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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앵무살수

‘칼 끝에 피를 묻힌 자 장강의 하류를 건너지 마라’ 한국 무협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는 김성진 작가의 무협만화 ‘앵무살수’의 첫 문장이다. 만화에서 등장하는 젊은 주인공의 직업은 장강 하류의 뱃사공이다. 그런데 이 주인공에게는 평범한 노 젓기 일 이외에 다른 일이 하나 더 있다. 중원에서 온갖 패악질을 다 저지르고 어디론가 숨어드는 중범죄자를 단죄하는 일이다. 법망을 피해 살아가는 이들을 색출하여 직접 형을 집행하는 만화 속 이야기다. 도주하는 범죄자를 태운 나룻배가 포구를 출발하는 장면으로 만화는 시작된다. 나룻배가 장강의 중간에 도착할 때, 앵무새 한 마리가 날아든다. 사뿐히 주인공의 어깨 위에 앉는다. 쪽지를 입에 문 앵무의 깃털이 장강의 물결에 빛난다. 누군가 내린 명령과 금액이 적힌 쪽지를 주인공이 펼친다. 사형! 그리고 엽전 열 닷 냥. 배가 멈추고, 칼이 춤을 춘다. 칼끝에 묻은 피를 유유히 흐르는 장강의 물결에 씻고, 검의 고수는 뱃머리를 돌린다. 이날의 나룻배는 장강의 저편으로 갈 일이 없다. 작년 6월경 포항문화재단 초청으로 육거리 꿈틀로 청포도 다방에서 ‘앵무살수’를 패러디하여 ‘제2회 인문학 강좌’를 한 적이 있다. 10년 넘게 침촌인문학당 사띠스쿨 원장을 하면서 나름 터득한 사유 여행의 한 꼭지로 열어보았다. ‘낭만자객', ‘지성의 몰락’, ‘붓다의 칼, 예수의 창’, ‘생각 죽이기’, '저 세상에 관심을 두지 마라’ 순서로 다섯 강좌를 성황리에 마쳤다. 주제는 ‘관념 죽이기’였다. 제1회는 칼릴지브란 선생의 예언자를 중심으로 ‘사랑의 타작마당’이라는 주제로 하였었다. 사랑의 개념을 타작하여 껍질을 벗겨보자는 것도 결국은 관념(개념, 생각, 편견 등) 죽이기였다. 두 번에 걸친 강좌는 겉만 달랐지 속은 같았다. 만화 ‘앵무살수’ 속 장강 하류 나룻터 풍경을 관념 죽이기의 소재로 써보았다. 예언자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관념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단죄의 칼부림에 비유하여 보았다. 주인공이 사는 조그만 집, 나루터, 나룻배, 악당, 칼, 앵무새, 주인공, 처형, 그리고 칼 씻음. 이 모두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 개념, 생각들의 환·망·공·상을 제거하는 것과 연결하여 강의하였다. 우리가 극복하여야 할 관념이 만화 속 악당들과 같은 존재라면, 무엇으로 극복할 것인가.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관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이다’라고 짚었다. 관념이란, 때론 삶의 에너지로, 때론 죽음의 에너지로 쓰이는 검의 양날이다. 우리는 생각 때문에 살고, 생각 때문에 죽는다. 악당이란 탈을 쓴 관념이 가끔 우리를 괴롭힐 때,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는가. 어떤 기술을 쓸 건지, 어떤 무기를 휘두를 쓸 건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취미활동, 운동, 예술 감상. 지인과 잡담 정도의 무기로 족할까. 만화 속 주인공은 검술의 최고수였다. 만화 속 주인공만큼 고수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명상’이라는 무기가 있다. 나름 든든한···. 우리는 알고 있다. 삶 속에는 건강, 돈, 명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음을. /공봉학 변호사

2025-11-03

타지 않는 불

온 산에 타지 않는 불이 타고 있다. 고향 가는 길, 포항-대구 고속도로 기계면 지역을 지날 때 만난 산의 모습이다. 남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선 산이 온통 안 타는 불길로 검붉다. 타지 않는 불이라면 주위에 옮겨붙지나 말아야지, 날이 갈수록 소리소문없이 더 빠르게 온 산으로 번져 간다. 삶에 어이없는 일이 많지만, 조상 대대로 귀히 여기던 소나무들이 속절없이 당하고 있으니 대체 무슨 까닭일까. 수십 년은 자랐을 저 커다란 낙락장송들이 아주 작은 미생물의 감염에 맥도 못 추고, 저렇게 많이 타지 않고도 말라 죽어간다. 바로 소나무 재선충(材線蟲· Bursaphelenchus xylophilus)이 벌인 검붉은 날벼락이다. 날벼락 현장을 억지로 보는 내 가슴이 찌릿찌릿 저리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재선충은 크기 1mm 내외의 실 같은 선충으로서 솔수염하늘소나 북방수염하늘소 같은 매개충의 몸 안에 산다. 매개충이 소나무 새순을 갉아 먹을 때 충의 상처를 통하여 나무에 침입한다. 무단 침입한 재선충은 빠르게 증식하며 수분과 영양분의 통로를 막아 소나무를 죽인다. 온전한 치료 약이 없어 감염되면 소나무는 100% 고사(枯死)하고 만다. 지독한 소나무 에이즈다. 소나무 재선충에 감염되는 소나무류는 소나무, 해송, 잣나무, 섬잣나무다. 최근의 산림청 자료에 따르면, 1988년 부산광역시 동래구 금정산에서 소나무재선충병이 최초 발생했다. 아마 수입 목재에 숙주나 충이 붙어 들어 왔으리라. 2025년 5월 기준, 우리나라 소나무 재선충병 피해 현황은 전국 154개 시·군·구에서 149만 그루가 감염되었다. 전국적인 엄청난 피해다. 출퇴근 때 지나다니는 S 초등학교 후문 쪽 녹지에는 25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그중 올 10월 28일 현재 소나무 에이즈로 말라죽은 것은 7그루, 28%다. 인터넷 지도 로드뷰로 이 녹지를 보면, 24년 11월에는 단 1그루(4%)만 재선충에 감염되었었다. 1년 만에 6그루, 24%가 더 감염된 것이다. 이곳의 소나무 재선충감염변화를 피해 통계 자료로 쓰기는 어려워도, 감염속도의 심각성에 경종을 울리는 한 사례가 분명하다. 이 시점에서 가장 먼저 대처해야 할 문제는 ‘고사목의 처리’라고 생각한다. 기후변화로 ‘방제’는 너무 어렵게 보이기 때문이다. 고사목처리의 가장 좋은 방법은 목재, 에너지원 등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온실가스 측면에서도 소나무가 살아있을 때는 대기 중의 탄산가스를 흡수하지만, 고사하여 썩어가면서 흡수했던 가스를 내놓을 테니까 그렇다. 해마다 극심해지는 산불의 확산에 기폭제 역할을 하는 게 소나무 송진이라는 주장이 많다. 우리도 이젠, 일본처럼 재선충의 전면적 방제보다 꼭 보존해야 할 소나무와 숲을 선별하여 관리하는 선택과 집중 정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나아가 재선충 방제와 오염 소나무의 반출금지에 초점이 맞추어진 ‘소나무재선충병 방제특별법’도, 불가피한 ‘기후변화 현실과 미래를 아우르는 법’으로 바꾸는 지혜를 발휘할 때다. 온 산에 번지는 타지 않는 불을 없애기 위하여···. /강길수 수필가

2025-11-03

포항, 인재유출 막을 기술 생태계 구축 시급

국내 이공계 인재의 해외 유출이 심화되고 있다는 한국은행 분석은 포항·경북 동해안 산업지대에 중요한 함의를 남긴다. 한국은행이 3일 발표한 보고서(이공계 인력의 해외유출 결정요인과 정책적 대응방향)에 따르면 국내 이공계 석·박사급 인력의 42.9%가 향후 3년 내 해외 이직을 고려하고 있으며, 20~30대 청년층에서는 70%에 달한다. 단기 이직 수요가 아니라 기술인력의 구조적 이동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문제는 포항의 현실과 직결된다. 포항은 포스텍, RIST, 포항가속기연구소, 포스코그룹 연구조직 등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기반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인재의 ‘양성과 유입’에는 성공했지만, ‘정착과 순환’은 여전히 미완이다. 졸업과 동시에 수도권 대기업 연구소나 해외 대학·기업으로 이동하는 흐름은 수년 간 고착됐다. 이른바 “포스텍에서 키우고, 수도권·해외가 가져가는 구조”다. 핵심 원인이 연봉 문제만이 아님은 분명하다. 한국은행 연구에 따르면 해외 이직의 주요 배경은 연구환경, 경력경로, 글로벌 네트워크, 장기 성장 가능성 등 비금전적 요인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다시 말해, ‘어디에서 얼마나 벌 것이냐’보다 ‘어디서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느냐’가 인재 선택의 기준이 되고 있다. 포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장비를 갖추고도 인재 유출을 막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비는 있지만 산업·창업·연구 트랙을 연결하는 생태계 사다리가 약하다는 것이다. 지방 대도시권 공통의 문제도 여기서 드러난다. 연구자는 있지만, 연구자를 계속 머물게 할 직업 생태계가 없다. 기술 창업 생태계는 아직 얕고, 고급 R&D 전담 기업 수는 제한적이며, 가족 단위 정주 환경 또한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다. 인재는 ‘사람이 많은 곳’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많은 곳’을 향한다. 이제 포항이 선택해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먼저, 연구소–대기업–기술기업–창업으로 이어지는 순환형 R&D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또, 석·박사 연구자들이 포항에서 연구→산업→창업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경력 사다리를 설계해야 한다. 아울러 포항·울산·경주를 ‘동해안 기술경제권’으로 통합해 단일 도시 단위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끝으로 자녀교육·문화·주거 등 정주 환경 개선은 연구 인재 정책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포항은 이미 세계적 대학, 세계적 기업, 세계적 연구장비를 갖춘 도시다. 부족한 것은 사람을 머물게 하는 연결 구조와 삶의 조건이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수렴된다. “포항은 인재가 머무를 수 있는 도시인가.” 앞으로의 포항 경쟁력은 제철의 도시에서 과학기술 도시로 완성되는 과정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 전환점이 지금 눈앞에 놓여 있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11-03

