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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개와 사람, 많이 닮았고 많이 다르다

모든 개들은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까지도 정확히 감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개들은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끼리의 만남에서 상대방 눈썹의 작은 움직임에도 얼굴 표정의 변화가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개들도 사람의 작은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사실 개는 소리보다는 손동작과 같은 시각신호에 더 쉽게 반응한다. 앞 또는 뒤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는 것을 사람들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지만 개는 네온사인을 보는 것처럼 뚜렷하게 느낀다. 몸을 기울이는 방향의 변화는 개에게 매우 중요한데, 앞 또는 뒤로 1∼2㎝만 기울기가 달라져도 겁에 질린 길 잃은 개를 우리 쪽으로 유인할 수도 있고 쫓아버릴 수도 있다. 사실 개를 사람들 앞으로 오게 하려면 개로부터 돌아서거나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개를 당신 앞으로 오게 하는 횟수를 늘릴 수 있다.사람들이 개와 함께 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하고 있는 모든 동작들, 즉 시각신호들은 개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개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살펴보면 부분적으로나마 밝혀낼 수 있다. 사실 사람들은 개가 사람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점 때문에 개에게 끌린다.개는 사람들처럼 실수투성이고 다정하며, 혼란스러워하고 쉽게 실망하고 즐거움을 열망하고 친절과 작은 관심에 감사할 줄 아는데 이러한 공통점들이 사람과 개의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좋아하는 행동을 개도 좋아할 것이라 생각하여 실수를 하는 경우들을 보게 되는데, 많은 어린이들이 개를 안아주기 위해 팔을 뻗었다가 개에게 위협을 받거나 실제 얼굴을 물리는 사례도 보게 된다. 아이들은 개를 꼭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는 것이 따뜻한 사랑의 표현이라 생각하는 반면, 개는 그 포옹을 무례하거나 위세를 부리려는 위협적인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길을 가다 인사하고 싶은 개를 만나면 몇 걸음 떨어져 멈춘 후 정면보다는 옆에 서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개를 무작정 쓰다듬어서는 안 된다. 길거리를 지나는 낯선 사람들이 너도나도 우리 몸에 손을 댄다면 어떤 기분일지를 상상해 보면 된다. 만약 개가 긴장하지 않고 평온한 상태로 다가온다면 개의 머리 위가 아닌 아래쪽에 손을 내려서 냄새를 먼저 맡게 해주어야 한다. 낯선 개들을 만질 때는 항상 턱 아래 또는 가슴을 만져야 하는데 절대 머리 위로 손을 뻗지 않아야 한다. 손을 펼쳐 누군가가 우리의 얼굴 쪽에 갑자기 손을 뻗어서 뒤통수를 만진다고 상상해 보면 그런일을 당하는 개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이동훈오늘날 전 세계에는 약 4억마리의 개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최근의 개들은 유기농 식품, 그레인 프리 식품을 먹고, 개 전문 척추지압사, 개 전문 스파, 개 전용 탁아소와 유치원에서 놀고 연간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장난감을 소비하고 있으며, 고급화된 샴푸와 에센스를 사용하고 있다. 아이를 잘 낳지 않는 이 시대에 반려동물은 사회의 새로운 흐름과 트렌드를 만들어 내고 있다. 반려동물들을 떠나보낼 때 4억명의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 살든 함께 깊은 슬픔을 느낀다.신이 반려동물을 창조한 이유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사랑과 헌신, 조건없는 사랑을 깨닫게 해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반려동물과 사람들은 많이 닮았고, 많이 다르다. 사람이 개에게 보여주는 행동들이 개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더 많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서라벌대 반려동물학과 학과장

2019-11-26

지역의 활발한 메세나 활동을 기대

김진홍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한 나라나 지역의 문화예술이 꽃을 피웠다면 그곳의 토양에는 반드시 선조들이 남긴 유무형의 유산을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적 소양과 정신문화 유산의 철학이 존재한다. 또 그러한 지역일수록 밑바탕에 흐르는 정신적 유산은 문화예술의 맥을 잇는 후손들의 철학으로 녹여져 새로운 독특한 문화의 흐름을 탄생시키기 마련이다. 문화예술 활동의 원리는 컴퓨터의 작동원리와 유사하다. 한 지역의 문화예술 전반을 관통하는 정신적 문화유산은 마치 컴퓨터의 운영체계가 수행하는 역할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일관된 큰 틀로서 작동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예술회관, 극장, 공연시설 등과 같은 창작무대가 컴퓨터의 하드웨어라면 그곳을 무대로 열리는 각종 행사나 공연프로그램은 소프트웨어다. 실제 해당 지역의 문화예술 유산을 계승하고 관련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문인, 사가, 예술가, 학자들은 어디에 속할까. 컴퓨터에 비유하면 하나하나가 데이터일 것이다. 양질의 데이터가 많아지고 다양해질수록 큰 틀인 운영체계 속에서 작동하는 소프트웨어들은 더욱 잘 돌아가고 결과적으로는 매우 양질의 결과물을 생산하면서 또 다른 새로운 데이터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마련이다.우리는 그동안 그저 제대로 먹고 사는데 급급하다보니 외형의 확장과 경제력에만 무게중심을 두어온 것도 사실이다. 물론 국제사회에서 여전히 힘의 논리는 경제력이 좌지우지하고 있지만 나라의 품격은 문화예술과 그 바탕을 이루는 인문학의 수준이 결정하는 것도 사실이다. 시험을 통한 경쟁사회에서 무시했던 인문학이야말로 지금과 같은 혁신과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영감이 모든 분야의 경쟁력을 키우는데 필요한 핵심소재인 것이다. 이는 이미 시카고대학의 시카고플랜이 입증한지 오래다. 앞으로도 문화예술과 인문학의 중요성은 변치 않을 것이다.그러한 맥락에서 지역의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하여 부를 축적한 기업이 해당 지역의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메세나(Mecenat) 활동은 가장 기초 데이터인 해당분야 종사자들을 확대재생산하는 효과를 높인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2019년 현재 한국메세나협회에서 메세나 활동에 참가중인 회원기업은 232개사에 이른다. 포항도 포스코, 티씨씨스틸 등 메세나 활동을 지속해온 기업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들 기업의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포항이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은 매우 많다.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활약할 젊은 인재들을 키워나가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저변의 확대와 다양성을 지닌 젊은 인재들이 무엇보다도 많이 육성되어야할 분야는 인문학분야다. 포항의 문화예술이 고유의 특성과 정체성을 나타내려면 그 밑바탕의 정신과 철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인문학적 기반이 함께 하여야만 균형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지역 청년들의 지역학,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이러한 때에 지역 기업들이 금액의 크기와는 무관하게 지역의 문화, 역사 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발적인 메네사 활동이 활발하게 확산되었으면 한다. 퇴근시간 빨라진 분들은 가족들과 꿈틀로 탐방이라도 한번 해보면 어떨까.

2019-11-26

세상을 변화시키는 특이점(Singularity) 3

유전자 가위질 기술은 인간 편집(human editing) 단계로 발전하리라 예측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 열풍은 이 기술 하나로 순식간에 잠잠해질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크리스퍼(CRISPR)를 통해 완벽한 시력, 절대음감을 지닌 청력, 불치병 요소를 완벽히 제거한 태아를 만들 수 있습니다. 거기에 우사인 볼트 수준의 빠른 다리, 최상의 아이큐, 심지어 대머리 유전자를 삭제해 디자인한 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거지요. 기술적 문제가 아닌 윤리적 문제만 남겨 둔 상태입니다.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까요? 유전자 가위질 기술은 불과 3만∼4만원 (30달러)정도면 시술이 가능합니다. 내 유전자가 혹시라도 불치병의 확률이 있는지를 체크해 볼 수 있는 유전자 해독 방법 역시 무척 저렴합니다. 200달러(25만원)에서 300달러(40만원) 내외만 지불하면 어떤 유전자적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 금새 판정해 휴대폰으로 알려주는 서비스를 미국에서는 이미 시행 중입니다.“장차 이룰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아니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는 사람이 미친 거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나오는 구절입니다.세상이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인간 수명 150세, 200세가 코앞 현실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노동에서 해방된 미래는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이런 시대에 우리의 삶은 과연 무엇으로 그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까요? 유전자편집이나 인공지능, 로보트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인간 고유의 특징, 그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면의 풍요입니다.성찰 능력, 직관, 따스한 감성. 오직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로움을 키워 가는 것. 따스한 손을 서로 잡고 격려하는 일. 이런 능력을 갖추려 애쓰는 일은 슬기로운 이들의 표지입니다./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1-26

사랑의 연탄

가스나 기름, 전기 등이 난방용 연료로 대체되면서 인기가 시들해진 것이 있다면 연탄이다. 서민의 연료로 서민의 삶과 애환을 함께 해온 우리의 연탄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민을 상징하는 대표적 아이콘으로 주목을 받았다. 서민들이 월동준비를 한다고 하면 김장과 더불어 연탄을 사두는 것을 의미했다. 겨울철 연료인 연탄이 집 창고에 가득 채워지면 그해 겨울은 큰 걱정없이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하다.연탄이 서민 연료로 인기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은 화력이 좋고 오래가는 경제성 때문이다. 그러나 일산화탄소 등의 가스와 나쁜 냄새가 나고 타고나면 많은 재를 남기는 단점도 있다. 우리나라는 전후 보급되기 시작해 30년 가까이 서민 연료로 사랑을 받았다. 연탄 값이 오를 때쯤이면 연탄기근 현상이 벌어져 시내 곳곳에는 연탄을 사려는 주부들이 연탄가게 앞에 줄을 서 기다리는 진풍경을 그 시절엔 자주 연출했다. 무연탄을 연료로 한 원통 모양의 땔감인 연탄은 공기구멍이 뚫려 있어 구공탄 혹은 구멍탄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런 연탄이 세월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도 저소득계층에게는 생활의 필수품으로 애용되고 있다. 경기가 나쁠 때면 연탄 수요가 갑자기 불어나기도 한다. 연탄 사용이 늘면 불경기로 서민의 삶이 팍팍해졌다는 뜻이다.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온기가 그리워지는 계절이 돌아왔다. 우리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되돌아 볼 때다. 사랑의 연탄 배달 소식이 올해도 어김없이 들려오고 있다. 포항에서도 대구에서도 전국 곳곳에서 따뜻한 이웃을 위한 사랑의 연탄 배달 소식이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고 있다.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계절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19-11-26

보수는 어떤 인적 쇄신을 해야 하는가

박준섭 변호사최근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조국 사건 이후에 27%까지 올라갔던 자유한국당 지지율이 다시 20% 가까이로 떨어졌다. 여기에는 박찬주 전 육군대장 영입논란이 악재로 작용한 면도 있다. 국민들은 민주당의 경제정책의 실패 등 총체적인 실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유한국당 등 보수당에 지지를 보내지 않고 있다. 이는 보수의 부활이 결코 상대방의 잘못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결국 보수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보수통합, 보수의 가치의 재정립, 인적쇄신이 필요하다. 인재영입 1호인 박찬주 대장은 자유한국당이 인적쇄신을 하면서 어떤 인재를 보수의 미래의 대표로 이해하고 있는지 국민들에게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되었다. 그는 군관료이고 대장으로 경력의 마지막에까지 도달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실여부를 떠나 권위주의적 처신이 문제되었고, 군사정권 시절에 인권침해가 논란이 되었던 삼청교육대를 교육의 장소로 인식하고 있어서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지에 뒤처져 보였다. 이번 일을 통해 국민들은 더이상 권위주의적인 인물이 보수의 대표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 안보와 산업화의 성과뿐만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 등 현대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관료출신을 주로 공천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베버가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썼던 1919년 당시에 독일은 참의원(국회의원)을 주로 행정부의 차관 출신으로 충당했다. 그 당시에는 국가정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관료밖에 없었다. 따라서 국가정책을 입법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국회의원으로 다시 소환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현재까지 차관출신 국회의원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이 시스템의 약점은 입법부가 행정부의 견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소위 통법부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가 행정부입법이 다수를 이루고 국회의원들이 당론에 따라 거수기 역할을 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국가정책을 입안할 국회의원을 관료 출신들이나 명명가들로 채워서는 안 된다. 아직은 약간 부족하더라도 정책을 이해하고 입법할 능력이 있는 비관료 출신 정치가들로 채워서 이들이 입법활동을 하면서 성장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정당은 독일과 같은 정치 선진국처럼 십대 때부터 정당활동을 하면서 국가정책을 이해하도록 키울 수 있는 시스템이 미약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정당에서 정책으로 무장된 당원들을 키워야 한다. 이들이 자라서 구의원, 시의원도 되고, 구청장, 국회의원으로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정당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될 기초가 생기고, 선진화된 입법부가 행정부의 견제와 균형역할을 제대로 할 수가 있다. 이번에 보수혁신을 위하여 인적쇄신을 하면서 관료출신 의원을 배제하고 다시 다른 관료출신으로 채우는 물갈이는 보수의 미래를 위한 인적 쇄신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9-11-26

