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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인류의 기록문화유산, 제주어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데이비드 크리스탈이 쓰고 권루시안이 옮긴 ‘언어의 죽음’은 스티븐 웜이 분류한 언어의 위기 5단계가 있다. 그 가운데 제주어는 이미 5단계로 소멸된 언어로 분류된 바가 있다. 제주어의 소멸을 안타까워했던 필자는 국립국어원장 시절부터 이 제주어를 인류의 기록문화유산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그 실천에 앞장서왔다. 제주방언의 보존을 위한 국제학술회의를 주도적으로 개최하였으며 제주방언연구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제주어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고유한 제주 문화와 역사까지 온전히 남겨져야 할 것이라 강조해 왔다. 그런데 제주 토착인들은 과연 제주어를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가? 당당하게 제주어를 교육하고 문학작품에도 제주어 사용을 하고 있는가?현길언의 소설 ‘용마의 꿈’에 나오는 ‘안가름’은 마을 이름이다. ‘안가름’(강남(江南) 천자국(天子國) 안가름 김정승 댁에서 솟아나신 총맹스런 세 부인입니다. )은 마을 이름이다. ‘-가름’ 또는 ‘-카름’은 ‘가르다(分)’의 의미를 가진 동사의 명사형이다.제주에서는 동쪽에 위치하면 ‘동카름’, 서쪽이면 ‘서카름’, 중앙이면 ‘안가름’ 또는 ‘안카름’이라 하고, 방위와 관계없이 바다 쪽이면 ‘알카름’, 한라산 쪽이면 ‘웃카름’이라 부른다. 또 ‘그신새’(나는 어머니 등 뒤에 달라붙어 누운 채 그 도깨비를 생각한다. 저건 틀림없이 그신새 귀신일 거야. -‘지상에 숟가락 하나’)라는 낱말의 뜻은 무엇일까? ‘그신+새’로 분석되며, ‘새’는 한자어 ‘사(邪)’에 해당한다. 사악함을 쫓는 것을 ‘새쾓리다’라고 하는데, ‘새쾓리다’의 ‘새’가 바로 이것으로 이것은 허약한 사람에게 잘 나타난다고 생각하고 있다.현기영의 소설에서는 ‘곤밥’(어린 시절에도 파제 후 ‘곤밥’을 몇 숟갈 얻어먹어 보려고 길수 형과 나는 어른들 등 뒤에서 이렇게 모로 누워 새우잠을 자곤 했다. -‘순이 삼촌’, 곤밥(흰쌀밥)으로 손님 대접해여마씸. -‘변방에 우짖는 새’)이 자주 등장한다. ‘곤밥’은 ‘고운 밥’의 제주어인데, ‘곤(麗)+밥(飯)’으로 구성된 낱말로 잡곡을 섞지 않고 흰쌀로만 지은 밥을 말한다. 가난한 제주사람들이 평소에는 잡곡밥을 먹다가 제삿밥으로만 흰쌀밥을 먹었기에 ‘곤밥’이라 하였을 것이다. 쌀밥이 잡곡밥보다 빛깔이 곱다고 생각한 언중들의 생각이 담겨진 어휘다.제주도는 삼다의 섬이라고 한다.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은 섬인데, 특히 바람과 관련한 어휘가 많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대양의 바람을 문충성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샛바람/ 갈바람/ 마파람/ 하늬바람/ 동마바람/ 서마바람/ 갈하늬/ 높새/ 높바람/ 높하늬/ 건들마/ 도껭이/ 도지/ 강쳉이/ 양도새/ 바람주제/ 놀/ 모든 제주 바람들 한데 모여 사는 곳”-(‘허공’). 여러 종류의 바람 이름이다. 이 가운데 특히 ‘도껭이’는 어떤 바람의 이름일까? ‘도껭이’는 ‘도(回)+ㅅ+개(疥)이’로 분석되는데 ‘회오리바람’으로 짐작할 수 있다. 동풍을 ‘샛킞름’, 서풍을 ‘놋킞름’, 남풍을 ‘마킞름’, 북풍을 ‘하늬킞름’이라 하고, ‘하늬킞름’도 다시 세분하여 ‘서하늬·놉하늬’로 나누기도 한다.제주의 명물 음식 중에 몸국이라는 게 있다. 해녀들이 물질을 하다가 뭍으로 올라와 한기를 가세며 몸국 한 사발을 먹으면 저절로 온몸에는 화사한 봄이 깃든다. 몸국에서 ‘몸’은 모자반의 제주도 방언이다. 돼지 뼈를 고아 끓인 국물에 모자반을 넣은 제주 음식이다. 제주도 시인 허영선은 ‘몸국 한 사발’이라는 시에서 몸국을 요리하고 먹는 제주사람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창밖에 폴폴 눈 내리는 날/그리운 바다가 화악 달려들었다/단 한 숟갈에도 몸을 살려주던 그것/돼지뼈 접쩍뼈/한번 질펀하게 우려내 국물을 내고/그 말갛게 싱싱한 바다의 몸 살짝 밀어 넣어주면/순식간에 덮쳐오던 미친 허기/그 위로 접착제처럼 끌어당기던/배설까지 베지근 보오얀 홀림/아무것도 걸칠 것 없는 바다의 식탁/몸이 ㅁ·ㅁ을 먹다보면/저절로 몸꽃 피어나던/성스러운/그 한 사발/몸국”-허영선의 ‘해녀들’. ‘접짝뼈’, ‘배설’, ‘벶근’, ‘ㅁ·ㅁ’과 같은 제주어로 감싸 안은 ‘몸국 한 사발’을 바다의 식탁에 올려놓고 허기진 배를 채울 몸국 한 숟갈을 떠먹어도 확 바다가 달려든다. 온 몸에 퍼지는 몸국은 제주인들의 성스러운 몸(身)이다. 바닷바람에 지친 마음을 달래는 혼이다. 방언의 힘, 몇몇 제주 단어가 살아 퍼덕이는 시에서 제주 사람들의 역동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

2024-03-25

마라톤 전투 - 서세동점의 기원

기원전 550년경 지금의 이란 땅에 아케메네스왕조가 번성한다. 이후 기원전 529년이 되면서 페르시아 키루스 대왕에 의해 통일제국이 탄생하였다. 페르시아는 나일강 유역의 3천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기간 자연재해 한번 없이 풍요를 누리던 이집트를 평정하고, 오리엔트를 하나로 묶는다.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는 막강 군사력으로 기원전 513년 본격적인 정복 전쟁에 나선다.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수중에 넣으면서, 해상무역에 사활이 건 그리스와 한판 세기의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를 진압한 후 아테네 원정에 나섰다. 현대 서양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사에서 처음 동서양 전투가 개시된다. 페르시아 군이 아테네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늘은 신들의 나라 편이었다. 바다에서 폭풍과 파도가 몰아치는 바람에 300여 척의 배가 침몰하면서 다리우스 1세는 분을 삭이며 회군해야 했다.다리우스는 절치부심,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는 제2차 정벌에 돌입한다. 당시 페르시아는 군함 600여 척의 막강 해군을 중심으로 보병 2만 5천 명과 기병 1천 명을 비롯해 군사들 사기마저 높아 거칠 것이 없었다.그리스 낙소스를 점령한 페르시아는 아테네의 굳건한 동맹 에레트리아 공격에 나섰다. 페르시아는 자신들의 성역 사르디스를 불태운 데 대한 복수로 시민 모두 페르시아로 데려가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고 창끝을 아테네로 향했다. 이때 아테네는 수성전을 펼쳐 스파르타군이 오기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나가서 맞서 싸울 것인가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이때 아테네에는 밀티아데스(Miltiades)라는 출중한 장군이 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아테네 군사는 그리스 동북부 마라톤 평원에서 막 상륙한 페르시아 주력부대를 맞았다. 그리스는 시민군 1만 명이 전부였지만,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자신들이 승리 하리라는 신탁을 듣자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 1만 5천 명만이 해안에 진을 쳤고, 나머지 1만 명은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항해를 이어갔다. 이를 확인한 밀티아데스는 급박해졌다. 아테네에 페르시아 공격을 막을 군사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했다.이때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마치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처럼 양익포위 전술이었다. 적은 수의 아테네 군사를 페르시아 군과 대등하게 맞서게 한 후 중앙을 얇게 양쪽은 두텁게 포진했다. 페르시아군은 종대로 대열을 맞춰 포진했다. 앞을 향해 나아가던 아테네 군사는 페르시아 군과 거리가 좁혀지자, 진군 속도를 높였다. 상대적으로 중앙군은 속도를 늦춘다.페르시아 군은 궁수도, 기병도 없는 그리스 군을 오합지졸로 얕보았다. 화살 사정거리에 들자, 페르시아 궁수들이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아테네 군사들은 진격 속도를 높여 사정권을 벗어나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리고 양측의 뛰어난 군인들이 페르시아 옆구리를 쳤다. 적진 뒤를 돌아 포위에 성공하면서 전열이 흐트러진 페르시아 군을 부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군대는 양측을 뚫고 들어오는 아테네군의 전광석화 같은 공격에 기가 꺾이고 말았다. 불과 15분여 만에 거둔 아테네 승리였다.아테네군 피해는 192명으로 미미한 반면에 페르시아는 6천400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서양 역사가들 주장처럼 동서양 간 최초로 벌어진 전투에서 그리스 승리로 끝났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승리라며 동양 지배, 즉 서세동점의 당위성에 무게를 실었다.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마라톤 전투는 유럽이라는 아기가 탄생하면서 낸 첫 외침이라고 감동한다. 고대에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동서양 대립이라는 시각 자체도 웃기는 일이다. 더구나 당시 그리스 문명이 유럽이 아니라 지중해, 즉 오늘날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을 아우르는 곳에서 일어났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문명 역시 아테네보다 페르시아가 더 발달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군국주의적인 스파르타보다는 훨씬 민주적이었다. 스파르타는 노예가 해주는 밥을 먹고, 함께 훈련에 동참했으며, 기형이 태어나면 죽였고, 여자는 원로원 출입도 할 수 없었다. 이 예를 든 것은 문명의 반대가 야만이기 때문이다.마라톤 전투 승리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 전령이 전력 질주해 아테네에 도착한 후 “승리했노라!” 외치고는 쓰러져 죽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 해군이 아테네를 침략하는 것을 서둘러 돌아가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마라톤이 되고 올림픽 공식 종목에 채택되었다. 이때 진군 거리가 42㎞다. 뒤에 195m가 추가된 것은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에서 영국 여왕이 있는 윈저궁까지 거리가 추가되면서 공식화된다. 여왕이 골인 지점으로 들어오는 선수를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는 게 정설이다./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3-25

“내가 이렇게 공천한다는데 뭐 어쩔래”

김진국 고문 민주당 박용진 의원 공천 탈락은 대한민국 정당사에서 오래도록 남을 사건이다. 지역구민의 뜻과 다르게, 국민 여론을 거슬러, 당권을 쥔 권력자 한 사람이 국회의원을 만들 수도 제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독자 출마할 수도, 주민이 그 사람에게 표를 던질 수도 없다. 민주주의가 살아 있나.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왜 박 의원을 쫓아냈을까.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또 당 대표 경선에서 박 의원은 이 대표의 눈엣가시였다. 박 의원은 이 대표의 약점을 아프게 공격했다. 그는 대장동 사건이 터지자 “‘부패세력 발본색원, 온갖 비리 일망타진’으로 밀고 가야지, 정치적으로 여당한테 유리할지 야당한테 유리할지 이런 것 생각할 때가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이 대표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세계를 여행하도록 1천만원씩 주자고 즉석 공약했다. TV 토론에서 박 의원이 이 공약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이 대표는 “그건 공약이 아니고요…”라고 발을 뺐다. 그러자 박 의원은 “그럼 뭐가 공약이냐”며 비웃어 망신을 줬다.다른 사람은 잊어도 이 대표는 모두 치부책에 적어둔 모양이다. 지난해 9월 이 대표의 체포동의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할 때, 민주당 내에서 최소 39표의 이탈표가 생겼다. 이후 명단이 여의도에 떠돌았다. 그 명단에 오른 의원은 이번에 모두 제거됐다.이 대표는 ‘시스템 공천’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고무줄이었다. 특히 박 의원 제거는 끈질겼다. 4달 전 의정활동을 잘못한 하위 10%에게 감점을 20%에서 30%로 올렸다. 거기에 박 의원을 집어넣었다. 재심 요청은 기각했다. 해마다 우수의원으로 뽑혔던 박 의원이 왜 하위 10%인지 설명이 없었다.1차 경선에서 이긴 정봉주 전 의원이 사퇴했지만, 차점자인 박 의원을 공천하지 않았다. 전남 순천과 다르게 적용했다. 2차 경선에서는 규칙을 다시 바꿨다. 강북을 권리당원 50%, 주민 여론 50%에서 전국 권리당원 70%, 지역 권리당원 30%로 조정했다. 지역 연고 없는 조수진 변호사를 위한 규칙이다.2차 경선에서 이긴 조수진 변호사마저 사퇴했다. 그러자 한민수 대변인을 ‘전략공천’했다. 한 후보는 박 의원·조 변호사와 2차 경선을 신청했지만 컷오프됐다. 예비심사에서 박 의원·조 변호사보다 못하다고 판단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박 의원을 배제하고, 한 대변인을 선택했다.‘자객’들의 자질도 기가 막힌다. 먼저 박 의원을 누르기 위해 입이 거칠기로 소문난 정봉주 전 의원을 투입했다. 정 전 의원은 이혼한 전 부인을 폭행한 전과가 있다. 그는 팟케스트에서 ‘발목지뢰 경품’ 망언을 했다. 그는 피해 군인들에게 사과했다고 주장했지만, 거짓말로 드러났다. 팟케스트에서 조국 사태에 바른말을 한 민주당 의원들을 향해 신문에 적을 수 없는 욕설을 쏟아내기도 했다.조수진 변호사는 ‘인권 변호사’라고 홍보했다. 그러나 미성년자 강간을 비롯한 성범죄자들을 여러 차례 변호했다. 변호 과정에 2차 가해를 한 과거도 드러났다. 성범죄자가 감형받는 요령을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다. 관련 범죄자들이 자신에게 의뢰하도록 홍보한 것이다. 일종의 전문변호사다.이 대표는 당 대표 경선 때 “박용진 후보도 공천 걱정하지 않는 당을 만들겠다”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말과 행동이 정반대다. 그는 과거 “존경하는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하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라며 조롱한 일이 있다. 아마 이번에도 그러지 않았을까.이재명 대표는 “이번 정권은 아예 대놓고 ‘내가 한다는데 뭐 어쩔래’ 이런태도”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 대표의 공천이야말로 ‘어쩔래 공천’ 아닌가. 하버드대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 교수는 ‘민주주의는 어떻게 파괴되는가’라는 책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정치 경쟁자를 부정하는 행동을 전체주의의 위험신호라고 지적했다. 정치인에 대한 맹신적인 지지, 가치 규범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게임으로 환원해 생각하는 정치적 몰가치성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정치인이 아니라 상식이 있는 시민이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3-24

