게 됐다. 그리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스 정교 전통을 지켜가며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피고 있었다. 더구나 부동항 확보라는 목표에 국운을 건 러시아와 오스만제국은 툭하면 치고받았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이러한 틈새를 공략하며 국제정세 흐름에 민첩하게 대응했다. 18세기 말이 되면서 불길처럼 번진 민족주의가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고, 19세기 초가 되자 그리스 사람들은 경제력이 높아지는 동시에 미국의 독립선언과 프랑스 혁명이라는 큰 물줄기에 합류하면서 독립에 대한 욕구가 더욱 물밀듯 밀려왔다. 민족이란 깃발 아래 종교와 언어, 문화를 앞세워 흩어지고 새롭게 뭉치면서 비장미 넘치는 기운이 샘솟았다. 민족이라는 의기 앞에 헤쳐 모여의 동기가 부여되면서 독립 열망이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는 초승달(사실 그믐달이지만)제국 오스만이 지배하고 있는 땅덩어리를 더 많이 가지려 불쏘시게 역할을 자처한 제국주의 소산이었다. 대제국을 유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도 위협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발칸반도 나라들 역시 독립 대열에 빠지지 않았다. 그 선두에 그리스가 있었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3-25

일월문화원의 발돋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완연해진 봄의 길목에서 난데없는 산불로 국토가 신음하고 있다. 지난 주말, 건조한 날씨 속에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산불이 발생해 안타까움이 더해지고 있다. 산청과 의성, 울주 등 하룻동안 전국에서 발생한 산불이 29건으로, 강풍을 타고 번져 나간 불길이 좀처럼 잡히질 않고 연기와 매캐함이 동해안 일대에서까지 느낄 정도였으니 심각함에 우려를 금할 길 없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에 이 무슨 화마의 변고란 말인가? 하늘이 온통 스모그 마냥 희뿌연 장막을 드리운 듯한 현상을 접하다 보니 초읽기에 들어간 국무총리와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안개정국과 뒤엉키면서 예측불허의 상황으로까지 치달아 때아닌 산불의 연무로 연상됨은 필자만의 억측일까? 어쨌든 봄은 왔고 산불은 곧 진화될 것이며 베일 같은 안개는 사라질 것이다. 널뛰기하듯 잎샘추위에 3월의 폭설까지 내리다가 화마의 엄습까지 봄은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시련과 위협 속에서 오는가 보다. 나무에는 이미 물이 올랐고 꽃은 앞다투어 피어나고 있으며 새순이 앙증스럽게 돋아나는 파릇함 속에 새들은 지저귀고 온갖 생물은 생명과 성장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겨우내 찬바람을 견디며 이기려고 몸에 힘을 줬다면 이제는 나른함을 이기려고 애를 써야 될 때, 문화의 새바람으로 봄보다 부지런히 심신의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곳이 있다. 그곳은 해와 달의 고장 답게 일월의 의미를 되새기며 독특한 문화적인 아이템으로 지역의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일월문화원이다. 전통문화의 전승, 보급의 사회교육과 문화유산 보호활동으로 지역민의 정체성 확보를 위해 2012년 설립된 (사)일월문화원은, 일월문화아카데미와 문화유산답사 등의 다양한 문화강좌와 문화사업 추진으로 현재까지 매년 200여 명의 회원과 수강생이 동참해 역사와 종교, 철학 등에 대한 인문학적인 소양과 의식을 함양한 문화시민을 육성하며 새로운 문화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이는 단순한 강의나 답사가 아닌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문화 인프라를 구축해 실질적인 문화사업 운영으로 주체적이며 지속가능한 문화발전을 담보하는 의미와 가치가 큰 문화활동이라 할 수 있다. 즉, 고품격 인문학 강의와 문화유산 방문교육·문화재 지킴이 봉사단 운영·문화유산 해설사 양성·감성계발 문화교실 등 일련의 사업을 다양하고 포괄적으로 기획하고 펼침으로써 문화의 융성과 건실한 내일을 기약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비전과 역량으로 일월문화원은 2019년 제1회 장기유배문화축제를 주도적으로 개최했으며, 재작년에는 삼일문화대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설립 15주년을 맞은 일월문화원은 올해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이 포항에 터전을 둔 포항사람임을 부각시키며 일련의 추모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문화이며, 문화예술의 품격이 그 도시의 품격이고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다. 우리 지역 전통문화의 발굴, 보존과 정체성을 탐구, 정립하여 문화유산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전승으로 현대화·미래화하는 일들은 중차대한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상에서 문화를 향유하고 융합·전파시키며 문화시민 저변확대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나가는 일월문화원의 기여와 발돋움이 사뭇 기대된다.

2025-03-25

기업 혁신 조건은 무엇인가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제조기업 통계를 보면, 기업에 혁신을 도입하여 중장기적으로 성공한 기업은 드물다. 그 이유는 분명히 있다. 필자가 17년여 기업 혁신 연구와 컨설팅을 하며 본 것은 기업 CEO나 조직의 수장은 혁신의 필요성을 공감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부분적으로 알지만 종합적으로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혁신은 백 명의 필하모니로 복잡한 구성을 갖고 있다. 한 사람만 피리를 잘못 불어도 음악은 제 소리를 못 낸다. 이것이 기업 혁신이다. 회사가 나아갈 방향, 자사에 맞는 혁신체계(Frame) 구성, 계층별 역할 정립, 실행 운영제도 등이 기업 혁신의 밑그림이다. 다양한 변수가 있는 혁신이기에 속 그림은 실행 과정에 발생되는 이슈를 개선하면서 함께 그려가야 한다. 이런 복잡한 기업 혁신의 조건과 성공요인은 무엇인가. 기업 혁신의 구성요건은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지며, 일반적으로 혁신의 조건과 혁신의 성공요소로 구분 할 수 있다. 먼저 혁신의 3가지 조건은 첫째,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기술 발전, 소비자 요구 변화, 경쟁 환경 등 혁신을 촉진하는 외부 요인을 보는 것이다. 연구개발 지원, 세금 혜택, 지적 재산권 등 정부 정책과 규제도 볼 필요가 있다. 둘째, 조직적 조건이다. 도전과 실험을 장려하는 기업 문화와 경영진의 중장기 비전 설정과 의사 결정력의 리더십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활동 동기부여, 혁신 인재 확보 등 인적,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 셋째, 기술적 조건이다. 동종 업계 한 발 앞서갈 수 있는 최신 기술 도입의 투자 및 활용 효용성과 AI, 빅데이터 등 기술 활용 능력을 갖춰야 한다. 기업이 혁신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필요한 요소는 하나, 혁신의 목적과 방향을 명확히 설정하고 장기적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단기적 성과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인 혁신을 위한 로드맵이 필요하다. 둘, 사내외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맞춤형 혁신을 구성하는 것이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신속한 피드백 및 소통하는 애자일(Agile) 접근 방식 활용이다. 셋, 실패를 용인하고 도전적인 시도를 장려하는 조직문화,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조직구조이다. 경직된 조직문화는 모든 것에 시너지를 내지 못 한다. 넷, 신속한 실행, 성과 측정 및 피드백을 통한 지속적인 개선이 이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조직 전체 공감대 형성이 필수 요소다. 이외에도 훈련되지 않은 야생코끼리를 목적하는 산 중턱까지 정해진 시간 내에 이르게 하는 끊임없는 변화관리가 필요하다. CEO, 임원층, 직책보임자, 일반 등 하나의 생각 흐름이 이어지는 계층별 마인드와 실행에 맞는 방법을 가이드 해야 한다. 변화관리를 멈추면 혁신도 멈춘다. 혁신은 생물이기에 다듬어 지지 않은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기업 혁신은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환경적, 조직적, 기술적 조건이 조성되고 명확한 목표, 현업 중심 사고 및 기획, 유연한 조직문화, 실행력과 개선 노력이 결합될 때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2025-03-25

