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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선덕여왕 행차` 기획 조경수 경주문화관광축제조직위 팀장

신라 최초 여왕 `선덕여왕`이 1천400여년 만에 부활된다.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 축조와 분황사 창건, 황룡사 9층목탑 건립 등 찬란한 신라문화를 꽃피운 선덕여왕의 업적을 기리는 `선덕여왕 행차`가 오는 주말 경주시 일원에서 재현된다.`선덕여왕, 그 화려한 부활`이란 주제로 열리는 대형 퍼포먼스의 총괄기획자인 (재)경주문화관광축제조직위 조경수(40) 기획팀장으로 부터 추진 과정을 들어봤다.-추진 배경은.▲경주문화의 컨텐츠화를 통한 `지역 브랜드`를 구축시키기 위함입니다. 특히 MBC 드라마 선덕여왕과 연계를 통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신라 문화유적의 배경인 경주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킬 것으로 예상됨니다.또한 선덕여왕 퍼레이드를 지역을 발전시키는 문화컨텐츠로 발전시켜 관광객에게 볼거리 제공 및 지역경제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행사와 관련된 전문가들은. ▲총감독 김수현 (사)전통문화진흥회 이사장을 비롯 음악감독 박상진 동국대 국악예술단 단장, 운영감독 이경우 2005년 APEC 정상회의 만찬행사 무대감독, 제작감독 김수완 서울시 왕궁수문장교대의식 연출자, 무술감독 구수본 이명박 대통령 취임 청계광장 축하공연 연출자, 안무감독 김응기 동국대 한국음악과 교수 등 국내 쟁쟁한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행차 내용은. ▲퍼레이드 구성의 기본 근간은 사료 상 유일한 6세기 진흥왕 순수비 중 영통확장의 산물인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와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의 변제지역 순시시 행차 구성을 토대로 구성됐습니다.제 1그룹은 `선덕여왕, 그 화려한 부활`로 총인원 79명이 투입돼 화려하게 만개했던 신라문화의 위상을 연출합니다.제2그룹은 `신라의 기상`으로 총 94명이 선덕여왕이 탑승한 플루트카를 중심으로 김유신, 김춘추, 화랑, 원화 등 여왕의 행차에 걸맞는 웅장함이 표현됩니다.제 3그룹은 `신라의 영광`으로 총 27명이 선덕여왕의 가장 큰 업적인 황룡사 9층 목탑과 첨성대를 플루트카로 제작, 여왕의 업적을 기리며 축원하는 시녀들이 펼치는 퍼레이드입니다.-큰 행사를 추진함에 있어 애로사항은.▲최근부터 시작된 장마와 무더위입니다.특히 이 행사는 수 천년 전의 복식 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에 참가자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또한 시내 주요 도로를 중심으로 퍼레이드가 펼쳐지기에 교통 통제 등 시민들의 불편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큰 행사인 만큼 시민들의 이해가 있었으면 합니다. /윤종현기자 yjh0931@kbmaeil.com▶▶ 프로필△경주 술과 떡잔치 △보문호반축제 △울진대게 축제 △부산 BEXCO 박람회 △AEPC CHAMBERS CONGRESS △강남 신세계 백화점 술과 떡 잔치 △정보통신부 홈 네트워크 디지탈 전시

2009-07-10

3. 임시수도 70일-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대항했나

공민왕이 홍건적의 2차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해 머문 기간은 1361년 12월 임진일로부터 1362년 신축일에 이르기까지의 70일 동안이다. 하필 몽진지로 안동을 선택한 것은 날랜 적 기병의 추격을 떨치는데 안동의 산간지형이 유리했고 태조 왕건 이래 보여준 고려왕실에 대한 안동인들의 충성심 등이 작용했음을 전편에서 언급했다. 또 당시 공민왕의 측근 중에는 안동 출신 또는 안동에 연고를 둔 인물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고려왕실을 의리로 지켜낸 안동 사람들은 공민왕의 체류기간 70일 동안 어떻게 왕을 모셨으며 위급한 정세에 대응했을까. 따뜻한 영접과 재기의지 독려 공민왕이 안동에서 70일을 무사하게 보냈다면 이는 안동지역을 관리하는 행정책임자와 지역 백성들의 역할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왕의 몽진 당시 안동의 관리는 목사 김봉환이었던 것으로 최근까지의 연구는 결론 내리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공민왕의 몽진 당시 김봉환 목사와 안동 사람들이 국왕을 극진해 예우해 모시자 공민왕은 그 공로를 인정해 복주목을 안동대도호부로, 복주목사를 안동대도호부사로 승격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이 안동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 `고려사`는 안타깝게도 자세한 기록을 전하지는 않는다. 이는 전략상 왕의 행적을 지나치게 노출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봉환 목사는 왕의 안동 도착 당시 상주도(尙州道) 소속 안기역 역리들에게 왕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독려하거나 지원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게 학계의 추정이다. 또 부녀자들이 인교를 놓아서 노국공주가 송야천을 건너게 한 것도 안동부의 행정적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목사 김봉환은 왕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신이 집무하던 복주목 청사를 정리한 뒤 왕이 머물 수 있는 행궁(行宮)으로 준비했을 것이다. 또 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왕과 군지휘자들과 협의해 확실한 방어태세를 구축했을 것으로도 보인다. 정세가 위급하던 이때 왕의 최후의 보루로 준비됐던 곳은 다름 아닌 현재 성곡동의 성황당토성과 청량산의 공민왕산성과 왕모산성, 오마도산성 등이었음을 들 수 있고 김봉환이 이를 주도했다는 사실적 추측이다. 이런 것들은 `영가지`가 김봉환의 직책에 대해 행정 관리인 목사나 부사라 하지 않고 무인에게 통용됐던 안집사(安集使)로 기록한데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왕의 휴식과 군사정비 지원 공민왕은 안동에서 우선적으로 오랜 몽진길의 피로함을 달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왕이 어느 날에는 낙동강 영호루 아래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며 물가에서 활쏘기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전시체제에서도 후방인 안동이 비교적 안전했으며 왕은 피로를 풀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나들이를 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실제 이때 홍건적은 한 번도 경상도를 넘은 일이 없었다. 이에 따라 왕의 일행은 전세가 비교적 안정된 틈을 이용해 안동 지역의 다른 곳으로도 순행했을 것이며, 안동 지역의 많은 산성들이 공민왕의 안전을 위해 축조됐거나 보수됐다고 전해진다. 산성 축조가 정확히 이 시기에 공민왕을 위해 이뤄졌다는 사실적 기록은 충분하지 않지만 안동에 이르러 공민왕의 마음이 편안했음은 여러 기록으로 입증되고 있다. 한편, 왕은 개성 일대를 휘젓던 홍건적을 물리치기 위해 안동에 머무는 동안 군대의 지휘체제를 정비했다. 이는 총병관으로 정세운을 임명해 홍건적을 격퇴한 사실로 증명된다. 이때를 전후해 진성이씨의 안동 입향조인 송안군 이자수(李子脩)가 정세운의 휘하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건적을 물리친 공로로 이자수는 공신이 됨으로써 그 자손들이 예안현과 청량산 일대에서 사회적 위상을 점했으며 후일 이 가문에서 성리학의 최고봉 퇴계 이황이 배출되는 계기가 됐던 점도 소홀히 볼 수 없는 한 인과다. 왕은 또 한편 봉정사의 진여문(眞如門) 현판글씨로 볼 때 봉정사에도 들러 불력으로 홍건적을 물리치기를 기도했을 개연성도 적지 않다. 이후 공민왕은 정세운이 지휘하는 군대가 개성의 홍건적을 섬멸했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개성 환도를 준비했던 것이다. 왕은 떠나기 전 “안동이 나를 중흥시켰다”며 안동부에 여러 가지 선물을 하사했으며 이 중 다수가 아직까지 태사묘 등에 전해지고 있다.안동에 대한 공민왕의 사은 공민왕이 안동에 도착해 송야천을 건널 당시 노국공주를 위해 안동의 부녀자들이 서서 엎드린 채 등을 잇대어 인교를 만들었다는 `놋다리밟기` 전설은 사실일까. 결론부터 내리자면 사실이 아니다. 영덕의 월월이청청과 의성의 지애밟기, 호남의 강강술래 등 놋다리밟기와 같은 맥락의 놀이는 얼마든지 있다. 여성들이 소로 손을 잡거나 몸을 잇대어 노는 춤의 문화는 세계적으로 보편적이다. 결국 안동의 놋다리밟기는 안동의 백성들이 공민왕을 어느 정도 환대했던지를 보여주기 위해 덧씌워진 전설이다. 이런 환대에 힘입어 왕은 재기할 수 있었고 안동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았다. 앞서 거론한 것처럼 두드러진 왕의 사은 중 하나는 몽진시에 복주목이었던 안동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킨 일이다. 안동이라는 지명은 왕건이 최초로 내렸고 중간에 몇 번이나 다른 이름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확고한 지명으로 굳었다. 이와 함께 `금방기`에 따르면 왕은 안동대도호부에 대해 세금을 면제해주는 조치를 내림으로써 안동 지역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도록 배려했다. 의미가 깊은 여러 가지 선물을 하사하기도 했다. 안동부와 안기역리들에게 복식류와 식기류를 하사했으며, 영남의 대표적 누각이자 자신의 시름을 달랬던 `영호루`의 현판 글씨를 친필로 하사했다. 이로써 안동의 영호루는 국가적인 주목을 받게 됐으며 이후 누각을 확장하고 유실시 복원하는 동력이 될 수 있었다. 또 몽진해온 공민왕을 중도에서 맞이한 손홍량에게는 “충정이 하나같이 곧은 사람이 늙을수록 나라 위한 마음이 독실하도다”라는 시를 내리고 그의 사후에는 정평이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당시 손홍량은 나라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벼슬을 그만두고 안동으로 낙향해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던 충성심 강한 신하였다. 이외에도 공민왕은 여러 가지 유무형의 선물을 안동에 남겼으며 안동의 백성들은 왕이 머물렀던 역사를 잊지 않는 의미로 `공민왕 신앙`을 이어왔던 것이다. /정태원·이임태기자

2009-07-10

문신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대구부의장

“국민 소통과 화합에 역량 집중하겠다” 2년간 평화통일 지역기반 확충 등 활동 펼쳐 “`상생과 공영` 대북정책 성공 위해 적극 노력”문신자 전 대구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이 최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대구지역 부의장으로 임명됐다. 신임 문 부의장은 앞으로 2년간 제14기 민주평통 대구지역회의 수장으로, 평화통일의 지역기반 확충과 평화통일을 위한 정책수립·추진에 대해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자문에 응하는 등 활동을 하게 된다.-민주평통의 활동방향은 어떻게 되나. ▲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고 남북한 모두의 이익과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윈윈(win-win)의 남북관계를 만들자는 정부의 `상생과 공영`의 대북정책 성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남북 간 공영, 공생, 나눔의 문화를 정립하고 다음으로는 통일무지개운동을 통해 젊은 인재들을 적극 영입, 평통 발전을 꾀하겠습니다. 또 해외 101개 국가에 평통 조직이 되어 있는데 교포들과의 네트워크를 강화해 홍보를 강화하는 한편 국내적으로는 국민과의 소통 및 화합에 앞장설 계획입니다. -대북정책이 어떻게 나아가야 된다고 생각하는지. ▲대북정책도 주고받는 관계가 돼야 합니다. 일방적으로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주고 받고 돕는 관계가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또 그렇게 돼야 남북관계도 건강해지고 투명해지겠지요. -국민들의 안보의식에 대해 한마디. ▲북한 핵도발이 빈번해지니까 요즘 우리 국민들이 이에 대한 경각심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분위기입니다. 안전불감증에 걸려 있다고 할까요. 하지만 아직은 북한과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좀더 우리 국민들이 안보의식을 갖고 남북관계 등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앞으로 활동 계획은. ▲남북관계 증진을 꾀하고 평화통일에 대한 소임을 다하며 회원 간의 화합과 내실을 다지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특히 평화통일을 위한 국민의 염원에 필요한 것은 국민화합으로, 소통과 화합에 역량을 집중하고 나아가 실용적 정책 건의 추진, 평화통일을 위한 한민족 네트워크 기반 구축 등에도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또 민주평통이 지역사회의 구심점이 되어 지역발전을 이루는데도 역할을 다할 생각입니다. /이현주기자 sun@kbmaeil.com▶▶ 프로필△대구시교육청 초등장학사·장학관 역임 △대구신천초 교장 역임 △경북과학대학 사회교육원장 역임 △제12대 대구여성단체협의회 회장 역임 △지방분권운동 대구경북본부 공동대표 역임 △재구 영덕군 향우회 회장 역임 △한국우즈베키스탄협회 회장 △독도사랑범국민운동본부 대표 △대구가톨릭대 미래지식포럼원장

2009-07-09

영일촌 한우, 영일촌 포크

철강산업의 메카 포항은 `글로벌 도시`라는 이미지답게 축산물 관리에 있어서도 세계적 수준을 자랑한다. 포항은 흔히 제조업에 편중된 산업도시로 인식하기 쉬우나 1천531호의 농가에서 모두 1만8천775마리의 한우를 사육하는 등 축산물 시장의 규모도 상당하다. 특히, 영일만의 이름을 딴 포항시 고유 브랜드 `영일촌`의 한우들은 포항축산농협 육가공공장의 전문화 공정을 거쳐 각 학교와 군 부대, 대형마트 등 전국으로 유통되고 있다. 편집자주▲`영일촌`이란 포항시에서 개발한 농특산물 공동브랜드이다. 포항지역 우수 농특산물의 차별화 및 통일된 이미지 창출로 소비자 인지도 향상과 판매촉진을 꾀하기 위해 지난 2001년 만들어졌다. 축산물의 수입 개방으로 국내 축산물 품질 차별화가 시급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에 포항축산농협은 정부의 축산물 유통구조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육가공공장을 설치, 지역에서 생산된 한우와 돼지고기를 가공해 그 중 선별된 고급육에만 `영일촌`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현재 8천775마리의 영일촌 한우들이 포항지역 곳곳에서 자라나고 있으며, 30개월의 사육기간을 거쳐야 영일촌 한우로써 인증 절차를 거치게 된다. ▲운영 및 가공 절차 영일촌 한우는 포항축협의 조합원들이 선별된 종자와 정형화된 사육 기준을 갖고 생산에 나서고 있다. 이들 조합원이 사육한 한우는 30개월이 흐른 뒤 포항축협 육가공공장으로 옮겨져 수집, 도축, 가공, 브랜드육 선별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영일촌이란 브랜드명을 부여받고 나면, 영일촌 한우는 3개의 조합직판장과 5곳의 가맹점, 120곳의 학교, 군 부대, 농협 하나로마트 등을 통해 전국의 소비자와 만나게 된다. 포항지역의 농특수산물 특성화 브랜드답게 영일촌 한우는 엄격한 가공공정을 거친다. 우선 영일촌 한우는 지금도 출하 하루 전 절식을 원칙으로 한다. 도축 시 오염을 방지하고, 제품의 신선도를 지키기 위해서다. 이후, 한우의 스트레스를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도축 전 최소 12시간 이상 계류하고, HACCP(위생 인증) 인정도축장에서만 도축한다. 이렇게 도축된 영일촌 한우는 도축 당일 바로 가공공장에 수송된다. 철저한 위생관리 역시 영일촌 한우가 자랑하는 부분이다. 특히, 미생물 번식의 최소화를 위해 냉장탑차의 온도는 항상 0~4도를 유지하며, 가공실 온도도 15도 안팎을 벗어나지 않는다. 한우가 가공실에 입고하면 36시간 이내 무조건 골발, 정형, 진공포장이 시행되며, 고압 세척기를 통한 냉장탑차 세척 및 소독도 이때 같이 이뤄진다. 이 밖에도 포항축협은 식육처리기능사 자격을 갖춘 자체 위생 관리인을 배치해 위생관리 일지를 작성하고 있다. 또, 매월 1회씩 시료를 채취해 경북도 환경 보건연구원에 의뢰, 성분 및 유해물질 잔류검사 등을 행하고 있다. ▲영일촌 한우 프라자 포항축협은 축산물 수입개방에 대응한 유통구조개선 사업으로 1993년부터 식육유통센터를 설치, 운영해 오고 있으며, 2001년 8월부터는 포항시 농특산물 공동브랜드인 영일촌 한우, 영일촌 포크를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한미 FTA 협상 타결에 따라 한우가격 하락 및 수입육시장 확대 등 축산업 사육기반이 위협받고 있는데다, 대형할인업소 입점으로 지역 브랜드의 입지가 줄어들자 고유 유통망 확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에 포항축협은 경쟁력 있는 도매센터 및 식당을 개설해, 생산농가와 판매업소, 소비자가 모두 윈-윈(Win-Win)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현재 포항축협은 영일촌 브랜드육의 판매를 위한 일반식당(80평형) 1곳, 고급식당(40평형) 1곳, 도매센터(40평형)을 운영하고 있다. 포항축협은 이들 유통기반을 통해 도매, 소매, 택배, 인터넷 판매 기능을 확충, 영일촌 한우 프라자를 축산물 프랜차이즈점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계획이다. 또, 이들 유통기반을 딱히 한우에만 국한하지 않고 지육, 부분육, 정육, 가공육, 기타 축산물 등을 다양하게 취급할 수 있는 복합 매장으로 운영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포항축협은 식당과 도매센터 경영을 성과에 의한 철저한 책임경영제로 운용해, 고급육 생산뿐 아니라 전문 브랜드 유통구조까지 정립시킨다는 청사진을 구현하고 있다. /신동우기자 beat082@kbmaeil.com

