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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1970~90년대 해도동·상대동 주민들의 쇼핑·외식 ‘일번지’

양학시장, 큰동해시장, 북부시장, 죽도시장…. 포항 도심에는 많은 전통시장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시장들은 1970~90년대 도심 유통, 상업 중심지로 자리 잡으며 서민, 생활경제를 지탱하는 든든한 배경이었다. 포항에서 도심 시장의 등장을 논할 때 1980년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우리 일상에서 전통시장은 늘 우리 주위에 있어 왔기에 매 순간, 매 시기가 중요했겠지만, 이 시기(1980년대)에 이르러 전통시장은 양적,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뭘까. 1980년대 전통시장이 우리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이유는? 학자들은 인구의 급속한 증가를 첫째 이유로 든다. 인구 팽창은 국민 수의 양적(量的) 증가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의식주 등 생활필수품의 급격한 수요 증가를 뜻하기 때문이다. 경제 개발이 본격화 되고,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국민소득이 급속히 높아진 점도 시장과 유통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늘어난 소득과 생활수준의 향상은 쇼핑이나 외식 문화 수요를 급속히 신장시켰고, 이런 흐름이 전통시장 발전으로 연결됐음은 물론이다. 이런 등식에 정확히 일치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포항대해불빛시장’(이하 대해시장)이다. 설립 시기도 1981년이고 앞에 열거한 여러 요인들과도 정확히 겹친다. 1980년대 대해시장이 어떻게 포항 남부 도심의 주요 상업, 유통거점으로 부상했는지 그 과정을 들여다보자. ◆1970∼80년대 해도동, 상대동 인구 급증 우선 대해시장의 공간적 근거가 되는 해도동과 상대동의 인구 변화에 주목해 보자. 1985년 해도동의 인구는 4만1000명, 1990년 상대동의 인구는 4만6000명에 이른다. 두 지역의 인구 합계는 웬만한 지방 소도시를 초과하는 규모다. 현재 해도동 인구가 1만6000명, 상대동 2만6000명이니 당시 인구 밀집도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해도동, 상대동 인구 증가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자료가 있다. 바로 1970~90년대 이 일대에 들어선 아파트, 연립주택들이다. 연도 별로 살펴보면 △동아아파트(1979년) △상대주공아파트(1981년) △해도대보아파트(1982년) △반도맨션(1984년) △대명뉴타운맨션(1984년) △금강맨션(1985년) △명성제2광장(1987년) △태양아파트(1988년) △신흥주택1차(1988년) △대림힐타운(1988년) △학산타워(1989년) △현대종합금속사원아파트(1989년) △선화아파트(1990년) △상록수아파트(1990년) △명성해도타운(1990년) 등이다. 대략 헤아린 것만 해도 15개가 넘고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고층 아파트나 대단지 규모는 아니지만 이들 주택들이 시장 근처에 집중적으로 들어서면서 유동인구와 시장 수요를 늘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68년 포항제철의 설립과 1973년 용광로의 가동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철강산업의 발달은 포항의 경제를 수직적으로 끌어올렸고, 안정된 일자리와 고임금 근로자를 발생시켰다. ◆대해불빛시장의 정식 설립과 발전 대해시장의 정식 설립은 1981년으로 기록돼있다. 하지만 시장 관계자와 원로 상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1970년대 이미 시장이 들어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인연합회 김하일 회장은 “마을 어르신들 증언에 의하면 1970년대 이미 노점 형태의 시장이 형성돼 있었다”고 말한다. 아마 허름한 장옥(場屋)과 가건물 위주의 점포들이 상가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80년대 들어와 부쩍 비대해진 상대동, 해도동 일대의 인구나 경제규모는 기존의 노점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포철 근로자들이 이 일대에 대거 입주하면서 생필품 수요가 증가하자 포항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생활근린형 시장 건립을 추진하게 됐다. 대해시장은 여타의 전통시장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오후 3시부터 6시 사이에 가장 붐볐는데 가게마다 손님으로 물결을 이뤄 교행이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구내식당이나 학교 급식시설이 없어 직장이나 학교에서 식사를 모두 도시락으로 해결하던 때였다. 이에 주부들은 오후가 되면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으로 나왔는데, 마침 학생들 하교 길과 겹쳐 시장이 북새통을 이뤘다는 것. 대해불빛시장은 2019년까지 대해종합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2020년 ‘포항국제불빛축제’를 계기로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됐다. 당시 불꽃축제장이 시장과 가장 가까웠고 포항시의 대표 야경 명소인 포스코가 500여m 거리에 있어 이런 이미지를 시장과 접목하기 위한 시도였다. ‘큰 바다’라는 이름처럼 시장 내에는 다양한 점포들이 들어서 있다. 각종 채소, 금은방, 생선점, 옷 가게, 분식점 등 100여 개의 점포가 구색을 맞추고 있다. 대해시장은 상인들 특유의 단결력과 끈끈한 유대감으로 유명하다. 98%를 웃도는 상인회 가입률이 이를 입증한다. 김하일 상인회장은 상인들 의식의 큰 변화 계기를 ‘시장첫걸음 사업’ 때 진행했던 ‘상인대학’을 든다. “나만 성실하게 일하고 좋은 물건 싸게 팔면 장사가 잘되겠지. 하던 상인들이 자신의 점포보다 ‘시장’이라는 더 큰 틀에서 상업을 이해하기 시작한 거죠. 상인회가 단결해 시장 전체 분위기를 이끌고 시민들을 위한 프로그램, 이벤트를 진행함으로써 시장 전체의 가치와 이미지를 올려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게 된 것입니다.” 변화된 상인들이 ‘무언가 한 번 해보자’고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들면서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현재 시장에선 카드 단말기 설치, 온라인 결제, 원산지 표시제, 가격 표시제는 기본이고 구획선 지키기 등 질서들이 잘 유지되고 있다. 특히 2020년에는 전국 전통시장 우수 시장에 선정되었고, 중소벤처부 장관상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상인회의 단합과 문화 공간 조성의 비전 상인들의 단결과 높은 상인회 가입률은 시장 활성화에 큰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결집을 바탕으로 상인회는 다양한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정기적인 봉사활동은 물론 플리마켓과 바자회 등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을 위한 행사들도 열고 있다. 특히 상인회는 향후 시장 내 120평 유휴공간에 대형 문화공간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공간이 완성되면 각종 축제 행사와 버스킹, 바자회, 경로잔치, 심지어 연예인 초청공연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이는 대불빛시장을 단순한 쇼핑 공간을 넘어, 지역 사회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시키기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김 회장은 대해시장을 한마디로 ‘정(情)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또 인심과 활력이 넘치고 저렴한 가격에 모든 종류 상품을 원스톱으로 구매할 수 있어 전통시장과 대형마트의 장점이 골고루 갖춰진 곳이라고 자랑한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는 대해시장이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현재 상인회는 ‘문화관광형시장’ 공모 준비에 전념하고 있다. 이 제도는 정부에서 전통시장의 대표상품 개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공모에 선정되면 연간 5억원 정도 정부지원금을 확보하게 돼 시장 환경 개선, 건물, 가로 정비 등 상인회 활동에 탄력을 받게 된다. 이제까지 포항의 도심시장으로 성장을 거듭해온 대해시장이 이번 ‘문광형시장’ 선정을 계기로 포항의 전통 상업 공간, 시민 경제의 중심으로 도약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11-21

전로 취련조업 무결함 ‘기록 제조기’ 역사를 쓰다

“취련사는 목표 온도와 성분에 맞게 쇳물을 조리하는 요리사와 같습니다.” 제철소에서는 생산직 중 유일하게 취련 작업자에게 ‘사’자를 붙여 ‘취련사’로 격을 높여 부르고 있다. 제강공정은 철을 만드는 중간 단계이다. 포항제철소 철강제품의 70~80%가 제강부를 거쳐간다. 어떤 성분으로 쇳물을 만드는지에 따라 철강제품의 성질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이 과정은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포항제철소 제강부 3제강공장 이영진(56) 포스코 명장에게 취련사의 길에 대해 들어본다. - 포스코에 입사하게 된 계기는. △내가 태어난 곳은 버스와 전기마저 들어오지 않던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진별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누나 두 명과 나, 삼남매를 키우기 위해 힘겹게 노력했다. 나는 누나들과 함께 작은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졸업이 가까워질 무렵, 누나들과 헤어져 경기도 가평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보내졌다.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중학교에 다니던 나는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담임 교사가 학비 무료, 기숙사 제공, 군 입대 면제 등의 혜택이 주어지는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진학을 권유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새롭게 전환하는 터닝포인트가 됐다. “먼 데까지 가서 공부할 수 있겠냐”며 걱정부터 하던 어머니의 말씀을 뒤로 하고, 가족을 떠나 나는 아무 연고도 없는 포항으로 오게 됐다. 처음에는 고향 생각과 외로움 속에서 남몰래 눈물을 많이 흘리기도 했다. 포철공고 제강과를 졸업한 후, 1987년 곧바로 포항제철소의 심장 제강부에 입사하게 됐다. 이때부터 나는 용선(쇳물)을 다루는 취련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 현재 포항제철소에서 맡고 있는 업무는. △포항제철소의 심장이라 불리는 제강공정, 그중에서도 3제강공장 전로파트는 철강제품의 성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용선에 산소를 불어 넣는 양을 조절하고 황, 인, 탄소와 같은 불순물을 제거해 질 좋은 철강 제품을 만들고 있다. 이 과정을 음식에 비유하자면, 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이기 위해 너무 졸여버리면 짠 음식이 되는 것처럼 쇳물 중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산소와 냉각재를 투입해야 한다. 무조건 산소를 많이 불어넣으면 용강의 청정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 업무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포항제철소 3제강공장을 처음 지을 때, 프로젝트 건설요원으로 공장 건설에 뛰어들었다. 당시 23년 차가 되던 해 ‘맨땅에 헤딩’을 하게 된 것이다. 주변서는 익숙한 업무를 뿌리치고 “왜 사서 고생을 하냐”며 만류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공장을 처음부터 계획해 보는 일은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고 특성에 따라 각종 표준을 만드는 기초적인 작업을 하면서 때론 아주 힘들었지만, 평생 남을 경험과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설비와 공장을 다 지어놓고 시운전을 앞둔 상황에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어디에 내가 모르는 문제가 있어서 그 문제가 터지지는 않을까?” 매일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결국 스트레스로 원형탈모와 눈썹이 빠지는 지경까지 갔다. 당시 몸도 마음도 지친 상황 속에서 포항 시민들의 따뜻한 응원과 지원 덕분에 큰 힘을 얻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포항 시민들이 나서서 떡도 나눠주고 성공적인 공장 가동을 위해 응원의 목소리를 내줬다. 포항 시민들은 큰일이 있을 때면 이렇게 한결같이 포스코를 지지해 준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덕분에 3제강공장은 무사히 착공돼 지금까지도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 무결함 작업으로 ‘기록제조기’라는 별명이 있다고. △자랑 같아 보일 수 있지만, 회사에서 “취련 좀 한다”라는 말은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무결함 작업을 지속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비법은 몇 가지 중요한 요소에 기인한다. 첫째, 철저한 준비와 분석이다. 항상 다른 사람보다 일찍 출근해 먼저 작업한 취련사의 작업 내용을 정밀하게 분석했다. 이를 통해 작업의 흐름과 문제점을 사전에 파악하고, 다음 작업에 반영할 수 있는지를 찾았다. 둘째, 집중력과 끈기이다. 취련에 들어가면 작업에만 몰두한다. 작업이 의도한 대로 온도와 성분이 나오면 보람과 희열을 느끼지만, 좋지 않게 나올 경우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스트레스조차도 나에게는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노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셋째, 지속적인 학습과 개선이다. 항상 새로운 기술과 방법을 배우고, 이를 실제 작업에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덕분에 금속제련기술사, 제강기능장, 제선기능장, 주조기능장 등 많은 자격증을 취득했고, 특허출원 5건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동료와 수시로 소통하고 협력하며 서로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해 더 나은 작업 환경을 만들어가고자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열정과 책임감이다. 취련사 직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포스코와 함께한 지난 시간 동안, 회사와 함께 성장해 왔고, 앞으로도 더 가치 있는 미래를 위해 지속 노력할 계획이다. - 국내 최초로 전로 출강 작업 자동화에 성공한 스토리를 들려 달라. △제강공정에서 작업자들이 가장 긴장하는 순간은 전로에 담긴 쇳물을 래들에 옮겨 담을 때이다. 이를 ‘출강작업’이라 부르는데 쇳물을 전로에서 정련한 뒤 깨끗한 쇳물만 분리해 내는 고위험 고기술 공정으로 작업자의 숙련도에 따라 품질 및 작업 편차가 크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처럼 중요한 작업을 수작업에만 의존하는 것은 위험성이 크다고 판단해, 포스코는 2018년 전로 출강 작업 자동화 기술을 국내 최초로 도입했다. 관련 핵심 기술은 원격으로 고열의 출장 조업을 정밀하게 조작할 수 있는 시스템과 공정 자동 프로세스이다. 고성능 적외선 카메라와 인공지능을 활용해 돌발 상황을 제어하고, 출강 작업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자가 학습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 결과, 작업자는 컴퓨터 화면에서 시작 버튼을 한 번만 클릭하면 출강 공정에 필요한 7가지 절차가 자동으로 이루어지게 됐다. 이를 통해 전로 운전자는 더욱 안전하게 작업함과 동시에 연평균 4.5건의 품질 불량을 사전에 방지하고, 연간 수억 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됐다. 현재 3제강공장에서 생산되는 전체 강종의 약 90% 이상이 출강 자동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 - 현장 관리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키워드는. △새로운 실적을 발굴하는 것도 좋지만, ‘협력과 팀워크’가 가장 중요한 키워드라 생각한다. 선후배가 함께 만들어내는 ‘조직의 힘’을 믿고 있다. 협력은 지식과 경험의 공유를 통해 조직의 지속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팀워크는 각자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서로의 강점을 활용하여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협력과 팀워크를 통해 이루어진 성과는 조직의 목표 달성에 기여하며, 공정한 보상을 통해 지속적인 동기 부여를 자극한다. 이러한 가치를 바탕으로 조직을 끌어 나갈 때, 새로운 실적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 명장으로서 후배 양성과 기술 전수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현재 작업자 안전, 품질향상, 생산성을 중심으로 명장이 되기까지 터득한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특히, 작업 현장에서의 안전 수칙 준수와 효율적인 작업 방법을 강조하고 품질 관리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이제 퇴직이 4년 남짓 남았지만, 그동안 선배들이 쌓아온 기술과 경험을 후배들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마지막 목표이다. 그래서 후배들이 현장에서 겪을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멘토링을 진행 중이다. 포스코인의 명성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 인생철학과 비전이 있다면. △나의 인생 철학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이다. 이 말은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경험과 도전 속에서 자연스럽게 깨달은 세상의 이치이다. 어떤 일이든지 노력과 헌신 없이는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후배들도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겨 자신만의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쌓아 더 큰 성과를 이뤄내고, 새로운 50년 철강 산업의 미래를 주도해 나가길 바란다. 어려운 도전에도 좌절하지 않고 까다로운 조건에서도 완벽하게 해내고자 노력한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 믿는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지금 철강 산업은 마치 배고프고 추운 겨울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고,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항상 그래왔듯이, 서로 협력하고 힘을 모은다면 이 어려운 시기를 함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본연의 업무에 충실한다면, 이 겨울은 반드시 끝나고 따뜻한 봄이 찾아올 것이다. 이런 시기일수록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고 힘을 모으며 배려해 새롭게 도약할 원동력을 준비해야 한다. 이영진 제강부 3제강공장 명장은 △금속제련기술사(2006년)△포스코 기술대상(2015년)△포항시최고장인(2020년)△대한민국 우수숙련기술인(2021년)△대한민국 산업현장교수 위촉(2021년)△포스코명장(2023년)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11-20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 데 10년을 바치기도

