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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주 4일, 혹은 4.5일 근무제

금요일 오후에 퇴근해 토요일과 일요일은 쉬고, 월요일 출근하는 주 4.5일 근무제가 국민의힘 대선 공약으로 추진된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 4일 근무제를 주요 민생 의제로 선정해 공약화하는 걸 검토 중이라고. 일과 개인의 삶이 조화롭게 균형 잡히기를 원하는 21세기 노동자들의 요구에 정치권이 진지하게 응답한 격이라 많은 이들이 관심 깊게 지켜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국민의힘 권영세 비대위원장은 “주 5일제와 주 52시간 근로 규제는 시대의 흐름과 산업의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획일적인 제도라 생산성과 자율성 모두를 저해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권 비대위원장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하루 8시간 기본 근무 외에 1시간씩 더 일하고, 금요일엔 4시간만 근무한 뒤 퇴근하는 방식을 시범적으로 도입한 울산 중구청의 사례도 언급했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이 검토하는 주 4일 근무제와 국민의힘이 공약으로 내놓은 주 4.5일 근무제 중 어떤 것이 노동자들의 워라밸을 높이는데 효과적일 것인지는 향후 제도 실행방안 등이 구체화되면 비교해 볼 수 있을 터.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20세기 한국의 노동자 대부분은 토요일 오전에도 일하는 주 5.5일 근무를 했고, 업종에 따라서는 일요일과 국경일 특근도 거부할 수 없는 경우가 흔했다. 돌아보면 ‘노동자 잔혹시대’였다. 이제 ‘적절한 휴식이 일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게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됐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좋은 변화다. 사회의 진보와 발전 방향은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의 환한 웃음을 지향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4-16

나를 두드리다

드르륵 쿵쿵, 피아노를 실은 구루마가 바닥을 훑었다. 모서리에 옆구리가 치이고 다리가 부딪혔다. 20년을 품고 있었던 피아노다. 여든 여덟 개의 건반들이 울음을 뱉어내듯 으르렁거렸다. 도살장으로 가는 소처럼 가기 싫다고 울어대는 소리 같았다. 고개를 돌렸다. 사명을 다했으니 이제는 보내도 된다고 애써 마음을 다독거렸다. 쓰레기 더미에 던져지지 말기를 바랐다. 손을 봐서 음악가를 꿈꾸는 가난한 누군가의 집으로 보내지길 빌었다. 텅 빈 자리를 보자 몸속 장기 하나가 빠져나간 듯 허전했다. 머릿속에는 저들과 함께 한 시간이 편집되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는 당신의 꿈을 대신해 내게 피아노를 사주었다. 내가 피아노를 칠 수 있다면 아버지는 뭐든 들어주었다. 늦둥이인 내가 고사리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음악대학을 졸업하며 진로를 고민했다. 친정집 2층에 가건물을 지었다. 그렇게 한 대씩 늘인 피아노가 어느새 열 대가 넘었다. 아이들은 하루도 어김없이 약속된 시간에 왔다. 그 많은 건반 중에서도 자기가 연주할 곡의 위치를 잘도 찾아냈다. 어설프지만 한 곡을 완성할 때면 내 마음의 선율 위에도 동심이 무지개 톤으로 펼쳐졌다. 시간이 축적되면서 아이들과의 이야기도 쌓여갔다. 친구의 장난으로 피아노 뚜껑이 닫히면서 다친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쫓아갔던 일, 연주회를 준비하면서 같은 멜로디를 수도 없이 되풀이하며 건반을 두드렸던 일, 스타카토처럼 통통 튀었던 수다와 귀에 익은 어설픈 연주는 흘러가지 않고 내 속에 고였다. 피아노마다 아이들의 얼굴이 새겨졌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박혔다. 피아노는 동심이 뛰어노는 언덕이었다. 그 언덕에서 나는 아이들을 기다리며 연필을 깎아냈다. 아이들은 내가 깎아준 연필로 연습을 마칠 때마다 사과 그림에 색칠을 했다. 엇박자를 고집하는 아이와 함께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박자를 맞추었다. 비밀창고처럼 피아노 의자에 숨겨 두고 꺼내 먹던 과자는 달콤했다. 수많은 가요 악보들과 아이들의 색으로 채워둔 그림들, 동심은 내 팍팍한 삶에 맑은 웃음을 선물했다. 겉으로 보면 피아노는 무심한 나무 구조물처럼 보인다. 뚜껑을 열면 하얀 건반과 검은 건반이 가지런히 대비되면서 반짝인다. 현마다 자신만의 음을 지닌 살아있는 생물이다. 속으로 우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육아로 힘들고 시댁 문제로 힘들 때 피아노는 나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피아노는 마음의 현을 망치로 두드려 희로애락을 드러낸다. 내가 내 현을 두드리면 피아노는 침묵하지 않고 언제나 바로 반응했다. 하나의 건반을 두드리면 더 크고 긴 여운으로 응답했다. 그날의 감정에 따라 나는 건반을 두드리며 내 마음속 파도의 수위를 조절했다. 건반을 두드리고 현이 울면 내 속에 음표는 공중으로 떠갔고 내 기분에 따라 안단테가 되었다가 비바체가 되었다. 내 감정의 북소리가 요동을 칠 때마다 나는 피아노 소리에 음정을 맞췄다. 내가 두드린 것은 피아노가 아니라 내 마음의 현이었다. 현의 장력을 조율하듯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의 현을 두드리면 내가 연주되었다. 삶의 다양한 음역대音域帶를 지났다. 팽팽해서 건들기만 해도 탱탱하게 반응하던 20대, 삶과 싸우며 희로애락을 넘나드느라 출렁거리던 청년기, 지금은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 고개를 이순耳順으로 가고 있다. 귀가 순해지면서 가끔은 내 안을 두드려본다. 삶의 장력도 오래된 피아노 줄처럼 느슨해졌다. 누가 나를 건들어도 반응이 가볍고 어디를 가도 걸음이 느긋해진다. 가끔 내 안의 현들을 바투 당겨보지만 이내 풀어지고 만다. 낡아간다고 생각하면 문득 서글프지만, 여유가 생겼다고 여기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무심코 즉흥환상곡을 연주한다. 이는 편안한 음역대에 진입했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사주신 피아노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집으로 가져왔다. 그 앞에 앉아 건반 위에 두 손을 올린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유년의 음표들을 날린다. 힐끗 거울을 보니 중년의 내가 여덟 살의 나를 두드리고 있다. /작가

2025-04-16

트럼프와 미국의 대학들

미국 트럼프(Trump) 정부가 대학들을 상대로 압박을 시작했다. 다양성과 포용, 평등을 중시해 온 미국 대학들의 전통적 정책에 정면으로 제동을 건 것이다. 백악관은 대학들이 인종 간 형평성을 고려한 입학정책과 인사정책 등을 수정하지 않으면, 총액 22억 달러에 이르는 연방 연구자금 지원을 중단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사실상 협박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을 대표하는 사립대학인 하버드(Harvard)대학이 가장 먼저 반기를 높이 들었다. 하버드는 이러한 정부의 개입이 단순히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수준을 넘어, 미국 사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져온 민주주의의 기반을 뒤흔드는 시도라고 지적했다. 대학은 특정 정치권력의 입맛에 따라 생각을 바꾸며 운영방식을 수정하는 기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대학들이 지난 긴 세월동안 유지해온 핵심 가치를 양보할 수 없다고 했다. 하버드대학은 “트럼프 정부의 요청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전체의 문제”라고 단언했다. 실제로 전국의 많은 대학들이 하버드의 입장에 동의하며 정부의 압박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 대학들은 어떤가.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언제쯤 학문의 자유를 이처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외부의 간섭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운영하며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독립된 지적 공동체로 설 수 있을까. 학문이 정치에 종속되지 않고 지식이 권력에 복무하지 않는 구조를 우리 대학은 얼마나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는가. 학문의 자유는 고상한 이상이나 듣기 좋은 구호가 아니다. 사회 전체의 당당함과 직결되는 가치다. 대학이 자유롭지 못할 때, 사회에는 신박한 창의성도 존재할 수 없으며 뚜렷한 비판정신도 사라지고 긴 안목의 비전도 설 자리를 잃는다. 교육과 연구의 중심이 권력에 종속되는 순간, 사회와 공동체는 쇠퇴와 몰락의 비탈에 서게 된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도 든든한 지식기반 위에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 학문의 자유는 누가 가져다주지 않는다. 누가 대신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정부나 사회가 나서서 선사하지 않는다. 대학 스스로 자유의 가치를 인식하고 지켜내기 위해 싸우며 때로는 불이익도 감수할 각오를 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하버드와 미국 대학들이 보여주는 대응은 바로 그런 태도의 실천이다. 자금이 끊기더라도 정책의 방향에 동의할 수 없다면 물러서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닌가. 대학이 사회적 책무를 다하겠다는 다짐이 아닌가. 대학은 교육기관에 머물지 않는다. 사회가 크고작은 질문을 던지는 공간이며 미래를 위한 실험공간이다. 그런 장소가 위축되거나 침묵할 때, 사회 전체는 비판적 사고를 잃고 방향감각마저 잃게 될 터이다. 학문이 자유로울 수 없다면, 사회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늘 한국의 대학은 학문의 자유를 얼마나 누리고 있을까.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되묻고 행동할 시간이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자유를 지킬 책임은 대학 스스로에게 있다. 학문의 자유를 지키지 못한 결과는 사회 전체가 짊어진다. 대학이 깨어야 나라가 산다.

2025-04-16

빨간 머리 ‘강백호’를 찾아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일본문화로 만화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겁니다. 수많은 일본의 만화가 세계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데요. 통계에 의하면, 전세계에서 1년 동안 출판되는 일본만화가 대략 10억 부에 이를 정도라고 합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톰’이나 ‘코난’부터 시작해 최근의 ‘귀멸의 칼날’이나 ‘단다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일본 만화가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저에게, 뻬놓을 수 없는 일본만화를 한 편만 꼽으라면 저는 주저없이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농구만화 ‘슬램덩크’를 말하겠습니다. 한국에서는 주간 ‘소년 챔프’에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연재되었고, 단행본으로도 출판되었는데요. 당시는 신기를 펼치던 마이클 조던의 인기가 대단했고, 한국에서도 대학농구가 수많은 젊은이들을 경기장으로 끌어들이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마지막 승부’라는 농구드라마가 만들어질 정도였는데요. ‘슬램덩크’가 큰 인기를 끈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러한 농구붐도 한몫했을 겁니다. ‘슬램덩크’는 강백호라는 빨간 머리의 문제아가 한 명의 어엿한 농구선수로 성장하는 간명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성장 서사의 앞과 뒤에는 강백호가 채소연에게 던지는 “좋아합니다.”라는 말이 놓여 있는데요. 첫 번째 “좋아합니다”가 이상형인 채소연이 강백호에게 건넨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면, 두 번째 “좋아합니다”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에 나가면서 채소연을 향해 하는 말입니다. 처음 ‘좋아합니다’의 목적어가 농구보다도 채소연에 가깝다면, 두 번째 ‘좋아합니다’의 목적어는 채소연보다 농구에 가깝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강백호의 성장이,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형에 다가가는 과정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슬램덩크’가 일본인론의 교재로 삼아도 손색없는 텍스트로 여겨집니다. 일본에 살면서 실생활이나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듣거나 보는 단어를 하나만 고르라면, ‘간바로(힘내자!)’라는 말을 꼽고 싶은데요. 일본인들은 굳이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일에도 꼭 ‘간바로’라는 말을 해서 긴장을 불어넣고는 합니다. ‘간바로’ 의식이 더욱 강렬해지면, ‘잇쇼켄메(一所懸命)’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하는데요. 이 단어를 직역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목숨 걸고 해낸다는 의미입니다. 사무라이가 쇼군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을 목숨 걸고 지킨다는 것에서 비롯된 단어를, 일상에서 태연하게 사용한다는 것이 조금 무섭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간바로’나 ‘잇쇼켄메’같은 단어들이 흔히 사용되는 것을 보면, 일본인들은 옛날 사무라이들처럼 자신의 임무를 목숨 걸고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슬램덩크’에서 감독인 안 선생님을 영감이라 부르고, 주장인 채치수를 고릴라라 부르던 자칭 천재 강백호는 ‘잇쇼켄메’는커녕 ‘간바로’에도 어울리지 않는 미숙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백호는 차차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모든 것, 심지어는 자신의 (선수)생명까지 바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데요. 이런 모습은 해남고와의 시합에서부터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센터인 채치수가 부상으로 교체되자, 강백호는 채치수 대신 자신이 골밑을 지키겠다고 나섭니다. 그러면서 강백호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해보일 테다!”라고 각오를 다지는데요. 이 대목에서 독자는 이전과는 달리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강백호의 어른스러운 모습에 놀라게 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간바로’의 모습이, ‘목숨을 거는 수준의 노력(잇쇼켄메)’으로 발현되는 모습은 산왕고와의 경기에서입니다. 산왕고와의 경기에서 후반전 2분을 남기고 힘들게 루스볼을 건져낸 강백호는 경기장 밖으로 넘어지며 등을 다칩니다. 이후에도 강백호는 부상을 숨기고 덩크슛을 넣으며 활약하다가, 결국에는 벤치로 물러나게 됩니다. 벤치에 쓰러져 있던 강백호는 심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농구, 좋아하세요?”라고 말을 걸던 채소연의 모습과 2만 번이나 했던 슛 연습을 떠올리며, 안선생님에게 경기에 다시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합니다. 강백호의 선수생명을 걱정하는 안 선생님은 강백호의 출전을 강하게 만류하는데요. 이런 안 선생님을 향해 강백호는 “선생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전 지금입니다.”라고 외칩니다. 이 장면을 읽을 때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 몸에는 찌릿한 전기가 흐릅니다. 이러한 강백호의 투혼은 일본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잇쇼켄메’의 완성형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그렇기에 누군가는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일본 역사상 최고의 무사로 꼽히는 미야모토 무사시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것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 1년간 머물게 되었을 때,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바로 ‘슬램덩크’의 배경이 된 가마쿠라 고등학교 부근이었습니다. 벚꽃이 만개한 4월 초순 드디어 답사를 나섰는데요. 다행히 도쿄에서 오다큐선을 타고 후지사와역에서 내린 후에, 쇼난 해변을 달리는 것으로 유명한 세 칸짜리 미니 전철 에노덴을 타자 1시간 반 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가마쿠라고교는 출입이 통제되어 벚꽃만 볼 수 있었지만, ‘슬램덩크’의 오프닝 장면으로 유명한 철길 건널목은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였습니다. 온갖 외국어가 들려오는 틈바구니에서 에노덴과 건널목의 사진을 찍으며, ‘슬램덩크’를 비롯한 일본 만화는 21세기 일본의 정체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4-16