숲으로 난 명상의 길… 영천 진불암(眞佛庵)

바쁘게 달려온 일상이 덧없어질 때, 숲길을 걸어보라.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지는 나뭇잎 세례가 찌든 몸과 마음을 정화시킨다. 몸은 젖지 않고 영혼이 촉촉해져 어느 새 활기를 되찾게 된다. 다리가 아프고 호흡이 가빠올 무렵이면 진불암 법구경이 마중을 나와 반겨주던 길, 한때 내가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길은 팔공산 비로봉을 향해 숲으로 이어져 있다.바람보다 먼저 떨어지는 나뭇잎 아래를 걸으며 일상을 잊는다. 한때의 사랑과 우수, 너무도 허무하게 지나가버린 젊음을 돌아본다. 욕망과 집착으로 눈이 멀었던 날들을 반성하고 작지만 빛과 같은 시간도 있어 흐뭇하다. 남은 생은 좀 더 베풀고 사랑하다 나뭇잎처럼 대지로 돌아가고 싶다. 인생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나를 돌아보는 일의 연속이다.다리가 아파온다. 공산폭포의 시원한 물소리가 들린다. 낙수 소리, 낙엽 지는 소리 그리고 책 읽는 소리만큼 맑고 겸허하게 하는 소리가 있을까. 첨단 기기의 소음 속에서 벗어나 자연에 온전히 나를 맡긴다. 발밑에서는 늦가을을 위한 시심(詩心)이 뒤척이고 나는 천천히 산길을 오른다.마음에도 제법 낙엽이 쌓일 무렵, 길가에 비스듬히 서 있는 지게 하나 만난다. 시멘트 길이 끝나고 자연 그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오솔길이 시작되는 구간이다. 반갑기보다 애잔하다. 속도와 편리함의 강박증을 벗어나 자연과 한 몸으로 살겠노라는 고독한 맹세 하나 보인다. 지게는 가볍고 견고한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지만 모노레일이나 드론에게 숲을 빼앗기지 않고 지켜내는 뚝심이 사랑스럽다.지게를 지고 산길을 오를 스님과 불자를 떠올린다. 내 몸 편하기를 바라지 않고 불편함을 감내하며 묵묵히 수행으로 삼는 사람들, 구도와 명상, 깨달음의 길은 편리함을 좇아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쌕쌕거리던 숨소리가 잠시 부끄럽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내릴 누군가를 생각하면 육신의 무게쯤이야 한낱 가랑잎에 지나지 않으리라. 깊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도 구도자가 된 기분으로 산길을 오른다.진불암 가는 길은 삶의 길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부도 하나 외롭게 서 있는가 하면, 연인처럼 다정한 부도도 만난다. 크고 작은 염원을 담은 돌탑들이 이야기를 건네 온다. 숲이 돌탑을 지키고, 그 돌탑들이 또 숲을 지킨다. 허리 잘린 돌비석에 새겨진 ‘나무아미타불’은 희미해져 가고, 쉬어가는 순간조차 엄숙하다. 숲이 커다란 법당이고 나무와 돌, 지저귀는 새들이 부처님이다.나도 모르게 ‘불정심 관세음보살 모다라니’ 진언을 왼다. 떠듬떠듬 기억을 되짚어가며 읊조리다 보니 벌써 진불암이 보인다. 작은 법당에는 관세음보살 부처님이 반갑게 맞아 주실 것이다. 십여 년 전 친구 따라 어색한 삼배를 올렸던 그날의 첫인연을 기억하고 계실까?진불암은 신라 진평왕(서기 632년)때 창건되었다는 설과 고려 문종때 환암혼수 국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많은 선지식들이 이곳에서 정진하여 도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비로봉 아래 있어 불자보다는 동봉을 찾는 등산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소박한 암자다.잠시 혼란스럽다. 내가 기억했던 진불암은 간 곳이 없고 변화의 몸살로 진통 중이다. 기와가 얹힌 반듯한 돌담 아래 비탈진 채마밭을 파헤치고 무법자처럼 서 있는 포클레인, 그 옆에 들어선 태양광, 모든 게 낯설다. 법당문을 열자 관세음보살 부처님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유리문 밖으로 부처님 진신 사리탑이 보인다. 적멸보궁으로 변해 있었다.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고향집에 온 것처럼 허전하다. 아무도 없는 빈 절을 이곳저곳 둘러보는데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심술을 부리며 따라다닌다. 요사채 주련으로 걸려 있는 함허득통화상의 게송이 눈에 들어온다.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세상에 태어남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며/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것.조낭희 수필가짧은 생, 무언가에 집착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게송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인데 나는 지금 절집에 와서 무엇을 구하는가.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느껴진다. 주련 옆에 ‘누구든지 과일, 차 드십시오’ 하얀 보드판 위에 쓰인 글귀가 보인다. 맞은 편 천막 아래 일회용 커피와 종이컵, 커피 주전자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한 번도 뵌 적 없는 스님의 정성과 배려가 추위에 떠는 길손을 맞는다. 드나드는 등산객들을 위한 세심한 노력들, 넉넉하지 않을 절 살림에 불자와 비불자를 가리지 않고 나그네를 맞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담장 너머로 늦가을 팔공산 자락이 환하게 들어온다.활짝 열린 공양간에 들어가 따끈한 커피 한잔으로 몸을 녹인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훈훈한 맛이다. 사람을 섬길 줄 아는 절, 그것은 곧 부처님을 섬기는 일이기도 하다. 처음 가도 편안한 암자, 진불암을 만나려면 훼손되지 않은 숲길을 한 시간쯤 올라야 만날 수 있다.

2019-11-25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리움의 음악

필자는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 길을 걷더라도 잘 정돈된 프랜차이즈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보다 문패가 붙어 있고 대문에 녹이 쓴, 무엇이 나올지 모를 예측불허의 오래된 골목을 헤매기를 좋아한다, 경주의 첨성대 앞을 거닐자면 먼 과거에도 누군가가 나와 같은 자리에 서서 저 건축물을 바라보았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고 이 후에도 누군가 같은 자리에 서리라고 생각하면 세월의 무상함마저 느껴진다.클래식 음악의 매력도 이와 비슷한데 오래전 누군가가 작곡한 것을 악보를 보며 연주한다고 생각하면 그 과정들이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무엇을 소유했는가’보다 ‘어떤 것을 경험했는가’를 더욱 중요시하며 자랑의 대상이 된다. 세월이 묻은 건물을 보거나 현재 상연되고 있는 뮤지컬 공연을 보고도 소중한 경험으로 여기는데 먼 과거에 만들어진 작품을 직접 연주하고 그 곡을 만든 이의 생각과 느낌을 공유한다면 일반적인 체험에서 느끼는 간접경험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필자가 피아노를 열심히 배우던 어린 시절, 유난히 만든 이의 감정이 느껴지는 곡들이 있었다. 바로 프레데릭 쇼팽의 음악이다. 쇼팽의 곡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은 다른 이들의 곡들과는 달랐다. 귀족적인 우아함과 도도함이 있었고 청년스러운 열정과 모험이 존재하였으며, 밤새 사랑에 이유없이 아파할만한 센티멘털함이 있었다.쇼팽은 여러 가지 고뇌를 가진 외로운 작곡가였다. 그가 연주활동을 위해 폴란드를 떠나 오던 날(쇼팽은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랑하던 여인(콘스타치아 글라도코프스카)과도 헤어져야 했으며 다시는 조국에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즉 조국을 떠나는 것부터 결심이 쉽지 않았다. 친구들은 떠나는 쇼팽에게 조국의 흙을 선물하였으며 그의 예감처럼 살아생전에 돌아오지 못했다.쇼팽이 폴란드를 떠나기 전 연주회를 열었는데 이때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며 고국과 작별을 고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그 전 해에 1번보다 먼저 작곡되었지만 출판이 늦어져 번호가 뒤바뀐 것이다. 쇼팽은 ‘피아노 작곡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피아노 전문 ‘싱어송 라이터’이다. 쇼팽의 작품 중 피아노곡을 제외하고 나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곡밖에는 남지 않는다. 그래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두 곡은 매우 귀한 오케스트라 작품의 곡이다.많은 평론가들이 두 협주곡의 관현악 파트가 수준이 낮다고 평가하며 심지어는 ‘누군가에게 오케스트레이션을 의뢰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지만 필자에게는 두 곡 모두 너무 아름다우며 청년 시절의 쇼팽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필자는 2번 협주곡을 더 좋아한다. 이유는 즉흥적인 쇼팽다운 특징이 더 많이 느껴져서이다. 하나 더 추천할 만한 오케스트라곡은 쇼팽 콩쿠르의 단골곡인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폴로네이즈 op.22’인데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는 바로 그 곡이다.쇼팽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작곡가가 아니었다. 당시 조국 폴란드는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분할통치를 받고 있었으며, 쇼팽이 떠난 지 1주일 후 독립을 위한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난다. 그가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고민한 흔적이 그의 편지에서 발견되며 돌아가 독립운동을 실천할 용기와 의지가 없음을 부끄러워한 것 같다. 하지만 다음 해 7월 러시아에 의해 바르샤바가 다시 함락되며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 당시의 감정은 ‘에튀드 op.10 No.12 혁명’을 들으면 느낄 수 있으며 당시 쇼팽이 느꼈던 분노와 독립에 대한 열망이 음악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포항예술고 교사

