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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북한의 대미 협상 전술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 정치학박한식 교수를 만난 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20여 년 전 어느 세미나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그의 혜안은 상당히 참신하였다. 미국 조지아대학 교수이며 대구 출신인 그는 아직 고향 사투리를 그대로 쓴다. 세계적인 북한 문제 전문가인 그는 카터와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그는 북한을 50여 차례 방문하여 북한 당국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최근 그의 북한 관련 언급은 우리들에게 상당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북한 당국은 종래의 통미통남(通美通南) 정책에서 다시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으로 회귀하였다. 북한이 최근 우리의 대북화해 협력 정책을 무시하고 남한 배제 정책을 쓰는 이유이다. 그것은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강한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김정은은 작년 9월 3차 평양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에게 파격적인 예우를 했다. 그러나 북한은 문재인 정부가 ‘우리끼리 정신’을 무시하고 미국의 대북 정책에 종속되었다고 비난한다. 북한이 남쪽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로 비판하면서 문 대통령의 8·15 경축사까지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이유이다.북한은 북미 협상을 앞둔 시점에서 미사일 시험 발사 등 종래의 벼랑끝 전술을 강화하였다. 그것은 한미 합동 군사 훈련에 관한 북한식 불만의 표시이며, 대미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압력이다. 물론 여기에는 북한이 상대적 열세인 재래식 무기를 미사일로 보완한다는 의도도 깔려 있다. 이는 북한이 단거리 미사일 발사를 통해 자신들의 기술력을 세계에 과시하고, 이의 제3세계 판매전술도 고려한 조치이다. 트럼프는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시험은 대북제재에 해당되지 않으며, 경비가 많이 드는 한미 합동 군사 훈련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역시 트럼프식의 대북 협상용 카드일 뿐이다.북한은 궁극적으로 체제 안전 보장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김정은은 북한 체제의 안전성 보장이 전제되지 않으면 결코 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대북 제재해제는 단번에 합의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북한과 미국이 일괄 타결론과 단계론적 타결론으로 대립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북한 당국은 대북 경제 제재 해제만으로 결코 비핵화를 실천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북미 평화 협정체결과 대사급 외교 관계 수립을 비핵화의 전제로 본다. 북한은 어떠한 진통을 겪더라도 체제의 안전 보장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대미 협상 전술은 트럼프와는 협상의 셈법이 다르다. 트럼프는 어느 협상에서나 미국 이익의 극대화를 최고로 우선한다. 그는 정치나 외교를 그의 경험세계인 비즈니스 개념으로만 파악한다. 트럼프가 최근 미일 동맹을 강화한 것도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익확보를 위함이다. 그는 미국 이익에 배치되면 언제든지 협상의 결과를 파기할 수도 있다. 트럼프가 이란과 체결한 핵 협정을 폐기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김정은의 최대 관심사는 북한 정권의 안전 보장이다. 북한당국이 경제적 제재 해제만으로 핵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북한의 협상 전술도 고정된 틀은 아니며 상당한 가변성이 있다.

2019-09-08

통합신공항과 함께 대구경북 미래를 꿈꾸다

김영만군위군수군위군의 황금빛 미래를 꿈꾼다. 이제는 현실이 된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의 군위 유치를 앞두고 있다. 2016년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유치 의사를 밝혔을 때만 해도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금년내 최종이전지 선정을 정부에서 약속했다. 흔들림 없이 추진한 통합신공항 유치의 결실을 맺을 시기가 다가오는 것이다.통합신공항을 유치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심각한 인구감소와 고령화로 열악한 자치기반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는 상태에서 대구공항 통합이전 소식을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가온 지역발전의 기회’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통합신공항은 주민소환이라는 거대한 벽을 만나기도 했고 지난 선거에서는 정쟁의 대상이 되어 지역은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그때마다 군민이 함께 있어 그 벽을 넘을 수 있었다.군위군은 대구광역시와 접해 있으면서도 팔공산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그동안 발전에 소외되었다. 부계~동명간 팔공산 터널 개통으로 대구에서 30분 생활권으로 들어가고 대구경북 어디에서도 1시간안에 접근할 수 있는 중앙고속도로와 상주~영천간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이전할 대구통합신공항의 입지적인 여건이 확연하게 좋아졌다. 대구통합신공항 이전은 대구경북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대역사의 시작이다. 통합신공항 군위 유치는 생산효과 13조원, 부가가치유발 5조원, 취업유발 12만명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내륙 거점도시로서 SOC유치와 경기활성화도 꿈꾼다.공항 이전은 공항만 오는 것이 아니다. 공항과 연결을 위한 도로망 구축, 고속도로 신설 및 확장, 철도망 구축 등 다양한 SOC가 개발된다. 교통망이 구축된다는 것은 산업기반의 핵심요소가 충족되는 것으로 글로벌 관문은 물론 대구경북 광역경제 공동체의 핵심 역할로 새로운 도약을 이루어 낼 것이다.통합신공항은 대구경북의 미래를 위한 시대적 소명이기도 하다. 4차산업 혁명으로 항공물류 기능이 더욱 중요해진 상황에서 수용 한계치를 넘어 섰고, 전국 거점공항중 시설여건, 규모가 가장 열악하여 취약한 항공물류 기능으로 대구경북 산업 발전에 큰 한계로 작용하는 대구공항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중장거리 공항으로 지역 이용객은 물론, 지역기업들의 물류비용과 시간을 절감하여 수도권에 집중된 항공물류를 분담해 대구경북의 항공 물류를 처리하는 거점기지가 될 것이다. 대구경북 내 산업도 함께 살아날 것이다. 인천국제공항에 2017년 12월 성탄 연휴 첫날 짙은 안개로 300여 편의 항공기가 지연 또는 결항된 적이 있다. 해안가 공항의 한계인 해무가 이착륙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엔 일본 간사이공항이 태풍 ‘제비’의 영향으로 침수되어 공항이 일시 폐쇄되기까지 했다. 이는 해안가 공항 건설의 이점을 주장해 온 사람들에게 그 위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대안은 안전한 내륙공항에 있다. 현재 군위후보지가 그러하다.공항은 방문객들의 규모가 크고, 방문객 1인당 지출이 일반 관광객보다 훨씬 높아 관광수익뿐 아니라 일자리 창출효과와 홍보마케팅 유발효과도 커 최근 세계 주요도시들의 불황극복의 새로운 산업분야로 지목받고 있다.공항을 매개로 한 회의,포상관광,켄벤션,전시회등 4개 비즈니스사업인 마이스(MICE) 산업과 연계하여 대구경북의 문화가 세계에 통하는 경쟁력 있는 문화유산임에도 접근성이 떨어져 외국인에게 외면받았지만 제대로 된 대구경북의 관문공항은 분명히 새롭게 조명받을 것이다.

2019-09-08

우리는 책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오지은 공무원지식과 정보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얻을 수 있지만 책은 지식을 얻는 가장 보편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 가을 문턱에서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공부를 위한 기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유식하게 보이기 위해, 더 넓은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서 등 책을 읽는 이유는 다양하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자신의 필요 때문에 책을 읽을 것이다.과거에는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만 책을 읽을 수 있었다.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이었다.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깊은 사고력을 바탕으로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힐 기회를 가질 수 있음을 의미했다. 과거의 사치품은 현대의 필수품이 된다고 하던가?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무료로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이 활짝 열려 있다.25년 차 공무원인 내게 있어 책 읽기는 생존을 위한 무기였다. 겉보기에 무난한 삶이지만 고비 고비마다 순탄한 적이 없었다.공정하게 느껴지지 않는 상황들, 모두가 자기 손해는 손톱만큼도 안 보는데 나만 순진해서 당하는 느낌, 바보 같이 살고 있다는 생각들이 짓누를 때 속으로는 화나고 슬펐지만, 겉으로 속상하지 않은 척 씩씩한 척해야 할 때가 많았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다. 누군가 내게 힘내라고 말해주었으면 싶었다.이런 힘든 상황을 가족이나 친구에게 사사건건 말할 수도 없다. 하소연하면 결국 나만 속 좁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타인이해 주는 위로가 아니라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때 나는 책을 통해서 자신을 위로하고 내면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함을 발견했다.책에 나오는 한 구절 한 구절은 내가 공정하지 못한 것 같은 세상에 분노할 때,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과거보다는 지금 세상이 훨씬 공정하게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었고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고가 있었는지 알게 해 주었다. 자기 생명을 위협받는 순간에도 자신을 믿고 행동한다면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지금의 시련이 너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격려도 해주었다. 네가 언제 한 번이라도 마음과 목숨을 다 바쳐 무엇인가 해 본 적이 있냐고 질책하기도 했다.세상에는 헐벗고 굶주린 상태로 폭탄이 집에 떨어지지 않기 만을 바라는 제3 세계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위만 바라보고 불평하던 내게 지금 얼마나 풍족하게 살고 있는지를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나는 사회에 나와 더 많은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칼의 노래’, ‘한비자의 관계술’, ‘한강’, ‘태백산맥’, ‘연을 좇는 아이’, ‘히말라야 환상방황’, ‘죄와 벌’ 이런 책들을 통해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을 만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도 배웠다.책을 읽으면서 힘을 주는 문장, 내 마음을 귀신같이 알고 위로해 주는 그 문장들 때문에 용기를 내어 외국인들이 역동적이라고 표현하는 한국에서 아직 잘살고 있다.책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성큼 발 내디딜 수 있는 길잡이다.몰랐던 사실에 대해 놀라워하기도 하고,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만나 지혜를 얻을 수도 있고 때로는 책을 읽다가 만난 문장을 통해 삶이 뒤집기도 한다. 그 한 문장은 누군가의 인생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사람들은 왜 책을 쓸까? 유전학에 의하면 달고 기름진 음식에 식탐을 느끼는 이유가 열량을 최대한 저장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태곳적 생존 정보가 우리 DNA에 각인된 결과라고 한다. 책을 통한 삶의 지혜 또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축적한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해줌으로써 인류 생존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본능일 것이다.가장 좋은 대화의 방법은 다른 사람 말을 잘 들어주는 경청이다. 책을 읽는 것을 저자와의 대화라고 말한다. 가을의 문턱에서 저마다 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다를지라도 저자와 대화를 해 보자. 나보다 인생의 경험이 많은 작가들 이야기를 경청해 보자. 그러면 거기에서 삶의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2019-09-08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피실험자가 광고를 볼 때 뇌파가 어떻게 변하는지, 어느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관찰한 빅 데이터를 모아 마케팅 전략을 수립합니다. 고급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유심히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나긋나긋 느린 음악이 주로 흐릅니다. 매장 내 음악 속도는 고객 매장 체류 시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칩니다.가격표가 빨간색인 이유는 가격 파괴 기대감을 심어줘 시선을 고정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뇌는 손해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2+1이나 한정 판매가 효과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기회를 놓쳤을 때 손해 볼 것이라는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백화점이나 매장, 홈쇼핑은 뉴로 마케팅 집합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성적 사고방식으로 자제하려 해도 우리의 각오는 그들 전문성을 이겨내기 힘든 게 사실이지요.왜 굴지의 기업들이 인공지능 스피커를 각 가정에 서로 깔려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을까요? AI 스피커는 사물 인터넷의 첫 교두보로 모든 가정에서 빅 데이터를 수집하는 안테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AI 스피커 점유율은 데이터양과 질에서 현저한 차이를 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편리함과 즐거움. 빠른 속도와 안락함. 다양한 먹거리와 안전하고 풍요로운 삶. 누구나 선망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서히 길들여지다가 언젠가는 덜컥, 더 이상 우리의 자유 의지대로 살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지금 이 새벽에도 포항 앞바다에는 오징어잡이 배들의 집어등이 찬란하게 빛납니다. 그 불빛을 보면 견딜 수 없어 수면 위로 꿈틀거리며 올라가는 오징어들의 몸짓을 상상합니다.유하 시인은 그의 시 ‘오징어’에서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이라 외쳤는데, 지금 우리를 향해 밝게 비추고 있는 저 빛이 과연 진리의 빛인지, 뉴로 마케팅의 첨단 연구로 똘똘 뭉친 유혹의 빛인지를 따져 물어야 합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9-05

