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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어떤 탈선의 추억

대부분 낚시인들이 그렇듯 나도 아버지께 낚시를 배웠다. 아버지와의 낚시는 내 유년의 가장 큰 행복이었으나, 그것은 IMF 사태로 부서졌다. 사업 망한 아버지는 지방을 전전하는 행상이 되어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뵙기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아버지와의 낚시는 흘러간 추억이 되고 말았다. 벌써 25년 전 일이다. 문득 낚시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학교를 땡땡이치고 낚시터로 향했다. 책가방 대신 낚시 가방을 메고 교복 입은 학생들을 피해 터벅터벅 걸었다. 사당역에서 777번을 탔다. “학생이요”라고 안 하고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내 요금통에 넣었다. 수원역에 내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는 화성 봉담읍 해병대사령부까지 왔다. 도로변에는 애기똥풀이 가득 피어 있고, 화물차 매연 아지랑이 너머로 휴가 나가는 군인들이 신나 보였다. ‘화성’ 하면 사람들은 영화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지만 내게는 ‘탈선의 추억’이 깃든 도시다. 아버지와 이따금 찾던 낚시터, 먼저 매점부터 들렀다. 혼자 왔느냐는 관리인의 물음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장료 만이천 원을 냈다. 돌아갈 차비 말고는 한 푼도 없었으므로 빵 한 개조차 살 수 없었다. 낚싯대를 부채꼴로 펼쳐 놓고 내 키만큼 찌를 맞춰 채비를 던졌다. 아버지께 배운 낚시 방법들을 몸이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한 주 전 내린 장맛비 때문인지 수심이 깊어 찌가 자꾸만 가라앉았다. 찌고무를 30센티미터쯤 올리자 그제야 어느 정도 수심이 맞았다. 저 물에 빠지면 나도 머리끝까지 잠기겠지, 그러면 나도 세상도 다 사라질 텐데… 낭만적 우울은 그 나이 때 감기 같은 것이었다. 붉은 노을을 되비추는 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저 속에는 온가족이 함께 모여 앉아 밥 먹던 저녁의 웃음소리가, 온갖 그리운 얼굴들이, 그리고 아버지가 있지는 않을까? 교복 대신 조숙한 쓸쓸함을 입고 찌를 바라보는 동안 산새 소리, 황소개구리 우는 소리, 트럭들이 지나가는 소리, 저쪽 저수지 건너에서 불빛들이 하나 둘 켜지는 소리가 귓가에 글썽거리며 저녁이 왔다. 수면 위로 어둠이 내려앉자 야광찌 불빛들이 어릴 적 내 방 천장에 붙여놓았던 형광별 스티커처럼 반짝였다. 모기가 성가시게 굴어도, 이른 열대야가 목덜미에 땀을 흐르게 해도 그저 물과 하늘 사이의 허공만 바라보았다. 때때로 멍해질 때마다 찌가 올라오는 바람에, 붕어 몇 마리 놓치고는 씩씩, 욕이나 내뱉으면서 밤낚시는 깊어졌다. 옆자리에서 어른들 몇이 술판을 벌였다. 한 아저씨가 “이리 와서 소주 한 잔 해요”하며 손짓했다. 하루 종일 굶어 배가 고팠다. 가스버너에 올린 코펠 속에서 라면이 끓고 있고, 신문지 위에는 편육과 치킨이 펼쳐져 있었다. 맛있는 냄새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스무 살이에요” 거짓말을 하고는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종이컵에 소주를 받아 마셨다. 허겁지겁 라면을 집어 먹었다. 어른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불콰하게 취해 자리로 돌아와 떡밥을 새로 갈아 던졌다.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 캄캄한 물을 바라보니 입질은 없는데 야광찌 불이 춤을 췄다. 꼭 빠가사리나 메기가 찌를 끌고 난리치는 것처럼 보였다. ‘소년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나는 돌아갈 곳이 없는데, 만이천원짜리 결석이 끝나면 어디로 가야할까?’ 지쳐버린 내 그림자가 나를 붙잡고는 어디로도 못 가게 하는 밤이었다. 술을 마신 탓인지 가슴 속에 불덩이가 얹힌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우스운 것은, 밤 깊은 저수지에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소주에 취해서는 한숨 푹푹 쉬며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노래를 부른 일이다. 나는 여태까지 아버지가 마이크 잡고 노래 부르는 것을 딱 한 번 봤는데, 내가 어릴 때 할머니 환갑잔치에서 아버지가 부른 노래가 ‘울고 넘는 박달재’다. 가슴이 터지도록 소리치고 싶었던 질풍노도의 밤, 그러지 못하고 나지막이 노래를 중얼거린 것은 “밤낚시 할 때는 절대 조용해야 한다”던 아버지의 가르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의자에 앉아 잠깐 졸았더니 아침이었다. 나는 지금도 낚시를 할 때면 ‘울고 넘는 박달재’를 흥얼거리곤 한다. /이병철(시인)

2025-06-15

러브 이즈 본

초여름으로 향해 가는 계절,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주 미약한 우울감을 함께 느끼는데, 그럴 때엔 초록으로 물든 강변을 약간의 땀이 날 때 까지 빠르게 걷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찬 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 섬유유연제 향기가 나는 얇고 부드러운 여름 잠옷으로 환복을 한 뒤, 냉장고 앞에 선다. 오늘을 위해 약 한 달 전부터 준비한 청량감이 느껴지는 화이트 와인과 마트 직원의 추천을 받은 프랑스산 치즈를 사왔기 때문. 주황빛으로 저무는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선 자연풍을 맞으며 와인을 따면 묵은 고민이 씻겨가듯 기분이 나아진다. 치즈와 햄도 먹기 좋게 그릇에 놓은 뒤 계절이 바뀔 때에 생각 나는 영화, <스타이즈본>을 튼다. 외모 콤플렉스를 앓고 있는 여주인공 엘리는 식당 주방에서 일하지만, 노래에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다. 낮에는 식당 주방에 일하고 밤엔 공연을 하던 와중, 우연히 톱스타 잭슨 메인을 만난다. 남주인공 잭슨 메인은 당시 최고의 스타로 이름을 알린 유명 가수이지만, 어쩐지 그는 밤새 술을 마시고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길거리를 방황한다. 그런 잭슨은 앨리가 일하는 바에서 우연히 방문하고, 앨리를 만나 점차 사랑이 깊어지게 되는 이야기다. 동시에 앨리는 잭슨을 만나면서 유명한 가수로 데뷔하여 점차 성공하지만 오히려 앨리와는 반대로 잭슨은 어린 시절의 상처와 예술가적 고뇌 속에서 점차 병들어 가며, 영화는 점차 파국으로 치닫는다. <스타이즈본>은 국내에서 2018년 10월쯤 개봉했으며, 나는 그때 실연에 대한 고뇌로 하루하루 생각에 깊게 잠겨 있던 때였다. 사랑은 대체 언제 돌보아야 하는지, 돌봄과 동시에 어느 타이밍에 어느 정도의 크기로 주고 받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몰랐고, 그 정답을 알고 싶었기에 무척이나 괴로웠다. 하지만 점차 외로운 의문 속에 빠졌고, 그 상황이 너무나 답답하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날도 무작정 걷다 영화관에 도착하게 되었고, 우연히 스타이즈본을 관람하게 되었다. 목이 탄 사람처럼 어딘가 불편해진 채로 영화를 관람했는데, 사랑과 동반되는 온갖 상처와 허무함, 조급함과 괴로움, 상대보다 내가 더 우선시되는 알량함과 이기적임 같은 수많은 감정을 모조리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감정이 폭발하면서 결국 상황이 최악으로 악화된다. 잭슨의 추모 현장에서 앨리는 잭슨을 위한 노래를 부르며 결국 이야기를 끝내게 된다. 영화를 다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어쩐지 눈물이 났다. 허탈감이 몸을 감싸며, 결국 사랑은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이 다 소진될 때 까지 가쁘게 걸었던 그날의 기억이, 실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랑은 연인 관계가 끝나고 나서도 아주 오랫동안 이어진다. 미련과 집착에서부터 멀리 벗어날 지라도, 이따금 한 번씩 수면 아래서 떠오른다. 멍하니 누워 있을 때, 소란스럽던 공간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적막에 잠길 때, 무언가 무력하다고 느낄 때에 종종 그 시기의 내가 생각난다. 지난 인연과 시기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련은 아니다. 처음 겪었던 감정의 소용돌이를 온 몸으로 맞았던 그 때의 기억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스타 이즈 본>은 사랑 이야기다. 앨리와 잭슨은 비록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했지만, 앨리는 영화의 막바지에서 잭슨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영화 속에서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시금 처음부터 보지만, 앨리는 이야기 끝 너머에서 잭슨을 오랫동안 가슴 속에 품으며 그녀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사랑의 끝은 계속해서 비참할 수 있지만 우린 늘 애써 노력한다. 애써 고민하고, 애써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애써 표현하고 존중한다. 그 애씀이 내게 더 많은 감정의 풍요를 가져다주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게끔 하며 결국 더 행복해지게 한다. 사랑이 죽어가는 만큼, 내게도 하루하루 수많은 사랑이 태어난다. 나날이 깊어가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 연인에 대한 사랑, 동생과 친구들과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에게까지. 편안함과 존경과 애정 같은 감정의 교류를 자연스럽게 하며 많은 것을 체화하고 있다. 동시에 이미 종지부를 내린 사랑들도 많이 생각한다. 마음처럼 되지 않았던, 무언가 시작하기도 전에 저물었던 수많은 아쉬움의 형태들. 이따금 생각하며 사랑으로 이름을 붙일 수 있고, 지난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확신이 생기므로 외려 감사하다. 어찌됐든 우리 모두가 사랑으로 오래 행복했으면 좋겠다. /윤여진(시인)

