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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땅꺼짐 관리’

도시의 빠른 성장과 함께 수십 년 된 상·하수도, 지하철과 같은 지하 인프라는 점차 노후화되고 있다. 또한, 기후변화로 인한 집중호우와 같은 극단적인 날씨 현상은 지반의 안정성을 더욱 위협하고 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2019년부터 현재까지 땅꺼짐 사고가 급증했으며, 그 중 대구시는 특히 하수도 노후화로 인해 땅꺼짐 사고 발생 위험이 커졌다. 예를 들어, 대구 동구의 한 도로에서 2024년 여름, 직경 50cm의 땅꺼짐 사고가 발생하여 차량 통행에 큰 차질을 빚었다. 기후변화에 따른 전례 없는 극심한 폭우로 지반을 더욱 약화시켜 이러한 사고를 촉발하고 있다. 따라서 대구와 경북 지역은 이러한 땅꺼짐 사고를 예방하고 관리할 체계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땅꺼짐 사고 또는 싱크홀(sinkhole)이란 지하공간의 침하나 파손으로 인해 지반이 급격히 내려앉는 현상이다. 이는 상·하수도관의 파손, 과도한 지하수 유출, 불법적인 지하 개발 등이 원인이 될 수 있다. 특히, 낡은 상·하수도 시설은 지속적인 노후화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위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로는 지하 공간 모니터링 시스템(GPR), 3D 지하공간 모델링, 실시간 침하 모니터링 시스템 등이 있다. 이러한 기술은 지반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점검하고, 이상 징후를 조기에 감지하여 사고를 예방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해외에서는 땅꺼짐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다양한 기술과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일본은 1980년대부터 지하공간 관리와 관련된 연구를 진행해 왔으며, 도로 지하공간을 탐사하는 차량을 도입해 도심 내 땅꺼짐 사고 발생을 예방하고 있다. 또한, 미국 플로리다주는 싱크홀 보험 제도를 의무화하여 사고 발생 시 피해를 신속하게 보상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국내에서도 서울시는 3D 지하공간 통합지도를 구축해서 지하시설의 안전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 대구경북 지역 역시 이러한 시스템을 도입하여, 빠르게 변화하는 기후 조건과 도시의 노후 인프라를 관리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대구시와 경상북도의 접경 지역에서는 지하수와 상·하수도 시스템을 통합 관리하여 위험 요소를 대폭 줄일 필요가 있다. 앞으로 대구경북은 땅꺼짐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첫째, 노후 상수도 및 하수도 시설을 조기에 교체하고, 지반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는 기술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둘째, 대구와 경북 지역의 지하공간 개발을 체계적으로 규제하여 무분별한 개발을 방지하고, 세밀한 지하공간 안전 점검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셋째,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시설을 설계하고, 급격한 날씨 변화에 대비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단순히 땅꺼짐 사고를 예방하는 것을 넘어, 대구·경북 지역의 기후변화 적응력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중요한 초석이 될 것이다. 대구경북 지역 주민들의 안전을 지키고, 더 나아가 미래 세대에게 지속 가능한 환경을 물려주기 위해서 이제는 ‘땅꺼짐 관리’ 정책의 질적·양적 확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5-06-19

선 넘은 요즘의 성(性)

나도향의 ‘뽕’이나 ‘물레방아’ 소설을 우리는 사실주의 문학이라고 배웠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글을 썼다는 이야기다. 인간들의 도덕의식 무너지고, 성 윤리가 없어지는 현실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던 것이다. 1925년에 발표된 글이니 그 당시 사람들의 성 풍속도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100년이 흘렀다. 지금의 성 풍속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리고 달라진 성 풍속도를 반영하는 수필 작품은 나온 게 있을까? 아직 중세 암흑시대의 문학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타 문학적 장르에 비해 수필의 영역에선 여러 가지 제약이 걸려 있어 파격적인 수필을 읽을 수는 없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사이에 오직 결혼에만 불을 밝힌 기집애들이 쓸 만한 남자들을 다 채갔다니까. 새벽 도서관에 한 번도 간 적도 없고, 독서는 패션 잡지 뒤적이는 걸로 대신하고, 자기 계발은 성형외과 드나드는 게 전부인 줄 아는 여자애들이 남자들을 다 채갔다니까” 이게 요즘 이야기가 아니다. 20년 전 드라마 대사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그 많던 싱아(괜찮은 남자)는 누가 다 먹었단 말인가? 라면서 여자 주인공들이 치고받던 대화이다. 20년 전만 해도 여자들은 여전히 ‘내숭’을 떨어야 하고 ‘얌전한 척’해야 했고 어떻게 하면 귀여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20년 후 연애의 낭만성과 고상함, 우아함은 이미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그 선을 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미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현실적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완전 자유로운 ‘연애’를 하는 것이 지금 젊은이들의 현주소이다. 기존 연애에서 보여주는 애절한 사랑과 그리움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오롯이 남녀의 심리와 육체를 가지고 게임을 벌이면서 서로를 탐하고 충돌하는 심리적 정치학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마치 그 옛날 ‘사랑과 전쟁’이라는 불륜 프로그램보다 더 진보한 폭로물이 여기저기서 방송되고 있음은 이미 안방에서 그런 정도의 남녀 관계물이 용인되는 시점까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낡은 도덕적 사고방식을 아주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성에 대한 고정관념, 결혼 이데올로기에서의 순결 의식과 배타적 소유욕, 청교도적 성 의식을 일순간에 비웃는다. 70년 전 피임방법이 개발되면서 혼전 성관계가 자유로워지고 섹스와 출산을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게 되므로 해서 여자들의 성에 대한 개념은 급속히 바뀌고 만 것이다. ‘성적 자기 결정권’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여성들만 이렇게 변한 것이 아니다. 남성도 마찬가지이다. 그 어디에도 ‘책임’이란 의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오롯이 쾌락만 존재하는 느낌이다. 우리가 겪고 상상하는 사랑의 패턴이 완전히 뭉개지고 이런 고루하고 진부한 사랑은 신파적 사랑으로 치부되면서 케케묵은 사랑 레퍼토리만 쌓여 있는 내 머리에 혼란이 온다. 생각은 ‘쿨’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뚜껑을 열고 나가기엔 주위의 싸늘한 시선으로 인해 아직 상당히 춥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글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애들에게 어른으로서 해줄 말도 생각이 안 난다. 어지간해야 말이 통하지. /노병철 수필가

2025-06-19

고인돌과 놀았다

고인돌 옆에서 1인용 텐트를 치고 밤을 세웠다 고인돌은 지상의, 별의 자리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헛된 욕망에 불구하다 누군들 불멸을 꿈꾸지 않으랴 그러나 권력은, 혹은 인생은 야비하고 무모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고인돌이었다 저 장엄한 것이 이슬보다 쓸모없다 잡풀에 희롱당하고 비에 젖어 후줄근하다 빛나는 죽음은 없다 주검만 잠시 있을 뿐 그마저도 사라진다 종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칠성재 마루 고인돌 옆에서 잠을 청한다 옛사람의 근본을 추적하여 오늘 우리의 터전의 발판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만 지금은 내가 불멸의 고인돌이다 자기의 자리에서 생(生)을 노련하고 집요하게 노려보는 것이, 긴 호흡 내쉬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 새벽이 되면 집으로 갈 것이다 그래, 오늘 살아 있어 미래를 전망하고 성찰하는 것이 오히려 단순해서 눈부시게 찬란하다 고인돌과 종일 잘 놀았다. … 내가 이 고인돌을 보러 갔을 때, 입구의 안내판은 누가 발로 찼는지 찢어져 있었다. 대체로 관리가 무성의해 보였다. 멋쩍은 미필적 실수, 행정력의 부재, 그 무엇이라도. 비교해 보니 강화도와 연천 전곡의 고인돌은 제법 대접을 잘 받는 듯 싶었다. 그러나 칠성재의 그 고인돌은 푸대접 받는 그 모습이 오히려 좋았다. 그렇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어쨌거나! /이우근 …..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6-18

순두부찌개

멀리 사는 딸네 식구가 간만에 집에 온다. 누나가 온다는 소식에 아들도 오겠다고 한다. 뭐가 먹고 싶으냐고 묻자, 망설이지 않고 하나같이 “엄마가 손수 끓인 순두부찌개”라고 했다. 때마침 길 건너에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라 다행이다. 장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두부를 전문으로 하는 가게로 향했다. 김이 나는 두부 모판 옆에 봉지 두 개가 서 있다. 두붓물에 잠긴 순두부의 따뜻함과 몽글한 순도가 마음에 든다. 냉장고를 뒤져 양파를 다듬고 당근을 깎는다. 파와 고추 곁에 잘게 썬 애호박을 담는다. 조갯살을 넣을까 하다가 딸과 아들의 입이 기억하는 비계가 붙은 돼지고기를 꺼낸다. 고추기름을 만들고 고기부터 볶기 시작했다. 빨간 국물을 보는 순간, 차고 방에서 만났던 그녀가 떠오른다. 손이 저절로 옛 기억의 맛을 쫓아가고 있다. 30년 전, 남편의 첫 사업 부도로 나는 집에만 있을 수 없었다. 유치원생인 딸과 어린이집 다니는 아들의 오후를 미술학원에 맡기며 내가 간 곳은 수학 학습지 사무실이었다. 오전에 전화로 학부모를 먼저 설득해야 했고, 오후에는 학생의 학습 수준에 맞게 수업 단계를 정해 선생님을 배치해 주는 일이었다. 새벽부터 비가 내렸던 그날, 아들 녀석이 눈 뜨자마자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칭얼거렸다. 기어코 눈물 콧물이 범벅된 녀석을 선생님 손에 넘기고 돌아섰다. 아이는 얼굴을 창문에 붙이고 엄마를 부르며 울었다. 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단계별 학습지가 담긴 가방을 메고 사무실을 나왔다. 빗속을 걸어 미리 약속한 주소를 찾아 골목을 헤맸다. 주소지를 들고 간 곳은 가정집 차고지를 개조해 만든 단칸방이었다. 집 안이 훤히 보이는 곳에 학생의 엄마가 홀치기 틀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가 하는 일에 방해될까 봐 한참 비속에 서 있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들어서자, 그녀가 반갑게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리라던 그녀는 재바르게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학습지 가방을 열어보지도 못한 채 허둥거렸다. 내 등 뒤로 학교에서 돌아온 남자아이의 소리가 들렸다. 빗물에 젖은 발을 씻고 들어오는 아이와 함께 얼떨결에 나도 둘레 밥상 앞에 앉았다. 갓 지은 밥을 세 그릇 올린 그녀는 가운데에 보글보글 끓는 순두부찌개 냄비를 놓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내게 그녀는 매일 아들의 하교 시간에 맞춰 새 밥을 짓는다고 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은 따뜻하게 배부터 채워야 한다며 웃었다. 고추기름에 어우러진 찌개를 보자, 아침도 먹다 만 내 배에서 소리가 났다. 내 숟가락은 염치도 없이 들락거렸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허기진 마음까지 몽글해졌다. 상을 물리고, 학습지를 풀던 아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동글납작한 아이를 보자, 유리창에 코를 문대며 울던 아들이 생각났다. 나는 애써 웃으며 문제 푸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막힌 곳을 뚫어주자, 아이는 거침없이 풀어나갔다. 그녀는 멀찌감치 앉아 홀치기를 하며 웃었다. 학습지 하는 아이를 뿌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나는 순두부찌개 요리법이 적힌 종이를 받아왔다.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그녀가 말한 순두부를 샀다. 나는 그녀의 솜씨를 어설프게나마 흉내 내 밥상에 올렸다. 찌개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남편과 아이들이 이내 밥 한 그릇과 찌개 그릇을 비우고도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국물까지 마신 아들이 나를 보며 웃었다. 어스름 속에 비가 그치고 있었다. 그 후로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 순두부찌개를 끓인다. 고추기름을 내면, 오랜 기억 속으로 들어가 갓 지은 밥 냄새를 맡고, 돼지비계가 뜬 순두부찌개를 떠먹는다. 세월이 흠씬 지나버린 지금도 그 둘레밥상을 기억한다. 오랜만에 식구들이 다 모인 밥상이 시끌벅적하다. 딸과 아들의 숟가락이 찌개냄비에 먼저 간다. “바로 이 맛이야.” 조미료를 넣지 않은 자리에 뭔지 모를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아들의 말에 딸이 “정성”이라며 맞장구친다. 정성보다 허기진 내 마음을 채워주었던 그녀가 함께 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비가 내리지 않아도 순두부찌개가 맛있는 밤이다. /윤명희 수필가

