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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록과 평가

역사가 인류사회의 변천과 흥망을 기록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큰 사건만을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 전반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일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역사적 기록으로 남는다.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든지 기록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먼 훗날에는 역사란 이름으로 평가를 받는다.지금처럼 공적 또는 사적 기록물 보관의 영역이 넓어진 시대환경을 생각하면 역사 자료 보존의 공간은 무한대다.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사관에 의해 집필된 정사라면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는 민중에서 나온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은 야사다. 두 서적은 정사든 야사든 상관없이 역사적 평가라는 관점에서 지금은 쌍벽을 이루는 역사 유산이다.기록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새로운 놀랄만한 성과나 성적을 세웠을 때처럼 신기록의 의미가 하나요, 다른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정확한 팩트가 중심이어야 한다. 이렇게 남겨진 기록들은 후대에 걸쳐 역사적 자료로 인용되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좀 더 정직하고 정의로운 기록이 남도록 하는 것이 역사 위를 걷는 선배 세대나 위정자가 취할 자세다.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야당 동의없이 29번째 장관을 임명했다. 이명박 정부 때 17명, 박근혜 정부 때 10명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다. 청문회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과 문제점과는 상관없이 국회가 보고서를 채택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면 장관직은 시작된다.29번 야당을 패싱하고 임명한 것이 청문회 취지를 못 살렸다며 국민의 반발도 적지 않다. 법률적인 하자가 없다고 정치적 행위가 단순한 기록으로만 남지 않는다. 역사란 기록과 함께 평가가 항상 뒤따르는 법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1-02-14

지방소멸 위기 극복 총력전

백선기​​​​​​​칠곡군수‘지방소멸’이라는 섬뜩한 경고가 화두다.지방 소멸을 막기 위한 핵심 과제가 바로 정주여건 개선이다. 정주여건이 개선되면 기관·기업 유치가 활성화되고 인구 및 세수가 증대해 주민 삶의 질이 향상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칠곡군은 정주여건 개선을 위한 첫 번째 과제로 산단과 기업하기 좋은 환경 조성 등을 통한 일자리창출에 매진해 왔다.이러한 노력의 결과 경상북도 일자리창출 평가에서 8년 연속 수상을 이어가는 등 과시적인 성과를 거뒀다. 또한 도시재생뉴딜사업, 문화도시, 칠곡U자형관광벨트 사업을 통해 주거·문화·관광 등의 정주여건을 개선하고 삶의 질을 한 단계 향상시켜 나가고 있다. 칠곡군은 주거환경의 개선을 위해 추진한 왜관읍 도시재생뉴딜사업이 지난해 9월 ‘국토교통부 2020년 1차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최종 선정됐다.왜관읍 도시재생뉴딜사업의 핵심축은 기존 왜관읍사무소를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의 ‘행정문화복합플랫폼’으로 조성하는 것으로, 지하 1층에는 스마트 주차장, 지상 1층에는 행정복지센터, 2층에는 작은도서관과 생활체육시설이 마련된다. 또 마을숨길틔우기, 스마트가로등, 쓰레기분리수거함, 골목길 고보조명, 무인택배함, 슬레이트 지붕개량 등의 마을생활환경 개선과 노후주거지 환경개선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이밖에도 △구상시인이중섭화가 거리조성 △인문학 목공소 운영 △소상공인 교육 및 창업지원 △청년활력공간 조성 △낙동지교사랑방 조성 △지역활성화 콘텐츠 운영 △주민역량 및 주민자치활동 지원 사업을 펼칠 계획이다.왜관읍 도시재생뉴딜사업과 왜관중심지활성화사업, 1번도로 전주·전선 지중화사업 등이 연계해 완료되면 왜관읍 구도심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 약목면과 동명면에도 도시재생뉴딜사업을 추진하고 북삼읍과 석적읍에는 수영장을 갖춘 군민체육센터를 건립해 정주여건을 개선하고 지역균형 발전을 이룰 방침이다.칠곡군은 군민 문화생활 향유를 통한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다양한 문화도시 사업을 추진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하는 예비문화도시에 선정돼 문화관광도시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됐다. 예비문화도시를 거쳐 법정문화도시에 최종 선정되면 5년간 15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 문화사업 관련 종합적으로 지원을 받게 된다.‘인문적 경험의 공유지 칠곡’을 비전으로 지난 2년간 법정 문화도시 지정을 위해 지역 내 다양한 계층과 세대의 의견을 반영해 문화도시 조성계획을 수립하고 주민의 다양한 문화실험 활동을 통해 내실을 다져왔다. 예비도시 사업기간인 올해에는 문화도시 거버넌스 모델기반 마련하고 문화도시 확산 기반 마련 등 3개 분야 9개 사업으로 법정지정을 위해 준비해 나갈 계획이다.칠곡군은 2012년부터 지역 최대 역점 사업으로 칠곡U자형관광벨트를 조성했다. 칠곡U자형관광벨트는 자연과 생태, 호국과 평화, 역사와 문화, 예술 관람과 체험을 한 곳에서 할 수 있는 3㎢ 규모의 메머드급 복합 관광단지다. U자형관광벨트가 완성되면 호국 평화를 테마로 한 맞춤형 체험관광산업을 통해 지역 정체성 확보와 경제 활성화가 기대된다. 지난 9년 동안 칠곡호국평화기념관, 칠곡보생태공원, 칠곡보오토캠핑장, 칠곡보 야외 물놀이장, 역사 너울길, 꿀벌나라 테마공원, 향사아트센터, 사계절 썰매장, 음악분수, 칠곡평화전망대 등을 준공했다.또 공예테마공원, 호국평화 테마파크 조성사업 등을 2022년까지 마무리하고 칠곡U자형관광벨트를 완성할 계획이다. 이러한 시설이 들어서면 관광 인프라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시너지 효과가 더욱 극대화 돼 관광산업 활성화와 정주여건 개선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칠곡군은 도시재생뉴딜사업, 문화도시, 칠곡U자형관광벨트 사업 등의 삼각편대를 통해 주거·문화·관광 등의 정주여건을 개선하고 삶의 질을 한 단계 향상 시켜 지방소멸의 위기를 모범적으로 극복한 지역으로 자리매김 할 것으로 확신한다.

2021-02-14

플라타너스가 말을 걸다

플라타너스는 가지가 잘려 나간 자리에 흉터를 만들지 않는다. 안으로 상처를 말아 넣어서 잘린 단면이 사라지게 한다. 흉터를 볼 때마다 떨어져 나간 가지가 생각나 가슴 아플까봐 그러는 것 같다. 자신의 상처를 쓰다듬듯 플라타너스는 어린 시절 내게 위로가 돼주었다.방송반이던 나는 매일 아침 명상시간에 읽을 내용을 그 전날 한 편씩 일지에 옮겨 적었다. 그날은 담임이 세 편이나 쓰게 했다. 청소 당번 아이들이 검사를 맡고 교실을 떠났고, 친구 미정이만 복도에서 내가 다 옮겨 적고 나오길 기다렸다. 어슬렁거리지 말고 집에 가라는 선생님의 큰소리에 우물쭈물하던 미정이의 발자국 소리가 계단을 울리며 멀어져 갔다.집에 혼자 갈 길이 심심할 것 같아 내 글씨가 점점 휘갈겨졌다. 마지막 장을 옮겨 적을 때, 이층 오학년 교실은 내 연필 긁히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선생님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만 쓰고 앞으로 나오라 했다. 한참 전부터 굳게 다문 입으로 서류 같은 걸 살피며 내겐 눈길도 주지 않더니 말이다. 내 책상에서 교탁까지 걷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뭔지는 모르지만 뒷머리에 닭살이 오소소 돋는 걸 느꼈다.그는 내게 다짜고짜 돈은 왜 훔쳤냐 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내 표정에 화를 내며 출석부로 머리를 쳤다. 두려운 마음에 애써 참았지만 눈물이 볼 위로 굴렀다. 뭐지, 무슨 돈, 어디서 훔쳤단 말인가. 숙직실에 걸린 선생님 옷에서 300원을 왜 훔쳤냐 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고, 그는 훔치는 걸 본 사람이 있다고 다그쳤다. 몇 번인지 때리고 다시 묻기를 반복했다. 손목시계를 흔들며 뺨도 몇 대나 때렸고 그때마다 나는 교탁에서 멀어졌다 끌려 왔다. 억울함에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300원을 훔칠 정도로 궁하지 않았다. 매를 맞는 간간히 훔칠 이유가 없는 내 사정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들어주지 않았다.그러다가 설핏 고개를 드니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운동장 가장자리의 플라타너스가 뉘엿뉘엿 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있었다. 밖이 환할 때와는 또 다른 두려움이 몰려왔다. 어떻게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열두 살짜리가 혼자 감당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훔쳤노라고 거짓말을 했고, 그는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이젠 집에 가도 좋다고 했다. 운동장엔 우리 반 남자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퉁퉁 부은 얼굴을 쳐다보며 수군거리던 아이들의 눈빛이 내 등에 꽂히는 걸 느꼈다. 눈시울 붉은 해가 교실 뒤로 뒷걸음을 치고 플라타너스만이 위로하는 듯 교문 앞까지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나를 따라왔다.집에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랫동안 울었다. 이불호청이 젖었다 다시 마를 때쯤 할아버지는 대문을 열고 들어 오셨다. 벌게진 내 눈을 보고 무슨 일이냐 물으셨고 할아버지가 혼내줘요, 난 억울하다고 울먹였다. 한참을 듣기만 하던 할아버지는 “거 참 무슨 일이고.” 달래는 것도 위로도 아닌 그 한 마디뿐이었다. 선생님이란 이름이 부모보다 높았던 시절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날들이 흘러갔지만 나는 속앓이를 심하게 했다.오랫동안 혼자였다.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멀찍이 떨어져 품 넓은 플라타너스 그늘에 숨어 있었다. 그런 나에게 나무는 방울 모양의 열매를 떨궈주며 말을 걸어왔다. 버즘같은 껍질을 벗겨내며 잊어버리라고 하는 듯했다.나는 바보같이 나중에 선생님을 찾아가야지 했다. 내게 왜 그랬냐고, 왜 괴롭혔냐고, 궁금한 모든 것을 따지리라 다짐했었다. 사십 년이 흐른 지금 알았다. 나에게는 아직도 노을이 질 때면 가슴이 아리며 잊지 못할 일이지만 늙어버린 그에게는 기억조차 없는 일이 되었다는 것을.지금도 초등학교 운동장엔 나를 위로해주던 플라타너스가 서있다. 어른 손바닥 같은 잎을 누군가의 발 앞에 떨어뜨리며 위로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김순희 수필가

2021-02-14

설, 복덕방, 제관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우리 조상들은 설이 되면 세배를 하고, 그림을 주고받고, 새해에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나누었다. 설날에 주고 받은 그림을 ‘세화’라고 하는데 복을 기원하고, 잡귀를 쫓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설날이 되면 이런 그림들을 출입문에 붙여 놓았다.또 우리 조상들은 유달리 제사를 많이 지냈다. 개별적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지만 부락 단위로 제사를 지내는 일도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부락제’라는 책에 의하면 전국의 부락제가 522개가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부락제가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비는 당제였는데 설날에 이 당제를 빼놓지 않았다. 특히 설날에는 떡과 술을 빚어 온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 그때 나누어 먹었던 음식을 ‘복덕’이라 했고, 복덕을 나누던 집을 ‘복덕방’이라 했다.이 제사의 특이한 점은 제관을 뽑는 일이었다. 보통 가정 제사의 제관은 가장 높으신 어른이 맡아서 했다. 그리고 풍어제나 기후제와 같은 제사는 무속인들이 담당했다. 그런데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비는 제사의 제관은 무속인도 아니고, 마을 이장도 아니고, 마을의 가장 덕망이 높은 어른도 아니었다. 한 해 동안 마을에서 가장 죄 짓지 않고, 부정한 짓을 하지 않고, 가장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을 뽑아서 제관으로 삼았다. 복을 기원하는 당제의 제관은 반드시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우리 조상들의 마음속에는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죄 없는 사람, 가장 선한 사람, 가장 부정한 짓을 하지 않은 사람이 복을 나누어 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 했다. 그런 사람을 뽑아서 제관으로 삼고,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제사가 끝나면 복덕을 나누는 일을 하게 했다. 그래야만 그 마을에 한 해 동안 복이 있는 마을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결국 복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것은 그 마을에 죄 없는 제관이 있으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다.성경 시편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이라 했다. 우리로 치면 당제의 제관이다. 설날에 가장 자주 듣고 자주 하는 말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덕담을 하기에 약간 쑥스럽다. 왜냐면 이 말은 원래 복덕방에서 복덕을 나누어 주면서 제관이 하던 말인데 나는 그런 제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의 설을 맞이 하면서 내년 설날에는 당제의 제관이 되어 복덕방에서 복덕을 나누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을 쑥스럽지 않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21-02-09

