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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달빛열차엔 제동장치도 없다

김형렬 전 대구 수성구청장대한민국의 운명을 실은 달빛열차가 철로가 끊긴 줄도 모르고 미친 듯이 달린다. 주저하지도 않는다. 적폐청산, 개혁의 미명아래 자갈을 물리고 혼을 뺀 언론, 검찰, 경찰, 사법부, 입법권력과 전교조, 민노총 등 홍위병들과 문빠들을 1등석에 태우고 2등석엔 달빛열차를 믿고 탄 국민들을 태우고 달리고 있는 것이다.열차의 고장난 제동장치를 고치려던 사람들을 강제 하차시키고 마냥 앞으로만 달린다. 열차를 움직이는 자들은 거침없이 달릴 수 있다고 좋아하지만 진작 그들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채 탈선할 것이라는 앞날을 못보고 있다.처음 달빛열차를 믿고 탄 소상공인, 자영업자와 종업원들은 이제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있다. 수많은 저소득근로자들은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부푼 꿈을 안고 달빛열차를 탔으나 최저임금 인상으로 고용주들이 경영악화를 이유로 노동시간을 줄여 오히려 소득이 감소하였으며, 자영업자들은 소비가 늘어 소득도 늘 것이라는 장담과는 달리 오히려 저소득층으로 전락했다. 폐업도 속출한다.열차를 타려했던 중산층들은 안전한 다른 나라 열차표로 바꾸려 한다고 한다.아무리 지켜봐도 기관사나 열차운행자들이 정상인 정신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고, 열차 푯값이 날이 갈수록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치솟기 때문이다. 달빛열차가 미친 열차인지 아는 사람들은 차라리 걷는 게 낫다고 열차에 타려 하지 않는다.공정역, 평등역, 정의역, 소득주도성장역 등 애초 내건 달빛열차의 정착지엔 서지도 못하고 승객들은 난폭 주행 열차에 실려 있다. 내려야 할 역에서 내리지 못한 승객들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 내려 아까운 목숨을 잃거나 부상자가 속출한다.그런데도 달빛열차의 기관사는 신년기자회견에서 달빛열차는 잘 달린다고 뿌~하고 기적소리까지 내고 있다. 2여년 전 달빛열차 운전대를 잡은 기관사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 5천2백만 승객 앞에서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기회는 불평등했고 과정은 불공정했으며 결과는 정의롭지 못하다는 게 세상만사에 알려졌다. ‘가족사기단 영화인 기생충’을 연상시키는데 일등공신이 된 조국 부기관사의 민낯이 드러나자 그는 ‘조로남불’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기도 하는 뻔뻔함을 보여줬다. 달빛열차가 중대한 문제를 안고 미친 듯 달리는 데도 기관사는 부기관사의 공로가 컸다고 떠들고 있다.그 다음 임명받은 안전담당 부기관사는 부임하자마자 차량을 손볼 철도원들을 쳐 내는데 첫걸음을 내디뎠다. 열차 점검원들은 낡고 망가진 부품을 제때 교체해야 열차사고가 일어나지 않고 정상 운행할 수 있다고 진언하나, 묵살하거나 아예 망가진 부품을 볼 수 없도록 손발을 묶어버렸다. 몇몇 용기 있는 철도원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는 허공에 맴돌기만 한다.안전을 책임져야할 철도원들까지 하나 둘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있다. 볼트가 빠져도, 녹이 슬어도, 객차 연결고리가 풀어져도 관심이 없다. 열차를 세우기 위해 바리케이드라도 쳐야 할까? 열차충돌시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장치라도 있어야 하는데 불행히도 그럴만한 장비도, 장치도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달리는 열차를 보며 열차가 가고 있는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국민의 고함소리에 기관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이동풍(馬耳東風) 그 자체이다. 국민들을 개, 돼지로 보는지 짖어라 열차는 간다는 식이다. 이대로라면 탈선, 전복은 불보는 듯 훤하다.달빛열차가 탈선, 전복되지 않으려면 열차를 세워야 한다. 힘으로라도 열차를 세워야 하는데 무슨 힘으로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과연 방법은 없을까? 있다. 그것은 바로 달빛열차를 움직이는 동력을 차단하고 새로운 연료로 동력을 교체하는 것이다. 달빛열차는 이제 4+1이라는 살아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유해한 합성연료로 달린다. 4+1이라는 검증 안 된 합성연료를 태워 달리다보니 온갖 유해물질들이 쏟아져 나온다. 제동장치 등 주요 부분에 대한 철저한 사전검사와 보수가 이루어지고 승객들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실 수 있으려면 열차가 탈선, 전복되기 전 반드시 세워야하고 그럴려면 달빛열차의 동력원을 4+1이라는 유해한 합성원료 대신 친국민연료로 바꾸어야 한다.미친 듯 달리는 달빛열차의 동력 전원을 끊자! 바로 4월 15일, 제20대 총선이 그 동력을 끊는 날이다.

2020-01-19

정중동(靜中動) TK 민심… 갈 길이 바쁘다

우정구 논설위원19일 정종섭 의원(대구 동구갑)이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써 TK 현역의원에서도 불출마 선언자가 최초로 나왔다. 그동안 TK 현역의원들은 보수 세력의 거듭된 불출마 선언 요구에도 그냥 묵묵부답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정 의원의 불출마 선언으로 당장 면피는 한 셈이 됐다.그러면 그동안 왜 그들은 버텼을까. 그 이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첫째는 대구경북에서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 확실시되는 분위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실정과 지역에 대한 푸대접이 가져 온 지역 정치인의 반사이익 부분이다. TK 정치권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또 하나는 핑계로 보일 수도 있으나 자신의 지역구를 이을 예비후보가 모두 약체라는 판단이다. 경선을 붙어도 질 이유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당장 유권자의 눈총은 받지만 조금만 버티면 공천을 거머지고 당선도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나보다 모두 못하다는 일종의 오만한 생각일 수도 있다.공교롭게도 대구 출마가 예상됐던 홍준표 전 대표와 김병준 전 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과 같은 거물급 인사의 등장이 대구에는 없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호재였던 셈이다. 이와 연관지어 지역에 출마한 예비후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참신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대개 전직 국회의원 출신이거나 행정관료 출신 혹은 지방의원 출신이며 그 중에 고령자의 얼굴도 간간이 눈에 띈다.어쨌거나 TK 현역의원에 대한 보수 세력의 불출마 요구는 당선 가능성이나 예비후보와의 경쟁관계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한국당의 쇄신책의 일환으로 국민의 지지도를 회복하는 해법의 하나로 요구한 것이다. 이미 한국당에서 용퇴를 결정한 다수 의원들은 당의 쇄신에 도움을 주기 위한 용단이라 말하고 있다.한국당이 죽느냐 사느냐를 심판받는 막중한 선택지의 하나인 것이다. 특히 TK 정치권에 요구하는 용퇴론은 20대 총선에서 잘못된 공천을 받은 수혜자로서 불출마를 통해 당의 쇄신에 기여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김병준 전 한국당 비대위원장은 지난주 대구의 한 포럼 행사에 참석, “서울과 부산, 경남에서 다 그만두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잘못된 공천의 수혜자가 많은 대구경북에서 왜 한 명도 나오지 않고 있느냐”며 “이 분들이 정리되지 않는 한 문재인 정부의 폭정을 막을 수가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 대구경북민의 자존심을 구기게 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같은 날 이언주 의원도 “한국당 등 기성 보수 세력이 성찰과 반성을 할 줄 모르는 것이 문제”라고 TK 의원에 대한 비판에 가세했다.범보수 세력은 한국당의 변신은 물과 물고기, 물통까지 다 바꿔야 산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대구경북 현역의원의 분위기는 “나는 아니다”는 생각인듯한 모습이다. 다만 향후 공천 작업이 개시되면 불출마 선언자가 뒤늦게라도 나올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버티다 당이 정한 쇄신기준에 의해 공천에 탈락하게 되면 모양새는 구겨질 것이 뻔하다. 현재 한국당은 물갈이 폭을 50%로 보고 있다. 이 기준대로라면 대구는 5명, 경북은 6명의 현역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 당이 대구경북에다 쇄신에 무게를 더 두게 되면 더 많은 물갈이가 가능할 수도 있다.대구경북 현역의원들이 버티는 모양새의 배경에는 ‘공천=당선’이라는 등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앞서 설명했다. 이 말을 잘 새겨들으면 대구와 경북의 민심이 전례 없이 한국당에 많이 쏠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설적이지만 문 대통령의 거듭된 실정은 대구경북의 민심을 더 똘똘 뭉치게 한 원인이 됐다는 분석도 가능하다.그렇다고 대구경북의 민심이 무턱대고 한국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와는 다르다. 문 정권 집권 후 진보세력이 보인 일방적이고 독주적인 통치스타일을 통해 많은 학습을 한 후 나타난 변화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당은 지지한다. 하지만 사람은 바꾸라는 요구다. 한국당이 얼마나 지역 민심을 만족시킬지는 알 수 없으나 앞으로 대응하는 과정은 지켜볼만 한 일이다.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처럼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대구경북의 민심은 지금 한국당에 일방적이다. 문 정부의 견제를 위해 과거보다 더 결집력이 좋아질 수도 있다. 지역의 한 인사는 TK 민심에 대해 “어떤 측면에서 더 뭉친 측면도 있다. 한국당이 이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그 힘이 새 방향을 모색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새 방향이 민주당은 아니라 본다고 했다.TK의 민심은 지금은 정중동(靜中動)의 분위기다. 보수통합의 결과에 따라 본격적인 움직임도 예측해 볼 수 있다. 과거보다 결집된 TK 민심이 어떻게 표심에 작용할지 판단하는 것은 아직은 성급하다.선거는 민주주의의 핵심 개념의 하나다. 유권자가 정치 과정에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정치 참여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짧은 민주화 과정을 거쳤지만 학습 효과는 늘 높았다. 유권자가 더 똑똑해졌다. TK 표심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2020-01-19

보수와 진보의 진영 편견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이념 갈등이 우리처럼 심각한 나라는 드문 것 같다. 보수와 진보의 진영논리는 서로 상대를 적으로 간주한다. 촛불과 태극기 집회 이후 그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대의 민주주의의 불신에서 비롯된 광장 민주주의가 초래한 비극일지 모른다. 보수와 진보 진영은 서로를 부정하고 거부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한다. 자기편은 항상 선이고 상대는 악이다. 자신은 정의이고 상대는 불의이다. 이러한 풍토에서는 국정에 대한 올바른 비판도 경쟁도 있을 수 없다. 네 편 내편이라는 감정의 골만 깊어져 정치판이 어지러워진다.보수진영의 일반적 편견부터 살펴보자. 보수진영은 항상 자신들만이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분단 상황에서 철저한 반공만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보수 우익만이 자유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 정치사에서 부패한 보수 권력이 몰락한 모습을 수없이 보았다. 이승만 보수 정권의 부정 선거, 박정희 정권의 유신 독재는 정권의 종말로 끝나 버렸다. 개혁하지 못한 보수는 결국 부패로 망한다는 교훈이다.진보진영의 편견도 이에 못지않다. 진보진영에서는 보수를 개혁을 거부하는 방해 세력으로만 간주한다. 보수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이며 역사를 후퇴시키는 부패세력으로 치부한다. 진보 진영은 보수를 ‘수구반동’ ‘수구 꼴통’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이 역시 보수의 참 가치를 모르는 편견이다. 진보는 자신들만이 자주성이 강하고 보수는 외세 의존적이라는 독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사는 급진적 개혁이 떼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몰락했음을 보여주었다. 지구상에는 개혁과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좌익독재가 무수히 인권을 탄압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한국사회의 보수와 진보의 편견은 어디에서 유래할까. 무엇보다도 한국 정치의 보수와 진보라는 고질적 적대관계가 이를 증폭시켰다. 우리 정치의 여야의 부정적인 네거티브 게임은 편견을 증폭시켰다. 선거의 승자는 정의가 되고 패자는 모든 것을 상실한 결과이다. 이 모순된 정치가 시민사회를 양분시켜 버렸다. 이런 진영싸움에서 중도 온건층은 설 자리를 잃어 버렸다. 이러한 보수와 진보 진영의 편견에는 이 나라 언론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정치를 비판하고 견제해야할 언론마저 진영논리에 편입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의 적대적 구도가 시민 사회를 분열시키고 언론이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구도가 되어 버렸다.이러한 보수와 진영 간의 편향적 시각은 무척 극복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를 방치하고 국민 화합이나 통합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정당간의 정권 교체도 두 번이나 경험하였지만 정치 문화는 여전히 후진적이다. 우리의 보수와 진보는 하루 빨리 진영논리를 극복하여야 한다. 보수와 진보 정당은 체질부터 개혁하여야 한다. 개방사회의 모든 정당은 이념보다는 실용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극단적 보수와 진보의 논리는 결국 정치적 허무주의로 연결된다.이 나라 정당은 언제쯤 보수와 진보라는 이데올로기적 허위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

