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스물다섯 살에 연고 없는 포항에서 무용학원 개원

여고 시절의 무용 선생님은 수업 전에 덧버선 검사를 했고, 꼭 수돗가에서 발을 닦고 들어오게 할 정도로 엄격했다. 당시 선생님의 반듯한 용모와 도도한 기품은 여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김동은 무용가와의 첫 통화 때 바짝 긴장했다. 내 염려를 알아차렸는지, 본인도 이런 대담은 생소하다며 서로 마음 편하게 만나자고 했다. 김동은 무용가는 지난 2월 23일 사단법인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선에서 당선된 바 있다. 동빈내항에 있는 포항예총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전은주(이하 전) : 지난 3월에 한국예총 포항지회장에 취임하셨죠. 그 후로 바쁜 나날을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김동은(이하 김) : 네, 회장 취임 후 한동안은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바빴습니다. 새로운 분야를 열심히 공부한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전 : 포항예총 역대 회장 중 첫 여성 회장이자 첫 무용협회장 출신입니다. 의미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김 : 1978년에 포항에 왔습니다. 그전에 포항에 무용학원 한 군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어요. 1970년대 이후 포항에서 학원 무용 선생으로는 내가 처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좀 어렸지요. 어리다고 하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스물다섯 살이었어요. 포항에 와서 교육청에 무용학원 인가를 받으러 가니까 내주지 않더군요. 춤이라면 사교춤으로만 생각할 때여서 무용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았어요. 학원 장소를 마련해놓고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6개월이 지난 후에야 인가를 받았지요. 인가 번호를 지금도 기억하는데 13호입니다. 그때 포항 시내에 공연장이 딱 하나 있었는데 시공관이었어요. 지금은 중앙아트홀이 있는 자리지요. 그곳에서 공연할 때 연극인들이 조명을 도와주고 미술가들이 무대를 꾸며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신상률 포항예총 회장님, 김삼일 은하 극단 대표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언젠가 때가 되면 신세를 갚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포항예총 회장이 되고 보니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군요. 전 : 지금도 무용 하면 생소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그 시절에 무용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김 : 초등학교 때 학예회가 열리면 주인공으로 뽑혀 공연을 했었지요.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고 무대에 서는 게 좋았어요. 중학교에 무용반이 있어서 무용을 했고 경북예고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경북예고 5회 졸업생입니다. 전 : 학창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김 : 선생님들이 나더러 “너, 아양 초등학교 졸업했냐”며 웃으시곤 했어요. 내가 아양(애교)을 많이 떨어서 그랬답니다. 귀여움을 많이 받았지요. 친구들한테는 잔소리를 많이 해서 시어머니라는 얘기를 들었고요. 피부가 곱고 뽀얘서 규율 선생님한테 볼 검사를 자주 받았지요. 가제를 손가락에 말고 볼을 싹 닦아보곤 하셨어요. 손톱도 유난히 반짝여서 무색 매니큐어를 발랐다고 혼나기도 했습니다. 전 : 어여쁜 학생이셨군요. 혹시 롤모델이 있었나요. 김 : 있었지요. 고등학교 다닐 때 대구에 무용학원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백년욱 원장님이 운영하는 학원에 가게 되었는데, 원장님의 첫인상이 근엄하면서도 그렇게 우아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가 겨울이라서 한복 치마저고리 위에 마고자까지 갖춰 입고 올림머리를 하고 계셨지요. 그때 목표가 딱 생겼습니다. 무용학원 원장이 되어야겠다고. 전 : 무용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김 : 나는 2남 1녀의 맏딸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을 기생으로 만들 수 없다며 극심하게 반대했어요. 그래서일까요? 아버지는 생전에 한 번도 제 공연에 오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섭섭하지는 않았어요. 무용하는 걸 묵인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지요. 내가 무용에 온 힘을 쏟는 걸 보고 나중에는 참 열심히 한다고 인정해주시더군요. 전 : 그 시절에는 아버지가 반대하면 무용뿐만 아니라 뭐라도 하기 힘든 시절이었을 것 같습니다. 김 : 아버지 몰래 어머니가 뒤에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어머니가 너 때문에 내가 주머니를 두 개 차야 한다고 하셨지요. 아버지 눈치 보느라 제대로 뒷바라지를 못 해준다며 늘 미안해하셨어요. 그때 어머니가 힘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을 겁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전 :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김 : 군인이었습니다. 육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셨지요.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있는 참전용사 비문에 아버지 존함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고집이 엄청나게 셌어요. 국가유공자 훈장을 받으러 오라고 했을 때 “그깟 종이 쪼가리는 받아서 뭐 하노” 하시면서 안 가셨답니다. 미군 부대에서도 표창장을 준다고 몇 번이나 연락이 왔는데 끝까지 안 가셨고요. 그래서 우리 형제들이 공부하고 사회생활을 할 때 국가유공자 가족으로 아무 혜택도 못 받았어요. 어머니께서 그 훈장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안타까워하셨지요. 세월이 흘러 막냇동생이 국방부에 의뢰했더니 아직 훈장이 있으니 찾아가라고 했답니다. 덕분에 아버지는 영천 호국원에 영면하셨지요. 전 : 국가유공자인데 아무 혜택도 못 받으셨군요. 김 : 연금은 물론이고 혜택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강사 지원서에도 국가유공자 자녀라 쓰면 우선권이 주어진다는데…. 지난 6월 25일,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한국전쟁 74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습니다. 군인들이 깃발을 들고 무대에 입장할 때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전 : 포항에 오실 때 연고는 있었는지요. 김 : 없었습니다. 전 : 연고도 없는 포항에 가서 무용학원을 열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김 : 아버지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저를 포항으로 시집보냈다고 생각하시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듯합니다. 전 : 포항에 온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김 : 친구가 동지여상 무용 교사였어요. 그 친구를 의지해 포항으로 왔는데 정작 그 친구는 결혼 후 포항을 떠났습니다. 궁극적인 이유는 대구에서 무용학원을 열면 스승이나 선배들의 영역과 겹치게 되지요. 그걸 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전 : 어쨌든 용기가 대단했군요. 김 : 지금 생각해도 무모했다고 할 수밖에 없지요. 나이 어리다고 무시할까 봐 허리까지 긴 머리카락을 둘둘 말아 틀어 올려 비녀 같은 걸 꽂고 다녔습니다. 나이 들어 보이려고요. 지금은 빈말이라도 젊어 보인다고 하면 기분 좋은데…. 그저 웃음만 납니다. 전 : 그 당시 포항 분위기는 어땠나요. 김 : 죽도동에 자리를 잡았는데 슬래브 지붕의 단층주택뿐이었어요. 밤이면 시내 전체가 조용했고 제철소의 용광로에서 뿜어내는 시뻘건 빛과 용광로 돌아가는 소리만 크게 들렸지요.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습 니다. 대담·정리 : 전은주(동화작가) 사진 : 김훈(작가) 김동은은… 1953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왜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경북예고와 광주대를 졸업하고, ‘월월이청청에 관한 연구’로 중앙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제2회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폐막공연에서 ‘월월이청청’을 선보이는 등 ‘월월이청청’의 가치를 알리는 데 기여했다. 1978년 포항에서 무용학원을 개원한 후 지역 무용의 저변을 넓히는 데 힘썼다. 포항무용협회 초대 회장, 경북무용협회장 등을 지냈으며, 제14회 금복문화대상, 제44회 경북도문화상 은상 등을 받았다. ‘충비 단량, 대를 잇다’ 등 지역에 기반한 20여 편의 창작 한국무용을 발표했다. 2024년 3월 제14대 포항예총 회장에 취임했으며, (사)한국미래예술문화진흥원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4-09-25

한강 선생의 충의 실천하며 수백 년간 서원을 지킨 느티나무

비구름 안개가 산천을 덮으며 점점 퍼져 간다. 구불구불한 시골 산길은 끝도 보이지 않는다. 모퉁이를 돌면 또 모퉁이가 나오고 하얀 구름안개 꽃은 달리는 자동차까지도 에워서 싼다. 피어오르는 하얀 구름안개 꽃 속을 헤집고 지나가는 길섶에는 풍성한 녹색 물결이 출렁인다. 펼쳐지는 녹색 자연은 가슴을 물들이고 꿈속 같은 어린 시절의 과거로 돌려놓는다. “go back to the past”. 하얀 구름안개 꽃을 헤집고 옛 유생들은 하염없이 이 산길을 걷고 또 걸어 선비 선생님이 계시는 성주 신정리 회연서원으로 걸어갔겠지. 골짜기에 피어오르는 는개는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듯한 느낌을 주었겠지. 녹색 산길을 돌고 돌 때마다 배움의 신비감은 더해져만 갔겠지. 회연서원으로 가는 길은 성리학의 깨우침일까, 자연 만물의 생과 사는 이(理)와 기(氣)의 합체와 이별의 조화인가. 마음은 배움으로 향하고 몸은 서원으로 향하는 유생들이 보인다. 도중에 흰 두루미가 푸른 볏논에 모양새 나게 앉는 꿈속 같은 아름다운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잎처럼 나풀거리거나 나뭇잎처럼 살랑거림도 없다. 그렇다고 하늘로 던진 돌멩이가 땅으로 뚝 떨어지는 속도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정적이면서 내려오는 동적인 모습은 정중동이랄까, 우주의 중력의 법칙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만의 특급 비밀인지 모를 참으로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행위 예술이었다. 아름다움의 절정은 마지막으로 긴 다리를 살짝 굽히면서 연착륙을 시도 하는 모습이야말로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름이 돋는 순간이었다. 오로지 잿빛으로 물들인 하늘과 짙은 녹색의 산야는 신비감을 더했다. 기(氣)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고… 우주 만물에는 이(理)가 깃들여 그 본성이 나타나고… 기(氣)와 이(理)를 가지고 우주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원리, 질서를 논하는 성리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향배하는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회연서원(檜淵書院) 느티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정구 선생은 이이 퇴계 선생과 남명 조식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성리학을 바탕으로 실천적 실용주의를 지키면서 후학을 가르치신 분이다. 회연서원은 학문을 강론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요즘의 지방 학교와 같다.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지난 역사와 함께 주변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여가를 즐기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정문에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 노거수야말로 한강 선생의 충의를 실천하며 서원을 지키고 있어 선생의 숨결이 스며있지 않을까 싶다. 현도루(見道樓) 망루 위에 오르니 회연서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생들이 강당에 모여 앉아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글 읽는 모습이 보인다. 서원으로 들어서는 대문 앞에 서 있는 우람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마주 서서 유생을 맞이한다. 지금은 400살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키 20m, 가슴둘레가 5m이다. 경내 뜰 정원에는 매화나무, 회화나무, 소나무, 배롱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백매원(百梅園)이라 부르고 있다. 꽃 피는 봄이면 모를까 뭐니해도 나이가 제일 많고 몸집도 제일 큰 정문에 서 있는 느티나무가 제일 높은 어른 같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서원 유생들의 등교 시 품성을 점검하는 규율부장 선생님 같다. 아니 한강 정구 선생이 느티나무로 환생한 것이 아닐까도 싶다. 선생은 성리학을 배우고 실천하여 사회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선생의 사상적 유산과 성리학적 가치를 충의로 연결하여 이를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느티나무가 하여 왔지 않나 싶다. 대가천 물을 남으로 돌린 봉비암을 업고 회연서원은 수백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도산에서 발원한 대가천이 무흘구곡(武屹九曲)을 노래하면서 깎아지른 듯 봉비암(鳳飛巖) 단예를 조각해 놓았다. 봉비암은 무흘구곡 중 제1곡의 자리이다. 대가천의 아름다운 계곡을 오르내리며 시를 지어 무흘의 절경을 노래한 것이 무흘구곡이다. 9곡의 굽이마다 이름을 지어 의미를 부여하고 나아가 이학(理學)으로 상징화함으로써 1곡에서 9곡에 이르는 과정이 단지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지만, 한편으로 도학의 근원을 찾아가는 일종의 수양 과정이기도 하다. 조선의 무흘구곡 문화는 산림 문학의 원류란 생각이 든다. 구곡 문화는 유학을 바탕으로 자연, 문학, 예술이 조화롭게 혼합하여 빚어진 조선 유학의 꽃이요, 진수라 할 수 있다. 완전한 구곡 문화의 향유는 구곡원림과 구곡시, 구곡도를 모두 갖춘 것으로 완성된다고 한다.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원림은 물론 산의 숲과 나무, 계곡, 바위, 폭포 등 모든 자연물은 산림 문학의 대상이다.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여 시를 짓는다거나 음악으로 표현한 노래 가사도 산림 문학의 범주에 포함된다 해도 좋을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은 마을을 드나들면서 마을 어귀에 있는 당산목 앞에서 몸가짐을 되돌아보았듯이 유생들 또한 서원을 드나들면서 늘 맞닥뜨리는 규율부장 선생님 느티나무를 보면서 충의를 불태웠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변함없이 우뚝 서 있는 꼿꼿함에서 충을 보았고 수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모습에서 의를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자연물의 상징성에서 늘 깨닫고 배우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느티나무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수백 년 동안 한자리에서 서원을 지키면서 선비들의 몸가짐과 행동을 보았을 것이니 회연서원 느티나무 노거수는 조선의 선비라 해도 좋을 듯하다. 이제는 학생을 가르치는 서원은 문화재가 되어버렸다. 현도로 망루에서 보는 경관이 어쩜 이렇게도 아름다운지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곱게 가지런히 쌓은 돌담은 서원의 지붕과 어울리고 병풍처럼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봉비암 숲은 하늘과 맞닿은 듯 고요, 적막, 평화로움으로 내게 다가왔다. 회연서원과 한강 정구 선생, 그리고 성리학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은 1654년에 한강 정구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한강 정구의 학문적 업적과 가르침을 후대에 전파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 서원은 한강 정구의 성리학적 사상을 보존하고, 성리학을 연구하는 중요한 장소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선생은 1543년에 태어나 1620년에 사망했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교육자로 이황과 이이를 잇는 중요한 학자로 평가된다. 성리학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고, 학문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진왜란 중 의병 운동을 했으며 도덕적 자기 수양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의 학문은 조선 중기 이후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성리학(性理學)은 중국 송나라 주자(朱子)에 의해 집대성된 유교 철학이다. 조선시대 이황과 이이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理)는 만물의 본질적 원리이고, 기(氣)는 그것을 실현하는 물질적 요소다. 인간과 우주의 원리를 이(理)와 기(氣)로 설명하며, 도덕적 자기 수양을 중시하는 유교 철학이다. 성리학은 도덕적 인간이 사회적 실천을 통해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9-25

제철소 심장, 고로를 움직이는 전기… 40년 한 길로 명장 반열

“모든 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흔히들 제철소의 고로는 24시간 365일 돌아가는 포항제철소의 심장이라 부른다. 고로를 포함한 제철소의 모든 설비는 전기를 먹고 산다. 포항제철소를 가동하는 무한한 에너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전기. 즉, 전기는 제철소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혈액과 같은 존재이다. 현재 포스코 전기 분야 최고 숙련인 정규점(63) 명장. 1985년 포스코에 발을 들인 그는 지금까지 전기를 주제로 한 길만을 걸어와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제철소 전력 공급 지킴이 EIC기술부 정 명장에게 최근 숙련기술인이 되는 과정을 들어 봤다. - 현재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맡고 있는 업무는. △수변전(受變電)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수변전이란 한국전력이나 자체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받아 각 공장에서 사용할 수 있게 변전해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제철소의 모든 생산시설과 생활 지원 시설에 전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포항제철소는 365일 밤낮으로 가동되는 장치산업으로, 잠시라도 설비에 문제가 생기면 제철 공정이 중단돼 큰 생산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내가 맡고 있는 업무에 문제가 발생하면 제철소 모든 곳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설비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 정비부서는 설비사고를 예방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신속하게 대응해 생산 피해를 최소화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있다. - 포스코에 입사했을 때의 첫인상은. △포스코에 처음 입사할 당시 전기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입사했지만, 현장 전기설비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제철소는 거대한 장치산업이다. 쇠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필요한 전기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요즘은 인터넷이나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전기 관련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제가 입사한 당시에는 자료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전기기술 월간지 등을 참고해 실무에 필요한 부분들을 발췌하며 틈틈이 공부했다. - 15개의 국가전문기술자격증을 취득하게 된 동기와 그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전기의 흐름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일 만큼의 열정을 다하겠다는 의지로 부족한 전문 지식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했다. 틈만 나면 전기기술 서적을 뒤적였고, 핵심적인 기술이나 자료는 노트에 빼곡히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취득한 국가전문기술자격증만 15개에 달한다. 전기 관련 자료와 지식을 모두 수집하겠다는 욕심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고, 끈기 있게 도전하면 해결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신념이 생겼다. 입사 초기 부대시설 정비감독 업무를 하면서는 인위적으로 고장을 내어 트러블 조치 방법을 습득하는 등 열정을 쏟았다. 자신감이 붙자, 업무에 임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고질적인 설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 분석과 문제 해결에 대한 강한 의지가 필요했다. 설비에 대한 애착과 관심을 바탕으로 끈기 있게 집중하다 보면, 엉켜 있던 실타래가 풀리듯 해답이 나타나곤 했다. - 기술대학에서의 학업 경험과 그로부터 얻은 가장 큰 성과는. △1992년,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더욱 전문적인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기술대학에서 공부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고, 이를 기꺼이 수락했다.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맨 앞자리에 앉아 강의를 녹음하고, 노트가 닳도록 외우며 최신 기술을 습득했다. 기술대학에서의 학업은 전기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가 되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됐다. 회사의 배려 덕분에 기초와 기본기를 탄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전기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각고의 노력 끝에 수석으로 졸업한 후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 새로운 과제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론과 실무를 바탕으로 제철소 전기설비 유지 보수는 물론, 해외 글로벌 패밀리, 그룹사 및 동반성장사 등에서 발생하는 설비 장애 해결에 많은 도움이 됐다. - 전기정비 업무를 39년 동안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설비가 정상 가동되던 순간이다. 특히 광양 2제강 화재, 포항 2열연 화재, 중국 청도 불수강 화재 등 대형 사고 복구 후 설비가 정상 가동될 때의 성취감과 전율은 잊을 수 없다. 2022년 9월 힌남노 태풍으로 인한 냉천 범람으로 포항제철소 전체 공장이 가동 중지된 사상 초유의 사태가 있었다. 당시 제철소 전체가 정전된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공장 가동이 멈추고, 밤이면 제철소 전체가 고요함과 적막감에 휩싸였던 그 순간, 전원 공급이 재개돼 용광로가 다시 가동되고 135일 만에 주요 공장이 기적처럼 정상 가동됐을 때의 행복감은 잊을 수 없다. - 후배 양성과 기술 전수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EIC 기반기술인 전력설비 인프라 기술 교육용 아이템을 5가지 선정해 후배 사원들이 전기의 기본과 기초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교재를 만들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많은 직원들이 이 자료를 공유하며 현장 전기업무에 큰 도움을 받고 있다. 현재 포스코 사내 인재창조원에서 기술교육 전문 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저근속 직원들을 위한 정비 기초 핵심기술 강의와 파트장을 대상으로 설비 관리 중점 포인트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패밀리사, 고객사, 동반 성장사, 해외 글로벌 생산기지 등에도 기술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기술 지원을 하고 있다. - 숙련기술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후배들에게 꾸준함과 도전 의식을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현장에는 늘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고 매일 새로운 과제가 발생한다. 이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분야의 전문가가 돼 있을 것이다. 물이 바위를 뚫는 것은 그 힘이 아니라 꾸준함 때문이다. 주자의 10가지 후회 중 ‘소불근학노후회’라는 말이 있다. 이는 ‘젊어서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후회한다’는 뜻으로, 자기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되는 길은 끊임없는 공부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주어진 운명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면 일 자체가 재미있어지고, 신뢰받는 진정한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인생철학과 비전이 있다면. △내 인생철학은 “노력하고 도전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 이다. 또한,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No Pain No Gain)”와 “땀 흘리지 않고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無汗不成)”는 속담을 자주 인용한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오듯이, 직장생활에서 문제 해결 능력과 위기 대응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노력하고 도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직장생활의 재미는 물론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밑거름이 된다. - 3000시간 이상의 봉사 활동을 하게 된 계기와 그 과정에서의 경험은. FFFC△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봉사활동을 이어왔다. 사내 전기기술 봉사단을 비롯해 쇠터얼 문화재돌봄 봉사단 및 자율방범대 활동을 20년 동안 해오고 있다. 특히 자율방범대는 자녀들의 안전한 귀가를 돕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몇몇이 모여 창설하게 됐다. 이를 통해 지역 주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물론, 소년·소녀 가장을 비롯한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었다. 늦은 밤거리를 서성대는 청소년들이나 학생들을 잘 타일러 집으로 돌려보낼 때는 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요즘은 문화재돌봄 봉사단에서 지역 문화재를 보존하고 알리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우리 지역의 문화재를 지키고 잘 보존하는 데 열정을 다하고 싶다. - 이밖에 하고 싶은 말. △포스코의 미래는 후배들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후배들이 애사심과 주인 정신을 가지고 기술적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도록, 맡은 업무에 대한 열정과 기술적인 열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각자의 마인드 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간디의 명언처럼, “네 생각은 네 말이 되고 네 말은 네 행동이 되며 네 행동은 습관이 되어서 네 습관이 바뀌면 네 가치가 된다”고 했다. 내 가치는 내 운명으로 생각이 있는 곳에 행동하게 되고, 행동이 곧 습관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을 성공으로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한다. 정규점 EIC기술부 포스코 명장은 △마산공업고등학교 전기과 졸업 △부산 동의과학대학교 전기학과 졸업 △창립 제40주년 올해의 포스코인(2008년) △대한민국 산업현장 교수 위촉(2012년) △경북도 최고 장인(2019년) △포스코 명장(2020년) △포스코 상무보 신규 선임(2023년)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09-25

‘청정 봉화’ 송이솔밭·내성천 특설무대서 펼쳐지는 문화축제

올해로 28회째를 맞이하는 ‘봉화송이축제’가 오는 10월 3일부터 10월 6일까지 4일간 봉화읍 내성천 및 관내 송이산 일원에서 개최된다. ‘송이향에 반하고, 한약우 맛에 빠지다’라는 슬로건으로 펼쳐지는 이번 축제는 체험, 공연, 전시 부대, 연계 행사 등 약 24개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올해 축제는 천혜의 환경에서 자란 봉화송이를 알리고 청정 봉화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힘썼다. 지역주민 함께 어우러지는 축제를 만들고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풍성한 체험프로그램으로 고품격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박현국 봉화군수(봉화축제관광재단 이사장)는 “이번 송이축제는 송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버섯 등 품질 좋은 우수 임산물도 많이 준비돼 있다”며 “가을문화 축제인 봉화송이축제의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테마(청량문화제, 목재문화, 세계문화 등)의 체험, 전시관을 운영하는 만큼 가족, 친구와 좋은 추억 쌓아가시길 바란다 ”고 밝혔다. □ 송이향에 반하고, 한약우 맛에 빠지고 봉화송이축제 대표 주제 체험인 송이 채취체험은 축제기간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진행된다. 축제 참가자들은 직접 송이를 채취하며 자연의 선물인 송이를 경험하는 특별한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송이 채취체험은 선착순으로 접수되며 체험은 하루 두 차례 무료로 진행된다. 회차마다 50명씩 참여할 수 있다. 봉화송이와 한약우에 관련된 퀴즈를 통해 숲속도시 봉화를 알아보는 ‘도전! 송이 골든벨’은 10월 5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내성천 특설무대 앞 잔디광장에서 펼쳐진다. 또한 축제 기간 중 진행되는 게릴라 이벤트인 ‘송이 한송이 챌린지’는 뽑기, 딱지치기 등 남녀노소가 쉽게 즐길 수 있는 간단한 게임으로 축제장 서편에서 진행되며 다양한 경품이 준비돼 있다. 이외에 송이 가요한마당, 목재문화축제 등 7개의 체험행사도 진행될 예정이다. 송이판매장터와 송이 한약우 식당 등 다양한 먹거리들도 판매해 관광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예정이다. 품질 좋은 등급별 송이를 구매할 수 있는 송이 마켓, 안동 봉화축협과 봉화한약우작목회에서 주관하는 한약우 홍보관 및 판매 마켓이 개설된다. 봉화군의 우수 농특산품을 직접 비교하며 구매할 수 있는 농·특산물 먹거리 마켓, 송이와 한약우의 화려한 조합으로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송이 한약우 셀프 식당도 운영돼 봉화 송이와 한약우를 활용한 미식 경험을 즐길 수 있다. □ 오색오미 비빔밥 퍼포먼스, 다채로운 공연 개막 첫날인 10월 3일 오후 12시 30분 내성천 특설무대 앞 잔디광장에서는 ‘제3회 오색오미 대형 비빔밥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봉화군 우리음식 연구회 주관으로 봉화송이와 한약우를 비롯해 지역에서 생산되는 다양하고 신선한 나물을 재료로 만든 비빔밥을 무료로 나눠주며 관광객과 지역민들이 하나로 화합하는 자리를 만든다. 축제 기간 동안 다채로운 공연행사도 이어진다. 축제 첫날인 3일 오후 7시부터는 송이축제의 성공적인 개최 염원을 담은 개막선언과 함께 최우진, 채희, 김소유, 정미애, 진해성이 출연해 멋진 공연을 선보이며 송이축제의 화려한 막을 올릴 예정이다. ‘몽룡전’뮤지컬, 봉화 샤이닝 스타 콘서트 등 지역 문화 예술인이 참여하는 다양한 공연도 마련돼 방문객들에게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관광객이 직접 참여하는 코미디 토크쇼 ‘톡까놓고 말해보쇼 시즌2’도 열린다. 개그콘서트에 출연했던 유명 개그맨 총 9인의 화끈하고 열정 넘치는 토크쇼가 펼쳐져 즐거움과 함께 지역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느껴볼 수 있다. 축제 마지막날인 6일에는 내성천 특설무대에서 지역주민, 관광객들과 함께 제28회 봉화송이축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한 공연행사가 진행된다. 황인욱과 송하예, 경서예지, 한강, 배아현이 출연하며, 올해 축제의 끝맺음과 내년 축제에 대한 기대를 담아 가을 밤하늘을 밝히는 불꽃쇼를 끝으로 축제의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다. □ 넘쳐나는 볼거리와 즐길거리 ‘숲속도시 봉화’브랜드에 알맞은 목재 친화도시 및 도시 재생 사업을 홍보하기 위해 목재문화축제를 함께 열어 목재를 활용한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봉화송이축제의 대표적인 연계문화행사인 청량문화제에서는 고유의 전통민속놀이를 재연한다. 봉화군민과 관광객이 화합할 수 있는 삼계줄다리기, 한시백일장, 보부상 공연, 서예 전시 및 체험, 우리음식만들기, 전통민속놀이체험 등 다양한 문화행사 및 체험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지역의 많은 문화단체들이 준비한 전시 및 체험행사를 즐겨볼 수 있다. 이밖에도 베트남 홍보관, 성이성문화제, 2024 어린이집 연합운동회 등 다양한 전시, 문화, 체육 연계 행사도 열려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할 계획이다. □ 지속 가능한 축제를 위한 노력 올해 송이축제는 지역 사회 단체의 협력을 통해 지역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주민 화합형 축제로 계획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관광객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상업 중심형 축제에서 벗어나 체험형 축제로 만들어 나갈 예정이다. 예방중심 안전관리 강화로 군민과 관광객이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축제 구현을 목표로 철저한 안전관리계획을 수립해 관련 유관기관과 연계 및 협력해 안전사고 예방에도 최선을 다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바가지 요금 근절을 위해 가격 표시제를 추진하고 고객편의 및 친절, 위생 등을 포괄적으로 고려해 입점 자격 요건을 강화해 관광객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관광 친화도시 이미지를 조성해 만족도를 향상시킬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4-09-25

그때 두고 온 내 마음은 아직 거기에 남아있을까?