진대제의 기업가 정신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지난 4일 한국 반도체 개발의 산역사이며, 삼성전자 대표이사, 정보통신부 장관 등을 지낸 진대제 전 장관이 포스텍에서 강연을 펼쳤다. 그는 ‘제2회 현은강좌’의 강사로 초대되었다. ‘현은강좌’는 필자가 제자들과 함께 조성한 ‘현은 기금’에 의해 매년 국가를 이끌어 가는 여러 분야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듣는 프로그램이다.그의 훌륭한 업적과 경력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날 현장에서 카리스마 있는 강연을 들으며 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 교수, 직원 그리고 외부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는 순간을 경험했다. 한국인의 자부심을 가득 심어주는 시간이었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가 미묘하고 일본을 어떻게 넘을 수 있느냐는 관심이 고조된 가운데 열린 강연이었기에 의미가 있었다.진 전 장관은 필자와 함께 스탠포드대학 재학시에도 자전거, 자동차를 직접 고칠 정도로 손재주가 비상했다. 졸업 후 IBM연구소에 근무할 때도 4MD램 팀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귀국시 IBM 측은 귀국을 만류하면서 “IBM에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다”라는 백지수표를 받았다고 한다.귀국하면서 그가 외친 말은 “Swallow Japan(일본을 삼키자)”이었고 그래서 주변에서는 “그렇게 입이 크냐”는 농담도 들었다고 했다.우리나라에서 더 좋은 반도체를 만들어 일본회사들 문을 닫게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귀국한 진 전 장관은 16MD램을 개발해 미국으로 들고 갔다고 한다.IBM이 “I Buy Memory(나는 메모리를 구입한다)”의 약자라고 농담을 곁들인 그는 16MD램을 내놓기 전까지 한마디로 그들에게 무시당했다고 한다. 일본과 한국을 차별하던 그들 앞에서 마지막 꺼낸 카드가 16MD램이라고 한다. 16MD램을 가방에서 내놓은 다음 그들의 안색이 변헀고, 자기들끼리 회의를 하면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미국신문에는 “삼성의 쿠데타”라고 헤드라인을 뽑고 삼성의 약진을 크게 보도했다고 한다. 어쨋든 짜릿한 순간이었고 일본의 히타치 도시바 NEC 반도체 등을 누르고 세계 정상에 서는 순간이었다고 한다.그는 실천적 엔지니어가 되는 기업가 정신을 강조했다. 지금까지는 소통과 실적의 두 개의 축으로 사람을 판단했지만 이제부터는 창의라고 하는 축을 만들어 3개의 축을 가진 3차원 공간에서 인재가 판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기업가 정신의 필수요소로 세가지를 꼽았다. “문제해결 능력을 갖춘 전문가가 되라”는 것이었고, “소통과 협력을 통해 남의 얘기를 경청하고 질문을 할 줄 알고 협업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변화를 두려워 말고 끝없이 도전하라. 꿈과 상상력, 호기심을 가져라”고 그는 말했다. KTX 포항역을 빠져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일본과의 갈등 속에 경제적 위기에 처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던진 그의 말이 전율을 타고 흘러왔다.“힘든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 힘든 시간을 견딘 이는 오래 간다.(Tough times never last, but, tough people do)”

2019-09-05

그들의 정의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를 자처하는 이 정권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나라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출발을 했다. 그런데 임기 2년차가 지나면서 정치, 경제, 외교, 국방, 언론 등 각 방면에서 무능과 오만과 불의의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과연 그들의 말처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보여주는 거라고나 할까.정권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법무장관으로 지명되자 온갖 추문들이 연일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가장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딸의 진학을 둘러싼 비리와 부정에 관한 의혹들이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남들은 꿈도 못 꾸는 화려한 스펙을 12가지나 쌓았다는 사실에 다들 혀를 내두른다. 그 중에서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장영표 교수를 책임저자로 대한병리학회에 제출된 연구논문의 제1저자로 등재된 스펙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후보자의 딸이 고등학교 1학년 때 그 논문작성이 끝난 후에 2주간 인턴을 한 경력으로 제1저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물의를 빚고 있다.대한의사협회는 지난달 21일 상임이사회를 열고 조 양의 지도교수인 장영표 교수를 중앙윤리위원회에 회부하기로 의결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논문의 제1저자는 연구주제를 정하고 실험 대부분에 참여하는 등 논문 작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며 기여도가 높아야 한다”면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실과 자료에 근거해 조사를 할 예정”이라지만,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더 가관인 것은 장 교수의 변명이다. 그 학생이 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해서 선의로 그랬다는 것이다.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게 참으로 놀랍다. 학자로서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일말의 양심이나 양식이라도 있다면 어떻게 그런 몰상식한 말을 버젓이 할 수가 있는가. 그리고 사람들을 못내 궁금하게 하는 것은 장 교수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치고 그의 말대로 그냥 단순한 선의로 그런 비상식적인 짓을 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검찰이 수사에 들어갔다고 하니 조만간 그 내막이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조국의 적은 조국’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조국이란 사람을 둘러싼 온갖 의혹과 스캔들은 평소 그가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하고 매도하던 일들이라는 것 때문에 생긴 말이다. 한 마디로 ‘조로남불’이고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라 것이다. 그런 조국을 비호하고 두둔하는 일부 좌파 인사들도 지난 정권에 들이대던 정의와 윤리의 엄정한 잣대를 슬며시 감추는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 정의와 도덕성을 전매특허로 내세우던 좌파집단의 민낯이 어떤 것인지를 전 국민에게 보여준 셈이다.증인채택 문제로 국회청문회가 결렬되자 조국 후보는 기습적으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셀프청문회’로 일컬어지는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의혹사항 대부분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국민 과반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조국의 법무장관 임명을 강행할 거라는 예측이다. 지난 정권을 모조리 적폐로 몰아넣고 새로 구현하겠다는 그들의 정의(正義)가 과연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019-09-05

네바다 주-미국여행 1

우리 일행은 오십 명 넘게 들어가는 긴 버스에 올랐다. 이제부터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 지나 애리조나 주 그랜드 캐년까지 가는 2박3일 여정을 시작하려는 것이었다.전전날 우리는 팜프스링스라는 곳에 가 문학캠프를가졌다. 나는 ‘기미년 삼일운동과 안창호’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핫스프링스라는 별명답게 팜스프링스는 밤 늦게까지 뜨거움이 가시지 않았다.다음날은 이십 년 전부터 알던 김준철 시인 안내로 산타모니카 지나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의 안창호 하우스에도 가고 말리부 해변까지 나갔다 돌아와 저녁에는 대한항공 73층에서 도시를 내려다 보았다. 로스앤젤레스는 크다기보다 정이 가는 한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버스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네바다 주로 넘어가 여러 시간을 달렸다. 태평양 건너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신채호 선생과 관련한 원고를 써야 했지만 아직도 일이 남아 있었다. 버스 안에서 타자를 치는 건 목디스크와 원인 모를 어지럼증으로 아주 어려워졌지만 끈기를 부렸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꼭 써야 할 긴 분량의 글이 있었다.간간이 고개를 들어 버스 맨 앞좌석에 앉은 덕에 훤히 펼쳐진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데,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고원 지대 가까운 높은 한없이 펼쳐진 땅이 태양 볕에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서 있지 않은 황원과 산맥은 중국 만리장성 밖 내몽고 가는 길에서나 보았던 풍경이었다. ‘데쓰 밸리’라는 이름의 계곡이 있다고 해서 과장벽이려니 했는데, 버스 엔진 과열로 잠시 선 틈을 타 내려 본 네바다 황원은 단 십 분도 제대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버스는 계속해서 외줄기 길을 말없이 나아갔다. 어렸을 때 ‘새소년’이나 ‘소년중앙’에서 보았던 사막 풍경이, 그러니까 선인장과 자갈돌들, 그리고 근육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산맥이 전부인 모습이 차창 밖으로 펼쳐지고 있었다.준철이 모처럼 나타난 작은 도시를 보고, 이곳에서 업체를 운영했었노라고, 사람들이 라스베이거스에 가다 여기가 그곳인 줄 알고 카지노에 들어가 다 날리고 돌아선다는 유머가 있다고 했다. 과연 길 가에 카지노 호텔 몇 개가 자못 라스베이거스 흉내를 내고 있었고 조금 더 가자 멀리 교도소까지 보였다.나도 라스베이거스에 가면 뭔가 일을 저질러 봐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도 같다. 과연 내게도 행운이라는 게 찾아오기는 할까. 그러나 ‘눈이 덮인’, ‘눈이 내린’이라는 뜻의 라스베이거스까지는 한참을 더 가야 한다고 했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9-05

벌 쏘임

벌초는 우리의 미풍양속이다. 후손이 조상의 묘에 자란 풀을 제거하고 묘 주위를 정리하는 풍속이다. 대개 음력으로 팔월이 되면 일가들이 모여 벌초에 나선다. 풀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는 처서를 기준으로 우리 최대 민속명절인 추석 전까지는 벌초를 모두 끝낸다. 벌 쏘임 사고는 벌초가 집중되는 9월에 가장 빈번하게 일어난다.올해도 벌초를 하던 사람이 벌에 쏘여 숨진 사고가 몇 차례 있었다. 추석을 앞두고 전국에서 벌어지는 벌초 행렬은 한편으로는 벌과의 전쟁을 방불케 한다.대수롭잖게 생각한 벌에 대한 방심이 소중한 목숨을 잃게 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방청에 의하면 지난 2년 동안 벌 쏘임으로 119구급 활동에 의해 이송된 환자만 무려 1만3천여명에 달한다. 연평균 6천800명 꼴이다.지난 2년 동안 벌 쏘임으로 사망한 사람도 22명이나 된다. 단순한 벌 쏘임의 문제가 아니라 부주의로 인한 치명적 인명 사고다.벌은 곤충 중 가장 큰 무리다. 전 세계에 10만종이 넘는 벌들이 분포해 있다. 특히 말벌은 한 마리가 꿀벌 550마리의 독성을 갖고 있다.쏘이면 즉시 심한 통증을 느끼고 쏘인 부위가 부어 오르고 전신에 두드러기가 생긴다.2005년 중국 산시성에서는 대황봉(大黃蜂)이라는 맹독성 말벌의 공격으로 715명이 다치고 36명이 목숨을 잃었다.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벌들의 공격성이다.벌 쏘임 사고가 특히 8∼9월에 많이 발생하는 것은 이때가 벌의 산란기이기 때문이다. 가장 활동이 왕성하고 예민한 시기여서 다른 동물이나 사람에 대한 공격성이 더 커진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벌초가 한창이다. 벌 쏘임이 인명을 다투는 문제로 인식할 때 사고도 줄일 수 있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9-05

서일필(鼠一匹) 청문회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조국 법무장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점입가경이다. 자유한국당이 더불어민주당과 증인채택을 둘러싼 이견으로 청문회 일정에 합의하지 않고 버티자 조 후보자가 국회에서 장관 후보자로서는 전무후무한 기자간담회를 통해 자신에 대한 여러 의혹들을 해명하는 이벤트를 펼치고, 그제서야 한국당이 뒤늦게 청문회를 열자고 요청해 6일 하루동안 청문회를 열게 됐다. 도대체 장관 후보자의 능력을 검증하자는 건지 여야 힘겨루기에 청문회가 수단이 됐는 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자유한국당의 심사야 조국 후보자에 대한 여러 의혹들을 버무려 추석 밥상에 비빔밥처럼 올리고 싶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인들 야당의 속셈이 뻔히 보이는 데 그리 무력하게 따라갈리 없지않나.오히려 민주당이 청와대와의 물밑 조율속에 6일까지 청문 보고서 재송부를 요청함으로써 ‘청문회 없이 임명강행’의사를 강력하게 표출했고, 패를 읽힌 자유한국당은 ‘청문회도 못여는, 존재감 없는’ 야당이 되지 않기 위해 여당에 끌려가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상대방이 어떤 방식으로든 추석 전에 청문회 정국을 끝내려는 전략을 확고히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야당은 거기에 맞춰 지적할 것은 지적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자세로 청문회를 열 수 있도록 조율하면 됐을 일이다. 어차피 정부여당은 국회 인사청문회가 장관임명의 요식행위가 된 게 이미 열여섯번이나 되고, 이제 열일곱번째를 맞은 들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명박 정부에서 5년간 청문보고서 없이 임명을 강행한 장관급 인사가 17명이고, 박근혜 정부 10명, 노무현 정부 3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현 정부의 인사행태는 비판받을 만하다. 더구나 정부 출범 당시 협치와 권력기관간 견제를 강조했던 문 대통령이 아닌가. 그런 정부가 정작 여야합의로 이뤄지는 청문보고서 없이 이렇듯 자주 임명을 강행하는 것은 자기모순적이다. 그나마 어렵게 합의돼 진행될 청문회가 6일 하루동안 진행되고, 증인은 조 후보자의 가족을 제외한 11명으로 결정이 났다.다만 동양대 최성해 총장이 조 후보자 딸 표창장 관련해 표창장을 준 적 없다고 밝혔는 데도 여당이 조 후보자 의혹과 직접 연관이 없고, 정치적으로 편향됐다는 이유로 증인 채택에 반대해 증인명단에서 빠진 것은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더구나 증인을 부르려면 법적으로 최소한 닷새 전에 통보해야 하나 그렇지 못한 청문회에 증인들이 꼭 나와야 할 의무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청문회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 지 의심스럽다. 이번 청문회가 조국 후보자의 셀프 청문회 형식이었던 기자간담회와 다른 것은 선서하고 거짓말을 하게 되면 위증죄로 처벌받게 돼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 거짓말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한 증인들이 나오지 않게되면 청문회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 걱정이다.‘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 처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나타난 것은 고작 쥐 한마리’가 나타난 모양새다. 홍준표 전 대표의 말처럼 이번 청문회는 오락가락, 갈팡질팡 청문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서일필 청문회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답답하고 서글프다.

