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은퇴를 앞두고 있다면 공부하자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지금 지구촌은 ‘지속가능’이라는 공통된 숙제 해결에 골몰하고 있다. 이 말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전 세계가 한 목소리로 이 지속가능이라는 목표에 동참할 정도로 옳은 이야기지만 그것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크다고 여겨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지구촌의 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세계의 산업경제가 발전하는 동안 지구 생태계가 병들고 급기야 인간의 생존까지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음을 이제야 깊이 인식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포항도 지구촌의 축소판과도 같은 발전 과정을 거쳤다. 시로 승격한지 1년 만에 발발했던 한국전쟁은 도시 포항의 모습을 거의 지워버렸다. 당시 포항시민 즉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은 생업의 터전이었던 바다가 메꾸어지고, 울창했던 산림과 산허리가 잘려나가고, 마실 정도로 맑았던 강물이 막히거나 오염되는 것 정도는 신경쓸 겨를조차 없었다. 당장 내 가족이 머물 곳을 마련하고 배불리 먹일 수만 있기만을 바랐다. 희망찬 ‘내일’보다 당장 눈앞의 ‘생존’이 중요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오륙십년이라는 세월 동안 포항시 인구는 6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늘어났고, 국가경제 성장에 필요한 산업의 쌀인 철강을 공급하였다는 자부심도 가지게 된 반면 원래 지녔던 적지 않은 천혜의 자연과 생태환경을 잃어버린 것도 사실이다.지금 포항시는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지역경제의 주력산업이 성숙기에 접어들어 과거와 같은 급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데다 인구사회구조도 저출산과 고령화가 빠르게 진전되고 있다. 더구나 과거처럼 환경파괴와 같은 것을 도외시한 채 무분별한 개발로 성장을 견인하는 방법은 쓸 수도 없는 상황이다. 결국 다른 나라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포항도 언젠가 ‘소멸도시’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속에 ‘지속가능’을 보다 분명하게 의식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다행히도 포항시는 상대적으로 다른 곳에 처지지 않는 ‘지속가능’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포항시는 대구·경북지역의 유일한 바다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 동해안에서 유일하게 국제화물과 국제여객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영일만항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조만간 영일만항까지 철도망이 진입할 수 있는 인입철도가 연결되고, 국제페리선이나 국제크루즈선을 타고 해외에서 관광방문객이 찾아올 수 있는 국제여객부두도 완공을 앞두고 있다.포항시가 추구할 ‘지속가능’의 방법론은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국제항만도시’라는 정체성을 포항시와 시민들이 어떻게 정립하고 활용해 나가는가에 성공여부가 달려있다고 본다. ‘환동해권’을 좁은 시각으로 보면 한반도 동해안과 중국 동북3성, 러시아 극동연방관구 그리고 일본 서안지역 정도다. 이 권역에서 국제 화물과 국제여객을 수용 가능한 해외관문 가운데 포항은 충분히 거점도시로서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 환동해는 영일만항을 거점으로 포항시가 앞으로 확장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잠재적인 경제영토인 셈이다.그런 의미에서 은퇴한 산업역군, 사업가, 연구원 등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포항시민은 포항시가 ‘지속가능’을 추진하는데 최고의 자원이며 바로 그들이 주역이 되어야만 한다. 포항의 미래 경제영토인 환동해권과 이들 시민은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포항에는 특급호텔이 없는 것이 약점이라고 한다. 하지만 포항에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은퇴자나 은퇴예정자들도 많다. 이왕이면 이들이 영어 외에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중 하나 정도는 더 공부하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준비된 시민들부터 국내외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홈스테이를 추진하였으면 한다. 그럴 경우 포항은 미래 경제영토인 환동해권을 선점하며 ‘지속가능한’ 해양관광도시 포항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2019-08-13

두 청년이 의기투합할 때

시카고 대학은 1892년 록펠러의 전폭적인 투자로 멋진 캠퍼스를 갖추고 탄탄한 교수진을 꾸렸지만, 삼류 학생들이 모이는 대학이었습니다. 재단에서는 학교를 이끌어갈 젊은 지도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발굴한 새 총장은 예일 대학에서 법학대학원장을 맡고 있었던 30세 젊은 청년 로버트 허친스입니다.허친스는 컬럼비아 대학 교육학자인 절친 27세 모티어 J. 애들러 박사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애들러 박사는 허친스에게 두툼한 목록 하나를 보내지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저서(Great Books) 목록이었습니다.애들러는 제안합니다. “만약 시카고 대학에서 이 위대한 저서들로 학생들을 가르쳐 보실 의향이 있으면 저도 함께하겠습니다.”허친스 박사는 목록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목록에 자신이 읽은 책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죠. 신입생들 가운데 뛰어난 학생 20명을 뽑습니다. 매주 두 시간씩 고전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시작하지요. 허친스는 20대 초반 학부생들과 매주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입니다. 고전 30권 정도를 독파해 나갈 무렵부터 변화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50권을 넘긴 시점부터는 학생들의 질문의 깊이, 생각의 폭, 점과 점을 잇는 상상의 능력,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해 삶에 적용하는 힘이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100권에 도달할 때 학생들이 지닌 잠재력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허친스 총장과 애들러 박사는 시카고 대학 전체에 고전 읽고 토론하기 프로그램을 전격 도입합니다.기득권 교수들의 극심한 반대와 모함에도 1930년대부터 시카고 대학의 커리큘럼은 고전 100권을 읽고 토론하는 세미나가 핵심 프로그램으로 바뀝니다. 이후 시카고 대학 학생들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1930년대 후반부터 2010년에 이르기까지 시카고 대학 출신들이 받은 노벨상이 81명에 이릅니다. 시카고 대학 교수진의 반발 등으로 허친스 총장의 실험은 22년 후 중단되고 말았습니다만, 분명한 열매가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고전 토론이 직업을 얻는 기술을 직접 가르쳐 주지는 않습니다만 ‘나다움’이 무엇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내 삶의 롤 모델은 누구인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음은 확실합니다. 먹구름 너머 눈부신 삶으로 우리를 이끄는 확실한 도구는 책 중의 책 고전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8-13

지방대학의 몰락

‘인서울 대학’은 90년대 유행한 용어다. ‘Universities in Seoul’의 영어 표현에서 따왔다. 서울시 내에 소재한 대학을 총칭하는 말이다.서울 쪽으로 정치와 경제 등 모든 것이 집중되면서 우스갯소리지만 그 시절에는 서울과의 거리에 따라 지방대학을 다르게 호칭했다. 서울 안에 있는 대학을 ‘인서울 대학’이라 했고,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수도권에 있는 대학은 ‘서울 약대’라 했다. 서울에서 약간 떨어진 대학이란 뜻이다. 서울에서 그런대로 다닐만한 충청권에 있는 대학은 ‘서울 법대’다. 서울에서 제법 떨어진 대학이란 말이다. 경상도, 전라도와 같이 아예 멀찌감치 떨어진 대학은 ‘서울 상대’다. 서울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대학이란 뜻이다.모든 잣대가 서울 중심이다. 어느 때부터 서울에 소재해야만 우수대학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다. 지방대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퇴조의 길을 걷고 있었다. 과거에는 서울의 몇몇 대학을 빼고는 우수한 대학은 지방에도 골고루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국가정책의 수도권 집중화로 지금은 지방대학이 설 자리를 잃었다. 벼랑 끝 신세다.외국 어느 나라에도 찾아볼 수 없는 비정상적 현상이다. 미국, 영국은 물론 가까운 일본과 중국도 이 정도는 아니다. 나라마다 지방에도 명문대학이 고르게 분포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의 특수한 여건이라고 하기에는 국가 시책의 잘못이 너무 컸다.서울과 지방으로 극단적으로 갈라진 한국의 대학구조는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내년부터는 하위권 대학부터 치명적 타격을 입는다. 교육부에 따르면 내년도 대입가능 자원은 올해보다 4만6천여명이 줄어든 47만9천여명이다. 작년 대입정원 기준보다 1만7천여명이 적다. 대입자원을 40만으로 잡고 지난해 전국 372개 대학의 입학정원을 토대로 학생을 순차적으로 채워간다고 했을 때 하위 180개 대학의 신입생 수는 0명이 된다. 기막힌 현실이다. 지난해 지방대 입시 경쟁률은 수도권 대학의 절반 수준이다. 이런 추세라면 지방대학의 몰락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지방도시의 황폐화를 예고하는 현상이나 마찬가지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지방대학을 살릴 묘안이 필요한 때다. /우정구(논설위원)

2019-08-13

미중 갈등의 해결점

김학주 한동대 교수미국은 3천억달러에 이르는 중국산 제품에 대해 다시 10%의 관세를 부과했다. 미국이 관세를 부과하면 중국산 제품이 비싸지게 되는 셈인데 중국 정부는 통화가치를 마지노선이라고 여겼던 달러당 7위안이 넘도록 절하시키며 수출제품 가격을 다시 낮추려고 한다.중국정부는 미국에 대한 보복으로 당장 미국국채를 팔기보다 위안화 가치 절하를 선택했다. 중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2016년처럼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며 중국 본토의 자금을 빼 가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이 금리인상 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사실 미국 기업들 가운데 신용등급이 투자적격의 최하단인 BBB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구경제 한계기업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고, 이들이 정크(junk)수준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미국정부는 금리를 인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시각이다.특히 미국은 그동안 자국의 금리 인상을 통해 중국 위안화를 절하시키는 게임은 해봤지만 중국정부가 위안화를 절하시켰을 때 미국 스스로가 달러를 절하시켜 위안화 절하를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그래서 트럼프는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정해 놓고 관세뿐 아니라 자금조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재(sanction)로 넘어가려 한다.시장에서는 미국이 어떤 새로운 제재를 내 놓을지 모르는 불확실성 때문에 주가가 폭락했다. 하필 그 때가 월요일이라 1987년 10월 19일에 있었던 블랙먼데이를 연상시켰다. 그런데 상황은 그 때와 비슷하다. 미중 갈등이 주가 폭락에 불을 붙인 것은 맞지만 그 파괴력은 컴퓨터 프로그램 매수세를 비롯한 쏠림 현상이 만든 주가 거품의 붕괴였다. 특히 리만사태 이후 각국 정부는 투자은행들의 위험관리를 위해 그들의 고유계정을 줄이도록 규제해 왔다. 즉 지금처럼 단기 매물이 출회될 때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받아줄 수 있는 기관들(market maker)의 자금 규모가 줄어 변동성이 더 확대되는 부분이 있다.트럼프는 겉으로 무역적자에 대한 불만을 쏟아 낸다. 그러나 핑계다. 미국이 중국에 대해 무역적자를 줄일 수 있는 대안이 당장 여럿 있기 때문이다. 갈등의 내막은 패권 다툼이고, 따라서 단기적으로 싸움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미국도 시간이 갈수록 골치 아파지는 문제가 있어 다툼을 계속하기 어려울 것이다.대표적인 문제가 셰일(shale) 유전이다. 그 동안 셰일 가스 덕분에 미국은 에너지 패권을 유지하고 고용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그랬던 셰일 유전들이 애물단지가 될지도 모른다. 셰일 유전의 손익분기점은 유가가 서부텍사스중질유(WTI) 기준 배럴당 50달러선으로 알려져 있으나 운영비가 제외된 수치이므로 이를 포함하면 60달러로 추정된다. 현재 WTI는 55달러 근방이므로 많은 셰일 유전들이 손익분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저금리 덕분에 좀비처럼 생존해 있다.셰일 광산 투자자들이 기대했던 채굴생산성은 둔화되고 있고, 환경 부담만 가중될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내 셰일 가스를 운송하는 파이프가 빠르게 확충되어 셰일 가스의 공급과잉도 우려된다. 현재 파이프로 운송할 수 있는 셰일 에너지의 양은 하루 220만 배럴인데 2020년까지 640만 배럴, 2021년까지 790만 배럴로 공급능력이 급증할 예정이다. 특히 셰일 가스는 경질유인데 그것을 가져다 쓰는 정유업체는 중질유와 경질유의 균형을 요구하는 바, 셰일 가스의 수요가 제한된다.결국 이런 셰일 가스의 공급 과잉분을 누가 사 주어야 하는데 다행히도 대기오염으로 몸살을 하는 중국은 석탄을 청정에너지인 천연가스로 바꿀 의향이 있다. 지금은 미중 패권 다툼으로 인해 미-중간 셰일 에너지 교역이 막혀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미국 셰일 유전의 공급과잉이 심각해질 것이므로 미국이 중국에 셰일 에너지를 수출하며 타협할 것으로 보인다.

