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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10·26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 총성이 울려 퍼진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이다. 안 의사가 발사한 세 발의 총탄에 맞은 이토 히로부미는 20분 만에 절명한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던 3인의 일본인을 추가 저격한 후 “대한만세!”를 외치며 현장에서 검거된다.안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여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한다. 거사 이후 꼭 5개월 뒤의 일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 총성이 울려 퍼진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와 차지철을 저격한 것이다. 와이에이치 사건, 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직 박탈, 부산-마산 시민항쟁 같은 사회-정치적인 소요의 와중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10월 28일 전두환이 김재규를 체포하여 내란목적살인과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언도한다. 광주항쟁이 핏빛으로 진압되기 사흘 전인 1980년 5월 24일 김재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안중근 의사는 수감 중에 ‘동양평화론’을 저술해 한국과 중국, 일본이 서양세력에 공동으로 대항할 것을 제안한다. “한-중-일이 ‘여순’에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한다. 3국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공용화폐를 발행한다. 3국 공동군대를 창설하고, 타국의 언어를 가르친다. 조선과 청국은 일본의 지도 아래 상공업 발전을 도모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동양평화론’은 1929년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대중의 반역’에서 유럽연합 창설을 주창한 것과 견주어 봐도 뒤지지 않는다. 공동은행과 공용화폐, 공동군대와 언어교육은 요즘 생각해도 시대를 앞서가는 사유와 인식이다. 다만, 일본의 지도를 받아 조선과 청나라가 상공업 발전을 도모한다는 내용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명치유신으로 근대화된 일본은 ‘탈아입구’와 ‘정한론(征韓論)’에 기초하여 조선을 병탄하고자 혈안이었기 때문이다.김재규의 박정희 저격은 영화 ‘그때 그 사람들’(2005)에서 단편적으로 다루어졌을 뿐, 김재규의 사상과 저격배경은 미궁에 있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시민항쟁을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강제 진압한 박정희를 김재규가 저격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광주학살을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이 10·26을 신속하게 처리함으로써 사건의 실체는 가려지고 말았다.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말을 남겼다.그는 “만약 내가 복권되면 ‘의사 김재규 장군지묘’라고 묘비에 적어달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그가 묻힌 경기도 광주시 엘리시움 공원묘원 추모비에 새겨진 ‘의사’와 ‘장군’ 네 글자는 심하게 훼손되어 10·26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웅변한다.70년을 사이에 두고 같은 날 벌어진 사건은 역사를 돌이키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안중근 의사 덕분에 한국인들은 일제 강점기를 꿋꿋하게 싸우며 버텨왔다.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김재규는 유신의 종말을 앞당기려 목숨을 던졌다.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를 망각해서도, 민주주의를 유린한 유신통치도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10·26의 소회다.

2019-10-30

관포지교(管鮑之交)(1)

제나라 임금 양공(襄公)이 죽자 노나라에 망명 중인 첫째 동생 규(糾)와 거나라에 체류하던 둘째 동생 소백(小白)이 왕위 계승 후보에 오릅니다.두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제나라에 도착해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지요.관중은 첫째 동생 규를 모시고 있었고 포숙은 둘째 동생 소백을 보필하던 중입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갑니다. 관중이 꾀를 냅니다. 경쟁자인 소백 일행을 노상에서 처치하고 왕위를 홀가분하게 차지하자고 제안합니다.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소백 일행이 나타나자 관중이 화살을 날리지요. 소백은 정통으로 화살에 맞아 쓰러집니다.관중은 유일한 경쟁자를 제거했으니 제나라 왕 규를 모시고 느긋하게 수도로 향합니다. 소백은 죽지 않았습니다. 화살이 허리띠에 꽂히는 바람에 목숨을 건집니다. 소백 일행은 전속력으로 제나라에 도착해 수도를 점거하고 왕위를 획득합니다. 소백이 제나라 환공(桓公)입니다. 천하에 명성을 떨친 임금이죠. 뒤늦게 도착한 규와 관중은 노나라로 재빨리 도망칩니다. 환공은 그들을 보호하는 노나라에 통보하지요.“규는 형제이므로 내 손으로 죽일 수 없다. 노나라에서 처단해 주기 바란다. 관중을 죽여 소금에 절이지 않는다면 내 직성이 풀리지 않으니 신병을 인도해 달라. 거부하면 전쟁도 불사한다.”제나라의 통보에 약소국 노나라는 어쩔 수 없이 규를 처형합니다.관중은 자기 발로 제나라로 향합니다. 이때 관중을 구출한 것이 포숙입니다. 환공은 포숙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렵습니다.결국, 환공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관중을 품는 배포를 보입니다.여기까지는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로 사마천의 사기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관중이 생명의 은인 포숙을 배반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한비자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0-30

플랫폼 비즈니스

플랫폼 비즈니스는 외부 생산자와 소비자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만드는 비즈니스를 가리킨다. 휴먼 네트워크 비즈니스라고도 불리는 플랫폼 비즈니스는 4차산업혁명 시대를 지배할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예를 들면 에어비엔비는 단 하나의 부동산도 갖고 있지 않지만 전세계인들이 찾는 숙박플랫폼으로 성장했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역시 자체 콘텐츠는 전혀 없지만 가입한 사람들에 의해 커뮤니티가 생성되고 콘텐츠가 만들어진다. 우버 역시 택시를 단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지만 5년도 안돼 5조원 규모로 성장했다. 알리바바나 아마존 역시 재고가 하나도 없는 거대한 쇼핑통신망이다.에어비앤비의 창업자인 브라이언 체스키와 조 게비아는 신참 디자이너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살기로 한 아파트의 임대료가 너무 비싸서 파자마 차림으로 인맥쌓기를 제안, 주말동안 머물 손님 3명으로부터 1천달러를 벌어서 다음달 임대료를 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아파트 공유경험이 119개국가에서 사업을 펼치는 거대기업 에어비앤비로 발전, 현재 원룸아파트에서 성에 이르기까지 50만건 이상의 숙소가 등록돼 있고, 서비스 이용자가 1천만명을 넘어섰다. 또 스마트폰 기반 차량서비스 기업인 우버 역시 마찬가지다. 2009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우버는 벌써 전세계 200개 이상 도시에서 전통적인 택시산업에 도전장을 내밀고 아예 택시산업을 대체할 기세다. 플랫폼 비즈니스는 자신들이 소유하거나 통제하지 않은 자원을 활용해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전통적 비즈니스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한다. 최근 택시업계와 마찰을 빚고 있는 타다 역시 플랫폼 비즈니스의 대표적 사례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10-30

무엇을 꿈꾸었을까

장규열 한동대 교수502년 전 오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어 올렸다. 그는 왜 그랬을까. 무엇이 못마땅하여 무엇을 바꾸기 위하여 그런 용기를 내었을까. 비르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의견서’를 내걸었을 적에, 그는 어떤 세상을 꿈꾸었을까. 교황과 교회가 신의 생각을 대신한다면서 사람들을 쥐고 흔드는 일이 불편하였다고 한다. ‘면죄부’를 돈받고 팔면서 지은 죄까지 용서한다는 만용과 권력에 저항의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하늘의 생각과 말씀을 교황의 손에서 옮겨 보통 사람의 손에 올려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가 바로 ‘개신교,’ 즉 프로테스탄트 교회였다. 오백 년이 지난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다른 결들이 있다고는 하나, 지면에 오르내리는 오늘 교회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프로테스탄트’가 저항의 마음을 담기는 하였으나, 폭력과 막말을 권한 적이 없다. 이성과 성찰을 거듭하며 화합과 평강의 하늘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고자 하지 않았을까. 세상보다 높은 가치를 실현하고 싶었지만, 차별과 혐오를 주장한 적이 없다. 누구에게나 열려있을 믿음의 문을 통하여 화합과 소통을 이루고 싶었겠지. 한 사람의 주장에 휘둘리는 세상은 공평과 정의에도 어긋난다. 생각을 모으고 모아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세상을 만들려 하지 않았을까.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운다는 저 겁박은 면죄부를 팔았던 그 교황과 무엇이 다른가. 말씀의 힘과 생각의 영향력은 누군가의 권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바로 나의 손과 삶에 달린 게 아닐까.사람은 모두 부족하다. 무엇이 모자라도 모자라고 어느 구석이 부족해도 부족한 게 인간이다. 모자라고 불편한 가닥을 핑계삼아 덜어내고 차별하며 편가르고 담장을 쌓노라면, 끝내 상처와 아픔만 가득한 세상이 되고 말지 않을까. 신학자 데이브 톰린슨(Dave Tomlinson)은 ‘모든 사람들이 그 어떤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환영받으며, 희망과 꿈을 나누고 상상력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 종교가 세상을 이념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으며, 믿음을 보수와 진보로 갈라 해석하지도 않았으면 한다. 루터의 용기와 생각을 다시 살펴, 사람들이 돌이키고 회복하며 이웃과 함께 힘을 내고 다시 삶으로 나아가게 북돋우는 믿음의 터전을 만나고 싶다.세상이 어둡다. 빛을 잃은 세상에 희망을 던지는 교회를 만나고 싶다. 거친 언사와 휘두르는 주먹은 그만 보았으면 한다. 내뱉는 욕설과 거북한 막말도 그만 들었으면 한다. 그것이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모습은 아니었으면 한다.굴곡진 세상을 힘내어 건너게 하는 다리가 어디 없을까. 무너지고 흩어진 세상을 모으고 꿰매는 손길이 혹 어디 없을까. 미움과 단절의 그늘이 사라져야 한다. 나눔과 대화의 마당이 늘어나야 한다. 조금씩 달라도 어차피 사람이다. 조금만 달리 보면 누군들 함께 못할까. 루터가 꿈꾸었던 세상은 그런 게 아니었을까.