권력에 취한 관행, 그게 내로남불이다

지난 주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가 열렸다. 무역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경제 협력을 논의하는 역설이 벌어졌다. 경주에서 가장 조명을 받은 건 역시 이 사태를 일으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김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관세전쟁을 휴전했다. 한국에 대한 관세도 합의했다.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없던 문제를 만든 협상이니, 만족스러울 리 없다. 그렇지만 힘이 좌우하는 국제 관계에서 더 이상 요구하기도 어렵다. 할 만큼은 다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궁화대훈장과 천마총 신라 왕관 모조품을 선물 받고, “그 들이 나를 그런 식으로 존중한다는 것은, 우리나라를 존중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만족감을 보였다. 왕관도, 한국의 대미 투자 약속도 흡족했던 것 같다. 미국의 언론들은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에게 아부했다고 조롱했지만, 광인을 흉내 내는 트럼프의 횡포를 막으려는 영리한 선택이었다. APEC이 열린 경주는 천년 왕국 신라의 수도다. 고려와 조선 500년. 최대의 제국으로 이름을 떨친 로마도 500년이다. 중국의 수많은 왕조도 이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라를 유지하기가 그렇게 힘들다. 신라는 여섯 부족의 연합체로 출발했다. 나중에 단일 왕조가 되었지만, 그 바탕에는 부족 간의 협력, 협치와 공동체 정신이 깔려 있다. 안정적인 권력체제와 유연한 외교가 힘이 됐다. 아집과 독단이 심한 군주가 등장해 국정을 흩트리고, 권력투쟁으로 자멸한 나라들과 대비된다. 권력을 쥐면 그 권력이 천년만년 갈 것으로 착각한다.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고려 무신들은 그 권력이 영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자기들끼리 죽고 죽였다. 정중부는 정변 동지들을 모두 제거했지만, 9년 만에 경대승에게 살해당했다. 경대승은 4년 만에 병사했다. 이의민이 정권을 독점했지만, 그 역시 최충헌에 게 살해당했다. 적은 밖에만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탐욕이 더 무섭다. 필자가 청와대 취재를 담당할 때 한 대통령 수석비서관이 창밖의 벚꽃을 가리키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권좌에 앉아서도 그 이후의 일을 걱정했다. 그런데 대개는 그 끝이 없는 줄 안다. 권불십년(權不十 年)이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인들 그것이 삼일 천하로 끝날 줄 알았겠는가. 전 세계를 뒤흔드는 트럼프도 임기를 늘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권좌에 있는 사람들은 그 권력의 끝이 없다고 착각한다. 지난 주말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는 서울의 민심이 흔들렸다. 오차 범위 내이긴 하지만 국민의힘 지지율이 32%로 민주당 31%보다 높다. 미디어 토마토가 서울시장 가상대결을 조사한 결과도 오세훈 서울시장이 민주당 박주민·박홍근· 서영교·전현희 의원과의 일 대 일 대결에서 모두 이겼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내년 6월 3일 지방선거다. 영호남에서는 큰 이변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선거다. 가장 큰 전장이 수도권이다. 특히 서울시장 선거가 승패를 가른다. 비상계엄이라는 패착으로 정권을 넘겨준 뒤 여론은 일방적이었다. 그런데 흐름을 바꾸는 건 민주당이다. 선거는 상대방 실수에 좌우된다. 민주당이 굴러온 복을 발로 차고 있다. 과욕이 참사를 빚고 있다. 국회에서 일당 독재가 뭔지 보여주고 있다. 가진 자의 여유도 관용도 없다. 지독히 ‘못된 말’만 찾아내 쏟아낸다. 당 대표가 앞장섰다. 집권당은 국정의 책임자다. 권한이 있는 곳에 책임도 있다. 이념에 매달리다 망쳐도 자기 책임이다. 그런데 이념도 아니다. 내 편은 무조건 옳다는 사이비 진보를 ‘노무현 정신’이라고 한다. 서민이 서울 아파트 사는 걸 철저히 막았다. 그 정책을 입안한 경제 관료, 정치인들은 이미 강남에 아파트를 갖고 있다. 피감기관이 벌벌 떠는 국감 기간에 국회에서 결혼식을 해놓고도 무엇이 잘못인지 모른다. 그들이 맞서 싸운 과거 정부의 부패도 당사자들에게는 ‘관행’이었다. 민란을 일으킨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도 당시에는 만연한 ‘관행’이었다. 그래도 과거에는 부끄러운 줄은 알았다. 무엇을 위한 싸운 건지 잊어버렸다. 권력에 취했다. 그게 내로남불이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11-02

유기 접시 산 날

모처럼 긴 연휴였다.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서울로 향했다. 연로한 부모님을 뵙고 그간 만나지 못한 친구들,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인사동이나 청계천을 가고 싶다는 동생의 말을 듣고 하루 인사동을 방문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집 앞에서 그곳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주로 지하철로만 다니던 길을 버스 타고 가니 풍경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길 가 오래 된 가게의 눅진하게 쌓인 시간의 흔적들이 눈길을 끌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대로인 길 가의 종묘상들, 음식점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대도시에서 옛 모습으로 남아 있는 건물과 가게를 보는 일이 즐거웠다. 마치 어린 시절 보물찾기에서 작은 보물 하나를 찾아낸 것처럼. 옆에서 말을 붙이는 동생의 물음에 건성으로 답하며 내 눈은 바깥의 모습을 담기 바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총총히 머릿속에 되돌아와 박히면서 나는 버스 속에서 세월을 하나씩 거슬러 가고 있었다. 길옆으로 낙산공원의 성벽이 보였다. 요즈음 세계적으로 인기몰이 중인 애니메이션의 배경 중 한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보기 위해 온다고 한다. 낯선 말과 낯선 복장의 여성들이 버스 정류장을 배경으로 한껏 행복한 웃음을 폰에 순간 포착하고 있다. 여러 명의 다른 외국인들도 보인다. 저들의 기억 속에 오늘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버스는 어느덧 종로3가였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인사동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한적했던 길을 벗어나니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한국어에 섞여 들리는 여러 언어가 이곳이 외국인들이 많이 방문하는 거리임을 더욱 실감 나게 해 주었다. 몇 년 전만 하여도 인사동에 오면 실망을 하고 발길을 돌리곤 했었다. 한국적인 물건을 전시, 판매하는 곳도 있었지만 조잡한 외국의 물건을 가져다놓고 파는 노점들이 종종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정체성이 흔들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랜 만에 보는 인사동은 그야말로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독특하면서도 한국적인 냄새가 가득 나는 물건들이 좁은 골목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조그마한 부스들이 모인 곳에서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을 찾아냈다. 놋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접시와 숟가락, 포크였다. 한 외국 어린이가 물고기 접시를 붙잡고 엄마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접시를 구입하였다. 온 김에 삼청동쪽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길을 건너니 악기 소리가 우리를 부른다. 두 명이 버스킹을 하고 있다. 맞은 편에는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서 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색소폰 소리가 부슬부슬내리는 빗줄기를 타고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 빗속에서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다채롭다. 저절로 리듬에 흔들리는 몸을 추스른다. 삶의 자그마한 여유가 쉼을 가져다주는 시간이었다. 빗줄기가 조금씩 거세지고 있어 카페를 찾아 들어가기로 했다. 특색을 가진 음식점, 문구점, 옷가게 등이 보였다. 개성을 내보이는 가게들을 보는 것 또한 색다른 경험이고 즐거움이었다. 한동안은 내국인이나 외국인들이 즐겨 찾던 삼청동 거리도 찾는 사람들이 줄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가끔씩 임대를 붙여 놓은 가게들이 눈에 띄는 것을 보니 예전의 인기를 유지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K-POP이 세계를 흔들고 뒤이어 한류라는 이름으로 문화가 수출되고 있다. 그 흐름을 타고 관광객의 수효가 늘어나는 때에 인사동이나 삼청동은 고유한 우리의 문화를 보여줄 많은 장점을 가진 곳이라 생각되었다. 한국적인 특색을 가졌지만 현대화된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물과 음식들. 비싼 임대료에 밀려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오늘의 이 보고 들은 일도 내 기억의 한 페이지에 얌전히 자리잡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많은 것을 보고 담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경복궁 옆에서 한복을 빌려 입고 서로의 자태를 돌아보는 외국인들 사이로 연휴의 마지막 자락이 가랑비와 함께 접히고 있었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5-11-02

지역 뿌리 찾기와 보존의 중요성

사람과 지역, 기업 등은 시작의 중요성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며 성장 과정에 자존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1976년, 미국에 정착하게 된 흑인 노예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찾아가는 영화 ‘Root’가 상영돼 전 세계의 심금을 울리며 뿌리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이처럼 자기 뿌리를 알고 보전하는 일이 현재에도 지속으로 진행되고 있다. 경북의 3대 도시로 성장한 경산(慶山)도 깊은 뿌리, 그것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고대 국가인 ‘압독국(押督國)’과 역사를 같이한다. 지금의 임당동과 옥곡동, 압량읍 신대리 일대에 임당동을 거점으로 국가 형성 이전 단계의 정치·사회집단인 강력한 읍락국가인 압독국이 지배했다. 757년(경덕왕 16) 행정 체계가 대대적으로 개편되며 압독군이 장산군(獐山郡)으로, 고려 태조 때인 940년 장산군(章山郡)으로, 1308년 충선왕의 이름인 ‘장(璋)’을 피하고자 고을 이름을 경산으로 개칭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산에는 압독국의 생활문화 공간을 보여주는 임당·조영동 고분군 등에 20기 봉분이 존재하며 15기의 봉분이 발굴되었다. 지금까지 1700여 기의 고분과 마을 유적, 토성, 소택지 등이 발굴돼 금동관과 금동 장식, 은제 허리띠, 고리자루칼(環頭大刀) 등 최고 지도자를 상징하는 유물들에 당시 사람을 복원할 수 있는 인골 자료와 동물과 생선의 뼈, 어패류 등 2만 8000여 점의 유물로 한국 고대사회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가 풍부하다. 경산시는 이렇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우수한 유산을 정리해 시민과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임당유적전시관을 임당 고분군 인근에 지난 5월 개관했다. 고분 토층의 단면을 형상화해 고분군과 주변 자연환경을 이어주는 조화로운 건축물인 임당유적전시관은 타 전시관 달리 고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생활유적)과 죽음의 관념(무덤 유적)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복합 유적전시관이다. 시는 임당유적전시관의 개관에 만족하지 않고 국가유산청이 주관하는 ‘상생 국가 유산 사업’ 선정으로 지역의 최대 역사 문화자산인 압독국 문화유산을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민 누구나 참여하는 체험형 프로그램을 운영해 문화유산을 단순한 관람 대상으로 머무르게 하지 않고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로 재구성해 지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높였다. 임당유적전시관의 진정한 매력은 유물을 중심으로 연구·공개되고 이 유물을 사용한 옛사람의 연구(풍습, 생활)를 다른 유적과 유물의 사례를 통해 추론하던 것에서 국내 최대 인골 개체 수(359개체)와 가까운 시대가 아닌 1500여 전의 실제 무덤의 주인공과 순장자의 인골 분석과 연구에 여러 학문의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가 지난 30일과 31일, 임당 유적전시관에서 ‘경산 임당 유적, 고고학에서 과학으로’를 주제로 개최된 국제 학술 세미나다. 임당 유적전시관 개관을 기념하기도 한 국제 학술 세미나에는 사람 뼈 연구와 전시에 있어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기관의 연구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자연사박물관의 폴 테일러 박사, DNA 분석과 고유전학의 선두 주자인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로드리고 바르케라 박사, 영국의 얼굴복원 대표 연구 기관인 리버풀 존무어스대 Face Lab의 제시카 리우 박사, 미국 UC데이비스대의 정현우 교수 등이 발표자로 참가해 압독국의 문화유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했다. 폴 테일러 박사는 “임당유적에서 출토된 고인골은 전 세계적으로 드문 사례로 보존상태와 개체 수가 탁월하고 남녀노소, 계층이 다양하게 확인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 가계의 뿌리를 잘 알고 그 후손들이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고장의 역사를 잘 알고 보존해 후손에게 넘기는 것은 더 중요하다. 경산시는 앞으로도 지역의 문화유산의 보존에 더 심혈을 기울이고 이를 시민과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과거는 현재에 사는 우리에게 추억으로, 미래는 현재의 우리가 거는 기대라는 말처럼 경산 문화유산의 미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조현일 경산시장

2025-11-02

공암풍벽(孔巖楓壁)