2020-01-19

시간을 훔쳤습니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자작시를 낭송했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미국인들 사이에 ‘국민시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한번은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해왔습니다. 프로스트가 그 청을 수락하고 연단에 서자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서 시인이 되셨습니까?”그 자리에 모인 사람 중 대부분은 글을 쓸 시간이 없어서 시인이나 작가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프로스트는 질문을 던진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았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이 강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비밀을 지켜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저만의 방법을 알려 드리지요.”사람들은 무조건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프로스트는 정말 큰 비밀이라도 고백하듯 소곤소곤 말했습니다. “나는 도둑놈처럼 시간을 좀 훔쳤습니다. 식사 시간도 훔쳐 오고, 잠자는 시간도 좀 훔쳐 오고, 사람들과 잡담하는 시간도 훔쳤습니다. 그리고 훔쳐 온 시간을 용감하게 휘어잡고 시를 썼습니다.”사람들이 할 말을 잊고 무어라 대꾸를 못하자 프로스트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늘 바쁘다고 생각하지만 필요한 시간이란 언제라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겁니다.”1860년, 안톤 루빈슈타인이 지도하는 제1기 음악교실에 행색은 초라하나 눈빛이 살아 있는 20대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광산에서 일하는 가난한 광부의 차남인 이 청년은 누구보다 시간을 아까워하며 음악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무의미하게 허비하는 시간을 가장 싫어했던 인물로 종종 나태해지려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서두르자. 시간이 없다. 내 영혼에 있는 이 아름다운 선율을 그대로 놔둔 채 죽을 수는 결코 없다.” 이 청년의 이름은 표도르 차이코프스키, 러시아의 보배입니다./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20-01-19

모두 행복한 것 같아, 나만 빼고

김현욱 시인영화 비트는 1997년 5월 3일에 개봉했다. 당시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고, 대구 동성로의 한 극장에서 영화 비트를 봤다. 1997년은 정초부터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부도, 도산하며 한국 외환 위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해였다. 12월 3일, 한국은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의 혹독한 관리에 놓이게 된다. 경제 관료와 재벌, 정치인, 언론, 기득권층의 도덕적 해이와 위선으로 수많은 서민이 영문도 모른 채 해고와 실업으로 뼈를 깎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니까, 1997년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무가 큰 도끼에 찍혀 휘청거리던 해였다. 크고 작은 벌레들은 배를 불렸지만, 가냘픈 나무초리와 이파리들만 우수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하지만, 한국 영화계는 1997년을 기점으로 명작들을 쏟아낸다. 비트, 초록물고기,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박하사탕, 공동경비구역 JSA, 동감, 파이란, 번지점프를 하다, 봄날은 간다, 친구 등이 그것이다. 영화 제목만 보고도 그때 그 당시의 장소와 상대를 추억으로 소환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특히, 영화 속 명대사는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접속의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꼭 만나게 된다고 들었어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봄날은 간다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버스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는 수십 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명대사다.최근에 영화 비트를 다시 보다가, 로미(고소영)의 대사가 귀에 쏙 들어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먼저야.”와 “사람들이 행복해 보여, 나만 빼고.”였다. 97년 당시에는 감각적인 영상에 휘둘려 대사를 음미할 여유가 없었는데 이십여 년이 흘러 다시 보니 곱씹어 볼 만한 명대사, 명장면이 많았다. 입시지옥에서 친구를 잃은 우등생 로미는 요양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돈을 벌겠다는 목표로 분식점을 차린 환규(임창정)는 사기를 당하고 인부를 칼로 찌른다. 감옥에서 나와 환규가 다시 한 일도 역시나 포장마차를 여는 것이다. 폭력 조직에서 중간 보스로 승승장구하던 태수(유오성)도 배신을 당하고 끝내 죽음을 맞는다. 태수를 구하러 갔던 민(정우성)도 만신창이가 된다.그 누구도 행복한 사람이 없는 영화다. 1997년의 청춘과 2020년의 청춘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명문대에 진학하려는 이유도, 돈을 벌려는 이유도, 조직에서 승진하려는 이유도 모두 행복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명문대에 진학하면, 돈을 많이 벌면, 승진하면 행복할까? 그때도 “모두 행복한 것 같아, 나만 빼고.”라고 아니 말할까? 지인의 SNS를 훔쳐보면서 부러움과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들보다 더 자랑거리가 많아지는 것일까?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정말, ‘행복’일까?

2020-01-19

‘다꾸’를 시작했습니다

이미하 영어 강사요즘 ‘다꾸’하는 재미에 빠져 있다. 예쁜 신상 ‘마테’랑 스티커 사느라 두부 20모쯤 되는 돈을 쏟아 부었나 보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분이 대부분 아닐까 짐작한다. ‘다꾸’는 다이어리 꾸미기를 뜻하고 ‘마테’는 알록달록하게 디자인한 예쁜 마스킹 테이프를 줄인 말이다. ‘다꾸’에 열성을 보이는 10대 청소년이나 20대 여대생들이 흔히 쓰는 표현이다. 학원을 운영하며 학생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쓰는 언어에 익숙해진다. 왠지 이런 표현을 쓰면 마음까지 살짝 젊어지는 기분이다.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작년까지는 흔히 볼 수 있는 푸른색 커버에 2019 숫자가 음각으로 찍힌 다이어리를 구입해 업무를 중심으로 스케줄 관리를 위해 사용했다. 1년이 지난 후 다시 펼쳐본 낡은 다이어리는 흉측했다. 검은색 볼펜으로 찍찍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메모들, 바빴던 스케줄 중심의 건조한 기록들로 가득한 다이어리는 그냥 버린다고 해도 미련을 둘만한 아무런 미적, 정서적 가치도 없었다. 올해는 나만의 가치를 담은 색다르고 예쁜 다이어리를 만들고 싶었다. 일 년 동안 내 삶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낼 예쁜 다이어리를 꾸미기에 의미를 부여하자 부질없는 시간 낭비로 보였던 장난 같은 ‘다꾸’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다이어리부터 바꾸었다. 작년까지 사용했던 푸른색 커버 대신 투명 비닐 커버의 노트처럼 생긴 캐주얼한 다이어리이다. 올해 받은 탁상 달력 속 노란색 뽀글 머리에 큰 눈을 가진 소녀 캐릭터가 사랑스러웠다. 달력을 포기하고 오려내 다이어리 앞. 뒤 표지에 붙인 후 꽃 스티커로 장식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다이어리가 탄생했다. 표지 장식을 끝낸 후 거금을 투자한 스티커를 이용해 월간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다. 매달 컨셉을 잡아 어울리는 스티커로 전체를 장식하고 기억해야 할 중요한 날은 특별히 눈에 잘 뜨이는 스티커를 붙였다.1월은 상큼한 출발을 다짐하며 레몬에 다양한 표정을 담은 스티커로 꾸몄다. 개나리색 형광펜으로 ‘좋은 일만 가득해라’ 소망도 써 두었다. 음력 내 생일과 양력 아들 생일이 겹치는 신기한 일이 있어 삼단 케이크 스티커와 빨간 하트 풍선을 쥐고 달리는 소녀 스티커로 꾸몄다.2월 월간 계획표는 한 편의 추상화다. 단순한 모양에 예쁜 파스텔 톤의 꽃과 나무 스티커를 곳곳에 배치하니 세련된 멋이 넘친다. 화요일 오전의 독서 모임 외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허전해 보이는 2월, 어떤 내용으로 빈칸을 채워갈지 기대 가득하다.새 생명이 약동하는 3월의 다이어리에는 온통 사슴들이 뛰어논다. 모진 추위를 견디고 생명이 움트는 계절, 사슴처럼 순수하고 맑은 눈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드러난 모양이다. 3월에 있는 아버지 생신을 잊지 말자고 파란 별 스티커를 붙였다. 계절의 여왕 5월에는 다이어리에도 꽃의 향연이 펼쳐진다. 정성껏 꾸민 분홍, 보랏빛 예쁜 꽃 스티커에서 향기가 진동하는 느낌이다. 5월 8일 어버이날 칸에 빨간 하트 스티커를 붙이고 사인펜으로 진하게 눌러쓴다. 사랑해요! 감사해요!7월 다이어리는 온통 푸른색이다. 화요 독서모임 회원 중 문구점을 운영하는 분이 내가 ‘다꾸’하는 걸 알고 스티커를 여러 장 선물했다. 그중에서 조개, 불가사리, 고동, 유리병 스티커로 시원한 여름 바닷가의 모습을 연출해 본다. 즐거운 여름 휴가가 기다리는 7월, 올여름 휴가는 어디로 갈까? 동남아? 중국? 벌써 마음이 설렌다. 휴가지를 결정하면 그곳 풍물이 가득한 스티커를 사서 꾸미려 한다.재미삼아 시작했던 다이어리 꾸미기는 점점 의미 있는 일로 변했다. 매달 그달의 컨셉을 잡고 꾸미는 일은 한 달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희망이며 약속을 시각화해 자연스럽게 그날을 의미 있게 보내려는 다짐을 자연스럽게 하게 만들었다. 소중한 날들을 미리 예쁘게 꾸며 놓았기 때문에 마음 든든하다. 아직 꾸미지 않은 빈칸이 많이 남아 있다. 바라기는 더욱 다채로운 스티커들과 아기자기한 이야기로 2020 나의 다이어리가 꽉꽉 채워져 소중한 삶의 기록으로 오래 남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2020-01-19

에티오피아에 칠곡군 마을이 있다?

