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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DJ, 마지막까지 맺은 국회 인연

국회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있어 정치적 삶의 터전이었다.지난 61년 5대 민의원에 당선된 이후 6선(5,6,7,8,13,14대) 의원을 지낸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라는 일생의 과업을 국회의 장(場)을 통해 달성하고자 한 철저한 의회주의자였다. 4수 끝에 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 전 대통령은 98년 2월 국회 앞마당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함으로써 수평적 정권교체의 첫발을 내딛는 동시에 의회 민주주의 완성시대를 열었다. 특히 사후(死後)로 가는 마지막 길을 국회로 택함으로써 의회주의 신봉자로서의 삶을 마감한다. 지난해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때 국회를 찾았던 김 전 대통령은 20일 1년반만에 다시 국회를 찾게 됐다.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국회는 민주주의의 상징이고 미래의 전당”이라며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위해 많은 공적을 남겼다”며 국회를 빈소 및 영결식 장소로 선택한 배경을 설명했다.■철저한 의회주의자61년 치러진 5대 민의원 보선에서 생애 첫 금배지를 달았다. 3수 끝의 국회 입성이었지만, 당선 사흘뒤 5.16 쿠데타로 의원선서도 하지 못했다.김 전 대통령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6대 의원 때부터다. 정치적 본산인 목포에서 당선된 김 전 대통령은 6대 국회 초반 6개월간 13차례나 본회의 발언을 함으로써 `달변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특히 64년 당시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시 본회의장에서 5시간19분 동안 물한모금 마시지 않고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한 것은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유명한 일화다.이후 갖가지 정치적 변곡점에서 김 전 대통령은 국회를 통한 해결에 우선순위를 뒀다. 오랜 야당 지도자로서 숱한 장외투쟁을 해왔지만, `원내외 병행투쟁`이 소신이었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신군부의 집권 계기가 된 12.12 사태에 대한 투쟁 노선을 놓고 야권내 이견이 격화됐던 94년 당시 민주당 이기택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등원을 촉구, 정면충돌한 것은 지금도 정치권에서 회자된다.김 전 대통령은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민주당이 장외투쟁을 이끌었을 때도 국회 복귀를 훈수했었다.■정치권, DJ에 대한 추억한국 현대사의 거목(巨木)이었던 만큼 여야 구분없이 현역 정치인과 김 전 대통령의 접촉면은 넓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회고가 이어지고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특히 현재 여야의 중진이자 핵심이 된 정치인들은 김 전 대통령과 자신만이 간직하는 추억이 하나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야권 인사들은 한결같이 김 전 대통령을 `어버이와 같은 분`(정세균 대표), `정치적 사부`(정동영 의원), `정치적 아버지`(이강래 의원) 등의 표현으로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고 있다.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워온 현 여권 인사들도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회상에 젖어있다.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한나라당 이재오 전 최고위원은 “두번째 감옥에 갔을 때 고문을 많이 당했는데, 석방 후 동교동에 인사를 하러 갔더니 (김 전 대통령이) 웅담을 하나 주며 `고문에는 웅담이 좋으니 자기 전에 먹고 자라`고 했다”며 “저녁마다 웅담을 먹은 덕분에 빨리 회복됐다”고 회고했다./연합뉴스

2009-08-21

DJ묘 현충원 유공자 묘역 하단 조성

국립서울현충원은 20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을 현 국가유공자 묘역 하단에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서울현충원 정진태 원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김 전 대통령의 유가족과 행정안전부와 협의한 결과 서울현충원의 국가유공자묘역 하단부에 김 전 대통령의 묘역을 조성키로 했다”고 밝혔다.묘역 위치는 국가유공자 제1묘역 하단으로, 인근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중종의 후비인 창빈안씨의 묘소가 있다.정 원장은 “유가족이 묘역을 최대한 소박하고 검소하고 친환경적으로 조성해 달라고 요청했다”면서 “묘역은 국립묘지설치법에 따라 봉분과 비석, 상석, 추모비 등을 합해 80여평(16mⅹ16.5m) 규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그는 “오늘부터 묘소 정비작업에 착수하고 21일에는 묘소의 틀을 갖추는 `활개치기` 작업이 진행될 것”이라며 “22일에는 봉분 조성과 진입로 개설, 임시재단 등을 설치하고 23일까지 조경작업을 모두 끝낼 것”이라고 밝혔다.현충원 관계자는 “묏자리는 지관(地官)과 김 전 대통령의 장조카가 정한 것으로 안다”면서 “장소가 굉장히 협소하지만 유족들의 뜻에 따라 결정됐다”고 전했다.김 전 대통령의 묘역은 추후 유족이 원할 경우 부인 합장도 가능하다.서울현충원에 조성된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은 주차장과 진입로 등을 모두 합쳐 각각 500평, 1천100평이다. 김 전 대통령 묘역에는 주차장은 들어서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현충원 관계자는 전직 대통령의 서울현충원 추가 안장 가능성에 대해 “현충원이 답변할 사항이 아니다”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나타냈다.정부는 서울현충원에 국가원수 묘를 쓸 공간이 부족하자 2004년 6월 대전현충원에 전직 국가원수 서거에 대비해 8위의 안장이 가능한 9천653㎡ 규모의 국가원수 묘역을 조성했다./연합뉴스

2009-08-21

홈피서 공개된 DJ 마지막 친필 연설문

“북한은 핵포기·미국은 국제사회 일원으로 수용해야”“오바마에 “대북 적대관계 종식 용기있는 결단” 당부”김대중평화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최근 공개된 이 연설문에서 김 전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출현으로 미국의 일방주의 시대가 종식되고 대화와 협력의 시대가 시작됐지만, 한반도 문제만은 예외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김 전 대통령은 “오바마 정권은 (이란과 시리아 등 그간 적대관계였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 언급하지 않고 차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태도에 실망하고 위협을 느낀 북한은 극단적 반발 자세로 나오고 있다”라고 분석했다.그는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문제를 둘러싼 북한 내부 상황이 사태를 더욱 촉진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북한이 지금 절박한 입장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해 안심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든지 아니면 사생결단의 자세로 생존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은 북한이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북한은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통해 핵을 포기했지만 부시 정부가 당시 합의된 약속을 잇따라 파기하면서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와 IAEA(국제원자력기구) 감시요원 추방, 핵실험 강행 등 상황이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는 “모두가 알다시피 북한 핵 문제는 전쟁으로 해결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북한에 대한 경제봉쇄도 중국이 협력하지 않는 한 성공의 가능성은 없다. (결국) 대화와 협상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강조했다.김 전 대통령은 “오늘의 북핵문제 해결방안은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길뿐이며 이 외에 대안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제안했다.그는 “북한의 근본적 목표는 국가안보와 체제보장, 북미 국교 정상화와 경제협력을 통한 국제사회의 진출이며 한국과 미국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한으로 하여금 핵과 장거리 미사일을 포기시켜 태평양 국가들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했다.즉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조건은 안전보장, 핵과 미사일 문제의 해결이며 이는 이미 2005년 9월19일 6자회담의 공동성명으로 합의된 바 있다”면서 “다시 9.19 선언으로 돌아가 동북아시아에 평화와 안전, 협력의 시대를 열어가자”라고 호소했다.김 전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종식하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그는 “`비핵화를 통한 점진적 관계개선`이라는 장기간이 소요되는 단계별 접근방식을 지속하기에는 상황이 달라졌고, 사태가 급박하다.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통한 비핵화`란 근본적이고도 포괄적인 접근방법으로 전환할 때가 됐다”라고 역설했다.김 전 대통령의 측근인 최경환 비서관은 이 연설문에 대해 “아마 대통령께서 직접 원고를 작성하시고도 연설을 못하신 마지막 연설문이 아닌가 싶다. 원고를 작성하시면 항상 연설하셨는데 그런 경험이 없다. 매우 귀중한 원고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연합뉴스