이호우의 ‘개화’를 생각하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 청도가 자랑하는 시조 시인 이호우(1912∼1979)와 이영도(1916∼1976)는 남매 사이다. 몇 년 전 여름 그들의 생가를 찾았다가 모기와 각다귀 패거리에 쫓기다시피 한 처참한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요즘 그분들 생가를 복원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처음 생가를 찾았을 당시엔 청도 군정(郡政)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약간의 인연만으로 문학관을 짓는 비용과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 지자체와 너무도 비교되는 나른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일례로 구상 시인은 서울에서 출생했으나, 본적이 칠곡군 왜관읍이고, 그곳에서 20년 시작(詩作) 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칠곡군은 2002년에 ‘구상 문학관’을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왜관에 갈 때마다 부러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요즘 여러 가지 풀과 나무에 꽃이 피어나고 있다. 사람들의 눈길은 오직 나무에 피어나는 꽃에 집중된다. 벌써 시들어가는 매화와 산수유, 이제 절정을 맞은 개나리와 진달래, 살구꽃, 명자꽃, 목련, 성급한 몇몇이 꽃망울을 터뜨린 벚꽃이 주요 대상이다. 하지만 눈을 내리뜨면 곳곳에 풀꽃이 앙증맞게 피어나고 있다.지난 2월부터 지치지 않고 얼굴을 내밀고 있는 봄까치풀, 요즘 한창인 광대나물, 민들레, 잔디꽃, 아슬아슬하게 피어나 여린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꽃다지, 꽃인 듯 아니듯 피어나는 머위꽃, 화사한 유채꽃, 흰색의 냉이꽃과 황새냉이꽃, 너무 작아서 색깔 먼저 보이는 제비꽃! 이 어린 중생 풀꽃들이 곳곳에서 피어나 들판을 화사하게 수놓고 있다.의상 대사가 ‘법성게(法性偈)’에서 갈파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의 세계가 우리 주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지는 경이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 작은 티끌 하나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는 ‘화엄경’의 정수를 불과 일곱 글자로 통찰한 선지식(善知識)의 탁견에 무릎을 칠 따름이다. 크고 작음의 경계를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겠는가?!이런 정황을 이호우 시조 시인은 ‘개화’(1940)에서 기막히게 그려낸다. 스물여덟 살의 패기 넘치는 청춘 이호우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심성과 기막힌 눈길이 포착하는 개화의 순간!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지막 남은 한 잎이 마침내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빛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하늘 향해 온몸을 열어젖히고 있는 여리고 작은 꽃송이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손에 땀을 쥐는 시인. 모든 꽃잎이 피어나고, 드디어 마지막 잎이 개화에 돌입하는 순간, 시인은 차마 눈을 감아버린다. 시인이 눈을 감기 전에 확인하는 정경은 시인과 함께 개화를 대면하는 바람과 햇빛마저 숨죽이는 것이다. 이런 도저한 시적 인식 혹은 감수성을 어쩔 것인가?!봄이 오면 꽃이 피는 게 당연하고, 여름엔 열매가 익어 가을에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게 당연하다 여긴다. 그러나 당연한 사이사이에 우리가 놓치는 숱한 고비와 난관이 있다. 북풍한설과 모진 강추위에 건조함까지 견디고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현대시조 ‘개화’를 떠올린다.

2024-03-24

‘물의 날’

우정구 논설위원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물을 만물의 근원이라는 일원설을 주장한 바 있다. 인류에게 물은 고대나 지금이나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자원임에 틀림이 없다.물이 없는 생물의 존재는 생각할 수 없다. 인류문명의 발상지가 강 등지서 출발한 것도 인류와 물의 상관관계를 말해 준다. 사람 신체의 70%가 물이다. 신체의 물은 물질대사에서 생긴 노폐물을 체외로 배출한다. 또 체내의 갑작스런 온도 변화를 막아주는 등 물은 인간의 생리적 기능을 원활하게 도와준다.인구 증가와 산업활동이 늘면서 수질 오염이 확대되고 전 세계적으로는 물 부족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유엔은 1992년 리우환경회의 의제 가운데 하나인 수자원 보호를 수용하면서 매년 3월 22일을 ‘세계 물의 날’로 정했다. 물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고 일깨우는 날이다.1990년대 국제인구행동연구소가 한국을 물 부족 국가로 발표했다. 한국은 연간 강수량이 세계 평균보다 많지만 국토의 70%가 급경사인 산지며 강수량 대부분이 여름철에 집중돼 물 부족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 또 인구밀도가 높아 1인당 물 사용량이 많아 물 부족 국가의 원인이 된다고 했다.그러나 국내 일부 학자들은 세계 물포럼 자료를 인용, 한국은 물 부족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해 물 부족 국가 논란이 이어져 왔다. 수돗물을 식수로 하는 세계 몇 안되는 나라인 우리나라가 물 부족 국가란 것이 맞지 않다는 논리인데, 국민도 물 부족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하지만 수질 오염이 확산되고 기후변화 등으로 물 부족 현상이 더 심해질 것으로 기후학자들은 전망한다. 물 부족 국가 여부를 떠나 물 부족에 대비하는 절약정신은 잘 지켜지는 것이 옳은 일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3-24

AI 시대 즐거운 변화, 로봇

장광일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지난주 충남 홍성에 있는 한양로보틱스(대표 강종원) 회사를 벤치마킹하러 다녀왔다. 이 회사는 정보통신기술(ICT)을 기반으로 한 로봇 제조 및 개발을 주요 사업으로 하고 있었으며, 국내외의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로봇 기술을 활용하고 있었다. 로봇 시스템의 설계, 제작, 통합 및 개발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으며, 높은 기술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고객 요구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었다.공장에 들어서니 하이브리드 다관절 로봇을 작업자들이 제작하고 테스트하고 있었는데, 함께 참석한 사장님은 이 로봇은 고객에게 인도되어 현장에 설치되었을 때 작업자가 쉽게 접근하고 쉽게 작동할 수 있도록 개발되었다고 하였다. 특히 자사 특허권이 있는 스킨센서 기술을 접목하고 있어 작업자와 협동으로 일하기 편하고, 작업자의 안전을 지키는 데 매우 효율적이라 하였다.스킨센서는 로봇이 주변 환경을 감지하고 상호작용하기 위해 사용되는 기술로 일반적으로 터치센서, 압력센서, 온도센서, 굽힘센서, 진동센서 등이 사용된다고 한다. 즉, 다양한 센서들이 통합되어 로봇의 피부와 같은 역할을 하여 외부 자극을 감지하고 처리하는 기술이다.더욱 감명을 받은 것은 이러한 로봇이나 센서 등을 관리하는 핵심요소로 청결이라고 하며 매일 사장님도 청소를 함께 하고 있었다. 센서가 깨끗해야 깨끗한 데이터(Clean Data)가 보내지고 로봇에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1965년 이정문 화백이 상상력으로 그린 그림을 보면 그 기술의 실현 정도가 현재 80%에 육박하고 있다. 그때 신문에 2000년대 미래 모습이라 그렸던 원격진료, 전기자동차, 태양열 주택, 로봇 청소기, 스마트폰, 전자신문 등의 그림은 모두 현실이 되었다.특히 로봇은 미래가 아니라 더 가까이 우리에게 있는 현실이 되었다. 인공지능 연구기관 중 하나인 오픈 AI에서 이번에 소개한 인공지능 로봇(AI Based Robot)은 먹을 것을 달라는 말에 사과를 집어주는 등 인간과 같거나 인간 수준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로봇이 오픈소스로 공개되어 저렴한 비용으로 누구나 제작이 가능해졌다는 것으로 이제 인공지능 로봇은 가상 세계를 넘어 물리 세계까지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었다는 것이다.로봇이 사람을 닮아가고 사람과 공존하고 있다. 로보틱스 1.0 시대에는 격리된 공간에서 용접 등 반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로봇이었다면, 현재는 로보틱스 4.0으로 사람과 대화하고 스스로 학습하여 발전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이다.기업에서는 공장 스마트 팩토리(Smart Factory)를 통한 인공지능, 빅데이터, 딥러닝, 머신러닝 등 혁신적인 기술을 활용하여 제조산업을 혁신하고 생산성을 향상하는데 주력하고 있고 특히 다양한 로봇 기술을 도입하여 공장 내 작업을 최적화하고 안정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는 회사 경쟁력을 향상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여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로봇 기술의 발전으로 회사에서는 고위험 수작업 등 어렵고 힘든 일을 로봇이 대신해 줌으로써 작업자의 안전을 확보하고, 가정에서는 가사를 돌봐줌은 물론 사람과 로봇이 함께 협동함으로써 편하고 윤택한 삶을 살아가길 기대해 본다.

2024-03-24

공허한 자유는 이제 그만

유영희 작가 지난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서울에서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가 화상으로 열렸다. 미국에서 열린 1차 때부터 화상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 회의 환영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자유, 인권, 법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다고 강조했다.그런데 같은 날 황상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이 사퇴했다. 황상무 전 수석이 MBC 잘 들으라며 1988년 정부에 비판적 기사를 쓰다가 회칼 테러를 당한 기자 이야기를 농담거리 삼아 했기 때문이다.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사퇴는 했지만,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이라는 자리에 있는 인물이 기자들 앞에 두고 정부를 비판한 기자가 테러 당한 이야기를 웃으면서 말한다는 것은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존중한다는 윤석열 정부에서 애당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그것뿐이 아니라 지난 1월과 2월에는 세 사람이 입틀막 당하며 끌려가는 모습을 온 국민이 지켜 보았다. 1월 18일 전북자치도 출범식에서 국정기조를 바꿔야 한다고 외치던 강성희 의원이 사지가 들린 채 끌려 나갔고, 2월 16일에는 카이스트 졸업식에서 RD 예산 삭감에 항의하던 졸업생이 입틀막 당하고 끌려 나갔으며, 2월 1일에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열린 의료개혁 민생토론회에서 임현택 소아청소년과 회장이 필수 의료 의견을 전달하려다 역시 입틀막 당한 채 사지가 들려 끌려 나갔다.이런 시절이고 보니, 지난 3월 7일 발표된 브이뎀 보고서에서 한국이 0.6점을 받아 세계 179개 나라 중 47위를 차지했다는 뉴스를 보아도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브이뎀은 민주주의 다양성(Variety of Democracy)의 약자인데, 이 보고서는 스웨덴 예텐보리 대학의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에서 발행하고 있다. 전 세계 4천200명 이상의 전문가가 민주주의 이슈와 관련된 데이터를 수집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어서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채점 기준은 선거·자유·참여·심의·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5가지 상위 원칙이다.이 기사를 보고 직접 브이뎀 보고서를 찾아보니, 2003년부터 2023년까지 자유민주주의 지수 변화가 극적인 나라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선 그래프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중에 한국은 벨 형 탑 10에 포함되었는데, 2015년 0.6점에서 2018년 0.8점으로 13위로 올랐다가, 작년에는 0.73으로 28위더니 올해는 더 내려가서 2015년 점수로 회귀하여 47위를 기록하여 U자를 엎은 벨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특히 언론 자유가 눈에 띄게 위축되는 20개국에 포함되었다고 한다.1에 가까울수록 민주주의가 발달한 것이고 0에 가까울수록 독재 국가다. 어떤 사람은 0.6도 높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된 42개국 중에 꼴찌라는 점, 0,8을 기록한 시절이 있었는데 퇴보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유는 소수에 의해 자의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만 주어지는 특권도 아니다. 공허한 자유 이야기는 이제 그만 듣고 싶다.

