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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통합당, ‘국민’ 편에 서라

안재휘 논설위원“개념이란 우리가 이것을 실천적으로 검증할 수 있을 경우에만 옳은 것이고, 행동의 결과로 나타낼 수 없으면 무의미하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 창시자인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정의다. 실용주의 정신은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능동적인 실천을 통해 미래를 지향해 가는 하나의 원동력으로서 극대화된다는 논리다. 실용주의란 투철한 ‘현실 인식’과 ‘실천력’, ‘미래비전’을 함께 수반할 때 가치가 있다는 얘기쯤으로 의역될 수 있을 것이다.이틀간의 21대 총선 당선자 워크숍을 마친 미래통합당이 ‘실용정당’을 표방했다. 총선 참패로 최악의 위기 상황을 맞고 있는 통합당은 긴 논란 끝에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기로 하고, 머뭇대던 미래한국당과의 통합도 29일까지 매듭짓는 것으로 결정했다. 주호영 원내대표가 발로 뛰고, 다수의 초재선 당선자들이 힘을 합쳐 밀어준 결과로 해석된다.워크숍이 끝난 뒤 배현진 원내대변인이 발표한 성명에는 중요한 대목이 많다. 우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눈에 띈다. “언제나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해 싸우겠다”는 선언도 시원하게 들린다. “익숙했던 과거와의 결별 선언을 한다. 오직 국민만 있고 국민 눈높이에 맞는 실용 대안 정당을 만들겠다. 대안과 혁신으로 가득한 미래만 있다”는 맹세도 뜻 깊이 들린다.실용주의 창시자 퍼스가 말한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일단 첫 번째 항목인 ‘현실 인식’ 측면에서는 꽤 많은 성찰이 이뤄진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그동안 좀처럼 탈출하지 못했던 ‘꼴통보수 감옥’에서 비로소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든다. 부디 선언문의 약속 조목조목처럼 확 달라지기를 성원한다. 하지만 통합당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리 다사롭지 않다. 형편없이 기울어진 운동장 아래쪽에서 정말 그 모든 걸 실천해낼까 하는 의심도 깊다.실천력을 담보해낼 응집력과 지혜는 튼튼한 기초체력에서 나온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히딩크는 모든 파벌의 넝쿨들부터 한칼에 잘라냈다. 한동안 기술훈련 대신 기초체력을 키우는 고강도 훈련만 시켰다. 경기에 거듭 대패해 ‘오대빵’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그래도 히딩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프로그램대로 밀고 나갔다.월드컵 본선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진가는 드러났고, 전무후무의 ‘4강 신화’를 기어이 이룩해냈다.통합당은 히딩크의 한국축구 월드컵 4강 신화에서 힌트를 찾을 필요가 있다.권력자들끼리만 주고받는 게임의 법칙부터 깨부숴야 한다. 이제 더이상 낡은 ‘권력’ 편에 서면 안 된다. ‘국민’ 편에 서서 국민이 듣고자 하는 목소리로 국민을 설득하는 기초능력부터 키워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공리공론의 늪에서 탈출해야 한다. ‘실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현실 인식’은 실용이 아니다. ‘미래비전’이 없는 ‘실천력’ 또한 실용의 범주 바깥에 있다. 통합당의 미래는 비로소 실험실에 있다.

2020-05-24

도시 기능 재활성화·도시 경쟁력 강화

김학동 예천군수예천은 지금 활기찬 원도심으로 변모하기 위해 지금까지 이색조형물과 6070을 테마로 한 벽화가 있는 예천 맛고을 문화의 거리, 한천 고향의 강, 시가지 주차장 확보, 상가 간판정비, 남산공원 폭포 및 산책로 등 문화와 쉼이 공존하는 도시로 변화를 꾀했다.하지만 도청 신도시로 인구가 몰리면서 예천읍 원도심에는 경기가 위축되고 있어 오랜 역사와 전통 먹거리 등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예천읍을 활기 넘치는 거리, 사람이 찾아오는 곳으로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남겼다.이에 쇠퇴한 구도심을 혁신 거점공간으로 변모를 위해 주차환경 개선을 위한 공영주차장 확보, 예천읍 원도심 일방통행 교통체계 구축 기본구상, 도시재생 뉴딜사업 등 3대 핵심과제로 정하고 도시기능 재활성화와 도시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첫째, 주차환경개선을 위한 공영주차장 확보이다. 부족한 주차공간으로 인해 생활불편이 증가하고 불법 주·정차로 차량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며 교통사고 발생으로 주민 불안이 가중되는 등 군민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부정적 지역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예천읍 시가지 예천교육지원청 인근 외 2개소, 상설시장 주변 3개소 총 6개소 150면 정도를 조성해 주차여건 개선으로 맛고을 문화의 거리 및 전통시장 이용객의 접근성을 높이고 주차난 해소를 위해 예천교육지원청 주변 주차장을 포함한 3개소는 보상 등 진행 중이고 상설시장 주변 주차장 외 2개소는 행정절차를 진행해 추진한다.특히, 지난해 한천길주차장(예천교~동본교 구간)조성을 위해 한천 제방사면에 구조물을 설치해서 주차공간을 만들어 기존 59면이던 주차구역을 164면으로 조성해 예산절감 및 효율화 사례로 2019 시민단체 선정 최우수 지방자치단체 예산효율화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둘째, 예천읍 원도심 일방통행 구축이다. 원도심의 불법주차로 인한 주차난이 가중되고 교통 혼잡이 심해 안전한 보행 여건조성, 주차공간 확보 등 교통환경 개선뿐만 아니라 지역경제 활력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한다.일방통행 구상안은 예천읍 원도심 동서 간선가로축 전구간인 시장로와 효자로 구간(굴머리~한전앞 삼거리) 2개 도로 2.8㎞를 일방통행 도로로 변경해 인도확장 및 주차공간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른 효과는 혼잡구간의 원활한 차량소통과 주차 및 보행 공간을 확대해 교통안전은 물론 가로경관 개선으로 군민 편익을 최대로 하는 사람중심 교통정책의 실현이다.원도심 일방통행체계 기본구상 용역을 추진중이며 향후 교통정책 전문가 토론회, 주민설명회, 관련기관 협의 등 주민의견을 다각적으로 수렴해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 최상의 일방통행 체계를 구축해 나간다.셋째, 원도심 도시재생 뉴딜사업 공모 준비다. 신도시 조성으로 교육여건과 주거환경이 좋은 신도시로 젊은층이 빠져나가면서 상권도 이동하고 예천의 심장이었던 원도심은 활기를 잃고 지역경기가 침체되는 등 공동화현상이 심각한 상황에 처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침체된 원도심의 기능을 되살리고 지역 내 유·무형의 자원을 활용한 특색 있고 경쟁력 있는 도시로 변모하기 위한 도시재생사업을 군정 최우선 과제로 정하고 공모 준비로 국비확보에 전력을 쏟고 있다.도시재생대학을 꾸준히 열어 지역주민의 관심과 자발적 참여 기회를 확대해 나가면서 주민과 행정의 중간에서 도시재생 전반을 지원하는 도시재생지원센터를 운영 중이고 행정협의회가 협업을 통해 사업 연계 및 조정, 결정 등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시재생 활성화계획(안)은 역사·문화 전시관과 도시재생지원센터를 설치하고 남본시장은 진입로 개설과 이용객 쉼터, 농산물 전시·판매시설을 마련하는 한편 상설시장 인근 공공임대상가와 복합공영주차장 등 지역특화 거점시설을 설치하고 구)119안전센터 주변에는 장난감도서관 및 돌봄센터, 문화쉼터 등 부족한 생활SOC 시설을 확충한다는 계획이다.예천군은 원도심 공동화 현상을 극복하고 신도시와 상생 발전할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도시재생 뉴딜사업, 시가지 주차난 해소를 위한 주차장 확보, 일방통행 교통체계 구축 등 지역경기 활성화의 돌파구를 찾아 지속가능한 도시로 발돋움하기 위한 도전은 오늘도 진행형이다.

2020-05-24

내 삶의 밀푀유

사십 년 넘게 일기를 썼다. 매일매일 성경 한 장을 읽고, 한 구절을 기록하고 잠시 기도하는 걸 몇 년째 계속 했다. 오래 쌓은 시간은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지진이 났을 때 무엇을 챙겨서 나가야 하나? 친구는 두 아이의 어릴 적 앨범을 들고 뛰쳐나갈 거라고 했다. 가까운 경주에 경고장처럼 지진이 나고 다음 해 빚쟁이 쳐들어오듯 포항에 큰 지진이 났다. 그 순간에 집에 머물지 않아서 무얼 챙겨야 하나 고민도 필요 없었지만 이제는 친구처럼 나도 대피용 작은 배낭을 챙기기로 하고, 무얼 넣어야 하나 생각했다. 어릴 적 아이들 사진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이니 몇 장 골랐다. 그 다음은 뭘까, 차곡차곡 모아 간직해온 일기장이 떠올랐다.40년 전에 쓴 일기장을 꺼냈다. 표지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꽃바구니를 들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새마을 일기’ 라는 제목이 시대가 언제쯤인지 짐작하게 만든다. 6학년 2반 42번이었던 내 일기장이다.1981년 6월 27일 토요일 날씨 흐림. 아침인사(0), 저녁인사(0)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했는지도 기록에 남겨야 했나보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썼다. 같은 반 친구 수미가 쓴 쪽지편지로 인해 찬호, 시열이, 세광이와 벌어진 사건과 아이들 표정을 자세히 묘사했다. 국어, 자연, 사회, 산수 시험을 치던 날, 인숙이네 토마토 밭에 갔던 일, 국사 시간에 선생님이 예습 검사를 하셨고 숙제를 하지 않았던 나와 친구들을 때렸고 다 한 아이들의 이름은 칠판에 적으셨다. 언니가 수박을 좋아해 내가 수박돼지라 불렀고, 남학생과 여학생으로 나눠 야구경기를 해서 진 것이 억울해 강가에서 몇 날을 연습을 하기도 했다.지금은 빨간 날이 아니지만 그 해 제헌절은 공휴일이어서 외갓집에 다녀왔고, 성의 상품화라는 이유로 중계하지 않는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를 그때는 텔레비전에서 중계하기도 했었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들이 누렇게 변한 일기장을 타고 2020년 봄으로 시간 여행을 왔다.초등학교부터 사춘기 중학생의 방황과 여고생의 고민이 한 장 한 장 포개져 있다. 대학노트에 적은 일기장은 아르바이트하며 어려웠던 시절에 마음을 털어놓던 친구였다. 일기장마다 첫 페이지에는 무슨 날에 누가 선물한 것인지, 마지막 장에는 친구들의 주소록과 생일을 음력으로 또박또박 기록했고, 그 옆 장에는 소망을 적는 곳도 있어서 해마다 바뀌는 내 꿈의 변천사도 알 수 있다.오래된 일기장을 넘기다 보니 손에 세월의 먼지가 까맣게 묻어나온다. 살며시 넘기는데도 출판사 이름이 적힌 겉지가 바스러져 아치럽다. 스물네 권의 책으로 묶인 추억의 밀푀유, 사이사이에 쪽지 편지가 껴 있기도 하고 그 시절의 영수증이 해사하게 웃으며 튀어나와 자꾸만 내 손목을 끌어 그 시절로 데려 갔다.김순희수필가그 일기 중 어느 날에는 선생님이 빨간 볼펜으로 한 문장에 밑줄을 긋고 빨간 도장도 찍혔다. 숙제장과 시험지에 선생님이 그려준 빨간 동그라미를 받으려고 억지로 착하게 굴었던 내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선생님은 그날 자신은 모르겠지만 중요한 일을 하나 해내고 있었다. 일기장에 ‘참 잘 했어요’라는 메모로, 또 선생님 이름의 목도장으로 내 삶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준 거였다.일기장은 내 어린 시절 기록부터 차곡차곡 쌓아 온 천장이 넘는 시간의 이파리들이다. 천 겹의 잎사귀라는 뜻의 ‘밀푀유’는 밀가루반죽을 여러 겹으로 층층이 쌓아 바삭하게 구운 프랑스식 과자이다. 밀푀유처럼 바스락거리는 일기장을 넘기며 추억을 씹다보니 온몸이 녹진해진다.지금은 종이가 아닌 컴퓨터에다 오늘의 흔적을 남긴다. 블로그에 사진까지 더해 8년 동안 쓰다가 스마트폰을 장만한 후에는 카카오스토리로 일기를 쓴다. 이렇게 무엇을 써서 간직하는 것은 미래에 나를 위한 빨간 동그라미를 크게 그리는 작업이다.

