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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추억을 긷는 소리

시끌벅적한 소리가 사라졌다.20년 넘게 초등학교 옆에 살았다. 아이들이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에 학교가 있다는 것에 무조건 이사를 결정했었다. 부엌으로 난 작은 창문을 열어두면 쉬는 시간 아이들의 뜀박질 소리가 그 문으로 들어온다.하지만 이맘때 들려오던 운동회 소리가 코로나 때문에 끊겨버렸다. 날이 정해지면 한동안 운동장에서 매스게임 연습하느라 선생님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날아오고, 행진곡이 배경음악으로 쉴 새 없이 동네를 들썩거렸었다. 그런 소리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마스크에 묻혔는지 초등학교 옆이란 게 느껴지지 않는 요즘이다.이십 대인 아들 둘이 졸업한 초등학교이다. 저 학교에서 큰아이는 봄가을로 여섯 번이 넘는 운동회를 경험했다. 일기장을 뒤적이니 2005년 9월 29일의 운동회 장면이 만국기를 흔들며 나타났다. 둘째가 1학년에 입학해서 5학년인 형과 함께 체육복 차림으로 신나게 학교로 향했다. 내 어릴 적 같으면 운동장에 만국기 날리고 장사꾼들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그 틈새에 할머니가 밤 삶고, 떡 싸서 큰 나무 아래에 전을 폈을 것이다.도시에 사는 우리 아이들의 운동회는 심심하다. 그저 맨손 달리기 한 번이면 끝이다. 남편과 나의 운동신경을 닮아 재바르지 못한 두 아들은 늘 꼴찌를 못 면한다. 학교 가기 전 아이들에게 남편이 부탁한다. “일등 하면 안 된다. 꼴찌로 달려라, 천천히. 너같이 잘 생긴 사람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천천히 달려줘야 해. 알았냐?” 말도 안 된다고 킥킥거리며 현관을 나선다. 저녁에 야영 간 남편이 전화했다. 3등, 4등을 했다니까 5학년은 세 명씩 달리고 1학년은 4명 달렸나 한다. 보물찾기나 장애물경기처럼 여러 변수가 없는 맨손 달리기는 어차피 다섯 명 달리면 5등, 여섯 명 달리면 6등 하는 아이들이라 위로할 방법으로 뒤로 처질수록 용돈을 더 주겠노라 약속했었던 거다. 그 후로 아이들이 맨손 달리기를 즐겼다.다음 해 가을, 두 아이의 학교 운동회날이 돌아왔다. 늘 간단하게 오전에만 하던 소운동회를 올해엔 학부모님들 다 모시고 거창하게 한다고 초대장을 들고 왔다. 수업 시간 쪼개서 달려가니 2학년 둘째의 달리기 순서였다. 달려가다가 훌라후프 다섯 번 넘고 또 달려가기였다. 신발 맞는 거 신으랬더니 또 형 신발을 신고 달려가느라 낑낑거리는 게 안타까워 목청껏 그냥 뛰라고 응원을 보냈다. 안 그래도 겨우 4등으로 달리다가 드디어 신발이 벗겨졌다. 엄마의 바람은 뒤로하고 우리 둘째 되돌아와서 천천히 신발을 다시 껴 신는다. 그동안 다른 애들 다 뛰어가 버리고 없다. 그래도 5등으로 웃으며 뛰어간다.6학년 큰애는 ‘손님 찾기’라고 쪽지에 적힌 대로 한 다음 달려가는 건데 4-4반 선생님을 찾으라는 쪽지를 잡았나 보다. 다른 선생님들 다 나와서 누구 찾냐고 물어보시는데 하얀 바지 입으신 4반 남자 선생님이 맨 꼴찌로 나와서는 아들더러 이왕 꼴찌인 거 아이 혼자 뛰어가게 했다. 헐! 성질 더러운 나는 화가 치밀었다. 초등학생 담임이 운동회를 뭐로 보는 거지? 아이들이 최선을 다하는 걸 배우도록 하는 게 운동회인데 꼴찌라고 그냥 혼자 뛰어가게 한다고? 안 그래도 부끄럼 많은 아들은 뻘쭘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얼굴에 쓰였다. 끝까지 손잡고 뛰어줘야지 선생님아. ‘님’자도 붙이기 싫었다.그 와중에 교감 선생님, 맨 나중에 단상에서 내려와 옆에 다른 아이 손 잡고 꼴등으로 달리던 아이를 거의 끌다시피 데리고 날아가서 3등으로 골인했다. 역시 교감 선생님 짱이다. 어른이라면 그 정도 모범은 보여야 하는 거 아닌지.콩주머니로 박을 터뜨려야 점심을 먹을 수 있었고, 마지막 청군 백군 학년 대표들이 나와 이어달리기를 하며 전교생을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 다음에야 운동장이 조용해지던 기억 속의 운동회, 일기장 속에서 길어 올린 아이들의 운동회로 허전한 가을의 쓸쓸함을 달랬다. /김순희(수필가)

2021-10-17

코로나 孤兒

브라질에 사는 64세 할머니는 하루아침에 다섯 손주의 보호자가 됐다. 싱글맘이던 딸이 코로나19로 숨지자 그녀가 남기고 간 아들 딸 3명과 이미 양육하던 친손주 2명을 더해 5명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생계비와 양육비 등 앞으로 그녀가 감당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다.코로나로 인해 졸지에 고아가 된 어린이가 급격히 늘고 있다 지구촌 국가마다 코로나 고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외신이다. 코로나19가 2년 가까이 전 세계를 휩쓸면서 부모를 졸지에 잃고 고아가 된 어린이는 국제아동보호단체 집계에 의하면 대략 50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불과 두 달 전 150만명 정도로 추정됐으나 그 사이 세배 이상 그 수가 늘어났다. 문제는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지 않는 한 앞으로 더 늘 것 같다는 것이다.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 의하면 인도에선 지난 4월 코로나19가 덮치면서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어린이가 1천742명에 달했다고 보도했다.인도의 한 시골마을에서는 숨진 어머니의 시신을 어린이가 직접 묻는 사례도 목격됐다고 했다. 더 심각한 것은 부모를 잃은 고아들의 생계와 양육 문제다. 이에 겹쳐서 인도에서는 고아에 대한 인신매매 가능성마저 제기돼 당국을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고 한다.최근 미국도 작년 4월부터 올 6월까지 14만2천여명의 코로나 고아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미국 미성년자 500명의 1명꼴이다. 특히 백인보다는 흑인, 소수민족 등에서 더 많이 발생해 인종 간 격차의 문제도 빚어졌다.코로나19가 2년도 되지 않는 사이 우리 인류에게 많은 숙제를 던져주었다. 코로나 고아는 코로나가 낳은 또 다른 비극의 한 단면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1-10-14

깐부 동맹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전세계적인 히트작인 넷플릭스 영화 ‘오징어 게임’에서 딱지치기, 구슬치기 등 놀이를 할 때 같은 편을 의미하는 속어로, 딱지나 구슬을 공동관리하는 한 팀을 ‘깐부’라고 불렀다. 영화에서 1호 오일남(오영수 분) 할아버지는 주인공 성기훈(이정재 분)에게 같은 편을 뜻하는 깐부를 맺자고 제안해 ‘깐부 할아버지’라고 불린다. 오징어게임에서 큰 화제가 된 ‘깐부’가 한창 달아오른 제1야당 국민의힘 대선경선에서 소환돼 화제다.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선출되자 2차 컷오프에서 뽑힌 4명의 후보가 각각 깐부를 맺으며 합종연횡, 승부가 예측불허로 접어들고 있다는 분석이다.지난 13일 제주에서 열린 국민의힘 대선 예비 후보 4명의 두 번째 TV 토론에서 이같은 후보 간 이합집산 양상이 드러났다. ‘2강’인 홍준표 후보와 윤석열 후보가 맞서고, 홍 후보는 유승민 후보 편을, 윤 후보는 원희룡 후보 편을 드는 그림이 연출됐다.우선 양강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홍준표 의원은 서로 불꽃 튀는 설전을 벌였다. 윤 전 총장은 홍 의원의 제주 개발 공약과 관련, “제주가 안 그래도 난개발 때문에 환경이 죽을 판”이라며 “환경 파괴에 어떤 복안을 갖고 있느냐”라고 비판했고, 홍 의원은 “그렇게 생각하면 도로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발끈했다. 홍 의원은 이어 윤 전 총장에게 “제주 제2공항 어떻게 추진하려고 하나. 천공 스님이 제주공항은 확장안이 좋다고 그리 말씀했다”며 윤 전 총장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역술인을 거론하며 반격을 가했다. 유승민 전 의원도 윤 전 총장을 공격했다.반면에 홍 후보와 유 후보는 서로의 생각에 동의했다. 홍 후보가 유 후보에게 자신의 노인복지청 신설 공약에 대한 생각을 묻자 유 후보는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답했다. 유 후보가 홍 후보에게 공매도 전면 폐지 공약에 대한 생각을 묻자 “유 후보가 보완책을 제시해주시면 제가 공부를 더 하겠다”고 아예 몸을 낮췄다.윤 후보와 원 후보 역시 깐부를 맺은듯 서로 우호적인 문답을 주고받았다. 윤 후보는 원 후보에게 “제주지사할 때 난개발도 잘 막고 공기업 채용도 100% 공채로 하고 업적 많이 남긴 것으로 안다”면서 원 후보가 자신의 치적을 알릴 기회를 주었다. 이쯤되면 2대2 토론 양상으로 비쳤지만 유 후보는 한사코 홍 후보와 깐부임을 부인했다. 여론조사상 선두주자인 윤 후보와 홍 후보는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지만 당심에서는 홍 후보가 다소 밀리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일까.노자는 “죄는 욕심이 많은 것보다 큰 죄가 없고, 화는 족함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 큰 화가 없으며, 허물은 얻기를 원하는 것 보다 더 흉한 것이 없다”라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이란 정치권력의 향방을 놓고 다투는 경선국면에서 욕심이나 족함을 아는 게 가능할리 만무하다. 어떻든 야당 대선경선에서 깐부 동맹이 아름답게 결말지어져 여야간 대권 경쟁이 국민의 뜻아래 이뤄지기를 바랄 뿐이다.