‘尹 선고’ 후폭풍, 정치권이 도발하지 말라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한덕수 국무총리에 대한 탄핵안이 그저께(24일) 기각된 후, 윤석열 대통령 탄핵사건 선고일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법조계에서는 빠르면 이번 주 후반 선고가 가능하지만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4월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전직 대통령 탄핵심판이 모두 금요일에 선고된 점과 선고 전후 안전 문제 등을 고려하면 금요일인 28일 선고될 가능성이 크긴 하다. 그러나 헌재가 한 총리 선고 당일에도 평의를 열어 윤 대통령 사건을 논의한 점으로 미루어, 선고일이 기약 없이 늦춰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윤 대통령 사건 선고가 미뤄지면서 우려되는 점은 보수·진보세력 간의 시위형태가 격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서울에서는 탄핵 찬반집회가 진지전(陣地戰)을 연상케 할 정도로 험악해지고 있다. 민주당은 이번 주 들어 헌재가 윤 대통령 파면을 선고할 때까지 국민과 함께 싸우겠다며 광화문에 천막당사를 만들었다. 당 지도부가 여기에 상주하면서 헌재를 압박해 탄핵 인용 결정을 이끌어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법원이 집회를 불허하긴 했지만, 전국농민회 총연맹 산하 ‘전봉준 투쟁단’은 트랙터와 트럭을 동원해 서울 시가지에서 시위를 하겠다고 했다. 국민의힘도 거칠어지고 있다. 여당 의원들은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탄핵 기각·각하’ 집회에 직접 참석하고 있다. 지난 주말 집회에서 한 중진 의원은 “반(反)국가 세력과의 전쟁 선포”라고 했고, “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말도 나오는 모양이다. 여야 정치권 모두 격화하고 있는 진영싸움을 말리기는커녕 앞장서서 충돌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 총리가 직무에 복귀하면서 정부기능이 어느 정도 회복됐지만, 사실상 지금도 국정은 마비상태다. 12·3 비상계엄 사태로 리더십을 상실한 여권은 정국을 수습할 역량이 없고, 야권은 거리집회와 탄핵공세를 강화하면서 경제·외교·안보 위기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북한도발에 대처할 국군통수권도 실제 공백상태고, 금융시장은 연일 휘청거린다. 우리사회가 지금의 혼란에서 벗어나려면 정치권이 냉정해져야 한다. 무엇보다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결과에 대해 여야는 물론 국민이 모두 승복해야 한다. 그렇지만 아직 윤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헌재의 탄핵선고에 승복한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윤 대통령은 앞선 탄핵심판 변론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로 자신에게 잘못이 없음을 항변했다. 이 대표는 지난 22일 전남 담양에서 “윤 대통령 탄핵이 기각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섬뜩한 말로 들린다. 이러다 정말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 경제안보 위기와 나라 미래를 진심으로 염려한다면 이제라도 두 사람은 국민통합을 위해 헌재와 법원의 판단에 대한 승복 의사를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여야 의원들도 그간의 당리당략에서 벗어나, 같은 테이블에 앉아 협상하는 정치인다운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헌재 선고 결과에 대한 불복을 정치권이 오히려 부추겨서야 되겠나.

2025-03-25

산불, 기후변화가 주범

우정구 논설위원 올 1월 7일 미국 LA에서 발생한 산불은 같은 달 31일까지 불길이 이어졌다. 캘리포니아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파괴적인 산불로 기록된 화재다. LA 카운티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이 산불은 긴 시간만큼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불탄 면적이 샌프란시스코 면적을 능가할 정도였고, 불탄 자리는 핵폭탄을 맞은 히로시마에 비견되기도 했다. 3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재민만 20만명이 넘었다. 미국의 한 미디어그룹은 피해 규모를 2750억 달러(한화 400조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산불로 LA 전역은 심각한 대기오염이 유발됐으며 예정된 스포츠 경기 등은 모두 연기됐다. 산불을 틈타 빈집털이가 성행해 경찰이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산불이 몰고 온 사회경제적 손실은 천문학적이며 복잡했다. LA뿐 아니라 지금은 북미와 유럽 등 세계 곳곳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산불이 자주 일어나 나라마다 골머리를 앓는다. 2023년 하와이에서는 산불 발생으로 100명이 숨지고 1300명이 실종되는 일도 벌어졌다. 산불 발생의 직접적 원인은 사소한 부주의에서 일어나지만 발화한 산불이 급속도로 커지는 데는 기후변화라는 숨은 이유가 존재한다. 지구 온난화 후 일어나는 폭염과 가뭄 등 이상기후 현상이 사실상 산불 발생의 주범이다. 가뭄에 말라버린 식물은 불쏘시개가 되고 강력한 강풍은 화마를 걷잡을 수 없이 키우게 된다. 경북 의성과 경남 산청군 등에서 발생한 산불이 며칠째 불길이 잡히지 않은 것도 건조한 대기와 강한 바람 때문이다. 지구환경에 순응하는 인간의 진실된 노력이 없다면 인간은 감당키 어려운 재앙에 직면할지 모른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3-25

