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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래 기억될 안성기의 삶과 죽음

영화제작자로 일했던 아버지의 친구 김기영 감독의 작품 ‘황혼열차’에 아역배우로 출연한 게 그가 다섯 살이던 1957년이었다. 마지막으로 영화 카메라 앞에 선 것은 2023년 제작된 김한민 감독의 ‘노량-죽음의 바다’. 자그마치 66년의 장구한 세월이었다. 빼어난 연기력과 스캔들 없는 모범적인 사생활로 많은 팬들에게 사랑받았던 영화배우 안성기가 5일 오전 영면에 들었다. 1952년에 태어났으니 향년 74세.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반에 걸쳐 한국 영화와 함께 울고 웃었던 주요한 배우 한 명이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안성기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베트남어를 공부했다. 군 복무는 ROTC로 마쳤다. 전공을 살려 외국에서 일하고 싶어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1977년 아역이 아닌 성인배우로 관객들 앞에 돌아왔다. ‘만다라’ ‘고래사냥’ 등에 출연한 1980년대는 말 그대로 ‘배우 안성기의 전성시대’였다. 1년에도 몇 편씩 주목받는 영화에 등장해 극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눈물, 웃음과 해학을 선물했으니. 그랬기에 대종상을 포함한 영화 관련 상도 40회 이상 받았다.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180편에 가까운 영화에 출연하며 왕부터 거지, 사장부터 말단 회사원까지 다른 사람의 삶을 사실적으로 연기했던 탁월한 배우의 죽음 앞에 적지 않은 영화팬들이 아쉬움을 표하며 명복을 빌고 있다. 지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눈물과 고통이 없는 피안(彼岸)으로 떠난 안성기의 발인은 오는 9일 오전 6시에 엄수된다. 한국 영화사에 ‘잊히지 않을 이름’으로 새겨질 것이 분명한 그의 삶과 죽음은 오래 기억될 듯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1-05

정당은 나쁜 사람만 골라 공천하나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는 말이 있다. 나쁜 일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겹치기로 덮친다는 말이다. 요즘 정치인들의 못된 짓이 그와 같다. 못된 짓이 드러나면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얼마나 나쁜 일을 많이 하면 그럴까? 이게 드러난 사람들만의 문제일까? 신설한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로 지명된 이혜훈 전 의원에 대한 폭로가 줄을 이었다. 그에게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옹호했다고 지적하자, “당파성에 매몰돼 사안의 본질을 놓쳤다”라고 사과했다. 그 뒤에도 여러 가지 갑질 폭로가 나오더니, 급기야 땅 투기 의혹까지 터졌다. 인천공항 개항 1년 전인 2000년 연고도 없는 영종도에 이 후보자의 배우자가 잡종지 6611㎡(약 2000평)을 사들였다. 그런데 2006년 한국토지공사와 인천도시개발공사가 공시지가 13억8800만 원 정도이던 땅을 39억2100만 원에 수용했다. 세 배 장사다. 더 가관인 것은 여야 공방이다. 이재명 정부에 발탁된 이 후보자를 배신자로 낙인 찍은 국민의힘은 “이재명 정부 인사 검증 시스템이 이토록 무너졌나”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민주당에서는 “국민의힘에서 다섯 번이나 공천받으신 분”이라고 빈정댔다. 분명한 것은 정치권 검증이라는 게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라는 점이다. 그뿐 아니다. 김병기 전 민주당 원내대표가 향응과 특혜 의혹으로 공격받더니, 부인이 구의회 부의장 업무추진비 카드를 사용했다는 녹음이 공개됐다. 이어서 강선우 당시 민주당 의원이 2022년 지방선거 때 김경 서울시의원으로부터 1억 원을 받았다는 대화가 담긴 녹음이 폭로됐다. 강 의원이 당시 민주당 수석사무부총장이자 서울시당 공천관리위원회 간사였던 김병기 의원에게 “살려주세요”라고 애원하는 목소리가 담겼다. 김 의원은 “돈을 당장 돌려주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대화 바로 다음 날 컷오프됐던 김경 시의원 후보가 민주당 단수 후보로 공천받았다. 컷오프된 후보, 거기에 공천 뇌물 1억 원까지 준 후보가 하루 만에 단수 후보로 둔갑했다. 뇌물 효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 1억 원이 김 전 원내대표나 그보다 더 힘이 센 사람에게 넘어갔다고 의심할 만하다. 이번에는 김병기 전 원내대표가 직접 공천 뇌물을 받았다는 폭로가 나왔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 김 전 원내대표의 부인이 구 의원 두 사람으로부터 각각 2000만 원과 1000만 원을 받았다가 몇 달 뒤 돌려줬다는 것이다. 이수진 전 민주당 의원이 돈을 준 사람들의 탄원서를 폭로했다. 이 탄원서는 이재명 당시 민주당 대표의 김현지 보좌관에게 전달했으나, 김병기 의원에게 도로 보내고 끝냈다고 한다. 경찰이 증거물을 도둑에게 준 꼴이다. 이 바람에 이재명 대통령, 김현지 청와대 제1부속실장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지난 총선 민주당 공천 때도 고무줄 기준이 적용됐다. ‘비명횡사’ ‘친명횡재’라는 비판이 나왔다. 오는 6월 지방선거가 있다. 여론조사가 한창이다. 선거도 전에, 후보가 나오기도 전에 당선자가 정해져 있는 곳이 많다. 당을 믿기에, 어쩌면 경쟁 정당이 너무 싫어, 찍을 정당을 정해놓은 유권자가 많다. 오죽하면 말뚝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말이 나오겠나. 그럴수록 중요한 게 공천이다. 정당의 책임이 무겁다. 거대 양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면 당선이 별 따기다. 그런데 유권자의 무한신뢰를 이용해 ‘공천 장사’를 한다. 오래된 과거가 아니다. 어쩌면 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도 반복된다. 선거제도 개편이 개헌보다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선거제도보다 더 중요한 게 공천이다. 선거제도가 아무리 공정해도, 공천이 잘못되면 헛일이다. 선거를 아무리 공정하고, 투명하게 치러도, 공천이 야바위판이 되면 비리 협잡꾼을 뽑게 된다. 후보가 유능한지, 깨끗한지 유권자들이 판별할 기회를 빼앗긴다. 정당이 추천한 후보 가운데서 고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당과 유권자가 양극단에서 대결하는 정치 구도에서 공천은 더욱 중요하다. 공천을 사고파는 사람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유권자가 깨어야 한다. ‘말뚝’이 아니라 ‘좋은 사람’을 뽑아야 한다. 말이 아니라 표로 응징하는 수밖에 없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6-01-04

“AI 혁명의 파도 위에 올라타 미래를 준비하자”

2026년 새해, ‘AI를 활용하고 주도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를 시작한다. 52주에 걸쳐 매주 인공지능(AI) 기술의 진화, 삶·일터·지역사회의 변화, 그리고 우리의 대응 전략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논의를 담을 예정이다. 왜 지금 AI인가? 2022년 말 ChatGPT 등장 이후 AI는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개인의 AI 이용률은 2024년 33.3%, 전체 AI 서비스 경험자는 60%를 넘어섰으며, 2025년에는 80%에 육박했다. 기업의 도입률도 90%에 근접했다. 이는 단순히 기술 발전이 아닌, 실생활 전반에 AI가 깊숙이 침투했음을 의미한다. 포항 죽도시장의 한 건어물 가게 주인은 AI로 SNS 홍보 문구를 생성하고, 형산강 카페거리의 카페 주인은 메뉴 설명과 인스타 콘텐츠를 제작한다. 교사들은 맞춤형학습 자료를 만들며, 구룡포 어촌계는 AI 번역기로 외국인 관광객과 소통한다. 심지어 포항테크노파크 입주 업체들은 AI로 업무를 자동화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일들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이제 AI는 특정 산업이나 선진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술 수용 속도가 사용자 적응 속도를 압도하면서, 모두가 AI를 일상 도구로 받아들이는 시대가 되었다. 문제는 이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이다. 활용하는 자와 외면하는 자의 격차 2024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AI를 업무에 활용하는 직장인과 그렇지 않은 직장인 간 생산성 격차가 최대 40%에 달했다. 동일한 시간 동안 한 사람이 10개의 업무를 처리할 때, 다른 사람은 6개밖에 완료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2025년에는 이 격차가 일부 직무에서 50%까지 확대되며 경고음을 울렸다. 더욱이 명문대 컴퓨터공학과 졸업생의 취업률이 70% 아래로 떨어졌고, 국내에서도 기업이 신입 개발자 대신 AI 도구 활용 경험이 풍부한 경력직을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과거 산업혁명이 기술 발전과 일자리 창출을 동반한 반면, AI는 기존 일자리를 대체하며 직업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트렌드 코리아 2026’이 말하는 AI 시대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발표한 ‘트렌드 코리아 2026’은 AI 시대를 관통하는 두 가지 키워드를 강조한다. 첫째, ‘Human in the loop’는 AI를 도구로 활용하되 인간의 비판적 사고와 윤리적 판단을 결합해야 함을 의미한다. AI의 출력을 맹신하지 않고 창의성과 인간적 통찰력을 더하는 것이 핵심이다. 둘째, ‘레디코어(ReadyCore)’는 “준비된(Ready) 상태”가 삶의 핵심(Core) 가치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변화에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학습하고 유연하게 적응하는 자세가 생존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주도’한다는 것의 의미 본 제목인 ‘AI를 활용하고 주도하는 자가 살아남는다’에서 ‘주도’란 AI에 종속되지 않고, AI를 도구로 삼아 능동적으로 활용한다는 의미다. AI를 주도한다는 것은 세 가지를 뜻한다. 첫째, AI가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AI는 마법 상자가 아니라 특정 원리로 작동하는 기술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단순한 정보 검색 수준에만 AI를 활용하며,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둘째, AI를 내 필요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법,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대화 기술, 여러 AI 도구 중 상황에 맞는 것을 선택하는 판단력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엔비디아 회장 젠슨 황이 제시한 AI 발전 단계를 보면, 우리는 이미 AI 에이전트 시대에 진입했다. 하지만 AI 사용자 대부분은 여전히 프롬프트 단계조차 완전히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창의성, 공감 능력, 윤리적 판단, 비판적 사고는 여전히 인간의 영역이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의 감정 교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의 창의적 문제 해결, 윤리적 딜레마 앞에서의 가치 판단은 여전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심화되는 AI 사각지대 더욱 심각한 문제는 생성형 AI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AI 기술로부터 소외되는 계층이 형성되면서 ‘AI 사각지대’가 생겨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격차는 점점 넓어질 것이다. 특히 우리 지역 포항과 경북의 경우, 수도권에 비해 AI 교육 기회가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AI 활용률도 낮은 편이다. 이는 단순히 기술 격차를 넘어 경제적 격차, 나아가 지역 경쟁력의 격차로 이어질 수 있다. 52주, 함께 걸어갈 여정 이러한 현실 앞에서, 경북매일신문 독자 여러분과 함께 1년간 네 단계의 여정을 걷고자 한다. 1분기(1~13주)에는 AI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기초를 다진다. ChatGPT, Claude, Gemini 같은 대화형 AI부터 Midjourney 같은 이미지 생성 AI까지,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을 소개한다. 2분기(14~26주)에는 일상 속 AI 활용법을 알아간다. 업무 이메일 작성, 회의록 정리부터 자녀 교육, 여행 계획, 건강 관리까지 생활 밀착형 사례를 다루며, 매주 ‘이번 주 AI 실습’을 통해 독자 여러분이 직접 따라 하며 배울 수 있도록 구성한다. 3분기(27~39주)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가 AI로 부업을 시작하는 법, 소상공인의 실전 활용법, 업무 자동화 구축 등 실질적인 경제 활동과 연결된 이야기를 나눈다. 4분기(40~52주)에는 AI 저작권, 딥페이크, 일자리 변화 같은 사회적 이슈부터 우리 지역 포항과 경북이 준비해야 할 AI 전략까지 폭넓게 조망한다. 포항의 철강 산업, 경북의 농업, 관광업이 AI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 지역 청년들이 AI 시대에 어떤 기회를 만들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한다. 지금, 선택의 시간 AI 혁명의 파도 위에 올라타 미래를 준비할 것인가? 아니면 일자리가 줄어드는 사회에서 경쟁에 매몰될 것인가? AI를 활용해 삶을 업그레이드할 순간이다. “과도기가 지나갈 것”이라 여기며 방관한다면 기회를 놓칠 뿐이다. 경북매일신문과 함께하는 52주 프로젝트로 AI 시대의 주인공이 됩시다. AI를 두려워하지 않고, 내 일에 적용해 성장하는 법을 배운다면 1년 후에는 AI를 활용한 혁신가로 거듭날 것이다. /서용운 계명대 교수·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그래픽=서용운