2021-10-14

플라타너스에 추억 걸렸네

하늘 높이 양떼구름이 몽글몽글하다. 산들바람이 양떼구름을 물리고 그 자리에 새털구름을 엎는다. 가을하늘이 그린 수채화 아래 플라타너스도 높다랗게 이파리를 달고 서 있다. 기억 속의 한 풍경이다. 플라타너스 이파리를 타고 희미한 흑백사진 속으로 떠난다.초등학교 때, 플라타너스는 약속장소였다. 수업을 마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플라타너스 아래 모였다. 십리 길을 혼자 가면 심심해서 친구들과 몰려다녔다. 나무 아래 친구의 가방이 하나둘 던져졌다. 가방 서너 개가 쌓이면 우리는 비석치기를 하고 그림자밟기 놀이를 했다.매번 늦게 오는 친구가 있었다. 받아쓰기를 통과하지 못했거나 숙제를 하지 않았거나 준비물을 빠트린 친구이다. 우리는 반이 달랐지만, 늦게 오는 친구를 기다리며 나무 아래서 뛰어놀았다. 한참을 소리 지르고 노느라 다리가 뻐근해질 때쯤, 친구가 왔다. 그러면 교실에 남아서 뭐 했노? 청소했나? 숙제했나? 한 사람이 하나씩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가방을 챙겼다. 친구의 처진 어깨를 동무하며 한 손으로 가방을 들어 올려 주었다. 교정을 빠져나갈 때쯤 플라타너스 잎에 노을이 내려앉았다.플라타너스는 넉넉하고 우람했다. 내 몸의 몇 배나 되는 나무 몸통에 기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감고 있는 눈에 구름이 내려 나를 감싸고 햇살이 조물조물 생각을 빚자 상상하는 것들이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졌다. 큰사람, 넓은 사람, 돈 많은 사람, 그리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지. 저 플라타너스처럼 풍성하게 그늘을 드리워야지.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에는 낭만이 깃든다. 낙엽이 쌓여 바스락거리는 곳에 연인들이 손잡고 걷는다. 걸을 때마다 낙엽이 소곤대는 것은 연인의 마음이 움직이는 소리다. 콩닥콩닥, 쿵쾅쿵쾅, 심장이 멋대로 나대는 소리를 감추며 걷기에 좋다. 저물녘에 부는 바람 한 자락은 연인들의 맞잡은 손을 더 감싸게 한다. 커다란 나뭇잎 하나 주워 얼굴에 대고 속삭이면 한쪽 어깨가 살짝 기울어진다.플라타너스는 성장 속도가 빨라 대기 중의 오염물질을 걸러준다. 자동차 도로에 플라타너스가 양쪽에 쭉 뻗어 있다. 나무는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무의 넓적한 잎은 자동차의 시끄러운 소리를 흡수하여 방음에 도움이 된다. 오염된 공기를 깨끗하게 하는 능력은 다른 어떤 나무보다 뛰어나다. 이미 오래전 그리스에서도 플라타너스를 가로수로 심었던 이유다. 영국 런던을 비롯한 세계의 이름난 대도시의 가로수로 플라타너스는 빠지지 않는다.언제부턴가, 플라타너스가 사라지고 있다. 점점 설 자리를 잃어버린 플라타너스. 가을이 깊어지면 큰 잎이 떨어져 도로 가장자리에 수북이 쌓인다. 제때 치우지 못하면 상수도의 구멍을 막아 비가 오면 물이 넘치기도 한다. 그리고 씨에 있는 털이 날려 기관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이소프렌’을 많이 배출하여 공기 중의 오존을 증가시킨다는 주장이 있다. 매연 속에서 견디느라 애쓰는 플라타너스의 몸부림일 수 있겠다.플라타너스의 공식적인 우리 이름은 ‘버즘나무’다 처음 나무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나무의 껍질이 얼룩덜룩해서 버짐나무라고 불렀다. 그리고 옛날 사투리로 부르던 그대로 버즘나무라 한다. 가난하던 시절 영양이 부족한 까까머리 어린아이들의 마른버짐이 생각난다. 아니면 왠지 피부병이 날 것 같은 이름이다. 차라리 영어 이름 그대로 플라타너스라 쓰면 좋겠다. 이순혜​​​​​​​수필가 플라타너스는 한 아름의 추억을 안고 있다. 그 나무를 보며 시인은 우리를 향해 묻는다. 꿈을 아느냐고,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파아란 하늘에 어느덧 젖어 있단다. 가을이면 입에서 흥얼거리는 노랫말은 가을이 다 가도록 그리운 얼굴이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아는 우리들의 약속장소 플라타너스, 그 아래 영화가 있고 시가 있고 추억이 있다.어른이 되자 플라타너스는 그저 그런 나무였다. 나이가 들어가니 도로에 줄 서 있는 플라타너스가 다시 보였다. 나무가 품고 있는 숱한 회상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이제 플라타너스가 사라지면 추억을 소환하는 풍경도 사라질 것이다.

2021-10-13

포구, 알알이 붉은

양태순수필가 몇 해 전부터 포구가 머릿속에 똬리를 틀었다. 모양이며 맛이 생생하여 눈앞에 삼삼하다.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커 큰 시장에 가 봐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맛이 그대로인지 확인하고 싶어 포구를 먹고 싶은 갈증은 점점 커졌다. 가을바람이 귓불을 스치면 입맛을 다시고는 몸살을 앓곤 했다.포구는 토종 보리수 열매다. 보리똥, 물포구, 보리수로 불리기도 하지만 내 고향에서는 포구라 불렀다. 동글동글 작은 알이 조롱조롱 모여 열린다. 빨간 열매에 흰 반점이 무늬를 만들고 속에 씨를 품고 있다. 산에서 만나면 알알이 눈을 붙잡아 손이 바빴다. 주섬주섬 따 먹으며 주머니에 담고 보자기에 싸서 집에 가져 왔다. 알불 아래서 깨끗이 다듬어진 포구는 어머니가 이고 장으로 갔다.포구, 알싸한 그리움으로 가는 티켓이다. 한 알씩 먹는 것보다 한 움큼을 입안에 털어 넣고 씹어야 맛있다. 와작 씹으면 살짝 떫은맛에 이어 새곰한 맛이 몸을 부르르 떨게 한다. 연달아 우물거리면 달큼한 맛이 혓바닥을 어루만진다. 어느 해의 일이다. 그때는 자취를 하던 때이고 전화도 없어 서로 연락이 잘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어머니가 설탕을 솔솔 뿌린 포구를 먹으라고 주었다. 숟갈로 푹푹 떠먹었다. 어저께 먹어본 듯 선명한 감각이다. 입술에 붉은 물 들이며 뛰어다녔던 고향의 풍경도 스르르 살아난다.간만에 소꿉친구들을 만났다. 포구하면 생각나는 추억이 있는지 물었다. 산에서 포구를 따다가 가시에 찔렸던 일, 벌집을 건드려 줄행랑을 치다가 땄던 포구를 엎었던 일, 어느 골짜기에 많이 있어서 몇 번이나 따러 갔던 일 등. 그 시절의 추억담이 쏟아졌다. 포구라는 말에 저마다 잊었던 산천을 떠올리며 그땐 그랬지, 아련한 웃음이 걸렸다.나는 어릴 적 시간을 더듬는 여행이 잦아졌다. 포구가 만들어낸 길이다. 오징어게임과 숨바꼭질하던 골목, 산딸기, 머루, 망개, 포구를 따먹던 산이며 두레상에 오르던 무밥, 호박범벅, 콩죽 따위를 지도에 그리듯 마음에 새겼다. 고샅길로 연결된 놀이터에서 일어난 일이며 계절별로 먹었던 먹거리를 조금씩 수정하기 몇 차례였다. 그래서 정확할 거라 믿었지만 가족이나 친구들과 맞춰보면 엉뚱한 것도 있었다. 순전히 나를 위한 나만의 맞춤형 여행지도일 뿐이었다.지도에 점으로 남은 것들은 지나온 시간을 연결하는 징검돌이다. 돌 주변은 희미해진 사건과 감정의 덩어리들이 부유한다. 언저리를 배회하는 흔적들을 잡아채서 얼기설기 엮으면 풍성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더러는 징검돌 사이를 연결하지 못해 끙끙대기도 하고 여기저기 전화질을 해서 기억을 이어보기도 한다. 담담히 시작된 순례길은 포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는 횟수가 늘었다.이유를 알 수 없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누구나 가끔은 아궁이에 불씨를 뒤적이듯 추억 한자락을 곱씹는 날이 있다. 그뿐이다 답을 내리기에는 시원찮았다. 그 자리를 맴돌 때마다 무지근한 명치를 눌러야 했다. 기어코 포구를 먹어야만 몸살이 나을 것 같았다.자주 시장을 기웃거렸다. 난전에는 갖가지 채소와 가을을 담은 과일이 소쿠리에 올라앉아 손님을 부른다. 발소리 엇갈려 지나는 틈틈이 흥정하는 소리도 끼어든다. 나는 구석구석 바삐 눈을 굴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사람들에 휩쓸려 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감을 소쿠리에 소복이 쌓아놓고 팔고 있는 펑퍼짐한 곡선의 뒷태를 본 순간이었다.포구, 나를 붙잡은 정체가 그이였구나! 나에게 포구의 맛을 알게 하고 포구를 팔던 야무진 장사꾼이자 내가 간절히 살 부비며 온기를 나누고 싶은 여인이다. 어떤 어려움도 끄떡없이 펄떡이는 심장으로 삶의 행로를 걸었으며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부족한 형편이지만 오남매 넘치는 사랑으로 키워 준 사람, 내 그리움의 여정에 언제나 불을 켜는 어머니.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수년째 병상에서 눈으로만 세상사를 읽으려 애를 쓴다. 뻐끔한 눈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무너졌다. 포구의 붉은 물이 추억으로 가는 문을 열길 바란 모양이다. 젊었던 날을 기억하며 스스로가 잘 살아냈다 인정할 수 있기를. 포구즙같은 비가 눈앞을 가린다.

