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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기업 1400조 투자, 5극 3특의 마중물로

김경수 지방시대위원장은 지난 8일 열린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한미관세 협상 후 대기업이 국내에 투자키로 한 1400조원은 5극 3특의 마중물이 돼야 할 것이란 취지의 보고를 했다. 김 위원장은 “정부가 균형발전을 목표로 추진하는 5극 3특의 가장 핵심과제는 지역경제를 어떻게 살리느냐에 달려 있다”며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권역별 대기업 투자를 통해 전략산업과 성장엔진을 육성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균형발전은 국가적 생존전략”이라고 말할 정도로 수도권 집중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이날 이 대통령도 “수도권 집중이 이어지면 향후 엄청난 비효율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언급도 했다. 국토의 12%에 불과한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 이상 살고 있고 100대 기업의 80% 이상, R&D 투자의 70% 이상이 수도권에 쏠려 있는 한 국가 균형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현 정부뿐 아니라 역대 정부가 균형발전을 내걸고 각종 정책을 펼쳤으나 수도권 일극 체제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이재명 정부 역시 과거와 다른 패러다임을 불러오지 않으면 역대 정부의 실패를 따라갈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김 위원장의 대기업 1400조 지방투자는 획기적 발상이다. 대기업의 투자가 지방으로 향하도록 유도하는 데는 그만한 유인책이 필요하다. 기업이 원하는 입지를 제공하고, 주택과 교육 등 정주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특단의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대기업의 투자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1400조원의 지방투자가 균형발전을 시동 걸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5극 3특은 전국을 5대 초광역권과 3개 특별자치도로 나눠 지방정부가 독자적으로 균형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선 지방정부에 대한 재정 및 권한 확대는 필수다. 동시에 경제 효과를 높일 대기업의 지방투자를 적극 유인해야 한다. 현 정부 균형발전의 모델이 될 5극 3특의 성공은 과감한 패러다임 대전환에 있다. 대기업의 집중 투자가 해답일 수 있다.

2025-12-09

한계에 부딪힌 ‘장동혁 리더십’

사분오열된 국민의힘 내에서 장동혁 대표의 리더십과 거취 문제가 공개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강성지지층에 기댄 그의 행보로 당 지지율이 20%대에서 정체되자 불만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당장 보수 안방인 대구·경북(TK) 최다선(6선) 주호영 국회부의장이 지난 8일 대구 언론인 모임에서 장 대표를 겨냥해 “지금처럼 윤 어게인 냄새가 나는 그런 방향은 맞지 않다”고 직격했다.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TK 중진까지 장 대표의 노선 전환을 압박한 것이다. 지난 3일에는 원내사령탑인 송언석(김천) 의원도 원내부대표들과 함께 “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통감하고 있다”며 장 대표와 엇갈린 메시지를 냈다. 소장파가 중심이 된 40여 명의 의원들도 송 원내대표와 같이 반성 메시지를 냈다. 반면, 장 대표는 의원들의 거듭된 요청에도 “비상계엄은 민주당의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것”이라며 계엄에 대한 사과를 거부했다. 원조 친윤으로 불리는 윤한홍 의원(3선)조차 지난 5일 장 대표가 주재하는 당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비판한다“면서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인연, 골수 지지층의 손가락질을 다 벗어던지고 계엄의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말했다. 당내 일각에선 장 대표의 거취 문제를 압박하는 기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당의 경쟁력 지표는 당연히 지지율이다. 현재 국민의힘 지지율은 TK지역을 제외하고 전 지역에서 큰 차이로 민주당에 뒤지고 있다. 당이 윤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계엄의 늪’에 갇히면서 민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게 주된 이유다. 이에 대해 주 부의장은 “정치의 방향은 민심인데 자기편을 단결하는 과정에서 중도가 도망간다면 그것은 잘못된 방법”이라고 장 대표를 비판했다. 장 대표가 취임한지는 벌써 100일이 넘었다. 본인 스스로 그동안 이반된 민심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장 대표는 취임 이후 윤 전 대통령 면회에 이어 “우리가 황교안이다”는 등의 주장을 펴며 제1야당을 스스로 고립시켜왔다. 민주당의 입법폭주가 도(度)를 넘고 있음에도, 대다수 국민이 야당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는 것은 장 대표의 이런 태도 탓이 크다. 국민의힘의 내분과 무기력증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러한 제1야당의 상황은 여권의 노골적인 삼권분립 위협과 입법폭주에 오히려 동력이 되는 형국이다. 정국이 이런 식으로 흐르면 국민의힘을 내란정당으로 규정해 당을 해산시키겠다는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말이 실제상황이 될 수도 있다. 국민의힘 일부의원들이 최근 장 대표에게 ‘내년 2월 설 명절 전’이란 데드라인까지 제시하며 노선 변화를 주문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늦어도 설 명절 전까지는 당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중도층 민심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공감가는 말이다. 국민의힘이 제1야당에 걸맞은 지지율을 확보하려면 하루빨리 다른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우선 107명 의원 모두가 한목소리로 국민에게 계엄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당 혁신비전을 제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12-09

AI시대와 세상

행운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역사상 몇 번 되지 않는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변곡점‘을 경험하고 있다. 생각하고, 글을 쓰고,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존재가 더 이상 우리 인간만이 아닌 세상, 인간에게 필적하는 지능을 갖춘 ‘인공지능 로봇과 함께 하는 세상‘을 맞이할 첫 세대가 된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원시시대, 농경시대, 산업화 시대 등 큰 사회적 변화를 거쳐 이제 상상을 초월하는 AI시대를 겪게 되는 것이다. AI시대가 오면, 일은 인공지능 로봇이 하고 인간은 유토피아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판단-분석-결정-창조‘의 영역까지 기계가 동참하는 인공지능 로봇과 함께 하는 AI시대, 과거는 노동을 기계가 대체하는 시대지만, AI시대는 챗GPT를 통해 사고, 기획, 판단 등에 활용하고, 미래는 인간의 ‘두 번째 두뇌‘라 할 정도의 모든 세상에서 AI 역할이 있는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인공일반지능) 시대가 도래한다. 사람처럼 배우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일상생활에서 인공지능 로봇과 함께 하는 AGI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기존 산업사회와 AI시대를 비교하면, 노동시장에서 큰 변화가 예상된다. 직접 일을 하고, 설비, 자동차 등을 운전하고, 병 진단과 치료 등의 세상에서, 인공지능 로봇이 일하고 진단하고 답을 제시하는 세상이 온다. 경험과 직관에서 AI의 예측 분석을 통한 과학적 의사결정, 대량 생산에서 초개인화 생산, 위계형 조직에서 네트워크 플랫폼으로 형성되어 지금의 조직은 사라진다. 기업의 제조업에서 보면, 스마트팩토리에서 자율공장의 시대로 간다. 불량을 예측하고, 설비 점검 및 고장 예측, 자동 품질 검사, 생산 스케줄 자동화, 조업 패턴 자동 조정과 생산·원가 자동 최적화 등 사람은 작업자에서 개선자, 전략가로 변한다. 금융계는 대출 심사 자동화, 이상 거래 탐지, 세무 자동 신고 등 단순 사무직 대거 축소, 고급 분석 인력만 생존한다. 의료 헬스케어 분야는 AI 영상 판독, 개인 맞춤 치료, 질병 조기 예측 등 의사는 진단에서 치료 전략가로 전환된다. 교육 분야는 AI 튜터가 되어 맞춤 수업이 되고, 교사는 지식 전달자에서 코치. 멘토가 된다. 마케팅, 영업은 고객 행동 예측, 자동 광고 제작, 수주 연결 등 감으로 하던 영업은 데이터로 최적화 된다. AI시대는 일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바뀐다. 출근하는 직장에서 원격으로 일하는 공간으로 바뀌고, 보고와 회의는 AI는 정리·분석·기록, 사람은 판단·결정 등 역할로 나뉘어 보고용 회의에서 결정용 회의로 전환된다. 사람의 가치 기준도 성실함과 전문성에서 창의성, 통찰력, 감정지능으로 변한다. AI가 못하는 것은 공감, 통찰, 판단, 리더십 등이고, 국가 경쟁력은 AI 기술력에 의해 좌우된다. AI시대 산업은 자동화 되고, 일은 지능화 되며, 인간은 ‘의미·판단·책임’을 맡는 존재로 재정의 된다. 개인은 생존을 위해 문제정의 능력, AI활용 능력, 비판적 사고, 감정·관계·리더십 능력이 필요하다. 역사적 큰 변화에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탐구하고 준비해서 함께 가는 세상으로 가야 한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12-09

겨울나무를 보며

대설이 지나도 겨울은 포근하기만 하다. 겨울은 추워야 제맛일 텐데 낙목한천(落木寒天)은 고사하고 아직 단풍조차 제대로 덜든 잎새들의 항거(?) 탓일까? 황록으로 변조되는 잎새들이 어서 단풍 들고 낙엽 져 나목(裸木)이 될 때까지 계절의 수레바퀴는 겨울을 손사래 치며 잠시 주춤하는 듯하다. 자연의 미묘하고 미세한 변화와 정교한 반응은 간혹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얼핏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층계가 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푸른 잎사귀가 단풍 들기 전이거나 열매가 채 익기 전에 떨어져 버린다면 나무들은 얼마나 아쉽고 마음 조여 할까? 충분한 연습과 적응, 내성(耐性)이 갖춰지지 않은 채 부모 곁을 떠나게 되는 자식과 비슷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때가 되면 떠나고 흩어졌다 모이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이, 시간이 경과되면서 순서에 따르거나 또는 역행(逆行)으로 나타나는 자연현상과 사회양상들은 실로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만큼 자연은 천변만화하고 세상은 복잡다단하기 때문이다. ‘조락(凋落)이 스미고/스산함이 감돌수록//비우고 떨구고 삭히고 재우면서//나무는/야윈 가지로 허허롭게 몸짓한다//두텁게 몇 겹 옷으로//추위를 밀어내고/움츠림을 가리는/부류들은 알지 못한다//나무가/왜 옷을 벗으며/절대고독에 맞서는가를//뼈저리는 혹한에/신음조차 삼키며//속으로 보듬고 의연히 참아가며//또 한 겹/숙성의 테두리/옹골차게 새긴다’ -拙시조 ‘겨울나무’ 전문 나무의 나이테는 그냥 당연히 생긴다거나 결코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온갖 비바람이나 가뭄, 풍상을 견디고 추위를 이겨내야만 인고의 증표 같은 나이테가 오롯하게 새겨지는 것이다. 열대지방의 나무나 콩나물 시루 같은 호조건(好條件) 속에서 생기게 되는 밋밋한 성장테와는 차원이 다른 촘촘하고 또렷한 나이테가 겹겹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나무의 성장과 시련의 과정이 응축되고 기록되는 나이테가 있기에 나무들은, 더욱 꿋꿋하고 강인하게 혹독한 추위에 맨몸으로 맞서며 ‘절대생존’을 지켜가는 것이다. 나이테를 감아가며 겨울을 나는 나무처럼 사람들은 한 해를 보내면서 연륜을 더해간다. 한 해가 마무리되는 12월은 지난 1년 동안의 자취를 반추하며 결실과 공적을 정리하고, 새로운 해의 계획과 목표를 가늠하여 보다 나은 새날을 기약하기도 한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크고 작은 일들과 희비의 사연이 점철된 아스라한 날들은 자신의 흔적이고 역사이며 삶을 지탱하는 자양분이기에 소중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미리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정리하고 차곡차곡 쌓아가다 보면 삶의 내면이 새롭고 알찬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러나 비록 올해 이룬 것이 그다지 없고 내세울 것조차 없다손 치더라도 너무 허탈해하거나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싶다. 하루하루 무위(無爲)로 보낸 것 같은 날들도 먼 훗날 되돌아보면 하나의 궤적이고 삶의 편린이기에 모든 날이 살갑고 다행스러운 안도의 나날이 될 것이다. 온갖 잎새 다 내려놓고 칩거에 드는 겨울나무처럼 홀가분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더 고요하고 깊어지며 생각에 잠겨 드는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세월은 무심치 않아 연륜을 쌓고 인생은 무상치 않아 슬기를 낳는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12-09