기후 변덕

기후학자들은 지구 상에서 발생하는 극단적인 기후변화의 원인은 엘니뇨 현상에 있다고 설명한다. 엘니뇨 현상이란 태평양 적도 부근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상승하면서 발생하는 기후변화를 말한다. 해수 온도가 상승하면서 대기 순환과 강수 패턴에 변화를 일으켜 전 세계적으로 이상기후를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2023년 7월 이탈리아 북부지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커다란 우박이 떨어져 100여명이 다쳤다. 우박의 일반적 크기는 0.5~5cm 정도인데, 이날 떨어진 우박은 직경 7~8cm로 테니스공만 했다. 한여름 강물에 얼음 조각들이 둥둥 떠내려가는 진풍경이 펼쳐졌다고 한다. 지구 상의 이상기후는 전 세계적 뉴스다. 엘니뇨는 남아메리카 서해안에서는 홍수와 폭우, 동남아시아에서는 심각한 가뭄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또 북아메리카 남부에서는 폭설과 한파를 일으킨다고 한다. 이런 기후변화는 농업과 수산업 등에 영향을 미쳐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타격을 입히게 된다. 우리나라도 이런 기후변화에서 예외는 아니다. 평균기온 상승과 더불어 아열대 기후로 점차 바뀌어 가고 있다. 특히 이상기후 발생 빈도도 잦아 기후변화 대응에 민감해지고 있다. 지난 주말 서울에는 기상청 관측이래 처음으로 4월 중순에 눈이 내리는 이상기후 현상이 빚어졌다. 전국에는 강풍을 동반한 비가 오면서 기온마저 떨어져 많은 사람들이 장롱에 넣어두었던 겨울 점퍼를 다시 꺼내 입기도 했다. 오락가락하는 기후변화가 단순한 변덕만으로 보이지 않아 마음이 편치 않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4-15

보수진영 후보 낮은 지지율, 돌파구 있을까

국민의힘 선거관리위원회가 14~15일 양일간 대선 경선 후보자 등록 신청을 마감함으로써 경선레이스가 본격화됐다. 당 선관위는 서류심사를 거쳐 오늘(16일) 중 1차경선 진출자를 발표한다. 당내 과반이 넘는 의원들로부터 경선참여를 요구받아온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예상대로 후보 등록을 하지 않았다. 국민의힘 경선 ‘빅3’로 분류되는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장관과 홍준표 전 대구시장, 한동훈 전 대표 모두 국정 공백을 우려하며 경선참여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데다, 한 대행 본인도 14일 “국무위원들과 함께 제게 부여된 마지막 소명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통령 선거 출마 요구에 대해 선을 그은 게 아니냐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출마설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공표하지는 않았다. 공직자의 최종 사퇴 시한이 5월 4일이어서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다. 관심사는 국민의힘이 경선과정에서 중도층 민심을 얼마나 흡수할 수 있느냐다. 그러나 오세훈 서울시장과 유승민 전 의원의 경선 불출마로 국민의힘으로선 중도층 외연 확장이 벽에 부딪힌 상황이다. 두 사람 모두 국민의힘에겐 중도층을 품을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유 전 의원이 경선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보수의 영토를 중원으로 넓히기는커녕 점점 쪼그라드는 행태가 할 말을 잃게 한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국민의힘의 또다른 고민은 대선주자들이 10명에 육박하지만 대부분 한 자릿수의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진 의원, 전직 당대표, 광역단체장 등이 대거 주자로 나섰음에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독주하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에게 맞설 인물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가장 최근 발표된 리얼미터 조사(9∼11일,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506명대상)를 보면,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민주당 이 전 대표는 48.8%를 기록했다. 그간 범보수 진영 선호도 1위를 기록했던 김 전 장관은 10.9%, 처음으로 조사 대상에 포함된 한 대행은 8.6%, 한 전 대표는 6.2%, 홍 전 시장은 5.2%,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은 3.0%,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은 2.4%를 기록했다. 범보수 주자 전체 지지율을 합산해도 이 전 대표 지지율에 한참 못 미친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고)국민의힘 경선이 흥행하면 유력 후보들의 지지율에 탄력이 붙겠지만 당내에선 불안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일찌감치 예비후보 등록을 한 후 대구경북(TK)지역을 중심으로 열심히 득표활동을 하는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이 대선을 완주하고, 유 전 의원마저 무소속 출마를 강행하면 보수지지층 표 분산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번 대선은 그 어느 때보다 보수·진보 양진영의 결집력이 강해, 당락이 근소한 표차이로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선거막판 보수진영 후보들의 극적인 단일화(‘빅텐트’)가 성사되면 다행이지만, 만일 ‘다대일’ 구도로 본선이 치러지면 국민의힘 후보가 민주당 이 전 대표를 이길 확률은 아주 낮아진다. 보수진영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2025-04-15

2,000번째의 장수사진

봄꽃 떨어지자 눈꽃인가. 팝콘 같은 벚꽃 잔치가 끝나기가 무섭게 강풍과 돌풍에 때아닌 4월의 폭설과 우박을 동반한 봄비라니? 사람사는 세상에 탄핵과 파면, 화마와 붕괴 같은 이변이 속출하자 하늘에서는 일진광풍의 일갈(?)로 날씨마저 변덕을 부리는가. 그래도 꽃이 진 자리마다 연두색 새 움이 실눈을 뜨고, 산과 들에는 소생의 희뿌연 기운에 연초록이 어우러지며 하루가 다르게 생동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몇 차례의 꽃이 피고지며 봄날이 깊어가는 때, 봄꽃은 산이나 들, 길거리에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짧게 피었다가 져버리는 꽃보다 더 밝고 화사하게 오랫동안 향기롭게 피어나는 꽃이 있으니, 이른바 ‘사람 꽃’이다. 머리와 얼굴을 곱게 손질하고 분홍, 연두, 남색의 알록달록한 한복 저고리로 새단장한 모습은 그야말로 활짝 피어나는 꽃이나 다름없다. 움직이는 사람 꽃이 피워내는 웃음꽃은 얼마나 환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울까? 그러한 꽃같은 매무새와 얼굴 표정을 애써 카메라에 담으며 오래도록 사람 꽃을 기억하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세월의 갈퀴 같은 이마의 주름살이며 검버섯이나 오므라들고 쪼그라드는 얼굴의 살갗마저 순수하고 리얼하게 앵글에 담으며 시간의 자취를 기록하고 있다.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사람의 얼굴에는 저마다의 희로애락이 스미고 풍진세사가 점철돼 있다. 그러한 얼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는 것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존중과 배려의 마음으로 당사자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려는 진솔한 정성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취지에서 어르신들의 인물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한 포스코 포항제철소 사진봉사단은 2019년 7월 창단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장수한다는 의미가 담긴 장수사진을 찍어 두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고 활기차게 익수(益壽)한다는 속설로 붙여진 ‘장수사진’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긍정이고 자신감이라 할 수 있다. 즉, 지금까지의 자취이자 앞으로의 존재감을 차분하고 평온하게 남겨두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출범 이래 포항시의 읍·면지역과 동·리단위의 마을 30여곳을 골고루 찾아다니며 어르신들께 장수사진을 찍어 드린지 5년 9개월만인 지난 주 촬영누계 2,000명을 돌파했다. 포항시 65세 이상 인구 11만여명의 2% 남짓한 어르신들께 장수사진을 선물한 셈이다. 직장에 몸 담으면서 주말이나 개인일정을 뒤로하고 간혹 휴가까지 내면서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단원들과 가족의 노력이 사뭇 가상하고 고무적이다.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익을 위해 힘쓰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을 체득하면서 밝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데 소리없이 일조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진 한 장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작년 말 기준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는 갈수록 고령자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때, 경로효친의 측면에서도 ‘찾아가는 장수사진’은 주위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추억과 스토리가 배인 사진을 보면 기억력이 살아나고 뇌운동에도 도움을 준다고 한다. 장수사진 속에서 피어나는 웃음꽃이 여생을 환하게 비추는 등댓불이 되어 어르신들께서 편안하고 느긋하게 연년익수(延年益壽) 하시기를 빌어본다.