‘화양연화’(2000)로 우리 관객에게 친숙한 왕가위(王家衛) 감독은 ‘동사서독’(1995)에서 기막힌 대사를 남긴다. “나는 사막에 오래 살았지만, 사막을 보지 못했다.” 서독 구양봉이 지금까지 살던 객잔을 불태우고 그곳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오래도록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사랑의 아픔과 정념을 뒤로 하고 어디론가 먼 길 떠나는 남자의 선 굵은 서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청도에 12년째 살고 있지만, 며칠 전에야 비로소 공암풍벽을 찾았다. 이른바 ‘청도 팔경’ 가운데 하나라는 공암풍벽을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미뤄둔 게 벌써 십여 년 세월이 지난 것이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그곳을 다녀온 일이 마음속에 흐뭇한 흔적을 남긴다. 공암풍벽은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에 자리한 높이 30여 미터의 반월형(半月形) 절벽을 일컫는다. 청도 하면 사람들은 ‘새마을 운동’과 ‘소싸움’ 그리고 ‘청도 반시’ 정도를 연상한다. 청도 곳곳에 거대한 크기로 새겨진 ‘새마을 운동 발상지’라는 푯말은 시대에 뒤지고 고색창연한 서글픈 느낌을 전한다. 산업화 시대의 낡은 구호를 써먹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시대를 앞서지는 못한다 해도 전체주의 시대의 유물을 아직도 들먹거림은 꽤 우울한 일이다. 나는 소싸움에 반대한다. 애초부터 순하고 선한 우리 소를 가지고 억지로 싸움질하도록 하는 게 뭐 그리 내세울 만한 것인지 모르겠다. 전통적인 투우의 나라 에스파냐에서도 투우는 이제 한물간 시대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우리 민간에서 소는 집안의 기둥이자, 아주 가깝고도 가족 같은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동물이다. 그런 소를 싸움판에 내몰다니! 해마다 벌어지는 청도 반시 축제는 그야말로 2박 3일 동안 외지인들과 청도 군민들을 들썩이도록 한다. 쟁반을 닮았다고 하여 ‘반시(盤柿)’라 불리는 청도 감은 굵기도 하거니와 씨가 없고, 당도 또한 상당히 높다. 요즘에는 상업성이 많이 떨어지고, 군민들의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수확 자체를 포기하는 농가가 속출한다. 위기의 대한민국 농어촌 풍경이다. 공암풍벽은 공암리에 있는 단풍나무 절벽을 의미한다. 봄에는 진달래를 필두로 온갖 꽃이 피어나고, 여름에는 운문천의 맑고 푸른 물이 감돌아 흐르며, 가을에는 단풍나무가 절벽을 붉고 화사하게 장식하고, 겨울에는 송림의 푸르름이 웅혼한 기상을 웅변한다. 오늘날 공암풍벽은 1985년 운문댐 건설로 인해 상당 부분 수몰되어 있기로, 적잖은 아쉬움을 선사한다. 마을 입구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거연정(居然亭)으로 방향을 잡고 걷다 보면 어느새 가을 정취에 흠뻑 젖게 된다. 왕복 2.7km를 느릿하고 여유롭게 걸으면서 지나간 시간과 사라진 자아를 돌아봄은 적잖게 유쾌한 노릇이다. 반환점이라 써진 풍벽 끄트머리 그곳에서 대를 이어가며 살아온 70세 중반 남성을 만나 수몰민(水沒民)의 애환을 들을 수 있었다. 불과 스무 사람 남짓 살고 있다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마을은 한 시대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퇴락해가는 인구소멸지역 주민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애수가 묻어있었다. 공암풍벽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에게 생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해본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11-02

경주 명물 황남빵

경주 황남빵은 1994년에 경주시가 향토전통음식으로 지정했지만 그 이전부터 경주의 명물로 잘 알려진 빵이다. 단팥소를 넣어 만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팥빵이다. 처음부터 황남빵이라 부르지 않았다. 1939년 경주시 황남동에서 만들고 그 소문이 나면서 동네 이름을 따 황남빵으로 불렀다고 한다. 창업주는 지금 대표의 할아버지인 고(故) 최화영씨다. 3대째 가업이 이어지고 있다. 86년 전통의 노포집 빵인 셈이다. 창업주인 최씨는 경주 최씨 집안 자손으로 조상 대대로 팥으로 떡을 빚어온 전통 풍속을 잘 알고 있어 이를 제빵에 적용해 보려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전래되고 있다. 팥은 우리 민족 전통음식 대표 재료의 하나다. 건강에 좋은 영영가 높은 식품이다. 단백질 함량과 식이섬유가 풍부해 소화를 돕고 피로회복에도 좋다. 어느 제과점에 가든 단팥빵은 기본이다. 길거리서 파는 붕어빵도 팥이 들어가야 맛이 있다. 동짓날 먹는 팥죽이나 팥을 넣어 만든 팥칼국수도 우리는 즐겨 먹는다. 특히 동짓날 먹는 팥죽은 겨울철 부족하기 쉬운 영양을 보충하는 뜻도 있으나 다가올 새해의 액운을 막아준다는 믿음이 담겨 있다고 한다. 팥에 대한 우리 민족의 유별난 사랑이다. APEC 행사가 치러진 경주에서 황남빵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이 CNN 인터뷰 중 “경주에 오시면 십중팔구는 이 빵을 드신다”고 소개한 것과 시진핑 중국 주석이 “맛있다”고 말한 빵이 황남빵인 것이 알려지면서 APEC 행사 기간 내내 경주 황남빵은 대박을 터뜨렸다. APEC 효과가 거창한 곳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황남빵에서 효과가 시작한 것 아닐까. /우정구(논설위원)

2025-11-02

상조가 미풍양속이 되려면

최근 여당 국회의원 최민희 과방위원장이 자녀 결혼 초대장을 피감기관에게까지 보냈다고 한다.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SNS에 자초지종을 상세히 밝혔지만, 뒤이어 이미 받은 축의금을 보좌관에게 시켜서 반환하도록 지시하는 사진이 의회에서 찍혀 공사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정치인들의 이런 행태가 처음인 것은 아니다. 2023년 4월에도 이상호 강원 태백시장과 김성 전남 장흥군수가 직무관련자 100~200여 명에게 자신의 은행 계좌번호가 적힌 직계가족 부고장·청첩장을 보낸 사실을 국민권익위원회가 ‘공무원 행동강령’ 이행 실태를 긴급 점검하여 밝힌 일이 있다. 이런 뉴스를 보노라니 오래전 일이 생각난다. 대학원 동기가 지방대학에 교수로 부임해서 가장 어려운 일이 지역 유지들의 경조사에 불려가는 일이라면서 초임 교수 월급이 빡빡한데 부담이 크다고 고충을 털어놓은 적도 있다. 크고 작은 학회에서도 경조사 단체 안내문이 수시로 온다. 동창회나 동호회에서도 단체 문자로 오는 경조사 소식은 빠지지 않는다. 요즘 내가 신청해서 듣는 강의에서 수강생이 교수 자녀의 결혼 소식을 전하며 청첩장을 먼저 청해서 놀란 일이 있다. 유전자에 상조 문화가 얼마나 뿌리박혀있는지 알 수 있는 사례들이다. 그래도 사적인 모임에서 청첩장이나 부고장은 조금만 용기를 내면 무시할 수 있지만, 이권이나 권력이 개입된 인간관계에서는 그러기 어렵다. 본래 주고받는 상조 문화는 우리의 미풍양속이다. 다만, 그 미풍양속이 생긴 배경에는 생활 공동체, 경제 공동체, 나아가 정서 공동체 역할까지 하는 농경 사회라는 조건이 있다. 농사는 혼자 지을 수 없으니 두레를 만들어 품앗이로 서로 돕고, 결혼이나 장례 같은 인륜지대사 역시 가족만으로는 치를 수 없으니 동네 사람들이 힘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농경 사회 특성상 평생토록 일정 공간에서 같이 살면서 형편껏 내놓으니 까다로운 손익 계산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마드라는 말처럼 현대인은 떠돌아다니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소속이 자주 바뀌니 주고받기가 보장되지 않고, 그러니 청첩장이나 부고장은 청구서 받는 기분이 든다. 상대가 상급자이거나 권력자라면 나의 의무만 있을 뿐 상대에게서 되돌려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1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평소, 아유, 알리지 그랬어요? 하는 말은 다 빈말이라면서 괜히 알려서 나중에 빚 갚으러 다니지 말라시며 가족끼리만 장례를 치러달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부모님의 뜻이 그러하니 부모님 장례는 물론, 딸들 결혼식에도 내 지인으로는 10명에게만 알렸다. 사회 관계에서 부조할 때도 받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최근 문형배 전 대법관이 ‘호의에 대하여’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호의’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친절이라고 하면서 호의를 악용하는 사람에게는 중단해야 한다면서도, 그럼에도 호의가 많을수록 살만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호의의 정신을 장착하지 못하더라도 공과 사의 경계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억지 춘향으로 하는 상조는 줄어들지 않을까?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11-02

이제는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엔비디아산 인공지능 보드 한 개가 약 3000W의 전기를 사용한다. 우리 가정에서 쓰는 소비전력과 비슷하다. 인공지능은 하루 24시간을 학습한다. 그만큼 전기를 많이 쓴다. 인공지능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 지 오래다. 인공지능에 대한 수요만큼이나 전기 수요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원자력 발전 용량을 2050년까지 지금의 4배인 400기가와트(GW)까지 확대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미국을 다시 원자력 강국으로 만들겠다며 페르미 아메리카를 설립하며, 세계 최대 규모 에너지 및 데이터센터를 목표로 하는 계획을 내놓았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도 원자력 발전 용량을 2050년까지 지금의 100GW에서 145GW로 늘이는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7월 영국 정부는 약 71조 원의 비용이 드는 대형 원자로 2기의 추진을 결정했다. 스웨덴은 소형 발전기인 소형모듈원자로(SMR) 여러 기를 세우는 계획을 수립했다. 태국 정부는 국가 에너지 계획(2024∼2037년)에 소형모듈원전(SMR) 도입을 포함하고, 필리핀도 2030년대 초반에 원전 가동을 계획한다. 우리나라는 두산 에너빌리티, 한전기술, 한전원자력연료 등에서 I-SMR 등 원자로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AI 기반 예측 제어, 디지털 트윈 기술에서 높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며, SMR 수출을 위해 노력 중이다. 국제에너지기구는 2030년 인공지능 시설 관련 전력 수요가 2024년 대비 2~3배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빅테크 기업들은 치열한 인공지능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한 소형모듈원전에 투자한다. 구글도 아마존도 오픈에이아이도 소형모듈원전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이외 많은 기업이 원전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에너지원별 1kwh당 발전 원가는 원자력 54원, 액화천연가스 126원, 신재생에너지 264원이다. 또한 화석연료는 환경오염 문제, 태양광·풍력은 날씨에 크게 좌우되어 생산이 불안정하다. 원자력은 대용량의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며, 탄소 배출도 적다. 원전은 사고 시 위험하고, 핵폐기물 처리 문제는 앞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다. 그럼에도 원자력은 안정적인 전기공급과 단가에서 매력적이다. 인공지능과 데이터센터는 엄청난 전기를 소모한다. 전기가 없으면 인공지능도 인공지능이 가져다줄 풍요도 미래도 없다. 세계 각국과 기업은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원전에[ 적극적으로 투자한다. 원전은 건설에도 많은 시간이 든다. 재빠른 대처만이 인공지능이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원전은 가장 위험한 에너지이나 지어진 원전은 계속 잘 쓰되 추가로 원전을 건설하는 데는 반대한다. 그가 내건 AI 세계 3대 강국 실현이라는 1호 공약은 원전 없이는 불가능하다. 말로만 하는 공약이 아니라면 사용할 정확한 전기량을 계산하고 이에 대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제는 이념을 떠나 현실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원전인지 친환경인지를. 원전 없이 나라의 미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전기 없는 세상은 미래도 없다. /김규인 수필가

