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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LA폭동과 비주류의 비애 2

▲ 구자문 한동대 교수로스앤젤레스 경찰청(LAPD) 찰리 벡 청장은 20년 전 LA폭동을 경찰의 리더십 실종사건으로 규정했다. 벡 청장은 미국 NBC와 인터뷰에서 1992년 한인타운을 포함한 로스앤젤레스 일부지역을 잿더미로 만든 LA폭동 때 경찰의 대응이 형편없었다고 털어놨다.당시 경찰 중간간부였던 그는 “폭동이 시작됐던 플로렌스와 놀만디 교차로에 가능한 한 모든 경찰력을 동원했어야 했다”면서 “그곳을 방치해 폭동의 발화점으로 만든 것이 실수”라고 말했다. 벡 청장은 초기대응이 실패한 나머지 폭동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시가지가 크게 불타는 재앙을 맞았다고 경찰의 실책을 인정했다.당시 로드니 킹을 구타한 경찰관들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흥분한 흑인들이 경찰 순찰차에 돌을 던지는 등 폭동조짐이 있었지만, 로스앤젤리스 경찰청은 병력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사고현장을 방치하고 철수했었다. 특히 폭동이 과격해지자 백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만 방어선을 구축해 한인타운을 폭도들 손에 내맡겼다는 비난을 받았다.이 폭동으로 한인타운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2천800여개의 한인업소가 약탈당하고, 전체피해액 10억달러 중 절반 이상이 한인업소의 피해였다. 그 당시 한인들은 피해자이면서도 매스미디어의 지원도 받지 못했다. 정부의 지원이 대단했지만 한인교포들은 세금보고 등에 서툴렀던 관계로 보상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하지만 이로 인해 우리도 정치력을 키워야 한다는 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폭동이 멎은 후 뿔뿔히 흩어져 살던 한인들이 불타고 부서진 한인타운에 너도 나도 모여들어 `평화의 행진`이라 이름 붙여진 대규모 행진을 통하여 재건의 의지를 온 미국에 알리기도 했었다.일부에서는 사태가 그렇게 악화된 데는 다민족·인종사회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고 그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한인들의 잘못이 크다고 지적했다. 베벌리힐스 등 백인 부유층 주거지의 길목에 한인타운이 있다 보니 한인이 크게 당했다는 분석도 있지만 이것만으로 사태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이제 주민들의 뇌리 속에서도 폭동의 기억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교육부는 교과과정에 LA폭동을 포함시키지 않았고 교과서에 실리지도 않았다.로드니 킹은 LA폭동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한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서 “우리 모두 함께 잘 지낼 수 없는 건가요?” 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방송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시당국으로부터 380만달러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자신의 힙합 레코드사를 차렸다가 파산하는 등 투자 잘못으로 대부분을 잃었다고 한다.1991년 잡힐 당시, 경찰관들은 곤봉으로 그를 50여 차례나 난타했을 뿐 아니라, 발로 차거나 전기충격기로 공격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백인만으로 구성된 배심원이 1992년 4월 29일 경찰관들을 무죄로 판정하고 석방하자, LA지역 흑인사회의 분노가 폭발하여 폭동으로 연결되어, 사흘동안에 55명이 죽고 2천명 이상이 부상하는 참사를 빚었던 것이다. 엉뚱하게 한인사회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이 사태는 6일 만인 5월4일에야 진정됐다.20주년을 맞으며 미주한인회와 교계에서 많은 성명을 내놓고 있다. 이들은 “재미동포사회가 민족적 자만에 빠져 타민족을 경시하는 풍조가 늘어가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봐야 한다”고 지적했고, “작은 실천을 통해 이웃 타민족들과 아픔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고, 그들의 커뮤니티에서 봉사하고 연대하는 일을 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맞는 말이라고 본다. 하지만 좀 아쉬운 것은 그 당시 다른 인종 커뮤니티에서와 같이 `우리의 권리가 침해되었다`, `우리에게도 권리를 달라`, `피해를 보상하라`고 외치는 우리 교포리더들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비참하게 깨지고 부서진 가운데 절망에 차있던 우리 동포들의 마음을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어조로 반목하는 것은 `옳은 말`이라고 생각되면서도 한편 서운함이 드는데, 이는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2012-05-15

LA폭동과 비주류의 비애 1

▲ 구자문 한동대 교수1992년 4월29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LA폭동은 1991년 3월3일 속도위반으로 차를 몰던 흑인청년 `로드니 킹`을 집단구타한 4명의 백인경찰관이 1년 후 무죄판결을 받은 데 대해 LA의 흑인들이 반발하며 6일간에 걸쳐 벌어진 폭동으로 역시 비주류라고 볼 수 있는 한인들의 피해가 매우 컸었다.그 흑인청년은 마침 현대 엑셀차를 몰고 가다 경찰에 잡혔는데, 그 구타당하는 모습이 한 시민에 의해 녹화되고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는 바람에 큰 사회적 이슈가 됐다. 지금도 그러한 경향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젊은이들, 특히 흑인이나 스패니쉬 젊은이들 여럿이 함께 타고 차를 몰게 되면 검문에 걸리는 경우가 더 흔했던 것 같다.지금도 미국경찰들의 위압적인 행동이 잘 알려졌지만 이는 범법행위를 막기위해 필수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한 사건임에도 명령에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심하게 얻어맞거나 총격을 당하는 경우가 있음이 신문지상 알려지기도 하는데, 그 당시에는 더욱 심했다고 보면 된다.그 구타하던 경찰들이 백인들만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에 의해 무죄로 판결됨이 알려지게 되자 흑인들이 많이 몰려 살던 도심지역의 몇몇 흑인들이 순찰차에 돌을 던지고 지나가던 백인운전자를 끌어내어 폭행하는 등의 범법행위를 벌였는데 이러한 항의 내지 난동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은 그날 오후 늦게 부터였다.이들 데모는 폭동이 되고 이들은 주변의 상가들을 때려 부수고, 불 지르고, 약탈을 단행했다. 이때 이 지역에 중소규모 마켓 등 사업체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한인들로서 당장 그 피해의 대상이 되었다. 폭도로 변한 데모대들은 차에 타고 무장한 채 총을 쏘아대며 북쪽에 위치한 한인타운을 휩쓸게 되고 이때 많은 피해가 났었다. 이들은 데모대라기 보다는 무장폭도들이었으며 그 목표가 한인타운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백인들이 운집한 베벌리힐스를 포함한 서부 로스앤젤리스라고 봐지는데 7~8천의 경찰과 6천여의 주정부군, 그리고 1천 여명의 연방정부군이 그때까지 넋놓고 있다가 백인지역으로 피해가 확산될 기미가 보이자 그곳 입구지역의 수비를 강화하게 되어, 폭동의 피해는 고스란히 도심상가와 한인타운에 집중되었다.LA시정부 주택국에 근무하던 필자는 다음날부터 업무상 도심 관할사업지역을 운전하며 돌아봐야 했다. 그 차에는 로스앤젤리스시청 로고가 크게 찍혀있기도 했지만 `폭동의 공격대상인 백인과 한국인이 타고 있어 위험하다`고 걱정하는 분들도 있었다.거리에 눈에 띄는 것은 부서지고 불타는 상가들과 중무장한 흑인 갱들이었고, 경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당시 로스앤젤리스에는 두 개의 흑인 갱단이 있었고 이들에 속한 갱들이 7만5천명이나 됐는데, 이들의 본부 앞을 지나자니 이들도 폭동가담자인지 피해를 막기 위해서인지 잘은 모르지만 기관단총 등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었다.폭도들은 총기를 든 약탈자가 되어 어두워진 도심지역이며 한인타운의 주요 상가지역들을 주기적으로 공격했다. 이때 많은 한인가게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도 하고 한인타운 몇몇 지역에서는 가게주인과 젊은 청년들이 권총, M16 등을 들고 밤새 폭도들과 싸우며 재산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이때 총상으로 숨진 이들도 있었다.이 폭동의 영향은 매우 커서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인기 좋던 `부시`가 패하게 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젊은 `클린턴`이 당선됐다.한인타운도 이로 말미암아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재산상의 피해도 그러하지만, 우리 교포들은 다른 소수인종들과 다를 바 없는 비주류이면서도 백인그룹들을 대신해 피해를 당하게 됐다. 그 당시 매스컴에서도 우리들을 보호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한·흑갈등을 부추겼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 한인교포들도 정치력을 키워야 한다는 의식이 싹트게 됐다.