백선기 칠곡군수올해는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군 13만 8천여 명과 유엔군 3만 7천여 명이 대한민국을 지키고자 북한군에 맞서 싸우다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국방부는 2000년부터 무려 20여 년 동안 6·25전쟁 전사자 유해를 발굴해 왔고, 지난해 칠곡군에서만 30위의 유해가 수습될 정도로 전쟁은 참혹했다.우리 국민은 미국, 영국 등의 전통적인 우방국의 참전은 알고 있어도 커피의 나라로 알려진 에티오피아가 아프리카 유일의 전투병을 파병한 참전국이란 사실은 대부분 모르고 있다.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는 “이길 때까지 싸워라. 이기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라는 명령과 함께 자국의 장병을 파병했다. 3주간의 긴 항해 끝에 지구 반대편 낯선 나라의 전투에 참여한 6천여 명의 에티오피아 장병들은 120여 명이 전사하고 5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하지만 황제의 명령처럼 이기든 죽든 하나만 선택했기에 참전국 중 유일하게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었다. 253전 전승이라는 무패신화를 쓰며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데 앞장선 에티오피아 전설의 부대, 그래서 그들은 ‘초전박살’이란 뜻의 ‘각뉴부대’라고 불린다.그런 형제의 나라 에티오피아가 1970년대 공산화되면서 각뉴부대 영웅들은 반역자로 전락했다.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이유로 재산이 몰수되거나 손가락질을 받으며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필자도 2014년이 되어서야 에티오피아 참전용사의 혁혁한 전과를 자세히 알게 됐다.이러한 사실을 지역민에게 전파하자 호국과 보훈을 도시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칠곡 군민은 보훈에는 국경이 없다는 신념으로 에티오피아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낙동강세계평화 문화대축전’에 평화의 동전밭을 마련했다. 동전밭을 통해 에티오피아 참전용사의 고귀한 희생이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지자 2015년부터 에티오피아 지원에 주민들의 본격적인 동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지역 유치원과 초등학생 5천여 명은 용돈을 모아 에티오피아 돕기에 나섰다. 생활에 여유가 있는 군민은 물론, 기초 수급자와 장애인 등 도움이 필요한 주민도 참여해 매월 1천200여 만 원을 모으기 시작했다.이러한 군민의 자발적인 정성을 모아 에티오피아 디겔루나 티조 지역을 칠곡평화마을이라 부르고 7년 동안 교육과 식수 사업 등을 펼쳐왔다. 현지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해 지원의 효과를 높이고자 2015년과 2017년에는 칠곡군 방문단을 구성하고 직접 티조 지역을 방문했다. 이를 통해 칠곡평화마을 제막식과 초등학교 준공식을 가지고 식수시설을 탐방했다. 또 과거 한국이 가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새마을 운동을 전파할 수 있었다.이뿐만 아니라 에티오피아 6·25전쟁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우리 군은 2016년, 2018년 두 차례에 걸쳐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를 초청해 그들의 무훈을 널리 알렸다.지역 독지가는 에티오피아 영웅들이 칠곡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사비를 털어 생필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참전 용사임을 알아본 상인들은 제품을 원가로 판매하거나 각종 생필품을 선물했다. 이밖에도 낙동강세계평화문화 대축전에 에티오피아 홍보 부스를 마련해 지역 사회에 그들의 전통 문화와 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을 전파하고 주한 에티오피아 대사관과 ‘문화·관광·보훈 분야 MOU’를 체결해 외교적 차원의 지원 방안도 모색하기 시작했다.칠곡군민의 위대한 발걸음은 올해에도 멈추지 않는다. 오는 2월 24일부터 28일까지 세 번째로 에티오피아를 방문할 예정이다. 이번 방문에서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해 한국전 참전용사를 만나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또 한국전 참전용사 마을을 방문해 의약품, 장난감, 축구공 등을 전달한다. 특히 지난 7년간의 군민의 성원으로 꿈과 희망을 되찾은 티조 칠곡평화 마을의 자립을 선포하고 짐마게네티를 방문해 또 하나의 칠곡평화마을을 조성할 계획이다.군수로서 한 것이라고는 군민을 대표해 에티오피아를 방문하고 진심 어린 마음을 전달한 것뿐이다. 지난 7년간 호국과 보훈의 가치를 올곧게 세우며 이역만리에 칠곡평화마을의 현판을 내건 우리 군민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칠곡군민에게 아낌없는 박수가 필요하다.

2020-01-19

정치권 인재 영입

인재 영입과 관련한 고사(故事)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삼고초려(三顧草廬)가 유명하다. 뛰어난 지략가며 불세출의 영웅 제갈량을 모시기 위해 유비는 자신보다 스물 살이나 어린 제갈량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아가 그를 감복시킨다. 훌륭한 인재를 맞는다는 것은 그만큼의 정성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삼국지 영웅 조조도 인재를 중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수하에 수많은 인재가 운집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는 “오직 재능만이 추천의 기준(唯才是擧)”이라 했다. 능력만 있으면 남에게 욕을 먹거나 말거나 주저 없이 발탁하는 것이 그의 특별한 인재관이다.일본의 전기회사 파나소닉을 세운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통한다. 그는 “사업은 사람이 전부다” 라고 말했다. 동서고금을 둘러봐도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틀렸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일의 중심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최근 기업이 인재를 얻기 위해 인재가 근무하는 기업 자체를 인수하는 새로운 경영 방식이 도입되고 있다 한다. 주로 기술인력 스카우트가 치열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세계는 바야흐로 인재확보 전쟁에 불꽃을 튕기고 있다.4.15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인재 영입바람이 한창이다. 여야는 좋은 인재 확보를 위해 물밑 경쟁도 마다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이 발표한 영입 인재에 대한 평가는 노력에 비해 별로다. 장애인, 권익운동가, 극지탐험가, 경력단절 워킹맘 등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을 했지만 국민 눈높이를 채우지 못한 탓이다. 구태 정치인은 그대로 두고 인재만 영입해봤자 포장만 바꾼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다. “일회용, 추잉껌” 등의 악평도 나왔다. 눈가림보다 내부혁신이 먼저라는 뜻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01-16

서로 다른 경제지표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지난 14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고민정 전 청와대 대변인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기자회견은 문 대통령이 직접 질문자를 지명하고, 답을 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회견이 끝난 뒤 참석한 기자들 상당수는 왠지 현 정부에 우호적이거나 온건한 성향의 기자들이 많이 지명된 것 같다는 의구심을 털어놨다. 또 질문자로 지명된 기자들이 거의 대부분 회견장 앞 첫째 줄과 둘째 줄에 포진해 있었던 사실 또한 우연한 일이었을까 의심스러웠다. 기자회견 시작하기 약 1시간 전에 영빈관에 입장해보니 이미 회견장 앞 둘째줄까지 꽉 차 있었던 점도 이상했다. 당시에는 “무척 부지런한 기자들이 많구나” 하고 지나갔지만 돌이켜보면 청와대측의 고육지책은 아니었을까.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과 살아있는 답변을 통해서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국민께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대통령의 질문자 지명 이벤트는 지난 해에 이어 재연했지만 청와대측은 지난 해 생방송된 신년 기자회견에서 벌어진 악몽을 되풀이할 수 있다고 우려했을 수 있다. 지난 해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한 지역 방송기자가 문 대통령에게 “나라 살림살이가 어려운 데 무슨 자신감으로 경제기조를 바꾸지 않겠다는 것이냐”는 공격적인 질문으로 논란이 된 바 있다.더구나 문 대통령은 신년사에 이어 이날도 우리 경제지표 개선을 이유로 ‘많이 좋아졌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지난해 신규 취업자가 28만명 증가해 역대 최고 고용률을 기록했고, 청년 고용률도 13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평가했다. 수출과 관련해서도 “지난해 우리는 미·중 무역 갈등과 세계 경기 하강 속에서도 수출 세계 7위를 지켰고, 3년 연속 무역 1조달러, 11년 연속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고 말했다.그러나 취업자가 크게 늘어난 것은 세금으로 늘린 노인 공공 일자리가 크게 반영됐고, 40대 이하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줄고, 초단시간 취업자가 급증하는 등 일자리 질은 오히려 급속히 나빠졌다. 수출상황도 마찬가지다. 순위나 수출액은 맞지만 지난 해 우리나라의 수출은 10.3% 감소해 세계 금융 위기 때인 2009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고, 무역 흑자는 372억달러로 전년에 비하면 반 토막이 됐다. 이런 부정적인 지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문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신년사에서) 긍정적인 지표를 많이 말하고, 부정적인 지표를 말하지 않았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말한 내용은 전부 사실”이라고 했다. 신년사 이후 언론의 따가운 비판이 잇따랐던 걸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객관적인 경제지표에 대해 의도적인 거짓말을 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경제가 어려우면 어렵다고 인정해야 새로운 개선책이 나올 것 아닌가. 영세자영업자들을 포함한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는 데, 대통령과 정부가 경제지표가 나아지고 있다는 식의 안이한 인식을 보이는 현실은 국민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2020-01-16

어머니

설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설이라고 해도 어렸을 때 같지는 않아서 나이가 들수록 즐거움보다는 의무감이 앞선다.가만 있자, 내 나이가 얼마나 되었더라? 하고 생각하니 실로 어마어마하다. 수십년전 대학원에 들어가 무서운 선생님 연세가 얼마나 되셨나? 했을때 바로 그 분이 지금 내 나이셨다.그러니 내 아버지, 어머니는 지금 얼마나 연세가 드셨을까. 아버지 서른두살, 어머니 스물일곱살에 결혼해서 이듬해에 내가 세상에 나왔다. 나오기는 부모님 덕분에 나왔는데, 그후로 부모님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나이 들어서도 내 좋은 것만 찾아다녔지 부모님 생각에 밤을 지샌 적은 없다.여름 지나서 어머니가 허리가 아프다고 하셨다. 키에 비해서 체중이 좀 되시기 때문에 허리에 부담이 되시는 것이려니 했다. 또 허리 아픈 데는 내가 왠만한 선수쯤은 우습게 보는 처지인지라 아프시면 얼마나 아프시랴 했다.그 사이에 학교 일이 무척이나 힘들고 바빴다. 민족에 관한 국문학 쪽의 논의를 둘러싸고 어떤 절박한 생각이 떠올라 그 일에 쫒기기도 했다. 유월부터 나도 얼마나 몸이 힘든 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고 지낸 것도 같다.십이월이 되자 겨우 정신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어머니의 허리 상태는 앉지도 서지도 못 할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이 아플 때 구해줄 수 있는 의사 만큼 귀하고 고마운 존재는 없다. 결국 어머니는 동생 병원에 계시다는 명의로부터 수술을 받으시게 되었다. 어머니가 의사며 수술을 그렇게 무서워 하시는 줄 이제서야 알았다. 기왕 하기로 한 것 마음 놓으시라고 몇번이나 안심시켜 드렸지만 다가올 큰 일이 내내 걱정이신 모양이었다.그동안 내가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잘해야겠다고 대전, 서울을 매일같이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수술 날이 닥쳤다.아침 일곱시 반에 어머니는 수술실로 들어가셨다. 아홉시 반까지 수술 준비를 하셨다. 열시 반이 되어서야 나는 아버지와 막내 동생이 기다리는 수술실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기차 안에서 잠이 든 나는 대전을 지나 동대구 역까지 갔다 되돌아 온 것이었다.열한시반, 열두시반, 한시반, 그리고 두시가 되어서야 어머니의 수술은 끝이났다. 전광판에 어머니의 이름 옆에 회복실이라고 써 있었다. 드디어 수술실 밖으로 참을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났다.허리 수술 만큼 아픈게 없다는데.나는 참 못나고도 나쁜 놈이었다.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구제불능, 천하의 불상놈 밖에는 안 될 것이었다. 사람의 사랑 가운데 어머니 사랑만큼 지극한 것이 없다. 나는 그 사랑을 받은 자식인 것이었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20-01-16

상식이 통하는 나라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요즘 많은 이들이 여야로 나뉘어 “한번도 경험 못한 나라”를 경험하고 있다고들 말한다.여당 지지자들은 과거 보수정권의 독재적 통치와 비교하여 대통령을 자유롭게 비판하는 현재의 상황을 한번도 경험못한 나라의 한 축으로 여긴다. 반면 야당 지지자들은 장관 임명의 일방적인 결정과 검찰의 수사팀 교체, 원전해체, 자사고 폐쇄 등 일방적인 독재가 더 심하다고 주장한다.얼마 전 한국의 특성화 과학기술대학교 중에 하나인 유니스트 졸업식에만 대통령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과학기술계는 매우 놀란 적이 있다.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의 수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야당은 선거개입이라고 하고 여당은 일상적 대통령의 선택적 통치의 일환이라고 한다. 속단하긴 어렵지만 수사는 공정히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여야가 모두 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수사하는 검찰의 모습은 국민의 성원을 받기에 충분했다. 사실상 정의를 추구하는 정부는 그러한 정의로운 수사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수사가 진행되기 힘들 정도로 최근 검찰의 수사팀이 급속히 해체되고 있는 모습이 상식과는 배치되지만 과거 검찰이 검사출신 범법자에 대한 관용으로 국민들로부터 검찰의 불신을 불러온 것도 사실이다. 검찰개혁도 기본적으로 필요한 정책일 수 있다. 그러나 검찰개혁을 찬성하는 국민들도 수사팀 해체는 찬성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검찰 개혁 등 권력기관 개혁은 권력의 견제와 정치적 독립성 보장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방향으로 슬기롭게 전개되어야 한다. 검찰도 일부 제식구 감싸기라는 상식적이지 않은 수사에서 벗어나 정의로운 검찰의 모습을 보이는 반성이 필요하다.교육자로서 현재의 이념 편향적 교육의 기조도 문제이다. 대부분의 학부모와 국민들이 이념편향 교육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고, 자사고·특목고 등의 폐쇄로 상징되는 획일적 사회주의적 교육정책 방향은 전교조 이념교육을 오히려 강화하고 자유민주주의적 원칙에 반하고 있다. 일부 자사고, 특목고들이 입시위주의 교육을 시켜온 것도 일부 사실이라면 그러한 점만 수정하도록 하고 차별화된 영재교육이나 특성화 교육은 계속 되어야 한다.외교 국방도 현재의 상황은 위중하다. 우리가 외쳐대던 한반도 운전자·중재자 외교는 북한의 조롱으로 되돌아 왔고, 대한민국의 대외적 외교적 입지는 크게 약화되고 있다는 평이다. 북한 핵 위협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으며 한국은 북한에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는데도 한국의 북한에 대한 짝사랑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의 외교 버팀목인 한·미·일 삼각동맹을 강화하여 중국과 북한에 의연히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선거전략, 자기당 이익만을 정치적 목적의 통치가 아닌 상식이 통하는 사회, 국가가 그립다. 답답한 마음이다. 여야로 나뉘어 서로 나름대로 해석하며 “한번도 경험 못한 나라”라고 자화자찬과 비판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은 “상식이 통하는 한번도 경험 못한 나라”를 진정 원하고 있다.

