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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인과 화가의 우정

가난한 천재 화가 이중섭에게는 절친한 벗 구상준이 있었습니다. 구상 시인으로 알려진 유명한 분이지요. 한국 전쟁이 막 끝난 1954년. 부산에서 홀로 작품을 그리고 있던 무명의 이중섭을 자신의 식객으로 대구로 모시고 올라와 지극한 정성을 다 합니다. 구상은 당시 영남일보 주필로 활동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힘을 다해 이중섭이 오로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친구의 작품을 알리기 위해 서울과 대구의 전시회를 진두 지휘하면서 무리한 탓이었을까요? 구상은 이중섭의 대구 전시회가 끝나자 쓰러집니다. 폐결핵 판정을 받고 폐 절단 수술을 받습니다. ‘누구누구는 꼭 문병을 올 거야. 중섭이야 제일 먼저 달려오겠지.’그런데 이상합니다. 다녀갈 만한 사람들은 모두 문병을 왔는데 가장 친한 벗인 중섭은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구상 시인은 마음이 상하기 시작합니다. ‘중섭이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회복 중이라 불편한 몸에 낙심한 마음이 겹쳐 구상은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습니다.며칠 후 마침내 중섭이 병실 문을 열고 나타납니다. “자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나는 다른 그 누구보다 자네가 제일 먼저 달려올 줄 알았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만은…” 친구의 원망에 이중섭은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머리만 긁적입니다. 부시럭 거리며 무언가를 꺼내 구상에게 내밉니다. “이게 뭔가?” “실은 이것 때문에 이렇게 늦었네. 내 정성일세.” 천도 복숭아 그림이었습니다. “어른들 말씀이 천도 복숭아를 먹으면 무병 장수한다고 하지 않나? 그러니 자네도 이걸 먹고 일어나게.” 과일 하나 사 올 수 없었던 가난한 이중섭이 과일 대신 그림을 그려 온 겁니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마주 잡습니다.구상 시인은 2004년 5월 11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천도 복숭아를 서재에 걸어 두고 평생을 함께 합니다. 시인과 화가의 우정을 생각하니 함석헌의 시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탔던 배 꺼지는 순간 /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 ‘너만은 살아다오’ 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불의의 사형장에서 /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려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내가 바로 누군가에게 중섭이 되는 날을 꿈꾸어 봅니다. 나는 과연 그 한 사람을 가졌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누군가의 그 한 사람이 되어 줄 수 있는 삶이기를 생각하는 그대의 멋진 모습에 반합니다./조신영 인문학365 대표

2019-04-24

임금님 수라상에서도 귀한 대접… 뽀얀 쌀밥 한 그릇

열 살 무렵, 시골에 살았다. 어느 날 이웃집에 놀러 갔다. ‘계란밥’이 나왔다. 쌀 조금에 보리쌀과 좁쌀을 잔뜩 넣은, 가난한 집의 식사였다.노란 좁쌀이 달걀과 비슷한 색깔이었다. 그 후 오랫동안 ‘계란밥’ 타령을 했다. 그나마 밥은 먹고 살 정도의 중농. 할머니는 철없는 손자의 ‘계란밥’ 타령을 듣다못해 말씀하셨다. “쟈, 저러다 병나겠다. 고마, 계란밥인지, 좁쌀밥인지 해조라.”그로부터 몇 번 ‘계란밥’을 먹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오래지 않아 그게 달걀이 아니라 좁쌀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렸다. 밥그릇에 담긴 작고 노란 좁쌀 알갱이. 당연히 좁쌀이 어떤 의미를 지닌 지도 몰랐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중국에서 샤오미[小米, 소미]라는 회사가 나올 줄은 짐작도 못 했다.◇ 쌀을 먹은 역사? 그리 오래지 않았다이밥에 고깃국? 북한이 김일성 시대부터 내걸었던,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구호다. 쌀밥 한번 마음껏 먹어보자. 만만치 않다.우리 ‘쌀밥 역사’도 그리 길진 않다. 수탈의 일제강점기에는 언감생심 힘들었다. 한국전쟁 후에는 전쟁의 상처로 먹고살기 힘들었다. 1970년대 혼식과 분식의 시대를 지났다. 힘들었던 시절, 정부는 아이들의 도시락까지 검사했다. ‘식량 자급자족’은 쌀밥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먹어보자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쌀밥 마음껏’을 이루었고 북한은 실패했다.그 이전, 조선 시대에는 가능했을까? 당연히 불가능했다.‘조선왕조실록’ 세조 4년(1458년) 6월26일의 기사다. 제목은 ‘도승지 조석문, 우승지 한계미에게 제향 외에는 갱미를 쓰도록 명하다’이다.임금이 도승지 조석문, 우승지 한계미에게 이르기를, “내가 항상 스스로 검약하여서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넉넉하고 유족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음식을 조금도 검찰하지 않으니, 반미(飯米)는 지극히 정(精)하고 지극히 희게 할 필요가 없다. 금후로는 제향(祭享) 이외에는 세갱미(細粳米)를 쓰지 말게 하고, 대개 중미(中米)를 쓰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조석문이 대답하기를, “중미는 지극히 거칠으니 진공(進供)하기에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갱미(粳米)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세갱미〉갱미〉중미’ 순서다. 중미보다 더 거친 쌀은 ‘조미(7CD9米)’다. 말 그대로 아주 거친 쌀이다. 조선 건국 후 60년이 지났을 시점이다. 나라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세조는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절대군주다. ‘반미(飯米)’는 밥쌀이다. 절대군주가 먹는 밥상의 쌀을 반쯤 쓿은 것으로 사용하라는 명령이다. 지금의 현미보다 덜 쓿은, 거친 쌀이었을 것이다. 세갱미는 완전히 쓿은 쌀이다. 오늘날의 백미(白米)와 흡사한 것으로 추정한다.역시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제향(祭享)’은 제사와 잔치다. 제사 모시는 일과 손님맞이 잔치 이외에는 귀한 백미를 쓰지 말라는 지시다. 임금도 일상적으로 백미를 먹기 힘들었다.조선 시대, ‘쌀’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쌀[米]과는 다르다. 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지금 우리가 먹는 쌀은 대미(大米)다. ‘소미(小米)’도 있다. 좁쌀이다. 좁쌀도 쌀이다.쌀만 일용하는 곡식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메밀도 일상적인 ‘밥의 재료’ 곡물이었다. 메밀을 구황작물로 여기지만 그렇지는 않다. 메밀은 흉년에 먹는 구황작물이면서, 일상적으로 재배하고, 식량으로 삼았던, 중요한 곡식 중의 하나였다. ‘메밀 쌀’도 있었다.곡식은 두 종류로 나누었다.정곡(正穀)과 잡곡(雜穀)이다. 사전에는 “쌀, 찹쌀 이외에는 모두 잡곡”이라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다산 정약용(1762~1836년)의 ‘경세유표_제12권_지관수제_창름지저3’의 일부다. 정곡과 잡곡의 종류, 곡식의 종류를 정확하게 기록했다.정곡 여섯 가지는, 첫째 대미(大米: 즉, 볍쌀), 둘째 소미(小米: 즉, 좁쌀), 셋째 벼(租: 즉, 稻), 넷째 조(粟: 즉, 稷), 다섯째 대맥(大麥), 여섯째 대두(大豆)이다(벼 중에는 혹 산도(山稻)라는 것이 있고, 조 중에는 혹 늦차조가 있음).잡곡 여섯 가지는, 첫째 패자(稗子: 吏文에는 잘못 稷이라 함), 둘째 수수(85A5黍: 이문에는 그릇 唐이라 함), 셋째 귀밀[雀麥: 이문은 그릇 耳牟라 함], 넷째 메밀[蕎麥: 이문에는 잘못 木麥이라 함], 다섯째 소맥(小麥: 이문에는 그릇 眞麥이라 함), 여섯째 소두(小豆: 녹두는 진제(賑濟)와 군량 양쪽에 마땅한 데가 없으니 그 이름을 열두 가지 중에서 없앰이 마땅함)이다.정곡은 대미(쌀), 소미(좁쌀), 벼(예전 멥쌀), 조[粟, 속, 기장으로 추정], 대맥(보리), 대두(콩) 등이다.잡곡은, 패자(피), 촉서(수수). 귀밀(귀보리), 교맥(메밀), 소맥(밀), 소두(팥) 등이다. 녹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진제(구휼 정책)와 군량 양쪽에 모두 큰 쓰임이 없다.쌀과 더불어 좁쌀, 메밀 쌀, 기장, 보리 등을 널리 ‘쌀’로 사용했다.다산 정약용의 시대, 즉 정조대왕이 통치하던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다. 비교적 안정적이고 넉넉하던 시절이다. 이 시대에도 ‘이밥에 고깃국’은 여전히 힘들었다. 쌀 대신에, 오늘날 우리가 잡곡으로 여기는, 보리, 좁쌀, 기장, 콩 등을 밥 짓는 곡물로 사용했다. 쌀만 쌀이 아니라, 여러 잡곡도 쌀로 여겼다.◇ 우리는 무엇을 먹고살았을까?우리 선조들이 한반도에 산 것은 5천 년이다. 역사를 글로 기록한, ‘유사시대’는 2천 년에 미치지 않는다. 긴 세월 동안 우리 선조들은 무엇을 먹고살았을까? 쌀보다는 잡곡이다. 한반도의 역사는 ‘잡곡 대신 쌀’의 역사다. 남쪽과 달리, 추운 날씨의 한반도 북쪽은 쌀 생산이 불가능했다.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8권_지관수제_전제(田制) 10’의 내용이다.촌감(村監) 한 자리는 곧 옛날 전준(田畯)의 직(職)이다. 그 해가 다 가도록 수고하는데, 녹(祿)이 없을 수 없으니 1년에 곡식 24곡(斛, 240두)을 받아서 양식으로 하며, (중략) 남방에는 벼, 북방에는 메기장을 준다촌감, 전준 모두 현장에서 농사를 관리하는 권농관이다. 급료를 준다. “남쪽에서는 벼(?), 북쪽에서는 메기장”이다. 원문에는 “南方以稻 北方以稷(남방이도 북방이직)”으로 표기했다. 남과 북에서 지급하는 급료의 내용물이 다르다.‘도(稻)’는 탈곡하지 않은 벼, ‘직(稷)’은 탈곡하지 않은 기장이다. ‘도’는 지금은 잡초로 여기는 ‘피’, 예전 멥쌀이나 볏과의 식물로 여기기도 한다. ‘직’도 마찬가지. 기장 혹은 볏과의 어떤 식물로 추정한다.‘도’와 ‘직’ 모두, 우리가 먹는, 쌀이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급료의 내용물은 다르지만, 양은 같다. 240말이다. 도와 직을 나누지 않았다.우리만 곡물, 잡곡을 먹었을까? 그렇지는 않다.조선 중기 문신 남용익(1628~1692년)은 효종 6년(1655년), 조선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문견별록’을 남겼다.“(전략) 음식은 반드시 젓가락으로 먹으며, 빈부귀천 할 것 없이 하루 두 끼 ‘밥’을 먹고 힘든 일을 하는 자라야 세 끼를 먹음. 가난한 사람으로서 역사(役事, 힘든 일)를 하는 자는 밥을 두서너 숟갈을 뭉쳐 한 덩이로 만들어 불에 쬐어 말려서 먹되 하루 두 덩이를 먹었으면 다시는 더 밥을 먹지 않으며, 심한 자는 더러 찐 떡만 먹거나 군고구마만 먹기도 하여, 아무리 큰 도성이나 큰 읍(邑)이라 하여도 솥밥을 먹는 집이 드물다. (후략)”이 글의 ‘밥’은 우리가 생각하는 쌀로 지은 ‘밥’이 아니다. 정확지는 않지만 ‘어떤 곡물’을 찐 것이다.원문에는 ‘반(飯)’이라고 표기했다.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밥’이 반드시 쌀은 아니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어떤 곡물이다. 글의 끝부분에 “솥밥을 먹는 집이 드물다”라고 했다. 솥밥은, 오늘날과 같이 쌀 혹은 보리 등으로 지은 밥을 의미한다. 솥밥을 먹는 집이 드물다는 것은 곧 쌀밥 혹은 보리밥을 먹는 이가 드물다는 뜻이다.조선 후기 이앙법이 보급되고 농법이 발달하면서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이 늘어났다. 불행히도 여전히 서민들은 쌀로부터 멀었다. 수탈도 심했던 시기다. 조선 말기에도 대부분 서민은 잡곡이 주식이었다.우리는 쌀에 관한 한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쌀은 두 종류다. 자포니카종(japonica, 日本種)과 인디카 종(indica, 印度種)이다. 자포니카종은 단립종(短粒種)이다. 쌀 길이가 짧고, 통통하다. 인디카종은 장립종(長粒種)이다. 길고 날씬하다.‘훅 불면 날아갈 것 같다’라고 표현하는 안남미(安南米)다. 한반도에 소개될 때 ‘베트남 쌀’로 불리면서 얻은 이름이다.우리는 단립종, 자포니카종을 주로 먹는다. 우리가 먹는 쌀이니 대부분 나라가 우리와 같은 쌀을 먹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렇지는 않다.전 세계를 통틀어, 단립종의 생산은 10%에 불과하다. 대부분 나라가 안남미, 장립종 쌀을 먹는다. 단립종 쌀을 먹는 지역은 한반도와 일본, 중국 북부 등이다. 동남아와 유럽, 미주 지역은 모두 장립종을 먹는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베트남 쌀국수’도 장립종 쌀로 만든다. 우리가 수입하는 베트남 쌀국수의 대부분은 태국산이다. ‘태국에서 수입하는 베트남 쌀국수’도 재미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4-24