민생경제 활성화 대책 성과 있기를

이강덕 포항시장과 주낙영 경주시장은 8일 각각 비대면 기자회견을 열고 지역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등에 대한 지원을 골자로 하는 민생경제 활성화 대책을 발표했다.1년 이상 지속된 코로나19 여파로 피해를 입은 지역 내 상인에 대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예산을 지원하고 이를 통해 골목상권 등 침체된 지역경제 회복에 나서겠다는 내용이다.포항시는 총 7천억원 규모의 예산을 푼다. 코로나 직격탄을 맞은 업종은 물론 간접 피해를 입은 업종도 예산 지원 대상이다. 포항시는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로 집합금지 명령이 내려진 단란주점 등 565개 업소에 대해 각각 200만원을 지원한다. 또 시간제한으로 피해를 입은 식당이나 카페, 노래연습장 등 1만1천303개 업소에 대해서는 100만원씩을 지원키로 했다.경주시도 집합금지 명령이 내려진 251개 업소에 대해 200만원을, 식당 등 9천168개 업소는 각 100만원을 지원한다고 밝혔다.경북도내 각 지자체가 코로나 사태로 벼랑 끝에 몰린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지방소재 지자체 예산으로 이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특히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 조치와 5인 이상 집합금지 조치 이후 자영업자 등의 영업 손실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는 마당이라 지자체의 고민도 그만큼 커진 상태다.포항시와 경주시가 발표한 민생경제 활성화 대책은 이런 점에서 파격적이면서 용기 있는 대책이라 하겠다. 포항시와 경주시는 가용한 재원을 모두 모아 민생대책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예산이 많은 수도권과는 달리 지방의 지자체가 취약한 재정난을 극복하면서 서민경제 활력을 위해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만으로도 칭찬 받을만 하다.포항의 경우 코로나 1년 동안 5천862군데 업소가 폐업을 했으며 점포 공실률이 24%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서민경제는 고사 상태에 빠지고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추가 도산도 불을 보듯 뻔하다.지금 서민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다. 설날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시장 경기는 썰렁하다. 대목 경기가 사라져 상인들의 한숨 소리만 높게 들린다. 서민경제 회복을 위한 지자체의 뼈 깎는 노력들이 서민경제에 스며들어 성과를 내길 간절히 바란다.

2021-02-09

비대면 세배

민족 고유명절인 이번 설 연휴에는 가족 간 모임이 통제된다. 정부가 5인 이상 사적 모임을 금지한 사회적 거리두기 수준을 설 연휴 마지막 날까지 연장하면서 가족 간에도 4인까지만 만날 수 있게 했다.많은 자녀를 둔 집안의 경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한꺼번에 만나면 방역지침을 위반하게 돼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번 설에는 72%가 고향방문 계획이 없다고 응답했다. 정부의 방역 지침에 따라 아예 귀향을 포기했다고 한다. “몸은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 “설 인사는 영상 통화로”라는 당국의 캠페인성 구호가 곳곳에 나붙어 있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은 허전하다.고향을 떠난 자식으로서는 1년에 겨우 두 번 있는 명절인데 부모를 만나지 못한다하니 아쉬움이 여간 큰 게 아니다. 일부 집은 방역지침에 어긋나지 않게 시간과 날짜, 사람 수 등을 조정해 부모를 만나기로 했다고도 한다. 또 일부서는 방역지침에도 고향에 오라는 시부모의 말씀에 속앓이 하는 며느리도 있다고 한다.우리의 고유 명절이 어쩌다 바이러스의 침범에 이렇게 옴짝달싹 못하게 된 것인지 안타깝다. 새해를 맞는 설날이 되면 우리는 윗사람에게 세배를 올린다. 올해도 건강하고 좋은 일이 많기를 기원하는 우리 민족의 예법이다. 윗사람도 아랫사람이 세배를 올리면 “소원성취 하라”는 덕담과 함께 술과 음식을 대접한다. 술을 못 마시는 어린아이에게는 세뱃돈을 준다.세배는 집안 어른에 이어 친척과 동네 어른들까지도 일일이 찾아 문안을 드리는 우리의 아름다운 풍속이다. 만약 연초 바빠서 인사를 못 드렸다면 시기가 늦더라도 반드시 꼭 챙겨야 하는 것이 세배 예법이다. 이번 설에는 영상통화나 비대면 인사로 세배를 대신한다고 한다. 아쉬움이 크다. /우정구(논설위원)

2021-02-09

더 교묘해진 ‘검찰총장 패싱’, 독립성 훼손 심각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 패싱’ 인사가 또다시 재연됐다. 신임 박범계 장관은 소통을 강조하고, 윤석열 총장과 만나는 사진을 공개하는 등 검찰총장의 독립적 인사권을 존중하는 척했지만, 결과적으로 패싱 기법이 더 교묘해졌을 뿐 추미애 전 장관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이 증명됐다. 윤석열 총장을 ‘식물 총장’ 상태에 묶어두겠다는 여권의 의지가 확인된 셈이다. 수십 년 제도와 관행으로 진전시켜온 검찰독립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법무부가 단행한 검사장급 검찰 인사에서 심재철 검찰국장과 이정수 서울남부지검장은 자리를 맞바꿨다. 공석이던 대검 기획조정부장에 조종태 춘천지검장을, 후임에는 김지용 서울고검 차장을 임명한 게 전부다. 승진은 없고 전보도 4명에 불과한 소폭 인사다. 문제는 바뀐 장관의 이번 인사에서도 윤석열 검찰총장의 의견이 철저히 배격됐다는 사실이다. 박 장관의 ‘소통’ 운운은 그저 정치적 제스처였을 뿐 결과는 ‘추미애 시즌2’였다는 게 검찰 안팎의 평가다.지난 5일 회동에서 박 장관이 인사 기준만 설명하자 윤 총장은 지휘통솔 능력을 상실한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과 총장 징계에 앞장선 대검 참모진 교체 등 ‘신상필벌’에 기초한 3가지 인사 원칙을 요구했다고 한다. 박 장관은 이 자리에서 구체적 인사안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정권 편향 검찰 간부들을 중용하거나 유임시킨 인사의 원칙이나 배경은 도무지 설명이 없으니 그저 그 뻔한 사유를 짐작하기만 할 따름이다. 문제는 추미애 장관이 마구 부숴버린 ‘검찰독립’을 위한 제도와 관행들이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는 점이다.법무부 장관이 검사 인사제청을 하기 전 검찰총장의 의견을 듣도록 규정하고 있는 검찰청법 34조 1항은 검찰독립을 위해 총장의 인사권을 최대한 존중하라는 정신을 담은 장치다. 그런데도 추 장관 이후 느닷없이 ‘의견을 들어’라는 문구에 대한 축소해석을 들고나와 검찰총장의 인사권을 뭉개는 행위가 관행화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가 검찰을 덮어버렸다’는 검찰 내부의 한탄이 안타까운 비명으로 들려온다. 어쩌다가 우리 검찰의 위상이 이 지경이 됐나.

2021-02-09

손때와 설 명절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동네 집 사이로 난/좁은 계단 길에/부러진 목발 기대앉아 있네요/외로운 얼굴로 기대앉아 있네요//작은 목발이에요/손잡이에 감긴 하얀 헝겊에/뽀얗게 손때가 묻어 있어요/참 작은 목발이에요/부러졌네요”황인숙 시인의 시 ‘골목길’ 일부이다. 시인은 골목길,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 용산 해방촌의 골목길에 관심과 애정이 많다. 이 좁은 골목길 한 귀퉁이에 용도가 다했거나 과도한 사용으로 부러진 채 목발이 버려져 있고, 시인의 눈길은 목발의 손때 묻은 손잡이 헝겊에 머문다. 손잡이 헝겊에 묻은 손때가 눈에 띌 정도면 엔간히 사용된 목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손때는 목발을 사용했던 이의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애씀이 고스란히 드러난 자국이리라.사전은 손때를 ‘오랫동안 쓰고 매만져서 길이 든 흔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른 단어보다는 그래도 비교적 건조하지 않고 담담하게 풀이된 듯 보인다. 하지만 우리에게 손때라는 단어는 이보다 더 애잔하게 다가온다. 따뜻함과 애틋함 그리고 세월의 눅진한 흔적을 담고 있는 말이 손때가 아닐까.지난 토요일 영등포 쪽방촌 봉사를 가면서 딸과 조카딸이 품고 놀던 인형들을 거둬 큰 비닐 봉투에 한가득 담아 갔다. 인형 나눔을 할 것이라고 진작에 이야기는 해뒀다. 그런데 늘 품고 있던 인형들 몇 개는 기념으로 간직하겠다는 조카의 말을 깜빡 잊고 몽땅 가져가서 기증을 해 버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다음날 때마침 조카는 인형이야기를 꺼냈고,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기증하였다는 소식에 그는 몹시 서운해 했다.혹시라도 남은 인형이 있는가 해서 기증한 곳에 전화했더니 거의 다 가져가고 몇 개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것이라도 챙겨보려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깨끗하고 비싸고 좋아보이고 비교적 새 것같은 인형들은 이미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가고 없었다. 남의 손이 많이 탄 더러운 인형을 가져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누구나 같았던 듯, 때가 묻어 꼬질꼬질하고 지저분해 보이는 인형 몇 개만 남아 있었다.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기에 하릴없이 남은 인형들을 가지고 돌아와 조카에게 보여주었다. 웬걸, 아이의 얼굴에는 대번에 화색이 돌고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자기가 간직하고 싶었던 인형이 그 중에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어릴 때부터 가슴에 품고 안고 주무르고 매만져서 더러워진 인형은 다른 사람에게는 쓰레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손때 묻힌 당사자에게는 애틋한 사랑과 추억의 덩어리이고 고갱이이고 ‘아카이브’(기록 보관소, 자료 저장고)였던 것이다. 아, 손때가 가져온 이 기쁨의 반전이자 역설이라니!곧 설이다. 아무리 모든 것들이 양력 시간으로 흘러간다 하여도, 설은 겨레의 손때 짙게 밴 새해 첫날이다. 한때는 이중과세 논란도 있었지만, 이제는 구정이라는 말도 사라지고 설이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자리잡았다. 온 겨레의 손때 가득 묻은 설 명절을 뉘라서 버리자고 하겠는가.단지 이번 설은 또 한 번의 손때를 배게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고향에 두루두루 손때 묻히기는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2021-02-09