2025-06-18

다한증과 자율신경

무더운 여름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땀을 흘린다. 이는 체온을 조절하고 몸 안의 열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생리적 반응이다. 하지만 평소보다 지나치게 많은 땀을 흘리거나, 더운 상황이 아님에도 땀이 멈추지 않아 일상생활에 불편을 겪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증상은 단순한 체질이 아니라 다한증이나 자율신경실조 같은 병적 상태로 볼 수도 있다. 여름철에는 이러한 증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특히 더위에 민감한 사람일수록 이로 인한 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되기 쉽다. 한의학에서는 몸의 기운이 부족해 땀구멍을 조절하는 기능이 약해져 발생하는 기허형 다한증과 열이 많은 체질이 더욱 과항진 되어 땀이 나는 열독형 다한증 그리고 갱년기나 화병처럼 스트레스를 받아 열이 훅 오르면서 땀이 나는 음허형 다한증이 있다. 기허형은 조금만 움직여도 쉽게 지치고 땀이 나며 땀을 많이 흘린 후엔 머리가 어지럽거나 팔다리에 힘이 빠지는 증상을 호소한다. 열독형은 평소에도 땀이 많긴 하지만 열이 과항진 되면 시도 때도 없이 땀이 나서 일상 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이다. 밥을 먹거나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나고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체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갱년기나 화병으로 인한 다한증은 열이 순간 오르면서 땀이 훅 나는 경우가 많은데 증상의 경중에 따라 하루 수차례에서 수십 차례 발생하고 이런 경우는 수면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모두 자율신경실조증으로 귀결되며 치료는 각 증에 맞게 자율신경을 회복하는 한약과 자율신경을 조절하는 약침을 쓰면 해결할 수 있다. 기운이 허한 사람은 황기나 인삼같은 약재를 써 기력을 보충하고 빠져나간 땀을 보충할 진액을 생성한다. 열이 많은 사람은 석고나 황련을 써서 처방을 해 몸의 열을 식히고 심장의 열을 식힐 수가 있다. 화병 같은 스트레스 관련은 치자나 시호를 이용해서 처방을 하면 불면과 가슴 두근거림 열이 훅 뜨면서 땀이 나는 증상 등을 개선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약침요법도 병행할 수 있다. 우리 척추는 오장육부와 대응이 되는데 실제 흉추에서 나오는 신경은 오장육부와 연결되어 이 신경에 약침을 놓으면 오장육부의 상태를 개선시킬 수가 있다. 이와 함께 경동맥 밑에 있는 성상신경과 근처의 부교감 신경에 약침을 놓아 자율신경을 조절할 수도 있다. 생활 관리도 치료만큼 중요하다. 덥다고 차가운 음료나 냉방을 과도하게 이용하면 오히려 면역력이 약해져 체온조절과 열 배출에 어려움을 겪어 다한증이 더 심해질 수 있다. 실내 온도는 외부와 5도 이상 차이 나지 않도록 하고 반신욕이나 족욕을 통해 체온을 안정시키고 하루 30분 가량의 가벼운 유산소 운동을 통해 몸의 면역력을 올리는 것이 좋다. 여름은 단순히 더운 계절이 아니다. 몸 안의 열과 수분, 기혈의 균형이 크게 흔들리는 시기다. 땀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율신경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이 계절을 버텨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한의학은 그 균형을 회복시켜주는 고유한 치료의 원리가 있다. 기와 음을 보하며 교감과 부교감의 리듬을 되찾아주는 섬세한 한방적 접근이야말로 여름철 다한증과 자율신경실조증으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6-18

아이가 자란다는 것은

아이가 자라면 한 그릇 밥을 먹는다. 어른 몫의 공기밥 하나를 거뜬히 다 먹는다. 숙주나물, 호박나물, 콩나물에 가지 반찬까지 갖은 채소 반찬을 즐겨 먹는 손자는 학교 급식 시간에 선생님의 칭찬을 도맡아 듣는다고 했다. 매운 김치도 곧잘 먹어 친구들의 부러움을 산다고 자랑하곤 했다. 한식당엘 가면 된장찌개와 배추나물을 제 앞에다 끌어다 놓고 먹는 어른 식성의 아이는 된장에 밥을 말다시피 먹고는 빈 그릇을 보이며 한 공기를 더 시켜 달라기도 한다. 어릴 때 고기를 즐겨 먹지 않아 애태우던 식성도 변해, 이제는 성인 한 사람 몫의 고기도 너끈히 먹어 치운다. 오늘 저녁 차려준 만둣국을 맛나게 다 먹고는 국물에 밥 말아 먹어도 돼요?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운다. 아침을 차려 주면 마다하지 않고 다 먹고 학교 간다며 제 엄마도 흐뭇해 자랑하곤 한다. 많이 잘 먹으니 또래보다 좀 작은 몸이 이제 쑥쑥 커지려나 기대가 잔뜩 된다. 아이가 자라는 만큼 아이의 사회도 확장되는 것도 알겠다. 최근 매일 하굣길을 도와주면서 아이의 일상을 더 가까이 관찰하게 되었다. 교실에서 나온 손자는 운동장을 거쳐 정문까지 오면서 만난 거의 모든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몸 부딪쳐 장난치고 얘기를 하는 걸 멀찍이서 본다. 2학년인 손녀는 내 손 꼭 잡고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대는데, 큰 아이는 다르다. 손자는 이제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오기도 한다. 휴대폰으로 만날 시간을 약속해 정하고, 심지어는 우리집에까지 와서 하루종일 놀기도 한다. 게임기만 가지고 놀길래 체스와 퍼즐을 줘도 저희끼리 잘 논다. 스스럼없이 할머니집에 친구를 데리고 오는 게 흐뭇해 같이 놀러도 가고 밥까지 차려준다. 제 아빠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손자다. 일 년에 서너 번 만나는 사촌누이 정도의 가족이 아이의 사회 영역의 전부인 줄 알았다. 이제 친구를 디딤돌 삼아 점점 더 넓은 세상으로 단단히 발 디뎌 걸어가겠지 싶다. 아이가 자라면 부끄러움도 자라는가 보다. 학교에 가지고 가는 물병이나 우산 취향이 싹 바뀌었다. 손녀는 분홍의 인형 그림 있는 물병, 손자는 파란색 로봇 그림의 물병이었다. 우산도 장화도 남녀 구분이 확실했었다. 어느 비오는 날 하굣길에 무늬 있는 우산을 가져다줬더니 유치하고 부끄럽다며 쓰지 않으려 해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원래 네 것이었잖았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이젠 검정우산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는다며 제 엄마도 웃는다. 하루는 내 옷매무새에 깜짝 놀라며 얘기하는 말에 내가 되려 놀랐다. 민소매 위에 재킷을 입었던 내가 차 안에서 잠시 재킷을 벗고 있었다. 재킷을 들고 차에서 내리는데 민소매 차림의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지르듯 말한다. 할머니 옷이 왜 그래? 빨리 옷 입어···. 그리고 하는 말이 더 가관이다. 부끄럽단 말이야···. 얼른 재킷을 둘러 걸치며 헛웃음을 삼켰다. 아이가 크면서 부끄러움도 알아 커지는 것 같다. 어딘가서 배운 짧고 야트막한 상식 자랑에 맞장구를 쳐주었더니 이런 소리를 들었다. 할머니랑 지적 수준이 맞아서 좋아···. 자라는 손자의 지적 수준에 맞춰 주려면 할머니의 공부도 끝이 없으려나 싶기도 하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6-18

스쿨존 시간제 속도제한, 교통의식이 관건

대구에서도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 시간제 속도제한이 본격 시행될 전망이다. 만식이법 제정으로 시행된 어린보호구역 속도 제한은 너무 낮은 속도와 사고가 나면 운전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돌아오는 문제 등으로 운전자간에 상당한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런 논란 해소 등을 이유로 경찰은 2023년 9월 전국 8곳을 시간제 속도제한 시범지역으로 지정하고 시범운영 해왔다. 지금은 자치단체별로 시간제 속도제한 지역을 넓혀가는 추세다. 경북서는 작년 9월 구미에서 처음으로 시범 운영에 들어갔으며 대구는 북구 신암초등 인근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시범 적용되고 있다. 대구시자치경찰위원회는 최근 어린이보호구역 시간제 속도제한 도입에 대한 설문조사를 두 차례 벌이고 제도 도입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다. 자치경찰위원회는 두 차례 조사에서 시민의 80% 이상이 시간제 속도제한에 찬성함에 따라 내년부터 대구지역 스쿨존 13곳을 추가로 선정할 계획이다. 후보지 선정에 앞서 대상지에 대한 도로구조, 사고이력, 차량 및 어린이 통행량, 학부모 의견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신중하게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어린이보호구역 시간제 속도제한이 시행되는 곳엔 현재 시속 30km인 제한속도가 보행자가 적은 밤 9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는 시속 50km까지 허용된다. 설문조사에서 시간제 속도제한을 도입하자는 여론이 많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민식이법 제정 이후에도 어린이 교통사고가 줄지 않고 있는 것이다. 보험개발원 발표에 의하면 작년 스쿨존 어린이 피해 교통사고는 172건으로 전년보다 5.5% 증가했다. 차량이 늘고 도로 여건과 교통시설이 이에 못따라 가 교통사고는 매년 20만건 이상 발생한다. 스쿨존 시간제 속도제한이 허용되더라도 교통법규를 지키려는 운전자들의 안전의식이 잘 유지되어야 소기의 목적도 달성될 수 있다. 정책이 바뀌면 시민의 혼란도 불가피하게 생길 수 있다. 제도 변화에 대한 홍보와 교통 표지판의 획기적 정비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교통흐름 개선과 어린이 안전을 지키는 두 가지 효과를 이루도록 신중한 준비와 결정이 필요하다.