2025-11-02

경주박물관의 글로벌화

국립경주박물관이 개관한 것은 해방직후인 1945년 10월 7일이다. 광복과 함께 국립박물관이 결성되자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을 접수해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출발한 것이다. 당시 최순봉 관장과 직원들은 일본인 직원으로부터 소장품과 시설 일체를 인수하게 된다. 이후 미군정의 협조를 얻어 부산과 대구에 살던 일본인 사업가가 소장하고 있던 문화재도 회수하게 된다. 경주분관은 1946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고고학적 방법을 통한 고분 발굴에 나서게 되는데 그곳이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신라시대 돌무지덧널무덤인 호우총과 은령총이다. 호우총서는 광개토대왕명 호우 이른바 청동그릇(보물 1878)이 발견됐고, 은령총에서는 금귀걸이 한 쌍과 귀금속 제품 등이 발굴됐다. 이후 박물관은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임시 이전하는 시련도 겪었지만 1975년 7월 지금의 자리에 건물을 새로 짓고 새역사를 시작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분관을 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름도 바꾸었다. 경주박물관은 오랫동안 신라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으로 박물관을 운영해 왔다. 일찍 어린이 교육과정도 두었다. 그래서 신라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박물관으로 소문났다.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두 번째 한미 정상회담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렸다. 경주박물관이 가진 신라 천년 고도의 역사적 상징성에 더해 APEC 외교 무대가 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고대 역사를 품어왔던 박물관에서 현대사의 의미가 가미된 이벤트가 일어난 것만으로 역사적 기록이다. 경주박물관에 대한 세계인의 이목이 모이면서 경주박물관은 이미 세계인의 박물관으로 격상됐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11-02

경주 APEC 이후에 남은 것: 유치의 성과보다 더 중요한 질문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도시 인프라와 지역 경제에 일정한 긍정 효과를 남겼다. 정상급 외교 무대가 지역에서 열렸다는 상징성, 관광 수요 확대, 글로벌 인지도 제고 등은 분명 지역 경제와 지방 MICE 산업에 적지 않은 자극을 주었다. 이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번 회의의 과정 전반을 돌아보면, 국제행사 운영 체계 전반에 관한 근본적 질문도 함께 남겼다. 이미 여러 외신은 행사 기간 중 교통·숙박·안내 체계, 의전 동선, 언론 대응 등 국제행사로서의 완결성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편향되거나 단편적인 평가가 아니라, 일부 외신 기사와 글로벌 기자단 커뮤니티에서 공통으로 제기된 사안이다. 즉, 행사 유치 자체는 성공했으나 운영의 디테일이 따라오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이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특정 항목의 ‘실패’가 아닌 ‘체계적 점검 부재’에 대한 평가다. 여기에 더해, 국내에서는 행사 전후로 국정 기능이 흔들렸다는 논쟁도 있었다. 정치권에서는 탄핵 논의와 권력 공백 문제를 둘러싼 지적이 이어졌고, 이로 인해 중앙정부 차원의 전략적 메시지 조율과 사후 정책적 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물론 정권 교체, 탄핵 논의, 정치적 대립은 민주주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정치가 흔들린다고 해서 민간경제나 행정까지 흔들려서는 안 된다. 대규모 국제행사는 정권의 이벤트가 아니라 국가 전 부문별 시스템의 종합 성능 시험대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단순하다. “누가 집권하든, 어떤 상황이 오든, 행정·의전·안전·숙박·교통·언론 대응·민간 협력 등이 자동으로 작동할 수 있는가?” 만약 그 답이 “아직은 그렇지 않다”라면, 이번 경주 APEC이 남긴 가장 큰 성과는 ‘유치의 성공’이 아니라 ‘취약 지점이 드러났다는 사실 자체’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번 APEC은 거울이었다. 외교 인프라, 지역 MICE 역량, 중앙-지방-민간 협력 체계, 행사 프로토콜, 취재·언론 지원 시스템, 위기 관리 매뉴얼 등 대형 국제행사를 치르는 국가의 기본 체계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여실히 보여준 계기였다.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 국제행사를 어디에 유치할 것인가”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국가 시스템은 언제든, 어떤 정치 상황에서도 제대로 작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제 우리는 국제행사를 ‘유치 목표’ 중심에서 ‘운영역량 강화’ 중심으로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정치가 일시적으로 멈추더라도, 행정·프로토콜·위기 대응·매뉴얼·민관 협력 체계는 흔들리지 않는 구조, 즉 국가 가버넌스의 내진 설계가 필요하다. 포항 등 국제컨벤션을 적극 추진하려는 지자체도 명심해야할 부분이다. Post-APEC 시대의 우선 과제는 더 이상 유치 경쟁이 아니다. 정부·지자체·민간·지역사회가 함께 작동하는 ‘시스템 국력’을 세우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이번 경주 APEC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크고 값진 메시지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11-01

기록을 안 보고 내린 판결이라니

“변호사님, 판사님이 저희가 낸 서면을 안 보신 거 같은데요” 변론 기일에 법정을 나오며 의뢰인으로부터 흔히 듣는 말이다. 준비서면에 적어 낸 것인데 판사가 이를 모른 채 묻는다거나, 이미 낸 증거인데 이에 대해 판사가 모르는 듯 보이면 당사자들이 묻곤 하는 것이다. 그럼 나는 판사님들이 사건이 많으신데다 우리가 서면을 낸 지도 얼마 안 돼서 그렇다고, 판사님들은 판결문 쓰시기 전엔 무조건 모든 서면과 증거를 꼼꼼히 보시니까 우린 그전까지 유리한 주장과 증거를 잘 내면 아무 문제 없다고 의뢰인을 다독이곤 한다. 이런 나의 판사를 위한 변론은 정말 그렇다. 재판 중엔 판사들이 기록과 증거를 확인하지 못한 듯 보였던 사건도 나중에 판결문을 보면 최종 판단의 근거가 된 증거와 주장이 무엇인지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렇듯 대부분의 판사들은 당사자가 낸 서면과 증거들, 변론전체의 취지를 정밀히 검토해서 판결하고 판결 이유를 구성한다는 것을 필자는 13년의 변호사 생활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의뢰인들이 이런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판사는 기록 안 보고 판단한다면서요. 우리도 저 판사랑 잘 아는 전관 변호사나 연수원 동기를 선임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대법원 판사들도 기록 안 보고 판결하던데요’ 할 말이 없다. 더 이상은 변호사 입장에서도 판사님을 위해 변론을 펼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판사 중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대법원 판사들이 기록을 보지 않고 판결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만 전 국민이 보고 말았으므로. 지난 대선기간 지지율 1위를 달리던 한 대선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기록이 인계된 지 이틀 만에 평결을 내렸다. 평결은 최종 판단을 끝내는 결정이다. 종이로는 트럭 한 대에 가득 실릴 양이라는 6만페이지가 넘는 기록이 온 지 이틀만에 최종 판단을 했다는 것은 기록을 안 보고 판단했음을 자인하는 꼴이었다. 심지어 민사소송법상 법률적 판단만 가능한 대법원이 사실심 판단이 의심되는 판단을 한 것이었고, 무려 항소심 법원의 무죄 판단을 유죄로 180도 뒤집는 내용의 판단이었다. 그런 중차대한 판단을 기록도 안 보고 이틀 만에 해버린 것이 잘못이라는 걸 대법원 스스로도 알긴 알았던 것일까. 처음엔 당당하게 “대법관들이 전자기록으로 다 보고 한 평결이다”라고 했던 천대엽 대법관은 최근 “대법관들이 기록을 다 봤다는 것은 나의 추정이었다”라고 말을 바꿨다. 얼마 전 국회 법사위에 나온 대법원장은 기록을 언제 보았냐는 국회의원의 질문엔 입을 꾹 다물고,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다가 갔다. 변호사 입장에선 꽤나 절망적이다. 판사가 기록을 안 보고 판단한다면 무엇을 믿고 재판을 받아야 하나. “내가 목숨 걸고 악착같이 붙들어야 할 것은 그 무엇이 아니라, 법정에 있고 기록에 있는 다른 무엇이라 생각합니다”라고 한 고 한기택 법관의 말이 떠오른다. 그래도 아직 우리 법원엔 이렇게 “목숨 걸고 재판하는 법관”이 더 많을 것이라고 믿어보는 것이 지금의 유일한 희망이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10-30

경주 APEC 이후, 포항이 나아갈 길

전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경주 APEC 의장국인 우리 대한민국이 자랑스럽고 경주가 부럽다. ‘회의는 경주에서 축제는 포항에서’ 준비 못 했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20년 전, 부산은 우리나라 제2의 도시로서 이미 잘 알려져 있었지만,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국제적 도시로 새롭게 도약했다. 그 행사를 통해 부산은 ‘국제 해양도시’의 이미지를 전 세계에 각인시키며, 관광·물류·컨벤션 산업이 급속히 성장했다. 이번 경주 APEC 또한 천년고도 경주를 세계 속의 도시로 우뚝 세우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APEC 이후, 경주는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전통문화의 상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인의 발길이 이어지는 글로벌 관광도시로 변모할 것이다. 국내외 관광객들이 대거 몰려들 것이며, 경주의 숙박과 교통, 문화시설은 물론 인근 지역에도 큰 파급효과를 미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포항의 역할과 기회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지금은 경주 중심의 준비 분위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볼 때가 아니다. 경주 APEC 이후 몰려올 관광객들의 동선을 분석하고, 포항의 독자적 자원을 결합해 ‘경주-포항 관광벨트’를 구축해야 한다. 포항은 경주가 갖지 못한 해양과 첨단산업이라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푸른 동해와 영일만, 호미곶, 그리고 포스코와 포스텍, 연구단지가 상징하는 첨단과학의 도시라는 이미지까지 - 이 두 축을 잘 엮어내면, 포항은 ‘해양문화와 첨단과학이 공존하는 도시’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경주의 문화유산 관광객이 포항의 해양레저 체험이나 첨단과학투어, 블루이코노미 산업관광으로 이동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또한 KTX, 동해선, 고속도로 등 교통망이 이미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두 도시 간의 시너지 효과는 매우 크다. 이제 포항은 ‘APEC이 경주에서 열리니까 우리 일은 아니다’가 아니라, ‘APEC은 경주에서 열리지만, 그 혜택은 포항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관광 안내, 숙박 연계, 해양 축제, 식도락 코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조기에 준비해야 한다. 부산이 APEC 이후 국제회의 도시로 성장했듯이, 경주와 포항이 함께 손잡는다면 ‘문화와 산업, 전통과 미래가 공존하는 동해안의 쌍두마차’’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경주의 문화가 세계인을 불러들이고, 포항의 바다가 그들을 맞이하는 그림, 그것이 우리가 준비해야 할 비전이다. 경주 APEC은 경주의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동해안 시대의 새로운 시작, 그리고 포항이 세계 속의 도시로 도약할 기회이기도 하다. 지금이야말로 포항이 스스로의 강점을 살려 미래를 설계해야 할 때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단체장 출마 희망자의 기고문을 받습니다. 후보자의 현안 진단과 정책 비전 등을 주제로 200자 원고지 7.5∼8.5장 이내로 보내주시면 지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기고문은 사진과 함께 이메일(hjyun@kbmaeil.com)로 보내주세요.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10-30