꽃나무에 이름표를 달며

김순희 수필가벚꽃이 진 영일대둘레길에 또 다른 분홍빛이 꽃불을 켰다. 아, 이 꽃 이름이 뭐였지? 누가 알려줬는데 지난해 휴대폰으로 검색도 했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무와 꽃 이름을 잘 아는 태명씨에게 전화를 걸어 둘레길에 터널을 이루고 피어있는 꽃나무의 이름을 다시 물었다. ‘꽃아그배나무’라고 금방 알려주었다.왜 이렇게 안 외워질까? 뇌세포가 쪼그라들었나, 만날 듣고도 자꾸 까먹는다. 이름이 생소하기도 하지만 관심 부족이란 걸 느낀다. 꽃아그배나무가 내게 많이 사랑스럽지 않았나보다.나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보는 그렇게 삼사 년 된 지인이 있다. 서로 친구란 말을 하는 사이다. 이번 봄이 시작 될 무렵, 그 분이 내 이름을 쓸 일이 있었다. ‘김순이’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슴에 다는 이름표에 써서 주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 모르게 살며시 네임펜을 들고 글자 ‘이’에 ㅗ을 씌우고 ㅡ를 받쳐 ‘희’로 만들어 주었다. 자세히 안보면 덧칠이 안 보인다. 몇 주가 지나도 이름표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 것을 보니 그분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눈치다.내가 그 사람에게 꽃아그배나무인 것이다. 꽃의 색깔을 알고 어디서 많이 피는지도 알지만 정작 이름은 모른다. 친구라는 이름표가 무색해져버렸다. 슬며시 그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친구에서 그냥 아는 사람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시댁에 다니러 갔다. 아버님이 홀로 가꾸어 놓은 뜰로 나가 두릅순과 엄나무순을 따와 전을 부쳤다. 나물 반찬으로 남편과 셋이 둘러 앉아 점심을 먹었다. 두릅순이 한창이라 따고 돌아서면 금세 다른 가지에 새순이 돋는다고 하셨다. 어머님이 계실 때는 장에 내다 팔아 돈을 샀는데 그 돈 써 보지도 못하고 갔다며 쓸데없는 일만 했다며 농을 하셨다.두릅이 가득한 바구니를 보니 두릅에 대해 몰랐던 그날이 떠올랐다. 나무백일홍이 붉게 피는 걸 구경하러 ‘초곡리 칠인정’에 가다가 둑방에 노랗게 키를 세운 꽃이 눈에 띄었다. 같이 간 일행에게 이름을 물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며칠 뒤 시댁에 갔더니 텃밭 울타리에 온통 노란 어제 그 꽃이 둘러 있었다. 가만히 보니 그 자리는 봄마다 내가 두릅을 땄던 그 자리였다.먹고 싶은 순을 달고 있을 때만 가까이 할 뿐 두릅의 여름과 가을의 모습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잎이 크고 꽃이 벙싯벙싯해서 겨울과 봄의 뼈대만 세운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노란꽃술 가득 꿀이 가득해 꿀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늦가을이 되면 까만 씨를 맺기 위해 여름내 벌을 불러들였다.두릅의 사계절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풀도 생각이 깊어지면 나이테를 품을 수 있을까, 두릅은 풀에서 진화해 나무가 된 것 같다. 나무는 쳐다보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아버님 뜰에 두릅은 그러기엔 키가 자그마해서 나무의 특징인 듬직한 둥치가 없다. 땅에서 바로 가지가 솟아나와 끝에 연두빛 불을 켠다. 그 모습은 아직 풀의 특징과 더 닮았다.치커리는 잎만 따다 싫증이 나서 두었더니 꽃대를 쑤욱 올렸다. 맑은 하늘빛 꽃이 어찌나 고운지 사진을 찍어 만나는 이마다 보여줘도 치커리꽃을 처음 본다고 했다. 텃밭에서 몸을 낮추면 생강꽃, 당근꽃, 완두콩꽃, 꽃이 목적이 아닌 풀들의 전성기가 보였다.사람에게 부대껴 사람멀미를 할 때마다 꽃구경을 다녔다. 자주 꽃을 보다보니 멀미가 없을 때에도 꽃을 찾아나서 꽃에 집중하는 나를 발견했다. 관심을 갖다보니 꽃이 남긴 이야기와 사람이 남긴 이야기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들꽃이라고 부르던 아이들이 주름꽃, 개구리자리, 좁쌀냉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다. 이름을 알고 나니 더 어여뻐 보였다. 꽃들의 이름표를 가슴에 새기고, 사진으로 일기로 기록하다보니 사계절이 지났다. 멀미도 사라졌다. 꽃의 다른 이름은 위로였다.

2019-04-24

카테리니 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물질이 사고를 결정한다우리는 흔히 역사는 발전한다고 말한다.이 말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로부터 왔는데, 헤겔이 쓴 정확한 단어는 ‘발전’이 아니라 ‘전개’였다.발전과 전개는 다르다. 발전이란 어떤 목표를 가지고 나아간다는 말이지만 전개한다는 말에는 그런 목표가 없다.역사가 전개된다는 의미는 더 나은 쪽이나 더 못한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펼쳐진다는 말이다.인류의 문화는 진화한다. 이때 진화라는 말도 하나의 종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방향 중 하나의 방향을 선택해 간다고 보아야 한다.오늘날 지구상 생명체의 진화도 어느 방향성을 따라 발전되거나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갈래의 무작위성의 결과다. 그 선택의 방향이 좋은지, 나쁜지 말할 수는 없다. 좋다, 나쁘다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비교 우위에 지나지 않는다. 삶은 반복될 수 없으므로 그 둘을 비교할 수는 없다. 패션의 흐름도 이와 다르지 않다.인류의 문화가 진화한다는 것은 변화하며 변화의 우열에 대해서 쉽게 말할 수 없는 방향으로 펼쳐진다.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이러한 변화를 불러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유물론은 물질이 이러한 변화를 불러온다고 말한다.물질은 인간의 정신과 삶의 방식을 변혁시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질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 이야기를 해보자.노벨 문학상을 받은 포르투갈의 호세 사라마고(Jos00E9 de Sousa Saramago·1922∼2010)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폭로한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를 썼다. 이 소설은 사람이 집단적으로 눈이 멀게 되는 전염병에 걸린다는 상상력에서 출발한다.이를 통해 인간의 법과 도덕과 윤리가 얼마나 연약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쉽게 와해될 수 있는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비겁하고 추악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람의 눈이 멀면 더럽고 깨끗하다는 개념이 사라질 것이고 더불어 잘 생겼다거나 예쁘다는 말도 사라질 것이다.TV가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백화점이나 아울렛과 같은 패션시장은 애당초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심지어 동물원까지 텅 비어 버릴 것이다. 눈이라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 속에서 예술이 만들어지고, 아름다움 에 대한 관념이 생긴다. 아무리 고결하고 고상하고 싶어도 물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유와 정신, 영혼까지 더러운 진창길을 헤매야 한다. 물질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카테리니 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내 기억 속에 남으리카테리니 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남긴 채 앉아만 있네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To Treno Fevgi Stis Okto)’의 가사 일부다. 조수미의 노래로 우리에게 친근한 이 곡은 음악의 거장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eodorakis·1925∼)가 작곡했다. 1960년대 그리스의 군부독재에 저항하여 싸우던 한 청년 레지스탕스와 연인이 겪은 이별의 아픔에 대해 다루고 있다.혼란한 정치적 상황에 질린 여성은 연인과 함께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카타리니로 떠나고 싶어한다.하지만 독재 치하에서 억압받는 민중을 놔두고 혼자만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떠날 수 없었던 청년은, 그녀 앞에 나타나지도 못한 채 그녀가 떠나가는 모습만 숨어서 지켜볼 뿐이다.근대적 탈 것은 전근대적인 탈 것과 전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이다. 마차는 사람의 사정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지만, 기차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기차에 탄 사람의 마음이야 어떻든 기차는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정해진 시간까지 달려가기 바쁘다.기차는 인간을 이해해주지 않는다. 인간은 떠나는 기차를 세울 수도 없으며, 기차를 따라 잡을만큼 빠른 교통수단도 없다. 연인은 떠나가고 홀로 남은 남성은 그 이별을 중지시킬 방법이 없다. 실제로 기차의 기적은 시끄럽다. 기차를 타기만 하면 이별은 자동적으로 이뤄진다. 사람과 사람을 떼어놓고 마는 기차의 속성이 그 요란한 소리를 슬프다고 느끼게 만든다. 기차의 기적이 슬픈 것이 아니라 기차의 속성으로 인해 기적은 슬픈 것으로 우리에게 인식된다.△경험의 양과 속도물질은 시대와 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사회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며 발전했다. 과거의 산업혁명은 기계의 발전에 힘입었지만 중세시대와 같이 신을 중시했다면 이런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계가 인간을 대신한다거나, 인간이 신을 흉내낸다는 것 자체가 불경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계에 대한 인식이 점차 호의적으로 바뀌게 되었을 때 비로소 기계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뤄졌다.인간은 평균 시속 10㎞로 달릴 수 있고, 걸으면 한 시간에 4㎞ 가량 갈 수 있다. 인간탄환이라 불리는 자메이카의 육상선수 우사인 볼트(Usain Bolt)가 세운 100m 세계신기록은 9.58초다. 이 속도로 사람은 10분도 달릴 수 없지만, 1시간을 달린다고 해봤자 고작 38㎞를 가는 것이 전부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하이퍼루프 프로젝트는 음속으로 달리는 열차 개발계획이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바퀴 없는 열차가 인간의 음성보다 더 빨리 달리는 시대가 지금 우리 눈앞에 열리고 있다.1850년대 사람이 이동하는 평균속도는 시속 6km였고, 이를 토대로 계산한다면 한 사람이 평생 이동하는 거리는 11만㎞였다. 그런데 2050년이 되면 운송수단의 평균속도는 시속 337㎞에 이를 것이고, 한 인간이 평생 이동하는 거리는 1천100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운송수단의 속도가 50배 늘어나는 동안 인간의 능력은 100배 이상 상승하게 된다. 인간은 더 쉽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더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의 능력은 거기에 비례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exponential)인 수준으로 높아진다.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평균이동속도가 빨라진 것은 경험의 폭이나 경험의 양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 이전의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자라고 그곳에서 죽었다. 그들의 경험은 그 마을 이상을 넘어서지 않았고, 마을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 이상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즉 근대이전 인간의 경험과 지식이 마을과 같은 크기였다고 할 수 있다.공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탈 것의 속도는 빨라져 자신이 태어난 나라는 물론 마음만 먹으면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단시간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의 경험과 지식의 크기는 지구라는 수준을 넘어서 우주로 뻗어나가고 있다. 우주는 터무니없이 넓고 거기에는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무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이제 우주 만큼의 넓이로 확장될 것이다.정신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인간을 지배한다. 과학기술은 물질을 만듦으로써 정신을 변혁시킨다.

2019-04-24

성공은 착실한 준비에서

심한식 경북부지난 19일부터 22일까지 경산에서 개최된 제57회 경북도민체육대회는 성공체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작성된 기록을 떠나 경산시의 철저한 준비에 민·학이 서로 소통과 협력으로 힘을 보탰기 때문이다.경산시는 2017년 8월 제57회 경북도민체전 개최지로 결정되자 2018년 1월 도민체전 T/F팀을 결성해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최적의 분위기 속에서 선수들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이들을 지원할 자원봉사자들의 교육, 부족한 경기장을 메울 학교시설의 사용을 위해 사전 소통을 강화했다.물론 부대비용은 들었지만, 중간고사 기간임에도 많은 학교가 시설을 경기장소로 제공해 어려움이 없었다.부부가, 자매가 특별한 사연으로 자원봉사에 참여한 미담들이 쏟아졌고 대회가 끝났지만 진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이처럼 철저한 준비와 소통이 뒤따라야 성공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주위에서 너무 자주 목격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일하기보다는 눈치로 승진하려는 공직자, 지역민과 동떨어져 정치판만 기웃거리다 출마에 나서는 정치인들, 진실을 전하기보다는 돈을 밝히는 기자, 사건을 왜곡시키는 수사기관, 돈으로 성적이 바뀌는 학교, “나만 아니면 돼”라는 지도자들. 눈을 들어 어디를 보아도 진실성보다는 거짓과 탐욕이 자주 목격된다. ‘참’보다는 ‘거짓’이 더 빠르게 전달되고 전염성이 강한 것을 인정하더라도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다.이 세상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세상을 버텨내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경산시의 성공적인 도체 개최를 부러운 눈으로 보지만 말고 지금부터라도 착실하게 준비해 보자. 열심히 노력한 이후에 뒤따를 보상을 생각해 보자. 비록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해도 최선을 다했다는 행복은 남지 않겠는가? 성공과 내일을 위해 어떠한 방법으로든 뛰는 우리는 ‘진실’의 토대 위에서는 벗어나지 말아야 하겠다./shs1127@kbmaeil.com

2019-04-23

포항의 야시장(夜市場)이라면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최근 대한민국의 밤은 어쩌면 예전보다 활기찬 모습을 보일 것 같다. 전국 각지에서 유행처럼 ‘야시장(夜市場)’을 개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야시장은 생각보다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이던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비교적 산업과 경제가 활발하게 움직이며 주요 도시에는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었기 때문에 서울, 부산, 대구는 물론 포항 등 주요 도시에서는 야시장이 개설되었던 것이다. 포항도 야시장의 역사는 이미 10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당시 포항의 상거래는 조선인들이 중심이 되는 여천시장과 지금의 중앙상가 위치에 즐비하였던 일본인 상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천시장에서는 해가 뜨면 시장이 북적이다가 해가지면 철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시 신문기사 등을 살펴보면 시장에는 노점들도 많았다. 주로 여인네들이 지역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던 돌김이나 청어의 머리를 자르고 몸통을 절반으로 갈라 내장을 제거한 후 염장 조미하여 말린 신흠(身欠)청어 등을 가지고 나와 호객하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지금 철강경기의 변동에 따라 지역경제가 흔들리듯이 당시에는 청어 어획이 풍어(豊漁)냐 불어(不漁)냐에 따라 포항읍내 경기가 결정되었다. 여름철에는 시장을 여는 시간이 늘어나기는 하였지만 취급하는 것이 부패하기 쉬운 수산물이어서 어려움이 많았고, 선선한 저녁에는 어두워서 장사할 수 없었다. 이에 지역 상인들은 스스로 값비싼 전기료와 전등임대료를 감내하며 사활을 걸고 깜깜한 밤을 밝혀 손님을 끌어 모으기 위해 시작한 것이 바로 야시장이었다.1930년대에 전국적으로 유행하였던 야시장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물리적으로 장사하는 시간이 연장된데 다 야밤에 환하게 전등으로 밝혀진 시장거리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볼거리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최대한 짧은 시간동안 값비싼 전기료비용을 건지려는 상인들의 조바심으로 인해 아이들과 함께 나온 부인들을 단순 구경꾼으로 지레짐작한 상인들이 막말하거나 무시하는 사례, 큰손이 아닌 군것질하는 아이들을 홀대하는 사례들도 많았던 모양이다. 당시 야시장을 둘러싸고 ‘부인손님에 대한 응대 특히 공손하게 하자’, ‘태도문제, 언사와 함께 중요’, ‘모처럼 온 손님 고마운 생각을 가져라’등 지금도 그대로 인용할만한 기사들도 눈에 띄고 있다.서울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밤 도깨비 야시장은 이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올해도 4월5일부터 시내 곳곳에서 개최하고 있다. 2015년에는 20만 명, 2016년에는 330만 명, 2017년에는 505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야시장이라고 해도 푸드 트럭과 같은 단순히 먹거리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야시장은 과거처럼 상인들이 사활을 건 단판승부가 아니라 일종의 축제와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된 셈이다. 과거에는 그저 깜깜한 밤을 밝히기만 해도 신기함에 사람들이 몰리는 매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간은 적고 가볼 곳은 많은 시대가 되었다. 결국 지자체가 주도하는 행사이기는 하지만 성공여부가 지자체의 역량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지자체의 역할은 하드웨어인 자리를 마련해주는 데 그쳐야 한다. 야시장에 한번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두세 번 재방문하거나 관광방문객이 반드시 찾게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이번에 포항에서 개최하는 야시장은 이왕이면 의미 있는 야시장이 되었으면 한다. 예를 들어 먹거리라면 적어도 구룡포 대게, 흥해 부추, 곡강 시금치, 청하 돌미역, 신광 흥곡주, 장기 산딸기 등 반드시 지역산 농수산물을 이용하였다는 원산지표시까지 있었으면 좋겠다. 비록 도심의 행사지만 지역 특산물도 함께 알리는 도농복합도시 포항다운 야시장으로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2019-04-23