2012-05-08

휴일, 아침을 걷다

▲ 구자문 한동대 교수 이른 아침에 집주변을 산책했다. 평일이라면 부산해질 6시 좀 넘은 시간인데도, 휴일이라서인지 주변이 적막하다. 벚꽃이 지고 느티나무 푸른 잎들이 제법 풍성해졌음은 봄이 한창 무르익었음을 나타냄일 텐데, 올해는 계절이 좀 늦었다. 좀 따스해 지려나 기대 했지만 여러 차례 반복된 꽃샘추위에 올해는 진해벚꽃축제며 경주벚꽃마라톤이 꽃망울만 맺힌 채 치러졌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려왔었다.아파트 담장을 따라 걷노라니 찔레넝쿨이 꽤 자라나서 작은 꽃송이와 함께 풋풋한 향기를 품어낸다. 이것은 핑크빛 철쭉이고, 저것은 보랏빛 라일락이다. 어린 이팝나무며 모감주나무도 푸른 잎을 피워내고 있다.한동안 게을렀는데, 두어 달 전부터 주변을 걷기 시작한 것은 `몸에 약간 이상이 생겼다`는 절박한 신호에 따름이었다. 이년반전 이 신주거단지로 이사 오기까지 교외의 한 산기슭 마을에 살았는데, 휴일에는 동네친구들과 등산도 가고, 평일에도 아침 일찍 뒷산 송림 우거진 산책길을 걷곤 했었다. 하지만 지난 1~2년간 할 일 많다는 핑계로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시간이 늘다보니 혈압이 크게 상승했던 모양이다.물론 병원에서 약간의 약과 규칙적인 운동이 필요하다는 처방을 함께 받았지만, `이런 생활방식은 않되겠다`는 나름 심각한 다짐 속에 조금씩이나마 규칙적인 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집에서 자전거도 타고 아령도 하지만, 가장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집 주변 산책으로서 일주일 몇 차례씩 저녁시간을 내어 30~40분, 때로는 한시간씩 걷곤 한다. 도심이 아닌 새로 형성된 주거단지라서 주변에 낮은 구릉 솔밭도 있고, 건물 사이 빈터들도 매우 넓어서 `공기 맑고 바람 시원하다`는 말을 많이들 하지만, 저녁 길을 걷다보면 차량통행으로 인해 매캐함을 느낄 때가 많다. 따라서 산책코스도 아파트 후면 한적한 곳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통량이 적은 휴일아침은 가고 싶은 곳 모두를 돌아 볼 수 있어서 좋다. 몇일 후면 개장한다는 대형마트도 있고, 요즘 문을 연 햄버거집도 있고, 가지각색 빌딩화사드의 커피숍과 레스토랑들이 있다.이렇게 동네를 걷고 익히게 되면 이 동네에 대한 애착이 더욱 늘어나게 될 것이다. 마주치는 사람들과도 좀 더 다정히 인사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서로 인사 나눔이 얼마나 상쾌한 일인가.30년전 미국에 처음 갔을 때, 그곳은 중북부지방으로 북유럽 이민자들이 많은 곳인데, 길을 걷다 마주치며 누구든 살짝 웃으며, 하이! 굿모닝! 인사를 해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물론 미국도 지역에 따라 좀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 한국인들도 서로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인사도 하고, 살짝 부딪히기라도 하면 죄송합니다! 사과할 수 있으면 좋겠다.필자의 근무지는 창립 된지 20년이 채 안된 신생 대학교인데, 누구든 방문을 하고 좋은 인상을 받는 것은 학생들이 안녕하세요? 인사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러한 모습이 국내외에 꽤 알려져 있다. 이러한 좋은 습관들이 우리의 시민운동으로 전개됐으면 좋겠다.우리 동네들도 산책로 조성은 물론이지만, 일상을 자동차에 의지하지 않고 손쉽게 걸어 다니며 일을 볼 수 있도록 모든 시설들이 도보로 가깝게 잘 연결됐으면 좋겠다. 상쾌한 걸음이 되도록 보도블럭도 잘 깔리고, 주변의 가로수며 소공원도 잘 가꾸어지고, 스트릿퍼니처와 빌딩화사드가 지역의 특색에 맞게 매력적으로 꾸며지면 좋겠다.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길가에 작은 화단도 만들고, 빈터에 유채 같은 꽃씨도 뿌리고, 주변에 쌓여가는 쓰레기도 서로 도와가며 치워낼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러한 `동네의식`의 중요성이 개인주의적이라는 미국 등 선진도시들에서도 다시금 힘을 얻고 있다.휴일, 아침 길을 걸으며 푸릇한 새싹과 향긋한 꽃내음을 맡으며, 이 향기가 일년 내내 온 동네를 감싸주기를 기대해본다. 이는 동네 모든 이들의 `새마음운동`이며 `새마을운동`으로서 자발적이고 협동적인 노력 속에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2012-05-01

DMZ 이야기

▲ 구자문 한동대 교수어제와 오늘 연달아서 DMZ (Demilitarized Zone)에 관한 텔레비전 특집을 시청할 수 있었다. 오늘 특집은 59년전 한국전쟁 당시 남편이 미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80여세의 미망인과 60세가 된 따님의 DMZ 방문 이야기였고, 어제는 40여년 전 DMZ 철책선에서 군생활을 했다는 60대 중반을 넘긴 한 남자분의 이야기였다.1940~5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한 자유주의에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던, 소련을 중심으로한 공산주의자들이 우리 한반도에서 큰 도발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은 6·25전쟁의 큰 비극을 겪게 됐었다. 58년전 그 전쟁이 멈춰진 장소가 DMZ이다. 휴전선 양측에 각각 2km씩의 완충지역인 비무장지대를 두고, 그 가장자리에 각자 철조망과 진지를 구축해 아직도 양측의 긴장이 생생히 느껴지는 장소가 DMZ인 것이다.그 미망인과 딸은 남편이며 아버지인 미군병사가 59년전 행방불명이 됐던 한국땅에 처음 찾아온다고 했다. 아버지가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 곳이 한국이었기에 지난 세월 동안 한국이 너무 무서운 곳이어서 방문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철책선에 위치한 초소 전망대에서 아버지가 전투를 벌였고 행방불명됐던 그 장소를 바라보며 흐느끼고 있었다.당시 그곳의 전투에서만 미군 수백명이 죽고, 천여명이 다치고, 수십명이 실종됐다고 한다. 이들 모녀는 남과 북이 어서 좋은 관계를 회복해 휴전선 완충지역안에 묻혀있을 실종자들을 어서 빨리 발굴하기를 바라고 있었다.지금 우리군은 미군과 합동으로 유해발굴작업을 진행하여 지난 수십년 동안 7천여구의 유해를 발굴했다고 한다. 그중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유해는 십여구. 하지만 6·25전쟁 중 실종된 우리 측 유해만도 13만구에 이르며 그중 유엔군의 유해가 8천구 정도 되는데, 2천구는 남쪽 땅에, 2천구 정도는 DMZ 완충지역안에, 그리고 나머지 4천구는 북한 땅에 묻혀있을 것이라고 한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이들의 죽음도 안타깝지만, 이들의 유해가 가족들 품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음도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어제 프로그램은 40여년전 자기가 근무하던 철책선을 찾아 이리저리를 둘러보며, 이제는 손자뻘 되는 사병들이 그곳을 지키게 되도록 변함이 없는 남북분단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는 60대 중반 한 남자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이분은 전직 국사학교수로서 완충지역안에 남북한계선 꽉 차게 사각형으로 터만 남겨진 옛 태봉국 궁궐의 흔적을 설명하면서, 당시 고려의 시조가 된 왕건에게 쫓겨났던 궁예의 안타까운 신세를 설명하면서 남북학자 누구도 그 터를 조사연구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세월이 지나며 DMZ는 전쟁의 상흔을 지워버리고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천연의 생태계로 변모됐다. 궁궐터며 집터에 산림이 우거지고, 강과 호수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와 각종 철새들이 수도 없이 자리하고 있다. 텔레비전 영상을 보면, 그곳에서 천연기념물인 잿빛두루미 수십쌍이 물고기를 잡고 있었고, 수많은 천둥오리들이 까맣게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노루며 멧돼지들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이미 멸종 됐다는 호랑이가 몇 마리라도 살아남아 있지는 않을지 모른다.동해안쪽 초소 전망대에서는 금강산 일부가 지척으로 바라다 보인다. 얼마전까지 몇 년 동안 남북화해무드 속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금강산을 다녀왔지만, 한 여성 관광객이 큰 이유 없이 북한초병에게 사살되고, 남북은 또 다시 얼어붙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언제나 서로 쌓인 앙금이 가시게 되고, 소통이 되고, 그리고 남북통일이 이루어질지 알 수 없다. 아직 DMZ는 낭만적인 가십의 대상이 아니다. 아직 피눈물 마르지 않은 역사의 현장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012-04-24

고층 주거의 발달과 논란 2

▲ 구자문 한동대 교수건설업계에 오래 근무하고 있는 필자의 사촌형이 중동지역에서 공사감독을 할 1970~1980년대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석유부자 나라들이니 한국업체들로 하여금 고속도로만이 아니라 아파트며 주택들도 현대식으로 건설해 줬는데, 막상 사람들은 적응을 못 해서 밤에는 가축들을 방에 들여놓고 자기들은 옥상에서 잔다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천막집에서 밤에는 시원하게 별을 보며 자는 게 그들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라나!우리나라의 경우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다. 처음 입주한 아파트에서 양변기 사용을 몰라 앞뒤로 앉아 본다거나 아예 습관대로 발을 딛고 올라갔다는 일화는 누구나 한 번쯤 들은 바 있다. 그 당시에는 목욕탕 욕조도 일 년에 한번 김장할 때 배추절임 용도로 썼었고, 집집마다 아파트 현관문 앞에는 가마니에 싸인 김칫독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지금은 누구나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져서 이러한 문제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아파트들이 좀 더 지역문화에 맞게 그리고 각 주호의 쓰임에 막게 설계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기 마련이다. 지금은 우리가 모두 미국화 내지 유럽화 된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으며, 아파트 형태가 일자형에서 타워형 등으로 변하고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아파트 형태는 물론 아파트 내부의 각 유닛의 다양성이 부족하다. 우리의 아파트 시장이 선분양 후 공급체계에 입주인의 자의적인 의견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차차 입주인의 필요에 따라 구조가 바뀔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MIT 교수였던 네덜란드인 `하브라켄`은 주거공간 구성의 유연성을 내세웠고, 주거가 지어지더라도 10년, 20년 후 필요에 따라 집안의 구조를 바꿀 수 있게 하기 위한 `SAR Theory`를 제안했다. 이 이론 및 방안에 따라 사람들은 주거 평면을 필요에 따라 건설시기부터 차별화시킬 수 있고 추후에도 손쉽게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요즈음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건설회사들이 추진하는 것이 80% 정도는 건설회사가 공통으로 건설하고 나머지는 입주자의 취향에 따라 꾸미는 것이다. 또한 홍콩의 경우처럼 10년이나 15년 후에는 두 개 집을 하나로 합하거나 각 집의 평면을 손쉽게 바꿀 수 있게 하는 것이다.우리 한국의 경우 미국과 같이 단독주택에 거주함을 국민의 염원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 한국은 그럴만한 땅도 없고, 현재는 대도시도 확산보다는 압축적으로 개발해 나가야 할 시대이기 때문이다. 대도시의 도심을 압축적으로 꾸미고, 교외의 소도시나 타운들도 정거장 등을 중심으로 압축적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대중교통망으로 네트워크화시키는 것이다. 인프라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서도 교통량을 줄이기 위해서도 압축도시를 추구해야 하고 고밀도주거 개발이 요구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예를 들어, 우리 포항의 경우도 도농통합시로서 도시지역은 매우 넓지만 대부분의 개발이 도심재생과 아울러 교외의 교통요지를 중심으로 제한된 개발을 해나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물론 이왕 있는 교외의 독립된 읍면 소재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을 교통시설을 통해 네트워크화하여 도시 자체를 `네트워크화된 단핵 압축도시` 형태로 가꾸어가자는 것이다. 물론 포항이 100만 이상의 대도시로의 발전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다핵도시`로서의 좀 더 다른 스케일의 계획이 요구될 것이지만…물론 압축도시라 하여 고층의 아파트만을 지으라는 것은 아니다, 현재 있는 역사유산들과 단독주택 동네들을 보전하면서도 정거장 등을 중심으로 고밀도 개발을 하여 더 이상의 도시확산을 막자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규모 주택단지 내지는 신도시 사업을 위해서 도심인근의 대지를 놓아두고 개구리 뜀뛰기 식으로 교외로 확산되어 나가는 경향이 컸었다.고밀도 개발을 하게 되면 도시의 혼잡이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건축가와 도시계획가, 그리고 정책결정자들이 해결해 내야 할 것이다. 물론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이러한 문제점들을 어느 정도 해결해 주기도 할 것이다.