헌재 내란죄 판단회피… ‘尹 운명’ 오리무중

헌법재판소가 지난 24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의 탄핵안을 기각하면서 12·3 비상계엄의 위법성 여부를 판단하지 않음에 따라, 윤석열 대통령 선고방향을 예측하기가 어려워졌다. 헌재는 이날 선고에서 윤 대통령의 파면 여부를 가를 결정적인 쟁점인 ‘내란 행위’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법조계에서는 한 총리의 ‘내란 공모’ 사유가 윤 대통령의 ‘내란 행위’ 사유와 연관돼 이날 헌재 결정에 따라 윤 대통령 사건 선고 방향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었다. 헌재는 이날 ‘내란죄 철회’ 논란에 대한 판단도 피했다. 여권에서는 헌재가 비상계엄의 위법성에 대해 판단을 하진 않았지만, 한 총리 사건에서 헌법재판관 8명 의견이 ‘5(기각)대 2(각하)대 1(인용)’로 나뉜 점에 주목하면서, 윤 대통령 사건이 기각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재판관 3명만 인용에 반대하면 윤 대통령 사건은 기각된다. 반면 야권은 한 총리 사건 기각 결정문에 ‘한 총리가 비상계엄 선포의 절차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국무회의 소집을 건의하는 등의 적극적 행위를 하였음을 인정할 만한 증거나 객관적 자료는 찾을 수 없다’고 한 부분을 언급하면서, 전원일치 의견으로 윤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내려질 것으로 보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헌재가 한 총리 탄핵심판 선고를 한 직후에도 평의를 연 것으로 미루어, 윤 대통령 선고일을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주류다. 아직 정치적으로 민감한 각종 쟁점과 절차 부분에서 재판관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 탄핵안은 헌재에 접수된 지 100일이 넘었고, 11차례의 변론을 거쳐 지난달 25일 탄핵심판 변론을 종결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헌재는 윤 대통령 탄핵 사건과 관련해 수많은 증언을 들었고, 다양한 수사자료도 확보했다. 이제 재판관들이 판단을 내릴 근거가 충분하다고 본다. 한 총리가 그저께 직무에 복귀하면서 내각 기능이 회복된 만큼, 윤 대통령 탄핵 사건도 결론을 내릴 때가 됐다.

2025-03-25

반복되는 산불 수종변경 등 근본대책 세워야

지난 주말 경북 의성과 경남 산청 등 영남권 5개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은 엄청난 피해를 내고 있으나 나흘이 넘도록 진화를 못하고 있다. 건조한 기후와 강한 바람 등으로 불길이 잡히지 않고 산불은 오히려 불씨를 타고 인근 지방으로 옮겨가면서 피해를 키우고 있다. 중앙재해대책본부에 따르면 25일 오전 현재 경북 의성과 경남 산청 등 5개 지역의 산불 영향구역은 1만4000여 ha다. 그 중 의성군이 8490ha로 가장 넓다. 이번 산불로 15명의 사상자와 수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재앙에 가까운 산불이 봄철만 되면 반복된다. 지난해까지 최근 10년간 전국에서 발생한 산불은 총 5456건이다. 연평균 546건 꼴로 그중 3∼5월 사이 발생하는 산불이 절반을 넘는다. 2022년 3월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에서 발생한 산불은 불을 끄는 데 9일이 소요됐다. 산불 피해면적이 울진 4개 읍면, 삼척 2개 읍면에 이르렀다. 불 탄 면적만 서울시의 40%다. 생각만해도 끔찍한 피해가 매년 반복되는데도 뾰쪽한 대책이 없다. 산불 발생의 원인은 대개 입산자의 사소한 부주의로 밝혀지나 한번 발생한 산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 봄철 건조한 날씨와 강한 바람으로 불길 잡기가 쉽지 않아서다. 초동 대응과 감시망 강화 등 산림당국이 매번 대책을 내놓지만 산불 발생은 줄지 않고 대형화로 이어진다.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내화력이 있는 수종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지적을 한다. 우리나라 산림면적의 40% 가까이가 소나무 중심의 침엽수림이다. 소나무는 휘발성이 있는 송진을 함유해 산불이 나면 불을 급격히 확산시키는 특징이 있다. 불에 탄 소나무 가지와 솔방울은 강한 바람에 날리어 멀리 날아가면서 이곳저곳에 불씨를 옮긴다. 복원사업을 추진할 때 활엽수 같은 수종으로 점차 바꿔가는 정책이 필요하다. 지구촌 기후변화로 산불 발생은 세계적으로 더 증가하는 추세다. 불이 나 대처하는 사후대책도 중요하지만 수종변경과 같은 근본 대책을 세우는 방법도 강구해야 한다.

2025-03-25

‘국가물산업클러스터 2.0’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기후변화가 일상이 된 시대, 물은 더 이상 흔한 자원이 아니다.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고, 해마다 여름철에는 하천과 호소에 녹조가 과다 번성하며, 신종유해물질로 인한 수질오염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낙동강의 수질 저하와 미량유해물질 검출, 취수원 이전 논란 등 시민의 물 안전과 직결된 이슈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물은 생명이며, 삶 그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중함을 종종 간과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물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산업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정부는 지난 2019년 9월, 대구 국가산업단지 내에 ‘국가물산업클러스터’를 조성하였다. 물 문제 해결을 위한 기술개발과 기업 육성, 나아가 물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국가 차원의 전략적 투자였다. ‘국가물산업클러스터’는 정수 및 하·폐수처리, 물재이용, 수질 모니터링 등 물 전 분야에 걸친 기술개발과 실증을 지원하며, 국내 물기업의 해외시장 진출을 촉진하는 통합지원 플랫폼이다. 2023년 말 기준 110여 개 물기업이 입주하였고, 지난 5년간 총매출 5조537억 원, 총수출액 3189억 원이라는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예컨대 (주)아쿠아웍스는 고효율 산기관 기술을 바탕으로 2년 만에 매출을 7배 이상 성장시켰으며, 블루센(주)은 스마트 수질측정 기술을 기반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여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 이는 대구에서 출발한 물기술이 세계 물시장에서도 주목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올해는 ‘국가물산업클러스터’가 제1기 운영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는 ‘2.0 시대’의 원년이다. 단순한 기술개발을 넘어, 기후위기 대응과 탄소중립 실현, 청년 일자리 창출 등 다양한 정책과제와의 연계가 요구된다. 대구시는 이미 ‘물관리기술 발전 및 물산업 진흥계획’과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 중이다.‘국가물산업클러스터 2.0’은 이러한 지역 전략과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물기업 육성, 청년 창업 지원, ESG 기반 기술개발 등으로 이어지는 지역형 물산업 생태계 조성에 중추적 역할을 할 것이다. 지난 3월 22일은 유엔이 지정한 제33회 ‘세계 물의 날’이었다. 이날을 계기로 물을 둘러싼 갈등이 아닌, 물을 매개로 협력과 공존의 길을 모색하고자 전 세계가 함께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다. ‘국가물산업클러스터 2.0’은 이러한 의미를 살리기 위해 단순한 기술개발 공간을 넘어, 갈등을 줄이고 공동의 이익을 창출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한다. 물산업을 통해 지속가능한 물순환을 실현하고, 지역 간 상생과 협력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물은 도시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이며, 동시에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 기준이다. 대구경북은 낙동강이라는 생명의 수계를 품은 만큼, 지속가능한 물관리와 물산업 발전을 통해 대한민국 녹색전환의 선도 지역으로 도약할 것이다. ‘국가물산업클러스터 2.0’은 그 중심에 있다.