2020-05-24

한국 때리면 저절로 방역 되나?

코로나19가 대유행을 하면서 ‘U 선생’들 가운데 한일 관계를 말하는 채널이 부쩍 늘었다. ‘애국주의’에 호소하는 방송들이다. 나라 사랑 열정에 불을 붙이는 데 일본 비판만큼 쉬운 방법이 없다. 누구라도 쉽게 ‘구독’과 ‘좋아요’에 손이 가 닿을 테다.덕분에 요즘 일본의 코로나19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다. 이 U선생들이 마치 올림픽 경기를 중계하듯 한일 간의 코로나19 상황을 비교해 주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렇게 자주 일본 사정을 접하다보니 아베라는 일본 아저씨를 자꾸 만나게 됐고, 이윽고는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버렸다.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고나 할까.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라는 자가 이웃 나라와 국민을 향해 대놓고 온갖 마타도어를 일삼다니 말이다.일본 방역에는 한없이 게으르고 무능력할 뿐 아니라 온갖 은폐, 축소를 밥먹듯 하는 아베 아니던가. 그런 주제에 티비 앞에 나와서는, 긴급사태를 해제하더라도 일본은 한국처럼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자기 국민들을 점잖게 ‘훈계’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경솔한 저들과는 다르지 않냐고 말이다. 이태원 집단 감염 사태가 그렇게도 반가웠던 모양이다. ‘친절한 금자 씨’가 뭐라고 했던가. 아저씨, 너나 잘하세요. 그 넓은 안면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그 마스크나 좀 어떻게 해보시죠.그 자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은 참 그렇게 약속도 안 지키는 족속인 모양인데, 그런 한국인들이 2011년 3월 11일 도호쿠 대지진 때는 재난 당한 일본인들을 위해 천억 원이나 성금을 보냈더란다. 정말 그랬었나? 그렇다면 이런 바보천치들이 있나. 사실을 말하면 그때 유튜브로 지진, 해일 장면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일본인들 또한 다 귀한 생명을 받고 이 세상에 온 게 아니던가.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일본 가 있던 조선인들은 살육 당하고 살육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 어둡고 괴로워라, 그 캄캄한 어둠 나날.이제 나도 아베와는 다른 도그마를 하나 넌지시 제출해 보련다. 한국인들은 약한 이들을 보면 돕지만 일본인들은 아예 짓밟으려 드는 족속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 좋은가? 진실이라고 생각되나?사실, 우리는 아베의 마타도어를 논박할 수 있는 근거를 역사적으로 정말 얼마든지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인들은 아베 류의 식민주의적 거짓말을 논박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아베 씨, 우리는 당신들 얘기 따윈 아무 관심도 없소. 어디 그 비뚤어진 입으로 맘대로 떠들어 보시구랴. 그리고 말한다. ‘좋은’ 일본인들과 함께. 아베 씨, 한국을 때리면 일본은 저절로 방역이 됩니까? 그 시간에 뭔가 그럴 듯한 대책을 좀 마련해 보시지요.아베, 침묵. 그의 마스크가 성능이 너무 좋은 모양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5-21

미래의 기대치를 높여야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포스텍 교수였다가 아주대 총장으로 가신 박형주 아주대 총장 칼럼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현재까지 업적과 미래의 성공확률과를 비교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A와 B가 만원씩을 내고 동전 던지기 게임을 한다고 상상해 보라. 동전 앞면이 나오면 A가 1점을, 뒷면이 나오면 B가 1점을 얻는다. 총 7점을 먼저 획득하면 상금을 다 가지고 가는 게임이다. 운이 좋다면 내리 7번을 이기고 주어진 상금을 가지고 갈 수도 있다. 두 사람이 경쟁하면서 A가 5점을 얻었고 B가 3점을 얻었는데, 귀가할 시간이 돼서 게임을 중단하게 되면 복잡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상금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까? 회계학의 대가인 파치올리는 현재까지 얻은 점수대로 5대3의 비율로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이것이 공정한 배분일까? 지금까지의 업적을 중심으로 배분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그러나 과학자이며 수학자인 파스칼과 페르마는 서신 교환을 통해서 확률과 기댓값의 개념에 다다랐다. 그들의 돌파구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자는, 즉 ‘현 상태에서 중단 없이 게임을 계속한다면 어떻게 될까’였다. A가 이길 확률은 16분의 13이고 B가 이길 확률은 16분의 3이 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업적 중심인 5:3 이 아니다. 이게 기댓값의 개념이다. 이 경우는 기댓값이 업적보다 더 우월한 경우이지만 이 반대의 경우도 존재할 수 있다.이 에피소드의 교훈은 현재까지의 업적보다 더 중요한 건 미래의 기대치라는 사실이다.또 하나의 예가 있다. 전자업계의 신화 소니는 1950년대 초반 전자제품의 기반 기술이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이전하는 변곡점에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워크맨과 콤팩트디스크(CD)로 이어지는 혁신을 주도하면서 아날로그 시대에 세계 음향가전 시장의 절대 지존으로 군림했다.그러나 소니의 성공신화는 디지털 혁명의 풍랑을 만나면서 좌초했다. 하드웨어의 시장 지배력을 소프트웨어 분야로 확장·결합시키려는 전략 방향은 타당했지만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융합시대의 주연 자리를 애플에 내주고 조연으로 전락했다.소니의 실패는 워크맨으로 대변되는 그들의 성공에 의존하여 미래의 성공확률에 눈을 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래의 기대치를 높이기 위한 준비와 자세가 부족했기 때문이다.대학의 수시모집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포스텍은 정시모집을 늘리라는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수시모집을 고수하고 있다.대학의 수시모집은 정시모집이나 과거의 대학입시와는 달리 지금까지 보다는 미래의 잠재력을 보는 모집방법이다. 수시모집의 미래 가능성을 보는 창의력 중심의 선발 방식은 미래의 기대치를 높이려는 노력이다.아마도 정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지금까지 과거사 문제로 서로를 공격하고 헐뜯는 과거 지향적 보다는 미래의 기대치를 높이는 일에 정치인들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미래의 기대치를 높이는 일은 교육, 경제, 산업, 정치 어디에서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일들이다.

2020-05-21

팬덤 신드롬

김병래시조시인신(神)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적이었다.왕과 제사장은 물론 로마 총독까지 엄존하는 당시의 유대 땅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심지어는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같은 경건주의자들보다도 세리나 창녀 같은 하층민들이 오히려 구원받기 쉽다는 말까지 했으니 어찌 무사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한 생명으로서의 가치가 평등하다는 것이지 세상의 부나 권력의 평등을 말하는 건 물론 아니었다.집단생활을 하는 동물들 간에도 서열이 있다. 무리의 질서를 유지하고 우수한 형질을 유전하는 등의 종족보존본능에 따른 것이다. 인류도 처음에는 거기서 출발했으나 문명의 축적에 따라 우두머리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온갖 수단이 동원되어 종교나 정치의 지도자를 신격화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그 권세를 옹위하고 떠받치는 무리들이 있게 마련이고, 일반 백성들은 권력자를 추앙하고 숭배하는 것으로 심신의 안위를 보장받으려 했다.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 ‘절대존엄’이라고 통치자를 우상화하는 집단도 있지만 대다수 국가들은 민주주의를 표방해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다. 선출된 지도자들은 국민의 계속적인 지지와 호응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할 것이고, 개중에는 포퓰리즘이나 프로파간다 같은 극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 히틀러나 스탈린은 물론 대다수 독재자들이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로 정권을 장악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듯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패망으로 몰고 가는 지도자를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어떤 대상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을 팬덤(Fandom)이라 한다. 유명 운동선수나 인기 연예인이 주로 팬덤의 대상이 되는데, 팬덤을 형성하는 심리적인 이유나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특정 정치인에 대한 팬덤이 기세를 떨치고 있다. 나라가 좌우로 나뉘어 반목하고 대립하는 가운데 자기들이 지지하는 정치성향의 인물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가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온갖 비리와 부정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거나 고발을 당한 자들을 지지하는 무리들이 자행하는 맹목과 광기에 가까운 행태는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름께나 있는 인사들까지 앞장서서 불법과 비리와 파렴치를 옹호하고 나서면 같은 편의 패거리들이 벌떼 같이 달려들어 반대편이나 사법체계를 조롱하고 위협하는 무법천지를 연출하고 있다.조국일가의 비리나 울산시장 부정선거 혐의자들, 최근에 불거진 정의기억연대의 비리의혹 등은 일말의 상식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진상을 철저히 밝혀야 할 일이지 무조건 편들고 두둔할 일이 아니라는 걸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팬덤의 무리들에겐 법치도 상식도 윤리의식도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유일한 판단 기준일 뿐이다. 더구나 저들이 지지하는 인물과 세력이 정권과 함께 사법부와 입법부, 언론과 교육과 문화계까지 장악을 하게 되었으니, 나라의 장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시국이다.

2020-05-21

장미꽃 등교

불가리아 카잔루크에서는 매년 5월말∼6월초에 걸쳐 장미축제가 열린다. 1903년 지역축제로 출발한 이 축제는 지금은 전세계인이 즐겨 찾는 장미축제로 성장했다. 불가리아 대통령이 참석하는 최고의 축제이자 최고의 관광자원이기도 하다.이곳의 장미 생산량은 세계의 80%를 차지한다. 행사장에 마련된 1만5천종의 장미 전시회는 놀라운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전통적 방법으로 추출한 세계 최고 수준의 장미오일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장미꽃으로 기획한 다양한 이벤트가 장미축제의 화려함을 더 빛내주는 행사다.계절의 여왕 5월은 장미의 계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맘때쯤이면 전국 각지에서 장미축제가 열린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전국 장미축제 대부분이 취소돼 많은 사람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5∼6월에 피는 장미는 야생종만 200여종에 이른다. 원예종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장미의 아름다움 때문인지 장미만큼 꽃말이 많은 꽃도 없다. 색깔과 개수에 따라 꽃말도 서로 다르다.붉은 장미는 열정적 사랑, 흰색 장미는 순결, 분홍색 장미는 우아함, 검은색 장미는 이별 등의 꽃말을 가지고 있다. 장미 한 송이에도 의미를 따로 붙였다. 붉은장미 한 송이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한다”는 뜻이고 노란색 장미 한 송이는 “당신을 향한 나의 감정은 순수하다”는 뜻이다. 만약 붉은장미 여섯 송이를 누군가에 주었다면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졌다”는 뜻이라 한다.코로나19로 80일 만에 등교하는 학생들의 장미꽃 등교에 온 국민의 시선이 쏠렸다. 그러나 등교 첫날 32명의 확진자가 나오면서 학생들의 등굣길이 마치 살얼음판 같아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학생들의 안전한 등교, 온 국민의 바람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5-21

아쉬운 20대 국회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린 지난 20일, 국회는 여야가 합의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을 비롯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법안, n번방 방지법, 공인인증서제도 폐지를 위한 전자서명법 개정안 등 100여 건의 법안을 통과시켰다.이날 기준으로 계류된 20대 국회 법률안 1만5천262건은 20대 국회 임기만료일인 29일 기점으로 모두 폐기된다. 통과된 법안 가운데는 논란거리도 있고, 박수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이날 본회의에서 통과된 법안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민식이법이었다. 지난해 9월 학교 앞 어린이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초등학생 김민식 군 사건 이후 국민적 관심 속에 어린이보호구역 내 교통사고 처벌을 강화한 이른바 ‘민식이법’은 기준 속도보다 천천히 달려도 사고가 나면 무조건 운전자를 형사처벌하도록 규정해 과잉 처벌이란 논란을 불렀다. 결국 법 개정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이어져 30만명이 넘게 동참했고, 청와대가 해명에 나서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또 텔레그램 등의 메신저 앱으로 ‘스폰 알바 모집’같은 글을 게시해 중학생 등 미성년자들을 유인한 다음, 성착취물을 찍게 하고 이를 유포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인 ‘n번방’사건을 막기위해 ‘n번방 방지법’역시 실효성 논란을 빚고 있다. 관련업계에서는 n번방 방지법이 국민의 사생활 영역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해왔다. 더구나 방송통신위원회의 해명처럼 이 법이 공개정보에만 적용된다면 텔레그램에서 발생된 n번방 사건도 막을 수 없어 n번방 방지법 자체가 의미 없다는 지적도 있어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다만 이날 통과된 과거사법 개정안과 김관홍법은 때늦었지만 국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우선 과거사법으로 인해 2010년 임기만료로 해산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새로 출범하고, 형제복지원 사건과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등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권위주의 통치 시기에 발생한 국가 인권유린 사건들에 대해 진상을 조사할 수 있게 됐다. 4·16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에 나섰다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은 민간 잠수사를 피해 구제 범위에 포함하는 법안인 ‘김관홍 잠수사법’ 역시 시대의 아픔을 보듬은 법안으로 평가된다.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 잠수사들은 3개월여 사투를 벌여 희생자 235명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냈으나 골괴사 등 잠수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지방의회 사무처 직원 인사권독립 및 정책지원 전문인력 확충, 자치단체 부단체장 증원, 특례시 제도운영 등에 관한 내용들이 포함돼 있는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과 자치경찰 보강을 통한 자치기능확대를 보장하는 통합경찰법개정안 등이 또 다시 폐기되고 말았다는 점이다.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한 ‘분권형 개헌’이 무산된 후 국가균형발전정책의 후퇴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당초의 국정목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지방자치법 개정안에 대한 국회의 관심을 촉구한다.