2025-06-18

질문은 기자의 존재 이유

각기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겠으나, 본질적으로 기자란 ‘묻는 사람’이다. 배우는 연기를 함으로써, 가수는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경찰은 도둑을 잡아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럼 기자는? 질문하는 것이 기자의 존재증명 방식이다. 그게 무시무시한 권력자건 파렴치한 범죄자건 취재 대상 앞에서 묻는 걸 멈춘다면 그는 더 이상 기자일 수 없다. 20세기를 통틀어 핵심적인 내용을 가장 잘 묻고, 상대로부터 독자들이 만족할 만한 답변을 끌어냈던 여성 기자가 있었다. 이탈리아의 오리아나 팔라치(1929~2006). 이란의 호메이니, 인도의 간디, 중국의 등소평, 리비아의 카다피, 미국의 헨리 키신저 등이 그녀의 질문 앞에서 쩔쩔맸던 사람들. 한 명 예외 없이 세계적 거물임에도 팔라치의 질문엔 거침이 없었다. ‘내가 이런 걸 물으면 혹시 그들이 화내지 않을까’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없었다면 팔라치가 세기를 뛰어넘어 아직도 ‘기자의 한 전범(典範)’으로 기억될 까닭이 없다. 새롭게 들어선 이재명 정부의 첫 번째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김민석 의원의 과거와 관련된 껄끄러운 질문을 한 기자가 김민석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비난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터넷 공간에선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힘든 인신공격도 없지 않다고 한다. 그 기자는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다. 앞서 말했듯 기자란 묻는 것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사람이니. 대장장이가 칼을 만든다고 “그 칼에 의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데, 왜 칼을 만드냐”고 질타하는 건 얼마나 무지한 짓인가. 기자에게 “왜 묻느냐”고 난리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6-18

국힘 김용태·송언석 충돌, 언제 정신차릴까

국민의힘 ‘5대 개혁안’ 추진을 놓고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과 송언석 신임 원내대표가 갈등을 빚고 있다. 쟁점이 되는 개혁안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반대 당론 무효화’와 ‘대선 후보 교체 시도 파동 당무감사’다. 김 위원장은 “이달 말까지 당원 여론조사를 실시해 개혁안 추진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송 원내대표는 “혁신위 구성을 먼저 해서 개혁안 추진 문제를 추후 논의하겠다”고 했다. 송 원내대표는 원내대표 당선 직후에도 “김 위원장의 쇄신안에 대해서는 여러 의원의 견해가 다르다. 추후 꾸려질 혁신위에서 논의돼야 한다”고 했었다. 당내 친윤계 출신 구(舊)주류 지원을 받아 선출된 송 원내대표가 김 위원장이 제안한 개혁안에 대해 제동을 걸면서 두 사람이 충돌하고 있는 모양새다. 국민의힘 당헌에 따르면, 혁신위를 비롯한 당내 특위 구성은 김 위원장의 결단이 필요하고 비대위 의결도 거쳐야 한다. 김 위원장이 브레이크를 걸면 혁신위 출범이 불가능한 것이다. 송 원내대표의 의중대로 김 위원장이 임기(6월 30일)를 마치고 물러난 후 혁신위가 구성되면, 5대 개혁안은 흐지부지 될 가능성이 높다. 혁신안 중 ‘대선 후보 교체 시도 관련 당무감사’는 구주류 세력의 핵심 의원들이 사정권에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의원 다수도 김 위원장의 개혁 드라이브를 외면하면서 정치적 유불리만 따지는 모습이다. 이러니 SNS에서는 국민의힘이 ‘영남자민련’ 또는 ‘친윤 어게인’으로 쪼그라든다는 비판이 쇄도하는 것이다. 국민의힘이 김 위원장이 요구하는 개혁의 길로 갈지, 아니면 ‘친윤 어게인’으로 돌아갈지 많은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국민의힘이 민심을 고려한다면, 김용태 위원장이 제안한 ‘5대 개혁안에 대한 전 당원 여론조사’를 수용하는 것이 맞다. 김 위원장은 여론조사 결과 당원들이 개혁안에 반대하면 개혁안을 철회하겠다고까지 약속했다. 취임 직후 “수도권 민심을 얻겠다”고 포부를 밝힌 송 원내대표가 한식구인 당원 여론조사마저 주저하는 이유를 국민은 훤히 알고 있다.

2025-06-18

고층 아파트와 멈춰 선 제철공장

포항의 스카이라인이 달라진다. 구도심이든 신도심이든 어디를 가도 고층 아파트가 불쑥불쑥 솟아오른다. 분양홍보 현수막이 요란하고 카페 골목에는 젊은 얼굴들도 간간이 보인다. 겉보기에 포항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도시다. 그럼에도 발밑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다르다. 최근 현대제철 포항 제2공장이 조업을 중단했다. 공장은 에너지 가격 상승과 수익성 악화 속에 멈추고 말았다. 지역고용에 직결되는데도 공장 가동중단은 너무도 조용히 이뤄졌고, 조업 재개의 기약은 오리무중이다. 이는 상징적이다. 철강산업으로 뿌리내리고 성장해온 포항이 더 이상 과실을 누릴 수 없는 시대가 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포스코라는 ‘산업수도’의 심장 외에도 현대제철이라는 대형 플레이어가 존재하던 포항의 산업 지형에 틈이 생긴 것이다. 포항은 너무 오랫동안 철강 한 우물만 파왔다. 철강으로 번 재정이 도시 인프라를 일으켰고 지역 대학과 병원, 학교와 상권을 지탱해 왔다. 지금은 글로벌 철강 수요가 꺾이고 탄소중립 규제는 산업 자체를 흔든다. 정부가 추진하는 산업구조 전환전략은 수도권과 세종, 충청권에만 집중되는 양상이다. 현대제철의 침잠은 예사롭지 않다. 포항은 점점 ‘철강 다음’이 필요해지는 도시지만, 아직 그 해답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더욱 두려운 바는 도시의 인구구조다. 포항의 인구는 50만 아래로 떨어졌고 청년층의 유실이 멈추지 않는다. 교육과 일자리, 문화와 경제 인프라 모두가 수도권에 집중된 상황에서 지방 도시의 쇠퇴는 예정된 수순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규아파트 단지는 속속 들어서고, 부동산 개발은 활기를 띤다. 산업이 줄어드는데, 왜 주거는 늘어나는가. 개발 논리의 비틀림에서 비롯된 현상이 아닌가 우려스럽다. 도시의 미래보다 눈앞의 단기수익에 매달리는 구조가 혹 아닐까. 철강산업이 위기를 맞았지만 도시는 분양가에 집착하고 부동산개발에 열을 올린다. 대학은 지역과의 소통이나 연계가 없고 청년대학생들은 수도권만 바라본다. 새 정부가 출범했다. 이재명 정부는 지방의 균형발전과 혁신을 말하지만, 그 메시지가 지역의 현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지역에서는 변함없이 정당 간 정치싸움과 예산 따내기 공방이 계속된다. 위기를 본질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지역의 위기를 ‘철강의 일시적 부진’으로만 여긴다면 더 큰 위기가 엄습할 터이다. 포항은 산업전환과 도시 재설계라는 이중과제 앞에 섰다. 철강을 넘어서는 산업기반을 어디까지 확보하고 유치할 것인지, 그 과정에서 지역의 대학과 기업의 역할은 무엇인지, 포항이 기른 청년들은 무엇을 할 것인지 진지한 계획과 협력, 실천과 투자가 필요하다. 정부의 관심과 투자에만 턱을 괴고 기다리는 시대는 끝났다. 지자체, 기업, 대학, 시민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또 한 가닥은 ‘삶의 질’이다. 청년이 지역에 머물기 위해 필요한 건 일자리만이 아니다. 아이를 안심하고 키울 수 있는 교육과 돌봄, 젊은 세대가 문화를 소비하고 생산할 수 있는 공간, 노년 세대가 외롭지 않게 지낼 수 있는 복지 시스템이 도시의 경쟁력을 만든다. 포항은 여전히 가능성이 높은 도시다. 가능성을 미래가치로 만들려면 온 도시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장규열 고문

2025-06-18

다가온 우수기, 실효성 있는 대비가 필요하다

‘힌남노’가 포항을 휩쓴 지 2여 년. 그 상처는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당시 오천읍 냉천의 범람으로 인명피해 10명, 재산피해 약 1조7000억, 기업피해 포스코 포함 92개 기업이 약 1조5000여억 원 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 끔찍했던 기억이 잊히기도 전에 또다시 올 우수기가 시작됐다. 포항은 태생적으로 침수에 취약한 도시다. 현재 시가지는 죽도·송도·대도·해도·상도 등 5개의 작은 모래섬 사이를 메워가며 형성됐다. 해수면과 고도차가 거의 없는 이 지형은 집중호우 시 배수가 지연되거나 역류가 발생하기 쉬운 조건이다. 여기에 국가하천인 형산강 하류와 동해에 접한 개방적 지형은 태풍과 집중호우가 겹치면 내륙과 해양 양쪽에서 물이 밀려드는 이중고를 초래하는 형태다. 포항시도 이에 대비는 해왔다. 현재 도심에 크고 작은 배수펌프장 14곳과 27개 간이펌프 시설을 운영 중이다. 환경부도 2022년 이후 포항을 하수도정비 중점관리지역으로 지정, 빗물펌프장 11개소 신ㆍ증설 총사업비 3557억 원을 투입하는 등 배수 능력 기준을 20~30년 빈도에서 50년 빈도로 상향(해당 사업은 2028년까지 단계적으로 마무리될 예정)시키고 있다. 수해 대비에 어마어마한 예산이 들어간다는 것은 포항의 침수 취약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자, 현장 유지 상태가 허술하면 언제든지 위험 요소가 발생해 인재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시는 올해도 우수기 대비 하수관로 33km를 정비하고, 빗물받이 2만여 개 준설 등 우수기를 앞두고 대응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수치는 그저 일의 총량일 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직 포항에는 위험 현장이 수두룩하다. 형산빗물배수펌프장 경우는 대표적 사례다. 이곳은 전동기 1100마력 2대 등 배수 능력이 401만7600t/일(분당2790t)에 불과, 집중 호우 시 고장 나 잠시 멈추기라도 하면 일대가 물바다가 될 수밖에 없다. 야산 절취가 많은 KTX신도시를 포함한 대형 개발 현장 13곳에 대한 철저한 점검도 시급하다. 이곳은 장마철마다 반복되는 토사 유출과 임시 가설물 붕괴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가 있다. 지진으로 손상된 노후 하수관로는 우려스럽고 남구 일원, 오천읍, 학산지구 등의 지역은 하수 역류가 여전히 예상되고 있다. 특히 학산지구 도시침수예방사업은 우수저류시설, 배수펌프, 관로 정비 등 침수 저감 효과가 기대되는 프로젝트지만, 연계된 학산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이 일정 지연을 겪고 있으면서 수량의 유입·유출 수리 체계의 불균형이 생기면 일대 피해가 불가피하다. GIS DB를 활용한 침수 이력 지도 구축, 실시간 강우·수위 감지, 배수시설 자동 제어 시스템 도입 등을 통해 기술 기반의 선제 대응 체계를 마련한 스마트 도시침수 시스템도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유기적으로 작동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 시점에서 포항시는 현 상황에만 매몰되지 말고 국외의 침수 대응도 연구했으면 한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도시 침수 저감을 위해 주택과 건물에 빗물을 일시적으로 저장하는 지연배수(遅延排水) 정책을 운용하고 있다. 이는 레인 가든, 빗물 저류 탱크, 침투 시설, 도시 저류 공간 등을 통해 빗물을 곧바로 하수도로 흘려보내지 않고 머물게 하여 하수처리 부담을 줄이는 분산형 빗물 관리 방식이다. 도쿄도, 오사카시, 요코하마시 등은 이를 법제화하거나 설치비 보조, 개발 허가 기준 등으로 실효성을 높이고 있다. 국내에서도 유사한 ‘저영향개발(LID)’ 개념이 점차 확산되고 있으니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면 한다. 최근 들어 나타나는 이상기후 변화에도 대비해야 할 것이다. 시는 지금까지 집중호우 시 순간적으로 쏟아지는 빗물을 몇 년 빈도로 설계하여 통수단면을 확보해 왔다. 대형 펌프장 증설 등도 이에 근거, 강제 배수 계획을 수립하고 있으나 이상기후로 인한 폭우에는 대응이 역부족이다. 포항시는 지금까지 다양한 제도와 시스템, 예산을 동원해 침수 대응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현재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수치와 실행계획, 실적 보고서보다 앞서야 할 것은 현장의 체감과 실효성일 것이다. 건축조례제정이나 제도개선을 통한 지연 배수 정책 등을 조속히 도입했으면 한다. 시민의 안전은 ‘대응’이 아니라 ‘예방’ 속에서 지켜져야 한다. 이 원칙이야말로 우수기를 맞은 지금, 가장 절실한 기준이다. 아직도 힌남노 태풍 피해에 대해선 인재냐, 자연재해냐를 놓고 책임 소재를 가리는 형사재판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민관이 잘 대응해서 이제는 그런 수준 이하의 논쟁이 사라졌으면 한다. /임창희기자 lch8601@kbmaeil.com