2025-03-24

한 표 차

강길수 수필가 “할아버지, 한 표 차로 떨어졌어요!” 시외버스 안에서 다짜고짜로 받은 손전화 말이다. 이달 초등학교 2학년이 된 큰 손자의 전화였다. ‘한 표’라는 말로 반장선거에서 낙선했음을 알아듣고, 그래도 2등 했으니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며칠 뒤, 집에 온 손주 녀석에게 반장선거 결과를 물어보았다. 같은 반 학생 28명 중 반장선거에 나온 학생이 10명이고, 1등이 10표, 2등인 손자가 9표였다고 했다. 속으로 손주 녀석이 대견해 보였다. 남들 앞에 나서기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나 보다. 같은 반 학생 모두 선거 결과를 받아들인 건 물론이다. 이 반장선거 결과를 따져보면, 3등이 2표, 나머지는 7명은 1표가 된다. 그러니까 득표율은 반장으로 뽑힌 1위 아이가 35.7%, 2위 손자는 32.1%, 3위 아이가 7.1%, 나머지 출마 아이 7명은 각 3.6%다. 득표율 계산 결과를 생각해본다. 초등학교 2학년 손자 녀석의 반 아이들의 반장선거가,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선거 결과를 냈다는 마음이 들었다. 대통령과 차점자의 지지율 차가 적으면, 여·야가 서로 무시할 수 없으니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의회도 마찬가지다. 여·야 의석 비율 차가 크지 않다면 여당은 야당을 무시할 수 없고, 야당도 여당과 대화와 타협을 안 할 수 없다. 의석 차가 적으니 대화와 토론, 타협의 길로 가야 하고 이럴 때 국민과 국가를 위한 정책이 나오기 마련일 터다. 한국의 제22대 국회는 여당 108석(36.0%), 1야당 175석(58.3%), 2야당 12석(4.0%), 군소 3개 정당 도합 5석(1.7%)으로 구성되었다. 1야당이 과반수 이상이다. 이에, 야당 폭주가 지나쳐 ‘의회 독재’란 말이 나온다. 현 정부 출범 이후 2년 10개월 동안, 1야당 주도로 30회의 공직자 탄핵소추 발의를 한 사실만 봐도 의회 독재가 분명하다. 한데, 국민의 절반 이상이 한국에 부정선거가 있다고 알게 되었다는 보도다. 부정선거 세력은 결국, 영구집권으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 전복을 획책할 것이다. 큰 비극이다. 지난 5년 가까이 한국의 부정선거를 선관위 발표 선거 데이터들을 통계학 대수의 법칙을 적용 분석, 추적한 G 박사는 지난 1월 28일 22대 총선 분석 결과를 종합 발표하였다. 그 결과에 따르면, 여당의 진짜 의석수는 최대 57석이 늘어 168석(56.0%)이라 한다. 그렇다면, 1야당은 118석((39.3%)이다. 국회가 G 박사의 연구 결과대로 구성된다면, 야당의 의회 독재는 아예 불가능할 일이다. 우리 사회가 선거에 컴퓨터와 전자개표기를 쓰지 않고 초등학교 반장선거처럼 수작업으로만 한다면, 부정선거 시비는 없어질 것이다. 선관위는 개표 정확성과 시간 단축을 위해 전산 개표 시스템을 쓴다고 하리라. 선거는 공명성이 생명이다. 대만이 수작업만으로 선거 개표를 해도 8시간이면 끝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기필코 벤치마킹해야 할 사안이다. 나라의 선거 개표제도를 초등학교 반장선거같이 ‘수개표’로 바꾸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5-03-24

믿음과 정치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사람의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부모·자식 관계는 여간해서는 변하지 않는 관계일 테다. 때로 부모·자식 간에도 돈이나 그 밖의 것으로 서로 외면하고 심지어 살상을 벌이기까지 한다. 그런 것들은 예외로 치부된다. 친구 관계도 고등학교 다닐 때쯤부터 깊이 사귄 이들끼리는 우정으로 평생을 지켜가는 경우가 많다. 초등학교 동창은 시골 동창 아니면 너무 어려서, 삶이 갈려서 오래가기 어렵고, 대학 동창은 머리가 커진 뒤라 순수한 관계를 만들기 어렵다. 고교 동창 정도면 한두 사람씩은 평생의 관계를 맺어나갈 수도 있다. 그 친구들은 정의감이 같아서가 아니요 기질이 맞고 정이 들어서 길게 진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다. 사회 나가서나 대학에서도 대학원 같은 곳에 가서는 정말 믿고 통하는 관계는 이루기 어렵다. 무엇보다 자기 존재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경쟁이 되고 위해를 가하는 존재로 여겨지기 쉽다. 나이 엇비슷한, 아래위 5년 정도의, 같은 세대 사람들은 평상시 친해도 끝내 상대를 불신하고 저버리기 쉽다. 이렇게 서로 믿고 의지하기 어려운 사람 관계 속에서 어쩌다, 정말, 저 친구는, 저 선배는, 저 상사는, 그리고 저분은 믿을 수 있다고, 따를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아주 드물게 얻어질 수 있다. 희귀하게 그런 관계들이 생겨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계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세상은 거칠고 인생은 험난해서, 누구 한 사람이라도 의지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그 괴로움, 외로움을 많이 덜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라면 어떨까? 글쎄다. 꼭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고교 동창이 한둘 있고, 대학에 믿고 의지할 선생님이 또 그만큼은 계시고, 대학 나와 문단과 학계에서 이런저런 관계로 얽힌 좋은 선후배들, 친구들이 또 몇 사람은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숫자를 너무 많이 ‘잡은’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한다. 더구나 지난 삼 개월여 동안 나는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다. 어떤 믿음의 위기를 겪고 있고, 이유는 비교적 간단명료해 보인다. 무엇인가, 내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표명한다는 것이다. 어쩌다 형이, 선생님이, 당신이 그렇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나는 또 나대로 오랫동안 숙고해 온 데다 특히 지난 3개월은 사태가 엄중한 만큼 별일 아니라고 쉽게 의견을 접어버릴 수도 없다. 이런저런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혹은 자기 확신의 적개심에서 쏟아내는 말들이야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없으면 아픔도 없는 까닭이다. 굳게 믿는 사람들이 걱정 반, 실망 반의 반응을 보일 때는 그러므로 상황이 달라 마음 아픈 것을 감추기도 쉽지 않다.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다고 애써 생각한다. 사람 사이의 믿음이란 세상의 정치보다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 정치적 견해란 얼마나 ‘쉽게’ 변하는 것이던가. 세월을 조금이라도 길게 돌아보면 이미 우리들이 그런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지 않던가.