선도산과 서악마을 일대는 신라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수많은 설화와 흥미로운 전설이 깃들어있다. 그 이야기들은 소설의 소재로도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할 터. 부침을 거듭했던 한 국가의 역사 이상으로 개인의 기억도 귀하고 소중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김도일 작가의 단편소설을 2회에 걸쳐 분재(分載)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선도산과 서악마을이다. /편집자주 부처와 보살들이 새겨진 암석은 오랜 세월 동안 깎이고 패이고 닳아져 있었다. 특히 중앙의 불상은 그 훼손 정도가 심하여서 얼굴의 절반 이상은 형체를 알 수 없었고 바위가 깨지면서 날카롭고 뾰족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나마 양쪽 보살들은 세월을 따라 부드럽게 닳아 형체만 희미했을 뿐 날카롭지는 않았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한 자리에서 한참 동안 불상을 바라봤고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어져서 보면 평범하지만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움과 뾰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나와 똑같았다. 보살들의 밝은색과는 달리 검은 바위에 새긴 모습 또한 근본이 어두운 내 성격에 비교되었다. 이것은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저 바위들의 본성처럼. 그래서 내 마음과 달리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지게 하는 것인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신문사에 있는 선배에게 전화가 온 것은 해가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 막 접어들 때였다. 수은주를 뚫을 듯한 기세가 한풀 꺾일 시간이었지만 한낮의 더위에 의식마저 녹아 방바닥에 흥건히 고인 기분이었다. 에어컨 바람 앞에서 의미 없이 TV 리모컨만 괴롭히다가 수신 단추를 눌렀다. “김 선생, 내가 어제부터 매주 연재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경주 선도산에 관한 이야기야. 매번 취재 기사만 올리면 독자들이 식상해하니 연재 중간에 김 선생 소설이 한두 번 들어갔으면 좋겠어. 생각 좀 해보고 답을 줘요. 나와 시간을 맞춰 취재를 같이 가보는 것도 괜찮고.” 평범한 원고청탁의 전화였다. 그러나 통화의 여운은 한참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저 깊은 곳으로 내려간 얇은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마치 잊고 있었던 커다란 기억이 삼십 년을 시간을 거슬러 떠오르는 것을 예고하듯. 1994년, 대학 학보사의 오월은 창문 너머 캠퍼스의 활기찬 기운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총학생회 출범식을 앞두고 취재 방향을 정하고 대학방송국, 교지편찬위와 공동기자단을 꾸릴 준비, 처음으로 큰 행사를 경험하는 1학년 수습기자들을 교육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대학의 낭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고달픈 기자 생활을 못 견뎌 다 떠나버리고 3학년 편집장 선배와 2학년인 나와 동기, 이렇게 셋이서 격주로 신문을 내야 했다. 그래서 사망한 북한 지도자의 분향소를 설치해 논란이 된 다른 지역 대학의 취재도 나 혼자 가야 했고 학교 재단 비리를 파헤치는 단체의 움직임도 놓칠 수 없었다. 수업은 고사하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학보사에서 먹고 자는 게 일상이었다. 소파의 높낮이를 등으로 느끼며 잠에 빠져 있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전날 밤도 선후배들과 결론 나지 않을 주제로 떠들며 냉동식품과 과자를 안주 삼아 소주를 나눠 마신 후 그대로 쓰러진 것이었다. 두통과 속쓰림에 괴로워하며 일어나니 학보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을 더듬어 담배를 찾았지만 치우지 않은 테이블 위에는 종이컵마다 가득 박힌 담배꽁초만 역한 냄새를 내고 있었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어, 네가 웬일이냐? 들어와. 담배 있냐?” “어제도 여기서 잤냐? 와, 냄새 지린다. 아무리 집에 안 들어가더라도 좀 씻고 다녀라.” 같은 과 친구 H가 가방에서 새 담배를 꺼내 갑 채로 던지고는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았다. 나는 내 책상 의자에 앉아 담배의 비닐을 벗겨 불을 붙이고는 옆 책상의 의자를 친구에게 내주었다. “과는 잘 돌아가지? 교수님들도 다 잘 계시고? 안부 좀 전해주라. 근데 누추한 분께서 이 귀한 곳에는 어쩐 일이냐?” “저 주둥이는 여전하네. 아무리 여기 꿀단지가 있어도 한 번씩 수업 들어와서 성의도 좀 보여라. 교수님 화 많이 나셨어. 이번에 조별 과제에도 참여 안 하면 너 졸업할 때까지 교수님 수업 들어오지 말래. 전공 교수가 들어오지 마라는 건 너 졸업 안 시키겠다는 거야 임마. 내가 교수님께 사정사정해서 너랑 같은 조 하겠다고 했어. 너 인간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말이야. 어쩌다 너 같은 놈하고 친구가 돼서 내 청춘이 꼬이는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우연히 내 오른편에 앉은 H와 그 오른편에서 이미 H와 친해 보이던 Y, 군을 전역하고 입학을 해 또래보다 네 살이나 많은, 왼편에 앉아 있던 J형과 나는 처음부터 마음이 맞아 학기 초부터 붙어 다녔다. 숫기 없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쩔 바를 모르고 힘들어하는 게 그들에게 전달되었는지 내게 제일 먼저 말을 건 사람이 J형이었고 두 번째가 H였다. 1학년 수업은 시간표가 거의 똑같았기에 우리는 학교에서 늘 함께였고 내가 학보사 일로 하교가 늦어지면 그들은 학교 근처 시장에 있는 분식집에서 나를 기다렸다. 2학기가 되자 수습 딱지를 떼고 정식 기자가 되었고 학보사 일은 더 바빠졌다.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빠질 때가 많았고 과제물 제출도 빼먹기 일쑤였다. 이미 학사경고를 예상했고 그렇게 된다면 2학년이 되기 전 휴학과 입대를 선택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학사경고를 면한 성적은 꽤 의외였다. 나를 위해 J형이 대리출석을, H와 Y는 과제물을 대신 써서 제출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이렇게 나를 이해해주고 바라는 것 없이 나를 챙겨주는 그들이었다. 특히 H는 한 번씩 학보사로 생사 확인을 한다며 찾아와 시험 족보와 담배 따위를 던지고 가며 나를 물가에 내놓은 동생 취급하듯 했다. 학보사 사람들이 H를 내 여자친구로 오해를 해 이를 전해 들은 넷이서 크게 웃은 적이 있었다. 답사지인 무열왕릉으로 가려면 기차로 한 시간 반을 달려 역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야 했다. H가 시키는대로 일회용 카메라 하나만 챙긴 나와 달리 H는 배낭에 무언가를 가득 담아 왔다. 2명이 조를 맞춰 수행해야 하는 과제는 포함해야 하는 요구사항이 하나 있었는데 반드시 답사지에서 조원 두 명이 들어간 사진을 찍어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누군가 혼자 과제를 하고 나머지 하나는 숟가락만 얹는 (나 같은) 얌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임을 알았기에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시내버스에서 내리자 벌써 열한 시 반이 지나 있었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았고 도로 건너 넓은 주차장에도 버스와 차들이 가득 차 빈 곳을 찾기 어려웠다. 무리를 지어 놀러 온 사람들 속에 섞이니 내 마음에도 공간이 생기는 것 같았다. 흐리지 않지만 희고 두꺼운 구름이 높은 곳 군데군데에서 태양열을 가려 주어 덥지 않은 상태에서 푸른 하늘을 누릴 수 있는 날씨였다. H는 내게서 받은 카메라로 입구의 조감도를 찍었고 나는 뒤에서 H의 배낭을 멘 채 그녀가 하는 것을 지켜보며 담배를 피웠다. 왕의 무덤과 그 뒤로 왕을 호위하듯 네 기의 무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무덤과 무덤 사이에는 생의 활력들이 소란스럽게 돌아다녔다. 살아서는 고귀한 존재였다가 죽어 누운 자리가 구경거리가 된 기분은 어떨까를 생각하며 사진 찍는 H를 따라다녔다. “야, 여기에 내려놓고 거기 앞주머니에 자리 있을 거야. 그거 깔고 가방 안에 있는 것 꺼내 예쁘게 한 번 차려 봐. 누님이 시장하시다.” “또 오라버니한테 까분다. 근데 이게 다 뭐냐? 너희 집 식당이나 반찬가게 같은 거 차렸냐?” “야, 말도 마라. 새벽부터 이거 준비하느라고 아주 죽는 줄 알았다. 이 누님이 어디서 죽도 못 얻어먹을 것 같은 너 먹이려고 이 고생을 한 거 아니겠냐.” “오, 좀 감동인데? 우리 H 시집보내도 되겠다. 그러고 보니 오늘 좀 차려입은 것 같다? 얼굴에도 분칠 좀 한 것 같고.” “쉰 소리 그만하고 먹기나 해, 물도 먹어가며. 야, 근데 나한테 장가오는 남자는 확실히 땡잡을 것 같지? 이 차린 것 봐라. 내가 만들었지만…… 감동이다 감동.” 준비한 음식은 내가 좋아하는 것 위주였고 맛도 상당히 좋았다. 맛있는 음식과 끊이지 않는 즐거운 대화, 맑은 공기와 선명한 색깔의 경치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잊게 했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처럼 여행이나 소풍을 나온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점심을 먹고 왕릉을 둘러본 후 나가기 전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부부에게 우리 둘의 사진을 부탁했다. 친밀한 포즈를 취하라는 아기 아빠의 요구에 나는 손가락으로 V를 그렸고 H는 내게 팔짱을 꼈던 것 같다. 왕릉 옆에 있는 마을에서 선도산 정상까지는 삼십 분 거리의 산길이었다. 술과 담배에 몸을 맡긴 대가를 근육과 폐의 고통으로 치르는 것 같았다. 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한심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기다려주는 H와 가다 쉬다를 서너 번 한 후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의 저질스러운 체력과는 별개로 산 정상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낮은 높이와는 달리 산은 아래로 도시와 도시를 감싸고 펼쳐진 들판, 그 평야를 가르는 고속도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풍경을 제공하였다. 바위를 품고 있는 산 정상에는 절벽 한쪽을 깎은 불상 셋이 있었는데 여기가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부처와 보살들이 새겨진 암석은 오랜 세월 동안 깎이고 패이고 닳아져 있었다. 특히 중앙의 불상은 그 훼손 정도가 심하여서 얼굴의 절반 이상은 형체를 알 수 없었고 바위가 깨지면서 날카롭고 뾰족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나마 양쪽 보살들은 세월을 따라 부드럽게 닳아 형체만 희미했을 뿐 날카롭지는 않았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한 자리에서 한참 동안 불상을 바라봤고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어져서 보면 평범하지만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움과 뾰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나와 똑같았다. 보살들의 밝은색과는 달리 검은 바위에 새긴 모습 또한 근본이 어두운 내 성격에 비교되었다. 이것은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저 바위들의 본성처럼. 그래서 내 마음과 달리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지게 하는 것인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진짜 보살이라도 되었나? 왜 그리 넋을 놓고 있어?” “H야, 내가 왜 수업에도 들어가지 않고 학보사에 눌러있는지 아냐? 물론 학보사 사정도 있지만 사실은 Y 때문이다. J형이랑 넌 몰랐겠지만 우리 작년에 잠시 사귀었어. 그런데 Y가 싫다네. 가까워질수록 내가 어두운 사람이래. 친해질수록 너무 날카로워서… 그래서 자기가 상처를 많이 받는단다. 내 의도와는 달리 걔는 그렇게 느꼈나 봐. 그런 말 듣고 관계가 일방적으로 정리되니까 Y 얼굴을 마주할 용기라 안 나더라. 반박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학보사는 내 도피처야. 앞으로 누굴 만나도 상처만 줄 것 같아.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이런 내가 앞으로 누굴 좋아할 수 있겠냐? 아까 올라올 때 돌탑에 돌 하나를 보태면서 Y에 대한 마음, 이성으로서 누굴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탑 위에 얹었다. 하, 털어놓고 나니 시원하네. 어이 친구, 그만 내려가자.” 다음 해 H는 휴학을 한 후 일본으로 갔고 나는 입대를 하였기에 자연스럽게 우리 넷이 모이는 일도 사라졌다. 내가 말년 휴가를 나왔을 때 J형이 결혼했는데 식장에서 만난 H는 학생 때의 선머슴 티 대신 우아하고 성숙한 여성이 되어있어 아직 군인인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복학을 하고 자퇴 신청서를 들고 온 H와 다시 만났다. 전공을 바꿔 일본에서 공부를 새로 할 예정이며 유학 중에 만난 남자와 거기에 터를 잡을 예정이라고 했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앞날을 응원하고 헤어진 후 피운 담배 연기에 눈이 따가웠다. Y의 소식은 어느 곳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돌탑 위에 마음을 두고 온 때문인지, 아직 닳지 못한 성격 탓인지 등 떠밀리다시피 한 결혼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버린 후 몇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십 년 동안 선도산 지척에 살며 거기에 한 번 가볼 생각은 왜 나지 않았던 걸까? 그때 두고 온 내 마음은 아직 거기에 남아있을까? 다음 주 잡은 선배와의 취재 약속 전에 혼자 삼십 년 전 그 길을 좇아 걸어봐야겠다. 소설가 김도일(49) 은 2017년 ‘포항 소재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생활 터전인 포항과 경주 등 경상북도 일대를 소설의 무대로 삼는 경우가 많다. 명료한 문장과 곡진한 세계 인식으로 주목받는 그는 소설집 ‘어룡이 놀던 자리’를 썼고, 공동창작집 ‘당신의 가장 중심’ ‘작은 것들’ ‘쓰는 사람’ ‘최소한의 나’ 등에 필자로 참여했다. (계속)

2024-09-24

내과·가정의학과·정형외과 등 주요 과목 전문의료진 상주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는 정부와 의료계간의 갈등으로 제때 적절한 진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갈등의 매듭이 속히 풀리기를 기다리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 이런 때일수록 근처에 대형 병원이 없는 농어촌 지역의 공공 의료서비스는 그 중요성이 커진다. 고령화와 저출생이라는 사회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필수 공공 의료의 필요성은 거듭 재론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시기에 청송군 보건의료원이 지역 주민들의 건강 증진과 의료 서비스 향상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 주목받고 있다. 지역 의료의 공백을 해소하고, 공공의료의 모범사례로 도약하려는 청송군 보건의료원이 집중하고 있는 각종 의료 서비스와 관련 사업들을 아래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 산부인과 등 지역민 위한 다양한 의료 서비스 제공 청송군 관계자에 따르면 청송군 보건의료원은 단순한 보건소의 기능을 넘어서고 있다. “농촌 지역 유일의 종합병원 역할을 수행하며 다양한 진료 과목을 제공하고 있어 주민들의 만족도가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청송군 보건의료원은 내과, 가정의학과, 정형외과 등 주요 과목에 전문의가 상주하고 있다. 여기에 소아청소년과, 재활의학과, 치과 등의 진료도 폭 넓게 제공함으로써 청송군 지역민의 건강에 관한 다양한 요구들을 해소함과 동시에 먼 곳으로 진료를 받으러 다니기에 여의치 않은 이들의 의료 수요를 충족하고 있다. 지난 9월 6일부터 청송군 보건의료원은 매주 금요일 산부인과 진료를 시작했다. 그동안 부족한 의료진으로 인해 산부인과 진료가 중단돼 산부인과 관련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 지역 주민들은 인근 지역으로 진료를 받으러 가야 하는 불편을 겪은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청송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과 협약을 체결해 임산부와 여성들을 위한 산부인과 진료를 다시금 재개하게 됐다는 것이 관련 담당자의 설명이다. 청송군 보건의료원의 산부인과 진료는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산부인과 장원규 교수가 담당하고 있다. 이와 관련 청송군은 “산부인과 진료가 다시 시작된 것은 임산부와 가임 여성에게 편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지역 여성들의 건강관리와 출산율 증가에도 적지 않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망했다. □ 고령화 대응과 의료 접근성 개선으로 농어촌 모범사례 비단 청송군만이 아니다. 한국 대부분의 농어촌 지역은 고령 인구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의료의 접근성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런 추세에 발맞춰 청송군은 전국 최초로 농어촌 버스를 무료로 운행하여 군민들이 병원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청송군 관내를 운행하는 모든 시내버스가 보건의료원을 경유하게 함으로써 주민들의 교통비 부담을 줄이고, 보건의료 서비스 이용을 활성화한다는 것이 청송군의 복안이다. 이 정책은 주민들 역시 반기고 있으며, 무료 농어촌 버스 이용 만족도 또한 높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정책으로 인해 접근성이 보다 좋아진 청송군 보건의료원은 전국 15개 지역 공공의료원 중 유일하게 인근 종합병원과 진료 부문을 위탁 체결해 다양한 진료 과목과 응급실, 입원실을 운영 중이다. 특히, 안과 등 접근하기 어려운 과목은 안동성소병원과 협력해 월 1회 ‘찾아가는 특별 진료’를 진행하고 있다. 이는 시간 부족 등의 각종 여건 문제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지역 어르신들에게 호평받는 의료 서비스로 자리매김 중이다. 여기에 “청송군 보건의료원은 24시간 운영되는 응급실과 닥터헬기를 통한 긴급 환자 이송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의 부연이다. □ 다양한 건강증진 사업과 맞춤형 복지사업도 함께 추진 청송군 보건의료원은 최근 급식시설의 현대화, 최신 의료 장비 도입 등도 의욕적으로 진행했다. 자동혈구분석기, 고압증기멸균기 등의 장비는 신형으로 교체됐고, 물리치료실 증축과 체외충격파치료기, 로봇 고출력 레이저치료기 등 전문 치료 장비도 확보해 양질의 의료 서비스 제공에 가일층 노력하고 있다. 이와 함께 다양한 건강증진 사업을 추진하고, 주민맞춤형 복지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는 65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무료 대상포진 예방접종 사업을 실시했다. 이는 고령층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고 건강한 노후 생활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더해 “AI-IoT 기반의 어르신 건강관리 사업, 재가 치매 환자 돌봄사업 등 다양한 맞춤형 복지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고 청송군 관계자는 말한다. 치매 가족을 위한 1박 2일 ‘엄마와 하룻밤’ 프로그램도 부모와 자식 세대 모두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청송군은 전했다. 고령화 문제와 함께 21세기 한국 사회의 가장 주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인 저출생 문제의 해결에도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청송군은 출산 지원을 확대해 첫째 자녀 출산시 200만 원, 둘째 자녀 이상은 300만 원의 ‘첫 만남 이용권’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난임 부부 지원사업도 체외수정 및 인공수정 시술비 지원을 총 25회로 더 넓게 확대했고, 산모와 신생아 건강관리 지원사업의 소득 기준을 폐지했다. 더불어 “고위험 임산부 의료비 지원 대상자의 소득 기준 폐지, 출산·육아용품 무료 대여방 증축 등을 통해 아이를 낳아 기르기 좋은 출산 친화환경 조성에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이 청송군의 설명이다. 이러한 제반의 공공 의료사업과 관련해 윤경희 청송군수는 “언제나 지역 주민들의 건강과 행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의료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며 “앞으로도 최신 의료장비 도입과 다양한 건강증진 사업을 통해 지역민의 건강과 복지를 꾸준히 챙겨가겠다”고 약속했다. /김종철·홍성식 기자

2024-09-24

“APEC 유치 성원 시민들에게 수준 높은 문화·예술로 보답”

경주 문화예술축제인 제51회 신라문화제가 가을축제 만족도를 높여 지난해와 달라진 내용으로 찾아온다. 올해는 예술제와 축제로 구분해 2025 APEC 정상회의 유치를 축하하고 내년 성공개최 기원을 담아 어느 해보다 뜻깊은 행사로 구성했다. 이번 축제는 안전상의 문제로 개막식 장소를 월정교에서 대릉원으로 변경하고 금관총 주변에 푸드트럭존을 신설, 스마트 QR 주문 및 결제 시스템을 도입했다 또 봉황대 법장사 뒤편에 ESG 존을 마련해 친환경 체험 공간과 반려견 동반 구역을 새롭게 준비했다. 신라예술제는 오는 28일부터 29일까지 주제공연 및 미술, 사진전시, 체험행사 등의 콘텐츠로 경주 예술의 전당 일원에서 펼쳐진다. 이어 신라문화제(축제)는 10월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신라복판타지 패션쇼, 실크로드 페스타, 화랑힙합 페스타, 달빛난장 등으로 풍성한 볼거리와 즐길거리, 먹거리를 선사한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올해 신라문화제는 무더위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APEC 정상회의 유치에 끝까지 성원을 해준 모든 분들에게 문화·예술로 보답하고자 수준 높은 콘텐츠로 준비했다”며 “가을 정취를 만끽하는 9~10월에 신라문화제에 반드시 오셔서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을 가득 담아 가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 개막식 월정교에서 대릉원 변경 올해 신라문화제 개막식은 대릉원에서 개최된다. 지난 2년간 월정교 수상 객석에서 진행했던 ‘화백제전’의 하천 지반 등 안정상 문제 우려에 따른 조치다. 경주시는 화백제전을 대신해 신라복판타지 패션쇼를 선보인다. 패션쇼는 신라 스토리를 담은 슈퍼모델 100인의 신라복쇼와 함께 미디어아트, 라이트쇼, 드론 등을 결합한 멀티미디어쇼로 진행된다. 쇼는 주요 내빈의 신라 상징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신라의 태동을 상징하는 박혁거세, 강한 국력의 진흥왕, 한반도 최초의 여성 군주인 선덕여왕, 김유신 생애, 문무왕APEC 등의 세부 내용으로 펼쳐진다. 특히 황리단길을 찾아오는 관광객을 대릉원 안으로 끌어들이고, 다시 봉황대로 퍼져나가게 해 ‘황리단길-대릉원-중심상가’를 잇는 새로운 축제관광 벨트를 만들어 낸다는 게 경주시의 올해 전략이다. □ 지역 상권과 동반 성장하는 상생형 축제 신라문화제 기간에만 즐길 수 있는 감성 낭만 야시장인 ‘달빛난장’이 봉황대 광장과 금관총 일원 등에서 진행된다. 판매 공간은 총 3개 구역, 41개 규모로 진행된다. 감성판매존은 나무부스와 파티라이트를 활용한 공간으로, 모던판매존은 네온을 활용한 공간으로 꾸려진다. 여기에 올해는 금관총 일원에 푸드트럭존을 신설해 스마트 QR 주문 및 결제 시스템을 시범 운영한다. 떡볶이, 어묵 등 간단한 요깃거리가 가능한 분식류부터 부대찌개, 제육볶음 등 입맛을 자극할 식사류, 케밥과 양꼬치 등 글로벌한 먹거리까지 선보일 예정이다. 취식공간도 총 3개 구역, 190개 규모로 마련했다. 차도 위 파라솔 공간인 레트로가맥존, 나무팔레트와 파티라이트 공간인 감성피크닉존, 캠핑테이블과 LED 공간인 신라라운지존은 방문객들이 축제장에 오래 머무르며 소비할 수 있게 준비했다. □ MZ세대 겨냥 화랑힙합 ·실크로드 페스타 실크로드페스타는 해외 2팀을 포함해 전문거리 예술팀 30개 팀이 70회 정도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봉황대 광장을 비롯해 공연 구역을 총 7곳으로 마련해 광장을 거닐며 공중극, 서커스, 마임, 마술, 버블쇼 등 다양한 공연을 제공한다. 특히 올해에는 봉황대 법장사 뒤편에 ESG존을 마련해 친환경 체험 공간과 반려견 동반 구역을 신설했다. 친환경 체험공간인 ‘그린어스 존’은 문정헌 뒤 잔디밭에 마련돼 폐플라스틱 업사이클링 체험부터 멸종위기 동물을 캐릭터로 한 에코백 제작까지 친환경을 소재로 재미를 더한 체험이 가능하다. 또 반려견 동반 구역은 그린어스 존 옆에서 반려견 TV를 관람하고 미로 체험을 하는 등 색다른 즐길거리로 채워진다. 청소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화랑힙합페스타는 요즘 힙합씬에서 가장 핫한 출연진으로 섭외했다. 출연진은 비와이, 비오, 자이언티 등 8팀이다. 시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서 라인업을 순차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 시민축제단 운영 올해 초 공개모집을 통해 축제 SNS홍보단(시민서포터즈) 207명, 실크로드 페스타(시민프로듀서) 85명, 친환경 그린리더(화랑원화단) 48명을 구성했다. SNS홍보단인 시민서포터즈는 인스타, 유튜브, 블로그 등 SNS를 통해 신라문화제와 시정에 관한 홍보활동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실크로드페스타 시민프로듀서는 생활문화, 체험예술, 마을축제로 팀을을 나눠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축제 기간 시민들과 함께 호흡한다. 친환경 그린리더 화랑원화단은 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친환경 체험학습을 운영하고 있으며, 축제 기간 친환경 체험·전시뿐만 아니라 축제장 플로깅 활동을 선보인다. □ 시민과 나눔의 장으로 승화 신라예술제가 28일과 29일 이틀간 경주예술의전당 일원에서 개최된다. 한국예총 경주지회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7개 예술협회가 힘을 합쳐 수준 높은 경주예술을 선보이는 축제다. 오는 28일 오후 7시 열리는 개막식은 일본 오이타현의 문화교류 공연을 시작으로 드론라이트쇼와 주제공연 ‘신라의 빛’이 차례로 펼쳐진다. 드론라이트쇼와 함께 하늘에 금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신라의 빛’ 주제공연을 통해 시민 마음에 희망의 빛을 띄운다. 체험 프로그램은 28일부터 29일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경주예술의전당 분수광장에서 열린다. 한국예총 경주지회 7개협회의 다양한 체험은 물론 플리마켓, 지역명인, 전통놀이 체험, 예술피아노 등의 20여개 체험이 분수광장을 가득 채울 예정이다. /황성호기자 hsh@kbmaeil.com