2025-06-15

그렇게 설명하면 됩니다

인터넷의 알고리즘은 기가 막히다. 최근 경험한 사연은 이렇다. 갑자기 코쿤과 박나래가 대화하는 영상이 떴다. 업로드된 날짜를 보니 3개월 전에 방송된 프로그램이다. 코쿤은 ‘소식좌’로 유명한 사람이라 그의 영상이 뜨면 내 두둑한 살집을 생각하며 즐겨 본다. 박나래가 코쿤에게 평소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화를 참는 건지 화가 안 나는 건지 묻는다. 그러자 코쿤은 제대 이후 한 번도 화낸 적이 없다면서 화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서 화를 안 낸다고 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코쿤 같은 사람이 현실에 많은 것은 아니다. 며칠 전 민주당에서 새 원내대표 선출이 있었다. 후보로 나온 김병기 의원이 아들 취직 과정에 부당한 압력을 가한 적이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언젠가 김병기 의원 지역구 주민에게서 그를 둘러싼 논란을 들은 적이 있어 지인의 sns에 사실 확인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댓글을 달았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봉변을 당했다. 의혹이 있다면 설명하면 될 일이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후 바로 코쿤 영상이 뜬 것이다. 이런 일이 있고 나니 지난달 대선 후보 2차 토론 때 인상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이재명 후보가 이준석 후보에게 12∙3 계엄 때 국회에 들어와 의결하지 않고 왜 밖에 있었느냐면서 정말 의결에 참여할 의지가 있었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이준석 후보는 이미 의결 시간이 5분 남짓밖에 안 남았고 의결 정족수가 채워졌다는 소식을 받았기에 군인들이 의원을 막았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들어가지 않았다고 상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재명 후보가 ‘그렇게 설명하면 됩니다’하고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이 말에는 함축적인 의미가 있었다. 이준석 후보가 토론에 임하는 태도가 사뭇 화난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선 후보 3차 토론회에서 했던 이준석 후보의 발언 하나가 삐-처리되었고 이준석 의원을 제명하라는 청원이 13일 오후 기준 56만 명이 넘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청원 143만 명에 이어 역대 2위라고 한다. 마감일이 내달 4일이라 청원인 숫자는 더 늘겠지만 현재 56만 명으로도 국민적 분노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본인도 그럴 리가 없다고 놀랐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제명 청원에 찬성한 것은 그 발언 하나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3회에 걸친 토론 내내 눈을 부릅뜨고 화난 얼굴로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이 그 발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설명하기보다 분노하기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나와 입장이 다른 상대를 만났을 때 자칫 잘못하면 그 분노가 종이에 기름 부은 듯 쉽게 불타오른다. 그러나 분노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옳음에 대한 신념보다는 다른 이유가 도사리고 있는 경우도 많다. 언젠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친구를 격한 말로 비난했다가 내 마음속 질투를 발견하고 낯이 뜨거웠던 적이 있다. 설명하기를 선택하려면 코쿤처럼 생각하기와 함께 내 마음 돌보기도 필수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6-15

이제, 시민이 행복한 포항을 이야기할 때이다

요즘처럼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는 처음이다. 세계 경제와 기술 변화, 복잡한 국제 정세, 물가와 기후 문제까지 시민의 삶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속에서 정치가 던져야 할 질문은 언제나 같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늘 하루를 더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지방이 이 역할을 해줘야 할 때이다. 청년들이 떠나고 고령화가 가속되는 현실, 지역 경제의 뿌리가 흔들리는 모습은 포항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자랑스럽게 성장해 왔지만, 이제는 새로운 전환의 시기를 맞고 있다.   바닷가 작은 어촌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철강 도시로 도약한 포항은 많은 도전을 이겨냈다. 하지만 철강에 의존하는 산업구조, 청년 유출, 농어촌 소외 등 우리가 안고 있는 숙제도 분명하다. 이제 철강을 넘어 AI, 바이오, 수소, 디지털 신산업 중심의 미래 산업으로 새 성장동력을 키워야 할 때이다.   바이오 특화단지, 수소 산업 클러스터, AI 기반 신산업 육성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하지만 산업의 성장만으로 시민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성장해도 시민의 삶이 불안하면 그 성장은 의미가 없다.   필자는 평소에 ‘청년이 일할 수 있고, 어르신이 평안하고,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도시’, ‘가족이 살기 좋은 도시’를 꿈꾸고, 그런 도시를 그려가기 위해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우선 남구와 북구, 도심과 내륙, 바다와 농촌이 함께 숨 쉬는 도시여야 한다. 오천의 산업단지, 흥해의 신도시, 구룡포·영일만의 어촌, 송라·기계의 농촌이 저마다 특색을 살려 어우러질 때 포항은 진짜 온전한 도시가 된다. 포항의 힘은 언제나 균형 속에서 빛났다.   행정 역시 책상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믿는다. 좁은 통학로, 끊긴 버스노선, 고장 난 빗물받이…. 그 작은 불편 하나하나가 바로 행정의 출발점이다, 늘 보고서보다 현장에서 답을 찾고 직접 뛰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시민과 함께 만드는 행정이야말로 진짜 행정이다. 예산을 어떻게 쓰고, 복지를 어떻게 설계할지 시민이 논의하고 결정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참여예산제, 시민감사단, 주민자치회, 동네별 정책 플랫폼 등은 보여주기용이 아니라 행정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   정치는 결국 갈등을 조율하는 일이다. 지방행정은 싸움이 아니라 서로 조금씩 양보하며 모두가 살아가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자와 기업인, 어민과 산업단지, 농민과 유통업자 모두가 함께 가야 한다.   포항은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시민들이 지켜낸 저력이 있는 도시이다. 태풍과 지진, 산업위기 속에서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왔다. 이제 그 저력을 바탕으로 한 번 더 도약할 시간이다.   바이오·수소·AI 산업이 포항의 성장을 이끌고, 청년이 돌아오고, 어르신이 평안하고,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노는 도시. 도심과 농어촌이 고르게 살아 숨 쉬는 도시. 환경과 복지가 함께 성장하는 도시.   이 모든 그림은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의지만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시민이 행복한 포항, 살맛 나는 포항. 이제 함께 만들어 갈 시간이다. /김일만 포항시의회 의장

2025-06-15

서울 집값 상승과 지방 민심

서울지역의 집값 상승세가 심상찮다. 한국부동산원이 조사한 6월 둘째 주 서울 아파트매매가격지수는 전주 대비 0.26% 증가하는 등 19주 연속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한 첫 주의 상승 폭은 올 최고를 기록했으며, 서울 전 지역에서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다. 매도자가 물건을 회수하거나 가격을 올려 다시 내놓는 사례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같은 기간 대구지역의 아파트 매매가격은 81주째 하락세를 기록했다. 전세가격은 86주째 떨어져 서울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서울지역 집값이 오르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금리인하 전망, 추경예산 살포에 따른 유동성 증가, 진보 정부에서는 집값이 오른다는 속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요인들이 왜 지방에는 적용되지 않는지 의아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집값은 기본적으로 안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대구처럼 81주째 하락하는 것은 정상이라 할 수 없다. 특히 서울의 집값은 상승하는데 지방의 집값 폭락은 지방에 사는 사람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준다는 점에서 서울과 지방간 또 다른 역차별이다. 집값의 변동은 개인의 재산이 늘고 줄고 하는 문제라 이보다 더 민감한 사안이 없다. 서울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수억 원을 버는데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재산을 까먹는 일이 벌어진다면 지방의 민심이 좋을 리 없다. 지금 추세라면 과거에도 그랬지만 모든 투자가 서울로 쏠려 수도권 블랙홀은 더 심화될 것이 뻔하다. 정부가 말하는 지역균형발전도 사실상 공염불이 된다. 서울 집값은 안정시키고 지방 집값은 정상화시키는 균형잡힌 정책이 나와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6-15

경북 산불 피해지역 장마철 산사태에 대비를

제주에서부터 장마가 시작됐다. 올해는 평년보다 7~10일 정도 빠르게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니 영남지역은 다음 주부터 본격적인 장마철에 접어들 전망이다. 지난주 부산과 경북 일부 지역에 내린 집중호우로 침수 피해가 발생했다. 지난 3월 역대급 산불로 피해를 입은 경북 안동, 영덕 일부 지역에서는 산사태가 우려돼 주민에게 사전 대피 권고를 내리기도 했다. 안동 60mm, 의성 81mm, 영덕 78.7mm 내린 비에 산불 피해지역의 긴장감은 예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경북지역 산불 피해지역은 규모가 워낙 넓은데다 산림 등이 몽땅 불타버려 곳곳이 산사태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나무가 소실된 산지의 지반이 약해져 있어 많은 비가 내리면 흙이 유실되면서 산사태 발생 우려 가능성이 높다. 경북 산불 피해지역 주민들은 이른 장마 소식에 벌써부터 걱정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산사태 취약지에 대한 사전 대책 마련에 나고 있으나 산불 피해 면적이 서울시 면적의 1.5배에 달할 정도로 넓어 사전 조치를 취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특히 지구촌 기후변화로 좁은 지역에 짧은 시간 많은 비가 쏟아지는 국지성 호우가 자주 발생하는 시기다. 당국은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산불 피해지역에 대한 감시활동을 적극 벌여야 한다. 주민들도 당국의 재난문자 발송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피장소 확인 등 만약의 사태에 철저히 대비를 해야 한다. 최근 10년간 산사태 등 풍수해로 인한 사상자 170명 가운데 60대 이상 고령자가 절반을 넘었다. 소극적 대응이 인명피해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아직도 산불 발생으로 인한 피해로 복구도 못한 채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올 여름에는 산불피해가 산사태로 이어지는 2차 피해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기상당국은 6월 중순 필리핀 서쪽 해상에서 열대저압부가 발달 중이며 일부는 태풍으로 발달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장마철 폭우와 태풍 등 여름철 재난 발생에 보다 과학적이고 선제적인 대응책을 강구해 주민의 안전을 지켜야 할 것이다.

2025-06-15

‘리박 스쿨’을 생각한다

낯선 이름의 단체가 눈과 귀를 자극한다. 듣도 보도 못한 ‘리박 스쿨 Rhee Park School’이다. ‘리박 스쿨’은 ‘이승만 박정희 학교’를 어설픈 영어로 단순화한 것이다. 2023년 7월에 개설된 그들의 홈페이지에는 ‘대한민국 역사 지킴이’라는 부제(副題)가 달려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대상이 역사를 중심으로 진행될 것을 예고하는 부제다. 이 조직의 본질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자유를 지키고 싶다면 이승만과 박정희를 배우라.” 이 구절 바로 다음에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근대화와 자유 정신, 한강의 기적을 만든 박정희 부국 대통령의 산업화를 연구하는 아카데미 단체입니다.” 하는 설명이 뒤따른다. ‘리박 스쿨’은 부패하고 타락한 전직 대통령들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단체다. 그들이 설립한 연구소와 협회는 역사 체험을 바탕으로 한 조직적인 이념 전파, 한국과 일본의 친교와 상생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과업 수행을 위해 그자들은 주니어 역사 교실, 바로 보는 현대사 같은 사업에 매진해 왔다. 이승만과 박정희로 대표되는 친일 극우 이념을 역사로 포장하여 나이 든 세대는 물론이려니와 어린 세대까지 세뇌하려던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탐사 전문 매체에 따르면, ‘리박 스쿨’은 국민의 힘 같은 보수 정치권을 지지하는 ‘자손군(댓글로 나라를 구하는 자유 손가락 군대)’을 운영해 왔다. ‘리박 스쿨’은 최소 4년 전부터 다수 보수단체에 ‘자손군’ 양성 방법을 강의함으로써 조직적인 댓글 공작원들을 길러온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일부 언론 매체는 ‘리박 스쿨’을 ‘자손군’ 양성 사관학교로 규정한다. 이와 아울러 ‘리박 스쿨’은 늘봄학교 강사 자격증을 발급해 초등학교에서 왜곡된 친일 극우 역사관을 전파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선 댓글 조작 의혹을 받는 ‘리박 스쿨’ 손효숙 대표는 여러 가지 이름의 보수단체를 동시에 운영하면서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뉴라이트 역사관을 전파해 왔다고 한다. 내란 수괴가 즐겨 사용한 용어 ‘자유’가 ‘리박 스쿨’ 곳곳에서 되풀이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자유 정신, 자유 손가락, 자유 대한민국 같은 표현에 담긴 ‘자유’를 다시 생각한다. 자유의 대전제는 책임과 의무다.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이 규정하는 한도 내에서 우리는 자유를 선언하고, 실천하며 살아간다. 특정 집단과 조직만을 위한 자유는 정신적 폭력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승만이 건국한 나라가 아니라, 3·1 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가 세운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를 일으켰다가 시민들에게 쫓겨난 독재자에 불과하다. 그들이 부국 대통령 운운하는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획책하다가 부하에게 사살된 타락한 권력자다. 수많은 노동자와 농민의 피땀 어린 희생 덕분에 우리는 가난과 후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유 대한을 부르짖는 자들이 내세우는 한국과 일본의 상생과 친교는 뉴라이트 역사관으로 무장한 자들의 최종목표를 드러낸다. 일본의 일개 신민(臣民)으로 살고 싶은 친일 부역 극우 맹동주의자들의 망발과 망언과 책동이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를 바란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6-15