2019-09-05

미중무역전쟁

세계 양대국인 미국과 중국이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 표준시 기준으로 2018년 7월6일 오후 1시(미국 동부 시간 2018년 7월 6일 자정) 미국이 예고했던대로 340억 달러 규모의 중국 수입품 818종에 25%의 보복관세를 부과했고 중국이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중국으로 수입되는 미국산 농산품, 자동차, 수산물 등에 미국과 똑같이 340억 달러 규모로 25% 보복관세를 물리면서 시작된 양국간의 무역전쟁이다.중국의 환율조작 의혹, 특권 침해, 본국 투자 해외기업에 대한 기술력 갈취 문제는 계속해서 제기돼 왔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후보 시절부터 계속 보호무역을 주장했고, 특히 중국을 노골적으로 언급했다. 보복관세 조치는 피터 나바로 국가무역위원장의 무역안보론을 도널드 트럼프가 채택하면서 발생했다. 무역안보론이란, 특정 국가가 지속적으로 다른 국가에서 무역흑자를 창출한다면, 그 국가는 무역적자를 보는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는 논리다. 특정 국가가 지속적으로 다른 국가에서 무역흑자를 창출한다면 그것은 그 국가가 무역적자를 보는 국가를 경제적 수단을 통해 침략하는 것이라는 논리다. 이 논리를 미국의 사례에 대입시켜 보면, 미국을 상대로 무역흑자를 보는 국가들은 경제적 수단을 통해 미국을 침략하고 있는 미국의 적국이 되는 것이니 이러한 경제를 통한 침략 행위에 대해 미국이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반격을 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트럼프의 행동은 비핵화 문제와 중국과의 무역 문제를 동시에 연계시켜서 중국에게 압박을 가해 북핵 해결과 무역 격차의 해소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이 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 궁금하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9-04

교육이 정치인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온 나라가 한 뉴스로 몸살을 앓는다. 각료 한 사람 임명을 놓고 이렇게 시끄럽기도 처음이지만, 그 탓에 꾸준히 오명을 뒤집어쓰는 집단이 하나 있다.대학. 대학은 어쩌다 이 일에 이렇게 깊이 끼어들게 되었는지. 세상을 둘러보아 우리만큼 대학과 대학입시에 초미의 관심을 쏟는 나라가 흔하지 않다. 우리에겐 어쩌다 대학이 모두의 역린이 되어 버렸을까. 그러나 들여다보면, 대학이 무엇을 하는지 대학생은 무엇을 배우는지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대학의 문을 어떻게 뚫고 들어갈 것인지에만 모두의 촉각이 곤두서 있다. 대학에는 무관심하고 대학입시에만 온 신경을 기울인다. 입시만 통과하면 모든 게 끝이 나는가. 이게 정상일까.대학은 왜 정치에 소환되는가. 어째서 대학은 온갖 비리와 거짓말에 물이 든 것처럼 보이는가. 빛의 속도로 변화해 가는 세상에 역설적으로 가장 천천히 적응해 가는 대학에 우선 책임이 크다. 융합과 소통을 통한 변화를 외치기만 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대학의 비역동성(非力動性)을 돌아보아야 한다. 스스로 일어서 움직여 가기보다 정부의 지원에 기대는 대학의 의존성(依存性)을 반성하여야 한다. 대학이 창의로운 역동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고 자기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생존력을 만들지 못하면 누누이 누구에겐가 기댈 수 밖에 없다. 대학이 변화를 예측하여 주도하지 못하면 이미 생명이 없고, 스스로 대학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면 자신있게 가르칠 수 없다. 역동성을 잃어버린 대학은 정치에 휘둘릴 것이며 자생력을 상실한 대학은 권력의 하수(下手)일 수 밖에 없다.공정한 입시제도를 만들기 위하여 정부가 고심해 온 흔적에는 박수를 보낸다. 그렇다 하여, 대학을 모두 같은 모양으로만 몰아온 궤적에는 찬성하기 어렵다. 다중(多衆)을 대상으로 한 정치의 논리가 대학에도 수정없이 적용되는 일은 대학의 발전에 덕이 되었을까 해가 되었을까. 인구절벽을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치열한 대입경쟁은 무슨 조화인가. 대학의 서열화를 없애기 위하여 대학은 무엇을 했는가. 대학간판이면 만사형통이 되는 인식은 어떻게 바꿀 것인가. 글로벌대학환경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대학입시가 문제인가 대학교육이 문제인가. 생각거리가 한가득인데, 우리 대학은 무엇을 하는가. 사회비평가 로저 킴벌(Roger Kimball)은 ‘정치가 대학의 본질과 소명을 심대하게 오염시킬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지 않는가.초중등교육에 아무리 좋은 정책을 펼쳐도, 대학과 대학입시가 그대로이면 아무 소용이 없다. 대학의 교육과 연구는 나라와 겨레의 내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터이다. 대학은 어떻게 자존감과 생명력을 회복하려는지 고심해야 하고, 정부는 우리 대학이 대학답게 변화해 가도록 도와야 한다. 분명하게 새로운 대학 모델도 만나보고 싶고 대학과 함께 숨쉬는 사회에서 살아보고 싶다. 정치와 교육이 서로 돕기를 바라지만, 정부의 그늘에 대학이 머무는 모습은 그만 보고 싶다. 교육은 정치가 아니므로.

2019-09-04

한국기자 질문수준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9월 3일자 ‘다음’ 포털 사이트 실검 1-2위를 다툰 제목은 ‘근조 한국언론’과 ‘한국기자 질문수준’이다. 양자 모두 ‘조국 기자 간담회’ 결과 검색순위 1-2위에 올랐다. 청문회가 무산될 지경에 이르자 여당과 후보자가 ‘기자 간담회’ 형식으로 법무장관 후보자에게 쏠렸던 세간의 의혹을 묻고 답하는 자리를 만든 것이다. 휴게시간 포함 10시간 40분이 소요됐다는 1박 2일 기자 간담회는 처음 있는 일이라 한다.‘근조 한국언론’이야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한국기자 질문수준’은 흥미로운 제목이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언론사 기자 150여 명이 8시간 40분 동안 100개의 질문을 던지고, 후보자가 응답한 희대의 기자 간담회. 시종일관 간담회를 지켜본 대중이 제기한 문제는 ‘저러고도 기자인가’ 하는 것이었다.중복질문과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의혹을 제기하는 수준의 질문이 차고 넘쳤다는 것이 대중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기자(記者)’는 본디 ‘쓰는 사람’이다. 한자말을 풀면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기자이거나 기자여야 한다. 자신의 언어를 가진다함은 자신의 사유와 논리를 타자에게 설득력 있게 쓰고 말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학이사(學而思)’가 정답이다. 공부하고 생각하는 것에서 기자의 능력이 생겨나고 발현한다. 공부함은 독서를 의미하고, 그것에 기초해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생각함이다.‘학이사’는 지식인의 기본적인 자세이기도 하다. ‘논어’ ‘위정편’에서 공자는 일갈한다. “책을 읽되 생각하지 않으면 기망을 당하기 쉽고, 생각하되 책을 읽지 않으면 위태롭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여기서 나온 결론이 ‘학이사’다. 문제는 한국의 기자들이 책을 읽는 것에는, 달리 말하면 공부 잘하는 데에는 특화(特化)되어 있지만, 생각하는 훈련은 태부족하다는 점에 있다. 시험은 잘 치는데,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시험 잘 치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뛰어난 집중력과 암기력이다. 단순암기로 성적 끌어올려 스카이 가서 언론고시 합격하면 기자가 된다. 거기서 끝이다. 공부는 잘하지만, 기자로서 가져야 할 기본 덕목이자 책무인 사유와 인식능력이 결여돼 있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거기인 질문을 되풀이하고, 자기가 무슨 질문을 하고 있는지조차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다.기자는 교사와 전문기사, 과학자와 금융가 등과 더불어 최고 지식인 집단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사실을 올바르게 전달하고, 그것에 기초해 인과관계와 필연성을 고려하면서 정확한 분석과 문제제기 능력을 소유해야 한다.언론이 사회 발전단계의 척도이자, 미래기획의 초석이기 때문이다. 사태를 제대로 직시하고, 타자에게 무조건적으로 동조하거나 비판에 편승하는 기자는 기자가 아니다. 그것은 저잣거리 대중의 속성이다.근자에 대중에게 뭇매를 맞고 있는 한국언론과 기자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 금하기 어렵다.스마트폰으로 무장한 21세기 똑똑한 대중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언론과 기자의 소명과 존립근거는 취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19-09-04

왼쪽 자리 효과에 대해

학생들을 무작위로 선발해 두 장의 카드를 주고 1초 만에 추정치를 답으로 적게 하는 실험을 했습니다.A카드문제: 1×2×3×4×5×6×7×8=□ B카드문제: 8×7×6×5×4×3×2×1=□ A그룹이 참여한 1번 카드의 평균값 512, B그룹이 참여한 2번 카드의 평균값 2천250입니다. 4배나 차이가 납니다. 사실 정답은 4만320입니다만.콜로라도대학 매닝 박사와 워싱턴주립대 스프로트 박사 연구 ‘왼쪽 자리 효과’입니다. 사람들은 왼쪽에 있는 숫자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이론이지요.연구팀은 확신을 얻은 후에 소비자들의 심리에 가격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추적 연구합니다. 연구진은 학생들에게 2달러와 4달러짜리 가격표가 붙은 펜을 보여줍니다.A그룹의 학생들은 주로 2달러짜리 펜을 선택합니다. B그룹에게는 4달러짜리 펜을 3달러 99센트로 가격을 바꾸어 2달러짜리와 하나를 선택하게 합니다. 3달러 99센트 쪽으로 손길이 가는 빈도가 높아집니다. 44%의 학생들이 3달러 99센트짜리 펜을 선택하지요. 1센트 차이가 학생들의 구매 형태를 완전히 바꾼 겁니다.왼쪽에 있는 숫자가 4에서 3으로 바뀐 것은 1센트 차이였지만 반사적으로 1달러 차이로 느낀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마트에 장 보러 갈 때 꼭 필요한 물건만 사리라 결심했다가 나올 때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물건들을 카트에 가득 담아 후회하신 경험은 없으신가요? 왼쪽 자리 효과 실험 결과를 즉각 매장에 응용한 것 처럼, 마케팅 전문가들은 소비자들이 어떤 행태로 움직이는가를 예의 주목합니다. 대표적인 연구가 뉴로 마케팅(neuro marketing)입니다. 신경 마케팅쯤 되겠지요. 소비자들은 이성으로 쇼핑하는 것이 아니라 반사에 가까운 내면의 심리 과정을 거쳐 물건을 구매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9-04