2021-10-13

한 몸 살기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한 번도 교육을 받지 않은 아프리카에 원주민들 아이들에게 1+1=2가 된다는 덧셈을 가르쳤는데 한사코 원주민 아이들은 1+1=1이라고 고집하였다. 진흙 두 덩어리를 합치면 한 덩어리가 되니 하나에 하나를 더하더라도 하나라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설명한 말이다. 머리가 둘인데 몸이 하나인 사람을 썀 쌍둥이라 한다. 이란에 썀 쌍둥이인 ‘비자니’ 자매는 두 머리가 자꾸 싸워서 한 몸살기를 거부하고 각자의 삶을 살고 싶어 분리수술을 하였는데 결국은 둘 다 죽었다. 반면에 태국의 썀 쌍둥이인 ‘창’과 ‘엥’은 한 몸 살기를 원했다. 생각이 다른 두 개체가 한 몸 살기 하기는 참으로 어렵지만 양보와 타협으로 몸을 공유하는 한 몸 살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서커스로 큰 돈을 벌고 농장을 구입하여 공동운영을 했다. 이후 각자 결혼을 하여 삼일은 이 집에서, 삼일은 저 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63세를 살았고 세 시간 간격으로 운명했다. 그들이 늘 했던 말은 “우리 둘은 합하여 한 몸을 이루었었다”는 말이었다.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어라”였다. 한 몸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소마’인데 개별적 특성을 그대로 지닌 개체적 몸을 뜻한다. 이런 몸은 하나로 묶어도 비자니 자매처럼 갈등과 분열과 분쟁뿐이다. 몸을 의미하는 다른 하나는 ‘사르크스’인데 창과 엥처럼 마음과 생각과 뜻을 하나로 결합한 큰 몸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생각과 마음과 뜻을 가진 몸이지만 그 다른 것이 유기적이고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큰 생각, 큰 마음, 큰 뜻을 이루는 큰 한의 거대한 한 몸이 사르크스이다. ‘소마’는 하나(one)의 한 몸이지만 ‘사르크스’는 큰 한(grand)의 한 몸이다.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어라”는 그 한 몸은 ‘소마’의 한 몸이 아니라 ‘사르크스’의 한 몸으로 큰 한 몸을 말한다. 아담의 원뜻은 인류라는 뜻이다. 인류가 큰 한 몸으로 살기를 명령한 것이다. 한(grand)몸을 이루고 공생해야 할 세상은 지금은 한(one)몸에만 머물러 있어 갈등과 분열과 분쟁과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태극기의 ‘태극’은 서로 다른 양극이 큰 원에서 한 몸 이룸을 의미하고, 대한의 ‘한’은 무한히 큰 한(grand)으로 한 몸을 이룬다는 뜻이다. 그런 국호를 가진 우리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있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하나에 하나를 더해 큰 하나가 되고, 합하여 둘이 큰 한 몸을 이루는 한 몸살기로 살아보자.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어라”

2021-10-13

오징어게임 덕에 돌아보다

장규열한동대 교수 오징어게임이 지배한다. 넷플릭스 전용 콘텐츠로 소개된 지 3주 남짓 전 세계 94개국 1억이 넘는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456억, 어른들의 동심이 파괴된다’는 슬로건으로 어릴 적에 동네 골목길에서 즐기던 놀이들이 소환되었다. 미국 내 주요매체와 외신들마저 ‘한국적 콘텐츠가 지구 보편적 감성을 흔들어놓은 작품’으로 호평한다. K-pop이 이끄는 한류가 영화계를 연이어 휘젓더니 이제는 글로벌뉴미디어 시장에서 드라마가 기회의 창을 넓게 열었다. 경제적 위기에 처한 456인의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456억원에 도전한다. 여섯 게임을 통과하여 살아남으면 큰 돈을 거머쥐겠지만 최후의 승자 한 사람 외에는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드라마적 허구로 가득하지만 현대인이 살아가는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한다.456인 가운데 455인은 죽어야 하는 비정하고 슬픈 구조를 드러내며 무자비한 경쟁과 극도의 긴장으로 몰고간다. 시청자들의 인기가 드높고 언론의 호평이 가득하지만, 희한하게도 ‘죽음’을 누구도 문제삼지 않는다. 콘텐츠는 오히려 패자의 죽음에 분홍색 리본으로 충격을 줄인다. 삶을 마감해야 하는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이 유연해 졌을까. 폭력적 콘텐츠에 길들여진 나머지 우리는 모두 죽음과 살인에 관하여 무감각해진 것일까. 돈을 위해서는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냉소와 자조에 빠진 것은 아닐까. 죽어 사라지는 경쟁자들에 오히려 짜릿한 승리감마저 느끼고 있는 것일까. 상생과 협력, 공감과 배려는 듣기에만 좋은 소리였을까. 죽음에 대하여 이렇듯 드러내고 바라보면서 슬픔이나 동정이 사라진 현실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최후의 한 사람이 456억을 굳이 다 가져야 하는 경기방식.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고안한 룰이지만, 돌아보면 극도의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우리네 자화상이 아닌가.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Winner takes it all.) 운영방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짜릿한 쾌감마저 느끼며 살고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이 1억씩 공평하게 나눌 생각은 아예 해 보지도 않는 사회경제적 구조에 너무 익숙한 것은 아닌지. 극한의 양극화가 삶과 죽음으로 극화 대비되었을 뿐 극소수와 99%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가. 분배정의를 논하지만 공평하게 나누는 일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능력과 배경에 따른 무한경쟁을 부추기며 제도와 관습이 지어져 오지 않았는가. 이제라도 돌아보며 공정과 상식을 살려내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죽음을 버거워하지 않는 사회와 승자만 모든 것을 차지하는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 삶의 가치를 가벼이 여기고 경쟁의 가치만 드러내는 일도 부당하다. 힘들어도 살아내며 어려운 이를 돌아보는 정서를 회복해야 한다. 오징어게임이 콘텐츠로 표현하는 비정함의 오류와 무한경쟁의 약점을 돌아보아야 한다. 죽음보다 삶이 소중하다. 정글같은 경쟁만큼 협력하는 상생이 화두여야 한다.갖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노력과 서로 살피며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2021-10-13

퍼펙트 스톰

퍼펙트 스톰은 개별적으로 보면 위력이 크지 않은 태풍 등이 다른 자연현상과 동시에 발생하면서 엄청난 파괴력을 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 용어의 기원은 프리랜서 기자이자 작가인 세바스찬 융거가 1991년 미국 동부 해안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쓴 베스트셀러 ‘퍼펙트 스톰’에서 출발했다.융거는 당시 허리케인 그레이스와 다른 두 개의 기상전선이 충돌해 유례없는 대형 폭풍이 만들어진 걸 보고 ‘완전한 폭풍’이라 이름지었다. 원래 기상용어인 퍼펙트 스톰은 2008년 미국 글로벌 금융위기로 달러가치 하락과 유가 및 국제 곡물가격 급등에 물가 상승 등이 겹쳐지면서 경제용어로 진화했다.최근 세계 경제에 ‘퍼펙트 스톰’이 닥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의 전력난 가중, 유가 등 원자재 가격 급등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박,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각국의 초저금리와 양적 완화 정책에 따른 부채 급증과 부실 확대 우려 등이 커졌기 때문이다.중국의 전력난은 반도체, 자동차 부품, 스마트폰 부품 등의 글로벌 공급망을 얼어붙게 하고 있다. 중국 산시(山西)성에서 발생한 폭우와 산사태로 탄광의 석탄 생산이 중단되고, 인도의 전력난 우려까지 가세했다. 국제 유가 역시 계속 오르고 있어 세계 경제의 불안을 키우고 있다. 원자재와 에너지발 물가 상승에 따른 생산과 소비 위축은 코로나19 사태 장기화까지 더해져 경기불황으로 이어지고 있다.한국도 대외 환경 악화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 국제 유가 상승은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국내외 증시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와 함께 약세고, 원화 가격도 약세다. 퍼펙트 스톰에 대비한 대책마련에 힘써야 할 때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10-13