2026-01-04

소한(小寒)과 ‘세한도’

지난 며칠 동안 신년 강추위가 찾아왔다. 그저께인 1월 3일 청도 아침 최저기온은 영하 11.6도, 봉화는 16.7도였다. 그래도 예전에 맹위를 떨치던 ‘소한 추위’가 없어서 한시름 놓고 있는 형편이다.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왔다가 얼어 죽었다는 말을 자주 들으며 살아왔다. 아파트와 승용차로 무장한 현대 한국인들은 이런 옛말이 무척 낯설게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차가운 날이면 추사(秋史)와 ‘세한도(歲寒圖)’ 생각이 절로 난다. 이조판서로 이름을 날리던 김정희(1786~1856)는 안동 김씨의 득세와 더불어 1840년 윤상도의 옥사와 관련하여 제주 대정(大靜)으로 귀양살이 떠난다. 고위직에 있을 때 문전성시(門前成市)의 경험을 기억하는 추사에게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 생활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고초였을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황량한 유배지에 귀한 서책을 바리바리 들고 찾아온 제자 이상적(1804~1865)에게 그려준 그림이 ‘세한도’다. 중인 출신 역관으로 청나라를 자주 드나들었던 우선(藕船) 이상적에게 추사는 크게 감동한 모양이다.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구절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也)”의 첫머리를 따서 화제(畫題)로 삼았다. ‘한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글귀는 변함없이 스승을 대하는 이상적의 마음 씀씀이와 닮았다. 그래서 화제인 ‘세한도’를 가로로 쓰고, 바로 그 옆에 세로로 ‘우선시상(藕船是賞)’ 네 글자를 쓴 것이다. 국보 180호로 지정된 ‘세한도’는 여전히 많은 이의 사유와 인식에 자양분을 선사하는 귀한 문화자산이다. ‘세한도’와 더불어 해남 대흥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은 추사의 고된 유배 생활의 결과를 입증한다. 추사는 대정 유배길에 초의선사에게 원교(圓嶠) 이광사(1705~1777)가 쓴 ‘대웅보전’ 편액을 내리게 하고 자신의 글씨로 대신한다. 그런데 해배(解配)되어 귀로에 들른 대흥사에서 추사는 자신의 편액을 떼게 하고, 이광사의 편액을 다시 걸도록 부탁한 것이다. 천 리나 떨어진 외로운 섬 제주에서 8년의 귀양살이를 경험한 김정희의 내면세계와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은 훨씬 깊어지고 유장해진 것이 아닐까! 한겨울 북풍한설과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고 꿋꿋하게 서 있는 낙락장송처럼 의연하고도 굳세진 추사의 인품이 ‘무량수각(無量壽閣)’ 네 글자에 담긴 것 같다. 삐뚤빼뚤하되 둥글둥글한 자체(字體)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 24절기 가운데 스물세 번째인 소한을 지나면서 우리 세대가 살아온 날들을 새삼 돌이킨다. 음습한 날이면 연탄가스 중독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야 했고, 콩나물 버스 안내양들이 추락사를 겪어야 했던 저 암울했던 1970~80년대! 도저히 밝은 미래를 꿈꾸거나 기대할 수조차 없던 군부독재의 잔혹한 고문과 투옥, 학살과 은폐, 용공(容共) 조작(造作)까지. 모진 겨울날이면 0.7평의 독방에서 겨울을 나야 했던 양심수들과 그들의 가족 생각이 우심(尤甚)해지곤 했다. 그런 칠흑(漆黑) 같은 죽음의 질곡(桎梏)을 넘어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우리 어린 것들에게 물려줄 자랑스럽고 따사로운 문화·예술의 나라 대한민국이 멀지 않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1-04

말띠 해

올해는 병오년(丙午年) 말띠 해다. 불의 기운을 지닌 병(丙)과 말을 상징하는 오(午)가 만나 말띠 중에서도 60년 만에 돌아오는 붉은 말의 해다. 띠는 한해에 붙은 십이지 동물의 이름에서 따왔다. 십이지는 쥐, 소, 호랑이, 토끼 등 12마리의 동물을 상징하는데, 말띠는 그 중 일곱 번째다. 한국인은 태어날 때 모두가 띠를 가진다. 한해의 수호 동물로 자신의 띠가 정해지며 자신 띠와 연결해 성격, 운명, 결혼, 궁합 등을 예측한다. 띠 문화는 한국인과 함께 해온 오랜 풍속이다. 전해오는 띠 풀이에 의하면 말띠 생은 밝고 개방적이다.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고 유머가 있다. 어떤 생각이 결정되면 목표가 관철될 때까지 한눈팔지 않고 계속 나아가 성공률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말띠의 기운은 처음에는 거창하나 끝이 오므라드는 유형이다. 아차 하는 순간 아무것도 쥔 것이 없어질 수 있으므로 낭비와 유흥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나라 속설에 말띠 여성은 “팔자가 세다”고 한다. 1990년 백말 띠 해에는 여아 출산을 기피하는 일들이 있었고, 백말띠 해를 앞둔 12월에는 제왕절개 수술이 늘었다고도 한다. 다음 말띠 해 출산 성비가 116명까지 치솟았다고 하니 여아 출산 기피가 거짓은 아닌 듯하다. 세태가 달라진 지금, 말띠 여성에 대한 띠풀이도 다르다. 생활력이 강하며 독립적이고 리더십이 강하다. 말은 각종 설화에서 하늘과 지상을 잇는 상스럽고 지혜로운 동물로 묘사된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 탄생 설화에 나오는 승천하는 말이 그러하다. 말은 힘과 용맹의 상징이다. 올 한해 우리나라는 말띠 기운이 크게 뻗어 국태민안(國泰民安) 했으면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1-04

연초부터 속도내는 충청·호남권의 통합 추진

대전과 충남이 행정통합을 추진키로 한데 이어 광주와 전남도 행정통합에 시동을 걸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수도권 일극체제 극복을 위해 광역단체 간의 행정 통합론을 띄우면서 대전·충남과 광주·전남이 올 6월 광역단체장 선출을 목표로 양 시도 간 행정통합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강기정 광주시장과 김영록 전남지사는 2일 광주·전남 대통합 추진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두 단체장은 “올 6월 지방선거에서 통합 단체장을 선출하는 것을 목표로 양 지역 통합추진협의체를 출범시킨다”고 밝혔다. 작년 행정통합에 합의한 대전·충남은 1월 중 대전·충남통합 특별법 발의, 2월 중 본회의 통과를 추진 중이다. 광주·전남도 대전·충남과 같은 타임라인으로 특별법을 추진할 계획이다. 충청과 호남에서 통합 논의가 갑자기 불붙기 시작한 배경에는 이 대통령의 독려가 주효하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민주당 소속 대전·충남 국회의원을 초청해 “대전·충남 통합을 추진하자”고 제안했고 “수도권 과밀문제의 대안으로 통합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조만간 광주·전남 국회의원도 불러 똑같은 취지의 간담회를 가진다고 한다. 대구와 경북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광역단체 행정통합을 시도했으나 홍준표 시장의 대선 출마로 지금은 논의가 중단된 상태다. 현재로선 새 단체장 선출이후 이 문제가 다시 논의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충청과 호남의 통합 추진이 계획대로 이뤄진다면 대구·경북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점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5극 3특은 권역 통합을 통한 인구를 늘리는데 그치지 않는다. 국가 자원 배분 시스템이 권역 중심으로 재편됨을 의미한다. 대구·경북이 통합의 타이밍을 놓치면 국가 예산이나 국책사업 유치에 불리해진다는 뜻이다. 중앙정부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모든 국가 자원이 통합권역으로 몰릴 수 있다는 것을 지역 정치권은 잊어선 안 된다. 충청과 호남이 경쟁하듯 통합을 서두는 것도 공공기관 이전 등 국가자원 배분의 선점을 노린 것이다. 대구와 경북 지도자들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한 때다.

2026-01-04

국힘 위기 극복, ‘보수통합’ 외에 다른 길 있나

6·3 지방선거를 5개월여 앞두고 ‘보수 대통합’이 화두로 떠올랐다. ‘자강(自强)’을 내세우며 강성 당원 중심으로 당을 이끌고 있는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노선 변경을 촉구하는 보수진영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일 자신을 예방한 장 대표에게 미래를 위한 따뜻한 보수를 강조하며, “‘수구 보수’가 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지난 연말부터 분출하고 있는 보수 통합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충고다. 하루 앞선 새해 첫날 오세훈 서울시장도 국민의힘 지도부가 모두 모인 신년 인사회에서 “우리 당이 목소리가 높은 극소수 주장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며 당 지도부를 비판했다. 그동안 우위를 차지했던 서울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 최근 여당 후보들과 오차범위 내에서 경합하는 결과가 잇따라 나오자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같은 처지인 박형준 부산시장, 유정복 인천시장, 김태흠 충남지사 등도 모두 장 대표에게 포용적 리더십을 요구했다. 이날 경기도지사 출마설이 나오는 유승민 전 의원도 CBS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지금 국민의힘은 최악으로 쪼그라들었고, 이런 모습으로는 도저히 선거를 치를 수 없다”고 했고, 보수진영의 주요 축인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역시 “보수는 윤석열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고, 새로운 정책적 대안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이러한 유력 보수인사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장 대표는 여전히 자강론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합이나 연대가 자강을 해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국민의힘이 지금처럼 ‘윤 어게인 스피커’들에 둘러싸여 당을 폐쇄적으로 운영하면 ‘집토끼’인 보수 유권자들도 등을 돌리는 날이 올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를 보면 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국민의힘이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면하려면 범보수 세력이 통합해 외연을 넓히는 길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