국힘, ‘쇄신·통합’ 리드할 원내대표 나올까

국민의힘이 오늘(16일) 의원총회를 열고 당 쇄신과 대여투쟁을 리드할 새 원내대표를 뽑는다. 원내대표 경선에는 일찌감치 출마를 선언하고 선거운동에 뛰어든 3선의 송언석(김천)·김성원(경기 동두천시양주시연천군을) 의원 간 ‘계파 대결’이 예상됐지만, 4선의 이헌승(부산진 을) 의원이 등록 마감일인 14일 출사표를 던지면서 3파전 대결 구도가 됐다. 송언석 의원은 당의 구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대구·경북(TK)에 기반을 두고 있고, 김성원 의원은 지난 대선 경선 당시 한동훈 후보의 캠프에서 활동해 친한계로 분류된다. 이헌승 의원은 김·송 의원과 비교해 계파색이 옅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초 이헌승 의원의 후보등록 전에는 판세가 송언석 의원에게 유리하다는 분석이 많았다. TK(25명)·PK(33명) 출신 영남권 의원만 58명으로 전체 의원(107명)의 과반이 훌쩍 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주류세력인 친윤(친윤석열)계는 현재 공통적으로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의 ‘5대 개혁안’에 부정적인 기류가 강하다. 그러나 PK 출신 이 의원의 출마로 송 의원에게 쏠릴 것으로 예상됐던 영남권 표심이 분산할 가능성이 커져 대결 구도가 복잡해졌다. 당내에서는 이번 원내대표 경선의 경우 당내 계파나 지역 기반보다는 각 후보에 대한 의원들간 친소관계에 따라 판세가 정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국민의힘 차기 원내사령탑은 누가 되든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 당장 계파별로 사분오열된 당을 통합시켜야 하는 데다, 정부 권력남용도 막아야 한다. 내년 6·3 지방선거도 지금부터 대비해야 한다. 게다가 민주당에서 국민의힘을 해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공개적으로 나오고 있다. 민주당은 일찌감치 ‘당 소속 대통령이 내란·외환으로 파면되면 정부가 해당 정당의 해산 심판을 헌재에 청구한다’는 내용의 정당법을 발의해 둔 상태다. 국민의힘이 이러한 ‘한계상황’를 극복하려면 당내 리더십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려면 차기 원내대표가 지방선거 공천권에 혈안이 된 기득권 세력의 대리인이 되는 것은 절대 막아야 한다.

2025-06-15

포항지진 트라우마, 통합적인 대응책으로 지혜롭게 대응해야

포항지역 ‘핫이슈’로 떠오른 포항지진에 관심을 두면서 개인 및 집단 트라우마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지진충격으로 50만 포항시민들이 경험한 공포와 고통은 집단 트라우마에 해당한다. 시민들은 재산상의 피해는 물론이고 불면증, 악몽, 불안 등의 정신적 고통도 받았다. 단기간이 아닌 오랜 세월 동안 생활의 안정감을 훼손하는 상처, 즉 트라우마를 남겼다. 상처의 깊이와 정도에 따라 개인별로 심리적 치유가 필요하지만, 시민들이 공유한 집단적 상처도 함께 치유해야 한다. 지진 재난의 의미를 재정의하고 기억하며 기념하는 상징물 설치, 가해자의 진정성 있는 사과, 그리고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 배상은 집단 트라우마 치유의 방법이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고, 시민들의 불안과 고통을 덜어주는 가시적인 노력을 기울일 때 아픔과 분노의 기억을 긍정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포항시민들은 지진 트라우마에 대해 정부와 관계자들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잘 알고 있다. 포항시와 시민단체, 언론이 포항 지진의 발생 원인 규명과 포항 지진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헌신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다. 지역의 일부 변호사와 시민들은 정신적 고통에 따른 정신적 위자료 청구 소송에서도 승소했다. 포항시민이 민사 2심 소송에 참여함으로써 지진 트라우마를 통해 소속감, 공동체 의식, 연대성 및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기여했다. 집단 트라우마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 있다. 책임을 져야 할 기관과 행위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신한다. 이들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약화시키며, 피해자가 자신의 기억을 점차 잊도록 유도하는 ‘망각의 전략’을 은밀하게 동원한다. 포항지진 발생 이후 정부는 지진의 진상을 규명하고 재산 피해에 대한 보상을 위한 지원금 지급, 새 집 제공, 그리고 도시 재생을 위한 복지시설 신축 등 가시적인 조치를 취했다. 분노를 급히 가라앉히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정부측 변신의 조짐은 2024년 8월 검찰의 수사 결과에서 보였다. 지진과 관련해 정부 관계자들을 불기소 처분하겠다는 발표에서 시작됐다. 이어 지난 5월 13일 고등법원 재판관들은 민사 1심 판결을 뒤집는 판결을 내렸다. 정부는 유명 로펌의 변호사를 동원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실과 명분을 제공받았다. 아직 대법원의 판결이 남아 있는 상황이지만 정부는 유명 로펌의 변호사를 통해 1조 5000억 원의 예산을 절감하는 큰 효과를 거뒀고, 변호사는 성공 보수를 받을 기회를 얻었다. 정부가 계속해서 ‘고통과 불안의 방관자’로 변신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중요한 것은 포항시민들도 함께 변신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진의 책임자를 명확히 하고, 피해에 대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결집력과 실천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 포항지역의 변호사와 법학자들은 대구고등법원에서 패소한 결과를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하도록 ‘상소문’을 최대한 잘 작성해 대응해야 한다. 지진 피해자로서 피해 보상을 받을 권리를 가진 주체임을 개인 혹은 집단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지진 트라우마 치유가 개인적인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되며 집단의 고통으로 재정의해야 한다. 과학적, 법적, 제도적, 심리적, 집단적 치유를 ‘통합적인 대응’으로 전환하고, 우선순위를 정해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양만재 포항지역사회복지연구소장

2025-06-12

감정의 공공성

21대 대선이 이재명 정부의 탄생을 알리며 마무리됐다. 지난 선거 과정을 복기할 필요가 있을 텐데,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통계 지표가 있어 짧게 다뤄보고자 한다. 한국갤럽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을 뽑은 유권자 다수는 ‘계엄심판/내란종식’(27%)과 ‘직무/행정 능력’(17%)을 투표 이유로 꼽은 반면, 김문수 후보를 택한 사람들은 ‘도덕성/청렴’(33%)과 ‘이재명이 싫어서’(30%)였다고 한다. 비상계엄과 탄핵 이후에 이루어진 대선이었음에도, 보수 유권자들 상당수는 상대 후보에 대한 반감만으로 투표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악감정에 편승하는 정치가 출현한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언제까지 이런 혐오 사회를 방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새 정부 출범에 발맞추어, 모두가 자기감정을 돌아볼 시간을 가져봤으면 한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오쓰카 에이지는 이성과 합리가 아니라 감정의 교환이 사회를 움직이는 유일한 엔진이 되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감정 이외의 커뮤니케이션을 기피하게 되는 상태의 지속을 “감정화하는 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 즉 사람들의 자기 표출이 감정의 형태로만 드러나고, 바로 그러한 감정을 기반으로 해서만 유일한 관계성이 통용되는 사회가 굳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타인의 행위와 감정에 대한 공감이 사회 구성의 근간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속한 세상에서는 공감할 수 있는 것보다는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나 의견을 더 많이 마주하며 살아야 한다. 감정적인 공감만으로는 제대로 된 사회가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분명 인간은 공감을 통해 연결된다. 그러나 공감할 수 없는 감정과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를 묻는 단계를 건너뛰고 공감이 커다란 감정으로 직결되는 것은 위험하다. 공감하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자세를 자명하게 수용하고 자기와 의견이나 생각이 ‘다른’ 차원의 지평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멀리하는 것이 사회적 태도로 성립해버리면 정치 그 자체가 실종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쓰카 에이지는 아담스미스가 말한 “도덕감정론”에서의 자기 내면의 ‘중립적 관찰자’를 강조하고 있다. 나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직접 공명시키는 게 아니라 자기 내면에 중립적 관찰자를 두고 그것이 자신과 타인의 감정 및 행위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의 감정을 스스로 다스리고 반성적으로 돌아봐야한다는 제안이기도 하다. 사실 이 자체는 너무 당연한 삶의 자세 아닌가? 자기가 너무 ‘감정적’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두가 매번 점검하며 살고 있지 않나? 이 당연한 태도가 왜 매번 정치의 영역에서는 소실되는지도 다시금 성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공감할 수 없는 감정을 오직 불쾌하다고만 받아들이고, 정작 그러한 불쾌함의 성격을 판단하거나 관찰해줄 중립적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분석보다는 단번에 감정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만을 선호하는 정신을 우리는 ‘반지성주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감정 바깥에 설 필요가 있다. 자기감정을 공공화하는 일은 여기서부터 가능하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6-12