구름을 뚫고 마주한 안데스의 심장, 마추픽추

리마의 황금빛 햇살을 뒤로하고 나는 안데스의 심장, 쿠스코(Cusco)로 향했다. 비행기로 불과 한 시간 반 거리였지만, 그 짧은 비행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고대 문명 속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통로와 같았다. 해발 3,400미터, 공기마저 얇아 숨쉬기조차 힘든 곳, 생명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고원 도시였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균형이 흔들렸지만, 잉카 제국의 옛 수도에서 풍겨 나오는 역사와 전설의 향기는 그 모든 불편을 잊게 할 만큼 강렬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돌길을 따라 걷는 발걸음마다 수천 년 전 잉카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쿠스코에서 이틀 밤을 보내고 새벽녘, 드디어 마추픽추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버스로 두 시간, 기차로 두 시간, 길지만 설레는 대장정이었다. 희뿌연 안개가 골짜기를 가득 채운 새벽, 나는 고요히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다. 전날 유적지를 오르내린 피로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고산병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잃어버린 도시를 향한 열망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잠시 눈을 붙였지만, 진정한 깨어남은 아직 오지 않았다. 버스는 고대 잉카의 요새 마을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에 도착했다. 그곳은 잉카 레일이 출발하는 환승지이자, 잉카의 건축 정신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역 앞에는 전통 복장을 한 현지인들이 나와 그들의 본래 언어인 케추아어로 노래를 부르며 여행객을 맞이했다. 그들의 맑은 눈빛에는 오랜 세월을 건너온 잉카의 영혼이 어려 있었다. 짧았지만 따뜻한 그 미소는 낯선 여행자에게 묘한 위안을 주었다. 잉카 레일은 안데스의 험준한 산맥을 따라 천천히 달렸다. 차창 밖 풍경은 마치 신이 붓을 들고 그린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깊은 계곡 아래로는 우루밤바 강이 은빛 실처럼 구불구불 흐르고, 절벽 위에는 구름이 피어올랐다가 이내 흩어졌다. 산과 강, 구름과 빛이 끊임없이 어우러지며 살아 숨 쉬는 듯한 풍경을 자아냈다. 그 장엄한 풍경은 곧 마주하게 될 마추픽추의 신비로움을 예고하는 서곡이었다. 기차가 오전 8시 무렵 마추픽추 마을에 도착했을 때, 거리는 이미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로 활기로 넘쳐났다. 맑은 강물이 흐르고, 거대한 산들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안았다. 하지만 마추픽추로 가는 길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었다. 시청 앞 광장에서 예비 입장권을 받고 지정된 시간에 돌아와 정식 입장권을 사야 했다. 복잡한 절차 속에서도 마음은 오히려 설렘으로 차올랐다. 11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 800킬로미터를 완주하며 품었던 꿈, ‘언젠가 마추픽추에 서리라.’ 그 약속이 마침내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이른 새벽,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버스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천천히 올랐다. 창문 밖으로 흰 구름이 손 닿을 듯 흘러가고, 계곡의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현지 가이드 Walter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 길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길이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의 말이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산등성이를 돌고 돌아 마침내 도착한 마추픽추는 처음엔 짙은 안개에 덮여 있었다. 수백 명의 여행자들이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안개가 천천히 걷히며 회색빛 화강암의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햇살에 반짝이는 성벽, 산허리를 따라 흐르는 정교한 수로, 계단식 밭의 초록빛이 눈부셨다. 세상은 잠시 숨을 멈춘 듯 고요했다. 나는 그 앞에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압도적인 경외감, 그것은 인간이 자연 앞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감정이었다. 마추픽추는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다. 인간의 기술이 자연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예술이자 생존의 철학이 담긴 도시였다. 잉카인들은 철제 도구도, 바퀴도, 시멘트도 없이 돌을 맞추어 쌓았다. 면도날조차 들어가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그 정밀함 덕분에 지진이 잦은 안데스에서도 수백 년 동안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은 건축이라기보다 자연과의 대화를 통해 도시를 빚어낸 것이었다. 산비탈을 따라 이어진 계단식 밭 역시 잉카의 지혜를 말해준다. 그들은 자연을 정복하지 않았다. 태양의 각도, 바람의 방향, 물의 흐름을 계산하며 자연 안에서 조화를 이루었다. 그들의 삶은 문명이라기보다는 자연 속의 예술과 같았다. 나는 천천히 신전의 계단을 올랐다. 햇살은 돌기둥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고, 저 멀리 우루밤바 강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산허리를 감싸고 흐르는 구름은 파도처럼 출렁였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인간은 왜 이토록 웅장한 자연 앞에서 숙연해지는가. 답은 하나였다. 경외심이었다. 자연은 우리보다 먼저 있었고, 우리가 떠난 뒤에도 남을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추픽추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누가, 언제, 왜 이 도시를 세우고 버렸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그 미지의 여백이야말로 이곳의 진정한 매력일 것이다.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더 깊이 상상하고, 이해할 수 없기에 더 진심으로 성찰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인종도, 언어도, 국적도 아무 의미가 없다. 세상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하나의 인간으로 서 있을 뿐이다. 그 자체가 잉카 문명이 우리에게 전하는 조용한 메시지였다. 잉카인들의 사회는 아이유(Ayllu)라는 혈연 중심의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사람의 땅이 아니라, 모두의 땅이었다. 농사를 지을 때는 함께 일했고, 수확한 곡식은 공동으로 나누었다. 누군가 병들면 이웃이 도왔고, 늙거나 혼자 사는 사람은 마을이 함께 보살폈다. 그들에게 삶이란 경쟁이 아니라 나눔이었다.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다’라는 믿음이 그들의 삶 속에 녹아 있었다. 하산길에 뒤돌아보니 마추픽추는 다시 구름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엔 여전히 그 빛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배웠다. 삶의 완성은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자연처럼 흐르고, 구름처럼 비워내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그날, 거대한 산은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구름처럼, 물처럼 살아라.” /글·사진 김상국(세종대 명예교수)

2025-12-09

윤곽 드러나는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군

내년 지방선거에 출마할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군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대구 수성구갑이 지역구인 주호영 국회 부의장은 8일 내년 지방선거에서 대구시장에 출마하겠다는 의지를 우회적으로 내비쳤다. 그는 이날 대구에서 열린 아시아포럼21(대구경북 중견언론인 모임) 토론회에 초청돼 “어느 정도 대구시장에 필요한 준비를 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다만 그는 "대구 시민 뜻을 확인하고, 지역 국회의원들과도 협의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 만큼 내년 초까지는 결심을 하겠다“고 했다. 주 부의장은 지방선거 때마다 대구시장 후보군으로 거론돼 왔다. 유력한 후보군인 추경호(달성) 의원도 지난 3일 법원에 의해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대구시장 출마 여부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추 의원도 최근 기자들과 만나 현재 출마여부를 고민중이며 내년 1월 중 공식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추 의원은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특검과 정부의 수사가 잘못됐다는 점이 부각되면 시장 공천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지난 5일에는 대기업 출신의 초선인 최은석(대구 동구·군위군 갑) 의원도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공식화 해,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 공천문제가 공론화되는 분위기다. 국민의힘 내에서는 윤재옥(대구 달서구을) 의원과 유영하(대구 달서구갑) 의원,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도 유력 후보군으로 꼽힌다. 민주당에서는 현재 출사표를 던진 홍의락 전 대구시 경제부시장과 김부겸 전 국무총리가 후보 물망에 올라 있다. 여야의 극심한 정쟁으로 내년 TK지역 지방선거 역시 중앙정치 프레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자칫 내년 선거가 중앙정치 연장전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커졌다. 이런 측면에서 지역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선거전이 TK지역의 비전 실현과 현안 해결 해법을 찾는 정책 대결로 흐를 수 있도록 언론은 관련 정보나 의제를 충분히 보도할 필요가 있다. 선거 때마다 지방의제가 부족하다 보니 유권자들이 중앙정치 프레임 속에서 투표를 하게 되는 것이다.

2025-12-08

대구안경산업 고도화 더 이상 늦추지 말아야

얼마 전 대구서 열린 대통령 주재 타운홀 미팅에서 제기된 대구안경산업 육성에 대한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대구시의 후속 조치가 시작됐다. 대구시는 지난주 김정기 시장 권한대행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안광학산업진흥원에서 ‘K-아이웨어 글로벌 거점도시 도약 간담회’를 가졌다. 대구시는 이 자리서 내년도 국가 예산에 반영된 안경산업 고도화 육성비를 활용해 대구를 글로벌 안경산업 허브로 육성할 계획임을 밝혔다. 대구는 일찍부터 안경산업이 발달해 현재 안경 제조업의 80% 이상이 모여 있는 안경특화 도시다. 정부는 이런 특성을 감안 2006년 대구를 안경산업특구로 지정해 신소재와 디자인 연구개발, 첨단공장 조성 등을 추진했다. 대구의 안경산업 글로벌화를 유도했지만 시장 변화 등으로 실효적인 성과는 내지 못했다. 세계 경제침체와 해외 유명브랜드의 시장 잠식 등으로 영세한 지역안경산업은 오히려 수출이 줄고, 수입이 늘어났다. 2018년 1억2300만 달러에 달하던 안경태 수출이 5년 만에 30%가 감소하고, 수입은 되레 20% 이상 늘어났다. 수출효자 상품으로 떠올랐던 선글라스도 최근 3년간 내리막길이다. 한국과 중국업체 간 기술격차가 줄고 수도권 안경브랜드가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기면서 지역 안경산업의 기반이 흔들렸다. 특히 지역의 영세기업이 제조공정이나 디자인 혁신을 이루지 못한 것은 성장 발목을 잡은 주 원인이다. 김 권한대행은 “국내 안경산업은 고급 디자인과 기술력이 더해지면 충분히 세계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며 첨단기술 융합과 브랜드 경쟁력 확보에 국비를 지원, 대구를 글로벌 안경산업의 거점으로 성장시키겠다고 말했다. 안경은 단순히 시력 교정 도구로 사용되는 시대는 지났다.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해 대중의 인기가 좋다. 대구는 수십 년간 영세기업들이 모여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안경산업을 발전시켜온 도시다. 디자인 혁신과 기술 고도화, 적극적인 마케팅이 더해진다면 얼마든지 성장이 가능하다. 대구시는 다시 한번 안경산업의 고도화에 역량을 모아주길 바란다.

