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주목받는 한국 밥상

홍석봉 대구지사장 한국인의 밥상은 어느 나라의 식단보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3대 영양소가 균형을 이뤄 신체에 필요한 적정 비율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곡식과 채소가 주식인 우리의 전통음식이 세계에서 건강한 밥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최근 K-팝 등 한류 바람의 영향이 크다.세계 최고의 건강 식단으로 꼽히는 지중해식 식단도 우리 밥상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지중해식은 채소 위주에 생선과 닭고기, 요구르트 등의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고 지방은 올리브유로 채운다.한국인은 비교적 뚱보가 적다. 적당한 몸매와 건강을 유지하는 데는 우리네 식단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젓가락을 사용하는 식습관도 과식을 피하는 데는 도움이 됐다.50, 60년대 굶주림을 면하고자 초근목피로 보릿고개를 넘기던 시절, 조상은 주위에서 먹을 것을 찾고 온갖 푸성귀까지 먹어야 했다. 이것이 다양한 오늘의 먹을거리가 됐다. 건강 밥상도 조상 덕분인 셈이다. 채소와 곡물 위주의 식단과 어패류 및 미역 등 해산물이 곁들여진 밥상은 고른 영양분 섭취가 가능토록 해 균형잡힌 밥상을 제공했다. 우리 밥상은 열량을 과잉 공급하지 않는다. 주요 음식재료도 열량이 높지 않다. 조리 방법은 영양소의 파괴를 줄이는 방법으로 발전했다. 절묘한 조화다.배추와 무 등 채소를 갖은 양념으로 버무리고 발효시킨 김치는 세계인의 건강식품이 됐다. 김치는 각종 비타민과 산화 및 노화 방지 물질이 풍부해 소화를 돕고 면역력을 높여준다.최근엔 구미에서 수출한 냉동 김밥이 미국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먹을거리 시장에 기린아로 떠올랐다. 한국산 만두와 라면도 큰 인기다. K-밥상이 세계인의 입맛과 건강을 돕는 아이콘이 됐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4-01-29

‘탄소국경세’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지난 연말 우리나라의 한 유력신문에 ‘2023 소셜섹터 10대 뉴스’에 “한국 COP28 핵심 의제 ‘재생에너지 3배확대’ 동참”,“유럽연합(EU) 수입품 대상 ‘탄소국경세’ 시행확정”,“환경부, 일회용품 사용 규제 철회”등 기후환경관련 이슈가 무려 3가지나 들어갔다. 이 이슈들과 관련된 내부사정을 살펴보면 유럽연합을 비롯한 선진국은 기후환경 관련 제도들이 잘 정비되어 이미 실천단계에 들어갔지만 우리나라는 실천을 위한 준비단계에서 많은 갈등과 어려움에 직면해 있음을 보여준다. 기후환경 관련 대응을 우리보다 수십년 앞서 진행해온 유럽 선진국가와 우리나라의 격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탄소국경세’는 2019년부터 준비한 제도로 EU로 수입되는 제품의 생산·이송과정에서 탄소배출량이 EU지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보다 탄소배출량이 많으면 그에 상응하는 배출권을 구매토록 하는 제도이다. 그래서 이 제도는 사실상의 추가 관세 성격의 ‘탄소세’ 부과이고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부상하고 있다. 앞으로 미국, 중국, 일본 등 강대국도 유사한 ‘탄소세’ 제도의 도입을 준비하고 있어 수출중심의 경제체제인 우리나라는 피할 수 없고 반드시 넘어야만 하는 장애물이다.EU는 ‘탄소국경세’ 적용을 단계적으로 확대할 예정인데, 우선 대상품목은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력, 수소 등 6개에 한정하였다. 2023년 10월 1일부터 2025년 12월 31일까지는 전환기간으로 6개 품목의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의무신고 하고, 2026년 1월 1일부터 본격 시행한다. 이번 단계에서 2022년 기준 우리나라 EU 총수출액 681억달러 중 ‘탄소국경세’ 적용 품목 수출액은 총 51억달러(약 6조8천억원)로 7.5% 정도이고, 이 중에서 철강이 45.5억달러(89.3%)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상태 EU수출기업 탄소배출량에 ‘탄소국경세’를 적용할 경우 3천~5천억정도가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어 상당한 가격경쟁력 저하가 우려된다.특히 경북 포항지역 일원에 위치한 포스코와 관련된 많은 기업들은 철강을 직접 생산하는 기업으로 ‘탄소국경세’ 적용 직접 대상이 되며, 대구의 수출 주력산업인 자동차부품, 금속가공, 기계장비 관련 기업들도 간접적 대상이다. 이번 1월 31일이 EU ‘탄소국경세’ 최초 의무신고기한인데, 국내 관련 기업 숫자는 1천700개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해 중소기업중앙회가 중소기업 30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기업의 78.3%는 ‘탄소국경세’에 대해 모른다고 답하였고, EU수출 실적이 있거나 진출계획이 있는 기업 142개 중 무려 54.9%가 ‘특별한 대응계획이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져 허둥댈 상황이 곧 닥치게 된 것이다.이에 대응해 정부는 ‘범부처대응 전담팀’을 운영 중이라고 하는데, 대구경북에서는 보다 근본적 대응이 필요하다. 이번‘제1차 대구광역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에서 제시된 ‘탄소중립 산업구조 혁신’, ‘그린에너지 전환’ 정책 등에서 제시된 사업의 실천이 ‘탄소국경세’ 대응 1차 해법이다.

2024-01-29

‘바이오 보국’과 ‘사이디오 시그마’

김기호 전 포스코인터내셔널 전무 바이오 보국을 향한 포항시의 열기가 뜨겁다. 포항시는 신성장동력으로 바이오산업을 주목하고 착실한 준비를 해왔다. 사실 국내 지방 도시 중 포항만큼 바이오산업을 일으키기에 좋은 곳도 드물다. 3·4세대 방사광가속기를 비롯해 포스텍과 한동대, 포항테크노파크 등 뛰어난 바이오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에 세계 세 번째로 설립된 세포막단백질연구소, 국내 최초의 식물 백신 상용화 시설 그린백신실증지원센터 등 차별화된 바이오 인프라가 집적해 있으며, 그린바이오벤처캠퍼스, 해양바이오메디컬 실증연구센터도 들어설 예정이다. 포스텍 의과대학과 스마트병원 설립에 포항시민 30만 명 이상이 서명한 것도 바이오 보국을 향한 시민들의 열의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바이오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좋은 기업을 유치하는 것이 필수적인 과제다. 그런 맥락에서 포항시는 임종윤 한미약품 사장의 행보에 많은 관심을 보여왔다. 임종윤 사장이 한미사이언스를 이끌던 지난 2020년 6월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에 스마트 헬스케어 단지를 조성하기로 하고 한미사이언스-포항시-경상북도-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 4자 간의 MOU를 체결했기 때문이다. 포항에서 바이오산업에 대한 관심이 증폭한 데에는 임종윤 사장의 당시 결단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지역균형발전의 관점에서 임종윤 사장의 판단은 선구적인 혜안으로 평가할 수 있다.임종윤 사장은 2020년 11월 ‘사이디오 시그마(CYDIO CIGMA)’라는 신용어를 내놓으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는 포스트 코로나19 시대 K-바이오의 진로를 선도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CYber education(사이버 교육), DIgital bio(디지털 바이오), Oral bio(오럴 바이오), CIty bio(시티 바이오), Green bio(그린 바이오), Marine bio(마린 바이오) 등 여섯 분야의 이니셜을 조합한 것이다. 임종윤 사장은 ‘사이디오 시그마’를 실현할 수 있는 최적지로 포항을 지목했다. 세계 각지에서 바이오 관련 사업을 펼쳐온 임종윤 사장의 눈에 포항의 잠재력이 포착된 것이다.하지만 한미약품그룹의 창업자인 임성기 회장이 타계한 후로 그룹 경영권이 불투명해지면서 임종윤 사장의 ‘포항 프로젝트’가 뜻대로 전개될지 물음표가 붙었다. 다행스럽게 ‘포항 프로젝트’의 주체가 임종윤 사장이 이끌어 온 코리그룹으로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코리그룹은 임종윤 그룹 회장이 2009년 홍콩에 설립한 RD 및 바이오 헬스케어 기술투자 기업으로 기업 가치가 1조2천억원 수준에 이른다.‘사이디오 시그마’는 K-바이오가 나아갈 길과 세계적인 바이오 클러스터에 도전하는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더구나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도 정부도 바이오제약산업을 새로운 국가기간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됐다. 기업-대학-지방정부-중앙정부가 유기적으로 협력해 포항에서 ‘사이디오 시그마’를 실현하는 것은 한국 바이오제약의 새 역사를 쓰는 일이라는 점에서 임종윤 사장의 웅대한 포부가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24-01-29

평안도의 가옥, 백석의 시 ‘가즈랑집’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백석(1912~1996)은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경성에서 영어 교사로 지내다가 만주 일대를 유랑하며 작품을 발표했다. 향토색 짙은 토속적인 소재를 평안도 방언으로 재구성해낸 탁월한 시인이었다. 해방 이후 고향에서 시작에 전념했으나 ‘사상 이외 문학성도 중요하다’는 그의 신념 탓에 1957년 즈음 북한 문단에서 숙청되었다.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어 시쓰기를 중단한 후 농부로 암흑의 삶을 살다가 1996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슴’(1936),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38), ‘서행시초’(1939) 등의 시집과 동요집을 남겼다. 그의 시는 모두 일제강점기에 쓰였고 시집들도 그때 발간되었다. 그가 경성에 머무는 동안 만났던 그의 영원한 연인 기생 김자야와의 짧고도 영원한 사랑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준다.그의 시는 전통적인 고향마을의 생활 속 소재들인 동식물, 민속, 음식 등 전반에 걸쳐 방언 시어들의 파편이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나라를 잃은 한 예술가가 탐해온 아릿하게 멀어져 가는 옛것에 대한 습속과 습성과 대상이 고향이라는 한 정점에 몰려 있다. 옛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향하는 구심력과 동경과 경성이라는 모던한 현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그의 시작품 속에는 옛것과 추억과 현재성이 보석처럼 알알이 박혀있다.그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가즈랑집’이라는 시는 고향 촌락의 다양한 추억과 전설이 함께 어울려 빚어내는 작품이다. ‘가즈랑집’은 이 작품의 배경인 셈인데, 오래되었고 낡아 귀신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타날 듯한 집이다. 시인의 유년 시절의 추억인 가즈랑 고개의 무당 할머니가 살았던 추억의 현장이다. 쇠메를 든 도둑과 ‘승냥이’가 출몰할 만큼 외딴 집이다. 아슴한 기억의 공간을 배경으로 얽힌 몇 가지 에피소드로 엮어진 서사적 구성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가즈랑집’이 단순한 가즈랑 고개에 있는 낡은 집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 ‘가즈랑’의 어원은 일본어 ‘가스라(かずら,葛·蔓)’이다. 칡덩굴이 뒤덮여 있는 오래되고 낡은 집이라는 뜻이다. 산짐승인 승냥이가 슬며시 지나가고 가끔은 산적도 출몰했던 가즈랑 고개에 얽힌 전설같은 추억으로 서사화된 작품이다. 교묘하게 ‘가스랑 고개’와 칡덩굴을 뜻하는 일본어 ‘가스라’가 일치하는 배경이다.산짐승이 가축을 물어간 이야기를 들려주던 신당집 가즈랑 할머니가 태어나자마자 시렁에 올리면서 명이 길게 오래오래 살도록 시렁귀신에게 수양아들로 팔았다는 시인의 태생적 비밀과 성장하면서 경험했던 시골 토속 음식을 기억한다. 유년기의 경험인 “울다가 웃으면 밑구멍에 털 난다”는 개구쟁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와 과거와 현재를 가로세로로 서사를 얽어낸다. 그 이야기 속에는 토속적인 방언들로 꼭꼭 메워져 있다. 이 시에서는 동물이나 식물 이름, 음식 이름, 가옥 이름, 민속과 관련된 이름 하나하나에서부터 질병 이름, 놀이 이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평안도 방언들이 나타난다. 마치 평안도 민속어사전이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토속어가 오롯이 모여서 한 편의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깽제미(꽹과리), 구신집(귀신집), 당즈깨(당세기, 고리짝), 수영(수양, 데려다 기른 아들이나 딸), 아르대즘퍼리(아래쪽에 있는 진창의 펄)는 평안도 사람이 아니면 그 뜻을 새기기도 힘든 방언들이다. 돌나물김치나 백설기, 도토리묵과 도토리범벅은 알 만한 음식이름이다. 그러나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히순,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 광살구, 당세는 식용 나물이거나 독초를 식용으로 가공한 나물음식의 이름을 평안도 사람이 아니면 누가 알까. 백석의 시에는 특히 평안도의 가옥구조와 관련된 매우 다양한 방언이 등장한다. ‘가즈랑집’을 비롯하여 옛 가옥을 구성하는 다양한 시어로 그려내는 마을의 골목골목이 정겹다. ‘곱새녕(이엉), 곱새담(풀, 짚으로 엮은 담), 돌 능와집(얇은 돌조각으로 이은 지붕), 딜옹배기(아주 작은 자배기), 섬돌(토방돌), 아르·(아랫목), 아릇간(아랫방), 울파주(대, 수수깡, 갈대, 싸리 등으로 엮어놓은 울타리), 재통(변소), 마가리(오막살이), 국수당(서낭당)’과 같이 옛날 서민들이 살았던 산골마을의 민속적인 전경이 펼쳐진다. 칡덩굴이 뒤덮인 외딴집 ‘가즈랑집’을 중심으로 하나의 민속마을을 복원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평안도 방언이 구사된 백석의 시이다.