2012-04-17

고층주거의 발달과 논란 1

▲ 구자문 한동대 교수현재 우리 한국의 주거형태는 아파트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미 우리나라 주택 중 아파트의 비율이 55%를 넘어섰다는 정부의 발표를 기억하고 있다. 이 비율은 아마 점점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 아파트들은 고층의 대형단지를 가진 것들도 있고 중저층에 작은 단지의 것들도 있다. 그 형태 면에서는 더욱 다양할 것인데, 우리가 보통 연립주택이라고 부르는 주거들도 아파트라고 보면 된다. 필자의 어린 시절인 60~70년대만 해도 서울에도 아파트가 막 생겨나는 시절이었다. 1960년대 초반 마포에 5층짜리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생겼고, 몇 년 후인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여의도와 한강변에 많은 아파트들이 지어졌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대부분의 국민은 단독주택 형식의 주거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지금은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에도 대규모 아파트단지들이 자리 잡았다. 우리보다 좀 더 발전이 앞서 나갔던 일본의 경우와 비교해도 우리 한국의 아파트 붐은 특이한 면이 있다. 우선 서울과 동경을 비교해보자. 김포공항에 착륙하기 전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풍경은 도심 및 부도심 가릴 것 없이 고층의 상가 및 오피스건물들이 즐비하지만, 더욱 눈에 뜨이는 것은 고층의 대단위 아파트단지들이다. 동경 도심의 아까사카 프린스호텔 25층에서 내려다본 동경의 풍경은 서울과는 다르다. 서울에서와 같은 큰 건물이나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눈에 뜨이지 않는다. 대개가 10층 정도의 상가, 오피스, 혹은 아파트 건물들이 수목들 사이로 무수히 눈에 뜨일 뿐이다. 두 도시 차이점의 원인은 두 민족 간의 사회적, 문화적 차이점을 포함하여 매우 다양할 것으로 생각되며, 어느 하나를 꼬집어 이야기하기 힘들 것이라고 보인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1970~80년대를 거치며 급격한 경제성장과 도시의 발달 등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개발을 촉진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우리는 일제시대와 6·25전쟁을 겪으며 많은 것들이 파괴되고 그 후 어려운 살림 속에 제대로 지어진 집들이 드물어 새롭게 지어지는 아파트에 열광적이었을 것 같다.우리 한국의 아파트는 미국으로 치면 각 아파트 유닛이 개인소유인 고층의 콘도미니엄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층의 주거가 인구밀도 높은 대도시에서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요즈음은 에너지 절약과 인프라 비용을 줄이기 위한 압축도시 형성을 위해 모두가 노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현대식 아파트의 효시라고 불리는 `위니테`가 4개동 337가구가 10층 정도의 높이로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세워진 것은 1952년이었다. 시의회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 고층주거에 대한 많은 비평을 토해냈고, 주민들도 거부반응이 커서 오랫동안 비어 있어야 했다. 우리 한국의 경우도 아파트 도입 초창기에는 `사람이 땅을 디디며 살아야지` 등등 염려가 많았었음을 기억하고 있다.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고층아파트에 대한 찬반논의가 꽤 크게 있어왔다. 프랑스의 건축가 `르 코르브지`는 1933년에 발행된 그의 저서 `빛나는 도시`에서 300만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고층도시를 제안하였다. 주거는 규격화되어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건물층수가 높이 올라감으로 인하여 정원 등의 공간은 오히려 많아지게 되어, 도시는 오히려 아름답게 꾸며지고 삶의 질도 높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하지만 이에 대해서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제인 제이콥스`는 1961년에 발행된 저서,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1950년대 미국의 도시재생 정책을 비평하면서, 이러한 대규모 고층 주거가 비인간적인 규모이며 쓸데없이 도시 확장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너무 높기 때문에 집에서는 창밖을 통하여 아이들이 노는 것도 지켜볼 수 없고, 이웃과도 교류가 없어 네이버후드가 파괴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신도시를 만들어 인프라에 쓸데없이 투자하지 말고, 이러한 작은 규모의 남겨진 땅에 작은 규모의 인간적인 스케일의 단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많은 미국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어쨌든 고층의 대단위 주거와 저층의 단독주택들은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도시지역에서는 고층주거가 주된 주거형태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

2012-04-10

인구의 노령화 2

▲ 구자문한동대 교수 이웃 일본은 65세 이상의 노령층 인구가 22.1%에 달해 초고령사회가 돼 있고, 우리 한국은 아직 7~8% 정도이나 그 증가속도가 빠른 편이다. 서울의 경우 10%가 넘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20%가 넘는 곳들도 있는데 대부분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지역들이다. UN이 정한 바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령층 인구비율이 전체인구의 7% 이상을 차지하면 고령화사회,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1%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구분하고 있다. 우리 한국은 2000년을 기준으로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인구의 7.1%를 차지해 고령화사회로 진입했다.나이가 많아지면 몸 이곳저곳에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고혈압, 당뇨 등도 흔하지만 시력, 청력,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흔하다. 또한 관절에 이상이 생겨 걷거나 층계를 오르는데 문제가 있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노인들은 몸에 다양한 장애를 지니게 돼 일반 공공시설이나 주거시설 이용에 어려움이 크다. 요즈음 새로 지어지는 공공건물들이 장애인들을 위해 출입구경사로, 엘리베이터, 화장실, 점자보도블럭 등을 설치하게 돼 있는데, 이는 단순히 장애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노인층을 위한 배려라고도 봐진다.하지만 이러한 장애인 시설들이 그 내용은 무늬에만 그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건물 정문이나 후문에 휠체어 탄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완만한 슬로프와 잡는 레일이 설치돼 있어야 하지만, 제대로 돼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시내버스에도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리프트 등의 장치가 필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다.고령사회에서 발생하는 대표적인 노령층의 문제는 질병 이외에도 빈곤, 고독감 등이다. 선진국의 경우에는 고령화사회에서 고령사회를 거쳐 초고령사회로 변모하는데 상당한 기간이 소요돼 그에 대한 준비도 체계적으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빠른 경제성장의 속도 만큼이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돼 그에 따른 해결책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아직도 우리 한국에서는 노령의 부모님을 장남이 모시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을 서구에서는 경이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다. 일부 나라에서는 이러한 형태가 부모를 위해서도 좋고 국가재정을 아낄 수 있다는 면에서도 칭송하고 있다.하지만 우리 한국의 경우에도 노령의 부부가 혹은 혼자되어 자식들과는 별도의 가구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자식들에게 경제적·정신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가 대부분일 것으로 보아지지만, 남은 삶을 여행도 하며 자신들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대답하는 경우도 있을 것으로 보아진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도 대부분 자식들의 경제적인 지원이 계속 된다고 보아진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매우 커서 노인들의 삶이 매우 어려워진다. 우리 한국의 경우 노령층을 위한 국가적인 지원이 선진국들과 비교하여 매우 부족하다고 보면 된다.필자가 몸담은 학교에서도 한동안 노인병원과 실버하우싱을 캠퍼스내에 건설하고자 한 적이 있었다. 노인병원은 노령층을 위한 진단 및 특수치료시설들이 필요하며, 실버하우싱은 노인들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가격대가 완비돼야 한다. 더구나 구내에 대학교와 중등학교가 있어 노인들이 파트타임 일도 하고 봉사활동을 할 기회도 생길 것이며, 학생들의 다양한 활동들을 구경할 수 있으니 덜 심심하고 덜 외로울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이 사업을 실현하지는 못했다.노인들은 허약하고 자주 아프기 때문에, 자주 병원에 가야하고 응급실로 가야할 급박함이 생기기도 하기 때문에 주변에 병원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 보살펴 주어야만 한다. 이들에게 쓰여지는 비용을 경제적인 논리로만 해석해서는 않될 것이다.누구나 노인이 된다. 더구나 노인으로 불리는 시간이 청장년시기 만큼 길어질 것이다. 이러한 초고령사회에 대비해서, 우리 국민들의 의식변화가 중요하다. 국가차원에서도 선진국의 경우와 같이 이들에 맞는 일자리창출과 복지체계 마련이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2012-04-03

