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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숨비소리

전화기 너머로 친구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나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는데 그의 이야기 속에 갇혀 숨 쉴 틈이 없다.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의 주변 이야기들을 쓰나미처럼 쏟아내 나를 덮는다. 내 속은 점점 깊이 잠겨 버린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내가 먼저 건 전화였다. 내 마음을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이 대화는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내 안부를 묻는 가벼운 질문조차 없이 친구는 자신의 이야기만을 토해냈다. 자신의 아이들 일상을 풀면서 정작 내 아이들의 일상은 묻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 자신의 문제만 존재하는 듯 쉴 새 없이 넘나드는 거친 파도처럼 쉼이 없었다.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참았다. 물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나는 듣는 사람으로 남았다. 익숙한 일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적절한 순간에 맞장구를 치고, 간혹 짧은 감탄사를 얹으며 존재감을 유지하는 일, 감정을 삼키고 하고 싶은 말도 접어두는 일, 그 소실점에서 묘하게 차분한 순간이 찾아왔다.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말할 수 없는 심연 속에서 조용히 견디는 느낌이다. 숨을 참고 버티며 내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끝내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잠깐 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친구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전화기 너머로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쉰다. 마치 해녀가 물 밖으로 올라오며 내뱉는 숨비소리처럼, 참아낸 숨이 길수록, 내쉬는 숨은 더 깊고 진하다.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물속에서 숨을 참고 작업한 뒤, 물 밖으로 나올 때 내뱉는 숨소리다. 깊은 바다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려면 숨을 최대한 참아야 하고, 마침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강하게 내쉬는 숨이 바로 숨비소리다. 그것은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생존과 인내의 증거이며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나는 지금 물속을 헤엄치고 있는 중이다. 깊이 잠길수록 주변은 조용해지고 오직 나의 심장 소리만 또렷하게 들린다. 숨을 참고 견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온몸이 묵직해지지만 나는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물 속에 오래 머물려면 급하게 숨을 쉬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면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리게 된다. 살면서 숨을 참아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아이가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했을 때 좌절하지 않도록 감정을 숨기고 숨을 죽이며 아이의 마음을 감쌌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자신만의 길을 찾았고 대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 주었을 때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숨을 참았던 그 시간이 나와 아이를 더 강하게 만들어준 시간임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김경아 작가 때로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켜야 할 때, 당장 도망치고 싶지만 버텨야 할 때, 조급한 마음을 누르고 기다려야 할 때, 숨을 참는 일은 힘들다. 하지만 그 순간을 이겨낼 때 비로소 물 위로 나와 크게 숨을 내쉴 수 있다. 해녀들이 힘겹게 숨을 내쉬며 다시 바다로 향하듯, 나 역시 삶에서 숨을 참고 견디는 과정을 반복하며 바닷속 보물들을 캐 나가는 것이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의외로 물속은 신비롭다. 빛이 닿지 않는 깊은 곳일수록 고요하지만,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잠시 그곳에 머문다. 물속에서 나의 감정들은 천천히 가라앉는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조급했던 흐린 감정들이 잠잠해지고 내 수면 깊숙이 덮여있던 언어의 조각들을 꺼내어 가만히 듣는다. 오래 참을수록 숨을 내쉴 때의 해방감은 더 크다. 친구가 다 들어주지 않더라도 견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면 위의 공기는 더욱 달고 청량하다. 다시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숨을 참고 견디고 다시 떠오르기 위해. /작가

2025-03-18

네 탓 하는 정치

우정구 논설위원 미국이 한국을 민감국가에 포함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네 탓 공방이 가관이다. 우리나라 여야 정치가 책임보다 책임을 전가하는 네 탓에 익숙한 분위기라지만 민감국가 지정을 둘러싼 여야간 네 탓을 보면 한심할 지경이다. 민감국가란 미국정부의 안보를 위협할 우려가 있거나 테러지원 등의 우려가 있는 나라를 대상으로 미국이 일종의 규제를 가하는 제도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 등이 이에 해당하는 나라다. 오랜 동맹관계의 한국을 민감국가에 올린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한국의 입장에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더구나 미국이 민감국가 목록에 동맹관계인 한국 이름을 올린 배경에 대해 아직도 우리나라 외교당국이 정확한 사유를 모른다고 하니 국가 외교력에 공백이 생긴 것 같아 실망이 크다. 이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은 더 실망스럽다. 야당은 “계엄선포 탓”이라며 공격하고 여당은 “탄핵남발 탓”으로 응수하는 등 책임 떠넘기는 모습이 한국 정치 수준을 짐작케 하고 있다. “넘어지면 막대 타령”이란 우리 속담이 있다. 제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는 탓하지 않고 애꿎은 남탓할 때 쓰이는 말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내 탓이오”란 이름으로 스스로 책임지는 사회혁신 운동을 벌였다. 남 탓하기 전에 자신부터 되돌아보는 사람이 되자는 운동이다. 사람의 심리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렇지만 정치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 국가 이익과 국가 미래 앞에서 네 탓보다는 내 탓을 하는 책임있는 정치가 돼야 한다. 네 정치 이제는 끝내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3-18

‘한국무시’하는 미국에 대응할 외교력 있나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우려했던 미국의 ‘한국무시’가 현실화 됐다. 아직 미국의 공식 발표가 나온 건 아니지만, 에너지부(DOE)가 산하 국책 연구기관에 다음 달 15일부터 한국을 민감국가(Sensitive Country)로 분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미국으로부터 일종의 기피국가로 낙인찍혔다는 사실을 정부도 몰랐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외교참사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세계 각국에 관세폭탄을 던지는 미국은 이제 한미자유무역협정(FTA)까지 재협상 대상으로 삼을 태세여서, 우리정부 공직자들이 정신을 바짝 차릴 때다. 작년까지 미국 에너지부의 ‘민감 국가 및 기타 지정 국가 목록’에 포함된 25개 나라는 심각성이 높은 순서로 테러지원국가(북한, 이란 등), 위험국가(중국, 러시아 등), 기타 지정국가(한국, 대만 등)로 분류된다. 이 목록에 오른 나라 중에서 미국과 ‘상호 방위 조약’을 맺은 동맹국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외교부는 지난 17일 밤 민감국가 지정에 대해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에 대한 보안관련 문제가 이유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했지만, 미 행정부는 아직 공식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 지정 주체가 미 에너지부라는 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23년 1월 국방부 업무보고 때 “대한민국이 전술핵을 배치한다든지 자체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 게 화근이 됐다는 말도 나온다. 윤 대통령의 이 발언은 당시 바이든 행정부에 큰 충격을 줬다. 미국이 우방국인 이스라엘과 대만을 민감 국가로 지정한 이유도 핵 비확산 문제 때문이다. 미 에너지부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민감국가 목록은 DOE 산하 정보방첩국이 관리한다. 민감국가 출신 연구자들은 DOE 관련 시설·기관에서 근무·연구하려면 엄격한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 다만 한국은 최하위 관리범주에 속해 제한이 크게 엄격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외교가 이렇게 혼란한 상황인데도 정치권은 서로 남탓만 하고 있다. 민주당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러한 결정을 한 것은 정부와 여당이 초래했다고 공격했다. 이재명 대표는 17일 “민감국가 지정으로 인공지능, 원자력, 에너지 등 첨단 기술영역에서 한미연합과 공조가 제한될 것이 명백하다. 윤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와 핵무장론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은 이에대해 “민주당이 국익, 미래가 걸린 외교까지도 정쟁 도구로 삼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 대표를 겨냥해 “이런 인물이 유력대권후보라 하니 민감국가로 지정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국민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정부의 대미외교 역량이다. 정부는 민감국가 지정에 대한 언론 보도가 나온 뒤에야 부랴부랴 상황 파악에 나섰다고 한다. 미국 에너지부가 밝힌 민감국가 적용 시한까지는 아직 한 달 남짓 남았다. 이번주 중 산업부장관이 미 에너지부 장관을 만나는 일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전에라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 지정 경위를 명확히 파악하고, 한미간 동맹체제에 금이 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2025-03-18

생각 변화가 삶의 질을 가름한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처음 혁신을 도입하는 기업이나 도입한지 오래되어 혁신의 피로도에 젖어 매너리즘에 빠진 기업을 만나면 한가지 질문을 한다. ‘혁신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돈 버는 것’‘변화하는 것’‘가치창출’ 등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혁신은 편함을 바꾸는 것’이기에 거부감이 있고 저항이 따른다. 혁신은 생각에 변화를 주어 편함을 바꾸면 더 편해지고 일의 효율성이 높아지는 원리이다. 이것이 참으로 어렵다. 혁신 경영에 생각이 있는 CEO를 만나면 회사 전반적인 분석과 의견수렴을 통해 하얀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린다. 속 그림은 실행의 주체인 현업과 함께 그린다. 기업의 혁신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지 탐색해 본다. 혁신은 생각이다. 인공지능(AI)시대 생활문화, 과학 문명, 한강의 소설 등은 생각의 산물이다. 생각에 가치 더하기를 하면 혁신이 된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혁신의 정의를 ‘새로운 조합의 창출’이라고 하였고, 제품이나 서비스의 개발, 생산 방식, 시장 개척, 조직 형태의 도입 등이 포함 된다. 현대 경영학에서는 ‘가치 창출을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 프로세스 최적화, 제품, 서비스 등을 개발하고 적용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제조업의 혁신은 단순한 제품 개선을 넘어, 생산성 향상, 원가 절감, 품질 개선, 지속 가능한 경영 등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보면, 신제품 개발이나 기존 제품의 획기적인 개선 등의 제품 혁신, 낭비를 찾아 제거를 통한 생산 공정의 개선과 자동화, AI 적용의 공정 혁신, 새로운 판매 방식, 유통 채널 확장, 서비스 결합 등의 비즈니스 모델 혁신 등이 있다. 혁신을 통해 잘 나가는 기업을 따라 생산방식을 도입하거나 모방하면 실패 확률이 높다. 자사의 일의 속성, 설비 특성, 생산 프로세스 특징 등을 고려하여 적절한 혁신 방식을 선택하여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학습 진화의 관점에서 6시그마, TPS, TPM 등 혁신 기법의 수행 원리와 기능을 이해하고 자사의 생산 조건에 맞는 기법을 선택하여 문제를 푸는 것이다. 일과 생산 조건 변화에 적용성, 효과성이 있으면 혁신체계를 재정립시켜 지속성 속에 고유의 혁신 문화로 만드는 것이 성공의 길이다. 일반 가정에서 보면, 정리 정돈의 방법론을 적용하면 생활의 질이 높아 진다. 옷장에 안 입는 옷을 버리지 못하고 같은 옷을 또 사는 경우가 많다. 유행이 지났거나 오래 된 것을 과감하게 버려야 가치 있는 변화의 시작이 된다. 신발장도 아까워서 못 버리는 경우가 많고, 냉장고 냉동실에는 몇 달 전에 사놓은 음식 재료를 잊고 또 구입한다. 이러한 것은 생각에 정리 정돈을 못하기 때문이고 물건에도 정리 정돈이 안 되는 결과다. 변화와 혁신은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크고 거창한 것에서 시작하려면 초기에 멈추고 마는 경우가 있다. 혁신은 거창한 이론이나 큰 변화보다 작은 생각의 변화에서 행동의 변화, 사물의 변화를 주고 가치 있는 행복한 삶으로 이어 진다.

