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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10,000여 참가자들, 포항 영일만 앞바다 뜨거운 레이스

아름다운 영일만 앞바다의 풍경을 무대로 8000여 명의 건각들이 힘찬 레이스를 펼쳤다.  전국 마라톤 동호인들의 축제인 ‘2024 제8회 포항 철강 마라톤(Steel Run!) 대회’가 지난달 31일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일원에서 화려하게 개최됐다.  경상북도와 포항시가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한 이번 대회에는 전국 각지의 마라톤 동호인 8천여명과 가족, 지역 주민 등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이강덕 포항시장을 비롯해, 김일만 포항시의회 의장, 김정재·이상휘 국회의원, 이정우 경북도 메타 AI 과학국장, 최윤채 경북매일신문 대표가 참석해 축하의 인사말을 전했다. 또 박용선, 이칠구, 손희권 경상북도의원, 나주영 포항상공회의소 회장, 전익현 포항철강관리공단 이사장, 천시열 포스코 포항제철소장, 이재한 포항시체육회장, 김종익 포항시의회 운영위원장 등 지역 각계 인사들이 건각들과 함께 달리며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행사는 남·녀 개인 10㎞(STEEL Run), 남·녀 개인 일반 5㎞(FUN Run), 남·녀 개인 학생부 5㎞(Z-Run) 등 6개 부문으로 나눠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푸른 동해 바다를 보며 질주하며 그동안 갈고 닦아온 기량을 선보였다. 남자 개인 10㎞ 부문(STEEL Run)은 박현준씨가 32분36초07의 기록으로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또 여자 개인 10㎞ 부문 우승은 38분12초07로 완주한 정순연씨가 거머쥐었다. 개인 5㎞ 부문 남자는 감진규(16분23초)씨가, 여자는 박교빈(20분47초)씨가 각 1위로 골인했다. 학생 5Km 부문 남자는 정지성(20분05초)군과 여자 조미라(25분42초)양이 이름을 올렸다. 마라톤이 끝나고 진행된 시상식에서는 기념 메달과 상품 등이 수여됐다. 이후 참가자 전원을 대상으로 한 추첨을 통해 다양한 경품을 전달하는 행사도 진행해 대회의 풍성함을 더했다.  최윤채 경북매일신문 대표는 환영사에서 “1만여명에 달하는 참가자들이 포항철강 산업발전을 염원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면서 “지금 이 순간 참가자들이 보여주는 열정과 정열, 용기와 힘이 모여서 포항 철강산업이 세계 속의 중심지로 다시 우뚝 설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강덕 포항시장도 “아름다운 바다와 함께 활력 있고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면서 “대회에 참가한 여러분 모두 힘내라”고 응원했다. /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대회 이모저모 ○…“내년에는 또 다른 코스튬을 입고 참가할 거예요!”  31일 ‘스파이더맨‘복장으로 대회에 참가한 정우남 (32·경주)씨는 선수와 가족 등 1만 명이 모인 마라톤 참여자 중에 단연 돋보였다.  정 씨는 지난해에 ‘캡틴 아메리카’복장을 하고 이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 분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면서 자신도 꼭 코스튬을 하고 마라톤을 한 번 뛰어 보고 싶었다며 이색 복장 착용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이날  다소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코스튬을 입고 10㎞ 마라톤을 완주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날 출발 전에 스파이더맨 복장을 한 정 씨가 행사장에 나타나자 참가자들이 함께 사진을 찍자며 몰려드는 등 정 씨는  이날  대회 내내 인기남이 됐다.   ○…미국에서 온 사업가 더스틴 앨런는 전투복을 입고 참가, 주목을 끌었다. 그는 “포항이란 도시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뛰기에 좋은 곳”이라며 해병대는 포항의 또다른 상징이어서 전투복을 입고 나왔다고 했다.  평소 달리기를 꾸준히 했지만 마라톤은 처음이라는 그는 기록을 세우기보단 완주를 목표로 세우고 참가했다고 했다. 이날 진행된 포항철강마라톤에는 더스틴 앨런을 포함한 다수의 외국인이 참여해 글로벌한 행사가 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포항제일교회에서 박영호 담임목사와 김경원 부목사 등 10명의 목사와 신자들이 대회에 참가, 포항철강발전을 염원했다.  첫 출전임에도 이 교회는 단체 부스를 설치, 청년부 등 참가자들을 격려하고 응원하기도 했다.  신자들은 “아름다운 영일대 해수욕장에서 자연을 느끼고 달리기 하는 동안 묵상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더 깊은 교감을 할 수 있었다”면서 “내년에도 기회가 된다면 더 많은 성도들과 함께 뛰겠다”고 전했다.  포항의 대표적 교회를 이끌고 있는 박영호 담임목사는 “올 초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 마라톤을 시작했다"면서  달리기는 단순한 운동을 넘어 기도의 한 형태, 또는 신앙 성장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뛰는 운동을 예찬했다. 이날 참가 목사들은 5㎞ 코스를 완주, 신자들의  아낌없는 박수를 받았다.  ○…철강마라톤 최고령 참가자는 10㎞ 코스를 완주한 한기식(78)씨. 한 씨는 “마라톤을 좋아해서 56년간 꾸준히 대회도 나가고 연습을 틈틈히 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한씨의 마라톤 경력은 예사롭지 않아. 국내외 마라톤 경기부터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까지 뛰었을 정도로 마라톤에 진심이다.  한 씨는 마라톤에 대해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운동, 완주 했을 때 뿌듯함이 크다”고  극찬과 애정을 드러냈다. 대회 최연소 참가자는 돌이 채 지나지 않은 11개월 이도율(2023년생) 아이였다. 도율이네 가족은  이날 아빠 이근주(37), 엄마 조아라씨(34), 누나 지율(4)이 등 4식구가 함께 출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윤희정·단정민기자/김채은수습기자·성지영인턴기자 남자 10㎞ 우승 박현준“아침 햇살 반짝이는 바다보며 달리니 즐거워” “생각보다 기록이 잘 나와서 너무 만족스럽습니다.” 31일 포항철강마라톤 남자 개인 10㎞에서 32분 36초의 기록으로 1위를 차지한 박현준 씨(41·대구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1위를 차지한 그는 이날 RMC런마클 크루들과 함께 마라톤에 참가했다. 박 씨는 “평소 주 2회 가볍게 러닝을 해왔다”며, “8㎞ 지점에서 맞바람이 불어 힘들었지만,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보며 달릴 수 있어 즐거웠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 날씨가 많이 덥지만, 러닝이 큰 인기를 얻고 있어 뿌듯하다”며, “다들 건강에 유의하시고 즐거운 러닝 하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남자 5㎞ 우승 감진규“3회 연속 우승… 마라톤은 내 삶의 활력소” “마라톤은 내 삶의 활력소입니다.” 남자 개인 5㎞에서 16분23초 성적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감진규(31·부산)씨는 지난해 포항철강마라톤대회에 이어 3연승을 달성했다. 감씨는 “철강마라톤 1회부터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첫회에 우승하고 2022년부터 올해까지 계속 1등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소방공무원으로 재직 중인 그는 “친구들과 취미로 마라톤 대회에 나갔는데, 그게 너무 재밌어서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감씨는 지난해 본인 기록보다 24초 앞당긴 것에 대해 “스마트 워치를 안 차고 왔다. 2, 3등과 같이 맞춰 가려고 했는데 뛰다보니 욕심이 생겨서 기록을 빨리 당긴 것 같다”고 밝혔다.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학생부男 5㎞ 우승 정지성“두번째 참가해 1위… 막판까지 열심히 뛰어” “이번 대회가 2번째 마라톤 참가였는데 우승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습니다.” 학생부 5km에서 우승한 동지고 3학년 정지성(19) 군은 뜻밖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솔직히 눈 앞에서 남자 초등학생이 열심히 뛰어 가길래 뒤따라 가게됐는데 들어와보니 1등이라고 하더라며 환하게 웃었다.   학교 유도부 선수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대학교에 진학해서도 계속 운동을 하고 싶다면서 내년에는 일반부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번에 유도부 코치선생님께서 대회에 나가 체력테스트를 한 번 해 보라고 해서 참가했는데 뜻밖의 성적까지 냈다며 코치선생님께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우승 상금으로 같이 대회에 참가한 친구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게 된 것이 너무 기쁘다는 그는 "영일만 앞 바다를 보며 뛴 포항철강마라톤에서 우승했다는 추억은 나에게는 영원히 기억될 소중한 자신"이라고 말했다.  /이석윤기자 lsy72km@kbmaeil.com 여자 10㎞ 우승 정순연“즐기려고 출전했는데 좋은 결과 얻어” “즐기려고 왔는데 더워서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앞에 뛰는 남자분들 보면서 끝까지 뛰었더니 좋은 결과를 얻은 것 같다” 31일 포항철강마라톤 여자 개인 10㎞에서 38.13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정순연 씨(51·대구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30대에 마라톤에 참여해 본 경험이 있는 정순연 씨는 51세의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마라톤을 뛴다. 그녀는 평소 러닝동호회 사람들과 주 3회 짧게는 5㎞ 길게는 10㎞ 러닝하며 체력을 길렀다. 언제가 가장 고비였냐는 질문에 정 씨는 “5㎞가 딱 넘어갈 때 너무 힘들었다. 평소에 연습할 때도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 그래도 걷지만 말자, 걸으면 여태 뛴걸음들이 다 무너지는 거다”라고 마음을 다 잡았다고 전했다. /성지영 인턴기자 thepen02@kbmaeil.com 여자 5㎞ 우승 박교빈“10년 만에 결승 골인… 달리는 모든 순간 좋아” “10년 만에 결승선을 뚫었는데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2024 포항철강마라톤 여자 개인 5㎞(FUN RUN) 우승자 박교빈(22)씨는 20분 47초를 기록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박씨는 중학교까지 체전을 준비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운동을 잠시 쉬다 올해 포항공과대학을 조기졸업한 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박씨는 “마라톤이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며 “공부와 운동 모두 체력이 중요한 만큼 달리기를 통해 길러둔 기초체력을 바탕으로 학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철강마라톤 FUN RUN 구간에 대해서는 “평지가 많은 데다 구간 통제도 아주 잘 돼 원활하게 경기를 치룰 수 있었다”며 “바닷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모든 순간이 좋았다”고 평가했다. /구경모기자 gk0906@kbmaeil.com 학생부女 5㎞ 우승 조미라“서울서 포항 방문… 가족들 응원 덕분에 1등 ”  이번 대회 학생부 5km 여자 1등은 12세 조미라(초등학교 6학년) 양이 차지했다.  서울시 구로구에 살고 있다는 조 양은 마라톤 대회 참가는 처음이었는데 가족들 응원으로 1등을 한 것 같다고 기뻐했다.   어릴 때부터 마라톤에 관심이 많았다는 조양은 “우승 상금으로 아빠 엄마에게 맛있는 것을 사드릴 생각”이라며  소감을 전했다.  포항은 이번 대회 때문에 처음 오게됐다는 조 양은 “포항은 바다도 예쁘고 자연 환경이 참 좋다고 생각해요”라며 귀엽게 살짝 웃었다.   조 양을 데리고 온 아버지 조성연 씨는 "포항까지 거리는 좀 멀었지만  막상 대회에 참가하고 보니 가족들 모두 아주 만족했다"면서 특히 바다를 보면서 뛰는 것이 아주 특별했다며 “내년에도 기회가 되면 꼭 참가하겠다”고 밝혔다. /이석윤기자 lsy72km@kbmaeil.com

2024-09-01

“아무리 힘들어도 하고 싶은 얘기를 할 터”

영화는 시스템 자체가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종합예술입니다. 투자를 받으면 규제나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지요. 투자자는 수익을 우선시하기 마련이고요. 결국은 투자자와 협상하고 타협을 봐야 하는데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만드는 영화는 사회적 이슈를 담아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을 비트는 주제는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런 영화는 투자를 받기 힘들고 흥행도 기대할 수 없어요. 운이 좋으면 상을 받기는 하겠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몸에 안 맞는 옷은 입지 않으려 합니다. 적은 예산으로 영화 만들기는 힘들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나는 가난할 수밖에 없어요. 영화는 “시간을 봉인하는 예술”이라고 한다.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저마다의 시절과 인연을 떠올린다. 상상과 사유의 안락의자에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렇지만 스크린을 직조하는 영화인에게 안락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스태프들의 일터이자 관객 수와 투자자와의 끊임없는 눈치싸움이다. 영화가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른 점은 자본의 힘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영화계에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면서 그런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사이에서 고민하던 문 감독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에 녹여내기 위해 기나긴 준비 과정에 돌입한다. 문 감독에게 이 시기의 영화는 ‘시간을 인내하는 예술’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10여 년의 공백기 끝에 영화 ‘원죄’를 세상에 내놓았다. 배 : 연극 ‘미란다’로 법정 공방을 벌이면서도 같은 제목의 영화를 내놓으며 화제를 모았는데 그 후로는 공백기가 길었습니다. 문 :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작품을 만들다 보니 저항에 부딪혔지만 감당할 자신이 있었죠. 창작자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관람자의 비판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사회가 그로 인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문제는 자본입니다. 영상산업은 자본이 수반되어야 하니까요. 경제 논리와 나의 예술세계가 다르니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어요. 배 : 연극 ‘미란다’가 화제성이 컸던 만큼 돈은 좀 벌지 않았나요. 문 : 그 돈으로 영화 ‘미란다’와 ‘콜렉터’를 제작했어요. 하지만 자비로 만드는 영화는 한계가 있지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기업의 자본이 영화계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영화계 구조가 바뀌고 배우 개런티도 큰 폭으로 올랐지요. 영화는 시스템 자체가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종합예술입니다. 투자를 받으면 규제나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지요. 투자자는 수익을 우선시하기 마련이고요. 결국은 투자자와 협상하고 타협을 봐야 하는데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려면 가게를 하든 사업을 해야지, 영화는 맞지 않아요. 그래서 이걸 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깊었어요. 한국 영화는 1990년대 들어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마주한다. 한국 영화가 예술에서 산업으로 거듭나는 시기였던 것이다. 영화계는 1990년대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1990년대 한국 영화산업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1995·96년 흥행 순위 10위 내 작품 대부분이 대기업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일 정도로 대기업 자본은 한국 영화산업의 가장 중요한 자금원이 됐다. 대기업의 막대한 자금이 영화계로 흘러들어오자, 영화 제작비와 마케팅비는 점차 상승하고 한국 영화의 대형화가 시작됐다. 영화계에 유입된 대기업 자본을 바탕으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여 영화 제작의 전문화를 이뤘으며, 영화산업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대기업 자본과 영화 인력의 결합으로 제작된 기획 영화는 영화를 예술이 아닌 상품으로 간주하면서 한국 영화는 ‘산업’으로 거듭났다. - 김소영·백해린·임대근, ‘한국 영화의 역사와 미래’, 컨텐츠하우스, 2018, 100쪽·120쪽. 배 : 긴 공백을 깨고 2018년에 나온 영화가 ‘원죄’입니다. 힘든 삶을 살면서도 세상의 동정을 거부하는 아버지와 딸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려는 수녀의 이야기를 그렸죠. 문 : 열악한 상황에서도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신학대학에 진학했어요. 신학 공부를 10년 가까이 한 뒤 목사 안수를 받고 1년여 동안 교회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 영화를 만들었고, 사회적으로 터부시하는 문제여서 더 철저하게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배 : 신학적인 주제를 담으려 목사 안수까지 받았다고요.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는 각오였나 봅니다. 문 : “하나님은 나를 심판하고 나는 하나님을 심판한다.” 영화 포스터에 이렇게 적혔습니다. 선천성 지체 불구자인 주인공은 스스로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영화는 하나님의 사랑과 목회자가 보는 시선이 얼마나 다른지를 고발합니다. 가식적인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희생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이 순간 가장 힘들고 어렵고 죽어가는 사람 곁에 있습니다. 하지만 세속의 교회당은 헌금을 받고 죄를 사하여 달라고 예배를 드립니다. 배 : 종교를 주제로 다루기 위해 종교인들과 대화도 나누었나요. 문 : 교회에 관한 주제를 담으려고 국내 유명한 목회자를 여럿 만났습니다. 서울 강남에 10만 가까운 신도가 있는 교회를 떠나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목사님도 계십니다. 존경하는 분이죠. 그리고 두 살 아래 제 동생이 승려이기도 합니다. 배 : 그 동생도 영화를 관람하셨나요. 문 : 시사회 때는 안 왔어요. 내가 3남 1녀의 장남인데 바로 아래 동생입니다. 일찍 출가한 동생은 형제나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어요. 포항의 조그만 사찰에 있죠. 배 : 형은 목사, 동생은 승려라니 평범한 가족은 아니군요. 문 : 부모님은 순박한 분이셨어요. 내가 영화 한다고 했을 때 다른 부모라면 두들겨 패기라도 했을 텐데……. 자녀들이 하고 싶은 걸 꺾지 못하셨어요. 되돌아보면 죄스럽죠. 두 분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더 아쉬워요. 배 : 영화 ‘원죄’는 주제와 서사도 충격적이지만, 흑백의 미학적인 화면과 연극적인 장면, 시적인 대사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문 : 내가 남의 작품을 못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대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입니다. 표현은 절제하고 반어법을 많이 쓰는 편이죠. 표현하면 할수록 상상력은 줄고 절제할수록 상상력은 늘어납니다. ‘원죄’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수녀를 카메라가 멀리서 잡아요. 보통은 수녀의 표정을 클로즈업했겠지요. 표정을 모를 때 상상하게 되고 감동의 폭은 커집니다. 그런 보너스를 왜 버리겠어요. 나는 반어법도 즐겨 쓰는데, 호감 가는 사람에게 보기 싫다고 말하는 식이죠. 그러다 보니 배우들이 오해한 적이 많아요. 물론 친절한 설명을 삼가니 호불호가 갈립니다. 배 : 영화의 결말도 충격적입니다. 마지막 장면은 파격적이었어요.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완전히 다르기도 하고요. 문 : 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편집을 모두 끝내고 재촬영했어요. 배우들이 왜 재촬영을 해야 하는지 물었죠. 편집해놓고 보니 스스로 용서가 안 되었어요. 아버지를 죽이고 자살하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으로 끝내는 건 아니다 싶었죠. 등장인물들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관객과 나를 위해서라도 다른 장면이 있어야 했어요. 춤을 통해 그들이 세상 또는 신과 화해하고 고통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담고 싶었어요. 춤추는 내내 들리는 웃음소리는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작품 ‘미궁’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배 : ‘원죄’로 2018 뉴질랜드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제29회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제24회 춘사영화제 심사위원 특별 작품상, 제38회 황금촬영상영화제 촬영 대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유난히 상을 많이 안겨준 영화입니다. 문 : ‘원죄’시사회 때 목사님 50명을 초대했는데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나가버리더군요. 그 일이 있고 난 뒤 일본 유바리 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과 함께 초청을 받았어요. 국내에서 별 반응이 없던 영화를 일본에서는 심사위원 전원이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춘사국제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감독상을 받았고, ‘원죄’는 특별 작품상을 받았어요. 수상 소감에서 “‘기생충’이 300억짜리 영화인데 ‘원죄’는 1억 5천짜리 영화”라고 했더니 큰 박수가 나오더군요. 기독교윤리실천위원회에서도 움직이지 않았고요. 저들에게 빈틈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준비를 철저히 한 것이 실수였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 : 영화는 논쟁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문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만드는 영화는 사회적 이슈를 담아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을 비트는 주제는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런 영화는 투자를 받기 힘들고 흥행도 기대할 수 없어요. 운이 좋으면 상을 받기는 하겠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몸에 안 맞는 옷은 입지 않으려 합니다. 적은 예산으로 영화 만들기는 힘들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나는 가난할 수밖에 없어요.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사진 : 김훈 작가

2024-09-01

“빠듯한 생활비에 자식 부담될까… 할 수 있을 때까지 해야죠”

퇴직 후에도 경제적 이유로 노동 시장에 남아야 하는 고령층의 현실은 고단하다. 포항시 남구 효자동에 살고 있는 A씨(70)는 50대 초반 대기업에서 퇴직한 후 몇 년간 작은 가게를 운영했지만, 경기 악화와 매출 부진으로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 50대 후반부터 다시 일자리를 구해 일을 해왔고, 현재는 대형 마트에서 출납원으로 일하고 있다. A씨는 “몸이 예전 같지 않아 힘들지만, 생활비 마련과 자녀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 어쩔 수 없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쉴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2022년 기준, 한국인의 평균 퇴직 연령은 49.3세. 실질적으로 노동 시장에서 퇴장하는 나이는 72.3세로 조사됐다. 고령층이 퇴직한 후에도 약 23년간 다른 일자리를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의미다. 66세 이상의 노인 인구의 소득 빈곤율은 40.4%로, OECD 평균 14.2%의 세 배에 달해 우리나라 고령층의 경제적 불안정성이 심각한 수준임을 보여준다. 포항시 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B씨(66)는 “국민연금을 받긴 하지만, 그 돈으로 생활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경비원 일은 다행히 나이 제한이 덜해서 내 나이에도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다. 월급과 국민연금을 합쳐야 겨우 생활이 가능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지난달 3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3년 12월 기준 국민연금 공표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중 국민연금을 받는 사람은 498만명으로, 전체 973만명 중 무려 51.2%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수급률이 노인 인구의 절반을 넘어선 것은 1988년 제도 도입 이후 최초다. 월평균 연금 수령액은 82만원 정도다. 국민연금만으로 안정된 노후를 기대하기 어려운 고령층이 노동 시장에 재진입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여겨진다.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5월 경제활동인구 조사 고령층 부가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고령층 55~79세 인구는 1598만3000명으로 전년동월대비 50만2000명 증가했다. 고령층 경제활동참가율은 60.6%로 전년 동월 대비 0.4%p 늘었다. 고령층 취업자는 943만6000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31만6000명 증가, 고용률은 59.0%로 0.1%p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장래 근로 희망자는 1109만3000명으로 전년동월대비 0.9%p 상승, 희망 근로 연령은 평균 73.3세로 0.3세 증가했다.경북도의 경제활동 인구 현황에 따르면 55~64세 예비노인은 69만2000명, 65세 이상 노인은 59만 9000명으로 집계됐다. 대구시의 경제활동 인구는 55~64세 예비 노인이 53만1000명, 65세 이상 노인이 22만800명으로 드러났다. 포항시의 노동 연령 별 취업자는 50~64세 9만1200명, 65세 이상 취업자는 3만5400명으로 조사됐다.김진홍 포항시지역학연구회 연구위원은 “한국의 고령층이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노동 시장에 남아야 하는 현실은 사회적 안전망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지방정부는 은퇴 고령자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의 선택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필요한 재교육, 재훈련의 역할을 지역의 대학과 협력 연대해 예비 고령자들의 전반적인 지식과 직업 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지역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황영훈 포항 시니어클럽 관장 인터뷰 / 황영훈 포항 시니어클럽 관장“고령자 경험·능력 활용 가능한 양질의 일자리 마련돼야”저소득층·고연령 어르신 위한단순 노무직·공공근로에 집중경제적 자립·자아실현 충족 못해보상·근무형태 등 맞춤지원 기대 은퇴후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다양한 취미생활에 몰입하면서 평온한 노년을 보내는 것은 이제 꿈이 되어 버렸다.한국의 고령층들은 경제적 이유로 노동 시장에 계속 남아야 하는 상황이다. 평균 퇴직 연령은 49.3세지만, 실제 노동시장에서의 퇴직 연령은 72.3세다. 심지어 66세 이상의 노인 중 40.4%가 소득 빈곤에 처해 있으며, 국민연금만으로는 안정된 노후를 기대하기 어렵다.황영훈 포항 시니어클럽 관장은 고령근로자가 증가하는 원인에 대해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주된 원인이라고 밝혔다.1955~1963년 사이에 태어난 이 세대는 약 713만 명에 이르며,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은퇴를 시작했다는 것.“은퇴는 했지만 경제적 필요, 건강 개선, 사회적 참여 욕구로 인해 이들은 꾸준히 일자리를 찾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령 근로자가 증가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황 관장은 고령 근로자의 사회적 역할이 커지고 있지만, 이들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현재 대부분의 노인 일자리는 저소득층과 고연령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공익형 일자리에 편중되어 있어, 이들의 경험과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자리는 낮은 임금과 제한된 근로 시간으로 경제적 자립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아, 고령 근로자들의 자아실현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죠.”노인일자리의 대부분이 시청이나 동사무소에서 주선해주는 단순 노무직이나 공공근로에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그나마 지속적이지 않은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무엇보다 노인 일자리 사업의 다양화와 전문화가 필요합니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역량을 활용할 수 있는 기술 교육, 창업 지원, 사회적 기업 연계 등의 프로그램도 필요합니다. 또한 사회참여 기회를 확대해야 합니다. 고령 근로자들이 교육, 문화,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원봉사나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황 관장은 또 노인들이 꾸준히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과에 따른 보상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맞춤형 지원과 인센티브 제공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유연근무제나 시간제 근무 등 다양한 근무 형태를 제공하고 보상(급여)도 성과에 맞게 현실화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노인들도 보람과 성취감을 가지고 일을 하죠.”황 관장은 노인일자리 문제는 단순히 노인에게 일자리를 시혜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노인들의 경험과 경력을 사회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라며 “지역 내 기관 및 기업과 협력해 맞춤형 일자리를 제공하고 성과를 토대로 성공모델을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2024-08-28

‘첫 국·공립 통합대학’ 국립경국대, 내년 3월 첫발 내딛어

지속적인 학령인구 감소와 지방기피 현상으로 지방 대학교들이 큰 위기를 맞으며 자구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경북도립대와 국립안동대는 이같은 교육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통합을 추진해 왔다.두 대학은 마침내 전국 최초로 국·공립대 통합대학교를 출범한다. 교명은 ‘국립경국대학교’로 짓고 2025년 3월 새롭게 출발한다.국립경국대는 경북도와 지자체, 유관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경북도의 대표 거점 국립대학으로 지역사회의 발전을 견인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대학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 전국 최초 국·공립 통합대학 출범경북도립대학교와 국립안동대학교는 학령인구 감소와 급격한 산업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대학교육체제 전반의 변화와 혁신을 선도하고자 대학 통합을 추진해 마침내 교육부의 승인을 받아 2025년 3월 ‘국립경국대학교’로 새롭게 출범한다.통합의 주요내용은 △(학사조직) 학부 12, 학과 15, 대학원 4(일반 1/특수 3) 운영 △2025학년도 입학정원 1539명 선발 △(행정조직) 총장 1, 부총장 2, 4처 1국 1본부 1센터, 4행정실 운영 등이다.국립경국대학교는 전국 최초의 통합 국·공립 통합대학이자 경상북도 지역대표 거점 국립대학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안동, 예천캠퍼스가 소재한 지자체, 산업체, 공공기관과 유기적 네트워크를 기반한 통합대학으로서 경북 중심의 새로운 거버넌스 구축, 지역 특화 산업과 연계한 인문, ICT, 바이오, 백신 및 공공수요 분야 특성화와 교육여건 개선을 통해 통합대학교의 경쟁력을 확보해 나갈 계획이다. 안동캠퍼스는 인문, ICT, 바이오, 백신 분야를 특성화 분야로 전통문화 기반 K-인문 글로컬 인재양성, 농생명과 공학 간 융합을 통한 AgTech 인재양성, 지·산·학·연 협업 기반 경북백신산업 성장 견인을 목표로 한다.또한 학과 간 벽을 허물 수 있는 융합교육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인문사회·IT 단과대학 같은 융합단과대학을 운영하며 전공 분야가 상이한 전공을 통합한 광역 학부제를 추진한다.예천캠퍼스는 축산, 응급구조 등 공공수요 분야를 특성화를 통해 지역 공공수요 기반 인재양성을 통한 지역발전 선도를 목표로 한다. 향후 지역수요 기반의 새로운 전공 신설과 함께 글로벌 한글학교 등을 설치해 캠퍼스별 차별화된 특성화 전략을 추진한다.캠퍼스별 특성화를 기반으로 지역 맞춤형 인재 양성 및 청년들의 지역정주 유도를 통한 지역소멸 예방에 기여하고 다양한 계층에 맞춤형 교육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대학의 책무를 다할 예정이다. □ 광역 학부제 통합모집국립경국대학교는 2024년 9월 9일부터 9월 13일까지 2025학년도 신입생 수시 원서접수를 실시한다. 선발인원은 정원 내 1521명, 정원 외 86명을 포함한 전체선발인원 1625명의 98.9%인 1607명을 수시에서 모집한다.특히 이번 수시모집은 작년 학과 단위 개별모집과는 달리 광역 학부제 통합모집을 통해 학부 내 전공선택권을 100% 보장한다.학부 입학생은 1학년 2학기에 학부 내 전공을 자유롭게 선택(사범대학 전 학과, 간호학부, 성인학습자학부 제외)할 수 있으며 학과(전공)를 선택한 이후에도 자유전과제를 통해 학년 제한 없이 학과(전공) 변경이 가능하다. 국립경국대학교는 경북지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다양한 혜택도 마련했다. 2025학년도 신입생을 대상으로 경북도에 주소를 둔(2025. 6. 30. 기준) 학생에게 1년간 등록금이 면제된다. 안동시·안동시의회와의 협약에 따라 안동시에 주소를 둔 신입생에게는 매년 100만 원의 학업장려금이 지원된다. 이외에도 천원의 아침밥 사업, 다양한 장학제도, 풍부한 해외연수 등 학생들의 복지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정안진기자 ajjung@kbmaeil.com

