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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혈죽(血竹)과 우국충절

강희룡 서예가조선 후기의 우국지사이며 학자인 황현(1855~1910) 선생은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되자 국치를 통분하며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지 500년이나 됐지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 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이 또한 슬프지 않겠는가!’라는 말과 함께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9월 음독 순국해 대한제국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이듬해 영·호남 선비들의 성금으로 ‘매천집’이 출간되고 한말 풍운의 역사를 담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총서 제1권으로 발간돼 한국 최근세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의 근간이 되고 있다. 황현 선생의 저서 매천집에 ‘혈죽명(血竹銘)이 실려 있다. 혈죽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1905년 11월 17일 무장한 일본군의 포위 속에 이토의 위협과 회유에 오적(五賊)의 찬성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게재되자 성난 민심은 울분으로 요동쳤다. 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빗발치고 민영환도 대궐 앞에 엎드려 조약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모두 허사였다. 11월 30일 어둠이 짙게 드리운 새벽녘 종로 전동(典洞)의 한 집에 민영환이 불을 밝힌 채 앉아 있었다.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그는 갑자기 자신의 명함(名銜)을 꺼내 들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비장함이 배어 있는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글을 마친 민영환은 단도(短刀)를 집어 들고 주저 없이 할복을 했으나 여의치 않자 자신의 목을 수차례 난자했다. 숨이 멎고도 한동안 피가 솟구쳐 옷을 적셨다. 한참 뒤에 급보를 듣고 시종무관 어담(魚潭)이 달려왔을 때까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원망하듯, 노한 듯, 부릅뜬 양쪽 눈은 처절하고도 가여웠고 참으로 장절한 죽음이었다.’고 어담은 당시를 회상했다. 고위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망국의 엄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마침내 속죄하는 심정으로 결연한 의지를 자결로 표했다. 12월 1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보도되자 추모객들이 구름처럼 몰렸고 비탄의 통곡이 전국으로 퍼졌다. 뒤이어 조병세, 송병선을 비롯해 수많은 우국지사와 인력거꾼 등 일반인들도 연쇄 자결을 통한 국권회복과 항일의지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민충정공이 순절하고 8개월 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순절할 당시 선혈이 낭자했던 옷과 단도를 침실 뒤에 보관해 뒀는데, 바로 그 마룻바닥 틈을 뚫고 녹죽(綠竹)이 네 줄기가 솟아났다. ‘죽어도 죽지 않으리라(死而不死)’던 그의 유서처럼 대나무로 부활한 것이다. 실상이 알려지자 고종황제도 직접 대나무를 보고 나서 ‘이 대죽은 민충정공의 충렬’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신채호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7월 7일자 황성신문 논설에서 이 대나무를 ‘혈죽’이라 명하면서 전국에 혈죽 신드롬이 일어났다.매천 황현이 쓴 ‘혈죽명’도 당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쓰여졌으리라. 내용을 보면 ‘충정을 남김없이 다 쏟은 뒤에/몸을 던져 하늘로 돌아갔나니/하늘이 그 충성 기리는 것이/어쩌면 이렇게도 치우쳤는가/ (중략) 생전의 공의 모습 볼 수는 없고/오로지 대나무만 청청하구나./을사오적(五賊)들 이 소식 듣게 되면/날이 춥지 않아도 벌벌 떨리라./내 문을 닫아걸고 깊이 누우니/계속해서 대나무 눈에 선하네.’ 대한의 지식인으로서 망국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황현과 자신이 몸담았던 지배층이 저질렀던 통한의 과오를 죽음으로 속죄했던 충정공 민영환, 같은 시대 그들이 서 있었던 자리와 삶의 궤적은 달랐지만 목숨으로 충절을 지키고자 했던 뜻은 같았다.지금 우리 정치판의 상황은 망국의 구한말을 떠오르게 한다. 사회 구석구석에 110년 전 오적이 현대판 오적으로 부활해 곳곳에서 활개치고 있다. 지금의 사분오열된 정치판을 향해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망국의 역사를 벌써 잊고, 너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선생의 호통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하다.

2019-02-25

한국당은 산업화·민주화의 전통 속에서 재건돼야

박준섭 변호사최근에 5·18민주화운동으로 시끄럽다. 5·18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투입된 살인폭동으로 폄훼한 지만원을 국회에 초청해 발언한 것은 물론이고 자유한국당 의원들도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을 계기로 크게 논란이 되고 있다. 이들이 당대표와 최고위원에 출마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자유한국당 자체의 정체성 문제로까지 이어지는 분위기다.이 발언들은 5·18민주화운동의 정통성을 결정적이고 치명적으로 훼손하는 발언이어서 결국 보수당인 자유한국당이 우리 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의 문제로도 직결되고 있는 상황이다.자유한국당이 보수통합을 통해 범보수를 재건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통합이라는 이름 아래에 보수주의의 그릇에 아무 가치나 담을 수는 없다는 여론이 들끓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이는 자유한국당이 전체주의국가로 갈 수밖에 없는 인민민주주의의 가치를 우리 헌법상의 민주주의의 내용으로 결코 담을 수 없다고 민주당 정부에 대해 단호하게 말하는 것과 같다.우선 북한군의 5·18민주화운동 광주개입설은 사실이 아니다. 최근까지 밝혀진 여러 가지 신뢰할 만한 자료들에 의하더라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과 보안사 정보처장이었던 권정달은 검찰 조사 시에 북한군의 개입사실이 정확한 원인분석에 의한 결과는 아니라고 진술한 바 있다. 대표적인 보수논객인 조갑제 씨조차도 그의 저서에서 직업적 관찰자로서 지역과 좌우를 무시하고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면서 북한군의 광주개입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자유한국당이 5·18민주화운동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보수당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민주화 전통을 스스로 훼손하는 것이라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보수당의 전통이 산업화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연합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보수당은 초기에 산업화세력이 자유를 유보하고 산업화를 추진하는 정책을 펴다가 산업화를 어느 정도 이룬 다음에 민주화 세력인 김영삼이 합류했다. 이후 김영삼은 보수당의 당수가 되어 활동하다가 집권하게 되면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하나회를 해체하는 등 민주주의를 확고히 했다. 그 이후에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우리는 지금까지 보수당이 산업화세력만 대변하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해 오지 못한 것처럼 오해하고 보수당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이바지한 측면을 소홀히 해온 것도 사실이다. 아마 김영삼 대통령의 경제실정으로 인해 국민이 겪어야 했던 IMF의 고통이 너무 커서 민주주의의 공이 잘 안 보였던 측면도 작용했을 것이다.그러나 이제는 보수당이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의 가치실현에 기여한 점을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할 때가 됐고 우리나라의 보수당이 산업화의 전통과 민주화의 전통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국민의 정당’이었다는 것을 인식할 때도 도래했다는 평가다.역사는 국가공동체의 영광의 이야기, 희생의 이야기, 해방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선배세대의 희생과 노력으로 인해 한사람당 연소득이 70달러도 안되던 가난한 나라에서 이제는 세계 10위권의 산업국가로 성장한 이야기는 하나의 영웅들의 이야기이고 외국에서도 회자되는 하나의 신화이다. 마찬가지로 4·19의거, 5·18민주화운동, 명예로운 87체제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희생과 성취의 이야기 또한 후세대에게 끊임없이 들려 줄 자랑스러운 현대의 신화이어야 한다.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민주주의실현에 기여해 온 자유한국당이 5·18민주화운동의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 단호히 거부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2019-02-25

맹렬히 과거를 추적하는 ‘일상의 스릴러’

△미끄러지는 사건과 진실들주고 받는 말들이 심상찮다. 부드럽고 일상적인 대화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날카롭고 예사롭지 않다. 일상의 어디쯤이라고 생각했던 짐작은 번번히 비껴가고, 차갑고 무거운 진실은 예상을 빗나가고 이리저리 자취를 감추며 날렵하게 숨는다.이혼과 결혼을 앞둔 이들과 가족의 일상. 파리의 공항에서 시작된 영화는 다정한 부부사이가 아니라 4년의 별거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이혼합의를 위한 만남이었다. 4년 만에 ‘깔끔한 정리’를 위해 아마드는 마리와 공항에서의 재회를 한다. 아마드와 마리가 살던 집. 그녀가 전남편의 사이에서 낳은 두 명의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이메일의 내용과 전달에 대해서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가볍고 지극히 평범했던 상황이 등장인물이 한명씩 늘어 갈수록 조금씩 엉뚱한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마리의 등장. 공항에서 나가는 방향을 찾던 아마드의 등장. 마리의 집에 도착했을 때 마당에서 놀던 그녀의 둘째 딸 레아와 낯선 남자아이. 마당에서 놀던 낯선 남자아이의 친아버지이며 마리와 결혼을 준비중인 사미르 등장. 그리고 큰 딸 루시의 등장. 이러한 순차적인 등장의 중심에는 마리가 있다. 마리는 등장하는 모든 이들을 한 곳으로 모으는 사람이다. 세 명의 남자, 이혼을 앞둔 아마드와 결혼을 앞둔 사미르와 그의 아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세 명의 여자는 모두를 알고 세 명의 남자는 첫 대면이다.세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그리고 다시 한 번 아마드와 이혼을 예정하고 있으며, 사미르와 결혼을 앞 둔 마리. 세탁소를 운영하며 갑작스러운 자살을 시도했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아내를 두고 있으며 마리와 동거하며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미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이지만 아마드를 ‘아빠’라고 부르며 따르는 두 딸들. 이들이 머물렀고 머무르고자 하는 마리의 집. 등장인물들의 등장과 함께 깊게 잠자고 있던 갈등들이 하나 둘씩 터져 나오고…. 그것들이 끓어 오르며 부딪치는 장소가 바로 마리의 집이다.이 순서들을 따라 관객은 각자의 처지에 따라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을 시작하고, 누가 더 상처받고 불쌍하며, 잔인한가를 은연중에 가늠한다.하지만 감정이입은 연이어 등장하는 인물과 대화를 통해 보기좋게 배신당하고, 이곳과 저곳, 배우들을 따라 다니며 혼란에 빠지게 된다.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누가 더 악하고 누가 더 선한가의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조금씩 선하고 조금씩 이기적이며, 마음과 다르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관계에 놓여 있다.한번쯤 우리가 타인에게 보여주고 받았던 신뢰와 믿음, 배신과 상처의 모습과 다름 아니다.△믿음과 진실의 변화가 주는 팽팽한 긴장감여기에 아마드가 마리의 큰 딸인 루시로부터 ‘사마르의 아내가 왜 자살을 시도했는가’를 듣게 되면서 누구를 믿어야하며, 누구를 두둔하고 위로해야하는가에 대한 혼란이 시작된다. 믿을 수 없는 사실, 진실을 확인할수록 거기 또 다른 사실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리고 곧장 영화는 ‘진실’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일상의 스릴러’ 영화가 된다.국내에 소개된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와 ‘세일즈맨’ 역시 평범했던 일상에 던져진 파문과 반전으로 이어지는 ‘일상의 스릴러’ 라는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공권력이나 정치적인 목적, 원한과 복수의 과정을 화려한 액션과 함께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작고 우발적인 평범한 사건의 진실을 파고든다.비록 시작은 작은 구멍에 지나지 않았지만, 파고들수록 깊고 커다란 구멍을 남기는 묵직함이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영화에 이어진다.진실이 믿음의 문제라고 했을 때, 그 믿음이 또 다른 사실의 확인으로 이어질 때 진실에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 의문을 쫓아 다시 한발짝 들어가지만 그것 역시 진실인지 모를 불완전하고 모호한 상태에 이른다.‘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의 원래 제목은 ‘The Past, 과거’다. 미래를 위해 현재 이곳에 모였지만 과거에 발목이 잡혀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지키고 머물러야할 공간에 결국은 아무도 머물지 못한다. 미래를 위해 모이고 만났던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과거의 공유되지 않은 기억들이다. 하나 둘씩 드러나는 사실로 인해 그들이 마음 둘 곳이라고는 물리적·정서적으로 아무 것도 어디에도 없는 상태로 흘러간다.과거의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드러나는 진실마다 묵직하다. 거기에 모든 사건마다 이유가 존재하니 사건을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감정이입의 단계가 순조롭지 못하다. 시작은 누가 더 ‘염치’없는가를 말하는 듯하다가 누가 더 ‘상처’받은 존재인가로 옮겨 간다.△아물지 않는 과거의 상처들마리는 사마르의 아이를 임신하고 결혼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아마드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아마드 역시 미처 다 못챙긴 4년 전의 짐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짐들이 있다. 이혼 판결을 위해 법원 복도에 앉아 임신 사실을 아마드에게 말하는 마리의 심리는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드에게 상처를 주기 위함이고 그 상처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자하는 미묘한 심리가 함께 한다.이는 마리와 결혼을 앞두고도 혼수상태의 아내를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사마르. “왔다가 잠시 머물다 떠났다”라고 엄마를 거쳐갔던 남자들에 대한 불안감과 상처를 가지고 있는 루시 역시 그러하다.마리와 어린 막내 딸 레아를 제외하고 모두가 한 번 이상 그 집을 떠나고 싶어하거나 떠난다. 도덕적이냐 그렇지 않냐의 문제가 아니다.비난의 대상이 진실에 접근해 갈수록 연민의 대상이 되고, 연민의 대상이 비난의 대상으로 위치를 옮겨 앉는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진실은 모호하게 남는다.영화 후반부 진실은 모호해지고 갈등은 봉합되지 않은채 놓여 있을 때, 아마드는 마리에게 자신이 “4년 전에 왜 떠났는가에 대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마리는 끝내 그 이유를 묻지 않는다. 이제 해답은 관객의 몫으로 남고, 마지막 장면에서 희망인지 비극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등장하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영화의 흐름에 따라 등장인물 모두에게로 감정이입이 옮겨 다니고, 사건을 물고 들어가는 흐름이 대단하다. 거기에 은유와 상징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대사 하나에까지 실마리들이 내표되어 있으니 상당한 몰입을 요하지만 어느 순간 스스로 몰입의 단계를 높여가게 만드는 솜씨가 좋다.이야기는 리듬을 타고, 감정이 함께 그 리듬을 따라 흐르고, 사건은 감정을 이끌다가 뒤집고 막다른 골목길로 내몰기도 한다. 미래를 위해 모인 자리에서 다시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가지만 그 자리 역시 편하지 못하다. 이후가 궁금하지만 마지막 장면으로도 감정을 곱씹기에 벅차다.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을 만나게 될 것이다./김규형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은 이란의 영화 감독으로 2003년 장편 영화 ‘사막의 춤’으로 데뷔하였으며, 각본가이기도 하다. 국내에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외에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세일즈맨(2016)’이 소개되었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 이 세 편의 영화를 함께 보게 되면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일관된 작품 세계를 알 수 있다.*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네이버영화나 구글플레이에서 다운로드하여 볼 수 있다.