2019-10-30

개를 바라볼 때 가지는 치유 능력

외로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자주 반려견에게서 위안을 받는다고 말한다. 개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받아들인다. 개들과 눈을 맞추면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 때문이다. 엄마가 아기의 눈을 바라볼 때 옥시토신의 수치가 높아지는데 놀랍게도 개를 키우는 주인과 반려견도 눈을 서로 바라보면 옥시토신 수치가 높아진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 연구는 2015년 사이언스에 실려 주목을 받았었는데, 사람과 강아지가 친밀하게 지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과학적으로 밝힌 연구결과가 되었다. 이 연구의 중요한 의미는 인간과 다른 종 사이에서도 호르몬에 의한 유대가 발생한다는 것을 처음 보여준 것인데,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의 눈을 바라본 개의 옥시토신 수치도 높아진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개도 사람의 눈을 보며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개를 기르는 주인과 개가 닮는다는 통설이 있다. 개주인과 실제 살고 있는 개의 사진, 같이 살고 있지 않는 사진 40장을 500명에게 보여준 결과 80%의 사람들이 실제 개주인과 살고있는 개의 사진을 맞추었다. 틀린 비율이 20%에 불과했다. 개 주인과 함께 살고 있는 개가 사람과 닮는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사람과 강아지의 얼굴 중에 입을 가린 사진을 보여주니 사람들의 정답 비율은 73%였다. 눈을 가린 사진을 보여주니 정답비율이 급격히 떨어졌는데, 답을 맞추어도 우연히 맞추는 수준이었다. 즉 눈을 가리니 개와 개주인의 닮은 점을 알 수 없었다는 뜻이 된다.서로를 바라보며 사랑을 키운 사람과 개는 닮아가는 모습이 있는 것일까? 이것을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순 없지만 개의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정보가 들어있다고 표현된다.강아지의 눈에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데 눈짓 하나로 사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헝가리 로란드대학교의 과학자 아담 미클로시는 생후 9주가 되지 않은 새끼늑대와 강아지가 닿을 수 없는 위치에 먹이를 두고 먹이를 먹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먹는것에 실패가 거듭되자 강아지와 새끼늑대가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강아지는 옆에 있는 사람의 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강아지들은 본능적으로 사람의 눈을 쳐다보았고, 새끼늑대들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강아지들은 본능적으로 사람의 눈을 바라보면 도와준다는 것을 아는 것 같다. 강아지들은 일상생활에서 번갈아 보기(gaze alteration)의 방법을 알고 있는데, 자신이 원하는 것에 닿을 수 없으면 이 방법을 흔히 사용한다. 맛있는 간식이 식탁 위에 있는데 올라가지 못할 때 강아지는 원하는 것을 보았다가 그다음은 사람의 눈을 바라보고 그 동작을 반복한다.이동훈사이가 좋지않은 사람들끼리는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다. 하루에 단 한번도 서로의 눈을 안보는 가족들도 세상에는 많이 있다. 개와 눈을 맞추며 돌보는 일은 사람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게 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사람의 감정이 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로써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이다. 미국 덴버의 교도소에서는 ‘교화훈련K-9 반려프로그램’이라는 개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중이다. 개와 함께 지내고 개를 훈련하고 개들에게 최고의 삶을 선사하는 일을 책임지게 하여 재소자들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해 주는 것이다.자존감을 되찾고 바깥세상에서 새 삶을 준비하려는 수감자들은 방치된 개 집단을 다루고 돌보는 과정에서 사람과 개의 유대관계가 가져다주는 긍정적 효과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은 개들과 눈을 맞추며 큰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개를 바라보며 가지게 되는 치유능력을 우리사회에서도 잘 활용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서라벌대 반려동물학과 학과장

2019-10-29

과학은 야박해!

자연을 닮으려는 노력 속에서 과학기술은 발전해왔다. 넓은 견지에서 보자면 옷은 동물의 가죽을, 비행기는 새를, 전기는 번개를 모방하려는 노력의 일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낮은 차원에서 시작해서 자연을 개선해 자연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해 나간다. 그렇게 과학기술은 도약한다.유물론자인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발전 5단계설을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이렇게 단계를 구분한 이유는 단계를 거칠 때마다 생산력이 급격히 증대되었으며, 이러한 생산력 증대를 가능하게 만든 새로운 형태의 생산수단이 출현했고, 이를 중심으로 한 사회관계가 새롭게 형성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이란 말 그대로 생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이며, 사회관계란 그 도구를 소유하는 사람과 소유하지 않은 사람의 관계다.역사발전의 제1단계에 해당하는 원시공산사회는 생산력이 가장 낮은 단계였는데, 생산수단이라 할 만한 도구가 따로 없었다. 인간의 육체가 곧 생산수단이었는데, 남성은 사냥을 하고 여성은 채집을 했다. 이러한 생산수단은 모두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계급없는 무계급의 사회였다.제2단계인 고대노예제사회에서 생산수단은 토지였으며,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주인으로 군림했다. 그래서 고대노예제사회에서 핵심적 사회관계는 노예와 주인의 관계였다. 이 시기부터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가 대두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중세봉건사회에서 영주가 착취를 하고 농노가 피착취의 대상이었으며, 생산수단은 장원이었다.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시대가 자본주의 사회다. 공장을 생단수단으로 하여, 공장을 소유한 자본가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대립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시대에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은 필연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자본가들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은 지나치게 많이 투자하거나 지나치게 많이 축적하게 되어 결국에는 경제공황을 낳으며 스스로 자멸해 갈 것이라 보았다.마르크스의 역사 5단계설은 두 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는 듯하다. 우선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가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아주 순진한 생각을 했다. 인간의 역사나 인식은 발전하기보다는 변화한다고 보아야 옳지 않을까. 인간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기도 하며, 특정한 국면에서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일을 저지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2차 대전 때 독일이 유대인에게 행한 것이나,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서 벌인 다양한 전쟁범죄들은 차마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으며, 차마 인간으로 저지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변화한다. 그리하여 퇴보를 향하기도 한다.다른 하나는 마르크스가 과학기술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증기기관이 기술의 최대치로 보았던 것 같다. 노동자 중심의 공장이 노동자들을 단결시켜 혁명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전 같으면 1천명의 사람이 일해야 했다면 이제는 100명 아니 10명으로, 더 나아가서는 무인공장으로 바뀌고 있다.오늘날 생산수단은 더 이상 공장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심 역시 중요한 생산수단이 될 수 있다.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많은 욕구가 분출되고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이 생겨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밀접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은 그렇게 많지 않으며, 1천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 또한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인터넷에 마련된 플랫폼에는 수천 만, 수억 명의 사람이 몰려든다. 이러한 가상의 공간이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 발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과학기술이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다시 마르크스로 돌아가 보자. 마르크스는 역사의 발전단계를 5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마다 혁명이 있었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들에는 러시아혁명, 명예혁명, 미국독립혁명, 청교도혁명, 프랑스 혁명, 쿠바혁명, 4.19 혁명, 문화혁명 등이 있다. 이러한 혁명은 기존의 나쁜 지도자를 몰아내거나 새로운 정치체제를 도입했을 때, 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위치가 완전히 뒤바뀔 때를 일컫는다. 이런 식이라면 혁명은 많아도 너무 많다.그러나 과학기술은 혁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극도로 아낀다. 예컨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는 엄청난 인식론적 전환 앞에 대해서도, 문명발전의 기반이 되었다고도 해도 좋을 전기가 상용화 되었을 때도 혁명이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다. 인간에게 엄청난 편익을 제공한 자동차나 컴퓨터가 발명되었을 때에도 혁신(innovation)이라고 부를 뿐, 혁명이라고 명명하기를 꺼린다. 과학기술은 크게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에 국한하여 혁명이라는 지위를 허락하고 있다. 왜 이렇게 과학은 혁명이라는 말에 야박한 것일까? 과학에서 말하는 혁명은 특정한 변화가 인간 개개인의 삶을 바꿀 뿐만 아니라 집단의 변화로 나아가는 현상, 그리하여 기존의 삶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이 등장하게 될 때를 혁명이라고 부른다.

2019-10-29

진정한 철강경쟁력의 원천에 대하여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세계 각국은 글로벌 경제가 활력을 잃거나 자국 경제의 성장세가 둔화될 경우 가장 먼저 보호에 나서는 산업 중 하나가 철강 산업이다. 이는 ‘철’이 ‘산업의 쌀’이라고 불릴 정도로 해당국에서 생산하는 다양한 공산품의 경쟁력을 담보하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연간 18억t이라는 세계조강생산량의 절반인 9억t 가까이를 생산하는 중국도 각국의 수입규제조치로 2015년 9천713만t의 수출초과를 기록했던 강재무역이 2018년에는 45.56%가 감소한 5천287만t으로 급감하였다.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초과 물량도 2015년 935만t에서 2018년에는 65.56%가 줄어든 322만t에 그쳤다.그런데 이처럼 세계시장에서 막대한 강재수출초과를 기록하고 있는 중국이 지속적으로 수입초과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가 있다. 일본이다. 일본에 대한 중국의 강재 수입초과물량은 2015년 시점 433만t에서 2018년에는 8.77%가 증가한 471만t을 기록하고 있다. 세계경기의 성장세가 둔화되고 각국의 철강 산업에 대한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됨에 따라 중국의 세계 시장에 대한 강재수출이 빠르게 위축되자 자국 철강 산업의 보호에 나선 중국임에도 유독 일본산 강재 수입만큼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오로지 일본산 강재만이 고품질, 고부가가치제품이기 때문일까. 이는 피상적인 분석에 불과하다. 일본 철강 산업이 지닌 경쟁력의 원천은 따로 있다. 일본 철강업체가 중국으로 수출하는 강재 대부분은 일본의 자동차, 건설기계 등 철강재를 소비하는 전방산업에 해당하는 일본기업의 중국 현지공장들과 처음부터 끈끈하고 치밀하게 연결된 글로벌 공급 사슬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일본 철강업체들은 개도국에 일관제철소를 지어주는 동안 수출실적을 늘릴 수 있는 일시적인 전략은 거의 채용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해당 국가에서 자국 산업 보호라는 명목으로 철강에 대한 보호주의를 발동하게 되어 제 발목을 잡는 행위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해외시장 진출 전략은 일견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철강기업 단독으로 해외시장 진출을 노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보다는 자동차, 기계금속, 조선 등 자국 철강수요산업의 기업들과 항상 소통하면서 그들의 해외 공장 설치 단계부터 가장 적합하고 필요한 강재의 필요물량을 가늠하여 현지 조달에 어려움이 없도록 부분품이나 중간재 생산을 지원하는 맞춤형 동반진출 전략을 선호한다. 그러한 전략은 일본 국내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 신제품 개발을 추진하는 기업에 필요한 강재를 공동개발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철강업체는 강재개발단계부터 판로를 확보하고 연구개발비까지 절감하는 일석이조를 거두는 셈이다.포항의 철강 산업이 앞으로도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연히 연구개발을 통한 고품질, 고부가가치 강재를 개발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부터라도 국내외 수요기업들과 보다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강재를 개발, 공급하는 맞춤형 공급 사슬을 형성하여야만 포항 철강 산업의 경쟁력이 원천적으로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2019-10-29

기대치를 낮추면

기대치 위반 효과(Expectancy violations theory)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그 기대치를 충족시켜주지 못할 때 더 큰 실망과 분노로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인간관계는 상대방이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것이라는 심리적 계약을 맺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약이지만 이런 기대치가 충족이 되지 못할 때 실망감이 형성되고 관계는 더 이상 발전되지 않습니다. 능력에 벗어나는 일을 장담하거나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함부로 꺼내지 말아야 하겠지요.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을 때 애매모호한 태도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행동도 지혜롭지 못합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관계가 악화되는 이유는 상대가 나에게 실망하거나 내가 상대에게 실망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원인은 각자의 기대치에 서로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기의 맑은 미소를 떠올려 보세요. 왜 우리는 갓 태어난 아기 모습에서 즐거운 감정을 느낄까요? 당장 이 아이가 어떤 훌륭한 행동으로 나를 만족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서로 행복한 거지요. 아기도 웃고 나도 방긋 웃으며 화답합니다.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욕심이 끼어들지요. 아이가 자라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온갖 기대치가 매일 마음을 파고듭니다. 잔소리를 하게 되고 맑은 미소와 행복감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합니다.무언가 베풀고 있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상대 반응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게 마련이고 실망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기대치를 낮추면 사소한 말과 행동에도 감사를 느끼며 좋은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눈빛 하나에도 기쁨이 오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아낌없이 베풀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깨끗한 마음이 관계의 지혜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0-29