2024-08-28

“예술의 사명은 그릇된 통념을 깨는 것”

문신구 감독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줄기는 사회적 금기에 대한 도전이다. 문 감독은 1990년대 중반 연극 ‘미란다’로 외설 시비에 휘말리며 법정에 서게 된다. 이 사건은 언론의 문화면보다 사회면에 더 자주 등장했다. 이후 연극 ‘미란다’는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연극보다 영화가 더 충격적이라는 세간의 평을 들었다. 문 감독이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들어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던 충무로 시기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배은정(이하 배) : 10대 중반에 상경한 후 이만희 감독의 연출부에서 일하면서 영화계 경력을 쌓으셨습니다. 주로 어떤 작품을 했나요?문신구(이하 문) : 닥치는 대로 했죠. 장르도 역할도 가리지 않았어요. 글도 쓰고 연기도 하고 연출도 하고 잠깐 록밴드에서 보컬도 했지요. 초기에는 주로 노동과 정치에 관심이 많았어요. 김지하의 민중극처럼 독재의 부당함을 알리는 무대를 만들었지요. 공연하다가 경찰에 쫓겨 도망 다니기도 했습니다.배 : 1990년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극 ‘미란다’는 울산에서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문 : 군대에서 제대하고 울산에 간 적이 있어요. 울산 지역 방송국에서 영화음악을 소개하고 울산 지역 신문사와 왕가위 감독을 주제로 한 영화제도 개최했지요. ‘포스트 극단’을 창단해 공연하고, 포항과 경주의 연극인들과 교류했습니다. 경주의 이수일 선생은 연극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분으로 중앙 무대에서도 인정하는 연극인입니다. 당시 나는 이 선생의 제안으로 연극 ‘무녀도’에 출연했고, 경주시립극단 창단에도 참여했습니다. 포항의 김삼일 선생도 그때 뵈었죠.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도전 의식이 생겼고,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문제작을 하기도 했지요. 배 : 제작하신 작품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을 꼽는다면 무엇일까요.문 :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 출연까지 한 첫 연극 ‘섹스’가 기억납니다. 남녀의 성에 관한 이야기로 공연이라기보다 해프닝에 가까웠어요. 경주 서라벌문화회관에서 공연했는데, 조명기를 담당하던 공무원이 공연 도중에 도망가는 일이 벌어졌어요. 상상도 못 한 일이 무대에서 펼쳐지니 너무 놀랐던 거죠. 결국 4회차로 기획된 공연이 무대 인사도 없이 종료됐어요. 공연장을 대관해 준 공무원은 좌천되고 난리가 났죠. 그리고 울산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1인극으로 각색한 ‘햄릿’을 올렸습니다. 오필리어 같은 등장인물은 인형을 만들어 무대에 세워놓은 전위적인 스타일의 작품이었죠.배 : 정말 실험적인 작품이군요. 세간의 화제가 된 연극 ‘미란다’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문 : ‘미란다’의 원작인 ‘콜렉터(The Collector)’는 납치범의 이상심리를 다룬 영국 소설이지요. 사랑을 얻기 위해 여자를 납치해서 감금하고 구애하는 내용입니다. 서울에서 연극 ‘콜렉터’가 무대에 올랐을 때 나도 그 작품을 봤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서 원작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원작은 납치범인 ‘콜렉터’와 피랍자인 ‘미란다’의 두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내가 본 연극은 ‘콜렉터’의 관점에서 만든 것이지요. 하나의 사건이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나를 지금까지 끌고 온 동기입니다.배 : 연극 ‘미란다’는 외설 시비에 휩싸이며 국내 공연 예술물로는 처음으로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마광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도 법정 다툼을 벌이던 때여서 ‘문학계의 마광수, 영화계의 문신구’는 예술계 에로티시즘 논란의 쌍두마차로 회자되었지요.문 : ‘성(性)’은 덕과 윤리, 제도와 종교로부터 죄악으로 취급당하던 시절이었죠. 많은 예술인이 그것은 부당하다며 문제를 제기했고요. 마광수 교수와 내가 세운 기록이 있어요. 대법원까지 변호사 없이 재판에 임한 겁니다. 당당하게 작품으로 스스로를 변호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연극 로리타(연출 문신구)의 포스터. 1990년대 문화계의 화두는 ‘성(性)’이었다. 표현의 자유를 내세운 작품이 끊임없이 생산되면서 외설이냐 예술이냐 하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성’은 한 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 문화계를 뜨겁게 달구었고, 문신구 감독은 그 중심에 있었다. 당시 언론의 반응을 다음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급문화가 옷을 벗는다. 연극, 무용, 문학, 미술 등 대중문화와 거리를 두었던 분야에서도 누드와 에로티시즘, 섹스를 다룬 작품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성을 포함한 모든 규제에 대해 너그러워진 우리 사회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몸에 대한 관심’이라는 90년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반영하고 있다. 정신은 고상하고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체의 아름다움’을 다양한 예술 양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연극의 경우 현재 서울 대학로에서는 ‘벗기기 연극’으로 이름난 존 파울즈 원작의 ‘콜렉터’가 ‘어떤 고백’ ‘콜렉터’ ‘미란다’ 등의 이름으로 네 군데 극단에서 공연되고 있다. 이 중 공연음란 혐의로 고발됐던 최명효씨(문신구 감독의 본명) 제작의 ‘미란다’는 11일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이 내려짐으로써 앞으로 벗기기 연극은 예술적 당위성이 없는 한 처벌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고급문화 누드-에로티시즘 홍수’, ‘동아일보’ 1996년 6월 12일.배 : 언론에 노출된 횟수도 그렇고 화제성으로 보면 전성기였군요.문 : ‘미란다’로 서울에서 장기 공연할 때는 대기업 영상사업단에서 돈다발을 들고 나를 찾아왔어요. 세금도 많이 냈죠. 현금 장사인 연극으로 돈을 가마니로 끌어왔으니까요. 미국 공연도 잡혔는데 재판이 오래가다 보니 공연이 무산되고 계약금을 돌려주는 일이 생겼어요. 배 : 연극 ‘미란다’를 각색해 영화를 제작하셨지요.문 : 예술의 테마와 장르를 고려하지 않고 음란성만을 전제로 한 사법 판결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투자 제안이 있었지만 마다하고 자비로 ‘미란다’를 영화로 만들었지요. 그런데 상영하기도 전에 기독교윤리실천위에서 고발을 하더군요. 간이 더 커져서 김종학 피디가 소개한 일본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콜렉터’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주인공 할 배우가 없어서 내가 출연했어요. 변태적 성향의 남자를 그린 영화인데 센세이션을 일으켜 지금도 회자됩니다. 대사는 한 마디도 없어요. 1시간 50분이 흐르고 마지막에 “물 좀 주세요” 한 마디가 전부죠. 전위적이고 획기적이긴 한데 아무래도….배 : 전위적이고 획기적인 이야기에 끌리게 된 계기는 뭐라고 생각하세요.문 : 전위예술 그룹인 ‘제4 집단’ 선배들을 쫓아다니다가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이 그룹은 한국 전위예술의 시초라 할 수 있지요. 광화문 광장에서 ‘기성 문화예술의 장례식’을 치르고, 희곡과 무대, 조명 등의 인위적 구조와 형태를 부정하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많이 했어요. 내가 구상한 걸 누가 듣고 괜찮다는 반응이 나오면 덮어버려요. 다른 사람이 괜찮다고 인정하면 굳이 해야 할 이유가 뭘까 싶어요. 반대로 말도 안 된다거나 미쳤냐는 반응이 나오면 이거 건드려볼 만하겠구나 싶은 거예요. 구상부터 그렇게 출발하니까…. 시나리오로 투자받기는 애초에 글러 먹은 거죠.배 : 사회풍속법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아쉬움은 없습니까.문 : 나는 늘 당대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아름다워야 할 성을 죄악으로 여기던 시대에 예술가는 그릇된 통념을 고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예술은 논쟁의 도마 위에 이슈를 올려 그 영향으로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작업에 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 때문에 욕을 먹고 손가락질도 당했지만 영광의 상처인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사진 : 김훈 작가

2024-08-28

평생을 내어주며 속이 텅 비어버린 우리네 부모님 같은…

오동나무는 아니지만 오동나무와 비슷하다고 하여 개오동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잎이나 꽃의 생김새와 냄새가 오동나무와 비슷하고 목재도 오동나무처럼 윤이 난다. 습기에 견디는 성질이 강하여 가구나 악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것 또한 비슷하다. 둘 다 양지에 사는 속성수로서 수명이 짧은 선구성 하록 교목이다. 개오동나무는 능소화과로서 긴 콩꼬투리를 닮은 삭과의 길이가 20~35cm이지만, 현삼과의 오동나무는 둥근 콩 모양의 삭과가 5cm 정도로 완전히 다른 종류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수인 개오동나무 노거수가 경북 청송군 부남면 홍원리 547번지에 살고 있다. 나이 450살, 키 14m, 가슴둘레 4.25m로 민속문화와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12월 23일에 천연기념물 401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정월 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고 있는 귀한 민속 식물자원이다. 개오동나무를 만나러 갔다. 마을로 들어가는 첫째 나무는 아직 젊은 청춘 나무이고 둘째, 셋째는 늙은 부모님이랄까 할아버지 할머니 나무이다. 나무의 모습에서 우리 세대의 부모님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세대의 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해 무한한 사랑을 주시면서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입는 옷이며, 먹는 음식이며, 자는 잠자리조차 변변치 못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먼저 자식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근검절약하여 한푼 두푼 모든 돈은 모두 자식을 위한 일에 쏟아부었다. 문풍지가 떨면서 소리치는 추운 겨울, 따뜻한 방구들 아랫목은 늘 자식들에게 양보하고 자다가도 깨어나 포근한 솜이불을 자식 몸을 덮어주느라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늘 부족함을 느끼고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그런데 우리는 우리만을 위해서 고집을 부렸다. 더 좋은 것, 더 풍족한 것을 원했다. 그러다 보니 늘 부모님을 원망하고 그 못남을 불평했다. 떼쓰고 대꾸하고, 심지어 울고불고하면서 항의의 표시로 입을 닫고 침묵하거나 심지어 가출까지 했다. 부모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는커녕 친구와 비교하고 이웃과 비교하면서 못난 부모님으로 마음을 상하게 하고 가슴을 후며 파는 아무런 생각도 죄의식도 없이 막무가내로 철없는 행동을 해 댔다. 이제 속이 시꺼멓게 타버려 아무것도 내어줄 것도 없다. 개오동나무 노거수처럼 몸은 찢어지고 속은 텅 비었다.개오동나무 노거수 역시 가지는 욕심을 내어 어미로부터 더 많은 것을 빼앗으려다 이제는 한 몸에서 태어난 가지가 둘로 나누어졌다. 꼭 자식들이 부모님 재산을 더 가지려고 싸움하다 의절한 것 같아 씁쓰레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노거수 또한 젊은 시절에는 우람하고 멋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몰골이 말이 아니다. 내어줄 것 아니 내어줄 것까지 다 내어주고 자신은 허기와 외풍에 견딜 수 없어 겨우 주민들의 외과 수술과 지팡이 선물의 도움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과거의 영광을 안고 추억하며 굳건히 살아가고 있다.봄이 되면 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무더운 여름을 견디면서 가을이 되면 잘 익은 긴 콩깍지 탄생시킨다. 겨울이 되어도 긴 콩깍지 열매 떠날 채비도 하지 아니하고 나뭇잎처럼 끈질기게 매달려 있다. 어미로부터 독립할 생각을 하지 않고 삭막한 겨울까지 부모의 품에 안겨있다. 오늘의 젊은 세태를 보는 것 같아 열매가 안쓰러움을 넘어 얄밉기까지 하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은 결혼과 출산을 늦추거나 부모님 품에서 살아가는 캥거루족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신조어가 생기고 있다. 부모님은 노후의 자신 몸조차 보전키 어려운데 이 또한 무슨 업보란 말인가.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일제 강점기 시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나라도 개인도 곳간이 텅텅 비어 자력으로 어찌해 볼 도리도 없는 형국이 되었다. 침략자 일본은 시도 때도 없이 갖은 명목을 붙여 공출을 요구했다. 이 모두가 못 배운 탓이라 여기고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는 데 희생했다. 자신의 노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식들이 성공하고 행복한 모습만 꿈꾸며 살아왔다. 장성한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며 안갚음에는 인색했다. 오히려 부담스러워하고 외면하기까지 하기도 한다. 노거수는 외세의 침략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민들은 노거수를 경외하면서 보살펴 주었다. 침략자들도 물러가고 우리 자력으로 국력을 키우고 살만해지니 이제는 노거수를 그전처럼 대해주지 않고 있다. 주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오히려 경제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눈치까지 주고 있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천연기념물 홍원리 개오동나무 노거수는 마을 주민들의 지극정성 보살핌으로 노후를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서울에서 고향인 청송 홍원리까지, 다시 대구에서 서울까지 걷으면서 길 위에서 만나는 서민의 이야기와 지난 역사를 오늘날 재해석한 ‘남듬길(進處道)’의 저자 조대환 변호사가 이곳 홍원리 출신이다. 험난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도 원칙을 지키려 했던 조 변호사의 올곧은 애국충정을 책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자서전을 넘어, 권력과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인간적 고뇌를 깊이 있게 조명했다. 그의 부모는 자신의 중한 병을 돌아가실 때까지 숨기면서 자식이 나라의 공무에 전념하게 했다. 또한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심상택 이사장도 개오동나무 노거수를 보고 자란 홍원리 출신이다. 산림청 산림복지국장으로 재임 시 인문학에 관심이 많아 한국산림문학회 활성화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상투를 고집하고 사신 분으로 ‘상투할배집’이라 불리었다 한다. 시골 농촌의 어려운 환경에 자식을 공부시키고 또 공무에 전념하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당연시한 이러한 힘은 지난 나라 잃은 슬픈 역사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우국 충절이 아닐까.우리 부모 세대의 어르신들은 오천 년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분들이다. 보릿고개라는 헐벗은 삶 속에서 인재를 양성하여 산업화를 이룩하였고, 이어 민주화도 이루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양날의 칼처럼 좀처럼 양립하기가 어렵다. 이를 인재 양성으로 극복한 우리 부모 세대들의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지혜가 돋보인다. 나라 발전에 공헌한 돌아가신 어르신들에게는 영혼을 위로하고 살아계시는 어르신들에게는 예와 효를 다할 것을 다짐해 본다.이웃 꽃밭고개라는 화전등(花田嶝) 마을에 항일의병기념공원이 있다. 적원일기(赤猿日記)라는 청송지역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의 진중일기가 청송에서 발견된 것도 우연만이 아닌 것 같다. 청송에서 공직에 근무할 때 항일 의병기념관 건립에 정성을 쏟았다. 청송은 자연도 수려하지만, 우국충정의 고장임을 새삼 느꼈다. 조대환 변호사 부모님 같은 분이 어디 한 분밖에 없겠는가. 대부분 부모님이 다 그러하실 것이다. 개오동나무 노거수를 뒤로하고, 아내와 함께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을 방문하여 항일 의병 역사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부모 세대 어르신들의 희생정신에 고개를 숙였다.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은…경북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 313-1에 위치했다. 2011년 전국 항일 의병들을 추모해 ‘항일의병기념공원’이 화전동에 세워졌다. 의병의 날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6월 1일이다. 2022년 1월부터 경북도 독립운동기념관에서 위탁 운영하고 있으며, 연락처는 054-870-6550. 입장료와 주차비는 무료다. 시설물은 창의루(倡義樓), 동재 인의예지재(仁義禮智齋), 서재 효제충신재(孝弟忠信齋), 충의사(忠義祠) 등. 2701개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무명의병용사충혼탑과 2개의 명각대(名刻臺)가 있다.적원일기(赤猿日記)는 청송의진이 결성되기 직전인 1896년 3월 2일부터 본진의 활동이 종료된 5월 25일까지 85일간의 청송의병 활동을 김숭진(金崧鎭), 심의식(沈宜植), 오세로(吳世魯), 서효격(徐孝格) 등이 매일 상세히 기록한 진중일기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8-28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도전 정신’ 명장 반열에 오르는 비결 아닐까요

“도전하지 않으면 결과는 없습니다.”기술은 단순 개인의 것이 아니다. 최종적으로 타 국가간 경쟁, 동종 회사간 경쟁을 하는 기술력은 생존경쟁에 큰 힘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도전 정신,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이 필요하다.세계 최고수준의 전문성과 노하우를 갖춘 2019년 ‘포스코 명장’에 선정된 오창석(61·사진) 포항제철소 기술컨설턴트.오 명장은 제강 연속주조분야 최고기술자로 연주기롤(roll) 직경을 확대해 교체시기를 늘려 원가절감을 이끌어 냈다. 특히 그가 개발한 연주기 몰드 실링재는 조업사고를 제로화 하는 등 조업 경쟁력 향상과 안전 조업현장 조성에 크게 기여했다. 최근 오 명장이 숙련기술인이 되기 위한 노하우를 본지에 전했다. - 금속재생산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어릴 때부터 철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졌다. 지난날을 회상해 보면, 농번기가 끝나는 시점 마을 한구석 이동식 대장간(작은 철공소)이 마을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동네 마을 어르신들이 낫, 호미, 도끼 등 농기구들을 가져왔다. 대장장이의 손에 의해 불에 달구어 지고 다듬질 돼 날카롭게 새로운 도구로 개선되는, 변화무상한 철에 대해 호기심을 늘 가지고 있었다. 경북 청송에 있는 부곡초등학교와 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포철공고 금속 분야(제강과)에 입학한 것이 금속재생산을 선택한 큰 계기가 됐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서.△고등학교시절 교련복 어깨 와펜(마크)에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글귀가 있었다. 내 시대의 시대적 사명이라 할까. 늘 마음속엔 대한민국을 우리가 새롭게 더 발전시켜야 된다는 다짐을 했다. 지금부터 41년 전인 1983년 포철공고를 졸업하고 포스코에 입사를 했다. 어린 약관의 나이(20세)로 포스코 생산현장에 근무를 하면서 선배로부터 그 동안의 기술과 노하우를 배우면서 아직도 개선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음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불합리 업무를 반드시 개선을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 특허(노하우)개발과 제안 및 개선과제 프로세스를 통해 하나하나 해결을 해 왔다. 2002년 제강부 29주년기념 ‘올해의 연주인’, 2005년 제강부 ‘우수제안 왕’으로 선정됐다. 큰 보람을 느꼈다. 앞으로도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며,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마음도 함께 가지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 씨름 선수로도 활동했다고.△어릴 적 친구들과 만나서 강가에서 물놀이와 씨름을 하면서 놀이를 하는 것이 농촌의 유일한 큰 즐거움이었다. 방학 때면 소를 마을 뒷산에 풀은 뜯어먹도록 하고 우린 숨바꼭질 및 씨름을 하면서 해가 지는지도 모르고, 또 송아지가 집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르고 놀이에 정신이 빠지기도 했다. 소는 농촌의 일꾼이자, 생활을 함께하는 또 다른 가족이다. 가보1호 및 재산증식과 더불어 집안 곳곳에 생활의 훈훈한 온기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3년 포스코에 입사를 하면서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몇 달 동안 월급을 모아 송아지 2마리를 선물로 사 드린 적이 있다. 초·중학교 학교별 대항씨름대회가 있으면 선발이 돼 대회 우승을 하면 담임 선생님이 자장면 한 그릇을 사 주는 것이 그 때 당시 유일한 희망이었다. 포철공고에 오면서 고등부 도민체전 선발전에 참여 대표선수로 선발돼 당시 1981~1982년 영일군 대표를 맡았다. 포항시로 통합이 되면서 포항시 대표선수로, 경북도민체전에 고등부 선수로 참여하기도 했다. 포항시 대학부·청년부·장년부씨름왕을 거치면서 포항시씨름협회 전무 및 부회장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인연으로 현재 포항시씨름협회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경북도 씨름협회 부회장을 맏아 경북씨름발전에 기여로, 지난 17일 이철우 경북도지사로부터 표창패를 받기도 했다.- 고향인 청송에 포스코를 더 사랑하는 어르신들이 있다고.△청송군 진보면 어르신들께서는 대한민국을 선진화로 발전하는데 1등 공신인 포스코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오씨 종친회’ 때 고향을 빛낸 ‘자랑스러운 율리인 1호’로 선정하는데 포스코명장인 나를 첫번째로 선정했다. 포스코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아, 고향 어르신들께 감사드린다. 포스코인으로 회사에 오래도록 근무하는 것이 더욱 보람있고 흐뭇함을 느낀다. - 제강의 연속주조 공정과 흥미는.△제강 분야 연속주조 공정은 금속을 용해해 연속적으로 주조하는 것이다. 주로 철강 산업에서 사용되며, 이 공정은 용융된 금속을 연속적으로 주형에 주입해 긴 슬래브, 빌렛, 불름 동의 형태로 만드는 과정을 포함한다. 연주 공정은 생산 효율성을 높이고, 제품의 품질을 향상시키며, 비용을 절감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첫물을 다루는 연속 주조작업은 짧은 공정 내 많은 변화(쇳물→슬라브)들이 있는 공정이라 관심만 가지면 많은 특허 및 노하우를 개발 가능한 공정으로서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오랜 근무기간에도 싫증이 나지 않는 특징이 있어서 기술개발에 관심과 연주공정작업 흥미가 더 있기도 하다.- 우수제안 1등급 포상금 전액을 기부했다는데.△연속주조공정 조업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고 원가절감에 크게 기여해 사내 우수제안 1등급에 채택됐다. 당시 포스코 창립 51년 중 전사 12번째 나온 우수제안이라서 더 감회가 깊다. 1등급 포상금을 더 가치 있는 곳에 사용하고 싶어서 포상금 전액(500만원)을 기부했다. 그 당시 강원도에 큰 산불로 고생하는 지역 주민들에게 포스코 1%나눔봉사 정신으로 전액 기부를 해 강원도지사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 어떻게 ‘포스코 명예의 전당’에 올랐나.△처음부터 꼭 명장이 되려고 노력한 건 아니었다. 회사 생활 본연의 업무를 충실히 하고 오랜 기간 회사 동료 선후배들과 협업을 통해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원만한 유대관계를 가졌다. 평소 고질적 문제점을 해결하고 많은 불합리 개선 과제의 성과들이 나타났다. 연주공정의 안전과 품질향상, 제조공정의 생산 원가절감 등 특허(노하우)개발로 인한 연주 조업기술개발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것 같다. 또한 제강, 연속주조공정은 쇳물을 다루는 공정이어서 안전 및 조업사고나 품질사고의 위험이 있다. 작업공정의 개선 및 방법의 개선에는 보수적인 성향이 있어서 개선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어려움을 개선하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직원들을 설득해서 표준시험 Process를 거쳐 이론적 이해를 돕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 결과 20~30건의 특허 개발을 바탕으로 불합리함을 개선해 우수제안 1, 2등급 선정 포함 약 227건 과제, 32억원/년 원가 절감 과제수행으로 2017·2019년 포항제절소 우수제안 왕 2회를 하는 큰 성과를 올렸다. 포스코 (본부장)사장표창 및 포스코 창립기념 우수사원 표창 등을 받았다. 이로 인한 크고 작은 노력과 그동안 함께한 (포)제강부 및 2연주공장 동료, 직원 분들의 많은 도움으로 2019년 7월 포스코명장에 선정됐다. ‘포스코 명예의 전당’에 영구 헌액돼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대한민국 동탑산업훈장도 받았다고.△산업현장의 오랜 근무기간 동안 불합리 업무와 설비개선으로 근로자의 복리 증진과 산업발전에 많은 기여를 인정받아 ‘2023년 근로자의 날 유공 정부포상 시상식’서 대한민국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하게 됐다. 이 모든 것은 함께 노력해 온 회사 동료 및 선후배들 덕분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선후배들에게도 기회가 된다면 큰 성과와 업적을 올리는데 많은 노력과 협업으로 지원할 예정이다.- 숙련기술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본인이 근무하는 회사의 주인라는 마음가짐과 자부심을 갖고 생활하도록 부탁을 드리고 싶다. 본인이 개발하고 연구하는 일들이 더 가치 있게 사용이 될 수 있도록 더 다듬고 관리를 잘해 기술의 고유성(보호)을 지닐 수 있도록 특허 등록 관리할 것을 추천한다. 또한 세계최고 철강사인 포스코에 나의 크고, 작은 특허 기술이 적용이 돼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존감이 넘치며 회사 생활에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경험과 폭 넓은 지식을 쌓고, 본인 고유의 기술력을 갖추고, 중장기 계획을 세워 목표로 하는 많은 공적이 쌓이면 본인 분야에 명장의 반열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앞으로의 포부는.△후진 양성을 위해 지역사회에 재능 봉사활동과 불합리 업무개선 및 신기술 개발을 지속적으로 추진 중이다. 금속재료 분야의 소재 연구과정을 통해 작년 재료공학 박사를 졸업했다. 더 많고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한 기술력을 쌓고 훌륭한 후진 양성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오랜 산업현장의 경험들을 후배들에게 자료를 만들어 공유하고 대한민국 산업현장을 더욱 기술 선진화로 변화시키는데 주력하겠다. 제선, 제강, 압연, 금속재료 등 7종류의 금속관련 도서를 만들어 포스코 도서관에 기증했다. 또 기술(전문)대학 교재로 사용을 해 후배들의 기술력향상에 지원을 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공계 고등학교 및 전문대에 특강을 통해 차세대 대한민국산업을 이끌어 갈 우수인재들이 많이 배출이 될 수 있도록 마인드 교육과 기술교육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아울러 (주)포스코 산하 국내외 법인 회사에도 필요할 시 기술 전수와 지도를 할 예정이다. 미래 꿈나무들이 산업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홍보에도 적극 나설 것이다. 중장기적으로 대한민국 젊은 인재들이 오래도록 행복하고 보람있게 생활할 수 있도록, 산업현장을 더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으로 만드는데 최대한 뒷받침하겠다.오창석 포항제철소 금속재생산 포스코명장은△ 포철공고 졸업△ 포스코 1983입사~현재 41년 근무 중△ 우수숙련기술인(금속재료)△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금속재료)△ 포항시 및 경북도 최고 장인(금속재료)△ 대한민국 동탑산업훈장 수훈△ 재료공학 박사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08-27