2009-07-09

석병양로원을 다녀와서

박 지 은영일고 1석병양로원은 내가 영일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세 번째 봉사활동을 하게 될 장소이다. 처음엔 양로원에서 봉사한다는 소릴 듣고 되게 힘들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면서 버스에 올라탔다. 도구와 구룡포를 지나 바다건너 산 건너 경치 좋은 곳에 다다랐다. 폐교가 되어버린 학교건물에 도착하였고 인상 좋으신 남자 선생님 한분이 우리 모두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몇몇이서 모둠을 짜서 활동하였다. 나와 내 친구들은 마른걸레와 젖은걸레를 들고 양로원의 모든 유리와 창문을 찾아 닦으러 다녔다. 우리가 온걸 알고 편찮으신데도 나와 주신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일일이 인사를 하였다. 인사를 할 때마다 몇몇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어디서 왔냐고 물으시기도 하셨다. 그럴 때 마다 “영일고등학교에서 왔어요.”하면서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한 할아버지께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였는데 할아버지가 대답도 안해주시고 다른곳을 쳐다보고 계시길래 몇 번이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여 인사하기도 하였다. 몇 번을 하고나서야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 때 빨리 깨닫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할아버지도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걸레로 유리와 창을 닦아나갈 때 마다 내가 느끼는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갔다. 유리에 낀 먼지 하나하나가 말끔히 사라질 때 마다 봉사활동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갔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다 끝마치고 잠시 쉬려고 복도에 앉아있었다. 옆 창 안으로 할머니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친구 두 명을 데리고 할머니들의 방 안으로 들어가서 인사부터 하였다. 그리고 친구들과 각자 할머니 한 분에게 붙어 안마를 하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처음 나와 얘기를 나눴던 할머니가 잊혀지지가 않는다. 내가 할머니께 “할머니 제가 안마해드릴게요.” 하자 누워계시던 할머니가 나에게 눈을 마주치시며 힘들게 몸을 일으키시곤 안 펴지는 무릎을 억지로 펴시는 모습이 아직 내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 내 마음 한 구석에 뭔가 모를 찡 한게 올라왔다. 할머니 무릎을 나도 같이 펴드렸고 할머니가 바지를 걷어 올리시자 무릎에는 파스가 붙여져 있었다. “ 할머니 아프시면 말씀하세요 ” 라고 수 십 번은 넘게 말 한것 같았다. 할머니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영덕에 계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우리 할머니도 지금 무릎이 많이 편찮으신데 하고 생각났다. 봉사활동 다녀와서 꼭 안부전화를 해야지 라고 생각했다. 여태 해드린것도 없고 불효 한 거 같아서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 때 만큼은 내가 할머니의 손녀처럼 정성껏 안마해드렸다. 할머니에게 안마해드리면서 할머니와 몇 마디 짧은 대화를 하였다. 할머니와 했던 대화 중 에서 “영일고등학교 학생들이 참 자주 오네~ ” 하는 소리에 나는 너무 흐뭇했다. 그 때 너무 우리 고등학교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할머니들께서 지루해 하실까봐 노래를 불렀다. 야영을 갔다 온 후라서 목이 많이 아프고 따가웠는데도 불구하고 할머니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열심히 힘껏 불렀다. 처음엔 뭘 부를까 망설이다가 노래 하다가 춤까지 추면서 열심히 웃기게 해드렸다. 그러자 할머니들께서 박수를 치며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 미소를 본 나는 더 힘에 입어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나서 반 아이들과 모두 모여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곳을 찾아가 순회공연을 하였다. 반 친구들과 다 같이 트로트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기도 하였다. 그때 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마치 손녀를 보듯이 대해주셨다. 몇 분이 흐른 후 다른 건물로 모두 이동하여 큰 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앉아계신 곳 앞에 모두 모여 앉아서 장기자랑을 하였다. 그 때 만큼은 같은 반 친구지만 얼마나 이뻐보이고 착해보이던지 모르겠다. 그리고 헤어질 시간이 다 되어서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느꼈다. 석병 양로원에 오기 전 까지만 해도 양로원이라는 생각 하나로 `많이 힘들고 고된 하루가 될 것 같다` 고 생각한 내가 참 부끄럽다. 한 달에 한 번 반 친구들도 단체로 오는 것 이외에도 가족들과 함께 양로원을 찾아 일손을 돕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도와주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뿌듯한 하루였고, 부모님에게 효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2009-07-08

사업가가 되기위한 필요조건

오늘은 엄마의 생신. 모처럼 가족끼리 외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요? 피자, 자장면, 돈가스, 갈비….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음식점에는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있고, 그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벌까요? 오늘은 음식점 주인이 되어봅시다! 그럼, 본격적으로 음식점을 경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찾아봅시다. 우선, 어떤 음식을 판매할 것인지를 정해야 합니다. 한식 ·중식 ·일식 ·양식 등 다양한 음식 종류 중 하나를 고르고, 판매하고 싶은 구체적인 메뉴를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한식을 선택했다면 설렁탕 한 가지만 집중해서 판매할 것인지, 아니면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 여러 가지 음식을 다양하게 팔 것인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음식점의 위치를 정해야 합니다. 위치는 내가 정한 메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나, 그 사람들이 이용하기 편리한 거리에 있는 것이 좋겠죠? 하지만 좋은 자리일수록 가게 세가 비싸다는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세 번째, 음식의 가격을 정합니다. 가격이 비싸면, 이윤이 많이 남아 좋지만 사람들이 많이 사지 않을 것이고, 가격이 싸다면, 사람들이 많이 사먹겠지만 이윤은 적게 됩니다. 이런 점을 잘 고려하여 적정한 가격을 책정해야 합니다. 네 번째, 이 음식점을 경영하기 위하여 어떠한 사람들이 필요할까요? 요리사, 계산하는 사람, 주문 받고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 접시 닦는 사람, 주차 요원 등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이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고용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음식점 경영에 필요한 사람들은 모두 생각한 뒤, 그들 중 어떤 사람이 더 필요한지를 생각하여 고용순서를 정해야 합니다. 가장 필요한 사람부터 고용한 뒤, 음식점이 잘 되면 추가로 한 명씩 고용합니다. 마지막으로 음식점 이름도 정해야겠죠? 내가 판매할 음식을 잘 나타내줄 수 있는 이름을 신중하게 생각해서 정해야 합니다. 음식점 경영에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가령 음식점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열 것인지, 음식점에서 음악을 틀 것인지, 음식점 내부는 어떤 색깔, 어떤 디자인으로 꾸밀 것인지 등 많은 것들을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음식점 사장, 즉 사업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해야 하며 식당의 위치, 음식의 종류 및 가격 등 여러 가지 사항을 결정해야 합니다. 훌륭한 음식점 사장, 훌륭한 사업가가 되기 위해서는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신중하고 꼼꼼하게 잘 준비해야 하며, 문제가 생겼을 때 합리적이고 올바른 결정을 해야 한다는 점 명심하세요.생각 생각 ▶초등 1. 음식점을 창업하려면 무엇부터 해야할지 적어 보세요. 2. 어떤 음식을 판매하고 싶은지 그림이나 사진으로 메뉴판을 만들어 보세요. 3. 음식점을 알릴 홍보물을 만들어 보세요.

2009-07-08

퇴직위로금 장학금 쾌척 천근배 前상주시의회 사무국장

“제 것 나눠주는 기부는 아름다운 덕목”매년 불우이웃돕기 성금… 봉사활동도 활발 부인과 함께 장기기증 절차도 마무리 `귀감`37년간의 공직생활을 명예롭게 마감하고 지난달 말 정년퇴임 한 천근배 전 상주시의회 사무국장은 후배 동료공무원들이 한푼 두푼 모아 전달한 퇴직위로금 성격의 300만 원을 (재)상주시장학회에 장학금으로 쾌척했다.평소에도 어려운 이웃들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이면서 박봉임에도 매년 상당액의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으며 부인 최순자씨와 함께 장기기증 절차도 마무리했다.선진국의 경우 빌 게이츠 등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기부와 자선이 사회적 덕목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지만, 아직 기부문화가 걸음마 단계인 우리의 실정을 감안 할 때 천 전 국장의 숨은 선행은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장학금을 맡기게 된 동기는. ▲먼저 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도 되지 않는 적은 금액을 맡겨 부끄러울 뿐입니다. 저 자신이 만학도로서 1968년도에 상주농잠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가세가 기울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찍이 사회생활에 뛰어든 적도 있습니다.1974년부터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하다 1991년 상주대학교 야간대학이 설립돼 행정학과에 입학하고 이어 같은 대학원 아동복지학과 노인복지학 석사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배움에 목말라하는 학생들을 수없이 봐 왔기 때문입니다.-주요 봉사활동 내용과 기부문화에 대한 의견은.▲1998년 사무관 교육 중 충북 음성에 있는 꽃동네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글귀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이후 꽃동네를 비롯해 상주시장애인복지회관, 상주사회복지관, 자원봉사센터, 장기기증운동본부 등에 매월 일정 금액을 맡기고 있으며 노력봉사로는 상주사회복지관에서 도시락 배달을 합니다.2006년도에는 아내와 함께 장기기증 서약을 하고 후원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연말이면 50~100만 원 수준에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맡기고 있습니다.봉사활동과 기부는 다 같은 맥락으로 남고 넘쳐서가 아니라 나누어 남을 도움으로써 자기 스스로 가슴 뿌듯해지는 아름다운 덕목이라 생각합니다.-퇴직 공무원의 진로에 대해서는.▲대부분의 공직자들이 퇴직과 함께 제2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실생활은 권위적이고 피동적인 공직생활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개인적으로 저는 공로연수 기간 중에도 중소기업에서 무보수로 연수를 받았으며 퇴직과 동시에 정상적인 보수를 받고 연수받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공직을 떠나고 나서 또다시 직장을 가지는 것이 마치 염치없는 선택처럼 인식되는 풍토가 팽배해 있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사고라 여겨집니다.심각한 인구 감소로 뒤따라올 인적자원이 고갈돼 가는 상황에서 퇴직 공무원이라 해서 팔짱만 끼고 있을 때는 절대 아니라 생각되며 오히려 집적된 노하우를 살려 적재적소에서 생산적 활동에 종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봅니다./곽인규기자 ikkwack@kbmaeil.com

2009-07-08

입체적으로 생각하게 하라

“사과가 열두 개 있는데 그 중 일곱 개를 먹었다. 남은 것은 몇 개일까?“ 영구가 벌떡 일어섰다. “일곱 개요.” “왜 일곱 개가 되지요?” 평소에 좀 엉뚱한 면이 있는 영구에게 되물었다. “우리 엄마가 늘 먹는 것이 남는 거라고 했어요. 사과를 일곱 개 먹었으니까 당연히 일곱 개가 남는 거지요.” 수학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엉뚱한 답이지만 영구가 말한 답은 그럴듯하다. 창의의 세계에서는 정답만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때로는 엉뚱한 발상에서 기발한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 창의 세계의 특성이다. 선생님이 이런 문제를 제시했다. `나는 준다`의 미래형은 무엇인가? 선생님이 생각한 답은 `나는 줄 것이다`였다. 그런데 영구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받는다.` 이 답은 문법적으로는 틀리지만 세상사를 통찰한 수준에서는 맞는 말이다. 주면 언젠가는 받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영구는 입체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아이다. 입체적 사고란 좀 엉뚱해 보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 보는 것을 말한다. `12-7=`에서 `5`라고 답하는 것은 마침표(.)와 같이 닫힌 답이다. 그러나 영구가 제시한 답 `7`은 다른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라는 물음표(?)를 던진 다음 `아하!`라는 느낌표(!)를 갖게 하는 열린 답이다. 단순히 마침표에서 끝나지 않고 물음표와 느낌표로 이어지게 하는 사고가 바로 입체적 사고이다. 입체적 사고를 위해서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 보다는 외워서 아는 지식이 많다. 이렇게 하면 `무엇`에 대한 것은 많이 알지만 `어떻게`에 대한 것은 잘 모른다. 여기서 `무엇`에 대해 아는 것, 즉 외워서 아는 것이 단순한 `알기`라면, `어떻게`에 대해 아는 것, 즉 체험적으로 아는 것은 `이해`이다. 어떤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응용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며, `어떻게`를 모르면 `새로움`을 창출할 수 없다. 결국 진정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는 `새로움`이 생명인 창의성 계발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이 `알기` 위주로 흐르는 예를 TV 프로그램에서 찾을 수 있다. `장학퀴즈` `도전 골든벨` 등과 같은 `어떻게` 보다는 `무엇`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들은 진정한 `이해` 보다는 `알기` 수준에 머물게 한다. `알기` 수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서 루트번스타인이 `생각의 탄생`에서 제시한 `관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찰훈련은 그 동안 학교 교육에서 중점을 두었던 `생각나기`의 기억훈련에서 벗어나 `생각하기`의 고등 사고훈련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된다. 학교에서 3학년을 대상으로 재미있는 실험을 해 보았다. 포장이 되어 있는 일반적인 껌을 하나씩 나누어 주고 20분 동안 관찰한 내용을 최대한 많이 적어보게 하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20가지 이상 쓰지 못했다. 그런데 관찰을 눈으로만 하지 말고 오감을 모두 사용해 보라고 했더니 50가지 정도를 썼다. 이렇게 관찰 훈련이 잘 되면 나중에는 같아 보이는 모양, 색깔, 맛, 향기 속에서도 미묘한 차이를 찾아낼 수 있다. 차이를 느끼고 발견할 수 있어야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모든 분야에서 남다른 차이를 만들 수 있는 힘이 바로 창의력이다. 그러므로 사물을 한쪽 면으로만 보지 말고 여러 면에서 보고 생각하도록 입체적 사고력을 키우는 것이 창의력 훈련의 핵심이다. Create yourself!