2019-08-13

고려 말 중국에서 들어와 조선시대 국립대학 ‘학식(學食)’으로 말복때 수박 하나씩 하사

늦여름이다. 수박 철이다. 이른 수박들이 흔하고, 한겨울에도 수박이 나온다. 수박이 제철을 잃었다. 수박 제철은 늦여름이다. 목은 이색(1328~1396년)이 남긴 시가 있다. 제목은 ‘수박을 먹다’이다. “마지막 여름이 곧 다해 가니/이제 수박[西瓜]을 먹을 때가 되었다/(중략)/하얀 속살은 마치 얼음 같고/푸른 껍질은 빛나는 옥 같다”(목은시고). 수박은 고려 말, 한반도에 전래 된 후, 조선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흔하게 재배했다. 여름의 끝자락, 수박으로 마지막 더위를 보낸다.다산 정약용의 귀양살이는 모두 세 번이다. 전남 강진의 귀양살이는 세 번째로 마지막이다. 첫 번째는 서산 해미, 두 번째는 장기였다. 장기는 지금 포항시 남구 장기면이다. 강진 귀양살이 중, 다산은 필생의 역작을 대부분 완성한다. 앞서 두 번의 귀양살이에서는 몇몇 시를 남겼다. 그 시에 수박이 등장한다. ‘다산시문집_제1권_시’의 ‘온천에서 느낌을 쓰다’다.경진년 과거사를 또렷하게도/유민들이 이제껏 얘기를 하네/복성이 세자 행차 따라왔는데/한밤중 높고 맑은 노래 들렸네/쌀 주어 망가진 밭 보상하였고(賜米酬殘圃)/조세 감면 장마의 피해 위문해/내린 분부 사신이 따르지 않아/울분에 찬 백성들 마음 보겠네온천은 온양이다. 시에는 ‘수박’이 등장하지 않는다. 설명이 필요하다. 다산의 첫 번째 유배는 ‘정치적 쇼’다. 1790년 2월, 다산 스물아홉 살.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9품의 소박한 자리지만 청요직(淸要職)이다. 반대파가 모함하고, ‘절대 불가’를 외친다. 정조는 ‘임명 강행’이다. 다산이 엉뚱하게 사직을 고집한다. 다툼은 임명권자 정조와 피 임명자 다산 사이로 번진다. 정조는 다산의 ‘사직 상소’를 ‘명령 불복종’으로 몰아붙인다. 서산 해미로 귀양. 1790년 3월 10일, 다산이 귀양지로 출발, 3월 13일 귀양지인 해미 도착, 3월 22일 해배. 겨우 열흘 정도의 유배. ‘정치쇼’라고 여기는 이유다.위 시는 돌아오는 길에 온양에 들러 남긴 것이다. 경진년은 1760년(영조 36년)이다. ‘경진년 과거사’는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온양 온천에 들렀을 때 있었던 일이다. 다산은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온양에 들렀고, 이때, 30년 전 장헌세자가 온양에 왔던 일, 당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현지 노인에게 듣는다. 그중 하나가 ‘쌀 주어 망가진 밭 보상하였고(賜米酬殘圃)’라는 부분이다. 상세한 내용이 남아 있다.장헌세자를 호위하던 금군(禁軍)의 말[馬]이 동네 주민들의 수박밭을 짓밟았다. 수박과 수박 넝쿨이 엉망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장헌세자가 밭 주인에게 ‘쌀’로 배상하고, 밭의 성한 수박들은 금군에게 내려 주었다는 내용이다. 백성들의 우레같은 함성이 뒤따랐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다산은 온양에서 사도세자의 발자취를 말끔히 정리정돈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정조 어필 ‘영괴대(靈槐臺)’는 당시 다산이 주관, 세운 것이다. 장헌세자는 정조에게 아버지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장헌세자의 자취를 다산이 끄집어내어 결국 정조 어필의 비석까지 세우게 했다. 정치적이다. 짧은 귀양을 ‘정치 쇼’라고 보는 이유다.포항 ‘장기의 수박’은 슬프다. ‘다산시문집_제4권_시’의 ‘장기농가(長鬐農歌) 10장’ 중 일부다. 장기에서 보낸 유배 기간은 220일이다. 그때 지은 시의 일부다.(전략) 호박 심어 토실토실 떡잎이 나더니만/밤사이에 덩굴 뻗어 사립문에 얽혀 있다/평생토록 수박을 심지 않는 까닭은(平生不種西瓜子)/아전 놈들 트집 잡고 시비 걸까 무서워서라네(후략)‘장기농가’는 ‘장기 농촌 노래’쯤 된다. 다산은, 당시 장기에 살던 농민, 어민들의 삶을 마치 그림처럼 상세히 그렸다.‘온양 수박’은 1760년이다. ‘장기 수박’은 1801년이다. 40년을 두고 두 지역에 모두 수박 재배가 흔했음을 알 수 있다. 장기의 농민들이 수박을 기르지 않는 것은 슬프다. 세금 때문이다. 수박 역시 먹으려고 기르는 것이 아니다. 내다 팔려니 세금 문제가 걸린다. ‘장기 수박’은 명백하게 환금작물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미 수박은 널리 퍼져 있었다.다산은 시에서 수박을 ‘서과(西瓜)’라고 표현했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수박을 이렇게 부른다. ‘서(西)’는 어느 지역의 서쪽일까? 중국의 서부 지역인 우루무치 일대다. 정확히는 중국인들의 ‘과일창고’라고 불리는 우루무치, 투루판 일대다. 포도의 당도가 세계 제일이고, 살구, 수박 등이 아주 좋다. 중국인들에게 우루무치 일대는 서역(西域)이다. 수박은 이 지역에서 전래 되었다. 수박을 서과, 서쪽에서 온 과일이라고 부르는 이유다.우리는 중국을 통해서 수박을 받아들였다. 그까짓 수박, 어디서 온들 무슨 이야깃거리랴, 싶지만 우리 선조들은 그렇진 않았다. 모든 과일, 채소 등이 어디서 왔는지 관심이 깊었다.수박의 전래에 대해서 비교적 정확하게, 그러나 혼란스럽게 기록한 이는 교산 허균(1569~1618년)이다. 교산은 ‘성소부부고_26권_설부’에서 수박의 한반도 전래를 명확하게(?) 밝힌다.수박[西瓜] : 고려 때 홍다구(洪茶丘)가 처음 개성(開城)에다 심었다. 연대를 따져보면 아마 홍호(洪皓)가 강남(江南)에서 들여온 것보다 먼저일 것이다. 충주에서 나는 것이 상품인데 모양이 동과(冬瓜 동아)처럼 생긴 것이 좋다. 원주(原州) 것이 그 다음이다.제법 정확하게 보이지만 아리송하다.홍다구가 홍호보다 빠르다고 했다. 틀렸다. 홍호(1088~1155년)는 중국 남송 시대 관리다. 홍다구(1244~1291년)는 고려 원종, 충렬왕 때 원나라의 고려 침략 앞잡이 노릇을 했던 이다. 홍호는 홍다구보다 1세기 이상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홍다구가 먼저 수박을 전래했을 리가 없다.홍호의 이력을 보면, 그가 수박을 봤을 리도 없다. 수박은 열대성 과일이다. 홍호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고 15년 후 남송으로 돌아왔다. 금나라는 북방 유목민족의 국가다. 홍호가 강남에서 들여왔다? 믿기 어렵다.수박은 12세기경 서역에서 비단길을 통해 중국에 전해졌다고 추정한다. 고려에 전해진 것은 13세기, 홍다구에 의해서라는 표현이 오히려 맞다. 모양이 동과처럼 생겼다고 했다. ‘동과’는 오늘날의 동아다. 겉껍질은 박처럼 생겼고 크고 길쭉하다. 수박 중 둥근 것이 있고 긴 것이 있다. 길쭉하게 생긴 것이 좋다고 했다.수박의 모양에 대해서는 기록들이 일치한다. 교산 허균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옥담 이응희(1579~1651년)는 수박을 두고, “서역에서 온 특이한 품종/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던가/녹색 껍질은 하늘빛에 가깝고/둥근 몸은 부처의 머리와 같다”라고 했다(옥담사집). 부처의 머리 모양은 동그랗지 않고 길쭉하다. 교산의 말과 일치한다.한치윤(1765~1814년)의 ‘해동역사’에서는 ‘고려도경’을 인용, “고려에는 능금, 복숭아, 배, 대추 등과 더불어 ‘과(瓜)’가 있다”고 했다. 이 내용을 근거로, “고려 시대에도 수박이 있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지는 않다. ‘고려도경’의 ‘과’가 서과 즉, 수박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고려도경’을 지은 송나라 사신 서긍(1091~1153년)이 고려에 온 것은 1123년이다. 홍다구보다 앞선다. 수박을 ‘서과[西瓜]’라고 부르지만, 오이[瓜, 과]와는 아주 다르다. ‘고려도경’의 ‘과’는 수박이 아니다. 시기적으로도 너무 이르다.수박의 전래에 대해서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이유원(1814~1888년)의 말이 믿을 만하다. ‘임하필기_제32권_순일편_서과’의 내용이다.어떤 사람이 서과는 원나라 세조 때부터 중국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초기에 절강의 순안 사람 방기는 이미 시를 짓기를, “줄줄이 이어진 꽃무늬는 침에 젖어 푸르고, 가닥가닥 붉은 속살은 멍이 들어 붉구나.[縷縷花衫粘唾碧 痕痕丹血搯膚紅]”라고 하였으니, 이때 절강에 이미 서과가 있었던 것이다. (중략) 송나라 말기 방회의 시에도, “서과는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니, 옥같이 푸른 껍질을 자르네.[西瓜足解渴 割裂靑瑤膚]”라고 하였고,(중략) 호교의 “함로기”에, “내가 회흘(回紇)에서 서과 종자를 얻었는데 말[斗]같이 큰 열매가 달려 서과라 불렀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서과는 호교를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중략) 우리나라는 경기의 석산(石山)과 호남의 무등산, 평안도의 능라도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씨가 검은색이다.회흘은 위구르 카칸국이다. 위구르, 우루무치, 투르크, 돌궐 등은 동의어거나 연관이 깊다. 즉, 중국의 수박(서과)은 오늘날의 우루무치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한반도 전래는 그보다 뒤인 고려 말기다. 홍다구의 개성 수박 시험 재배(?)가 믿을 만하다.수박이 희귀한 과일은 아니었다. 다만 수박은 귀하게 사용되었다. 여름철 종묘에 천신하는 물품으로 앵두, 보리, 수박[西瓜], 참외 등이 등장한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여름철에는 특별히 수박을 지급했다. 조선 후기 문신 무명자 윤기(1741~1826년)는 ‘무명자집’에서 “성균관 유생들에게, 초복에는 개고기 한 접시, 중복에는 참외 두 개, 말복에는 수박 한 개를 준다”고 했다. 조선 시대 ‘국립대학의 학식(學食)’이다.당뇨로 고생하는 이들도 수박을 귀하게 여기며 먹었다. 조선 초기 문신 사가정 서거정(1420~1488년)은 “10년 묵은 소갈병이 수박을 먹으면서 시원하게 낫는 듯하다. 약재보다 수박이 오히려 낫다”고 했다.(사가시집)/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8-12

세계가 주목하는 전시가 포항에서!

1957년 9월 26일 목요일 저녁, 서독의 도시 뒤셀도르프(Dǖsseldorf)의 어느 공장건물에서 미술전시회가 열렸다. 작품 전시를 위한 격조 있는 공간도 아니었고, 격조를 차릴 만큼 유명한 미술가들이 참여한 것도 아니었다. 1950년대 후반, 2차 세계대전으로 초토화되다시피 한 독일에서 미술을 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사회적으로 비상식적인 일이었는지 모른다. 예술이 언제 한 번 이라도 상식적인 적이 있었느냐마는, 정말이지 그 시절에 미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더더욱 아무런 존재감도 없던 20,30대 젊은 미술가들에게는 어떠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젊은 미술가들은 작품 활동을 이어갈 방법을 모색하던 중 조건이나 형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전시형태를 고안해 낸다. 아무 곳이나 전시장이 될 수 있었고, 원한다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는 그런 전시회였다. 격식을 차린 개막식 따위는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서서히 음악 소리가 커졌고, 맥주를 든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파티의 시작이 곧 전시회의 시작이었고, 파티가 끝이 나면 전시도 함께 막을 내렸다. 미술가들은 이 전시를 ‘저녁전시’(Abendausstellung)라 불렀고, 이곳에서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미술운동 ‘제로’(ZERO)가 태어났다.‘제로’는 1950년대 후반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태동한 ‘국제미술운동’이다. 주축이 되었던 것은 독일 출신의 미술가 하인츠 마크, 오토 피네, 귄터 위커이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중심은 유럽에서 뉴욕으로 넘어갔다. 유럽에서 망명한 미술가들의 영향 아래 잭슨 폴록, 바넷 뉴먼, 마크 로스코 등 이른바 ‘추상표현주의’ 미술가들이 등장해 미국미술을 이끌어 갔다. 1960년대 초 미국에서는 소비문화와 상업주의적인 미술경향을 반영하는 ‘팝아트’가 유행했다. 유럽에서 문화와 역사를 상징하면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던 미술작품은 이제 대량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이 되었다.이 무렵 유럽 전역에 걸쳐 전통미술과 결별을 선언한 전위적인 미술가 그룹이나 미술운동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스페인에서는 ‘에키포 57’(Equipo 57)가, 파리에서는 누보 레알리즘(Nouveau Réalisme)이, 이탈리아에서는 ‘그루포 엔’(Gruppo N) 그리고 독일 뒤셀도르프에서는 ‘제로’가 태동했다. 당시 유럽의 미술가들에게는 극복해야만 했던 두 가지 시대적 과제가 있었다. ‘전쟁으로 단절되고 왜곡된 전통미술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하는 것과 ‘상업적으로 퇴색되어버린 미술의 본질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진취적인 미술가들의 다양한 미학적 시도들 중 연속성을 가지며 국제적으로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 제로이다.1958년 마크와 피네는 ‘제로’라는 제목의 미술 매거진을 출판했다. 숫자 ‘영’(0)을 뜻하는 제로에는 과거에 속박되지 않는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했던 젊은 미술가들의 미학적 염원이 담겨 있다. 20세기 초 유럽은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경험했다. 전쟁이 보여준 반인륜적 학살과 파괴는 모든 것을 일순간 앗아가 버렸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그로 인한 상처와 공포는 쉬 잊히지 않고 집단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모든 것이 파괴된 현실, 그렇다고 전쟁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려놓을 수 도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실존적 빈사상태에서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무전제적으로 초기화(reset)하여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자 한 미학적 태도가 바로 제로라는 말에 담겨 있다.미술가와 미술이론가들의 글이 수록된 제로 매거진은 1958년과 1961년 걸쳐 모두 세 차례 발간되었으며, 개별 호의 출판에 맞춰 국경을 뛰어넘는 미술가들로 구성된 전시회가 함께 진행되었다. 출판을 매개로 국제적인 미술가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 전시와 행위예술, 관람객들이 참여하는 이벤트 등 당시로서는 너무나 진보적인 형식들이 과감하게 실험되었다. 1966년 제로의 활동이 공식적으로 종결될 때까지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의 10여개 나라에서 온 40여명 이상의 미술가들이 제로의 활동에 동참했다. 특히 이브 클라인, 피에로 만초니, 루치오 폰타나, 쿠사마 야요이 등과 같이 국제적인 명성을 떨쳤던 미술가들은 제로가 태동하는데 결정적인 미학적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제로에 참여한 미술가들에게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예술과 기술이 융합되고 빛이나 움직임 등과 같은 비물질적인 재료를 작품에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하인츠 마크는 알루미늄의 재료적 특징을 이용해 빛과 움직임이 서로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조각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는 문명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빛’(pure light)을 찾기 위해 1959년 ‘사하라 프로젝트’를 계획했던 3년 뒤 실행에 옮긴다. 우주인 복장을 갖추고 광활한 사하라 사막에서 모래와 바람 빛을 이용한 실험적 퍼포먼스를 진행했다.오토 피네는 불로 그림을 그렸다.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고 불을 가해 이미지를 만들었다. 감상자가 보는 것은 불에 녹아 흘러내리거나 검게 그을린 물감의 흔적들 뿐이지만 사실 이러한 작품을 가능하게 한 근원에는 공기가 있다. 공기가 없다면 불은 존재할 수 없다. 피네에게 있어서 공기는 무언가를 실존하게끔 해주는 정신성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미술을 가능하게 끔 해주는 창조적인 정신과 다르지 않았다.귄터 위커는 ‘못’이라는 소재로 명상적인 작품들을 선보이면서 국제적으로 크나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망치로부터 힘이 가해지면 못은 무언가를 뚫어 버리는 파괴력을 지닌다. 철이라는 차가운 재료의 속성과 뾰족하고 날카로운 형태 때문에 못은 폭력과 고통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커의 경우는 다르다. 위커에게 중요한 것은 못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못을 박는 반복된 행위이다. 그는 못을 박아 그림을 그린다. 못과 못 사이의 간격에 따라, 들어오는 빛의 방향에 따라, 감상자의 위치에 따라 새로운 형태들이 만들어 진다. 위커 역시 못이라는 물질적 재료를 작품에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본질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비물질적 정신성이었다.1950년대에서 60년대로 넘어가던 길목,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접어들던 변화의 시기에 제로는 미술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가치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움직이는 작품이 탄생했고, 빛과 공기가 작품이 되었고, 미술가와 감상자의 간극이 사라지는 상황 그 자체가 미술작품이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경계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림이다’, ‘조각이다’ 하던 미술 장르간의 경계가 사라졌고, 국가 간의 경계도 사라졌다. 미술작품은 반드시 물질적으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원칙조차 사라졌다. 일시적인 행위가 미술이 되거나, 보존하거나 보관할 수도 없는 거대한 자연이 작품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현대미술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선구적인 미술운동이 ‘제로’이다. 제로 미술가들의 주요 작품들은 9월 3일부터 아시아 미술관으로는 처음으로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19-08-12