2024-09-23

‘계단식 성장 맞춤형 정책’ 으로 창업 기업 지원 체제 구축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가진 구미시가 창업특화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구미시는 민선8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글로벌 유니콘 스타트업 탄생을 위한 창업지원 정책과 기능을 점검하고 창업지원 체계 대전환에 대한 방향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다. 김장호 구미시장은 침체된 구미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선 혁신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 기업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제조업 수출 중심의 국내 산업이 위기를 맞고 있음에도 스타트업은 국내 산업의 활로를 모색하며 성과를 창출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제조업의 침체에 따른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3년 연속 20%대 성장률을 기록하는 고성장 스타트업 기업의 숫자는 2020년 4215개사에서 2021년 4995개사로 18% 증가했다. 스타트업 기업들이 급성장하면서 정부와 지자체들도 다양한 창업지원 정책을 펼치면서 2023년 국내 창업지원사업의 규모는 426개 3조 6607억원에 달한다. 사실상 후발주자인 구미시가 창업특화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선 현재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타 시·군보다 차별화된 지원정책이 필요했다. 이에 김 시장은 기업지원과에 창업벤처팀을 신설하고 그동안 창업정책들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개선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 죽음의 계곡을 넘어서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매월 평균 630여 개의 기술기반 창업기업이 경북에서 탄생하고 있다. 그 중에서 구미시는 2800여 개의 제조기업을 보유하고 있어 기술경력을 가진 잠재적 창업자가 풍부하다. 제조업 기술경력이 중요한 이유는 창업기업 중 기술제조 분야 7년 생존기업 비중이 전체(18개 분야)의 37%나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구미시는 수요와 자원 등 환경적인 요인은 타 시·군에 비해 매우 우수한 편임에도 성장 가능성이 높은 스타트업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혁신 기술을 자진 창업기업이 일명 ‘죽음의 계곡’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에 맞춤형 지원정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창업기업이 가지고 있는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과 시제품 제작까지 추진하고서도 상용화가 어려워 시장 진입을 눈 앞에 두고 주저않는 경우가 많아, 아이디어 검토에서 연구개발과 시제품 제작까지의 단계를 ‘죽음의 계곡’이라 부른다. 구미지역 창업기업들도 이 ‘죽음의 계곡’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구미시 창업벤처팀은 구미전자정보기술원과 그동안의 창업지원 정책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동안의 지원책들은 특정 대상과 산업, 지원분야별로 지원금을 주다보니 단기 성과 창출에 집중할 수 없어 지속적인 기업밀착형 지원과 성과 관리에 미흡했다. 또 지원금도 수요자 중심이 아닌 공급자 위주의 지원체계로 되어 있어 통합된 관리 체계가 부족하고 지역기업 상호 연계기반도 약화시키는 악순환이 지속돼 왔다. 구미시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창업기업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창업기업이 원하는 지원책을 마련하게 된다. □ 성장 맞춤형 지원체계를 구축하다 구미시는 혁신 기술을 보유한 스타드업 기업들의 전 주기를 지원하는 ‘계단식 성장 맞춤형 지원’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계단식 성장 맞춤형 지원’은 스타트업 기업들이 성장하는 단계별 맞춤 지원정책으로, 초기 창업기업, 혁신 스타트업, 글로벌 창업기업으로 구분해 성장 단계별 계단식 지원프로그램이다. 초기 창업기업에게는 기술 고도화 자금 1억원, 입주공간 제공, 창업 아카데미, 시드 머니 투자 등 기술 고도화 지원에 따른 혁신 창업기업으로의 전환을 돕는다. 혁신 스타트업에게는 사업화 자금 최대 2억원, 가치 평가·전담 연구, 인증·마케팅, VC 투자(인프라 구축) 등의 풀 패키지 지원과 지역 중소공장과의 연계강화로 공동 연구개발을 지원한다. 글로벌 창업기업에게는 해외 진출 컨설팅, 글로벌 컨텐츠 제작, 전시회 참가, 해외 바이어 매칭, VC 투자(성장 자금) 등을 집중 지원한다. 구미시의 이러한 성장 단계벌 맞춤 정책은 전국 창업기업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실제, 지난해 12월 혁신 스타트업 지원 수요기업 사전 모집에 전국에서 300여 개사가 지원하기도 했다. 시는 이들 중 본사 및 근로자 70% 이상이 구미로 이전을 희망한 혁신 창업기업 182개사(구미 88개사, 타지역 94) 중 5개사를 최종 선발했다. 이러한 관심은 구미시가 창업기업들에 자금도 충분히 지원하면서 글로벌 창업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지원정책을 마련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 산·학·연이 창업기업을 돕다 구미시는 창업지원 사각지대를 보완하고, 분산된 창업 정책을 일원화하기 위해 창업지원 통합 플랫폼인 ‘산학연관 커넥티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산학연관 커넥티드 프로그램’은 구미시 창업지원 사업의 목적에 따라 세부적으로 유형을 구분한 것으로, △창업지원 사업 통합 정보제공 서비스 △지역 산업과의 기술 교류를 위한 이노테크 포럼 △지원기관 협의회를 통한 원스톱 창업지원 등으로 구성됐다. 통합 안내사이트는 창업지원에 대한 맞춤형 알림 서비스 제공 및 원클릭 간편 신청접수 기능으로 접근성과 편의성을 제공하며, 지원기관 협의회는 혁신 스타트업 공동 발굴과 집중 육성을 위해 종합적 검토 및 최적의 창업지원 모델을 제공한다. 벤처투자 협의회는 지역 창업기업의 투자 요구에 신속 대응하고 기술, 사업성 등 성장 가능성이 높은 혁신 스타트업을 발굴해 글로벌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후속 투자를 지원한다. 또 이노테크 포럼은 지역 기업 간 기술교류 촉진과 관심 기술에 대한 기술 협력 중개 등 급변하는 신산업 미래기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SOS 대응 서비스는 창업기업의 애로사항을 신속 정확하게 해결하기 위한 1대 1 맞춤형 밀착 서비스를 제공한다. 김장호 구미시장은 “구미는 반도체 소재부품 특화단지 지정과 방산 혁신 클러스터 유치 등 대형 국책사업 선정으로 다시 한번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지만,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선 혁신 기술을 보유한 글로벌 창업기업들이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구미만의 독립적이고 차별성 있는 창업지원 프로그램으로 창업 특화도시 구미를 만들어 가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4-09-22

“지금도 지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 간절해”

구순을 바라보는 김자중 선생은 지금도 지화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여건만 만들어준다면 가위를 다시 잡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지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고 했다. 김자중 선생의 부인인 장숙자 여사는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남편과 함께 만든 지화가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고 동해안별신굿도 전승이 잘돼 여한이 없다고 술회했다. 김홍제(이하 제) : 1985년 동해안별신굿이 무형유산으로 지정될 때 선생님도 지화 전승자가 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김자중(이하 김) : 그때는 무형문화재라 했는데, 김석출과 그의 아내 김유선이 지정되었지요. 김석출은 넉살이 좋아 굿판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불려 다녔어요. 우리 집에 대학교수들이 한창 찾아올 때는 경상도, 강원도 어촌에 풍어제나 굿이 많이 열렸고, 그 바람에 나도 바빴던 터라 무형문화재 같은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때는 굿하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많이 작고할 때여서 굿판에 사람이 부족했지요. 김석출이 2005년에 세상을 뜨자 조카인 김용택이 전승자로 지정되었고, 김석출의 딸들도 전승자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나도 노력을 좀 했으면 전승자로 지정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왜 없겠어요? 워낙에 나서지 못하는 내 성격 탓도 있지요. 제 : 지화를 계속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지요? 김 : 이제 내가 살날이 얼마나 남았겠습니까? 바람에 나부끼는 가랑잎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2021년에 지화 전시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과연 가능할까 싶었는데 막상 가위를 잡으니 힘이 나더군요. 그때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50평 정도 되는 작업실을 누가 마련해준다면 지화를 다시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요. 지화를 평생 만들어왔지만 솔직히 돈 없이는 힘든 일입니다. 화주가 내는 돈이 많을수록 힘이 더 날 수밖에 없어요.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지화를 만들어보고 싶군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았던 어부들을 생각하며 정성이 가득 들어간 지화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고 싶어요. 동해안별신굿은 무형유산으로 지정돼 전승되고 있지만, 지화는 개인의 솜씨에 달려 있지요. 지금 굿판을 장식하는 지화는 성에 안 차요. 지화가 사라지지 않고 예술작품으로 계속 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지화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에서 흥과 장단이 용솟음칩니다. 동해안별신굿의 드렁갱이장단이 아직 내 몸속에 흐르듯이요. ※ 김자중 선생과 대담을 마친 후 김 선생의 부인인 장숙자 여사와 대담을 이어갔다. 김홍제(이하 제) : 사모님도 지화를 만들 때 함께하셨습니까? 장숙자(이하 장) : 나도 지화를 잘 만들어요. 영감만큼 가위질에 능숙하지는 않지만요. 지화를 염색하고 말리는 일은 주로 내가 맡았지요. 지화는 혼자서 만들기 힘들어요. 누군가와 함께해야 할 수 있는 힘든 작업이에요. 우리는 생계가 달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진짜 열심히 했어요. 굿이 겹쳐서 잡히면 밤을 꼬박 새울 때도 많았지요. 제 : 김자중 선생이 지화를 만들며 굿판에 나선 세월이 70년 가까이 됩니다. 결혼하고 60여 년을 함께하셨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나요? 장 : 나도 흥이 참 많았어요. 영감을 따라다니면서 사설과 가락을 배웠고, 장구와 국악기를 잘 다뤘지요. 가장 기억나는 일은 국악경연대회에 참가한 일입니다. 영일군이 포항시와 통합된 게 아마 1995년이지요. 그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청하면장이 찾아와서 영감한테 영일군 국악경연대회에 청하면 대표로 출전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래서 영감이 젊은 사물놀이패들과 함께 굿거리장단을 가르치고 대회에 나갔는데 나도 갔지요. 다행스럽게 영일군 경연대회에서 우리 청하면이 1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팀이 영일군 대표로 경상북도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지요, 그때 마침 영감한테 일이 들어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내가 젊은이들을 인솔해 경상북도 대회에 나가 2등을 했어요. 영감과 함께 나갔으면 1등은 따놓은 당상인데 정말 아쉽더군요. 전국대회에 나가서 입상했더라면 국악으로 무형유산이 될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제 : 굿판에서 일하는 분을 남편으로 둔 인생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장 : 굿판에 가보면 양중이 장구를 치며 추임새를 넣고, 무당이 사설을 늘어놓을 때 제 신랑인 양중이가 계집질에 노름까지 한다며 신세 한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구경꾼들은 재미있다며 배꼽을 잡으며 웃지만 실은 무당 자신의 신세 한탄인 거죠. 굿판에 나선 남자들은 술과 노름, 계집질에 흥청거리며 살았어요. 그걸 바라보는 여인네들의 속이 어떻겠어요? 까맣게 타들어갔지요. 그래도 그 험한 세월을 참고 견뎌냈습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어디 가당키나 했겠어요? 모두 모성으로 버텨냈지요. 그런 세월이 다 지나자 영감도 늙고, 나도 늙어버렸군요. 꽃 같은 호시절이 다 지나갔어요. 요새는 영감이 저 없으면 꼼짝도 못 해요. 제 : 슬하에 자녀는 어떻게 되는지요? 장 : 2남 1녀를 두었어요. 큰아들은 포철공고를 졸업하고 포스코에 다니고 있어요. 포항 시내에 삽니다. 가까운 곳에 살아 자주 우리 내외를 찾아온답니다. 며느리도 참 좋아요. 둘째 아들은 울산 현대자동차 계열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옛날 부산에서 자동차 수리 일을 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하던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어요. 막내딸이 있는데, 용두리 한동네에서 살아요. 사위가 어선 수리하는 일을 하고 있지요. 의지가 많이 되는 딸 내외입니다. 제 : 아주 다복하군요. 자녀들은 자라면서 부모가 굿판에 종사하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요? 장 : 아이들이 자라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에 반대를 많이 했어요. 오죽하면 큰아들이 교회를 다녔겠어요? 이제 성인이 되어 다들 이해하지만, 한창 자랄 때는 아이들에게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고 봅니다. 나도 아이들 눈치를 많이 보면서 살았어요. 지화 일을 그만두게 된 것도 아이들 영향이 컸지요. 제 : 가슴에 품고 있는 이야기가 참 많을 것 같습니다. 장 : 그럼요. 다 이야기하자면 장편소설 몇 권을 쓸 수 있을 텐데 이젠 기억이 가물거려요. 세월이 약이라고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 영감이 치매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주니 고맙지요. 영감이 얼마 전에 화장실 바닥에 미끄러져 다리를 다쳐서 한동안 병원에 다녔어요. 그때는 속이 많이 상했답니다. 제 : 이제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해주시죠. 장 : 영감과 나는 지화 만드는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았어요. 천직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요즘 가만히 생각해보면 영감이나 나나 생각을 미처 못한 게 있어요. 영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형유산 전승자로 지정을 받았는데 영감은 그걸 못한 겁니다. 영감도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촌에 살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 어두워 그런 걸 모르고 살았던 거예요. 그래도 영감이 나이에 비해 건강하고, 가족들 무사태평하니 한평생 고생했지만 나름 잘 살았다고 여깁니다. 영감과 내가 만들던 지화가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고 동해안별신굿도 전승이 잘되니 여한은 없어요. 끝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

2024-09-22

KT, 봉사활동으로 지역사회와 소통… “그저 함께 살아가는 것”

기업이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실현하는 가치는 단순한 기부나 자선 활동을 넘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있다. 이는 기업이 속한 지역사회와의 상호 유대를 강화하고, 기업의 이미지를 제고하며, 나아가 장기적인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다. KT가 2만여 명의 임직원으로 구성된 사랑의 봉사단 활동으로 지역사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 지 올해로 24년째이다. 직원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회문제를 바탕으로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실행하며 사회 문제 해결에 동참하고 있다. KT대구경북광역본부 사랑의 봉사단 단원들을 만나 봉사 경험, 그 과정에서 경험한 땀의 가치와 자기효능감에 대해 들었다. 주인공은 노조 지부장을 맡고 있는 대구코어운용센터지부 하정명 지부장과 대구ICT기술지부 이상열 지부장, 대구고객본부지부 정재윤 지부장이다. -봉사활동은 언제부터 시작했고, 어떤 활동들을 주로 하나. △ 정재윤 지부장 : KT 사랑의 봉사단 이름으로 지난 20여 년간 농촌일손돕기, 김장 나눔, 장애인 도우미, 목욕 봉사, 후원물품 전달 등의 활동을 해왔다. 그러면서 봉사는 특별한 일이 아닌 그저 함께 살아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척수장애인은 신체의 일부 또는 전체가 마비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대다수가 일상생활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단독으로 외출 자체가 어려운 이들에게 짧은 시간이지만 틈이 나면 이동 지원과 동행 봉사, 문화 체험 지원 등 자립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활동들을 하고 있다. ‘장애는 불편하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선한 행동 하나 하나가 모여 우리 사회가 편견없이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공정한 세상이 되길 바란다. - 바쁜 업무 시간에 일부러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힘들지 않나. △ 하정명 지부장 : 사실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에 동참한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 시켜서 하는 업무 연장선 정도로 생각했고 일이 많고 바쁠 때는 귀찮기도 했다. 그러다 내 손길이 닿는 사람들의 미소와 눈빛, 표정을 보면서 누군가에게 기쁨과 도움이 됐다는 사실에 점차 보람과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간들이 삶의 활력이 됐다는 부분에서 봉사활동은 업무로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오히려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벗어나 KT의 얼굴로서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주며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경험들이 더 긍정적인 마음으로 업무에 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여러 부서 직원들과 어울려 하는 봉사활동은 세대나 직급, 직무에 상관없이 소통과 공감의 시간이 된다. 구슬땀을 흘리다 보면 어느새 진한 전우애가 생긴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시작이 중요하다.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봉사부터 시작하는 것을 추천한다. 주변에 작은 도움이나마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곳곳이 많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 뿌듯함을 느낀 순간이 있었다면 어려움을 느낀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 하정명 지부장 : 코로나 19 장기화로 자원봉사 활동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면 봉사 활동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지면서 봉사활동도 주춤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무료 급식소가 문을 닫았고 후원의 손길도 줄어들었다. 비대면으로 독거노인 반찬 배달 봉사를 시작했다. 문고리에 반찬이 담긴 봉투를 걸어놓고 문밖에서 어르신에게 안부인사를 건네는 정도였지만 많이 고마워 했던 기억이 난다. 재택근무, 자가격리, 비대면 기간이 늘어나면서 우울, 고독, 분노 등이 쌓여 심리 방역이 화두로 떠오르던 모두가 힘들던 시기였다. 특히 사회적 고립에 취약한 고령자 지원사업이 절실했었다. 그때부터 반찬 배달은 지금도 월 1회 정기활동으로 하고 있다. 점심 배식봉사를 하다 보면 오후 12시부터 식사시간임에도 이미 한 두시간 전부터 어르신들이 줄을 서고 계시는데 거의 오픈런 수준이다. 단촐한 식사에 연신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고 미소를 짓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어쩌면 그날의 첫 끼니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많은 독거노인들은 정서적,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아, 그런 분들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곤 한다. 특히 봉사활동 중에 개인적인 어려움이나 고민을 털어놓으시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적인 도움을 드릴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라 안타까울 때가 많다. 마음 한켠이 무겁지만, 오히려 이러한 경험들이 더 큰 책임감을 심어 주었고 봉사활동을 꾸준히 이어가야 한다는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해줬다. - 보람되거나 인상 깊었던 경험을 들려달라. △ 이상열 지부장 : 개인적으로 201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가족과 함께 처음으로 연탄배달 봉사를 한 적이 있다. 한겨울이었지만 땀을 흠뻑 흘렸다. 여느 때 같으면 연말 연시 송년회나 부서 회식 등으로 흥청망청 시간을 보냈을 텐데, 가족과 함께 참여한 첫 봉사활동이라 그런지 의미가 더 컸던 것 같다. 그 시간을 계기로 더불어 사는 삶과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겨울철 실내 온도를 높이기 위해 ‘뽁뽁이’라고 불리는 기포 단열재를 창문에 붙이는 게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장애인이나 독거 어르신 등 취약 세대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창문에 ‘뽁뽁이’를 부착하고 창문 틈새도 막고 실내 간이보온텐트도 설치했다.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작업하는 것이 피곤하긴 했지만 겨울철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거란 기대에 정말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시각장애인 학생들을 위해 3D프린터로 명화를 제작하고 ‘손으로 만지는 명화 전시회’를 가진 적이 있다. 말로만 듣던 명화들을 손으로 직접 만지고 설명을 듣는 학생들을 보니 마음 한 켠이 울컥했다. 장애란 결국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 실감났다. 그간 나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들여다 본 것은 아닌지, 세상을 이해한다고 생각한 것이 부끄러웠다. -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은데. △ 이상열 지부장 : 언젠가 복지관에서 배식봉사를 하던 중 한 어르신께서 너무 착하고 믿음직하다고 손을 덥석 잡으며 당신 딸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셨다. 그때 이미 대학에 다니는 자녀가 있었던 터라 많이 당황스러웠다. ‘저도 다큰 딸이 있다’고 하니 크게 실망을 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동안으로 봐주셔 감사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다. 지난 연말 김장김치 봉사 활동에 참가했다. 양념을 버무린 김장 김치를 옮기다가 바닥에 떨어진 배추 조각에 미끄러졌고 그 바람에 온몸이 김장 김치 양념으로 빨갛게 뒤범벅이 되어 다 같이 크게 웃은 적이 있다. 반찬 배달 사고가 난 적도 있다. 문 손잡이에 잘 걸어 뒀는데 길고양이가 봉지를 뜯어 반찬을 먹고 헤집어 놓았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다시 어르신을 방문해 반찬을 전달했다. 이런 황당하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은 나중에 소중한 추억으로 될 것이다. 무엇보다 봉사활동을 통해 배운 배려와 감사함은 개인이나 우리 사회가 건강한 성장을 하는데 자양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봉사 활동에 동참하여 함께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 가길 기대한다. /김재욱기자 kimjw@kbmaeil.com

2024-09-19

600년 넘게 마을 공동체 안녕과 평화의 지킴이 역할

노거수에 대한 고사와 설화에는 노거수의 실질적인 수령을 가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거수를 보호해야 하는 마을 공동체의 필연적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실체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내용을 포함하는 가상의 설화를 가지고 있다. 특히 자연재해에 대한 취약한 마을의 구조와 자연환경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그런 사례가 있다.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의 지킴이로서 특정 수목의 식재와 보호는 그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노거수의 고사와 설화는 현장의 자연환경 조건에 대한 간접적인 정보가 포함되는 한편 나무를 지켜주는 강력한 보호 수단이 된다. 조선시대 흥해군 관아의 동헌인 제남헌(포항 영일민속박물관) 앞뜰에 나이 640살, 키와 맞먹는 몸 둘레 6.7m 되는 회화나무 두 그루가 살고 있다. 동헌(東軒)은 조선왕조 지방 관청의 중심 건물이다. 수령(守令), 즉 사또(使道)라고 불리던 부사, 목사, 군수, 현령, 현감 등의 지방관이 직무를 보는 관청 건물로서, 오늘날의 시군 청사 본관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회화나무는 당시의 관아 건물과 함께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정원수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또한 청렴과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조선 선비들이 애호하는 나무로 집무실 앞 뜰에 심어 나쁜 유혹과 흐트러지는 마음가짐을 다잡지 않았나 싶다. 이웃 청하현 관아(포항 청하면사무소)에도 회화나무 노거수가 살고 있다. 그러나 이 회화나무는 정원수가 아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바람과 습기를 예방하는 치료제로 심은 나무란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의 유명한 풍수지리학자인 성지(?-1623년)가 영남 지방의 산세를 조사하고자 흥해 지날 때 동해를 따라 내려오는 낙동정맥을 잇는 비학산 정상에 올라 흥해 분지를 바라보고 ‘과연 천년 옛 고을의 승지’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당대의 이름난 풍수가요 조정의 권문세가와 대신들도 앞다투어 초청하던 어전 관상감으로 유명한 사람이라 흥해 군수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환대하였다. 그는 ‘흥해는 다풍질(多風疾, 바람과 질병이 많은 곳)이라서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5대 이상 그 후손이 세거할 곳이 못 된다’라고 하였다. 그 연유를 묻자 ‘흥해의 지세와 지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먼 옛날 선사시대에 이곳은 필시 큰 호수였을 것이다. 수만 년 동안 호수였던 이곳을 동편 낮은 곳의 산맥을 절단하여 그곳으로 호수의 물을 흘러가게 하여 평야를 이루게 하였으므로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겠으나 그 반면에 습기가 많아 필시 괴질이 많이 돌고 피부병을 앓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 참석한 마을 노인 한 분이 ‘과연 그렇다. 이 고을에는 괴질을 앓는 사람이 많은데, 그 원인을 말했으니, 처방도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성지는 ‘바람과 습기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회화나무를 많이 심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회화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하여 물을 섭취하는 양이 4~5배나 많으므로 지하의 습기를 제거하는 양 또한 4~5배나 되므로 지하의 습기를 제거하는 데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흥해 군수는 고을 전체에 지시하여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집마다 회화나무 심기를 권장하여 그 후 물 좋고 농사 잘되는 사람 살기 좋은 고장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이는 흥해지역에 내려오는 회화나무에 대한 전설이다. 회화나무는 우리 민속문화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조경 측면에서 보면 나무 없는 삭막한 마을에 녹음이 짙고 단풍이 아름답게 물이 드는 나무를 선택하여 심기를 권유하였다는 것은 지방 수령으로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화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지만, 오랜 옛날 우리나라로 도입되었다. 낙엽교목으로 키가 30m까지 자라 여름에는 녹음이 짙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정자나무나 기념식수로 안성맞춤이다. 또한 열매가 겨우내 열려있다 보니 직박구리 같은 새들이 열매를 먹으러 많이 모여 자연적이다. 7, 8월에 꽃이 피고 열매는 9, 10월에 황색으로 익으며 꼬투리는 잘록잘록한 모양이다. 꽃과 열매는 약용으로 사용되며 꽃봉오리는 황색의 염료를 만들기도 하여 옛날에는 일상생활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인문학적으로는 예로부터 선비 나무라 하여 서원이나 향교, 문중의 제실 등 많이 심었다. 특히 선비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집의 마당이나 마을 어귀에 심기도 하였다. 이러하다 보니 통용되는 명칭이 많아서 헷갈리기도 한다. 회화(槐花)나무, 회나무, 홰나무, 괴나무, 괴화(槐花)나무 등 많은 이름이 지역마다 다르게 불리고 있다. 회화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학자수(學者樹)라 통한다. 이는 중국 주나라 때 삼괴구극(三槐九棘)이라고 해서 회화나무 3그루와 가시나무 9그루를 심어놓고 여기에 정승 3명, 고급관료 9명 등을 세웠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궁궐이나 정승이 태어난 고택, 문묘 등지에서 회화나무를 심어 길상 목으로 여겨왔다. 임금이 친히 상으로 하사하거나 기념식수로 심어 오늘날 수령이 몇백 년 이상의 회화나무 노거수가 궁궐이나 향교, 서원 등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회화나무 괴(槐)를 풀어보면 나무 목(木)과 귀신 귀(鬼)가 되므로, 회화나무를 귀신 쫓는 나무라고 하여 잡귀를 쫓기 위해 회화나무를 심었다고도 한다. 수형이 제멋대로 뻗는 듯하면서도 단정한 모습이 학자의 기개를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회화나무는 수형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 주민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워 주변의 건물과 함께 멋진 뷰를 선물한다. 겨울에는 열매가 오래도록 달려 있어 새들이 찾아와 나목의 삭막함과 겨울의 쓸쓸함을 달래 준다. 회화나무는 더위와 가뭄 그리고 오염에 아주 잘 견디며 성지의 말대로 왕성한 증산작용으로 땅속의 지하수를 정화하고 초겨울까지 잎을 달고 있으니 방풍 방습 기능이 있는 유용한 식물 자원이란 생각이 든다. 회화나무 주변에 세워진 대원군척화비, 항왜혈전기념비, 흥해군수 공덕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들의 주인공은 모두 사라지고 없는데 회화나무 노거수만이 덩그렇게 남아 그 역사를 더듬어 보게 한다. “어떻게 하면 이런 비석을 세우지 않는 날이 올까?”라고 회화나무 노거수에 한 번 물어나 볼까. 필자의 시 ‘회화나무 노거수’ 관아 뜰에 서서 세월을 품은 그대 말없이도 깊은 지혜로 바람을 막아주네. 고요한 관아의 품속에서 그대의 잎은 흩날리고 긴 역사의 그림자는 그대 아래에 머물러 있다. 학자수 회화나무 나 그대를 닮으리라는 흥해 사또의 고백이 들리는 듯하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9-18

