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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자본주의 체제에 미래가 있을까

전 세계적으로 경제 양극화가 심화되고 공동체가 급속도로 붕괴되면서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도시와 지방 사이의 간극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지고 있다. 한때 모두의 번영을 약속했던 자본주의의 실패는 극심한 경제 양극화와 중도 정치의 소멸로 이어지고 있다. 번영에 대한 기대가 경제, 정치 분야에 대한 냉소와 환멸로 뒤바뀐 지금, 자본주의 체제에 미래가 있을까? 세계적인 개발경제학자 중 한 명인 폴 콜리어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자본주의의 미래’(까치)에서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경제, 정치 양극화에 우려를 표하며 호혜성의 윤리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의 미래를 제시한다.그는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도시와 지방의 균열 등 오늘날 자본주의가 맞닥뜨린 위기와 그 원인을 진단하고, 정치 선전 구호나 다름이 없어진 이데올로기와 국가주의 대신 “지금 여기서 효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을 찾아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 논의한다. 가족과 기업, 국가를 중심으로 한 그의 논의는 서로에 대한 의무를 중시하는 인간상을 정립하고, 권리에 앞서는 의무를 강조하며 ‘나’보다는 ‘우리’, 이데올로기보다는 실용성에 중심을 둔 자본주의의 미래를 제안한다.제1부의 제1장은 오늘날 우리의 세계가 맞닥뜨린 어려움을 진단하며, 경제, 정치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요인인 이데올로기, 대중 영합주의를 넘어 실용주의적 입장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데올로기의 옹호자와 대중 영합주의자는 선전 구호만 반복하며 오늘날의 정치를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 교육 불평등 및 지역 간의 격차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분석과 근거를 기반으로 한 실용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제2부에서는 자본주의의 윤리적 토대를 구축한다. 제2장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다. 현재 경제학이 상정하는 인간상은 합리적인 인간, 즉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를 원하는 이기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폴 콜리어는 인간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느끼며, 경제적인 이득보다 사람들 사이의 존중을 통해서 효용을 얻는다고 말한다. 제3장은 윤리적 자본주의를 구축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을 논의한다. 국가는 사회 전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각각의 국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공유 정체성을 형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국가주의와 구분되는 애국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제4장에서는 기업의 윤리를 살펴본다.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은 신뢰를 잃고 몰락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다양한 기업들의 사례를 통해서 기업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탐구한다. 제5장은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을 살펴본다. 오늘날 가족은 사회 불평등을 유지하고 심화시키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가족은 여러 세대를 어우르면서 불평등을 완화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제6장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호혜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각 국가의 지도자들은 다른 사회에 대한 의무를 이행했고, 이를 통해서 세계를 재건했다. 의무를 기반으로 한 국제기구는 난민과 HIV, 가난한 국가 등 세계가 마주한 어려움에 대한 방책이 될 수 있다.제3부는 우리 세계가 맞닥뜨린 현실을 해결할 실용적인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제7장은 망가진 지방 도시를 재생하고 대도시와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서 대도시에 과세할 방안을 탐구한다. 도시 부동산 소유주가 얻는 불로소득은 인구 밀집에 따른 것이므로, 전체 인구에게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따라서 저자는 집적에 대해서 과세할 강력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다. 제8장은 저학력층과 고학력층을 중심으로 계급 분단을 완화할 방안을 논의한다. 저학력층으로 이뤄진 가정은 실업과 가정 파탄의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이를 막기 위해서 육아 보조와 실업 급여 제공, 고용 및 은퇴 안정성 보장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 제9장에서는 논의의 범위를 세계로 넓혀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국가 사이의 재분배에 대해서 살펴본다. 국제무역은 국내의 재분배가 적절하게 이뤄진 후에 시행돼야 한다.제4부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위한 조언을 정리하면서 정치, 경제적 양극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윤리적 담론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공유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임을 강조하며, 호혜성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를 재생할 것을 요청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11-25

공직세계 속 지역감정과 차별, 국회의 민낯을 고발한다

정재룡 전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이 자신의 30년 국회 공무원으로서의 경험과 그 안에서 겪은 지역감정으로 인한 차별에 대해 ‘입법고시 출신 30년 국회 공무원의 끝나지 않은 외로운 투쟁’이란 제목으로 책을 썼다. 국회 입법고시를 통해 국회공직자로 입문한 저자는 30여 년간 국회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정년퇴직을 얼마 남지 않은 시점까지 국회 내 비리를 고치려고 노력했다. 저자는 국회와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등 만연된 부패를 고발하기 위해 발로 뛰었고, 그런 과정을 통해 사회적 모순이 여기저기에 많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전직 공직자가, 그것도 국회 차관보급 1급 고급 관리관 출신이 현직 국무총리를 상대로 1인 시위를 하고, 공직세계의 만연된 부패를 고발한다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용기 있는 자세로 국회 공직자 불만과 인사의 부당성, 공직자 개인 사생활 침해 등에 대해 남김없이 격앙된 어조로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저자는 이 책에서 호남 출신으로 받아야 했던 서러움과 영남과 호남의 지역감정이 공직자 세계에서도 끊임없이 독재정권의 잔재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저자가 지역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지역차별금지법률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현실 정치와 싸웠던 경험담을 담담히 털어놓는 모습은 자못 눈물겹다.저자는 이 책을 집필한 이유가 두가지라고 밝혔다. 첫 번째는 국회 사무처 공무원들이 어떤 일을 하는가를 국민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왜 국회 사무처 공무원들이 책임감을 갖고 일을 해야 하는 지를 낱낱이 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국회 공무원들이 정직하고 투명하게 국민의 편에 서서 입법활동을 돕도록 해야 올바른 법률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었다고 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11-18

아브라함은 왜… 인간의 이야기로 다시 쓴 神

‘관념적이고 사유하는 작가’이승우(61·사진)씨의 열한번째 소설집이자 첫 연작소설집 ‘사랑이 한 일’(문학동네)이 나왔다. 이씨는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가 “한국 작가 중 노벨상을 받는다면” 후보 0순위로 꼽는 소설가다.인간 실존의 문제, 성과 속의 이원성 극복, 초월자와 인간의 괴리가 데뷔 이래 줄곧 화두였던 이씨는 사십 년 가까운 작가인생을 갈망 너머의 구원에 대한 천착으로 채우며 독보적인 성취를 거둬왔다.한국소설로는 흔치 않은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통찰로 ‘생의 이면’을 파고든 그가 신작 소설집에서 ‘창세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삶의 궁극적 물음들을 마주 세운다. ‘신’이 아니라 ‘인간’의 텍스트로 ‘창세기’를 다시 읽고 다시 쓴 밀도 높은 작업, 그 가운데 키워드가 돼준 단어 ‘사랑’, 이 책은 이승우 작가의 작품세계 전반이 총동원됐다 할 수 있겠다.이 소설집은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에 대한 ‘창세기’의 일화를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태어났다. 다섯 편의 작품들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다룬 표제작 ‘사랑이 한 일’을 한가운데 두고 시간순으로 앞뒤에 두 편씩이 더 배치돼 있다. 자기 딸을 불량배들에게 내주는 소돔성의 롯의 이야기인 ‘소돔의 하룻밤’,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부당하게 내쫓기는 하갈의 이야기 ‘하갈의 노래’가 앞의 두 편, 이삭이 느끼는 기묘한 허기와 그의 쌍둥이 아들 야곱과 에서를 향한 편애에 대한 소설적 해설이라 할 수 있는 ‘허기와 탐식’ ‘야곱의 사다리’가 뒤의 두 편이다.맨 앞자리에 놓인 ‘소돔의 하룻밤’과 표제작 ‘사랑이 한 일’은 우선 독특한 문체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소돔의 하룻밤’의 경우 소돔의 멸망 과정을 보여주는 다섯 개 장면의 문장이 반복된다.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소설의 문장이라기보다는 논리적 변증에 가까운 치밀하고 끈질긴 문장들이다. 성경 텍스트 속 서사의 빈자리를 작가가 디테일하게 채우며 추론하고 납득해가는 과정이 한 편의 소설로 완성된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표제작 ‘사랑이 한 일’에서 반복되는 문장은 ‘소돔의 하룻밤’과 다른 방식으로 기능한다. ‘소돔의 하룻밤’이 이야기를 따라가되 작가가 자신의 속도에 맞추어 그 흐름을 밀고 나가는 방식이라면, ‘사랑이 한 일’은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라는 단 하나의 문장이 반복되며 화자인 이삭, 그러니까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바쳐라”라는 신의 명령과 그 명령을 따른 아버지 아브라함 양쪽을 어떻게든 이해해보고자 하는 인물의 내적 투쟁을 격정적으로 보여준다. 아버지의 손에 죽을 뻔했던 아들이 스스로 묻고 답한다.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누구에 대한 사랑인가, 누구의 사랑인가. 그 사랑이 조금 덜했다면 신은 아버지에게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을 테고, 아버지 아브라함은 나를 제물로 바치겠다 순종하지 않았을 테고, 다시 신이 아버지에게 ‘멈추라’고 하지 않았을 일인가.‘허기와 탐식’은 나이든 이삭과 그의 두 아들 에서, 야곱의 이야기이다. 맏아들 에서가 아닌 둘째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여 가부장의 권리를 가로채려 하고, 여러 사건 끝에 참회를 한 야곱이 적통을 잇는다는 것이 골자이다. 그러나 작가 이승우는 다른 지점에 주목한다. 왜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편애했는가. 아버지의 칼날에 죽을 뻔했던 그에게 남은 상흔과 그런 그에게 위로가 되었던 이복형 이스마엘이 잡아준 들짐승 고기의 맛. 그것이 사냥꾼인 맏아들 에서에게 투사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삭의 편애와 축복은 빗나가고, 자기 것이 아닌 축복을 받은 둘째 야곱은 도망치듯 집을 떠난다. “거의 최초로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존재, 고아이고 나그네가 된 시간에, 크게 두렵고 깊이 외로운 그의 밤 광야의 자리로 그분이 찾아왔다.” “너와 함께하겠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겠다”는 말과 함께. 아버지의 편애는 받지 못했으나 신의 편애를 받은 야곱의 이야기 ‘야곱의 사다리’로 소설집은 마무리된다. /윤희정기자