2024-01-29

신의 피가 흐른다는 알렉산드로스의 최후

기원전 356년 7월 폭풍우가 쏟아지던 날 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는 전쟁터에서 알렉산드로스 출산 소식을 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아내 정조를 의심하기 시작했다.우리 속담에 ‘친아버지 도끼질하는 데 가지 말고, 의붓아버지 떡 치는 데 가라’란 말이 있다. 아버지 눈 밖에 난 알렉산드로스 옆에는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있었다. 그녀는 어린 알렉산드로스에게 신의 피가 흐른다고 믿게 했다.기원전 336년, 향년 46세였던 필리포스 2세가 피살당하자, 알렉산드로스는 군부의 강력한 지지로 왕위에 오른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린 그를 얕본 그리스 도시들의 반란을 잠재운 뒤 동방으로 눈 돌린다.기원전 334년, 22세의 알렉산드로스는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페르시아 원정길에 오른다. 그의 옆에는 동갑내기 명마 부케팔로스가 있었다. 그라니코스강 전투를 시작으로, 미트레스, 판퓨리아, 프리기아, 카파도키아를 점령하면서 손쉽게 아나톨리아를 완전정복한 뒤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해군 본거지 키리키아를 향해 진군하는 도중에도 저항 없이 수도 타르수스에 도착하였다.알렉산드로스는 그곳에서 풍토병 키리키아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여름이 지나면서 회복 기미를 보였다. 이때 다리우스 3세가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 왔다. 알렉산드로스가 이소스로 떠난 뒤였다.기원전 333년, 두 군대가 이소스에서 마주했다. 군사력에선 우위에 선 다리우스 3세였으나 전술 면에서 알렉산드로스가 한 수 위였다. 다리우스는 상처를 입고 도망쳤다. 알렉산드로스는 티루스를 7개월이나 걸려 힘들게 점령하고, 기원전 332년 가을, 남쪽으로 내려가 이집트의 나일강 어구에 ‘알렉산드리아’ 도시를 세운다. 기원전 331년, 페르시아 옛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로 향했다. 이들은 성문을 활짝 열며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잔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용했다. 약탈은 재물, 살육, 강간, 방화를 동반한다. 죽음을 부르는 비명은 검은 연기와 함께 페르세폴리스 하늘을 메웠다.신의 피가 흐른다고 믿었던 알렉산드로스는 100여 년 전, 신성한 아테네가 페르시아에 의해 화마에 휩싸였던 과거를 떠올렸다.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예술의 결정체, 화려하면서 왕권을 드높인 왕궁, 장엄한 도시가 화마에 휩싸인 채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즐기며 자신의 신성성을 확인하였다. 이때 그도 엄청난 금은보화를 손에 넣는다.한편 페르시아 대왕 다리우스는 박트리아 총독 베소스의 배신으로 비장한 죽음을 맞이한다. 다리우스 시체를 확인한 알렉산드로스 분노를 샀다.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힌두쿠시산맥 넘어 베소스를 추격했다. 도망친 베소스 역시 그가 그랬듯 스피타메네스 배신으로 사로잡혔다. 그는 코와 귀가 잘려 나가고, 다리우스 3세가 죽은 장소에서 처형된다.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강행군에 지칠 대로 지친 군사가 문제였다. 전리품도 챙겼겠다, 다리우스 3세가 죽었으므로 고향에 돌아가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의 패자가 되고 싶었다. 기원전 327년, 드디어 카이바르 고개를 넘어 인도 펀자브 지방에 들어서면서 히다스페스강에서 코끼리로 중무장한 포로스 왕과 일전을 치른다.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의 힘을 역이용해 승리를 거둔다. 이때 알렉산드로스의 명마 부케팔로스가 치명상을 입는다. 기원전 326년 6월, 태어난 지 서른 해, 그와 함께한 지 18년이 되던 해다.알렉산드로스는 갠지스강 계곡에 도착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미지의 땅으로 들어가는 데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들은 지쳐 있었다. 더한 것은 그들도 인간이기에 가슴에 벌집처럼 숭숭 구멍을 뚫어버린 향수병이었다.“나를 따르라!” 알렉산드로스의 외로운 외침은 의미를 잃었다. 결국 대단원의 원정을 마쳐야 했다. 선택! 병사들에겐 귀향이란 정곡을 찌르는 판단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발길을 돌렸다. 피를 부르며 질풍노도처럼 밀고 왔던 그 길을 내려 걷는 그의 가슴은 허무 자체였다.정신력이 시들하면 체력도 함께 떨어진다. 그의 신은 신으로서 영역을 딱 거기까지만 허락했다. 회향을 거듭하며 바빌론에 도착했다.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알렉산드로스는 부케팔로스가 죽은 3년 뒤 기원전 323년, 33살의 나이로 말라리아에 걸려 그곳에서 객사한다.메타인지, 즉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가 중요하다. 알렉산드로스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신의 영역에 가둠으로써 기능을 잃었다. 풍토병에 걸렸을 때, 부케팔로스가 죽었을 때, 부하들이 회향을 주장했을 그때 하늘의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후 치세를 쌓든, 악정을 펼쳤든, 33세 젊은 나이로 객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1-29

선거를 치르려면 돌팔매라도 맞아라

김진국 고문 국민 10명 중 7명(69%)은 윤석열 대통령이 김건희 여사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주 엠브레인 퍼블릭 조사다. 윤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도 63%가 해야 한다고 응답했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윤 대통령이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사퇴를 요구했다는 뉴스가 터지자 보수층이 경악했다. 이러다 총선이 쫄딱 망하게 생겼다는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겨도 되는 일이 없었다. 국회를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어서다. 총선을 기대했는데, 그것마저 말아먹을 분위기다.바둑을 둘 때 훈수꾼이 되면 자기 급수보다 2, 3급은 더 잘 보이는 법이다. 막상 돌을 쥐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다. 욕심이 앞선다. 실수로 놓은 돌에 집착하게 된다. 이미 저질러놓은 실수를 인정하기 싫다. 어린아이는 본성에 따라 움직인다. 철이 든다는 건 감정을 조절하고, 절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치 9단이 별 건가. 욕심과 집착, 사적 인연에 얽매여 사리 판단을 흐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면 9단이다.이번 사태에서 가장 노발대발한 사람은 누구일까. 민주당 고민정 의원은 KBS에 나와 “바보같이 뒤통수를 맞고 다니느냐는 말을 할 사람은 김 여사뿐”이라고 말했다. 친윤계 의원들이 “피해자에게 왜 사과하라고 하느냐”, “사과하면 민주당 공격을 받아 선거에서 불리해진다”라는 말을 흘릴 때도 김 여사가 떠올랐다. 이 바람에 그동안 사사건건 거론된 영부인 국정 개입설을 더 많은 사람이 사실이라고 믿게 됐다.윤 대통령은 조만간 KBS와 대담하면서 ‘명품 백’에 대해 해명할 생각인 모양이다. 최순실 사태로 궁지에 몰려 있던 2017년 1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규재TV’ 인터뷰가 생각난다. 박 전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은 하지 않고 유튜브 방송과 대담한 건 참으로 엉뚱했다. 스스로 조롱거리가 됐다.기자회견을 거부한 것은 대통령의 답변이 궁색하다고 인정한 꼴이다. 유튜브 방송을 선택해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지고, 고립됐음을 보여주고, 상황을 편협하게 왜곡되게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그런 지경에서도 귀를 열지 못하고, 극단적 지지자로부터 위로받고 싶었던 셈이다. 그러니 사과를 제대로 못 했고, 그것도 여러 번 실기(失期)했다.문재인 전 대통령도 기자회견 대신 방송 대담을 선택했다. 2019년 5월 KBS와 임기 2년을 정리했다. 그것마저 찬양 일변도의 질문을 하지 않는다고 ‘문빠’들은 인터뷰 기자를 공격했다. 퇴임 직전에도 JTBC의 손석희 사장과 대담했다. 그것을 본 시청자들은 문 전 대통령을 ‘별에서 온 사람’ 같다고 했다. 여론과 동떨어진 자화자찬으로 일관한 탓이다.기자회견으로 정면 돌파하는 게 옳다. 현실에 눈감고, 칭찬만 들으면 행복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명한 대통령이라면 현실에 발을 디뎌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9년 ‘옷 로비’ 때 ‘마녀사냥’이라며 화를 냈다. 그러다 보궐선거를 망쳤다.‘명품 백’ 사건은 대통령실이 지적한 대로 비열한 공작이다. 아버지까지 들먹이며 명품 백을 선물해놓고, 그걸 몰래 찍어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하니 복장이 터질 일이다. 그러나 불법이냐 아니냐,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리는 법정이 아니다. 지극히 공적인 대통령 부부와 국민 사이의 문제다.더구나 이 폭로가 없었다면 영부인은 최재영 목사에게 대북 강연도 시키고, 대북사업도 도와주었을 것 아닌가. 대통령 부인이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과 그렇게 긴밀히 접촉하고, 수상한 사람이 몰카를 들고 대통령 부인을 만나도, 방송할 때까지 몇 개월을 모르고 있어도 괜찮은 건가. 아니면 더 큰 일이 터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사과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대담이 아닌 기자회견이어야 한다. 그와 별도로 김 여사까지 직접 사과하면 더 좋다. 선거 이후를 생각한다면 무엇이 두려운가. 돌팔매를 맞지는 못하더라도, 진심을 담아 설명하고, 사과해야 국민의힘이 선거를 치를 수 있다. 자신을 비우고 양보할 줄 아는 그런 영부인을 국민은 기대하고 있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1-28

기록물 산책

이준걸 전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금세기 최고의 지성 아놀드 토인비에게 한국의 어느 석학이 조심스레 한국 방문을 청하자 즉각 무안을 준다. 그 도전과 개혁의 늙은 역사가의 대답은 단호했다. “천년이나 한 왕조가 존속한 그런 꽉 막힌 역사를 지닌 나라에 갈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오만해지면 그 어떤 비판도 비난으로 들리고, 독선에 빠지면 그 어떤 잘못도 소신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여운은 한동안 뇌리에 감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물었다. “만약 지구가 멸망해서 다른 별로 이주할 때 오직 한 가지만 가져가야 한다면 무엇을 가져가겠느냐”고 하니 천하의 옹고집인 그도 촌각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의 가족제도인 ‘족보’를 가지고 가겠노라”고 대답했다.사실 책은 무생물이기는 하나 입 없이 말하는 살아있는 정혼(精魂)의 응결체로 얼이 담긴 그 서적을 두고 어느 지성인은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선물로 받지 않고 인간의 정신으로 창조해 낸 그 수많은 물건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책의 세계다”라고 한 말은 인간이 언어동물로 남아 있는 한 변함없는 만고의 진리이다.집필자는 항상 편식은 몸을 상하게 하지만 편견과 곡학 그리고 표절의 낙인은 천형(天刑)보다 무서우며 때로는 붓을 꺾게도 하고 오히려 성명(性命·인성과 천명)까지도 해치는 흉악무도한 현상으로 뒤돌아 온다는 것을 명심하고, 보편타당성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학문은 사실에 기초한 ‘해석’에 치중하다 보면 흔적을 찾아 본체에 접근하는 외곬이 있을 뿐 타협을 모른다. 그러므로 학문탐구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창조의 길이며 고독한 구도자의 길이다.책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이라 미진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모자람은 보태고 넘쳐 남은 깎기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덧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인(古人)을 사귀게 되고 수백 년 뒤의 벗에게 자신을 확인시키는 것도 책만이 내 비치는 묘한 아량의 매개체이다.책 속에 빛깔은 없다 하나 학문의 연마에 따라 눈 큰 사람에게는 문장의 광채가 눈부시게 비쳐 그 문채가 선명하게 어릴 것이다. 그리고 책의 소리는 열린 귀에는 들려 책의 기운이 꿈틀 거려 서권기(書卷氣)가 이글거리고, 문자의 향기는 천지간으로 퍼져 오래 머물며 난향 백리에 그 십 배를 더한 묵향천리라고 하나 덕향(德香) 만 리에는 아직 못 미친다.‘화안(畵眼)’이란 글에 그림 재주는 타고난다. 다만 보강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만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여행한다는 독만권서(讀萬卷書)에 행만리로(行萬里路)라는 글귀가 보인다. 사실 독서는 심성을 풍요롭게 하는 보충일 뿐 아니라 본성까지도 개조하고 변환하는 힘을 가진 영물체이다. 그러므로 한 나라의 과거를 보려면 박물관에 가고 미래를 보려면 도서관을 가 보라는 말이 있다.미국 의회도서관에 수년 전에 인류 최초로 개발한 유물전시회에 세계 최고(最古)의 인쇄물인 ‘직지심체요절’(세계기록유산)을 소개했다. 지난 1천년 동안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문화사적 사건으로 금속활자 인쇄술은 한국인이 처음 발명했다. 그리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활자를 발명해 문명을 혁신시켰다는 서구인들의 일반 상식과 달리 최고의 금속활자는 한국인이 발명하였다”는 내용의 광고를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워싱턴 포스트’지에 크게 실었다.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독창적인 언어 문자와 가옥 구조의 온돌 및 의복과 음식 그리고 세시 풍속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소홀히 다룰 수 없고, 한국이란 본질의 실상을 알고 보면 우습게 보다 가는 큰 코 다치는 문명의 자긍심이 대단한 예사롭지 않은 나라임을 알게 될 것이다.2024년으로부터 578년 전에 태어난 ‘한글’은 기계식 타자기에 입력이 용이한 음소문자(音素文字)체계로 무려 1만2천여 자의 소리 값을 가져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정보기술(IT) 시대에 적합한 문자로 인정받고 있다. 이 외에도 지적 보고로 대표적인 것은 ‘팔만대장경판’으로 1236년에 시작해 1251년에 완성한 16년이 걸린 노작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은 1392년부터 1863년까지 472년간의 시정기(時政記)이며, ‘승정원일기’는 1623년부터 1910년까지 288년간의 시정기록으로 위의 3종류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의 문화유산은 인류의 자존심이고 인류의 생존 흔적이다.이러한 나라의 역사를 그토록 오랫동안 편년체로 기술한 나라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유구한 전통을 가진 문명의 민족만이 기록 유산으로 남긴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사실 세월에는 망각이란 허상이 찾아오고, 기록에는 추억이란 실상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비단 천년에 신라지 만 년’이란 말은 그만큼 제지술의 발전은 서책 간행에 큰 영향을 미쳐 기록문화에 많은 진전을 보았다는 의미이다.이 모두가 세계사적 정신문명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아무튼 기록에서 해가 뜨고 기록에서 해가 저문 집념어린 노작에다 외곬의 깊은 뜻은 “무딘 붓이 총명을 이긴다”는 일념으로 살아 온 우리 조상들이 문명의 선각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2024-01-28