지역미술계의 새바람 ‘대안공간’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최근 대구 수성아트피아 갤러리에서는 2010년을 전후해 대구·경북에서 결성된 ‘B커뮤니케이션’과 ‘보물섬’이란 대안공간의 소속작가들 작품과 그 동안 기록들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전이 함께 마련되었다. 이를 통해 동시대 지역미술의 방향성과 젊은 미술그룹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지역 신진작가의 그룹 활동에 대한 방향성 모색’이라는 세미나도 개최되어 10년간 지속해 온 두 단체의 활동내역과 성과, 지역미술계에 끼친 영향 등을 되짚어 보는 토론의 장도 가졌다.1990년대 국내 대안공간이 미술시장과 전시문화의 환경 변화에 의해 자생적으로 개관되었다면, B커뮤니케이션과 보물섬은 2010년 전후 전시기획과 아트프로젝트 진행을 위한 큐레이터의 기획부터 활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창작활동과 전시기획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기에는 제한된 사회적 여건과 개인중심의 작가 창작환경으로 턱없이 부족함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젊은 기획자의 열정과 용기만으로는 다변화되어 가는 미술문화와 작가들의 요구를 수행해 나가기에 더없이 많은 한계를 스스로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이번 기회를 빌려 그들에게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기획자 정세용은 2009년 ‘별의 별 시장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방천시장과 인연을 맞은 후 B커뮤니케이션이라는 작업실을 마련해 다채로운 창작활동과 소통의 공간으로 활용하며 대안공간 운영을 시작했다. 2013년 ‘RUN+8展’에 이은 2015년부터의 ‘Bcom Artist Run Space展’은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발표의 장이 되었다. 지금은 동성시장 프로젝트와, 방천예가 운영까지 믿으며 대안공간의 발전가능성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대구와 인근 지역에서 활동 중인 작가들을 중심으로,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전시활동을 위해 2010년 결성된 ‘썬데이페이퍼’그룹은 전시 기획자 최성규에 의해 운영되어오다 2016년 해체되었다. 그리고 미술중심공간 ‘보물섬’을 경산시장 인근에 새롭게 마련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나가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국내 대안공간의 역사는 짧지만 대부분 상업화랑에 반발해 비영리 전시공간을 표방하며 활동 중이다. 이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젊은 작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정부 지원금이나 기업체 기타 단체 등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특징으로 인해 나날이 인기는 높아지는 추세이다. 이러한 대안공간들의 운영체제는 재능이 있는 신진작가들을 발굴·육성하고 이를 통해 동시대 미술이 국제적 현대미술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데 일조하려는 자발적인 미술운동이기도 하다. 이들 두 단체가 한국미술의 흐름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설립됐거나 정치적 배경 속에서 결성된 그룹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들의 활동이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그리고 두 단체의 기획전과 이를 통해 배출된 작가들의 작품성향, 창작활동 영역은 지난 10년간 지역미술의 발전에 절대적 공헌을 한 점 역시 지극히 고무적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2019-10-29

교육개혁, 또 방향을 잘못 잡은 것 아닌가?

박준섭 변호사지난 25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교육개혁관계장관회의 결과가 발표됐다. 자사고, 외고, 국제고를 2025년도 고교학점제 도입과 함께 일괄 일반고로 전환하고, 수시비율이 높은 서울 소재대학은 정시 수능 전형비율을 상향조정할 방침이라고 했다. 벌써부터 서울권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정시 40%선을 맞출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이러한 정책방향은 깜깜이로 상징되는 수시입시제도가 불공정하다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사실 현재 우리나라의 수시 뿐만 아니라 정시 입시제도도 모두 불공정하다. 정시는 어릴 때부터 좋은 학원에서 선행과 무한반복으로 연습한 강남의 아이들에게 절대 유리하기 때문이다. 수시의 불공정성은 조국장관 사태에서 얼마나 불공정하게 운영되고 있었는지 국민들이 여실히 확인했다. 수시제도가 그동안 많이 개선됐다지만 깜깜이로 상징되는 불공정성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가 현재의 수시와 정시라는 틀에서 개혁의 방향을 맞추고자 한다면, 오히려 수시의 지방균형, 지역균형선발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강남과 비강남, 수도권과 비수도권을 나누고 비수도권도 교육우세지역을 나누어 지역균형선발 비율을 획기적으로 70∼80%로 늘리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교육우세지역의 인구가 기존에 성과가 낮은 학교를 찾아 분산될 것이고, 그러면 강남 집값도 상당히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또 지방균형발전에 가장 유효한 정책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제도 시행 초기에는 학교마다 격차가 있겠지만 차츰 평준화되어 갈 것이다. 실제 지방균형선발로 입학한 학생들이 대학 3, 4학년에 이르면 성취도에 격차가 없다는 보고도 있다. 지방균형 선발도 학교에서 특정학생에게 혜택을 몰아주는 등 불공정 시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터내셔널 바칼로레아(IB)를 도입해 국제적 기준으로 엄격하게 내신을 평가하는 방안이 함께 도입되면 이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이 방안은 미래의 창의적인 인재를 키우는 교육제도개혁도 동시에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지금의 상태에서 자사고와 외고를 폐지하는 정부안은 강남쏠림 현상이 심해져 강남 집값은 더 인상될 것이다. 교육부가 강남과 비강남 사이의 실질적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눈감은 채 자사고와 외고 등의 형식적 차이만 보려고 하니 사태가 더 꼬이는 것이다. 외고, 과학고 등 특목고의 문제는 선행학습과 스펙으로 무장된 부유층이 아니라 학습능력은 있으나 가난한 인재들에게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는 학교로 만든다면 전혀 문제가 없다.문재인 정부의 정책목표는 공정인데도 불구하고 이번 교육개혁의 결과는 대한민국을 강남중심의 더 불공정한 사회로 만들 것이다. 정책목표와 정책시행결과 사이의 불일치가 또 한 번 일어날 것같다. 문재인 행정부는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개혁을 위한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2019-10-29

외로운 섬 독도

독도(獨島)는 한자 뜻으로 풀면 외로운 섬이다. 우리나라 동쪽 끝의 섬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87.4km 떨어진 홀로 섬이니 외로운 섬이 맞다. 그러나 독도의 독은 홀로 독(獨)이라는 한문 표기와 상관없이 한자의 소리를 빌려 쓴 글자라 한다. 본래 뜻은 돌(石)의 서남지방 방언인 독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돌섬이라는 말이다. 바둑의 옛말이 바독인 것으로 미뤄보아 독은 돌의 고어형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최근 일본과의 무역 갈등이 커지자 독도를 찾는 국민이 급증하고 있다. 9월 현재 독도 땅을 밟은 관광객은 20만명을 넘었다. 독도 관광객 집계를 시작한 이래 최고라 한다. 독도 관광객은 한일관계가 경색을 보일 때마다 급증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의 무역 도발이 시작된 이후 독도 관광객이 늘어난 것도 마찬가지 현상이다. 일본은 우리의 독도를 자신의 땅이라고 억지 주장을 한다. 시네마현 오키군에 딸린 다케시마 섬으로 한국이 강제 점령했다는 주장이다. 우리 정부는 분쟁거리조차 안 된다며 일축한다.얼마 전 정부는 관공서 및 공공기관 홈페이지에 사용된 독도와 동해의 오류표기를 긴급 수정하라 지시했다. 일부 공공기관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직접 경고도 보냈다. 독도가 우리 땅인데 대한 공공기관의 엄중한 인식을 촉구한 조치다. 그러나 독도를 바로 알리고 지키기 위한 정부의 예산은 거꾸로 가고 있다. 경북도가 신청한 독도관련 13건(323억원) 예산 가운데 겨우 6건(65억원)만 내년도 국가 예산안에 반영됐다는 소식이다. 독도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수호의지는 오간데 없는 모습이다. 독도의 실효적 지배는 예산 수반이 필수다. 독도를 외로운 섬으로 그냥 방치하겠단 것인지 정부 속을 알수 없다. /우정구(논설위원)

2019-10-29

영조의 인재등용 지혜를 배워야

강희룡 서예가영조(1694∼1776)가 스스로를 반성하는 한편 세자를 가르칠 목적으로 유교경전과 역사서에서 수신과 위정에 관련된 내용을 주제로 자신의 견해를 기록한 책으로 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이 있다.이 책에서 영조는 수신의 요체를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보았고, 위정의 요체를 기미(幾微)를 살피는 것으로 보았다. 기미를 살핀다는 것은 선악이 나뉘는 조짐을 살핀다는 것으로 선한 인재를 변별하고 등용하여 국가를 다스리는 바탕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영조는 젊은 시절부터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당쟁을 목도하였고, 왕세제(王世弟)가 되어서는 충신과 역적의 시비로 발생한 신임사화(辛壬士禍)의 참상을 몸소 겪었다.이를 통해 어느 당파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왕으로 즉위하자 탕평책을 시행했다. 사적인 호오(好惡)나 당파의 이익이 아닌 개인의 능력과 선악에 따라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정치로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였던 것이다.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선생의 1569년(선조1) 부교리(副校理)를 사직하는 상소에서 인재등용에 대해 잘 기록하고 있다. 임금은 등용하려는 사람에 대해 국민 모두가 적합한 사람이라고 평가해야 하며, 반드시 훌륭한 점이 있는지를 직접 확인하고서 그를 등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널리 자문하고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다. 등용되는 신하 역시 자신의 능력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군주와 함께 국가발전의 업적을 성취하는 것에 내 능력이 적임자가 아니라면 즉시 물러나서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임금은 어진 인재를 찾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작위와 봉록을 함부로 내주어서는 안 되며, 신하는 스스로의 지조를 지키는 것을 뜻으로 삼아 이익과 명예를 위해 과분한 자리를 받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옛날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서 임금이 잘못 등용하는 실수가 없기에 신하가 벼슬자리에서 놀고먹는 경우가 없었던 이유이다.자리나 재물에 대해 구차하게 얻으려고 하지 말며, 어려움을 당하여 구차하게 모면하려고 하지 말라는 예기 곡례(曲禮)편에 실린 교훈이 생각난다. 이 구차함은 크게 둘로, 하나는 밖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의식주와 같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고위직 자리나 재물을 얻으려는 것에 대해 말하면 이것들은 밖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얻겠다고 자신과 약속한 일이라면 그 일 또한 나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번듯함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겉멋을 부리려든다면 그 삶이 얼마나 초라하겠는가.군부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논리를 폈던 상당수 80년대 운동권들은 짧은 고난으로 긴 영예를 누렸다.신념을 위해 권력과 싸웠던 그들이 이젠 권력의 중심에서 사실을 조작하려고 한다. 오늘날처럼 공직자의 자질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서 인재 등용의 중요성과 방법을 제시한 영조와 율곡의 글은 ‘조국사태’로 혼란스러운 지금의 우리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9-10-28

공부를 즐겁게 하려면?