나의 장례식은 웃음이 많았으면 좋겠다

소대(燒臺)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니 막재가 있었나 보다. 절집에서 망자의 옷가지나 소지품을 태우는 장소를 ‘소대’라고 한다. 검은 옷을 입은 유족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 모양이다. 슬퍼하는 이도 있고 서로 장난치며 웃는 이도 있다. 생전 어디선가 한번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뜩 들어 법당에 차려진 망자의 영정 사진을 힐끗 쳐다봤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남자다. 영가단에 합장하여 예를 표했다. 요즘은 찾으래야 찾기 힘든 곳이 장의사 간판이다. 길을 걷다 보면 동네마다 관을 잔뜩 쌓아놓은 가게가 보이곤 했다. 당시엔 집에서 장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객사하면 시체가 원혼이 붙은 채 구천을 떠돈다고 생각했고 악귀로 변해 사람들에게 해코지한다는 말을 찰떡같이 믿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시신을 집으로 모시려고 애썼다. 병원에 있다가도 죽을 때가 되면 집으로 모시게 된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여우도 죽을 때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고 하지 않는가. 예전에는 돌아가시기 전에 집으로 모셔가면 좋으련만 세상살이가 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숨을 거두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땐 병원에서는 시신 입에다 수동식 인공호흡기를 물리고 열심히 공기를 손으로 주입하면서 집으로 모셨단다. 그러고는 마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집에 돌아오신 줄 아셨나 봅니다.” 망자의 가족인들 이미 돌아가셨는지 알지만, 편하게 집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치부하고 장례 절차를 밟게 된다. 전화로 장의사 부르고 곧이어 염한다고 가족들은 시신 곁에 모여야 한다. 이때부터 집안에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정이 많았던 할머니셨고 많이 따랐지만, 이상하게 그날은 무서웠다. 아마 정을 떼고 가시려고 했나 보다. 세상이 바뀌었다. 요즘은 거의 다 객사한다. 집에서 장례 치르는 집이 없다. 옛날엔 상을 당하면 상주는 삼일을 불식(不食)한다고 하여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래서 상주에게 미음이나 죽 같은 것을 가져와서 먹이곤 했다. 요즘은 상주도 잘 먹고 잘 자고 샤워 시설까지 갖춘 방에서 잘 씻는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씻는 것은 고사하고 양치도 못 해 입에서 군내가 진동한 기억이 난다. 슬프다고 너나없이 술을 권하던지 정신은 해롱거렸고 속은 거북했다. 삼베옷에 살갗이 쓸려서 밤엔 따갑고 쓰라렸다. 지금은 삼베옷과 대나무가 사라졌다. 서양처럼 검은 양복 빼입고 있으면 된다. 모든 것을 상조회에서 와 조금도 불편함 없이 해 준다. 서세원 장례식장에서 개그맨 김정렬이 선배의 마지막 가는 길에 춤을 춘 것이 화제였다. 세상 구경 제대로 하는 기안84라는 친구는 마다가스카르라는 나라에서 기이한 장례문화를 소개한다. 다 같이 춤을 추는 축제 같은 장례문화였다. 지금까지 변화된 장례문화를 볼 때 내가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그때는 장례문화가 지금보다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지 않을까. 내 장례식에는 슬픔보다는 웃음이 더 많았으면 싶다. 그리고 제사상 차림 같은 것은 없이 그냥 하늘로 가고 싶다. 많이 먹으면 무거워 잘 날지 못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마지막에도 웃고 싶을 뿐이다. /노병철 수필가

2025-06-12

軍에 군기가 없다면

군인이란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부대조직의 일원으로 이들은 전투에 필요한 장비와 기술을 갖추고 항상 전쟁에 대비하는 집단이다. 중국 고사에 등장하는 침과대적(枕戈待敵)은 군인들이 창을 베개 삼아 자면서 적과 대처하는 모습을 표현한 한자 말이다. 밤낮없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군인이야말로 진정한 국민의 군인이다. 이처럼 군은 언제 어느 때나 경계 태세를 게을리 할 수 없고, 전쟁이 나면 목숨도 기꺼이 바쳐야 군인답다 할 것이다. 백제 계백장군의 황산벌 전쟁은 전투에서 승리한 나당연합군의 위력보다는 나라의 존망을 걸고 끝까지 목숨으로 항전한 계백과 그의 부하들의 얘기가 훨씬 감동적이다. 군인정신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필수 요소임으로 군에서는 군인정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군인 복무 규율에도 군인정신은 임전무퇴의 기상과 죽음을 무릅 쓴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이라 한다. 군대의 명령은 태산과 같이 무겁다는 말은 군인정신의 중요함을 가르치는 교훈이다. 군의 기강을 이르는 군기(軍紀)는 상명하복의 지휘체제를 유지하는 규율이다. 지금은 군부대도 민주화 바람의 영향을 받아 과거 같은 살벌한 군기는 없겠지만 그래도 군은 군기의 엄격함이 있어야 기강이 서는 법이다. 대구 50사단에서 황당한 총기 분실 사고가 발생했다. 신병이 소총을 렌터카에 두고 내린 사실이 사흘 뒤에 알려지고 그제서야 총기가 회수되는 위험천만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연히 군의 기강 해이가 도마에 올랐다. 군에 군기가 없으면 오합지졸 소리밖에 듣지 못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6-12

분위기 고조되는 경주 APEC, 역량 총결집을

지난 10일 이재명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통화에서 11월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요청하면서 APEC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는 분위기다. 탄핵소추 파동과 대선 등으로 잠시 소원했던 APEC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살아난 것은 다행한 일이다. APEC 행사의 국가적 중요성에 비춰보면 하루라도 빨리 행사의 성공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기해야 할 것이다. 전화 통회에서 두 정상은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의 성공을 기원하며 내년도 APEC 의장국인 중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이어가기로 공감했다고 한다. APEC은 세계 21개국 정상이 참석하는 세계적 외교 이벤트다. 특히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정책과 급변하는 글로벌 시장 환경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는 세계가 주목하는 행사라 하기에 충분하다. 미중 갈등 속에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함께 참석한다면 한국은 외교의 장(場)으로서 세계의 이목을 받을 수 있다. 부산 APEC보다 준비기간이 짧은 경주 APEC은 이제 불과 4개월여 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 21개국 정상과 각료, 언론인 등 2만여 명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되는 APEC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불철주야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양금희 경북도경제부지사는 10일 APEC 준비상황을 브리핑했다. 주요 시설 사업들은 9월 중순 경 마무리된다고 밝히고 완벽한 행사를 위해 공사 일정을 앞당겼다고 했다. 특히 이번 APEC에 처음 시도되는 문화 분야 장관급 회의가 경주에서 열려 천년고도 경주를 알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경주 APEC은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열리는 세계적 빅 이벤트로 국가적으로는 경제위기 극복과 국격을 높이는 기회의 장이 될 수 있다. 한편으로 행사가 열리는 경주는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로 부상할 수 있는 기회다. 행사 준비와 함께 천년고도 경주를 알리는 관광인프라 확충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경북도 기대대로 행사가 성공적으로 개최되면 경주가 세계 10대 글로벌 관광도시로 도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025-06-12

포항지진 판결, 대법원이 사법정의 세워달라

포항시와 정치권, 시민단체가 지난 11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을 찾아 포항지진과 관련한 5·13 대구고법 항소심 판결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고, 포항시민 전체의 이름으로 호소문을 제출했다. 대법원 방문에는 이강덕 포항시장과 김일만 포항시의회 의장, 김정재(포항 북구)·이상휘(포항 남구·울릉군) 국회의원, 포항지진범대위와 범대본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이강덕 시장 일행이 대법원까지 가서 포항시민의 호소문을 전달한 것은 항소심 결과에 대한 지역사회의 실망과 분노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 포항시민들은 호소문에서 대법원이 전원합의체를 통해 공명정대한 판결을 해 줄 것을 촉구했다. 포항시는 그동안 대법원 상고심을 앞두고 전문가 자문회의, 포항지역 변호사 공동대응 간담회, 대시민 토론회 등을 거치며 항소심의 부당한 판결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해왔다. 지난달 대구고법 민사1부는 대구지법 포항지원 1심 재판부가 지난 2023년 11월, 포항지진(2017년 11월 15일 5.4규모 본진, 2018년 2월 11일 4.6규모 여진)은 국가의 배상책임이 있다며 주민 1인당 200만~3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을 뒤집고, “국가배상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2심 소송인단은 49만9881명에 달했다. 지진 발생 당시 포항 인구(51만9581명)의 96%에 해당하는 숫자다. 포항전체가 충격에 빠질 수밖에에 없었다. 대법원이 호소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7~8년 전 지진에 대한 포항시민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포항지진은 여러 과학적 조사와 국가 조사보고서를 통해 정부 산하기관이 주도한 지열발전사업의 부실한 관리와 넥스지오 컨소시엄의 무책임한 시추작업이 원인으로 이미 밝혀졌다. 그런데 항소심에서 포항 지진이 인재(人災·유발지진)이긴 한데, 정부 과실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는 판결을 한 것에 대해 포항시민들이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 최종심인 대법원에서는 피해자들의 정신적인 고통을 충분히 감안해서 실질적인 손해배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정한 판결을 해 주길 바란다.

2025-06-12

사회를 피폐하게 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이재명 대통령이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통령의 취임사처럼 분열의 정치가 아닌 양보하고 타협하는 정치를 하길, 내란을 종식하고 사회통합과 경제성장을 이루는 대통령이 되시길 희망한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 가장 절실한 것 중 하나는 사회통합이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근거 없는 음모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포항시 북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직을 5년째 맡고 있다. 사실 필자처럼 본업이 따로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선관위 위원직은 시간적으로 부담이 되는 일이다. 이번 대선처럼 큰 선거가 있으면 선거 몇 달 전부터 정기적으로 위원회가 있기 때문에 수시로 선관위 건물에 가 위원회 의결에 참여한다. 위원들이야 위원회만 참석하면 된다지만 선관위 직원들은 선거 몇 달 전부터 매일 야근을 하며 선거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선거일이 되고 투표가 끝나면 엄격하게 관리되던 투표함들이 개표 장소로 모이고 선거관리 위원들과 선관위 직원들 그리고 개표사무원 수백 명이 모여 밤새 개표를 한다. 개표사무원들의 개함과 개표· 개수를 거친 투표용지들이 바구니에 담겨 전달되면 선거관리위원들은 차례차례 이를 검수하고 최종적으로 선거관리위원장의 확인을 마치면 개표 결과가 확정되어 공표된다. 필자는 2021년 포항시 북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으니까 이번 6월 3일 대선으로 벌써 네 번째 밤을 새웠다. 20대 대통령 선거와 2023년 지방선거, 2024년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고, 이번 보궐 대선을 치렀으니 말이다. 바쁜 가운데에서도 이 선거관리위원직을 수행하는 데엔 이 직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가 큰 원동력이 되었다. 고향인 포항의 선거관리위원회에 소속되어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공정하게 치를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그렇기에 아무리 바빠도 어떤 일보다 선관위를 우선으로 하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선관위 위원직을 수행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총선 때부터 스멀스멀 활개를 치기 시작한 부정선거론은 이 자부심을 흔들기 시작했다. 선관위 위원이라고 하면 부정선거 어쩔 거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확정된 판결로 부정선거가 없었음이 여러 번 밝혀졌다고 설명해도 이미 부정선거 음모론에 심취한 사람들은 선관위 위원들마저 부정선거에 연관된 사람으로 취급하며 비아냥거렸다. 대한민국의 선거가 부정선거로 치러지고 있다는 음모론은 선거를 공정하게 만드는 데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보였다. 사람들의 불신과 의심을 키우며 선거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를 깨뜨렸고, 진실과 허위의 경계를 흐려지게 했다. 필자와 같이 맡은 자리에서 사명감으로 일하던 사람들을 맥 빠지게 했다. 음모론은 많은 사람들이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게 만들고, 다수의 국민이 선출한 정부에 대한 정당성을 흔든다.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을 자극해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폭력적 집단행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지난 12월 3일부터 벌어졌던 일들을 통해 이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지 않았던가. 내년 지방선거를 치르면 필자의 선관위원으로서의 임기는 끝날 것 같다. 부디 내년 지방선거만큼은 다시 명예롭게, 자부심을 느끼며, 개표일 밤을 새울 수 있길 바라본다. /김세라 변호사