옹이

오낙률시인·국악인 나무에 생겨난 상처의 흔적을 옹이라 하지만 인간에게도 옹이가 있다. 육신이나 마음에 남은 상처는 한번 생기고 나면 옹이처럼 돼 버리며,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옹이 몇쯤은 지니며 산다.무언가의 떠남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며 세월이 지나면 잊어질 것을 기대하지만, 사실 그 상처는 옹이가 되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살면서 외부로부터 상처받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어쩌면 상처받지 않고 살다 가는 인생, 그것이 삶의 목표일지도 모른다.어느 날 산책길에서 재선충에 당했는지 푸석푸석하게 썩어가는 아름드리 소나무를 보았다. 이미 푸석하게 썩어서 흙이 다 되어 가는데도 그 소나무 마디마디에 있는 옹이들은 썩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백년은 족히 살았을 저 소나무가 나무꾼들에 의해 가지가 잘려나갈 때 얼마나 아팠으면,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해 상처부위를 호호 불고 살았으면 저렇게 단단히 옹이 져서 아직도 썩지 못하고 있는 걸까?사실 소나무의 옹이란 것은, 소나무가 자라는 과정에서 상처가 나거나 가지가 부러졌을 때 소나무 자체의 치유본능에 의하여 상처 난 자리에 송진이 몰리게 되고, 그렇게 몰려든 송진이 상처부위를 도포하듯 감싸서 그 부위가 마치 송진에 절여진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상처부위가 송진덩어리처럼 돼있기 때문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다 썩어 가도록 옹이부분은 썩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살아있는 소나무의 송진은 상처가 발생하지 않으면 절대로 한곳에 모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들의 민족성 같다.이를테면 아주 미미한 농도로 가지와 이파리에까지 분포하다가 어느 한 부위에 상처가 생기면 일제히 모여들어 상처치유에 나서곤 한다. 상처가 크면 클수록 더 많이 모여든다. 그래서 그 부위는 예전보다 더 단단하게 옹이가 되고 오래도록 썩지 않는 부위가 되는 것이다.가끔, 사람들이 자주 찾는 산사 주변에 아름드리가 넘는 소나무의 허리춤에서 수도 없이 도끼질을 당한 흉물스러운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는 이러한 소나무의 특성을 이용해서 일제가 군사용 송진을 수탈해간 흔적인데 그 소나무들도 언젠가는 죽어서 썩을 때 그 상처부위만 옹이로 남아서 두고두고 수탈자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하물며 소나무에 생긴 옹이도 그러할진대, 사람에게 생긴 옹이야 더 말해 무엇할까.돈 몇 푼 쥐어주며 그것으로 옹이를 지워 달라 하고 정부와 정부가 합의했다고 그 상처 잊어 달란다. 머지않은 세월, 위안부 피해를 입으신 할머니들이 모두 다 돌아가신다 해도, 절대로 잊지 못하고 우리 민족의 상처로 남게 될 옹이, 그 할머니들의 영혼에, 또 그 자손과 민족의 자존심에 생긴 커다란 옹이를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싶다.불에 태워도 시커먼 연기만 내 뿜으며 쉬 지워지지 않을 민족의 옹이를 진정 어찌해야 좋을까 싶다.

2021-10-12

‘국가지정 명승’ 내연산 폭포의 위상

박창원​​​​​​​수필가 지난 8월 24일, 문화재청은 포항시 북구 송라면에 있는 자연유산 ‘포항 내연산 폭포’를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 예고했다. 늦은 감이 들지만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내연산은 그 명성이나 가치에 비해 평가절하되어 왔다. 고찰 보경사를 품고 있는 내연산은 1983년 당시 영일군에 의해 보경사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1995년 포항시와 영일군이 행정통합을 하여 포항시가 된 후에도 ‘보경사군립공원’이란 이름을 계속 써 오고 있다.내연산은 경북 내륙에 뿌리를 둔 산맥이 동해안으로 한 줄기를 뻗어 형성된 산으로 풍화에 강한 화산암 기반에 깎아지른 절벽과 깊게 패인 계곡이 발달돼 있다. 그러다보니 이곳에는 침식지형의 폭포와 폭포수 바로 밑의 웅덩이인 용소(龍沼)가 많아졌고, 열두 폭포를 가진 명산이 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 등장하는 내연산은 현재의 연산폭포, 관음폭포, 잠룡폭포 일대를 일컫는 명칭인 삼용추(三龍湫),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지만 양손으로 밀면 꿈쩍도 않는다는 기이한 바위인 삼동석(三動石)으로 일찍이 유명세를 탔다.조선 선비들이 내연산을 명승지로 인식한 것은 대략 16세기부터이다. 1587년에 내연산을 유람한 울진의 선비 황여일(黃汝一)은 유내영산록(遊內迎山錄)에서 “산을 잘 논하는 자는 (내연산을) 소금강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때 벌써 소금강이란 이름이 등장한다. 서사원(徐思遠)은 1603년에 쓴 동유일록(東遊日錄)에서 “만 길 하얀 절벽이 좌우에 옹위하며 서 있고, 천 척 높이 폭포수가 날아 곧장 떨어져 내렸다.(중략) 사다리로 올라보니 선계에 앉은 듯하여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고 적었다. 정시한(鄭時翰)이 17세기말에 전국의 산천을 유람하여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책인 산중일기(山中日記)에 내연산 탐승 기록이 나온다. 이 글에서 그는 삼용추 일대의 모습을 보고 “금강산에도 없는 것이었다.”고 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림으로써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한 사람은 진경산수화의 거장 정선(鄭敾)이다. 정선은 1733년부터 2년 간 이곳을 관할하는 청하고을의 현감을 지내는 동안 내연삼용추(內延三龍湫) 등 내연산폭포를 소재로 4점의 그림을 그려 남겼다. 그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내연산 폭포를 보기 위해 찾았고, 17부터 19세기까지 400여 명의 명사들이 내연산 폭포 주변에 탐승 기념으로 이름을 새겨 남겼다. 그것은 현재 내연산의 인문학적 자산이 되고 있다.지금 우리가 국가 명승으로 그 위상이 높아진 내연산 폭포를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 많다. 12폭포 탐방로는 최근 3년 사이 잦은 태풍과 폭우로 훼손된 채 방치돼 있어 정비가 시급하다. 또한 자연유산으로서, 인문유산으로서 관광객들에게 친절하게 다가설 수 있도록 안내판도 보완해야 한다. 보경사와 12폭포를 중심으로 한 수많은 문화재와 자연경관, 인문학적 자원을 가진 내연산은 사실 도립공원 급이다. 그러니 차제에 도립공원으로 격상시키는 방안을 검토해 볼 만하다.

2021-10-12

우리들의 오징어게임

‘오징어게임’이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모든 국가에서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다. 외국인들은 딱지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구슬치기, 달고나 뽑기 등 한국의 골목 놀이에 열광한다. 프랑스 파리에 오픈한 오징어 게임 체험관에는 드라마 속 놀이들을 직접 해보려는 파리지앵들이 긴 줄을 서기도 했다. 거액의 상금이 걸린 살인 게임이라는 설정이 긴장감을 유발하면서 시청자들을 몰입시킨다. 독특한 의상, 기묘한 화면의 구도와 색감이 청년 세대의 트렌드를 반영한 것도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무엇보다 빈부격차, 양극화 등 세계 공통의 시대적 요소를 담아낸 것이 주요했다. 특히 젊은 세대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데, 청년들은 드라마 속 캐릭터들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성기훈, 조상우, 강새벽, 알리, 지영 등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생의 벼랑 끝에 몰려 더는 갈 데가 없는 이들이다. 게임에서 탈락하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목숨을 건 데스매치에 참가한다. 현실에서의 삶이 더 지옥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국 서로 죽고 죽이는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이 사람도 살아야 하고, 저 사람도 살아야 한다. 꼭 살아서 상금을 차지해야 할 각자의 사정이 있다. 하지만 단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다. 게임을 거듭할수록 생존자는 줄어들고 탈락자의 목숨 값인 상금은 오른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것은 물리적 힘, 두뇌 회전 속도, 행운과 불운의 차이지만, 현실의 지옥 대신 차라리 목숨을 걸고 인생 역전을 노리는 이들의 절박함만큼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가장 역겨운 장면은 깡패 덕수와 한미녀의 화장실 정사 신도 아니고, 자신을 따르던 외국인 노동자 알리를 속여 죽음에 이르게 한 상우의 야비함도 아니다. ‘VIP’로 불리는 세계 각국의 부자들이 동물 가면을 쓴 채 마치 경마를 즐기듯 가난한 사람들의 살인 게임을 관람하던 대목이다. 시청자들은 그제야 ‘오징어게임’이 사람을 체스마로 삼은 부자들의 유희였음을 알고 씁쓸함을 느낀다. 사채업자에게 신체 포기각서를 써주고 어머니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게임에 참가한 456번, 외국인 노동자로 고국의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199번, 북한에 있는 엄마를 데려오고, 보육원에 맡긴 동생과 함께 지낼 방 한 칸을 얻어야 하는 67번… 이 모든 ‘사람’의 간절함이 VIP들에게는 그저 벌레들의 우스꽝스런 몸부림으로 보일 뿐이다. 라운지에서 게임을 내려다보는 VIP의 시선으로 화면이 전환될 때, 시청자들은 마치 자신의 삶이 농락당하는 것 같은 당사자성을 감각하게 된다.대장동 개발 비리에 수많은 공직자와 여야 정치인들이 연루되었다. 국민의힘 곽상도 전 의원의 아들은 화천대유로부터 50억 원의 퇴직금을 받았고,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을 수사했던 박영수 전 특검도 특혜 의혹에 휩싸여 있다. 국민들의 박탈감과 분노가 극에 달한 가운데 문재인 정부는 전세자금대출과 신용대출을 규제하면서 무주택 실수요자들의 주거 안정 기회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집값을 올려놔 내 집 마련은 꿈도 못 꾸게 해놓고, 전세를 장려하더니 막상 전세대출을 막아버린 것이다. 정부가 가계부채를 줄이겠다며 대출을 틀어쥐는 동안 33세의 한 중국인이 89억 원짜리 도곡동 타워팰리스 펜트하우스를 전액 은행 대출로 매입한 사실이 알려져 국민들을 허탈하게 했다. 한편 내년 1월부터 암호화폐 과세가 시행되는데, 주식에 비하면 갈취라 할 만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 투자자 보호는 하지 않고 세금만 걷겠다는 정부 방침에 2030 투자자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 차버리는 기성세대의 행패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금요일 저녁, 차가운 가을비가 내린다. 다음 문장을 골똘히 생각하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배달대행 라이더 어플에서 피크타임이라며 높은 단가에 배달하라고 부추긴다. 원고도 쓰고 강의 준비도 해야 하는데…. 빗길 운전은 위험하다. 하지만 단가가 높다. 고민을 거듭하다 한 5만원이라도 벌고 오자며 우비를 챙겨 입고 스쿠터에 시동을 걸었다. 몇 건의 배달을 마치고 집에 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이번 판에선 살아남았지만 다음 판에선 죽을 수도 있다.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빗길에서,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공장에서, 거리두기로 파리만 날리는 식당에서 우리들의 오징어게임은 계속 된다. 한국사회의 VIP인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들은 저 높은 곳에서 가면을 쓴 채 낮은 데서 벌어지는 비참한 생계의 분투를 웃으며 지켜볼 것이고, 우리끼리 죽고 죽이게 할 것이다.