2025-03-18

꿈나무에서 실버까지 피우는 묵향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봄이 오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은 듯 비바람과 강원 산간에 ‘봄눈 폭탄’까지 내리니 막바지 동장군의 심술(?)이 만만찮은 것 같다. 더욱이 이번 주부터는 영하권의 꽃샘추위로 남도에 피기 시작한 산수유나 홍매화가 화들짝 놀라며 가녀린 꽃잎을 짐짓 다물지 않을까 싶다. 한창 망울이 부풀어가던 벚꽃나무 가지가 찬 기온에 필 듯 말 듯 낭창거리며 개화시기를 가늠하고 있어도, 볕 바른 곳엔 이미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며 생동의 새봄을 부추기고 있다. 생동하는 봄날의 리듬을 먼저 타기라도 하듯 고사리 여린 손길에서부터 백발의 주름진 더벅손까지 벼루에 물을 부어 먹을 갈고 붓을 잡는 모습들이 진지하게만 보인다. 사각거리며 먹이 갈리는 소리가 긴 겨울의 움츠림을 걷어내는 손끝의 기지개 같고, 붓에 먹물을 찍어 서툴지만 한 점 한 획 써내려 가는 운필(運筆)은 성글어진 마음의 밭을 일구는 쟁기질 같다. 마치 예전의 서당이나 글방처럼 지필묵(紙筆墨)을 가까이하며 은은하게 묵향을 피워가는 몸짓들이 사뭇 담담하고 새롭기만 하다. 이러한 광경은 포스코 붓글씨봉사단에서 펼치고 있는 ‘함께하는 서예 나눔’의 테마별 재능봉사활동 장면들이다. 즉, 포스코 붓글씨봉사단에서는 매월 지역의 아동센터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서예체험학습을 통한 정서순화와 감성계발에 도움을 주는 ‘찾아가는 서예교실’을 운영하는가 하면, 고령화사회를 맞아 노년기의 인지력ㆍ기억력 개선과 치매 예방 및 어르신들의 활력증진을 도모하는 ‘실버인지 서예치유’ 교육 프로그램을 매주 진행하고 있다. 서예 꿈나무들의 육성에서부터 황혼기의 어르신들께 인지학습 소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니, 세대와 공간을 아우르는 활기차고 유익한 서예 재능기부활동이 아닐 수 없다. 포스코 붓글씨봉사단은 2021년 4월에 창단돼 서예재능 나눔으로 관내 취약·소외계층을 배려하고 지원하는 다양한 재능봉사활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찾아가는 서예교실 30여 회, 포항다문화가정·탈북민가족 가훈 써주기, 사회복지시설 방문 부채작품 써주기, 포항문화원 주관 새해 가훈 써주기 등의 서예 나눔활동을 지속적으로 실천했다. 어르신들의 말벗을 해주며 인지능력을 향상시켜주는 이색적인 서예치유 프로그램은 올해 3월부터 실시돼 주위의 눈길을 끌고 있다. 서예를 배움은 단지 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만이 아닌, 그에 수반되는 유용한 가치와 활동으로서 심신의 건강과 의지의 단련, 심미안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는 고도의 정신수양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먹을 갈고 먹물의 농도를 조절해서 붓글씨를 순서대로 써내려 가는 과정에는 뇌의 여러 영역이 자극되고 교감해 뇌의 활발한 활동이 이뤄진다. 한글이나 한문 글자의 의미와 필순을 떠올리며 기억력과 표현력이 좋아지고, 글자의 대소강약이나 먹물의 퍼짐, 전체적인 구도를 생각하면서 붓을 움직이면 공감각적인 능력이 살아나는 등의 효능을 기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음악치료나 미술치료, 웃음치료 못지않게 ‘서예 치유’가 실버세대들의 정신과 마음의 안정, 치매 예방과 건강을 유지하는 신 장르로도 주목받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예 꿈나무 학생들이 붓을 잡는 것이 흥미와 설렘의 희망이라면, 실버들에게는 치유와 소일의 활력과 위안일 것이다.

2025-03-18

국공립 어린이집이 혐오시설?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최근 한국일보의 한 보도가 적지 않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지난해 말. 서울 종로의 어느 아파트에서 운영되던 민간 어린이집이 사정상 문을 닫게 됐다. 폐원된 어린이집을 대신할 국공립 어린이집 설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견이 극단적으로 갈렸다고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다양한 견해 표출이야 별반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국공립 어린이집으로의 전환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내뱉은 말들은 도가 지나치다. “우리가 사는 곳에 국공립 어린이집이 들어오면 저소득층, 장애인, 다문화가정 애들도 올 거 아니에요.” “영어유치원이면 괜찮지만 국공립 어린이집은 안 됩니다.” “일과 양육을 병행하기 어려우면 워킹맘을 때려치우세요.” 심지어 “너희들이 거지야?”라는 막말까지 나왔다. 특정 계층을 비하하고, 교육의 균등한 기회 제공이라는 대원칙을 부정하며, 심지어 국공립 어린이집 설치를 원하는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는 이야기까지 오갔다는 보도에 많은 이들이 혀를 찼을 게 분명하다. 21세기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내 집, 내 식구, 내가 사는 동네다. 더불어 살아가는 걸 지향하는 공동체의 붕괴는 극도의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를 가져왔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돌아보는 경우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특히 자기보다 경제적 형편이 좋지 못한 주변을 바라보는 눈길은 차갑게 식어간다. 요즘 아이들은 같은 동네에 산다고 하더라도 아파트 평수에 따라, 그 아파트가 임대냐 분양받은 것이냐에 따라 친구를 가려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장이거나 거짓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에 서글퍼진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3-17

증오를 선동하는 정치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정치판이 ‘증오와 저주의 굿판’이다. 진영으로 갈라선 정치는 이미 전쟁이 된 지 오래고, 광장의 탄핵 찬반집회에서는 비난·욕설·저주가 난무한다. 통합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대통령은 갈등의 중심에 서있고, 여야 의원들은 자기편 집회에 참석해서 증오를 더욱 부추긴다. 온 나라가 총성 없는 심리적 내전상태다. 누가, 무엇을 위해 증오를 선동하는가? 국민을 빙자하여 권력투쟁을 벌이는 정치인들의 그 검은 속내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여야는 상대를 괴멸시키기 위해 ‘증오 마케팅’에 열을 올린다. 상투적 수법은 ‘정의로운 우리’와 ‘무도한 그들’로 나누어 적개심을 부추기는 것이다. 증오정치로 ‘주체적 시민(市民)’은 점차 이성을 잃고 감정에 따르는 ‘종속적 신민(臣民)’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확증편향에 갇힌 정치팬덤들은 자기 진영의 돌격대로 기꺼이 선봉에 선다. 게다가 편향적 언론과 극단적 정치 유튜버들도 증오의 선동에 가세한다. 정치권과 연계된 당파적 미디어들은 정치적 증오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다. 미디어와 정치권력의 공생관계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공정한 보도’가 아니라 보수 또는 진보의 이념에 부응하는 ‘편향적 나팔수’가 되는 것이다. 정치 유튜버들은 혐오를 부추길수록 조회 수가 늘어나고 더 많은 돈을 번다. ‘증오의 확대재생산’으로 그들은 돈을 벌고 나라는 망해간다. 이처럼 망국적인 증오정치를 어떻게 끝낼 것인가? 무엇보다 정치인들의 성찰과 반성이 시급하다.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품격을 잃은 보수’나 ‘개혁성을 잃은 진보’는 똑같이 나치 독일의 선동가 괴벨스(P. J. Goebbels)를 닮았다. 이성을 잃은 권력은 괴물이고, 괴물이 된 권력이 감성을 자극하는 선동정치가 바로 파시즘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이 ‘증오의 프레임’에 갇히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증오는 편협을 초래하는 영혼의 타락’이다. 확증편향에 갇힌 정치인들이 독선과 아집을 버릴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다시 회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정치인들에게 반성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주권자의 각성과 혜안(慧眼)’이 매우 중요하다. 역사학자 리처드슨(H. C. Richardson)은 “민주주의는 총구가 아니라 투표함에서 죽는다.”고 하면서 “유권자가 깨어 있지 않으면 정치인들은 히틀러(A. Hitler)처럼 대중을 선동해서 권력을 잡는다.”고 했다. 선동정치는 분노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국민들이 선동 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하면 백약이 무효다. 따라서 주권자는 ‘선동에 휘둘리는 감정’을 억제하고 ‘잘잘못을 가려내는 이성’의 눈을 밝혀야 한다. ‘비판은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지만, ‘선동은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증오의 감정에 지배당하면 이성적 판단을 그르친다. 민주주의는 관용과 절제, 대화와 타협이라는 ‘이성의 작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선동정치에 휘둘려서 이성을 잃으면 ‘독재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025-03-17

내란 정국의 역사 기술과 ‘전환기’라는 시대 의식

허민문학연구자 훗날, 오늘의 내란 정국은 어떻게 역사에 기록될까? 국회와 선관위를 급습한 12·3 비상계엄의 발동, K-극우의 준동과 유튜브 수익 경쟁, 집권 여당의 부화뇌동, ‘야당 독재’라는 가짜 프레임과 다수 언론의 기계적 중립, ‘키세스 시위대’와 남태령의 트랙터, 아이돌 응원봉과 ‘다만세’ 제창, 내란성 불면과 우울증의 사회적 확산, 개헌 논의의 필요와 반동성 등, 분명 이 연쇄된 사건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과 성취,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고 대립·갈등하는 정치사의 주요 국면으로 기술될 것이다. 그럼에도 미래에 남게 될 역사서술의 향방이 가장 궁금한 건 ‘내란 우두머리’ 혐의자에 대한 구속 취소와 검찰의 ‘즉시항고’ 포기에 있다. 경호처 영장 반려에서부터 예견된 이 기괴한 판결과 의도된 무력한 수용에 대해 역사의 페이지에는 어떤 방식으로 작성해야 하나? 그야말로 남들 보기에 창피한, 특별한 교훈(?)이나 철 지난 의미조차 없는 이 사태를 그 자체로 남길 수 있는 방법이 새삼 걱정된다. 물론 누가 작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언제나 중요하다. 반일종족주의나 뉴라이트 역사관을 봐도 그렇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비유한 ‘역사의 천사’는 역사의 진보를 믿기보다는 과거의 잔해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다. 시간은 결코 단선적이지 않으며 파열과 중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때론 작가 한강의 말처럼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도,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도 있다. 파당 정치나 계급투쟁, 진영 대결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역사의 법정을 바로 세우는 길에 관한 과업이며, 그 문턱에서 말소되어선 안 될 진실한 기억에 대한 사수를 호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당치 않은 비상계엄의 정당성이 운위되는 작금의 사회적 대혼란이 누구에 의해 어떤 관점으로 역사에 남겨지게 될까. 그런 의미에서 탄핵 심판은 역사의 갈림길이다. 어쨌든 내란 이후의 한국 사회는 일종의 ‘전환기’를 맞이할 거란 사실만은 분명하다. 흔히 ‘이행기’나 ‘전환기’라고 불리는 특정한 역사의 국면에는 과도기적인 현상이 관찰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그 전후 시기의 단절과 연속, 상실과 회복의 교차를 비롯해 ‘과거의 잔여’와 ‘미래의 현현’이 ‘현재의 쟁점’ 속에서 충돌하거나 병행하는 복잡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역사 인식의 방법이 필요하다. 이때 그 방법이란 역사학자들의 학문적인 고심으로부터 확보될 수도 있겠지만, 그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대로 정치적 획책으로 도모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과연 내란 이후의 한국 사회는 글로벌한 규모에서 횡행하는 우익 포퓰리즘의 바람에 말려 들어갈지 아니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가 아래로부터 다시 논의될 수 있는 극적 발판이 마련될지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역사의 운명이 소수의 법비들에게 달려 있는듯한 요즘의 형국이 심히 불안하고 불쾌할 따름이다. 전환이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일과 가능한 데 불가능했던 일들을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세상이 일거에 바뀔 수는 없다. 조금 지쳐도 더 나은 세계와 사회를 만들어가는 고달픈 경로라 생각하고 모두 힘을 냈으면 좋겠다.