2009-08-21

장항리사지

언덕 위 절터에 5층 석탑 두 기·불상대좌만 남아 있어 사자상으로 표현된 `신수상` 신라석조예술 극치 보여줘 경주 불국사에서 시작되는 토함산 순환도로를 따라 석굴암에서 감포방향으로 가다 보면 계곡 건너편 언덕 위에 5층 석탑이 보인다. 지나면서 보면 탑신부만 보이는데 이 탑이 바로 국보 제236호인 월성 장항리 사지 서(西) 오층석탑이다. 도로 옆에 조성한 주차장 아래로 향한 돌계단과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 5층 석탑이 있는 장항리 절터로 올라가는 길을 만들었지만, 낙석이 계속 발생하여 지금은 비탈면 보수공사 중이다. 주차장에서 감포 방향으로 50여 m 정도 더 내려가면 임시주차장이 있는데 이곳에 주차하고 올라가면 된다. 장항리 절터는 토함산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두 계곡과 만나는 곳에 있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대종천을 따라 흘러 감은사지를 지나 대왕암 근처에서 동해와 만나게 된다. 사찰의 이름을 알 수가 없어 마을 이름을 따서 장항리 절터라고 부르고 있는데, 원래 장항사가 있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장항리로 불리게 되었는지도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다. 절터는 계곡의 비교적 높은 언덕 위에 있고, 현재 5층 석탑 두 기와 불상대좌가 남아있다. 석탑에서 약 10m 정도 떨어진 불상대좌의 주변으로 금당터를 확인할 수 있는 초석이 있다. 금당의 기단 규모는 동서 15.8m, 남북 12.7m이며, 초석으로 미루어보아 정면과 측면이 각각 세 칸으로 된 그다지 크지 않은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당 터 가운데 놓여 있는 불상대좌의 크기는 하대석 높이 0.6m, 최대 폭이 2.4m이며, 상대석은 높이 0.53m, 지름 1.84m의 각기 다른 돌로 만들어졌다. 8각으로 된 하대석의 안상속에 신장(神將)과 신수(神獸)상을 번갈아 가며 높은 부조로 새겼다. 특히 사자상으로 표현된 신수상은 포효하는 듯한 생동감과 익살스러움이 넘쳐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데 신라 석조예술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둥근 상대석에는 연화문을 새겼으며, 그 가운데에 불상을 안치했던 깊고 큰 홈이 남아 있다. 불상대좌 위에 있던 석조 불상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어 있었는데, 1932년 서탑을 복원할 때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으며, 연재 북쪽 정원에 전시되어 복원과정을 거치고 있다. 언뜻 보면 좌상처럼 보이나 광배 일부와 무릎 이하가 결실되었다. 머리와 얼굴 모습 그리고 광배에 새겨져 있는 화불 등의 조각 수법을 볼 때 8세기경에 만들어진 여래입상으로 판단되며, 현존 높이 3m이나 실제로는 4m 이상 되는 장육상의 불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당 역시 이 불상의 안치를 위해 중층구조를 가진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인 장항사의 모습은 쌍탑을 배치한 통일신라시대의 가람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나머지 절터가 유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돼 강당이나 회랑의 존재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금당터 남쪽 약 15m 거리에 있는 서탑은 1925년 도굴범이 탑 속에 있는 사리장치를 절취하기 위해 폭파하면서 파괴되어 있던 것을 1932년에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복원된 서탑은 높이 약 10m로 노반(盤)까지 남아있다. 하층기단은 비교적 넓고 높으며, 초층 탑신의 4면에 도깨비문양의 문고리가 장식된 두 짝의 문이 모각되어 있다. 그 좌우에는 연화대좌 위에 서있는 고부조의 인왕상(仁王像)을 조각하였다. 인왕상은 금강역사라고도 하는데 문을 지키는 신장(神將)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4면에 새겨진 8개의 인왕상은 얼굴표정과 울룩불룩한 근육, 나풀거리듯 새겨진 옷과 여러 가지 장식이 아주 섬세하게 새겨진 수작으로 무서운 인상을 주기보다는 심술궂은 장난꾸러기와 같이 친근함이 느껴진다. 동탑은 계곡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66년 2월에 인양하여 현재 위치에 놓게 되었는데 남아있는 부재로 보아 서탑과 같은 규모이나 인왕상의 조각기법이 서탑에 비해 조잡해 보이고, 서탑과 달리 인왕상 아래에 연화대좌도 없어 다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립 경주박물관장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정양모 씨는 장항리 절터의 서편 5층 석탑을 본 감흥을 `뭉클한 아름다움과 위대한 소박성`으로 표현했다. 예전과 달리 도로가 잘 조성되어 있는 지금은 언제든지 이곳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보문단지에서 덕동댐을 지나는 도로를 따라와도 좋고, 앞서 말한 토함산 순환도로를 이용해도 된다. 어느 문화유산이든지 걸작으로 회자하는 곳에는 `가슴 뭉클한 아름다움`이 전해진다. 이번 주말 아이들 손을 잡고 이곳을 찾아 다이너마이트를 동원한 도굴꾼의 무자비한 파괴에도 살아남은 5층 석탑이 자연과 어우러진 `뭉클한 아름다움`과 석탑의 인왕상과 불상대좌의 사자상이 전하는 익살스러운 `위대한 소박성`을 느껴봄이 어떨까?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09-08-21

`국가대표`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전달하는 영화들은 많다. 하지만 그러한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얼마나 높은 점수를 받는가 하는 것은, 웃음 속에서 감동을 어떠한 방식으로, 얼마나 자연스럽게 녹아냈는가 하는 것과 같다.일련의 한국영화들을 살펴보면 앞에서 말한 공식에 스포츠라는 요소가 얼마나 제격인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그리고 `미녀는 괴로워`로 흥행기록을 새롭게 갈아 치웠던 김용화 감독의 신작 `국가대표`는 다시금 그 성공적인 결과물을 내놓았다. 더불어 휴먼드라마와 스포츠의 결합이 내뿜는 완벽한 시너지 효과를 다시 한 번 증명해 주는 영화다.조로증에 걸린 이복동생과 형의 이야기를 그린 `오! 브라더스`, 성형미인이 된 비만녀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미녀는 괴로워`에 이어 국가대표 스키점프 선수들의 사연을 담은 신작 `국가대표`는 김용화 감독의 세 번째 영화다.1996년 전라북도 무주,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정식 종목 중 하나인 스키점프 국가대표팀이 급조된다. 이에 전(前) 어린이 스키교실 강사 방종삼(성동일 분)이 국가대표 코치로 임명되고, 그의 온갖 감언이설에 정예(?) 멤버들이 모인다.전(前) 주니어 알파인 스키 미국 국가대표였다가 친엄마를 찾아 한국에 온 입양인 밥(하정우 분), 여자 없으면 하루도 못 버틸 나이트 클럽 웨이터 흥철(김동욱 분), 밤낮으로 숯불만 피우며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살아온 고깃집 아들 재복(최재환 분), 할머니와 동생을 돌봐야 하는 짐이 버거운 말 없는 소년 가장 칠구(김지석 분), 그런 형을 끔찍이 사랑하는 4차원 동생 봉구(이재응 분)까지! 방 코치는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엄마와 같이 살 집이 필요한 밥에게는 아파트를, 사랑 때문에 또는 부양 가족 때문에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흥철, 칠구-봉구 형제, 그리고 재복에게는 군 면제를 약속한다.단, 금메달 따면 스키점프가 뭔지도 모르지만 한때 스키 좀 타봤다는 이유로 뽑힌 이들이 모이면서 대한민국 최초 스키점프 국가대표팀이 결성된다.그러나 스키점프(Ski Jump)의 스펠링도 모르는 코치와 경험 전무한 국가대표 선수들의 훈련은 험난 하기만하다.변변한 연습장도 없이 점프대 공사장을 전전해야 했고 제대로 된 보호장구나 점프복도 없이 오토바이 헬멧, 공사장 안전모 등만을 쓰고 맨몸으로 훈련에 임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복이네 고깃집 앞 마당에서의 지상 훈련을 시작으로 나무 꼭대기에 줄로 매다는 공중 곡예(?), 시속 90km의 승합차 위에 스키 점프 자세로 고정되어 달리는 위험천만한 질주, 폐(閉)놀이공원 후룸 라이드를 점프대로 개조해 목숨 걸고 뛰어내리기 등 나름 과학적(?) 훈련으로 무장하는 선수들.이런 식의 무대뽀 트레이닝에도 이들은 점점 선수다운 모습을 갖춰 가고, 스키 하나에 의지해 하늘을 날아가는 순간이 행복해진다. 매번 독특한 소재의 이야기로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전달했던 김용화 감독은 이번에도 역시 자신의 색깔이 그대로 묻어 난 이야기를 보여준다.대중들에게는 비인기 혹은 무관심 종목인 스포츠들이 한국영화들에서 만큼은 최고의 인기소재로 거듭나는 게 요즘 대세라지만 스키점프라는 스포츠는 유독 시선을 끈다.이번 영화를 통해 감독은 가족 관계의 회복을 통해 개인이 치유 받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고 하는데, 각자 영화관에서 확인해 보자.