2025-04-15

건설공정에도 AI시대가 열린다

건설사업에도 혁신이 필요하다. 건설 공정의 4요소인 공기단축, 비용 절감, 품질 향상, 안전 확보와 친환경 공법 적용 등이다. 초고층 빌딩과 다양한 건물들이 전문 디자인 및 건설 설계를 통해 여러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일은 건설 공정, 기술, 조직, 프로세스, 제품 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경쟁력과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전략적 활동으로 건설사업에서도 혁신이 일어 난다. 건축 공법에는 과거 안전사고 데이터와 실시간 센서 데이터 분석 등 AI 기반 위험 예측을 하거나, 개인 보호 장비에도 스마트 헬멧, 웨어러블 기기 활용한 심박수, 낙상 감지 등 실시간 모니터링, 고위험 접근없이 구조물 상태 드론 점검 등 첨단 기법이 적용되고 있다. 포스코건설은 일과 장비, 작업공정 특성과 니즈에 맞는 혁신 기법 CQSS(Cost Quality Safety Schedule) 이름으로 적용했다. CQSS 기법은 공사 품질, 공기, 안전, 비용을 통합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건설 프로젝트 성과관리시스템이다. 단순한 건설공정 절차가 아니라 데이터 기반 실시간 모니터링 시스템과 표준화된 시공 프로세스를 정립하여 지속 개선하는 것이다. CQSS 주요 구성요소는 원가 계획, 실적 분석, 낭비 요소 제거 등의 Cost(비용), 표준시공절차, 품질 점검 체계, 사전 분석 등의 Quality(품질), 스마트 안전관리 시스템, 위험성 평가, 교육 등 Safety(안전), 3D~4D를 통한 시뮬레이션, 주간 일일 공정관리 등 Schedule(공정) 등이다. 즉, 건설 공정 프로세스의 시작과 과정, 마무리까지 분석과 낭비를 발굴하고 제거하여 최적화 하는 활동이다. 필자가 송도 고층 건물 건설 현장의 혁신 진단을 할 때 독일 FERI사의 거푸집 방식인 자동 클라이밍 시스템(ACS, Automatic Climbing System)을 도입하여 유압식 자동 상승 장치를 이용해 타워크레인 없이 거푸집이 자력으로 상승하게 하고, CQSS 활동을 통한 작업 프로세스 상의 항목별 낭비 제거 활동으로 건설 공기, 안전, 품질, 생산성 등 적용 효과를 최대화 하고 있었다. 포스코의 고유 혁신 기법인 QSS를 건설 특성에 맞게 변형하여 성공적으로 적용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건설 공정의 CQSS 활동은 여러 활동의 성과이지만 ACS 도입 등 한 층 시공 시간 단축, 작업자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접목한 양질의 콘크리트 품질 확보, 장비 효율화와 첨단 기술 적용의 현장 인력 20~30% 감소의 원가 개선, 첨단 장비에 AI 연결하여 안전관리체계 정립,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과는 1회성 건설 프로젝트 개념의 한계를 극복한 작업자의 마인드와 건설사의 열린 조직문화 개선이다. 건설 산업의 혁신은 첨단 기술 적용과 작업자의 지속적인 낭비 제거 활동이다. AI, 로봇공학, 웨어러블, 빅 데이터 활용 등 첨단 건설 기술에 CQSS로 종합 혁신운영체계와 건설 작업자의 문제를 보는 눈, 낭비 발굴 및 제거 방법을 인지시켜 안전하고 최적화 된 건설 공법을 통한 지속적 진화 발전과 경쟁력 있는 건설사로 거듭 날 수 있는 것이다.

2025-04-15

정치를 바꿔야 나라가 산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정치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고 있다. 정부와 국회의 이중권력 충돌은 결국 비상계엄 발동, 대통령 탄핵소추 및 파면으로 끝났다. 정치의 이상은 권력투쟁의 현실 앞에 무력하다.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정권이 바뀌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정권교체’보다 ‘정치교체’가 더욱 절실한 이유다. 정치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는 전문가·언론·시민사회의 의견이 대체로 수렴되고 있다. 기존의 ‘공급자(정치인)중심 정치’를 ‘소비자(국민)중심 정치’로, ‘고비용 저효율의 정치’를 ‘저비용 고효율의 정치’로 바꿔야 한다. 이를 위해 제왕적 대통령제는 이원집정부제, 내각제 또는 4년 중임제로, 그리고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는 중·대선거구제로 바꾸어 사표(死票)를 줄이고 승자독식 정치문화를 개선하자는 것이다. 나아가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는 양당제는 협치를 제약하고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제3지대 정당의 참여기회를 확대하자는 데에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개혁이 결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개혁을 주도해야할 여야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다르고, 기득권 상실을 우려하는 정치인들이 개혁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선거 때마다 약속했던 개혁을 시늉만 했을 뿐, 한 번도 제대로 추진한 적이 없다. 말로는 민심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당파적·개인적 이익에 혈안이었다. ‘개혁 주체’가 되어야 할 정치인들이 ‘개혁 대상’으로 전락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정치제도의 개혁’은 ‘정치의식의 개혁’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투철한 민주주의 가치관, 도덕성, 그리고 정치적 소명의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인들의 언행불일치와 표리부동, 전쟁 같은 적대정치, 법꾸라지(법률+미꾸라지) 행태 등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다. 법과 제도를 만들고 운용하는 것은 결국 정치인들이기 때문에 올곧은 정신이 없으면 개혁은 불가능하다. 정치인들이 권력을 탐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의 의식수준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여야는 서로를 비판하면서 ‘자신은 개혁주체’이고 ‘상대는 개혁대상’이라고 코미디를 연출한다. 자신은 바뀌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오만과 독선이다. 적대적 공존관계 속에서 정치적 이익을 챙겨온 그들에게 성찰과 반성, 변화와 혁신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불과하다. 따라서 주권자인 국민이 두 눈 부릅뜨고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에게 채찍을 들어야 한다. 특히 정치적 편향성이 없는 지식인·언론·시민사회가 여야에 대한 공정한 심판자로서 정치개혁 추동력을 발휘해야 한다. 지식인과 언론은 정론직필(正論直筆)을 통해서, 그리고 시민사회는 정치혁신운동을 통해서 정치인들이 바뀌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도록 강력한 비판과 압력을 계속해야 한다. 정치의 질이 국민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2025-04-14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소풍의 추억

홍성식(기획특집부장) 봄과 가을 2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70~80년대 초등학생들은 소풍 가는 날을 너나없이 기다렸다. 김밥과 사이다 한 병, 평소엔 엄마가 잘 사주지 않던 과자까지 몇 봉지 조그만 가방에 넣고 학급 전체가 1시간쯤 걸어 유원지나 동물원을 향했다. 아이들답게 목적지로 가는 내내 친구끼리 장난을 치고, 별 것 아닌 이야기에 크게 웃었던 소풍. 도착하면 노래와 춤으로 흥겨운 장기자랑과 공책이나 연필을 선물로 주는 보물찾기라는 재밌는 놀이가 이어졌다. 그보다 한 세대 전에는 멀리 걸어가 야외에서 하루를 보내고 온다는 뜻으로 소풍을 원족(遠足)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아이들에게 사회성을 길러주는 동시에 일상을 벗어난 짧은 여행의 즐거움을 선물했던 소풍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최근 현장 체험학습(소풍)을 나갔던 초등학생이 사망한 사고에 교사의 형사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나왔다. 학교 측으로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의 안전사고는 누구도 예측하기가 쉽지 않으니. 거기에 더해 학생들을 인솔하는 교사의 무거운 책임감과 업무 부담도 소풍을 꺼리는 세태를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학생들 역시 과거와 달리 매번 비슷비슷한 행사 패턴에 싫증을 느끼기도 한단다. 상황이 이러하니 여러 학교가 현장 체험학습을 학교 안에서 진행되는 실내 프로그램으로 대체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안전’에 대한 가치가 무엇보다 중시되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소풍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 학생들의 안전과 학창 시절의 추억. 2가지 모두를 포기하지 않고 소풍을 즐길 묘책은 없는 걸까? 어려운 문제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4-14

한국과 계몽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오래 전에 심훈의‘상록수’란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 1930년대 농촌 계몽운동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인데, 동아일보 창간 15주년을 기념하는 공모전의 당선작이다. 1935년 9월부터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일부가 교과서에도 실리는 바람에 널리 알려졌다. 최용신이란 실재 인물을 모델로 한 이 소설은 농촌 계몽운동에 투신한 남녀 주인공의 활동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30년 당시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77.73%였다. 여성의 경우는 92%나 되었으니 열에 아홉은 글을 못 읽는 까막눈이었다는 얘기다.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맹퇴치가 우선이라는 걸 깨닫고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등의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인 계몽운동을 펼쳤다.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농촌에서 야학을 열어 국어와 산술을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활동을 벌였다. 2025년 현재 한국의 문맹률은 1%도 되지 않는다. 이제는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 실행되어 한글은 물론 영어도 의무적으로 배운다. 일부 고령층이나 장애인들을 제외하고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문맹퇴치는 거의 완성이 된 셈이다. 그런데 때아니게 “저는 계몽이 되었습니다”란 말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대통령 탄핵을 심리하는 법정에서 김계리 변호사가 변론 중에 한 말이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민주당의 패악과 일당독재, 파쇼 행위를 확인하고 이 사건 변호에 참여하게 됐다는 것이다. 대통령 탄핵정국을 계기로 상당수 젊은이들이 ‘계몽’되었다고 한다. 권력의 정점에까지 올랐으면 전임 대통령처럼 국빈대접 받으며 외유나 하다가 임기를 마칠 것이지, 느닷없이 비상계엄이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여간한 충격이 아니었다. 그 바람에 그 때까지 덮이고 감춰져 있던 온갖 것들까지 백일하에 본색을 드러냈다. 국회는 물론 사법부와 언론까지, 심지어는 정부기관인 검·경과 군부까지 좌경화 의식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뜻 있는 국민들을 경악케 했다. 계몽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순수와 정의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하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찌들지 않은 열린 사고라야 가능하다. 불순한 욕망이나 완고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과오가 밝혀져도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실을 왜곡하거나 자기합리화에 급급한 행태를 보인다.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 했던 사람들 중에도 노선을 바꾼 사람이 적지 않다. 자유와 민주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정의감으로 사회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이 어느 정도 달성되고, 운동권이 변질되고 타락한 양상을 보이자 단호히 절연했다. 그러나 불순한 의도와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은 여전히 운동권 전력을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발판으로 이용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계몽파와 비계몽파가 대선을 앞두고 일대 결전을 벌이는 형국이다. 내전을 방불케 하는 이 대결의 승패에 우리나라의 미래가 달려있다.

2025-04-14

개소리의 시대

공봉학 변호사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사람들의 거처이자 자신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우리는 이 언어를 통해 세계 속에서 머물며, 꿈을 꾸고 사랑하며, 세계를 이해하고 존재하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존재는 언어를 통해 비로소 의미로 나타나기에, 대화는 언어라는 집으로의 상호 초대이다. 그런데 그 파티가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소리 내어 읽어보자! “저는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봤고, 결국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진실을 살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 문장 더 읽어보자! “이 고난은 하늘이 당신에게 주신 시험입니다. 이겨내면 분명 더 큰 축복이 올 겁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시라. 깊이 생각하는 척하는, 뭔가 있을 듯한 아무말 대잔치! 즉 ‘개소리’다. 거짓말 조차도 이것 앞에선 작아진다. 개소리! 진실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가짜 면허증을 부여받은 말장난. 그렇다. 개소리는 말장난이다. 그런데 매우 나쁜 것이 문제다.‘소리’라는 글자 앞에 붙은 ‘개’가 무슨 죄가 있으랴. 개소리는, 개보다 더 못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된다. ‘개소리에 관하여(On Bullshit)’의 저자 해리 프랭크퍼트는, “개소리는 진실이나 거짓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말”이라 정의한다. 개소리 꾼은 자신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 개소리 꾼의 목적은 사실의 전달이 아니다.‘설득’‘이미지 관리’‘주목받기’등을 위한 ‘인상조작(impression management)’이 그 목적이다. 거짓말은 진실을 전제로 하지만, 개소리는 진실을 전제하지 않는다. 개소리는 처음부터 진실에 기반하지 않으므로, 거짓말보다 더 위험하다. 개소리를 지껄이는 자는, 양심의 가책은 고사하고 의기양양이라는 파렴치 범죄까지 추가함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거짓말쟁이는 진실을 존중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개소리 꾼은 처음부터 진실에 무관심하다. 개소리에는 소위 ‘진리값(양심의 가책)’이 없다. 거짓말과 개소리 중간에 ‘협잡’이 있다. 협잡은, 상대를 속이려는 의도는 있으나, 말 자체가 명확히 거짓은 아닌 경우다. 예를 들어, 광고문구 ‘이 제품은 당신을 바꿉니다’라는 말을 보라. 부분적 왜곡이거나 뻔뻔한 과장이다. 이렇듯 협잡은 듣는 이의 믿음을 이용하여 이득을 노린다.‘거짓말-협잡-개소리’의 순서로 점점 더 악이 가중된다. 거짓말이 최고로 나쁜 말이라 알았던 우리에게 충격적인 순서가 아닌가! 거짓말은 진실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두려움)이라도 있지만, 개소리는 이것에 관심조차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정치인’. ‘SNS 정보’, ‘광고언어’, ‘이념에 도취된 떠벌이들’은 대표적 개소리 생산공장이다. 진실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사랑도 민주주의도 없다. ‘아는 것이 없을 때 침묵하는 태도’‘진실에 대한 집요한 관심’‘비판적 사고’는 개소리라는 병을 낫게 하는 약이다. 개소리로 포장된 사람은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유의하자. 얼마나 많이 개소리에 속았던가! 얼마나 많이 개소리를 지껄여 왔던가! 우리는 말에 중독되어 있으면서도, 말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서글프게도.