2019-02-25

NCR 규제 논란

NCR은 영업용순자본비율(Net Capital Ratio)의 준말이다. 증권사의 재무 건전성을 파악하는 기준이 되는 지표로, 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과 비슷한 개념이다.영업용 순자본을 총위험액으로 나눈 값을 백분율(%)로 표시한 것을 말한다.영업용 순자본은 전체 자본에서 유동성이 낮은 자산(부동산 등)은 빼고 신속하게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의 합계액을 말하고, 총위험액은 기업 내부 요인에 의한 가격변동 등 기초위험액과 정치·경제·사회적 요인에 의한 시장위험액을 더한 금액을 말한다.총위험이 증권사의 유동성에 비해 적합한 지를 판단하는 지표로, NCR이 높을수록 재무상태가 좋다는 의미다. 현재 금융감독당국이 권고하고 있는 NCR 비율은 500%다.이 제도는 1997년 도입됐으며 자본시장법에 따라 150% 미만으로 내려갈 경우 부실증권사로 보고 적기시정조치를 내리게 된다. 예를 들어 150% 미만에는 경영개선 권고, 120% 미만에는 경영개선 요구, 100% 미만에는 경영개선 명령을 내린다.다만 최근 금융투자업계가 NCR 규제를 개선해 달라며 더불어민주당과 금융감독 당국에 공식적으로 건의해 논란이다.업계에서는 NCR 부담으로 중소·벤처기업 투자가 위축되고 시중 유동자금의 모험자본 유입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투자자 보호가 최우선인 만큼 건전성 규제장치인 NCR 규제를 완화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지난해 3분기 기준 전체 증권사의 NCR 평균은 553%로 금융당국이 정해놓은 500%를 웃돈다. 다만 대형증권사를 제외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상위 10위 이내 대형 증권사의 평균 NCR은 1060%이고, 이들을 제외한 증권사의 평균 NCR은 400%를 겨우 웃돌고 있기 때문이다.금융당국이 증권사 시정조치 기준과 각종 인허가 기준비율로 NCR 지표를 활용하는 것이나 금융업계가 NCR 규제완화를 호소하는 것은 보수와 진보의 서로 다른 주장을 보는 듯한 데자뷰 현상을 불러온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2-25

취업인가 창업인가, 극한직업시대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영화 ‘극한직업’이 누적 관객수 1천500만명을 돌파했다. 마약반 형사들이 조폭을 검거하기 위한 좌충우돌 분투기가 치킨 집을 무대로 펼쳐진다.“세상에 이런 맛은 없었다”는 수원 왕갈비 맛 치킨으로 영화 속 치킨집은 대박이 난다. 그러나 현실의 사정은 다르다. 특별한 기술이 없이도 진입할 수 있는 업종이다 보니, 치킨집들은 한 집 건너 늘어나지만 얼마 못가서 문을 닫는다. 높은 건물임대료와 최저임금, 프랜차이즈 갑을구도 속에서 자영업 상황이 녹록치 않다.경기침체로 취업환경도 어렵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다시 취직 공부를 하는 실정이다. 대학 졸업장이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월 기준 대학 졸업예정자의 정규직 취업률은 11%로, 열 명 중의 한 명만이 안정된 일자리에 입성하였다. ‘SKY’졸업생들 취업사정도 만만치 않다.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평생 미래가 보장되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취업 문제는 지방대학으로 내려갈수록 심각하다. 그러다 보니 많은 청춘들이 공무원 시험에 뛰어들고 있다.공무원은 평생 안정된 직장, 고정된 수입을 보장해 준다. 각자의 생존전략으로 선택한 공무원 시험 준비로 청년들은 학원 앞 컵 밥을 먹고 비좁은 고시원 생활을 감내한다. 이런 상황을 LA타임스는 하버드대 입학보다 한국의 공무원에 합격하는 것이 더 어렵다며, 새벽부터 밤까지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있는 기현상을 보도하였다. 최근 정부가 ‘국가공무원 총정원령’을 개정하여 올해 1분기에만 1만명 정도 공무원을 증원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공무원 시장에 수험생들이 더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각자도생’식으로 각 개인이 불안한 미래를 해결하려 고군분투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불행이다. 4차 산업혁명과 과학기술 혁신으로 세계경제가 바뀌고 있는데 지금과 같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다수가 ‘백수 취준생’으로 공무원 시험을 공부한다면 비싼 등록금을 낸 이유가 무엇인가? 미래 일자리에 걸맞는 취업교육이든, 앙트러프러너십에 기초한 창업교육이든 학생들이 제대로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대학이 변해야 한다. 또한 치킨집을 차려 몇 년 안에 폐점하는 상황에 정부는 무겁게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의 자영업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7.0%보다 높은 25.4%인 점을 고려해 볼 때 이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고령화시대에 인생 2막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재교육과 사회적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세계 경제는 긱이코노미(Gig Economy)로 재편되고 있다. 고용시장은 그 때 그 때의 필요에 따라 일을 맡기는 추세가 확대되고 있다. 자율성, 유연성을 이유로 정규직을 꺼리고 외주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다이앤 멀케이가 지적한 것처럼, 긱경제는 “숙련된 노동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구조이기에 새로운 기술과 역량이 중요해지고 있다. 학교, 학위, 직함, 이름을 중시하던 이전과 달리 특정 지식과 기술, 재능과 경험이 중시되는 환경인 것이다. 이제 대학 학위가 더 나은 일자리를 보장하지 않는 시대가 되고 있다.졸업도 취업도 창업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고 대학 졸업을 유예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치킨집을 차리는 것은 답이 아니다. 일찌기 하워드 가드너가 ‘미래 마인드’에서 언급했던 훈련 마인드, 종합 마인드, 창조 마인드, 존중 마인드, 윤리 마인드 개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최소한 한 분야의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계속 훈련해 갈 수 있도록 평생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개인의 이익을 넘어 사회 전체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숙련된 인재가 자본보다 더 부족하다고 말한다. 대학 졸업생이 쏟아지는 2월 졸업식을 지켜보며, 취업과 창업, 어느 것도 만만치 않은 극한직업의 시대, 대학과 정부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묻는다.

2019-02-25

김성조 경북관광공사 사장에 거는 기대

경북문화관광공사가 마침내 수장을 맞았다. 지난해 김대유 사장이 퇴임한 이후 새로운 인물을 찾기 시작해 무려 세 번째 공모 끝에 겨우 적임자를 찾았다.김성조 신임 경북문화관광공사 사장은 지난 22일 이철우 경북도지사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김 사장은 관광공사 사장 임명장을 받은 직후 공사 북부지소에 들러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을 시작으로 25일 취임식을 갖고 본격 업무에 들어간다.김성조 사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철우 지사가 관광활성화에 큰 기대를 걸고있는 것을 무엇보다 잘 알고 있다. 많이 부족하지만 관광공사 대표가 된 만큼 지금까지 익힌 경험과 철학을 앞세워 경북관광활성화에 온 몸을 바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이철우 지사의 기대가 큰 만큼 향후 업적을 내놔야 하는 등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경북문화관광공사는 김 사장이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철우 지사가 각고면려와 삼고초려를 거듭했지만 1차 관문에선 재공모로 결론났다. 2차공모에선 김연창 전 대구시 경제부시장이 응모했고, 거의 낙점되는 분위기였다. 국정원 출신인 김 전 부시장은 이철우 도지사와 돈독한 관계였고 평가도 좋았다. 그 즈음 이 지사 또한 한 좌석에서 “김 부시장은 선배와 동료 후배를 아우르는 성격에다 업무능력 또한 뛰어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었던 기자들은 김 전 부시장이 거의 경북관광공사 사장으로 굳어졌다는 감을 잡았다.하지만 장기간 낙점이 안돼 도청 내외부에서는 많은 뒷공론이 돌았다. 당시 이 도지사가 가전제품박람회 참석차 미국출장을 앞둔 시점에서도 결정을 하지 않아,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설이 돌더니 결국 김 전 부시장은 낙마했다.김성조 전 국회의원은 이후 이어진 3차 공모에서 혜성처럼 등장했다. 면접을 거쳐 전 한국관광공사 부사장과 함께 이름이 이철우 지사 테이블에 올라갔고 결국 낙점을 받았다.김 사장 선임을 두고 안팎에서 아직도 이런저런 야기들도 적지 않다. 김 사장이 전직 국회의원에다 대학 총장까지 역임한 거물인 것은 틀림없지만 관광과는 거리가 좀 있기 때문이다. 당초 선정 과정에서 전 한국관광공사 부사장이 좀 유리할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 배경도 전문성 면에서는 앞선다는 평가가 있어서였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고 김 전 의원이 이름을 올렸다.김 사장은 운을 타고났다고 생각된다.그에겐 공교롭게도 고비고비마다 운대가 들어왔다. 마치 연못속에서 몸을 움츠리다 비바람이 몰려올 때 단번에 승천하는 것처럼…. 그가 응모했을 당시 도청출입기자들도 김 사장의 관광공사행에 별 기대를 걸지 않았으나 보란듯이 넘어갔다.김 사장은 1958년 11월생으로 나이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흘러간 물이라는 생각이 드는게 사실이다. 워낙 젊었을 때인 30대에 경북도의원을 두 번이나 역임하고, 바로 국회의원에 도전 대부분의 예상을 깨고, 당시 최고의 실력자였던 허주(虛舟) 김윤환 의원을 꺾는 등 화려한 정치역정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후 내리 3선의원으로 승승장구하다 4선에 실패했다. 잠시 야인생활을 하다 한국체육대 총장으로 복귀했다. 풍운아에 다름 아니다.그리고 이번 달 한체대 총장을 마치자 마자, 다시 새로운 단체를 맡았다. 그야말로 관운이 대박을 넘었다.그에게도 보이지 않는 위기도 있었다.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 당시 청와대 수석비서관에 거의 내정됐었다. 하지만 일이 뒤틀리면서 가지않은 것이 오히려 득이 됐다고 그는 회고했다. 만약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에 들어갔다면 지금 어떤 위치에 있을까,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는 것이다.그는 이제 경북의 관광을 컨트롤하는 경북문화관광공사 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철우 지사가 임명한 만큼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이 지사는 과거 국회의원 시절 잘 아는 인사를 뽑은 것 아니냐는 즉 ‘입맛대로 인사’를 했다는 말도 듣고있는게 사실이다. 다음 선거를 겨냥한 포석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김 사장이 이 자리가 과연 맞는가’라고 의문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이를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일정 이상의 성과를 내야한다.이 지사는 단기간에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관광활성화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삼성출신 경제부지사를 뽑은 것도 관광도 염두에 둔 인사다.베트남 현지에 삼성근로자들이 수십만명이 일하고 있는데 이들을 경북으로 관광차 불러들이겠다는 야심찬 계획인 것이다. 향후 경북관광 활성화는 경북도 전우헌 경제부지사와 김성조 경북문화관광공사를 양 축으로 가동할 가능성이 크다.김성조 신임 사장은 도의회 인사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쌓아온 국회의원과 대학총장 등 여러 경험과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경북도가 문화관광을 발판 삼아 새롭게 도약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경북도는 요즘 고난의 여정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온 예타면제 사업 부진, 하이닉스투자유치 실패, 원해연유치 난항, 통합공항 이전 지지부진 등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해있다. 김 사장이 경북도정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바라보는 눈들이 많다./이창훈 경북도청본사 취재본부장 myway@kbmaeil.com

2019-02-24

주변 4강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바라는가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세계의 이목이 베트남의 하노이로 쏠리고 있다. 북미 2차 정상회담에서는 어떤 합의문이 발표될 것인가. 이번 북미 정상회담에서도 획기적인 합의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다. 북미 간에는 완전한 비핵화, 대북 제재 해제, 종전선언과 평화 협정 체결이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은 북미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고 주변 국가의 이해관계도 걸려 있는 문제이다. 주변 4강은 겉으로는 한반도의 평화 구축을 표방하지만 내심으로는 자국의 실익을 우선하려고 한다. 이 점이 우리의 4강 외교가 극복해야할 과제이다.미국의 입장부터 살펴보자. 미국은 북한의 장거리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의 미 대륙 침공이 최우선적 관심사이다. 미국은 북핵으로 인한 미국인들의 안보 불안제거라는 입장에서 북핵문제를 접근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트럼프는 북한의 직접적인 핵실험 등 핵위협이 없었더라면 북한을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치 않았을 것이다. 미국 언론도 트럼프는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북핵 협상으로 타개하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트럼프는 러시아와의 내통관련 뮬러 특검의 조사 결과발표에 따라 탄핵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이를 희석시키고 내년 재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대북 협상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그가 정상회담을 앞두고 대북제재와 대북 투자라는 채찍과 당근 전술을 구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중국도 한반도 문제를 자국의 이익확대라는 관점에서 추진하는 것은 미국과 비슷하다. 중국은 북한이 종국적으로 북미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중국의 세계 전략에 도움이 된다고 보지 않는다. 중국은 오히려 내심으로 북한이 미국 제국주의에 대해 대립각을 세우는 종전의 정책을 선호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종래의 순망치한(脣亡齒寒)에서 보듯이 친중적인 북한 정권이 중국의 입술역할을 기대하면서 북한이 대미 방어전선의 교두보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열세인 북한지역의 광산이나 나진 등에 투자하고 북한 소비시장에도 영향력을 확대중이다. 이런 정황에서 중국은 미국이나 남한 자본의 북한 투자를 꺼릴 수밖에 없다.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해 종전선언 당사자임을 강조하면서 간여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 당국이 김정은을 수시로 다독이는 외교도 이런 연유이다.일본과 러시아의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미국의 동북아 외교는 적극 지지한다. 일본은 북미 관계가 개선되고 북한이 정상국가로 대접받으면 대일 청구권 등 골칫거리가 등장할 것을 우려한다. 과거 6·25 전쟁 때 군수 보급 기지로 재미를 본 일본은 현재의 분단 상황을 내심으로 즐길지도 모른다. 러시아 역시 미국에 대해 각을 세우면서 한반도의 비핵화에 자신의 역할을 행사하려고 한다. 그들은 태평양 진출을 위한 북한 항구개방에 관심이 많으며, 북한 경유 가스 라인의 남한 연결 등 경제적 이득을 노리고 있다. 러·일은 공히 남북의 화해나 북미 평화 협정보다는 과거 6자회담의 당사자로 회귀하여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주변 4강의 이러한 자국 이익우선의 원칙은 한반도의 평화 체제 수립의 본질적 장애물이다. 정부는 한반도 평화 보장을 위해 주변 4강 외교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과거 통일 전 서독은 미국과 프랑스 등 서방외교를 유지하면서도 대소, 대 동구 외교를 교묘하게 추진하였다. 그것이 독일 통일의 초석이 되었다. 우리도 주변 4강 외교를 현 수준에서 한 단계 끌어 올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의 한류 등 문화적 우수성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외교에는 경제력 못지않게 문화적 헤게모니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서도 너무 조급한 접근은 경계하면서 경제 협력과 문화적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그것이 완전한 통일이전의 ‘사실상의 통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2019-02-24

사소함의 미학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몇 년 전, 학위 논문을 심사할 때의 일이다. 한 장씩 읽어가다가 어느 한 모퉁이에서 나도 모르게 눈이 멈췄는데, 그 이유는 바로 명명백백한 표절의 흔적 때문이었다. 방대한 자료를 훑다보니 출처 밝히는 것을 깜빡했나보다 하고 있었는데, 감사해야 할 학생의 지도교수가, 오히려 투덜대는 것이 아닌가! 이유인즉슨, 그 부분은 전체 중 지극히 소소한 부분이라 아무도 모르는데, 괜히 문제를 삼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박사 논문도 아닌 석사 논문에서 뭐 그리 소소한 것까지 따지느냐는 원망의 눈빛마저 보내는 바람에 적잖이 당혹해 했던 기억이 있다.옛말에 ‘필작어세(必作於細)’라는 말이 있다. 노자의 ‘도덕경’ 63장에 나오는 말로,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뜻이다. 사소한 것이라고 가벼이 여기게 되면 뒤에 큰 화를 당하기 십상이다. 한비자가 ‘천 길 제방도 땅강아지나 개미의 작은 구멍으로 무너지고 백 척 높이의 고대광실도 아궁이 틈에서 나온 작은 불씨 때문에 타버린다’고 한 것이나, 공자가 일찍이 ‘군자는 광대함에도 도달하고 작고 정미한 것에도 진력하여 높고 밝음을 끝까지 추구하며 중용을 도로 삼는다.’고 한 것은 모두 ‘사소함’의 중요성을 설파한 말들이다.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가 쓴 ‘산업재해 예방: 과학적 접근’이라는 책에는 ‘1:29:300의 법칙’이 나온다. 이는 어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그와 관련된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들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통계적 법칙으로, 핵심은 큰 재해는 항상 사소한 것들을 방치할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중국 반캬오 저수지 붕괴 사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건, 2차 의료 감염 사건 등도 모두 인근 댐들의 저수량을 감안하지 않은 설계, 기술자들의 안전규칙 위반, 수술 전 올바른 방법으로 손 닦기 같은 사소함을 무시한 결과이다. 물론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거나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있고 보면, 작은 것에 집착하다 큰 것을 놓치는 경우도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100%의 실패를 막는 것은 1%의 실수, 곧 사소함이다.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은 이러한 디테일, 사소함에 강하다. 이 ‘사소함’은 단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하찮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큰 것을 보기 위한 첫 걸음이자 주변을 배려하는 ‘세심함’을 내포한 말이다.그런데 세상에는 내게는 자그마한 일이, 상대에게는 큰일이자 상처이고 평생의 아픔이 되는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마시던 소주병을 베란다 밖으로 무심코 던진 게 길 가던 행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목숨을 앗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재미로 놀리고 때린 일이 상대에게는 상처가 되어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 세상이다. 오래 전 사탕 한 개를 훔친 아이, 겨우 사탕 한 개쯤이야 하고 눈감아 준 것이 수십 년 후 은행털이범이 된 경우도 많이 본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법, 이 모든 것은 초기의 사소함을 크게 생각지 않은 탓들이다.사소함을 차츰 무시하다보면, 나중엔 큰일을 사소함으로 여기는 대범함이 생기기도 한다. 힘겹게 번 돈으로 도와주었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뭐 큰 금액도 아니고, 그런 사소한 것쯤이야, 친구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등 임용 출제 기간에 개인 사유로 무단이탈해 놓고선 오히려 사소한 일이라며 문제없다고 발뺌하는 교육계 인사들…. 이들에게는 도덕적 양심이 없다. 따뜻한 심장이 없다. 모든 게 ‘사소한’ 까닭이다.내게의 ‘사소함’이 남들에게 ‘큰일’이라면, 그것은 결코 ‘사소함’이 될 수 없다. ‘사소함’은 ‘나’가 아닌 ‘남’을 위한 배려이다. 그래서 ‘필작어세(必作於細)’에 담긴 사소함의 미학‘은 바로 다름 아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인 것이다.