2025-06-12

소나무 향 따라 맨발로 걷는 북천수

포항 북송리 북천수(北川藪)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숲 중 3번째로 긴 숲이다. 조선 철종 때 조성된 북천수는 오래된 지명의 향기를 지닌다. 북천의 숲이라는 뜻으로 곡강천의 다른 이름인 북천에서 유래했다. 예로부터 주민들은 북천의 물길을 따라 논과 밭을 일구었다. 가물어도 북천수가 마르지 않으니 생명의 젖줄이라 불렀다. 그 세월을 말하듯 지금도 그 옆길을 걷다 보면 시간이 잠시 숨결을 고르는 듯하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그 길에 들어선다. 소나무가 드리운 그늘 아래여서 햇살도 새소리도 부드럽다. 북천수 산책로는 잔돌과 흙이 동시에 밟혀 나 같은 맨발 걷기 초보자에게는 발걸음을 떼기가 조심스럽다. 그러나 맨발로 걷는 경험은 눈이 아닌 발로 세상을 다시 읽어내는 일이 아닌가. 흙의 온도, 잔돌의 감촉, 마른 솔잎의 간지러움까지, 나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발바닥이 전달하는 감각으로 주변을 인식하기 위해 노력해 본다. 세상과 나 사이에 있던 어지러운 고민들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 같다. 문득 김훈 소설가의 ‘자전거 여행’ 책 속 문장이 떠오른다. “나는 걷는다. 걷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이다.” 걸음을 옮기며 시공간을 통과하는 행위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유의 흐름에 빠지게 된다는 의미인 것 같다. 작가의 표현처럼 나는 북천수 솔숲 길을 맨발로 걷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생각을 많이 한다. 나는 왜 늘 빠르게 걸었을까. 무엇을 향해 그리 바삐 살아왔던 걸까. 내 이마에 땀 한 줄기 흐르고, 저녁노을이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 스며들기 시작할 즈음, 나는 한동안 생활하면서 천천히, 여유롭게, 걷는 법을 잊고 지냈던 일상을 회상한다. 북천수를 거닐 때처럼 느리게 걸어야 바람의 결을 느낄 수 있고, 나무 향을 맡을 수 있으며, 풍경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에 솔향이 섞여온다. 곧게 뻗은 소나무 숲은 바람을 타고 진한 송진 냄새를 풀어낸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시간, 마음속 깊이 잠들었던 유년시절 고향의 뒷산 소나무 숲에서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기억의 편린이 불쑥 되살아나 잠시 그리움에 젖어든다. 솔방울을 던지다가 다람쥐나 청설모를 만나면 그 뒤를 쫓아 내달리던 추억이 생각나서 웃어본다. 소나무 우듬지 사이로 새가 날고 있다. 이름을 모르는 작은 새가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옮겨 다니며 노래한다. 어떤 날은 곤충이 지나가며 흔적을 남기는 것을 보고, 또 어떤 날은 반려견이 가족과 발자국을 흙 위에 찍고 지나가는 것을 본다. 이 숲길은 사람만의 길이 아니다. 새와 곤충, 동물이 함께 다니는 생명의 오솔길이다. 산책로 중간쯤에는 오래된 정자가 있다. 사람들이 앉거나 누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편안한 자리다. 나도 그곳에서 고요히 눈을 감는다. 그러면 햇살이 내 무릎 위에 가만히 내려앉고 나뭇잎 그림자가 내 등에 업힌다. 포근하다. 그 순간부터 정자는 나에게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마음이 한 뼘 자라는 공간이 된다. 때마침 북천수 소나무가 노래를 들려준다. 솔바람과 새와 더불어 나지막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마치 시간이 흐르는 소리 같다. 어릴 적 외할머니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할 때였다. 맑은 물소리와 한데 어우러져 하얀 비누 거품이 떠내려가던 그 장면처럼, 북천수도 지금 그렇게 시간을 씻어 내며 흐르고 있는 듯하다. 나는 다시 걷는다. 맨발로 조심조심 한 발자국씩 내딛는다. 발바닥이 말해주는 촉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며, 소나무 향기를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발끝으로 세상을 느끼고, 차분한 숨결로 시간을 받아들인다. 그 단순한 행위가 지금 내 마음을 맑게 비운다. 내가 걷는 북천수 길이 곧 생각의 자리이자 삶의 중심이 되는 것 같다. 나의 두 눈 가득 맺히는 북천수 길이 정겹다. 앞으로도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소나무 향기를 따라 맨발로 걸으리라. 북천수에서의 저녁, 붉은 노을이 숲에 번지면 새들이 날아든다. 그 풍경을 눈에 담으니, 소나무 숲에서 위로받은 나의 하루가 조금은 더 단단해진 느낌이다. /정미영 수필가

2025-06-11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면서

우리나라 연극계 두 노장의 마지막 무대라고 하길래, 또 까마득한 옛날 봤던 연극을 다시 보는 것 역시 의미있다 싶어 예매했다. 이정희 교수도 마침 보고 싶었던 참이라며 함께 했다. 막이 오르면 그다지 크지도 높지도 않은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무대 뒤에 서 있고, 앞쪽엔 넓지 않으나 두 사람 정도가 앉을 만한 낮고 평평한 돌 하나가 있다. 그 돌에 앉아 불편한 신발을 벗으려 애쓰는 주인공. 그렇게 시작하는 연극은 거의 50년 전 대학생 시절에 봤던 ‘고도를 기다리며’와 똑같았다. 똑같은 건 그것뿐이었다. 그 옛날 탐구심과 지적 욕구도 왕성했던 대학생 때, 연극을 본 후 뭔가 아는 척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연극이었던 기억밖에 없다. 하긴 은사이신 김춘수 선생님께 무의미시를 배우면서도 그 의미를 몰랐던 때였으니 부조리 연극이라고 한 이 작품을 이해하긴 어려운 젊음이었으리라. 하니 이 연극을 볼 거라는 나에게 남편도 ‘재미없는 걸 왜 보는데’ 했고 나는 ‘그러니 지금은 어떨지’ 대꾸했다. 두 주인공의 대사는 말 그대로 동문서답이 대부분이다. 대화를 하지만 그들은 각자가 지껄이고 싶은 걸 말한다. 서로 뭔가에 대해 묻지만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고, 대답하지만 듣지도 않는 맥락없는 대화다. 잠시 뒤에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하는 대사가 또 오간다. 무엇인지 누구인지도 모를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나날이 무한 반복되는 듯한 2막의 연극을 숨죽여 웃으며 봤다. 그러면서 그들의 대사가 내겐 참으로 현실감 있었고 전혀 부조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어제의 경험이 자꾸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손주 둘과 근처 공원에 갔다. 집에만 무료히 있느니 더워도 바깥에 나가 땀 흘리며 노는 게 나을 듯해서 제안했더니 둘 다 퀵보드를 타고 신나게 앞장섰다. 난 혼자 심심할 듯하여 강아지에 목줄 채워 데리고 나갔다. 따갑고 무더운 볕도 아랑곳 않고 퀵보드를 타는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는 그늘은 많지 않았다. 볕은 뜨겁고 오후의 그늘은 아직 길지 않았다. 나무 아래엔 이미 안늙은이 서넛이 앉아 있었지만 더위를 피할 곳은 그들 가까운 벤치밖에 없었다. 옆의 벤치에 앉고 강아지도 앉혔다.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듣게 되었다. 잠시 후 한 분의 노인이 오시자 모두들 반가워하시길래 아는 분인가 보다 여겨 내 옆자리를 양보해 그들과 가까이 앉게 했다. 강아지에 시선을 주시며 고맙다고 하셨다. 한 분이 며칠 후의 자신 생일날 옆에 있는 분들을 초대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내 옆에 앉는 분에게도 그 얘기를 다시 시작했다. 또 한 분은 텀블러에 담아 온 커피를 옆자리의 노인에게 권했고 노인은 집에서 두 잔이나 마셨다며 사양했다. 그럼에도 서너 번을 더 커피를 권했고, 또 서너 번을 사양했다. 생일 초대의 노인은 작년의 생일을 장황하고 자랑스레 얘기하고 올해의 생일날 계획에 대해 또 말하기 시작했지만 그 말에 귀기울여 듣는 사람은 딱히 없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또 한 분의 노인이 휠체어를 능숙하게 몰며 벤치와 벤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고 커피를 권하던 노인은 또 커피를 권하고, 생일 초대의 노인은 또 생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본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이 아니라 리얼리티 연극이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6-11

여름과 더위 관리

여름이 시작됐다. 낮의 기온이 점점 오르고 있어 야외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부터 조심하고 관리를 해야 한다. 강한 햇볕 아래 오래 서 있거나 밀폐된 실내에서 일하는 동안 체온 조절 기전이 무너지면 신체는 마치 증기로 가득 찬 압력솥처럼 내부 열을 배출하지 못한다. 심부 체온이 40℃를 넘어서면 단백질이 변성되고 효소의 촉매 활동이 멈추며 뇌∙간∙신장 같은 장기에 문제가 생긴다. 어지럼, 두통, 피부 홍조와 건조감이 경고 신호인데, 의식 혼미나 경련까지 나타나면 일사병에서 열사병 단계로 치닫는다. 응급조치는 간단하면서도 즉각적이어야 한다. 서늘한 곳으로 옮기고 옷을 느슨하게 풀어 땀 증발을 돕고, 얼음팩을 목·겨드랑이·사타구니에 대어 중심부 혈관을 식힌다.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미지근한 물로 수분과 전해질을 함께 보충하는 편이 안전하다. 한의학에서는 여름철 더위로 열이 치솟고 진액을 소모한다는 관점으로 본다. 열을 식히고 진액을 채워야 장기 손상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열이 맹렬하게 치솟을 땐 석고가 주약인 백호탕 계열이 열독을 꺼 주고, 붉고 건조한 피부에 답답함과 초조한 증상은 황련해독탕으로 심화를 내려 해결한다. 땀을 지나치게 흘린 뒤 맥이 약하고 갈증이 계속되면 인삼·맥문동·오미자를 배합한 생맥산을 먹으면 기운이 나고 진액이 차오른다. 노인의 경우 열사와 함께 기혈 손상이 동반되기 쉬워 황기·당귀·백출을 더한 청서익기탕을 써서 체력 회복을 돕는다. 차로 즐기기 좋은 녹두·연교·금은화는 가슴의 열을 내리고 약성이 부드러워 가정 상비 음료로 무리가 없다. 한약 관리 못지않게 생활 관리를 병행해야 치료 효과가 좋아진다. 가장 먼저 수분 섭취를 조절해야 한다. 한 번에 벌컥 마시면 위장만 늘어나고 흡수가 늦어지니, 미지근한 물이나 염분이 약간 섞인 보리차를 15~20분 간격으로 소량씩 나누어 마신다. 몸 안 열기를 빼려면 체표 순환을 원활히 해야 하므로 얇고 땀 흡수가 좋은 면∙마 소재 옷을 선택하고, 모자나 양산으로 직사광선을 차단한다. 한낮 실외 작업은 가급적 오전 10시 이전이나 오후 4시 이후로 미루고, 꼭 밖에 있어야 한다면 그늘에서 10분씩 휴식하는 ‘쿨링 브레이크’를 습관으로 만든다. 실내 온도가 30℃ 가까이 오르면 선풍기만으로는 대기 온도 자체가 내려가지 않으니 에어컨을 26~27℃로 가동해 습도와 열을 동시에 잡는다. 발에 열이 몰리면 수면의 질도 떨어지므로 자기 전 미지근한 물에 발을 10분 담그는 족욕이 도움이 된다. 몸이 보내는 미세한 신호를 놓치지 않는 것이 가장 확실한 예방책이다. 야외에서 평소보다 숨이 가빠지거나 가슴이 두근거리면 즉시 그늘로 들어가 몸을 식히고 물을 마셔야 한다. 이미 열사병으로 진행된 경우엔 응급조치 후 119를 불러 응급실로 가야 한다. 고열과 의식 저하는 생명을 위협하는 응급 상황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름볕은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내리쬐지만, 그 열기를 이겨낼 준비를 갖춘 사람에겐 더 이상 공포가 되지 않는다. 자신을 식혀 줄 물 한 모금, 그늘 아래 짧은 휴식, 그리고 진액을 보충해 줄 한방 차 한 잔을 곁에 두면 긴 여름도 충분히 건강하게 보낼 수 있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6-11