2025-03-17

값과 가치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인터넷으로 난(蘭)을 몇 촉 샀다. 구입한 난의 종류와 재배방법을 알아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난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는 내가 보기에는 잎의 모양이나 색이 조금씩 다를 뿐인데 판매 가격은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몇 촉에 만 원 이하의 난이 있는가하면, 일견 비슷해 보이는 다른 종류의 난은 수십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값이 매겨져 있었다. 심지어 어떤 희귀종이라는 난은 20억 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었다. 풀 한 포기의 값이 보통사람은 평생 만져볼 수도 없는 돈이라니, 놀라움을 넘어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다. 미술작품 중에도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거래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작년까지 경매시장에서 팔린 작품 중에 가장 비싼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르도문디’라는 그림이라고 한다. 무려 4억5천30만 달러에 사우디 왕자가 낙찰 받았다고 하는데, 한화로는 5천억 원이나 되는 가격이다. 그 밖에도 폴 세잔, 폴 고갱, 잭슨 폴락 등의 그림이 3천억 원을 호가했고, 렘브란트, 앤디워홀, 마그로스코, 크림트 등의 그림이 2천억 원 상당에 팔렸다고 한다. 물론 경매시장에 나오지 않고 박물관 같은데 보관된 작품 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값나가는 것도 많을 것이다. 난이나 그림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것을 그저 준다고 해도 마다할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애호가들은 애지중지 수억 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희귀난도 김매는 시골 아낙네의 눈에는 그냥 귀찮은 잡초로 보이지 않겠는가. 극단적인 예로 사막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수천억 원짜리 그림이 물 한 모금보다 나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고흐는 평생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를 못했고,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그림을 빵부스러기와 바꾸어 먹을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다 결국 요절하고 말았다 한다. 우주 만물에는 원래 차별이나 가격이란 게 없었다. 사람들이 자의로 구분하고 값을 매겨서 경중이나 귀천이 생긴 것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물의 고유한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통용되는 가격의 형성은 보통 상품으로서의 가치, 즉 경제적 가치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가령 예술 작품의 경우는 시대적·문화적 의미부여와 상업적 계산도 작용해서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수긍이 가는 가치일 수는 없을 터이다. 물론 세상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더 많다. 우선은 하늘과 바다, 해, 달, 별, 눈비와 바람 같은 자연이 그렇고, 생명과 영혼과 사랑과 진실이 그렇다. 인간 사회는 물질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인위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가 삶의 기준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 많은 재화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하게 되고,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비관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마음먹기 따라서는 누구나 다른 가치관을 가질 수가 있다.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도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고, 그것으로 얼마든지 삶의 보람과 기쁨을 창출할 수가 있는 것이다.

2025-03-17

탄핵 반대 세력을 키운 건 이재명 대표다

김진국 고문 지난 주말에도 거리는 소란했다. 광화문 앞 세종대로를 비롯한 서울의 거리 곳곳은 물론 구미 등 지방 도시에서도 수만, 수십만 인파가 몰려 아우성쳤다. 이번 주에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올 예정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당하거나, 업무로 복귀하거나. 양단간에 결정이 난다. 그러고 나면 조용히 끝날까. 탄핵당하면 60일 내 다음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 차기 대통령 후보들 경쟁으로 관심이 쏠릴까. 탄핵이 기각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걸까. 지금 거리에 쏟아져 나온 군중은 집으로 돌아갈까. 아무리 생각해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탄핵 찬성과 반대로 갈라진 군중이 더 흥분하지 않을까.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건, 그 결정을 반대하는 군중이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파괴적으로 흥분하지 않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 때는 보지 못한 일이다. 그때도 문재인 정부 임기가 끝나도록 시위가 이어졌다. 토요일마다 ‘태극기 부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서울 시청과 광화문에서 집회하고, 행진했다. 그래도 지금처럼 큰 규모는 아니었다. 박 전 대통령은 윤 대통령보다 혐의가 작았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한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한 일을 책임졌다. 그런데 왜 지금 더 폭발했을까. 흥분한 보수 인사들이 주목하는 것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다. 보수세력은 이 대표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비상계엄보다 더 두려워한다. 이런 식이다. “이재명이 대통령 되면 바로 공산화된다”, “빨갱이 세상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나”….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논리를 비약하고, 비약해서 쏟아내는 억지를 일일이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은 이 대표가 뿌린 씨앗들이다. 이 대표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적대적 공생 관계다. 윤 대통령이 당선된 것은,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다. 이 대표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서다. 지금도 누구를 더 싫어하느냐로 세력을 끌어모은다. 탄핵 반대 세력을 모아준 1등 공신이 이 대표다. 뒤늦게 놀란 이 대표가 광화문 앞에서 연 최고위원 회의에도 빠졌다. 이 대표는 수시로 말을 뒤집었다. 최근 대선이 가깝다고 생각해선지, 우클릭 행보를 했다. 그러고는 여론의 눈치를 보며 다시 좌클릭했다. 이 대표는 과거 “존경하는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했더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라고 말했다. 가벼운 말은 신뢰를 무너뜨린다. 최근 사법 리스크를 대처하면서도 상식과 다른 해명들이 신뢰를 흔들었다. 지난주 헌재는 민주당이 소추한 탄핵 건을 줄줄이 기각했다. 지난해 민주당이 밀어붙인 최재해 감사원장,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조상원 중앙지검 4차장, 최재훈 반부패2부장에 대한 탄핵 심판이다. 헌법재판관 만장일치로 기각했다. 탄핵 근거들을 모두 배척했다. 민주당의 무리한 탄핵소추였음을 확인시켜준 판결이다.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에서 탄핵소추안을 29번 발의했다. 13건을 강행 처리했다. 역대 모두 합쳐서 16건인 탄핵소추 가운데 3건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이 정부에서 민주당이 한 것이다. 지난주까지 그중에 8건이 기각됐다. 탄핵 요건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탄핵을 기각한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다. 탄핵 심판하는 동안 해당 고위공직자의 손발을 일하지 못하게 묶어놓게 된다.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의 이유로 지적했을 정도다. 쥐도 도망갈 구멍을 보고 쫓는다고 한다. 너무 궁지에 몰지 말라는 경구다. 그런데 이 대표는 권력을 너무 휘둘렀다. 이 대표는 대통령 관심 예산을 모조리 칼질했다. 윤 정부의 국정 방향과 충돌하는 법안을 끊임없이 밀어붙였다. 윤 대통령 내외를 특검으로 몰아세웠다. 당내 정치도 그렇게 했다. 지난 총선 공천이 전형적이다. ‘비명횡사’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 박용진 전 의원 낙천 과정은 드라마보다 극적이었다. 이 대표와 갈등을 빚은 사람들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집권하면 상대 정당에도 같은 보복을 할 것 같은 공포를 심었다. 탄핵 반대 여론이 높아진 책임의 상당 부분을 이 대표가 떠안아야 하는 이유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3-16

폭싹 속았수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재밌게 봤다. 제주도 말로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가수 아이유와는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배우 이지은의 1인2역이 눈길을 끄는데 특히 소녀가장으로 식모살이하면서도 문학소녀의 꿈을 잃지 않는 오애순을 핍진하게 표현해냈다. 생선집 아들인 광식(박보검)과 애순의 패가망신을 겁내지 않는 ‘요망진’ 로맨스가 가슴을 뛰게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건 극 초반에 등장하는 애순 엄마 전광례(염혜란)의 눈물겨운 모정이다. 일찍 부모를 잃고 부모의 빚까지 떠안았다. 결혼하고서는 해녀 물질하면서 남편 병수발까지 했다. 남편 죽고서 얻은 새서방은 방구석에 누워만 있는 백수건달이라 밥이라도 안 굶기려고 딸내미를 시어머니 집에 더부살이 보냈다. 억척스럽고 강인한 엄마 광례는 언제까지나 애순의 곁을 지켜줄 것 같았지만 애순이 10살 되던 해에 물질해서 얻은 숨병(감압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예감한 광례가 애순의 손톱에 봉숭아꽃물을 들이면서 말한다. “두고 봐라. 요 꽃물 빠질 즈음 되면 산 사람은 또 잊고 살아져. 살면 살아져. 손톱이 자라듯이 매일이 밀려드는데 안 잊을 재간이 있나” 이 대목에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광례는 신산하고 박복한 삶을 산 우리들의 모든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오직 자식만 생각하며 자신을 희생한 어머니의 사랑이 ‘제주 해녀’라는 특별한 지역적 문화와 더해져 더 큰 감동으로 밀려왔다. 살면서 만난 여러 사람 중 제주도의 송협 형은 참 각별하다. 낚시로 맺은 인연이 이제는 거의 가족이 됐다. 가족보다 더 자주 통화하고 제주나 내가 사는 안양에서 며칠씩 동숙한다. 내게 “살다가 힘들면 제주 와라”라고 말해주는 이 형 덕분에 세상살이가 아무리 괴롭혀도 나는 끄떡없다. 나에게는 제주라는 피난처가, 거기서 온 맘으로 나를 맞아줄 아름다운 사람이 있으니까. 드라마를 보면서 제주에 가고 싶고, 형이 그립고, 형네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언젠가 형이 들려준 어머니 이야기야말로 드라마다. 1945년 제주 안덕면 사계리에서 7남매 맏딸로 태어난 김이선 삼춘은 초등학교를 그만 두고 밭일, 가게일, 동생들 돌보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물질을 배워 열여섯 살에 해녀가 되어서는 형제섬 근처에서 미역을 캐고, 매년 2월부터 8월까지 강원도로 ‘바깥물질’을 다녔다. 그렇게 번 돈으로 부모님 밭 사드리고, 돌아가실 때 입혀드릴 수의도 사고, 동생들 옷과 신발을 샀다. 스무 살에 결혼해 쌍둥이 딸을 낳자마자 시어머니께 맡기고 또 바깥물질을 나갔다. 집안 어른이 춥게 물질하지 말라며 일본에서 구한 고무옷을 보내줬는데 전통 해녀옷인 ‘물소중이’를 입은 다른 해녀들이 질투해 못 입게 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바깥물질을 다녔다. 그렇게 두 해 강원도에 다녀와서 보니 사계 해녀들도 전부 고무옷을 입고 있었단다. 닻줄에 발이 걸려 죽을 뻔했다. 물질하다가 시체를 본 적도 있다. 겁이 나도 물질은 그만 둘 수 없었다. 뱃속에서 이미 죽은 아이를 사산하기도 했다. 아이를 잃고 일주일만에 바다에 나갔다. 친정아버지가 “너 경허당 죽는다”고 해도 도무지 말릴 수 없었다. 바다에 가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운명이었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다른 해녀들이 미역과 소라를 캐서 나오는 걸 보면 저절로 바다에 뛰어들게 됐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몸을 혹사한 결과 양쪽 무릎을 수술하고, 물에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뇌선(진통제)을 하루에 한 번 꼭 먹게 됐지만 젊어서나 지금이나 바다에 가고 싶은 마음은 한결 같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0년 동안 병수발 했다. 물질만으로는 살림이 되지 않아 장사도 했다. 생선, 미역, 톳 등 안 팔아본 게 없다. 낚싯배도 했다. 남편이 떠나고서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낚시 손님들을 태우고 가파도, 마라도로 직접 배를 몰았다. 그렇게 물질하고 장사하고 낚싯배 몰면서 집안 빚을 다 갚고 아이들 공부도 시켰다. 어머니의 일생이 드라마 속 광례처럼 파란만장하다. 어느 겨울 형과 함께 어머니가 담요 덮고 앉아 계신 집에 갔더니 귤을 잔뜩 꺼내주셨다. 현무암처럼 전복 껍데기처럼 거친 손에서 뭉클한 물소리가 들렸다. 그리운 사람과 그리운 바다를 만나러 봄날 제주에 간다. 험한 생의 파도를 넘어 이제 잔잔한 물가에서 볕을 쬐고 계시는 어머니께 “폭싹 속았수다” 말씀드려야겠다.