2025-03-24

1천만원 써서라도 키 큰 자식으로?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훤칠한 외모와 큰 키도 사회생활의 경쟁력”이란 이야기가 세간을 떠돈 것은 이미 꽤 오래전이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를 이야기하면 고루하다는 말을 듣는 시대가 됐다. ‘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귀한 것이니 함부로 상하게 하거나, 애초의 형태를 바꾸지 않는 게 효도의 시작’이라는 지난 시대의 가르침이 부모들에서부터 먼저 무너지고 있는 듯하다. 24일 세계일보에 눈에 띄는 기사 하나가 실렸다. 세칭 ‘키 크는 주사’로 불리는 성장 호르몬 치료제의 시장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보도다. 작년에만 키 크는 주사가 27만 회 처방됐고, 이는 3년 전과 비교하면 2배가 늘어난 수치라 한다. ‘서울에서 1만1444명이 처방받았고, 경기도 7164명, 대구시 2947명, 부산시 2346명 등 전국적으로 성장호르몬 치료제가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고 기사는 이어진다. 성장 호르몬 주사의 비용은 만만찮다. 1년에 1000만원 안팎이 사용된다. 거기에 어린아이가 길게는 3년 동안 일주일에 6번 주사를 맞아야 하는 고충도 따른다. 짐작하다시피 주사 맞는 걸 좋아하는 아이는 거의 없다. 부모는 적지 않은 돈을 쓰고, 아이는 두려움과 울음을 참으면서까지 ‘키가 큰 어른’이 돼야 하는 걸까? 의구심을 가지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나폴레옹이 키가 커서 유럽 대륙을 집어삼킨 건 아니다. 그는 오척단구였다. 또한, 존경할 만한 과학자나 의사가 되는 게 키와 무슨 상관이 있나. 중요한 건 ‘몸의 높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연민하는 ‘마음의 넓이’가 아닐지.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3-24

‘줄탄핵’ 100%기각… 野 국정공백 책임져야

윤석열 대통령이 선포한 12·3 비상계엄의 후폭풍으로 탄핵심판에 넘겨진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안이 기각됐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8명의 의견은 엇갈렸다. 5명은 기각 의견을, 1명은 인용 의견을, 2명은 각하 의견을 냈다. 한 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던 지난해 12월 27일 국회에서 탄핵 소추됐다. 탄핵소추 87일 만에 직무에 복귀해 다시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게 됐다. 한 대행은 이날 오전 10시 헌재가 기각을 선고하자 정부서울청사에 출근해 “미국과의 통상문제 등 급한 일부터 추스려 나가겠다”고 밝혔다. 헌재는 이날 논란이 돼 왔던 탄핵 절차와 관련해선 “문제 없다”고 판결했다. 6명의 재판관이 국회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탄핵하려면 대통령 기준(200석) 의결 정족수가 적용돼야 하는데 총리 기준(151석)이 적용됐으므로 소추를 각하해야 한다는 한 총리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형식·조한창 재판관만 탄핵안 가결에 필요한 의결정족수를 충족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한 총리가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공모하거나 묵인·방조했으므로 파면돼야 한다는 국회 측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총리가 국회에서 선출된 조한창·정계선·마은혁 재판관 후보자의 임명을 보류한 것과 관련해선 “헌법과 법률 위반”이라고 판단했지만, 파면을 정당화하는 사유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대표와 ‘공동 국정 운영 체제’를 꾸리려 했다는 탄핵사유도 인정하지 않았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민주당 주도로 발의된 탄핵소추안(29건) 중 헌재가 결정을 내린 9건 모두 기각됐다. 탄핵이 얼마나 마구잡이로 추진됐는지를 여실히 말해주는 부분이다. 헌재가 탄핵 여부를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하게 판단하는 것은 사건의 중대성과 위법성이다. 위법한 사안이라도 탄핵해야 할 중대한 사유가 아니라면 대부분 기각된다. 국회는 앞으로 소추권을 행사할 때 이를 염두에 두고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 공직자 탄핵을 남발하면서 국정을 마비시킨다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2025-03-24

이차전지 특별법 제정에 여야가 따로 없다

포항시가 지난주 국회에서 이차전지산업의 육성과 지원을 위한 국회토론회를 개최했다. 국민의힘 김정재 의원과 이상휘 의원이 주최하고 포항시가 주관한 이날 토론회에는 국민의힘 권영세 비대위원장과 권성동 원내대표 등 현역 의원이 대거 참석해 이차전지산업에 대한 관심을 표시했다. 이차전지산업이 미래 먹거리이자 국가 전략산업이란 관점에서 정치권의 관심은 당연하다. 다만 여야가 대립하고 있는 지금의 정치 상황을 고려하면 특별법 제정이 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이날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이차전지산업은 국가전략 핵심산업으로 글로벌 패권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하며 그를 위해선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권 위원장은 “미국, 유럽, 중국 등 주요국은 배터리산업을 전략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대규모 투자 지원책을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다”며 “이차전지 특별법 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의 이차전지산업은 수년간 급격한 성장을 거듭했으나 최근들어 일시적인 수요둔화로 고전 중이다. 그러나 전기차시장의 확대 등 이차전지산업의 성장잠재력은 반도체를 능가할 것으로 전망이 된다. 세계 주요국이 시장 선점에 뛰어들고 있는 상황이어서 한국의 발빠른 대응이 절실하다. 이차전지산업은 기술주도와 시장선점을 위한 RD 투자가 지속 이뤄져야 하는 기술집약산업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기술개발에 국가가 나서 지원해야만 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이차전지산업이 포항의 주력산업으로 등장해서가 아니라 국가 핵심전략산업이라는 측면에서 정부 지원의 특별법 제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미국의 관세압력 등 급변하는 세계시장 질서에 대응할 국가 경쟁력 확보는 기술 우위 전략뿐이다. 삼성전자가 사즉생의 메시지를 던진 것과 같이 국내기업의 기술역량을 키울 국가차원의 과감한 지원이 필요하다. 국회는 서둘러 특별법 제정에 나서야 한다.