2020-05-21

마늘과 어머니

이순영수필가마늘을 얻었다. 김장철도 지났고 햇마늘이 날 때도 아닌지라 잠시 망설이다가 받았다. 한손으로 들어도 빈 바구니 같았다. 푸석푸석 먼지가 나는 마늘 한 접을 집으로 가져와 베란다에다 두고 며칠 밤을 지냈다. 빨래를 널고 청소를 하면서 눈에 띌 때마다 근심덩어리였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갈무리를 해 두어야만 될 것 같았다. 미루어두면 버려야 할 형편이 될 일은 뻔했다. 친정어머니가 생각났다.어머니는 김장철이 되면 집에서 가꾼 마늘을 틈이 날 때마다 햇살이 잘 드는 마루에 앉아 장만하셨다. 깐 마늘을 수북하게 모아 두었다가 김장양념장을 만들 때쯤이면 마당 귀퉁이 감나무 아래에 있는 돌절구에 마늘을 찧으셨다. 지난 초겨울에도 어머니의 마늘 까는 일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그 양이 줄어든 것과 방안에 앉아서 플라스틱으로 된 작은 통에 마늘을 찧는 것만 달라졌을 뿐이다. 어머니의 성품은 때로는 온화하셨고, 때로는 매우 강직하셨다. 이런저런 모습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신문지를 활짝 펼치고 마늘을 깔 준비를 했다.두고 보니 이 많은 마늘을 언제 다 손질할까. 긴 한숨이 나왔다. 받아오지 말걸, 식구도 적은데, 곧 햇마늘이 나올 터인데…. 친정에 가지고 가서 어머니께 맡길까. 그러려면 오고가는 시간과 머무는 시간을 합하면 서너 시간은 걸릴 텐데. 그 정도면 내가 혼자서 모두 손질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야, 나는 어머니를 뵙고 오는 즐거움이 있어 좋고, 어머니는 심심해하던 차에 일거리가 생겼다고 반가워하실 지도 모르지….나만의 계산법으로 나에게 돌아올 득과 실을 따지면서도 깐 마늘을 담을 그릇과 껍질을 담을 비닐봉지를 챙겨서 옆에 두었다. 어머니가 하신 것처럼 쭈그리고 앉아 마늘을 까기 시작했다. 볼품없이 말라 푸석거리던 껍질 속에서 하얀 마늘이 보석처럼 발라져 나왔다.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며 시작한 일인데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자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려왔다. 어깨와 목덜미, 손목이 뻐근해지고 눈도 따가웠다. 온몸이 뒤틀리는 것 같았지만 하얀 마늘이 통에 소복하게 모아지는 재미는 쏠쏠했다. 그릇 위에 봉긋하게 솟은 하얀 보석들을 쓰다듬으니 촉촉한 속살이 내 손바닥을 간질였다.한편 비닐봉지 속에는 흙이 묻은 뿌리와 버썩 마른 껍질들이 가득해졌다. 부풀어 오른 봉지를 손등으로 누르자 풀썩 내려앉았다. 붕긋하던 봉지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되자, 몇 해 전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벽에 기대어 가만히 앉아 계시던 어머니. 마당이며 부엌과 방, 집 안팎 어느 한 곳도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고 윤기가 흐르게 하시던 어머니의 갑작스런 변신은 믿어지지 않았다. 불러도 대답 없이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시고 사람을 보면서도 아무런 표정이 없으셨다. 때로는 한참동안 두 눈을 힘껏 감으시고 입을 꾹 다물고 계시기도 했다.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으시니 마치 그림 같았다.너무나 낯선 어머니였다. 바스라질 것만 같아 어머니를 부둥켜안을 수조차 없었다. 어머니 옆에 가만히 앉아 어머니처럼 벽과 천장을 바라보며 가슴앓이만 했다. 그러기를 몇 개월이 흐른 뒤 멈추었던 어머니의 시간은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조금씩, 아주 조금씩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어머니는 마치 아기 같기도 하고 때로는 천사 같기도 했다.삶을 온전히 바쳐서 우리들을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귀로(歸路)로 향하셨지만 나는 어머니께 해 드린 것이 없다. 오늘도 오랜 시간을 쭈그리고 앉아서 해야 하는 힘든 일을 어머니께 맡기려고 하지 않았던가.네 시간도 더 걸려서 마늘은 모두 갈무리가 되었다. 비록 껍질은 불태워지더라도 알맹이는 적재적소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마늘이 함유하고 있는 성분을 따져서 무엇 하리. 음식에 향과 맛을 더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건강에 이로움을 주면서도 그 형태를 잘 드러내지 않는 마늘, 그 품성이 꼭 어머니 같다.

2020-05-20

깔끔하게, 담백하게

수목원 나들이를 갔습니다. 변덕 앓는 제 맘과 달리 꽃 피고 지는 일은 어쩜 저리 한결 같은지요. 숲 천지 꽃 잔치, 신록이 한창입니다. 오월 동산에 취한 것도 그만인데, 운 좋게 샤스타데이지까지 만났습니다. 전망 좋은 언덕, 한울타리 가득 흰 꽃을 피워 올립니다.데이지 종류는 제가 좋아하는 꽃입니다. 경계가 분명한 꽃이지요. 뒤집어 보지 않는 한 드러나지 않는 꽃받침이며, 꽃 필 자리보다 한참 밑에 자리 잡은 이파리, 가시 없는 줄기마저 곧게 뻗어 꽃송이와 부수적인 것들이 뒤섞이지 않습니다. 심지 곧고 깔끔하며 소박한 꽃이지요.데이지와 달리, 꽃송이와 잎사귀가 뒤섞여 피는 꽃들이 화려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너저분한 인상을 주는 면이 있어요. 하지만 데이지는 꽃송이는 송이요, 줄기는 줄기요, 이파리는 이파리대로 각각 제 자리를 지켜 핍니다. 튤립이 그러하고 양귀비꽃도 비슷하긴 해요. 깔끔하기로만 따진다면 그 둘이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두 꽃은 어쩐지 고고한 느낌이 있어 부담스러운 면도 없지 않아요. 그에 비해 데이지꽃은 적당히 소박하고 알맞게 단정한 모습이지요. 산뜻하지만 가볍지 않고 소담스럽지만 격조를 잃지 않는 꽃입니다.환대의 시늉도 없고 포장의 허례도 없는 꽃. 향기 아래 가시를 박지도 않고, 미소 뒤로 우울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꽃송이보다 큰 꽃받침으로 꽃 본연을 갉아먹지도 않고, 넘치는 향기로 꽃잎을 미혹에 빠뜨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담박하게 피어 있을 뿐입니다. ‘나 이런 꽃이니 알아주시오.’ 하지도 않습니다. ‘나 그냥 이렇게 피었소.’ 하고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진중한 위엄이나 날렵한 멋을 품고 있다고나 할까요.사람도 마찬 가지예요. 데이지꽃만 보면 떠오르는 친구가 있어요. 학창 시절, 의기소침하면서도 질척댔던 저에 비해 담백한데다 넘치지 않았던 그 친구를 참 좋아했었지요. 심지가 곧으니 포장할 필요가 없고, 사심이 없으니 과장할 이유도 없는 그런 성정의 친구였어요. 얼핏 보면 그녀는 평범하다 못해 존재감이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단체 미팅을 했을 때였지요. 누가 봐도 괜찮은 남학생이 있었어요.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 남학생에게 관심을 보였을 때 친구는 그저 덤덤하기만 했어요. 성격 상 호들갑을 떨거나 적극성을 비칠 친구가 아니었어요. 그것이 도리어 그 남자를 도발했나 봐요. 친구에게 꽂힌 남학생은 사흘이 멀다 하고 친구를 찾아 왔어요. 물론 친구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요. 지나치다싶을 만큼의 무덤덤함이 오히려 남학생을 울릴 만큼의 매혹이 되었다는 것을 그 친구는 알지 못했어요. 소식조차 모르는 그 친구를 지금 만난다 해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천진스럽지만 직접적이고, 단순하지만 단호했던 그 면을 제가 좋아했던 거지요. 아마 남학생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지 않나 싶어요. 복잡할수록 핵심에서 멀어지잖아요. 단순함과 깔끔함은 같은 집안 아니겠어요.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데이지꽃 같은 이미지의 글을 선호합니다. 그러려면 덜어냄의 미학이 우선 되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칼럼도 너무 기네요. 글의 본질은 주제에 있어요. 전하고 싶은 게 선명하면 말에 꼬임이 없습니다. 알면서도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제 맘이 허욕으로 들떠 있을 때입니다. 쓰레기로 가득 찬 손끝에 힘이 들어차니 글이 무거워집니다. 덕지덕지 붙이고 켜켜이 쌓는 순간 형체는 모호해지고 끝내 글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마감에 내몰릴 때면 정도는 더 심합니다. 며칠 지난 뒤 보면 버릴 것투성이입니다. 퇴고의 명약은 시간이라는 걸 느끼는 부끄러운 순간이지요.김살로메소설가써지지 않는 글 때문에 머리가 무겁고 심장이 무거운 날이면 데이지꽃을 떠올립니다. 에너지를 소진하는 잡념부터 없앱니다. 쓰잘머리 없는 곁가지 치기에 집중합니다. 더하기는 쉬워도 빼기는 왜 이리 어려운지요. 그럴수록 한 줌 덜고 두 말씀 닫는 연습을 하는 거지요.오후로 가는 수목원, 한밭으로 깔린 데이지 언덕에 오월 바람이 나부낍니다. 여백 깃든 저 꽃처럼 소담스레 피어날 글꽃들을 그려봅니다. 꽃송이와 주변부의 조화를 생각하며, 줄기는 곧게 이파리는 조금 멀리 플롯을 짜봅니다. 꽃잎 아래, 보일락 말락 배경으로 들일 꽃받침도 잊지 않지요. 덤덤한 듯 정갈한 글 꽃 한 송이, 꽃대를 올리는 상상만으로도 미소 짓는 아침입니다.