2025-03-16

덧없음의 위로

나의 삶의 주인공은 ‘나’지만, 언제나 그럴듯하게 멋진 것만은 아니다. 최근 재미있게 읽은 ‘미스터 초밥왕’에서는 주인공 쇼타 옆을 지키는 ‘오바타 신고’라는 인물이 있다. 신고의 별명은 ‘신코’로, 새끼 전어를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이른 봄에 나오는 새끼 전어를 ‘신코’라 부르는데, 아직 제몫을 못하는 견습이라는 뜻으로 미성숙하고 불완전 하다는 뜻에서 붙었다. 오바타 신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름보다는 ‘신코’로 불린다. 주인공 쇼타와는 동년배이자 쇼타와 같이 일하는 오오토리 초밥에선 쇼타보다 반년 더 일찍 들어온 선배이지만, 어쩐지 주인공다운 쇼타의 엄청난 활약에 묻혀 오히려 비교당하고 계속해서 혼나며 결국 부담을 이기지 못한 채, 오오토리 초밥에서 야반도주하여 건설 현장에 일하게 된다. 뭐 어쨌거나 쇼타의 도움으로 다시 초밥 장인의 꿈을 되찾은 신코는 다시금 오오토리 초밥으로 돌아오지만 만화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하루하루 눈부시게 성장하는 쇼타와는 달리, 신코는 완벽한 주연처럼 쇼타의 활약에 ‘굉장해! 정말 굉장해! 쇼타’와 같은 대사만 날릴 뿐이다. 나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건, 어디서나 주연보단 조연에 가까운 인물이다. 주인공의 활약을 돕고, 주인공의 서사를 더 극적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어딘가 급조한 듯한 ‘신코’ 같은 캐릭터와 같달까. 어디서나 주인공처럼 주목 받는 게 부담스럽고, 실은 주목 받을 만큼의 엄청난 능력이 있어서도, 패기와 열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도 아님을 객관적으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을 조금 달리 해서 영화 ‘트루먼쇼’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는 가짜 세트장에서 조작된 삶을 살고 있단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어느 날 하늘에서 조명이 떨어지고, 죽은 아버지를 길거리에서 만나고,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다 자신의 모습이 생중계되는 알 수 없는 일들을 겪는다. 그러다 첫사랑 실비아가 모든 것이 쇼라는 사실을 트루먼에게 남기고 사라지게 되고, 트루먼은 그 말을 쫓고 쫓아 결국 자신의 30년간의 일상이 모두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TV쇼였단 것을 알게 된다. ‘트루먼 쇼’라는 이름의 이 쇼는 트루먼 버뱅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현재까지 모든 일상을 촬영해 전 세계에 생중하는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깨닫고,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결국 그는 세트장을 떠나 피지로 가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물론 이 쇼를 제작한 총 책임자이자 트루먼의 삶을 조종한 크리스토프는 트루먼이 스튜디오를 떠나지 못하도록 온갖 방해 공작을 펼친다. 하지만 트루먼은 이미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고 리스크를 겪더라도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행한다. 모두 나를 속이고 있지만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완벽한 세상을 버리고 미지의 세계로 결국 나아가는 것이다. 이전에 트루먼쇼를 볼 때에는 트루먼이 참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트루먼처럼 용기 있게 알에서 깨어나는 새처럼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트루먼처럼 섬을 떠나기 위한 시도를 계속할 만큼의 의지와 용기가 없는 사람임을, 최근에 결국 깨닫고 말았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나는 근래에 새롭게 도전한 모든 것들에 적응하지 못했고, 결론적으로는 많은 실패를 남겼다. 그 실패 앞에서 지나치게 무력했다. 트루먼처럼 물 공포증을 이겨낸 채 다리를 건너 스튜디오 끝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음, 그렇지 못하다. 마치 미스터 초밥왕처럼 주인공 옆의 그림자처럼 자연스레 깔리는 ‘신코’처럼, 나의 역할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하다. 그렇다. 나는 트루먼처럼 모든 것이 연출된 가짜 세상을 뛰어나갈 용기도, 결단도, 현명한 지혜도 없다. 그저 이 세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도 못하고 나약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실패를 실패로 여기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임을 안다. 실패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보며 불편한 쾌락과 조롱을 하더라도 나는 나의 삶을 산다. 내가 현재 살아가고, 느끼고, 만나고, 해쳐나가고, 견디고 있는 이 모습만큼은 아직까지 내게 진짜이고 진실된 순간이라 믿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가짜 세상을 깨지 못하고 이 속에 바보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한들, 이 모든 것이 결국 다 덧없는가? 글쎄,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이리저리 방황하는 인간이라면 우선은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 수밖엔 없다. 그 허무함과 덧없음에게서 나는 이상한 위로를 얻는다.

2025-03-16

사교육비 줄일 묘수는?

우정구 논설위원 지난주 교육부가 발표한 2024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조사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쓰인 사교육비는 무려 29조 원이다. 전년보다 7.7%가 증가했고 4년 연속 최고치를 경신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의 각종 사교육 경감 대책에도 일선학교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교육비는 좀처럼 줄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초중고 학생의 사교육 참여율이 80%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등학생은 참여율이 87.7%, 중학생은 78%에 달한다.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경감을 목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늘봄학교 운영 등 각종 대안에도 사교육비는 꾸준한 증가세다. 학생 1인당 사교육비를 분석해 보니 월평균 59만2000 원. 800만 원 이상 고소득 가구의 사교육비 지출이 300만 원 미만 저소득 가구의 7배나 됐고, 반면에 증가율은 저소득 가구가 고소득 가구보다 더 높았다. 또 지역별로 보면 사교육 참여율은 서울이 86.1%로 최고다. 참고로 대구 81.8%, 경북 75.4%다. 1인당 사교육비 역시 서울이 67만3000 원으로 가장 높았다. 대구는 47만8000 원, 경북은 35만6000 원이다. 통계를 놓고 보면 국내가정의 사교육비 지출은 줄어들 기미가 전혀 안보인다. 지역별로 편차도 심해 이러다 교육 격차가 더 벌어질 판이다. 사교육 열풍이 줄지 않는 데는 학벌주의, 노동시장 불균형 등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대구시교육청이 늘봄 확대 등 각종 대안 제시로 사교육 경감에 나서고 있지만 사교육비 추세로 보아 성과가 나올지 의문이다. 교육을 백년대계라 했다. 백년을 내다본 공교육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3-16

공자, 정치의 근본을 말하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청도 인문학’에서 ‘논어’를 읽기 시작한 것도 어느새 10회차 두 달을 넘어선다. 그동안 ‘학이편’과 ‘위정편’을 마치고, 이번 주부터 ‘팔일편’에 접어든다. 복잡다단한 국내외 정세로 인해 공부에 마냥 집중할 수는 없었으나, 나름대로 여러모로 애쓴 점은 확실하다. ‘위정편’을 완독하고 나니 머릿속이 조금은 명쾌해지는 느낌이다. 공자가 정치에서 본질적인 요체를 설파한 ‘위정편’은 2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글 첫머리에 ‘시경(詩經)’을 도입한 것이다. “시경에 들어있는 300편의 시를 한 마디로 개괄하면 생각에 사특(邪慝)함이 없다는 것이다.” 현대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상당한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 혹은 문학과 정치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위정’이라 함은 정치 혹은 정사(政事)를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위정편’에서 정치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보다는 정치의 근간 혹은 근본을 설파한다. 공자가 ‘위정편’에서 강조하는 정치의 핵심은 세 가지다. 그것은 학문과 효, 그리고 군자다. 학문은 네 차례, 효는 다섯 차례, 군자는 세 차례 언급되어 모두 12개의 장이 할애돼 ‘위정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공자는 왜 학문과 효 그리고 군자라는 덕목을 강조한 것일까?! 그것은 유가(儒家)의 핵심인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기인한다. 선비가 먼저 제 몸과 마음을 닦아 인간이 된 연후에야 백성을 다스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자신을 닦는 행위의 근저에는 효와 학문이 자리한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충이 아니라, 부모를 향한 효를 강조한 공자의 심사가 실로 아득하다. ‘서경(書經)’을 인용하여 효 역시 정치하는 것이라고 역설한 공자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공자는 효와 형제 우애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 먼저 인간이 된 후에야 비로소 정치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그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지식인의 가장 기초적인 자세를 역설한 것이다. 지식인의 개인 수양에서 앎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공자는 ‘학이사(學而思)’라는 공부법을 가르친다. “책만 읽고 생각하지 않으면 남에게 속기 쉽고, 생각만 하고 책을 읽지 않으면 위태롭다.” 책을 읽되 비판적으로 독서해야 하며, 생각하되 망상(妄想)에 빠지지 말고, 근거를 책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공자의 공부법이다. 효와 학문에 이어 공자는 ‘군자불기(君子不器)’를 역설한다. 특정한 용도와 크기, 형태, 색깔과 무게를 가진 그릇으로 군자를 규정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공자는 친하게 지내되 무리를 짓지 아니한다는 ‘주이불비(周而不比)’로 군자의 본질 가운데 하나를 설명한다. 이것은 화합하되 같지 아니하다는 ‘화이부동(和而不同)’과 같은 맥락이다. 벌써 100일 넘도록 진행된 내란 사태가 종결되지 않고 있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러매 정치와 정치인의 기초적인 덕목을 새삼 돌이켜보는 것이다. 법 기술자들이 권력을 농단하고, 국민을 우롱하는 역겨운 상황이 조속히 종결되어 화평한 날들이 오기를 간절히 희구한다.

2025-03-16

환상 방황

전영숙 시조시인 어제도 그 남자 곁을 지나갔다. 집을 나서면 거의 매일 보는 사람이다. 오랫동안 씻지 않아서인지 찌든 쉰내가 코를 스친다. 장시간 이발을 하지 않은 머리는 이리저리 엉켜 어깨 뒤로 늘어져 있다. 다행히 검은색 두툼한 패딩점퍼를 입고 신발도 방한화를 신고 있다. 빈 가게 앞 계단에 손을 가슴 위로 모으고 누워 있다. 겨울치고 날이 따스해서 해바라기라도 하나 보다. 그 남자가 움직이는 행동반경은 비교적 일정한 듯 했다. 자주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과 큰 사이즈의 콜라를 먹고 마셨다. 우리 집 근처 약국에서 시작해서 두 정거장 정도 떨어진 재래시장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내가 본 것만 3년이 넘었는데 노숙의 삶이 몸에 익었나 보다. 노숙에 익숙해지면 좀처럼 그 생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런 삶을 사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붕괴된 기족 관계, 무너진 가정 경제, 실직 등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한다. 요즘은 실직으로 젊은 노숙자의 수가 증가 추세에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 남자가 눈에 들어온 것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무엇이 이 동네에서 그를 떠나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지 궁금했다. 문득 환상 방황, 윤형 방황으로 풀이되는 링반데룽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산에서 등반 중 본인은 어떤 목표물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방향감각을 잃고 큰 원을 그리며 같은 지역을 맴도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열심히 목적지를 향해 간다고 믿고 움직이지만 같은 자리를 맴돌다 보면 사고력이 둔해지고 이런 행동을 무리하게 하면 조난사고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한다. 특히 눈보라나 안개가 많이 끼었을 때 일어나기 쉽고 해나 달 같은 방향을 알려주는 기준점이 없을 때 더 심하게 나타난다는 연구보고서도 있다. 위기에 처하면 생각이 흐려지고 감각이 둔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은 늘 평탄한 길만 걸어가는 것은 아니다.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때론 안개나 눈보라, 폭풍 같은 것도 만날 수 있다. 그런 어려움이 닥치면 처음에는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힘든 일이 반복되며 더 깊은 어려움 속으로 들어가면 방향성을 상실할 수도 있다. 우리는 삶에서 이런 환상 방황을 크게나 작게나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엘리베이터에 갇힌 일이 있었다. 단순히 엘리베이터가 멈춘 것이 아니라 불까지 몽땅 나가서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에 놓여 있었다. 손을 얼마만큼 뻗어야 비상 호출을 누를 수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방향도 거리도 측정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같이 탔던 고등학생과 나는 숨소리조차 죽이며 잠잠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같으면 휴대폰이 있어서 밖으로의 연락이 가능했겠지만 그 당시엔 휴대폰이 일상화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처음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어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진한 무력감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 누군가는 문을 열어 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이 있어서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노숙의 삶을 살다가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다. 존 폴 디조리아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두 번이나 노숙자 생활을 했다. 그런 중에도 그는 늘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했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스스로 믿었다고 한다. 두 바퀴 스케이트보드로 유명한 강신기 대표도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사업을 하던 중 외환위기를 겪었다. 그 후 식구들은 처가로 보내고 서울역에서 노숙을 했었다. 그러나 인력시장을 나가면서 희망과 긍정적인 마음이 늘 마음에 남아 일어설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부모나 주변의 격려도 일어서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고백했다. 오늘도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고 원을 그리는 삶을 사는 그 남자를 지나쳤다. 요즘은 몸이 많이 힘든지 걸어 다니는 시간보다는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 마음 가운데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마음이 작은 불씨로 일어났으면 좋겠다. 자신의 환상 방황을 끝내고 평범하지만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삶으로 돌아가기를 빌어본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웠으면 싶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 말끔해진 그를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시조시인