영화 ‘기생충’이 보내는 메시지

강희룡 서예가사람에게 기생충(寄生蟲)은 이나 벼룩 같은 외부 기생충과 회충 또는 십이지장충 같은 내부 기생충이 있다. 조선의 허준(1539~1615)이 지은 동의보감도 대부분 중국의 각종 의서 내용들을 그대로 인용하는 데 그쳤다. 그 예를 보면 ‘사람이 고단할 때 열이 있으면 충이 생기는데 이 심충(心蟲)을 회충, 비충(脾蟲)을 촌백충(寸白蟲), 폐충(肺蟲)은 누에와 같으니 모두 사람을 죽이는 병으로서 그 중 폐충이 가장 급한 병이다’ 라고 천금방(千金方)의 기록을 인용했다.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관객수 1천만을 넘었다. 인간 기생충을 다룬 이 영화는 한국 최초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영화의 흥행은 현실의 사회상을 반영한 대중성이 높을수록 성공한다.내용을 살펴보면, 지상과 지하를 경계로 지상의 집에 도착해도 다시 계단을 오르는 부유층과 반지하에서 작은 창문 틈을 통해 위를 봐야 세상이 보이는 지하방, 그리고 더 지하로 내려가서 사는 하층계급을 다룬다.이 영화에는 계획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부자인 IT회사 사장은 직원들과 회사경영의 계획을 세우며 그 계획을 성공시켜 부를 이루지만, 가난한 계층은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계획대로 안 되니, 하루하루를 살며 무계획을 계획으로 살아가게 된다.땅을 경계로 지상과 지하 즉 피라미드형 사회적 계층으로 지상은 언제나 풍족하고 폭우 앞에서도 걱정 없지만, 반지하부터는 물에 잠겨 피난을 가야 한다. 신계급주의사회의 양단에 살고 있는 두 가족의 거주형태는 빈민계층 사람들이 아무리 위로 올라가려 해도 불가능해 현실사회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없는 자의 몸에선 늘 가난이란 냄새가 공통적으로 풍긴다. 이 냄새는 옷을 빨아도 없어지지 않는 찌든 생활의 냄새이다. 빈민층끼리는 못 맡지만 부유층에선 쉽게 맡아 이 냄새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삶이 고통으로 찌들면 여유가 없어 남을 배려하거나 동정심은 사라지고 증오와 미움만 남는다는 인간심리 또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부유층은 빈민층이 선을 넘는 것을 싫어한다. 이 선이란, 운전기사는 기사로서, 가정부는 가정부로, 각자 위치에서 맡은 일을 충실히 수행하되 상부층에 도전하지 말라는 선이다. 기생충 가족이 일시적으로 성충이 되어 보지만, 결국 못 견디고 숙주(宿主)가족을 공격한 후, 파멸되어 스스로 본연의 자리인 지하로 내려간다.달팽이는 몸속의 수분이 많이 증발하기 때문에 건조한 곳에 오래 있지 못한다. 하지만 바다달팽이는 기생충에 감염되면 매일같이 바위 위로 올라와서 갈매기들의 먹잇감이 된다. 이는 갈매기 몸속에서 번식할 수 있는 기생충이 달팽이를 이용한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개미도 있다. 평소에는 풀숲 사이로 기어 다니던 개미가 기생충의 공격을 받으면 자꾸만 풀잎 끝으로 기어오른다. 그리곤 풀을 뜯는 가축의 장으로 들어간다. 초식동물의 장 속에서 번식하는 것이 이 기생충의 삶이다. 영화는 우리 사회의 빈부의 양극화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사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살아가는 동선을 보면 거의 안 겹치는 게 현실이다. 기생충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국민을 숙주로 한 것이다. 어둠속에서 유권자들이 맡긴 권력을 이용하여 청탁이나 횡령 등으로 부패한 공직자들, 정치권력을 가진 엘리트가 대중매체 등을 이용해 그들의 의도대로 대중조작해 언론소비자들을 마취시키는 행위에 편승한 언론사는 회충 같은 내부 기생충이며, 패거리 정쟁을 일삼고 일을 안 하는 국회나 직권남용 같은 사례는 벼룩 같은 외부 기생충들이다. 대체로 이런 기생충들은 정치 후진국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런 독버섯 같은 기생충이 토착화하기 전에 완전 제거가 안 되면 사회와 나라는 병들어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다.

2019-08-12

교사의 평가 자율성 확보해야 창의력 교육 꽃핀다

조현명 시인·교사한국인의 평균 지능지수는 106으로 세계 1위라고 알려져 있다. 이 지능지수에 창의력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학교에서 경험하는 것은 한국인들의 유전자에 창의성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창의력이 어떻게 길러지는지 의문이지만 학교가 이 창의력을 막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창의력은 질문할 용기에서부터 출발한다. 학교에서 질문하는 아이는 버릇없고 쓸데없는 생각을 가진 아이로 취급되기 쉬운데 질문은 어디까지나 학습하는 진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범위를 넘어가면 쓸데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범위를 제한하면 창의력이 담길 수 없다. 시험성적을 위해서 정해진 답을 암기해야하는 현실에서 창의력을 발휘한 질문은 금물이다. 당연히 쓸데없는 질문을 하면 성적향상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한국기자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었으나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고 오히려 중국기자가 질문하려 한 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토론 강의 서두에 단골로 올라온 영상이다. 그때 강사들의 질문은 ‘왜 한국기자들은 아무도 질문하려 하지 않았을까’이다. 이 화두는 충격을 주기 위함이고 반성을 이끌어내려는 의도가 있다. 이래서 한국인들은 토론문화에 익숙하지 않고 비판정신도 없고 어쩌고 하는 평을 늘어놓아 반성적으로 토론강의에 임하게 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 기자들이 질문과 토론의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기자회견의 질문자가 정해져있는 데다가 미국 대통령에게서 나올만한 대답이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질문자가 정해지지도 않고 답변도 예상할 수 없는 내용이라면 그렇지 않았으리라 생각이 든다. 학생들에게 적당한 문제를 내어주고 프로젝터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문제 상황에서 길을 찾아가는 학생들의 능력은 대단하다. 열정이 있고 충분히 아는 것도 많으며 해결점을 찾고 조직하고 적용하는 수업에서 학생들의 호기심과 끈기를 그들의 잠재력을 보았다.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 그것을 새로운 아이디어로 바꾸어 내는 창의적인 두뇌들도 있다. 감탄할 만하다. 이런 경험을 필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한국인들은 노벨상을 탈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나 국력이 그를 뒷받침해주지 못해서 상을 타지 못할 뿐이라는 설이 떠돌아다니기도 한다.창의력을 억누르고 있는 학교의 교육시스템, 그것을 극복하고자 새로운 변화가 시도되고 있다. 새로운 교육과정과 수업개선 등 다양한 노력이 병행되고 있다. 그러나 평가방법이 올바르게 개선되지 않으면 허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전국적으로 동시에 치르면서 오지선다형인 대입 수학능력시험에 의해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왜곡되어 오고 있다. 고3의 2학기 수업이 파행적인 것이 대표사례다. 대입 학생부종합전형은 그나마 평가를 다양하게 유도하는 듯 보이나 학교에서 시행되는 중간·기말고사의 성적이 사실상 과목별로 반영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중간·기말고사가 100%인 다양한 형태의 수행평가로 시행되는 고교는 드물다. 공정성 때문이다.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평가방법의 개선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숙명여고 사건이나 여타 성적조작 사건으로 보더라도 우리 사회는 교사에게 책임을 지우고 문책하는 편이지 평가에 대한 자율권은 조금도 인정해 주진 않는다. 바칼로레아라는 논술평가를 시행하는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 교사가 교과서도 없이 자신이 직접 조직한 내용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자율권을 가지고 평가한다. 학부모와 학생들도 그대로 따라 간다. 프랑스의 시스템에 한국 학생들이 배운다면 한국 학생들의 창의력은 아마 우주를 뚫고도 남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인재는 창의성을 가진 인재이다. 교사의 평가를 믿어주고 성적조작이라는 시선으로 공정성만 요구하다보면 평가개선은 요원해지고 미래를 여는 창의력 교육은 어려워진다.

2019-08-12

어떻게 살 것인가 캐묻는 삶(2)

동굴 속 답답한 공기와 달리 맑고 달콤한 산소가 폐 속으로 들어와 새로운 활력을 몸에 공급합니다. 밤이 되자 눈뜰 용기를 냅니다. 하늘에는 뭇 별들이 반짝입니다. 교교한 달빛에 비친 나무며 들판이며 산들을 바라봅니다. 하룻밤을 흥분으로 지새웁니다. 눈이 현실에 적응합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자 세상 만물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멀리 뛰어가는 사슴 한 마리.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꿩 한 마리를 봅니다. 경이로움에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마침내 죄수는 용기를 내어 가장 강렬한 빛인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봅니다.플라톤은 동굴 밖으로 나온 죄수가 경험하는 세상을 ‘진정한 삶’이라고 말합니다.동굴 안에서 희미하게 보던 삶을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시(可示)적 영역이라면, 동굴 밖 세상은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가지(可知)적 영역이라 말합니다. 가지의 영역에서는 태양으로 비유한 선의 이데아, 즉 만물의 궁극의 제1원리가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한 삶, 진정한 앎에 이르도록 빛을 비춰 준다고 말합니다.지성으로만 알 수 있는 영역은 오로지 캐묻는 방식으로 탐구할 수 있다고 말하지요. 캐묻는 삶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금광에서 황금을 캘 수 있는 비결입니다. 플라톤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진정한 삶을 한 번 본 사람은 거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굴로 돌아가야 합니다.다시 어둠에 적응해야 하고, 밖에서 본 것들을 죄수들에게 설명하고 사슬을 끊고 방향을 돌려 밖으로 탈출하자고 설득해야 한다는 거죠. 죄수들은 익숙해진 삶에 태클을 걸고 자꾸만 캐묻는 이 작자가 귀찮아집니다. 결국, 죄수들은 밖에 나갔다 온 자들을 모두 잡아 죽이자고 결의합니다.아테네 법정에서 죽을지라도 캐묻는 삶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포한 소크라테스 존재와 죽음의 이유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진정한 골드러시는 생각에서 황금보다 소중한 것들을 캐기 시작할 때 벌어지는 축제입니다. 익숙하게 살고 있는 먹구름 아래 현실이 어쩌면, 동굴 안의 죄수와 같이 희미한 삶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자기 인식과 성찰. 동굴 밖으로 나가 보고 싶은 호기심과 열망. 같이 가자고 부추기는 진정한 친구.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삶이 고난의 통로를 거치고 진흙으로 엉망이 된다 해도, 빛을 만나 안구에 극심한 통증을 느낀다 해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할 길입니다. 진정한 황금은 우리 생각 안에 이미 가득 매장되어 있습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8-12