윤석열 정부의 재생에너지 정책에 분노한다

위현복 (사)한국혁신연구원 이사장 18세기 후반 석탄 에너지를 핵심으로 하는 1차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일어났다. 석탄에너지 기반의 영국 산업은 철도와 증기선을 바탕으로 5대양 6대주에서 해가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고 20세기 전반기까지 세계를 지배하고 세계 문명을 선도했다. 20세기 석유 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미국의 산업은 1차 세계대전 끝나는 시점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까지 25년 정도에 걸쳐 석유 에너지 바탕의 2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며 세계경제를 이끌어가는 선도국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기후위기로 인해 1, 2차 산업혁명의 원동력이었던 석탄, 석유, 가스 등 화석연료 기반 에너지가 계속 재생이 가능하고 탄소배출이 제로인 태양광, 풍력, 수력 등 “자연에너지”로 대체되고 급격하게 퇴출될 환경에 처해있다.현재 이러한 변화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지역이 유럽과 중국이다. 1차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유럽은 다시 한번 글로벌 선도국가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재생에너지로 에너지 전환이라는 시대적인 조류를 간파하고 총력 질주하고 있다. 그리고 뒤늦게 재생에너지로 에너지전환의 중요성을 깨달은 중국이 국가적 과제로써 에너지 전환을 주도해 나가며 에너지전환의 세계 주요 플레이어가 되고 있다. 미국은 기후위기 대응이 향후 번영과 경제 안보를 제공할 것이라는 진단 아래 민주당 정권에서는 에너지전환에 대단히 적극적이다. 하지만 공화당 정권에서는 특정 화석연료 중심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발목 잡혀 아직 정권에 따라 혼미한 상태에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미국 또한 시대 조류를 놓치지 않으려고 IRA(인플레 감축법) 등을 통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 같다.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교토의정서가 협정될 당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부터 6명의 대통령이 취임하고 정권이 네 번 바뀌었으나 에너지전환은 제자리걸음이고 보수정권이든 진보정권이든 막론하고 에너지 대전환이라는 시대 조류에 대해선 눈을 감았거나 혹은 뒷걸음질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제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재생에너지 50%를 넘어섰고 중국도 30%를 넘어섰으며, 미국과 일본도 25%를 넘어섰고 OECD 평균도 35%를 넘어섰는데 우리는 아직 10%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지경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재생에너지는 제자리에서 맴돌고,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생태계는 LNG에 원자력까지 보태서 에너지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한 것 같다. 산업 또한 핵심인 기후대응과 에너지 전환은 뒷전인 채 주변부인 전기자동차, 2차 전지, 전기 배터리, 반도체 등에 집중하고 있다.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되어 핵심인 재생에너지는 빠진 채 주변부 중심의 산업정책 추진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조차 두렵다.세계 주요 나라들이 모두 에너지전환을 위해 동(東)으로 가고 있는데 우리만 선진국들이 왜 동으로 가는지 모른 채 LNG와 원자력을 껴안고 서(西)로 달리고 있다. 우리보다 후진국이라 생각했던 중국조차 재생에너지 시대야말로 이제 중국이 세계를 선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국력을 총집결해서 돌진하고 있는데 우리만 두 눈 감고 LNG발전소 짓고, 원자력에 목숨 거는 듯하다.문재인 정권의 탈 원전이 비난받는 것은 아직 수십 년 더 쓸 수 있는 원자력 발전소를 느닷없이 멈춰 세운 탓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탄소중립, 재생에너지 외면은 시대조류에 역행하는 것이어서 비난받는 것이다. 2011년 블랙아웃 뒤 ‘GREEN GROWTH(녹생 성장)’를 부르짖던 이명박 정부가 추가 발전설비를 계획하면서 700만kW 이상의 발전소를 17조 원의 돈을 들여 석탄발전소로 계획하고 건설한 시대착오적인 패착으로 인해 아직 우리나라가 재생에너지 후진국을 헤매고 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탄소중립 역행은 에너지전환이라는 3차 산업혁명의 선도국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낙오자로 전락할 수 있는 정책이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다.1960년대 들어서서 산업화를 시작한 우리나라는 다행히 산업화라는 시대 조류에 편승해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기적적으로 산업화를 달성한 시대적 행운아다. 그런 우리나라가 위정자들의 잘못된 판단과 무지와 무능으로 인해 탈산업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길을 잃고 미아가 된 듯하다. 산업화 시대의 막내로 탈산업화하기에 가장 좋은 산업조건을 갖춘 우리나라가 무지하고 무능한 지도자들 탓에 전 세계가 모두 동(東)으로 가는데 한국만 서(西)로 달리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지금이라도 “뒤로 돌아 앞으로!”라는 구령을 외쳐 시대 조류를 따라간다면, 국가가 의지를 갖고 더 빨리 움직인다면 에너지전환시대에 중국 못잖은 세계 주요 플레이어가 될 것이라는 게 외부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더 머뭇거리다가는 영영 낙오자가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정신 차려 방향을 똑바로 잡아간다면 아직 우리나라가 선도국가가 될 기회는 남아있다.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만 에너지전환으로, 재생에너지를 통한 에너지 자립으로 나아간다면 말이다.

2024-01-28

공(空)과 색(色) 사이에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 ‘반야심경’을 이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첫 번째 문장인 것 같다.“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깊게 행하실 때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함을 밝게 깨우치시어 모든 고액(苦厄)을 뛰어넘으셨다.”여기서 ‘오온’이라 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섯 가지를 일컫는다. 대상을 보고,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판단하는 다섯 가지가 오온이다. 이 문장을 통찰할 수 있다면, 이후의 모든 내용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온이 어째서 모두 공한지,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첫 문장이 막히기 때문에 이후의 전체 이해가 불가능해진다. ‘반야심경’에서 세간에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무상정등각자(無上正等覺者)는 그 앞에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이란 전제를 제시한다.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고 한 연후에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란 명쾌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3년 넘어 4년이 가깝도록 나는 이 문장에서 꽉 막혀 멈춰 서 있다. 몇몇 사람에게 묻기도 하고, 책을 찾아 읽기도 하고, 유튜브를 보기도 했으나, 딱히 명료한 깨우침은 구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근자에 ‘양자 물리학’에 관한 책을 읽다가 암시와 만난다. 뉴턴이 대표하는 고전 물리학과 달리 현대 물리학은 미시세계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현대 물리학의 꽃이라 할 양자역학은 무엇보다도 빛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속성, 입자성과 파동성에 주목한다. 하나의 물질에 두 가지 속성이 있다는 것은 고전역학의 근본체계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영의 이중슬릿 실험으로 빛에 두 가지 속성이 있음은 200여 년 전에 확인되었으나, 20세기 20년대에 이르러 서로 상충하는 속성이 밝혀진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가 폭넓게 수용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발원하는 이른바 ‘슈뢰딩어의 고양이’는 아직도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중첩과 관찰자란 개념이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예를 들어보자. 초저녁 하늘을 보면 보름달이 뜰 무렵 동남쪽 하늘에 오리온자리가 환하고, 북쪽으로는 카시오페이아자리가 선명하다. 카시오페이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북극성이 환하게 빛난다. 이들은 날마다 밤하늘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지만, 우리가 보지 않을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와 관계가 없을 때는 별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아인슈타인의 물음, 즉 “내가 저 달을 보고 있지 않다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는 사태의 핵심을 찌르는 구절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상호관계함으로써 존재하는 셈이다. 관찰자인 내가 없다면, 이 세상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적인 결론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본체가 환하게 드러난다.김춘수 시인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일갈은 양자역학과 ‘반야심경’의 핵심을 관통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2024-01-28

깨진 유리창

우정구 논설위원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은 ‘깨진 유리창 이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어떤 건물이 유리창이 깨진 채 방치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건물주가 건물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던 어느 날 그 앞에 하나둘 쓰레기를 갖다버리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돌을 던져 다른 유리창을 깨는 일들이 생기면서 급기야는 그곳의 모든 유리창이 깨진다. 건물은 버려진 건물로 인식돼 이 일대는 강력범죄가 일어나는 무법천지로 변하게 된다.깨진 유리창 이론은 낙서나 유리창 파손과 같은 경미한 범죄를 방치하면 큰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론을 근거로 한때 지하철 치안이 엉망진창이었던 뉴욕시가 범죄를 줄여나가는 데 성공을 거두게 된다.깨진 유리창 이론에 입각해 생겨난 것이 무관용의 원칙이다. 사소한 규칙위반에도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과 질서를 초반부터 엄하게 잡겠다는 뜻이다.미국의 대부분 명문 사립학교는 제로 톨러런스(Zero Tolerance)원칙 즉 무관용의 원칙이 지켜진다고 한다.평소 착실한 학생일지라도 마약·음주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면 학교에서 추방을 당한다. 1차 경고 등 몇차례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는 우리사회 분위기와는 다르다. 무관용의 원칙은 명확한 원칙과 일관성이 장점이다.최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정치테러를 보면 우리사회의 근본 기강이 흔들린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앞으로 어떤 일이 또 더 벌어질지 불안해지기도 한다. 깨진 유리창처럼 우리사회가 방치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1-28

탄핵이 능사는 아니다

유영희 작가 며칠 전, 이언주 전 국회의원이 현 대통령의 지지도가 25%라면서 이 정도면 탄핵 수준이라고 말하는 영상을 보았다. 언제부터 대통령 탄핵 이야기가 나왔는가 살펴보니, 검색으로는 2023년 6월부터였다. 그러다 11월이 되면서 탄핵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 지지도 추이를 찾아보았다.문재인 전 대통령은 첫해에 7, 80%에서 점차 내려가기는 했으나 임기 내내 높은 지지율을 보였고 마지막까지 41.4%로 퇴임하였다. 2012년에 당선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2014년을 포함해서 임기 내내 4, 50%대의 지지율을 유지하다가 2016년 10월에 11%대로 떨어진 후 11월에 한 자리 숫자를 기록하면서 탄핵되었다.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퇴임하던 해 1년 동안 내내 23% 정도를 기록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초창기에 60% 지지율을 기록한 적은 있으나 그 후 임기 전반에 걸쳐 20% 대가 많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의회에서 탄핵 소추를 받기는 했으나 지지율이 낮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임기 후반 2년간 지지율은 20% 중후반 대가 많았다. 이보다 더 지지율이 낮았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10%대였다.동영상 하나로 이렇게 뜻하지 않게 역대 대통령의 재임 기간 지지율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이런 기록을 보면, 10%대도 있었고, 탄핵된 대통령의 지지율은 한 자릿수였다. 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다고는 할 수 없으나 아무리 봐도 탄핵될 만큼 치명적으로 낮은 것은 아니다. 지금 지지율이 25%라고 탄핵을 꺼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대통령 탄핵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정도가 파면을 정당화할 정도로 심각할 경우에만 할 수 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의회나 헌재가 파면한다는 것도 부담이고, 탄핵 이후의 혼란과 비용 등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당한 정책 결정이나 정치적 무능력으로 야기된 행위로는 탄핵할 수 없고 국민에게 확실한 이익이 있을 때만 해야 한다. 정책의 부당함이나 무능이라는 기준은 다툼의 여지가 많아서 이런 일로 탄핵하면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분열과 갈등에 빠진다.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후 여러 행보를 보면 민망한 것이 많다. 영국 여왕 조문에 참석하러 갔다가 정작 참배는 하지 않는 해프닝도 있었고, 파리에서는 기업 총수를 불러 폭탄주를 돌렸다는 등의 뉴스에 얼굴이 붉어진다. 중국과의 외교 마찰은 더 큰 실책이다. 10위권 안에 들던 경제 성장률 세계 순위가 작년에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났고, 대출을 부추기는 부동산 완화 정책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김건희 여사 리스크도 크다.그렇지만 법을 아는 사람이 25% 지지율을 근거로 탄핵을 운운하는 것은 무책임할 뿐더러,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의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탄핵이라는 방법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할 뿐이다. 정치인들은 정도를 지키면서 대안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2024-01-28