2025-03-24

모질고 악착같은 정치인은 위험하다

김진국 고문 정치는 욕을 많이 먹는다. 정치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 서로 다른 주장을 절충하는 게 본질이다. 소리가 크건 작건 다툼이 없을 수 없다. 더구나 권력을 두고 경쟁할 때는 시끄럽지 않을 리 없다. 그렇더라도 그럴듯한 모양을 갖추는 건 명분 덕분이다. 이제는 달라졌지만, 어린아이들에게 꿈을 물으면 과학자뿐 아니라 정치인이 되겠다는 대답이 많았다.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명분이 그럴싸하기 때문이다. 그런 명분에 걸맞게 짐짓 점잔을 빼는 정치인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겉치레조차 던져버렸다. ‘동물 국회’가 심하게 싸울 때 잠시 보이는 모습이 아니다. 일상적인 여의도 문법이다. 민주당이 윤석열 정부 들어 30번째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대통령 권한 대행인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대해서다. 탄핵 사유로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은 것, 내란 상설 특검 후보자 추천 의뢰를 미룬 것, 비상계엄을 묵인·방조하고, 윤 대통령 지시를 하급자에게 전달했다는 문제를 제시했다. 마은혁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는 것은 헌법재판관 전원일치로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그러니 이를 무시한 조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이게 탄핵사유라고 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비상계엄과 관련해서는 두드러진 행동이 없었다. 다른 국무위원과 차이가 없다. 이것으로 탄핵한다면 ‘대행의 대행의 대행의 대행’…. 국무위원을 모두 탄핵해야 한다. 더군다나 한덕수 국무총리에 대한 탄핵 인용 여부가 오늘(24일) 결정된다. 기각될 것이라는 전망이 높다. 기각이 되건, 인용이 되건 한 총리에 대한 탄핵심판을 불과 며칠 앞두고 최 대행을 탄핵 소추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과잉대응이다. 그뿐 아니다. 그동안 민주당이 발의한 탄핵소추안을 보면 참담하다. 정말 탄핵할 필요를 느껴서 발의한 건지, 집권당을 겁박하고, 국정 운영을 방해하려는 건지 헷갈린다. 발의했다가 스스로 철회하거나, 본회의에 상정하지도 않고 대부분 폐기했다. 그나마 헌재로 보낸 탄핵소추안도 결정이 난 8건 가운데 8건 모두 기각됐다. 탄핵이 목적이 아니라 탄핵 소추가 목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탄핵 소추하면 우선 피청구인의 직무가 정지된다. 일을 할 수 없다. 가뜩이나 대통령이 탄핵 소추당해 직무가 정지된 처지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경제적 부담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대표적으로 손봐야 할 나라로 지목하고 있다. 김정은 정권과의 친분까지 자랑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을 ‘민감 국가’로 지정한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게 국내 정치상황과 무관하다고 하기 어렵다. 그런데 국무총리에 이어 경제 사령탑까지 직무가 정지당하게 됐다. 대통령 부재라는 국가적 위기를 넘어가는 데 힘을 모아도 부족한 마당에 이게 무슨 짓인지 알 수 없다. 모든 일에는 적당한 도구가 있다. 압정을 박으려고 망치를 쓸 수는 없다. 화분에 물을 주려고 살수차를 동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요즘 우리 정치는 정말 악착같다. 가장 독한 방법, 상상도 못 할 수단을 모두 동원한다. 벼룩 한 마리 잡으려고 초가삼간에 불을 지른다. 이렇게 몰아치면 타협의 여지가 없다. 정치는 없고, 송사(訟事)만 있다.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모습을 TV로 보면서 온 국민이 경악했다. 탄핵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걸 어떻게 막느냐를 걱정했다. 탄핵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탄핵 심판보다 가장 빨리 결론을 낼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계엄 직후에 비해 탄핵 반대 여론이 아주 거세졌다. 왜 그럴까. ‘이재명 포비아’ 탓이다. 계엄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아니라 ‘이재명은 안 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표 스스로 본인의 재판과 탄핵 심판을 묶었다. 시간 싸움을 벌였다. 조급하게 몰아치는 모습이 거부감을 일으켰다. 지난 총선 공천의 잔인한 숙청을 대선 이후에 투영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런데도 민주당만 모르는 것 같다. 조급하고, 몰아칠수록 신뢰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줄탄핵’과 ‘줄기각’이 윤 대통령 탄핵마저 그르칠까 두렵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3-23

얼마나 더 속아야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금요일에는 헌법재판소가 있는 동네에 강의하러 간다. 이번 학기에는 ‘세속 윤리와 하늘 도리의 조화, 중용’을 읽고 있다. ‘중용’이 고전 반열에 오른 지 어림잡아 2천 년쯤 되니 매시간 뜻깊은 문장을 만나지만 지난주 수업에서는 시국과 맞물려 특별히 더 뜻깊은 내용이 나왔다. 바로 6장에 이런 말이 나온다. ‘공자가 말하셨다. 순임금은 아마도 크게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여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말 살피기를 좋아했고, 나쁜 말은 덮어서 힘을 못 쓰게 하고 선한 말은 드러내어 그 양쪽 끝을 잡아 그 가운데 말을 백성에게 사용했으니, 그것이 곧 순임금이 된 이유이다.’ 이 문장이 인상 깊은 이유는 순임금의 행동 때문이다. 그는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반드시 주위 사람에게 묻고 그 대답을 잘 살펴서 좋은 말만 채택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순의 한자어 舜은 ‘충실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뒤이어 나오는 ‘양쪽 끝을 잡아 그 가운데 말을 정책으로 삼는다’는 대목이 더 중요하다. 많은 해설서에서는 양쪽 끝을 선과 악, 또는 적절과 부적절로 풀고 그 가운데를 중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운데’라는 것은 가장 적절한 최선의 기준을 말하는 것인데 선과 악의 중간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된다. 그저 적당히 타협하라는 것이니 양쪽에서 돌멩이가 날아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과와 불급의 중간으로 풀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70세는 넘어 보이는 학습자가 질문한다. ‘앞에서 이미 선한 말을 드러낸다고 했으니, 여기서 양 끝은 선 중의 양 끝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선에 양 끝이 있을 수 있나요?’ ‘선한 방향은 같지만 실천 방법에서는 급진적이거나 온건하거나 하는 식으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아, 그럴 수 있겠습니다.’ 같은 방향을 추구하면서도 세부 노선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반목하며 지리멸렬하게 갈라지는 일들이 많은데, 그때 이런 경구를 참고했더라면 좋았겠다는 깨달음이 퍼뜩 떠올랐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이지만 정치인들이 얼마나 국민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지는 미지수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만 해도 같은 당에서도 심하다고 할 만큼 심각한 거짓 주장을 연일 내고 있다. 이렇게 소수의 권력자가 자신들의 이익을 영구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불법도 서슴지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더 큰 문제는 비상계엄이 해제된 지 100일이 넘도록 헌재에서 탄핵소추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 많은 국민이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주말마다 집회가 열리니 그 고단함이 이루 말할 것이 없고, 심지어 지인의 친구는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다고 한다. 판결 이후 양분된 국민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심사숙고일지는 모르겠으나, 장고 끝에 악수 둘까 두렵다. 나쁜 말은 빨리 덮어서 힘을 못 쓰게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제주도 말에 ‘속았다’는 ‘수고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나라의 평화를 위해 국민이 얼마나 더 속아야 하는가? 강의실 안 토론이 일상에서 실현될 날을 고대한다.