2020-05-20

사람과 사람 사이

김규종경북대 교수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인간과 인간의 격의(隔意) 없는 유대관계에 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격의 없는’이라는 어휘가 좋다. 양자가 속마음을 툭 터놓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떤 비밀이나 마음의 장벽이 없는, 문자 그대로 흉허물없이 속내를 모두 드러낼 수 있는 사이가 격의 없는 관계다. 그런 관계를 맺은 사람을 우리는 친구나 동지라고 부른다.하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호락호락한가?! 현대 사회에서 격의 없는 유대관계는 희귀하며, 이런 현상은 나날이 심화하고 있다. 집단 따돌림으로 자살을 택하거나. 히키코모리로 자발적인 유폐를 선택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그러하다. 혼술과 혼밥과 혼산을 생각해도 날로 소원(疏遠)해지는 인간관계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인간을 위로하고 대화상대가 돼주는 인공지능 로봇이 나오는 세상이고 보면 그럴 법도 하다.격의 없는 사이가 아니라면 적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필수적이다.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통해 네 가지 인간관계를 조명한다. 45센티미터 이내의 친밀한 거리 (포옹과 키스), 45∼120센티미터까지 개인의 거리 (악수), 120∼360센티미터까지 사회적 거리 (모임), 360센티미터 이상 공적인 거리 (관람).우리가 누군가와 친구나 연인 혹은 지인 관계를 맺을 때 순서를 생각해보면 홀의 지적에 자연스레 동의하게 된다.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크고 작은 모임을 통해 거리를 좁히고, 악수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다가 소수의 인간은 포옹과 키스하는 친밀한 거리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런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박에 친밀한 거리로 넘어가는 경우는 영화에서만 가능하다.정보통신이 현저히 발달한 현대에서는 인터넷상의 거리도 문제가 된다. 누군가 잘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무단으로 틈입(闖入)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면서 이런저런 댓글을 달기도 하고, 무언가 충고하는 글을 남기기도 한다. 글 쓰는 본인이야 스스로가 대견하고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읽는 사람에게는 고통이자 공포가 아닐 수 없다. ‘뭐지, 또 들어왔나, 왜 저런 거야, 누구 허락을 받았나?!’본인이야 격의 없는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고 싶기도 하겠지만, 상대방은 그럴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면, 거기서 멈춰야 한다. 그것이 예의고 염치다. 격의 없는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옳다. 싫다는 사람을 끈덕지게 추적할 때 인간관계는 피로와 짜증과 분노로 아수라판이 되고 만다.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것은 옛말이다. 그렇게 해도 괜찮았던 시절은 완전히 지나갔다. ‘스토커 처벌법’이 그래서 나왔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스토커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다. 인터넷상에서 폭력적이고 살인적인 댓글로 얼마나 많은 연예인이 고통받고 있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적절한 거리를 생각했으면 한다.

2020-05-20

탁상교육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이팝나무는 나뭇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고봉으로 봄을 지었다. 이는 곧 있을 꽃궁기 전에 실컷 꽃으로 마음을 채우고 여름을 잘 이겨내라는 5월의 배려이다. 이와 더불어 5월은 사람들에게 여름을 준비할 시간을 준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은 올해가 관측 이래 가장 더운 해가 될 확률을 74.7%로 예측했다. 관련 뉴스다.“역대 가장 더웠던 해는 2016년이었는데, (중략) 올해는 강한 엘니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더울 거란 예상이 되고 있는데요. (중략) 관계자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비정상적인 상황”의 직접적인 원인은 온실가스에 의한 지구온난화이다. 더 심각한 것은 다음 내용이다. 만약 이것이 현실이 된다면 그 심각성은 코로나 19와는 비할 바가 안 된다.“이대로라면 50년 내에 전 세계 인구 3분의 1의 거주지역이 사막이 될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었는데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우리는 대책이 무엇인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그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문명의 편안함에 중독된 사람들은 이를 실천할 생각이 없다.최고의 무더위도 무더위이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탁상교육(卓上敎育)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교육 당국은 탁상교육이 만들어 낸 입시 공화국의 민낯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교육부가 고등학교 3학년의 등교수업을 고집하는 이유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학교 입시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지금까지 교육 당국은 “학생 중심 수업, 학생 역량 강화 교육, 창의융합형 인재 육성” 등 그럴싸한 말들로 입시 위주의 교육을 은폐(隱蔽)하고 있었다. 이제 교육의 실체가 드러난 이상 교육부와 교육청은 학생과 학부모를 이상적인 말로 기만해서는 안 된다.필자는 교사이면서 고등학교 3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이다. 2020년도 달력이 장을 넘길 때마다 느끼는 부담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래도 필자보다 더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를 위해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너무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독서실 갔다 올게.”등을 덮고도 남을 큰 가방을 메고 아이는 현관을 나섰다. 가방은 가방이 아니라 짐이었다. 아이의 등을 휘게 할 정도로 무거운 짐을 지운 이 사회가 싫었다. 하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스크를 챙기라는 말뿐이었다. “마스크 꼭 해!”“알았어, 그런데 하루 종일 마스크 하고 있으니까 머리가 너무 아파. 속도 안 좋고.”교육을 받을 당사자인 학생들의 고통을 교육 관료들은 알기나 할까? 책상에 앉아서도 학교 현장의 모습을 다 볼 수 있다는 탁상교육의 달인들은 그 고통을 절대 모른다. 그들은 말한다, 자신들이 계획한 대로만 하면 다 된다고. 그러니 잔말 말고 그냥 따르라고.이 나라 교육판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 있다. 그것은 소통이다. 웃기는 것은 소통할 생각도 없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소통이라는 것이다. 탁상교육의 달인들, 그들의 전지전능한 능력이 참으로 부럽다.

2020-05-20

코로나19와 공유경제

코로나19가 공유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고 있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생활수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비대면접촉이 ‘함께 나누는’공유경제에는 직격탄으로 작용하고 있다.실제로 미국의 3대 공유경제 업체로 유명한 위워크, 우버, 에어비앤비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으로 나타났다. 먼저 위워크는 사무실 공유업체로 세계 여러나라에 120개 이상 도시에 진출해 800여개 이상의 대형 건물을 빌려서 수만개 스타트업체에 재임대하는 공유사업을 펼쳐왔다. 이 사업이 코로나19의 만연으로 큰 어려움에 처했다. 공유공간에 대한 불안감이 사무실 공유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면서 공유시장환경이 극도로 위축되고 있다. 우버는 차량공유업체로 기존 택시시장의 장벽을 허물고 성장가도를 달려왔다. 그러나 이 역시 코로나19가 다른 사람과의 차량공유를 꺼리게 만들면서 사업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최근 이용횟수가 70~80%까지 감소해 위기를 맞고있다. 이미 우버는 직원 14%에 해당하는 3천700명을 해고했다. 에어비앤비는 숙박시설 공유업체로 미국과 유렵에서 인기를 끌면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미국과 유럽 여러나라에서 감염자와 함께 적지않은 사망자를 내면서 타격을 입고 있다.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이 입국금지조치를 내리는 바람에 항공산업과 함께 매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역시 직원 25%인 1천900명을 해고했다. 문제는 코로나가 물러간 이후 공유경제가 다시 살아날 것인가다. 대답은 회의적이다. 사스, 메르스, 코로나19 등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바이러스가 비대면접촉을 강조하는 한 공유경제의 미래에는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울 수 밖에 없어 보인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5-20

둘이서 하나가 되어

장규열 한동대 교수삼십 년을 훌쩍 넘겼다. 달달하게 찾아왔던 사랑을 지키기로 마음먹고 함께 건너온 세월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만나고 헤어진 수많은 얼굴들 가운데 아직도 곁을 지키고 있는 우리는 어쩐 일일까. 셀 수도 없을 이야기들 가운데 늘 등장하는 당신은 내게 누구란 말인가. 살을 맞대고 살아도 속속들이 다 안다고 할 수도 없는 당신은 누구인가. 사람이 생겨난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생각할수록 오묘한 것이 부부라는 이름의 관계가 아닐까. 아이들까지 있고 보면 둘이서 만들어온 세계가 신통하기도 하다. 울고 웃으며 놀라고 분도 내지만, 얽히고설킨 사연들 가운데 만들어온 시간의 흔적은 부인할 방법이 없다. 내 탓이고 당신 덕이며 함께 걸어온 발자취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만 한가득이다.둘이서 이루지만 하나인 듯 살아야 하는 게 부부라고 한다. 부부의날이 21일인 것도 둘이서 하나를 만들라는 뜻이라는데,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박자가 맞기는커녕 갈수록 엇나가기만 하는 당신과 내가 아닌가. 솔직히 하나가 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게 아니었을까. 차라리 끝내 하나는 안 될 것이니 참고 견디며 살아가겠노라는 소박한 다짐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다. 적당히 포기하고 이제는 거울 앞에 돌아와 선 심정이 되어 체념하고 그냥 일상을 대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공연히 부딪히지 않고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며 남도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듯 그렇게 그렇게 지내는 게 서로에게 이롭지 않을까. 다치지 말고 침범하지 말고. 사랑은 아예 꺼버리고 관심도 전혀 주지 않으며 한 울타리에 사는 당신과 나는 부부인가 아닌가.‘부부’인 까닭은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아이들 탓에 억지로 산다는 건 그거야말로 억지가 아닌가. 이왕 함께 사는 김에 뭐라도 만들어가는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도 끈끈한 감정이 있지 않은가. 넘치는 열정이 식었는지 몰라도 끊임없이 샘솟는 호기심이 있지 않은가. 치열한 질투는 혹 잊었어도 잔잔히 흐르는 관심이 거기 있지 않는가. 핏대어린 싸움을 이제는 못하겠지만, 호수같이 너른 마음에 담지못할 미움도 이제는 없다. 부부가 되어 함께 바라보며 불쌍히 여길 세상이 저기 있지 않은가. 부부가 되어 마음모아 일으켜 세울 다음 세대가 거기 있지 않은가. 뜨겁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정겹게 나누어줄 넓은 아량이 이제는 생겨야 하지 않을까. 서로를 바라보기 보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마음이 되어.부부의날에 한 번씩 돌아보았으면 한다.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 이제 서로에게 무엇을 선사할 것인지 새겨보았으면 싶다. 받으려고만 하며 살아오지 않았는지, 나누기에는 인색하지 않았는지. 당신의 목소리를 이제는 들어주는 내가 될 수는 없겠는지. 세상에 완벽한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음을 어째서 애써 부인하며 살았는지. 어차피 부족하여 늘 도우며 살아야 했음을 왜 이제야 깨닫는지. 격려하고 북돋우며 응원하고 일으키는 당신이 되고 부부가 되시길. 부부의날, 파이팅!

2020-05-20

흑산도 공항의 황당한 울릉도 핑계

김두한경북부‘섬의 고향’ 신안이 발칵 뒤집혔다. 울릉공항이 올해 하반기 착공할 것이라는 소식이 최근 전해진 것이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뉴스였다고 중앙언론이 보도했다. 울릉공항은 비용 대비 편익이 흑산도공항보다 떨어지고, 총 비용도 훨씬 더 많이 든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흑산 공항이 안 되는 것과 울릉공항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물고 늘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비용대비 편익을 말한다면 할 말이 너무나 많지만 남 핑계를 대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울릉도는 우리나라와 러시아, 중국, 북한, 일본 해안을 아우르는 한가운데 위치하고 정점에는 독도가 있다. 우리나라 안보의 요충지라는 뜻이다. 울릉도에 군 관련 시설만 9곳이 넘는다.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육지에서 독도에 접근하려면 가장 가까운 죽변이 216.8km고 공항이 있는 포항과는 257km 떨어져 있는데, 일본과 독도는 오끼 군도에서 157.5km 거리에 있다. 오키섬에는 대형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공항이 있다. 전쟁이 난다면 선점을 일본이 먼저 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따라서 울릉공항 건설에는 국토방위의 개념도 포함돼 있다.관광적인 측면에서 봐도 흑산도, 홍도, 가거도는 모두 합쳐 연간 30만명이 방문하지만 울릉도는 단독으로 40만명이 찾는다. 인구 역시 울릉도는 1만여명으로 대흑산도 2천여명의 5배다.특히 울릉도는 동해의 깊은 수심 때문에 연간 여객선 운항이 100일 이상 통제되는 지역이다. 이런점을 염두에 둔다면, 단순히 건설하는 비용이 적게 든다고 우수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흑산도의 공항 건설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흑산도의 여건을 잘 살려 필요성을 설득하고 장점을 부각시켜 공항이 건설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울릉군민들은 흑산도 공항 이야기가 나왔을 때 같이 건설되기를 염원했다. 공조하기도 했다. 다만, 울릉도 주민들은 흑산도 주민처럼 핑계를 대지는 않았기에 이번 흑산도 공항 관련 이슈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kimdh@kbmaeil.com