2025-04-14

대통령 후보들이 답해야 할 문제들

김진국 고문 대통령 선거일이 6월 3일로 결정됐다. 이제 겨우 51일 남았다. 민주당에는 ‘어대명’(어차피 대통령 후보는 이재명)이라는 말이 나온다. 국민의힘에서는 여러 사람이 혼전(混戰)이다. 여론조사에서 도긴개긴이다. 이번 선거는 탄핵 선거다. 2017년 5월 9일 제19대 대통령 선거와 비슷하다. 그때는 탄핵 극복이 시대 과제로 두드러졌다. 절대다수 국민이 탄핵을 지지했다. ‘촛불혁명’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바람에 문재인 후보가 너무 쉽게 당선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배출해 죄인이 된 자유한국당이 힘을 쓸 수 없었다. 문 후보에 대한 검증도, 미래 구상도 따져볼 틈도 없이 바로 정권을 넘겼다. 그는 ‘촛불혁명’의 이름으로 과거에 매달렸다. 임기 내내 ‘적폐 척결’을 했다. 보수 정부에 관계한 사람들을 정부에서 쫓아냈다. 자기편은 비리조차 감싸 ‘내로남불’이 유행어가 됐다. 지나친 규제와 세금으로 집값을 폭등시켰다. 탈원전정책으로 원전 생태계를 와해시켰다. 사드 배치 지연, 대일 합의 번복 등으로 외교 축이 흔들렸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직접 대화의 길을 터주고, 북한 핵무기와 미사일 완성을 방치했다. 일일이 나열하기 숨이 가쁘게 보수 정부 정책을 뒤집었다. 물론 탄핵이 이 선거를 있게 했다. 탄핵을 피해 갈 수 없다. 특히 국민의힘 후보들은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탄핵은 어떻게 판단하는지, 자기 생각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런 사태를 다시 반복할 순 없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자기 행동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사저로 돌아가면서 개선장군처럼 행동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의 태도도 불분명하다. 윤 전 대통령을 업고 나서겠다면 탄핵을 반대한다고 당당히 말하고,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 임기를 못 마치고 물러난 것은 분명히 실패다. 그런데 사과는커녕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면 국민이 직접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헌법재판소는 탄핵 결정문에서 “피청구인(윤석열)과 국회 사이에 발생한 대립은 일방의 책임에 속한다고 보기 어렵고, 이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해소되어야 할 정치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회는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정부와의 관계에서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결론을 도출하도록 노력하였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치를 포기한 정치권에 던진 준엄한 훈계다. 민주당 후보도 이 지적에 답해야 한다. 비상계엄의 가장 큰 책임이 윤 전 대통령에게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모든 후보가 헌재의 지적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태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온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국민 통합은 대통령의 최고 책무다. 갈라진 국민을 어떻게 통합할지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정치 실종, 반복되는 헌정 중단 사태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 해법을 내놔야 한다. 선거 이후의 상황은 산 넘어 산이다. 이재명 후보가 당선되면 행정부와 입법부를 모두 장악한 거대 권력이 된다.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국민의힘은 108명에 불과하다. 개혁신당 3명을 합쳐봐야 111명이다. 180석을 넘으면 국회선진화법이 무력화된다. 200석이 필요한 탄핵과 개헌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 대표는 22대 국회의원 후보 공천 때 충성파를 제외하고는 노골적으로 정리했다. 무자비한 숙청이었다. 그가 정부와 국회를 모두 장악하면 견제받지 않고, 폭주하는 기관차가 될 위험이 있다. 비상계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조치에도 탄핵 반대파가 기세를 올린 이유다. ‘이재명 포비아’에 대한 이 후보의 이해할 만한 설명이 필요하다.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되면, 거대 야당에 직면하게 된다. 윤 전 대통령이 놓였던 바로 그 환경이다. 선거로 달궈진 대결 의식 속에 어떻게 민주당의 협조를 받아낼지 관건이다. 여기에 실패하면 윤 전 대통령의 길을 걷거나, 아무 일도 못 하는 무기력한 대통령이 된다. 나라도 스톱이다. 국민의힘 후보가 탄핵의 강을 건너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50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후보마다 답을 내놔야 한다. 우리도 그 답을 듣고, 냉정하게 답을 찾아야 한다. 또다시 나라가 거꾸로 달리게 할 수는 없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4-13

권한대행의 본질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한덕수 씨가 며칠 전 헌법재판관 세 명을 전격적으로 임명했다. 국회 추천 몫 마은혁 재판관 임명은 이미 헌재에서 임명 안 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은 사안이라 문제가 없다. 그러나 4월 18일 임기가 만료되는 문형배, 이미선 두 재판관 후임으로 이완규 법제처장과 함상훈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임명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이 크다. 비판 측에서는 두 사람의 과거 이력도 문제 삼고 있지만, 핵심은 권한대행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3월 24일 한덕수 탄핵소추 기각 판결문에도 이 문제가 담겨있다. 최형식, 조한창 두 재판관은 각하 의견을 냈는데, 그들은 헌법재판관 임명권이 대통령의 권한이므로 이 문제로 탄핵소추하려면 소추안 발의와 의결에 대통령에 준하는 정족수를 채워야 한다면서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의견을 낸 것이다. 이 판결문을 보고 언뜻 조선시대 예송이 떠올랐다. 예송이란 효종이 사망하자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가 효종을 위해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이냐로 서인과 남인 두 정파가 대립한 사건이다. 이 논쟁의 핵심은 효종의 본질을 왕으로 볼 것인가 둘째아들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역할을 중시하여 효종의 본질을 왕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한덕수 탄핵소추 판결에서도 각하 의견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권한대행이 대통령 지명권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권한대행의 역할은 효종의 지위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일단 효종은 공식적인 왕이었고 업무가 분명했으며 종신직이었지만, 대통령 권한대행은 공식적 직함도 아니고 권한대행의 권한과 한계에 대한 명확한 규정도 없으며 임시직이다. 권한대행의 애매한 포지션을 해결하기 위해 제20대 국회에서 민병두 의원 등 41명이 ‘대통령의 권한대행에 대한 법률안’을 발의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방법도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권한대행 체제는 비상시에 발생하는데, 권한 범위를 명문화했다가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관행을 보면 권한대행의 본질이 무엇인지 추론할 수 있다. 먼저, 권한대행 경호 인력은 대통령에 비해 현격히 적고 국무총리를 경호하는 세종시 경찰청에서 맡는다. 집무도 본래 업무 보는 곳을 근거지로 두고 대통령 업무를 볼 때만 대통령 집무실에 방문한다. 기재부장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때 발생한 제주항공 사고와 산청 산불 처리 업무는 기재부에서 담당했다. 외교에서도 권한대행은 한 나라의 수장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권한대행이 명목상으로는 대통령의 권한을 가졌지만 국무총리가 본질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통령 몫의 재판관 두 명을 임명한 것은 월권이다. 탄핵소추 같은 중요한 상황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 이미 2024년 10월 17일 국회 몫 3명의 재판권이 임기 만료된 후부터 정계선, 조한창 재판관이 임명된 12월 31일까지 6인 체제로 운영되었으니 대통령 지명 몫 헌법재판관 임명이 급한 것도 아니다. 신임 헌법재판관 지명은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맡겨야 한다.

2025-04-13

철강·수요산업 균형 잡힌 정책 필요

서정헌 스틸앤스틸 회장 지나친 철강수입 규제로 수요산업의 역풍이 우려스럽다. 최근의 철강위기를 극복하는데 수입규제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에는 철강업계 모두가 공감하는 것 같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최근 우리나라 철강 수입규제 건수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철강수입을 규제하면 국내 철강가격이 올라가고 수요산업의 철강재 확보가 어려워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수입규제를 반대하는 철강 수요업체들의 주장에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철강업계는 수입규제를 원하고 철강수요업계는 수입규제를 반대하는 상황에서 정부 산업정책은 어느 쪽 주장에 더 귀를 기울여야할까? 철강과 철강수요산업 사이에 우선순위를 정할 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철강이 철강수요산업과 강한 산업간 상호의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철강 수입규제는 단기적으로 철강 산업의 위기극복과 사양화 속도를 조절하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하면 산업간 상호의존관계로 인해 철강수요산업은 역으로 수렁에 빠져들게 된다.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원가 인상 등으로 인해 경쟁력 약화라는 암초에 부닥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다시 철강산업의 후퇴로 이어진다. 이런 산업간 상호의존관계를 감안하면 지나치게 수요산업의 희생을 강요하는 철강수입규제는 장기적으로 철강 산업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양 측의 시장과 수요를 정확히 잘 판단, 시책을 집행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정부의 산업정책은 주로 대형 고로사의 입장을 많이 반영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철강 수입규제가 시작되면 철강사는 더 적극적으로 정부를 설득하여 수입규제를 연장하려고 노력한다. 반면에 중소 철강사나 유통 가공사는 자신의 주장을 산업정책에 반영하기가 쉽지 않다. 철강수요산업의 경우 위기의 징후가 장기적으로 분산되어 표출되기 때문에 정량화가 쉽지 않고, 철강소비자 단체의 조직력도 약해서 수입규제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산업정책에 반영되는데 한계가 있다. 철강산업과 철강수요산업 관계는 깊게 얽혀 있다. 처음에는 철강이 산업을 이끄나 자동차 조선 가전 등 철강 수요산업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수요산업이 철강을 견인하게 된다. 당국도 산업구조 고도화를 위해 산업정책의 초점을 철강에서 철강수요산업으로 이동시켜 나간다. 산업정책의 큰 방향이 어느 정도 철강산업의 희생을 감내하더라도 수요산업을 통한 제조업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철강은 주로 수요산업의 안정적인 생산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에 주력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산업구조는 철강산업에서 철강수요산업으로 더 확산, 성장하게 되고 또 하부로 파생되면서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관련 산업 구조다. 필자는 철강과 수요산업의 산업간 연관효과가 튼튼한 나라가 철강산업이 강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바람직한 산업간 관계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철강의 산업경쟁력을 강화하는 길이기도하다. 수요산업이 후퇴하면 철강도 설 자리가 좁아진다. 그런 점에서 수요산업과의 상호의존관계를 고려하는 산업정책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당국은 철강과 수요산업의 바람직한 상호의존관계를 반드시 유념, 수입규제를 하더라도 철강 하공정이나 수요산업과의 공존, 산업 간의 균형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