2021-10-12

루저들의 참혹한 놀이터

오징어게임 열풍이 한창이다.‘오징어게임’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로,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생존 게임에 참석하게 된 기훈(이정재 분)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벼랑 끝에 몰린 삶을 사는 기훈은 상금에 혹하여 게임에 참석하게 되고, 이는 곧 목숨이 걸린 기이한 생존 게임으로 이어진다.게임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설탕 뽑기, 줄다리기와 구슬치기, 징검다리 건너기 등 어릴 적 동심을 떠올리게 하는 단순 게임으로 구성되어 있다.하지만 여기서 반전은 게임에 탈락하는 순간 가차 없이 게임 관리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오징어게임은 국내에서도 뜨거운 인기를 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세계 90개 국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최근엔 미국 인기 토크쇼인 ‘더 투나잇 쇼 스타링 지미 팰런’에서도 오징어게임 출연진의 인터뷰가 진행될 정도였으니 이전에는 쉽게 보지 못했던 실로 대단한 인기다.인기를 몸소 체감했던 건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오징어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는 것. 해외 유명 먹방 유튜버들 또한 달고나 먹방을 진행하며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유는 뭘까. 이야기는 어느 사회에서나 만연한 사회 계층과 빈부 격차 문제를 한 회도 빠짐없이 끈질기게 담아내고 있다.구조조정 후 이혼을 하게 된 기훈은 빚에 쫓기는 동시에 돈 때문에 치료를 포기한 어머니를 잃기도 한다. 돈의 부재로 극단의 벼랑에 몰린 기훈은 온갖 소외와 부당함으로 괴로움을 겪는 인물이며 한국 사회의 소외 계층 시선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도 한다.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을 단순 놀이가 생존 게임으로 이어진 점도 흥미로운 포인트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설탕 뽑기 등 외국인들의 시각에선 처음 보는 놀이이기에 새로울 것이며, 단순하고 명쾌한 놀이는 흥미를 벗어나 죽음으로 곧장 이어지는 신선함도 담고 있다.게임 플레이 또한 플레이어 간 공평함을 기준으로 정해놓았지만 점차 온갖 실수와 꼼수로 관문을 통과한다. 게임 주최 측 또한 이를 암묵적 허용하며 즐긴다.이는 한국 사회의 경쟁과 생존의 현실을 담아낸 것은 물론, 선과 악이 긴밀히 섞인 캐릭터들이 연달아 등장하며 흥미를 자극한다.오징어게임을 시청하는 이들은 드라마 내 대사를 바탕으로 밈을 형성하고 있다.실시간 SNS으로 글과 영상으로 패러디되고 있으며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전 세계적인 유행의 흐름을 보이고 있다,감독은 루저들끼리 싸우고 그 루저들이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다룬 것이라 밝히며 이어 현실에 게임을 돌파하는 멋진 히어로는 없는 것이라 말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순수와 선으로 이루어진 100% 인간상은 없다는 것이다.그래선지 기훈 또한 모든 관문을 평이하게 통과하지 않는다. 선과 악 사이에서 몸 붙이며 순수와 잔혹 사이를 아슬아슬 넘나든다.어린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도 엄연히 승과 패가 난무하는 장소다. 제일 마지막인 오징어게임도 그렇지 않은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선 안에서 게임이 진행되며, 돌진하는 이는 막는 이를 몸으로 밀치며 일정 장소에 도달해야 한다. 막는 이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돌진하는 이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한다.이 단순하고도 거친 게임에서 승리하는 이는 일정한 성취감을, 패배하는 이에겐 슬픔과 당혹감, 그리고 선망과 두려움 같은 얼굴빛이 읽힌다. 이러한 상황은 어딘가 늘 불편하다.경쟁 사회에서 한 두어 발자국 물러난 채로 관조하고 시니컬해지는 것도 마냥 옳다는 건 아니다. 이 모든 게 인간의 도덕성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인 시스템 문제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누군가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전형적인 한국 드라마라 말하기도 하지만, 난 충분히 파장을 일으킬 만큼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9시간 내내 시선을 곧잘 붙들어 놨으니까.세계인들이 한국의 콘텐츠를 소비하고 주목하여 K-붐을 일으키는 것 또한 기쁜 일이다.미국 CNN 방송 홈페이지에도 오징어게임이 한국어로 소개되고, 한국어로 진행한 영상도 볼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흐름임은 확실하다.

2021-10-12

메르켈리즘

일반적으로 정치인 이름에 이즘(ism)을 붙이면 그의 정책이나 정신을 가르키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조금 다르다. 메르켈 이름에 붙인 메르켈리즘이란 권력을 과시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포용하면서도 힘을 가진 정책을 추진하는 그녀의 리더십을 가르키는 말이다.메르켈른(merkeln)이란 말도 있다. 메르켈스럽다는 뜻이다. 조용하고 신중하면서도 유연함과 강인함을 가진 메르켈 총리의 스타일을 이르는 용어다. 강경한 정책을 휘둘러 철의 여인으로 불리던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와는 대조되는 지도자 스타일이다.메르켈 총리에게는 숱한 별명이 따라다닌다. 독일 최초의 여성총리, 가장 젊은 나이에 집권한 총리, 헬무트 콜을 잇는 최장수 총리, 포브스 선정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등의 수식어다. 2005년 총리에 올라 16년간 총리직을 수행했으나 지금도 그녀는 80%의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2008년 경제위기나 유로존 위기, 최근의 코로나19 대유행에서 보여준 그녀의 리더십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준 지지율이다. 그녀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국가가 번영을 누리고 국민 대다수가 비교적 좋은 삶을 누린 결과라 보면 될 것 같다.최근 퇴임을 앞둔 메르켈 총리가 이스라엘 홀로코스트를 방문해 또한번 세계의 화제가 됐다. 독일의 책임과 반성을 뜻하는 그녀의 이스라엘 방문이 벌써 8번째다. 퇴임을 앞둔 지도자로서 다시 한번 반성의 시간을 가지겠다는 그녀의 폭넓은 아량과 대범함에 세계는 존경의 눈으로 바라본다. 메르켈 총리가 떠난 자리에 누가 올지 독일인도 관심이라 한다. 지도자를 잘 뽑는다는 것은 국가나 국민에게 크나큰 행복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대목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1-10-12