2025-06-18

나에게 보내는 편지

엽서 한 통이 도착했다. 엽서에 적힌 날짜는 작년 이맘때, 손 글씨가 어색하고 낯설었다. 주소도 이름도 나였지만 그 문장은 현재의 내가 아니라 과거의 내가 써 보낸 것이었다. 발신인도 수신인도 내 이름이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를 조우했다. 간절곶, 바다를 마주한 그 끝자락에서 나는 나에게 편지를 썼다. 한 해가 지나 도착한 그 편지는 뜻밖에도 현재에 깊이 잠들어 버린 나의 본질적 자아를 깨워주었다. 결국은 오늘도 과거가 될 것이기에 지금 이 순간을 진심으로 써 내려가고 싶어졌다. 그 진심이 먼 훗날 또 나를 다시 일으킬 것임을 나는 알아간다. 살다 보면 자신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사람들을 돌보며 사는 일이 내 삶의 한복판이 되어 있었다. 교회 교사로, 구역을 돌보는 일로, 가족의 울타리로, 일터의 누군가로 나는 늘 누군가의 뒤에서 등을 밀고 다리를 붙잡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에게 무관심했다. 아니 오히려 나의 슬픔이나 지친 일상이 사지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겨울, 간절곶을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는 수식어처럼 나에게도 막연한 무언가가 새롭게 떠오르길 바랐다. 파도 소리에 마음을 씻으며 ‘소망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다. 단단히 닫힌 붉은 우체통은 바람 앞에 묵묵히 서 있었고 나는 그 안에 나의 계획과 다짐, 아무도 몰라주더라도 나만이 체감하는 삶을 대하는 나의 존중, 약간의 불안함과 기대를 함께 밀어 넣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위로했다.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에서 ‘수오재기’를 썼다. ‘수오’는 ‘나를 지킨다’는 뜻이다.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작은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글을 남긴 정약용. 나라에서 쫓겨 학문도 단절되고 명예도 무너진 자리에서 그는 다시 ‘나’를 세웠다. 그 글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람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군자가 군자다울 수 있는 것도, 날마다 나를 살피는 데 있다.” 나를 세우는 편지는 나를 살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한 문장이 아닌, 세상에 보이기 위한 수사가 아닌, 그저 내 마음의 중심에 귀 기울이는 글. 그게 바로 1년 전 내가 나에게 쓴 편지였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편지는 내 손에서 계속 머물렀다. 읽고 또 읽으며 지금의 ‘나’가 본질적 ‘나’를 찾아가는 시간을 충분히 허비하게 했다. 읽는 내내 알 수 없는 감정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1년 전 나는 참 대견했구나.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았다고 적어 놓은 그 몇 줄이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만 같았다. ‘잘 살아내고 있구나’라고 나는 내게 말했다. 우체통이 보이는 바닷가에 앉아 나에게 편지를 쓰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맞았던 차가운 바람들이, 부서져 날아오던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들이, 편린처럼 다가와 지금의 나를 그곳에 앉혀 놓은 듯 했다. 나쁘지 않았다. 이따금은 나를 위해 편지를 써야겠다. 누구를 위한 위로도 중요하지만 나를 위한 위로는 더욱 절실하니까. 그리고 그 편지는 꼭 1년 후에 받아도 좋겠다. 시간을 두고 돌아온 문장은 내 삶을 한 발짝 떨어져 보게 하고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격려하게 한다. 편지는 삶이라는 바닷속에 흘려보낸 나날들을 거슬러 오르는 조용한 거울이 된다. 무심코 지나친 감정들, 스쳐버린 나의 얼굴을 다시 비추며 우리가 얼마나 자주 스스로를 잊고 살아가는지를 일깨운다. 시간이라는 발효를 거친 문장은 이제야 드러나는 마음의 결을 또렷이 보여주고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조용히 묻는다. 간절곶 바다 앞, 우체통을 다시 찾아갈 것이다. 붉은 철문을 여닫으며 조용히 나를 담아볼 것이다. 그리고 ‘수오재’처럼 나를 지키는 글을 한 줄씩 쓸 것이다. 편지는 언젠가 내게로 와서 내가 놓치고 지나온 마음들을 꺼내어 펼쳐 보인다. 그 속에 다짐보다 흔들림이 계획보다 숨결이 담겨 있어서 비로소 살아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편지는 과거의 내가 건넨 인사이며 미래의 나를 지켜내는 조용한 약속이 될 것이다. /작가

2025-06-17

세르비아, 상처만 남은 도시들 ①고도(古都) 스메데레보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동쪽을 향해 버스로 한 시간을 달리면 스메데레보가 나온다. 인구 7만 명이 채 되지 않은 도시지만, 베오그라드 지척에 있는 만큼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도나우강이 도심을 감싸며 흐르고, 낡은 석축성벽이 우뚝 솟아서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폭력의 역사를 서둘러 입을 연다. 로마제국 당시에는 로마 땅이었다가 오스만제국 시절에는 이슬람 땅이자 세르비아 수도 역할을 톡톡히 해낸 침탈과 아픔이 담긴 저력(?)의 도시다. 그리고 오스만과 헝가리 국경을 긋는 지리적 전략적 요충지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독일군 긴 장화발이 장악하면서 하켄크로이츠 폭력을 온 몸으로 맞아야 했다. 인간의 능력은 창조와 건설에 발휘되지만, 모방과 파괴에 더욱 뛰어난 재능을 자랑한다. 이 도시를 찾는 사람은 주로 낡아 초라하기까지 한 스메데레보의 성을 보기 위해서다. 도나우강과 사바강 합류 지점에 서 있는 베오그라드 칼레메그단처럼 도나우강과 스메데레보 도심을 관통하는 예자바강 사이 두물머리, 혹은 합수머리에 버티고 있어 사람들은 ‘물 위의 성’이라고 부른다.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기차역을 지나야 했다. 성 입구 허물어져가는 성벽과 마치 띠처럼 어울리는, 언제부턴가 멈춘 녹슨 열차의 처연한 모습은 시공을 뛰어넘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스메데레보성은 1430년 무렵 세르비아공국 군주 브란코비치 명에 의해 세워졌다. 물론 장기간 공성에 대비한 수성의 역할이 성 내부 곳곳에서 어렴풋이 나타난다. 성벽 두께 2m, 한눈에 보아도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본뜬 거대한 돌들로 이루어진 비잔티움 스타일이다. 25m 높이 망루(성 전체에 25개의 망루가 있었다고 함), 우물, 화장실, 마구간, 계급과 신분의 차에 따라 거처의 높낮이 차이도 애써 찾아보았다. 한 곳에서 알게 모르게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긴 하다만, 지원금이 딸려서인지 급할 것이 없는 모습이다. 세월에 허물어지고,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원형은 상상으로도 거의 불가능하니 입체 그림을 그려내는 소프트웨어 성능도 딸리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에서 무척 드물게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라니 할 말을 잊는다. 관광객 낙서에 온몸을 그대로 맡기는 구간도 있다. 우리나라 청잣빛 하늘을 닮은, 도도하게 흐르는 물길을 바라보며 마음을 풀어 놓고 그야말로 멍 때리기에 좋은 곳이다. 그러나 늘 시간을 급조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은 형태를 잃어버린 채 서 있는 성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에 바빴다. 돌계단과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나무계단을 오르내리며 전쟁의 화급함을 상상했다. 아비규환 속 절규도 그렸다. 그러다 좁은 아치형 통로를 몇 개 돌아서자 탁 트인 망루에 이방인이 올라서 있었다. 건너편 도나우강을 바라보는 망루가 외성(外城)의 존재를 알렸다. 독일 남부 산악지방에서 발원해 흑해로 흘러드는 물길 그 아랫부분에 속하는 스메데레보 도나우강은 그래서 더 넓고 잔잔하며, 한적하기까지 하다. 다분히 세월에 삭아 내린 성채와 고색창연하게 어울리며 장엄하기까지 했다. 허물어지는 성벽 아래를 걷는 젊은 아낙과 조막만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해맑은 아이 얼굴을 바라보며 동방의 수도자 글이 생각났다. “네가 무한한 사랑과 하나가 되는 순간에 겸손해지기를 바란다.” 신의 은총을 입은 순간에 잊지 말아야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이방인에게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역시 낯선 곳에서 먹거리다. 스메데레보성, 길차길옆 작은 식당, 낡은 비닐조각으로 안과 밖의 경계를 구분하고 있었지만, 그곳에 머리를 숙인 채 우연히 들어서서 맛본, 메뉴판을 들고서도 도무지 이름을 읽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빵과 빵 사이에 두께 2cm 됨직한 다진 쇠고기를 넣고 토마토를 비롯해 양파 등 채소가 가득 들었다. 우리나라 햄버그와는 맛은 물론, 크기에 있어서도 비교가 안 된다. 대․중․소가 있어 가장 작은 것을 주문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어마어마한 크기라서 실수로 잘못 나온 줄 알았다. 인근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음식이란다. 포장해가는 손님이 대부분이다. 넌지시 분주하기 짝이 없는 주방을 훔쳐보다가 깜짝 놀랐다. 훈제불판에서 익어가는 고기 중 가장 큰 것이 우리나라 개다리소반 너비만 했다. 콜라와 곁들여 먹는 맛 또한 일품이다. 사이사이 구멍이 숭숭 뚫린 부드럽고 촉촉한 빵과 잘 구워진 다진 고기가 잘 어울렸다. 때마침 참새 두 마리가 나눠먹자며 교대로 식탁에 앉는다. 저 쪼끄만 참새조차도 제 눈에는 낯선 이방인 생김이 만만한 게다. 공원 의자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캔 음료를 마시는 노인들의 주름진 얼굴에 인생의 황혼에서 맛보는 여유를 보았다. 따스한 햇살 아래 꾸벅꾸벅 조는 할아버지 옆에 앉아 말을 거는 할머니 모습은 이보다 행복한 표정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저들에 의해 폭력이 생산되고, 폭력에 오롯이 노출된 과거를 뭐라 설명해야 할까. /스토리텔링 작가

2025-06-17

신뢰는 경영의 전부다

신뢰와 경영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신뢰는 조직의 성과, 혁신, 협업, 지속 가능성 등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친다. 신뢰는 경영의 모든 기반이 되며, 조직은 상호 믿음과 배려, 존중하는 문화가 되면 신뢰 경영이 된다. 신뢰가 높은 조직은 불필요한 확인 절차와 감시가 줄어들어 의사결정과 실행이 빨라진다. 서로 믿고 협력하므로 부서 간, 개인 간 장벽이 낮아지고, 협력 촉진으로 시너지가 창출된다. 리더가 신뢰를 받으면 구성원은 자발적으로 따르고 몰입한다. 신뢰는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조직 구성원이 리더와 조직의 의도를 신뢰하고, 변화에 적응하는 수용성이 증가한다. 또한 신뢰는 직원의 창의성, 도전 정신, 책임감 등을 자극하는 성과와 혁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신뢰 경영의 핵심 요소는 정직과 일관성이다.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고, 원칙을 지키며 일관된 기준을 유지하는 일이다. 정보의 공유, 결정 과정의 공개, 열린 피드백의 문화 조성 등 투명한 소통이 신뢰와 건강한 조직을 만들어 간다. 인사, 보상, 평가가 객관적이고 신뢰받을 수 있는 기준을 기반으로 공정한 시스템 운영이 필요하다. 직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양성을 인정하며 수용하는 경청과 존중하는 문화가 중요하다. 실수나 제안이 비난 받지 않는 환경 조성과 창의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전 확보가 필요하다. 리더는 솔선수범하며 책임지고, 실패 시 변명보다 책임지는 태도를 보임으로서 신뢰받는 리더십이 중요하다. 고객, 직원, 협력사와 단기성과보다 장기적 관계 지향형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조직에 신뢰가 무너지면, 구성원들이 진심을 숨기고, 방어적이며,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 소통이 단절된다. 책임 소재를 회피하고 실수 은폐 및 책임 전가가 빈번해진다. 신뢰가 없는 조직은 만족도가 낮아 우수 인재가 떠나고, 구성원들이 최소한의 노력만 하여 적극적인 참여가 줄어 저성과가 고착된다. 조직 내 이익을 위한 눈치 보기와 줄서기로 내부 갈등 및 정치화 되는 현상을 초래한다. 필자가, 김포에 있는 대형 송유관 제조 중소기업을 컨설팅 할 때 일이다. 아버지 창업주와 아들 생산 이사와 불신의 관계가 깊어 조직과 일에 불균형이 일어난다. 아들은 주차장에 아버지 차가 보이면 돌아가 버리는 소통의 부재였다. 하부 조직 라인과 임원 층에서도 눈치 보는 문화가 팽배하고, 모든 일의 정보와 의사 결정 과정이 순탄하지 못하여 시너지 창출은 요원한 것이다. 종합 진단을 통해 회사의 방향을 설정하고, 경영 목표, 전략, 실행계획, 운영 제도, 조직 역할 등 혁신활동을 체계화 하고, 생산 전무를 중심으로 의사결정 라인을 정립하며 불협화음을 줄여 나갔다. 대형 배관 제조업체 특성에 맞게 용접 등 주요 용역 업체 대표를 포함하는 협의체를 운영하며, 조직의 불협화음을 줄이고, 의사 결정의 효율성을 높여 나갔다. 부자(父子) 간의 인간적 신뢰는 한계가 있지만 회사 일의 추진과 의사 결정 상의 문제는 해소되었다. 조직 운영에 기본은 신뢰이고, 신뢰가 없는 경영은 한 순간에 무너진다. 좋은 기업을 향한 신뢰는 경영의 전부인 것이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06-17