평화로운 땅에 우뚝 선 깔끔하고 단아한 무열왕릉

묘호(廟號·왕이 죽은 후 살아생전의 공덕을 기려 붙인 명칭) 태종.시호(諡號·이전 왕이 사망한 후 다음 왕이 선대 군주에게 붙인 이름) 무열대왕.휘(諱·선조의 생전 이름)는 김춘추.비단 신라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중고교 시절 졸면서 역사 수업을 들은 학생이라도 한 번은 들어봤을 이름 무열왕 김춘추(603~661).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의 국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아들 문무왕(김법민)이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게 초석을 깔아준 사람이다.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삼척동자에게도 낯설지 않은 무열왕 김춘추의 능(陵)으로 추정되는 고분은 선도산 입구에 자리해 있다. 고문헌은 아주 짤막하게 그의 유택이 위치한 지역을 지목했다. 이런 문장이다.“661년 음력 6월. 59세로 무열왕이 죽었다. 그는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묻혔다.”추정하면 7세기 중반 신라엔 영경사라는 이름의 규모가 큰 절이 있었고, 그 절 북쪽이 여러모로 길한 땅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을 터. 왕의 장지(葬地)를 아무 곳에나 쓰는 경우는 없는 법이니까.법흥왕 때 불교를 국가의 공식 종교로 받아들였던 신라는 선도산 일대를 서방정토(西方淨土)라 부르며 ‘부처가 다스리는 평화로운 땅’으로 생각했다. 바로 그 서방정토 들머리에 존경 받는 왕의 시신을 매장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 ‘서방정토’에 잠든 무열왕 김춘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선도산 초입엔 공원 형태로 커다랗게 조성된 무열왕릉(사적 20호) 묘역이 있다. ‘마애여래삼존불’이 선도산 꼭대기에서 서라벌의 서악(西岳)을 내려다보는 형상이라면, 무열왕릉은 서악 입구를 지키며 우뚝 선 모습이다.부정할 수 없는 ‘불교왕국’ 신라가 성스럽게 여겨온 땅에서 영원한 잠에 든 무열왕 김춘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의문에 간명하게 답하는 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아래와 같은 설명이다.“태종무열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54~661년이다. 이름은 김춘추로 진덕여왕 사후 신하들의 추대로 즉위하여 신라 중대왕실을 열었다. 즉위 전부터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를 직접 오가며 탁월한 외교역량을 보여주었고, 김유신과 연합해 신귀족세력을 형성하여 보다 강화된 왕권 중심의 집권체제를 확립했다. 이후 친당외교를 통해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고구려와 백제를 공략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의 토대를 마련한 후 재위한 지 8년 만에 사망했다.”여러 가지 취재를 위해 지난 몇 년 사이 경주 선도산 자락에 위치한 무열왕릉을 네댓 번 찾았다. 그때마다 ‘참으로 깔끔하고 단아한 고분이구나’란 생각을 했다.철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주위 풍광도 좋았다. 다른 왕릉 주변에선 볼 수 없었던 귀부(龜趺·거북이 형상의 비석 받침돌)도 이채로웠다.무열왕은 신라 992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왕 중의 왕’이라 불러도 이론(異論)을 제기할 역사학자가 별로 없을 정도의 행적을 보인 인물이다. 그의 학식과 외교 협상력은 탁월했고, 잘생긴 외모까지 돌올했다.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룬 7세기 중후반을 다룬 각종 학술논문에서도 무열왕 김춘추의 ‘튀는 행적’은 여러 차례 발견된다.“668년에 문무왕은 고구려를 평정하고 선조묘 종묘에 개선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태종(무열왕)에게 ‘일통삼한(삼국통일)’의 공덕을 올렸다 일통삼한은 삼한이라는 천하를 평정하였다는 의미로 신라의 왕이 삼한의 천자(天子·하늘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라는 것을 뜻한다.”위의 서술은 경북대 사학과 안주홍의 논문 ‘신라 태종(太宗) 묘호(廟號)와 일통삼한 의식’ 중 한 대목을 인용한 것이다.‘하늘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란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문무왕은 무열왕의 아들. 하지만, 아무리 아들이라 해도 터무니없는 업적을 억지로 부풀려 아버지 앞에 바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해서 백성들의 비웃음을 부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므로. ◆ 고문헌과 학술논문에서 보여지는 무열왕은…무열왕은 신라 내부에서만이 아닌 당시로선 군사·경제·문화적 선진국이었던 중국 당나라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조금은 우스운 비유가 될 수 있겠으나, 지금의 보이 밴드가 일으킨 ‘한류 열풍’ 같은 인기였다.동국대 사학과 김상현의 논문 ‘일연(一然)의 일통삼한(一統三韓) 인식(認識)’에서도 무열왕에 대한 국내외적 호평은 간명하고 명료하게 드러난다. 다음과 같은 형태다.“당나라의 황제는 김춘추의 풍채를 보고 ‘신성지인(神聖之人·고결하고 거룩한 사람)’이라 칭찬했다. 무열왕이 통치하던 시대를 백성들은 ‘성대(聖代·어질고 현명한 왕이 다스리는 시대)’라고 불렀다. 이는 태종무열왕에 대한 서술이다. 이러한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도….(후략)”이처럼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탁월한 정치·외교적 성과와 영토 확장이라는 통치자로서의 업적을 보여준 사람이 묻힌 곳이라면, 그 시절 선도산과 서라벌 서악이 가졌던 위상 또한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지난 7월 하순. 무열왕릉을 찾았을 땐 무시무시한 폭염이 머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어지럽게 매미가 울고,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괜한 짜증과 스트레스를 불러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무열왕릉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풀밭 그늘에 다리를 뻗고 앉아 1400여 년 전 드라마나 영화 같았던 신라의 역사를 떠올리니, 참을 수 없을 듯한 더위도 ‘한순간 지나가는 짧은 고통’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 무열왕 외에도 4명의 신라 왕이 묻힌 선도산무열왕이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도산 입구 묘역엔 적지 않은 여행자와 경주시민들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드나든다. 남녀노소 불문이다. 그들을 위해 무열왕릉의 간략한 개요를 ‘위키백과’를 인용해 소개한다.“무열왕릉(武烈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이다.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4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으며, 사적 제20호로 지정돼 있다. 경내의 비각에는 국보 제25호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는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어 흥덕왕릉과 함께 신라 왕릉 가운데 매장된 왕이 명확한 능으로 보여지고 있다.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형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 장식이 소박한 편이다.”세상 인간 대부분이 그렇듯 무열왕 김춘추도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몸 안에 지니고 살았다.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여타의 인물들처럼 호오(好惡)가 엇갈린다.“김춘추가 외교관일 때 일본과 중국은 그를 ‘잘생긴 외모에 빼어난 화술을 구사하는 사내’로 기록한다. 동맹을 맺었던 중국만이 아닌 적대국가였던 일본도 김춘추를 좋게 평가한 것”이라는 호평과 함께 “삼국통일 과정에서 대동강 이북을 포기한다는 협약을 당나라와 체결했고, 외세의 힘을 빌려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민족주의 성향 사학자들의 비난도 받고 있는 것.어쨌건 세간을 떠도는 이런저런 이야기와는 무관하게 무열왕은 자그마치 1363년이란 긴 시간 동안 선도산 자락에 누워 웃지도, 울지도, 말하지도 않은 채 잠들어 있다. 그 잠은 편안했을까?선도산엔 무열왕릉 외에도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있다. 당연지사 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거기도 가봐야 할 터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8-27

대구 ‘자갈마당’ 사례 처럼 포항도 이제 본격 재정비 나서야

대구에서 110년간 성업했던 성매매업소 집결지인 ‘자갈마당’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지 약 6년이 지났다. 이곳은 현재 원도심 개발사업을 통해 대규모 주거단지가 들어섰다.이전 성매매 현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성매매집결지가 평범한 주택가로 변화하기 까지는 수많은 시련이 있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반발과 반대 집회,  철거에 이르는 과정 등 시행착오를 겪은 후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현재 이곳은 주거복합단지에 입주가 한창 진행 중이며, 원도심의 개발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대구시 성매매 집결지 ‘자갈마당’ 정비의 역사를 살펴보고 포항시 성매매 집결지 ‘중대’의 개발 대책을 모색해봤다. △습지 메우려 자갈 깐 것이 지명유래자갈마당은 1909년 중구 도원동 일대에 설립된 성매매집결지를 말한다.원래 이곳은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이 몰려와 집단 거류지를 형성할 때 공창을 함께 들여온 것이 시초라고 한다.자갈마당이라 불리게 된 것은 집창촌 여인이 달아나면 잡으려고 자갈을 깔아 소리가 나도록 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해석으로 자갈마당을 ‘넓은 마당’이라고도 했다. 저습지대로 쓸모없는 황무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6. 25사변 이후 대구로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됐다.이곳은 대구의 북쪽 관문구실을 한 교통의 중심지가 돼 이 일대 전체가 넓은 장터로 변했다. 그래서 한때는 ‘넓은 마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이곳은 땔감(주로 소나무 잎)과 구들장을 팔기 위해 인근 시골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그러나 비만 오면 땅이 질어 대단히 불편했다. 주민들은 대구읍성을 철거할 때 나온 돌로 비만 오면 질퍽한 습지를 메워서 자갈을 많이 깔아놓게 됐다. 그 후에 사람들은 ‘넓은 마당’ 대신‘자갈마당’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자갈마당은 대구시의 대표적인 성매매 집결지인 데다가 집결지에서 300m도 채 안 떨어진 곳에 대구 수창초등학교가 있고 인근의 옛 전매청 자리에 대구역센트럴자이 아파트가 당시 신축 중인 지라 대구시 및 많은 시민들이 폐쇄를 원했다. △성매매 특별법 이후 쇠락의 길 걸어 자갈마당이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성매매방지 특별법이 시행되면서부터다. 특별법 제정 이전에는 약 350명이 일할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제정 이후에는 100여 명으로 규모가 줄어들었다. 2015년부터는 도시철도 3호선 개통과 대규모 아파트 건설로 인해 집결지 주변의 유동인구가 늘면서 ‘자갈마당’의 폐쇄를 요구하는 민원이 빗발쳤고, 이는 집결지 정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대구시는 도심부적격시설(1만 4000㎡)과 상가 등 1만 9000㎡를 재개발해 주거시설과 공원을 조성하려고 했다. 대구시에 따르면, 당시 ‘자갈마당 재개발’에는 민영과 공영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지만, 대구시는 ‘민영·공영 병행’이라는 강수를 던지며 사업 추진에 나섰다. 그 결과 2019년 1월 ㈜도원개발이 부지를 매입해 사업 승인을 신청하며 본격적인 개발에 발을 뗐다. △폐쇄를 위한 노력시가 재정비에 착수하자 자갈마당에 위치한 건물주들은 쉽사리 수긍하지 않았다. 저항도 심했다. 하지만 시의 의지는 확고했다. 물러서기보다 각종 제제 수단을 내세워 압박하며 강력한 정비 의지를 내세웠다. 지속적인 대화가 오갔고, 결국 중구 도원동 일대를 민간 주도로 재개발한다는데 합의를 이끌어 냈다. 건물주 80% 이상 매수 동의를 받은 시는 이후 재개발에 속도를 냈고, 성공적으로 일대를 깔끔히 정비했다.당시 시는 건물주와는 민간개발로 합의를 했지만 성매매 여성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이 많았다. 생존권을 내세운 이들이 반발한다면 정비도 쉽지 않지만 해결에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이 뻔해서였다. 예민한 문제이기도 했고 조심스럽기도 한 이 사안에 대해 시는 과감한 지원이라는 카드를 꺼냈다.먼저 시는 2016년 자갈마당을 폐쇄하기 위해 성매매 피해자 자활 지원 조례를 제정했다. 성매매 피해 여성에게는 10개월간 생계유지비 월 100만원, 훈련비 300만원, 주거 이전비 700만원 등 최대 2000만원을 지원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외에 타 기관의 이런저런 지원책도 함께 제시되며 힘을 보탰다. 그 결과, 순조롭게 관련 일이 추진됐다. 대구시에 따르면, 조례 제정 이후 2018년까지 57명이 상담을, 27명이 자활 지원을 받았다. 전체 성매매 여성 추정인원 110명 중에서 4분의 1 정도는 시의 지원을 받은 후 현장을 떠났고 5명은 새로 취업에 성공하기도 했다.대구 여성인권센터 관계자는 “성매매 자체가 불법이다 보니 개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부터 자활 사업을 통해 성매매 여성의 정착을 유도하고 있었는데 시 지원책이 나오니 순순히 그걸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이는 자갈마당 사업장 철거 전에 이미 성매매 여성 이주가 모두 완료된 것에서도 확인된다. 110여년을 버티어 온 자갈마당은 그렇게 해서 2019년 5월 모든 영업을 중단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자갈마당의 현재 모습대구시는 이 일대의 대구 도심부적격시설(1만4000㎡)과 상가 등 1만9000㎡를 재개발해 주거시설과 공원 조성을 계획했다. 2019년 6월 4일, 시행사 ㈜도원개발에 의해 자갈마당 철거 작업이 시작됐다. 1달가량 진행된 철거 현장에는 많은 주민들이 나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당연 찬반 논쟁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호사가들이 한잔 후 내뱉는 입담에 불과했을 뿐 개발은 계획대로 진행됐고, 자갈마당 부지에는 현재 주상복합아파트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역사 속 자갈마당은 과거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별개로 이 일대 원도심 개발의 원심력 작용을 하기도 했다. 그간은 그곳이 대구 지역 최고 번화가인 동성로로 도보로 이용이 가능하며 대구역도 인접해 있어 대구 지역에서도 마지막 남은 노른자위지로 입지를 평가받았었지만 자갈마당 존재 때문에 일대 개발은 엄두도 못낸 채 있었다. 그러나 자갈마당이 없어지면서 일대는 입지적인 장점 때문에 재개발, 재건축, 도시정비사업 등이 잇따랐고 지금은 대구 신흥 주거지역으로 거듭나고 있다. △포항도 과감한 결단을포항 성매매 집결지 ‘중대’ 역시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중앙동에 있어 대구 ‘자갈마당’과는 얼추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다.그러나 이 문제 처리에 있어선 대구시와 포항시 간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대구시는 철거 원칙 아래 대책을 수립한 후엔 과감하게 또 속전속결로 이 사안을 정리했다. 반면 포항시는 다소 미지근하다. 현재의 성매매집결지를 그대로 놔두고 3m 길 바로 건너편 구 포항역사에 70층 높이의 주상복합 건물, 그것도 5성급 호텔 까지 입주를 내용으로 하는 인허가를 내줬다.기자는 이번에 포항성매매 집결지를 취재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서고 호텔이 문을 열면 외국인들이나 관광객들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성매매 실태를 보고 포항을 어떻게 생각할까’ ‘성매매 집결지 건축주는 그렇더라도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은 또 뭔가. ‘왜 다른 곳은 다 정리하는데 포항은 미진할까’ 참으로 난해한 질문들이 수없이 오갔다. 그러나 취재 기간 내내 어디 한군데서라도 속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다.성매매집결지는 그 도시의 품격 및 품위와도 연결된다.여성친화도시 포항, 100만 포항을 기대한다면 이제 포항성매매집결지 정도는 정리할 때가 됐다. 현장에 답이 있다고들 했다. 글로벌 포항을 외치는 이면에는 아직도 60∼70 대 여성이 성을 파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포항이다. 그런 점에서 대구의 자갈마당 사례는 포항에게 좋은 시금석이다./김재욱 기자·성지영 인턴기자끝

2024-08-26

철강업계도 AI 홀릭, 정확하고 안전하게 작업...AI 제철소로 변신한 포스코

사람의 개입이 없는 자동화가 실현된다.전 세계적인 인공지능(AI) 붐이 일면서 철강업계도 고위험·고강도 현장에 산업용 로봇을 도입한다.안전한 현장과 생산성 향상을 제고하고, ‘인텔리전트 팩토리’ 구현을 지원하기 위함이다.글로벌 업황 둔화 속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산업용 로봇과 AI 기술의 적용이 핵심요소라는 판단에서 해당 분야에 대한 회사 차원의 투자와 인력육성 및 인재 영입을 강화해 나간다.포스코는 주력 생산현장을 대상으로 로봇을 우선적으로 적용해 무엇보다도 안전한 현장 구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CCTV를 활용한 육안작업 자동화, 조업상황 및 소재품질 상시 모니터링 등에 AI기술을 접목시켜 운전자의 작업 부하를 줄이고, 생산성과 수익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AI로 코크스오븐 연소 제어코크스는 제철소에서 쇳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연·원료로, 코크스의 품질은 곧 쇳물의 품질과 직결된다. 코크스는 코크스오븐에서 석탄을 가열해 만들어진다. 이때 코크스를 어떻게 가열하느냐에 따라 코크스의 품질이 결정된다.열화상 이미지와 AI를 활용한 코크스오븐 자동 연소 제어 시스템은 열화상 이미지를 이용해 코크스의 건류 상태를 판단한다. 이를 딥러닝으로 학습시켜 AI가 적정 연소량에 맞춰 연소를 제어하는 것이 이 기술의 핵심이다. 시범 도입을 통해 70만 개 데이터를 실시간 검증한 결과, 기술 정합성이 95%가량으로 높게 나타나 실제 조업에서도 활용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포항제철소 2코크스공장은 3기 코크스오븐에 자동 연소 제어 시스템을 일부 활용하고 있다. 연소 제어는 작업자가 수동으로 하되, AI가 제안하는 적정 연소량을 작업에 활용하는 것이다.시스템을 실제 조업에 적용한 결과, 코크스 품질과 연소 효율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열화상 카메라로 코크스 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해 품질 편차를 줄이고, 코크스 제조에 필요한 최적의 연소량을 도출해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었다. 안정적인 연소 제어를 통해 질소산화물(NOx) 배출량 또한 감소시킬 수 있어 대기오염물질 저감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까지 자동연소제어시스템은 작업 보조용으로만 활용되고 있지만, 향후 포항제철소는 시스템만으로 자동 연소 제어가 가능하도록 사용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또한 2코크스공장 3기 코크스오븐 외에도 시스템 적용 개소를 4기, 5기 코크스오븐 설비로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 작업 데이터 재학습하는 AI기술 개발철강제품은 두께와 성분 등 고객사의 주문사항에 맞춰 출하되는데, 생산을 거친 제품의 형상이 고객사의 요구 규격을 만족하지 못하게 되면 교정 공정에서 이를 바로잡게 된다.가장 두꺼운 제품을 생산하는 후판공장에서는 별도의 온도조정 없이 생산된 제품을 롤(Roll)과 롤 사이로 통과시켜 물리적인 힘으로 제품을 정정하는 ‘강력교정’ 방식을 사용한다. 현재까지의 강력교정은 제품의 규격과 변형 정도에 따라 압하량이 정량적으로 정해져 있어, 정해진 데이터에 맞게 입(入)측과 출(出)측의 롤 사이 간격을 조절해 실시해왔다.‘후판 강력교정 자동화 모델 재학습 기술’은 단순 정량 데이터 적용을 넘어 AI가 이전 조업 결과를 바탕으로 재학습하고, 보다 효과적인 압하량을 스스로 찾아 교정 작업의 완성도를 높이는 기술이다. 재학습 기술을 적용한 이후 포항제철소 후판공장에서는 교정 전과 비교한 교정 후 평탄도 형상관리 지표가 10% 이상 개선되는 등 효과적인 정정작업이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고강도강 교정 시 제기됐던 설비사고 위험성도 크게 줄었다.◇ ‘지게차 안전제동 AI시스템’ 현장도입고용노동부에서 공개한 산업재해 분석정보에 따르면, 제조업 12대 사망사고 기인물 중 지게차에 의한 사망사고가 1위로 20%(632건 중 124건)를 차지하고 있다.‘지게차 안전제동 AI시스템’은 영상인식 기술과 자동정지 속도제어 기술 등이 적용돼 충돌에 따른 재해를 원천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 지게차가 주변 작업자에게 접근하면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지게차가 단계적으로 자동 정지한다. 충돌 위험 거리가 6m 이내일 경우 알람이 울리고, 4m 지점에서는 감속이 시작되며, 2m 이내로 작업자가 근접하면 지게차가 자동 정지한다.해당 기술은 운전자 또는 작업자가 스스로 주변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돌발상황 발생 시 지게차 속도를 자동으로 제어해 지게차 충돌에 의한 재해를 원천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제철소 열악한 현장과 다양한 지게차 Maker에 ‘지게차 안전제동 AI 시스템’을 적용한 실증테스트 결과를 바탕으로, 2024년부터 포스코 DX는 (주)태양전기와 협업해 포스코 뿐만 아니라 포스코그룹 전체로 적극 확산할 계획이다. ◇ Smart CCTV와 AI기술 융합으로 선재제품 라벨 검수작업 자동화포항제철소에서 생산돼 고객사로 출하되는 선재, 코일, 후판 등의 제품 생산 정보와 차량에 상차된 현품 정보의 일치 여부를 검수하는 검수장이 있다. 만약 제품라벨이 검수위치의 반대편에 부착될 경우, 검수자가 차량에 탑승해 직접 육안으로 검수를 실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때 검수자가 MES 송장정보와 제품라벨을 육안으로 대조하기 때문에 휴먼에러 발생 가능성이 있다. 이는 고객사의 클레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적재 차량 위에서 검수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생산기술부 제품출하섹션은 포스코DX와 협업해 Smart CCTV를 활용한 ‘선재제품 라벨 검수 자동화’ 기술은 12대 카메라의 회전과 줌 기능을 제어하는 ‘추적좌표 영상분석’ 모델이 차량에 불규칙하게 적재된 선재제품의 라벨위치를 자동으로 추적해 문자를 인식한다. 인식된 문자는 MES 데이터와 비교한 뒤 검수 결과를 시스템으로 출력한다.해당 스마트 기술은 객체인식 AI 알고리즘을 활용한 것으로, 고정된 화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AI모델이 직접 CCTV의 각도와 줌 기능을 제어해 라벨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적용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개발된 객체인식 AI 알고리즘을 기존에 설치된 CCTV에 적용하면, 선재제품 뿐만 아니라 후판, 코일 등 다른 제품의 출하 검수장에도 쉽게 확대적용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포항제철소는 2025년까지 코일 및 후판 제품 검수장에도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 AI 영상기술로 스마트 제조 혁신 추진포항제철소는 포항 체인지업그라운드에 입주한 AMSquare사, SensingPlus사와 함께 인공지능 및 영상기술 분야에서 합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서 포스코는 산업현장의 데이터와 제철 공정의 운영 노하우를 공유하고, 벤처기업은 이를 최신 스마트 기술과 혁신적인 분석 아이디어를 활용해 스마트 예측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양측은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특히 인공지능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AMSquare사와의 협력을 통해 포항제철소는 생산 공정에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한 스마트 제조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영상분석 전문업체 SensingPlus사와는 열연공장 및 STS냉연공장 입측을 고해상도 3D 스캐너와 카메라로 정밀 실사해 정교한 3D 모델링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포항제철소는 디지털트윈 및 고위험개소 원격점검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이러한 대기업과 중소벤처기업 간의 상생협력 모델은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08-25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지방의회 혁신’ 필요하다

‘의회 없는 자치 없고 자치 없는 민주 없다’는 말이 있다. 지방자치를 제대로 하지 않는 나라에 민주주의란 무의미하단 뜻이다. 하지만 최근 시민들 사이에서는 ‘지방의회 무용론’이 대세다. 포항시의회의 경우, 원구성에서 파행과 갈등을 거듭해 시민들의 우려가 더욱 심화했다. 이번 제9대 후반기만의 문제는 아니다. 평소에도 의회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뚜렷한 정치철학이나 기조 없이 중앙 정치의 논리와 의석수에 따라 움직인 결과물이다. 뿐만이 아니다. 의원들이 의회 활동 중 일으키는 물의도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민생과 관련된 시급한 안건들도 별다른 진전 없이 대부분 묶여있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방의회가 다시 제 기능을 하도록 혁신할 방법은 없는지, 여러 각도에서 모색해봤다. ◇정당공천제 폐지지방의원 정당공천제는 광역의회는 1991년부터, 기초의회는 2006년부터 도입해 지속해오고 있으며 현재는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다.지방선거에 정당이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지방자치도 민주정치의 일환으로서 정당 참여로 인해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의 의사 결정에 대한 책임소재가 명확해진다. 현실적으로도 지방선거에서 정당 참여는 이뤄져 왔다.하지만 정당공천제도로 인해 지방선거의 중앙 정치 예속화가 점점 심화됐다는 부정적 의견도 커지고 있다. 또 지방선거가 지역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중앙정부의 중간평가로 전환, 정당의 지역패권주의가 재현되고 있다. 포항시의회 제9대 후반기 원구성에서도 국민의힘 중앙당의 공문에 따라 의장단 선거 전 의원총회를 열고 내정자를 선임했다. 국민의힘 의원이 다수라 내정자는 그대로 본회의 선거에서 당선됐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당공천을 받기 위해 중앙당이나 지역 국회의원에게 일종의 줄서기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초단체장이나 의원 출마자들이 지역 국회의원에게 고액 후원을 하는 일도 다반사다. 또 각 정당이 후보자 선출을 위한 경선을 줄이고 ‘내 사람 끼워 넣기’식의 형태가 계속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정당공천제도는 정당에 대한 충성심이 강조돼 지방자치를 역행하는 현상이 벌어지곤 한다.중앙당도 이 같은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일방적인 공천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자 여야 정치권은 지난 4월 총선에서 향후 치러질 지방선거에 시민 투표로 결정되는 ‘상향식 공천’ 방식을 도입하겠다는 방침이 나왔지만 이것이 지켜질지는 미지수다.우수인력의 지방의회 진입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지방선거 때 일부 대상에 대해 정당공천을 배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기초의원의 경우 정당공천제를 없애고 기초단체장의 정당공천 배제에 대해서도 충분한 검토를 거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 포항시의회 한 의원은 “기존에 논의되던 국민경선제의 방식을 보다 체계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며 “장기적으로는 정당공천을 완전히 배제하는 점진적인 대응책 마련이 강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섭단체 조례 제정포항시의회 김성조(개혁신당, 장성동) 의원은 지난달 31일 제317회 포항시의회 임시회 전 5분 발언에서 “‘포항시의회 교섭단체 구성과 운영에 관한 조례 제정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 광역·기초의회에서 산발적으로 ‘교섭단체 조례’가 제정되고 있다. 25일 자치법규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전국 243개 기초·광역지방자치단체 중에서 교섭단체를 구성·운영하는 곳은 91개 지자체다. 지난해 3월 개정된 ‘지방자치법’ 63조의2에는 ‘조례로 정하는 수 이상의 소속 의원을 가진 정당은 하나의 교섭단체가 된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국회에서와 같이 교섭단체를 지방의회에서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교섭단체는 의회 의사 진행에 관한 중요한 안건을 의장과 협의하기 위해 일정한 수 이상의 의원들로 구성된 의원 단체를 말한다. 보통 의회에서 일정한 정당 또는 원내 단체에 소속한 의원들의 의사를 사전에 통합·조정해 정파 간 교섭의 창구역할을 함으로써 의회의 의사를 원활하게 운영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국회에선 20명 이상의 소속 의원을 가진 정당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다. 행정안전부 자치법규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기초의회 교섭단체 소속 의원 수를 보면 많게는 9명에서 적게는 3명만 있어도 구성할 수 있다. 소수당이 교섭단체를 구성해 원내에서 배제되지 않을 수 있게 됐다.지방의회의 교섭단체 대표의원은 국회에서의 각 당 원내대표와 마찬가지로 의회 정책 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방의회 교섭단체와 그 대표의원의 권한은 의회 의원 구성 협의, 소속 의원의 상임위 배정, 의장단과 상임위원장 등 직위에 관한 인선, 위원회 위원 선임과 개선의 요청과 협의, 의회 일정과 의사 진행순서 협의, 대집행부 질문의원 수와 질문순서, 긴급 현안질문 관련 협의, 정례회 중 대표연설 등과 같이 막중하다. 즉 소속 정당 의원들의 의사를 수렴하고 의회운영에 있어 상당한 결정권을 가지며 정당 간 교류에도 핵심적 역할을 한다.포항시의회는 교섭단체 구성·운영에 관한 조례가 아직 없다. 지역 사회에서는 정당이나 원내 단체에 속하는 의원들을 중심으로 정파 간 교섭 창구 역할을 할 교섭단체가 구성돼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포항시의회 더불어민주당 김상민 원내대표는 “현재 포항시의회는 7명의 소수당 의원을 배제함으로써 포항시민 약 5분의 1을 배제하고 있다”며 “교섭단체를 통해 정당 간 견제와 협력으로 균형을 이뤄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더 보장하고, 포항시의회 민주주의 또한 더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의회법 제정지방의회는 지방정부를 통한 지방자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지방의회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25일 현재 지방의회(광역의회 17개·기초의회 226개) 의장 협의체인 대한민국시도의회의장협의회와 대한민국시군자치구의장협의회는 지방의회법 제정을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지방의회법 제정은 지방헌법을 만들어서 각 자치단체를 지방정부로 인정하고 각자의 권한 속에 진행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정책지원관 정상화, 수석전문위원실 증설 등 숙원 과제를 지방의회에 관한 독립법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지방의회와 관련한 법률 조항은 ‘지방자치법’에 포함돼 있는데 △지방자치 분권에 따른 지방의원 역할 확대 △의원 2인당 1명 배정방식의 정책지원관 부족 문제 △특례시의회 출범 등 변화하는 사회적 환경을 법 조항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지방자치법은 지방의회의 조직·예산권을 규정하지 않아 의회사무처 운영 등에 있어 차질을 빚고 있다.문제는 전국 243개에 달하는 지방의회 규모와 기능에 비해 지방의회법 등 독립법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가 낮다는 것. 때문에 국회 등 중앙 정치에서 지방의회법은 주요 법안으로 분류되지 못하고 있다. 지방의회법은 지난 2018년 전현희(더불어민주당, 강남을) 국회의원이 최초 발의했지만 계류,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는 4건의 지방의회법이 상정됐지만 모두 불발됐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인 ‘지방시대위원회’도 지난해 7월 10일 출범, 약 1년 넘게 지역 균형발전 정책, 지방분권 과제 등을 총괄해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지방의회법을 주요 안건으로 삼지 않고 있다.지방의회법은 일선 지방의회에서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후반기 시도의회의장협의회와 시군자치구의장협의회 활동이 본격화되면 전국 지방의회 대표들이 모여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지난 14일 열린 ‘대한민국시도의회의장협의회 정기회’에서도 지방의회법 제정 촉구를 논의했다. 또 각 당 대표들에게도 지방의회법 필요성을 전달해 국회에서 공론화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대구권 대학의 한 행정학과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는 기관대립형 정부형태지만 단체장 권한이 우위에 있다”며 “지방의회법 제정으로 지방자치를 실현할 법률을 만들어 의회와 단체장의 관계가 각 지역에 맞게 다양한 형태로 바뀔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장은희기자