혁신의 성공을 위한 트라이앵글

엄주선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많은 회사가 지속 발전하고 더 많은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 그 시대에 필요하거나 최고의 성과를 창출하는 기업의 혁신활동을 도입한다. 제철업의 경우도 초기 도입기에는 일본기업의 품질개선 방법인 제로디펙트 활동을 시작으로 성장기에 들어서는 현장 설비 개선을 위한 자주관리 활동을 거처 성숙기는 데이터에 근거한 일하는 방법의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모토로라사의 경영혁신 방법론인 식스시그마를 도입 추진하였다.2000년대부터 국내 유수의 기업들이 이 식스시그마 경영혁신 활동을 유행처럼 도입하여 추진하였으나 현재도 지속하는 기업은 거의 없다. 식스시그마를 경험한 사람이 본인 업무에 부분적으로 적용하거나 스마트 팩토리(Smart Factory) 구축과 연계하여 분석기법을 사용하여 공장을 자동화 지능화 하는데 일부 활용하는 정도이다. 이는 한번 도입한 혁신활동이 그 회사 고유의 문화로 자리매김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하기란 매우 어렵고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방증일 것이다.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혁신활동이 장기적으로 기업의 문화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3가지가 만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Top의 혁신에 대한 지속적인 의지 표명과 리더십의 발휘이다. 토요타 자동차의 사례를 보면 1937년 자동차 회사가 설립되면서 시작한 도요타생산방식(TPS)으로 불리는 혁신활동을 87년째 지속하고 있으며 위기가 있을 때마다 도요타생산방식의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경영진이 앞장서서 주창한다. 일례로 2009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일가족 4명을 태운 렉서스 승용차가 급가속으로 4명이 사망한 사고로 촉발한 페달게이트라 불리는 리콜 사태가 있었다. 도요타의 경영진이 미국 청문회에 출석하여 해명과 사과를 하고 전세계에 1000만대가 넘는 리콜을 실시하였다. 이듬해 8월 토요타 조 후지오 회장은 전 일본 도요타자동차 관리자 수천 명을 모두 한 곳에 모아서 도요타생산방식의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눈물을 흘리며 강조하였다.둘째는 혁신이 일과 일체화되어야 한다. 토요타자동차의 경우는 한 축은 필요한 물건을 낭비없이 생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조달기간(Lead Time)을 단축하는 생산성 향상과 직결되어 있다. 또 한 축은 팔리는 물건만 생산하기 위해 불량이 발생하면 설비가 자동으로 정지하고 불량을 만들지 않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사람의 지혜를 발휘하는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종적으로 이 두 축은 생산원가를 줄이도록 작용한다.셋째가 혁신 활동을 잘 이해하고 지속할 수 있는 인재를 꾸준히 양성하는 것이다. 토요타 직원들은 토요타생산방식의 창시자인 오노 다이이치의 몇 대 제자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현 토요타 아키오 회장을 포함한 1대 제자가 3명이 있고 이 3명이 각기 3명씩의 제자로 명맥이 이어진다고 하였다.도요타 자동차를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수도 없이 벤치마킹하고 따라하고자 하지만 쉽게 안되는 이유는 일관되게 경영진이 강조하고 일과 혁신이 일체화되어 개선을 통해 사람이 성장하고 이를 지속 전승하는 문화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2024-01-28

시민을 위한 녹색복지, 그린웨이의 끊임없는 확장

이강덕 포항시장 지금은 한겨울이라 다소 한적하지만 날씨가 조금이라도 풀리면 철길숲을 따라 걷는 수많은 시민들의 활기찬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혈액 순환과 면역력 강화 등 걷기 운동의 탁월한 건강 효능이 알려지고 있어 철길숲을 내딛는 시민들의 건강한 발걸음이 더욱 반갑게 다가온다.어느 연구결과에 따르면 도시숲은 심신에 안정을 줘 우울증상을 완화하는 효과도 있다고 알려진다. 이뿐 아니라 도심 열섬 현상과 미세먼지를 저감하는 효과 또한 상당하다고 한다.산업화 시대에는 도시 구조에서 속도와 효율성만이 강조됐지만, 지금은 얼마나 쾌적한 정주여건을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있는지가 도시 경쟁력의 중요한 척도가 되고 있다.특히, 도심 속 숲과 공원의 가치가 갈수록 부각되면서 여가와 휴식을 위한 녹색 공간의 존재가 도시의 품격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우리시가 추진하고 있는 ‘그린웨이 프로젝트’는 회색 산업도시로 알려진 포항을 지속가능한 녹색 생태도시로 변화시켜 누구나 살고 싶은 쾌적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변화시켜 나가는 미래 비전이다.포항시는 2016년부터 바다와 산, 도심을 3대 축으로 철길숲과 미세먼지 차단 도시숲, 해안둘레길, 자연휴양림 등 다양한 ‘녹색 복지’ 인프라를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다.대표 사업인 철길숲은 동해남부선 폐철도 부지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한 선형 도시숲이자 그린웨이의 중심축이다. 우현동 유성여고~유강 정수장까지 총연장 9.3㎞ 구간이 조성됐고, 지난해 10월 상생숲길 인도교가 준공되면서 형산강 남쪽까지 시민들의 발길이 편리하게 닿을 수 있게 됐다.이 길을 따라 수많은 나무와 꽃을 심고, 운동기구와 분수 등을 설치해 마치 ‘내 집 앞 정원’처럼 시민들이 애용하며 큰 사랑을 보내 주고 있다.많은 사람들이 모이면서 철길숲을 따라 노후화된 주택과 공터가 말끔한 카페와 식당으로 바뀌고 골목상권에 뜨거운 활기를 불어 넣어 자연스레 도시 재생도 이뤄지고 있다.국내외 녹색도시·경관 분야 평가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성과를 인정받고 있는 철길숲은 포항의 자랑이자 자부심이기도 하다.이와 함께 송도솔밭과 오어지, 형산강 둔치 등 도심과 강변, 해수욕장 등 곳곳에도 맨발걷기 좋은 맨발로(路) 등 다양한 둘레길과 도시숲을 마련했다.특히 도시숲과 문화·행정 공간이 융합된 북구청사, 미활용 학교부지를 활용한 양덕 나무은행 등 창의적인 녹색 공간의 조성으로 도시에 짙푸른 생명력을 더하고 있다.그린웨이 추진 이후 지금까지 축구장 95개 넓이인 67만여㎡의 녹지 공간을 새로 조성해 시민들에게 돌려 드렸다. 아울러 10년 동안 총 2천만 그루 나무 심기 운동도 연계해 추진 중이며 지난해까지 7년 간 목표를 초과 달성한 1천851만 그루를 심었다.이를 통한 막대한 탄소 흡수 효과로 기후 변화 대응력을 높이며 탄소중립 시대를 살아갈 미래 세대를 위해 포항을 더 푸르게 가꿔가고 있다.도시 전체를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생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그린웨이는 앞으로 더욱 확장할 방침이다. 먼저 수십 년 간 아스팔트로 덮여있던 학산천의 생태 복원이 올해 마무리 되면 물길을 따라 사람이 모이는 수변도시로 탈바꿈할 예정이다.아울러 천혜 바다풍경을 즐길 해안둘레길 112㎞ 전체 구간의 완성을 앞둔 가운데 포스코대로 그린워크, 희망대로 가로숲길 등 녹색 보행망을 단절 없이 이어가고 또한 늘려갈 계획이다.시민들이 그린웨이를 걸으며 행복한 웃음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는 지속 가능한 ‘친환경 녹색 생태도시’로 변모할 포항의 모습이 더욱 기대된다.

2024-01-28

평행선

가을 공원길, 나란히 산책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눈부시다. 두 분은 오늘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을 맞춰 왔을 것이다. 자신의 속도를 고집하지 않고 손을 꼭 쥔 채 걸어가는 등 뒤로 석양이 비춘다. 남편과 나는 보폭이 맞지 않았다. 함께 길을 걸을 때 저만치 앞서간 남편은 뒤를 돌아보며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시간의 굴레를 풀어놓은 산길에서는 쉬엄쉬엄 걷고 물 맑은 여울에서는 발이라도 담그고 싶었다. 느릿하고 맛갈지게 걷고 싶은데, 남편의 성화에 이끌렸다.남편은 매사에 반듯했다. 책이든 가구든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있어야 했다. 상자 안에 정리하고 차곡차곡 줄을 맞추는 것을 좋아했다. 남편이 지나 간 자리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잘 못 건들면 흐트러질까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때로는 그런 모습이 숨 막혀 일부러 흩트리기도 했다. 내가 지나간 자리는 언제나 어수선했다. 대충 개놓은 옷가지와 선반에 질서 없이 올려놓은 그릇 그리고 어른 아이 구분 없이 뒤섞인 신발들, 충동구매를 한 옷가지가 나뒹구는 옷장, 남편은 볼 때마다 속 시끄럽다며 잔소리를 해댔다. 그러면 나는 적당히 흐트러진 것이 인간답다고 볼멘소리를 했다.살아 온 환경이 달랐던 우리는 씀씀이에서도 부딪혔다. 남편은 알뜰하고 나는 헤픈 편이었다. 때로는 계획 없는 지출이 스트레스 해소라는 소득이 되기도 하는데 남편에게는 통하지 않는 계산서였다. 결혼 초 남편과 어느 장터에 기차 여행을 갔다. 장터로 안내하던 철길은 추억으로 이끄는 길이 되었다. 도시에서 들을 수 없었던 엿장수 가위 소리에 귀가 열렸다. 백화점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흥정하는 모습, 골목을 돌면 나는 ‘뻥’소리, 먹어 보라고 과일을 건네는 농부의 손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시간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공간을 만나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들었던 풍경을 만났다.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를 만나고 애니메이션에서 본 그림과 마주쳤다. 우리는 계속 흘러가는데 이 곳은 어느 순간 멈춰 버린 듯 낡아 있었다. 이 공간을 담고 싶었다. 간이역에 잠시 정차한 기차처럼 멈추고 싶었지만 남편은 충동구매는 안 된다며 모든 공간을 뒤로 물리며 갈 길을 향했다. 나는 여행지보다 가는 길을 더 좋아했다. 가까운 곳보다 지루할 정도로 먼 목적지가 좋았다. 느리게 걸으며 목적지까지 걸어가길 원했다. 들꽃을 보며 웃기도 하고, 비가 오면 처마 밑에 잠시 쉬어 가고도 싶었다. 감당 할 수 없는 속도에 조금씩 지쳐 갔다. 크기가 다른 기차 바퀴처럼 어느 하나가 밀려날 것 만 같았다.남편을 따라 계획을 세워 보았다.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계획표대로 책을 읽으려 하면 열어 놓은 창가에서 신문지 팔랑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어느 세월에 이 책을 다 읽나 싶어 괜스레 뒷장을 뒤적였다. 계획을 세우기만 하면 뭐하나, 노안은 오고 시력은 점점 나빠지고 몰입 할 수 없는 핑계만 가득했다. 우리는 다투었다. 감정으로, 언어로 밀어냈다. 인도와 차도처럼 늘 경계선이 있었다. 남편의 속도에 맞춰 보려고 애를 썼다. 나의 속도로 살아도 손해 본 적이 없는데 자꾸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평행선은 나란히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김경아 작가 도돌이표 같은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은 내가 흘려 놓은 것을 줍기 시작했다. 내가 빼 놓은 것을 챙겼다. 내가 벌여 놓은 틈을 메웠다. 내가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걷도록 내버려 두었다. 굽이진 길을 돌아 나올 때는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주었다. 내게 맞는 보폭이 나를 당당하게 걷게 했다. 서로의 걸음을 인정하고 나니 똑같은 속도가 아니라도 마음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쉼 없이 전진하는 게 헛걸음이 될 때도 있었다. 같은 속도로 꼭 성공해야 한다는 법칙도 없다. 사람마다 오르려고 하는 봉우리가 다르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다. 함께 돌아보며 늦춰 주고 당겨 주면서 생각의 보폭을 맞추어 가는 것이 부부였다.남편과 함께 걸어온 시간을 돌아본다.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어느새 보폭이 비슷해졌다. 이제부터는 우리의 평행선은 이탈 없이 내일로 갈 것이다. 나란히 손을 잡고 인생의 소실점으로 가는 노부부처럼.

