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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중국 국적 안동시청 공무원 왕위 씨

한국인과 결혼 `안동 새댁`으로 제2의 인생“안동문화 해설 가능한 전문가가 되고 싶어”이달부터 안동시청 지방계약직 공무원으로 임용된 중국 국적의 왕위(25)씨는 앞으로 진짜 안동 사람이 되고 싶다.안동의 명소인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도산서원의 경치는 볼수록 좋고 지난달 2일에는 안동 사람인 남편과 결혼을 해서 `안동 새댁`으로 제2의 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그녀는 중국어와 한국어는 물론 영어에도 능통한 인재로 어학능력을 이용해 외교사절로 활약하겠다는 당찬 여성이다. 굴뚝 없는 산업이라는 관광산업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고국인 중국인 관광객 유치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인과 결혼하고 한국의 공무원이 돼서 정착했다. 한국의 어떤 점이 좋은가.▲ 한국은 어딜 가나 아름다운 경치가 그만이다. 특히 안동의 대표적 관광지인 도산서원과 하회마을의 경치는 볼수록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며 인정이 넘친다. 아주 만족하면서 한국생활을 해 왔다.-현재 일하는 안동시청 관광산업과의 업무는 어떤가.▲아직은 업무를 배우고 공직사회의 분위기에 적응하는 단계이다. 한국어도 더 익혀야 하므로 단어장을 들고 다니면서 듣기와 말하기 연습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 연세대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한국학도 전공하고 있다. 앞으로 중국어 통역과 번역 및 중국어로 된 안동 홍보물 제작 등 내가 할 일이 많을 것이다.-결혼 생활을 시작한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문화적으로 부딪히는 부분은.▲ 남편과는 이미 5년 전 중국 동북사범대 국제정치학과 시절 만났다. 당시 교환학생으로 유학와 있던 남편을 알게 된 뒤 2006년 내가 동국대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오면서 다시 만났다. 알고 지낸 게 오래됐고 서로 이해심이 많아 특별한 어려움은 없다. 비슷한 문화도 많이 있다. 다만 높임말을 구분하는 한국어를 아직 정확하게 구사하지 못해서 시댁 어른들 앞에서 민망한 경우에 처할 때가 있다.-한국과 중국의 유교문화는 어떤 차이가 있나.▲중국에는 공자나 맹자, 주자 등의 학문과 사상이 크게 보존돼 있지 않다. 나 역시 별 관심이 없었는데 오히려 한국학을 배우면서 공자 등의 유교문화를 더욱 깊이 접하게 됐다. 유교문화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 필수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과제다.-안동시청 공무원으로서 포부는.▲안동의 유교문화와 중국 문화의 공통점을 찾고 안동을 중국에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현재 안동을 찾는 중국인은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이들이 안동을 찾아 관광하고 체험하는 데 나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단순한 통역과 안내를 넘어서서 안동의 문화를 그들에게 이해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 관광객 안내는 물론 안동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까지도 가능한 전문가가 되고 싶다. 중국인 관광객을 안동으로 최대한 많이 유치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이임태기자 lee77@kbmaeil.com

2009-06-26

고갈없는 청정자원 해양심층수

해양심층수(Deep Sea Water)는 햇빛이 전혀 도달하지 않는 수심 200m 이상 깊은 심해 바다에 형성돼 있는 바닷물을 말한다. 따라서 바닷물이 마르지 않는 한 영원한 자원이다. 자원적 가치가 높고 재생순환형이어서 석유처럼 고갈될 염려는 없는 `블 루 골드`인 셈이다. 표면적이 30만㎢에 달하는 동해의 심층수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남동부 해역에서 형성돼 100년에 걸쳐 반시계방향으로 순환한다. 북대서양 그린 랜드 근처의 빙하가 녹으면서 염분 차이로 가라앉아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을 4천 년에 한 번 순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온이 연중 2℃ 이하의 저온 안정성, 무균·비 오염의 청정성, 90종이 넘는 원소를 함유한 미네랄 성, 부영양성 등 5대 자원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또 화장품·물리치료, 바디크림 등 건강미용 산업에도 활용이 가능하며 선진국에서는 표층수와의 온도차를 이용한 발전기술도 개발되는 산업용으로도 사용된다. 특히 한국해양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울릉도 주변 심층수는 개발 가능한 동해 심층수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일본, 미국 심층수와 비교해서는 자원적 특성은 비슷하지만 저온성 측면에서는 더 뛰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일반적으로 표층수 등을 육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수질이 나빠지기도 하지만 해양심층수는 안전한 물이라는 것이 큰 장점이기도 하다. /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2009-06-26

백자도예전 연 이점찬 경일대 공예디자인학과 교수

“뛰어난 `도자기 문화` 현대화 이뤄져야” 도예가 이점찬(48) 경일대 공예디자인학과 교수는 조선백자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드문 작업을 하는 도예가다. 기존 백자를 그대로 전승하는 작업이 아닌 `현대적 백자의 재창조`가 그가 지향하는 작업 목표다. 최근 대구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 도예전을 개최한 이 교수를 만나 작품세계와 도자기에 대한 철학 등을 들어봤다. 500년간 계승돼온 조선백자의 재창조가 목표“힘든 현실 맑은 백자를 통해 정화시키고 싶어”-어떤 도예작업인가. ▲세계적으로 미적 아름다움을 인정받고 있는 조선백자는 500년 동안 계승 발전돼왔다. 이러한 백자도 시대에 맞는 미감이 필요하다. 그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이 나의 작업이라 하겠다. 백자는 발색이 중요하다. 보통 백자라 하면 흰색 하나로 대표되는데 흰색에도 푸른빛이 도는 흰색 등 수만가지의 색이 존재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눈이 온 것 같은 설백색 느낌의 색감과 일반적인 백자 크기보다 훨씬 큰 형태미를 조화시킨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또 낚싯줄과 실로 도자기 면을 치는 기법을 통해 선이 가지는 한국미술의 아름다움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우리는 21세기를 희망과 꿈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경제불황에 흔들리는 가치관과 자아정체성 등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이러한 현실을 티없이 맑은 백자를 통해 정화시키고 싶었다. 우리 사회도 백자처럼 밝고 투명하고 깨끗해졌으면 하는 마음을 백자에 담았다. -도자기에 대한 철학은.▲도자기는 흙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재료적 속성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재료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도자기의 조형작업이다. 특히 조선백자의 경우 500년 동안 그 문화가 계승돼왔다는 것은 전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현상이다. 세계 문화사를 봐도 기껏 30~40년 정도 그 흐름이 지속돼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백자를 현대 속에서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지 진지한 고민을 해봐야 할 시점이다. -현대 도예의 나아갈 방향은.▲고려청자, 조선백자가 한국에서 우수하다는 얘기는 세계에서 우수하다는 얘기다. 도자기 만큼은 한국이 최고라는 것이다. 이런 뛰어난 도자기 문화를 현대화시키는 작업과 모색이 많이 나와야 발전이 있겠다. 시대 미감이 바뀌었고 주거공간도 바뀌었으니 현대생활 속에 어울릴 수 있는 작업이 보다 많아져야 도자기의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현주기자 sun@kbmaeil.com▶▶ 프로필△상지대 공예학과·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졸업 △이탈리아 파엔자 국제도예전 입상 △대구공예대전 대상 수상 △대한민국 공예대전 심사위원 역임

2009-06-25

국립 영천호국원을 다녀와서

장재영 영일고 2오늘은 영천호국원을 다녀왔다. 호국원은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신명을 바친 국가유공자와 참전유공자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공적을 기리는 곳이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수천, 수만 개의 비석들이었다. 그 비석 모두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위패를 새긴 것이었다. 정말 장관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광경에 잠시 말을 잊을 정도였다. 이런 곳이 몇 곳 더 있다는 말에 얼마나 많은 분이 전쟁으로 돌아가셨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 반은 먼저 관리인 아저씨를 따라 현충탑에서 참배를 했다. 높이 솟은 하얀 현충탑 앞에서 장엄하면서도 조용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우리는 묵념을 하면서 국가를 위해 스러져간 분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일단 우리는 수만 개의 비석들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기로 했다. 물론 모두 청소한 것은 아니지만 잠드신 애국자 분들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쓰레기를 치웠다. 각각의 비석을 살펴보니 이름과 돌아가신 곳, 날짜가 매우 자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많은 비석을 일일이 새긴 정성은 매우 놀라웠다. 거의 6줄 정도를 끝내자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전쟁 당시 사용된 진짜(모형도 있지만) 전쟁무기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수십 킬로미터를 날아가 적진을 부순다는 나이키 미사일이었다. 그러나 이 무기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 거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병기들을 관람한 우리 반은 거대한 영천대첩비를 지나 현충관으로 갔다. 이곳에서 2002년 월드컵 열기에 파묻혀 제대로 보도되지도 않은 제2차 연평대전을 짧은 영화로 보게 되었다. 서해바다를 지키는 참수리 호 해군들은 가족들과 많은 꿈을 가진 순수한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기습해 온 북한전함에게 포격당하여 전원이 사망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도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말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선제공격은 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NLL을 침범한 북한전함을 맞아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신 분들은 딸의 100일 잔치가 얼마 지나지 않은 분, 즐거운 신혼을 보내던 분, 제대하고 나선 반드시 효도하겠다는 분등 정말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순수한 분들이었다. 참수리 호의 조타수 분은 마지막까지도 온몸으로 키를 붙잡아 조류가 심한 그 바다에서 우리의 자존심과 애국심을 지켜내었다. 우리는 그 분들의 희생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영원히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호국원에 간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 매우 기대했었는데 기대만큼 즐거운 봉사가 되어서 정말 기뻤다. 또 평상시 잠잠하던 애국심이 솟는 것만 같아 은근히 기분도 좋았다. 이번 봉사활동은 우리의 애국심을 반성하면서 우리의 나라를 좀 더 소중히 하고 돌아가신 분들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한 활동이었다. 앞으로도 이 같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봉사활동을 해야겠다.