든 교육? 난 교육? 된 교육!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지금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을 사회에서 써먹지 못하는 첫 번째 세대가 될 것이다.” 유발 하라리(‘사피엔스’ 중에서)의 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필자의 경험상 이 말은 지극히 맞는 말이다. 부끄럽지만 필자는 그나마 배운 것에 대한 혜택을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이 나라 교육은 변한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변하자고 수십 년째 떠들고 있지만 놀랍게도 변한 것은 거의 없다.누군가는 자유학기(년)제가 생겼고, 수업도 학생활동 중심 수업으로 많이 바뀌었고, 제일 중요한 평가에서도 과정중심 평가가 도입되는 등 교육전반에 걸쳐 변화가 있다고 말 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겉모습만 보면 바뀐 것도 같다. 없던 것들이 많이 생겼으니 말이다.그런데 교육계 안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말하는 변화라는 것이 혼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육계의 혼돈이 가중 되는 이유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독립적이어야 할 교육이 정치의 하수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제일 먼저 바뀌는 것이 교육 정책이다. 혹 대통령의 정당이 바뀔 때는 전 정부의 많은 교육정책들은 패대기쳐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전혀 낯선 정책들이 자리 한다. 낯섦은 더 큰 혼란을 야기하고, 그 혼란을 덮기 위한 억지 교육정책들이 봇물 터진 격으로 쏟아져 나온다.그러면 수단 좋은 교육 정치꾼들은 여론 수치를 이용하여 혼란을 변화와 역동이라는 말로 포장하여 자신들의 업적으로 홍보하느라 바쁘다. 그러다가 교육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면 모든 것을 전(前) 정부 탓으로 돌려버린다. 그러면 친정부 언론들은 갖은 방법으로 전 정부의 교육정책을 비판할 수 있는 사건을 찾아내어 공론화시킨다. 상황이 이즈음 되면 처음에 제기되었던 교육 문제는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교육계는 정치 싸움판이 된다. 이런 교육에 무슨 희망이,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 교육이 죽었다는 말이 헛말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비록 죽은 교육이지만, 교육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것이고, 학생들이 그린 꿈속에서 인류가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의 꿈을 빼앗아버린 정치는 학생들의 꿈도 삭제해버렸다. 학생들의 꿈이 사라진 사회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우리는 정말 미래가 없는 사회를 살아야 하는가?물론 이런 삶을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답은 하나다. 미래 사회 역군인 학생들이 다시 행복한 꿈을 꾸고, 그 꿈을 즐겁게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을 하루 빨리 정치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 대통령 말 한 마디에 교육정책이 바뀌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그 전에 교사들부터 교육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그래서 필자는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는 “든 사람은 머릿속에 지식이 많은 든 사람, 난 사람은 재주가 있어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는 사람, 된 사람은 인격이 훌륭하고 덕이 있어 됨됨이가 된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혹 독자 여러분은 본인이나 본인의 자녀가 이 중에서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지? 아마도 들고 난 사람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우리 교육 또한 학생들이 그렇게 자라도록 든 교육과 난 교육만 해왔다.그 결과 우리 사회는 지금과 같이 참담(慘憺)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그럼 우리는 계속 희망이 부재한 교육 암흑기 시대를 살아야 하는가? 누구도 이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정치로부터의 교육 독립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동시에 사회에서 써먹지도 못할 죽은 교육 내용을 과감히 버리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학생들이 스스로 찾고 내면화할 수 있는 ‘된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

2019-04-23

누가 진정한 친구인가?

유명 야구 선수가 은퇴 후 방송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인상적입니다. “돈 좀 꿔 달라고 할 때 왜 돈이 필요한지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보내면 되겠는가를 묻는다면 진정한 친구다.”만종, 이삭 줍는 여인 등을 남긴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는 무명 시절 끼니를 잘 잇지 못할 정도로 궁핍했습니다. 물감을 사는 일이나 화구를 구입하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힘겨웠지요. 마지막 남은 장작을 난로에 넣으며 한숨을 내 쉽니다. ‘이제는 추워도 불을 피울 수 없구나.’ 한껏 움츠러든 마음이 우울과 슬픔으로 물듭니다.이때 밀레의 절친한 벗 테오도르 루소가 방문합니다. “밀레. 좋은 소식이 있네! 자네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네.” 밀레는 깜짝 놀라지요. 자기 그림이 팔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수집상이 자네 그림이 좋다며 한 작품 골라 달라고 선금을 주고 갔네.” 봉투 안에는 300프랑이라는 큰 돈이 들어 있습니다.밀레는 친구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립니다. “고맙네. 루소. 자네 덕분에 이 겨울을 걱정없이 날 수 있겠어. 자 어서 그림을 골라보게. 뭐가 좋겠나?” 밀레는 그 돈으로 식량과 물감을 샀고 용기를 내 더욱 매진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밀레는 화단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고 마침내 비싼 값에 그림이 팔리기 시작합니다.세월이 흐릅니다. 밀레는 오랜 만에 친구 테오도르 루소의 집을 방문하게 되지요. 루소의 집 벽에는 낯익은 그림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아니? 저 그림은. 몇 년 전 자네가 수집상에게 전해준다며 사 간 그림이 아닌가?” 루소가 말하지요. “그 수집상이 바로 나였네. 어려운 자네를 돕고 싶은데 그냥 돈을 건네면 자네 자존심이 상할까봐 그랬어.”많은 화가들이 바르비종으로 이주해 퐁텐블로 숲의 경치를 그립니다. 하지만 그곳에 끝까지 남아 바르비종 파를 지켰던 화가는 테오도르 루소와 밀레 두 사람 뿐입니다. 둘의 우정은 깊디 깊어 루소는 밀레 자녀들의 대부가 되어 주었고 밀레는 1875년 먼저 세상을 떠난 테오도르 루소의 옆에 나란히 묻힙니다. 퐁텐블로 숲에는 두 사람을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두 거장의 기운이 아스라히 퍼지는 숲이지요.폰을 열면 친구가 넘쳐납니다. 아무런 사심없이 내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그립습니다. 세상에서 누가 나를 그런 친구로 기억해 줄까, 고민 깊어가는 새벽입니다. /조신영 인문학365 대표

2019-04-23

신문고(申聞鼓)

신문고는 억울한 일이 있을 때 북을 쳐서 임금에게 알리는 옛날 왕조시대의 민원 상소 제도다. 조선시대 때 태종이 이 제도를 도입해 백성의 억울함을 직접 들었다고 한다. 신문고는 원래 당나라 태종이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설치한 등문고(登聞鼓)가 최초인데 이것이 조선으로 유래한 것이다.역사가들은 백성의 뜻을 잘 살핀 조선 태종(이방원)과 당나라 태종(이세민)은 닮은 데가 많다고 해석하고 있다. 우선 태종이란 묘호를 쓴 게 같다. 태종이란 묘호는 본래 건국 후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기틀을 다진 왕들에게 붙여주는 명칭이다. 신라시대 태종 무열왕이 대표적이다.조선의 이방원과 당나라의 이세민은 둘 다 개국 군주의 아들이다. 둘 다 장남이 아니면서 권력의 실세였고 왕자의 난을 치르며 권력의 정상까지 오른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건국초기의 나라 기반을 굳건히 세운 공로자라는 점에서도 같다.당 태종은 중국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성인(聖人)으로 통한다. 그는 농민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나눠주고, 과거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했다. 등문고를 설치, 백성의 억울함을 살피는 등 국가와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푼 황제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조선 태종도 사실상 조선의 창업군주라 불린다. 정몽주를 제거하는 등 개국 공신일 뿐 아니라 아버지를 이어 국가의 기반을 조성하는데 세운 그의 공로는 대단하다.1401년 조선 태종이 설치한 신문고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왕이 직접 듣고 풀어주기 위한 제도다. 억울한 백성은 대궐 밖 문루에 올라가 북을 두드리면 임금이 직접 이를 챙겼다고 전한다. 지금으로 보면 청와대 게시판과 같은 역할을 한 제도다. 이용하는 백성이 얼마나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왕조시대에 백성의 목소리를 직접 듣겠다고 한 왕의 발상이 놀랍다.‘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지금의 국민청원은 곧 조선시대 신문고와 비슷한 취지의 정책이다. 포항지진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민청원이 21만 명을 넘었다. 정치권이 풀지 못하고 있는 포항시민의 요구에 이제 청와대가 답할 차례다. 어떤 답을 줄지 사뭇 궁금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19-04-23

포항 지진과 세월호

정철화 편집부국장최근 포항의 최대 관심사는 포항지진특별법 제정이다. 11·15 포항지진이 지열발전소에서 촉발된 것으로 판정이 나면서 포항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지진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도시를 재건하고 시민들의 정신적, 물적 피해를 보상하기 위한 특별법제정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표현했다.포항지진은 세월호 사건과 많이 닮아 있다. 인재에 의한 엄청난 피해가 났고 사고가 터지기까지 과정이 거의 판박이다.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는 탑승자 476명 중 295명이 사망하고 5명이 실종됐다. 무엇보다 제주도 수학여행길에 나섰던 단원고 학생 250명이 희생된 비극이어서 아픔은 더욱 컸다.2017년 11월 15일 포항시 흥해읍에서 규모 5.4 지진이 지진이 발생했다. 한국은행의 분석에 따르면 포항지진 총 피해액은 3천억원으로 추산했다. 도시 브랜드 손상과 인구감소, 기업의 투자위축, 관광객의 감소, 집값 폭락, 지진 트라우마 등 직간접적 피해가 수백조를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두 사건은 국가 전체에 넓게 퍼져 있는 안전불감증과 부실한 국가 재난관리시스템이 빚어낸 전형적인 인재로 온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포항지진은 지열발전을 위해 땅에 시추공을 뚫어 고압의 물을 주입하는 과정에서 단층을 자극해 발생한 것으로 결론났다. 지열발전은 산업자원부 에너지정책사업의 하나로 넥스지오가 시공을 맡았다. 세월호에는 침몰하는 배 속에 승객들을 내팽개친 채 도망가버린 어이없는 선장이 있었다면 포항지진에는 지열사업의 학문적 근거를 제공한 비양심적인 학자들이 있었다. 지열발전은 스위스 바젤에서 지진유발 가능성 때문에 실패한 사업으로 학계에 보고돼 있다. 그런 사업을 그것도 지진단층이 지나는 포항에서 추진하도록 자문을 한 학자나 연구기관은 세월호 선장과 다를 바 없다. 세월호 사건에는 사업주가 선체 복원력에 중대한 위험이 있는 선체구조를 변경했고 이를 안전하다고 승인해준 국가기관이 있었다. 포항지진에는 지열발전 물 주입과정에서 100여 차례의 미소지진이 발생했고 수 차례 지진 위험 경보신호가 보내졌지만 사업은 그대로 강행됐다. 세월호의 실제 사주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사과를 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도망을 다녔다. 포항지열발전의 사업주 역시 여태까지 포항지진과 관련한 사과 한마디 없다.세월호 사건은 그해 11월 7일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피해자 보상과 함께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돼 사고와 관련한 정부기관과 청와대 지휘 책임자의 과실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 세월호와 달리 포항지진은 사업 발주기관이 정부기관이란 점이 차이점이다. 지열발전을 발주한 산업자원부는 포항지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포항시민들이 특별법 제정을 요청할 게 아니라 산자부가 앞장서 특별법 제정을 건의하는 등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순리다. 그게 아니면 사고를 축소, 은폐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한다는 의심만 살 뿐이다.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할 당시에도 여야가 극렬하게 대립하며 정쟁이 벌어졌었다. 더욱이 세월호 사건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던 당시 국가 지도자들은 법적 처벌과 함께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청와대와 여야 정치권은 물론 지역의 지도자들은 세월호의 전례를 새겨야 한다. 포항지진 특별법제정 과정을 포항시민들은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시민들의 뜻을 존중하지 않고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거나 후속대책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시민들의 준엄한 심판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019-04-23

한국 정신문화의 성지, 화랑정신과 새마을운동의 발상지

이승율 청도군수청도는 산이 푸르고 물이 맑고 인심이 좋은 삼청(三淸)의 고장, 소싸움의 고장으로 불릴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신문화의 성지로 불린다.화랑정신과 새마을운동의 발상지가 청도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화랑정신, 조국근대화의 초석이 된 새마을운동, 이 두 가지 정신문화가 청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청도가 대한민국 정신문화의 성지라는 데에 이견(異見)이 있을 수 없다.청도를 화랑정신의 발상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이곳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서기 600년(진평왕 22년)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대작갑사(현 운문사)와 가슬갑사에 머물고 있을 때, 신라 화랑인 귀산과 추항이 찾아와 세속오계를 지침으로 받아 실천함으로써 화랑의 모범이 됐고, 세속오계가 화랑의 행동지침으로 보편화됨으로써 청도가 화랑정신의 발상지가 된 것이다.청도는 이러한 화랑정신의 발상지라는 정신문화 자산을 계승·발전시킴과 동시에,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다. 그 옛날 신라 화랑도의 수련도장이었던 운문산 일대에 화랑정신의 뿌리를 잇고 참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2009년 ‘삼국 통일 초석, 화랑정신의 발상지 청도’란 안내간판을 운문면 삼계리 입구 길가에 세우고, 안쪽 가슬갑사지로 추정되는 곳에 두 화랑이 세속오계를 들고 있는 모습의 조형물을 세워 놓았다.또한 2008년 9월, 정부의 3대 문화권 관광기반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운문면 방지리 일대에 30여만㎡ 규모의 ‘청도신화랑풍류마을’을 총 610억원을 투자해 화랑정신을 이어가는 교육·체험시설 및 문화시설로 조성했다.잊혀진 화랑혼을 현대로 전승하기 위해 세워진 청도신화랑풍류마을은 화랑도의 세속오계 정신과 풍류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감성충전 힐빙(Heal-Being) 공간으로 화랑정신발상지기념관, 화랑VR체험존, 다목적홀, 대강당, 화랑촌콘도, 화랑국궁장, 캠핑장, 야외체험장 등을 갖추고 있어 단체의 교육, 연수, 수련활동의 최적지로 손색이 없다.청도신화랑풍류마을은 최근 공공기관, 기업체, 청소년 단체, 교회 및 성당 등에서 조직관계의 중요성, 조직활성화, 구성원 커뮤니케이션 강화, 학업스트레스 감소, 일반 수련활동 등을 위해 많이들 이용하고 있다.2012년 12월에는 화랑정신 발상지의 역사적 가치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9월 1일을 ‘청도 화랑의 날’로 제정해 다채로운 행사들을 열고 있다. 이와 연계해 2015년 5월, 미래의 꿈나무인 청소년들을 화랑의 기상을 이어받은 올바른 정신과 강건한 신체를 겸비한 글로벌 리더로서의 자질 함양과 21세기 신화랑 인재 육성을 위한 ‘청도신화랑단’을 청도교육지원청과 협력시책 사업으로 출범시켰다.지역 내 초·중·고 22개교 380여 명으로 구성된 청도신화랑단은 각 학교에서 정규교과 과정과 연계한 동아리 활동을 실시한다. 청도군에서는 동아리 활동 내실화와 지속가능한 지역 동아리 활동 토대를 조성하기 위해 매년 동아리 활동비를 지원하고 있다. 또 신(新)화랑정신을 체득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 및 체험프로그램을 마련해 지역의 우수한 정신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자긍심을 키워주고 있다.새마을운동 역시 청도에서 시작됐다. 대한민국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된 새마을운동은 새마을운동발상지 청도읍 신도리는 새마을운동에 앞서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착안토록 아이디어를 제공한 최초의 마을이다. 즉, 신도마을은 대한민국 전역을 새마을운동으로 점화시키는 데에 불씨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예로부터 신도마을은 일찍이 노는 사람이 없고, 술독에 빠진 사람이 없으며, 노름하는 사람이 없는 3무(三無)의 마을로 주민들의 협동심이 유달리 강하고 부진런해 개미마을이라 불렀다. 이러한 신도마을의 협동심과 근면성을 바탕으로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우리 청도는 대한민국 근대화의 중심이 되고 새마을운동의 효시가 된 신도마을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고 지역의 정신문화를 재조명하기 위해 2009년 새마을운동발상지 기념관을 건립했다. 또 2011년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을 추진했으며, 2015년에는 새마을 테마파크를 건립해 새마을정신 함양 교육, 문화관광 테마시설을 조성했다.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공원은 과거를 재구성하고 미래를 기약하는 구체적인 테마공간이다. 새마을운동의 탄생배경과 발전단계,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미친 성과, 그리고 새마을운동 세계화 경향 등을 직접 확인하고, 또 함께 어울리면서 즐겁게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이다.최근 새마을운동 국제화, 세계화의 트렌드에 걸맞게 개발도상국가의 많은 지도자들이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우리 청도를 찾고 있다. 외국인 새마을연수단의 필수 방문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이처럼 우리 청도의 화랑정신, 새마을운동발상지라는 정신문화는 미래세대에게 온전하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자산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귀중한 정신문화 유산을 넘어 세계인들과 함께 나누어야 할 정신적 가치이다.즉 정신문화는 국민들의 정서와 지혜를 풍요롭게 하여 삶의 질 향상과 행복증진에 기여한다. 우리 청도는 경북의 4대 정신(화랑, 새마을, 호국, 선비)중 2대 정신의 발상지인 만큼 정신문화의 성지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앞으로 우리 청도군은 화랑정신과 새마을운동 정신을 널리 보급·확산해 건강한 국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에 힘쓰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2019-04-23