2025-04-13

위기에 처한 포항경제, ‘해법’ 찾아야 한다

박승호 전 포항시장 경북 제1의 도시 포항이 흔들리고 있다. 이 나라 근대화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포스코를 위시한 철강산업의 본고장 포항이 국내외 경기침체와 트럼프 정부의 관세정책, 중국의 덤핑전략 등의 악재로 뿌리째 휘청이고 있다. 포스코 포항공장 2개소가 잇달아 문을 닫았으며 현대제철 2공장마저 조업을 중단하는 등 철강업계가 그야말로 창립 후 최대위기를 겪고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위기는 국가 경제적 차원에서도 심각한 현상이지만 아직까지 철강 단일업종에 편중돼 있는 포항의 경우 2차, 3차적 폐해마저 우려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포항시와 지역 상공계, 철강업계가 머리를 맞대고 하루빨리 특단의 해법을 찾지 않으면 자칫 IMF보다 더 큰 ‘경제 위기(economical crisis)’로 이어져 철강 도시 포항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점차 커지고 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최대 위기는 미국의 관세 폭탄이다. 트럼프 정부가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에 25%의 추가관세를 부과하면서 포스코를 위시한 포항 철강업계가 대책 마련에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수년 전부터 중국의 덤핑 저가물량 공세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던 철강업계로서는 느닷없는 미국의 관세 폭탄으로 그야말로 업계 전반이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실제로 포항 철강업계의 경우 국내 건설 경기 부진과 글로벌 경기 침체 등의 영향으로 생산과 수출 모두 급감하고 있다. 지난해 포항 철강산단의 생산실적은 14조7824억원으로 전년도인 2023년 16조3247억원보다 약 9.4% 감소했다. 또 수출도 2023년에는 36억5893만 달러의 실적을 올렸으나 지난해에는 33억2592만 달러로 9.1%가 감소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부터 트럼프 정부의 대미관세 25%가 적용될 경우 그 결과는 어떠하겠는가. 특히 포항의 경우 아직까지 철강산업을 대체할 만큼 첨단 신산업이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주력산업인 철강산업이 뿌리째 흔들린다면 포항시의 내일과 시민의 안녕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게 지역경제가 안고 있는 현주소다. 예컨대 포스코와 현대제철소의 몸집 줄이기가 구조조정으로 이어지면서 결과적으로 포항 인구감소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미 50만 대도시 포항의 한계선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그 반증이다. 인구감소 현상이 반전되지 않는다면 50만 이상 대도시에 주어지는 행·재정적 정부 지원이 대폭 감소하게 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포항 경제의 어려움은 도심 내 상가와 거리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포항 시내 중심가인 오거리와 육거리 일대 중심상가에는 영업 중인 가게보다‘임대’를 붙인 공실 점포가 더 많을 만큼 을씨년스럽다. 포항시에서도 ‘포항사랑상품권’을 발행하는 등 나름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으나‘언 발에 오줌 누기 식’의 미봉책으로는 근본적인 서민경제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많다. 위기에 처한 포항 경제를 살릴 해법을 찾기 위한 그야말로 ‘솔로몬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발 관세정책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범정부 차원의 철강산업 살리기에 포항시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와 함께 서민 가계를 살려 나갈 보다 근본적인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함은 불문가지다. 위기에 처한 포항을 더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단체장 출마 희망자의 기고문을 받습니다. 후보자의 현안 진단과 정책 비전 등을 주제로 200자 원고지 7.5∼8.5장 이내로 보내주시면 지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기고문은 사진과 함께 이메일(hjyun@kbmaeil.com)로 보내주세요.

2025-04-13

예산 8000억 원 시대를 바라보며

김하수 청도군수 자치단체의 장으로 바라는 바가 있다면 재정자립도를 높이는 것과 풍부한 예산으로 지역에 꼭 필요하고 지역민들이 원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것일 것이다. 재정자립도를 높이는 것은 하루 이틀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가능하지만, 지역에 필요한 예산 마련은 자치단체장과 공직자들의 노력이 뒤따른다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에서 체득했다. 청도는 풍부한 천혜의 자원에 서울특별시 면적과 비슷한 696.53㎢를 자랑하지만, 시대상을 거스르지 못해 인구소멸지역에 포함되며 현재는 4만여 명의 주민이 사는 농촌 도시다. 이로 인해 2021년 청도군의 연간 예산이 5599억원에 그치고 2022년 6317억 원으로 겨우 6000억 원 시대를 맞았다. 2023년 6935억 원이던 연간 예산은 2024년 7018억 원으로 6천억 시대에서 7천억 시대를 2년 만에 달성했다. 2024년 7018억 원의 예산은 자주재원은 500억 원에 그치지만, 지방교부세가 2600억 원, 국·도비사업과 공모사업, 지방소멸 대응 기금 등으로 3918억원을 확보했다. 예산의 절반 이상을 국·도비 보조사업과 공모사업, 지방소멸 대응 기금으로 충당한 것은 인구 4만여 명의 군 단위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다. 특히 지난해 37건의 공모사업으로 확보한 1566억 원의 국·도비의 비율이 73% 이르는 우량 공모사업이 차지하는 등 열심히 노력한 결과를 보상받았다. 인구소멸지역에 청도군이 포함되었지만, 앞으로 상주인구는 늘어날 전망이다. 통계청이 2022년을 기준으로 2042년을 목표로 발표한 경상북도 장래인구 추계에서 대부분 시·군의 인구가 5~10% 감소할 것으로 예상하지만, 청도군은 2022년에 비해 2042년 316명이 증가할 것으로 분석했다. 316명의 인구 증가가 큰 의미가 있나로 물음을 던질 수도 있지만, 청도군이 고령인구가 많아 자연적인 인구 감소 요인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숫자이다. 청도군의 인구 증가는 문화예술관광 허브 도시 조성을 통한 생활인구 유입과 농업대전환으로 소득 증대, 평생학습을 통한 지역 인재 양성, 복지 체계 강화로 얻은 정주 여건 개선 등의 효과에 따른 것이다. 청도군의 생활인구 유입 효과는 2024년 1분기에 평균 30여만 명으로 주민등록인구의 7.2배에 달했고 결국 34만 명의 유입으로 주민등록인구의 8배를 초과로 인구감소지역 중 전국 7위, 경북도 1위를 기록해 미래 청도의 발전 가능성을 증명했다. 청도군은 올해도 11건의 공모사업 선정으로 89억 원을 확보하고 지자체 혁신평가 우수기관, 지자체 적극 행정 종합평가 우수기관, 지방자치단체 복지대상 등 3건의 수상 실적을 기록하는 등 지역주민을 위한 최대의 노력으로 이에 따른 평가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행안부의 혁신평가 우수기관 선정과 적극 행정 종합평가 우수기관 선정은 경북에서 유일하게 2관왕을 차지한 것이다. 청도군수의 책무를 다하고자 지난 3월 18일에는 이만희 국회의원과 함께 중앙부처를 동시적으로 방문해 지역의 현안을 설명하고 필요한 예산의 적극적인 지원을 부탁하기도 했다. 청도의 공무원들과 나는 지금까지의 성적에 만족하지 않고 지속으로 노력하며 지역주민을 위한 다양한 시책을 개발하고 이를 적용하기 위한 예산확보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민선 8기가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주민복지와 평생교육, 농업, 문화예술관광 등 주민 생활과 직결된 것은 사소한 것 하나라도 자세히 살피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러한 현장 중심의 행정은 지난 11일 한국사회복지사협회가 주최하고 보건복지부가 후원한 ‘2025 지방자치 복지대상’을 받기도 했다. 앞으로 돌아가 재정자립도를 높일 수 있는 대책도 찾을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직원들의 힘을 믿고 자리에 안주하지 않는 솔선수범의 행정으로 8000억 원 예산 시대와 생활인구 40만 명 달성을 이른 시간에 이루도록 다시 마음을 다져본다.

2025-04-13

기다림

벚나무 한 그루가 겨울 거리에 서 있다. 바싹 마른 가지 끝의 파르르 떨림이 눈에 보일 정도다. 거친 바람의 야유에 그저 흔들릴 뿐이다. 가지 끝을 희롱하던 성난 바람은 잠시 머무르다 휙 하니 떠나버린다. 학원 출근 첫날이었다. 옆 반 선생님이 우리 반의 K를 잘 지켜보라고 한다. 태도도 불량하고 무엇보다도 욕을 너무 많이 해서 수업 분위기를 자주 망친단다.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다. 교실에 들어서니 다들 헤드셋을 끼고 바른 자세로 앉아 오디오를 듣고 있었다. 헤드셋을 한 쪽은 귀에 다른 한 쪽은 머리에 삐딱하게 쓴 채 옆으로 거의 눕다시피 한 아이가 있었다. 금방 K인지 알 수 있었다. 광대가 좀 나오고 눈이 작고 가늘며 우락부락한 느낌이었다. 힘도 좀 쓸 것 같았다. 옆으로 가서 반듯하게 앉으라고 했더니 대뜸 욕이 날아온다. 아들 둘을 키워 남자아이들의 반항쯤이야 하던 나도 순간 당혹스러웠다. 한동안 K를 관찰했다. 6학년인 그는 친구들에게도 굉장히 짜증을 잘 내었고 쓰는 단어의 반 이상이 욕이었다. K와 나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달래도 안되고 야단쳐도 안되고. 쉽지 않았다. 억지로 수업을 시켜도 효과가 없을 건 자명한 일이었다. 어느 날 K와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집안 얘기는 또 술술 잘 한다. 엄마가 집에서 일을 하셔서 학교 갔다 와도 집에 있기가 어려웠다. 거기다 중학생인 형은 공부를 무척 잘 해서 특목고나 자사고를 가려고 한단다. 당연히 부모님의 관심은 입시를 앞둔 형에게 쏠려 있었고 공부가 썩 뛰어나지 않은 K는 뒤로 좀 밀려 있는 것 같았다. K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나름 이해가 되었다. 형도 엄마도 자랑스러워했지만 본인도 인정받으며 사랑받고 싶다는 열망이 강한 아이였다. 그에게는 기다려주는 것이 꼭 필요할 것 같았다. 그 후 K와 나는 그런대로 잘 지냈고 중학교에 가면서 헤어졌다. 때때로 그 아이를 생각하면 겨울나무가 생각났다. 나무는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잎을 떨어뜨려 수분 손실을 최소화한다. 물관에 공기방울을 형성해 물의 이동을 막아 얼음이 형성되는 것을 막는다. 기본 에너지를 제외하고는 양분들을 뿌리로 이동시킨다. 혹독한 환경에서의 적응과 생존을 위해 성장을 멈추고 에너지소비를 최소화하는 기다림의 시간을 갖는다. 새봄의 새 잎을 틔우기 위한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반드시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 시간 속에는 아픔이 있다. 아픔을 안으로 삭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모습이 때로 밖으로는 오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혹한을 견디고 새봄을 맞을 준비를 저마다의 다른 방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전영숙 시조시인 학기 초에 학원 근처 학교 앞에서 홍보지를 나누어 주고 있을 때였다. 어떤 학생이 다가오더니 학원 선생님이시죠 한다. 얼굴은 눈에 익었는데 누구인지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모른 척 할 순 없어서 어 잘 지냈니 하고 어물쩍 대답했다. 그 순간 그 아이의 이름이 떠올랐다. K였다. 3년 만이었다. 키가 훌쩍 크고 단정한 모습이 많이 낯설어 금방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선생님이 보여 왔다고 하며 깍듯이 인사를 했다. K는 나름 잘 보낸 것 같았다. 사랑을 덜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환경에 대처한 방법이 다소 불량스럽고 공격적이었어도 그것을 잘 극복한 것 같았다. 욕을 하던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살짝 웃음도 나왔지만 의젓해진 그가 너무 기특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며 웃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앞으로 멋있는 청년으로 성장할 그가 기대되었다. 홍보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나뭇가지 끝이 약간 분홍빛을 띄고 있다. 몽글몽글 앙증맞게 꽃눈을 틔우고 있다. 며칠 있으면 연분홍의 꽃잎이 활짝 그 손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꽃구경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할애할 것이다. 기다림의 시간이 끝나 피우는 꽃은 아름다울 것이다. 모른 척하고 가도 되는데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K의 뒷모습에 그 봄꽃이 오버랩된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5-04-13

군맹무상(群盲撫象)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지난 4월 4일 오전 11시 22분 역사적인 판결이 나왔다. 작년 12월 3일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초토화된 한국 사회에 단비가 내렸다. 탐욕과 분노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자의 사악한 행위가 몰고 온 파국적인 상황에 최초의 마침표가 찍힌 것이다. 무려 123일 동안 이어진 극심한 분열과 혼란 양상이 어느 정도 진정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가 저지른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야만적인 살육이 있은 지 45년 만에 불시에 터진 비상계엄 사태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지경까지 진행되었다. 내란 수괴(首魁)를 하늘처럼 떠받드는 정당 대표와 그 수하 국회의원들의 4개월 동안의 기행(奇行)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다. 나는 이번 사태 진행 과정을 청도 촌구석에서 조용히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사태의 출발점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먼저 생겨난다. 나는 그것을 불교 경전인 ‘열반경’에 나오는 고사성어 ‘군맹무상’에서 찾고자 한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는 우리 속담으로 잘 알려진 고사성어가 군맹무상이다. 고대 인도의 왕이 맹인(盲人) 다섯 사람을 불러서 코끼리를 만지게 했다고 한다. 코끼리를 처음 접한 그들은 각자 다른 부위를 만지고 나서 왕에게 소감을 말한다. 코끼리 다리를 만진 자는 코끼리가 기둥 같다고 했으며, 귀를 만진 사람은 부채 같다고 했다. 코를 만진 자는 뱀과 같다고 했으며, 등을 만진 사람은 벽 같다고 했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밧줄 같다고 했다. 맹인들의 말은 모두 맞지만 동시에 모두 틀린 것이다. 그들은 일정 부분을 정확히 지적했지만,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를 보지 못한 채 부분에 함몰된 맹인들은 각자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이른바 ‘확증편향’의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부분적 사실과 전체적인 맥락은 상호 보완적일 때에만 의미를 확보할 수 있다. 요즘처럼 지식과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는 균형 잡힌 시각과 안목을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다. 누구에게나 나름의 편향과 호오(好惡)가 있기 때문이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고, 받는 것도 없이 좋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살아온 내력이나 경험 혹은 지역 관계 속에서 자기의 입장을 확립한 사람은 특정 계층이나 집단에 휩쓸리기 쉽다. 더욱이 개인적인 취향과 믿음, 고집에 가까운 소신을 철석같이 가진 사람은 그야말로 요지부동이다. 정보와 지식의 원천을 특정 유튜브에 두고 있었다는 자의 망상과 궤변, 끝없는 거짓말과 자기변명은 21세기 정보사회의 실체와 한계를 여실히 폭로한다.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해 온 자의 말로(末路)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선사한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통치했던 무능한 자와 어리석은 추종자들의 행악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일이다. 부분과 전체, 사실과 진실, 역사와 미래를 두루 통찰하고, 반성적(反省的)인 자세로 우리 시대와 문제와 과제를 깊이 숙고해야 할 시점이다.