학생 정서불안, 근본적인 해결 위한 질문 필요

조현명 시인·교사신인류가 탄생했다는 우스개가 있다. 요즘 10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른들의 말을 안 듣는 것은 기본이고 예의도 없다. 거기에다가 마음대로 한다. 이런 못 말리는 아이들의 탄생은 학교가 얼마나 어려운 지경에 처했는가를 말해준다. 어느 학급에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에 해당하는 학생이 1명이라도 있으면 그 아이를 지도하느라 다른 아이들에 대한 보살핌은 매우 어려워진다. 이런 질환이 학령기 학생의 3~20% 정도라는 통계가 있다. 물론 중증인 경우 병원에서 약을 처방한다. 그것으로 상당히 제어가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부작용 때문에 약을 복용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초등학교 교사 B는 이 질환을 겪는 아이의 심한 행동을 뜯어 말리다가 그만 아이의 얼굴에 손톱생채기를 내게 되었다. 하교 후 그것을 확인한 부모가 전화로 폭언과 함께 협박까지 했다. 이후 B 교사는 병가를 내고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퇴직을 고려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특수한 경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큰 문제는 요즈음 상당수의 학생에게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 많아졌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심증은 많다. 먼저 병원에서 아이를 낳은 후 바로 산모와 떼어내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다. 세상에 처음 나온 아이가 그동안 기대고 있었던 엄마의 심장박동 소리에서 떨어져 너무나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또 휴대폰에 노출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유튜브를 보면 그 특징이 드러난다. 유튜브를 보는 세대는 자신이 듣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에만 감각을 여는 세대이다. 관심 없고 흥미 없는 것에는 주의력이 결핍일 수 밖에 없다. 또 SNS는 빠르게 소통하고 자극적이다. 행동과잉을 일으키게 하는 요소들이 많다. 또 게임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게임은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고도 한다. 심리적인 어려움에 처한 아이에게 게임은 탈출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정서불안증 학생이 늘어나는 학교, 매우 위험해져가고 있다. 학생 자살이나 자해 사건이 전에 없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학교마다 위클래스를 설치하고 상담인력을 배치하고 있지만 잠재된 위험요소에 대한 대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상담인력과 인프라 확충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정서불안과 유사한 증상들이 증가하는 근본 원인에 대한 분석과 함께 그것을 줄여가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그때 마다 땜질식 대책으로 해결해나가고 있다. 또 매뉴얼 만능주의가 만연해서 사건 이후 대처 매뉴얼만 만들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 자살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대처 매뉴얼만 늘었지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또 유야무야다. 사건이 나지 않기만 바랄뿐이다.‘옛날처럼 학생들이 수업을 듣지 않고 수업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자괴감이 든다’ 라는 소리를 교사들에게서 많이 듣는다. 이것은 사회 전체가 어느덧 병들었다는 증거다. 결국 대부분의 학교나 교육은 이런 현상으로 망가져가고 있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나?’ 하는 근본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할 때다.

2019-09-04

다시 ‘태풍’이 불어 온다-최인훈의 ‘태풍’을 읽고

한국과 일본의 무역 갈등으로 감정이 격하다. 이런 가운데 최인훈의 ‘태풍’의 일독을 권한다. 이 작품은 1973년 1월 1일부터 10월 13일까지 243회에 걸쳐 ‘중앙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이다. 1940년대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주인공인 오토메나크는 나파유의 장교이긴 하지만, 사실 애로크인이다. 그는 오랫동안 니브리타의 식민지였다가 나파유의 식민지가 된 아이세노딘에서 포로감찰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의 충직함과 충성심을 아는 상부에서 오토메나크에게 중요하고 긴요한 임무를 맡긴다. 그것은 아이세노딘의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지도자인 카르노스를 보호감찰하는 일이며, 카르노스를 포함하여 40명의 니브리타 포로들을 나파유와 아이세노딘의 휴전을 위한 조건으로 석방 및 호송하는 임무다.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오토메나크는 우연히 니브리타인이 숨겨놓은 비밀창고에서 비밀문서를 발견하게 되고, 이를 통해 니브리타가 아이세노딘을 지배하면서 벌였던 만행을 소상히 알게 된다. 오토메나크의 생각은 여기에서 자라나 나파유의 지배방식 역시 니브리타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자신이 그토록 신봉했던 나파유의 지배담론이 지닌 허위와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오토메나크는 자신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아니 일부러 잊으려고 했던 사실, 피식민지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후 오토메나크는 카르노스의 독립 전쟁에 동참하여 아이세노딘를 독립시키는데 독립투사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태풍의 주요 무대는 아이세노딘이며,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파유의 장교인 오토메나크다. 세계 어디에도 아이세노딘이나 나파유란 나라는 없다. 완전히 가상적 공간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의 첫머리에서 서술자는 “유럽인들이 극동 혹은 동북아시아라고 부르는 지역”이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아니크, 애로크, 나파유라고 불리는 세 나라”가 모여 있으며, 그 중 아니크는 “지구 표면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큰 대륙”이며, “에로크는 그 동쪽 끝에 붙은 반도이며, 나파유는 이 반도를 활 모양으로 바라보는 몇 개의 섬”으로 된 나라임을 밝히고 있다.이 가상의 나라들은 실제의 지명과 공명하고 있다. 아니크는 중국, 애로크는 한국, 나파유는 일본에 해당한다. 이러한 이름들은 철자순서를 바꾸어 이름을 아나그램(angram)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원래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아이세노딘’은 ‘인도네시아’를 거꾸로 표기한 것이며 ‘로파그니스’는 ‘싱가포르’이며 ‘나파유’는 일본이며 ‘애로크’는 ‘코리아’(한국), ‘오토메나크’는 ‘가네모도’(금본)이다.이 공간속으로 ‘태풍’이 불어온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태풍’은 몇 가지 의미를 내함하고 있다. 먼저, 이 소설의 말미에서 오토메나크가 탄 배를 전복시키고 표류시키는 실질적인 위력을 지닌 일반적 의미의 ‘태풍’(颱風)이 그 하나다. 둘째 오토메나크의 인식론적 전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식민모국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오토메나크는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발견하게 되면서 인식론적 혼란을 겪게 되는데, ‘태풍’은 그러한 혼란과 그로 인한 인식의 전복을 상징한다. 셋째 ‘태풍’은 개인의 인식 전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힘으로 형상화된다. ‘태풍’이 지나간 후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부조리한 상황은 약소국의 동맹을 통해 극복된다. 이를 종합해보자면 ‘태풍’은 주인공의 철저한 자기반성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새롭게 세계질서를 재편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연재되었을 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 소설은 파격적이다. 왜냐하면 친일과 반일, 협력과 저항의 이분법적 구조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것으로 이해될 수 없는 복잡하고 복합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을, 승전국인 미국과 영국을 등치시킨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열강은 정의를 지키고 세계 평화를 유지한 국가가 아니라 단지 독일이나 일본과 다를 바 없이 식민지를 지배했던 국가라고 말한다. 영국과 미국이 보기에 독일과 일본은 파쇼적 전체주의 국가라면, 일본의 관점에서 미국과 영국은 귀축(鬼畜)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과 영국을 위시한 서방의 열강은 전쟁에서 이겼다는 이유로 선(善)의 자리를 차지했을 뿐인 것이다.1990년대까지도 일본문화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고, 일본을 조금이라도 옹호하는 말을 하면 ‘친일파’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아직도 한국과 일본의 스포츠 경기는 ‘한일전(韓日戰)’으로 불리며 관중들은 전쟁에 참여하듯 응원을 보낸다. 그런데 최인훈은 한일협정으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던 1970년대에, 일본과 미국을 동일선상에서 다루었다. 한국을 전쟁의 포화 속에서 구했으며, 우리나라에 원조를 아끼지 않았던 영원한 우방인 미국 역시 제국주의 국가이며 식민모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은 당대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식민지를 거느렸던 국가들과 식민지배를 당했던 국가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탈식민주의 이론이 성행하면서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탈식민주의는 1960년대 파농, 에드워드 사이드 등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하면서 한 시대를 휩쓴 문학연구 방법이자 문학이론이다. 이 이론은 1990년대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탈식민주의가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도 전에 탈식민주의를 관통해버린다. 많은 훌륭한 작품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2019-09-03

개를 진정시키는 신호, 카밍시그널(下)

한 개가 그 자리에서 동작을 멈추고 꼼짝 않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카밍시그널 중 하나이다.사람의 뇌가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두개골 안의 뇌는 크게 셋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들 세 종류의 뇌는 인체활동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지휘통제센터로서 함께 일한다.미국의 선구적인 뇌 과학자 폴 매클린은 인간의 뇌는 파충류 뇌(뇌간), 포유류 뇌(변연계 뇌), 그리고 인간의 뇌(신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사람의 변연계란 뇌의 특정부위가 아닌 뇌의 가운데를 연결하는 여러 부위를 일컫는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반응을 지배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행동은 변연계 반응으로 나타난다. 변연계는 상황이나 환경에 대해 생각없이 반사적이고 순간적으로 반응한다.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신피질과는 다르게 변연계는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대한 진정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 변연계는 감정이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에 직면하면 행동을 지시하게 되고, 변연계의 생존반응은 신경계에 내장되어 있으므로 숨기거나 참기 어렵다. 변연계의 영향을 받는 행동은 통제하기 어렵다.사람을 포함한 많은 동물들 그리고 개들이 위험에 반응하는 방식은 정지, 도망, 투쟁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개들이 자신보다 큰 개가 가까이 다가오거나 자신의 냄새를 맡으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동작을 멈추고 꼼짝 않고 있는데, 어떠한 위험 앞에서 정지하는 것은 대표적인 개의 카밍시그널(calming signal) 중 하나이다. 변연계는 위험을 감지하자마자 생존을 위해 즉시 행동을 멈추는 방법으로 반응한다. 대다수의 포식자는 움직임에 반응해 주의를 집중하므로 위험 앞에서 정지하는 능력은 생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개들은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 앞에서 멈추고 움직이지 않음으로 자신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표시하는 카밍시그널을 사용한다. 또한 평소보다 천천히 행동하거나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일만큼 느리게 움직이는 것도 강한 카밍시그널이다. 만일 개가 사람을 보고 겁을 먹는다면 사람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으로 카밍시그널을 보낼 수 있다. 개가 사람을 두려워한다면 천천히 다가가면 개가 가만히 있을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개가 사람 앞에 앉은 상태로 등을 돌리거나 다른 개가 접근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앉는 카밍시그널을 보냄으로써 상대를 진정시키기도 하는데, 낯선사람이 방문했을 때 개가 무서워하다가 낯선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면 개가 진정되기도 하는데, 개들은 앉는 행동을 상대를 진정시키는 카밍시그널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개가 배를 위로하고 드러눕는 것은 복종의 신호이지만 배를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도 강한 카밍시그널이기도 한데, 개들은 스트레스를 받거나 다른 개의 주의를 끌어야 할 때 배를 땅에 대고 엎드리는 신호를 보낸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개가 있다면 그 사람이 소파같은 곳에 엎드려보면 개가 안심하고 다가올 것이다. 개들은 대부분 다른 개들에게 직선으로 다가가지 않고 빙 돌아가거나 거리를 두고 지나가는 것으로 상대를 안심시키기도 하고, 으르렁거리며 공격적인 개들에게는 앞발을 들거나, 눈을 깜빡여서 상대를 안정시키는 카밍시그널을 사용하기도 한다.사람은 감정이 폭발하면 인지능력이 제 기능을 못하고 이때 뇌의 모든 이성적 판단을 장악한 변연계 뇌는 투쟁반응에 집중하게 된다. 개들의 비언어 행동과 카밍시그널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이를 잘 알고 활용할 수 있게 되면 개의 행동에서 나쁜 조짐을 보일 경우 카밍시그널을 활용하여 아예 잠재적 위험을 피하거나 경고를 함으로써 삶에서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삶은 말없는 생명체인 개들에게도 중요한데, 말없는 개들과 함께 살아가며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카밍시그널은 개들과 말없이 소통할 수 있는 기본이 된다./서라벌대 교수(마사과)