보더콜리는 양을 모는 게 아니라 쫓는 것

보더콜리가 양을 몰고, 양은 축사로 들어가는 것을 본적 있는가? 매우 신기해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복잡하지도 않고, 동물들 간의 특별한 의사소통이 필요하지도 않다. 양은 늑대같은 천적이 공격해 오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무리의 중심으로 이동하려는 습성이 있다. 이렇게 무리의 중심으로 향하려는 구심력은 무리의 밀도를 높게 하고 무리가 하나의 개체같이 움직이게 한다. 보더콜리는 움직이는 양을 지속적으로 쫓아다니는데 이것은 사냥감을 쫓는 추격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양을 먹이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을 쫓는 행동 자체는 먹이동물을 추격하는 본능에서 비롯된 것임은 분명하다. 무리에서 이탈한 양이 빠르게 움직일 때는 빠르게 쫓고, 가만히 있을 때에는 개가 자신의 몸을 낮추고 가만히 주시하고 있는 것은 육식동물이 먹이동물의 움직임에 맞추어 자신의 움직임을 숨겨가며 포획하려는 본성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양 한 마리가 어떤 이유로 인해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면 양몰이개가 잽싸게 쫓아가다보니 초식동물의 본성대로 도망을 치게되고 양몰이개는 육식동물의 본성대로 이를 쫓기 때문에 양은 우왕좌왕하다 무리가 있는 곳으로 합류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양과 양몰이개의 기본적인 쫓기게임은 끝나게 된다.양몰이개의 머리속에 ‘양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면 위험하므로 얼른 되돌아가도록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돌아다니는 양은 사냥하기 좋은 대상이기 때문에 이리저리 쫓다가 양이 무리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더 이상 쫓지 않는 것일 뿐이다. 실제 야생 늑대들의 경우에도 초식동물의 무리를 발견하면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한 마리를 사냥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무리의 좌우를 돌아 달리며 한 두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도록 만들어 그 대상을 쫓아 사냥한다.양몰이개 보더콜리는 특유의 매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움직이는 물체에 대한 높은 집중력과 그에 따르는 짖음 신호를 쉽게 낸다는 것이다. 이 특이한 매력은 움직이는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같이 덩치가 큰 것에서부터 나뭇잎, 테니스공, 비닐봉지같은 작은 것에까지 다양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추포하기 위해 응시와 돌진을 하지만 그것을 실제 사냥감처럼 물어뜯거나 과격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이는 보더콜리만의 오묘한 사냥습성이자, 절제된 표현을 하는 그들만의 특성이다. 보더콜리가 양떼를 울타리 안으로 몰고 축사로 들어가게 하는 행동을 잘 살펴보면 보더콜리는 양떼에서 떨어져 나온 한 마리를 쫓는 것외에도 양떼가 이리저리 움직일때 마다 양떼의 주위를 돌아다니며 사냥포즈를 취한다. 보더콜리의 입장에서 ‘양떼가 이쪽으로 가면 위험하니까 다른 쪽으로 몰라야겠다!’라는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방향의 개념없이 양떼가 한쪽 방향으로 계속이동하면 얼른 그 선두쪽으로 달려가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다.너무 자주 양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로막게 되면 양들은 충분히 풀을 뜯지도 못하고 이내 축사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목동은 보더콜리에게 단순한 몇 가지를 가르치는데 이것이 바로 ‘정지’, ‘부르기’, ‘쫓기’ 등이다. 이 훈련을 통해 너무 자주 또는 성급하게 양들을 따라다니게 되면 정지신호를 주거나 개를 불러들여 가만히 있게 하고, 양떼에서 이탈한 양이 발생하면 쫓아가라는 신호를 주어 얼른 양떼로 되돌리도록 한다. 목동이 양들을 우리로 가둘 시간이 되면 보더콜리에게 지속적으로 양들을 쫓도록하는데 양떼의 후미에서 자극을 주거나 무리의 선두를 가로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도록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다.이렇게 끝도 없이 양들을 쫓아다니게 되면 양들은 더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숨으려 하게 되는데 몰려다니는 중에 축사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때부터는 보더콜리가 자신들을 더이상 쫓지 않음을 익히게 된다. 양떼가 축사로 들어가게 되면 목동은 보더콜리를 불러들이고 축사문을 닫아 더 이상 보더콜리로부터 양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다. 경험없는 양떼가 처음부터 축사로 잘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의 도움도 필요하겠지만, 은신처에 대한 개념은 동물들에게 금방 인식되어지는 것이므로 양떼가 축사로 몸을 피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는 일상적인 생존습관이 된다. 양떼를 따라 다니는 보더콜리와 그를 피해 도망다니는 양떼의 관계는 개의 사냥행위와 양이 자신을 지키기위해 무리에 합류하고 은신처로 피하려는 관계에서 비롯된 본성적 행위이며 둘 사이의 쫓고 쫓기는 신경전이 ‘양몰이’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다./서라벌대 반려동물연구소 소장(마사과 교수)

2019-04-23

겸손과 성실함이 빚어낸 위대한 음악?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학생들과 음악사 수업을 하던 중 다음과 같은 토론 주제를 준 적이 있다.대작곡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결론은 첫째, 많은 곡을 작곡하여야 한다. 둘째, 다양한 장르의 곡을 작곡하여야 한다. 셋째, 미래의 양식을 지향할 수 있는 진보적인 형식이 있어야 한다, 등이었는데 조건에 맞는 작곡가를 얘기하다 보니 가장 이 조건에 걸 맞는 작곡가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였다. 현재 남아있는 작품 번호만 1천100여 개에 달하며 그가 활동하였던 바로크 시대는 출판업이 활성화 되지 못하여 악보의 보존과 유통이 제한적이었던 시대였기에 실제 분실된 악보를 추가한다면 그 곡의 수는 훨씬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된다.악보의 출판이 활성화 되고 작곡가가 작품의 인세를 받기 시작한 시기는 베토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대부터이니 바흐뿐만 아니라 다른 바로크 작곡가들의 유실된 악보도 많을 것이다.바흐의 작품들이 내용적으로 완벽하고 평생 동안 독일을 떠나지 않고 신앙의 힘으로 작곡에만 전념하였던 그였기에 음악에 매료되어 그의 인간적인 부분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바흐도 불행했던 어린시절을 보냈다. 막내였던 그는 10살 이전에 그의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 장남인 첫째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Johann Christoph Bach·1671∼1721)에게 양육되었으며 그가 35세가 되던 해 첫째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에게까지 총 20명의 자식들이 있었으나 그 중 절반이 영유아기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의 나이 38세인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 교회에서 활동하고부터는 과도한 교회 업무로 막중한 음악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바흐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 교회의 음악가를 뽑는 경쟁에서 그는 텔레만(G.P.Telemann·1681∼1767)과 그라우프너(J.C.Graupner·1683∼1760)에 밀렸으나 앞의 인물들이 과도한 업무를 이유로 사임하는 바람에 시의회의 ‘가장 우수한 인물을 얻을 수 없어 중류급의 음악가로 임명해야 한다’라는 다소 모욕적인(?) 성명과 함께 비로소 성토마스 교회의 칸토르로 임명되는, 지금으로는 믿지 못할 사실이 있다.1729년에 초연되었던 ‘마태수난곡’이 이후 100년간 잊혀졌다가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1809∼1847)에 의해 다시 무대 위에 세워졌으며,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카잘스(Pablo Casals·1876∼1973)에 의해 1889년 바흐의 6개의 무반주 첼로 조곡이 200년만에 발견된 것은 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이 후 카잘스는 고백하기를 “이 후 12년간 매일 밤 그 곡을 연습했지만 그 중 한 곡이라도 무대에서 연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25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연주를 해도 되겠다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이 후 이 곡을 발굴한지 47년이 지난 1936년이 되어서야 녹음을 했다고 한다. 현재 이 곡은 첼리스트들의 독주회에서는 절대 빠지지 않는 불멸의 곡이 되었다. 독일의 근대 작곡가 막스 레거(J.B.Max Reger·1873∼1916)는 “작곡가와 돼지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죽고 난 뒤에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다”라는 재미있는 말을 남겼는데 동시대에 살면서 그 음악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말해주는 문구다.바흐의 인생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노력했던 사람임에 분명하다.첫번째 부인을 잃은 다음 해인 1721년, 그의 나이 36세에 새로운 아내를 맞이하게 된다. 16세 연하의 아름다운 여인이라 전해지며 그녀의 이름은 ‘안나 막달레나’였다. 그녀는 궁정악단의 가수였으며 남편의 재능을 존경하고 이해할만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악보를 사보하는 솜씨가 좋아 바흐의 작품을 자주 사보하였다고 전해진다. 바흐는 이 사랑스런 아내에게 두 권의 작품집을 헌정한다. 바로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음악노트’라는 작품이며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가지지 못한 그녀를 위한 작품이기에 누구나 연주하기 쉬운 건반 작품집이다. 이 곡 중 영화 ‘접속’의 OST로 유명한 ‘어 러버스 콘체르토(A Lover’s Concerto)란 팝송으로 편곡되어 더 잘 알려진 ‘미뉴에트’도 포함되어 있다.바흐는 자식들의 음악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정기적으로 가정음악회를 열어 음악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그의 장남이 10살이 되던 1720년에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를 위한 소품집’을 작곡하여 그의 아들에게 선사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교육을 위해 작곡된 것이었다. 그의 가문이 200년간 약 60여 명의 작곡자를 배출한 뛰어난 음악가문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자식들 중에는 음악사에 남을 만한 걸출한 인물이 세 명이나 있다. 장남이었던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W.F.Friedemann Bach·1710∼1784)’와 특히 둘째였던 ‘칼 필립 에마뉴엘 바흐(C.P.E Bach·1714∼1788)’는 전고전주의 양식을 이끈 감정과 다양식의 대가였으며 가장 유명했던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Christian Bach·1735∼1782)’는 런던 바흐라고도 불리며 그의 부친인 J.S.바흐가 재조명되기 전에는 당시 ‘바흐’라고 하면 이 인물이 지칭될 만큼 아버지 보다 더 유명한 작곡가였으며 모차르트와의 우정이 매우 깊었다고 전해진다.J.S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라는 그의 별명처럼 후배 작곡가들에게 성경과도 같은 절대적인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200곡에 달하는 칸타타와 그의 수난곡들은 합창곡 작법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2권의 ‘평균율 클라이비어곡집’은 각각 24개의 장조와 단조로 된 전주곡과 푸가로 구성되어 피아노곡의 구약 성서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현재에는 24개의 장단조가 모두 자유롭게 작곡되어지나 바로크 시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일부의 조성들만 완벽하게 인식되어 사용되어 졌는데 바흐는 두 번에 걸친 24개의 클라이비어 곡집으로 모든 조성들을 완벽하게 실험하여 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필자는 바흐의 작품을 생각할 때마다 인류 최고의 건축물인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상하곤 한다. 그 규모의 광대함과 빈틈없는 구조는 현대의 건축물조차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며 몇 천년 동안 굳건히 서 있다. ‘세상의 모든 음악들이 없어지더라도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 곡집만 있으면 다시 원래대로 복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만큼 완벽한 음악적 구조와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바흐 이후 이러한 작품을 흉내낸 작곡가 조차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바흐에 의해 완벽하게 완성된 푸가 기법은 이 후 후대 작곡가들이 푸가 기법으로는 바흐라는 큰 산맥을 넘을 수가 없기에 작품의 일부를 표현하는 기법으로만 제한되어 작곡되는 현상들이 나타난다.바흐의 말년도 그리 평탄치는 않았다. 바흐의 마지막 작품은 특이하게도 개인을 표현한 예술작품이라기 보다 학습서의 성격을 가진‘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 BWV.1080)’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쓰면서 좋지 않았던 바흐의 눈이 완전히 멀어버린 것으로 예상된다. 바흐는 이 작품을 통해 후세에 자신이 구사할 수 있었던 푸가기법을 모두 전수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 작품은 결국 끝까지 작곡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남았다. 아쉽게도 그 곡을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 완성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이 여기까지 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바흐는 신이 자신에게 허락된 그 순간가지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바흐는 신 앞에서 겸손했다. 자신이 작곡하던 작품을 끝내고 난 뒤에는 오선지에 SDG란 약자를 적었는데 풀어쓰자면 ‘Soli Deo Gloria’로, 해석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에게서 잠시 빌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구조적인 완벽함 속에 인간적인 따스함과 신 앞에 선 겸손함이 존재한다. 바흐의 작품은 현재 재즈 연주가들이나 락커 등 클래식 이외 다른 장르의 뮤지션에게 가장 많이 편곡되어 다른 버전으로 연주되어 진다. 바흐의 곡은 어떻게 편곡을 하더라도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하며 실제로 원곡보다 편곡된 버전이 더 사랑받는 특이한 작곡가이다. 이유는 바흐의 음악은 악기가 지정되어 표현되기 보다는 성부자체로 표현되어 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자는 생각한다. 바흐의 음악은 신이 인간에게 들려주고픈 음악의 모양과 가장 닮아 있는 예술작품이었으며, 신이 부여한 능력을 타고난 권리가 아닌 의무이자 소명으로 생각하고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실천한 진정한 음악의 장인이었다./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