2024-03-24

[기고] 이가난진(以假亂眞)과 AI ‘밤양갱’

이승재 대구시 선관위 공보계장 중국 전한(前漢)의 왕망은 역성혁명을 통해 평제를 독살하고 신(新)나라를 세워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모든 것이 새롭다 하여 국호를 ‘신(新)’으로 명명하였으나 정작 왕망 자신의 폭정과 관리들의 부패로 15년 만에 붕괴되고 중국 역사에도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다.중국 역사학자 반고는「한서(漢書)」 교사지에서 이를 두고 ‘가짜 황제가 세상을 어지럽혔다’고 하여 ‘이가난진(以假亂眞)’이라고 하였고 후대에서는 가짜가 진짜를 어지럽히고 거짓이 진실을 뒤흔든다는 뜻의 고사성어로 회자되고 있다.진짜를 어지럽히는 가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종 있어왔다. 최근 가수 비비의 노래 ‘밤양갱’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가운데 여러 가수의 ‘밤양갱’ 커버곡이 나란히 유튜브의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재다. 그런데 이 커버곡이 딥페이크(Deep Fake) 기술을 이용한 AI커버곡임이 밝혀지면서 연예계는 물론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가수의 진짜 목소리와 거의 유사한 AI의 가짜 목소리에, 일각에서 호기심과 경이를 넘어 우려와 불쾌감을 표현하는가 하면 법조계에서도 퍼플리시티권, 저작권 등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딥페이크’는 인공지능(AI) 기술 중 하나인 ‘딥러닝(Deep learning)’과 ‘가짜(Fake)’를 조합한 용어이다. 딥페이크를 통해 시·공간을 뛰어넘어 무궁무진한 창작활동과 의사표현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게 되었지만 앞서 보았듯 순기능만을 찬양하기에는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아 보인다. 또한 기술이 정치적 영역으로 확장됨에 따라 또 다른 피해 확산도 우려된다.실제로 2023년 슬로바키아 총선의 가짜 음성, 미국 대통령선거 예비경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가짜 목소리가 유포되어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세계적으로도 이슈가 된 바 있다.진짜를 위협하는 가짜의 등장이 정권의 정당성, 나아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대두되자 각국에서는 뒤늦게나마 딥페이크등 신기술에 대한 규제의 입법화를 서두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23. 12. 28.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딥페이크영상등을 이용한 선거운동’ 조항을 신설함으로써 딥페이크에 대한 규제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선거일전 90일부터 선거일까지 ‘선거운동을 위한’ 목적의 딥페이크는 제작ㆍ편집ㆍ유포ㆍ상영 등이 금지되고 선거일전 90일 도래 전에 딥페이크를 이용하여 선거운동을 할 경우 딥페이크임을 표시하도록 규정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일정 기간 가짜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고, ‘가짜를 가짜라고 알릴 의무‘를 부과한 것이다.교묘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딥페이크라는 가짜는 유권자의 직관적 인지력을 교란하여 거짓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판단을 왜곡할 수 있다. 또한 ‘전파’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온갖 정보가 전 국민에게 실시간 ‘공유’되는 현실에서 선거현장에 유포되는 가짜 정보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하며, 사후 복구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수반되고 나아가 정권의 정당성마저 위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짜를 가짜라고 알릴 의무’를 부과하는 것과 ‘일정 기간 가짜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딥페이크로 인한 선거혼란을 막는 필요 최소한의 방편이다.그러나 이러한 규제로는 급속도로 발전하는 AI기술의 폐해에 대비하는 데 한계가 있다.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이 펴낸 ‘글로벌 리스크 리포트 2024’에 따르면 전 세계 각계 전문가들이 기후변화를 인류 최대의 위협으로 꼽으면서 뒤이어 AI가 생성한 가짜 정보를 두 번째 위협요인으로 꼽았는데, 그 이유가 각국의 규제 속도와 효과가 AI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라고 했다.선거에서 딥페이크영상 등 규제의 한계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정보의 진위여부를 따져보고 정확한 정보를 선별하여 취하려는 유권자 스스로의 노력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짜에 대항해 이를 저지하려는 사회 공동체적 노력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민의를 교란하고 선거를 왜곡할 수 있는 딥페이크 선거범죄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공동 파수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조지오웰은 “거짓(가짜)이 만연하는 시대에 진실을 말하는 것은 혁명적 행동이 된다.”고 하였다.4월 10일 국회의원선거가 20일 남짓 남았다. 딥페이크 기술의 산물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유권자를 현혹할 수 있는 가짜 정보 생산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 그리고 딥페이크를 이용한 가짜 정보를 가짜라고 알리는 것이 결국 진실을 말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후보자와 유권자 모두 가짜로부터 진짜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혁명적 행동에 동참함으로써 이번 국회의원선거가 ‘이가난진’의 선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2024-03-24

국민의힘과 TK

홍석봉 대구지사장 기껏 좋은 일을 해놓고도 사소한 잘못으로 되레 원망을 들을 때 ‘뭐 주고 뺨 맞는다’라는 말을 한다. 지금 TK(대구·경북)가 꼭 그 모양이다. 4년마다 되풀이되는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낙하산에 지역민들이 단단히 ‘뿔’이 났다.TK는 지난 박정희 정권 때부터 정권의 창출지이자 보수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해왔다. 보수의 원조이자 보수 지킴이였다. 이후 5, 6공화국을 거쳐 윤석열 정부에 이르기까지 보수의 터전이 됐다. 그러다가 3김 때부터 영·호남으로 편이 갈리며 ‘망국병’이라는 지역주의의 한 축이 돼버렸다. 이후 선거 때마다 TK는 지역 보수 정당에 표를 몰아주며 성원했다.하지만, 돌아온 것은 처참한 배신이었다. 매번 뒤통수를 맞고 땅을 치는 일이 벌어졌다. 걸핏하면 낙하산 공천으로 지역을 물 먹이기 일쑤였다. 그래도 TK는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듯 선거 때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표를 줬다. 그만큼 당했으면 외면하거나 돌아서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렇게 하질 못했다. TK는 ‘바보’, ‘못난이’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수 십 년이 흘렀다. 하지만, 또다시 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4·10 총선 국민의힘 TK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 지역민들의 바람은 철저히 배척당했다. 오히려 지역민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지역의 재선 이상 다선 대부분이 공천 열차에 무임승차했다. 잡음 없이 가려는 당 지도부와 공천관리위원회의 안전 운영 기조 탓이려니 했다.그게 아니었다. 공천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자 감동과 혁신 없는 공천이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다급해진 공관위는 국민추천제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대구 동·군위갑과 북을 등 국민의힘 강세지역 5곳에 회심의 카드로 내밀었다. 밀실 공천과 전략 공천 우려가 나왔다. 결국, 지역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사들이 벼락 공천을 받았다. 5·18 폄훼 발언으로 공천을 번복한 대구 중·남구도 의외의 인물을 낙점했다. 지역이 부글부글 끓었다.보수의 안방이자 윤석열 정부 탄생에 절대 공헌을 한 TK의 공로와 헌신은 안중에도 없었다. 당 지도부가 해당 분야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생면부지의 인사를 낙하산으로 꽂았다. 당 지도부가 영입인사는 우대하고 지방 정치인은 무시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만만한 것이 홍어 X’라고 궁지에 몰리기만 하면 TK에 칼을 들이댔다.결국, 현 정권과 국민의힘을 여태껏 밀어주고 지지한 대가가 TK 홀대로 되돌아왔다.헛물을 켠 TK의 자존심만 형편없이 구겨졌다. TK 유권자 무시와 다름없다.다른 선택지만 있어도 이만큼 허탈하지는 않았을 터다. TK의 정치 냉소와 ‘해보나 마나 한 선거’만 기다리고 있다. 국민의힘을 지지하자니 속이 뒤집힌다. 민주당엔 더더욱 눈길이 안 간다.기대했던 제3지대는 지리멸렬이다. 판을 뒤집을 수도 없다. 자칫 투표권 행사 포기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국민의힘의‘갑툭튀’에 TK 곳곳에서 파열음이 나오고 있다. TK는 지금 조건 없는 국민의힘 짝사랑과의 결별을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2024-03-21

행복한 나라

우정구 논설위원 핀란드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등과 함께 북유럽 선진국의 하나다. 유럽국가 중 면적은 3번째로 크나 인구는 554만명에 불과해 인구밀도가 유럽국가 중 가장 낮다.지구의 북쪽에 위치해 1년의 절반 가량이 추운 겨울인 나라다. 유럽의 극지여서 겨울엔 해가 뜨지 않는 날도 많다. 일부 지방의 12월은 해가 오전 10시에 떠서 오후 2시면 진다.핀란드가 UN산하기구인 UN지속가능발전해법 네트워크가 매년 발표하는 국가별 행복도 조사에서 올해도 가장 행복한 나라로 선정됐다. 연속 7번째다. 세계 150여 개국 대상으로 1인당 GDP, 사회적 지원, 기대수명, 부정부패지수 등의 자료를 근거로 설문 조사한 결과다. 한국은 52위로 지난해보다 5단계 올랐다.상위권에는 핀란드를 포함 덴마크 등 북유럽국가들이 많이 포진했다. 우리나라는 2022년 기준 경제규모가 세계 13위나 행복도 순위는 그보다 훨씬 낮게 나타났다.경제 규모 3위인 일본도 행복도는 51위에 그쳤다. 부자나라 미국은 23위, 독일은 24위로 조사됐다.행복이 소득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국민이 만족하는 행복감은 소득 이외에도 정치적 안정감, 부패없는 나라, 사회적 신뢰도, 소득불평등 해소 등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분석이다.핀란드가 7년 연속 행복도 1위를 유지한 이유 중 하나 눈여겨볼 것은 높은 사회적 신뢰다. 국가와 국민, 나와 이웃 간의 신뢰가 나를 행복하게 했다는 것이다.거짓과 불신, 막말 등이 판치는 우리 정치를 보면 우리 국민이 행복해질 날이 올 지 걱정이 된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3-21

꽃샘추위의 3월에는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반도 동쪽의 저기압과 서쪽의 고기압 사이로 차가운 북서풍이 불어온 탓이다. 또 건조주의보까지 내려져 있는데 강풍까지 불어오니 산불도 염려되고 화재의 발생도 우려된다. 그런데 다음 주까지 빗방울이 떨어지겠다고 하니 수상한 3월의 봄날이다. 길가의 개나리와 계곡의 산수유, 산기슭의 생강나무들이 서로 노란 꽃잎을 피워올려 진달래의 연분홍 잠을 깨우고 있다.3월 22일은‘서해수호의 날’이다.‘제2연평해전’과 ‘천암함 피격’ 그리고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도발로 희생된 ‘서해수호 55 용사’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3월 넷째 주 금요일로 정한지 벌써 9주년이다. 20일부터 전국 각지에는 ‘불멸의 빛’이 켜지며 국립대전현충원에서는 오후 8시부터 55분간 3개의 큰 빛기둥이 사흘간 쏘아 올려진다. 지금도 북한은 장거리포 등을 발사하며 싸움을 걸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에서는 추모행사에 관심 없는 듯 불참이 많았고 윤석열 대통령은 참석하여 55인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는 등 열의를 보였으니 사상이 반대일까 궁금하다.23일은 ‘세계 기상의 날’이다. 세계기상기구 WMO가 1950년 세계기상협약을 제정하였었고 우리나라는 1956년 68번째로 가입하여 기후 위기 대응과 기상이변 등에 협력하고 있다. WMO의 올해 주제는 ‘기후 행동의 최전선에서’인데, 여기서 ‘기후 행동’이란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개인, 정부, 사회의 모든 노력’을 말하며 일상 속에서 1회용 사용을 줄이는 것부터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하고 재생에너지 활용을 통하여 탄소중립을 실현해야 한다.지표면의 온도상승은 150여 년 전 산업혁명 이후보다 섭씨 1.1도나 올라 최고치를 기록하였고 남극의 얼음양은 자꾸 줄어들고 있다. 잦은 태풍과 가뭄도 인류에게 두려움을 준다. 북아프리카의 폭염은 섭씨 50도를 넘었었고, 기상이변도 심해져 미국은 한파와 폭우가 덮쳤고 유럽에서는 이상 고온·저온 현상으로 기후가 요동쳤다.또 23일은 ‘세계 물의 날’이다. 그 주제는 ‘함께 누리는 깨끗하고 안전한 물’이며 인류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로 물 부족뿐만 아니라 강이나 바다가 오염되면서 먹을 수 있는 물이 줄어들고 있다. 가뭄과 홍수가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으니 물 자원을 잘 관리해야 할 것이다.이제 총선도 20여 일 남았다. 각 당마다 후보자를 선정하는데 무척 시끄럽고 뭐가 뭔지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진흙탕 속 싸움을 보면 참된 국가의 미래가 암담해지기도 한다.의대 정원도 확정되었다. 2천 명 중 대구·경북 지역 5개 대학은 289명을 배정받아 640명이 됐고, 동국대 분교는 71명, 경북대는 90명이 증원되어 ‘지역의 필수 의료를 살리는 꼭 필요한 정책’이라고 환영하지만, 의사가 된 후 몇 명이 지방에 남을지는 의문이다.그러면 작년 11월부터 범시민 결의대회와 서명 운동으로 연구 중심 의대설립을 요청해 온 포항시의 꿈은 깨졌는가. 가속기연구소와 바이오 기반 시설이 많은 포스텍이 스마트 병원을 구상해 온 것도 헛꿈이 되었는가….희망찬 3월, 꽃가루 날리는 광장에 서서 국가의 밝은 미래를 그려 본다.