박수철 선생은 해안둘레길을 자주 걸었다. 바다의 도시 포항에 사는 화가로서 바다를 제대로 그리려면 몸으로 바다를 체험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렇듯 그는 작품 한 점 한 점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그에게 작품은 신앙이다. 김도형(김) : 선생님이 사신 흥해 해원빌라는 2017년 포항 지진 때 심하게 파손돼 언론에도 소개되었지요. 박수철(박) : 또 한 번 하늘이 무너졌지요. 한마디로 끔찍했습니다. 나중에 빌라를 철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바람에 두 달 가까이 흥해체육관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에서 텐트 생활을 했습니다. 보상금으로 용흥동에서 전세를 살다가 송도에 작은 집을 장만했습니다. 이 집도 6개월 동안 수리한 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서도 힘든 일을 당하게 되더군요. 2022년 태풍 힌남노가 몰아쳤을 때 집에 물이 차올라 화실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김 : 지상에 집 한 채 구하기가 이렇게 힘든 일이군요. 집수리 기술은 언제 익혔습니까? 박 : 조각하는 후배의 집안이 죽도시장에서 가구점을 했습니다. 후배는 가구점을 기반으로 인테리어 사업에 뛰어들었지요. 그때 후배와 함께 다니며 집수리 기술을 배워 지금까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20년 정도 되었군요. 김 : 작품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바다 풍경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유가 있는지요? 박 : 포항은 바다의 도시가 아니겠습니까. 바다를 보고 자랐고 지금도 바다와 함께하고 있으니 바다를 그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바다를 그리려면 몸으로 바다를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해안둘레길을 자주 걷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는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걸었지요. 구룡포에서 호미곶 구만리까지 가는데 하루가 더 걸렸어요. 걷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진도 찍고 스케치도 해야 하니까요. 도중에 민박하면서 그 길을 걸었습니다. 김 : 구만리 사진은 지금도 갖고 계시겠군요. 박 : 구만리뿐만 아니라 포항의 옛 풍경 사진을 여러 장 갖고 있습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괜히 울적해지지요. 김 : 선생님의 과거 사진 중에 ‘사라진 구만의 언덕을 애도하며’라는 글을 배낭에 붙이고 몇 사람과 함께 걷는 장면이 있습니다. 박 : 구룡포에서 구만리까지 가는 길에 큰 도로가 나면서 아름다웠던 모래 언덕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정말 가슴 아팠지요. 지인들과 그 길을 걸으며 다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송도해수욕장에도 모래 언덕이 참 좋았는데……. 물론 개발이 필요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지워버리면서 해야 하는 건지, 참 안타깝습니다. 박 선생은 젊은 날부터 작가 노트를 꾸준히 써왔다. 31년 전 여름 어느 날, ‘송도의 모래 언덕’에 관한 상념의 기록이 남아 있다. 바람이 불던 날 송도의 작은 모래 언덕이 생각난다. 파도가 일고, 바람이 바다 내음을 몰며 내 얼굴을 쓰다듬고 머리카락 위로 사라지는 그 한나절을 그렇게 무릎 조아려 세워 앉아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던 그 작은 모래 언덕이 생각난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오늘 나는 하루 종일 그 언덕에 앉아 있다. 하모니카와 하프 연주의 브리티시 포크를 들으면서. 삶이란 수많은 모래알 속의 하나로 반짝이면 되는 것을 왜 저 혼자 바위가 되려 하는지. - 1993년 7월 18일 김 : 작업은 주로 언제 하십니까? 박 : 자연광이 비치는 낮에만 합니다. 그림이 인공조명을 받으면 색의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자연광도 오전과 오후의 느낌이 다르지요. 그리고 여름 풍경은 여름에, 겨울 풍경은 겨울에만 그립니다. 그 계절에 마무리하지 못하면 다음 해로 넘어갑니다. 여름 풍경을 겨울에 그리면 여름의 느낌을 살려내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작업 속도가 느린 편입니다. 김 : 그렇다면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박 : 평균 3∼4년이 걸립니다. 10년 넘게 걸린 작품도 있어요. 김 : 아직 완성이 안 된 작품도 있을 텐데, 그런 작품을 보면 어서 완성해야지 하는 조바심이 나지 않습니까? 박 : 사는 게 미완성인데 조바심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김 : 젊은 날에도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까? 박 : 젊은 날에는 1년에 100여 점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연말이 되면 그중 90여 점은 찢거나 뭉개버렸어요. 해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지요. 김 : 다작(多作)을 하다가 과작(寡作)으로 바뀐 거군요. 박 : 젊은 날에는 의욕과 열정이 넘쳐 작품 수가 많았지요. 나이 들수록 작품의 완성도에 집중하게 되니 작품 수에는 집착하지 않게 되더군요. 김 : 열정적으로 그리다 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었겠습니다. 박 : 젊은 날 눈이 내리면 자전거를 타고 동빈내항과 철길을 미친놈처럼 돌아다녔습니다. 나의 내면에 그 풍경을 꼭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그러고 보니 이제 포항도 눈을 구경하기 힘든 곳이 되었습니다. 김 : 그림을 그리려면 비용이 많이 들 텐데요. 박 : 내가 벌어서 해결했고, 미국에 있는 누나와 조카가 물감과 이젤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김 : 포항의 풍경 중 각별히 애정이 가는 곳은 어디인가요? 박 : 구만리이지요. 구만리는 가장 포항다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토에서 싹을 틔우고, 바람과 싸우며 결국 이겨내는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지요. 나는 구만리를 포항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김 : 아버지가 있으면 어머니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박 : 동빈내항을 어머니로 여깁니다. 모든 것을 품어주고 지켜주는 곳이니까요. 태풍이 오면 동해안의 많은 선박이 동빈내항으로 몰려오지요. 김 : 신앙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박 : 나에게 신앙은 곧 작품입니다. 믿는 만큼, 다가서는 만큼, 노력하는 만큼 신앙도 작품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과 예술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김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박 : 갖고 있는 물감과 캔버스를 모두 소진한 후 죽고 싶습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고 프랑스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말했다. 고흐와 이중섭 그리고 많은 예술가가 그랬다. 하지만 고통은 지나가도 아름다움은 남지 않을 수 있다. 1950년 전쟁통에 태어난 이 화가는 숱한 시련과 고통을 겪으며 일흔 중반에 이르렀다. 인생을 정리할 시점에 이 화가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현장에 나간다. 신은 과연 이 화가에게 아름다움을 남겨줄 것인가. 인터뷰를 마무리하는데 묵직한 질문이 명치를 찔렀다. 끝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20

깊이 깃든 전설과 함께 우리 이야기를 담은 은행나무

고향인 청도를 오고 갈 때면 길목에서 쉼터를 제공해 주고 반겨주는 고마운 분이 있다. 청도 대전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서원리 자계서원 은행나무, 원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삼총사이다. 서원리 은행나무는 자계서원에 배향되는 탁영 김일손 선생의 상징물이고 원리 은행나무는 사대천왕과 함께 천년 고찰 적천사의 호위 무사다. 대전리 은행나무 노거수는 내려오는 전설로 인하여 나무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보호받으며 마을을 홍보하는 홍보대사이다. 원리의 은행나무와 마찬가지로 생태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나라의 보호를 받는 귀족계급의 나무이다. 삼총사로부터 쉼터를 제공받고 가르침과 교훈을 얻고 있으니 그곳 나무 밑은 나에게는 안락한 카페요, 나무는 인자하신 스승님이다. 삶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달래 주며 힘과 용기를 준다. 그분들 품에 안겨 편안히 쉬기도 하고 늠름하고 우람한 모습을 닮으려고 노력한 지도 벌써 십수 년이 지났다. 요즘 차를 몰고 시골길을 달리면 주변은 만산홍엽으로 아름다움에 취해서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오늘도 아내와 함께 조상 묘사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청도군 이서면 대전리 638번지 마을 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은행나무를 찾아 쉬었다 왔다. 주민들은 나무 방책에다 작은 돌로 주변을 경계 지우고 그에게 물리적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귀한 손님에게 주인이 제공한 푹신한 방석에 곧게 앉은 자세이었다. 정자를 설치하고 대리석으로 앉을 자리는 물론 주차장까지 조성하여 방문객의 편의를 돕고 있었다. 우람한 은행나무의 아름다운 단풍을 배경으로 오후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연인들이 기념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하늘 높이 솟은 나무의 우람한 모습과 노란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무가 되어갔다. 아직 노란 단풍이 물들어 가는 중이라 주말인 11월 23일 토요일 전후로 정점을 찍을 듯싶다. 산그림자가 어둠의 이불로 마을과 은행나무를 덥고 동산으로 달음질칠 때 마을을 빠져나왔다. 대전리 천연기념물 301호 은행나무는 키 30.4m, 가슴둘레 8.8m의 수나무이다. 밑둥치에서 처음 두 가지가 자라 하나로 붙고 나중에 또 새로운 가지가 자라 또 하나로 되어 지금은 모두 하나의 큰 줄기로 탄생했다. 이렇게 다수의 수간(樹幹) 다발로 왕성하게 성장하면서 웅장한 수형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낙엽이 질 때 소리 없이 조용히 지면 이듬해에 풍년이 들고, 여러 차례 바람에 흩날려서 낙엽이 지면 흉년이 든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식물 개체의 생장 환경이 양호하면 일정 기간 내에 낙엽이 지며, 생장 환경이 불량하면 각각의 수간별로 낙엽이 지는 시기가 다르기 때문인데, 노거수의 건강성을 가늠하는 생활 속의 과학이다. 많은 사람이 노거수 나이가 얼마인지 묻는다. 아마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누군가 기념식수로 심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다면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그럴 때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수백 년을 살아오고 있는 신령 같은 분의 나이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얼버무려버린다. 물론 과학적으로 나이를 측정하는 방법은 있지만, 경비도 많이 들고 고령의 노거수 몸을 상처 내는 일은 좋은 방법도 아니고 또 해서도 안 될 일이다. 나이는 400년 정도 된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 가장 오래된 1300년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1300년 전 이곳을 지나가던 한 도사가 원래 이곳에 있던 우물의 물을 마시려다가 빠져 죽었으며, 그 후 우물에서 이 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또 다른 비슷한 전설로, 이 마을을 지나가던 한 여인이 물을 마시려다가 빠져 죽었는데 주머니에 있던 은행의 싹이 터서 자랐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는 수나무지만 때로는 은행이 달리는 수도 있다고 전해 온다. 마을 당산나무로 취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전설이 아닌 실제 사건이었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설정해 보았다. 재미 삼아 전설의 나이가 맞는지 조사자의 나이가 맞는지 궁금하여 나름대로 나무의 나이를 계산해 보았다. 가슴높이 둘레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1982년엔 8.5m이었고 2005년 조사에서 8.65m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23년 동안 15cm 굵어졌다. 이는 일 년에 평균 6.5mm씩 굵어진 셈이다. 이러한 가슴높이 둘레의 증가를 고려한 대전리 은행나무 노거수의 나이는 2005년에 1,330세가 된다. 이 수령은 전설로 전해지는 수령 1982년 당시 1308세이고, 2005년 1331세이다. 공교롭게도 거의 일치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설의 이야기가 맞는지 조사자의 기록이 맞는지는 나무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전설의 나이가 맞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등극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의흥 예씨(義興芮氏) 세거지인 이곳 청도 대전리는 ‘한밭’으로도 불리며, 골이 깊고 들이 넓어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경북 예천 부군수를 역임한 예경해 시인은 이곳 대전리 출신이다. 2019년 시집 ‘누고?’를 출간했다. 이 시집은 경상도 사투리를 활용하여 서민들의 삶과 정서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표제작인 ‘누고?’는 성형수술 후 할아버지를 찾아간 손녀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 간의 소통과 정체성의 변화를 다루고 있다. 또한, 예경해 시인은 전통과 현대, 서정과 비밀, 사랑과 사투리, 고향과 도시, 선(禪)과 해학 사이의 역설적인 시학을 추구했다. 그는 이곳에 태어나서 살면서 천 년 묵은 은행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서정시를 창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무는 우리의 삶에 문학과 예술 등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지구상 다양한 인류 문화 가운데 노거수 사랑은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전통문화가 아닐까 싶다. 필자의 시 ‘은행나무’ 오랜 세월 뿌리내린 너아득한 세월을 넘어 깊이 깃든 전설과 함께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구나.긴 세월을 품고 서서말없이 나를 반겨주는 너 바람에 실린 낙엽 소리에풍년을 속삭이는 나무 고단한 몸 기댈 때마다넌 조용히 힘을 주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1-20

‘마애여래삼존불’이 세워진 영적이고 신령한 땅

가을 하늘 아래 서있는 마애여래삼존불 보살상. 너른 벌판 아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들을 내려다보고 선 마애여래삼존불, 고대왕국 신라 첫 번째 왕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여겨지는 성모(聖母)의 설화, 성스러운 기운이 서렸다는 땅 서악(西岳)…. 이 모두는 선도산(仙桃山)이란 키워드와 연결되는 것들이다. 조용한 늦가을 오후. 한낮에 찾은 선도산은 평화로운 모습으로 길게 엎드려 있었다. 수천 년 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얼핏 보기엔 경주의 여느 지역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른바 ‘서악’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역사학계가 주목한 곳이다. 민족사학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이기백(1924~2004)은 삼한일통(삼국통일) 이전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겼다는 지역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974년의 일이다. “신라에는 통일전쟁 전에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오악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동쪽의 토함산(吐含山), 서쪽의 선도산, 남쪽의 남산(南山), 북쪽의 북악(北岳), 중앙의 부악(釜岳)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영토가 확대되고 통일전쟁을 치른 뒤에는 오악도 국토의 사지(四至)에 있는 산들로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 이때의 오악은 동쪽의 토함산, 서쪽의 계룡산(鷄龍山), 남쪽의 지리산(地理山), 북쪽의 태백산(太白山), 중앙의 부악이다. 이는 각 방위에 따라 국토를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그 지역의 일정한 정치적 세력을 제압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지녔다고 한다.” ◆‘명당 중 명당’으로 여겨졌을 경주의 서악 앞서의 언급처럼 서악은 신라 오악 중 하나로 선도산 일대를 지칭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자신의 이름과 행적을 세상이 오래 기억해주길 원한다. 민의가 반영되는 선거가 아닌 타고나는 혈통으로 왕위를 이어갔던 고대엔 이런 열망이 더 컸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나 어마어마한 규모로 축조된 중국 서안의 진시황릉은 그런 열망이 낳은 유적이 아닐까. 합리와 이성보다는 하늘의 뜻과 임금의 의지로 지배되던 고대엔 이른바 ‘명당(明堂) 중 명당’이 죽은 왕의 유택(幽宅) 자리로 선택됐을 것이다. 신라인들은 분명 서악을 명당이라 믿었을 터. 1964년 여름 사적 제142호로 지정된 경주 서악동 고분군(慶州 西岳洞 古墳群)은 통일신라시대 즈음에 조성됐을 것으로 보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선도산 초입에 커다랗게 모습을 드러낸 무열왕릉의 뒤편 언덕에 자리한 네 개 봉분을 지칭하는 서악동 고분군에 대한 ‘위키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곳 고분들은 경주 분지의 대형 고분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고분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 시설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으로 보아 안에는 나무로 된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형식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들 고분이 분포한 지형은 선도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뒷산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의 영향 아래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영남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 최미경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仙桃山 阿彌陀三尊像)-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는 서악과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아미타삼존상), 7세기 신라 불교 조각과 아미타신앙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논문 역시 서악과 선도산이 가진 지리적·역사적 위상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불상(마애여래삼존불)이 위치한 선도산은 신라에서 서악이라 불리며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주재처로 숭상 받던 곳이다. 현재 선도산 아래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해 서악 동 고분군 및 무열왕 후손의 묘가 있으며 불상은 선도산에서 이들 고분군을 내려 보는 것 같이 조성돼 있어 지리적 위치 또한 주목을 받았다.” ◆마애여래삼존불은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을까 대부분이 알다시피 신라는 부정할 수 없는 불교왕국이었다. 법흥왕 이후 국교(國敎) 수준으로 귀하게 대접받았던 신라 불교.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숭배하는 불교신앙을 아미타신앙이라 한다. 그렇다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뭘까? 불화와 번뇌가 없는 서방정토를 다스리는 부처다. 앞서 말한 최미경의 논문엔 “선도산 불상이 아미타삼존인 점에 주목해 조성 시기에 즈음한 아미타신앙의 형태를 살핀 결과 이는 사자(死者)의 극락왕생을 위한 추선(追善)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공덕(功德)으로 사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믿음에서 조성된 것”이라는 서술이 나온다. 여기에서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만들어진 이유의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논문은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 “이러한 대규모 불사는 일반 백성의 의지로 보기는 어렵고 지리적인 위치 등을 고려했을 때 불상의 발원 세력은 왕족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도산 불상은 무열왕대에 선대(先代)의 왕생을 빌며 발원했거나 혹은 문무왕의 발원 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불상의 양식을 고려하면 650년경을 전후로 한 시기에 무열왕의 발원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최미경을 포함한 적지 않은 사학자들은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무열왕 김춘추, 또는 문무왕 김법민 재위 시절에 바위에 새겨졌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신라 사람들이 영험이 깃든 성스러운 땅이라 믿었던 서악, 조금 더 좁혀 말하자면 선도산은 그런 국가적인 대형 프로젝트가 행해지기에 모자람이 없는 지역이었다고 추정된다. 영적이고 신령한 땅, 마애여래삼존불이 세워지기에 안성맞춤인 산, 신라를 태동시킨 여성의 신화…. 일연이 쓴 역사서 ‘삼국유사’ 역시 이 지역이 가진 신비스러움에 관해 짤막하게 서술한다. “신라 시조 혁거세왕, 불구내왕이라고도 하는 바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이다. 설명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가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미하는 글에 현인(賢人)을 잉태해 나라를 열었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또는 계룡(鷄龍)이 상서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으니, 또한 서술성모의 현신이 아닌 줄을 어떻게 알 것인가…(후략)” ◆마애여래삼존불은 수나라 시대 양식 영향 받아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仙桃山 阿彌陀三尊像)-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는 마애여래삼존불의 양식을 “본존은 고부조임에도 볼륨감이 없어 전체가 하나의 원통형 기둥처럼 보이며 세부 표현을 생략해 간결하다. 이런 간결함, 양감 없는 체구, 부드러운 조형은 북제불(北齊佛)과 유사하나 적절한 신체 비율과 당당한 체구는 수대(隋代·수나라 시대)의 양식”이라고 보고 있다. 더불어 “통견의 법의는 굵은 선을 한 줄 새기고 그 아래 얕은 선을 번갈아 넣는 새김을 반복해 조각의 단조로움을 피했다. 몸에 밀착된 얇은 옷주름이 대칭으로 내려오는 것은 북제 불상의 특징이지만 장대한 신체는 오히려 수대 불상에 가까운 것으로, 본존은 북제불을 원류로 하면서도 보다 진전된 수대 양식을 받고 있다”고 쓴다. 7세기 중반 무렵. 번창 일로에 있던 불교왕국 신라는 당시 최고의 석조 기술을 가진 장인들을 동원해 부처와 보살의 형상을 선도산 정상 부근에 새겼을 것이다. 그것들이 장구한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신라를 신라답게, 경주를 경주답게’ 보이게 하는 보물로 존재하고 있다. 반갑고 다행한 일이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1-19