2009-06-24

신임 정창교 포항농협 조합장 취임

정창교 신임 포항농협 조합장이 23일 취임했다. 포항지역 3천여명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선두 농민으로서 본격적인 첫 임무에 들어간 것이다.갈수록 어려워져 가는 농촌 현실을 감안할 때, 현재 상황이 정 조합장에게 던지는 부담은 크다.특히, 요즘처럼 가속화 된 경제위기로 인한 농촌 경영위기와 금융불안은 농협의 미래에 불안하기만 하다.-당선을 축하한다.▲감사의 마음보다는 먼저 심한 중압감을 전해 드리고 싶다. 직선제로 선출된 만큼, 앞으로 나에게는 유권자인 조합원들을 대표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최근 세계 경제위기는 단위 농협이라고 해도 전혀 예외가 없다. 또, 이번 조합장 선거와 관련된 조합원들 간의 감정싸움도 향후 극복해야 할 문제다. 먼저 내부 화합에 주력하고 나서, 조합원들의 의견을 그러모아 그들을 대표하는 직무를 수행할 작정이다.-어려운 농촌현실을 위한 복안은.▲선거공략에서도 말했듯 농산물 유통을 총망라한 `유통기획단(가칭)`을 신설할 계획이다. 이는 현 농민들의 수익구조를 개선하기 위함이다. 사실 현재의 유통망은 농민들에게 다소 불리한 감이 있다. 거미줄처럼 얽힌 중간 유통체제는 정작 농민들에게 돌아갈 실수익을 줄어들게 하고, 오히려 소비자의 부담은 가중시키게 된다. 유통기획단은 이러한 누수 비용을 거둬들여 농민과 소비자에게 돌려주자는 취지다. 그 후 비료 지원 등 농민들의 실정에 맞는 정책을 펼쳐나갈 생각이다. 그러려면 먼저 포항농협이 밝아져야 한다. 그래서 이번 포항농협 정책방안을 `투명화`로 꼽아봤다.-내부 화합을 위한 방안은.▲어떠한 선거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감정의 골은 종료와 동시에 사라져야 한다. 어차피 선거 후에는 당선자가 모두 안고 가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선거로 발생한 불신을 잊고, 포항농협이란 한 단위로 뭉쳐 함께 발전해나가야 한다. 같은 조합원이란 것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만약 대립하고 있는 조합원들이 있으면 내가 나서서 중재하고, 나를 반대했던 조합원이란 더 깍듯이 위하는 것이 최선이라 믿는다.-포항농협은 그동안 신용사업과 비교하면 농업사업이 적다는 질타를 받아 왔는데.▲포항은 도시지역이다. 그래서 포항농협도 도시농협이 될 수 밖에 없다. 포항농협은 신용사업이 경영구조의 80%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포항시민과 유리해서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오히려 포항농협을 도시민과 농민의 가교역할로 만들 생각이다. 직거래 장터 등의 직통 판매망 구축이 그것이다. 생산자로서 농민이 있다면 소비자로서 시민도 당연히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경북지역 1등 도시의 단위농협이 갖춰야 할 자세라고 믿는다./신동우기자 beat082@kbmaeil.com▶▶ 프로필◆출생:1952년생 포항시 남구 동해면 ◆학력:포항중(23회)·포항고(20회) ◆가족관계:부인 이영애(56) 여사, 1남 1녀 ◆좌우명: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자.

2009-06-24

세계의 장기 집권자들

잡는 것보다 놓는 게 더 힘들다는 권력. 그 달콤한 유혹 속에 수십 년을 빠져 지내던 세계의 장기 집권자들이 하나 둘 권좌를 내려오고 있다. 가봉의 오마르 봉고(73) 대통령은 지난 8일(현지 시각) 심장발작으로 숨을 거두며 무려 42년간 움켜줬던 권력의 끈을 내려놓았다. 이에 앞선 지난해 2월엔 `세계 최장기 집권자`로 군림해온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83)가 49년 영욕의 세월을 마무리하고 국가평의회 의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세월과 민심 앞에서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절대권력. 하지만 세계 곳곳엔 여전히 허망한 권력의 모래탑을 쌓아가고 있는 인물들이 있다. ♠장기집권의 필수 코스 `쿠데타` 장기집권의 권좌는 합법적 선출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이 주로 취하는 방법은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쿠데타`. 이처럼 불법적으로 권력을 차지할 경우 권력을 내놓았을 때 받게 될 보복 등이 두려워 통치권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봉고 대통령 사망으로 `현역 최장기 집권` 타이틀을 넘겨받게 된 리비아 국가 원수 무아마르 카다피(67)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 1969년 육군 대위 시절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 40년째 통치하고 있다. 예멘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67) 또한 1978년 쿠데타를 통해 북예멘 정권을 장악했고, 1990년 남예멘을 흡수 통일한 뒤 31년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견제 장치 고장 난 장기집권국 장기집권에 대한 폐해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역사학 교수였던 액튼 경(Lord Acton)의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유명한 말로 정리된다. 국가가 한 사람의 권력에 의해 통치된다면, 권력이 사유화되고 이로 인해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이 제약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서울대 박찬욱(정치학과) 교수는 “권력의 속성은 결국 부패로 이어진다”며 “이를 막기 위해 견제가 중요한데, 장기집권국가에서는 이 같은 정치 기본원리가 지켜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지구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군주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인물은 1946년 즉위한 푸미폰 아둔 야뎃(82) 태국 국왕이다. 생각 생각 ▶초등 1. 기사에 나온 장기 집권자들은 누구인지 찾아보세요. 2. 장기 집권을 하게 되면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3. 장기 집권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4. 기사의 핵심 내용은 무인가요? 기사를 읽으며 느낀 점도 정리해 보세요.

2009-06-24

창의력 키우는 다섯가지 원리 `OMEGA`

창의성은 용어의 정의만 해도 100여 가지가 넘을 정도로 다양하고 다루는 범위가 넓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학생들이나 자녀에게 창의력을 제대로 길러주고 싶은 교사나 부모가 있다면 창의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지도할 필요가 있다. 그 동안 창의성이 왜 필요한지(Why), 창의성이 무엇인지(What)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 왔다. 그런데 생활 속에서 어떻게(How) 창의성을 키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필자는 그 동안 창의성의 `How`에 대해 연구를 해 오면서 학부모나 교사들이 창의성 교육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섯 가지 원리를 생각해 보았다. 이 원리는 일반인들이 기억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OMEGA`의 이니셜로 정리하였다. 첫째, Open Mind(열린 마음)이다. Open Mind는 말 그대로 마음을 여는 것이다. 창문을 열면 바깥의 시원한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와서 새로운 기운을 느낄 수 있듯이 새로움이 생명인 창의력을 키우려면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마음을 여는 활동은 상대편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자기의 새로운 것을 표현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Open Mind를 통해 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가벼운 게임, I-message 대화법, 감정코치법, 토론법 등의 활동이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Open Mind 상태에서의 활발한 토론은 창의력 신장에 크게 도움이 된다. 둘째, Multiple Thinking(다면적 사고)이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의 정답을 찾는 공부를 해 왔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시각에서 문제에 접근하기 보다는 정답을 좇아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면 핀잔을 받는 분위기에서는 남다른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다. 창의성을 키우려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면적으로 바라보고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셋째, Embodied Knowledge(체화된 지식)이다. 창의력을 발휘하려면 풍부한 바탕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때의 지식은 암기 위주로 얻은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직접 경험을 통해서 얻은 주관적 지식을 말한다. 직접 고민하면서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문제 상황에서 창의력을 발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므로 체험적 지식을 많이 얻어야 한다. 넷째, Goal-oriented Learning(목표 지향 학습)이다. 창의성에는 크게 지식, 경험, 기능, 성향의 네 가지 영역(Category)이 있다. 이 영역 속에는 24가지의 요인(Factor)이 있다. 이 요인들을 세분하면 다시 114개의 요소(Element)가 있다. 창의성을 기른다는 것은 각 요소들을 자극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창의성을 기른다고 막연하게 영역이나 요인에 해당되는 큰 덩치에 접근할 것이 아니라 세부 요소들을 자극하는 목표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한 후 그것에 도달하여 성취감을 맛보는 경험을 자주 해야 한다. 다섯째, Aha, Product(새로운 산출물)이다. 사람은 새로운 것을 생각하거나 놀라운 것을 보게 되면 `Aha(아)하!`라는 탄성을 지르게 된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창의성 교육에서도 `Aha!` 탄성이 자주 나오게 해야 한다. Aha 경험을 많이 하게 하기 위해서는 한 번도 안 가본 곳에 자주 가고, 새로 나온 것과 자주 접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해 보는 활동을 많이 해야 한다. 생활 속에서 이 다섯 가지 원리를 잘 적용한다면 누구나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문구가 있다. `To get what you have never had, you must do what you have never done.`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을 해 보아야 한다.) Create yourself!