2025-03-16

인구가 늘어나는 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재훈 영주 부시장 도시에 대한 패러다임이 급격히 변하고 있다. 수도권의 인구 밀집과 대비되는 지방 소멸의 가속화, 전 지구적인 환경오염과 그에 따른 기후 위기, 재난 등 복합적인 문제들이 대두하고 있다. 이제 도시는 스스로 지속 가능한 발전시스템을 마련 해나가야 한다. 무조건적인 개발에만 몰두한 결과 현재의 모습이 만들어졌듯, 지금 우리가 하는 준비에 따라 미래의 모습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지난 1월 포브스가 GDP와 군사력, 외교적 영향력 등 국가의 경쟁력을 토대로 발표한 ‘2025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순위’에서 6위를, 경제 규모에서는 12위를 차지했다. 눈부신 성과다. 하지만, 앞으로의 미래는 어떨까. 대한민국은 2024년 기준 총인구 약 5200만 명을 기록해 전 세계 인구 순위에서 20위권에 간신히 이름을 올렸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경제와 인구가 무슨 상관인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구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 경제 동력이자 사회 구조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요소이기에 어쩌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현재 대한민국은 합계출산율 0.7명을 기록하고 있고, 전체 인구 대비 65세 이상 인구는 19%에 달하고 있는 등 인구 전망이 밝지 않다. 경제 대국, 문화 대국 대한민국은 한국인 특유의 집념과 지혜가 만들어 낸 결과지만, 인구가 지금의 추세대로 지속적으로 감소 된다면 10년 후 대한민국의 모습을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영주시를 비롯한 전국의 모든 지자체는 지속적인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에 대응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다행히 조금씩이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거두고 있는 지역이 나타나고 있다. 영주시도 그중 하나다. 영주시는 10년간 감소세를 이어오던 지역 출생아 수가 증가세로 돌아서는 경사를 맞이했다. 지난해 지역 출생아 수는 330명으로 전년 대비 18명 증가했다. 어떻게 보면 작은 숫자라 할 수 있지만 최근 10년간 감소세를 이어오던 출생아 수가 처음으로 증가세로 전환된 것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동안 시는 국립산림치유원과 연계한 ‘너를 기다리는 설레임(林)’ 숲 태교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가임기 여성부터 출산 가정까지 생애주기별 맞춤형 지원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또한 임산부 교실을 운영해 안전한 임신과 건강한 출산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며 육아 준비를 돕고, 지역 임산부와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산전검사(혈액검사·소변검사 등)를 지원하는 등 건강한 임신·출산 환경 조성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출산 가정을 위한 경제적 지원을 대폭 확대해 둘째아 이상 출산 가정에는 국민행복카드를 활용한 첫만남이용권 300만 원을 지급하고 있다. 이 밖에도 도내 최초로 산후 조리비 100만 원과 출생 축하금 50만 원을 지급하고, 첫째아 월 20만 원(12개월), 둘째아 월 30만 원(24개월), 셋째아 이상 월 50만 원(36개월)의 출생장려금을 차등 지원해 경제적 부담 완화를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지역 출생아 증가가 단순히 우수한 출산 정책 때문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영주시의 인구 증가를 위한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보다 지역경제의 회복과 발전에 방점이 찍혀 있다. 양질의 일자리와 우수한 주거환경, 경제 성장이야말로 최고의 복지이자, 인구 증가에 필수 요소기 때문이다. 영주시는 최근 몇 년간 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 지정 승인, SK스페셜티 5천억원의 투자유치 협약체결 등 가히 ‘역대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의미 있는 성과를 많이 거뒀다. 영주시가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인구와 자본의 수도권 집중이라는 위기에 맞서 일자리와 삶의 질이 보장되는 경쟁력 있는 지자체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 지역의 새로운 미래 먹거리를 찾기에 나선 땀의 결과다. 영주시는 지금까지 이뤄온 경제적 성장과 우수한 출산, 보육환경 조성을 위한 정책적 노력이 단순 출생아 수 증가에 그치지 않고, 경제 인구와 생산인구 증가까지 이룰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 나갈 방침이다. 떠났던 인구가 돌아오는 도시, 지역형 인구 증가 모델을 만들기 위해 앞으로도 쉼 없이 관련 정책을 마련하고 추진하는 등 경제적 기회, 문화적 풍요, 사회적 연결망을 결합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떠났던 청년들이 돌아오는 도시로, 새로운 기회의 장이자 희망을 상징하는 도시 영주를 위해 시민과 함께 힘을 모아 나갈 것이다.

2025-03-16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김규인 수필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삼 년 넘게 계속된다. 양쪽의 인명피해는 너무나도 크다. 전쟁을 피해 우크라이나를 떠난 사람도 많다. 우크라이나 국토는 부서지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렵다.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는 우크라이나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인다. 트럼프의 휴전 제안은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피트 헤그세스 미국국방부 장관은 종전 조건을 내놓는다. 우크라이나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반대, 2014년 이전으로 영토 복귀 불가, 우크라이나 평화유지군의 미국 참여 불참 등을 꼽았다. 휴전을 제안하며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무기 공급마저 중단한 입장에서 러시아는 답답할 게 없다. 현재의 전황은 러시아에 유리하다. 러시아 내의 쿠르스크 지역 3분의 2를 되찾았고, 수천 명의 우크라이나 군인은 고립된 상태다.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전쟁도 러시아가 유리하다. 이런 가운데 우크라이나에 전쟁 비용을 정산하라며 트럼프는 우크라이나가 절실히 필요한 안전보장은 제시하지 않고, 5천억 달러라는 전쟁 비용을 요구한다. 이를 거부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무기 공급을 전면적으로 중단한다. 무기를 공급하며 응원해 주어도 힘든 싸움을 외면하며, 철저히 자국의 이익만을 챙기는 것 같아 씁쓸하다. 협상카드로 내민 우라늄, 흑연, 리튬 등 우크라이나의 천연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공동 투자 건도 미국의 양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우크라이나의 운명이 걸린 문제를 강대국인 미국은 철저히 사업으로 인식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미국의 마음을 돌릴 카드 하나 없는 우크라이나의 현실이 슬프다. 그런데 이게 남의 일 같지 않다. 사업가 출신 트럼프 생각은 국익 앞에 동맹도 약소국도 없다. 철저하게 주고받는 계산기만 놓여있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바닥까지 뒤져서라도 이익을 챙기고야 만다. 상도의도 서로 체결한 FTA도 무용지물이 된다. 막무가내식의 운영이 다른 나라를 옥죄고 있다. 이미 우리나라에도 불똥이 튀었다.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한 관세 부과로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에서는 대비책을 세우느라 바쁘다. 미국은 반도체에 대해서도 관세를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타국으로의 시장 개척은 쉽지 않고 고민 속에 시간만 흘러간다. 세계 제1의 경제 대국,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가 세계 경제를 검은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하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국가의 모든 시설이 붕괴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트럼프의 철저히 계산적인 태도를 보면서 미국의 관련자를 만나 협상하고 미국 경제에 필요한 우리의 산업을 이야기하고 잘못 인식한 통계는 바로 잡아야 한다. 고율 관세로 미국의 물가 상승이 심상치 않다. 어쩌면 미국 국민에 의하여 이 고통스러운 정책은 멈출지도 모른다. 국민의 인기를 잃은 대통령이 끝없이 정책을 들고 나갈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우리는 최선의 노력으로 버텨내야만 한다. 지금은 살아남는 게 중요한 시점이다.

2025-03-16

다정함보다 예의를

유영희 덕성여대 교수·평생교육원 다정함을 강조하는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올해만 해도 벌써 세 권이나 된다. 며칠 전 김민섭의 ‘다정함이란 거래가 아닌 삶의 태도’라는 칼럼을 읽고 검색해서 알게 된 것이다. 이 칼럼에서 김민섭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다정하게 대하면서 상처받지 않게 되면 계속 다정할 수 있다고 한다. 개인의 선한 의지를 강조하는 이런 태도가 얼마나 설득력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가 제시한 근거를 보면 그 의문은 더 커진다. 8살 딸이 친구에게 선물을 주고 자기는 받지 못했다고 슬퍼할 때 친구가 즐거워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를 바라고, 어느 기업의 신입사원이 낯선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밥도 사주고 홍삼도 사줬다가 그것이 그 할아버지의 상술이라는 것을 깨닫고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을 때도 정확하고 성실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이면서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계속 다정하게 살기를 바란다. 이렇게 다정함을 강조하게 된 이유는 우리 사회가 너무 살벌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혐오 발언이 쏟아지고 사회적 재난에 희생당한 사람에게도 조롱의 댓글이 달린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다정함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회복시켜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출간 시기를 기준으로 처음 나오는 몇 권이 모두 번역서라서 원서 제목들을 확인해보았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다정함은 ‘friendliest’다. 동물을 포함하여 친화력이 좋은 생명체가 생존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무엇이 우리를 다정하게 만드는가’의 원제는 ‘이타적 충동’이다. 사람들이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서 남을 돕는 행동을 분석한 책이다. 김민섭이 말하는, 상대에게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행하는 다정함과는 거리가 있다. 그나마 ‘kindness’를 부제로 쓴 ‘다정함의 과학’이 우리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금이나마 관계가 있다. 원서 제목이 ‘토끼 효과’인 이유는 실험실에서 진심으로 돌본 토끼들은 다른 토끼와 똑같은 고지방 사료를 먹어도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다는 연구 결과에 착안했기 때문인데, 건강을 위해서는 영양과 의료로는 부족하고 일대일의 인간관계부터 사회적 돌봄까지 여러 수준의 진정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누구에게나 다정함을 발휘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다정함을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 나누는 감정으로 자주 쓰기 때문이다. 두루 쓸 수 있는 표현으로는 다정함보다 예의가 더 적절하다. 예의는 형식적인 태도가 아니라 가까운 사람에게는 다정하게, 먼 사람에게는 상냥하게 대하는 ‘정확하고 성실한 태도’이다. 끝내 딸이 아빠의 조언을 수용하지 못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친구란 상대가 즐거운 것으로 만족하는 관계가 아니다. 답례하지 않는 친구는 손절하라는 조언이 딸과 친구를 위해 건강하다. 낯선 할아버지의 청이 지나쳤는데도 해준 것은 시혜의 기쁨을 위한 것이었을 뿐 다정함도 아니다. 예의에 맞을 때 상처도 덜 받고 오래 할 수 있다. 혐오와 반목이 가득한 우리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마음의 태도는 다정함보다는 예의라는 절도 있는 태도다.