2009-08-21

최윤희 한국자유총연맹 중앙여성회장

“다양한 분야의 여성 네트워크 활성화”각계각층서 활동하는 젊고 역동적 여성으로 구성튼튼해진 조직력 바탕으로 21세기형 운동 펼칠것“21세기 성숙한 시민단체로 재도약하는 21세기형 한국장유총연맹운동을 펼치겠습니다.”최윤희 경북도의원이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많고 힘이 강한지 전국은 물론 세계를 누비며 증명이라도 하듯 분주하다. 최 도의원은 어린시절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후 청소년 시절을 미국에서 생활해 왔다. 이어 2006년 경북도의원에서 2008년 (사)전문직여성(BPW)한국연맹 회장에 이어 한국자유총연맹 중앙여성회장으로 선임되는 등 여성으로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한국자유총연맹 중앙여성회장의 역할과 앞으로 운영 방향 등을 들어봤다.-한국자유총연맹은 어떤 단체인가.▲한국자유총연맹은 55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 대표 국민운동 단체입니다.1954년 국민이념운동으로 창립된 이후 그간 우리사회 환경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선배들의 투철한 국가관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우리나라가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앞으로 연맹은 튼튼해진 조직력을 바탕으로 더 투철한 국가관으로 급변하는 시대에 발맞춰 성숙한 시민단체로 재도약하기 위해 21세기형 한국자유총연맹 운동을 펼칠 것입니다.-한국자유총연맹 중앙여성회의 역할은.▲중앙여성회는 경제, 사회, 문화, 정치, 교육 등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고 역동적인 여성으로 구성해 새로운 차원의 여성활동을 펼칩니다.따라서 여성회의 목표는 많은 여성들이 사회 곳곳에서 관심을 갖고 적극 참여하는 것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성들과의 네트워크를 활성화해 정보교류는 물론 끊임없는 교육을 통한 자기개발을 하고 나아가 연맹 산하 각 시도여성협의회와 함께 따뜻한 자유주의와 성숙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각종 봉사활동을 펼치겠습니다.-중앙여성회원은 물론 각 시·도여성협의회 회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됐다면 2009년은 편견과 장벽을 허물고 우리 모두가 화합하며 협력하고 서로 배려는 물론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는 새마음운동을 할 때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여성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가정, 직장, 사회에서 우리 여성들이 긍적적인 사고로 서로 협력하고 나누는 새마음운동을 실천하면 우리사회 환경이 자연스럽게 `그린 코리아`는 물론 모두가 행복한 나라, 살기좋은 대한민국이 될수 있습니다./서인교기자 igseo@kbmaeil.com

2009-08-21

“DJ는 큰 역사의 흐름속에 기억”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19일 기자 시절 피랍 후 귀환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인터뷰했던 일화를 전하며 “큰 역사의 흐름속에 기억될 인물”이라고 회고했다.최 위원장은 이날 방통위 전체회의에 앞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추도하는 묵념 시간을 가진 뒤 “김 전 대통령의 85년 인생은 어찌보면 우리 현대사의 큰 고비이자 큰 획이었다”며 개인적인 소회를 털어놓았다.그는 “김 전 대통령이 갈등하고 타협하고 도전하고 성취하는 모습을 지켜본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며 “언론인과 여론조사인으로 활동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만나서 조언을 듣는 등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고 전했다.그러면서 동아일보 기자 시절이었던 1973년 일본에서 납치됐다 생환했던 김 전 대통령을 동교동 자택에서 인터뷰했던 일화를 꺼냈다.그는 “당시 유신체제여서 동교동 자택에 연금된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외부인 접촉이 금지됐는데 억지로 찾아들어가 지하 집필실에서 4~5시간 만나 진솔한 얘기를 나눴다”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당시 김 전 대통령은 도쿄에서 납치돼 배에 실리는 과정, 수장될 뻔하다 살아 돌아온 과정, 서울로 돌아와 `팽개치듯` 버려진 과정 등을 `최 기자`에게 전했다.최 위원장은 “인간의 운명과 인권, 생명에 대한 자연인 김대중의 진솔하고 생생한 얘기였다”면서 “당시 상당히 긴 기사를 작성했으나 유신체제여서 보도를 할 수 없었고 그 기록도 사라지고 말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최 위원장은 올 1월에 세배를 가서 김 전 대통령을 만난 것이 가장 최근에 만난 일이었다고 전했다.그는 “정치적 견해를 같이할 수도, 달리할 수도 있지만 지난 80여년 인생을 그렇게 진지하고 쓰러지지 않고 성취한 사람으로서 역사에 크게 기록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연합뉴스

2009-08-20

DJ와 영욕 함께한 세아들

야당 지도자의 아들로 지근 거리서 보필대통령의 아들 격상 후 비리로 비운겪어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세 아들 홍일, 홍업, 홍걸씨는 부자지간이면서 정치적으로는 동지로서 고난과 영광을 함께 했다.세 아들은 아버지의 구속과 연금 등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어려워진 집안을 이끌었고 `DJ의 아들`이란 이유로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을 때도 지근 거리에서 아버지를 도와 훗날 대통령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김 전 대통령은 이런 아들들에게 미안함과 함께 애틋한 부정(父情)을 보였다.사형수로 수감됐던 1980년 12월 세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너에게 준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할 때 아버지는 언제나 너에게 본의 아닌 일을 한 것 같아 죄책감을 느껴왔다”고 토로하기도 했다.장남 홍일(61)씨는 아버지의 정치적인 굴곡을 그대로 뒤따랐다. 아버지가 대선에 출마, 박정희 전 대통령에 맞섰던 1971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고초를 겪었고 1980년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그는 1980년 결성된 30만명 회원 규모의 청년조직인 민주연합청년동지회(민청)를 실질적으로 이끌면서 국민의 정부 탄생을 외곽에서 도왔다.하지만 50대 중반 들어 내란음모사건 때 고문을 당한 후유증이 악화되면서 사실상 정치활동을 접고 투병생활을 해왔다.차남 홍업(59)씨도 형과 함께 정치권 주변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김 전 대통령 망명 시절엔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설립했고 광고이벤트 회사 `밝은 세상`을 운영하면서 선거 홍보 책임을 맡아 아버지의 당선에 공을 세웠다.그 역시 내란음모사건으로 형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이희호 여사가 낳은 3남 홍걸(46)씨는 일찍이 미국에 머물며 `민주투사`였던 두 형과는 다른 삶을 살았지만 고교생 때인 1980년 아버지의 구속과 사형언도를 지켜봐야 하는 등 어릴 적부터 마음고생이 심했다.꿈만 같았던 아버지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세 아들은 탄압받는 야당 지도자의 아들에서 `대통령의 아들`로 신분이 격상됐지만 이번에는 주위에서 가만두지 않았다.권노갑 전 의원의 양보로 15대 때 목포·무안갑에서 금배지를 단 홍일씨는 재선의원 때인 2003년 `나라종금 로비` 수사 과정에서 돈을 수수한 혐의가 드러나 불구속 기소됐다.또 홍업과 홍걸씨는 2002년 `이용호·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돼 아버지의 재임기간 구속되는 비운을 겪었다. 당시 야당과 언론에서는 세 사람을 `홍삼트리오`라고 불렀고, 이런 낙인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채 이들의 진로에 족쇄가 되고 있다.홍업씨는 17대 무안·신안 재보선에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으나 18대 때 비리 전과로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뒤 낙선했다. 정치권 안팎에 있는 두 형과 달리 홍걸씨는 중국에 머물며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삶을 모색하고 있다는 후문이다./연합뉴스