2020-11-18

에너지를 지배하려는 미국의 야심

에너지를 지배하려는 미국의 야심이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석유를 장악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 이래, 오래된 동맹 관계 따위는 아랑곳없이 독자 노선을 걷고 있다. 미국은 오로지 석유와 가스만이 자국을 세계 초강대국으로 만들어줄 것으로 확신한다. 즉, 세계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무기인 셈이다. 이를 방해하는 세력은 무조건 적으로 규정하고 협박과 보복을 서슴지 않는 바람에 미국과 중동,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복잡해졌다. 에너지 장악을 향한 미국의 야망은 이미 전 세계의 정치, 경제와 환경에 심각한 결과를 불러오고 있다. 에너지 냉전주의는 시작됐다.‘석유전쟁’(율리시즈)은 석유산업 현장을 중심으로 세계가 당면한 문제에 주목하면서, 특히 에너지 장악을 위한 미국의 야망을 주시한다.미국과 미국인을 수호하겠노라 선언한 트럼프가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한 이후, 미국은 전속력으로 화석연료 시대로 회귀 중이다.서부 텍사스에서 수압파쇄법을 사용해 추출해낸 엄청난 양의 석유 덕분에 전 세계를 상대로 마구잡이 협박과 보복이 가능해졌다. 경제와 금융 전문가인 저자는 집요한 취재와 관찰을 통해 미국의 에너지 주도권이 세계의 경제와 지형을 바꿔놓는 현장, 그로 인해 촉발된 긴장과 위기, 그 결과 전 세계의 정치, 경제, 환경이 처하게 된 위험을 낱낱이 보여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11-04

세계사서 가장 위대한 정복 이룬 그들은…

13세기 칭기즈 칸이 일으킨 몽골제국은 인류 역사상 최대 단일 제국을 형성했던 국가였다. 몽골제국은 동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와 인도, 중동을 거쳐 유럽의 흑해 연안까지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아울렀다. 칭기즈 칸과 몽골의 세계 정복은 흔히 무자비한 파괴와 살육, 역사적 퇴행의 주역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상 근대 세계를 열어젖힌 변화의 출발점이 된 것은 유라시아의 양극단을 연결한 몽골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흑해 초원과 러시아에서 인도 및 중동에 이르는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제국을 형성한 몽골은 국제 무역, 세계 종교의 확산, 전염병 창궐과 같은 전 세계적 지각변동을 일으켰다.신간 ‘몽골제국’(교유서가)은 뉴욕시립대학 모리스 로사비 역사학과 교수가 몽골제국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미국의 저명한 몽골사 연구자인 저자는 유목민의 삶, 칭기즈 칸과 제국의 등장, 제국의 팽창과 세계 지배, 동서 교류의 확장, 제국의 쇠퇴 등 몽골제국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소개한다.세계 역사에서 가장 거대하고 연속적이었던 몽골제국은 광범한 영역에 걸쳐 전례 없는 수준의 폭력을 분출했다. 그러나 몽골족은 잔인한 정복자에서 현명한 지배자로 재빠르게 진화했고, 자신들이 복속시킨 지역의 경제를 육성했다. 한편으로는 현지인들에게 익숙한 정치·경제 제도들을 채택하고 토착 관료들을 등용함으로써 피정복민 다수를 설득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의 예술과 문화를 열렬하게 후원하고 다양한 민족 집단에 속한 상인들, 과학자들, 예술가들, 선교사들 사이의 교류를 불러왔다. 저자는 “제국 영역의 모든 곳에서 몽골족은 무기, 전략, 전술, 군사 조직에 영향을 끼쳤다”면서, ‘팍스 몽골리카’는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처음으로 형성했다고 강조한다. 세계사는 몽골제국에서 출발했던 것이다.몽골 유목민의 생활은 동물들이 풀과 물을 찾을 수 있게 하는 데에 중심이 두어졌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환경에 처한 이 지역에 필요한 생활 방식이었던 것이다. 육체적인 힘뿐 아니라 기술과 지식도 중요했다. 유목민은 갖가지 동물들이 저마다 필요로 하는 다양한 식물들을 알고 있어야 했고, 동물들의 특정한 몸짓에 담긴 의미를 감지하고 있어야 했다. 날씨와 그 영향을 예측해야 했고, 풀이 무성한 지역들을 알아둬야 했으며, 자기 지역의 자원이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했다. 생필품을 얻으려면 동물이나 축산품으로 최선의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시장도 당연히 알아둬야 했다. 몽골족은 유목민으로서 자주 이동을 했기 때문에 특별히 예배를 위한 건물을 짓지 않았고 웅장한 조상(彫像)을 만들지도 않았다. 대개는 언덕 혹은 산들을 숭배하거나 희생물을 바쳤는데, 그 장소에는 돌을 쌓아올린 오보(oboo)라고 불리는 것들이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었다. 유목민들은 산, 별, 나무, 불, 강과 같은 자연적인 형상을 향해 기도했는데, 그러한 형상들을 몽골족의 후원자이자 보호자인 최고신 텡게리(Tenggeri·하늘 신)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 존재라고 여겼다.이 책에서는 몽골족의 말(馬)과 관련한 서술도 흥미롭다. 몽골족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는 가죽으로 된 덮개로 말들의 머리를 감쌌다. 말들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던 몽골족은 말들을 무척 아꼈다. 개개의 몽골 기병들은 대체로 4~5마리의 말을 보유하고 번갈아가며 탔기 때문에 말들이 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다른 말들은 장비를 날랐는데, 그중 한두 마리에는 짐을 싣지 않았다. 전투를 앞두고 힘을 비축했던 것이다. 말들은 덩치는 작아도 강인했다. 몽골족은 거세마와 암말을 선호했다. 수컷보다 다루기 쉬운데다 젖을 생산한다는 이점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말들은 유목민이 장기간 이동하던 중 음식이 소진됐을 때 먹을 것을 제공하기도 했다. 말의 혈관을 끊어서 그 피를 마시고 원기를 보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에 대한 몽골족의 경의는 매장 관습에 드러나 있었다. 유력한 몽골 귀족이 사망하면, 그의 말은 희생돼 함께 매장됐다. 가장 신뢰했던 말을 사후에도 필요로 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몽골족이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복이라는 평판을 듣는 원정에 나서게 된 실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무엇보다 그들의 경제가 불안정했다는 점을 든다. 가뭄이나 추운 겨울, 동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질병은 그들의 생존을 위협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생필품을 얻기 위해 교역을 하거나 약탈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주 문명에서 나오는 화려한 물건들을 더 많이 보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사치품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만약에 교역을 거부당하면 그와 같은 생활 기반이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필요로 하거나 선망하는 물건들을 획득하고자 공격에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12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몽골족이 아주 급속도로 성장함에 따라 이러한 공격들은 그들이 약탈하고자 노렸던 거주지를 황폐화시킬 수도 있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11-04

자연의 다채로운 색채와 음향으로 뒤섞인 독특한 시어

오스트리아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1887∼1914)은 자기혐오에 시달리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푸른 순간, 검은 예감’(민음사)은 게오르크 트라클의 대표 시선집이다. 게오르크 트라클은 유럽 표현주의 대표 시인으로,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다. 당시 유럽은 전통의 쇠락과 새로운 시작이 길항하고 있었고, 특히 오스트리아는 미술, 음악, 문학, 정신의학, 철학 등 예술과 사상의 전 분야에서 미증유의 탐험과 특이한 문화적 동요가 함께 일어나던 공간이었다. 유복한 사업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건강하고 바른 시민의 삶에 그다지 잘 적응하지 못했던 그는 세기의 전환을 온몸으로 살아 내며 끝까지 ‘몰락하는 자’로서 노래했다. 그의 시에서는 바깥으로 발산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깊숙이 침잠하는 고통, 우울과 전망 없음이 자연의 다채로운 색채와 음향이 뒤섞인 독특한 감각으로 구현된다.“저녁에 박쥐들의 울음소리 들려오고.두 마리 가라말이 초원에서 뛰어논다.붉은 단풍나무는 바람에 살랑거린다.나그네에게 길가의 작은 선술집 나타나고.새 포도주와 견과들은 맛이 훌륭하다.어둑해져 가는 숲에서 술에 취해 비틀대는 것은 멋지다.검은 가지사이로 고통스러운 종소리 울린다.얼굴에 떨어지는 이슬방울.”― ‘저녁에 나의 마음은’에서그의 시는 말로 에워싸여 있지만 침묵에 가깝다.같은 오스트리아 출신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트라클 시에 대해 “색채로 연주하는 음악”에 비유했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똑바로 가리키기 보다는 우리가 끝없이 마주치는 색채와 소리에 집중하고 있다는 해설이다.또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트라클의 시에 대해 “시야의 폭, 사유의 깊이, 말 행위의 단순 소박함이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친밀하고도 영원하게 빛난다”고 남겼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10-28