2025-03-16

화이트데이, 파이데이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3월 14일은 ‘화이트데이’이다. 굳이 ‘하얀날’이라 하지 않는다. 남자가 마음에 있는 여자에게 달콤한 사탕을 선물하는 날로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기념일로 자리 잡고 있으며, 1980년대 일본 제과업체의 마케팅 전략으로 탄생하였고 한국, 대만, 중국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때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며 사랑을 다져갔다는 사연과 짝을 이루는 날이지만 우리 조선 시대에도 처녀와 총각의 사랑 나눔 날이 있었다. 가을에 노랗게 익은 은행알을 주워 보관해 두었다가 경칩 날에 함께 까먹으며 은행나무 주변에서 사랑을 확인했다고 한다. 암수 나무가 서로 가까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봄날에 미세먼지가 하늘을 덮더니 주말엔 중국과 몽골 사막에서 발생한 황사가 북서풍을 타고 와서 온 천지에 누렇게 흙먼지 뿌리고 대기의 질을 나쁘게 할 것이라는데 화이트데이에 황토 먼지(yellow dust)를 뿌리게 되면 봄 내음이 달콤한 사탕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려는 청춘남녀가 흙비에 젖게 되지는 않을지…. 이날 인연을 맺지 못하면 다음 4월 14일 솔로(solo)들은 흑갈색 짜장면을 먹게 되는 ‘블랙데이’의 외로움을 맛보게 된다. 4월에도 짝을 찾지 못하면 5월 14일 ‘옐로우데이’에 노란 카레를 먹으며 연애운을 빌어야 하는가…. 이날은 또 ‘로즈데이’라고도 하니 예쁜 장미 한 다발 주고받으며 사랑스러운 날을 보내야겠지. 이렇게 언제부턴가 매달 14일을 특별한 날로 정하고 젊음의 연애문화를 즐기는 독특한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이른바 ‘포틴데이(14일)’ 문화다. 즉, 1월 다이어리데이, 6월 키스데이, 8월 그린데이, 10월 와인데이, 12월 허그데이 등이 있고, 또 같은 숫자가 중복되는 3·3 삼겹살데이, 4·4 클로버데이, 6·6 고기데이, 8·8 라면데이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11·11 빼빼로데이까지…. 이러한 비공식 기념일은 상술의 한 방편이겠지만 소비자와 관련 기업의 상호 작용으로 공감대를 형성한 자발적 참여문화가 그 기반에 깔려있으며, K-팝 K-드라마 같은 대중문화 영향이 크고 소비도 촉진시키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경상도 사투리로 한마디 던져본다, “기념일 참 많데이!” 또 3월 14일은 2019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수학의 날’이기도 하고 ‘파이데이’(π day)라고도 한다. 원의 지름과 원둘레 간의 기본 상수인 원주율 3.1415와 같기 때문이다. 이날 각급 학교에서는 갖가지 수학 관련 행사로 학생들의 창의력을 길러주기도 하고, 또 그 발음이 둥근 빵 파이와 같아서 파이데이(pie day)라고 하여 파이 나누어 먹고 파이 굽기 대회도 하며 3·14마일 달리기도 한다니 참 재미있는 날이다. 희한하게도 이날은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생일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여전히 뿌연 하늘 아래 앞길이 잘 보이지 않은 듯 헤맨다. 황사를 뒤집어쓴 듯 마음을 덮는 무기력과 우울감을 극복하고 싱그러운 봄의 맑은 화이트데이를 만끽하려면 파이 대신에 파릇한 봄나물 캐서 전을 부쳐 먹으며 햇볕도 쬐고 행복 호르몬을 많이 만들어 봄을 타지 않아야 한다.

2025-03-13

진정 성공한 삶

노병철수필가 사람들은 살면서 환경 탓을 많이 한다. 아버지가 재벌이었으면, 아니 어머니가 재벌 집 무남독녀라는 설정도 괜찮다. 그랬다면 자기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워낙 없는 집에선 몸뚱이만으로 어떻게라도 해서든지 난국을 헤쳐 나가야만 하는 사람에겐 절실함이 생긴다. 그래서 부자 부모에게 집이라도 하나 얻은 친구와 월세방에서 시작하는 사람은 출발선부터 다르다. 경상도에선 “새가 빠진다.”라는 말이 있다. 정말 뭐 빠지게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그렇다 보니 나이 먹을수록 남는 것은 악다구니뿐이다.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충혈된 눈으로 반항적 기질만 쌓이고 만다. 젊은 시절, 내가 본 책 중에는 성공한 사업가의 책이 대부분이었다. 성공한 사람들이 한없이 부러웠고 성공에 대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여기서 성공이란 돈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이라 생각했다. 성공은 곧 돈이 많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얼마나 단순한 논리인가. 머리가 나쁜 것은 여기서도 표시 난다. 그들의 인생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돈 버는 탁월한 기술이 무엇인지만 열심히 뒤졌다. 근면 성실 그리고 절약만이 최선이 아니란 생각이 어슴푸레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분야에서든 세계 수준의 전문가, 즉 마스터가 되려면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1만 시간은 대략 하루 4시간, 일주일에 28시간씩 7년간 연습해야 하는 시간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전문가가 절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전문가가 되기 위해 그렇게 피곤하게는 살고 싶지 않았기에 좀 더 손쉽게 돈 벌 궁리만 했다. 1만 시간의 노력은 그냥 우리가 늘 들었던 근면, 성실 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와 닿지 않았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정도는 안다. 사람은 주제파악이 중요하다. 따라서 1만 시간을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보다 머리 좋은 사람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자신만 죽어라 하면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사 하나가 빠진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남들도 나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그들은 나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달린다는 생각을 왜 못하는지 모르겠다. 수백 권의 책을 독파하면서 겨우 하나 건진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선 ‘운’이 따라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머리 좋은 인간도 복 많은 인간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말에 나의 전두엽이 빠르게 다가간다. 그렇다. 조건이 충분하지 않는 사람이 살 길은 ‘복’이었다. 결론은 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어차피 성공이란 단어는 비교 대상이 필요조건이라는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남들보다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선 이것저것 어렵게 따지지 말고 자기가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진정으로 즐길 때 행복감을 느끼게 되고, 이 행복감이 성공이라는 이야기다. 이 말인즉 성공이란 단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기준으로 정해진다는 말이다. 돈이 많아도 불행한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성공한 인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결론은 삶의 질이다. 행복도 복인데 복 받는 인생을 살기 위해 즐기는 삶을 찾아본다.

2025-03-13

우정구 논설위원 봄의 절기로 입춘(立春)이 있지만 실제로 봄기운을 느끼는 시기는 경칩(驚蟄)부터다. 얼음이 녹아 내린다는 우수(雨水) 다음에 오는 경칩은 개구리가 놀라서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때다. 농부들도 이때부터 농사 준비에 들어가는 시기다. 기상학적으로는 3월 중순부터 5월 하순까지를 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기후변화로 기온이 상승하면서 이제 5월은 더 이상 봄이라 보기가 어렵다. 3월 중순에 들어선 지금 산천 곳곳에서 봄기운을 받은 꽃들이 벌써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이번 주 들어서는 낮 기온도 18도까지 올라서니 겨울이 저만치 멀리 가버린 듯하다. 봄은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의 계절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들도 가슴을 활짝 펴고 따뜻한 햇볕의 봄기운을 만끽한다. “겨울이 가고 봄날이 왔다”는 말은 고생이 끝나고 행복한 날이 시작됐다는 뜻으로 통용된다. 젊음을 뜻하는 청춘의 춘(春)은 봄이다. 인생의 황금기인 청춘에 춘 자가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름에도 춘 자를 넣고 혹은 봄 자를 그대로 쓰기도 한다. 봄 그 자체가 신선하고 희망적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의 봄이나 프라하의 봄처럼 정치에서 봄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다. 봄은 젊음이자 희망이요, 변화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표징이라 하겠다. 지루했던 겨울이 끝나고 봄이 돌아왔다. 한 시인은 “봄이 오면 겨울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겨울 동안 힘든 시간을 견디어 내면서 배운 것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한다는 뜻이다. 정치적으로 대혼란기에 맞은 올해의 봄에는 모두가 지난 날을 기억하며 희망을 노래했으면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3-13

강남스타일·수성스타일·영일만 스타일

신광조​​​​​​​사실과 과학 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 광주 상무 신도심에서 가장 잘나가는 성형외과나 치과는 병원 이름에 뉴욕이나 파리보다는 강남이 하나 붙어야 한다. 외국어학원은 더 하다. 나는 늘 전복적(顚覆的)인 사고를 한다. 출세는 크게 못했지만, 공무원 아이디어 황제로 자타가 인정했다. 항상 다른 사람과 다른 독창적·창조적·혁신적 사고로 승부한다. 내 존재의 이유이자, 살아가는 사유다. 중앙부처에서 근무하면서 정책을 입안해 전국에 자신의 정책이 시행되는 것을 보면 황홀하다. 그러나 수도권에 뒤져있는 지방의 발전을 위해 땀과 눈물을 흘리며 선두를 추격하는 것도, 찬란한 보람과 기쁨을 준다. 늘 역전을 꿈꿨다. 한순간도 소홀히 보낼 수 없다. 나의 업무일지 첫 페이지에는 ‘지방의 반란’을 꽃피우기 위한 다짐이 묘비명처럼 새겨져 있다. 격차는 갈수록 더 벌어져 수도권 집중은 일극화로 귀결되어갔다. 문화예술 한 분야만이라도 서울과 맞장 뜨고 싶었다. ‘문화수도 광주’ 기치를 내걸고 매달렸던 이유였다. 작년도 프로야구 코리안 시리즈 챔피언 전에서 기아와 삼성의 대결 정도가 지방의 분발이 있는 정도였다. 지방은 2류부터였다. 훨씬 더 잘할 수도 있는, ‘살기 좋은 지역풍경 만들기’나 주거정책 등도 수도권에 뒤졌다. 지방은 패배의식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2021년 경남 함양군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농촌유토피아’ 사업을 벌여 도농상생 발전 길을 열고 농촌지역 재생의 희망에 불붙인다는 소식을 접하고 광주에서 진주까지 초고속으로 달려가 보기도 하였으나 꽃피우지 못하고 시들하다. 지방반란 불씨를 찾고 있던 나에게 희망의 모닥불이 보였다. 하나는 2025 대학입시에서 경신고의 기적과 같은 성과다. 서울 강남8학군 학부모들의 엄청난 교육경쟁 몰입을 따돌렸다. 대학입시 레드 카펫으로 등장한 의예과에 75명 등 의학계열 합격자 수만 105명이다. 강남의 학부모들도 대구의 반란이 범상치 않음을 간파하고 정보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 경신고 외에 경북고·대륜고·덕원고·능인고 등 대구 2학군은 강남 8학군 못지않은 입시성적을 내고 있다. 서울에서 전학 올 조짐이다. 성적 지상주의 대학입시 제도를 비판하는 입장이지만, 입시제도가 전면 개혁되지 않는 한, 주어진 제도에서 승자가 되고 보아야 한다. 강은희 대구시 교육감을 비롯한 대구고교 교장단과 교사 등 교육관계자, 그리고 학부모와 학생, 수성구에 있는 학원선생님들까지 GRIT(성장성취 동기·재충전과 회복능력·학습의욕·끈기)가 충만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승리다. 둘째는 2036년 하계올림픽 유치 국내 도시 선정에서 전주가 서울을 제친 것이다. 막강한 서울을 이기기 위해 전주를 중심으로 전주 대구 광주 대전이 연합전선을 폈다. 홍준표 대구 시장은 전주 홍보 영상에 출연, 강한 경상도 액센트를 과시했다. 아름다운 일이다. 지방의 반란은 모든 분야에서 계속되어야 한다. 수도권 중심으로 형성된 반도체 벨트를 시스템 반도체는 영호남 라인으로 하강시켜 구축하는 대반란을 꿈꾸고 있다.