2024-03-21

선거판의 몰이성(沒理性) 현상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선거를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제도라는 말일 터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국가권력에 직접이든 간접이든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나라도 민주주의국가이므로 국민투표권과 공무담임권 같은 참정권을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선거는 국민 개개인의 정치적 의사 표현일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선택으로 모든 국민의 다양성을 아우르는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는 제도다.그러나 선거는 독재자를 탄생시키는 산파역을 하기도 한다. 독일의 전신인 바이마르공화국 국민들은 보통·평등·직접·비밀이 보장되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하여 전폭적인 지지로 히틀러의 나치를 탄생시켰다. 왜곡된 집단기억, 주류정치권의 실책, 경제위기, 반세계화·반민주 정서, 진영갈등 등의 이유로 국민들이 분노와 혼란에 빠져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던 상황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는 후일의 분석이다. 그 밖에도 선거를 통해 집권한 독재자들이 적지 않지만, 최근 러시아에서 치러진 선거에서는 80%를 넘은 압도적인 지지로 블라디미르 푸틴의 장기집권을 선택했다. 그에게 선거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지금 한창 열기를 더해가는 우리나라 총선 정국도 그리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다. 아름답기는커녕 역대 어느 선거판보다 추한 행태를 드러내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우선은 그 선거판을 주도하고 있는 인물들의 자질과 인성이 과연 국민을 대표할 만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제일야당의 공천권을 쥐고 있는 이재명 대표의 경우, 4건의 전과는 차치하더라도 성남시의 대장동과 백현동의 개발사업에 관련된 혐의와 성남FC, 대북송금, 위증교사 등에 관련된 범죄 혐의로 기소된 사건만도 9건이나 된다. 이런 인물을 국민의 대표로 선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될 수 없는 일인데도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선거판을 누비고 있다.어디 그뿐인가, 업무방해·청탁금지법 위반,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1심과 2심에서 징역 2년형을 받은 조국 전 장관이 비례정당을 만들어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으로 1심에서 징역 3년 형을 받은 황운하 등을 영입한 것에도 국민 상당수가 지지를 하고 있다. 곧 감옥에 가야할 범법자들이 정당을 만든 것도,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들도 정상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이런 병적인 현상이 극심해진 것은 가뜩이나 뿌리 깊은 이념 대립이 상존해 있는데다 정치인들의 편 가르기가 주된 원인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정치인들이 가장 손쉽게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데는 편 가르기 만큼 좋은 전략이 없다. 일단 편을 갈라놓고 한 편에서 싸움을 부추기면 절반은 아군이 되어 피터지게 싸워주는 구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지금 선거판에 횡행하는 이런 몰이성적이고 반지성적인 행태들이 나라를 어디로 몰고 갈지 불안과 우려를 금할 수 없다.

2024-03-21

손목 건초염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손목 통증은 잘 낫던가 잘 낫지 않던가 확연하게 둘로 나눠진다. 잘 낫는 손목 통증은 오래되지 않고 손목의 틀어짐이 없는 경우이다. 이럴 땐 환자의 통증이 심하지 않고 잘 낫는다. 잘 낫지 않는 경우는 오랫동안 아팠거나 손목의 틀어짐이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대부분이 손목 건초염이나 삼각섬유연골복합체(TFCC) 통증이다.대부분은 일시적으로 손목을 쓰고 나서 아파서 내원하는데 일반 통증은 정확하게 아픈 부분을 찾아서 치료하면 빠른 시간 내에 회복이 된다. 오래된 통증이 잘 낫지 않는 경우는 손목 안쪽 요골 부근의 압통이 심한데 드퀘르뱅 건초염이라고 하는 손목 건초염일 확률이 높다. 손목 바깥쪽 척골 부근이 아프면서 걸레질이 힘들고 손이 부어 손가락이 쥐어지지 않는다면 손목 TFCC 쪽의 문제일 수 있다. 드퀘르뱅과 TFCC는 적합한 치료가 병행되지 않으면 수개월 혹은 수년간 고생을 하고 일상생활에서도 손목 통증이 심하고 움직임도 제한된다.일반적인 손목 통증은 대부분 부항으로 피를 뽑고 기본 약침으로 주변 힘줄을 풀어주면 4~5회 안쪽으로 좋아지나 드퀘르뱅이나 TFCC는 그렇지 않다. 손목 통증이 심한 환자들은 손목 전체가 아프다고 표현을 하기 때문에 꼼꼼히 살피지 않고 치료를 하면 엉뚱한 곳을 치료를 하게 된다. 그래서 의사는 꼼꼼히 살펴 손목 안쪽이나 바깥쪽이 아프지 않은지 양쪽 손목의 요골과 척골의 끝 부분을 비교해 더 튀어나와 있지 않은지 틀어지지 않은 지를 비교를 하고 진단을 내리고 치료를 해야한다.드퀘르뱅과 TFCC 등의 건초염이나 혹은 다른 심한 손목 질환은 일반적인 침치료에 더해 초음파 약침을 쓰면 효과적이다. 직접 손목의 힘줄을 보고 어느 힘줄 주변이 부었는지 확인을 한 후 그쪽으로 약침을 놔주면 빠른 효과를 보인다. 초음파로 보면 손목의 어느 힘줄이 부어 있고 물이 차있는지 혹은 어떤 신경이 눌러 있는지 보이기 때문에 정확히 치료를 할 수 있다. 한 달 동안 일반 치료 하는 것보다 한 번의 초음파 약침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다. 손목은 다른 부위와 비교해 약침으로 힘줄과 신경이 눌린 곳을 분리해주면 더 빠른 효과를 볼 수 있다.손목 통증은 기본적으로 사용을 금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고 쓴다고 하면 손목을 둘러쌀 수 있는 보호대를 착용하는 것이 좋다. 걸레를 짜거나 바닥을 짚는 것은 절대 금해야 한다. 치료는 시간이 되는대로 자주 하는 것이 좋으며 일반적인 치료에다 직접 보면서 약침을 놓는 초음파 약침으로 하는 것이 몇 배 더 효과적인 치료다.보통 잘 낫지 않는 질환에는 이름이 붙는다. 테니스 엘보 드퀘르뱅 터널증후군 흉곽출구 증후군 디스크 등등 병명이 있는 질환들은 잘 낫지 않는 질환들이다. 손목 관련 질환에도 많은 병명이 붙는다. 가장 많이 쓰는 부위고 또 소흘히 하는 몸의 부분이 손목이다. 사용 후엔 손과 손목 그리고 팔뚝으로 이어지는 근육과 힘줄부를 마사지 해주는 것이 좋다. 평생 써야 할 소중한 몸의 부분이니 스스로 잘 관리하고 아프면 근처 한의원에 가서 진료를 받는 것이 좋다.

2024-03-20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온 책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은 영국의 여성작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수필집이다. 그녀가 1928년에 영국의 두 개의 여자대학교에서 한 강의를 기본으로 1929년에 출간한 책이다.여성의 지적 생활이나 사회적 역량은 경제적인 뒷받침과 자기만의 독립적 공간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향후 백년 후면 여성의 지위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할 것이며, 사회적·문화적·경제적으로 남녀가 평등한 세상이 도래할 것도 예견했다. 그녀 사후 80여 년이 지난 지금 과연 우리는 그녀의 예언대로 되어있는가.한 평자는 이렇게 얘기했다. “시대가 바뀌어 여성의 지위는 많이 향상되었으나 지금도 자기만의 방을 애타게 갈구하는 여성, 그 방을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하는 여성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1993년, 박사 학위를 받은 이듬해, 여성학을 더 공부하고 싶어 대구가톨릭대 대학원 여성학과에 입학했다. 영미여성소설론 수업 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버지니아의 통찰력과 예지력과 용기있는 목소리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덕에 나는 페미니즘과 양성평등에 제대로 눈을 떴다.그로부터 2년 후인 1996년, 위덕대 교수로 임용이 되면서 나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공간, ‘자기만의 방’인 연구실을 얻는 동시에 버지니아가 말한 ‘지적 자유의 물적’ 토대인 급여생활자가 되었다. 그녀의 예언인 100년보다 더 빠른 68년만에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경제적인 능력을 획득했다. 임용 당시 나는 나를 사회적 인격으로 가능하게 한 위덕대를 위해 뼈를 묻어도 좋겠다는 다짐을 했고, 정말 열심히 강의와 연구와 봉사를 하는, 사회적으로 충실한 삶을 살았다.나의 연구실, ‘자기만의 방’은 무엇으로 채울까 고민할 필요없이 출입문과 창문을 제외한 벽과 천장까지 가득 빼곡하게 책으로 메워졌다. 25년이나 지나자 책은 책장마다 이중으로 꽂힐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넘쳤다.2020년 12월, 25년간의 학교생활이 끝날 즈음 저 책을 어쩌나 걱정되었다. 집엔 이미 남편의 책들로 가득했다. 대학 도서관에 기증한 1만권의 책을 덜어내고도 방방마다 넘쳤다. 나보다 2년 먼저 퇴직한 남편은 서재를 마련했지만, 난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때 마침 의성에 사는 지인의 연락을 받았다. 그가 사는 시골마을에 작은도서관이 생겼는데, 책이 없다는 것이었다.마침맞게 서로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접점이 생겼다. 그 많은 책을 싣고 가다가 트럭의 타이어가 터졌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잠시 헤어지자 생각했던 나의 책들은 4년 동안이나 의성에 가 있었다. 가끔 필요한 책이 있으면 의성까지 가서 가지고 오곤 하면서 책들에게 한없는 미안함이 있었다.지난 달 이사하면서 여분의 방이 생기자 남편의 첫마디가 “당신 책 가져오자”였다. 10개의 책장을 새로 사들였고 이사까지 남편이 주도해주었다. 그렇게 나의 책들은 무사히 돌아와 나의 ‘자기만의 방’에 안착했다. 잠 오지 않는 밤이나 일찍 잠 깬 새벽에 책으로 둘러싸인 방으로 가서 돌아온 나의 책 냄새를 즐긴다. 제자리를 찾은 책들이 기뻐하며 수런거리는 소리도 듣는다.

2024-03-20

말 많을 절

말을 많이 한 날은 왠지 속이 텅 빈 것 같다. 내 속의 무언가를 다 끄집어내 보여준 것 같아 기분마저 가라앉는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많은 얘기를 나눌 때도 있다. 그런 날은 가슴이 꽉 차게 느껴지지만, 나 혼자 떠든 것 같은 날은 왠지 마음 한 쪽 구석에 찬바람이 휭 하니 지나간다. 주책없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왜 했을까?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어 괜히 머리만 쥐어박는다. 나는 말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한다.한자를 찾아 옥편을 뒤적이다 획순이 가장 많은 글자는 무슨 자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획순 따라 가장 뒷면을 펼치니 총획수가 64획이나 되는 ‘말 많을 절’이 있었다.용(龍)자가 네 개나 붙어 있는 글자다. 한 마리만 해도 획수가 많은데 위 아래로 포개듯이 네 마리나 있으니 그 수가 좀 많겠는가. 그런데 왜 용이 많으면 말이 많을까? 낙관(落款) 같은 글자의 모양에 관심이 일었다.용은 우두머리를 뜻하지 않을까? 우두머리 넷을 한 글자에 담았다는 자체에 생각이 머물렀다. 용이 넷이나 되니 서로 자기가 최고라고 자칭하게 될 것이고, 그러자면 자연 말이 많아 시끄러울 것이라는 쪽으로 마음이 갔다. 같은 용이지만 위치가 어디냐에 따라 차이가 나지 않을까? 위에 있는 것과 아래에 있는 용이 다를 것이고, 좌청룡 우백호를 따지는 입장에서 보자면 같은 위에 있더라도 직책은 다를 것이다. ‘말 많을 절’자 안에는 같은 용이지만 네 가지의 계급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생각이 꼬리를 물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글자 안의 용들이 꿈틀거린다. 누가 더 힘이 셀까? 네 마리의 용의 모양은 같지만, 품성은 다 다르게 보인다. 네 자리 중 서로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물고 뜯는다. 서로를 비방하고 모함하며 모두 제가 가장 잘났다고 내세우기에 바쁘다. 남의 얘기는 들으려 하지 않기에 나와 상대를 비교분석 해야 한다는 것은 애초에 없다. 단지 내가 아니면 안 될 이유만 말 할 뿐이다.그 글자 안에는 말만 많은 것이 아니라 욕심도 많다. 세상과 단체를 위한다는 대의명분 속에 감춰진 마음을 조금도 버릴 수가 없어 한 치의 양보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진정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누가 더 갖추고 있는지 차근차근 따져, 나보다 더 나은 한 마리의 용에게 선뜻 여의주를 넘겨주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남은 세 마리의 용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 추천된 용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준다면 아마 그 글자는 처음부터 ‘말 많은 절’자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윤명희 수필가 용(龍)은 하나일 때 빛이 난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용이 될 수 없다. 그저 ‘말 많을 절’자에 불과하다. 말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은 모습만 용일 뿐 이무기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자신을 용이라 하겠지만, 멀리서 보는 내 눈에는 그들이 말 많은 한 무리로 보일 뿐이다. 여의주를 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용들로 인해 그 글자는 지금도 복잡하다.좁은 내 생활의 테두리 안에도 작지만 용의 자리는 있다. 예전, 어느 단체에서 잠시 네 마리의 용 틈에 있었던 적이 있다. 지나고 보니 그 자리였지, 정작 그때는 몰랐다. 그런데 한 사람이 계속 다른 사람들의 험담을 내게 해서 마음이 복잡했다. 그가 다른 이에게 내 말을 하는 것을 안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른 체 이상해져 가는 단체 분위기에 갈팡질팡했다. 말 속에 있는 내가 싫어 그 단체를 나왔다. 시간이 흘러, 한 발짝 뒤에서 보니 그녀가 단체장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것을 알았다.뉴스에서 보는 정치가들의 모습이 내가 속한 단체에서 보였다. 서로 화합하면 재미있을 일이 누가 회장이냐에 따라 갈라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네모난 낙관(落款)처럼 생긴 ‘말 많을 절’자를 가슴에 찍는다. 다만, 내가 그 속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용 뒤에서 비록 내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2024-03-20