2009-07-08

김정철 경북대병원 모발이식센터장

“첨단의료복합단지 대구 유치가 급선무” “전국 최고 의료인프라로 `메디시티 대구` 만들어야” 모근복제 연구 진행… 모발이식용 로봇 개발도 추진 모발이식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김정철 교수가 센터장을 맡고 있는 경북대병원 모발이식센터에는 연간 수백명의 환자가 찾는다. 정치인, 기업인, 고위 공무원도 상당수다. 대기 환자도 2011년까지 밀려 있다. 올 4월에는 경북대병원 모발이식연구소 산하 노화극복·웰빙을 위한 융합의료기술개발사업단(단장 김정철 교수)이 교과부 지정 지역거점연구사업으로 최종 확정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최근 의료관광 바람을 타고 대구시는 아예 모발이식을 대구의 의료관광 대표상품으로 내세웠다. 이달 말께 첨단의료복합단지 선정을 앞두고 김 교수를 만나 대구·경북지역의 의료산업이 나아갈 길을 들어봤다. -의료산업을 대구의 신성장동력으로 육성시키기 위해 필요한 제반 여건은. ▲대구는 전국 최고 수준의 의료인프라를 갖고 있으며 의료관련 산업도 풍부합니다. 하지만 의료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계속적인 지원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첨단의료복합단지의 유치가 가장 중요합니다. -`메디시티 대구`의 전망을 어떻게 보나.▲메디시티 대구의 성공 역시 첨단의료복합단지의 유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첨단의료복합단지가 대구로 와야 하는 당위성은.▲첨단의료복합단지의 성공여부는 역시 우수한 인재에 의해 좌우된다고 봐야 합니다. 대구·경북에는 의과대학 5개, 치과대학 1개, 약학대학 2개, 한의과대학 1개가 있으며 대학병원 5개를 포함한 27개 종합병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의료인재 인프라를 갖고 있는 지역은 서울을 제외하고는 대구·경북이 최고입니다. -개인적으로 모발이식 분야와 관련한 또다른 계획이 있는지. ▲옮겨 심을 모발이 부족한 사람을 위해 모근을 복제하려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모발 이식용 로봇도 개발할 계획입니다./이현주기자 sun@kbmaeil.com

2009-07-07

예순여덟번째 안부 - 바느질을 하며

그대에게 그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말았지요. 쉬이 사과도 못하고 근심만 돌돌 굴리다가 도무지 꼼수로는 헤어날 길 없어 종일 바느질을 했네요. 입 꼭 다물고 돋보기 끼고 뚫어져라 한 곳만을 바라보며 왼손으론 천을 잡고 오른손으론 바늘을 잡고 한 땀 한 땀 넣었다 빼고 다시 뒤로 찔러 앞으로 빼는 동안 촘촘하게 길을 내는 실의 자국들. 그렇게 커다란 방석 하나를 만들어 갑니다. 도톰하게 속을 채운 뒤 먹물 염색한 천을 테두리에 두르고 쪽물 염색한 천을 가운데 대고 붉은 실로 한 바퀴 흰 실로 한 바퀴 그렇게 깁습니다. 행여 앉는 자리 속이 밀릴까봐 곱하기 모양으로 다시 또 길을 내고 그것도 모자라 돌려가며 네모를 자꾸 그립니다. 한 줄로는 모자라 또 한 줄 곁에 내니 어느새 톡톡하게 자리를 잡는 귀퉁이가 제법 그럴듯한 방석 매무새로 고개를 듭니다. 이 가느다란 실을 끌고 가는 바늘 하나도 조금만 비껴 지르면 빼또롬해지는 길 선명한데 하물며 함부로 말하고 생각 없이 행동한 나의 모습은 얼마나 흐트러진 자국을 주변에 남겼을까요. 함께 기워가는 세상일 텐데 삐딱하게 돌아앉는 나 하나로 인해 잠시나마 흔들린 우리들 질서에 대해 생각합니다. 올려놓은 음반이 서너 번이나 반복해서 돌아가는 동안 바늘을 쥔 엄지와 검지가 아파 오는 동안 솜씨 없는 바느질로 다시 그대를 생각하는 동안 말없이 말을 건 나와 내가 잘 화해하고 있더군요. 참나무 좌탁 아래 놓아둘까? 강돌 위에 깔고 앉아 강을 바라볼까? 그러다가 아니야, 그대에게 주어야지 하고는 만져보며 또 만져보며 가뿐해진 마음을 부지런히 깁습니다.

2009-07-07

홍희덕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서민 소비생활 촉진해야 대한민국 경제 되살아나” 2008년 총선 당시 환경미화원 출신 국회의원으로 유명세사회적 약자·서민들 권익 옹호·생활향상 노력 보람 느껴현재 비정규직 문제, 정부가 나서 정규직 전환 주도해야" 대부분이 석·박사, 판·검사출신인 국회에서 저 같은 노동자출신이 의정활동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저도 있었고 저를 바라보는 국민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치란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경북 상주의 조그마한 아이에서 아버지를 도와 일하는 소작농으로, 그리고 우유배달과 도로포장일 등 그 옛날 우리네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가족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그러다 청소부, 즉 요즘 같지 않았던 냉대 속의 환경미화원 출신의 국회의원. 그가 경북 상주 출신의 홍희덕(비례대표) 민주노동당 의원이다. 인터뷰를 통해 “대부분이 석·박사, 판·검사출신인 국회에서 저 같은 노동자 출신이 의정활동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저도 있었고 저를 바라보는 국민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문을 뗀 그의 꿈은 서민이 행복해지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5명 중의 1명인 홍 의원은 다른 정당의 10배의 몫을 해야 한다. 때문에 의원실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오히려 본회의장이나 상임위에 있는 것도 감사해야 할 지경. 그가 찾아가야 할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있었던 시간. 그 시간에도 그는 쌍용차 문제라든가, 비정규직법 관련 문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경북 상주가 고향이신데, 당시의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78년도만 하더라도 아직 우리나라가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70년대 공업화가 진행되고 부동산개발도 진행됐지만 그것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지요. 노동자, 서민들은 그때도 지금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래 초등학교 졸업 후 13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소작농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78년 배곯는 자식들을 볼 수 없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서울에 와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유배달, 도로포장 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93년도에 환경미화원이 되면 자녀들 학자금을 지원해준다는 말에 의정부시에 환경미화원으로 취직하게 돼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상주의 은척 초등학교 당시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그 시절 이야기야 다들 어렵고 힘들던 시기였다는 것이 기억합니다. 십릿길이 넘는 거리를 꽁꽁 언 발과 손을 입으로 불며 학교에 가던 일이 기억이 납니다. 밤에 산길을 갈 때는 무서워서 크게 노래부르며 뛰어가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가난입니다. 다들 가난했지요. 그래서 어릴 적부터 아버지 농사를 도우며 노동을 했습니다. 얼마 전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습니다. 옛날 기억도 많이 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실 보수적 성향이 강한 대구와 경북 출신으로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대구·경북지역이 좀 보수적이라는 인식이 있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난한 노동자, 서민의 삶을 살아오다 보니 노동자, 서민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진보정당에 가입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93년 의정부시에 환경미화원으로 취직해서 생활이 조금 나아지나 싶었지만 98년 IMF 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으로 환경미화원들의 소속이 의정부시 시설관리공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사회적 약자인 환경미화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운동을 하게 됐고 자연스레 노동조합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정치세력화를 고민하고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지난해 총선 당시에 환경미화원 출신 국회의원으로 유명세를 탔는데. ▲처음 국회에 들어올 때는 사실 걱정을 많이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대부분이 석·박사, 판·검사출신인 국회에서 저 같은 노동자출신이 의정활동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저도 있었고 저를 바라보는 국민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치란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년 전 처음 들어올 때처럼 임기가 끝날 때까지 노동자, 서민들의 이해를 대변하자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사회적 약자, 노동자, 서민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의원님은 6,70년대를 산 억척스러운 아버지의 느낌인데, 고향민들에게 하실 말씀은 ▲과거 6,70년대 우리가 살아갈 때 다들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었습니까? 전쟁 직후 이어진 가난과 수많은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우리 노동자, 서민들은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아왔습니다. 지금 또다시 경제위기다 뭐다 하면서 서민들의 삶이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대구·경북지역의 서민들의 삶도 많이 힘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힘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노동자, 서민들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온 저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려울 때일수록 노동자,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저 자신도 다짐하고 있습니다. -현재 비정규직법 문제로 국회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은 비정규직의 남용과 차별입니다. 이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기간을 유예한다던지 하는 방식으로는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금 정부가 나서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주도해야 합니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가 주장하는 비정규직법 개악은 결코 동의할 수 없으며 오히려 비정규직의 사용을 제한하는 형태로 비정규직의 숫자를 줄여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저임금의 소폭 인상, 그리고 박사 환경미화원 등이 현재 사회의 모습입니다. 의원님이 바라시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있다면. ▲얼마전 2010년 최저임금이 결정됐습니다. 고작 2.75% 인상, 110원이 올랐습니다. 경영계와 정부에서는 경제가 어려워서 최저임금을 오히려 삭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어떻습니까? 경제가 어려우니까 오히려 최저임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 많은 나라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경제가 어려울수록 최저임금을 인상해서 서민들이 소비를 하고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경제가 살아납니다. 한국은 지금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최저임금은 전체 노동자 평균임금의 50%는 되도록 올려야 합니다. 제가 법안까지 제출해놓은 상황입니다. 이명박 정부와 국회가 진심으로 노동자, 서민들의 생활과 삶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홍희덕 국회의원은 1949년 경북 상주 출생, 은척초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 93년 경기 의정부시 환경미화원으로 입사, 2004년 제3대 경기노동조합 위원장, 2006년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초대위원장, 2008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2009-07-06

법원 회생절차개시 결정받은 C&우방 심명대 C&우방 법정관리인 겸 사장

“MA 통한 조속한 매각에 속도 내겠다” 임직원·채권단 `비상대책위` 동분서주 “지역·출향기업인이 인수해 줬으면…”“20여년간 지역민들의 사랑으로 성장한 지역의 대표적인 브랜드인 C우방이 사라져서는 안됩니다. 그동안 쌓아올린 지역 브랜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인수·합병(MA)을 통한 매각이 조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C우방은 지난 11일 법원의 회생절차개시 결정과 함께 심명대씨가 C우방 법정관리인 겸 사장으로 선임되며 MA를 통한 매각에 속도를 내고 있다.-C우방 회생에 막중한 임무를 맡으셨는데….▲C우방이 지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큰 만큼 책임감도 무겁다. 우방이 기력을 차려 지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으로 다시 서야 하지만 주변 여건이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자력 회생은 불가능해 MA를 통해서만 회사의 장래가 담보될 수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지난달 10일 삼일회계법을 매각 주관사로 선정하고 자산실사와 채권내용 등을 파악해 오는 16일 매각공고를 내는 등 속도를 내려고 한다. 지역 또는 출향인사가 인수하기를 기대한다.-C우방의 현 상황과 MA 일정은.▲현재 직원임금이 9개월 체불 상태이고 협력업체 납품대금 미지급, 운영자금 고갈 등으로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다. C우방을 살려내기 위해 경영진이 아닌 임직원과 채권단으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가 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는 등 직원들이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하고 있어 대구시와 지역민들의 성원이 필요하다. 특히 대구시를 비롯한 지자체와 지역민, 채권단 등이 참여하는 사모펀드조성, 금융기관 지원 등의 대책을 구상하고 있다. 우방은 빠른 시일 내에 매각을 위해 16일 일간지 매각공고를 내고 24일까지 인수의향서(LOI) 접수를 통한 예비실사, 8월19일 입찰, 8월21일 우선협상대상자 통보, 8월27일 양해각서(MOU) 체결, 9월25일 최종계약 체결 등으로 일정을 잡았다. -최근 언론에서 현장직원 임금직불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했는데….▲언론에서 터져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내용을 확인해본 결과 현장 직불에 대한 경영인의 인감 날인이 빠진 부분이 문제가 됐다. 그러나 이 부분도 당시 결재권자인 건설본부장과 현장소장 등이 정상적으로 회의를 거쳐 결제 품의를 받았으나 이후 결제 과정에서 경영진과 비대위 간의 갈등이 심화되며 결재라인이 혼선돼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직원이 혼자 살겠다고 가로챈 것도 아니고 문서 위·변조도 사실과 다르다. 이번 사건은 다분히 MA를 추진 중인 회사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 회사 명예를 훼손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처하겠다.-MA에 관심을 가지는 기업은 그리고 MA를 빠르게 진행하는 이유는.▲최근 매각주관사인 삼일회계법인과 접촉한 결과, 3~4군데에서 인수에 대해 관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지역 또는 출향기업인이 인수해주기를 가장 바라고 있다. MA에 속도를 내는 것은 대형 국책사업인 4대강 살리기 사업이 벌써 발주되는 등 기업이 회생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업은 우방과 화성, 서한 등으로 손에 꼽을 정도이다. MA가 빨리 이루어져야 4대강 살리기 사업 등의 국책사업 수주를 통해 기업을 정상화될 수 있다./이곤영기자 lgy1964@kbmaeil.com