2024-01-28

통일의 전망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이 된 이후 통일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던 적이 몇 번 있었다.그 첫 번째는 김일성이 사망한 때였다. 반도의 북쪽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절대존엄으로 군림하던 ‘위대한 어버이수령’이 죽었으니 엄청난 충격과 혼란과 변화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머지않아 통일의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김정일 세습체제가 들어서서 전과 별로 다를 게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김정일이 죽었을 때도 또 한 번 통일에 대한 기대로 온 나라가 술렁거렸다. 후계자를 키울 충분한 시간이 없었던 터라 정치 경험이 없는 이십대 후반의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 않겠나 하는 예측이었다.더구나 3대에 걸쳐 세습을 한다는 것도 마땅한 명분이 아닐 터라서 권력의 분화와 다툼이 일어나고 체제의 붕괴를 가져와서 통일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그러나 그런 기대마저 이복형을 죽이고 고모부를 처형하는 등의 잔인함을 보이며 일축해 버렸다.그렇다고 김정은 체제가 안고 있는 불안 요소가 다 가신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무절제한 생활로 인한 고도비만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방불케 한다. 실제로 한동안 중병설에 사망설까지 나돌았다. 만약 김정은이 건강 문제로 쓰러지면 이번에는 선대와는 다른 양상이 전개될 거라는 전망이다. 백두혈통이라는 여동생이 있고 십대의 어린 딸이 있지만 그들이 권력을 장악하기는 쉽지 않을 터이니 마침내 김일성 일가의 세습체제가 종식을 고하지 않을까.그와 동시에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불만과 원성이 분출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첨단기기의 보급으로 더 이상은 외부의 정보를 차단할 수 없게 되어 젊은 층에서부터 세습체제에 대한 회의와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더구나 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는데 지도자란 놈은 몸을 못 가눌 정도로 호의호식하고 나라의 살림을 거들내면서 미사일이나 쏘아대는 짓을 두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박근혜 대통령은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천오백만 북한 주민들을 빈곤과 압제에서 구해내는 것이 더 시급한 통일의 과제이다. 얼마 전 김정은은 대한민국을 ‘같은 민족의 남측’이 아니라 ‘적대적인 다른 국가’로 간주하겠다고 강조하고,‘점령·평정’해 ‘편입’할 대상이라고 선언을 했다.‘그동안 같은 민족이라고 봐줬는데 이젠 무자비하게 도발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김정은이 그렇게 선언한다고 남과 북으로 갈라진 혈족의 연이 끊어지는 건 아니다.통일을 위한 우선의 전제조건은 김정은 세습체제의 종식이다. 그것이 통일로 가는 길이다. 김정은에게 타격을 주고 인민들이 더 이상 세습독재에 굴종하지 않고 분연히 들고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남한부터 뜻과 힘을 모아야 가능한 일이다.

2024-01-25

세월의 흔적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교직을 떠난 후 얼마간 무언가 모를 우울증이 있는 듯하여 ‘제2의 밝은 삶’을 사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갖자고 마음을 잡았다.책도 많이 읽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나름대로의 취미생활도 해보지만 무엇보다 대화의 상대가 줄어들었으니 웃음이 줄었다. SNS에 많이 떠도는 말이 생각났다.‘자주 웃어라. 혼자서 거울과 대화도 하며 웃는 연습을 하라.’그래서 요즈음 혼자 운전할 때는 차 안에서 큰 소리로 웃고, 집에서는 거울을 보며 소리 없이 표정으로만 크게 웃곤 한다. 그러면 참으로 기분도 좋아짐을 느낀다.자주 거울을 보게 되면서 내 얼굴이 조금 이상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세수할 때만 거울을 잠깐 볼 뿐이었는데 요즘 자주자주 보니 주름살도 많아졌고 살도 많이 빠졌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한다.그뿐 아니다. 얼굴 모양이 좀 이상하다. 바르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냥 자연스레 힘 빼고 보면 얼굴이 삐딱하니 왼쪽으로 기울었다. 따라서 목과 윗몸도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바로 하면 두 눈썹 선과 입술선이 평행이 아니다.눈썹을 수평으로 하면 입부분이 왼쪽으로 올라가니, 턱을 오른쪽으로 조금 움직여야 콧날과 인중, 그리고 입술의 중심이 맞는다.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아! 그래. 40년 이상을 교단에 서서 분필로 칠판에 글씨를 써왔지. 나의 전공이 전기공학, 그중에서도 이론 과목이 많아서 수학공식으로 문제를 풀고 복잡한 회로를 그렸다 지우며, 인문 계통과는 달리 말로만으로는 강의가 안 되는 분야다. 분필을 쥔 오른팔에 힘주고 몸을 반쯤 학생들을 향해 비틀고 방정식을 풀어가며 입으로 설명을 해야 하니, 자세가 왼쪽으로 기울고 턱이 돌아가게 된 것이리라. 한번 강의에 칠판 서너 번은 지우게 되니 오랜 시간 반복적인 몸짓이 나의 얼굴을 살짝 비틀어 버린 것이다. 이것을 신체기억(Body Memory)이라고 하던가. 나의 인생에는 ‘세월의 흔적’이리라.그래서인지 최근 치과에 가서 임플란트를 하면서 검사해보니 이빨도 아래위가 잘 맞지 않고 음식도 한쪽으로만 씹었던 흔적이 보인단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부터 자세도 삐뚤었던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을 때 나는 바르게 한다고 자세를 잡았는데도 사진사는 자꾸 교정을 해주었던 일이 기억난다.‘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고 했던가. 위의 사실을 미루어보아 ‘습관이 바뀌면 몸도 외모도 바뀐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러면 얼굴이 바뀌고 걸음이 바뀌어 상(相)이 바뀌었으니 나의 운명도 바뀌었다는 말인가. 어디 외모뿐이랴, 신체의 각 기관과 생각하는 틀과 성격도 바뀌었겠지.오랜 세월 반복된 비뚤어진 자세가 나의 얼굴과 뼈를 불균형으로 바꾸어 버렸음을 깨닫고 몸에 남은 세월의 흔적은 지울 수 없겠지만 이제까지 잘못된 일상의 행동과 몸짓, 보고 듣는 관점을 고쳐서 바른 자세와 자신을 낮추는 배려로 남은 인생을 잘 갈무리하여 건강한 삶을 살아가려한다.

2024-01-25

딥페이크(Deep Fake)

우정구 논설위원 딥페이크는 인공지능(AI)과 딥러닝 기술을 활용해 실제와 구분하기 어려운 가짜 영상이나 음성을 만드는 기술이다.이 기술은 연예인이나 유명 정치인의 얼굴을 다른 사람의 몸에 합성해 사용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어 딥페이크로 인한 부작용에 대한 각계의 우려가 높다. 특히 딥페이크가 범죄에 악용될 경우 법적, 제도적 장치가 뒤따르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사회의 몫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지난해 우리나라는 딥페이크를 활용한 선거운동을 전면 금지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AI 기술의 발전속도가 매우 빠른 데다 진위를 구별하기 힘든 합성사진이나 영상물의 유포가 총선을 앞두고 대거 유포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최근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지인 뉴햄프셔주 프라이머리를 앞두고 민주당 소속의 조 바이든 대통령을 사칭한 딥페이크 음성이 유포돼 주 정부가 수사에 나섰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인공지능을 활용한 허위정보는 민주주의를 중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보고 각 주마다 규제에 착수했다는 소식이다.지금 우리는 발전하는 기술이 주는 혜택과 위험 사이에서 고심 중이다. 인공지능 기술의 양면성을 어떻게 수용하고 균형을 잡아갈 것인지에 대한 적절한 해법이 필요하다. 특히 인공지능 기술을 악용한 각종 범죄에 대응할 제도적 장치 마련은 다급한 문제이다. 딥페이크가 아니더라도 가짜뉴스 하나로 선거의 판도가 바뀌는 큰 혼란을 우리는 경험한 바 있다. 총선을 앞두고 더 교묘해지고 비밀스런 가짜뉴스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딥페이크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서둘러져야 할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01-25

이준석이 불 지핀 무임승차

홍석봉 대구지사장 노인 인구의 급증은 저출산 못잖게 우리 사회의 큰 부담이다. 노인 인구는 지난 10년간 크게 늘었다.2023년 말 현재 주민등록인구상 65세 이상 인구는 973만411명이다. 10년 전인 2013년에 비해 348만 명, 55.7%가 늘었다.노인 인구의 급증은 선거 판세를 좌우할 정도다. 노인 인구는 21대 총선 직전 해인 2017년에 비해서도 약 237만명, 32.3% 급증했다. 70대 이상 인구(632만명)가 20대 인구(620만명)를 넘어서며 인구 비율이 역전됐다.노인 인구 비율은 2025년 20%, 2036년 30%, 2050년 40%로 점점 높아진다. 갈수록 선거에서 노인 입김이 더 세진다.노인 인구 규모를 고려하면 노인 관련 정책이 쏟아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정치판 사정은 그렇지 않다. 노인은 갈수록 찬밥신세다. 예전엔 선거철에 반짝 대우를 받았다. 선량 후보들은 노인정을 찾았고 고개 숙였다. 이젠 아니다. 보수진영 외에는 노인은 표가 안 된다며 무시하기 일쑤다. 보수 성향이 짙고 노인층 다수가 보수인 현실이 그렇게 만들었다.지하철 무임승차 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무임승차가 도입된 1980년대만 해도 노인 인구는 4%가 안 됐다.하지만, 지난해 19.2%까지 급증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지하철 무상 이용 혜택을 폐지하는 공약을 발표했다. 무임승차 제도가 수명을 다했다며 폐기를 선언했다. 또 노인 정책의 재설계 필요성을 얘기했다.이에 대한노인회장이 “패륜아 정당을 만들겠다는 망나니 짓거리”라며 노발대발했다.지하철은 노인들의 친근한 교통수단이다. 오죽하면 ‘지공거사(지하철 공짜로 타는 사람)’라는 말까지 나왔겠나.노인 무임승차는 사회복지 차원에서 출발했다. 한데도 우리 사회는 노인들의 공짜 탑승을 백안시한다. 노인 무임승차에 대한 편견은 순전히 도시철도를 운영하는 지자체 탓이다. 도시철도 당국들이 운영 손실을 무임승차 탓으로 돌린 것이 결정타다. 수십조 원의 누적 적자 등 운영 손실의 책임을 무임승차에 전가한 것이다. 힘없는 노인들만 덤터기 썼다.2014년 한국교통연구원이 내놓은 ‘교통부문 복지정책 효과분석’ 보고서엔 노년층 지하철 무임승차 혜택이 노인 건강 증진과 우울증 감소, 교통사고 감소, 복지비용 축소 등에 도움을 준다고 분석한 바 있다.대한노인회 회장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도시철도는 승객이 있든 없든 운행해야 한다. 한 칸에 노인 몇 명 더 탄다고 해서 비용이 추가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반면 노인들의 도시철도 이용은 노인 건강에 도움이 된다. 의료비용 절감은 덤이다. 보건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공공서비스에서 발생하는 도시철도 적자는 지자체에만 맡겨둬서는 답이 없다. 지자체의 획기적인 경영 개선과 정부의 정책적 지원 없이는 백년하청이다. 도농 간 형평성 제기도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 농촌을 운행하는 버스와 택시도 1천 원 택시 등 노인은 거의 공짜다. 정치 시즌만 되면 휘둘린다. 노인은 서럽다. ‘이제 고마 해라’.

2024-01-25

방송대학, 그 청렬한 학창의 갈피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배움에는 끝이 없다. 어쩌면 사람의 일생은 전 과정이 배움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어나서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며, 학교엘 가서 공부하고 기술을 익히며 예의범절을 알고 공중도덕을 지키게 된다.직장에서 일을 배우거나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배우면서 사랑을 쌓아 가기도 하고 세상살이의 풍파를 겪으며 지혜를 더해 가기도 한다. 이렇듯이 사람은 태어나서 일생을 마감하기까지 전 생애에 걸쳐 가르침과 배움이 이루어지기에 평생교육 또는 평생학습이라 하는가 하면, 배움에는 끝이 없고(學無止境) 배움의 바다는 가없다(學海無邊)고 하기도 한다.그러나 농사짓는 일에도 때가 있듯이 배움에도 때가 있는 법이다. 배우고 익힘의 과정이 사람마다 다 같을 순 없겠지만, 가정·학교·사회로 이어지는 교육과 학습의 시기는 대부분 엇비슷하여 또래나 동년배들이 함께 배우고 성장하면서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敎學相長)하듯이, 사람은 주위의 자극이나 영향을 받아 호기심이나 궁금증을 일으켜 애써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 하고 끝없이 배움의 끈을 놓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 배움에 대한 즐거움과 깨우침에 대한 열망으로 자긍심을 고취하며 쉼 없이 자아실현을 추구하게 되는지도 모른다.하지만, 배움이란 누구나 쉽게 접할 수는 있어도 개개인이 유익한 성과를 거두기는 결코 쉽질 않다. 전 세계적인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을 거치면서 교육과 학습환경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온라인 비대면 학습에 대한 줌(Zoom)교육시스템이 강화 정착되고, 유튜브 등 인터넷 매체를 통한 사이버 학습콘텐츠가 다양화되면서 교육과 학습방식의 일대 변혁을 가져왔을 정도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쉽고 편리하게 청강과 학습에 임할 수 있으니,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상상하기조차 힘든 변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40~50년 전부터 다소 빈약하고 미비한 학습여건에서도 원격교육과 출석수업에 임하며 학문탐구에 매진해온 사람들이 있었다면?이러한 측면에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1972년 개교한 대한민국 최초의 원격대학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온라인 시대를 예견하며 미래형 대학교육의 실재를 구현, 선도해왔다고 할 수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한창 진행되던 70, 80년대부터 고등 원격교육 서비스를 제공하여 배움의 기회를 놓쳤거나 일하면서 배울 수 있는 교육기반을 조성해서 사회 각계각층의 인재를 육성, 배출해왔다. 또한 대학 졸업 후에도 어학이나 관심학과에 편입학하여 전문지식 확충과 자기계발의 선순환을 제시하는 평생교육의 기틀을 다져서 ‘자기 발견의 감동’을 일상적으로 체득하도록 하고 있다.힘들게 배우고 어렵게 취득한 학업성과는 결코 쉽게 없어지질 않는다. 더욱이 주경야독으로 고단함 무릅쓰고 배움에 대한 의지와 희망으로 학업의 고락을 함께한 학우들은 친구나 학습동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동문들이 수십년 간 뜸해졌다가 최근 재회와 결속의 마음을 나누고 있어서 고무적이다.전국이 캠퍼스인 방송대학이라는 청렬한 학창의 갈피에서 동학(同學)의 웃음꽃이 봄꽃처럼 환하게 피어나길 기대해본다.