포스코에서 35년간 취련직 외길… ‘용강의 마술사’ 별명

“저의 운명은 쇳물을 다루는 야금(冶金)의 기술자입니다.” 자원도, 재력도 없는 빈국(貧國)이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기술인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휘호를 내걸었다. 조국의 근대화 작업에 참여한 기술인들은 과학 기술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당시 산업의 쌀은 ‘철’이었다. 산업 전반에 가장 폭넓게 사용되는 게 철이었기 때문이다. 고(故) 박태준 포스코 전 명예회장은 품질 좋은 철을 만들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게 곧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고 강조했다. 포스코에서 35년 간 ‘용강의 마술사’라 부르는 취련직을 담당한 김영화(62·사진) 금속재료분야 명장. 쇳물로 뜨거웠던 산업 현장에서 학구열이 불타는 교육 현장으로, 제2의 인생을 그려가고 있는 김 명장의 여정을 최근 들어봤다. - 서울에서 포항으로 오게 된 계기는. △서울에서 초·중·고등학교, 전문대학을 다녔다. 초등학교 졸업할 즈음에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렵게 중학교를 마친 후 학비가 저렴한 서울소재 공립공업학교인 용산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쇳물을 용해해 주형에서 제품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때 기술을 배워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재수 생활을 했다. 홍익공업전문대학 금속과에 입학해 2년 동안 공부를 한 후 졸업과 동시에 군 입대를 했다. 양구에서 2년 5개월(군사복무 혜택으로 조기 전역) 근무한 후 (주)POSCO에 1986년 7월 1일 입사했다. - 포스코에 입사한 이유는. △한 편의 영화 ‘팔도강산’ 덕분이었다. 영화에서 1남 6녀를 둔 한 노부부가 전국 팔도강산에 뿔뿔이 흩어져서 사는 자식들의 집으로 유람여행을 떠난다. 근대화로 대한민국 곳곳이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식 중 한 명이 포항제철이라는 회사에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때 고로에서 나오는 쇳물을 강(steel)으로 제조하는 제강공장, 코일이 생산되는 열연공장의 모습이 얼마나 멋있었던지 연고가 전혀 없었음에도 꼭 입사하고 싶다는 생각에 군 제대 후 포항까지 내려가 시험을 봤다. 고등학생 때 딴 주물조형 자격증을 갖고 포스코에 입사했다. 마치 철을 다루는 마술사가 되는 운명인 것 같았다. 제강분야 자격증인 제강기능사 1급, 제강기능장, 철야금기술사, 주조기능장만 취득한 것을 보면 나는 ‘용강의 마술사’라는 직함이 어울리게 타고 났다고 할 수 있다. 회사에서 우수제안과 특허 14건을 출원시키고, 철야금기술사(현 금속제련기술사)를 취득했다. 이어 나의 인생 좌표인 “이론과 전문성을 겸비한 최고의 기술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 제강공정과 취련사란 무엇인가. △고로에서 철광석 코크스와 함께 반응을 시켜 녹여 만든 용선을 전로에 장입해 고압의 산소를 불어 넣어 인, 황, 탄소, 규소, 망간 같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자동차나 배등의 소재를 생산하는 작업이다. 한번 작업할 때마다 전로에는 용선 과 고철 수백 톤이 들어가는데, 취련 정련 과정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취련사의 직무는 용선의 불순물을 제거해 용강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용강온도가 1670℃정도에서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강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시스템적으로 용강이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쓸모있는 강을 제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오직 기술자의 숙련된 노하우와 판단으로 만들어진다. 2제강 공장에서 나가는 강종만 무려 600여 종, 화학성분이 전부 다 다르기 때문에 모르는 상황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 작업 중 가장 까다로운 공정은 용강온도 1670℃ 정도에서 저린강제조시‘인 [P]’을 제거하는 것이다. ‘인 [P]’을 10ppm 이하로 낮게 만들지 않으면 압연 시 압하력에 의해서 쇠에 금이 가버리기 때문에‘인 [P]’을 완벽히 제거하면 불량률이 엄청나게 낮아지고 제품 납기도 정확히 맞출 수 있다. 원가와 물류비 절감은 물론 회사 신용도까지 높아질 수 있다. 그래서 ‘인 [P]’을 없애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기술중의 하나이다. 용강 작업중 ‘인 [P]’제어를 위해 꾸준히 연구해 특허 14건 출원과 무결점 작업을 1년 이상해 부소장 표창 5회 수상했다. - 일과 학업을 병행했다고. △회사에서 일하면서 작업 공정의 개선을 위해 특허와 우수제안을 자연스럽게 하게 돼 무결점을 1년 넘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대한민국 명장이 됐다. 학문을 접하게 되면서 기술사 자격 취득으로 경주에 있는 서라벌대학제철산업 플랜트과에서 철강공학 강의를 했다. 학문과 기술을 좀 더 배우고 싶었다. 금속 중 화학야금과 물리야금을 전공하고 싶은 마음에 부경대학 금속공학과에 진학해 직장과 학업을 병행했다. 특허 출원과 우수제안의 실적을 도출하면서 석사과정 중 논문 1건, 박사과정 중 논문 6건(SCI급 1건, SCIE급 1건)을 학술지에 발표했다. 박사 과정 중 산업현장 교수 위촉(2016년), 사회 봉사활동으로 국회의원 표창장 수상(2016년), 경북도 최고 장인에 선정(2017년)됐다. 그 후 우수숙련기술자 선정(2018년)과 노동부 장관상을 수상(2019년)했고, 2020년 대한민국 명장에 선정됐다. 대한민국 명장, 기술사, 공학박사를 취득한 저에게 대학원 졸업식장에서 “개천에서 용 났다”며 축하해 준 아내에게 감사하다. - 개천(川)에서 용(龍)이 되기까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전문대학에서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제선, 제강 자격증 취득과 철강회사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제선과 제강 기능사 문제집, 주조공학, 열처리공학을 출판했다. 산업인력공단에서 NCS 제강분야와 용접기능장 출제위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이차전지와 리사이클링의 제련기술 및 철강의 노하우를 학생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제조업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 기술자를 양성해 회사에서 인정을 받는 학생을 지도하고 싶어 포항대학교와 울산 및 대구 폴리텍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박사 학위 취득 및 대한민국 명장이 되기까지 전 직장 동료들의 응원이 있었다. 대학원 다닐 때 휴가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나의 빈자리를 메꿔준 건 전부 동료들이었다. 학교에 강의하러 다닐 때도 모두 묵묵히 옆에서 지켜봐 주고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도 해줬다. 나의 노력은 물론, 전 직장동료들과 아내의 도움의 도움으로 기술사, 공학박사, 명장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올 수 없는 길이었다. 실패로 좌절도 했었지만, 나를 지금까지 지탱해 준 가족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가족이 있었기에 힘든 일도 극복해 지금의 내가 있다. - 앞으로의 계획은. △그동안 야금 기술자의 외길을 걸어왔다. 이제는 학교 강의를 통해 기본적 기술력 배양과 현업에 조기 적응을 할 수 있는 현업 실무능력을 보유한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기술적인 지식과 현장 실무에서 필요한 노하우, 특허 도출, 설비와 작업시 안전을 고취시키면서 후배들의 진로와 계획을 지도할 것이다. 또한 기술자가 갖춰야 할 덕목과 인성,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집념 등 실무형 엔지니어를 양성하고 싶다. 정년 퇴직이 없는 기술자를 만들고 싶다. 나와 같이 ‘개천에서 용이 되는 기술자’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제2의 인생을 잘 지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김영화 금속재료분야 명장은 △1980년 용산공고 졸업 △1983년 홍익공업전문대 졸업 △1986년 POSCO입사 2021년 정년퇴직 △2004년 제강기능장 취득 △2007년 철야금기술사 (현 금속제련기술사)취득 △2016년 금속공학박사 취득,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 △2017년 경북도 최고 장인 선정 △2018년 우수숙련기술자 선정 △2019년 노동부 장관상 수상 △2020년 주조기능장 취득, 대한민국 명장 선정 △2022년~ 현재 포항대학교, 울산 및 대구 폴리텍대학 외래교수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09-18

‘경북 대표 랜드마크’ ‘문화예술 성지’… 기대감에 영천 들썩

한국 영화계 거장 고(故) 신성일 배우가 타계하기 전 10년간 직접 지어 살았던 한옥 성일가(星一家·영천시 괴연동 160-7)에서 5분쯤 걸어 올라가자 가지런히 정리된 벌판이 나왔다. 영천시가 오는 2025년 7월 완공을 목표로 신성일기념관을 지으려는 부지다. 최기문 영천시장은 지난 13일 이곳에서 강석호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와 신성일의 장남 강석현 지피워크샵 대표 부부, 이만희 국회의원, 김선태 영천시의회 의장, 김상철 경북도 문화관광체육국장 등 정·관계 관계자와 지역 주민들을 초청해 기공식을 열었다. 오후 3시부터 1시간여 동안 열린 기공식 행사에는 이춘우·윤승오 경북도의원 등 영천시 정치인과 관료뿐만 아니라 무용인 등 문화예술인도 참석했다. 신성일의 조카인 강석호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는 축사에서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로, 문화예술발전을 위해 평생을 살았던 고 신성일 배우를 기념하는 공간을 마련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유족을 대표해 전한다”면서 “영천시가 숙원사업으로, 신성일기념관 건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한 결실은 많은 이들에게 문화예술의 향기를 전해주는 문화예술의 성지로 돌아올 것”이라고 밝혔다. 강 총재는 또 “작은아버지는 1960∼70년대 한국 영화계의 대표 배우로 많은 팬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시면서 대학교수, 국회의원 등의 길을 걸으며 문화예술 발전을 이끌다가 2008년 영천에 성일가를 지어 노후를 보내셨다”며 “그의 아름답고 멋진 삶의 흔적이 반영된 훌륭한 건축물이 완성되면 아마도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문화공간으로, 또 하나의 세계적 명소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를 대신해 기공식에 참석한 김상철 경북도 문화관광체육국장은 “신성일기념관 건립에 대한 영천 시민들의 높은 기대와 바람을 알고 있기에 경상북도에서도 재원을 투자했다”면서 “한국 영화계 거장 신성일 배우를 추모하는 신성일기념관이 영천시의 문화관광자원으로서,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노후를 보냈던 성일가를 먼저 돌아본 강석현 지피워크샵 대표는 “2020년 9월 어머니(배우 엄앵란씨)와 함께 성일가 단독 주택(113㎡)을 비롯해 7필지 2839㎡를 영천시에 기부채납했다. 기념관이 아버지의 삶과 업적이 오래 기억되고 탄탄한 콘텐츠로 꾸며져 한국영화의 메카가 되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지역 사회는 관광객들이 찾아올 새로운 문화시설이 건립되는 데 대해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괴연리 이장 김효섭(61) 씨는 “오늘은 괴연동 주민들이 갖게 된 새로운 공간, 새로운 기회를 축하하는 날”이라며 “이번 신성일기념관 건립 기공식은 우리 영천을 미래 수십 년 동안 경쟁력 있는 도시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한 걸음”이라고 말했다. 생전 신성일과 호형호제했던 정길락(75·영천시 완산동) 전 영천중앙로타리클럽 회장은 “괴연리 마을의 애량산과 치악산의 빼어난 경치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신성일 배우와 생일잔치를 함께 하는 등 정을 나누며 즐겁게 지냈던 주민들에게는 오늘이 더욱 감사하고 기쁜 날”이라고 말했다. 괴연리 주민 허은숙(69·영천시 신성일길 14-10) 씨는 “영천시에서 신성일 배우를 기리며 신성일길이라 이름도 붙였다. 청바지 입고 본천까지 개를 끌고 산책하시던 모습이 선하다”며 “기념관이 웅장하고 멋지게 잘 지어졌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조규남기자 nam8319@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9-18

“동해안별신굿의 원형은 포항에 있어”

동해안별신굿에서 지화는 굿상 뒤편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조상신이나 골메기신(골막이)을 모셔와 굿을 하려고 곱게 단장하는 것이다. 음식을 차리고 잔을 올려 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굿의 기본이며, 맨바닥에서 잠들고 굿을 받는 것보다 꽃밭에서 굿을 받고 인간세계와 소통하라는 의미다. 김홍제(이하 제) : 어릴 때 굿판에 가보면 구경꾼이 참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김자중(이하 김) : 1박 2일이나 2박 3일 동안 굿판이 벌어지면 근처 50리 반경에 사는 주민들이 소문을 듣고 구경을 많이 왔어요. 요즘의 큰 축제나 마찬가지였지요. 할머니들은 한복을 곱게 다려 입고, 하얀 버선에 고무신을 정성껏 닦아 신고 왔답니다. 신에게 정성을 바친다는 정갈한 마음가짐이었지요. 굿을 하는 어촌에서는 사돈에 팔촌까지 연이 닿는 사람은 재우고 먹이면서 함께 밤을 새워가며 굿 구경을 했어요. 가난했지만 인심이 넉넉하던 시절의 이야기지요. 구경꾼이 많으면 우리도 신나게 굿을 했어요. 어디 그뿐입니까. 굿판이 열리면 엿장수와 깨배기(쌀 강정의 경상도 사투리) 장수도 왁자지껄했지요. 제 : 굿이 거의 사라지면서 선생님이 좀 쓸쓸할 것 같습니다. 김 : 어쩌겠습니까, 세월이 흘렀고 세상이 변했다는 걸 인정해야지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어촌이나 농촌의 풍어제와 동제는 거의 사라졌다고 보면 됩니다. IMF가 사람들 생각을 많이 바꿔놓은 것 같아요. 이제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후원해주지 않으면 어촌에도 굿이 잘 열리지 않아요. 그리고 무속 일을 하던 사람들이 늘 일이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흥청망청 살았던 것도 사실이지요. 굿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무속 하는 사람들이 노름을 많이 했답니다. 굿판이 열리면 많은 현금이 들어오는지라 노름꾼들이 달려들었어요. 나도 한 시절 노름으로 돈을 꽤 날렸지요. 쉽게 들어 온 돈이 쉽게 나가는 법이잖아요. 아무래도 어부들이 농부들에 비하면 돈을 쉽게 만지게 되지요. 고깃배가 만선으로 돌아오면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어요. 술판이 질펀하게 벌어지고 계집질과 노름이 이어졌지요. 그 바람에 이 집 저 집에서 부부싸움이 벌어졌답니다. 제 : 별신굿 하던 이름 있는 분들은 거의 작고하셨지요? 김 : 그렇지요. 김석출의 딸 김영희도 나와 나이가 비슷하니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언제까지 굿판이나 무대에 오를 수 있겠어요? 제 : 어떻게든 별신굿의 전통을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김 : 포항에서도 흥해나 청하가 별신굿을 참 잘했지요. 별신굿의 원형은 포항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포항 여남 출신인 김석출이 있었고, 그의 딸인 김영희·김동연·김동언이 부산과 울산 등에서 활동했으니까요. 이 자매들이 아버지를 이어 무형유산 전승자로 지정되기도 했고요. 포항에서 한터울을 운영하는 정연락 같은 이가 별신굿의 명맥을 이어주는 게 참 고맙지요. 국악을 전공한 젊은이들도 여기에 동참한다고 들었어요. 행정기관에서 관심을 갖고 지원해줬으면 좋겠군요. 제 : 동해안별신굿의 원형이 포항에 있다고 하셨는데, 근거가 무엇인가요? 김 : 동해안 세습무는 혈연과 혼인 관계로 이어져 있어요. 양중으로 활동한 부산의 김동영은 김석출의 딸 김동언과 결혼했지요. 강릉에서 활동한 신석남은 김석출의 사촌 김용출과 혼인해 세습무가 되었고, 신석남의 동생 신동해와 그의 부인 사화선, 신석남의 아들 김명익도 대를 이어 강릉에서 활동했어요. 내 사촌 김미향은 울진의 송동숙과 결혼해 세습무가 되었는데, 나중에 조카인 김장질이 후포 삼율에서 활동했어요. 그렇게 서로 인연이 이어지는 관계인데, 자세히 보면 그 뿌리는 포항에 있지요. 김석출 집안과 혈연과 혼인 관계로 얽히고설켜 세습무가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제 : 지화는 어떤 식으로 이어지면 좋을 것 같습니까? 김 : 굿이 있는 곳에 지화는 늘 있었어요. 지화가 없거나 적은 굿판은 왠지 허전하지요. 지화를 본 사람들은 미술작품 같다고 말하곤 해요. 앞으로 지화가 미술작품으로 인정받고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제 : 무속 일을 하면서 후회한 적은 없었는지요? 김 : 이 일을 하면서 후회는 별로 안 했는데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지요. 고모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도 무당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지인의 소개로 인물도 좋고, 노래 잘하고, 춤도 잘 추는 무당과 인연이 되었지요. 호흡이 잘 맞아 여기저기 몇 년을 같이 다녔어요. 그때 7번 국도가 확장돼 포항으로 가는 직통 시외버스를 타고, 지금 청하 사거리에서 버스를 세워달라고 해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곤 했지요. 그날도 일을 마치고 밤늦게 청하 사거리에 도착했어요. 무당과 같이 내리자마자 나는 어둑한 논둑 가에 가서 볼일을 보고 돌아섰는데 여자가 안 보이는 겁니다. 한참을 찾았지만 끝내 못 찾고 용두리로 왔는데 청하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 무당이 청하 사거리에서 월포리 방향으로 가지 않고, 포항 시내 쪽 7번 국도를 따라 걷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겁니다. 결국 그 무당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무속 일을 하면서 겪은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한동안 술로 슬픔을 달랬지요. 제 : 선생님은 청하 용두리에서 70여 년 사셨는데, 용두리 이야기를 좀 해주시지요. 김 : 청하 용두리는 월포리에 인접한 어촌입니다. 월포 해수욕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지요. 동해중부선 월포역이 생겼고, 포항-영덕 고속도로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우리 집 앞에 북포항 IC가 생긴다고 공사가 한창입니다. 그만큼 동네가 많이 바뀌었어요. 외지인이 상가나 건물을 지어 많이 살고 있고 토박이는 노인들밖에 없다고 보면 됩니다. 1990년대 초반에는 핵폐기물 설치 반대 운동 때문에 정말 시끄러웠던 기억이 나는군요. 마침 내가 용두리 이장을 할 때 그렇게 큰일이 벌어졌답니다. 정부가 핵폐기물 처리 장소로 청하를 지정해 밀어붙였지요. 온 면민이 나서서 결사적으로 반대했어요. 7번 국도를 막고 장기간 데모를 했으니까요. 제 : 그전에는 고기가 많이 잡혔지요? 김 : 그럼요. 댕구리배(저인망 어선)나 목선으로 고기를 많이 잡았지요. 어종도 다양했고요. 사고가 잦아 위령제를 자주 했어요. 월포리와 용두리는 전통적으로 후릿그물(어선 두 척이 저인망 그물을 끌고 나가서 그물을 끌고 들어오면 해안에서 동네 주민이 모여 그물을 당겼는데, 이를 후리라고 부름)로 멸치를 많이 잡았어요. 아귀 같은 게 그물에 걸려들면 가시가 있고 못생겼다며 바다에 버렸는데 요새는 없어서 못 먹는 고기가 되었지요. 요즘 남해안에서 잡힌 멸치가 인기가 좋다더군요. 그런데 그 맛이 우리가 후릿그물로 당겨 잡아 바로 삶아서 말려 먹던 멸치 맛에 비하겠습니까? 이젠 그 맛을 볼 수 없게 되어 좀 씁쓸하지요. 언제부턴가 후리가 불법으로 금지되었어요. 지금은 여름철에 해수욕장 관광객을 위해 한 번씩 후리를 하게 해주는데, 인기가 좋다고 들었어요. 후릿그물에 든 싱싱한 횟감을 관광객들에게 나눠 주는 행사도 있다고 하더군요. 후릿그물에 멸치와 싱싱한 횟감이 많이 잡히면 관광객들이야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그런데 월포가 유명한 해수욕장이 되면서 동네 인심은 예전만 못해요. 여름철이면 차량이 많이 밀려서 불편하기도 하지요. 가난하지만 함께 나눠 먹던 옛날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

2024-09-18

“올 추석엔 가족과 함께 ‘야경 맛집’ 찾아 떠나자”

추석을 맞아 가족과 함께 특별한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보름달이 떠오르는 가을밤,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명소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전국의 달맞이 명소 4곳을 소개한다. ◇ 수원 대표 야경 명소, 서장대 경기도 수원에 있는 서장대는 보름달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손꼽힌다. 수원 화성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는 1794년(정조 18년)에 군사시설로 세워졌으며, 군사 훈련과 외부 감시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서장대에서의 낮과 밤은 각기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낮에는 수원 화성의 전경이 탁 트인 시야에 아름답게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밤에는 현대적인 도시 야경과 전통 건축물이 조화를 이뤄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보름달이 떠오르는 저녁에는 고즈넉한 달빛 아래 화성과 수원의 야경이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서장대를 찾아 그 매력적인 야경을 즐기곤 한다. 서장대 바로 아래에는 효원의 종이 설치돼 있다. 이 종은 1991년 수원시가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방문객들은 직접 종을 치면서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할 수 있다. ◇ 바다와 도시 야경이 한눈에 구봉산 전망대 전라남도 광양시 구봉산에는 광양만과 여수, 순천, 남해를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 서면 포스코(POSCO) 광양제철소, 이순신대교, 광양항 등의 산업 시설에서 나오는 조명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환상적인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추석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더욱 낭만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구봉산 정상에는 메탈 아트로 만든 독특한 봉수대가 눈에 띈다. 이는 전통 봉수대의 기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조형물로 광양의 상징인 빛과 철, 꽃을 활용한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이곳은 해맞이 행사, 야외 공연, 결혼식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장소로도 활용돼 많은 방문객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 월출 명소로 손꼽히는 산책하기 좋은 공원, 부산 달맞이 동산 달맞이 동산은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대표적인 월출 명소다. 이곳은 해운대 해변에서 가까워 바다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도착할 수 있으며, 아름다운 해안 경관과 함께 여유로운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정월대보름이나 추석 보름달을 감상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달맞이 동산은 과거부터 시인과 묵객들이 자주 찾던 장소로, 여기서 바라보는 월출은 해운대의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매우 인상적이다. 특히 달맞이 동산을 지나가는 달맞이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달맞이 동산 정상에는 1997년에 세워진 해월정이 있으며, 이곳에서 보름달을 바라보면 한층 더 운치 있는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야외 음악당, 조각공원 등 다양한 볼거리가 마련돼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 추천한다. ◇ 달빛 아래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의 바위, 제주 용두암 제주 용두암은 제주시 용담해안도로 인근에 있는 높이 약 10m의 바위다. 용이 승천하려다 실패해 바위가 됐다는 전설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바위의 모양이 용의 머리와 닮았다고 하여 용두암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파도와 바람에 깎인 독특한 형태로 오랜 세월 제주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전설에 따르면, 한라산 신령의 옥구슬을 훔쳐 달아나던 용이 신령의 화살을 맞아 바다에 떨어져 바위가 됐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는 달빛 아래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믿어지며, 이러한 신비로운 전설 덕분에 용두암은 특히 밤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용두암에서 도두항까지 이어지는 6km의 해안도로는 제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다양한 카페와 맛집이 있어 눈과 입이 즐거운 여정을 즐길 수 있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사진자료 제공 - 한국관광공사

2024-09-12

이야기 보따리 다시 풀어내는 명작 만나보세요

긴긴 뜨거운 여름을 지나왔다. 아직 가을이라 하기엔 미흡하지만, 가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추석이 코앞이라고 말해준다. 추석 연휴가 5일이다. 조상님들 산소를 돌보고, 친척들과 만나 가져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정성스럽게 마련한 음식을 나누는 기쁜 명절이다. 하늘 저쪽에서 구름 공장이 열심히 뭉게구름을 만들어 보내온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가까운 곳에 나들이하기에 좋은 날씨다. 누렇게 익어가는 들도 즐기고, 오래전 함께 즐겼던 영화도 곱씹어보는 추석 명절이 되길 바라며, 영화 네 편을 골라 보았다. 모든 위조품 속에는 진품의 미덕이 숨어 있다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베스트 오퍼’ 시네마 천국 감독 작품이다. 36년 전 개봉한 ‘시네마 천국’은 지금도 사람들의 최애 작품을 꼽을 때마다 등장한다. ‘베스트 오퍼’는 아날로그 필름 작품만 고집하던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첫 번째 디지털 영화이다. 영화 제목 ‘베스트 오퍼’는 경매가 최고액을 의미한다. 주인공은 미술품을 보는 남다른 안목으로 당대 최고의 경매사다. 하지만 심각한 결벽증으로 사람들과 소통이 힘들다. 60이 넘도록 사랑하는 이 하나 없이 경매를 도와주는 친구 한 명뿐이다. 그와 함께 부당한 방법으로 여인들의 초상화를 낮은 값에 경매받아 혼자만의 비밀의 방에 모아두고 감상한다. 그 앞에 광장공포증을 가진 여자가 나타난다. 그때부터 주인공 올드만의 인생은 달라진다. 처음 사랑에 빠진다. 영화음악은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 작품이다. 모든 위조품 속에는 진품의 미덕이 숨어 있다라는 대사가 주인공의 첫사랑이 진짜 사랑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을 대변한다. 그의 비밀의 방에 가득한 여인들의 초상화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진정한 친구 한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올드만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속고 다시 속이는, 거짓말 게임의 끝은 진실?빌 콘돈 감독의 ‘굿 라이어’ 명품 연기의 주연, 연기경력 50년이 넘는 여주인공의 주체적인 캐릭터. 부유한 미망인 ‘베티(헬렌 미렌)’는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서‘로이(이안 맥켈런)’를 만나고,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하지만 사실 로이는 베티의 돈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것. 이를 모르는 베티는 로이가 제안한대로 공동 계좌를 만들어 본인의 재산과 로이의 재산을 합하는 데 동의하고, 두 사람은 베를린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 곳에서 베티는 로이의 정체를 알게 된다. 미녀와 야수와 위대한 쇼맨을 만든 빌 콘돈 감독이 만들었다.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그는 인간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이 영화는 반전의 반전이 재밌다. 이야기의 처음 시작은 2차 세계 대전 독일이다. 거짓말이 제일 쉬워 거짓말로 사람들의 돈을 갈취하며 살아가는 로이, 마지막 장면에서 거짓말을 할 때마다 자신의 돈이 사라지니 그제야 진실을 말한다. 스릴러 장르라지만 남녀 연기자의 내면 연기를 보는 맛으로 영화를 즐기면 더 재밌을 것이다.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삶의 철학을 묻다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앙: 단팥 인생 이야기’ 납작하게 구운 반죽 사이에 팥소를 넣어 만드는 전통 단팥빵 ‘도라야키’를 파는 작은 가게.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가게 주인 ‘센타로’에게 ‘도쿠에’라는 할머니가 찾아온다. ‘마음을 담아’ 만든다는 할머니의 단팥 덕에 ‘도라야키’는 날로 인기를 얻고 가게 주인 ‘센타로’의 얼굴도 밝아진다. 하지만 단골 소녀의 실수로 할머니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예상치 못한 이별의 순간이 찾아오는데…. “당신에게는, 아직 못다 한 일이 남아 있습니까” 제목이 팥 이야기인 만큼 도라야키 안에 들어갈 팥소를 만드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여준다. 팥에서 상태가 안좋은 것을 골라내야하고, 전날 미리 물에 불려놓는다. 팥에서 색이 우러나온 것도 살핀다. 팥을 삶고 솥에 귀를 가져가 소리를 듣고는 시간이 됐다는 듯 건져 차가운 물로 헹궈낸다. 제대로 헹구지 않으면 떫은맛이 남는다. 냄비에 다시 넣어 물을 넉넉히 부어 삶는다. 서서히 끓기를 기다리다 김의 냄새가 달라졌다며 팥 상태를 살피고 뚜껑을 닫아 뜸을 들인다. 복잡하네요 하는 남자 주인공 말에 극진히 모셔야 한다고 할머니가 말한다. 손님을 모신다는 말이냐 하고 묻자 할머니는 팥들이라고 대답한다. 밭에서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까 하고 살짝 조신다. 뜸이 든 팥 냄비에 팥이 으스러지지 않게 조심히 수도꼭지에서 아주 약하게 물을 흘려 냄비에 팥물이 투명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팥을 자세히 사랑스럽게 들여다본다. 건져낸 팥에다 당을 넣어 섞은 후 또 기다린다. 왜 기다리냐고 남자가 묻자 할머니는 갑자기 끓이는 건 실례라고 하며 팥이 당과 친해지길 기다려주자고 한다. 마치 맞선과 같으니 뒷일은 처녀 총각에게 맡기자 한다. 얼마나 기다려요 하니 2시간이란다. 그 후 팥이 으깨지지 않게 서서히 저으면서 뭉근히 달여 불을 줄인 후 물엿을 넣어 완성한다. 팥알이 한알한알 제 모습 그대로 간직한 맛있는 앙이 완성되었다. 이런 맛은 처음이라는 가게 주인 남자, 이제껏 도라야키를 한 개 다 먹은 적이 없다고 한다. 팥을 정성스럽게 만들면서 늘 무표정이던 그의 표정에도 웃음이 살아난다. 살아가는 것도 팥을 삶는 것과 같다라고 감독이 우리에게 일러준다. 해맑은 동심의 세계 그린 명작 애니메이션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웃집 토토로’ 경주 천년의 정원 외나무다리에서 찍은 영상을 sns에 올리니 지인이 토토로의 숲같다고 좋아했다. 오랜만에 ‘이웃집 토토로’를 돌려보았다. 주인공 사츠키와 메이 자매, 음력 5월을 뜻하는 사츠키. 나이는 12살. 소학교(초등학교) 6학년이다. 쿠사카베 가의 장녀로, 메이의 언니. 씩씩하고 밝은 성격을 가진 단발머리의 소녀다. 비가 몹시 쏟아지던 날 버스 정류장에서 아빠를 기다리다가 토토로를 만나게 된다. 동생 이름의 유래는 영어로 5월을 뜻하는 메이(May). 나이는 4살. 사츠키의 여동생으로, 아빠와 언니를 잘 따른다. 숲에서 놀다가 조그맣고 이상한 동물을 발견하고 뒤를 쫓아 숲속으로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도토리나무의 요정 토토로를 만난다. 사실 메이는 원안에는 없던 캐릭터였다. 당초 기획 단계에서는 주인공은 사츠키 단독으로 하려 했으나 주인공의 배역을 둘로 나누어서 동생 캐릭터인 메이가 추가로 만들어지게 된다. 작품의 성격상 외동딸보다는 자매나 남매로 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두 소녀가 뛰어다니다 큰 나무를 가리키자 아빠는 녹나무라고 알려준다. 녹나무 파수꾼이란 일본 소설이 떠오른다. 이 영화로 감독은 일본의 아름다운 풍경을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우리 지역에도 훌륭한 숲이 많다. 경북수목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등등 추석 연휴에 가족이 함께 산책하기 좋은 숲이다. /김순희 수필가