뽕짝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대학시절을 돌이키면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젓가락 장단과 거듭된 폭주(暴酒)다. 강의가 끝날 무렵이면 선배 가운데 한 사람이 쪽지를 보낸다. ‘고모집, 6시!’ 술집 이름치고는 정겨운 고모집이 우리 학과 아지트 비슷한 곳이었다. 막걸리와 빈대떡, 김치찌개, 제육볶음 정도가 주된 안주였다. 제육볶음은 특별한 일이 있어야 먹는 호사스러운 음식이었다. 가난했던 시절에 고기안주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으니 말이다.자리를 잡으면 막걸리나 소주를 한 순배하고 누군가 흘러간 옛노래를 선창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노랫소리가 들리면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들고 술상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당시 우리가 즐겨 부르고 따라 했던 노래는 예외 없이 뽕짝이었다. 요즘 고급스럽게 ‘트로트’라고 하지만, 나는 뽕짝이나 ‘도로토’ 같은 용어가 친숙하다.뽕짝은 4분의 2박자가 주조를 이루는데,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고복수의 ‘사막의 한’이나,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 같은 노래는 ‘폭스트로트’이기에 속도감이 배가된다. 그런 노래가 나올라치면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기 마련이었다. 누군가는 운치 있게 ‘왈츠’나 ‘슬로 록’ 혹은 ‘탱고’ 같은 곡으로 분위기를 잡기도 했지만, 대세는 뽕짝이었다. 수준 높은 일부 선배는 ‘명태’ 같은 가곡으로 기를 죽이기도 했지만.뽕짝을 함께 부르고, 정치 얘기에 치열하게 몰두한 적도 많았다. 유신정권 말기에 학교를 다녔기로, 세상의 모든 것이 고깝고 부정적으로만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술을 먹고, 강의 빠지고, 여기저기 쏘다니고, 염세주의에 함몰되어 20대를 마구 살았던 시절이었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공부했던 극소수의 대학생이 ‘범생이’ 딱지로 소외되고 고립되어야 했던 희한한 시대. 그 시대를 위로했던 흘러간 옛노래와 젓가락 장단 그리고 막걸리의 추억.요즘 ‘트로트 열풍’이라고 한다. 일부 유튜브에서는 외국인 여성까지도 기막히게 트로트를 불러댄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K’로 시작하는 온갖 것이 세계 전역으로 팔려나가는 놀라운 시대를 경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와중에 뽕짝이 불러온 향수는 대단한 것이다. 어린 친구들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흥얼거리는 뽕짝의 열풍은 분명 놀라운 시대상이다.20대 10년을 학교에 다녔던 까닭에 나는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막걸리와 젓가락 장단과 뽕짝에 심취한 사람이다. 그 결과 수많은 노래와 곡조를 기억한다. 더욱이 남들의 노래를 듣기보다는 직접 노래하는 게 체질에 맞는다. 농촌에 사는 관계로 이웃에 아무런 방해도 주지 않고 노래 부를 수 있는 환경 또한 든든한 우군이다. 힘들고 지치고 괴로운 때가 오면 조용히 기타를 꺼내서 조율하고 노래한다.한동안 국민 뽕짝이었던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을 3절까지 부르고 나면 속이 시원하고, 맺혔던 울혈(鬱血)이 풀리는 느낌이다.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과 그이를 보내는 사람의 정한이 사무치게 다가오는 시대의 명편(名篇) ‘눈물 젖은 두만강’. 여러분은 3절 가사를 아시는가?!

2021-02-09

(제안) 정치인 인성교육진흥법 발의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방역은 핑계 같다. 모이면 정부와 정치인 욕하니까, 욕 듣기 싫어서 모이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재보궐 선거가 있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국민이 욕하는 거 알기나 할까?”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중년의 손님들이 하는 말을 잠시 옮겼다. 물론 비속어들은 모두 제외했다. 단어 사이가 모두 비속어라고 생각하면 된다. 비속어도 그냥 비속어가 아니다. 감정이 최대한 고조될 대로 고조된 상태에서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한이 서린 비속어! 말이 비속어지, 실제로는 울분이고 절규였다. 만약 청와대에 있는 사람과 여의도에서 파란 넥타이를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면, 분명 그들은 불안감을 넘어 살기(殺氣)를 느꼈을 것이다.그들에 의해 거리마다 내걸린 고향 방문 자제 가로펼침막은 거의 공해 수준이다.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에 있어 제일 큰 혼돈은 명절 풍습이다. 다음은 어느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설 5인 이상 금지 신고는 어디에 하나요? 저희 시댁은 씨도 안 먹혀요. 자기네 가족들은 절대 안 걸리는 줄 알아요. 어이가 없어서, 벌금을 내야지 반성할 건가 봐요. (….)”이 글을 읽다가 필자는 현 정부는 시댁과 시댁 식구들을 범죄인으로 만들고, 나아가 가족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불순조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위와 같이 말하는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서 음식을 먹고 마스크를 벗고 이야기를 나누면 당연히 위험하다.”라고 덧붙였다.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조건 방역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방역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기에 5인 이상 모이는 식당이나, 관광지 등에는 절대 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방역을 걱정하는 이런 분들이 많은 이상 코로나19도 더 빨리 끝난 것이라고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추석에 이어 설에도 제주 등 유명 관광지는 예약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코로나19 이후에 맞게 될 명절은 진짜 어떤 모습일지 걱정이다. 불 보듯 뻔한 명절 갈등을 정말 어이할까!명절을 앞둔 지금 인성교육진흥법이 생각나는 이유는 왜일까? 비록 믿지 못할, 또 편향된 언론이지만, 그런 언론에 비친 정치인의 모습과 혼돈의 정점에 있는 우리 사회 모습은 절대 무관하지 않다. 인과 관계로 볼 때 우리 사회 혼돈 주범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정치인이다. 말로만 국민이 하늘이라고 떠들어대는 위선 덩어리 정치인들은 그들이 만든 인성교육진흥법을 기억이나 할까! 나라의 진정한 주인인 이 나라 국민을 위해 더 이상 위선 덩어리 정치인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정치인을 위한 강력한 인성교육진흥법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혹시 바쁘다는 핑계를 댈 것 같아 그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만든 인성교육에 대한 정의를 적어 준다.“인성교육이란 자신의 내면을 바르고 건전하게 가꾸고 타인·공동체·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을 말한다.”(법 제2조1호)

2021-02-09

정확하게 사랑하기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창문을 본다. 오늘의 날씨는 어떤지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위해서다. 미세먼지가 잔뜩 낀 먹먹한 하늘이나 눈이 내리는 날은 만날 수 있는 확률이 극명히 낮아지기에 걱정이 앞선다. 반면 볕이 느껴지는 따뜻한 날에는 일렁이는 마음을 잠잠히 누르며 여분의 생수와 사료가 있는지 확인한다. 쾌청한 날 느지막한 오후에는 흰 고양이가 집 앞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몇 주 전 쯤 집 앞 화단에서 흰 고양이를 만났다. 평소 집 근처에서 자주 보이곤 했던 고양이였지만 사실 그간 별 감흥이 없었다. 어렸을 때 작은 사건으로 인해 동물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던 어느 날 지인을 기다리던 와중 흰 고양이가 나타났고, 한두 번 울음을 뱉더니 내 발치 아래로 와서 자신의 등을 비비기 시작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얼어붙은 내게 고양이는 돌연 자신의 배를 보여주었다. 마치 만져보라는 듯 이리저리 몸을 구르는데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씩 손가락을 펼쳐 흰 등을 쓸어보니 고양이가 대답에 응하는 듯 활발히 움직였다. 몸을 구부릴 때마다 뼈가 두드러졌고 고양이가 내뱉는 숨에 따라 손이 오르내렸다. 조금씩 옮겨져 오는 고양이의 체온에 한동안은 손바닥을 꼭 쥐고 있었다.흰 고양이는 자신의 구역이 있는 건지 볕이 좋은 날에만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날은 줄무늬 고양이 두 마리도 함께였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재빨리 도망갔다. 아직까지도 줄무늬 고양이들과는 늘 일정 거리를 둔 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그럴 때 비어있는 두 손이 부끄럽기만 하다.길고양이에 대한 지식이 없던 나는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영상을 찾아보며 정보를 습득했다. 길고양이를 만났을 때는 무작정 예쁘다고 만지거나 아무 먹이나 주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길고양이를 위한 급식소가 따로 있는데, 만약 급식소가 없는 곳에서 굶주린 고양이를 발견한다면 깨끗한 생수와 사료를 주어도 된다. 사료는 고양이가 한 끼 먹을 만큼만 주어야 하며 먹이를 주는 통은 재활용이 가능한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또, 먹는 걸 천천히 지켜보다 다 먹은 그릇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그릇과 물통은 제때 치워야 한다.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자동차 엔진룸에 들어간 고양이를 확인하기 위한 라이프 노킹(Life Knocking)이나 밥을 챙겨주는 장소에서 TNR(길고양이 중성화 사업)이 되지 않는 고양이를 파악하는 것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였다. 라이프 노킹이란 겨울날 따듯한 곳을 찾기 위해 자동차 엔진룸에 들어가는 고양이를 확인하기 위해 창문을 두드리거나, 차 문을 힘껏 닫아 소리로 확인하는 방법이다. TNR은 Trap(포획), Neuter(중성화 수술), Return(리턴)의 앞글자를 딴 것으로, 도심에 살고 있는 길고양이의 개채 수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중성화 사업이다. 인도적인 방법으로 고양이를 포획하여 중성화수술 후 원래 장소에 풀어주어 부상과 질병에 노출되지 않도록 돕는다. TNR은 마친 고양이들은 왼쪽 귀 끝부분이 조금 잘려 있어 구분하기 쉽다.동물은 예쁘다고 마음껏 만질 수 없다. 안쓰럽고 가엽다는 이유로 길가에 놓인 고양이를 모조리 만지고 지나치게 먹이를 챙겨주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나의 능력으로 내가 책임질 수 있을 만큼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규칙이 필요하다. 다른 구역에서 넘어오는 고양이가 있을 수 있기에 제시간에 맞춰 같은 장소에 밥을 주기, 밥을 먹은 자리는 깨끗하게 유지하기, 너무 사람의 손을 타지 않도록 적당한 애정을 주는 등 분명한 기준을 통해 행해야 한다.고양이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면 싫어하는 이들 또한 있다는 걸 잊지 않아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의견을 존중하여 타협점을 찾아 나가야 하며 반려동물 등록제, 입양 문화, 반려동물 놀이터 확충 등 동물 보호 행정을 파악하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켜봐야 한다.무언가 급하게 쫓기는 날에는 볕 아래 몸을 만 고양이를 생각한다. 작고 하얗고 단단하게 놓인 고양이의 묵묵하고도 순수한 등을. 안네-소피 스웨친은 한 방향으로 깊이 사랑하면 다른 모든 방향으로의 사랑도 깊어진다고 했던가. 조금만 눈을 돌리면 주변에서 무수히 많은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날이 흐려도 고양이가 있던 쪽을 계속해서 기웃거려 보는 이유다.

2021-02-08

집합금지와 소갈비찜

직계가족이라도 주소가 다르면 5인 이상 모일 수 없는 관계로 우리 가족은 각자 사는 곳에서 따로 명절을 쇠기로 했다. 코로나로 인한 일시적 이산가족인 셈이다. 아버지는 충남 당진에, 엄마는 서울 신림동에, 결혼한 여동생은 김포에, 나는 안양에 살고,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신다. 병원이야 면회 금지라 어쩔 수 없고, 동생과 매제, 조카까지 함께 모이면 6인이 되는지라 이 또한 별 수 없다. ‘핵가족’, ‘1인가구’라는 말이 등장한 지 꽤 오래 됐지만, 1년에 한두 번 모이는 것마저 어렵게 되니 그 단어들에 함의된 고독감이 더 짙게 느껴진다.비록 한 자리에 모이진 못하지만 같은 음식을 먹을 수는 있다. 이번 설에 우리 집은 명절 음식을 준비한다. 축산업을 하는 친구가 한우 갈비 10kg을 선물로 줬고, 그동안 낚시 가서 잡아온 참돔이 냉동실에 여러 마리 있다. 이 귀한 재료들을 신림동 집에 가져다주고, 재래시장서 장을 보고, 엄마가 음식 하는 걸 옆에서 도왔다. 갈비찜, 도미찜, 소고기무국, 삼색전, 나물무침, 잡채, 조카가 좋아하는 백김치 등이 완성됐다. 양껏 나눈 음식을 스티로폼 아이스박스에 잘 포장해서 아버지께는 고속버스 택배로, 김포 동생네는 운전해서 직접 갖다 줬다.차례를 지내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이 한 데 모이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시간과 돈과 힘을 들여 명절 음식을 준비할 필요가 있느냐고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이때 가족이라는 말을 ‘식구(食口)’로 바꾸면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사전에서는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한 집에서 함께”가 불가하니 “끼니를 같이”만이라도 함으로써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자는 것이다.“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 뽁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백석, ‘여우난곬족’)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가족이 모일 수 없는 설을 앞두고 시 읽는 마음이 축축해진다. 아버지한테 택배 보내고, 동생네 갖다 주고 오니 남은 내 몫의 갈비찜을 엄마는 김치통에 담아 보자기로 싸뒀다. 어디서 많이 보던 보자기가 반가웠다. 어릴 적 ‘슈퍼맨’ 흉내 내며 육교 아래서 롤러스케이트를 탈 때 망토처럼 목에 두르던 것이다. 엄마의 패션 스카프는 이제 음식 보자기가 됐지만 엄마 갈비찜 맛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 맛있는 걸 뿔뿔이 흩어진 우리 가족들은 각자 사는 곳, 사는 형편에서 먹으며 가족 해체 시대에 ‘식구’의 유대를 지켜낼 것이다.음식은 가족을 통합하고 외부 집단과 구별시키는 고유하고 내밀한 문화다. 음식의 향미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수용되는 양상이 천차만별인 주관적 감각 작용인데,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라든가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 또 “두부와 콩나물과 뽂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의 맛은 ‘여우난곬’ 가족들에게 공통의 만족감과 유대감을 제공한다. 음식은 가족 집단의 특징적 취향을 넘어 유전 형질로까지 확장된다. 음식은 뼈와 살을 이루고, 나아가 DNA에 관여하기 때문이다.‘여우난곬’ 가족들은 한 솥에 끓인 ‘무이징게국’을, 우리 가족은 한 냄비에 끓인 소갈비찜을 나눠 먹음으로써 ‘혈육’, ‘식구’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특정한 음식의 맛과 냄새는 가족의 해체 또는 가족으로부터 분리된 상황에서도 과거 온가족이 함께 지내던 시절을 재생시킨다. 오늘 저녁 한 그릇의 갈비찜은 내 어린 날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준다. 명절 음식은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처럼 맛있는 식사를 한 충남 당진과 서울 신림동과 김포와 안양의 식구들은 또 살아갈 ‘똑같은 힘’을 얻어 코로나 시대에도 용기를 잃지 않을 것이다.