정말 모르고 있나

요즘 우리 나이 때 사람들의 카톡 프로필을 보면 전부 손주 사진으로 도배를 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니 보고 또 보는 것을 넘어 돈 만 원을 주고서라도 손주 자랑을 하고 싶은 수준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우리가 손주만을 바라보면서 그저 “귀엽다”라는 마음으로 한정되어 있고 젊은 부모들의 육아 전쟁은 실로 엄청나게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현실은 갑갑하다. 그래서 함부로 결혼하라느니, 애를 낳으라는 말을 못 한다. 언제까지 이런 현상을 두고만 볼 것인지 엉뚱한 정쟁만 늘어놓는 정치권만 맥 놓고 바라만 본다. ‘위대한 고전’이란 말이 있다. 여기저기에서 많이 인용되어 실제로는 읽지 않았음에도 마치 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거나, 정말 읽은 것으로 착각하는 책을 일컫는 말이다. 대표적인 책이 맬서스의 ‘인구론’과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같은 책들이다. 그래서 이런 책을 세상 사람들이 말하길 “누구나 그 내용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읽은 이는 거의 없는 위대한 고전”이라고 평하는 것이다. 맬서스의 인구론에 나오는 단 하나의 문장은 정말 또렷이 기억한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식량이 부족해지면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서로 죽이거나, 병들어 죽게 된다는 이론이다. 즉 다시 정리해서 말하면 맬서스의 인구문제 제기는 식량이 부족하기 전에 인구 조절을 하자는 의도가 아니라 그 해결이 불가능하므로 정치적 해결방안조차 필요 없고 구호의 손길조차 끊어 하층민들이 죽거나 살거나 그냥 내버려 두라는 이론이다. 우리나라는 1962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 많이 낳는 게 효(孝)라는 농경 사회 인식이 팽배했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자, 그동안 미뤄졌던 결혼과 출산이 한꺼번에 일어나 연간 약 80만~100만 명이 태어난다. 소위 말하는 ‘ 베이비붐’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58년 개띠가 약 90만 명 태어나기도 했다.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 깜짝 놀란 정부는 맬서스의 인구론을 인용하면서 인구 억제 정책을 부랴부랴 내놓기 시작한다. 인구론을 교과서에까지 언급하면서 인구를 줄이고자 많은 정책을 쏟아 놓았다. 당시 정부는 인구폭증을 막기 위한 ‘가족 계획’ 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적게 낳아 훌륭히 기르자”, “둘도 많다”라는 포스터 구호를 우린 기억한다. 적극적인 피임 교육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갖다 부었다. 인구 증가로 인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이 정책 입안자 머리에 팽배했던 것 같다. 그 결과 지금은 인구 절벽이니 하면서 외국에선 한국이란 나라가 곧 없어질 것이라 예언할 정도로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맬서스의 이론처럼 식량이 부족해서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서로 죽이거나, 병들어 죽게 되어 인구가 줄어든 것도 아니다. 뒤늦게 부랴부랴 저출산 억제 및 출산 장려 정책을 펴고 있지만 막대한 세금만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아직도 아기 울음소리는 자꾸 사라지고 노인네 기침 소리만 들린다. 정부는 우리 젊은이들이 애를 낳지 않는 이유를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일까? /노병철 수필가

2025-10-30

여성들의 학습력

은퇴해서도 여기저기서 강의 의뢰를 받는다. 학교에 있을 때도 종종 강연이나 특강도 한 터라 사회 강의가 낯설지 않다. 당시에는 주로 특정한 주제를 의뢰받고 많은 청중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면 지금은 달라졌다. 어떤 기관이나 지자체의 의뢰나 지원을 받아 아카데미나 공부방을 개설해 두고 회원을 모집하는 강의가 대부분이다. 불러 주는 것이 고마워 어디든, 강의료가 얼마든 상관하지 않고 수락하여 가는 편이다. 며칠 전,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 수당정에서 낙빈서원 유교아카데미 강의를 했다. 성균관 주관 유교문화활성화사업으로 공모해 선정된 교육이었다. 매주 1회 4시간씩, 총 10주간의 교육 일정이었다. 나야 2회 총 4시간 정도의 강의만 하면 되지만 수강생들에겐 공부에 대한 보통 열의가 아니면 만만찮을 것 같은 일정과 주제였다. 강의실에 들어가 깜짝 놀랐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작년에도 서원 강의를 두어 번 한 적 있는데, 기억엔 거의 모든 수강생들이 남성들이었기에 여기도 당연히 그러리라 지레짐작한 거였다. 두 시간 강의가 지루하다 여길 겨를이 없을 정도로 수업에 열정적이었다. 여성 수강생의 질문 덕에 모처럼 재미있는 강의를 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내가 다닌 강의에는 여성 수강생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났다. 은퇴 후부터 올해까지 5년째 강의하는 경북도민행복대학이 있다. 김천의 경북보건대에서 운영하는 경상북도 지원 사업의 강좌였는데, 매년 1회씩 강의했다. 약 60명의 학습자 중 절반 이상이 여성들이었다. 바쁜 농번기임에도 결석이 많지 않을 정도로 수업에 열성이라는 얘기를 듣고 감동한 적이 있다. 안동의 내방가사전승보존회가 운영하는 안동시 지원사업인 내방가사공부방에도 매 해 몇 차례 특강을 간다. 연령대가 다양한 여성들 20여 명이 넓지 않은 교실에 빼곡하게 앉아계시다가 내가 들어가면 그리도 반기실 수 없다. 90대 어르신부터 50대 비교적 젊은 여성들까지, 안동뿐만 아니라 예천, 청송, 영천, 영주 등 인근 도시에서 원거리 마다하지 않고 참석하는 수강생들이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에 집중하시는지 잠시도 쉬지 않고 한 시간 강의하고 나면 진이 빠질 정도지만 손뼉 치며 호응을 잘해 주셔서 매번 보람을 느끼게 된다. 내가 안동의 공부방에 강의하러 갈 때 함께 가는, 대구의 열혈수강생들이 몇 있었다. 그야말로 내방가사 찐팬들이었다. 이따금 참석하게 되다 보니 내방가사 강의에 늘 목말라하는 분들이었다. 한 달에 한두 번이라도 대구에서 공부하는 방법을 찾자고 상의했다. 6월 안동을 다녀온 다음 주 바로 실행에 옮겼다. 수업 장소를 카페로 정했다. 그 후 이 카페 저 카페 전전하면서 여러 차례 수업했다. 강의 자료 등 수업 준비를 철저히 하여 마치 특별반 학생을 가르치는 것 같은 마음 자세로 강의했다. 수업 전후 식사를 같이하면서 나눈 담소도 내방가사가 주제였다. 이 시대 여성들의 지적 호기심과 탐구가 만만찮으니 더없이 고맙고 반갑다. 노소 구별 없이 수업 내용의 수준에 상관없이 공부하는 이 시대 여성들을 지지한다.

2025-10-30

‘RE100’ 수출 생존의 조건…포항시·포스코 대응 전략 있나

전 세계 기업들이 RE100(Renewable Electricity 100%) 이니셔티브에 속속 합류하면서 재생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한 수출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RE100은 기업이 2050년까지 전력 사용량의 100%를 태양광·풍력 등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하겠다는 자발적 약속이지만, 실제로는 글로벌 공급망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애플·구글·BMW·볼보 등 주요 글로벌 기업들은 협력업체에도 RE100 이행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단순한 친환경 선언이 아니라 계약의 전제 조건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한국 처럼 수출 의존도가 높은 산업 구조에서 RE100 대응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된 셈이다. 수출 기업이 재생에너지 전환을 이행하지 못하면 공급망에서 제외되고 수출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는 상황이 현실화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의 재생에너지 인프라가 아직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발전 단가가 높고 입지 여건도 까다롭다 보니 기업이 자력으로 RE100을 달성하기 어려운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부담을 떠안는 곳이 바로 제조업 중심의 수출 거점이다. 포항도 이에 해당된다. 대표적인 산업도시인 포항에는 포스코를 비롯한 철강 및 2차전지 관련 산업이 밀집해 있다. 포항의 산업 구조 자체가 전력 다소비형이기 때문에 RE100 이행 부담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포스코는 이미 탄소중립을 기업 전략으로 내세우고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 재생에너지 확보, CCUS(탄소 포집·활용·저장) 등 다양한 방안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지역 차원의 인프라와 제도적 지원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글로벌 기업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실제로 글로벌 시장에서는 재생에너지 조달 수단으로 자가발전, PPA(전력구매계약), REC(재생에너지 인증서), 녹색 프리미엄 등이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제도 활용 폭이 좁고 절차도 복잡해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다. 포항시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RE100은 개별 기업의 문제를 넘어 지역의 산업 경쟁력과 직결된다. 특히 철강산업 중심의 포항은 재생에너지 인프라를 어떻게 구축하느냐에 따라 글로벌 시장에서의 입지가 달라질 수 있다. 단순한 ‘기업 몫’이 아니라 지자체 차원의 에너지 전환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태양광·풍력 같은 재생에너지 생산 기반을 적극적으로 확보하고, PPA·REC 거래 구조를 촉진하는 제도적 지원이 절실한 시점이 됐다. 관건은 포스코의 기술적 대응과 별개로 포항시가 지역 차원의 ‘RE100 지원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느냐 여부다. 공업용수 문제 처럼 에너지전환도 지역의 산업 생존과 직결되는 인프라 과제인 만큼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RE100은 더 이상 선언이나 캠페인이 아니고 글로벌 시장의 문을 열어주는 ‘입장권’이다. 포항시와 지역기업이 이 흐름을 제때 따라가지 못한다면 세계시장에서 철강도시 포항의 존재감도 흔들릴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선언’이 아니라 실행 전략이다. /임창희 선임기자

2025-10-30

트럼프와 신라 금관

선택된 한 인간이 왕이 되어 신(神)과 하늘을 대신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국가를 통치하고 백성을 거느렸던 고대 왕국. 금관(金冠)은 바로 그 왕이 머리에 올린 집중된 권력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2000여 년 전 태동한 신라는 ‘황금의 나라’로 불렸다. 금을 세공하는 기술이 당시 존재했던 지구 위 어느 나라보다 뛰어났고, 그 기술력을 바탕으로 최고 통치자에게 바칠 미학적으로 빼어난 금관을 만들었다. 현대에 들어서며 탐사·발굴을 통해 신라 왕들의 무덤에서 몇 개의 금관이 발견됐을 때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지금까지 찾아낸 고대 왕국의 금관은 세계를 통틀어도 10여 개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절반이 신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금관이다. 희소성으로 인해 금은 수천 년 전부터 귀하게 여겨졌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금에 대한 욕망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고대를 지나 중세와 근대에 이르러선 금을 약탈하기 위한 침략전쟁이 적지 않게 발생했다. 약소국을 점령한 제국주의 국가는 가장 먼저 식민지의 금을 제 나라로 실어 날랐다. 귀한 금으로 만들어진 얼마 되지 않는 고대 금관은 좋건 싫건 인류의 주요 문화유산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경주를 찾았다. 경주는 ‘황금왕국’ 신라의 옛 도읍이다. 한국 대통령실이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선물로 신라 금관 모형을 전달했고, 크게 기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기업인 출신의 트럼프는 백악관 집무실을 각종 황금 장식물로 꾸밀 만큼 금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모형이지만 신라 금관은 그에게 맞춤한 선물이 될 것 같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10-30