디지털디톡스

디지털디톡스는 세계적으로 디지털중독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처방으로 등장한 운동을 말한다. 디톡스(detox)는 인체 유해물질을 해독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 디지털 중독 치유를 위해 디지털분야에 적용하는 디톡스요법을 디지털디톡스라 한다. 디지털 단식이라고도 한다. 세계적인 IT회사인 구글의 에릭 슈미트 회장도 디지털디톡스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슈미트는 2012년 5월20일 보스턴대 졸업식 축사를 통해 “인생은 모니터속에서 이뤄질 수 없다”며 “하루 한시간 만이라도 휴대폰과 컴퓨터를 끄고 사랑하는 이의 눈을 보며 대화하라”고 강조했다. 디지털디톡스 운동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체로 다섯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인터넷 휴(休)요일’을 만들거나 한 시간 정도 ‘디지털과의 이별’을 연습하라. 둘째 디지털기기와 단절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뭐하고 시간을 보내나?’하는 생각을 예방하기 위해 생각의 목표를 설정하라. 셋째, 디톡스의 궁극은 침묵에 있기에 꼭 필요한 말외에는 하지 않는 ‘말의 침묵’, 불필요한 행동은 자제하는 ‘표현의 침묵’, 필요한 것에만 관심을 두는 ‘정신의 침묵’, 불같이 화를 내지 않는 ‘열정의 침묵’, 남에 대한 선입견을 품지않는 ‘상상의 침묵’을 시도해보라. 넷째, 디지털디톡스를 결심했다면 다음 날 기상한 순간 무엇을 할 지를 정해두라. 다섯째, 메신저로 수다를 떨고 싶은 욕심이나 블로그에 사진과 글을 올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 마다 공책을 임시보관함 삼아 생각을 적어두라.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하는 디지털디톡스 5계명을 소개했다. 침대로 스마트폰을 가져가지 않기, 이메일 계정 로그아웃하기, SNS와 모바일 메신저 알림기능 끄기, 디지털기기 대신 종이책 보기, 온라인 접속시간 측정하기 등 5가지다.디지털중독을 치유하기 위한 디지털디톡스가 디지털을 매개로 전개되고 있다는 자체가 아이러니다. 하지만 그만큼 디지털중독이 심각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름휴가가 한창인 요즘, 하루만이라도 디지털디톡스를 실천해보면 어떨까. 사랑하는 가족들과 더 많은 대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귀한 처방이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8-12

진정한 ‘광복(光復)’은 지금부터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연일 폭염특보가 발령되고 있다. 입추와 말복이 지났는 데도 기세가 여전하다. 최고 기온이 39도에 육박하는 무더위에도 전국 곳곳에서 ‘반(反)아베’ 시위가 확대되고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극장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김복동’과, ‘봉오동전투’가 항일영화로 받아들여져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영화 ‘김복동’은 본다”는 해시태그(#)가 확산되고, 못 보는 경우 표를 예매하는 ‘영혼보내기’가 진행되고 있다. ‘봉오동전투’는 개봉 4일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였고 전체 예매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일갈등이 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가 어느덧 1400회가 되며 맞이하는 제74차 8·15 광복절의 의미가 그래서 더 각별하다.‘광복(光復)’은 일본의 식민통치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주권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백가쟁명 시대라고 하더라도 최근 언론에 보도된 극우인사들의 발언을 보면 우리 안의 식민성을 돌아보게 한다. 지만원은 유튜브 방송에서 ‘반일 나선 개돼지들’이라는 제목 하에 “위안부가 창피하다”고 말한다. 엄마부대 대표 주옥순은 위안부 소녀상 옆에서 “한일동맹을 고의적으로 파탄 낸 문재인은 하야하라”고 주장하며 “아베 총리에게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인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우리 일본’이라는 표현속에 편 가르기를 하며 대중을 호도하고 있다. 어려운 시국에 함께 뜻을 모으기는커녕 역사의식의 부재로 자신의 이해관계가 우선적인 기준이다.우리들은 사회에서 태어나고 역사를 통해 성장한다. 지금의 한일관계를 고려할 때 우리 내부가 먼저 단합하고 스스로의 존엄을 지켜갈 필요가 있다. 현 정부가 강조하는 ‘적폐청산’도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아야만 제대로 된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안의 부끄러운 모습과 모순들을 해결해가야 한다. 일본산 제품의 불매운동을 넘어서 차제에 독자적으로 경제기술을 개발하고 자력으로 설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해야 한다.일본 아베정권이 경제적 압박이 시작되었다.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려면 구한말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운 것은 무엇인지 깊은 통찰이 요구된다. 또 다시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으려면 구호만이 아닌 구체적인 전략과 실천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친일(親日)’, ‘반일(反日)’이라는 프레임 논쟁을 넘어서서 실질적으로 ‘극일(克日)’을 하려면 ‘지일(知日)’과 ‘용일(用日)’의 마인드가 요청된다. 미 국무성이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문화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를 활용하여 일본인의 의식구조와 문화적 특성을 파악해 전후 관리를 구상하고 도모했던 것처럼, 일본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일본에 대한 격앙된 감정과 우리 내부의 소모적 논쟁을 극복하고, 일본의 ‘혼네’를 정확히 파악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의 주체적 역량을 키워가야 한다.지난 주 한국사고와표현학회 동학들과 인제 만해마을로 하계 워크숍을 다녀온 덕분에 독립운동가 한용운 선생의 행적을 자연스레 접하게 되었다. ‘조선인은 조선 것으로’ 라는 물산장려운동과 국산품 애용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의 자주자립 운동을 이끈 한용운 선생은 ‘독립은 민족의 자존심’이라고 강조하였다. “개인은 개인의 자존심이 있고 국가는 국가의 자존심이 있나니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나라의 간섭을 절대로 받지 아니한다”며 재판정에서 열변을 토하는 만해 소식을 보도한 오래된 신문의 글이 마음에 남았다. 폭염과 열대야로 힘든 여름을 보내면서 더욱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한일갈등을 바라보는 우리 안의 대립되는 시선이다. 우리의 앞날을 좌우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미래를 열망하는가에 달려 있다. ‘진정한’광복은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는가?

2019-08-12

한국에는 없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성과를 낸다. 하나는 계층 간 대립을 해소하는 최고의 수단이 된다는 점이다. 계층 간 대립은 정치의 안정을 해치는 불안한 요소다. 그러나 가진 자 특히 귀족층의 용기 있는 양보를 통해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요즘 부자들의 도네이션 등이 이런 것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국민을 통합하는 힘이다. 기득권층의 솔선수범 정신은 국민을 하나로 묶고 사회적 역량을 높일 수 있다. 특히 이런 경우는 고위층의 청렴성과 높은 도덕심이 관건이 된다.지금 우리가 맞이한 정치적 상황은 매우 불안스럽기 짝이 없다. 대외적으로 북한의 핵 도발과 미사일 발사, 한미일 안보공조의 불안감, 일본의 무역보복 조치 등 어느 하나 불안하지 않은 구석이 없다. 국내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극으로 달리는 정치적 대립과 시민사회의 갈등은 설상가상이다.여야 정치인 모두가 좀 잘 풀어갔으면 하는 국민적 바람이 간절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우리의 지도층이 지금쯤 꼭 새겨야 할 정신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떠올려 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의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다.프랑스의 작은 항구도시 칼레시의 시민정신은 아직도 많은 후손에게 회자되는 교훈의 장이다. 영국 정부가 전쟁에서 이기고 모든 칼레 시민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그동안 저항한 죄를 물어 6명의 대표를 처형키로 결정했다. 누가 단두대에 오를 6명의 대표가 되어야 하는 문제를 두고 칼레시는 갑론을박을 벌인다. 그 때 도시 최고의 부호가 가장 먼저 목숨을 내놓기로 자청한다. 그러자 곧 칼레시의 시장과 고위 관료들이 줄지어 목숨을 내놓기를 자청하면서 칼레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도시가 된다.우리의 정치인 및 고위 관료가 이런 상황에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 본다. 역사적 교훈을 백번 익혀도 한번 실천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청와대가 2기 장관급 인사를 단행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검증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한국은 지금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필요한 때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8-11

‘쓰레기통’ 엎어놓고 ‘미래’를 팔다

안재휘 논설위원‘애국가’가 위험하다. 이 나라 헛똑똑이 리더들의 어리석은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 반일(反日) 선동에 혈안이 된 집권당 인사들의 경거망동 또한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인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안익태 곡조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 주제의 공청회를 열고 “친일 잔재를 청산할 수 있는 최적기”라고 주장했다. 과거에도 작곡가 안익태의 친일행적 문제로 애국가가 논란이 된 바 있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안익태에 대한 단편적 평가도 그렇거니와 대한민국 근·현대사 내내 불린 애국가에 대한 뿌리 깊은 국민 정서를 무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지금 일본의 무역보복을 막아내는데 ‘애국가’ 시비가 대체 무슨 해법이 되는가.최재성 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은 한 라디오에 나와 방사능 물질 검출을 이유로 “도쿄를 포함해 여행 금지구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간사인 신동근 의원은 나아가 ‘도쿄올림픽 보이콧’을 말했다. 올림픽 보이콧은 일본의 무역보복보다도 더 천박한 망발이다. 후쿠시마 방사능과 연결해 내놓는 궤변이 교졸하기 짝이 없다.여기자 성추행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전력이 있는 민주당 정봉주 전 의원과 김현 민주당 사무부총장, 최민희 전 의원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코피를 흘리는 그림이 들어있는 ‘일본 가면 코피나(KOPINA)’ 티셔츠 판매를 홍보하고 있다. 그 밖에도 지자체들이 만국기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일본 연수단 방문을 거절하고, 직원들이 쓰는 일본 문구들을 폐기 처분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등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서울 중구 서양호 구청장은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동과 청계천 일대 등 중구 전역에 1천100개의 ‘노 저팬’ 깃발을 걸겠다고 나섰다가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깃발을 도로 내리는 망신을 당했다. 시민들이 위정자들보다 더 성숙한 의식을 발휘해 ‘무차별 선동’을 꾸짖은 셈이다.지난해 10월 우리 대법원은 역사에 오점으로 남을 어리석은 판례를 남겼다. 한국 사법부는 이 판결을 ‘사법 적극주의’라고 지칭하지만, 국제적으로 ‘사법부가 외교 문제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사법 자제의 원칙’을 어겼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글로벌 스탠더드로 말하면 한국은 1965년 청구권협정을 인정하는 게 옳다.우리 정부는 어떻게 했어야 온당한가. 일본 정부의 반발을 예측하고 청구권협정 제3조 1항에 명시돼 있는 대로 후폭풍에 대해 적극적으로 외교력을 발휘했어야 마땅했다. 제3조 2항에 명시된 ‘중재’ 조항대로 내놓은 일본의 중재 제의 자체를 우리 정부가 8개월 동안이나 묵살했다는 대목은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아베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행태는 모조리 미심쩍다.우리 국민은 이미 알고 있다. ‘반일(反日)’이 아니라 ‘반 아베’로 가는 것이 슬기롭다는 것을 훤히 꿰고 있다. 일본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므로 현 정권이 문제이지 일본 국민 모두가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더 잘 깨닫고 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의 후손들이 영원히 함께하며 평화롭게 살아야 할 이웃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오직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혈안이 돼 과거의 냄새 나는 ‘쓰레기통’을 모두 엎어놓고 나라의 ‘미래’를 몽땅 헐값에 팔아먹고 있는 정치지도자들의 망동은 중단돼야 한다. 반론자는 물론 신중론자들마저 무차별적으로 악의에 찬 ‘친일’ ‘매국’ 딱지를 붙여대는 정치꾼들의 저열한 행태는 즉각 청산돼야 한다. 국민을 속이다 못해 자신마저 속이고 있는, 나라를 말아먹을 수도 있는 그 엉큼하고 어리석은 속셈일랑 당장 거두는 게 맞다. 야구장에서 들려오는 미스트롯 우승자 송가인의 애국가가 새삼 뭉클하다.

2019-08-11

어떻게 살 것인가 캐묻는 삶(1)

생각 속 황금은 어떻게 캐낼 수 있을까요?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사형을 결정한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나 자신은 포테이다이아와 암피폴리스 그리고 델리온 전투에서 그대들이 나를 지휘하라고 임명한 장군들이 머무르라고 명령할 때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장소를 죽음을 무릅쓰고 지켰습니다. 그랬던 내가, 지혜를 사랑하며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이 인생에 대해 생각하도록 캐묻는 데 삶을 바치라고 신께서 이 땅에 보내주셨는데도 죽음이나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제자리를 버리고 떠난다면 이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소크라테스는 삶의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캐묻는’ 데 있다고 말하지요. 문답법을 통해 사람들에게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 삶의 목적이므로 설령 죽음에 이르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할 일을 하겠다고 말합니다.제자 플라톤은 ‘국가’ 7권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캐묻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갑니다. 동굴의 구조가 특이합니다. 벽 앞에는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이 있는데, 이들은 단단히 결박해 놓은 상태로 평생 한 번도 뒤를 돌아볼 수 없었고 오직 앞만 볼 수 있습니다. 뒤편에는 담이 있고 그 담을 끼고 길이 나 있습니다. 담 뒤편에 큰불이 피워져 있어서 그 불빛에 사물들이 비치고 죄수들은 담 위를 오가는 물건들의 정체에 대해 그림자를 보고 유추합니다. “아. 지금 당나귀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구먼.” “이번에는 두 사람이 가고 있네.” “바윗덩어리가 굴러간다.” 이런 식으로 그림자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거지요. 죄수들은 세상만사를 벽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정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본질이 아닌 피상적인 생각으로 평생 살아갑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합니다. “어느 날 한 죄수가 사슬에서 풀려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게.”동굴은 비스듬히 지하 쪽으로 깊게 파 내려가 있고 불이 피워진 담 아래쪽으로 밖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통로가 존재합니다. 풀려난 죄수는 난생처음 겪어 보는 자유의 걸음을 한 발씩 딛게 되지요. 통로를 따라 오르막을 기어오르자 저 멀리 환한 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출구입니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망막을 보호하기 위해 눈을 감다시피 하고 동굴 밖으로 나옵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어서 눈을 감고 있습니다. (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8-11