2024-01-24

한옥의 겨우살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대한 추위가 매섭다. 지난 며칠은 겨울답지 않게 겨울비까지 내려 포근한가 싶더니 어제오늘은 제법 춥다. 이럴 땐 집안에만 있고 밖엘 나가지 말아야 한다. 나이 들어선 더욱 그렇다. 주말 이틀을 집안에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은 채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다 문득 모두의 집이 걱정되었다. 그 동네 묘골의 집들은 모두 한옥이다. 외관으로는 한옥고택이지만 엔간한 집들은 겨우살이를 위한 채비를 해 두었다. 툇마루나 큰 마루에도 나무나 유리로 된 문을 달아내었다. 겨울 냉기와 바람을 적당히 막아야 실제 거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옥의 미관을 크게 해치지 않은 선에서 한 장치다. 그러나 우리 집은 겨울바람과 추위에 온전히 노출된 집이다. 온전히 옛집 그대로의 모습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겨울 지낼 요량으로 방안에 커튼을 달거나 비닐막이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작년 겨울, 모두의 집에서 몇 번 잔 적이 있었다. 바깥에서 씽씽 바람소리 들렸으나 방바닥이 따뜻하니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4중으로 된 문의 틈새로도 칼바람이 들었다. 바늘구멍으로 든 황소바람을 실감했다. 보일러의 온도를 최대로 높여 방바닥은 뜨거운 데도 코끝은 시렸다. 이불을 함부로 차대는 어린 손주들 챙기느라 밤새 잠을 설쳤다. 그곳에서 자고 오면 애들은 어김없이 감기에 들어 고생했다. 올핸 아예 갈 생각이 없었다. 겨울 석 달은 없는 집 삼으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세와 수도세는 더 많이 나오고, 보일러의 기름은 수시로 점검해야 할 정도로 많이 쓴다. 혹시 수도가 얼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약하게 물을 틀어 두었다. 화장실엔 동파를 막으려 라디에이터를 켜두고 방안의 냉기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 보일러도 틀어두어야 한다.예전 어렸을 적 외갓집의 겨울이 생각난다. 오래된 고택이었다. 아궁이에 잔뜩 군불을 넣고 방엔 이불을 넓게 깔아 온기를 가두었다. 아궁이의 숯을 가득 담은 청동화로를 방 한쪽에 두고 방안을 덥혔다. 그 화로에 밤을 구워먹었다. 외할아버지께서 고방에서 내주신 꽁꽁 언 홍시도 화롯전엔 얹어 녹여 먹었다. 화로의 불씨가 거의 꺼질 때면 멀리 머리맡으로 밀쳐두고 두꺼운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고 잤다. 방바닥은 발이 닿으면 뜨겁지만 머리맡의 자리끼에 살얼음이 끼고, 코끝은 시렸던 겨울밤이었다. 아랫목의 온기가 가실 무렵, 새벽이면 외할머니는 군불을 다시 한 번 넣으셨다. 제일 큰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화장실은 밤엔 혼자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곤히 주무시는 외할머니를 깨웠다. 촛불을 켜 든 외할머니를 앞세워 화장실엘 갔다. 외할머니는 노래를 부르거나 이야기를 하면서 추위와 무서움에 떠는 나를 안심시켜 주셨다. 그 날 후론 방 밖 툇마루에 요강을 갖다 두셨다. 무서움은 덜했으나 한기는 여전했다. 주방과 화장실이 실내에 있는 우리의 한옥은 그에 비하면 얼마나 편리한가. 뜨거운 방바닥에 코끝 쨍하게 시린 추억이 아련하긴 해도 아파트의 안락함에 길들어진 나에겐 한옥의 겨우살이가 두렵고 버겁다.

2024-01-24

흩어 놓는가, 모아 내는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1992년, 미국을 뒤흔들었던 사건이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폭동(L.A. Riot)’. 백인경찰들이 흑인운전자 한 사람을 사정없이 폭행했던 동영상이 알려지면서 시작되었던 도시 소요. 흑인, 아시안계와 히스패닉계를 포함하는 유색인종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고, 한국교포들에게도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하였다. 피해 당사자 로드니킹(Rodney King)은 법정에서 증언하면서 모든 소란에 혼란스러운 심경을 한마디로 요약하였다. “우리 그냥 어울려 살 수 없을까요? (Can we just get along?)”피부색이 다르다는 외적 차별조건을 극복할 방법이 정말로 없겠냐는 그의 안타까움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끊임없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해 내는 능력은 인간이라면 거의 본성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출신이 다르고 피부가 다르며, 성씨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며, 키와 몸무게 그리고 혈액형이 다르다. 겉으로도 다르고 속으로도 다르다. 느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며 사상이 다르고 이념도 다르다.하나의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다른 겉모양과 속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이상 어울려 살아야 한다. 피해자 흑인 한 사람의 저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가. 우리는 어울려 살아낼 수 있는가.‘다르다’는 데서 시작해서 ‘틀리다’는 생각에 이르면 구별을 넘고 차별에 이르러 질시와 혐오, 폭력과 불공대천의 경지에 이른다.파국으로 치닫는 일이 발생하지 않고 조절하며 견제하도록 우리에게는 ‘정치’라는 장치가 있다.정치는 권력을 획득해 행사하는 활동이지만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이해를 조정해 질서를 바로잡는 일을 하도록 국민이 위임한 행위인 것이다. 정치인들은 그렇게 하고 있는가. 정치인이 쏟아낸 한마디 말이 질서와 조정을 불러오기는커녕, 오히려 단절과 불화의 도화선이 되고 분열과 등돌림의 단초가 된다면 그는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싸움꾼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정치인 당신은 화목의 씨앗을 찾아내는가, 아니면 분열의 기운을 조장하는가.사회가 조정과 타협을 통해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돕는 또 하나의 기제가 ‘언론’이다.사실을 밝혀 알려 여론을 형성하면서 민주주의가 구현되도록 사회적 공론의 장과 소통의 텃밭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흥미를 끌거나 충격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 머물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의 기초가 될 접점을 찾아내고 대화의 토대를 불러와야 한다. 사실과 문제를 알려내는 데 기여해 왔지만, 앞으로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에도 집중해야 한다.다른 나라의 언론계는 ‘해결책 저널리즘’이라 부르는 새로운 시도에 나서고 있다. 사람은 어차피 모두 다르다. 다른 모습과 다른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며 보듬고 포용할 때 민주주의로 가는 싹이 튼다. 갈등이요 분열이었을 다른 존재들을 정치가 조절하고 언론이 담아내야 한다. 흩어놓는 정치와 언론은 그만 보았으면 한다.

2024-01-24

대형마트 의무휴업 규제 폐지

홍석봉 대구지사장 대구시는 지난해 2월부터 대형마트 의무휴업일을 매월 둘째, 넷째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변경했다. 시민들은 환호했다. 휴업일 변경 영향은 금방 나타났다. 대구시 분석결과 규제 완화 조치는 소매업과 대형마트 등 매출도 동반상승하는 등 지역 상권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긍정적으로 나타났다. 청주시가 3개월 뒤 대구시의 뒤를 따랐다. 서울 서초구와 동대문구 등 의무휴업일 변경에 동참하는 지자체가 속출했다.정부도 마침내 지난 22일 대형마트의 공휴일 의무 휴업 규제를 폐지키로 했다. 정부가 국민과 함께 생활규제 개혁 방안을 논의, 대표적인 규제인 대형마트 영업규제를 없애 평일에 휴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참에 대형마트의 영업 제한 시간 온라인 배송도 허용하기로 했다. 대형마트 공휴일 의무 휴업은 2012년 3월, 전주시의회가 처음으로 조례로 제정해 시행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됐다.대형마트 영업규제는 당초 골목상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도입됐다. 하지만, 대형마트의 주말 휴무는 평일 쇼핑이 어려운 맞벌이 부부와 1인 가구 등에겐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각종 소비자 조사결과 대형마트 규제를 폐지 및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높게 나왔다. 정책 전환이 불가피했다.의무휴업 규제 폐지는 최근 온라인 유통시장이 급성장하는 등 다양한 소비 채널의 등장과 함께 영업형태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규제 실효성이 낮아진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시대와 환경이 바뀌면 법과 제도도 바껴야 한다. 이제 국민들의 주말 장보기가 훨씬 편해졌다. 나들이 선택지도 넓어졌다. 우리 생활 속의 이러한 각종 규제는 하나씩 찾아 없애야 한다. 그것이 정부와 국회가 할 일이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4-01-24

보물찾기

피귀자 수필가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예외의 것들이 필요하다.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점들이 구석구석 많이 박혀 있어야 이야기가 재미있고 흥미진진해지듯 시장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의 손맛과 할머니의 푸근함과 아버지의 비틀걸음도 들어있다.그 중에서도 떠나고 없는 어른들과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울 때 푸근한 정을 느끼고 싶을 때, 만남이 그리울 때 시장엘 간다. 만남은 함께 자라며 흐르는 강물 같기에.목요장은 도심 속 시장이다. 상주하는 많은 가게가 있는 큰 시장으로 장날이 되면 주변의 골짜기에서 가꾼 많지 않은 푸성귀와 과일과 곡식들을 늘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들이 모여 있는 골목도 여러 군데 있다. 그곳은 어릴 적 시장의 모습 같아서 꼭 들르는 곳이다.가을이 무르익자 울긋불긋 더 풍성하고 활기가 넘치는 골목에 어떤 할머니가 대추를 사라고 손짓을 했다. 큰 상자에 담긴 굵고 실한 것을 점찍어 둔 것이 있었음에도 주름진 손과 간절한 눈빛에 이끌려 담아오게 되었다. 아뿔사! 집에 와서 검은 봉지를 열었더니 덜 영글고 벌레 먹어 떨어진 작고 꼭지 없는 대추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한 알 한 알 주워 말렸는지 연하고 진하게 색깔도 다양하고 너무나 쪼글쪼글 상처투성이인 대추는 아무리 후하게 골라 봐도 먹을 것이 반도 되지 않았다.처음부터 탐탁지 않았지만 위쪽에 그나마 꼭지 달린 몇 알을 얹어 놓아 검은 봉지 속사정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당장 물리러 가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엎드려 수레를 밀고 가는 사람과 그릇을 앞에 놓고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생각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며 오죽하면 그렇게 팔겠느냐고. 화살의 방향을 1도만 바꿔도 목적지가 완전히 달라지듯 생각의 각도를 1도만 바꾸면 자칫 심각해질 수 있는 상황도 달라질 수 있다고 달래며.신뢰를 얻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누가 정직한지 진실은 위기의 순간에 가장 잘 드러난다. 쭉정이와 알곡을 갈라놓는다. 무엇이 거품이고 무엇이 실체인지도 가려주고, 희미했던 진실과 거짓도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할머니라는 단어 속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편안하고 따뜻한 손, 푸근한 어루만짐, 무조건적인 사랑 등 누구에게나 아련한 기억이 깃들어 있는 그런 할머니를 그렸는데 대추 할머니 때문에 다른 사람도 경계하게 될까 겁나지만 때로는 가만히 있어도 덤을 얹어주는 아저씨와 두 소쿠리 사면 군말 없이 깎아주는 아지매도 있기에 상쇄되고도 남지 않는가. 거의 모든 사과가 퍼석해질 시기에 아삭아삭 새콤달콤한 사과를 사서 기분 좋은 날이 있다. 싱싱한 도라지와 연근과 파르스름한 현미 햅찹쌀에 도톰한 다시마, 새파란 멸치 등 찾는 것이 펼쳐져 있을 때의 기쁨은 또 어떤가.생각지도 않았던 귀한 산나물이나 말랑한 찰옥수수, 갓 따온 첫 홍시를 사는 기쁨을 얻는 곳도 시장이다. 포근한 이불을 파는 아저씨는 따뜻하고 재미있는 말과 온몸에서 발산하는 기쁨의 에너지가 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니 발길이 향하게 된다. 어려운 일도 의외로 쉽게 풀어가는 창의적인 인물들은 자신의 일을 얼마나 놀이처럼 즐기고 있는지를 누누이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일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은 그 일이 주는 즐거움이 포기할 수 없는 가장 큰 보상인 것이다.외딴섬이라고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다 속의 한 공간이고, 또 다른 외딴섬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사람과 자연과 우주도 서로 얽히지 않은 것은 없다.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서로 서로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면서 성장하고 소멸한다.물건을 받기 전 미리 돈을 지불했는데 안 받았다고 우기던 아주머니, 주머니에서 돈이 나와도 사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쁜 일보다는 즐거운 일이 더 많고 볼거리와 흥겨움이, 활기가 넘치는 시장이 거기 있어 오늘도 간다. 많이 파시라는 사랑의 말을 얹어서 웃음을 나눌 수 있는 그 곳, 어린 시절 숨겨둔 보물찾기하듯 싱싱하고 귀한 보물을 찾으러. 어느 새 발걸음이 빨라진다.