대선과 정치인

김규종 경북대 교수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2022년 3월 9일 치러지는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후보를 선출하느라 부산하다. 일찍이 공자는 정치는 발라야 한다고 설파했다.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정자정야(政者正也)’가 그것이다.노나라 재상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가 대답한다.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선생이 백성을 올바르게 이끈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습니까.” 2천500년 전 공자의 말로써,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단순명쾌한 이치를 드러낸 것이다.정치가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통치행위이기에 정치인이 정도(正道)를 걸어야 함은 자명하다. 위정자가 정도를 걷는다면 그를 따르는 국민 역시 올바른 길을 걷게 된다. 따라서 정치가에게 필요한 첫 번째 덕목은 바른 인간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바르지 않고 거짓되며 사특한 사람은 정치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그런데 요즘 대선정국에서 언론에 노출되는 예비후보들을 볼라치면 낯이 뜨거워진다. 비리와 부정과 의혹과 막말로 얼룩진 후보가 한둘이 아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그런 자들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이다. 왜 이런가?! 언론이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확고한 반증이다. 언론이 자신에게 주어진 공론장을 통해 인물과 정책을 전혀 검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언론은 공정과 신속, 정확을 바탕으로 여론을 형성하는 공적 기구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구독자 숫자에 함몰되어 공정과 정확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 결과 정체가 모호한 수많은 1인 유튜버들과 혹세무민하는 인사들만 득세한 꼴이 되고 말았다. 언론이 오히려 그들에 편승하여 조회 숫자를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본연의 사명을 망각해버린 꼴이다.2020년 기준 대한민국은 국민총생산 세계 10위, 국방력 세계 6위의 경제-군사 강국이다. 여기에 문화의 힘까지 보태져 선진국 대열에 당당하게 들어서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선진국 모임인 G7 정상회담에 작년과 올해 연이어 초대받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크고 중요하며 대단한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데 나온 인물들의 면면은 적잖게 아쉽다.미국과 중국의 사활을 건 패권 경쟁, 일본의 지속적인 우경화, 경색된 남북한 관계처럼 외교·안보 분야 역시 녹록지 않은 도전이다. 예비후보 가운데 외교와 안보 분야에서 내공을 쌓은 사람은 드물다. 세계 곳곳에서 한류 바람이 드세게 부는데, 정작 외교도 모르고, 경험도 없는 자들이 득세하는 형국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지금 국민은 특정 인물과 정당에 쏠려 있다. 확증편향에 기댄 집단적 선택이 강하다. 하지만 우리 국민의 혜안은 늘 놀라웠다. 집단지성을 발휘하여 민족과 국가의 명운을 짊어질 지도자를 고르리라 믿는다.이제 대한민국은 새우가 아니라, 최소한 돌고래 이상의 힘과 경륜을 갖춘 나라다. 그런 나라의 격에 맞는 대통령을 뽑는 것은 우리 모두의 시대적 과제다.

2021-10-12

문무왕이 시작해 신문왕이 완성한 사찰 감은사

불교는 고대 삼국이 공통으로 받아들인 종교이며, 신라시대 경주지역 최초의 사찰은 흥륜사(興輪寺)로 554년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륜사를 시작으로 경주지역에는 많은 사찰이 건립되는데 초기에는 주로 평지를 중심으로 세워지다 점차 구릉부로 입지가 변화되어가는 것으로 파악된다.그러나 오늘 이야기의 중심인 감은사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이 대부분 평지나 구릉에 세워진 것과는 달리 바다에 인접해 창건된 흔치 않은 사찰이다.감은사(感恩寺)가 바다 근처에 위치한 것은 사찰의 창건이유와 관련된다. 동해안에 위치한 감은사는 문무왕이 창건을 시작하였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그 뜻을 이어받은 신문왕이 682년 완성하였다. 그 뜻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동해안에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불력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한 바람에서 시작된 호국의 이념에 매우 강하게 투영된 사찰임과 동시에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한 마음이 함께 담긴 사찰이기도 하다.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감은사에서 직선거리로 약 1.4㎞에는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낼 것”이라는 유언에 따른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이 위치하고 신문왕이 감포 앞바다에 있는 문무대왕릉을 바라보고 그리워했다는 이견대(利見臺)도 인접하여 위치한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감은사 창건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문무왕이 창건하고 신문왕이 완성했다. 그렇다면 그 뜻은 언제까지 이어졌을까? 감은사 창건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지만 폐사된 시점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그 시기를 짐작해 볼 수는 있겠다.감은사에 대한 조사는 195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차적으로 발굴한 바 있고, 이후 전체 가람구조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정비하기 위해 1979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추가조사를 실시하였다.그런데 당시 서회랑터 조사를 위한 트렌치에서 예상하지 못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바로 청동반자(靑銅飯子)가 그것인데 글자만 보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무슨 용도인지 금방 와 닿지 않는다.청동반자는 사찰에서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든 일종의 북으로 금구(禁鼓) 또는 금고(金鼓)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감은사에서는 의도적으로 매납 된 반자 위에 청동풍탁이 함께 출토되었다. 청동반자는 지름 32.2㎝로 표면에 연꽃무늬가 양각되어 있고 테두리는 당초무늬를 돌렸는데 무엇보다도 뒷면 구연부 둘레에 명문 77자가 음각되어 있었다.특히 “至正 11년”이라는 명문은 고려말기 공민왕 즉위년인 1351년으로 이를 통해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사찰이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또한, 명문의 내용 중에는 반자의 제작 동기가 해적이 감은사의 반자, 소종, 금구 등을 훔쳐갔기 때문에 재차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어 당시 고려 말에 동해안에 해적이 시시때때로 출몰하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감은사는 강당지-금당지-중문지가 일직선을 이루고 금당지 앞에 삼층의 동·서 두 탑이 서 있는 쌍탑일금당식(雙塔一金堂式)임이 밝혀졌다. 특히 석탑은 높이 13.4m로 1959년 석탑 보수를 위한 해체시 서쪽 탑 3층에서 청동사리장치가 확인되었고, 1996년 동탑 해체시에는 금동사리함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정여선학예연구사 감은사 건물지 구조 중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금당의 구조이다. 금당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하부는 지하구조를 이루고 있다. 구조는 방형의 석재를 일정한 간격으로 놓고 이 석재와 석재 사이에 남북방향으로 길다란 장대석을 걸쳐 끼웠다. 그리고 장대석 위에는 다시 동서방향으로 길게 장대석을 직교하도록 잇대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마치 마루바닥처럼 돌바닥을 깔아 초석 아래에 약 60㎝의 지하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이 시설은 당시 일반적인 금당지의 구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로 ‘感恩寺 侍中記(감은사 시중기)’에 보이는 “문무왕이… 금당 밑의 섬돌을 파고 동쪽으로 향하도록 구멍을 내었으니 이 구멍으로 용이 금당으로 들어와 서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2021-10-11

가을, 산더미처럼 쌓인 책의 바닷속에서 갈곳을 잃다

어떤 책은 꼭 필요해서, 또 어떤 책은 꼭 필요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필요할 것 같아서, 또 어떤 책은 꼭 필요했는데 어디다 두었는지 몰라서 한두 권씩 사들이는 책들이 순식간에 산을 이루게 된다. 집이든 연구실이든 책꽂이를 넘쳐 바닥에 쌓이기 시작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다.아마도 책을 읽는 것을 그다지 자신의 취미로 삼지 않으시는 분이라도 이것만큼은 공감하실지 모른다. 별 대단한 생각 없이 읽으려고,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아이들을 위해 조금씩 사둔 책들은 어느새 집안 여기 저기 쌓인다. 한번 불어나기 시작한 책들은 단호한 마음을 먹고 정리하지 않으면 절대로 줄어들지 않으며, 자기 증식한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야말로 대략 난감한 혼란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아마도 무언가 수집을 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잘 이해하시리라. 무언가 모으는 데 들이는 시간은 비교적 잠깐이지만, 이를 정리하는 시간은 무한대에 가깝게 소모된다. “오늘만큼은 꼭 이 산더미 같은 책들을 정리해버려야겠다”고 굳은 마음을 먹고, 그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보면, 정리는커녕 고작 책 몇 권을 버리고 난 뒤 빈곳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새로운 책들을 주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무언가를 모아 내 집에 들여 어떤 공간에 언제든 꺼내볼 수 있도록 배열하여 두는, 수집이라는 행위가 한편으로는 자기가 가진 취향이나 기호, 감식안을 드러내는, 즉 사회 속에 자기 정체성의 확인과 과시라는 행위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분명하다. 부르주아의 지적 취미에 해당했던 서적에 대한 수집은 이제는 한물간 것이지만, 최근 젊은 세대들에게서 불고 있다는 신기한 바이닐 레코드(LP) 붐도 그렇지만, 어떤 것이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모으고 보여주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행위이다.게다가 책을 모은다는 것은 어떤가, 책이란 물성(物性)을 가진 것이기도 하면서, 기억 그자체이기도 하지 않은가.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이 파리의 시인 보들레르에게서 발견했던 ‘산책자’라는 것은 결국 ‘수집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다만 그 수집가는 과시만을 위해 자신의 서재에 책을 모아두는 수집가가 아니라 자신이 거닐던 파리라는 도시의 파사주들 사이에서 어딘가 다른 시대로 연결되는 선들을 발견해서 기억들을 그러모아 새로운 시로 써냈던 이들이었다. 기억의 수집가였다고 생각해도 좋으리라.미술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근원 김용준(1904~1967)은 그의 수필들을 담아놓은 책 ‘근원수필(近園隨筆·1948)’속에서 ‘골동(骨董)’을 완상하는 행위에 대해, 그것이 단지 좋은 옛 물건을 소유하는 의미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흘러오는 옛 형제의 피를 느끼고 그들의 감각이 어느 모양으로 나타났는지가 궁금”해서라는 의미를 덧붙이고 있다. 이 글이야말로 ‘골동’을 수집하는 행위가 단지 귀중하고 값나가는 물건의 수집이 아니라, 머나먼 기억을 수집하는 행위임을 알려주는 의미가 담겨 있다.마찬가지로, 한국미의 순례자이자, 찬미자였던 혜곡 최순우(1916~1974)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1992)’에서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그것의 비색이나 곡선, 상감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좀 더 근원적인 ‘빛깔’이 몸에 배어드는 마음을 지적한다. 그 아름다움에는 분명 형태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어떤 교감이 존재하고 있으리라.아차, 책들을 꺼내 정리하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책을 정리해 버리기는커녕, 새로운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이제 갓 들어선 가을의 오후가 지나가 버린다. /홍익대 교수