2009-07-06

`킬 빌`

이 영화는 원래 `킬 빌`이라는 한편으로 된 영화인데, 런닝타임이 길다는 이유와 상업적인 목적으로 `킬 빌 Vol. 1`과 `킬 빌 Vol. 2`으로 나뉘어 개봉했다.감독이 동양 문화를 좋아해서 그런지 영화 내내 일본 사무라이 칼이 등장하고 사무라이 정신이 바탕을 이룬다. 킬 빌 Vol. 1에서는 영화의 반이 일본을 무대로 한다.타란티노가 동양 무술 영화의 마니아라는 사실은 너무 유명하다. 홍콩 쇼브러더스의 로고를 띄우는 장난스런 오프닝부터 시작해서 사지절단 무술과 사무라이 영화의 피분수가 솟구치는 액션 장면,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이 보이는 캐릭터, 무엇보다 이소룡의 노란색 트레이닝 복을 입은 주인공까지 타란티노는 자신이 보고 열광한 영화를 재료 삼아 `킬 빌`이라는 큰 그릇에 넣어 화려하고 그득한 성찬을 내 놓았다.다음 8가지 사항들을 알고 보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1. 영화의 라스트씬에서 모든 복수를 끝내고, 소파에서 휴식을 취하는 브라이드(우마 서먼)의 모습은 `펄프픽션`에서 빌려왔다.2. 엘 드라이버(대릴 한나)와 브라이드가 버드(마이클 매드신)의 트레일러에서 싸우는 장면을 눈썰미를 가지고 지켜본 관객이라면 대릴 한나가 출연한 `블레이드 러너`포스터를 발견할 수 있다.3. 장장 13분이나 되는 영화 엔딩 크레딧이 끝나면 우마 서먼이 대릴 한나의 눈알을 뽑는 장면이 어떻게 촬영이 되었는지 볼 수 있다.4. 타란티노는 버드가 브라이드를 생매장하는 장면에서 `황야의 무법자`의 영화음악을 사용했다.이 음악이 `황야의 무법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악당들에게 붙잡혔다가 관에 주검 대신 자기 몸을 넣고 탈출하는 장면에서 흐르던 음악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올드팬이라면 감회가 남다를것 같다.5. 전편보다 말이 많아진 `킬빌2`에는 `슈퍼 히어로`를 다른 식으로 접근하는 빌의 발상에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빌은 슈퍼 히어로들이 지니고 있는 양면성을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하는데, 이는 실제로 데이빗 캐러딘과 타란티노가 나누었던 대화다.6. 원래 브라이드에게 쿵푸를 가르치는 백발의 파이 메이 역은 타란티노 본인이 연기하려고 했지만 1편에서 크레이지 88의 대머리 두목으로 출연했고, 무술의 조예가 깊은 유가휘에게 최종낙찰됐다.파이 메이라는 캐릭터는 쇼브라더스의 전속배우였던 유가휘가 출연한 영화 `홍휘관`에서 빌려왔다.실제로 유가휘는 남파소림권이기도 한 홍가권을 익힌 진짜 무술인으로 황비홍의 직계제자라고.7. 타란티노 감독과 절친한 영화동료인 사무엘 L.잭슨은 브라이드의 결혼식장에서 축가를 연주하는 오르간 주자로 깜짝 출연했다.8. 2편의 백미인 브라이드와 엘 드라이버의 결투는 원래 넓은 황야를 무대로 펼쳐질 예정이었으나 촬영 하루 전날 타란티노는 버드의 트레일러로 장소를 변경했다.타란티노는 한 인터뷰에서 “현재 `킬빌3`를 기획 준비중”이라고 말문을 연 뒤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 `속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처럼 처음부터 이 작품이 나의 달러 삼부작(Dollars Triogy)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타란티노가 밝힌 `킬빌3`은 `킬빌1`에서 브라이드에 의해 희생된 버나타 그린(비비카 A.폭스)의 딸 니키가 주인공으로 나설 예정.내용은 빌의 모든 유산을 상속받은 소피(줄리 드레퓌스)가 니키를 키워 브라이드에게 보내고 니키가 차세대 브라이드가 된다는 내용.15년후 정도에나 제작이 가능할 `킬빌3`을 위해 몇몇 장면을 미리 찍어놓았다고 하니 역시 타란티노 다운 발상이다.다음주에 계속

2009-07-03

2. 공민왕은 왜 안동을 피난처로 택했나

공민왕 몽진 당시의 정세 1360년 홍건적은 해로를 거쳐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산발적으로 침입하는 한편 요동 지방에서 활동하던 홍건적의 대부대는 원(元)의 상도를 공격했다. 같은 해 9월 원이 대군을 동원해 만리장성 이남과 이북의 양 방면에서 홍건적을 포위해 압박하자 궁지에 몰린 홍건적은 진로를 고려로 돌렸다. 이에 따라 고려는 다시 한 번 홍건적과 결전을 치러야만 했다. 공민왕 10년인 1961년 10월 20일 10만여 명의 홍건적이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서 고려의 영내에 침입했다. 이들이 5일 만에 삭주를 거쳐 이성을 점령하자 고려 조정은 홍건적을 방어하기 위한 지휘부를 편성했다. 방위군을 전진 배치하는 한편 각 도에서 장정을 징발하고 선비와 향리가 출전을 자원하면 관직을 주고 천민이 출전을 자원하면 양인 신분을 주는 우대를 통해 전투 병력의 확충에도 팔을 걷었다. 그러나 1차 홍건적의 난을 비교적 쉽게 제압한 바 있는 상원수 안우와 도지휘사 이방실 등이 지휘한 고려군은 홍건적을 다소 과소평가했다. 청천강 방어선에 머물던 고려군은 홍건적이 한꺼번에 대부대를 남하시킬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경계태세를 게을리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중과부적으로 고려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홍건적은 놀라운 기세로 남하했다. 패배와 퇴각을 거듭한 고려군이 개경까지 퇴각하자 고려 조정은 개경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파천을 결정하기에 이른다.눈보라 맞으며 초라한 몽진 파천 계획에 따라 고려조정이 부녀자와 노약자를 도성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하자 개경 도성의 민심은 크게 흔들렸다. 최영과 이방실 등 무장들은 공민왕과 문신들이 피난길에 오르자 앞을 가로막고 도성의 사수를 주장했다. 최영 등이 국왕의 파천을 반대한 것은 국왕이 조정을 지켜야 군대의 사기가 유지되고 의병모집도 쉬워지며 그래야 반격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문신들은 개경의 성곽이 불완전하고 비축된 양곡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파천을 강행했다. 이때 최영은 통분을 이기지 못해 울면서 “주상께서 개경에 머물며 종묘와 사직을 지키셔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다고 `고려사`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결국 겨울이 닥쳐오는 11월 19일 공민왕 일행은 개경을 떠났다. 20일 파주 분수원과 양주 영서역을 거쳐 21일에 광주 사평원에 도착했다. 당시 이 지방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도망친 뒤였고 고을의 행정책임자만이 쓸쓸이 남아 왕을 맞았다. 이천에 이른 24일에는 눈과 비가 함께 섞여 휘몰아치는 궂은 날씨여서 공민왕은 옷이 눈비에 젖어 얼어붙자 모닥불을 피워 옷을 말리는 등 초라함을 면치 못했다. 25일 충주 북쪽의 음죽에 도착했지만 발길이 닿는 지방마다 관리와 백성은 도망친 뒤였으므로 공민왕 일행의 고생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이 같은 백성들의 외면과 함께 피란 중 전해진 수도 개경 함락 소식은 공민왕으로서는 그야말로 뼈 아팠을 것이다. 안동에 이르러 비로소 극진한 대접 거쳐 온 지방마다 국왕의 지위에 걸맞은 대접은커녕 눈보라를 뚫고 갖은 고생만 겪은 초라한 몰골로 왕은 충주와 문경을 거쳐 예천과 용궁을 지나 12월 25일 한 달 정도 만에 복주(福州:안동)에 도착했다. 안동의 초입인 송야천에 공민왕이 이르러 다리가 놓이지 않은 냇물을 건너야 할 상황에 놓이자 추운 겨울 이 곤란한 장면을 본 안동의 젊은 부녀자들이 서로 등을 잇대 인교(人橋)를 만들어 노국공주 일행을 건너게 했다고 전설로 전한다. 이는 다른 고장에서는 받아본 적 없는 극진한 대접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깃발을 앞세우고 관복 행렬이 줄지어 나타나 왕을 맞이하고 궁궐을 정해 어가를 모시니 공민왕이 비로소 기뻐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공민왕 일행은 그동안 지나온 다른 고장과는 달리 안동에서는 고을 입구에서부터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안동의 목사였던 김봉환과 토착세력은 주민들과 힘을 합쳐 공민왕을 성심껏 보위하면서 재기에 필요한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민왕은 나중에 수도 개경을 수복한 것을 두고 안동 주민들의 정성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정도로 이때의 고마움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실제 공민왕은 안동의 주민 대표들에게 옥대와 옥관자, 상아홀 등 귀중품을 하사했는데 이는 홍건적의 1차 침입을 물리치고 개선했던 무신에게도 노국공주의 반대로 하사하지 못한 귀중품이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당시 안동의 안기역 관리들에게도 여러 종류의 귀중품을 하사했다. 개경에 환도한 뒤 안동과 안동 주민들의 따뜻한 대접을 잊지 못한 공민왕은 복주목(福州牧)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조세를 면제하기도 했다. 대도호부란 지금의 광역자치단체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행정단위다. 이와 함께 공민왕은 손수 붓과 벼루를 가져다가 자신이 몽진의 시름을 달랬던 안동의 누각에 `영호루(映湖樓)`의 현판을 써서 내려 걸어두도록 했다. 임시수도는 왜 하필 안동이었나 안동은 고려의 건국부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등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패한 뒤 수세에 몰리자 찾은 곳은 안동이었다. 태조 13년 안동지역의 토착세력인 삼태사(三太師)가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친 공으로 안동부로 승격됐다가 다시 영가군(郡)으로, 성종 14년 길주자사(吉州刺史)로 바뀌었다가 현종 3년 다시 안동부라 했다. 이후 명종 27년 김사미와 효심 등이 반란을 일으켜 이를 안동부에서 평정한 공으로 도호부(都護府)로, 신종 7년 동경 야별초의 패좌 등이 일으킨 반란을 막아낸 공으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했다. 이후 다시 복주목으로 고쳤다가 공민왕에 의해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된 것이다. 이 같은 안동의 지명변천 및 승격과 강등의 역사적 사실로 미뤄 안동 지역은 당시만 해도 지방지배의 핵심이자 군사 전략상의 요충지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들로 안동은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고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여러 유리한 점을 가진 지역이었다. 홍건적은 북에서 처내려왔기 때문에 주변에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험준한 산들이 에워싼 안동의 지형은 적의 날랜 기병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상당했다. 또한 내륙이라는 특성으로 서남해안에 자주 출몰한 왜구의 침략을 우려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식량은 물론 철을 비롯한 각종 물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에도 유리했다. 이외에도 안동은 수차례 반란을 제압한데서 알 수 있듯이 `남쪽에서 충성과 의리가 가장 뛰어난 고장`으로 고려 왕실은 인식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전란을 맞아 고려의 임시수도가 된 안동은 왕을 보필해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왕이 수도를 떠나는 몽진이 결코 흔치 않았기 때문에 왕의 방문지라는 강한 자부심을 안동사람들은 지녔고 지금까지도 그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정태원·이임태기자 lee77@kbmaeil.com

2009-07-03

충남 예천 남연군의 묘

` 2대에 걸쳐 천자 배출` 천하의 명당 흥선대원군이 가야사에 불지른 후 석탑 부숴 묏자리 만들어묘 옮긴후 7년뒤 `고종` 탄생… 완벽한 `배산임수` 최고 명당 명당(明堂)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일에 썩 좋은 자리`, `풍수지리에서 후손에게 장차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는 묏자리나 집터`로 나와 있다. 이번 충남 지역 답사의 마지막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묘를 찾았다. 흥선대원군은 잘 알려진 대로 왕족에 대한 안동김씨의 감시와 멸시가 심해지자 파락호(破落戶)로서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철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병약해지자 조대비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기에 이른다. 흥선대원군은 풍수지리의 대가인 정만인을 불러 경기도 연천에 있는 부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고자 명당을 추천 받는데, 이때 정만인이 두 곳의 명당을 천거하게 된다. 한 곳은 자손이 만대에 걸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명당이고, 다른 한 곳은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명당이라고 천거하는데 흥선대원군은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온다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의 명당자리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가야사라는 사찰과 석탑이 있어서 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원군은 가문의 가보인 `단계 벼루`를 가야산 주지승에게 선물로 건네고, 그 당시에 충청감사로 있던 자를 회유해 가야사의 스님들을 다른 사찰로 보내기에 이른다. 1844년 어느 날 가야사에 불을 지른 흥선대원군은 직접 석탑을 부수고 묏자리를 만들어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게 된다. 묘를 옮긴 지 7년 후 차남 명복을 낳았는데, 명복의 나이 12세에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 가야사를 없앤 대원군은 인근 골짜기에 절을 지어 보덕사(報德寺)라 이름 짓고, 개운사 주지인 도문을 초대 주지로 삼은 후에 남연군묘 수호일품대승이라는 직책을 내려 묘를 돌보게 하였다. 1868년에는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하고 나서 대원군과 통상 문제를 흥정하고자 남연군묘의 시체와 부장품을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쳐 대원군이 쇄국정책강화와 천주교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인 남연군의 묘는 높은 언덕에 반구형 봉분이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앞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물과 비석이 서 있다. 주차장에서 마을 길을 따라 5분여 정도 걷다 보면 남연군의 묘가 보인다. 마을 길을 따라 걸을 때만 해도 그냥 조용한 시골마을 정도로만 여겨졌는데, 묘가 있는 언덕에 올라서니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천하의 명당이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짧은 순간이지만 바람도 멈춘 듯 주위가 고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딱 잘라서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굳이 글로 표현하자면 `포근함`이었다. 이곳을 찾기 전에 답사지도위원께서 “남연군묘에 가보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그곳이 명당인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말 그대로였다. 풍수에 대해서는 `배산임수`를 들어 본 것이 고작이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알 수 없는 포근함이 이곳이 명당임을 느끼게 하였다. 시야가 확 트인 묘의 전면에는 좌·우에서 내려온 산의 줄기가 맞다은 듯 이어지고, 후방과 좌·우에는 높고 낮은 산이 인근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남연군묘의 이장과 고종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가 세상에 전해지면서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한바탕 명당 찾기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지금도 유적 답사를 다니다 보면 명산의 사찰 주변에 무덤이 많고 특히 탑이 있었던 자리에 무덤이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때부터 유행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대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부모의 묘를 이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이인제 의원 등 수많은 대권 도전자와 대권에 뜻을 둔 정치인들이 조상의 묘를 소위 명당으로 이장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09-07-03