석굴사원의 효시, 군위 아미타여래삼존석굴

군위 부계면에 가면 기암절벽 아래 세워진 사찰과 서원 그리고 잘 조성된 소나무길에서 풍기는 솔향을 물씬 느낄 수 있다.솔향이 이끄는 길을 따라 조금 걸으면, 경주 토함산에서만 볼 수 있을 것 같은 신라 시대의 석굴사원이 보인다.제2의 석굴암이라 불리는 이곳은 험준한 팔공산자락의 하나를 칼로 동강을 낸 듯한 학소대 절벽의 아랫부분에 아파트 한 동 크기의 자연동굴을 활용하여 만들어진 석굴사원이다. 멀리서 보면 절벽 아래쪽 중앙에 자연 동굴의 동그란 모양과 그 안에 평평한 장소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삼존불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현재는 가까이서 볼 수 있게 설계된 계단이 통제되어 있어서 강 건너 멀리서만 볼 수 있다.군위 아미타여래삼존불상은 본래 지역민에게서는 불암-부처바위-으로 불렸다. 대략 7세기 중엽에서 말경 신라의 원효대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인공적으로 조성된 경주 토함산 제1의 석굴암보다 규모는 작지만 시기는 100년을 앞선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굴의 높이는 4.25m이며, 본존상인 아미타불은 2.18m, 우협시 관세음보살상 1.92m, 좌협시 대세지보살상 1.8m나 된다.협시보살은 대체로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형상을 지녔으며, 본존불은 인자함보다는 진중한 인상으로 석굴 안에 봉안되어 있다. 원효대사는 이 동굴에 아미타여래삼존불상을 조성해서 봉안하고, 미타정토신앙을 우리나라 최초로 포교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본존불인 아미타불은 무량수불·무량광불과 같은 말로, 줄여서 ‘미타’라고도 불린다. 서방 극락세계의 부처를 의미하는데, 아미타불은 성불하기 전 법장보살이었을 때 48개의 서원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 중 ‘선하고 바르게 살면서 내 불국토에 오고자 하는 이는 모두 극락에 왕생한다.’, ‘어떤 중생이든지 지극한 마음으로 내 불국토를 믿고 좋아하여 와서 태어나려는 이는 내 이름을 열 번만 불러도 반드시 왕생한다.’ 등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서, 중생에 대한 넓은 포용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정토사상을 가장 먼저 신라에 도입한 원효대사의 자취와 그 뜻을 군위의 아미타여래삼존석굴에서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다.특히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상징하며, 손가락으로 땅을 짚은 항마촉지인을 취하는 최초의 불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아미타불 왼쪽의 관세음보살은 관음보살·관자재보살과 같은 말이다. 대개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이나 무량수전에 모셔져 있지만, 워낙 우리나라에서는 하층민과 상인 등에게 인기가 있는 보살이라 관음전·원통전·보타전 등으로 독립되어 모시기도 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잘 외워도 극락에 가까워질 수 있고, 현세의 고통에 시달리는 중생을 자비로 구제한다고 하니 좋아할 수 밖에 없는 보살이다. 또 관세음보살은 손과 눈이 각각 천 개씩 있다하여 천수천안으로도 불린다. 재미있는 것은 불상이나 탱화에 천 개를 전부 표현할 수 없기에 대개는 약식으로 42개만 표현한다고 한다. 광배에 수많은 손이 있고, 그 손마다 눈도 하나씩 달려 있다면 관세음보살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아 자애로운 어머니로 불리기도 한다. 사실은 성별이 모호하여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할 수 없다.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위치하며,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독립적으로 봉안된 경우는 드물고 삼존불상에서만 주로 찾아볼 수 있는 보살이다. 머리에 쓴 보관의 꼭대기 위에는 한 개의 보배병을 이고 있는데, 이 보배병 안에는 세상을 비출 지혜의 광명이 담겨 있다. 대세지보살은 세상의 모든 중생을 자신의 독특한 지혜광으로 비추기도 하고, 삼천대천세계와 마귀의 궁전도 뒤흔들릴 정도의 힘으로 발을 구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까지 만들어지다가 조선 초에는 유행에 밀려 만들어지지 못했다. 다시 16세기에 이르러 제작되는데, 이때는 꼭 보배병을 이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주로 삼존불의 오른쪽 협시보살이면서 연꽃을 들고 있다면 대체로 대세지보살로 여긴다.솔향이 풍기는 길의 끝, 기암절벽의 아래쪽 가운데 사람의 손이 닿기 힘든 동굴 안에 아미타여래삼존이 모셔져 있다.7세기 초반에 창건되었다는 삼존석굴사와 9세기의 양식을 보이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본래는 3층이었으나 지역민의 손으로 재건되었던 독특한 모전석탑도 볼 수 있다. 근처에 조성된 소나무길과 복원된 양산서원까지 군위의 부계면에는 옛 불교의 자취가 남아있다./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4-03-20

정치, 흐르는 물처럼

장규열 고문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사건 이후로 물은 공공재라기보다 소비재가 되었다.공적으로 공급되는 수돗물이 있지만 병물을 사다 마신다. 홍수가 일면 물이 무섭다가도 평소엔 아직도 가벼이 생각하는 게 또 물이다.지구표면이 71퍼센트가 물이라거나 사람 몸무게의 70퍼센트 가량이 또 물이라면 놀랍기도 하다. 천체물리학자들도 우주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을 평가할 적에 그곳에 물이 있는지를 먼저 살핀다고 한다.물은 과연 생명의 원천쯤 되는가 싶다. 대기오염과 기후변화에 따른 환경 파괴와 문명 훼손은 급기야 물을 오염하게 만든다. 산업화와 물질문명은 물길을 자연스럽게 놓아두지 못하였다. 물이 망가진 결과 그 물을 인공적으로 가공하고 다시 만들어 병물로 사다 먹는 꼴이 된 게 아닌가.3월 22일은 ‘세계 물의 날(World Water day 2024)’이다. 국제연합(UN)이 제정하고 선포한 올해의 슬로건은 ‘물은 평화를 위하여(Water for Peace)’라고 한다. 물이 오염되고 부족해 지면 나라와 공동체 간에 갈등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난다.기후변화가 극심하고 인구문제가 격화되면서 나라 안팎에서 물이 가장 중요한 자원임을 인식하고 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제가 분명해진다. 공공보건, 환경보전, 식품과 에너지 시스템의 안정적 관리 등에 있어 깨끗한 물을 확보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물은 이제 사용하고 확보해야 할 자원일 뿐 아니라 모든 생명의 근원임을 자각하고 인권보호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게 국제사회의 공통된 시각이다. 물은 국가 간 분쟁의 씨앗이기도 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물이 성장과 번영을 가져오기도 하고 갈등과 파괴를 초래하기도 한다.총선 정치로 접어들면서 물의 날을 맞는 감회가 있다. 물 흐르듯 놓아두었으면 자연스러웠을 터에 억지로 구부려 화를 맞는 미련함을 우리 정치가 피해야 한다. 곧 후보 등록을 마치고 본격 선거전에 돌입하면 유권자들에겐 혼돈의 시간이 찾아온다.공약이 남발되고 확성기가 동원되면서 선심과 회유가 춤을 춘다. 물같이 흐르던 일상이 멈추고 흐트러지며, 억지춘향 악수세례와 믿지못할 약속공세가 쏟아진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뜬히 건너온 국민들을 아직도 우습게 보는 후보들에게는 물처럼 도도히 흐르는 민심을 보여주어야 한다.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과 겪어온 날들을 차분히 평가하는 날카로움을 드러내야 한다. 헌법에 적힌 대로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었음을 확인하는 자랑스런 총선이 되어야 한다.경쟁을 화합으로 이끌며 갈등을 협력으로 몰아가는 정치가 되었으면 하는데, 정치의 실상은 늘 반대로만 치닫고 있어 국민이 걱정하고 염려한다. 국민이 편안하고 민생이 안정되는 일상을 만나고 싶은데, 정쟁과 다툼만 파도치는 정치를 너무 오래 보고만 있다. 유권자의 표심이 평정한 수심으로 나타나 정치인들이 크게 각성하는 이번 총선이 되었으면 한다. 물처럼 흐르는 정치를 만들어 주시라.

2024-03-20

군 사격장 민원

홍석봉 대구지사장 사격 훈련은 군인의 전투력 증강을 위해 꼭 필요하다. 실전 같은 연습이야말로 승리와 생존을 보장한다. 국민의 안전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군 사격장이 소음과 진동 민원으로 애물단지가 된 지 오래다.경북 포항시 장기면의 수성 사격장과 산서포병훈련장이 주민 반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방부와 국민권익위원회까지 나섰지만, 주민 간 이해가 엇갈리면서 주민들이 사격훈련 반대 집회를 여는 등 반발하고 있다. 군은 사격 훈련을 못 하고 있다.지난 1953년 미군이 설치한 공군의 낙동강 사격장도 지역 주민들의 소음과 오폭 위험 민원이 잇따르고 있다. 이전 요구가 드세다.군 사격장 민원의 대표적인 사례는 경기 화성의 매향리 사격장이다. 매향리 주한 미 공군 전용사격장은 한국 전쟁 당시인 1951년 조성돼 사격 소음과 오폭 등의 사고로 주민들이 피해와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 시위가 이어졌고 대법원의 배상판결로 종결됐다. 매향리 사격장은 2005년 8월 폐쇄됐다. 이곳엔 현재 유소년 야구장인 화성드림파크와 평화생태공원이 조성돼 있다.2020년 11월 ‘군용비행장·군 사격장 소음 방지 및 피해 보상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다. 이에 따라 K2 등 군용 비행장 41곳과 5군단 사격장 등 군 사격장 60곳 인근 주민들이 2022년부터 소음 피해를 보상받고 있다. 구역별로 1인당 월 3만∼6만원의 소음 피해 보상금을 받는다.남북 대치 상황에서 군 사격장은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사격장 인근의 주민들은 소음 등 피해를 안 입을 수가 없다. 정부의 소음 피해 최소화를 위한 조치와 함께 적정한 보상 및 주민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군대가 있는 한 사격장은 없앨 수 없다. 분단국가의 숙명이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4-03-20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소통의 기술은 상호 작용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청취, 이해, 발언, 그리고 적절한 피드백을 포함한다. 소통의 기술을 향상하는 데는 적극적으로 듣고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직을 잘 이끌어 나가려면 피드백을 잘해야 한다. 피드백의 효과는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의 태도와 기술에 달려 있다. 소통과 피드백을 못하면 조직 동맥경화 현상에 걸린다.인천 남동공단에 위치한 탑금속은 포스코의 냉연 제품을 가공하는 고객사로 혁신 지원을 했다. 기업 혁신은 인사조직부터 진단한다. 조직은 사람으로 보면 몸의 구조이고 몸통과 팔이 잘 연결되어야 손 기능이 된다. 사람의 몸에 살을 붙이고 동맥과 정맥 혈관을 연결하는 것이 혁신이다. 자사 금형 기술로 자동차 문을 만드는 탑금속은 123개 긴 생산공정에서 중간재 34.3% 리사이클 되는 것을 줄여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16년 된 노조위원장은 처음 방문 스케줄에 반응이 없어 약속없이 찾아갔다. 노조위원장 반응은 ‘내가 저 양반을 왜 만나야 하는가’였다. 이 때 물러나면 혁신은 방해를 받아 실패한다. “위원장님, 저기 봉달이 커피 한 잔 안 주시렵니까?” 이에 “커피야 한 잔 드리지요”로 시작해서 상대 관점의 많은 대화 속에 혁신의 문을 열었다.조직 진단에서 탑금속은 2개 사업본부가 있고 두 사업본부 간 두꺼운 벽이 있었다. 서로 간의 소통이 어려웠고 직책 간부와 현장 직원, 협력사 등 인터뷰에서 조직 동맥경화 현상을 알 수 있었다. 특히, B본부장은 첫 상견례 자리에서 습관처럼 부하직원 욕하는 모습을 보고 조직 흐름을 가름할 수 있었다. 10분의 임원과 인터뷰 했을 때 금형기술이사와 총무이사는 혁신에 대한 저항이 컸다. 중소기업의 열악한 환경에 전 직원의 혁신 공감대 형성을 위해 즉실천대회를 하고자 생산라인을 세워야 한다고 했을 때 B본부장이 반대했다. 22년 치과의사를 한 사장은 ‘지금 하루 세워 치료하면 되는 일을 병이 생겨 한 달 세우게 되면 책임질 수 있겠느냐’라며 의사 결정을 내렸다.28개 즉실천팀의 현장 개선은 시작되었고 매월 사장과 임원 변화관리 교육을 이어갔다. 조직 상하 간 막힌 혈을 뚫기 위해서다. 3개월여 시간이 지날 즈음 금형기술이사는 프로젝트 기술지도를 하겠다고 나섰고, 총무이사는 노동조합 실무를 담당하며 열린 노사관계 기반을 만들어 갔다. 욕을 못하게 하니 울화통이 터질 것 같다고 했던 B본부장도 변화되는 현장을 보며 긍정조직문화의 선두에 섰다. 생산 프로세스 123개 공정을 23개 공정으로 재정립하고 생산 과정에 중간재의 손상 원인들을 분석해서 5%대 이하로 개선했다.이명박 정부 시절 P사 회장과 중소기업협회장이 동반성장 산업 3.0 발대식을 탑금속에서 했다. 혁신 성공비결은 임원들의 혁신 인식 변화로 긍정 조직 기반이 형성되었고, 사장의 적극적 리더십, 매월 톱(Top) 진단과 경청, 이해, 적절한 피드백을 통한 신뢰를 쌓고 변화를 이끌어 냈다. 한 부서를 책임지는 직책보임자의 혁신에 대한 인식은 조직 흐름을 결정한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2024-03-19