조공인가 협력인가

‘조공(朝貢)’은 먼 옛날 이야기로만 들린다. 그럼에도 강대국과 약소국 간 힘의 비대칭이 존재하는 한, 조공의 논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중국 황제가 주변국의 충성을 공물로 확인하던 질서는 형식과 이름만 달라졌을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 1기 동안 한국에 방위비를 내라던 장면은 현대적 변주였다. 동맹을 거래로 바꾸었고 안보를 상품으로 정산하려 했다. ‘우리가 지켜주니 대가를 내라’는 언사는 동맹의 언어라기보다 제국의 언어가 아닌가. 냉전 이후 미국이 구축해온 자유주의적 질서 속에서 ‘동맹’은 신뢰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트럼프의 세계관에서 동맹은 ‘보호받는 고객’일 뿐이다. 그에게는 한국이 내는 돈이 조공과 다르지 않았다. 분담의 협력 대신 복종의 표시가 외교의 기준이 되었다. 조공의 본질은 금액이 아니라 위계의 상징이다. 방위비 협상을 통해 한국의 충성을 시험하고, 그 시험을 통과할 때만 ‘공정한 거래’라 부르려 한다. 오늘의 한미관계를 옛적의 조공체제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한국은 독립된 민주국가이고, 미군주둔은 상호 방위조약에 근거한다. 그래도 관계의 심층바닥에는 여전히 힘의 불균형이 놓여 있다. 한국은 ‘기여금’이라 부르고 싶지만 미국은 이를 ‘분담금’이라 부른다. 단어의 해석과 무게의 차이에는 외교질서의 위계가 살아있다. 그들의 요구는 금전협상이 아니라 권력시험인 셈이다. 한국사회가 ‘동맹은 동등하다’고 외치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말할수록 조공체제의 줄타기처럼 보였다. 한쪽에는 새로운 중화가 있고 다른 켠에는 구미제국이 있다. 우리는 지금도 어느 쪽에 먼저 절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같은 형태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오늘의 조공은 조공이 아닌 듯 포장된다. 외교문서는 ‘동맹강화’와 ‘상호이해’가 가득하다. 돈이 언어를 대신하고 힘이 정의를 가리면 관계는 본질적으로 예속이다. 진정한 자주는 군사적 독립 그 이상이다. 사고의 독립이며 스스로 가치를 지키는 정신의 독립이다. 구시대 조선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문화의 자존을 잃지 않았다. 오늘 한국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것도 정신과 가치임에 틀림없다. 힘의 비대칭은 어쩔 수 없더라도 존엄한 가치의 비대칭은 피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내세워야 할 공물은 돈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는 품격이어야 한다. 마침 31~11월 1일 신라의 왕경 경주에서 APEC 정상회담이 열린다. 트럼프가 오고 시진핑이 온다. APEC 역내 이슈들이 다루어지고 정상들 간 현안들에 귀추가 주목된다. 미국과 중국 사이 통상현안과 한국과 미국 간의 관세 줄다리기가 관심을 모은다. 북한의 김정은이 트럼프를 만날 것인지도 세간의 흥밋거리다. 복잡다기한 이익을 조정하기 위한 정상들 간 대화를 세상이 지켜본다. 신라의 자존이 살아있는 땅에서 열리는 의미를 살려야 한다. 중국도 미국도 대한민국을 가볍게 여길 수 없음을 확인해야 한다. 그들의 나라 안 사정이 어렵다고 우리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압박은 부적절하다. 부당한 압력에 당당한 대한민국을 세워야 한다. 조공체제를 당당하게 거부하고 공정한 협력관계를 이룩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0-29

멀고 긴 밤-양동마을 설천정사(雪川精舍)에서

왜 읽는가 책이 묻는다 은하수는 어디로 흐르는가 밤이 묻는다 물살 같은 손금으로 책갈피에 남긴 침 자국 먼 바다 물결 소리 채집하여 소금꽃 피우듯 사람 사는 거 한 글자 한 글자 깨치며 먼 길 가듯 책이 묻는다 어찌 살 것인가. …… 양동마을은 경주에 속해 있지만 그 앞을 흐르는 형산강은 포항으로 이어진다. 또한 회재 이언적 선생의 묘소가 연일읍 달전리에 있으니 이 또한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각설하고, 양동마을의 파종손인 친구의 배려로 설천정사에서 혼자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다. 해가 지면서 안강평야로 저녁 이내가 퍼지면서 풍경이 서서히 지워질 때 괜히 눈물이 났다. 지독하게 외로울 때가 필요한 법이다. 그날이 가장 서러운 날이었다. 그리고 혼자라서 지독하게 행복했다. 자신을 바로 보는 일은 어려운 법이다. /이우근 ……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10-29

마음이 익어가는 계절

가을은 모여듦의 계절이다. 추석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고 여러 지역 축제마다 사람들이 찾아든다. 오늘 아침에 지인이 농사일을 돕기 위해 가족이 모여 있는 고향에 갔다고 연락했다. 잠시 후, 그가 손전화로 여러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들판에는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였고, 탈곡기가 돌아가자 쌀알이 좌르륵 쏟아져 나오는 장면도 있었다. 장독대 옆에는 크고 작은 호박들이 줄지어 앉아 가을볕을 쬐고 있는 정겨운 모습도 보였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내게 짙은 가을 향기가 무시로 전해졌다. 가을이란 단어는 ‘거두다’에서 왔다고 한다. 단어의 어원 속에는 이미 한 해의 눈길과 손길이 담겨 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면 햇살과 바람 속에서 시간을 견뎌낸 뒤, 마침내 가을이 되어 열매를 거둔다. 사람의 그 행위는 이름을 얻었다. 단순히 계절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의미를 얻는 순간이 바로 ‘가을’이 되는 것이리라. 봄이 초록빛 새싹을 틔워 우리의 눈을 열게 한다면, 가을은 손끝으로 알곡과 열매를 거두게 하여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가을이면 마을과 거리는 거둠의 손으로 가득 찬다. 들판에서 벼를 거두는 농부의 손끝, 밤송이를 주워 담는 아이의 손, 사과와 감을 바구니에 담는 아주머니의 손길까지. 그 손길이 모여 사람들의 축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가을 축제에서 사람들은 송이버섯이나 풍기인삼, 사과를 사고, 전통 음식을 맛보며 다른 계절보다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느낀다. 나는 가을 축제하면 언제나 학창 시절의 운동회가 떠오른다. 교문에서 들려오던 상인들의 외침, 만국기가 휘날리는 운동장,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 모래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기 전에 신발끈을 고쳐 묶던 순간들, 아이들과 어른들의 왁자한 웃음소리. 모든 긴장과 설렘이 높고 맑은 가을 하늘 아래에 녹아 있었다. 그때의 운동회는 가족과 이웃이 모처럼 함께 어울리는 잔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이나 고모가 한마음으로 피붙이를 응원하고 이웃들도 구경삼아 왔다가 함께 경기에 참여했다. 콩주머니를 던져 박을 터드리면 색색의 종이처럼 쏟아지던 함성소리,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청껏 외치던 응원소리가 푸른 가을 하늘을 흔들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여기저기 돗자리가 펼쳐졌다. 김밥과 과일, 삶은 달걀과 밤, 통닭 한 마리가 놓인 자리마다 잔칫상처럼 먹을거리가 넘쳐났다. 그때만큼은 승패가 중요하지 않았다. 편을 가르지 않고 사이좋게 음식을 나눠먹었다. 운동회의 열기가 쉽게 식지 않았기에 우리들은 끊임없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세월이 흘렀다. 요즘 도시의 운동회는 많이 달라졌다. 가족이 참여하지 않고 학생들끼리만 진행되는 곳도 있다. 그런 곳은 점심도 학교급식으로 대신한다. 학부모인 나는 지금도 가을이 되면 예전의 운동회가 그리워진다.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 아래에 놓인 돗자리, 학년 단체로 부채춤을 추고 난 뒤에 내 이마에 흐르던 땀을 닦아주던 친구의 따뜻한 손길, 운동장 한복판에서 신명나게 춤을 추시던 할머니들, 운동회에 울려 퍼지던 북소리와 노랫소리가 이제는 모두 추억 저장소에 아련히 남아 있다. 가을(秋)이라는 글자는 곡식 ‘禾(벼 화)’와 불 ‘火(불 화)’가 합쳐진 것이다. 익음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타오름의 계절이다. 낙엽 한 장이 땅으로 내려앉는 순간조차 잎사귀는 스스로를 붉게 불태우며 마지막 언어를 남기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가을이 되면 사람의 마음도 익는다고 생각한다. 오래 품어온 그리운 기억이 결실을 맺어 더욱 빛을 내는 계절이 가을이다. 이제는 내 곁을 떠난 이들을 자주 볼 수 없어도, 혹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더는 만날 수 없어도, 그들의 목소리를 추억 속에서 불러내기에 가을만큼 잘 어울리는 때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내게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자, 마음이 익어가는 시간이다. 가을비가 연일 내리고 있다. 비가 그치면, 가을 햇살을 만끽하러 축제에 다녀올 요량이다. 가을을 온전히 즐기면서 기억을 저장해 둔다면, 다가오는 매서운 겨울에 마음만이라도 따뜻하게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정미영 수필가

2025-10-29

잉카의 돌길에서 되찾은 내 안의 목소리

나는 지금, 계절이 엇갈리는 대륙의 초입에 서 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머물렀던 뉴욕은 새로운 계절의 활기로 가득했다. 거리마다 활기가 넘실거렸고, 기운이 부드럽게 감돌았다. 하지만 긴 비행 끝에 도착한 페루 리마는 이미 차가운 가을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뚜렷한 사계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반대의 계절이 시작되는 낯선 땅에서 나는 묘한 떨림을 느꼈다. 밤의 공항은 낯설었고, 언어와 표정 또한 생경했다. 그 낯섦은 내 안의 고요마저 흔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낯섦 속에서 오히려 오랜만에 ‘살아 있음’을 느꼈다. 익숙한 공간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기운이었다. 아마도 자발적 고립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에너지일 것이다. 나는 이번 여정을 ‘자발적 고립’이라 명명한다. 가족을 떠나 홀로 다른 대륙을 밟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내는 늘 내 곁에서 삶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던 소중한 동반자였다. 그녀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은 그 자체로 용기가 필요했고, 동시에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했다. 체력의 한계를 핑계 삼아 늘 익숙한 일상에 안주하려 했던 아내와는 달리, 나는 이번에는 홀로 떠나는 길을 택했다. 그 고립 속에서 잊고 지냈던 ‘진정한 나’와 마주하고 싶었다. 자발적 고립이라는 표현은 다소 쓸쓸한 울림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도피가 아닌 귀향이다. 익숙한 이름과 역할, 책임의 무게에 짓눌려 잊고 지냈던 내 안의 진실한 목소리를 되찾기 위한 귀향. 그 목소리를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는 시간이 바로 이번 여정이다. 정든 가족의 품을 떠나 홀로 떠나는 트레킹이나 여행과 같은 자발적 고립은 일상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한다. 자발적 고립의 가장 큰 장점은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가족이나 타인의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고, 오직 자신과의 대화에 몰두하며 내면을 깊이 성찰할 수 있다. 또한, 일상에 지친 심신을 평온함 속에서 재충전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홀로 떠나는 여행은 자신감과 독립심을 키워준다.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부터 예상치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까지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한다. 낯선 환경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은 독립심을 길러주고 “나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높여준다. 더불어 평소에는 미처 몰랐던 자신의 장점과 단점, 진정한 취향 등을 발견하며 한층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통해 정신 건강을 증진하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 트레킹이라는 활동 자체가 지닌 치유력과 고립된 자연 환경이 긍정적인 시너지를 발휘한다. 디지털 기기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 속을 거닐며, 외부의 자극 대신 오감을 통해 자연을 온전히 느끼게 된다. 이는 마음챙김(Mindfulness) 능력을 향상시키고 정신 건강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 웅장한 자연 경관과 고요함 속에서 걷는 것은 심신을 안정시키고,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특별한 치유 경험을 선사한다. 그러므로 자발적 고립을 통해 떠나는 혼자만의 트레킹은 단순한 여행을 넘어,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내면을 성장시키며,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대학에서 수십 년간 학생들을 가르쳐온 교육자이다. 그 길은 책임과 헌신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후회는 없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오면서 언제부턴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잊고 살았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교수로서의 역할은 분명했지만, 그 모든 가면을 벗어던진 ‘본래의 나’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페루의 땅은 낯설지만, 묵직한 침묵이 감도는 곳이다. 잉카의 돌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오래된 돌벽에 새겨진 고요와 조우한다. 그 고요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너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이곳까지 왔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문득 가족을 떠올린다. 가족이란 과연 무엇일까? 과거에는 주저 없이 ‘헌신’이라고 답했다.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희생하는 것이 가족의 의미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가족은 단순히 전통과 의무라는 무거운 짐만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다. 그들은 각자 고유한 리듬으로 살아가는 작은 우주와 같다. 내가 그들을 보듬는 방식 또한 이제는 ‘헌신’뿐만 아니라 ‘경청’이어야 함을 깨달았다.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따뜻한 마음, 그것이야말로 가족의 진정한 모습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그 해답은 아마도 이 여정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거창한 깨달음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잉카의 산책길 위를 스치는 바람처럼, 혹은 낙엽처럼 조용히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작은 깨달음 하나하나가 흩어진 삶의 조각들을 하나로 이어줄 것이다. 고립은 더 이상 고통스러운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나를 회복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떠남은 끝이 아닌, 진정한 나를 되찾기 위한 새로운 시작임을 잉카의 돌길 위에서 깨달아간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고립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가장 깊고 진실한 귀향임을. 떠남은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아닌,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는 과정임을.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길 위를 걷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역설적으로 내면의 목소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김상국(세종대 명예교수)