2020-05-19

음악 같은 행복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녹음방초(綠陰芳草) 짙어가는 젊음의 계절 5월이다. 봄의 향연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푸르싱싱한 초목이 활개치는 여름날로 치닫고 있다. 아침나절 우짖는 멧새들의 지저귐은 맑기만 하고, 한낮의 뻐꾸기 울음소리는 한가롭기만 하다. 또한 저녁답의 어스름을 타고 흐르는 소쩍새의 독창은 올해도 풍년을 점치며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다. 초록의 캔버스에 색채와 향기를 드리우고 물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새소리의 추임새까지 더해가는 자연은 미술과 음악을 곁들인 일종의 예술 종편을 연출하는 듯하다.산이나 들, 강이나 바다 주위를 소요하며 이따금씩 접하는 자연의 소리는 무슨 음악처럼 들리기도 한다. 때에 따라선 향기가 들리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소리가 보이는 것 같으며, 가만히 몰두하면 색깔이 만져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어쩌면 자연 속에 원천적으로 내재한 종합예술을 인간이 미술과 음악의 이름으로 표현해내고 문학과 문화의 매체로 통역하며 재창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가운데 청각적 인식에서 비롯되는 음악은 인간의 매우 뛰어난 감성적인 공감능력의 한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주로 음률로 나타내는 소리예술로 정의되는 음악은 가창, 기악, 성악, 선율, 리듬, 화음 등 장르와 표현방식이 다양하다. 세계 공통언어인 음악은 일종의 ‘패턴 찾기’의 즐거움이며 반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음악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육체적, 정신적 회복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며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가령 같은 노래를 함께 부르면 힘든 상황에서 서로 돕고자 하는 유대감이 형성되고, 좋은 음악 속에는 우울증과 스트레스의 악순환을 돌파하는 힘이 존재한다. 그래서 정신과 신체건강을 유지, 복원시키며 향상시키는 음악치료라는 예술치료분야가 고대로부터 활용되지 않았을까?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온갖 소음과 잡음, 불협화음에 노출되고 시달릴 때가 많다. 그런 때일수록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취향에 맞는 음악을 들으며 심신을 달래나간다면 마음건강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는 거의 매일 자전거를 타면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자주 듣곤 하는데, 출퇴근길이나 산악 라이딩을 하면서 즐겨 듣는 음악의 장단에 맞춰 몸을 들썩이며 페달을 밟다 보면 힘도 그다지 들이지 않고 미끄러지듯 신나게 달려나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반복으로 인한 음악의 세밀한 선율과 리듬에 집중할 수 있고, 그러한 음악이 연료처럼 작용해 몸이 저절로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것 같았다.음악은 지친 일상의 고단함을 풀어주고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보약같은 효능이 있다. 콘서트나 음악발표회로 햇살같은 선율이 피어나야 하는데, 코로나19 시국으로 인해 울림마저 감금당하고 있다. 그러나 침울한 마음이 치유되고, 소통하는 공감으로 상생과 화합의 메아리가 조만간 울려 퍼지리라. 작은 생의 아픔 속에도 아름다움은 살아있듯이 삶이란 그 무언가의 기다림 속에 오는 음악같은 행복이니까….

2020-05-19

Z세대들의 “라떼는 말이야….”

곽지영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인정사정없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습격에 안전지대가 있을 리 없었다. 정도나 형태에 차이가 있을 뿐 이 시대를 함께하는 모두가 엄청난 내상을 입었다. 그러나 위기마다 강했던 우리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 역시 감내하며 각자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의료진, 소상공인, 어르신들, 직장인들, 모두가 ‘덕분에’를 들어 마땅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생의 꽃인 학창시절을 하필 지금 지나고 있는 Z세대들에게 연민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칭찬과 격려의 박수를 드리고 싶다.Z세대란 밀레니얼 세대의 다음 세대로, 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출생한 세대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그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로 학교에 가지 못했던 유치원, 초·중·고교생, 대학생까지를 포함한다.선생으로 그들 가까이 있어서일까? 코로나바이러스가 Z세대에게 유독 가혹해 보여 그들이 특히 안쓰럽다. 개학은 3차례나 연기되었고, 급기야 초유의 ‘온라인 개학’, ‘랜선 등교’라는 낯선 상황을 준비도 안된 채 경험했다. 졸업식도 입학식도 치를 수 없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들께 후배들이 드리는 꽃다발도 화면 넘어 마음으로만 나누어야 했다. 입학식은 고사하고, 담임선생님도, 새로 같은 반이 된 친구들 얼굴도 아직 보지 못했다. 수업은 모두 인터넷 강의나 원격 화상학습, 과제제출로 대체되었고, 교실에서 친구들과 왁자지껄 즐거워야 할 시간, 아이들은 집안 컴퓨터 화면 속에서만 선생님을 겨우 만난다.물론 이전에도 ‘인강’, MOOC, 사이버대학과 같이 온라인 공간에서만 이루어지는 수업은 있었다. 스마트 기술을 이용하는 게 어려워서도 아니다. 한창 친구가 좋아질 나이에 집에만 있어야 하는 현실이 아이들에게는 너무 가혹하다는 말이다.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꼭 필요한 선생님과의 심리적 유대감, 라포(Rapport)의 형성도 온라인 수업만으로는 기대하기 어렵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의 기지로 드라이브인 입학식이 열렸다거나, 학교에 못 나오는 아이들을 위해 교장선생님이 코믹한 동영상을 찍어 선물했다는 소식이 미담으로 알려지는 상황이 무슨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져 씁쓸할 지경이다. 준비 덜 된 상황과 불편한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Z세대들은 변화된 상황에 너무나 빠르게 잘 적응해 주었고, 여전히 밝게 웃으며 자신과 사회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듬직하게 버텨내 주고 있는 것이다.80~90년대 X세대의 학창시절에 초점을 맞추어 그 시대 사건들을 특유의 유머코드로 들려준 ‘응답하라 시리즈’는 2012년 이후 지금까지도 재방송이 계속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40대의 치열한 삶을 감내하느라 드라마에 무관심했던 X세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덕에 그들을 TV 앞으로 소환했고, 그 시대를 모를 후배들에게 소싯적 얘기를 하게 만들어 ‘라떼는 말이야….’ 신드롬도 일으켰다. 10~20년 후, ‘응답하라 2020’을 감상하며 자기 후배 세대들 앞에서 ‘라떼는 말이야….’를 외칠 중년이 된 Z세대들을 상상하며, 그들의 무용담이 멋진 해피엔딩이 되게 힘을 보태리라 다짐해 본다.

2020-05-19

떨어진 꽃 보기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넘게 피는 꽃은 없다. ‘권불십년(權不十年)’. 10년을 넘기는 권력은 없다. 아무리 화려한 꽃이라도 10일을 넘기지 못하고 나는 새를 떨어뜨린다는 권세 역시 10년 넘게 지속될 수 없다는 말이다.주역의 이치를 들지 않더라도 세상이 변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로 받아들인다. 아침 산책길에 철 보내는 꽃들이 이곳저곳 떨어져 있다. 몇몇은 즈려밟힌 자국들이 선명하다.화려한 날은 가고 사람의 발자국이 주홍글씨처럼 찍혀 있음에 울먹이는 것 같아 산책 내내 떨어진 꽃들이 눈에 밟힌다. 사람의 발에 밟히고 눈길에 외면당한 꽃의 말년이 안타깝기까지 하다.모진 긴 겨울 남몰래 버티고 새봄에 잠시 폼 좀 잡은 날이 겨우 10일이라니 야속한 마음이 들었을 듯하다. 사람들은 꽃이 겪은 지난겨울 인고의 시간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화려하게 핀 모습을 즐길 뿐이다. 다가와 향을 맡는다.배경삼아 사진을 찍는다. 고운 자태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 것 같이 그 가벼운 친근감을 맘껏 즐겼다. 짧은 몇 날이 가고 계절을 재촉하는 비바람에 뚝뚝 떨어져 길바닥에 나뒹굴게 된다. 언제 그랬냐는듯 사람들의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사람 마음이 다 그런거려니 받아들이기엔 아쉬움과 회한이 밀려온다.하지만 이 또한 세상 이치다. 정승집 개가 죽은 경우와 정승이 죽은 경우가 다른 것이 세태다. 명심보감에 ‘주식형제 천개유(酒食兄弟 千個有), 급난지붕 일개무(急難之朋 一個無)’란 말이 있다, 술 마시고 밥 먹을 땐 형동생 하는 사람이 천 명이 넘는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같이할 친구는 한 명도 없다는 말이다.잘 나갈 때는 너도 나도 친분을 과시하다가 정작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땐 사람이 썰물처럼 다 밀려가고 없다는 말이다. 세상인심으로 맞는 말인 것 같은데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평소 너의 행실도 문제가 있어 그런 것 아니냐고 되받는다면 더욱 할 말을 잃고 비참함만 느끼게 될 뿐이다.인생살이도 꽃처럼 한 때 만개할 때가 있다. 나의 화려한 날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만개한 꽃이 시들거나 떨어지듯 어느 시점엔 퇴락의 때를 맞이한다. 물론 때가 되어 물러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지혜는 자신의 몫이다. 자연스러워야 할 퇴장의 시간이 백세시대를 맞아 때 이른 퇴장그늘로 짙게 드리우고 있다.정신적·육체적 활동 능력이 아직은 청장년같은 사람들이 퇴장의 긴 시간들에 시달리고 있다. 근교 산에 평일 등산객으로 출몰(?)한다. 출근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에 산책로가 붐빈다. 평일 골프장 내장객으로 퇴장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제법 호사를 누리는 부류에 속한다. 아직 자녀들 교육과 독립을 위해 이곳저곳 2진으로 뛰어들어 남은 구간을 뛰는 처지가 되면 말년 삶이 신산함을 넘어 처량해진다.이제 나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맡기 위해 몰려들던 상춘객은 어디에도 없다. 시들고 떨어진 꽃이지만 한 번 더 바라봐 줬으면 하는 바람뿐이다.한 때는 당신들이 좋아하고 열광했던 꽃이었으니 한 번 더 눈길을 줬으면 한다.

2020-05-19

신라왕경

왕경(王京)은 임금이 거주하는 수도다. 현대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표현이다. 역사적 용어라 하겠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을 왕경이라 했고, 고려사에는 개경을, 조선왕조실록에는 한양을 왕경으로 지칭했다.경주는 신라의 왕경으로 역사적으로는 서라벌 혹은 금성으로 불렸다. 삼국사기 기준으로 보면 약 991년 동안 신라의 수도로 존속했다. 한 나라의 수도가 1천년 가까이 한 곳에 유지된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흔치 않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적지라는 점에서 경주는 역사문화 도시로서 가치가 특별한 곳이다.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8세기경 최고 번성기를 누렸다. 그 당시 경주에 거주한 가구가 17만9천호에 달했고 인구만 100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나 당나라 수도 장안성 등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도시였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천년동안 간직했던 신라왕경의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13세기 몽골군의 침입으로 신라왕경은 완전히 불타버렸다. 지금은 주춧돌 등을 제외하면 당시의 왕경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우여곡절 끝에 신라왕경 발굴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당시의 모습을 잘 재현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왕경의 발굴복원 사업으로 경주의 문화유물적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풍부해 질거란 기대감은 고무적이다. (재)경주문화엑스포가 경주엑스포공원 경주타워 1층에 설치된 신라왕경 모형을 13년 만에 리뉴얼해 공개했다. 역사문화적 고증까지 거쳤다. 신라시대 유적지와 유물,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볼 수 있는 자료공간이라는 점에서 신선한 감흥이 기대된다. 상상 속에 머물렀던 도시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으로 관광도시의 흥미는 더 높아질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05-19

작은 것에 감사하며… 군위 지보사(持寶寺)