진정한 과학세대 등장 예언한 고전적 에세이

현대 천문학을 대표하는 저명한 과학자인 칼 세이건(1934~1996·사진)은 1980년대에 텔레비전 과학 다큐멘터리 시리즈 ‘코스모스’의 해설자로 나서 생명의 탄생부터 광대한 우주의 신비까지 까다롭고 난해한 개념을 이해하기 쉽고 명쾌하게 전달했다.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 60여 개 나라에서 방송돼 7억5천만 명이 시청하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고, “까다로운 우주의 신비를 안방에 쉽고도 생생하게 전달했다”는 평가와 함께 권위 있는 에미상을 수상했다.그 프로그램 내용을 책으로 옮긴 ‘코스모스’는 영어판만 600만 부가 팔리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70주 연속 오를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모은 교양서의 걸작이다.이 역작의 출간 40주년을 맞아 그의 과학 에세이 ‘브로카의 뇌: 과학과 과학스러움에 대하여’(사이언스북스) 완역본이 국내 첫 출간됐다.‘브로카의 뇌’는 ‘코스모스’보다 1년 앞선 1979년 출간됐다. 칼 세이건이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피직스 투데이’ 등의 과학잡지와 ‘플레이 보이’, ‘애틀랜틱 먼슬리’ 등 대중 잡지 등 여러 매체에 발표했던 에세이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 경계 과학 또는 대중 과학, 유사 과학, 사이비 과학 등에 대한 비평, 아인슈타인이라는 위대한 과학자에 관한 평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사이 미국 천문학의 역사, 태양계 행성 탐사와 인공지능 로봇의 전망에 대한 논평, 종교에 대한 성찰 등 다양한 이야기를 5부 25장에 걸쳐 다룬다.“만약 과학이 일반적인 흥미와 관심의 주제라면, 만약 그 즐거움과 사회적인 중요성이 학교와 언론, 그리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정규적으로 충분히 논의된다면, 세계의 실제 모습을 배우고 세계와 인간 모두를 향상시킬 가능성을 크게 증진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나를 사로잡는 이 생각은 포르말린과 함께 느리게 움직이는 브로카의 뇌 속에도 여전히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이 책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탄생 100주년에 출간돼 주목받기도 했다. 칼 세이건에게 퓰리처상을 안기고 100만부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수식어를 안겨준 ‘에덴의 용’(1977년)과 ‘코스모스’(1980년) 사이에 출간된 책이다.금성의 대기 환경을 분석하고, 나사(NASA)에서 행성 탐사 계획을 짜던 과학자가 대중 과학 저술가로, 전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과학 사상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제1부 ‘과학과 인간’은 과학과 인간 사회의 관계를 성찰하며, 2부 ‘역설가들’은 임마누엘 벨리콥스키(1895~1979) 등 역설가들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이어 3부 ‘우주의 이웃’은 행성 과학의 이모저모를 소개하고, 4부 ‘미래’는 천문학과 우주 과학, 그리고 우주 탐사 기술의 미래를 다룬다. 마지막 5부 ‘궁극적인 질문들’에서는종교, 우주의 운명, 죽음 같은 큰 문제들을 만날 수 있다.저자는 1978년 10월에 쓴 머리말에서 “세상은 서로 연결돼 있으며 책의 주제들 역시 서로 연결돼 있다”며 “세계 자체가 연결돼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외부 현실을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적당한 성능의 감각 기관들과 뇌, 그리고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인지한다”고 말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10-28

금기를 뛰어넘는 사랑 시작도 끝도 없는 여정 방현석 신작 소설 ‘사파에서’

신동엽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수상자인 방현석 작가(중앙대 교수)가 신작 소설 ‘사파에서’(도서출판 아시아)를 펴냈다. 소설은 사파를 무대로 한 아주 독특한 러브스토리를 그린 작품이다. 사파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북서쪽으로 약 300㎞ 떨어진 해발 1천500m의 산악 지역이다. 소수민족의 도시인 사파에는 ‘사랑시장’이란 금기를 뛰어넘는 특별한 문화와 전통이 있다. 사랑시장이 열리는 매년 3월 27일, 이날은 누구나 자신의 사랑을 찾아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허용되고 이날의 일은 불문에 부쳐진다. 베트남에서 근무하는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에서 찾아온 정민과 함께 사랑시장이 열리는 3월 27일 사파로 간다. 죽음을 앞둔 정민과 한평생 그녀만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살아온 주인공이 찾아간 사랑시장에는 더 아픈 사연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 년에 단 한 번 자신의 사랑을 만나 그리움을 채우는 곳인 동시에 금기를 뛰어넘은 사랑이 허락되는 사파의 몽환적인 밤을 그린 작가 방현석의 문체는 한 편의 시처럼 서정적이다.어떠한 위협 앞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낮추지 않는 인상적인 인물을 주로 다뤄 온 방현석의 지난 소설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작품이다. 섬세하고 감각적인 문체가 돋보이는 이 소설을 통해 방현석은 가늠하기 어려운 사랑의 실체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함께 던진다.이수명 시인은 “‘사파에서’는 한 편의 시 같은 이미지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이러한 세계의 다정한 아름다움만큼이나 두 사람의 묵시적 사랑은 고요하고 치명적”이라고 평했다./윤희정기자

2020-10-28

“잊고 있던 이데아의 세계로…”

김만수 시인“이슬처럼 머물다/ 먼 강물 소리에 묻어가는/ 그대를 따라갑니다/ 사랑은/ 아슬한 굽이마다 내걸린/ 희미한 등롱이었지요/ 그대 사랑하는 저녁을/ 여기/ 마디마디 새겨 보냅니다/ 청댓잎 새순으로/ 다시 피어오르시어/ 푸른 마디마다 매단/ 눈물방울들/ 보십시오” - 김만수 시 ‘목간(木間)’포항의 중진 시인 김만수는 ‘자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성찰을 통해 존재의 진정성을 찾아가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올해 등단 32년을 맞는 그가 최근 새로운 시집을 펴냈다.‘목련 기차’(천년의시작)라는 제목의 이번 시집은 이전 시집들보다 시에 나타나는 지역성과 장소성이 강화됐다는 점 외에도 시집 전반에 걸쳐 서정미가 한층 두터워졌고 문장의 세련미도 향상됐다는 평가다. 해설을 쓴 공광규 시인의 말처럼, “시인에게 가져다주는 문장의 세련미라는 선물을 받기 위해 그동안 쉬지 않고 시를 쓰고 시집을 내는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은 시인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김 시인을 만나 새 시집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지난 2017년 여덟 번째 시집 이후 아홉 번째인데.△그렇다. 세월 속에 훼손돼 가는 주체를 끊임없이 복원해 나감으로써, 잃어버렸거나 혹은 잊고 있던 이데아의 세계로 많은 사람을 인도하고 싶었다고 할까.-이번 시집 ‘목련 기차’는 지난 시집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몇 해 전 문학을 하면서 상처받고 힘들었던 일들이 있었다. 지난 시집이 그러한 나의 내면의 응어리가 분출된 시들과 소외되고 움츠린 사소한 것들의 끈질기고 아름다운 생명력을 노래한 것이었다면, 이번 ‘목련 기차’는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 오래된 혹은 현재의 시간들에 말 걸기, 내 삶의 주변을 세밀한 눈빛과 마음으로 다가가 말을 걸고 가만히 들은 것들을 기록한 것들이다.-시의 주된 소재와 마음에 드는 시를 소개한다면.△장성동, 여남바다, 포항 지진 같은 지역의 자연환경과 사람들의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다가갔다. 그리고 오래 휘어진 시간 속의 인물들에 대한 소재가 많다. 마음에 드는 시는 16세기 최초의 한글 편지라고 알려진 ‘원이 엄마의 편지’를 제재로 쓴 ‘목간’이라는 작품이다.김만수 시인의 시집 ‘목련 기차’ 표지.-코로나19라는 힘든 시대를 보내고 있다. 문학의 역할은 무엇인가.△일상의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묶임과 닫힘의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현실은 우리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재앙이 아닐 수 없다. 근래 트롯 열풍이 일어서 오래 갇힌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 일조를 하듯이 문학 작품은 피폐해져 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위안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극복과 되살아남의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감동적인 문학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고 유통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앞으로의 계획하고 있는 것이나 바람이 있다면.△더 깊은 서정의 바다에 들려고 한다. 지금까지의 시들은 언어와 정서의 긴장을 추구해 와서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누구에게나 쉽게 읽히고 공감할 수 있는 편안하고 쉬운, 그러면서도 간절함이 묻어나는 서정시를 쓰려고 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김만수 시인은 포항 출신으로 1987년‘실천문학’으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시 ‘송정리의 봄’과 시집 ‘소리내기’ ‘햇빛은 굴절되어도 따뜻하다’ ‘오래 휘어진 기억’ ‘산내통신’ ‘종이 눈썹’ ‘메아리 학교’ ‘바닷가 부족들’ ‘풀의 사원’ 등을 출간했으며, 해양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20-10-25