2024-01-24

소행성 L2001의 사멸 <상>

프랑스의 철학자 뤼시앙 골드만이 “소설은 타락한 세상에서 진실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야기”라고 말한 게 벌써 100여 년 전이다. 하지만, 이 은유적 어법에 담긴 내밀한 뜻은 아직 온전해 해석되지 못했다. 포항에서 내과 의사로 일하는 김강(52)은 7년 전 등단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쉽지 않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며 성실함을 보여준 그가 올해 본지에 짤막하지만 완결성을 지닌 엽편 소설을 연재하게 된다. ‘소소한설(小笑寒說)’이란 타이틀처럼 때로는 따뜻한 웃음, 때론 냉철한 비판의식을 통해 독자들에게 ‘소설 속에 담긴 진실의 의미’를 선물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편집자 주소행성 L2001이 사멸했다. ‘장렬히’와 같은 수식어를 붙이지 않은 이유는 사멸의 순간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멸 직후의 순간을 목격한 이의 증언에 따르더라도 그것의 사멸은 ‘장렬’하지 못했다 여길 수 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소행성 L2001은 잠시 꿈틀거리다, 꽈배기처럼 휜 경로를 보이다 스윽 하고 으스러졌다고 한다.‘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난 후 불붙은 성냥을 어떻게 해? 후~ 불거나 흔들어서 불을 끄잖아. 그리고는 개수대의 수전 아래 흐르는 물에 갔다 대지. 그러면 피식 하고 짧은 소리가 나고. 그렇게 식어버리고 결국 으스러지고 마는 성냥, 성냥 머리 같았어.’누군가 이렇게 댓글을 달았는데 비교적 잘 들어맞는 표현이었다. 케이크가 놓인 테이블에서 수전까지 옮겨가는 동안 성냥에서 피어올랐을 연기 같은 것을 소행성 L2001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 연기 덕분에 소행성 L2001이 소행성이 아니라 혜성으로 분류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또 그렇게 되어가던 중이었다.연기가 아니었다면 소행성 L2001은 아텐 소행성군을 이루는 지름 150km 정도의 중간크기를 가진 중형의 소행성에 불과했을 것이다. 소행성 L2001은 특이한 점이 없는 다른 소행성처럼 천체물리학자나 동호인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보통은 과학자의 이름을 붙이는데 그저 알파벳 L을 붙이고 싶다는 최초 발견자의 의견을 소천체명명위원회가 이례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만이 소행성 L2001이 가진 유일한 개성이었고, 실제 소행성들을 설명하는 책자나 안내서에도 소행성 L2001이라는 이름 뒤 다음의 한 문장만이 인쇄되어 있을 뿐이었다.‘최초 발견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명명한 몇 안 되는 천체’.소행성 L2001이 천체물리학자 뿐만 아니라 동호인, 일반인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연기 때문이었다. 3개월 전 아텐 소행성계를 살피던 동호인 한 명이 연기를 내고 있는 소행성을 관측했다. 소행성이 연기를 만들고 연기가 다시 꼬리가 되는 것은 곧 소행성이 아니라 혜성으로 성격과 분류, 명칭이 바뀌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동호인에게는 나름 의미가 큰 관측이었다. 동호인은 곧 학계에 사실 확인을 문의했고 소행성 L2001은 곧 천체물리학계에서 주목하는 천체가 되었다. 하지만 넓은 의미의 천체물리학계-동호인과 학계를 아우른-에 한해서였다. 동호인들에게는 당연히 의미가 있는 발견이며 자랑거리가 되고 학자들에게는 논문은 누가 쓸 것이며 교신저자는 누구로 할 것인지, 발견자를 논문 저자 중 한 명으로 넣어줄 것인지 등등 한바탕 소란 거리가 되겠지만 어린 왕자가 방문했던 소행성, 몇십 년 마다 돌아온다는 혜성 정도 떠올리는 일반인에게 소행성이냐 혜성이냐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김강 소설가·내과의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행성 L2001은 일반인에게도 의미를 가진 천체가 되었다. 한 독립 천체연구가가 중앙일간지에 보낸 메일 덕분이었다.‘제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지구와 가까이 있는 아텐 소행성계의 소행성이 혜성으로 성격을 바꾼 것은 전례가 없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단지 천체물리학적 발견의 문제가 아니며 지구, 지구인의 생존과 관련된 사항일 수 있습니다. 소행성 혹은 혜성 L2001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 있을 때 연기의 꼬리는 지구를 향하게 됩니다. 꼬리는 가스와 이온으로 형성되는데 이들이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꼬리를 이루는 성분들은 처음에는 소행성을 이루던 물질이었기 때문에 소행성의 질량은 점차 감소하게 될 것이며 기존의 궤도 또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언제 어느 위치에서 태양 혹은 지구 중력의 영향을 받아 어떤 궤도를 만들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종국에는 어딘가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 어딘가가 지구라면 이는 엄청난 재앙이 될 것입니다.’(계속)

2024-01-24

‘영부인 명품백논란’이 국가적 의제인가?

심충택 논설위원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주 같은 날 총선 공약으로 ‘저출생 관련 대책’을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정책 대결에 나섰다. 여야의 저출생 공약대결이 서로 ‘받고 더’ 식의 카드게임 양상을 보이긴 하지만, 정쟁이 아닌 정책 대결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도 지난 주말 “민주당이 지금도 ‘김건희 나빠요’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저는 솔직히 관심도 없다. 제발 사법부에 가져가라. 선명한 정책 경쟁을 하자”며 여야의 공약대결 기류에 합류했다.여야가 4·10 총선을 명실상부한 정책대결의 장으로 만들려면 우선 곪은 정쟁요인부터 터뜨려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그동안 여권이 쉬쉬해오던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논란을 쟁점화한 것은 긍정적이다. 여당이 먼저 영부인 명품백 의혹을 이슈화함으로써 민주당으로선 김이 빠지게 생겼다. 민주당은 현재 ‘김건희 리스크’를 총선득표에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시점을 계산하며 쌍특검법(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 대장동 뇌물 의혹 특검법) 재의결에 당력을 쏟고 있다.예민한 이 쟁점을 드리블해야 하는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쉽지 않은 숙제가 생겼다. 그는 “김 여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사람들이 기획한 함정 몰카”라고 명품백 논란을 일축하면서도, “국민이 걱정할만한 부분이 있다”는 입장을 지난주 밝혔다. 명품백 논란을 털고 가야 한다는 당내 일부 인사들의 주장에 보조를 맞춘 것이다.대통령실은 한 위원장의 이러한 언행에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직접 한 위원장을 만나 사퇴를 요구하는 위험한 행위도 했다.대통령실과 여권 일각에선 ‘한 위원장이 야당 프레임에 휘말리고 있다’는 불만을 제기하고 있지만, 나는 그 반대로 생각한다. 군중심리는 선동과 공작에 취약하고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김경율 비대위원이 프랑스혁명을 촉발한 마리 앙투아네트를 거론한 것에 대해 대통령실과 친윤 인사들이 펄쩍 뛰고 있는데, 어리석은 행동이다.민주당이 4월10일 총선일에 임박해 쌍특검법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이 이슈를 들고 나오지 않을 것 같은가.설 민심을 고려해 영부인의 입장 표명은 빠를수록 좋다. 당사자가 정직하게 수수경위를 설명하고, 사과할 부분이 있으면 사과하고, 처분받을 부분이 있으면 처분을 받겠다고 하면 된다.명품백 의혹은 절대 윤석열 대통령의 통치권 문제가 아니다. 이 이슈를 그대로 놔둘 경우, 여권 내부 갈등이 어디까지 갈지 짐작하기도 힘들다. ‘명품백 수수 의혹을 사과하는 순간 민주당이 들개처럼 물어뜯을 것’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사과 안하면 들개들이 안 달려들겠는가. 당사자가 먼저 사과를 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을 하면, 오히려 좌파진영의 정치공작 효과를 줄일 수 있다.이번 총선에서도 나라 전체가 가짜뉴스나 정치공작성 이슈에 함몰돼선 안 된다. 영부인의 명품백 수수의혹이 과연 국가적 의제인가. 여야가 서로 정책대결에 치중하면서 민생 살리기에 나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

2024-01-23

교사와 정치인

우정구 논설위원 어느날 수녀와 정치인이 강물에 빠졌다. 119 구조대가 달려와 얼른 정치인부터 구조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한 구경꾼이 물었다. “어째서 정치인부터 먼저 구하게 된거죠?” 119 구조대원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도 모르세요. 정치인은 놔두면 강물이 더러워지잖아요”.인터넷 상에 떠도는 정치인 관련 유머의 한 토막이지만 우리나라 정치인의 신뢰는 한마디로 바닥이다. 최근 한국교육연구원이 전국 초중고생 1만여 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각 직업군 중 정치인이 꼴찌를 했다.이 조사에서 정치인을 신뢰한다는 답변은 23.4%에 그쳐 가짜뉴스로 논란을 빚는 유튜브 등 인터넷 매체보다 신뢰가 낮았다.또 우리나라 정치가 국민의견을 반영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긍정적 답변이 겨우 13.5%다. 일반적으로 국민의 정치 신뢰가 낮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학생조차도 신뢰를 않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정치 선진국인 미국도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정치인에 대한 직업 신뢰가 최하위로 나타났다고 하니 정치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국민적 신뢰를 얻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 정도쯤 되면 정치인 스스로가 대오각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SNS상에 떠도는 정치인에 대한 각종 풍자물에서 정치인을 존경한다는 내용은 거의 없다. 정치인을 부패하거나 무능한 직업군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많다.총선을 앞두고 정치인에 대한 신뢰 조사와 상관없이 국회의원을 하겠다는 사람은 줄을 섰다. 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신뢰받는 직업군을 살펴봤더니 교사였다. 정치인과 대조되는 직업군이어서 눈길이 더 갔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1-23

R&D 예산 삭감 유감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2024년도 RD(연구개발) 예산이 전년도 대비 약 16.6%(5조2천억원) 감액된 것에 과학계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공계 연구자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삭감된 연구비 때문에 연구과제 수행이 어렵게 되었다거나, 고용 중인 연구원을 해고하게 되었다는 고충 토로와 성토가 이어진다.정부출연연구소들은 예산 부족으로 연구원 채용계획을 줄이거나 없애고, 이는 이공계 석·박사들의 고용 불안을 심화시킨다. 대학에서는 원래도 넉넉하지 않았던 대학원생 인건비를 더욱 줄이는 연구실이 많다. 인건비가 줄어들자 생활비를 벌충하기 위해 과외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그만큼 연구에 집중할 시간이 부족해질 것은 당연하다.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일 과학기술인 간담회에 참석해 RD 예산을 지속적으로 늘려나가겠다고 밝혔다. 5조가 넘는 예산을 일방적으로 줄여 놓고, 반발에 못 이겨 고작 6천억 원을 증액한 뒤에 나온 말이라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과학기술인들을 대하는 현 정부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정부가 RD 예산을 삭감하며 내놓은 핑계는 이른바 ‘이권 카르텔’의 존재다. 이것이 정권의 기조인 ‘노동조합 때리기’, ‘시민단체 때리기’에서 이어진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문제는 정부가 그 이권 카르텔의 정체를 명확하게 짚어내지도 못하면서, 과학기술인들을 ‘예산을 낭비하고 사적으로 전용하는 부패한 집단’으로 치부해 버렸다는 점이다.어떤 집단이든 규범을 어기고 일탈을 저지르는 사례는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례들이 집단 전체의 도덕적 해이로 발전한 상태인지, 아니면 개별적 처벌로 충분히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인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후자의 경우를 전자의 경우로 섣불리 규정해 버리면, 정상적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대다수 구성원들의 모티베이션을 심각하게 저해하게 된다.그렇지 않아도 우수한 이공계 인재들이 의대로, 또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과학에 대한 열정과 소명 의식을 갖고 연구자의 길을 선택한 이들을 이렇게 모욕해 놓고 미래 먹거리나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간은 에너지와 명령만 주어지면 작동하는 로봇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지만, 예산을 결정하는 높은 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하다. 설령 RD 예산을 삭감 이전 수준으로 돌려놓는다 해도, 가장 든든한 ‘파트롱(후원자)’이어야만 하는 국가와 정부에게 배신당한 과학기술인들의 트라우마는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인공지능·첨단 바이오·퀀텀(양자) 등 특정 분야를 ‘3대 미래기술’이라 호명하고 집중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계획 또한 우려스럽다. 해당 분야에만 예산과 지원이 몰리고 다른 분야들은 고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건강한 학술 생태계를 위해서는 학문의 다양성이 필수적이다.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은 예산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싶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2024-01-23