해발 437미터의 선방산(船放山)은 마치 배를 띄운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전에 의하면 선방산 꼭대기에 배를 띄우고 놀 만큼 큰 못이 있었지만 당나라 장수들이 그곳에서 뱃놀이를 즐기고는 못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어떠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옹달샘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설화를 간직한 그곳에 지보사가 있다.지보사(持寶寺)는 신라 문무왕 13년(67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할 뿐 그 이후 근대까지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그 옛날에도 그리 큰 절은 아니었던 듯하다. 다만 지보사에는 이름처럼 세 가지 보배가 있었다. 아무리 갈아도 닳지 않는 맷돌과 사람 열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큰 가마솥 그리고 청동향로이다. 향로 대신 단청의 물감으로 쓰이는 오색 흙을 꼽는 경우도 있지만 향로만 은해사 성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송홧가루 날리는 오월,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텅 비어 있는 주차장을 두고 극락교 앞 그늘에 차를 세운 후 다리를 건넌다. 큰 나무 그늘이 내 발등을 서늘하게 적셔주고 곧게 뻗은 길은 다시 돌계단으로 이어진다.“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운명을 좌우한다.”계단 입구에 새겨진 글이 마음 밭을 돌아보게 한다. 첫 느낌이 가지런한 절이다. 계단 위에서 은행나무가 사천왕처럼 내려다볼 뿐 한낮의 풍경은 모든 게 멎어 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은행나무 뒤로 아담한 루(樓)가 막아서는 작은 뜰, 한쪽에는 삼층석탑 하나가 투명한 햇살에 몸을 씻고 있다.가지가 휘어지도록 핀 불두화, 막 씻고 나온 듯한 순백의 얼굴빛과 마주하며 나는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무언가로 꽉 찬 절은 비밀의 화원처럼 조심스럽다. 저들만의 따스한 언어들이 두런두런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작고 경이로운 세계로 초대받은 이 순간조차 우연과 필연으로 예정된 약속이었으리.불두화 한 그루 심고 잠들었던 어제 일을 떠올린다. 이토록 많은 불두화를 만날 운명이었을까. 종자를 맺지 못하는 애잔한 불두화, 그 순결한 아름다움에 빠지노라면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숨소리 낮춰가며 사진을 찍고 한참을 서성인다. 주지 스님이 어떤 분인지 뵙지 않아도 그려진다.작은 소읍에 위치한, 적요처럼 말간 추억들이 꿈꾸듯 살아가는 절, 어디선가 스님이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른다. 나는 오월의 품에 안겨 또 다른 세계로 빠져든다. 별 기대없이 찾아온 내게 절은 빛바랜 고향처럼 푸근하다.조각미가 뛰어난 고려시대 석탑, 보물 제 682호 삼층석탑의 시선도 부드럽다. 대웅전을 비켜나 두 단 아래 서 있지만 결코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구석구석 시선 닿은 곳마다 부처님의 섬세한 눈길이 머물고 커다란 은행나무는 대웅전만큼이나 든든하다. 섬세함과 고요함, 소박함까지 갖춘 지보사에는 까마득히 잊고 있던 향수가 어룽거린다.욕심 없는 평온함이 경내를 가득 메우는 이 시간, 현판도 없는 작은 루에 올라 시집을 읽으며 한껏 여유를 부리고도 싶다. 산 아래 정경도 궁금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조심스럽다. 절은 열린 듯 편안하고 비밀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러움이 느껴진다.햇살이 따가운 줄도 모르고 행복에 취해 마당을 거니는 이 소박한 특권은 누가 보내주셨을까. 작은 자갈돌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고 풍경이 간헐적으로 울다 멈추는 처마 아래에서 나는 한량없는 감사함에 젖는다. 수많은 경쟁 속에서 키 재기를 하며 살아왔던 눈 먼 날들, 어쩌면 그런 시간들이 있어 지금의 작은 행복에 감사할 줄 아는지도 모른다.대웅전 법당에 들어가 석조아미타여래 삼존불 앞에서 백팔 배를 시작한다. ‘비록 적게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종무소 입구에 걸려 있던 글이 법당까지 따라왔다. 손에 잡히지도 않은 것들을 끝없이 좇으며 쉼 없이 달려왔던 가여운 내 육신과 마음을 어루만져 준 것은 언제나 작고 소박한 것들이었다.삼존불 옆으로 보이는 일타 큰스님의 인자한 미소가 빈 법당을 더 푸근하게 밝힌다. 법당 문 앞에 고여 있는 투명한 햇살, 더 이상 울지 않는 풍경, 모두가 숨을 죽이고 참선 중이다. 은행나무 그늘 아래 안기듯 자리 잡은 루(樓)의 처마 끝에는 빛바랜 염원들이 걸려 있다.조낭희 수필가그 아래로 조금 전 내가 들어왔던, 은행나무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는 출구가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면 출구는 다시 입구가 되어 바쁜 시간 속으로 이어지리라. 지보사에서 만난 오월의 말씀들은 까마득히 깊다.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면 아주 낮은 자세로 걸어오던, 작아서 혹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말씀들이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해마다 오월이 오면 지보사를 찾으리라. 내 안에 든 영원성을 잊고 만족할 줄 모를 때, 손 안에 움켜쥔 젖은 아픔들이 되살아날 때도 지보사를 기억할 것이다. 그때도 나의 기도는 언제나 한결같기를 바란다.“교만하지 않고 작은 일에 감사하며, 여름 풀냄새 같은 기도로 살아가게 해 주소서.”

2020-05-18

여름, 시 읽기를 위한 짧은 제목의 수사학

날이 따뜻해져 완연한 여름이 되면 몸도 마음도 조금씩은 활동적인 상태가 된다. 이번 여름에야말로 책을 좀 읽고자 마음이 동한 분들도 적지 않으시리라. 눈에 띄게 한산해진 서점에 들러 서가를 살펴보면, 이 계절에 읽기에 좋은 시집이며, 소설집들의 제목이 적잖게 눈에 띈다. 요즘 나오는 문학책들은 대부분 한 번 들으면 그야말로 쉽고 재치 있는 제목들을 갖고 있어 선뜻 쉽게 꺼내볼 수 있다.예전 시인들은 분명 시어의 메타포, 즉 은유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생각하여,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에 달라붙어 있는 풍부한 의미들을 살리고자 애썼다. 반면, 요즘 시인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독자의 공감을 부른다. ‘진달래꽃’이라는 단어 하나에 한 인간이 살아온 삶과 그 분위기, 욕망 등이 다 담겨 그 가벼움 속에 둔중하고 두터운 의미들이 들어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면, ‘진달래꽃’이야 그저 아무 것도 가리키지 않는 것이라는 시대도 있는 법이니 어느 쪽이 더 낫다거나 더 시의 본질에 가깝다거나 할 수는 없다.최근 일본 정부 환경상인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90CE)의 독특한 화법이 여기저기에서 화제였다. 인터넷에는 재밌는 밈(meme)으로 다뤄져 여기저기서 인기를 얻고 있는 한편,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그의 화법 중 흥미로운 것은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지금대로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야말로 일본은 지금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말하고 있는데, 그 원인과 결과가 동어이다. 논리적인 언어 사용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의아한 기분이 들 만하다.물론 정부각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겠지만, 시를 좀 읽어보신 독자들이라면 이런 어법이 그리 낯설지 않은 분이 많을 것이다. 1993년 성철 스님이 열반에 드실 무렵, 남기셨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한 마디의 말은 우리 사회 전반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또 있을까. 또한 이 말을 산이 산이며, 물은 물이라는 그대로의 말로 받아들였던 사람이 또 있을까.우리는 하나의 말이 단지 하나의 의미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의 말 속에는 그 말의 표면적 의미를 넘어서는 온갖 의미들이 착 달라붙어 있다. 때로는 비꼼 같은 대상에 대한 태도가 언어에 포함되기도 하고, 그것을 위해 반어나 역설 같은 수사법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또 우리가 시를 읽을 때 하나의 단어에서 들려오는 화성과도 같은 울림은 바로 그 시가 펼쳐놓은 은유와 상징의 그물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 기형도의 ‘빈집’에서 온갖 종류의 음색을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이처럼 인간의 언어 사용이 고도화된 시대 속에서는 자칫 고색창연한 언어적 전통이 무겁게 내려앉기 쉽다. 윗사람의 한 마디를 이리저리 곱씹으며 그 속에 담겨 있는 진의를 파악해야 했던 사회의 분위기는 얼마나 무거운가. 분명 그런 시대의 시는 그 고도화된 언어를 더 나은 방향으로 풍요롭게 표현하여 방향을 틀거나 오히려 당연한 것은 당연하게 말해버린다. 모두가 하나의 말을 듣고 하나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는 시대에는 하나의 당연한 말이 잔잔한 물 위의 파도가 되는 것이다. 앞서 일본의 환경상은 말의 책임을 져야하는 자리에서 말의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니, 그런 어법을 ‘잘못’ 이용했던 셈이고, 웃음거리가 될 만하다.다시, 서가에 꽂혀 있는 시집들의 제목을 쭉 눈으로 훑는다. 어떤 제목은 무언가 풍부한 함의가 담겨 있을 것만 같아서 눈길이 가고. 어떤 제목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어서 눈길이 간다. 시의 언어에 있어서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그때의 내 기분과 계절의 냄새가 있을 뿐이다./홍익대 교수

2020-05-18

부부의 날을 기념하여

고광영국민연금공단 포항지사장국민연금은 1988년 시행 이래로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해 연금수급자 500만명 시대를 열었고, 2025년에는 연금수급자가 700만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지난해 국민연금은 496만명의 수급자에게 약21조원의 연금을 지급했으며, 올해로 33돌을 맞은 국민연금은 제도가 무르익으면서 부부가 함께 국민연금에 가입해 노후에 각자 노령연금을 받는 부부수급자가 35만쌍을 돌파했다.연금액도 꾸준히 높아지고 있는데, 개인최고 연금액은 월 220만2천원이고 부부합산의 경우 월 364만4천원에 달해 국민의 행복한 노후를 책임지는 사회안전망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국민연금연구원에 의하면, 노후에 부부가 평범한 생활을 유지하려면 월243만원이 필요하고, 최소 생활비는 월 176만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노후대비의 의존도는 결국 본인 스스로 해결해야하는데 정부가 기초연금 등 노후복지 관련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의존은 10% 미만이며 배우자에 대한 의존은 20%, 자녀는 5%로 나타났다. 이에 반해 본인의 책임은 60%가 넘는 것이다. 현대 의학의 발달로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82.7세를 넘었고, 이는 선진국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노후준비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결론은 부부가 함께 국민연금에 가입하면 노령연금을 각자 받기 때문에 노후는 2배로 든든하다. 한편, 사람의 생명은 유한하므로 부부가 모두 노령연금을 받다가 배우자가 먼저 사망하면, 국민연금 중복급여 조정규정에 따라 둘 중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자신의 노령연금을 선택하면 노령연금에다 유족연금의 30%를 추가로 받을 수 있고, 유족연금을 선택하면 유족연금만 받는다.국민연금을 많이 받으려면 가입기간과 납부금액을 늘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업주부, 학생 등 소득활동을 하지 않아 의무가입대상은 아니지만 본인 희망하여 자발적으로 국민연금에 가입할 수 있는 임의가입제도를 활용하거나 반·추납신청 등으로 가입기간을 늘릴 수 있으니 국민연금에 대해 궁금한 사항은 전국 국민연금공단 지사(국번없이 1355)로 문의하면 된다.

2020-05-18

코로나19 이후 세계정치경제의 향방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코로나19의 세계적 팬데믹(pandemic)은 세계정치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예고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가 “폭풍은 지나가고 인류는 살아남을 테지만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살 것”이라고 한 것처럼, 이 ‘새로운 세상’은 우리에게 ‘도전이자 기회’이다.세계 각국은 감염병 확산에 대처하기 위하여 자국 우선주의와 각자도생(各自圖生)전략을 채택하였다. 세계정치질서를 주도해 왔던 미국의 리더십은 크게 실추되었고, 미국과 중국은 서로 상대방에게 코로나 확산의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향후 전략적 패권경쟁이 더욱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유럽을 표방했던 EU회원국들 역시 위기상황에서는 국익과 자국민 보호가 우선이었고, 강대국의 재정지원에 종속되어 있는 WHO는 국제기구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코로나는 경제세계화의 상징이었던 물자와 인력의 자유로운 왕래를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진출기업을 다시 국내로 불러들이는 이른바 ‘리쇼어링(reshoring)’을 촉진하고 있다. 그 동안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수반되어 온 부작용과 취약성이 반세계화(anti­globalization)를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포스트 코로나(post­corona)시대의 세계정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코로나의 대처과정에서 글로벌 파워(global power)인 G2의 리더십이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견국(middle power)들의 역할공간이 확대될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료시스템의 부실이 드러남으로써 선진국들의 신화가 깨어졌고, 코로나 진원지인 중국의 강압적·음성적 대응방식은 결코 방역모델이 될 수 없다. 반면에 최소한의 통제 속에서 민주적이고 투명한 대응으로 선방하고 있는 한국과 같은 중견국들의 역할과 책임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현행 ‘세계화 분업체계’의 위험성이 드러났기 때문에 국제공급망의 재편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특히 과학기술이 낙후한 후진국들의 고통이 심각하다는 점에서 경제적 남북문제도 민감한 이슈로 부상될 것이다. 게다가 코로나19와 같은 세계적 감염병 확산은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정치경제질서의 향방은 상당히 유동적이다.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경을 초월하는 질병·마약·환경·테러 등의 초국가적 인간안보(human security) 이슈들에 대처하는데 있어서 각자도생 전략은 한계가 있다. 더욱이 우리는 GDP대비 무역의존도가 70%에 달하는 개방경제이기 때문에 국제교류협력이 생존과 번영의 길이다. 따라서 IT강국으로서 향후 새로이 형성될 세계정치경제질서의 논의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국력과 빈부의 격차를 넘어 국제적 연대와 협력을 바탕으로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의 표준, 즉 ‘뉴 노멀(new normal)’은 우리의 국익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인류의 미래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2020-05-18