목소리, 이웃사랑의 달란트가 되다

아시아 정상급 바리톤이 농어촌과 장애인시설 등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을 찾아다니며 노래로 헌신해온 감동적인 이야기가 도서출판 아시아의 인물 논픽션/픽션 ‘이 사람’ 시리즈의 세 번째 책으로 나왔다. ‘극장에서 나간 바보 성악가, 우주호’,책의 주인공은 한양대 음대 겸임교수 우주호. 특이한 이름 때문에 어릴 때부터 친구들에게 수시로 놀림을 당하지만 그때마다 아버지는 큰 사람이 되라고 지은 이름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임금 우(禹), 두루 주(周), 하늘 호(昊)’에 담긴 큰 뜻 때문인지 그는 평범한 삶과는 궤적이 다른 삶을 살게 된다.한양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서울시립합창단에 있던 우주호는 주변의 권유로 1992년 2월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라 발터 카탈디 타소니, 파올로 실베리, 카를로 베르곤치 등 당대 대가의 지도를 받으며 유럽 무대의 샛별이 됐다. 프란체스코 칠레아 국제콩쿠르 등에서 1위를 차지했고, 로마 국제오페라콩쿠르 1위를 계기로 로마국립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의 제르몽 역, ‘팔리아치’의 토니오 역으로 데뷔하며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주목을 받았다. 독일 플랜츠부르크극장에서 ‘오셀로’의 이아고 역으로 출연한 후 독일의 저명 음악잡지인 ‘오픈벨트“가 “베르디가 원하는 최고의 바리톤이 나타났다”고 호평할 정도였다.가난한 유학생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음악 인생의 화려한 꽃을 피울 무렵,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어머니마저 치매 판정을 받은 것. 우주호는 유럽의 은사, 지인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유럽 생활을 접게 된다. 어머니 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우주호는 중학생 때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점심시간에 수돗물로 헛배를 채울 정도로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어린 주호는 운명처럼 다가온 성악 공부를 계속 밀고 나갔고, 어머니는 방앗간을 하며 아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어머니의 희생 없이 아들의 음악은 있을 수 없었고, 아들은 어머니의 황혼을 지키며 새로운 음악 인생을 펼치고 싶었던 것이다.한국에 정착한 우주호는 고향인 포항의 선린애육원을 찾아가 아이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나의 목소리는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나의 것이 아니기도 하니 이제 누구를 위해 어떻게 쓰여야 하는 것일까. 눈물 젖은 기도를 들어주던 신에게 보답하는 길은 무엇일까.” 우여곡절 끝에 얻은 물음에 대한 응답을 실천으로 옮겼던 것이다.곧이어 ‘우주호와 음악친구들’을 결성해 농어촌과 장애인시설, 노인복지관, 보육원, 교정시설 등에서 17년간 1천500여 회의 무료 음악회를 열었다. 이 ‘문화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홍사종 전 경기도문화예술회관 관장, 김병종 서울대 명예교수가 큰 힘이 됐다. 특히 김병종 명예교수는 김수환 추기경의 바보 정신을 따르기 위해 바보 예수를 화두로 그림을 그려 왔다며, ‘우주호와 음악친구들’도 그 정신을 잇는 ‘바보 음악가’라 부르며 아낌없는 격려를 해줬다.우주호는 2003년 귀국 후 국립오페라단 등의 초청을 받아 ‘오셀로’ ‘라 트라바이타’ 등 주요 오페라에 500여 회 출연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바리톤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특히 2005년 8월 31일, 남한 오페라 작품으로는 역사상 처음 북한 무대에 오른 ‘아, 고구려 고구려’에서 주연인 광개토대왕 역을 맡았고, 2015년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국립오페라단이 기획한 창작 오페라 ‘주몽’에서도 주연인 주몽 역을 맡는 등 역사적 무게가 담긴 중후한 역에서 역량을 높게 평가받고 있다.성악가가 농어촌과 장애인시설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자신의 음악적 위상과 가치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양대 성악가 고성현 교수가 추천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런 위험을 모를 리 없는 우주호가 이런 행동을 지속해온 뚝심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증을 풀어주는 동시에 예술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보여준다.저자 김도형은 이 책이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노래를 부른 바보 성악가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10-21

톨스토이가 가르치는 삶의 대혁명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 우리는 그를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을 남긴, 19세기 말, 20세기 초가 낳은 위대한 작가로만 인식한다. 실제로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러시아를 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여전히 사랑받으며 걸작이자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톺아보면, 그는 세상의 변혁을 꿈꾼 ‘혁명가’이자 날카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한 ‘사회사상가’이기도 했다. 또한 귀족이자 대지주로서 자신이 가진 사회 경제적 기반과 자신이 실천하고자 하는 소박한 삶 사이에서 오는 모순적 상황에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온 인물이기도 했다. 톨스토이가 남긴 다양한 주제의 산문들은 그의 이러한 고민과 성찰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그는 인생과 철학은 물론 교육과 종교, 예술과 문화, 사회개혁 등 다양한 주제의 산문을 남겼는데 그 철학과 사상을 몸소 실천하고자 몸부림친 ‘실천가’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바다출판사)는 평생 무신론자로 살다 나이 오십이 넘어 기독교를 믿게 된 레프 톨스토이가 종교 관련 저술 작업을 하게 된 사상적 뿌리이자 후기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열쇠가 되는 산문이다. 톨스토이는 수년에 걸쳐 옛 히브리어로 된 성경과 유대교 율법, 각 언어로 번역된 성경 등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연구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반전과 평화, 비폭력과 희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단순 명료하고 의심할 바 없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했고, 어떻게 평안과 행복을 얻게 됐는지 스스로 변화된 삶을 고백한다. 톨스토이는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를 집필하면서 자기 신앙이 어떤 신앙인지 스스로 정리해 보는 계기를 가졌고 이책으로써 일반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 가르침의 실천을 강조하고자 했다.톨스토이는 신약성경 복음서의 산상수훈 부분에서 자신의 기독론을 확립했다. 기독론은 톨스토이의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톨스토이의 모든 작품에서 나타나는 주제인 ‘악을 선으로 갚아라’는 주장의 출처인 것이다. 그밖에도 이 부분에서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의 5계명을 재해석해 진정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내놓았다.책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빛을 가리는 ‘교회의 가르침’도 폭로한다. 그는 믿음 중심의 교의에 도전해 실천 중심 교의로 회귀할 것을 제안했고 전혀 그리스도적이지 못한 교회의 여러 기만, 이를테면 교회의 의례적 측면들을 비판한다.톨스토이는 자신의 책 마지막 장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나는 믿는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로 이에 나의 신앙이 있다. 나는 믿는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오직 그때에만 이 땅에서의 나의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이 가르침이 온 인류에게 행복을 선사하고, 나를 필연적 사망에서 구원할 것을, 그리고 여기서 최고의 복을 줄 것을, 그래서 난 이를 실천하지 아니할 수 없다….” /윤희정기자

2020-10-14

옳은 삶을 위한 혁명과 저항에 불멸의 영감을 불어넣다

미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초월주의자, 시인이자 산문가였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정치관, 사회사상, 인생론과 철학을 결정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대표작이자,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멸의 영감을 끼친 네 편의 에세이를 엮은 ‘시민 불복종’(민음사)이 출간됐다. 1817년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 태어나, 교직 생활을 거쳐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에 대항해 자발적 아웃사이더로서 탐욕적인 국가 체제와 배금주의를 초월하고자 했던 ‘진정한 자유인’ 소로가 남긴 이 네 편의 에세이에는, 가장 널리 알려진 ‘월든’과 ‘달빛 속을 걷다’ 등의 작품에서 보여 준 ‘자연인’으로서의 면모와는 사뭇 다른, 양심적이고 옳은 삶을 성취하고자 분연히 투쟁하는 실천가로서의 모습이 깊이 각인돼 있다.평온한 삶을 살던 소로에게도 인생을 뒤바꿀 만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중 하나는 단연 월든 호숫가에서의 실험이고, 나머지 하나는 1846년에 발생한다. 정부가 반인륜적 노예 제도를 옹호하고, 침략 전쟁 따위를 획책하며 타락한 교회에 봉사한다고 판단한 소로는, 양심적 불복종의 일환으로서 ‘납세의 의무’를 거부한다. 결국 이 선택으로 말미암아 체포돼 감옥에 갇힌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민 불복종’의 이념을 구체화해 낸다. 최고로 존엄한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소로는, 법을 변명거리로 삼아 사회적 불의를 암묵적으로 지지하지 말고 양심이 부르짖는 진정한 정의를 먼저 실현해야 한다고, 놀랍도록 예리하고 급진적인 주장을 전개하며 ‘노예 제도’, 부와 권력에 도취한 자본가와 정부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10-14