2019-04-22

톨레랑스가 실종된 사회

강희룡서예가프랑스어로 톨레랑스는 타인의 사상이나 행동에 대한 ‘관용’을 뜻한다. 여기에서 관용은 단순히 개인의 아량(덕)뿐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과 관련되며 종교, 정치, 국가라는 연관에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관용은 사회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며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하나의 ‘예(禮)’인 것이다. 여기서 도대체 예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논어’에 기록된 인상 깊은 대목은 학이(學而)편의 공자가 제자인 자공과 나눈 대화이다. 자공의 생각은 대개 사람들이 가난하고 심지가 굳지 못하면 부자나 권력 앞에서 아부하고, 부자이거나 권력을 쥔 사람은 교만해지기 쉬운데, 아부하지 않고 교만을 부리지 않는다면 강직하고 겸손한 가치관을 가져 예를 갖춘 인격체이다. 라고 생각하며 물었는데, 공자의 답은 한발 더 나아가 강직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좋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살고, 부유하면서도 겸손한 데서 멈추지 않고 예를 좋아해야 한다고 답했다. 공자의 안빈낙도(安貧樂道)와 호례(好禮)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가난 속에 도를 즐길 줄 안다는 것은 이미 부자와 차이를 알고,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여기에는 상대와 나의 차별심이 사라지게 되므로 자연히 안빈낙도할 수 있다. 부자나 권력자 역시 자신의 부나 권력에 대해서 크게 의식하지 않으면 상대와 나 사이의 차이가 사라진다. 따라서 상대의 가난은 물질적 가난일 뿐이고, 상대와 나는 인격적인 대면만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가난한 자에게는 낙도(樂道)를 요구하였고, 부자나 권력자에게는 예를 요구하였으니 부자나 권력자가 예를 통해 상대와 자기의 동등함을 인정하는 태도라고 보겠다. 따라서 부자나 권력자가 먼저 시작해야 한다. 군주와 신하 관계에는 신분적인 차이가 있지만 군주는 신분적 차이만 인정할 뿐 신하를 인간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이 먼저이며, 장유(長幼) 사이도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상대에 대해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은 상대의 진면모나 진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심리적 태도에서 출발한다. 형식적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형식 이전에 실질적인 이유로 존재하는 것이다. 예에는 본디 톨레랑스적인 사고가 전제돼 있다. 톨레랑스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에서 출발해 다른 상대를 포용한다는 뜻이니 우리는 서구를 근대 이전에 양이(洋夷·서양오랑캐)라고 불렀지만 그들 내부에는 이미 예에 버금가는 톨레랑스가 있었던 것이다.지금의 우리의 정치집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중에는 상호 예의만 지켜졌다면 충돌을 피해 갔을 법한 일들이 많다. 생각이 서로 같지 않다고 반대 방향으로만 치닫는 정치사회적 구조와 진영 논리의 갈등 속에 상대를 향해 쏟아지는 막말이 그렇다. 여야 할 것 없이 모두가 집단이나 개인의 이익만 존재하고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는 풍조에서 나온 발상들이다. 아무리 정치가 말로 하는 전쟁이라 하지만 국민들의 수준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서야 이런 언어폭력들이 마구 쏟아질 수 있겠는가. 세월호 같은 슬픈 역사를 정치에 이용해 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이들도 큰 문제다. 사회적 갈등을 치유해야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갈등을 조장하고 정치의 품격을 추락시켜 국민들의 정치혐오증을 끝없이 증폭시키는 요인을 만들고 있다. 지구촌에서 소통으로 존재하고 있는 무수한 언어 중에서 한국어가 가장 우수하다는 증거는 저속어와 욕설 그리고 막말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겠다. 언론 또한 이러한 막말을 기사의 무슨 호재처럼 앞 다퉈 보도하니 갈등유발의 한몫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의 언론은 이제 단순히 보도뿐만 아니라 계몽과 교육적 기능도 함께 해야 한다. 한 국가로서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상대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이며 국가에 대한 바람보다 내가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2019-04-22

흔들리는 유로존과 원화가치 하락

김학주한동대 교수200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생산시설 및 연구개발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그래야 고용이 늘고 소비가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실패를 시인해야 하는 순간이다. 여러 유인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투자에 의욕을 잃었던 이유는 먼저 이미 시들고 있는 구경제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한편 신경제도 미래 기술의 방향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단계이므로 서둘러 투자하기가 부담스럽다. 또 신경제의 특징은 진입장벽이 낮다는 것이다. 독과점이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오히려 경쟁이 줄고 겹치는 조직이 없어 고용에 부정적이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그 기술의 미완성에서 오는 부작용을 해소할수록 사람들의 직업을 본격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 기계가 완전해질수록 사람들은 덜 필요해질 것이고, 출산의욕도 떨어질 것이다. 인간은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인공지능을 도입했지만 그것이 인구 축소를 고착화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소비를 줄이며 경기 위축을 가속화시킬 수도 있다. 결국 신경제는 편의성은 주지만 성장을 방해하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아무튼 세계경제가 성장이 얼만큼 둔화될 수 있는지 손을 놓고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국면이다. 단, 중국은 이런 역경을 계획경제에서 민간경제, 그리고 시장경제로 전환하며 돌파하려 하고 있다. 특히 트럼프의 저돌적인 개방공세가 중국 공산당을 변화시키고 있다. 미국이 중국 물건을 사주지 않는다면 중국은 스스로 소비를 일으켜야 하는데 계획경제로는 역부족임을 실감하고 있다. 이것이 트럼프가 한 일 가운데 유일하게 잘한 일이다. 어쩌면 트럼프가 본의 아니게 중국을 변화시킨 인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만일 중국이 시장경제에서 성과를 내면 글로벌 유동성이 중국으로 들어가 투자될 수 있다. 최근 증시 반등의 이유를 미국과 중국의 타협 가능성에서 찾고 있는데 오히려 중국의 변화 가능성에서 찾는 이들도 많다.지금의 문제는 전통경제를 고수하고 있는 늙은 유럽에 있다. 최근 글로벌 헤지펀드들은 유로화를 집중매도하고 있다. 유럽이 흔들리는 이유는 먼저 독일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유로화라는 단일통화가 독일에게는 통화가치 절하 효과를 주기 때문에 유럽지역에서 드물게 제조시설이 발달한 독일은 수출경쟁력을 활용하여 돈을 벌어 와 그 이득을 유로존 회원국들에게 나눠주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글로벌 경제가 저성장으로 돌입하여 제조설비를 갖고 있는 독일이 타격을 받고 있다. 만일 미국의 자동차 관세가 구체화되면 독일은 휘청거릴 수 밖에 없다. 독일에서 얻을 것이 줄어든다면 영국, 그리스, 이탈리아처럼 유로존을 이탈하려는 국가들이 증가할 것이다. 화폐의 가치는 사용주체가 줄어들면 떨어지게 되어 있다. 가상화폐의 가치가 사용자의 증가에 따라 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글로벌 경기침체 우려가 있었던 2016년 하반기에도 유로화, 위안화가 약세를 보였는데 지금은 글로벌 저성장의 희생양이 신성장의 활력이 있는 중국보다는 유로존이다. 그런데 문제는 달러의 평가 잣대가 유로화라는 것이다. 즉 유로 약세가 달러 강세를 유발하고 있다.향후 가치가 떨어질 유로를 빌려 달러 자산을 사는 유로 캐리(euro carry) 전략이 유행이다. 과거 금리가 낮은 엔화를 빌려 자금을 조달하는 엔 케리 트레이드(yen carry trade)를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대상이 유로화로 바뀌어 가는 모습이다.유로화 약세에 따른 달러 강세 영향으로 인해 원화도 간접적으로 약세 압력을 받고 있다. 만일 우리나라 수출업체가 이러한 원화약세를 활용해 달러를 더 벌어 온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아쉽게 한국도 독일과 비슷한 입장이다. 제조설비가 점점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따라서 한국 투자자들은 재산의 일정부분을 달러나 위안화를 비롯한 해외자산으로 다각화할 필요가 있다.

2019-04-22

삶의 가지치기를 위한 지혜를 얻으려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바쁘고 분주한 삶에 서서히 지쳐가는 봄날입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돌보아야 할 사람도 많습니다. 참여해야 할 모임도 많고 내 봉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단체도 많습니다. 읽어야 할 책들은 산더미 같고 써야할 글들은 끝도 없습니다. 누구나 이런 압박에 시달리는 것이 우리 삶의 현 주소가 아닐까요?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 이후 삶이 너무도 바빠졌을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에겐 매일 한 시간씩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바빠져서 요즘은 세 시간씩 기도해도 부족하다.” E.M 바운즈의 책에서 이 글을 처음 보았을 때 저는 잘못 읽은 줄 알고 눈을 잠시 깜빡인 후 다시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세 시간 기도하다가 바빠서 한 시간 기도한다는 것을 잘못 쓰거나 번역한 것으로 착각했던 거죠. 곰곰이 생각하다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우리 삶이 바쁜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진다는 뜻이고, 나의 개입과 판단, 에너지를 써야 일이 이뤄지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이겠지요.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내가 지금 당장 죽으면 세상도 바로 멈추는 걸까요? 물론 아닙니다. 세상은 내가 사라져도 아주 잘 굴러갈 겁니다. 삶이 바쁜 이유는 우리 착각 때문입니다. “나 없이는 안돼.” 라는 의도적 착각에 스스로가 빠져 있는 거라 할 수 있겠지요. 내 존재의 중요성을 입증하고 거기서 안정감과 인정을 얻으려는 욕구를 해소하려는 본능입니다.마르틴 루터는 생의 본질과 속성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었습니다. 기도 시간을 세 배 늘림으로써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과업 중 무엇이 중요한 지,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걸러내는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겁니다. 진정 중요한 일에만 삶의 우선 순위를 둘 수 있는 분별력 함양에 시간을 쏟은 거지요.삶이 바쁠수록 더 깊은 자발적 고독으로 나를 분리시켜야 합니다. 그곳에서 자신과의 내밀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삶의 핵심 가치를 세우고 그 가치에 따른 절제된 행동으로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나보다 훨씬 강한 에너지와 전략으로 나의 시간을 뺏으려 달려드는 온갖 힘에 저항할 능력을 잃게 마련입니다.저와 그대 앞에 놓인 남은 2019년, 그리고 머지않아 다가올 2020년.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며 삶의 목적지를 향해 뚜벅뚜벅 걷는 시간이시기를, 그리하여 생애 최고의 시간들을 보내실 그대에게 박수를 드립니다./조신영 인문학365 대표

2019-04-22

읽고 떠들 수 있는 권리를 허(許)하라

신희선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우리는 계급을 미리 정하고 조건반사적 습성을 훈련시킨다. 우리는 사회화된 아기를 내놓는다. 아기들은 책과 꽃에 대한 본능적 증오심을 가지고 성장할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가 쓴‘멋진 신세계’를 읽으며 주목한 구절이다. ‘문명사회’는 사람들을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계급으로 구분한다. 아기 때부터 책과 자연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도록 책과 꽃에 다가갈 때마다 요란한 소리와 전류쇼크를 준다. ‘하수구 청소부’로 배치되는 엡실론 계급은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존재로 양육된다.이러한 문명사회의 “도서관에는 오직 참고서류밖에 없다.” 셰익스피어가 쓴 책은 ‘미개한 땅의 이야기’로 치부되어 읽지 않는다. 학생들은 기분 전환이 필요하면 ‘촉감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고 고통을 느낄 경우 ‘소마’를 먹고 행복해진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를 모르는 세상, 쾌락적인 감각에만 의존하는 세계는 결코 행복한 사회가 아닐 것이다. 2019년 ‘책의 날’을 앞두고 문득 드는 생각, 우리는 어떤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가?4월 23일은 ‘세계 책의 날’이다. 독서 출판을 증진하고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해 1995년 유네스코가 제정하였다. 책을 구매하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던 ‘세인트 조지’ 축일과 세계적인 대문호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가 사망한 날에 ‘책’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만든 날이다. 에스파냐에서는 책과 장미의 축제가 펼쳐지고, 세계 곳곳에서 책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우리도 곳곳에서 책의 날을 기념하지만, 현실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에 밀리고 있다. 한국인의 독서량은 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다. ‘책의 해’였던 작년만 보더라도, 일본의 평균 독서량이 40권이었던 것에 비해 우리는 8.3권을 읽었다. 1천만관객 영화가 나오고, 게임산업 매출이 세계 4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출판계는 위기를 호소한다. 미래 세대인 청소년들이 책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고등학생 7명 중의 1명은 3년 동안 단 한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학생들도 대부분 생기부에 독서활동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입시모드로 전환된 사회에서 학생들의 하루는 영어와 수학학원 공부만으로도 빡빡하다. 학업이 우선인 환경에서 독서는 뒷전이다. 책을 읽을 시간도 없고 관심도 없어 독서를 포기하는 ‘독포자’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대학생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매일 토익 책을 펼치고 인적성검사 기출문제를 푼다. 입시부담은 취업부담으로 이어져 독서는 나중 일이다. 이런 점에서 동원육영재단이 독서를 통한 인성교육을 강조하며, 대학생들이 폭넓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의 의미가 크다. 멘토 교수로서 참여하고 있는 ‘숙명라이프 아카데미’의 경우 올해 ‘동료수업’을 마련하였다.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발표와 독서토론을 하며 수업을 이끌어가도록 하였다.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함께 책을 읽으며 서로 질문하고 소통한다. 혼자서 읽는 독서에서 사회적 독서로 의미를 확장하는 것이다.최근 부산시청 로비에 ‘꿈+도서관’이 마련된다는 소식이 더 반가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과 자연스레 만날 수 있는 일상의 공간이 늘어나야 하고,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 ‘시민이 행복한 책읽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부산시가 시민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로비 공간을 도서관으로 탈바꿈하겠다고 한 것은 큰 변화의 시작이다. 행정업무만 보고 총총 돌아가던 발걸음을 멈추어 1층 로비에 위치한 도서관을 잠시 둘러보다가, 누군가는 책 장을 펼쳐보기도 하고 책을 읽는 기적같은 효과를 낳을 것이다. 진정으로 ‘멋진’ 신세계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책의 날’에 만방에 외친다. 자유롭게 책을 읽고 떠들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 그런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라.