2024-09-12

재밌고 신나고 여유롭고 … ‘봉화’로 떠나는 모든 이유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 다가왔다. 올해 추석은 주말 포함해 5일간 황금연휴가 이어져 가족들간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 늘어났다. 올 추석 뭐 하고 보낼까를 고민하는 이들을 위해 반가운 가족들과 함께 즐겁고 소중한 추억을 쌓을 수 있는 봉화의 추천 관광지를 소개한다. □ 백두대간수목원에서 재밌게 봉화군 춘양면에 자리잡은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전체 크기가 약 5179ha, 1500만 평으로 전 세계에서도 두번째로 큰 규모이다. 특히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기후변화에 취약한 희귀·특산식물을 수집·보존하고 있다. 희귀식물 313종, 특산식물이 164종에 달한다. 이 밖에도 각종 식물 전시원과 백두대간의 상징 동물인 백두산 호랑이, 세계 최초의 야생 식물종자 영구 저장시설 ‘시드 볼트(seed vault)’를 보유하고 있다. 방문객들에게 인기가 가장 많은 곳은 ‘호랑이숲’이다. 호랑이숲은 멸종위기종인 백두산호랑이의 야생성을 지키기 위해 자연서식지와 유사한 환경을 조성한 전시원으로 면적은 총 3.8ha(약 1만 1000평)로 축구장 6개 크기와 맞먹는 거대한 규모다. 국내에서 가장 넓은 사육환경을 갖추고 있는 이 호랑이숲에서 6마리의 백두산 호랑이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 90분 동안 수목원 내 주요 전시원 30곳을 탐방하는 ‘달려라 어흥카트’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전문 숲해설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고산식물의 안식처 ‘알파인하우스’부터 인기 전시원인 호랑이숲도 관람할 수 있다. 특히 추석 당일을 제외한 14일부터 18일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연휴 동안 투호, 윷놀이, 제기차기 등 전통놀이 3종과 백두랑이 캐릭터 풍선 나눔 행사, 한가위 행복 나눔 추억의 선물뽑기, 수목원 on 버스킹 공연(14 하루) 등 다양한 행사들이 마련돼 가족나들이로 제격이다. 백두대간수목원은 관람객 편의를 위해 추석 연휴 안동버스터미널과 영주역에서 매일 1회 왕복 셔틀버스(무료)를 운행한다. 한창술 백두대간수목원장은 “추석 연휴 가을꽃으로 물든 수목원을 관람하면서 즐겁고 풍요로운 한가위를 보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 분천산타마을에서 신나게 분천 산타마을은 봉화군 소천면 분천역에 위치해 있다. 백두대간이라는 자연 자원과 동심을 자극하는 산타클로스 이미지를 접목해 1년 내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조성됐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모두가 함께 기다리는 즐거운 날, 크리스마스를 여름에도 느껴볼 수 있다. 새파란 여름 하늘과 새빨간 산타의 모습들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입구에서부터 아기자기한 산타 조형물들이 반기고 있으며 곳곳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진 포토존이 있어 예쁜 사진들을 남겨볼 수 있다. 특히 분천산타마을 내 산타우체국에는 관광객들을 위해 산타옷과 모자가 마련돼 있어 산타로 변신해 사진을 찍어볼 수 있으며, 크리스마스에 받아볼 수 있는 엽서 쓰기 체험도 해볼 수 있다. □ 선유교와 범바위 전망대에서 여유롭게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봉화를 거쳐 태백에 이르는 35번 국도는 세계적인 여행정보지 미슐랭 그린가이드가 유일하게 별을 준 한국 최고의 길이다. 구불구불 강변을 따라 청량산입구에서부터 낙동강을 거슬러 명호면사무소로 가는 방향에는 길이 120m, 폭 2.5m의 봉화 선유교가 있다. 선유교에 올라 주변 경치를 둘러보면 청량산의 풍경이 낙동강과 어우러지며 윤슬 일렁이는 옥빛 강물까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선유교 끝에 도착하면 작은 정자가 있어 햇살도 피하고 산바람을 맞으며 잠시 쉬어갈 수 있다. 35번 국도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다보면 ‘삼동재 호랑이상 경관 쉼터’라는 팻말이 보인다. 봉화에서 낙동강 줄기를 가장 잘 굽어 볼 수 있는 범바위 전망대다. 범바위 지명은 고종 때 선비 강영달이 선조 묘소를 바라보며 절을 하다 만난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았다는 얘기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전망대 옆 바위 위에는 호랑이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전망대에서는 낙동강이 만든 물돌이 모습과 그 중심으로 태극 문양을 하며 돌아치는 아름다운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맑은 하늘 아래 눈앞에 펼쳐진 탁 트인 경치를 배경 삼아 사진을 남기기에 좋다. /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4-09-12

달빛 아래 책 한권… 가족과 함께하는 지혜의 시간

‘AI 시대의 소크라테스’ 2022년 11월 챗GPT의 상용 버전이 공개된 이후, 생성형 인공지능은 사회경제적 변화의 선두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어떤 질문에도 척척 답하고 그림을 그려주며 영상을 만들면서 사람들은 진짜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섰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인간과 비슷하거나 넘어서는 일반인공지능 또는 초지능의 출현도 머지않았다는 기대감과 그에 따라 인간은 필연적으로 도태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엇갈리고 있다. 고통과 불평등 속에서도 어떻게 사유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지를 천착해온 철학자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는 신간 ‘AI 시대의 소크라테스’(휴머니스트)에서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는 원하는 결과물을 즉각 제공하는 인공지능을 ‘21세기의 소피스트’라고 규정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소크라테스의 지혜’라고 강조한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원하는 답이 아니라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진우 교수는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대체할 것처럼 보이는 지금이야말로, 인공지능은 못 하지만 인간은 할 수 있는 질문을 통해 인간 조건과 존재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기계는 느낄 수 있는가? 기계는 의식을 갖고 있는가? 이진우 교수는 이 세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인공지능 시대 또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인간 조건을 성찰하자고 제안한다. 이진우 교수는 챗GPT가 상징하는 기술 진보를 구텐베르크 혁명에 못지않은 지성 혁명으로 파악하고, 인공지능 혁명이 불러일으킨 철학적 전환에 주목한다. 이 교수는 현대의 인공지능이 고대 아테네에서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 지식과 기술을 전수했던 소피스트와 같다고 본다. 실제로 고대의 소피스트는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했지만 정작 지혜는 전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대의 소피스트를 비판하고 무지를 고백함으로써 진정한 지혜를 추구한 소크라테스의 질문이다. 이 교수는 “인간이 계산으로 단순화된 사고 체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때, ‘왜?’라는 질문도 사라진다.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란 질문은 결국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가’란 질문으로 이어진다”며 “이제 인공지능은 생각을 넘어 공감까지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공지능이 잘하는 것은 인간이 뒤떨어지고 인간에게 능숙한 것은 인공지능이 하기 어려워한다는‘모라벡의 역설(Moravec’s paradox)’은 감정이라는 문제로 집약된다. 인간에게는 몸이 있기에 감정을 가졌고 인공지능은 그렇지 않기에 감정에 미숙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감정 인공지능’이 상식을 바꾸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또 “감정 인공지능은 사용자의 ‘깊은 감정’보다 ‘피상적 감정’에 집중한다. 사용자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하는 감정 인공지능은 영화 ‘그녀(Her)’가 미리 보여준 인공지능과의 우정과 사랑이 현실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진짜와 구분할 수 없는 가짜 감정으로 소통하는 인공지능이 출현하면서 감정이 인간에게 고유하다고 강변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며 도덕성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을 인공지능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은 인간에게 과연 감정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화’  세계적인 불교 지도자이며 평화운동가인 틱낫한(1926~2022) 스님의 ‘화’가 20여 년 만에 새롭게 선보인다. 틱낫한 스님 하면 ‘화’(초판 2002년)가 연상될 정도로, 이 책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마음의 불꽃을 식히는 지혜’라는 부제를 달고 최근 번역·출간된 책은 화, 절망, 좌절감 등에서 벗어나 나와 상대가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것은 난해하거나 깊은 이론적 공부, 극한의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로 ‘마음챙김’수행 하나면 된다. 현대인들은 ‘화(분노)’를 촉발, 촉진시키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배경에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물질주의, 이기심, 무한경쟁 등이 자리한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가? 스님은 화는 정신적, 심리적 현상이지만, 생물학적, 생화학적 요소와도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고 본다. 즉 몸과 마음은 별개가 아니며, 몸이 마음이고 마음이 몸이다. 따라서 화의 뿌리는 마음만이 아니라 몸에도 존재하며, 결국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어떻게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지, 자신의 몸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등 ‘마음챙김 먹기 수행’을 하라고 한다. 많은 사람이 돈, 권력, 높은 지위가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를 다 얻고도 불행하거나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고 스님은 지적한다. 결국 분노, 절망감, 좌절 등을 다스리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찾는 과정에서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스님은 화가 날 때는 수백개의 근육이 긴장해 아름답지도 멋지지도 않은 자기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고 이를 바꾸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 바로 미소 짓기를 해보라고 권한다. 타인의 행동 때문에 화가 치솟을 때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맞대응하는 것을 경계하고 대신 스스로를 돌아보며 화를 다스려야 한다고 알기 쉬운 비유로 깨달음을 전한다. ‘부의 설계자들’ ‘페이팔(PayPal)’은 전 세계 온라인 지불 시스템을 운영하는 미국 회사다. 일론 머스크, 피터 틸, 리드 호프먼, 맥스 레브친 등 실리콘밸리의 부흥을 이끈 일명 ‘페이팔 마피아’들은 현재 테크 산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으로 일컬어진다. 테슬라, 메타, 유튜브, 스페이스X, 팔란티어, 링크드인 등 이 시대를 이끈 수많은 기업을 창시하고 투자하고 경영한 이들의 시작점에는 모두 페이팔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미국 논픽션 작가 지미 소니의 신간 ‘부의 설계자들’(위즈덤하우스)은 일론 머스크 등 창업자와 초창기 직원들과의 수백 건의 인터뷰와 수십만 장에 달하는 방대한 내부 문건 분석을 통해 페이팔이 어떻게 태동했고 성공했는지 그 전략을 낱낱이 파헤친다. 언론인 출신인 저자는 페이팔의 창업 과정과 초기 운영을 추적하며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책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페이팔의 역사를 조명한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난민 소년 맥스 레브친이 다소 엉뚱한 꿈을 좇다가 스탠퍼드대학에서 피터 틸을 만나고,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창업에 나서는 데서 전설의 첫 막이 열린다. 그들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디지털 금융 서비스를 그린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같은 발상의 사업을 전개하던 일론 머스크와의 만남, 그리고 두 기업의 합병과 페이팔의 탄생이 이어진다. 페이팔의 사업은 낯선 개념을 고객에게 설득하는 일, 경쟁자의 도전과 음해, 해커와 사기꾼들의 위협에 이르기까지 생존 기반을 뒤흔드는 도전이 계속됐다. 이 속에서 페이팔 구성원들은 갈등과 협력, 원칙과 효율성, 사려와 신속함의 균형점을 찾아가며 성장을 이룬다. 이후 이베이에 매각하고 기업공개를 함으로써 창업자들은 거부가 되고, 종업원들은 안정적 고용 기반을 만든다. 하지만 전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새로운 모험에 나선다. 일론 머스크가 대표적이다. 지분 매각 대금을 바탕으로 스페이스X와 테슬라를 설립했다. 피터 틸은 팔란티어와 파운더스펀드를 설립했으며 페이스북의 최초 투자자가 됐다. 맥스 레브친은 슬라이드와 어펌홀딩스를 만들어 도전을 이어간다. 페이팔 초기 직원들도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유튜브 공동 설립자 채드 헐리, 스티브 첸, 자웨드 카림이 모두 페이팔 출신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책의 특징은, 지금은 존경의 대상이 돼 장막 뒤에 숨겨진 피터 틸과 일론 머스크 등의 초년기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됐다는 것이다. 19세의 일론 머스크가 피터 니콜슨이라는 인물에 매료돼 단지 그를 따르고자 스코샤 은행에 인턴으로 들어가 근무한 이야기는 이색적이다. 저자는 이들이 기존 관행을 거부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남다른 행동을 했다고 말한다. ‘아웃사이더’의 모습을 특별하게 보였다는 얘기다. 이 책은 행운과 불운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날것 그대로의 현실을 주인공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했는지를 덤덤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 건조한 진술들은 때로 더 묵직한 통찰을 던져주곤 한다. “옳은 것보다는 틀린 것을 찾아라”, “경계를 부수어라”, “시장을 독식하라” 등 파괴와 혁신을 일으킨 이들의 전략은 현재 디지털 스타트업 문화의 토대가 됐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4-09-12

문경으로 떠나는 스무번째 五味여행

우리나라 중부 내육에 위치한 문경은 높은 일교차로 사과를 비롯한 각종 농산물의 품질이 우수하다. 이 가운데 지역을 대표하는 농산물로 오미자가 유명하다. 기후적 특성으로 우리나라에서 오미자가 가장 많이 생산된다. 문경시는 오미자 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올해로 20회째를 맞고 있다. 제20회 문경오미자축제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오미자 주산지인 문경시 동로면 금천둔치에서 열린다. 신현국 문경시장은 “솜사탕 같은 오미자꽃이 새빨간 결실로 변신한 9월, 문경으로 오셔서 추석 선물도 구입 하시고 문경오미자로 건강도 챙기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 문경 오미자 축제 문경시는 지난 6일 문경시청에서 신현국 시장을 비롯해 관계 공무원, 문경관광진흥공단, 축제대행사가 참석한 가운데 가을철 문경 대표 농산물 축제인 문경오미자축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추진상황 보고회를 갖고 축제 전반에 대한 점검을 했다. 2024년 제20회 문경오미자축제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문경시 동로면 금천둔치(동로면 적성리 525-11)에서 개최된다. 박서진과 마이진, 정서주 등 유명가수 축하공연을 비롯해 오미자 할인판매, 청담그기체험, 미각체험관 등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해 전국 일등 문경오미자의 위상을 높일 계획이다. 축제장에서는 최고품질 생오미자, 건오미자, 오미자당절임을 특별할인가(생오미자 1만5000원/kg)로 구입할 수 있다. 또한 오미자홍보관, 농특산물판매장, 미각체험관을 통해 다양한 오미자 제품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올해는 가족 단위 관광객을 위해 키즈존(에어바운스, 친환경 나무놀이터), 키다리 삐에로 아저씨 공연, 오미자 수상라운지가 준비되어 있으며 축제장에 조성된 파크골프장도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시는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스퀘어 광장에서 2024년 제20회 문경오미자축제 개최 홍보와 제2중앙경찰학교 유치 홍보 행사를 열었다. 시는 올해로 20주년을 맞는 문경오미자축제를 홍보하기 위해 일 평균 10만명이 방문하는 서울 강남구 강남스퀘어 광장에 홍보 부스를 설치 운영했다. 문경시와 오미자축제추진위원회, 문경관광진흥공단 등 관계자들이 참석해 수도권 시민에게 오미자슬러시를 나눠주며, 관광도시 문경과 특산품을 함께 홍보했다. □ 다섯가지 맛의 오미자 문경 오미자가 제철을 맞아 빨갛고 탐스럽게 익은 열매를 요즘 한창 수확 중이다. 오미자는 준고랭지 작물로서 문경의 백두대간을 형성하고 있는 문경시 동로면 황장산과 대미산 중턱이 바로 우리나라 최대의 오미자 자생지로 알려져 있다. 백두대간의 해발 300~700m 산자락에서 천혜의 자연환경조건과 친환경 과학농법으로 재배되고 있는 문경오미자는 신이 준 열매로 불리며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오미자(五味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달고, 시고, 맵고, 쓰고, 짠 맛 등 다섯 가지 기본 맛을 다 갖춘 유일한 열매로서 다양한 효능을 자랑한다. □ 오미자의 효능 오미자는 기침과 천식 등 호흡기 질환에 좋아 연예인을 비롯한 목을 많이 사용하는 직업인에게 인기 만점이다. 예로부터 천연 강장제로 불리며 동의보감에서 남녀 모두의 정력에 좋다고 했으며, 시잔드린 성분과 사과산 등 유기산이 풍부해 기력 증진과 피로회복 효과가 뛰어나 태릉선수촌의 대표적 건강식품으로 꼽히고, 기억력을 증진시키고 머리를 좋게 해 수험생 등 학생들에게 매우 유익하다. 또한, 술과 담배의 부작용을 줄여주는 효능이 있고, 여성들의 자궁을 건강하게 해주며, 이 외에도 뇌졸중과 간·심혈관 질환 등에 뛰어난 효능을 가졌음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 오미자의 활용법 오미자는 9~10월이 제철로, 요즘 오미자를 구입해 오미자청을 담가놓으면 1년 내내 온 가족의 건강음료이자 만능조미료로 활용할 수 있다. 생과를 활용한 오미자청은 보통 오미자와 설탕을 1대1 비율로 담지만, 문경에서는 설탕량을 30% 줄이고 그 대신 올리고당을 첨가한다. 왜냐하면 올리고당은 설탕보다 칼로리가 40% 정도 낮고 체내 흡수율 역시 낮기 때문에 설탕의 단점을 상당부분 보완해준다. 오미자는 색상이 환상적이고 다섯 가지 맛이 조화를 이루어 어떠한 식재료와도 찰떡 궁합을 보여준다. 가정에서 오미자 음료, 술 등으로 손쉽게 이용함은 물론 야채샐러드, 김치류, 소스류 등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생선 요리에는 비린내를 없애주고, 육류 요리에서는 누린내를 없애주며 고기를 아주 부드럽게 하고 풍미를 더해준다. 이뿐만 아니라 오미자차는 차게 혹은 따뜻하게 4계절 모두 즐길 수 있는 전천후 음료로 각광받고 있다. □ 문경 오미자의 특징 문경오미자 생산에서는 무엇보다도 소비자들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한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맞춤형 안심먹거리를 위해 천적과 생물제제 활용, 제초제 사용금지 등 친환경 농법으로 오미자를 재배하고 있다. 상품 포장마다 문경오미자 진품확인 스티커를 부착해 QR코드, ARS, 인터넷 등을 이용해 소비자가 구매한 제품의 문경오미자 진품 여부를 그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경 오미자가 세계 최고로 꼽히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생산자협회를 중심으로 한 청정제품 생산과 우수한 기술연구 시스템, 가공산업에 대한 당국의 지원, 업체들의 자생력이 그것이다. 오미자생산자협회는 친환경 오미자를 생산하기 위해 뭉친 생산자 단체로 오미자 가공제품에 질 높은 원료를 공급하는 주역이다. 문경의 오미자연구기반은 당연히 다른 지역에서는 쫓아올 수 없는 수준으로 친환경미생물센터, 토양검정실, 오미자연구소, 친환경오미자대학 등 다양하게 운영된다. 문경/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4-09-11

참혹한 동족상잔 ‘비극의 역사’와 함께 하다

요즘 단체 카톡방에 79주년 8·15 광복절에 관한 논쟁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광복절에 기모노와 기미가요가 흐르는 오페라 ‘나비부인’을 방영한 방송국을 지탄하고 있다. 물론 오페라 장면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 오랜 일본 강점기 시대를 끝내고 해방을 맞은 날을 기념하는 날에 방영되었으니 어떤 변명이라도 이해하기 어렵다. 독립기념관 관장 인사에 반발한 광복회장은 숭고한 8·15 광복절 국가 기념식에 불참하고 따로 기념행사를 개최하여 국민 분열 행위로 손가락질 받고 있다. 이 또한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광복절 기념행사와는 무관한 일로써 수긍하기 어렵다. 조선 왕조시대 당파 싸움 같은 소모적인 정쟁 같아 또다시 주변국이 얕잡아 야욕의 불꽃을 피울까 우려스럽다. 장훈(張勳) 선수를 일본 야구인들은 영웅이라 부른다. 생애 홈런 504개와 안타 3085개를 치는 등 기록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 하지만 당시 프로선수 등용문인 고시엔 대회에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실력으로 1990년 일본 야구의 전당에 입성했다. 또한 전 일본 고등학교 야구대회 2024년 고시엔(甲子園) 대회에서 한국계 고등학교인 교토국제고(京都国際高)가 우승배를 거머쥐면서 한국어로 된 교가를 우승할 때마다 일곱 번이나 일본 전국에 울려 퍼졌다. 이처럼 교포들의 뭉친 하나 된 단결의 힘과 우수한 능력만이 반일을 뛰어넘어 극일로 나아감을 우리는 보았다. 광복절에 대한 논쟁은 광복절에 대한 추모와 국민의 자긍심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내부 분열의 씨앗이 될 뿐이다. 교포 장훈 선수와 교토국제고의 활약이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일본인들에게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보여주어 과거와 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하지 못하도록 하나의 쐐기를 박는 극일의 길이다. 우리는 일본의 침략에 국권이 빼앗겨 나라 잃은 슬픔을 경험해 보지 않아도 그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다. 러시아가 이웃 나라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일부의 영토를 빼앗아 점령하고 통치하고 있다. 세계 각 국가가 국제법상 불법이고 나쁜 짓이라고 하면서도 응징하지 못하고 있다. 유엔 평화군이 있지만, 무용지물인 것 같다. 약소국인 우크라이나는 각국의 도움을 요청하지만, 원하는 만큼의 지원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억울하게 지옥 같은 고통의 삶에 시달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침략자의 땅따먹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심보일까. 생명체가 지향하는 본성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서식처를 확보하는 것이고. 둘째, 번식한 개체들이 살아가 위해 서식처를 넓히는 것이다. 이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많이 보아 왔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자손이 점점 늘면서 씨족에서 부족으로 그리고 부족이 모여 국가로 발전되었다. 대부분 민족 단위로 국가가 탄생했다. 주변국을 침략하여 삶의 터전을 넓히고 재물을 빼앗아 끝없는 욕망의 배를 불렸다. 이렇게 불변의 진리처럼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평화 공존을 부르짖으면서도 극단적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밑바탕에는 생명체가 지향하는 유전자, DNA 본능에 따른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보면 스스로 강해지는 것만이 나라를 지키고 평화 공존의 번영을 누릴 수 있다. 칠곡군 가산면 유학산 자락 학산리 1034번지 다부동 전투에서 ‘지게 부대원’을 숨겨준 느티나무 노거수를 만나러 갔다. 이곳 유학산은 6·25 한국 전쟁 때 낙동강을 사수하기 위하여 수많은 남과 북의 젊은 군인과 경찰, 주민들이 전사한 곳이다. 이곳에서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간 유학산 고지 점령 전투에서 아홉 번이나 빼앗고 뺏기는 싸움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적군과 아군을 포함하여 2만7500여 명의 인적 손실 피해를 보았다. 당시 참전한 대대장은 전투의 절반은 지게 부대원이 수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회고를 남기고 있다. 승리를 이끈 지게 부대원의 몸을 숨겨주고 휴식하게 장소 제공해 준 것은 바로 500살 먹은 느티나무 노거수라고 한다. 키 18m, 가슴둘레가 7m, 앉은 자리 폭이 18m나 되는 거인 느티나무 노거수가 지금도 계곡가에 주민들의 보호를 받으며 온전히 살아가고 있다. 비처럼 쏟아지는 폭탄과 총탄이 하늘을 덮고 땅이 진동할 때도 느티나무 노거수는 꼼짝하지 않고 현장을 지키며 지게 부대원들을 숨겨주고 전투를 목격한 역사의 산증인이다. 지난 역사를 나이테에 고스란히 기록하여 먼 훗날 우리의 후손에게 전해 줄 것이다.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이곳에 느티나무 노거수에 아내와 함께 머리 숙여 경외감을 표했다. 김만섭 학산리 마을 이장으로부터 6.25 전쟁 당시의 치열한 전투 상황과 ‘지게 부대원’의 활약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다부동 전투에는 군인도 아닌 무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지게 부대원’이라고 하는 생소한 이름의 부대로 군번도 계급장도 없었다. 주민들로 군복을 받지 못해 평상복으로 식량과 탄약 등 40~50kg 짊어지고 가파른 유학산 고지를 올라가 전쟁물자를 날랐다. 그리고 내려올 때는 부상병을 업고 내려왔다. 오직 대한민국 국군과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죽음의 전장 속을 누비다 하루 평균 50여 명 지게 부대원이 전쟁 동안 모두 2800여 명이나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주민들의 애국 애향심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느티나무와 함께 있는 돌탑이 희생된 지게 부대원의 영혼을 추모하는 위령탑으로 다가왔다. 예전에는 마을 동제를 지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중단되었다. 무속인들이 이곳을 찾아 제를 지낸 음식을 그대로 방치하는 등 주민들의 생활에 불편을 주고 있어 노거수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철책을 둘러쳐 놓았다. 주민들은 주변에 경쟁하는 음나무를 베어내고 정자를 철거하는 등 환경 개선에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느티나무 노거수와 함께 있는 돌탑을 없애 공간을 넓게 확보하려 했으나 마을 할머니와 어르신들이 극구 반대하여 옛 원형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느티나무가 여성이라면 돌탑은 남성으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양과 음이 함께 마을 수호신으로서 역할을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파란 하늘 아래 유학산과 마을, 느티나무 노거수 모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풍성하고 평화로운 가을맞이를 하고 있다. 귀가하는 도중에 유학산 자락에 있는 다부동 6·25 전적기념관에 들러 희생자를 추모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은… 1950년 8월 l일에서 9월 24일까지 55일간 전개된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최대 격전지인 칠곡군 가산면 유학산 혈투의 현장에 세워져 있다. 암벽을 오르며 9번에 걸친 백병전 끝에 결국 유학산 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전쟁의 최대 위기를 넘기고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전사한 희생 장병을 1994년 9월부터 1997년 1월까지 8차례에 걸쳐 육군 제50사단 장병들이 유학산 일대에서 발굴한 259기의 유해가 ‘구국용사의 묘’에 합장되어 있다. 구국용사충혼비, 구국경찰충혼비도 세워져 있다. 격전지였던 유학산 자락에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전차 형상으로 지어진 다부동전적기념관 상단에는 기념 조형물이, 기념관 주위로 국군이 사용했던 무기와 북한군 노획 무기가 함께 전시돼 있다. 백선엽 장군, 이승만, 트루먼 대통령의 동상도 함께 서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9-11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지화의 예술적 가치