2009-06-24

1. 들어가며-공민왕과 홍건적

글 싣는 순서① 들어가며-공민왕과 홍건적② 공민왕은 왜 안동을 피난처로 택했나?③ 임시수도 70일-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대항했나?④ 공민왕이 남긴 문화유산 ⑤ 문화유산의 전승방안 안동은 지리적으로 경북북부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웅부로 명실상부하게 자리매김한 것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몽진을 온 이후부터 이다. 공민왕은 수도 개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파천하면서 왜 하필이면 임시수도로 안동을 택했을까? 왕이 다녀간 뒤 안동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었으며 현재의 안동인들에게는 공민왕의 파천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본지는 창사 19주년을 맞아 특별취재팀을 편성하고 관계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어 `공민왕과 안동`을 5회에 걸쳐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주공민왕이 남긴 발자취1361년 12월 임진일 고려 31대 공민왕은 2차 홍건전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와서 난이 평정될 때까지 70일간 이곳에 머무른다. 전란 70일 동안 안동은 임시 수도의 역할을 하며 왕을 극진히 모셨다. 공민왕이 머물고 간 안동에는 이와 관련된 많은 문화유산이 곳곳에 산재해 지금껏 전해오고 있다. 공민왕이 하사한 백옥대와 옥관자 금대 비단 등을 비롯해 안동웅부와 영호루 현판 등 유형문화와 공민왕을 모시는 사당, 민속놀이 등 다양한 무형문화가 전승돼 오고 있다.지난달 29일부터 3일간에는 안동시내 일원에서는 공민왕 안동 70일 체류 역사 재현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이 행사는 안동시 용상동 공민왕 사당에서 열린 성황제를 시작으로 놋다리밟기와 어가행렬 재현, 그리고 사은행사 등 다양하게 펼쳐졌다. 행사에 맞춰 안동지역 내 신석동과 수동, 가송, 신남, 원천 등 6곳에 있는 공민왕 관련 사당에서는 왕의 추모제가 열리기도 했다. 이에 앞서 지난 2월8일 자정 무렵에 안동시 도산면 가송 가사리마을에서는 인근 올미재, 쏘두들 주민들이 수백 년 전부터 연례행사로 이어져 온 마을 동신제를 올리기도 했다. 청량산 축륭봉을 이은 연봉 아래 자리 잡은 이 마을의 동신제는 여느 마을 동신제와는 다르게 공민왕의 따님을 마을 수호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이 마을 어귀 산자락에 자리한 부인당에 모셔진 공주는 인근 원천리의 왕모당과 신남리의 며느리당과 함께 왕의 가족들까지 신으로 모시고 600여 년이 넘게 섬기고 있다.공민왕과 홍건적의 난“공민왕은 이름이 전이고 몽골 이름은 백안첩목아(佰鞍貼木兒)이다. 충혜왕의 동생이고 충숙왕 17년에 태어났다. 성품이 엄격 중후하고 또한 자애로우며 어질어 백성의 인심을 많이 얻었으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시기심이 많고 음란하여 화를 당하는 데에 이르렀다.”라고 고려사절요는 적고 있다. 그림과 글씨 등 예능 방면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왕후인 노국대장를 끔찍이 사랑하는 등 감수성이 예민해서 유약해 보이기까지 한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원나라와 왜구에 시달리는 등 고려 말의 시대 상황마저 녹록하지 않아 원만한 국정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즉위 8년째 되던 1359년 2월부터 침략의 조짐을 보이던 홍두적(홍건적)은 그해 11월 3천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노략질을 해 갔으나 변방을 지키던 지휘관은 이를 숨기고 보고마저 하지 않는다. 홍두적은 중국 원나라 말기에 허베이 성[河北省] 영평(永平)에서 한산동(韓山童)·유복통(劉福通) 등이 중심이 돼 일어난 한족(漢族) 반란군이다.머리에 붉은 수건(紅巾)을 둘러 표시를 했으므로 홍건적 또는 홍두적·홍적이라고도 했다. 몽골민족이 세운 원나라는 중국 내지를 통치했으나 13세기 전반에 이르러 피지배 민족이었던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홍건적은 당시 유행하던 비밀결사인 백련교(白蓮敎)를 업고, 우두머리가 미륵불을 자처하며 큰 세력으로 성장해 중국의 각지를 점령했다. 홍건적은 원나라와 벌인 전쟁의 물자를 구하기위해 1357년부터 1360년까지 여러 차례 2~3천 명의 소규모로 고려를 침범한다.그러다 공민왕 즉위 10년(1361년) 10월에 10만 여명의 무리가 압록강을 건너 삭주로 침입해와 최영과 이자춘 등을 중심으로 고려군이 필사적으로 대항했으나 결국 밀리고 만다. 적들이 개경 인근까지 밀고 들어오자 다급해진 왕은 태후와 공주를 대동하고 남쪽으로 파천을 모색한다. 이 때 최영 장군이 통곡을 하며 왕이 조금만 더 머물면서 군사를 모집하고 종사를 지키자고 간청했으나 왕은 남쪽으로 파천을 결심하기에 이른다.의병을 모집하겠다고 신하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모집에 응한 이는 겨우 몇 명에 불과하고 적은 코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상황이라 우선 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다급하게 피난이 이뤄졌던지 왕이 숭인문을 나서자 `늙고 어린 자들은 땅에 넘어지고, 자식을 버리고, 짓밟혀 깔린 자가 들판에 가득했으며,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고려사는 이 상황을 묘사했다. 이처럼 다급한 파천 길이라 공주마저 연을 버리고 말을 탔는데 차비가 탄 말은 병들고 약해 제대로 달리지 못하자 보는 이들이 모두 울었다. 왕의 일행은 이처럼 경황 없이 남행길을 재촉한다. 왕의 안동 도착 공민왕 일행이 수도를 버리고 떠난 뒤 홍두적들은 바로 경성을 함락시키고 소와 말을 죽여 그 가죽을 벗겨서 성을 만들고 물을 부어 얼리니 이 같은 전술을 겪어 보지 못한 고려군들은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홍두적들은 온갖 만행을 다 저지르는데 사람을 잡아 굽거나 임산부의 젖을 구워먹는 등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고 다녔다. 왕의 일행이 경기도 이천현에 이르렀을 때는 눈까지 내려 왕의 옷이 젖어 모닥불을 피워 말리는 궁색하기 그지없는 피난길로 이어진다.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인 음죽현에 이르렀을 때 백성은 물론 관리마저 도망가 버리고 없어 먹을 양식마저 구하기 힘들어 관리 한 명이 어렵게 구해 온 쌀 두 말로 일행이 연명을 하는 등 어렵고 힘든 여정으로 문경새재를 넘고 예천을 거쳐 12월 임진일에 목적지로 잡았던 지금의 복주(안동)에 다다른다. 안동에 도착한 왕은 정병운을 총병관으로 삼고 임금의 죄를 뉘우치는 `애통교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민왕의 이 같은 행동은 일부 충신들의 간언에 따른 것일 뿐 왕 스스로는 유흥을 즐겨 찾는 등 전란 중의 임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서슴지 않았다.안동에 도착한 며칠 뒤 왕은 영호루에 올라 한동안 경치를 바라보다가는 누에서 내려와 강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이를 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줄을 지어 늘어섰고 더러는 차마 이 모습을 보지 못해 돌아서서 탄식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의 왕이었지만 안동 지역 백성들은 언 강을 공주가 건너도록 사람의 등으로 놓아 주는 충성스런 모습으로 왕의 일행을 맞이해 이를 후세의 문화로 전해 오고 있기도 하다.특별취재팀 : 정태원·고도현·이임태· 이용선 ♠자문: 한양명(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권두현(안동축제관광조직위 사무처장, 안동대 출강) ♠사진자료제공: 사진작가 강병두·안동시청 문화예술과