2024-08-25

영화가 좋아 중학교 졸업 후 무작정 상경, 노숙하며 버텼죠

문신구사진 감독은 줄곧 시대의 금기를 화두로 꺼내왔다. 1970∼80년대에는 정치와 노동을 무대에 올렸고, 1990년대에는 연극 ‘미란다’로 ‘성(性)’을 파격적으로 다뤘으며, 2000년대에는 영화 ‘원죄’로 종교의 위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 한국 연극영화계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문 감독은 2023년에 고향 포항을 스크린에 담아 지역사회의 화제가 되었다. 포항 원도심의 오래된 커피숍에서 문 감독을 만나 연극과 영화에 바친 한평생을 들어보았다. 배은정(이하 배) : 작년에 영화 ‘2퍼센트’ 개봉으로 바쁜 한 해를 보내셨고, 이 작품으로 2023 뉴질랜드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문신구(이하 문) : ‘2퍼센트’는 고향 포항에서 만든 첫 작품이지요. 이 작품으로 국제 영화상을 받게 돼 큰 영광이었습니다. 이전에 영화 ‘원죄’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적은 있지만 감독상은 처음이라 더 기뻤습니다. 지금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1호이자 국가무형문화재인 ‘안동포 짜기’를 다큐멘터리 영화 ‘베틀소리’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여인네들의 삶을 노래한 ‘베틀소리’는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전수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두 분이 요양원에 계시지요.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가는 것들의 소중함을 담아보려 합니다.배 : ‘2퍼센트’는 한마디로 ‘메이드 인 포항’ 영화인데요. 영화의 배경으로 포항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문 : ‘2퍼센트’는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포항지부가 발족하고 지역 영화인들이 합심해 만든 영화입니다. 시민을 대상으로 시나리오 공모와 신인 배우 공모 등의 과정을 거쳤고, 경상북도와 포항시가 제작을 지원했습니다. 나는 포항 흥해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갔고, 그 때문에 늘 마음에 포항을 품고 있었습니다.배 : 어릴 적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문 : 포항시 흥해읍 남송2리에서 태어나 남송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20여 년 전에 가보니 마을은 숲으로 우거지고, 고향집은 사라졌더군요. 그땐 10리를 걸어 학교에 다녔어요. 산 넘고 곡강천을 건너 들판을 지나다녔지요.배 : 시골 소년이 영화를 꿈꾸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문 :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영화관을 들락날락했어요. 수업을 마치면 이른 저녁을 먹고 영화관으로 달려갔지요. 외국영화는 1962년에 국내에 개봉된 ‘벤허’와 ‘십계’ 등을 봤고, 국내 영화는 ‘빨간 마후라’(1964), ‘광야의 호랑이’(1965) 등을 본 기억이 납니다. 신작만 나오면 영화관으로 냅다 달려갔죠. 상영작을 보려면 저녁을 서둘러 먹고 영화관으로 뛰어야 했어요.배 : 지금은 흥해에 영화관이 없는데 당시에는 있었군요. 관람권은 어떻게 구했나요.문 :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읍내에 영화관이 있었어요. 그러니 산 넘고 강 건너 들판을 뛰어야 했지요. 어린 나이에 돈이 어디 있었겠어요. 표 살 돈이 없으니 쌀이나 달걀을 훔쳤지요. 쌀은 한 되 정도, 달걀은 한 판을 팔아야 표를 살 수 있었어요. 혹시나 학교 선생님들과 마주칠까 봐 숨어서 관람했죠. 기가 막힌 추억도 꽤 있습니다. 하루는 달걀을 보자기에 싸서 영화관으로 뛰어갔는데 거의 다 와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거예요. 티켓값이던 달걀이 깨졌으니 어떻게 되었겠어요? 영화관 문턱에서 울면서 집으로 되돌아갔지요. 영화인을 꿈꾸게 된 최초의 계기가 된 것이 바로 그 시절이었습니다.1960년대 포항의 영화관은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당시 영화관 현황을 ‘포항시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1960년대 들어와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활성화되면서 포항시, 영일군 지역에는 사설 영화관 개설 붐이 일어나 관내에 총 13개의 극장이 문을 열었다.포항시에는 포항극장(대흥동, 1964년 개관), 시민극장(상원동, 1964년 개관), 대신극장(대신동, 1964년 개관), 아카데미극장(여천동, 1965년 개관), 부민극장(죽도동, 1966년 개관)이 있었고, 영일군에는 흥해극장(흥해읍 성내리, 1960년 개관), 오천극장(오천읍 세계리, 1961년 개관), 양포극장(장기면 양포리, 1962년 개관), 연일극장(연일읍 생지리, 1963년 개관), 구룡포제일극장(구룡포읍 중앙리, 1963년 개관), 지행극장(장기면 읍내리, 1963년 개관), 흥해제일극장(흥해읍 성내리 1964년 개관), 동보극장(청하면 미남리, 1965년 개관)이 있었다.-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제2권, 2010, 26~27쪽.배 : 영화관이 감독님의 ‘시네마 천국’이었군요. 단순히 영화를 좋아하는 걸 넘어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언제였나요.문 :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했어요. 성적도 괜찮았고 글과 그림, 운동 등 다방면으로 뛰어나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집안의 기대가 컸지요.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면서 철학 개론서나 융의 심리학 등을 읽었습니다.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다양한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영화에 매료됐지요.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 무작정 서울에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배 : 집안의 반응은 어땠나요.문 : 원래 본명은 최명효로 경주 최씨 종갓집 종손입니다. 당시 조부는 상투를 틀고 계셨어요. 아버지는 ‘딴따라’ 할 거면 호적을 파겠다고 하고, 어머니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어쩌려고 그러냐고 걱정했죠. 그래도 봇짐 하나 메고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촌놈이 빈털터리로 갔으니 결론이야 뻔하죠. 남산 야외 음악당 벤치 밑에서 노숙했어요. 새벽에 시장에서 식은 연탄을 끌어안고 몸을 녹이고, 쓰레기통을 뒤져 허기를 채웠어요. 결국 3개월 만에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호적을 판다던 부모님도 포기하시더군요. 말려서 될 일이 아니구나 싶었던 거죠. 고향집에서 몸을 추스르고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했더니 논을 팔아 방 하나 얻어주셨지요.배 : 열예닐곱에 혼자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로 갔다니 대단했군요.문 : 영화배우 이혜영의 아버지이자 영화 ‘만추’로 유명한 이만희 감독을 찾아갔어요. 영화 잡지를 뒤져보면서 이 사람을 찾아가면 되겠다 싶었거든요. 충무로에서 물어물어 이만희 감독의 단골 다방 앞에서 일주일을 기다렸어요. 그러다 지인들과 다방으로 들어가는 이 감독님을 본 거예요. 들어갈 때 인사하고 바깥에서 기다렸다가 나오면 인사하기를 사나흘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혼자 계실 때 따라 들어가 배우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차를 시켜주면서 나이를 묻더군요. 나이를 말하니 감독님이 웃으며 “학교는?” 하시길래 그만뒀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이 감독님이 배우는 영화를 알아야 한다며 연출부로 들어오래요. 그렇게 스크립터부터 시작했어요. 장면 하나 찍으면 그림 크기, 배경, 렌즈 크기, 배우 동선, 대사를 모두 기록하는 역할입니다.이만희 감독의 ‘만추’는 여죄수와 위조지폐범으로 쫓기는 남자의 절박한 사랑을 미학적으로 그려낸 1966년도 영화로 국내 흥행뿐만 아니라 해외로 수출되는 등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만추’ 이후 문학을 원작으로 하는 문예영화가 연이어 나오면서 작품성과 상업성을 모두 갖춘 문예영화는 한국 영화의 새로운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김소영·백해린·임대근 지음, ‘한국 영화의 역사와 미래’, 컨텐츠하우스, 2018, 69쪽.배 : 제작에 처음 참여한 작품을 기억하십니까.문 : 1972년에 개봉한 전쟁영화 ‘1950년 6월 25일 04시’를 포항 오천에 와서 찍었어요. 한국전쟁 때 동족끼리 총을 겨누는 참상을 그린 영화예요. 이 영화는 제9회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았지요. 영화에 관해선 아무것도 모르니 고생을 많이 했어요. 총 맞아 죽는 역할만 열 번 이상 했으니까요. 그렇게 시작했어요. 무지했으니 용감했고요. 그걸 하면서 영화를 배웠는데, 어린 눈에 감독이 멋있었나 봐요. 언젠가 감독이 되어야지 다짐했고 결국은 이루어냈지요. 그 뒤로 박노식 감독과도 작업했어요. 그러다 5년간 하사관으로 근무하다가 중사로 제대했고, 본격적으로 연기를 했습니다. 주인공으로 일고여덟 작품을 했으니 연기를 계속했다면 지금쯤 알아보는 사람이 꽤 많았겠지요. 문신구 감독은…본명 최명효. 1955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송리에서 태어나 남송초등학교와 흥해중학교를 졸업했다. 영화인을 꿈꾸며 중학교를 졸업한 후 무작정 상경했으며 영화계에서 활동하기 전에는 연극을 주로 했다. 1994년 연출한 연극 ‘미란다’가 외설 시비로 재판을 받게 되자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며 영화 제작에 나섰다. 노동과 정치, 성(性) 등 사회적 금기를 주로 다뤘으며, 총신대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활동을 했다. 영화 ‘원죄’로 제29회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제24회 춘사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작품상 등을 받았고, 2023년에는 포항을 배경으로 한 영화 ‘2퍼센트’로 뉴질랜드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사진 : 김훈 (작가)

2024-08-25

포항 아치못-아치골-연화재-대안저수지 돌아보기

포항 IC를 빠져나와 연화재에 이르면 길 양옆으로 산줄기가 나란히 펼쳐진다. 오른쪽이 포항 도심의 주산(主山) 양학산 줄기고, 왼쪽이 오늘 소개할 아치재다.‘아치재’는 이름에서 보듯 산(山)도 아니고 령(嶺)도 아닌 재(峙)다. 100m 남짓한 조그만 봉우리이지만 시계를 잠시 전통시대로 돌려보면 재밌는 사실들과 만난다. 아치재 인근은 조선 후기엔 흥해군에 속했다. 당연히 인접한 포항과 흥해 사이에서 행정구역을 둘러싸고 많은 조정 과정이 있었다. 또 이름(阿雉)에서 보듯 꿩과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행정구역 상 같은 북구지만 외곽에 위치한 탓에 우창동이나 용흥동처럼 도시의 주류에 포함되지 못했고, 늘 도시의 변방으로만 머물렀다. 개발 수혜는 비켜갔지만 옛 전통부락 마을길, 지명 등 민속적 전통이 잘 남아 있어 포항의 옛 자취를 더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조선 후기 아치골은 흥해읍 동상면에 위치아치재가 위치한 북구 우현동은 조선후기에는 흥해군 동상면(東上面)에 속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여천동(余川洞) 일부를 통합해 우현동이 됐다. 한자로 ‘우현(牛峴)’은 우리말로 ‘소티’ ‘쇠퇴’의 뜻인데 지명 유래와 관련해서 몇 가지 설이 전한다.첫째는 7번 국도를 따라 흥해로 넘어가는 재의 모습이 마치 ‘누운 소(牛峴)’같다 하여 유래됐다는 설, 둘째는 옛날 소장수가 날이 저물어 이 고개에서 잠을 자던 중 소뼈가 쌓여 있는 꿈을 꾸고 이 골짜기를 소티골로 불렀다는 설, 셋째는 ‘작은 고개’라는 뜻의 소티가 변음되어 ‘소현 ‘우현’으로 바뀌었다는 설 등이다.우현동 일대는 옛부터 숲이 울창해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고장으로 소문이 난 곳이다. 현재는 시세(市勢)가 확장,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신흥 주거지로 주목받고 있다. 또 2019년 개통한 서울∼포항간 KTX의 역사가 흥해읍 이인리로 이전함에 따라 포항의 새 관문으로서 도시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꿩이 알을 품고 있는 지형이라 하여 아치재우현고개는 연화재와 함께 7번국도에서 포항과 흥해를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로 기능하고 있다. 아치재는 우현고개와 비슷한 공간에서 재(峙)로써 역할을 해왔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기능과 역할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우현고개가 큰 도로와 인접한 중심 도로에서 포항 북부와 흥해를 연결하던 재(峙) 역할을 했다면, 아치재는 아치골이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주변의 마을과 마을을 잇던 산속 교통로로써 의미를 갖는다.‘아치골’이라는 이름 유래도 재미있다. 마을 뒷산 봉우리가 알을 품고 있는 꿩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유래됐다고 한다. 사실 꿩은 닭이나 오리처럼 가금(家禽)은 아니지만 산이나 들, 민가 주변에 동거하면서 반(半) 가금 상태로 인류와 함께 해왔다. ‘꿩먹고 알먹는다’‘꿩 잡는 게 매 ‘꿩 궈 먹은 자리’ 등과 같이 우리 속담에 등장하며 민중들의 일상 속에서 함께 공감해왔다. ‘꿩! 꿩!’ 하고 힘차게 우는 소리는 까치소리와 함께 마을을 울리던 정겨운 소음이었다. 또 밀밭, 보리밭이나 산에 수북이 알을 낳아 민초들에게 간식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아치골은 흥해-대련-연화재로 통하던 교통로고향이 포항인 사람들도 아치재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많다. 북부 너무 외진 곳에 위치해 밖으로 드러낼 기회를 잘 얻지 못해서다.나루끝 큰도로에서 우현동 쪽으로 접어들어 아치골사거리에서 한신휴 아파트, 우현 화성타운을 끼고 직진하면 잠시 후 아담한 못이 나오는데 바로 아치못이다. 전통시대 우현동 일대 농사를 위한 관개(灌漑)시설로 추측된다.못의 북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본격 아치재의 시작이다. 아치재는 앞서 언급한대로 옛날 우현마을과 흥해읍 이인리, 대련마을, 연화재를 연결하는 교통로는 몰론 밤밭골, 수태골, 뒷골 같은 재(峙) 주변 마을을 이어주던 산 속 교통로다.우주선이 행성을 날아다니고,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린 시대에 옛날 고샅길, 마을길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의미를 두고 다가가면 전통시대 길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전통시대 옛길 걸으며 선조들 자취 탐방아치골 등산로는 사방으로 뚫려 있어 어느 쪽으로든 진출이 가능하다. 골짜기 전반을 아우르고 싶다면 아치못-아치재-대안지-연화재를 모두 돌아보는 코스를 권한다.전체를 천천히 둘러보는데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10~20분 간격으로 이정표가 나타나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아치재에서 20분쯤 비탈길을 급한 걸음으로 오르면 삼거리가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가면 아치골이고 왼쪽으로 가면 대안지-연화재 가는 길이다. 아쉽게도 아치골 골짜기에 민가(民家)는 이제 거의 없다. 흥해와 통하는 큰길 공사가 현재 진행 중이다.삼거리에서 10분쯤 오르면 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흥해읍 이인리 방향이고 직진하면 연화재다. KTX 역사가 들어선 이인리 쪽은 이제 전통마을은 볼 수가 없고, 대단위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다.산에서 만난 배정숙(72)씨는 “20~30년 전만 해도 아치재 주변엔 ‘뒷골’ ‘말골’ ‘큰골’ ‘밤밭골’ 같은 전통부락들이 널려 있었다”며 “이 모든 마을들의 중심에 아치재가 있어 (이 재가) 산속 교차로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이 길을 따라 흥해에서 포항장으로 가던 장꾼들이, 행정문서·세수미(稅收米)를 실은 아전들이, 대련으로 마실을 가던 민초들이 왕래했다.◇연꽃 활짝 핀 대안저수지 돌며 늦여름 정취 만끽아치재와 연화재는 30분 거리에 있다. 양학산으로 연결해서 산행을 하고 싶다면 연화재 육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산림조합 뒷산을 지나 시청 뒤 양학산과 연결된다.흙산(土山) 위주 밋밋한 산행에 식상했다면 대안못 방향을 추천한다, 연화재 갈림길 못 미쳐 대안못-포항여자전자고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 길로 접어들면 된다.대안지는 전통시대 조성된 소류지로, 작은 연못이지만 규모에 비해 호수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다. 아담한 저수지를 푸르게 덮고 있는 연잎과 그 위를 아름답게 채색한 연꽃에, 싱그러운 초록의 기운에 빠져드는 것도 여름 산행의 이벤트다. 저수지 둘레길을 따라 데크가 조성돼 있고 못을 둘러싼 백일홍 등 수 십여 종 식물이 수채화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늦여름 한나절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아치재 옛길, 저수지 둘레를 걸으며 선조들의 자취를 한 번 느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인 듯하다. 글·사진/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08-22

불어나는 이자에 얽매여… 서른부터 지옥 같은 22년 세월

22일 오후 기자는 영등포와 포항 등지에서 22년간 성매매를 하며 살아온 65세 한 여성을 만났다. 아래는 인터뷰를 통해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를 독백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9세 때부터 시작한 식모살이나는 성매매 여성이었다. 태어난 곳은 강원도 오지마을, 네 남매 중 둘째로 위로 오빠 한 명과 밑으론 여동생 한 명, 남동생 한 명이 있다. 우리 집은 처음부터 가난했다. 노름을 좋아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우리에게 빚만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원망할 틈도 없이 나는 대처(大處)로 식모살이를 떠나야 했다. 어머니의 장사를 돕기 위해서다. 그때 내 나이 겨우 9살, 나는 그 집 아기를 보살폈다.지금 생각하면 아기가 아기를 키운 꼴이다.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7년을 꼬박 일했다. 남들 다 다니는 국민학교(초등학교)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식모 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엄마에게 돈을 보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또다시 큰 오빠를 따라 서울 변두리 봉제공장으로 갔다. 어렸을 때부터 옆집 바느질거리를 조금씩 맡아오며 밥을 얻어먹은 터라 곁눈질로 배운 손기술로 잠시 그곳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래도 돈은 늘 부족했다. 워낙 없던 살림이라 돈을 보내도 겨우 굶주림을 면할 정도였다. 결국 엄마는 23살이 되던 해에 나를 시집보냈다. 한 명이라도 군식구를 줄이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결혼 상대는 장사하는 집 아들이었다. 기구한 팔자는 타고난 것일까? 남편은 평소에는 멀쩡한데 술만 마시면 날 때렸다. 하루는 뺨을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고막이 나가버렸다. 그날부터 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더니 지금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의사는 일찍 병원에 갔으면 이 정도로 심해지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그땐 그럴 수 없었다. 남편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나에게 남겨진 두 아이 때문에 원망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더 큰 돈이 필요했다.봉제 공장을 다니던 중 내 사정을 아는 동료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영등포 신세계백화점 너머로 가면 큰돈을 만질 수 있어. 정 급하면 그곳으로 가봐.” 나는 그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내 나이 서른살이었다. ▲영등포에서 포항으로 오기까지처음 내가 영등포에서 했던 건 ‘나까이’(호객꾼) 일이다. 나이가 많은 탓에 직접 성매매를 시키기보단 손님을 호객하는 역할을 준 것이다. 그 일도 쉽지 않았다. 돈도 많이 벌지 못했다. 직접적으로 성매매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빌린 돈이 있으니 견뎌야 했다. 선불금 2000만 원, 나는 2000만 원을 벌기 위해 5년 동안 일을 했지만 매달 10%씩 불어나는 이자 탓에 돈을 다 갚지 못하고 포항으로 내려왔다. 포항은 직접 성매매를 할 수 있어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갚아야 할 돈이 남아 있었지만, 자식들에게 생활비를 보내야 했기에 나는 또 업주에게 5000만 원을 빌렸다. 지옥 같은 22년은 그 5000만 원으로부터 시작됐다.▲온갖 욕설을 들어야 했던 포항포항 뱃사람들이 거칠다는 것은 영등포에서 일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하루는 술을 마시고 온 남자 손님이 잠자리가 마음에 안 들었다면서 욕설과 함께 내 목을 졸랐다. 나는 속옷도 입지 못한 채 거리로 뛰쳐나왔다. 주위에 있던 여성들이 급하게 수건과 담요를 가지고 나와 나를 감싸 안고 업소 안으로 들어온 적도 있었다. 관계 가진후에 화대를 주기 싫어서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돈을 돌려받으려던 남성,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강요한 남성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일들을 겪었다. 하루에 적게는 5명, 많게는 10명의 남성들과 관계를 가졌다. 남성들은 툭하면 나를 바보로 불렀다.초등학교도 못 나온 탓에 글을 읽을 수도 없었고 귀가 어두워 불러도 대답을 못했던 탓이다. 업주들은 이런 나의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일한 만큼 돈을 주기 시작한 것은 내가 달력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 하루에 받은 남자 손님들의 수를 세기 시작한 때부터다. 억울했지만 바보 같은 내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포항에 와서 성매매에 뛰어들어서야 업주들에게 빌린 돈을 다 갚을 수 있었다. 돈을 다 갚고 나니 업주가 오히려 나에게 20만 원을 돌려줬다. 위로금인지, 양심에 찔린 건지 모르겠으나 그날을 절대 잊지 못한다. 빚을 다 갚은 뒤에도 약 19년간 더 성매매를 했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50대 초가 되니 점점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원래도 하혈을 자주 하긴 했지만, 자궁을 적출해야 할 수준까지 간 줄은 몰랐다. 나는 모아둔 200만 원을 들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는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수술은 해야겠기에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연락해다. 그렇게 5년 만에 아들을 만났다. 아들을 본 순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아들은 지금까지도 내가 성매매를 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알게 되면 나를 사람처럼 보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혼자 모든 시련을 견뎠다. ▲내 꿈은 공주방을 가지는 것나는 57세에 성매매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집결지 주변에 여성상담센터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포항에 온 지 10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그곳을 방문했다. 그곳에 있는 상담 선생님들은 너무나 착했다.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웃어주고 내 사연을 궁금해 했다. 나는 그들을 따라 착실히 공부했다. 1년간 낮에는 자격증 공부를 하고 밤에는 성매매를 했다. 1년의 피나는 노력끝에 기술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길로 나는 22년간 몸담았던 업소에서 짐을 싸서 나왔다. 업소를 나오기까지 큰 결단이 필요했다. 10년 넘게 함께한 동료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곳을 나왔다.그곳을 떠나고서야 알았다. 집결지에 있는 동료들이 왜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지를. 사실 이곳에 있으면 세상이 온통 3평 하늘처럼 보인다. 우물안 개구리가 되는 것이다. 떠나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와락 겁이 나기도 한다.하지만 동료나 동생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다. 하루빨리 그곳을 빠져나오라고. 너희가 보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고. 사실 나도 이곳을 떠났지만 요즘도 마음이 답답해지면 여기있는 친구들과 이야기 하곤한다. 이곳은 어쩔 수 없이 나의 고향이자 친정같은 곳이 되었으니까.성매매 집결지를 떠나 8년의 세월이 흐르고 지금은 중앙동 주변에 집을 얻어 살고 있다. 새벽 4시에 출근해 2시간 가량 차를 타고 농촌마을로 가 사과를 따기도 하고, 섬으로 가서 밭일을 돕기도 한다. 그래도 8년 전보단 행복하다. 아무도 나를 바보라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내 꿈은 ‘공주방’을 얻는 것이다. “육십이 넘은 할머니가 웬 공주방이냐”고 하겠지만, 식모 생활하던 시절 주인집 딸의 방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하얀색 레이스 침대에 분홍색 캐노피 커튼이 달린 방을 가지고 싶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벗어버리고 그방에서 고운 꿈을 꾸고 싶다. 오순도순 가족들과 모여사는 행복한 꿈을./성지영 인턴기자 thepen02@kbmaeil.com

2024-08-22

“성매매 여성의 심리·경제적 자립 지원 최우선 과제”