“이 세상엔 서로 다른 아이들이 있을 뿐입니다”

‘누가 이무기 신발을 훔쳤을까?’표지.포항 출신 최소희 동화작가가 최근 신작동화 ‘누가 이무기 신발을 훔쳤을까?’(책내음)를 펴냈다.초등학교 3~4학년생들이 주인공인 ‘누가 이무기 신발을 훔쳤을까?’는 신발도둑으로 오인 받은 주인공 안진범 어린이가 범인을 찾는 고군분투기를 그린 동화로 어린이들 세상에서 빚어질 수 있는 사랑과 우정, 갈등을 고스란히 담은 수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최 작가는 이 동화를 통해 ‘세상에 나쁜 아이와 이상한 아이는 없으며, 오직 서로 다른 아이들이 있을 뿐’임을 전달하고 ‘누구나 한 두 가지 못 하는 일이 있어도 자신만의 모양으로 세상을 유영하는 아이로 성장하면 됨’을 아이들의 눈으로 말하고 있다. 작품과 함께 더욱 주목받는 것은 최소희 작가가 포항 출신 한국 동화계의 거목인 김일광 작가의 맥을 잇는 동화작가라는 것이다.포항에서 초중고를 졸업하고 한양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최 작가는 지역에서 문학적 발판을 닦아 중앙에서 등단한 드문 사례이다.지난 2012년 아동문학 전문 계간지 ‘어린이와 문학’에 ‘우리 동네 한 바퀴’, ‘날아라, 철수야!’, ‘물파스주식회사’가 추천돼 동화작가로 등단, 손춘익·김일광 동화작가를 잇는 대표적 포항 출신 동화작가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현재 포항지역 문화계의 중심축인 김일광 작가가 이끄는 ‘햇살동화’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최 작가는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상황이지만 누구보다 어린이들이 힘들 거로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즐겁게 뛰어노는 건 어린이의 가장 중요한 권리이자 임무입니다. 서로 엉겨 놀지 못하고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이 상황이 어서 빨리 해소되길 바란다”며 “친구들과 실컷 놀지 못해 심심한 어린이들이 ‘누가 이무기 신발을 훔쳤을까?’를 읽으며 함께 진범을 찾고 진정한 친구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누가 이무기 신발을 훔쳤을까?’는 전국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윤희정기자

2020-10-11

코로나 가을엔 힐링독서

요즘 지속되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다. 완연한 가을이라 야외활동을 즐기면 좋겠지만, 집에 머물러야 되는 상황이 답답할 수 있을터. 당장 밖으로 나가서 오감으로 가을을 느끼고 싶지만 외출은 잠시 미루고 위안이 되는 책으로 마음에 여유를 가져보는 것을 추천한다. 집에서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가꿔 일상의 행복을 업그레이드하는 힐링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오늘도 인생의 깨달음을…’임정묵 지음·좋은날들 펴냄인문·1만4천원◇ ‘오늘도 인생의 깨달음을 만났습니다’저절로 좋아지는 삶은 없다.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살아가는 마음부터 바꿔야 한다. 숱한 좌절과 시행착오 속에서도 하루하루 나만의 깨달음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이 책은 인생에서 무엇이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지, 묵묵히 살아가는 우리가 어쩌면 놓쳐버리고 마는 ‘지금보다 나은 삶을 앞당기는 법’에 대해 들려준다. 저자인 서울대 식품동물생명공학부 임정묵 교수는 인생의 봄, 여름, 가을을 지나며 마주했던 삶의 불안과 힘겨움, 그 길을 지나며 깨달은 바를 친근한 필치로 풀어놓는다.삶은 결코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며, 내가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으며, 한 우물을 파며 기다리는 마음가짐의 중요성, 익숙해서 오히려 무심코 지나치는 삶의 소중한 가치 등등 책에는 ‘오늘이 고달프지만 내일 또다시 걸어야 하는’ 우리 삶을 다독이고 이끌어주는 지혜가 가득하다.“성공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삶 근처에서 꾸준히 노력하며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그가 제시하는 세상살이의 법칙 2가지는 이렇다. “인생에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길도 있다.” “노력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가 온다.”‘버지니아 울프 미니 선집’버지니아 울프 지음시공사 펴냄문학·3만9천원◇ ‘버지니아 울프 미니 선집’버지니아 울프(1882∼1941)는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지평을 연 선구자로서 인간의 내면을 기술하는 실험적인 수법을 구사하며 삶의 의미와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작가이다. 그녀는 기존의 문학전통에 반기를 들고 인간의 의식과 심리를 포착할 수 있는 실험적인 기법들을 사용했고 의식의 내면세계를 탐구함으로써 전통적 소설 기법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삶의 실재에 좀더 다가섰다. 울프는 삶이란 ‘투명한 후광이며 의식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반투명의 덮개 같은 것’이라고 정의 내리면서 삶의 파편적 인상을 언어로 재현하려 한다.버지나아 울프의 1902년 사진. /시공사 제공대표 소설인 ‘댈러웨이 부인’과 당대 금기를 다룬 ‘올랜도’, 페미니즘 글쓰기를 거론할 때 첫 손에 꼽히는 에세이 ‘자기만의 방’ 세 권으로 구성됐다.세 권을 관통하는 울프의 깊은 내면과 작가로서의 열정, 그리고 뭉클한 자매애는 선집을 읽는 독자만이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수확이 될 것이다.188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울프는 청소년기에 부모의 잇따른 죽음으로 정신 착란에 시달리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댈러웨이 부인’과 ‘올랜도’ 등의 성공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정신이상 증세가 심해지면서 실종됐고, 주변에선 그가 자살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박산호, 권진아, 이태동이 번역에 참여했다.‘내일이 와준다면 그건 축복이지’이철수 지음·문학동네 펴냄산문집·1만4천500원◇ ‘내일이 와준다면 그건 축복이지!’담백한 그림과 명징한 성찰이 담긴 문장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시대정신을 이끌어온 예술가 이철수의 신작 판화집이다. 이철수는 그간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민중판화부터 종교적 수행과 깨달음을 담은 구도판화에 이르기까지, 자본과 물질의 격랑 속에서 흔들리는 심신을 곧게 일으켜세우는 작품들을 발표하며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아왔다. 그런 그가 데뷔 40주년을 앞두고 그간 모아뒀던 소품 연작을 책으로 묶었다. 마음 가는 대로 그리고 새긴 ‘작은 판화’들이다.작가의 일상과 밀착돼 있는 이 작품들에는 판화가 이철수가 독자에게 청하는 가장 내밀하고 소탈한 대화가 담겨 있다. 소품이라고는 하지만 판화의 크기만 작아졌을 뿐, 안에 담긴 메시지는 변함없이 묵직하고 오묘하다.이철수 판화가의 판화작품. /문학동네 제공오히려 계산된 바 없이 편안하게 그려진 그림만이 갖는 솔직한 매력이 더욱 돋보인다. 눈에 힘을 풀고 마음에 빈틈을 낼 때 비로소 감각되는, 당연하게 여기곤 했던 소중한 삶의 순간들이 작품마다 편편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자면 새삼 환기되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 자신의 힘으로 노동하고 생활을 꾸림으로써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건강한 감각이 간결하고 힘있는 선을 타고 전해져 온다.이철수의 판화는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과 사물을 지긋이 바라보며 하루하루의 의미를 찾고 주어진 삶을 소중히 여기도록 해준다. 이 판화집을 읽고 나면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삶을 무료하게 반복하던 지난 시절이 문득 낯설어지고, 찾아올 내일이 귀한 축복처럼 여겨진다. /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20-10-07

절필이라는 침묵 시위 끝, 더욱 깊어진 ‘시심의 붓’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안도현 시 ‘그릇’ 중‘시인 안도현’이 돌아왔다. 안도현사진 시인이 신작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창비)를 펴냈다. “절필이라는 긴 침묵 시위”(도종환)를 끝내고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지 4년, 시집으로는 ‘북향’(2012) 이후 8년 만에 펴내는 열한번째 시집이다.4년간의 절필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음에도 시심(詩心)의 붓이 무뎌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깊어졌다. 세상을 늘 새롭게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과 그동안 겪어온 “인생살이의 깊이와 넓이”(염무웅, 추천사)가 오롯이 담긴 정결한 시편들이 가슴을 깊이 울린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시인 안도현’을 만나 ‘안도현 시’를 읽는 반가움과 즐거움이 크다.그의 시집을 기다려온 독자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는 귀한 시집인 만큼 두께는 얇아도 내용은 아주 묵직하다. 그는 이번 시집을 화초, 식물, 어머니, 고모 등 일상의 정겨운 것들을 소재로 쓴 서정시로 채웠다. 40년 만에 고향인 경북 예천으로 돌아가 터전을 잡은 영향일지도 모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9-23