2026-01-04

화단의 변신

한 평 정도 되는 작은 밭 가운데 동백나무가 서 있다. 겨울의 추위를 담은 꽃봉오리들이 조금씩 그 크기를 키워가고 있다. 그 밑으로는 배추를 다듬고 남은 겉껍질들이 찬바람에 배를 내어 놓은 채 시들어가고 다른 쪽에는 파릇파릇 겨울 채소가 한 뼘 정도 자라고 있다. 텃밭의 이야기가 아니고 아파트 화단 모습이다. 이곳은 오래 된 5층짜리 건물이다. 옆으로는 20여 층의 고층 아파트가 그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 그곳은 정원석을 경계로 삼아 나무와 꽃들이 계획적으로 잘 조경이 되어 있다.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다. 초봄 이곳을 지나면서 깜짝 놀랐다. 화단에 나무나 꽃은 거의 없었고 누군가가 고랑을 일구어 놓았다. 검은 비닐을 죽 깔아놓은 곳도 있었다. 무언가를 심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한쪽 구석에는 비료 포대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아파트 앞뒤를 다 돌아보아도 그런 모습이었다. 벌써 어느 곳에는 쪽파, 양파가 자라고 있었고 다른 곳엔 부추 등이 자라고 있었다. 아파트라면 당연히 잘 조경된 화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왔기에 그런 모습에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처음 든 생각은 누가 제재를 가해야 하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예쁜 꽃이나 나무를 심어야 마땅할 터인데···. 봄이 지나면서 화단의 텃밭은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 비교적 넓은 곳에는 가지, 고추, 깻잎, 배추 등이 심어져 있었다. 고추나 깻잎은 여름으로 접어들자 높이도 제법 커져 나름 울창해보였다. 가끔은 나비가 날아드는 모습도 보게 되어 궁금한 마음에 키우는 채소의 종류를 살펴보았다. 대충 20여 종은 되는 것 같았다. 어느 주민이 정성들여 가꾸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관리사무소에서 제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집에 친구들이 놀러와 같이 산책을 하다가 텃밭이 된 화단을 보고 저게 뭐냐며 깜짝 놀랐다. 모종을 사서 심고 키우는 수고를 생각하면 사서 먹는 것이 더 낫지 않냐고 하면서. 지극히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느끼며 나 역시 변해가는 화단을 보며 지나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아파트의 주민을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거에 큰 공장이 있어서 결혼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단다. 그 자녀들이 다 커서 대부분 독립해 나가고 나이가 든 사람들만이 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커다란 전쟁을 두 번씩 겪은 세대이다. 세계적인 빈국에서,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신 분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화려하고 예쁜 조경의 꽃들보다는 실생활에 조금이라도 유용한 작물을 기르는 것이 살림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사셨을지도 모른다. 그런 절약과 억척스러움이 없으면 생존이 어려운 시절을 지났던 분들이다. 우리나라는 도시라 할지라도 1970년대를 지나면서 냉장고가 서서히 보급되었다. 지금처럼 음식을 냉동실에 재어 놓을 수가 없었다. 여름이 되어 높은 온도에 약간 밥맛이 이상하면 엄마는 여러 번 물에 헹군 뒤 끓여서 먹었다. 그것보다 조금 더 상하기라도 하면 풀을 쑤어 이불 등을 빳빳하게 만들었다. 그 때는 모든 물자도 귀했지만 절약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았던 것이다. 문화적인 것을 향유하는 것은 그 당시 일부가 누리던 사치였다. 오로지 자녀들을 입히고 먹이고 교육시키는 것에 열심인 세대였다. 그런 세대들에게 어쩌면 아파트의 화단은 쉽게 먹거리를 얻을 수 있는 텃밭으로 이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텃밭으로 변한 화단을 보기 시작했다. 여름이 지나면서 고구마가 왕성하게 줄기를 뻗으며 자라고 있었다. 늦여름이 지나가며 고추도, 깻잎도 치워지고 그 자리엔 가을 배추가 자리잡았다. 옆의 화단에서는 부추가 여전히 푸름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쁜 꽃은 있지 않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화단텃밭. 그 속에는 한 생을 열심히 살아온 우리 윗세대들의 부지런한 역사가 함께 숨쉬고 있었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6-01-04

이제는 문화다

새해는 지역 발전의 방향을 되돌아보게 한다. 과거 산업과 경제 중심으로 성장해온 지역은 이제 새로운 질문을 마주한다. 사람을 머물게 하고 지역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그 답은 점차 문화로 좁혀지고 있다. 문화는 단기적 성과보다 장기적으로 지역을 지탱하며, 세대를 연결하고 공동체 정체성과 삶의 품격을 높여왔다.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문화는 사람을 끌어모으는 힘이 있다. 미래의 문화정책은 외형적 확대보다 내실 강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전통을 지키되 현대적 삶과 기술,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결합해 재창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문화원은 기존 프로그램을 시대에 맞게 재정비하고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단순한 체험과 행사 중심에서 벗어나, 지역의 역사·생활문화·구술자료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교육·전시·콘텐츠로 확장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전통문화 역시 현대적 해석과 접목을 통해 청년과 다음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특히 AI와 디지털 전환의 시대에 걸맞은 문화 인프라 구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지역 문화 자산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자료의 축적과 활용이 선순환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춰야 한다. 흩어져 있던 기록과 아카이브를 정리하고, 누구나 접근하고 연구할 수 있는 열린 문화 데이터로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문화의 보존을 넘어, 새로운 창작과 산업으로 이어지는 기반이 될 것이다. 문화원의 운영 또한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고도화되어야 한다. 프로그램 기획, 인력 운영, 기록 관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중장기 계획 속에서 지속가능하게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문화는 열정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전문성과 시스템이 함께할 때 비로소 오래 갈 수 있다. 이처럼 문화원의 내실을 다져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다음 과제가 보이게 된다. 아무리 콘텐츠와 시스템이 충실하더라도 이를 안정적으로 담아내고 확장할 공간이 없다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문화는 사람을 모으는 일이고,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터전이 필요하다. 지금의 문화원은 그 역할과 기대에 비해 물리적 여건이 충분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문화가 함께 숨 쉬는 공간, 시민 누구나 드나들며 배우고 만들 수 있는 문화의 집이 요구되는 이유다. 2026년을 향해 나아가는 지금, 문화원 신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준비의 문제라 생각한다. 이는 새로운 건물을 짓는 일이 아니라, 그동안 축적해 온 문화의 내용과 가치를 온전히 담아내고 다음 세대에게 어떤 문화 환경을 물려줄 것인가에 대한 지역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문화원은 늘 앞서기보다 곁에서 지역을 지켜보는 존재여야 한다. 크게 외치기보다 묵묵히 쌓아가며, 빠르기보다 오래 가는 길을 택해왔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다만 이제는 그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단단한 내실 위에 새로운 터전을 더해야 할 때다. 새해를 맞아 다시 한번 말씀드린다. 이제는 문화다. 그리고 문화의 미래를 준비할 시간이다. /박승대 포항문화원장

2026-01-04

소박한 우리의 새해 소망

2026년 병오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첫날 포항은 호미곶을 비롯해 영일대와 송도 해수욕장, 영일만항까지 일출 명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른 새벽부터 도로 위는 해맞이객들로 분주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포항은 어디에서든 해맞이할 수 있는 도시다. 장소를 골라 떠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도시에 대한 작은 자부심이 생긴다. 이날 나는 효자동의 한 아파트 옥상에서 시민들과 함께 새해 첫 태양을 마주했다. 동이 트기 전, 주위를 붉게 물들이던 여명을 바라보며 곧 떠오를 태양을 기다리는 마음은 이내 벅차올랐다. 매일 떠오르는 해이지만, 1월 1일에 마주하는 해돋이는 우리에게 늘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더 이루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조급해진다. 크고 분명한 목표를 세워야 할 것 같지만, 올해만큼은 조금 더 소박한 우리의 소망들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제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일상에 감사할 수 있는 오늘, 출근길 바다가 오늘은 유난히 잔잔하기를 바라는 마음, 신호등 앞에서 괜히 숨을 재촉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를 바라는 마음 말이다. 누군가는 사무실 한켠에서 건네는 따뜻한 인사 한마디에 하루를 시작할 힘과 용기를 얻고, 누군가는 병원에서 듣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더 건강해질 내일에 희망을 걸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 누군가는 오늘 하루만큼은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 않고, 잘 견디고 버텨온 스스로를 토닥이며 칭찬할 수 있는 여유로 채워지는 그런 하루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처럼 소박한 우리의 새해 소망은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묵묵히 지탱해 주는 힘은 어쩌면 이런 사소하고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포항은 수많은 파도를 넘으며 지나온 도시다. 산업의 굴곡이라는 파도를 넘어왔고, 지금도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높은 파도 앞에 서 있다. 하지만 그 숱한 파도 앞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살피고 다독이며 함께했기에 오늘까지 올 수 있었다. 그래서 2026년의 포항은 성장이라는 속도만큼이나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가 더욱 필요하다. 지난해 우리 모두는 큰 파도와 어려움을 함께 넘어왔다. 거친 파도를 견디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함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가 더욱 겸손해졌는지도 모르겠다. 2026년 포항은 도시의 변화와 성장만큼이나 사람의 온기가 차가운 철의 도시를 따뜻하게 채워가길 바란다. 기업은 노동자를 살피는 마음으로, 노동자는 경기 침체로 어려운 기업의 입장을 한 번쯤 돌아보면 어떨까.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아닌 민의를 살피며 공공의 선을 위해 일하고, 시민들은 서로의 이웃을 돌아보며 알뜰하게 챙긴다면, 이 도시는 다시 생명력으로 가득 차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소망은 꼭 거창할 필요가 없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내일을 다시 마주할 용기만 있다면 우리 모두의 2026년은 충분히 단단해질 수 있다. 새해를 맞은 포항의 아침이 조용하지만, 깊은 희망으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에 천천히 스며들기를 바라며, 올 한 해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 도시로 함께 걸어가고 싶다. /김은주 포항시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2026-01-04