다 쓴 물감 튜브에 십자가 새기며 시련을 견뎌내

오지호의 죽음 이후에 박수철 선생은 오지호의 둘째 아들인 화가 오승윤과 인연이 이어진다. 그리고 일요화가회를 만들어 지역 미술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그가 의지하던 이들이 죽음을 맞고 사업이 실패하면서 큰 시련을 겪는다. 김도형(김) : 갈뫼화실을 운영하면서 일요화가회도 만드셨지요? 박수철(박) : 오지호 선생의 둘째 아들인 오승윤 선생이 포항에 가면 일요화가회를 만들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1979년에 일요화가회를 만들었는데, 10명 정도가 참여했습니다. 제1회 일요화가회 작품전 축사를 오지호 선생이 쓰셨지요. 오승윤(1939∼2006)은 1939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나 8·15 광복 후 아버지(오지호)의 고향인 전라남도 화순군으로 이사했다. 1964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4년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창설에 참여하여 1982년까지 교수를 지냈다. 198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Acad00E9mie de la Grande Chaumi00E8re) 등에서 공부했다. 1982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전업 화가의 길을 걸으며 한국 전통의 색깔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승윤의 작품은 한국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미술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 ‘오승윤’, ‘두산백과’ 참조. 김 : 오지호 선생이 작고하신 후 오승윤 선생과의 인연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 : 오지호 선생의 빈자리를 오승윤 선생이 채워주었지요. 그분께 많이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오승윤 선생이 사기를 당하면서 그 괴로움으로 2006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나로서는 기댈 언덕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지요. 그 충격과 상실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김 : 포항 출신 화가 중에는 장두건 선생이 유명한데 혹시 교류가 없었는지요? 박 : 1990년대 후반 장두건 선생이 동아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있을 때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 직후 선생의 본가가 있는 흥해 초곡에 집을 지을 때 형상회 동인이자 동양화가인 정대모와 함께 도와주었지요. 그 후로도 선생과 인연은 이어졌습니다. 장두건(1918~2015)은 포항시 흥해읍 초곡리에서 태어나 흥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세에 일본 유학길에 올라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미술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메이지(明治)대학 전문부 법과로 옮겨 졸업했다. 이때 법과에 학적을 두고 야간에는 미술연구소에서 그림을 그리며 프랑스 유학의 꿈을 품었다. 귀국 후 서울사대부중에서 교편을 잡았던 장두건은 1957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리고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수학하며 ‘르살롱(LeSalon)’전에 ‘내려다본 식탁’(1958)을 출품해 동상을 받았다. 귀국 후 세종대 전신인 수도여자사범대 미술학과장, 성신여대 예술대학장, 동아대 예술대 초대학장 등을 역임하며 후학을 양성했고, 미술단체인 목우회, 이형회 등을 결성했다. - ‘서울아트가이드’ 참조. 김 :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박 : 오지호 선생이 작고한 이듬해인 1983년에 결혼했습니다. 가장으로서 생계를 꾸려야 했기에 돈이 안 되는 화실은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형은 국민은행 최연소 차장으로 승진하며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형의 도움으로 1980년대 후반 중앙상가에서 신사복 대리점(코오롱 맨스타)을 열었지요. 하지만 대리점을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형이 백혈병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내가 믿던 또 하나의 의지처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김 : 신사복 대리점은 잘되었습니까? 박 : 영업을 몰랐으니 잘될 리 없었고 본사에서는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요. 그래도 후배들한테 밥 사주고 술 사줄 형편은 되었습니다. 그 뒤에 제일모직 브랜드(빈체레)로 바꿨다가 IMF 때 문을 닫았습니다. 김 : 후유증이 컸겠습니다. 박 : 암담했지요. IMF 후에 우동 장사, 꽃집 등을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살길이 막막해서 누나와 막냇동생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갈까 고민했어요. 마침 지인이 죽도파출소 맞은편의 건물 지하를 무상으로 내주어 ‘자유인’이라는 술집을 열었습니다. ‘자유인’을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만들고 싶었고, 실제로 많은 예술인이 찾아왔지요. 하지만 3년을 버티다가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김 : 장사하면서 기억에 남은 일이 있는지요? 박 : 신사복 대리점을 하면서 중앙상가 상인회 총무를 맡았습니다. 중앙상가 한중간에 길이 있으니 길을 중심으로 상가를 살려보자고 하면서, 메타세쿼이아 같은 나무를 심자고 했지요. 하지만 의견이 수용되지 않더군요. 지금 중앙상가 풍경을 보고 있자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김 : ‘자유인’이 문을 닫은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 : 집을 팔아 빚을 정리하니 2000만 원이 남더군요. 그 돈으로 어디를 가겠습니까. 또 한 번 앞이 캄캄해졌지요. 그때 지인이 흥해 양백리에 자신이 소유한 빈집이 있다며 거기서 살아보면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천만다행이다 싶어 그 집에 가보았어요. 그런데 얼마나 오래 방치되었던지 수풀이 우거져 출입구를 찾을 수 없었고 집 안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5개월 정도 수리해 그 집에 들어갔지요. 모든 것을 잃고 가족들의 보금자리를 겨우 얻게 되자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고, 그림의 주제에도 반영되었어요. 김 : 흥해 양백리에서는 얼마나 사셨습니까? 박 : 7년쯤 살았는데, 어느 날 집주인이 그 땅을 판다며 집을 비워달라고 하더군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집에서 나가면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신세였지요. 자존심을 접고 통사정을 했지만 주인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내는 큰 병에 걸려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김 : 시련을 어떻게 헤쳐나갔습니까? 박 : 절망적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새벽 기도를 열심히 다녔어요. 새벽은 하나님께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김 : 새벽 기도 후에 변화가 있었습니까? 박 :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더군요. 2009년에 미국에 있는 누나와 막냇동생이 4000만 원을 보내주었습니다. 그 돈으로 흥해에 있는 해원빌라를 매입해 4개월 동안 수리한 후 입주했습니다. 김 : 교회는 언제부터 나갔습니까? 박 : 바로 위 누나가 태어나자마자 천연두에 걸려 죽고 말았어요. 어머니가 그때부터 교회에 나갔는데 나도 어머니를 따라 나갔지요. 어릴 때야 신앙이 무엇인지 알았겠습니까. 20대 후반에 신앙을 제대로 받아들였고, 50대 들어 힘든 일을 겪으며 신앙이 깊어졌습니다. 김 :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떤 작업을 하셨는지요? 박 : 다 쓴 물감 튜브 안쪽을 긁어서 십자가를 새겼습니다. 그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십자가 연작이 만들어지더군요. 박수철 선생은 2023년 5월 흥해 성곡리에 있는 푸른마을교회에서 개인전 ‘The Cross 40’을 열었다. 전시를 본 한 관람객은 이중섭의 은지화가 떠오른다고 했다. 또한 수명을 다한 물감 튜브가 십자가로 다시 태어난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와 중첩되며 깊은 감동을 주었다고 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17

완공 1년 앞둔 포항∼영덕 고속도, 동해안 관광·교통 중심지로

포항~영덕 고속도로는 지난 2017년 9월, 영덕 3, 4, 5 공구별로 착공되면서 신호탄을 쐈다. 타 공사와 특이한 점은 공구별 시공사가 다른 점이다. 총 4개 시공사가 참여하고 있으며 1공구(흥해읍 곡강리~청하면 신흥리)는 (주)한화, 2공구(신흥리~송라면 화정리)는 디엘이앤씨(주), 3공구(송라면 화진리~영덕 남정면 부흥리)는 대우건설, 마지막 4~5공구(부흥리~남정리~강구면 원직리)는 현대산업개발이 맡아 하고 있다. △ 차별화된 시책 도입 안팎으로 호평 공사 초기 영덕군 남정면 양성리 산 8-6 일원에 고려시대에 세워진 ‘토석혼축목책성곽’이 발견돼 진행에 차질이 발생했지만, 문화재청과 문화재 유적 보존방안을 2021년 5월 최종협의 하면서 탄력이 붙었고 현재 마지막 공사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도로공사 측은 “당초 2024년 말 계획됐던 개통이 내년 12월로 1년 정도 지연된 것은 여러 사정 변경이 발생, 연기가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주요시설물로는 분기점 1개소(영덕)와 나들목 3개소(북영일만, 북포항, 남영덕)를 비롯해 휴게소 2개소(포항, 영덕)가 건설된다. 특히 포항~영덕 간은 산악지역을 통과하는 것으로 설계되면서 상대적으로 구조물 비율이 높아 시공에 난관이 많았다. 실제 이 구간은 교량이 37개소에 6.43㎞(21%), 터널이 14개소에 9.89㎞(31%)에 달하고 있다. 현재 교량과 터널 공사 큰 줄기는 거의 마무리됐고, 터널 내 포장과 교량 상부 공사가 차질 없이 진행 중에 있다. 2025년에 본선 토공부 및 교면포장, 부대시설 설치 등을 추진해 공사를 마무리 할 예정이다, 시공 과정에서 적잖은 우여곡절이 있기도 했지만 이 구간은 차별화된 시책 도입 등으로 안팎으로 호평을 받았다. 사업단이 추진한 폴더형 교량 점검시설 출입문 개발과 진동저감 터널발파 공법 등은 한국도로공사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안전관리 부분에서도 순조롭게 대처해 눈길을 모았다. 한국도로공사 측도 이 사업에 거는 기대가 크다. 박재범 포항영덕건설사업단장은 “포항~영덕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동해안을 잇는 남북축이 형성돼 교통망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포항∼영덕 고속도로는 국가간선도로망 중 남북 10축 동해선 고속도로에 포함돼 있다. 전체 구간 433㎞중 222.7㎞는 이미 개통됐으며 포항~영덕 간 30.9㎞가 내년 준공될 경우 나머지 179.4㎞는 장래 단계별로 사업이 추진된다. △ 포항시 접근성 강화 위해 도로정비 내년 말 개통에 맞춰 포항과 영덕은 지역발전 프로젝트 수립 등에 적극 나서고 있다. 포항시는 고속도로 접근성 강화를 위해 시가지내 도로 정비와 신설에 들어갔다. 시가지내 도로망 재정비를 통한 효율적인 도로운영과 교통량 분산으로 시민 불편을 사전에 해소하기 위해서다. 먼저 북구 한동대 인근에 설치되는 북영일만 IC 접근성 강화 및 시내구간 교통량 분산을 위해 주 출입도로인 국도대체 우회도로와 도심과 주거 밀집 지역 연결도로를 확충한다. 득량동, 죽도동에서 우회도로로 연결되는 도시계획도인 중로 1-55호선(양학체육공원~연화 IC)은 총사업비 328억원 연장 L=1.76㎞를 시행중이며 토지보상이 마무리돼 수용절차가 끝나면 내년 하반기에 착공된다. 우현동, 학산동에서 우회도로로 연결되는 도시계획도로 대로 3-27호선(한신공영~흥해읍 이인리)도 총사업비 434억원 연장 L=2.74㎞로 현재 공사 중이며 내년 12월에 준공할 예정이다. 또한 구도심과 용흥동 접근성 향상을 위해 연화재에서 연화IC를 연결하는 도시계획도로 대로 2-47호선을 현재 2차로에서 4차로로 확장할 계획이며, 국도 28호선과 초곡지구, 성곡지구와 우회도로를 연결하기 위해 리도 211호선은 총사업비 25억원으로 연장 L=1.2㎞를 개설할 예정이다. 북구 청하면 필화리에 설치되는 북포항 IC는 진출입도로가 2차로로 협소해 고속도로 개통 전 7번국도 청하4거리에서 IC간 도로를 4차로로 확장한다. 이 사업은 경북도에서 시행하는 국지도 20호선 상원~청하 간 도로 확장공사에 포함되어 있다. 모두가 포항∼영덕 고속도로 개통에 맞춰 계획된 지역발전, 주민편의 등을 향한 맞춤형 사업들이다. 시 관계자는 “그동안 포항은 북쪽 도로가 사실상 7번국도 하나뿐이어서 도시가 뻗어나가는데 한계가 있었다”면서 포항∼영덕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북 지역 개발이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영덕이 동해안권 교통중심지 될 것 영덕은 그동안 교통오지라고 불려왔다. 인구와 물자가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상황에서 수도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도로환경 또한 매우 불리한 입지 조건이었다. 영덕군이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2017년 상주~영덕 간 고속도로 개통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 실제 2016년 687만여명 이었던 영덕 관광객 수는 2017년 984만여명으로 급증하였고 2018년 1000만명 대에 들어서며 명실상부한 최고의 해양 휴양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고속도로 하나가 한 지역의 미래에 기대 이상의 효과를 일으킨 대표적 케이스로 꼽힌다. 하지만, 교통인프라에 있어서 아직 다각화와 효율성이 필요하다. 다행히 동해선 포항~삼척 동해선 철도는 다음달 개통 예정이고 포항~영덕 고속도로 개통은 이제 1년을 남겨두고 있다. 포항~영덕 고속로도가 개통되면 7번 국도의 정체 해소와 함께 주행거리는 기존 37㎞에서 31㎞로 줄어든다. 주행시간도 지금은 40∼50여분 걸리지만 20분 이내면 주파가 가능하게 된다. 이로 인한 효과는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포항~영덕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대구~포항 고속도로와 부산~포항 고속도로 등의 간선도로망이 연결되면서 주변 메가시티와의 접근성이 비약적으로 개선되고, 상주~영덕 고속도로와도 격자형 도로망을 구축할 수 있게 돼 영덕의 관광 등 관련 산업이 날개를 달 수 있을 전망이다. 군에서도 지역 성장 동력이 될 동해선 철도와 고속도로 개통 효과를 극대화하기위해 대중교통 강화 등 대비에 나서고 있다. 국지도 20호선 구간의 강구대교 건설 등 주요 관광지를 연결하는 도로 개선과 상위 교통수단과의 연계와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버스 증차와 노선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김광열 군수는 “2025년 말 포항~영덕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이제 영덕은 더 이상 교통오지가 아니라 동해안 해양관광의 중심지이자 동해안권 교통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면서 관광, 에너지, 해양 등의 미래 산업 육성을 위한 초광역 교통망 구축에도 군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울진도 포항~영덕 고속도로 개통에 거는 기대가 적잖다. 영덕까지 오는 교통 접근 개선이 이뤄지면 풍선효과로 울진 후포 등이 후광효과가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울진군 역시 이런 상황에 맞춰 담대한 후포발전계획을 구상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석윤기자 lsy72km@kbmaeil.com