‘매혹의 원천’ 고대그리스 로마에 빠지다

고대 그리스 로마는 매혹의 원천이다. 당대 최고의 역사가, 문필가, 사회과학자, 소설가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중에서도 고전학자 메리 비어드는 그리스 로마 연구자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독창성이 돋보이는 인물로 꼽히는 거장이다. 그녀의 최근작 ‘고전에 맞서며’(글항아리)가 번역 출간됐다.비어드는 광대한 그리스 로마사를 거장의 솜씨로 종횡무진한다.책은 마치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를 둘러보는, 가이드 딸린 여행기 같다. 크레타섬의 크노소스에 있는 선사시대 궁전부터 아스테릭스와 친구들이 로마에 맞서 싸우는 갈리아 지방에 있는 가상의 작은 마을까지 31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둘러본다.그리스·로마 연구의 뛰어난 연구자이자 BBC 다큐멘터리 진행자로서 고전의 대중화에 앞서고 있는 비어드는 영미권에서 출간된 고대 그리스 로마 관련 도서 중 31가지 주제에 맞는 책을 뽑아 서평하면서 독자들을 본격적인 여행에 가담시킨다.먼저 고대 역사에서 더없이 유명하거나 악명 높은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여류 시인 사포, 알렉산드로스 대왕, 한니발, 율리우스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 칼리굴라, 네로, 부디카, 타키투스 등이다. 다른 한편 무명의 평민들도 역사 전면에 나선다. 노예, 말단 병사, 광활한 로마 제국의 군사 점령 아래 생활했던 수많은 백성…. 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웃었을까? 이빨은 잘 닦았을까? 결혼생활에 불만이 있거나 경제적 파산에 내몰렸을 때 누구를 찾아가 절박한 마음을 드러내고 도와달라고 매달렸을까?이 책은 고대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강렬했던 시기, 온갖 신분과 직업에 속한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흥미로운 주제들을 다룬다. 나아가 현대 학계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논쟁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로마인들은 왜 그렇게 많은 노예들을 해방시켰을까부터 로마 지배하의 브리타니아는, 혹은 불굴의 용사 아스테릭스가 살던 갈리아 마을은 대체 어디까지 ‘로마화’됐을까? 현대의 시선으로 보면 항상 새로운 질문이 생길 뿐 아니라 과거의 해답에도 의문을 제기하게 되고, 때로는 새로운 해답들을 찾아낼 방법이 보인다.여기서 비어드의 주장은 간단하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 대한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 로마 고전학의 미래는 밝다. 열정과 재치를 발휘해 논쟁을 벌이며, 조사하고 맞서야 할 흥미로운 질문과 문제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현재의 우리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줄까를 이 책은 묻고 있다.고전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일종의 대화에 참여한다는 의미다. 이는 고대의 문헌과 유적처럼 물리적 유산과의 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에 앞서 수백 년 동안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온 사람들,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말을 전하고 인용하면서 재창조 작업을 해온 사람들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책은 과거 여러 세대의 고전학자와 고고학자, 여행가, 예술가, 골동품 전문가 등의 목소리를 비중 있게 들려주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9-23

모택동의 고향·中 인문유산 보고 호남성으로

‘중국 인문 기행 3’(창비)은 국내 손꼽히는 한문학자인 송재소(77)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인문학적 지식 가득한 중국 기행 시리즈 제3탄이다. 이른바 ‘코로나 시대’가 반년 넘게 이어지면서 해외여행은 먼 일처럼만 느껴지는 요즘, 중국 인문 전통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이 책의 출간이 반가울 따름이다.저자는 50차례 이상 중국을 드나들면서 답사한 중국의 인문유산에 시와 술과 차 이야기를 곁들여 문향(文香) 짙은 기행서를 내놓았다. “술술 풀어놓은 답사기에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을 얹은 탁월한 기행서”라는 평을 받았던 전작들에 이어 이번에도 중국의 여러 인문유산들을 통해 수천년 중화문명의 진수를 꿰는 탁월한 통찰을 제시한다.이번 시리즈 3권은 중국 호남성의 명소를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호남성은 중국 남동부에 있는 성으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장가계로 잘 알려져 있지만, 천연경관 못지않게 풍성한 인문학적 유적을 보유하고 있다. 이곳에는 중국 4대 서원의 하나인 악록서원과 한나라 초기의 유물이 발굴돼 세계를 놀라게 한 마왕퇴 유적, 중국에서 손꼽히는 호수 동정호와 천하의 누각 악양루가 있고, ‘초사’의 창시자 굴원과 시성 두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오늘날 중국을 만든 모택동과 유소기 등 중국공산당 최고 지도자들이 나고 자라 그야말로 전통과 현대의 중국을 동시에 만나볼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호남성은 고대 중국에서 ‘남만’으로 불리며 오랑캐가 사는 지역으로 폄훼됐지만, 한나라 이후로 점차 중국에 편입돼 문화와 역사에 굵은 자취를 남겼다. 특히 호남성을 대표하는 동정호와 동정호를 상징하는 악양루는 중국 삼국시대 이래로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악양루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오나라 명장 주유가 병사를 지휘했던 곳에 그의 후임인 노숙이 군사적 목적으로 누각을 지은 것이 그 시작이다.이후 동정호는 군사적 목적보다는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명소로 자리 잡았고, 많은 문인과 정세가가 이곳을 다녀간 뒤 글귀를 남겨 명승지로 알려졌다. 그중에서도 범중엄이 쓴 ‘악양루기’는 천하의 명문으로 애송돼 악양루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백, 두보, 백거이, 유우석 등 중국 문학의 거인들 역시 직접 악양루에 올라 그 감상을 시문으로 남겼다. 누각 안에는 두보가 악양루에 대해 남긴 시를 모택동이 옮겨 적은 글씨가 전시돼 있기도 하다.오늘날 악양루를 찾는 이들은 중국 문학과 역사의 진한 향기와 더불어 바다처럼 펼쳐진 거대한 동정호의 절경을 만날 수 있다. 이를 경계로 호남성과 호북성을 나눌 정도로 거대한 이 호수를 보고 시인 이백은 다음과 같은 명시를 악양루 주련에 남기며 경치를 찬탄했다. “물과 하늘이 온통 한 색깔이요 / 청풍명월 경치는 끝이 없도다”저자는 이번 3권에서 특히 다양한 건축물들의 ‘주련’에 주목했다. 주련은 기둥에 새긴 문장을 말하는 것으로, 한자문화권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이다. 건물의 품격을 높이고 장식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으로 여겨져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보편화됐다. 해당 건물의 특징, 역사적 의의, 지리적 환경, 주인의 인품 등을 나타내는 구절을 기존 유명 시문에서 따오거나 주인이 직접 창작해 건물의 얼굴로 내세웠다. 주련은 당대 문화와 서체를 연구하는 귀한 자료인 동시에 중국 정신을 함축적으로 느낄 수 있어 그 가치가 크다.오늘날 신중국 성립의 기틀이 이곳에서 마련됐다는 점에서 호남성의 가치는 더욱 두드러진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영원한 지도자 모택동의 고향인 호남성에는 그가 출생해 중국 혁명을 꿈꾸고 활동해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소산 마을의 생가, 신혼집으로 쓰였던 청수당 등에서 유년과 청년 시절의 모택동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모택동이 수학한 호남제일사범학교는 송나라 시절부터 이어져온 전통 있는 교육기관으로, 악록서원과 함께 ‘천년 학부’로 불린다.여기서 조금 더 반경을 넓힌다면, 모택동과 함께 초기 중화인민공화국을 주도한 유소기, 중국 인민군의 핵심 팽덕회의 생가 역시 호남성에 있어 모택동 생가와 더불어 ‘홍삼각’을 이룬다. 저자는 유소기 생가를 방문해 말년에 문화대혁명으로 비참하게 숙청된 유소기의 일생을 떠올린다. 이들보다 조금 앞선 시대를 살았던 혁명가이자 여성해방 운동가 추근이 거주했던 집과 모택동이 말년에 거주하고자 지었던 별장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처럼 중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곳 호남성 답사의 큰 매력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9-16