2019-11-25

‘닭고기+두부’ 조선 후기 화려한 연포탕

두부는 진화한다. 딱딱한 두부에서 부드러운 두부로, 순두부 넣고 끓여 먹던 단순한 두붓국에서 닭고기나 해물이 들어가는 프리미엄 두붓국으로. 조선 시대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두부는 진화한다. 목은 이색(1328~1396년)의 시다. 제목은 ‘새벽에 한 수를 읊다’이다,기름에 두부 튀겨 잘게 썰어 국을 끓이고/여기에 다시 총백(蔥白)을 넣어서 향미를 도와라/(후략)기름에 두부를 튀긴 뒤, 잘게 썬다. 두부가 어느 정도 딱딱하지 않으면 힘들다. 목은 시대의 두부는 딱딱했다. 가늘게 썬, 튀긴 두부로 국을 끓인다. 부재료는 총백이다. 다른 부재료는 없다. ‘총백’은 파 혹은 파의 뿌리 부분이다. 대파가 없던 시절이다. 지금의 쪽파 정도였을 것이다. 파 뿌리를 익히면 단맛과 특유의 향이 살아난다. 왜 날두부를 썰어 넣지 않고, 튀긴 두부를 사용했을까? 아마 맛 때문이었을 것이다. 날두부보다는 튀긴 두부로 끓인 국물이 맛있다. 기름을 가열하면 맛이 도드라진다. 튀기면 썰기도 한결 편하다.목은은 고려 말기, 조선 초기를 살았다. 고려 말에는 목은의 튀긴 두붓국 정도가 최고의 두부 요리였을 것이다.조선 초기까지도 별다른 두부 요리법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두붓국[豆腐羹, 두부갱]이다. 세종이 받아든 중국의 국서도 “두부를 정교하게 만드는 여인을 보내달라”는 것이었고, 성종 때, 도깨비 같은 존재가 먹었다는 음식도 단순한 두붓국[豆腐羹, 두부갱]이다. 조선 초기 두붓국은, 두부만 넣은 단순한 것이었다. 부재료는 쪽파 정도다.조선 초기 문신 사가정 서거정(1420∼1488년)의 ‘사가시집_권40_윤상인(允上人)이 두부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에 실린 두붓국이다.보내오신 두부, 서리보다 더 하얀데/잘게 썰어 국 끓이니 연하고도 향기롭네/부처 숭상한 만년엔 고기를 끊기로 했으니/소순이나 많이 먹어 가냘픈 창자 보하려네소순(蔬筍)은, 푸성귀와 나물의 새싹, 대궁이다. 두부는 “잘게 썰어 국 끓였다”고 했다. 역시 평범한 두붓국이다. ‘부처’ ‘고기를 끊는다’고 했으니 채식이다. 소박하다.두부, 두붓국은 끊임없이 진화한다.서거정의 시대를 지나 200여 년 뒤다. 유암 홍만선(1643∼1715년)의 ‘산림경제’는 소 백과사전이다. 여기에 ‘자연포법(煮軟泡法)’ 즉, 연포탕 끓이는 법이 나온다. 유암의 두부, 연포탕은 17세기 모델이다. 그 이전의 단순한 ‘두붓국[豆腐羹]’이나 그 후의 연포탕과도 다르다. ‘산림경제_2권_치선’ 중 일부다.자연포법(煮軟泡法). 두부를 만들 때 꼭 누르지 않으면 연하다. 작게 썰어 한 꼬치에 서너 개씩 꽂는다. 흰 새우젓국[白蝦醢汁, 백하해즙]을 물에 타서 그릇에 넣고 끓인다. 베를 그 위에 덮어 소금물이 스며 나오게 한다. 그 속에 두부 꼬치를 거꾸로 담근다. 슬쩍 익혀 꺼낸다. 따로 굴을 그 국물에 넣어서 끓인다. 다진 생강을 국물에 타서 먹는다. 극히 보드랍고, 맛이 아주 좋다._속방(俗方)서거정의 순수 채식 두붓국이 200여 년의 세월을 보내며 진화한다. 새우젓국과 굴이 들어가는, 제법 화려한 연포탕이다.재미있는 것은 이 내용의 끝부분에 있는 ‘속방’이란 단어다, 조선 시대 상당수 책은 근거를 밝힌다. 원나라 서적인 ‘거가필용’이나 우리 책 ‘향약집성방’에서 따왔다는 식이다. 속방은 ‘민간에서 취하는 방식’이라는 뜻이다. 넓은 의미로는 ‘다른 나라에서는 하지 않는, 그래서 유례가 없는 순수 우리식 방법’이다.연포탕은 화려하게 변신한다. ‘산림경제’의 ‘자연포법’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시기다. 숙종 7년(1681년) 6월 3일, 조정에서 ‘엉뚱한 일’이 벌어진다. 영의정 김수항이 여러 어사의 비리를 고발한다. 국왕 대신 지방의 실정을 조사하던 어사가 ‘비리, 적폐’로 몰린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이날의 기사 제목은 ‘김수항이 비리 어사들의 처벌을 아뢰고(후략)’이다.(전략) 영의정 김수항이 말하기를, “(중략) (어사) 목임일은 역마를 바꿔 탈 때 형장이 낭자하였으며, 또 본도(本道)의 찰방(察訪), 적객(謫客)과 어울려 산사(山寺)로 돌아다니며 놀았으며, 연포회(軟泡會)를 베풀기까지 하였습니다.”목임일은 숙종 7년(1681년) 평안도 암행어사를 지냈다. 암행어사는 말 그대로, 암행이 원칙이다. 어사 목임일이 ‘찰방, 적객과 어울려 산사에서 놀면서 연포회를 베풀었다’고 했다. 찰방은 조선 시대 역원의 관리 책임자다. 종6품으로 그리 낮지 않다. 이들은 지역의 도로를 관리하고 역이나 원의 시설, 인원도 관리했다. 암행어사는 암행이니,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마패를 보여주고 말을 구하고, 역원에 머물면 될 일이다.연포회는 연포탕을 끓여 먹으며 노는 모임이다. 적객은 귀양살이하는 이다. 죄인이다. 암행어사가 현직 관리, 죄인과 연포회를 베풀었다. 터무니없다. 신분도 다 드러났을 것이다. 어사 목임일이 먹었던 연포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그저 연포회를 베풀었다고 적었다. ‘산림경제’의 연포탕인지, 그 후 화려하게 변신하는 연포탕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연포회는 상당히 널리 퍼졌다.남인이었던 목임일은 나중에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등을 지낸다. 이때의 ‘연포회 사건’이 이력에 그리 큰 흠이 되지는 않았던 듯하다.약 150년 후쯤에 다산 정약용이 남긴 시가 있다. ‘다산시문집_제7권’의 “절에서 밤에 두붓국을 끓이다”이다. 상당히 화려한 연포탕이다.다섯 집에서 닭 한 마리씩을 추렴하고/콩 갈아 두부 만들어 바구니에 담아라/주사위처럼 두부 끊으니 네모가 반듯한데/띠 싹을 꿰어라, 긴 손가락 길이만 하게/뽕나무버섯 소나무버섯을 섞어 넣고/호초와 석이를 넣어 향기롭게 무치어라/(중략) 연포(軟炮)라는 이름은 우리 풍속을 따르더라도/빈한한 선비의 풍류로 이름을 높여 부르니/(중략) 철마산은 골짝 얕고 강물은 넓기도 해라/속히 그대 따라 이곳에 은거하고 싶네이 시에는 두부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 있다. 다산은, “세속에서 두붓국을 연포(軟泡)라고 하는데 포(泡) 자가 너무 속되므로 지금 포(炮) 자로 고쳤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포(泡)’는 거품이다. 본질이 아니다. 쓸데없는 부분,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본질에서 벗어난 한낱 거품이니 ‘너무 속되다’고 표현했을 것이다.이 시를 쓴 시기는 19세기 초반이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고향 마재[馬峴, 마현]로 돌아왔다. 다산의 강진 유배는 1801년 11월부터 1818년까지다. 다산은 1836년 세상을 떠났다. 이 시는 고향에서 노년을 보낸 1818∼1836년 사이에 쓴 것이다.철마산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와 수동면 수산리에 걸쳐 있다. 다산의 고향이자 노년을 보낸 마재와 멀지 않다.다산의 두부는 19세기 초반, 우리 선조들이 먹었던 두부다. 상당히 화려한 연포탕이다. 두부는 주사위처럼 네모반듯하게 잘랐다. 네모난 두부를 띠 싹에 꿴다. 국물에는 여러 버섯을 넣었다. 후추와 석이버섯도 넣었다. 국물의 바탕은 닭고기다. 인근의 여러 젊은 선비들과 푸짐한 야외 파티를 했던 모양이다. 닭을 다섯 마리나 준비하고 절 밑에서 놀았다. 시회(詩會)도 베풀었을 것이다.다산의 연포탕은, 조금 뒤에 나온 책, ‘동국세시기’의 연포탕과 비슷하다. “10월 두부, (중략) 두부를 가늘게 썰고 꼬챙이에 꿰어 기름에 지지다가 닭고기를 섞어 국을 끓이면 이것을 연포탕(軟泡湯)이라고 한다.”‘닭고기+두부’의 연포탕이다. 다산의 연포탕이 바로 조선 후기 화려한 연포탕이다. 부드러운 두부, 연포로 끓였으니 연포탕이다. 낙지는 없다. 닭고기와 닭고기 국물을 준비해서 마치 오늘날의 전골 혹은 샤부샤부 같이 데쳐서 먹었다.교산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두부는 장의문(藏義門) 밖 사람들이 잘 만든다. 말할 수 없이 부드럽다”고 했다. 두부는 흔하지만 연한, 잘 만든 두부는 귀하다. 두부를 많이 먹지만, 새우젓국, 굴이나 닭고기 국물과 끓인 부드럽고, 맛있는 연포탕은 사라졌다. /맛칼럼니스트

2019-11-25

보리가 패는 교실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11월 말, 학생들이 분주하다. 몇몇 아이들은 필기도구를 들었고, 또 몇몇 아이들은 붉은 장갑을 꼈다. 간혹 장갑을 낀 아이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기도 했다. 아이들은 논쟁의 정석(定石)을 보여주었다. 한 아이가 문제를 제기하면 다른 학생들은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문제 제기가 끝나면 학생들은 숙고의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은 묵언의 시간과도 같았다.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학생들은 먼저 눈으로 서로의 상태를 확인했다.그리고 대화 시작을 위한 동의를 구했다. 제일 먼저 동의를 구한 학생이 자신이 생각한 해결방법을 설명했다.말하는 어조에서는 성숙함이 풍겼다.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정치인들의 말하기와는 수준부터 달랐다. 공손한 자세로 상대의 입장에서 말하는 모습은 말하기의 정석이었다. 정석은 정석을 불렀다. 듣는 학생들도 말하는 학생의 생각을 공감하며 말하는 학생이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잘 듣는 것이 잘 말하는 것이라는 화법의 정석을 실천하였다. 훌륭한 논쟁은 협동과 협력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문제 해결 방법을 창출한다는 것을 학생들은 활동을 통해 스스로 체득했다.학생들이 그토록 공을 들이는 작업은 바로 교실에 보리밭과 밀밭을 만드는 일! 학생들은 지난 주 목요일 아침 보리와 밀을 심을 미니 텃밭을 손수 만들었다. 학생들이 아름다운 논쟁을 펼친 작업 단계는 흙의 높이를 정하는 부분이었다. 학생들은 보리와 밀의 뿌리를 생각해서 각자의 학급에 맞게끔 밭을 만들었다.학생들은 개성 있게 보리와 밀을 심었다. 과연 학생들은 무엇을 바라고 보리와 밀을 심었을까? 물론 학교 교육 프로그램으로 한 활동이지만 분명 학생들의 모습은 달랐다. 억지스러움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학생들에게는 생명을 심는다는 경이로움만 있을 뿐이었다.11월 말, 학교는 참으로 혼돈의 시기이다. 입시에 성공한 학생들과 실패한 학생들이 같은 공간에 공존하는 시간. 유종의 미에 대한 배움과 실천보단 입시를 끝낸 학생들은 학교에서 방치되는 시간. 1학년과 2학년은 학기말에 몰아치는 수행평가와 곧 있을 기말고사에 영혼이 탈탈 털리는 시간. 유의미한 것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학교의 11월 말이다.잠시 시간을 내어 보리나 밀 등이 심겨진 학급 텃밭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보리가 심겨진 반에서 한흑구 선생의 수필 ‘보리’를 같이 읽어 보면 어떨까! 그래서 혹독한 겨울 같은 힘든 시기를 이겨내야 할 우리 학생들의 마음 밭에 인내와 희망의 보리를 심어주면 어떨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보리를 보며 가슴 뭉클해 하는 산자연중학교 학생들과 수필 ‘보리’를 읽는다.“(…) 이제 모든 화초는 지심(地心) 속의 따스함을 찾아서 다 잠자고 있을 때, 너, 보리만은 억센 팔들을 내뻗치고, 해말간 얼굴로 생명의 보금자리를 깊이 뿌리박고 자라왔다. 날이 갈수록 해는 빛을 잃고 따스함을 잃었어도 너는 꿈쩍도 아니하고 그 푸른 얼굴을 잃지 않고 자라왔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디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억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었다. (…)”