2019-09-03

경북형 마을학교 3 - 머무는 학교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하늘 붓은 청명한 가을 하늘을 그리고, 마음의 붓은 하늘을 향해 소원을 그리는 9월입니다. …. 가을 대추는 여름날에 품은 땡볕과 우뢰와 열기로 고운 빛을 빚어냅니다. ….”성분을 바꾼 바람이 시를 부르는 9월이다. 많은 가을 시 중에서 앞에 인용한 시(예강 ‘평온하게 하소서’)에 시선이 멈췄다. 시를 읽다가 올려다 본 은행나무에서 9월의 모습을 보았다. 늘 푸를 것만 같았던 은행나무가 여름내 품었던 푸른색을 겨울을 견뎌야 하는 나무들에게 나눠 주고 있었다. 철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은 올해도 오감(五感) 풍성한 가을을 선물하고 있다.하지만 철이 없는 이 나라는 해가 거듭될수록 지독한 혼돈에 빠지고 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뉴스가 있다. “세계 최초 ‘출산율 0명대 국가’ 한국” 조국이 조국답지 못 하다는 우스갯소리가 한창이던 지난 주 필자의 이목을 끈 뉴스이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결과는 출산율 저하가 아니라, 출산 실종 현상을 초래하였다.다른 수치도 절망적이지만 나라의 미래가 걱정되는 가장 암울한 수치가 출산율이다. 국가의 3요소는 국민, 영토, 주권이다.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국민이다. 우리가 주권과 영토를 빼앗겼을 때에도 국가가 없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빼앗긴 것을 꼭 되찾고자 하는 강한 열망과 그 열망을 행동으로 옮긴 국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출산율 0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나라를 굳건하게 지켜온, 또 지킬 국민이 사라지고 있다.0명대 출산율의 비극을 가장 절감하는 곳은 학교이다. 혹 학교가 무너지면서 출산율도 무너진 것은 아닐지? 그렇다면 답은 다시 교육이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정책들도 좋지만, 그와 병행해서 교육을 살리는 일에 좀 더 매진해야 한다. 자유학년제, 고교학점제 등으로는 안 된다. 이들 정책들이 주효했다면 교육 붕괴는 예전에 멈춰야 했다. 그런데 우리 교육은?물론 필자도 교육을 살릴 묘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육수요자들은 교육의 본질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교육의 본질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성장시키는 것이다. 산자연중학교에서는 그 교육의 본질을 마을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구현하고 있다. 마을 어르신들은 물론, 학생, 학부모, 교사들의 만족도도 매우 높다. 그 만족도가 다른 지역 학생들을 경북 교육 안에 계속 머물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필자는 마을학교를 시작하면서 교육 단계를 세 단계로 설정하였다. 첫 번째 단계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오는 교육. 두 번째 단계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교육.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그들을 고향에 계속해서 머물게 하는 머무는 교육. 앞 두 단계는 성공했다. 이제 마지막 단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노력이라고 해서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을의 품 안에서 어르신들을 공경하고, 나만을 위한 꿈이 아닌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학생들을 지도하면 된다. 그런 교육에 입시 따위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2019-09-03

포항은 최고의 로봇시티다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가 세계를 진동시키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언론의 주인공은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AI)이었다. 빠른 속도의 기술 진보와 혁신이 그동안 제조공장에 국한되었던 그들의 역할을 세상 밖에서 찾기 시작하였다. 결국 지금까지 축적되어왔던 인공지능의 기술, 유무선 통신망의 발달, 새로운 산업간 융합과 협업체제의 구축과 같은 여건이 갖추어진 결과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나타난 것뿐이다.로봇분야도 마찬가지다. 용접과 같은 단순 반복적인 기능을 전담하던 산업용 로봇들은 오랫동안 대량생산 체제에서 효율성 증대와 공장프로세스 개선에 기여해 왔다. 산업용 로봇이라는 이름 그대로 이들은 공장 내에서만 존재하였다. 그랬던 로봇들이 점차 공장 밖으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관점에 따라 다양한 개념이 있겠지만 그 핵심 중 하나가 빅 데이터인 것만은 분명하다.오랫동안 존재했지만 우리 시야에 노출되지 않았던 산업용 로봇들이 형태와 모습, 그리고 그 기능을 확장하여 우리 생활 속에 서서히 침투하고 있다. 우리가 서비스로봇이라 부르는 것들이다. 굳이 인간모습으로 걷고 말하는 것만 서비스로봇이 아니다. 인공지능으로 제어되면서 운전자의 필수품이 되어 버린 내비게이션도 광의의 서비스로봇이라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서비스로봇은 청소로봇, 요양보호로봇 등 가정용이나 개인용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에는 태풍이 극심한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기자를 대신하여 리포터의 기능을 수행하는 언론방송용 미디어로봇까지 출현하였다. 이러한 서비스로봇의 관심과 수요가 확장되면서 세계 서비스로봇시장은 지난 5년간 약 12.3%라는 경이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중국전자학회가 발표한 ‘중국로봇산업발전보고서 2019’에 따르면 2019년 세계로봇시장규모는 약 294억1천만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포항은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포항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은 지도 무척 오래되었다. 문제는 항상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새로운 것만 찾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포항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대단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포항에는 국내 6대 로봇연구기관의 하나인 한국로봇융합연구원이 있다. 이곳은 실용로봇의 개발과 생산 모두가 가능한 로봇전문기관으로서 포항에서 한국지능로봇경진대회를 개최한지도 이미 20년이 넘는다. 포항이 명실상부한 최고의 로봇시티라는 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을 뿐이다.최근 포항은 환호공원부터 죽도시장 일대까지를 영일만관광특구로 지정받았다. 관광특구에는 먹고, 보고, 즐기고, 체류하는 것이 모두 있어야만 활성화된다. 이왕이면 한국로봇융합연구원이 그동안 개발했던 다양한 서비스로봇들을 직접 보고, 만지고 체험할 수 있는 전시관을 관광특구로 이전 확장하는 방안도 검토하였으면 한다. 이를 계기로 관광특구의 자랑거리를 확보하고 여기에서 판매 가능한 서비스로봇을 생산하는 지역기업까지 육성하면 좋겠다.

2019-09-03

‘아마도(maybe)’라는 긍정이 만든 기적

잭은 인근 존스홉킨스 대학 전문가 200명에게 이메일을 보냅니다. 답장이 하루에도 몇 통씩 들어옵니다. 세계 최고의 의학 전문가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잭의 실험 과정에서의 오류와 아이디어의 부적절함, 이 연구가 왜 의미가 없는지 반박을 쏟아냅니다. 순식간에 100통이 넘는 거절 편지로 메일함이 쌓입니다. 거절의 이유는 논리적이며 날카롭습니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세계 최고 전문가들의 비판과 거절 속에서 소년의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199통의 거절 편지 끝에 마지막으로 기적과 같은 메일 한 통이 도착합니다.“얘야. 어쩌면(maybe) 내가 이 연구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존스홉킨스 마이트라 박사의 답변이었습니다.잭은 199통의 거절보다 ‘아마도(Maybe)’라는 한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벌떡 일어나 마이스트라 박사에게 달려갑니다. 논문 500편과 수십 권의 책을 읽어 인터뷰 준비를 하지요. 박사와 연구원 20명이 몰려들어 수도 없는 질문 공세를 퍼붓습니다. 잭은 침착하게 그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하지요. 마이스트라 박사는 빙그레 웃으며 실험실 한쪽을 내어줍니다.이 연구소에서 7개월을 보낸 후 잭은 마침내 탄소 나노 튜브에 항체를 엮어내 조각 센서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합니다. 피 한 방울을 뽑고 센서를 담그기만 하면 5분 이내로 결과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비용은 불과 35원(3센트) 정확도는 100%입니다. 60년 전에 정립한 구닥다리 췌장암 진단 방식과 비교해 보면 잭의 방식이 168배 빠르고 2만 6천배 저렴하며 400배 더 민감하고 100%에 가까운 정확도를 보입니다.췌장이라는 신체 기관이 있는 것조차 몰랐던 중2 소년이 거의 혼자 힘으로 기적을 일으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대범한 십대들이 여기저기 대나무처럼 쑥쑥 솟아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9-03

여론과 민심

여론은 사회 구성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인정되는 공통의 의견을 말한다. 특히 건전여론은 사회 구성원이 그 사회 전체의 이익이나 정의에 대해 동질적 관념을 가질 때 성취가 가능하다. 선진국일수록 건전여론 형성도가 높다. 현대사회가 여론을 중시하는 것은 민주적 이념과 맥을 같이한다.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의견을 잘 받드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근본이 된다는 뜻이다. 현대 사회에서 여론조사가 활발히 활용되는 것은 국민의 마음을 잘 살펴보기 위한 방안의 일환이다. 여론조사는 사안에 따라 국론(國論)이라는 말로도 사용한다. 여론 청취만큼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요한 일은 없다.옛날에는 이를 민심(民心)이라 불렀다. 백성의 마음이다. 민심보다 여론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쓰는 요즘이나 과거나 그 중요성은 똑같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한 것은 하늘의 뜻만큼이나 백성의 뜻을 잘 살펴야 국가가 평온할 수 있다는 것이다.서경에는 “군주가 선정을 베풀면 백성이 사모하고 악정을 하면 앙심을 품는다”고 했다. 민심을 얻는 것이 바로 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는 가르침이다. 군주민수(君舟民水)란 “백성은 강물이며 임금은 강물 위에 떠 있는 배”라는 뜻이다. 강물이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을 수도 있음을 이른 말이다. 2016년 광화문 촛불집회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이뤄졌던 그해 교수신문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였다.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에 대한 수많은 문제 제기에도 대통령이 후보자 임명을 강행될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 임명반대 여론이 월등히 높은데도 아랑곳 않겠다는 분위기여서 정국의 앞날이 시계 제로 상태다. 민심을 제일로 살폈던 옛 성현의 지혜가 아쉬운 때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9-03

달러패권에 대한 불만

김학주 한동대 교수리만사태 때 사고를 친 것은 미국이다. 그런데 그 부작용은 신흥국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미국이 양적완화를 한 이후 시중에 풀린 자금은 아시아로 건너 와 핫머니가 되었고, 미국이 통화정책을 바꿀 때마다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외환보유고에 달러를 더 쌓아야 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즉 신흥국 정부가 지출 대신 저축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또한 미국의 무역장벽으로 인해 신흥국 국민들도 불안감을 느끼며 소비대신 저축을 선택하고 있다. 최근 중국 정부는 대규모 세금 감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축이 증가한다는 소식이다. 세계적으로 소비를 늘려 줄 수 있는 곳은 세계 인구의 60%를 차지하고,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있는 아시아인데 달러가 기축통화라는 이유로 이곳에 불안감이 조성되어 소비 대신 저축이 증가하고 있다. 그 결과 세계경제 성장에 걸림돌이 된다는 불만이 일고 있다.브레튼 우즈(Bretton Woods) 협정은 1971년 깨졌다. 그럼에도 달러는 그 때의 힘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현재 미국은 세계 교역의 10%, 세계 GDP의 15%를 차지하는데 불과하지만 50%이상의 교역과 세계 증권 발행량의 2/3 이상이 달러로 이루어지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지적이다.최근 영란은행장인 마크 카니는 달러가 단일 기축통화라는 사실이 주는 역기능을 비판했다. 미국이 불안해질수록 다른 나라들이 더 달러를 사야 하는 역설을 꼬집었다. 그는 세계교역 비중을 기준으로 한 바스켓 통화를 제안했다. 그것도 디지털 통화로 하자고 한다. 그는 내년 1월로 영란은행을 떠나 IMF내 집행임원으로 내정될 확률이 높다. 즉 점점 달러에 도전하는 세력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미국은 달러 패권을 고집하겠지만 결국 수출해야 먹고 살게 된 스스로를 인정할 것이다. 트럼프가 수출을 위해 달러 약세를 원한다고 해서 생뚱맞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워렌을 비롯한 민주당의 차기 대선 주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 동안 여러 나라들의 물건을 사주던 미국의 전후 세대(baby boomer)가 늙어 더 이상 구매력을 유지할 수 없으니 이제는 미국도 남의 나라에 물건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미국의 물건을 사 줄 수 있는 곳은 아시아다. 미국은 청정에너지인 천연가스를 비롯해 사물인터넷 시대의 기초소재인 IT부품을 팔 수 있다. 그럴수록 미국도 서서히 아시아 패권을 인정할 것이다. 따라서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아시아에서 내수시장이 큰 중국의 위안화 자산에 투자해 볼 수 있다.그런데 미국이 그렇게 생각을 바꾸기 전에 커다란 갈등을 만들 수도 있다. 군사력을 활용할 수 있다. 이것이 증시에 충격을 줄 수 있다. 주가지수는 10년을 주기로 두 배 올랐다가 위기가 발생하며 반 토막 나서 제자리로 오는 경우가 자주 발견된다. 미국이 만드는 갈등이 시장에 쇼크를 주며 코스피를 전고점인 2600의 절반인 1300근처로 끌고 내려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장은 안전자산인 달러에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2019-09-03