이수원계명대 교수·유아교육과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 不亦說乎(불역열호)의 공자 말씀처럼 배우고 익히면 즐거워야 하지만 실제로는 공부가 즐겁지 않은 경우가 많다. 왜 공부가 즐겁지 않을까? 공부하는 내용이 나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삶과 연관 있는 공부는 어떤 공부일까? 미국 위스콘신 주의 메디슨 시(市) 고등학교에서 시의 중심지를 디자인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공연장, 가게, 공원, 관공서, 대학 등이 자리 잡은 작은 도시를 재개발하는 프로젝트였다. 디자인 대상인 시 중심지가 학습자에게 친숙한 장소였으며 학생들 간에 도시의 활성화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도시 재개발 프로젝트를 위해 메디슨 시의 역사, 지리, 경제 뿐 아니라 물리나 건축학 같은 지식이 필요했다. 이처럼 지식 습득 자체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학습자가 자신의 삶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식을 활용하는 것이 학습자에게 의미 있는 공부가 될 수 있다. 초등학교로 진학하는 아이들이 글을 습득하도록 그림 그리기를 가장한 철자 쓰기, 놀이를 가장한 수 세기 등의 학습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하지만 아이들은 놀이를 가장한 공부라는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아이들이 무의미하게 철자를 따라 쓰거나 숫자를 읽기보다는 생일날 친구를 초대하기 위해 초대장을 쓰고, 좋아하는 과자의 가격을 읽어 보는 것처럼 배움이 아이들의 삶과 연관될 때 더 효과적일 수 있다.혹자는 ‘학생의 일상 삶과 무관하게 기본적으로 배워야 할 지식이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식의 본질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학습자가 배워야 할 지식은 달라진다. 단순하게 논의하면, 지식이 절대적인가 아니면 상대적인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지식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불변하며 절대적이라고 간주할 경우 학습자가 배워야 할 지식의 목록은 고전이나 전문가가 구성한 교과 내용이다. 하지만 지식이 사회문화적으로 다양하여 상대적이라고 간주할 경우 오늘 과학이라고 믿었던 내용이 내일 사실 관계가 뒤집힐 수 있으므로 학습자가 배울 지식은 학습자가 속한 사회문화나 일상의 삶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산에 사는 아이는 식용 가능한 식물의 종류나 산을 오르내리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 반면, 바닷가에 사는 아이는 생선의 종류, 항해할 수 있는 날씨, 생선을 잡기 위한 도구를 알아야 한다. 배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학생들을 줄 세우고 우열을 가리기 위한 것인가? 학생이 일상에서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함인가? 이 질문의 대답이 교육 방법과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일단 잘 놀아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도 놀이에 흠뻑 빠져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저녁 무렵 골목길에서 해가 지는 것을 잊을 만큼 놀이하던 경험 말이다. 그 놀이는, 어른의 간섭 없이 여러분 방식대로 진행하던, 순전히 자기-주도적인 놀이였을 것이다. 놀이를 통해 길러진 자기주도성은 훗날 자기주도적인 학업과 책임감 있는 직장생활로까지 이어진다. 놀이에 흠뻑 빠졌던 여러분도 지금 책임감 있는 성인이 되어 있지 않는가.

2019-10-28

미소(2)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나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미소를 지은 채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 또한 그에게 미소를 보내면서 그가 단순히 한 사람의 간수가 아니라 살아있는 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도 새로운 차원이 깃들어 있었다.문득 그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에게도 자식이 있소?” “그럼요, 있구말구요.” 나는 얼른 지갑에서 나의 가족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다.그 사람 역시 자기의 아이들 사진을 꺼내 보여주면서 앞으로의 계획과 자식들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을 얘기했다.내 눈은 눈물로 가득해졌다. 나는 다시는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고 고백했다.내 자식들이 성장해 가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고. 이윽고 그의 눈에도 눈물이 어른거렸다.갑자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감옥 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나를 조용히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소리 없이 감옥을 빠져나가 뒷길로 해서 마을 밖까지 나를 안내했다. 마을 끝에 이르러 그는 나를 풀어주었다. 그런 다음 한마디 말도 없이 뒤돌아서서 마을로 걸어갔다. 그렇게 해서 한 번의 미소가 내 목숨을 구해주었다.작가 생텍쥐페리가 실제로 겪은 이야기입니다. 그 미소의 기적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어린왕자’를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엘라 휠러 윌콕스는 말합니다. “웃어라 그러면 세상도 그대와 함께 웃는다. 울어라 그러면 그대 혼자 울게 된다.” 우리 안면 근육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굳어지게 마련입니다. 굴러가는 낙엽에도 깔깔거리며 웃고 말았던 어린 시절의 감성을 살려낼 수 있다면 행복하겠습니다. 밝은 웃음은 주변을 맑히고 빛내며 타인의 마음속에도 작은 행복의 씨앗을 심어주는 가장 큰 사회 공헌입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멋진 일을 시작해 볼까요?/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0-28

죽음마저 극복한 음악 구스타프 말러(下)

말년의 구스타프 말러.말러는 위대한 작곡가가 되기를 열망하던 친구의 비극적인 죽음을 보며 안정적인 음악가로서의 생활을 위해 지휘자가 되려고 결심한다. 그리고 당시 작곡가로보다 지휘자로서 더욱 명성을 얻는다. 그는 빈 필하모닉과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극장 등 최고의 무대에 서는 지휘자였으며 차이콥스키가 그의 오페라 ‘에프게닌 오네긴’의 초연을 직접 맡아줄 것을 부탁하는 등 지휘자로서의 커리어가 매우 높았다. 말러는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자신의 작품이 당시에는 기대만큼 평가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필자뿐만 아니라 고전적 교향곡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 말러의 교향곡을 처음 들으면 대부분 난해하여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시의 평가는 약간 달랐다. 오히려 말러가 사용했던 선율은 너무 단순하고 서민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선율이 단순한데 비해 화성의 메커니즘은 매우 복잡하고 악장의 구성이 확대되고 배치가 철학적 구성을 지니고 있는데다 연주 시간이 매우 길어 보통의 청중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예술가의 시련은 같은 렌즈를 보더라도 시력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이듯이 시대에 따라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중들의 스펙트럼이 다르다는 데 있다. 가장 복 많은 예술가는 시대의 스펙트럼과 자신의 작품이 일치하는 인물일 것이다. 말러의 작품도 당시에 외면당했으며 20세기에 들어와 유럽에 불어 닥친 반유대주의의 광풍으로 고의적으로 제외된 측면도 많다. 말러의 음악은 세기말적인 탐미주의가 가득하며 희망과 절망, 죽음과 부활, 열정과 염세주의 등 철학적이고 모순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전 교향곡 작곡가들의 서사적이고 논리적인 플롯을 완전히 벗어난다.그는 보헤미아의 유태인이었다. 당시 유태인들이 받던 차별에서 그도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칼리슈테에서 태어나 작은 농촌 마을인 이글라우에 이사해 성장했다. 이글라우는 당시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의 군인들이 프라하에서 빈으로 이동하던 길목에 있었으며 이러한 환경적인 요소들은 말러의 음악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의 음악은 ‘교향곡 7번’ 5악장에 나타나듯 금관악기와 타악기의 ‘군악적인 요소’와 시골 마을에서 성장한 덕분에 ‘농민의 춤곡’인 란틀러(Landler)를 비롯한 민중의 춤과 관련된 요소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유태인의 종교의식인 ‘시나고그’의 영향을 받은 ‘유태인의 음악적 요소’들이 목관악기 곳곳에 나타난다. 말러는 아버지가 선술집을 운영해 거리를 떠돌던 장사꾼들이 자주 드나들어 어린 시절 그들이 즐기던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말러의 작품에는 위에서 언급한 민중들의 생활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으며 이전까지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음향으로 표현된다.필자가 가장 사랑하는 말러의 작품이 있다. 바로 말러의 ‘아다지에토’라고도 불리는 ‘교향곡 제5번’의 4악장이다. 말러는 뒤늦은 나이인 40세에 그토록 열망하던 20세 연하의 아름다운 여인 알마 쉰들러와 결혼한다. 그녀는 결혼 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작곡가였던 A.폰 켐린스키 등과 염문을 뿌리던 예술가들의 뮤즈였으나 말러의 적극적인 구애로 결국은 결혼한다. 결혼 6년 뒤 장녀가 사망하는 등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으나 이 곡은 그녀와 결혼하고 난 후 가장 행복한 순간에 작곡된 곡이다. 바그네리안적인 대규모 편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하프와 현악 합주로만 구성돼 사랑을 노래한다. 마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가 계속해 노래되며 사랑을 절정으로 이끌며 행복한 사랑을 노래하다가도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한다. 현실적인 사랑을 넘어 죽어서도 계속될 것 같은 불멸을 노래한다.말러는 19세기 말 교향곡이 꺼져가려고 할 때 교향악의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며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으며. 교향곡의 형식은 전통을 따랐으나 그 음악적 내용은 표제적인 모습을 담았다. 베토벤이 음악에 자유와 정신을 심었다면 말러는 그가 경험했던 인간 본연의 모습들을 음악에 담았으며. “중요한 것은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단호하게 가는 것이다”라고 그가 말한 것처럼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교향곡의 마지막 숨결을 이끌며 교향곡의 아름다운 가치를 묵묵히 세상에 외친 사람이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

2019-10-28

무소의 뿔은 고독하다 - 청도 대비사(大悲寺)