2024-11-17

인구절벽 속 ‘희망의 빛’ 품은 청도, 살기 좋은 지방시대 만든다

청도는 신석기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지며 청동기시대 유물과 유적이 지역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토지가 비옥하고 수원(水源)이 풍부해 한때는 인구가 10만 명에 육박하고 각기 특색이 있는 5일 장으로 상권이 활성화됐던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하지만, 산업경제의 발달과 도시 및 수도권 인구 집중으로 감소하기 시작해 2021년 행정안전부의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새로운 성장 가능성으로 주목받고 있다. 경북도의 인구감소지역은 봉화와 안동, 영덕, 영양 등 15곳이지만 청도는 지난 1분기 행정안전부의 인구감소지역 생활인구 조사에서 전국 7위, 경북도 내 1위라는 놀라운 성과를 달성하며 지방소멸과 인구감소의 위기 속에서 희망의 빛, 정주 인구의 확산 가능성을 보았다. 화랑도와 새마을운동 발상지라는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도약을 위해 꿈틀거리는 청도의 변화 물결을 살펴본다. □ 살아 있는 정신문화 청도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산이 푸르고 물이 맑고 인심이 좋은 삼청(三淸)의 고장이라는 천혜의 자연뿐만 아니라 화랑정신과 조국 현대화를 앞당긴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는 우리나라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청도를 화랑정신의 발상지로 부르는 이유는 사군이충(事君以忠)과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등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이곳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서기 600년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대작갑사(현 운문사)와 가슬갑사에 머물고 있을 때 화랑인 귀산과 추항이 찾아와 세속오계를 지침으로 받아 실천함으로써 세속오계가 화랑의 행동 지침으로 보편화하고 삼국통일의 바탕이 되었다. 또 청도읍 신도리는 1969년 8월 경남지역 수해복구 현장을 시찰하고자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철로 주변 마을의 슬레이트 지붕을 보고 기차를 멈추게 하고 새마을운동에 착안하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한 최초의 마을로 대한민국 전역을 새마을운동으로 점화시키는 불씨가 되었다. □ 청도행복헌장 재정과 자생 돌봄 공동체 발굴·육성 지자체의 정주 인구는 특수성이 있겠지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 세대가 어울리며 공경과 사랑, 배려가 어우러지는 사회로 구성되는 것이 마땅하다. 청소년 인구의 비중이 약한 청도는 이를 해결하고자 지난 2023년 1월 군민의 행복과 공동체를 위한 ‘청도행복헌장’을 제정하고 지방소멸 대응 기금을 투입하고 있다. 자생 돌봄 조직 활성화와 공동체 정신 함양을 강조하는 행복헌장은 서로 배려하고 웃어른을 공경하기 등 10가지 계명으로 삶의 발전을 위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이다. 2022년부터 확보하기 시작한 지방소멸 대응 기금의 활용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자생 돌봄 조직의 활성화는 마을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지역의 자원을 활용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 지역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청도군은 올해 초, 지방소멸 대응 기금을 재원으로 시작된 자생 돌봄 공동체를 통해 지역 아동들의 돌봄 공백을 메우고, 부모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고자 기획된 ‘행복 울(ALL)타리 프로젝트’는 △마을 탐험(마을 지도 만들기) △플로킹(청도천 쓰레기 담기) △소셜다이닝, 부모의 식탁 △두부 만드는 아이들 △마을회관 어르신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 등 특색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고령화된 농촌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고 세대 간 소통을 활성화로 단순한 돌봄을 넘어 지역 공동체의 회복과 지속 발전이라는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자생 돌봄 공동체를 통해 저출생 문제 해결과 지속 가능한 마을 공동체 구축, 마을 돌봄 센터 확충, 돌봄 전문가 양성, 돌봄 네트워크 구축 등 적극적인 행·재정적 지원으로 저출생 위기를 극복해 가고 있다. 자생 돌봄 공동체의 평균 자녀의 수가 2명 이상으로 이를 증명하고 있다. □ 지방소멸대응기금의 지속적인 확보 2022년부터 2031년까지 10년간 연간 1조 원 규모로 지원되는 지방소멸대응기금은 기초자치단체에 75%가 배분된다. 자치단체가 여건에 맞는 투자계획을 자율적으로 수립하고 일 잘하는 곳이 더 많이 배분받을 수 있다. 청도군은 지금까지 470억 원의 기금을 확보했다. 9개 사업에 기금을 투입해 정주 여건 개선과 체류형 생활인구 유입 증가를 위한 환경조성 구축에 힘쓰고 있다. 특히, 지난달 16일에는 2025년 기금을 확보하고자 김하수 청도군수가 직접 사업 계획(PPT)을 발표하고 질의·응답에 나서는 등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6일 발표된 2025년도 인구소멸대응기금 배분에서 160억 원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외에도 지방소멸대응기금을 재원으로 ‘작고 강한 학교 만들기 프로젝트’를 통해 교육시설 개선, 특성화 영어 프로그램 운영, 교원연수비 지원 등 역량 강화를 지원하고 있다. □ 3대 비전으로 변화 주도 청도군의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변화에는 민선 8기 군정을 이끌어 가는 김하수 군수가 강조하는 ‘평생학습 행복 도시와 문화·예술·관광의 허브 도시, 농업대전환’이라는 3대 비전이 한몫하고 있다. 평생학습 행복 도시는 생애 전 주기에 필요한 평생학습을 제공하는 것으로 단편적인 지식을 제공에 그치지 않고 전문성으로 지역에 힘을 보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국 최초로 대구한의대에 ‘청도인적자원개발학과’를 개설해 지역의 인재를 맞춤형 교육으로 미래의 청도를 혁신할 자원으로 활용하고 평생교육을 청도 군정이 나아갈 기조로 정립했다. 문화와 관광, 예술이 어우러진 지역의 내실을 다지고 있다. 역사유적인 청도읍성, 운문사,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석빙고, 레일바이크 등의 관광자원을 즐기고자 매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고 있지만 자연드림파크와 예술인 창작 공간 등의 조성, 적극적으로 유치에 나선 대규모 위락단지와 종합레포츠단지는 청도를 정주를 꿈꾸는 고장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농업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변화시킬 농업대전환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 과학·기술 영농으로 살기 좋고 지속 가능한 농촌을 꿈꿀 수 있다. 청도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는 말처럼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이라는 위기를 자생 돌봄 공동체를 통한 저출생 극복과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시대정신인 ‘평생교육’이란 성장의 사다리를 놓아 희망을 숲을 조성하고 있다. 김하수 청도군수는 “청도는 청도군보건소에 소아청소년과를 개설해 주민 불편을 최소화하고 인구정책 지원 조로 재정 등 지역민, 특히 유입되는 젊은 세대를 위한 정책마련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젊은 층의 유입은 지역의 미래와 연결된다는 철학으로 이미 정주해 터전을 일군 군민들, 새로운 시도를 통해 청도로 이주하는 군민 모두를 아우를 군정이 민선 8기의 최대 목표로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4-11-14

AI 열풍에 빅테크 기업 전력 확보전… 새로운 성장 기회 온다

전 세계적으로 원자력은 이제 단순한 에너지 공급 수단을 넘어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자, 국가 안보와 지속 가능한 성장의 핵심 전략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특히 최근 글로벌 주요 반도체 및 빅테크 기업들이 원전 지역으로 이전하고 있음은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AI)과 데이터 센터 운영에 막대한 전력이 소요되기 때문에 적재적소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소멸 위기에 처했던 지역들이 원전 사업을 기반으로 고급 인력과 관련 기업들이 모여 성장하는 사례 또한 증가 추세다. 당연 경북에도 기회가 오고 있다. 이런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 원자력 산업의 중심지인 경주에서 ‘2024 경북 원자력포럼’이 마련됐다. 13일 라한셀렉트 경주 베가홀에서 열린 이번 포럼에서는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원자력산업과 관련된 화두들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펼쳤다. 이인선 국회의원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남태석 교수, 이재학 한국원자력환경공단 고준위사업본부장, 임승열 KHNP 처장, 김한곤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 기술개발사업단장이 주제발표를 진행했다. 이인선 국회의원이 ‘지역발전과 원자력, 함께 만들어가는 미래’를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고준위 방폐장 건설, 현 세대가 책임져야” 기조강연 이인선 국회의원 국가와 지역 발전을 위해서는 원자력이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원자력은 온실가스 감축과 안정적 전력 공급에 기여한다. 국가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는 핵심 자원이기도 하다. 원자력 발전은 전기요금 안정화에도 도움이 되고, 장기적으로는 국민 에너지 비용 절감에 효과가 있다. 나는 경북도경제부지사로 4여년 재직하면서 경북원자력을 앞장서 이끌었다고 자부한다. 경주는 중저준위처분시설 유치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유지해 가고 있다. 방폐기금을 통한 특별지원금으로 지역 인프라를 개선하고 교육, 의료 등 주민 삶의 질 향상에도 크게 기여했다. 경주는 앞으로도 원자력산업의 핵심이자 중심지역으로 그 자리를 확고히 해 나갈 것임을 확신한다. 다만, 안타깝게도 1978년 대한민국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1호기 가동이래,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수십 년간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 시설 확보 실패는 ‘화장실 없는 아파트’와 같은 상황이다. 아파트에 화장실이 없다고 해서 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현 세대가 원자력 혜택을 누리면서 폐기물 처리 부담은 미래 세대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 현 세대의 책임으로 해결해야 하며, 사용 후 핵연료 관리 또한 시급하다. 실제 사용 후 핵연료 임시저장 시설은 현재 포화상태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놔 둘 곳도 없다. 이래서는 안된다. 특히 원전 내 사용후핵연료 반출이 지연되면 안전 문제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 경우 국민 부담이자 사회 갈등 요소로 커질 것이다. 이제 이를 해결해야 한다. 그 방법과 열쇠는 고준위방폐물관리특별법 제정이다. 고준위 방폐장 확보의 지연은 국제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 원자력산업이 기지개를 켠 부분은 정말 다행이다. 향후 에너지 시책은 원자력과 신재생에너지를 믹스해 수립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K-택소노미, 즉 원자력이 RE100에 포함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나라 원전산업이 도약하고 글로벌 경제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얼마 전 원전 생태계 복원을 위해 신한울 3·4호기가 착공됐고 현재 여러 프로젝트가 진행 중에 있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글로벌 원전시장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위한 것들이다. 원자력의 유연성과 안전성을 높이는 소형 모듈 원자로(SMR) 기술은 우리가 앞서나가고 있다. 경주나 대구 군위 중에서 최적 단지가 조성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원자력 산업은 앞으로도 지역 사회와 함께 성장하며 협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지속적인 소통과 혁신을 통해 지역 발전과 원자력 산업의 상생을 추구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경북원자력 산업이 미래 국가 경쟁력의 한 축으로 더욱 우뚝 자리 잡길 소망한다. 그 길에 나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 주낙영 경주시장 “원자력 전주기 관할 첨단과학 산업도시로” 주낙영 경주시장 환영사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 가을, ‘Miracle Again, 원자력’이라는 주제로 2024 경북 원자력 포럼을 개최하게 됨을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 현재 원자력은 저탄소 에너지원으로 지속가능한 개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수단이자 저렴하고 안정적인 에너지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주시는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원자력환경공단, 문무대왕과학 연구소, 중수로해체기술원, 한국원자력연구원 등 공공기관 및 연구기관이 밀집된 원자력 산업의 중심지이다. 특히 SMR(소형모듈원자로)은 일반 원전 대비 매우 높은 안전성과 낮은 건설비, 다양한 활용성을 가지고 있어, ‘2050 탄소중립’의 해결사이자 차세대 원전 ‘블루칩’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동안 대형원전을 통해 축적된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의 우수한 원자력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SMR로 전환되는 세계적 추세에서 경주시는 지난해 3월 ‘SMR 국가산업단지’를 성공적으로 유치했다. 또한 혁신원자력 RD 거점기관인 문무대왕과 학연구소는 2025년 준공을 앞두고 있다. 연구-발전-산업화-해체 등 원자력의 전주기를 관할하는 첨단과학 산업도시, 미래형 청정에너지 친화 도시 경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린다. 이번 포럼이 원자력산업과 경주시의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중요한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이동협 경주시의회 의장 “국가 경제·에너지 안보 중심지로 자리매김” 이동협 경주시의회 의장 축사 원자력 에너지는 탄소 중립을 달성하고, 에너지 수급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필수적인 자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경북과 경주는 우리나라 원자력 산업의 중심지로서, 국가 경제와 에너지 안보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이번 포럼을 통해 최신 기술 동향을 공유하고, 원자력 산업이 한층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시민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원자력 에너지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함께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남태석 중부대학교 항공서비스학과 교수 “APEC 경주 성공적 개최 위해 시민 역할 중요” 주제발표 남태석 중부대학교 항공서비스학과 교수 2015년 필리핀 마닐라 APEC 정상회의에서 2025년 개최국으로 대한민국이 결정됐다. 2023년 3월 APEC 경주유치 범시민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등 적극적인 유치전을 벌여 2024년 6월 27일에 2025 APEC 개최지로 경주가 최정 선정됐다. 1989년 출범한 12개국의 각료회의로 출범한 APEC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21개 주요 국가가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APEC은 전 세계 국내 총생산의 62%, 교역량 50%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규모 지역·경제 협력체이며 우리나라는 APEC 창설의 주도국 중 하나이다. 정상회의가 열리면 보통 미국·중국·일본 등 회원국 정상과 고위 관료,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 등 6000여 명과 국내 경제인·행사관계자 등 1만7000여 명을 포함한 총 2만3000여 명이 직접적으로 경주에 모일 것으로 예상된다. 2025 경주 APEC 때는 정상회의 2박 3일, 장관회의와 각료회의는 2005 부산 APEC때와 상황이 상이할 수 있지만 5박 6일 정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성공적 정상회의를 위해서는 시민과 시민단체의 역할과 참여가 절실하다. 단계별 실천방안 로드맵을 완성해 시민과 시민단체로 구성된 협의체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행정적·재정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APEC 개최가 일회성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닌 미래 100년의 지속가능한 경주관광의 이미지 안착을 위한 프로그램 제시가 필요하다. 2025 경주 APEC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는 시민들과 시민단체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주시 범시민단체 협의회 발족 △경주시 분과별 자원봉사단 발족 △경주시 APEC 경주 시민대학 개설 △APEC 경주 민관산학협의회 발족 △경주시 APEC 범시민 및 시민단체 결의대회 필요 △단계별 로드맵, 실천방안 수립해 시민단체에게 공유 △정부·광역 및 기초단체·시민단체·시민 간 정보 공유 △경주시민이 홍보대사, 자원봉사자, 안전지킴이로서 참여와 역할이 절실하다. 이재학 한국원자력환경공단 고준위사업본부장 “방폐물 저장시설 한계… 부지선정 등 절차 법제화 필요” 주제발표 이재학 한국원자력환경공단 고준위사업본부장 2024년 6월말 기준 국내 원전내 저장시설에 보관된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인 사용후핵연료는 53만6598다발이며 원전 부지내 저장시설에서 보관 중이다. 작년 2월 발표된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 자료에 따르면 원전내 저장시설이 부족해 2030년 한빛원전, 2031년 한울원전, 2032년 고리원전 순으로 포화가 예상된다. 원전을 지속적·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조속히 고준위방폐장을 확보하거나 원전부지내에 저장시설을 확충해야 한다. 1970년대부터 32개 원전 운영국 중 23개 국가에서 원전부지내 또는 부지외부에 건식저장시설을 건설해 안전하게 운영 중이다. 우리나라는 1988년 7월, 제220차 원자력위원회에서 사용후핵연료 관리방안으로 원전부지외에 중간저장시설 확보를 결정한 후 수 십 년간 부지선정을 추진했으나 주민 반대로 실패했다. 2004년 12월, 제253차 원자력위원회에서 사용후핵연료 관리방침은 국민적 공감대 하에서 추진하기로 결정한 후, 박근혜정부와 문재인정부에서 2차례 공론화를 거쳐 제10차 원자력진흥위원회에서 고준위방폐물 직접처분을 원칙으로 하는 제2차 고준위방폐물 관리 기본계획을 확정했다. 제2차 관리 기본계획에는 부지 착수부터 처분시설을 운영하는 37년 간의 고준위방폐물 관리로드맵이 포함됐다. 특별법 제정 필요성은 원전확대 또는 탈원전 등의 원전정책과 무관하게 현재 발생한 고준위방폐물의 안전한 관리, 2차례의 공론화에서 국민과 원전지역주민들이 고준위방폐장 부지선정절차와 원전내 건식저장시설의 한시적 운영에 대한 법제화 요구, 원전 강국으로서 우리나라의 국제 위상 강화 등이다. 주요 내용은 고준위방폐물 관리위원회 설치, 부지선정과정에 지역의 결정권 및 국회 보고절차, 고준위방폐장 운영시점, 원전부지내 건식저장시설 인허가 과정에 주민의견수렴 및 지역지원절차 반영 등이다. “세계 원전 동향 파악, K-원전 글로벌 시장 확대해야” 주제발표 임승열 KHNP 처장 2024년 10월 현재, 세계 원전은 가동 원전 415기, 영구정지 원전 211기, 신규원전 63기가 총 16개국에서 건설 중에 있다. 글로벌 에너지시장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신규원전 건설 감소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기후변화에 따른 탈탄소 에너지정책,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대두 및 AI사용에 따른 에너지 수요 증가로 2022년 변곡점을 맞이했다. 특히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들은 강력한 친원전 정책을 발표했다. 글로벌 얼라이언스도 원전확대를 촉구하고 있다. 한국은 2022년 국정과제를 통해 2030년까지 10기 수출을 목표로 함을 밝혔다. 이를 위해 발족한 원전수출전략추진위원회를 통해 하나된 팀코리아의 힘으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수원은 고리 1호기 건설 이후 약 50년간 국내외 원전건설 및 운영을 통해 제반 과정의 최적화를 이뤘고, 원전산업 전분야에 완벽한 공급체계를 구축했다. 바라카 원전을 ‘On time Within Budget’으로 건설함으로써 한국의 기술과 능력을 증명했다. 한수원은 현재 진행 중인 신규원전 건설산업, OM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실적을 갖춘 신뢰받는 기업이 될 것이며, 이를 발판으로 글로벌 원전시장에서 점유율을 높혀갈 계획이다. 김한곤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 기술개발사업단장 “탄소중립 위한 중요 수단 ‘SMR’… 혁신기술개발 총력” 주제발표 김한곤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 기술개발사업단장 소형모듈원자로는 원자로 모듈을 공장에서 제작할 수 있는 정도의 원자로로 최근 세계 에너지 시장의 게임체인저로 각광받고 있다. 2023년 기준으로 세계적으로 90여 종의 SMR이 개발 중에 있다. 우리나라도 세계 최초로 표준설계인가를 획득한 SMART 원전을 비롯해 5종의 SMR을 개발했거나 개발 중이다. 이 중 현재 정부의 국가전략과제로 추진중인 혁신형 SMR은 2021년부터 기획과 4차례의 국회 포럼을 거쳐 2023년 사업을 착수해 2028년 표준설계인가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개발중이다. SMR이 에너지 시장의 게임체인저로 주목받는 가장 중요한 탄소중립의 주요 수단이기 때문이다. 2050년까지 인류가 탄소중립을 달성하려면 2030년대부터 연간 약 130조원 이상의 SMR 투자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선진국들은 예측하고 있다. 현재, 세계 각국은 전력 뿐만 아니라, 수송 분야, 산업분야에서의 탄소배출을 SMR로 대체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 및 사업을 시도중이다. 현재 한국을 포함한 SMR 선도국들은 최소 SMR을 성공적으로 완공해 2030년대에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세계 SMR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할 경쟁을 벌이고 있고, 우리나라도 2035년까지 최초 혁신형 SMR 원전 준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리=황성호·이부용기자