죽음의 공포도 이겨내는 이야기의 힘

이야기는 늘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흘러간다. 한 번 이야기에 붙들린 인간은 그 어딘가로 흘러가는 이야기가 결국 끝날 때까지, 그 이야기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이야기에 들린 경험이란 어린 시절일수록 더욱 강렬한 법일 터, 고백하건대 나는 어린 시절 어린이용 문고판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고 신밧드의 모험 이야기에 붙들려, 중앙아시아 부근의 저 먼 어느 세계를 그리워하기도 했다.분명 어린 시절,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었거나 혹은 누군가의 입을 통해 이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 이야기는 중동 지역에서 누군가의 입을 떠돌던 구전의 이야기를 모아둔 것으로, 1,001일 밤 동안 이어진 이야기라는 의미로 ‘아라비안 나이트’ 혹은 ‘천일야화’라 부른다.중동의 여러 지역에서 제각각 생겨난 280여 편 정도 되는 이야기들을 모은 것인 만큼, 이 이야기들 사이에 연관성은 없다. 어린이용 문고판에는 신밧드의 이야기나 알라딘의 마술램프 같은 어린 아이들의 모험에 대한 취향을 자극할 만한 것들이 특별히 선택되었던 것뿐이다.이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의외로 재미있는 것은 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엮고 있는 액자가 되는 이야기이다. 바로 우리에게는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로 알려진 그것이다. 이야기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고대 페르시아 왕에게 두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맏이인 샤리아가 왕위에 올랐고, 동생인 샤즈난은 평민으로 만족했다. 샤리아는 그런 동생이 기특해서 타타르 왕국을 그에게 주었고, 샤즈난은 그 왕국의 왕이 되었다.하지만 샤즈난은 자신의 왕비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을 보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형인 샤리아에게 해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샤리아는 오히려 본인이 여성에 대한 공포에 빠져, 여성과 결혼을 하고 하룻밤이 지난 뒤 그 여성을 죽이는 끔찍한 행동을 반복한다.이런 샤리아 왕의 고약한 습벽 때문에 결혼 적령기의 여성이 도시에서 거의 사라질 때쯤, 당시 ‘채홍사’를 맡고 있던 재상의 딸이었던 셰에라자드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샤리아 왕과 결혼하여 샤리아의 끔찍한 행위를 막아보겠다고 자원하게 된다. 셰에라자드는 그렇게 동이 떠오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야기를 시작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앞두고 있던 셰에라자드가 이어가던 이야기가 바로 ‘천일야화’였던 것이다.동이 터오고 샤리아 왕이 자신과 결혼한 여성을 죽여야 할 시간이 되었지만, 아직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기에서 샤리아 왕의 고민이 시작된다. 여느 경우처럼 셰에라자드를 죽이면 더 이상 그 이야기의 뒷부분을 들을 수 없다. 샤리아는 그래서 셰에라자드를 살려두고 다음의 이야기를 듣기로 한다. 여성에 대한 공포가 빚어낸 강박을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 이겨낸 것이다. 호기심은 그렇게 힘이 세다.셰에라자드 역시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을 터.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샤리아의 관심이 끊어지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치 독자의 서늘한 눈빛을 상상하는 연재 작가의 공포와 닮았다. 그런 공포와의 줄타기 끝에 셰에라자드는 무사히 천 일과 하루 동안 이어진 이야기를 마친다. 물론 영원히 이어지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 언젠가 셰에라자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끝난다. 하지만, 샤리아는 그간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이야기의 두 번째 힘은 바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분명, 이야기는 어딘가로부터 와서 어딘가로 흘러간다. 우리는 그 흐름 어딘가에서 이야기에 붙들리고 그 이야기로부터 빠져 나오지 못한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에 샤리아가 붙들렸듯이./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09-02

소중한 것은 내 곁에… 청도 운문사

지난 밤 꿈에 그가 하얗게 핀 파꽃을 안고 찾아왔다. 안부를 물어야 하는데 그만 가위에 눌려 잠을 깨고 말았다. 더 이상 잠들지 못하고 정원으로 나갔더니 젖은 달빛아래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넘쳐흐른다. 잔디밭이나 바위 틈, 담장 너머 빈터의 강아지풀숲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어댄다. 생의 가장 눈부신 한 때를 위한 이 장엄한 합창들이 나를 숙연하게 한다.고요의 겹을 벗고 아침이 열리는 시간, 운문사로 향한다. 미처 가슴 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것들과의 재회는 세월이 흘러도 아름답다. 그런 기억들이 사라질까 두려워 우리는 가슴 속에 애틋한 시구 하나 쯤 만들어 두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비록 그 때는 힘들었다 할지라도.운문댐의 수위와 물빛은 계절마다 달랐고, 봄날의 벚꽃은 언제나 내 늑골 사이에서 통증을 일으키며 피고 졌다. 보슬비의 속삭임이나 여름날 폭풍우의 거친 숨결조차 나를 위무하던 곳, 크고 작은 외로움이 방점처럼 찍히는 날이면 무작정 달리던 길, 이 길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신라 진흥왕 18년(서기 557년) 신승이 창건한 운문사는 대작갑사(大鵲岬寺)라 불리다 고려 태조가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로 불려졌다. 지금은 승가대학과 대학원, 율원과 선원을 갖춘 전국 최대 규모의 비구니 교육 도량으로 알려졌지만 관광지화 된 여느 사찰과는 다르다. 호거산 아래 스스로를 가둔 듯 세상으로 열려 있는, 활짝 핀 연꽃 같은 사찰이다.미혹으로 결박당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비로자나불, 그 아래 무릎을 꿇고 백팔 배를 하노라면 이내 지혜의 눈이 떠질 것만 같다. 색 바랜 단청과 오래된 마룻바닥이 주는 편안하고 정갈한 기운들, 비로전을 지키는 동서삼층석탑과 담장 너머 불이문의 세계를 상상하는 일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까치 떼가 땅을 쪼는 곳에 절을 지었다는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를 떠올리게 하는 작압전(鵲鴨殿) 앞을 지나노라면 작은 공간 속에 나를 맡기고 싶어진다. 두어 시간 정도는 온전히 나를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하며. 가부좌를 하고 앉았노라면 백팔배를 할 때와는 다른 기분에 젖어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천연기념물로 지정된 500년 수령의 처진 소나무나 젊은 후박나무의 늠름함 앞에서 일상을 돌아보고, 불이문 앞을 지나다 젊은 스님이라도 만나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면 만다라의 세계가 그리 어렵고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드리 전나무 길과 노송들이 늘어선 솔바람 길을 걸어 나올 때쯤이면 내 안에서도 맑은 샘물소리가 들린다.이제는 만남보다 이별을 경험하는 일이 훨씬 많아졌다. 투병하는 그를 데리고 이곳에 오겠다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세상에 덩그러니 남아 있을, 주인 잃은 약속들이 모두 하늘에 올라 별이 되어 빛나기를 빌어본다. 건강했던 그가 어느 틈에 내 곁에서 걷는다.생전에 그도 이 길을 걸었을까. 나처럼 홀로 핀 쑥부쟁이와 사진을 찍고, 미간을 찌푸리며 전나무 꼭대기에 걸린 하늘을 올려다보았을지 모른다.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몇 번이나 뒤 돌아보기도 했을 것이다. 한 줄의 편지글조차 닿을 수 없는 아득한 허공, 때로는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지척에 그가 있을 것만 같다.백팔배는 그를 위한 기도로 시작되었다. 땀이 흐르고 몸이 젖는다. 이따금씩 무릎 관절이 경고를 보내오지만 멈출 수가 없다. 내가 없어지고 젖은 몸이 바다가 된다면 후련해질까. 그는 자주 썰물이 되어 내 가슴에서 파도친다. 잘 지내느냐는 흔하디흔한 한 마디를 어디에다 전하랴.버거울 정도의 아픔이나 고난조차도 누군가에게는 사치로 보여질 수 있다. 힘내라는 말만 되풀이하다 돌아오는 날이면 나의 헐벗은 문장들이 마른 나뭇잎마냥 밤새 떨다 잠들곤 했다. 오히려 상대편의 빠진 머리칼과 창백한 얼굴, 말을 아끼는 눈빛 속에 훨씬 깊고 쓸쓸한 문장들이 설산처럼 쌓이곤 했다. 그가 떠나자 마지막 경전의 문구처럼 내 안에서 종소리가 되어 울린다.인연이 깊든 얕든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힘들다. 이별 뒤에는 고통과 아픔만 따르는 것은 아닌데 여전히 두렵다. 있을 때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떠난 후에야 주변을 밝히는 경우가 있다. 나는 한 동안 그를 떠올릴 것이다. 시시할 정도로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그리워할 게 분명하다.조낭희수필가법당을 나서는데 바람이 어깨를 치며 장난을 건다. 재빠르게 전나무 숲으로 숨어버린 바람의 뒷모습에서 얼핏 그를 보았다. 그는 생각보다 자주, 어쩌면 모든 순간에 함께 하는지 모른다. 멧비둘기의 구슬픈 울음소리나 길고 긴 여름 말없이 타오르던 배롱꽃, 때로는 시집(詩集) 속에 내리는 밤비가 되어 함께 할 수도 있다.아름다운 삶은 기도로 성장하며 고귀한 죽음을 전제로 한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그와 연결된 많은 추억들이 어딘가에서 사랑스럽게 빛나고 있으리라. 세상은 소중한 것들로 넘쳐나고, 수많은 감사의 기도로 충만해진다.바위틈 이른 쑥부쟁이 한 송이 피어 가을을 알린다. 가만히 두 손 모을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진실로 소중한 것은 지금, 여기 내 곁에 있다.