인구의 노령화 1

▲ 구자문 한동대 교수21세기의 화두가 뭐냐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다. 환경오염, 기후변화, 물 부족, 빈곤, 소득격차 등을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고, 한반도에 국한해서는 중국의 영향력, 남북통일 등을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21세기를 감성의 시대로 표현하며, 엔지니어링+인문학적인 상상력을 언급하는 이들도 있고, 기기의 발달을 빗대어 스마트(Smart)를 화두로 던지는 이들도 있다. 이들 각자가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겠지만, 오늘 필자는 21세기 역시 중요한 이슈인 노령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원시시대 인류의 수명이 어떠했을지는 제대로 알 길이 없겠지만, 역사 이래로의 기록들을 살펴본다면 평균수명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스·로마시대에는 전쟁이 많아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평균수명이 19세 정도였다고 한다. 훨씬 후인 산업혁명 즈음에도 유럽의 대도시 노동자계층의 평균수명이 19세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들었다. 농촌에서 대도시로 이주해온 많은 젊은이들과 영아·유아기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 혹독한 공장노동, 열악한 주거와 극심한 매연 때문에 각종질병에 시달리고 죽어갔기 때문이다.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짧게 살았다는 것은 아니며, 60~70년 혹은 그 이상을 산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층의 사망률, 특히 0~1세 사이의 영아사망률이 매우 높아 평균을 내면 20세 이하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원시시대부터 산업혁명 이전 즈음까지 각 나라의 인구증가율은 거의 0에 가까웠다. 영양상태가 나빠 많이 낳지도 못했지만, 낳아도 대부분 어릴 때 사망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소득이 높아지고 식량생산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더구나 그즈음 의료기술이 발달하게 되고, 도시의 위생 및 환경시설이 좋아지게 되어 영아사망률뿐만 아니라 각 연령계층의 사망률이 급격히 감소하게 됐다. 당연히 평균수명이 늘어나게 되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것이다.이때는 젊은층이 노령층보다 훨씬 많은, 좀 납작한 피라미드형의 인구구조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삶의 스타일이 변함에 따라 결혼이 늦어지고 결혼을 해도 애를 한두명만 낳든지, 아예 결혼을 하지 않는 싱글가구가 늘어남에 따라 영아·유아층이 급격히 줄어들게 됐다. 더구나 의학기술이 고도화되어 감에 따라 불치병들이 차차 정복되고 있어서 이제는 평균수명이 우리 한국의 경우에도 80세 가까이 접근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구구조도 피라미드형이 아닌 종(Bell) 모양을 띄게 됐다.아직까지 정복되지 않고 있는 암 치료를 위한 획기적인 방법이 발견될 경우에는 많은 이들이 100살까지 무난히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공장기 등에 관한 의공학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면 누구나 120세 정도 수명을 지니게 될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 우리 한국과 다른 선진국들이 겪는 문제는 노동인력의 감소이고, 은퇴 연령층에 대한 비용증가이다. 노령층 인구를 65세 이상으로 보았을때, 우리 한국의 노령인구비율은 7~8%에 달하고 있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13~14%에 달하며 10~20년 후에는 25% 이상으로, 40년 이후에는 50% 이상으로 늘어 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인구의 고령화는 각자에게는 큰 기쁨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노동력 감소와 사회적 부담의 증가를 초래한다. 은퇴 후에도 수명이 30년 혹은 그 이상 계속되기 때문에 이들을 부양하기 위한 가정과 국가적 비용이 크게 증가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따라서 현재보다 갑근세, 지방세, 의료보험 등이 2~3배 올라 갈수도 있을 것이고, 의료시설, 실버하우싱, 양로시설 등이 대폭 증가해야 한다. 국민연금이나 보험사들도 요율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하면 파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비용의 부담, 노령층을 위한 소일거리 내지 생산적인 기능을 담당해 줄 수 있는 직장창출 등이 정부와 사회의 큰 숙제이다.

2012-03-27

1억 인구와 스마트시티

▲ 구자문 한동대 교수요즈음 한국은 출생율이 낮아져서 장차 젊은층 보다 노년층이 많아져 경제활동이 저하되고 사회복지부담이 엄청 커질 것을 염려하고 있다.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100~200년 후에는 한국인이라는 민족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걱정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있다. 30~40년전만 하더라도 한국은 인구증가 억제가 살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산골마을을 포함한 전국 방방곳곳에 가족계획요원들이 상주하고 방문했으며, 갖가지 산아제한 방안들을 교육 및 시행했었다.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어떻게 보면 너무하다 할 정도의 인구억제책을 쓰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빠른 시일 내의 국민소득 증가를 위해서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국민총생산을 인구수로 나눈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한국에서는 출생률 증가가 각 지자체의 화두가 돼있다.한국의 출생률 저하의 원인은 다양하다. 우선은 대학 및 대학원 진학 등 수학기간의 연장, 과거와 달리 여성들의 직장생활 등으로 인한 결혼연령이 높아진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경제불황과 사회생활의 빠듯함으로 인한 결혼시기 연기, 자녀교육경비의 상승으로 인해 결혼하더라도 자녀를 한둘 낳아 기르기도 힘들어진 것 등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인구증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하나는 이미 설명한대로 인구가 적어야 1인당국민소득이 오르므로 인구증가율을 억제해야한다는 주장이고, 또 하나는 한 국가가 외풍에 시달리지 않고 자체의 생산과 소비만으로도 유지되려면 인구가 최소한 1억은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나, 지금 우리 한국은 두 번째 견해에 힘을 싣고 있다고 보아진다. 하지만 인구 1억 만들기도 힘들겠고, 이 좁은 땅덩어리가 문제가 될 것이다.맬더스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비해 식량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에 인구증가를 조절해야 한다는 유명한 이론을 발표했다. 하지만 맬더스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초를 살아간 사람이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구가 늘기 시작하는 시기였고, 빈곤과 굶주림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맬더스의 이론이 현대에는 비평을 받는데, 그 이유는 맬더스가 20세기 후반의 과학기술의 발달과 농업생산량의 증가를 감히 예측하지 못했기에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현재 세계적인 큰 화두인 환경오염이나 자원의 고갈에 대한 해결에 대해서도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이러한 문제들이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비관적인 견해와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긍정적인 견해가 있다. 물론 누구도 어느 한쪽을 장담하지는 못하고 있다.다시 인구문제로 되돌아가 본다면, 이 좁은 한반도에 1억 이상의 인구가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필자는 `물론이다` 라고 답하고 싶다. 이미 남북을 합하면 7천만명이 되고 있으니, 남북통일이 되면 3천만명 정도만 더해지면 1억이 되는 것이다.이들 대부분이 대도시권역의 고층아파트에 거주하게 될 것이다. 도시 자체가 최적화된 스마트시티(Smart City)이고, 스마트빌딩(Smart Building)들로 구성될 것이므로, 에너지며 상하수도가 자동공급 및 제어되고, 에너지 생산과 폐기물 처리도 마을단위 내지 도시단위에서 해결되고, 농업생산량의 적지않은 부분들이 빌딩안밖에서 생산될 것이다. 물론 고밀도로 인한 혼잡도 첨단의 디자인과 제어시설들로 인해 모두 해결 될 것이다.결론적으로 필자는 우리나라의 인구를 1억으로 증가시킴도 중요하지만, 작은 국토라도 스마트하게 개발하고 경쟁우위적인 과학기술과 생산기반을 유지한다면 1억의 인구가 잘살 수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2012-03-20

포항 발전이슈 몇 가지

▲ 구자문 한동대 교수필자가 로스앤젤레스 시정부에서 일할 때, 연구주제 중 하나가 로스앤젤레스시의 광역적인 기능 및 인구추정에 관한 것이었다. 그 당시 로스앤젤레스시의 인구는 350만 정도였는데, 도시가 연단화돼 로스앤젤레스광역권의 인구는 1천200만이었다. 문제는 이 광역권에는 인구 5만에서 35만 정도의 150여개 독립된 도시들이 있고, 각자 세금을 걷고 쓰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도시기능은 중심부인 로스앤젤레스시가 제공하고 있었다. 따라서 로스앤젤레스시는 350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1천200만에 대한 도시기능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었다.주변 소도시의 시민들은 직장을 로스앤젤레스시에 가지고 도시인프라 및 시설들을 로스앤젤레스시에서 이용하면서도 각자 자기도시에 거주하고 세금을 내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시로서는 매우 부담이 큰 것이다. 따라서 도시인프라의 용량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인구를 350만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무엇을 기준으로 할 것이냐 고민했었다.이러한 고민은 동해안의 중심도시인 포항도 가지고 있다고 봐진다. 포항의 인구는 52만이지만, 포항에서 일하면서도 주변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도 있고 포항 밖에서 일하고 거주하더라도 포항의 도시기능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어떻게 포항시의 실제 인구를 계산해 내고 도시인프라를 산정해낼지는 쉽게 이야기하기 힘들다. 포항시의 실제인구는 60만이 넘을 수도 있고, 80만도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요즈음 신항만배후단지의 한 회사만 하더라도 고용인 500명 중 대부분이 식구들을 고향에 두고 혼자 포항에 와 있으면서 주소는 옳기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들었다. 포스텍이며 한동대의 학생들도 대부분 그러할 것이다. 학생들의 경우는 좀 예외이기는 하지만, 고용인의 경우 포항에 거주시키기 위한 방안들이 혜택적인 것들과 아울러 여럿 있을 것으로 보아진다.지역개발전문가로서 필자가 요즈음 자주 생각해보는 것은 지역경제활성화의 주요 핵인 문화관광에 관한 것이다. 동해안의 다른 지자체들도 이에 대한 많은 계획들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주요과제는 첫째, 지역특성에 맞는 사업을 찾아내는 것이고 둘째, 사업성확보이다. 정부보조금을 주로해 세워지는 계획들은 단기적으로야 좋을 것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문제점을 내보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시장성에 대한, 그리고 공공민간합작에 대한 세밀한 연구와 계획이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포항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첨단산업도시이면서도 해양관광도시를 지향하고 있기에 첨단도시로서의 이미지를 살린, 예를 들어, 과학테마박물관, 첨단 롤러코스터 등이 있는 첨단테마공원, 해양도시로서 샌디에고 씨월드 같은 해양테마공원이나 해양박물관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투자가 확보 및 사업성의 문제가 크다.이러할 때 포항의 가장 큰 자산은 이미 잘 알려진 죽도시장이라고 본다. 해산물 중심의 재래시장인 죽도시장은 어떻게 꾸미고 운영하느냐에 따라 국내외 많은 관광객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곳이라고 보아진다. 예를 들어, 깨끗하고 정리됨, 특산물 판매 및 홍보, 바가지 없애기 등을 통한 신뢰성 회복 등.죽도시장은 싱싱한 해산물만이 아니라 옷, 가전제품, 농산품 등도 잘 알려져 국내외 고객들을 모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러시아인들은 옷이나 가전제품을, 일본인들이라면 싱싱한 해산물만이 아니라 건어물, 한우고기 등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요즈음 몇몇 동해안발전계획 관련 자료들을 보면, 영일만항의 북방항로 개척의지가 간과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수정돼야 할 것이다. 포항은 컨테이너선을 `자루비노항`이나 `나진항`으로 연결하고, 농수산물과 여객을 중심으로한 페리선도 환동해지역 여러 곳에 취항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국내 최고수준의 첨단산업도시이며, 대구경북의 관문항만도시이며, 동해안 중심도시로서의 경쟁력을 갖춘 포항의 이러한 노력을 전혀 헛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2012-03-13