2025-03-23

日 난카이 트로프 거대지진 강 건너 불 아니다

김규한 이화여대 명예교수 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장 일본 열도는 환태평양 지진·화산대에 속해 지진과 화산 활동이 빈번하다. 역사적으로 메이오 지진(1496년), 게이조 지진(1605년), 보에이 지진(1662년), 안세이 난카이 지진(1854년), 간토 대지진(1923년), 난카이 지진(1944년) 등 90~150년 주기로 거대 지진이 발생해 큰 피해를 초래했다. 거대 지진은 해구형과 직하형 두 가지로 나뉘며, 최근 일본 정부는 난카이 트로프 지역에서 30년 내 해구형 거대지진 발생 확률을 80%로 상향 조정했다. 이로 인해 일본 전역에서 지진에 대한 공포와 관심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왜 난카이 트로프 지역인가? 난카이 트로프 진원지는 시즈오카현 연안에서 미야자키현 연안까지 약 700km에 걸쳐 있는 깊은 바다의 해구 지역이다. 이곳은 필리핀 해판이 유라시아판 아래로 섭입하는 경계로, 판 구조 운동에 의해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지진 전문가들은 이 난카이 트로프 지역에서 머지않아 규모 8~9급의 거대 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과거 100년 주기로 다섯 차례나 거대 지진이 발생한 곳이며, 1940년 이후로는 장기간 큰 지진이 일어나지 않아 이른바 ‘거대 지진 공백’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백 기간 동안 지각에는 섭입 과정에서 축적된 지진 에너지가 상당량 존재하므로, 지진 발생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본은 지진 대책 분야에서 세계적인 선두주자로 꼽힌다. 에도시대부터 개울 속 메기의 이상한 행동을 지진 사전 징후로 인식해 왔다. 전국에 걸쳐 내진 설계가 적용된 건축물이 많아 지진 안전성이 높다. 또한, 활성 단층 조사, 지화학 모니터링, 지진계 및 GPS 관측 시스템 등 최신 과학 기술을 활용한 상시 지진 감시망을 완벽히 구축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진 발생 후 지진재해 저감시스템 구축과 대비훈련이다. NHK공영방송의 통상 지진, 쓰나미 재난방송과 얼마 전 지진재해 저감방안에 대한 NHK ‘미미요리 해설’ 방송이 가슴 깊이 와 닿는다. 그러면 한반도는 지진에 안전한가? 한반도는 판구조론적으로 지진이 빈발하는 판의 경계와는 떨어져 있다. 때문에 일본열도와는 달리 지진발생 빈도가 낮다. 그러나 신생대에 판내부에서 백두산, 제주도, 울릉도 등에서 대규모 화산폭발과 함께 지진이 일어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약 2400회의 지진 발생 기록이 남아 있으며, 최근에도 연평균 30회 이상의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2016년의 경주 지진과 2017년의 포항 지진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우리나라 건축물은 대부분 내진 설계가 부족해 직하 지진에 취약하며, 난카이 트로프 거대지진 발생 시 한반도 연안에도 쓰나미 위험이 존재한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는 2만2325명의 인명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초래한 바 있다. 당시 일본에서 1700km 떨어진 칠레 해안에까지 2m 높이의 쓰나미가 발생하였다. 난카이 토로프 거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라면 한반도 주변 해안과도 가깝다. 따라서 난카이 트로프 거대지진은 강 건너 불이 아니다.

2025-03-23

사랑했던 ‘토끼굴’을 떠나보내며

나는 어떤 시절을 어느 장소로 기억하기도 한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의 시간은 빨간 벽돌건물과 그 외벽을 타고 올라가던 담쟁이덩굴이 있던 고등학교 교정으로 기억한다. 그 다음 몇 년은 취하고 휘청이다 토하고 소리치던 대학교 앞 술집 골목으로 기억하고, 또 어떤 시절은 눅눅하고 곰팡이 냄새 나던 어느 지하 공연장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마 꽤 긴 시간, 그러니까 2012년 봄부터 약 십 년 동안의 시절은 내게 ‘토끼굴’이라는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토끼굴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까. 술을 주로 팔았다는 이유로 ‘바’라고 하자니 분명 누군가는 커피를 주문해서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고, 때로는 재즈부터 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라이브 연주가 이루어지기도 했던 그곳을 말이다. 토끼굴은 2012년 초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 해 5월. 토끼굴의 사장 수진이 누나와 서로 인사를 나누다, 나는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한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무척 반가워하던 기억이 난다. 누나는 그때부터 마지막까지 토끼굴을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예술가들이 드나들며 서로를 존중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말이 시인이고 싱어송라이터이지 시집 한 권, 정규앨범 한 장 없었던 내게 예술 하는 친구는 언제든 환영이라며 언제든 놀러오라던 그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날부터 토끼굴은 내게 단골집을 넘어서 집이었고 학교였고 놀이터였다. 토끼굴에는 크고 멋진 바 테이블이 하나 있는데 언제 가도 거기에는 수진이 누나와 정겨운 얼굴 몇몇은 꼭 있었다. 모르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자주 있었는데 그들 역시 예술가이거나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예술을 모르더라도 최소한 예술과 인간에 대한 존중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쉽게 말을 트고 친해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술과 인간에 대한 존중조차 없는 사람은 수진이 누나가 반드시 쫓아내곤 했으니까. 거기서 만난 멋진 사람들 하나 하나가 다 삶의 교과서였고, 누나와 그들이 걸어둔 플레이리스트도 내겐 음악 교재였다. 언젠가 내가 드디어 끝내주는 노래를 한 곡 썼다며 달려가 거기 있던 기타를 부여잡고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방금 쓴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바로 지금까지 내 대표곡으로 사랑받고 있는 ‘타임머신’이었다. 첫 책이 나왔을 때 책을 받자마자 단숨에 달려갔던 곳도 토끼굴이었다. 출간일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책을 토끼굴의 책꽂이에 꽂아두는 대신 축하주를 얻어먹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만큼 내게 특별했던 공간이었던 토끼굴은 시간이 지나 은근히 입소문을 타게 되었고, 모두에게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가수 강산에 형님 앞에서 타임머신을 부르고 칭찬을 받는 바람에 밤잠을 설쳤던 일, 술에 잔뜩 취해 형은 진짜 최고라고 내가 술 한 잔 사야겠다고 기어이 하림 형님에게 술을 사고 나중에 다시 만나 훨씬 비싼 답례주를 얻어먹었던 일, 장기하 형님과 시에 대해 이야기 했던 마법같은 일들이 모두 토끼굴에서 일어났다. 어느 밤엔가는 해외 뮤지션인 Damien Rice가 술을 마시다 가기도 했고, 또 언젠가는 토끼굴에 놀러 온 Rachael Yamagata가 연주를 한다는 다급한 연락을 받기도 했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10년 정도 화려하게 빛나던 토끼굴의 불빛은 2022년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으로 인해 꺼지게 되었다. 영업을 종료한 후 수진이 누나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방치되었던 그 공간을 뒤늦게 정리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며칠 전에 받았다. 누나는 내게 기타를 가져가라고 했다. 오래 전 술값이 없던 어느 날 공짜 술을 얻어먹기 미안해서 토끼굴에 내가 기증했던 그 기타. 거기 머물면서 수많은 뮤지션들과 노래하던 그 기타를 돌려받게 된 것이다. 누나는 기타 뿐 만 아니라 몇몇 음향장비, 그리고 개봉하지 않은 술들까지 선물해주었다. 짐을 챙기면서 횡재했다는 기분보다 정말로 토끼굴과 이별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사는 동네에서, 그리고 어딘가로 여행을 가서도 항상 괜찮은 바를 검색하곤 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내 마음에 쏙 드는 그런 공간은 없다. 사실 나는 오랫동안 또 다른 토끼굴을 찾고 있지만 토끼굴 같은 곳은 토끼굴 밖에 없었고 이제 그곳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있고 그런 장소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하게 되었다. 이 글은 내가 사랑했던, 그러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장소에 대한 마지막 선물이다. 더 오래, 잘 기억하기 위해 몇 자 적어보았다. 참 많이 고마웠다.