저무는 공인인증서 시대

공인인증서는 인터넷상에서 신원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자정보로, 국가에서 지정한 공인인증기관이 발급한다. 1999년 시행된 ‘전자서명법’에 기반해 도입됐다. 금융결제원·코스콤 등 국가에서 지정한 공인인증기관(CA)에서 실명 확인을 토대로 발급하며, 은행·증권사·우체국 등의 등록대행기관에서도 발급 신청이 가능하다. 사용범위는 인터넷 뱅킹·온라인 증권거래·보험 가입 등의 금융 서비스, 기업 간 전자 입찰·계약·세금계산서 발행 등의 전자상거래 관련, 세금 납부·전자송달·증명서 발급·등기 업무·실적 신고·수출입통관·예비군 등의 정부 민원, 전자문서 전달·전자출원·전자처방전·인터넷 청약 등 다양하다.도입 초기에는 전자상거래 활성화 등에 기여했으나 시장독점을 초래하고, 까다로운 발급절차로 전자서명 기술과 서비스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2018년 9월 정부가 공인인증제도를 폐지하고 다양한 전자서명 수단을 활성화하는 내용의 ‘전자서명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공인인증서 폐지를 골자로 한 전자서명법 개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오는 20일 열리는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 상정, 처리될 전망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지정하는 공인인증기관과 공인인증기관에서 발급하는 공인인증서 개념을 삭제하고, 공인·사설 인증서를 모두 전자서명으로 통합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공인인증서가 도입된 지 21년만에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공인인증서의 독점적 지위가 사라지면 향후 인증플랫폼 시장의 급성장이 전망된다. 생체정보, 클라우드, 블록체인 등 다양한 전자서명 기술 경쟁을 활성화해 국민의 생활이 더욱 편리해질 것으로 보인다. 국민을 불편하게 하는 규제는 하루라도 빨리 개선돼야 마땅하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5-18

시민단체 출신들의 ‘정치 먹튀’

강희룡 서예가역사 속에는 수많은 인생을 희생시키며 한 사람의 영웅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그냥 흔적도 없이 소멸되는 한 많은 인생이 수도 없이 많다.조선 역시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스러졌고, 19세기 말 마지막 왕조의 어지럽던 정치상황은 조선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대한제국으로 고쳤으나 14년을 지탱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5년의 긴 세월 일제강점기라는 어둠의 터널에서 허우적대다 1937년 시작된 전쟁이 1945년 원자폭탄의 위력에 무릎 꿇자 해방됐다. 이 기간 중 한반도 백성들은 전시체제 하에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근로정신대’가 조직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전쟁 수행을 위한 노역에 투입되기 시작했으며, 여성 대원으로 이루어진 ‘여자근로정신대’도 결성됐다. 이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근로정신대라고 모집해 놓고 위안부로 끌려가거나 성 착취를 당하는 경우가 잦았다.1990년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진실규명과 힘들게 사는 생존자 할머니들을 지원하려는 37개 여성단체들이 모여 만든 연합체가 바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다.이 단체는 2015 한일합의무효화와 일본군성노예제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100만 시민들의 참여로 2016년 설립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과 2018년 7월 통합해 현재는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되었다.이 시민단체 출신들을 적극 기용하기 시작한 노무현정부부터 이들의 존재감이 급격히 커진 원인은 위안부 단체 활동 자체가 진보진영에서 여성운동의 상징 중 하나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정의연’의 전신인 정대협 출신 간부들이 장관, 국회의원, 청와대 인사 등 적잖게 배출되면서 일각에선 시민운동의 순수성에 의심을 둔지도 오래다. 실제로 상당수 피해 할머니들은 노무현 정부시절부터 자신들을 이용한 정대협 출신 정치인들에게 강한 반감을 표시해 왔다.위안부 피해자 모임인 세계평화무궁화회 소속 할머니 33명은 그해 ‘위안부 두 번 울린 정대협은 문 닫아라.’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이미 정치인으로 둔갑한 정대협의 전, 현직 관계자들에게 그들이 지금까지 한 일이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인 관련 의혹을 폭로한 이용수 할머니 역시 윤 당선인의 국회입성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자신들을 이용해 정치인으로 탈바꿈하는 윤 당선인을 향한 이용수 할머니의 지적은 2000년대 초부터 고수하고 있는 다른 할머니들 입장과 사실상 판박이다. 허영구 전 민노총 부위원장 말처럼 지금 우리 사회에는 당사자가 아니라 대리인, 거간꾼들이 조직의 고난을 거치며 쌓아 온 성과를 낚아채 정치적 대표가 되는 ‘정치 먹튀’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직위를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회원이나 후원자들이 그들의 지위를 팔아서 국회의원 배지 달라고 말한 적도 위임한 적도 없다. 참 시민단체는 그냥 순수한 목적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단체일 뿐이다.

2020-05-18

균형발전은 ‘서울화’가 아니다

김주일한동대 교수우리나라 국토계획의 역사는 큰 정책 전시관과 같다. 국토 균형발전과 관련된 정책은 더욱 그러하다. 각종 지방경제 진흥 정책에서부터 수도권을 억제하는 정책, 그리고 최근 수도권의 행정기능과 공기업을 지방으로 이전시키는 정책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모든 유형의 정책이 동원돼 왔다.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균형발전에 대해 목말라한다. 균형발전은 신기루와 같이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인가. 아니면 우리가 뭔가 잘못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사실 우리나라에서 균형발전이란 지방의 ‘서울화(Seoulization)’로 이해되어온 듯하다. 지방에서 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그렇다. 제한된 시간 속에 사업을 따오고 결과도 얻어야 하는 지방의 입장에서 가장 손쉬운 선택은 다른 곳의 사례들을 가져오는 것이다. 지자체는 항상 인력, 아이디어 부족에 허덕이고, 결국 벤치마킹이라는 명목으로 다른 곳의 사업을 모방하곤 한다. 당연하게, 모방의 대상은 주로 수도권과 대도시들이다. 이런 ‘카피캣’ 현상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선거다. 총선, 지선을 막론하고는 대표 공약은 대부분 ‘우리지역에 이런 저런 사업을 도입하겠다’는 것들이다. 마치 지역을 수도권처럼 만들어줄 것 같은 공약이 많다. 이러다 보니 지역 발전 정책은 ‘서울화’ 내지 ‘서울 따라가기’가 돼버리고 만다. 하지만 형태상으로 서울을 따라간다 해도 도시의 활력은 복제될 수 없다. 결국 정책의 효과는 기대를 채우지 못하고 지방은 또 다시 좌절하게 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혁신도시, 기업도시와 같은 정책에도 함정이 있다. 수도권의 일부를 지방으로 양보하는 통 큰 정책이지만 여기에도 ‘서울화가 곧 균형발전’이라는 코드가 들어 있다. 아무리 좋은 균형발전 정책이라도 지방의 독자적인 노력이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금싸라기 같은 수도권의 기능이라 해도 그것이 서울의 중력권을 떠나는 순간, 그 효능은 예전과 같지 않다. 지방의 자체적인 혁신이 아닌, 주어진 혁신도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서울화가 균형발전의 방향성이 될 수는 없다. 서울화 정책들은 단기적으로는 그럴듯 해보일지 몰라도 결국은 지방의 자발성, 독자성을 잠재운다. 시간과 노력이 좀 더 들어가더라도 지방 도시들이 스스로의 발전 방향성을 찾도록 도와주는 방안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최근 지방의 자율성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의 지원사업이 구상되고 있는 점은 의미가 크다. 지방이 독자적으로 정책 사업을 기획·제안하는 가운데, 중앙정부는 장려·후원하는 방식의 균형발전 정책이다. 사업의 형식과 내용, 결과물 모두에 있어 지방이 독자성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한다. 깊고 깊은 지방의 위기를 충분히 살펴보고 고민할 수 있도록 사업기간도 가능하면 제한이 없으면 좋겠다. 인구가 감소하고 지방 소멸의 우려가 나오는 시점에 각 지역의 독자적 생존력은 어차피 선택이 아닌 필수다. 앞으로도 이런 접근을 통해서 탈 중심화, 그리고 지역 자립으로서의 균형발전 정책이 정착돼갔으면 한다.