포항의 3·1만세운동

▲ 구자문 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며칠 전 휴일은 삼일절이었다. 이는 일제의 점령 하에 있던 우리 국민들이 독립을 되찾고자 만세운동을 전개했던 1919년 3월1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야 했던 우리 민족의 아픔을 기억하며, 독립을 되찾기 위해 무수히 죽어간 독립투사들을 기억하며 이 기념일을 보냄이 한국인으로서 마땅히 요구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우리 한국은 장족의 발전을 이룩해 선진국대열에 들어섰다. 비교적 풍요 속에 자라난 우리 젊은 세대들은 일제시대며, 6·25며, 궁핍했던 전후시절의 이야기들을 교과서나 영화로만 배우고 보아왔을 뿐이기에 그 시절의 어려움과 투쟁의 의미가 구구절절 이해되기는 힘들다고 본다.학생들의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한 방안으로 역사교과서가 3·1만세운동을 비롯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서울 중심으로만 기록하지 말고 학생들이 사는 지역의 관련 역사물들이 보조자료로 함께 쓰일 수 있도록 준비되면 좋을 것 같다. 이는 필자를 비롯한 성인들에게도 좀 더 감동적인 민족사 교육 내지 각성의 계기 마련을 위해 필요하다고 본다.3·1만세운동은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이었다. 손병희를 대표로 해,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지도적 인사들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마침 고종황제의 인산(국장)이 3월3일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모일 것을 예측해, 3월1일 정오를 기해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인쇄물을 뿌리고 시위운동을 전개했다.이 운동이 차차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와 시위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일제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비무장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군중들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부상·투옥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은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대내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선명히 드러낸 바가 되어, 우리 근대민족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삼일절이면 포항에서도 대전리 등지에서 기념식 및 퍼포먼스가 열리기는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3·1만세운동이 포항과 그 인근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전개됐는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포항에서도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이곳에서 가장 격렬했던 3·1만세운동은 포항제일교회(옛 포항교회) 교인들과 영흥초등학교(옛 영흥학교) 교사들이 주도했던 포항장터(여천시장)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과 송라면 대전리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청하면과 송라면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을 들 수 있다.포항장터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은 포항제일교회 장로 송문수의 연락으로 영흥학교 교감이었던 장로 최경성, 집사 이봉학, 교인 이기춘, 영흥학교 교사 장운환 등이 비밀히 회합을 가져 제반 준비를 하고, 1919년 3월11일 포항장날을 기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거행하기로 준비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시내에 알려져 포항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고 한다.포항은 1970년 이래 산업도시로서 많은 발전을 이룩했고 이제 철강산업만이 아니라 무역, 교육연구, 문화면에서 글로벌 도시로의 위상을 구축해가고 있다. 하지만 포항이 역사가 없는 도시로 알려지고 있음이 안타깝다. 우리 포항인들은 3·1만세운동을 비롯한 포항인들의 몸부림치던 근대사를 다시금 정리할 필요가 크다.포항에는 3·1만세운동만이 아니라 구한말의 의병활동, 6·25 포항전투, 새마을운동 등 역사적 사건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잊혀져서도 않되겠지만, 묻혀진 사실들을 발굴해냄도 중요하다. 이를 기록으로 정리하고, 새롭게 조명하고, 그 정신을 발전시켜 나가야할 것이다.또한 지역의 역사적인 발자취들을 조각하고, 기념공원화하고, 연극 및 영화화해 시민교육처로서의 역할 및 지역브랜드 및 관광의 주요자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선조들의 활동과 업적이 우리 포항의 역사이고 새롭게 펼쳐져갈 미래를 위한 바탕이 돼야 하는 것이다.

2012-03-06

환경도시전략

▲ 구자문 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지난 수 십년에 걸쳐 세계의 많은 나라와 도시들이 지속가능한 개발을 실천하고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상황은 크게 좋아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환경오염 방지를 위한 기술과 설비들을 개발·도입하고, 자원절약적인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지난 수세기 동안 산업화 및 인구증가로 인해 오염된 지구가 짧은 기간 내 나아지기도 어렵거니와 값비싼 오염방지시설들이 모든 나라와 도시, 그리고 기업에 도입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한 탓이다. 지난 2009년 `코펜하겐 기후회의`, 2011년 `더반 기후회의` 등 일련의 기후관련 국제회의들이 실패 내지 반쪽만의 성공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은 많은 나라들의 현격한 입장 차이에 의한 것이다. 모든 나라에 동일한 기준을 부여하기를 원하는 다수의 선진국들과 이에 항의하는 개발도상국들의 다툼 때문이기도 하고, 가장 높은 가스배출국이면서도 자율에 맡기자는 주장을 견지하는 미국 등 몇몇 선진국들의 주장 때문이기도 하다.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중간 정도 위치에서 최근 선진국으로 발돋움 하고 있는 우리 한국으로서는 이러한 환경보전과 녹색성장의 추진에 있어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문제를 모두 지니고 있어서, 관련 정책과 전략들을 수립 및 실행함에 있어서 어려움이 클 수 밖에 없다.하지만 우리는 환경친화적인 개발과 생활을 실천해가고, 녹색기술을 생산원료와 생산과정에 적용해가고, 이러한 기술들을 해외에 수출하고 지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목표들이 장기적인 안목과 계획 속에서 꾸준히 준비되고 실행돼야지, 짧은 기간 내 이뤄지기는 힘들다.포항시는 친환경 에코도시를 지향하면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쾌적한 환경도시`를 비전적인 목표로 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발전목표를 `쾌적한 도시환경 조성으로 시민의 삶의 질 향상`, `자연친화적 도시디자인으로 세계적 환경도시 도약`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위한 추진전략을 다양하게 수립해 놓고 있다.막대한 양의 탄소를 배출하는 지역 선도기업인 `제철소`를 유지하면서 친환경 에코도시를 가꾸어 감이 쉽지 않음은 당연하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급격한 감소목표의 집행은 기반산업의 붕괴를 가져오기 십상이므로 단계적인 감축계획 아래, 원료투입, 공정, 그리고 제품완성에 이르기까지 에너지 절약, 오염배출 최소화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또한 포항시로서 중요한 것은 환경오염 배출 및 쓰레기 저감, 오폐수 정화 차원만이 아닌 도시구조를 바꾸고 관성적인 토지이용과 교통체계를 혁신하는 것이다. 압축도시개념의 도입, 공공교통기관의 증설, 에너지절약과 대체에너지 활용이 가능한 건물과 시설의 건설 등이 그것이다.환경도시전략은 포항인의 삶의 질 제고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이를 통해 도시를 브랜드하고, 포항의 생산물을 홍보하고, 관광객도 유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포항이 글로벌 철강도시 및 첨단과학도시로서 이미 잘 알려져 있기에, 혁신적인 환경도시로서의 이미지가 더해진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을 것 같다.포항의 환경친화적인 이미지며 개발이 자연그대로를 유지보전하는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산업시설들을 환경친화적으로 가꾸어서 경제산업을 부흥시키며 최첨단 환경도시로서의 이미지를 가꾸어나가야 하는 것이냐에 대한 딜레마는 항상 존재한다.예를 들어, 얼마 전 포항시의 복합화력발전소 유치계획이 무산됐는데, `경제산업발전이냐 환경보전이냐` 혹은 `환경친화적인 산업시설 유치냐 자연 그대로의 지역보전이냐` 등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이슈의 대립이 두드러졌으나, 이에 대한 중재 내지 해결방안은 찾지 못했다. 이 모두가 시민들의 공감대에서 결정해야할 사안이라고 보지만, 리더쉽의 비전적인 계획과 실천, 그리고 설득이 더욱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2012-02-28