윤희정 기자가 만난 여성들 (72) 김인순 포항차인회장

茶 한잔 마시며 찻잔 속 여유를 담다 26년간 다도교실 운영… 2천여명 제자들 배출포항여성차문화축제 10회째 열며 우리차 홍보 김인순(79·포항시 북구 중앙동 59번지·사진) 포항차인회장은 경북도내 최고령 다도인이다. 경남 김해가 고향인 그녀는 남편과 결혼후 포항에 정착하면서 올해로 26년째 다도 인생을 살고 있다. 경기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그녀는 지난 1983년 1월 (사)한국차인연합회에 입회해 (사)한국차인연합회포항차인회를 직접 설립했다. 1994년 7월 한국다도대학원 교수 자격증을 취득하던 그해부터 한국차인연합회 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1974년경에 일본의 지인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동경에 가게 됐다. 그 집이 바로 일본에서도 이름있는 表千家(오모데센게)의 교수집이다. “생전에 보지도 못한 차(茶)를 대접 받고 당혹스러움을 본 다도교수님이 한국에도 茶가 있느냐 하고 묻는데 나는 그 순간 입이 딱 다물어졌어요. 과연 우리나라는 차가 숭늉인가?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쥬스, 사이다인지, 아니면 커피일까?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으며 대답을 할 수가 없었지요. 이 순간이 계기가 되어 한국에 돌아와서 백방으로 우리 차 알기에 앞장섰으며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때, 교수분이 2007년 포항시청 개항 기념 때 한일다도 교류하신 교수님 이시지요.” 그녀는 다도가 주는 보람으로 단연 `여유로움`을 꼽았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취미라고 귀띔했다. “우리는 무한경쟁 속에 살고 있어요. 학교 들어가서부터 계속 남보다 한 점이라도 앞서야 했으며, 사회에서도 모든 면에 심사기관이 있어 대상이다 은상이다 하며 또한 겨누며 마음 다치게 합니다. 그러나 다도(茶道)란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다도를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의 경지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내면과의 부단한 싸움, 자기를 이기면 성공하는 것 입니다. 다도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철저하게 상대방을 배려함이 스며 있으며, 차 생활에는 예절이 덧붙여 가게 돼 있습니다. 예절이 플러스 돼 있다는 것이 가장 좋은 점이라 할 수 있지요.” 26년간을 쉬지않고 다도 교실을 운영해 오면서 하나의 조직이 자연이 생기게 되니 많은 사람을 소리 없이 하나같이 한결같이 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 만은 아닌 것. 그녀는 바쁘게 살며 마음의 여유가 없는 현대인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것은 차 생활이라며 사람으로 하여금 예의롭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차 한 잔 마시는 짧은 시간이지만 이 짧은 시간에 몸에 배고 습관이 되어서 차츰 자기의 마음속에 향유하는 시간과 공간이 한 없이 넓어진다면, 자기의 인생을 멋지게 설계하는 항목이 생길 것입니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을 놓아보기도 하고, 삶의 갈증난 목을 적셔보기도 하는 마음의 여유, 이것이 정신적인 건강이 됩니다.” 그녀는 최근 포항시민에게 있어 최고의 영예인 포항시민상을 수상했다. 포항시승격 60주년 뜻깊은 행사날에 수상하게 돼 그 기쁨이 배가 됐다고 했다. “차! 하면 보통사람들 생각에도 굴러다니는 차로 생각하는 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굴러다니는 차가 아니고 기호음료인 마시는 차로 인식하게 되어 무엇보다 기쁩니다. 말하자면 차의 위상이 이 만큼 높아졌으며 많은 사람이 차를 즐겨 찾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 시민상은 비단 본인에게 준 것이 아니며 차를 사랑하는 차인들에게 주신 큰상이라 믿습니다. 그동안 차를 찾는 곳이라면 앞뒤 돌아보지 않고 경제적인 문제 등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으며 무조건 홀린 듯이 쫓아가서 찻자리를 폈던 것입니다. 그 회수, 그 많은 시간 등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요.” 그녀는 여성들을 위한 `포항시 여성차문화대축제`를 올해 10회째 열고 있다. “차가 무언지도 모르는 20여년전부터 우리차를 알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포항 덕수공원에서 먼저 충헌탑에 헌다를 시작으로 또한 반공비에도 동시에 헌다를 했으며, 두리차회를 하면서 찾아오는 시민들에게 차를 음미하게 했으며, 가을에는 송라 보경사에 10월 3째주 일요일에 등산객들에게 무료 차 봉사를 지금까지 하면서 우리차를 알리는데 앞장서 왔습니다. 처음에는 무료 시음회라고 하니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공짜 뒤에 무엇인가 대가를 바라는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했으나 진정한 뜻을 알았기에 돌아가는 길의 등산객들의 호응은 너무도 좋았지요. 이때는 떡에도 차를 넣고 하여 가마니로 해서 가지고 갔었습니다. 엄마 따라 온 아이들의 저 떡 좀 얻어달라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그녀에겐 2천여명의 제자들이 있다. 포항시 북구 신흥동에 위치한 청정다례원은 포항다도인 배출의 산실이랄 수 있다. “청정다례원에 들어오면 본원에 들어오면 한국, 중국, 일본 세나라의 차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자라나는 문생들이 직접 중국이나 일본에 가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전체에도 이와 같은 공간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초부터 차 생활과 우리나라 전통예절을 배울 수 있도록 한 공간입니다.” 다도는 여성들이 주로 하고 번거롭다는 편견에 대해 그녀는 우리나라는 원래 선비들이 차 생활을 많이 했으나 최근에는 남성들은 직장관계로 여성들이 많은 편이다. 가정에서 차 생활은 자녀들과의 대화의 시간, 차를 마시면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다도예절이야 말로 최상의 웰빙이라는 것. “웰빙이란 최상의 몸과 마음을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생각이 나옵니다. 사실입니다. 다도예절이야말로 웰빙입니다.” 여름에 어울리는 우리차를 물으니 “여름에는 차를 우려서 유리다관 등에 넣어두고 시원하게 마시라”고 추천한다. “차라고 해서 무조건 뜨거운 것을 마시는 것은 아닙니다. 냉차를 해서 마시는 것 또한 최상이다. 특히 여름에는 연화차나 오미자차에 얼음을 넣어서 시원하게 마시는 것도 좋습니다.” 그녀는 우리차를 최고의 차로 꼽는다. “우리나라의 차는 최고의 찻잎으로 만든 것이며, 우리 한국 사람의 입맛에 어울리게 덖어서 만든다는 것입니다. 일본차는 증기로 찌는데 그래서 증제차라고 하는데 색은 아름답습니다.일본은 색성민족이라고 합니다. 색상을 중요시하기에 증기로 찌는 것이지요. 이 차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시기에는 느끼하고 미원 같은 조미료를 넣은 듯한 맛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40여년을 다도예절을 가르치는 사범으로 다도인으로 살며 여성계의 큰언니로 존경받고 있는 그녀. 잘사는 것은 무엇으로 생각할까. “사람이 뒤돌아보면 잘 산다, 잘 살았다는 것은 후회 없는 인생살이가 될 것입니다. 정말 정갈하고 질서있게, 검소하고 덕망스럽게 산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 연세가 많으신데 강의하랴 시범보이랴 힘들지 않는지 물었다. “다도가 끝이 있나요? 나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할 겁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09-07-03

독도 지키기 선봉 나선 최상식 독도평화호 선장

“전 국민이 부여한 임무 사명감 다해 수행” 20만t급 상선·썬플라워호 선장 역임한 베테랑 항해사“선박 운항한지 27년만에 가장 큰 보람… 책임감 느껴” 국민의 염원을 담고 독도 지키기에 나선 독도평화호. 독도 영토를 지키는데 큰 역할을 하는 선박이다. 독도 평화호가 최근 취항식을 하고 독도 지키기의 최선봉에 나섰다. 역사적인 현장의 중심에 서 있는 최상식(49)독도평화호 선장.-독도평화호 초대 선장이 된 소감은.▲대학을 졸업하고 지난 82년부터 20만t급 무역선과 지난 91년부터 2천t급 여객선 선장을 하다가 작은 선박에 선장으로 승선했지만 이 세계에서 가장 큰 선박의 선장이라는 자부심을 느낀다.독도를 지키고 가꾸는 역사적인 현장에 선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고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낀다. 선박을 운항한지 27년 만에 가장 큰 배를 운전한다고 생각하며 가장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독도평화호선장을 지원한 동기는. ▲ 올 초 독도관리선 건조와 직원 책용 소식을 듣고 공직 생활에 대한 동경과 독도관리라는 역사적인 사명을 경험하는 것도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18년 동안 조선한 경험과 노하우로 독도를 가꾸고 지키는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선박운항 경력은.▲ 지난 82년 목포해양대학 졸업과 동시 무역선에 승선 수출의 역군으로 9년간 세계 각국을 누볐다. 지난 91년 5월 (주)대아고속에 입사해 지난 94년 우리나라 최연소(34) 여객선 선장으로 목호에서 울릉도를 왕복한 대원카타마란호을 몰았다. 이후 씨플라워호, 오션플라워호, 한겨레호 선장 등 울릉도 여객선만 18년을 운전했다. -독도평화호가 다른 선박과 다른 점이 있다면. ▲독도평화호는 알루미늄 선체로 일반 선박과는 달리 스크루와 키가 없는 물 분사 추진방식의 특수한 선박이다.따라서 일반 선박을 운전하던 선장들은 조선을 하기 힘들다. 저는 18년동안 물 분사 방식의 선박을 조선한 경험이 있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물분사 선박을 조선했던 풍부한 경험이 있다. 또한 이 선박이 정선해 있을 때 선박이 움직이지 않도록 자동적으로 움직임을 조정해주는 장치가 부착돼 있는 것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각오가 있다면.▲독도평화호는 영토를 수호하고 보존하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국민적으로 독도사랑운동이 전개되고 있고 독도수호의 최일선에 저희 독도평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해 독도평화를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게을리 하지는 않겠다. 또한 지금 주어진 독도평화호의 선장의 임무는 전 국민이 나에게 부여한 임무로 생각한다. /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2009-07-02

전국 여자천하장사 씨름대회 4강 신은현 씨

“전국대회 여자부 통합장사가 목표” “여성 씨름인구 크게 늘면서 기량 날로 발전”“방어기술 등 훈련으로 정상 꼭 제패하겠다” 제1회 국민생활체육 전국 여자천하장사 씨름대회가 지난달 28일 전남 구례체육관에서 막을 내렸다.전국 씨름왕(1997년) 출신 신은현(38)씨는 초대 여자천하장사에 등극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갖고 경북대표로 대회에 참가했으나 준결승전에서 2판을 모두 비긴뒤 계체패를 하며 아깝게 결승진출에 실패했다.신은현씨를 어렵게 꺾고 결승에 오른 임수정(25·부산)은 초대 여자천하장사에 올라 안타까움이 더했다. 97년 김종호(42·포항시 남구 대잠동)씨와 결혼하면서 씨름을 그만뒀다가 다시 샅바를 잡은 가현(10·대이초 3년), 채언(7) 두딸의 엄마인 신은현씨를 만나 소감과 각오, 앞으로의 목표 등에 대해 들어봤다.-아깝게 결승진출에 실패했다. 대회 출전 소감은.▲옛날 실력만 믿고 훈련을 많이 하지 못한채 출전해보니 자세도 잡히지 않는등 부족한 점이 많았다. 또한 여성 씨름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실력이나 힘, 기량등이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월(?)이 흐른만큼 젊은 선수들을 이기려면 처음부터 다시한다는 마음으로 훈련해야 할 것 같다.-오랜만에 다시 샅바를 잡았는데 앞으로의 목표는.▲당연히 여자천하장사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우선 당장 오는 10월에 있을 전국대회 여자부 통합장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체계적인 훈련을 받을수 있는 여건이 안돼 안타깝다. 남은기간 열심히 훈련해 다시한번 정상에 서고 싶다.-여자 천하장사에 오르기 위한 라이벌을 꼽는다면.▲여자씨름은 남자들과 달리 변수가 많다. 그만큼 기량이나 씨름에 대한 이해도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대회에 출전하는 모든 선수가 라이벌이다. 굳이 꼽는다면 임수정, 임혜미, 정은미, 박미정등이 정상의 기량을 갖춘 선수인 것 같다.-씨름을 그만뒀다가 다시 시작한 계기는.▲지난 1997년 해태유업 선수시절 전국씨름왕에 올랐다. 당시 전국씨름왕에 오른 선수는 대회에 출전할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고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됐다. 이후 2004년 규정이 풀리면서 다시 샅바를 잡았으나 아이들 때문에 훈련은 하지 못한채 가끔씩 대회에 출전해 왔다.-자신의 장점과 보완해야 할 점은 뭐라고 생각하나.▲씨름은 중심이동이 중요한 운동으로서 용인대시절 기본기를 철저하게 배운만큼 자세가 좋다고 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연함도 부족하고 균형감각이 많이 떨어졌다. 또한 상대 선수가 배지기나 밧다리기술을 걸어올때 방어기술이나 되치기 기술등이 부족하다.-가정일과 훈련을 병행하려면 힘들텐데 앞으로 각오는.▲태권도장을 운영하는 남편이 많이 이해하고 도와준다. 남편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그동안 도와준 남편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여자 천하장사에 오르고 싶다. 또한 사랑하는 두 딸에게도 자랑스런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권종락기자 kwonjr@kbmaeil.com

2009-07-01

정애원 봉사활동을 마치고

조 은 지 영일고 225일 토요일 아침, 두 번째 봉사활동을 가는 2학년 반들이 모두 입지관 앞에 모여 앉았다.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을 듣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자랑스러운 영일고등학교의 이름이 새겨진 봉사 유니폼을 입고 씩씩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한 소대의 정예부대를 보는 것 같아 왠지 웃기면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번에 우리 반은 정애원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이번이 정애원에 세 번째로 가는 것이라서 그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다가 드디어 정애원이 위치한 산 아래 논길로 접어들었다. 늘 그랬듯이 논길이 너무 좁아서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버스가 논으로 빠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 앞 쪽의 길목에 차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논일을 하다 점심을 드시며 쉬고 계시던 할머니, 할아버지셨다. 버스가 지나가기 위해선 점심상을 치우고 모두가 비켜서야 하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할아버지 한 분께서 버스 쪽을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화를 내셨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당황하시며 얼른 차에서 내리셨고, 할아버지께선 마치 담임선생님을 한 대 칠 기세로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담임선생님께서 진땀을 흘리며 할아버지께 연신 사과를 드리고 할머니께서도 할아버지를 말리셨지만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버스기사 아저씨께서도 차에서 내리셨다. 그렇게 한참동안 실랑이하다 결국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길을 비켜주셨다. 버스기사 아저씨 말씀이 근처 논 주인들은 논 근처에 정애원이 세워지고, 가뜩이나 좁은 길에 봉사다 뭐다 해서 차가 많이 다니는 것을 못마땅해 하신단다. 그래서 정애원 봉사 초반에 근처 논 주인들이 아예 고의적으로 길을 막기도 했을 정도로 말이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정애원에 도착했다. 맑은 공기에 가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날씨도 쨍쨍하여 봉사하기에 기분 좋은 날씨였다. 우리는 건물 앞에 쭉 줄을 서서 정애원 봉사자 분께 인사를 드리고 각자 봉사구역을 배치 받았다. 나는 2층에 배치되었다. 계단을 올라가자 많은 할머니 분들께서 계셨다. 먼저 인사를 드리고 네 사람씩 방 하나를 맡았다. 우선 깨끗이 청소를 하기 위해 걸레를 빨고 방을 닦으려는데 매일 청소를 해서 그런지 먼지도 별로 없고 내 방보다 훨씬 깨끗했다. 그래도 일단은 꼼꼼히 방바닥을 걸레로 훔치고 있는데 할머니들께서 우리들을 보고 미안해하시며 그냥 대충해라고 말씀하셨다. 또 우리들에게 밥은 먹었냐며 힘들진 않느냐며 계속 걱정을 해주셨다. 가슴이 정말 따뜻해졌다. 봉사를 하러 온 것이지만 내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의 말씀에 힘을 얻고 더욱더 열심히 봉사를 하기 위해 애썼다. 방바닥을 다 닦고 다시 걸레를 빨아 넌 후, 이번에는 이불을 털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온 방의 이불을 다 밖으로 가지고 나와 온 힘을 다해 이불을 털었다. 이불에서 날리는 먼지들이 햇빛에 비쳐보였다. 정말 안 털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는 생각이 들만큼 먼지가 많았다. 빨랫줄이 있다면 햇볕에 뽀송뽀송하게 말리고도 싶었지만 그냥 잠시 동안이나마 햇볕을 쬐여주는 데에 만족해야만했다. 드디어 다 턴 이불을 들고 다시 방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어느 방에 어느 이불이 있었는지가 잘 생각이 안 났다. 들고 나갈 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간 탓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정확히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자원 봉사자 선생님께 여쭤보아 겨우 이불을 원래 자리에 개어놓을 수 있었다. 봉사란 이런 사소한 일에도 섬세함과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고 내 자신에 대해 반성했다.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되었다. 할머니들께서는 식사를 하러 가시고 우리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러 밖으로 나갔다. 시원해 보이는 정자에는 등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그 옆으로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져있었다. 어젯밤 내린 비를 머금은 것 같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정말 예쁜 풍경이었다. 여름에 클럽활동 부서에서 정애원에 캠프를 온다고 하던데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2009-07-01

정부, PSI 전면 참여 선언

북한의 제2차 핵실험에 대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가 강력한 제재안을 준비 중인 가운데, 우리 정부는 26일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 참여를 선언했다.-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이란?대량살상무기(WMD)와 그 운반 수단을 차단해 WMD 확산을 막자는 일종의 국제 협력체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앞으로 우리 영해나 영공에서 WMD 운반이 의심되는 선박과 항공기를 세우거나 착륙시켜 검색을 할 수 있다. 한국의 이날 선언으로 PSI 참여국은 모두 95개국으로 늘어났다.-우리 정부, 전면 참여 선언 왜?WMD 확산을 막겠다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PSI 가입 요구에 대해, 자칫 남·북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전면 참여를 미뤄왔다. 이처럼 계속된 PSI 참여 연기가 국제사회에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이번 결정의 계기가 됐다.-북한의 핵무장 수준은?2차 핵실험으로 드러난 북한 핵무기의 위력은 지난 2006년 1차 실험 때보다 최대 20배 이상 강력해진 TNT 폭약 2만t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투하된 것이 1만5천t, 나가사키에 투하된 것이 2만2천t가량의 위력을 가졌었다. 핵무기를 실어 날릴 수 있는 미사일 제작에 있어선, 스커드(사정거리 300~500km)나 노동(사정거리 1천300km) 미사일 장착 핵탄두 개발은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북한의 핵실험 의도는?단순히 미국과의 `협상용 카드`가 아니라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체제를 유지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이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를 공격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핵무기 보유가 미국의 공격에 맞서 체제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군사적 입지가 점점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1. PSI란 무엇인가요?2. 현재 PSI 참여국은 몇 개국인가요?3. 우리 정부는 PSI 전면 참여를 왜 하게 되었나요?4. 북한의 핵실험 의도가 무엇인지 기사에서 찾아보세요.