2025-10-28

크레센도

어린 시절에는 세상이 조용했다.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고, 시간은 언제나 나를 기다려 주었다. 그때의 하루는 낮게 깔린 선율 같았다. 피아노의 도와 레 사이를 오가며 간간이 불협의 음이 섞여도 금세 사라지곤 했다. 나는 나의 음표에 맞춰 살아도 괜찮았다. 어느새 어른이 되어도 벌써 어른이 된 중년에 접어들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고 일정표는 빈칸이 없으면 불안할 정도로 꽉 차 있다. 손끝에는 처리해야 할 문서와 원고들이, 마음 한쪽에는 챙겨야 할 관계들이 쌓였다. 나의 하루는 점점 음량이 커졌다. 아침엔 휴대폰 알람으로, 점심엔 수업 알림으로, 저녁엔 문자 알림으로···. 세상은 나에게 쉬지 말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제는 음악의 볼륨을 줄이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어릴 땐 소리가 점점 커지는 음악을 듣는 일이 설렜다. 그건 무언가가 완성되어 간다는 신호였으니까. 음악에서 크레센도(crescendo)란 ‘점점 세게, 점점 커지게’ 연주하라는 뜻이다. 처음엔 낮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더해지고 소리가 세상을 가득 채운다. 그 단어에는 기대와 긴장, 생동감이 함께 깃들어 있다. 나는 늘 그 악상기호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떤 순간에도 점점 커져가며 하나의 절정에 다다르는 것이 마치 우리의 꿈이 커지고 포부가 커져가는 순간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크레센도는 다르다. 내 인생의 음량은 점점 커지는데 정작 내 마음의 여백은 점점 작아진다. 처음엔 잠시일 줄 알았다. 일이 많아도, 챙겨야 할 사람이 많아도, 언젠가 다시 조용한 구간이 찾아오리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의 악보엔 ‘디미누엔도(점점 작게)가 잘 없었다. 지휘자는 언제나 손을 들어 올리고 나는 그 손짓을 따라 힘껏, 있는 힘껏 소리를 내어야만 하는 구간이 너무 길었다. 가끔 나는 묻는다. 이 음악은 언제 끝나는 걸까. 언제쯤이면 쉼표를 얻을 수 있을까. 이상하게도 나는 여전히 그 무게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의 기대를 감당하며 나를 필요로 하는 손길을 만나며 때로는 버겁고 때로는 울컥하면서도 나는 계속 나의 소리를 내고 있다. 그건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이 점점 커지는 소리에 휩쓸리면서도 그 안에서 새로운 조화를 찾아내는 일일지도. 친구들은 늘 나에게 일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왜 그렇게 일을 많이 하냐고 물어올 때마다 나는 명징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해야 해서’라는 말은 뭐가 초라해 보이고, ‘좋아서’라고 말하기에도 뭔가 진심이 아닌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자발적 연주자가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된다. 각자의 파트가 있고 그 파트는 서로 얽혀서 하나의 곡을 만든다. 내가 내 음을 멈추면 누군가의 멜로디가 끊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멈추지 못하는 것 같다. 조금 지쳐도, 조금 흔들려도, 나의 악보를 읽어 내려간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크레센도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모두의 삶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아이의 울음 속에서, 누군가는 회사의 불빛 속에서, 누군가는 늦은 밤 병실의 모니터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소리를 조금씩 키워내고 있었다. 이 커짐은 소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부르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이 크레센도는 끝나지 않아도 괜찮다. 언젠가 음악은 자연스럽게 다음 악장으로 넘어갈 테니까. 잠시 조용해질 때, 그 여백 속에서 나는 다시 내 소리를 조율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단단한 음으로 울릴지도 모른다. 단단한 음은 세게 내는 소리가 아니라 오래 울릴 수 있는 소리일 것이다. 삶이 나를 흔들 때마다 나는 그 울림으로 다시 나를 지탱해 본다. 삶은 한 곡의 연주다. 누구도 리허설 없이 각자의 템포로, 각자의 악기로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모여 세상을 채운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커져가는 크레센도로. 우리 모두의 크레센도로. /김경아 작가

2025-10-28

오늘부터 경주는 세계외교의 중심이다

세계적 외교 이벤트인 APEC 정상회의가 오늘(29일)부터 본격적으로 경주에서 펼쳐진다.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간의 한미 정상회담이 오늘 경주에서 열리고, 내일(30일)은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 간의 미중 정상회담이 부산 김해공항에서 개최된다. 이 대통령과 시 주석과의 한중 정상회담은 APEC 마지막 날인 11월 1일 열린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날 가능성도 거론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7일 일본으로 향하는 전용기 안에서 “김정은이 원한다면 만나고 싶다. 내가 한국에 있으니 그쪽으로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 한국방문을 계기로 트럼프는 여러 차례 김정은과 만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다만, 북한이 트럼프 제안에 응답할지는 미지수다. 트럼프 대통령은 30일 김해공항을 통해 출국할 예정이다. 한미, 한중, 미중, 북미 간의 정상회담은 한국의 국익이 걸려 있을 뿐 아니라 세계 무역 질서를 가를 분수령이 된다. 우리 국민은 이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 의장으로서 글로벌 정치와 경제를 좌우하는 정상들을 상대로 실용외교의 진면목을 보여주길 기대하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은 지난 8월 이 대통령 방미 이후 두 달 만에 열린다. 미국과의 관세협상은 현재까지 오리무중이다. 양국은 지난 7월 큰 틀에서 무역합의를 했지만,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 구성과 이행 방안을 두고는 아직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협상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있는 모양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협상의 물꼬를 트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시 주석은 지난 2014년 7월 이후 11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최근 양국은 상호 비자를 면제하며 민간 교류가 어느 때보다 활발하지만 중국이 서해에 무단으로 설치한 구조물로 인해 여전히 관계가 껄끄럽다. 주한미군 사드 배치의 앙금도 남아 있다. 이 대통령은 향후 한중 관계의 방향을 가늠할 이번 만남에서 양국의 현안을 매듭지어야 하는 숙제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30일 정상회담은 ‘세기의 담판’으로 불린다. 세계 경제와 안보 정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 주석과 직접 만나는 것은 집권 1기 때인 2019년 6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국(G20) 정상회의 이후 6년 4개월 만이다. 일단 양국 고위급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지난 주말 최대현안이었던 ‘희토류 수출통제(중국)’와 ‘관세 100% 추가 부과(미국)’를 철회하는 중재안에 합의하면서 전면전은 피했다. 양국 모두 무역 갈등 확전이 가져올 파국을 막아야 한다는데 이해가 일치한 것이다. 한미, 미중, 한중, APEC 정상 등 다자·양자 간 만남으로 이어지는 정상외교 슈퍼위크에 이 대통령은 무대의 중심에 선다. 의장으로서 가교 역할이 맡겨진 만큼 국익을 극대화하는 성과를 내야 한다. 여야 정치권도 이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 특히 APEC 중심 무대인 경북도와 경주시는 정상회의의 다양한 성과를 ‘포스트 APEC’의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10-28

‘안가관리법‘ 제정을 허(許)하라

12·3계엄 직후 안가에서 모임을 가진 이상민·박성재 전 장관과 이완규 전 법제처장, 김주현 전 민정수석 등 ‘4인방’은 최근 특검 수사로 구속되거나 수사를 받는 등 수난을 겪고 있다. 그런데 국민들은 대통령 아닌 국무위원들도 손쉽게 안가를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경호상 기밀사항이기도 하지만 안가가 몇 채나 되며 누구까지 이용이 허용되는지 국민들은 모른다. 미국 드라마에서 안가는 FBI나 마약단속국의 주요 증인이나 범죄피해자를 보호하는 장소로 등장한다. 하지만 한국의 안가는 권력자와 재벌간 비밀회동을 통해 뇌물이나 특혜를 주고받는 자리, 또는 고관대작들이 비싼 양주, 귀한 요리와 함께 화류계 여인들과 술자리를 갖는 은밀한 곳으로 연상되곤 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의 잦은 술자리나 재벌 회장과 회동 등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부패가 이곳 안가에서 발생하고 행해진 까닭이다. 그만큼 한국의 안가는 떳떳하지 못한 모임을 할 때 이용되는 음습한 공간이다. 이제 사적 목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는 안가들은 없애고 경호상 꼭 필요한 안가들도 투명하게 관리되도록 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술이 당긴다고, 또는 친목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굳이 혈세를 낭비하며 안가를 이용할 이유는 없다. 저잣거리 식당과 술집은 널려있다. 그간 안가에서는 고위 관료들이 춘향가에 나오는 못된 벼슬아치들처럼 ‘백성들의 고혈로 호사스런 술독의 맛있는 술과 옥쟁반 위 기름진 안주‘ 를 훔쳐 먹는 ‘세금 도둑질’을 얼마나 저질렀을지 모를 일이다. 그간 우리 국민들은 고위 공직자 등 권력자들의 특혜나 방종에 너무 관대했다. /류승완(중부본부장)

2025-10-28

하우(How) 사고의 함정

문제란 무엇일까? 사전적으로는 ‘해답을 요구하는 물음’ 또는 ‘해결하기 어렵거나 불편한 대상 또는 그런 일’이다. 이것만 보면 문제란 부정적인 것이어서 당장 해결해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분명히 어렵고 복잡하며, 신속하게 해결해야 할 무언가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구나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기업에서 보면, 제조업은 제조 조건을 충족 못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근원적인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의사는 환자에게 ‘배가 아프다’는 말만 듣고 곧장 약을 처방해주지 않는다. 배가 아픈 것은 하나의 증상일 뿐 병의 원인을 알려면 더 정밀한 검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불경기에 적자가 나는 식당 주인은 분석없이 대책을 세우고, 은행 대출까지 해서 문제 해결을 하려 했다면 과연 얼마나 개선되었을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대출만 남을 수도 있다. 그것은 문제의 근원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뭔가를 해야한다는 마음으로 성급하게 대책을 수립하여 실행한 결과다. 이것을 ‘하우(How) 사고의 함정’이라고 한다. ‘하우 사고의 함정’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되는 쓸모없는 대책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돈을 모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에, ‘무조건 절약하기’ 등은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이다. 문제를 해결할 때는 경험과 직관에 따른 행동도 필요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전략과 계획이 중요하다. 전략과 계획을 제대로 수립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정의부터 올바로 내려야 한다. 시대와 나라, 업종에 상관없이 통용되는 문제의 정의는 ‘현재 수준과 이상적인 수준의 차이(Gap)‘이다. 즉, 현재의 상태와 바라는 미래의 모습의 차이가 문제인 것이다. 문제가 정의되어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은 문제의 성격에 따라 복잡성이 있고 접근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문제는 분석을 통해서 해결되지만, 미래 경쟁력을 위해 기준을 높인 경우는 미래의 요구 조건을 이해하고, 이를 갖추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해결되고 미래 경쟁력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문제를 잘 풀어가려면 전략을 잘 세워야 한다. 내부 환경의 강점과 약점, 외부 환경의 기회와 위협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SWOT(강점·약점·기회·위협) 전략을 수립하면 된다. 현재의 나를 알고 상대의 흐름을 읽은 후, 그에 맞는 전략을 정하고 제대로 된 안을 짜서 실행해야 한다. 현실은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문제의 현황과 원인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채, “그냥 해”라고 ‘하우(How·지시)’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면 부하직원은 생각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일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상사는 부하직원에게 현재 상황(what)과 문제의 원인(why)이 이러하니 함께 생각해보자고 리드해야 한다. 좋은 기업문화에서는 작은 일이라도 “이렇게 하세요”라고 지시하지 않는다. 상황과 이유, 현재의 문제를 알려주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물어보는 질문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상대가 답을 내게 하고 주인공이 되게 하면 좋은 성과와 보람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10-28