사막화 방지 노력

▲ 구자문 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우리나라의 평균 강수량은 1,245㎜로 세계평균의 1.4배에 달하는 수준이나, 수자원확보 차원에서 보면 여유롭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계절별 강수량의 편차가 심해 장마기에 바다로 흘러가는 물이 대부분이며, 좁은 국토에 많은 인구가 살고 있어 1인당 가용 수자원량은 세계 하위수준이다. 세계경제포럼은 1970년대 석유파동이 있었다면 이제는 물 파동에 대비해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에 적용되는 말인데, 중진국 대열을 벗어난 우리 한국을 비롯한 선진 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이러한 경고에 무관하게 물 과소비의 생활행태 및 사회체계에 젖어있다.한편, 전 지구적으로 사막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사막화로 인하여 1년에 600만 《의 농경지가 사막으로 변하고 있다. 사막화는 세계적으로 미국 남서부, 멕시코 동부, 북아프리카, 동북아시아 등지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사막화는 지구온난화의 영향도 크지만, 무분별한 방목, 경작, 벌채 등으로 빠르게 확산된다. 이에 따른 식생파괴, 토양침식, 토양의 열악화 등이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는데 그 대표적인 피해가 물부족을 포함한 식량문제이다.중국의 경우 사막화 발생 원인의 85% 이상이 과도한 방목, 개간 및 약초 채취 때문이라고 한다. 모두 생계와 관련된 활동들이다. 아무런 대책 없이 이러한 활동들을 단속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로 인해 사막화는 더 가속화되고 척박해진 토지는 식량이 자랄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한다.또 하나의 대표적인 피해인 황사는 호흡기질환과 안질환을 유발하며, 미세먼지에 유해물질이 있을 경우 건강위해도가 크게 증가한다. 농업, 축산, 산업, 교통부분에서도 다양한 손실을 유발하고, 항공업, 초정밀산업, 유통업, 조선업, 자동차 산업, 레저산업, 유리산업 등에 피해가 발생한다.세계 최대의 사막화 지역은 사하라 사막 주변에서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곳이다. 지금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으며 물과 식량을 찾아 이동하고 있다. 사막화는 반건조 지역 중에서도 마을이나 도로를 중심으로 그 바깥쪽으로 퍼져 가는 경향이 있다.중국은 전 국토의 27.5%가 사막화 지역이다. 건조기후대인 몽골은 전 국토의 40%가 사막화 지역으로 100년 후에는 전 국토의 90%가 사막화 지역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우리 한국에는 사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막화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매년 봄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황사의 발생일수 증가가 그것을 말해준다. 중국과 몽골에 걸쳐진 고비사막과 내몽골지역에서 발생하는 황사는 우리 한국에 미치는 전체 황사의 60% 이상을 차지한다.문제는 일단 사막화가 시작되면 대개가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사막화가 가속화된다는 사실이다. 일단 식생이 상실되면 바람이나 물에 토양이 쉽게 침식당하게 돼, 영양분이나 수분을 공급할 토양이 유실된다. 이와 같은 토양에서는 식물들이 자라지 못하고 사막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만다. 따라서 사막화 방지책은 식생의 회복이 가능한 초기에 빨리 세워야 한다.우리 한국에서도 사막화방지를 위해 몽골 등의 사막지대 조림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상황에 따라서는 식생이 수자원을 고갈시켜 오히려 사막화를 촉진할 수도 있다. 또한 배수로를 제대로 만들지 않고 물을 관개하게 되는 경우 토양이 염분 많은 땅으로 변하여 식생을 해치게 된다고 한다. 사막화방지를 위한 관개사업이며 조림사업에 있어서 좀 더 많은 연구와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우리 포항의 경우, 역사적인 `사방공원`도 있는 만큼, 사막화방지를 위한 식생 및 조림, 지하수개발, 농업개발, 수자원관리대책 등의 노하우를 축적하여 사막화로 위기에 처한 많은 나라들을 도와주고 컨설팅해 줄 수 있는 방안을 구상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2012-02-21

살기 좋은 마을이란?

▲ 구자문 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지난 십 수년 전부터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논의가 큰 주제로 등장했고, 함께 다뤄지고 있는 개념 중 하나가 `생태마을`이다. 생태마을의 개념은 1992년 브라질 리우환경회의 이후 개발과 환경보전을 조화시키기 위한 지속가능한 개발의 한 방안으로 제시됐다고 할 수 있다.생태도시의 유형적인 특색은 첫째, 녹지 및 쾌적한 수계와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는 환경, 둘째, 물, 대기, 폐기물 관련 처리가 환경친화적이고, 무공해에너지를 사용하고, 자원절약 및 재사용이 체계화되고, 셋째, 시민의 편의를 최대한 고려한 건축, 토지이용, 교통계획, 인구계획이 확립된 지속가능한 개발체계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생태마을의 기원은 1960년대 덴마크에서 시작된 코하우징 커뮤니티(Co-housing Community)이다. 이 마을에서는 20~30가구를 중심으로 태양에너지를 활용하고, 유기농업과 공동취사 등을 실천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서구의 다른 나라들도 주택의 재료 및 형태, 대체에너지의 이용, 폐기물의 재활용 등에 걸친 다양한 형태의 생태마을을 도입했다.한편,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이용되던 풍수지리는 살기 좋은 마을과 좋은 묘자리 찾기에 대한 원칙들을 철학적인 논리에 의거 기술해 놓은 것이다. 풍수지리에서는 만물이 기(氣)로 이뤄졌다고 보아 만물 중의 하나인 땅도 지기(地氣)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지기(地氣)에 대해 음양과 오행, 그리고 주역의 논리로 체계화한 것이 풍수지리이다.풍수지리는 인간이 일찍부터 자연 속에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터득된 지혜에 근본을 두고 있다. 특히 농경을 시작한 이후부터 작물의 재배와 성장에 관계되는 땅의 성격과 분포의 차이를 기의 차이로 이해하면서 풍수지리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게 됐다. 여기에 춘추전국시대 이후 기의 변화와 동정을 음양으로 파악하는 음양가의 성장이 인간의 개별 경험적 수준에 머물던 기에 대한 인식을 학문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렸다.풍수지리에서 중요한 것은 땅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은 그 특징을 알아서 적절히 대할 때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반면, 그 개성을 무시하고 죽은 것으로 대한다면 죽은 것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풍수지리는 땅이 살아야 사람도 살 수 있다는 논리이며, 이 양자의 존속을 `조화와 균형`에서 찾고 있다.풍수지리는 땅과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다소 은유적이거나 비유적인 표현을 빌리는 경우가 많고 애니미즘(Animism)적인 요소들을 품고 있기 때문에 현대과학의 서술양식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연과학적 사실, 특히 생태학과 같은 지식체계에 풍수지리의 논리가 잘 부합된다고 생각된다.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말하는 `살기 좋은 마을`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지리측면에서의 산의 모양, 흐르는 물, 흙의 빛깔 등 풍수적인 요소이다. 풍수와 지기(地氣), 안전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생리(生利)측면에서의 경제적 잠재력이다. 살기 좋은 마을의 입지로서는 땅이 비옥해야 하는데, 오곡과 목화를 경작하기 알맞은 곳을 좋은 곳으로 꼽았다. 셋째, 인심(人心)측면에서 공동체성과 풍속을 강조한다. 풍속의 내용이란 사람들이 거칠지 않고, 재리(財利)만 추구하지 않아야 하며, 간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산수(山水)측면에서 환경적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하는 것으로 환경적 아름다움이 없으면 사람들이 거칠어진다는 것이다.결국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제시하는 `살기 좋은 마을`이란 자연 생태적 조건, 경제적 요인, 교통, 풍속과 전통, 인심, 환경적 아름다움이 갖추어진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풍수지리와 택리지의 내용들은 현재 우리사회에서 요구하는 살기 좋은 마을의 요건을 이미 잘 갖추고 있다고 봐진다. 특히 자연생태적인 요건이나 풍속과 전통 등은 환경친화적인 개발, 문화적 정체성과 역사성을 강조하는 현대의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와 많이 닮아있다.

2012-02-14

북방역사의 인식

▲ 구자문 / 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요즈음 텔레비전에서도 세계 각국의 역사나 문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많은데, 그중에서 관심을 끄는 중 하나가 중국 북방에 위치한 수 많은 피라미드에 관한 것이다. 위성사진으로 확인을 해본다면 피라미드의 배열형태가 북두칠성을 닮아있는 경우가 많고, 각 구조물의 크기가 이집트의 피라미드 보다 훨씬 크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정부가 이들의 존재를 숨기거나 파괴하는 경우가 많다는데 그 이유는 설이 다양하다.이러한 피라미드 말고도 중국 땅에는 고대 황제 내지 왕들의 무덤이 무수히 남아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진나라 진시왕의 묘이다. 그 묘의 웅대함은 그 주위에서 발견되는 진흙으로 빚은 실물 크기의 병마들과 함께 이미 세계에 잘 알려져 있다. 이 진시왕의 묘도 이집트 피라미드의 2배 높이에 전체 크기가 4배 정도였다고 한다.이 피라미드를 완성하기 위해서 국가재정을 탕진하게 되고, 수 많은 사람들이 노역에 동원되어 불만이 커져서 강력하던 진나라는 15년만에 멸망의 길을 걷게 됐다. 그후 한동안의 혼란기를 거쳐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게 된다.지난 10년간 우리 한국인을 분노하게 하는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이고 고구려역사 왜곡이다. 만주땅에는 광개토왕비도 있고 거대한 장군총도 있는데, 우리가 고토를 잃어버리고, 더구나 근현대사에 있어서 중국이 공산화되고 우리 한반도도 남과 북이 나뉘어져 이러한 유적들을 제대로 연구하고 보살필 기회조차 없었다.중국의 피라미드들은 중국인들의 유적이라기 보다는 고아시아족 내지 동이족들의 것이라고 한다. 중국인들이 중국땅에 들어오기 이전에 상, 하, 은나라가 세워져 높은 문명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 피라미드들도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인 이들 나라의 것이라고 한다. 그후 중국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이동을 하게 되고 이들에 밀려 은나라가 망하고 유민들이 북방으로 한반도로 이동을 하게 되었을 것으로 봐진다.근래 우리나라의 연속극 중에 고구려, 발해 등을 배경으로 한 것들이 많이 있다. 물론 각색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한국인들의 민족혼을 일으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역사속의 스토리들을 극화한 시나리오작가들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의 역할이라고 본다. 이들이 이러한 잊혀진 우리 한국인의 역사, 즉 과거 우리선조들의 활동무대, 남겨진 유적, 그리고 고구려며 백제의 멸망 후 흩어진 후예들에 대한 연구를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진행했으면 좋겠다.우리 한국은 20세기 후반에 들어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국토는 작아도 한국인의 저력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는 시대이기에 몽골, 바이칼, 실크로드를 거쳐 한민족의 옛자취를 찾아가는 방송프로그램도 있고, `한민족 디아스포라`라고 러시아의 고려인, 멕시코의 애니깽 후손들을 찾아가는 프로그램도 있다. 모두가 가슴 뭉클한 내용들이다.필자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서 두루두루 관심이 많지만, 포항에 오래 거주하면서, 포항지역의 오랜 역사 내지 야사들이 스토리텔링화 되지 못하고, 3·1운동이나 새마을운동 등 근현대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바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또한 포항시의 환동해권 활성화 노력, 블라디보스톡이나 자루비노와의 연계를 통한 TSR 연결, 환동해권에서의 크루즈 및 페리 연결을 통한 관광연계 등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역사찾기와 국내외적인 교통물류 및 관광네트워크의 활성화를 통해서 좀 더 많은 이들이 북방영토에도 가보고, 우리 한국인의 잊혀진 역사를 다시금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2012-02-07