옛 선현들에게 배우는 지혜로운 자녀 교육법

지난 6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심력이 허락하는 날까지 글을 쓰고 싶다”고 고백한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강사 김재욱 씨가 약속을 지키듯 새로운 책을 출간했다.‘옛 선현들의 지혜를 어린이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겠다’는 취지에서 만든 ‘아이를 크게 키운 고전 한마디’(한솔수북).가장 먼저 독자들의 눈길을 잡아채는 건 책의 헤드 카피다. “우리 아이만큼은 잘 자라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욕심으로 진정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진 않은가?”도발적인 질문에 이어지는 다음 대목도 신선하다. “반듯하고 똑똑하고, 순종하는 아이를 바라기 전에 담대하고 현명하고 품 넓은 부모가 되어 보자.”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며, 어른은 아이가 배우는 또 다른 교과서다.김재욱 씨는 아이를 키우면서 마주치는 선택의 순간이나 갈등의 순간에 고전에서 얻은 가르침을 문제 해결의 실마리로 삼으면 어떻겠냐고 묻는다. 김씨는 “때로는 실수도 하고 아이들과 부딪히기도 하지만 고전의 가르침은 결국 틀리지 않았음을 양육의 과정에서 경험했다”고 말한다.예를 들어 아이의 총명함과 상관없이 더 많이, 더 빨리 공부를 가르치겠다는 의욕을 불태웠던 경험담에서는 이덕무의 이야기와 글귀를 소개하며 아이의 상태와 수준을 감안해 가르쳐야 한다고 코치한다.또, 아이의 공부에 부모가 얼마나 개입하는 것이 옳은가로 부부가 싸운 체험을 들려주면서는 ‘부모 자식 사이에는 책선을 하지 않는다’고 한 맹자의 글을 인용한다.박세당의 편지와 일화를 보여주면서는 남의 집 부모처럼 자식한테 정성을 다하지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하고 있다.‘천천히 걸어야 멀리 간다’ ‘자식의 삶은 자식의 것’ ‘뭐가 되려고 애쓰지 말게’ ‘남의 처지를 헤아리는 일’ ‘혼자 힘으로 사는 사람은 없다’는 등의 책 속 소제목은 저자가 부모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압축하고 보여준다.공부만 잘하는 것이 아닌 인성과 사회성을 갖춘 한 명의 인간으로 성장하기까지 아이에겐 시간과 삶의 조언이 필요하다. ‘아이를 크게 키운 고전 한마디’는 이 중 삶의 조언으로 역할 할 수 있을 듯하다.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드물게도 네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저자는 ‘한문학자’답게 고전 속에서 인생의 답을 찾으라고 말한다. 옛 사람이 남긴 새겨들을 말은 2020년 오늘날에도 분명 새겨들을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1972년 경북 봉화군에서 태어난 김재욱 씨는 동국대와 고려대에서 공부했고, 박사 학위 취득 후 여러 대학에서 한문과 글쓰기를 강의해왔다. 삼국지 속 등장인물과 현대 한국의 인물을 비교해서 쓴 ‘삼국지인물전’, 인문교양서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등의 저자이기도 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9-09

기득권이 된 진보세력… 무너진 정의에 대하여

“‘무너진 정의, 사라진 공정, 물구나무선 민주주의!’”(천년의상상 출판사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서평 중)‘조국 백서’로 불리는 책 ‘검찰개혁과 촛불시민’에 대항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천년의상상)가 출간됐다.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김경율 경제민주주의21 공동대표, 강양구 미디어 전문 재단 TBS 과학 전문 기자, 권경애 법무법인 해미르 변호사,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등 5명이 공동으로 집필했다. 이 책은 앞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지지하는 인사들이 펴낸 ‘검찰개혁과 촛불시민’ 일명 ‘조국 백서’와 대비된다는 의미에서 출간 전부터 ‘조국 흑서(黑書)’로 불렸다.회계사인 김 대표는 ‘조국 사태’에 대한 참여연대의 침묵에 분노해 이 단체를 탈퇴했고 권 변호사 역시 이에 관한 민변의 미온적인 태도에 실망해 정권 비판에 나섰다고 한다.황우석 박사의 연구 부정 의혹을 보도했던 강 기자와 기생충학자이면서 사회 현안에 관해 목소리를 내온 서 교수, 현 정권과 문재인 대통령 지지층에 맞서는 SNS 활동을 활발히 펼쳐온 진 전 교수도 ‘조국 사태’에 관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책의 집필에 참여하게 됐다.앞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지지하는 인사들이 펴낸 ‘검찰개혁과 촛불시민’(일명 ‘조국 백서’·오마이북)은 출간 직후인 8월 둘째 주 교보문고의 온·오프라인 종합 베스트셀러 20위에 진입했고 그다음 주에는 9위로 올라섰다.‘민주주의는 어떻게 끝장나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는 전문 분야 별로 필진 가운데 한 명이 사회를 보고 두 명이 대담하는 형식으로 엮어졌다. 전체 7개 장 가운데 1~3장은 미디어와 지식인 그리고 팬덤 정치를 다룬다.저자들은 “2019년 8월의 ‘조국 사태’로 인해 우리는 미래사회의 비전에 대한 토론과 합의는커녕 ‘청와대냐 검찰이냐’는 선택을 강요하고 정의와 상식의 기준 자체를 바꿔버리는 언어도단과 ‘비상식의 상식화’를 체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4~5장은 금융자본과 사모펀드 문제를 분석한다. 권경애 변호사, 김경율 회계사는 한국 사회의 금융시장이라는 커다란 그림 그리기부터 시작해 ‘조국 일가 사모펀드 에피소드’까지 2020년대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문제를 넓고 깊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김 대표는 “자본시장 플레이어들이 익명으로 하는 불투명한 투자활동이나 경영에 참여한 회사의 자금 횡령을 돕는 가림막 역할을 한 것이 사실상 사모펀드 제도였다”고 지적했고 권 변호사는 “공직자윤리법은 다양한 자본시장의 등장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는 낡은 규정들이 많고 특히 사모펀드의 규제는 전무한 상태”라고 비판했다.6~7장에서는 5명의 필자가 모두 참여해 ‘586 정치 엘리트와 무너진 정의와 공정의 회복’을 주제로 토론했다. 저자들은 “‘진보적 시민단체’로 불리던 곳에서 이전에 ‘우익 관변단체’가 하던 일을 하고 있다”면서 “진보세력은 거의 10년 동안 집권했고 문재인 정부도 벌써 집권 3년을 넘어가면서 이들이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사회에 뿌리내렸다”고 진단했다.이어 “원한 감정과 피해 의식 속에서 기득권 유지, 정권 유지에만 집착하는 것 같다. 이제는 꿈이 사라져 버렸다. 586 정치엘리트가 득세하는 현실 정치 속에서, 정의가 무너지고 공정이 사라지고 평등이 망가지고 있는 모습들과 대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8-27

전 생애 걸쳐 참된 스포츠 정신 실천한 故 손기정 선생

1936년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고(故) 손기정(1912~2002) 선생의 일생과 스포츠 철학을 기록한 데라시마 젠이치(寺島善一) 일본 메이지 대학 명예교수의 ‘손기정 평전’(사회평론사)이 국내 번역 출간됐다. 선생의 모교인 메이지 대학교수로서 여러 차례 선생과 만난 적이 있는 데라시마 교수는 일제 강점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방대한 문헌과 언론 보도, 선생의 자서전을 비롯한 관계 인물들의 기록과 지인들의 증언을 종합해 참된 올림픽 정신을 구현한 선생의 생애를 정리했다.그는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과 일본 한류 붐 등을 계기로 조성된 한국과 일본의 우호적 관계가 최근 양국의 정치적 문제로 붕괴해 역사상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보고 집필을 서두르게 됐다고 한다.책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을 겪으면서도 운동에 전념해 올림픽에서 우승했으나 일제의 탄압을 받았던 청년기를 거쳐 후진 양성과 스포츠를 통한 국제 우호 증진에 앞장선 광복 이후에 이르기까지 생애를 시대순으로 정리한다.‘손기정 평전’은 데라시마 명예교수의 ‘스포츠는 국경을 넘어 마음을 이어준다’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광복절인 15일부터 일반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8-27

한적한 어촌 마을이던 포항의 성장과정 조명

포항지역의 일제강점기 모습을 기록한 책이 출판돼 관심을 끌고 있다.김진홍(58·사진)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이 펴낸 ‘일제의 특별한 식민지 포항-포항지(浦項誌) 주해와 그 주변의 이야기들’(글항아리)에는 구한말 당시 동부 해안가의 한적한 어촌 마을이던 포항동(浦項洞)이 면(面)으로, 또 읍(邑)으로 성장한 과정이 나와 있다.제1부는 ‘포항지’를 주석과 함께 번역한 주해서로 구성했고, 제2부는 ‘포항지’ 발간 전후의 포항 관련 사료들과 강점기 말에 이루어진 창씨개명, 일본인의 귀환, 포항시의 시승격까지의 자료를 모아 구성했다. 이 책은 저자가 몸담고 있는 포항지역학연구회 연구총서 4호격이다.이 책의 제1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인 1935년에 간행된 ‘포항지(浦項誌)’다. 당시 식민정책의 최전선에서 조선총독부 정책을 대변하는 두 명의 일본인 기자가 쓴 것으로 20세기 초반 포항으로 건너와 깡촌이던 그곳을 일약 동해안의 중심 항구도시로 키워낸 일을 자랑스럽게 기록으로 남겼다.“조선 시대에 들어 태종왕 때 연일에 진(鎭)을 설치하여 성을 짓고 병마의 구비도 완비했으나, 이것은 그다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아니다”라고 쓰고 있는데 편역자 김진홍은 주석을 달아 “특기할 만한 사실이 아니라고 폄하하고 있으나, 이것이야말로 포항 지역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곳에 설치한 연일진은 말하자면 해병사단 안에 배치한 육군이다. 진은 군사적 요충지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조선 시대에 이미 영일만 또는 연일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3·1운동을 “만세 소란”이라고 반복적으로 지칭한 것에 대해서도 “3·1 만세운동을 ‘만세 소란’이라고 표현한 데서 일본인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영일군수(난바 데루지), 포항읍장(시모무라 시게히데) 둘 다 일본인이었다”라고 지적했다.이 책의 제2부 또다른 포항의 발자취는 ‘포항지’ 발간 전후 포항을 다뤘던 사료들을 모아 구성했다. ‘포항지’ 발간을 전후한 자료와 광복 직전의 창씨개명과 징용, 광복 직후 일본인의 철수와 6·25전쟁 직전의 혼란기 포항의 모습까지 담았다.△일제 강점기 초기에 소개된 포항 △조선총독부 자료에 소개된 포항 △특집기사에 소개된 구룡포 △특집기사에 소개된 포항 △포항읍 발전 좌담회에 소개된 포항의 당시 현안 △1939년부터 광복 이후 포항의 이모저모 등 알찬 내용들이 담겨 있다.게다가 2부에서는 일본 총독부가 창씨개명과 징용 등을 강제했다는 증거도 찾아내 싣고 있다. 특히 일일이 본문에서 소개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연표 작성으로 보완했다. 이 연표만 보더라도 구한말 이후 포항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일제가 조선인의 평균 체격을 측정하기 위해 남녀별로 모아놓고 찍은 사진, 1920년대 포항 나카초(仲町) 설경, 포항의 발전상과 변화를 한 눈에 보여주는 지도, 포항 구도심지의 초기 형성을 알 수 있는 지도, 1931년 2월 포항역에서 청어를 출하하는 광경, 1910년대 헌병출장소로 사용된 영일현청 사진 등 희귀한 사진 자료도 많이 담고 있다.저자 김진홍씨는 대구 출신으로 단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에서 ‘남북통일 시 재정 통합 방안’을 연구했다. 한국은행 조사국에서 아시아 지역 국제경제를 담당하다 2009년 포항으로 내려왔으며 현재는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그동안 ‘영일만항의 활성화 방안’ ‘포항 철강클러스터의 구조적 문제점 진단’‘경북 동해안 지역 글로벌 발전 방향’ 등 많은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포항의 근대 도시 발전, 역사, 문화, 산업 등을 연구하는 포항지역학연구회 회원으로 ‘포항지역학연구총서3) 포항 6·25’(공저)를 펴내기도 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8-20