2019-04-22

위기의 ESS

ESS(Energy Storage System)는 태양광·풍력발전으로 생산된 전기나 값싼 심야 전기를 배터리처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하는 장치다. 이에 쓰이는 장치를 축압기라고 하고, 더 넓은 범위의 시스템 전체를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라고 부른다.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건전지나 전자제품에 사용하는 소형 배터리도 전기에너지를 다른 에너지 형태로 변환하여 저장할 수 있지만 이런 소규모 전력저장장치를 ESS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수백kWh 이상의 전력을 저장하는 단독 시스템을 ESS라고 한다.에너지 저장방식에 따라 크게 물리적 에너지저장과 화학적 에너지저장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물리적 에너지저장으로는 양수발전과 압축공기저장, 플라이휠 등을 들 수 있으며, 화학적 에너지저장으로는 리튬이온배터리, 납축전지, NaS전지 등이 있다. 배터리 형식의 ESS를 BESS(Battery Energy Storage System)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ESS라고 하면 BESS를 말한다.문제는 우리나라에 설치된 ESS에 원인불명의 화재가 잦아 가동이 중지되는 등 업계가 위기에 빠져있다는 점이다. ESS 화재는 지난 2017년 8월 전북 고창변전소에서 처음 발생한 이래 올 1월까지 전국에서 21건이 잇따랐다. 이 가운데 15건(71%)은 태양광·풍력 발전에 연계된 ESS에서 일어났다. 정부는 지난해 12월부터 ESS 가동 중단을 권고했고, 지난 1월부터 ‘민관 합동 ESS 화재 사고 원인 조사위원회’를 꾸려 조사하고 있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단 한 곳에서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산업통상자원부가 자유한국당 정유섭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4월 12일 기준으로 전국에 설치된 ESS 1490개 중 747개가 가동 중단 상태다. 화재가 잇따르자 전국 ESS의 절반은 가동중단 조치됐고, ESS 신설 역시 중단됐다. 정확한 사고 원인 규명이 지연되면서 신규 ESS 설치 계약 물량도 끊겨 ESS 산업 생태계도 무너지고 있다.신재생에너지 시대를 맞아 관련 기술의 선제적 개발과 적용 노력이 아쉬운 때다.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4-22

노트르담 화재 이후

지난 15일 불이 나 첨탑 부분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 대한 뒷얘기가 무성하다. 가톨릭 국가 프랑스의 정신적 안식처이자 대표적 상징물로서 노트르담 대성당은 화재 진압 후에도 충분한 화젯거리들을 쏟아내고 있다. 대성당의 오랜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 등이 후일담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가장 관심이 많은 복원과 관련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5년 내 재건”의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본래 모습으로의 복원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고 한다. 본래의 재료인 참나무를 사용해야 한다면 40년은 족히 걸릴 것이란 전문가의 견해가 나와 복원과 관련한 논란은 쉽게 숙지지 않을 전망이다.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 혁명 이전 중요한 정치행사와 왕실의 의전이 대개 이곳에서 진행됐다. 영국과 프랑스 왕가의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1804년 교황 비오 7세가 참석한 가운데 나폴레옹의 대관식이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건물의 역사성과 뛰어난 명성에 걸맞게 대성당 복원을 돕겠다는 성금이 줄을 잇고 있다. 화재 발생 하루 만에 8억 유로(약 1조 원)가 모였으니 명불허전(名不虛傳)의 건물임을 실감케 한다. 세계 최대 명품그룹 프랑스 루이비통 모에헤네시(LVMH) 창업자가 성당 재건을 위해 2억 유로(약 2천560억 원)를 기부하겠다고 전해 왔다. 미국의 애플도 금액은 밝히지 않았으나 기부 의사를 밝혔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에 긴박하게 대응하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모습이 긍정적 평가를 얻어 지지율이 3%나 상승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지지율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대성당의 위엄에 감탄사를 보내야 할 판이다.이곳 대성당을 찾아오는 한해의 관광객 수가 1천400만 명에 달한다. 한국의 많은 관광객도 대성당 앞 광장에 별모양으로 새겨진 포앵제로(도로원표)에서 사진 찍은 경험이 있다. 이곳을 밟으면 파리를 다시 오게 된다는 속설을 믿고서 말이다. 대성당의 화마는 아픔과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과거를 추억케 한 사건이기도 했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4-21

총선 ‘블랙홀’

안재휘 논설위원지난해 말 퇴임을 앞두고 국회예결위에 출석한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김동연은 “현재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야당 의원의 지적에 대해 “경제의 위기라기보다 정치적 의사결정의 위기”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경제마저 정치의 흥정대상이 돼버린 ‘경제의 정치화’가 끼치는 해악에 대한 장관의 비명으로 들렸다. 사실 이 나라는 경제뿐 아니라 사회, 문화 등 사람 사는 모든 일이 정치적 결정에 맡겨져 있다.‘좌파 독재’라는 용어가 정치권에 등장하는 일이 잦아졌다. 대통령이 이미선 헌법재판관을 기어이 임명하자 자유한국당이 길거리로 나섰다.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집회에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문재인 정권은 한결같이 좌파 독재의 길을 걸었다”며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좌파천국을 만들어왔다”고 공격했다.황 대표는 이어 “힘도 없는 지난 정권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잡아넣고, 아무리 큰 병에 시달려도 끝끝내 감옥에 가둬놓고 있다”며 “‘친문(친문재인) 무죄, 반문(반문재인) 유죄’가 이 정권이 말하는 민주주의냐”고 성토했다. 황 대표는 나아가 “개성공단에는 목을 매면서 우리 공단을 살린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면서 “대한민국이 ‘베네수엘라행 특급열차’를 타고 망하는 길로 달려가고 있다”고 주장했다.청와대와 여당은 내년 4월 총선 승리를 목표로 일찌감치 모종의 프로그램을 가동하기 시작한 모습이다. 윤영찬 전 국민소통수석을 필두로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권혁기 전 춘추관장, 한병도 전 정무수석,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 송인배 전 정무비서관 등의 총선 출마 선언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김부겸 전 행안부 장관, 김영춘 전 해수부 장관, 도종환 전 문광부 장관 등도 당에 복귀했고, 대통령 복심으로 통하는 양정철은 차기 민주연구원장으로 내정됐다.잇단 인사 검증 실패로 구설수에 오른 조국 민정수석의 부산 출마 여부를 놓고 입방아가 시끄럽다. 이낙연 국무총리 차출설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출격 이야기도 나온다. 그만큼 민심이반에 대한 문재인 정권의 위기감이 크다는 의미도 되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의 심중은 마뜩지 못하다. 도대체 도탄에 빠진 민생, 지독한 불경기의 늪에서 죽어가는 영세상인들의 생사는 어쩌라고 권력 놀음, 총선 체스판만 벌이는가 싶은 것이다.한국 경제의 허리인 40대 취업자 수는 끝없는 추락 중이다. 올 3월 40대 취업자는 1년 전보다 16만8천 명 줄었다. 지난 2월 12만8천 명 감소한 것보다 더 많다. 30대 취업자도 8만2천 명으로 감소했다. 체감실업률을 보면 정부의 재정 투입을 통한 일자리 창출 정책은 실패한 게 분명하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6%에서 2.5%로 하향 조정했다.‘경제’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감각은 마비 상태에 빠졌다. ‘경제실패’ 비판을 귀 기울여 듣는 위정자들조차 이젠 없다. 이미 영세서민들의 연옥이 돼버린 뒷골목의 불황을 개선하기 위해 굿판이든 뭐든 뭔가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민성(民聲)을 제대로 알아듣는 모습도 없다. 일 안 하고 놀면서 뒷주머니 열어놓고 있으면 ‘복지’의 이름으로 먹고살게 해주는 나라가 돼가고 있다는 항간의 비아냥이 우스개로 들리지 않는다.민주노총 등 과격 좌파 운동권의 위세에 무력화되는 공권력을 상징으로 ‘정치적 의사결정의 위기’가 한껏 깊어지고 있는 나라에 희망이 남아날 개연성은 없다. 이런 판에 1년 가까이 남은 총선에서의 240석 대승을 장담하며 팔 걷어붙이고 나선 집권당의 행태는 온당한 것일까. 이렇게 총선 블랙홀, 판도라의 상자부터 무책임하게 열어젖혀도 괜찮은 것일까. 머지않아 펼쳐질 정치권의 포퓰리즘 선심 잔치가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2019-04-21

3차 북미 회담이 성사되려면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지난달 3·27 하노이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기대했던 북미 회담은 노딜(no deal)로 끝나 버린 것이다. 지난해 6·12 싱가포르 북미 1차 회담은 그런대로 공동 선언이라도 발표되었지만 하노이 회담에서는 아무런 합의문 없이 끝나 버렸다. 하노이 회담에서 미국은 여전히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FFVD)를 우선 요구했으며, 북한은 미국에 대해 대북제재 해제를 우선 요구한 결과이다.미국은 북 핵의 완전 폐기와 제재해제라는 빅딜을 원했고, 북한은 핵 폐기만큼의 스몰딜을 원할 만큼 회담의 목표, 내용, 방식이 사뭇 달랐다. 그러나 북미는 여전히 회담의 불씨를 살려가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3차 북미 회담은 과연 성사될 것인가. 현재로서는 정확한 예측은 어렵지만 양측의 조건만 조율되면 연내 개최도 가능할 것이다. 당사국인 미국과 북한의 현재의 입장과 성사의 요건을 점검해보기로 한다.미국은 하노이 회담 결렬 후 3차 회담에 관해 ‘느긋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사실 외교는 내치(內治)의 연장이라 답답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연방예산의 셧다운(Shut Down)문제도 해결되고, 로버트 뮬러 특검 위기도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협상의 달인 트럼프는 북한과의 핵 협상에 조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한편 그는 김정은을 ‘좋은 친구’라고 칭찬하며 대화의 의지는 계속 보이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이러한 정치 행보만으로 대북 핵협상은 쉽게 풀 수 없다. 그의 전술은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은 막았지만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과의 빅딜에 앞서 북미 수교 등 체제의 안전 보장책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북한 당국은 이란의 후세인이나 리비아의 카다피의 비극적 운명을 보았기 때문이다.북한 역시 미국에 대하여 종래의 벼랑 끝 협상이 통하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 북한은 여섯 차례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를 통해 북한을 협상의 테이블로 유도하는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모호한 셀프 핵 폐기와 대북제재 해제라는 카드는 통할 리 없다. 그러한데도 북한은 여전히 북미 정상 간의 톱다운 식의 협상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북한은 협상의 파트너인 미 국무장관 폼페이오의 교체까지 요구하고 있다. 그가 김정은을 압제자(tyrant)로 모독한 결과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러한 ‘기 싸움 식’ 전술만으로 미국을 협상으로 유도할 수 없다. 미국은 대북 제재로 경제적 타격을 받는 북한에 대해 핵 폐기의 실질적 징후를 보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북한도 이제 ‘영변+α’라는 핵 폐기의 실천적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중일 정상회담에 이어 오는 25일 블라디보스톡 북러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 정상외교 보다는 통큰 결단을 해야 할 시점이다.여기에 우리 정부의 중재자적 외교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는 2차 판문점 정상 회담을 통해 북미 싱가포르 회담을 추동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로서 한국의 중재자 역할이 샌드위치의 신세를 탈피하지 못하고 제한받고 있다. 우리 정부가 북한으로부터는 ‘오지랖 넓은 중재자’로 비판을 받고, 미국으로부터는 유엔의 대북제재에 적극 공조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이번 한미 워싱턴 회담도 내용상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 버렸다. 우리가 미국과의 동맹외교와 중재외교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이러한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조건 없는 4차 정상회담을 제안하였다. 트럼프는 문재인 대통령 편에 김정은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했다고 밝혀 남북 정상 회담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미국을 설득하면서도 북한에 대해서도 북미 회담을 촉구해야할 입장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는 길을 가는 것처럼 우리의 중재자의 외교는 길은 멀고 험하지만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

2019-04-21

꽃심과 청보리

김도형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이사꽃심이란 단어를 들어보셨는지?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이 단어는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다. 유사한 단어인 땅심은 국어사전에 올라 있다. 땅심은 ‘땅이 식물을 길러내는 힘’이란 뜻이다. 땅심에서 꽃심의 뜻을 유추해 본다면 ‘꽃의 힘’이란 뜻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꽃심은 전주의 정신이자 브랜드이다. “부드럽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새 생명을 틔워내는 강인한 힘이 있는 꽃의 힘, 꽃의 마음”이 전주의 정신을 상징한다. 구체적으로 “전주사람들은 대동·풍류·올곧음·창신의 특질이 있으며, 꽃심은 이 네 가지를 다 아우르고 있다”고 한다. 전주는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꽃심을 다양하게 응용해 도시 홍보에 활용하고 있다.꽃심은 어디에서 나온 단어일까? 대하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전주를 꽃심 지닌 땅”이라 한 데서 유래했다. 전주 출신의 최명희는 1980년 4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만 17년간 ‘혼불’ 집필에만 전념했으며, 1998년 12월 향년 51세로 숨을 거뒀다. 1930년대 말, 전라도의 한 유서 깊은 문중에서 무너지는 종가를 지키며 몸을 일으키는 종부 3대와 남루한 상민들의 애환을 다룬 ‘혼불’의 주제가 꽃심이다. 한국 소설의 한 장관을 이루고 있는‘혼불’과 최명희는 전주의 자랑이자 긍지다. ‘혼불’ 완독 모임, 꽃심전주 전국독후감대회 등이 꾸준히 열리고 있다. 지난 2006년 4월 개관한 전주의 최명희문학관에 가면 최명희의 치열했던 작가정신과 문학적 발자취, 전주 사람들의 최명희에 대한 존경심을 느낄 수 있다.꽃심은 지역에 기반한 예술정신을 도시 브랜드로 활용한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포항은 이 같은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주제나 소재가 없을까? 바야흐로 청보리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지금 구만리에 가면 청보리가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한때는 10만여 평의 광활한 보리밭이 펼쳐져 있던 곳이다. 지금은 경작 면적이 많이 줄었지만, 구만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쪽빛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청보리밭이다. 그 원색의 향연은 구만리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황홀한 풍경화이다.청보리는 푸른 생명의 원천이다. 청보리를 떠올리는 순간, 푸르디푸른 생명의 기운이 마음속 깊이 스며든다. 구룡포사람들조차 식은밥 먹고는 가지 마라는 바람의 땅 구만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푸른 잎을 피워내는 청보리는 거센 자연의 바람과 역사의 바람을 견디며 살아 온 이 지역사람들의 영혼이 오롯이 배여 있다.보리 하면 떠오르는 문인, 한흑구가 있다. 포항에 문학과 예술의 씨를 뿌린 이가 한흑구다. 본명이 세광(世光)이고, 평양 출생인 그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노 노스파크대학에서 영문학을, 템플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했다. 일제에 항거하다 1939년 흥사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고, 단 한 편의 친일작품이 없다. 미국문학 번역에 크게 기여했으며, 한국 수필문학의 정립도 한흑구 없이는 얘기할 수 없다. 특히 그가 남긴 ‘보리’는 한국 수필의 백미다.“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한흑구는 미군정 통역관으로 있다가 첫 수필집 ‘동해산문’(1971) 서문에 밝힌 것처럼 “항상 푸르고 맑고, 볼륨이 넓고, 거센 바닷가에서 한가히 살고자” 포항에 정착했다. 그의 삶과 문학적 여정은 청보리의 빛깔 그 자체이다. 한흑구는 포항의 자랑이자 긍지가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 한흑구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청보리를 포항의 정신이자 브랜드로 활용해보는 방안은 없을까? 미증유의 지진과 여러 어려움이 겹쳐 있는 시기, 구만리 봄바람에 푸르게 일렁이는 청보리밭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2019-04-21

미친 듯 글을 써서 세상을 뒤집은 이 남자의 삶

“넘쳐 흐를 듯하고 터질 듯한 생명, 한 민족 전체의 무게와 야성이 있다. 목소리를 높일 때는 언어 안에 있는 오르간 전체가 울린다. 모든 말이 투박하게 소금을 쳐 노릇노릇 갓 구워낸 농가의 빵처럼 맛있다. 불을 토해내는 말은 마치 강력한 뇌우처럼 거칠고 난폭하게 독일 땅에 휘몰아친다.” 16세기 초 독일을 뒤흔들고 전 세계를 글로 뒤집은 마르틴 루터 이야기입니다.1515년, 교황청은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면죄부 판매라는 아이디어를 냅니다. 권력을 얻으려 사채업자에게 거액의 빚을 진 할버슈타트에게 대주교 자리를 내어 주고 8년 동안 면죄부 영업권을 선물로 하사합니다.“교황청이 낡아 성 베드로의 유골이 노숙할 지경에 이르렀다. 조상들이 연옥의 불길에서 고통받으니 후손들이 면죄부를 사서 조상들을 고통에서 건져주지 않으면 대대로 고난을 받을 것이다. 면죄부의 효력은 성모 마리아를 겁탈해도 깨끗이 용서받을 수 있을 정도로 효력이 있다. 돈 궤에 쨍그렁 면죄부 대금이 입금되는 순간, 연옥에서 고통받는 영혼은 천국으로 간다.” 이런 강렬한 홍보 문구는 민중들에게 먹혀듭니다.마르틴 루터는 이런 현실에 분노하지요. 상황의 부당함에 대해 글로 전투를 벌입니다. 모두 비웃음을 사고 말지요. 교황청은 루터를 이단으로 몰고 갑니다. 심지어 루터를 살해해도 아무런 죄를 묻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교시를 하달합니다.루터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은밀히 잠적한 상태로 엄청난 양의 글을 쓰며 저항합니다. 1523년 한 해 동안 독일 전체에서 발간된 출판물 총 900여편 중 346편이 루터가 쓴 글입니다. 한 국가에서 발행한 출판물 1/3이 넘는 분량을 혼자 써낸겁니다. 살아있는 동안 루터 한 사람이 발표한 글은 독일 모든 가톨릭 저자들이 발표한 글을 다 합친 것보다 다섯 배가 많은 분량이라고 하지요. 독일 공영TV인 ZDF가 2003년 11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독일인 100명을 선정합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10위, 구텐베르크 8위, 괴테 7위, 바흐 6위, 칼 마르크스 3위. 마르틴 루터가 2위를 차지하지요.썩어지고 부패한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돌직구를 날린 마르틴 루터의 정신이 그리운 새벽입니다. 오늘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부지런히 사색하며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기르고 있을 그대를 응원합니다. 그대 시원한 글 한 줄이 험한 세상에 누군가의 마음 속 씨앗으로 심겨지는 내일을 위해 기도합니다./조신영 인문학365 대표