병오년 새해에 희망한다

을사년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대통령 탄핵 사건 후유증으로 온나라가 혼란스러운 터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의성에서 촉발돼 영덕까지 경북 북부를 초토화시켰던 초대형 산불은 자연뿐만 아니라 경북 지역민들의 가슴조차 시커먼 숯검댕이로 만들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지만 사회 정의의 지속적인 유지와 서민 경제와 서민 삶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소모적인 정쟁만 있는 암울한 정치 상황이다. 국민의 안전도, 행복도, 재산도 지킬 정부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이탈리아 지식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설명대로 우리 국가와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들이 권력의 토대를 독차지하고 있으면 향상시켰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만한 상황이 우리에게도 도래했다. 여야 정치의 극심한 불균형으로 인한 국가 권력의 불균형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대통령 권력에 대한 도덕적 불신과 지역 불평등 확대, 성장둔화, 기회 감소에 대한 회의적 여론 또한 팽배하다. 이기적이고 자기 과시적인 관료와 정치인들로 인해 포퓰리즘과 극단주의 정부 출현은 매우 우려스럽다. 늑대에게 자유를 맡긴다면 양떼에게는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여야가 극심하게 기울어진 국회에서 일방으로 찍어내는 법제가 국민의 자유와 권리와 어떻게 상충되는지 그 한계가 아직 매우 모호한 상황에서 2026년 병오년 새해를 맞는다. 아직 정리되지 못한 계엄 국면의 정치적 과제와 치솟는 실업률, 실물 금융의 최대 위기와 신자유주의 무역의 압박, 탈산업화의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할 만한 믿음직한 국가적 대안이나 비전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위험에 처한 대한민국의 자유, 국가 주권의 불안정,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년들, 서민 소상공인과 근로자들의 사회적 자신감을 증진시켜줄 정치를 기대하는 바람으로 병오년 새해에 빌어본다. 특히 올해 6월에는 지방선거가 실시될 것이다. 우리 대구·경북은 이미 여야 지형도가 심히 기울어져, 새로운 고립의 섬으로 결판날 것이라는 절망적 우려조차 숨길 수 없다. 어떤 선택이 가장 많은 사회구성원들에게 의미 있는 자유와 행복을 제공할 수 있을지 건전하게 추론하여 선택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이름으로 도리어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치닫거나 이념적으로 치우쳐져서는 안 될 것이며, 이로 인해 경제 자유가 위축되어서는 더더욱 안될 것임을 시민사회와 주민은 엄중하게 판단하고 신중한 선택으로 지켜내야만 할 것이다. 동해안 저 푸르디푸른 바다를 헤치고 밀쳐 오는 새해가 우리들의 결핍과 두려움을 거두어주기를 희망한다. 강인한 적마처럼 행동할 자유를 우리들이 스스로 지키고 갖추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더 깊고 넓은 행복의 대한민국, 대구경북이 되기를 희망한다. 행복경제, 통합정치, 수준 높은 문화예술의 기치를 들고 미래의 문이 환하게 열려주기를 희망한다. 열심히 일하면서 누리는 일상의 행복이 우리들에게 충만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국가미래연구원 이사

2026-01-01

새해 2차 공공기관 유치에 ‘TK命運’ 걸어라

이재명 대통령이 이번 주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지방 혁신도시에 입주한 공공기관이 지역 경제 활성화에 제대로 기여하고 있는지 체크해봐 달라”고 주문했다. 지난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 14개 시·도에 이전한 공공기관들이 해당 지역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질책성 지시로 보인다. 그는 전북 전주 혁신도시에 입주한 국민연금공단을 예로 들면서 “주말이면 직원들이 다 서울로 가버린다. 유치 효과가 미미하다”고 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처럼 지방이전 공공기관 대부분은 원래 취지와는 달리 지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대구 동구 신서동과 경북 김천 율곡동에 조성된 혁신도시도 마찬가지다. 주말이면 텅 빈 도시로 변한다. 공공기관 직원들의 가족 동반 이주율이 낮은데다, 해당 지역민도 생활인프라가 열악해 이사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대구 혁신도시를 지역구로 둔 국민의힘 강대식 의원은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교통·교육·문화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으니 공공기관 직원들이 장기 정착하지 못하고, 시민들도 이사 오기를 꺼린다. 이 상태에서 2차 공공기관 이전을 추진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재명 정부는 새해에는 ‘2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은 12월 12일 열린 대통령 업무 보고에서 “새해에 공공기관 2차 이전 계획을 발표하고 2027년부터 이전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현재 대구시는 대법원과 IBK기업은행,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국립치의학연구원 등을, 경북도는 한국철도기술연구원,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 등을 유치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다. 2차 공공기관 유치는 비수도권 지자체로선 명운(命運)이 걸린 문제다. 희망하는 공공기관 유치에 성공하려면 대구·경북 모두 현재의 혁신도시를 누가 봐도 살고 싶은 ‘수준 높은 도시’로 완성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혁신도시에 교육·의료·문화 등 분야별 생활 인프라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

2026-01-01

대구공항이 활성화돼야 신공항도 힘 받는다

대구시가 올해부터 대구공항발 해외직항 노선 확대를 위해 지원을 대폭 강화한다고 한다. 대구공항을 이용하는 항공기에 대한 재정지원금 예산을 작년보다 63% 늘리는 한편 조례 개정을 통해 항공사 지원 대상과 범위도 확대했다. 대구공항의 활성화는 지역민의 편의 증대 의미 이상으로 지역경제에 미치는 경제적 파급 효과가 크다. 외국 관광객의 유입과 이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도 기대된다. 대구시의 국제적인 도시 위상이 올라가고, 도시의 국제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 대구공항 활성화는 대구시 발전을 위해 반드시 관리해야 할 주요 정책이라 할 수 있다. 대구공항은 코로나 팬데믹 이전만 해도 전국의 지방공항 중 이용자 수가 상위권에 든 공항이었다. 2019년 대구공항 이용객 수는 467만 명이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수요가 급격히 줄면서 지금까지 2019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대구공항 활성화 노력이 부족한 가운데 상대적으로 다른 지방의 국제공항이 도약하면서 지금은 청주공항보다 이용객 수가 적다. 현재 대구공항은 일본, 중국, 대만, 베트남, 태국 등 8개국 14개 국제노선을 운항하고 있으나 해외여행 수요 증가에 비해 시간대와 목적지, 공항 인프라에 이르기까지 부족한 부분이 많다. 많은 대구시민이 김해공항을 이용하거나 인천공항까지 가야하는 시간 낭비와 경비 부담을 안고있다. 대구시가 올해부터 대구공항의 국제노선을 강화키로 한 것은 늦었지만 잘한 일이다. 보다 많은 투자로 공항 활성화를 적극 이끌어 내야 한다. 특히 대구공항 활성화는 사업 추진이 제대로 되지 않은 대구·경북 신공항 사업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대구공항의 국제화가 촉진되고 수요가 늘면 신공항을 조기에 건설해야 하는 이유와 명분이 쌓인다는 논리다. 정부 지원을 이끌 명분도 된다는 것이다. 대구·경북 신공항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서도 대구공항의 활성화는 필수다. 대구의 경제성장은 대구공항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으로 대구시는 공항 활성화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2026-01-01

권력의 부패

과학자들은 권력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난폭한 행동과 같은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지는 이유를 뇌에서 답을 찾는다. 어떤 과학자는 사람이 권력에 빠져들게 되면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이 많이 나오면서 뇌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해 오만해지고 충동적인 행동을 한다고 말한다. 또 일부는 뇌의 안하 전두엽이 손상돼 자신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과대망상에 빠져들어 이타심과 공감 능력을 잃게 된다고도 설명한다. 마치 마약에 중독돼 이성을 잃는 것처럼 권력에 중독되면 모든 이성적 판단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권력부패의 원인이라 한 것이다. 1887년 영국의 역사학자 존 액턴은 높아만 가는 성공회 교황의 권력과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편지 속에서 그는 “절대권력은 절대부패 한다”는 말을 남기는데, 권력의 집중과 견제 부재가 부패를 부른다는 경구로써 이 말은 오늘날까지 유명하다. 많은 민주주의 국가가 삼권분립 등 권력의 정체성을 구현해 권력의 부패를 막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권력이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부패가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 속성이다. 사회가 분화되면서 정치권뿐 아니라 각 분야에서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지만 권력자의 부당한 횡포와 비리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민주당 강선우 의원이 지역구 시의원으로부터 1억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더불어민주당의 도덕성이 도마에 올랐다. 특히 지역 단체장이나 시의원으로부터 공천 대가가 오가는 오래전 폐습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에 국민적 실망감이 크다. 30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에 대한 견제와 감시 기능은 사실상 어렵다. 국회의원의 자정 능력을 높일 대안을 찾아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1-01

팔자를 넘어

해마다 자기에 대한 기대로부터 한발 물러나게 되는 것 같다. 미래에의 가능성보다는 한계를 직시하며,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성숙으로 가장하며 살아온 것 아니겠나. 주어진 운명과 맞서 싸우는 영웅들을 동경했던 시대는 아득하고, 앞길에 대한 모색보다는 현상 유지를 기도하며 하루를 소진하는 삶이 반복되고 있다. 어쩌면 강제된 이러한 사고 정지 속에서 새해의 소망을 품는다는 게 얼마나 망령된 일인지 요맘때면 새삼 깨닫게 되곤 한다. 일본의 서브컬처 비평가 우노 츠네히로는 ‘무언가를 했다’라는 사회적 자아실현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을 승인하는 방식의 자의식 형성에 관해 논한 바 있다. ‘~을 하다/했다’라는 행위가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면, ‘~이다/~이 아니다’라는 자기 형상에 대한 인지는 데이터베이스화된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기를 살피지 못하고, 주어진 조건을 수용할 뿐인 자세로 자아를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청년들이 세계로부터의 고립을 자처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행위를 통해 아이덴티티를 찾기보다는 현재의 처지를 스스로가 납득하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규정해 가는 타입의 인간들이 늘어가는 시기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상’에 대한 설정이 행위를 압도케 되는 사회적 조건이 구축되고 있다. 요즘의 한국이 그렇지 않나. 이제는 ‘영포티’가 된 ‘N포세대’ 출신의 ‘영끌’을 바라보며, 도무지 물려받을 게 없는 ‘젠지세대’의 원망이 사회를 뒤덮고 있는 형국이기에 그렇다. 나아가 그 원망의 방향이 시대의 모순을 사유케 하기보다는 단순한 피해의식으로만 점철되고 있으니, 대체 어떤 미래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미래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고루한 표현이 그리워지곤 한다. 그러한 시대의 환멸로부터 나 역시 자유로울 리 없다. 그래서일까? 요새는 ‘팔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된다. 지인이나 동료가 잘 되거나 잘 안되거나, 그게 ‘그 사람의 팔자 아니겠나’라는 식의 어법이다. 팔자란 게 ‘일생의 운수’를 뜻하니 나 역시 숙명론적 인생관 따위에 함몰돼 버렸다고 해도 좋다. 진정 타고난 운명이란 게 있는 걸까? 살다 보니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것 같다. 죽어도 안 되는,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란 게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달성될 수 없는 목표라면 차라리 그 실패에 매달려 괴로워하지 않고, 외려 이를 일종의 팔자로 받아들이자는 태도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자기의 한계에 대한 이러한 순응이야말로 내가 나 자신을 지지할 수 있는 유일한 구실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과거 도지사 시절부터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소신을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안다. 2026년 병오년부터는 진정 그러한 시대가 오길 바란다. 자기에 대한 체념을 성숙의 조건으로 가장하는 그러한 세계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사회가 막다른 길에 몰렸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6-01-01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어릴 때 짜장면 한 그릇이면 다 통했다. 졸업식, 입학식, 그리고 생일 때 짜장면 이상은 사치였다. 탕수육 같은 건 있는지도 몰랐다. 우동 아니면 짜장면이었고 아버지는 가끔 짬뽕을 잡수시곤 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짬뽕은 어른들이 드시는 음식으로 안다. 짜장면이 1970년에는 한 그릇에 100원 정도였으나 최근엔 7000원 선으로 가격대가 형성돼 있다. 물론 동네 중국집에선 5000원 정도 받는 곳도 있긴 하더라만, 50년 동안 50배나 가격이 뛰었다. 요즘 식당 밥값이 장난이 아니다. 1만원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중국집이나 분식집 말고 없을 정도이다. 학창 시절 데이트할 땐 돈 1만원만 있으면 둘이 극장가고 다방에서 커피 한 잔씩 마셔도 집에 갈 버스비는 남았다. 지금 애들은 도대체 얼마를 들고 나가야 데이트를 할 수 있는지 걱정이 앞선다. 특히 남자애들이 부담이 상당할 것 같다. 둘이 짜장면만 먹을 수는 없을 테고 분위기 한번 잡을라치면 두당 3만원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차 한 잔 마시면 거의 10만원 돈이다. 요즘은 그래도 ‘카드’라는 것이 있어 돈 떨어져 집에까지 뛰는 사태는 없어 다행이다. 제주 유명호텔 짬뽕 한 그릇이 6만2000원이다. 가족끼리 옹기종기 모여 먹으면 20~30만원이 짬뽕값으로 나간다. 메뉴 제목이 ‘전복 한우 차돌박이 짬뽕’이라는데 우리 동네 중국집에선 문어까지 넣은 고급 짬뽕이라도 2만 원을 넘지 않는다. 비싼 호텔 짬뽕이 대중적인 음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비싼 짬뽕을 먹기 위해 줄을 선단다. 인생 짬뽕이라나 뭐라나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 짬뽕 가격에 질려버린다면 파인다이닝 식당엔 근처에도 갈 생각을 접어야 한다. 언제부터인지 몇몇 생소한 단어가 옆을 스친다. ‘파인다이닝’ ‘오마카세’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 그냥 서민으로 한세상 그렇고 그렇게 산다고 보면 된다. 재혼을 준비하는 돌싱들 이야기가 흥미를 끈다. “재혼 목적 교제 중, 어떤 말을 자주 들으면 재혼 의지가 꺾이느냐”라는 질문에 남성 대부분이 ‘파인다이닝’을 골랐다고 한다. 데이트비를 거의 지불하지 않는 여성이 맨날 고급 식당을 요구하면 ‘나를 호구로 보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여자는 정이 뚝 떨어진단다. ‘파인다이닝’이란 ‘좋은’, ‘질이 높은’이라는 뜻의 ‘fine’과 ‘식사’를 뜻하는 ‘dining’의 합성어이다. 문자 그대로 비싼 식사, 고급 식사를 뜻하는 일반적인 어휘라고 보면 된다. 이름난 셰프가 운영하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식사 금액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다. 시그니처 메뉴를 제공하고 받는 금액이 일인당 수십만 원이라고 한다. 수억대의 자금을 인테리어에 투자하고 테이블과 의자 또한 최고급이다. 화장실에는 고급 향수가 비치되고, 고급 브랜드들의 식기가 제공된다. 보험 신청하고 받은 그런 허접한 그릇에 밥 먹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갑자기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 한 번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서글퍼진다. 인생이 헛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제주도는 비행기 값이 없어서 못 가고 동네 중국집에서 뜨끈한 짬뽕 국물로 속을 달래야겠다. /노병철 수필가