바이든 美 대선 후보의 극적인 인생과 정치 역정

신간 ‘바이든과 오바마’(메디치미디어)는 오는 11월 치러질 미국 제59대 대통령 선거 바이든(78) 민주당 후보의 극적인 인생과 정치 역정을 상세히 보여준다. 바이든 후보는 2009년부터 2017년까지 제47대 부통령을 지냈다. 같은 기간 제44대 대통령을 역임한 버락 오바마(59)의 정치적 동반자였다.책은 대통령이었던 오바마와 부통령이었던 바이든의 ‘애정에 가까운’ 특별한 관계를 찬찬히 소개한다. 더불어 향후 펼쳐질 미국의 정치 변화도 예측하게 한다.두 차례의 임기 동안 오바마와 바이든은 완벽한 정치적 파트너로서 기쁨과 고통을 함께했다. 특히 바이든은 외교와 입법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오바마의 수석 고문으로 전례 없는 역할을 수행하며 부통령직의 모범이 됐다.책의 저자 스티븐 리빙스턴은 두 정치인의 깊은 애정과 신뢰가 미국에서 보기 힘든 ‘진실한 정치 브로맨스(남자들 사이의 유대와 우정)’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도널드 트럼프의 무례한 정치 행태에 질린 미국의 지식인과 대중에게는 오바마와 바이든이 진한 ‘그리움’이 되고 있다고 덧붙인다.책에서는 바이든의 극적 인생 스토리를 비롯해 그의 정치 성향과 철학을 살필 수 있다. 이와 함께 상원의원에서 시작해 부통령에 오른 정치 역정을 상세히 얘기한다. 가족의 죽음을 거푸 겪은 바이든의 파란만장한 삶은 물론 미국 내 정치·경제 문제, 인종 문제, 외교 정책 등도 들여다보게 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8-20

“혼자 조용히 읽고 생각하고 쓰고 요약하라”

“손을 움직여 읽으면(초서 독서법) 뇌가 깨어나고, 의식을 집중해 읽으면(의식 독서법) 뇌가 편안해진다. 바로 그때 독서의 기적이 일어난다”조선 시대 또 한 명의 위대한 학자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두 손을 모으고 똑바로 앉아 공경히 책을 대해야 한다. 마음을 통일하고 뜻을 모아 골똘히 생각하고 깊이 두루 살펴 뜻을 철저히 이해하되 모든 구절마다 반드시 실천할 방법을 찾도록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또다른 조선 선비 담헌 홍대용도 ‘여매헌서(與梅軒書)’에서 “정신을 한데 모아 책에 쏟아붓는다. 이렇게 하기를 계속하면 의미가 나날이 새롭고 절로 무궁한 온축(蘊蓄)이 있게 된다”고 말했다.이 모두 의식 독서법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김병완의 초의식 독서법’(싱긋)의 저자 김병완 작가는 한국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독서법은 우리 선조들이 남겨준(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말살돼버려 후손들에게 이어지지 못한) 독서법이라고 말한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서양 특유의 독서법(예를 들면, 책을 읽고 토론하는 방법)보다는 혼자 조용히 집중해 읽고 생각하고 쓰고 요약하는 초의식 독서법이 우리에게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독서를 하는 이유는 지식과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의식의 확장과 강화, 그리고 생각하는 법의 획득에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속독과 발췌독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책의 주장과 씨름해 온전히 그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독서법의 힘을 웅변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독서를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게 구체적인 독서 방법을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3년 동안 도서관에 거의 칩거하다시피 하며 책과 씨름해왔던 저자는 자신이 해온 독서법이 실제로는 이미 조선 시대 우리 선조들이 독서법으로 활용해온 것임을 우연히 알게 됐다. 그 독서법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초서 독서법과 의식 독서법(이 둘을 합쳐 초의식 독서법)이다. 초서 독서법은 눈만이 아닌 손까지 사용해 책의 중요 부분을 가려내고 베껴 쓰면서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이고, 의식 독서법은 온 정신과 의식을 다해 온전히 책에 몰입해서 읽는 것을 말한다.이 초의식 독서법을 몸과 마음에 온전히 체득하게 되면 책이 전달하는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의 습득 차원에서 벗어나 해당 책의 저자와 책 속에서 만나게 되고, 이야기하고 논쟁하고 씨름하게 되며, 그 결과 오롯이 자기 자신만의 의식이 만들어져 새로운 인생을 펼쳐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럴 때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게 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저자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 현대화한 초의식 독서법 실천방안을 제시한다. ‘BTMS(Book, Think, Mind, Summary. 읽고 생각하고 의식을 확장하고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 독서법’으로 명명한 이 실천법은 독서노트 쓰기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또한 의식 독서법을 위한 방법론으로 서구에서 열풍을 일으킨 ‘포토 리딩(Photo Reading)’과 ‘그뤼닝 학습법’에서 말하는 집중력 강화법(귤 기법, 골프공 연습법 등)을 제안하고 있다.저자는 속도의 노예가 되고 실용성만 강조되는, 그리고 글자 하나하나에만 집중하는 지금의 독서법으로는 절대로 인생을 바꿀 수 없다고 단언한다. 또한 일제 35년 동안 후대로의 전수가 끊어져버린 선조들의 위대한 독서법을 다시 기억하고 복원해야만 비로소 ‘새로운 생각’이 지배하는 이 시대를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김병완 작가는 2013년 ‘48분 기적의 독서법’, 2014년 ‘김병완의 초의식 독서법’, 2017년 ‘퀀텀독서법’등의 저서를 차례로 출간하며 사람들이 독서에 대해 관심을 유도한 바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8-13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

시인이자 산문가인 민병일이 ‘모든 세대를 위해’ 쓴 동화 ‘바오밥나무와 방랑자’(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그의 동화는 시적 영감으로 가득한 이야기와 반짝이는 사유의 문장들을 통해 꿈과 상상력을 잃어버린 현대인을 때로는 비판적으로, 때로는 따뜻한 위로의 시선으로 그려내며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그러나 잊히거나 상실한 것들, 그리하여 보이는 것 뒤에 숨어 있는 더 아름다운 것들을 다시금 불러낸다.이 책에서 인격화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바오밥나무는 그 크기가 높이 20미터, 둘레 40미터에 이르며 하늘을 떠받치듯 우뚝 솟아 5천 년을 사는 신비한 나무로, 삶의 무게에 짓눌려 고단하고 상처 입은 방랑자들, 깊은 절망에 빠져 고독하게 길 헤매는 방랑자들에게 수천 년을 살아오며 터득한 지혜를 건넴으로써 위로와 더불어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북돋는다.또한 이 책에는 바오밥나무 외에도 동화적 상상력으로 가득 채워진 여러 방랑자들이 등장한다. ‘유리병 속 꿈을 파는 방랑자’ ‘그림자를 찍는 사진사’ ‘순간 수집가’ 등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들뿐만 아니라 ‘물구나무딱정벌레’ ‘양귀비꽃’ ‘무당벌레’ ‘달팽이’ 등 그 대상도 동식물을 가리지 않고 폭넓다.저자 민병일은 자유로운 글쓰기와 무한한 상상력을 통해 독자들을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이끌지만, 그의 동화가 무엇보다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 속에 고단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름다운 은유로서 녹아 있기 때문이다.3부로 구성된 이 책에는 24편의 글과 32점의 그림이 수록돼 있다. 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시각예술을 전공한 저자는 동화에 그림을 직접 그려 넣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