2019-04-21

월성 에밀레종소리와 대왕암 피리소리 더듬으며 그 길을 거닐다

반짝이는 것들이 모두 보물은 아니다. 그러나 보물, 진정 드물고 귀한 가치를 지닌 보배로운 것은 기어이 반짝이게 마련이다. 세월의 먼지를 들쓰고 땅속 깊이 묻혀도 훼손되지 않는다. 훼손될 수 없다.(신문)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삼국유사’ 기이 편에는 신라의 보물을 보관한 월성의 보물창고가 나온다. 이름 하여 천존고, 하늘에서 내린 신물(神物)을 보관하는 곳이다. 백률사 조에는 신문왕이 신적을 얻어 현금(玄琴)과 함께 내고(內庫)에 간직해두었는데, 효소왕 때 부례랑이 도적들에게 붙잡혀가자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덮으면서 창고 안에 있던 거문고와 피리 두 보물이 없어졌다고 했다.일단 천존고와 내고는 월성의 보물창고로 같은 곳을 지칭하는 듯하다. 부례랑 혹은 실례랑이라 불린 국선은 부모가 백률사에서 기도를 바친 덕분에 보물과 함께 돌아와 재상에 해당하는 대각간이 된다. 만파식적은 다시금 기이한 보물로 추앙되어 만만파파식적이라는 이름을 얻는다(693).이 피리가 백 년 조금 못 미처 원성왕 때(786) 다시 등장한다. 아버지 김효양에게서 만파식적을 전해 받은 원성왕이 보물을 빌려달라고 조르는 일본 왕의 요청을 물리치고 만파식적을 내황전(內黃殿)에 보관한다. 내황전이 월성에 있던 천존고와 내고와 같은 곳인지 새로운 보물창고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다가 김효양이 대대로 만파식적을 물려받아 간직하고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김부식은 ‘삼국사기’ 중에서도 음악 편에 ‘만파식 설화에 대한 고기 기록’을 썼다.‘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신문왕 때 동해 가운데 홀연히 한 작은 산이 나타났는데, 형상이 거북 머리와 같았다. 그 위에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갈라져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베어다가 적(笛)을 만들어, 이름을 만파식이라고 하였다” 한다. 비록 이런 말이 있으나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유학자의 붓은 냉정하다.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단다. 냉소로 입아귀를 비트는 김부식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어느 편도 쉽게 들고 싶지 않다. 과연 역사는 이성과 감성, 냉정과 열정, 사실과 신비가 만나는 지점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첫 번째는 황룡사지, 그 다음은 감은사지! 꼭 가보세요!”개인적으로 황룡사지에 이어 ‘강추’하는 명소는 감은사지다. 그 두 개만 보고와도 경주 여행은 만족스러우리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천한다. 황룡사지와 감은사지에서 느끼는 감흥은 좀 다르다.황룡사지가 시(詩)적이라면 감은사지는 산문에 더 어울린다. 감은사지의 동과 서 삼층석탑 앞에 섰을 때,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흐의 그림 ‘오베르 교회’를 보았을 때와 같은 감흥을 느꼈다. 그 푸른 빛, 코발트블루의 어두운 하늘과 교회의 창은 어느 도록에서도 보지 못한 빛깔이었다. 초록과 노랑이 뒤엉켜 흐르는 듯한 길, 그것도 사진이나 인쇄물로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다. 미술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경비원이 등을 떠밀 때까지 나는 ‘오베르 교회’ 앞에서 떠날 수 없었다.세상이 좋아서 안방에 앉아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자기 발로 찾아가서도 도저히 볼 수 없는 것들까지 볼 수가 있다. 때로 영상이나 모사가 실제보다 세세하고 생생하다. 그러다보니 눈이 높아진 건지 본디 그다지 대단한 게 없었던 건지, 정작 실물 앞에 서면 시시하고 맹맹하기 십상이다.그런데 ‘오베르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그랬다. 숨이 턱 막히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오직 내 발로 다가가 그 앞에 서야 한다. 천년 전과 다를 바 없을 바람과 햇살을 맞으며 목을 꺾고 쳐다봐야 한다. 눈부시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도 이처럼 압도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균형감으로 아름다운 삼층탑 뒤로 감은사 터가 자리한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구들 구조를 가진 금당 앞에 털끝이 쭈뼛 선다. 이것은 사람의 집과 길이 아니다. 신성한 용(龍), 용이 된 왕을 위해 뚫어놓은 것이다.이번에 월성과 신라 역사를 공부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인물이 문무대왕과 신문왕이다. 그들은 격동기의 영웅이자 신라 중대(中代:29대 태종 무열왕∼36대 혜공왕·8대 127년간)의 핵심이다. 특히 문무왕의 일대기를 살폈을 때는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영웅에 대한 존숭이라기보다 인간에 대한 연민, 그리고 요즘 식으로 표현해 ‘리스펙트(respect)’의 심정이었다.문무왕 김법민은 김춘추와 김문희의 아들이다. 김춘추는 진골로 처음 왕위에 오른 태종무열왕이고 김문희는 김유신의 둘째 동생으로 언니에게서 ‘오줌 꿈’을 샀던 바로 그 여랑이다. 법민은 아버지와 외삼촌과 함께 통일전쟁에 뛰어든다. 그의 평생은 치열한 전투, 또 전투였다. 왕위에 오른 후로도 백제의 부흥운동을 진압하고,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으며, 고구려 무너진 뒤 대당독립전쟁을 벌여 한반도에 욕심을 드러내는 당나라를 물리쳤다.더군다나 문무왕의 시기에 중국을 지배한 것은 피의 여제, 측천무후였다. 황제가 되기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죽였던 측천무후의 공포정치에 대응해 문무왕은 두뇌게임으로 교묘한 외교전을 벌인다.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덫을 식별하기 위해 여우가, 늑대를 물리치기 위해 사자가” 된 것이다.그토록 고단한 일생을 보내고도 그는 마지막까지 ‘상징’으로 남기로 한다. 죽어서도 동해의 용으로 신라를 지키겠다며 수중 장례를 치른다. ‘대왕암’으로 불리는 문무왕릉의 구조는 감은사 법당의 구조와 유사할 것으로 짐작된다.1940년에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펴낸 ‘고려시보’에 실린 ‘경주기행의 일절’을 다시금 떠올린다.“경주에 가거든 문무왕의 위적을 찾으라. 구경거리의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보아라. 태종 무열왕의 위업과 김유신의 훈공이 크지 않음이 아니나 이것은 문헌에서도 우리가 가질 수 있지만,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경주의 위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경주에 가거들랑 모름지기 이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문무왕과 그의 유훈을 받잡은 신문왕의 발자취를 좇아 ‘왕의 길’을 걷기로 했다. 아버지를 동해에 수장한 아들은 절을 짓고 누대를 쌓는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행차해 아버지를 추모하는데, 용이 바친 흑옥대를 얻고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구한 것도 이 길에서였다. 2012년 경주시가 함월산 국립공원 내에 개설한 길의 정식 명칭은 ‘신문왕 호국행차길’이다. 모차골 입구에서 기림사까지 약 5.9㎞에 이르는 길인데, 문제는 자동차를 가지고 갈 경우 돌아오는 차편이 없어 고스란히 왕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은 수렛재까지 가보려고 나섰는데 초입에서 100m쯤 지난 후부터 여의치 않다. 지난 태풍의 후유인 듯 돌과 나무가 뒤엉켜 길을 지우고 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헤치고 걷자니 더욱 힘겹다. 모차(마차)골, 수렛재, 말구부리 등의 지명을 통해 신문왕이 수레를 타고 지났던 길임은 분명한데, 지금은 사람이라도 일렬로 지나야 한다. 산행을 포기하고 돌아서 기림사를 향했다. 반대편의 형편은 낫지 않을까 했던 건데 결과적으로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신문왕은 감은사에서 자고, 기림사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는다. 월성을 지키고 있던 태자(효소왕)가 말을 달려와서 신문왕이 가져온 흑옥대를 살펴보더니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한쪽을 떼어 시냇물에 던지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 그래서 그 못의 이름이 용연(龍淵)이다……기림사는 단청 없는 대적광전을 보물로 품은 아름다운 절이다. 기림사 쪽에서 반대로 호국행차길을 오르니 오래지 않아 용연이 나타난다. 포기하고 지나갔으면 후회할 뻔했다. 한겨울에도 시원한 물줄기를 쏟아내는 폭포와 맑은 연못, 그리고 묘하게 쪼개진 듯한 바윗돌이 신비롭다. 던져 넣은 허리띠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고 해도 순진한, 혹은 신심 깊은 사람들은 믿을 만하다.기실 이 길은 문무왕의 장례 행렬이 지난 길이었고, 신문왕이 부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갔던 길이었으며, 수백 년 동안 신라를 괴롭혀온 왜구의 침범 루트이기도 했다. 그러니 자주 행차해 걸어주고 정비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더하여 아버지의 분투를 가장 곁에서 지켜보았을 아들이, 왕관을 쓰기 전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고독을 제 것으로 곱씹으며 걸었을 길이기도 하다.감은사와 대왕암이 함께 보이는 원래의 이견대 자리는 아니지만, 아쉬운 대로 길가의 이견정에서 대왕암을 바라본다. 푸른 물결과 흰 포말 사이로 한 줄기 행여 피리소리가 들릴까 귀를 세운다.성낙주는 ‘에밀레종의 비밀(2008·푸른역사)’에서 황수영이 발표한 ‘신라종 양식과 만파식적’을 발전시켜 에밀레종의 만파식적 기원설을 주장한다. 또한 만파식적과 흑옥대 등 안정기에 돌연히 출현한 새로운 신기들을 정치적 수단으로 해석한다. 만파식적 설화 중 후일 효소왕이 되는 태자가 등장하는 ‘흑요대’ 부분은 후대의 가필로, 부례랑이 납치되고 천존고에 보관 중이던 만파식적과 현금이 사라진 것은 효소왕대의 정치 불안을 상징하는 것이다. 얻기에 어려우나 지키기는 더 어려운 이치가 그곳에도 있다.문무왕은 문(文)과 무(武)를 아우르는 이름으로, 길고 고단한 전쟁이 끝나고 마침내 평화의 시대가 펼쳐지길 기원하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김부식은 비하하듯 만파식적을 ‘삼국사기’의 ‘음악’편에 실었지만, 경계 없이 멀리 가는 만파식적의 피리소리는 음악을 통해 세상을 교화한다는 유교적 ‘예악’의 이데올로기와 닿아 있다. 에밀레종의 종소리는 ‘일승지음’, 부처님의 음성을 닮아 목숨들을 피안의 낙토로 실어 나르는 커다란 수레가 되길 기원하는 것과 연관된다.월성 안에서 에밀레종 소리를 듣고, 대왕암을 바라보며 피리소리를 더듬는다. 이름부터 멋진 천존고는 아쉽게도 월성 안이 아닌 불국사 가는 길에 출토 유물 보관 건물로 개관했지만, 보배로운 마음은 애초에 창고든 전시실이든 가둘 수 없는 것이다. 문제적 인간 김법민, 물결을 덮고 잠드신 문무대왕의 마음을 바람결에 가만히 헤아려본다.

2019-04-21

퓰리처상

2015년 대구에서도 퓰리처상 수상작 전시회가 열린 적이 있다.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이날 사진전을 구경한 많은 사람들은 ‘사진의 힘’을 현장에서 직접 느껴보는 이색 경험을 했다.퓰리처상 수상작은 작품마다 한편의 예술을 느낄 만큼의 높은 작품성이 있다. 그리고 역사의 순간과 특종의 순간을 고스란히 담음으로써 사진을 보는 재미가 예사롭지 않다.1973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베트남 전쟁 관련 사진으로 유명한 ‘소녀의 절규’가 있다. 당시 9살의 베트남 소녀가 네이팜탄의 폭탄 세례로 불이 붙은 옷을 벗어던져버리고 울부짖으며 달리는 모습을 AP통신기자가 카메라에 포착했다. 전 세계가 이 사진 한 장을 통해 베트남 전쟁의 비극상을 실감했다고 한다.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이 소녀는 전쟁의 아픔을 이겨내고 훗날 UN 명예대사로 전쟁 피해 아동구호 활동을 펼쳤다. 올해 독일 드레스덴 인권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으니 인생 반전을 일궈낸 셈이다.퓰리처상은 미국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특히 언론계서는 ‘기자들의 노벨상’이라 부른다. 1917년 헝거리 출신의 미국 저널리스트 퓰리처의 유산으로 만들어진 상이다. 언론분야 14개 부문과 문학, 드라마, 음악 등 7개 부문이 시상된다. 매년 4월 수상자를 발표하며 수상자에게는 1만 달러의 상금이 주어진다.이 상은 권위와 신뢰도가 높으나 미국신문사에 활동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져 미국 내 문제가 주로 다뤄지는 아쉬움은 있다. 시중에는 퓰리처상 사진을 모은 책이 발간되어 일반인도 퓰리처상 수상작을 손쉽게 접할 기회가 있다.올해 퓰리처상 사진부문에 한국인 사진기자가 포함돼 화제다. 로이터 통신의 사진기자로 일하고 있는 김경훈씨는 미국 국경지대에서 최루탄을 피해 달아나는 온두라스 모녀의 사진을 잡아 미국 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한국의 일간스포츠지 사진기자로 일하다 2002년부터 로이터 통신 도쿄지국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은 그에게 축하를 보낸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4-18