소월의 ‘진달래꽃’ 시집 발간 100주년

시원한 그늘을 즐겨 찾게 되는 계절이다. 어디선가 풀피리 소리가 정겹게 들리고, 먼 곳의 뻐꾸기 울음소리는 드문드문 한가함의 여운을 더하는 것 같다. 바람결에 흘러가는 구름은 유유자적 시를 쓰는가 하면, 나날이 벼려지는 햇살에 무성해지는 풀과 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초록의 시편을 엮어내는 것 같다. 유월의 자연현상 그대로가 시의 여울처럼 흐르고 사람들은 자연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시의 행간을 거니는 것처럼 보인다. 초목에서 뿜어지는 향긋한 냄새며 새들의 지저귐과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등을 가만히 듣거나 보고 있노라면 자연과 바람이 전하는 시의 운율과 리듬에 아늑히 젖어드는 것 같다. 마치 들판이나 산 속에서 잠을 자다 보면 자연의 아늑함과 편안함에서 느껴지는 기운으로 ‘잠의 맛’이 달라지듯이, 자연에서 머무는 그 자체가 힐링이고 위안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자연은 시의 보고(寶庫)이며 예술의 총본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시는 ‘영혼을 치유해주는 약’처럼 현실의 삶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따스한 위로와 치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1925년 매문사(賣文社)에서 발행된 지 올해 100주년을 맞게 됐다. 김소월 시인이 생전에 발간한 유일한 시집으로 대표적인 ‘진달래꽃’을 비롯해 ‘먼 후일’, ‘산유화’, ‘초혼’, ‘왕십리’, ‘개여울’,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등 많은 수작 127편의 작품이 수록돼 있다. 이 땅에 최초의 자유시가 나온 지 약 106년쯤 되고 보면 외국에 비해서 그다지 역사가 깊은 편은 아니지만, 당시 일제강점기 상황을 고려해볼 때 초창기부터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며 창작의 열기가 퍼져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김소월 시인은 우리의 한글을 가장 아름답고 맛깔스럽게 표현해서 암흑의 시대를 그리움의 언어로 위로해 준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진달래꽃’은 한스러운 민족 정서를 민요 가락과 민중의 일상어로 표현해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한국 현대시를 꽃 피운 기적과도 같은 시집이며, 한국 근대 시문학사에 중요한 위치에 있는 점이 인정돼 2011년 ‘진달래꽃’ 2종 4권이 등록문화재로 등록되기도 했다. 일반 대중들에게 다소 생소한 100년 전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 초판 복각본(復刻本)이 서울의 ‘푸른사상사’에서 출간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한글 맞춤법, 활자, 세로쓰기 등이 현재와는 판이하지만, 손 안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의 초판 그대로의 완벽한 복간으로 최고의 선본(善本)임을 자임하고 있다. 그에 발맞춰 (사)일월문화원과 ‘시뜨락’에서는 복각본 편저자를 다음 주 포항으로 초청해 김소월 주제의 특별강연과 김소월 시 초판 원본으로 낭송하기, 시극 공연, 독자와의 대화 등의 시낭송 북콘서트를 풍성하게 준비하고 있어서 벌써부터 주목된다. 나라를 빼앗긴 깊고 무거운 어둠의 시대를 가볍고 찬란한 빛으로 바꿔준 김소월의 아름답고 맛있는 시편들로, 고단한 일상의 위로와 메마른 감성을 적셔주는 치유의 공감을 더해 ‘진달래꽃’ 발간 100주년 의의가 되새겨지길 기대해 본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6-17

과잉 관광

최근 오버투어리즘(Over Tourism)으로 불리는 과잉 관광이 유럽 남부지역 등지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15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는 약 1000여 명의 시민들이 도심 고급 상점가에서 바르셀로나를 찾은 관광객에게 물총을 쏘고 “관광객은 집으로 가라” 등의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바르셀로나는 인구 160만명의 도시이나 지난해 경우 2600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해 현지 주민들 일상생활에 큰 불편을 주고 있다는 것이 시위 이유다. 관광객의 과잉 유입으로 물가가 오르고 교통 혼잡이나 주차난 등 현지 주민들이 겪는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것이다. 스페인의 다른 관광지 그라나다와 이탈리아 나폴리, 베네치아 등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위가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도시마다 많은 관광객의 방문으로 도시 인프라를 늘려야 하는 부담이 생기고 문화유산 훼손이나 상업화 경향 등 사회 문제가 곧잘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7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항구에 입항하는 크루즈선을 현재 190척에서 내년까지 100척으로 줄이기로 했다. 무분별한 관광객 유입에 따른 해양 오염을 막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싶어 하는 주민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라 한다. 관광산업 진작을 위해 관광객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는 우리의 처지에서 보면 배부른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한편으로 과잉으로 유입된 관광객이 유발하는 각종 공해 등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면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제주도와 서울 북촌한옥마을, 부산 감천문화마을 등 일부 지역에서 과잉 관광의 부작용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그러나 관광을 국가 주요 산업으로 삼으려는 우리나라에선 아직은 과잉 관광은 낯선 풍경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6-17

장·차관 국민추천제, 성과낼 수 있을까

이재명 정부 장·차관에 대한 하마평이 무성한 가운데 대통령실은 그저께(16일) 고위급 공직 후보자에 대한 국민추천제(‘진짜 일꾼찾기 프로젝트’) 시행 현황과 관련해 “15일까지 7만4000여 건이 접수됐다”고 밝혔다. 프로젝트 추진 한 주 만이다. 추천자리는 직위별(정무직, 개방형 직위, 공공기관장 및 임원, 정부위원회 위원 등), 전문분야(31개)별로 나눠져 있으며, 본인 추천도 가능하도록 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한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기존의 밀실인사나 낙하산인사 등 각종 인사 논란을 피하고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인사제도라는 점에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칫 인기투표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일각에서는 어차피 누군가를 앉히는 데 명분을 구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프로젝트 시행 첫날에는 법무부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 검찰총장 추천이 가장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일부 정치인은 ‘셀프 추천’을 해 눈총을 받았다. SNS에 게시된 흥미있는 정부 부처별 추천케이스를 보면, 문화체육부 장관 후보에 아이유, 봉준호, 유재석 등 유명 인사가 추천됐고, 방송통신위원장에 진보 진영 지지를 받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추천됐다. ‘환자 중심 의료개혁’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새정부 보건복지부 장관에 대한 추천도 많았다. 부산시의사회는 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을 장관 후보로 추천하면서 “의료 최전선의 외상외과학 교수로서 뛰어난 전문성과 헌신을 보였고, 군인으로서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남다른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일해왔다”는 사유를 밝혔다. 검찰총장에는 ‘검찰개혁’을 주장해온 임은정 부장검사 추천도 올라왔다. 임 부장검사는 자신의 SNS에 “법무부와 검찰을 바로 세워달라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그 추천에 담긴 기대와 열망이 무겁고 뭉클하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일부 누리꾼은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내걸었던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을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부정선거를 주장해온 황교안 전 국무총리를 선거관리위원장에 추천했다는 게시글을 올리기도 했다. 장·차관 국민추천 프로젝트는 노무현·문재인 정부 때도 시도를 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 당시에도 정부 고위직 인사를 희화화하는 창구가 되거나, 공직 인사가 업무 역량이 아닌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었다. 대통령실 강유정 대변인은 SNS에 ‘국민추천제가 인기투표냐’는 글이 다수 올라오는 것에 대해 “인기투표가 아니다. 추천 횟수는 참고사항”이라고 반박했다. 실제 국민 추천제를 통해 접수된 국민 추천 인사 명단은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을 거쳐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의 인사 검증과 공개 검증 절차를 밟는다. ‘인사는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다. 대통령실이 갖고 있는 인사풀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전국 곳곳에 흩어진 인재를 국민추천으로 발탁하는 제도는 긍정적인 발상이다. 이번에 추천된 다양한 인사를 어떻게 적재적소에 활용하느냐에 따라 새 정부의 역량이 달라질 수 있다. /심충택논설위원

2025-06-17

신공항 등 새정부 국정과제 반영에 힘 모아야

대구시가 김정기 대구시장 권한대행 주재로 대통령 공약 국정과제화 추진 점검회의를 열고 TK신공항 건설을 포함한 대구 핵심 사업의 국정과제화 추진에 본격 나섰다. 이날 회의는 새 정부 출범으로 자칫 소홀해질 수 있는 지역현안을 미리 점검하고 새 정부 기조에 맞추는 대응 논리 개발과 전략을 모색하는 자리다. 대구시는 신공항 건설은 군공항 이전을 추진 중인 광주와 공동 대응해 국정과제 반영을 추진하고, 취수원 이전은 영남권 전체의 물 문제로 대응해 국정과제에 채택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밖에도 군부대 이전과 미래 5대 신산업 육성 등 지역현안은 중앙부처를 찾아 국정과제 반영의 필요성을 적극 알리기로 했다. 같은 날 새 정부는 이재명 정부 5년의 청사진을 그릴 국정기획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새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 선정과 로드맵이 기획위원회에서 만들어진다. 국정기획위원회는 17일부터 부처별 업무보고를 받는데, 벌써부터 각 지자체가 지역현안의 국정과제 반영을 위해 총력전을 펼친다는 소문이다. 대구시 현안은 대구시 힘만으로 추진하기 어렵고 정부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새 정부의 국정과제에 포함돼야 속도감 있고 원활히 추진될 수 있다. 특히 지역 최대 숙원인 신공항은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사업 추진 지연요소 조속 해결”이라는 다소 애매한 약속만 했을 뿐 구체적 답변이 없어 새 정부 국정과제에는 반드시 포함시켜야 연속성 있게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 때마침 대구지역 국회의원들이 주축이 돼 ‘TK신공항 사업의 효과적 추진방안 마련과 국정과제 채택 등을 위한 정책 세미나’가 18일 국회에서 개최된다. 대구 지역구 의원 12명이 공동 개최하는 세미나에서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다만 야당이 된 처지여서 행사의 무게감이 떨어질까봐 우려되는 바도 없지 않다. TK신공항은 대구경북의 미래 100년을 내다본 역사적 사업이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사업이 추진돼야 지역의 미래가 있다. 어려울수록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말이 지금 필요하다. 대구시와 지역 정치권이 합심해 돌파구를 찾길 바란다.