통증 치료의 새로운 접근 매선치료

통증의 근본은 근육과 근막이 오랜 시간 굳고 말라붙은 결과다. 근육은 반복된 긴장, 잘못된 자세, 스트레스, 혈류 저하 등으로 유연성을 잃고 내부 수분이 빠져 탄력을 상실한다. 이때 유착과 혈류 장애로 신경이 자극받아 만성 통증이 된다. 매선치료는 이러한 근막층의 문제를 지속적인 자극으로 회복시키는 치료다. 녹는 성분의 특수 실을 근막층에 삽입해 바늘을 뺀 후에도 실이 남아 꾸준히 작용하도록 만든다. 실은 서서히 녹으면서 그 부위에 미세한 염증 반응을 일으키고 그 반응이 새로운 혈류를 불러들이며 손상된 조직의 재생을 유도한다.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메마른 땅에 물길이 다시 트이듯 매선은 말라붙은 근육에 물길을 열어주는 셈이다. 근막층 속에 실이 자리를 잡으면 그 주변으로 미세한 혈관이 새로 자라나고 조직 내 수분이 늘어난다. 이로 인해 말라붙었던 근육은 다시 부드러워지고 탄력을 되찾는다. 동시에 세포 대사가 활성화되면서 지방세포의 부피도 줄어든다. 매선은 단순히 통증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근육을 살리고 지방을 줄이는 재생형 치료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침치료처럼 보이지만, 원리는 다르다. 침은 순간 자극을 주고 빠지지만 매선은 실이 남아있기 때문에 3개월에서 6개월 이상 지속적인 자극이 이어진다. 근육이 회복되는 동안 실이 서서히 흡수되며 그 자리에는 단단한 섬유조직이 새롭게 형성되어 구조적 안정성이 강화된다. 이 효과를 쉽게 비유하자면 매선은 속에 붙이는 테이핑이다. 겉에 테이프를 붙여 근육을 지지하듯이 매선은 근육 속에서 구조를 잡아주며 지속적으로 지탱한다. 시술 후에는 근육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자세가 안정되며 움직일 때의 통증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한 부위에는 보통 30~50개의 실이 들어가며 전신 시술 시에는 한 번에 약 100~150개의 실을 사용한다. 실의 개수와 위치는 통증 부위 근막의 두께 체형에 따라 달라진다. 목·어깨·허리·무릎 같은 부위는 특히 효과가 좋으며 반복적인 통증이나 근육 위축이 심한 경우 매선과 약침 초음파 가이딩 치료를 병행하면 더 큰 시너지를 얻을 수 있다. 시술 후 초기에는 약간의 뻐근함이 느껴질 수 있으나 며칠이 지나면 근육의 피로감이 줄고 몸의 중심이 안정되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실이 녹아 없어질 때쯤이면 근육은 이전보다 훨씬 유연하고 단단한 상태로 회복된다. 매선은 단순히 통증을 눌러주는 치료가 아니라 근육의 생명력을 되살리고 몸의 구조를 새롭게 세우는 치료다. 매선치료의 핵심은 몸이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지속적인 자극을 통해 혈류와 산소 공급이 증가하면 근육은 다시 숨을 쉬고 생기를 되찾는다. 겉으로는 작은 바늘자국만 남지만 그 속에서는 수많은 미세한 변화가 일어나며 근육이 부드럽게 풀리고, 통증의 뿌리가 사라진다. 결국 매선치료는 통증을 단순히 억제하는 기술이 아니라 몸속의 흐름을 되살리고 구조를 재정렬하는 근본적 회복법이다. 근막 속 테이핑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근육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매선의 힘은 만성통증 환자들에게 새로운 회복의 길을 열어준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10-28

‘차등 전기요금제’ 같은 지역균형정책 안 나오나

지난주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타운홀미팅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지역균형발전은 지역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탈출구이자 필수 전략”이라고 했다. 지방선거용 발언이 아니라면, 전적으로 공감 가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수도권에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분야의 자산이 몰리면서 주변지역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지난해에도 비수도권에서 수도권으로 이동한 인구가 41만8000명에 이른다. 비수도권 미래의 바로미터인 청년 유출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지난 한 해만 6만1000명의 청년이 취업과 진학을 위해 부모 품을 떠나 수도권으로 갔다. 청년이 떠나가니까 비수도권 지역에서는 일차적으로 초등학교가 붕괴되고, 이로 인해 교육문제로 아이를 키우기가 불가능한 지자체가 매년 늘고 있다. 전국 228개 시군구 중 인구 소멸 위험지역이 118곳에 이른다는 것은 이미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다. 이재명 정부의 ‘10·15 부동산 대책’도 돈과 사람이 모두 수도권에 몰리면서 서울 집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수도권 집값이 소득 대비 가장 높은 편이다. 이 문제가 계속 시정되지 않으면 일본처럼 언젠가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이 정책에 대해 정치권 반발이 크지만, 비수도권 지역민들로선 ‘시의적절한 정책’이라고 판단된다. 이 대통령은 취임이후 줄곧 “똑같은 내용의 정책을 만들어도 지방에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했다.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비수도권 인센티브 정책은 ‘차등 전기요금제’다.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처음 주장한 이 제도는 ‘발전소와 송전탑이 몰려 있는 지역은 전기요금을 낮추고, 소비만 하는 수도권 지역은 요금을 상대적으로 비싸게 책정하자’는 내용이다. 이 제도는 그동안 지역균형 발전의 핵심 정책으로 평가받았지만, 이 역시 여야 정치권이 수도권 표심을 의식하면서 제도도입이 지연되고 있다. 모든 정부마다 어김없이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외쳤지만, 결과는 용두사미였다. 2차 공공기관이전 문제가 대표적이다. 문재인·윤석열 정부 때도 취임 직후 2차 공공기관 이전에 속도를 내겠다고 했지만, 전혀 진척되지 않았다. 비수도권 지역민에게 그냥 ‘희망고문’을 한 것이다. TK 신공항 같은 사회기반시설(SOC) 건설이나 기업 배치 등에 있어서도 지역균형이 고려돼야 했지만, 그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사실 경제성만 놓고 보면 지방 SOC 사업은 대부분 불가능하다. 이 대통령이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정책을 설계하겠다”고 한 말은 반드시 실현되길 기대한다. 비수도권 균형발전은 수도권 정치인들의 반발을 수반하기 때문에 정권 초기 대통령이 직접 밀어붙여야 가능하다. 정부의 10·15 부동산 정책에 대해 야권에서 “국민이 살고 싶은 곳에 집 한 채 마련하려는 것을 걷어차 버리는 행위”라고 비난하는 것도 비수도권에서 보면 지극히 이기적인 행태로 해석된다. 조사를 해보면 알겠지만, 여야 국회의원 대부분이 수도권에 수십억대의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서울 집값이 떨어지는 어떤 정책도 원하지 않는다. 이재명 정부는 막연하게 ‘지방 인센티브’ 원칙을 선언할 것이 아니라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 같은 구체적이고 구속력 있는 정책을 내놓길 바란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10-27

오래 사는 게 불행인 나라

의료 기술의 발달과 예전에 비해 훨씬 위생적인 생활환경, 여기에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각종 건강 정보의 확산으로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지난 세기처럼 나이 예순을 맞아 환갑잔치를 벌인다면 웃음거리가 되는 세상이 됐다. 노인 인구의 가파른 증가는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우리가 맞아야 할 미래의 모습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노인을 홀대하고 은연중에 무시하는 모습 또한 알게 모르게 분명히 존재한다. 헬스클럽에선 나이 많은 회원의 가입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일부 카페는 ‘노 키즈존’에 이어 ‘노 시니어존’ 팻말을 내걸고 영업을 한다. 어떤 골프장은 70세 이상 노인에겐 회원권을 판매하지 않는다. 사회적 푸대접과 배제만이 아니다. 노인들이 겪고 있는 개인적 현실 또한 평탄하지 않다. 한국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38.2%)과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40.6명)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경제적 궁핍이 고령층 삶의 의지를 꺾는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 여기에 더해 지난 6월 발표된 보건복지부의 ‘노인학대 현황 보고서’도 위험 수준으로 읽힌다. 2024년 노인보호 전문기관 신고 등을 통해 노인학대로 인정된 사례는 모두 7167건. 10년 전인 2014년 3532건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학대의 사례는 가정, 노인 생활시설, 병원, 공공장소를 막론하고 발견됐다. 젊은이들 속에 섞이지 못하고 겉돌며, 가난한 환경에서 희망을 발견하기 못한 채 정신적·육체적 학대까지 당한다면 오래 사는 게 축복일 수 있을까? 바뀐 시대 노인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사회적·법적 제도의 개선이 시급해 보인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10-27

누가 삼권분립을 파괴하는가

민주주의의 제도적 기반은 삼권분립에 있다. 우리 헌법에 명문화되어 있듯이 입법권(국회)·행정권(정부)·사법권(법원) 등 세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삼권분립이 파괴되면 권력의 집중과 남용으로 민주공화정(民主共和政)은 무너지고 독재의 문이 열린다. 누가 삼권분립을 파괴하는가?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의 삼권분립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한민국에는 권력의 서열이 분명히 있다. 최고 권력은 국민, 그 다음은 직접 선출권력, 그 다음이 간접 선출권력”이라고 했다. 이러한 대통령의 권력서열론은 삼권분립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입법권·행정권·사법권이 모두 대등하지 않다면 어떻게 서로를 견제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에서는 그 누구도 삼권분립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선출권력(국회·정부)이 임명권력(법원)보다 높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사법부는 입법부와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그 권한은 헌법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선출권력이라고 해서 임명권력을 제멋대로 평가절하 할 수 없다. 자칭 ‘국민주권정부’라고 하면서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삼권분립’을 훼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대통령은 삼권분립을 수호해야 할 엄중한 책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한편 국회를 장악한 민주당의 삼권분립 파괴도 심각하다. 민주당이 대법원장을 축출하기 위해 벌이는 반헌법적·비민주적 행태는 갈수록 가관이다. 아무 근거도 없이 ‘조희대­한덕수 음모론’을 제기하는가 하면, 이재명 대통령의 선거법재판 상고심에서 대법원이 유죄취지로 파기 환송한 근거를 공개하라고 압박한다.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재판공개를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게다가 국정감사를 악용해 대법원장을 국감증인으로 채택하고, 답변을 거부한 대법원장에게 온갖 모욕을 주었다. 문재인 정권 때 민주당은 김명수 대법원장의 국감 답변 거부를 삼권분립을 이유로 옹호했던 사실을 벌써 잊었는가? 게다가 ‘내란특별재판부’ 설치는 또 어떤가. 그 배경은 사법부의 판단을 못 믿겠으니 국회와 정부가 특별법으로 전담재판부를 구성하겠다는 것이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특별재판부를 구성하겠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삼권분립을 파괴하는 위헌적 발상이다. 민주당의 박희성 의원조차도 “사법권은 법원에 있다는 헌법(제101조)의 개정 없이 특별재판부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했는데, 변호사 출신인 대통령은 “그게 무슨 위헌인가”라고 했다고 하니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정부여당이 사법부를 겁박하고 재편(再編)하려는 것은 장기집권의 기반을 구축하는 동시에 대통령의 퇴임 후 재판을 무산시키거나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것임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 독선적이고 오만한 권력은 국민이 절대 용서하지 않음을 명심하라. 높은 대통령지지율과 압도적 국회의석을 가지고도 정권재창출에 실패한 문재인 정권을 반면교사로 삼기 바란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2025-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