성매매 집결지 정비를 둘러싸고 지방자치단체마다 홍역을 앓았다. 포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포항시의 성매매 집결지 3곳을 밀어내고 도시재생차원의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성매매집결지를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이 충돌해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옛포항역 성매매집결지 주변에 69층 규모의 주상복합단지를 조성하자는 개발흐름이 진행됨에 따라 적극적인 정비의 필요성이 높아졌다.이에 포항시는 2024년 1월 18일, 옛 포항역 성매매 집결지 정비 테스크 포스(이하 TF)를 발족했다. 장상길 부시장을 단장으로 구성된 TF는 1단 2팀(자활지원팀, 도시정비팀) 4반(피해여성지원반, 지도단속반, 공간정비반, 운영지원반)으로 구성되었으며, 집결지 정비 완료 시까지 협업 체제로 운영될 예정이다. TF는 현재까지 두 차례 회의를 진행했으며 연구용역을 통한 집결지 실태조사와 도시개발과 관련한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본지는 포항시 성매매 집결지 정비를 전담하고 있는 포항시 여성가족과 양성평등문화팀과 포항시의회 김은주 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의 인터뷰를 통해 집결지 정비를 위한 포항시의 현재까지의 노력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시민과 집결지 걸으며 ‘성매매’ 인식부터 바꾸려 노력” 인터뷰 정연학 포항시 여성가족과 과장  - 성매매집결지 정비를 위해 시 차원에서는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 △포항시는 2021년부터 꾸준히 성매매 집결지 정비를 위해 힘쓰고 있다. 같은 해 4월 민관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성매매 집결지 지역 협의체를 발족했다. 2023년 4월부터 6개월간 연구용역을 통해 ‘포항시 성매매집결지 대책 기본계획’보고서를 제작했다.보고서에는 성매매집결지 현황 분석, 국내외 성매매집결지 정비 사례분석, 성매매집결지에 대한 시민의식 조사, 옛 포항역 성매매집결지 일대 도심 활성화를 위한 기본구상, 성매매피해여성 자활지원 방안 연구 등이 담겨져 있다. 올해 4월에는 집결지 정비의 세부적인 업무를 논의하게 위해 관련부서 팀장들로 구성된 실무협의체를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외에도 성매매집결지 걷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성매매집결지 걷기 운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달라. △집결지 정비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시민들을 대상으로 정비의 필요성과 성매매 여성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성매매집결지 걷기 운동은  시민들이 성매매 집결지를 직접 보고 걸으며, 성매매집결지 정비와 성매매피해여성 자립지원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걷기 활동은 올해 4~6월까지 진행했다. 집결지 걷기 운동은 포항시 부시장을 비롯한 행정기관도 함께 했다. 시민 대상으로는 현재까지 5개 단체 100여명이 참여했다. 걷기 활동을 마치고난 시민들은‘옛날부터 있었던 성매매집결지가 현재까지 영업 하는 줄 몰랐다’, ‘하루빨리 성매매집결지는 정비되어야 한다’는 등의 다양한 반응과 함께 집결지 정비에 대해서 함께 공감했다. -포항 성매매집결지 정비에 있어 어떤 점이 가장 힘든가. △성매매 집결지 정비 사업은 정비유형에 따라 여러 사업들이 균형 있게 추진 되어야 하기 때문에 중장기적인 사업이 되는 경우가 많다. 타 지역의 정비 사례를 보더라도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이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포항시는 구체적인 청사진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이 가장 힘들다.포항시는 여건에 맞는 최적의 정비 계획이 나올 수 있도록 각 부서와 더 긴밀한 협의를 통해 세부계획을 완성해 나갈 계획이다.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면 성매매 집결지가 없으면 ‘성매매 범죄 발생률이 높아질 것이다’, ‘성매매는 필요악이다’라는 일부 사람들의 인식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경찰 단속과 같은 강력한 방법으로 정비를 할 수는 없는 것인가? △현재 집결지 정비에 있어 경찰 단속은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현재 경찰의 입장은 집결지 폐쇄를 위해 적극적으로 단속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성매매집결지 정비 문제의 경우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있어 무조건적인 단속이 답이 되지 않는다. 타 지자체 사례를 살펴보아도, 공간정비·지도단속·피해여성지원 등 3가지 중점과제를 가지고 함께 진행을 했을때 완전한 집결지 정비가 가능했다. 만약 경찰 단속만 강행할 경우 성매매 여성이 중앙동 공간에서만 사라질 뿐, 다른 지역 성매매 업소로 여성들이 유입되는 양상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때문에 성매매 여성의 자활지원 조례 제정이 중요하다. 조례를 제정하고 나면 여성들이 시 차원의 보호를 받고 성매매 자연스럽게 그만둘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포항시는 관련 조례안 발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집결지 정비계획 수립되면 자활 지원 조례제정 속도” 인터뷰 김은주 포항시의회 민주당 비례대표 - 포항시 성매매 집결지 정비를 위해서는 집결지 인근의 도시 개발 계획과 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자활 조례 제정이 시급한 것으로 안다. 자활 조례 제정에 관련한 진행 상황은 어떠한가.  △올해 안으로 포항시에서 성매매 집결지 정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한다면 그와 동시에 성매매여성에 대한 자활 지원 조례 제정도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 본다.지난해 포항시에서 성매매 집결지와 관련해 용역을 실시했다. 용역 결과 중에 성매매여성들에게 자활에 대한 의지를 물었을 때 ‘자활 지원이 된다면 탈성매매를 하겠다’라는 결과가 있었다. 이로써 조례 제정의 필요성이 이미 증명 되었다.성매매 시장에 유입되는 여성의 경우에는 학력, 가정형편 등 사회적 자본이 취약하기 때문에 유입되는 경우가 많다. ‘쉽게 돈 벌기 위해서 성매매를 한다’라는 성매매에 대한 통념을 ‘성매매 여성의 몸을 기반으로 쉽게 돈을 버는 포주나 공간제공자’로 바로 세우는 인식 변화도 수반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또한 성매매여성에 대한 자활 지원 조례를 제정하는 것과 동시에 이제는 포항시에서는 성매매 집결지 정비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수립해야 할 시점이다. -성매매 집결지 정비에 대한 논의를 지금까지 진행하면서 시의회 안에서나 시와 소통하면서 겪은 과정을 평가한다면. △의회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리고 시의원으로 성매매 집결지 관련해 공론화하는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하지만 지금까지 성매매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왜곡된 인식들, ‘쉽게 돈 벌기 위해서 성매매한다.’, ‘성매매는 필요악이다’, ‘성매매가 없어지면 성폭력이 증가할 것이다’라는 통념을 하나하나 이해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나는 전공자이기도 하고 여성운동가 출신이라 다른 분들과 이해의 스펙트럼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충분히 설명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하겠다.앞으로도 포항시와 의회, 그리고 지역사회와 함께 협력해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역할을 다 하겠다. -앞으로 포항시가 성매매 집결지 정비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성매매 집결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두의 협력이 최우선 되어야 한다.포항시와 포항시의회는 물론이고 포항시민들이 함께 성매매 집결지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추진해야 할 것이다. 또한 경찰과 검찰, 세무서, 소방서 등 관련 공공기관의 협력도 중요하다./성지영 인턴기자 thepen02@kbmaeil.com

2024-08-21

싫고 좋음 없이 모두를 품어 안는 한수정과 함께 400년

41. 봉화 한수한반도 야생에서는 멸종되었다는 백두산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는 우리 전통 민속문화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찰이나 마을에 있는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함께 백발에 수염이 있는 신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반도 지형을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습으로 상징하거나 용감한 사람을 호랑이로 일컬었다.한민족 삶의 곳곳에 호랑이는 용감한 기질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로 인하여 호랑이의 용감무쌍한 기질을 은연중에 우리 민족의 기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 운동과 일제 강점기 때의 독립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것도 모두 이러한 용감무쌍한 호랑이의 상징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경북 봉화 문수산 자락 수림 속에서 포효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얼마나 의젓하고 품위 있는지, 붉은 털에 검은 줄무늬를 한 호랑이는 용감무쌍 그 자체란 생각이 든다. 고개를 들고 “어흥”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산울림이 크게 메아리쳐 계곡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뭍 짐승이 놀라 숨죽이는 순간에 한 바퀴 몸을 뒹군다. 날렵 용감무쌍한 백두산 호랑이의 기상이 내 가슴에 박히는 순간이었다.상징성 문화로 백두산 호랑이와 마을 노거수는 우리 전통 민속문화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 민족의 용감한 기상을 상징하는 백두산 호랑이는 야생에서 그 실체가 사라져 민속문화에서도 서서히 잊혀 가는 반면에 다행히 노거수 문화는 아직도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수정(寒水亭)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134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건축물이다. 정자 3면에 맞닿게 연못을 만들고 주변에는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 작은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연못은 해와 달, 정자, 나무 등 찾아온 모든 물상을 좋아하고 싫어함을 가리지 않고 모두 품어 안는다. 연못에 비추어진 물상을 보면서 포용의 의미를 배운다. 느티나무 노거수는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 주민들의 결속과 단합을 그리고 장수, 건강, 절개, 끈기 등 노거수의 다양한 상징성이 우리 삶의 여정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찬물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정자라 하여 한수정이라 이름을 붙인 이곳은 조선 선비문화를 비롯한 산림 문학 등 인문학적인 소양을 배울 수 있는 도서관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정자와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 안에 숨 쉬며 살아가는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다. 한수정이 1608년에 세워졌다고 하니 느티나무 역시 그 당시에 조경수로 심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면 나이가 400년 훌쩍 넘었다. 봉화 한수정은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47호로 지정되었다가, 다시 대한민국의 보물 제2048호로 승격되었다. 그런데 정자와 함께한 느티나무 노거수는 공적에서 제외되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400여 년 전 담장 안의 나무가 담장을 허물고 바깥세상에 그 억울함을 토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답할 때가 아닌가 싶다.사실 호랑이를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우연한 기회라면 기회였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 소재한 한국산림과학고등학교 제2회 한국산림문학회 미래목 청소년 글짓기 공모전 시상식에 참석했다. 이날 행사를 스케치 해보면 김선길 산림문학회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장차 산림 분야의 진출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게 하는 행사로써, 산림 분야의 미래를 밝히는 청소년들이 꿈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이서연 부이사장은 작품 심사 소감을 설명하면서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나왔다며 제한된 수상자를 가리는데 힘들었다고 했다. 윤정란 산림과학고등학교 교장은 글짓기 공모전에서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데 큰 힘이 되었으며 앞으로 산림 문학적 소양을 갖도록 지도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했다. 황욱준 경상북도 산림레저관광과장이 도지사를 대신하여 운문부 대상인 경북도지사상을 ‘우리 반은 숲이다’라는 작품을 쓴 사공효주에게 수여했다. 최영태 남부지방산림청장이 산림청장을 대신하여 산문부 대상인 ‘서정은 희망과 무한을 안고’라는 작품을 쓴 오재현에게 수여했다.행정, 교육, 산림문학회가 삼위일체가 되어 미래목을 육성 발전시킨다면 우리의 금수강산은 지구촌 제일의 강산이 되지 않을까. 인문학적 소양은 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래목 청소년 글짓기 공모전” 사업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행사를 마치고 ‘백두대간수목원’ 백두산 호랑이를 보러 갈 것을 모두 원했다. 늦은 시간이라 볼 수 있을지 조마조마했는데 마침 수목원에 근무하고 있는 동문인 안경환 박사의 친절한 안내로 백두산 호랑이 ‘무궁이’를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한수정은 우리 조상의 선비문화와 산림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지난 가을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마루에 앉아 느티나무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나무는 우리가 늘 마시는 공기를 신선하게 해주고, 마시는 물을 깨끗하게 정화 시켜 주고, 주변의 소음을 줄여 준다. 침침한 눈을 맑게 해주고, 오감을 활성화하여 기분을 좋게 해준다. 나무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한 기분이 든다. 왜일까? 이는 영적인 충만감에 젖어있는 나무들의 심리적 진동을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심호흡을 해 본다. 자연에 가까워지면 병은 없어지고 자연에 멀어지면 병은 가까워진다. 행복의 기본은 건강이다.”나무와 숲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산림문학이다. 노거수는 우리 인생길에 지혜와 교훈, 위안을 주어 우리 삶의 여정을 아름답게 살찌운다. 앞으로 노거수와 숲에 대한 깊은 사고의 글을 쓰리라. 다짐해 본다. 사단법인 한국산림문학회는…2000년 대형 산불로 동해안 일대의 막대한 산림자원이 소실되자 이를 안타까워한 많은 산림공직자가 산림청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묶어 ‘아까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란 문집을 펴냈다.조연환 산림청 사유림지원국장의 제안에 따라 산림공직자 38명이 모여 산림문학회를 출범. 2009년 3월 3일 산림청장 허가 제111호로 (사)한국산림문학회가 설립됐다.설립 목적은 산림 문학의 발전과 산림문화 창달. 회원 상호간의 친목 도모이고, 산림문학회지 발행 및 산림문화 창달에 관한 출판 사업. 산림 문학 연구발표회, 강연회 및 강좌 개최. 저명작가 초청 및 출판물의 교류. 기타 목적 달성에 필요한 사업 등을 진행해왔다.산림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으로서 문학회의 목적에 찬동하고 회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는 개인 및 단체면 가입할 수 있다. 신입회원은 이사 2인의 추천을 받아 이사회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제8대 이사장은 김선길, 상임 부이사장은 이서연, 사무차장은 강준혁이다. 사무실은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 57 국립산림과학원 내 나무병원 2층에 위치해 있다. 홈페이지는 http://kofola.or.kr/, 연락처는 02-3293-2004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8-21

솔개가 멈춘 산에 자리잡고 나라를 도와 神異한 일을 일으켰다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쓴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 이 책엔 기이한 설화와 신묘한 전설이 곧잘 등장한다. 그래서, 대중들에겐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보다 쉽고 재밌게 읽힌다.‘삼국유사’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불리는 ‘선도산 성모’와 관련된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것이다.“(선도산 성모는)옛날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신선처럼 도술을 부릴 줄 알았던 그녀는 해동(지금의 한국)에 와서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딸을 걱정하던 황제가 편지를 써서 솔개의 발에 달아 보냈다. ’이 솔개가 멈추는 곳에 자리 잡고 살라‘는 내용이었다. 사소는 아버지의 말대로 솔개를 날렸고, 솔개가 멈춘 산에 머물면서 신선이 됐다. 그 산의 이름은 서술산(지금의 선도산)이었고, 신모(사소)는 오랫동안 거기 살면서 나라를 도와 신이(神異)한 일을 많이 일으켰다.”선도산 성모, 또는 선도산 신모로 불리는 설화 속 여성은 절벽에 세운 마애여래삼존불, 무열왕릉을 비롯한 여러 개의 거대 고분과 함께 선도산의 수수께끼를 푸는 주요한 3개의 열쇠 중 하나다.베일 속에 싸인 비밀스런 이 여성이 신라 당대에 가졌던 위상과 서라벌 귀족들과의 관계를 알아보는 건 흥미롭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몇몇 고문헌에 서술되는 내용만으론 구체적 실체가 선뜻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 ◆곤륜산 서왕모와 선도산 성모의 연결고리는...신라사 연구자들은 그간 각종 연구 논문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선도산 성모’에 접근하려 애썼다.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김태식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김태식은 그의 논문 ‘고대 동아시아 서왕모(西王母) 신앙 속의 신라 선도산 성모(仙桃山 聖母)’에서 중국 고대사와 연관시켜 선도산 성모를 설명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신라 건국신화에 의하면 건국 시조 박혁거세는 선도산 성모가 낳은 아들이다. 선도산은 경주의 서악이었다. 나아가 선도(仙桃)라는 이름 자체는 중국의 곤륜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 즉, 중국 곤륜산 신화에서 서왕모가 지배하는 곤륜산에는 불로장생을 보장하는 선도(仙桃·먹으면 죽지 않는 복숭아)가 자란다고 했거니와, 이 런 모티브를 신라 왕도에 적용한 산악이 바로 선도산이었다. 선도산 성모는 신라 건국시조의 어머니인 까닭에 성모(聖母)로 추앙되었다. 성모란 신라라는 지상왕국을 낳은 최고 여신격이란 의미다. 이런 점에서 선도산 성모가 바로 신라판 서왕모였음은 명백하다.”인접한 나라의 고대 설화 속 여신과 신라의 ‘성스러운 어머니’를 연결고리로 묶어낸 김태식. 그렇다면 논문에서 언급되는 ‘서왕모’는 어떤 인물일까?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서왕모는 선도산 성모처럼 숭배 받는 여성이었다. 곤륜산에 살면서 신선들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요지금모(瑤池金母), 왕모낭랑(王母娘娘) 등으로도 불린 서왕모를 과거 우리나라에선 통상 ‘왕모님’이라 칭했다.재밌는 건 크고 사나운 파랑새와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교활한 여우를 수족처럼 부렸고, 어린 아이의 정기를 빨아들여 항상 부드러운 살결과 젊음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다.선도산 성모에 얽힌 전설 또한 근엄하고 진지한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재밌고 가벼운 에피소드도 존재한다. ‘삼국유사’를 다시 펴보자.“신라 54대 경명왕이 선도산으로 사냥을 나왔다가 사냥매를 잃었다. 성모에게 사냥매를 찾아주면 작위를 주겠다고 빌었더니, 사라졌던 사냥매가 왕의 책상 위로 날아와 앉았다. 이후 경명왕은 선도산 성모를 대왕(大王)에 봉했다.”◆세상을 쥐락펴락한 제주도 여신 이야기오래전 쓰인 몇몇 책에 파편적으로 등장하는 희미한 존재의 실체를 찾아다니는 건 어쩔 수 없는 사학자들의 고난이자 즐거움일 터. 선도산을 오르는 기자의 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수백 번을 거듭 오르내려도 선도산 성모가 “나 여기 있소”라고 모습을 드러낼 턱이 없음에도 그냥 무작정 그녀의 신위가 있다는 성모사(聖母祠)를 향했다. 비지땀을 줄줄 흘리며. 그 와중에 몇 해 전 한라산을 등반했던 때가 떠올랐다.역사가 5000년쯤 되는 국가면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매혹적인 설화나 신비한 전설 하나쯤은 지니고 있다.한라산이 있는 제주 역시 ‘거대한 여신’의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긴 시간 떠돌았다.제주도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여신 ‘설문대할망’. 다소 과장된 이 여신의 스토리를 ‘한국민속문학사전’은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태초에 탐라(제주도)에는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크고 힘이 센 설문대할망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누워 자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앉아 방귀를 뀌었더니 천지가 창조되기 시작했다. 불꽃이 굉음을 내며 요동치고,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할머니는 바닷물과 흙을 삽으로 퍼서 불을 끄고 치마폭에 흙을 담아 부지런히 한라산을 만들었다. 치마폭의 흙으로 한라산을 이루고 치맛자락 터진 구멍으로 흘러내린 흙들이 모여 오름이 생겼다. 할머니는 몸속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 풍요로웠다. 탐라 백성들은 할머니의 부드러운 살 위에 밭을 갈았다. 할머니의 털은 풀과 나무가 되고, 할머니의 오줌 줄기에서 온갖 해초와 문어, 전복, 소라, 물고기들이 나와 바다를 풍성하게 했다. 그때부터 물질하는 해녀가 생겨났다.”신라의 선도산 성모, 중국의 곤륜산 서왕모, 제주의 한라산 설문대할망. 이들이 능히 해내지 못할 일이란 없었다.도망친 매를 왕의 곁으로 돌아가게 하고,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복숭아를 키우고,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70km가 넘는 섬을 혼자서 만들고….고대 한국과 중국엔 ‘불능’을 모르는 절대적 힘을 가진 여성들이 있었다. 물론 설화 속에서지만. ◆‘만물의 어머니’로 불리는 여성은 서양에도 존재신라의 첫 번째 왕을 탄생시키고(선도산 성모), 신선들의 머리 위에서 세상을 다스리고(곤륜산 서왕모), 수천수만 사람들 삶의 토대가 될 섬을 만들어낸(설문대할망) 동양의 여신들.그렇다면 서양엔 이에 필적할 여신이 없을까? 당연히 있다. 동서양 불문 인간들이란 무엇이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걸 옮기는 걸 즐긴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앞서 언급된 동양 세 여신 수준에 이르는 서양 여신으로는 ‘가이아(Gaia)’를 내세울 수 있겠다. ‘만물의 어머니’이자 ‘신들의 어머니’로 지칭되는 여성이다. ‘그리스·로마신화 인물백과’는 가이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의인화된 여신이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또 다른 명칭으로 ‘게(Ge)’가 있다. 이 명칭의 어원적 의미는 ‘땅’ ‘대지’, 또는 ‘지구’다. 이름의 어원적 의미에서 추측할 수 있듯, 가이아는 모든 생명체의 모태인 대지를 상징한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 따르면 가이아는 ‘카오스’와 더불어 혈연관계 없이 태초부터 존재한 신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작가 히기누스의 ‘이야기’ 서문에 의하면, 가이아는 혈연관계에 의해 태어난 존재로 빛의 의인화된 신 아이테르와 낮의 의인화된 신 헤메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영생불멸 신들의 계보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모신(母神·어머니 신)으로….”어느 시대, 어느 장소건 삶이 유한한 인간은 불멸하는 존재를 동경해왔다. 선도산 성모와 가이아는 그런 부러움의 마음이 탄생시킨 고대 설화 속 숭배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계속)/홍성식기자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8-20

37년 쇳물 인생, 명장의 한마디“기술력, 혼자만의 산물 아니다”

“기술력은 혼자만의 산물이 아닙니다. 서로 소통하면서 함께 노력하고 발전해 나가려는 생각을 통해 완성도를 올립니다.”2015년 대한민국 명장, 2019년 포스코 명장에 동시 선정된 김공영(56) 금속재생산 대한민국 명장.각 명장 동시 선정은 작년 광양제철소에서 1명이 추가돼 2명으로 늘었지만, 포항제철소에서는 아직도 김 명장이 유일하다.포스코명장 제도는 포스코에서 2015년부터 뛰어난 기술은 물론 타의 모범이 될 만한 인품까지 겸비한 탁월한 직원을 선발해 예우하고 포상하는 제도이다. 포스코는 매년 2~4명을 선발하고 있다. 명장으로 선발되면 특별 승진·포상금 5000만원·명예의전당 헌액 등 다양한 혜택을 부여하고 있어 현장 기술인들의 최고 영예이자 롤모델로 여겨진다.최근 김 명장에게 최고의 기술자가 되는 길에 대해 들어봤다. - 금속재생산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진학을 포철공고로 하게 된 것이 첫 계기이다. 부친은 함경도 원산이 고향인데, 6·25 때 혈혈단신으로 피난을 와 결국 고향에 가보지 못하고 작년 12월 별세했다. 잠깐 떠났다 집에 돌아갈 줄 알았는데, 가족들과 영원한 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부친은 친척이라곤 한명도 없는 남한 땅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넉넉지못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혼자라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식들이라도 많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7남매를 두게 됐다고 했다. 나는 3남 4녀 중 다섯째였다. 중학교 때 공부를 제법 잘 했지만,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해 대학을 가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했다. 3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해 제강과 수석으로 졸업했다. 포스코의 제강부에 배치받아 현재까지 금속재생산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금속재생산 분야 명장이 된 것은 특별한 선택이 아닌, 그때 당시의 사정에 의한 선택의 결과였다.- 포스코에 입사 후 취련사가 된 과정은.△1987년 포철공고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포스코에 입사했다. 처음 배치받은 부서는 제강부 2제강공장 전로였다. 전로는 용광로에서 생산된 선철을 정련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강으로 만드는 공정으로, 전로에서 용강을 정련하는 작업자를 취련사라고 했다. 기술력이 부족했던 그때 당시 취련사는 매우 힘든 직무로 누구라도 좀 더 수월한 부서에 근무하는 것을 원했고, 전로에 근무하는 것을 기피했던 때였다. 나는 일이 힘들고 쉬운 것에 크게 개의치 않고 근무했다. 그런데 입사 1년 후인 1988년 10월에 스테인리스제강부 정련로로 근무 부서를 옮기게 됐다. 스테인리스제강부도 제강부와 동일하게 취련사라는 직무가 있는데, 제강부 취련사와 거의 같은 일을 한다. 다만 차이는 스테인리스강은 일반 탄소강에 비해 3~5배정도로 비싼 강인데, 정련 과정에서 사용하는 합금철이 제강부 전로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10배 이상 비싼 부분이고, 취련사가 어떻게 작업을 하느냐에 따라 원가에 미치는 영향력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입사후 5년 차인 1992년에 취련사가 됐는데, 이때부터 포스코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취련사로서의 노력은.△취련사가 되면서 스스로 다짐한 것이 동료 취련사보다 훨씬 싸게 스테인리스강을 생산해 회사에 이익을 매년 내 연봉의 10배 이상은 벌어줘야겠다는 것이었다. 스테인리스강을 싸게 만들려면 고가의 원료인 크롬과 니켈의 성분조정을 가능한 낮게 매우 엄격하게 관리하고, 가능하다면 저가원료를 최대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매일 취련 작업을 하고 나면 복기 과정을 거치면서 내 작업의 잘된 부분과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 공부하고, 개선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부족한 이론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책을 통해 열심히 공부도 했지만, 잘 모르는 것은 연구소에 근무하는 박사님들께 찾아가서 묻고, 배우고, 이런 과정을 약 5년 하다 보니 취련 작업에는 도사 수준이 됐다. 그때 당시 취련사들은 매월 2~5개의 불합격 작업을 해 불량에 의해 원가손실과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나의 경우, 불합격작업 자체가 월 1~2개 수준으로 적게 발생되다가 5년 동안 불합격작업 자체를 한번도 안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불합격 작업을 5년 이상을 못한 것은 내가 최연소 반장으로 승진해 취련 작업을 못하게 되었기 때문인데, 취련사로 근무하는 약 10년의 세월동안 내가 처음 다짐했던 동료취련사들보다 훨씬 싸게 스테인리스강을 생산하겠다는 것은 이룬 것 같다. 이 밖에도 설비개선을 통한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원가를 절감하는 노력을 계속했다.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개선활동을 해 성과를 보상받을 수 있는 제안활동과 자주관리 분임조활동에 대해 강조를 많이 하곤 했다.- 명장이 되기 위해서는.△처음부터 계획하고, 노력한 경우는 아니다. 매 순간순간에 충실했던 것이 밑거름이 돼 어느새 명장으로 선정될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내가 명장이 된 것은 항상 개선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더 싸고 품질좋은 스테인리스강을 생산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배우고 노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雨垂穿石(우수천석)’이라는 글귀를 가슴에 새기고 생활하고 있다. ‘천년을 두고 떨어지는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법구경에 나오는 글귀와 일맥상통하는 글귀인데, 1만시간의 법칙과 비슷하다. 오랜 세월 노력하고 익히면 못할 것이 없다. 명장이 되기까지 회사생활에서 이와 비슷하게 생활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우수제안 활동을 통해 탈산적중률을 획기적으로 올린 일이다. 약 23년 전 일이다. 스테인리스강 정련공정 탄소제거과정에서 발생된 크롬산화된 것을 모두 회수해야 원가나 품질, 생산성 등에 문제가 없다.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때 당시 환원제 적중률이 65%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 35%는 원가쪽으로 불리하기도 하고, 품질 불량이 발생되기도 하고, 성분격외가 발생되기도 했다. 이게 고질적인 문제라서 부서에서는 엔지니어를 투입해 1년 동안 개선활동을 진행했는데 1년 활동 후에도 전혀 개선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것을 내가 6시그마에 기반, 취련작업 데이터를 활용해 회귀모형을 만드는 활동을 했다. 환원제 적중률을 93% 수준까지 향상시킨 것이다. 아주 획기적인 일이었고, 이 활동은 우수제안 2등급과 특허등록으로 마무리했다. 지금까지도 그때 개선한 것이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2018년 우수제안 1등급 개선활동을 한 것이다. 포스코 56년 역사에서 우수제안 1등급은 아직까지 10건 정도밖에 나오지 않은 아주 귀한 것이다. 스테인리스제강부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1등급이다. - 숙련기술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이나 먼저 그 길을 간 선배들, 나를 따라오는 후배들 등 모두와 소통을 잘 해야 한다. 나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주변 그 누구와도 모두 공유한다.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노하우는 언제나 동료들과 공유하고, 한 단계 레벨업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결국에는 자신의 기술력을 더욱 높이는 수단이 된다는 부분이다. 나만이 아는 노하우를 공유하지 않으면 불완전한 노하우로, 언젠가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얻은 노하우를 모두와 공유하면 내가 사용할 때는 발견하지 못한 부분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또다른 노하우를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예전의 방식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기존의 것에만 의지하면 변화가 없고 발전 자체를 기대할 수 없다.- 앞으로의 포부는.△숙련기술인으로 성장하려는 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수준 높은 전문교재를 편찬하고자 한다. 제강분야 전문교재를 보면 아직도 1970년대 이론과 내용이다. 최근의 기술동향이나 설비동향 등을 파악하기 어려워 공부하고자 하는 후배들이 제대로 공부하기 힘든 현실이다. 최근의 조업기술과 이론을 포함한 전문교재를 편찬해 후배들이 배우고 익히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 또한 포항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언젠가는 포항지역 문화해설사로 봉사를 할 계획도 갖고 있다./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08-19