2019-02-24

아홉 장 히든카드가 승리의 비결

교차로에서 음주 운전자가 7중 추돌 사고를 냅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친 동생을 마중하러 왔던 오빠는 활활 타오르는 조수석의 동생을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대학 4학년 동생은 전신 55% 3도 화상을 입습니다. “곧 사망할 수 있으니 미리 작별 인사를 나누세요.” 의사의 말이 귓전을 때립니다.폐에 가득 찬 유독 가스를 빼기 위해 튜브를 박은 채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입니다. 화상 입은 다리는 피부가 다 사라지고 생닭처럼 흐늘흐늘한 근육과 노란 지방덩어리, 흰색 뼈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듭니다. 잘 알려진 이지선씨 화상 이야기입니다. 이지선씨는 “왜 하필 나인가요?”부르짖으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원망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냅니다. 어느 날 문득 “하필이면 나? 그렇다면, 나 대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다쳤어야 하니?” 깨달음이 밀려옵니다. 나는 다치면 안되고 다른 사람은 다쳐도 괜찮다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마음을 바꾸기로 결심합니다.“하루 한 가지 감사할 것들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매일 한 가지 엄마와 감사거리를 찾는 연습을 합니다. 화상을 입지 않은 두 발에 시선이 머물지요. “찾았어요. 엄마. 불에 타지 않은 두 발, 씻을 수 있는 두 발이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해요.” 마음을 추스른 그녀는 한 가지 결심을 합니다. “책을 쓰자! 나보다 더 큰 절망과 고통을 당해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그 누군가에게 내 상황은 새로운 힘을 줄 수도 있을지 몰라.”찰스 스윈돌 박사는 말합니다. “인생에서 내게 벌어진 일이 10%라고 하면 그 일에 대한 내 반응이 나머지 90%를 결정한다.” 인생이란 10장의 카드가 주어지는 게임이고 1장은 이미 드러난 패, 나머지 9장은 히든카드입니다. 어떤 순서로 카드를 내미는가에 따라 승부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지요.힐링 캠프에 출연했던 지선씨는 말합니다. “오늘 TV로 제 흉한 모습을 보신 분들이, 이렇게 생각할지 몰라요. 저렇게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도 대단한 삶을 살아가는데, 나는 뭐지? 멀쩡한 몸을 갖고 건강한데 더 잘 살아야지, 감사해야지.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저와 비교해 감사가 나온다면, 미모의 여자 MC분과 비교하면 당장 불행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거죠. 비교하지 않고 진짜 내 모습으로부터 우러난 감사였으면 좋겠어요.”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요.”/조신영 인문학365 대표

2019-02-24

상복(喪服) 입은 상주시

용인시가 SK하이닉스 유치로 환영 분위기로 들떠 있을 무렵 경북 상주시 공무원은 검은 넥타이를 매고 출근했다. 여직원은 검은색 계통의 복장으로 근무하는 모습이 언론에 비쳐졌다. 상주시 공무원이 마치 초상집을 연상케 하는 상복차림으로 근무해야 했던 사정은 다름 아닌 줄어든 인구에 있었다.한때 26만 명을 웃돌았던 상주시 인구가 이달 초 10만 명 선이 무너졌다. 농촌도시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지만 막상 10만 명 선이 붕괴되자 상주시가 받은 충격은 꽤나 컸다.그동안 학자금 지원 등 인구 늘리기에 온갖 행정력을 쏟아 부었지만 인구 증가는 불가항력이었다. 설마하던 것이 현실로 나타남에 따라 모두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도시소멸의 위기감도 실감 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검은색 넥타이 차림으로 각오를 다져보지만 농촌 현실이 얼마나 뒤따라줄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상주시는 경주와 더불어 웅도 경상도를 대표하는 고을이다. 조선시대 200여 년 동안 경상감영이 자리한 곳이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농경문화가 발달했고 과거부터 수륙교통의 요충지였다. 학문과 문화를 숭상하는 선비의 고장이자 충열의 고장이다. 경상도라는 이름도 경주의 ‘경’자와 상주의 ‘상’자에서 따왔다고 할 정도로 위세당당한 지역이다.경북도내에는 상주시와 같이 딱한 사정에 놓인 도시는 수두룩하다. 영천과 영주도 인구 10만 명 선에 오락가락 한다. 인구문제에 관한 뾰족한 대책도 없어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는 게 지방도시다.SK하이닉스 유치로 신이 난 경기도 용인시는 1970년대 초반 만 해도 인구 10만이 안 되는 작은 도농혼합 도시였다. 1995년 시로 승격되고 22년 만에 인구 100만 도시로 성장했다. 수도권 집중화 정책의 수혜 도시다.경기도에는 인구 100만이 넘는 밀리언 시티가 수원, 고양, 용인 등 3군데나 있다. 성남과 부천시도 곧 합류하겠다고 한다. 경북과는 처지가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에 이질감마저 느껴진다. 국토면적의 12%에 불과한 수도권에는 인구의 절반과 경제의 80%가 몰렸다고 한다. 상주시 공무원이 상복 차림으로 근무한 이유를 알 만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2-24

칼날 위의 ‘한국당’

안재휘논설위원김진태 의원이 깔아준 멍석 위에서 지만원 씨가 ‘편견’ 굿판을 벌이고, 이종명·김순례 의원이 덩달아 춤을 춘 ‘5·18 망언’ 소동 후폭풍이 자유한국당을 막다른 골목길로 몰아가고 있다. ‘5·18 망언’ 사태는 경제정책실패와 북한 비핵화 지지부진의 여파, 당정 인사들의 잇따른 구설수 늪에서 버둥거리던 청와대와 민주당, 그리고 진보세력 모두에게 반격의 핵폭탄을 제공한 망동이다.봄 날씨를 연상시키는 따뜻한 주말 청계광장이 사람들로 넘쳐났다. 5·18 비상시국회의와 5·18역사왜곡처벌 광주운동본부가 주최한 ‘5·18 민주화운동 왜곡·모독·망언 3인 국회의원 퇴출! 5·18 학살 역사 왜곡 처벌법 제정! 자유한국당 해체! 범국민대회’라는 외우기도 힘든 긴 이름의 행사에 광주에서만 1천500여명 시민들이 상경했단다.참여시민단체가 550여 개라고 발표된 이 날 집회에는 여야 4당 소속 국회의원 20여 명과 이용섭 광주시장, 박원순 서울시장,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등도 참석했다. 집회에서는 ‘지만원 구속’‘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 퇴출’ ‘5·18 왜곡 처벌 특별법 제정’ ‘5·18 진상조사위 출범 협조’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인근 지역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보수성향의 태극기집회가 열렸다. 집회 참가자들은 ‘5·18 가짜 유공자를 공개하라’, ‘문재인 대통령은 퇴진하라’고 주장하며 5·18 망언규탄 시위대에 거친 말을 쏟아내기도 했지만 이 날의 태극기집회가 자아내는 보편적 공명은 미미했다.그런데, 일방적 군중심리의 여파로 추진되는 이른바 ‘5·18 망언 처벌법’이라는 이름의 법안은 참으로 걱정스럽다. 개정안은 5·18을 비방·왜곡하거나 허위사실을 유포한 사람을 7년 이하 징역 또는 7천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 법안 발의에 동참한 국회의원은 모두 166명에 이른다니 심각한 일이다.입법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독일과 프랑스 등의 경우들을 사례로 든다. 독일은 1985년 형법 제130조 3항에 ‘홀로코스트 부인’을 금지하는 규정을 담았다. 형법 86조에 나치 상징 깃발과 슬로건을 사용할 경우 3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으로 엄벌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프랑스도 1990년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외국인 혐오 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나치학살 부인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하지만 ‘5·18 망언 처벌법’이라는 이름의 개정안은 이렇게 허투루 다룰 법안이 결코 아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야만의 칼로 악용될 개연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현령비현령이거나 견강부회의 궤변기술을 동원해 국민의 기본권을 훼손시킬 여지가 다분하다. 갖가지 편법으로 표현의 자유를 난도질했던 뼈아픈 정치사를 아직 무시해서는 안 된다.문제는 지리멸렬의 뻘밭에서 도무지 헤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제1야당 자유한국당의 형편이다. 27일로 예정된 전당대회가 한국당을 살려낼 가능성은 여전히 높지 않다. 국민의 가슴이 뭉클하도록 ‘혁신과 부활’의 기적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상처를 후벼 파는 드잡이판이 되어버린 전당대회를 놓고 대다수 여론은 또다시 비관 일변도다. ‘싹수가 노란’ 간판 내리고 각자 흩어져 각자도생이나 모색하라는 주문이 줄을 잇는다.자유한국당이 칼날 위에 서 있다. 한 발만 더 삐끗하면 산산조각이다. 도로친박당, 도로수구꼴통당으로 돌아가 낡은 필름이나 돌릴 시대착오적인 광풍 속에 갇힐 것이라는 낙망이 난무한다. 나라와 당의 ‘미래’를 겨루는 희망의 설계도가 넘쳐나기를 바랐던 많은 이들을 모조리 절망의 섬에 가두고 있다. ‘폐업만이 답’이라는 충고를 반박할 여지란 추호도 없게 만든 보수 야당의 행태에 가슴을 친다. 운명의 순간이 째깍째깍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다.