2019-09-02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柿)’는 처음부터 없었다

제사는 어떻게 모시는 것이 좋은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정성으로, 검소하게 지내는 것”이 제사를 모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너무 평범한, 꼰대 같은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이런 표현은 오래전에도 있었다.조선 후기 문신이자 유학자인 갈암 이현일(1627~1704년)의 글이다. 제목은 ‘갈암집 제23권_학암처사 정달중의 묘표’.(전략) 또 말하기를, “상례와 제례는 형식을 갖추어 잘 치르는 것보다는 슬퍼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차라리 더 낫고, 사치스럽게 하기보다는 검소하게 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 하고, 털끝만큼도 남들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차리는 일이 없었다.(후략)갈암은 영해(寧海)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경북 영덕이다. 남인계의 사대부다. 성리학을 완성한 퇴계 이황의 적통. 위 문장은, 갈암이 인척 관계였던 정달중의 묘표에 적어넣은 ‘정달중의 말’이다. ‘형식보다 슬퍼하는 마음이 앞서고, 사치스럽기보다는 검소하게’다. ‘털끝만큼도 남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차리지 마라’고 했다. 조선 후기 최고의 유학자가 전하는, 제사 잘 모시는 방식이다.제사 모시는 방식에 대한 엉터리 이야기가 너무 많다. 추석이다. 제사 잘 모시는 방식, ‘제사에 대한 엉터리 이야기’를 더불어 살펴보자.홍동백서, 조율이시는 엉터리다펄쩍 뛸 사람들이 많겠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오랫동안 제사 모시는 금과옥조로 받아들였다.‘홍동백서(紅東白西)’는 이른바, 제사 모실 때, 과일을 놓는 순서다. 제사 모시는 이를 기준으로 오른쪽이 동쪽, 왼쪽이 서쪽이다. ‘홍동백서’는,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는 뜻이다. 사전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불행히도 엉터리다. 조율이시(棗栗梨柿)는 대추, 밤, 배, 감(곶감)의 순서대로 제사상에 놓는다는 뜻이다. 역시 엉터리다.일제강점기 이전 어떤 기록에도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없다. 맞다, 틀렸다고 이야기하기도 모호하다. 부디, ‘홍동백서’를 이야기하는 분을 만나면 어디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느냐고 여쭤보기 바란다. “옛날부터” “오래된 책에” “우리 집안에서”라는 대답이 대부분이다. 예전의 오래된 책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제사상 차리는 법을 그린 그림은 진설도(陳設圖)다. 진설도 어디에도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없다.어동육서(魚東肉西)도 마찬가지다. 물고기는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놓는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 거유(巨儒) 우암 송시열(1607~1689년)이 말하는 어동육서의 유래는 엉뚱하다. 중국 기준으로 동쪽은 바다, 서쪽은 내륙이다. ‘어동육서’는 여기서 시작된 게 아닐까, 라는 추측이다. 우암도 이 문제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 고기는 서쪽에 놓고, 생선은 동쪽에 놓습니까?”라는 질문에 속 시원하게 대답하는 이는 없다. 역시 예전부터 내려오는, 옛날 자료에, 라는 엉뚱한 대답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우암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이 있다는 정도다.세종대왕의 시대는 조선 초기다. 건국 직후, 법률을 비롯하여 사회 규범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을 때다. ‘세종오례의’가 나온 이유다. 우선 급하게 법령을 만든다. 이 문서에 제사상 차림이 있다. 중국 측 자료를 참고하고, 조선에 맞는 ‘공식 제사상 차림’을 만들었다.상차림 앞줄에 ‘생율(밤), 생이(배), 실상(잣), 산자(한과, 과줄, 박산), 은행, 강정, 약과, 호도(호두), 사과, 홍시(감), 대조(대추)’ 등이 나타난다.‘조율이시’는 어디에도 없다. 조율이시는 대추, 밤, 배, 감의 순서다. ‘세종오례의’에는 밤, 배, 감, 대추의 순서다. ‘조율이시’는 대추[棗, 조]가 가장 먼저다. ‘세종오례의’에는 대추가 가장 나중이다. 언제 변할 걸까?또 다른 의문점도 있다. 왜 대추, 밤, 배, 감만 순서를 정했을까? 밤은 있는데 같은 견과류인 호두는 순서에 없다. ‘세종오례의’에는 호두도 있다. 마찬가지로 순서에서 빠진 잣, 은행은 어디에 놓아야 할까?배는 있는데 사과도 순서에서 빠졌다. 이건 어떻게 된 영문일까? 조선 시대 제사상에는 수박도 없다. 과일 진설 순서를 정하는 것은 우리 방식이 아니다. 1778년 궁중 장례원의 진설도에는 과일 이름이 아예 없다. 모든 과일을 ‘實果(실과, 과일)’라고 적었다. 종류나 순서는 없다.‘홍동백서’ ‘조율이시’는 허망하다.추석, 설날의 ‘차례’도 뒤틀렸다추석과 설날의 ‘차례’도 엉뚱하다. 내용과 형식 모두 뒤틀렸다.차례[茶禮]는 ‘차 한잔 올리는’ 정도로 간소한 의례다. 오늘날의 추석, 설날은 이것저것 뒤섞은 ‘짬뽕’이다.추석은 음력 8월 15일이다. 한가위다. ‘오곡백과가 무르익는다’라고 표현한다. 2019년은 ‘이른 추석’이다. 양력 9월 13일이다. 오곡백과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벼는 들판에 서 있고, 과일은 익지 않았다. 늦은 추석이라도 10월 초, 중순 정도다, 한반도의 추수,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것은 11월이다. 음력 8월 15일은, 농사일이 바쁜 계절이지 오순도순 모여 앉아 한담할 때가 아니다.한반도의 현대화는 ‘이농(離農)’이다. 농경사회는 산업사회로 바뀐다.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주한다. 노동자, 학생이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다. 제사를 모셔도 도시로 간 아들, 딸들이 매번 농촌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1년에 두 차례 설날, 추석이 고작이다. ‘한가위, 오곡백과’의 신화는 이렇게 완성된다. 추석날 온 가족이 모이는 ‘아름다운 풍습’이 생긴 이유다.설날, 추석은 ‘민족 최대의 명절’이 되었다. 추석, 설날의 제사상은 기제사 상을 따른다. 기제사와 차례상이 섞였다. 차례(茶禮)와 제사는 같다. 차례상은 사라졌다.1969년 ‘가정의례준칙’이 발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정확한 제사의 방식을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1960년대, 이들이 대부분 제주(祭主)가 되었다. 진설 방식을 모르는 이도 많았다. 이런저런 이론들이 나타난다. 공무원이나 민간 모두 예전 자료를 뒤졌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자료였다. 허둥지둥 한국 방식으로 바꿨다. 뒤섞인다.‘홍동백서’는 일본식이다?‘홍동백서’도 이 무렵 어물쩍 끼어들었을 것이다.우리는 ‘홍백(紅白)’이 아니다. 우리는 ‘홍청’이다. 신랑, 신부는 ‘홍실, 청실’이다. 신혼부부의 베개는 홍실, 청실로 꾸민다. 태극기도 홍과 청이다. 위는 홍, 아래는 청이다.‘위키트리’의 어린 시절의 운동회, ‘청백전’에 대한 설명이다. ‘홍백’은 한반도로 건너온 뒤 ‘청백’으로 바뀐다.“(청백은) 푸른색[靑]과 하얀색[白]으로 편을 갈라 싸우는[戰] 것을 의미한다. 일본에서 헤이안 시대 미나모토 가문과 다이라 가문의 겐페이 전쟁에서 유래한 ‘홍백전’ 문화가 일제강점기를 통해 조선에 넘어온 뒤 대한민국 정부의 왜색 척결 및 반공사상 강화 차원에서 이름이 바뀐 것이다.”일본인들의 ‘홍백’은 뿌리가 깊다. 겐페이 전쟁[源平合戰]은 1180년, 원씨(源氏) 가문(흰 깃발)과 평씨(平氏) 가문(붉은 깃발) 사이의 내전이다. 이때부터 홍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 NHK의 연말 가요 프로그램은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이다.우리는 홍백을 청백으로 바꾸었지만 ‘홍동백서’는 일본식이라 여기지 않았다. 조선 시대 어느 기록에도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없다. “언제, 누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없다. 근거가 없다. 일본 방식이라는 게 오히려 근거가 있다.반드시 전통을 따라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불가능하다. 따를 필요도 없다. 되새겨야 할 것은 제사를 모시는 정성이다. 제물(祭物)이나 형식이 전통은 아니다. 조선 시대 제사에는 반드시 생선 젓갈[醢, 해]을 사용했다. 지금 제사에 생선 젓갈을 사용해야 할까? 그렇진 않다. 형식은 변한다. 시대를 따른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은 정성이다.제사를 잘 모시는 방법은 무엇일까? 갈암 이현일의 글에 답이 있다. “형식보다는 진정으로 슬퍼하는 마음, 사치스럽지 않게, 검소하게, 정성스럽게”다.그까짓 과일 어디에 놓으나 무슨 허물이랴?/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9-02

‘폴리페서’의 ‘앙가주망’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폴리페서(polifessor)’가 ‘앙가주망(engagement)’을 강변(5F37辯)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성을 상실하고 정치권력의 시녀가 된 폴리페서가 ‘정의의 상징’인 법무부 장관을 맡게 된다면 나라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조국 교수를 둘러싼 의혹들은 마치 ‘비리백화점’ 같다. 자녀의 입학관련 부정, 웅동학원의 불법과 탈법, 사모펀드 투자, 자녀의 논문게재 및 장학금 특혜 등 그 의혹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교수로서 마치 ‘정의의 사도’나 되는 것처럼 열을 올렸던 ‘도덕적 담론’은 이제 부메랑이 되어서 다시 돌아왔다. 그가 격렬하게 비난했던 폴리페서는 알고 보니 바로 자기 자신이었고, 특목고 출신은 원래의 설립 취지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해놓고서는 외고를 졸업한 딸은 이공계 대학을 거쳐서 의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갔다. 논문의 편법 게재를 비판했으면서도 고2 학생이었던 딸은 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을 제치고 의학전문 학술지에 제1저자로 이름을 올렸다.이처럼 그가 평소에 교수로서 했던 말들은 모두가 위선임이 드러났다. 서울대 학생들은 조국 교수를 ‘부끄러운 동문 1위’로 선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캠퍼스 촛불집회를 하면서 “서울대 학생으로서 조국 교수님이 부끄럽다. 장관은 물론이고 교수의 자격도 의심스럽다”고 하면서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그를 둘러싼 비리의혹에 직간접적으로 짬짜미한 ‘교수 카르텔’ 역시 우리나라 교수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조국 교수의 딸을 논문의 제1저자로 올려 어떠한 처벌도 받겠다고 인정한 단국대 장교수, 다른 사람에게는 장학금을 한 번씩 주고 ‘낙제생’에게는 격려 차원에서 6학기나 계속 줬다는 부산대 노교수, 대학생 이상 지원자격이 있는 ‘유엔인권인턴십’에 고교생이었던 두 자녀를 선정, 파견했던 서울대 정교수 등도 역시 폴리페서라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다.조국 교수의 은사인 서울대 최대권 명예교수는 “트위터 날리며 청와대 수석 하느라 바빠 생긴 학문연구의 공백에도 어떻게 복직할 염치가 남았는지 딱하다”고 하면서 “읍참마속(泣斬馬謖)의 마음으로 법적 정의와 보편적 양심을 좇아 최선의 선택을 할 것”을 충고하고 있다. 또한 그를 아끼던 선배이자 진보인사인 신평 교수도 “당신이 진보귀족으로서 지금까지 저질러 온 오류와 다른 사람들에게 안겨준 상처들에 대해 깊은 자숙의 기간을 거쳐야 한다.”고 꾸짖고 있다. 게다가 사태를 관망하던 검찰도 드디어 전방위 압수수색에 착수하는 등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앙가주망’을 하겠다고 버티고 있으니 기가 막힌다. 도덕성을 상실한 폴리페서는 ‘앙가주망’을 말할 자격이 없다. 정치지도자는 모름지기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를 한 후에 비로소 치국(治國)을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로서 자신과 가족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사람이 나라를 위해 정의로운 사법개혁을 하겠다고 하니 ‘소가 웃을 일’이다.

2019-09-02

자동봉진의 스펙세습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스펙세습이 화두가 되고 있는 가운데 문제가 된 게 자율·동아리·봉사·진로활동이다. 이른바 ‘자동봉진’의 스펙세습이다.입시에서 합격기준이 아리송한 학생종합부전형, 이른바 학종을 통과하려면 ‘학생부에 기재하는 모든 항목이 번듯해야 한다’는 게 통설이다.내신과 수상실적처럼 점수를 매기기 좋은 항목뿐 아니라 ‘세특’(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에다 ‘자동봉진’(자율·동아리·봉사·진로활동)기록, 독서활동까지 빼곡히 적혀 있어야 한다.국회에서 열린 ‘특권층 대학부정입학 근절을 위한 특별위원회 1차회의에서 우리교육연구소 소장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이른바 스카이(SKY)대학에 들어간 기득권층 자녀가 4만7천여명이며, 재작년 서울대 입시에서 자동봉진을 통해 수시로 입학한 특목고·자사고 학생이 3분의 2에 해당하는 65%인 것으로 나타났다.이는 전체 학생비율의 4.5%다. 95.5%의 약자집단 부모들에게는 3분의 1이 배당되고, 4.5%의 부모들에게 3분의2가 배당되는 시스템이라는 분석이다.그런데 자동봉진으로 들어가는 수시가 80%이고, 정시는 20%에 불과하다. 그런 만큼 자동봉진이란 기록이 스펙세습의 핵이 되고 있다. 이러니 조국 후보자 딸이 특혜입학 논란에 휘말려서가 아니라 기득권층에 유리하게 설계된 입시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현행 대학입시 전형이 이처럼 복잡하기 그지없고, 각각의 대학별 전형까지 감안하면 학부모들이 자녀의 대입에 훈수를 두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런 현실이 입시컨설팅이나 고액 입시 코디네이터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게 ‘자동봉진’ 스펙 논란을 지켜본 서민들의 씁쓸한 소감이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9-02