이국에서 맞는 봄눈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봄 마중이 한창이다. 산수유와 매화나무는 앞다투어 꽃망울을 터트리고, 남도에선 목련꽃의 하얀 자태가 이른 봄의 전령(傳令)인 듯 서서히 피어나며 멀지 않은 봄날을 예고하고 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만물이 다가오는 봄날을 채비하고 있는데, 아직도 겨울잠에서 못 깨어난 듯 동토의 계절엔 하얀 눈이 날리고 수십 차례 내린 눈의 층계가 만년설 마냥 육중하게 버티고 있다면? 남극·북극이면 극지방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나라와 가까운 곳에 그러한 곳이 있다면 의아심과 함께 호기심(?)을 부추기기에 충분할 것이다.그렇게 떠난 곳이 일본의 홋카이도(北海道)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최북단에 위치한 홋카이도는 마름모꼴의 섬으로 대한민국 면적의 약 80%에 달할 정도로 크고 위도 상으로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과 비슷하며, 동쪽과 북동쪽에는 사할린섬과 쿠릴 열도가 인접해 있다. 홋카이도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사람들의 성향과 문화 등이 각각 달라서 오키나와 지역과 더불어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지역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내에서도 관광과 거주하고 싶은 지역 1위를 나타나는 이국적인 특성을 띠고 있는 곳이다.또한 고위도(북위 41~45°)에 위치해 섬 전역이 한랭하고 냉대 습윤기후가 나타나 겨울철에는 추위가 매우 심한 폭설지대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선 3월의 눈구경은 드물고 강원도 등 일부 산악지대에 눈이 짧게 내렸다가 금세 녹기도 하지만, 홋카이도의 겨울철에 내려서 쌓인 눈은 이듬해 4월까지 가는 등 강설이 잦고 설경이 아름다워 우리나라를 비롯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눈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안고 떠났었는데, 과연 북해도에 당도한 첫날부터 함박눈이 펄펄 내리니 이방인의 심경이 오죽했으랴.‘따사로운 삼월엔/가지마다 물올라//망울이 부풀고/잎새가 도드라지는데//여태껏//동면 꾸러기//옴짝달싹 못하는 곳//설마하고 떠난 걸음/듬성듬성 손내밀다//저녁답 때를 맞춰/수만 꽃잎 나부낌//수 천리//이방객을 반기며//갈채로 내려앉네’-拙시조 ‘이국에서 맞는 봄눈·Ⅰ’ 전문정말 설국(雪國)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눈길 머물고 발길 닿는 곳마다 온통 백색의 세상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해도 희끗희끗한 잔설의 여운이 아쉬운 듯싶었는데,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펑펑 쏟아지는 눈발은 유객(遊客)의 심사를 한결 설레게 하고 동심에 빠져들게 했었다. 실로 몇 십년만에 눈 다운 눈을 맞으며 눈길을 거닐어 보는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행은 설경에 젖어 들어 눈밭을 뒹굴거나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온갖 포즈를 취하며 눈의 환희를 만끽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이렇듯 일상을 벗어나면 도처에는 뜻밖의 행운이나 우연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다만 떠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 그림 속의 떡(畵中之餠)일 뿐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되듯이 여행의 즐거움도 어디론가 떠남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의 행복’이 여행이라면,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맛보며 즐기는 자유여행은 단순관광 그 이상의 매력과 묘미를 안겨다 줄 것이다. 홋카이도의 눈 내리는 저녁의 설렘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리라.

2024-03-19

‘의과학과 신설’로 醫政갈등 풀어보라

심충택 논설위원 의정(醫政)갈등의 핵심요인인 ‘2천명 의대증원 숫자’에 조금의 여지나마 줄 수 있는 대안이 나와 주목된다.박은철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의과학과 정원 등을 활용하면 의대 정원 2천명을 늘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 선거 캠프에서 보건의료분야 정책의 밑그림을 그린 인물이다. 그의 제안은 전공의들의 반발을 해소하기 위해 내년에 바로 정원을 2천명 늘리는 대신, 2026학년도부터 국가현안인 의과학과 신설 등을 통해 의대 정원을 확대해 나가자는 내용이다.서울대가 최근 의정갈등을 감안해 내년도 의예과 증원인원을 15명만 신청하면서, 새로 신설할 의과학과에 50명을 따로 신청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동안 임상의사가 아닌 의사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온 서울대는 “의과학과가 신설될 경우 서울대의 바이오·헬스 관련 학과 및 첨단융합학부와 연계하는 교육·연구를 통해 우수인력 양성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박 교수는 서울대뿐만 아니라 카이스트와 포스텍(포항공대)에도 의과학과를 신설할 수 있도록 정원을 확대해줘야 한다고 했다. 박 교수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포스텍의 의과학과 신설은 오래전부터 제기돼온 현안이다. 지난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경북도와 포항시는 과학공학 분야 인재가 몰려있는 포스텍에서 의사과학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해왔다. 의사과학자는 의사면허를 갖고 있지만 환자진료가 아니라 새로운 의료기술, 신약, 첨단의료장비 연구개발에 전념하는 사람들이다. 코로나 당시 백신이 빠른 속도로 개발된 배경에도 의사과학자의 역할이 컸다. 세계최고수준의 인프라를 갖춘 서울대나 카이스트, 포스텍에서 의사과학자가 배출된다면 한국의료계로서도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닌가.출구없이 격화하고 있는 의정갈등은 앞으로 현 정권에 엄청난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15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떨어진 이유 중에는 ‘의대 정원 확대’가 한몫했다는 분석도 있다. 정부의 한 치 양보 없는 강경자세가 대통령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외신에서도 한국정부가 의대증원을 밀어붙이면서 경제 분야, 특히 반도체산업이 타격을 입고 있다는 분석을 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최근 “한국의 많은 학생들이 (의대증원으로)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취업을 보장하는 한국 최고의 공과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거부하고, 의료 분야에서 더 나은 직업 안정성과 더 높은 급여를 받고 싶다는 유혹을 받는다”고 했다.의대 증원을 두고 전공의가 지난달 19일 사직서를 내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갔다. 전공의의 90% 이상이 아직 복귀하지 않고 있어 대형병원 의료진의 피로가 극에 달하고 있다. 이 와중에 의대 교수들이 사직서를 내고 진료 현장을 이탈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의료시스템이 더 망가지기 전에 정부는 2천명이라는 숫자에 연연하지 말고 파국을 막을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2024-03-19

스트롱맨의 득세

우정구 논설위원 강경 성향의 지도자 또는 군사정권의 지도자를 지칭할 때 보통 스트롱맨이라는 말을 쓴다. 스트롱맨은 독재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철저히 우선시하는 극단주의적 정치 성향을 띄기도 한다.2000년대 들어 대표되는 스트롱맨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필리핀의 두테르테,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 주석, 북한의 김정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2000년대 등장한 인물들이어서 국제사회는 지도자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주목을 한다.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4년 러시아 대선에서 87%의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을 확정지었다. 5선이 확정된 푸틴은 2000년 처음 집권 후 30년간 러시아를 통치하게 된다. 특히 2020년 개헌으로 2030년 대선에도 출마할 수 있어 이론상 그는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정권을 연장할 수도 있다.푸틴의 당선으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의 정당성이 확보됨에 따라 이곳에서의 전선이 더 강력해질 수 있다. 또 서방과의 대립도 더 날카로워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스트롱맨으로 지칭되는 푸틴의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다.또다른 스트롱맨인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지난해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3연임에 성공했다. 국가 주석에 오른 그는 첫 방문지로 러시아를 선택, 푸틴과의 스트롱맨 브로맨스를 과시했다. 최근 김정은의 푸틴 방문도 같은 맥락으로 읽혀진다.또 하나 강력한 스트롱맨인 미국의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4년만에 재집권을 노리고 있다. 스트롱맨들의 연이은 등장에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3-19

사람들과 개가 함께하는 풍경

김규인 수필가 모델이자 배우인 배정남의 전신마비 반려견인 벨이 1년 7개월간의 재활 끝에 돌아왔다는 보도가 나온다. 인터넷에 벨을 끌어안은 배정남의 기사가 뜬다. 사진이지만 재활의 기쁨을 나누는 배정남의 좋아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유튜브를 통해 벨의 재활 과정을 올리는 모습까지 더해진다.신천을 걷다 보면 유모차에 개를 태우고 걷는 사람을 아이를 태우고 걷는 사람보다 더 자주 본다. 개와 보조를 맞추며 걷는 사람, 벤치에 개와 나란히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 반려견의 개똥을 치우는 사람은 이제 생활 주변에서 늘 일어나는 일상이다.인터넷에서 반려견을 검색하니 반려견 장례식장, 반려견 동반 자연휴양림, 반려견 무료 분양, 반려견 종류, 반려견 등록 방법, 반려견 산책, 반려견 동반 펜션, 반려견 보험, 반려견 사망신고, 반려견 안락사 등 사람이 필요해서 한 시설들이 이제는 개를 위한 시설로 바뀌고 사람들의 관심사도 개에 관한 이야기다.선거철을 맞아서인지 국회의원의 공약 사항으로 ‘반려견 놀이터 건립’, ‘1만2천명 영등포 반려동물 가족 함께’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개를 키우는 유권자의 표심을 공략하는 내용이지만 개에 사람들이 밀려난다는 생각마저 든다.개를 키우는 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늦은 시간에 퇴근하면 발소리만 듣고도 집안에서 현관으로 달려 나오는 애완견의 소리를 들으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심지어 가족들은 자기 일을 하느라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과 비교되어서 개를 한 번 더 껴안게 되고 먹을 걸 챙겨주게 된단다.지자체에선 반려견 산책 지역 안전관리 사업을 추진하고 반려견 관절 영양제를 광고하고 사람들은 자신도 먹지 못하는 고가의 식품을 사서 먹인다. 반려견 수술을 위한 혈액 부족 문제를 이야기하고 화재 현장에서 한 소방관이 강아지들을 구하기 위해 심폐소생술을 한 이야기가 떠돈다. 개에 밀려 사람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아이들이 타야 할 유모차를 빼앗고 노인들을 산보시킬 자손들의 옆자리를 개들이 차지한 지 오래다. 소아과병원이 개를 돌보는 병원으로 바뀌고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 개를 위한 시설로 바뀌는 요즈음이다. 다리 밑의 벤치에서 산보하는 개를 바라보는 노인들은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그저 바라만 본다.사람과 개를 키우는데, 나에 대한 충성심의 잣대로만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 자식을 키우는 일이 때로는 개를 키우는 일보다 힘이 들지라도 보람된 일이 아닐까. 성장한 자식이 옆에 설 때 듬직함은 자식을 가져본 사람만이 안다.매번 개의 짧은 생명으로 안타까움을 더하기보다는 자식이 있는 풍경이 멋있지 않을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 손잡아 주는 건 사람이고 모든 걸 사랑한 당신의 고귀한 유전자를 남기는 것은 자식이다.개를 몰고 다니는 사람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향해 조건 없는 충성심을 보이는 동물 앞에 먹이를 내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이야 숨길 수 없겠지만 그 옆에 사람이 설 수는 없을까. 사람들과 개가 함께하는 풍경이 더 좋아 보여서다.