지화는 예술작품으로도 훌륭하다. 가위와 손으로 한지를 수없이 자르고, 접고, 오려 붙이고, 하나하나 색을 입혀야 지화는 아름답게 피어난다. 따라서 굿청을 장식하는 지화는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 배어야 한다. 굿판이 열리면 구경꾼들은 무당과 양중의 솜씨와 함께 지화를 평가하며 굿의 수준을 논했다. 물론 화주(굿을 맡긴 사람)의 돈 씀씀이에 달라지지만, 지화를 만들 때는 온 정성을 다해야 했다. 김홍제(이하 제) : 지화를 어떻게 만드는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김자중(이하 김) : 지화는 원래 바닷가의 위령제에 많이 썼어요. 그 위령제를 수망(水亡) 오구굿이라 했지요. 바다에서 죽은 어부의 영혼을 불러내고, 좋은 곳에 보내주는 굿입니다. 동해안에는 바다에서 죽은 사람이 많아서 굿이 많이 들어왔어요. 굿이 잡히면 우선 재료를 구하러 갑니다. 한지와 염색약이지요. 대개는 부산 범일동 시장으로 갔어요. 그리고 날짜에 맞춰 몇 날 며칠 지화를 만들지요. 자르고, 접고, 오려 붙이고, 하나하나 손으로 만듭니다. 지화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풀 먹임을 한 후 종류별로 색을 입히고 마당에 내놓아 햇볕에 색이 잘 들도록 말려야 합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서 두 명 이상이 하지요. 대개 부부가 같이합니다. 굿을 장식하는 굿청은 꽃이 병풍처럼 두르는 형태로 복잡하고 화려합니다. 제 : 지화의 종류가 다양할 것 같습니다. 김 : 전국화, 가시게국화, 청계작약, 추라작약, 다래화, 든불국화, 외든불국화, 매화, 산함박, 함박, 불도화, 외추라작약, 한지추라통, 반연봉, 연봉, 연등, 외박꽃, 강화, 허드레꽃 등등 셀 수 없이 많아요. 보통 우리가 지화를 말할 때 한 묶음을 한 병이라고 표현하는데, 아홉 송이 또는 열 송이, 많게는 스무 송이 정도 됩니다. 이 한 병을 만드는 데 한나절이 꼬박 걸릴 때도 있어요. 그리고 지화는 아니지만 굿판을 장식하는 제일 크고 아름다운 연등이 있어요. 신태집(신(神)광주리의 사투리)과 용선(龍船)도 아름답지요. 굿청에 이런 지화를 스무 병 이상 장식하니 지화를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되시겠지요. 제 : 수망 오구굿에 지화를 많이 쓴다고 하셨는데, 오구굿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김 : 예전에는 뎅구리(머구리)나 목선에 장비가 부족해서 해난 사고가 잦았어요. 그래서 망자의 넋을 천도하는 위령제인 오구굿을 많이 했지요. 오구굿은 우선 바닷물에 들어가 망자의 넋을 달래고, 조상굿, 베리데기(바리데기)굿을 하지요. 오구는 바리데기 공주 설화에 나오는 저승 왕의 이름입니다. 제 : 바리데기에 대해서도 좀 더 말씀해주세요. 김 : 바리데기를 경상도 사투리로 베리데기라 했어요. ‘버린다’는 뜻이죠. 옛날에 딸만 여섯 낳고 아들을 간절하게 원하던 왕이 있었는데, 왕비가 또 딸을 낳자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베리데기입니다. 훗날 왕과 왕비가 불치병을 앓게 되자 여섯 딸은 아예 나 몰라라 했답니다. 그런데 베리데기 공주가 저승의 오구대왕(염라대왕)을 찾아가 저승 문지기와 결혼해 아들을 낳게 되었고, 오구대왕이 베리데기 공주에게 불로초를 주어 이승으로 돌아와서는 왕과 왕비를 살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속에서는 바리데기 굿을 발원굿이라고도 하지요. 지역마다 다르지만 우리나라 거의 모든 굿에 펴져 있는 한국 굿의 원형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제 : 지화를 만들 때 특별히 염두에 두는 것이 있는지요? 김 : 지화는 대대로 전수되어온 기술을 몸으로 체득하고, 특히 손으로 익혀야 하는 어려운 작업입니다. 굿을 주문한 화주나 구경꾼들이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워야 하고요. 제 : 지화 중에 어떤 게 가장 아름다운가요? 김 : 나는 추라작약이 가장 아름답다고 봅니다. 추라는 종이를 잘게 썬다는 뜻이고 작약은 붉은 꽃입니다. 가위로 오려 잘게 썬 추라작약은 염색해서 꽃병에 담아놓으면 정말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 같아요. 추라작약의 꽃심은 꽃의 암술이나 수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지화의 가운데를 풍성하게 장식하지요. 또 살잽이꽃이라고 있어요. 이 꽃은 바리데기 설화에 등장하는 존귀한 꽃입니다. 불등화라고도 하는데, 만들기가 참 어려워요. 죽은 목숨을 살려낸다는 바리데기의 다부살이(다시 산다는 뜻) 전설이 담긴 꽃입니다. 제 :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지화 제작은 맥이 끊겨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혹시 제자는 있는지요? 김 : 나이 들면서 굿이나 지화 만드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어요. 정연락(동해안별신굿 전승 교육사)이라는 이가 지화에 관심을 가져서 지화 만드는 도구와 기술을 거의 다 전수했어요. 정연락이 내 제자라고 할 수 있지요. 제 : 과거에 굿 연구자들이 선생님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 : 1980년대에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교수들이 집이나 굿판으로 찾아왔어요. 지화 만드는 과정과 굿에 대해 많이 물어보더군요. 그 무렵에 정연락이 찾아왔지요. 경북대학교 최경희 교수도 자주 찾아왔고요. 한번은 최 교수가 외국인을 데려오기도 했어요. 내가 만든 지화를 촬영해서 프랑스의 유명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고 하더군요. 대구의 한 화가는 지화를 본떠 화폭에 담아 유럽에서 전시했다는 소문도 들었어요. 내가 시골에 살다 보니 그런 정보에는 어두웠지요. 하지만 지화가 그런 방식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은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제 : 2021년에 포항문화재단 주관으로 지화 개인전을 하셨지요? 김 : 예, 그랬지요. 포항문화재단 관계자들이 찾아와 지화 전시회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더군요. 손을 놓은 지 꽤 되었지만 마음먹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지화 20여 개를 만들어 전시했지요. 작은 작품은 집에서 만들고, 연등과 용선처럼 큰 작품은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했어요. 제 : 굿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군요. 포항과 다른 지역의 굿이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만. 김 : 동해안 어촌마다 굿이 비슷하면서도 지역에 따라 무당의 사설과 노래가 조금씩 다르고 양중 또는 화랭이가 연주하는 박자와 춤도 차이가 있어요. 동해안 마을굿 중에서 포항의 흥해와 청하 굿이 가장 좋았지요. 전통이 잘 보전되어 있으니까요. 후포 삼율의 무당이 영덕과 울진에서 활동했는데, 뚱띠 무당이라 불렀어요. 가락이나 사설, 춤은 포항 무당에 비해 좀 떨어졌지만 사설할 때 촉성(초성의 경상도 사투리)이 좋아서 인기가 높았어요. 뚱띠 무당은 놋동이굿(별신굿에서, 무녀가 놋동이를 입에 물고 장군신을 모시는 굿)도 아주 잘했어요. 8단까지 쌓아 입에 물었지요. 강원도 임원, 호산, 삼척에서도 굿이 활발했어요. 북쪽으로는 강릉과 주문진 그리고 속초에도 강릉을 거점으로 굿을 하는 무당이 있었지요. 강원도는 가락이나 장구로 치는 드렁갱이 굿거리장단이 약했어요. 포항 무당들이 많이 가르쳐줬지요. 내가 젊은 시절에는 강원도 고성까지 불려 다녔어요. 강릉 단오제도 별신굿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나도 강릉 단오제에 수없이 참여했어요. 제 : 이제 별신굿은 바닷가 마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죠. 하지만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예술공연으로 가끔 무대에 오르기도 합니다. 김 : 안동 하회마을에서도 별신굿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굿을 예전처럼 며칠씩 안 해도 사람들에게 이런 굿이 있었네, 하고 기억될 수 있다면 다행이지요. 또 젊은 사람들이 국악을 배울 때 동해안별신굿도 배우는 모양인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

2024-09-11

서악마을 곳곳 거대한 능들, 신라 천년 가족사·사연 서려

무열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그 외에도 왕이나 최고위층 귀족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능(陵)들…. 선도산과 서악마을을 돌아본다는 건 신라 왕들이 조용하게 잠든 유택 사이를 방황하는 일과 다름없다. 신라 천년의 역사 속을 거니는 행위인 것. 진흥왕과 진지왕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였고, 삼국통일의 주춧돌을 놓은 무열왕은 진지왕의 손자다. 살아서 가장 가까웠던 이들이 죽어서도 1천년 이상을 지호지간에 묻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은 무언가 애틋하고 가슴 뜨거워지는 감흥을 보는 이에게 선물한다. 그게 최고 권력자의 봉분이 아니라 보통 백성의 무덤이라 해도 다를 게 없을 듯하다. 기자 역시 그런 감정을 피해갈 수 없었다. ◆진흥왕의 손자가 묻힌 진평왕릉에서 쓴 한 편의 시 신라사(新羅史)를 돌아볼 때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통치자 중 하나이며, 공적 또한 숱했던 진흥왕의 능을 찾았던 지난달 하순. 그가 아낀 장남 동륜(銅輪)의 아들, 그러니까 진흥왕의 손자이자 진지왕의 조카인 진평왕의 유택(幽宅)까지 찾아갔다. 할아버지와 숙부가 묻힌 선도산이 아닌 경주시 보문동에 위치한 진평왕의 능. 후텁지근한 바람 부는 한낮.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진평왕의 모습을 상상했다. “진평왕(眞平王)은 태어날 때부터 외모가 범상치 않았고 체격이 컸다. 거기에 지혜롭고 의지가 굳기까지 했다. 사냥을 무척 좋아해 이를 말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다만, 죽은 뒤 무덤 속에서도 간언(諫言·왕의 잘못을 바로잡도록 하는 신하의 말)을 하는 충신에게 감동해 사냥을 그만둔다. 진평왕은 키가 11자나 되었으며, 천주사(天柱寺)를 방문했을 때 그가 밟은 돌계단이 한꺼번에 3개나 부서지기도 했다.” 다수의 신라 왕들에 관한 책과 논문을 읽고, 그들의 유택을 찾으며 보낸 몇 주의 시간 탓이었을까? 진평왕릉에 갔던 날 밤엔 다음과 같은 졸시를 쓰기도 했다. 제목은 ‘진평왕릉 훑어간 바람’. 화살 맞은 사슴이 악몽으로 돌아온 밤 청동가위로 길어진 초의 심지를 자른다 조부 진흥이 그토록 만류했으나 버리지 못한 사냥 취미, 그 탓인가 사찰 돌계단을 두부처럼 부순 완력도 열 자 아홉 치의 몸피로도 꿈을 막을 수야 일찌감치 정해놓은 장지가 땅꺼짐에 벌어지고 어젠 검은 그늘 만드는 까마귀 떼 다녀갔다고 품고 자던 마야부인 목을 틀어쥐고 식은땀 범벅으로 깨어난 미명 문득 내려다보니 무섭게 자라있는 발톱 왕의 의지로도 불가능한 일이 있다. ◆선도산, 조카와 숙부의 안식처...문성왕릉과 헌안왕릉 진평왕의 할아버지인 진흥왕과 진흥왕의 차남인 진지왕의 유택 외에도 선도산엔 왕의 지위에 올랐던 조카와 숙부의 안식처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문성왕릉과 헌안왕릉이다. 선도산 자락에서 볼 수 있는 두 능 역시 그다지 크고 화려하게 장식되진 않았지만, 고적한 풍경 속에 소박하게 솟아 있는 게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문성왕과 헌안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신라 46대 왕인 문성왕에 대해서 ‘나무위키’는 이런 설명을 들려준다. “신라 45대 신무왕 김우징의 아들로 신라 하대에서 애장왕(제40대)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적장자 군주다. 김제륭, 김명, 장보고로 이어진 반란의 시대를 끊어내고, 통일신라의 수명을 늘린 수성 군주로 평가된다. 857년 승하했고 공작지(孔雀趾)라는 땅에 묻혔다. 문성왕은 죽을 때 유언으로 아들이 아닌 숙부 김의정(金誼靖)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자신의 아들이 아닌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공작의 발가락’이라는 묘한 이름의 땅에서 영원한 잠에 든 문성왕. 그렇다면 지금의 경주시 효현동이 문성왕 때는 ‘공작지’로 불렸던 걸까? 이에 대해서는 또 다른 취재가 필요할 것 같다. 그렇다면 조카로부터 왕의 권력을 받아 신라 47대 왕이 된 헌안왕의 삶은 어떠했을지. 헌안왕의 재위 기간은 857년 가을부터 861년 1월까지로 3년이 조금 넘는 짧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그에겐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다. 왕으로 있던 858년 봄과 여름에 이상 기후로 백성들이 굶주리자 서라벌 전역에 관리를 파견해 곡식을 나눠주는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제방을 쌓아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자 힘썼기에 ‘어진 군주’로 불리던 헌안왕은 당시 열여섯 살이던 사위 김응렴(경문왕)에게 양위(讓位·왕의 자리를 물려줌)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고문헌에 의하면 헌안왕 역시 ‘공작지(孔雀趾)에 묻혔다’고 기록돼 있다. (계속) 서악서원에 서려있는 김유신 설화 설총·최치원·김유신 서원에 위패 모실 때‘김유신 빼자’ 는 말에 꿈 속 나타나 불호령 경주 선도산 입구의 무열왕릉 지척엔 서악서원(西岳書院)이 자리해 있다.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유교의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전국에 설립한 교육기관. 그중에서도 사액서원(賜額書院)이란 왕이 서원에 현판과 책, 노비 등을 하사함으로써 권위를 높여준 서원을 지칭한다. 서악서원은 사액서원 중 하나다. 서악서원엔 3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설총, 최치원, 김유신이 바로 그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셋 모두 여러 차례 이름을 들어봤을 사람들이다. 헌데, 이 가운데 김유신에 얽힌 흥미로운 사연이 옛이야기로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시대의 야담을 모아 펴낸 ‘천예록(天倪錄)’에 실린 설화다. 서악서원이 사액서원으로 지위를 높일 즈음의 일이다. 김유신, 설총, 최치원 세 사람의 위패를 모두 모신 경주의 서악서원. 이 서원이 사액(賜額·왕이 서원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림)을 받게 되었을 때, 경주 유학자 중 한 명이 말한다. “설총은 중국 유교 경전을 이두로 풀이한 공적이 있고, 최치원은 문장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김유신은 신라의 일개 장군으로 유학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으니 김유신의 위패를 서원에서 빼야 한다.” 그런 말을 한 며칠 후. 그 유학자는 자다가 꿈을 꾼다.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그의 머리채를 잡고 서원 뜰에 꿇어앉혔다. 그때 나타난 김유신이 일갈한다. “유학자의 덕목은 충(忠)과 효(孝)가 아닌가.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아가 삼국을 통일했으니 그것이 충이요, 입신양명으로 부모의 이름을 빛나게 했으니 그건 효다. 그런데, 감히 네가 나를 함부로 평가하느냐?” 꿈에서 깨어난 서생은 두려움에 떨면서 며칠을 앓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이는 김유신이 가졌던 정치·사회적 위상이 신라시대를 넘어 조선에 이르기까지 낮아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악서원 설립의 배경과 역사적 내력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아래와 같다. “1561년(명종 16) 이정(李楨)을 중심으로 한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유신의 위패를 모시며 창건했다. 1563년(명종 18) 신라의 문장가 설총·최치원의 위패를 추가로 배향했다. 처음은 선도산 아래 서악정사(西岳精舍)로 창건해 향사를 지내오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00년(선조 33) 서원터의 초사(草舍)에 위패를 봉안했다. 1602년 묘우(廟宇)를 신축하고, 1610년 강당과 재사(齋舍)를 중건했다. 1623년(인조 1) ‘西岳(서악)’이라고 사액됐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헐리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9-10

무당 고모의 권유로 굿판에 뛰어들다

우리나라는 굿을 통해 동제(洞祭)를 지내는 풍습을 오랜 세월 이어왔다. 수심이 깊고 파도가 높은 동해안에서는 별신굿이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다가 1985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동해안별신굿의 한 요소인 지화(紙花, 종이로 만든 꽃)를 70여 년간 만들어온 김자중 선생을 댁에서 만나 어릴 때부터 지화를 만들게 된 계기와 동해안별신굿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김홍제(이하 제) :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김자중(이하 김) : 지화 만드는 걸 그만둔 지 좀 되었는데 지금이라도 지화를 만들 수 있는 기력은 있지요. 제 :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김 : 지금은 청하 용두리에 사는데, 태어난 곳은 흥해 대벌리(현 죽천리)였어요. 광복 후에 죽천초등학교(1940년 5월 개교)에 입학했고 8회 졸업생입니다. 할아버지는 굿판의 양중(兩中, 남자 악사)을 했고, 아버지는 한평생 한량과 어부로 사셨지요. 그 때문에 집이 가난했어요. 나는 아버지가 사십을 넘겨 얻은 늦둥이 외동아들로 자랐어요. 위로 형이 몇 명 있었는데 모두 일찍 죽는 바람에 외동이 되고 말았지요. 제 :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김 : 부산으로 가서 택시회사에서 일했어요. 자동차 시동을 걸 때 ‘스따찡’(자동차 엔진 스타터의 일본식 발음)을 돌려야 하는 시절이어서 기술 배우기가 엄청 힘들었지요. 제 : 그러면 굿은 언제부터 접하게 되었나요. 김 : 고모가 무당이었는데 이름은 김일향입니다. ‘무숙’이라고도 하고, ‘간데기 무당’이라고도 했지요. 흥해, 청하에서는 꽤 유명한 무당이었어요. 내가 부산에서 자동차 수리 일을 하고 있을 때 고모가 같이 일하자고 꼬드겼어요. 아버지는 엄청나게 반대했고요. 당시에도 굿판에서 일한다는 건 사회적으로 인식이 무척 안 좋았거든요. 그래도 고모는 집요하게 아버지를 설득해서 결국 고모와 일을 하게 됐어요. 제 : 고모님의 설득으로 굿과 인연이 되었군요. 선생님은 오랫동안 동해안별신굿의 지화를 만드셨는데, 요즘은 동해안별신굿을 보기 힘들지요. 김 : 아마 그럴 겁니다. 부산 기장에서부터 강원도 고성까지 동해안 대부분의 마을에서 별신굿을 했어요. 별신굿은 ‘벨신’, ‘별손’이라 부르기도 했지요. 형편이 넉넉한 마을은 격년으로 하고, 그렇지 않은 마을은 5년에 한 번씩 했어요. 굿이 열리면 짧게는 1박 2일, 길게는 3박 4일 했고요. 젊은 날의 김자중 제 : 일반인들은 지화를 잘 모릅니다.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지요. 김 : 지화는 굿판에서 생화 대신 종이로 만든 꽃을 말합니다. 원래 동해안별신굿에서는 지화를 많이 쓰지 않았고, 위령제인 오귀굿(오구굿의 경상도 사투리)에서 많이 썼지요. 예전 별신굿에서는 지화 몇 병을 만들어 제당인 굿청을 소박하게 장식했는데, 오귀굿이 점차 줄어들자 무당들이 수입을 늘리려고 별신굿에서도 지화를 많이 장식했어요. 제 : 선생님과 고모님에 얽힌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세요. 김 : 고모는 강신무(降神巫, 신이 내려서 된 무당)가 아니라 세습무(世襲巫, 조상 대대로 무당의 신분을 이어받아 된 무당)였어요. 동해안별신굿에서 강신무는 보기 어렵고 거의 다 세습무지요. 고모는 할아버지 영향을 받았는데, 포항 여남의 3대째 세습무 집안과 인연이 있었어요. 동해안별신굿이 1985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될 때 포항 여남 출신으로 부산 기장에 살면서 동해안별신굿을 한 김석출 씨가 전승 보유자로 선정되었지요. 그분의 호적(태평소) 산조가 아주 유명했어요. 김석출은 형과 남동생이 있었지요. 형은 김호출이고 동생은 김재출입니다. 삼 형제 모두 굿을 했는데, 남자는 지화를 만들고 굿판에서 장구, 태평소 등을 연주했어요. 고모는 김호출과 같이 살면서 세습무를 했지요. 김호출에게는 김용택이라는 막내아들이 있었고 나보다 여덟 살 아래였어요. 용택이는 초등학교 3학년만 다니고는 아버지를 따라 굿판에 나섰지요. 나와 용택이는 비슷한 시기에 지화 만드는 일을 시작했어요. 용택이는 장구를 비롯해 악기를 잘 다루었지요. 용택이도 삼촌인 김석출에 이어 동해안별신굿 보유자로 인정되었어요. 그런데 2018년 5월에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참 가슴 아픈 일이었어요. 제 : 고모님이 김석출의 형과 결혼하면서 선생님이 김석출 집안과 인연이 되는군요. 김 : 그렇게 되었지요. 원래 무속 일은 남녀 기본 2인 1조로 하고 큰 굿은 몇 팀이 모여 했어요. 당시엔 수입이 꽤 괜찮았고요. 고모는 김호출과 살다가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헤어졌는데, 그 후로 독립해 굿을 생계로 살았어요. 굿판에는 준비 과정부터 일손이 많이 필요해요. 특히 굿을 할 때는 양중이나 화랭이, 즉 남자 악사 겸 조력자가 있어야 하는데 고모는 피붙이인 내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아무튼 고모가 몇 년을 졸라 아버지한테 허락을 받아내면서 내가 고모 밑으로 들어가 일을 배우게 되었지요. 내 나이 열여덟 살 때였습니다. 제 : 지화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김 : 내가 만들어온 지화도 어쩌면 김석출 집안에서 내려오던 기술을 습득했다고 볼 수 있어요. 김호출이 지화를 참 잘 만들었거든요. 그때는 김호출과 고모 사이가 좋을 때라 김호출에게 지화 만드는 기술을 직접 배웠지요. 손재주가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굿판에 필요한 지화를 만들려면 수천, 수만 번의 가위질을 해야 하는데, 나한테 남들보다 눈썰미도 있고 손재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만든 지화를 보고 김호출이 탄복했거든요. 가락에 맞춰 장구를 메는(장구를 친다는 경상도 사투리) 것도 내가 잘했지요. 나는 처음 굿판에서 일할 때는 비우(비위의 사투리)가 없고 남사스러워서 굿판에 얼씬도 안 했어요. 고모를 도와 지화를 만들고 굿판을 준비하는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했지요. 제 : 남자가 그 나이에 지화만 만들고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군대도 가야 했을 테고. 김 : 입대 영장이 나와 스물한 살에 입대했어요. 그때 부모님은 환갑이 넘었고 죽천을 떠나 청하 용두리에서 사셨지요. 일은 못 하고 면사무소에서 나오는 강냉이 배급을 타서 끼니를 때웠어요. 전쟁 직후 보릿고개가 있던, 모두 가난하던 시절이지요. 제대 1년을 앞두고 휴가를 나왔을 때 고모가 아버지를 설득해서 장가를 들게 되었어요. 군복을 입고 경주에서 혼례를 치렀지요. 그런데 신부가 썩 맘에 들지 않는 겁니다. 게다가 결혼식을 마치고 바로 귀대했는데, 신부가 고모와 다투고 집을 나가버렸다고 하더군요. 내키지 않는 결혼을 했는지라 솔직히 그 여자에게 정이 없었어요. 인연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당시에는 호리호리하고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듣던 터라 여자 보는 눈이 높았지요. 제 : 선생님 삶에는 고모님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군요. 김 : 그런 셈이지요. 제대 5개월을 앞두고 서울에 있는 사촌이 편지를 보냈는데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바빠서 문상을 못 왔다는 겁니다. 아버지 부고를 그 편지로 알게 된 것이지요. 고모는 부대에 관보(기관으로 보내는 전보)를 보냈다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도착하지 않았어요. 워낙에 어수선한 시절이다 보니 그런 일이 있었던 거죠. 대대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집에 왔더니, 아버지는 산에 묻히시고 어머니는 혼자서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어렵게 지내시더군요. 당장에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요. 그래서 귀대를 못 하고 고모를 따라다니며 본격적으로 지화를 만들고 굿판에서 일했어요. 나중에 부대에서 인사계가 찾아왔더군요. 사정을 고려해 다행히 탈영 처리는 안 되고 제대증을 직접 갖다주었습니다. 김자중 명인은… 1939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죽천에서 태어나 죽천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8세에 고모를 따라 동해안별신굿의 세습무가 일을 시작했다. 70여 년간 동해안별신굿을 장식하는 지화(紙花) 제작과 굿판의 양중(兩中)으로 활동했다. 은퇴 후 청하면 용두 2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2021년 12월 포항문화재단 주관으로 대안공간 298에서 지화 개인전(‘바다에 핀 종이꽃’)을 개최했다.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