2025-04-13

구미 국가산단의 변신

우정구 논설위원 산업단지 노후화 문제는 우리보다 산업화가 먼저 일어났던 서구에서는 오래된 과제였다. 노후산단으로 산업이 쇠퇴기를 맞고 청년들이 떠나면서 도시의 몰락을 경험한 도시들은 해외에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런 도시 가운데 노후산단의 부흥을 통해 새로운 기업을 유치하거나 관광산업 등을 진작하면서 도시의 재기에 성공한 경우도 또한 적지 않다. 빌바오 효과로 유명한 스페인의 빌바오시는 철강산업이 무너진 위기에서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하면서 관광산업도시로서 유명해졌다. 영국 맨체스타 트레퍼드파크 산업단지는 1890년대 조성된 세계 최초 산업단지다. 그러나 영국의 섬유산업이 쇠퇴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1980년대 추진한 재생사업으로 일자리가 창출되면서 지금은 전성기 이상의 활황 경기를 구가하고 있다. 최근 구미 국가산업단지가 전국 최초로 국가지정 1호 문화산단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이다. 대한민국 1호 국가산단이 1호 문화산단으로 지정되면서 갖는 역사적 의미도 있거니와 문화산단으로 변신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 문화산단이란 노후산단을 혁신해 문화와 산업이 공존하는 미래형 융합산단을 이르는 말이다. 구미시는 이번을 계기로 1조9000억원을 투자해 구미산단 전체를 문화산업 복합형 미래산단으로 확 바꿀 계획이라 한다. 일본의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 신도시를 모델로 삼겠다고 한다. 미나토미라이는 1980년대 동력을 상실한 조선 중심의 도시를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대기업을 유치하고 일본 3대 미항으로 변신한 곳이다. 구미시의 문화산단 지정과 이에 따른 사업 구상이 일본 미나토미라이를 넘어 대한민국 최초의 문화산단 성공 사례로 남길 기대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4-13

시는 맛있어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시는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이어주는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한다. 어린 애순이는 ‘개점복’이라는 시로 백일장에 입상한다. “허구안날 점복 점복/ 태풍 와도 점복 점복/ 딸보다도 점복 점복/ 꼬루룩 들어가면 빨리나 나오지/ 어째 까무룩 소식이 없소/ 점복 못봐 안나오나/ 숨이 딸려 못 나오나/ 똘내미 속 다 타두룩/ 내 어망 속 태우는/ 고놈의 개점복/ 점복 팔아 버는 백 환/ 내가 주고 어망 하루를 사고 싶네/ 허리 아픈 울 어망/ 콜록대는 울 어망/ 백 환에 하루씩만/ 어망 쉬게 하고 싶네”(오애순, ‘개점복’). 목숨 걸고 물질하는 엄마를 걱정하는 감동적인 시다. 1967년 문학소녀 애순이가 교복을 입고 ‘창작과 비평’ 창간호(1966. 1)와 ‘현대문학’ 과월호를 읽는 장면은 문학사적 고증을 잘 해냈다. 무엇보다 ‘폭싹 속았수다’는 험하고 가파른 생을 산 애순이 노년에 쓴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를 좋아한다. 선배 시인이 고모네 아파트에 갔다가 반상회 자리에 불려갔는데 아파트 동 하나에 사는 주민들이 전부 시인이라며 명함을 내밀더란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시가 적혀 있고, 신춘문예 경쟁률은 1000대 1 수준이다. 이토록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회에서 온갖 혐오가 넘쳐흐르는 건 의아하다. 시가 정서적 액세서리나 팬시 상품 정도로만 가볍게 소비될 뿐 대중들의 의식에 내면화되지는 않아서일까. 파괴적이고 전위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시의 영향일까. 그래도 여전히 시의 생산자와 소비자들 사이 신뢰할 수 있는 거래의 지표는 서정성이다. 서정의 본질은 조화와 화해, 그리고 합일이므로 시를 사랑하는 사회엔 미움과 시기, 차별과 소외가 점점 줄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정말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부터다. 맛집을 판가름하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려 한다. 벽면에 시가 붙어 있거나 걸려 있거나 새겨 있거나 갈겨져 있다면 그 집은 ‘찐맛집’이다. 시인이라서 팔이 안으로 굽는 ‘시 옹호론’을 펼치는 게 아니라 경험상 진짜 그렇다. 윤동주의 ‘서시’나 기형도의 ‘빈 집’, 이형기의 ‘낙화’ 같은 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름난 유명 시인의 시 말고 대표메뉴 음식을 찬양하는 시나 식당에 바치는 헌시가 있으면 제대로 된 맛집이다. 수업을 마친 월요일 저녁마다 안양중앙시장의 허름한 순대국집인 ‘대구식당’엘 간다. 거기 거울에 ‘나그네 온달’이라는 한 방랑시인이 쓴 시 ‘골라서 먹는 순대국집’이 붙어 있다. “안양중앙시장/ 중앙통로와 4번 출입구 교차하는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순대국만 전문으로 하는 나란한 여러집 중 한 집 대구식당/ 상호는 대구식당인데 대구는 없고/ 1번 머리고기만/ 2번 머리고기와 내장/ 3번 머리고기와 순대/ 4번 머리고기에 내장과 순대 등의 맞춤식으로/ 구성을 취향대로 골라서 주문하는 특별한 메뉴판이 있는 딱 한 집/ (중략) 땀 흘려 일하고 보충하는 막걸리엔 필수요 자동인 콤비 순대국/ 시민들의 정서와 애환이 녹아 있고/ 고객 중심 맞춤식으로 배려 깊은 아지매의 풋풋한 정이 배인/ 노가다나 주당들의 단골집 대구식당” 당장이라도 들어가 앉아 순대국에 막걸리를 시키고 싶어지지 않은가? 이 시는 문학적 과장이 아니라 리얼리즘 그 자체다. 동대문 생선구이 골목에서 30년 가까이 장사하는 ‘아내의 밥상’에는 주인인 유미화 씨가 쓴 십여 편의 시가 식당 안팎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표메뉴인 꼬막비빔밥을 소재로 한 ‘꼬비’는 소리내 읽으면 입안에 참기름 밴 양념장의 매콤함과 통통 쫄깃한 꼬막살의 식감이 느껴진다. “오동통 살이 오른 청정지역 벌교 꼬막/ 펄펄 끓는 뜨건 물에 멍울지게 살짝 삶아/ 속살을 발라낸 후 목욕재계 시킨 후에/ 새콤달콤 양념장에 싱싱야채 함께 섞어/ 참기름 깨소금도 솔솔 뿌려 버무린 후/ 양푼에 담아내어 윤기 잘잘 쌀밥 함께/ 쓱싹쓱싹 비벼주니 맛깔난 그 모습에/ 눈이 먼저 달려가서 시장기를 유혹하네/ 입안에서 꼴깍꼴깍 군침돌며 침 삼키는/ 예쁘면서 맛도 좋은 네 이름이 꼬비렸다” 시의 맨 밑에는 “꼬비는 우리집 메뉴”라는 각주가 달려 있다. 음식 냄새와 함께 사람 냄새도 물씬 풍기는 시, 한 식탁에 여럿이 둘러앉아 꼬막비빔밥 먹고 싶게 하는 시다. 서정시의 원리인 조화와 합일 그 자체다. 이런 시가 “반포래미안퍼스티지 천년의 보금자리” 어쩌고 하는 천박한 시보다 천배 만배 낫다. 정현종 시인이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라고 노래했던가. 그 문장을 나는 “맛집에는 시가 있다/ 그 시를 먹고 싶다”로 바꿔본다. 시가 있는 식당에서 음식은 시가 되고, 시는 맛있다.

2025-04-13

시작하는 마음

비 내리는 토요일 오전, 일찍 일어나 동네 한 바퀴를 산책했다. 비 때문인지 아직 다 피지 못한 벚꽃 나무의 꽃잎들이 거리에 지저분하게 내려 앉아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다가도 미처 다 피지 못한 잎들이 떨어져, 온몸으로 밟히고 있단 사실이 조금 울적해지기도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대체 무슨 기분인지도 모르겠는 마음으로 두 시간 여를 넘게 같은 곳을 빙빙 돌았다. 집에 가면 이삿짐을 마저 싸야 하고, 필요 없는 물건을 버려야 하고, 겨울 이불 두 세트를 세탁하고 건조를 시켜야 하며, 냉장고에 있는 음식물들을 모조리 먹거나 또는 처리해야만 했다. 몸은 걷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이미 집에서 처리해야할 목록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있었고, 결국 몸과 마음 모두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결국 집에 오자마자 잠에 빠져 들었다. 이사는 너무 갑작스럽게 정해졌다. 그간 9평 남짓한 오피스텔에 혼자 살면서 이곳은 살긴 좋지만 월세가 부담스럽고 또 너무 좁아서 답답하다는 불만을 달고 살았다. 내 이야기를 일년 반 째 듣던 막내 동생이 그럼 같이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동거 제안을 했고, 정말 우연히도 조금 더 넓은 집을 보게 되어 한순간 함께 살게 되었다. 그렇게 이삿날을 잡아두고 잠깐 잊고 살았더니, 어느새 나는 내일인 일요일 오전에 이사를 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새로운 회사의 입사를 앞두고 있던 터라, 급작스런 변화에 이 모든 것이 정말 꿈이거나 엔딩을 앞둔 게임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사실 이사하는 곳도 지금 살고 있는 곳과 오분도 걸리지 않는 건물이고, 결국 이 동네에 사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어딘가 아주 머나먼 곳에서 리셋을 앞두고 있는 것만 같다. 새로운 시작은 설레기도 하지만 동시에 두려운 마음이 크다. 또다시 마음이 흔들려 방황할 때면 인스타그램을 켜서 아이패드 드로잉 작가인 여유재순님의 그림을 본다. 거의 매일 올라오는 그녀의 그림은 투박하다. 나는 그림을 잘 볼 줄 모르지만, 따스한 색감과 깔끔한 구도로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을 준다. 그녀가 주로 그리는 그림은 꽃과 식물, 나무가 있는 풍경이다. 여유재순 작가님의 나이는 92세. 친구들은 모두 노인정에 가서 시간을 보낼 때에 자신은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코로나 때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자 작가님은 무작정 아이패드를 사고, 유튜브를 보며 그림을 그렸다. 처음엔 펜을 들고 선을 긋는 것도 못했지만 인터넷에서 그림을 찾아 따라 그리고, 유튜브로 강의를 들으며 모르는 것은 메모를 하며 하나씩 배웠다. 그 그림을 본 손녀딸이 인스타그램에 그림을 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모여든 것인데, 벌써 여유재순 작가님의 인스타그램은 1705개의 그림 게시물을 발행하였고, 9만 팔로워나 모여 있다. 작가님은 현재까지도 그림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새로운 꿈을 그린다. 동시에 아주 담백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20대에서 30대로, 나이를 먹으며 새롭게 뭔가를 시작하고 도전하는 일이 두려웠던 때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이 일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건 아닐지, 또는 새로운 일을 시작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만 하며 현실과 타협했을 때 그녀는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그러한 불안감은 내 안의 가능성을 잠재우는 소모적인 요소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아주 늦은 나이에도 컴퓨터 학원에 다니며 배움을 지속했다. 당시 반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 배움의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선생님은 집에 가면 안 되겠느냐고, 컴퓨터를 배우지 않으면 안되겠느냐는 말을 들었지만, 꼭 배워야 하겠다고 대답하며 끝까지 수업을 들었다. 옆에 있는 친구들이 ‘넌 바보짓을 퍽도 잘한다’라고 말해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통해 배움을 지속한다. 또한 처음은 누구나 잘 알 수 없는 거기에 부끄러움은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 부끄러움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면 그 기쁨과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나는 작가님의 인터뷰 영상을 점차 돌려보며, 꿈꾸는 사람은 늙지 않고 영원히 젊음으로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현재 새로운 시작 앞에서 걱정만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부끄럽게 비춰졌다. 그러면서 시작 앞에서 두려울지라도, 언제고 그저 시작하면 되는 것임을, 단순함에서 오는 용기와 지혜 앞에서 나는 무수한 위로를 받았다.