2026-01-01

해맞이 명소 호미곶

일출(日出)은 자연의 경이로움이자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현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해가 되면 일출을 보려는 행렬이 줄을 잇는 것도 이러한 상징성 때문이다. 나라마다 일출을 맞이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일출을 향해 한해의 소망을 기원하는 마음은 어느 나라든 똑같다. 새해 일출은 단순히 자연현상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뜻이다. 오랫동안 인간의 삶 속에 어우려져 왔다는 말이다. 새해를 앞두고 동해안 일출 명소에는 벌써부터 숙박업소마다 예약이 꽉 찼다. 행정기관도 연말연시 인파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는 소식이다. 포항시 남구 호미곶은 연간 200만 명 이상이 찾는 대한민국 대표 일출 명소다. 다가올 새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 등과 더불어 이곳을 찾아 일출의 장관을 바라보며 새해 소원을 기도할 것이다. 한반도 최동단에 위치한 호미곶은 조선시대 풍수지리학자 남사고는 ‘해동산수비록’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모양인데, 백두산은 코 이곳은 꼬리 부분”이라고 밝혔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이곳에서 일곱 번이나 답사하고 측정해 우리나라 가장 동쪽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포항시의 옛 이름 영일(迎日)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오래전부터 해맞이 장소로 여겨져 왔던 곳이다. 울산시는 간절곶이 포항시의 호미곶보다 해가 먼저 뜬다고 자랑을 하나 때로는 간절곶이, 때로는 호미곶에서 해가 먼저 떠 정확히 누가 먼저인지 말하기가 어렵다. 신년의 첫 일출은 오전 7시 26분 독도에서 가장 먼저 관측되고 호미곶에서는 7시 32분 관측될 것이란 예보가 있다. 가는 해 잘 보내고 오는 해 기쁘게 맞이하자. /우정구(논설위원)

2025-12-30

위기의 자영업자···소비자의 배려 필요

올 한해도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매우 어려웠다. 서민의 대명사인 월급쟁이와 자영업자의 실질소득이 가파른 물가 상승 탓에 오히려 뒷걸음질 쳤기 때문이다. 특히 퇴직금을 비롯해 전 재산을 투입해 개인사업에 뛰어든 자영업자들이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뉴스는 가슴을 아프게 한다. 주변을 보면 퇴직자나 청년들이 빚을 내 생계형 창업에 나섰다가 과당 경쟁을 견디지 못해 무너지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앞으로 2차 베이비부머(1964~74년생)들이 본격적으로 은퇴하기 시작하면 자영업자 위기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국가데이터처가 최근 발표한 ‘2024년 자영업자 부채’ 통계를 보면 지난해 자영업자 대출 연체율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고금리로 갚아야 할 이자는 늘어나는데 빚을 제때 갚지 못하는 사람이 급증한 게 원인이다. 전국적으로 빚에 허덕이는 자영업자 수가 코로나 때보다 4배나 늘었다고 하니 충격적이다. 대구에서도 지난 10월 한 달간 폐업한 자영업자가 40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불황이 오면 자영업자에게 제일 먼저 한파가 닥친다는 게 빈말이 아닌 것이다. 가장 우려되는 점은 자영업자들의 부채 부담이 20~30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악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2분기 말 기준으로 대구의 자영업자 1인당 대출액이 3억8000만원에 달했다. 국세통계포털을 보면 지난해 100대 생활업종의 3년 생존율(창업 후 사업을 지속하는 비율)은 52.3%로 나타났다. 100곳이 개업하면 3년 뒤에 영업을 이어가는 업체가 52곳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1년 생존율은 지난해 77.0%로 집계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비심리 위축 등으로 내수가 얼어붙으며 자영업자의 생존율이 낮아질 것이라는 우울한 분석도 나온다. 자영업의 위기는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대구 도심 곳곳에는 ‘임대 문의’라고 쓰여 있는 건물이 흔하고, 골목마다 문 닫은 상점과 식당이 넘쳐난다. 내가 사는 동네 상가도 오래전부터 장사가 안돼 하나둘 문을 닫는 가게들이 늘고 있다. 소비자 발길은 줄어들고 있는데 인건비와 재료비, 배달 수수료는 계속 상승하고 있으니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해 연말에 갑자기 닥친 전 정권의 비상계엄 이슈는 안 그래도 비관적인 골목경제에 더 짙은 먹구름을 끼게 했다. 대부분 시민이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지만, 길거리 슈퍼마켓이나 빵집, 음식점 등은 상품을 파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순기능(順機能)을 한다. ​만약 이들 가게가 어느 날 갑자기 모두 사라졌다고 가정해 보면 그동안 간과했던 자영업의 다양한 기능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공기나 물처럼 항상 우리 주변에 있으니까 모두가 그 중요성을 잊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어려운 시절 이웃끼리 콩 한쪽도 나눠 먹고 살아온 민족이다. 어려움에 처한 자영업자들이 대형 유통업체와 경쟁해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부나 지자체는 물론 소비자의 배려도 중요하다. ​지금처럼 자고 일어나면 골목에 빈 점포가 하나씩 생기는 것은 이 지역 앞날을 가장 어둡게 하는 장면이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12-30

혁신의 성공 비기(秘器) 회의체

모든 기업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 경쟁력을 위해 혁신을 도입하지만 성공하는 기업은 드물다. 비전, 전략, 목표, 실행계획이 있고 슬로건도 그럴듯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혁신은 구호로 남고, 조직은 다시 익숙한 방식으로 되돌아간다. 이유는 단순하다. 혁신을 실제로 밀어붙이는 ‘비기(秘器)‘가 없거나 제대로 운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비기가 바로 혁신회의체다. 혁신회의체는 단순한 보고 회의가 아니다. 기업의 비전과 전략을 실행으로 전환시키는 공식적 의사결정 장치다. 혁신 과제를 선정하고, 실행 상황을 점검하며, 부서 간 충돌을 조정하고, 필요하면 기존 제도와 규정을 바꾸는 권한을 가진 상설회의체다. 기업의 대내외 상황 조건을 분석하고, 업종의 특성을 반영하여 방향을 설정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고, 목표 설정, 실행계획과 운영제도, 계층별 R&R을 설정해서 혁신활동을 하는 데, 실패하거나 성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은 이슈 개선 중심의 ‘혁신회의체‘를 운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혁신회의체는 활동 현황 공유와 이슈 개선을 위한 자리이고, 조직의 관성을 깨는 장치다. 혁신회의체가 기업 혁신 성공을 위해 필요한 이유는 첫째, 전략은 자연스럽게 실행되지 않는다. 대부분 조직은 기존 KPI, 평가, 예산 체계에 의해 움직인다. 전략이 실행되려면 이 제도들과 충돌을 조정해야 하는데, 실무진에서 해결할 수 없다. 둘째, 혁신은 필연적으로 부서 간 이해충돌을 낳는다. 생산성과 품질, 단기 실적과 장기 경쟁력 사이의 선택은 상위 의사결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셋째, 혁신의 최대 적은 ‘지속성 부족‘이다. 초기 3~6개월이 지나면 현안에 밀려 흐지부지된다. 정기적이고 강제적인 점검 구조가 없으면 혁신은 캠페인으로 끝난다. 넷째, 실행 과정에서는 계획 수정이 필수다. 실패의 내용을 들여다 보고, 학습으로 승인해 주며, 더 나은 내일의 디딤돌 역할을 하게 하는 운영 구조가 없으면 조직은 다시 안전한 과거로 돌아간다. 성공하는 기업의 혁신회의체는 최고 경영진 또는 혁신 임원이 직접 주도한다는 점이다. 혁신은 조직의 힘으로 움직이는 속성이 있다. 혁신은 의지의 문제이고, 의지는 시간과 권한 투자로 증명된다. 혁신회의 주관은 혁신 총괄 임원이 맡고, 참석자는 활동 리더 이상으로 구성한다. 회의 흐름은 ‘보고형’이 아니라 ‘결정형’이어야 한다. 승인, 변경, 조정 등 이슈 개선을 통한 운영 최적화, 더 나은 동력이 나와야 한다. 정기적으로 해야하고, 회의 결과는 즉시 제도에 반영하여야 한다. 현장 데이터가 중심이 되고, 감이 아니라 수치, 팩트로 모니터링 하고, 이슈를 발굴 개선해야 한다. 실제 기업에서 부서장 주관 혁신회의 흐름을 보면, 활동 종합 현황 공유와 테마별 내용에 대한 현재의 이슈를 걸어 토의하고 결론을 낸다. 그 결론에 따라 동력이 생기고 실행력은 배가된다. 다음 회의에서 확인하고 운영 최적화를 통해 한 단계 발전한다. 이러한 혁신회의는 계획~실행~성과까지 매월 진행하는 것이 답이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12-30