2009-07-01

창의력 계발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상관계수가 높게 나타난다. 미네소타 대학 심리학과 토마스 보우차드 교수가 1981년 일란성 쌍둥이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에 의하면 함께 자란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아이큐 점수에 대한 가중 평균 상관계수가 0.86으로 나타났고, 따로 자란 일란성 쌍둥이는 0.72, 함께 자란 이란성 쌍둥이는 0.50으로 나타났다. 같은 환경에서 자라게 되면 일란성 쌍생아는 지능면에서 86%가량 같게 된다. 이 일란성 쌍둥이를 대상으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한 아이에게는 걷기 전에 수영을 먼저 가르치고, 또 한 아이는 보통 아이들처럼 걷기를 가르쳤다. 시간이 지난 후 비교해 보니 수영을 먼저 가르친 아이는 걷기를 어려워했고, 걷기를 먼저 가르친 아이는 수영을 어려워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아이의 입장에서 어렵고 쉽다는 기준은 어느 것을 먼저 배우고 나중 배우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람이 영어를 어려워하는 것은 우리말 보다 나중 배우기 때문이지 영어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배우느냐가 아니라 시기인 것이다. 다중지능 이론을 소개한 미국의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는 `아이들은 지적 능력의 발전 속도가 빠르고 잠재력이 크기 때문에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고 하여 어린 시절에 적절한 지적 자극을 줄 것을 강조하였다. 가드너는 지적 능력의 구성 요소를 주의집중력, 관찰력, 기억력, 사고력, 상상력으로 생각하였다. 이들 요소는 서로 관련성이 있으며 상호작용이 잘 이루어질 때 잠재력이 극대화 된다. 창의성과 관련이 깊은 관찰력, 사고력, 상상력 등은 어릴 때 적절한 자극을 주고 체계적인 교육을 하면 그 능력을 극대화 할 수 있다. 관찰력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평소에 민감성 훈련을 충분히 하는 것이 좋다. 민감성 훈련은 오감을 자극하는 훈련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 있는 것을 소재로 삼아 훈련을 진행하면 교육이라는 생각 보다는 생활로 받아들이게 된다. 민감성 훈련을 쉽게 할 수 있는 예를 들면, 음식을 할 때 보지 않고 냄새로 무엇인지 알아맞히기 게임을 한다.(후각) 눈을 가린 후 가족의 손을 만져보고 누구인지 알아내게 한다.(촉각) 가족의 옷차림이 어제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보게 한다.(시각) 요리를 맛보고 나서 어떤 재료들이 들어갔는지 알아보게 한다.(미각) 집 안에 있는 물건을 나무젓가락으로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후 어떤 물건에서 나는 소리인지 알아보게 한다.(청각) 이러한 오감 훈련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후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여 그 특징을 알아내게 하면 무엇이든지 예사롭게 보지 않을 것이다. 사고력을 키워주려면 평소에 부모가 질문을 잘 해야 한다. 질문은 비판적 사고, 논리적 사고, 창의적 사고를 키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녀가 무슨 말을 하면 `과연 그럴까?`라고 되물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어떤 사실에 대해 한 번 더 확인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습관을 가지게 한다. 논리적 사고를 키워주려면 `왜 그럴까?`라고 물어서 이유와 근거를 찾아 말하도록 한다. 창의적 사고를 키워주려면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을 것 같은 답`을 하도록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답이 하나 밖에 없는 질문(정답형 질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답이 있는 확산적 질문(해답형 질문)을 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자녀도 이러한 수준의 질문을 많이 하도록 훈련하면 창의력 계발에 도움이 된다. 상상력을 키워주려면 평소에 책을 많이 읽도록 한다. 특히 그림이 많은 책을 읽다가 그림이 적은 책을 읽고 장면을 생각하도록 하며, 각 장면에 어울리게 이야기를 꾸며 보도록 하면 좋다. 또 이야기의 중간이나 결론 부분을 자기 나름대로 꾸며서 이야기를 해 보게 한다. 또 `만약에~`를 넣어서 생각하게 하면 상상력 자극에 많은 도움이 된다. “만약에 네가 엄마라면 어떻게 하겠니?” “네가 만약 코끼리라면 좋은 점과 불편한 점이 무엇이겠니?” 이와 같이 성장 시기에 맞게 적당한 활동과 질문을 의도적으로 해 주면 자녀의 창의력은 쑥쑥 자라게 된다. Create yourself!

2009-07-01

예순일곱번째 안부 - 봄이, 짱이, 소낙비

봄이는 화실로 출근합니다. 짤막한 다리로 힘겹게 3층 계단 끙끙 올라 그림 그리는 엄마 곁에서 납작한 코, 동그란 눈으로 종일 맴돌지요. 음악을 들으며 콜콜 잠을 자는 게 대부분이지만 간식 생각이 나면 킁킁 조르기도 하고 위층 체육관에서 아이들 포도 알처럼 쏟아지면 유리문 앞으로 가서 물끄러미 내다보기도 합니다. 봄아~ 지나는 길에 문 밀고 들어서면 어찌나 반가워하는지요. 겅중겅중 뛰고 뱅뱅 돌고 머리라도 쓰다듬을라치면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눈빛을 줍니다. 짱이는 회사에 출근합니다. 큰딸이 낳은 아이를 봐주느라 아내가 서울로 간 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있을 짱이가 걱정되어 데리고 출근하는 아빠, 간식과 사료 그리고 담요까지 꼼꼼하게 챙긴 배낭 속 빵빵 합니다. 그 녀석 물기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면 사장님 체면이고 뭐고 짱이 보다 소중한 건 없습니다. 일가친척 없는 곳에서 젊은 날을 다 소진하며 기업주로 산 세월 컸다고 훌쩍 떠나 저 살기 바쁜 자식들이 서운할 때 마다 정 붙이고 맘 나눈 게 짱이였기 때문이지요. 솔직히 말해서 짱이가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니라고 장난처럼 말하면 무슨 소리냐고 얘처럼 예쁜 애가 어디 있냐고 펄쩍 뛰는 짱이 아빠 보는 마음 간혹 짠할 때가 있답니다. 그게 뭔지 아니까요. 우리 소낙비는 바닷가 마을에 삽니다. 제가 베란다에 앉아 신문을 보면 주둥이를 쭈욱 깔고 곁에 자리를 잡구요.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다 `소낙비야, 오늘 바람 참 좋재?` 하면 눈 지그시 감고 까만 코 발름거리며 `그렇네요` 바람 냄새 맡지요. 태어난 지 40일이 되어 와서 12년 훌쩍 넘는 세월을 살았으니 제가 하는 말, 눈빛, 마음까지 죄다 읽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는 얼굴로 말입니다. 이젠 녀석도 늙어 예전처럼 뛰노는 일은 줄었지만 글 쓴다고 앉은 늦은 밤이나 어쩌다 홀로 마시는 술상 앞에는 여전히 눈 맞추고 소낙비가 있네요. 봄이 엄마, 짱이 아빠, 그리고 소낙비 엄마는 압니다. 통하는 말 때문에 통하는 글 때문에 막혀버린 세상에서 아무것도 통하는 게 없어 최선을 다하는 녀석들. 그 맑은 눈망울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깊은 소통이고 울림인지를.

2009-06-30

김용창 11대 구미상공회의소 회장

“구미경제 규모 걸맞게 기업 참여도 확대”회원사 권익신장 앞장 직접적 혜택 창조“발전기획단 발족… 자생력 키워나갈 터”구미공단 1단지에 소재하고 있는 (주)신창메디칼 대표 김용창(57)씨가 제11대 구미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됐다. 김 회장은 지난 25일 열린 구미상의 회장 투표에서 19표를 얻어 18표를 얻은 류한규 후보를 1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오는 7월 8일 구미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 3년간 구미경제계를 새롭게 이끌어갈 김 회장을 만나 이모저모를 들어봤다. -상의 회장에 출마하게 된 동기는.▲수도권 규제완화 등으로 지방은 어려움에 처해있는 것이 현실이다.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업하기 좋은 도시, 교육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 상공인 여러분들과 일조하기 위해 출마하게 됐다.또한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에 변화의 바람은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인 사명이며, 상공회의소의 위상도 거기에 걸맞게 많은 변화를 추구해야 할시기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변화에 대응하고자 출마를 결심하게 됐다. -앞으로 구미상의를 이끌어 나갈 계획은. ▲50만도시에 걸맞게 구미상의도 많은 변화와 혁신을 추구할 계획이다.먼저 회원사 권익신장에 앞장설 것이다. 이를 위해 회원사가 요구하는 필요사항을 파악해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회원사가 회비납부에 대한 보람과 긍지를 갖도록 하겠다.구미경제의 규모에 맞게 상공의원 수를 증원해 기업의 참여도를 확대해 나가겠다. 회장단과 회원들이 함께 걱정하고 토론하는 등 구미상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화합의 장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구미상의 비전은. ▲앞으로 구미상의는 지역경제계의 중심지로 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항상 고민하며, 문제를 명쾌하게 풀려는 자세로 임하겠다.그리고 오는 2011년 상공회의소 임의가입에 대비해 자생력을 키울 수 있도록 구미상의 발전기획단을 발족시켜 여러가지 현안들을 해결해 나갈 계획이다. -지역경제계의 수장으로서 한 말씀. ▲앞으로 구미상의는 작은 목소리도 크게 들어 모두가 참여하는 화합의 장을 만들어 나가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따라서 회원사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어떻게 하면 구미가 `기업하기 좋은 도시, 교육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하고 앞장서겠다. 많은 조언을 부탁드린다./이승호기자 shlee@kbmaeil.com▶▶ 프로필△구미 출신, 1952년 4월14일생 △1968년 구미시 해평중학교, 1971년 대구 농림고등학교 졸업, 2008년 경운대학교 의료경영학과 졸업, 2009년 안동대학교 경영대학원 재학 중 △1999년 구미시 이업종교류회 회장, 2001년 구미 국가산업단지 중소기업협의회 초대, 2대, 3대 회장 역임, 2006년 구미 국가산업단지 초대 경영자협의회장 역임, 2006년 구미상공회의소 부회장 역임, 2008년 구미국제친선교류협회장 현임,

2009-06-30

적자기업 흑자 전환시키는 `마이더스의 손`

`적자기업 구원투수`, `소방수 CEO`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경북 김천출신의 배영호 코오롱 사장이다. 우연찮게도 적자기업만을 맡아 흑자기업으로 바꿔놓은 이력때문이다. 적자에 허덕이던 코오롱제약을 살려냈고, 코오롱유화의 성장기반을 닦아놓은 게 바로 그다. 강성노조로 소문난 구미 코오롱 노조를 보듬어 지난 2007년 `항구적 무파업선언`까지 이끌어낸 후 영업이익도 지난해에 비해 두배 가까이 불렸다. 글로벌 경기침체속에 코오롱을 고부가가치 기업으로 변모시킨 배영호 사장의 어린시절 추억들과 경영자로서의 성공비결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고향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비록 태어나기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부친 고향이 김천시 조마면이어서 김천출신이라고 해야겠죠. 학교는 부산 초량초등학교를 다니다 김천으로 전학해 서부초등학교와 김천중학교를 거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죠. 어릴 때 추억이라면 이사만 열 번 정도 다닐 정도로 집안사정이 어려웠던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세끼 밥 잘먹는 게 꿈이었죠. 소풍때는 부추김치만 싸갔을 정도였습니다. -대학때 섬유공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한창 공부해야할 고등학교 3학년때도 등록금 마련을 위해 입주 가정교사 생활을 해야했습니다. 당시 가르치던 아이가 제일모직 공장장집이었어요. 매일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와 빚독촉하던 일이 다반사였던 제 입장에서 `나는 앞으로 사업은 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한 데다, 그 집의 생활이 매우 윤택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섬유쪽이 취직도 잘 되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섬유공학을 전공하게 됐죠. -입사후 임원만 21년, CEO경력도 11년째에다 `적자기업 구원투수`란 별명을 얻었는 데, 어떤 뜻입니까. ▲워낙 상태가 안좋은 사업을 자꾸 맡다보니 제가 기업인이라기 보다 의사라는 마음이 들 때가 많았을 정도입니다. 가장 먼저 미국 뉴욕지사 근무후 1981년 귀국해 타이어코드 사업부장을 맡았는 데, 가동률이 40%도 안돼 존폐기로에 서있었습니다. 이유를 살펴보니 거래선이 금호타이어에 의존하고 있어 그 회사가 파업하면 조업이 중단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최고의 타이어회사인 미국의 굿이어사에 납품할 수 있도록 1년여 노력끝에 판로를 뚫었습니다. 그 결과 적자에서 흑자로 돌릴 수 있었죠. 1998년에는 코오롱 제약겸 코오롱 유화 사장으로 발령났는 데, 코오롱 제약은 부도직전이었습니다. 저는 부임하자 마자 300여명의 전 직원에게 1인당 100만원의 격려금을 지급했습니다. 직원 사기부터 올려놓고, 발로 뛰는 영업망을 점검해야겠다는 `역발상`을 했는 데, 이게 먹혀들었죠. 1년여만에 흑자로 돌려놨습니다. 코오롱유화 역시 재임기간동안 매출이 두배이상 늘었고, 수익구조가 개선돼 이제는 알짜배기 회사가 됐습니다. 코오롱 사장에 취임한 뒤에는 노조문제를 해결했고, 이어 구조조정과 경영혁신을 통해 지난 1.4분기 매출액 4천311억원, 영업이익 405억원으로 지난 해 동기에 비해 영업이익이 두배가까이 불었습니다. 이런 성과가 그런 별명의 유래가 된 셈입니다. -강성노조로 유명한 코오롱 노조를 노사화합의 모델로 탈바꿈시켰는 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코오롱 사장으로 취임할 때는 구미 코오롱 노조와의 갈등때문에 회사 존립까지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최우선으로 노조문제를 해결하고,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혁신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데 동의가 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해 취임식을 며칠 앞당겨 치른후 신년을 맞았는 데, 모 일간지 신년특집기사 2면에 GM대우 관련 기사가 난 걸 보게됐습니다. 영국인인 닉 라일리 GM대우사장이 신년 1월1일 인천 앞바다에서 노사상생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사진이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두가지를 느꼈습니다. 먼저 인천 대우노조가 노조운동이 제일 심했던 곳인 데, 이런 회사도 노사화합을 이루는 데,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 하나고, 둘째로 외국사람도 노사문제를 잘 해결하는 데, 같은 문화에 같은 민족인 내가 해결못할 일이 없다고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도 자신감만으로 해결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데, 비결이 있었습니까. ▲저는 사원들에게 회사, 즉 CEO에 대한 신뢰를 강조했습니다. 저를 믿고 따르면 회사도 발전하고, 사원들에게도 성과급이 돌아올 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구미공장장으로 3년을 근무했던 인연이 도움이 됐습니다. 또 그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3가지를 지시했습니다. 먼저 경산공장에 사장전용 승용차가 있었는 데, 자주 쓰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승용차를 매각토록 지시했습니다. 또 사장이 쓸 수 있는 골프멤버쉽카드도 1개만 남겨놓고 모두 팔도록 했습니다. 비서도 2명에서 1명으로 줄였습니다. 이런 작은 것들부터 솔선수범한다는 자세로 처리했습니다. 또 사원들에 대해 신뢰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전 사원 2천명에게 100만원씩 20억원을 들여 격려금을 지급했습니다. 이 돈으로 개인부채를 정리하고 같이 열심히 일해보자는 뜻이었습니다. 흔히 일 잘하면 돈을 많이 주겠다고 하지만, 저는 먼저 돈을 주면서 일 잘할 것으로 믿는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래도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 데요. ▲코오롱은 임금동결을 3년간 했습니다. 월급을 올리게 되면 회사가 어려워 정리해고를 하게 되니까 오히려 동결해서 성과를 올린 뒤에 성과급을 주겠다고 설득을 했습니다. 성과급을 주면 결국 연봉개념으로 보면 봉급이 오른 것과 같은 효과가 납니다. 그러나 노사간 신뢰가 없어서 대부분 노조가 받아들이지 못하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 노조는 받아줬습니다. 저와 회사를 믿어 준 것입니다. 제가 코오롱 유화나 코오롱 제약 사장을 맡아서 적자기업을 흑자기업으로 만들어낸 `마이더스의 손`이란 평판을 받고 있었던 것도 신뢰의 기반이 된 게 사실입니다. -최근에는 아예 노조가 영업까지 나서서 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일명 `노사부부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회사 사장은 남편이고, 노조는 부인이라는 것입니다. 남자는 바깥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고, 부인은 집안살림을 아껴쓰고 해야 그 집이 잘된다는 논리죠. 더 잘되는 집은 부인도 밖에 나가서 돈벌어오는 집이 있잖아요.(웃음) 그래서 노조위원장이 거래선에 가서 영업을 하기도 합니다. 대구 상신브레이크도 코오롱의 납품업체인 데, 노조위원장이 직접 가서 “책임지고 좋은 품질의 물건을 제때 납품하겠다”고 영업활동을 펼쳐 화제가 됐죠. 요즘은 노조에서 저보고 자주 공장에 내려오지 말고, 돈많이 벌어서 성과급을 많이 달라고 합니다. 노조위원장이 원가절감팀장을 맡아 뛰고 있고요. 이제 신뢰의 기반을 굳힌 이상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경기침체로 어려운 고향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저는 어릴 때 학비가 없어서 시험준비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그런 제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무한불성(無汗不成)`즉, 땀이 없으면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려움이 생겨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극복해 낼 때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배영호 코오롱 사장은 코오롱 배영호 사장은 1944년 부산에서 출생했으나, 초등학교때 부친의 고향인 김천으로 전학해 서부초등학교, 김천중학교를 거쳐 경북고와 서울대 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 (주)코오롱에 입사해 뉴욕지사 근무, 타이어코오드 사업부를 거쳐 1989년 산자사업본부장으로 기업의 별인 이사를 달았다. 이후 구미공장장을 거쳐 1998년 코오롱제약 겸 코오롱유화 사장을 맡아 적자기업을 흑자로 돌려놓았으며, 2006년 (주)코오롱 사장으로 취임해 코오롱 도약의 기수로 뛰고 있다.