2009-08-20

DJ 법정 족적… 사법부 과거청산 물꼬 터

민주화 운동의 최일선에 섰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질곡 많은 사법부 역사에도 깊은 족적을 남겼다.“법에 의해 신군부를 단죄하고 저의 무죄를 밝혀줘서 국민과 역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2004년 1월29일 오후 2시 서울고법 303호 법정에서 열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김 전 대통령은 서초동 법원 청사를 나서면서 소회를 이같이 밝혔다.당시 재심 재판장은 최근 `촛불재판` 개입 논란을 빚은 신영철 대법관이었다.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사건을 맡은 신 판사는 김 전 대통령에게 지워진 내란음모와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맞서며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려 한 정당행위였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국가보안법 위반과 반공법 위반,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면소 판결했다.몇 달 뒤엔 김 전 대통령이 1980년 5월18일부터 949일 동안 불법 구금당한 데 대해 국가가 구금일수 하루당 10만원씩 총 9천490만원을 보상하라고 판결했다.1980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가 5.18 광주민주화 항쟁을 내란음모로 규정하고, 배후로 지목된 김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고은 시인 등 26명을 연행하면서 시작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암울했던 1970~80년대 사법부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사건 중 하나다.당시 군법회의는 1심에서 김 전 대통령에게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했고, 항소심에도 사형을 유지했으며, 대법원은 상고심에서 사형을 확정했다.김 전 대통령은 이후 미국 백악관과 교황청 등 각국 각계의 구명 운동에 힘입어 1981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20여년간 조작 의혹 속에서도 미제로 남아있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1999년 연루자들이 낸 재심청구가 법원에 받아들여진 뒤 무죄 선고를 받으면서 빛을 보게 됐다.이는 이후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간첩 누명을 썼던 `함주명씨 사건`, 교사·공무원 등 무고한 시민을 반국가단체 구성원으로 몰아 중형을 선고한 `아람회 사건` 등 비극적인 시국·공안 사건들에 대한 재심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김 전 대통령은 이 같은 암흑기 사법부의 피해자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으며, 이후 재심 등을 통해 사법부가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는데 나름대로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연합뉴스

2009-08-20

“아~ 나로호” 발사 중지에 항우연 `침울`

“7년간 준비해 온 나로호가 이렇게 허무하게 발사중지되다니….” 19일 발사 7분56초를 앞두고 한국의 첫 우주발사체인 `나로호(KSLV-I)`의 발사가 전격 중지되면서 발사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대강당에 모여 있던 300여명의 연구원들은 안타까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발사예정 시간 30여분을 앞두고 대형스크린이 설치된 300석의 강당을 모두 채우며 나로호 발사에 대해 강한 자부심과 기대감을 보였던 참석자들에게 발사중지 소식이 전해지자 강당안은 순식간에 탄식과 좌절 섞인 목소리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추진체 연료를 곧 배출`하고 발사체 기립설비를 재기립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일부 연구원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래도 혹시나 발사작업이 재개되지 않을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연구원들도 예정시간인 오후 5시가 지나고, 발사가 어려울 것 같다는 소식에 침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일부 연구원들은 착잡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삼삼오오 건물 밖에 모여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한 연구원은 “동료 연구원들이 갖은 노력끝에 만들어 낸 발사체가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꼭 보고 싶었다”면서도 “발사실패가 아닌 발사중지인 만큼 꼼꼼히 원인을 해결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전국 곳곳의 발사중계 현장에서 나로호의 발사 모습을 지켜보던 시민들도 갑작스런 발사중지 소식에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전남 고흥군 남열해수욕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10만여명의 관람객이 모였으나, 발사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대형 스크린을 통해 발사중지라는 뜻밖의 소식이 전해지자 탄식을 내뱉으며 아쉬워했다. 관람객들은 오전 일찍부터 나와 한국 첫 우주발사체의 성공적인 발사를 기원하며 함성을 지르는 등 기대감을 드러냈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송림 그늘에서 나와 우주센터를 향해 이목을 집중시켰던 10만명의 시민들은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려는 듯 물밀듯이 해수욕장으로 나갔다. 경기도 과천 국립과천과학관 앞마당에 설치된 대형전광판을 통해 카운트다운을 지켜보던 600여명의 관람객들과 대전 한밭야구장에서 현장 중계를 지켜보던 시민들도 발사중지 소식에 실망하며 서둘러 자리를 뜨는 모습이었다. 나로호에 탑재된 과학기술위성 2호와 교신을 맡은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연구원들도 모니터를 통해 나로호의 발사 모습을 지켜보며 성공을 기원했으나, 안타깝게도 발사가 중지되자 허탈해하는 모습이다. /연합뉴스

2009-08-20

나호로, 발사 직전 카운트다운 중지

한국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가 개발 7년만인 19일 발사될 예정이었지만 발사 직전 가동되는 자동시퀀스의 기술적 문제로 발사가 연기되는 상황을 맞았다. 나로호는 2002년 8월 개발 사업이 시작된 이래 6차례의 연기를 겪은 경험이 있어 이번 발사 연기는 더욱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우주로켓의 발사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채연석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연구위원은 “우주개발 기술은 기계공학, 화학공학 등 모든 과학기술의 총합”이라며 “이 기술의 어느 한 부분만 잘못돼도 처참한 실패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도 지적하고 있지만, 로켓 발사성공이 쉽지 않은 것은 먼저 복잡한 우주발사체 구조를 들 수 있다. 추진시스템(Propulsion)과 로켓 구조, 항공전자시스템, 분리시스템, 전기장비 시스템 등 로켓을 구성하는 많은 부분 중 하나만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로켓 발사의 실패는 물론 심각한 물적·인적 피해까지 불러올 수 있다. 항우연이 1957~2003년 사이에 발생한 우주발사체 비행실패의 원인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발사체의 추진시스템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행실패 원인 가운데 추진시스템 관련은 66.2%로 가장 높은 비율을 기록한 것. 추진시스템이란 가장 중요한 액체엔진 및 고체 모터를 비롯해 추력기, 동력장치(TVC), 연소실, 노즐 및 노즐밸브, 연료 및 산화제, 터보펌프, 점화 장치, 연소실 내부의 단열장치 등을 말한다. 우리 나로호와 같이 `처녀비행`을 대상으로 한 통계에서도 추진시스템 문제로 발사가 실패한 비율은 56%로 가장 높았다. 두번째로 중요한 실패 원인으로는 나로호 등과 같은 2단형 이상 발사체에서 1, 2단 및 페어링 분리 메커니즘에 문제가 있거나, 분리를 위한 전기적 연결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꼽히고 있다고 항우연은 분석한다. 분리 기술 문제는 전체 비행실패 건수의 12.6%를 차지한다. 세번째로 높은 비행실패 원인은 항공전자공학(Avionics) 기계장치 문제로 전체 원인의 10.6%를 차지했다. 여기에는 발사체 탑재 소프트웨어와 컴퓨터를 비롯해 회로 보드, 비행안전 관련 장치, 비행 및 유도 제어 장치, 내부 측정 장치, 텔레메트리 장치, 비행장치 등이 있다. 이밖에 △고체로켓모터 내부 구조, 모터 케이스, 점화기 하우징(housing), 각종 탱크, 단 연결구조, 페어링, 발사체 외피 등과 관계된 구조부문(4.5%) △전기연결 및 배선, 전력공급장치, 전력 릴레이 박스, 솔레노이드 등 전기장비(4.0%) △번개 등 기상환경, 통신의 문제 등과 관계된 기타 요소(2.0%)가 있다. 전문가들은 “로켓 발사 카운트다운 10초를 남겨두고도 문제가 감지되면 발사를 중지시킬 정도로 항공우주산업에서는 작은 결함이 천문학적 비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로켓 발사에는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연합뉴스