눈부시다

12월 첫 주말 낮. 집으로 돌아오는 세상이 눈부시다. 찜찜한 기분으로 갔던 나들이가 나눈 말 몇 마디로 상서롭게 바뀌었으니 말이다. 한 온라인 쇼핑몰에서 해외직구로 컴퓨터 부품 ‘이더넷 어댑터’ 한 개를 발주했었다. 몰 상품 광고면에는 c 타입을 a 타입으로도 쓰는 변환젠더가 사진으로 함께 있었고, c 타입은 가격도 +1,700원이라 되어 있었다. 내 상식으로는 c 타입을 살 경우, 당연히 a 타입 변환젠더도 함께 주는 것으로 보였다. 변환젠더에 대한 어떤 설명이나 조건, 가격 같은 것이 없으니까. 열흘 정도 기다려 발주했던 어댑터를 받았다. 한데, 변환젠더는 없이 어댑터만 달랑 왔다. 순간, 판매자의 트릭에 속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쇼핑몰 고객 문의 창에 변환젠더가 왜 없느냐고 물었다. 주말이어선지 이삼일이 지나도 대답이 없었다. 속은 기분이 더 들었으나 반품은 않기로 했다. 배송비가 변환젠더값보다 더 드니까. 찜찜한 기분에 울며 겨자 먹기로 다이소로 향했다. 붐비지 않았다. 계산대에 있는 젊은 여직원에게 어댑터를 내보이며, a 타입 변환젠더가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친절하게 현품을 찾아 건네주었다. 받은 걸 그녀에게 도로 맡기고, 이층에서 다른 필요상품을 골라 한참 후 계산대로 갔다. 맡긴 것을 찾아 계산하는데. 여직원이 말했다. “선생님은 참 젠틀하세요!” 잘못 들었나 싶어 의아해하는데, 그녀가 다시 젠틀하시다며 이야기를 더 이었다. “젠틀하게 말하시니까요.” 기분이 좋아진 나는, k 신문에 칼럼을 쓴다는 말도 나누며 계산을 마쳤다. “또 올게요” 작별 인사를 하며 바라본 그녀는, 아까 그 얼굴인데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돌아오는 길에 물건을 사며 했던 내 언행을 되돌아보았다. 보통 때와 별반 다르게 하지 않았다. 한데, 그녀는 왜 그랬을까. 문득, 그 아가씨가 ‘눈부시다!’는 마음이 들었다. 진실을 보는 마음이 말에서 드러나 사람을 눈부시게도 한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집에 와서 되새겨보았다. 여직원은 그 말을 직업정신으로 했을 수도, 안 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고 하듯, 말의 힘에 내가 고무된 것이다. 내 마음은 분명, 여직원에게서 희망을 보았으리라. 자연스레 여직원 얼굴이, 아직도 많은 거리에서 지난해 12·3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외치는 20~30대 젊은 얼굴들과 오버랩 되었다. 국민이 미증유의 정치사회 격변을 억지로 겪는 올 세모다. 내겐, 대화 몇 마디로 ‘사람이 눈부시다’고 느낀 때이기도 하다. 느낌이 상서로운 기운 되어 마음에 깃든다. 덕분에, 올해를 눈부시게 보내게 되었다. 이 밝은 기운이 우리 가족과 친지들에게도 스미어, 2026 새해는 모두 눈부신 한해 짓기를 기도한다. 나아가, 올해 사람이 만든 검은 구름이 온 곳을 덮어가는 우리나라도 새해엔 하늘에서 훈풍이 불어와 그 구름을 걷어내면 좋겠다. 그리하여, 밝은 빛 돋아올라 국민이 ‘눈부시다!’하고 환호할 상서로운 날이 빨리 오시라고 두 손 모아 빈다. /강길수 수필가

2025-12-30

폭력의 동반자 크로아티아 ①대크로아티아주의 - 토미슬라브

세르비아의 영원한 맞수 크로아티아는 10세기 초 남슬라브족 중 발칸반도 불가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왕국을 세웠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비잔티움제국과 로마교황 사이에 이해가 맞물리는 현장이다. 크로아티아지역 아드리아해 항구도시 역시 비잔티움제국 영향 아래에 있었지만, 점차 프랑크왕국 카를대제에 의해 복속되고, 북서부와 남동부로 발칸반도가 나눠지면서 두 제국의 영향에서 까닭 없이 보냈다. 긴 역사에 있어서 아주 짧은 기간에 독립왕국을 세웠을 뿐 대부분 이민족 영향을 받으며 제국으로부터 피지배 민족으로 살거나 자치권을 획득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의외의 효과가 나타났다. 현재 아드리아해의 빼어난 풍광을 비롯해 중세 유적들이 크로아티아 곳곳에 산재해 관광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자 국민 생활 수준 역시 몇 단계 상승한다. 크로아티아는 남슬라브족이 그랬던 것처럼 이미 5~7세기경부터 아드리아 해안 지역에 진출해 정착하면서 성장을 거듭한다. 일부 크로아티아 역사가들은 그들은 여타 남슬라브민족과는 다른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키운 샤르마냔(Sarmatian)인의 일파라고 주장하면서 남슬라브민족과 일단의 선긋기를 시도한다. 역사적으로 보헤미아지방과 폴란드 남부를 정복했으나, 발칸반도로 이주하면서 남슬라브족과 섞여 문화가 통합 흡수되고 동화되어갔을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공허한 소리일 가능성이 높다. 세르비아에게 역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수준이랄까? 7세기에 이르러 온전히 발칸반도에 정착한 남슬라브민족은 민족적 기원만 같을 뿐 역사가 전개되면서 단절과 고립, 그에 따른 종교와 경제력 차이, 사회제도, 관습 등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문화를 경험하면서 이어졌던 탓에 이러한 주장이 나올 수 있다. 아드리아해 바닷가에 그리스와 일리리아(Illyria)인들(알바니아인 조상격)이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정착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마지막까지 로마를 괴롭힌 전사들이었다. 이후 로마제국 우산 아래서 풍부한 물산으로 인해 로마제국 소비재 생산지로서 빠르게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해안, 즉 달마티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주로 일리리아인)은 지속적으로 외부의 침략을 받아야만 했다. 캅카스 아르메니아 선조인 아바르족의 침략과 훈족 역시 꾸준하게 약탈을 이어갔다. 로마가 동‧서 로마로 갈라지면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지역은 자연스럽게 비잔틴제국의 영향으로 정교가 깊게 뿌리 내린다. 그리고 훈족의 침략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낳았다. 무주공산이 된 발칸반도에 슬라브족이 몰려들었다. 우크라이나를 지나, 헝가리 판노니아평원(부다페스트 지역 대부분)과 도나우강 건너 발칸반도까지 먼 길을 이동해온 남슬라브민족이 정착하면서 깊숙하게 뿌리내린다. 6~7세기 이곳은 비잔티움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들은 유목민족과는 딴판으로 느리면서도 습관적 이동에 인이 쌓였다. 그러다 기름진 땅을 만나 정주생활을 이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인구가 늘어났다. 이들은 아드리아해 북쪽 바닷가부터 흑해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걸쳐 삶을 이어갔다. 그리스 북서부와 지금의 알바니아,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지방 전체가 남슬라브민족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때로는 훈족과 어깨를 당당하게 하면서, 혹은 아바르족과 손을 잡는 등 비잔티움제국은 물론 게르만족이 세운 프랑크와 대결구도에 돌입하기도 한다. 이로써 발칸 내륙과 아드리아해 도시들은 오롯이 남슬라브민족 차지가 된다. 이때 세르비아, 불가리아, 슬로베니아와 함께 크로아티아 역시 독립적인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터전을 닦는다. 크로아티아 선조들은 달마티아 해안가와 아드리아해 가운데 코르출라 지역 등 여러 섬에까지 정착하면서 영역을 넓혔다. 사실 남슬라브민족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비잔티움제국이 아바르인을 물리치기 위해 크로아티아인을 제국의 군대에 편입했다는 기록(헤라클리우스황제/ 재위 610~641년)이 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비잔티움제국의 뒷배를 믿고 세르비아인과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는 역사적·시기적으로 세르비아와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같은 지역을 두고 서로의 주장이 상이하다는 뜻이다. 크로아티아 주장에 따르면 자신들 선조가 내륙으로는 지금의 헝가리 땅이자, 헝가리 선조들이 최초로 나라를 세운 판노니아 평원에서부터 보스니아 지방을 거쳐 몬테네그로까지 넓은 지역에 걸쳐 자리 잡았다고 거품을 문다. 세르비아 사가들 시각으로선 가당찮은 주장이다. 이들은 비잔티움제국을 근거로 든다. 7세기에는 발칸반도 대부분을 세르비아인들이 차지했으며, 9세기 말에는 달마티아까지 정복했노라 주장한다. 현재 크로아티아 지역 거의 모든 땅을 세르비아인이 정복했다는 말이다. 서로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면, 둘 다 틀렸거나 둘 다 맞는 주장이다. 지도는 역사가 그려놓은 화판이라고 하는데, 제각각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면 답은 없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12-30