2019-11-25

극단적 투쟁보다 개혁정당으로 국민 지지 얻어야

강희룡 서예가단식은 건강이나 항의 표시를 할 때 동원되는 행위이다. 의학계에서는 단식을 대체로 에너지 섭취를 1일 200㎉ 미만으로 정의한다. 대략 커피믹서 4개 먹는 정도이다. 만약 저항의 의미로 단식한다면 72시간 이상이 필요하며 이때는 물 이외 다른 것(소금은 예외)은 입에 대서는 안 된다. 단식에서 중요한 것은 72-72(72시간-72일)법칙이다. 의학적으로 72시간 가량 굶으면 체내 포도당이 모두 사용돼 인체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뼈와 근육, 장기 등에서 에너지를 모두 빼앗아간다. 학자들이 단식의 한계를 72일로 보는 경우는 대부분의 사람은 72일이면 굶어죽기 때문이다. 단식은 2500년 전 중국에서 발간된 한의학 최고의 원전인 ‘황제내경(黃帝內經)’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책은 소문(素問)과 영추(靈樞) 두 부문으로, 소문편에서는 인체의 생리현상과 양생법에 대해 기술하였고, 영추편에는 침구의 임상적인 활용에 대해 서술했다. 조선 초 태종실록에 양녕대군에 대한 단식기록이 실려 있다. ‘세자(양녕)가 몰래 기생 봉지련을 궁중에 불러들였다.(중략) 임금이 듣고 수하에게 곤장을 때리고 봉지련을 가두니 세자가 마침내 걱정해 음식을 들지 않았다.(태종10년, 1410년 11월)’ 태종이 봉지련을 가두자 세자가 단식으로 저항한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조선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인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경우 역시 9일간의 폭염 속에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로 고통스럽게 굶어 죽어갔다.한국정치사에서 위정자들의 대표적인 단식투쟁은 1983년 5월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YS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이던 5월 18일부터 6월 9일까지 ‘대통령 직선제’등 5개항을 내걸고 23일간 단식을 했다. 이 투쟁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가 정식 출범하여 4년 뒤 6월 항쟁과 대통령직선제로 이어져 정치민주화에 이정표를 세웠다. 1990년 평화민주당 총재였던 DJ는 10월 8일부터 20일까지 13일간 ‘내각제 포기와 지방자치체 도입’을 외친 단식을 통해 지방자치제 결실을 맺었다. 1995년 전두환 전 대통령도 수감 중이던 안양교도소에서 5공 청산에 항의하며 27일간 단식을 했으나 역사의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소미아, 공수처, 패스트트랙 등 굵직한 정치현안들에 대한 야당 요구를 내걸고 죽기를 각오하겠다며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하지만 21세기의 깨어있는 국민들은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투쟁보다는 기존 패거리 정치에 함몰되어 있는 정당의 비합리적인 조직운영과 정치구도의 개혁을 더 바라고 있다. 인재등용이 없고, 진영논리에 빠진 패거리 정치의 결과는 한탕주의로 흘러 국가미래를 암울하게 한다. 이제라도 구태정치의 답습에서 벗어나 개인의 영욕을 내려놓고 국가의 미래지향적 정책과 대안을 제시하는 민주정당으로 탈바꿈해야 하는 시점이라 본다.

2019-11-25

세상을 변화시키는 특이점(Singularity) 2

주목해 보아야 할 특이점이 있습니다. 생명공학, 유전자 공학 분야의 특이점이 거의 임박해 있다는 사실이지요. 과학자들은 거미줄이 얼마나 놀라운 소재인지 알고 있습니다. 거미줄은 사람이 만든 그 어떤 소재보다 가볍고 튼튼합니다. 이 소재를 무한 생산해 의복이나 첨단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대량으로 거미를 길러내 거미줄을 뽑아내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금방 실패하죠. 거미는 군집생활이 불가능한 개체입니다. 유전공학이 위력을 발휘합니다. 거미 몸에서 거미줄을 만들어 내는 유전자를 뽑아냅니다.염소에서 젖을 만들어 내는 유전자를 추출하죠. 두 유전자를 편집합니다. 염소의 젖을 짜면 그 젖에서 거미줄 성분이 들어 있는 소재를 수확해 내는 데 성공합니다. 염소 젖 1㎏에서 거미 10만 마리가 평생 생산할 수 있는 분량의 거미줄을 뽑아 낼 수 있습니다.지금은 이 기술이 실용단계에 접어들어 우주복, 방탄복 등을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렀지요.유전자 가위기술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크리스퍼(CRISPR) 기술은 무궁무진한 적용 가능성을 앞두고 있는 상태입니다. 인간유전자 지도인 게놈과 결합해 난치병의 싹을 아예 다 잘라내 암이나 불치병의 발병 확률을 아예 없애버릴 수도 있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생명의 길이를 좌우하는 염색체 성분 텔로미어가 줄어드는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있으리라 예측합니다. 텔로미어가 노화를 일으키는 염색체 말단 부분입니다. 텔로미어의 길이가 줄어들지 않도록 편집이 가능하다면? 인간의 수명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완전히 뒤바뀔 수 있습니다.인간 장기는 이미 3D 프린팅 기술로 실제 복제가 가능한 임상단계입니다. 3D프린팅 기술은 이미 육류를 실제 먹을 수 있는 고기의 상태로 프린팅해 내는 단계까지 발전해 있습니다. 이쯤 되면 덜컥, 숨이 멎지 않으시는지요? (계속)/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1-25

베르테르 효과

베르테르 효과는 유명인 또는 평소 존경하거나 선망하던 인물이 자살할 경우, 그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을 말한다. 모방 자살(copycat suicide), 자살 전염(suicide contagion)이라고도 한다.베르테르 효과는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유래됐다. 괴테가 1774년에 간행한 이 소설에서 괴테는 자신의 실연 체험을 바탕으로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불멸의 고전을 남겼다.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는 약혼자가 있는 로테라는 여인을 사랑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자 깊은 실의에 빠진다. 결국 베르테르는 로테와의 추억이 깃든 옷을 입고 권총 자살을 한다. 소설 발간 후 유럽의 청년들 사이에 베르테르의 열풍이 불었다. 청년들은 소설에 묘사된 베르테르의 옷차림을 따라했고, 베르테르의 고뇌에 공감했다. 심지어 베르테르를 모방한 자살 시도까지 하게됐다.미국의 자살 연구학자 필립스(David Philips)는 유명인의 자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일반인의 자살이 급증하는 패턴을 발견하고, 이 현상에 ‘베르테르 효과’라는 이름을 붙였다. 실제로 록스타 엘비스 프레슬리의 죽음 이후 그를 추모하는 자살 행렬이 있었고, 영화배우 장국영이 투신자살하자, 그가 몸을 던진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일반인이 목숨을 끊는 경우도 발생했다.24일 가수 겸 배우 구하라가 28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자 베르테르 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실제 지난해 우리나라 자살 사망률 증가 역시 베르테르 효과가 원인으로 꼽혔다고 한다. 보건복지부가 정한 언론의 자살보도 권고기준에 따른 신중한 보도가 필요한 때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11-25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붙여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한국과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의 대화관계 수립 30주년을 기념하여 25일부터 부산에서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다. 이번 특별정상회의는 2009년 제주, 2014년 부산에 이어 세 번째이며, 한·메콩 정상회의도 처음으로 개최된다.이 회의는 현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신남방정책’의 일환이다. 동남아시아의 경제적·전략적 가치가 매우 크고 한국 외교의 다변화가 절실하다는 점에서 아세안 외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전반기에 이미 아세안 10개 회원국 방문을 완료함으로써 정책추진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이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대통령직속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와 외교부 ‘아세안국’을 신설하고, 주아세안대표부를 격상하는 등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는 점도 평가할 만 하다.그럼에도 신남방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 또한 적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협력파트너인 ‘아세안’과 ‘아세안 방식(ASEAN way)’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대통령의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방문 때 있었던 ‘의전 실수’는 아세안에 대한 전문성 부족이었고, 아세안의 독특한 국제협력방식인 ‘협의를 통한 합의, 점진적·비공식적 접근, 조용한 외교(quiet diplomacy)’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것은 정책결정자는 물론이고 외교실무자들의 아세안에 대한 전문성이 크게 제고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둘째, 장기적 관점에서 ‘윈-윈’할 수 있는 호혜적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아세안은 중국 다음으로 중요한 교역대상이며, 한국과 아세안 교역은 한국의 일방적 흑자이다. 한국의 무역흑자는 2018년 406억 달러, 2019년 10월 현재 300억 달러이다. 이러한 교역불균형은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협력의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아세안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를 비롯하여 다양한 방식의 지원을 더욱 확대함으로써 모두 ‘윈-윈’할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셋째, 사회문화적 교류와 협력의 강화이다. 한·아세안 관계는 상호신뢰가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쌍방향의 사회문화적 교류확대가 절실하다. 현재는 동남아지역의 한류 확산에 비해서 한국인의 동남아문화에 대한 이해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에 살고 있는 동남아 출신의 결혼이민자 및 이주노동자들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한·아세안 관계 발전에 가교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마지막으로 아세안을 국내정치나 대북정책에 이용하려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조용한 외교’를 선호하는 아세안의 협력방식을 고려할 때 ‘요란한 외교 이벤트’는 대국민 선전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질적 협력을 증대시키기는 어렵다. 또한 이번 특별정상회의를 대북정책에 활용하려고 김정은을 초청했다가 거절당한데서 알 수 있듯이,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외교’는 북한뿐만 아니라 아세안으로부터도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2019-11-25

오직, 책 읽어주기를!

김현욱 시인기해(己亥)년도 어느덧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12월은 갈무리하는 달이다. 갈무리는 정리, 저장, 마무리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한국어 대사전 예문으로 ‘어머니는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의 갈무리 때문에 바쁘셨다’나 ‘갈무리를 제대로 못 하면 그간의 노력이 헛수고가 될 수 있다’로 쓰인다. 12월은 ‘시작이 반이다’보다는 ‘석 달 장마에도 개부심이 제일’이라는 속담이 어울린다. 개부심은 큰 장마가 끝난 후 한동안 쉬었다가 다시 퍼붓는 비를 말한다. 아주 새롭게 하는 것을 뜻한다. 마무리가 중요함을 빗된 속담이다.올 한 해 ‘책 읽어주기’ 강의를 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선생님과 학부모와 아이들을 떠올려 본다. 지난주에는 경주 감포초등학교 학부모와 선생님을 만났다. 저녁 7시부터 시작된 책 읽어주기 연수는 9시 30분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쉬는 시간도 없이 책 3권을 읽어드렸다. 다비드 칼리의 그림책 나는 기다립니다, 고 장영희 교수의 에세이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김소연 시인의 에세이집 한 글자 사전이 그 주인공이다. 언제나 그랬듯 책 읽어주는 시간은 순수한 웃음과 따뜻한 공감이 넘치는 시간이다. 책 읽어주는 시간은 재미와 감동, 눈물과 성찰이 촛불처럼 타오르는 시간이다. 자신과 타인과 가족과 세상을 동시에 발견하는 시간이다. 아, 이토록 소중한 시간을 함께한 그리운 이들에게 축복을!많은 부모가 자녀를 책 읽는 아이로 키우고 싶어 한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 줄 안다. 그렇지 않다. 방법이 아니라 실천만이 있다. 집에 책이 많으면, 교실에 학급문고가 많으면, 학교도서관이 훌륭하면, 공공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면, 자녀에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한 것뿐이다. 책이 많다고 도서관이 좋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책 읽어주기다. 뉴먼(Neuman)의 연구에 따르면,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생후 6개월 정도부터 낮잠을 잘 때나 잠자리에서 부모가 매일 책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교사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 이야기에 대해 토의하는 활동을 하면 아이들이 스스로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한다.부모와 교사의 책 읽어주기는 우리 아이의 리터러시(읽고 쓰는 능력)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집이나 학교에서 꾸준히 책 읽어주기를 경험한 아이들은 독해력과 어휘력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잠자리에서 엄마나 아빠의 품에 안겨 책 읽어주는 부모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아이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다. 교실에서 매주 책 읽어주는 선생님의 눈빛과 목소리는 아이의 영혼에 그대로 아로새겨진다. 책 읽어주기는 우리 아이에게 햇빛을 쫴 주는 것과 같다. 생명수를 떠 먹여주는 것과 같다.막상 해보면 쉽지 않다. 책 읽어주기는 실천이 제일 어렵다. 강연장에서 만난 학부모와 교사들의 고충에 십분 공감한다. 퇴근하면 쉬고 싶다. 묵언하고 싶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꾸준히 책 읽어주기를 실천하는 위대한 부모와 교사들이 있다. 그들을 보고 힘을 내자. 우리도 할 수 있다. 오직, 책 읽어주기를!