2021-02-08

신라고분과 경주 쪽샘 유적

신라의 옛 고도(古都)인 경주에는 지금도 과거 신라인들이 쌓아 올린 거대한 고분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거대한 고분들은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낭만을 느낄 수 있게도 해준다. 특히 신라 고분들 중 천마총 그리고 황남대총이 위치한 대릉원(大陵園)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직접 방문하거나 들어보았을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이다.한편 이와 같은 거대한 고분들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금공예품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더불어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화려하고 찬란한 신라인들의 고분 문화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천마총과 황남대총이 있는 대릉원 바로 동쪽 편에는 현재에도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 중인 쪽샘 신라 고분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쪽샘 유적과 대릉원이 담장과 도로로 단절되어 있지만 본래는 하나의 묘역(墓域)에 속하는 곳으로 신라 왕경인들의 공동묘지로 이 일대가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쪽샘 유적의 고분들은 대릉원과 달리 과거 보존조치 구역으로 지정되지 못하였고 점차 상가와 민가들이 들어선 마을로 변하여 그 훼손이 심각하게 진행되었다.이후 유적의 중요성에 비해 관리와 보존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이에 경주시는 ‘쪽샘 고분공원 조성사업’을 계획하고 2000년부터 이 일대에 대한 토지 매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7년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경주 쪽샘 유적은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대릉원과 본래 한 묘역에 속하는 신라 왕경인들의 집단무덤 유적이다. 특히 신라의 대표적 묘제로 거론되는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들이 집중 분포하고 있고 이외에도 목곽묘(덧널무덤), 석곽묘(돌덧무덤), 옹관묘(독무덤)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존재하고 있음이 지속적인 조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2007년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쪽샘 신라 고분 유적의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적석목곽묘의 경우 봉분 직경이 30m 이상의 대형분(大形墳)이 있는 대릉원과 다르게 봉분 직경 10~20m의 중·소형분(中·小形墳)들이 집중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그리고 일정한 묘역을 가지는 대형분들과 달리 쪽샘 유적의 적석목곽묘들은 서로 근접하거나 중복되게 축조된 모습이다. 이러한 규모, 입지의 차이는 무덤 주인공의 생전 신분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신라 사회가 무덤의 규모나 입지, 조성방식에서 일정한 사회적 규제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이와 관련된 현상은 목곽묘 축조 양상에서도 그대로 관찰된다. 쪽샘 유적 일대에서 발견된 목곽묘의 입지는 적석목곽묘가 만들어지는 낮은 구릉 사면부(斜面部)나 주변부에 주로 위치하며, 그 규모도 길이 5m 이하의 것들이 대부분이다.또한 부장 유물도 적석목곽묘에 비해 양과 질에서 다소 떨어지는 것들이 많으며, 서로 중복되어 있는 양상이 뚜렷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적석목곽묘가 축조되던 시기 목곽묘는 아마도 적석목곽묘의 주인공 보다는 조금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묘제였음을 가정해 볼 수 있다.정대홍학예연구사쪽샘 유적에서는 석곽묘와 옹관묘도 확인되었는데, 전체 무덤 중 그 수량이 많지 않고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마도 목곽묘의 주인공보다 더 낮은 신분의 사람들의 무덤으로 보인다.이러한 쪽샘 유적의 고분 분포양상은 얼핏 작은 무덤들 혹은 화려한 금공예품(金工藝品)이 없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신라 고분 연구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고대 사회의 지배자들은 거대한 봉분과 다량의 부장품, 우월한 입지 등을 통해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은 무덤의 주인공을 당시 사회에서 최상위 지배층일 것이다. 반면 이보다 규모, 입지, 부장품 등이 다소 떨어지는 쪽샘 고분의 주인공들은 당시 사회에서 이들보다 더 낮은 계층이었을 것으로 설정할 수 있다.이러한 관점에서 쪽샘 유적의 신라 고분들은 당시 신라 사회의 계층성과 이에 따른 일정한 규제 등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즉 고분에 투영된 입지, 규모, 부장품의 차이를 통해 당시 신라 사회의 신분적 차별성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신라 왕경 내 중심 고분의 형성과 전개 그리고 경관 복원에 있 쪽샘 유적은 신라 고분 연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2021-02-08

그들의 여름밤이 모두의 여름밤이 되는 시간

그들의 여름밤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나의 여름밤에 가닿는다. 그들 각자의 어느 시절 여름밤이 우리 모두의 어느 한 때 여름밤으로 연결된다. 그해 여름, 더웠다는 것만을 빼고 특별한 일이 없었던 여름밤이 되살아나 화면 속에 펼쳐진다. 그것은 오래된 앨범을 펼쳤을 때, 잊고 있었던 추억과 이야기들이 되살아 오듯 세월의 먼지를 안고 다가온다.윤단비 감독의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가족앨범을 펼쳤을 때의 그 느낌으로 진행된다. 예전 살던 집을 배경으로, 막내가 태어나 한창 걸음마를 뗄 때의 모습으로, 꽃다발을 안고 있는 누나의 졸업식에서, 아버지의 생일날 모두가 모여 앉은 식탁 위에서.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들 속에서, 그 시절 그때 각자의 표정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나름의 고민을 살포시 들춘다.얼마 되지 않은 세간을 승합차에 싣고 더부살이를 하러 할아버지의 오래된 이층집으로 옮겨 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소녀(옥주)와 소년(동주), 아버지와 혼자 살고 계신 할아버지 3대의 결합 속에 어머니가 부재한다. 이혼한 아버지와 상처한 할아버지 모두 아내의 존재가 없다. 그리고 몸이 좋지 않은 할아버지의 염려를 핑계로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은 고모가 이곳 이층집으로 피신하듯 들어온다. 고모 역시 누군가의 아내이지만 자식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니다.이러한 설정 속에서 펼쳐질 수난과 갈등, 화해의 과정을 짐작하지만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갈등이 존재하지만 그 갈등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아버지의 생활고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깊은 고난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는다. 사춘기 옥주의 고민과 사건이 존재하지만 극적인 상황으로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우리들 모두의 기억 속에 하나씩 간직하고 있었을 그 여름날의 정서를 끄집어 낸다.사는 집과 가족 환경, 자라온 배경이 다를지라도 어느 한때 여름의 가족들이 지나왔을 그 지점의 희노애락을 포착하여, 낡은 앨범을 들추듯 회상의 분위기로 이끈다. 여기에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품들도 한몫을 한다. 할아버지와 함께 세월을 이고 있는 것들. 오래된 선풍기와 괘종시계, 그 시절 필수 혼수품이었을 전축과 재봉틀, 넓지 않은 마당을 정성스레 가꾼 텃밭, 할아버지의 집은 그 세대가 보편적으로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을 살림들이 그때 그 자리에 차분히 자리잡는다.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각자의 고민과 사연이 있듯이, 할아버지의 이층집과 살림살이들이 모두 보편적인 추억을 가지고 있으며, 오래된 소품들이 ‘우리의 여름밤’에 대한 추억을 되살려주고 있다. 그래서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우리의 여름밤’이기도 하다.사건과 갈등, 고민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깊고 어두운 골짜기로 향하지 않는 것. 영화 속 등장인물은 한때 우리 가족들 누군가의 모습으로 투영되어 구구절절하지 않지만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는 것. 우리에겐 없지만 그때 누군가에겐 있었을지 모르는, 혹은 우리도 하나쯤 가지고 있었을 살림살이의 모습.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등장인물과 풍경과 소품들이 모두 어울려 우리 모두의 어느 여름밤으로 조용히 내려 앉는다.영화는 큰 갈등없이 물흐르듯 흐른다. 그 시절 그때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지도 모를 이야기 속에서 한 여름밤 모기향 피어오르듯 기억들이 피어오른다. 영화 속 풍경 모든 것이 우리의 기억을 일깨우고, 세월의 때를 묻히고 묵묵히 자리잡고 있는 모든 소품들이 우리의 그때 그 모습이었다.할아버지의 이층 양옥집을 포함해 그 집에 가득 들어찬 모든 물건들이 추억을 소환하는 영화. 자잘한 갈등 속에 차분히 유년의 기억으로 가닿는 영화다. 대사와 설명 이전에, 언어로 전달하기 이전에 전달되는 그 무엇인가로 ‘남매의 여름밤’은 전달된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몸짓만 봐도 알’ 수 있는, 펼쳐지는 화면만으로 먼저 전달되는 공통적인 정서와 추억 속으로 데려다 놓는다.영화의 시작과 늦은 밤 할아버지가 혼자서 전축을 듣는 장면과 엔딩에 신중현 작곡의 ‘미련’이 흐른다. 그 노래의 가사,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처럼 그 시절의 가족들과 그 속에서 일렁였던 갈등과 묵묵히 지켜봐왔을 우리집과 물건들이 “갈 수 없는 먼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한다. /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1-02-08

맛과 정성의 밥상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을까, 먹기 위해서 살까? 이에 대한 논쟁은 수도 없이 해왔고 계속되고 있지만, 각자 나름의 취향이나 주관에 따라 받아들이고 추구해 나가면 편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을 비롯한 온갖 유기체는 생리구조 상 음식물을 섭취하고 배설하는 신진대사 작용이 있어야만 최소한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은 적어도 먹어야 살 수 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먹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먹음으로써 움직일 수 있고 기력이 있어야 제반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처럼 먹는 것은 인간생활의 중요한 요소이며, 의식주와 함께 인류역사학적으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는다지만 그것을 통칭하면 먹거리이고 달리 보면 음식문화나 정서적인 산물인 것이다. 그만큼 음식을 만들고 준비하고 먹고 마시는 과정에는 많은 생각과 사연과 풍습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음식에는 지역적인 특색과 삶의 양식이 더해져서 독특한 맛과 향으로 눈요기를 자극하는지도 모른다.음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근간이자 정과 얼이 버무려진 고마운 양식(糧食)이다. 잘 먹어야 잘 산다는 말처럼, 우리는 음식을 먹고 자라며 음식을 통해 인심과 밥상머리 교육을 받아왔다. 단순히 배만 채우는 밥이 아니라 밥상을 통해 알게 모르게 인성과 예절을 배우고 터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어머니께서 차려 주신 두레밥상을 대하며 우리는 슬기를 발라내고 뚝심을 길러내며 가족을 위해 험난한 세상의 밥상을 온전하게 차려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평소 음식에 대해 많은 관심과 미식가를 자처하는(?) 필자로서는 일전에 방영한 ‘한국인의 밥상’ 특집 프로그램을 흥미롭게 시청했다. 지난 10년간 전국의 방방곡곡을 돌며 80천여 가지의 향토음식을 소개한 대장정은, 기억마다 계절마다 사람을 만나고 음식에 얽힌 많은 얘기와 추억이 서린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그렇게 보듬고 장만한 음식에는 각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었고 정성을 더하고 아픔을 달래며 위로와 감사를 나누는 진정한 사랑의 손맛이었다. 건강과 장수에 직결되는 음식을 잘 먹어야 무병과 노화지연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과일, 채소, 생선, 견과류, 통밀, 올리브유가 풍부하고 건강과 장수에 이로운 식단으로 정평이 나 있는 ‘지중해식단’을 한국형 장수식단으로 특성화시키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먹는 것에 대한 연구와 건강식, 균형 잡힌 식단, 식이요법 등으로 젊고 건강하게 사는 것은 인류의 희망사항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산다는 것은 어쩌면 밥을 먹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밥 한끼에 얽힌 그리운 추억과 잊지못할 기억이 있을 것이다. 가난했던 시절의 음식에는 큰 지혜가 배어 있고 추억의 맛과 향이 진하게 우러난다. 애틋해서 고마운 밥상, 힘들 때는 힘찬 응원가였으며 어려울 땐 가슴 찡한 위로로 다가오는 소중한 추억 나눔의 음식은 함께 했던 시간의 행복한 기억이 아닐까?