미국, 이민의 나라

미국은 이민의 나라다. 극소수 본토 인디언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미국인은 이민자들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조차 그들의 뿌리는 다른 나라에 있다. 그런 미국이 불법체류 외국인들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주위군을 투입한 데 이어 급기야 해병대까지 동원하겠다는 위협을 쏟아낸다. ‘불법체류자’라는 용어가 쉽게 사용되지만 사실 ‘서류가 미비한(undocumented)’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까다로운 조건을 갖추지 못했을 뿐 대부분은 열심히 일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시민들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 미국경제는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이민자의 희생과 노동 위에 세워진 나라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미국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 덕분에 미국은 산업과 경제를 일구었고 성장과 발전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 중국인 노동자들의 대륙횡단 철도건설, 멕시코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농업 현장 점유율, 실리콘밸리의 이민자 출신 기업가들, 의료계를 지탱하는 이주 의료진, 건설현장과 서비스업계에서 이주노동자들 없이는 미국이 경제적 위기를 견디기 어려웠을 터이다. 정부와 극우 보수층이 몰아세우는 이들은 오늘도 직장에서 농장에서 가정에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하게 일하고 있다. 그들을 몰아세우는 일이다.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는 ‘우리는 모두 이민자의 후예다’라 자랑스럽게 적는다. 미국 정부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불법체류자들을 범죄자로 낙인찍는다. 미국의 근본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불법체류자 강제추방정책에 맞선 저항이 거세다. 미국 각지 법원은 행정부의 과잉단속에 법적제동을 건다. 미국의 진보는 인종주의와 배타주의에 맞선 투쟁을 거듭해 왔다. 미국이 더 넓은 포용과 정의를 향해 나아가면서 진정한 힘을 발휘해 왔다.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군을 동원하는 모습은 6개월 전 대한민국에서 목격했던 부끄러운 광경을 떠올리게 한다. 정부는 이민자들을 미국의 위협으로 간주하며 백인 중심주의로 회귀하려 한다. 그들은 엄연한 역사적 진실을 애써 외면한다. 선량한 시민들의 합법적인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시도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한다. 군대는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미국 사회는 정부의 강경책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낸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수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미국이 여전히 ‘이민의 나라’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미국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미국이 이민자의 기여를 부정하고 백인 중심의 폐쇄적인 사회로 돌아선다면 스스로 택하여 쇠퇴의 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목소리를 내며 행동하는 미국인들은 그들의 저항과 노력이 정부의 독주를 막는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민자로 살면서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열심히 살아가는 ‘서류미비체류자’들을 범죄자로 낙인찍으며 추방하려는 일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이 스스로 뿌리를 부정하는 일이며 오늘 사회공동체를 훼손하는 일이다. 미국이 ‘자유의 여신상’ 아래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 갈림길에 섰다. 이민의 나라 미국이 위기에 빠졌다. /장규열 고문

2025-06-11

글로벌 우경화와 ‘나쁜 남자들’

불안정한 시대, 인류는 ‘나쁜 지도자’를 찾는다? 침팬지, 고릴라는 위기나 외부 위협이 있을 때, 무리는 더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알파 수컷(Alpha Male)을 따른다고 한다. 미중 패권 경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글로벌 공급망 붕괴, 기후 위기까지 겹친 지금 국제 정세는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사람들을 본능적으로 보수로 이끈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보수, 우경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독일에서는 극우정당 AFD가 제2당으로 부상했고, 영국 지방선거에서는 영국 개혁당이 돌풍을 일으켰다. 이탈리아의 멜로니 총리는 아예 무솔리니의 후예로 불릴 정도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스트롱맨 리더십’이다. 혼돈의 시대에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도자보다는, 근육질의 ‘나쁜 남자’가 국민의 지지를 얻는다. 푸틴은 걸핏하면 밀리터리룩을 입고 나온다.(언제나 일전을 불사할 것처럼) 튀르키예 에르도안은 오스만 제국 의장대 의전(儀典)을 가장 즐긴다고 한다. 트럼프의 막말, 아베의 대규모 군비 증강도 모두 스트롱맨의 전형이다. ‘사상의 편향은 역사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격언처럼 이런 사조가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이 흐름을 낳은 시대의 불안을 무시한 채, 도덕에 안주할 수도 없다. 이제 한국도 6·3대선을 치르면서 새 지도자가 선출되었다. 한미일 동맹이 한반도 외교, 안보의 가장 최우선 가치가 되어야겠지만 베트남, 인도, 중국의 거대한 시장과 그들의 정치, 경제적 동향도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지도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큰 관심사다. ‘나쁜 남자’. ‘스트롱맨’이 되어 주변 강국들과 까칠한 외교를 펼칠 지, 합리적인 리더십을 바탕으로 균형, 실리(實利) 리더십을 펼칠 지. /한상갑 경북부 에디터 arira6@kbmaeil.com

2025-06-11

100회 맞은 AP포럼… ‘포항 품격’을 높인다

지난 2012년 6월 출범한 포항 ‘AP(Advanced Pohang)포럼’이 그저께(10일) 포항시 남구 포스코 국제관에서 100회차 기념 특강행사를 했다. 특강연사로는 포스코그룹 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장인화 회장이 초청됐다. 장 회장은 이날 향후 우리나라 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6대 과제를 제시하면서, “각계 지도층에 있는 리더들이 소명 의식을 가지고 미래 기회를 포착해 달라. 도전과 혁신을 장려하되 배려와 관심으로 구성원의 잠재력을 최대한 창출해야 한다. 그러려면 신뢰 구축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장 회장이 제시한 6대 과제는 선제적인 산업구조 개편, 근본적인 사업(BIZ) 모델 혁신, 미래 산업 기회 선점, 신성장 동력 발굴, 사업 경쟁력 정책 강화, 핵심 인재 양성으로 요약된다. 기업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 리더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과제들이다. 포럼 회원은 포항지역 산·학·연·관 핵심 리더들로, 170여 명이다. 회원들은 이날 질의 시간을 통해 앞으로도 장 회장이 글로벌 시장 통찰력을 통해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어 줄 것을 당부했다. AP포럼은 환동해 중심 도시이자 국제도시로 성장하는 포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회의체다. 포스텍과 포항상공회의소, 포항철강산업단지관리공단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포스코가 후원하고 있다. 연간 10회 조찬 세미나 형식으로 열린다. 기초자치단체에서 AP포럼 같은 조찬 포럼이 정기적으로 열리는 지역은 아마 포항이 유일할 것으로 짐작된다. 이 포럼은 지난 13년 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해 포항의 현안에 대한 해법과 미래 발전방안 등을 의제로 심도 있는 토론을 해왔다. 일종의 지적(知的)허브, 또는 ‘공론의 장’ 역할을 해 온 것이다. 역대 주요 연사로는 정운찬·김황식 전 국무총리, 홍석우 전 지식경제부 장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등을 꼽을 수 있다. 앞으로도 AP포럼의 조찬 세미나가 계속돼 포항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변화를 선도하는 이슈들이 많이 제시되길 기대한다.

2025-06-11

포스텍 연구의대, 새정부 국정과제 반영돼야

포스텍이 추진하는 연구 중심 의과대학 설립의 당위성은 차고 넘친다. 먼저 포스텍이 표방하는 과학기술 분야 연구 중심 대학의 이념과 방향성이 일치한다. 대학의 연구 역량 또한 세계적인 것이 입증됐고, 대학이 소재한 포항의 관련 인프라가 전국에서 최고로 평가받는다. 포스텍의 연구 중심 의대 설립 움직임은 2018년부터 시작해 지역사회에서는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지역 숙원이다. 지역 숙원이지만 연구의대 설립이 갖는 의미는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범국가적이다. 좁게는 지역대학과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겠지만 국가적으로는 바이오산업 육성과 의사과학자를 양성하여 국가 의료발전과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과정이 된다는 것이다. 의사과학자는 임상의료와 연구개발을 동시에 수행하는 바이오 의료전문가다. 백신개발, 첨단의료기기, 신약 등 의료기술을 혁신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미국은 매년 의과대학 졸업자 가운데 1700여 명이 의사과학자로 배출되고 있다. 우리는 전체 의사의 1%가 채 되지 않는 의사과학자만 보유하고 있다. 포항시는 바이오 오픈이노베이션센터와 세포막단백질연구소, 식물백신기업 등이 포진해 있고 3.4세대 방사광가속기, 극저온전자현미경 등 세계적 수준의 연구 인프라가 구축돼 있는 곳이다. 포스텍의 연구개발 대부분이 바이오관련에 집중돼 있고, 정부가 국가첨단전략산업 바이오특화단지로 포항을 지정한 것도 연구의대 설립의 뚜렷한 명분이다. 이강덕 포항시장이 포스텍 연구의과대학 설립을 위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시절 다소 희망적이던 연구의대 설립이 새 정부 들어 정책이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시장은 서울에서 열린 미래의료혁신연구회 세미나에 참석해 “포스텍 의과대학은 양질의 의료서비스와 의사과학자 양성을 아우르는 국가적 모델이며 최적지는 포항”이라고 역설했다. 새 정부 들면서 지역사회마다 숙원사업들이 그대로 존속될지 여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 정부 사업이 반드시 지속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명분이 있는 사업은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포스텍의 연구의대 설립이 국정과제에 포함되길 바란다.