엘리트 체육 도시로… 문경, 국제대회·전지훈련 성지로 뜬다

문경시는 2013년 국가스포츠의 요람이자 엘리트 체육의 산실인 국군체육부대의 문경 이전과 함께 2015 경북문경세계군인체육대회의 성공적 개최로 국제적 스포츠 인프라를 구축해 국내·외 스포츠대회는 물론 전지훈련의 메카로 우뚝 서 있다.문경시는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로서, 전국 어디에서나 2시간대에 접근이 가능한 대한민국의 중심지이다. 현재 차질없이 진행중인 중부내륙고속철도가 개통되면 수도권과 1시간대에 접근가능해 진다.여기에 국군체육부대의 우수한 스포츠 인프라와 함께 천혜의 자연환경과 관광자원까지 품고 있다. 융복합 스포츠 산업으로 스포츠·전지훈련의 메카로 발돋움해 앞으로도 더 많은 대회와 전지훈련 유치가 가능할 전망이다.신현국 문경시장은 “문경은 완벽한 스포츠 인프라를 구축해 엘리트체육의 전지훈련은 물론, 각 종목의 대회 개최지로 자리매김 할 것”이라며 “세계대회를 치러낸 경험을 바탕으로 숙박, 관광 등의 분야와 접목된 ICT스포츠 융복합산업 육성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국군체육부대국군체육부대는 2013년 성남에서 문경으로 이전됐다. 태릉선수촌의 5배 규모로 국제규격 스포츠 시설을 자랑하는 국가 스포츠의 요람이자 엘리트 체육의 산실이다.건립비 3900억원으로 호계면 견탄리 일대 45만평 규모로 조성됐다. 실내훈련장 18동과 실외훈련장 10동, 실내육상장 1동, 선수 숙소 등 29개 동과 영외 아파트가 있다.1만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메인스타디움은 4개면의 축구장, 근대5종 복합경기장, 사이클 벨로드롬을 갖추고 있다. 국제규격 경기장은 축구, 럭비, 핸드볼, 농구, 유도, 복싱, 레슬링, 수영, 육상, 태권도, 아이스하키, 빙상 등 25개 하계종목과 바이애슬론, 아이스하키, 빙상, 스키, 루지, 봅슬레이, 스켈레톤 등 7개의 동계종목을 치러낼 수 있다. 특히, 14개 종목 동시훈련이 가능한 V자형(520m)의 세계 정상급 수준인 국내 최대 실내훈련장, 세계 유일의 근대5종 전용 실내경기장 등이 있다. □ 완비된 체육 인프라문경시는 국제규격의 최신시설을 갖춘 국군체육부대가 있고, 시민운동장에는 트랙 8레인을 갖춘 육상경기장이 있다. 시민운동장(천연잔디)과 영강체육공원(인조잔디)에 축구장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문경국제소프트테니스장(13면)과 배드민턴 전용경기장, 온누리스포츠센터, 국제클라이밍센터, 문경야구장, 그라운드골프장 등 다양하고 우수한 스포츠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지난해 마성 남호리에 위치한 씨름전용훈련장에 다목적 야외씨름훈련장을 설치해 올해 10월에 완공예정이다. 경북도 여자하키팀 훈련 및 전지훈련팀을 유치해 국군체육부대와 연계한 전지훈련 거점 조성을 위해 호계면에 필드하키장을 조성중이다.그리고 베이미부머 세대가 골프를 은퇴하고 파크골프에 입문하는 등 농촌을 중심으로 파크골프가 새로운 여가 활용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는 최근 트렌드를 반영해 제11회 대한체육회장기 파크골프대회를 유치하고, 각 읍·면·동별로 파크골프장해 명실상부한 스포츠 메카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문경시는 지난 3월 28일 2007년 부산광역시를 연고지로 창단한 상무여자축구단의 연고지 이전을 위해 국군체육부대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4월 첫 홈경기를 치른 문경상무팀은 창녕 WFC를 상대로 2대1로 승리를 거뒀으며, 7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세계군인여자축구대회’에서 프랑스와의 결승전에서 1대 0으로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 전지훈련의 메카국내에서 수영과 승마 펜싱 사격 크로스컨트리로 구성된 근대 5종을 한꺼번에 훈련할 수 있는 곳은 문경 체육부대가 유일하다보니 국내·외 선수단의 인기 전지 훈련장이다.문경을 방문하는 전지훈련팀은 종목별 국가대표팀과 국가대표 상비군, 한국체대를 비롯한 각종 대학팀, 전국의 체육 중·고등학교, 실업선수팀 등 다양한다. 특히 문경시-국군체육부대-한국관광공사 등 3개 관계기관이 긴밀히 협력해 노력한 결과 미국, 중국, 일본, 대만,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스페인,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등 해외 훈련팀의 참여도 해마다 늘고 있다.문경 전지훈련의 가장 큰 매력은 국군체육부대의 최첨단 시설을 갖춘 경기장에서 국가대표급 체육부대 선수들이 멘토로 지도를 해주는 등 훈련 파트너로서 실전연습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또한, 훈련장과 숙소 간 차량지원과 함께 관광체험, 지역 특산품 홍보 등 전지훈련 선수단에 대한 타지역과 차별화된 문경시의 다양한 정책으로 문경을 방문하는 전지훈련 선수단들이 훈련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는 점도 문경이 추진하고 있는 스포츠마케팅의 강점이다. □ 성공적인 체육대회 유치문경시는 문경 브랜드를 앞세운 전국 단위 체육대회를 개최해 스포츠도시 문경의 이미지를 굳건히 하고 있다.매년 문경의 특산품과 관광명소를 타이틀로 하는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2021년 7개의 전국대회에 이어 2022년에는 25개 전국대회를 성황리에 치렀다.지난 2월 2023 민속씨름 문경장사대회를 시작으로 3월에는 제53회 전국장사씨름대회, 제51회 춘계 전국 초중고 유도연맹전, 아시아 하키연맹 총회를 개최했다.4월에는 파크골프 중앙회 임원대회와 제23회 경북협회장배 합기도 대회 및 국무총리기 대표선발전을 유치했다. 5월에는 선수·임원 1000여 명이 참여하는 동아일보기 전국소프트테니스대회가 10일간 열렸으며, 8월에는 1만여 명이 함께하는 문경새재 맨발 페스티벌이 개최됐다.또한, 오는 26일부터 8월 31일까지 6일간 국군체육부대 실내종합경기장에서 8개국 초청 국제대학 배구대회가 열린다. 8개국 160여명이 참가하는 이번 대회는 SBS스포츠채널을 통계 중계될 예정이다.오는 11월까지 50여 개 전국 규모 대회가 이어진다. 대회와 관련된 선수와 임원 등 대회관계자, 학부모, 응원단 등 연간 8만여 명이 문경을 찾는다. 대회기간 동안 문경에 체류하며 숙박과 음식점, 관광지를 이용할 것으로 보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4-08-19

“할아버지 명예 위해 더 열심히 해야겠다 결심”

“미미가 한국 국가대표로 시합을 나갔으면 좋겠구나.”처음부터 한국인이었다. 한국과 일본, 두 개의 국적을 가진 이중국적자였지만, 한국을 택했다. 할머니의 유언이었다.언어도 모르고 낯선 땅이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대한의 딸이었기 때문이다.허미미(21·경북체육회) 유도 선수는 독립운동가 허석 지사의 후손(5대손)이다. 할아버지 허무부씨는 독립운동가 허석 선생의 증손자이다.허 선수는 할머니의 바람대로 2021년 국가대표선발전을 거쳐 2022년 태극마크를 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2024년 파리올림픽에서 유도 여자 -57㎏급 은메달 및 혼성단체전 동메달을 획득해 국위를 선양했다.귀국 후 한국에서의 첫 일정으로 지난 6일 대구 군위군 삼국유사면에 있는 허석 선생의 기적비를 참배했다. 4년 뒤엔 반드시 금메달을 가지고 이곳에 다시 오겠다는 다짐과 함께.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허 선수에게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들려주며 이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다음은 허미미 선수와의 일문일답. - 허미미의 5대조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 허석 선생이다.△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정말 놀랐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윤석열 대통령 주최로 열린 열린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오찬에 참가했다. 어떤 대화를 나눴나.△윤 대통령과는 두 번째 만남이다. 메달을 따서 감사하다, 축하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유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아버지가 유도 선수였다. 유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멋있었다. 그래서 유도를 시작하게 됐다.- 기억에 남는 올림픽 경기 순간은.△몽골 선수인 엥흐릴렌 라그바토구와 시합을 한 것이 가장 기억이 남는다. 작년과 재작년 모두 세계선수권대회 동메달 결정전에서 만나 패배했다. 올해에는 아시아선수권대회 결승에서도 졌다. 3승 무패의 상대이다보니 8강전에서 대결하게 됐을 때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고 너무 부담감이 있었는데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이겨서 너무 행복하고 좋았다. - 슬럼프 극복은 어떻게.△나는 나를 믿고 있다. 자신감이 별로 없는 편인데도, 언제든지 ‘내가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매일 운동도 하니 나를 믿는다.- 유도를 시작하려는 어린이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은.△이번 올림픽을 보고 유도를 시작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생각을 한다. 유도를 좋아해 주고 사랑해 주고 유도를 하면서도 재밌게 해주면 좋겠다.- 한국과 일본 유도의 다른 점은.△한국에만 있는 게 있다. 유도에 집중할 수 있는게 좋다. 제일 차이가 있는 것 같다. - 경북에서 좋아하는 관광지는.△아직 안 가봐서 모르겠다. 나중에 다녀오면 말씀드리겠다. 찾아보겠다.- 허미미 선수에게 유도란.△유도는 재미, 행복 같다. 유도를 하면 고민이나 힘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집중할 수 있으니까 유도가 정말 좋다.- 유도의 매력은.△사실 매력을 모르겠다(웃음).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너무 재밌다.- 앞으로의 계획은.△파리올림픽에서 아쉽에 은메달을 받았는데 금메달을 따고 싶은 마음이 크게 생겼다. 2028 LA올림픽에서 꼭 금메달을 따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이번에 올림픽 응원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앞으로도 유도를 사랑해주면 좋겠다. 독립운동가 허석 선생은“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 충(忠)은 곧 생명을 다하는 것이요, 마땅히 힘을 다하는 것이다. 어버이를 섬기는 도(道)와 임금을 섬기는 마음은 우리와 더불어 다를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임금이 다른가. (중략) 너희들은 일시에 진멸(盡滅)코자 하노라.”1910년 7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겪은 후 망국의 한을 품고 있던 허석(許碩·1857~1920).그는 일본인들의 조선 침탈에 분개해 동포들에게 일제의 침략상을 알리고자 계획했다.1918년 8월경 군위군 의흥면(義興面)으로 통하는 도로 부근의 눈에 잘 띄는 암벽에 항일 격문을 작성해 동포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했다.이로 인해 일경에 붙잡혀 1919년 5월 3일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만기출옥 후 3일 만에 옥중 여독(餘毒)으로 순국했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각각 추서됐다.고향 마을인 대구광역시 군위군 삼국유사면 화수리에 ‘효의공 허석 의사 순국 기적비(孝義公許碩義士殉國紀蹟碑)’가 세워져 있다. 인터뷰  / 김정훈 경북체육회 유도팀 감독2024 올림픽에서 유도 메달리스트를 키워낸 경북체육회 유도팀 김정훈(43·사진) 감독.허미미(21)는 유도 여자 57㎏급에서 은메달과 혼성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김지수(23)는 혼성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두 제자는 모두 재일교포. 한국의 뿌리를 찾아 조국을 빛나게 해 준 김 감독을 14일 서울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허미미 선수와의 인연은.△고등학생 전국 체전 때부터 지켜봐 왔다. 재일교포인 김지수 선수를 통해 허 선수가 우리 팀에 오고 싶어 하는 의사를 지속적으로 전달받았다. 김 선수가 한국에서 잘 적응하면서 지내고 있으니 허 선수도 그런 마음이 들었을거다. 또 김 선수의 할아버지가 경북 상주 출신이고, 허 선수의 허석 할아버지 기적비도 군위에 있다. 이게 경북체육회 유도팀에 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된 것 같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도 허 선수를 원했고, 자기도 오고 싶어 했고, 서로 같은 마음이었다.- 허 선수를 한국에 데려오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허 선수는 재일교포 3세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는데 2021년 코로나19 여파로 ‘한국·일본 입국시 2주 격리’ 등 여러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국제대회에 출전하며 좋은 성적을 내고 유도 팬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어 보람을 느낀다.- 허 선수가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 과정을 알고 싶다.△허 선수가 2021년에 왔을 때 혼자 자가 격리를 여러번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한국에 와서 선수 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한국에 가족도 없이 혼자 외롭게 있는 모습이 많이 안쓰러웠다. 옛날 본적지를 찾아가면 혹시 친척이나 가족이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수소문을 했다. 우연찮게 마을 주민한테 독립운동가의 후손일 수도 있다는 그 얘기를 듣고, 관공서를 찾아다니면서 직계 가족인 것을 알게 됐다.- 경북체육회 소속의 허미미, 김지수 선수가 녹록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파리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던 비결은.△재일 교포 출신이다 보니 두 선수 모두 어찌보면 특별한 케이스다. 우리나라 선수 자격 유무 등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두 선수가 유도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도록 하는 데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 분들의 도움으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행정적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이철우 경북지사를 비롯해 경북도청 관계자, 체육회 관계자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부용기자

2024-08-15

포항시의회 후반기 출범식 33명 중 18명 출석… 멀고 먼 화합의 길

◇민의는 소홀한 포항시의회 의원들…입법·정책 감시 뒷전상당수 포항시의원이 공천과 이권 챙기기에만 눈이 멀어 본연의 업무인 입법 및 민원 해결, 정책 감시기능에 소홀하다는 비판이다. 국민 혈세가 낭비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경북매일신문이 지난 14일 포항시의원 33명의 제9대 지방의회 임기 동안 본회의 시정질문 현황을 전수 조사한 결과 시정질문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시의원은 전체의 63.6%인 21명에 달했다. 정당별로 보면 현재 국민의힘(이하 국힘)이 24명 중 18명,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7명 중 2명, 무소속 1명이 여기에 해당됐다. 김은주·전주형 의원이 각 4회로 시정질문을 가장 많이 했다.국회는 법률을 제·개정하고, 각 지방의회는 이 법률에 근거해 해당 지역에서 시정에 여러 영향을 미치는 자치법규인 조례를 만든다. 제9대 지방의회 임기가 시작된 2022년 7월부터 현재까지 포항시의회에 접수된 조례 제·개정안 중 시의원들이 발의한 의안은 총 98건이었다. 시의원들은 한 명당 평균 2.97건의 조례안을 발의한 셈이다. 제9대 전반기 임기 동안 조례를 단 한 건도 발의하지 않은 의원은 7명에 달했다.현재까지 발표한 5분자유발언은 101건으로 한 명당 평균 3번이었다. 전체 시의원 중 지금까지 단 1번도 5분자유발언을 하지 않은 의원은 모두 4명이다. 김성조 의원이 16번으로 가장 많이 발표했고 이어 김은주 의원 13회, 김영헌 의원 8회, 박칠용 의원 6회 순이었다. 30년 넘은 지방의회, 이대로 괜찮은가 (1) 제 밥 그릇 챙기기 급급, 정당 간 기 싸움까지 (2) 해법은 없나…정당공천제 폐지, 교섭단체 조례제정, 지방의회법 제정(3) 해외 선진사례…영국·일본·미국을 중심으로 ◇소속 정당 간 기 싸움·의회 권력 두고 내부갈등 위험수위 넘어 포항시의회 제9대 후반기는‘반쪽짜리’ 원구성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다수당인 국민의힘에서 자체적으로 의원총회를 열어 의장단과 상임위원장 후보를 내정하고 그대로 진행했다.포항시의회는 지난달 24일 제317회 임시회를 열어 제9대 후반기 원 구성을 완료하고 출범식을 개최했다. 하지만 상당수 시의원이 임시회 출범식에 불참했다. 국힘 포항남·북당원협의회는 의장단 선거 며칠 전인 6월 28일 포항시산림조합에서 의총을 열어 의장과 부의장, 상임위원장 후보를 미리 내정했다. 포항시의회 민주당 의원들은 국힘 의총이 열리기 하루 전인 27일 성명서를 통해“포항시의회 후반기 의장단 독점을 시도하는 것은 야권의 목소리를 원천차단하는 다수당의 횡포”라고 지적했다. 또 포항시의회 더불어민주당 김상민 원내대표는 이날“국힘 원내대표 추경호 국회의원의 지역구인 달성군의회는 개원 이래 처음으로 민주당 소속 부의장도 배출했다”며“중앙당에서 지령이 배포됐다고 하지만 지역 사정에 맞게 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포항시의원 33명 중 국힘 소속이 22명(민주당 7명, 무소속 3명, 개혁신당 1명)이어서 다수당의 의견에 따라 내정된 그대로 본회의에서 통과됐다.이 뿐만이 아니다. 포항시의회는 지난달 31일 제317회 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윤리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조영원 의원, 부위원장에 함정호 의원을 각각 선출했다. 문제는 윤리특별위원회 구성 또한 모두 국힘 소속이라는 것. 소수당 소속 의원은 본회의에 앞서 열린 전체 의원 간담회에서 즉각 반발했다.개혁신당 김성조 의원과 민주당 김상민 의원은“특위에서는 화합이 이뤄질 줄 알았는데 윤특위 위원장과 위원 모두 국힘 의원들로만 구성돼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한다”고 했다. 그러자 김 의장은“9월 임시회에서 사·보임 등을 통해 재구성할 의사가 있다”고 해명했다. ◇지방의회 인사권 독립 2년, 잡음 이어져지방자치법 개정으로 지방의회가 소속 직원의 인사권을 행사하게 된 지 올해로 2년이 됐다. 당초 지방의회 전문성 강화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의회의 인사권 독립에 반발한 집행부와 갈등을 빚는가 하면,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 않는 등 잡음이 생기고 있다.포항시의회는 포항시 파견 공무원 인사를 협상의 여지 없이 바꿨다. 포항시의회는 지난 6월 21일 전문위원 3명(5급)의 결원이 발생해 포항시에 파견을 요청했다. 포항시는 3명의 파견 공무원 명단을 확정하고 포항시의회에 보냈다. 또 의회에 파견할 3명의 직렬과 직급에 맞춰 포항시 인사를 준비했다.하지만 포항시의회는 포항시가 파견하기로 한 경제산업전문위원을 기존 파견 대상 명단에 없었던 공업직 A씨로 교체해 달라고 요구했다. A씨는 포항시 확대간부회의 상황을 녹음해 특정 당협에 넘겨줬다는 의혹을 받아 공황장애를 호소하며 병가를 낸 바 있다. 김일만 의장은 7월 2일 포항시가 A씨를 파견하지 않는다면 다른 2개 위원회 공무원도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이에 포항시는 내부 인사를 예정일보다 2주 뒤에야 완료할 수 있었다. 이같은 포항시의회의 독불장군식 인사로 공직사회의 인사 질서를 붕괴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이후 포항시의회는 지난달 16일 인사권을 발휘, 내부 인사이동을 진행했다. 파견 받지 못한 3명의 인원을 메우기 위해 타 시도에 전출을 요청했다.현재 의회 인사 시스템으로는 업무 능력이 미흡한 검증되지 않은 직원을 채용해 업무 효율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동안은 포항시와 적절한 인사교류로 직원들의 직무역량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 시에서도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거나 관련 부서에서 어느 정도 근무한 인력을 뽑아서 파견받았다. 현재 구조로서는 의장의 권한으로 임용·승진된 직원에 대한 업무 능력에 따라 의장의 신임도와 인사권 실효성이 인정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지방의회 인사권 독립은 마땅히 필요하나 지방공무원 내에서 검증받은 직원을 파견받는 현재 방안과 적절히 병행해 장·단기의 전략적 방안을 채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통·화합·협치’는 먼 나라 이야기포항시의회는 지난 9대 전반기부터 남·북구 의원들의 신경전에 이어 후반기에는 초·재선 의원들의 불협화음으로 시작됐다. 타 지방의회는 원구성이 마무리 되면 화합과 협치를 강조하는데 비해 포항시의회는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의장단은 김일만 의장은 북구, 이재진 부의장은 남구로 각각 한 자리씩 맡았다. 상임위원장은 남구 3명, 북구 2명으로 국힘 자체 의총에서 배정했다. 의원은 국가 또는 주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하지만 현실적으로 직위유지(공천), 선거구 관리를 위한 전략 차원, 주민들의 이익이 복잡다기해 전체를 대표하기 어려운 현실적 사정 등으로 지역구 중심의 행동과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 하더라도 의회는 전체 대표와 선거구 대표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기능을 수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이번 후반기 의장단 구성 과정과 그 후 의장단의 전횡에 다선 의원들이 홀대를 받았다는 지적이 있다. 지난달 24일 본회의에는 전체 의원 33명 중 19명이, 출범식에는 18명이 출석했다. 민주당 소속 시의원 7명과 개혁신당 시의원 1명 외에도 여러 국힘 소속 의원들이 불참한 것이다. 같은달 25일 각 위원회별로 진행된 주요 업무보고에서도 4개 위원회 모두 2명 내지 5명까지 위원들이 불참했는데 재선 이상급 위원들이 대거 불참했다.법률상·형식상으로 시의원 간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매월 수령하는 의정비도 같다. 하지만 국회의 경우 국회의장단 선임과정과 상임위원장, 원내대표 선임과정 그리고 본회의장 내 좌석 배정에서 다선을 중요한 요소로 배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포항시의회 한 의원은“경북도의회에서는 상임위원장 후보가 되려면 재선부터 의장단은 3선부터 출마가 가능한 암묵적 룰이 있다”며 “포항시의회에서도 소속 당과 지역구에서 여러 번 선출된 경험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장은희기자 jangeh@kbmaeil.com

2024-08-15

신라 첫 번째 왕 박혁거세의 母神이자, 신령한 산의 女山神

고대의 왕 혹은,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국가의 통치자는 다소간 과장되게 기록되거나 묘사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가 가졌던 권력의 크기와 보통 사람과는 구별되는 신성(神性)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조금 먼 나라 이야기지만 16세기 프랑스의 사례를 잠시 살펴보자.수도자에서 의사로 직업을 바꾸고, 거기에 소설가로까지 활동한 프랑수아 라블레(1483~1553)란 작가가 있다.그가 쓴 작품 중 하나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다. 한국에선 그다지 높은 인기를 누린 소설이 아니지만, 프랑스인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작품”으로 추켜세우는 5부작 풍자소설.이 소설은 비교적 간단한 스토리로 이뤄져 있다. 왕인 가르강튀아의 기이한 출생과 해괴한 행적을 좇아가는 형식이다. 이는 그 당시 풍자소설의 기본적인 골격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무엇이건 범인(凡人)과는 달랐던 왕을 낳은 어머니는...소설에서 가르강튀아는 ‘어머니의 왼쪽 귀’에서 태어난 것으로 서술된다. 인간이 ‘자궁’이 아닌 ‘귀’에서 생겨난 것부터가 엄청난 상징과 은유를 담은 과장이 분명하다. 게다가 그의 먹성을 묘사하는 대목에 이르면 놀라움은 더 커진다. 이런 것이다.“소 16마리, 송아지 32마리, 염소 63마리, 양 95마리, 돼지 300마리, 메추리 220마리, 도요새 700마리, 수탉 400마리, 암탉 600마리, 토끼 1400마리, 산돼지 11마리, 사슴 18마리, 꿩 140마리, 오리, 왜가리, 황새, 칠면조….”어떤 인간도 위에 열거하는 것들을 한꺼번에 다 먹을 수 없다. 이는 15~16세기 부패한 귀족들의 퇴폐와 전횡을 꼬집어 풍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해학이 아니었을까 싶다.이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많이 먹는 왕’의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서도 나타난다. 아래는 ‘삼국유사’의 인용이다.“무열왕은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는데 경신년(庚申年)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출생에서부터 먹는 양까지 평범한 사람과는 판이하게 달랐던 왕들. 그렇다면, 그런 왕을 넣은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선도산 성모(성스러운 어머니) 또는, 선도산 신모(신의 지위를 가진 어머니)로 불리는 여성은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의 모신(母神)이자, 신령한 산의 여산신(女山神)으로 회자돼 왔다.1000년을 지속된 강력한 고대 왕조의 출현과도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니, 선도산 성모(신모)의 존재는 출발부터가 기세등등했을 터. ◆건국 영웅 낳고 도움을 주며, 죽은 후엔 제의(祭儀)의 대상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채미하 강사의 논문 ‘한국 고대 신모(神母)와 국가제의(國家祭儀)-유화와 선도산 신모를 중심으로’는 신라를 포함한 고대 왕국의 건국신화 속 여성이 가진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건국신화는 초현실적·초자연적인 내용을 전함과 동시에 국가의 창업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포함하고 있다. 한국 고대 건국신화 역시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가 있다. 이러한 한국 고대 건국신화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다양한 연구들이 있어 왔다. 이중 신모(神母)는 건국 영웅을 낳고 그들을 기르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 내지는 건설하기 위해 떠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거나 시조의 조력자로 나온다. 이와 같은 신모로는 고조선의 웅녀와 고구려의 유화, 백제의 소서노, 신라의 선도산 신모와 알영, 금관가야의 허왕후, 대가야의 정견모주가 있다. 그리고 이들 신모는 죽은 후 국가제의의 대상이기도 하였다.”지금도 사당을 세워 성스러운 존재로 대접하는 선도산 성모에 관해서는 ‘나무위키’ 역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건국 전의 인물이자 신라의 여신. 고대 한국 문화와 역사에 영향을 끼친 신으로 여러 문헌에서 언급됐다. 사후 경주 선도산의 산신으로 숭배됐다. 혁거세 거서간(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신라시대에 숭배 받은 여성 산신”이라 정의하고 있다.취재를 위해 두 번째로 경주 선도산을 찾았을 때다. 무열왕릉 뒤편에 자리한 진지왕릉 앞에서 한참 동안 굳은 각오(?)를 다졌다. 땡볕 내리쬐는 한여름에 산길을 꽤 오랜 시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선도산 성모사(聖母祠)까지 가기 위해선 그런 다짐이 필요했기 때문.마침내 성모사에 이르렀을 땐 섭씨 35도가 넘는 날씨임에도 어떤 서늘한 기운에 잠시잠깐 몸이 떨렸음을 고백한다. 이는 문학적 과장이나 엄살이 아니다.어쨌건 다음 연재에서는 성도산 성모, 또는 선도산 신모로 불리는 존재의 보다 내밀한 모습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우리 곁 ‘신라 보물’ 서악동 삼층석탑무열왕릉 입구에서 차를 꺾어 3분쯤 오르막길을 오르면 한국 작은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조용한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오가는 사람이 드물고, 땡볕 아래 산새 울음소리만이 청명한 곳. 정확한 주소는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705-1번지.바로 거기 신라인의 예술적 품격을 가감 없이 확인할 수 있는 ‘고대 보물’ 하나가 우뚝 서있다.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 慶州 西岳洞 三層石塔)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됐을 것으로 예측되니 만들어진 게 벌써 1400여 년 전.몹시 귀한 것임에도 너무 쉽게 만날 수 있어서였을까? 석탑이 가진 가치가 쉬이 짐작되지 않았다.이럴 땐 관련 자료를 찾아볼 수밖에 없다. 기자를 포함해 신라 역사를 잘 알지 못하면서, 호기심은 많은 이들을 위해 ‘두산백과’가 이 탑에 얽힌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준다. 이런 내용이다.“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제 석탑.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됐다. 전체 높이 5.07m, 기단의 너비는 2.34m다. 무열왕릉 북동쪽 경사지에 있는 탑으로, 모전탑(模塼塔) 계열에 속한다. 지면에는 두꺼운 장대석(長臺石) 4장을 동서로 깔아서 지대석(址臺石)을 삼았고, 그 위에 8개 돌덩이를 2단으로 쌓아 직육면체의 이형기단(異形基壇)을 구성했다. 경주 남산동 동삼층석탑과 비슷한 형태. 기단 상면에 탑신을 받기 위한 1장의 판석(板石)이 끼어 있는 것은 남산동 석탑에 있는 3단의 층급(層級)에 비해 생략된 형식으로 보인다. 그 위 3층 탑신은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초층 옥신은 정육면체로 우주(隅柱)의 표시가 없으며, 정면 중앙에는 얕은 감형(龕形)으로 호형(戶形)을 만들고 그 중앙에 4개의 못자리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금속제의 수환(獸環)을 달았던 자리로 짐작된다…(하략)”삼층석탑 부근은 계절 따라 피는 작약과 구절초로도 유명하다. 신라문화원(원장 진병길)은 지속적인 노력으로 이 지역의 문화유적을 보호하고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이 단체가 조성한 작약과 구철초 꽃밭은 역사 공부와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의 여유를 원하는 여행자 모두를 만족시켰다. 꽃이 만발하는 철이면 축제도 연다. 물론 이때면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모여든다.게다가 서악동 삼층석탑에서 불과 수십m 거리엔 왕릉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고분이 4기나 존재한다. 신라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이 바로 거기에 잠들어 있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서악동, 혹은 서악마을 불리는 곳은 이처럼 ‘경주의 보석’ 역할을 하고 있다. 신라시대 땐 ‘부처가 다스리는 평화롭고 근심 없는 땅(西方淨土)’이라 불렸던 곳이 1천 년 넘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그 역할을 바꾸지 않고 있는 것이다.바로 그 가운데 모든 걸 지켜보고 기억하며 세파를 견뎌 온 서악동 삼층석탑이 있다. 그 탑을 쉽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이유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8-13

불꺼지지 않은 포항의 홍등가...35개 업소 41명 여성 ‘힘겨운 삶’