중년의 여자가 홀로 걷는다. 아무런 보호 장치 없는 차로를 묵직한 배낭 하나 메고 걷는 모습이 잘 여문 가을을 닮았다. 마른 꽃잎 같은 여인이 발걸음을 뗄 때마다 탑이 쌓인다.여인은 큰 길을 따라 걷고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안고 대비사를 향해 마을 어귀로 들어선다. 눈길 닿는 곳마다 해묵은 그림처럼 정감 넘치는 가을 풍경이 기도가 되어 따라온다. 그곳이 비록 초행길이라 할지라도.길은 대비지 푸른 어깨를 타고 굽이굽이 이어진다. 수심 깊은 호수에는 하늘의 낮별들 죄다 내려와 반짝이며 수다를 떨고, 일찍 물든 단풍은 무심히 붉고 외롭다. 내 안에 숱한 그리움들 몰려나와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깨달음이란 없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 호젓한 물결이 내게 속삭인다.호수와 헤어지고 골짜기로 접어들 때, 일주문과 천왕문을 대신하는 사천왕상이 길을 막는다. 심란하고 소소한 탐욕들 죄다 접어 호수 위로 띄워 보낸 뒤라, 나를 검문하는 사천왕상의 눈빛은 한없이 너그럽다. 용소루 처마 끝에서 빈몸으로 허공을 가르며 울어대는 풍경처럼 오늘은 몸도 마음도 가볍다.누하진입식의 용소루를 지나 너른 마당을 가로지르면 적당한 높이의 기단 위에서 강렬한 눈빛이 나를 맞는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의 조선 중기 건축물인 보물 제 834호 대웅전이다. 오랜 그리움 품고 피어나는 한 떨기 꽃처럼 대웅전의 자태는 단아하면서도 흔들림이 없다.텅 빈 마당에 서서 대웅전을 바라본다. 눈 밝은 사람이 아니면 찾아올 수 없는 이곳, 영겁의 세월을 외로이 떠돌았을 독백 하나, 허기진 날들을 견디고 비로소 닻을 내린다. 인연의 끈을 붙잡고 다가오는 숨결처럼, 전생에 한번쯤 다녀갔을 법한 절이다. 어쩌면 나는 이곳에 오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사찰을 스쳤던 것은 아닐까.절은 신라 진흥왕 18년(557년) 한 신승이 호거산에 들어와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중심으로 오갑사(대작갑사, 천문갑사, 소작갑사, 가슬갑사, 소보갑사)를 지었는데 서쪽의 소작갑사가 오늘날의 대비사다. 진평왕 22년에 원광국사가 중창하며 대비갑사로 바꾸었다는데, 불교의 대자대비(大慈大悲)라는 뜻으로 지어진 것이라고도 하고 신라 왕실의 대비가 수양을 위해 이 절에 오랫동안 머물러 대비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도 한다.호거산 품안의 박속마냥 적당한 크기의 절이 말없이 나를 안아주고 대웅전은 길고 길었던 침묵을 위로하듯 손을 내민다. 빨려들 듯 법당으로 들어가 겨우 삼배의 예를 갖춘다. 이 아늑하고 뜨거운 기운의 정체는 무엇일까. 대웅전이 내 안으로 성큼 들어오고 나는 대웅전의 품에 안긴다.요사채는 인기척이 없다. 새로 지은 듯한 뒷산 선원은 가을날의 빈집을 지키듯 허공만 응시하고, 감로수 떨어지는 소리가 염불을 대신해 천년고찰을 밝힌다. 고색창연한 단아함과 깊고 그윽한 우수가 겹쳐 기품이 묻어난다. 안쓰러움이나 비굴함 따위는 결코 허락하지 않을 듯 간결하고 남성적이다. 스스로의 결을 지켜내기 위해 묵언수행하며 고독을 사랑하는 사찰이 마음에 든다.시대에 편승하며 속세와 물꼬를 트는 일에 중독된 생기발랄한 사찰들과는 달리, 사찰로서의 본질과 정체성을 놓치지 않고 도약하려는 꿈틀거림이 보인다. 절 뒤편에 우뚝 솟은 기개 넘치는 억산의 형세도 대비사와 닮았다. 대웅전의 시선은 앞산 너머 운문사를 향해 있지만, 승천하는 용의 품에 안겨 절대적인 자유를 꿈꾸고 있는 것 같다.입구를 지키는 느티나무 옆 오솔길을 따라 11기의 고승대덕들의 부도밭에 들어서면 가을이 물들고 낙엽 지는 소리가 내 안에서 들린다. 부도밭의 맑고 고요한 분위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즈음, 용이 되어 승천하려다 이무기로 변한 상좌의 억울한 전설을 간직한 억산 봉우리의 깨진 바위로 향하는 등산로도 한번쯤 걸고 싶다.절 뒤 숲에서 마애 아미타삼존불입상을 조성하는 돌 깎는 소리가 천년의 꿈을 안고 몇 번이나 날아오르다 숲으로 떨어져 잠든다. 그의 손길에서 태어날 마애불을 위해 날마다 정성스런 기도로 하루를 열 석공을 생각한다. 아사달의 애절한 전설만큼 불심 가득한 석공에게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천년을 밝혔으면 좋겠다.조낭희 수필가주지 스님은 출타 중이다. 공양주보살도 절일을 돕는 처사님도 없다. 단출한 살림에 문화재를 관리하는 분 홀로 절을 지킨다. 주지 스님을 뵈러 다음 날 다시 절을 찾았을 때, 대웅전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고, 주지 스님은 번잡한 만남은 피한다는 전갈만 보내 오셨다.눈 밝은 자 스스로 찾아와서 스스로 기도하고 공부하면 된다는, 문턱 높은 꼿꼿함이 싫지 않다. 하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 젖은 걸음으로 찾아왔을 때, 대웅전이 내게 손을 내밀듯 위무해 주시기를 바라며 천천히 대비사를 빠져 나왔다.잔잔한 호수 너머, 절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 대비사의 은혜로운 향기가 멀리까지 따라 나와 배웅해 주었다. 호수에서 놀던 뭍별들 어느 새 내 안에서 총총히 뜨기 시작하고.

2019-10-28

조선시대 임금님께 진상된 과메기는 구룡포 과메기

‘과메기’는 관목(貫目), 관목어(貫目魚)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은 ‘다수설’이다. 관목은 ‘눈을 꿰뚫었다’는 뜻이다.‘정설’이 아니라 다수설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다. “관목어에서 과메기가 시작되었다”라는 명확한 기록은 없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몇몇 기록에서는 ‘관목’ ‘관목어’를 다르게 설명한다. 빙허각 이 씨(1759~1824년)의 ‘규합총서’에서는 “청어 두 눈이 말갛게 서로 비칠 정도가 되는, 신선한 것을 관목이라고 한다. 청어 2천마리에서 관목 한 마리를 얻을 정도로 귀하다”고 했다. 빙허각 이 씨의 ‘관목’은 싱싱한, 그래서 눈이 맑고 투명한 청어다. 우리가 아는, 말린 청어, 혹은 꽁치가 아니다. 과메기가 관목어는 아니다.오주 이규경(1788~1856년)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관목’은 빙허각 이 씨와 또 다르다.“청어(靑魚)는 비늘 있는 물고기 중 가장 개체 수가 많다. (중략) 정조 무오, 기미년 간(정조 22~23년, 1798~1799년)에 다시 쏟아져 나오니 천해졌다. 조기[石首魚, 석수어] 정도로 크기가 작다. (동해의) 북쪽에서 시작하여 관동 바다를 따라 내려온다. 한겨울에 영남 울산, 장기(長耆) 등에서 잡히기 시작한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크기가 작아진다. 어상(魚商)들이 멀리 한양으로 나른다. (중략)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연창(煙窓, 연기가 빠져나가는 창틀)에 매달아 훈제한다. 하여, 이름이 연관목(煙貫目)이다. [관목은 건청어의 속명(俗名)이다.](후략)”‘만물편_충어류_어_용어’관목, 과메기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다. “관목은 말린 청어의 속명”이라고 못 박았다. 연관목은 재미있다. 연기 쐰 관목, 훈제 과메기다.오주와 빙허각의 이야기는 명백하게 다르다. 한 사람은 말린 청어의 속명이 관목이라고 하고, 한 사람은 싱싱한 청어를 관목이라고 부른다.두 사람 모두 18, 19세기를 살았던 실학자다. 오주는 물론이거니와 빙허각 이 씨 역시 실학자로는 명문 집안 출신이다. 빙허각은 친정, 시가 모두 실학자 집안이었다. 빙허각은 어린 시동생 풍석 서유구(1764∼1845년)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살았던, 학풍도 비슷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청어와 꽁치, 어느 것이 과메기인가?청어, 꽁치도 마찬가지다. 몇 해 전부터 “원래 과메기는 청어 말린 것이었는데, 최근 청어가 잡히지 않아서 청어 대신 꽁치로 과메기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청어 과메기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포항, 구룡포 일대에서는 청어 과메기도 선보이고 있다.청어 과메기가 원조? 일부 사실이나, 이 역시, 정확한 이야기는 아니다.‘청어 과메기가 원형’이라는 표현은 과장이다. 원래 청어나 꽁치 모두 과메기로 만들었다. 날생선 유통이 어려웠던 시절이다. 냉장, 냉동 설비가 없었다. 생선을 말리거나 염장(鹽藏)이 보관, 유통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조기도 마찬가지. 날 것으로 옮기지 못하고, 말렸다. 굴비다. 명태도 그러하다. 겨울에 많이 잡히니, 추운 바람에 말려서 북어로 만들어 운반했다. 말리는 과정에서 발효, 숙성된다. 곰삭은, 좋은 맛은 덤이다.등 푸른 생선은 쉬 상한다. 말리거나 염장을 해야 한다. 과메기나 젓갈 등이다.청어가 많이 잡힌다. 공물 혹은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날것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려서 대도시로 옮겨야 한다. 말린 생선, 곧 과메기다.꽁치도 마찬가지. 과메기로 만들었다. 어느 날부터 청어가 사라지니, 청어 과메기도 사라졌다. 꽁치 과메기만 남았다.꽁치는 일제강점기 이후 많이 잡았다. 일본인들은 꽁치를 ‘추도어(秋刀魚)’ 혹은 ‘삼마(サンマ)’라 하고 귀하게 여긴다. 조선 시대에는 꽁치보다 청어가 대세였다. 청어는 구룡포, 장기 일대에서도 많이 잡았다.왜 구룡포 과메기인가?‘청어관목’ ‘구룡포 과메기’에 대한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비슷한 시기, 두 종류의 문서다. 두 문서 모두 1798년(정조 22년) 10월에 작성했다. 200여 년 전이다. 지역도 비슷하다. 영일현(迎日縣)과 경주부(慶州府)다. 영일현(포항 남구 구룡포, 장기 일대)과 경주는 바다와 땅으로 맞닿아 있다. 같은 지역임에도 ‘과메기’에 대한 서술은 전혀 다르다.먼저 ‘일성록’에 남아있는 경주 부윤(慶州 府尹) 오정원(吳鼎源)의 상소다.정조 22년(1798년)10월 11일(전략) 상소의 대략에, (중략) 연읍(沿邑)에 있는 해호(海戶)의 폐단은 교남(嶠南)이 가장 심합니다. 본주(경주)의 경우에는 진상하는 청어관목(靑魚貫目)과 건대구(乾大口) 등의 종류는 본래 토산(土産)이 아니기에 이전부터 인근 고을에서 사서 옮겨 왔고, 전복(全鰒)은 토산으로 채취하여 바쳤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는 몸집이 작고 색깔이 변질되었다는 이유로 감영으로부터 퇴짜를 맞아서, 다른 곳에서 사다가 바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대로 규례가 되었습니다. 오며 가며 사들이는 과정에서 해민(海民)들에게 폐단이 되고 있는데, 각종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호마다 수렴하는 돈이 도합 1800냥 남짓이나 됩니다. (후략)교남은 영남이다. 경주부 ‘연읍’ 바닷가면 지금의 감포다. 청어관목과 건대구는 이 지역의 산물이 아니다. 인근 고을에서 사서 공납한다. 전복은 생산된다. 공납하는 곳은 경상좌도 감영이다. 퇴짜를 맞으면 다른 곳 생산품을 구해야 한다. 별도로 드는 돈이 엄청나다. 해민, 바닷가 사람들에게 큰 폐단이다. 생선 종류가 많지 않다.같은 시기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영일 현감(迎日縣監) 정만석(鄭晩錫)의 상소다.정조 22년(1798년)10월 13일(전략) 영일현으로 말씀드리자면, 봉진하는 물선(物膳)으로 건광어(乾廣魚), 건대구(乾大口), 반건대구(半乾大口), 전복, 건문어(乾文魚), 관목청어(貫目靑魚), 분곽 등의 종류가 있으나 유독 본현에서 생산되는 전복은 크기가 작고 색이 거칠기 때문에 반드시 제주(濟州)에서 생산되는 것을 사 옵니다. 그런데 그 본가(本價)와 노비(路費)를 계산하면 첩(貼)당 소요되는 비용이 33냥이나 되는데, (중략) 좌도 연안의 여러 읍의 상황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분곽은 미역이다. 생선 여러 종류가 토산품이다. 그중 구룡포나 장기 일대를 포함한 영일현의 산물로 관목청어를 든다. 오히려 이 지역은 전복이 말썽이다. 제주에서 생산된 것을 사 온다. 전복 1첩당, 전복값과 경비로 33냥이 든다.같은 시기에 올린 상소문이다. 지금도 지척 간인 경주 바닷가와 포항 바닷가의 해산물이 다른 것이 흥미롭다.울산부터 북쪽의 바다까지 청어는 잡혔다. 왜 청어 관목, 과메기는 지척 간인 경주 바닷가에서는 생산되지 않고, 포항 바닷가에서만 생산되었을까? 경주 부윤 오정원이 밝힌, 과메기를 사 오는 ‘인근 고을’은 울산 혹은 포항 구룡포, 장기 일대였을 것이다.과메기, ‘바람’이 만든다‘구룡포 과메기 생산’은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일 현감 정만석이 밝힌 ‘영일현 생산 해산물’은 건광어, 건대구, 반건대구, 전복, 건문어, 관목청어, 분곽(미역) 등이다. 7가지 중, 전복을 제외하면 모두 말린 해산물이다. 전복은, 생전복도 공물(세금)로 사용했다. 색깔과 모양이 좋지 않다고 했다. 모양, 색깔을 따지는 것은 생전복이다. 대구는 건대구와 반건대구로 상세히 나눴다. 굳이 ‘건복(乾鰒)’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생전복이다.경주 부윤 오정원의 상소문 내용은 정반대다. 전복은 생산되는데, 청어관목과 건대구가 문제다. 관목, 과메기와 건대구는 모두 말린 것이다.경주 바닷가와 포항 바닷가 해산물은 전혀 다르다. ‘바람’ 차이다. 구룡포 과메기의 바탕은 ‘바람’이다.과메기의 역사는 깊다. 고려 말, 목은 이색 (1328~1396년)은 “쌀 한 말에 청어가 스무 마리 남짓으로 비싸다”라고 했다. 청어 스무 마리는 한 두름이다. ‘두름’은 ‘冬音(동음)’ 혹은 ‘冬乙音(동을음)으로 표기했다. 조선 중기 무신 정충신(1575~1636년)의 ’만운집‘에는 “곶감 1첩, 관목 4두름[貫目四冬音, 관목사동음]을 보낸다”는 표현이 있다. 곶감 100개와 과메기 80마리다. 과메기는 400년 전에, 선물로 보낼 정도로 귀하게, 그러나 한꺼번에 80마리를 보낼 정도로 흔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10-28