2025-12-08

국민의힘, 수권 정당이 되려면

정당의 목적은 집권에 있고, 집권하려면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민주주의에서는 어떤 정당도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는 주권자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 국민의힘(이하 ‘국힘’)이 주권자의 신뢰를 얻어 재기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반성과 혁신 여하에 달려 있다. 계엄과 탄핵으로 집권 3년 만에 또 다시 야당이 된 국힘에 대한 민심은 어떤가? 최근 여론조사(한국갤럽, 11월 28일)에 따르면 국힘의 지지율은 24%(민주당은 42%)이며, 대선 이후 지난 6개월 동안 지지율이 20%대(민주당은 40%대)에 갇혀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정부의 부동산 규제, 대장동 항소포기 외압 의혹, 여당의 독선과 입법 폭주 등 여권의 계속된 악재에도 불구하고 국힘에 대한 지지율은 오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당 지지율을 좌우하는 중도층의 민심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다. 이처럼 저조한 지지율의 원인은 무엇인가? 정권을 잃고서도 반성과 쇄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개혁을 외면하는 구주류가 당을 장악하고 “윤석열을 버리고 당을 혁신하라”는 주권자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다. 당대표 장동혁이 수감 중인 윤석열을 면회한 것은 민심과 싸우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당대표가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황교안을 두둔하고, ‘윤 어게인’을 외치는 극우세력과 야합하는 한 민심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김용태·안철수·윤희숙 등 세 차례 혁신위원회의 개혁안들도 모두 당 지도부가 뭉개버렸다. 자신의 잘못은 고치려하지 않으면서 상대의 잘못만 비판하는 장외투쟁으로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혁신에 소극적인 국힘은 ‘열린 보수’가 아니라 ‘닫힌 보수’이며, 닫힌 보수는 ‘확장성’이 없다. 극우화되어가는 국힘, 민심을 외면하고 당심을 앞세우는 국힘이 바로 닫힌 보수다. 내년 지방선거 경선규칙을 개정하여 당원투표 50%를 70%로 확대하고, 여론조사 50%를 30%로 축소하겠다는 것은 ‘민심을 거부하는 역주행’이다. 민심과 괴리된 당심 후보가 어떻게 본선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선거 승패를 결정하는 ‘중도층의 지지율이 국힘(15%)은 민주당(45%)의 1/3에 불과하다.(한국갤럽, 11월 28일 현재)’는 사실을 생각할 때 정말 어이없는 발상이다. 민심을 얻기 위해 여론의 반영비율을 확대해도 모자랄 판에 축소하겠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국힘이 수권 정당이 되려면 영남에 갇힌 ‘낙동강 정당’에서 벗어나 ‘수도권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당을 지배하고 있는 영남의원들이 기득권 유지에 안주하거나 ‘영남의 지역민심’을 ‘국민의 전체민심’이라고 우기면 재기불능이다. 보수의 생명력은 민심을 받드는 변화와 혁신에 있으며, 그것은 열린 보수이어야 가능하다. 유연한 변화를 중시하는 열린 보수는 민심에 민감하지만, 경직된 투쟁에 집착하는 닫힌 보수는 민심에 둔감하다. 민심을 받들어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자신부터 먼저 환골탈태(換骨奪胎)하는 것이 재기의 첩경임을 왜 모르는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2025-12-08

12월 3일에 대한 철학적 우울감

2024년 12월 3일 밤. 한 인간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던진 한마디. 이것으로 인하여 평온하던 세상은 알 수 없는 침묵과 우울감으로 뒤덮였다. 의학적 우울에피소드와는 전혀 다른 우울감이다.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심리상태. 억장이 무너지고, 미치고 팔짝 뛰는 침묵의 시간이 온 것이다. 의학 전문 용어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냥 ‘철학적 우울감’이라 해보자. 치료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지만. 기분이 너무 나쁘다. 나의 경우는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지독하게 집착한 것도 아니었다. 민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소양이랄까. 뭐 이 정도의 범위 내에서 나름 올바른 견해를 갖기 위하여 적당히 관심을 두었다.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정치가 술판의 안주처럼 언제든 꺼내 씹을 수 있는 가벼운 화제였고, 금지되지 않은 신나는 주제였던 시절이 있었다. 정겨운 사람들과 화기애애한 술자리에서 ‘정치라는 안주’를 씹으면서 웃고 떠들었다. 가타부타 갑론을박하다가, ‘그래 너 말도 맞아’ 하면서 상대를 치켜세워 주기도 하고, ‘뭔 개소리야’ 하면서 상대를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정치판을 떠도는 사람들을 술판의 안주 삼아 맛나게 씹어대고 삼켰다. 술자리가 더 흥성거릴지언정 분위기가 망가지는 일은 없었다. 이런 개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1968년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미국, 일본까지 퍼진 ‘68혁명’은, 전통, 권위, 군사주의, 자본주의, 성도덕, 학벌과 교육의 위계에 대한 저항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전 세계를 들끓게 하였다. 냉전과 핵전쟁의 공포, 소비사회와 중산층의 확대, 교육의 팽창과 지식인의 각성, 베트남 전쟁이라는 화두 중심으로, 푸코, 들뢰즈, 데리다와 같은 포스트모던 철학이 본격적으로 전면에 등장하여, 국가권력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학벌·성적·규율 중심의 교육, 가부장제 및 성에 대한 금기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68혁명과 같은 정신적 변곡점을 거칠 수 없는 못한 불우한 지리적, 환경적 상황에 있었다. 남북 대치 상황과 군부독재 속에서도 우리는 나름 민주주의를 지키고, 키워왔다. 순국선열과 민주열사들의 피로 지켜온 21세기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는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믿었다. 2024년 12월 3일까지는. 믿음은 깨어졌고,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침잠하여 들어갔다. 문제의 인간을 신속하게 권력의 정점에서 제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침묵과 혼돈이 계속되고 있다. 왜 그럴까? 계속된 혼돈의 이유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반드시 그 이유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민주주의는, ‘권력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는 철학적 불신’의 제도화이다. 권력이 시민을 두려워할 때 민주주의는 시작된다. 우리가 느끼는 이 ‘철학적 우울함’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감각의 증거이다. 철학적 우울은 패배가 아니라, 잊지 않겠다는 공적 기억의 방식이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시민의 우울감에서 세워진다. 우울을 느끼는 시민이 사라지는 순간, 독재는 완성된다. 철학적 우울은 인류가 ‘자유를 감각하는 방식’이자, 상처받은 자유를 치유하는 ‘정치적 명약’이다. 우울감을 즐기자. 이러한 감각은, 당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더욱 마음껏 즐겨라. 아직도 그날을 옹호하는 그들보다는 덜 괴롭고, 훨씬 덜 우울할 테니. /공봉학 변호사

2025-12-08

초겨울 단상(斷想)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겨울의 문턱을 넘어섰다. 봄의 신록과 여름의 녹음, 가을 단풍에 이어 이제 곧 설경이 펼쳐질 것이다. 수시로 얼굴색을 바꾸는 중국의 변검(變臉) 배우처럼, 자연은 계절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생태계는 얼핏 보면 일사불란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천차만별 제각각인 걸 알 수 있다. 겨울을 맞는 모습도 그렇다. 일찌감치 잎을 다 떨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나무들이 있는가 하면, 무슨 미련인지 늦도록 푸른 잎을 달고 있다가 한파에 얼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풀들은 더 다양한 모습이다. 가을이 되기도 전에 씨앗을 맺고 말라버린 줄기로 생을 마감하는 풀도 있고, 된서리를 맞고도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풀들도 있다. 더구나 벌초를 한 자리에 새로 돋아난 풀들은 그런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다가 겨울을 맞기도 한다. 내가 산책하는 들길에서는 쑥과 개망초가 특히 눈길을 끈다.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 것들은 벌써 씨앗을 맺고 메마른 줄기로 홀가분하게 서 있다. 그러나 예초기로 배어낸 길가에 새로 돋아난 쑥과 개망초는 봄보다 더 왕성한 기세로 자라서 계절을 무색케 한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도, 용을 쓰느라 붉어진 얼굴처럼 잎을 적갈색으로 바꾸고 최대한 버틴다. 하지만 혹한이 닥치면 결국에는 얼어 죽고 말 것이다. 무모하고 불합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사람이 나서서 뭐라고 할 일은 아닐 것이다. 일견 복잡하고 혼란해 보이는 자연생태계도 분명 일관하는 원리와 법칙이 없지 않을 터이다. 어찌 지구생태계 뿐이겠는가,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고 무궁무진한 우주만상에 불변의 원리와 질서가 어찌 없겠는가. 기독교와 이슬람은 세계를 신의 창조와 섭리로 보았고, 불교는 인과의 그물인 연기(緣起)가 세상 모든 존재를 엮고 있다고 보았다. 도가(道家)는 억지로 꾸미지 않고, 스스로 그러함에 맡기는 자연(自然)의 길을 따르라고 하고, 성리학은 우주를 움직이는 근본 원리인 이(理)와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기(氣)를 통해 인간과 세상의 구조를 설명하려 했다. 그렇듯 인류가 수천 년 동안 각종 종교나 사상, 과학을 통해서 끊임없이 탐구하고 주장해왔지만, 그 모두를 통합하는 하나의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로 요약되는 우리의 인생사 역시 지구생태계의 일부라는 생물학적 조건을 벗어날 순 없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복잡계이론(Complex System Theory)이 말하듯, 수많은 변수와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이 얽히고설켜 우리의 삶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다단해 보여도, 그 모든 것을 일관하는 본질과 원리, 그리고 섭리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구태여 우리가 그것을 다 알거나 이해할 필요는 없을지라도. 삭막한 초겨울의 풍경 속에서,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겨울을 맞고 있는지 생각한다. 처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혹한에 대비하는 초목들처럼 나 또한 나에게 가장 적당한 자세와 지향이 있을 터이다. 찬바람으로 와 닿는 초겨울의 전언을 온몸으로 듣는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5-12-08

줄어든 중국 관광객, 일본 교토는?