2024-09-08

‘안전 부서’ 명장 선정 첫 사례, 포스코 장인문화 새 지평 평가

포스코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인성을 겸비한 직원을 ‘포스코 명장’으로 매년 선발한다. 제철 기술의 발전과 전수를 목표로 하는 명장 제도는 2015년부터 시작돼 현재까지 총 28명의 명장을 배출했다. 명장으로 선정되면 특별 직급 승진, 5000만 원의 포상금, 명예의 전당 영구 헌액 등의 혜택을 받게 된다. 포스코 포항제철소는 지난 7월 12일 올해 명장으로 안전방재그룹의 서정훈(52) 차장과 포항 EIC 기술부 이원종(57) 부장을 선정했다. 특히 안전 부서에서 명장이 선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포스코 내 기술 장인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숙련기술인의 날(9월 9일)을 맞아 2024년 포스코 명장들의 인터뷰를 최근 진행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두 명장의 소감과 그들의 기술적 성과, 앞으로의 포부를 들어 봤다. ● 서정훈 명장 2020년 철강업계 최초 안전관리평가 P등급 획득에 결정적 기여기업이 제품 뿐 아니라 사람 생명 중시하는 문화 정착 계기 되길 ● 이원종 명장 모든 공정 컴퓨터 제어 ‘PLC 전문가’ 평가, 이번 수상에 큰 도움후배들 기술 교육 중 ‘선배님이 제 롤모델입니다’ 말 들을때 보람 ◇안전방재그룹 서정훈 명장 - 자기소개 및 명장 선정된 소감은. △1990년 입사해 34년째 포항제철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산시스템부, 계측제어부, 전기제어설비부, 압연정비부, 혁신지원그룹을 거쳐 2015년부터 안전방재그룹에서 위험물질을 취급하는 설비에서 누출, 화재, 폭발 등 중대 산업사고를 예방하는 PSM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이번에 안전 분야 1호 명장으로 선정됐다. 평소 동경의 대상이었던 포스코 명장에 선발돼 매우 기쁘고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 포스코 명장으로 선정된 의미는. △포스코 명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인품을 겸비한 직원을 선발해 예우하는 제도이다. 현장 기술인 최고의 명예이자 후배들에게 롤모델이 되는 영광스러운 자리이다. 지금까지 선발된 명장은 모두 운전, 설비관리 등 제품 생산과 직결된 분야에서 선발됐다. 나는 올해 안전관리 분야 최초로 명장이 됐다. 이는 포스코가 제품의 품질, 비용, 생산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명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롤모델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회사가 안전을 생산, 품질, 비용, 납기, 공기 등 그 무엇보다 최우선시한다는 경영방침의 실천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본다. - 포스코 명장 선정 기준은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선정된 것 같은지. △포스코를 대표하는 기술 전문가로서, 엄격한 심사와 철저한 검증을 통해 선정된다. 우선, 포스코 기술역량 인증제도 테크니컬 레벨 5.0 이상을 보유하고, 기능장 또는 기술사 자격과 인사고과 기준을 충족해야 지원이 가능하다. 선발 과정은 1차 서류심사, 2차 현장실사 및 동료평가, 3차 적합성 심사 및 기술 심사 등 체계적인 검증 단계를 거친다. 본심사에서는 포스텍 교수 등 각 분야 전문가를 대상으로 직접 보유기술과 업무성과를 발표하고, 기술 수준과 조직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받게 된다. 나는 업무편람을 제작해 포스코형 공정안전관리체계를 정립하고, 누구나 쉽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전면 시스템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점에서 현장 안전 관리 역량과 안전 체계 구축을 위해 노력한 부분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은 것 같다. - 2020년 포스코가 철강 업계 최초 공정 안전관리 평가 P등급(최고등급) 획득하는데 서정훈 명장의 기여가 크다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공정 안전관리 분야는 사회적 영향이 커서 4년마다 국가기관에서 이행 수준을 평가하도록 규정돼 있다. 법적으로는 제철소 전체를 1개의 평가 단위로 받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수많은 인원과 설비를 운영하는 포항제철소의 특성을 고려, 13개 현장 부서장 단위로 세분화해 평가를 받게 했다. 부서원 모두가 책임감을 갖고 체계적인 현장관리를 하도록 해 공정 안전에 대한 인식변화, 실행수준 향상 등 공정 안전관리 체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었다. - 근무하면서 좋은 점과 힘든 점은? △누군가의 생명과 가정의 행복을 지키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 반대로, 제 가정에는 조금 소홀할 수밖에 없는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있어서 아쉬운 순간들도 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포항제철소 안전방재그룹에 전입해 오면서 다짐한 게 세 가지 있다. 첫째, 안전은 최종적으로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둘째, 안전 스텝으로서 안전 전문가가 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초심을 끝까지 잃지 말자는 세 가지 다짐을 했다. 앞으로도 기술을 갈고닦아서 현장에 있는 후배 사원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데 중점을 두고 이런 마음을 변치 않고 끝까지 견지하도록 하겠다. ◇ EIC 기술부 이원종 명장 - 자기소개 및 명장 선정된 소감은. △EIC기술부의 EIC는 Electric(전기), Instrument(계측), Control(제어)을 의미하며 전체적으로 전기제어의 기술력을 갖춘 부서이다. 나는 1985년 입사 후에 후판, 냉연, 전기강판 정비부서에서 전기와 PLC 제어설비를 담당했다. 지금은 제철소 전 공장의 PLC 제어 부분의 기술지원을 통한 설비 안정과 생산성, 품질향상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포스코 명장으로 선발돼 큰 영광이지만, 앞으로 포스코 명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책임감도 있다. - 포항제철소 PLC 전문가라고 들었다. PLC는 무엇이고, 어떤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지. △PLC는 ‘Programmable Logic Controller’로 쉽게 설명하자면,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모든 공정에 컴퓨터를 이용해 자동제어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어,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시작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물을 공급하고, 세탁과 탈수 등 일련의 순서를 순서제어라고 한다. 이런 제어를 수행하는 것이 PLC 제어와 유사하다. 나는 여러 공정 과정을 두루 거치며 압연 분야 PLC 전문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지금은 주로 공정에 대한 프로그램 개발 및 개선, PLC 이상 발생 시 빠르게 원인을 파악하고 정상화하는 기술지원을 수행하고 있다. - 포스코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 △아무래도 처음으로 제어 업무를 맡았던 시기가 아닐지 생각된다. 입사 후 처음으로 2후판 가속냉각설비가 도입될 때, 자동 제어 부분을 맡아 가속냉각 후판강 제조를 성공시켜, 당시 제철기술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계기로 지금까지 ‘제어인’으로 현장설비 자동화 기술개발과 안정화의 역량을 향상시켜 포스코 명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근무하면서 좋은 점과 힘든 점이 있다면. △본연의 업무 분야에서 창의적인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조직문화 분위기가 가장 좋은 점이라 생각한다. 반면, 24시간 가동되는 제철소 설비 특성상 주야로 장애가 발생할 때가 있어 즉각적인 복구를 위해 비상 출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줄이기 위해 예방정비와 설비 강건화에 힘쓰고 있다. - 명장 이후의 시간은 어떻게? △솔직히 ‘내가 명장의 역량이 충분하고 수행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한 적도 있다. 현장에서 후배에게 기술교육을 할 때 한 후배가 나에게 해준 말이 있는데 ‘선배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제 가슴을 뛰게 한 것 같다. 앞으로도 열정을 갖고 내가 가진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들의 역량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후배들에게 내가 걸어온 길이 디딤돌과 나침판이 돼, 후배들 또한 최고의 기술인으로 성장하는 데 이끌어줄 수 있는 그런 명장이 되고 싶다. 서정훈 안전방재그룹 명장은 △포철공고 졸업△1990년 입사, 34년 근무 중△대구지방노동청장 산업안전유공표창△기계안전기술사 이원종 EIC 기술부 명장은 △포철공고 졸업△1985년 입사, 39년 근무 중△후판 가속냉각 DDC 제어△냉연 자동 두께제어, 자동형상제어△크레인 무인 자동화△전기강판 소둔로 장력제어△전기공학사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09-08

포항제철 사택·효자역 화물·여객 후광 업고 1970년대 전성기

물류의 집산(集散), 유동인구, 특정 작물 대량 재배, 장인(匠人) 집단 활동 여부, 교통의 요지…. 전통시대 시장의 성립 요인은 다양하다. 열거한 요인 중 한두 가지만 중복돼도 쉽게 시장은 형성되고, 더 많은 요인이 겹치면 대형 상권이 조성되기도 한다. 이번에 소개할 효자시장의 형성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다. 효자시장은 앞서 언급한 시장 성립 요인 중 교통, 그 중에 철도역과 관련이 깊다. 잘 알려져 있듯 포항에는 경동선(1927년 개통), 동해선 (1945년 개통), 괴동선이 운행됐다. 이 중 효자시장과 직접 관련이 있는 곳은 괴동선(槐東線)이다. 1971년 개통된 이 철도는 부조(지금의 부조장터)와 효자-괴동-제철(포항제철역)을 잇는 10.6km 노선을 말한다. 짧은 노선이지만 이 철길로 철강 공단의 화물, 제품, 원자재들이 수송되었고 포스코 근로자들을 위한 국내 최초 통근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화물의 집산과 근로자, 인구의 유입은 필연적으로 시장을 필요로 했고, 효자시장은 그 ‘수요’에 대한 대안이었다. ◆지역 3대 시장 중 하나인 부조장 전통 계승 효자동 일대는 조선시대 연일현 북면에 속했었다.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흥해, 영일, 청하, 장기 4개군으로 개편될 때 영일군 북면에 귀속됐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4개군이 영일군으로 개편될 때 연일면에 편입됐고 효자동과 지곡동을 통합해 효곡동이 됐다. 효곡, 효자동은 포항의 서쪽 관문에 위치해 옛날부터 신라, 경주 세력들의 관문 역할을 했다. 고대에는 형산강 줄기를 따라 신라나 내륙의 문물이 동해로 진출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육로를 따라 동해의 문물이 양동-경주를 경유에 영천-경산으로 드나들었다. 효자동의 서쪽 형산강 변에는 지역 3대 시장 중 하나였던 부조장터가 있는데 효자시장은 바로 이 부조장의 전통과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 부조장이 형산강을 배경으로 포항의 청어, 소금 등 해산물을 전국으로 유통시킨 물류의 중심이었다면, 효자시장은 효자역 철도, 포항제철 유동인구를 배경으로 지역의 전통시장을 일으킨 골목상권의 디딤돌이었다. 효자시장의 태동은 포항제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68년 포철이 들어서면서 효자동 일대에는 포철 직원들을 위한 대규모 사택 단지가 조성됐다. 갑작스럽게 주택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근에 상가, 학교, 관공서들이 따라서 들어왔다. 이때 설립된 학교, 연구소가 포항제철초-중-고교와 포스텍, 포항테크노파크, 방사광가속기연구소였다. 효자역 인근엔 포항제철 직원들과 인근 공장 인부들, 학생들을 위한 식당, 생필품점, 노점상인들이 대거 들어섰고 이런 수요를 바탕으로 1971년 효자 시장이 정식으로 개설됐다. ◆1970년대 밀려드는 손님으로 골목 북적 “당시 1970년대 주말에는 시장에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손님들이 넘쳤습니다. 하루 종일 리어카 소리, 짐자전거 소리로 늘 소란스러웠죠. 장사도 얼마나 잘 됐는지 배추를 트럭 채 가게 앞에 부려 놓으면 반나절도 안 돼 한 차씩 다 팔아 치우곤 했죠. 그땐 다들 정직해서 분에 넘치는 이윤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냥 손만 바쁘고 계산하느라 정신만 없었지, 살림은 늘 그대로였어요.” 한 야채가게 어르신의 증언처럼 1970~90년대 전국의 전통시장은 전성기를 누렸다. 아직 백화점, 대형마트, 인터넷 쇼핑몰이 등장하기 전이었고 유통체계는 생산자-도매업자-소매로 연결되는 단선(單線) 라인이 주류를 이룰 때였다. 무엇보다 풍부한 ‘인구’는 시장을 견인하는 가장 든든한 원군(援軍)이었다. 당시엔 가구당 4~7자녀가 당연시 되던 시절이었고, 인구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생필품은 대부분 전통시장에서 조달됐다. 앞서 언급한 대로 ‘효자시장의 8할은 포항제철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둘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수천 세대에 이르는 포철 직원, 주민들의 생필품 공급처이자, 수천 명에 이르는 포철재단 학생들의 간식, 군것질거리, 학용품 조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만난 야채 가게 어르신은 “1970년대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사택, 학교들이 들어서면서 기존 시장 규모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며 “당시 효자역 부근 논밭을 따라 노점상들의 비닐하우스, 가건물들이 들어서며 시장이 급속히 확장됐다”고 증언했다. ◆포철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시장도 가동 재미있는 것은 효자시장의 모든 운영이 포철 직원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 1970년대 보통 효자시장은 4시 무렵이면 문을 열었다. 당시 효자역 포철 통근기차 첫차가 5시57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효자시장엔 미처 아침을 챙기지 못한 직원들이 국수, 국밥, 간식을 먹느라 식당마다 북적거렸고, 아침 일찍 찬거리를 사기 위해 나온 주부들로 혼잡을 이뤘다. 당시 포철 출퇴근 열차가 하루 열 번 정도 운행되었는데 매 시간 마다 시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상인회 김병근 회장은 “당시 안전화에 제복을 입은 포철 직원들이 수백 명씩 여명을 뚫고 효자역으로 출근하는 모습은 자체로 감동이었고 풍경이었다”고 말한다. 이미 반세기 전의 일이고 당시 근로자들은 대부분 노년기에 접어들었지만 이런 노력과 희생들이 쌓여 오늘날 포항 경제를 이룬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통근열차가 가고 나면 이제 학생들이 통학 행렬이 시장을 쓸고 지나갔다. 포항의 다른 지역 아이들보다 살림이 나았던 아이 학생들은 시장에서 떡볶이, 어묵, 라면, 튀김 등 간식거리를 소비하고, 학교준비물과 학용품을 준비해 갔다. 당시 포철초교 학생들은 노랑 모자에 노랑 교복을 입고 다녔는데 등하교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상인들이 ‘병아리들’이라고 부르며 반겼다고 한다. ◆효자역 사라진 시장, 급격히 쇠락의 길로 2000년대 이후 전통시장은 급격히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인구의 감소, 온라인 쇼핑몰, 대형마트의 등장, 소비 행태의 변화 등이 주 원인이었다. 효자시장이 있는 효자, 지곡동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1970년대 건축됐던 포항제철 사택들이 민간에 분양되고, 상당수는 효자동을 떠났다. ‘제철(製鐵) 빌리지’를 이뤘던 효자, 지곡동 사원 아파트에는 이제 소수의 직원들만 남아 당시를 추억할 뿐이다. 포철과 효자시장을 끈끈하게 이어주던 효자역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30년 동안 657만 명을 실어 나르던 괴동선은 이제 통근버스나 시내버스, 자가용으로 대체돼 효자시장의 유동인구에 큰 타격을 입혔다. 포항제철과 효자역과 반세기를 함께해온 효자시장. 이제 괴동선엔 하루 30여 차례 화물열차만 운행된다. 2015년 4월 마지막 여객열차가 멈춰선 이후 효자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효자역 플랫폼엔 안전화 소리도 사라지고, CDC 기관차의 거친 엔진음도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기적소리라도 한번 울려 퍼지면 거친 음파(音波)를 따라 옛 추억이라고 소환해 보고 싶지만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올까요?” 한 시장 어르신의 넋두리를 배웅 삼아 시장 골목을 빠져 나온다. ◆괴동선은? 30년 동안 포항제철 직원들 657만 명 출퇴근길 실어날라 포항시 효자역과 괴동역을 연결하는 철도로 포항과 부산진역을 이어주던 동해남부선의 지선(支線)이다. 제철선 또는 포항제철선으로 불렸다. 1968년 4월 25일에 착공하여 같은 해에 효자역-괴동역 구간이 완공됐으며, 총공사비는 2억3313만원이었다. 1970년 10월에 괴동역에 포항제철전용선이 부설돼 1975년부터 포항제철 직원 전용 통근열차로 기능했다. 포철 통근열차는 30년 동안 운영 되며 하루에 총 10회, 약 109만km를 운행했다. 총 이용 승객은 약 657만명. 30년 동안 운행하면서 사고는 단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8년 화물수송량은 263만2172t으로, 무연탄 103만1847t, 잡화 159만901t을 처리했다. 1975년 7월 1일 운행을 시작할 당시 운임은 일반 이용객은 40원. 제철 근로자는 할인 혜택이 주어져 28원만 냈다. 2005년 폐선 당시 운임은 353원. 새벽 교대근무자를 위해 첫차가 오전 5시 57분에 출발했으며, 야간 근무자를 위해 막차는 밤 11시 30분에 들어왔다. 한국철도공사와 포스코 간의 운행 협상이 결렬되면서 2006년부터 운행이 중단됐다. 현재 괴동선은 화물전용으로 운행되고 있으며, 여객수송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글·사진/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09-05

‘실패 없는 성공’은 이루기 어려운 법 작은 목표라도 도전하는 습관 길러야

“누구나 실수를 한다. 좌절도 경험한다. 기술은 그런 것이다.” 현장의 많은 문제점 개선을 하다 보면 실수나 실패를 할 때도 있다. 이때 좌절을 하면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 한가지 실수는 한가지 안 되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천재가 아닌 이상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는 말을 믿어야 한다. 때론 이 말이 두렵지만, 해야 한다. 그리고 비판 받을 각오도 해야 한다. 권영국(59·사진) 포스코 포항제철소 열연부 기술개발섹션 부장(명장)은 실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난 2018년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한 권 명장은 42년 간 포스코에 근속하면서 세계 최초로 열간 연연속 압연기술 도입 및 상용화를 통해 생산성의 획기적인 향상과 제조범위 확대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았다. 최근 권 명장에게 소성가공 분야의 장인이 되기까지 노력의 과정에 대해 들어 봤다. - 소성가공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목표를 갖고 선택했다기보다는, 어려운 시기에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해 압연과를 전공하면서 자연스럽게 포항제철소 2열연공장으로 배치됐다. 열간압연을 하게 된 것이 오늘까지 한길을 걷게 됐다. 산골짜기 시골 마을에서 어린 나이에 병환이 있으신 아버님을 돌보며 어렵게 성장하면서도, 이웃집 어르신의 대장간을 놀이터로 삼았다. ‘쇠’라는 것이 불속에서 뜨겁게 가열됐다가 두드림에 의해 모양이 만들어지고, 물에 넣을 때 수증기가 나오며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이 유일한 세상 문물이었다. 포철공고의 모집 요강을 보고 철에 대한 추억으로 주저 없이 지원했다. 포항제철소의 웅장함과 생기 있는 모습을 보며 꿈을 키웠다. 처음으로 포항제철소 2열연공정을 견학할 때 거대한 설비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면서 열연코일을 생산하는 것을 보고 겁도 났다. 그러나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전달이 됐는지, 1982년 포항제철소 열연공장 열간압연공정에 배치돼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포항제철소의 허리인 열간압연 공정에서 운전요원으로 현장 교대 근무를 했다. 현장의 굉대한 설비와 그 설비를 한치의 오차 없이 컨트롤하는 설비를 운전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우고 학습했다. 어려운 문제점을 하나하나 해결을 하면서 주위에서 인정과 보상을 받으면서 많은 보람을 느꼈다. 이는 끊임없는 학습과 개선을 통한 오늘의 철강 기술인으로 성장을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 소성가공은 무엇인가. △소성가공이란 금속이나 기타 재료를 변형시켜 원하는 형태로 만드는 가공 방법 중 하나이다. 이 과정에서 재료는 영구적으로 변형되지만, 파괴되지는 않으며, 재료를 부수지 않고 모양을 바꾸는 가공 방법이다. 소성가공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내가 하고 있는 압연(Rolling)이 있다. 압연중에서도 열간압연은 금속을 재결온도 이상의 고온까지 가열한 후 롤러로 압연해 원하는 두께와 형태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금속은 더 유연해지고 변형이 쉬워지며, 내부 결함이 줄고, 또한 재료의 낭비가 적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포항제철소에서는 2개의 열연공장에서 연간 850만t의 열연코일을 생산하고 있다. - 대한민국 명장이 되기 위한 노력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도전을 한다면 좋겠지만, 나는 솔직하게 목표를 정해놓고 일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했다. 지금 하는 일에서 문제점이 발생하면 항상 좀 더 나은 방법은 없는지 고민하고 개선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실패 없이 큰 성공을 거두기는 어렵다. 많은 개선을 하면서 실패의 아픔을 겪으며 터득한 기술을 정리해 운전방안을 만들고 현업 후배들과 신입인턴 사원들에게 경험을 공유하면서 보람을 얻었다. -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의욕을 가지고 개선을 했다.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아 롤교체 방법 개선 우수 제안 등록에 성공해 포상을 받았다. 회사에서 백암온천 1박2일 포상 휴가를 갔을 때 정말 즐겁고 뿌듯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이후 현장 문제점에 대한 개선의 DNA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열간압연 2열연공장은 대규모의 설비가 동조돼 돌아가는 설비로서 어떠한 트러블 발생시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 골든타임이 있다. 그것이 잠깐이라도 늦어지면 많은 피해를 볼 수 있다. 운전자의 대응이 늦어 많은 피해를 보았다. 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데이터를 이용한 자동 기능을 만들면 어떨까 싶었다. 정비와 협업을 통해 작업 중 이상시자동 정지 기능을 만들어 많은 효과를 봤다. 포스코의 모든 열연공장에 전파 적용하는 기술이 됐다. 한번은 열간 연연속압연시 두 장의 소재를 접합 후 트러블이 발생했다. 제대로 분석이 안 된 상태에서 다시 시도했으나 같은 트러블이 발생해 체면을 구긴적이 있다. 이후에는 같은 작업 시 설비와 제어 상태를 확인하는 체크시트를 만들어, 이상 발생시 체크시트 기준으로 하나하나 체크를 해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했다. - 숙련기술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목표를 가지고 도전하라. 그렇다고 목표가 클 필요는 없다. 작은 목표를 세우더라도 성공하는 습관을 길러라. 일을 함에 있 꼭 목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지금 있는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성공의 씨앗이 한 알 한 알 쌓일 것이다. 살다 보면 힘들 때도 있을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버티는 힘도 능력이다. 힘들 때 좀더 냉철하게 판단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조언자를 찾아라. 힘들 때 의지할수 있는 주위의 동료를 멘토로 만들어라. 그리고 배워라. 나의 기술 노하우는 주위의 필요한 모두에게 공유하라. 그러면 더 큰 기술이 돼 나에게 돌아온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가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그곳에서의 긍정과 부정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모든 일에 가능한 긍정의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라. - 앞으로의 포부는. △오랫동안 많은 어려움 속에서 많은 기술을 개발하고, 인생의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기술이 됐든, 삶의 지혜가 됐든, 기회가 있을때마다 후배들에게 많은 것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숙련기술인으로서 해당 분야 산업발전에 이바지, 후진양성 등 전문적인 활동을 할 계획이다. 앞으로도 대한민국 철강산업이 50년 이상 지속적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고자 후배들의 기술력 향상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가르치겠다. 특히 후배 직원들을 잘 이끌어 선배들의 기술이 잘 전수가 될 수 있게 해 현재의 기술을 향상·발전시키겠다. 후배들의 업무 외적인 부분까지도 관심을 갖고 도와 회사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 마이스터고등 후배들에게도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전수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기회를 만들어 나가겠다. 또한 사회봉사를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기술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포스코 명장 선정 이후 사내 기술전수 및 특강 등을 통해 기술 전수를 했다. 경북최고장인 선정 이후 도내 사회 봉사 및 학교 강의를 통해 나눔을 했다. 이제 대한민국 명장이 됐으니 더 넓은 분야에서 기술 전수 및 봉사 활동을 할 것이다. - 이 밖에 하고 싶은 말 . △세상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내가 위치한 곳에서 누군가와 함께 일을 할 것이고, 경쟁도 할 것이다. 주위의 동료를 이겨야 할 경쟁자보다는 함께 일을 해야 하고 성과도 함께 나눌 수 있는 협업의 대상자로 서로 협력을 해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그랬고, 아니면 많은 일 중에서 현장에 답이 있는 경우가 많다. 어려움이 있다면 현장에서 직접 보고 현장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을 즐겨라. 새로운 기술 개발을 위해 현장에서 맨땅에 헤딩하듯이, 아무런 기반 없이 세계최초 신 열간연연속 압연 기술을 개발할 때도 많은 어려움과 좌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일을 즐겼던 것 같다. 또한 기술 개발은 치열한 도전 정신과 끝을 모르는 가능성을 열어준 또 하나의 새로운 경이로운 세계이다. 세상의 모든 곳에는 나의 스승이 있다. 나는 일본의 ‘호리이’라는 기술자가 현장의 설비 공사 및 시운전을 하면서 하나하나 꼼꼼하게 기술하는 것을 보고 나도 업무하면서 모든 일을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을 가지게 됐다. 이는 많은 기술 자료가 돼 후배들이 찾아보고 활용을 하고 있다. 권영국 소성가공 경북최고장인, 포스코 명장은 △포철공고졸업 △1982년 포스코 입사~ 현재 근무중 △2015년 포스코명장 △2016년 경북최고장인(소성가공) △2018년 철의날 은탑산업훈장 △2018년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 △2024년 대한민국명장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09-04