2025-04-13

사람도 기계도 노후화… ‘산불 진화시스템’ 개선 필요할 때

황인무 대구 본사 산불 진화 체계 전반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올해만 벌써 2건의 충격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달 26일 경북 의성과 지난 6일 대구 북구에서 벌어진 사고. 각각의 산불을 진화중이던 헬기가 추락해 조종사 2명이 목숨을 잃었다. 구체적인 상황을 들어보면 더욱 안타깝다. 지난 6일 북구 서변동 헬기 추락사고의 정확한 원인 규명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당시 사고를 목격한 이는 헬기가 저수지에서 물을 담은 뒤 저공비행을 하다 잠시 멈췄고, 물주머니가 위로 튀어 오른 직후 꼬리 날개가 비닐하우스에 걸린 뒤 추락했다고 전했다. 지난 7일 국토부 등으로 꾸려진 합동조사단이 사고 현장에서 헬기 잔해물 분포도, 인근 폐쇄회로(CC)TV, 전소된 보조 기억 장치, 목격자 진술 등을 토대로 감식을 다각도로 진행했으나, 사고 헬기의 고도나 속도를 추적할 수 있는 장비를 찾지 못했다. 해당 장치는 불에 타 소실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졌다. 답답한 마음이 가득한 가운데, 전문가들은 기체 노후화를 헬기 추락 원인으로 꼽고 있다. 통상 헬기는 운항 기간 20년이 넘으면 ‘경년 항공기(기령이 일정 기간을 초과한 항공기)’로 분류돼 국토교통부가 특별 관리하지만, 도입 헬기의 내구연한을 제한하는 규정은 없다. 대구지역 산불진화 헬기 역시 노후화된 것으로 알려져 불안감이 커진다. 지역에는 대구소방안전본부가 2005년식, 2019년식 헬기 2대를 보유하고 있고 달성군청, 동구청, 군위군청, 수성구청이 각 1대의 산불진화 헬기를 민간에서 임차해 운용하고 있다. 임차 헬기는 각각 1975년, 1981년, 2001년, 2010년에 제작됐다. 짧게는 15년부터 최대 50년이 지난 노후 헬기들이다. 이들 노후된 헬기로 산불 위험 기간인 1월∼6월, 11월∼12월 사이에 산불예방활동, 산불진화, 기타(재난 등) 등을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매년 임차비용도 지자체들에게는 부담이다. 정부는 산불 진화가 지자체 소관이란 이유로 국비 지원을 해주지 않고 있다. 매년 10억원이 넘는 예산이 기초지자체로서는 부담인 것이다. 여기에 헬기 정비를 민간업체가 전담하다보니 지자체가 관리하는데 한계가 있다. 지자체가 정비 내역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 조종사의 나이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자체가 운영하는 산불 진화 헬기조종사 90% 이상이 육해공군 출신 퇴역 조종사인 것으로 전해진다. 전문가들은 “산불 현장은 특히 연무가 끼어 시야가 나쁜데다 돌풍이 부는 경우도 있어 70대 조종사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소중한 목숨이 잃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이제는 당국이 나서 산불진화에 현실적인 대응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him7942@kbmaeil.com

2025-04-10

대구와 광주의 영원한 승리를 위하여

신광조​​​​​​​사실과 과학 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 대구와 광주는 상당히 유사한 면이 많다. 한쪽은 정치 성향이 우측으로 기울어져 한쪽은 좌측으로 기울어져 있을 뿐, 둘 다 본질적으로 자존심이 세고 변화에 저항하고 고집이 세다. 두 도시 미래 발전전략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여러 훌륭한 대구시장이 있지만, 대구발전을 이끈 최고의 대구시장으로 이상희 시장과 문희갑 시장을 들겠다. 이 시장님은 대구 도시계획 근간인 신천대로를 왕복 8차선에 녹지를 갖춘 형태로 구상하였고, 칠성시장 인근 구간은 시장 정비 후 지상이나 지하도로로 계획하였다. 낙동강을 대구한강으로 만들겠다는 포부에도 찬사를 보냈었다. 문희갑 시장은 대구 곳곳에 600만 그루 나무를 심어, 대구를 폭염의 도시에서 탈출시킨 분이다. 난 대구를 벤치마킹하여 ‘광주 천만 그루 나무 심기 운동’을 벌였으니, 문 시장님은 전 국토 푸르게 최고 수훈자인 셈이다. 대구와 광주는 내륙도시 한계로, 수출 전진기지가 될 수는 없다. 대신 대한민국 빛나게 하는 지혜의 도시는 될 수 있다. 시대정신은 늘 변한다.‘불과 금속과 돌’의 시대에서 ‘나무와 꽃과 물’의 시대로 변했다.‘기계와 땀’의 시대에서, ‘인간과 눈물’의 시대로 변했다. 대구와 광주에게 부여된 시대적 명제는 무엇일까? 도시를 ‘생명, 자유, 평화’의 꽃이 만발하는 극락도원으로 바꾸어 달라는 것이다. 대구와 광주는 가장 부자인 도시가 될 수는 없으나, 가장 살기 좋은 도시는 될 수 있다. 그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가장 살기 좋은 도시는 생명에 대한 사랑을 담은 도시다. 이런 이념을 추구하는 도시를 미국 버지니아 대학의 티모시 비틀리 교수는 ‘바이오필릭 시티(biophillic city)’라고 부른다. 난 이런 도시를 ‘자연사랑·인간사랑·세상사랑 삼중주 도시’로 명명한다. 핀란드는 유치원 때부터 자연으로부터 ‘배움’을 내면화·생활화했다. 덥고 습해서 짜증 나는 도시 싱가포르는 지도자와 시민들의 지혜로 ‘바이오필릭 시티’ 개념을 도시디자인에 전면 도입, 도시는 부강해지고 시민은 행복해졌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 대구시장·광주시장 이하 두 도시 공무원들이 바이오필릭 시티에 미치기만 하면, 두 도시는 승리의 도시가 된다. 우선 두 도시 새로 생긴 공항 이전 적지 250여만 평에, 바이오필릭 시티 조성 사령탑을 만들자. 그리고 이 ‘자연사랑·인간사랑·세상사랑’ 도시 만들기 수법을 대구·광주 전 지역에 확산시키자. 서울을 비롯한 전 세계인들이 대구와 광주를 찾아올 것이다. 호기심 많은 홍준표 시장이 묻는다. “빵 문제, 경제발전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요?” 걱정할 것 없다.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자연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청색 경제 기술도시 요람 만들면 된다. 미국에서 개발한 상어피부 모방 항균 표면은 항생제나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병원 내 감염율을 80%까지 줄인다. 청어 비늘 구조를 모방한 태양광 패널 코팅 기술은 기존 태양광 패널보다 15% 더 많은 빛을 흡수한다. 청년 일자리 창출 무궁무진하다. 경제 중흥한다. 미국 메이요 클리닉 센터나 플로리다 암 센터 같은 공익 의료 시설을 대구는 군 공항 이전 적지에 광주는 바이오필릭 시티 배경으로 화순에 만들면, 세계 최고 의료 힐링 도시 된다.

2025-04-10

관세 싸움에 새우 등 터질라

우정구 논설위원 미국과 중국의 관세 전쟁이 어디까지 뻗칠지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9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대중국 상호관세를 84%로 높이는 행정명령에 또다시 서명했다. 미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미국은 이제 중국에 모두 104%의 관세를 부과하게 된 셈이다. 이러자 10일 중국도 미국산 수입제품에 대해 또다시 84%의 관세를 부과한다고 밝혔다. 두 나라 간 관세전쟁이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는 두 나라의 관세 전쟁을 핵전쟁에 비유하기도 한다. 치킨게임은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한 자동차 게임이다. 서로 마주보며 달려오는 게임으로 어느 한쪽이 포기하지 않으면 양쪽 다 크게 다치는 게임이다. 1950년에서 1980년대까지 미국과 소련이 군비경쟁을 한창 벌일 때, 세계는 두 나라의 경쟁을 치킨게임이라 불렀다. 역사상 국제사회가 서로 양보하지 않고 치킨게임을 벌인 사례는 이외에도 많이 있다. 이런 이유로 전쟁에 휘말린 경우도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힘센 강자들 싸움에 아무 관계없는 약자가 손해를 보는 경우를 표현한 말이다. 미중의 관세전쟁에 지금 세계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한국증시도 9일 패닉 상태에 빠졌다. 미국과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다. 수출로 살아가는 한국은 두 나라의 치킨게임 영향력 안에 있는 나라다. 중소업체들은 중국산 저가 제품의 국내시장 공략을 벌써부터 걱정한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신세가 우리 처지 아닐까. 나라든 기업이든 단단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4-10

물모이와 물모아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기후변화가 일상이 된 오늘날, 우리는 심각한 물 부족과 산불이라는 두 가지 큰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특히 지난 3월, 경북에서 일어난 역대 최악의 산불은 큰 인명 피해와 막대한 재산 손실을 가져왔다. 당시 산불의 직접적인 원인은 입산자의 작은 부주의였지만, 피해를 키운 근본 원인은 따로 있었다. 메마른 산림과 오랜 가뭄으로 인한 물 부족, 초기 대응의 한계, 그리고 절실히 기다렸던 비조차 내리지 않은 환경이 더 큰 비극으로 이어졌다. 결국 많은 공무원과 산불 대응 인력이 밤낮없이 산불 진화에 투입되었으며, 심지어는 입산 자체를 통제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해야 했다. 이제 산불은 봄철 일부 지역만의 일이 아니다. 최근 10년을 되돌아보면 산불 발생 빈도는 뚜렷하게 증가했다. 과거 산불은 주로 강원도 산간 지역에서 집중되었으나, 현재는 계절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대형 산불 피해가 빈번해지고 있어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고온 건조한 날씨가 늘고 강풍이 자주 불게 되면서, 불에 약한 소나무림 중심의 산림 구조는 더욱 취약해졌다. 산불 초기 대응은 여전히 어려움이 많다. 급격히 퍼지는 산불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려운 데다, 헬기의 야간 투입 제한, 장비의 노후화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산불특수진화대의 인력 부족과 열악한 근로 환경 또한 큰 걸림돌이다. 초기 진화가 늦어지면 결국 산불은 더 커지고 걷잡을 수 없는 재난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산불 대응의 현실적인 해법은 무엇일까? 이제는 ‘물모이’와 ‘물모아’를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 먼저 ‘물모이’ 운동이란 산 속에 흙과 돌, 나무 등을 활용해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빗물을 모으는 방법이다. ‘물모이’를 통해 주변의 습도를 유지할 수 있고, 산불이 났을 때 초기 진화를 위한 소중한 물을 확보할 수 있다. 슬로바키아의 경우, 대형 산불 이후 약 10만 개 이상의 ‘물모이’를 조성해 산림 생태계 복원과 산불 피해 감소에 큰 효과를 거둔 사례가 있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물모아’ 시스템이라는 국가물관리 통합 플랫폼(mulmoa.go.kr)을 구축하고 있다. 산림뿐 아니라 농업, 도시 생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물 정보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이 시스템은 가뭄이나 홍수 같은 극단적 재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물모아’ 시스템을 통해 신속하게 지역의 물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활용한다면, 장기적으로 산림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기후 변화 시대, 산불은 이제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다. 체계적인 물 관리 시스템인 ‘물모아’ 구축과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물모이’ 운동은 지속가능한 산불 예방책이다. 우리의 숲을 지키고 소중한 인명과 재산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건강한 숲 조성으로 탄소 흡수 능력을 높여 기후 위기 대응에도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이제는 모두가 지혜를 모아 작은 실천부터 시작할 때다.