2009-08-20

김천에 개소한 `세계기후변화종합상황실` 박세훈 실장

“세계적인 기후변화 최신 정보 실시간 파악 가능”기업·연구소 합작 `신재생에너지연구소` 등 설립 김천, 세계에너지기술 종합정보센터로 성장 기대 세계의 기후 변화와 관련한 최신정보와 신재생 에너지와 관련된 신기술 정보를 총괄해 종합적으로 관리 운영할 `세계기후변화 종합 상황실(Global Climate Change Situation Room)`이 19일 김천시 덕곡동 제이엠(JM) 빌딩에 개소됐다.유엔협회 세계연맹의 미래싱크탱크이자 세계 갈등과 문제 해결 방안을 연구 목적으로 하는 유엔미래포럼의 사무총장이면서 세계기후변화종합상황실 책임자인 박세훈 실장을 만나 종합상황실 운영 등에 대해 들어봤다.-세계기후변화종합상황실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세계기후상황실에는 지구촌의 기후 변화를 다스리기 위한 GENIS(Global Energy Network Information System)를 구축한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집단지성 에너지 포털로 세계적인 기후 변화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데 최신· 최고급·신기술 정보가 모이게 된다.-이 자료는 어떻게 활용되나.▲이 자료는 김천시와 경북도에 제공하기 때문에 사업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최신형으로 개발되거나 아이디어로 나오는 값싼 에너지기술을 점검하고, 그 기술을 제3국으로 확산시키게 된다.상황실 산하에는 미래예측연구소와 신재생에너지연구소 등이 설립되는데 국내의 연구소와 기업이 함께 만들게 된다. 이 곳에서 연구하고, 기술개발을 하고 산업화하기 때문에 지역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이것이 핵심이다.-김천에는 이 외에 어떤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나.▲김천에 세계기후변화종합상황실이 세워지게 됨으로써 김천은 세계에서 가장 값싼 에너지기술을 가장 빨리 접하게 된다.또 세계 에너지 전문가들이 인트라넷으로 설정된 포털에 자신이 아는 기술을 집단지성으로 올리게 되는데 김천이 이것을 가장 먼저 활용할 수 있게 된다.미래 석학, 세계 에너지 전문가들이 이 사이트에 들어와 다양한 아이디어를 남기면서 포털이 커질 경우 김천은 세계에너지기술 종합정보센터가 된다.이를 겨냥해 국내 유수 대학과 굴지 기업이 이미 김천의 세계기후변화종합상황실 부근에 연구소를 두고 김천에 연구원을 파견하려고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유엔미래에코타운은 어떻게 조성되나.▲유엔미래에코타운에는 미래국제학교(Future Leaders Int`l School)가 설립된다. 영국의 FIC 정식 중·고등학교의 교과 과정을 수행하는 분교를 설치해 국제적인 리더 그룹으로 성장하고 싶은 학생들을 교육할 예정이다.-유엔미래에코타운은 어디에 세워지나.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 15만3천150㎡를 사업부지로 확정했고, 오는 2012년 8월 완공된다.제니스와 국제협력본부, 기술본부, 일반사업본부 등 4개 본부가 들어서게 된다. /최준경기자 jkchoi@kbmaeil.com

2009-08-20

김 前 대통령 장례 `6일 국장` 결정

국회서 영결식… 장지는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원수묘역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 형식이 가장 높은 예우를 갖추는 국장(國葬)으로 결정됐다.정부 핵심관계자는 19일 “국장이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이명박 대통령이 이에 대한 보고를 받고 대국적 견지에서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이와 함께 김 전 대통령의 장지는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원수묘역으로 결정됐다.정부는 이날 오후 8시 한승수 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소집해 이 같은 장례 방안을 의결했다.김 전 대통령의 장례 형식과 절차를 놓고 정부는 국민장을, 김 전 대통령 측과 민주당은 국장을 각각 주장해왔으나 긴 협의 끝에 결국 `6일 국장`이라는 절충안이 채택됐다.그리고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와 분향소, 영결식 장소는 국회로 결정됐다.김 전 대통령측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19일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내 임시빈소에서 기자 브리핑을 갖고 “민주주의와 의회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영결식을 치르기로 했다”고 말했다.박 의원은 “영결식과 빈소, 분향소를 국회 광장에 차리기로 정부와 협의를 끝냈다”면서 “정부에서 빈소와 분향소 등을 준비하면 내일 오전 중 그쪽으로 모시도록 하겠다”고 밝혔다./연합뉴스