2021-10-11

詩가 흐르는 古宅에서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 시월 초순 저녁답, 고즈넉한 고택마당이 부산해졌다. 한쪽에서는 전(煎)을 부치거나 어묵 끓이는 냄새가 구수하게 진동하고, 다른 편에서는 야외무대에 현수막을 설치하며 음향시설을 준비하는 등 무슨 잔치라도 벌이려는 듯 하나씩 구색을 갖춰가는 모양새가 바쁘기만 하다. 이쪽저쪽 두리번거리며 일손을 돕던 몇몇 사람들은 막걸리를 몇 잔씩 들이켜고는 김이 설설 나는 정구지전을 손으로 쭉쭉 찢어 안주삼아 먹기도 하는 등 벌써부터 분위기에 들뜨는 듯했다.이윽고 어둠이 내리고 풀벌레 합창의 선율 속에 설장고 가락의 들썩임으로 오프닝 되면서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됐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아슴하게 찾아 들고 마종기의 ‘우화의 강’이 담담하게 흐르는가 하면, 코로나19의 딜레마에 고정희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가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정호승의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시의 울림이 역경의 고비(苦悲)를 이겨내는 용기와 희망의 북돋음처럼 전해졌다. 거기에 그윽한 대금소리가 심금을 파고드는 듯 구성진 시조창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들숨과 날숨으로 경쾌하게 여울지는 하모니카 멜로디 ‘숨어 우는 바람 소리’가 고택의 마당을 휘감는 듯했다.이러한 레퍼토리는 경북문화재단 지역문화활성화 지원사업으로 진행된 코로나 극복 기원 힐링 콘서트로, 포항지역의 박기영 시낭송가가 기획·연출한 ‘시(詩)와 음악(音樂)이 흐르는 고택(古宅)을 거닐다’의 부분적인 행사 정경이다. 이 행사에는 (사)시 읽는 문화와 포항시낭송회의 시낭송가와 초청 게스트, 주민 등이 참여해 세계문화유산인 경주시 양동마을 만호고택에서 소박하면서도 다채롭게 열렸다. 넓직한 마당 한 켠에는 국화와 쑥부쟁이가 소담스레 피어 반기고 옛적의 흐릿한 등잔불 마냥 정겨운 불빛이 얼비치는 고택을 배경삼아 시를 읊고 시조창을 하며 대금과 하모니카 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은, 정말이지 고색창연함 속에 설레임으로 즐기는 이색적인 풍류가 아닐 수 없었다.더욱이 시낭송에 어울리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맵시나 남·여고생 교복 또는 기타 고상한 차림 등으로 저마다의 표정과 몸짓을 시의 행간에 담아, 흐르는 배경음에 매끄러우면서도 차분하고 애절하고 청순가련하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시의 감칠맛을 한껏 더하며 시 나눔의 마당을 고조시켰다. 그 즈음 툇마루 밑의 아궁이에서 지피는 군불로 몽실몽실 피어나는 연기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고택 곳곳에 운무처럼 스며들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까지 했다.그렇게 보낸 두 시간여 시낭송과 음률의 흥취 속에는 별빛도 내려앉고 밤이슬도 내려앉아 모두가 촉촉함에 젖어드는 감미로운 어울림의 마당이었다. 양동마을 이장까지 시종 참관하여 깊은 관심 표명과 문화적인 발전방향의 덕담까지 해줘서 눈길을 끌었다. 이렇듯 문화는 생활 속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함께 즐기고 누리며 만들어갈 때 활성화되는 것이리라.

2021-10-11

17÷3

조현태​​​​​​​수필가 낙타 17마리를 전 재산으로 가진 노인이 있었다. 그는 슬하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고 유복하게 살았다. 어느 날부터 자신의 수한이 차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자 자녀들에게 재산분배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깔끔한 방법보다는 자식들이 우애를 잘 지키면서도 흡족하게 분배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드디어 심사숙고하지 않으면 쉽사리 해결하기 어려운 방법을 고안해냈다. 노인은 자식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맏아들에게 낙타 수의 1/2을, 차남은 1/3을, 그리고 딸은 1/9을 차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했다.자식들이 함께 논의했다. 장남은 8마리를 가지자니 남는 1마리에 자신의 욕심이 드러날 것 같았고, 9마리를 가지려니 동생들의 욕심이 끼어들 것 같았다. 차남도 5마리를 가진다면 두 마리가 남는다. 형과 동생에게 한 마리씩 더 주어도 되겠으나 1/2과 1/9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6마리 가진다는 것도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딸도 마찬가지로 한 마리는 억울하고 두 마리는 오빠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머리를 맞대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버지의 계산법에 정직하게 따를 수가 없었다. 고민 고민 끝에 평소에 친분이 두텁던 아버지 친구 분을 찾아가 상의해 보자고 했다. 여차저차 하니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유산을 나눌 수 있도록 묘안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 친구 분이 이들의 자초지종을 다 듣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내가 낙타 한 마리를 너희들에게 주겠다. 한 마리 더 늘어난 18마리라면 너희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상속받을 수 있을게다.”그 말씀을 듣고 보니 세 명 모두 아버지의 계산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장남은 18/2니까 9마리, 차남은 18/3이니까 6마리, 그리고 딸은 18/9이므로 2마리씩 가지는 계산이다. 이렇게 명쾌한 해답을 얻게 된 것은 낙타 한 마리를 더 보탠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배분법대로 준행하고도 1마리가 남는다. 아버지 친구께서 보태준 낙타를 돌려주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출처:과목별학습백과 퀴즈초등)집으로 돌아온 자녀들이 아버지 앞에서 그 방법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노인이 자식들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이 세상사는 방법을 내 친구처럼 하면서 살기를 바란다. 자신의 것을 공짜로 내주어도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공평할 수 있도록 말이다.’ 당연히 그 자녀들은 아버지 유언대로 훌륭한 공무원이 되어 많은 칭송을 받으며 살았다.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러한 분위기로 흘러가면 좋겠다. 남의 것을 탐하기보다, 내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으면 누구를 탓할 것도 없게 된다. 내가 먼저 더 유리한 조건의 재물에 욕심내는 것은 9:7:2를 주장하게 되고 서로 부당하다고 논쟁할 것이 뻔하다. 보태진 가상의 숫자 하나가 완벽한 배분을 하게 했고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유익한 여유감이 아닐까 한다.노인이 고민했던 내용을 친구와 상의하였고 친구가 노인의 자녀에게 가르쳐준 방법도 노인이 고안한 것이었다면 현 정치에 적용할 부분은 없을까 싶다.

2021-10-11

그린플레이션(greenflation)

그린플레이션은 친환경을 뜻하는 ‘green’과 물가상승을 뜻하는 ‘inflation’의 합성어로, 친환경정책으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고, 물가가 올라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현상을 뜻한다.최근 정부가‘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40%로 대폭 상향하면서 ‘그린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각국의 기준연도에서 한국의 연평균 감축률은 4.17%로, 영국과 미국의 2.81%나 유럽연합(EU)의 1.98%보다도 높다. 특히 배출 비중이 높은 전환(발전) 부문의 온실가스는 44.4% 줄인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석탄 발전량을 줄이고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확대한다. 에너지원별 2030년 발전 비중을 보면 △원자력 23.9% △석탄 21.8% △액화천연가스(LNG) 19.5% △신재생 30.2% 등으로 제시됐다.이에 따른 막대한 비용 상승과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 재생에너지 설비 비용 등이 더해지며 발전 단가가 가파르게 늘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에 따라 발전사들이 신재생에너지로 만든 전력을 공급해야 하는 비율이 늘어나는 점도 전기료 인상을 부추길 수 있다.정부는 전체 발전량 중 일정 부분을 신재생에너지로 만든 전력으로 채우는 신재생에너지공급의무화제도(RPS) 비율을 2022년 12.5%로 설정했고, 2026년까지 단계적으로 상향해 법정상한인 25%에 이르도록 설계했다. RPS 비율과 비용이 증가할수록 한전의 부담도 커진다. 올해 4분기에 약 8년 만의 전기요금 인상에 이어 내년에도 추가 인상될 수 있다. 전기료 인상은 에너지 다소비 업종의 제조원가 상승으로 이어져 그린플레이션을 불러온다.에너지 위기가 서민의 생활비 상승으로 이어질까 걱정스럽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10-11