2025-06-11

시모다에서 생각한 현대인의 원죄

항구도시에서 태어나서인지 바다를 오랫동안 보지 못하면, 바다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일본에 머믈면서 오랫동안 바다를 보지 못한 저는 K대학의 A선생과 함께 이즈반도에 있는 시모다 답사를 떠나기로 했는데요. 숙소 근처의 고마바도다이마에역에서 만난 우리는 열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180km 떨어진 시모다로 향했습니다. 이즈반도에 들어설 때부터, 차창 밖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바다가 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시모다(下田)는 일본 시즈오카현의 이즈(伊豆)반도 남부에 위치한 조그만 항구도시입니다. 남북 길이 50㎞ 정도의 이즈반도는 도쿄의 남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온난하고 풍광이 좋은 데다가, 아타미나 이토 등의 온천까지 발달하여 휴양지로 유명한데요. 시모다가 일본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시모다역의 간판에도 써있는 것처럼 ‘개국(開國)의 땅’으로서입니다. 시모다는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이 조인된 곳이며, 하코다테와 함께 일본에서 최초로 개항된 곳입니다. 무려 4시간이나 열차를 타고 달려온 우리가 주로 둘러본 것도 개국과 관련한 흔적들이었는데요. 미국의 페리 제독이 행진하였다는 페리 로드, 일본의 첫 미국 영사관이 개설되었던 교쿠센지, 일본과 미국이 미일 수호 통상조약을 맺었던 료센지, 일본과 러시아가 러일 화친 조약을 맺었던 조라쿠지 등이 바로 개항의 흔적들입니다. 제가 시모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시인 백석을 통해서입니다. 백석은 아오야마 학원을 다니던 시절 도쿄에서 기선을 타고 시모다항에 도착한 후에, 근처의 작은 어촌인 가키사키에 머물기도 했는데요. 이 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바로 시 ‘가키사키(柿崎)의 바다’(1936)와 ‘이즈노쿠니노미나토카이도(伊豆國湊街道)’(1936), 산문 ‘해빈수첩’(1934)입니다. 시모다는 요즘 어디 가나 외국인이 넘쳐 나는 일본의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한적하고 평화로운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시모다항에는 페리 제독의 동상과 함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를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었는데요. 우리는 야스나리 하면 자동으로 ‘설국’만 떠올리지만, ‘이즈의 무희’(1926) 역시 일본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소설입니다. ‘이즈의 무희’는 제일고등학교 학생인 ‘나’가 유랑 가무단과 함께 이즈반도를 다니다가 시모다항에서 헤어지고 도쿄로 돌아오는 일종의 여로형 소설인데요. 그 여로는 ‘오늘날 ’오도리코보도(踊子歩道)’라 불리고 있으며, 길 주위에는 ‘이즈의 무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정표나 문학비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즈의 무희’는 야스나리의 초기 작품으로서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인데요. 야스나리도 제일고등학교에 다니던 1918년 이즈반도를 여행했으며, 그때 유랑 가무단과 동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작품 속의 ‘나’는 “고아 근성”과 “우울”을 견디지 못하고 이즈로 여행을 온 것이라 고백하는데요. 야스나리도 두 살과 세 살 때 연이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열 살 때는 누나를 잃었으며, 열다섯 살에는 조부마저 잃은 고아였습니다. ‘나’는 유랑 가무단, 그중에서도 소녀(무희)와 깊은 교감을 나누는데요. 주인공이 소녀가 속한 유랑 가무단과 맺는 관계는, ‘나’의 머리에 씌어진 모자가 ‘학생 제모(制帽)’에서 ‘사냥모’로, 그리고 다시 ‘학생 제모’로 변하는 것을 통해 압축적으로 드러납니다. 이 시절 고등학교는 오늘날의 대학교에 해당하며, 주인공이 다니던 제일고등학교는 오늘날의 도쿄대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주인공이 쓰고 있는 학생 제모는 주인공이 일본 최고학부에 다니는 엘리트임을 알려주는 증표인데요. 그렇기에 한 숙소에서 만난 노파는 유랑 가무단 사람들에 대해서는 “심한 경멸”을 담아 “저런 것들이야 어디서 묵을지 알 게 뭡니까요. 아무 데서나 자면 그뿐이죠.”라고 말하면서도, 손자뻘인 ‘나’에게는 극존칭을 씁니다. 그러나 ‘내’가 소녀를 비롯한 유랑 가무단과 친밀해지자,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가게에서 산 사냥모를 쓰고, 일고 제모는 가방 안에 쑤셔 넣어 버립니다. ‘나’는 우월의식에서 벗어나 유랑 가무단과 동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유랑 가무단은 ‘내’가 자신들이 사는 오시마에까지 함께 갈 것이라 기대하기도 하고, 소녀는 ‘나’를 가리켜, “정말로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우월감을 버리고 유랑 가무단과 하나로 연결된 그 순간, 안타깝게도 일고생으로서의 알량한 자의식은 강하게 고개를 쳐듭니다. 이즈의 곳곳에 있었지만, 그동안 한 번도 ‘나’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거지와 유랑 가무단은 마을에 들어오지 말 것.”이라는 푯말이 눈에 들어온 겁니다. 결국 ‘나’는 유랑 중 죽은 아기의 49재를 위해 출발을 하루만 미뤄달라는 유랑 가무단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도쿄행 배를 타기로 결심합니다. 배를 타기 전에, ‘나’는 사냥모를 벗어 버리고, 다시 가방 속에 넣어 두었던 일고 제모를 꺼내 쓰는데요. 아무래도 ‘나’에게 이즈반도와 유랑 가무단, 그리고 “꽃과 같이 웃는” 무희는 한때의 바람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배에 오른 ‘나’는 가방이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눈물 속에서 “달콤한 상쾌함”을 느끼는데요. 이 ‘달콤한 상쾌함’이야말로 현대인이 지닌 원죄의 정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6-10

그늘

무더위가 막 시작되던 초여름 어느 날이었다. 간단히 점심을 때우려고 컵라면을 먹었는데 좀처럼 소화가 되지 않아 산책을 나섰다. 자동차로 다닐 땐 보이지 않던 많은 풍경들이 걸음을 늦추었고 기온이 많이 오른 탓에 자신을 돋보이려 강렬하게 빛을 뿜어대는 햇빛 덕분에 걸음은 더욱 더뎌졌다. 차들이 다니는 길목에서 지인 부부를 만났다. 딱히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만나지 못하던 지인이었는데 산책길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정형적인 약속이 아니라 우연한 만남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고 말문이 트이자 금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의 일상을 쏟아냈다. 무심히 서 있던 그 자리는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곳이었다. 그곳에 서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건강은 어떠한지, 지난번 만남에서 들었던 직장에서의 힘든 부분은 잘 해결되었는지, 왜 이 시간에 걷고 있는지, 가족은 잘 있는지 같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몇 마디로 그칠 줄 알았지만,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박수를 치며 웃기도 하다가 심각한 이야기도 하다 보니 두 시간 가까이 서서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오래 서 있었던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지친 줄도 몰랐고,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고, 햇살이 따가운 줄도 몰랐다. 그들과 함께 서 있었던 자리가 그늘 덕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름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그늘을 찾는다. 태양이 너무 뜨겁고 강렬해서 그늘 아래서야 숨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햇볕은 생명을 키우는 존재다.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자라듯 우리도 햇볕 아래서 활기를 얻는다. 하지만 햇볕은 오래 머무르면 탈이 나기도 한다. 너무 강한 햇볕은 자라게도 하지만 시들게도 한다. 그래서 그늘이 필요하다. 그늘은 빛이 없는 곳이 아니라 빛이 닿지 않아도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다. 생명을 직접적으로 키우지는 않지만 지친 생명이 회복될 수 있도록 숨을 고르게 해준다. 햇볕과 그늘은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을 균형있게 만들어 주는 두 개의 축이다. 햇볕이 생명을 키우는 존재라면 그늘은 생명을 쉬게 해주는 공간이다. 햇볕이 ‘살게 하는 힘’이라면 그늘은 ‘살아낼 수 있는 숨’이다. 나는 스스로 햇볕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왔다. 환하고 따뜻하고 삶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으니까.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햇볕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걸. 때로는 그늘에서 머무르며 숨을 고르고 내 안의 조용한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날 만난 지인 부부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내 안의 답답함이 말 한마디에 풀리는 그냥 그늘 같은 사람들이었다. 말에 말을 더하지 않고 듣고 웃어주는 그들은 마치 더위에 지쳐 찾아간 여름날 나무 그늘 같았다. 강하지 않지만 깊었고 말없이 서 있어도 충분했다. 요즘은 그늘 같은 사람이 그립다. 함께 있으면 내 마음이 쉴 수 있는 사람,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론 말이 없어도 괜찮은 사람. 세상은 빛나는 것에만 주목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빛나지 않아도 좋은 그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가 잠시라도 기대어 숨을 돌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그들 부부같은. 산책길에서의 그 짧은 만남이 나에게는 긴 여운으로 남았다. 그날의 햇볕도, 그늘도, 그리고 그늘처럼 나에게 다가와 준 지인도. 사람 사이에도 그런 그늘 하나씩 있었으면 좋겠다. 벤치처럼 앉을 수 있는, 나무처럼 기대설 수 있는, 쉼표 같은 존재 말이다. 그늘은 단지 햇빛을 피하는 공간이 아니다. 마음이 머무는 자리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 마음도 잠시 그곳에 쉬어 갔음을 알았다. /작가

2025-06-10

詩書畵 깃발이 나부끼는 포항철길숲

6월의 바람은 싱그럽다. 연록의 잎새들은 날로 짙어져 꿈결처럼 암록이 흐르고, 풋보리가 익어가는 들판엔 초록의 바람이 분다. 화사한 꽃들이 져버리자 초목은 더욱 무성해지며 생명력을 드러내는 때, 그래서 우거진 그늘과 향기로운 풀들이 꽃필 때 보다 낫다(綠陰芳草勝花時)고 했던가. 거기에 도심 속을 길게 가로지르는 숲길 한 켠에는 녹음방초 보다 더 진하고 그윽하게 묵향(墨香)을 피우며 지나가는 시민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올해 14회째를 맞은 ‘포항서예연합전’이 걸개 형태로 만든 다양한 깃발작품들을 길거리에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100여 년 동안 열차가 다니던 옛 철길을 획기적으로 개선, 복원하여 시민들이 즐겨 찾는 열린 공간인 ‘포항철길숲’ 한 켠에서 형형색색의 깃발 서예작품들이 유월의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도심 속의 복합 힐링공간으로 탈바꿈하여 전국적인 명소가 된 포항철길숲 모퉁이에서 피어나는 은은한 묵향이 푸른 초목과 어우러져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산책하거나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바로 곁에서 깃발 서예작품을 만날 수 있다니, 일상과 접목되는 ‘거리예술’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서예작품이 전시장이나 갤러리가 아닌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쉽고 편하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서예가 일반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자연이나 일상 속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사람과 자연, 예술과 삶을 어우러지게 하는 새로운 문화적 향유를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통을 살리면서 자연 속에서 예술과 생활을 이어주는 문화적인 소통으로 ‘문화도시’의 품격과 기치를 한층 높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도 여겨진다. 특히 이번 연합전은 서예 동호인이나 서예작가·출향작가 뿐만 아니라 포항시민이면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열린 문화행사로서, 유치원생에서부터 100세 어르신까지 남녀노소의 시민들이 참여해 눈길을 끌고 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붓을 잡고 한 점 한 획 또박또박 꿈과 희망을 쓰거나,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거북등 같은 손으로 떨리는 붓을 진정시키며 자손들에게 사랑과 염원의 글귀를 쓴 작품 속에서 순수하고 진솔함이 느껴져 눈시울을 붉게 만들기도 한다. 연령과 세대, 계층과 지역을 아우르는 문화 예술적인 소통과 어울림으로 전통문화예술의 현대적인 계승 발전과 서예인구의 저변확대를 꾀하기도 한다. ‘도심을 넘나들며/만남과 이음으로//소통이 숨을 쉬고/여유가 살아나네//가뿐한 몸놀림 속에/활기참이 묻어나네//테마가 어리고/예술이 피어나는//철길숲 둘레마다/쉼과 삶이 어우러져//깃들고 품어주는 뜻/공생의 문화 흐르네’ -拙시조 ‘선로의 변신’ 중 구체적인 의미 표현의 수단이나 상징성을 드러내는 깃발에 곱게 스며든 350여점의 시서화(詩書畵) 작품들이 창공에 휘날리며 한결같이 문화예술을 외치는 것 같다. 묵향으로 수놓아진 아름다운 철길숲을 마실 가듯이 거닐며, 길가에서 환호하듯이 반기는 깃발 서예작품으로 잠시 풍요롭고 품격 있는 문화생활을 즐겨보면 어떨까? 철길숲과 예술작품이 조화를 이루고 시민들이 공감하며 상생하는 포항에는 문화의 향기가 피어난다. 예술과 문화는 시대를 초월하여 융화와 공감, 감동의 울림으로 도시의 활력과 지속가능성을 담보해준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6-10