북한의 권력 세습, 남한의 재벌과 교회 세습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세습(世襲)이란 권력이나 재산, 신분, 직업 따위를 가족이나 친족끼리 승계하는 것을 말한다. 개방된 민주사회에서는 특권, 재산, 권력, 명예이든 어떤 것이든 세습은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재산의 세습을 막기 위해 최소 50%에서 최대 65%까지 상속세를 부과하여 부의 불평등을 막으려고 한다. 자유 민주 사회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 경쟁이 이루어져 모든 사람은 출발에서부터 과정, 결과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분단의 세월 70여 년, 같은 민족인 남북은 추구하는 정치 이념에 따라 사회의 구조와 관행도 상당히 이질화되어 있다. 남북한은 세습행태도 다른데 북은 권력 세습, 남은 재벌세습이 심각한 문제이다.북한의 권력세습은 3대에 걸쳐 이루어지고 비판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봉건 왕조국가도 아닌 나라에서 백두혈통이 세습의 기본 요건이 된 것은 아이러니이다. 백두 혈통이란 김일성이 백두산을 거점으로 부인 김정숙과 항일 빨치산 투쟁을 했다며 붙여진 명칭이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김정일마저 백두산 정일봉 아래서 태어났다고 선전하는 것도 백두혈통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북한당국은 권력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령승계론을 제시하였다. 수령은 인체의 뇌수처럼 가장 중요하며 북한의 전 인민은 수령의 수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북한의 학자들도 ‘위대한 조선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백두혈통의 권력세습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다. 북한 땅에서 수령에 대한 비판은 ‘국가 존엄 모독’으로 숙청을 당한다.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의 처형도 이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사람도 많다. 재산의 상속도 인정치 않는 북한체제에서 권력의 3대 세습은 그들만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종의 도그마이다.남한사회에서도 재벌 세습은 경제 정의 실현의 최대 장애물이 된 지 오래다. 재벌(財閥)이란 가족과 혈연으로 이어지는 거대 자본을 뜻한다. 우리나라의 대기업 삼성, 현대, 롯데, LG, SK 등은 대표적인 재벌이다. 한국어 고유명사인 재벌은 한국 경제의 독특한 모순 구조로 이해되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재벌 세습이 한국에서는 당연시되어 양극화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한국 재벌의 위장 상속, 분식회계, 배임과 횡령, 땅콩 회항 등의 횡포는 이제 다반사가 되고 있다. 한국의 재벌은 정치, 사법, 심지어 언론권력까지 교묘히 장악하여 재벌의 세습구조를 이어가고 있다.이같은 재벌 세습에 이어 교회 세습이 우리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다. 우리나라의 장로교회 중 등록교인 10만이 넘는 초거대 명성교회는 목사의 부자세습 문제로 시끄럽다. 성경 어딜 찾아보아도 교회의 부자 세습을 정당화하는 구절은 찾아보기 어렵다. 성경은 오히려 하느님의 참된 자녀는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고, 세상의 탐심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드디어 대한 예수교 장로회교단 재판국은 며칠 전 명성교회 부자 세습은 교회법상 ‘무효’라고 심판하였다. 그러나 명성교회의 현직 장로들은 합법적 절차를 내세워 후임결정이 결코 세습이 아니라는 주장하고 있다. 모두가 세속의 재물이 교회에 침투한 결과로 씁쓰레한 감정을 지울 수 없다.북쪽의 권력세습이나 남쪽의 재산 세습은 자유 평등사회의 구현의 장애물이다. 김정은의 3대 권력 세습은 북한의 모든 권력을 독점화하여 인민들의 인권마저 말살하고 있다. 남쪽의 재벌 세습은 부의 독점과 편중으로 경제 정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다. 북한의 3대 세습구조는 인민들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종식되어야 할 사안이다. 북한은 최소한 권력의 집단지도 체제라도 등장하길 바란다. 남한의 재벌구조는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 최소한 자본과 경영이라도 분리되어야 한다. 민족 통일을 위해서라도 남북의 장애물은 제거되어야 한다. 남북의 세습구조가 해소될 때 남북의 교류 협력은 더욱 촉발되고 통일의 새벽은 가까이 올 것이다.

2019-08-11

관찰하는 사람

김현욱 시인사다리차가 들어온다. 뒤따라 이삿짐차가 들어온다. 주차 된 차를 빼달라고 인부들이 휴대폰을 들고 분주히 오간다. 하나둘 차가 빠지면 사다리차가 튼튼한 지지대를 내린다. 사다리차가 겹겹이 접혀있던 사다리를 펴 올린다. 7층 베란다 난간을 겨눈다. 난간에 담요를 덮는다.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위치를 맞춘다. 짐을 올릴 사다리차 바닥이 몇 번 오르락내리락한다. 이삿짐차 문이 열리고 짐이 쏟아져 나온다. 짐이 올라간다. ‘아, 이사를 왔구나!’ 누가 이사 왔는지는 모른다. 저 사람들은 인부들이다. 저기 저 위 베란다에 있는 아주머니가 주인인가? 책이 많은 걸 보니 집에 학생이 있거나 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화분도 제법 자리를 차지한다. 초등학생이 타는 자전거와 킥보드도 보인다. 집에 초등학생이 있는 모양이다.이상은 우리 아파트에 이사 풍경을 관찰한 글이다. 그냥 무심히 보아 넘기기도 하지만 어느 날은 이렇게 대놓고(?) 관찰한다. 그러다 운 좋게 시를 몇 편 얻기도 한다. “이사// 이른 아침부터/ 베란다 밖으로/ 사다리차 바구니가/ 오르락내리락/ 고개 내밀어 보니/ 침대 냉장고 장롱 텔레비전…./ 부지런히 내려가는/ 이삿짐들/ 여태/ 누가 살다/ 누가 가는지 몰랐는데/ 짐이 이사 가네/ 짐만 살다 가네.//’, ‘인사// 분리수거장 앞에// 낡은 장롱/ 깨진 벽거울/ 다리 한쪽 부러진 식탁/ 주저앉은 소파/ 둘둘 말아 놓은 전기장판/ 칠 벗겨진 옷걸이/ 빨간 끈에 묶인 전집/ 내려앉은 책장/ 녹슨 세탁기// 잘 있다 간다고/ 인사도 못하고 간다고/ 친구네 대신/ 그렇게 한 이틀 서 있었습니다.//”관찰(觀察)이란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본다는 뜻이다. 주의(注意)는 마음에 새겨 집중한다는 말이고, 살피다는 두루두루 자세히 보고 따지고 헤아린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관찰보다는 익숙한 판단을 따른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캠릿브지대학의 연결구과에 따르면, 한 단어 안에서 글자가 어떤 순서로 배되열어 있는가 하것은 중요치 않고, 첫번째와 마지막 글자가 올바른 위치에 있것는이 중하요다고 한다. 나머지 글들자은 완전히 엉진망창의 순서로 되어 있지을라도 당신은 아무 문없제이 이것을 읽을 수 있다. 왜하나면 인간의 두뇌는 모든 글자를 하나하나 읽것는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하식기 때이문다.”글자가 엉망진창의 순서로 나열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별 탈(?) 없이 읽을 것이다. 관찰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루트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에서 13가지 창의성 도구 중 가장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이 바로 ‘관찰’이다. 이 책에는 위대한 관찰자들이 나오는데, 화가 조지아 오프키는 “나는 그전에도 천남성을 많이 보아왔지만 그 꽃을 그렇게 집중해서 들여다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은 우리에게 ‘그냥 듣는 것’과 ‘주의 깊게 드는 것’을 구분하도록 한다.”고 말했다.미술 선생님이었던 피카소의 아버지는 피카소에게 비둘기 발만 반복해서 그리도록 시켰다. “열다섯 살이 되자 나는 사람의 얼굴, 몸체 등도 다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비둘기 발밖에 그리지 않았지만 어느 때는 모델 없이도 그릴 수 있었다.” 피카소는 한 사물을 유심히 반복적으로 관찰함으로써 다른 것들도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관찰은 모든 창의성의 시작과 끝이다. 관찰은 인내가 필요하다. 후천적 연습이 필요하다. 세상 모든 순리가 그리하듯 “관찰은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삶에서도 관찰은 중요하다. 붓다가 설했다. “분명한 지혜를 가지고 관찰하는 사람은 괴로움에서 멀리 떠나게 된다.” 나는 분명 관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19-08-11

향기

김순희 수필가어머님 생신이라 모든 가족들이 모인 몇 해 전 8월이었다. 얼마나 굶었는지 눈도 뜨지 못하고 여간해선 사람 손에 잡히지 않는 날쌘 고양이가 겨우 기어서 시댁 문 안에 들어왔다.허약해서 어미 고양이가 버린 새끼였다. 남편의 손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밥알을 몇 개 앞에 놓아주니 얼른 먹어치웠다. 생선살도 주워 먹더니 작은 먹이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피곤함을 잊은 듯 장식장 밑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조그만 몸으로 온 가족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서도 귀여움을 내뿜고 있다.마음이 동한 남편이 며칠만 키우자고 하자, 안 된다 아파트에서 어찌 돌볼 거냐고 자르기도 전에 두 아들이 똥도 치우고 목욕도 자신들이 알아서 하겠다며 설레발을 쳤다. 예전부터 아이들은 친구들이 애완견을 키우는 것을 부러워했었다. 못이기는 척 일주일만 돌보고 보내자며 집에 데려오는 것을 허락해주었다.상자에 담아 차에 싣고 오면서 우리 집 남자 셋은 고양이 이름 짓기로 들떠있었다. 남편이 나비라고 외치자 둘째는 야옹이 어떠냐 했다. 큰아이는 노란 얼룩무늬라고 치즈라고 하자고 했다. 신호에 걸려 창밖을 보니 꽃가게 이름이 ‘풀향기’였다. 고양이에겐 관심도 없던 내가 무심코 “향기 어때?” 하자 모두들 박수를 치며 좋다고 반겼다. 그렇게 향기는 한여름에 우리 집으로 왔다.나는 무엇을 돌보는 것에 약한 사람이다. 아들 둘을 키우면서도 여느 엄마들이 하는 행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도 업어주지 않아서 다 자란 후 포대기를 동서에게 물려줄 때 보니 새것처럼 뻣뻣한 풀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손을 탈까봐 많이 안아주지 않았더니, 잠투정 한 번 하지 않고 컸다.아이들이 순한 탓도 있지만 남편 말에 의하면 계모 같은 엄마가 받아주질 않으니 아이들이 알아서 큰 거라고 했다. 이런 내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다. 아기 고양이가 가까이 오려하면 발로 슬쩍 밀어냈고, 곁에 오지 못하게 하려고 작은 덩치로는 기어오르지 못하는 높은 소파 위나 침대에만 앉았다.몸에 닿으면 소리를 지르며 아이들을 불러서는 데려가라고 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향기는 자꾸만 내 옆에 다가왔다. 모두가 학교에 가고 나면 집에는 나와 향기만 남는 일이 많았다. 못 먹어서 뼈만 남은 다리로 소파를 암벽 등반하듯 겨우 기어올라서는 내 무릎에 엎드려서 잠을 청했다. 분명 집을 따로 만들어 주고 폭신한 방석까지 깔아 주었는데도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에 누운 내 등에 자기 등을 붙이고 있었다.엄마를 잃고 내게 자꾸만 달라붙는 고양이가 애처롭기 시작했다.외출해서도 혼자 있을 향기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계단을 오르는 내 발자국 소리를 기억하고 현관 앞에 두발을 모으고 기다리는 것도 기특했다. 고양이의 상징인 도도함을 버리고 다가오는 향기에게 나도 마음을 주기로 했다.사랑하면 보이나니, 고양이에 관한 모든 것이 궁금해져 향기가 내게 온 길을 더듬어 보았다. 몇 천 년 전 이집트에서 곡식을 갉아 먹는 설치류 때문에 길을 들이게 된 고양이는, 무역하는 배를 타고 여러 나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불교가 전해지던 삼국시대에 들어 왔다.마차에 실려 오는 불경을 쥐들이 갉아먹자 그 속에 고양이를 함께 태워왔다. 불교가 다른 종교를 가진 내게 고양이를 선물해주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 달이 지나자, 나는 향기의 집사가 되어 있었다. 모임에 가서는 아들 자랑하듯 고양이 이야기가 수다의 주제가 되었고, 귀여운 동물의 눈빛에서도 향기가 보였다. 길가에 핀 노르스름한 꽃을 보아도 향기의 보드라운 가슴털이 떠올랐다. 고양이에 관한 백과사전을 섭렵하며 울음소리와 행동이 조금만 이상해도 조바심을 냈다. 향기가 내게 없던 모성을 일깨워주고 있었다.그렇게 육 개월이 지났다. 덩치도 다 자라 제법 아가씨 고양이티가 났다. 남편과 나는 미뤄오던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다.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반려묘로 살아가려면 중성화 수술을 해야 한다. 저 조그만 몸에 칼을 대야 한다니 애처로워서 자꾸만 시기를 늦추었다.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남편은 향기를 데리고 산책을 간다며 집을 나섰다. 밤이 늦어서 돌아온 남편은 혼자였다. 차마 수술은 못하겠어서 좁은 우리 집보다 넓은 시골집인 시댁이 나을 거라 판단하고 시댁에 데려다 준 것이었다. 주말에 향기를 보러 갔다가 돌아온 날, 어머님이 전화로 한 말씀이 아직도 마음 아프다.우리 차가 떠난 곳을 향기는 한참이나 바라보며 매번 서너 시간 앉았더란다. 그 모습을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지금은 무지개다리 건너간 향기가 그립다. 하늘나라에서 어머니와 만났을 것이다. 향기가 왔던 여름이다.