2020-01-16

겨울 유희(遊戲)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꽝꽝한 빙판을 보면 지치고 싶어진다/ 팍팍한 세상살이 껄끄러운 마찰을 잊고/ 유착도 고착도 없이 미끄러지고 싶어진다// 숫눈의 들판을 보면 밟으며 걷고 싶다/ 낡고 찌든 세상을 덮은 순백의 전인미답/ 신생의 벅찬 설렘으로 마냥 걷고 싶어진다// 바싹 마른 풀숲에는 불 지르고 싶어진다/ 조바심으로 서걱이는 마른 풀에 불을 댕겨/ 이 세상 한 귀퉁이를 방화하고 싶어진다// 산과 들 쏘다니며 나이도 무엇도 잊고/ 걷다가 지치다가 논두렁에 불도 놓으며/ 한 마리 산짐승처럼 참 생생한 하루였다’- 졸시 ‘겨울 유희’골목에 아이들이 없다. 시골 동네에는 아이가 사는 집이 거의 없다. 간혹 아이들이 있어도 골목에 나와 놀지 않는다. 골목마다 아이들이 바글바글하던 시절에 비한다면 금석지감을 금할 수 없다. 집집마다 네댓은 보통이고 일곱이나 여덟인 집도 적지 않아서 방학이면 하루 종일 골목이 시끌벅적했다. 오죽하면 “시끄럽다, 딴 데 가서 놀아라!”라는 꾸중을 듣곤 했을까.아이들이 많다 보니 놀이도 참 다양했다. 술래잡기, 구슬치기, 팽이치기, 제기차기, 연날리기, 썰매타기, 비석치기, 자치기, 땅따먹기, 딱지치기, 공놀이, 고무줄놀이, 공깃돌놀이, 원수놀이, 전쟁놀이, 눈싸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칠 줄 모르고 놀아도 놀 거리가 달리지는 않았다. 놀이에 소용되는 도구도 거의가 스스로 만들었다. 돈을 주고 사는 것은 구슬이나 고무공 정도였고, 초등학교 상급반이면 팽이를 깎고 연이나 제기, 썰매를 만들 줄 알았다.지나고 보니 그 때 그 놀이를 통해 많은 것을 얻고 배웠던 것 같다. 우선은 마음껏 뛰고 구르고 노는 일이 자유롭고 즐거웠다. 방학숙제 따위 까맣게 잊고 노는 일에만 열중해도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먹고 입는 것이 열악해도 그것 때문에 슬프거나 괴로울 겨를이 없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단벌옷으로 겨울을 나도 방구석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있지는 않았다. 놀이를 통해 우정을 쌓고 협동과 단결을 배우고 도구를 만드는 손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그 아이들이 그때 배운 기술과 지혜를 바탕으로 국민소득 백 불 미만의 최빈국을 세계 십위 권 경제대국으로 밀어 올리는 기틀을 마련했다.겨울방학 동안만이라도 아이들을 마음껏 뛰어놀게 하자. 과외니 학원이니 하는 족쇄를 풀어주고 텔레비전, 컴퓨터, 휴대전화기도 던져놓고 동무들과 어울려 술래잡기도 하고 팽이치기, 연날리기도 할 수 있게 하자. 시골의 학교를 이용해서 방학동안 놀이교실이라도 열 것을 제안한다. 일주일이나 2주일쯤 도시의 아이들이 합숙을 하면서 마음껏 놀 수 있게 놀이를 가르치고 놀이기구를 손수 만드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를 바란다. 제 손으로 만든 연과 썰매, 제기, 팽이를 가지고 놀이를 한다면 그보다 좋은 체험학습이 없을 것이다. 저절로 몸과 마음이 튼튼해지고 정서도 넉넉해져서, 행복지수 OECD 꼴찌에다 5명 중 1명꼴로 자살충동을 경험했다는 우리나라 아이들이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기쁨과 활력을 회복하기 바란다. 아이들은 잘 놀아야 건강해진다.

2020-01-16

그들이 기다린 이유는

미국의 어느 부둣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정기 여객선이 도착해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는 도중 배가 출렁이는 바람에 한 여자 승객이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를 목격한 주위 사람들이 모두 고함을 치면서 발을 동동 굴렀으나 선원들은 이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기만 했습니다.그러자 사람들은 이런 무책임한 선원들이 어디 있느냐며 거세게 비난하기 시작했지요. 선원들은 여자가 두 번이나 물속에 떠올랐다 잠겼는데도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습니다.그런데 잠시 후 여자의 힘이 완전히 소진된 것을 알고서야 한 선원이 비호같이 다이빙해서 축 늘어진 그 여자를 구해서 올라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왜 처음부터 빨리 구해주지 않았느냐고 그 선원을 나무랐습니다. 선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합니다. “모르시는 말씀들 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물에 빠져 자기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쓸 때는 어느 장사가 구하러 들어간다고 해도 빠진 사람의 힘에 눌려 같이 빠져 죽게 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힘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표현이 한때 유행했습니다.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누구나 1만 시간을 투자해 노력하면 어떤 분야에서든 전문가 수준에 오를 수 있다는 말콤글래드웰의 이론입니다.최근 안데리스에릭슨은 ‘1만 시간의 재발견’이라는 책에서 이 이론의 문제점을 밝힙니다. 그 분야의 마스터 코치 없이 무조건 1만 시간을 채우는 행위는 큰 변화를 일으키기 어렵다는 겁니다. 여인을 구한 선원의 지혜처럼, 매사 그 분야에 가장 뛰어난 전문가의 조언과 피드백을 받으며 1만 시간을 채울 때 가장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발견이었습니다.모두가 희망으로 시작한 2020년. 우리 곁에 날카롭고 지혜로운 멘토가 등장하기를 기대합니다./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20-01-16

게으름에 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더러 억장으로 취하는 때가 있다. 나이 먹고 몸이 부실한 것도 원인이겠으나, 강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술에 장사 없다는 말을 실감하곤 한다. 주독으로 고단해진 육신을 추스르다 보면 성찰의 시간이 찾아온다. 구토와 오심으로 괴로워한 적도 있으나, 요새는 그런 일이 없다. 그것도 음주 행각으로 얻어낸 작은 지혜이거나 깨달음이려니 생각한다.나른해진 몸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지난 일을 회억하거나 흐뭇한 추억에 잠기는 날도 있다. 아마 그것이 음주 다음 날의 유쾌한 선물일 것이다. 온종일 빈둥거리면서 몸과 마음을 분망한 일상과 격절(隔絶)하는 한가한 하루! 술을 싫어하거나 홀짝거리는 정도의 애주가는 빈둥거림의 미학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마다 세상과 대면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자크 러클레르크의 ‘게으름의 찬양’(1936)을 선물받았다. 버트란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1935)을 인상 깊게 읽었기로, 같은 부류의 서책이려니 짐작했다. 러셀은 모든 지구 거주자가 하루 4시간 노동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문제는 누군가는 전혀 노동하지 않으면서 부를 축적하고, 어떤 이들은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당하는 것이다.세상에는 온종일, 매달, 매년, 종신토록 놀고먹는 자들이 있다. 그것도 적잖은 자들이 그런 놀라운 행운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 아무리 일해도 하루 세끼 배불리 먹지 못하는 인간도 아주 많다.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조국과 부모 때문에 이런 편차가 생겨난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말은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그런 까닭에 우리는 흙수저와 금수저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것이 운명이나 되는 것처럼.러클레르크 신부가 게으름을 찬양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속도’에 있다. 너무 신속하게 변해가는 세상과 거기 편승해서 ‘더 빨리’를 외쳐대는 20세기 초반 유럽의 풍경을 그려낸다. 2차 대전으로 느림이 찾아왔다는 그의 생각은 무척 새로운 것이었다. 수많은 인명살상을 가져온 전쟁의 참화가 아니라, 속도경쟁에서 빠져나오도록 인도한 전쟁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하는 혜안과 통찰! 하지만 2차 대전 직후 인간은 우주로 날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달에 도달한다. 옥토끼가 절구질한다는 항아의 달에 사람이 꿈처럼 발자취를 남긴 것이 벌써 50년 전 일 아닌가?! 결국 그것은 지구 자전속도를 능가하는 속도에서 비롯된 일 아닌가! 오늘날 우리는 300킬로미터의 시속으로 전국을 오가고, 시속 1000킬로미터 내외로 지구를 왔다 갔다 한다. 그야말로 속도에 빠져서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현대인의 특징처럼 각인된 시대다.느림은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해준다고 러클레르크는 말한다. “우리의 삶이 제대로 인간적이려면 거기에는 느림이 있어야 합니다.” 아주 큰 울림을 주는 구절이다. 올해에는 나도 어느 정도 빠름에서 놓여났으면 좋겠다. 그것이 궁금한 빈들거리는 하오가 느릿하게 지나간다. 여러분의 하루는 어떤가, 궁금하다!

2020-01-15

졸업이 무서운 아이들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아, 망했다!” 2020년에 대한 느낌을 묻는 말에 초등학교 6학년 아이의 반응이다. “왜? 중학생이 되잖아!” “중학교 왜 있어요? 꼭 가야 해요?”필자는 초등학교 입학을 학수고대하며 입학식 전날까지 가방을 안고 자던 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그런 아이가 벌써 중학생이 된다는 세월의 빠르기에 숨이 막혔다. 비록 초등학교 입학 전의 기대가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원망으로 바뀌었지만, 뭐든지 긍정적인 아이가 시작도 하기 전부터 절망에 가까운 부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처음이라 몹시 놀랐다.필자의 놀람은 금방 걱정으로 변했다. “중학교 가면 서열이 있대요. 인기 있는 애들은 선배들이 처음부터 챙겨주고, 혼자 다니거나 인기 없는 애들은 학교에서 찐따처럼 지내야 한대요. 또 선배나 친구들에게 한 번 찍히면 끝이래요! 1학년 때는 자유 학년제라 시험을 안 쳐서 다들 학교에서는 놀고, 학원 가서 공부한다는데 왜 중학교 1학년이 있어요?”서열, 찐따, 자유 학년제, 학원 등 필자가 들어도 마음이 무거운 단어들인데, 중학교 입학도 전에 이런 단어들에 노출된 아이의 마음은 오죽할까 싶었다. 그리고 지금의 심상치 않은 중학교 분위기가 상상되어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3년 내내 또 의미도 없는 졸업장을 따기 위해 극도의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할 아이를 생각하니 부모로서 아이의 중학교 입학이 망설여졌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 해외로 나가는 부모들이 이해갔다. 할 수만 있다면 아이와 같이 그들을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형편이 못 되기에 아이에게 미안했다.지난주 산자연중학교에서는 2020학년도 입학과 전학을 위한 예비학교가 2박3일 동안 열렸다. 올해도 제주도에서부터 서울, 대전 등 전국에서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왔다. 비록 학년은 다르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뭔가에 잔뜩 주눅든 모습이었다. 무엇이, 또 누가 저 아이들을 저토록 주눅들게 했는지 필자는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책임질 사람은 청와대에도, 정부에도, 그 어디에도 없다.글 오염에 가까운 사회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영혼 없는 신년사가 남발되는 요즘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2020 경자년 희망찬 새해”라고 말한다. 과연 그들은 희망(希望)이라는 말의 뜻을 알기나 하는지 궁금했다. 아무리 뻔뻔해도 최소한 이 나라 돌아가는 모습을 본다면 새해 앞에 “희망찬”이라는 수식어는 절대 붙이지 못할 것이다.절망만 가득한 이 나라와 이 나라 교육에 제일 필요한 단어는 희망이다. 그런데 대변혁이 일어나지 않고는 2020년도도 2019년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희망이 부재한 이 나라 교육계는 신입생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까? 필자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아이는 믿지 않는다.혹시 대통령께서 “이 나라 중학교에는 왕따, 학교폭력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모든 학생이 즐겁고 행복하게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 중학교입니다”라고 말하면 아이가 믿을까? 그런데 슬프게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대통령이 이 나라에는 없다.