북한 벌목공 이야기

▲ 구자문 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며칠 전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서 한 탈북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분은 40대 중반의 나이로서 모스크바에 무국적자로 지내다가 최근에 다행스럽게도 러시아 정부로부터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아 제3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이었다. 이 분은 북한에서 결혼해 자녀도 낳고 살다가 러시아에 파견된 벌목공으로서, 시베리아의 산림지대에서 어렵게 노역에 종사하다가 10년전 탈출했었다. 그후 러시아에 숨어 살면서 막일도 하고 한국교회의 도움도 받아가며 살아 왔는데, 러시아경찰에 걸리면 있는 돈을 다 뺏기게 되고 북한정보원에게 붙잡히면 북한으로 압송될 것이기에 불안한 하루하루였다고 했다.이 분이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기자들을 시베리아의 벌목지대로 안내해줬는데, 어두움 속에 보여진 그 벌목소에는 북한 그대로의 건물이며 표어들이 즐비했다. 그 안에서 벌목공들은 나무에 치여 죽고 병들어 죽으며 감시 속에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일을 해도 원래 약속한 대로의 임금을 주지 않고, 버는 돈의 80~90%를 뺏어가고 10% 남짓만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고 했다.이 분은 탈출 이후 러시아 여러 도시에 숨어 지내며 밑바닥 생활과 막일을 하면서도 도망치길 잘했다고 토로했다. 버는 돈의 일부를 어떻게 북한으로 보낼 수 있어 식구들이 굶지 않게는 할 수 있었다고 했다.지난번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두만강을 건넌 탈북자들의 중국에서의 그리고 제3국에서의 어려운 여정을 보여줬었다. 이들이 몇 년의 세월 걸려 한국땅으로 오는 죽음을 무릅쓴 여정이 너무나 안타까웠었다.한동안 미국에 거주하면서 알고 지내던 분 중에는 1960년대에 독일에 광부로 갔다가 역시 독일로 파견됐던 간호사와 결혼하여 미국에 사시는 분이 있었다. 이들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그 당시 어려웠던 우리 한국의 살림살이와 함께 그 기사를 읽을 때마다 필자는 눈시울이 뜨겁다. 이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벌어 가족들에게 보내는 돈들이 우리 경제를 살찌게 했고 이들의 성실함을 담보로 많은 경제원조와 협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이 분은 미국에 와서 전기공으로 일했고 부인은 간호사로 일하면서 집도사고 아이들도 다 대학을 가르쳐서 키워냈다. 나이가 들어 신학교를 가고 이제는 목사안수도 받았다.이 분과의 인연은 우리 집의 작은 전기공사 때문이었다. 오래전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했음에도 손에 굳은살이 박힌 전형적인 육체노동 기술자 스타일이 되어 있었는데, 독일에서의 세월과 그후 미국에서의 생활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우리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도 애틋했다.어떻게 보면 북한의 벌목공과 독일에 파견된 광부들의 경우가 비슷해 보이지만, 그들의 처지며 처우가 전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벌목공들도 그 당시 자기들의 처지 보다 좀 나은 보수를 원해 지원했지만, 강제수용소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낮은 임금에 그것도 90%를 빼앗기며 사고로 병으로 죽어갔다.우리 한국인에게 주어지는 지난 수 십년간의 어려움을 꼽아 본다면 남과 북의 분단이고 이로 인한 여파들이라고 생각된다. 북의 핵탄두 개발과 이로 말미암은 국제정세, 신음하는 북한동포들과 탈북자들의 고통 등 우리 민족 누구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본다.우리는 우선 탈북자들을 위한 정책적인 지원이 시행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북한체제가 개방되고 주변 나라들과 우호 속에 발전되어 북한동포들이 굶주림과 탄압을 면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물론 더 나아가서 남북이 통일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우리 한국이 통일된 민족국가로서 세계에서 손꼽는 복지국가며 강대국이 될 수 있도록 다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12-01-31

북한과 탈북자 문제

구자문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1980년대 말 동서독의 통일과 사회주의 국가들의 잇따른 자본주의로의 체제전환 등 변혁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우리 한반도는 평화와 통일을 향해 별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2012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분단이후 태어난 필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과 함께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폐쇄적인 체제를 고수해오고 있는 북한에 대해 큰 안타까움을 지니고 있다. 이러함 가운데 우리 국민들 대다수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북한의 핵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북한의 핵개발에 거듭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우리는 북한이 핵무기와 핵무기운반수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뿐만 아니라, 핵시설의 폭발사고 가능성에도 근심이 없지 않다. 북한의 핵시설이 안정성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가동을 계속한다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우리 국민들의 북한에 관한 또 하나의 큰 염려는 급증하고 있는 탈북자들의 어려움에 관한 것이다. 물론 지난 수 십년간 북한주민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안타까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북한이탈주민들이 많아지고 이들의 어려움이 미디어를 통해 구구절절 전해지고 있어서 우리 국민들의 염려도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올해 들어서만 2천300여명의 탈북자가 제3국 등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89년 이전까지 607명의 탈북자가 국내로 들어온 이후, 매년 숫자가 늘어나 2001년에는 연간 입국자가 1천명대를 넘었다. 그리하여 현재까지 입국한 탈북자 누계는 2만2천617명이라고 한다.대다수의 탈북자들은 국경인 두만강을 넘어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로 탈출하는 방법을 쓴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는 국경경비대들이 지키고 있지만, 안내 브로커 등을 통해 경비병의 눈을 피해 탈출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 잠입에 성공한 사람들은 숨어 있다가 일부는 각국 대사관이나 외국인학교로 도망쳐서 도움을 요청하며 대부분 남한으로 망명한다.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중국에 숨어 지내며 비인간적인 수모를 크게 겪고 있다. 중국을 거쳐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경유해 제3국으로 망명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지만, 현재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숨어서 지내고 있는 탈북자도 수십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북한국경을 탈출한 이후에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중국이 북한정부와의 관계를 중시하여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발견하는 대로 불법입국자로서 북한으로 돌려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돌려보내지면 중노동에 처해지고 때로는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은 탈북자들을 국제법에 따른 위임난민(Mandate Refugee)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탈북자의 난민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체포하여 강제송환하고 있다. 탈북자를 지원하는 단체들은 중국 공안당국의 극심한 감시와 적발 속에서도 탈북자와 접촉하고 대사관이나 외국인학교로 뛰어들게 준비하는 한편, 탈북자 지원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그 모습을 촬영하고 국내외 미디어에 제공하고 있다.외교부는 보호시설 운영비, 국내이송 항공료, 의료지원 등 탈북자들의 지원예산을 집행하고 있지만, 이들 문제해결에 그리 적극적이지는 못하다.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해서 혹은 민감한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 일수도 있다고 본다.요즈음 우리 국민들 사이에 통일에 대한 방법과 시기, 북한동포를 돕는 방법에 대해서, 또한 탈북자 정책에 이견이 있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남북대화의 진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중국 등지에 숨어 지내는 탈북동포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서도 좀 더 획기적인 전략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2011-11-29

구겐하임 뮤지엄과 빌바오 효과

구자문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세계의 많은 도시들이 도심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양한 산업과 비즈니스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문화관광자원의 개발 및 도시브랜드화를 위해 애쓰기도 한다. 이러한 노력의 한 예가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알려진 구겐하임 뮤지엄(Guggenheim Museum Bilbao)이다. 구겐하임 뮤지엄이 있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자치주의 중소도시인 인구 35만의 빌바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화관광도시 중 하나이다. 15세기 이래 제철소, 철광석광산, 조선소가 있던 산업도시 빌바오는 1980년대 철강산업의 쇠퇴로 몰락의 길을 가고 있었다. 실업율이 25%에 달했고 바스크주를 기반으로 무장단체들이 중앙정부를 상대로 독립투쟁을 전개하며 스페인 곳곳에서 테러를 일으켰다.1991년 바스크 정부는 이 절망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문화산업이라고 판단해 구겐하임 뮤지엄을 유치하게 된다. 프랑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한 이 뮤지엄은 2만4천여㎡의 대지에 1억5천만달러(1천500억원)를 들여 지어졌는데, 이곳에 1997년부터 10년간 약 1천만명의 국내·외 관광객이 다녀갔고 16억유로(2조1천억원)를 소모했다. 이 뮤지엄은 `메탈 훌라워(Metal Flower)`로 불린다. 이 건물의 표면에는 물고기 비늘처럼 수 십만개의 비행기 외장재로도 쓰이는 티타늄 판들이 은은한 빛을 내고 있으며, 햇빛을 받으면 카멜레온처럼 색이 변한다. 구겐하임 뮤지엄은 빌바오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있다. 독일계 이민자인 미국의 철강재벌 솔로몬 구겐하임(Solomon R. Guggengheim)은 192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에서 추상화 작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해 1937년 `구겐하임재단`을 설립하고 1959년에 솔로몬 알 구겐하임 뮤지엄을 뉴욕에 세웠다. 이 뮤지엄은 칸딘스키, 몬드리안, 브랑쿠시, 피카소, 칼더, 샤갈, 클레, 미로 등 20세기 거장들의 작품들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한 미술관으로 아름다운 미술관 건축으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구겐하임재단은 이탈리아 베니스의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독일 베를린의 도이치 구겐하임,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뮤지엄 빌바오를 운영 중이며, UAE에 구겐하임 아부다비 뮤지엄을 건설 중이다. 20세기 건축 예술품의 이정표로 평가되는 뉴욕의 솔로몬 알 구겐하임 뮤지엄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에 의해 설계됐는데, 아래보다 상부가 넓은 나선형의 원통형 흰색 콘크리트 건물이 달팽이 모양을 띄고 있다.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은 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딸인 페기 구겐하임이 살던, 18세기에 건립된 왕가의 저택으로 그녀가 평생에 걸쳐 수집한 초현실주의, 입체파,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도이치 구겐하임은 도이치 뱅크의 유치로 1997년에 베를린에서 개관했는데, 전시장은 1920년에 지어진 도이치뱅크 1층에 위치하며 리차드 글럭만(Richard Gluckman)이 디자인을 맡았다. 구겐하임 아부다비는 아부다비의 `미술강국 프로젝트` 아래 이뤄져고, 프랭크 게리가 설계를 맡은 45만㎡에 달하는 건물로서 2012년 완공될 예정이다. 구겐하임 뮤지엄의 개관 이후 빌바오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태어났고, 세계적인 건축물 하나가 도시 전체를 살린다는 `빌바오 효과`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됐다. 현재 한국의 도시들도 이와 같은 빌바오 효과를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스타건축가들의 작품들이 항상 성공적인 빌바오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랭크 게리 조차도 “빌바오의 성공은 뮤지엄 하나 때문이 아니고 공항, 지하철 등 도시 전체 활성화에 대한 매스터플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빌바오 효과가 성공적으로 얻어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계획들을 실현하기 위한 재원은 물론이고 우수한 기획과 지역사회의 폭넓은 지원이 필요하다.포항의 경우에는 동빈운하, 해상신도시 등이 그러한 브랜드 효과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이왕이면 이미 언급되고 있는 철강박물관, 해양박물관 등이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건설되면 좋을 것 같다. 또 다른 의미의 브랜드화를 기대 할 수 있는 `미니어쳐 도시`, 실물 크기의 `노아의 방주` 등도 좋은 예가 될 수 있다고 본다.