2024-03-18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2002)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은밀한 내면을 드러낸 말이다. 영화의 세부적인 내용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유독 저 대사만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머릿속에 선명하게 기억되어 있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괴물로 변하는 주위 사람을 목격하며 사람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했기 때문이다.지금 대학가에서는 생존을 위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다. 그 출발은 합계출산율의 급감이란 상황이다. 서울에서도 초등학교가 폐교되고 교대의 인기가 예전과 다른 것이 현실이다. 초등학교에 닥친 위기가 몇 년 뒤 대학에 들이닥칠 것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예정된 미래였지만 우리는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고, 위기를 눈앞에서 목격하고야 바빠지기 시작했다.얽히고설킨 매듭을 하나씩 풀기보다는 단칼에 끊어버리는 것이 현명하듯 그간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이해당사자의 말을 듣기보다는 결정권자가 강하게 밀어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마 부분적인 진실을 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특정 집단이 자신의 이익만 탐하는 극단적 이기주의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성립할 때 설득력을 얻는다.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 다시 유명해진 ‘하나회’를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해체했듯 말이다.이 정권의 교육 정책은 대학 구성원을 마치 ‘하나회’ 보듯 한다. 정권의 교육 정책을 따르지 않으면 자기 이익 지키기에 급급한 이익 집단으로 취급한다. 자율과 혁신이란 이름으로 ‘글로컬 대학’‘무학과 단일전공’ 등을 추진하며 정작 현장의 목소리는 잘 듣지 않는다. 누군가의 머리에서 나온 정책을 불도저처럼 밀어내기에 바쁘고,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인물로 낙인찍고 있다. 어느 순간 감정적으로 격화되고 있는 의대 정원 문제를 둘러싼 갈등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하지만 나는 정부를 비판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아무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정부 정책이 사람을 선동하는 방식과 돈 앞에 괴물로 전락해 버리는 우리들의 초상이다. 모든 정책은 지원금을 동반한다. ‘돈’이란 당근으로 정책에 따르길 요구하는 것이다. 학령인구 감소라는 물결 앞에 생명이 위태로운 대학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래서 대학의 보직을 맡으면 평상시 모습과 모순되는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유독 돈 앞에 모멸감을 느끼는 횟수가 많아지는 요즘이다. 눈앞의 몇 푼에 부끄러움 따위는 잊은 지 오래인 사람이 많은 사회가 정상인 사회라 할 수 있을까. 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두렵다.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영화 속 대사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볼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울 수 없는 무기력만 남게 되는 현실이 말이다. 출산율 급감이 웅변하듯, 이미 우리는 이 사실을 직관적으로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2024-03-18

책을 다시 돌보려는 마음

방민호 서울대 교수 꿈을 꾸었다. 무슨 일인가로 나를 잡으려는 사람들에게 쫓겼고, 나중에 잡혔는지 그러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꿈 한가운데 있던 일만 선연히 남았다.어느 큰 파도가 치는 바다로 달려가 뛰어들었다. 밀려오는 파도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나는 마치 서핑을 하는 사람처럼 그 파도 굽이쳐 감기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치 서핑을 하는 사람처럼. 파도는 한없이 크다 해도 좋은 정도였다. 내 키를 열 곱 스무 곱 넘도록 거대하게 솟아오른 파도 속, 그 아래로, 아래로 나는 끝 모르고 파도의 물기둥 벽을 타고 내려갔다.파도는 검푸르다고도, 소랏빛이라고도 할 수 없이 신비로운 어둠에 물들어 있었고, 나는 태양빛을 푸른빛 셀로판지처럼 막아주는 거대한 물기둥 아래로, 아래로, 자꾸만, 빨려들 듯 내려가는 것이었다.또 다른 내가, 그렇게 아득히 멀어져 가는 내가 마치 하나의 점처럼 작아졌다고 느낄 즈음에 꿈이 깼다.아침이 이미 아주 늦도록 잠들어 있었다. 어제는 하루종일 이광수를 이야기하는 학술대회 자리에 있었고, 그저께는 수업을 하고 박사논문 발표하는 학생들과 밤 늦게까지 함께 있었다. 그 전에는 어땠더라? 잡지 ‘맥’을 교정을 보고 모자란 부분을 기웠다. 그 전에는 우정권 선배가 목월 시 유작들 발굴하는 일, 기자회견 자리에 있었고.눈을 뜨면서, 오늘은 꼭 파주에 가봐야 한다고 생각한다.책들이 어떻게 되었을까?대학원 학생들에게 다음 주에는 꼭 ‘노동해방문학’ 창간호부터 끝날 때까지 누락된 것 없는 열 몇 권을 다 갖다 보여주겠다고 했다. 벌써 몇 번을 찾아보았는데, 없다. 몇 년 전 학교 건물 4층을 리모델링 한다고 전부 비우라고 할 때, 어디로 갔을까? 파주였을까? 아니면 단체로 보관해 준다는 창고에 휩쓸려가 사라져 버린 걸까?파주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처음 책들을 갖다 둘 때는 주말에는, 2주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가서 옮겨놓은 책들을 돌볼 작정이었다. 미련스러운 것이 사람, 욕심껏 사들이기는 했는데, 둘 곳 없을 것은 내다보지 못했다.되도록 햇빛 받지 않도록 하려 했지만 벌써 몇 년째 아직도 유리창에 햇빛 차단용 셀로판 지를 붙이지 못했다. 몇 개 미닫이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도 먼지에도 속수무책인 책들. 들이는 것만 일이 아니요, 책도 식물을 기르듯, 화초를 기르듯 물 주고 돌봐야 하는 것을, 몰라도 너무 모른 무지의 나날들이었다.어디로 갔을까? ‘노동해방문학’은 무크지 황토빛 ‘실천문학’도 낙질은 있지만 분명 잘 두었었는데….그런데, 있다.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던 책들이 오늘 책장 맨 하단 구석에 그대로 꽂혀 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 바로 이런 일을 두고 말함인가 한다.내친 김에 어지럽게 꽂혀 있는 아이들을 이제는 다시 마음 잡고 돌보기로 한다. 앞에서 물을 준다 했지만, 이 아이들은 습기도, 햇빛도, 추위도, 먼지도, 몹시 힘겨워 하는 애들이다.나의 삶의 증명 같은 아이들. 나와 같이 깊은 바닷속 같은 심연을 향해 함께 가는 아이들. 이제 다시 물을 주고 돌봐 주기로 한다. 더 알뜰하게 가꿔 보기로 한다.

2024-03-18

산불과 영농부산물 파쇄

홍석봉 대구지사장 매년 3, 4월이면 우리나라는 산불로 홍역을 치른다. 날씨가 건조해지면서 산불 비상이 걸렸다. 산림 당국은 지난 주 산불 경보 단계를 ‘관심’에서 ‘주의’ 단계로 상향하고, 산불 감시 활동 강화에 나섰다.지난해 우리나라에는 596건의 산불이 발생, 4천992ha의 면적이 피해를 입었다. 2022년엔 756건, 2만4천797ha의 피해가 발생했다. 역대 가장 많은 피해다. 산림청에 따르면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 간 연평균 567건의 산불이 발생, 4천4ha의 산림을 불태웠다. 지난해 발생한 산불 596건 중 56건이 농산 부산물을 태우다가 불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요즘 농촌에는 지난해 수확이 끝난 영농 부산물을 태우거나 잘게 부수는 작업이 한창이다. 영농부산물 파쇄는 봄철 산불의 주요 원인인 불법 소각을 하다가 내는 산불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문경시가 ‘찾아가는 영농부산물 안전처리 지원사업’을 추진, 관심을 모은다. 올해 처음으로 실시하는 ‘찾아가는 영농부산물 안전처리 지원사업’은 산림인접지, 영농 부산물 파쇄가 필요한 65세 이상 고령층 및 취약계층이 우선 지원 대상이다. 3인 1조의 부산물 파쇄지원단은 농장을 방문해 사과, 오미자 등 과수 전정가지 및 영농부산물 잔량을 수거, 파쇄를 대행해 준다.특히, 산불 발생이 많은 3~4월에 집중 추진해 산불 예방과 소각으로 인한 미세먼지를 줄일 수 있다. 또 영농부산물을 파쇄 후 농경지와 과수원에 뿌려 퇴비로 쓰면 토양에 유기물을 공급하고 비옥도가 높아지는 등 자원순환 효과가 기대된다. 산불과 미세먼지도 잡고 퇴비화까지 1석 3조의 효과를 보는 영농부산물 활용이다. 지자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4-03-18

서남 전라도 서사시 ‘그라시재라’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여항의 사람들을 탐구한 언어 풍경화가 한 권의 서사 시집으로 꾸며졌다. 조정 시인의 ‘그라시재라’(이소노미아, 2022)에서는 전라도 서남지방 할머니의 목소리가 벼랑 끝에서 살아남은 하얀 민들레 씨방의 솜털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한 섞인 억양과 까칠하고 쉰 목소리의 사투리 시편을 조정 시인이 서사적 조정자로 개입하여 유장한 한 권의 신화같은 시집으로 묶었다. 전라도 할머니들의 어둔한 사투리 문법은 한 많은 삶을 끈질기게 버텨내며 살아남아 당신들의 말이 표정이 되고 시가 되었다. 갈라지고 쉰 목소리는 그대로 그림이 되었다. 판소리가 되었다.산속에서 울려오는 산바람과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에 간이 알맞게 밴 방언 속에는 죽음보다 더 짙은 비극 속에서도 간간이 희망의 목소리가 끼어있음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어떻게 할머니들의 일상적 회상의 언어가 시가 될 수 있을까? 표준어로 변복도 하지 않은 차림으로 이 세상으로 걸어 나왔을까? 평생 이름대신 태어난 마을의 지명으로 가려진 존재였던 여자들,‘진주떡(댁)’, ‘순천떡이’, ‘화순떡이’, ‘보성떡이’로 서로 호명하는 시적 화자의 언어를 받아쓰기해 낸 조정 시인은 행간과 행간에서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여러 첩의 병풍 속 풍경화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념과 권력의 헤게모니 쌈박질로 굴곡진 현대사에서 검게 물든 핏빛 전라도 여항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려 퍼진다. 때로는 역사의 흔적이 되어버려 두려운 기억들을 그리움이나 슬픔의 언어로 담담히 깨워내기도 한다.‘그라시재라’는 ‘그러믄요’, ‘그럴 수밖에요’라는 체념이 담뿍 담긴 전라도의 관습적 언어다. 동네마다 사람마다 같고도 다른 모양으로 남아 있는 깊은 상처가 이 한마디에서 이렇게 크게 울려 나오다니? 상대 존대의 화법 ‘그라시재라’는 겸허하고 수수한 전라도 토속의 정서와 태도를 한마디로 보여준다. 가래침 소리가 섞인 할머니의 낮은 자세, 내 뜻보다 그대의 뜻을 더 존중한다는 전라방언의 울림이 전라도에서 지리산을 넘어 경상도까지 넘어 온다. “천지에 아는 사램 한나 없는 디서 머슬 보라꼬 살것능가?”의 어말어미 ‘살것능가’는 경상도의 ‘살겠능개’, ‘살겠능교’로 이어져 있다. 방언은 경계를 허물고 손에 손잡고 이어져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원래 다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다만 지역과 계급을 나누어 차별하는 동안 달라졌을 뿐이다. 몸속에 숨어서 핏줄처럼 살아 있는 할머니의 방언은 원래 한가락이었다. “어야 덕진떡(댁) 자네 친정엄니는 고향이 으디시당가?/예 금정이라 어째 그라쏘?/보 성님도 이상하셌지라? 나허고 같은 생각 하셌고만이/덕진떡 엄니 말씨가 쪼깐 귀에 설드랑께요./갈에 우리집 콩 뚜듬서 이약헌디/항, 항허고 답을 허시등만/매 한말이이다 허고 봉께/아먼 그라재 헐 대목이서/항, 항 그라시드랑께”‘새야 새야 파랑새야’란 시에서 같은 전라도라도 친정이 달라 서로 말씨가 조금 다른 것을 느끼는 시적 화자들의 대화다. 서남전라방언에서는 동의한다는 의사 표현으로 ‘그라재’로 말하지만 동남전남방언을 쓰는 덕진댁의 말은 ‘항’, ‘항’이니 말씨가 서로 귀에 설게 들린 모양이다. 이 말이 태백줄기를 넘어 경상도로 들어서면 ‘하모’, ‘하머’로 나타난다. 방언학을 전공한 나에게 조정의 이 시편들은 마치 방언지도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가야와 제주지역에서만 ‘파리’를 ‘포리’하고 ‘팔’을 ‘폴’이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 전라도에서도 ‘남’을 ‘놈’이라 하니 ‘아래 아’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징하게’(매우, 찡하게), ‘보타지것네’(몸이 마르네), ‘느자구’(싹수), ‘끼께’(끌리어), ‘뿌사리’(황소), ‘태끼래지다’(그릇 이가 빠지다)와 같이 전라도 방언사전 없이는 해독이 어려운 방언이 난무한다. 경계의 표지도 없고 무지해 보이기만 하는 변두리 기층민들의 말씨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다. 묘하게 정겹고 살가운 말씨들에서 역사의 흔적과 사건의 서사가 바람처럼 드나든다. 오래된 나무에 깊이 박힌 옹이, 말의 옹이가 차진 송진을 뿜어내듯 우리 말결을 윤이 나도록 눈이 부시도록 풍요롭게 해 주고 있다. 이 책의 편집자의 말을 빌면 방언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표준말로 통일되기 전에도 이미 전국을 자유롭게 흘러다니고 있었다.” 조정 시인은 이 시집으로 표준어라는 한 가지 꽃만 피어있는 언어의 독방이 아닌 다채롭게 화석화된 방언의 깊은 지층을 우리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았다.