2021-02-08

줌, 휴대폰으로 하는 졸업식

권윤구포항 중앙고 교사세상은 바뀌었다. 신축년 2021학년도 새해는 코로나19로 졸업식이 온라인 졸업식으로 바뀌었다. 3년간 함께한 친구들과 대학 진학의 기쁨을 나누며, 부모님의 축하 꽃다발을 받으며, 친구와 함께 사진도 찍고, 담임 선생님과 이별의 인사도, 추억의 사진을 남겼던 축하의 졸업식이 바뀌었다.올해는 텅 빈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 혼자 인사를 하고 졸업식을 진행했다. 교장선생님의 인사 말씀도, 부모님의 축하인사도, 친구와 교정에서 마지막 나눌 이야기도, 선생님과 마지막 감사의 인사도, 강당에서 상을 받는 친구에게 보내는 큰 박수 소리도, 교복 입고 남길 추억의 사진도, 학교 앞 꽃다발을 파는 상인들이 줄지어 있던 모습도 없는 썰렁한 모습의 졸업식이 되어 버렸다.필자는 졸업식 날 정든 제자들에게 늘 편지를 낭독했었다.“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몇 날 동안 깊은 잠을 계속 들지 못했다. 잠결에 울컥 화가 나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며 1월이 시작되면서 생긴 새로운 현상이다. 새벽에 잠이 깨면 늘 이런 생각들을 한단다. 아! 이제 서서히 준비를 해야 겠구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하며 살아가는 모습 이길 진심으로 빌며 00학년도에 우린 같은 공간에 머물던 가족이었고 3학년 3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라. 너희들의 앞날에 좋은 일, 행복한 일, 기쁜 일만이 있길 바랄게. 그리고 그럴 땐 언제나 너희를 생각하고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하여라. / 이별을 가슴 아파하는 아빠 같은 선생님이”이러한 편지를 낭독하게 되면 교실 뒤쪽에 계시던 학부모님께서 눈물을 훔치곤 하신다. 편지 속에는 간단하게 졸업생들에게 축하의 말, 당부의 말, 대학생활, 사회생활, 앞으로 시련과 고난을 이겨 내야 할 일 등 이런 저런 이별과 축하의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학생·학부모·교사 서로 졸업을 축하해 주고 함께 사진도 찍고 이별의 악수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축하와 격려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코로나19로 세상은 바뀌었다.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웃는 얼굴에서 마스크를 사용해서 웃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세상으로 교실은 바뀌었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친구들과 함께 졸업사진 대신 각자 추억의 스냅사진 찍기가 요즘 유행을 한다.2020년은 온라인 수업으로 인하여 학교에서 서로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던 한해였다. 그러나 졸업생들은 휴대폰 속의 줌 채팅창으로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나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상으로 변해 버렸다.정든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은 하루 빨리 코로나19가 종식되어 모든 것이 멈춘 일상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두 번은 없어야 한다.2021년에 처음 경험해 보는 휴대폰 졸업식 풍경, 코로나19로 힘든 한 해를 보낸 친구들과 대학합격의 기쁨도 축하도 나누지 못한 채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첫 발을 내딛고 있다. 바라건데, 온라인 공간에서 이별의 정을 나누었지만 서로를 격려하고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는 마음과 힘찬 전진을 약속하는 친구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야 한다.

2021-02-08

‘이웃사촌 시범마을’ 성공적 안착을 기대한다

경북도와 의성군이 추진하는 ‘이웃사촌 시범마을’ 사업이 순항 중이라 한다. 의성군 안계면 일대에 조성 중인 이웃사촌 시범마을은 일자리와 주거, 문화, 복지 등이 복합된 마을을 건립하는 사업이다. 저출산 등에 의한 지방소멸에 대응하는 대안 사업으로 경북도가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이다. 특히 청년층의 농촌 유입과 일자리 창출 여부가 성공적으로 안착할지가 관심을 모으는 사업이다. 경북도와 의성군은 전국 1위의 인구소멸 위험지역인 의성군에 청년시범마을을 건립기로 하고 2019년부터 이곳 시범마을에 스마트 팜, 특화농공단지, 청년허브센터, 청년예술창고 등 청년경제 중심의 환경을 꾸미고 있다. 농촌을 떠났던 청년이나 도시의 청년들이 몰려들 수 있도록 주거시설에서 창업환경 조성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관리를 하고 있다.이 사업으로 현재 40여 명의 청년이 이곳에 입주했다. 지난해 11월 준공한 4ha 규모 스마트 팜 농장에는 청년농부 43명이 딸기 실습교육을 받고 있다. 또 이곳에서 창업을 시작한 청년 8명이 생산한 딸기는 전국 각지로 팔려나가면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수제맥주 공방과 유럽식 파스타 식당, 지역생산 농산물 판매점 등이 들어선 소보안계로는 안리단길로 불리며 청년거리로 변신 중이라 한다. 컨테이너 하우스와 모듈러 주택 등 실속형 보금자리가 마련되고 농촌지역에는 드물게 LH에서 청년 행복주택 140세대도 올해 중 착공할 예정이다.안계평야에 조성 중인 경관단지가 확대되는 등 사업 착수 2년 차를 맞은 이웃사촌 시범마을 사업이 착실한 성과를 내고 있다고 한다. 인구소멸 위기 극복을 위해 진행되는 이웃사촌 시범마을 사업이 순항하고 있다는 소식은 반가운 일이다. 의성군은 4년 전 조사에서 전국 1위의 인구소멸 고위험지역으로 30년 내 사라지는 도시로 지목된 바 있다.의성군에서 시행 중인 이웃사촌 시범마을은 우리나라 농촌지역이 직면한 고령화, 청년유출의 문제에 대응하는 대안사업이란 점에서 앞으로도 주의깊게 지켜볼 사업이다. 농촌지역에 청년을 유입하는 일이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다. 관광산업과 연계하는 등 혁신적 아이디어 개발과 함께 세심한 관리와 지원이 필수다. 지속 가능성과 성공적 미래가 보인다면 청년들이 귀농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2021-02-08

새 부동산 대책, ‘수도권 집중’ 가속화 우려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국민 불신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4일 발표된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대해 절반이 넘는 국민이 불신을 드러내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서울과 경기에 61만여 가구의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정부 대책이 그러잖아도 개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수도권 집중화 현상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소멸 위기에 빠진 지방의 문제를 해소할 특별한 방안들이 반드시 함께 모색돼야 할 것이다.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한 언론사의 의뢰로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2·4 부동산 대책이 부동산 가격 안정화 효과에 ‘도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이 53.1%(대구·경북 61.0%)로 나타났다. ‘도움 될 것’이라는 응답은 41.7%(대구·경북 31.9%)에 그쳤다.문재인 정부의 25번째 부동산 대책인 2·4 부동산 대책은 오는 2025년까지 공공 재개발·재건축, 역세권개발 사업, 신규 택지조성 등을 통해 전국에 83만6천 가구를 공급하는 것이 골자다. 서울 32만3천 가구, 인천·경기 29만 3천 가구 등 수도권에 61만6천 가구가 몰려있다.지난 3년 반 동안 줄곧 ‘공급’ 필요성을 부정하는 이상한 대책을 24번이나 내놓던 정부가 임기가 1년 반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지역조차 빠진 대규모 공급방안을 덜컥 내놓은 형국이다.서울·경기 위주의 주택 공급 폭탄이 기존의 수도권 인구 집중화 현상을 가속화하는 결과로 이어질까 하는 우려가 뒤따르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수도권으로 유입된 인구는 모두 8만8천 명으로서 지난 2006년 이래 14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대구·경북에서 순유출된 인구는 1만7천 명으로 지방에서 가장 많은 숫자였다.이번 물량 공세 약속은 일단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는 수도권 집값 안정화에 기여할 것이란 긍정적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수도권 집중화 현상의 속도를 높이는 효과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소멸 위기에 빠진 지방에 대한 특별한 대책이 시급해졌다.대증요법(對症療法)에 급급한 정부의 냉탕온탕 대책의 한계가 씁쓸하기 짝이 없다.

2021-02-08

화제의 ‘클럽하우스’

춤추고 노래하는 곳이 아니다. 클럽하우스는 초대를 기반으로 한 실시간 음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2020년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의 창업가 폴 데이비슨과 구글 출신인 로언 세스가 만들었다. 영상이나 글 등은 사용할 수 없고 음성으로만 대화한다. 사진이나 텍스트 기반의 기존 SNS와의 차별화가 뚜렷해 신선하다.보통 SNS는 이용자가 가입을 한 후 친구를 추가해서 사용하는데, 클럽하우스는 기존 가입자로부터 초대를 받은 사람만 가입할 수 있는 희소성이 매력이다. 1인당 2장의 초대권이 주어지며, 활동을 활발하게 하면 추가 초대권을 받을 수 있다. 초대를 받지 못했다면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린 후 승인을 기다려야 한다. 대화방을 만들어 사용자를 초대하면 방을 만든 모더레이터와 모더레이터가 지정한 스피커는 음성으로 대화할 수 있고, 나머지 청취자들은 이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구조다.이 소셜플랫폼은 초대 전용이라는 특성에 따른 클럽하우스만의 매력으로 오프라 윈프리, 마크 저커버그 등 미국 유명 인사들이 대거 가입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2월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인 엘론 머스크가 클럽하우스를 통해 미국 주식거래 플랫폼인 로빈후드의 CEO 블라디미르 테베브와 설전을 벌여 화제가 됐다.국내에서는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과 가수 호란 등 유명인들이 연일 클럽하우스의 채팅방을 찾고 있다.가입만 하면 채팅방에서 유명인들의 이야기를 라디오 사연을 듣듯 편하게 접할 수 있고, 채팅방에 입장하면 참가자로서 목소리도 낼 수 있어 매력적이다. 사진이나 동영상, 텍스트 대신 오디오를 차세대 소셜미디어로 택한 클럽하우스가 과연 소셜미디어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2-08