2019-08-11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강하다

장욱현영주시장우려했던 일이 결국 벌어지고야 말았다. 최근 일본이 무역과정에서 우대 조치하는 백색리스트+에서 대한민국을 제외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우리나라 경제 전반에 걸쳐진 중대한 사안임과 동시에 우리지역에서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현실이기도 하다.일본이 먼저 수출제한 조치를 했던 불화수소 등 우리지역에 소재한 기업인 SK머티리얼즈에서 생산하는 반도체 식각가스의 고도화와 영주시가 주력하고 있는 향후 로봇산업과 무기 등 군수산업에 필수품인 부품소재 첨단베어링 분야에도 미치는 영향이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어려운 현실을 맞이해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 조성 등 우리 영주시가 해야 할 일을 착실히 추진해 나간다면 우리의 선명하고 확실한 성과를 거둘 것이 틀림없다.세계적인 경기침체와 불안한 정치상황 속에서 전국의 자치단체들은 한 발짝이라도 앞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변화를 수용하면서 이를 구체적인 정책으로 만드는 일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영주시는 힐링중심, 행복영주를 시정목표로 시민이 행복한 도시를 만드는 데 힘써 왔다. 영주가 자랑하는 사람을 살리는 산 소백산에 걸 맞는 생명력 넘치는 도시로 영주를 바꾸어 보자는 꿈, 다른 도시와는 다른 새로운 길을 걷는 행복도시를 영주의 비전으로 삼았다.비전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바른 정책과 실천이 필요하다. 영주는 다양한 정책으로 시민이 행복한 도시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영주의 면모가 확 바뀌기 시작했다.먼저 새 정부의 국정과제인 첨단베어링산업을 비롯해 영주의 도시 경쟁력을 높일 새로운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베어링은 첨단산업 핵심부품으로 해외시장 100조원, 국내시장 6조원에 이르는 미래 첨단산업의 하나로, 지역의 새로운 미래를 이끌어 나갈 핵심 산업으로 육성해왔다. 모든 시민이 한마음으로 노력한 결과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되었으며, 국가산업단지 최종 후보지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영주에서 추진되는 또 다른 국책사업인 중부권 동서내륙철도건설 사업 등 영주를 철도 물류 중심도시로 부활시키기 위한 다양한 사업들도 진행 중이다.다음으로 농업혁신을 통해 부자농촌의 기반을 다져왔다. 서울 청계산 한우 프라자, 석촌역 농·특산물 직판장, 인천 문학경기장 영주한우셀프장 등 지역 우수 농·특산물의 직거래를 통한 수도권 시장을 확보했다. 또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베트남 호찌민, 미국 로스앤젤레스 농·특산물 홍보전시 판매장 개장 등 공격적인 수출 마케팅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전환점을 마련했다. 외국인 계절 근로자 도입으로 농가의 고질적인 일손문제를 덜고, 농기계 임대사업을 대폭 확대한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사업으로 영주 농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영주는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문화도시다. 지난해 부석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데 이어 지난 7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소수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영주의 문화적 가치가 다시 한 번 인정받는 순간이었다.대한민국을, 그리고 영주를 알렸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지만 경제적인 분야에서도 가지는 의미가 크다.영주가 갖고 있는 문화전통 자원은 어느 산업자원 보다도 더 훌륭한 영주의 미래 먹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영주는 가진 문화적 강점은 전통문화를 박제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유물’로서가 아닌 ‘유산’으로 전통문화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영주는 모든 정책의 원동력을 영주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유산에서 찾는다. 영주시가 전국 최초로 시행한 초·중·고 선비인성교육이 그렇고 대한민국 선비대상 조례 제정 등 전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책도 궤를 같이한다. 살아있는 문화와 전통을 세계에 알리고, 대한민국의 전통문화산업을 주도해 나갈 계획이다.이밖에도 영주시는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시민들의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물론, 우수하고 아름다운 공공건축물로 전국에서 주목받는 건축의 도시로 이름을 알렸다. 이낙연 국무총리의 방문과 각 지방자치단체의 벤치마킹이 이러한 성과를 증명했다.시민의 삶을 보듬는 생활밀착형 복지와 유니세프 아동친화도시 인증에 걸 맞는 아동친화 정책의 추진 등 도시의 비전과 정책을 다듬어 나가고 있다. 국제적인 정세로 보나, 국내 여건으로 보나 어려운 시기가 도래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를 겪을 때야말로 우리가 성장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영주가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 후보지로 선정될 때도 부석사와 소수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될 때도 쉽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지나온 과정 하나하나 쉬운 걸음은 없었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갔고 선명한 자취를 남겼다.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본연의 역할을 다할 때 위기는 기회가 될 것임을 믿는다. 도전할 줄 아는 용기와, 하나로 힘을 모을 줄 아는 지혜를 갖춘 영주시의 미래는 그래서 희망적이다.

2019-08-11

대통령은 응답하라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일본이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수출규제조치를 강행한 이후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일본의 이같은 조치에 강하게 반발한 문재인 대통령의 결기는 시원·통쾌·상쾌할 정도였다.특히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란 대통령의 선언에는 마치 3.1독립운동 선언때 같은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일본의 무역보복 조치에 대한 문 대통령의 태도는 그 이후에도 한결같이 단호하다.지난 5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 주재 수석보좌관회의에서도 문 대통령은 “일본은 결코 우리 경제의 도약을 막을 수 없다”면서 “오히려 경제강국으로 가기 위한 우리의 의지를 더 키워주는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면서 “남북 간의 경제협력으로 평화경제가 실현된다면 우리는 단숨에 일본의 우위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 바로 다음 날 북한이 단거리 탄도미사일로 보이는 발사체를 쏘는 바람에 평화경제에 대한 비판론이 들끓기는 했지만 말이다.지난 7일에는 문 대통령이 일본 경제보복 사태 후 첫 부품소재 생산기업 현장 방문에 나섰다. 문 대통령이 찾은 경기 김포시의 정밀제어용 감속기 생산 전문기업인 SBB테크는 일본에서 수입해 오던 ‘로봇용 하모닉 감속기’기술을 국내 최초로 개발한 업체다.문 대통령은 “수출규제 때문에 어려움이 있는데 SBB로서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격려했다. 8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경제자문회의에서도 문 대통령은 일본의 수출규제조치에 대해 “자유무역 질서와 국제분업 구조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조치”라고 비판했다.문 대통령은 “국제적으로 고도의 분업체계 시대에 나라마다 강점을 가진 분야가 있고 아닌 분야가 있는데, 어느 나라든 자국이 우위에 있는 부문을 무기화한다면, 평화로운 국제 자유무역 질서가 훼손된다”면서 “일본의 기업들도 수요처를 잃는 피해를 입게 될 것이므로 부당한 수출규제 조치를 하루속히 철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러면서 “변명을 어떻게 바꾸든, 일본의 조치는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경제보복”이라고 규정한 뒤 “이는 다른 주권국가 사법부의 판결을 경제문제와 연결시킨 것으로, 민주주의 대원칙인 ‘삼권분립’에도 위반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당장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단기대책부터 시작해서 우리 부품·소재 산업의 국산화 등 경쟁력을 높이고, 더 나아가서는 전반적으로 위축된 우리 경제의 활력을 되살리는 보다 종합적이고 근본적인 장기대책까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그러나 대통령의 말잔치에는 우리가 일본에 맞대응할 카드가 정확히 무엇인지 친절한 설명이 없다. 알맹이가 빠져 있다. 그냥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 많이 발전했고, 국력도 많이 신장했으니, 맞싸워서 이기겠다는 얘기다. 최근 퇴근 뒤 술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궁금증은 한결같았다.우리 정부가 일본을 압박해 이길 카드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사태를 풀어 나갈지에 대해 상세히 알고 싶다는 주문이었다. 필자도 민심의 요청에 따라 대통령과 청와대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 지 열심히 취재해 봤지만 근거없는 자신감의 피력만 반복될 뿐 설득력있는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일본의 조치에 상응해 맞춤형 대책을 세우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는 지는 밝히기는 어렵다”고 했다. 작전상 알려주지 않겠다니 마구 따지기도 어렵게 됐다.다만 큰 소리는 쳤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일 뿐이다. 이쯤되면 대통령은 응답해야 한다. 일본 수출규제조치는 이런저런 방안으로 헤쳐나갈 작정이고, 단거리미사일 쏴대며 난리치는 북한은 요런저런 방법으로 살살 달래서 협상장에 자리 앉혀 평화경제를 실천해나가겠다는 구상을 밝혀야 한다. 대통령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주인의 궁금증을 풀어줄 의무가 있다. 대통령은 응답하라.

2019-08-08

위기의 망월지

충북 청주시에 있는 ‘원흥이 두꺼비 생태공원’은 전국 최초로 아파트 단지 안에 조성된 생태공원이다. 4천900가구가 들어선 택지개발지구내에 생태공원이 조성된 것 자체부터가 이색적이다. 이렇게 조성되기에는 자연을 보존해야겠다는 이곳 주민들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2003년의 일이다. 토지공사가 산남지구 택지개발공사를 시작하기 전 인근 구룡산에서 동면하던 두꺼비 수만 마리가 알을 낳기 위해 방죽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주민들에 의해 포착됐다. 이곳이 두꺼비의 집단 산란지임이 알려지게 되었고, 개발과 보존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업무방해와 환경평가 소홀 등으로 서로 맞고소를 하던 양측이 합의점을 찾아 이곳에 두꺼비 생태공원이 지어진다. 원흥이 두꺼비 생태공원은 이처럼 시민의 뭉쳐진 힘으로 만들어졌다. 자연을 보존하겠다는 주민들의 뜻이 모아지면서 만들어진 생태공원은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로 평가를 받았다.33만평 규모 아파트 단지를 끼고 100억 원 가까운 예산이 투입돼 만들어진 이곳 두꺼비 생태공원은 전국 최고의 두꺼비 생태공원으로 지금도 명성을 날리고 있다. 자연생태 학습장으로서도 많은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전국 최대 규모 두꺼비 산란지로 알려진 대구 수성구 망월지가 존폐 위기를 맞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해마다 수만 마리의 두꺼비들이 알을 낳고 이동하는 자연의 신비로움을 선사했던 이곳은 주변의 개발과 지주들의 연이은 용도폐지 신청으로 어쩌면 못의 일부가 메워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져있다. 사유권 행사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막무가내로 자연생태계가 훼손되는 것을 방치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2007년 새끼 두꺼비 300만 마리가 이동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이곳은 도심 속 자연생태공원이라는 별명으로 전국적 유명세를 탔다.원흥이 두꺼비 생태공원처럼 개발할 수야 없겠으나 생태적 가치를 살리는 행정당국의 관심과 지혜가 필요하다. 최근 20년간 양서류의 급격한 감소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망월지 위기에 대한 해법이 있어야 할 이유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8-08

무궁화의 날을 아시나요

심한식경북부8일은 우리나라 꽃인 무궁화의 날이었다. 별 의미없는 상업적인 이벤트에도 관심을 보여온 방송에서도 무궁화를 들먹이거나 의미를 되새기는 보도조차 없이 넘어가 무궁화를 아끼는 국민으로서 실망스러운 하루였다. 지난2007년 민간단체가 주도해 옆으로 누운 8자가 무한대(∞)의 무궁(無窮)을 상징한다는 의미로 8월 8일을 무궁화 날로 지정했다. 정부의 공식 지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무궁화의 날로 지켜져 오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를 아는 국민은 아주 극소수에 그치고 있다.기자는 이른 아침부터 공영방송을 중심으로 방송매체의 뉴스 시간을 주의 깊게 시청했다. 그러나 “오늘이 무궁화의 날”이라는 보도나 발언은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일본의 식민통치 잔재로 이 땅에 남겨진 벚꽃철에 벚꽃축제는 주요 뉴스로 다투어 반복 보도해온 모습과 대비돼 씁쓸하기조차 했다.“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 꽃” 무궁화를 너무나 쉽게 이해하며 따라 부르던 동요이다. 지금은 어린아이들이 이 동요를 부르는 것을 듣기도 어렵다. 숨바꼭질 하는 아이도 찾아볼 수 없지만 술래가 수를 셀 때 반복했던 것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였을 정도로 무궁화는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지금의 현실은 이 뿐이 아니다. 무궁화의 의미를 교육하고 가꿔야 할 대다수 관공서와 교육현장에서 무궁화를 홀대하고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공영방송에서조차 무궁화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서울시가 8일부터 15일까지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3·1운동 기념탑을 품은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서울 무궁화 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란다. 무궁화는 특별한 날에만, 특정한 인사들에게, 특정한 곳에서만 대접받아야 할 꽃이 아니다. 전국 어디서나, 국민 누구에게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아야 명실상부한 나라꽃이 될 것이다. 시인 김춘수는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로 노래했다.누구나 쉽게 볼 수 있고 쉽게 이야기 속에 등장할 때 무궁화가 진정한 나라꽃이 될 것이다. 지금 정부와 국민들은 일본의 무역규제에 따른 경제전쟁의 일환으로 일본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가열차게 진행하고 있다. 극일(克日)을 외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에게 더욱 다가오는 것이 무궁화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의 선조들이 목숨바쳐 지킨 것 중의 하나가 무궁화임을 감안하면 무궁화의 날을 올해처럼 흘려보내는게 과연 옳은 일인지 되묻고 싶다./shs1127@kbmaeil.com

2019-08-08

장맛비

두 주 동안 서울 가까운 곳에 가 갇혀 있었다. 시험문제를 내는 일이었는데,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것은 물론 휴대폰도 사용할 수 없었다.건물 바깥으로도 나갈 수 없을 뿐 아니라 건물 중앙의 창으로 보이는 뜰에도 출입할 수 없는 ‘감금’은, 몸 아픈 사람의 ‘휴양’에는 더 없이 좋은 약이었다. 아침이 오면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고 문제를 내다 보면 금방 점심 때가 되고 오후는 조금 더 길게 느껴졌지만 아무 나갈 일도 없고 연락올 데도 없는 두 주일이란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던가! 바깥 소식은 오로지 텔레비전으로만 접할 수 있었으니, 이 일방통행식 수신도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보고 듣고 생각만 하면 되니 말이다.텔레비전 뉴스는 세상의 소식을 먼데 일처럼 실어다 주었다. 안타까운 죽음의 소식이 들려왔다. 정두언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인데, 경찰은 휴대폰의 행방을 찾고 있다고 했다. 지난 번에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날 때도 휴대폰이 없어졌다 나타났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황병승 시인도 자신의 집에서 세상 떠난지 근 보름만에 발견되었다고 했다. 지난 ‘미투’ 열풍 때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데, 그때부터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삶을 살아왔다 했다. 나는 ‘미래파’라는 ‘소동’ 가까운 ‘유파’에 ‘전혀’ 냉담한 편이었다. 그의 죽음은 지난해 그를 후원해 주던 비평가의 타계와 함께 이 ‘유파’의 ‘치세’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듯했다.세상에서는 폭염이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벨기에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더위로 무슨 조치가 내려졌다고도 하고 서울에서도 관측 이래 최고였다나 하는 무더위 소식이 이어졌다. 갇혀 있기는 해도 문제를 ‘뽑아내기’ 위해서 실내 온도만큼은 적절한 수준에서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당국’의 배려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옛날에는 겨울이 좋고 더운 여름이 싫었는데, 지금은 겨울도, 여름도 다 좋아진 나 자신의 삶을 생각했다. 체온이 내려가고 심장이 느리게 뛰고 사람들을 만나는 활기보다 홀로 주어진 시간이 반가운 나이.갇혀서는 술도 마실 일 없으니, 지난 오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막걸리로 오염된 몸의 독소도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좋은 일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드디어 술을 끊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출소’해서 나가면 새 삶을 살겠다고 생각했다.몸이 덜 시달리게 하니 잠도 규칙적으로 잘 수 있기는 하지만 이미 두세번은 깨다자다 해야 하는 체질, 새벽이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검은 창밖으로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가까이서 비내리는 소리 듣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도시에서 창은 이중창일 때가 많고 그나마 허공에 뜬 아파트에서 날것 그대로의 빗소리란 쉽게 듣기 어렵다.‘비가 내리는군.’그러고 보니, 장마전선이 북상해서 며칠 동안 수도권 일대에 비가 계속될 거라는 소식을 들은 것도 같았다. 며칠 전에는 태풍으로 제주도 무슨 오름인가에는 사상 초유 천 밀리미터가 넘는 비가 내리기도 했다고도.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날들, 새벽의 장맛비는 내 몸속에 남아있는 소년 시절을 되살아나게 했다. 참 비가 좋은, 비가 오면 몸이 흠뻑 젖도록 자전거를 타고 학교까지 한 바퀴 돌아오고서야 직성이 풀리던 시절이었다. 새벽에 줄기차게 내리는 빗소리를 하나하나 세면서 생각했다. 정말 이번에 출소하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하루하루가 새로운 삶을./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8-08