퍼즐의 끝에서

성탄의 불빛이 거리를 덮고 연말이라는 단어가 달력 위에 눌러앉을 즈음이면 사람들은 으레 설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계절의 변화가 무심해진다. 성탄이 와도 마음은 조용하고 연말이 되어도 가슴이 먼저 반응하지 않는다. 축제는 여전히 반복되지만 감흥은 해마다 한 겹씩 옅어진다. 어쩌면 우리는 기쁨에 둔감해진 것이 아니라 기쁨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한 해가 이렇게 빨랐던가. 새해라는 말이 입에 붙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또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다. 시간은 분명 같은 속도로 흘렀을 텐데, 체감은 해마다 더 가팔라진다. 빠르다는 감각은 결국 충만함의 다른 이름일까. 아니면 붙잡지 못한 날들에 대한 아쉬움일까. 그 질문 앞에 쉽게 답을 찾지 못하고 또 연말을 맞았다. 돌이켜보면 한 해는 언제나 ‘완성’아니라 ‘과정’으로 존재했다. 시작할 때부터 계획했던 그림이 그대로 실현되는 경우는 드물다. 삶은 늘 예고 없이 방향을 틀고 우리는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 앞에서 임시방편의 선택을 내린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쌓인다. 그 하루들이 모여 한 해가 되지만 그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은 언제나 마지막에 허락된다. 종종 한 해를 퍼즐에 비유해 본다. 수많은 조각들이 제각기 다른 모양과 색을 하고 흩어져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퍼즐의 완성된 그림을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조각이 중요한지, 어떤 조각이 빠져도 되는지 처음에는 가늠할 수 없다. 때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각들이 의외의 자리에서 맞물리고 애써 붙잡고 있던 조각은 끝내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남기도 한다. 그 퍼즐을 맞추는 동안 수없이 망설이고 실수하고 떼어낸다. 이 선택이 옳았는지, 저 결정이 너무 성급했던 것은 아닌지 자문한다. 그러나 퍼즐은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다만 다음 조각을 내밀 뿐이다. 우리는 그 조각을 받아들고 또다시 하루하루를 맞추며 이어가다 보면 퍼즐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낸다. 그 조각들은 무작위로 흩어져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 해의 끝에 다다라서야 조금씩 알아 간다. 기쁨이라 믿었던 순간도, 실패라 여겼던 장면도 모두는 한 그림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인 요소였다는 것을. ‘나’라는 자아를 만들기 위해 이 일이 필요했구나. 시간이 지나가야 했구나를 조금씩 깨닫게 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연말이 되어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삶이 더 복잡한 결을 가지게 되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환희보다는 깊은 이해가 필요해진 나이. 번쩍이는 감정 대신 오래 남는 의미를 찾게 된 시간. 그래서 더 이상 크게 들뜨지 않고 잠잠히 돌아본다. 한 해 동안 내 손을 스쳐간 퍼즐의 조각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많은 사람들의 퍼즐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완성되기를 꿈꾼다. 모든 조각이 빛나지 않더라도 적어도 전체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림이기를 바란다. 상처 난 조각은 그 나름의 결을 지니고 닳아버린 조각은 그 시간만큼의 깊이를 품은 채 제자리를 찾기를 소망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또다시 내년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퍼즐 상자를 받게 될 것이다. 아직은 아무 그림도 알 수 없는 퍼즐을 다시 조각을 맞추며 헤매고, 의심하고, 때로는 웃고 울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의 끝에서도 지금과 같은 자리에서 조금 더 다정한 시선으로 지난 시간을 바라볼 수 있기를 꿈꾼다. 연말은 평가의 시간이 아니라 이해의 시간이라 생각한다.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따지기보다 어떤 조각들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헤아려 본다. 하나하나를 헤아려 보면 자신에게 조용한 박수를 보낼 수 있다. 아무도 대신 맞춰주지 않은 퍼즐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완성해온 자신에게. 성탄의 불빛이, 연말의 소음이 크게 와닿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이미 많은 조각을 품고 살아왔기에. 한 해의 끝에서 퍼즐을 내려다보며 더 환하게 웃는 얼굴의 퍼즐을 향해 다시 한 해를 살아갈 준비를 한다. /김경아 작가

2025-12-30

‘역사혁명’의 시대

역사서들을 편집한 한 책을 두고 논의가 분분했다. 논점인 즉슨 위서냐 진서냐 하는 것이었다. 비유가 좀 끔찍하지만 살인사건이 났다고 하자. 이 사건을 해결하려면 먼저 시신의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그 책은 우리들 눈앞에 버젓이 놓여 있으므로 첫 단추는 꿰어졌다. 이제 범인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 범인도 실명까지 그대로 제시되어 있다. 이제 그가 진범인지를 밝히려면 범행도구와 범행방법, 범행동기까지 밝혀야 한다. 이 가운데 범행동기는 강력히 추정되는 게 있다. 강렬한 민족주의적 이상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없는 역사를 지어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동기가 범행으로 어떻게 이어졌는가를 밝혀내야 한다. 가짜 책을 어디서, 무슨 수를 써서 지어냈느냐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나는 이를 밝혀내면서 가짜라고 주장하는 이는 찾아보지 못했다. 역사학 전문가가 못 되어서 못 찾았는지 모른다. 옛날 책에 근대어가 씌어져 있다든가 하는 등의 주장이 있는데, 엊그제 어느 분의 유튜브 채널을 보니, 그 어휘들이 거의 모두, 하나만 빼고는 옛날 책들에 나온다고 책 이름들과 문장까지 밝혀주는 것이었다. 앉아서 썼느냐 서서 썼느냐를 밝히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책들을 근거로 짜깁기를 한 것인지, 아예 없던 것을 발명을 한 것인지 증거든 추론이든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꾸 범인이라고만 주장하면 우김성 센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논쟁적인 글들을 보며 생각한 것이 하나 있다. 문제와 관련된 역사학적 논구 방법이 좀 더 진취적이고 새로워졌으면 하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이분이 주장한 내용이 다 맞아서가 아니요, 그 패러다임과 방법론이 새로웠기에 훌륭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식민사학의 우격다짐을 밀어낼 방법론, 그때까지 고려하지 않았던 북방민족의 역사서들까지 함께 읽어내는 방법이 새로웠던 것이다. 왜 지금이 ‘역사혁명’의 시대인가? 새롭고 창안적인 방법론이 다투어 제시되고, 그로써 기존 지식의 패러다임을 깨뜨리고 있기에, 바로 ‘역사 인지’의 혁명의 것이다. 컴퓨터 천문학(박창범), 유전자학, 빅데이터를 활용한, 기록과 주장들의 엄밀한 검증, 동북아시아뿐 아니라 다른 문명권(아랍어권, 라틴어권, 산스트리트어권)의 역사서들까지 읽어내고 참조하는 방법, 이와 관련되는, 문명론적 시각으로 인류의 삶을 이동성(mobility) 속에서 포착하는 방법, 여러 언어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적극 활용하는 방법 등이 새로운 역사 인지를 위해 지금 적극 활용되고 있다. 방법론의 창안과 혁신은 이번 세기에 들어와 가능해진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힘입은 것이다. 진위서의 판별과 고대 지리 인식 등에 이와 같은 방법들이 넓게 활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AI 시대는 이와 같은 변화를 더욱 빠르게 촉진할 것이다. 이런 마당에 고루한 문헌 해석과 동북아에 갇힌 시야로 뭘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오늘의 새로움에 한 표를 던진다. 오해는 금물, 그 내용이 다 맞다고 확신한다는 뜻이 아니다. 요점은 그 방법론에 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12-29

청와대시대 재개···민심과 멀어져선 안 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29일부터 청와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지난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가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긴 지 약 3년 7개월 만에 청와대시대가 다시 열린 것이다. 세종 대통령집무실 완공 목표 시점이 2030년인 만큼 이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임기를 마무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재명 정부의 청와대 복귀는 불법계엄으로 조기 퇴진한 전 정권과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하기도 한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도 최근 “청와대로 돌아오는 것은 대한민국을 리부팅(재시작)하는 정상화의 상징”이라고 말했었다. 대부분 국민은 윤 전 대통령의 계엄선포와 무리한 대통령실 이전으로 새 정부가 청와대로 복귀하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이재명 정부는 과거 청와대가 ‘구중궁궐’이자 권부(權府)의 중심지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는 점은 늘 상기해야 한다. 청와대 터는 25만 ㎡에 달해 과거 대통령들은 경내를 이동할 때도 차를 타야 할 정도였다. 청와대로의 복귀가 대통령이 민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대통령도 이를 감안해 본관과 여민관에 설치된 집무실 중 여민관 집무실에서 대부분의 업무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한다. 핵심 참모인 3실장(비서실장, 정책실장, 국가안보실장)도 여민관에서 근무하도록 한 것도 잘한 결정이다. 쟁점이 있을 때마다 대통령이 참모들과 수시로 소통하는 것은 권부의 불통을 막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새해를 맞이하는 이재명 정부 앞에는 어려운 과제가 산적해 있다. 미·중의 패권 경쟁과 북한의 위협 등 외교적 난제가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데다, 고환율·고물가로 인한 경제위기 상황은 갈수록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방선거를 앞둔 여야 정치권은 극한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청와대시대 개막’은 대한민국의 외교·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 갈등을 해소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이 대통령이 새해에는 더욱 귀를 활짝 열고 민심을 챙기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

2025-12-29

국제무대 나선 수성구의 공공캐릭터 ‘뚜비’

대구 수성구의 대표 캐릭터 뚜비가 글로벌 지식재산권(IP) 시장에 진출해 호평을 받았다는 소식이다. 뚜비는 20일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홍콩 일러스트레이션 크리에이티브 쇼에 참가해 홍콩 현지 에이전시와 IP 수출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자치단체 공공캐릭터로서 IP수출 협약은 드문 일로, 지자체 캐릭터의 해외시장 진출 전망을 밝게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망월지 두꺼비를 모티브로 탄생한 뚜비는 공공 캐릭터시장에서 성공한 케이스로 소문나있다. 지난 9월 문화관광부 주최 대한민국 우수문화상품(K-RIBBON)에 최종 선정되는 쾌거를 얻었고, 공공분야에서 굿즈 판매 신기록도 세웠다. 공공캐릭터는 과거처럼 단순히 기관의 상징물로 인식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시민과 소통하고 지역경제를 견인하는 브랜드 자산으로 커가야 한다. 일본 구마모토현의 캐릭터 구마몬의 사례가 이를 잘 입증한다. 구마몬은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공공캐릭터다. 구마모토현에는 역, 버스, 전차, 호텔 등 관광객이 갈만한 곳은 모두 구마몬이 붙어있다. 인형, 라면, 생수, 학용품에 이르기까지 구마몬 캐릭터가 들어가 연간 관련 상품 매출만 1조원이 넘는다. 일본 브랜드 연구소는 구마몬의 성공 이후 구마모토현의 인지도가 전체 지자체 중 32위에서 18위로 급상승했다고 했다. 두꺼비를 소재로 한 뚜비는 친환경적 이미지와 연결돼 대중의 공감대가 큰 캐릭터다. 굿즈 출시 18개월만에 누적 매출액 2억1800만원을 기록해 일반 기초단체 캐릭터 평균 매출액을 훨씬 상회했다. 아직은 지방에 국한된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나 홍콩쇼 참가를 계기로 전국적 이미지를 올리는 노력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 민간기업과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한 상품화에 나서 경제적 가치 증대도 적극 유도해야 한다. 전국적으로 많은 지자체가 캐릭터를 제작, 홍보에 나서지만 성공한 사례는 많지 않다. 홍콩전시에서 받은 뚜비에 대한 시장 반응을 면밀히 분석해 해외진출의 발판으로 삼는 한편 과감한 영역 확장에 나서는 시도도 필요하다.