지금도 진행형인 포항 성매매 집결지 문제. 그곳의 오늘은 어떠할까? 현재 포항시 성매매 집결지엔 약 35개 업소와 41명의 성매매 여성이 남아 있다. 옛 포항역(1구역), 속칭 중대(2구역), 우체국 부근(3구역)으로 나눠진 그곳에는 구역별로 많게는 28명, 적게는 12명의 여성이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40~50대이며, 70대 여성도 있다. 10~30년 동안, 그러니까 청춘 후 삶의 절반가량을 거기서 보낸 사람이 과반수다. 시는 이들을 대상으로 지난해 4월∼10월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그 조사에 따르면 성매매 업소에 처음 들어온 시기는 30대가 가장 많았다. 10대와 20대도 각각 3명과 7명으로 나타났다. 60대 이후 그곳으로 유입된 여성도 2명이나 됐다. 그들은 왜 성매매를 통해 생활을 이어갈까. 이유는 거의 유사했다. 돈 때문이었다. 가족을 부양하는 여성이 절반 넘는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여성들 중 30%는 자녀를 돌보고 있고, 19%는 부모를 부양하고 있었다. 이들 성매매 여성 중 과반수(55.9%) 이상이 유리방에서 숙식도 함께 해결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빛이 겨우 스며드는 이 유리방들은 거의 불법 개조된 것. 당연 안전은 보장받지도 못하는 먼 나라 얘기였다. 기자가 찾은 유리방 역시 1~3평 크기의 협소한 공간이었고, 벽 끝은 불에 타 갈색으로 변해 씁쓸함을 더했다. 기본적인 소방시설조차 갖추지 않은, 작고 열악한 공간은 이들이 처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성매매 여성들은 하루 8시간에서 10시간 이상 일한다고 했다. 1일 평균 성구매자 수는 6명 내외. 화대를 역산하면 이들이 하루에 벌어들이는 수입은 적게는 30만 원, 많게는 60만 원 정도다. 하지만, 여성들의 손에 남는 수익은 적다. 번 돈을 포주와 50대 50으로 나눠야 하는 탓이다. 심지어 30대 70으로 나누는 여성도 있다. 거기에 유리방 월세 같은 고정 지출이 있어 생활고에 시달리는 여성들도 적지 않다. 그런 이유로 탈(脫)성매매를 희망하는 여성들이 가장 원하는 건 생계 지원(79.4%)이었다. 주거 지원(14.7%)과 부채 관련 법률 지원(5.9%)을 압도했다.여성들의 건강 상태 역시 예상대로 역시 좋지 않았다. 불특정 다수와 성관계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병 때문이었다. 고령층인 관계로 내분비내과 질환(고지혈증, 당뇨 등)을 앓는 여성이 29%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산부인과 질환(자궁근종 등)을 앓는 여성이 23.5%나 됐다. 설문조사 대상 중 3명을 제외한 모든 여성이 내분비내과와 산부인과 질환 외에도 정신 질환, 치과 질환 등 다양한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병원 방문을 꺼린다. 신분이 노출될까 두려워서다. 포항시 성매매 집결지를 오래 관리해온 포항여성상담센터 관계자는 “병원 진료 과정에서 혹시 문제가 발생해 경찰에 인계되는 상황 등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아프더라도 병원에 잘 가지 않는다”며 이런 부분이 이들을 더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다고 전했다. ▲ 성매매 집결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성매매 여성들이 집결지를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빚 때문이다. 빚은 이곳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어깨를 짓누른다.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는 조건으로 여성들에게 빌려주는 ‘선불금’이 일단 빚의 시작이다. 다수의 여성들은 돈을 대여할 때 선불금만 갚으면 성매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돈을 변제하더라도 업주가 일을 시작할 때 배당 해 준 숙소부터 가구, 생활용품, 의류 등까지 모두 선불금으로 계산해 갚을 것을 요구 한다. 그 때문에 쉽게 빠져 나올 수도 없고 빚 또한 줄어들지 않고 이어질 뿐이다.  올해 6월 포항시 서부시장 유흥업소에서 일하던 두 명의 종업원이 성매매를 강요하는 포주를 견디다 못해 경찰에 신고한 사건이 발생했다. 포주가 이들에게 3000만 원의 선불금을 갚도록 압박하면서 1년간 원치 않는 성매매를 하도록 했다는 것. 유흥업소 등의 선불금은 이자가 높아 한 번 올가미에 묶이면 빠져 나오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구 포항역 성매매 업소 여성들도 그런 과정을 겪었고, 지금도 허덕이고 있다.성매매 집결지를 떠나지 못하는 다른 원인으로는 성매매 여성들의 자활 의지 부족도 있다.   이는 포항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나타난다. 집결지 여성 중 50%가 탈 성매매를 희망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그 이유로는 ‘나이가 많아 탈 성매매 이후 직업을 구하기 어렵다’는 답변이 48.4%로 가장 많았다. ‘생계유지의 어려움’도 35.5%나 됐다. 포항시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탈 성매매 시책에 따라 맞춤형 재활대책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일 의지가 있을지 의문인 것이다. ▲여성단체 사이에서도 갈리는 성매매 관련 의견성매매를 둘러싼 시각은 여성단체들 사이에서도 극명하게 갈린다.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안드레아 드워킨은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라 주장하면서 성매매 또한 여성을 착취하는 강간문화의 일종이라 비판한다. 그러나 같은 급진주의 페미니즘 내에서도 성매매를 성인들 사이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노동행위로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성매매를 노동으로 인정하면 노동법에 따라 성매매산업이 법제화되고, 성매매 여성들의 환경이 안전해 질 수 있다는 논리다. 실제 이것은 몇몇 선진국들이 성매매 합법화를 채택하는 근거가 됐다. 독일은 2002년 성매매 법을 제정해 성판매자와 성구매자 간의 계약 관계에 법적 효력을 부여하고, 성판매자가 사회보험 등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각에선 성매매 집결지 정비 등 합법화를 통해 음지로 가는 성매매를 양지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이처럼 성매매에 대한 의견은 학자와 여성단체들 사이에서도 엇갈리고 있어, 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대책 수립 또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문가들 “자활지원 조례 제정 시급”지난해 4월부터 10월까지 포항시 성매매 집결지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한 연구진은 ‘성매매 피해자 등 자활지원 조례’의 제정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우선 조례가 제정되어야만 자활지원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예산 수립이 가능하다는 것. 성매매집결지 정비부터 이곳 종사자들의 생계문제 해결 등은 예산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사회공론화를 통해 함께 고민하고 머리를 맞댈 필요성도 언급했다. 그래야만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통상적으로 내놓는 틀에 박힌 기존의 자활 기본 안을 넘어선 ‘포항만의 혁신안’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시 차원의 자활지원센터뿐만 아니라, 포항의 다른 기관들도 성매매 여성을 위한 자활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할 수 있도록 기회를 유도하고 포항 소재 기업들이 건전한 사회 만들기 차원에서 기여금 형식으로 성매매 여성 자활지원기금을 마련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성지영 인턴기자

2024-08-13

“포항 대전리, 3·1운동의 역사·문화 계승하는 호국 성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국권 회복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3·1의사들의 숭고한 희생과 업적이 없었다면 조국 광복은 이룰 수 없었겠죠.”포항 북구 송라면 대전리 마을. 이곳은 3·1운동 때 영일 지역 만세운동의 근거지가 된 마을이며 14명의 3·1의사가 난 곳으로서 전국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호국 성지다.광복절 79주년을 앞두고 12일 대전리에서 만난 안시호(62·포항시 북구 송라면 대전리) 대전3·1 독립운동 유족회장은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포항 지역의 3·1운동 의사들의 숭고한 독립 정신과 호국정신을 기억하고, 민족의 숭고한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매년 대전리 3·1만세촌에서는 3·1절 기념행사와 만세 재현 행사를 개최해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고 마을을 소개하며 반겼다.안 회장은 대전길120번길 22-5에 자리한 대전3·1의거 기념관에서 지난 2019년부터는 단체 관람객에게 대전리 3·1운동사를 전하는 도슨트(전시해설) 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현재 1층으로 된 기념관을 2층으로 확장해 체험관 등 부대시설을 갖춰 요즘 세대에 맞춘,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독립운동 기념관으로 거듭나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20년째 대전3·1 독립운동 유족회를 이끌고 있는 안 회장은 1919년 3·1운동 당시 포항시 북구 청하면 청하장터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3·1만세 운동을 일으킨 송라면 대전리 출신 윤영복, 윤영만, 이준석, 이영섭, 이준업, 안천종, 안상종, 안덕환, 안화종, 김진순, 김종만, 이명만, 김진봉 등 3·1의거 14명 의사 중 한 사람인 안도용(1893∼1921) 의사의 손자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었던 아버지가 8살인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인 안도용 의사가 돌아가셔서 힘들게 자랐을 거 같은데, 어땠나?△할아버지는 감옥에서 고문당하신 후유증으로 집에 오신 다음 계속 누워 생활하시다 2년 후에 돌아가셨다. 어린 아버지는 할아버지 곁에 가는 것을 두려워해서, 할머니로부터 1919년 3·1 운동 당시 포항 청하 독립 만세운동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포항 대전리 ‘만세촌’ 14명의 의사 중 9명이 대전교회 교인이었는데, 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아버지가 기억을 많이 못하고 계신 탓에 나는 이명만 의사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1981년, 대학교 1학년 때, 14인의 의사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명만 의사(당시 81세)가 서울에 있던 나를 불러 14인 의사의 공적을 적어 보훈청에 제출하라고 하셨다. 이명만 의사는 그 5년 뒤에 돌아가셨다. 이 의사의 말씀에 따르면 1919년 3·1 운동 당시 대전교회는 영수 윤영복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대전교회 창립자인 이익호 선생의 아들 이준석·이준업 형제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교인들은 3월 21일 청하 장날에 맞춰 5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90여 명이 검거됐고 대전리 마을의 14인 지사도 끌려갔다. 이익호 선생은 배재학당 졸업 후 낙향해 청하면 일대에 3개의 교회를 세워 기독교 중심의 구국 계몽운동을 전개했지만 일찍 병사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민족의식과 신앙 구국의 의지가 아들과 교인들에게 그대로 이어졌고, 교회가 만세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안시호 대전3·1 독립운동 유족회장 -대전3·1의거 기념관을 소개한다면.△이준석·이준업 형제의 생가 바로 옆에 대전3·1의거기념관이 운영되고 있다. 이준석 의사의 증손자인 이병찬 계명대 석좌교수가 3·1의거 당시 태극기를 제작했던 생가 부지를 포항시에 기증해 포항시가 2001년 개관했다. 이곳에는 대전리 출신 14인 의사들이 당시 항일 운동을 전개하면서 사용했던 유품과 판결문, 훈장, 영정 등 관련 유물 180여 점이 전시돼 있다.-다른 지역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 등 여러 시설이 운영되고 있는데, 대전3·1의거 기념관의 차별점이 있다면?△포항은 경상북도에서 가장 먼저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1919년 3월 12일 대전리 출신 14인과 청하 출신 9인이 중심이 되어 청하장터에서 수백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을 펼쳤으나 무자비한 무력 탄압으로 23인이 투옥되고 옥사하기도 하였다. 대전리 사람들이 체포되자 마을 사람들은 마을 앞 두곡숲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옥고를 치르고 마을로 돌아온 의사들은 청년회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이어갔으며, 어린아이들도 골목에서 만세놀이를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태극기를 제작했던 장소에 기념관이 건립되었으며, 기념관 옆 복원한 이준석 의사의 생가에는 당시 대전교회의 종탑과 태극기 만들던 장면도 재현되어 있다. 마을 안에는 1913년 3월 2일 설립되어 만세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대전교회가 여전히 있다. -시대 변화에 따라 독립운동사 교육 방식에도 변화가 있어야 할 듯한데….△독립운동 기념관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기억의 전달 장소로 이용돼야 한다. 그래서 포항시에서 시대의 흐름이나 요즘 세대에 맞게 어떻게 변화해야 할 건지 다방면으로 고민해야 할 것 같다. 특별전시나 문화행사, 교육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할 문화정책 전문가, 해설사 배치 등을 위한 시의 예산도 필요하다. 단지 건물을 세우고 1년에 한 번 이벤트성 3·1절 기념 행사를 운영하는 것에만 기념관 건립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모순이다. 현재적 시점에서 미래에 전달하는 역사 교육 기관으로서, 기념관은 현재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분류되고 있다. 박물관미술관 진흥법 제2조에, 역사·고고(考古)·인류·민속·예술 등에 관한 자료를 수집·관리·보존·조사·연구·전시·교육하는 시설로 정의돼 있다. 여러 물품을 모아놓은 공간이라는 의미로 접근하기보다 유산을 수집, 보존, 연구, 교류, 전시하는 옛사람들의 문화를 함께 향유하고 교육하는 공간으로 인식해야 한다.현실적인 방법 중엔 우선 독립운동가의 개별적 스토리를 좀 더 들여다보고 콘텐츠로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전3·1 독립운동의 주인공 격인 대전교회 설립자 이익호 선생을 조명하는 사업이 진행돼야 한다. 그리고 80호 작은마을에서 14명의 멸사봉공 독립운동가가 나온 전국 유일의 마을인 만큼 이를 널리 알릴 수 있는 문화제 개최 또한 고민할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위한 해법을 제시한다면?△2017년 독립·참전유공자에 대한 지원 강화와 관련한 구체적인 후속 조치로 보상금을 받지 못하는 생활 형편이 어려운 (손)자녀에 대한 생활지원금이 신설됐다. 기준중위소득(전체 가구 중 소득을 기준으로 50%에 해당하는 가구의 소득) 50% 이하 및 70% 이하의 (손)자녀가 지원 대상이다.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융통성 있는 지원금 설정과 후손 예우의 폭을 넓혀 증손자까지 보상 대상에서 포함시켜 주었으면 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사진/안성용 사진가 제공

2024-08-12

내 목소리와 똑같은 AI 목소리… 인류 문명 확 바꾸나

전 세계 증시가 폭락하며 지난 5일에는 ‘검은 월요일’에 빠졌다.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대형 악재는 없었다. 무슨 일일까? 이날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8.77% 급락하며 2500선이 무너졌고, 일본 닛케이225(닛케이 평균주가) 지수는 12.4% 폭락해 3만1000 선을 위협받았다. 미국 SP500, 나스닥, 다우존스 산업 평균도 모두 2~3%대 지수 하락률을 나타냈다.이번 폭락의 배경 중 하나가 인공지능(AI) 회의론 확산이다. 2022년 챗GPT 등장 이후 관련주 상승을 이끌던 AI 투자와 기술 선두 주자인 엔비디아,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구글 모기업), 아마존, 테슬라, 메타 등 이들 ‘매그니피센트 7’의 실적이 시장 기대에 못 미치면서 AI 거품론이 힘을 얻고 있다.빅테크 기업들이 수익성만 신경 쓸 뿐 AI 윤리는 뒷전에 두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으면서 AI 윤리 논란은 반복되고 있다. 오픈AI는 챗GPT를 활용해 논문을 쓰면 적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는데도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글은 생성형 AI 모델인 제미나이로 어린이에게 편지를 쓰라는 광고를 냈다가 비판에 휩싸이고, 백인인 역사적 위인을 유색인종으로 생성하는 등 오류가 잇따르자 이미지 생성 기능을 중단하기도 했다.오픈AI는 챗GPT-4o에 유명 배우 스칼렛 요한슨과 비슷한 목소리를 사용했다가 소송에 휘말렸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AI 이미지 생성 도구가 미성년자 음주,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 등 유해한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는 내부 폭로가 나오기도 했다.그렇다면, 스티븐 호킹 박사의 예언처럼 AI가 ‘인류 문명 역사 최악의 사건’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초 AI의 한계 지적하고 위협을 걱정하는 과학자들과학적 측면으로 초 AI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과 이로 인한 위협을 걱정하는 과학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세계적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는 지난 2017년 11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웹서밋테크놀로지 콘퍼런스에 참여해 “AI는 인류 문명사의 최악의 사건이 될 수 있다”, “자율적 작동 무기로 인류를 위협하고, 모든 인류 경제도 파괴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AI 버블(거품) 발생 가능성 놓고 수익성에 물음표 던지는 빅테크들오픈AI가 ‘챗GPT’를 출시한 이후 구글, 메타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잇따라 관련 투자를 늘리고 있지만, AI 서비스 수익성에 대한 의구심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1년 전 AI가 향후 10년 동안 세계 경제 생산량을 7% 증가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던 골드만삭스도 AI 수익성에 물음표를 찍었다. 골드만삭스의 짐 코벨로 애널리스트는 최근 발표한 AI 관련 보고서에서 “세상에 쓸모가 없거나 준비되지 않은 것을 과도하게 구축하는 것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고 부정적 의견을 제시했다.영국의 투자은행 바클레이즈도 최근 보고서에서 “(챗GPT가 나오고) 2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소비자나 기업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챗GPT와 마이크로소프트의 ‘깃허브 코파일럿’뿐”이라면서 월가의 회의적인 시각이 커지고 있음을 짚었다.월가의 논쟁은 기업의 실적 발표날 현실로 들이닥쳤다. 7월 23일 구글의 2분기 실적 콘퍼런스 콜에서 월가의 애널리스트들은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에게 “분기당 120억 달러(약 17조 원)에 달하는 AI 투자가 언제부터 성과를 내기 시작할 것인가”를 물었다. 피차이는 “(AI에 대한) 과소 투자 위험이 과잉 투자 위험보다 훨씬 더 크다”고 답했다. 수익성 대비 과잉 투자는 맞지만, 과소 투자의 위험이 더 크므로 투자 규모를 줄이지 않을 것이란 말이었다.지난 2분기 구글의 매출은 작년 동기 대비 14%, 순이익은 29% 증가하는 등 월가의 예상치를 충족했지만 이날 구글 모회사인 알파벳 주가는 AI 투자에 대한 우려로 오히려 5% 하락했다. 투자자들이 슬슬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AI가 실제 어떠한 이론을 따르든 시장 심리는 이미 ‘AI 버블(거품현상)’에 대한 피로감이 짙게 형성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처럼 ‘옥석 가리기’ 과정을 거쳐 살아남은 기업들이 수익을 독차지하는 상황이 재현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국민 10명 중 6명 “AI 기술 이점이 위협보다 커”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새로운 디지털 질서 정립 추진계획’의 후속 조치로서, 지난 6~7월에 ‘인공지능(AI)의 안전, 신뢰 및 윤리’를 주제로 디지털 공론장을 통한 국민 의견 공론화 결과를 지난 7일 발표했다.대국민 설문조사 결과, 국민들의 57%가 AI 기술의 잠재적 이점이 위험보다 많다고 답했다. 또 55%는 안전한 AI 발전을 위해서 규제보다 혁신이 중요하다고 답했으며, 가장 중요한 정부 정책으로 34%의 국민이 ‘AI법 제정 및 윤리기준 마련’을 꼽았다.8월 7일부터 9월 6일까지 디지털 접근성 강화 주제로 대국민 설문조사와 정책 아이디어 공모전이 디지털 공론장을 통해 진행된다.△AI가 부정적 환경 초래하는 주체적 대상 될 수 있다는 미래학자들‘4차 산업혁명시대’에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기반 인프라의 조성은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긍정적 요소와 더불어 비인륜적일 수 있는 매우 부정적 환경을 초래하는 주체적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AI가 인간 사회의 윤리 규범을 판단할 수 있는 인지 지능학습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자가 학습을 통해 반인륜적 알고리즘을 스스로 생성하고 나아가 인류에게조차 대립하게 되는 사태에 대한 우려가 깊다. 그런 우려와 예측은 세계 유수의 석학들에 의해 예견돼왔다.2014년 5월 영국 인디펜던트지 기고문에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프랭크 윌책 MIT대 교수, 맥스 태그마크 MIT대 교수, 스튜어트 러셀 UCB 교수 등 4명은, “인공지능이 인류 사상 최대 성과인 동시에 최후의 성과이자 인류의 재앙이 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AI의 콘텐츠 검열 능력은 검증이 불가능세계적 SNS 기업인 페이스북 사가 2017년부터 운영해온 성 착취 혹은 자해, 테러 암시 등 유해 콘텐츠를 검열해 삭제하는 ‘콘텐츠 모더레이터(Contents Moderator)’들이 강박증세 및 비정상적인 행동과 퇴폐적인 행위, 심지어 자해 영상 속의 상황들을 따라 하는 모방 자해 행위를 시도해 이들을 위한 정기적인 상담과 심리치료까지 병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됐다.페이스북 사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는 “AI가 단기적으론 ‘콘텐츠 모더레이터’ 작업과 비교해 예전만 못할 것으로 본다”라고 인정했다. 현재의 시점에서 AI는 사회적 규범이나 윤리성을 감안해야 하는 인지능력과 감정의 이해는 아직까지 인간을 모방조차 할 수 없다는 점을 대변하고 있다. 이는 AI에게 적용, 학습 시켜야 할 과제로 사회 윤리적 가이드가 최우선으로 필요하다는 점도 시사하는 것이다. △AI의 사회윤리 이슈2016년 3월 24일, 마이크로소프트사는 트위터, 그룹미(GroupMe), 킥(Kik) 등의 SNS를 통해 채팅이 가능한 AI 챗봇 ‘테이(Tay)’를 공개했고, 공개 후 단 16시간 만에 운영을 중단한 일이 있었다. AI 챗봇 ‘테이(Tay)’ 스스로도 인종차별적 언어로 대화를 했기 때문에 이를 모니터링하던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AI ‘테이(Tay)’의 서비스를 끊어버리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었다.당시, AI 챗봇 ‘테이(Tay)’는 말을 따라 하는 게임 ‘내 말을 따라 해 봐’를 통해 의도적으로 세뇌하고자 했던 사용자들의 악용에 통제 알고리즘의 방어기제는 작용하지 못했다.더 심각했던 상황은 사용자들의 욕설 및 인종차별 발언과 더불어, 심지어 나치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는 “지어낸 말”이라는 거짓된 내용의 말을 AI 챗봇 ‘테이(Tay)’가 무분별하게 그대로 학습하게 됐던 점이 가장 큰 위험 요소로 인지됐다. 이러한 AI 챗봇 ‘테이(Tay)’사건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사는 2년여간 AI 윤리 부문에서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표방하며 윤리 가이드 라인을 정립했다. 모든 AI를 개발하는데 있어서 ▲공정성 ▲신뢰성과 안전보장 ▲투명성 ▲프라이버시와 보안 ▲포용성 ▲시스템에 대한 책임 등 6가지 원칙을 수립·적용하기로 했다. 최근 장애인 보조(도움) 기술에 AI 적용 시 음성인지 발음교정 텍스트 변환, 오디오 정보의 3차원 그래프 구현으로 청각이나 시각장애인들의 이동성 개선에도 ‘윤리 가이드’를 의무적으로 적용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4-08-11

“노력한 만큼의 대가만 얻겠다” 각오로 47년 산업현장 외길

“지금 우리 사회는 학력이 아닌 능력위주의 사회로 변모했습니다. 자기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자기 일을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기능한국인, 국가품질명장 등 수많은 타이틀을 거머쥔 김석준(63) 기계정비분야 대한민국 명장.김 명장은 한국전쟁 당시 총상을 입은 아버지 대신 막냇동생의 학업을 돕기 위해 현대제철 포항공장(구 강원산업)에 병역특례요원으로 입사했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외국에서 도입한 신설비의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하는 등 고장 제로화,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약 반세기 동안 외길을 걸어왔다.포항시 숙련기술인협회 초대회장을 맡고 있는 김석준 명장과 최근 인터뷰를 가졌다. - 포항시 숙련기술인협회는 어떤 단체인가.△작년 정부에서 숙련기술인의 날(9월 9일)을 제정함에 따라 포항시에 거주하는 대한민국명장, 우수숙련기술자, 경북도최고장인, 포항시최고장인 45명이 포항시의 기술발전을 위한 기업의 기술전수와 후진양성을 위해 결성됐다. 지금까지 100여 건의 기술전수와 불우이웃돕기 및 자연정화활동을 비롯한 봉사활동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협회 발족에 많은 도움을 준 한국산업인력공단 측에도 늦었지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하지만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비영리 단체이다 보니 다양한 활동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아 행정적인 지원이 아쉽다.- 숙련기술인이 되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왔나.△경북 울진이 고향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국립인 부산기계공고로 진학해 기숙사비 이외에 전액을 국비로 공부할 수 있었다. 2학년부터 장학금을 받아 기숙사 비 일부를 충당했다. 3학년 때 부산지방 기능경기대회 전기용접분야에서 금메달을 수상했으나, 전국대회에서 부정행위로 의심돼 최고 점수를 받고도 탈락이 됐다. 이때 “노력한 만큼의 대가만 얻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 그 교훈이 오늘을 살아가는 이정표가 됐다. 1977년 교원자격증을 취득해 영월 공고에서 2년 8개월 근무하며 기능경기대회 입상자 배출 및 국가기술자격증 전원 취득 등의 보람을 느낄 수 있었으나, 첫발을 내딛은 산업현장은 적응하기에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처음 접해보는 기계정비를 이해하기 위해 독학으로 일본어를 익히고 용접과 절단은 기본이고 공, 유압을 비롯한 관련분야의 기술을 익혀야만 했다. 분임조 활동을 통한 개선활동으로 획기적인 고장시간 단축과 원가절감은 물론 안전사고 예방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동안의 실적을 인정받아 월급을 받아가면서 창원기능대학에서 공부를 할 기회가 주어졌으며, 현대제철 1호 기능장이 됐다. 미국을 비롯한 9개 나라의 해외연수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숙련기술인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명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힘든 일도 많았을 텐데, 극복 노하우는.△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반드시 해결해내고야 말겠다는 집념과 끈기가 해결의 열쇠였다고 믿는다.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론과 경험이 동반되지 않으면 절반의 성공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개발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조직의 힘은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동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명장이 되기 위한 특별한 노력보다는, 폭 넓은 지식의 습득은 물론이거니와 나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하고자 하는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었던 비결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2011년 산업포장을 받아 대한민국명장 선정자들과 유럽 연수를 같이 가게 됐다. 일행 중 영월공고에서 첫해에 졸업시킨 제자가 먼저 명장이 돼 동행을 해 뿌듯하기도 했지만, 대한민국명장에 도전하는 확실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2019년 근로자의 날에 포항시에서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을 때가 직장생활의 가장 보람된 시간으로 기억된다.- 앞으로의 포부는.△47년 동안 굴곡이 많은 외길을 걸어왔고 내가 한 노력에 비해 과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주변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올 수 없는 길이었다. 앞으로는 건강을 잘 챙기면서 컨설팅을 통해 중소기업의 원가절감과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고 싶다. 직업진로 특강 등을 통해 후배들에게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또한 그늘진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과 그동안 갈고닦아 온 재능을 모두 기부하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다. 돌이켜보면 돌아가고 싶지 않은 험난한 길을 걸어온 것 같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고 있을 것이며 그땐 지금보다 더 멋진 오솔길을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 밖에 하고 싶은 말은.△살아오면서 넘기 어려운 무수히 많은 벽을 마주했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그때마다 원인을 찾으면 해결 방법이 보였다. 그 원인을 찾아가는 길에는 많은 노력과 지식이 필요했다. 반세기 전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을 배웠다. 사무직에 비해 현장직은 보수도 적었지만, 승진과 대우에서도 학력의 벽을 넘기에는 많은 난관이 있었다. 이제 우리 사회는 학력의 벽을 넘어 능력 중심 사회가 됐다. 자기 적성에 맞는, 정년이 정해진 직장이 아닌 평생 직업을 찾아 1만 시간 이상을 투입한다면 성공이 보장되리라 확신한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지났다고 하지만, 해 본 일이 많은 사람 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사람이 대우받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가는 길에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부단한 노력을 이어간다면 용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08-11