2009-06-23

"태양신화의 '삼족오 문양' 포항 브랜드로"

3. 태양신화의 동점과 농경제의1) 태양신화의 동점연오랑과 세오녀가 이즈모(出雲)를 중심으로 한 산음(山陰)지역 변읍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고 추정되는 것은《일본서기》와《고사기》등 일본 사서의「스사노오노미코도의 출운천강설화(出雲天降說話)」와 아메노히보코(天日槍)의 도일설화 속에 나타나는 내용과 기본 구조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병도는「천일창의 전설은 《삼국유사》에 보이는 연오랑세오녀의 설화를 연상케 하거니와 단 후자는 전자와 반대로 남편 연오가 먼저 일본에 건너가 왕노릇을 하고 다음에 아내 세오가 도해하였다고 한다. 연오 세오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에는 신라의 일월이 빛을 잃었다는 설화와 천일창이란 이름과의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이것도 생각할 문제이다......천일창 등의 사화는 무엇보다 고대 변진인들이 동해의 일본을 별천지로 알아 여기에 빈삭(頻數)한 왕래, 활발한 무역과 이주식민을 행하면서 일대세력을 잡고 있었던 것을 우리에게 말하여주고 남음이 있다.」라고 하였다.장덕순은 연오랑세오녀가 바다를 건너간 자세한 이야기는 한국 문헌에는 없으나 다행히도 일본 문헌에는 자세히 전하고 있는데, 신라의 일월신인 연오랑세오녀가 오끼(隱岐)섬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은기는 본래 영일지역의 초기 명칭인 근오지(斤烏支)가 일본의 오끼(오기)지명으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고찰을 종합할 때 한국 일월신화의 근원인 한민족(고조선)문명권의 삼족오태양숭배사상이 민족 이동과 함께 고구려와 백제를 거쳐 한국 양곡(暘谷)의 고장 영일지역에 귀착하였으며, 아울러 이 일월신화가 일본으로 이동하여 일본 소국의 개국신화로 정착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2) 농경제의(農耕祭儀) 특별한 환경의 영일지역에 귀착한 고대 한민족 문명권의 삼족오 태양신화에서 비롯된 연오랑세오녀의 일월신제는 광명을 발하여 천지를 밝게 하고 만물을 생육하게 하는 해와 재생과 풍요를 상징하는 달을 숭배하여 한해의 풍년과 집단의 안녕을 기원하는 농경제의를 구조적 기저로 하여 형성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흔히들 신화시대를 제정일치사회라고 칭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이 신화의 구조를 종합할 때 연오랑세오녀가 근오지국의 유력한 인사 특히 일월신제와 농경제의를 주재했던 제사장으로 생각된다. 아달라왕대의 시대적·역사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수서(隋書)》와《당서(唐書)》에서「매양 정월 초하룻날 일월신에 절한다」라 하여, 정월 원단에 일월신에게 절(제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라의 고유한 일월제는 정월 초하루에 거행되지 않았나 추정되며, 그 제의 장소는 연오랑세오녀 설화가 유전되는 도기야인 듯하다.포항지역이 신라시대부터 중요한 제의 장소로 등장된 것은 근기국의 일월신제의의 본거지였고, 동해안의 긴 해안지역의 어로채취 뿐만 아니라 특히 농경지가 넓게 분포되어 농산(農産)이 많고, 신라 왕경 경주로 침입하는 동해구로서 ‘해구침입의 요해처(海寇侵入之要害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오랑세오녀 신화는 처음에는 삼족오태양숭배의 일월신제에서 출발했으나 선사시대부터 국토방위를 위한 성격이 첨가되고 후대로 오면서 점차 농경제의와 습합되어 제일(祭日)도 매년 원단(元旦)과 파종·수확기인 봄·가을 2~3회로 지내왔던 것으로 본다.Ⅳ. 포항문화 브랜드의 미래화 포항 영일만은 한국 삼족오 태양(일월)신화의 귀착지로서 2번의 신화를 창출한 한반도의 정기와 국운상승의 기운이 서린 곳이다. 포항문화 정체성의 원형질이며 포항정신의 근원인 삼족오 일월사상의 문화브랜화는 지역문화의 자생력과 경쟁력을 발현시키는 동시에 빛의 광명사상을 문화화·생활화하여 포항과 지역기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미래 포항발전의 원천적인 에너지로 승화하자는데 큰 뜻을 두고 있다. 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와 일월사상을 브랜드화하여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몇가지 제시한다. (1) 학술적이고 과학적인 문화재 발굴, 문화유산의 보존과 발전에 대한 계기적 연구가 뒤따라야 하며, 이 분야의 전문인력을 길러낼 수 있는 지역 대학의 인문·예술 관련 학과의 개설을 추진해야 한다. (2) 포항문화 브랜드화의 핵심적인 과제 중의 하나인 박물관(가칭, ‘일월박물관’) 설립을 추진해야 한다. (3) 포항정신의 DNA로서 아름답고 힘찬 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와 한민족 태양숭배신앙의 ‘삼족오태양’를 표상하는 ‘삼족오’ 문양을 포항(문화)의 브랜드로 채택할 것을 제의한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국가 브랜드인 삼족오의 세발이 삼신(환인, 환웅, 단군)을 상징한 것이라면, 현대 포항 삼족오의 세발은 선진 첨단과학문화관광도시로의 도약을 상징하는 세발, 즉 3S(Sun, Steel, Science, 또는 Sightseeing)가 될 것이다. 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의 고장(과거), 영일만 신화의 철강도시(현재), 꿈과 신화의 첨단과학문화관광도시(미래)를 상징하고 있다. 맺음말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포항지역의 특수한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배경을 새로운 관점에서 고찰함으로써 연오랑세오녀 신화에 대한 지금까지의 여러 추정을 ‘실존 인물 연오랑세오녀의 행적’이 신화화 된 것으로 구명할 수 있었다. 포항문화 정체성의 고향이며 포항정신의 뿌리인 일월신화와 일월사상은 온누리를 밝히는 광명정대 사상으로서 홍익인간의 이념을 표방한다. 즉, 포항인의 신앙이며, 사상이며, 꿈과 희망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광명정대 사상(일월사상)은 구체적으로 희망, 충절, 개척, 화합, 근면, 부부사랑을 함축하는 일월정신(포항정신)의 요람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포항의 역사와 문화 저력이 되었던 일월정신(포항정신)은 포항이 역사의 시련과 위기 때마다 시대적 과제를 달성해 온 포항의 생존과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를 낳은 ‘일월지향(日月之鄕), 포항’이란 말은 시민들에게 자긍심과 함께 무한한 꿈과 희망의 가능성을 심어주고 있다. 포항은 ‘삼족오태양의 도시’ ‘일월신화의 도시’다. 포항은 고대국가 형성기에 연오랑세오녀가 신천지를 개척하고 신라의 빛을 회복하여 제1의 영일만 신화를 창조하였고, 근래 1968년 이후 포스코의 설립으로 제철보국의 한국 근대화를 이룩하여 제2의 영일만 신화를 재창출하였고, 바야흐로 지금부터 꿈과 희망의 도시 첨단과학문화관광도시, 글로벌 포항을 향해 제3의 영일만 신화에 도전, 점화할 때이다. 아울러 앞으로 한국과 일본 태양신화의 요람인 포항이 삼족오 일월신화를 브랜드화하고 일본 신화의 도시와 자매결연·민관교류 등을 모색한다면 양국 선린교류의 한 물꼬로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에 의해 전통과 미래가 함께하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하는 ‘활기찬 경제’ , ‘쾌적한 환경’, ‘따뜻한 복지’, ‘꽃피는 문화’의 도시 글로벌 포항은 성큼 다가오는 것이며, 이 길은 포항시민들의 행복한 삶과 자손만대의 무궁한 번영을 위한 영일만 신화의 세 번째 목표인 것이다. 포항(문화) 브랜드의 이론적 배경은 새로 발견된 자료에 의해 연오랑세오녀가 실존 인물로 밝혀짐에 따라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이번 ‘제7회 일월문화제’의 ‘제1회포항정신문화 심포지엄’을 통해 포항이 이 ‘일월신화의 도시’로 브랜드화 하여 포항 정체성의 이미지를 세계화하는 횃불로서 역사적인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끝