2025-03-23

빚진 마음

인터넷을 켜는 일이 이렇게 피로한 줄 몰랐다. 나는 단지 쉬고 싶을 뿐이었다. 언어와 씨름하느라 정신이 쏙 빠진 끝에 숨을 고르기 위해 화면을 열었는데, 쏟아지는 뉴스가 밀물처럼 덮쳤다.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추락, 누군가의 분노. 정치는 혼란스럽고 범죄는 쉴 틈이 없다. 이 모든 일이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젠 지겹다고 혀를 찰 법도 한데, 번번이 걸려 넘어지고 만다. 뉴스를 읽다 보면 슬픔보다 피로가 먼저 찾아올 때도 잦다. 하나하나가 고통의 파편처럼 느껴지지만 낯설지 않은 충격이다. 언제나 고통은 타인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그것은 멀리서 벌어지는 국지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는 보이지 않는 구조의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이어져 있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그 앞에서 어떠한 빚을 느낀다. 누군가 내게 책임을 강요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니, 정말 책임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나와 무관해 보이지만 무관하지 않은 일. 어쩌면 내가 누리고 있는 이 고요가 누군가의 침묵과 상처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닐까? 예소연 소설, ‘영원에 빚을 져서’는 이런 부분을 매만진다. 이야기는 친구의 실종 사건을 접한 이들이 그를 찾아 나서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대학 시절 캄보디아 프놈펜이 있는 바울 학교에서 봉사 단원으로 만나 친해진 사이다. 세 명의 친구는 타국에서 생활하며 도움이라는 명목 아래의 타자성을 느낀다. 나아가 함께 있는 행위 자체가 반드시 이해나 연대와 같지는 않다는 사실, 삶의 조건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은 때때로 끝까지 공유되지 않는다는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그들은 자신이 보았던 것들과 끝내 마주하지 못했던 것들을 되짚기 시작한다. 이러한 질문은 그들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지나갔다고 여겼던 슬픔은 어딘가에 남아 있으며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부채로 삶에 스며 있었다. 소설은 바로 그 잔류하는 감정의 흔적을 섬세하게 포착해 낸다. 소설 속 인물들이 인터넷 뉴스로 세월호 참사를 접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이 비극적인 소식에 참담함을 느끼는 이들 앞에서 캄보디아 학생은 꺼뻑섬에서 벌어진 압사 사건에 관해 말한다. 물축제에서 너무 많은 인파로 사람들이 다리에 끼여 죽은 사건이었다. 그들의 죽음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애도를 공유하려는 순간, 한 친구가 말한다.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뭐 그런 죽음이 다 있어.” 소설이 은밀하게 건드리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는 무수한 고통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에 경계를 둔다. 어떤 죽음은 우리를 멈춰 세우고 어느 죽음은 스쳐 지나간다. 나와 얼마나 가까운지, 얼마나 자극적인지, 또 얼마나 자주 보았는지에 따라 경중을 나누게 된다. 바라보는 일은,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본다는 것은 누군가의 고통을 알아주는 일이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볼 수 있는지 끊임없이 묻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매일 벌어지는 사건에 일일이 응답하기는커녕 바라보는 일조차 때로는 벅차다. 우리 일상은 그 자체만으로 숨 가쁘고 삶을 꾸려가는 일만으로 충분히 위태롭다. 인터넷을 종료하고 눈앞에 까만 화면이 떠오른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라면 얼마나 편할까. 뉴스 기사의 마침표를 보고도 나는 끝내 고개를 돌리지 못한다. 기억하는 방식으로 조금이나마 빚을 갚는다는 생각 때문일까.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라도 응답하자는 다짐. 그것은 죄책감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무에 가깝다. 인간으로 최소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증거이자 바라보는 일부터 출발하는 작고 조용한 윤리. 정말 두려운 것은 무시무시한 사건이 벌어지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그 반복에 익숙해진 마음이다. 고통 앞에서 더 이상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가장 깊은 윤리적 위험 속에 있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자신의 연인에게 말한 것처럼. “가장 끔찍한 게 뭔 줄 알아? 그건, 사람의 마음을 찢어놓는 게 아니라-마음은 찢어지라고 있는 것이니까-돌로 만들어버린다는 거야.” 숨을 고르고 멈춰 선다. 스쳐 지나가는 고통 앞에, 너무 늦게 도착한 슬픔 앞에, 끝까지 닿을 수 없는 고통일지라도 잠시 머무는 일 정도는 가능하니까. 그렇게 조용히 바라볼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응시가 빚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고서.

2025-03-23

다음이라는 미래에 눈이,

이희정시인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어 제 고요를 쌓고 그리고 가끔 바람에 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 한 가지씩만 덮고 있었다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 이루어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꾸 꿈결에 물소리가 들렸고 발이 시렸다 ― 장석남 ,‘맨발로 걷기’ 부분(‘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문학과지성사, 1991) ‘맨발로 걷기’는 1987년 경향일보로 등단한 장석남 시인의 첫 시집에 실려 있는 등단작으로 그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잘 보여준다. “생각난 듯이 눈이 내”리듯 우연히 떠오른 생각이 자연 현상과 만나고, 이는 단순한 외부의 일시적인 변화로만 보지 않는다. 시인이 풍경을 보는 방식은 당시 사회의 변화와 갈등 속에서 외부의 큰 흐름에 휘말려 있음과 동시에 그 혼란이 내면의 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포착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 이루”듯 장석남 시인의 시선을 따라 내려가던 풍경은 저도 모르게 꽤나 먼 풍경에 이르게 되는데. 가령 2024년에 발표된 양안다 시인의 ‘다음 미래’속에 묘사된 이런 풍경이 그렇다. “나는 네가 쏘아 올린 눈보라 속에 있다. 그것은 지구 최초의 인간이 사랑한 풍경이거나 지구 최후의 인간이 마주할 풍경이다. 내가 아름답게 바라본 형상들이 나를 아름답게 만드는 모순 속에서. 지구 최후의 풍경은 인간이 아니지만 지구 최후의 풍경은 인간이 될 것이다. 뙤약볕도 없이 눈보라가 그치고 물이 되어 흐른다. 네가 두 팔 벌린 물보라 속에 내가 잠긴다. ” 묘하게도 그 예전 젊고 푸른 장석남 시인의 첫눈에 담긴 그 먼 풍경이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듯 양안다 시인의 “네가 쏘아 올린 눈보라 속”처럼 포개어지는 오늘이 있어, 기실 우리의 시간은 과거로부터가 아닌 미래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꾸 꿈결에 물소리가 들렸고”라는 감수성으로부터 어떤 감각은 오래도록 시리게 한다. 마치 장석남의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는 고백이 다음의 양안나 시인에게 닿는 것처럼. “끝나지 않는 마음의 동정”이 “어른이 아이를 망치자 아이는 복수를 학습”하게 하고 “어른이 된 아이가 아이를 망치자 망각이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예의 먼 맨발 걷기의 감수성으로부터 회복의 가능성을 타전해 보게 한다. 우리가 문학을 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인간의 미래를 믿는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최초로부터 혹은 최후로부터 두 시인은 인간의 지속적인 고통을‘눈’이라는 시린 형상을 통해 보는 것에서 예민하게 감각하는 것으로 조우한다. ‘발이 시리다’는 감각의 표현은 기억 속에서 생겨나는 세계의 불화와 내면의 고통이 물리적 경험으로 나타나는 섬세한 묘사일 것이다. “네가 아름답게 바라본 형상들이 나를 아름답게 만드는 모순”

2025-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