2025-06-17

송언석 원내대표, ‘개혁’으로 당의 활로 찾아라

대구·경북(TK) 출신 송언석 의원(김천)은 지난 16일 국민의힘 새 원내대표에 선출된 직후 “한순간도 웃을 수 없다. 어깨가 너무 무겁다”고 말했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는 당장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와 쟁점 법안 처리를 두고 정면 승부를 가려야 한다. 김 원내대표는 취임 일성으로 “이재명 정부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불침의 항공모함이 되겠다”고 했다. 각종 현안(인사청문회, 추가경정예산 협상, 법사위원장 조정 문제 등)에 대해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는 ‘불통(不通) 선언’으로도 해석된다.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 거부권에 가로막혔던 상법 개정안, ‘방송3법’, ‘노란봉투법’ 입법 과정에서도 송 원내대표의 고도의 협상력이 요구되고 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반된 민심을 회복하는 것도 송 원내대표의 임무다. 민심회복을 위한 최우선 해법은 ‘당의 쇄신’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가 당선되자마자 당 혁신위 구성을 제안한 것은 긍정적이다. 송 원내대표는 우선 김용태 비대위원장이 제시한 ‘5대 개혁과제(윤 대통령 탄핵 반대 당론 무효화, 대선 후보 교체 진상규명, 당심·민심 반영 절차 구축 등)’를 수용할 필요가 있다. 당 주류 측에서 이 개혁안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송 원내대표가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해서라도 5대 개혁과제는 추진돼야 한다. 이번에 국민의힘이 변화와 쇄신으로 가느냐, 구태와 기득권 세력의 연장으로 가느냐에 따라 당의 명운이 갈라질 수 있다. 국민의힘이 새로 태어나려면 ‘친윤 정치’ 청산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송 원내대표가 혁신 과제를 적당히 봉합하려 하면 당은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국민의힘은 지난주 갤럽 조사에서 정당 지지율이 21%까지 추락했다. 송 원내대표는 내년 6월 지방선거 전에 이반된 민심을 복원하는데 정치생명을 걸어야 한다. 국민의힘 소속 107명의 의원 모두가 송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형성해 중수청(중도·수도권·청년) 중심의 외연확장을 하는데 총력을 쏟아야 당의 활로를 찾을 수 있다.

2025-06-17

조상 묘 깎고 도로를 내버린 영덕국유림관리소

영덕군 병곡면 산골 마을 한쪽에 수십 년을 자리를 지켜온 조상의 묘가 어느 날 사라졌다. 국유림을 가로질러 낸 임도 공사 때문이었다. 공사를 진행한 기관은 영덕국유림관리소와 영덕군산림조합이다. 이들은 “묘지의 존재를 몰랐다”며 유족에게는 150만 원의 보상금을 제안했다. 하지만 묘 하나를 없애는 일은 단순히 ‘땅’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 가문이 세대에 걸쳐 지켜온 기억, 정체성, 그리고 뿌리를 파괴하는 행위다. 수십 년간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던 묘소를 국가기관이 몰랐다면 그것은 무능이고, 알고도 무시했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어느 쪽이든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해당 관청은 “절차대로 진행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국민이 묻는 것은 법적 정당성이 아니다. 그 절차가 과연 사람을 위한 것이었는가, 공동체를 존중했는가이다.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효율이 아니라, 사람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 사건은 단지 한 가족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늘 당장의 피해자는 해당 유족일지 몰라도 내일은 우리 누구라도 당할 수 있는 일이다. 한 번 무너진 공권력의 윤리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그 피해는 특정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를 병들게 만든다. 국가는 도로를 낼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이 사람의 기억과 역사를 짓밟아서는 안 된다. 조상의 묘를 파헤치고도 “몰랐다”는 말 한마디로 끝낼 수 있다면 그런 사회는 결국 공동체도, 역사도 지켜내지 못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보상이 아니다. 책임 있는 공식 사과, 관련자 문책,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 이 사안은 단순한 행정 실수가 아닌, 구조적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영덕국유림관리소 입장에선 사라진 것이 묘소가 있던 땅 한 평이지 몰라도 그곳에는 유족들의 각가지 사연과 추억과 기억, 그리고 유구한 시간이 얽혀 있다. 우리들은 수천여년을 그런 인연을 통해 기대며 살아왔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뿌리이기도 하다. 사소하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아껴주는 그런 국가기관을 옆에 두고 싶다. /박윤식기자 newsyd@kbmaeil.com ▶ [정정보도문] 영덕 국유림 임도 개설 중 묘지 훼손 관련

2025-06-17

불길 속 숨겨진 방패, 방화문 닫기로 안전한 일상을 지키자

포항의 밤하늘 아래,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 그러나 그 빛나는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위협이 우리의 일상을 노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화재’라는 이름의 재앙이다. 이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한 간단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방화문 닫기’이다. 방화문은 단순한 문이 아니다. 그것은 불길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든든한 방패이며, 연기와 유독가스로부터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생명의 울타리와 같다. 화재 발생 시 닫힌 방화문은 불길이 번지는 속도를 현저히 늦추고, 피난 시간을 확보해 준다. 이는 곧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방화문은 단순히 물리적인 장벽 이상의 역할을 한다. 화재 발생 시, 고온의 열과 연기가 빠르게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설계된 방화문은 특정 시간 동안 구조적 안정성을 유지하며 불길을 차단한다. 일반적으로 30분에서 1시간 이상 견딜 수 있도록 내화 성능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건물 내 사람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한다. 특히, 방화문에는 단열재가 내장되어 있어 열전도를 막아주고, 문 주변의 틈새를 최소화하기 위한 실링 기술이 적용돼 있다. 이러한 기술적 특성 덕분에 방화문은 화재 확산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며, 인접 공간으로의 연기 유입을 방지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사실은 방화문의 역할을 ‘비상 탈출구’라고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오히려 열어두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혹은 방화문 닫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문을 열어둔 채로 방치하거나 평상시 문을 열어놓고 지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는 화재 발생 시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화재 발생 시 방화문이 조금이라도 열려 있거나 손상되어 있다면, 그 효과는 급격히 떨어진다. 우리는 ‘방화문 닫기는 안전의 시작’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화재 예방의 첫걸음이며, 우리가 매일 실천해야 할 작은 습관이다. 또한, 방화문이 잘 설치돼 있더라도 방화문의 성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인 점검이 필수다. 도어클로저는 시간이 지나면서 마모되거나 오작동할 가능성이 있어, 주기적으로 문이 잘 닫히는지, 완전히 밀폐되는지 확인하고 정상 작동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문틀이나 바닥에 장애물이 없는지 살펴보는 작은 관심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방화문에 부착된 각종 표지와 비상등 역시 화재 발생 시 대피에 혼선을 주진 않는지 섬세한 확인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은 실천이 모일 때 큰 화재를 막는 힘이 된다. 방화문 닫기는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안전을 지키는 첫걸음이며, 가족과 이웃의 생명을 보호하는 소중한 습관이다. 화재는 예고 없이 찾아오지만, 우리가 미리 준비하고 예방한다면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오늘부터라도 방화문 닫기를 실천해 안전한 일상을 만들어가자. ‘방화문 닫기’ 사소하지만, 중요한 이 행동이 우리 모두에게 안전한 내일을 선사할 것이다. 방화문을 닫는 작은 행동의 실천 하나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중한 일상을 지켜나가길 바란다. 안전한 내일을 위해 지금 이 순간부터 바로 방화문 닫기를 실천하자.

2025-06-16

6월, 대전리에서

6월의 시원한 바닷바람에 태극기가 대문마다 펄럭인다. 송라면 대전1리다. 업무차 왔다. 포항에 오래 살면서도 여태 이 마을을 찾지 못했다. 일이 생겨서야 왔다고 생각하니 지역 역사에 무심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3‧1운동 때, 이곳 대전리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은 전에 문학 모임에서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흘러가는 말로 들었던 나는 별 관심 두지 않았었다. 헌법 전문에 들어갈 정도로 우리 역사에 큰 이정표를 남긴, 민족의 독립운동을 먼 과거의 일로 가벼이 여기고 만 것이다. 가만히 “3‧1운동과 6월···.”이라고 되뇌어본다. 1919년 3월 1일. 경술국치 후 일제강점기 10년 차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나라를 빼앗긴 국민이 분연히 일어나 ‘대한독립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곧, 외세 지배에 대한 한민족 공동체의 자생적 항거였다. 한편, ‘6월’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민족 최대의 비극 6‧25다. 하늘은 왜 민족상잔의 6월에 내가 대전리를 찾게 하였을까. 포항시 자료에 따르면 대전리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1~12일 포항면 여천장터(현 육거리 일대) 만세운동에 이어, 3월 22일 청하장터, 3월 27일 대전리 두곡 숲으로 이어졌다. 또, 4월 1일 연일, 동해, 장기, 오천, 대송, 4월 2일 기계, 죽장, 신광, 청하, 송라, 흥해로 확산이 되었다. 참가 연인원 2,900명, 사망자 40명, 부상자 380명, 피검자 320명이나 되는 큰 만세운동이었다. 대전리에는 ‘대전 3‧1의거 기념비’와 ‘포항 만세촌 대전 3‧1의거 기념관’과 대동수(大東數)라 불리는 두곡숲이 있다. 기념관에는 ‘대전 14인 3‧1 의사’들의 넋이 숨 쉬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 시골 마을에서 14명의 3‧1 의사가 나온 것은 투철한 독립정신, ‘대전리 3‧1정신’의 발로였을 터다. 3‧1운동은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1945년 8‧15해방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외세에 힘입은 불완전한 해방이었기에 나라가 남북으로 갈리는 비운도 맞았다. 그 와중에 남한은 1948년 7월 12일 헌법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 북한은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로 되어, 민족 분단 역사를 만들고 말았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25 한국 전쟁의 달이기 때문일 테다. 나무위키의 6‧25전쟁 자료에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인명피해가 전사 17만8569명, 부상 55만5022명, 실종, 포로 4만1769명이다. 또, 북한과 중공군 인명피해 112만5000명, 남한 민간인 99만978명, 북한 민간인 150만 명, 기타 피난민 240만여 명, 미망인 20만여 명, 고아 10만여 명에 이른다. 너무 크나큰 비극이다. 집집에 태극기를 달고 이어온 ‘대전리 3‧1 정신’은, ‘6‧25의 달 6월’에다 무엇을 말해줄까. 이렇게 말하리라. “6월이여, 그대는 외세 소련 공산주의 체제를 끌어들여 민족 최대의 동족상잔 6‧25 비극을 만든 달이지 않나. 그러니, 그대 유월이여! 이제부터라도 대전리 3‧1정신을 본받아 핵무기도, 내부 체제전쟁도 바로 없애고 민족 공존공영의 길로 나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네. 꼭, 그리하기를 비네!···.” /강길수 수필가

2025-06-16

제사에 관한 에피소드

오래전 일이다. 친동생처럼 지냈던 경남에 살고 있는 후배 부부가 갑자기 찾아왔다. 용건은 간단했다. 부부의 고민 사항이 하나 있는데, 나에게 그 답을 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부부 사이의 고민 사항이라는 게 뻔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동생 부부가 나에게 던진 질문은 의외였다. “제사를 지내야 하는가요?” 듣고 나서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이혼 상담보다 더 심각한 부부의 분위기가 나의 웃음을 안으로 들이키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표정에서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지난 세월 제사로 얼룩진 동생 가족의 일상이 그려졌다. 나의 답변에 따라 한쪽은 완전하게 패배하는 그런 순간이었다. 나는 부부에게 두 가지 요구조건을 걸었다. 위대한(?) 답변에 대한 나름의 대가를 요구한 셈이었다. 제사에 대하여 일찍이 결론을 내고 있었던 나의 입장도 있었지만, 나의 답변으로 인하여 한쪽이 입게 될 상처가 눈앞에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첫째, 나의 답변대로 실천할 것, 둘째, 이 결정으로 인하여 상대방에 대하여 어떠한 원망도 하지 않을 것. 부부는 맹세하였다. 답변대로 실천하면서 살아가겠노라고. 절대 상대를 원망하지 않겠노라고. “지금 이 순간부터 제사는 지내지 마라” 그때, 동생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제수씨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스쳤던 걸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평소 완고한 성격의 동생은 자신의 완전한 패배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답을 구한 상대가 왜 나였는지, 무슨 연유로 제사의 생사를 결정하려고 하였는지의 사연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제사에 대한 위대한 대화가 있다. 최시형과 손병희 사이에서 주고받은 대화이다. 의암이 물었다. “스승님 제사란 무엇인가요?” 해월이 답하였다. “위패를 너 자신을 행하게 하는 것” 즉 제사는 자신을 위해 지내는 것이라는 통찰이 담긴 대화이다. 나에게 있어 제사라는 단어는 옛말이다. 나는 매일 제사를 지내고 있으므로 따로 제사를 지낼 필요도 없다. 제사는, ‘조상이 후손에게 바라는 그 무엇을 실천하는 행위 자체’라고 생각한다. 위패를 자신을 향하게 한다는 것은,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 되어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하에 더 잘 살아가기를 스스로 다짐하라는 뜻이 아닐까. 제사를 고집하는 사람의 내면세계에는 욕망과 집착 및 권위라는 달갑지 않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할 가능성이 많다. 제사는 오래된 잘못된 문화라 생각한다, 늦었지만 과감히 제사상을 치우자. 진정한 제사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천 번의 제사보다, 한 번의 가족 나들이가 나으리라. 동생 부부가 하동으로 내려간 이후 지금까지 계란이 끊이질 않는다. 답변에 대한 실천의 징표이기도 하지만, 실천 이상으로 얻은 것이 있다는 뜻이리라. 인문학당 도반 한 분이 나에게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질문한 적이 있다. 깨달음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굳이 깨닫고 싶다면 그냥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나의 답이었다. 단지 하지 않음으로써, 삶의 많은 부분에서 도에 이를 수 있다. 술 담배 끊으면 되고, 싸우지 않으면 되고, 화내지 않으면 된다. 제사! 일러 무삼하리요. /공봉학 변호사