2007-11-16

연오랑 · 세오녀는 日 개국신화의 모태

Ⅲ. 역사적 배경1. 근기국 형성과 신라로의 편입1) 근기국의 형성근기국의 읍기는 고현리(古縣里)로서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포항시 남구 오천읍 원리(院里:院洞)지역이다. 고현은 오늘날 포항 남부지역의 젓줄인 형산강과 냉천 사이의 중심지역으로, 양쪽 하구 부근에 어미들, 제내들, 송내들 등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포항시 남구 인덕동, 동북쪽으로는 일월동과 청림동을 접하여 영일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연해지역과 내륙을 있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선사시대부터 주거생활의 중심지로 발전되어 간 것이다. 이병도 박사는 일찍이 근기국을 신라시대의 근오지현(斤烏支縣) 지역이었던 경북의 영일지역으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음운상으로도 근기(勤耆)-근오기-근오지(斤烏支)로 변함이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근기국은 고현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포항시 남구의 오천읍, 연일읍, 동해면, 대송면 등의 지역을 지배한 소국을 형성하면서부터 이 고장의 역사는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2) 신라로의 편입과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탄생근기국은 기원전 2세기 말~기원전 1세기초 경 소국을 형성하였다가 신라 건국 이후 2세기경 고대국가에 편입되었다. 신라 고대국가의 형성기인 제5대 파사왕(80~112)때에 전쟁을 수행하여 안강·흥해·기계를 복속하여 울산까지 동해안 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 후 신라 고대국가 형성의 큰 정치사적 사건인 근기국 복속이 제8대 아달라왕(154~183)대에 이루어진다. 연오랑세오녀 신화 탄생의 역사적 배경은 아달라왕대 고대국가의 영역 확장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신화가 탄생된 왕 즉위 4년(157)이 주목되며, 「2월에 감물·마산의 두 현을 처음으로 두었고, 3월에 왕은 장령진으로 순행하여 군사를 위로하고 모든 정병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3월에 지난 해(왕 3년)의 계림령에 이어 죽령(竹嶺)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계획과 실천은 아달라왕대에 이르러 영일만 일대를 실질적인 지배영역으로 복속하여 흥해에서 울산만에 이르는 동해안의 지역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신라 2대 남해왕 3년에 시조묘를 세운 후 7대까지 한 차례씩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으나 8대 아달라왕대에 와서 두 번이나 시조묘 제사를 올리며, 시조묘를 중수했다는 사실은 건국의 시조신을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통합하여 신라 고대국가의 확립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연오랑과 세오녀를 중심으로 한 근기국의 삼족오일월숭배 집단(사제자·귀족·직조·제철기술자 등)은 전통적인 천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사로국 세력으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자 신라의 복속에 불응하고 도기야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양곡의 땅 신천지 일본지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영일만의 근기국세력이 일본 변읍의 왕이 되었다는 것은 신라의 정치적 상황과 연계된 것으로 이 후 전개되는 모국 신라와의 교류관계를 짐작하게 한다.2. 선진문화 전파와 일본과의 교류 잘 아는 바와 같이 고대 한국인의 일본이주와 문화이식이 일본고대사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음은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관계로 선사시대부터 관계를 맺어 고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의 문화가 대량으로 일본에 유입 전수되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일본의 야요이시대(彌生時代:B.C 4세기~A.D 3세기)문화는 토기·청동기와 묘제·주거양식 등 한반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진한과 신라는 철과 철기를 생산하여 당시 동북 아시아에 널리 공급하던 철국이었으며, 그 흔적으로 영일 호동(虎洞:현 포항시 남구) 폐고분군(廢古墳群)에서 B.C.2세기~A.D.2세기경의 초기 철기시대의 철부(鐵斧)·철모(鐵?)·철도자(鐵刀子)·철촉(鐵鏃) 등의 철제품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근기국의 치소 인근에서 활발했던 철생산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 실체는 고고학적 성과를 더 기다려 확인되어야 할 것 같다. 일찍이 이홍직(李弘稙)은「신라 지방과 이즈모지방과의 긴밀한 척식(拓殖)관계를 전하는 일본측 고전으로서는 ‘이즈모풍토기(出雲風土記)’가 있다.」,「진한(辰韓) 지방에서 동해를 건너서 일본의 일부 지방의 지배자가 된 신화는 우리나라 고전에도 남아 있다... 이것이야 말로 태고시대에 정말 있을 수 있는 역사를 반영한 전설로 볼 곳이며, ‘연오랑(延烏郞)’이야 말로 일본 전설의 ‘스사노오노미코도(素잔嗚尊)’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라 하여 양국의 교통과 문화교류 등 이 방면 연구에 큰 시사를 주었다.연오랑세오녀 세력들이 배를 타고 떠난 곳은 영일만 출입의 요해처인 임곡진으로 비정되며, 그들이 도해하여 개척한 곳은 영일만 지역과 가장 가까운 일본 지역으로 거의 같은 위도인 36。에 있는 오키(隱岐)섬과 이즈모(出雲)·마쓰에(松江)지역을 들 수 있다. 영일과 출운 지역은 가까운 거리, 항만, 조류와 풍향 등의 자연의 지리와 환경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일본의 천일창(天日槍) 설화는 연오랑세오녀 신화가 동점하여 이루어진 태양신화의 이동으로 보는 연구와 함께「도기야(都祈野)는 근오지(斤烏支)의 ‘오지’(烏支)와도 음이 일치하며, 일본의 지명 오키(隱岐)와도 동일한 것으로 미루어 연오랑세오녀가 건너가 옛땅 오기(迎日)의 이름을 신왕국의 명칭으로 삼았다」고 보는 연구는 태양신화 동점의 민속학적 접근과 지명의 언어학적 접근으로 눈길을 끈다. 계속

2007-11-09

포항은 한국 일월신화의 대표적 聖地

Ⅱ. 신화의 지리적 배경과 지명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의 명증(明證)은 앞의 문헌자료 외에도 포항 지역의 특성을 밝혀주는 연(영)오·세오의 인명과 근기국, 근오지(斤烏支), 오천, 일월·영일·도기야·일광·세계·夫山(부산 또는 扶桑)·광명 등 해와 달, 해맞이, 빛을 상징하는 밀집 분포된 지명을 통해 밝힐 수 있다. 연오랑세오녀 신화가 없었더라면 일월·빛과 관련된 수많은 인명·지명의 역사적 배경을 온전히 구명할 수 없고, 반면에 이러한 명칭들이 남겨지지 않았다면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지리적 배경을 구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一 즉 二’ ‘二즉 一’로서 서로의 정체성을 보완하고 밝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1. 영일현과 도기야《삼국유사》에서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고 한 것에 대해 필자는 넓게는 영일현(당시의 근기국과 근오지현의 영역), 좁게는 도기야를 지칭한 것으로 보았다.선사시대부터 사용되었을 두 명칭 중 영일은 근기국 수립시의 치소 명칭과 신라 편입후 고을명인 근오지·오천·오량우·임정 등의 명칭으로 변하였으나, 도기야는 초기와 같은 ‘해돋는(크게 비는)’ 신성한 들(野)의 이름, 제장명(祭場名)으로 오랫동안 불리워지다가 점차 마을이 형성되어가면서 마을명으로 변천했다고 본다. 2. 일월지, 천제당, 연오랑세오녀의 거주지 ‘당평’(塘坪)마을 현재 일월지는 오천 해병부대 내에 소재하고 있으나, 본래는 도기야 지역에 속해 있었다. 주위보다 높은 언덕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저수지로서 주변의 여러 작고 큰 들을 끼고 있어서 비록 바닷가 지역이지만 일찍부터 벼농사를 짓는데 큰 도움을 준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일월지의 못 위’가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일월지 위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해석을 좀더 폭넓게 하여, 일월지 못둑 위 가까운 지점에서만 제천지나 제당을 찾지 않고, 좀 떨어진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되어, 연오랑세오녀가 살았던 세계동의 당평 마을이 제천지와 일월사당이 있었던 지역으로 보고자 하였다. 세계동은 ‘당평(안마실, 안마을)’, ‘중흥’, ‘등위(신흥)’, ‘원세계’, ‘장터’ 등의 자연부락을 합쳐 이루어졌다. 이 동네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천제당(天祭堂)’이 있어서 매년 정월 초 정일(丁日)에 연오랑·세오녀 일월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당집 내부 앞 벽면에는 부부처럼 보이는 남녀가 서로 마중하는 시늉을 하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곳이 과거 천제당 자리였으므로 아마도 연오랑세오녀 부부를 상징한 그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천제당이 있었던 당평마을에서 동해바다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길목 언덕에 ‘당옆’이란 자연부락이 있다. ‘당옆’마을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다. 바로 이 당옆마을에 연오랑세오녀가 집을 짓고 살았다고 전한다. 마을 이름의 유래도 연오랑세오녀의 집인 ‘당(堂)옆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3. 연(영)오·세오와 삼족오 포항지역의 일월과 관련된 명칭 중에 ‘오(烏)’자가 든 지명인 斤烏支·烏良友·烏川·斤烏兄은 삼족오태양(일월)을 상징하는 양곡(暘谷:해가 가장 먼저 돋는 곳)의 고을명이다. 延烏와 細烏 역시 삼족오태양(일월)을 상징하는 인명이다. 해 속의 세발 까마귀 삼족오(日中三足烏)는 달 속의 두꺼비(月中蟾?)와 함께 쌍을 이루고 있다. 삼족오는 음양론에 따라 해의 상징으로 양의 뜻이고, 두꺼비는 달의 상징으로 음의 뜻이다. 이러한 인명과 지명들은 영일만 양곡이 고대 한민족 문명권의 삼족오태양신화가 이동 전승된 귀착지로서 한국의 대표적 일월신화의 성지임을 밝혀주고 있다. 천손의 나라 한민족의 태양숭배사상과 조류숭배사상의 연합토템으로서의 우주관, 일월의 음양조화사상 및 천제적 제의에 대한 종합적인 인식이 상징화되고 체계화된 것이 삼족오라 할 수 있으며, ‘하느님숭배’·‘태양숭배’·‘삼신(三神:환인·환웅·단군)숭배사상의’ 상징적 표현양식의 하나임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월지정(日月之精)이라는 의미와 함께 일월신화의 이동 경로에 나타난 삼족오의 ‘烏’자가 든 인명이 주목된다. 연오랑세오녀는 일월지정의 양오(暘烏)이며, 천강지자(天子) 왕(태양)의 안내자임을 말하고 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오이(烏伊), 백제의 시조도 오간(烏干) 등의 보필로 나라를 세웠다. 그러므로 연오랑과 세오녀도 근기국과 신라의 왕을 보필하는 지배세력의 유력한 인사(사제자,왕족, 귀족, 고급기술자 등)로서 태양을 상징하는 왕을 대신하여 태양의 빛을 온 나라와 백성에게 안내하고 밝히던 높은 직분의 인사였을 것이다.삼족오 문양은 고구려의 벽화 뿐만 아니라 1986년 익산(益山) 입점리(笠店里) 백제고분의 금동관에서도 발견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지난 1985년 출토된 순흥읍내리 고분벽화에서도 양광(陽光) 즉, 양수지조(陽燧之鳥)와 흡사한 삼족오의 전신(前身)을 상징하는 일상(日象)이 발견되었다. 신라지역인 경북 동북부의 영풍·안동·봉화·청송·울진·영덕·영일·영일지역에서도 고구려 지명이 나타난 점으로 보아 상당한 기간 고구려의 세력이 이들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출토된 삼족오태양 관련 유물 연구와 지금까지 살펴 본 지명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의 지리적·역사적 특성 구명을 종합해 볼 때 우리 나라 일월신화와 삼족오태양신앙의 종착지인 포항 영일만 지역에도 이와 같은 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될 것임을 기대한다. 계속