2019-11-24

전쟁의 상흔(傷痕) 3곳을 찾아가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6·25 전쟁은 민족적 비극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남침한 북한 공산군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해 버렸다. 당시 우리 국군은 무엇을 했을까. 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분단의 상흔은 아직도 남아 있다. 천만 이산가족 당사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2세, 3세들은 가족 상봉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지난주 실향민과 탈북민이 함께하는 부산 거제 탐방여행에 동참하였다. 부산의 임시 정부청사, 유엔군 묘지,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둘러보는 이틀 일정이었다.부산 임시 정부청사부터 찾았다. 이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부산 부민동 2만8710㎡의 임시 정부청사, 붉은 벽돌식 2층 건물은 아직 잘 보존되어 있었다. 1923년 설립되어 일제 시부터 경남도청으로 사용했던 이 건물은 6·25 전쟁 시 임시 정부청사로 이용되었다. 이 건물에서 비상 국무회의가 개최되고, 대통령의 긴급 전시의 행정이 집행되었다. 당시의 도지사 관사는 오늘날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부산 임시 정부도 전황이 나쁘면 제주도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니 아찔한 생각이 든다. 아픈 역사의 상처를 잊어버린 듯 이곳을 찾는 사람은 적었다.오후에는 새롭게 단장하여 6·25 참전 전사자 2천300기를 모시는 대연동의 유엔 기념공원을 찾았다. 공원 내에는 전쟁 시 희생된 4만869명의 희생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진 위령벽도 있었다. 공원 내에는 16개 참전국과 의료 지원국 5개국 등 22개국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1955년 유엔 총회는 이곳을 세계 유일의 유엔군 공원으로 확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이역만리에서 파병되었다가 전쟁에서 산화한 이들에게 정중한 묵념을 올렸다.우리는 마지막 일정으로 거제 포로수용소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 중국군 포로 2만 명, 최대 17만3천여 명의 포로가 수용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여기에 여성 포로 300여 명도 포함되어 있음에 놀랐다. 현장에 재현된 형편없는 수용소 막사는 당시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곳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간의 유혈 살상도 있었다.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관리관 돗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사건도 있었다. 반공 포로가 석방되고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이 수용소는 폐지되었다.이번 탐방은 우리 모두 전쟁 아픈 상처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번 방문객들은 대부분 6·25의 비극을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이다. 최근 북한을 탈출하여 새롭게 출발한 이들은 신기한 눈으로 비극의 현장을 바라보았다. 북에서 그들이 배운 6.25를 미화한 ‘민족해방’ 전쟁의 부당성만은 충분히 목도했을 것이다. 전쟁 시 남한으로 피난해온 실향민들은 전쟁의 참화를 체험하고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전쟁의 상흔을 바라보는 그들 간 시각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비극이 이 땅에서 재현될 수 없다는 교훈은 모두가 깨닫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2019-11-24

세상을 변화시키는 특이점(Singularity)

특별한 재주나 지혜가 있는 이들을 초청해 들어보고 마음에 드는 만큼 상을 베푸는 왕이 있었습니다. 한 발명가는 체스 게임을 발명해 왕 앞에서 몇 게임을 시연합니다. 왕은 체스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지요. 발명가에게 어떤 상을 받고 싶은지를 묻습니다. 발명가는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소원을 말합니다.“임금님. 제가 받고 싶은 상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 체스판의 첫째 칸에는 쌀 한 톨을 주시고, 둘째 칸에는 두 톨만, 셋째 칸에는 네 톨. 이렇게 한 칸을 지나갈 때마다 앞칸의 2배씩 주시면 고맙겠습니다.”왕은 순수해 보이는 발명가의 요청에 흔쾌히 그렇게 하겠노라 답을 하고 쌀을 준비해 당장 선물로 보내라고 지시합니다.잠시 후 얼굴이 하얗게 변한 신하가 왕에게 헐레벌떡 달려옵니다. 체스 칸의 절반을 채우면 논 한 마지기의 쌀이 필요했고, 쌀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왕이 가진 모든 재산과 영토를 다 합해도 상을 줄 수 없을 만큼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맙니다. 64칸을 다 채울 경우 필요한 쌀의 양은 922경 3천372조 톨입니다. 문화마다 결말은 다릅니다. 왕이 발명가를 죽이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기도 하고, 왕이 모든 재산을 발명가에게 빼앗긴다는 결말이 있기도 합니다.임계점을 넘을 때 눈덩이처럼 불어나 감당할 수 없는 지점을 싱귤레러티(Singularity), 우리말로는 특이점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컴퓨터의 마이크로프로세서 발전 속도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느린 속도로 발전하더니 어느 순간 기하급수적으로 속도와 용량이 급증하죠. 휴대폰은 불과 30년 전만 해도 이 정도의 기능을 갖추려면 약 90억원 정도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특이점이 온 덕분에 지금은 누구나 90억짜리 물건 하나씩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앞으로 양자 컴퓨터가 펼칠 세상은 아찔하지요.(계속)/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1-24

계승해야 할 청도의 정신문화

이승율청도군수청도는 산이 푸르고 물이 맑고 인심이 좋은 삼청(三淸)의 고장, 소싸움의 고장으로 불릴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신문화의 성지로 불린다.화랑정신과 새마을운동의 발상지가 청도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화랑정신, 조국근대화의 초석이 된 새마을운동 등 이 두 가지 정신문화가 청도에서 시작됐다는 역사적 사실로 청도가 대한민국 정신문화의 성지라는 데에 이견(異見)이 있을 수 없다.청도를 화랑정신의 발상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등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이곳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서기 600년(진평왕 22년)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대작갑사(현 운문사)와 가슬갑사에 머물고 있을 때, 신라 화랑인 귀산과 추항이 찾아와 세속오계를 지침으로 받아 실천함으로써 세속오계가 화랑의 행동지침으로 보편화 돼 청도가 화랑정신의 발상지가 된 것이다.우리 청도는 이러한 화랑정신의 발상지라는 정신문화 자산을 계승·발전시킴과 동시에,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자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다.그 옛날 신라 화랑도의 수련도장이었던 운문산 일대에 화랑정신의 뿌리를 잇고 참된 가치를 구현하고자 2009년 ‘삼국 통일 초석, 화랑정신의 발상지 청도’란 안내간판을 운문면 삼계리 입구에 세우고 가슬갑사지로 추정되는 곳에는 두 화랑이 세속 오계를 든 조형물을 세웠다.또 운문면 방지리 일대 30여 만㎡ 규모의 ‘청도신화랑 풍류마을’을 총 610억원의 사업비로 2018년 3월 개관해 화랑정신을 이어가는 교육·체험시설 및 문화시설로 조성했다.잊힌 화랑혼을 현대로 전승하고자 세워진 청도신화랑 풍류마을에는 화랑도의 세속오계 정신과 풍류도를 계승하기 위한 화랑정신발상지 기념관, 화랑VR체험존, 화랑국궁장, 어린이 수련장 등을 갖추고 있다. 군은 2012년 화랑정신 발상지의 역사적 가치를 기념하고자 9월 1일을 ‘청도 화랑의 날’로 제정해 다채로운 행사들을 열고 있다.새마을운동발상지 청도읍 신도리는 새마을운동에 앞서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에 착안토록 아이디어를 제공한 최초의 마을로 대한민국 전역을 새마을운동으로 점화시키는 데에 불씨가 됐다. 예로부터 신도마을은 일찍이 노는 사람이 없고 술독에 빠진 사람이 없으며 노름하는 사람이 없는 3무(三無)의 마을로 주민들의 협동심이 유달리 강하고 부지런해 개미 마을로 불렀다. 이러한 신도마을의 협동심과 근면성을 바탕으로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새마을운동의 효시가 된 신도마을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고 지역의 정신문화를 재조명하고자 2009년 새마을운동발상지 기념관을 건립하고 2015년에는 새마을 테마파크를 건립해 새마을정신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또 지역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녹색성장 실천을 위한 새마을백일장 및 사생대회를 매년 개최해 후손들이 새마을운동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최근 새마을운동의 국제화에 걸맞게 개발도상국가의 많은 지도자가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하려고 우리 청도를 찾고 있고 외국인 새마을연수단의 필수 방문지로 자리매김하는 등 새마을운동 가치가 재조명받고 있다.이처럼 우리 청도의 화랑정신과 새마을운동이라는 정신문화는 미래세대에게 온전하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자산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귀중한 정신문화 유산을 넘어 세계인들과 함께 나눠야 할 정신적 가치이다.우리가 계승하는 정신문화는 눈에 보이는 건축물과 조형물들을 통해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활에 스며든 실생활이 몸에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것이다. 앞으로 청도군은 화랑정신과 새마을운동 정신을 널리 보급·확산해 건강한 국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 후손들에게는 참다운 정신문화를 전파해 지역민임을 자랑스럽게 할 것이다.