2019-02-24

신으로 상징되는 자연·운명 앞에 가장 귀한 ‘목숨’을 바치다

공포이기도 하고 미개의 상징이기도 하다. 영화에나 가끔 등장하는 인신공양 혹은 인신공희(human sacrifice·人身供犧) 의식은 현대인들에게는 믿기지 않고 믿고 싶지도 않은 야만이다.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두고 보면 인권은 물론이거니와 합리적 이성조차 근대에 이르러 증기기관차처럼 ‘발명’된 개념이다. 수렵시대와 유목시대를 지나 농경시대까지도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는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페니키아에서는 몰렉 신에게, 마야에서는 우신(雨神)에게, 아즈텍에서는 태양신에게 제의를 올리며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이 야훼에게 충성을 보이기 위해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하고, 입다는 끝내 자기의 딸을 번제로 바친다.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에서는 목공이 죽자 177명의 신하를 순장시켰고, 진시황이 죽자 아들 호혜는 비빈과 궁녀, 무덤을 만드는 데 동원된 장인과 기술자들까지 모두 생매장시켰다.하지만 고대인들이 현대인에 비해 ‘특별히’ 잔인무도해서 생사람을 잡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인신공희는 풍작을 기원하거나, 천재지변을 당해 신의 노여움을 풀거나, 전쟁의 승리를 소원하거나(혹은 패배를 반성하거나), 통치자의 위엄을 보이거나, 죽은 자의 넋을 달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들은 ‘신’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운명 앞에서 그들이 바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 목숨을 바쳤다. 그들은 다만 자신을 둘러싼 어둠 앞에서 턱없이 무력했고, 그래서 어리석은 맹목이었을 뿐이다.2017년 5월 16일, 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성 발굴현장에서 2015년 3월부터 진행 중인 정밀발굴조사의 중간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바야흐로 보물창고이자 비밀의 창고가 열린 셈이다. 그때 새롭게 밝혀지거나 최초로 확인된 수많은 출토물 중에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성벽을 본격적으로 쌓기 직전인 기저부 성토층에서 출토된 2구의 인골이었다. 국립경주박물관과 경주문화재연구소가 공동 기획한 특별전시 도록 ‘신라 왕궁 월성’에 실린 ‘성벽 밑에 잠들어 있었던 사람들’ 사진을 들여다본다. 나란히 누운 둘의 머리는 북동쪽을 향해 있다. 한 구는 정면을 향해 팔다리를 가지런히 하여 누워있는 앙신직지(仰身直肢)의 자세이고, 다른 한 구는 몸을 약간 틀어 반대편 인골을 바라보는 자세다. 두 인골 모두 성인이고 외상(外傷)의 흔적 없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전한 형태였다고 한다.발치에는 흙으로 만든 항아리 3개와 손잡이가 달린 컵이 놓여 있고, 머리 주변에 남은 나무껍질로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을 하니 5세기 전후에 묻힌 것으로 확인되었다. 키 166㎝의 인골은 골반과 후두돌기의 모양으로 미루어 남성임이 분명했다. 159㎝ 크기의 인골은 성별이 불분명한데, 인골의 골반에서 채취한 콜라겐으로 체질인류학 DNA 검사를 진행하면 건강상태와 질병, 식생활과 유전적 특성 등이 밝혀질 것이라고 한다.(2019년 1월 4일 확인한 바, 연구 결과 한 구는 50대 남성이고 다른 한 구는 50대 여성의 인골임이 밝혀졌다고 한다.)신라인들은 왜 성벽 아래 사람을 묻었을까? 기자들의 질문에 경주문화재연구소 박윤정 학예실장은 “별도의 매장시설이 없어 사람을 제물로 바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고, 이인숙 학예사는 “인골이 매우 가지런한 형태로 발견되어 산 사람을 묻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답했다.다시 도록 속의 앙상한 뼈를 들여다본다. 그들은 자연사하지 않았다. 고통에 몸부림치거나 저항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그들을 죽여 월성의 기초공사가 끝나고 성벽을 쌓아올리기 직전에 시신으로 묻었다. 1500년을 뛰어넘어 해골로 발견된 신라인들은 바로 ‘인주(人柱) 설화’로만 전해오던 풍습의 고고학적 증거인 것이다.경술 개경의 도성 사람들 사이에 유언비어가 돌았는데, 왕이 민가의 어린 아이 수십 명을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에 묻는다는 것이었다. 집집마다 경악하여 아이를 안고 도망쳐 숨는 자들도 있었다. 악소(惡小)들은 그 틈을 타서 재빠르게 도둑질을 자행하였다.‘고려사’ 충혜왕4년(1343)의 기사는 이른바 ‘인주(人柱) 설화’에 대한 기록이다. 인주, 말 그대로 사람을 물속이나 흙 속에 파묻어 ‘사람 기둥’을 세우는 것이다. 거대한 토목공사인 성 쌓기, 둑 쌓기, 다리 놓기 등을 할 때 사람을 기둥으로 세우거나 주춧돌 아래 묻으면 제방이나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신석기시대 산동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해대(海岱)는 동방문명이 이루어진 핵심 지역인데, 치평 교장포 유적의 건물과 성벽에 어린아이 혹은 성인을 건물의 기초를 다지는 공사의 희생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배진영.2009) 기원전 17세기부터 11세기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최초 왕조 상(은)나라는 순장을 비롯한 인신공양의 풍습이 만연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수도의 은허 궁전 토단에서 수십 구에 이르는 인신 제사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일본에서도 성과 제방과 다리를 건설하는 난공사 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히토바시라(人柱)’의 풍습이 에도시대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고대의 토목사업은 전쟁만큼이나 중대한 나랏일이었다. 사업의 성패가 국운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였다.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려면 우선 많은 노동력을 조달할 수 있는 집권력과 막대한 지출을 감당할 만큼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했지만, 현장에서 직접 쓰이는 측량과 토목 기술 또한 중요했다. ‘삼국시대 고고학개론1’에 실린 논문 ‘토목기술과 도성조영’(권오영)에는 ‘튼튼하고 단단한 성곽을 쌓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애쓴’ 고대인들의 분투가 고스란하다.장비와 제반 조건이 열악한 상태에서는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위험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토질을 개량하고, 중력에 의해 흘러내리는 돌과 흙을 최소화하는 각을 찾고, 경사 진 지형을 이용하거나 주변에서 흙을 캐와 덩어리를 쌓는다. 이때 식물의 잎과 줄기 등을 층층이 까는 부엽공법으로 미끄러움을 줄여 구조물의 붕괴에 대비하고 비와 눈에 의한 누수현상을 막는다.월성의 성벽 또한 점성이 서로 다른 흙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재료와 다양한 축조공법으로 만들어졌다. 성벽의 최상부에는 사람 머리 크기만 한 돌이 4~5단 가량 무질서하게 깔려 있는데, 이것은 월성의 특징 중 하나로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기능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토록 필사적으로 성벽을 쌓은 것은, 왕성이야말로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보존하는 최후의 방어시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시 최고의 기술력과 막대한 인력과 물적 자원을 총동원했음에도 홍수가 나서 무너졌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유례이사금7년(290) 등에 나온다. 따라서 문헌의 기록과 더불어 C지구에서 다량 출토된 연호명 기와로 미루어 월성 성벽이 여러 차례 수리와 보수를 거쳤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럼에도 쌓으면 무너진다. 무너지면 다시 쌓는다. 이처럼 도저한 불가항력 앞에서 고대인들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통해 이루려 한다. 토지의 신이든 물과 바람의 신이든 어떤 신령에게든 희생 제물을 바쳐 애써 쌓아올린 성벽과 다리와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간절한 만큼 치열했고, 처절한 만큼 끔찍한 사람 기둥의 설화가 월성 성벽 발굴을 통해 국내 최초로 확인되었다.사람이 사람의 값어치를 어떻게 매기는가, 말하자면 ‘사람 값’이 그 사회의 성숙도와 문화 수준의 척도다. 502년 지증왕은 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다섯 명씩을 함께 묻는 순장 풍습을 국법으로 금한다.(그러니까 최소 6명 이상의 순장자가 확인된 황남대총은 지증왕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아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527)하기 전에 생명에 대한 아버지의 자각이 있었다. 진평왕 때(600)는 수나라 유학파 원광법사가 세속오계 중 ‘살생유택’을 설파하고, 비슷한 때 백제에서도 법왕이 일체의 살생을 금해 새들을 풀어주고 고기잡이 도구를 불사르게 한다.공식적인 인신공희는 사라졌다. 하지만 애당초 인신공희는 공개된 장소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지 않고 대부분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부지에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우물에서는 동물 뼈와 함께 8~9세쯤 되는 어린아이의 전신 유골이 나왔는데 그 인골이 제의용인지 여부는 아직 논란중이다. 월성을 방어하는 시설인 해자에서 출토된 인골은 지금까지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인해 묻힌 사람으로 보고되어 왔지만 인주 설화가 확인된 이상 새로운 접근도 필요해 보인다.‘고려사’에 이어 ‘고려사절요’ 희종6년(1210)에도 최충헌이 대저택을 지으며 “몰래 남녀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오색으로 옷을 입히고 저택 네 귀퉁이에 매장하여 토목의 기운을 물리친다고 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조에도 성종25년(1494) 군(君)과 옹주가 집을 지으며 주춧돌 밑에 어린아이를 묻었다는 거짓말을 유포한 자를 체포하라는 명이 내렸고, 사관이 덧붙이길 소문이 퍼지자 경기·충청·황해도의 사람들이 아이를 안고 산에 올라가 피하느라 마을이 텅 비는 데 이르렀다고 하였다.물론 후대의 인주 설화 대부분은 유언비어로 밝혀졌다. 부자와 권력가들의 탐욕과 전횡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낭설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이 엄하다고 죄가 없을까? 어두운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간의 비밀은 계속된다.1500년을 훌쩍 뛰어넘어 인골로 다시 세상의 빛을 본 두 사람,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인신공희의 제물은 주로 이민족이거나 노예이거나 죄인이었다. 때로는 ‘순결한’ 처녀와 어린아이이기도 했다. 드물게는 순교자 이차돈과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주인공처럼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보시하는 경우도 있었다.인골에서 추출한 DNA 검사를 통해 우리는 어떤 비밀을 알게 될까? ‘사람 기둥’이 되어야 했던 두 사람의 정체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밝혀질까? 죽어 성벽 아래 묻힐 때 그들의 마음이 원한이었을지 희생정신이었을지 아니면 얼떨떨함이나 황망함일지 알 수 있을까?한 쌍의 백골 앞에 넋을 놓고 있노라니, 문득 터널과 댐과 고속도로 인근에 외로이 서 있는 위령비들이 떠올랐다. 언젠가 무심히 비문을 읽다가 ‘순직자’이거나 ‘산업전사’인 그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음에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누군가의 삶이 희생된 자리에 누군가의 삶터가 지어지는 이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니, 인간의 역사란 참으로 슬프고도 잔인하다.

2019-02-24

하노이에서 보는 북미 회담

배용재 변호사지금 베트남은 북미 정상회담으로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베트남은 이번 기회를 국위를 선양하고, 북미와 동시에 관계를 개선하는 기회로 삼고자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특히 앞서 미국과의 직항로까지 개설돼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내친 김에 한발 더 나아가 미국의 공적 자금의 유입까지 기대한다. 현재 베트남에서의 북미 정상회담은 가장 중요한 이슈로 떠올라 있다. 현지 매스컴이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고, 국민들의 환영분위기 또한 잔칫집이나 다름없다.이곳 한국인 사회의 열기도 마찬가지다. 전쟁 대치상태에서 벗어나 평화해빙무대로, 공존번영의 세계로 나아간다는데 반대할 한국인들은 없을 것이기에 북미정상회담에 거는 기대가 크다. 많은 한국인들이 ‘이제 베트남에서 북한으로 사업장을 옮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흥분하는 광경을 쉽게 목도할 수 있다. 민족끼리 잘 살게 되는 세상이 온다하는데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서로 윈윈(win-win)하면서 통일로 성큼 나아간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터다.북한의 잠재적 가치는 베트남에서도 관심거리다. 10대 광물 잔존가가 3천200조원(2016년 기준, 광물자원공사)에 달한다는 등 뉴스마다 화제 집중이다. 하노이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경제인들도 북한은 숙련도는 높으나 비용은 낮은 노동력에다 같은 문화와 언어 등 남한 경제인들이 바라는 요소들이 많아 세계 어떤 곳보다 매력으로 꼽는다. 베트남 한인사회 입장에선 당연히 북미회담 결과를 주시할 수밖에 없고, 북한개방에 큰 희망을 걸고 있다.하노이에서 생활하고 있는 필자 역시 이번 북미회담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오길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서는 무언가 모를 불안감도 엄습함이 사실이다. 하노이에서 만나는 지식인들로부터 북미회담 물밑 소식들을 접할 때가 꽤 있다. 이들도 북미회담이 겉은 화려하나 한국인들이 바라는 수준까진 아닐 것이라고들 전한다. 테드 크루즈와 로버트 메넨데스 같은 미국 상원 중진들의 ‘유엔 또는 미국의 대북제재 위반 경고’ 메시지를 비롯 펠로시 하원의장의 ‘비핵화가 아닌 무장해제’ 충고, 미국 정보기관이나 군대간부(필립 데이비슨 인도태평양 사령관)들의 ‘비핵화가 아닌 핵동결’ 가능성 예견 등을 예로 들면서 한국인들은 이런 때일수록 더 냉정해져야 한다는 충고까지 곁들이기도 한다.지금 베트남에 있는 한국기업들이 가장 많이 신경을 쏟는 것이 대북제재 위반으로 만에 하나, 미국으로부터 1차 보이콧 또는 세컨더리 보이콧을 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베트남에 나와 있는 경제인들은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 삼성전자의 대규모 공장이 있기에 그동안 이 부분을 더욱 조심해 왔다. 이번에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삼성전자 공장을 방문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들리자 관련 기업인들은 대북제재 위반 부분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고 한다.필자는 이번 하노이 북미회담에서는 비핵화(핵무기의 완전폐기)가 아니라 핵동결(핵무기를 보유하되 추가 실험금지, 단계적 핵사찰)로 결론이 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제까지 북한의 전례를 보면, 단계적 핵사찰은 약속하지 아니한 것이나 다름없다. 시간만 끌면 그만이다. 남은 것은 북한의 핵무기이다. 그 부담은 핵무기를 머리에 이고 사는 오로지 한국의 몫이다.한국의 명운이 타인들의 손에 놓여있다는 것을 안타깝게 느끼는 것은 한국인이라면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우리 국가 지도자들은 당파를 떠나서 그 당사자들에게 우리의 입장을 올바르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 자유와 행복, 번영의 보장이다. 나머지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하노이 미딩경기장에서 베트남-북한 친선 축구경기가 있었고, 한국인들이 함께 모여 경기를 지켜봤다. 박항서 감독이 취임한 이래 일군 성과물로, 덕분에 한국이 베트남인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을 때였다. 결과는 1:1 무승부. 치열한 접전을 벌인 당시 쌍방의 멋진 경기는 지금도 자주 베트남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이번 북미회담도 수 싸움에 양측의 기력이 총동원될 것이다. 그 사이에 한국이 끼여 있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우려와는 달리, 한국인들이 쌍수로 환영하는 반가운 결과가 나오길 기대 또 기대한다.◇배용재씨는 하노이에서 법률법인 대표로 일하고 있다. 포항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했으며 대구지검 검사와 영덕지청장을 역임했다.

2019-02-21

老 기업가의 꿈

기부문화가 가장 잘 활성화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의 기부문화가 잘 발달하게 된 배경으로는 기부금 운영의 투명성과 세제 혜택, 사회적 분위기 등을 손꼽는다. 미국 비영리 기부단체에 기부된 돈만 약 462조 원에 이른다. 우리나라 1년 예산보다도 많은 돈이다.키다리 아저씨는 1912년 진 웹스터가 발표한 소설의 제목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주디가 자신의 후원자 뒷모습 그림자를 보고 붙인 별명이다. 여기서 연유해 얼굴 없는 후원자를 우리는 키다리 아저씨라 부른다.대구에도 키다리 아저씨가 있다. 작년 12월 24일 대구 키다리 아저씨는 대구공동모금회 직원을 찾아 1달에 1천만 원씩 12달 모은 돈을 전달했다. 2012년부터 누구인지 알리기를 거부하며 매년 그가 전달한 돈이 벌써 9억6천만 원에 달한다고 한다. 쉽지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의 기부 정성이 너무나 놀랍다. 기부를 하는 동기는 개인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기부를 통해 전달한 그들의 마음은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하며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청청하게 한다. 기부가 숭고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기부의 참뜻을 잘 살려낸 표현이라 할 수 있다.어느 은퇴 소방관의 기부 이야기도 감동적이다. 자신과 같이 소방관의 길을 걸었던 아들이 뜻하지 않는 사고로 순직하자 그는 자신과 아들의 이름으로 모금회에 2억 원을 기부했다. 순직한 아들을 기리고 아들에게 보여준 우리 사회에 대한 감사의 뜻이라 했다.기부는 받는 사람에게 크나큰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기부를 하는 사람에게도 희망의 빛이 된다. 90세의 어느 기업가가 자신의 모교인 서울대에 500억 원을 쾌척했다고 한다. 세계 유수대학이 인공지능(AI) 개발에 열을 올리는데 서울대가 뒤처져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라 했다. 모교에 대한 그의 애정이 유난히 돋보이는 선행이라 잔잔한 감동이 와 닿는다. 기부자의 뜻에 따라 공학도 후배들이 한국을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 국가로 끌어 올리는 성과를 냈으면 한다. 그것이 90세 노련한 기부자의 꿈을 이루는 일이다. 각박한 세상에 기부천사들이 주는 작은 감동은 우리 사회를 버티게 하는 힘이자 희망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2-21

한국당의 딜레마, 태극기 부대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자유한국당의 새 지도부를 선출하는 2·27 전당대회가 ‘박근혜’‘탄핵’‘계파갈등’, ‘5·18’ 등 과거 이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태극기부대가 한국당의 딜레마가 되고 있다.특히 대구·경북을 비롯해 두 차례 열린 합동연설회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열성 지지층인 일명 ‘태극기 부대’가 수백여 명씩 몰려와 김진태 후보 지지와 함께 집단적인 야유와 고성으로 다른 후보들을 공격하는가 하면 합동연설회장 밖에서 ‘아스팔트 국민 여론은 김진태·김순례’라고 소리높여 외쳐대 기대했던 컨벤션효과마저 날려버렸기 때문이다.그렇다고 한국당 입장에서 태극기부대를 마냥 비토하지도 못할 처지다. 우선 태극기부대에 대한 국민여론 조차 찬반양론으로 갈린다. 21일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국민 10명 중 6명은 자유한국당이 ‘태극기 부대’와 단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tbs 의뢰로 지난 20일 전국 성인 502명을 대상으로 ‘태극기 부대에 취해야 할 한국당의 입장’을 조사(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4.4%포인트)한 결과 ‘단절해야 한다’는 응답이 57.9%로 집계됐다. ‘포용해야 한다’는 응답은 26.1%였고, 모름·무응답은 16.0%로 나타났다. 대구·경북(단절 36.9%·포용 43.8%)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과 연령에서 한국당이 태극기 부대와 단절해야 한다는 여론이 포용해야 한다는 여론보다 높았다. 정치성향별로는 중도층(단절 65.8%·포용 18.7%)과 무당층(단절 45.2%·포용 16.7%)에서 ‘단절해야 한다’는 응답이 더 많았고, 한국당 지지층(단절 13.5%·포용 64.8%)과 보수층(단절 32.3%·포용 52.7%)에서는 ‘포용해야 한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었다.태극기부대 포용여부는 탄핵으로 파면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배신여부를 따지는 ‘배박’ 논란과도 맞닿아있어 간단치 않다. 설령 태극기부대를 포용하려해도 기존 한국당 의원들의 입장이 곤란하다.탄핵 복당파 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남아있던 친박·비박의원들 역시 찬반입장을 분명히 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을 크게 느끼는 모양새다. 또 특정 계파의 ‘보스’나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낡은 보스정치로 퇴행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부담스럽다.또 태극기부대가 박 전 대통령 탄핵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만큼 박 전 대통령 탄핵 인정 여부가 전대 TV토론에서도 주요 논쟁 포인트가 되고 있다. 입당 이후 박 전 대통령과 탄핵에 대해선 되도록 언급을 삼갔던 황 후보가 처음으로 “박 전 대통령이 돈 한 푼 받았다는 것이 입증된 바 없다”며 탄핵의 부당성을 주장해 적지않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실 탄핵후 구속수감된 박 전 대통령은 비록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상태지만 한국당의 정치지형에 끼치는 영향은 아직도 크다. ‘옥중정치’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국정농단과 탄핵의 책임 소재를 거론할 때마다 당내 친박(친박근혜)과 비박(비박근혜) 간 계파 갈등이 불거질 정도다. 더구나 지난달 15일 입당 후 당 대표 출사표를 던진 후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황교안 후보에게 따라붙은 게 ‘탄핵총리’‘배박’(背朴·박근혜를 배신했다) 이란 꼬리표란 점은 이번 전당대회가 박 전 대통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치러지고 있다는 방증이다.무엇보다 한국당의 전대에서 2020년 총선 승리와 정권 교체 전략 등 미래 담론은 부각되지 못한 채 ‘문재인 탄핵’과 같은 선동적인 구호만 난무하고 있는 데 대해 당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제1야당인 한국당 입장에서는 축제가 돼야 할 전당대회의 분위기를 다툼과 분열의 장으로 바꿔놓고 있는 태극기부대가 마냥 원망스러울 법 하다. 그렇다해도 그게 한국당이 뿌린 원죄에서 비롯됐으니 어찌하랴. 사소취대(捨小取大)의 정신으로 작은 이익은 버리고 큰 이익을 취할 밖에.