2009-08-20

자녀가 잘 하는 것에 주목하라

자녀가 음악듣기를 좋아하고 가수의 노래를 잘 따라하며, 악기를 쉽게 다룬다면 음악지능이 높을 가능성이 있다. 음악지능을 자극하려면 평소에 다양한 음악을 많이 들려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악기를 배우도록 하면 좋다. 또 주변의 물건들 중에서 소리가 나는 것들을 모아놓고 눈을 감고 소리만으로 어떤 물건인지 알아맞히는 놀이를 하면 도움이 된다. 음악지능이 높은 자녀에게 맞는 직업으로는 성악가, 연주가, 작곡가, 지휘자, 음악 치료사, 음향 기술자, 피아노 조율사, 가수, 음악 교사, 공연 연출가 등이 있다. 자녀가 집 안에 있는 것 보다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들이 다툴 때 끼어들어서 서로 화해 시켜주기를 잘 한다면 신체운동지능이 높을 가능성이 많다. 이 지능이 높은 사람은 혼자 하는 경기 보다 단체 경기를 좋아하고 연극에 관심을 보이며 실제로 연기를 잘 한다. 신체운동지능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역할연기, 목공놀이, 공기놀이나 뜨개질 등 손가락을 많이 쓰는 활동과 만지고, 느끼고, 춤추는 활동을 하게 하면 좋다. 어울리는 직업은 운동선수, 체육학자, 물리치료사, 레크레이션 지도자, 배우, 안무가, 무용가, 엔지니어, 체육 교사, 보석 세공인, 군인, 무술인, 발레리나, 등반가, 치어 리더, 경찰, 경호원, 정비사 등이 있다. 자녀가 수학 문제 풀기를 좋아하고 돈 계산할 때 암산으로 잘 하며, 왜 그런지 이유를 자주 묻는다면 논리 수학지능이 높을 가능성이 크다. 논리 수학지능을 높이려면 숫자놀이, 각종 색깔이 있는 구슬을 규칙에 따라 꿰기,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하기, 퍼즐 맞추기, 암산하기, 실험하고 원리 찾아내기, 어떤 생각에 대해 의도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놓기 등의 활동을 하면 좋다. 어울리는 직업으로는 수학자, 물리학자, 과학자, 엔지니어, 은행원, 컴퓨터 프로그래머, 공인 회계사, 경리, 의사, 과학교사, 법조인 등이 있다. 자녀가 평소에 책읽기를 좋아하고, 친구와 말싸움에 자신이 있어 하고, 이야기하기와 글쓰기를 즐겨 한다면 언어지능이 높을 가능성이 많다. 언어지능을 높이기 위해서는 녹음된 이야기 들려주기, 편지쓰기, 끝말잇기와 같은 단어게임하기, 가족회의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서슴없이 말하기, 구체적인 질문하기 등의 훈련을 하면 좋다. 적합한 직업으로는 외교관, 성우, 번역가, 통역사, 문학 평론가, 소설가, 시인, 도서관 사서, MC, 기자, 언어학자, 연설가, 변호사, 정치가, 설교자, 학원 강사, 프로듀서, 외판원, 개그맨, 아나운서, 리포터 등이 있다. 자녀가 그림으로 표현하기, 레고 블록 쌓기, 엉뚱한 상상하기, 한 번 갔던 길 찾기 등을 잘 한다면 공간지능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공간지능을 높이려면 보물찾기, 미술관 견학, 미술과 관련된 작품 활동하기, 사진찍기나 캠코더로 영상물 제작하기, 생각을 마인드맵이나 색깔로 표현하기 등의 활동을 하면 도움이 된다. 적합한 직업으로는 조종사, 항해사, 디자이너, 엔지니어, 화가, 건축가, 설계사, 사진사, 조각가, 코디네이터, 공예가, 미술 교사, 택시 운전사, 네일 아티스트, 요리사, 외과 의사, 치과 의사, 서예가 등이 있다. 자녀가 친구들과 어울려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고, 남을 잘 돕는다면 대인관계지능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대인관계지능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있는 놀이하기, 팀을 짜서 과제 해결하기, 봉사활동, 파티 열어주기 등의 활동을 하면 좋다. 어울리는 직업으로는 종교지도자, 교사, 정치인, 심리치료사, 사업가 등이 있다. 자녀가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생각을 많이 하며, 일을 할 때 심사숙고하고 반성을 잘 한다면 자기이해지능이 높을 가능성이 많다. 이 지능을 높이려면 일기쓰기, 계획표대로 실천하기,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해 주고 성취감을 맛보기 등의 활동을 하고 집안 분위기를 편안하게 꾸미는 것이 좋다. 알맞은 직업으로는 신학자, 심리학자, 철학자, 성직자 등이 있다. 자녀가 애완동물을 좋아하고 식물을 키우기를 좋아하며, 신체기관의 위치와 작용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자연 속에서 노는 것을 좋아한다면 자연지능이 높을 가능성이 많다. 자연지능을 키우려면 애완동물 키우기, 식물 재배, 동식물 스케치, 조개나 나뭇잎 모으기, 갯벌탐사, 별자리 관찰 등을 하면 좋다. 알맞은 직업으로는 식물학자, 생물학자, 수의사, 조류학자, 천문학자, 고고학자, 한의사, 의사, 약사, 동물 조련사, 원예가, 약초연구가 등이 있다. 창의적인 부모는 자녀의 강점지능에 주목하고 그것을 계발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이렇게 하면 시간과 노력이 덜 들고 자녀의 행복한 미래가 보장될 수 있다.Create yourself!포항제철지곡초 이용석 교사

2009-08-19

'김대중 前 대통령 서거' 대구·경북 각계 반응

“생전에 숱한 고초 잊고 편히 쉬셨으면…”시·도민 “대한민국 위대한 지도자 한분 잃었다”정치권 “국민화합·남북평화 승화되는 계기 되길”18일 오후 서거 소식을 접한 지역 정치권과 학계를 비롯한 시·도민들은 서거 소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한 분을 잃었다”며 “생전에 수감생활, 해외 망명 등 숱한 고초를 겪었셨던 만큼 이제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셨으면 한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한나라당 대구시·경북도당=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한 분을 잃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누구보다도 민주화, 인권,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헌신해오셨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생전에 이루고자 했던 숭고한 뜻이 국민화합과 남북 평화로 승화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민주당 대구시·경북도당=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화해, 평화통일, 중산층의 권익 보호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위대한 지도자다. 고인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먼저 가시니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황망하고 허전하다. 민주당은 고인의 뜻을 계승해 민주주의, 남북통일, 따뜻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을 계속해 나가겠다.◇자유선진당 대구시당=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한평생을 바치신 큰 별이 안타깝게 서거하셨다. 김 전 대통령은 한평생을 민주화 투쟁과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평생을 헌신하셨으며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남북화해협력 시대를 열었고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정치권도 분열과 갈등에서 벗어난 지역갈등을 없애고 화합하는 계기가 되어 우리 정치가 한층 성숙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창조한국당 대구시당=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통일, 그리고 경제발전을 위해 온몸을 던지신 한국현대사의 진정한 지도자였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그리고 애민애족의 정신은 후세에도 영원히 빛날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특히 대립과 대결보다 화해와 협력으로 상생하는 대한민국과 국제사회를 꿈꾸었던 그의 꿈은 남은 자들에 의해 반드시 이룩될 것이다.◇이종용씨(57·교사·대구시 동구 신암4동)=“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소식에 깜짝 놀랐다. 김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민주화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한국 현대사의 거목(巨木)이셨는데 이렇게 가셔서 너무 안타깝다”며 “부디 하늘나라에 가셔서도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애써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김미주씨(여·27·대학생)=“아직까지 김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만났던 그 감격스런 장면이 눈에 선하다. 김 전 대통령이 남북화해를 위해 노력한 숭고한 뜻을 후손들인 우리가 잘 이어갔으면 좋겠다”면서 “생전 독재정권에 맞서 투옥, 수감생활, 해외 망명 등 숱한 고초를 겪어셨던 만큼 이제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셨으면 한다”고 했다.◇이용환씨(남·45·공무원)=“우리나라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이룩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 전 대통령의 업적과 뜻을 남아있는 우리들이 잘 이어나갔으면 한다”면서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이 바라셨던 남북 화해가 하루빨리 이뤄졌으면 한다”고 전했다./사회1·2부

2009-08-19

DJ 입원부터 서거까지 투병 37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37일 동안 위험한 고비를 수차례 넘기며 쾌유를 기원하는 가족과 지지자 등에게 희망을 줬지만 18일 끝내 병환을 이기지 못해 유명을 달리했다.고인의 병세가 세인에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달 13일. 가벼운 열이 나는 등 감기 기운이 있어 병원에 입원했고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것.85세의 고령임에도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를 직접 찾아 조문하는 등 최근까지 비교적 정정한 모습을 보였기에 김 전 대통령이 입원했다는 소식에도 많은 사람은 곧 회복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건강상태는 병원 바깥의 기대와 달리 매우 심각하게 악화했다.김 전 대통령은 입원 사흘 만인 지난달 15일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다음날에는 산소포화도가 처음으로 정상치를 밑도는 86%까지 떨어져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했다.다행히 며칠이 지나자 스스로 호흡할 수 있게 됐고, 7월 22일 인공호흡기를 떼고 일반병실로 옮기면서 회복 가능성을 보여줬다.안도와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반병실로 옮긴 바로 다음날 폐동맥이 막히는 폐색전증이 갑작스럽게 나타났고 김 전 대통령은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져 인공호흡기를 달았고 이때부터 심각한 고비가 잇따라 찾아왔다.상태는 날로 악화해 김 전 대통령은 7월29일 기관절개 수술을 했고 갑자기 혈압이 떨어질 때마다 의료진은 강심제 같은 약물을 투여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가족과 측근들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김 전 대통령의 투병이 길어지자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물론, 과거 경쟁 또는 반목 관계에 있던 이들도 병상을 찾아와 극적인 `화해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했다.8월 10일에는 평생의 맞수로 최근까지도 불화를 빚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문병와 화해의 손을 내밀었고, 14일에는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을 1980년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찾아와 쾌유를 기원했다.고인이 병실에서 투병하는 동안 여야 정치권 인사들은 물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시린 에바디 노벨평화상 수상자 등 세계 곳곳에서 800명이 문병하기도 했다.많은 사람의 간절한 바람에도 18일 오전부터 다발성 장기부전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의 혈압과 산소포화도는 크게 떨어졌고 오후 1시43분 한국 현대 정치사의 거인이던 고인은 끝내 운명했다./연합뉴스