2019-11-24

잔액이 부족합니다

문춘희 종합자산관리사마트에서 물건을 산 후 휴대폰 페이로 결제한다.“잔액 부족입니다”“잠시만요”결제 수단을 신용카드로 한 단계 올린다. 처음 카운터에서 잔액 부족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너무 부끄러워 캐셔에게 체크카드라서 그렇다며 허둥지둥 손사래를 치곤 했다. 아는 사람이라도 주위에 있으면 어쩌나 마음도 졸였다. 이제는 당황하지 않는다. 마일리지 적립이라는 달콤한 보상으로 신용카드를 긁게 만드는 유혹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대신 한도가 분명한 체크카드로 지출을 조절하며 통장이 부디 월급날 전에 바닥을 드러내지 않도록 기대할 뿐이다.25일 새벽, 반가운 급여 문자가 들어온다. 설렘도 잠시, 통장 나누기에 들어간다. 자동 이체 이외의 고정 항목을 하나씩 직접 송금하는 과정에서 급여가 만드는 대단한 위력을 실감한다. 동시에 공중으로 사라지는 지출과 차곡차곡 쌓이는 자산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종합자산관리사 일을 하면서 다양한 재무관리 현장을 본다. 수입이 많지만 소비를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나 신용카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매달 악순환을 거듭하는 사람도 있다. 나 또한 갑자기 늘어난 씀씀이에 오랜 세월 동안 어려움이 많았었다. 진작 통장 나누기를 실천해 지출과 자산 만들기를 차근차근 해왔더라면 지금쯤 꽤 괜찮은 종잣돈을 마련해 자산을 굴리고 있을텐데, 당시에는 번거롭다고 생각했다.벤저민 프랭클린이 말했다. “세상에서 죽음과 세금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누구도 돈을 관리하는 인생의 책무를 피해갈 수 없다. 평생 돈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불편한 동거보다 확실한 친구로 삼는 것은 어떨까? 그 첫걸음으로 통장 나누기를 제안한다. 통장을 급여통장(고정지출), 예비비통장, 소비통장으로 세 개로 나눈다. 체크카드는 소비통장과 연결한다.25일에 반가운 소리가 들린다. “띵똥” 월급이 들어오는 소리다. 이날 예비비통장으로 급여의 5∼10% 범위에서 정한 금액을 이체한다. 여기에서는 1년 단위로 지불하는 자동차 보험, 자동차세, 재산세 등 세금과 비정기적으로 발생하는 경조사 비용을 모은다. 고정지출, 소비 지출에서 절약한 돈도 이곳으로 이체해 종잣돈 굴리기 재원을 만든다. 부작용도 물론 있다. 예비비통장에 보관한 현금 유혹에 한두 달은 분명 시행착오가 생기게 마련이다.소비통장은 지난 3개월간 지출 평균 금액을 입금해 두고, 체크카드를 연결한다. 생활비, 식비, 피복비, 문화비, 유류대, 기타 잡비를 위한 통장이다. 카드 지출 내역을 2개월만 뽑아보면 매월 평균 지출 금액과 내 ‘방앗간(소비패턴)’이 어딘지 파악할 수 있다. 커피를 많이 마시는지, 외식을 많이 하는지, 계절마다 기분전환을 위해 옷을 얼마나 사는지. 자기계발에 한창인 사람은 책 구매 실적을, 사람이 우선인 경우는 아마 각종 술집 계산서를 금액을 확인할 수 있다. 소비는 생활 습관이기에 갑자기 줄이기 어렵다. 커피를 줄였더니 스트레스로 가을 코트에 지름신이 내리고, 술을 줄여보겠다고 애썼더니 억눌린 소비심리 때문에 더 큰 일을 터트린다. 무리하게 소비를 막으려 하지 않고 불필요한 소비를 조금씩 줄여나가야 한다. 월 5만 원이라도 지출 흑자를 기록한다면 대단한 일이다. 이 귀한 돈은 그대로 이월하지 않고 다음 달 급여가 들어오기 전 예비비통장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보낸다.마지막 작업은 급여통장에서 나가는 고정지출을 정비하는 일이다. 기부금, 관리비, 보험료, 대출이자, 용돈, 통신요금, 자기계발비, 곗돈, 운동 등 매월 선택의 여지 없이 나가는 고정비다. 기존 출금 통장을 확인해 이체 날짜를 급여 이후로 조정하고 다른 통장에서 이체되는 고정비는 급여통장으로 일원화한다.여기까지 정비하는 과정을 통해 통장 나누기를 완성하면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몇 달 치 카드내역서를 읽고 몇 개의 통장을 확인하며 야무지게 잘살고 있는 나를 만날 수도, 지금까지 버텨온 대견한 나를 만났을 수도 있다.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 내 급여의 행방을 확인하는 자체로 의미가 있고, 분명해진 지출 패턴을 인지하고 예비비 마련까지 가능하다. 이제 신용카드의 굴레에서 벗어나 내 돈의 주인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2019-11-24

음악 창의도시 대구

창의도시에 대한 자치단체의 관심이 날로 커지고 있다. 창의도시는 영국 등 유럽을 거쳐 지금은 일본과 한국에서도 각광받는 도시 담론이다. 인류의 삶을 새롭게 설정하는 시대적 담론이란 점에서 관심이 높은 주제다. 전 세계 72개국 180여 도시가 유네스코가 창의도시 네트워크에 가입돼 있다, 우리는 대구, 서울, 부산 등 전국 9개 도시가 가입돼 있다. 유네스코는 2004년부터 음악, 문학 등 7개 분야에서 뛰어난 창의성으로 인류문화 발전에 기여한 도시를 창의도시로 선정하고 있다. 대구는 2017년 음악 창의도시로 선정됐다.대구가 음악창의도시로 선정된 배경에는 대구가 가진 풍부한 음악적 자산이 큰 힘이 됐다. 대구는 근대음악이 태동한 곳이라 할 만큼 음악과 관련한 인연이 많다.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서양음악이 일찍부터 이곳에 보급됐다. 서양 악기를 대표하는 피아노가 1900년에 낙동강 뱃길을 따라 달성군 사문진 나루터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최초다. 그 기념으로 이곳에는 해마다 100대 피아노 콘서트가 열리고 있다. 대구 출신으로 근대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도 많다. 동무생각을 작곡한 박태준, 국내 최초의 창작 오페라 춘향전을 작곡한 현제명, 한국 최초로 독창회를 연 테너 권태호 등이 그들이다. 국내 1호 클래식 감상실 녹향도 자랑거리다. 6.25전쟁으로 피란 온 예술인의 사랑방 역할을 한 곳이다. 이중섭, 유치환 등 당대 최고의 문인과 예술가가 즐겨 찾았다. 당시 외신은 대구를 ‘바흐의 음악이 흐르는 도시’라 묘사했다. 지난 주말 대구에서는 ‘음악창의도시 대구 주간’ 행사가 열렸다. 음악 창의도시로서 국제적 역량을 강화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음악도시의 글로벌 가치를 키우는 일에 민관이 힘을 모아야겠다./우정구(논설위원)

2019-11-24

‘당랑거사(螳螂居士)’ 짝사랑

안재휘 논설위원춘추시대 ‘장공’이라는 제(齊)나라 왕족이 사냥터에 가고 있었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왕족의 행차에 무례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길가에 멀찌감치 물러섰는데, 웬 낯선 벌레 한 마리가 길 한가운데에서 앞발을 치켜들고 수레바퀴를 칠 듯이 덤벼들었다. 사마귀였다. 장공은 “저 벌레가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용감한 장군이었을 것”이라면서 사마귀를 피해 가게 했다.‘사마귀가 앞발을 쳐들고 수레를 막는다’라는 뜻의 ‘당랑거철(螳螂拒轍)’ 고사다.국제사회의 변화와 상식을 거부한 채 외톨이 길을 가고 있는 북한의 존재 방식을 놓고 사람들은 당랑거철을 떠올린다. 한미동맹이라는 형태의 편짜기 지혜로 놀라운 번영을 이룬 한국이 미국의 변심으로 곤혹스러운 번뇌 국면에 접어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갑자기 방위비 분담금을 5배나 올리자고 제안하면서 전천후압박을 시작했다.문재인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 김정은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 자세를 줄기차게 견지하고 있다. 우리가 소원하는 ‘북한 비핵화’는 단 1㎜도 움직이지 않았다. 며칠 전 생방송으로 진행한 타운홀 미팅에서 문 대통령은 “남북관계는 제가 보람을 많이 느끼고 있는 분야”라고 표현해 국민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도대체 뭐를 얼마나 이뤘다고 보람을 느낀다는 것인지.동료 선원 16명을 살해한 혐의로 탈북 어민 2명을 우리 정부가 강제북송한 사건에 대한 여파가 길다. 북한인권탈북단체총연합 등 국내외 30여 인권단체가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을 비롯한 고위 관계자 4명을 ICC(국제형사재판소)에 고소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의 강제북송 조치는 헌법과 대법원 판례, 국제법에 정면으로 어긋난다는 비판이 많다.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초청 친서를 보낸 날짜가 11월 5일이라고 북한이 공개했다. 바로 그날이 정부가 동해로 넘어온 탈북 어민 2명을 추방하겠다고 북에 서면으로 통보한 날이란다.‘김정은 초청장’에 ‘어민 북송문’을 선물꾸러미로 동봉한 셈이라는 의혹과 논란이 증폭 일로다.아무리 살펴보아도 문재인 정권은 북한과 잘해보려고 ‘평화’ 도박에 ‘짝사랑’을 몽땅 걸었다. 북한은 “(문 대통령) 친서 이후에도 (남측은) 몇 차례나 특사 방문을 허락해달라고 청했다”고 까발렸다. “반성과 죄스러운 마음으로 삼고초려(三顧草廬)해도 모자랄 판국” 운운하며 아랫사람에게 훈계하듯 하는 그들의 패악질은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는다.미국은 변했다. 이제는 미국이 우리를 여전히 짝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북한을 계속 짝사랑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 이 판에 북한을 따라 하듯이, ‘미군 철수’ 피켓을 들고 당랑거사(螳螂居士 사마귀) 놀음을 하자고 대드는 것은 더더욱 곤란하다. 북한이 천사로 변신하기를 고대하며 걸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이 지독한 ‘짝사랑 도박’은 멈춰야 한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게 아니다.

2019-11-24

김세연의 절대반지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반지가 정치권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 절대반지는 소유자의 힘을 증대시키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게 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반지다. 하지만 이 반지는 소유자의 마음을 사악하고 탐욕스럽게 변질시켜버리는 어두운 면도 함께 가지고 있다. 영화에서는 사우론처럼 이 반지를 차지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의 소유자가 등장하는 가 하면 프로도를 위시한 반지원정대처럼 이 반지를 용암의 불 속에 던져 넣어 영구히 파괴해버리려는 측도 있다.이 영화속의 반지가 현실속에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특히 한국사회에서 절대반지에 해당하는 것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법치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법률을 제·개정하는 정치권력이 절대반지 첫번째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문재인 정부에서 개혁을 외치고 있는 검찰권력 역시 또 하나의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이다.지난 17일 부산지역 3선의원인 자유한국당 김세연 의원이 총선 불출마 입장을 밝히면서 절대반지를 언급해 화제가 됐다. 영남지역 3선퇴진론으로 쇄신론이 일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 의원은 선언문에서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절대반지를 끼는 순간 이성을 잃게 된다”며 “공적 책무감으로 철저히 정신무장을 해야 그것을 담당할 자격이 주어짐에도, 아무리 크든 아무리 작든 현실 정치권력을 맡은 사람이 그 권력을 사유물로 인식하는 순간 공동체의 불행이 시작된다”고 정치 현실에 대한 실망이 불출마의 원인이 됐음을 언급했다. 김 의원이 가리키는 절대반지는 문맥으로 보아 현실 정치권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쇄신과 통합으로 새바람을 일으켜야 할 자유한국당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표현이란 해석도 있다.이 와중에 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느닷없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파기 철회, 패스트트랙에 오른 공수처법과 선거제개편안 처리 철회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투쟁에 나서 당내외에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우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물론 다른 야당들은 일제히 냉담한 반응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대변인은 “황 대표의 단식은 명분이 없음을 넘어 민폐”라고 비판했고, 바른미래당 최도자 수석대변인도 “자신의 리더십 위기에 정부를 걸고 넘어져서 해결하려는 심산”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당 지도부와 의원직 총사퇴를 주장한 김세연 의원 역시 “단식투쟁 취지의 순수성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서도 “창조를 위해서는 먼저 파괴가 필요하다. (한국당은) 깨끗하게 해체해야 한다”라고 거듭 당쇄신을 요구했다.22일 자정 지소미아가 종료되고, 12월 2일 패스트트랙 법안 본회의 상정을 앞둔 시점에 제1야당 대표인 황 대표가 단식투쟁에 나서야 했던 정황을 이해못할 바 아니다. 다만 누군가 절대반지를 끼고 이성을 잃는 사태까지 가지는 말아야 한다는 걱정이 앞설 뿐이다.