2025-04-10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노병철수필가 어떤 때는 한 대 패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 자기가 손해 보는 짓은 죽어도 하기 싫고 자기 생각만 옳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싸가지 없는 전형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인간은 모든 인간 삶 자체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고 있는 듯했다. 세상 사람이 다 그렇게 살아가듯이 나도 다른 사람 인생에 디딤돌은 못될망정 걸림돌은 되지 않아야겠다 싶어 대충 맞춰주고 사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막가파 인간들에겐 왠지 그런 마음이 사라진다. 혹자는 종교인이라면서 어찌 마음을 그렇게 나쁜 방향으로 먹느냐고 수양이 덜 됐다고 나무라지만, 수양은 수양이고 성질은 성질인 것 같다. “난 그 쪽 보다 이 쪽으로 가고 싶어.”“밥은 무슨 밥 그냥 허기만 달래면 되지.”어떤 때는 내가 제 놈의 ‘심부름꾼’이 된 느낌마저 들어서 혼자 여행길을 잡은 지가 꽤 된다. 동행을 원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나의 규칙에 따라줘야 하기에 처음 몇 번은 맞춰주더니만, 서로가 불편하니까 이젠 같이 가자는 말도 잘 안 한다. 그 지방 특색 있는 음식은 모조리 다 먹고 와야 하고 어지간하면 내가 보고 싶은 곳은 다 다녀야 하는 나의 특유의 여행습관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 스스로 혼자 여행하는 인간형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나의 지병이 혼자 여행하는 것을 막았다. 운전대만 잡으면 잠이 쏟아지는 이상한 병이 내게 있다. 당뇨로 인한 졸음 현상이 심했다. 그래서 운전대를 오래 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나 편하자고 운전만 해 달라는 여행 동반자는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관광버스 여행이었다. 아주 저렴하고 운전은 안 해도 되면서 음주가무는 전혀 없는 그런 여행만 전문으로 하는 관광버스들이 생겨났기에 정말 편했다. 하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혼자 아닌 혼자 여행을 즐기는 것이다. 요즘은 목적 여행을 시작했다. 목적이 같은 사람끼리 같이 움직이게 되었다. 무리가 생겼다. 하지만 싸가지 없는 인간이라고 판단되면 같이 여행을 가지 않았다.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이상한 인간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정말 피곤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나를 변하게 했는지 주위 좋은 사람들이 나를 바꿔놓았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인식에 변화가 왔다. 우리가 자주 듣는 이야기 중 여행을 가장 즐겁게 하려면 동행자가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백번 동감한다. 하지만 이는 나 중심적 사고방식이다. 나를 기준으로 나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깔린다. 이게 맞는 것일까? 동행자에게 나의 여행습관까지 포기하면서도 맞춰줄 수는 없는 것일까? 이제야 깨달았다. 남들이 보았을 때 ‘나’라는 인간도 이기적이고 싸가지 없는 인간 중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론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결정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부터 좋은 사람이 돼야 좋은 사람이 옆에 온다는 진리를 말이다. 사람이 사는데 네 가지 ‘연’이 있단다. 혈연, 학연, 지연 그리고 ‘인연’이란다. 그 좋은 인연을 만드는 것은 내 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세월이 알게 해 주었다.

2025-04-10

대통령이 없는 나라

장규열 고문 대통령이 없어졌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 결정은 역사의 한 장면을 강렬하게 새겼다. 최고권력자가 법의 심판을 받았고, 국민은 거리에서 침묵과 함성으로 그 순간을 지켜보았다. 체념과 분노 그리고 마지막 남았던 희망도 사그라진 시간이었다. 대통령이 없는 나라에서 허전함은 곧 혼란으로 남았다. 책임을 못다한 권력의 잔해들로 남았다. 대통령이 없는데도 낡은 권력과 그 잔재는 아직도 곳곳에 살아서 꿈틀거린다. 부패한 권력체계는 단순히 대통령의 퇴진으로 마감되지 않는다. 국정농단의 진실이 밝혀졌지만 일부 세력은 아직도 기득권을 붙들고 움직이고 있다. 경제는 멈췄고 민생은 외면되며 외교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 이후, 한미 간의 대화는 자취를 감췄고, 보호무역주의적 경제공세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 관세폭탄이라는 현실 앞에 대응은 커녕 방향조차 잡지 못하는 게 아닌가. 무책임한 정권이 남긴 그림자가 깊고도 어둡다. 시대를 잘못 짚은 비상계엄으로 문제를 덮으려 했지만 국민은 지혜로왔다. 우리는 달랐다. 대통령이 사라진 날에도 아이는 학교에 가고 지하철은 정시에 달렸으며 국민은 법을 지켰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것은 대통령 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라를 지탱하는 힘은 결국 국민에게 있었다. 우리는 과도기의 한복판에 섰다. 두 달도 못미칠 권한대행 체제는 한계가 있다. 나라가 스러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정권 때문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자정능력과 우리가 가진 민주주의의 회복탄력성 덕분이다. 그렇기에 더욱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의 책략이나 술수에 나라를 맡기지 않는다고. 잘못 사용된 군경의 위협과 ‘장난같은 게엄’이라는 터무니없는 궤변 앞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던 국민이기에 이제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자격이 있다고. 조기대선은 단지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이벤트가 아니다. 우리는 혼란의 끝에서 진짜 질문을 마주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누구를 위한 나라를 만들 것인가.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더 이상 ‘적당히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책임질 줄 알고 공감할 줄 아는 리더를 요구해야 한다. 선택은 단지 희망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사라졌지만, 국민은 깨어 있다. 혼란 속에서도 상처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길을 찾는다.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온 세상을 향해 말을 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아니,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더욱 단단히 붙들었다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온 나라가 한마음이 되었다고. 온 세상이 혹 거꾸로 달린다 해도 대한민국은 국민이 자유롭고 풍요할 내일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갈 것이라고. 국민은 많이 배웠다. 자유와 민주의 고귀함과 헌법을 지켜야 할 까닭에 관해 분명히 깨우쳤다. 주권자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는 권력자는 언제든지 버려질 것이라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경탄하는 중이다. 지난 몇 달이 모두의 위기였지만, 나라의 역사 위에는 오히려 빛나는 시간으로 새겨야 한다. 국민이 살아있어 나라가 안전하다.

2025-04-09

치매와 결혼의 상관관계

홍성식(기획특집부장) 인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불가피하게 주목받는 병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치매’다. 대뇌 신경세포의 손상이 지능, 의지, 기억 따위를 상실시키는 치매는 대부분 노인들에게서 발병한다. 증상에 따라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고, 대여섯 살 철부지 아이처럼 행동하며, 심지어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는 치매는 세상 누구도 걸리고 싶지 않은 병이 아닐까. 이와 관련, 최근 미국에서 발표된 조사 결과 하나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이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낮다’는 것.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 연구팀은 2만4107명을 대상으로 결혼 여부와 인지 장애의 연관성을 오랜 기간 조사했다. 인지 상태에 대한 신경 심리학적 검사와 임상의의 평가가 겸해진 18년 동안의 추적·관찰에 의하면 사별·이혼·미혼인 사람들이 배우자와 함께 생활하는 이들보다 치매 발병 위험성이 40%가량 낮았다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결혼한 사람보다 친구, 이웃과 사회적 교류가 활발했고 보다 자립적이었다. 이런 게 인지 능력 유지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게 연구팀의 부연. 만성 스트레스는 뇌의 신경세포를 손상시키고 사멸을 불러와 치매 위험성을 높인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결혼이란 관계를 불화 없이 유지시키기 위해선 적지 않은 스트레스 속에서 인내해야 한다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결혼을 꺼리는 세태에 더해 과학적 조사 결과까지 나왔다니 앞으론 “나는 치매에 걸리기 싫으니 결혼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드물게 있을 듯하다. 이래저래 결혼이 홀대받는 시대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4-09

연극을 보고 나서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취미란에는 어김없이 책이나 영화를 즐긴다고 적는다. 글눈을 뜨면서부터 책을 찾아 읽더라는 부모님의 말씀도 자주 들었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도 어딘가 구석진 곳에서 책을 보고 있던 아이로 나를 기억해 주니 나의 독서벽은 꽤나 오래된 것임에 틀림없다. 영화를 즐기는 것도 역사가 깊다. 아버지와 함께 간 극장에서 본 ‘콰이강의 다리’가 여전히 선명하다. 대입 공부를 치열하게 하던 고3 때에도 TV 주말의 명화극장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 연극을 처음으로 본 건 고2 때였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오빠가 안톤 체호프 작품인 연극에 배우로 등장한다면서 친구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객석을 채워 주라고 했다. 오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가까이 지내는 친구 몇을 데리고 극장을 찾았다. 어두컴컴한 무대 앞에 몇 되지 않은 의자가 깔려있었다. 무대에 조명이 밝아지자 전통 러시아식 흰옷에 붉은 허리띠를 매고, 목 긴 가죽장화를 신은 오빠가 구부정한 채로 등장했다. 흰머리에 흰 수염을 붙이고 과장적으로 노인 분장한 오빠의 모습이 매우 생경해서 난 괜히 친구들에게 부끄러웠다. 무대 위의 오빠 모습은 이렇게도 기억에 선명한데 그 연극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대학 다닐 때도 국문과의 밤이라는 축제를 하면 당연히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고, 학과의 선후배들과 친구들이 밤낮으로 연습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 가까이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행사 후 찍은 단체사진에 분장한 채로 웃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잠시 부러웠지만 그 정도였다. 연극은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나 보다. 이화회 회원들과 ‘친정엄마와 3박4일’을 본 적이 있었다. 워낙 티켓파워가 있는 배우들의 연극이라 볼 만하다고 관람한 거였다. 잘 아는 내용의 연극에, 배우의 연기는 훌륭했으나 무대가 너무나 큰 극장은 연극 감상을 심히 방해했다. 비교적 앞자리에 앉았음에도 도저히 몰입되지 않아 성에 차지 않았다. 연극의 묘미는 무대 가까이에서 배우의 숨소리와 땀방울을 느끼고 보는 것인데. 지난달 배달된 대구문화 소식지에서 대구연극제 뉴스를 접했다. 연극 일정을 꼼꼼히 살폈다. 안톤 체호프의 ‘고니의 노래’를 택해 맨 앞자리를 예매했다. 원래 희곡은 두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15분짜리 단막극이나 실제 공연은 60분이었다. 지방 작은 극장 68세의 노배우가 연극이 끝난 뒤 프롬프터와 함께 연극 인생을 회고하는 내용인데, 각색이 많이 된 듯했다. 확인하고 싶어 도서관에서 ‘체호프 희곡 전집’을 빌려 읽기도 했다. 힌트가 될 만한 무대 장치, 젊은 배우의 서툰 분장과 연기에서는 오히려 노배우의 노쇠함 대신 청년극단의 활기가 전해졌다. 그러나 앞자리에서 직관한 배우의 땀방울, 거친 숨소리와 먼지내 나는 무대는 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엔 충분했다. 극장을 나서며 오랜만에 오빠와 통화했다. 52년 전 오빠가 공연한 연극 제목이 뭐냐고 물었더니 안톤 체호프의 ‘곰’이라며 첫 대사를 또렷이 기억해 들려준다. “좋지 않습니다. 마님, 몸만 상하실 겁니다….” 전화 너머로 건너온 오빠 목소리에서 아주 잠깐 연극배우의 포스가 느껴졌다. 그 옛날 20대에 늙은 배우를 연기한 오빠는 지금 73살이다.

2025-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