국민의힘이 가야 할 혁신의 길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국민의힘’은 현재 비상체제다. 선거 4연패 후 김종인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해서 환골탈태(換骨奪胎)를 모색하고 있다. 당의 간판을 바꾸고,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과오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5·18묘역에서는 무릎을 굻고 눈물로 사죄했다. 잘못된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한 것이다.물론 이러한 조치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외관(外觀)이 아니라 내면(內面)’이다. ‘국민의힘’은 변화와 혁신에 대한 수용성이 부족하다. 게다가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영입한 비대위원장을 자기들이 흔들어댄다. 여전히 변화를 외면하고 서푼 어치도 안 되는 권력놀음에 빠져있다. ‘영남당’이라고 조롱받는 상황에서도 ‘가덕신공항이라는 덫’에 걸려 TK와 PK가 자중지란(自中之亂)이다. ‘국민의힘’이 가야 할 혁신의 길이 결코 순탄치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국민은 제1야당의 회생(回生)을 바라고 있다. 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야당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힘’이 되겠다는 정당이 ‘국민의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혁신을 통하여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보수꼴통’이나 ‘진보꼴통’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을 가진 중도층’이 “여당도 싫지만 야당은 더 싫다”고 한다면 문제가 심각하다.선거의 승패는 확증편향에 갇힌 좌우의 꼴통들이 아니라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고 있는 중도층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의힘’은 중도층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혁신보수의 길’을 가야 한다.혁신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의 전환’이다. 생각이 바뀌어야 변화가 일어난다. 보수는 수구(守舊)가 아니다. 변화를 수용하는 유연성이 없으면 보수의 생명력은 사라진다.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paradigm)을 가지고 새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소통할 수는 없다. 패러다임의 전환에 진보는 빠르고 보수는 느리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혁신에 인색하고 작은 권력에 취해있으니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다. 선당후사(先黨後私)의 정신이 없는 정당은 미래도 없다. ‘국민의힘’에 있어서 가장 힘든 싸움은 바로 ‘자신과의 싸움’이다.혁신의 길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미래를 열 수 있는 새로운 인재들이 필요하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노인은 과거에 살고 청년은 미래에 산다. 과거에 익숙한 사람들이 새 시대의 ‘혁신보수’를 이끌어 갈 수는 없다. 이제 기성세대는 보수의 미래를 젊은 세대에게 맡겨야 한다. 변화를 싫어하는 원로들이 기득권에 연연하면 할수록 혁신에 방해가 될 뿐이다.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가 끝나면 대선정국에 돌입한다. ‘국민의힘’은 선거에서 4전 4패할 때마다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로는 혁신을 약속했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는 않았다. 국민이 명령한 혁신을 거부한 정당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똑 같은 실수를 또 다시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2021-02-08

당신의 정신건강은 안녕하십니까?

사공정규동국대 의대 교수·정신건강의학과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정신건강의학과를 선택했어요?” 정신건강의학과를 택한 나의 탁월함과 위대함(?)을 기대했을까? 아니면 ‘오죽하면 정신건강의학과를 택했을까’ 하는 위로와 동정심(?)이 내포되어 있을까?사람들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에게 묻고 싶어 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정신건강은 어떻습니까?” 일반적으로 우리가 “내과 의사의 신체건강은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 하는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정신건강은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은 무슨 의미일까?일반적으로 가지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에 대한 생각들 중 하나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매일 정신건강의학과 환자들만 상대하면 일종의 직업병처럼 의사도 환자와 비슷한 상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우울증 환자를 계속 대하다 보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도 우울해지지 않을까?” 또는 “불안증 환자를 계속 대하다 보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도 불안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또는 “의사의 정신상태가 환자와 비슷해져야 치료가 더 잘되지 않나?”하는 생각도 있다.마약 중독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마약 중독자를 상대하므로 일종의 직업병처럼 의사도 마약 중독 상태가 되거나 또는 환자 치료를 더 잘 하기 위해 마약 중독자가 되어야 할까? 물론, 아니다. 참고로 마약 중독의 치료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한다.또 한편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꿰뚫어 볼 수 있는 ‘족집게’ 점쟁이나 역술인처럼 생각하기도 한다.‘황혼 이혼’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즈음의 일이다. 어떤 할머니가 진료실에 오셨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귀가 어두워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나 싶어 내가 큰 소리로 다시 물어 보아도 역시 아무 말이 없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생각하던 할머니가 던진 한마디는 “그걸 말하면 되나? 치료비를 받으려면 묻지 말고 맞추어야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이혼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다가 점을 보러 가는 대신에 정신건강의학과로 왔다는 사실을 파악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진료 후 “가슴에 얹혀 있던 돌 하나를 내려놓은 것 같다”며 밝은 표정으로 병원을 나섰던 그 할머니, 몇 달 후 부군과 잘 지내고 있다는 말씀으로 보아 점을 보러 가는 대신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찾은 점은 탁월한 선택이었다.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초능력자로 보는 이런 에피소드는 그리 드물지 않게 겪는 일이다. 일상의 만남에서 대화를 잘 나누다가도 내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줄 알고 나면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까봐 입을 굳게 다무는 분도 있다.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정신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도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초능력자도 아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완전한 정신건강의 소유자도 아니다. 나는 환자를 만나면서 그 속에서 나 자신의 미숙함을 본다. 나의 건강하지 못한 점을 본다. 그 속에서 깨우친다. 그리고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우리 모두 완전한 정신건강의 소유자는 아니므로, 어떤 면에서는 우리 모두 환자이다.그렇다면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자문해본다. 굳이 말하자면,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부처님, 예수님 같은 성인들은 완전한 정신건강을 가진 분들이겠지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그런 경지에 도달하기란 요원한 꿈에 불과하다.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재는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 자신의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점을 알고 있고, 그래서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인격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정신건강이다. 건강을 찾고 지키려는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건강하다는 말이다.어떻게 해야 정신이 건강해 질 수 있을까? 나는 정신이 건강해지는 그 출발점은 자신의 인격 성숙이 완전하지 못함을, 다시 말해 자신의 인격이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완전한 인격 성숙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우리의 정신은 더 나은 성장을 위한 여백이 남아있으니, 이 얼마나 축복인가! 누가 잘난 것도 없고 누가 못난 것도 없다. 기껏해야 ‘오십보 백보(五十步 百步)’이다. 남과 비교하기보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남과 비교한 성공이 아닌,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오늘, 자신의 성장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 그 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인생의 참다운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이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묻겠다. 당신의 정신건강은 안녕한가? 당신은 당신의 정신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체건강에 대해서는 노력을 하고 있다. 왜 우리는 신체건강을 위한 노력은 하면서, 정신건강에 대한 노력은 상대적으로 등한시 할까? 여태껏 우리는 정신건강을 너무 멀리서 찾았다. 그러나 진리는 평범한 데 있는 것처럼 정신건강도 우리의 일상 속에 있다.그래서 일상 속의 정신건강에 대한 이야기와 그 처방을 ‘사공정규의 마음 처방전’이라는 칼럼으로 나의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사공정규의 마음 처방전’, 사공정규와 함께 하는 정신 건강 여행에 정중히 초대 드린다.

2021-02-07

정치 만능주의를 우려한다

윤대식영남대 교수·도시공학과다시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재보궐선거가 불과 두 달도 남지 않았고, 새로운 공약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한 공약들 가운데 국가와 지역을 살릴 수 있는 신선한 아이디어들도 많이 포함돼 있고,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해 바람직한 것들도 있다.그러나 문제는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오랜 기간 연구를 거치고 중장기 계획과 마스터플랜(master plan)을 수립한 후에 추진돼야 하는 사업들이 정치인들의 공약으로 졸속적으로 추진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최근 정치적 이슈로 떠오른 가덕도 신공항 건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신공항 건설문제는 정치권이 이슈로 제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공항건설과 관련된 최종적인 의사결정은 행정부(국토교통부)가 국토종합계획, 항공정책 기본계획(중장기 국가 공항건설계획), 재원조달계획 등을 수립한 후에 국토 권역별로 입지 후보지를 선정해 시의 적절하게 추진하도록 절차를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그러나 지역의 요구에 따라 특정 입지후보지를 미리 정하고 입지후보지에 대한 검증절차나 타당성 검토 없이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모든 의사결정이 이뤄진다면 심각한 후유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특히 공항건설 주체가 중앙정부(행정부)이니 만큼, 중앙정부가 종합적인 국가공항정책을 수립하고 단계적 절차를 거쳐 공항의 입지후보지 선정과 구체적인 공항건설계획(공항의 규모, 공항철도 건설 등)을 수립한 후 추진해야 부실을 피할 수 있다.정치의 영역은 행정부가 종종 놓칠 수 있는 이슈를 부각시키거나,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라면 총론(總論) 수준에서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체적인 사업내용(후보지 결정 등)까지 정치적인 결정을 내린다면 행정부와 전문가는 왜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정부 부처마다 수많은 심의위원회와 자문위원회가 있는 만큼, 이들 위원회가 합리적이고 건전하게 작동될 수 있도록 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모든 길은 정치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정치 만능주의를 에둘러 표현한 말이고, 그 만큼 정치의 영향력이 크다는 말이다.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매우 우려스러운 표현임은 분명하다.권위주의 시대에는 소위 ‘수지형’ 의사결정이 많았다. 최고 의사결정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지형’ 의사결정이 모든 것을 한방에 해결했다. 그러나 1999년도에 대규모 국책사업의 추진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예비타당성조사 제도가 도입됐고, 소규모 국책사업에 대해서도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는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지형’ 의사결정은 매우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접근은 모두 합리성과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두고 정책결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절차적 과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만큼 행정부의 역할과 기능은 법적 혹은 제도적으로 잘 정비돼 있고, 합리성과 과학적 근거에 기초를 두면서 최소한의 절차적 하자도 없이 모든 사업이 추진될 수 있도록 제도화돼 있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정치의 영역은 매우 포괄적이다. 특히 지방자치제 하에서 모든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정당정치를 통해 선출됨으로써 지방자치단체들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정치의 힘은 원천적으로 막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그들의 ‘막강한’ 힘을 발휘해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으려 하고, 더 오랫동안 그들의 힘을 발휘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그런데 4∼5년의 임기를 가진 정치인들이 과연 국가 백년대계를 생각하고 정치를 할지는 의문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모든 정치적 이슈들에 대해 100∼200년을 바라보고 정책을 추진하고 계획을 수립할 필요는 없다. 어떤 정책과 사업은 매우 빠르게 추진해서 그 효과와 혜택을 빨리 누려야 하는 것도 있다.예컨대 현재 우리가 겪는 코로나사태와 관련된 것들은 그렇다. 그러나 어떤 정책과 사업의 영향이 100∼200년 혹은 그 이상의 먼 미래에도 영향을 미치고 많은 비용의 지출이 수반되는 경우에는 신속한 추진보다는 멀리 보고 하나하나 따져보고 추진하는 지혜가 더욱 필요하고, 과학적 접근이 더욱 요구된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과 사업에 대해서는 더욱 더 과학적 의사결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종종 많은 사회적 이슈들이 정치의 영역과 과학의 영역 사이에 있는 것들은 사실이지만, 가능하면 과학의 영역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이슈들은 과학의 영역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높은 수준의 가치판단이 요구되거나 극명한 이해의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에 한해 정치가 개입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이 경우에도 다양한 집단과 지역의 이해를 조율하고 각론보다는 총론에 집중해 정치의 역할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모든 사회적 이슈들을 정치적 이슈로 만들어서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하는 것은 국리민복과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국민들과 정치인 모두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제 정치 만능주의의 폐해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2021-02-07