기업혁신 실패를 넘어 성공하는 길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기업의 혁신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특히, 제조업에서는 기업경쟁력과 지속 가능한 경영을 위해 혁신을 도입하고 다양한 활동을 한다. 제조기업의 혁신의 원리는 최소의 원가로 최고의 제품을 생산하여 고객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최소의 생산원가로 가기 위해서는 생산라인의 생산제 조건을 보고 조건이 안 맞는 모든 문제를 찾아 개선하는 것이다. 혁신성공의 정의는 한 기업에 혁신기법을 도입하여 모방과 창조를 거쳐 자사에 맞게 진화 발전시키고, 일하는 사고와 일하는 방법에 내재화 되어 제품생산방식과 경영전반에 녹아 기업 문화화 된 것을 말한다. 국내 기업의 통계를 보면, 6시그마, TPM, TPS 등 다양한 혁신의 기법을 선택해서 적용하고 있지만 성공한 기업은 한자리 수준이다. 그럼, 혁신이 부분 성공이나 실패하는 원인은 무엇일까.혁신의 기법을 도입할 때는 일의 속성, 설비 특성, 생산 프로세스 특징에 맞는 것을 선택해서 자사에 맞게 진화 발전시켜 최적화해가야 한다. 선진 기업이 도입하여 성공했다고 해서 유행따라 도입하면 실패한다. 그리고 단순히 혁신 기법을 잘 선택했다고 순탄한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문제를 푸는 기법의 적합성과 전 조직이 공감하고 참여하여 개선하는 일하는 문화를 구축하는 것이 기본 조건이다. 기업혁신이 실패하지 않는 조건은 첫째, 조직과 개인의 성장비전 설정이다. 직장생활이 삶의 반을 차지하는 데, 일로서 성장하고 꿈을 이루게 하는 조직이 중요한 조건인 것이다. 꿈이 없는 조직은 혁신은 물론 일도 개선도 할 수 없다. 두번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과 목표 설정이다. 경영 목표가 명확하고 전략이 공감된다면 실행력은 커지는 것이다. 셋째, 최고 Top의 스폰서십과 지속적인 지원을 얻는 것이다. 혁신은 철저하게 조직의 힘으로 움직이는 속성이 있기에 경영자의 관심은 물론 혁신이 경영 속에 녹아 기업 체질화로 가야 한다. 넷째, 생산프로세스 특징과 일의 흐름에 맞게 진화시키는 것이다. 문제를 푸는 기법은 일의 속성과 생산제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진화 발전시켜 나가지 않으면 일하는 방법론으로써 현업에서 멀어진다. 다섯째, 운영제도의 시스템화 및 인사와 연계하는 일이다. 즉, 경영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혁신활동의 지속성과 인사와 연계하여 제도화 하고 동기부여를 강화시키는 일이다. 여섯째, 평가와 보상이다. 기업 문화와 세대 특성에 맞는 인증과 포상 등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필자가 P사에서 혁신 일을 20여 년 해오면서 혁신경영의 방법론은 수없이 진화 발전해 왔다. 2005년 6시그마 경영을 도입하고 3년 반 만에 부즈 알렌 해밀턴이란 세계적 전문회사의 진단을 받고 그에 따라 자사에 맞는 TPS를 도입하였고, 필요에 따라 TPM을 추가 도입하여 통합하고 진화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에도 현업과 경영층의 깊이 있는 의견을 수렴하여 또 다른 진화된 모습을 준비하고 있다. 스마트 제철소를 향한 필요 요건이 변화되고 있고 이에 맞는 혁신의 기법도 스마트 기술을 적용하는 등 한단계 높은 기법이 필요한 것이다. 혁신성공은 사회적 기술발전 흐름에 따라 지속적으로 진화 발전하지 않으면 필요 가치 창성에서 멀어져 소멸한다.

2024-01-23

숨탄 것과 동거

눈 내린 아침 너구리의 방문을 받았다. 녀석은 바깥 아궁이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비집고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눈 마당을 산책하는 중이었고 녀석은 내 발자국 소리에 부스럭거렸다. 기척을 듣고 다가가니 눈 덮인 뒷산을 내려왔는지 기력은 쇠잔해 보였고 털은 젖어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쳐도 엉덩이를 돌려 앉는 시늉만 할 뿐 자리를 떠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 짐승의 형편이 오죽할까 싶었다. 급한 대로 아끼는 강아지 사료를 한 그릇 부어 근처에 놓아주고 돌아섰다. 허기가 가시고 나면 목마른 것쯤이야 마당 가득 쌓인 눈을 먹으면 해결될 터였다.처마를 지탱하는 철골 구조물 틈새엔 박새 부부가 산다. 아침이 되어 먼저 일어난 한 녀석이 빠끔히 고개를 내밀더니 작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눈 덮인 세상을 한참이나 둘러보았다. 사냥을 나가기에 적당한지 어떤지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잠시 박새 부부는 좁은 구조물 틈새를 벗어나 사이좋게 날아올랐다. 아침을 거르는 것보단 눈 속에서라도 먹잇감을 찾기로 한 것 같았다. 지켜보는 내내 기특한 맘이 가시지 않았다.산속, 마당 넓은 집에 살다 보면 온갖 숨탄 것들을 대하게 된다. 대낮 닭장 앞에서 잘 생긴 삵과 마주치기도 하고 뜰에 앉아 차를 마시며 마당을 가로지르는 담비 가족을 보기도 한다. 개울을 벗어나 집안을 기웃거리는 수달을 구슬려 돌려보낸 일도 있다. 평상으로 쓰는 너럭바위 곁에서 햇볕을 즐기는 뱀도 만난다. 꽃나무에 터 잡고 사는 딱새도 있고 수시로 날아와 제 안부를 전하고 가는 직박구리 한 쌍은 오래 보이지 않으면 궁금하다. 툭하면 뒷마당을 순회하는 꿩 무리며 뜀박질하는 고라니, 뒷산 뻐꾸기 울면 희한하게 알아듣고 마당귀에선 뻐꾹채 꽃 핀다. 천지가 잠든 밤이면 여운 가득 끌어안은 부엉이 소리가 먼 마을까지 기별을 보낸다.어떤 뜻밖의 방문객을 맞든 이제 더는 놀라지 않는다. 원래 그들의 영역이었던 곳에 허락도 없이 둥지를 튼 건 나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이방인이다. 나는 이기적인 동물이라 그들이 나를 밀어내더라도 나갈 생각 같은 건 없다. 되도록 주인 티를 내지 않고 그들과 섞여서 살고 싶다. 뒷산 은사시 나무에 몸빛이 노랗고 예쁜 꾀꼬리가 날아와 고운 소리로 불러주는 노래를 오래도록 듣고 싶다. 귀하고 사랑스러운 담비 가족을 내 집 마당에서 더 자주 만나고 싶다. 이런 생각마저 욕심인 걸 알지만 자연 속에서 자연을 누리며 살고 싶은 게 사람 맘이다.눈 내린 이튿날 가장 먼저 바깥 아궁이부터 살펴보았다. 빈 사료 그릇만 남겨두고 손님 너구리는 언제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개밥을 먹은 산짐승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다가 금방 안쓰러운 맘이 들었다. 녀석이 앉았던 자리에 손을 넣어 보았으나 온기라곤 없었다. 서둘러 떠난 걸 보면 포근한 안식처는 아니었던가 보았다. 녀석이 숨어들었을 뒷산을 올려다보니 날이 푹해서 눈은 이미 다 녹고 없었다. 녀석은 어쩌다 겨울잠 자는 시기를 놓쳐버리고 홀로 민가에 내려와 떨고 있었을까. 뒷산에 녀석이 먹을 것들이 부족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봄이 올 때까지 잘 견뎌 주었으면 했다.아침상에 어머니가 자주 해 주시던 감자탕을 올렸다. 뼈다귀를 들고 정신없이 뜯다가 물휴지에 손이 가려는 걸 겨우 참는다. 얼른 행주에 손을 닦는다. 쓰레기 하나를 줄인 셈이다. 빈 그릇 가득한 뼈다귀를 살짝 헹궈 마당을 지키는 개한테 가져다준다. 음식 쓰레기가 특식으로 변했다. 코를 박고 먹는다. 식탁에서 짓는 죄를 조금 덜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볍다. 밀가루를 풀어 설거지를 한다. 세제로 부신 것보다 더 개운하다. 마트에 근무하는 친구가 봉지가 뜯어져 판매할 수 없는 것을 나눠 준 것이다. 생태에 관심이 많은 그 친구로 인해 우리 집엔 설거지용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는다. 어릴 적에 손님이 오기로 한 날이면 촘촘한 타일 부뚜막을 밀가루 묻힌 행주로 깨끗이 닦아내는 건 늘 내 몫이었다. 세제 대신 밀가루 설거지를 하면서 푸른 지구별을 위한 작은 마음 하나를 보탠다는 생각에 더없이 뿌듯하다.아흔 고개를 넘는 어머니에게 일회용품은 소용에 닿지 않는 물건이었다. 필요한 만큼 그때그때 음식을 만들고 넉넉하다 싶으면 낮은 담장 너머로 이웃과 나누었다. 냉장고란 게 집안에 들어온 후에도 일회용 비닐에 음식을 담거나 하지 않으신다. 전기와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 세탁기 보다 손빨래를 즐기는 어머니는 평생토록 간소한 삶을 이어오셨다. 전기와 물과 기름을 누구보다 아끼고 낭비를 무서워하는 어머니는 아픈 지구별의 이마를 언제나 짚어주고 계셨다. 박월수 수필가 오늘도 산골 마당엔 딱새가 놀고 직박구리가 다녀갔다. 내 눈이 미치지 않는 뒷마당 귀퉁이에 배고픈 산짐승이 내려와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앞 거랑 보 아래선 흰 두루미들이 모임이라도 하는지 하나둘 모여들더니 어느새 그득하다. 그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려면 내 욕심을 내려놓고 숨탄 것들을 배려하는 맘이 먼저라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만큼은 아니더라도 정갈하고 간소하게 살아야겠다. 나는 보일러 온도를 낮추고 도톰한 스웨터를 꺼내 입는다.◇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수필가 박월수

2024-01-23

분열과 융합의 사건에 대해서

불을 사용하던 인간은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게 되면서 불을 빼앗기게 된다. 이후 인간들은 문명의 씨앗과도 같은 불을 빼앗기고서 어둠 속에서 고통을 겪게 된다. 이를 애처롭게 지켜보던 프로메테우스는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해준다. 이것을 계기로 프로메테우스는 카프카스의 바위산 정상에 쇠사슬로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벌을 받게 되고, 제우스에 의해 질병과 재앙의 고통이 인간들에게 내려진다. 인간은 신에게서 불을 얻음과 동시에 그에 따른 재앙과 고통을 받게 된다.영화 ‘오펜하이머’는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한 영화다. 영화의 시작 장면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에서 거대한 화염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1945년 7월 16일 앨라모고도의 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을 때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인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고 읊조린다.인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하고 거대한 전쟁인 세계2차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개발된 무기는 비록 전쟁의 불을 꺼뜨렸지만 그것이 가져올 파괴력을 인지하게 되면서 커다란 근심을 떠안게 된다. 물과 불, 죽음과 파괴, 전쟁과 평화, 신으로부터 불을 얻은 인간이 직면하게 된 재앙이 충돌한다.불을 처음 발견한 인간에게 있어서 불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후 불을 다루게 된 인간은 빠르게 번식했으며 지구 곳곳으로 영역을 넓혀가게 된다. 이를 이용하여 문명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숱한 멸망과 재앙의 과정을 겪게 된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디뎠던 오펜하이머는 전쟁의 종식과 함께 종식을 막기 위해 헌신한다. 이런 면에서 오펜하이머는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고 그 간극이 극과 극을 달린다.영화 속에서도 오펜하이머가 겪는 여정은 이와 다르지 않다. 양자역학의 성립에 기여했던 닐스 보어는 영화 속에서 케임브리지의 한 강연장에서 “아인슈타인이 열어놓은 문을 통해 우리는 모두가 받아들이기 힘든 에너지와 역설의 세계로 들어왔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세계의 최전선에서 오펜하이머는 핵분열이라는 “우주의 본질적인 힘을 이용”해 폭탄을 만든다. 바로 핵폭탄이다.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과 캐나다가 공동 참여한 원자폭탄 개발이 진행된다. 1946년까지 극비리에 진행된 계획은 약 13만명의 고용인원과 당시로서는 막대한 금액인 약 20억 달러의 비용이 들었다. 이 프로젝트의 중심에서 오펜하이머는 핵분열을 위해 모든 인력과 역량들을 융합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물리학자 중 한명이 헝가리 태생의 에드워드 텔러였는데, 그는 핵융합의 프로젝트 안에서 끊임없이 핵분열의 수소폭탄 개발을 주장한다.영화는 ‘분열’과 ‘융합’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컬러와 흑백으로 이어지는 화면 전환은 현재진행과 과거로 나뉘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대표적인 영화구조인 레이어가 쌓여간다. 그의 전작인 ‘덩케르크’ ‘인셉션’에서 레이어가 플롯의 깊이와 풍성함에서 사용되었다면, ‘오펜하이머’에서는 플롯의 모순과 역설, 대립과 충돌의 기능으로 사용되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성공적으로 투하된 이후 오펜하이머는 핵통제주의자이자 반(反) 수소폭탄의 아버지가 된다. 모순과 역설, 분열과 융합이 반복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존재가 오펜하이머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1986년 핵무기는 7만개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핵폭탄보다 더 큰 위력을 지닌 수소폭탄도 개발된다. 전쟁의 종식을 위해 인간의 손에 쥐어진 핵폭탄은 인류 전멸이라는 재앙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핵폭탄의 개발은 과학자의 일이었고, 그것의 사용은 정치인의 몫이었다. 전쟁과 평화는 과학과 정치의 역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4-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