2024-11-13

사람이 지켜야 할 윤리를 강조한 스승 오지호

박수철 선생은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 오지호를 사사했다. 상고 야간부를 졸업하고 포항에 살던 박 선생이 어떻게 광주에 있는 오지호를 스승으로 섬길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오지호는 어떤 가르침을 전했을까. 그 특별한 인연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도형(김) : 현대미술학원이 지역 청년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고 하셨는데, 동인 활동은 없었습니까? 박수철(박) : 1976년으로 기억하는데, 문학과 미술을 하는 청년들이 모여 형상회라는 동인을 만들었습니다. 김 : 동인 활동을 하며 각별히 기억에 남은 일이 있는지요? 박 : 형상회 동인 중에 김원택이라는 시인이 있었는데, 『이 천박한 땅에서』라는 시집을 냈어요. 그런데 시대 분위기 때문에 시집 제목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지요. 한번은 형상회 동인들이 김원택의 시집을 들고 한흑구 선생 댁에 찾아가 인사를 드렸는데 사모님께서 “제목을 왜 하필 천박한 땅으로 했냐”고 하자 한흑구 선생이 “땅이 천박해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이 천박해서 그랬겠지”라고 말씀하셨던 장면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더군요. 김 : 선생님은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인 오지호(1905∼1982) 선생을 사사하셨는데, 어떻게 된 인연입니까? 박 : 1977년에 생계를 위해 부산 온천장에 있는 이화당표구사에서 일했습니다. 부산 석마미술학원의 윤석균 원장이 포항에 왔을 때 소개받았지요. 이화당표구사는 서예가로 명성이 높았던 오재봉(1908∼1991)의 조카가 운영했어요. 오재봉은 오지호와 친분이 있었고, 오재봉의 조카는 광주에 있는 오지호 선생을 만나러 간다고 자랑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오지호 선생을 만나야겠다고 작심하고 오지호 선생에게 10장 가까이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김 : 장문의 편지에 뭐라고 쓰셨나요? 박 : 대학에서 그림 공부를 하지 못한 처지인데 어떻게 하면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는지, 또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등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김 : 답신이 왔나요? 박 : 답신과 함께 선생님의 저서인 『현대회화의 근본문제』를 보내주셔서 뛸 듯이 기뻤습니다. 박수철 선생이 간직하고 있는 오지호 선생의 답신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서양화는 재료와 도구가 많고 커서 그림을 그리자면 일정한 면적의 장소가 필요한 것이요. (……) 서양화는 한번 그리기 시작하면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요. 그리고 서양화 재료는 고가이고 많은 분량이 필요해서 상당한 돈이 있어야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요. 이러한 관계로 서양화 공부는 제자를 스승의 집에 두는 법이 없는 것이요. 그리고 공부를 하자면 학교나 연구소에서 하게 되어 있소. 그리고 이 밖의 방법은 집에서 그림 공부를 하면서 작품을 가끔 스승에게 가지고 가서 평(評)과 지도를 받는 것이요. 귀군(貴君)도 이런 방법으로 공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귀군이 부산이나 대구로 나와서 일정한 직업을 갖고 생활비를 얻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그곳 화가들에게 지도를 받도록 하는 게 좋을 줄 아오. - 1978년 11월 30일 김 :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이 무명의 청년 화가에게 이렇게 정성 들여 답신을 보냈다니 뜻밖입니다. 박 : 오지호 선생의 인품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지요. 선생은 답신 말미에 추신으로 한자 1800자를 완전히 습득하기를 부탁한다고도 하셨어요. 김 : 무슨 이유로 그런 부탁을 하신 걸까요? 박 : 한자를 알아야 우리 전통과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글도 정확하고 품위 있게 쓸 수 있다는 게 선생의 소신이었습니다. 미술 이론에 해박했던 오지호는 한자 교육 부활 등 사회 현안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밝혔다. 1970년 정부가 모든 교과서에서 한자를 제거하자 작품 활동을 뒤로 하고 한자 폐지에 대한 폐해를 역설한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라는 글을 써 한자 교육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1975년 다시 한자 교육을 부활시킨다는 방침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 밖에 문화유산 보호 운동에 앞장서는가 하면 양심수에 대한 구명운동을 펼쳤고,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건의문을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던 앞선 지식인이었다. - 「오지호」, 『두산백과』 참조. 김 : 오지호 선생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까? 박 : 『계간 미술세계』에서 오지호 선생의 작품을 보자마자 빠져들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즐겨 쓰는 청보라색(울트라마린 블루)을 선생도 즐겨 썼습니다. 나는 하늘과 바다, 설경을 그릴 때 이 색을 주로 씁니다. 둘째, 고추장을 이겨놓은 듯한 끈적임과 어우러짐의 질감(마티에르, mati00E8re)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김 : 그 후로도 오지호 선생과 편지를 주고받았는지요? 박 : 그랬지요. 선생한테 받은 편지가 꽤 되는데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김 : 오지호 선생을 뵙기도 했겠습니다. 박 : 선생한테 첫 번째 편지를 받고 1년 후인 1978년에 선생이 계신 광주로 찾아갔습니다. 그 후로 1년에 두어 번씩 광주로 갔습니다. 김 : 당시 광주 가는 길이 멀었을 텐데요. 박 : 기차로 광주까지 여덟 시간쯤 걸렸어요. 포항역에서 출발해 동대구와 대전을 거쳐 광주로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고무신을 신고 쌀 포대에 작품 두세 점을 담아서 기차에 올랐지요. 김 : 오지호 선생을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하군요. 박 : 선생을 뵈러 가기 전에 묻고 싶은 걸 스무 가지쯤 종이에 적었어요. 그런데 막상 선생을 만나 이것저것 물어보면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셨지요. 선생은 미술에 관한 얘기보다 주로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원칙 등 윤리에 관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김 : 오지호 선생의 대표작 중 「항구」가 있지요. 박 : 선생은 항구를 즐겨 그렸는데, 지금도 많은 미술 애호가의 사랑을 받습니다. “배는 자유롭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선생이 1981년 울릉도에 가기 전에 동빈내항을 둘러보면서 참 아름다운 곳이라며 감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진 촬영을 많이 하셨지요. 선생이 이듬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동빈내항 그림을 많이 그렸을 텐데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김 :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박 : 선생은 택시 타는 걸 싫어했습니다. 택시는 교통사고가 자주 난다고 여겼지요. 그런데 울릉도에 다녀온 후 광주에서 택시를 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이듬해 숨을 거두었습니다. 김 : 이화당표구사에서 계속 일하셨나요? 박 : 부산에서 1년쯤 있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큰숲교회(옛 성남교회) 인근에 갈뫼화실을 열었습니다. 그때가 1978년이었어요. ‘갈뫼’는 수도산을 뜻합니다. 수도산은 포항 원도심의 어머니 같은 산으로, 내게는 정신의 의지처입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13

주렁주렁 은행 열매·땅과 맞닿은 가지들… 금빛 물들다

청도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 세속오계를 창시한 원광법사가 주지로 있은 고찰 호거산 운문사와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 스님이 역사 자료를 수집한 비슬산 대견사가 있는 고장이다. 고구려는 평양, 백제는 부여,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반도를 삼국이 삼분하여 적대하면서 서로 국경 침략 등 백성은 편안할 날이 없었다. 분열된 한민족을 하나로 만든 신라 삼국통일 군사 훈련 중심이 된 곳도 이곳이며, 우리의 역사를 오천 년으로 끌어올린 삼국유사의 역사 자료를 수집한 장소도 이곳이다. 화랑도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며 삼국유사는 우리 역사의 뿌리를 기술하였다. 이러한 유서 깊은 역사의 고장인 청도는 산자수명하고 인재 또한 많아 예나 지금이나 살기 좋은 고장이다. 역사적 인물로 탁영 김일손(1464~1498)은 조선 중기 사관으로 무오사화에 희생된 청도인이다. 그는 절효 김극일의 손자로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486년 성종 때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서원리에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짓고 학문에 열중했다.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김굉필, 정여창, 남효온 등과 교류하면서 다시 벼슬길에 나가 이조정랑을 지냈다.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훈구파의 불의와 부패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돕기도 했다. 춘추관에 근무할 때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어 1498년 반역죄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조의제문은 항우가 초나라 회왕 의제를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초나라 의제를 조상하는 형식이었지만, 세조가 권력을 찬탈한 부당성을 풍자한 것이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권되고 순조 때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그의 굽히지 않는 올곧은 성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아마 젊은 시절에 운계정사에 심어 놓은 은행나무의 역할이 크지 않았나 싶다. 선생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가 지금까지 우람하게 자라면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탁영(濯纓)이란 호는 맑은 물에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로 중국의 고대 서적인 초사(楚辭) 굴원의 글에 나오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물이 맑을 때 갓끈을 씻고, 탁할 때 발을 씻겠다는 비유로 세상의 혼탁한 일에 연연하지 않고 고결하게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의 표현이다. 비록 현실이 혼탁하더라도 자신의 고결함과 깨끗함을 유지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손수 서원 내 은행나무를 심고 그를 닮고자 하지 않았을까 싶다. 자계서원이 있어 마을을 서원리라는 이름의 지명을 붙였고, 자계서원을 상징하는 것은 나이 500살을 훌쩍 넘긴 은행나무 노거수이다. 청도군청 김윤길 행정안전복지국장의 도움으로 굳게 닫힌 서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은행나무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키 15m, 가슴 높이 둘레 4.4m 두 그루가 우람하게 자라고 있었다. 한 그루는 5가지 줄기가 하나로 뭉쳐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 암그루로 은행 열매가 나뭇가지에 너무 많이 열려서 가지가 땅에 맞닿아 있었다. 1983년 7월 2일 보호수로 지정되었지만, 나무의 수령이나 그 크기 등 역사 문화적 가치로 보아 천연기념물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몇 년 전 11월 5일 자계서원을 찾았을 때는 은행나무가 가을 하늘과 서원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리의 발과 닮았다 하여 압각수(鴨脚樹)란 이름을 가진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잎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은행나무 아래에는 하늘에서 나풀나풀 춤추며 내려앉은 노란 압각수 잎으로 덮었다. 자계서원의 은행나무 노란 단풍잎의 절정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그해의 기후와 날씨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청도의 진산인 아름다운 남산을 바라보면서 아담한 동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비슬산에서 발원한 청도천이 흐르고 있는 서원리는 유서 깊은 자계서원을 품고 또한 자계서원은 은행나무를 품고 평화롭게 가을을 물들이고 있다. 유교와 관련된 서원에서는 은행나무가 인문학적 다양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은행나무는 지구상에 하나뿐인 속과 과의 나무이다. 화석식물이라 할 만큼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살아온 나무이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1200년이 지났지만,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서원에 다니는 유생들에게 은행나무는 지식과 학문의 지속성, 변치 않는 가치를 상징하면서 교훈을 주었을 것이다. 서원은 조선시대 교육의 중심으로 지속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교육 공간이라는 점에서 은행나무는 이러한 교육의 가치관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은행나무는 천천히 자라며 장수하는 나무이다. 그러면서도 건강하고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학문의 길에 들어선 유생들에게 이와 같이 지혜와 인내, 꾸준한 끈기의 노력을 상기시킨다. 이는 선비 정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은행 열매는 약재로 쓰이며, 나무의 모습 또한 우람하면서도 단정하여 선비의 지조와 품격을 떠오르게 한다. 서원에서 수양하고 학문을 닦는 선비들은 이러한 은행나무의 상징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확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원의 은행나무는 단순히 조경의 일부가 아닌 유교적 가치와 관련된 상징적, 정신적 요소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유교적 사상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당에 은행나무는 이러한 사상을 잘 반영하는 나무이다. 자연에서 인간이 본받아야 할 원리를 찾는 데 의미를 두었고 은행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은 자연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서원은 학문을 탐구할 뿐만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공간이기도 하므로, 은행나무는 그 상징적 의미를 강화한다. 서원 내의 은행나무는 학문적 가치, 정신적 수양,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조선시대 철학의 핵심을 상징하고 있다. 탁영 김일손 선생처럼 나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가리 마음먹으면서 노란 은행잎처럼 내 마음도 곱게 물들어 간다. 자계서원은 처음에는 은행나무를 담장 안으로 품었지만, 지금은 은행나무가 자계서원을 품고 탁영 김일손 선생의 올곧은 성품을 대변하고 있다. 은행나무를 닮고자 손수 심은 선생의 나무 사랑은 나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다. 청도 서원리 자계서원(紫溪書院)은…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는 1400년경 김극일(金克一)이 입향하여 정착한 김해김씨 집성촌이다. 선조 1578년에 사당의 중수와 함께 학사 곳간 등의 새로이 세워져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자계서원이 되었다. 김일손이 형벌을 당할 때 그의 고향에 있는 냇물이 별안간 붉게 물들어 사흘 동안 물 색깔이 되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며 그런 까닭에 붉은 시내라는 뜻의 자계(紫溪)라 불리게 되었다. 1615년에 절효 김극일, 삼족당 김대유를 병향하고, 현종 1661에는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고종 1871에 흥선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4년에 사림과 후손들에 의해 김용희(탁영 14세손)의 사재로 복원되었다. 1975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솟을삼문인 유직문(惟直門), 서원에서의 여러 행사를 하거나 학생들이 모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인 영귀루(詠歸樓), 강당인 보인당(輔仁堂), 학생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는 생활공간인 동재와 서재, 사당인 존덕사(尊德祠), 제사 준비를 하는 전사청(典祀廳) 등이 있다. 1482년 점필재 김종직이 지은 ‘절효김선생효문비명’과 대제학 조정이 지은 ‘효자승사랑김극일정려본김해’ 두 기의 비석이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1-13