2024-03-18

일본 성터에서 발견한 러시아 금화

마쓰야마성에서 내려다본 마쓰야마 시내. 일본이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인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습니다.실제로 2024년 1월 일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268만8100명) 가운데 한국인은 가장 많은 85만7000명을 기록했다고 하는데요. 이런 추세로 가면, 올해에는 일본 방문 한국인 관광객 수가 역대 최대인 1000만 명을 넘길지도 모른다고 합니다.최근에 유명 관광지인 오사카의 도톤보리나 도쿄의 센소지 등에서는 한국어가 일본어만큼이나 많이 들린다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제가 실제로 한국인의 뜨거운 일본 관광열을 확인한 것은, 2024년 1월 28일 한국과 일본의 고전문학을 전공한 C·Y교수와 마쓰야마(松山) 공항을 나왔을 때입니다. 공항을 나선 저희 일행 앞에는, 무려 세 대의 대형버스가 한국인 관광객을 마쓰야마 각지로 실어 나르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에히메현(愛媛県)의 대표도시인 마쓰야마 시내로 들어서자, 가츠산(勝山) 산정에 자리 잡은 마쓰야마성의 혼마루(本丸, 성의 중심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숙소인 비즈니스 호텔의 욕탕에서도 보이던 마쓰야마성은, 마쓰야마 시내 어디를 가든 보였는데요. 3박 4일 내내 마쓰야마성을 보며,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판옵티콘(panopticon, 일망감시체제)이 떠올랐습니다. 판옵티콘은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고안된 원형 감옥을 말합니다. 이곳에서 모든 죄수들은 감시자가 머무는 중앙을 바라보지만, 감시자가 머무는 곳은 늘 어둡게 처리하여 죄수들은 감시자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죄수들은 자신들이 늘 감시받는다고 느끼게 되며, 그 결과 나중에는 감시자들이 원하는 규율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게 된다는 것인데요. 어쩌면 일본에서 성은 외적을 방어하는 목적보다도 영지에 사는 평민들에게 웅장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영주의 권력을 각인시키는 목적이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목적에서라면 세토나이해(瀬戸內海)까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마쓰야마성은 참으로 빼어난 성임에 분명합니다.이름난 무장이었던 가토 요시아키가 1602년에 축성을 시작한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완성된 마쓰야마성은 일본의 3대 연립식 평산성(산성과 평지성의 중간쯤으로 구릉지와 평지를 각각 일부씩 포함한 성곽) 중의 하나입니다. 마쓰야마성은 매우 큰 규모를 자랑하는데요, 해발 132m의 가츠산 정상에는 혼마루가, 산기슭에는 니노마루(二の丸, 영주의 거주공간)와 산노마루(三の丸, 가신들의 저택)가 짜임새 있게 펼쳐져 있습니다.우리 일행은 에도 시대에 건축된 천수각으로 유명한 혼마루을 구경한 후에, 과거의 니노마루를 복원한 니노마루사적공원을 산책했습니다. 일본 특유의 정원미가 가득한 공원을 거닐던 저는 흥미로운 안내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안내판은 거대한 우물 옆에 놓여 있었는데요.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매립되었던 우물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제정 러시아 시대의 10루블짜리 금화가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금화에 러시아인과 일본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인데요. 일본의 전통 정원에서 러시아 금화가 나온 것이나, 거기에 러시아인과 일본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 등이 모두 이해되지 않아 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제 의문은 한국에 돌아와 박삼현 교수가 쓴 ‘마쓰야마, 언덕 위의 구름’(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서해문집, 2022)이라는 글을 만나면서 비로소 해소되었는데요. 박삼현 교수에 따르면, 러일전쟁 당시 마쓰야마에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러시아군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고, 당시 마쓰야마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4천여 명의 러시아군 포로가 수용되었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마쓰야마 사람들과 러시아군 포로들의 일상적 교류도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 마쓰야마성의 니노마루를 복원한 공원의 우물에서 러시아 금화가 발견될 수 있었다는 것인데요. 여러 조사를 통해, 금화에 이름을 새긴 러시아인과 일본인은 각각 당시 포로가 되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러시아군 장교와 그를 간호하던 일본인 여자 간호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금화가 발견된 이후 마쓰야마의 니노마루공원은 연인들이 프러포즈를 하는 성지가 되었고, 2019년에는 금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 ‘소로킨이 본 사쿠라’까지 제작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영화는 일본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제작했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는 생각이 듭니다.니노마루공원의 바로 옆에 있는 반스이소(萬翠莊)의 곳곳에도, 반스이소에서 ‘소로킨이 본 사쿠라’가 촬영되었음을 알리는 사진이나 문구가 전시돼 있었습니다.프랑스풍 르네상스식 건물인 반스이소는 마쓰야마 영주의 자손인 히사마쓰 사다코토가 1922년에 지은 이후, 사교장으로서 그 명성을 떨쳐온 아름다운 건축물입니다. 일본 중요문화재로도 지정된 반스이소를 각계의 명사들은 물론이고 천황이 방문하기도 했지요. 일본의 성터 우물에서 발견한 러시아 금화를 보며, 어쩌면 인류는 늘 깊이 연결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24-03-18

자만하면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

김진국 고문 얼마 전 대구에 사는 지인이 전화했다. 국민의힘이 과반을 차지한다고 믿었는데, 그 많던 표가 다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다. 선거 초반 국민의힘이 기세였다. 민주당이 비명계를 몰아내고, 친명계 일색으로 공천하느라 비난을 많이 받았다.거기와 비교하면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데도 아이돌처럼 인기를 누렸다. 가는 곳마다 사진을 함께 찍으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 성급한 보수 지지자들은 국민의힘 과반 확보가 당연한 듯이 예측했다. 그런데 민주당 한병도 전략기획위원장은 15일 민주당이 지역구에서 130~140석을 얻는다고 전망했다. 현재 지역구 의석은 254석, 비례대표 의석은 46석이다. 지역구 절반은 127석. 결국 민주당 계열이 과반을 차지한다는 의미다.지난주 한국갤럽 조사를 보자. 비례대표 투표 정당을 묻는 설문에 국민의미래(국민의힘 위성정당) 34%, 더불어민주연합(민주당 위성정당) 24%, 조국혁신당 19%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4%인 개혁신당을 포함해 3% 문턱을 넘은 정당에 비례의석을 나누면 국민의미래 19석, 더불어민주연합 14석, 조국혁신당 11석, 개혁신당 2석이 된다. 민주당이 최소치로 전망한 130석만 얻어도 단독 제1당이다. 조국혁신당을 합치면 과반인 155석. 개혁신당도 윤석열 정부에 협조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지역구로 가면 더 어렵다. 같은 조사에서 ‘여당이 더 많이 당선돼야 한다’는 응답이 서울에서 31%, ‘야당이 더 많이 당선돼야 한다’는 응답이 58%다. 인천·경기에서는 32% 대 55%로 역시 민주당이 유리했다. 지역구 의석은 서울 48석, 인천 14석, 경기 60석으로 수도권만 모두 122석이다. 그 지인 말처럼 며칠 사이에 왜 흐름이 바뀌었나. 수도권은 미풍에도 판세가 뒤집힌다. 1천표 이내로 당락이 결정되는 곳이 많다. 그런데도 여권이 긴장의 끈을 놓았다.수험생이 있는 집에서는 걸을 때도 조심한다. 선거를 앞두고 출국금지 상태인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을 왜 굳이 이 시점에 출국시키려 했을까. 한덕수 총리는 안보 협력이 긴요해 빨리 내보내야 했다고 설명했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최대 안보 협력국인 일본 주재 대사를 2년 반 만에 내보냈다. 당연히 의회청문회 등 절차를 모두 거쳤다. 주한 미 대사도 1년 반 만에 부임했다.영남권 민심만 따진다면 도태우·장예찬 후보를 공천하는 게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선거 전체 판세를 보고, 판단하고, 책임져야 한다. 선거는 자만하면 진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한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재검토를 지시하고, 공관위는 이를 뒤집고, 여론이 비등하니 다시 뒤집었다. 중도층뿐 아니라 지지층에서도 불만이 터지는 계기를 만들었다.명품백 사건도 영부인이 빨리 사과하고 털었어야 할 문제다. 그런데 오히려 한 위원장 사퇴를 요구했다. 전략공천하려던 김경률 비대위원만 찍어냈다. 한 위원장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심판이라는 선거 구도가 이재명 대 한동훈 대결로 바뀌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지방으로 다니며 윤석열 대 이재명 구도로 만드는 게 국민의힘에 유리한 걸까.의대 증원 문제도 불안하다. 의사들 주장대로 선거를 유리하게 끌어가려는 노림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혹시라도 그런 생각이 있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초반의 높던 증원 지지율이 점점 내려간다. 피로감이 쌓인다. 선거와 얽히면 야당 지지자들이 돌아설 수 있다. 진료 공백으로 인해 사고가 터지면 불만 여론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정부로 향하게 된다. 자칫 게도 구럭도 다 잃을 수 있다.황상무 대통령 시민사회수석의 폭언도 해이해진 대통령실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는 “MBC는 들어”라면서 군인이 비판적 기자를 칼로 테러한 사건을 들먹였다고 한다. 황 수석은 농담이었다고 하지만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다. 이러고도 선거에서 이긴다면 기적이다. “대통령실에 야당 프락치가 있는 것 같다”라는 한 보수 인사의 개탄이 실감 난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3-17

커밍아웃이 필요 없는 세상

유영희 작가 ‘삼국유사’에는 임금님의 두건을 만드는 장인이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는 것을 혼자만 알고 있다가 죽기 전에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고 외쳤다는 이야기가 있다.이 이야기의 교훈은 권력자의 횡포로 읽기도 한다. 그러나 임금님 같은 권력자라도 남들과 다른 자신의 모습을 남들이 알까, 장인이 발설할까 전전긍긍하며 두려움에 떨었을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권력자라도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 하거나 나만 알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이렇게 자신에 대한 정보를 혼자만 또는 아주 극소수만 알고 있다면, 그것을 지키는 데는 큰 에너지가 들어간다. 그 정보가 알려졌을 때 자신이 심한 피해를 보게 된다면 그것을 말하지 않기 위해 사용되는 에너지는 몇 배 가중될 것이다. 그런 사람 중에는 성소수자들도 있지만, 특정 질환을 가진 사람도 있다. 이들은 커밍아웃의 부담을 개인이 고스란히 떠안은 채 살아간다.치매 역시 너도나도 밝히기를 꺼리는 질환이다. 한국도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치매 환자가 늘어가고 있는 상황이라, 이미 초고령사회인 일본의 대처 방법을 눈여겨보게 된다. 김웅철의 ‘초고령사회 일본이 사는 법’의 첫 장에는 스타벅스가 어떻게 치매와 만나는지 소개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치매 환자의 가족은 물론, 치매 당사자와 간병인, 전문가가 지역 주민들과 함께 모여 차를 마시거나 간단한 식사 하면서 서로의 고민을 이야기하거나 정보를 공유한다고 한다.이것은 일본 정부가 2012년부터 치매 정책 5개년 계획에 2025년까지 일본 전역에 치매 카페를 설치한다는 목표를 세운 후 일어난 일이다. 처음에는 공공시설이나 빈 가게를 활용하다가 최근에는 스타벅스가 나서서 치매 카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도쿄 근처 마치다 시에는 치매 카페를 의미하는 D-카페 푯말이 붙은 스타벅스가 8곳이나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이벤트가 있는 것은 아니고, 고령의 치매 환자들이 가족과 함께 일상의 여유를 즐기는 방식이라고 한다.치매 카페에서도 이들을 특별히 따로 구분하지 않아서, 일반 손님과 자연스럽게 섞여 어울리니 주민들도 치매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스타벅스는 이것을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의 장소로 운영한다고 한다. 일본 상황을 잘 아는 지인에게 들으니, 일본에는 치매 환자들의 토론대회도 있다고 한다.2021년 현재 우리나라 65세 이상 치매 유병률은 10%, 85세 이상은 40%라고 하니, 더 이상 쉬쉬할 일이 아니다.그런데도 주변에는 검사를 받아보시라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는 사람이 많다. 그러다 누가 진단이라도 받는 날이면, 가족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치매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고 환자를 일상에서 배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그들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는 당나귀 귀처럼 생긴 귀를 가지고 있어도 기꺼이 두건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2024-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