2019-02-21

삼세번 째 이주

강길수수필가입춘 지나고 세 번째 날이다. 산 너머 남촌의 꽃바람이 그리운 마음을 하늘도 아는 지, 따사한 날이다. 삼년 째 벼르던 주인공을 이주를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어제 설날, 고향에 다녀온 노곤(路困)이 다 가시지는 않았으나, 오전까지 쉬었으니 됐다. 작년과 재작년에도 주인공을 치우자는 아내의 주장에, 날씨를 구실삼아 미적거리며 내심 이주시키지 않으려 했었다. 그만한 연유가 있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필요한 도구를 챙겨들고 나서며, 아내에게 함께 가지고 했다. 피곤한지 내키지 않아 한다. 힘들어도, 마음먹은 김에 해야 한다고 말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아파트 뒤 자그마한 텃밭이다. 지난 여름 강풍에 비스듬히 쓰러진 주인공을 바로 세우려, 아내가 담장너머 큰 향나무에 매단 끈을 풀었다. 가지 끝엔 아직도 주인공의 분신 몇 개가, 빨간 자태를 뽐내며 까치밥으로 제 몸을 내놓고 있다.주인공을 마주한다. 자신을 이주시키려는 내 속을 알 텐데도, 반갑게 맞는 것만 같다. 수십 년 된 옆 향나무만큼이나 키가 커지고, 밑동은 내 팔뚝만하다. 지난해는 앙증스런 토종대추가 많이도 열렸었다. 속말로 인사한다.“우리 주인공아, 잘 있었니? 미안하다! 나와 연 맺어 숱한 고생만 하고, 생사기로도 세 번씩이나 넘긴 너다. 오늘, 네 몸을 동강내어 세 번째로 이주시키려 한단다. 슬프고 아프더라도, 이해하고 참으며 받아주기 바란다. 그래야 네가 살고 또, 우리 차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란다.”톱으로 주인공의 몸, 첫가지 위를 자른다. 단단한 나무라 톱질이 더디다. 젊은 향내가 퍼진다. 한참 후, 줄기는 두 동강이 났다. 윗부분의 잔가지와 줄기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묶는다. 설거지를 마친 아내도 나왔다. 나머지 잔가지 정리를 그녀에게 맡기고,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한다. 뿌리가 드러나자, 깜짝 놀랐다. 두 번째 이주 때 보다 훨씬 큰 똬리를 틀고 있어서다. ‘내가 잊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핑 돌았다. 자태가 가부좌 한 사람의 아랫도리 같기도 하다.처음 만나던 모습이 떠올랐다. 세 번째 직장의 어느 여름날, 화단 가장자리 콘크리트의 틈새에서 방긋방긋 웃는 연록아가를 만났다. 갓 돋아난 주인공, 토종대추나무새싹이다. 이태쯤 지났을까. 연록아가는 몸이 제법 굵어지고, 무릎위로 오를 만큼 자라나 새싹어린이가 되었다. 그냥 둘 수 없어, 집에 데려다 관상용으로 키우자고 결정했다. 그해 늦가을, 큰 플라스틱 화분에 새싹어린이를 첫 이주시켰다. 거처는 집 베란다다. 주인공에게는 고생 끝, 내게는 즐거움 시작이라 믿었다.다른 대추나무보다 일찍 잎 나고, 꽃 피고, 열매 맺었다. 줄기 수도 늘었다. 몇 해 지나자, 베란다에서 감당할 수 없이 커져 새싹소년이 되었다. 보다 못한 아내가 내 반대를 무릅쓰고, 틈을 타 화분을 베란다 밑 코크리트 바닥으로 옮겼다. 나는 물주기 담당을 자청했다. 하지만 다음 두 여름동안 물주는 일을 게을리 해, 새싹소년은 세 번씩이나 생잎이 말라죽는 변을 당하고 말았다. 마음이 억새 잎에 베인 듯 아팠다. 물을 주자, 죽은 줄 알았던 새싹소년은 그때마다 눈부시게 되살아나 짜릿한 기쁨을 선물했다. 몸을 살리려 제 생명을 바친 푸른 잎들은,‘내가 죽어야 다른 이를 살린다!’는 근본메시지를 가슴에 아로새겨주었다. 언제부턴가, 몸이 튼튼해지며 청년이 되어갔다. 살펴보니 뿌리가 화분의 물 빠지는 구멍을 빠져나와, 콘크리트 틈새를 파고들어 땅에 깊이 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일로, 주인공을 아파트 뒤 작은 밭으로 두 번째 이주를 시켰다. 그때 드러난 뿌리는, 화분을 몇 바퀴씩 휘돌아 똬리가 되어있었다. 삶의 처절함은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있나보다.춘분 뒤 삼세번 째 날, 주인공 이주를 근교 양지바른 우리 밭두렁에 잘 마쳤다. 따져보니, 주인공의 삶이 공교롭게도 겨레를 닮아 삼세번과 연이 깊다. 부디 삼세번 째 이주로, 우리 주인공, 대추나무새싹청년이 영주(永住)하고 번성하기 빈다. 우리 집이 삼세번 째 이사로, 내 집을 마련했던 것처럼….

2019-02-21

본능으로서의 ‘구별 짓기’

△옷의 기능옷은 ‘구별 짓기’의 본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키톤(Chiton)’이라고 불리는 옷을 입었다. 옷이라고 했지만, 몸에 천을 두르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로는 그 정도의 천마저도 생산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도 생산이 까다로운 모직물이나 비단은 고대사회에서는 더욱 생산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귀하고 비쌌다. 그러니 이런 옷은 한정된 일부 계층의 사람만 입을 수 있었을 것이다.로마시대 원형경기장으로 가보자. 이곳에서는 검투시합이 벌어지곤 했다. 시합이라고 했지만 거의 살육에 가까웠다. 싸움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죄수에게 칼을 주고, 잘 훈련된 군인과 싸우게 했기 때문이다. 죄수는 대부분이 사형수였는데 소매치기, 좀도둑, 생계형 범죄자도 사형수가 되는 시대였다. 그러니 이들이 싸움을 잘 할 리 없었고, 전문적인 검투사와 싸워 이길 가능성도 매우 낮았다.검투시합을 보기 위해 원형경기장에 사람이 몰렸다. 사람들은 자신의 계층과 신분을 드러내는 옷을 입었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무릎까지 닿는 블라우스 형태의 ‘토니카(Tonica)’를 입었다. 그리고 로마의 시민만 토니카를 휘감는 ‘토가(Toga)’를 입을 수 있었다. 옷의 색과 천도 계층마다 달랐는데, 귀족은 린넨이나 흰 양털로 된 옷을, 그 중에서도 원로원 의원은 넓고 붉은 줄이 있는 토니카를 입었다. 기사 계급은 자주색 장식을 착용할 수 있었고, 평민이나 노예는 조잡하고 어두운 색의 옷을 입어야 했다. 신발도 신분에 따라 달랐는데, 귀족은 붉은색이나 주황색 샌들을 신었고 원로원 의원은 갈색 신발, 집정관은 흰색 구두를 신었다.△‘구별 짓기’의 진화왜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서로를 구별 지으려 하는 것일까? 옷을 통해 신분이나 계급을 구분하려 했던 흔적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까운 예로 조선시대 사람은 모자(갓)의 크기나 모양으로 신분을 구분했다. ‘구별 짓기’의 방법으로 모자를 선택했던 이유는 눈에 가장 쉽게 띄기 때문이다. 과거로 가면 갈수록 구분의 방법은 직접적이고 노골적이 되지만, 현대사회로 오면 그러한 구별은 보다 간접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런 점에서 ‘구별 짓기’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오랜 진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학생들 사이에는 눈을 강조하는 스모키 메이크업(smokey makeup)이 유행하고, 여학생은 교복 치마의 길이는 물론 폭까지 줄인다. 남학생은 바짓단을 최대한 줄여서 입는다. 그 극단에 ‘7통 바지’가 있다. 바지통이 7인치, 17.8㎝밖에 되지 않아 발목이 드러나도 이런 바지를 선호한다.어른은 그런 아이들을 이해하지 않는다. 어른은 아이돌의 노래와 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요즘 노래는 노래도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말은 누구나 어른이 되기 전 많이 들어본 것이다. 언제? 당신이 학생이었을 때, 당신을 학생이라고 부르던 어른들로부터 듣던 이야기다.세대 간에 격차가 있고, 그 세대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음악이 있고, 패션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취향’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깊이 있게 천착한 사람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1930∼2002)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취향은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이다. 인간과 사물,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람은 스스로를 구분하며, 다른 사람에 의해 구분된다.”△아비투스과거에는 가문을 중심으로 사람을 구분했다면 오늘날은 문화와 취향에 따라 서로를 구분한다. 편의상 취향이라고 했으나 부르디외는 이것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이름으로 개념화했다. 부르디외는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들의 계급과 계층을 구별하고 있다. 상류층 혹은 고급 취향의 사람은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이 많은 부류일 것이다. 이와 달리 경제자본도 적고, 문화자본도 적은 부류는 하층민으로 분류될 것이다.그렇다면 보편적인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훌륭한 예술 작품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무지한 사람이 보더라도 그 작품의 우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세대와 계급과 계층 속에서 사람은 저마다 다른 취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힙합을 듣는 이에게 딱딱하고 웅장한 바흐나 베토벤과 같은 클래식이 귀에 찰리 없다.젊은이들은 자기가 듣는 음악을 이해해 주는 어른과 그렇지 않은 어른을 구분한다. 후자를 ‘꼰대’라 부를 것이다. “어떤 음악, 어떤 영화를 좋아하세요”라는 물음은 단순히 상대방의 취미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대답을 통해서 상대방의 사회적 위치와 교육 환경, 나아가 계급이나 계층적 위상을 확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대중가요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회적 위상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당구가 취미인 사람과 승마가 취미인 사람의 경제적 수준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 음악이 어떠세요,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 음악의 좋고 나쁨을 따지기 전에 그렇게 묻는 사람이 어떤 계급이나 계층에 속해 있는지를 살피면 그 사람의 취향을 읽을 수 있고, 그 사람이 원하는 대답에 더 가깝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타인의 취향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고급하고 품격이 높은 문화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낸 하나의 취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별 짓는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잘못이라는 점을 그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역사는 옷이 민주화되는 쪽으로 전개된다. 어떤 것을 고급하다고 규정짓는 집단은 정치적, 사회적 헤게모니를 쥔 사람들이었다. 귀족과 왕족이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사회가 분화되고 더욱 복잡한 단계로 발전해 나가면서 다양한 취향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회가 성숙하게 발전하면서 취향을 고급한 것과 저급한 것으로 나누어 그것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고,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는 쪽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이를테면 바로크 시대와 로코코 시대는 화려한 의복을 자랑하는 시대였다. 현란한 레이스가 달려 있고, 치마는 풍성하며, 옷색깔은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옷을 통해 자신의 부를 과시했고, 이를 통해 다시 명성을 쌓아갔다.

2019-02-21

작디작은 의자

하노이 제일경은 호수들이다. 하노이는 한자로‘河內’라고 쓴단다. 두 강 사이에 끼어 있는 도시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다. 막상 하노이는 강보다 크고 작은 호수의 도시다. 물웅덩이가 자그마치 삼백 개나 된다나.여기 상사에서 십 년 넘게 일하고 있다는 어느 분에게 호수들이 물은 깨끗한가 물었다. 수질 관리가 어느 정도 되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만약 호수들이 오염되어 있다면 하노이는 물 썩은 내를 풍길 텐데 그런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워낙 자외선이 뜨거워 물이 자연 정화되는 것 같다고도 한다.지금 여기 시간 아침 7시 반. 42층 호텔 벽면 유리창으로, 나는 지금 그 가운데 하나인 ‘서호’(호 떠이)를 내려다 보고 있다. 안개에 감싸인 하노이의 아침은 아름답다. 높은 건물들이 몇 년 전보다 많이 늘어났지만 하노이는 여전히 붉은 지붕을 가진 높지 않은 집들이 빼곡하다. 서울과는 달라서 산 하나, 언덕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 평평한 도시에 크고 작은 집들과 큰 호수가 함께 어우러졌다.하노이 제이경은 복숭아나무 꽃이다. 홍매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복숭아나무 꽃이라 한다. 사원마다 건물마다 모셔놓은 복숭아나무 분재들에 겨울에 피어난 붉은 빛 꽃송이들이 사람이 시선을 강탈한다.하노이 문묘라는 곳에 가서도 오른쪽에는 금귤나무 분재를, 왼쪽에는 복숭아나무 분재를 세워 놓은 것을 보고 감탄을 했는데 겨울의 하노이에는 이 붉은 복숭아나무 꽃이 없는 데가 없단다.그럼 하노이 제삼경은 무엇이냐, 하면 작디작은 의자들이다.벌써 다섯 번은 온 것 같은 베트남에 가장 먼저 갔던 곳은 호치민, 그러니까 옛날의 사이공, 거기 가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베트남어를 적는 알파벳, 남국의 빛깔을 띤 건물 외벽들, 그리고 또 하나가 그 작디작은 의자들이었다. 이제 하노이에 오자 알파벳의 충격은 가셨고 호치민보다는 한결 색조 부드러운데, 유독히 눈에 도드라져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작디작은 의자다.단체로 따라다니는 여행은 하루만 지나도 버겁다. 어느 사원 문 앞에서 나는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혼자 청계천, 을지로 ‘마찌꼬바’ 풍경 같은 동네를 어슬렁거린다. 호수가 있고 물고기를 잡은 청년이 있고 초등학교도 있는 곳에서 한 번 꺽어 들자 한 없이 펼쳐진 자그마한 제작소들. 자칫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단체 여행에 혼자 길을 잃는 건 ‘범죄’에 가깝다. 더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되돌아선 길에 작디작은 의자들이 보인다.이 의자들은 차나 커피 같은 음료를 파는 아주머니가 내놓았고 남녀 한 쌍이 아이스 커피를 의자만큼 작은 탁자 앞에 놓고 나란히 앉아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나도 무턱대고 그 작디작은 의자 하나에 앉아버린다. 따뜻한 베트남 차가 부드럽고도 강하다.나는 그 작디작은 의자에 앉아 세상 풍경을 구경한다. 평화롭다.어떻게 해서 이 베트남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의자를 발명한 것일까.큰 엉덩이는 앉기가 황송할 것 같은 이 앙증맞은 의자가 작게 보고 작게 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한낮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2-21