교토는 매력적인 여행지다. 거기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물론, 건축물에서도 고풍스런 역사적 숨결이 느껴진다. 다양한 조리법으로 만들어진 정갈한 일본 요리도 관광객들에게 적지 않은 만족감을 주는 도시. 다른 지역에선 이미 사라진 일본 전통을 지켜가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기에 교토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경주’로도 불린다. 기자 또한 2023년에 이어 올해도 교토를 찾아 중세 일본의 향기를 느끼며 맛깔스런 장어덮밥과 초밥 등을 즐기는 휴가를 즐긴 바 있다. 교토는 한국인만이 아닌 유럽 사람들과 미국인도 선호하는 관광도시. 중국 관광객들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얼마 전까진 교토의 유명 사찰과 이름난 식당에선 언제든 중국말로 대화를 주고받는 관광객을 볼 수 있었으니. 그런데, 최근 교토를 찾는 중국인이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이유가 있다. 1개월 전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개입할 수도 있다”는 발언이 나온 것. 이는 당장 중국의 반발과 비난을 불러왔다. 지난달 30일 중국은 ‘일본 여행 자제령’ 내렸고, 정부의 방침에 따를 수밖에 없는 중국 항공사들은 12월 운항 예정이던 일본행 항공 노선 5548편 가운데 904편의 운항을 취소했다. 운항이 중단된 항공기 대부분은 교토와 오사카를 여행 거점으로 하는 간사이국제공항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 여행 절제’를 결정한 중국이 받아든 성적표는 어땠을까? 기대 이하라고 한다. “시끄럽고 매너 없는 중국인이 줄어들어 오히려 좋다”는 게 교토 사람들의 보편적 의견이라고. 이런 추세가 얼마나 갈 것인지를 중국은 물론 일본도 지켜보고 있다. 어떻게 될까? 모두 궁금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12-08

포항 구만리 교석초 신화

포항시 호미곶면 구만리 앞바다에는 암초가 많다. 그러다보니 이곳에는 옛날부터 해상사고가 잦았다. 1907년 일본의 수산강습소 실습선 카이오마루(快應丸)가 이곳에서 좌초되어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사망한 사고가 대표적인데, 이 사건이 연유가 되어 1908년에 호미곶 등대가 들어섰다. 암초 중 특별히 교석초(橋石礁)라 부르는 곳이 있다. 구만리 북쪽 약 650m 해상에 자리한 암초로 맨 위쪽 수심은 1.5m이다. 2002년 11월 이 암초에 대해 해양지명위원회에서 교석초로 공식 명명하면서 한국 최초로 확정 고시된 해양지명에 등재되게 되었다. 1959년, 해상 안전을 위해 수중에 암초가 있음을 알리는 등표를 세웠는데, 주민들이 흔히 ‘물등대’라 부르는 교석초 등표다. 교석초는 우리말로 ‘다릿돌’이라는 뜻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1/50,000 지형도에도 표시돼 있는 걸로 봐서 오래 전부터 불러 온 명칭임을 알 수 있다. 다릿돌이라는 이름은 다리로 놓은 돌이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구만리에 마고할미가 살고 있었다. 마고할미는 남편을 만나러 영덕 축산에 다녀오곤 했다. 구만리에서 보면 축산은 빤히 건너다보이는 곳인데, 영일만 해안을 따라 빙 돌아가려니 너무 멀었다. 그래서 바다에다 징검다리를 놓기로 했다. 마고할미는 물살이 잔잔한 날을 택하여 치마에 바윗돌을 싸 와서는 바다에 하나씩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밤샘작업에도 불구하고 날이 새는 바람에 완성을 못한 채 중단하고 말았다. 이렇게 마고할미가 놓은 바윗돌이 구만리 앞바다에서 북쪽으로 이어져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다릿돌 또는 교석초라고 부른다. 구만리 앞바다에 있는 암초의 유래를 설명하는 신화인데, 우리 귀에 익숙한 마고할미라는 여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남편이 있는 축산을 오가는 데 편리하게끔 영일만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놓기로 한다. 이 할미는 덩치도 크고 힘도 아주 센 ‘슈퍼 우먼’이기에 큰 바윗돌을 치마에 싸서 운반한다. 그런데 날이 새는 바람에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굳이 밤에 다리를 놓아야만 했을까? 신들은 보통 밤에 일을 한다.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이 새거나 닭울음소리가 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만다. 마고할미는 할머니지만 거대한 덩치에 괴력을 소유한 신격으로 우리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창조신이다. 제주도 선문대할망이나 서해안 개양할미, 지리산 성모천왕도 따지고 보면 이름만 달랐지 마고할미계 여신이다. 이처럼 마고할미는 신화 속에서 거대한 덩치와 엄청난 힘으로 산을 만들거나 옮기기고, 바위를 치마폭에 싸서 나르는 괴력을 보여 준다. 다만 이러한 작업을 사람이 보지 않는 밤에 하다 보니 작업 중에 날이 새거나 닭이 울면 작업을 중단해야 하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마고할미 관련 자연물은 거의 다 미완성이다. 교석초가 위치해 있는 호미곶 구만리에서는 정기적으로 신화의 주인공 마고할미를 위한 제의를 지내오고 있어 주목된다. 이 마을에서 열리는 다릿돌별신굿이 바로 그것이다. 교석초 등표가 건너다보이는 구만리 해안에서 3년두리(격년)로 열리는 별신굿으로 풍어와 해상안전을 기원하는 제의다. 그러기에 교석초 이야기는 구만리의 ‘살아 있는 신화’라 할 만하다. 마고할미가 놓았다고 하는 교석초 일대는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구만리 갯마을인 까구리개(구만2리)의 지명이 해안에 밀려 온 물고기를 까꾸리(갈고리)로 끌어서 잡는 곳이라는 데서 연유한다는 유래담을 보아도 예로부터 어자원이 풍부한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파도가 높고 암초가 많아서 배가 다니기엔 매우 위험한 지역이다. 지리적 위치로 인해 강원도 쪽 배들이 남으로 가거나 부산 쪽의 선박들이 북으로 갈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다. 그러기에 이곳 사람뿐만 아니라 선박을 운행하는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도 마고할미가 놓은 교석초는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신앙적 대상이 되었다. 별신굿을 앞두고 구만리 사람들은 경비 마련을 위해 경남, 부산은 물론 강원도 지역까지 모금하러 다녔고, 그곳 뱃사람들은 두 말 하지 않고 성금을 냈다고 한다. 다만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는 별신굿 대신 소규모 제사로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4년에는 12월 2일 밤에 제사를 지냈다. 현재 포항시에는 포항지역의 숙원사업인 영일만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영일만대교 가설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신화가 집단무의식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교석초 신화는 아득한 옛날 사람들도 구만리에서 손에 닿을 듯이 건너다보이는 흥해읍 용한리까지 다리를 놓아, 육지 안쪽으로 빙 돌아가는 대신 바다를 가로질러 편하게 영일만을 건너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러한 꿈이 교석초 신화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영일만대교는 오래 전 이곳 사람들이 꿈꾸었던 소망의 현실화인 셈이다. 제주도에 가면 선문대할망상이 있고, 지리산 아래의 산청군 중산리에는 성모천왕상이 세워져 있다. 구만리 해안에 교석초 신화의 주인공 마고할멈상이 세워지는 날을 그려 본다. /박창원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

2025-12-07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눈을 치우는 사람과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가 한 골목에 나란히 있다 그해 겨울엔 검은 눈이 내렸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내렸다 눈송이를 돌려주기 위해서 그들은 빛보다 먼저 내려앉아 눈을 거들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다행이라는 물방울 속에 적설량을 감춰왔나 사람들의 눈금을 지우며 쌓여가는 검은 눈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들에게 소원을 빌었다 하얀 입김이 빚는 검은 눈사람의 형태를 눈이 녹아가는 거리 그들은 이제 모두 같은 골목을 걸어간다 검은 눈은 세상의 하얀 것을 데려간다 없었던 일은 될 수 없겠지만 해프닝으로 남겨지기 위해 머리를 찾는 눈사람이 굴러간다 검은 눈은 사람들을 목격자로 만들어놓고선 이제 아무 때나 오지 않고 ―서윤후, ‘흑설(黑雪)’전문 (‘나쁘게 눈부시기’, 문학과지성사) 골목에는 두 개의 장면이 나란히 포착된다. “눈을 치우는 사람”과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 장면은 파편적인 이미지로 펼쳐져 있을 뿐 구체적인 서사가 없다. “눈”과 “눈사람”은 “치우는 사람”으로, “만드는 아이”로 진행 중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보이는 그대로 선하거나 정직하지도 않다. 화자가 기억하는 “그해 겨울”은 “검은 눈이 내렸다”라는 언술에서 감지되듯 이 세계는 드러나지 않는 부정과 불신이 검은 유령처럼 숨어 있다. 하지만 시종일관 검은 것과 흰 것의 대비로 끌고 가며 불안한 정황을 환기하고 있을 뿐이다. 언뜻 보기에 “눈”에 기댄 우회적인 묘사는 밝을 법하지만 외려 어둡다. ‘우리’라는 공동체에 드리운 짙은 음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령 “믿을 수 없겠지만”이라는 전제는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의 심각성을 강화하고 있다. 이어 “우리는 얼마나 많이 다행이라는 물방울 속에 적설량을 감춰 왔나”는 물음을 통해 줄곧 화자가 나와 타자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를 호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송현지의 해설에서, “서윤후는 일반적으로 나와 타자를 묶어 가리키는 ‘우리’라는 말을, 타자와 다름없어진 어제의 나, 지금의 나를, 그리고 여러 ‘나’들을 아우르는 독특한 방식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이러한 개념이 역설적으로 시간의 존재로 살아가는 한 아무도 그런 ‘우리’를 가질 수 없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한 글자 사전에서 김소연은 인간의 눈에 대해 “보이는 것만 잘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들”에 우리는 여전히 무지하다고 했다. 서윤후 시인이 응시하는 세계는 가시적인 공간 그 너머에 있다. 골목이라는 공동체에서 ‘우리’가 감각을 통해 보는 것은 흰 눈과 검은 눈이라는 양가적 윤리성에 있다. 예컨대 “하얀 입김이 빚는 검은 눈사람의 형태”처럼 말이다. 이 무력한 점층법 “사람들의 눈금을 지우며 가는 쌓여가는 검은 눈”처럼 비록 “없었던 일은 될 수 없겠지만” “세상의 흰 것”의 믿음을 끌어안고 가 보려는 노력은 될 것이다. “머리를 찾는 눈사람이 굴러간다” /이희정 시인