4천 번 실패를 넘어서다

중학교 2학년 학생인 잭은 대담한 질문을 던집니다. “췌장암을 진단하는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잭은 암에 걸리면 특정 단백질이 혈액에서 증가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라? 해결책은 간단하겠네? 췌장암에 걸릴 때 증가하는 단백질을 찾으면 되잖아?”하지만 잭은 혈액 속 8천 종류 단백질이 있다는 걸 아직 몰랐습니다.잭은 다짐하지요. “내가 반드시 찾아내고 말겠어.” 산 같은 건초더미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격이지만, 소년은 도전을 시작합니다. 방학 3개월 내내 단백질 하나하나 분석합니다. 주방 구석과 학교 실험실을 오가면서 실패를 반복합니다. 췌장암에 걸려도 미동도 없는 단백질 수치 8천 종을 하나씩 확인해 나갑니다. 실패, 또 실패, 또 실패… 잭은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순수한 결심을 지켜내죠. 방학이 끝나갈 무렵 잭은 발견에 성공합니다. 4천 번 실패 끝에 드디어 췌장암이 걸렸을 때 수치가 증가하는 단백질을 찾아낸 겁니다.‘메소텔린’은 췌장암, 난소암, 폐암에 걸리면 증가하는 단백질입니다. 잭은 기뻐 날뛰지요. 흥분을 가라앉히고 가만 생각해 보니 혈액 속에서 메소텔린이 증가했는지를 감지해 낼 센서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피를 한 방울 뽑아 센서에 떨어뜨리면 메소텔린의 지표를 알아낼 수 있어야 췌장암을 진단할 수 있을 테니까요.잭은 혼란에 빠집니다. 새 학기를 시작했지만, 메소틸렌 증가 수치를 혈액에서 감지해 낼 수 있는 물질을 찾는데 골몰하지요. 어느 날 생물 수업 시간에 책상 밑에 넣고 몰래 읽고 있던 과학 저널에서 탄소 나노 튜브에 대한 논문을 읽습니다. “유레카!” 머리카락보다 5만 배나 더 가느다란 탄소 나노 튜브에 메소텔린에 반응하는 항체를 엮으면 센서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9-02

도시의 영웅 탄생을 방해하다

곽지영 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소방관, 경찰, 군인, 구급요원, 응급의료 종사자 등등. 공공의 안전과 시민의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 자기 몸을 던져 위험을 상대하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 언론은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벌어진 그들의 영웅담을 생생하게 전하고, 우리는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린다.매번 그런 데자뷰 같은 반복을 접하는 필자의 감정은 이내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사명감으로 빛나는 제복 뒤에 가려져 미처 못 볼 수 있겠으나 그들은 우리 부모이고, 형제자매이고, 귀한 자식들이다. 국가와 도시 시스템이 취약하여 우리 가족인 그들을 자꾸만 순직하는 ‘도시 영웅’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후배들 볼 면목이 없다.물론 국가 차원의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토부는 2022년까지 전국 80개 이상 지자체에 스마트시티 통합 플랫폼과 도시 안전망 서비스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스마트시티 통합 플랫폼은 관내 CCTV 영상, 교통, 기상, 시설물 정보 등 도시의 안전 상황을 한곳에서 모니터링하고 시청, 소방서, 경찰의 현장 대응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경북에서도 올해 구축이 완료된 포항과 경산을 시작으로, 2019년 새로 선정된 구미를 비롯해 김천, 영천, 안동, 울릉 등 여러 지자체가 다음 차례를 준비하고 있다. 통합플랫폼과 도시 안전망 서비스가 스마트시티 구현의 근간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치와 비교할 때 아직 첫 걸음마를 내딛은 정도에 불과하다. 예측불허, 위험천만인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지켜내는 일을 믿고 맡기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라는 뜻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첨단의 정의를 갱신해가는 통신, 가전제품이나 엔터테인먼트 분야와 비교할 때, 공공안전 분야의 스마트화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은 반성해야할 일이다.그래서 필자는 미래의 도시, 스마트시티 구축에서 우리가 가장 정성을 쏟아야 할 분야가 바로 안전이라 믿는다. 도시의 바람직한 미래에는 기술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위험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사람들은 절대 없어야하기 때문이다.조용히 눈을 감고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그려본다.일반 가정을 비롯한 도시의 모든 건물에는 위험감지와 자기방어를 위한 지능형 장치가 마련되고, 유사시 그 장치의 모니터링과 제어가 원격으로도 가능하게 서로 연결된다. 집집마다 설치된 화재경보기와 소화기는 이제 상황을 스스로 감지해 자율적으로 동작하고 중앙 시스템에 상황을 알릴 줄도 아는 ‘스마트’ 버전으로 바뀐다.재난현장의 소방관은 스마트 안전장치로 철저하게 보호받는다. 각종 센서를 통해 수집된 현장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분석되고, 혼합현실 장치를 통해 구조자의 위치와 안전한 이동 루트 등 현장 대응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으며 효과적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상황실에서는 소방관들의 실시간 위치와 그들의 생체 데이터를 모니터링하며 만약의 위험상황에 2중, 3중으로 대비한다. 그 꿈속 도시는 스마트 기술의 가장 큰 특징인 연결성과 지능화를 통해 스스로의 안전을 지켜낼 수 있도록 변모하여 시민들과 안전요원 모두를 위한 진정한 안전망이 된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이제 더 이상 도시 영웅의 희생에 슬퍼하고 미안해할 일은 없다.

2019-09-02

책을 가까이

강성태 서예가·시조시인9월은 독서의 달, 이른바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다. 등화가친이란, ‘등불을 가까이 할 만하다’라는 뜻으로, 중국 당나라 대문호인 한유가 그의 아들에게 독서를 권하기 위해 지은 시 ‘부독서성남시’(符讀書城南詩)의 끝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때는 가을이라 긴 장마 걷히고/신선하고 서늘한 바람 들에서 불어오니/등불 점점 가까이 하고/책을 펼칠만 하다’ “시추적우제(時秋積雨霽) 신량입교허(新凉入郊墟) 등화초가친(燈火稍可親) 간편가권서(簡篇可卷舒)” 54행으로 된 오언고시(五言古詩)에서 한유는 어려서 비슷하던 아이들이 자라나 두각을 드러내면서 하나는 용이 되고 하나는 돼지가 되는 것, 누구는 군자가 되고 누구는 소인이 되는 것은 배우고 배우지 않은 차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들을 아끼는 마음과 공부를 채근하는 마음이 엇갈린다면서도 세월을 아껴 책을 읽고 시를 지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도록 권면하고 있다.우리나라의 독서율은 해가 갈수록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2017년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연간 독서율은 1994년 86.8%에서 2013년 71.4%, 2017년에는 60% 이하로 떨어졌다. 1년 간 책을 한 권도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10명 중 4명이나 된다. 시대가 각박해지고 넘치는 정보의 홍수 속에 휘말려서일까?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간편하게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전자책이나 오디오북을 수시로 보거나 들을 수 있으니, 독서에 투자하던 시간과 노력이 그만큼 줄어들게 되면서 책과는 점차 멀어지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초간편사회가 된다 해도 책읽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것까지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생각의 힘과 창의성은 독서와 토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독서는 깨달음의 원천이다. 경험해보지 못해 얻을 수 없는 것들을 간접적으로라도 얻게 해준다. 그것은 곧 주어지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하고, 존재하는 것을 다르게 생각하며, 낡은 것을 새롭게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독서는 사람의 재능을 밝혀주고 지혜를 더해주는 마음의 등불이라 하지 않았던가.필자의 주위엔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독서와 토론을 하고, 소리 내어 윤독(輪讀)을 하며 책읽기의 재미에 빠지는 분들이 더러 있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고 진지하며, 중년의 연배임에도 저마다 글 읽는 목소리는 샘물처럼 낭랑하기만 하다. 아마도 변하지 않는 친구를 대하듯 책과 만나고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으며 정겨움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리라. 독서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고 소소하지만 생활의 저변에서 독서문화를 조성해가는 작은 변화의 물꼬가 아닌가 생각된다.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키우고 길러낸다.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는 책 속에 가득하다. 책을 읽는다면 그 계기들을 만날 수 있고, 고금동서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천랑기청(天朗氣淸)한 가을의 길목에서 풀벌레 소리의 화음에 맞춰, 책장마다 새록새록 피어나는 감칠맛 나는 이야기 나라로 독서여행을 떠나보자.

2019-09-02

‘낙동강세계평화 문화대축전’의 비어있는 두 자리

백선기 칠곡군수칠곡군은 예로부터 국방의 요충지로 6·25전쟁 당시 칠곡에서 펼쳐졌던 ‘다부동 전투’ 승리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반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있게 한 호국·평화의 도시이다. 이러한 칠곡의 역사와 도시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은 문화행사가 ‘낙동강세계평화 문화대축전’이다.2013년부터 개최된 낙동강대축전은 특산물을 활용해 먹고 즐기는‘그저 그런’축제가 아니다. 6·25전쟁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하며 전쟁의 아픔을 일깨우고 전세계에 평화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기획됐다. 낙동강대축전은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과 참전용사에게는 보은(報恩)의 장이요, 전후세대에게는 안보를 교육하는 현장학습의 무대이다. 올해는 오는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칠곡보생태공원과 칠곡보 오토캠핑장 일원에서 열린다.그동안 전쟁과 평화라는 다소 무겁고 교훈적인 주제임에도 지역 정체성과 차별화된 콘텐츠로 축제 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며 30만 명의 구름 관람객을 불러 모았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지침에 따라 실시한 평가에 따르면 낙동강대축전의 만족도는 5점 만점 기준으로 4.28점으로 문화관광축제 평균인 3.47점을 크게 상회하며 만족도 최상위에 이름을 올렸다. ‘내용과 흥행’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명품 축제로 평가받았다. 재방문, 추천의사, 구전의사 등에서도 평균 4.34점이라는 최고 수준의 점수를 기록, 높은 만족도를 반영했다. 외지방문객 1인당 평균소비금액은 4만4천594원으로 분석됐다.낙동강 대축전을 통해 호국과 보훈이 6월 같은 특정한 시기와 현충시설과 같은 제한된 장소에서만 실천하는 의전행사가 아닌 일상의 삶 속에서 향유하고 실천하는 문화행사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국내 유일의 호국 축제이자 명품축제를 개최한다는 자부심으로 민관이 하나 돼 축제준비로 분주하다. 낙동강이 가지는 역사, 기억, 호국을 바탕으로 ‘칠곡, 평화로 흐르다’를 주제로 펼쳐지며, 육군 제2작전사령부 주관의 ‘낙동강지구 전투전승행사’와 통합 개최해 시너지 효과가 더욱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칠곡보생태공원을 중심으로 평화 테마파크와 강 건너 오토캠핑장에 위치한 호국 테마파크로 공간이 분리가 되기에 각 테마파크를 잇는 ‘파크 브릿지’를 행사장 중앙 430m 부교로 설정해 공간도 연결할 계획이다.먹거리와 공연을 즐길 수 있는 ‘푸드코트’가 새롭게 펼쳐진다. 대형 원형트러스를 푸드코트 공간으로 조성해 예년보다 더 많은 먹거리를 마련할 계획이다. ‘문화의 무대’객석으로도 활용해 먹거리와 공연을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다. 농·특산물 홍보관과 기업홍보관이 함께 자리하면서 지역홍보와 경제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축전을 방문한 관람객들에게 칠곡의 좋은 농·특산물과 중소기업 제품을 소개하는 자리도 마련된다. 특히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생생하게 그려낸 실경 뮤지컬 ‘55일’을 통해 실제 경치를 활용한 뮤지컬의 매력과 감동을 느껴볼 수 있다. 뮤지컬 배우, 칠곡군민, 군인 등 총100여 명의 배우들이 출연하는 이 뮤지컬은 55일간 낙동강 전투의 대서사시를 담아낼 예정이다. 뮤지컬 공연이 펼쳐지는 평화의 무대 바로 뒤에 위치한 낙동강과 관호산성을 배경으로 화려한 조명과 레이저, 음향, 특수효과 등이 조화를 이뤄 이번 축전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눈여겨 볼 것은 관람석에 비어있는 두 자리다. 올해부터 각종 공연이 열리는 무대에는 관람이 가장 용이한 VIP 좌석 두 곳을 전몰장병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실종 장병을 위해 비워둘 예정이다. 국화꽃을 올려두고 정복을 입은 부사관 후보생이 미동도 않고 옆에서 지킬 예정이다. 비어있는 자리는 낙동강 대축전의 의미를 국민들에게 잘 전달하는 상징이 될 것으로 보인다.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참전용사의 고귀한 희생에서 비롯됐다. 올 가을에는 6·25전쟁 최대의 격전지인 칠곡군에서 자신의 모든 것과 가족의 행복까지도 포기했던 참전용사의 희생을 기억하고 존경과 감사를 보냈으면 한다. 역사의 이름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이젠 당신이 응답할 차례이다.

2019-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