2009-06-29

명예퇴직 앞둔 서현수 대구지방국세청장

“국세청, 권위 벗고 국민 섬기는 전통 쌓아야” 찾아가는 세정지원 등 납세자 우대 최선 다해“고향 대구발전에 기여할 새로운 방법 찾겠다”우리나라 주세법의 대가이면서 주류정책학 박사 1호인 서현수 대구지방국세청장이 국세청과의 공식적인 인연을 마치고 새로운 국세청과의 인연과 개인의 또 다른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 30일 명예퇴직 한다.주류박사로 불리는 서 청장은 국세청이 권위에서 탈피해 국민을 섬기는 전통을 세워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명예퇴직하는 서 청장을 만나봤다. - 대구·경북에서 국세청장을 하셨는데.▲글로벌 금융위기로 불어닥친 경제위기는 대한민국은 물론 대구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짧은 시간이지만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해 나가는데 국세청과 더불어 대구·경북시도민들과 함께 한 시간이 정말 헛되지 않았다. 대구지방국세청장에 금의환향 한지 꼭 6개월만인 30일 대구청 직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할까 한다. 어려운 지역경제회복과 대구청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그동안 정말 수고했고 앞으로 받은 은혜 꼭 돌려 드리겠다.- 정말 어려운 시기에 오셨고 역할을 다하신 것 같은데.▲국세청은 이제 세금 징수가 아니라 기업(납세자)을 도와 지역경제, 나라발전을 시켜주는 중간역할을 해야 하고 권위에서 탈피해 국민을 섬기는 자세로의 전통을 세워나가는 새로운 변화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따라서 비상경제상황 세정지원단을 만들어 대구·경북 지역 상공인들과 일일이 만나 기업의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도와주는 데 정말 노력했다.그간 어려운 기업에게 1만5천800여건의 납기연장, 1만6천여건의 징수유예, 238건의 체납처분 유예, 더 낸 세금 찾아주기 6천여건 등 10만여건의 찾아가는 세정지원을 펼치는 등 납세자 우대에 최선을 다했다.- 왜 주류 박사였나.▲경기도에서 근무할 당시 주류총괄업무를 보고 국세청에서 전국적인 주류정책업무를 담담하게 됐다. 따라서 국내 주류산업의 정책과 전략을 접하면서 이론과 학문으로 연계해 공부했다. 이후 주류박람회, 주류 품평회 등의 행사를 펼쳐 명품주 제도 육성과 주류혁명을 이루기도 했다.- 앞으로의 여정은. ▲서울에 있는 세무법인에 근무하면서 대학 강의도 나갈 예정이다.국세청과의 인연으로 맺은 고향의 고마움도 많이 느꼈다. 청장으로서가 아닌 개인으로서 고향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찾겠다. - 좌우명과 가족에 고마움이 있다면▲정말 내조를 잘해준 김종수 마님에게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리고 잘 자라준 아들과 딸 자식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좌우명은 서산대사의 `답설`이다.(답설(踏雪)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行(불수호난행)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서인교기자 igseo4302@kbmaeil.com▶▶ 프로필△대구 출신 △영남고 고려대 졸업 △1980년 1월 세무직 7급 공채 △안동세무서장, 국세청 소비세과장, 서울청 조사 2국장

2009-06-29

이정희 위덕대 일어일문학과 교수

정확한 시선으로 일본문학·문화 봐야일본 대학과 교류 위해 `7+1유학제도` 정착시켜“열의·성의 다해 한국 최고 학과로 만들고 싶어” 이정희(49·사진) 위덕대 일어일문학과 교수. 경기도 파주가 고향인 그녀는 1999년 위덕대로 부임해 올해로 11년째 전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8년간 일본 유학생활 후 1998년 2월 귀국해 서울에서 1년간 시간강사 생활 후 1년만에 전임이 됐다. 위덕대에 일문과가 신설되면서 부임해 `일문과 1호 교수` 타이틀도 얻었다. 처음으로 교수가 되자마자 일본인 교수와 그녀밖에 없었으니 학과장을 연이어 3년간 맡기도 했다. “당시는 미혼이었기에 24시간 모두 투자해서 학과 기틀을 마련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지요. 2000년부터 일본 대학과의 교류의 물꼬를 틀기 시작해서 지금은 `7+1유학제도`라고 해서 대학생활 4년(8학기) 중 한 학기는 일본 대학에서 학점을 취득하는 것으로 정착했습니다. 2004년에는 제1회 위덕대 총장배 전국 중고등학생 일본어 스피치 대회를 주최, 개최해 올해로 6회를 맞게 됐습니다. 이 행사는 해를 거듭 할수록 내실 있는 행사로 거듭나 위덕대 일본어학과에서 가장 주요한 행사가 됐습니다.” 그녀는 올해 다시 학과장을 맡게 됐다. 현재 추진 중인 사업은 일본 호텔인턴십 제도를 성사시켜 해외 현장학습 체험을 주기적으로 실시해 해외 취업과 연계시킬 계획에 있다. “우리 위덕대는 앞으로 무한히 성장 가능성이 있는 대학입니다. 올해 개교 13년째를 맞고 있습니다만, 짧은 기간 내에 많은 발전을 했습니다. 경주, 포항, 울산이라는 잠재력 있는 도시와 긴밀하게 연계돼 있어서, 지방대학의 한계를 극복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의 강점은 대학 교수들이 100% 박사에다 젊고, 학생들 교육과 지도에 열의와 성의를 다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현재 위덕대 일본어학과 4학년 학생들 90%정도가 재학 중 `7+1제도`로 6개월 또는 1년 이상의 일본 유학 경험이 있어서 일본어 실력이 상당히 뛰어나고, 3학년 학생들은 70% 이상이 일본어능력시험(JLPT) 2급 이상으로 일본어를 잘 한단다. 일본 쓰쿠바대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그녀는 박사논문으로 작가 아베 고보의 문학세계를 분석했다. 아베 고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한국에서는 그녀가 1호이다. 그래서 일본 관련 학회에서는 아베 고보 연구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 현대문학의 기수라 불리는 작가 아베 고보(安部公房)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아베 고보를 연구하면서 그의 작품을 번역한 작업이 가장 보람되게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문학치료학 분야를 새롭게 연구할 계획에 있습니다.” 위덕대 일문과 1호 교수, 아베 고보 연구 박사 제1호 등 여러 닉네임이 붙은 그녀는 여성으로, 주부로, 엄마로 바쁘게 살지만 힘들지 않다고 했다. 2002년 그녀 나이 42살에 결혼한 그녀는 그 다음해에 딸을 낳았다. “40이 넘어 엄마가 된 그때 그 감동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답니다. 그 이후로 제 생활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직장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겪는 어려움 중의 하나가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일 것입니다. 임신한 직장 여성에 대해서도 의외로 주위의 배려가 없고, 출산 이후 육아 시기의 직장여성에 대한 배려 역시 인색하죠. 요즈음 출산을 장려하는 분위기인데 무엇보다도 먼저 각 직장마다 보육시설이 완비돼 있지 않으면 여전히 직장 여성들이 출산을 꺼려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제 주위에 있는 미혼 여성들에게는 반드시 엄마체험을 하라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그나마 자신의 일에 충실 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남편의 이해와 시댁식구들의 이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숙모가 아이를 돌봐주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이런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경험하면서 인간이 인간으로 더욱 더 성숙해 가는 구나 하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무엇보다 사람과 사물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 “제가 일본문학, 일본문화를 공부하면서 좋아하게 된 문구가 있습니다. 일본어로 `이치고이치에`라고 하는데, 사람과 사람과의 인연, 나아가 사람과 사물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입니. 다도(茶道) 정신 중의 하나로, 다도에서 함께 차를 마시는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상대방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람, 또는 사물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나아가 좋은 인연으로 발전해 나가도록 노력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인간관계라 생각합니다.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게 되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일본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 너무도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제가 일본문학, 일본문화를 연구하는 이유는 정확이 일본을 보자는데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일본의 직업의 귀천이 없는 사회입니다. 무슨 일을 하건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의식이 강합니다. 이것이 일본인의 장인정신이죠.” 늦깍이로 얻은 7살난 딸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위덕대 영재교육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며 `자랑아닌 자랑을 하는` 그녀. 영재교육 전문가에 의한 수업으로 다양한 지적 자극과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열렬 엄마”이지만 후배 여성들에 대한 마음도 이에 못지 않다. “제 권유(?)로 제 후배들이 40이 넘어서 일본 유학을 결정하고 약 5년 뒤에 박사학위를 취득해 온 후배들이 더러 있습니다. 일본유학을 권한 이유는 물론 미국이나 유럽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일본만 하더라도 남녀 차별이 거의 없는 사회입니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인정받고 기쁨을 맛 볼 수 있는 사회죠. 이런 측면에서 여성 후배들에게는 권할 만하죠.” “앞으로의 꿈이라면, 열의와 성의를 대해서 위덕대학교 일본어학과를 한국 최고의 학과로 만들고 싶습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09-06-26

“동서횡단 고속철도 건설사업은 지역화합·국토균형발전의 열쇠”

동서횡단 고속철도 재조명동서횡단 고속철도의 건설 사업은 지난 정부의 제1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서 제외됐다. 철도 건설에 비해 이득이 낮다는 것이 제외의 배경이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의 계획은 포항의 영일만항과 새만금 개발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사업. 따라서 환태평양 물류 기지로서의 포항과 새로운 공업단지로서의 새만금을 연결하는 구간으로의 동서횡단 고속철도를 조명해본다.편집자 주 김천에서 전주에 이르는 97.4km 구간을 이어, 장래에 포항과 새만금을 연결시킨다는 계획인 동서횡단철도 건설에 대한 움직임이 뜨겁다. 더욱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책 화두가 `지역화합`이었다는 측면에서 철도 건설 사업이 탄력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다 부산과 인천에 이은 새로운 물류항구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경북권으로써는 환태평양의 중심 항구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상황. 이와 관련, 동서횡단철도 김천에서 전주구간은 지난 제1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서 타당성이 낮아 추가검토대상사업으로 반영됐었지만, 근래 들어 새만금 지구와 포항의 영일만 신항이 대두되면서 “2010년에 추진중인 제2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 마련시에 교통수요와 지역여건 변화 등을 고려해 타당성을 면밀히 검토 후 법정계획 반영 여부를 재결정한다”는 것이 국토해양부의 설명이다. 실제로 김동선 대진대학교 교수는 “장래수요 예측결과, 여객수요는 2010년에 4천763명(인/일), 2036년에 7천231명(인/일)으로 분석됐으며 화물수요는 2016년에 3천363t(t/일), 2036년에 4천418t(t/일)로 분석되고 있다”며 “정책적 측면과 지역균형발전 측면을 종합해 고려한 결과, 사업의 시행이 타당한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또 “본 과업노선은 경북권과 전북권을 연계함으로써 환황해경제권의 물류수송의 기간망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특히 동서4축 간선철도망 완성의 가교 역할을 담당하는 중요 노선”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김 교수는 “김천은 동서4축과 더불어 남북3축 간선철도망의 십자형 결절점을 형성하는 집분산지역”이라면서 “이번 사업은 단일철도건설사업의 파급효과를 일정부분 이상 상회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송하진 전주시장 역시 “전주에서 김천 간 철도의 경제성 분석 결과, 단선으로 건설시 B/C(편익/비용) 비율이 0.72로서 비록 경제적 타당성은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으나 물동량과 관광자원이 풍부한 새만금 지역까지 연장 건설한다면 B/C 비율이 크게 향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기대감은 박보생 김천시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박 시장은 “동서횡단 철도의 건설은 ▲국토 균형 발전을 위한 필수 사업 ▲동서화합과 문화교류를 위해서 건설 필요 ▲환황해권, 환동해권 동반 발전 ▲저탄소 녹색 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며 “동서간 인적·물적·문화적 교류 및 동반성장과 동서화합 차원의 광역철도교통망 조기구축과 포항에서 새만금 간 국가철도망 구축 수정계획에 대한 반영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09-06-26