2011-11-01

도심개발 아이디어

구자문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미국과 유럽의 경제가 크게 위축되고 있지만 한국경제는 그래도 건실하다는 자위감과 함께 한국인들 무사할 수는 있겠느냐는 걱정들이 함께 존재한다. 요즈음 주택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음이 여러 지표로도 나타나 보이고, 건설업 관련인들의 한숨에서도 그 어려움들이 크게 표출되고 있지만, 어떻게든 지역숙원사업들이 하나 둘 이루어져서 지역의 주택경기를 되살려놓았으면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도 사실이다.주택을 포함한 건설경기는 일반경제와 궤를 같이 하면서도 반박자 쯤 엇갈려 있기 때문에, 가장 경제가 좋은 시점이 건설경기의 정점이 아니며, 건설경기가 가장 좋은 시점이 일반경기의 정점은 아니다. 주택을 포함한 건설산업은 하이테크 산업이 아니라서 업체의 형성 및 진출이 비교적 용이하고, 많은 비숙련노동자들의 고용을 창출한다. 따라서 불황기에는 정부가 부양책으로 SOC건설에 많은 자금을 투여하게 되는 것이다.포항의 경우에도 어려운 경제 활성화의 방편으로 정부자금들이 대폭 SOC에 투여되기를 희망한다. 이는 대규모 교량일 수도 있고, 대규모의 해양박물관 내지 과학체험관일 수도 있고, 도심개발사업의 사업성제고를 위한 인센티브적인 시설 및 SOC 자금 투여일 수도 있다.현재 포항시가 공을 들이는 사업 중 하나가 동빈내항복원이다. 포항시는 이를 통하여 오염된 동빈내항을 정화하고 주변 재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사업들을 통하여 도심재활성화를 이룩하고, 환경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이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포항의 도심재활성화를 위해서 다양한 사업들이 고려될 수 있겠지만, 도쿄의 대표적인 재개발사업으로 불리는 롯본기힐즈를 벤치마킹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복합문화도심으로의 새로운 도시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롯본기힐즈 재개발은, 잘 구상된 도심개발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그 도시를 사랑받게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1986년 재개발 유도지구로 지정되었고, 2000년 공사를 시작으로 2003년 4월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평범하고 보잘 것 없던 도쿄 미나토구의 롯본기 주거지는 일약 세계적인 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문화도심`이라는 기본 컨셉으로 개발된 33,275평에 걸친 대규모의 도심개발사업에 종합기획사인 모리부동산주식회사는 “거주하고, 일하고, 놀고, 쉬고, 공부하고, 창조한다”는 기발하면서도 다양한 복합기능을 제시했다.17년이라는 장대한 기간에 토지비용을 제외한 2,700억엔의 공사비가 투입되면서 새로운 도시모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낡은 단독주택과 보잘 것 없는 건물들을 헐어내고 자유로운 흐름과 다이나믹한 건축공간들이 결합된, 미술관, 박물관, 방송국, 영화관 등이 들어선 10여개의 복합타운과 함께, 주거, 업무, 쇼핑, 놀이 등이 종합된 입체적인 쇼핑·문화·주거지역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롯본기힐즈는 매력적인 이미지를 선보이며 건축도시전문가에서부터 일반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발길을 끌고 있다. 일본의 대기업과 다국적 기업들을 위한 오피스공간, 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문화·쇼핑의 공간으로서 도쿄를 세계적인 도시로 거듭나게 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포항은 중소도시로서 거대도시 도쿄와는 모든 여건이 다르다. 하지만, 복합 주거·쇼핑·문화단지로서의 다이나믹한 입체도시개념은 분명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디어라고 보아진다. 도심해변의 정취, 포스코와 포스텍의 첨단산업 및 RD, 국제무역항, 크루즈 운항, 적극적인 중·일관광객 유치 등을 바탕으로 지자체, 개발업자, 건축 및 도시전문가, 지역기업, 지역주민 모두가 협업을 이룬다면 낡은 도심에 그 규모는 좀 다를 수 있겠지만 롯본기힐즈와 같은 새로움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2011-10-04

울란바타르 이야기 3

구자문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폐수처리 시설에 관해서도 토론했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그러하겠지만, 몽골에서는 더욱 작은 단위의 폐수처리 시설이 필요하다. 한국에서와 같은 1만t, 10만t, 50만t 단위의 용량이 아니라 500t, 1천t 정도의 소용량이 필요하다. 하지만 집과 건물들이 모여 있느냐 흩어져 있느냐가 관건인데, 너무 광역적으로 흩어져 있으면 힘들고, 500가구, 1천가구 집합주택 정도는 되어야 일일용량 20t 정도가 가능하다.몽골에서는 겨울기온이 평균 -20℃이고 -30~40℃까지 내려가 지하 2~3m까지는 얼어 버리는데, 어떻게 폐수처리를 할 것이냐라는 몽골 관리들의 질문에 처음에는 적합한 대답을 찾아내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날 밤 상하수도 전문가인 구사장과 다각도로 고민을 하며 새로운 방안을 고안해냈다. 폐수가 얼면 처리가 불가능하므로, 배출 즉시 단열파이프(Insulated Pipe)를 통해 짧은 거리이면서 얼지 않을 깊이에 위치한 시설에서 즉시 처리하도록 하면 될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했다.몽골의 경제가 2000년 이후 광물 가격의 급등으로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호시절이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돈을 헛되이 쓰지 말고 어떠한 곳에 투여해야 할 것인지 연구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대적인 SOC구축과 주택개발이 필요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시멘트, 벽돌 등 건축자재공장이 필요하다. 현재 대부분의 건축자재를 중국 등 인근국가에서 수입하는데 품질도 낮고 가격도 비싸다.또한 광물연계의 야금과 제조업, 목축관련의 식품가공, 관광산업 인프라구축 등등 가능성을 타진해 봐야 할 것이다. 현재 많은 외국회사들이 광산을 운영하고 있지만, 몽골인 자체의 광산회사 운영도 늘어나야 할 것이고, 이를 제대로 수출하기 위해서는 산지까지 도로망이 개설돼야 할 것이다.내륙국가인 몽골에는 항만이 없어 중국의 철도망과 천진항을 이용하여 물자를 수송하는데, 앞으로는 러시아의 철도망을 이용해 블라디보스톡이나 자루비노항을 이용하는 방안도 연구해야 할 것이다. 물론 현지에서 철강 등을 활용한 제조업을 활성화시키는 방안도 찾아야 할 것이고...몽골은 전통적인 목축국가인데, 기후의 변화로 인해, 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해 목축업을 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몽골정부도 목축업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필자는 몽골이 좀 더 목축업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몽골의 가축들은 방목되는 관계로 광우병 등을 피해가고 있다. 하지만 너무 넓은 지역을 풀을 찾아 헤매어야 하고 긴 겨울동안 굶어죽는 숫자도 만만치 않다. 몽골의 초지에 새로운 품종, 길게 자라는 품종의 풀들을 길러서 이를 말려 저장해 겨울에 사료로 쓸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으로 본다.관광산업은 승마와 트랙킹 정도이며 아직 외국인들의 수요가 크지 않다. 좀 더 사람들을 유인할 수 있는 관광거리 개발이 중요하다고 본다. 호텔 등도 좀 더 정비돼야 할 것이지만, 또한 중요한 것은 몽골과 한국 등 외국과의 항공편 증설이며, 몽골정부는 이에 대한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으로 본다.오후에 꽤 긴 시간을 달려 태를지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나는 여러 차례 와 보는 길이지만 다른 교수와 학생들은 멀리 펼쳐진 초원에 탄성을 지른다. 2/3 쯤을 지나갔을 때, 이게 웬일인가. `나담축제`가 거의 끝나간다는데, 이날이 가장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승마대회가 있었다. 초원 한 가운데 텐트가 쳐지고 많은 사람, 자동차, 그리고 말들이 모여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가 계획했던 말타기가 좀 어려워 졌지만, 그 흙먼지 날리는 경주를 지켜볼 수 있었다. 물론 경주가 끝난 후 말 10필을 빌려 일부 팀원들이 30분 정도 말을 탈 수 있었지만 말이다.하루가 바삐 흘러갔다. 울란바타르의 거리는 예전과 다름이 없다. 많은 차와 먼지, 그 가운데 새로운 건물들이 세워지고 있다. 여름이라서 나무와 풀이 도심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모든 것이 얼어붙을 것이다. 땅은 넓지만 기후가 열악하고 인구도 300만에 불과한 이 나라가 이러한 대규모 도시를 지닐 수 있음은 분명 천연자원 덕택이기는 할 것이다. 이러한 자산을 낭비하지 말고 잘 활용하여 국가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끝

2011-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