2020-05-18

가게 문을 다시 열기 전에

이제야 약간이지만 도시가 깨어나 몸을 뒤틀기 시작하는 듯하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마스크를 한 사람들의 표정도 다소 풀린 것 같다. 생활방역체계로 이행한 이후 거리에 사람이 조금 늘어난 것도 같고, 택시기사님 목소리에도 활기가 돌아오고 있다. 다만, 일찌감치 승강기에 비치한 손 소독제를 없앤 곳이 있고, 마스크도 하지 않은 채 좁은 승강기에서 통화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에는 눈살을 찌푸리기보다는 걱정부터 앞선다. 정부가 궁여지책으로 국민을 믿고 생활방역체계로 전환한 것이지, 우리나라가 코로나19라는 무서운 전염병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님을 모두 마음속에 새겨두어야만 한다. 전문가들은 당장 내년이라도 재발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여하튼 포항 지역에서도 코로나19 이후의 지역경제 회복을 위해 많은 지원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안도하여 안일하게 지금까지 닫아두었던 가게 문을 그저 열기만 해서는 V자 회복이 아닌 L자 회복에 그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만에 하나 코로나19가 아닌 또 다른 전염병-20, 전염병-21이 발생한다면 지금처럼 가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여는 상황만 반복할 가능성도 크다. 물론 그때도 지금처럼 정부가 있는 자금 없는 자금을 끌어모아 소상공인이나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재정자금을 투입할지는 미지수다. 상황에 따라서는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문제가 아니라 아주 국부적인 어쩌면 국내 한정 나아가 특정 지역에만 한정한 전염병이 있을 수도 있다. 일례로 조류인플루엔자나 구제역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피해지역이나 대상이 좁혀지겠지만 여전히 전통시장, 골목 정육점, 관련 식육을 취급하는 식당과 마트 매출은 떨어질 것이고, 해당 지역 방역을 위한 출입통제로 관광 관련 업종도 피해에서 벗어날 수는 없게 될 것이다.결국, 어떠한 위기 그중에서도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게 되는 전염병과 관련한 사태가 발생하게 되면 소비자의 행동 패턴은 지금과 거의 다르지 않게 나타날 것이다. 당연히 위기 발생과 그로 인해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될 소상공인들은 이번 코로나19사태에서 보여주었던 방식을 답습하기 쉽다. 이와 같은 위기와 대응과정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변화를 바란다고 해서 굳이 새로운 획기적인 어떠한 경영방침이나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지는 않다. 단지 신뢰를 쌓는 것뿐이다. 가게와 손님 간의 신뢰. 평소 자신의 가게를 찾아오던 손님들이 이번 코로나19사태로 발길을 끊었다면, 그렇지 않은 가게도 분명히 있었다. 가게 매출이 급감한 원인을 무조건 세계적인 코로나19 때문이라며 외부에서만 범인을 찾지 않았으면 한다. 최소한 1%라도 일부 원인이 자신의 가게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객관적인 판단을 하였으면 한다. 단골손님들이 굳이 말하진 않았으나 평소 자신의 가게가 비위생적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출입구가 너무 좁아 드나들 때 손님들과 부딪치기 쉽다고 여겨 이번 사태에 아예 발길을 끊었을 수도 있다. 다른 가게는 평소에도 전화 주문이 가능하여 집으로 배달해준 다음 배달원이 지참한 카드결제기로 결제하고 있었기에 이번 사태로 가게 문을 닫은 상태에서도 일부 매출이 있었던 반면, 자기 가게는 신용카드의 사용도, 배달도 불가능하였기에 가게 문을 닫아 피해가 더욱 컸었을 수도 있지는 않았나 근본부터 생각해보아야만 한다.최근 정부는 적어도 1가구당 40만 원 정도의 소비 여력을 만들어 주었다. 일정 지역 범위 내에서만 쓸 수 있고 사용기한도 정해진 특별조치다. 분명히 가게 문을 연다면 이번에 소비자 지갑에 들어간 돈 중 다소 얼마라도 거래해 왔던 인근 소비자를 통해 가게 매출이 일어날 가능성은 생겨났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을 무작정 바라고 가게 문을 연다고 해서 지금 비상시국 전환을 위해 정부가 마련한 경기회복 조치에 따른 수혜가 자기 가게까지 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면 큰 오산이다. 지금은 사태가 완전히 종식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이며, 소비자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사회적 거리 두기와 위생, 최대한의 비접촉, 비대면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게 문을 열기 전에 어떻게 해야만 할까.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다음과 같이 일부 방향성만큼은 받아들여 앞으로 펼쳐질 비대면, 비접촉의 시대에도 가게를 지켜나가겠다는 마음가짐을 더욱 굳건하게 다져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첫째, 그동안 카드수수료가 들고, 당장 현금화하기 어렵다는 등 여러 이유로 오직 현금결제만을 선호하였던 가게라면 최소한 고객이 신용카드 정도는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할 필요가 있다. 이번 정부지원금만 하더라도 현금 지급 대상이 많지 않고 상품권보다는 오히려 신용카드, 체크카드, 선불카드 등을 선택하는 소비자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역소비자 대부분은 신용카드를 중심으로 정부지원금을 사용하기 쉬운데 자기 가게만이 현금결제를 고수한다면 가게 문을 열지 않은 것과 별다른 차이가 생겨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자기 가게도 온라인 판매망을 갖춘다면 최상이겠지만 그러려면 돈도, 시간도 들여야만 한다. 하지만 적어도 일정 금액 이상을 산 고객에게는 집까지 배달해주는 서비스는 쉽게 도입할 수 있다. 현대 소비자에게 택배, 배달은 일상화된 지 오래다. 지금은 ‘신뢰’하는 가게에 전화로 ‘회’까지 주문하여 배달받아 먹고 있는 시대다. 하물며 썩지 않는 공산품을 취급하는 가게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종전까지 찾아가야만 하던 가게에서 전화로 배달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면 다시 위기가 오더라도 가게가 입는 피해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 것은 분명하다. 셋째, 음식점이라면 더욱 앞으로의 변화를 수용할 태세를 갖추어야만 한다. 철저하게 자기 가게의 특성에 맞추어 서비스를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 음식점은 상시 방역합니다’라고 적어둘 필요도 있다. 가능하다면 테이블마다 칸막이는 물론이고 아예 자리를 한 방향으로만 배치하는 방법도 좋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투명 안면 마스크를 주방은 물론 홀서빙 직원들까지 착용을 의무화해야만 할 것이다. 손님들은 일일이 주인에게 지적하지 않는다. 안가면 그뿐이다. 앞으로 음식점의 성패는 이처럼 적어도 가시적인 위생 수준의 확보가 매출을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 각자의 수저가 모두 넘나드는 전골류를 서비스하는 가게라면 1인당 뚝배기로 배식하는 방법도 필요할지 모른다. 예전에는 고급음식점이나 직원들에게 모자를 쓰도록 했다면 이제는 골목 식당도 그래야만 살아남는 시대가 왔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넷째, 전통시장에서는 여전히 모든 손님이 한 번씩은 만져보고 일일이 필요한 무게만큼 저울에 달아야만 전체 가격을 알게 되는 방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작은 분량별로 미리 분리 또는 포장해두고, 가격도 킬로그램당이 아니라 소량으로 구분해둔 분량별 가격을 표시해둔 곳일수록 손님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옛날처럼 주인과 흥정하고 일일이 가격이나 원산지를 물어야만 하는 곳일수록 비대면 비접촉시대에는 살아남기 힘들다. 신용카드가맹점임을 밝힌 가게일수록 생존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택배까지 된다면 금상첨화다.이상과 같은 가게의 변화는 시청공무원이나 시민들이 도와주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가게의 흥망성쇠를 책임지는 가게 주인만이 결정할 수 있다./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김진홍

2020-05-17

두꺼비 대이동

두꺼비는 개구리목의 두꺼비과로 분류되는 개구리와 비슷한 양서류다. 몸길이 80∼120㎜정도로 개구리 중에는 가장 크다. 주둥이는 둥글고 둥에는 불규칙한 돌기가 많이 나 있다.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몽골 등지에 주로 분포돼 있다. 저산지대의 밭이나 초원에 서식하는 동물이다. 요즘 같이 도시화한 곳에는 이제 보기 드문 동물이 됐다.두꺼비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개구리와 두꺼비가 뱀을 먹는 사건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 선조들은 신령스런 동물로 여겼다. 두꺼비와 연관된 설화나 민담도 많다. 민가에서는 집지킴이 혹은 재복의 상징으로 삼았다.크고 튼실하게 생긴 갓난 아이를 “떡두꺼비 같다”고 한다거나 금두꺼비를 만들어 가정에 재물이 들어오길 바라는 민가의 풍속이 이런데서 유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올해도 대구 수성구 망월지에서 새끼 두꺼비의 대이동이 시작됐다는 소식이다. 욱수동 망월지에서 산란을 거쳐 성장한 새끼 두꺼비 수백만 마리가 서식지로 돌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새끼 두꺼비의 대이동은 자연생태계의 모습을 그대로 실감나게 보여줄 수 있을뿐 아니라 생태 가치 측면에서도 보존할 만한 일이다.매년 2월 성체 두꺼비 수백 마리가 욱수산에서 망월지로 내려와 산란을 하고 돌아간 지 60∼70일 만에 나타나는 이 모습은 매년 전국적 화제를 뿌리고 있다. 2010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으로 선정하기도 했다.그러나 이곳도 망월지를 메우자는 일부 지주의 법정소송으로 개발과 보존의 문제로 진통 중이다. 두꺼비의 대이동 내년에 또 볼 수 있을까. /우정구(논설위원)

2020-05-17

‘태종·세종’이 왜 거기서 나와?

안재휘 논설위원정치권이나 정치 논객들이 종종 써먹는 비판 용어 중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는 비유가 있다. 용비어천가는 원래 조선 세종 때 선조인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에 이르는 6대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다. 정치 이야기에서 이 말은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이 특정 실세 보스를 향해 비판의식을 거세하고 과장된 수사법으로 칭송만 일컫는 현상을 비꼬기 위해서 주로 동원된다.지난 4·15총선 결과와 관련해 여당의 대승을 진작 예견했다는 반응이 없지는 않지만, 뜻밖이라는 표정도 상당수다. 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라는 표현까지 쓰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라는 탄식이 많다. 그 정서를 타고 일부의 메아리 없는 ‘부정선거’ 주장은 좀처럼 식을 줄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개헌선에 육박하는 숫자의 거대한 ‘범여권’ 의석을 당당히 거느리게 됐음은 역연하다.느닷없이, 여당 정치권에서 듣기 민망한 문비어천가(文飛御天歌)가 잇따르고 있다. 강원도지사에서 영어(囹圄)의 신세로 전락했다가 와신상담 끝에 국회로 돌아온 민주당 이광재 당선자가 시작했다. 그는 노무현재단의 유튜브 특별방송에서 “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은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새롭게 과제를 만드는 태종 같다”며 “이제 세종의 시대가 올 때가 됐다”고 말했다.그러나 그 며칠 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3년 동안 태종의 모습이 있었다면 남은 2년은 세종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 참모로서의 바람”이라고 고쳐 말했다. 이광재 당선인이 문재인 대통령을 노 전 대통령에게 ‘끼워팔기’하듯 표현한 일이 못마땅했던 것일까, 그는 문 대통령에게 ‘태종+세종’ 이미지의 화려한 포장지를 붙였다.정세균 총리까지 칭송대열에 동참했다. 정 총리는 페이스북을 통해 “지난 3년은 대통령님의 위기극복 리더십이 빛난 시기”라고 찬사를 띄웠다. 이쯤 되면 정부·여당 내의 작금 분위기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총선 압승 결과를 만들어낸 최대의 공신으로 불가사의한 지지율 고공행진을 일궈낸 문재인 대통령이 꼽히는 분석은 부인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그 시혜를 풍성히 받아든 여권 인사들이 감탄을 외치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태종+세종’은 너무 심했다. 왕권강화로 조선의 기틀을 세운 태종과 백성을 사랑한 불세출의 군주 세종을 함께 묶어 붙이는 찬송가는 좀처럼 소화하기 버겁다. “나라가 조선 시대로 돌아간 듯하다”는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의 촌평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민주주의가 만개한 나라에서 왜 하필이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봉건시대 군주들의 이름을 줄줄이 소환하는지 께름칙하다. 총선 대승이 아무리 흥겹더라도 꼭 기억해야 할 덕목은 있다. 내리막길에 정말 필요한 것은 액셀러레이터가 아니라 브레이크라는 교훈을 아주 망각하지는 말기를 부탁한다. ‘태종·세종’이 왜 거기서 나오나.

2020-05-17

미래통합당이 개혁에 성공하려면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정당은 정치적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선거에 승리하는데 기본 목적이 있다. 지난 4·15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은 처절하게 패했다. 선거 참패 원인을 갑작스런 코로나 재난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야당의 무능 때문이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물론 180대 103이라는 민주당의 승리는 국정운영을 잘해서 얻은 결과는 결코 아니다. 야당의 시대에 뒤진 당의 정체성, 조직과 운영 방식, 총선 전략이 실패한 초래한 결과물이다. 미래통합당은 총체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이러한 보수 야당의 위기는 그 연원이 상당히 오래다. 박근혜 정부의 탄핵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파적 이해에 침잠한 당 지배구조, 대통령의 불통의 리더십, 친박의 오만과 부패는 반동의 정당으로 당 위상을 추락시켰다. 대통령과 당 지휘부는 광화문의 수천만 누적된 촛불 함성에 적절히 대응하지도 못했다. 보수 당내의 친박과 비박이라는 계파적인 갈등은 위기 수습은커녕 책임 전가로 일관하였다. 결국 탄핵에 가담한 비박은 신당을 만들고, 친박은 반성은커녕 탄핵에 동조한 탈당파를 비난하는 형국이 연출되었다.미래통합당은 먼저 당 개혁을 위한 당의 정체성부터 확립하여야 한다. 미래통합당은 합당 후에도 당의 정체성은 오리무중이다. ‘탄핵의 강’을 건너자는 유승민 의원의 주장은 아직도 당의 발전의 걸림돌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당내 강보수의 주류는 돌아온 비박을 아직도 배신자 프레임으로 가두려고 한다. 탄핵당한 대통령 시의 총리가 당 얼굴이 될 때 당의 정체성은 더욱 위기에 봉착했다. 보수 정당은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중시하는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야한다. 야당은 ‘개혁 보수’, ‘참 보수’에서 당의 정체성을 찾을 수밖에 없다.주호영 새 원내대표는 당 조직을 개편하여 정당을 역동적으로 운영할 책임이 있다. 세계 선진 보수 정당은 당 조직과 운영을 새롭게 정비하여 보수층의 지지를 회복하였다. 미래통합당은 전통 보수 정당인 미국의 공화당과 독일 기민당의 역동성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우리의 국가 위상이 G20에 이르고 4차 산업시대 진입했는데도 한국의 보수정당은 아직 ‘개발 독재 시대’의 환상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탈 이념화 시대가 도래한지 오래인데 반공과 냉전적 사고에 갇혀있다. 야당은 영남 지역 당, 노인당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야 개혁은 성공할 수 있다. 미래통합당은 ‘뇌가 없는 무능 정당’이라는 비판을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한국 야당의 이러한 위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역동적인 한국 정치는 급변하는 민심처럼 요동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등락을 반복하는 것도 한국 정치의 한 단면이다. 2022년 지방선거와 대선은 아직 약 2년이 남았다. 미래통합당은 당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중도 보수 세력의 지지를 회복해야 한다. 위기 시마다 처방전으로 썼던 비상 대책위원회 만으로 병의 근원은 다스릴 수 없다. 김종인 신드롬에 너무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야당은 ‘미래도 통합’도 없는 당명부터 바꾸고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임해야 한다.

2020-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