2009-08-19

혈액투석 등 병고와 싸웠던 `인동초`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차례 사선을 넘나들면서 육체적으로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말년에는 정기적으로 신장 혈액 투석을 받고 입원을 반복하는 등 고통을 겪었지만 꾸준히 대외 활동을 벌이는 등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강한 `인동초`였다.그가 처음 육신의 고통을 짊어지게 된 사건은 1971년 5월24일 벌어진 의문의 교통사고였다. 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전남 무안에서 지원유세를 하던 중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살해 기도 의혹이 일었던 이 사고로 그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왼쪽 다리에 고관절 장애를 입고 여생을 불편한 다리로 지내야 했다.유신 이래 5년반의 투옥, 3년여의 망명, 6년반의 가택연금으로 신체의 자유마저 온전히 누릴 수 없었던 그는 80년 5.17사태를 주도한 신군부에 의해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이처럼 수차례 생사의 문턱을 오르내렸던 김 전 대통령은 고문 후유증 탓인지 찬바람을 극도로 싫어해 한여름에도 경호원들이 에어컨의 찬바람을 막아야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네번째 도전만에 대선에 승리, 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2년 4월 과로와 위장장애 등으로 국군 서울지구병원에 입원해 국민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2003년엔 관상동맥 확장시술을 받았고 이후 주기적으로 매주 세차례씩 신장 혈액 투석을 받아 왔다.또 국정원 도청사건으로 떠들썩하던 2005년에는 폐에 물이 차는 폐부종 증세 등으로 2차례 입원하는 등 건강 상태가 극도로 나빠지기도 했으나, 이후 잦은 병원 신세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외부 활동을 통해 여전히 자신의 건재를 알려 왔다.그러다 지난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한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돼 영결식장에는 휠체어를 탄 채 등장했다. 당시 주변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구급차도 대기하고 있었다는 후문이다.김 전 대통령은 지난 6월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특별강연회에서 현 정부를 비판하며 건강에 대한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듯 했으나 최근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결국 반평생을 괴롭혀 온 육신의 고통을 조용히 내려놓고 영면했다./연합뉴스

2009-08-19

`투자의 전설` 존 템플턴

존 템플턴(1912~2008)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투자자` 중 한명으로 꼽힌다. 그는 미국 남동부에 있는 테네시 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비 템플턴은 변호사 일 외에도 목화씨를 골라내는 공장을 운영하는 등 여러 사업을 했다. 덕분에 집안 형편은 비교적 넉넉했다. 존의 부모는 아이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자랄 수 있게 도와줬다. 먼저 아이들에게 충고를 한 적도 없었다. 행동이나 태도, 시간관념, 심지어 숙제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랬다. 물론 아이들이 던지는 수많은 질문에 대해서는 성의껏 대답해줬고, 검소한 생활, 아낌없는 기부 등으로 솔선수범을 보여줬다.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 어린 형제를 데리고 장거리 자동차 여행에 나서기도 했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존은 형 하비와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존은 이미 11세 때 전기에 대한 지식이 상당한 수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원 가꾸기, 천체 관측, 나비 채집, 사냥, 낚시 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주 싼값에 물건을 사는 재주가 있었다. 12세 때의 일이다. 존은 마을 외진 곳에 고장 난 채 방치된 아주 오래된 자동차를 발견하고는 10달러에 산다. 그리고 똑같은 모델의 자동차를 한 대 더 구입한다. 차 한 대를 분해해 필요한 부품을 다른 자동차에 교체하기 위해서였다. 존과 친구는 반 년 가까이 자동차수리 지침서를 읽고, 기계정비공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한 끝에 마침내 자동차를 움직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차는 무려 4년이나 더 달렸다. 존은 성적이 매우 좋았다. 초등 1학년 때 존은 우쭐해져서 아버지에게 성적표를 보여줬다. 모두 A였다. 아버지는 내기를 제안했다. 한 해 두 차례 받아오는 학기말 성적표가 전부 A라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면화 한 베일(bale· 한 꾸러미)씩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과목이라도 A 아래 점수를 받게 되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면화를 내놓아야 했다. 11년 뒤, 아버지는 아들에게 22베일의 면화를 빚지게 된다.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전과목에서 A를 받은 것이다. 1930년 고등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템플턴은 예일대 경제학과도 수석 졸업하고 로즈 장학생에 선발돼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을 간다. 다시 미국에 돌아온 그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1만 달러를 빌려 당시 1달러 밑으로 폭락한 104개 주식을 100주씩 샀다. 이 중 34개는 부도가 난 상태였다. 그러나 꼭 4년 뒤 그의 투자액은 4배로 불어났다. 망한 회사는 단 4개였다. 1954년 그는 최초로 세계 주식에 분산 투자하는 `템플턴 그로스 펀드`를 만들었다. 1980년대 그의 주식 중 일부는 매입가보다 68배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그의 투자원칙은 단순했다. `남들이 사면 팔고, 남들이 팔면 사는 것`이다. 이 역발상의 투자 철학은 그를 `투자의 전설`로 만들었다.생각 생각 ▶초등 1. 존 템플턴이 창안한 것으로 최초로 세계 주식에 분산 투자하는 펀드는 무엇인가요? 2. 존 템플턴의 투자원칙은 무엇인가요? 3.위 기사에 맞는 부제를 붙여 보세요.

2009-08-19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50년 정치인생을 마감하고 서거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궤적에는 그가 남긴 수많은 어록이 수놓아져 있다.김 전 대통령은 때로는 치밀한 논리로, 현안의 핵심을 찌르는 표현으로, 때로는 화려한 수사로 좌중을 압도한 달변가이자 뛰어난 대중연설가였다.군사정권 시절 그가 남긴 말들은 쉽사리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채 `옥중서신` 등을 통해 재야 및 운동권 인사들 사이에서 `조용히` 퍼져갔다.이후 사면·복권으로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온 87년 이후 쏟아진 거침없는 발언들은 그를 지탱해준 최대의 정치적 무기였다.“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현미경처럼 치밀하게 보고 망원경처럼 멀리 봐야 한다” 등은 그가 생전에 즐겨 쓰던 문구들이다.“정치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과도 같다”는 표현은 그가 몸담았던 한국 현대 정치사의 역동성을 대변하며 지금까지도 정치권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92년 대선운동 과정에서는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이라는 감성적 수사로 표심을 자극했다.97년 `준비된 경제대통령`이라는 구호로 대권 도전 4수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 `햇볕정책`, `제2의 건국` 등으로 자신의 통치철학을 드러내기도 했다.김 전 대통령은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언급해가며 강조하고자 하는 새로운 주제를 하나씩 추가해 나가는 `얼레(reel) 화법`을 구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연합뉴스