2025-12-07

‘현지 누나’, 세긴 세구나

“정치권에서 형, 형님, 누나, 누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선배 동료들을 살갑게 부르는 민주당의 일종의 언어 풍토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이 지난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그는 또 “동료 후배 의원들께서도 저를 의원, 전 대표보다는 대부분 거의 형님, 큰형님이라 부른다”라고 강조했다. 박 의원이 이 글을 올린 이유는 분명하다. ‘현지 누나’를 비호하기 위해서다. 박 의원은 83번째 생일이 6개월이나 지났다. 그는 김대중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자칫하면 그의 사소한 언행이 김 전 대통령에게 누를 끼칠 수도 있는 처지다. 그때도 그랬느냐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그런 박 의원까지 나서서 ‘현지 누나’를 엄호하는 것을 보면, ‘세긴 세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동료 의원들끼리 ‘살가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쁠 리가 없다. 그런 호칭이 굳이 민주당이나 호남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풍토도 아니다. 경북 출신인 한 대학 총장도 젊은 시절 만나는 사람마다 ‘형님’, 아니면 ‘아우님’이라고 부른다고 소문이 난 적이 있다. 친화력이 좋고, 마당발이라는 평가가 따랐다. 국민의 힘 정치인 중에도 ‘형님’이라는 호칭을 버릇처럼 내뱉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정치인이 ‘형님’, ‘누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뻔하다. ‘공식적인 관계보다는 가깝게 지내자’는 제의다. ‘너무 야멸차게 원칙만 들이대지 말아달라’는 응석이다. 친 형님처럼 푸근하게, 친 누님처럼 따뜻하게 대해달라는 부탁이다. 좀 더 들여다보면 인사나 청탁을 잘 챙겨달라는 뜻이기도 하다. 남의 부탁은 몰라도 형님이나 아우 부탁은 들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계산이 담겨 있다. ‘형님’이란 말을 정치인보다 더 잘 쓰는 집단이 ‘조폭’이다. 무슨 말을 하건 ‘형님’을 갖다 붙이는 게 조폭 어법이다. 개그맨들이 종종 그런 말투로 조폭을 흉내 내 관객을 웃기는 걸 본다. ‘형님’에는 논리가 없다. 명령과 복종뿐이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단순 무식’이 이 세계의 절대 규율이다. 그러나 이런 관계가 정치권, 공직 사회에 얹혀지면 곤란한 일이 생긴다. ‘공(公)’과 ‘사(私)’가 비빔밥이 되는 것이다. 문진석 민주당 수석원내부대표가 김 남국 전 대통령실 디지털소통 비서관에게 보낸 문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남국 아, 우리 중대 후배고···”. 같은 대학 동문이니 내가 챙기는 것이고, 너도 챙겨야 한다는 논리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업무와 관계없는 줄이 작동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는 민간단체다. 공직, 공공기관, 정부가 공식으로 관여하는 자리가 무수하다. 그런데, 이런 민간단체장까지 대통령실이 좌지우지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 디지털소통비서관은 자동차산업과 관계가 없다. 인사 와도 거리가 멀다. 제1부속실장도 인사담당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거대 여당의 원내 제2인자가 그런 줄을 잡고, 인사청탁을 했다. 대통령실 비서관도 ‘현지 누나’가 인사를 좌우하는 실력자라고 지목했다. 이걸 단순한 해프닝으로 덮을 수 있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여권 실세들이 모두 ‘현지 누나’가 민간협회장을 낙점해줄 수 있다고 믿었을까. ‘만사현통’이라는 시중의 소문만 믿은 건 아닐 것이다. 야당이 김현지 대통령실 제1부속실장을 국회로 부르자, 이재명 대통령은 그에게 문고리 권력을 맡겼다. 국회 출석을 회피할 수 있는 자리다. 문자 소동 끝에 김현지 실장은 “나는 아주 유탄을 맞았다”라며 억울해했다. 그렇다면 진즉 국회에 나왔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최서원(최순실의 개명)으로부터 사소한 도움을 받다 비선 논란에 휘말렸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의 지나친 국정 개입을 감싸려다 제 발등을 찍었다. 권력에는 책임이 따른다. ‘비선(秘線)’은 권력은 휘두르는데, 책임을 지지 않는다. 무책임한 권력만큼 위험한 게 없다. 이재명 대통령의 인재 풀은 매우 좁다. 성남 시절 지인이 아니면, 자기 사건 변호인들이다. 그 밑에서 돌아가는 모양도 ‘끼리끼리’다. 사적 관계에서 살갑고 정이 넘치는 건 좋다. 하지만 공적 영역은 다르다. 달라야 한다. 국정 운영은 더욱 그렇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12-07

호칭 문화

한국사회의 호칭문화는 매우 복잡하고 독특하다. 사회적 구조와 나이, 서열, 직장에 따라 호칭하는 방법이 각기 다르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이 애로를 겪는 분야 중 하나다. 친가, 처가, 외가 등에 따라 호칭이 다르고 나이에 따라 존댓말과 반말이 구분된다. 직장에서도 상사와 부하 간 사용하는 호칭이 별도 있다. 영어의 YOU에 해당하는 단어도 ‘님’ ‘씨’가 있는 반면 ‘놈’ 혹은 ‘것’까지 다양하다. 자칫 잘못된 단어 선택은 상대에게 큰 실례가 된다. 4년 전 가장 권위 있는 영어사전인 영국 옥스퍼드는 한국의 단어 26개를 표제어로 등재했다. 먹방, 김밥, 불고기, 삼겹살 등 한류문화와 관련한 단어다. 그중 눈여겨볼 것은 여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오빠(OPPA)와 언니(UNNI)가 등재된 사실이다. 옥스퍼드 측은 K팝이나 K드라마가 등재의 결정적 이유라 했다. 외국인은 한국 배우나 가수를 부를 때 자신의 성별과 무관하게 ‘오빠’와 ‘언니’를 사용한다는 것인데 남성 외국인이 ‘오빠’ ‘언니’라 불러도 이상할 것 없다는 뜻이다. “Oppa JinJa Deabak!”(오빠 진짜 대박)과 같은 말들이 K-컬처를 타고 세계 곳곳에서 들을 날도 멀지 않을 것 같다. 청탁문자 파문으로 대통령실 비서관이 사직했다. 이와 별개로 공적 관계 속에 그가 사용한 “형” “누나” 호칭을 두고 논란이다. 일부에서는 “민주당의 일종의 언어풍토”라고 했지만 공직자가 근무 중 “형, 누나”같은 사적 호칭을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많다. 사적 친밀감을 나타내는 표현의 사용은 공적 영역에서는 신중한 게 옳다. 공적 기능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12-07

무지와 빈곤

사노라면 우연한 계기로 변화와 마주하는 수가 있다. 무슨 연유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2012년에 빅토르 위고(1802~1885)의 ‘레미제라블’을 읽게 되었다. 영화와 드라마, 오페라와 뮤지컬로 여러 차례 만들어졌지만, 정작 원작을 읽지 않았던 터였다. 6권짜리 2400쪽이 넘는 대작이었지만, 대가의 솜씨 덕분에 비교적 빠른 기간에 완독할 수 있었다. ‘레미제라블’ 첫머리에 위고는 쓴다.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런 종류의 책도 쓸모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위고 이전에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1812~1870)는 19세기 영국에 만연한 무지와 빈곤에 대한 소설을 출간했다. ‘올리버 트위스트’(1838), ‘크리스마스 캐럴’ (1843), ‘데이비드 코퍼필드’(1850), ‘어려운 시절’(1854)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디킨스의 소설 작품들은 위고의 ‘레미제라블’만큼 울림이 크고 깊지 않다. 필시 그것은 디뉴의 미리엘 주교와 죽음을 눈앞에 둔 86세의 노정객 국민의회 의원 G 사이에 펼쳐지는 프랑스 대혁명 관련 논쟁 때문일 것이다. 왕당파이자 보수주의자 미리엘 주교와 진보적인 공화주의자 국민의회 의원 사이의 기나긴 논쟁은 소설의 백미(白眉) 가운데 하나다. 국민의회 의원은 말한다. “루이 16세 처형은 여성에게는 매춘의 종말, 남성에게는 노예의 종말, 어린이에게는 어둠의 종말이오. 공화제(共和制)에 찬성함으로써 나는 그 일에 찬성한 것이오.” 그의 선택은 왕과 그 아내만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무지와 빈곤에 신음하며 매춘과 노예 노동, 출구 없는 암흑에 빠진 가난한 다수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얘기다. 파괴적인 분노에 반대한다는 미리엘 주교를 반박하면서 의원은 말을 잇는다. “정의에는 분노가 있는 법이오. 올바른 분노는 진보의 요소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예수 탄생 이래 인류의 가장 힘찬 일보였소. 대혁명은 비천한 인간들을 해방했소.” 여기서 우리는 위고의 정치적 입장이 궁금해진다. 그에게는 왕당파와 공화주의자 양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 같다. 어떤 영화나 오페라에도 이런 기막힌 서사는 나오지 않는다. 공연에 필수적인 상업적 고려 때문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소설에서 독자는 무지와 빈곤에 시달리는 여러 인물과 대면한다. 장발장, 팡틴, 코제트, 에포닌, 가브로슈 등등을 거명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자기 손으로 무지와 빈곤을 극복한 유일한 인물은 장발장이다. 무지와 빈곤의 최대 피해자 팡틴은 매춘하다가 병에 걸려 죽는다. 그래서 위고는 여자가 비참한 경우에 빠진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한 것이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미혼모임이 밝혀지면서 쫓겨나고, 저임금으로 바느질하다가 머리털을 잘라 팔고, 끝내는 거리의 여자로 전락해 죽어갔던 비운의 여인 팡틴! 고교교육을 의무화한 한국 사회는 무지와 작별했다. 하지만 빈곤은 여전히 사회 전반적인 문제다. 2014년 2월의 ‘송파구 세 모녀 자살 사건’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사회 안전망과 경제적 양극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창밖 바람이 차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12-07

지속 가능한 포항시 2040 도시기본계획의 조건

지난주 금요일부터 포항시의회는 내년도 예산 심사에 돌입했고, 건설도시위원회는 첫 순서로 도시안전주택국 예산을 심사했다. 특히 이번 심사에는 포항시 도시계획과가 제출한 2040 도시기본계획 수립 용역비가 포함되어 있다. 본 의원은 도시안전주택국 정책 질의에서 ‘2040 도시기본계획 수립의 중요성’을 집중 다뤘다.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이 계획은 앞으로 포항시의 행정·재정·공간정책을 이끄는 도시의 헌법과도 같은 존재다. 사실 그동안 포항시의 도시기본계획은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대표적으로 △생활권 구조 분석의 부족 △인구·경제 전망의 과도한 낙관주의 △구체적 실천 전략의 부재 등이다. 특히 지난 계획에서는 인구 감소 추세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해 택지 과잉 조성, 녹지 훼손, 공동주택 공급 과잉 등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포항 시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2040 도시기본계획은 이런 문제점을 제대로 검토한 다음 계획 수립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산업 전환을 반영한 미래 도시상을 제시해야 한다. 포항은 오랜 기간 철강 산업 중심의 산업도시였지만 지금은 AI, 2차전지, 수소 등 신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산업 다변화가 아니라 도시 전체의 구조를 다시 설계해야 하는 변화다. 산업이 바뀌면 도시공간의 기능, 주거와 교육, 교통체계, 청년 정주 환경까지 모두 달라져야 한다. 둘째, 남·북구 균형 발전을 실질적으로 실현할 도시계획 전략이 필요하다. 현재 포항은 남구에 산업단지와 공업시설이 집중되면서 환경 부담이 커지고, 반대로 북구는 주거와 상업 기능이 몰리며 지역 간 편차가 심화 되고 있다. 이로 인해 출퇴근 시간 증가, 교통 혼잡, 주거·교육 서비스 격차 등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남·북구 생활 SOC 균형 배치, 원도심 활성화 전략 등을 포함해 도시 전체가 균형 있게 발전할 수 있는 계획이 필요하다. 셋째, 2040 도시기본계획은 개발 중심을 넘어 지속 가능한 도시를 목표로 해야 한다. 그동안 많은 도시는 “아파트를 지으면 인구가 늘어날 것”이라는 개발 중심 논리를 앞세웠지만, 저출생·고령화·인구 유출이라는 구조적 변화를 고려하면 이러한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포항 역시 1인 가구가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도시 인프라, 아이를 키우며 일할 수 있는 보육·교육 환경, 어르신의 돌봄 공백이 없는 촘촘한 복지체계를 우선적으로 담아내야 한다. 또한,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도시 숲 확대, 안전도시를 위한 환경·재난 계획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2040 도시기본계획은 행정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계획이 아니라, 시민이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 산업 전환, 균형 발전, 지속 가능성이라는 세 가지 방향을 중심으로 2040 도시기본계획이 설계된다면 포항은 단순히 ‘성장하는 도시’를 넘어 시민이 살기 좋은 도시, 다음 세대가 꿈꿀 수 있는 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2040 도시기본계획이 지속 가능한 포항시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길 기대해본다. /김은주 포항시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2025-12-07