2025-06-16

끔찍한 스토킹 살인범죄, 왜 계속 반복되나

우리 사회에서 스토킹 범죄 살인사건이 잇따라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14일에는 대구에서 스토킹하던 여성을 살해한 40대 용의자가 사건 발생 나흘 만에 검거됐다. SNS에서는 “스토킹 범죄를 일주일에 한 번꼴로 보는 것 같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대구·경북만 하더라도 지난해 11월에는 구미에서 스토킹 가해자가 피해자 어머니 앞에서 전 애인을 처참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고, 2022년 7월에는 안동시청 여성 공무원이 스토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대구 성서경찰서가 지난 10일 새벽 달서구 한 아파트에서 검거한 스토커 A씨는 범행 전 도주 차량을 미리 준비하는 등 사전에 치밀하게 범죄계획을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안타까운 것은 범행을 막을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는 점이다. 스토커 A씨는 지난 4월 피해자의 집을 찾아가 흉기로 협박하는 범죄를 저질러 경찰에 체포됐지만,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해 풀려나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받다가 범행을 저질렀다. 지난 2022년 2월에 발생한 서울 구로구 스토킹 사건 때도 경찰이 가해자의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이 이를 반려하는 바람에 살인 범행을 막지 못했다. 이번에도 이런 일이 반복된 것이다. 작년 1월부터는 스토킹 범죄에 한해 경찰 수사 단계에서도 피의자에게 전자발찌를 채울 수 있게 됐지만, 경찰은 A씨가 초범이라는 이유로 법원에 전자발찌 부착 신청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스토커의 범행은 갈수록 치밀해지는데 공권력의 대응이 이처럼 허술하다 보니 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최근 들어 스토킹 범죄가 급증하는 추세다. 경찰청에 따르면 스토킹 신고 건수는 2020년 4513건에서 지난해 3만1947건으로 7배 넘게 늘었다. 피해자 대부분이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당하다가 신변 위협을 느끼고 신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스토킹 범죄는 신고가 들어올 때부터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끔찍한 2차 범행을 막을 수 있다.

2025-06-16

시니어 의사 채용, 의료공백 개선 첫발 되길

보건복지부는 올해부터 임상 경험이 많고 사명감 있는 시니어 의사의 전문성을 지역 의료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시니어 의사 채용 활성화 정책을 펴고 있다. 60세 이상 의사로서 종합병원급 이상 수련병원에서 10년 이상 재직했거나 20년 이상 임상 경력을 가진 전문의를 대상으로 지원금을 제공하는 제도다. 경북도는 보건복지부의 시니어 의사 채용 지원금 지원사업에 최근 선정됐다고 밝혔다. 도는 이에 따라 포항의료원, 안동의료원 등 도내 공공의료기관 7곳에 근무할 시니어 의사 16명을 뽑는다고 발표했다. 시니어 의사 채용은 풍부한 경험과 역량을 갖춘 전문성 있는 의사를 고용한다는 면에서 긍정적 효과가 기대된다. 특히 의정 갈등으로 빚어진 의료공백을 일부나마 메울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기대감도 나오고 있다. 경북도 관계자도 시니어 의사 채용 지원사업은 “지역 의료인력 부족 문제 해결의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며 “이를 시작으로 다양한 의료인력 지원정책을 개발해 미흡한 지역의료시스템 개선에 도움이 되게 하겠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도 지속적인 의사 인력난을 겪고 있는 지역 공공의료기관 뿐 아니라 공중보건 의사 감소로 의사 인력 확보가 어려워진 보건소까지도 이 제도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의대생 중 여성이 증가하고 군복무를 하는 경우에도 일반병 입대가 많아지는 경향이 나타나 공보의는 매년 감소 추세에 있다. 공보의에 의존하던 지역의료 시스템을 보완할 방법으로 시니어 의사 채용은 바람직하다. 경북도의 시니어 의사 채용을 시작으로 시니어 의사들의 채용이 보다 활성화됐으면 하는 기대가 있다. 시니어라고 하지만 건강수명이 늘어난 요즘 시대에 60~70세 정도면 정상적 업무를 수행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특히 오랜 경험을 가진 의사가 근무함으로써 농촌지역의 의료공백 해소만이 아니라 의료 질 향상에 대한 기대감도 높여준다. 시니어 의사 채용이 의료시스템 개선의 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2025-06-16

서두르지 않는다

내가 관여하는 한 학회에 아주 오랫동안 활동을 영상 기록으로 담아오는 선생님이 계시다. 봄이 무르익은 어느 날, 인사동 하고도 선천(宣川)이라, 평안북도 지명을 딴 곳에서 어려운 학회를 지원해준 원로 어른들 모시고 점심식사를 했다. 그날도 역시 이 선생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을 해주셨다. 내가 이 학회에 관여하며 일해온 십여 년 동안 한결같이 보아온 모습이셨다. 국문학계, 거기서 현대문학 쪽에는 학회들이 많다. 작가 이름을 딴 학회도 많고, 주제나 영역을 가리키는 이름을 가진 곳도 많다. 어떤 학회는 그 연구 대상 작가의 이름이 아직 높지 않아서 고생하기도 한다. 또 어떤 학회는 첨예해서 논쟁이나 논란의 대상이 되기 쉬울 수도 있다. 그런 곳에서 오랫동안 일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돈으로 보상받기도 어렵고 많은 이들의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남들 안 하는 궂은일을 계속해 나가기란 극난하다. 점심 자리가 파하고 선천 대문 앞에 나가 사진들을 찍었다. 사진 찍는 어른들 모습을 보니 그 십여 년 사이에 많이도 변하셨다. 몸이 눈에 띄게 불편해지신 분들도 계시다. 이곳 인사동 골목과 선천의 연륜만큼 오래 버티고 서 오신 분들인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하기에 이 어른들의 한 가지 모습 있어, 그것은 한결같다는 것, 변하지 않고 계속해 나가신다는 것이다. 사진 찍는 일도 끝나자 이제 차담(茶談)을 나눌 차례다. 나는 이쯤에서 다른 일을 위해 떠나야 한다. 어른들이 골목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들 가시고, 이제 선천 앞 공터에는 촬영하시는 선생님과 나만 남았다. 장비를 정리하시는 선생님께 다가가 여쭈어본다. ―요즘 세상이 참 어지럽지요? 늘 고생하시는 선생님께 친밀감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었다. ―글쎄요. 세상에는 나 모르는 원리나 메커니즘이 있는 것 같아요. 오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래. 그걸 내가 바꿀 수는 없는 것 같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지요. 선생님은 한 번도 당신이 하시는 일에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불평을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오늘 시국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고 있던 한 분의 보석이 허가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열흘 남짓만 있으면 벌써 6개월이 흐르고 그러면 자동으로 구속 취소가 되어 나오게 된다 한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흐른 것이었다. 지난 사나흘 사이에는 저 멀리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해서 군 수뇌부들, 핵 과학자들이 죽고, 핵시설과 유전이 파괴되었다 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도 상황이 무척이나 뒤바뀐 듯도 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식은 ‘나비효과’도 아니어서 내일의 이곳이 변화할 것을 시사할 수도 있다. 세상을 걱정하는 선배 한 분이 전화를 하셨다. ―이제 세상은 우리 손을 떠난 것 같아. 요즘 벌어지는 일들을 보니 그래. 가만히 우리 할 일 하며 때가 어떻게 오는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해. 딴은 그렇다.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세계를 움직이는 크나큰 원리며 메커니즘의 하나로서 나타난 것이리라. 이 작은 개체의 생각과 눈으로 보이지 ‘바람’을 다 헤아리랴. 서두르지 않는다. 기다린다. 내 일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6-16

일본의 쌀값 폭등이 던진 화두

1918년 일본 도야마(富山)현에서 ‘쌀 소동’이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 말기 전시(戰時)동원 체제에서 군량미 수매를 시작한 후 쌀값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농민·시민이 대규모 폭동에 가담해 약 6만 건의 시위가 발생하고 2만5천명이 체포됐다. 이 사건은 당시 내각 수반인 테라우치가 사퇴하면서 겨우 일단락 됐다. 1세기가 지난 현재 일본에서 다시 쌀값 폭등이 일본 열도를 강타하고 있다. 도심 쇼핑몰에서 쌀을 사기위해 오픈-런을 하는 장면은 자체로 충격이다. 세계 3위 경제대국에서 일어난 이런 유통 왜곡 현상은 우리의 평안한 일상이 언제든지 거두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 폭염으로 인한 흉작, 지나친 감산(減産)정책, 관광객 증가로 인한 쌀 소비 급증 등이 원인으로 지적되지만 전문가들은 유통 구조 왜곡과 도매상들의 사재기를 이유로 들고 있다. 쌀 과잉생산, 정책·보조금·직불금 확대에 농촌 고령화까지 우리 농업현실이 일본과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언제 우리도 쌀값 폭등 같은 유통 대란이 일어날지 모르고, 군사적 긴장 수위가 높은 우리 지형에서 그 파장은 상상 이상이 될 수 있다. ‘In the East rice is more than just food.’ 격언처럼 동양에서 쌀은 식품 이상의 대상이다. 쌀은 자체로 인문학적 ‘양식’인데다 쓰기에 따라 안보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일본 사태를 계기로 한국 역시 농정 체질을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농민을 규제 대상으로 보지 않고, 식량 안보의 동반자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밥상에 올라오는 한 공기 밥을 단순한 ‘식품’이 아닌 ‘국가 자산’으로 바라보는 것, 일본 쌀값 소동이 우리에게 준 교훈이다. /한상갑(경북부 에디터)