한적한 시골장터 ‘갯마을 차차차’ 촬영 이후 글로벌 관광지로

‘내가 맛집 기사 한 줄 쓰면 다음 날 음식점 앞에 줄이 쫙 섰지’. 10여 년 전 맛집 소개로 필명을 날리던 한 선배의 후일담이다.몇 줄 글에도 손님들이 식당을 칭칭 감던 신문의 위력은 이제 예전 같지 않다. 오히려 ‘6시 내 고향’이나 ‘생생 정보통’ 같은 방송 매체에 주도권이 넘어가 버린 느낌이다.요즘은 특정 장소를 알리는데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 세트장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극(劇)에서의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고, 드라마 현장을 바로 확인할 수 있어 MZ세대들에게 소구력이 크다고 한다.근래 포항에서 드라마에 등장한 후 크게 인기를 끄는 곳이 있다. 바로 포항시 청하면에 있는 ‘청하시장’이다. 2021년 tvN ‘갯마을 차차차’가 방영되면서 청하시장은 전국적 명소 반열에 올라섰다. ‘3년이나 지났는데 드라마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아직도 시장통에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심지어 곳곳에서 외국인들의 수다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한가로운 시골 전통시장이 경북의 명소를 넘어 글로벌 관광지로 도약한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고려 후기 이후 동해안 지역 물산 집중포항에 본격적으로 인간이 터를 잡은 것은 흥해읍의 지석묘를 통해 보듯 청동기시대부터였다. 이 지역엔 변진 24국 중 하나인 근기국(勤耆國)이 자리잡고 있었고 이들은 동해안을 배경으로 정치 세력을 형성했다. 근기국은 후에 신라에 복속되면서 경주 세력의 군현체제 아래 편제됐다.6세기 후반 청하 일대에는 냉수리고분을 축조한 세력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덤 양식, 부장품을 통해서 볼 때 냉수리 세력은 포항의 북부, 동해를 배경으로 상당한 정치, 경제 세력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통일신라시대 아혜현(阿兮縣)이 있었던 청하면 일대는 고려 후기 이후 동해안의 물류 집산지로 뿌리를 내렸다.‘청하(淸河)’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태조 13년으로 이때부터 청하는 흥해, 영일, 장기와 함께 독자적인 행정 구역으로 발전하게 된다. 청하시장의 개시(開市) 연도는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볼 때 1920년대 일제강점기로 추측된다. 1910년대 이미 청하면은 17개 리(里)와 동(洞)을 관할할 정도로 면세(面勢)를 형성했다고 하니 전통시장의 출현은 훨씬 그 이전이 아닌가 한다. ◆1970~90년대 장날엔 장꾼들 대혼잡청하시장은 위로 영덕, 남쪽으로는 흥해 사이에 위치한 소규모 시장이다. 주변에 우시장, 어시장이 들어섰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고 장옥(場屋) 규모도 크지 않아 읍면 단위의 상권을 담당한 정도였던 것 같다.청하시장은 단층상가 두 곳을 아케이드로 연결한 형태로, 점포수도 많지 않다. 그러나 시장 전체 면적은 상당히 넓은 편이고, 광장이 잘 발달돼 있어 상설시장보다는 오일장(1, 6일)에 최적화된 구조다. 현재 대로변과 장옥 등의 상가는 약 90여 곳으로, 입점 상가들은 보통 시골 장터처럼 과일, 건어물, 철물점, 신발, 잡곡, 의류, 어류, 농약, 종묘, 가축 등이다.30년째 시장을 지켜왔다는 한 어르신은 “1970~90년대만 해도 청하시장 장날엔 인근 흥해, 영덕, 포항은 물론 영천, 경주에서도 장꾼들이 몰려들 정도로 성시(盛市) 이루었다”고 말한다. 바다에 인접해 꽁치, 가자미, 오징어, 고등어 등 각종 수산물이 풍부하고, 또 인근에 평야, 산지 농사가 잘 발달해 과일, 채소 등 농작물 난전도 크게 발달했기 때문이다.한때 주변 20~30리 장꾼들과 난전들을 불러 모으던 청하시장은 2000년대 이후 상권이 급속히 위축되었다. 그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고령화, 이농현상, 저출산 등 전반적인 사회현상 때문이다.◆‘갯마을 차차차’ 방영 이후 전국적 명소로경북 동해안 오지의 작은 시장으로 활력을 잃어가던 청하시장에 2021년 귀한 손님들이 찾아들었다. tvN의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제작팀이었다.짠내, 사람 내음 가득한 바닷가 마을 ‘공진’에서 펼쳐지는 힐링, 로맨스 드라마는 국내는 물론 넷플릭스 시청률 전체 순위 10위권에 랭크되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드라마 히트는 극의 무대인 청하시장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음은 물론이다. 드라마가 회(回)를 거듭할수록 촬영장을 찾는 방문객들이 늘어났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2021년 10월부터 다음에 초까지 약 10만여 명의 관광객들이 시장을 다녀갔다고 한다. 한 달 평균 3만~4만 명이 이곳을 다녀간 셈인데, 덕분에 지역 경제에도 관광 특수가 일었고, 시장 매출도 몇 배씩 늘었다고 한다.노점을 운영하는 한 어르신은 “드라마가 방영되던 당시에 하루 종일 젊은이들이 시장을 찾아 사진을 찍고, 세트장을 둘러보느라 연일 인파로 북적거렸다”고 말한다.드라마를 시청했던 외국인들의 방문도 러시를 이뤘다.모종을 파는 한 상인은 “주말이면 관광객들을 실은 관광버스, 승용차들이 주차장을 가득 메웠다”며 “덕분에 시장통에서는 하루 종일 외국어 소리가 떠나질 않았다”고 기억했다. ◆보라슈퍼, 공진반점, 청호철물 그대로청하시장엔 현재도 드라마 속 공진시장 세트장과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드라마 촬영 당시 시장의 25곳 점포는 드라마 세트장이 됐지만 상인들도 불편함을 감수하며 촬영에 협조했다고 한다.동네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보라슈퍼’도 남아 있다. 현재 보라 엄마는 없지만 쫀드기, 아폴로, 사탕, 과자와 장난감들을 팔고 있다.자장면, 탕수육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던 ‘공진반점’ 간판도 그대로다. 대신 메뉴는 곰탕, 소머리국밥, 국밥으로 바뀌었다.보라 아빠가 일하던 ‘청호철물’엔 지금도 옛날처럼은 아니지만 셀카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문앞에 소품용 의자를 준비해 사진을 찍도록 배려했다. 전직 가수 오윤이 운영하던 ‘한낮에 커피 달밤에 맥주’도 사진 촬영 명소로 사랑을 받고 있다. 파스텔톤의 건물과 고즈녁한 풍경 덕에 드라마 당시 낭만적인 분위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여기가 정말 우리가 찾던 곳이었어요.’ 당시 드라마 제작진들이 촬영을 위해 이곳을 답사했을 때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라고 한다.이런 ‘준비된’ 세트장 분위기를 배경으로 드라마가 성공을 거두고 시장이 관광지로 부상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개인과 국가가 성장, 발전 과정에서 흥망성쇠를 겪듯 동네 어귀의 시장도 수없이 부침(浮沈)을 반복한다. 일제강점기 청하, 신광면에서 생필품 조달 창구로 시작한 청하시장은 1980~90년대 사방 30리 난전(亂廛)들을 불러 모을 정도로 번창하다 안타깝게 이제 쇠락기를 맞았다.이런 침체기에 갑자기 나타난 ‘갯마을 차차차’ 촬영팀은 시장을 지역 명물, 국가적 명소를 넘어 글로벌 관광지로 도약시켰다.시장으로 치면 로또를 맞은 셈인데, 이젠 자치단체와 상인들이 이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혜를 모을 때가 아닌가 한다.글·사진/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08-08

부러지고 굽은 몸통은 ‘인고의 연륜’ 새겨놓은 훈장

매번 올 때마다 특별한 감흥을 주는 성밖숲은 생명 문화의 산실이라는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 버드나무 종류는 40여 종에 달한다. 그 가운데서도 왕버들은 가장 큰 교목이면서 장수하는 나무이다. 수관 폭이 어느 나무보다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 여름에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로는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왕버들 단일 수종의 노거수로 숲을 이룬 곳은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이 유일한 곳일 것이다. 숲은 나무들과 그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많은 동식물이 어우러져 사는 공동체 마을이다.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사의 과정이 계절마다 펼쳐지는 삶의 현장이고 무대이다. 황혼이 되니 외로움이 차가운 겨울바람처럼 옆구리를 찌르며 찾아든다. 어딘가에 정을 주고 외로움을 달래려고 애를 쓴다. 하천에 자유롭게 헤엄치면서 사는 예쁜 물고기는 어항이라는 감옥에 넣어두어야 하고 또한 먹이를 주어야만 함께 할 수 있다. 창공을 자유롭게 나는 새들도 새장 우리에 가두고 먹이를 주어야 한다. 우아하게 하늘을 나는 나비와 잠자리는 가까이하기에는 먼 당신이다. 꿀을 주는 꽃을 쫓아다닌다. 그들의 본성을 짓뭉개고 자유를 빼앗아 나의 외로움을 달랠 수는 없다. 아무것도 줄 수 없는 나를 멀리하는 것은 당연하다.예쁜 꽃도 화무십일홍이라 친해지려고 하면 지고 만다. 이들은 단지 만질 수도 없고 그들이 안전하다고 하는 거리에서 바라만 보아야 한다. 그러나 나무와 숲은 계절 따라 새 옷으로 단장하고 언제나 한 곳에서 묵묵히 살아간다. 그의 모습은 늠름하고 세월이 갈수록 연륜이 더해져 나의 경외심까지 빼앗는다. 외로워 찾아가면 언제나 변함없이 맞이해 주는 나무와 숲은 황혼의 반려목으로 위안은 물론 지혜와 교훈을 준다. 성밖숲을 찾는 이유도 그러하다.성밖숲의 사계절은 독특한 모습을 띠고 우리를 부른다. 겨울은 곱게 물든 단풍잎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졸가리가 겨울바람 매 맞는지 윙윙거리며 우는 소리 낸다. 옹두리 훈장을 몸에 달고 추운 겨울바람에 맞서고 있는 고령의 왕버들을 보면 역경을 극복하는 힘을 얻게 한다. 봄의 성밖숲은 거칠고 노쇠한 몸에서 고운 연노랑 잎을 틔우는 모습에서 생명력의 끈질김을 배우게 한다. 나뭇가지의 잔설을 녹이고 녹색의 정원으로 물들어 가는 모습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한다. 태고로부터 내려오는 자연이 연주하는 바람과 나뭇잎의 합창하는 노래를 들으며 마음은 즐겁다. 여름은 무성한 녹색 잎에서 맑고 신선한 공기가 뿜어져 나오고 새들이 노래하는 공연장이다. 맥문동 보랏빛 꽃은 왕버들이 앉은 꽃방석인가 아니면 꽃목걸이인가. 푸른 이끼로 몸을 단장하고 노익장을 과시하는 왕버들 노거수를 볼 때면 경외감이 절로 든다. 가을은 그 무성한 녹색의 잎이 노란 단풍으로 물든다. 뜨거운 여름과 태풍에도 끄떡없던 녹색 잎이 만추에는 새들의 작은 날갯짓에도 못 이겨 꽃비처럼 우수수 낙하한다. 이렇게 또 겨울을 맞고 봄을 기다리는 왕버들 숲을 거닐면서 황혼의 나를 돌아보면 왕버들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왕버들과 친근해지면 질수록 묘한 느낌이 나를 붙잡는다. 고령의 왕버들 가지는 일부 고사 되었거나 비바람으로 부러져 나가기도 했다. 굵은 원줄기는 온전하지 못하고 몸통 속은 구멍이 뻥 뚫어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의 몸통 줄기나 피부의 모습은 세월을 맞이하고 보낸 인고의 연륜을 새겨놓은 훈장이 아닐까. 하늘 높이 뻗지 못하고 굽은 모습, 속살을 모두 내어주고 텅 빈 모습, 몸에 이끼 옷을 걸친 것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반 천 년의 역사 기록물이고 아픈 추억의 흔적이 아닐까. 나뭇잎의 크기와 두께는 하늘 쪽 나뭇가지에는 작으며 엷다. 반대로 뿌리 쪽 나뭇가지에는 잎이 넓고 두껍다. 또한 가장자리 잎은 안쪽 잎보다 작고 엷다. 빛에너지를 받은 환경조건에 따라 잎의 모양을 달리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보면 공정과 공평이 똑같이 대하고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 아닌 조건에 따라 달리하고 차등을 두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잎도 위치에 따라 모양과 두께가 변하는 것을 보면서 현재 내 위치를 원망하기보다 위치에 맞게 내가 변해야겠다는 교훈을 터득한다. 지난 일제 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이 성밖숲과 같은 마을 숲을 보고 “인류 문화사적으로 독창적인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토지와 야생에 대한 지속 가능한 이용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사례다”라고 하면서 놀라워했다고 한다.세계 어느 곳도 마을 숲을 만들고 보호하고 가꾸어 온 나라는 없다. 성밖숲 운동장과 잔디광장도 왕버들 숲으로 돌려주면 어떨까.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60여 그루가 넘던 왕버들 노거수가 지금은 50여 그루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500살이라는 나이의 한계령을 넘은 왕버들이 고령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태풍이나 노화로 사라져가고 있다. 일찌감치 대비하는 것이 숲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우리는 문명에 이끌려가며 천복으로부터 유리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인간의 본성과 자연의 신비주의 영역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는 현실의 간극을 좁혀보려고 계절 따라 성밖숲을 찾아 생명 문화를 이해코자 한다. 생명 문화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생명체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문화를 의미한다. 인간이 자연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이를 통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생명과 관련하여 성주에는 세종대왕자 태실이 있다. 가장 많은 왕자의 태를 보관하고 있는 전국에서도 유일무이한 곳이다. 성밖숲을 ‘생명문화숲’으로 개명하면 어떨까? 성 밖이란 어감이 왠지 아웃사이드란 느낌이 든다. ‘생명문화숲’과 ‘태실’을 연계한 생명 문화를 꽃피울 수는 없을까? 성주 경산리 성밖숲은…천연기념물 403호다,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446-1번지 일원에 조성된 마을숲이다. 나이가 약 300~5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왕버들 52그루가 자라고 있다.숲은 노거수 왕버들로만 구성된 단순림으로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가슴높이 둘레가 1.84~5.97m(평균 3.11m), 나무 높이는 6.3~16.7m(평균 12.7m)에 달한다. 성밖숲은 조선시대 성주읍성의 서문 밖에 만들어진 인공림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한 비보림수(裨補林水)인 동시에 하천 범람에 대비한 수해방비림이기도 하다.성밖숲에 대한 기록은 성주읍의 옛 문헌인 ‘경산지(京山誌)’, 및 ‘성산지(星山誌)’ 등에 수록되어 있다.구전에 의하면 조선 중기 성밖 마을에서 아이들이 이유 없이 죽는 일일 빈번하였는데, 한 지관이 말하기를 “마을에는 족두리 바위와 탕건 바위가 서로 마주 보기 때문에 이러한 재앙이 발생하니, 이를 막기 위해 두 바위와 중간 지점 이곳에 밤나무 숲을 조성해야 한다”라고 하여 숲을 조성했더니 우환이 사라졌다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마을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밤나무를 베어내고 왕버들로 다시 조성했다고 한다. 성밖숲은 마을의 풍수지리 및 역사·문화·신앙에 따라 조성되어 마을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과 토착적인 정신문화의 재현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마을 비보림(裨補林·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의 안녕을 위해 조성된 숲)으로 향토성과 문화적 의미를 동시에 가진 곳이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8-07

아미타신앙 뿌리 둔 ‘무열왕대 先代의 극락왕생’ 발원

튀르키예가 터키로 불리던 13년 전 여름. 1개월쯤 그곳을 여행했다. 서쪽은 유럽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현대적 도시로 변화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터키 최대 도시’로 불리던 이스탄불이 그랬다.반면 동쪽으로 갈수록 이슬람문화의 색채가 짙었고, 주민들 또한 보다 완고한 종교적 신념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한 나라에서 다양한 문화·종교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그 여행이 끝나갈 무렵. 터키와 이란 접경에 자리한 아라라트산(Ararat Mt.)을 찾았다. 무언가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듯한 눈 덮인 산봉우리를 보며 무신론자인 기자도 잠시잠깐 외경(畏敬)을 느꼈다.실제로 아라라트산은 간단찮은 역사와 장대한 설화를 동시에 간직한 공간이다. ‘종교학대사전’을 펼쳐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터키의 동쪽 끝, 이란의 국경 근처에 솟아있는 화산이다. 터키 최고봉이며 터키어로는 알 다아(Agn Dagl)라고 부른다. 아라라트산은 두 개의 봉우리로 나뉘는데, 대(大)아라라트산은 5165m다. 만년설로 덮여 있다. 소(小)아라라트산은 3925m. 1829년 독일인 F. 파로트가 첫 등정에 성공했다. 전설에 의하면 ‘노아의 방주’가 그 산에 머물렀다고 한다. 산 인근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에게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국민의 단결과 통일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산으로 대접받는다. 아라라트는 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전 8세기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왕국의 명칭으로서도 사용됐다.”아라라트산 기슭엔 흙으로 만들어진 매력적인 성(城)도 있다. 그 성 아래 조그만 마을 숙소에서 이틀을 머물며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경북에도 전설과 더불어 역사를 품은 성스러운 산이 있을까? 있다면 어디일까?” ◆아라라트산 이상의 감흥을 선물한 경주 선도산귀한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선 수고와 고생이 필요하다. 때는 폭염이 시작되던 시기. 무열왕릉이 자리한 선도산 입구에서 ‘마애여래삼존불’이 우뚝 선 정상 부근까지는 꽤 오랜 시간 산길을 올라야 했다.기자는 물론 동행한 사진기자까지 포악한 흰줄숲모기로 추정되는 것들에게 수없이 목덜미와 팔을 뜯기고, 가져간 수건을 땀으로 온통 적시고서야 마침내 바위에 새긴 거대한 석불(石佛) 앞에 설 수 있었다.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을 본 첫 느낌은 ‘아, 이곳은 튀르키예 아라라트산 못지않은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성산(聖山)이겠구나’라는 것.세월이 마모시킨 불상의 모습은 온전치 않았으나,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aura·예술품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와 격조)는 1400년의 시간을 무색하게 했다. 힘겹게 만난 불상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는 사이 등으로 흘러내린 땀이 서늘하게 식었다.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선도산 아미타삼존상(仙桃山 阿彌陀三尊像)’으로도 불린다. 영남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 최미경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된다.“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은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의 정상 부근에 위치하며 현재 보물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도산 불상은 신라 불상 중에서 단석산 마애불상군을 제외하면 조성 규모가 가장 크고 신라 불상의 고유한 특징과 함께 중국 북제-수대(北齊-隋代)의 다양한 불상 양식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불상이 위치한 선도산은 신라에서 서악(西岳)이라 불리며 선도성모(仙桃聖母·선도산의 성스러운 어머니)의 주재처로 숭상 받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선도산 아래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하여 서악리 고분군 및 무열왕 후손의 묘가 있으며 불상은 선도산에서 이들 고분군을 내려 보는 것처럼 조성되어 있어 지리적 위치 또한 주목을 받았다.”이로써 기자가 당시 받았던 느낌은 터무니없는 상상이나 과장된 감정이 아니란 게 증명됐다.신라 불상 중 조성 규모가 두 번째로 크고, 서라벌 사람들이 숭배하던 여신(女神)이 머물렀던 곳으로 이야기되며, 통일제국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이름 높은 무열왕의 유택(幽宅)을 내려다보는 곳에 만들어졌으니. ◆중국 화산(華山)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앞서 ‘튀르키예의 명산’으로 불리는 아라라트산을 살펴봤으니, 가까운 나라 중국이 내세워 자랑하는 산 가운데 하나도 잠시 돌아보자. 화산(華山)은 ‘중국의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으로 불린다. 선도산이 신라의 서악이라면, 화산은 거대 대륙 중국의 서악인 것.중고교 시절 무협소설을 읽으며 지냈던 지금의 중년이라면 화산을 어떤 방식으로건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아래 상상출판에서 펴낸 ‘중국 시안 여행’ 중 이와 관련된 부분을 인용한다.“중국 무협에 관심 있다면 화산은 가장 궁금한 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김용의 ‘소오강호’에서 영호충이 화산 검종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장면, ‘신조협려’에서 북개 홍칠공과 서독 구양봉이 서로 내공을 겨루는 장면이 묘사되는 곳은 바로 화산과 화산 일대. 화산은 친링(秦嶺)산맥 동단에 최고 2437m까지 솟아 있고, 옆으로는 위수(渭水)가 흘러 웅장하게 느껴진다. 화산은 중국 도교의 성지이자, 무협의 근본이기도 한 오악(五岳) 가운데 서악(西岳)으로 불린다. 오악 중 가장 높고, 전체가 바위산의 분위기라 험준한 느낌을 준다. 더욱이 화산의 등산로는 외줄기로 등산객들 사이에서 난코스로 유명하다.”사실 무협소설은 과장된 상상력과 허풍을 재료로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대중적인 재미가 있다.우리가 통상 ‘설화’ ‘전설’ ‘민담’이라 부르는 것들도 마찬가지. 거기선 현실에서의 존재 가능성과 실현 가능성이 거의 제로(0)에 가까운 인물과 사건이 나오고 전개된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게 아닐까? 인간에게서 상상력을 거세한다면 삶이 얼마나 무료해질 것인가를 생각해보자.그러니, 성경 속 ‘노아의 방주’가 실재했다고 강변하는 종교인들과 축지법과 공중 부양이 무시로 등장하는 중국 무협소설을 마냥 “비현실적이라 한심하다”고 힐난하는 건 합리를 가장한 독선일 수도 있다. 어쨌건. ◆마애여래삼존불의 불사(佛事)는 누가 주도했을까?이제 다시 오늘의 주제어인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로 돌아가자.고대 신라인들이 부처가 다스리는 이상향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인식했던 선도산 일대. 그 공간 가장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부드러운 눈길로 굽어보던 마애여래삼존불은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만들었을까?아주 기초적인 의문이다. 이 질문에 최미경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가 친절하게 답해준다.“조성시기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7세기 중엽으로 막연히 인식했으나 양식적 특징을 살펴본 결과 650~67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선도산 불상이 아미타삼존인 점에 주목하여 조성시기에 즈음한 아미타신앙의 형태를 살핀 결과 이는 ‘사자(死者·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위한 추선(追善·죽은 사람 넋의 괴로움을 덜고 명복을 축원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공덕(功德·선한 행위로 쌓은 덕)으로 사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믿음’에서 조성된 것이라 하겠다.”여기까지가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만들어진 시기와 목적을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불상을 만든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논문은 이렇게 이어진다.“이러한 대규모의 불사는 일반 백성의 의지로 보기는 어렵고 지리적인 위치 등을 고려했을 때 불상의 발원 세력은 왕족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도산 불상은 무열왕대에 선대(先代)의 왕생을 빌며 발원했거나, 혹은 문무왕의 발원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불상의 양식을 고려하면 650년경을 전후로 한 시기에 무열왕의 발원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이로써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조성 불사’ 주도자는 둘로 좁혀졌다. 무열왕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 서라벌 역사의 궁금증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8-06

70년 함께한 포항역 사라졌지만, 업소 30여 곳은 여전히 영업

그곳에 켜진 붉은 등은 아직 꺼지지 않고 있다. 해가 지고 밤 8시쯤이 되면 낮엔 커튼으로 가려져 있던 조그만 가게들의 대형 유리창이 빨간 조명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포항시 중앙동 성매매 집결지 속칭 ‘중대’다.현재 포항시에는 약 35개의 성매매 업소가 남아 있다. 1950년대 6·25전쟁 직후 옛 포항역 주변에 형성된 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70여 년 세월이 흐르며 변화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어째서 이곳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까?성매매 집결지 운영은 포항만의 문제는 아니다. 각 지자체의 공통적인 문제였기에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서는 시 차원의 집결지 정비 사업을 진행 중이거나 완료했다. 하지만, 포항시는 집결지 지척에서 도심 개발을 진행하면서도 해당 구역을 개발 구역에 포함하지 않는 등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본지는 2004년부터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되고 있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포항의 성매매 실태를 파악하고, 사회적 대안을 모색하는 기획기사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 성매매 집결지 6·25 직후 포항역 주변에 형성 지루한 폭염이 지속되는 여름밤, 옛 포항역 주변에 있는 중대 거리를 찾았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니 말로만 듣던 유리방(성매매 업소)이 다닥다닥 모여 있었다. 일반인들은 다니기가 꺼려지는 골목길이었다. 각 업소마다 한 명 또는 두 명의 여성이 유리방에 앉아 소위 ‘손님’을 기다렸다.  이런 곳에 누가 올까. 의문도 들었지만 그 사이, 옷깃을 여민 한  남성이 유리방 한 곳으로 재빨리 들어가는 광경이 눈 앞에 들어왔다. 포항시 성매매 집결지는 70여 년 전인 6·25전쟁 직후 포항역 주변에 하나 둘씩 형성됐다. 당시 남편을 잃은 여성들과 생활 형편이 어려운 여성들이 모여들면서 성매매 업소들이 생겨났다. 이후 미군 부대가 포항에 주둔하고 대형 공장이 들어서면서 100여 곳까지 불어나기도 했다. 오랜 기간 그 지역에서 살던 주민 A씨는 “성매매 업소가 많을 때는 골목을 넘어 대로변까지 붉은 조명이 넘실거릴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2015년 포항역이 중앙동에서 흥해읍으로 이전했고, 옛 포항역은 2021년 완전 폐쇄됐지만, 성매매 업소들은 아직도 거기 남았다. ▲ 군산 성매매 집결지 화재로 폐쇄 논의 확산  2000년 9월. 전라북도 군산시 성매매 집결지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국에 산재한 성매매 집결지 폐쇄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당시 군산 성매매 여성 15명은 철문과 쇠창살로 폐쇄된 방에 감금된 상태였기에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거기서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사람들은 성매매 집결지의 실태를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됐고, 2004년엔 성매매에 대해 형사 처벌을 대폭 강화한 특별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성매매 피해자 지원을 위한 현장상담센터협의회’에 따르면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시행된 2004년부터 2023년도까지 폐쇄된 전국의 중요 성매매 집결지는 총 14곳. 연도별로 살펴보면 △2006년 강원도 춘천시 장미촌 △2010년 강원도 동해시 동해부산가 △2013년 춘천 난초촌 △2014년 부산시 범전동300번지 및 해운대 609 △2020년 인천시 숭의동 옐로하우스 대구시 자갈마당 △2021년 서울시 청량리 588 등이다.  그 결과 현재 전국에 남아 있는 성매매 집결지는 10여 곳 정도로 줄어들었다. 대표적인 곳이 서울 영등포와 부산 완월동 등이다.  포항 중앙동 성매매 집결지도 성매매특별법 제정과 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운영되는 업소 수가 줄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상태다. ▲ 민관이 힘 모아 문제 해결한 대구 ‘자갈마당’ 성매매 근절에 노력하는 단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포항시는 성매매 집결지 정비의 의지를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것. 사실일까? 포항시가 그동안 성매매 집결지 문제에 손을 놓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책이 늘 미온적이다 보니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포항시가 성매매집결지 바로 앞, 구 포항역 일원에 개발하고 있는 사업이 대표적이다. 시는 이곳 땅을 용도 변경, 69층 규모의 주상복합건물 건립이 가능토록 해줬다.  하지만, 성매매 집결지 공간을 사업 대상 구역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시가 업소 건물주 및 업소 대표들과 협의에 나섰으나 불발되자 개발대상에서 제외했다. 다만 시는 대형 주상복합건물이 세워지면 주변 땅값이 상승해 ‘중대’가 자연스레 사라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포항시가 간과한 것이 있다. 타 지역 성매매 집결지 폐쇄 사례 가운데 ‘자연 도태’ 방식으로 정비가 이루어진 곳은 없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 폐쇄된 성매매 집결지에 대한 정비 사업 유형을 살펴보면 경찰 단속 등의 자율 정비가 6곳, 도시환경 정비 사업이 2곳, 도시계획시설 사업이 2곳, 도시재생사업 2곳 등이다. 유형들 모두가 시가 정비의 주체가 돼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고 경찰과의 협업을 통해 정비한 점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성매매로 인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 알선자들을 지속적으로 압박하고, 성매매 집결지 주변의 물리적 환경 개선으로 집결지를 서서히 사라지게 한 것이다.  대구 도원동(자갈마당)은 대표적인 사례다. 대구시는 민간개발업체(도원개발)와 함께 대대적인 도시개발 사업을 진행했다. 당시 자갈마당 부지 소유주들이 시세보다 높은 땅값을 요구하거나 매매 비용을 일시불로 요구하는 등 개발사와 갈등이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민간개발업체는 대구시와의 업무협약을 통해 행정적, 금전적 지원을 받아 이를 토대로 정비 사업을 추진해 냈다.  그 과정에서 대구시는 집결지 폐쇄 기한을 정해 그곳 건물주와 성매매 여성들에게 이전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한편 집결지 주변 CCTV 추가 설치(6대), 현금인출기(ATM) 2대 철거, 보안등 47개 교체 등 환경 개선에 집중했다. 또 성매매 방지 홍보물(전단지 8000매, 포스터 300장)을 제작·배포하고, 대구외국인력지원센터에서 외국인 근로자 600명을 대상으로 성 인식 개선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성매매 여성들의 자활을 위한 금전적 지원도 해줬다.  대구시는 광역자치단체로는 최초로 성매매 여성 자활 지원 조례를 제정해 성매매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여성에게 1인당 최대 2000만 원까지 지급하며 자활을 도왔다.▲포항 성매매 집결지 정비 TF 구성그렇다면 포항은 성매매 집결지 정비를 안하는 걸까 못하는 것일까.포항은 지난 2021년 ‘포항시 성매매 집결지 대책 지역협의체’를 발족하고 그간 성매매 집결지 대책 마련에 관한 각계의 의견을 듣고자 했다. 또, 옛 포항역 개발 결정 후인 올해 초엔 ‘포항시 성매매 집결지 정비 TF’를 만들었다.올해 초 결성된 ‘포항시 성매매 집결지 정비 TF’역시 그간 2차례 회의를 진행했지만, 실효성 있는 대책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성지영 인턴기자 thepen02@kbmaeil.com

2024-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