2009-08-19

반세기 정치역정… 한국 현대사 질곡 투영

파란만장했던 영욕의 삶후광(後廣)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통일운동과 민주화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巨木)이었다.“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그가 헤쳐나간 반세기 정치역정에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오롯이 투영돼 있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향한 의지는 투옥과 연금, 망명의 고통을 딛고 마침내 인동초(人冬草)처럼 피어올라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이란 열매를 맺었다.그러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가 놓지 못했던 남북화해라는 화두는 미완의 유업으로 남았다.■섬소년에서 정치인의 길로김 전 대통령은 목포 앞바다에 솟아있는 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전답을 팔아 뒷바라지해 준 덕분으로 목포로 유학,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합격했다.졸업 후 강제징집을 피해 일본인이 운영하던 해운회사에 취직했다 해방 후 이 회사 관리인으로 사업수완을 발휘, 목포일보까지 경영하는 등 청년실업가로 성장했다.그는 해방공간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환멸을 느껴 탈퇴했다. 그러나 건준에 몸을 담은 이력은 그를 평생 `색깔론`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 멍에였다.54년 실시된 제3대 민의원 선거 때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쓴 잔을 마신 그는 56년 장 면 박사가 이끌던 민주당에 입당,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64년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 때에는 본회의장에서 5시간19분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연설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해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40대 기수론에서 6월 항쟁까지71년 첫 대선 도전에서 97년 4수 끝에 최고 통치권자에 오르기까지 36년간의 대권 도전사는 좌절과 재기의 반복이었다.67년 7대 총선에 당선된 뒤 그해 5월 한평생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원내총무 경선에서 첫 대결을 펼치지만 고배를 마셨다.그러나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철승 의원의 막판 지원으로 YS를 누르고 이듬해 대선에 나섰으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95만표차로 석패했다.그의 대권 도전은 야당의 대표 정치인으로 도약한 계기가 됐지만 긴 가시밭길에 들어서게 만든 원인이 됐다. 박정희 정권이 정적으로 지목, 탄압을 본격화한 것이다.유신이 선포된 72년부터 87년 6.29 선언까지 17년의 시간은 납치와 망명, 투옥, 연금으로 점철된 암울했던 시기였다. 73년 일본 도쿄에서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납치돼 수장당할 뻔했으나 미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살아났고, 74년에는 명동성당에서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했다가 3년간 복역한 뒤 가택연금을 당했다.79년 10.26 사태로 복권, 정치일선에 컴백했지만 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다시 민주화의 꽃을 피우려던 그의 꿈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무산됐고,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후 군사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사형에서 무기, 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돼 죽음의 그림자에서 또 한 번 벗어났지만 82년말 미국으로 쓸쓸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양김 분열 후 정권교체까지그는 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YS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했다. 당시 YS로 단일화될 경우 민주진영의 정권교체가 보다 유력시되는 상황이었지만 두 사람은 끝내 권력욕 앞에서 갈라졌다.대선에서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치면서 민주진영으로부터 지역주의에 기댄 야권 분열의 책임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김 전 대통령 스스로도 훗날 “당시 내가 후보직을 사퇴하는 게 옳았다”고 회고했다.92년 12월 대선에서 YS에게 패해 대권 3수에 실패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홀연히 영국 유학을 떠났다. 곡절 많은 정치인생에 마침표가 찍히는 듯한 순간이었다.93년 7월 귀국한 김 전 대통령은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는 등 통일운동에 전념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다 95년 7월18일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호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정치전면에 복귀했다. 우여곡절 끝에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 정권의 최대 실세였던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와 손잡았고, `DJP 공조`는 외환위기를 맞아 `준비된 대통령` 탄생을 갈망하는 국민 여론을 타고 정권교체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DJ정부 출범… 불운했던 말년국민의 정부 5년은 순탄하지 않았다. 대선 승리의 감격을 누릴 여유도 없이 당선 다음날부터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김대중 정부는 5년 동안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분단의 벽을 허물어 남북화해와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는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집권세력 내부의 갈등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견제,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측근 비리 사건이 잇따라 터져나오면서 YS처럼 조기 레임덕에 빠지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퇴임후 그는 외부활동과 정치적 발언을 통해 건재를 과시했다.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 사태가 터지자 “북미관계가 안 돼서 진전을 하지 못한 것”이라며 햇볕정책 책임론을 반박했고, 2007년 대선 전에는 여당의 대통합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그의 `한마디`는 퇴임 후에도 민주당과 전통적 지지층에 무시못할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관계가 위기에 빠졌다고 비판하면서 민주개혁세력의 연대를 주문하는 등 왕성한 정치활동 때문에 현실 정치 개입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이명박 정부를 독재로 규정하는 등 대정부 투쟁의 선봉에서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연합뉴스

2009-08-19

“큰별 졌다”… 전국 애도 물결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서거하자 전국 각지에서는 애도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3김 정치`를 직접 경험했던 노·장년층에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는 물론 영·호남 등 지역을 막론하고 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부산공동어시장에서 일하는 박수만(60)씨는 “우리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고 민주화에 헌신했던 분이 갑자기 서거했다고 하니 무척 울적하다”고 슬퍼했다.소상공인 이형진(56·경기 안양)씨는 “이 시대의 국가원로를 잃어 너무 슬프다. 노 전대통령에 이어 이번에도 김 전 대통령 빈소를 찾을 계획”이라며 “기업을 하면서 `김대중 정권`의 정책에 대해 불만이 있었지만 김 전 대통령이 추진한 남북대화와 민족공존의 정신을 높이 산다”고 평가했다.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취약지`였던 영남 지역도 안타까움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울산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최성길(47)씨는 “여러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지면서도 매번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 결국 대통령이 된 분”이라며 “이런 강한 의지는 국가원수로서 큰 귀감”이라고 말했다.부산에서 지난 20여년간 `영원한 DJ맨`의 길을 걸어온 정오규(48) 전 통합민주당 부산시당위원장도 “김 전 대통령은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의 빛을 밝혔다”면서 “정치적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김태일 영남대 정치행정대학장은 “김 전 대통령은 지역발전을 위해 밀라노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대구·경북 지역에 대해 끊임없이 애정을 표현했다”며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지역간 편견이 없어지고 국민이 진정으로 손잡는 나라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희망했다.민주화와 남북대화 등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업적을 평가하는 목소리도 높았다.이광호(56) 부산 민주공원 관장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6·15공동선언`을 이끌어냄으로써 남북의 화해와 협력, 한반도 평화 조성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말했다.경기 안산 탈북청소년 생활공동체 `우리집`의 최경숙(45·여) 총무는 “`우리집`은 김 전 대통령 재임 때인 2001년 남북을 잇자는 의미에서 `다리공동체`란 이름으로 시작됐다”면서 “남북화합과 평화통일에 애쓴 거목이 쓰러져 안타깝다”고 슬퍼했다.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광주·전남 지역의 슬픔은 남달랐다.광주 지역 대표적 재야 원로인 조비오(71) 신부는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국가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더 해주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면서 “민주화와 시장경제의 발전, 남북교류와 통일의 기틀을 닦은 `평화 지도자`였다”고 회고했다.김 전 대통령의 초등학교 동창인 박홍수(87)씨는 “고난의 세월을 이겨온 강한 친구라 병마를 떨치고 일어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다니 허망하기 그지없다”고 흐느꼈다.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 직전까지 1년 남짓 살았던 경기도 고양시 정발산동 3통 권영숙(56·여) 통장은 “대통령과 한동네에서 살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너무 안타깝다”면서 “좀 더 오래 사시길 바랐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또 남기헌(50) 충청대 행정학부 교수는 “김 전 대통령으로 인해 한국이 세계 속에서 민주주의 국가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고 평가했다./연합뉴스

2009-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