2025-06-16

개구리는 움츠려야 멀리 뛴다

국민의힘 지지율이 폭락했다. 정치판에는 주식시장과 달리 서킷브레이커도 없다. 여기가 바닥이라고 자신할 수도 없다.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힘 지지율이 전주보다 15%포인트나 떨어진 21%였다. 반면 민주당 지지율은 4%포인트 오른 46%로, 국민의힘보다 두 배가 넘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불안하다. 대구·경북(TK)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모두 민주당 지지율이 높았다. 지금 이대로라면 내년 지방선거에서 대구 시장과 경북지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민주당이 차지한다는 말이다. 국회의원 선거도 마찬가지다. 완전한 ‘TK 자민련’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결과를 국회의원 선거구별로 비교했을 때 국민의힘은 99석밖에 얻지 못했다고 중앙일보가 보도했다. 그 런데 국민의힘은 반성은커녕 거기서도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내렸다. TK에서도 크게 앞선 게 아니다. 국민의힘이 40%로 민주당 32%를 겨우 앞섰다. 국민의힘 핵심 지지층인 60대(54%→25%)와 70대 이상(61%→30%)에서 한 주 만에 반토막 났다. 한국갤럽 조사만 그런 경향을 보인 것이 아니다. 4개 여론조사기관이 합동한 전국지표조사(NBS)에서도 민주당 45%, 국민의힘 23%로 갑절 차이를 보였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지난 대통령 선거가 비상계엄과 탄핵에 대한 심판이라면, 이번 조사 결과는 선거 이후 국민의힘의 사후 처리에 대한 실망이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를 찾아 반성하고, 고치려는 노력은 전혀 없었다. 파산하고 남은 부스러기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모습에서 회생 가능성조차 찾을 수 없는 절망이다.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 그렇지만 이러고도 국민의힘이 다음 선거를 치를 수 있을까. 선거 뒤 국민의힘이 한 일은 분란뿐이다. 선거 패배 책임을 서로 떠밀었다. 먹을 것이나 있는 것도 아니다. 행정부도, 국회도 민주당 정권에 다 넘겨줬다. 사법부까지 넘어갈 위기다. 다 팽개치고, 알량한 당권에 목을 맨다. 국민의힘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은 10일 “선거에서 이긴 정당처럼 행동하는 의원과 원외 당협위원장들이 많다”라고 말했다. 쪽박을 찼지만, 그 쪽박을 두고 싸우는 모양새다. 선거에 졌으니, 당을 정비하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당권 경쟁에서 상대의 약점을 들추느라 정작 당이 해야 할 일을 잊어버렸다. 국민의힘은 정권을 빼앗겼다. 무장 강도에게 빼앗긴 게 아니다. 임기를 절반이나 남긴 정권을 스스로 갖다 바쳤다. 일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상계엄을 시도했다. 그래 놓고는 탄핵에 찬성한 의원들을 탓한다. 탄핵 이후에도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유지하겠다고 고집한다.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들, 저항하는 시민은 어떻게 막을 건가. 발포라도 해야 했다는 건가. 시민과 무장 군인이 대치할 때 실수로라도 발포할까, 폭력이 발생할까, 가슴을 졸였다. 비상계엄에 성공한들 몇 년을 끌고 갈 수 있을까. 그런 체제로 다시 집권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을까. 그야말로 망상이다. 일부 국민의힘 의원은 “계속 탄핵 반대 활동을 해왔는데, 어떻게 당론을 무효화하느냐”라고 말한다. 이미 해온 일은 반성할 수도, 뒤집을 수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선거도 계속 지겠다는 생각인가. 국민의힘이 “내가 잘못한 게 없다”라고 한다면, 선거는 왜 졌나. 나는 잘못한 게 없으니, 국민더러 반성하고, 다르게 투표하라고 훈계하는 오만함과 다르지 않다. 좋건 싫건 선거는 국민의 심판이다. 그 결과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을 물갈이할 수는 없다. 국민을 계몽해 투표 경향을 바꾸겠다는 건 독재자의 논리다. 왜 졌는지 냉철하게 분석하고, 반성해야 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방탄이 보수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정치인도 잘못할 수 있다. 다만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개구리도 움츠려야 높이 뛸 수 있다. 물론 의원들의 지역구에 따라 여론이 다를 수 있다. 그렇다고 의원마다 자기 이익만 지키려 움직이면, 정권을 포기해야 한다. 여론이 추락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영국의 자유당처럼 사라지느냐, 재건하느냐, 국민의힘이 기로에 서 있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6-15

울릉도의 경제기반은 안전한 공항과 오징어 풍어

울릉도가 안고 있는 당면 현안은 울릉공항 건설과 연근해 오징어 어업 활성화 대책 등으로 요약되고 있다. 이 가운데 최대 과제는 지역 관광활성화를 위한 안전한 울릉공항 건설이다. 울릉공항은 2022년 5월 첫 케이슨 함을 거치 후 3년 동안 케이슨 거치 작업이 진행됐고 올해 5월 마지막 30번 함 거치가 완료됐다. 울릉공항은 2028년 상반기 개항을 목표로 현재 전체 공정률이 62.69%이다. 케이슨 거치 완료한 뒤 공항부지 조성을 위해 가두봉 절취 작업 및 해상 매립작업이 이어진다. 하지만, 지난해 연말 안타까운 무안공항 참사 이후 울릉의 미래 교통의 핵심이라고 할 울릉공항의 안전성에 대해 재고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앞으로 주력 기종으로 예상되는 80인승 항공기 기종의 안정적인 이착륙을 위해 활주로 길이와 종단안전구역이 현 수준 보다 더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우선 현재 울릉공항 활주로와 종단안전구역 길이는 각각 1200m와 90m로 공사가 진행 중인데 활주로 시설 등급 중 최저수준이다. 따라서 80인승 항공기 기종이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면 항공기의 이착륙 중량을 크게 줄여서 운항 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탑승인원과 적재화물의 감소로 이어져 경제적 측면에서 수익이 크게 나지 않는 구조가 된다. 또한, 기상청 자료에 근거하여 최근 5년 동안 최대 순간 풍속이 25노트 이상인 날이 연평균 138일 정도이며 풍속이 25노트 이상이면 80인승 항공기는 결항률과 사고 발생률이 증가할 가능성이 커진다. 더불어 5년간 연평균 강수량은 1538mm, 강수일 수는 144일이다. 이 수준은 우리나라 최대 강수 지역에 준하는 수준이다. 이 또한 결항률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활주로와 종단안전구역 연장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울릉공항 활주로 연장 추진위원회라는 상설 시민단체를 구성해 활주로 연장 필요성에 대해 지역사회의 공감대 확산과 대정부 건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있다. 울릉도는 관광산업에 버금가는 지역 경제기반으로 오징어 어업을 들 수 있다. 최근 ‘금징어’라 불리며 자취를 감추었던 울릉도 오징어가 올해 다시 울릉도 앞바다에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회복의 조짐이 과연 단순한 반짝 현상인지, 아니면 기후환경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얻어낸 값진 전조인지에 대해선 더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2024년 울릉도 해역은 5월 기준 평균 수온이 15.8~17.2° C 수준으로, 오징어가 선호하는 수온범위보다 높았고 특히 6월에는 수온이 상승하며, 어군이 빠르게 북상했거나 수심 깊은 곳으로 이탈해 저동항 기준 조업량은 거의 전무했다.   반면, 2025년 올해는 상대적으로 늦은 수온 상승세를 보였다. 5월 내내 오징어 생육에 이상적인 수온을 유지했고, 이는 올해 5월 후반~6월 초 단기 반짝 풍어로 나타났다.   이 차이는 단순한 계절적 요동일 수도 있지만, 기후 변화 속 ‘예외적 적정 수온 구간의 회귀’로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오징어 회유 경로에 수온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는 것을 울릉도에서 오징어 조업을 하는 분들이라면 모두다 알 것이다. 올해 5월 이상적인 수온 안정은 오징어 조업 조건에 분명히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기적 회복 속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변화도 있다. 바로, 열대·아열대 어종의 북상이다. 6월 들어 울릉도 연안 수온은 18° C에 도달했고, 이는 이미 오징어의 적정 상한선에 가까워진 온도다. 실제로 작년에는 아열대성 플랑크톤이 울릉도·독도 해역에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는 단순한 ‘수온 상승’ 그 이상의 변화다. 생태계 재편이 시작되었고, 우리가 익숙했던 ‘울릉도의 해산물 풍경’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올해 오징어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분명 반갑다. 그러나 문제는 앞으로도 오징어가 이 바다에 머물 수 있을지, 그리고 지속적인 어획이 가능한 구조로 회복될 수 있을지다.   기후변화로 인한 수온 불안정성은 물론이고, 여전히 반복되는 남획, 야간 집어 조업의 집중도 등은 오징어 자원에 악영향을 준다. 울릉도 인근 해역이 더 이상 ‘조업 최적지’로 남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이제는 풍어 소식만 반가워할 것이 아니라, 바다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전환해야 할 때다. 오징어 한 마리의 귀환을 ‘복귀’라 치부하기보다는, 해양 변화 전환기를 맞이하고자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다른 판로를 개척해 나가야 할 시기이다.

2025-06-15

안전한 피난처, 굴항

버스에 오른다. 비 오는 주말 아침 시간이어서 거리는 한적하다. 비에 젖은 가로수들이 유난히 청명하다. 봄이 무르익고 있다. 관광버스에 오르는 회원들의 얼굴에는 비에 젖은 설렘과 낯선 곳을 향한 호기심이 서려 있다. 종일 내리는 비와 벗하며 간 마지막 장소는 사천에 있는 대방진 굴항이었다. 바다 쪽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지만 좁은 입구를 통과해 들어오면 넓고 잔잔한 항이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 말, 남해안에 빈번하게 침입하던 왜구의 약탈을 막기 위해 설치된 ‘구라량영’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구라량이 폐쇄된 후 순조 때 다시 둑을 쌓았고 1820년경에 완공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수군기지로도 이용해 거북선을 숨겨두었다. 병선에 굴이 달라붙지 않도록 민물로 채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굴항 주변을 찬찬히 한 바퀴 돈다. 수령 200년 이상의 팽나무와 소나무가 숲을 이루는 이곳은 당시 병사들의 활터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왜구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와 숨죽였을 당시를 그려본다. 그들에게 이 작은 항구는 아마도 든든한 피난처였을 것이다. 엄마는 깔끔하고 집안일을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칭찬에 인색했다. 또한 스킨십도 별로 없었다. 삼남매의 맏이인 내게는 더 그랬던 것 같다. 할머니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엄마는 자주 내가 할머니를 닮았다고 했다. 본인이 싫어하는 사람을 닮은 나를 좋아할 리 없다고 짐작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옆집 가족과 덕수궁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갔다. 신고 있던 운동화가 작아서 발이 너무 아팠다. 다른 사람들이 구경하고 나오는 동안 나는 전시관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도 일행이 나오지 않아 불안이 점점 커져 갔다.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아픈 발을 끌고 전시관 안으로 들어갔다. 전시관을 다 돌아보았지만 엄마도 동생도 옆집 식구들도 보이지 않았다. 나를 두고 다들 가버렸나 생각하니 울컥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무작정 덕수궁을 나왔다. 길은 모르고 가진 돈은 없고 운동화는 작아서 발이 너무 아파 서러움이 몰려왔다. 집이 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2시간은 족히 걸은 것 같았다. 집을 찾지 못할 거라는 불안은 다리의 아픔을 잊게 만들었다. 멀리 동대문이 보였다. 비로소 마음이 조금 놓이기 시작했다.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동대문에서 집까지는 찾아갈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 가야되겠단 생각에 걸음을 재촉하는데, 버스 창문 너머로 누군가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엄마였다. 안도의 한숨도 잠깐, 슬그머니 걱정이 올라왔다. 집에 가면 얼마나 혼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 까닭이었다. 버스에서 뛰어내린 엄마는 울면서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넉넉지 못한 형편이라 제때 발에 맞는 운동화를 사 주지 못함에 미안해했다. 밤늦도록 숨죽여 우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미안함을 느꼈지만 엄마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에 포근했고 그제사 안심이 되었다. 73개 면의 주민들이 동원되어 둑을 쌓았다. 활처럼 굽은 만을 만들어 병선의 정박지로 사용하던 굴항은 본래의 목적은 상실하였고 주민들이 선착장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팽나무가 굽어보는 이곳은 인근에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하는 학섬과 늑도와 함께 관광명소가 되었다. 든든한 굴항이었던 엄마는 이제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투병 중이다. 심한 골다공증으로 등이 많이 굽었고 탈장으로 고생 중이지만 나이가 많아 수술도 불가하다. 큰딸인 내가 서울에서 울산으로 이사 온 후 꼭 와보고 싶다고 했는데 한 번도 오질 못하고 있다. 어린 나에게 엄마는 은신처가 되어주었듯 노쇠한 엄마에겐 내가 그 역할을 해야 하리라. 하지만 아픔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엄마가 아직도 내겐 든든한 피난처이다. 풍파에 지치고 사는 일이 아득해질 때면 여전히 엄마를 찾아간다. 굴항은 팽나무와 함께 고요하다. 오늘도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가만가만 옛일을 들려주고 있다. 종일 내리는 비에 항구의 물결이 살랑인다. 내 마음도 촉촉이 젖어간다. /시조시인 전영숙

2025-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