2007-11-02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 연구

배용일(포항1대학 초빙교수)이 글은 배용일 초빙교수(포항1대학)께서 지난 10월 8일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된 제7회 일월문화제 기념 ‘제1회 포항정신문화 학술심포지엄’(연오랑 세오녀 설화와 일월사상)에서 발표한 주제 논문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 연구 -포항 정체성 탐구와 포항문화브랜드화를 중심으로- ”를 요약한 것이다.(각주는 지면 관계로 생략) /편집자 註 머리말 포항지역의 연오랑 세오녀(延烏郞細烏女) 일월신화(日月神話)는 단군신화를 수록하여 유명한《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어 일찍부터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일찍이 최남선이 단군신화는 한국문화 일체의 종자라고 했듯이 연오랑 세오녀 신화는 포항문화 일체의 종자이며 원형질이다. 지금까지 ‘연오랑 세오녀 설화’라고 일컬어 온 것을 2007년 포항의 문화제 명칭을 영일만축제에서 이번 제7회 ‘일월문화제(日月文化祭)’로 개칭한 것을 기념하는 ‘제1회 포항정신문화 학술심포지엄’ 개최를 계기로 ‘연오랑 세오녀 신화’로 명명하였다. 그 이론적 근거는 본고의 지리적 배경, 역사적 배경 및 신화적 구조를 통해 구명하였다. 이번 연구에서 연오랑세오녀가 실존 인물임을 밝히는 귀중한 사료를 발견하여 포항 정체성 탐구에 큰 전기를 맞으며, 일월신화 1850년의 신비로운 베일을 한 겹 벗길 수 있게 되었다.이 논문의 궁극적 목표는 연구 결과 얻은 포항문화의 정체성을 브랜드로 상징화하여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와 일월사상의 창조적 가치를 재창출하는데 큰 뜻을 두었다. Ⅰ.연오랑 세오녀 사료연오랑 세오녀 신화 연구의 가장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는 《삼국유사》의 ‘연오랑(延烏郞)세오녀(細烏女)’와《영일읍지》의 ‘세계동(世界洞)’의 내용을 소개한다. 1.《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제 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부부로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미역 종류〕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한 바위 -혹은 한 고기라고도 한다-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이는 비상한 사람이다.」그래서 왕으로 삼았다. -일본 제기(帝紀)를 살펴보면 전후에 신라 사람이 왕 된 이가 없으니, 이것은 변읍(邊邑)의 소왕이고, 진왕(眞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는 그 남편이 돌아 오지 않음을 괴이히 여겨 가서 찾다가, 남편의 벗어놓은 신이 있음을 보고 또한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또한 그 전처럼 세오를 싣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놀라서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세오〕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이 없어지니, 일관(日官)이 말했다.「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 나라에 있었던 것이 지금 일본으로 가버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일어났습니다.」왕은 사자(使者)를 일본에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았다. 연오는 말했다.「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거요.」이에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그런 후에 해와 달이 그 전과 같아졌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며,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三國遺事》권1, 紀異, 원문생략) 2.《영일읍지》의 ‘세계동’예로부터 세곡이라 부르다가 후에는 누을(또는 혜곡)이라고 불렀다. 세 구역(원신흥·중흥·세계)을 합하여 세계동이라고 했다. 신라 아달라왕 때 영오랑·세오녀가 세계동의 못둑 위의 들에 집을 지어 살았던 곳이나 지금은 빈터만 남았다. 남쪽에는 춘덕보가 있어 일월지로 통하고, 동쪽에는 순제가 있어 앞들에 물을 대고, 북쪽에는 옥령이 있고, 서쪽에는 도덕곡이 있다.(金鎔濟,《迎日邑誌》권1 ‘世界洞’ 원문생략) 《삼국유사》에서는 연오랑(延烏郞)이라 했으나《영일읍지》는 연(延)자를 영(迎영)자로 써서 영오랑(迎烏郞)이라 다르게 표기했다. 그러나 ‘연(延)’과 ‘영(迎)’은 음과 훈이 흡사하여 조선시대에는 영일현(迎日縣)과 연일현(延日縣)을 혼용해 온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같은 명칭이다. 《영일읍지》‘세계동’에서는 영오랑 세오녀가 집을 짓고 살았던 세계동 마을과 주위의 못·재·골짜기 등 구체적인 지형적 환경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일월지와 제천지(祭天地) 및 연오랑세오녀 거처를 비정할 수 있고, 이를 근거로 하여 당시 부부의 신분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세계동〉의 마을명과 주변의 못·재·골짜기의 명칭이 지금까지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동국여지승람》의「일월지 못 위에서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은 일월신화의 발생지역을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단서가 되고 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세오녀 신화는「동해 바닷가에 사는 해와 달의 정(精)인 연오랑세오녀가 바위를 타고 일본에 건너가 그곳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도일(渡日) 건국 사실이 자연환경의 지역성과 고대 신라왕국 성립기의 역사성을 토대로 상징화된 것이다. 즉, 당시 전개되었던 근기국(勤耆國)의 신라로의 편입, 선진문화의 일본전파 및 신라와 일본과의 문물교류를 반영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신화화한 것으로 추단된다. 특히 일월신화(日月神話)의 탄생지를 에워싼 여러 지명들과 이 지역의 가장 빠른 연중 일출시각 등은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까지 포항지역만이 일월신화의 정체성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계속