선도산이 간직한 최고 유물은 ‘마애여래삼존불’ 아닐까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무너지고, 파괴되고, 시간에 깎여나간 것들이 멀쩡하고, 번듯하고, 번쩍거리는 것보다 매혹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사람들은 때로 폐허와 상실을 아름답게 받아들인다. 20년 전쯤이다. 인도를 여행했다.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돌아가지 않는 낡은 버스와 연착을 거듭하는 기차를 갈아타며 인도 남부 내륙 깊숙이 자리한 도시 ‘함피(Hampi)’를 찾아갔다. 아주 오래 전 비자야나가르 제국의 수도였던 함피는 힌두왕국과 이슬람제국이 번갈아가며 지배한 지역. 예나 지금이나 서로 다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자주 갈등과 반목이 있었다. 함피도 다르지 않았다. 힌두왕국이 번성할 때 이슬람 세력은 웅크렸다. 힌두교도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을 탄압하고, 그들의 종교가 발붙일 수 없도록 억눌렀다. 이슬람 세력은 ‘우리가 권력을 얻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며 이를 갈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힌두교도의 통치가 끝났을 때 등장한 새로운 지배자는 이슬람제국이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힌두교와 힌두교도에 대한 가혹한 핍박이 시작됐다. 힌두교를 신봉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됐고, 힌두교가 섬기는 갖가지 신(神)의 형상은 모조리 목이 날아갔다. 이슬람교도의 보복이었다. 파괴된 함피의 신전과 조형물은 지금까지도 온전히 복원되지 않았다. 도시 곳곳에 무너진 유적들이 보인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함피를 ‘아름다운 폐허’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서진 유적과 유물은 부서진 유적과 유물대로의 의미와 가치가 있을 터. 그래서다. 1986년 유네스코는 폐허의 함피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세월과 세파도 온전히 파괴하지 못한 선도산의 불상들 올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취재를 위해 여러 차례 경주 선도산을 찾았다. 선도산이 간직한 최고의 유물은 누가 뭐래도 마애여래삼존불이 아닐까? 처음으로 그 불상을 봤을 때 20년 전 인도 함피에서의 기억이 소환됐다. 시간에 깎여나가고, 세월에 풍화되며 잊힐 수도 있었던 신라의 석불(石佛)은 21세기인 오늘도 실체로 우리들 앞에 존재하고 있다. ‘경이(驚異)’는 이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닐지. 명지대 미술사학과 최선아 교수는 바로 이 마애여래삼존불이 무열왕 시기에 만들어졌다 추정하며 ‘신라 陵墓(능묘)와 추선 佛事(불사): 서악동 고분군과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이란 논문을 쓴다. 논문에 쓰인 ‘아미타삼존불입상’은 마애여래삼존불을 지칭한다. 같은 불상을 이야기하는 것. 그 논문은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의 외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신라의 왕경 경주 서편에 위치한 선도산(仙桃山)의 정상에는 높이 6m가 넘는 마애불이 조성돼 있다. 우뚝 솟은 안산암 암벽 위에 환조에 가까울 정도의 고부조로 새겨진 불상은 현재 얼굴과 몸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여전히 거대한 위용을 간직한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불상의 현존 높이는 5.81m이지만 얼굴이 온전히 남아 있다고 가정하고 복원한 높이는 6.4m 남짓이다. 불상의 좌우에는 각각 높이 4.49m와 4.56m의 보살상이 서있는데, 두 상은 안산암이 아니라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미국 NBA 농구팀. 그들 가운데 최장신 선수보다 2배 이상 큰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의 가운데 불상. 법흥왕 이후 신라의 국교로 역할했던 불교의 위상을 감안한다면 만들어졌을 7세기 당시 그 불상의 미려함과 섬세함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왕이나 최상층 귀족의 명령에 의해 신라 최고의 석공(石工)이 조각했을 터이니. ◆‘아미타삼존’을 표현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가운데 가장 큰 불상은 마모와 훼손이 심하다. 반면 양쪽에 선 두 보살상은 파괴의 정도가 덜하다. 그래서, 여전히 은은한 미소와 부드러운 곡선을 확인할 수 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위의 논문은 이 보살상에 관해 서술하며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을 언급한다. 아미타삼존은 아미타불을 중앙에, 그 좌측에 관음, 우측에 세지(勢至)의 양 보살을 안치한 삼존을 말한다. 다시 한 번 논문을 인용해보자.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보살상 역시 부분적으로 마모됐으나 불상보다는 보존상태가 양호해 상호와 복식, 지물, 장신구 등 중요한 세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불상의 왼편, 즉 좌협시보살상의 보관에는 화불(化佛·부처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일)이 남아 있어, 세 구의 상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하는 아미타삼존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그마치 1400~1500여 년 전. 이름도 남기지 않은 신라 석공은 우뚝한 불상 하나와 보살상 두 개를 힘겹게 만들어 왕릉을 굽어보게 했다. 바위를 깎고 다듬는 지난하고 긴 작업이었을 게 분명하다. 지금까지도 희미하게나마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유적과 유물엔 만든 이들의 피땀이 깊게 배어있을 터. 이는 신라와 백제가 다르지 않고, 동양과 서양이 동일할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을 바라볼 때면 그걸 깎아 세운 신라 석공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계속) 서산과 태안에도 마애여래삼존불이… 불교는 꽤 오랜 시간 우리 땅을 지배한 종교이자 통치이념이었다. 신라와 백제가 그러했고, 고려 또한 사찰과 그 안에서 수도하는 불승(佛僧)을 귀하게 대접했다. 한국에서 ‘명산’이라 불리는 곳엔 대부분 큰 사찰이 있고, 불당과 인근 바위에선 수많은 불상과 보살을 만날 수 있다. 그 형태와 예술적 완성도는 각기 다르지만. 그러니, 한때 ‘불교왕국’이라 불렸던 신라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있는 경주에 불상과 보살상이 많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도 그런 차원에서 보고 해석해야 존재 이유가 선명해진다. 마애여래(磨崖如來)란 ‘바위에 새겨 넣은 부처의 형상’을 의미하는 단어다. 그렇다면 삼존불(三尊佛)은 뭘까? 어렵지 않은 한자이니 얼마든지 해석이 가능하다. ‘3개의 존엄한 부처’라는 뜻이 아닌가. 비단 옛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만이 아니다. 앞에 말한 것처럼 불교는 한 시대의 통치이념이자 많은 백성들이 믿었던 종교였다. 그런 까닭에 경주 이외의 다른 지역에도 ‘마애여래삼존불’이라 불리는 불상이 존재한다. ‘위키백과’가 “백제 후기 중국 및 고구려와의 해상 교통을 통한 불교문물 수용의 요지였던 서산에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상은 중앙에 여래 입상의 거구(巨軀)를 양각(陽刻)하고 여래의 오른쪽에 보살 입상을, 왼쪽에 반가사유형 보살좌상을 배치했다. 삼존에 나타난 고졸(古拙)한 미소는 백제 불상의 특이상(特異相)으로 지적된다”라고 설명하는 건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있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이다. 가야산 적벽에 부조(浮彫)된 이 불상은 ‘법화경’ 사상이 백제 사회에 유행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귀한 유물. 1959년 4월 보원사지 유물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발견됐고, 이후 국보고적보존위원회가 국보로 지정했다. 충청남도 태안 동문리의 마애여래삼존불은 백화산 바위에 새겨져있다. 이 불상은 신라와 함께 패권을 다퉜던 또 다른 고대왕국 백제가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산 마애여래삼존불보다 더 빨리 조각됐을 것으로 여겨지는 태안 동문리 마애여래삼존불에 관해서 ‘나무위키’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반도에 존재하는 마애불 가운데서 가장 초기 작품 중 하나로 판단되며, 그 형식에서도 아주 특수한 모습을 보이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삼존불은 크게 묘사된 석가모니와 같은 본존불의 좌우로 보살이 보좌하고 있는 모습인데, 이 마애여래삼존불은 중앙에 위치한 작은 보살의 좌우로 중앙 보살보다 큰 여래입상이 있는 대단히 특이한 형태다. 이런 형태는 현재까지 발견된 마애불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도 유일한 것이다.” 태안 동문리 마애여래삼존불 역시 경주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과 마찬가지로 세월의 바람과 파도에 깎여 본래의 형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신라인이 만든 것이건, 백제인이 조각한 것이건 1500~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마애여래삼존불이 가치 있는 유물이란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1-12

대구 패션의 전설, ‘한땀 한땀 한사람 위한 작품’ 혁신을 더하다

대구는 오랜 전통을 지닌 섬유산업의 메카이자 한국 패션 산업의 중심지다. 천상두(70) 디자이너는 무려 4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대구에서 ‘옷’과 동행해 왔다. 천상두 디자이너의 컬렉션은 독특하면서도 단순하다. 천상두 디자이너는 매번 신선한 작품을 런웨이에 펼쳐 보여 놀라움을 안긴다. 지난달 28일 대구 중구 대봉동에 자리한 자신의 브랜드인 이노센스(INNOCENCE) 매장에서 만난 천상두 디자이너는 45년 동안 걸어온 길을 떠올리며 이날 인터뷰를 시작했다. 패션쇼가 예정돼 바쁜 기색이 역력했지만 패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자 금세 안광을 밝히며 발언을 이어갔다. ◇톱 디자이너로 롱런할 수 있는 비결 천상두 디자이너는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국내 유수의 패션쇼에 다수 초청받고 경북외국어테크노대학 패션디자인과 겸임교수, 대구경북패션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패션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그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같이 학문적인 배경을 쌓는 대신, 경험과 실험을 통해 디자인 세계를 익혔다. 천 디자이너는 “처음에는 제대로 된 방향을 잡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결국 나만의 옷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회상했다. 천상두 디자이너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점은 바로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에 대한 고집이다. 그는 프레타포르테(pret-a-porter)와 같은 대중적인 상업 패션보다는 한땀 한땀 정교하게 완성된 오트 쿠튀르 디자인을 고집한다. 천 디자이너는 1981년 캐나다에 사는 한 선배의 권유로 ‘Mr.천’이란 옷가게를 오픈했다. 2년 뒤 ‘보니클라이드’로 상호를 변경한 의상실은 마네킹 대신 대나무를 사용해 옷을 전시하고 의상 디자인 또한 독특해 배우 엄앵란 씨의 관심을 받았다. 이후 1988년 대구 향촌동 출신의 디자이너이자 영화배우인 하용수 씨가 상호를 지어준 이노센스를 오픈했다. 현재 이노센스 건물 3층은 천 디자이너의 옷 공장으로 최대 하루에 한 벌만 의상을 제작한다. 대량 생산되는 기성복을 거부하고 오트 쿠튀르 방식, 즉 유일의 고급 의상만 제작하는 천 디자이너는 “오트 쿠튀르는 단순히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라며 “옷이 사람을 표현하고, 그 사람의 삶과 성격을 담을 수 있어야 진정성 있는 패션이 된다”고 강조했다. 천 디자이너의 또 다른 특징은 그의 디자인이 일상생활에서 얻은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는 “패션은 거창한 디자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가장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거리에서의 사람들, 자연에서의 색감,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들이 그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다. 천 디자이너는 한 의상을 꺼내 보이며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색감이나 형태들을 디자인으로 풀어내면, 더욱 진솔하고 감동적인 작품이 나온다”며 “어릴 적 고향 하늘에서 본 은하수를 떠올려 검정색 원단에 흰색 무늬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의 패션쇼 천상두 디자이너는 예술적인 ‘패션쇼’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다. 최근에는 45주년을 맞아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디너 패션쇼를 개최했고 오는 15일 대구시 산격동에 위치한 한국패션센터 대공연장에서 패션쇼 ‘더 마스터피스’를 선보일 예정이다. 그는 여전히 패션쇼 준비를 직접 구상하고, 음악과 쇼 연출, 모델들의 움직임까지 하나하나 신경을 쓴다. 패션쇼가 시작되면, 그는 무대에서 모델들의 표현력과 관객들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며 작품의 완성도를 점검한다. 천 디자이너는 “패션쇼는 제 작품이 관객과 소통하는 순간”이라며 “관객의 눈길이 모델을 끝까지 따라가면, 그 작품은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천 디자이너는 1997년 대구 프린스호텔에서의 봄 패션쇼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고, 그때부터 패션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130벌의 옷을 선보였던 그 패션쇼는 가수 계은숙 씨의 관심과 동시에 매스컴과 디자이너들의 주목을 받으며, 그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줬다. 그 이후로 패션쇼는 그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와 콘셉트를 통해 관객을 만난다. 지역에서 열리는 패션쇼만 직물과패션의만남전 10회, 대구컬렉션 11회, 대구패션페어 5회 등 참여했고, 오사카컬렉션, 경북패션이노베이션, 부산패션위크 등의 패션쇼에 참가했다. 천 디자이너는 해외까지 무대를 넓혀 일 년에 최소 두 번 중국에서 패션쇼를 연다. 대련, 베이징, 상하이, 연길, 칭다오, 온주, 정저우, 충칭 등 중국 전역이 그의 패션쇼 무대였다. 천 디자이너는 대구시립극단 악극 ‘울고 넘는 박달재’, 뮤지컬 ‘만화방 미숙이’, MBC드라마 ‘내딸 금사월’등 수 많은 드라마와 뮤지컬, 연극에 의상을 협찬했다. 또 대구섬유박물관에 작품을 45벌이나 기증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예술은 패션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장르에서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 디자이너는 패션쇼에서 무대장치와 음악, 모델의 표현 등을 연결성 있게 구성해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고 있다. 그는 “패션쇼에서 클래식 음악만 고집하지 않고 김추자의 ‘눈이 내리네’ 혹은 샹송이나 팝송도 사용한다”며 “계속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고 연구한다”고 말했다. ◇“클래식, 심플, 모던”…세월이 지나도 예쁜 옷 만들 것 천상두 디자이너는 45주년을 맞으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후반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단다. 트렌드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방황하던 그 시절, 그는 자기만의 색채를 찾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꼈다. 그는 여러 디자이너들의 패션쇼를 찾아다니며 ‘자신만의 옷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천 디자이너는 매년 패션쇼를 통해 경험을 쌓으며 비로소 자신만의 옷에 대한 철학을 완성할 수 있었다.‘디자이너 천상두의 이미지’로 불리는 클래식함을 주제로 한 그의 옷들은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입을 수 있는 작품을 목표로 한다. 심플함과 모던함은 그의 의상 철학의 핵심이다. 천 디자이너는 지금도 매일 아침 의상실로 출근해 해가 질 때까지 옷을 만들며 하루를 보낸다. 아이디어가 샘솟으며 에너지가 넘치는 그는 자다가도 옷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 공장으로 나와 직접 확인할 정도로 열정적이다. 그 결과가 생각대로 나오지 않으면 완제품도 버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천 디자이너는 하루 종일 의상 작업에만 몰두하느라 밖을 나가지 않아, 대구에서 유명하다는 수성못도 택시를 타야만 갈 수 있을 정도란다. 천 디자이너는 패션계에서 45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음에도 앞으로 20년을 더 옷을 만들고자 하는 열정을 품고 있다. 전 세계를 다니며 패션쇼를 더 열고, 더 완벽한 옷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낸다. 천 디자이너는 “2013년 아시아 광저우 패션 최우수 디자이너상을 받았을 때,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다”며 “이때부터 10년, 20년이 지나도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고 말했다. 천 디자이너는 오늘도 사람들을 만나며 즐겁게 일하고 있다. 그는 연령대, 유행, 시대를 초월해 누구나 예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구상한다. 그의 창조적 여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그 끝없는 탐구와 열정은 앞으로도 패션계에 많은 영감을 줄 것이다. /장은희기자 jangeh@kbmaeil.com

2024-11-11

“타 도시로 환자 가지 않고, 지역사회가 안전하고 행복했으면…”

“병원을 운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병원을 통해 지역사회가 안전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지난 10일 개원 16주년을 맞이한 에스포항병원의 김문철 대표 원장은 자신의 운영철학을 설명하며 미소 지었다. 김 원장은 “뇌졸중(Stroke)과 척추(Spine) 분야에서만큼은 환자들이 타 도시에 치료받으러 가는 불편을 겪지 않게 하겠다”면서 “환자들이 우리 병원이 있는 포항에 사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만들 것”이라며 포부를 밝혔다. 에스포항병원은 올해 초 ‘보건복지부 제5기 1차 연도 뇌혈관부문 전문병원’으로 지정됐다. 앞서 2011년 1기 신경외과 전문병원에 지정된 후 2∼5기 ‘5회 연속 뇌혈관 전문병원’이라는 금자탑을 쌓아 올리기도 했다. 에스포항병원은 개원 이래로 대학병원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전문화된 진료로 ‘지역민의 건강 파수꾼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오고 있다. 지금의 모든 영광은 김 원장의 피나는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 원장은 대구 경북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그는 대구가톨릭대병원 신경외과 교수가 됐지만,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 밤을 꼬박새서 만든 신규 논문 계획서가 교수회의에서 매번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는 다니던 대학병원을 과감히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기로 다짐했다. 퇴직 후에는 수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더 높은 연봉과 조건을 제시하는 곳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자리는 없었다. 고심 끝에 김 원장은‘지역 의료 질을 높일 수 있는 제대로 된 병원을 만들자’라는 일념 하나로 돌연 ‘포항행’을 택했다. 2008년 11월 마침내 김 원장은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됐다. 북구 죽도동에 에스포항병원을 개원했기 때문이다. 개원 후 환자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개원 9년 만에 병원 규모는 3배가량 늘었고, 남구 대이동으로 신축 이전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4명의 의사와 70여명의 직원으로 출발한 병원은, 현재 66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16년간 성장시킨 병원의 모습은 만족스럽나? - 아직 가야 할 길이 많다. 에스포항병원이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본다. 병원이 단순히 치료를 제공하는 곳을 넘어,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신뢰와 희망을 주는 사회적 책임을 가진 기관이다. 병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환자의 건강을 개선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좋은 병원의 시스템을 가지고 치료의 질을 높이고 우리 지역사회를 안전하게 만들 수 있도록 해야한다.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병원에 대해 어떠한 이미지를 갖길 바라나. - ‘진짜 괜찮은 병원’, ‘진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쓰는 병원’이다. ‘진짜 목적’의 의미는 지역사회가 안전하고 내 부모와 형제, 친구가 사는 이 도시를 안전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환자 진료 시 의료진이 가장 중점을 두는 점은. - 우리 병원의 모토는 ‘가치 있는 일을 좋은 사람들과 오랫동안 함께하자’이다. 어떤 이들은 ‘병원 모토에 정작 환자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며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환자를 잘 보기 위한 가치 체계가 바로 우리 병원의 모토이고, 이것이 곧 우리 병원의 인격이라고 생각한다. 환자를 잘 보기 위해서는 먼저 병원과 구성원들이 건강해야 한다. 건강은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비전과 삶의 태도에 대한 건강함을 뜻한다. 이 모든 게 합쳐진다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 이 목표는 개인의 영달이 아닌, 오로지 공적 가치를 공동으로 추구했을 때 가능하다. 그래야만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의료봉사 등 사회공헌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떠한 활동들이 있나. - 병원이 지역사회와 긴밀한 연결을 통해 지역사회의 건강을 증진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중요한 역할을 다해야 한다. 한 예로 매주 포항시 남·북구 치매안심센터로 신경과 의료진을 파견근무하고 있다. 이는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 병원이 가진 전문성을 가지고 치매안심센터에 직접 나가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 치매 환자의 초기 증상과 경과를 잘 파악해 조기에 치매를 발견하고, 향후 환자에게 필요한 치료나 예방 프로그램을 안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치매 친화적인 지역사회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며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 앞으로의 에스포항병원은? - 우리 병원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 미션, 목표는 단순히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좋은 시스템을 바탕으로 가치와 정보를 직원들끼리 서로 소통하고 통합이 되었을 때 혁신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에스포항병원이 단순히 환자 치료를 넘어서, 사회적 책임, 지속 가능한 가치공유, 혁신적인 의료 서비스 제공하는 병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2024-11-11