2025-03-13

병란에 ‘솔 송(松)’ 자를 피하라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7년 동안 조선을 유린했다. 전쟁의 와중에서 백성들은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되었고, 어디가 안전하다는 속설이 유언비어처럼 퍼지기도 했다. 그 중에도 특히 ‘솔 송(松)’자가 들어있는 곳이 안전하다는 설이 힘을 얻었는데, 포항지역의 경우 기북면 송을곡(松乙谷)과 죽장면 송내동(松內洞)이 대표적이다. 송을곡은 지금의 기북면 덕동마을의 옛 지명으로,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운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가 이 속설에 따라 자기 식솔들을 이 마을에 피란시켰다고 전해진다. 송을곡은 우리말 지명 ‘솔골’의 이두식 표기이다. ‘솔’의 뜻을 나타내는 부분인 ‘松’과 받침 ‘ㄹ’음을 표시하는 ‘乙’을 써서 ‘송을(松乙)’로 하고, ‘골’은 ‘谷’으로 표시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정문부가 고향으로 이사할 때 손서인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堈)에게 재산 일체를 양여하면서 오늘날 여강이씨 중심의 덕동이 된 것이다. 송내동은 지금의 죽장면 입암리에 위치한 자연마을로 임진왜란 때 동봉(東峰) 권극립(權克立),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 등이 피란차 들어와 살았던 곳이다. 권극립 선생이 영천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온 것은, 임진왜란 때 가장 안전한 피난처는 지명에 ‘솔 송(松)’자가 들어있는 곳이라는 속설을 믿었기 때문이라 하며, 그런 곳을 찾다보니 영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송내(松內)’라는 데가 있음을 알고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임진왜란 때 나돌았다는 속설인 “난리가 났을 때 가장 안전한 피난처는 ‘솔 송(松)’자가 들어있는 곳”이란 말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다.‘솔 송’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전국적으로 꽤 많다. 고려의 도읍지인 송도(松都)가 있는가 하면 청송(靑松) 같은 고을도 있고, 마을까지 거명하자면 부지기수다. 그 근거를 암시하는 말이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고전소설 임진록(壬辰錄)에 나온다. “이 때 왜장 소서가 바로 군사를 몰아 강원도로 향하더니 왜국에서 소서의 매씨(妹氏) 편지가 왔거늘, 하였으되 ‘제번(除煩)하고, ‘소나무 송(松) 자’가 있는 곳을 가지 말라. ‘송 자’ 있는 곳을 가면 대패할 것이니, 부디 가지 말라.’ 하였거늘, 청송(靑松)과 송도(松都)를 가지 않고 강원도로 들어가 강원 감사 이래(李來)와 평안 감사 이공태(李公太)를 버히고, 그 골 기생 월천(月川)은 천하의 절색이라 죽이지 않고 첩을 삼아서 주야로 연관정에 놀아 풍류로 세월을 보내더라.” 임진록에 의하면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의 매씨(여동생)가 오빠에게 편지를 보내 “‘솔 송(松)’가 있는 곳 가지 말라, ‘송 자’ 있는 곳을 가면 대패할 것이다.” 라고 했고, 소서행장은 매씨의 충고에 따라 청송이나 송도 같은 ‘솔 송’ 자가 들어 있는 곳을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고전소설이 그렇듯이 임진록도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면, 당시에 ‘솔 송’자가 있는 곳을 피하라는 참언(讖言)은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 소문이 포항 지방까지 전해올 정도면 이 속설은 당시 조선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명에 ‘솔 송’자가 들어 있는 곳들이 과연 임지왜란을 피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그러한 지명들을 다 조사해 보지 않아 알 수 없다. 어쨌든 송을곡이나 송내동은 왜병이 지나갔다는 기록이 없으니 무사했던 것 같다. 1990년경 죽장 송내동, 속칭 솔안마을로 필자를 안내했던 죽장 지역의 향토사가 권태한 선생은 ‘솔 송’자를 피하라는 참언의 ‘솔 송’자는 지명이 아니라, 인명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솔 송’자가 들어있는 사람은 바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라는 것이다. 이여송을 피하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맞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왜군이 ‘솔 송’자가 들어 있는 지명만 피해 다니다가 ‘솔 송’자가 들어 있는 명나라 원군 이여송 장군을 만나 패했다는 것이다. 박창원수필가 ‘솔 송’을 지명이 아닌 인명에 연결시킨 경우에도 근거는 있어 보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참서인 정감록(鄭鑑錄)에 “壬辰 島夷蠹國 可依松柏(임진년에 섬 오랑캐가 나라를 좀 먹으면 소나무와 잣나무에 의지할 것이요)”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松柏, 즉 소나무와 잣나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松柏은 나무가 아닌 사람, 즉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이여백(李如柏)을 상징한다. 이여백은 이여송의 동생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와서 벽제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정감록 같은 도참서에서도 ‘솔 송’ 자를 언급하고 있을 정도이니 임진란 당시 ‘솔 송’ 자와 관련된 유언비어는 널리 퍼져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참설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애매한 표현을 즐겨 쓰는 법이니, 어느 것이 맞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특정 글자가 들어 있는 곳을 우회하여 갈 수 있을지언정 싸우자고 덤벼오는 적을 피해 갈 수는 없는 법이다. /박창원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

2025-03-12

한 사람을 위해 원칙을 붕괴하다니

장규열 고문 법과 원칙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흔들림없이 공정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면 안 된다. 그럼에도 현실에는 법이 특정 개인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적용된 후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사례들이 고약하게 존재한다. 최근 법원의 판결과 검찰의 대응이 그러하다. 법원은 구속된 대통령을 석방하기 위해 법률에 명시된 ‘날(day)’이 아닌 ‘시간(hour)’을 단위로 기간을 계산했다. 법관이 정해진 법을 적용하지 않고 그 법을 다시 쓴 것이다. 사법부가 법대로 판결하지 않고 입법부가 하듯이 법을 새롭게 적었다. 이에 검찰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석방을 지휘하였다. 바꾼 법이나마 그렇게 지킬 것인가 했더니 그도 아니었다. 검찰 내부와 사법계에서 반발이 터져나오자, 검찰은 이제 다시 처음처럼 ‘날’ 단위로 계산하라고 한다. 특정인을 위한 예외적 해석으로 끝났으며 이제 다시 원칙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법 해석과 적용이 특정인을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증거임에 분명하다. 처음부터 ‘날’ 단위로 계산해야 했다면, 왜 이 때는 ‘시간’ 단위를 적용했을까? 이제 와서 ‘날’로 돌아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행정 판단의 시비거리가 아니라, 법과 원칙, 사회적 신뢰의 문제다. 법이 특정 대상에 따라 차별적으로 작동하는 순간, 공정과 정의는 무너진다. 유사한 사례는 역사에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1974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사임한 후, 후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닉슨을 사면하였다. 법과 정의의 기준을 고려하기보다 정치적 안정을 이유로 법의 엄정함을 구부렸다. 미국 사회에서 대통령 사면권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2008년 한국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특별사면도 유사한 사례다. 정치적 상황과 타협 속에서 사면이 이루어졌고, 이후에 다시 법의 원칙을 논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법의 신뢰는 무너지고, 국민은 법 앞의 평등을 의심하게 된다. 특정인을 위한 예외가 만들어지고 나면, 이후 다시 원칙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원칙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 더욱이 이번 사안의 당사자는 ‘공정과 상식’을 기치로 걸고 당선된 대통령이다. 공정과 상식을 강조했던 사람이, 법과 원칙이 자신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할 때 침묵하는 모습은 심각한 신뢰의 위기를 초래한다. 대통령은 법과 원칙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 모범을 보여야 한다, 예외적 적용의 중심에 그가 선다면 국민은 사회적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묻는다. 법과 원칙이 특정인을 위해 바뀌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 공평한 처사인가. 이런 일이 반복될 때, 법치주의는 온전히 유지될 수 있는가. 아이들에게는 법과 원칙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법은 특정 개인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 일반을 위한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특정인을 위한 예외를 만들면서 법은 신뢰를 잃고 사회적 불신은 증폭된다. 공정과 상식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모두에게 공평한 사회적 가치여야 한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2025-03-12

남자도 ‘황혼 이혼’을 꿈꾼다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주변을 둘러보라. 퇴직한 60~70대 남성들의 푸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젊었을 땐 죽어라 일만 하며 월급 다 가져다주고 살았는데, 직장에서 나오니 이제 아침저녁 밥 얻어먹는 것도 아내에게 눈치가 보인다.” 하루 세 끼를 모두 집에서 먹는 퇴직 남성들이 ‘삼식이 남편’이라 불리는 세태를 부정할 수 없다. 변화한 세상이 만든 서글픈 풍경. 이런 현실을 감안한 것일까? 오랜 세월을 함께 산 부부가 나이 들어 헤어지는 ‘황혼 이혼’이 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이혼을 원하는 건 대부분 여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요즘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최근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내놓은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상담소를 찾은 5065명(여성 4054명·남성 1011명) 중 60대 이상 여성의 비율은 22%로 2004년 6.2%에 비해 3배가 늘었고, 같은 기간 60대 이상 남성의 상담 비율은 8.4%에서 43.6%로 5배 이상 폭증했다. 황혼 이혼을 원하는 남성이 여성보다 큰 폭으로 증가한 것. 이혼 상담자의 연령대도 여성은 40대가 가장 많았지만, 남성의 경우엔 60대 이상이 43.6%로 전 연령대 가운데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다. 심상찮은 일이다. 더 이상 아내와 살고 싶지 않다는 60대 이상 남성이 갈수록 늘어난다. 60대 이상 남성들이 이혼하려는 건 장기 별거, 성격 차이, 아내의 가출이나 폭력이 주요 이유였다. 맞고 사는 여성만 있는 게 아니라, 아내의 막말과 폭력을 고민하는 남성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다수 젊은이들은 결혼을 꺼리고, 노년층은 이혼을 꿈꾸는 21세기. ‘해로하는 부부’는 이제 소설 속에서나 만나게 될 것 같아 걱정스럽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3-12

무방수날 장담그기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장담그기는 김장 문화와 함께 한국만의 독창적 문화로 2018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됐고, 작년 2024년 12월 3일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콩을 발효해 먹는 문화권 안에서도 한국만의 독특한 장 제조법이기에 중국과 일본보다 먼저 등재되었다. 장담그기는 콩을 주재료로 메주를 만든 뒤 이를 발효시켜 된장과 간장 등을 만드는 전통적인 과정을 이르는 것으로, 한국 음식의 기본양념인 장을 만들고 관리·이용하는 과정의 지식과 신념·기술을 모두 포함한다. ‘장’은 한국인의 일상음식에 큰 비중을 차지해 왔으며, 가족 구성원이 함께 만들고 나누어 먹는 문화가 세대 간에 전승돼 왔다는 게 등재 사유였다. 우리나라의 장 문화는 거의 1년이 소요되는 그야말로 슬로푸드의 끝판왕이다. 초여름에 콩을 심고, 늦가을 서리가 내리기 전에 거두어 말린 뒤 입동 무렵에 메주를 쑨다. 콩을 불려 충분히 무르게 삶아 으깬다. 메주틀로 네모 반듯한 메주를 만들어 볏짚으로 묶어 두면 곰팡이균이 만들어지는데 겨우내 처마 끝에 매달아 바싹 말린다. 이월 좋은날을 가려 장담그기를 한다. 먼저 항아리를 깨끗이 씻어 물기를 말린 뒤 속에서 볏짚을 태워 살균소독한다. 메주를 씻어 말리고 소금물을 계량해 준비한다. 메주를 항아리에 담고 물을 붓고, 말린 고추와, 말린 대추, 옻나무, 숯을 적당히 넣고 가늘게 자른 대나무를 항아리 안에 걸쳐 떠오르는 메주를 눌러둔다. 볕 좋은 장독대에서 두세 달이 지나면 간장과 된장을 분리하는 장 가르기를 한다. 이렇게 두 가지 장을 만들고, 지난해에 사용하고 남은 씨간장에 새로운 장을 더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내려와 오래 묵힐수록 좋다고 했다. 몇 백년 묵은 간장을 간직한 종가도 있다고 들었다. 작년 흰머리소녀 모임, 유복혜 선생님께서 ‘장은 무방수날에 담근다.’고 하셨다. 무방수날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는데, 알고 보니 이월의 ‘손없는 날’이었다. 귀신이 날마다 동서남북 4방위로 다니며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고 해코지를 하는데, 9와 0으로 끝나는 날짜에는 하늘로 가서 어디에도 없다고 믿었고 그날이 바로 ‘손없는 날’이다. 따라서 ‘손이 없는 날‘은 무슨 일을 하여도 탈이 없어 꺼리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고, 결혼, 이사, 개업 등 인간의 중요한 행사 날짜를 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 중 특히 이월의 초아흐레와 열흘을 무방수날이라고 하는 거였다. 세시풍속사전에 의하면 특히 무방수날에 담근 장은 맛이 좋다고 했다. 지난 주말이 무방수날이었고 내 생애 첫 장담근 날이었다. 청도의 유복혜 선생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소금으로 소금물을 만들어, 잘 소독하신 항아리에 메주를 넣고 붓는 참 짧은 공정만이었지만 첫 시도는 설레고 값졌다. 함께한 이솔희 선생님은 이 의미있는 행사를 유튜브에 올렸고, 같이 간 손녀는 일기에 적을 거라고 했다. 매일 햇볕을 가려 받는 유 선생님의 수고가 맛난 장을 만들어 낼 것이다. 석 달 뒤 장가르기를 위한 또 한 번의 청도나들이가 기대된다. 평생 여기저기서 된장을 얻어먹던 내가 어쩌면 올해부터는 된장을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25-03-12