장애인이 웃는 작업장

우리나라 인구의 5.1%가 장애인으로 등록되어 있고, 현재 264만 정도 된다고 한다. 공공기관이든 민간 기업이든 일정 비율 장애인을 고용해야 한다. 장애인 사업장의 일의 조건은 아직 좋은 환경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 단순 법적인 인원 비율만 채용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 상황에 맞춰 일을 쉽게 할 수 있어야 하고 행복한 일터가 되어야 한다. 장애인이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조건은 첫째, 물리적 환경 개선이다.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작업대의 높이 조절이나 휠체어, 보행기 등 이동을 고려한 충분한 공간과 통로가 있어야 한다. 경사로, 자동문, 시각, 청각 알림 시스템 등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 둘째, 작업 방식의 단순화이다. 반복 작업, 조립 작업, 포장, 검사, 데이터 입력 등 단순 저강도 작업으로 분류하여 배치하고 불필요한 동작은 제거한다. 셋째, 보조 기구나 자동화 기기 도입이다. 무겁고 난해한 작업은 자동화하거나 간단한 도구, 지그 사용, 음성 안내시스템 등을 도입하여 불편함이 없도록 한다. 넷째, 작업 분할과 협업 구조로 한다. 1인 완결 방식이 아닌 작업 공정 분할 및 팀 기반 서로 협업하는 체계가 좋다. 제철소의 작업복을 세탁하는 일을 맡고 있는 포스위드는 직원의 반이 장애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장애인의 반은 중증 장애인(1~3등급)이다. 필자는 광양 포스위드 사업장을 진단할 때, 장애인 작업자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세탁물이 입고 되면 분류하고, 세탁기에 넣고 세탁이 되면 건조기로 이동한다. 건조기에서 다림질 공정으로 이동, 완료 된 세탁물은 박스에 담겨 창고로 이동한다. 하루 이동 거리는 개인당 평균 11.2km 정도로 작업자의 피로도가 높은 작업 환경이고, 세탁 공정 Layout 배치가 효율적이지 못했다. 세탁기 11대가 왼쪽 벽에 있고, 건조기는 반대편 오른쪽 벽에 있었다. 그 사이는 거리가 있고 불필요하게 넓어 이동 동작이 많았다. 다리미질 작업장과 출고장이 반대편에 있어 세탁 물류 흐름이 좋지 않았고, 작업자 동선이 지그재그였다. 장애인의 일하기 쉬운 조건으로는 많은 개선이 필요했고, 또한 중증 장애인은 1시간 일하고 2시간 쉬어야 하는 요건이고 쉬는 공간이 거리가 있고 환경 개선이 필요했다. 사람과 물(物)의 이동을 최소화하고, 일이 쉽고 편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여러 차례의 작업자 의견수렴과 최적 레이아웃 설정을 위한 포석을 두었다. ‘최소의 동작으로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조건’ 만들기였다. 세탁업의 특성상 물, 스팀 배관 등 유틸리티 공사를 하고, 세탁기 근거리에 건조기, 다리미질 작업장을 배치했다. 화단을 개간하여 중증 장애인의 쉼터를 만들며, 동작 낭비를 25% 수준으로 줄였고, 작업자의 하루 이동 거리는 4.1km로 크게 줄어들었다. 세탁 작업 조건과 프로세스의 최적화로 일은 편리해지고 생산성은 높아졌다. 작업자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와 답은 보인다. 장애인이 가능한 일의 조건과 일하기 쉬운 작업장으로 직원이 웃는 일터를 이룰 수 있었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06-10

산불 특별법도 못 만들고 민생 말할 수 있나

지난 3월 경북 북부지역에서 발생한 사상 초유의 산불이 발생 80여 일이 지났지만 이들 지역의 피해 회복을 도울 특별법 제정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간 대통령 선거라는 특별한 상황이 있었지만 그것이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여야 정치권의 무신경, 무성의가 드러난 결과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지난 4월 국회에서 여야는 특별법을 발의해 피해 주민에 대한 국가의 지원과 정책을 약속했다. 빠르면 4월 말까지 국회 통과가 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특별법은 아직도 국회에 계류 중이다. 경북도가 10일 열리는 국회산불대책특별위원회를 방문해 초대형 산불 특별법 제정을 다시 한번 건의했다. 국회 특별위원회는 지난달 13일 첫 회의를 연후 이번이 두 번째인데, 이날부터 특별법 제정에 본격 들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경북도는 주택, 산림, 농경지 등 사각지대 없는 피해구제, 피해복구비 현실화와 중소기업, 소상공인의 피해복구 및 경영안정 지원, 송이 등 채취임산물 농가에 대한 피해복구까지 특별법에 명시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지난 3월 경북 북부 5개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은 주택 4457채를 태우고 이재민 3501명이 발생했으며, 피해 규모가 최대 2조원대 이르는 역대급이었다. 마을이 송두리째 잿더미로 변해 맨바닥에서 재건을 시작해야 할 곳도 수두룩했다. 산불 발생지역에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이유로 떠나는 농가가 나오면서 지방소멸이 가속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경북도는 이런 상황을 고려, 원상복구를 넘어 재창조 개념의 복구가 필요하다는 정책적 주장을 했다. 물론 이런 계획은 법적 근거가 반드시 필요해 특별법이 하루빨리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다. 특히 경북 북부지역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은 국내선 유래가 없는 큰 산불이다. 지구촌의 기후변화로 그와 유사한 사고가 앞으로 더 잦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특별법에 담길 내용도 심도 있게 검토해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민생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경북 산불 피해에 따른 특별법 제정이 바로 민생이다.

2025-06-10

사라지는 남아선호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부모들이 여아를 축복으로 여기는 시대가 열린다”는 보도를 했다. 선진국일수록 남아보다 여아 선호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는 인류사에서 처음 있는 변화라는 해석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코노미스트는 여아 선호의 대표적 사례로 한국을 꼽았다. 1990년대 한국은 여아 100명당 남아 116명이 태어난 것으로 조사됐으며, 특히 셋째 자녀부터는 여아 100명당 남아 200~250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자연 출생 성비가 여아 100명당 남아 105명 정도라고 볼 때 성비 불균형 정도가 매우 심각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여아 100당 남아 105.1명으로 자연 성비에 가까운 수준으로 낮아졌다. 중국과 인도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했는데, 사회인식의 변화, 여성 지위 향상, 문화적 반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때문으로 풀이했다. 우리 속담에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이 있다. 남아 선호 사상의 사회 분위기에서 생겨난 말이다. 딸을 낳은 여성이나 가정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이다. 이코노미스트 지적이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남아선호 사상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사조다. 한 결혼정보회사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절반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자녀를 낳겠다고 답했고, 만약 가린다면 남아보다 여아를 선호하는 비율이 5배나 높았다고 하니 놀라운 대답이다. 여아선호가 높은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노후에 부모를 부양할 가능성이 높은 때문으로 풀이도 하나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다만 남아선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우정구 (논설위원)

2025-06-10

국힘 친윤 세력, 지금 헤게모니 싸움할 때냐

‘소수야당’으로 전락한 국민의힘이 당권경쟁에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대선 패배 1주일이 지났지만 누구 하나 수습에 나서기는커녕, 다들 내년 지방선거 공천권을 장악하기 위해 혈안이 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나오는 국민 반응이다. 지난 9일 열린 의원총회에서도 당내 계파싸움의 핵심인 ‘김용태 비대위원장 거취’ 문제를 두고 5시간 넘게 격론을 벌였지만 아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당내 주류인 친윤계 의원들은 당권장악의 장애물로 여겨지는 김 위원장의 즉각 사퇴를 요구했고, 비윤계 의원들은 “당내 개혁을 주도하기 위해 김 위원장이 다음 전당대회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양쪽 다 당권을 차지해 지방선거 공천권을 행사하겠다는 욕심뿐인 것 같다. 친윤계 핵심들이 여전히 기득권을 누리고 있으니, ‘당 해체 수준의 혁신’을 주문하는 외부 목소리가 당 운영에 반영될 수가 없다. 오는 16일 선출되는 원내대표도 친윤계가 맡게 될 경우, 국민의힘 혁신은 요원해진다. 국민의힘이 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다수당인 민주당은 거리낌 없이 입법 독주를 하고 있다. 지난 5일 국회 본회의에서 ‘3대 특검법안(채상병·내란·김건희 특검법)’을 처리할 때도 주진우 의원 혼자 반대토론을 한 것 외에는 모든 국민의힘 의원들이 남의 일처럼 구경만 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이유에서다. 어제(10일) 공포된 특검법이 로드맵대로 시행되면, 국민의힘 의원들은 대거 특검 사정권에 놓이게 된다. 특검은 늦어도 한달 뒤인 7월 11일쯤 본격 수사에 들어간다. 특검의 주요 타깃은 윤석열·김건희 부부지만, 국민의힘 인사들도 상당수 수사를 피하기 어렵다. 우선 내란 특검법 수사 대상(11개)에는 ‘국회 표결 방해 시도 행위’가 적시돼 있다. 여권에선 비상계엄 선포 다음날인 지난해 12월4일 새벽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 표결에 국민의힘 의원 다수가 불참한 이유를 ‘핵심 친윤계의 의도적인 표결방해행위’로 의심하고 있다. 만약 국민의힘 지도부가 윤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국회 표결에 불참했다는 증거가 나오면 내란 방조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는 게 법조계의 분석이다. 김건희 특검법(김건희와 명태균·건진법사 관련 국정농단 및 불법 선거 개입 사건 등 진상규명을 위한 특검법)도 국민의힘에겐 저승사자가 될 수 있다. 15개 의혹사건으로 구성된 이 특검법에는 ‘명태균 게이트’ 수사도 포함돼 있어 국민의힘에는 뇌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국민의힘으로선 그야말로 사면초가 상태다. 특검 수사 진행 상황에 따라 당이 해산 위기에 몰릴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문제는 민주당이 특검법으로 사실상의 적폐 청산에 들어갔지만, 국민의힘으로선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국회 의석이 여권은 민주당 167석을 포함해 184석인 반면, 국민의힘은 107석밖에 안 된다. 개혁신당과 합치더라도 110석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헤게모니 싸움이나 벌이고 있는 국민의힘을 보며 국민이 혀를 찰 수밖에 없다. /심충택 논설위원

2025-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