입춘첩(立春帖)을 붙이며

윤영대수필가지난 3일은 입춘이었다. 봄의 시작이고 한 해의 시작으로의 의미도 있다. 24절기 중 첫째, 주로 음력 정월에 드는 절기지만 올해는 아직도 경자년 섣달이다. 이렇게 정월과 섣달에 거듭 든다고 쌍봉춘(雙逢春), 또 ‘봄을 다시 만난다’고 재봉춘(再逢春)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 해에 결혼하면 좋다는 속설도 있다.입춘에는 대문이나 문설주, 기둥 등에 입춘첩을 써 붙이는데 올해도 졸필이지만 써봤다. 요즈음 나라의 상황을 보아서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라’는 국태민안(國泰民安) 등 큰 의미의 바람도 있지만 많은 글 중에서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을 골랐다. 그런데 올해 입춘 절기가 드는 시간을 알아보니 자정이 가까운 밤 11시 59분이라 그냥 붙이려다가 시간에 맞추어 붙어야 효험도 있다고 해서 재미 삼아 기다렸다. 자정이 다 되어 현관문을 열고 나가 여덟 팔자로 정성껏 붙이고 ‘봄이 되면 크게 길하고, 따뜻한 기운을 받아 좋은 일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고 마음으로 빌었다. 조용히 들어와서 따뜻한 녹차 한 잔을 마시니 가슴에 봄이 드는 듯 훈훈해진다.예전엔 각 지방마다 재미있고 뜻있는 의례와 행사들이 많았다지만 요즘 세태에는 절식 하나 정성껏 마련해 먹는 집도 드물 것 같다. 옛 궁중에서는 파, 냉이, 부추 등 맵고 신 맛의 채소들로 만든 오신반(五辛盤)을 수라상에 올렸고, 민간에서는 눈밭에 돋아난 햇나물을 뜯어다가 무친 입춘채(立春菜)를 먹었다고 한다. 마침 집에는 아내가 구해온 싱싱한 산미나리가 한 묶음 있어서 새싹은 아니지만 감식초에 무쳐 막걸리 한 잔 마시며 ‘봄이 드는 계절’을 맛보았다.옛날 의례에는 흙으로 만든 소나 나무로 만든 소로 잡귀를 쫓고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고 하는데 올해가 마침 하얀 소띠해라 큰 마을 잔치라도 벌였으면 좋겠지만 집합금지의 어려운 시기이니 마음으로나마 우직한 소들의 뚝심을 품고 역병을 쫓아버려 주기를 다짐해보자.입춘에 맑고 바람 없으면 풍년이 든다 했는데 중부지방에는 눈발이 날렸고 기온은 영하권으로 내려갔지만 여기는 바람 없는 조용한 날씨여서 다행이었다. 보리 뿌리를 뽑아 보아 뿌리가 많으면 풍년이고 적으면 흉년이라는데 부근엔 보리밭이 없으니 멀리 호미곶 청보리밭에 가서나 알아볼까.기계면 시골집에도 입춘첩을 붙이려고 갔더니 화단에는 노란 납매가 피어있다. 섣달에 피는 꽃이라 납매(臘梅)라고 했겠지마는 나에게는 봄이 오는 길목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꽃이다. 능수매화는 아직도 겨울잠인데 남쪽 지방에는 매화도 핀 모양이다. 오는 길에 봄이 어디까지 왔는지 보려고 창포동 마장지 못을 둘러 보았더니 버들강아지가 하얀 솜털을 부풀리고 있는 물가에 청둥오리 한 쌍이 정답게 물을 가르고 있었다. 집 베란다의 사랑초는 겨울에도 연분홍 꽃을 피우고 있지만 동양란 몇 포기는 잘 가꾸어 주지 않은 탓인지 아직도 꽃대를 올리지 않고 있다.이제 정녕 봄은 오리라. 엄청난 질병의 엄습에 움츠렸던 몸을 털고 기지개를 쭉 켜고 화창한 봄날을 맞자. 그리고 이번 설날에는 두루 세배는 못 다니겠지만 가까운 자식들의 큰 절을 받았으면 싶다.

2021-02-07

알코올 중독자에게 희망을

문가인참마음심리상담센터 원장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해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술 소비량이 증가하게 되면서 알콜중독환자도 늘어날 것이다.어린 시절 우리 집의 뒷집에도 술을 많이 마시는 한 남성이 살았다.그는 딸기코의 붉은 얼굴, 술 취한 목소리, 건들거리는 발걸음으로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사람들이 알코올중독자라고 하였다. 그의 아내는 결국 도망가 버리고 외동딸은 외롭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서 자라났다. 그 아이는 우리 집에 와서 내 여동생과 자주 어울리며 놀았다. 결국 딸기코의 붉은 얼굴의 그 남성은 어느 추운 겨울날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하였다.내가 기억하는 알코올중독자의 첫 기억이었다.나는 심리학을 전공하고 정신병원에서 임상심리사로 일하면서 정신병원의 폐쇄병동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50%이상이 술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40∼50대 남성이 주로 많았고, 간혹 20∼30대의 남성과 여성도 입원해 있었다.그 시절 의료진들은 알코올문제는 완치가 잘 안되며, 재발이 잘 된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 ‘심리상담과 약물치료로는 안 된다. 평생 관리해야 한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자조모임(A.A: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모임)이 그나마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퇴원한 날 병원 앞 슈퍼에서 환자들은 다시 술을 마시고 재입원을 하였다. 가족들에게도 철저히 버려져서 정신병원을 전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끔 교통사고도 내고 자기 몸에 생채기를 내기도 하고 자살하기도 하였다.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그는 젊은 나이에 온 몸이 성한 데가 없고 자해 이외에도 자살과 같은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망상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웬일인지 나와 상담하는 것을 좋아하고 나를 참 많이 따랐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위로해주고 희망을 주는 것에 그쳤을 뿐, 그를 완치시키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해주지는 못하였다.나는 병원을 퇴직하고 상담센터를 개업해서 다양한 심리적 문제를 치유했다. 그렇지만 알코올문제는 자신이 없었다. 알코올중독은 완치가 안 된다는 병원에서의 사고의 도식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최근에 알코올문제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내방하고 있고, 그들은 최면치료로 신기하게도 치유되고 있다.어렸을 때 우리 집 뒤에 살았던 그 남성도 나와 같은 임상심리전문가를 만났다면 가정이 깨지지도, 비명횡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딸은 할머니 품에서 외롭게 홀로 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독서를 좋아하던 그 아이는 잠재력이 있어보였다. 어디에서 좋은 일하면서 살고 있을까? 아니면 마음의 상처를 술로 위로하며 외롭게 살고 있을까?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사람을 욕을 한다. 손가락질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술 문제는 우리나라의 빠른 경제 성장 과정에서 선택한 하나의 스트레스 관리방법임을 사람들은 알까?알코올중독자에게 욕하고 손가락질 하지 말라. 위로하고 격려하며 대화를 시작하라. 그리고 마음의 전문가를 만나보라.

2021-02-07

‘토착왜구’ 선동 망국론

안재휘 논설위원미국의 저명한 미래학자 래리 다이아몬드(Larry Diamond) 스탠퍼드대 교수의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수법’에 관한 정리가 진한 공감을 부른다. “전체 국민을 ‘진짜’와 ‘부패한 엘리트’로 양분한 뒤에, 반대편을 불법적이고 비애국적인 악마로 낙인찍는 전략을 구사한다. 다음은 사법부를 내 편으로 채운 뒤에, 언론의 독립성을 압박하는 한편, 공영방송과 인터넷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선거구와 선거제도를 유리하게 조작하고, 선거 주관 기관도 내 편으로 채운다.”지난해 10월,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과 벌인 ‘토착왜구’ 설전에서 이념에 찌들어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초라한 지식인의 민낯을 들켰다. 그는 등단 50주년 기자간담회에서 “토착왜구,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라고 말했다. 진중권이 이를 ‘광기’라면서 “이분의 영혼은 아직 지리산 어딘가를 헤매는 듯하다”고 맹비판하자, 조정래는 “대선배 작가에 대한 무례와 불경”이라며 신경질을 냈다.조정래의 발언 중에 정작 놀라운 내용은 “반민특위를 설치해 인구의 150만, 160만에 달하는 친일파들을 처단하자”는 대목이다. ‘책 장사’를 위한 의도된 도발이라는 해석이 있다. 조정래가 꺼내 든 ‘친일파 처단’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먹히는 ‘선동언어’라는 현실이 끔찍하다. 헐렁한 민심의 틈새를 파고드는 선동정치와 국민의 단세포적 반응은 통한을 부른다.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가덕도’에 더해 제안한 ‘한일 해저터널’ 공약을 놓고 민주당이 또다시 ‘친일 프레임’을 꺼내 들었다. 해저터널이 우리보다는 일본에 더 이익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이 공약은 ‘토착왜구 행각’이라는 선동이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도 같은 정책을 검토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민주당은 곧바로 역풍을 맞았다. 뒤늦게 괴발개발 변명을 늘어놓지만 궁색하기 짝이 없다.문재인 정권의 악착같은 ‘친일 프레임’, ‘토착왜구’ 선동은 고질병이다. 우리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어있는 ‘식민사관’을 청산하는 일에는 모든 정권이 비겁했다. 역사교육 현장이 ‘식민사관’에 붙박인 ‘강단사학자’들로 장악된 현실 때문에 어느 정권도 학문적 수술을 감행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해야 할 일은 못하면서 상대방을 ‘토착왜구’로 몰아 때리는 유치한 선동에만 몰두하는 민주당의 행태가 참으로 고약하다.영남권 신공항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오래고 지독한 영남권 갈등의 역사를 깡그리 뭉개고 ‘가덕도 신공항’ 광풍이 불고 있다. 맞서기는커녕 ‘원 플러스 원(1+1)’ 개념으로 ‘한일 해저터널’ 건설을 끄집어내야 하는 제1야당의 처지가 참으로 딱하게 됐다. 자기들도 숱하게 내놓고 검토했던 해저터널 공약을 ‘친일’로 몰아가는 민주당의 망국적 선동정치는 더 한심하다. 모두가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고 있는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중우정치(衆愚政治) 한복판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로 끌려가고 있나.

2021-02-07

취약계층이 최대 피해자… 집중 지원해야

코로나19 사태 이후 일용직 근로자나 저임금 근로자 등 취약계층일수록 고용상황이 더 악화된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가 밝힌 자료에 의하면 코로나19 이후 지역의 취업자 수가 대면 위주의 전통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감소하는 가운데 여성이나 임시일용직 등 취약계층의 고용이 상대적으로 더 부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산업별로는 도소매업, 음식·숙박업 종사자의 고용이 크게 준 것으로 나타났다. 도소매, 음식·숙박업은 2019년 한해동안 2만3천명이 감소했으나 코로나가 발생한 지난해는 6만명으로 그 폭이 크게 증가했다. 특히 코로나 사태 이후 대구경북의 청년층의 취업자 수는 지난해 6.7%가 감소해 전국 평균(4.6%)보다 훨씬 큰 것으로 조사됐다. 지역의 청년 고용 상황은 최악 상태라 할만하다.전국적으로도 코로나 여파로 고용 상황은 비슷하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비자발적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전국적으로 200만명을 넘어섰다. 일을 하고 싶으나 직장의 휴·폐업, 사업 부진 등으로 직장을 그만둔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 40%는 임시직 근로자며 23%는 일용직 근로자로 집계됐다. 또 가계소득도 소득하위 계층은 1.1% 감소했으나 소득상위 계층은 2.9%가 증가했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지는 소득의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분석이다.코로나19 이후 전반적으로 우리 경제가 후퇴하면서 일용직이나 임시고용직 등 취약계층일수록 어려움이 더 가중되었던 것이 각종 통계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국제통화기금(IMF)은 코로나19로 촉발된 위기는 1930년대 대공항 이후 가장 큰 경제 재앙이며 특히 취약계층에 큰 타격을 입혀 불평등을 악화시킬 것이라 예측한 바 있다. 코로나19가 1년 이상 지속된 지금의 우리 상황이 그렇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등의 도산이 줄을 잇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약계층의 경제난이 이젠 극에 달했다.경북도 등 행정기관에서 취약층에 대한 각종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언발에 오줌누기 정도다.정부가 또다시 재난 지원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재난 지원금만큼은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집중 지원하는 것이 효과를 높이는 방법이란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21-02-07

리플리 증후군

리플리 증후군은 과도한 신분상승 욕구 때문에 타인에게 거짓말을 일삼다 결국에는 자신마저 속이고 환상 속에 살게 되는 유형의 인격장애 현상을 뜻한다. 거짓말이 탄로 날까 봐 불안해하는 거짓말쟁이와는 다르다. 리플리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은 자신이 한 거짓말을 진실로 믿게 된다는 것이 특징이다.1955년 미국의 작가 하이스미스가 쓴 범죄소설 ‘재능있는 리플리씨’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톰 리플리가 재벌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구를 살해하고 자신이 그의 인생을 대신해 사는 내용을 줄거리로 했다. 담대한 거짓말과 행동으로 살던 리플리는 어느 날 친구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그의 인생도 막을 내리게 된다.1960년 알랭들롱이 주연한 ‘태양은 가득히’가 이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화해 크게 흥행하면서 리플리 증후군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우리나라에서는 2007년 신정아 학력위조 사건이 리플리 증후군을 알린 사건으로 유명하다. 신씨가 예일대 박사학위와 학력을 위조해 대학교수와 국제비엔날레 총감독에 지원하다 가짜임이 드러난 사건이다. 영국의 한 언론은 당시 이 사건을 두고 능력보다 학벌이 중요시되는 한국사회의 병폐가 드러난 사건이라 꼬집었다. 심리학자들은 리플리 증후군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욕구가 극에 달해 발생된다는 점에서 시대혐오의 ‘사회병’이란 분석도 내놓는다. 양극화 등 갈수록 불평등해지는 우리 사회의 구조가 리플리 증후군에 노출돼 있다는 해석도 가능한 말이다.김명수 대법원장의 거짓말을 둘러싼 후폭풍이 일파만파다. 사법부 수장이 거짓말 한 사실이 드러나 국민적 거부감이 크다. 국민의 다수가 이 사건으로 사법부에 반감을 갖게 된다면 리플리 증후군처럼 우리 사회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정구(논설위원)