2019-11-21

민식이법

엊그제 대통령과 국민의 대화에서 정치 이슈에 묻혀 두각을 보이진 않았지만 국민의 마음을 잔잔하게 흔들어 놓은 게 하나 있다. 스쿨존 내 어린이 안전보호를 위한 ‘민식이법’이다.지난 9월 충남 아산 스쿨존 구역에서 차량사고로 숨진 9살 민식군의 이름을 따온 이 법은 스쿨존 내 속도제한과 CCTV 설치 의무화, 가해자 처벌 수위 상향 등을 내용으로 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이다. 민식군 부모의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지면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청원자 20만명을 순식간에 돌파했다. 그동안 민식이법은 내 자식과 같은 다른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는 민식이 부모의 애타는 발품에도 겨우 2만여명 서명에 그쳤다.우리생활 주변에는 어린이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들은 얼마든지 있다. 20대 국회에는 어린이 생명과 관련한 법안이 17건이 발의돼 계류 중이다. 그러나 그중 한 건도 통과되지 못했다. 어린이집에서 귀가 중이던 5살 해인이가 제동 장치가 풀려 미끌어져 온 차량에 치여 숨진 사고를 계기로 만든 해인이법도 마찬가지다. 주차장에서 미끌어진 차량에 치어 숨진 하준이법도 국회에 계류 중이다. 한음이법이나 태호·유찬이법도 같은 케이스다.사고가 나 세간의 관심을 끌면 국회가 나서 법 제정을 해놓고 시간이 지나면 그냥 잊어버리는 꼴이다. 국회의원의 관심도가 이 정도인가 싶어 안타깝다. 어린 자식을 사고로 떠나보낸 부모의 심정이야 말로 다할 수 없다. 자식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으로 어린이가 안전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마음을 모아 국회에 호소한 것이 어린이 안전 관련 법이다. 애절한 사연을 우리 사회가 아직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민식이법을 계기로 국회의 관심을 다시 촉구해 본다./우정구(논설위원)

2019-11-21

단재 신채호의 역사 방법론

‘민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다 보니 나의 눈은 다시 신채호로 향한다. 옛날부터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은 외로웠던 모양이다. 단재 신채호는 선생이라 불러 마땅한 선배 선각자였다.‘민족’이란 서양에서처럼 근대에 들어서나 자본주의 상품이 미치는 단위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 양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달리 신채호는 아주 오래 전부터 형성, 발전되어 온 민족사를 규명하려 한 학자였다. 황당한 역사를 주장했던 사람이 아니요 민족의 이상을 품고 있었고 가려진 진실을 밝히기 위해 투쟁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그는 확실히 잃어버리고 잊혀지고 훼손된 것을 새롭게 일구어 내 본체를 드러내고자 애쓴 사람이어서 『조선상고사』나 『조선상고문화사』는 그 처절한 사투의 기록들이다.예를 들어, 그의 『조선상고사』는 사료의 수집과 선택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옛 비석을 참조하고 각 서적들을 서로 비교하고 진서와 위서를 가르는 제 주의를 기울이고 지명이나 인명 등을 해석하는데 따르는 문제들을 거론하며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 우리와 가까운 인접 민족들의 언어와 풍속으로부터 추론해 내는 방법 등에 관해 그 나름의 치밀한 사유를 구축하고자 한다.“역사 재료에 대하여 그 사라진 것(亡)을 찾아서 기워 넣고(補), 빠진 것을 채우며, 사실이 아닌 것(僞)은 빼버리고(去), 거짓 기록을 판별하여 완비(完備)를 추구하는 방법”에 관한 『조선상고사』의 사유는 『조선상고문화사』에 오면 유증(類證), 호증(互證), 추층(追證), 반증(反證), 변증(辨證)의 다섯 가지 논리적 방법으로 가다듬어진다.방민호 서울대 교수유증이란, 어떤 규칙이나 유별을 따라서 증명하는 것으로 삼경 제도 같은 것이 있어 둘이 이미 밝혀졌다면 다른 하나도 밝혀야 하는 식이다. 호증이란 사서들에 적힌 사실들을 상호 참조하여 증명하는 것이니, 한국사의 망실된 부분들이 많은 것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중국 사서들을 대거 참조하여 한국사의 사실들을 밝히려 했다. 추증이란 “이 사건이 있으므로 저 사건이 없을 수 없음”을 들어 증명하는 것이요, 반증이란 “반면에서 그 사실의 참을 발견”하는 방법이었으니, 사서 안에, 또는 사서들 사이에 서로 모순된 서술들이 공존할 때 진실을 밝히는 방법이었으며, 마지막으로 변증이란 것도 어떤 서술들에 담긴 내적 논리를 따져 이치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따짐으로써 진실 여부를 가리고자 하는 것이었다.단재는 헛된 이야기라도 쓸 수 있으면 좋다는 식의 몽상가는 전혀 아니었다. 그를 알면 알수록 그의 외로움에 대한 나의 사랑도 자꾸자꾸 깊어지는 것 같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1-21

사는 데까지 살아있는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벼를 베어낸 그루터기에 파랗게 싹이 돋았다. 머지않아 닥쳐올 추위에 얼어 죽기 마련일 터인데, 물기가 조금이라도 있는 논마다 제법 생기롭게 자라나 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풀은 베어내면 금방 또 새싹을 낸다. 절기 따위 아랑곳없이 최소한의 조건만 되면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벼 그루터기 뿐 아니라 풀을 깎은 논둑에도 때아니게 새 풀들이 자라고 있다. 식물이 생장을 하는 목적이 꽃 피우고 열매 맺는 것이라면 이런 늦가을의 새싹이란 한갓 무모하고 부질없는 게 아닌가.사람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이 수긍하는 교훈이다. 그래야 보다 가치 있고 보람된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목적도 없는 삶은 무의미한 허송세월일 뿐이라고 지탄한다. 맞는 말이다. 사회나 개인이나 발전하고 성취하려면 뚜렷한 목표와 굳센 의지가 필요하고, 거기에 부단한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런데 목표의 유무를 따지기 전에 먼저 생각할 것은 어떤 목표를 갖느냐다. 무엇을 목표로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이 될 것이므로. 보통은 남보다 많이 가지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걸 출세라 하고 거기에 이르는 걸 성공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열심히 태교를 하고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수단과 방법을 다해 스펙을 쌓고 학업에 매진한다. 그러나 그것이 출세라는 목표에 도달할 확률을 높이는 건 사실이지만 해피엔딩까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드물지 않게 본다.소위 출세를 위해서 희생하고 쏟아 부은 것에 비해 성취감이나 만족도는 충분하지가 못한 경우가 많다. 더 많이 차지하고 보다 높이 오르기 위한 욕망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그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비극적 결말을 초래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방송 드라마의 스토리가 대부분 그런 것이고 매스컴에 오르는 사건사고 대다수도 그런 범주의 일들이다. 근자에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어느 가족의 경우를 보더라도 삶의 목표 설정에는 올바른 선택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인생의 목표에는 몸과 마음의 건강이 기본이라는 생각이다. 우선은 몸을 상하는 일을 말아야 할 것이고, 그것에 못지않게 마음(정신)의 건강도 챙겨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취미와 소질과 능력에 맞는 목표를 정하는 일이 바람직할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정신으로 성취한 것은 결국 진정한 보람과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 경우가 많다.늦가을 들판의 벼 그루터기에 돋아난 새싹들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또 다른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 삶이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란 것, 매순간 살아있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완성이라는 것, 그래서 대자연을 호흡하며 살아있는 데까지 살아있는 것이야말로 장엄한 우주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살아서 내 몸에 와 닿는 햇볕과 바람과 눈비를 체감하는 일이 가장 절실하고 궁극적인 삶의 성취이라는 것이다. 바람이 차다.

2019-11-21

둔마장관과 벌거벗은 임금님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1975년 관악신림 종합캠퍼스로 이주하기 전 마지막 동숭동 캠퍼스 졸업식은 유난히 추운 날씨였다. 이날 벌어진 서울대 29회 졸업식에선 기가찬 촌극이 벌어졌다. 교육부장관의 축사가 시작되자 가운을 입은 졸업생들이 난데없이 “둔마장관”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의자를 돌려 등을 단상에 대고 둘러앉는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1974년 9월 문교부 장관에 발탁된 유기춘 장관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이 둔한 말에 채찍질을 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 ‘주마가편(走馬加鞭)’에서 주마가 둔마(鈍馬)로 바뀌었다. 이후 그는 ‘둔마 장관’으로 불리며 세간에 놀림거리가 됐다. 권력자에 아부하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두고두고 회자됐다.지금 벌어지고 있는 지소미아 폐기, 한미공조와 한일관계 악화, 특목고 폐지, 원전폐지, 4대강보 파괴 등등 이런 정책에서 청와대 눈치만 보면서 제대로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청와대 주변에 없다는 사실이 둔마장관의 에피소드를 생각나게 한다.정부 관계자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현재 추진 중인 여러 가지 정책이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국회의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정부 하급관료들은 현 정책에 대한 반론을 많이 가지고 있다.그런데 왜 권력에 아부하고 바른말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일까?오래전 한 동화가 생각난다. 사기꾼 2명이 궁궐 앞에서 “우리는 바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신비한 옷감을 짭니다”라고 외친다. 임금님은 귀가 솔깃하여 그 두 사람을 궁으로 불러들여 옷을 만들라고 명령을 했다. 사기꾼 두 사람은 베틀을 놓고 옷 짜는 시늉만 하다가 드디어 옷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임금 앞에서 옷을 입어보라는 것이다. 임금의 눈에는 옷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좋은 옷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싱글벙글 했고, 신하들은 보이지 않는 옷을 두고 온갖 아양을 떨며 색도 무늬도 이렇게 좋을 수 없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의기양양한 임금님은 거리를 활보하고 싶어 거리행진이 시작되었다. 옷에 대한 소문을 들은 백성들은 벌거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임금님을 보고도 모두가 하나같이 좋은 옷이라고 칭찬을 하는 코미디가 벌어졌다. 그러던 중 한 어린아이가 외쳤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그제야 백성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은 거의 200년 전인 1800년대 초 발표됐다. 약 50년 전의 ‘둔마장관’이나 200년 전의 ‘벌거벗은 임금님’의 모습은 지금 우리 정치 사회의 자화상이다.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합리적 사고에 의한 사회 경제, 정치상황을 판단하여 청와대에 직언을 할 수 있는 양심있는 관료가 절실히 요구된다.야당대표가 거리로 나와 무기한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을 비아냥 거리는 분들이 있다면 정말 단식을 해보았냐고 묻고 싶다. 과거 필자도 단식을 해보았다. 단식 정말 힘든다. 장난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죽 절실했으면 삭발과 단식을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까지 우리 관료들은 둔마에게 채찍을 때려달라고 하고 벌거벗은 임금님을 바라보면서 옷이 멋있다고 박수를 치고 있을 것인가?