미리 본 총선판세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요즘 사람들이 몇몇만 모이면 내년 4월 총선판세를 두고 화제다. 얼마 전 자유한국당 TK지역 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내년 총선 판세가 어떨지에 대해 의견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 의원은 현재의 여당이 내년 총선에서 과반수 당선을 자신한다는 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함께 자리했던 대다수 기자들은 회의적이었다. 필자도 내년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당선이란 좋은 성적을 내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에 공감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우선 문재인 정부 들어 기업들의 경영환경이 너무 어려워져 경제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노동정책에 전향적이고, 민주노총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다. 그러다보니 많은 기업들이 노조의 강경한 노동운동 및 과도한 임금 및 사원복지정책에 떠밀려 제대로 항변조차 못한 채 경쟁력을 잃어가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기업가들이 열심히 기업을 키워야겠다는 열정을 잃어버리고 있고, 고용환경이 열악한 국내가 아니라 해외로 공장을 이전할 궁리에 골몰하고 있는 상황이다.또 현 정부가 일자리정부를 표방하면서 기업들을 압박해 일자리를 늘릴 것을 종용하고, 공무원을 늘리는 등 일자리 증가 정책을 펴나가고 있지만 그 실적이 너무 미미하고, 청년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현실이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 고용통계에서도 일자리는 늘었지만 고용의 질은 악화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 36시간 이상 일하는 취업자는 33만8천명 감소한 반면 36시간 미만 취업자는 62만7천명 늘어난 것은 일자리쪼개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었다. 그 다음으로 전문직에 대한 증세로 전문직 종사자들의 현 정부에 대한 반감도 매우 커져있다는 데 있다. 이같은 정황들은 문재인 정부의 핵심브레인들을 많이 배출한 경제정의실천연합이 문재인 정부 출범 2년을 맞아 전문가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에서 잘 나타났다. 경실련이 경제·정치·행정·법률 등 전문가 310명을 대상으로 문재인정부의 정책에 대해 조사한 결과 10점 만점에 5.1점의 낮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사실만 봐도 내년 총선 결과가 여당에 그리 유리할 게 없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해보인다. 구체적으로 전문가들이 가장 낮게 평가한 정책은 인사정책으로 3.9점이었고, 그 다음이 일자리 정책(4.2점)이었고, 부동산 정책(4.3점)이 그 다음을 차지했다. 특히 부동산 정책 중 ‘대규모 국책사업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는 3.9점을 받아 인사정책과 더불어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재벌개혁 정책도 평균 4.6점으로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그나마 남북·한미 관계는 6.1점으로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다음으로 적폐청산이 5.5점이었다. 경실련은 “전문가들이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2년의 주요 정책에 대해 평균 5.1점으로 평가한 것은, 촛불혁명으로 출범한 정부에 대한 기대는 높았으나 성과가 낮고, 정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실망감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이러니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내년 총선에서 좋은 성적을 내리란 기대는 무망해보인다. 이대로라면 여당 대선후보로 꼽히는 김부겸 의원도 대구지역에서 재선되리란 보장이 없다는 게 지역분위기다. 그렇다고 해서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정부여당의 실정에 대한 민심의 이반과 그에 따른 반사이익으로 나머지 의석을 고스란히 차지할 수 있을것이라고 낙관하는 것은 금물이다. 한국당은 친박과 비박계 등으로 분열된 당 내부를 단단히 추스르고, 보수야권의 제 정파들을 통합해 보수대통합으로 새롭게 당을 정비해야 한다. 연후에 정부여당에 대한 합리적인 견제와 나라경제를 새롭게 살릴 방책들을 새 비전으로 내세워 국민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지금 우리 국민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필요하다.

2019-04-18

무은재 25주기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포스텍 김승환 대학원장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금년 4월 30일이 무은재 김호길 포스텍 초대총장의 25주기이니까 특별행사로 명예교수님들을 초대하고 싶다는 전언이었다. 그제서야 무심하게도 금년이 무은재 25주기라는 걸 깨달았다. 1994년 그날은 토요일로 기억된다. 동료교수들과 시내에서 식사를 하는 도중 지역TV 방송에서 그의 서거를 알리는 화면이 나왔고 식사를 하던 교수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부근 병원에 이송된 그는 포스텍 총장 6년 동안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뒤로한채 그렇게 떠났다. 금년 1월 과기정통부는 과학기술 발전에 공헌한 연구자를 기리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에 한국 최초의 가속기 학자인 고(故) 김호길 포스텍 전 총장 등 16명을 신규 지정했다고 발표하였다. 과학기술유공자는 2015년 제정된 ‘과학기술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른 것으로 2017년 초대 유공자 32명이 지정된 데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과학기술유공자 제도는 일반 국민이 존경할 만한 우수한 업적이 있는 과학기술인을 ‘과학기술유공자’로 지정해 명예와 긍지를 높이고 과학기술인이 존중받는 사회문화를 조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마련됐다.무은재는 1933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출생하였으며 경상북도 영일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는 1952년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직하면서 양자역학과 전자기학을 공부하면서 이론물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1961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장학생으로 영국 버밍엄 대학교로 유학을 떠난 그는 1964년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싸이클로트론(cyclotron) 분야의 연구를 병행하였다. 그는 이후 1964년부터 1966년까지 미국 UC버클리의 로렌스 연구소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기며 물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1966년부터 1978년까지는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물리학과와 전기공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재미한국 과학기술자협회 창설 및 회장을 역임했다. 1983년 한국의 과학발전과 후진양성을 위해 영구 귀국했으며 당시 럭키금성그룹(현 LG그룹) 구자경 회장의 초청으로 경상남도 진주에 위치한 연암공전 초대 학장직을 맡았고, 이후 공대 신설을 추진하던 포항제철과 인연을 맺으며 1985년 포항공과대학교 초대총장으로 선임되었다. 1985년 8월부터 1994년 4월까지 포항공과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연구 중심의 교육을 통해 기술 입국을 실현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과 철학을 바탕으로 포스텍 설립과 발전을 이끌었으며, 순수 국내 기술로 범국가적 연구시설인 포항방사광가속기의 건설을 주도하였다.그는 서울이 아닌 지역에 위치한 포항공대가 성공하는 지름길은 “다른 대학이 가지지 않은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것이 신념이었고 방사광가속기 건설을 총장수락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1994년 체육대회 도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 추진했던 포항방사광가속기의 완공을 보지 못하였다. 또 필자가 맡고 있었던 최고경영자과정의 특강을 한 주 앞두고 떠나셨기에 그 아쉬움과 슬픔이 두고두고 흐른다. 무은재란 중국 사회과학원의 신관결 박사가 국제 퇴계학상 수상을 위해 1989년 내한하여, 김호길 박사에게 지어준 것으로 그가 호방한 성품뿐만 아니라 자연, 인문과학 등 광범위한 학문과 지식을 갖추었음을 표현한 것이다.포항의 포스텍은 무은재 김호길 초대총장과 박태준 포스텍 명예이사장 두 분의 작품이라는 건 누구든 잘 아는 사실이다. 무은재 25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업적에 존경을 표하며 이 한마디를 전하고 싶다 “정말 감사합니다”.

2019-04-18

인생의 사각 링에서 벌어지는 일들

고구치 마사유키(28)씨는 취미로 권투를 배우고 있습니다. 링에 오르면 오를 수록 권투가 신나고 재밌어 집니다. 체육관에서 깜짝 제안이 옵니다. “이봐 고구치씨, 혹시 진짜 시합에 한 번 나가보지 않겠어요?”챔피언 은퇴 경기의 오프닝 게임이랍니다. TV 중계까지 잡혀있다지요. 결전의 날이 밝습니다. 야심차게 링에 오른 고구치 마사유키. 상대방을 거세게 몰아 부칩니다. 가볍게 풋웍을 하며 링을 빙글빙글 돕니다. 원투 스트레이트. 잽, 잽…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땡 땡 땡…” 시합 중지를 알리는 공이 계속 울립니다. 심판은 경기를 중단합니다. 고구치 마사유키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습니다. 상대방의 라이트 훅 한방에 고구치 머리에서 가발이 링 위에 떨어진 겁니다. 세상에나!멀쩡한 선수가 갑자기 대머리가 되는 해프닝에 관중들과 시청자들 모두 웃음을 참지 못합니다. 심판은 반칙패를 선언합니다. 복싱 규정에 이런 게 있거든요. “선수는 슈즈와 트렁크, 낭심 보호대 외에는 어떤 물건도 착용해서는 안된다.”두 세 사람이 잡아당겨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한 가발이었기에 설마 시합에서 이런 불상사가 벌어 지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습니다. 정작 큰 문제는 다음 날 일어납니다. 부업을 엄격하게 금지해 온 회사에서 고구치의 복싱을 부업으로 판단, 즉시 해고합니다. TV 중계로 온 세상에 창피를 당하고 직장까지 날려먹은 꼴입니다.그런데 말입니다. 이 사건이 일본 전역에 퍼져 나가자 눈을 동그랗게 뜬 회사들이 있습니다. 가발 회사, 발모제 회사, 두피관리 업체 광고 담당자들이지요. 그들이 동시에 고구치에게 전화를 걸어옵니다. 광고 모델이 되어 달라는 겁니다. 인생 역전. 막대한 광고 수입을 올리면서 평소 하고 싶었던 복싱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던 거죠. 이후 고구치는 벌이는 시합마다 연전 연승합니다.우리 삶은 때로 치욕적인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고 결핍으로 자존감이 바닥으로 처박히는 순간이 종종 있습니다. 넘사벽처럼 보이는 한계가 우리를 낙담케 한다 할지라도 거기에 굴복하면 안됩니다. 고 정주영 회장의 이 말을 기억하시지요. “이봐 채금자(책임자). (해 보기는) 해 봤어?”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집념과 열정으로 지금 바로 내 앞에 주어진 이 순간의 일에만 전념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리는 태도로 하루 하루 충실히 살아가면 내일 우리 앞에 어떤 선물이 주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조신영 인문학365 대표

2019-04-18

우리는 국민의 아픔을 만져주는 국가를 원한다

조근식 포항침례교회 담임목사지난 2017년 11월 15일, 꿈에서조차 생각지도 못한 천재지변으로 포항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아픔을 겪었다. 한 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으신 이재민과 1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안한 마음으로 단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시민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시민의 아픔만큼 도시 자체도 아픔을 겪었다. 포항시는 그동안 지진으로 인한 인구감소, 도시브랜드 손상, 지진 트라우마 호소 등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피해를 입어왔다. 뿐만 아니라 기업의 투자심리 위축, 관광객 감소 등의 막대한 경제적인 피해도 입었다.지난 3월 20일, 아직까지도 많은 시민이 이재민 임시구호소에 머물고 있는 가운데 포항지진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지열발전소 사업으로 촉발된 인재(人災)라는 정부조사연구단의 발표에 포항시민은 이제는 ‘지진도시’의 오명을 벗었다는 안도감에 앞서 허탈함과 분노가 뒤섞인 절망감에 빠졌다. 정부의 국책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행사례와 수차례에 걸친 경고 지진을 무시하고 이를 강행하여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발생한 인재(人災)였다는 점에서 포항시민이 느끼는 분노는 극에 달했다. 무엇보다 국가의 사업보다도 국민의 안전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진상조사나 피해주민, 지역에 대한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지난 2일 열린 ‘지진피해 특별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결의대회에 3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가했다. 시민대표로 연단에 오른 중학생은 하루빨리 안전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은 지진의 아픔을 극복하는데 온 국민의 관심과 도움을 요청했다. 답답한 시민의 마음을 알기라도 했던지, 이강덕 포항시장은 “국책사업이라는 이유로 시민의 안전과 지역의 발전을 챙겨야 하는 시장으로서 시민들에 대한 송구함과 앞으로 일어날 모든 후속대책들은 시민 모두를 감싸고 살피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삭발을 통해 시민과 약속했다. 정부의 무모한 국책사업의 추진으로 그 피해를 포항이 고스란히 입었지만 이 문제는 비단 포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전 국민이 함께 대처해 나가야 한다. 이 같은 인재(人災)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재난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반성하고 함께 대처해 나가야한다.인구감소, 도시브랜드 가치 하락 등을 회복하기 위해서 ‘포항지진 피해배상 및 지역 재건 특별법’을 하루속히 제정하고, 범정부대책기구를 구성하여 신성장산업 육성은 물론 위축된 투자심리 회복을 위한 특단의 대책 등 지역경제 활력 회복을 위한 종합대책이 필요하다. 또한 아직까지도 시민들이 공포감과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지열발전소의 안전한 폐쇄와 정부차원의 지속적인 사후관리 조치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지열발전소에 의한 지진유발을 막을 수 있었던 4번의 기회를 놓친 것이 뼈저리게 안타까운 만큼 그 책임소재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마침 정치권의 여야대표가 포항을 찾아 문제의 지열발전소와 피해현장을 둘러봤다. 그리고 아직도 임시구호소에 남아있는 이재민들의 손을 잡고 지진 피해 극복에 힘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청와대 국민청원과 범시민결의대회에 발맞춰 여야 모두가 포항지진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점은 참으로 고맙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지난해 7월, 동굴에 갇혀있던 13명의 유소년 축구팀 소년과 코치 전원을 구조했다는 태국의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국가의 역할을 보았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위(安危)를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국가가 일으킨 인재(人災)로부터 피해를 입은 포항시민의 경우도 국가가 지키고 보살펴야 할 국민이다. ‘국민의 생명뿐만 아니라 안전도 지키는 대한민국’의 멋진 모습이 전 세계인들에게 회자되길 바란다.

2019-04-18

벌써, 세월호 참사 5주기

세월은 짧고 소년은 금방 늙어진다고 한다. 서울에 바야흐로 봄이 미쳐 진달래와 개나리, 벚꽃이 흐드러졌다. 목련은 좀더 일찍 피었다 사그러들 지경이고 산수유도 일찍 왔다 다녀갔다.올봄은 그래도 어렵게 왔다 허무하게 간다. 며칠 날씨가 좋지 않아 비 왔다 추웠다 오늘에야 활짝 갰다. 학생들에게 이번 비에는 벚꽃이 지지 않겠지만 한 번 더 비가 오면 그때는 아름다운 벚꽃도 다 져버릴 것이라 했다.그러고 보니 처음 세월호 참사 일을 소식으로 접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날 나는 관악산을 홀로 오르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은 게 계속되다 보니 어떻게든 회복해 보겠다고 사람 없는 한적한 숲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그 무렵 이미 텔레비전 뉴스를 보지 않게 된 후였다. 전날 무슨 배가 뒤집혔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어렴풋이 들었지만 미디어를 끊으면 세상은 고요한 법, 나는 산속 깊은 곳 꽃나무 잎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었던 것 같다.그러나 곧 비극의 크기와 깊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은 배가 뒤집히고 구조를 못한 무능의 소치려니, 경제와 이익에 눈 먼 사람들이 안전을 소홀히 한 까닭이려니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 자디잔 사람들은 국가나 정부에 대해 근본적인 생각을 내놓기 꺼려한다. 그런 큰 존재에 대한 믿음이 깨어져 버리면 삶을 어디에 어떻게 의탁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설마, 나라가, 위정자들이 그럴 수 있을까?그러나 나는 모든 막연한 믿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그때 분명히 경험할 수 있었다. 시시각각 전달되는, 공식 매체들 이면의 소식들은 참사가 어떤 계략이나 음모에 의해 시도된 것일지 모른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국가는, 정부는, 그리고 이 기구를 움직이는 어떤 사람들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지난 1980년에는 군부 인사들이 시민을 상대로 살육전을 벌였는데, 2014년에는 누가 학생들과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무슨 일을 벌인 걸까.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의문을 떨쳐 버릴 수 없다.나는 많은 것을 알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바뀐 지금도 우리는 많이 알면 위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바뀌어도 바뀌지 않고 바뀌는 시늉만 하는 경우가 많다.참사 이후 세월호는 두 번 바다 위로 떠올랐다. 한 번은 대선 때, 또 한 번은 지자체 선거 때. 이제 또 언제 세월호는 떠오르려나. 바꿔쳐졌다는 CCTV의 ‘진실’은 언제 다시 무대 위의‘연극’을 펼치려나.김어준 씨, 주진우 씨, 뭐하고 계시는지요? 이상호 기자님, 더 힘을 내주세요. 아직은 봄은 봄이라도 추운 봄이랍니다. 나도 이 추위를 잊지 말아야겠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