한글날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내일은 훈민정음 반포 575주년이 되는 한글날이다. 일제치하인 1926년 조선어연구회는 11월 4일에‘가갸날’을 선포하고 2년 후에는 ‘한글날’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40년에 발견된 ‘훈민정음하례본’에 근거하여 1945년부터는 한글날을 10월 9일로 정하고 훈민정음 반포 500돌이 되는 1946년에 국경일(공휴일)로 지정하였다. 1990년 휴일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하는 바람에 기념일로만 유지하다가, 2005년에 다시 국경일로 격상되고 2013년부터는 공휴일도 회복 되었다.자국의 글자를 만들어 선포한 날을 기념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만든 이유와 사람과 연대를 아는 문자를 가진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언어는 6천800여 종이지만, 문자로 표현이 가능한 언어를 가진 나라는 100개국 정도이다, 그중 자국어를 가진 나라는 28개국이고 고유한 문자는 한글, 한자, 로마자, 아라비아문자, 인도문자, 에티오피아문자 등 6개뿐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은 고유한 말과 문자를 가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인 것이다.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음소문자(音素文字)이자 자질문자다. 문자는 크게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로 나뉘고, 표음문자는 다시 음절문자와 음소문자로 나뉘는데, 한글이 음소문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우수한 것은 자질문자(featural writing system)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음소문자란 글자 하나하나가 하나의 소리를 낸다는 것이고, 자질문자는 자음이나 모음을 나타내는 각각의 글자들이 별개의 독립적인 기호가 아니라 일정하게 연결된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질문자인 한글은 감정 표현을 더 세심하게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졌다.한글의 모음 10개와 자음 14개를 조합해서 표현할 수 있는 소리는 무려 일만 천 개 이상이나 된다. 고작 300개인 일본어와 400개인 중국어(한자)와는 비교가 안 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가 한글이다. 또한 한글은 조합된 문자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제자의 원리만 이해하면 누구나 쉽사리 익힐 수가 있고 쓰기도 쉽다. 유네스코에서도 말은 있되 글자가 없는 소수민족에게 그들의 말을 한글로 쓰도록 함으로써 소수언어의 사멸을 막자는 제안이 있고, 실제로 인도네시아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과 남태평양의 솔로몬제도에서는 한글표기법을 사용하고 있다.한글(훈민정음)은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이 되었고,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도 만들어 매년 시상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한국인들 중에는 한글이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한 문화유산인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요즘 인터넷 등에서 자행되는 한글 파괴현상은 여간 우려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상한 비속어와 은어, 국적불명의 신조어 등으로 우리의 말과 글이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유행과 변화를 통제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교육현장이나 공영방송 등 책임 있는 기관만이라도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고 가꾸려는 성의와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21-10-07

오징어 게임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필자가 어릴 적인 60년대에는 지금같이 오락 기구도 많지 않고 장난감도 많지 않던 가난하던 시절이라 몸으로 때우는 놀이를 많이 했다.골목길에서 친구들 등에 타는 말타기, 술래를 정해서 숨는 다방구, 다리를 들어올려 싸우는 닭싸움, 딱지 치기, 자치기, 팽이돌리기, 여자 아이들은 고무줄 놀이, 공기 놀이 등을 즐겼다. 사실 거의 준비물이 필요하지 않는 놀이들이다. 학교 앞에는 해삼, 멍게를 엄마가 쓰는 핀으로 찍어먹는 장사꾼 옆에는 달고나 장사가 있어 입으로 별모양, 삼각형 모양 등을 잘 발라내면 한 개를 더주곤 하는 놀이도 있었다.최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오징어 게임, 이 두 개의 결정적인 게임을 모티브로 한 ‘오징어게임’이 넷플릭스라는 영화 전문 채널에 소개 되면서 전 세계를 흔들고 있다.‘오징어 게임’ 신드롬이 2주 전 개봉되자 마자 전 세계를 폭풍의 도가니로 넣어가고 있다. 넷플릭스 패트롤 집계에 따르면 ‘오징어 게임’은 ‘TV 프로그램(쇼)’부문에서 압도적인 기록으로 1위를 유지하고 있고 미국, 유럽, 아시아 국가 등 거의 모든 국가에서 인기 1위를 달리고 있다. ‘오징어 게임’은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쇼가 될 것이라고 넷플릭스는 단언하고 있다.필자는 ‘오징어 게임’을 보다가 너무 잔인한 장면을 견디지 못하고 다 보지 못했다. 미국 방송들도 ‘Ultra-violent(도를 넘는 잔인함)’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방송에서는 못 보여 준다고 하면서도 ‘오징어 게임’을 연일 크게 보도하고 있다. 과거에도 ‘헝거 게임’같은 유사한 영화가 있었지만 ‘오징어 게임’의 돌풍에는 미치지 못한다.도대체 ‘오징어 게임’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그건 코로나 사태 이후 겪고 있는 부의 불균형과 관련이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드라마 인물들은 모두 빚을 져서 내몰린 사람들이고 상금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놓아야만 하는 그런 설정이 부의 불균형에 대한 사람들의 카타르시스를 자극했다는 것이다.그런데 또하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드라마에 나오는 게임들이 전 세계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에서는 ‘오징어게임’ 체험관의 줄이 몇 백미터가 된다고 한다.디지털 시대에 온갖 온라인 게임이 난무하고 있는데 아날로그 시대의 게임들이 신선하게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사실, 드라마 중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오징어 게임’ 등은 아무런 준비물이 필요없는 아날로그 시대의 대표적 게임이지만 디지털 게임과는 다른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연기가 재미있다.‘헝거게임’은 공포속에서 떨게 하지만 ‘오징어 게임’은 공포속에서 아날로그 게임이 보여주는 게임의 신선함과 재미를 배우들이 재미있게 선사한다.최근 한류문화의 세계화는 강남스타일, K-팝, 방탄소년단의 인기를 몰아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에 이어 ‘오징어 게임’까지 왔다. 인구 수나 국토면적이 작은 한국이 전 세계 문화를 흔들고 있는 것은 신기할 정도이다.“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도 와 닿는다. 한국 문화의 계속적인 질주를 기대해 본다.

2021-10-07

반려동물 전성시대

지난달 27일 통계청은 처음으로 국내 반려동물 사육가구를 조사해 발표했다. 전체 가구의 15%인 312만9천 가구가 반려동물을 키운다고 했다. 그 가운데 개를 키우는 가구가 77%로 가장 많았고, 고양이도 22%나 됐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연령대는 50∼59세가 가장 많았던 것으로 조사됐다.통계청이 반려동물 조사를 시작한 것은 반려동물 사육가구가 늘어난 데 따른 사회현상을 관측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반려동물의 증가와 달라지는 사회인식도를 반영한 조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3년 전 통계지만 반려동물을 키우며 느낀 점을 조사한 내용이 있어 잠시 소개해 본다. 지금 다시 조사한 데도 내용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반려동물을 키우기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가장 크게 변화된 것에 대해 16세 미만 자녀들의 답변은 첫째가 “생명의 소중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다음이 “외로움이 줄었다”고 대답했다. 반려동물을 둔 부부에게 물었더니 첫번째 답변이 부부간 스트레스가 줄었다고 했다. 다음으로 많은 대답은 부부간의 대화가 늘었다는 것이다. 또 65세 이상 노인들은 반려동물을 키움으로써 외로움을 덜 수 있었고 정서적으로 안정화 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다.반려동물은 표현대로 사람과 더불어 사는 동물이다. 동물이 인간에게 주는 여러 혜택을 존중하며 사람의 장난감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인식한다는 의미다. 물질문명 발달 속에 세상의 민심은 달라져도 동물은 타고난 천성 그대로의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사람마다 동물과 더 친해지려는 것은 아닐까 싶다. 역설적이지만 세상이 각박할수록 반려동물은 전성기를 맞는 셈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1-10-07

CPR(심폐소생술) 알고, 내 소중한 가족 지키자

심학수포항남부소방서장 겨울철(10월∼1월)에는 심장질환, 뇌혈관질환, 고혈압성 질환 등과 같은 순환기계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가 증가한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총 사망자 수는 30만4천947명으로 사망원인통계 작성(1983년) 이래 최대라고 한다.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한해 사망원인 1위는 암, 그다음이 바로 심장질환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지난해 심장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3만2천347명, 뇌혈관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가 2만1천860명에 달하며 두 질환이 전체 사망률의 18%를 차지한다.심혈관 질환의 경우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식은땀·현기증·호흡곤란·통증확산 등의 증상을 보이고, 뇌혈관질환은 한쪽 마비·언어 장애·심한 두통·어지럼증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증상을 안다고 해서 바로 처치할 수 있을까? 순환기계 질환 발생은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가정에서의 발생률이 높기 때문에, 당황해 심폐소생술 처치를 못하고 골든타임을 놓치는 경우가 빈번하다.심폐소생술은 정지된 심장을 대신해 심장과 뇌에 산소가 포함된 피를 공급하는 응급처치로 가슴압박과 인공호흡을 반복하는 것이다. 인공호흡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가슴압박만 시행해도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는 경우, 심정지 환자의 생존율을 2∼3배 증가시키기 때문에 최초 목격자의 초기대응이 중요하다. 심정지 환자가 발생했을 경우, 의식확인, 도움요청(119신고 및 자동심장충격기 요청), 호흡확인, 가슴압박 순으로 구급대원 도착 전까지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면 된다.심폐소생술을 배웠더라도 자신이 없거나 당황스럽다면, 119에 전화를 해서 의료지도를 받을 수도 있다. ‘의료지도’란 적절한 응급의료를 제공하기 위해 의사 혹은 응급의료 전문 의료인이 하는 활동을 말하는데, 위급상황 신고 시 응급처치를 실시간으로 도와주는 제도다. 환자 발생 시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확한 방법으로 시행하는 것도 중요하니 참고하길 바란다.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지 말고,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응급처치 ‘심폐소생술’을 익혀 소중한 생명을 구하자.

2021-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