손목 통증의 원인과 효과적인 치료 방법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손목 통증은 흔한 증상 중 하나이다. 손목은 사용 빈도가 높고 구조적으로 섬세하기 때문에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통증이 발생할 수 있다. 손목 통증의 주요 원인으로는 반복적인 사용으로 인한 과사용 증후군, 손목을 짚고 넘어지는 등의 외상, 힘줄 염증으로 발생하는 드퀘르뱅 병, 그리고 손목의 안정성을 담당하는 삼각섬유연골 복합체(TFCC) 손상 등이 있다. 이러한 원인들은 손목에 무리를 주어 염증과 통증을 유발하며 심한 경우 손목 기능에 제한을 초래할 수 있다. 손목 통증의 치료 방법으로는 보존적 치료와 한의학적 접근을 병행하는 것이 좋다. 침 치료를 통해 손목 주변 경혈을 자극해 염증을 줄이고 기혈 순환을 원활하게 하며, 부항 요법으로 근육과 인대의 긴장을 풀어주고 어혈을 제거해 통증을 감소시킨다. 또한 뜸 치료는 온열 자극을 통해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조직 회복을 돕는 역할을 하며, 초음파 가이딩 약침을 사용하여 손상 부위를 정밀하게 확인한 후 약침을 주입함으로써 염증 완화와 조직 재생을 유도할 수 있다. 경추와 팔꿈치 손목의 정렬을 조정하고 관절 기능을 개선하는 추나요법도 손목의 부담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보존적 치료 방법으로는 손목 사용을 줄이고 보호대를 착용하여 추가적인 손상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냉찜질과 온찜질을 적절히 활용하여 염증과 통증을 조절하고 손목을 지지하는 근육을 강화하는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을 병행하면 재발을 예방할 수 있다. 손목 통증은 생활습관과 연관이 깊으므로 예방이 중요하며 무리한 힘을 가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손목 보호대를 착용하거나 테이핑 요법을 활용하여 부담을 줄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의학적 치료와 함께 손목의 유연성을 높이는 운동을 병행하면 통증 완화와 재발 방지에 더욱 효과적이다. 손목 통증은 단순한 근육 피로에서부터 만성적인 염증, 인대 손상까지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조기에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기에는 간단한 생활습관 교정과 보존적 치료로 충분히 호전될 수 있지만 방치할 경우 만성화되거나 수술적 치료가 필요한 단계로 악화될 수 있다. 따라서 증상이 경미하더라도 손목을 보호하고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 손목을 사용할 때는 꼭 중간 중간 스트레칭과 휴식을 취해주고 반복적인 손목 사용이 불가피한 직업을 가진 경우 손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정기적인 손목 관리 및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좋다. 전반적으로 손목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소 생활습관을 개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올바른 자세와 적절한 휴식 근력 강화 운동을 병행하면 손목의 부담을 줄이고 통증을 예방할 수 있다. 만약 손목 통증이 지속되거나 악화된다면 한의학적 치료를 포함한 전문가의 진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침, 부항, 뜸, 약침, 추나요법, 초음파 가이딩 약침 등 다양한 치료법을 활용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손목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무엇보다 손목에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예방책이며 평소 손목 사용 습관을 점검하고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

2025-03-12

대릉원 뒷골목

윤명희 수필가 오가는 관광객들 사이로 황남파출소가 눈에 띈다. 예전에 놀란 가슴으로 파출소 문을 열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친구와 황리단길을 걷던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파출소에서 보호자 찾는 전화가 왔었다. 아버지가 뙤약볕 아래 종일 헤맨 것 같다고 했다. 경찰에게 파출소 위치를 물은 나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그곳으로 내달렸다. 백발노인의 지친 몸이 소파에 처져있었다. 대릉원 뒷골목에서 발견했다는 말에 의아했다. 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몇 번이나 더 그 곳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아버지를 모시러 갈 때마다 왜 연고도 없는 여기서 길을 헤매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이 없었다. 오래된 그날, 속이 더부룩하다고 병원에 간 엄마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엄마만 두고 우리는 집으로 왔다. 병원에 가져갈 생필품을 챙기는 내 뒤로 아버지는 안방에서 이불과 베개를 작은 방으로 옮겼다. 울음을 삼키는 아버지 뒤로 효자손도 물병과 컵도 따라갔다. 말리는 내 손을 내치는 아버지를 바라만 보았다. 닫힌 안방은 가족사진이 대신 지키고 있었다. 결국 엄마는 누웠던 병원 침대마저 내 놓았다.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엄마의 흔적을 못 견뎌 했다. 아버지는 집을 버린 듯 했다. 아들의 학사모를 쓰고 웃는 엄마의 사진을 거실 벽에서 떼어 내렸다. 남은 사진들을 자식들에게 나눠주며, 엄마가 아끼느라 넣어 둔 것들을 다 가져가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집을 팔고, 당신이 누우면 세간이 다 보이는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 집은 멀리서 자식들이 와도 자고 갈 공간이 없었다. 이젠 집이 아니라 아버지만의 거처였다. 줄어든 살림만큼 아버지의 뒷모습은 작아져갔다. 경주로 이사 오던 날, 아버지를 혼자 두고 올 수 없었다. 함께 이사하자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자, 아버지는 어디에 가서 살아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저 아버지가 부르시면 한달음에 내가 찾아 올 수 있는 거리에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낯선 곳에서도 아버지는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다. 나는 그저 아버지가 생활하기에 불편한 일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찾아뵐 때마다, 겨우 얼굴만 봤을 뿐인데도 빨리 집에 가라고 등 떠미는 것 또한 변함이 없었다. 자꾸만 밖으로 도는 아버지는 집이 없는 듯 했다. 눈만 뜨면 하릴없는 사람처럼 여명의 산길을 따라 김유신 장군 묘에 올랐다. 다음날엔 첨성대를 한 바퀴 돌고, 그 다음 날에는 중앙시장을 찾아 막걸리 한잔을 마셨다. 종일 어딘가를 다니다 해거름해지면 지친 몸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집 대신 우리 집에 형제들이 모이는 날이 많았다. 즐거운 시간도 잠시, 하룻밤만 지나면 당신의 거처로 돌아가려했다. 아직 남아있는 형제들이 조금만 더 있다 가시라고 붙잡아도 막무가내였다. 자식들의 집이 당신의 집은 아니라는 것을 매번 보여주는데 은근히 화가 났다. 그 빈 마음은 우리가 채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얼른 차의 시동을 걸었다. 아버지의 팔순 생신날, 대릉원 근처에 숙소를 빌렸다. 기와지붕이 반듯한 한옥 독채에 형제들이 모였다. 건넌방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안방에는 음식상이 푸짐했다. 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혼자서 집 둘레를 몇 바퀴나 돌아보았다. 나는 창 너머로 한참동안 나무 기둥을 쓰다듬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이제 아버지도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가셨다. 몇 년 만에 황남 파출소 앞에 서 있는 나는 당신이 왜 매번 그 골목을 헤매고 다녔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하룻밤을 보냈던 그 집이 아버지에게는 엄마와 함께 잃어버린 옛집으로 보였나보다. 나도 쉽게 다시 찾아가지 못하는 그 집을 흐린 눈으로 찾아 다녔을 거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잃어버린 기억들이 날아다니는, 아버지가 찾아 헤맸던 기억의 집. 대릉원 뒷골목은 아버지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파출소 창문 너머에 낯익은 얼굴이 나를 보고 웃는다. 나는 자꾸 눈앞이 침침해 고개 숙인다.

2025-03-12

장기(長鬐) 읍성1

우암(尤菴)과 다산(茶山)이 잠시 머물렀다고 그게 자랑할 일은 아니지 영일만(迎日灣)은 저리 푸른데, 결국엔 촌구석이란 이야기지 그러나 사람의, 그리고 아주 먼 일별(一別)의, 꿍쳐놓고 싶은 공간, 지금도 유효한 지도 몰라 반성은 습관으로 반복적이었을까 역모(逆謀)는, 분노는 꿈도 꾸지 못하고 서울을 향하는 삶, 그 농밀하고 내면적인 지향(志向), 그렇게 팽개쳐진 삶 그래도 구룡포(九龍浦)와 모포(牟浦)와 하정리(河停里)의 바다는 고요하고 무심하며 여전히 생기발랄 그래서 우리는 뇌록지(磊綠地)2를 관찰하고 날물치3의 시원(始元)을 본다 외지(外地)여도 보석인 땅이 곳곳에 있더라 뭉개고 자빠져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음의 즐겁고 처절한 마스터베이션, 유림만보(儒林漫步)4한들 세상이 움직일까, 나의 용도폐기 뒤엔 세상이 있었다 비로소 고운 모래밭을 걸으며 받들어야 할 백성들의 생활을 기웃거리며 배워야 할 것들, 먹거리를 생각함 끝내 청보리밭 끝 모퉁이에서 오줌을 누고 비로소 세상과 결별하고 다시 세상과 조우(遭遇)함. 타박타박 걷고 싶으면 장기읍성에 가면 된다.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나는 나에게로부터 유배(流配)를 받았기 때문이다. 1. 경북 포항시 장기면 읍내리에 있는 고려, 조선시대의 읍성터. 2. 뇌록은 중간 명도의 탁한 녹색의 돌로 단청의 바탕칠에 사용되는 전통안료가 추출, 장기면이 국내 유일의 산출지로 인정되었다. 3. 생수암(生水岩), 바위 사이로 생수가 나오는 곳의 지명. 4. 愉를 儒로 바꾸어 보았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3-12

정전 예방, 주민 안전을 위한 한전의 노력

박경수 한국전력 경북본부장 한국전력공사는 산업통상자원부와 함께 정전사고 예방과 안정적인 전력공급을 위해 ‘아파트 노후 변압기 교체 지원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변압기 설치 후 15년 이상 경과된 아파트를 대상으로 △아파트 노후도 △가격(저가 아파트 우대) △세대당 전력용량(소용량 우대) △전용면적(소형 평형 우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지원 대상을 선정한다. 최근 여름철 폭염으로 전력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정전사고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지난해 15년 이상 된 노후 아파트의 수전설비 고장 중 변압기와 저압 차단기 고장이 전체의 36%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한전은 2005년부터 해당 지원사업을 추진해 아파트 단지의 노후설비 교체를 지원했다. 지난해 연말 기준 경북본부 관할 아파트 중 15년이 지난 아파트는 총 246단지로 전체 아파트의 56.5%를 점유하고 있으며, 25년 이상된 아파트도 109단지에 이른다. 아파트 고객은 구내에 설치한 변압기 등의 수전설비를 아파트에서 소유·관리하고 있어, 한전에서 고장원인 파악과 정전 예방을 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파트 정전예방을 위해 올해 아파트 노후변압기를 교체할 경우 변압기 및 변압기부 저압차단기 자재가격의 최대 80%까지 지원할 예정이며, 특히 UVR(저전압 계전기) 위치변경시 공사비의 100%를 한전이 부담한다. 또한, 노후 변압기를 고효율 변압기로 교체할 경우 용량에 따라 최소 160만 원에서 590만 원까지 추가 지원을 제공한다. 이번 사업을 통해 아파트 노후 설비를 조기에 교체함으로써 정전 위험을 줄이고 입주민의 안전과 편의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기대한다. /박경수 한국전력 경북본부장

2025-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