2007-10-26

‘충효의 고장’ 영천

2월이 다가기전에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 가족과 함께 ‘충효의 고장 영천’, ‘관광 영천’의 명소들을 찾아다니며 여행의 참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해 보는 것이 어떨까. 영천에는 우리나라 3대 천문관측소 중의 하나인 보현산 천문대와 정각 별빛마을,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임고서원, 국내 최고 수준의 시안 미술관, 국내 최대 한약재 거래지역인 영천한약약령시장, 7천평 규모로 산 정상에 자리한 사일관광온천,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있는 영천댐 등이 가볼만한 곳을 2회에 나눠 게재한다. 편집자 주 보현산 천문대 태양플레이어 망원경 보유 먼저 보현산 천문대를 찾아 겨울철 별자리를 찾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정각리 별빛마을에 들러 상큼한 고로쇠 수액도 맛볼 수 있다. 국내 3대 천문관측소 중 하나인 보현산 천문대는 보현산 정상에 위치해 있어 밤하늘 머리 위로 별빛이 쏟아진다하여 ‘별빛 나라’로 불리고 있다. 보현산 천문대는 천체의 움직임과 변화를 관측하며 우주의 생성과 진화를 연구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국내 최대의 천체망원경(렌즈구경 1.8m)과 태양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태양플레이어 망원경을 보유하고 있다.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100만 배 이상 관측이 가능하고, 12km에 떨어져 있는 100원짜리 동전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해상력이 높다. 천문대에 오르면 탁 트인 전망과 함께 야간 개장 때에는 별도 함께 관측할 수 있어 청소년 견학지로 좋은 곳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망원경을 비롯해 천체관측 시설을 직접 둘러보고 별과 우주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4월부터 10월까지, 매월 네 번째 토요일 주간 공개행사를 열고 있다. 행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전에 전화(054-330-1000)로 예약을 해야 한다. 보현산 천문대 방문객센터에 있는 전시관에는 각종 천체사진들이 전시돼있으며, 간단한 기념품들을 구입할 수 있다. 야간에는 천체관측이 이뤄지기 때문에 방문객들은 일몰 전에 산을 내려가야 한다. 야간공개 행사는 연 중 보현산 별빛축제 기간 중에 한 차례 열린다. 행사시간은 오후2시부터 밤11시까지다. 부대행사로는 유명가수 축하공연, 불꽃놀이, 별빛 패션쇼, 별빛 가요제, 별빛 퀴즈대회, 심야과학영화상영, 별빛 동요왕 선발대회등도 열린다. 보현산 천문대는 1996년4월 영천시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에 걸쳐 있는 보현산 정상일대 9천122평(3만156평방미터) 부지에 세워졌다.(문의 : 054-330-1000) ◎ 가는 길 영천시내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청송방향으로 약 20km 지나면 자천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자천과 과적차량 검문소를 지나면 천문대로 향하는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우회전해 ‘옥계교’라는 다리를 건너 10여분 정도 가면 왼편으로 정각교회가 보이고, 곧 정각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해 정각 별빛마을을 가로질러 보현산 천문대(9km)로 향하면 된다.   정각별빛마을 밤하늘 쏟아지는 별빛 감상 이름만 들어도 신비스러운 별빛마을에서는 연중 흐린 날을 제외하곤 머리위로 쏟아지는 별빛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별빛마을은 보현산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동사, 양촌, 신리, 절골 등 4개의 부락 산골마을로 보현산 천문대 입구에 있다. 행정동으로는 정각(正覺 : 바르게 깨닫다)리다. 별빛 마을은 해발 1천124.4m의 웅장한 보현산이 거대한 병풍처럼 우뚝 솟아 정각리 별빛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을 한 가운데를 관통해 바위틈을 비집고 흐르는 맑은 물은 횡계천으로 향하고 있다. 밤하늘을 쳐다보면 머리위로 얹혀 있는 듯 한 수많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별빛축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아마추어 천문캠프가 설치되고 별빛마을 농촌체험이 운영돼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진다. 영천시는 이곳에 20억원을 들여 지상2, 지하1층 연건평 200평 규모로 보현산 천문과학관을 착공, 올해 말 문을 열 예정이다. 천문과학관은 주관측실, 보조관측실, 전체투영실, 천문관측 전시실, 시청각실 등으로 꾸며진다. 천문관측관이 들어서면 관광객들이 연중 천체관측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정각리 별빛마을에는 모두 55가구 1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주민들의 주 소득원은 미나리와 고로쇠 수액, 사과 등이다. 미나리는 14농가가 참여, 매년 3월5일부터 한 달 동안 1억3천200여만 원의 매출을 올리며, 고로쇠 수액은 2월18일부터 40일간 5천100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요즘 이곳을 찾는다면 별빛을 머금고 자란 고로쇠 수액을 구입할 수 있다. 고로쇠 수액은 20리터 한 통에 5만원 정도.(문의 : 허성수 이장, 010-6595-3773)   임고서원 선현들 배향 사설교육기관 임고서원은 위기에 처한 나라의 국운을 바로 세우고자 죽음으로서 절의를 지킨 시대의 충신 ‘정몽주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임고서원은 1553년 조선 명종 8년에 창건해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03년 선조 36년에 중건됐다. 1643년 인조 21년 여헌 장현광과 1727년 영조 3년에 지봉 황보 인을 배향했으나 1871년 고종 8년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됐다. 1965년 복원했고, 1990년대부터는 성역화사업을 추진해 기존 서원 옆에 새로 서원을 세워 큰 규모를 갖추었다. 임고서원 소장전적 및 포은 정몽주 영정이 보물 제1109호, 11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앞에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다. 높이 20여m, 둘레 5.95m의 이 은행나무는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됐다. 수관 폭은 동서방향으로 22m, 남북 방향으로 21m에 이르고 있으며, 생육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여기서 서원에 대해 간단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 여행 중에 더한 즐거움을 얻게 된다. 어려서 처음 가는 교육기관은 서당이며, 서당에서 기본적인 유학서들인 ‘동몽선습’, ‘격몽요결’, ‘명심보감’ 등을 익힌다. 지금의 사립초등학교라 생각하면 된다. 서당을 마치고 다음으로 진학하는 교육기관이 서원과 향교이다. 서원과 향교는 유학의 선현들을 모시고 후학을 양성하던 똑같은 기능을 하던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국가교육기관인 향교는 대성전을 두어 공자를 배향하는데 비해 사설교육기관인 서원은 우리나라의 선현들을 배향했다. 향교나 서원에서는 ‘소학’을 시작으로 사서삼경을 배웠다. 서원이나 향교에서 공부를 마치면 과거를 보거나 성균관 입학시험을 보았다. 대원군의 서원(당쟁의 뿌리 역할) 철폐령 이후 남아 있는 오늘날 서원들은 교육기능을 상실한 채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는 문묘의 기능만 하고 있다.   정몽주 선생 · 조양각 영남 3대 루 중 하나 조양각 ◆정몽주 선생 호는 포은. 1337년 고려 충숙왕 6년에 임고면 우항리에서 태어났다. 성리학을 세계관으로 한 고려 말 신진사대부 중 온건파의 수장으로서, 고려를 보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급진파인 이성계 일파와 대립하였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으나, 1392년 공양왕 4년 4월4일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됐다. 이때 나이 56세였으며, 선혈을 흘린 자리에서 푸른 대나무가 솟아나 이름을 선죽교로 고쳐 부르게 됐다. 이후 조선 태종 원년(1401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익양 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를 문충공이라 했다. 포은은 효성이 지극했으며, 생활이 검소했고, 벼슬에 있을 때 청렴, 근신했다. 이방원의 하여가의 답가로 유명한 단심가를 남겼으며, 의창과 5부학당, 향교 등을 세워 빈민구제 및 성리학 보급, 사회윤리 확립, 교육진흥에 힘썼다. 문집으로는 ‘포은집’이 있고, 그의 굳은 충성을 읊은 시조 ‘단심가’가 전해지고 있다. ◎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영천IC에서 빠져나와 시청방향으로 진입해 안강, 포항 방면 26번 국도 조교삼거리에서 임고 방면 69번 지방도로를 따라간다. 4.5km 정도 가다보면 임고 삼거리가 나오는데 바로 왼편이 임고서원이다. (054-335-2864) 여기서 곧장 가면 보현산 천문대가 보인다. ◆조양각 진주 촉성루,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 3루 중 하나인 조양각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년)에 성리학의 원조 포은 정몽주 선생과 당시 부사이던 이용, 향내 유림들이 합심해 지은 건물이다. 조양각은 명원루, 서세루라고도 한다. 명원루라는 이름은 당나라의 문장가 한퇴지의 시구(훤히 트인 먼 곳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조차 더 밝아오는 듯하다)에서 왔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 15년(1637)에 조양각이라는 이름으로 중건했으며, 누각 안에는 포은의 청계석벽을 비롯 율곡, 사가, 노계 등 명현, 풍류객들의 시구가 새겨진 현판 80여개가 걸려 있다.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 3대 루 중에 하나이며, 경내에는 백신애 문학비와 황성옛터 노래비, 영천지구 전승비 등이 있다. 계속 /김규동·장병욱기자