애슬레저(Athleisure)

애슬레저(Athleisure)는 애슬레틱(athletic)과 레저(leisure)를 합친 스포츠웨어 용어로, 날씨가 추워질수록 운동하기에 적합하면서도 일상복으로 입기에도 편안한 옷차림을 가리킨다. 즉, 스포츠웨어와 일상복의 경계를 허문 가벼운 스포츠웨어를 이르는 말로, 기온이 낮아지면서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기능성 소재를 찾는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애슬레저 룩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애슬레저의 유래는 1980년대 건강 스포츠가 붐이 일어났을때 생긴 말이다. 이같은 패션이 유행하게 된 데는 스포츠의 흥미로부터 일반인들도 스포츠를 일상적으로 받아들여 손쉽게 레저와 같은 즐거움을 맛보자는 경향때문이라고 한다. 시대에 따라 즐기는 스포츠의 유행은 조금씩 달라지는데, 배드민턴, 테니스, 조깅, 에어로빅, 볼링, 골프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애슬레져 룩을 가장 쉽게 연출하는 방법은 하의를 스포츠웨어로 선택하는 것이다. 예컨대 조거 팬츠는 조깅하는 사람을 뜻하는 조거(jogger)와 바지를 뜻하는 팬츠(pants)의 합성어로 발목 부분을 리브(lib)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레깅스, 테니스 스커트 등을 하의로 활용하면 간단하게 애슬레져 룩을 완성할 수 있다.의류업계에서는 운동복과 일상복을 구분하지 않는 분위기에 힘입어 애슬레저 상품군의 매출이 지속적으로 신장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애슬레저 상품군 중 ‘레깅스’수요가 특히 높다. 캐시미어 레깅스와 에어코튼 기모 레깅스 등 보온성을 높이는 레깅스가 인기를 끌었다. 추워진 날씨에 근육이 수축하기 때문에 같은 운동을 하더라도 따뜻한 날씨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상의 위험이 높아진다는 점을 감안, 애슬레저 룩을 즐겨보면 어떨까 싶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10-28

한국 외교의 총체적 위기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문재인 정부의 외교가 총체적 위기이다. 북핵 중재외교는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김정은으로부터 “삶은 소대가리가 웃을 일”이라는 조롱만 돌아왔다. 한미동맹은 북한이 요구하는 ‘우리민족끼리’식의 외교를 추진하다보니 균열이 심화되어 동맹국 간 불신이 깊어지고 있다. 한일관계는 일본의 수출규제와 한국의 ‘지소미아(GSOMIA)’ 폐기로 정면충돌하면서 우리 경제와 안보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고 있으며, 중국과 러시아는 ‘한국방공식별구역’을 헤집고 다니고, 특히 러시아는 독도 영공까지 침범하였다.왜 이렇게 외교 참사가 끊이질 않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최고정책결정자의 외교환경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대통령은 외교환경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위하여 외교부 및 전문가 집단의 자문을 받는다. 이 때 대통령의 ‘가치(value)지향성’이 강할수록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의 태도를 가지게 되며, ‘예스맨(yes man)’ 참모들은 대통령이 원하는 정보만 제공함으로써 정책결정자의 사실(fact) 인식이 왜곡된다. 외교환경을 정확히 인식해야 하는 대통령의 ‘이미지(image)라는 필터(filter)’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게다가 현 정부의 외교는 ‘목적과 수단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다. 외교정책은 설정된 ‘목적’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한미동맹의 당사자인 한국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외교는 ‘중재(arbitration)’가 아니라 ‘중개(mediation)’이다. 북한 외무성의 최선희 부상도 “한국은 중재자가 아니고 플레이어(player)”라고 중재를 거부하지 않았는가. 중재외교가 동맹국인 미국에 의혹을 사고 북한에는 불신당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강제징용 배상을 둘러싼 한일갈등은 일본의 경제보복과 한·미·일 공조체제의 와해를 초래함으로써 경제적·안보적 위협이 증대되고 있다. ‘수단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고려 없이 목적의 정당성에만 의존하는 외교’는 실패를 자초할 뿐이다.더욱이 ‘외교는 내정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대통령은 외교를 국내정치에 이용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정치공학적으로 생각한다면 남북대화는 북핵의 엄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긴장을 완화시킴으로써 여당의 선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반일감정이 강한 나라에서 ‘강경한 대일외교’ 역시 동일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민주당의 민주연구원에서 분석한 “한일갈등이 내년 총선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대외비 보고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이처럼 문재인 정부의 외교는 ‘사실보다는 가치’, ‘수단보다는 목적’에 치중할 뿐만 아니라, 선거승리를 위한 ‘정치공학적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총체적 위기를 자초하였다. 이러한 외교의 실패는 단지 한 정권의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안보와 국민생존을 위협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있다. 외교는 ‘총성 없는 전쟁’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냉철한 현실인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2019-10-28

등화가친지절(燈火可親之節)

중국 당나라 때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한유는 자식 교육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많았다. 자식에게 책 읽기를 권하는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문장 속에 등화가친(燈火可親)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등화가친은 등불을 가까이 하여 책 읽기 좋은 계절이라는 말로 보통 가을을 이른다. 가을이 되면 날씨가 서늘해지고 하늘이 맑고 풍성한 수확이 기다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계절이다. 공부하기 더 없이 좋아지는 계절이라는 뜻이다. 흔히 책을 마음의 양식이라 한다. 책을 통해 사고의 힘을 키우고 세상을 알게 하는 지식을 배운다. 특히 성장기에 있는 아이에게는 신체의 건강을 위해 좋은 음식이 필요하듯 마음과 정신의 건강을 위한 독서는 매우 유익하다.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가을이다. 독서의 계절을 맞아 책을 가까이 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일상이 바쁘다는 이유로 책을 멀리했던 현대인에게 독서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호기가 된다. 우리 국민의 독서율은 선진국에 비해 많이 뒤진다. 2017년 기준 독서율은 74.4%(전자책과 만화 포함)다. 스웨덴 85.7%, 핀란드 83.4%보다 크게 떨어진다. 연간 독서시간도 성인 기준으로 23분에 불과하다. 불행하게도 국민적 독서율이 갈수록 떨어져 심각성을 더해 주고 있다.이번 가을에는 등화가친의 의미를 새롭게 한번 되새겨보길 권한다. 책은 삶의 지혜를 밝히는 등불이라 했다. 독서는 우리에게 정보도 주지만 논리적 사고를 가르치고 합리와 비합리를 구분하는 지적 능력을 키워준다. 복잡한 세상이다. 가치의 중심이 이동해 판단키 어려울 때도 많다.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는 지혜가 갈망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번 가을에는 한 권의 책이라도 읽어보자./우정구(논설위원)

2019-10-27

‘공수처’ 법안의 암수(暗數)

안재휘 논설위원북한의 사법체계는 ‘인민재판’ 방식이다. 1946년 12월 1일부터 현재까지 북한 전역에서 시행되고 있는 ‘인민재판’은 ‘공개된 장소에서 일반 군중들을 모아놓고’ 한다는 차원에서 외견상 상당 부분 요건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판의 핵심인 재판부 구성이 문제다. 조선로동당이 지명한 재판부가 재판을 진행하기 때문에 도무지 문명사회가 추구하는 ‘공정한’ 재판이라고 인정하기 어렵다.문재인 정권이 시작되면서 악착같이 밀어붙인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의 교묘한 정치보복극은 소위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자행됐다. ‘진보 시민단체’가 장악한 공기관들의 ‘위원회’는 이미 태동에서부터 공정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온갖 기밀서류들을 다 까발리며 정적 연루자들의 적폐목록을 찾아내어 언론에 ‘죽일 놈’이라고 공표하며 검경에 넘겨 수사하게 하는 인민재판식 타작 놀음을 해왔다.‘조국 낙마’ 이후 집권세력은 ‘공수처(공직자비리수사처)’ 가속 페달을 힘껏 밟고 있다. 엊그제 친여세력 집회의 손팻말도 ‘설치하라 공수처’와 함께 황교안 한국당 대표를 겨냥한 ‘내란음모 계엄령 특검’이 새롭게 등장했다.이제 우리는 ‘검찰 개혁’이라는 흐드러진 구호와 함께 여권(與圈)이 조국 블랙홀을 넘어 외치고 있는 ‘공수처’에 대해서 깊이 따져보아야 할 때다.패스트트랙 급행열차에 올라가 있는 민주당의 법안은 어쨌든 공수처장을 대통령이 뽑도록 하고 있다. 추천위원 7명 중 최소 6명의 찬성으로 2명을 추천하도록 하는 등 꼼수 장치를 붙이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더욱이 공수처 검사의 절반 이상을 비(非)검사 출신으로 충원한다는 조항에 엄청난 마수(魔手)가 숨어 있다.‘적폐 청산’ 토끼몰이처럼 민변, 좌파 시민운동가들을 동원해 ‘민변 검찰청’ 혹은 ‘대통령 호위무사단’으로 만들자고 들면 식은 죽 먹기다. 더욱이 ‘수사권·기소권 분리’를 ‘검찰 개혁’의 본질로 부르대던 사람들이 공수처에는 다 주자고 하니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수상하다는 것이다. 잘라 말하면, 독립성이 확실히 보장되지 않는 한 대통령을 초헌법적인 최고의 사냥개들을 거느리는 황제로 만들려는 음모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무엇보다도 판사 3천 명, 검사 2천 명과 경찰 간부에 대한 기소권을 보장하는 ‘공수처’ 법안은 결코 허투루 다룰 일이 아니다. 나라 말아먹는 공직자들의 부패 비리를 발본색원한다는데 싫어할 국민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이렇게 추악한 ‘인민재판’을 획책해서는 안 된다. ‘검찰 개혁’이 문제의 본질이라면, 그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검찰의 정치적 독립’ 장치를 만들어 놓고, 수사권·기소권을 조정하면 된다. 모사꾼들의 철저한 기획 아래 지지자들을 길거리에 내세워 몰아붙이는 ‘공수처’는 중국 역사의 오욕으로 기록된 ‘홍위병’ 소동을 떠오르게 한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공수처’ 법안은 암수(暗數)가 다 제거될 때까지 더 연구되는 게 옳다.