여성 과학자 시대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DGIST 총장특보한국 과학기술계가 바야흐로 ‘여성 과학자 시대’를 맞았다. 이젠 여성과학자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는게 별로 낯설지 않다. 대통령비서실 과학기술보좌관에 이화여대 약학과 이공주 교수가 임명되었다고 한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김명자 회장,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문미옥 1차관에 이어 “여성과학자 트로이카”시대를 열었다는 요란한 언론보도가 주목을 끈다.모두 필자와 인연이 많은 교수들이다.카이스트 석사과정 후배인 이공주 교수를 만난 건 80년대초 스탠포드 대학 시절이었다. 당시 최근 임명된 오세정 서울대 총장과 함께 20대의 학생 시절이었다. 학업에 열중하면서 학생회 모임에 열심히 나오던 모습이 기억난다. 이후 뛰어난 학술업적으로 여성과학기술자상, 마크로젠 여성과학자상 등 다양한 상을 수상하였다.문미옥 차관은 포스텍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했으니 학과는 다르지만 제자인 셈이다. 최근 디지스트(대구경북과기원) 졸업식에 참석한 문 차관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국회의원, 과학기술보좌관 등을 거치며 과학계의 실세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적극적인 성격이 주목을 끈다.김명자 회장은 오래전부터 과학계의 잘 알려진 인사다. 숙명여대 화학과 교수를 25년간 역임한 김 회장은 김대중 정부에서 44개월간 환경부 장관을 지내 ‘헌정 사상 최장수 여성 장관’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자주 각종 회의에서 인사를 나누었다.한 분은 차관이고, 또 과학기술보좌관은 차관급, 과총 회장은 한국의 ‘과학기술인 대표’로 친다면, 한국과학기술계는 이들 3명의 여성과학자 트로이카가 맡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간다.‘역사 속의 여성 과학자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을 듯하다. 흔히 ‘퀴리 부인’이라 불리는 ‘마리 퀴리’(Marie Curie·1867∼1934)는 성공한 여성과학자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는데, 노벨상을 두 차례나 받았다. 또한 퀴리 부인의 큰딸인 이렌 퀴리(Irene Curie·1897∼1956) 역시 1935년도 노벨화학상을 받는 등 크게 성공한 여성과학자였다.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1878∼1968)와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Elste Franklin·1920∼1958)처럼 퀴리 모녀에 못지않은 비범한 능력과 열정을 가진 과학자도 있었다. 우라늄 원자핵이 두 쪽으로 쪼개지는 핵분열의 원리를 명확히 밝혀내는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또한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히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왓슨(James Watson·1928-)과 크릭(Francis Crick·1916∼2004)이 경쟁자였던 윌킨스(Maurice Wilkins)와 함께 1962년도 노벨 생리의학상까지 받게 된 불후의 업적인 DNA의 이중나선구조 발견은 프랭클린이 찍은 DNA의 X선 회절사진이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돌이켜 보면 공학분야의 여성 진출이 눈에 띈다. 70년대 대학시절 공대 입학생 600명 중 여학생은 단 3명이었고 큰 화제가 됐다. 보통 1∼2명 입학하는데 3명이나 입학했으니 단연코 화제였고 남학생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이제 대부분 대학의 공대에서도 20% 정도가 여학생으로 채워진다. 생명, 컴퓨터공학, 수학 등 여학생 선호분야 뿐만아니라 기계, 토목, 에너지 자원 같은 중후장대한 분야에도 여학생의 진출이 눈에 띈다.공학분야의 여성 과학자들이 많아지면서 여성CEO들도 늘고 있다. 이제 여성과학자, 여성공학자는 보편화 되는 모습이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과학계에선 가속화 되고 있고 이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여성과학자들에게 파이팅!이라고 외쳐 본다.

2019-02-21

성장과 가치, 어느 것을 따를까?

김학주한동대 교수투자자 가운데 가치보다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화려한 성장 이야기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가치가 있다는 것은 투자 대상에 하자가 있지만 가격이 너무 하락하여 싸졌다는 의미다. 그런데 하락한 가격이 매수하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수준까지 내려왔는지 일반 투자자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성장 스토리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2000년대 들어 세계경제는 저성장이 확연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치주 펀드의 수익률이 성장주 펀드보다 저조하다. 그 이유를 두가지로 설명해 보자.첫째, ‘가치’에 대한 정의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싸다고 무조건 가치주가 아니다. 단지 싸 보이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기업은 과거의 잣대로 보면 싸 보이나 주가는 계속 흘러 내리게 되어 있다. 워렌버펫이나 그의 스승 벤자민 그레이엄이 가치주를 고를 때 주가가 과도하게 떨어진 부분을 보기에 앞서 투자대상이 속한 산업이 진입장벽이 높아 경쟁강도가 낮은지, 또는 수요가 안정적인지를 관찰한다. 이것이 하락한 주가를 다시 정상궤도로 돌려줄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고, 가치주의 위력은 여기서 나온다.둘째, 지금은 산업의 중심이 제조업에서 맞춤형 서비스로 넘어가고 있다. 뜨는 해와 지는 해가 확실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신성장 산업이 저성장 환경 가운데 더 빛나 보일 수 밖에 없고, 또 전체적으로 그 비중이 작아 희소성마저 있다.작년 말 증시가 조정을 받은 이후 쏠림이 심했던 기술주가 무너지고, 그 반사이익을 가치주가 받으며 상대적인 성과가 좋았다. 이런 경우가 가치주가 힘을 발휘하는 유일한 구간이라고 생각한다. 즉 시중의 자금이 미래의 희망을 보며 쏠리는 기간은 길게 진행되는데 이 시기에는 성장주가 득세한다. 그런데 지금처럼 기술주가 규제의 장벽에 막혀 희망에 손상이 가는 등 쏠림이 무너지면 주가는 짧은 기간 폭락하게 되는데 이 때가 가치주가 득세하는 시기다. 결국 가치주는 과거의 성장과 새로운 성장 사이에 일시적인 피난처로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지금이 그런 시기다.그렇다면 언제 새로운 쏠림이 나타나서 증시를 다시 끌어 올릴까? 그 동안 증시를 좌절시켰던 주요인이 규제였으므로 그 해결책도 정치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즉 정보의 국가간 이동, 환경, 그리고 개인정보 사용에 관한 규제에 근본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 정치적 사건은 내년 미국 대선이다. 여기서 민주당이 이길 경우 규제가 풀리고 새로운 희망을 던져 줄 수 있다. 무역갈등의 수위도 낮아질 수 있다. 즉 미국에서 중국으로의 패권이동이 질서 있게 진행되어 시장에 혼란을 덜 줄 수 있다.그 때까지는 가치주가 득세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증시가 다시 한번 주저앉을 수도 있다. 최근 재미있는 현상은 미국 중앙은행이 기준금리 인상을 보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달러가치가 상승한다는 점이다. 즉 미국이 너그럽게 자금을 풀겠다고 선언했음에도 그 돈이 신흥시장을 비롯한 미국 이외의 지역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그 만큼 미국 이외의 지역이 불안해서 미국에 숨어있겠다는 것이다.최근 독일이 경기침체에 가까워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독일은 유럽의 핵심국가다. 미국 이기주의의 결정판은 자동차 수입관세인데 이것이 구체화됐을 때 독일은 결정타를 맞을 수 있다. 일본도 휘청거릴 것이다. 달러의 경쟁국 통화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최근 원화에 대한 달러의 강세도 미국 이기주의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고, 이는 세계경제 시스템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내년 미국 대선 이후 갈등보다는 화해, 그리고 규제완화 분위기가 도래하며 새로운 성장과 쏠림을 만들어 주기를 기다린다. 그 때까지 가치주가 회복하며 과도기를 메워주기를 바라지만 증시가 무너졌다가 새로운 질서를 찾으며 회복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자.

2019-02-21

오늘 하루 일어날 수 있는 일

실수 하나로 독일이 통일되었다는 이야기, 들어보셨나요?소련의 몰락을 불러온 독일 통일은 동독 공산당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의 폭음에서 비롯합니다. 독재자 호네커가 사임하자 동독 주민들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합니다. 서방 기자들이 잔뜩 몰린 상태에서 읽어 내려간 여행 자유화에 대한 임시 법안은 여권 발급 시간을 약간 단축한다는 내용 외에는 중요한 게 없었습니다.술이 덜 깬 상태로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가 법안을 읽은 후 질문이 쏟아집니다. 이탈리아 기자가 서툰 독일어로 질문합니다. “법안이 발효되면 동독 주민들의 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진다고 봐도 되는 건가요?” 어리벙벙한 대변인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채 대답하죠. “그렇소!” 아주 민감하고 중요한 이슈에 충격적 답변이 나오자 다른 기자가 재빨리 질문합니다. “언제부터 유효한가요?” 귀찮아진 대변인은 멀뚱한 눈으로 답합니다. “바로 sofort!” 한마디 덧붙입니다. “즉시 unverzuglich!” 기자들은 황급히 본국으로 이 뉴스를 타전합니다. “지금부터, 즉시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바로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다.”여행에 굶주린 동베를린 시민들은 소식을 듣자 마자 너도 나도 차를 끌고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는 관문 ‘체크포인트 찰리’로 끝없이 몰려듭니다. 우왕좌왕 하던 경비병들은 어쩔 줄을 모르지요. “너희들은 TV 뉴스도 안 봐? 여행 자유화가 선포됐다고!” 시민들의 항의에 결국 경비병들은 국경을 열어주고 뒤로 물러납니다. 물꼬가 터진 베를린 장벽은 마침내 시민들의 힘에 와르르 무너져 내립니다. 결국 독일 통일로 연결되지요. 고위 관료 한 사람이 폭음 후 저지른 황당한 실수 한 마디가 세상의 역사를 바꾸어 버렸습니다.마크 트웨인은 말합니다. 오늘 일어날 수 없는 일은 단언코 아무 것도 없다!(Apparently, There is nothing that cannot happen today). 오늘이라고 하는 이 하루 세상에는 그 어떠한 일들도 일어날 수 있는 법입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우리 삶은 날실과 씨실로 짜지는 옷감과 같습니다. 하루 하루 무의미한 반복처럼 보이는 우리의 일상이 어느 순간 임계점을 만나면 하루 아침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 일으킵니다.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소망을 잃지 않고 내 자리에서 묵묵히 전진하는 일입니다. 그날은 오늘 일 수도 있고 1년 후 일 수도, 5년 후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조신영 인문학365 대표

2019-02-21

Ctl+c, Ctl+v 사회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시간을 얼려버릴 추위에도 자연은 결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철을 아는 자연은 천천히 겨울 솜이불을 걷어내고 있다. 때론 겨울이 마지막 투정을 부리지만, 바뀌는 바람에 겨울도 수긍한다. 바뀐 바람을 타고 눈이 꽃 소식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바람이 가지에 묻은 겨울을 털어내면 자연은 꽃눈을 힘껏 밀어 올린다. 그렇게 밀어 올린 봄은 작년 봄과는 다른 봄이다.사람들이 자연에 감탄하는 이유는 바로 새로움 때문이다. 자연에는 구태(舊態)가 없다. 자연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낸다. 자연이라고 왜 미련이 없을까마는 새로움을 짓는 방법을 아는 자연은 미련을 모른다. 춥다고, 가물다고 절대 투정을 부리지 않는다. 그 어떤 탓도 하지 않고 자연은 자신과 주변을 살핀다. 이것이 자연이 겨울을 임하는 자세이다.겨울은 자연에게 준비의 시간이오, 기다림의 시간이며, 또 철저한 자기반성의 시간이다. 그런 시간들이 있기에 자연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자연의 힘은 때를 아는 것이다. 자연에게 있어 2월은 출발의 달이다. 새 출발을 시작하는 자연의 이야기를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상략)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기어코 /봄은 찾아온다는 것//슬픔과 고통 너머/기쁨과 환희로 가는 길은//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음을/가만가만 깨우쳐 준다//이 세상의/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여//나를 딛고/새 희망 새 삶으로 나아가라 (하략)” (정연복 「2월」)자연은 슬픔과 고통을 기꺼이 감내(堪耐)하고 기쁨과 환희로 가는 길을 만들고 있다. 그 길은 꽃들이 만개한 꽃길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게 서로 손잡고 그 꽃길을 가면 된다. 자연은 인간들에게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그 길에서 모두가 행복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발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하지만 인간들은 자연의 이야기에 귀를 닫아버렸다. 비록 해는 바뀌었지만, 어찌해서 이 사회는 바뀐 게 하나도 없을까?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앵무새 유전자라도 이식받았는지 정말 변한 게 단 하나도 없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특히 정치와 교육에는 새로움과 희망이라는 단어가 없는지도 모르겠다.뭔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나아지기는커녕 더 힘들기만 하다. 마치 올무에 걸린 모습과 같다. 발버둥 칠수록 더 옥죄는, 그래서 결국엔 고통스럽게 생을 마치고 마는 올무에 걸린 삶! 과거라는 올무에 걸린 이 나라의 운명이 안타까울 뿐이다. 인구 절벽, 경제 절망, 교육 붕괴, 정치 불신…! 이대로 가다간 남는 건 결국 국가 부도밖에 없다.이 나라의 미래가 부도로 끝나기를 바라는 국민은 없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를 털어내야 한다. 지금처럼 정치 이익을 위해서 과거의 특정 부분만 그대로 복사(ctl+c)해서 붙여넣기(ctl+v)를 해서는 안 된다. 과거청산이 어려우면 과거를 용서하자! 민족상잔의 주범도 이해를 하고 대화를 위해 간과 쓸개를 내놓는데, 왜 우리끼리는 서로의 올무가 되는가!이 나라에 진정 봄이 오기 위해서는 교육부터 봄을 맞이해야 한다. 그런데 곧 교육의 봄인 3월이지만, 신학기에 대한 설렘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나라 교육방향의 핵심 키워드 또한 ‘과거 복사’, ‘붙여넣기’이기 때문이다. 말로만 창조, 변화를 외치지, 교육현장에서는 글자 하나 틀려도 생난리를 치는 게 이 나라 교육 현실이다.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아이가 말한다. “아빠, 내 친구 벌써 수포자(수학 포기 자)다. 근데 학원에서는 중학교 2학년 끝났대. 엄마가 초등학교 때 중학교 수학 다 끝내라고 했대. 내 친구 정말 불쌍해!” 이 나라 교육의 봄은 언제 오는가!