2019-11-21

비둘기에 관한 생각

TIME이 선정한 최악의 올림픽 개회식이 있습니다. 88년 서울 올림픽이 그 주인공으로 뽑혔다고 하지요. 올림픽 깃발을 게양하면서 비둘기를 날리는 순서가 있었는데 이때 경기장을 빠져나가지 않은 비둘기 몇 마리가 성화대 위에 앉아 있었던 겁니다.온 인류가 TV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지켜보는 중입니다. 비둘기들은 성화가 점화되는 순간 푸드득 날아오릅니다. 하지만, 거센 불길에 미처 날아오르지 못한 비둘기들이 그대로 통구이가 되어 버리는 장면이 중계 화면에 잡힙니다. 정부는 국제적으로는 커다란 이슈가 된 이 사건을 절대 보도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하지요.2018년 8월 통일연구원이 발표한 ‘평화를 위한 심리학’ 자료를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한국인 1천명을 대상으로 ‘평화’라는 단어를 보고 떠오르는 단어 3개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검사를 했습니다. 응답자의 21.1%가 비둘기를 떠올립니다. 다음이 17.5%로 통일이었다고 합니다. 나이, 성별, 이념에 따른 차이는 없었습니다.2011년 서구인 81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평화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단어 중 비둘기는 불과 1%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유와 행복을 가장 많이 떠올렸지요.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교육의 힘이지 않을까요? 서구인보다 24배쯤 더 많이, 더 자주 우리 뇌는 이런 자극에 노출되어 있었던 셈입니다.뇌는 언어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덫처럼 곳곳에 누군가 설치한 언어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영혼에 스며듭니다. 어떤 이미지가 구축되면 꼼짝없이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자극-반응의 프레임에 갇혀 버리게 되지요. 깨어있지 않으면 자석에 쇳가루 끌리듯이 우리보다 훨씬 더 강렬한 에너지를 가진 쪽의 의도대로 휘둘리고 말지요. 영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애쓸 일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1-21

유럽과 아시아

김규종 경북대 교수1988년 햇살이 따사로웠던 4월 중순, 로렐라이 언덕을 찾아가는 길에 라인과 모젤, 란 강이 만나는 코블렌츠에서 중년신사와 대화를 튼다. 유럽의 시간은 영원히 사라진 것 아니냐는 나의 질문에 아니라는 답이 순식간에 나온다. “유럽은 한 지붕 아래!” 하고 그가 간명하게 말한다.장구한 세월 유럽은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각축을 벌이며 살아왔다. 특별한 절대강자 없이 전개된 피의 역사에서 ‘유럽은 한 지붕 아래’라는 전통이 세워진 것이다.‘유러피언 드림’에서 세계주의자 리프킨은 유럽이 공유하는 두 가지로 기독교와 계몽주의를 제시한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 유럽은 예수와 마리아의 그늘 아래 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인류역사에서 최고의 가치를 구현한 4인으로 예수와 마리아, 베드로와 바울을 거명한다. 지리상의 발견과 신대륙 착취에 기초한 17-18세기 계몽주의는 유럽의 과학적 세계관과 제국주의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그런 맥락으로 유럽을 보면 대강(大綱)이 잡힌다. 에르도안 이후 터키는 더 이상 유럽연합 가입에 목을 매지 않는다. 이슬람이자 계몽주의와 무관한 오스만튀르크의 후예가 어찌 유럽연합 회원국이 될 수 있겠는가?! 동유럽 국가들과 달리 제국의 영욕(榮辱)을 역사적인 자산으로 가진 러시아도 유럽연합과 무관하다. 그들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끼어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19세기 중반에 정체성 혼란을 겪은 일도 있다. 그런데 프랑스 대혁명과 결부해 흥미로운 사실이 보인다. 프랑스는 물론이려니와 영국과 도이칠란트, 오스트리아까지 대혁명과 결부한 혁명문학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1837년 뷔히너가 장막희곡 ‘당통의 죽음’, 1859년에 디킨스가 ‘두 도시 이야기’, 1862년에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쓴다.위고가 “예수 탄생이후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고 규정한 프랑스 대혁명을 문학적인 자산으로 공유하는 유럽. 하지만 아시아에는 그런 전통이 없다. 동북아의 절대강자 중국과 남아시아의 패자 인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및 서남아시아의 무슬림 국가들과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에는 유럽이 공유하는 종교-문화-예술적인 자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다채롭고 중층적인 아시아는 커다란 덩어리로 나누어 이해하는 편이 수월해 보이기도 한다.그런 점에서 습근평이 주도하는 ‘일대일로’에 눈길이 간다. 현대판 실크로드 ‘일대일로’가 어디까지 순항할지 궁금하다. 요즘 우리를 사로잡는 홍콩시위는 다른 과제를 던진다. 홍콩의 민주화투쟁이 어떤 의미인지, 숙고해야 할 듯싶다. 유럽 내지 영국식 민주주의의 고수인지, 중국 내정문제인지, 혹은 대만까지 포괄하는 동북아 전체문제인지, 명징한 판단이 쉽지 않다. 막강한 백과사전을 손에 쥐고 있지만, 세계적인 문제의 올바른 인식과 정의는 난맥상이다. 숱한 사건과 전쟁으로 점철된 유라시아 동과 서에 자리한 아시아와 유럽은 특별하게 공유하는 대목이 없다. 그럼에도 유럽과 아시아는 정말 많이 다르다, 하는 것만은 분명한 아침이다!

2019-11-20

분노하라

고전 중 가장 오래된 책.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분노’ 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지배하려 드는 아가멤논 왕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대서사시는 시작하지요.스테판 에셀은 2차 대전 중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겨우 탈출, 목숨을 건지고 나치즘에 저항하며 살아갑니다.평생 우리의 자유를 옥죄는 거대 시스템에 저항하는 삶을 일구신 분이지요. 그가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외치는 노구의 목소리입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무언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동물과 사람의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동물에게도 물론 생각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본능에 따른 반응 일부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고유한 능력은 ‘생각을 생각하는 힘’입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나 스스로를 한 발짝 떨어져 생각할 수 있는 메타 인지 능력 즉 메타노이아입니다.이 능력을 발휘할 때만 사람은 동물과 구분될 수 있습니다.생각을 생각하는 힘 기르기. 자유를 앗아가려는 교묘한 술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 힘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글을 쓰는 작업이 유일한 훈련 방법입니다. 내 생각을 텍스트로 쏟아내고, 텍스트로 문자화된 내용을 보면서 내 생각을 한 걸음 떼어 놓고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이 힘이 싹트기 시작하는 삶은 진정한 자유를 항해 마침내 위대한 첫 걸음을 떼는 삶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1-20

목련화 같은 내 인생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입시공화국인 이 나라 입시에 또 하나의 나이테가 새겨졌다. 선 굵은 나이테를 위해 찬란한 학생시절 전부를 시험에 바친 수험생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마음만 전한다, 제발 이 사회를 요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흥청망청하는 어른들을 흉내 내지 말기를!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진정한 성년의 길에 선 예비 사회인들이 더 정신을 빠짝 차려야 한다. 그래서 나라를 참담하게 몰고 가는 구세대들을 견제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시험 만능주의에 빠진 이 나라의 불행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변명 같지만 필자의 외침은 이제 공허한 메아리도 못 된다. 우리 사회의 중추인 수능을 끝낸 수험생들이 나서서 참혹했던 학교와 시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의미 없고 오로지 경쟁만 부추기는 시험의 폐단을 알려야 한다.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암기식 시험 때문에 학교와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는 학생들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외쳐야 한다.그런데 필자는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 지난 12년 동안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의 대부분이 시험을 위한 죽은 지식이라는 것을! 과연 학생들이 배운 것이 이것 말고 뭐가 있을까?자유롭게 주어진 시간 앞에서 몹시 당황하는 것이 우리 학생들의 현실이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과연 교사들 중에서 큰 시험이 끝난 학생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이 아닌 삶의 지혜로 가르칠 교사가 얼마나 될까? 설령 그런 내용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다가 해도 학생들이 마음으로 배우고 따를 교사가 있을까?학교교육의 불신의 정점은 수능이다. 그래서 수능이 끝나는 순간 학생들은 더 이상 학교와 교사의 지도를 따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동안 교사와 학생들을 연결해준 것이 수능이기 때문이다. 수능이 끝났다는 것은 학생들이 학교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과 같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수능 이후의 학생 생활지도가 불가능하다. 학교에서는 자신들이 학생들에게 한 짓은 모르고 학생 탓만 하기 바쁘다. 의미 없는 대학 탐방, 더 의미 없는 체험 학습은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신만 더 키운다는 것을 교육 관계자들은 꼭 알아야 할 것이다.수능이 끝나면 언제나 수험생들을 위하는 글들이 홍수를 이룬다. 모두 좋은 말이지만, 정작 수험생들은 전혀 관심이 없다. 이런 글들의 공통점은 학생들을 옭아맨 수능에 대한 비판이나 반성은 없고, 무분별한 격려만 있다는 것이다.이 글도 그런 글이 되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홀로서기 앞에 망설이는 학생들을 위해 칠순을 넘기면서 새로 공부를 시작한 자친(慈親)께서 얼마 전에 쓴 시(박화자, ‘목련화 같은 내 인생’)를 졸업 선물로 전한다.“집 가에 서있는 목련화 한 그루 / 어느 날 아침 나를 부르는 듯 / 곱게도 피어 나를 반기더니 / 밤새 그만 꽃잎 끝이 다 말라 시들어져가네 // 가만히 눈 깜박하고 나니 / 세월의 흐름 따라 꽃 같은 내 앞날도 / 다 시들어져버렸네 //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리오 / 슬기롭게 잘 받아들여 / 예측 못 할 남은 인생을 / 행복과 보람 찾아 즐겁게 보내보련다”

2019-11-20

변화를 위하여

장규열 한동대 교수바뀌지 않을 수 있을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세월이 흐르고 사조가 바뀌며 세대가 변하고 세상이 달라진다. 아니 이미 변화했다. 당신은 십 년 전 당신이 아니며 생각도 그때와는 다르다. 좀 가만히 있으려 해도 가파르게 달라져 가는 세상이 그대로 두지 않는다. 조금만 눈을 떼고 있으면, 사물들의 모습이 어느새 몰라보게 바뀌어 있는 걸 발견하곤 한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많은 걸 바꾸어 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도 함께 바뀌어 간다.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이해와 각성에 이르기도 한다. 소통하고 관계를 만드는 방법도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스승과 제자, 상사와 부하, 남자와 여자, 위정자와 국민, 국가와 국가. 모두 다른 세상을 만나는 중이다.한국 기독교 내 가장 보수적으로 알려진 교단 신학교에서, 교수들이 성희롱적 발언을 한 사건이 발생해 물의를 빚고 있다. 여성의 성기를 자극적으로 언급하며 비하했는가 하면, 외모를 놓고 희롱하는 발언까지 있었다고 한다. 수업과 채플 등에서 성희롱과 성차별 발언이 있어, 학생들과 학교 당국이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고 한다. 성직자를 기르는 이들이 어떻게 그런 행태에 이르게 됐을까. 그들이 섬길 사람들의 가슴에도 상처를 입힐 뻔 하지 않았는가. 성경 구절이 혹 남녀를 구분하고 차별하며 여성을 가벼이 여기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했더라도, 오늘 바뀐 세상이 이를 부당한 것으로 바라보는 터에 어떻게 그 같은 옛 모습을 아직도 고수하는가. 보수(保守)라 하여 어느 것도 바꿀 수 없다는 수구(守舊)에 머물러야 하는가.진보라 하여 급진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듯이, 보수라 하여 수구를 고집하면 안될 일이다. 진보가 변화에 신중해야 하며, 보수는 변화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보수가 오히려 세상 변화에 민감해 바꾸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헤아려야 한다. 어차피 바뀌어 가는 세상을 멈출 수 없을 바에야, 보수가 변화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보수의 생명은 그 변화를 어떻게 맞느냐에 달려 있다. 용도폐기에 이른 가치를 붙들고 고집하는 보수는 부끄럽고 처연하다. 생각의 틀을 시대정신에 걸맞게 빚어내는지 국민이 불꽃같이 살피고 있다. 이전과 다르게, 살피고 헤아릴 도구들은 국민의 손에 들려있지 않은가.여성에 대한 차별과 경시는 부당하다. 양성은 각각 특별한 존재로 인식돼야 하며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함부로 칭하며 가벼이 대하면 안 되고, 그 어떤 목적을 가지고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동료로서 여성을 새롭게 발견하길 바라고 더욱 폭넓은 가슴으로 받아들이길 기대한다.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딸들의 하루하루를 새겨보아야 한다. 보수라는 핑계는 낡아도 너무 낡았다.보수가 새로워져야 한다. 진보가 정신이 번쩍 들도록 다시 태어나야 한다. 국민이 편안한 나라가 되기 위해 변화를 겁 없이 맞아야 한다.

2019-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