효를 상징하는 삼구정과 함께하는 마을 숲, 삶의 교훈으로

나뭇잎이 물드는 가을에 농촌 마을을 찾아들면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머문다는 당우와 곱게 물들어 가는 당산나무가 한 세트가 되어 풍요롭고 평화로운 가을을 맞이하는 풍경이다. 또한 굽이쳐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볼 수 있는 바위 언덕 언저리나 마을의 동산 숲속의 스토리가 있는 정자와 나무는 부부의 인연처럼 절경의 주인공이 되어 한 폭의 가을 풍경화를 연출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가을 풍경화 속으로 빠져들어 그들의 품에 안겨 옛이야기를 들어본다. 끝없는 욕망과 불안에 지친 마음은 안정을 찾고 야생마 같은 거친 나의 삶에도 고운 단풍 물이 스며든다. 농촌 마을의 당우와 당산목, 정자와 노거수는 풍요와 평화를 선물하는 우리 전통 민속 생명 문화의 자연자산이다. 특히 안동은 노거수의 고장이다. 서울 면적의 2.5배나 클 뿐만 아니라 어느 지역보다 마을에는 노거수가 많이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당우와 정자도 많다. 안동 풍산에서 하회마을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넓은 들을 바라보고 있는 소산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지방 문화재가 무려 7점이나 있다. 이런 문화재를 품게 된 것도 마을 숲속에 있는 삼구정과 느티나무와 소나무 등 노거수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공직에 있을 때 안동 출신 국장으로부터 지역 신문 기사를 펼쳐 놓고 열변을 토하면서 소산마을을 자랑하던 것이 아삼아삼하다. 안동김씨 집성촌 마을로 전통과 효심이 살아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라면서 역사적 고증을 들어가면서 설명하는 모습에서 안동인의 자긍심이 짙게 묻어났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이신 후 “이 마을을 좀 더 품위 있는 역사적 마을로 가꾸어 볼 아이디어가 없을까?”라고 물었다. 안동은 우리나라 삼대 문화권 중 유교문화권의 중심지이다. 안동은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표어를 내걸고 물질문명의 이 시대에 행복의 근원은 정신에 있다면서 끈질기게 목소리 높이고 있다. 그 자긍심 또한 대단하다. 이러한 주민의 정신 바탕에는 정자와 마을 숲, 노거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삼구정만 해도 그렇다. 조선 시대 문신 김영수와 그의 형제들이 어머니 예천권씨를 위해 1496년 마을 동산 위에 정자를 짓고 그곳에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세 개 있는 것을 보고 삼구정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정자 이름에서 어머니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아들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정자와 함께 있는 느티나무와 소나무 역시 우리 삶에 중요한 가치 개념으로 삼고 있는 건강, 장수, 다산, 절개, 사랑 등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하니 마을에 훌륭한 인물들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궁하면 통한다고 마침 중앙정부에서 ‘2002 월드컵 축구 경기 맞이 공원 조성’ 사업비가 내려왔다. 삼구정 주변의 마을 숲과 문화재 등을 연계하는 역사가 숨 쉬는 인문, 생태 마을을 조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의 문화재와 함께 삼구정에 담긴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마을을 품은 숲과 숲을 이룬 나무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싶었다. 마을 주민과 이장, 안동김씨 종친회장 등 관계 어르신들과 삼구정에 모여 사업 내용을 설명하고 의견을 구했다. 종친회에서도 문중 재산을 희사하겠다면서 흔쾌히 동의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열변을 토하면서 소산마을과 안동을 자랑하던 안동 출신 김휘동 국장이 2002년 7월 1일 자로 민선 3기 안동시장으로 취임했다. 아마 감회가 남다르지 않았나 싶다. 때마침 환경부에서 주관하는 자연보호에 대한 의식 함양과 소재를 제공하여 방송을 포함한 문화·예술 부문과의 자연생태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범국민운동으로 확산하고자 방송작가, 소설가, 시인 등 원로작가 생태기행이 있었다. 2000년 3월 10일부터 1박 2일간 26명으로 구성된 원로작가 자연생태 기행 대표로는 경북 청송 출신 소설가 김주영 작가였다. 자연생태 기행 안내를 맡아 일정 중에 하회마을 대신 소산마을을 방문할 것을 권했다. 김명자 환경부 장관도 일행과 함께 소산마을을 방문했다. 문화재는 물론 삼구정 정자와 마을 숲, 노거수를 둘러보고는 전통과 효심이 살아있는 마을이라면서 모두 감탄했다. 원로작가들에게 마을 숲과 노거수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공익적 환경가치를 설명하고 글의 소재로 많이 사용해 달라고 부탁도 했다. 안동 부용대 옥연정사에 갔다. 버스에 내리면서 두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손을 잡고 오르막 숲속 오솔길을 택해 부용대로 걸어서 올라갔다. 그리고 정상에서 수건을 내렸다. 모두가 놀랐다.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을 끼고 있는 하회마을의 자연경관에 감탄을 자아내었다. 하회마을과 만송정 숲, 굽이 흐르는 푸른 낙동강과 반짝이는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했다. 하회마을에 갔으며 전체의 마을 경관을 조망할 수 없을 것인데 여기로 오기를 잘했다고 모두 이구동성으로 칭찬했다. “사랑하는 이여 언제라도 님이 오시는 날만 기다릴지니 아니 오신 듯 다녀가시옵소서”라는 원로작가들의 표어가 마음에 들었다. 가끔 소산마을을 찾아 삼구정 누대에 올라 주변 숲의 노거수를 바라보기도 하고 숲속을 거닐어 본다. 어머니의 건강을 보살피는 아들의 효심이 얼마나 극진했으면 삼구정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그리고 어머니는 또 얼마나 자식을 사랑했으면 이러한 자식의 효심을 불렀을까, 오늘날 옛 제도가 맞지 않다고 야단이다. 모두 버리더라도 부모의 사랑과 자식의 효도는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삼구정 아래 이곳 출신 삼당 김영이 지은 빗돌에 새겨진 “빈 배에 섯는 백로/ 벽파에 씻어 흰가/네 몸이 저리 흰들 마음조차 흴쏘냐/ 만일 마음이 몸과 같으면 너를 좇아 놀리라.”라는 시조 한 수는 소산마을의 순결하고 청렴한 정신을 가장 잘 노래한 시조라고 여겨진다. 소산마을의 삼구정 주변에 자리한 느티나무 노거수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존재이다. 삼구정을 건립할 때 심었다면 나이가 530살이 된다. 나무는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침묵하며 우리에게 전해줄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조선 시대의 유교 문화가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마을이었고, 그 중심에는 삼구정과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다. 세월의 흐름을 견디며 마을의 역사를 지켜본 생명의 증인이자, 마을 주민들의 삶을 묵묵히 지켜봐 준 친구였다. 노거수를 보호하는 이유는 단지 오랜 세월을 살아남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서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전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오랫동안 살아있음이 그리고 앞으로 오랫동안 살아갈 생명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효를 상징하는 삼구정과 함께하는 마을 숲, 노거수는 그저 오래된 자연물이 아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은 역사이자,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교훈이다. 소산마을 지방문화재는 뭐가 있을까 삼구정(三龜亭)은 장수의 상징인 거북처럼 생긴 세 개의 바윗돌이 정자 뜰에 놓여 있어 붙여진 것으로, 노모의 장수를 비는 뜻도 담겨 있다. 청원루(淸遠樓)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선생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풀려난 뒤 이곳에 내려와 머물면서 ‘미운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이름 지었다. 양소당은 안동 김씨 종택(安東金氏 宗宅)이다. 조선 성종(成宗) 때의 명신 김영수(金永銹) 선생이 연산군(燕山君) 7년(1501년)에 지은 집이기도 하다. 동야고택은 공자가어(孔子家語)의 노인(魯人) 동야필사(東埜畢事)를 인용 영조(英祖)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면시(面試)에서 답안에 공자가어의 노인 동야필사를 인용한 것에서 유래했다. 묵제고택은 감찰공파(監察公派) 자손이 누대에 걸쳐 세거(世居)해 온 집이다. 비안공 구택은 조선 세종(世宗) 때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낸 안동 김씨 김삼근(金三根, 1419-1465) 선생이 살던 집이다. 삼소재는 선안동(先安東) 상락 김씨(上洛金氏) 시조의 18대손인 김용추(金用秋, 1651-1711) 공의 종택이다, 현종(顯宗) 15년(1674년)에 건립됐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9-04

‘2퍼센트’ 불가능 아닌, 도전을 위한 출발점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 영화계에서 낯선 존재였던 한국 영화의 위상이 놀랄 만큼 높아졌다. 한국 영화는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인재들의 도전의 무대가 되었고, 포항에서도 영화산업을 일으켜보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포항의 인적, 물적 자산으로 제작된 영화 ‘2퍼센트’의 개봉이 더욱 반가운 이유다. ‘2퍼센트’는 문신구 감독의 새로운 시도이자 고향에 보내는 연서다. 배 : 본명 대신에 ‘문신구’라는 이름을 쓰고 계신데. 문 : 문신구는 필명입니다. 내가 1986년에 쓴 희곡 ‘분출구’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지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필명을 썼습니다. 배 : 감독님께서 연극영화계에 입문한 지 50년이 넘었습니다. 열정 하나로 뛰어들어 장르를 불문하고 역할을 가리지 않으며 활동했습니다. 지난 활동을 되돌아본다면 현재는 어느 단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문 : 돌이켜보니 긴 시간이 흘렀군요. 그동안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도전했고 침잠기도 거쳤습니다. 현재는 지금까지 걸어온 예술세계를 정리하는 단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원죄’와 ‘2퍼센트’입니다. ‘원죄’는 외부 자본의 도움 없이 내가 하고 싶고 또 해야 하는 이야기를 밀어붙인 작품이지요. ‘2퍼센트’는 고향 이야기를 하나쯤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임했습니다. 배 : ‘원죄’는 감독님께 많은 상을 안긴 작품이고, ‘2퍼센트’는 포항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문 :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포항지부를 출범하면서 지역 영화인들과 영화산업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았습니다. 그중 하나로 지역의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 포항 단편 시나리오 공모전을 개최했어요. 수상작 한 편을 내가 각색해 장편영화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정된 예산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이 뭘까 고민했어요. 적은 예산이라고 작은 이야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배 : ‘2퍼센트’에서는 포항의 명소가 스크린을 가득 채우지요. 등장인물을 포항의 여러 공간에 담아내는 데 고심이 컸을 것 같습니다. 문 : 시나리오를 포항이라는 공간에 녹여내는 작업이 감독으로서 풀어야 할 과제였습니다. 되도록 골고루 소개하려고 애쓰면서도 배경이 스토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어요. 포항의 아름다운 풍광도 담아내고 의도하는 스토리도 잘 전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심했죠. 배경 중에 월포해수욕장 인근 이가리 닻 전망대는 효과적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 바다 장면은 동시녹음을 했는데 소음 때문에 촬영지를 두세 번 옮겨야 했어요. 해변 도로를 지나는 차량은 CG로 지우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배 : ‘2퍼센트’는 실패를 거듭하다 생존 확률 2퍼센트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영화감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출연한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니 주인공으로 나오는 고집불통의 감독이 문 감독님과 무척이나 닮았다고 하더군요. 감독님은 촬영 현장에서 어떤 감독입니까. 문 : 상황을 배우들에게 주고 자연스럽게 연기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미친놈, 무모한 놈이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영화는 촬영하고 필름에 담기는 모든 순간이 최선이어야 합니다. 최선의 장면을 뽑아야 하니 현장에서는 거칠고 날카로워집니다. 충분치 않은 예산에 맞추다 보니 여유가 없기도 하죠. 사비로 제작한 ‘원죄’는 하루 3시간씩 자면서 11회차에 끝냈어요. 비슷한 시기에 백승철 배우가 ‘군함도’를 촬영했는데, 거기서 한두 컷 찍을 동안 우리는 열 컷도 더 찍으니까 “감독님, 이게 영화가 돼요? 이게 되면 감독님 천재예요”라고 했을 정도죠. ‘2퍼센트’ 촬영도 13회차로 끝냈습니다. 고생을 많이 했죠. 해 뜨는 장면을 찍느라 자동차에서 밤새고, 성당 꼭대기에서 촬영한 적도 있어요. 배 : 등장인물 중에 가장 짧고 강렬하게 나오는 남명렬 배우는 문 감독을 두고 ‘변신의 귀재’라고 하더군요. 감독님의 정체성을 묻는다면요. 문 : 1980년대 중후반은 나도 주목받는 배우였지요. 신성일 세대 다음에 신영일 세대, 그다음에 안성기 세대가 있었고, 나는 바로 그다음 세대라고 봅니다. 연기를 계속했다면 사람들에게 익숙한 얼굴이 됐을지도 모르죠. 나의 정체성을 말한다면 배우나 연극 연출가라기보다 영화감독이에요. 부러울 정도로 영화 잘 만드는 감독은 정말 많습니다. 그래도 스스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상업영화는 시류를 탑니다만 내 작업은 그렇지 않죠. 지금도 해외 영화제 관계자가 내 작업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배 : ‘2퍼센트’라는 영화 제목이 흥미로운데, 지역 영화산업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보십니까. 문 : ‘2퍼센트’는 불가능이 아니라 도전을 위한 출발점입니다. 포항은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인 ‘인디플러스 포항’이라는 귀중한 자산이 있습니다.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니 안타까워요. 다른 지역에 없는 자산이 포항에는 꽤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배 : 감독님 말씀대로라면 2퍼센트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시작되는 비율인데요, 지역의 영화산업 여건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문 : 포항은 문화예술적으로는 좀 건조한 것 같습니다. AI가 지배하는 시대에 아날로그적 사고에 갇혀 있어선 안 되겠죠. 영화 제작자의 눈으로 보면 경상북도만큼 숨겨진 명소가 많은 곳이 없어요. 하지만 행정에서는 관심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안타깝게도 경북은 영상위원회가 없는 유일한 지역이죠. 이제는 콘텐츠의 시대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앞서지는 못하더라도 뒤처져서는 안 됩니다. 배 : 콘텐츠의 시대를 포항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문 : 전국 청소년 영화제 심사를 하다 보면 실력이 출중한 친구들이 많아요. 학교와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영상교육 시스템을 갖춘 곳이 꽤 있습니다. 포항에서 훌륭한 콘텐츠 작가가 나올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제2, 제3의 봉준호가 포항에서 나올 수도 있어요. 지방자치단체나 학교도 인식을 전환해 영화 관련 인재 발굴에 힘써야 해요. 세상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는데 지역의 영화산업도 이런 변화를 따라갔으면 합니다. 영화는 대중 예술의 한 영역이 되었고, 앞으로 영상에 대한 소비와 제작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영상산업에 대한 교육도 학생들이 원하는 만큼 제공되어야 합니다. 배 : 감독님께서는 그동안 노동과 정치, 성(性), 종교까지 한국 사회의 굵직한 이슈를 다뤄왔는데, 앞으로는 어떤 주제를 다룰 계획인가요. 문 : 세상이 다원화되고 복잡해질수록 정치가 중요하죠. 그래서 정치 문제를 다뤄보려고 해요. 구체적으로는 태종 이방원의 장자인 양녕대군 이야기를 다뤄볼 생각입니다. 양녕대군은 왕이 되지 않을 방도를 궁리하며 스스로 비뚤어지는 독특한 인물이죠. 결국 동생인 세종이 세자에 책봉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들 간의 갈등과 투쟁이 정치가 아니겠습니까. 정치 이야기는 곧 복잡다단한 인간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여겨져요. 그리고 ‘안동포 짜기’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사라져가는 옛것에도 관심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배 : 감독님과의 대화를 마무리하며 이 질문을 드리고 싶군요. 감독님에게 영화란 무엇입니까. 문 :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위해 평생을 살아왔고, 남은 인생도 영화를 위해 살 겁니다. 앞으로 몇 작품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말 남기고 싶은 이야기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으려 합니다. 영화가 세상을 바꾸지 못해도 적어도 하나의 문제를 제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감독이 되고 싶어요. 자식들에게도 그렇고, 가장 죄스러운 부모님께도 말입니다. 끝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사진 : 김훈 작가

2024-09-04

가장 넓은 영토 지배했던 진흥왕과 아들 진지왕

신선이 먹는 복숭아가 열린다는 이야기가 떠도는 산. 서라벌 서쪽에 있는 거대한 봉우리라 해서 서악(西岳). 부처가 다스리는 불화 없는 이상향을 의미하는 서방정토(西方淨土), 또는 극락정토(極樂淨土). 지금의 경주시 효현동에 위치한 선도산(仙桃山) 일대를 신라 사람들은 위와 같이 받아들였다. 거대한 불상 ‘마애여래삼존불’이 내려다보는 곳에 다수의 왕릉이 솟았고, 신라의 첫 번째 통치자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숭배 받는 성모(聖母)가 기거했던 곳. 무언가 비밀스럽고 신비한 분위기 속에 갖가지 설화와 전설이 숨겨진 공간이 바로 경주 선도산이다. ‘두산백과’는 이곳에 자리한 유적, 그 가운데서도 왕의 유택(幽宅)으로 추정되는 능(陵)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런 문장이다. “선도산 주변에 유적지가 많다. 경주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과 무열왕릉, 법흥왕릉, 서악리 고분군 등이 선도산 자락에 있다.” ◆신라시대 선도산의 위상을 짐작케 해주는 왕릉들 지난 주말 다시 찾은 선도산. 그 산 입구 무열왕릉을 지나 10~15분쯤 야트막한 산자락을 오르면 몇 기의 봉분(封墳)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크기가 경주 시내에서 볼 수 있는 대릉원의 봉분이나 황남대총과 달리 ‘거대함’과는 거리가 멀다. 어찌 보면 소박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서라벌 백성들에게 선도산이 어떤 의미를 지녔었고, 동시에 그 시절 서악의 위상을 떠올려보면 ‘왕의 영원한 안식처’를 그곳에 만들었던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게 분명하다. 동국대 사학과 최연식 교수의 논문 ‘선도산의 신성함을 바라보는 세 가지 입장’을 먼저 살펴보자. “선도산의 신라시대 위상과 관련해서는 산의 동편 자락에 조성된 왕릉들의 존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피장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법흥왕과 진흥왕의 능이 포함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근처에 있는 다수의 왕족 및 귀족들의 고분도 왕릉과 마찬가지로 6세기 후반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시기부터 이 지역이 왕실과 귀족들의 장지로 적극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두 명도 아니다. 다수의 신라 왕이 잠들어있다고 추정되는 선도산 초입은 그런 이유로 묘한 기운이 감돈다. 한여름 뙤약볕을 피해 왕릉 주변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있으면 불어오는 한 점 바람도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것.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한 가지. 진흥왕, 진지왕과 달리 무열왕은 6세기 아닌 7세기의 신라 통치자다. 7세기에 세상을 떠난 다른 왕들은 선도산 인근이 아닌 다른 곳에 묻혔다. 헌데, 어째서 무열왕릉은 선도산 입구에 조성된 것일까? 앞서 언급한 최연식의 논문이 아래와 같은 답을 들려준다. “7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의 능은 모두 선도산을 떠나 왕경의 다른 지역에 만들어졌는데, 661년에 죽은 무열왕의 능이 다시 선도산 지역 기존 왕릉 옆에 조성된다. 이는 동륜계의 성골 출신이 아닌 진골로서 왕위에 오른 무열왕이 자신의 혈연 계보가 6세기 후반의 법흥왕·진흥왕·진지왕 등에 이어짐을 보임으로써 정치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으로 생각된다.” 이는 충분히 이해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주장이다. 고대국가는 선거라는 방식을 통해 통치권을 부여받는 현대의 공화정과 달리 권위와 신성(神性)을 바탕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였다. 신성과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하늘이 선택한 자’라는 백성들의 무조건적 믿음이 있어야 했고, 존귀한 혈통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을 터. 성골이 아닌 진골 출신 왕이라는 ‘정치적 약점’의 극복을 위해 무열왕은 ‘동일한 혈통’ 진흥왕에게 기댄 것이라는 추정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선도산 자락에서 영면(永眠) 중인 진흥왕은… 그렇다면 무열왕의 선대 혈족인 진흥왕은 어떤 사람이며 신라 역사에서 어떠한 역할을 한 권력자인지 궁금해진다. 534년에 태어나 576년 마흔두 살에 타계한 것으로 알려진 진흥왕은 ‘신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왕’으로 유명하다. ‘위키백과’는 그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해 사상적 통합을 도모했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해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돼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됐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해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돼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진흥왕 때는 신라의 전성기였으며, 정복 군주로 불렸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원산만 훨씬 너머까지 진출한 흔적은 마운령비에서 알 수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삼국통일을 ‘무열왕이 기틀을 닦고 문무왕이 완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진흥왕이 있었던 것이다. 지속적인 정복 전쟁을 통해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하고, 대가야를 병합했으며, 백제의 팽창을 저지했던 사람이 바로 진흥왕이었던 것. 그렇다고 진흥왕이 ‘비교할 대상이 드문 강한 무력을 가졌던 통치자’로만 기억되는 건 아니다. 윤희진의 책 ‘인물한국사’는 진흥왕의 예술적 심미안(審美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 “진흥왕이 지방을 시찰하던 중 가야 출신인 우륵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진흥왕은 우륵을 불러 가야금을 연주하게 했고, 552년 계고·법지·만덕 세 사람을 시켜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했다. 우륵은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친 뒤 왕 앞에서 연주하게 하니, 왕이 기뻐하며 크게 포상했다고 전한다.” ◆차남 진지왕도 진흥왕릉 곁에 묻혀 진흥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 곳곳에 순수비(巡狩碑·왕이 살피며 돌아다닌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를 세워 복속시킨 땅의 광대함을 내세워 자랑하려했던 ‘정복 군주’였다. 물리적인 힘과 예술적인 감각을 동시에 지녔던 인물이었음에도 진흥왕의 삶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그가 아끼던 장남 동륜(銅輪)이 572년 사망한 것이다. 진흥왕이 서른세 살이던 때다. 아들을 앞세운 참척(慘慽) 앞에서 그 슬픔이 왕이라고 달랐을까? 그렇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속으로는 피눈물을 쏟았을 터. 선도산 자락 진흥왕릉 지척엔 진지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무덤도 있다. 진지왕은 죽은 형 동륜을 대신해 보위(寶位)에 오른 진흥왕의 차남이다. 역사학계는 그를 아버지와 달리 인색하게 평가한다. ‘삼국유사’와 ‘화랑세기’ 같은 고문헌은 진지왕을 “방탕하게 생활하다가 끝내 폐위되어 쓸쓸하게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지왕릉이 다른 왕릉에 비해 작은 게 그런 이유가 있어서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재위 기간 역시 576년에서 579년까지로 3년 남짓한 시간이었기에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지왕은 김춘추(무열왕)의 조부로 오랜 시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이것 하나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건 선도산 아래쪽엔 증조부(진흥왕), 조부(진지왕), 손자(무열왕)가 함께 잠들어 있다. 아버지 진흥왕은 20대에 요절한 아들 진지왕의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삶을 측은하게 생각하고 있을지.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9-03

‘농심 품은’ 영주 농·특산물로 추석 감사의 마음 전해요

수확의 계절, 넉넉함이 있는 가을이다. 가을은 나눔의 계절이기도 하다, 풍성한 마음과 농심이 가득 담긴 가을걷이는 명절인 추석을 맞아 좋은 사람과 함께 나누는 따뜻함이 담겨 있다. 영주시에서 생산되는 농특산물이 소비자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제품의 우수성 때문이다. 소백산 기슭에서 자란 다양한 농축산물은 맑은 공기, 맑은 물, 우수한 토양과 기후, 그것에 더해 정성과 땀방울로 농심을 담았기 때문이다. 영주시에서 생산되는 특산품들은 소백산록의 자연환경과 전통기법에 따른 생산 방식을 선택해 그 맛과 품질이 우수해 추석 선물 및 제수용품으로 그 가치성이 높이 인정되고 있다. □ 풍기인삼 국내 최초 재배삼의 시효지인 영주 풍기 지역은 500여년의 재배인삼 역사를 통해 우수한 인삼을 생산하고 있다. 소백산록의 유기물이 풍부한 토양에서 생산되는 풍기인삼은 타 지역 인삼에 비해 내용과 조직이 충실하고 인삼향이 강하며 유효사포닌 함량이 매우 높다. 특히, 다양한 홍삼제품은 웰빙건강 식품 뿐만 아니라 선물용으로도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 홍삼제품은 홍삼절편삼, 홍삼차, 홍삼정과, 홍삼정, 홍삼타브렛, 홍삼액, 홍삼분말, 인삼분말, 홍삼정, 홍삼캡슐, 홍삼비누, 홍삼제리, 홍삼캔디 등이 있다. 인삼은 혈압조절, 간장보호, 항암작용, 항당뇨, 피로회복, 식용증진, 면역력 강화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영주사과 영주시는 국내 사과 생산의 14.5%를 차지하는 전국 제1의 사과 주산지로 백두대간의 주맥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분기하는 지역의 소백산 남쪽에 위치한 산지 과원에서 생산, 풍부한 일조량과 깨끗한 공기,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에 의해 맛과 향이 뛰어나며 성숙기 일교차가 커 사과의 당도가 높다. 영주사과는 대부분 15kg 상자로 포장되어 출하되고 있으나 다양한 소비자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포장단위를 5kg, 10kg 단위로 다양화 체제를 갖췄다. 사과는 피로회복, 피부미용, 위장장애 등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영주한우 천혜의 환경을 자랑하는 소백산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에서 사육된 영주한우는 개량된 암소에 1등급 정액으로 인공수정해 생산된 우량 숫송아지를 5-6개월에 거세하고 한우고급육 표준사양관리프로그램에 의거 사육한다. 비육 후기에는 특수사료 급여와 초음파 육질진단을 실시해 출하적기를 판단, 고품질의 육질만을 생산·판매한다. 영주한우는 위생 및 질병 안정성을 위해 부루세라병 등의 악성가축전염병을 차단하고 축산물의 위생·안정성에 대한 소비자 신뢰확보를 위해 사육 ·도축·가공·판매에 이르기까지 정보를 기록·관리하는 쇠고기이력추적시스템을 2006년부터 실시해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안전한 축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 풍기인견 풍기인견은 천연섬유라 가볍고 시원하며 몸에 붙지 않고 통풍이 잘 되며 땀띠가 예방되고 촉감이 좋아 냉장고 섬유, 에어컨 섬유라 불린다. 인견은 땀 흡수력이 탁월하며 정전기가 없고 부드러우며 식물성 자연섬유로 피부가 여린 갓난아기, 알레르기성 피부, 아토피성 피부 등 피부가 약한 분들에게 좋은 건강섬유다. 가볍고 얇아서 여름 실내복, 반바지, 잠옷, 침구류, 천연염색을 한 외출복 등 다양한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어 선물용으로 인기가 많다. □ 영주복숭아 소백산 자락의 청정 자연환경 속에서 자란 영주복숭아는 과실이 크고 육질이 연하며 과즙이 많고 당도가 매우 높을 뿐 아니라 비타민A와 펙틴이 풍부하여 향이 뛰어나다. 복숭아에 함유된 구연산 등 유기산은 니코틴 해독과 항암작용, 펙틴 성분은 장을 부드럽게 해 변비에 좋으며 혈액순환을 도와 관상동맥경화 등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복숭아는 단맛이 강하지만 실제 당분은 10% 정도에 불과하며 펙틴 성분 때문인 포만감으로 다이어트에도 도움을 준다. □ 단산포도 단산포도는 간이비가림 시설과 저농약 고품질 호맥재배로 생산 되는 유기물 생산품이다. 단산 포도는 미숙과는 출하하지 않고 적정량을 착과시켜 품질이 우수하다. 특히, 유기물효소를 균형시비하고 선과와 포장을 철저히 관리한다. 단산포도의 특징은 포도생육에 가장 적합한 최적의 기후조건과 비옥한 토양에서 유기농업으로 재배해 육질이 조밀하고 맛과 향이 뛰어나다. □ 소백산 오정주 옛날 사대부가의 선비들이 건강 약용주로 마시던 술로서 소백산 청정약수, 우리 쌀, 우리 밀로 만든 누룩, 소백산에서 자생하는 약초로 빚어 만든 전통 명주다. 저온에서 백일이상 장기 숙성해 뒤끝이 깨끗한 오정주는 영주시 고현동 박찬정가에서 4대째 그 비법을 전수해 오고 있다. □ 정도너츠 영주지역에서 생산되는 국내산 찹쌀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찹쌀 도너츠로 지역의 특산물인 인삼, 사과, 생강, 고구마 등을 재료로 만든 웰빙 식품이다. 찹쌀을 주재료로 해 밀가루로 만든 도너츠 보다 영양 성분검사를 해보면 적개는 7배 많게는 10배 이상 지방함량이 낮게 나오며 콜레스테롤과 트렌스지방이 0%로 먹을거리로 맛과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 순흥 기지떡 기지떡은 서리꽃처럼 희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상화떡, 상화병이라고도 하며 기지떡은 술로 빚어 여름철에도 쉬지 않아 오래두고 먹을수 있다. 칼로리가 낮고 속을 든든하게 해줘 여성들의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인기가 높다. 한국 전통음식 조리법을 대표하는 발효 과정을 거친 떡이라 살아있는 유산균 덩어리로 단순한 계절떡, 의례떡과 달리 기지떡은 건강을 생각한 고품격 떡이다. □ 상떼마루 천혜의 자연속에서 재배된 지역 특산물인 영주사과로 만든 100%순수 천연제품으로 설탕과 알코올이 전혀 첨가되지 않은 제품이다. 상떼마루 아이스와인은 2013년 샌프란시스코 국제와인품평회에서 은상을 받은바 있는 지역 특산품이다. □ 선비촌 한과 전통의 맛을 지켜가는 선비촌 한과는 영주지역의 특산품인 인삼, 마, 자연 식품인 쑥, 솔잎 등을 이용해 생산되고 있다. 달지않고 담백하며 고소한 맛이 특징으로 제수용, 선물용, 혼수용으로 구분 생산된다. □ 고구마빵 맑고 깨끗한 청정지역 영주에서 재배 가공한 자연 웰빙 건강제품으로 고구마는 칼륨성분이 많은 알칼리성 식품으로 소화촉진, 변비해소, 노폐물 배출, 간의 신진대사, 피부노화 방지, 체내지방 분해, 체중감량에 효과적이며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 및 식이섬유가 함유된 국내산 100% 고구마로 만든 빵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수 있는 고구마빵이다.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4-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