혐오하기의 즐거움을 넘어서려면

며칠 전 12·3 계엄 1주년이 지났다. 12·3 계엄 선포는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혐오가 극단적으로 표현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포고령 1호의 1번이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런 혐오하기가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가 깊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제인 엘리엇은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살해된 다음 날 자신이 담임을 맡았던 3학년 학생 20여 명을 대상으로 이틀간 ‘푸른 눈, 갈색 눈’ 실험을 시도했다. 교사 엘리엇은 평소 서로 잘 지내던 아이들을 푸른 눈, 갈색 눈 두 집단으로 나눠서 첫날은 푸른 눈이 열등하다고 차별하고, 둘째 날은 갈색 눈이 열등하다고 차별했다. 처음에 아이들은 어리둥절했으나 우월하다고 지목된 집단의 아이들은 하루 만에 바로 열등하다고 지목된 집단의 아이들을 혐오하고 차별하며 공격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 혐오는 단순히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혐오 다음에는 반드시 폭력이라는 행동이 뒤따른다. 작년에는 당시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부산에서 기자간담회 도중 칼로 피습 당했고, 같은 해 7월에는 트럼프도 피습 당했다. 윌리엄 피터스의 ‘푸른 눈, 갈색 눈’을 번역한 김희경은 책 말미에 해설과 후기를 아주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섬뜩했던 것은 엘리엇이 이 실험 결과를 책으로 낸 후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는 뒷이야기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일이 몇십 년이 지난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격 행동을 유발하는 혐오가 여전한 것을 보면, 어쩌면 혐오하기가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실제로 영국의 수필가 윌리엄 해즐릿 (1778-1830)은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산문에서 ‘인간은 순수한 선에 금방 싫증을 내고 변화와 활기를 원한다’면서 ‘혐오할 게 없으면 생각과 행동의 원천마저 잃어버릴 것 같다. 삐걱거리는 이해관계, 제멋대로인 열정으로 계속 파문을 일으키지 않으면 삶은 고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썼다. 해즐릿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우정과 사랑의 가치를 믿었다가 배신당한 후 냉소적으로 쓴 것이기는 하지만, 그가 제시한 자료들을 보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질이 있다는 것은 그다지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 사이코패스도 좋은 교육을 받으면 사회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인간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올해 92세를 맞이한 교사 엘리엇이 여전히 강의 활동을 하는 이유다. 한편, 혐오하기의 즐거움이 가슴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한, 남의 신발을 신어보라는 ‘푸른 눈, 갈색 눈’ 교육만으로는 혐오를 다 해결하기 어렵다. 행복한 사람은 혐오에 휘둘릴 가능성이 적다. 혐오를 즐기지 않기 위해서는 우정과 사랑의 가치를 믿는 행복한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12-07

포항 도심 가로수 관리 이대로 좋은가?

포항 시가지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육거리에서 오거리 방면의 가로수는 수십 년째 플라타너스(Platanus)가 주류를 이룬다. 거대한 수폭을 자랑하는 이 수종은 짙은 녹음으로 여름 한철은 시원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 떨어지는 넓은 낙엽은 도심의 골칫거리가 됐다. 건물을 가릴 정도로 무성한 수관도 도시 미관을 해치지만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낙엽은 시가지 차도와 인도를 뒤덮으며 흉물스러운 환경을 만들고 있다.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잎이 넓고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낙엽이 지는 특성 상 가로환경미화원들의 감당할 수 없는 업무 부담으로도 이어진다. 매일 24시간 시시각각 떨어지는 낙엽을 청소 인력이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더욱 문제는 거리에 마구 나뒹구는 낙엽이 단순한 도시미관 문제를 넘어 시민들의 일상적인 불편과 인근 상인들의 생업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상인들은 바람이 부는 날이면 가게 안으로 낙엽이 밀려 들어와 문을 열 수 조차 없다고 하소연 한다. 수십 년간 겪어온 고통이다. 시청과 구청에 아무리 불편민원을 넣어도 답이 없자 어느때부턴가 아예 체념하고 ‘그러려니’ 하고 있다. 이를 더 방치하는 건 행정의 무관심과 무책임이며 오만과 방종이다. 근본적으로는 수종 갱신이라는 전면적인 재식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이 당장 어렵다면 예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지혜로운 개선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시민들이 요구하는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안은 바로 가을철 낙엽이 지기 전 선제적인 가지치기를 시행하는 것이다. 낙엽이 지기 전에 적절한 가지치기를 통해 낙엽의 양을 줄이고, 도심 건물과의 조화를 고려한 수관 관리를 한다면 시가지 가로 환경을 훨씬 깨끗하게 관리할 수 있다. 포항시가 수십 년 동안 반복된 관성적 가로 정비 방식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해답은 현장에 있다. 잠깐만 시간을 내어 시가지를 걸어보면 알 일이다. 언제까지 과거 낙엽처리 방식을 답습만 할 것인가. 개선 1안·2안을 찾아 시민들의 울분에 답할 때도 됐다. 글·사진/임창희 선임기자

2025-12-07

포항시 재선충병 방제 주먹구식이었나?

전국에서 소나무 재선충병 피해가 가장 심각한 지역은 경북이다. 산림청이 2021년-2025년까지 조사한 소나무 재선충병 발생 현황에 따르면 경북은 186만 그루가 재선충병에 감염된 것으로 파악됐다. 국내 전체의 45%다. 도내에서 피해가 가장 심각한 지역은 포항과 경주, 안동으로 밝혀졌고, 산림청은 3곳을 소나무 재선충병 극심지역으로 분류했다. 이 지역에서는 최근 5년간 재선충병으로 고사한 소나무가 75만그루에 달했다. 불과 5년 사이 7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특히 고사목의 40%는 포항에서 발생했다. 지난달 포항시 소나무 재선충병 지역방제협의회에서 공개된 소나무 재선충병 방제 기본설계용역 최종보고서에 의하면 포항지역의 완전 고사목은 소나무 10개 중 3개 꼴인 31.3%에 달했다. 그동안 방제를 위해 수많은 인력과 예산을 투입했지만 결과는 전국 최악의 재선충병 지역이란 오명만 쓴 셈이다. 용역 보고서는 당국의 방제사업이 비합리적이고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수천억원의 예산을 날렸다는 등의 몇 가지 비판을 제기해 눈길을 끌었다. 보고서는 설계, 조사, 모니터링없이 사업을 진행하는 바람에 사업이 어느 정도 실효성을 보였는지 알 수 없고, 또 오히려 방제의 역효과로 확산을 가속화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지역주민들도 일부 사업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위해 표본지 몇 곳만 처리하고 끝냈으며 방제지역 경계 설정과 이력 관리가 엉망이었다는 비판 목소리를 냈다. 항공방제나 드론 살포가 필요하다는 제안이 반복됐지만 시행 시기와 범위가 제멋대로여서 효과가 단기에 그쳤다는 비판도 나왔다. 처치 대상 선정 기준도 불분명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보고서는 고사된 숲의 단순한 제거가 우선되면서 재조림, 토양회복, 생물다양성 회복 등 후속 조치는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그나마 늦게라도 재선충 방제 기본설계를 한 것은 다행이라 했다. 포항시는 설계용역 최종보고서를 바탕으로 전국 최악의 재선충병 확산지역이란 오명을 벗어내는 데 총력을 쏟아야 한다.

2025-12-07

단체장·지방의원 비리, 피해는 결국 유권자 몫

윤석준 대구 동구청장이 지난 5일 대구지법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벌금 200만 원을 선고받았다. 벌금 100만 원 이상은 당선무효형이다. 그는 변호사와 의논해서 대법원 상고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윤 청장은 지난 2022년 지방선거 당시 선관위에 신고하지 않은 개인 계좌로 문자 발송 등 수천만 원의 불법 선거비용을 지출한 혐의를 받아왔다. 진보당 대구시당은 이날 성명을 내고 “윤 청장이 동구청을 ‘월급 현금인출기’로 여긴 것이 아니라면 상고를 하지 말고 즉각적인 사퇴를 하라”고 요구했다. 그동안 윤 청장은 무단결근과 업무추진비 목적 외 사용 의혹 등으로 지역 시민단체들로부터 사퇴요구를 받아왔다. 전국적으로도 마찬가지지만, 대구·경북에서도 일부 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의 불법행위, 이권개입 등의 부패 잡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대구 중구의회가 대표적이다. 중구의회는 차명회사를 세워 중구청·중구의회와 수의계약을 체결했거나 허위공문서 작성, 상표법 위반 혐의 등으로 의원들 간에 법적분쟁이 끊이지 않아 한때 의회기능이 정지되기도 했다. 대구 중구의회가 지난 2023년부터 2025년까지 소속 의원이 의회를 상대로 한 8건의 행정소송에 5321만원을 지출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대구 남구의회에서는 음주운전을 한 의원이 동승자와 ‘운전자 바꿔치기’를 했다가 발각돼 의회로부터 징계처분을 받기도 했으며, 달서구의회에서는 언론사 기자에게 금품을 받은 의원이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는 일도 있었다. 시민들이 보기엔 지방자치 시스템이 감시 사각지대에 방치된 것은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1995년 전면 시작된 지방자치제가 그동안 30년을 거치면서 본연의 기능을 뿌리내리는 측면은 있지만, 각종 비리 문제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내년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은 다시 한번 지방선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뽑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것은 유권자 책임도 크다.