2025-12-29

치킨집 3만9789개 시대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하니 치킨집이라도 차릴까?” 짧지 않은 경제 불황이 이어질 때면 정년 이전에 회사를 그만두는 이들이 흔해진다. 희망퇴직이 됐건, 권고사직이 됐건 자의 반 타의 반 월급쟁이 생활을 그만둔 이들이 퇴직금을 받으면 쉽게 하는 결정이 치킨집 개업이다. 그러나, 종일 끓는 기름 앞에서 닭을 튀기고, 바쁜 손길로 양념 묻힌 치킨을 포장해도 실상 손에 쥐는 돈은 쥐꼬리인 경우가 태반이다. 배달대행 업체에 주는 수수료와 적지 않은 세금, 거기에 개업할 때 목돈으로 들어간 인테리어 비용까지를 감안해야 하는 탓이다. 그럼에도 벼랑 끝에 몰린 퇴직자 등은 울며 겨자 먹기로 치킨집을 차린다. 한국이 특히 그렇다. 그래서일까. 어느 곳 특정할 것 없이 동네마다 치킨집이 넘쳐난다. 그걸 수치로 증명하는 조사 결과가 최근 발표됐다.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와 프랜차이즈 점포를 합하면 현재 이 나라에선 3만9789개의 치킨집이 영업 중이라고 한다. 여러 말 할 것 없다. 이미 포화 상태다. 가게들의 경쟁이 심한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치킨집 운영에서도 소수만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그걸 알면서도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사람들은 위험한 자영업자가 되고 있다. 치킨 프랜차이즈 가맹점 수는 2018년 이후 매년 1000여개씩 늘어나는 추세다. 당연지사 몇 년을 견디지 못하고 폐업하는 치킨집도 우후죽순이다. 생기는 만큼 없어지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는 것. 적은 월급 받으며 겨우겨우 먹고 사는 서민들이나, 샐러리맨의 옷을 벗고 치킨집 주인이 된 이들이나 너나없이 모두 춥고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있다. 딱한 일이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12-29

인구정책이 미래를 좌우한다

역사적으로도 웅주거목이었던 상주시는 1960년대 후반 인구수가 26만을 상회했지만 2019년을 기점으로 10만 벽이 허물어졌다. 급격한 산업화와 수도권 집중 등으로 50여 년 만에 인구수 약 2/3가 감소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재까지의 감소 추세는 인구 유출이 주된 요인이었지만 앞으로는 자체 감소가 가속화할 전망이다. 인구 그래프의 가장 넓은 폭을 그리던 1954년 출발의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이미 70세를 훌쩍 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소멸과 인구감소는 더 이상 특정 지역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마주한 구조적 위기이며, 이제는 이를 어떻게 관리하고 대응하느냐가 지역의 미래를 좌우하게 됐다. 상주시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2025년부터 인구정책실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인구정책 전환에 나서고 있다. 단기적인 인구수 증가에 그치지 않고, 지역에 머물고 관계를 맺는 ‘사람 중심 정책’을 통해 지속 가능한 지역 활력을 만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상징적인 성과는 지방소멸대응기금 확보다. 인구감소지역을 대상으로 한 투자계획 평가에서 상주시는 기본 배분액에 인센티브를 더해 기초기금 88억 원을 확보했다. 여기에 경북도 광역기금 33억 원을 포함해 총 121억 원 규모의 재원을 마련했다. 이는 단순한 재정 확보를 넘어, 상주시 인구정책의 방향성과 실행력이 대외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시는 이 기금을 바탕으로 ‘청년 LIFE-ON 프로젝트’, ‘상주형 미래인재 교육 플랫폼’, ‘주민주도형 마을리빙랩’ 등 11개 핵심 사업을 추진하며 지역 맞춤형 인구 대응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인구 활력 증진을 위한 현장 중심 정책도 성과를 내고 있다. ‘이안 한복마을’을 포함한 4건의 경북도 공모사업이 선정돼 총 10억 원 이상의 사업비를 확보했고, 마을 단위 활성화 사업이 지역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특히 주민이 직접 기획하고 실행하는 ‘주민주도형 마을리빙랩’은 행정안전부 주관 지방시대 엑스포 우수사례로 소개되며, 상주시 인구정책의 실험성과 확장성을 보여줬다. 저출생 대응 역시 생애주기 전반을 아우르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미혼남녀 만남사업부터 통합아동돌봄센터 조성, 바구니 카시트 대여, 결혼장려금, 공공산후조리원 운영에 이르기까지 삶의 단계별 지원 체계를 구축하며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도시’로의 기반을 다지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광역 단위 정책 평가에서도 점검 대상이 될 만큼 주목을 받고 있다. 청년 정책은 상주시 인구정책의 또 다른 축이다. 일자리와 주거, 커뮤니티를 연계한 청년 정착 플랫폼 구축을 통해 청년이 머무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올해 4월 확장 이전한 청년센터 ‘들락날락’은 취미 클래스와 공유 오피스 운영을 통해 월평균 500명 이상이 찾는 지역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단기 체류 청년을 위한 ‘청년 드림하우스 모락모락’은 11월 착공에 들어가 2026년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고향올래’ 공모사업을 통해 청년창업 지원센터 조성도 추진 중이다. 외국인 정책과 농업 인력 인프라 확충 역시 지역 현실을 반영한 중요한 과제다. 지역특화형 비자사업과 계절근로자 지원을 체계화하고, 대학 및 관계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우수 외국인재의 안정적인 정착을 도모하고 있다. ‘우수 외국인재 단기숙소’ 조성사업은 올해 12월 착공을 앞두고 있으며, 베트남 까마우성과의 협력으로 구축한 계절근로자 원스톱 지원체계는 농가의 인력난 해소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있다. 공공형 계절근로자 기숙사 2개소 건립 추진은 소규모 농가까지 정책 효과를 확산시키는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귀농귀촌과 생활인구 확대 전략도 병행하고 있다. 초기 영농 정착을 위한 소형농기계 지원, 농지 임차료 지원, 주택 수리비 지원 등 실질적인 정주 여건 개선과 함께, 상주서울농장과 이안면 체험 프로그램 등 체류형 귀농귀촌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2026년부터는 ‘상주온시민제도’를 도입해 생활인구 확대에 나선다. 지난 10월 관련 조례 제정을 마친 이 제도는 내·외국인을 대상으로 공공시설 이용 혜택과 시정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지역과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장기적인 인구 유입을 도모하는 새로운 시도다. 인구정책에는 정답이 없다. 분명한 것은, 지역의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사람의 삶을 중심에 두는 정책만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상주시는 앞으로도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며, 인구 감소와 지방소멸이라는 거대한 과제 앞에서 지역 특성에 맞는 전략적 선택을 이어갈 계획이다. 인구를 지키는 일은 곧 지역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상주시의 도전이 지속 가능한 성장에 하나의 해답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곽인규기자 ikkwack@kbmaeil.com

2025-12-28

한해의 마무리

제야(除夜)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마지막 밤이란 뜻이다. 불교에서는 섣달 그믐에 108번의 종을 치는 종교 의식이 있다. 108가지 인간 번뇌를 소멸시키고 깨끗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자는 뜻이다. 인간의 마음을 혼란케 하는 감정과 생각들을 한해의 끝자락에서 조용히 마무리하는 종교적 수행 방법의 하나다. 1년의 마지막 무렵이다. 늘 오는 이때지만 누구나 한해를 되돌아보며 아쉬운 마음을 가진다. 미련이 남거나 후회되는 일, 그리고 감사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가슴을 새삼 요동치게 한다. 올해도 예년과 다르지 않게 다사다난(多事多難)했구나 싶다. 나라뿐 아니라 직장과 한 사람의 개인도 기쁨과 슬픔, 기대와 실망 등으로 얼룩진 한해다. 매년 보내는 해지만 한해 끝자락이 되면 늘 아쉬움이 남는 게 세모(歲暮)의 감정이다. 중국 최초의 시가집인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처음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으나 능히 끝을 얻은 사람이 적다”고 했다. 마무리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교훈이다. 유종의 미와 비슷하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새겨야 할 교훈이 아닐까 한다. 끝과 시작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마지막과 시작은 서로 연결돼 한 끝이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진다. 과거와 미래로 갈라지는 시점일 뿐이다. 끝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시작이란 원인이 있었기에 끝이 있는 법이다. 자연의 순리다. “아름다운 시작보다 아름다운 끝을 선택하라”는 유명인의 말이 생각나는 시간이다. 비록 모자라고 만족스럽지 않아 보이는 한해가 지나가지만 시작의 새해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심기일전(心機一轉)의 시간이다. /우정구 논설위원

2025-12-28

포항시 무탄소 에너지 선도도시 길 열었다

정부가 지산지소형 분산에너지 시스템의 활성화를 위해 첫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에 경북에서는 유일하게 포항시가 선정됐다. 정부가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으로 지정한 지역은 한전을 거치지 않고 지역내 생산된 전력을 인근의 전기 사용자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다. 포항의 주력산업인 이차전지와 철강 등 전력 수요가 많은 기업의 전력비 절감과 함께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획기적 도움을 줄 수 있어 기대가 크다. 포항시가 기후부에 제시한 모델은 무탄소 에너지 공급시스템이다. 영일만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그린 암모니아 기반의 수소엔진 발전소를 통해 무탄소 분산전원을 상용화해 청정전력을 지역 수용 기업에 직접 공급한다는 것. 암모니아에서 청정수소를 추출한 뒤 수소엔진 발전기를 통해 전력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탄소배출이 전혀 발생 않는다. 이 사업의 컨소시엄 업체로는 GS건설과 글로벌 에너지기업인 아모지, HD현대인프라코어 등이다. 무엇보다 기업이 지역에서 생산된 전력을 통해 값싼 전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특구의 장점은 고비용 전기료로 어려움을 겪는 지역 이차전지 및 철강산업에 큰 힘이 된다. 유럽은 2026년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에 따라 무탄소 제품을 우대한다. 무탄소 에너지 공급은 국제적으로 탄소중립에 따른 무역장벽이 높아지는데 대한 대응책이다. 특히 이차전지와 철강 등 해외수출 기업이 많은 포항으로선 꼭 필요한 제도다. 포항시는 인근의 원전과 태양광, 풍력 등 재생 에너지의 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분산형 에너지 공급의 거점을 기반으로 다양한 신재생 에너지 자원을 활용하는 전략에도 집중해야한다.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전력 자급자족 모델 구축하는 데 힘써야 한다. 분산에너지 특구가 지정됨에 따라 전력료가 싼 포항으로 기업을 옮기고자 하는 업체도 늘 것이다. 이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지정으로 포항은 철강도시를 넘어 에너지 자립형 첨단산업도시로 발돋움하게 된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 포항시와 지역경제계의 분발이 필요한 때다.

2025-12-28

외연확장 목소리에 여전히 귀 닫는 장동혁

지난 26일에는 ‘장동혁·한동훈·이준석 연대’가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지만,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즉시 이를 부인하면서 무산됐다. 장 대표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지금은 구체적인 연대를 논의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선을 그었다. 보수세력 연대보다는 당원결집을 우선시하는 장 대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세 사람의 연대 얘기가 갑자기 나온 배경은 장 대표와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통일교 특검법‘을 공동 발의하면서 손을 잡은 데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장 대표의 ‘24시간 필리버스터’를 칭찬하면서 비롯됐다. 세 사람의 연대에는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관계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우선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 강성 지지자들로부터 여전히 배신자 소리를 듣고 있으므로 ‘윤 어게인 노선’을 걷고 있는 장 대표로선 손을 잡기가 쉽지 않다. 장 대표와 이 대표의 경우에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중도 확장이 필요한데다, 개혁신당은 단독으로 전국 선거를 치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양측이 연대할 명분은 충분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계엄이나 탄핵에 대한 관점이 달라 각각의 지지층을 설득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 국민의힘 정당 지지율은 대부분 20%대를 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5일 발표된 전국지표조사(NBS)에서는 국민의힘 지지율이 대구·경북에서 19%까지 떨어진 것으로 드러났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조사 결과의 신뢰성 문제는 따져봐야 알겠지만, 최근 국민의힘에 대한 민심이 차가워지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당원 게시판 등을 둘러싼 당 내분이 격화하고 있는 게 주원인이다. 현재 국민의힘 내에서는 장 대표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계엄 1주년 때 대국민 사과를 발표했던 의원 20여 명은 30일 다시 모임을 열 계획이다. 중도층 외연 확장 없이는 국민의힘 앞날이 위태롭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작 장 대표는 이러한 목소리에 아예 귀를 닫고 있으니 안타깝다.

2025-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