2021-02-07

김명수 대법원장 논란 확산… 핵심은 ‘편향성’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해 국회에서 탄핵안을 통과시킨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가 공개한 녹음파일로 거짓말이 들통 난 김명수 대법원장에 대한 비판여론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 시점에 돌아보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는 사법부 내의 ‘하나회’라고 불리는 진보성향 판사들의 사조직 정리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거짓말’이 아니라 ‘편향성’이다. 김 대법원장의 발언은 그 금도를 확실하게 넘었다.보수 성향의 변호사단체인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한변)은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한변은 “김 대법원장에게 마지막 법관으로서의 소명의식과 수오지심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다면 이제라도 즉각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물러나기 바란다”고 촉구했다.포털사이트 판사 익명 게시판 ‘이판사판’에 올라온 글들도 살벌하다. ‘대법원장 2’라는 글을 올린 판사는 “어제 일어난 일들로 저는 새벽에 잠이 벌떡 깨고 아침부터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대법원장님은 ‘쏘리’ 한마디 하고 발 뻗고 주무셨습니까”라고 힐난했다. ‘대법원장님’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판사는 “이제 법조 선배, 조직과 수장과의 대화도 녹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거짓말쟁이로 몰릴 위험을 무릅쓰고 살아야 하느냐”고 비꼬았다.검찰 개혁위원 출신의 김종민 변호사의 발언이 눈에 띈다. 김 변호사는 “과거 법원의 엘리트 서클 ‘민사판례연구회’를 그렇게 비판하던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가 그보다 더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었고 그런 사법부 정치화의 정점에 김명수 대법원장이 있다”고 직격했다. 대법원장의 거짓말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허물이다. 그러나 정말 심각한 문제는 녹음파일에서 뚜렷하게 드러난 정치적 ‘편향성’이다.건강상의 문제로 사표를 제출한 임 판사를 향해 김 대법원장은 “탄핵이라는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오늘 그냥 (사표를) 수리해 버리면 탄핵 얘기를 못 하잖아”라고 했다. 그의 정치편향을 입증하는 부인하기 힘든 뚜렷한 증거다. 김 대법원장의 용퇴는 물론, 사법부 내의 사조직도 일소돼야 한다. 차제에 패거리 의식에 찌든 이념 판사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모두 정리하는 게 맞다.

2021-02-07

자동차산업에서 제조업 혁신을 선도한다

최영조 경산시장경산은 칠곡∼경산∼영천∼경주∼포항을 잇는 자동차부품산업 밸리의 중심지역이다. 자동차부품 주력업종 업체는 240여 개나 된다.자동차 130년 역사에도 큰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기후 협약에 따라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각국이 친환경 차 혁신에 박차를 가함에 따라 단기적으로는 전기차, 장기적으로는 자율주행차라는 변화를 추구하며 자동차 산업의 경계가 무한 확장되고 있다.정부도 지난해 말 ‘2050 탄소 중립 추진전략’에서 친환경 차의 전면적인 대중화와 자율주행차량 보급의 확대를 발표하는 등 친환경, 디지털 전환 등 4차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 있다. 또 IT와 제조, 서비스 업종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산업융합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가치를 향상시키는 일이 큰 흐름으로 되고 있다.자동차산업은 소재·전자산업은 물론 유통·운수산업에 이르기까지 전후방 연관 효과가 크고 미래혁신기술이 모두 연관되므로 ‘산업 중의 산업’이라 불린다.지역에는 완성차업체에 직접 납품하는 1차 부품업체의 비중은 작고 1차 부품업체 등에 납품하는 2·3차 부품업체의 비중이 매우 높아 미래 차를 대비하기 어려운 상황이다.경산시는 미래형 자동차산업의 기술 분야별 육성책을 여러모로 매진하고 있다.탄소소재 기술지원을 위한 탄소 복합설계 해석기술 지원센터가 준공을 앞두고 있으며 자율형 자동차 소재 부품을 개발하는 연구기관인 청색기술 선도연구센터가 운영되며 고강도 셀룰로오스 나노섬유, 습기 제어 소재, 능동 차체제어 기술 등을 개발하고 있다. 탄소소재는 가볍고 튼튼해 기능성 의류나 테니스 라켓에서부터 자동차, 항공기, 풍력 발전용 블레이드와 수소차 연료탱크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시장을 가진 ‘꿈의 소재’다. 자동차의 경량화를 위해서는 가장 적합한 대체 재료로 인식되고 있어 완성차 업체와 소재업체, 부품업체 간 공동대응이 시급하다. 차세대 차량융합부품 제품화지원 거점센터와 도심형 자율주행부품 연구지원센터, 사물무선충전 실증 센터, 무선전력전송센터 등 제조업의 혁신을 이끌 국책사업이 활발하다. 특히 태양광선을 차단·제어해 차량 냉난방 효율을 높이는 스마트 윈도우 필름을 개발하는 사업이 지난해 과기부 공모에 선정돼 장기적으로는 신재생 에너지 산업과 더불어 미래형 친환경 자동차 시장을 주도하는 한 축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S/W기반 지능형 시스템반도체(System on Chip) 모듈화 지원사업으로 시스템반도체 개발에도 참여한다. 시스템반도체는 중앙처리장치(CPU)처럼 데이터를 처리하는 비메모리 반도체로서 고도로 기술집약적이며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 수요가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자율주행 시스템과 관련해 데이터 저장·분석, SW서비스 등으로 기업 지원을 수행할 클라우드 데이터 인프라 구축 사업도 추진되고 있다.지난해부터 진행되는 모빌리티 플랫폼 구축은 전통적인 교통수단에 정보기술(IT Information Technology) 등을 결합해 효율과 편의성을 높이는 개념으로서 이 플랫폼이 완성되면 기업들은 대규모 데이터를 확보하고 분석해 최적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자동차산업이 제조업에서 융합산업으로, 자동차의 개념이 소유에서 이용·공유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경산시의 제조업혁신은 산업단지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창의와 소통의 인프라를 구축해 뒷받침하기 위한 사업도 추진된다. 10개 대학, 16개 전문 연구기관 및 산업단지를 가진 지역의 장점을 살려 중소벤처 기업육성의 최적지를 만들려고 역세권에 지식산업센터와 스타트업파크, 컨벤션센터를 조성하며 청년 창업, 네트워크, 문화기능이 집적된 복합공간으로 경산 청년 지식놀이터를 구축하고 청년희망 Y·STAR 프로젝트도 추진한다.기술은 알고 있을 때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겨졌을 때, 제품으로 소비자에게 다가갈 때 빛이 난다.경산시는 새롭게 개발된 기술을 활용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자동차산업의 전진기지가 될 것이다.

2021-02-07

오후의 홍차

오후 4시, 홍차를 주문했다. 홍차 세계에 오래전 입문한 S가 문외한인 나에게는 스리랑카에서 자란 우바를, 함께 간 M에게는 중국산 기문을, 자신은 인도산 다아즐링을 시켰다. 이렇게 세 가지 세계 3대 홍차를 우리에게 소개했다.홍차 전문 카페답게 실내는 앤틱하게 꾸며 놨다. 주문한 차가 나오기 전에 손님이 우리밖에 없기도 해서 돌아다니며 소품들을 구경했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그린 그림, 노란 조명이 켜진 장식장, 차가 담긴 모양이 다양한 틴 케이스가 한쪽 벽면을 장식해서 하나하나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했다.그러는 사이 따뜻한 털옷을 입은 티팟이 홍차를 품고 우리 테이블에 놓였다. 먼저 찻빛이 싱싱하고 홍차의 샴페인이라 불리는 다아즐링을 맛보았다. 시간을 길게 우렸는지 떫은맛이 약간 느껴졌다. 함께 곁들여 나온 스콘을 한입 머금으니 금상첨화였다. 그 다음으로 루비처럼 진하고 붉은 색이 돋보이는 우바를 음미했다. 내 취향은 우바였다. 그 다음엔 영국인들을 매료시킨 동양적인 향의 기문을 기품 있는 찻잔에 따랐다. 투명한 적색의 깊은 맛이 느껴졌다. 이 차도 좋았다. 차를 마시는 오후 내내 오래된 가구와 레이스 장식의 조명 아래에서 오묘한 홍차의 전설을 들었다. 들으며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라는 영국홍차문화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왜 오후에 홍차를 마실까 궁금했다. 19세기 중반까지 영국인들은 식사할 때만 차를 마셨다고 한다. 안나 마리아라는 공작부인이 점심은 먹었고 저녁은 아직 먼 오후 4시 전후에 매우 허기를 느꼈고, 참다못해 하녀에게 홍차 한 잔과 간단한 음식을 요청해 먹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애프터눈 티의 기원이 되었고 최상류층 귀족들 사이에서 하나의 유행으로 확산되어 나간 것이 관습의 시작이었다는 설이다. 1890년쯤 수입량도 충분히 늘어나게 되고 가격도 많이 낮아져 부자들의 애프터눈 티 문화를 부러워하던 서민들도 이 무렵이 되어서는 홍차를 부담 없이 마시면서 애프터눈 티 문화를 마음껏 즐기게 된다. 영국에 차가 처음 소개된 지 거의 250년 만에 홍차는 진정으로 영국 국민들을 위한 일상음료가 되었다. 헨리 제임스라는 작가는 “애프터눈 티 라고 불리는 모임에서 보내는 시간 보다 더 아늑한 순간은 삶에서 그다지 많지 않다”라고 적었다. 홍차하면 떠오르는 ‘얼 그레이’라는 단어도 ‘그레이 백작’이라는 뜻으로 총리를 지낸 영국 정치가 이름에서 따왔다. 총리부터 일반 사람들까지 모든 영국인이 즐기던 영국 애프터눈 티 문화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서서히 영국인의 일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홍차를 엄청나게 마시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차와 티 푸드를 여유롭게 즐기기에는 현대의 삶이 너무 바쁘고 팍팍해진 탓이었다.김순희수필가우리도 오래전부터 스스로 홍차를 만들어 마시던 민족이었다. 선덕여왕 때부터 이미 차 재배를 한 하동 차도 녹차가 아니라 발효차인 홍차라고 한다. 일상다반사라는 말은 차를 마시는 일이 밥 먹듯 늘 있는 예사로운 일이라는 뜻이다. 명절 때 차례(茶禮)를 지낸다. 원래 차를 올리던 의식인데 차례가 어느 정도 보편화하면서 이 차를 구하기 어려우니까 술로 대신한 거라고 한다.“언니, 저는 나중에 영국할머니들처럼 늙고 싶어요.” 영국할머니가 어떻게 사는데 M이 그런 말을 할까 궁금했다. 유학 가서 어렵게 공부하느라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없던 그녀가 진짜 오랜만에 카페에서 친구와 한국말로 수다를 떨던 오후, 하얀 머리의 할머니 세 분이 차를 마시며 두런거리다, 뜨개질도 하다,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있기도 하며 오후를 마음껏 즐기더란다. 그날만 특별히 하는 행동이 아니라 매일 찾아오는 오후 그 시간을 여유 있게 보내는 삶이 부러웠단다.지인들과 영국할머니들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감미로운 차향이 우리를 스리랑카로 인도로 중국으로 또 영국 어느 골목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붉은 홍차에 오후의 해 그림자가 드리운다.

2021-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