2019-02-20

평범한 회사원이 받은 어떤 상(賞)

2002년 10월 9일. 다나카(43)씨는 이 날도 열심히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오후에 전화 한 통이 걸려옵니다. “15분 후 외국에서 중요한 전화가 옵니다. 직접 받아주세요.” 다나카는 기대 반 불안 반 심정으로 기다리지요. 잠시 후 벨이 울립니다. 상대는 또렷한 영어로 말합니다만 평소 외국인과 통화할 일이 없던 다나카는 진땀을 흘립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기억을 더듬지요. “....○○을 받게 되었다. 스웨덴... 어쩌고 저쩌고...” 다나카는 주변을 살핍니다. “혹시 몰래 카메라가 아닐까?”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잠시 적막이 흐르고 30초쯤 지나 회사 전화기 50대가 동시에 울리기 시작합니다. 한결같이 다나카 고이치를 찾는 전화입니다. 기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방송국 TV 송출버스와 카메라 기자의 플래시로 회사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지요. 대학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늦깎이 주임 다나카 고이치가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발표 난 직후 풍경입니다.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에 강연 요청이 쇄도합니다. 양복이 두 벌 밖에 없어 양복을 사러 외출했다가 그를 알아본 사람들에 둘러 싸여 곤욕을 치릅니다. 눈 뜨고 일어나니 일약 스타가 되어 있었지요. 시마즈 생명과학연구소는 이 사건으로 큰 명성을 얻습니다. 주가도 큰 폭으로 상승하지요. 대표이사는 다나카를 이사로 승진시키려 합니다만 본인이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결국 부장 승진으로 타협을 보았습니다.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는 이 연구가 생체 고분자의 질량과 입체구조를 해석하는 방법을 개발, 바이오 산업의 미래를 활짝 열었기 때문에 노벨상을 수여한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정작 다나카는 자기 연구가 실수에서 비롯한 것임을 털어 놓아 화제가 되었지요. 코발트와 글리세롤 조합의 결과를 얻어내기까지 200번 이상을 실패했는데 실험 중 부주의로 인해 액상의 글리세롤이 코발트 분말에 흘러내려 버리는 실수를 합니다. 버리기 아까워 분석해 본 것이 단백질을 파괴시키지 않고 이온화하는 현상을 발견하는 데 이른 겁니다. 우연한 실패가 대 성공으로 이어진 것이지요.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오직 두 가지 태도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아무 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라고요. 우리 삶에 벌어지는 여러 실패와 실수들, 비록 따갑고 아프지만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 버릴 것 없는 소중한 기적의 씨앗일지도 모릅니다. /조신영 인문학365 대표

2019-02-20

울분장애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세상 살면서 사통오달(四通五達) 인생을 향수하는 이는 많지 않다.그것은 세상살이가 녹록치 않아서, 나와 같지 않은 타자로 인해, 기획한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혹은 기대치 충족의 불가(不可)로 인해서 발생한다. 어떤 이들은 불의한 시공간과 부당한 억압으로 울분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가 열사나 위인으로 존숭하는 유관순이나 윤봉길, 김구 같은 분들이 그러하다. 공적인 영역의 거룩한 울분을 제외하면 우리는 일상의 영역에서 울분을 경험한다.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울분(鬱憤)은 ‘답답하고 분함 내지 그런 마음’을 일컫는다. 한자말을 들여다보면 나무와 나무, 바위로 길이 막혀 답답한 형국과 분노로 인해 감정이 북받치는 상황임을 보게 된다. 명약관화한 길과 해결방도가 있음에도 에둘러야 하거나, 그럼에도 길이 속 시원하게 현현하지 않을 때 우리는 조바심과 갑갑증을 호소한다. 대개의 경우 울분은 내재적 원인이 아니라, 자아를 둘러싼 인간과 관계와 사건이 원인제공자로 등장한다.얼마 전 한국인의 울분을 점수로 환산한 기사가 눈에 들었다. 한국인 성인남녀의 14.7%에 이르는 사람들이 중증(重症)의 울분을 겪으며 살고 있다는 얘기. 동시대 도이칠란트 성인들은 불과 2.5%만 그런 증상을 경험한다고 한다. 도이칠란트 국민의 6배 가까운 한국인이 중증의 울분상태에서 일상을 영위한다는 것이다.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토록 높은 비율의 울분을 강제하고 있는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룩한 지구 유일국가 대한민국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가?! 기사에 따르면,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정의 부재 및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무시하는 사회구조가 울분의 근간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사회-경제적으로 하위계층에 속하는 사람은 중산층이나 상위층에 속하는 사람보다 울분지수가 높았다. 예컨대 작년에 급격하게 오른 부동산 보도에 분노하고 절망한 사람들 대다수는 무주택자 하위계층이었다. 그들은, 당연한 얘기지만, 민주화된 한국사회에 반드시 존재해야 할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절감하는 계층이기도 하다. 직장을 구하는데 무진 애를 먹거나, 일터에서 온전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들도 극심한 울분장애를 경험한다고 한다.기사를 읽다가 생각한다. 국민소득 3만 달러시대 한국사회에 가장 결정적으로 결여된 미덕이 무엇인지 숙고한다. 그것은 평등과 공정이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사회-경제-정치-문화적인 불평등과 그것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불공정과 불의의 수인(囚人)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부모와 국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까닭에 ‘스카이캐슬’은 불가피하게 우리의 일생을 불평등과 불의로 낙인(烙印)하고 강제한다.여기 더해 소수지만 뼛속 깊이 타락하고 부패한 정치 모리배들의 끈질긴 행악질이 우리의 울분을 자아낸다.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을 여전히 폭도들과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우겨대는 극우 악질분자들의 패악(悖惡)은 우리의 정서를 극도로 자극한다. 부패-무능-타락-패거리주의로 엮인 정파의 인간들이 아무 수치심 없이 외쳐대는 간첩과 폭도 운운은 범죄수준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해서 그자들이 얻는 것은 국회의원의 한시적인 특권일 뿐.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분간하지 못하고 내갈기는 그자들의 언사는 토악질마저 불러일으킨다. 그자들이 유수한 대학과 육사 출신이라며 사람들을 호도(糊塗)하는 양상을 보노라면 을사오적(乙巳五賊)이 절로 떠오른다. 일신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역사도 민중도 국가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희대의 도둑질 괴수집단. 장자는 도둑질에도 다섯 가지 도(道)가 있다고 일갈했다. 성(聖), 지(智), 용(勇), 의(義), 인(仁)이 그것이다.국가와 역사와 민중을 도둑질하지 않는 품격과 자질을 갖춘 자들의 공간으로 국회가 거듭날 때 우리의 울분지수도 하락하지 않을까.

2019-02-20

붕당과 편파가 없는 왕도를 걷고자 했던 뜻이 이 한 접시에 담겼을까

◇ “그라마 다른 데 사람들은 뭘 먹는교?”네댓 해 전 겨울 저녁이었다. 늦은 시간 배가 제법 출출했다. 경북 예천 읍내. 식당들도 고만고만하다. 자영업자 한 명, 농사짓고 소 키우는 이 등 토박이 셋에 예천 출신 출향인과 필자 등 5명 일행이었다. 가까운 분식집(?)으로 갔다. ‘태평초’나 먹을 겸. 난로 위에 먹음직한 태평초가 놓였다.태평초는 신 김치가 주인이다. 더러는 메밀묵이 더 중하다 하지만 역시 듬성듬성 썰어 넣은 신 김치가 태평초 맛을 좌우한다. 신 김치, 기름진 돼지고기, 메밀묵. 여기에 두부를 썰어 넣어도 좋다. 고명이라야 고춧가루와 김 부스러기 정도다. 채소를 좀 썰어 얹어도 탓할 이는 없다. 막걸리가 두어 순배 돌았을 때 필자가 문득 말했다. “하여튼 여기 사람들은 태평초 무지 좋아하네요. 저녁마다 태평초네요.”출향인이 거들었다. “그렇죠. 태평초 좋아하지요. 이거 아무 것도 아닌데, 외지 가면 겨울에는 가끔 태평초 생각이 납니더. 서울에도 태평초 내놓는 집이 없으니.” 토박이가 한참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태평초가 없다고예? 그라마 외지 사람들은 겨울에 태평초 말고 뭘 먹니껴?”경북북부 사람들은 겨울이면 난롯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태평초를 끓이고 밥과 술을 먹고 마신다. 일상적이다. 토박이들 상당수는 “겨울에는 전국 어디나 다들 태평초를 먹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태평초가 경북북부의 특이한 음식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탕평채가 영조대왕 탕평책에서 시작되었다?태평초는 도무지 뿌리를 알 수 없는 음식이다.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음식’이라고 억지 해석을 해도 마찬가지. 태평성대와 이 지역만의 특별한 연관은 없다.굳이 이 지역에서만 태평성대를 기원하고 태평초라는 음식을 만들었을까? 이해하기 어렵다. 발음의 유사성을 들어 “탕평채의 서민 버전이 태평초가 아닐까?”라고 지레짐작할 뿐이다.탕평채는 태평초와 달리 널리 알려진 음식이다. 조선시대에 이미 탕평채가 나타난다. 서울 등 대도시의 한식집에서도 그럴 듯한 요리로 탕평채를 내놓는다.“탕평채는 영조대왕의 탕평책에서 시작되었다. 영조대왕이 여러 가지 채소를 모둠으로 내놓으면서 조정의 신하들을 골고루 채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탕평채는 탕평책을 드러내는 음식이다.”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더러는 채소가 가진 색깔이 각각의 붕당을 설명한다고 말한다. 이 설명은 틀렸다.‘탕평’은 ‘서경(書經)’에서 시작된 표현이 다. ‘탕탕평평’이다. ‘탕탕평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고 평평하다”하다는 뜻이다. ‘탕탕평평’은 왕도, 왕의 행동거지에 대한 표현이다. 통치자가 평소 매사에 부끄럼이 없으면 하는 일이 거리낌 없다는 뜻이다. ‘탕(蕩)’은 확 쓸어버린다는 뜻이다. ‘탕평’은 ‘거침없이 확 쓸어버린다’는 뜻이다. ‘인재를 고르게 등용한다’는 뜻이 아니다. 탕탕평평, 탕평을 고른 인재 등용과 연관한 탕평책으로 바꾼 이는 영조다.‘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2년(1496년) 3월18일의 기사다. 제목은 ‘대간이 봉보부인 · 정문형의 일을 서계하다’이다.지금 유온(乳媼)은 은혜를 믿고서 전횡하여, 노비(奴婢)를 사급(賜給)하고 족친(族親)을 종량(從良)하는 등의 일을 제멋대로 아뢰어 욕망을 채우니, (중략) 단 왕자(王者)는 사(私)가 없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본디 탕탕평평(蕩蕩平平)하여 대공지정(大公至正)한 도로써 자처하셔야 하는데, 지금 우상(右相)에 대하여 의논한 것을 신들에게 보이지 않으시니 무슨 까닭입니까?탕탕평평하지 않고 우상과의 논의를 숨겼다는 것이다. ‘유온’은 여기서 연산군의 유모다. 연산군 즉위 2년차, 유모가 각종 특혜를 받았다고 대신들이 따진다. “국왕이 탕탕평평하고 공정한 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말한다. ‘우상과 속닥속닥 나눈 이야기를 숨기지 마라’고 말한다. 그래야 탕탕평평이다. 탕평은 인재를 고르게 쓴다는 뜻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영조가 탕탕평평을 위해 인재를 고르게 쓰겠다고 밝혔고 그걸 탕평책이라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탕평책은 정조대왕 시절 도드라진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뜻을 이어 여러 차례 탕평책을 이야기하고 실행한다. 영조든 정조든 탕평책과 탕평채의 관계를 보여주는 정확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영조의 탕평책과 탕평채는 아직은 근거가 없는 야사일 뿐이다.◇ 영조와 영남의 관계? 탕평채는 엉터리다영조대왕과 오늘날 경북 지역의 ‘인연’을 되짚어 보면 ‘영조대왕 탕평책’과 경북 북부 탕평채는 근거가 없는 억지다.영조대왕을 평생 괴롭힌 트라우마는 ‘이복형 경종 살해설’이다. 병석에 누워 있는 이복형 경종에게 게장과 감을 올렸고 이걸 먹고 경종이 죽었다는 이야기다.역적으로 잡혀온 죄수가 영조 앞에서 “그날 이후로 저는 게를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라고 내뱉었다.‘그날’은 경종이 죽은 날이다. ‘신(臣)’이라고 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영조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복형 독살설의 정점은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의 난은 영조 4년(1728년)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이 일으킨 난이다. 주모자는 이인좌, 정희량 등. 난을 일으킨 명분이 문제다. “연잉군(영조)이 게장과 감으로 이복형 경종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했다.” 대역죄다. 여기에 “연잉군은 숙종의 자식이 아니니 밀풍군 탄(坦)을 추대한다”고 내세웠다. 이인좌의 난은 한편으로는 ‘영남란’이라고도 부른다. 시작은 충청도였지만 안동, 상주를 기점으로 영남 남쪽에서 넓은 호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들이다. 영조는 난을 평정한 후 대구부(大邱府)의 남문 밖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영남을 반역향으로 못 박았다. 반역의 고장인 영남을 ‘탕탕평평’했다는 뜻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안동을 제외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 전체’가 반역향으로 몰렸다. 과거에도 제한을 두었고, 벼슬길에도 제약이 따랐다. 겉으로는 영조 통치 기간인 ‘50년 동안’이었지만 실제로는 조선 말기까지 남인, 소론은 중앙정계에서 대부분 배제되었다. 순조부터 고종까지 중앙정계의 벌열(閥閱) 비율이 노론 77%, 남인 1%라는 통계도 있다(차장섭, 조선후기벌열연구, 일조각, 1997). 이 시기 소론도 불과 14%. 노론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조선후기는 당쟁이 심했던 시기가 아니다. 사색당파, 당쟁이 끝나고 일당독재 세도정치의 시대다. 영조를 옹립했고 이인좌의 난을 해결한 노론은 이때부터 힘의 우위를 갖추고 정조 시대를 넘긴다. 순조가 열 살의 어린 나이에 등극한다. 수렴청정. 영조 계비 정순왕후 김 씨와 더불어 장동 김 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조선은 사색당파로 무너진 나라가 아니다. 사색당파가 끝나고 노론 일당독재 세도정치 100년에 무너졌다. 당파가 살아 있고 탕평책을 썼으면 오히려 허무한 망국의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영조와 경북북부 지역은 대척점에 있다. 이 지역 선비들은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왕은 이 지역을 반역의 땅으로 몰아세웠다. 영조의 탕평책과 경북 북부의 탕평채? 뭔가 어색하지 않은가?◇ 탕평채는 영조의 음식이 아니다일제강점기인 1940년, 홍선표가 출판한 ‘조선요리학’에서 “영조 때 노소론을 폐지하자는 잔치에 묵에 다른 나물을 섞어 탕평채라고 하였던 것이 초나물의 시작”이라고 했다. 믿을 수는 없다. 영조가 탕평채를 거론했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초(酢)나물은 맛이 신 식초 등을 넣어서 버무린 것을 말한다. 여러 가지 나물 모둠 쟁반인 잡채와 닮았다. 잡채를 버무릴 때 식초를 넣으면 바로 홍선표가 말하는 초나물이다. 다른 점은 묵을 넣는다는 점이다.조선후기 학자 조재삼(1808-1866년)은 1855년(철종 6년)에 완성한 책 ‘송남잡지’에서 탕평채의 연유를 다른 곳에 두었다. “탕평채: 청포에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어서 이것을 만들기 때문에 곧 나물의 골동(骨董)이다. 송인명이 젊은 시절에 가게를 지나가다가 탕평채 파는 소리를 듣고 사색을 섞어 등용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탕평사업을 하였다고 전해진다.”-‘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음식 100년’ 탕평채, 경향신문 2011. 07.19‘송남잡지’는 조재삼이 기록한 백과사전이다. 단어의 어원 등을 상세히 밝힌 책이다. 이 책에서 탕평채를 설명한다. 젊은 시절 송인명이 이미 저자거리에서 팔고 있던 탕평채를 보고 탕평사업, 탕평책을 생각했다는 내용이다. 장밀헌 송인명(1689~1746년)이 젊은 시절 이미 탕평채를 보았다는 기록이 설득력이 있다. 탕평책을 펼치며 탕평채를 만든 것이 아니다. 탕평채를 보고 탕평책을 떠올렸다. 탕평채가 민간에서 널리 팔릴 때 이 광경을 보고 탕평책을 생각했다는 뜻이다.장밀헌은 숙종 45년(1719년) 급제한 후, 영조 시절 무거운 직책을 모두 맡았다. 동부승지, 대사간, 이조판서 등의 벼슬은 국왕에게 인사 문제를 건의할 수 있는 자리다. 지금까지 나타난 기록으로는 송인명이 저자거리의 탕평채를 보고 탕평책을 생각해서 영조에게 건의했다는 설이 믿을 만하다.태평초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탕평채는 영조의 탕평책 이전에 있었다. 영조의 탕평채 자체가 엉터리다. 경북북부 탕평채의 뿌리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존재다. 경북북부의 태평초와 탕평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2-20