“영호남 잇는 인적·물적교류 통한 녹색성장시대 교통수단으로 각광”

“동서횡단고속철도를 통해 새만금에서 생산된 각종 공산품들이 포항의 영일만항에 집결한다. 대형 컨테이너에 속속 화물이 적재되고, 대형 화물선은 미국을 포함한 아메리카 대륙과 호주의 오세니아 등지로 나갈 준비를 한다.”새로 나온 소설의 첫 머리가 아니다. 오는 2020년 동서횡단고속철도가 완공되면, 현실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번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이철우(경북 김천) 국회의원은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측면과 영남과 호남의 자유로운 소통의 분위기가 가장 큰 매력”이라고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이 의원은 “전북과 경북을 잇는 인적·물적 교류의 네트워크는 지역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으며 향후 정부가 추진하는 녹색성장시대의 대표적 교통수단으로 각광받을 것”이라고 말했다.-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남북을 잇는 종단철도 및 도로에 관심을 쏟아온 것이 사실이다. 이 후 동서횡단철도의 의미를 부여한다면.▲지금껏 백두대간으로 가로막혀 소통이 되지 않았던 동과 서가 서로 화합함은 물론이고 인적·물적 그리고 문화적 교류가 원활해져 국토의 균형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며, 새만금이 개발되면 중국으로의 수출 증대 효과까지 누릴 수 있어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사업이다. 수도권으로만 향해오던 교통망이 영남과 호남을 같이 잇게 해준다면 우리 국토는 그야말로 균형발전을 이루게 되며, 영남과 호남의 자유로운 소통의 분위기가 정착되고 서로의 경쟁력 있는 분야가 활발히 교류한다면 지역감정은 완전 치유될 것이다. -포항의 영일만항과 새만금의 물동량이 합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사업의 매력이다. 그 효과는.▲물론 포항의 영일만항과 전북 새만금의 물동량이 합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사업의 매력이 맞다.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 평가 받고 있는 것은 바로 대구·경북 경제자유구역에서 포항 영일만으로, 또 전북 새만금으로 이어지는 물류교류가 활성화 될 것이며, 나아가 대구와 김천혁신도시, 전북혁신도시, 군산산업지대 및 새만금 지구를 연결하는 인적·물적 교류의 네트워크가 잘 구축돼 지역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일각에서는 이번 철도가 건설되면, 철도의 가장 큰 목적인 인력수송보다는 화물수송에 주력하는 철도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부정적 견해도 나오고 있는데.▲김천과 전주를 잇는 동서횡단철도의 수요를 예측한 용역결과에 따르면, 사업의 초기개통년도인 2016년에는 1일 이용 여객수가 4천763명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새만금 종합개발계획이 단계별로 추진되는 2021년 이후에는 1일 이용여객수가 6천108명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여기에다 1일 화물수요예측량은 2016년에 3천363t, 2021년에는 4천t정도 상승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따라서 이 노선은 화물수송에만 치우친 철도가 아니란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더욱이 철도는 자동차에 비해 에너지 소비가 1/13 수준이다. 자동차에 1만명을 태우고 서울~부산까지 갈 연료비라면 철도로는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갈 수 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자동차의 1/30에 불과하다. 그래서 철도의 건설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녹색성장시대의 대표적 교통수단이다.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09-06-26

`아버지의 깃발`

피 비린내 나는 참혹한 전쟁 속 비극·고뇌·갈등때는 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연합군은 유럽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일본군과의 태평양전투는 점점 치열해지고 있었다.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던 곳은 바로 일본 이오지마 섬.이오지마 섬 전투는 6천명의 미군병사가 사망하고, 1만 7천여명의 부상자를 기록하며 태평양 전투의 중요전환점이 되었는데, 1945년 2월 23일, 마침내 섬을 손에 넣은 미군이 수라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으며 끝을 맺는다.당시 5명의 해병대원과 1명의 해군병사가 성조기를 세우는 모습은 AP 통신의 존 로젠탈 기자에 의해 사진기로 찍히고, `이오지마 섬에서의 성조기 세우기`란 제목으로 신문 1면을 장식, 미국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고 로젠탈 기자는 퓰리처 상을 수상한다.깃발을 세운 6명 중 곧 사망한 3명을 제외하고 본국으로 송환된 생존 병사 3인은 영웅대접을 받으며 대국민 전쟁기금마련 행사에 동원되지만, 정작 본인들은 자신들을 영웅이라 생각하는데 대해 어색해하고 괴로워한다.이 영화는 그런 전장의 한가운데를 묘사함으로써 영웅주의의 탄생 배경을 묘사하고 그런 영웅주의가 탄생하게되는 사연을 추문한다. 본국으로 돌아온 세 전쟁영웅은 사실 자신들이 다른 이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단지 자신들은 성조기를 세우는 옆에 있었을 뿐이고 우연히 그 깃발을 세우게 되었을 뿐이다.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그 깃발을 세우던 영광이 아니라 그곳에서 무참히 죽어나가던 동료들의 마지막 순간이다.그들은 자신들이 선 단상에서 자신들은 영웅이 아니고 그곳에 목숨을 바친 전우들이 진정한 영웅이라고 말한다.물론 이는 전쟁기금마련에 한몫을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그것은 그들의 진심이다. 아이라와 닥은 모형으로 만들어진 돌산을 기어오르면서 그 당시의 기억을 회상한다.우연찮게 거머쥔 영광이지만 그 영광은 결코 맛있게 씹어넘길만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기억에 각인된 것은 그 전장에서 세운 깃발의 영광 따위가 아닌 피 흘리고 찢겨져 나간 채 죽어간 전우들에 대한 목도이다.이 작품은 우리가 전쟁을 기억하는 옹졸한 시선을 탐색하고 지나간 것들에 대해 쉽게 간과해버리는 습성을 지적한다. 모든 것은 세월이라는 필터를 걸쳐 추억으로 미화되고 포장되지만 전쟁이라는 비극이 그 필터에 걸러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전장 한가운데 서보지 않은 이들의 지독한 무지함일 것이다.명예로운 애국심에 고개를 들던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날아드는 총알과 포격에 공포의 시선을 떨군 채 고개를 숙일 때 우리는 전장의 진실을 발견한다.우리가 미화하는 전쟁의 명예는 그 현장을 애써 포장하고자 하는 합리적 욕구의 발현과도 같다. 그 현장에서 죽어나간 이들의 본심과 무관하게 우리는 그것을 명예로 미화하고 숭상한다.과연 그곳에 명예가 있는가. 그곳에는 인간의 죽음이 있다.승리와 패배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곳에는 파시즘과 프로파간다에 휘둘려 내몰린 나약한 인간들의 피 비린내나는 비극들이 엉켜있다.정상에 꽂힌 알량한 깃발의 명예는 그 깃발을 위해 죽어간 수많은 비극들을 함구해버리게 만든다.전쟁의 참혹함과 영웅주의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이다.

2009-06-26

울릉도, 세계 최고 `해양심층수` 메카 된다

Blue Gold시대 개막 바닷속 심해에서 끌어올리는 제3의 물 해양심층수. 지난해 2월 해양심층수관련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프리미엄 생수시장이 활짝 열렸다. 대기업, 대형음료회사들이 해양심층수시장에 앞다퉈 뛰어들면서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시장으로 발전하고 있다. 해양심층수는 우리나라에서 서해, 남해에서는 생산할 수 없어 현재 강원도 지역에 고성 등 5곳, 울릉도 현포리, 서면 태하리, 울릉읍 저동리 3곳 등 동해안 8개 지역에 취수허가가 나 있다. 전국의 37.5%의 취수 시장을 가지고 있는 울릉군은 섬에서 해상으로 3~4km만 나가도 1천m가 넘는 수심을 보유하고 맑고 깨끗한 청정해역 등 해양심층수 취수지역 여건상 세계 최고의 해양심층수를 자랑하고 있다. 울릉도는 전역 해안 가까이에서 해양심층수를 취수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는 천혜의 해양심층수 취수 지역으로 육지의 해양심층수 생산과는 비교가 안 된다.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울릉도는 단연 해양심층수 메카로 부상하고 있다. ■해양심층수 1호 면허업체 (주)파나블루(구 울릉미네랄) 우리나라에서 해양심층수 면허 1호인 현포리 취수지는 이미 대기업인 (주)SK가 울릉미네랄을 인수, (주)파나블루로 사명을 변경하고 생산에 들어간다. ㈜파나블루는 (구 울릉미네랄) 지난 2004년 국내 최초로 울릉도 현포리 앞바다에 취수관을 설치, 해양심층수 취수에 성공한 뒤 2005년 정수 및 제염기능을 갖춘 제1공장 준공했다. 해양심층수에서 추출한 소금을 1일 700t가량 생산, `U-650`이란 브랜드로 출시했고, 하루 60t 가량 생산하는 생수도 CJ와 협력해 혼합음료인 `울릉미네워터`란 브랜드로 판매 중에 있는 등 해양심층수업계 선두주자로 나섰다. 이후 SK가 울릉미네랄을 인수하고 곧바로 제2 공장건설에 들어가 총 사업비 115억 원을 투입, 부지 8천25㎡에 제조시설 2천213㎡ 부대시설 1천843㎡ 등 울릉도에서 가장 큰 민자 공장을 건설하고 26일 준공식을 한다. 이 공장에서는 생수 350㎖ 분당 250병, 500㎖ 분당 200병, 10ℓ 분당 4병을 생산한다. 소금도 1일 2t(제품명 마레솔트 110g, 250g, 500g)의 생산능력을 갖췄다. 자사제품인 생수 `슈어` 350㎖, 500㎖와 CJ의 생수 `울릉미네워터` 500㎖와 1천500㎖들이를 생산하고 있으며 7월부터 양산체제에 들어갈 계획이다. ㈜파나블루는 지난 4월27일 세계 최고 수심에서 해양심층수를 취수할 수 있는 해역변경허가를 받았다. 취수해역이 현재보다 3km 더 연장, 취수 수심을 현재 650m에서 1천500m 이상을 추가 확보해 제품이미지 및 경쟁력도 높였다. 또 취수로 397m(총연장 4천687m)와 배수관로 374m(총연장 1천254m)를 증설하고 해양심층수개발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시설기준에 적합한 처리수 제조설비를 설치했다. 따라서 (주)파나블루는 7km의 HDPE(향균수도관, 크기 250㎜)관을 해저에 깔아 구관을 교체하고 1천500m 수심에서 해양심층수를 끌어올린다. 심층수 제품은 유리병과 페트(플라스틱)병 2종에 5∼20ℓ들이 4종 벌크제품을 생산할 예정이며 현재 시판 중인 심층수 정제 소금을 비롯한 화장품 첨가물 등 고기능성 제품 등을 생산, 2015년까지 연간 1천억원대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기대된다.■해양심층수 7호 업체 울릉군(울릉읍 저동리) 우선 공익목적으로 개발되는 울릉군해양심층수개발은 지난 9일 시공회사, 감리단, 마을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울릉읍 저동1리 어선상가 장에서 해양심층수개발 취수공사 안전기원제를 지내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신활력 사업으로 진행되는 해양심층수개발사업은 총 사업비 34억1천600만원을 투입해 취수관실 1식, 관로 매설 4㎞, 취수관 규격 300㎜ 규모, 1일 취수예상량은 1천800t 규모다. 동해안 어업전지기지인 저동항 선박이 출입하는 항구 입구를 통과 해상으로 취수관(경도 130도57분24초, 위도 37도29분32초)을 설치, 해저 750m 바닷속에서 해양심층수를 끌어올리게 된다. 해상취수관로 공사는 해상에서 취수관로를 통해 끌어와 육상취수 관로를 통해 울릉수협위판장으로 이동된다. 이를 위해 해상취수관로는 아쿠아이엔지(주)(대표 강석중)가, 육상취수(저동어선상가장∼수협위판장) 사업은 세원건설이, 감리는 (주)도화종합기술공사가 맡아 공사를 하고 있다. 울릉군은 해양심층수(원수)를 이용해 오징어 세척 및 기타 농, 수산업에 이용하고 타라소테라피 사업 등에 사용할 계획이다. 이번에 개발하는 해양심층수는 개인에게 판매 또는 먹는 물 등으로 가공하지 않고 원수를 출하하며 지자체의 이익보다는 공익 목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울릉군은 앞으로 특산품인 오징어 세척 전 과정을 해양심층수로 처리하고 울릉도에서 생산되는 웰빙 산나물도 해양심층수로 세척 경쟁력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울릉군은 또 활어수족관에도 공급, `해양심층수 활어`를 시판하는가 하면 해양심층수로 양식한 어패류도 내놓을 방침이다. 이와함께 어민들이 운영하는 횟집 등 저동지역 횟집에 해양심층수를 공급, 육지와 차별화하고 해수탕 등에도 공급해 울릉도관광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즐기고 건강도 챙길 수 있는 관광지로 만들어 간다는 계획이다.■해양심층수 제8호 업체 울릉도 심층수(주) 육지와 울릉도를 연결하는 여객선을 운영하고 있는 (주)대아고속의 자회사인 울릉도 심층수(주)가 서면 태하리 해양심층수 취수 제8호 면허를 인수 올해 안으로 본격적으로 개발에 들어갈 계획이다. 모 회사의 막강한 자금력을 동원 서면 태하리 앞바다의 맑고 깨끗한 해양심층수를 생산할 계획인 울릉도 심층수는 가능한 깊은 바다에서 해양심층수를 끌어올려 제품의 이미지와 경쟁력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특히 울릉도 심층수(주)는 울릉도에서 최고의 품질을 생산하는 서면 태하리 오징어와 함께 청정이미지를 상품에 접목하고 생수, 소금 등 가능한 완제품을 울릉도에서 출시 고용창출도 늘린다는 계획이다.■해양심층수의 경제적 효과 한국해양연구원이 지난 2006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해양심층수의 생산유발효과와 취업유발효과는 연간 3조5천270억 원, 3만1천1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현재 시장에 나온 해상심층수 제품은 술, 화장품, 간장, 생수류, 두부 등이지만 앞으로 의약품, 음료수, 간장, 소금 등 일상생활에 사용되지 않는 곳이 없고 고갈되고 있는 식수난으로 엄청난 시장이 형성될 생수시장은 천문학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동해안 최고 청정해역인 울릉도 심층수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해저에서 취수돼 품질경쟁력이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어 향후 세계시장 도전의 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워터비스는 지난해 8월 4만 달러, 10월 8만 달러에 이어 올해 4월 12만 달러를 중국에 수출하는 등 동해바다에서 끌어올린 해양심층수가 세계 곳곳으로 수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서도 생수, 주류, 생활용품 등에서 해양심층수가 부각되고 있는 가운데 워터비스는 `깊은 바다`가 없는 중국을 비롯해 이미 해양심층수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일본, 미국 등지에까지 관련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중국에는 회사명과 같은 워터비스란 상품명으로 수출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호주서 12만 달러어치를 주문받았다. 또 이미 해양심층수 취수기술을 10년 전 선보였던 일본보다 앞선 기술력을 내세워 일본에 수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류석필(주)파나블루 공장장은 “울릉도 심층수가 해외시장 개척에서는 한발 뒤처졌지만 세계 최저 수심에서 취수하는 품질을 발판으로 기술개발에 나설 경우 세계 시장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며 “울릉군과 지역 심층수 개발업체들은 심층수 개발과 함께 세계 시장을 향한 품질 제고 방안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2009-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