2019-10-27

미소(1)

생텍쥐페리(Antoine Marie-Roger de Saint-Exupery)는 어린 왕자로 인류의 가슴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입니다. 원래 직업은 전투 비행사였습니다.2차 대전 중에 전투기를 몰고 나갔다가 실종되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난 영웅이기도 합니다.생텍쥐페리는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스페인 내란에 참전해 파시스트들과 싸운 경험도 있습니다. 그때 자신이 겪었던 체험을 단편소설로 써서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작품 제목은 미소(Le Sourire)입니다. 이렇게 시작하지요.내가 죽게 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했다. 나는 극도로 신경이 곤두섰으며 고통을 참을 길이 없었다. 담배를 찾아 주머니를 뒤졌다. 몸 수색 때 발각되지 않은 게 어디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였다. 손이 떨려서 그것을 입까지 가져가는 데도 힘이 들었다.하지만, 성냥이 없었다. 그들이 모두 빼앗아버린 것이다. 나는 창살 사이로 간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눈과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와 누가 눈을 마주치려 할 것인가?나는 그를 불러서 물었다. “혹시 불이 있으면 좀 빌려주겠소?”간수는 나를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 담배에 불을 붙여 주기 위해 걸어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성냥을 켜는 사이, 무심결에 그의 시선이 내 시선과 마주쳤다.바로 그 순간 나는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신경이 곤두서서 그랬을 수도 있고, 어쩌면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니까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아무튼,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우리 두 사람의 가슴속에, 두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의 불꽃이 점화되었다. 나는 그가 그런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의 미소는 창살을 넘어가 그의 입술에도 미소가 피어나게 했다.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0-27

나의 아름다운 선생님들

김현욱 시인고3 때, 대학 진학을 앞두고 내 선택지는 국어국문학과와 국어교육학과로 좁혀졌다. 아이들이 있는 학교에서 일하고 싶었고, 학교에서 일한다면,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고 싶었다.당시는 수능과 내신, 논술이 대학 입시의 당락을 좌우했다. 수능과 내신 성적은 곧잘 반비례했다. 내신은 좋은데 수능이 나쁘거나, 수능은 좋은데 내신이 별로인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후자였다. 내신은 형편없었지만, 수능은 기대 이상으로 잘 나왔다. 글쓰기를 좋아해서 논술도 별 부담이 없었다.존경하는 선생님을 몇 분 찾아뵙고 진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넌 교대를 가면 좋겠다.” 가정 형편, 성격, 특기, 전망 등을 종합한 선생님들의 애정 어린 조언이었다. 결국 나는 가까운 교대로 진학했다. 교대는 고등학교와 비슷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여학생이 많다는 것뿐. 한동안 적응을 못해서 학사경고를 받으며 방황했다.어찌어찌 졸업해서 고향으로 돌아와 교단에 섰다. 18년이 흘렀고, 그때 선생님들의 조언이 제자를 향한 깊은 애정에서 우러나왔음을 비로소 깨닫는다.교대 진학해서 놀랐던 것 중의 하나는 동기들이 그동안 만났던 교사들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점이었다. ‘인간’ 같지 않은 ‘선생’들이 많았다고 고백했다. 물론, 나도 그런 ‘선생’들을 만난 적이 있다. 촌지, 편애, 폭력, 권위, 방관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억울하게 심한 폭행을 당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아름다운 선생님들의 면면이 더 많다.심윤경의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에는 동구의 아픔을 다독여주는 박영은 선생님이 나온다. 가정사에서 비롯된 폭력과 억압 때문에 동구는 초등학교 3학년임에도 불구하고 글씨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난독증을 앓고 있다. 박영은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과 자상한 배려 덕분에 동구는 가족들 앞에서 선생님의 편지를 낭독하기에 이른다. 동구에게 박영은 선생님은 ‘영혼의 성장’을 이끄는 중요한 인물이다. 박영은 선생님이 없었다면 동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동구의 아름다운 영혼의 정원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으리라.교사는 아이들의 영혼에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다. 최근에 본 영화 ‘벌새’의 김영지 선생님, 그 유명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키팅 선생님, 하이타니 겐지로의 동화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에 고다니 선생님과 아다치 선생님. 그리고 심윤경의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에 박영은 선생님. 이들이 책과 영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이들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아름다운 선생님도 많을 것이다.입시철이다. 고3 조카는 최근에 면접을 열심히 보러 다닌다. 오로지 성적으로만 가늠해서 원서를 쓰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삶에서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한다. 의대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애니메이션 학과로 진로를 바꾼 학생이 그걸 증명한다. 자신을 잘 아는 아름다운 선생님들과 삶과 진로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으면 좋겠다. 좋은 스승을 만나려는 준비가 되어있다면, 김영지 선생님, 박영은 선생님, 키팅 선생님, 고다니 선생님, 아다치 선생님들은 바로 여러분 곁에 있다.

2019-10-27

김정은의 금강산 남측 시설 철거령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백두산에서 백말을 타고 달리던 김정은이 이번에는 금강산을 찾았다. 그는 금강산의 국제 관광지구 재건을 위해 ‘너절한 남쪽 시설물’을 제거하라고 지시하였다. 남북관계가 좋았던 시절 필자는 여러 차례 금강산을 다녀온바 있다. 대형 유람선을 개조한 장전항의 해금강호텔에서 개최된 전국 국립대교수협의회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금강산 호텔에서는 남북 학자들 50여 명이 참가한 ‘남북(북남)관계의 발전과 학자들의 역할’을 주제로 한 학술토론회에도 참여한바 있다. 그곳의 이산가족 면회소, 평양 서커스 공연장, 간이식당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현대아산이 7천800억 원을 들여 지은 시설물인데 김정은은 이 시설을 싹 들어내라고 지시했다.북미 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김정은의 이러한 돌출선언의 배경은 무엇일까. 김정은은 일찍부터 금강산 관광 특구개발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원산의 갈마반도에 5성급 호텔을 여러 채 짓고, 마식령 스키장과 연계하여 금강산 관광 특구 사업을 야심차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유엔의 대북 제재는 대북 관광 자체를 봉쇄했다. 북한은 이에 동조하는 남한의 소극적인 자세에 불만이 많았다. 이것이 김정은이 남한의 건축물 철거를 위한 협상 통지문을 보내온 배경이다. 개성과 금강산에 막대한 재산을 투자한 남한 기업인들의 타들어 가는 심정은 어떠할까 짐작하고도 남는다.김정은의 금강산 시설물 철거 관련 발언은 그의 개혁 개방의 의지를 드러낸 측면도 있다. 그의 이번 금강산 현지 지도에 국무위 설계국장 마원춘과 외무 담당 최선희 등이 수행하였다. 그는 4개월간 보이지 않던 리설주까지 대동하였다. 이는 김정은 시대의 관광 개발 특구 정책을 가속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는 “금강산의 자연경관에 어울리는 현대적인 시설들을 북한식으로 새로 건설해야 한다”고도 하였다. 북한당국이 금강산 등 관광 특구를 본격화하기 위해서는 외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유엔의 대북 제재는 이를 기본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이번 철거 협상 제의는 외교적 협상이라는 ‘협박성 애걸’이 포함되어 있다.김정은의 이번 발언에는 선대(先代)의 관광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점이 포함되어 있다.그는 “‘선임자들의 대남 의존 정책’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국력이 여릴 적에 남에게 의존하려 했던 선임자들의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지목한 선임자가 김정일을 말하는지 담당 책임자를 말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북한 세습 체제의 특성상 그들이 절대시하는 수령보다는 관광 책임자를 일컫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실은 김정일도 과거 중국 상해를 방문하여 그의 부친을 원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애매모호한 발언이지만 후계자가 선대를 비판하는 듯한 발언은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3대 세습체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김정은의 이러한 발언은 북한 체제 변화를 위한 하나의 몸짓이라고도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금강산 관광시설의 철거를 위한 남북의 협상 과정을 지켜볼 수 밖에 없다.

2019-10-27

공수처 논란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안이 여야간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공수처 설치는 20여년 전인 1998년 처음 추진됐다. 1997년 금융위기, 한보 사태 등으로 정경유착이 ‘사회악’으로 지탄받을 때였다. 당시 여당(새정치국민회의)은 공수처를 ‘부패방지법’의 일부로 여겼다. 공수처가 ‘검찰개혁’의 상징으로 바뀐 건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때부터다. 이때의 공수처는 기소권이 없었지만 정치적 중립성이 문제가 됐다. 당시 야당(한나라당) 의원 30명은 “행정·입법에 이어 사법까지 장악하려는 의도”라며 결사 반대하고,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도 반발하는 등 갈등 끝에 무산됐다. 이후 2000년대 들어 스폰서검사 논란, 100억원대 수임료 수수사건, 넥슨과의 유착 의혹 사건 등이 잇따르면서 ‘검찰개혁론’에 힘이 실렸다. “검찰의 권한이 과도해 생기는 구조적 부패”란 지적이었다. 하지만 “공수처가 검찰개혁에 최선이냐”는 질문엔 여야간 이견이 크다. 필자는 검사출신으로 검찰개혁을 주장하다 조직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 국회에 입성한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이 쓴 ‘공수처에 반대하는 이유 3가지’란 글에 공감한다. 그가 든 첫째 이유는 공수처 설치는 새로운 권력기관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사법과잉’ ‘검찰과잉’의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 사회에 또 다른 특별권력기관을 만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두번째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지 않다. 일정한 직급 이상의 고위 공직자를 수사 및 기소하는 공수처는 전세계 어느 국가에도 없는 기관이다. 글로벌 스탠다드는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다. 대한민국 검찰에서 수사권을 폐지하거나 축소하면 바로 개혁이 이뤄진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세번째 공수처가 일단 설치되면 악용될 위험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찬성하는 사람들은 검찰 외에 공수처가 있으면 서로 경쟁하면서 국민들에게 봉사할 것이기 때문에 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조직원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역대 정권은 검찰 하나만 가지고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해왔는 데, 공수처라는 권력기관이 하나 더 생기면 전횡을 일삼을 위험성이 커진다.특히 금 의원이 지적한 세가지 이유 중 필자 역시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보장이 어렵다는 점에서 악용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는 데 주목한다. 공수처법안에 따르면 공수처장 추천위원 7명은 법무부장관, 법원행정처장, 대한변호사협회장, 여당추천 2인, 야당추천 2인으로 돼 있다. 이러면 야당 추천 2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위원이 모두 살아있는 권력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로 봐야 한다. 더구나 요즘처럼 야당이 분열돼 있는 상황에서는 야당 추천위원 한명은 친여성향의 사람일 수 있다. 결국 공수처장은 대통령의 정치성향에 따라 맞춰 움직일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이러니 권력남용의 위험이 있는 새로운 권력기관을 만드는 것보다는 기존 권력기관(검찰)의 권한과 힘을 축소하고, 제한하는 방향으로 검찰개혁을 이뤄나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

2019-10-24

“소통이 답”