2020-01-15

소나무의 가르침

소나무 씨앗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위틈에 떨어지고 다른 하나는 흙 속에 묻혔습니다. 흙 속에 떨어진 소나무 씨앗은 곧장 싹을 내고 쑥쑥 자랐습니다. 그러나 바위틈에 떨어진 씨는 조금씩밖에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흙 속에서 자라나는 소나무가 말했습니다. “이것 봐, 나는 이렇게 크게 자라는데 너는 왜 그렇게 조금밖에 못 자라니?” 바위틈 소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이깊이 뿌리만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태풍이었습니다. 산 위에 서 있는 나무들이 뽑히고 꺾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위틈에서 자라나는 소나무는 꿋꿋이 서 있는데 흙 속에 있는 나무는 뽑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바위틈에 서 있던 소나무가 말했습니다. “내가 왜 그토록 모질고 아프게 살았는지 이제 알겠지? 뿌리가 튼튼해지려면 아픔과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 거야.”러시아 과학자들이 동물을 대상으로 오랫동안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게는 이상적인 생활환경을 제공했지요. 풍성한 음식과 상쾌한 공기와 안락한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동물들을 괴롭히는 것은 없었습니다. 동물들은 초원을 뛰놀다가 지치면 그대로 나뒹굴었다. 몇 개월 후부터 동물들의 털에서는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두 번째 그룹에게는 걱정과 기쁨이 공존하는 공간을 제공합니다. 동물들은 초원에서 한가롭게 놀다가 가끔 맹수의 습격을 받습니다. 먹이를 얻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이 필요했고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러시아의 과학자들은 두 집단의 연구결과를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안락한 환경에서 살던 동물들이 훨씬 먼저 병들어 죽어갔다. 약간의 긴장과 노력이 건강과 장수를 보장한다.”우리에게 시시각각 멈추지도 않고 다가오는 어려움과 장애는 거침 돌이 아니라 디딤돌이라는 점을 마음에 새겨보는 새벽입니다./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20-01-15

우리 안의 불안과 경쟁: 수우족과 유록족의 이야기(1)

교육 특구를 자처하는 대구 수성구의 범어동 거리에는 학부모와 학생들의 눈으로만 알 수 있는 표식들이 있다. 평범한 건물의 소박한 간판 뒤에 월급쟁이 부모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고액의 개인 과외와 소그룹 과외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늦은 밤,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아이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최근 발표된 정시 확대 결정은 수능 준비를 위해 학교를 그만 두려는 아이들까지 속출시키면서, 학원으로 향하는 아이들의 발걸음은 마냥 무겁게 보인다. 종일 무기력하게 교실에 엎드려 있다가 해질녘 학원가를 향할 아이들의 모습에 어느 원주민 부족 아이의 물음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수업에서 달리기 경쟁을 시키자, 아이는 ‘누가 이길지 아는데, 왜 달리라는 거죠?’라고 반문하였다. 그 아이에게 학교에서의 경쟁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왜 달리라고 하는 것인지, 그리고 왜 또 달리라고 하는지 말이다. 아이의 답변에서 우리는 경쟁이라는 현상이 인류의 보편적 현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경쟁에 익숙해진 우리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에릭 에릭슨(E. H. Erikson)의 유년기와 사회에 기술된 수우(Sioux)족과 유록(Yurok)족의 아이들을 차례대로 만나보도록 하자.수우족은 미국 사우스다코타 지역의 초원을 지배하던 버팔로 사냥꾼이자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치던 전사였다. 넓은 초원은 그들 삶의 원천이었고, 버팔로의 고기, 가죽, 뼈, 내장, 배설물은 모든 삶의 수단을 제공해주었다. ‘관대함’은 이들의 주요한 미덕이었고, 이는 버팔로를 사냥하며 유랑하는 삶에서 최소한의 생계 도구 외의 소유나 저장은 불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식량은 바닥날 때까지 공평하게 나누어졌고, 식량이 떨어지면 그들은 팀을 꾸려 사냥에 나서거나 식량을 나눠 받기 위해 친척을 찾아갔다. 그러했기에 보호구역의 근대식 학교를 다니던 한 아이는 그의 부모가 은행을 이용한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받기도 하였다.소유에 대한 개념만큼이나 수우족의 양육방식은 독특하였다. 그들은 놀라울 만큼 아이들의 양육에 관대했는데, 수유기간이 평균 3년에 이르렀다. 어머니의 초유는 짜서 바로 버려졌고, 어머니의 젖이 충분히 나올 때까지 이웃의 어머니들이 아이에게 공동으로 넉넉히 젖을 물렸다. 에릭슨은 이를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갓 태어나 굶주린 아이가 안간힘을 다해 얻은 것이 찔끔 나온 젖 한 모금이라면, 과연 그 아이가 세상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이다. 또한, 아이들의 배뇨와 배변훈련은 매우 느슨하였는데, 보호구역의 백인 교사들은 ‘수우족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방치한다’며 분노하였다. 그러나 수우족의 아이들은 그들의 배설물이 초원의 태양과 바람 아래 잘 마르게끔 배설하도록 양육되었고, 수우족의 시각에서 본 서구식 화장실은 햇볕과 바람을 막으면서도 정작 파리 떼는 막지 못하는 신통찮은 것이었다. 에릭슨은 긴 수유기간과 너그러운 양육방식이 수우족의 미덕인 관대함의 바탕이 되었다고 추론했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한 수우족 아이가 근대식 학교와 교실 내의 경쟁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반면, 캘리포니아 지역에 거주하던 유록족은 대서양와 만나는 클래머스강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연어잡이 부족이었다. 대서양에서 헤엄쳐 온 연어는 강의 급류를 거슬러가 상류에 이르러 알을 낳은 후 생애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산란한 치어들은 강을 내려와 다시금 대서양으로 향한다. 연어의 삶은 유록족의 삶에 깊이 녹아 있었는데, 이들에게 주요한 미덕은 ‘정결함‘이었다. 유록족은 인색하고 의심이 많으며 강박적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가령 강 상류에 사는 유록족은 다른 호전적인 부족이 강 하류의 유록족을 공격하러 가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 할 만큼 주위에 무관심했다. 이들은 사적 소유와 조가비 화폐에 익숙했고, 강을 둘러싼 수많은 강박과 금기를 가지고 있었다. 가령 사냥한 동물의 피나 사람의 분비물은 강에 섞여 들어갈 수 없었다. 또한 성관계를 갖거나 이성과 같은 집에서 잠을 잤다면, 그들은 다음날 아침 한증막에서의 정결 의식을 통과한 후 클래머스강을 헤엄치는 것으로 정화를 마무리해야 했다.유록족은 양육방식 또한 수우족과 판이하게 달랐다. 신생아에게는 열흘간 젖 대신 견과즙이 주어졌다. 수유는 6개월이 되는 어느 날 갑자기 끊겼는데, 유록족은 이를 ‘어머니 잊기’라고 불렀다. 이후 양육은 매우 엄격하였고, 아이들은 음식에 먼저 손댈 수 없었으며 더 달라고 조를 수도 없었다. 식사 자리는 위아래가 정해져 있었고, 아이들은 숟가락에 음식을 조금만 올려놓고 숟가락을 입에 가져갈 때에는 손을 천천히 움직여야 하며, 씹는 동안에는 숟가락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 과정 내내 돈과 연어를 생각하며 침묵하도록 교육받았다. 이는 유록족의 절제된 현실과 내면화된 환상 간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유록족의 내면에서 클래머스강 어귀는 연어가 밀려오는 수평선을 향해 기다림의 형태로 열려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연어 떼가 밀려와 그들에게 믿기 어려운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그 환각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정결하고 절제된 일상을 유지시켜주는 환상이자, 현실에서의 예기된 보상이기도 하였다. 1년에 한 번 연어가 찾아오면 유록족은 강 양쪽 기슭에서부터 댐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댐이 완성되면 마침내 연어잡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열흘간의 축제가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축제 기간 동안 금기를 깨고 이교도의 의식에서나 볼 수 있는 방탕하고 난잡한 해방의 시간을 가졌다.수우족의 불안이 ‘무력해지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 즉 이동하며 생활하는 무리로부터 낙오되는 두려움이었다면, 유록족의 불안은 ‘연어 떼가 돌아오지 않는 것’, 즉 양식이 없이 남겨지는 것이었다. 수우족이 관대함과 확대가족을 통한 긴장의 분산으로 그들의 불안을 이완시켰다면, 유록족은 연어 떼의 도래를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긴장과 불안을 자신의 몸 안에 체화시켰다. 유록족의 쪼그라든 일상의 이면에는 거대한 환상, 즉 클래머스강 어귀에 도래한 연어 떼의 환각이 열망처럼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거리두기를 마치고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와 본다. 겨울 방학에도 학원가에 늘어선 아이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는다. 수우족과 유록족의 사례는 각각의 맥락 내에서만 이해가능하며, 그들의 미덕인 관대함이나 정결함을 우리 사회의 미덕에 견주어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러나 어떤 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의미한 질문과 단서를 던져준다. 우리 안의 불안이 대체 무엇이기에 혹은 우리의 환상이 무엇이기에, 우리의 일상은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경쟁으로 숨 막히게 짜여진 것일까? 우리에게 연어는 무엇일까? 자연으로부터 너무도 동떨어져 버린 우리 삶의 방식과 주기가 이제 자연을 닮지 않은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안에 내재하는 불안과 열망을 질문하는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을 넘어선 진화를 가능케 할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수우족과 유록족의 두 번째 이야기는 이러한 탐색을 계속해갈 것이다. /김은영 교수김은영 미국 텍사스AM대학에서 교육학 석사,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임상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20-01-15

휴대폰 해킹 방지법

최근 주진모 씨를 비롯한 유명 배우와 아이돌 가수 등 연예인 10여 명의 휴대 전화 해킹으로 아주 사적인 SNS 대화들이 유출되는 사건이 있었다. 주씨는 휴대폰을 분실하거나 수리를 맡긴 적도 없고, 쓰던 폰을 판 적도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카톡 대화가 털린걸까? 전문가들은 휴대폰에 있는 전화번호부 목록이나 캘린더 일정, 문자메시지 내용 등을 클라우드에 자동으로 백업되도록 해 놓았다가 백업해 둔 정보가 유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 클라우드 백업은 스마트폰을 분실할 경우 데이터를 카피해서 복구할 수 있기에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활용하고 있다. 다만 이 경우 클라우드 서비스가 해킹된 게 아니라 아이디, 패스워드를 도용당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통상 해킹당한 사례를 조사해보면 진짜로 해킹당한 게 아니라 여러 사이트에서 같은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쓰는 것을 해커가 알아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A라는 연예인이 영세한 쇼핑몰에서 쓰던 아이디와 비번을 클라우드와 카톡, 그리고 다른 사이트에도 공통으로 쓸 경우 보안이 허술한 사이트에서 아이디와 비번을 알아내 다른 계정을 털수 있게 된다. 따라서 휴대폰 해킹 방지를 위해서는 첫째 사이트가 달라지면 비밀번호는 바꿔 쓰고, 둘째 비밀번호 외에 생체 인식이라든가 SMS 문자 확인 등 별도의 인증 수단을 추가하는 이중인증을 켜둔다. 셋째로 스마트폰 OS나 앱을 항상 최신 버전으로 바로바로 업데이트하는 게 중요하다. 업데이트 공지가 뜨면 해커가 보고 스마트폰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알아내 하루이틀 안에 공격 코드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첨단IT기술의 발달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개개인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1-15