2025-12-07

AI 데이터센터, 축복인가 숙제인가

전 세계적으로 AI 경쟁이 가속화하면서 데이터센터 유치가 각 지자체의 새로운 산업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 포항 역시 이 흐름에 올라탔다. 오픈AI와 NeoAI Cloud가 추진하는 글로벌 AI 데이터센터가 조만간 착공될 예정이고 2027년 1월 본격 운영할 목표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내년 포항시장 자리를 노리는 지방선거 출마예정자들도 이에 관한 포항의 미래를 그리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는 데이터센터 건설사업이 잇따라 중단되고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 6일 최근 약 3개월간 미국 내 약 242억달러(약 35조7000억원) 규모의 데이터센터 개발사업이 주민 반발로 중단됐다고 보도했다. 소규모 일자리 외에는 전기요금 상승, 소음, 환경오염 우려와 같은 ‘외부 불경제 시설'이라는 것이 핵심 이유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아예 ‘혐오시설’로 분류되기도 했다. 전력 문제가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이다. 데이터센터는 대규모 전력을 24시간 사용한다. 미국 버지니아주는 데이터센터 밀집 이후 전기료가 전년 대비 13% 상승했다. AI 데이터센터 비상발전기용 디젤 연료가 배출하는 PM2.5와 NOx가 건강 위험 요인이어서 주민 반대여론에 불을 붙였다. 미국 UC리버사이드는 2028년 데이터센터발 환경비용이 연간 2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분석했다. 미국의 사례는 포항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남긴다. 광명산단은 국가 간선망 수준인 345kV 변전소를 기반으로 별도 이중화 없이도 전력공급 안정성이 확보돼 유리한 조건이다. 하지만 산업전환과 지역 수용성 측면에서는 과제가 적지 않다. 포항의 데이터센터가 ‘기회’가 될지, 미국처럼 ‘갈등의 불씨’가 될지는 여러 측면에서 어떠한 해법을 제시할 지에 달려 있다. 데이터센터는 지역사회와 밀접한 시설인 만큼 발열·소음·전력소비 등 운영데이터의 투명한 공개와 감시·평가 구조에 시민 참여가 필요하다. 또 미국의 사례처럼 지역과 무관한 데이터 처리·저장시설에 그치면 지역경제에 미칠 파급효과는 거의 없다. 포항이 지닌 철강, 배터리, 바이오, 가속기 등 방대한 기술데이터가 AI와 연계되는 전략이 뒤따라야만 한다. 데이터센터의 고용유발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다. 반면 AI 연구·운영·서비스 생태계가 함께 구축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포스텍·한동대·RIST·KIRO 등 기존 R&D 인프라와 융합된다면 포항은 AI 전문도시로 성장할 수도 있다. 포항은 지금 변곡점에 있다. 데이터센터는 미래 산업의 심장이지만 심장은 혈관과 조직, 생태계가 연결돼야만 제 역할을 한다. AI 데이터센터 유치로 포항의 미래를 바꾸려면 처음부터 그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포항은 데이터센터를 ‘보유만 한 도시’에 그칠지, 이를 계기로 ‘AI 산업을 주도하는 도시’가 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12-06

지방의 청년인구 감소, 대책은 없는 것일까?

경북 청년인구가 5년 새 6만명 감소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경북의 청년인구(19~34세)는 올 10월, 37만여 명으로 5년 전 같은 기간보다 15%인 6만여 명이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체 평균 4%의 4배에 가까운 수준이다. 경북 인구감소가 자연 감소를 넘어 청년층 위주로 급속히 가속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지방 청년인구 감소는 경북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수도권 지자체가 공통으로 겪는 지방소멸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반면에 수도권 인구집중은 20년 이상 지속된다. 작년 수도권으로 순유입된 인구는 4만여 명. 청년층 비중이 가장 높다. 경북에서 이탈한 청년인구도 70%가 19~24세다. 수도권 유입인구의 대다수가 청년층에 몰려 있는 것과 유관한 통계다. 청년이 지방을 떠나는 이유는 대학 진학과 일자리다. 문제는 수도권에 한번 가면 그들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의 기회와 수도권의 매력에 이끌려 대부분 그곳에 머물고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서 지방은 인구소멸로 빠져든다. 국가데이터처가 밝힌 농림어업 자료에 의하면 2024년 기준, 경북 농가 수는 16만가구로 10년 전보다 11.8%가 감소했다. 농가 비중도 17.1%에서 13.4%로 하락했다. 청년인구의 지속된 이탈이 농도 경북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있다. 얼마 전 캄보디아에서는 한국 청년들이 살해, 실종, 감금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해외범죄 조직이 내건 고수익 아르바이트와 해외 취업 미끼에 한국 청년들이 속절없이 당한 사고다. 눈여겨보면 피해 청년의 대부분이 지방 청년들이다. 일자리가 없어 놀고 있던 그들이 돈 벌겠다고 나간 뒤 범죄조직에 휘말려 희생된 사건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지방인구 감소에 대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수많은 대책도 내놓았지만 효과가 없다. 매년 수만 명의 인구는 여전히 수도권을 향하고 있다. 앞서 말했지만 삶의 기회나 삶의 질이 지방과 다르기 때문이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지방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청년인구 감소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다.

2025-12-04

국민의힘 ‘계엄사과’로 오히려 내분 증폭되나

12·3 비상계엄사태 1년을 맞은 지난 3일 국민의힘 당대표, 원내대표, 소장파 의원들이 계엄책임에 대해 서로 다른 메시지를 내놓으면서 분열된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된 ‘계엄사과’가 국민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 채 당 내분만 부각시킨 결과를 낳았다. 당내 소장파·개혁파로 분류되는 재선·초선 의원 25명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계엄 사과와 함께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을 선언했으며, 의원 40여명은 별도로 자신의 SNS를 통해 계엄사과 메시지를 냈다. 원내 사령탑인 송언석 원내대표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계엄의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감을 통감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장동혁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계엄에 이은 탄핵이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다”고도 했다. 이 메시지를 두고 당내에서도 계엄이 정당했다는 것이냐는 반응이 나왔다. ‘친윤계’가 주류인 대구·경북 지역을 비롯해 영남권 중진의원 대다수는 이날 침묵을 택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강성 지지층의 이탈을 우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계엄사태 1년이 지났지만 국민의힘이 여전히 사분오열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오히려 최근에는 더 계엄의 늪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이러니 민주당의 ‘내란 프레임’이 국민에게 먹혀들고, 입법독주와 특검남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당은 3일에도 국민의힘 반발에도 불구하고 법사위를 열어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법안 등을 통과시켰다. 민주당은 이날 대법원장 인사권을 무력화하는 법원행정처 폐지 법안도 발의했다. 지방선거가 이제 6개월 앞으로 다가왔지만 국민의힘 지지율은 반등 기미가 없다. 민주당 독주에 대한 반사이익을 전혀 챙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심이 야당 쪽으로 움직이게 하려면 국민의힘이 혁신을 통해 수권정당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법밖에 없다.

2025-12-04

로비가 본업(?)

대규모 정보유출 사고를 낸 쿠팡의 로비가 언론을 통해 구설수에 올랐다. 최근 언론을 통해 밝혀진 쿠팡의 정관계 로비는 국내 굴지 대기업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정관계 인사 영입에서 입증된 결과다. 보도된 내용에 의하면 쿠팡은 2020년부터 올 9월까지 4급 이상 고급 공무원 44명을 영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만 18명을 채용했는데 그중 절반은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이라 한다. 특히 연초 정권교체가 예상되면서 더불어민주당 보좌관을 대거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고, 또 최근에는 고용노동부에서만 8명을 데려왔다고 한다. 이들은 억대 연봉과 임원급 대우를 받으면서 정관계를 대상으로 쿠팡의 입장을 대변한 것으로 전해진다.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은 한 방송에서 “쿠팡은 보안 내실보다 정관계 로비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같은 사실은 쿠팡의 정보보호 투자액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쿠팡의 정보보호 투자액은 매출 대비 0.2%(660억원)로 카카오나 SK텔레콤 등 다른 IT기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기업은 이해관계를 보호하고 불합리한 규제나 정책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는 과정에서 로비의 필요성을 제기할 수 있다. 미국 등 일부 나라에선 로비를 합법화해 신고 및 관리한다. 대신 기업은 로비 활동 내역을 분기별로 공개해야 한다. 국가든 기업이든 일에는 원칙이 우선이다. 기본이 지켜지지 않으면 사회는 혼란이 오게 마련이다. 사자성어 정본청원(正本淸源)은 “기본에 충실하자”는 뜻이다. 이커머스 회사의 기본은 정보보안이다. 로비는 그 이후 문제다. 쿠팡 사태는 기본을 망각한 데서 나온 경영의 실패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12-04

초코파이 한 개와 기소편의주의

작년 1월 전북 완주군의 한 물류회사에 보안업체 직원이 순찰을 하다가 사무실 냉장고를 열어 초코파이 한 개와 커스터드 한 개를 꺼내어 먹었다. 대기실 같은 곳에 놓여 있는 손님용 다과가 아닌 사무실 내 냉장고에 들어있던 과자였으니까 이것은 회사의 직원들이 먹기 위해 사둔 간식이지 외부인인 보안업체 직원이 먹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것일 수 있었다. 필자의 변호사 사무실에도 캡스 직원이 출동할 일이 있다. 그럴 때 점검을 끝낸 캡스 직원이 사무실 입구 대기의자에 놓인 사탕을 몇 개 집어먹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탕비실에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안에 보관해 둔 박카스나 귤을 꺼내어 먹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보안업체 측에 문제 제기를 하거나 고소를 생각할 여지도 있다. 이번 초코파이 사건도 그렇게 바라보면 절도죄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절도죄가 성립하려면 불법영득의사와 절취의 고의가 있어야 한다. 불법영득의사란 권리자를 지속적·계속적으로 배제하고 타인의 물건을 자기 소유물과 같이 그 경제적 용법에 따라 이용·처분할 의사를 말한다. 포장이 바뀐 초코파이의 사진을 잠깐 찍기 위해 꺼냈다가 넣어놓으면 불법영득의사가 인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금방 다시 사 와서 넣어둘 생각으로 초코파이를 꺼내어 먹고 실제로 금방 같은 초코파이를 사 와 냉장고에 넣어두었더라도 이것은 불법영득의사가 있는 것이고, 절도죄는 기수이다. 타인의 재물을 절취한다는 점에 대한 고의도 있어야 한다. 회사 측의 명시적인 허락이 있었든 아니면 그동안의 관행에 비추어 묵시적 허락이 있었던 것이든 순찰을 오는 보안업체 직원들도 냉장고 속 과자를 먹는 것이 허락되었다면 절취의 고의는 없는 것이 되겠지만, 반대로 회사의 허락의 의사가 명확하지 않았다면 고의가 인정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물류회사는 초코파이를 꺼내 먹은 보안업체 직원을 고소했고, 검찰은 고의와 불법영득의사를 인정해 절도죄로 기소했다. 1심 법원도 절도죄를 인정하며 벌금 5만원형을 선고했지만, 이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며 2심 법원은 불법영득의사는 인정되나 절도의 고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단 한 번, 1050원치의 과자 두 개를 꺼내 먹은 이 사건은 이렇게 오랜 수사와 기소와 재판과 기자들의 취재와 사회적 논란 등을 거쳐 마침내 무죄로 마침표를 찍었다. 이 사건을 절도죄로 인정한 검찰의 판단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법리적으로 절도죄가 맞든 아니든 이런 사건에 이 정도의 공권력과 사회적 에너지를 쏟는 것이 맞는가? 기소독점주의만큼 강력한 검찰의 기소편의주의라는 것이 있다. 기소는 오로지 검사만이 할 수 있지만 검사는 재량으로 기소를 하지 않아도 된다. 법리적 논란도 있고 피해액도 극도로 경미한 이런 사건을 굳이 기소하지 말고 국민세금과 공권력 아끼라고 기소편의주의가 있는 것이다. 처벌받아 마땅한 사건들도 이유 없이 경찰의 불송치결정, 검찰의 불기소결정이 나곤 해 답답한 요즘, 초코파이 한 개, 커스다드 한 개 사건을 보며 당신들 기소의 기준이라는게 도대체 무엇인지 경찰과 검찰에게 묻고 싶어진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5-12-04