중학생 때 미술 선생님을 보며 화가를 동경

포항 미술계는 배원복, 김두호 선생이 첫 장을 열고 이방웅(동아미술학원), 강문길(현대미술학원), 박수철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박수철 선생은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해 호미곶 구만리, 포항역, 철길 같은 포항의 풍경을 깊고 따듯한 색채로 그려냈다. 또한 1979년 일요화가회를 창립하는 등 지역의 화단을 두텁게 하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 중앙동에 있는 그의 화실과 오래된 커피숍 그리고 죽도시장의 보리밥집을 오가며 선생의 삶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도형(김) : 이 화실에는 언제쯤 들어오셨는지요? 박수철(박) : 7년 전에 들어왔습니다. 식당을 하다가 비어 있던 곳인데, 고쳐서 화실로 만들었습니다. 김 : 근사한 화실이군요. 박 : 생계를 위해 집수리하는 일을 20여 년간 해왔습니다. 덕분에 이런 일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할 수 있게 되었지요. 김 : 선생님의 이력을 살펴보니 6·25 전쟁이 터진 1950년에 태어나셨더군요. 박 : 전쟁 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 고향인 울산 호계동 근처의 신답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때 나는 어머니 배 속에 있었어요. 박씨 집성촌인 그곳에서 9월 말(음력 8월 19일)에 태어났습니다. 4남 1녀 중 셋째였지요. 김 : 전쟁통에 태어난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댁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박 : 선린병원과 나루끝 사이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지은 기와집이었지요. 아버지는 페인트 판매업을 준비하다가 친척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힘든 처지가 되었어요. 그래서 페인트칠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렸지요. 집 마당에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장독대가 있었습니다. 여름이 되면 장독대 주변에 노란 달맞이꽃이 피었어요. 모란, 작약 등이 핀 작은 꽃밭도 있었지요. 집 주변 텃밭에는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포플러가 우리 집 울타리 역할을 했는데, 마루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면 포플러 사이로 송도 송림이 보였어요. 돌이켜보면 나는 사람 이전에 풍경을 먼저 봤습니다. 이런 환경이 미술의 세계로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김 :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으니 아름다운 풍경화 한 점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박 : 동네에 큰일이 있으면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모여 의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연장자이고 마당이 넓은 편이었기 때문이지요. 김 : 댁 주변에는 어떤 건물이 있었습니까? 박 : 지금 선린병원 자리에 선린애육원이 있었어요. 미 해병대에서 선린애육원에 지원을 많이 해줬는데, 여러 가지 물품 중에 종이 팩에 담긴 우유를 보고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요. 포항세무서 자리에 덕수교회가 있었고, 근처에 구세군교회가 있었습니다. 점심때 구세군교회에서 강냉이죽을 배급했어요. 나도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는 그 강냉이죽을 먹었습니다. 김 : 초등학교 입학한 후에도 배급이 있었나요? 박 :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옥수수빵을 무상으로 주더군요. 배가 고프기도 했고 빵을 난생처음 맛보았으니 얼마나 맛있었겠어요. 우리 집에서는 시래기와 쌀을 섞어 끓인 시래기갱죽을 자주 먹었습니다. 집 근처 술도가에서 달착지근한 술찌끼를 받아먹고 취했던 게 떠오르는군요. 김 : 당시 포항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박 :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 집 앞에 북부시장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어요. 시장 바닥이 질퍽질퍽했고 주변에 오리가 뒤뚱뒤뚱 다녔지요. 그리고 칠성천 옆 뻘밭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좌판을 놓고 장사했어요. 그곳에 엉성한 판잣집을 지은 사람들도 있었지요. 죽도시장은 그렇게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에 고아나 소아마비, 언청이가 많았어요. 걸인들이 하모니카를 불며 구걸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연민을 느꼈지요. 김 : 미술을 처음 접한 건 언제입니까? 박 : 포항중학교 다닐 때 미술 교사인 권영호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권 선생님은 한마디로 자유분방한 분이었어요. 미술실의 책걸상을 모두 빼내고는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지요. 그런 모습을 보고 화가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림에서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권영호(1936∼2012)는 경주에서 태어나 포항 구룡포 등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포항수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으나 곧바로 미술과로 전과해 2년 과정을 마쳤으며, 그 뒤 영남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1년부터 경북의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76년 경남대학교 사범대학으로 부임해 2001년까지 26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 「권영호」, 『네이버 지식백과』(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 : 중학교 시절은 어떻게 보냈습니까? 박 :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신문 배달을 했습니다. 대구매일신문을 돌렸는데, 한 달에 450원을 받았어요. 석 달 치를 모으면 한 분기 공납금을 내고 50원이 남았지요. 김 : 고등학교는 동지상고로 가셨지요? 박 : 동지상고에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야간부로 옮겼습니다. 학비를 벌어야 했거든요. 당시 야간부는 한 학년에 한 학급이 있었어요. 1학년 때는 대신동사무소에서 급사로 일하면서 한 달에 1000원을 받았고, 2학년 때는 포항경찰서 정보과에서 한 달에 2000원을 받았지요. 3학년 때는 서경도서관(훗날 포항문화원이 되었던 곳)에서 한 달에 3000원을 받고 일했습니다. 그때는 많은 학생이 그렇게 돈을 벌어가며 학교에 다녔어요. 김 : 고등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박 : 2학년 때 200일가량 결석했어요. 사춘기의 방황이었지요. 왠지 학교에 가기 싫었고,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에 빠졌습니다. 그 바람에 학교 게시판 유급 명단에 내 이름이 올랐지요. 다행히 담임교사였던 손춘익 선생이 손을 써서 유급 명단에서 빠졌습니다. 김 : 중고등학교 시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소가 있는지요? 박 : 중학교 다닐 때부터 새벽마다 수도산 자락의 철길을 따라 수도산에 올라갔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 철길을 따라 등하교를 했는데, 당시는 많은 학생이 그렇게 했습니다. 여덟 살 터울의 누나도 시집갈 때 철길을 걸어서 포항역으로 갔어요. 그러고는 기차를 타고 포항을 떠났지요. 철길에 많은 추억이 묻혀 있는데, 철길이 사라지면서 추억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김 :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 : 대입 시험에서 두 번 떨어지자 군 입대 영장이 날아왔습니다. 서울 거여동에 있는 30사단에서 근무했지요. 군에서 제대한 후 집 안의 헛간을 개조해 혼자만의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공간에서 네 살 터울의 형이 대학 다닐 때 보던 영문 소설책의 표지를 복사해 드로잉 연습을 했지요. 형도 동지상고 야간부를 나와서 서경도서관에서 공부했는데 고려대 상대에 합격했으니 예삿일이 아니었습니다. 서경도서관에 형의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붙을 정도였지요. 김 : 이제 선생님의 미술 인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박 : 20대 중반 무렵 포항에는 미술학원이 하나뿐이었어요. 바로 시민제과 2층에 있던 현대미술학원이었습니다. 강문길이라는 사람이 원장이었는데 형을 무척 따랐지요. 형 덕분에 나보다 한 살 많은 강 원장과 안면을 트게 되었습니다. 레슨비를 낼 형편이 안 되어 돈이 생기면 소주 한잔은 사겠다고 했더니 선선히 그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학원에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대미술학원은 예술을 하는 청년들의 아지트가 되었어요. 난로에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며 삶과 예술에 관한 열띤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그러면 누군가 옆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지요. 박수철은… 1950년 6·25 전쟁 때 포항에 살던 가족이 피난을 간 울산 신답에서 태어났으며, 9·28 서울 수복 후 포항으로 돌아왔다. 포항중학교와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했고,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 오지호를 사사했다. 1978년부터 1982년까지 갈뫼화실을 운영했으며, 1979년 포항일요화가회 창립을 주도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2005년 포항문화예술회관 기획 초대 개인전, 2017년 포항 우수작가 초대전(포항문화재단), 2023년 ‘The Cross 40’(개인전), 2024년 ‘Still Life’(개인전)를 열었고, 그 밖에 여러 기획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10

“트로트계에 전유진 있다면 클라이밍엔 박지유가 있지요”

15m, 인간이 극한의 공포를 느끼는 높이라고 한다. 암벽 여제(女帝) 김자인도 클라이밍 첫 도전 때 밑을 내려다보고는 그대로 얼어버렸다는 높이다. 이 높이를 오르내리는 운동이 스포츠클라이밍이다. 60여 개의 홀더를 이용해 직벽과 오버 행어를 올라야 하니 국대급 피지컬은 기본이다. 푸시-업 100개에 턱걸이 50개는 해줘야 ‘선수급’ 명함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이 극한의 운동에 뛰어든 어린 꼬마가 있다. 바로 포항 효자초등학교 3학년 박지유 양이다. 키 135cm, 체중 27kg으로 놀이터 구름다리나 타면 딱 맞을 나이인데 지유의 성적을 들여다보면 깜짝 놀란다. 지방, 전국대회 입상 메달이 10개가 넘고 우승컵도 몇 개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기록이 입문 1년 여 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란다. ‘트로트계에 전유진이 있다면 스포츠클라이밍에는 박지유가 있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오늘도 열심히 인공암벽을 오르고 있는 박지유 양을 만나보았다. ◆놀이터 구름다리에서 발견한 지유 재능 “엄마 손 떼도 돼. 나 혼자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지유와 암벽과의 만남은 동네 놀이터에서부터 시작됐다. “지유가 5살 때 놀이터 구름다리에 올려달라는 거예요. 위험했지만 애가 원하니까 난간을 잡게 해주었는데 바로 한달음에 끝까지 가는 거예요. 그때 우리 애의 손힘이 남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딸의 운동 재능을 발견한 가족은 그 길로 포항의 클라이밍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지유는 여러 종목 중 리드(Lead, 정해진 시간 안에 높이 오르기 경쟁)에서 강점을 보였다. 아이의 재능을 살릴 전문시설을 찾고 있는데 마침 클라이밍 선배가 구미의 ‘포시즌’(센터장 김기만)을 추천해줘 그곳에 등록을 했다. 좋은 코치진, 훌륭한 시설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지유의 기량은 날로 향상됐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 들이듯. 다행히 지유는 부모님의 기대와 믿음대로 따라 주었다. 입문 두 달 만에 출전한 영남이공대총장배 ‘전국 클라이밍 대회’에서 2등(초교 저학년부)을 차지하며 가족은 물론 코치진을 놀라게 했다. 출전 학생들은 대부분 2~3년씩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선수들이고, 이미 ‘전국구급’에 이름을 올린 애들이 대부분이어서 부모님의 보람은 더 컸다. 아직 초보 수준이었지만 ‘일등’이 못내 아쉬웠는데 금메달 갈증은 6개월 후에 풀렸다. 2024년 4월 ‘광주김홍빈컵 클라이밍대회’에서 지유가 1위 시상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제 지유 역시 초등학교(저학년부) 유망주에 이름을 올리며 전국구급 선수로 부상했다.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에 승부욕까지 “아빠도 체육중학교 육상선수 출신이고, 저(엄마)도 학교 대표로 각종 육상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나름 운동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단기간에 성장을 거듭한 지유 운동 능력은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 덕인 듯하다. 타고난 근력과 운동신경 외 성적을 받쳐주는 또 하나의 축(軸)이 있으니 바로 지유의 정신력이다. “지유가 처음 클라이밍장에 등록을 하고 며칠 훈련을 받았는데, 코치가 조용히 부르는 거예요. 지유가 암벽에 최적화된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 못지않게 정신력과 도전 자세가 너무 좋다는 거예요. 저 정도 멘탈이면 중간에 슬럼프가 와도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다는 거예요” 보통은 초창기에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거나 피가 나면 훈련을 멈추거나 권태기가 한두 번 오는데 지유는 지혈이 끝나는 대로 암벽장으로 달려간다는 것. 엄마 눈에는 10살 어린 나이에 하루 5시간 고된 훈련에도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지유가 대견하고 애처롭기만 하다. 피로 물든 홀더를 바라보는 부모님 가슴은 안타깝지만 고통을 견딘 후에 돌아올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며 위안을 삼고 있다. 구미 포시즌에 등록하면서 지유는 어쩌면 본격 선수의 길로 들어선 셈인데, 이곳의 훈련 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선 근력을 위해 턱걸이 100개(세트), 푸시-업 300개(세트) 크런치 100개(세트), 스쿼트 200개(세트)는 기본이고 하체 근육을 위해 개인 PT를 별도로 받고 있다. 클라이밍장에는 난이도 별로 A부터 F코스까지 있는데 이 코스를 하루 10번씩 반복하고 있다. ◆포항 유소년 클라이밍의 기대주로 성장할 “현재 지유의 라이벌은 전주의 오채서, 시흥의 김재령이에요. 동갑내기인 이 3명은 전국 대회에서 1~3위를 주고받으며 경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작년 겨울 구미에서 동계훈련 후 지유는 성장을 거듭해 현재 위의 두 학생과 초등학교 저학년부 전국 ‘빅3’를 형성하고 있다. 앞선 두 학생이 2~3년 체계적인 레슨을 거친 데 비해 지유는 입문 1년밖에 안됐기 때문에 성장 가능성은 더 크다고 보지만, 다들 어린 선수들이어서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지유는 현재 기록에서 앞서고 있는 채서보다 기량이 날로 향상되고 있는 재령이가 더 두렵다고 말한다. 이에 코치진은 경쟁 선수들을 공략할 나름의 작전과 훈련을 구상하고 있다. 현재 지유가 롤모델로 삼고 있는 선수는 국가대표 서채현 선수다. 서 선수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암벽 여제’로 불리던 김자인 선수를 단숨에 제끼며 국내 정상에 올랐다. 장기적으로 서채현 선수처럼 국가대표가 되는 게 꿈이지만 우선은 각종 대회, 체전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한다. “2025년 전국소년체전에서 클라이밍의 정식 종목 채택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우리 지유한테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입니다.” 클라이밍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 지역 대표에 선발돼 전국체전에도 참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체전에서 공인(公認) 입상은 국가대표로 가는 중요 관문이기 때문에 지유 입장에서는 가장 절실한 부분이다. 센터에서는 우선 전국대회에 참여해서 기량을 더 쌓고 몸을 만든 후 소년체전 참가 기회가 오면 포항시 명예를 걸고 훈련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전유진이 압도적인 노래 실력으로 ‘포항의 딸’이 되었듯이, 우리 지유도 더 열심히 성장해서 포항 클라이밍의 기대주로 거듭나겠습니다.” ◆2023∼24년 박지유양 입상 성적 ◇2023년10월 영남이공대총장배 2위11월 제주도지사배 스포츠클라이밍 3위 ◇2024년4월 김홍빈컵 광주시 스포츠클라이밍 1위5월 서울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2위5월 전주 스포츠클라이밍 동호인대회 2위5월 문경 전국 청소년스포츠클라이밍 2위6월 영남이공대배 스포츠클라이밍 2위6월 대구시장배 스포츠클라이밍 2위8월 부산 스포츠클라이밍 2위9월 포항 스포츠클라이밍 1위10월 엄홍길배 스포츠클라이밍 2위 (초교 저학년부)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11-07

“해월 최시형은 우리 곁을 다녀간 형님 같은 성자”