시운상승(市運上昇)

장규열 한동대 교수포항이 가라앉았었다. 지역 경기침체와 더불어 이 도시는 초유의 지진까지 겪으며 지난 몇 해 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지진 진원지 흥해를 중심으로 한 도시의 북부 지역을 비롯하여 도시 는 몸살을 앓았다. 부동산 경기의 침체와 함께 전반적인 도시경제와 분위기는 활력을 잃었던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것일까. 눌리고 낮은 기운이 도시를 감싸고 돌았다. 기다리던 새벽녘에 한꺼번에 햇살이 비취듯이 해를 넘기면서 좋은 소식이 도시에 들려왔었다. ‘포항지진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어 구체적인 활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도시와 지역의 재건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터이다.문화도시가 되었다. 수년을 공들여 준비한 끝에 포항은 ‘법정 문화도시’로 선정되었다. 지난 세월동안 지켜온 산업도시의 역할에 더하여, 지역의 이미지 기반을 ‘문화’로 이어가는 새로운 비전이 시동을 건다. 문화도시와 더불어, 포항은 ‘배터리도시’가 되었다. 포항에 설정된 규제자유특구에 ‘배터리 리사이클링 제조시설’을 유치하여 미래 먹거리사업으로 지정하였다. 철강이 과거산업의 쌀이었다면, 배터리는 미래산업의 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대통령이 축하하며 전한 메시지는 포항의 경제산업적 특성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기개를 언급하며 지역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다. 즉, 경북에서 처음으로 삼일운동을 시작한 곳이 포항이며 한국전쟁 때에는 학도병들이 목숨으로 전선을 사수했던 보루였다는 것이다. 산업과 문화를 든든하게 담는 지역이 된 셈이 아닌가.수년 전에 한동대의 한 프로젝트 과목에서 포항시 ‘도시브랜딩프로젝트’를 과제로 수행하였다. 당시 학생들이 추천한 바에 따르면, 포항의 이미지를 ‘충전도시’로 차별적으로 브랜딩하여 디지털환경과 4차산업혁명에 걸맞는 도시로 만들어가자고 하였다. 마치 포항이 ‘배터리도시’가 될 것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며, 실제로 배터리와 충전을 함께 활용하여 도시브랜딩의 새로운 모습을 개발해 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치고 피곤하여 배터리가 방전된 모습을 한 현대인들에게 충전과 회복을 경험하는 도시로서 포항을 마케팅하고 소개한다면! 관광과 도시 홍보에도 큰 기여를 할 소재가 아닐까 여겨진다. 충전도시와 함께 포항은 축제도시로서 강점을 가진다. 포항국제불빛축제가 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되어 지속적인 성공을 이어가는 중이다.터널을 지나 빛이 보인다. 포항에 새벽이 찾아왔다. 이제는 올라간다. 도시가 깨어나 기지개를 켜면서 문화도시, 충전도시, 배터리도시, 축제도시가 되어 날아오를 터이다. 올라가는 길에 혹 어려움을 겪는 이웃 도시들이 보이면 기꺼이 지혜와 슬기를 나누는 넉넉한 도시가 되어야 한다. 글로벌지평에도 손색없는 도시가 되어,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지역이 되어갈 것이다. 포항, 2020년은 포항에게 시운상승(市運上昇)의 해가 아닌가. 포항, 파이팅!

2020-01-15

작은 친절의 경제학

(사례 1) 비바람이 몰아치는 늦은 밤,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 노부부가 들어왔습니다. 젊은 직원은 도시에 컨벤션 행사가 있어 호텔에 남은 방이 없으니 다른 호텔을 알아보겠다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느 호텔에도 객실이 없답니다. 비도 오고 새벽 1시나 되었으니 나가라고 말씀드리기도 어렵군요. 누추하지만 제 방에서 주무시면 어떨까요?”노부부는 다음날 아침 이렇게 덕담을 합니다. “당신은 미국에서 제일 좋은 호텔 매니저가 되어야 할 사람 같군요. 언젠가 당신을 위해 호텔을 하나 지어 드리지요.”2년 후, 직원은 왕복 비행기표와 함께 노신사의 편지를 받습니다. 뉴욕에 도착한 그를 노신사는 궁전같은 호텔로 데리고 가서 말합니다. “2년 전 내가 당신에게 약속했던 호텔이요. 오늘부터 당신은 이 호텔의 총지배인이요.”그 호텔은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의 시초인 월도프 호텔이었고 노신사는 윌리엄 월도프 아스토(William Waldorf Astor)였습니다. 젊은 직원 조지 볼트(Gorge C. Boldt)는 이 호텔의 첫 번째 지배인이 되었습니다.(사례 2) 노신사가 은행을 찾았습니다. 만나야 할 직원이 출장을 가고 자리에 없어 주차카드를 창구 여직원에게 내밀며 확인을 요청했습니다. 여직원은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은행에서 업무를 본 경우에만 주차증에 도장을 찍어 드립니다.” 신사가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여직원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신사가 물었습니다. “아무 업무라도 보면 주차카드를 확인해줄 수 있습니까?” 여직원은 그렇다고 짧게 대답했습니다.신사는 예금인출서를 건넸습니다. 통장에 든 모든 예금을 인출하겠다고 기록했는데 액수가 100억 원이 넘었습니다. 직원 얼굴은 사색이 되었고, 잠시 후에 은행지점장이 부랴부랴 달려왔지만, 노신사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20-01-14

3.0과 4.0의 차이

곽지영 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스마트시티 연구를 하다 보니 소위 ‘4차 산업혁명 관련 내용’으로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더러 받게 된다. 학생, 기업, 공무원, 일반 시민 등 강의 대상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청중들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4차산업혁명이나 스마트시대는 자동화 시대의 연속이거나 아직 막연히 먼 미래 아닌가요? 얼마 전까지도 이제 곧 모든 게 자동화될 거라며 세상이 떠들썩했는데 주변을 보면 갈 길이 멀지 않은가요?”떠들썩했던 3.0 시대의 등장을 기억한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앞세운 3.0의 시대는 마치 폭주하는 마법사처럼 ‘자동화’의 마술지팡이를 휘두르며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변화시켜버릴 기세로 우리 삶 속으로 날아 들어왔었다. 산업, 시장, 리더십, 조직, 일자리, 웹, 미디어 등 우리에게 익숙했던 거의 모든 것들에 유행처럼 3.0이라는 숫자가 붙었다. 신기하게도 3.0이라 불리게 된 순간, 마법에라도 걸린 듯, 그 이전의 것들은 일제히 낡고 무능해 보이기 시작했다. 증기기관이 이끈 산업혁명의 시대를 1.0으로, 조립생산 라인이 가져온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를 2.0으로, 누가 봐도 오래된 것임이 명백하도록 선을 딱 그어 놓은 다음 주인공처럼 마지막에 등장했으니 그럴 만 했다.그러나 3.0시대가 불러온 보다 의미 있는 변화는 그 이후에 시작되었다. 강력한 컴퓨팅 파워에 힘입은 자동화의 물결은 산업현장에서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그 결과, 제품을 만들면 팔리는 공급자가 ‘갑’인 시대는 끝났고, 시장에서는 기업들 간의 무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기업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장이나 소비자를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을 시장, 혹은 단순한 소비의 주체로만 바라보던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의 무모함을 반성하게 되었고, 이제 사용자를 이성과 감성, 취향과 영혼을 가진 전인적 존재로 인식하고 ‘고객’이라 칭하며 모시기 시작한 것이다.3.0시대로의 변화가 아직 미치지 못한 산업 분야도 적지 않은데, 이미 세상은 4.0의 시대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고 하니, 3.0과 4.0의 차이가 ‘허상’으로 느껴질 만도 하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3.0과 4.0은 순차적인 개념이 아니라 서로 효능이 다른 ‘마술지팡이’로 봐야 한다. 3.0시대의 마술지팡이가 사람의 역할을 대체할 자동화 대상을 찾아내는 데 주로 쓰였다면, 4.0시대 마술지팡이의 효능은 연결성과 지능화의 대상을 찾아 사람이 하는 일을 돕는데 있기 때문이다.자동화를 무리하게 추진하여 생태계 내의 저항이나 마찰을 야기하는 ‘자동화의 늪’에 빠져 실패하는 기업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자동차 업계는 미래차의 전략적 방향성을 무인차가 아닌 자율주행차로 조정하여 운전자 탑승여부가 아니라 연결성과 지능화를 통해 차량이 스스로 판단하고 주행하는 기술에 집중함으로써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자신의 분야가 지금 비슷한 난관에 부딪혀 있다면 서둘러 마술지팡이를 바꿔 드는 것을 권하고 싶다. 3.0시대의 지팡이를 과감히 버리고 4.0시대의 지팡이로 갈아탄다면 더 쉽고 확실한 답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2020-01-14

해외 어학연수를 떠나는 엑소더스에 대한 단상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번역학 전공지난 1월 초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출장을 다녀왔다. 뉴질랜드는 남반구에 있어 한국과 계절이 반대여서 1월이면 그곳은 여름이다. 오클랜드 시내에는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어학원과 사설 어학원 등 영어교육 기관과 관련 업체들이 많다. 뉴질랜드는 한국 학생들이 어학연수를 위해 많이들 가는 나라중의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뉴질랜드 시내 곳곳에는 한국 학생들을 비롯하여 많은 아시아계의 학생들로 가득했다. 시내 여기저기에 보이는 한국어 간판과 도처에서 들리는 한국어 말소리로 여기가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온 외국이라는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지금은 방학이라 초, 중, 고, 대학생들이 해외로 어학연수를 많이 떠나는 시즌이다. 문득 필자는 한국 학생들이 어학연수를 위해 전 세계에 뿌리는 돈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과연 한국에 돌아와 취업을 하게 되면, 업무를 진행하는데 실제 영어를 사용하는 인력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과거 영어공부라면 책으로 문법을 공부하고 소설을 읽고 하는 것이 유일했다. 당시의 시청각 교재는 영어회화 테이프, 그리고 주한미군 방송이었던 AFKN, 그리고 외화가 전부였다. 요즘은 멀티미디어로, 온라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영어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를 공부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지금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3까지 총 9년을 공부하지만, 여전히 말못하는 영어를 배운다는 것이다. 흰 와이셔츠에 명찰을 달고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는 미국의 선교사들은 몇 년 지나지 않아 한국어를 유창하게 한다.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한국으로 온 외국인노동자들도 한국에 온 지 몇 년 되지 않았는데도 한국어를 곧잘 한다. 그런데 왜 한국인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그리고 대학에 와서도 영어로 인해 학교를 휴학하고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는 것일까? 전국에 초, 중, 고, 대학생들이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으로 어학연수를 가서 쓰는 학비와 생활비는 과연 얼마나 될까? 가히 천문학적일 것이다.10여년 전 필자가 지금 근무하는 학교에 오기 전에 근무하던 대학교에서의 일이다. 영어 원어민 교수들에게 한국의 실제 수능영어 문제를 시험삼아 치르게 해보았더니 이들은 독해지문을 보고 그 어려움에 혀를 내두른다. 이것은 영어 문제가 아니라 시험을 위한 문제, 그리고 영어로 쓰여진 철학 문제라는 것이다.외국어를 학습하는 궁극목적은 의사소통이다. 통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현재의 난해한 영어지문 해독 방식은 누가 어려운 영어단어를 잘 알고, 누가 어려운 영어문장 퍼즐을 잘 풀어내는가 하는 것을 평가하는 것이다. 필자는 해외로 컨텐츠를 배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수단인 영어를 배우러 가는 한국 학생들의 엑소더스(exodus)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정말 이제는 누구나 말을 잘할 수 있는 영어, 통할 수 있는 영어, 그냥 어렵기만 할 것이 아니라 콘텐츠를 전달하기 위한 실용적인 영어를 가르치도록 바뀌어야 할 것이다.