종교지도자는 시국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할까 가끔은 궁금할 때가 있다. 정치적 편향성이 없는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의 눈에는 지금 우리 시대의 갈등 상황을 어떻게 볼지가 궁금하다는 뜻이다.고인이 된 김수환 추기경은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대표적 성직자다. 강압적인 정권에 맞서 싸우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 했던 그의 종교적 순수성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를 방문한 우리나라 종교계 지도자들이 대통령과 나눈 대화의 일부가 언론에 보도됐다. 정확한 그곳 분위기는 알 수 없지만 단편적 보도 내용을 살펴보면 분열과 갈등으로 나눠진 민심을 잘 수습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들이 오간 것으로 짐작된다.불교계를 대표한 조계종 총무원장은 원효대사의 화쟁(和諍)사상을 화두로 꺼냈다고 한다. 화쟁은 다양한 불교이론들 사이의 다툼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 소통으로 승화시키는 사상이다. 국민 통합을 잘 이끌라는 주문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천주교를 대표한 주교회의 의장은 “나와 다른 것을 틀리다고 규정하지 말라”는 주문을 했다. 이기적이고 아전인수식으로 기울어진 국민의 분열된 마음을 잘 수습해달라는 주문으로 보인다. 또 함께 참석한 천도교 대표는 여우와 두루미의 동화에 빗대어 작금의 사태를 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를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존경하는 처지에서 문제를 풀자는 뜻이다.종교계 지도자의 생각이 남다른 영향력이 큰 것은 어느 누구의 이익에 치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날 만남에서는 소통이 공통의 분모로 모아졌다. 소통은 상대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더 낮은 자세의 소통이 지금의 난국을 풀 해법으로 본 것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19-10-24

서로의 눈을 바라볼 때

2017년 12월 캠브리지 대학에서 진행한 ‘눈 맞춤’ 연구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어린 아기와 성인의 눈 맞춤이 서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아기와 성인 머리에 전기자극을 측정하는 모자를 씌우고 두 가지 실험을 진행합니다.첫 번째는 비디오 시청. 자장가를 부르는 연구원이 다양한 각도에서 아기를 바라보는 장면을 화면에 담아 8개월 된 신생아 17명에게 비디오 테이프를 틀어 줍니다. 비록 영상으로 본 것이지만 아기들은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눈을 맞췄는지 아닌지에 따라 뇌파에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두 번째 실험은 19명의 신생아를 실제로 마주 보고 연구원이 자장가를 부르며 여러 동작을 수행합니다. 아이들은 연구원이 자신에게 눈을 맞추어 줄 때 뇌파가 동기화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눈을 맞출 때 아기들은 더 자주 목소리를 내는 것도 입증합니다.이때 아기들이 낸 목소리가 연구원에게도 영향을 끼쳐 아이와 뇌파 동기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실험을 진행한 빅토리아 레옹(Victoria Leong)교수는 말합니다. “성인과 아기가 이야기를 나누며 눈이 마주칠 때 서로 간의 소통 의사를 교환합니다. 동일한 파장의 뇌파가 오고 간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공동연구자인 워스 박사는 말합니다. “눈 맞춤이 상호 뇌파 패턴을 일치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아기를 상대할 때 부모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더 다정하게 아기를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대화 중 평균 4초 내외 상대방의 눈을 한 번씩 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로 호감을 가진 경우 눈 맞춤 시간 평균이 8.2초라고 합니다. 의지적으로 우리가 서로의 눈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며 대화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눈을 마주 보며 우리 딱딱한 마음이 풀어지고, 얼었던 마음이 녹아질 수 있다면 일상은 기적이 아닐까요?/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0-24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서정주 시인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했지만, 내게는 딱히 그럴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 워낙 시골에 묻혀 살기도 했지만, 어디 간들 올바른 정신과 맑고 고운 심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 쉽겠는가.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도 그렇다. 사람들이 주는 기쁨과 위로보다는 사람 때문에 받는 실망과 고통이 더 큰 것이 현실인 것 같다.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상처입고 좌절한 사람들이 사람이 없는 산속에 들어가서 치유와 활력을 얻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사람을 싫어하거나 멀리하자는 말이 아니라 사람에게만 집착을 하여 실망하고 좌절할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날 중에 가장 좋은 날이다. 어느 계절이든 좋은 날이 없지 않지만 나는 청명한 가을날이 그중 좋다. 그 가장 좋은 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도 좋겠지만, 온전히 나만의 날로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혼탁한 인간사를 저만치 제쳐놓고, 그 보석같이 찬란한 날 속으로 들어가서 이것저것 보이고 들리는 대로 해찰하며 하루를 보내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누리게 되는, 사계절이 뚜렷한 금수강산에서 산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일 년 삼백육십오일, 비바람 눈보라 몰아치는 날이든 고요하고 청명한 날이든 사실은 어느 하루 축복이 아닌 날이 없다.우리가 누리는 산과 들 하늘과 바다는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들이다. 인간사회의 부귀영화나 지위권세 따위로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라 그렇다. 이렇게 좋은 날들을 두고 비관하고 절망해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인가. 저 가을 들판에라도 나가보라. 눈부신 가을볕과 시원한 바람이 나를 감싸고 코스모스, 쑥부쟁이, 산국, 구절초…. 풀꽃들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긴다. 아무 것도 나를 따돌리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오히려 반기니 자괴감이나 박탈감 따위를 가질 이유가 없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는 비록 초라한 존재지만 이 가을날 속에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는 오로지 나다.한가롭게 하늘이라도 쳐다볼 여유도 없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 재물을 모으고 높은 지위에도 올라서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던 사람들이 졸지에 망신살이 뻗쳐 만인의 지탄과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본다.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자부심과 자존감이 하루아침에 수치와 오욕으로 바뀌지 않던가.그러므로 무엇을 위해서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는 것에 박수를 보낼 일만은 아닌 것이다. 온갖 편법 탈법 불법으로 스펙을 만들어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는 부모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못해 주어서 자식에게 미안해 할 게 아니라, 적어도 그런 식으로 자식 교육을 시키지는 않았다고 오히려 자부심을 가질 일이 아닌가.모든 존재가 그렇듯 인생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살아있는 그 자체로 이유이고 목적이고 충만이다. 어쩔 수 없이 각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 수밖에 없는 처지지만, 이렇게 좋은 날에는 하루쯤 저 가을꽃들처럼 자족의 모습으로 나를 놓아두자.

2019-10-24

대통령의 한마디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헌법이고 법률인가? 과거 왕권시대나 독재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대통령의 한마디에 정책들이 수시로 바뀌는 모습을 보고 있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무슨 말을 또 할지 몰라 불안해하고 있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정책이 수시로 바뀐다.일관성이 결여된 정책들, 특히 교육정책이 그렇다. 대통령이 꺼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교육정책이 출렁거리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교육정책의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단편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내일이면 어떤 메시지가 나올지 몰라 교육 현장의 혼란은 극에 달하고 있다.대통령이 “대입제도 전반검토”하니까 대입제도를 다 뜯어고칠 듯이 북새통을 떨다가 “고교서열화 금지”하니까 당장 자사고, 외고, 국제고 등 특성화고교 모두를 일괄 없앤다는 발표가 있었다. 당초 단계적 폐지 정책은 대통령 한마디로 판이 뒤집혔다. 다시 정권이 바뀌면 폐지된 특성화 고교를 다시 부활시킬지도 모른다.특성화고와 자사고를 만들 때는 그만한 타당성이 있어 만든 것인데 그런 타당성을 외면한채 대통령 말 한마디로 고교의 폐지를 무슨 나무하나 베는 것으로 생각하니 참으로 개탄할 노릇이다. 또 “정시모집 확대”하니까 정시모집을 마지노선인 30% 이상으로 올리겠다는 정책이 발표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교육공정성 강화특위’를 만들어 11월께 ‘대입제도 개편안’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한다.도대체 이런 식의 조령모개식 교육정책이 있을 수 있는가? 내일이면 어찌될지도 모르는 정책을 그저 대통령의 한마디에 이리저리 좌우되는 형국은 정말로 개탄스럽다.교육정책만이 아니다. 과거 편의점 출점 규제도 대통령 지시로 뒤집혔다. 공정위는 새 편의점을 차릴 때 다른 편의점과 50∼100m 이상 거리를 두게 하는 ‘자율규약’을 승인해달라는 편의점산업협회 요청을 ‘담합’이라는 이유로 거절했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편의점 과밀 문제를 해소하라”고 지시하자 갑자기 입장을 180도 바꿔 업계 요구를 받아들였다.원전정책도 그러했다. 대통령의 “원전폐기” 공약은 우리나라와 같이 자원이 없는 나라는 산업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원전이 필수적인 데, 나라를 혼란으로 몰고 있다. 우리가 발전시켜온 원전기술은 세계 원전수출이라는 블루오션을 맞을 수 있고 대체에너지의 현실적 타당성이 부족한데도 대통령 한마디가 원전정책을 좌우하고 있다. 말썽 많은 한전공대 설립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의 공약사업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외에는 아무런 정당성을 찾을 수가 없다.정부 정책은 무엇보다 공정하고 예측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국민생활의 근간을 흔드는 정책이 언제 뒤집힐지 모르면 국민은 혼란스럽다. 이제 우리도 대통령 말 한마디로 주요 정책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그런 수준의 국가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정 발전된 국민의 의견이 수렴되고 국민을 안심시키는 그런 안정된 국가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정부는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롭다”는 참 멋진 말을 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과정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이고 결과는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2019-10-24

어떤 지식을 습득할 것인가?

현대 지식 상황의 특징 하나는 지식의 범람일 것이다. 어느 쪽으로도 찾기만 하면 얼마든지 충분한 양의 지식 정보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자본주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할 때 자본 쪽을 옹호하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지식들을 찾아 나설 수도 있고, 반대로 노동 쪽을 강조하는 지식들을 선호할 수도 있다.두 방향 다 지식은 넘쳐난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공부하든 그 선택을 위한 공부거리는 널려 있다. 어느 방향이든 상당한 수준까지는 논리를 구축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은 제공되는 것이다.같은 이야기를 식민지 근대화 문제를 논의하는 데도 적용할 수 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가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했고, 때문에 일제에 의한 지배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을 위한 지식은 그 시대의 통계자료들이나 지금 시대의 연구논문들 가운데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이 사람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부정할 만한 통계자료는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사실은 꼭 그렇지는 않다.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인의 인간됨을 부정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지, 그 시대에 한국의 물자와 노동력이 얼마나 많이 유린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자료들도 적지 않다.근대화 과정은 수량중심적으로 계산되곤 하기 때문에 식민지근대화론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더 많고 또 더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외형적, 가시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측정가능한 근대과학, 근대경제학의 약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이 근대과학, 경제학이 아직 측정하지 못한 인간고통의 양적, 질적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면, 아니 거기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식민지근대화론의 논리를 반박할 만한 사실적 자료들을 보다 성실하게 모아놓을 수만 있다면 일제에 의한 폭력적 지배를 부정할 수 있는 논리는 얼마든지 치밀하게 재조립할 수 있다.진짜 문제는, 따라서, 어느 방향으로 자신의 지식을 쌓아 나가고 무엇을 위해 논리를 정당화 할 것인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 그 자신의 선택이다. 만약 폭력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근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길을 따라가면 된다. 그러나 그는 이 근대화가 완숙단계에 접어든 오늘도 여전히 비민주적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기 쉽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그와는 다른 길이 열려있음을 고려하지 않는다.나는 지배와 폭력을 당연시하거나 정당화하는 논리는 생리적으로 싫다. 나의 이 생리가 학문적으로도 더 많은 올바름을 향해 열려있기를 말할 뿐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