사람과 쓰레기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여름 휴가철이면 온 산천이 몸살을 앓는다. 물 좋고 경치 좋은 곳마다 사람들이 북적대고, 사람들이 다녀간 곳마다 쓰레기 더미가 악취를 풍긴다. 모처럼 기대를 걸고 계곡이나 바닷가를 찾았다가 함부로 버린 쓰레기가 눈에 띄면 기분을 잡치게 마련이다.그런 쓰레기와 악취를 좋아할 사람은 없을 터인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의외로 그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래서 저들도 갈 때는 태연히 거기다가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 심지어는 먹고 마시고 놀던 자리에 쓰레기를 그대로 두고 가는 파렴치들도 적지가 않다.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한 농어촌 사람들이 행락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까지 치워야 하는 처지가 된다.행락철의 쓰레기문제는 해결방법이 의외로 간단하다. 자기가 가져온 것은 도로 가져가는 것이다. 자기가 먹고 마신 쓰레기는 집으로 가져가서 평상시처럼 분리 배출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어느 계곡 어느 바닷가에도 담배꽁초나 수박껍질 하나 없는 깨끗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쉽고도 좋은 일을 사람들은 왜 한사코 마다하는 것일까.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길러진다고 한다. 젖먹이 아이를 늑대가 데려가서 키우면 늑대의 습성을 그대로 가진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떤 교육을 받고 무엇을 학습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우리나라 산천에 쓰레기가 넘쳐나는 것은 그만큼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반증인 것이다.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생활을 하려면 어려서부터 남과 더불어 사는데 필요한 사회성을 길러야 한다. 그 사회성의 기본은 역지사지하는 마음, 즉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다. 올바른 인성을 위한 교육은 유치원에서부터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는가, 건전한 사회의 바탕이 되는 가장도 기본적인 인성을 함양하는 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다. 삽으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말도 있지만, 올바른 인성교육으로 절감되는 사회적 비용만 하더라도 실로 엄청난 것일 수 있다.남이 버리고 간 쓰레기가 악취를 풍기며 나의 기분을 잡쳤다면, ‘이렇게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구나. 나라도 이런 짓을 하지 말아야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의 태도일 것이다. 유치원생들에게 설명을 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일인데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교육과 학습이 충분히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그런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걸 의미한다.남을 배려할 줄 아는 능력, 역지사지하는 공감능력은 올바른 인성의 기본이고 교육의 최종 목표라야 한다. 학문과 종교와 예술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도 바로 그런 것일 때 그것이 인류에게 기여하는 바가 될 것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느냐 덕을 끼치느냐가 인격을 평가하는 기준일진대 이해와 배려와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해도 남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한 사람이라면 제대로 인격을 갖춘 사람일 수가 없는 까닭이다.우리나라가 한 걸음 더 선진국이 되고 국민들이 보다 성숙한 시민이 되려면 무엇보다 우선으로 유치원에서부터 철저하게 올바른 사회성을 기르는 학습을 시켜야 한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은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나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학습하고 또 학습하여 뇌리에 각인하고 몸에 배게 하는 것이 바로 바람직한 교육이 될 것이다. 제가 먹은 쓰레기를 되가져 가는 정도의 교양이나 상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가 무슨 짓을 하고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한낱 저급한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2019-08-08

교육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대학 교무회의에 참석하면 가장 골치 아픈 논의가 하나 있다. 그것은 어떤 학과의 정원을 줄여서 어떤 학과의 정원을 늘리느냐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가장 골치아픈 논의 중 하나다. 학과의 정원을 줄이고 싶은 학과는 없기 때문인데, 대학의 입장에서는 잘 나가는 학과의 정원을 늘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한국대학에서만 빚어지고 있는 기현상이기도 하다. 그건 대학정원의 결정을 교육부가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오랜만에 교육부가 다소 충격적인 발표를 하였다. 교육부가 대학입학정원 감축을 대학 자율에 맡긴다는 다소 듣기에 생소한 정책 발표를 하였다. 지금은 교육부가 전체 대학에 점수를 매겨 ‘재정 지원 제한 대학’을 선정, 국가 장학금 등 교육부 지원금을 받을 수 없게 만들어 사실상 대학의 정원조정을 압박하고 퇴출시키는 방식으로 대학정원에 간섭하고 있다. 그런데 내년부터는 이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평가는 원하는 대학만 하고 평가 결과를 내놓을 때도 ‘일반 재정 지원 대학’만 선정하겠다고 했다. 다소 획기적이다. 아마도 이런 조치의 배경은 구조조정을 해봐야 학령인구 감소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정책변경이라기보다는 정책포기로 봐야 할 것이다.고된 과정을 통해 힘들게 평가해서 줄인 정원이 5년간 6만5천 명 정도인데 앞으로는 5년간 학령인구는 15만 명 가량 줄어든다는데 주목해 본다. 2000년 수능에 응시했던 학생은 89만 명이었다. 수능 시험일 일정 시간에는 비행기가 날지 못하고, 전 국민이 수험생을 위해 숨을 죽이고, 모든 언론 매체가 수능 시험을 톱 뉴스로 다루는 그런 분위기였다. 대학으로 가는 길은 그만큼 치열했다.그런데 금년 수능시험 응시자 수는 55만 명으로 예상된다. 2000년보다 35만 명 가량 줄어들었고 역대 최저라고 한다. 그리고 당장 내년부터 만 18살 학령인구 숫자는 50만 명 밑으로 내려가고, 5년 뒤 2024년이 되면 37만 명이 된다고 한다. 2000년에 비하여 정확히 반으로 줄어든다는 이야기이다.그래서 이번 발표는 교육부가 구조조정을 하는 속도보다 인구 감소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에 공연히 고생만 하고 문제해결을 못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정책좌절로 보인다. 그동안 교육계에서는 “교육부가 없는 것이 최선의 정책이다”라는 자조적인 말이 있어왔다. 교육부가 대학지원을 무기로 입학정원에서부터 대학 구조조정까지 여러 가지로 대학을 규제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은채 대학을 규제하여 오던 교육부가 이젠 가만 내버려 두어도 대학은 고통 속에 스스로 규제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손을 놓겠다는 뜻으로 보인다.교육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혼돈하고 있다. 상황이 좋을 때는 대학을 규제하지 않는 것이 교육부가 할 일이고 상황이 안좋을 때는 대학을 도와주는 것이 교육부가 할 일이다.지금 상황은 거꾸로 가고 있다. 대학을 규제하는 힘을 과시하기 위해 교육부가 평시에도 대학지원을 무기로 대학을 규제하고 있다가 지금과 같이 위기 상황에서 대학은 고통을 대학자율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앞으로 고통을 받게 될 지역 군소 대학이나 전문대 같은 취약 대학에 좀더 많은 지원책을 입안하여 그러한 대학들이 입학정원 감소에도 불구하고 생존할 수 있는 지원책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평가는 필요하고 평가를 징계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의 잣대로 삼아야 한다. 평소에 규제의 칼을 사용하던 교육부는 이제 대학생존을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펼 필요가 있다.교육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좀 더 잘 구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9-08-08

황금을 가장 많이 캘 수 있는 곳은?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이 노래 원곡은 어부 이야기가 아니라 광부와 딸 이야기입니다. “In a canyon, in a cavern, 골짜기와 동굴 안에서 Excavating for a mine 광산을 캐며 Lived a miner, forty niner, 살아가는 포티나이너와 And his daughter, Clementine. 그 딸 클레멘타인.”포티나이너는 금광을 찾아 1850년대 미국 서부로 몰려간 사람들, 금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금광을 통해 벼락부자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드는 현상을 ‘골드러시’라고 하지요. 일부 성공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금광을 찾는 데 실패합니다. 정작 부자가 된 사람들은 금광에 달려든 사람이 아니라 몰려든 그들에게 온갖 생활용품을 팔던 사람들입니다.리바이 슈트라우스(Levi Strauss)는 천막 캔버스 천으로 바지를 만들어 팔았고 바로 그 청바지가 리바이스입니다. 찰리 채플린 주연의 영화 ‘골드러시’를 보면 먹을 것이 떨어지자 가죽으로 된 신발을 삶아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골드러시에 휩쓸려 삶이 무너져 내린 사람들을 묘사한 장면이었지요.일리노이대 해부학 교수 할리 먼센은 인체를 화학 성분으로 분석했습니다. 사람의 몸은 칼슘 2.25㎏, 인산염 500g, 칼륨 252g, 나트륨 168g, 마그네슘 28g, 그리고 소량의 철과 구리 성분으로 구성됐음을 밝혔습니다. 체중의 65%는 산소, 18%는 탄소, 10%는 수소, 나머지 3%는 질소로 돼 있다는 것도 입증했지요. 이 모든 인체 구성 물질의 값을 계산했을 때는 단돈 89%, 우리 돈 1천원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한 사람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요? 물질로 생명의 가치가 정해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의 이마 안쪽에 있는 그 무엇. 체중의 0.2%밖에 차지하지 않지만, 산소는 거의 20%를 소비하는 신체 기관. 두뇌 속에 과연 어떤 것이 채워져 있는 가로 한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법입니다.“황금은 땅에서 채굴된 것보다 인간의 생각 속에서 더 많이 채굴되었다”라고 나폴레옹 힐은 말합니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의 주 무대가 샌프란시스코였고 그 지역에서 훗날 실리콘 밸리가 탄생했으니 멋진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8-08

조롱 당하는 기상청

이시라 기획취재부“아침에 일어나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는데”제8호 태풍 프란시스코가 지역에 많은 비와 함께 초속 25∼30m의 강풍이 몰아칠 것으로 보도된 뒤끝이라 어리둥절했다는 시민들이 많았다. 물론 태풍 피해가 없었기에 다행스러웠지만 오락가락한 예보 때문에 많은 인력과 행정력이 낭비됐다는 측면에서 뒷맛이 개운치 않다.기상청은 제8호 태풍이 한반도에 근접해오던 초기인 지난 5일 “6일 밤 남해안에 상륙한 뒤 한반도 내륙을 관통하며 7일 오전 경북 안동 서쪽 약 90㎞ 육상을 거쳐 강원도 속초 부근에서 동해안으로 빠져나가며 소멸할 것”이라고 예측했다.하지만,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은 6일 기상청은 태풍이 동해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초기의 전망과 달리 경북 안동 주변에서 열대저압부로 약화하면서 소멸할 것으로 말을 바꿨다. 뭐가 뭔지 모르게 계속해서 바뀐 기상청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정작 태풍은 6일 오후 8시 20분께 부산으로 상륙하고 나서 열대저압부로 인해 세력이 약해지면서 40분 만에 소멸했다. 태풍이 온 사실을 느끼지 못한 지역민들은 이런 이유로 분통을 터뜨렸다. 기상청은 당초 경북 지역을 통과하며 강한 바람과 함께 최대 200㎜ 폭우가 쏟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태풍예보 시 바다 기온이 낮아 급속히 열대저기압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는 ‘면피 사유’를 끼워넣은 것이 기상청으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어쨌든 경북지역의 민관은 태풍 피해를 최소화하기 만반의 준비를 하느라 갖은 부산을 떨었다. 공무원 2천487여명이 밤샘 비상근무를 했다. 태풍과 같은 재난에 과잉대비를 한다 해도 무방비 상태로 맞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기상청이 통보문을 발표할 때마다 태풍의 상륙지가 수시로 바뀌고 시민들에게 혼란만 준다면 기관의 존재가치를 찾기도 어렵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태풍의 경로는 얼마 동안 제자리에 멈춰 있기도 하고 다양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변수가 많아 진로 파악이 어렵다. 더욱이 한반도와 같은 반도지형을 거쳐 가는 태풍의 진로 예보는 특히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기상청은 그동안 항상 슈퍼컴퓨터 타령을 해왔다. 지금과 같은 예보능력이라면 슈퍼컴이 아무리 많아도 책임 있는 기관이 되기는 글렀다는 비판을 어떻게 감당할지 의아할 뿐이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기상청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예보’가 아니라 ‘중계’를 하고 있다는 따가운 조롱거리로 전락한 상황이다.기상 예보 하나로 수많은 인력과 예산이 투입되는 상황이다. 지구온난화 등으로 기후 변화가 무쌍한 지금,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정확한 일기예보가 갈수록 요구되고 있다. 민간기상업체만도 못한 이번 태풍 예보를 보면서 많은 시민이 조롱해온 ‘구라청’이란 별명이 피부에 와 닿은 며칠이었다./sira115@kbmaeil.com