2007-02-23

“마고할멈 전설 · 忠婢단량 · 貫目魚등 다양한 역사 간직”

이삼우포항향토사가더 이상 갈 곳 없어 ‘이제 그만’이란 탄식에서 유래된 ‘구만리’청어 관목어에서 비롯된 과메기, 지금은 세계속 먹거리로 발전사랑하는 님 만나려고 마고할멈이 놓은 바닷속 돌다리 ‘교석초’■ 구만리의 유래동해안에 별스럽게 툭 불거져나온 작은 반도 그 끝 부위를 장기곶이라 한다. 고산자는 이 나라의 지형이 호랑이 같다며 이 일원을 호미등(虎尾嶝)이라, 곧 호랑이꼬리짬으로 표현했다.해맞이 공원이 있는 대보면소재지 보천마을 북쪽으로 KBS송신소가 자리하는 언덕배기 전체를 구만등(九萬嶝)이라 한다. 구만리라는 단어 그 자체가 한없이 넓다는 뜻을 품는다. 혹자는 거북이가 많이 서식하던 지역이라고 龜滿, 혹은 언덕이 질펀하다하여 丘滿이라는 설도 있다. 그 다 일리 있는 풀이이겠지만 ‘이제 그만이구나’라고 외친 한 여인의 절규에서 발생했다는 설이 설득력 있다 여겨진다.세종때 영의정에 올라 훗날 단종을 보필하던 충신 황보 인 정승 가문이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몰락할 때였다. 단량(丹良)이라는 여종이 정승의 어린 손자를 물동이에 숨겨 한양을 빠져나와 산 넘고 물 건너 낯선 길 천리를 걸어서 봉화군 닭실마을로 황보 인의 사위 윤당(尹塘)을 찾아가 노잣돈을 마련하여 은신처를 찾아서 이 곳까지 내려온다.이제 더 달아나 숨을 곳이 없는 허허로운 구만등 언덕에 이르러 한숨지으며 외쳤던 절규가 ‘이제 그만이구나’이었다. 이 ‘그만’이 ‘구만’으로 와전되어 이두식 한자표기로 구만(九萬)이라 불려지게 되었다는 설이다.더 나아갈 땅길이 없음에 그녀는 아기를 다시 들쳐 업고 눈을 피해 장곡봉수대(봉화봉 130m)가 있던 고금산(일명 馬峯산) 골짜기 집신골(집성골)로 숨어든다. 그 곳은 해변에서 불과 1㎞ 남짓 떨어진 그리 높지 않은 산이요 깊지도 않는 골이건만 외지고 깊숙하기가 심산유곡 같아서 숨어 살기에 적지였다. 그 곳이 곧 황보 집안의 맥을 다시 잇게 하는 은둔처였으니 4대를 칩거했던 곳이다. 그래서 이름이 집성골[集姓 골]이라 불러지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그 자리에 대곡(大谷) 저수지가 축조되어 550여 년 전의 그 뼈아픈 흔적들을 물속에 묻어 담고 유유하기만 하다.훗날 세상이 밝아지고 곤혹의 역사가 희석되면서 그 후손들은 장기면 모포리 뇌성산성 뒷자락, 지금의 구룡포 성동(城洞)마을로 이주를 하여 세거(世居)할 터를 잡고 다시금 핏줄을 늘리며 가세를 회복하기 시작하여 숨어 산지 290여년 만에 자유와 명예를 되찾게 된다. ■ 깔구리개와 과메기의 전설대보 마을에는 ‘봄 샛바람에 목장 말 얼어 죽는다’는 말이며 ‘내밥 먹고 구만등 바람 쐬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3면이 탁 트인 바다요 바람막이 숲도 없는 언덕배기 지형이라 바람거세기가 가히 살마적(殺馬的)인 곳이다.그 구만등 끝자리에 깔구리개라는 작은 포구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종종 깔구리로 고기를 끌어 모아야 했던 풍경들 때문에 지어진 마을 이름이다. 그도 보통 고기가 아닌 청어였다. 개는 浦-개 자다. 옛날에는 음력 정월이면 이 연안으로 청어 떼가 몰려오곤 했는데, 몹시도 풍랑이 거친 지역이라 몰려다니던 고기 떼들이 거친 파도에 떠밀려서 이 마을 포구로 내동댕이쳐지기 일쑤여서 이를 주민들이 깔구리로 긁어모았던데 연유한다.과거 영일만 호시절 까지도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풍어였었다니 족히 가능한 이야기다.교석초 일원은 암초투성이다. 물밑의 험준한 지형 때문에 난파선도 잘 생기는 별난 자리다. 그래서 풍랑이 거친 날에는 고기떼가 방향을 잘못 잡아 골탕을 먹고서 뭍으로 밀려 나둥그러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한 북새통 속에 어떤 녀석은 해변 나뭇가지에 걸리고 어쩌다 꺾어진 나뭇가지에 눈이 꿰뚫려 걸린 상태로 피둥피둥 건조되기도 하였다. 한자로 쓰니 곧 ‘꿰뚫을 관(貫)’ ‘눈 목(目)’이라, 즉 관목어(貫目魚)가 된 것이다.어느 추운 날 가난한 한 선비 나그네가 이 해변을 거닐다가 그렇게 방치된 고기를 챙겨 주막에 들어가 술을 사 마실 때 안주로 했던 것인데, 그 맛이 특이하고 좋은지라 신상품이 개발되니 이에 관목어(貫目魚)라 이름 한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방언의 습성이 작용하여 ‘과메기’가 된 것이라 한다.그 후 과메기는 발달을 거듭한다. 옛날에는 꽁치가 아닌 청어두름을 부엌 환기창 밖에 걸어두고서 말리게 되어 있었다. 부엌 아궁이에서 나오는 연기가 훈제역할을 하여 방부효과를 내게 하기 위함이요,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면서 건조되게 하기 위함이다.그것도 등이 아래로 향하게 거꾸로 메어 달게 된다. 그래야 온도의 고저에 따라 애간장이 녹아내려서 서서히 몸체에 스며들어 깊고 오묘한 맛을 내기 때문이다.惡化(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더니 과메기 원조는 까마득히 사라지고 꽁치과메기가 기승을 부린다. 어쨌거나 경향각지로, 마침내 세계로 까지 판매망이 이루어지고 있다니, 꽁치팔자도 시간문제였나 싶다.깔구리개 앞 바다 속으로는 겉과는 달리 험하기가 설악이나 금강산의 어느 바위산지느러미 능선 같다고 한다. 수중 험한 산봉우리들의 정수리가 해수면위로 노출된 부분이 북쪽 축산을 향해 거대한 디딤돌 놓이듯 돌출 배치되어 있어 교석초(橋石礁)라 한다. 태고적에 마고(麻姑)할멈이 영덕군 축산으로 사랑하는 님을 만나러 가려고 밤새 놓다만 돌다리라는 전설을 갖는다.1907년 9월9일 일본 동경수산대학의 전신이던 수산실습소 실습선 가이요마루(쾌응환·快鷹丸)라는 범선이 이 지점에서 좌초, 조난하면서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거친 파도에 휩쓸려 죽은 것을 기념하는 비가 이 일원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있어 그 정황을 짐작케도 한다.이 지점이 겉보기에는 육지의 한 끝이지만 해저지도에 의하면 바다 속으로 울퉁구불 이어지는 큰 산맥이 있어 영덕의 축산과 연결된 형국이라 한다. 바다 속에도 산맥이 있고 분지며 평원이며 단애며 밀림이며 갖가지 형상의 지형이 있게 마련이다.곧 이 해중(海中) 산맥 때문에 동해로 흘러드는 각종의 오염물질들이 쌓이고 또 쌓여서 마침내 조개 한 톨 건저 먹을 수 없는 죽은 바다로 변한다는 학설이 있어 우리를 경악케 한다. 환경부 발간 환경백서에 의하면 포항과 경주, 영덕이 지금과 같은 속도로 바다를 오염시키는 우행을 지속한다면 불과 20년 이내에 그렇게 된다는 경고다.특히 우리 포항은 해양 도시로 발돋움하여야 할 운명인데 바다가 죽으면 함께 죽어갈 것이 뻔 하기에 걱정이 된다.후손들에게 온전히 물려주겠다는 각오를 한다면 과메기에서 벌어들인 순수입에 해당하는 재원부터 몽땅 바다 살리기 투자로의 전환을 기획하는 것도 불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이제 ‘포항의 역사이야기’ 연제의 그 끝을 본다. 필자가 써 내린 글 들 중에 더러는 誤記(오기)며 文弱(문약)함에도 핀잔 없이 격려와 공감대로 함께해준 애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표하고 향토 사랑의 깊은 정이 확산되므로서 품격 있고 아름다운 포항이 건설되기를 빌어본다.끝

2006-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