계엄 이후의 민주주의

어두운 시절의 철 지난 유품처럼 여겨졌던 계엄을 목도한 지도 벌써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문학으로 비유하자면 삼류 소설이자 흔한 졸작조차 되지 못할 어설픈 국가 폭력의 시도를 떠올리면 지금도 어안이 벙벙하다. 내란 종식에는 한 치의 타협도 있을 수 없건만 별의별 사족들이 왜 그렇게 달리는지 모르겠다.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 아닌가. 계엄을 선포한 자나 이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이들의 위증을 지켜봐야 하는 일도 고되다. 조속히 응분의 대가를 받길 바랄 뿐이다. 요즘 들어 출근길 지하철 역사의 안내방송이 눈에 밟힌다. “특정 장애인 단체의 불법 시위로 열차 운행이 지연되고 있다”는 식의 내용이다. 불법이라는 이름으로 장애인 농성의 의미를 축약할 수 있을까. 법대로 소수자들의 권리가 쟁취되는 꼴을 여태껏 보고 들은 경험이 없다. 직장이나 학교에 조금 늦는 일도 각자의 일상에서 작지 않은 손실일 수 있겠지만, 남은 생애를 바쳐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에도 귀를 좀 열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쿠팡 새벽 배송에 관한 논란들은 어떤가. 야간 근무에 시달리다 사망한 노동자의 죽음을 뒤로하고, 나름 배웠다는 정치인도 그들의 선택이었음을 강조한다. 노동권의 자발적 행사였으면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건가. 그런 논리면 자살 방지 대책 같은 것들도 쓸모없는 일이 될 것이다.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하는 자들을 정부나 지자체에서 왜 챙기려 하는지 이해를 못 하는 건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계엄 이후의 민주주의는 불법이라 호명되는 소수자들의 행진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수호되는 노동자의 죽음에 천착하는 태도로부터 비롯되지 않을까 한다. 민주주의란 본래 소란을 의미한다. 질서의 반의어라는 말이다. 계엄 이전에도 윤석열 정권은 ‘입틀막’으로 버티고 있었다. 독재는 고요한 법이다. 권력에 반하는 무수한 말들을 억누르는 힘의 강제야말로 전횡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주의란 사회에서 자신의 몫이 없다고 간주되던 자들이 여기저기서 자기의 권리를 주창하고 나서는 사태를 의미한다. 숨죽이며 지내던 이들의 목소리로 세상이 분란할 때야말로 민주주의를 실감할 수 있는 적기라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어떤 이들의 목소리와 행동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퀴어 축제나 장애인 시위, 노동자 파업이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굳이 자신들의 주장을 왜 관련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며 해야 하느냐는 성토도 이해 못 할 건 아니란 거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불편 따위가 무슨 큰 대수인가 싶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바쳐 행해야만 하는 과제가,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남의 일’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용인하면 되겠나. 사회란 그렇게 굴러가서는 파멸할 뿐이다. 따라서 계엄 이후의 민주주의는 어쩌면 공동체 의식을 되살리는 일로부터 쟁취될 수 있는 것 아닐까. 학창 시절에는 지겹게 듣던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표어가 여전히 유효한지 모르겠다. 분명 우리의 곁에는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비)존재들이 있다. 이들의 삶과 죽음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을 때, 계엄을 해제하며 소망하던 그런 민주주의가 비로소 당도하지 않겠는가 싶다. /허민 문학연구자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12-04

덜 떨어진 금성인

‘깻잎논쟁’이란 말이 있다. 남의 부인이 깻잎을 먹는데 잘 안 떨어지는 것을 본 남자가 깻잎을 떼주다가 자기 부인에게 된통 혼이 났다는 이야기다. 이게 방송을 타자마자 패널들 사이에서 논란거리가 된다. 별것 아닌 이야기가 이렇게 논쟁이 된다는 자체가 놀라웠다. 깻잎이 안 떨어져 곤란을 겪고 있으면 좀 도와주는 것이 뭐 어떤가 하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많이 당황하게 된다. 사실 주위에 물어보니 이와 유사한 사례가 많이 벌어졌고, 남자들은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 채 당한 적이 많다는 것이다. 생선 가시를 발라주다가도 낭패 보고 술자리에서 한 잔 따라주다가도 잔소리 들은 적이 많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부부가 함께하는 모임을 자제하게 된다. 내 물건에 누가 손대는 것을 싫어하는 소유욕 혹은 독점욕이 너무 과한 것은 아닐까 싶어 조심스레 물어보았지만, 자신의 프라이버시와 나름 고상한 체면 때문인지 대답을 잘하지를 않는다. 단지 그러한 행동을 좋아하는 여자는 별로 없을 것이라고 에둘러서 말한다. 그냥 애착과 소유욕으로 인해 그런 친절한 서비스는 나만 받을 자격이 있고 나 이외에 그 어떤 여자가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을 보는 순간 눈에 불이 튄다는 말은 애써 자제한다. 요즘 유행하는 ‘천박한’ 언어이기에 사용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대놓고 “내가 뭘 잘못했느냐?”라고 물었다간 일이 커질 것이 불 보듯 뻔하기에 그냥 늘 하던 식으로 내가 또 뭘 잘못해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접는다. 남자 인생이 뭐 별거가 있나. 이런 것을 서로 말이 안 통할 수밖에 없는 화성인 금성인으로 구분한다든지, 혈액형으로 성격을 분류해서 왜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MBTI에 가져다 붙여,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성격상 차이를 규명하고자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 같아 보인다. 그래서 한동안 논란에 휩싸인 라캉의 한 책에서 그 정답을 찾곤 했다. 남자와 여자는 동일한 언어 체계로 수렴되지 않고, 부부가 ‘서로 통하는 사랑’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으나, 실제로는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논리에 격하게 공감하는 것이다. 아마 이런 상황이 한국 남자만 겪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모임에서 여행을 갔다가 여자분이 나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한다. 별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 정도의 부탁은 당연히 들어줄 수 있다는 나의 이성적 판단으로 몇 가지 포즈를 더 요청하면서까지 성의를 베풀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벌어졌다. 집사람이 말을 안 한다. 분명 내가 또 무슨 잘못을 한 것이 분명하다. 깻잎을 떼어준 적도 없고 생선 살을 발라준 적도 없기에 집에 올 때까지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서 남은 여행 일정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조차 없다. 사진 찍어준 것도 죄가 되나? 나이가 들어도 이런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한참이나 이어질 것 같고 이해할 수 없는 여자의 마음 때문에 누구라도 붙잡고 이 억울한 마음을 하소연하고 싶다. “AI, 너는 아느냐? 저 여자가 왜 저렇게 삐졌는지를?” /노병철 수필가

2025-12-04

호미곶 생태공원, 동해안 관광업 기폭제 되길

경북 포항 호미반도가 올해 내로 국내 최초의 국가해양생태공원으로 지정된다. 해양수산부는 포항 호미반도와 충남 가로림만, 전남 무안, 전남 여자만 등 4곳을 국가해양생태공원으로 지정한다고 밝히고, 연말까지 해양수산발전위 심의를 거쳐 국가해양생태공원 지정을 완료하겠다고 했다. 국가해양생태공원은 해양보호구역 및 그 인근 해양 자산의 가치를 보전하고 지속 가능한 이용을 위해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제도다. 해수부는 국가해양생태공원 지정을 계기로 해양생태계를 유엔생물다양성협약(UNCBD) 기준으로 끌어 올리고, 이를 바탕으로 해양생태공원을 지역경제 활성화 거점으로 삼겠다는 계획이다. 2030년까지 생태공원을 찾는 관광객을 1000만명까지 달성하겠다고도 했다. 한반도 최동단의 호미반도는 해안선 길이만 106.7km다. 해양생물인 게바다말과 물수리,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 야생생물 보호종으로 지정된 점박이 물범, 해양보호생물인 바다거북이 등이 출현하는 곳이다. 또 호미반도 주변 해양생태계 건강도도 우수하다. 수천만 년 전 만들어진 동해안 지질과 해안단구가 다양한 생물자원의 보고 역할을 한다. 경관적 가치 또한 뛰어나다. 정부가 국가해양생태계공원을 지정한 배경에는 늘어나는 해양생태 관광수요를 수용하고, 해양생태 자원을 활용해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지자체 개발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데 있다. 정부는 해양생태계를 보존과 이용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복합해양생태 관광의 지역거점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관광 수요가 늘면 지역경제가 잘 돌아가고 인구소멸을 걱정하는 어촌지역의 지역소멸 위험도 줄일 수 있다는 전략이다. 포항 호미반도는 일출·일몰 명소로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호미반도의 국가해양생태공원 지정은 포항 등 동해안 지역 관광산업을 진작하는 획기적 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소식이다. 국가정원 1호인 순천만은 연간 43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포항시도 호미반도 국가해양생태공원 지정의 효과를 높이는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2025-12-03

정치 후폭풍 몰고올 ‘추경호 영장기각’

서울중앙지법이 3일 새벽 국회 계엄 해제 표결방해 혐의를 받는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이정재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9시간에 걸친 영장실질심사 후 “피의자 주거·경력, 수사 진행 경과 및 출석 상황, 관련 증거들의 수집 정도 등을 볼 때 도망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기각 사유를 밝혔다. 추 의원이 현직 국회의원 신분인 만큼 도주의 우려가 없고, 실제 국회의 계엄해제 표결을 방해했는지도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본 것이다.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당일 국민의힘 원내대표였던 추 의원은 당시 의원총회 장소를 국회에서 중앙당사,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장, 중앙당사로 세 차례 바꾸며 계엄 해제 표결을 방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특검팀은 수사 기간(14일 종료)이 얼마 남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할 때 영장 재청구 없이 추 의원을 불구속기소 할 것으로 보인다. 법원이 추 의원에 대한 영장을 기각하면서 향후 정국은 살얼음판을 걷게 됐다. 민주당은 예고한 대로 내란 공세와 사법부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고, 국민의힘은 여권 독주에 대해 대대적인 역공에 나섰다. 국민의힘은 계엄 선포 1년 만에 ‘위헌 정당 해산심판’에 내몰릴 상황은 일단 면하게 됐다. 민주당은 한덕수 전 국무총리,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에 이어 추 의원에 대한 특검의 영장이 잇따라 기각되자 법원을 향한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에 따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등 ‘사법개혁’ 패키지 법안 처리도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정청래 대표는 최근에도 “추 의원 구속영장이 기각되면 그 화살은 조희대 사법부로 향할 것이다. 내란 재판부 설치 같은 사법 개혁 요구가 봇물 터지듯 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의 영장 기각을 ‘조희대 사법부’ 책임으로 규정하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민주당의 사법부 위협과 국민의힘에 대한 ‘위헌 정당 심판 드라이브’ 공세가 계속 강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극단 정쟁이 몰고 올 정치적 후폭풍이 걱정된다.

2025-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