2020-01-14

복세편살과 安分知足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새해 새날의 여명 속에 경자년이 밝았다. 찬란한 태양이 온 누리 밝고 푸른 희망의 빛살로 다시 떠올랐다. 새해 첫날이 열리는 해를 보며 사람들은 한 해의 소망이나 다짐을 하곤 한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사람들은 처음과 새로움에 대한 느낌과 의미를 부여하며 새해는 보다 희망적이고 발전적이기를 빌고 기대를 해보는 것이다.작년에 이어 불안정한 국내외 정세와 바닥권 경기, 사회적인 갈등 등으로 올해도 여전히 격동과 변화의 소용돌이가 거세질 것으로 짐작된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각자의 처한 위치에서 차분하게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알고 동요되지 않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을 추스려야 한다고 본다. 서로의 관계와 이해, 협업과 상생의 고리를 지속적으로 엮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여겨진다. 나의 관념이나 주장만 고수하고 선과 악, 득과 실의 타산만 따지는 편중된 사고방식이나 흑백논리는 직장이나 시민사회, 나라에 있어서 융화와 호전 보다는 해악과 퇴보만 끼칠 따름이다.이른바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과 안분지족의 삶이란 어떤 삶일까? 필자는 하루하루를 안분과 지족으로 살아가면 저절로 복세편살이 되리라고 본다. 안분(安分)이란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는 것이다. 분수, 즉 자기 신분이나 능력, 한도에 맞게 처신하며 욕심 없이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즐겁게 살면 그 자체가 복세편살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복세편살과 안분지족은 긍정과 배려, 감사를 실천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잡다단한 세상을 나름 편하게 살려면 작더라도 자기의 생활에 만족해야 하고, 사소한 것에라도 긍정적으로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매사에 만족할 줄 알고(知足), 분수를 알며(知分), 멈출 줄 아는(知止) 지혜야 말로 긍정과 감사, 행복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선현(先賢)들은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족상락(知足常樂)의 삶을 늘 추구하지 않았을까?시대의 가치와 변화의 격랑이 심해질수록 자신의 분수를 지키고 작은 것에 만족해하며, 주어진 환경에 고마워 하고 맡은 일에 성심성의를 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타인을 신뢰하고 배려하며 동료들과 협력해나가는 노력이야 말로 융합의 시대에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본다. 단순하지만 개인의 안분지족과 복세편살이 가정을 화목하게 가꾸고 사회를 안정시키며 나라를 평화롭게 만드는 근간이 아닐까 여겨진다.삶의 변화란 나부터, 주위의 가까운 곳에서부터 찾고 이뤄나가야 한다. 삶의 작지만 소중한 가치들을 인식하며 서먹하고 무관심했던 사람들과의 진정성 있는 소통과 교감을 통해 자신과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자신의 삶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안분지족의 마음으로 작은 베풂과 나눔, 긍정과 감사를 실천하고, 복세편살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삶을 추구해 나갈 때 우리 모두가 보다 밝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경자년의 부신 햇살이 모두에게 꿈과 희망의 빛살로 비춰 일년 내내 웃음과 기쁨이 가득하기를 기원해본다.

2020-01-14

청와대 불상의 귀환

김영삼 대통령 때 이야기. 보물 제1977호인 청와대 불상(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을 두고 세간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소문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등 때마침 일어난 대형 참사가 개신교 출신 장로인 김 대통령이 청와대 불상을 치웠기 때문이라는 것. 청와대는 사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 기자를 대동하고 경내 있던 불상을 전격 공개하는 해프닝까지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청와대 불상의 존재감은 더 확실해진다.청와대 불상은 1912년 경주에서 조선총독 관저로 옮겨졌다.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경주 순시 때 환심을 사려는 현지 일본인 유지가 갖고 있던 불상을 밀반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불상을 일제 강점기 문화재 수난사의 대표 유물로 평한다. 불상은 시원한 이목구비와 딱 벌어진 어깨, 유연하게 흘러내린 법의 자락 등이 석굴암 본존불을 닮았다 하여 미남불(美男佛)로 불린다.벌써 경주를 떠난 지 100년 이상 세월이 흘렀다. 청와대 경내서만 80년을 보냈다. 그동안 변화무상한 권력을 묵묵히 지켜보았지만 존재 가치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2018년에 와서 문화재청이 서울시 유형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석불 중 보기 드물게 불상 전체가 온전히 보존돼 있고, 다른 불상에서는 찾기 힘든 사각형 대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 불상의 대표적 수작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경주시 도지동 이거사(移車寺)가 원출토지로 보고 있다. 최근 문화재청은 최초 출토지가 이거사로 확실시됨에 따라 불상의 경주이전을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언이다. 일제 강점기에 함부로 옮겨진 불상이 100여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것만으로도 뜻 깊은 일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1-14

쥐구멍에 볕들 날

박화진전 경북지방경찰청장202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떠오르는 새해 첫날의 해를 맞으며 새해에는 더 나은 삶을 소망해 봅니다. 연례행사 같은 해맞이를 하면서도 새해 첫날 아침은 늘 설레고 기대를 가져봅니다. 우리 가족은 물론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의 새해 첫날의 다짐과 소망들이 꼭 성취됐으면 합니다.올해는 10간의 일곱 번째 ‘경’(庚)과 12지의 첫 번째 ‘자’(子)가 합쳐져 경자년(庚子年)입니다. ‘경’(庚)은 흰색을 의미하고 ‘자’(子)는 쥐를 상징하기 때문에 ‘흰쥐 띠’의 해라고 합니다. 쥐 중에서도 흰 쥐는 우두머리 쥐이자 매우 지혜로워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생존 적응력까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실, 근면, 지혜, 총명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성실하고 근면한 우리 민족의 기질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해인 것 같아 기대를 해봅니다. 하지만 녹록치 않은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있어 들뜬 기대만큼 마음이 마냥 가볍지는 않습니다. 민생을 책임져야할 정치권은 선거를 앞두고 대화와 타협보다는 극한 대립으로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밝지만 않은 경제전망들은 골목안 자영업자의 긴 한숨을 새해에도 잦아들게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자리를 찾으려는 청년들의 핏발서린 눈을 보듬어줄 희망찬 정책들도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매주말이면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나누어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고 외치는 쪼개진 민심은 언제쯤 봉합될지 종잡지 못하겠습니다. 남북간 긴장과 대치상황도 제대로 풀리게 될까하는 의구심이 생기게 되어 남아있던 희망조차 흐릿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마냥 주저앉아 체념과 낙심에 빠져 있을 수만 없습니다. 저 멀리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돌이켜 볼 것도 없이 우리 국민은 금모으기 운동이란 경이적인 한마음 한뜻 운동으로 그 어렵다던 IMF체제의 파고를 넘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가 놀란 월드컵축구 4강의 신화를 이룬 대한민국입니다. 쥐의 해를 맞이하여 생각나는 속담이 있습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속담입니다. 몹시 고생을 하는 삶도 좋은 수가 터질 날이 있다는 뜻입니다. 고난 속에 희망을 갖게 하는 속담인 것 같습니다. 쥐구멍은 아주 작은 공간을 빗댄 말입니다. 햇볕도 잘 들지 않아 동물이 서식하기에는 열악한 환경입니다. 그럼에도 쥐는 그 속성처럼 근면과 성실성으로 생존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좁은 공간으로 볕이 들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찮은 동물의 삶에도 희망의 끈이 있는데 세계를 놀라게 한 저력의 대한민국이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흰쥐처럼 근면, 성실은 물론 지혜와 총명으로 헤쳐나갈 것으로 확신합니다. 한 때 유행했던 ‘해뜰 날’이라는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새해에는 반드시 ‘쨍’하고 해뜰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오늘도 어김없이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그런 마음을 다졌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태양이 내려주는 밝은 빛과 따스한 온기를 그늘진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주변 이웃과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20-01-13

간디 망국론(亡國論)의 교훈

강희룡 서예가정치세력 간 갈등은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다. 그럼에도 조선후기의 당쟁과 세도정치가 유독 거센 비판을 받는 데엔 그 이유가 있다. 왜란과 호란이라는 큰 전쟁의 와중을 겪은 후에도 지배층은 국가나 백성은 안중에도 없이 그들의 영욕만을 위한 권력다툼을 벌인 탓이다. 이러한 지도층의 갈등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일상화됐다. 조선후기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행해지던 세도정치는 사회변화를 바탕으로 한 조선의 전통적 지배체제가 전반적으로 한계를 드러내자 마지막으로 도달한 정치운영의 한 형태였던 것이다. 조선후기는 진주민란을 계기로 한 전국적인 ‘임술민란’에 나타나듯이 민중의식이 성장하고 상업이나 농업경영을 통한 새로운 성격의 경제시스템을 통해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력을 사용할 준비를 하고 있던 민중들에게 적극적으로 대처할 역량이 없던 부패한 지배계층은 오히려 그들의 낡은 지배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쪽으로 권력을 집중시켰던 결과가 망국으로 귀결된 것이다.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며 인도 민족운동의 지도자라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는 나라가 망하는 데는 일곱 가지 원인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원칙 없는 정치, 둘째, 도덕이 빠진 상업, 셋째, 노력 없는 부(富), 넷째, 인격이 빠진 교육, 다섯째, 양심이 마비된 쾌락, 여섯째, 인간성 없는 과학, 마지막으로 희생이 빠진 종교’가 그것이다. 이중 ‘원칙 없는 정치’를 망국의 으뜸으로 꼽았으며 이러한 정치는 부패한 권력을 낳아 망국의 지름길이라고 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에서 한국처럼 법의 해석과 적용이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념은 무조건 옳고, 상대조직의 이념은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진영논리로 흘러 국가의 통치력으로 객관적 법치의 원칙을 파괴함으로 이미 그 기능을 잃어버린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조국일가의 범죄행위와 하명수사로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은 선거공작이라는 증거가 드러나고 있다. 수사선상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모두 청와대 문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로 밝혀지자 추미애 법무부장관은 취임과 동시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조직을 개혁이라는 명분을 들어 법과 상식을 벗어난 인사이동을 감행했다. 이 인사의 내막엔 살아있는 권력의 비리행위에 대한 수사가 좁혀오자 검찰개혁으로 포장해 수사조직을 공중분해시킴으로써 사건 자체를 덮으려는 속셈과 보복성 인사의 성격도 담겨 있다고 보겠다. 원래 검찰은 국민의 안전보장과 국가기강 확립,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부패척결과 약자보호 그리고 인권보장에 그 사명을 두고 있다. 이 사명완수를 위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는 검찰조직을 정부와 여당이 요구하는 입맛에 맞게 칼을 마구 휘두르는 현실을 보면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는 애초부터 없는 원칙이 무너진 좌파정치의 민낯을 보고 있다. 간디가 설파한 망국론이 요즈음 한국 사회의 자화상으로 다가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나라 안팎으로 처한 불확실한 시국에 대해 절망과 분노를 넘어 이제 국민의 권리인 저항권을 행사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2020-01-13

절망에서 생기는 용기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 벅은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느 해 그들이 사는 지역에 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먼 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 마을에는 외국인 펄 벅의 어머니가 하늘을 분노하게 만들어 가뭄이 계속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사람들의 불안은 점점 분노로 변해 어느 날 밤 사람들은 펄 벅의 집으로 몰려왔습니다. 소식을 들은 펄 벅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따르게 하고 케이크와 과일을 접시에 담게 했습니다. 대문과 집안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아이들과 함께 거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을 성대하게 준비한 것처럼 어린 펄 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하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들어 바느질을 시작했습니다.잠시 후 거리에서 함성이 들리더니 몽둥이를 든 중국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들은 활짝 열린 대문을 통해 단숨에 거실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굳게 잠겨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문이 열려 있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집안 구석구석을 들여다봅니다.“정말 잘 오셨어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서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드세요.” 말하며 어머니는 폭도들에게 정중히 차를 권했습니다. 그들은 못 이기는 척 방으로 들어와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습니다. 천천히 차를 마시며 그들은 구석에서 천진난만하게 노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갔습니다.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촉촉하게 내렸습니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의 두려움을 들려주며 만약 도망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다면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입버릇처럼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고 말했는데, 이후 펄 벅 여사는 인생을 살며 절망적인 순간을 맞을 때마다 항상 그 교훈을 떠올렸습니다./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20-01-13