교육이 살린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우리 교육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우리 사회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면 볼수록, 결국 ‘교육’에 기대를 거는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다 자라버린 기성세대에게 무엇인가 새롭고 신선한 감동을 바라기보다 이제부터라도 다음 세대를 제대로 가르쳐 이 나라의 미래가 밝고 맑게 펼쳐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미래 세대를 맡아 기르는 선생님들에게 높은 기대를 거는 것이고 그들이 가꾸어낼 후손들에게 이 땅의 장래를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오늘 펼쳐지는 우리 교육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학생들은 학교와 사회에서 경험하는 교육에 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학생들이 즐겁게 배우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배우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과연 펼쳐질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교육을 통하여 나라와 사회는 기대하는 효과를 거둘 것인지 묻고 싶어진다.최근, 이 나라에서 교육을 받는 학생과 아동들이 그들이 받는 교육에 관하여 연구하고 정리하여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가 있다. 4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해 우리 교육현장 경험에 대하여 작성한 ‘유엔아동권리협약 이행 대한민국 아동보고서’의 내용은 이를 처음 접한 유엔 인사들에게는 충격적이었을 터이다. 길고긴 학습시간, 틀에 가둔 듯 억압적인 학습환경, 성적과 평가에 따르는 학업스트레스, 놀 권리를 박탈당한 재미없는 학교분위기, 대학입시가 교육목표인 교육현실. 보고서의 부제목 ‘교육으로 인해 고통받는 아동’은 우리 교육현장에서 교육수혜자여야 할 학생들이 겪는 아픔과 상처를 요약해 주고 있다. 교육으로 인해 당연히 있어야 할 즐거움과 희망은 어디가고 학생들의 마음에 ‘고통’만 기억된다니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이들은 보고서의 결론으로, 교육현장에서 적절한 학습시간과 함께 휴식과 여가가 함께 주어지길 바라고, 시민적 권리와 자유가 보장되길 기대하며, 공교육이 본연의 소임과 기능을 회복하여 교육격차에 따라 당한 차별과 억압이 사라지길 원하며 교육의 목표가 대학입시가 아닌 다양한 기회와 폭넓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교육이 되어주길 희망한다고 하였다. 드라마 ‘SKY캐슬’은 실제 상황이며 이를 지혜롭게 극복할 방도를 교육계는 찾아야 한다. 보고서를 받은 유엔은 이에 대하여 한국사회를 향한 ‘권고안’을 마련하여 이행을 촉구할 것이라고 한다.우리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 성적에 따라 줄세우고 차별하는 교육을 벗어나 ‘사람을 기르는’ 교육의 소명을 회복하여야 한다. 학생들 사이에 경쟁과 반목을 조장하는 교육 분위기를 탈피하여 ‘나를 이기는’ 진정한 경쟁의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 실력을 길러 성공만 지향하는 교육을 넘어 소양과 기량을 길러 개인이 잘될 뿐 아니라 이웃을 돌아보는 넓은 도량을 기르도록 이끌어야 한다. 국가 간 울타리가 사라져 가는 마당에 세상을 품는 ‘글로벌 시민’을 길러내야 한다. 대학입시에 성공하는 것으로 끝나는 교육을 넘어 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나의 성공을 위하여 노력하는 만큼, 이웃과 더불어 조화롭게 사는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 일등만 대접받는 교실을 벗어나 한 사람도 놓고가지 않는 교육을 구현해야 한다.학생들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런 보고서를 작성했을까. 하마터면 그냥 그렇게 ‘고통’만 겪었을 일을, 이렇게라도 깨우치게 되니 고마운 일이 아닌가. 학생들의 용기가 계기가 되어 우리 교육이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지적이 따끔했던 만큼, 분명히 바뀌어 갔으면 하는 것이다. 이제는, 교육으로 인해 ‘일어서는’ 아동을 만나고 싶다. 정치과 경제, 사회와 문화가 걱정을 끼치는 자리에 교육이 분명한 소망과 열쇠를 선사해 주길 기대하는 것이다. 무너진 세상을 교육이 살려야 하므로.

2019-02-20

미세먼지 대책

먼지란 대기 중에 떠다니거나 흩날려 내려오는 입자상 물질을 말하는데, 석탄·석유 등의 화석연료를 태울 때나 공장·자동차 등의 배출가스에서 많이 발생한다. 먼지는 입자의 크기에 따라 50㎛ 이하인 총먼지(TSP, Total Suspended Particles)와 입자크기가 매우 작은 미세먼지(PM, Particulate Matter)로 구분한다.미세먼지는 다시 지름이 10㎛보다 작은 미세먼지(PM10)와 지름이 2.5㎛보다 작은 미세먼지(PM2.5)로 나뉜다. PM10이 사람의 머리카락 지름(50~70㎛)보다 약 1/5~1/7 정도로 작은 크기라면, PM2.5는 머리카락의 약 1/20~1/30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작다. 이처럼 미세먼지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매우 작기 때문에 대기 중에 머물러 있다 호흡기를 거쳐 폐 등에 침투하거나 혈관을 따라 체내로 이동하여 들어감으로써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세계보건기구(WHO)는 미세먼지(PM10, PM2.5)에 대한 대기질 가이드라인을 1987년부터 제시해 왔고, 2013년에는 세계보건기구 산하의 국제암연구소(IARC)에서 미세먼지를 사람에게 발암이 확인된 1군 발암물질(Group 1)로 지정했다.20일 오전 수도권에서는 처음으로 고농도 미세먼지 예비저감조치가 내려졌다. 예비저감조치는 지난 해 11월 수도권에 도입됐는데, 실제 발령된 건 처음이다.이에 따라 해당 지역의 행정기관과 공공기관 임직원 52만여 명을 대상으로 한 차량 2부제가 오전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시행됐다. 또 행정,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107개 대기배출 사업장은 단축 운영하고, 457개 건설공사장도 공사시간 단축, 노후기계 이용 자제, 살수 차량 운행 등의 조치를 시행하게 된다.고농도 미세먼지 예비저감조치는 당일 오후 5시 예보 기준으로 앞으로 이틀 연속 초미세먼지(PM 2.5) 농도가 50㎍/㎥를 넘을 것으로 예보될 때 발령할 수 있다. 예부터 금수강산으로 알려진 우리 산하가 미세먼지로 더렵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2-20

소원성취의 달

우리나라 세시 풍속기에 보면 1년 동안 우리 민족이 벌이는 세시풍속은 189건이나 된다고 한다. 그 중 정월달에 지내는 세시풍속이 78건으로 전체의 40%가 넘는다. 세배나 설빔, 부럼깨기, 지신밟기, 쥐불놀이 등이 그것이다.특히 정월 대보름날 하루 동안 관련된 세시풍속이 40여 건이나 된다고 하니 음력 정월은 우리 민족에게는 매우 바쁘고 의미 있는 달이다.정월달에 이렇게 세시풍속이 몰린 이유는 새해를 맞는 각오와 바람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농경사회였던 우리의 조상에게는 한해의 풍년 농사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 한해의 시작인 정월달에 그해 풍년을 빌고 마을과 가정의 평안도 함께 비는 행사를 벌이게 된다.세시풍속을 살펴보면 거의가 한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정월 보름날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먹는 부럼깨기는 부스럼이 없는 건강한 한 해를 염원하는 풍속이다. 식사 전에 먹는 귀밝이 술도 귓병이 생기지 않고 한해 동안 기쁜 소식을 많이 들으라는 뜻이다. 지신밟기 행사는 악귀와 귀신을 물리쳐 마을의 안녕과 가정의 다복을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입춘을 맞아 가정의 대문 등에 붙여놓는 입춘축(立春祝)도 봄이 되어 크게 길하고 밝은 기운으로 경사스런 일이 많기를 기원하는 소망을 담고 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 바로 그것이다.한해가 시작되면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세도 많이 알아본다. 점복풍속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우리의 풍속이다. 조선시대 이지함이 지은 토정비결을 통해 조상들은 그 해의 농사풍년과 가정의 화목을 알아보았다. 그해의 운세가 나쁘면 나쁜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미리 알아보고 대처했던 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풍속이다. 요즘은 컴퓨터를 통한 인터넷 토정비결이 인기라 한다.사람은 누구나 행복해 지길 바라고 있다. 가정의 평화와 다복을 바라는 마음이야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특히 새해를 맞아 제화초복(除禍招福)의 마음이 더 간절해지는 때이다. 복잡해진 세상이다. 사회와 가정의 화복을 바랐던 조상의 정신이 담긴 세시풍속에서 지혜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2-19

동남권신공항 재검증 유감

이곤영대구본부장‘살은 쏘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 ‘혀 밑에 도끼가 있어 사람이 자신을 해치는 데 사용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는 말을 조심해서 하라는 뜻이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으며, 그 말이 잘못 전달돼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지난 13일 문재인 대통령이 부산지역을 방문해 동남권신공항의 재검토 가능성을 시사하며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대구와 경북, 부산, 경남, 울산 등 5개 시도가 10년이 넘는 갈등 끝에 합의해 김해공항 확장으로 결론난 동남권신공항이 자칫 백지화되고 또다시 영남권이 분열될 위기에 빠지게 된 셈이다.문 대통령은 이날 동남권신공항과 관련해 “부산·울산·경남의 타당성 검증 결과를 놓고 5개 광역자치단체의 뜻이 하나로 모아지면 결정이 수월해질 것이고, 만약 생각이 다르면 총리실에서 검증 논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논의하느라 사업이 표류하거나 지나치게 늦어져서는 안된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2016년 6월 최종 결정된 김해신공항 건설을 백지화하고 가덕도신공항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문 대통령의 재검증 발언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부산은 김해신공항 확장 결정을 재검토하라는 뜻으로 기정사실화하고 그동안 주장해온 가덕도신공항 건설 재추진에 더욱 힘을 모으고 있다.문 대통령의 발언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된 대구·경북은 “이미 동남권 신공항은 5개 시도가 합의해 김해공항 확장으로 결론난 국가정책을 왜 대통령이 뒤집느냐. 이미 결정나 추진되고 있는 일로 재론할 사안이 아니다”며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지도가 떨어지는 부산·경남지역을 배려하려는 속내가 아니냐는 비판 여론이 들끓고 있다. 당장 권영진 대구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도 즉각 공동입장문을 발표하며 반발했다. 양 시·도지사는 14일 동남권 신공항 문제는 김해공항 확장과 대구공항 통합이전으로 이미 결정나 추진되고 있는 일로 재론할 사안이 아니다며 문 대통령의 동남권신공항 재검토 발언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동남권신공항은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006년 12월 공식 검토를 지시한 후 10여년간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 때마다 ‘뜨거운 감자’였다. 경제성 부족으로 무산됐다가 박근혜 정부 때 우여곡절을 겪으며 5개 지자체 합의끝에 김해공항을 확장하는 안으로 결론이 났다.이런 상황에 대통령이 나서서 김해신공항을 재검증을 운운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처사다. 국책사업으로 결정 후에도 부울경에서 김해공항 확장을 반대하는 분위기속에 문 대통의 발언은 더 큰 갈등의 불씨를 만드는 것이다. 국토교통부는 올 상반기 김해신공항 건설을 위한 기본계획안을 확정·고시하고 하반기 설계에 들어가 2021년 착공하고 2026년 완공해 개항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국토부의 김해신공항 사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당장 동남권 신공항사업 자체가 상당 기간 지연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특히, 총리가 결정권한의 주체로 승격될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총리가 정무적 판단으로 김해신공항 사업을 철회하면 동남권신공항 사업은 입지 사전 타당성부터 예비타당성 조사와 후보지 선정 등 모든 절차를 새로 거쳐야 하는 등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10년 갈등을 넘어 어렵게 합의를 이끌어낸 사업을 무시하고 또다시 합의를 이끌어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미 결론을 내고 추진하고 있는 국책 사업이 정치 논리에 휘둘려 오락가락하는 선례를 남겨서는 안된다. 정부는 하루빨리 입장을 정리해 불필요한 논란을 조속히 매듭짓기를 바란다.

2019-02-19

옛것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할때

최영조경산시장예로부터 경산은 좋은 공기와 맑은 물, 천연재해가 없는 곳으로 사랑을 받아왔고, 문화와 역사가 살아있는 도농복합도시로 지속적인 인구 유입으로 경북의 새로운 강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경산의 3선 시장으로 시민의 사랑을 받는 저는 상당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시민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 드리고자 많은 시정을 펼치지만, 시민의 모든 욕구를 충족 시키지 못하는 아쉬움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경산이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 중 하나가 고대국가 압독국(押督國)의 터전이자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고자 경산을 전초기지로 삼았다는 역사입니다. 또 우리 역사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원효대사와 설총, 일연선사가 태어난 고장이라는 점입니다.경산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삼성현(三聖賢)으로 추앙하고 있으며 삼성현역사문화공원 등을 조성해 후손에게 그들의 얼을 전하고 있습니다.압독국은 기원전 2세기에 터를 잡아 신라가 6세기경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리기 전까지 경산지역에 있던 고대국가로 음즈벌국(안강), 이서국(청도), 골벌국(영천), 조문국(의성) 등과 함께 나름의 영역을 가지고 존재했던 국가입니다. 압독국은 3세기에 편찬된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기록이 없으나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처음 나타나 정확히 경산지역에 언제부터 ‘압독’이라는 국명이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신라는 경산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하며 압독군, 압량주로 불렀으나 757년 35대 경덕왕 때 한자식으로 지방명칭을 바꾸며 장산군(獐山郡)으로 표기해 압독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압독국은 경산의 자랑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삼국유사에도 압독국에 관한 자료가 있습니다. 압독국의 유적은 임당고분군과 진량 신상리 고분군, 자인 북사리 고분군이 있으며 임당고분군 등은 사적 제516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압독군주로 부임한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훈련한 ‘경산병영유적’과 이 말들에 물을 먹였다는 ‘마위지’가 현재까지 존재하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습니다.압독국은 비록 신라에 복속되었지만, 최고 권력자들이 금, 은동, 은, 유리 등 매우 진귀한 재료로 만든 관이나 목걸이, 귀걸이, 허리띠, 큰칼 등을 소유하는 등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는 것은 출토된 유물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 압독국의 특이한 풍습은 순장(殉葬)입니다. 최고 지배자가 죽으면 생전에 부리던 사람이나 노예를 죽여 함께 매장한 것입니다.압독국은 경산지역에 있었던 고대국가였음이 문헌자료나 고고학적 성과로 명확하게 밝혀졌고 문화자원은 그 어느 지역보다 잠재적 가치가 뛰어납니다.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손에게 계승시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하양 양지리에서 발굴된 목관 묘에서는 2천 년 전 경산지역 최고 권력자의 면모를 알 수 있는 중국제 거울, 청동검을 비롯해 화려하고 소중한 유물이 쏟아져 학계와 전문가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역에서는 압독국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화려한 유물 1천여 점이 출토되었고 전역에서 많은 유적과 유물이 계속 발굴되고 있습니다.경산시는 이러한 독창적이고 찬란했던 압독국의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연구·전시하고 국민이 활용할 수 있는 ‘압독국 유적 전시관’을 임당동에 2024년까지 건립해 문화도시 경산 이미지를 높이고 지역에 부족한 관광자원으로 삼을 예정입니다. 또 압독국의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정비·복원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연구·활용 프로젝트도 함께 진행해 압독문화에 대한 연구보고서도 발간할 계획입니다.신라시대의 고승으로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다가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一切唯心造)을 터득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며 일심과 화쟁(和諍)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이바지한 원효대사. 원효대사의 아들로 이두를 집대성하고 화왕계(花王戒)라는 명문으로 우리 문학사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한 설총, 민중의 역사로, 사대의 역사에서 자주로 역사로 바꿔 놓은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선사에 대한 연구와 역사 찾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것입니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지역의 정체성과 얼이 담긴 귀중한 유산을 활용한 새로운 가치 창출에 힘쓸 것입니다.옛것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역사에도 관심을 두겠습니다. 3·1운동 때 대구 남산교회 장로로 있으며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다 체포되어 2년간 복역하고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백남채 애국지사와 광복회에 가입해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허병률 의사와 우국동지회를 조직해 청년 계몽에 앞장선 허동상 열사도 잊지 않겠습니다. 3·1운동과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저항했던 배은희 지사와 평양 3·1운동에 참가하고 대구에서 학생 주모자로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체포되어 복역한 김무생 열사 등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와 인물을 담은 ‘독립운동사’ 발간과 함께 ‘항일독립운동 기념공원’을 조성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애국지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나아가 지역의 정체성과 시민의 자긍심을 더욱 높일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수천 년을 이어온 유구한 역사는 새로운 희망의 역사를 열어가는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과거가 현재로 이어지고 미래로 발전하는, 시민이 행복한 경산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19-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