2019-08-07

항왜(抗倭)와 토왜(土倭)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일본의 조선침략이 잘못되었음을 확신하고 경상좌병사 박진에게 부하들을 이끌고 투항한다. 사야가처럼 일본의 무의미하고 명분 없는 침략전쟁에 반대하여 조선에 투항해 일본에 맞서 싸운 왜인들을 ‘항왜’라 한다.반면에 조선인이되 왜군의 침략에 즈음하여 자발적으로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군과 대적한 자들을 일컬어 ‘순왜(順倭)’라 한다. 선조가 명나라 신종에게 요동태수 자리를 애걸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순왜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휘하의 신료들조차 순왜의 규모를 이실직고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니, 조선왕조의 피폐와 무능과 신하들의 타락과 분열상은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22살 나이에 투항한 사야가는 왜군에 대적하기에 부족한 조선의 무기에 눈을 돌린다. 그는 충무공과 서찰을 교류하면서 조총제작과 화약제조에 관한 견해를 개진한다. 그를 기려 1798년에 간행한 ‘모하당문집’에서 일부 발췌한다.“소장은 비록 타국에서 온 천한 군인이오나 외람되게도 신민의 대열에 끼게 되었사오니 본국인의 심정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문하신 조총과 화포와 화약 만드는 법은 전번에 비국(備局)으로부터 내린 공문에 의거 진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또 김계수를 보내라 하명하시니 곧 보내옵니다. 총과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기필코 적병을 전멸시키기를 밤낮으로 축원하옵니다.”사야가는 충무공에게 부하 김계수를 보내고, 조선의 무기체계 개선에 진력한다. 아울러 그는 경주와 울산 전투에서 전공(戰功)을 세워 선조에게 가선대부 직함과 사성(賜姓) 김해김씨를 제수받는다. 그가 곧 김충선이다. 김충선은 1636년 발발한 병자호란에도 65세 노구를 이끌고 출정하여 청나라의 2대 칸인 홍타이지와 맞서 싸우는 애국정신을 발휘한다.아베 총리가 도발한 경제전쟁으로 나라가 온통 소란스럽다. 총칼과 대포를 동원한 살육전은 아니지만, 경제전쟁도 전쟁이다. 단지 총성 없는 전쟁일 뿐. 이럴 때 특히 유의할 것이 내부의 분열과 그것을 획책하는 자들의 분탕질이다. 임진왜란에서 조선백성이 고통받은 까닭은 암군(暗君) 선조의 무능과 우심(尤甚)한 당쟁으로 왜적의 침략을 예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1세기 한일 경제전쟁에 임해 우리는 국론을 통일하고, 침착한 자세로 저들의 도발에 응전해야 한다. 적전분열이나 과도한 공포, 지나친 선전선동은 백해무익할 뿐이다. 더욱이 순왜 못지않은 현대의 ‘토착왜구’ 준동은 기필코 막아내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친일부역자를 가리키는 ‘토왜’는 1910년 ‘대한매일신보’에 ‘토왜천지(土倭天地)’라는 글로 구체화한다. 신문은 토왜를 “얼굴은 조선인이나, 창자는 왜놈”이라고 규정하고, 네 가지로 부류로 나누었다.첫 번째가 일본의 앞잡이 노릇하는 고위 관료층이고, 두 번째는 일본의 침략행위와 내정간섭을 지지하는 정치인과 언론인이다. 세 번째는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원, 네 번째가 토왜를 지지하고 애국자를 모함하는 가짜 소식을 퍼뜨리는 시정잡배다. 100년 전과 비교해보면 차이는 있지만, 아직도 토왜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정치인과 언론인, 자발적 부역자(附逆者)가 적잖다. 그자들이 정보강국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백기투항(白旗投降)을 주장하는 자들이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과 2015년 위안부 협상의 후예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차 대전의 영웅 처칠이 남겼다는 말을 깊이 생각해볼 때다. “싸워본 나라는 다시 일어나도,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나라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2019-08-07

달걀 껍데기를 품은 방학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달걀 껍데기에도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필자를 포함해 2019년 중등 교감 자격 연수에 참가한 백 명이 넘는 연수생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강사만 바라보았다. 강사는 연수생들의 반응을 살폈다. 서로의 눈치가 몇 번 오가도 답이 없자 강의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그래도 강사는 계속 반응만 살폈다.필자는 강사로부터 이야기를 듣기까지는 육체적 상처 정도로 생각했다. 주변의 반응도 필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답답해진 연수생들이 강사에게 답이 무엇인지를 직접 물어보았다. 강사는 계속해서 강의실의 분위기만 살폈다. 여기저기서 생각한 답을 말하는 목소리보다는 답답함에 짜증이 난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다. “달걀 껍데기에 상처 받은 사람은 지금 목소리를 높이고 계신 바로 여러분입니다.” 갑자기 강의실 분위기 싸늘해졌다. “여러분 말고도 있습니다. 집에서 아침밥으로 계란 프라이가 나왔는데 거기에 아주 작은 달걀 껍데기가 같이 나왔습니다. 과연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강의실이 술렁이었다. 그냥 먹겠다는 사람들과 상황에 따라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는 등 여러 가지 반응이 나왔다. 반응을 지켜보던 강사의 말에 모두가 숙연해졌다.“물론, 아침상을 차려준 사람의 정성을 생각하며 맛있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껍데기에 마음을 상하여 아침부터 험한 말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마음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긍정적으로 마음을 쓰는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상황에서 부정적인 것부터 먼저 생각을 하고 표현합니다.”필자의 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만약 필자였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보았다. 굳이 말은 하지 않았더라도 불쾌감은 들었을 것이고, 만약 그때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분명 불쾌감을 말로 표현했을 것 같았다. 결국 필자가 달걀 껍데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었던 것이다.강사의 설명에 많은 연수생들이 격한 공감의 표시를 보냈다. 강의는 계속 이어졌다. 패턴은 똑같았다. 얼음 한 조각에 상처 받는 사람, 물 한 모금에 상처 받는 사람 등 사소한 것에 상처를 받는 유형에 대해 강사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비슷한 상황에 대한 자극이 이어지면서 연수생들의 연수 태도도 바뀌었다. 강사는 ‘자리바꿈’이라는 용어로 마음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하였다. 마음의 상처는 결국 자리바꿈을 하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결론에 필자는 많은 반성을 하였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줄기차게 이야기 했지만, 정작 필자는 이 역지사지를 단 한 번도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최근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일본의 경제보복 역시 자국 이익에만 눈멀어 자리바꿈을 하지 못한 일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고, 미사일로 추정되는 발사체를 며칠 째 계속 쏘아대는 북쪽 또한 이 자리바꿈에 문제가 있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자리바꿈의 문제는 국내 교육계에도 있었다, 바로 자사고 폐지!강의 내내 강사의 접근방법이 필자에게는 너무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필자 또한 달걀 껍데기와 관련된 여러 상황을 겪었을 텐데 왜 사람의 태도는 보지 못했는지 강의를 듣는 내내 필자의 획일적인 사고방식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필자의 생각 방식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데 오래 생각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강사가 필자의 잘못된 사고방식에 대해 정확히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기 계시는 교감 선생님들은 교사, 학부모, 학생과 대화하실 때 ‘직책’으로 대화 하시는 분이 많을 겁니다. 이제 ‘나’ 라는 사람으로 이야기를 해보세요.”교감 자격 연수를 마치면서 필자는 ‘달걀 껍데기’를 가슴에 품었다, 2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자리바꿈’이라는 가치가 필자의 마음에 꼭 부화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2019-08-07

대오각성(大悟覺醒)

한 남자가 유서를 씁니다. 궁정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나 승승장구하던 그는 스물일곱이 되었을 때 왼쪽 귀에 고음이 들리지 않기 시작하지요.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칩니다. 증세는 점점 심해집니다.1802년 의사 권고로 하일리겐슈타트라는 조용한 시골로 내려가 6개월을 쉽니다. 도시를 떠났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합니다.유서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신이시여! 제게 단 하루만 온전히 깨끗한 귀를 허락해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절대 안 된다고요? 안됩니다. 그것은 너무나 가혹합니다.”이 유서를 쓰고 난 후 남자는 다른 사람으로 변합니다. 대오각성(大悟覺醒). 죽음 문턱까지 다녀온 그는 남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가혹한 운명과 맞서 싸우겠노라 다짐합니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지요.윙윙거리는 굉음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울려댑니다. 자기 귀에서 울리는 이 지독한 소음 때문에 세상 모든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도로 작품을 쓰기 시작합니다. 결국, 완전한 귀머거리로 쓴 곡이 9번 합창 교향곡입니다. 프리드리히 실러 시에 베토벤이 곡을 붙인 4악장의 장엄함. 이 4악장을 빛나게 하려고 1악장에서 3악장까지 빠른 전개로 기대를 한껏 끌어올립니다.베토벤은 청력을 상실한 상태로 9번 합창 교향곡 초연 무대에 올라 지휘합니다. 현악 연주자들 활 놀림을 보며 곡 진행을 파악하려고 진땀을 흘립니다. 마지막 피날레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성악과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곡이 끝나는 지점을 파악 못 해 계속 손을 움직이지요. 알토 독창자 카롤리네 웅거가 베토벤 옷자락을 잡아끌며 청중 쪽으로 몸을 돌리게 했고 열광하는 사람들 모습을 보고 그제야 연주가 끝난 것을 알아차립니다.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쓴지 22년 세월이 흐르고 나서 일입니다. 베토벤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어떤 분은 해마다 12월이면 유서를 작성한다고 합니다. 신과 맺는 1년 동안의 인생 연장 계약서라고 표현하더군요. 대오각성, 이 네 글자 의미를 되새깁니다. 그럭저럭 살아온 지금까지 내 인생이라는 판을 뒤흔드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도끼질 같은 충격,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아픔.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죽음을 심각하게 고려하며 유서를 썼던 베토벤 심정 말입니다. 삶이 변하지 않고 늘 제자리걸음을 하는 이유는 대오각성이 없기 때문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8-07

가을을 기다리며

장규열 한동대 교수입추(立秋). 장마와 폭염 그리고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입추를 맞는다. 여름의 끄트머리는 몇 자락 무더위를 남기고 있겠지만 다가오는 계절을 막을 길은 없다. 뜨거운 날들을 지나면서 빚어진 일본과의 갈등은 모두의 생각을 무겁게 한다. 한낮의 더위는 몸을 지치게 하지만, 이웃이 던진 불씨는 마음을 힘들게 한다. 두 나라의 역사 가운데 오래 쌓여온 불화는 이번에는 해소할 것인지 한 자락 기대도 얹어 보지만, 불편함의 빌미만 한 차례 더하는 게 아닐까 걱정부터 생긴다. 남들은 혹 모른다 해도, 두 나라 백성들은 이 다툼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통상과 무역이 문제이지만, 속으로 멍든 까닭은 오랜 세월을 두고 쌓여온 탐심과 반목이 아닌가.전쟁이 시작되었다. 역사가 빌미인데 애꿎은 경제가 힘들 모양이지만, 따질 겨를도 없이 우리 기업과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경제가 지향하는 자유무역과 개방경제에 제동이 가해진 터에, 새로운 출구와 해결책을 찾아서 온 나라의 지혜를 모아야 할 모양이다. 나라 간 비교우위에 따라 국제적 분업의 균형과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일본이 그에 차단과 교란을 초래한 일은 세계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한국을 공격하기 위한 일본의 선택이라 해도, 글로벌시장에서 일본은 무엇을 얻을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미국과 중국도 금융과 경제로 갈등의 소용돌이에 있어 한일 간의 문제는 국제적인 관심도 모아지지 않는다. 후텁지근한 기후만큼 답답한 실타래를 두 나라는 지혜롭게 풀어낼 수 있을까.전쟁은 이겨야 한다. 이기려면 모아야 한다. 지혜를 모아야 할 때에 생각을 흩어놓지 말아야 한다. 생각도 모으고 전략도 모으며 이기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여 싸워야 한다. 나라도 기업도 개인도 역량과 지혜를 한점에 모아 뚫고 나아가야 한다. 상대 앞에서 우리끼리 흩어지는 일은 우리를 얕잡아보게 할 치명적인 실책을 스스로 만들게 한다. 현명하고 치밀하게 대응하여야 하며, 이성적인 판단에 실수가 없어야 한다. 당면한 과제에 집중하여 정연한 논리와 협상의 포인트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이 우리를 힘들게 한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옛일에 사무쳐 감정으로 흐르지도 말아야 한다. 통상과 외교에서 승부수를 만들어야 하며, 스포츠나 문화로 확산하지 않아야 한다. 글로벌환경도 염두에 두어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는 오히려 점수를 올리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일본이 솔직해져야 한다. 경제가 문제인가 역사가 숙제인가. 한국경제를 욕보인 끝에 국제통상의 가치사슬(value chain)이 무너진다면 일본이 얻을 실익은 무엇인가. 사라질 고객들을 어떻게 다시 불러온 것인가. 나라가 빚은 역사의 상처 앞에 겸허하게 태도를 밝히고 분명하게 실천하여야 한다. 식민지 국민을 힘들게 하였던 굴곡진 기억을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국이 원한다면 수없이도 돌이키겠다는 독일의 마음도 다시 보아야 한다. 일본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가 21세기에 적절한 것인지도 살펴야 한다. 전쟁을 다시 하겠다는 야욕이 실재한다면, 일본 국민은 이를 분명히 판단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전쟁은 74년 전에 끝이 났지만, 우리가 진정한 독립을 누리고 있었는지도 돌아보아야 한다. 아직도 남아 있을 미묘한 열등감이나 패배의식은 이 기회에 분명히 벗어야 한다.한국과 일본은 글로벌환경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웃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선린관계를 다시 지어야 한다. 이념과 욕심을 앞세워, 성실하게 일하는 기업과 국민을 어렵게 하지 말아야 한다. 시원한 가을을 기다리듯이, 평화롭고 화합하는 한일관계를 기대해 본다. 갈 길이 멀다.

2019-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