산사 가는 길

오염되지 않은 산세를 자랑하는 청정지역 봉화, 호랑이가 걸터앉은 형국을 지닌 북지리 호거산 자락에 지림사가 있다. 신라 문무왕 13년(673) 의상대사가 지림사에서 산쪽을 바라 보다 멀리 서광이 비치는 곳에 지금의 축서사를 지었다고 전한다.지림사 일대는 ‘한절’이라 불리는 큰 사찰과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수도하는 승려가 5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조선 정조 때 저술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지림사는 문수산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까지 사찰이 존속하며 법통을 이어온 것을 알 수 있다.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혹은 ‘축서사로 인하여 사세가 기울었다’는 등의 이유로 폐사되었다고 한다.그러다 1949년경에 한 승려가 법당을 세우고 수월암이라 불렀다. 땅속에 묻혀 있던 마애불여래좌상을 발견하여 지림사라는 이름을 되찾아 다시 불사하여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부석사 가는 길목, 너른 들녘을 외다리 물새처럼 지림사가 지키고 있다.지림사에는 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높이 4.3m 부조형식의 거대한 마애여래좌상(국보 제 201호)이 있다. 현재까지 파악된 우리나라의 마애불은 모두 195점으로, 이 가운데 국보는 7점뿐이다. 그 중 하나가 북지리 마애불여래좌상이다. 자연 암석을 파서 만든 감실은 무너지고 보호각 속에서 태백산을 바라보듯 눈길은 동북쪽으로 향한다.일주문이 없는 경내에 들어서자 멀리서도 마애불상이 눈에 띈다. 새로 지은 전각들은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너른 마당은 더 황량해 보인다. 단조로운 절 풍경이 마애불의 존재감을 훨씬 크고 웅장하게 한다. 거침없이 위협적으로 불어오던 바람도 지림사 마당에서는 포복하듯 엎드리고, 척추를 곧추세운 이들조차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다.가까이 가서 보니 그 장중함이 더 놀랍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 몸이 먼저 저기압의 신호를 감지하듯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려 절부터 하게 된다. 나의 기도가 하루살이의 무심히 내젓는 날갯짓과 무엇이 다르랴만, 흔들림 없고 끝없이 아늑하면서도 평온한 기운에 사로잡힌다.나를 따라다니던 수식어들이 일제히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가볍다. 태생의 동물들만이 갖는 징표인 배꼽 한가운데 앉아 있는 기분이다. 모체와 분리되는 최초의 단절, 불안은 그곳에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삶의 젖줄이며 생명줄이 되어준 나의 모든 기도가 돌아가는 곳이기도 하다.상처투성이 마애불이 내뿜는 아우라에서 슬픔이 묻어 나온다. 마애불을 쳐다볼수록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외경함에 찬탄할 뿐이다. 온갖 고난과 아픔을 이겨낸 세월이 안겨준 훈장을 모를 리 없다. 마애불의 장엄한 위엄 뒤로 인간적인 고뇌가 크게 다가온다. 움츠러든 어깨와 풍화와 훼손으로 떨어져 나간 오른손, 보일듯 말듯 한 미소,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묵직하게 가슴을 헤집는다. 일상의 번잡함과 흔들림을 내려놓고 나를 찾던 여느 때와 달리, 나는 하나의 미약한 생명체가 되어 마애불을 바라본다.얼마나 많은 비바람이 다녀갔을까? 나는 마애불의 사라진 미소를 찾아 헤맨다. 숨은 그림을 찾듯 세상 빛을 보던 날의 온화한 표정을 상상하기도 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실눈을 떠보지만 좀처럼 잡히질 않는다. 군데군데 깨지고 뭉개진 자리에는 민초들의 한과 슬픔이 두껍게 녹아 흐른다. 처음 누군가가 혼을 불어 만들었을 그 옛날의 선명한 미소가 그립다.조낭희 수필가수천 년 전, 누군가의 간절한 불심에 의해 존재감을 드러낸 마애불, 순수한 자연의 경계를 허물고 경외의 옷을 입는 순간 고난은 시작되었으리라. 무릎을 꿇고 간절함을 호소하는 기도가 바람이 되어 밀려든다. 마애불의 가슴을 툭 치면 역사가 남기고 간 수많은 아픔들이 선혈처럼 쏟아져 흐를 것만 같다.길고 긴 옹이진 세월을 건너왔을 마애불의 심경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으랴. 언어의 경계 저쪽 너머에서 마애불은 무심히 앉아 있고, 사람들은 보물을 찾듯 숨어 있는 미소를 찾아낸다. 그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하고 쉬운 일이 나에게는 번번이 어렵고 힘들다. 때가 되면 누구나 돌아가야 할 가장 근원적인 곳, 언어가 없는 그 길목에도 마애불이 있을 것 같다.바람을 동무 삼아 할머니 한 분이 걸어오신다. 자그마한 육신과 소박한 몸놀림, 더 이상의 욕심도 없어 보이는데 더 내려놓을 것이 있으랴. 쇳소리가 날 것 같은 무릎관절은 절을 허락할 리 없다. 선 채로 삼배를 올리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거친 세월의 숨결이 선명하다. 할머니께 물었다. 아프지 않고 좋은 곳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하셨는지를.“살아온 대로 가는 길도 정해져 있지. 엉터리로 살아놓고 이제와 그런 기도하면 못써. 그건 도둑놈 심보야.”합죽한 웃음 한 자락 흘려놓고 또 법당을 향해 걸음을 옮기신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잔잔한 겨울 햇살 같은 미소가 걸려 있다. 그것은 여유와 달관이 빚어내는 마애불의 미소였다.

2020-01-13

객관화 돼가는 주관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은 상대의 장점을 나의 목소리를 통해 보여준다. 알고 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의 괴리는 그 독백이 끝나는 시점부터 균열을 일으킨다. 함께 살아가야할 수백 가지의 장점들. 그 속으로 함께 살아가지 못할 하나의 단점이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노아 바움백 감독의 ‘결혼 이야기’는 분명한 장점들 속에서 흐릿한 단점이 점점 명징해지는 시간을 그린다. 그리고 하나였던 것이 분화되고 세분화되면서 모든 장점들을 깡그리 무너뜨리고 ‘이혼’이라는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의 영화다.처음 시작은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사랑했으며 그 결과로 무엇을 남겼는가 아름답게(?) 헤어지는 것으로 약속한다. 하지만 현실은 누가 누구를 더 사랑했는가로 끝나지 않고, 누가 누구를 더 미워하느냐의 싸움으로 진입한다. 법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혼의 과정을 준비하던 부부 사이에 변호사를 선임하면서 이혼은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와 서로를 괴롭힌다. 아름다운 이별이 치열한 ‘승리’의 문제로 바뀌고, 감추어야할 것과 드러내야할 것들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함께 살아왔던 지난날은 어지럽고 서로를 고통스럽게 만든다.‘누가 더 사랑했었던가’는 이제 누가 더 상대의 치부를 까발릴 용기, 더 솔직한 용기를 가졌는가의 척도가 된다. 사랑의 깊이는 그대로 누가 더 상대방에게 좀 더 큰 상처를 안겨주느냐의 문제가 된다.뉴욕에서 시작된 영화는 LA로 옮겨간다. 결혼이 시작된 뉴욕에서 결혼이 끝나고 영화가 끝나는 장소 LA가 된다. 미국의 동부와 서부, 양극단의 물리적 거리만큼 심리적 거리가 멀어진다. 이는 영화 속에서 아들 헨리의 양육권을 다투게 되면서 법적 주거지인 뉴욕과 현실의 실거주지인 LA가, 과거의 삶과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규정되어지는가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우리’의 집이, ‘누구’의 집이 되는 과정이며, ‘너’의 집과 ‘나’의 집으로 분화되는 과정을 통해 잔잔한 감정에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한다. 부부는 ‘소송’이라는 사법제도를 활용함으로써 감성적이었던 관계가 냉정한 이성적인 관계로 돌아서고, 주관적이었던 것들은 모든 객관적인 것들로 치환된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기 위해 개인의 섬세한 감정을 쓰다듬기 보다는 거두절미하고 냉정하리만큼 물리적인 객관성을 유지할려고 한다. 법의 특성에 의해 상대의 감정에 이입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나의 현실적인 이익에 충실하도록 강요한다.개인적인 선택이겠지만 그래서 후련하고 만족하느냐의 깔끔한 결과로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편 찰리가 아들 헨리와 장난을 치고 하던 작은 칼. 그 칼이 한 번의 실수로 어떤 상처를 남기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은 ‘결혼 이야기’의 뒷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소한 사실들은 변호사의 변론을 통해 날카로운 날을 가진 무기가 된다. ‘우리’였을 때,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들이 ‘너’와 ‘나’가 됐을 때 상처가 되어 두고두고 남는다.‘이혼’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영화제목을 ‘결혼 이야기’라고 한 것은 반전이나 역설의 의미보다는 두고두고 다스리고 지니고 가야할 상처, 시작보다 중요한 마무리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속 이혼과정에 사랑, 양육, 과거와 미래, 성취와 돈의 문제까지 복합적으로 등장하고 얽힌다. 그렇다고 치졸하거나 막장으로 치닫지 않는다. 어느 부분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섬세하며, 자연스럽다. 다양한 요인들이 등장하지만 복잡하지 않고, 날카로움이 오고가지만 불쾌하지 않다. 슬프지만 애처롭지 않으며, 끓어 오르지만 태우지 않고 은은하다. 탄탄하게 짜여진 내용 속에 예술영화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는 아담 드라이버와 폭넓은 연기변신을 보여주고 있는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야기의 현실성, 그 현실성을 더해주는 주연 배우들의 연기로 인해 누구나 공감할 ‘이혼’을 다루는 ‘결혼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김규형*노아 바움백 감독의 ‘결혼 이야기’는 서울·부산 일부 극장과 넷플릭스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2020-01-13

정치의 계절이 오면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총선 예비후보로부터 북 콘서트 초청장이 왔다. 현역 국회의원은 의정보고서라는 이름의 총선 출마 홍보물을 보내왔다. 분열된 보수의 통합이 논의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에 체류 중인 안철수 전 의원이 정치재개를 선언하면서 향후 정당의 이합집산이 예상된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함께 공부하던 동기들의 단톡방에서도 정치적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시나브로 정치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지만 그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다. 선거 승리를 위하여 정당과 후보자들은 포퓰리즘(populism) 공약을 남발함으로써 유권자의 표심을 왜곡한다. 당선을 위해서라면 경쟁자에 대한 중상모략과 허위사실 유포도 서슴지 않는다. 연고주의가 만연하는 한국정치에서는 혈연·지연·학연이 총동원되어 ‘내편 네편’으로 나누어 ‘유치한 편싸움’이 벌어진다. 선거가 끝나면 유권자들은 다시 현실정치로부터 소외되어 방관자가 된다. 민주주의 꽃이요 축제라는 선거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정치의 계절이 오면 유권자는 눈을 더욱 크게 부릅뜨고 각 정당과 후보자의 행태를 주시해야 한다. 정치적 무관심은 민주주의의 반동화를 초래하여 독재정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권자는 정치적 관심의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것을 수호할 의지가 있는 정당과 인물을 찾아내야 한다. 민주주의 가치가 내면화되어 있어야 민주정치를 할 수가 있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는 흑백논리나 ‘사회적 패권의 교체’를 주장하는 혁명논리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국민의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는 선동정치는 독재자의 혁명전술이다.국가적 당면과제인 ‘안정과 혁신’을 도모할 수 있는 정당과 인물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북한의 핵 위협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여 국가안보를 확고히 하는 한편,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하여 경제혁신을 통해 미래의 번영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정치권력에 도전하는 사람은 자신의 출세에 목적을 둔 정치꾼(politician)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봉사하려는 정치인(statesman)으로서의 소명의식이 투철해야 한다. 베버(M. Weber)가 지적한 것처럼 “직업으로서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는 책임의식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선거 때는 유권자에게 머리를 조아리지만 권력을 잡으면 목에 힘을 주면서 돌변하는 정치꾼들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민주주의에 대한 링컨(A. Lincoln)의 명언, 즉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에 의한 정부”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정부를 선택하는 것이며, 그 선택의 책임은 국민에게 있다. 국민이 현명하면 ‘훌륭한 정치인’을 선택할 것이요, 국민이 어리석으면 ‘교활한 정치꾼’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정치의 수준’은 곧 ‘국민의 수준’이다.

2020-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