경주에서 태어난 해월 최시형은 부모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10대 중반에 포항으로 옮겨 신광면에서 살았다. 34세인 1861년 6월 동학을 믿기 시작해 수운(水雲) 최제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1863년부터 영덕, 영해 등 경상도 곳곳을 다니며 포교 활동을 했다. 1863년 8월 도통(道統)을 승계받으며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었다. 김용옥은 “오늘 우리의 가능성의 모든 씨앗이 동학에서 뿌려졌다”고 했고, 김상봉은 동학을 “현대 한국 철학의 시원”이라고 했다. 이형수 선생은 환갑을 넘어 동학에 매료되어 동학에 관한 그림을 그려왔다. 포항에 깃든 동학 정신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도형(이하 김) : 언제부터 동학을 알게 되었습니까? 이형수(이하 이) : 서울에서 그림을 배울 때 동학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해월이 포항에서 살았다는 걸 몰랐어요. 환갑이 지나 동학 공부를 하면서 해월과 포항의 깊은 인연에 대해 알게 되었지요. 김 : 해월의 살림터에도 가보셨겠군요. 이 : 신광면 기일리와 마북리 검곡에 자주 갔어요. 기일리는 오지이긴 하지만 산세와 터의 기운이 참 좋습니다. 기일리는 해월이 일하던 제지소가 있던 곳이고, 검곡은 해월이 농사를 지으면서 동학 수련을 하던 곳이지요. 김 : 동학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습니까? 이 : 당시에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선포한 것은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동학은 알면 알수록 가치와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해월은 36년 동안 보따리 하나를 들고 도피 생활을 했어요. 그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피폐해진 민초들의 삶을 보듬어 안으며 인내천 사상을 전했지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해월은 우리 곁을 다녀간 형님 같은 성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 : 동학에 관한 그림은 어떤 방식으로 그렸습니까? 이 : 동학의 깊은 뜻을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인물화를 그릴 때 해월과 장일순, 김지하도 그렸어요. 해월의 정신이 장일순과 김지하로 이어지니까요. 2022년에는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 있는 문화예술촌 벽면에 삼례의 역사 기록 도판화를 만들어 부착했습니다. 삼례읍은 동학운동에서 의미가 깊은 곳이지요.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51A4) 운동을 했고,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가 있었던 곳입니다. 동학의 역사를 기록한 도판화 1천여 장을 그려서 그중 420장을 도판으로 만들어 삼례문화예술촌 벽면에 부착했어요. 참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김 : 천도교에서 제작한 2024년 달력에 선생님의 작품이 있더군요. 이 : 해월의 큰딸 최윤(1878~1956)과 외손자인 정순철(1901~?)을 그린 인물화입니다. 정순철은 전 국민의 애창곡인 짝짜꿍, 졸업식 노래를 작곡했고 윤극영, 박태준, 홍난파와 함께 한국 동요 4대 작곡가로 꼽힙니다. 방정환과 색동회를 조직해 어린이 운동에도 앞장섰어요. 6·25 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 확인이 안 되면서 잊힌 인물이 되고 말았지요. 정순철은 충북 옥천 출신으로 정지용 시인의 문우(文友)다. 도종환 시인이 2022년에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어린이를 노래하다-한국 동요의 선구자 정순철 평전』(미디어창비)을 내면서 한국근현대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한 그의 삶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평전에 따르면, 정순철이 방정환과 함께 전개한 어린이 운동은 “어린 자식 치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것이 곧 한울님을 치는 것이오니”라고 한 해월의 「내수도문(內修道文)」에 뿌리를 둔다. 김 : 정순철의 어머니도 명성이 높은 분이지요? 이 : 그렇지요. 정순철의 어머니 최윤은 경주 용담정을 지키며 동학사상을 널리 전파해 ‘용담 할매’라고 불립니다. 그분이 고생한 건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김 : 수운 최제우는 경주 최부자 가문의 정신적 지주인 정무공(貞武公) 최진립의 7대 후손입니다. 동학은 경주 최부자 가문과 인연이 깊을 것 같습니다. 이 : 해월의 첫째 아들 최동희가 최부자 가문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손병희가 주선했지요. 최동희가 최부자 가문에 보낸 감사의 편지를 최부자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어요. 김 : 죽도시장과 동학 외에 관심 있는 분야가 있습니까? 이 : 동해안별신굿도 귀중한 문화유산이지요. 한번은 영해에서 별신굿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1박 2일 동안 구경했는데 정말 볼만하더군요. 다른 곳에서도 별신굿 한다는 소식이 있으면 달려갑니다. 김석출 만신에게 자문을 구한 백남준도 “나의 예술의 뿌리는 굿”이라고 했어요. 김 : 선생님을 뵐 때마다 배낭을 메고 걷기에 좋은 복장으로 오시더군요. 평소에 많이 걸으시나 봅니다. 이 : 걷는 게 삶 자체라 할 수 있지요. 60대 초반에는 호미곶 둘레길을 거의 다 걸었습니다. 구룡포 삼정리에서 호미곶면 신창리까지는 여섯 시간 정도, 구룡포에서 호미곶 보리밭까지는 네 시간가량 걸립니다. 60대 후반에는 집(장량동 대림골든빌아파트)에서 출발해 달전 사거리를 지나 도음산을 거쳐 신광면사무소에 있는 신라 냉수비까지 걸었어요. 이 코스도 대략 여섯 시간이 걸리지요. 영덕에도 이따금 가는데 강구 버스 정류장에서 화림정맥을 타고 영덕군민운동장까지 가면 여섯 시간쯤 걸립니다. 강구 등대에서 오십천변을 따라 무릉도원교까지 가면 네 시간가량 걸리고요. 김 : 그렇게 오랜 시간을 걷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 두 가지 이유가 있지요. 첫째는 작품 구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혼자 걸어요. 둘째는 작품을 계속 그리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김 : 걷기 외에 꾸준히 하는 일이 있습니까? 이 :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점의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독서는 게을리할 수 없어요. 김 : 많은 작품을 그렸을 텐데, 작품을 정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일 것 같습니다. 이 : 시간 나는 대로 작품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작품만 남기고 나머지는 소각할 생각이에요. 김 : 한 점 한 점 공들여 그린 작품을 소각하려면 마음이 아플 것 같습니다. 이 : 어차피 모든 작품을 안고 갈 수는 없습니다.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되겠지요. 김 : 최근에 하신 작업이 있습니까? 이 : 영덕 출신 동갑내기인 김종완 선생이 동시집을 내는데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더군요. 동시에 어울리는 그림 50여 점을 그렸는데, 동시의 원천에는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이 고여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어요. 최근 『열두 살의 봄』(청개구리)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왔습니다. 김 : 이제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이 : 한 자루 붓이 한 생명이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숲을 찾으려 합니다. 지방에 묻혀 있는 귀한 인문학적 자료를 찾아내 그림으로 그리는 작업도 계속해 나갈 생각입니다. 끝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06

신라의 전설 깃든 840년 은행나무… 그 시간과 마주한 장대함

하늘로 치솟은 웅장한 은행나무의 모습에 놀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이었다. 먹구름이 몰려와 푸른 하늘을 가렸다. 은행 나뭇잎에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은행잎에 모여 큰 빗방울로 변해 머리 위에 떨어졌다. 천둥번개가 치면서 번갯불이 하늘을 가르고 벼락 치는 우레는 가슴을 조이게 했다. 숨돌릴 틈도 없이 빗방울은 채찍으로 변해 대지를 사정없이 때렸다. 거대하고 무성한 잎의 은행나무 아래에도 소낙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빗물은 도랑을 형성하고 산자락 경사진 개울로 쏟아져 내렸다. 신라 천 년 고찰 적천사로 뛰어들었다. 맞닥뜨린 것이 험상궂은 얼굴의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는 사대천왕이었다. 두려움에 간은 쪼그라들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내 유년 시절에 청도 원리 적천사에 갔을 때 은행나무와 사대천왕을 처음 보았을 때 경험한 일이다. 화악산 적천사는 나의 고향 청도군 청도읍 소재지에서 밀양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내려가면 오른쪽에 원리 마을이 있다. 마을 고샅길을 따라 산 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산자락에 자리 잡은 고찰이다. 고찰과 함께 원리 981번지에 나이 840살, 키 29m, 가슴둘레 9m, 앉은자리 폭이 30.8m 되는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두 그루의 서 있다. 신라 보조국사 지눌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심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은행나무는 웅장함에 경외감을 가지게 한다. 고향 가는 길에 청도 원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이곳 원리 마을 출신 대구광역시 교육청 부교육감과 대구예술대학 총장을 역임한 도정기 선배님은 늘 고향 적천사 은행나무 자랑을 나에게 늘어놓곤 했던 기억이 오늘따라 새롭게 떠오른다. 고찰로 가는 산 비탈진 오솔길은 유년 시절에는 걸어서 갔지만, 지금은 자동차로 숨 한 번 헐떡거림 없이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노거수의 웅장한 몸집에 주렁주렁 달린 은행이 떨어져 나무 밑을 꽉 채워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잘못하여 은행을 밟기라도 한다면 신발에 그 고약한 냄새는 귀가할 때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히기 때문에 조심해서 발걸음을 옮기면서 접근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바라보면서 가을의 정취를 만끽했다. 은행나무는 노란 옷으로 갈아입은 어머니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채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나무는 인간에게 위안을 주고,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가진 하나의 존재임을 알았다. 자연과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감정을 나무 아래에서 느꼈다. 나무는 그 자체로 시간의 기록이었고, 수많은 세월 동안 이곳에서 불교 신앙을 지키며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의 쉼터를 제공했을 것이다. 나무 아래 서 있으면 마치 그 시간 속에 내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가지에는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장대한 모습, 그 아름다움은 마치 세상의 모든 고요와 평안을 담고 있는 듯했다.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나무, 그 나무를 지켜온 사찰, 아니 사찰을 지켜온 은행나무, 그리고 사대천왕의 존재는 나에게 자연과 불교, 그리고 인간의 삶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가르쳐주었다. 사대천왕은 그들의 세상을 지키고, 악을 물리치며,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로서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리고 은행나무는 그 모든 것을 묵묵히 바라보며 천년의 세월을 지켜왔다. 나는 이곳에서 자연과 신앙, 그리고 인간의 삶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경험을 했다. 은행나무는 그 자체로 생불(生佛)이라 할 수 있다. 부처가 인간 내면의 불안감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주듯, 은행나무는 그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자연의 지혜를 상징한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마치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주고, 그 고요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잠재운다. 인간은 종종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흔들리지만, 고요히 떨어지는 은행잎을 바라볼 때면 그 모든 걱정이 잠시나마 잊히고, 평온과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렇듯 은행나무는 자연의 순리 속에서, 그리고 부처의 자비 속에서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선사하는 생명의 상징이다. 천년 사찰의 은행나무는 이렇게 나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불과 같은 존재로 와 닿았다. 가을 햇살이 사찰을 비추고, 은행나무의 잎이 바람에 날리면서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마치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시간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서 있으면, 마치 내가 그 시간 속에 포함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청명한 가을하늘이 저만큼 높이 솟아 있고 푸른 솔가지 위에 가을 햇살이 반짝인다. 사대천왕의 무서운 트라우마를 떨치고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 산사를 빠져나왔다. 빠져나온 내 빈자리에 누군가 또 다른 방문객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오르고 있다. 은행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고요히 방문객을 맞이하고 떠나보내고 있다. 천년의 시간은 은행나무와 사찰을 지나, 나의 마음속에도 스며들었음을 적천사를 빠져나오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적천사 사대천왕은… ①동쪽의 국토를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눈알이 튀어나올 듯 부릅뜬 눈을 하고 있다. 치켜세운 눈썹과 드러난 이빨로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왼발로 마귀의 등을 밟고 있다. 발밑에 깔린 마귀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다. 단청의 화려한 색상으로 앉아 있는 키만 하더라도 4m는 족히 되었다.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권선징악으로 인간을 고루 보살핀다고 한다. ②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검은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이를 악물고 부릅뜬 눈으로 아래를 보고 있다. 양손으로 비파를 들고 있으며 세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진 마귀를 왼발로 배를 밟고 있다.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한다. ③서쪽을 방어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검은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입을 꾹 다물고 부릅뜬 눈은 앞을 직시하고 있다.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른손은 용을 왼손에는 여의주를 쥐고는 왼발로 악귀의 배를 밟고 있다. 죄인에게 벌을 내려 매우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광목천왕의 결의에 찬 모습이 믿음직스럽게 느꼈다. ④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부릅뜬 눈으로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붉은 입술의 입을 벌리고 있다. 오른손은 삼차극(三叉戟)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손바닥 위에 보탑을 받들어 쥐고 왼발로 악귀의 배를 밟고 있다.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며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고 하는 다문천왕은 다른 천왕과는 다르게 배와 발아래 이상하게 생긴 마귀가 있다. 사대천왕의 오른발 아래 악귀가 하나씩 꿇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상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미산(須彌山)에 살면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며 제석천(帝釋天)의 명을 받아 불법을 수호하며 팔부중을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1-06

황산벌 5000 결사대는 떼죽음을 맞았고…

우뚝 선 부처와 보살이 장엄함을 보여주는 마애여래삼존불과 줄줄이 늘어선 왕릉, 여기에 국가의 시작을 알린 성모(聖母)의 전설이 떠도는 선도산. 신라는 56명의 왕이 통치하며 992년간 지속된 강력한 고대 왕조였다. 하지만 백일 붉은 꽃이 없고, 달도 차면 기우는 게 어쩔 수 없는 순리. 말기에 들어서며 신덕왕·경명왕·경애왕 등이 다스렸으나, 지역에선 반란 세력들이 들끓었다. 중앙집권 정치의 힘을 잃고 있었던 신라. 이윽고 918년엔 궁예를 무너뜨린 왕건(王建)이 후백제와 비교해 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신라의 마지막 집권자 경순왕은 935년 11월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이름을 지우게 된다. 조금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백제에 비해 신라의 멸망은 피비린내가 덜했다. 왕이 스스로 무릎을 꿇고 새로운 실력자에게 머리를 조아림으로써 전쟁으로 인한 대량 학살은 막을 수 있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반면 백제의 멸망 과정은 참혹했다.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맞서겠다고 황산벌로 나섰던 5천명의 결사대가 떼죽음을 맞았고, 이후 백제 수도로 쳐들어온 나당 연합군에 백성들은 혼비백산했다. ◆지는 해처럼 사라진 고대 왕국 백제는... 백제의 멸망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이후 백제부흥운동의 전개 과정은 어떠했는지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위키백과’ 등에 자세하게 서술돼 있다. 이를 요약해 옮기면 아래와 같다.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당나라는 고구려 공격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던 종래의 전략과는 달리 먼저 백제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660년 6월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의 군대와 김유신이 지휘하는 5만의 신라군은 백제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백제 군신들이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신라군은 요충지인 탄현을 무사히 통과했고, 당나라 군대는 기벌포에 상륙했다. 의자왕은 계백을 출전시켰다. 하지만, 결사대 5000명은 황산벌전투에서 전멸했다. 이후 나당 연합군은 사비성을 무너뜨리고…(후략)” 백제의 마지막 통치자인 의자왕은 무력했다.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사비성 지척에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웅진성(熊津城)으로 도망을 간 것이다. 왕자 중 한 명인 태(泰)가 끝까지 사비성을 사수하고자 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남은 군대에선 이탈자가 속출했고, 백성들의 마음은 이미 왕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니. 한때 한반도의 절반 이상을 지배했던 백제는 그렇게 지는 해의 형상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칠갑산은 충청남도 청양군에 자리했다. 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칠갑산 일대는 백제의 사라짐을 통곡하며 그 옛날의 영화를 다시 찾고자 했던 세칭 ‘백제부흥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나당 연합군의 횡포로 촉발된 백제부흥운동 그렇다면 백제부흥운동을 촉발시킨 매개체는 무엇이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들려주는 해답은 이렇다. “사비성을 점령한 나당 연합군은 횡포와 약탈을 자행했다. 점령군의 이러한 횡포는 백제 유민들을 크게 자극하여 곧바로 각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끊어진 왕조를 다시 일으켜야겠다는 ‘흥사계절(興祀繼絶)’의 정신을 표방했다. 백제부흥군의 주요 인물로는 정무·지수신·흑치상지·복신·도침 등을 들 수 있다. 무왕의 조카인 복신은 승려 도침과 더불어 임존성(任存城)을 공격해 온 소정방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는 부흥군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그에 따라 각 지역의 200여 성들이 부흥군에 호응함으로써 부흥군의 형세는 커졌다.” 올해는 여름이 유난히 무더웠고 또한 길었다. 그래서일까? 10월 중하순에 찾아간 청양 칠갑산엔 드문드문 물들어 있는 나무 몇 그루가 보였을 뿐, 제대로 된 단풍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칠갑산의 초입과 등산로를 제법 오랜 시간 거닐었다. 한때는 신라와 고구려 못지않은 힘과 세력을 과시하며 일본으로까지 이른바 ‘문화 수출’을 했던 예술지향의 백제 왕조. 하지만, 사라짐의 순간은 찰나처럼 덧없고 짧았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깨진 사발의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몰락한 국가를 재건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백제부흥운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흥운동 초기 백제의 복신은 두량윤성 전투에서 신라군을 압도하기도 했고, 661년 가을엔 의자왕의 아들 풍(豊)이 일본에서 돌아와 왕에 오르며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갖추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제부흥군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이 생겼고, 주요 수뇌부가 암살되기도 한다. 그 다음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내부로부터의 불화와 같은 편끼리의 암투, 나당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 풍왕의 고구려 도피, 신라군에 의한 주류성과 임존성의 함락…. 백제부흥운동의 짧았던 3년 역사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아직까지 백제의 서러운 멸망사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내려오는 길에 본 칠갑산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유독 핏빛으로 붉었다. (계속) 토기가 제작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의 전시물. 절제되고 간결한 백제토기 고구려·신라 등과 비교하면 기종 다양장식성 강하지 않고 실용적인 면 선호 ‘백제부흥운동의 본산’으로 불리는 청양군. 그곳에 건립된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서 가장 주목되는 건 토기다. 흙으로 만들어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사용됐던 그릇과 병은 1천 년 전 먼 옛 시대 백제인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유용한 역사 자료이기도 하다.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엔 백제의 토기가 출토된 지역을 아기자기하게 복원해놓은 전시 공간이 있고, 흥미로운 형상을 지닌 여러 가지 토기를 모아 선보이고 있다. 박물관을 찾는 학생들이 토기 제작 과정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전시물도 확인 가능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백제 토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백제 토기는 고구려, 신라, 가야 등과 비교하면 매우 다양한 기종이 확인된다. 장식성이 강하지 않고 단순하며 색조, 유려한 선 등을 통해 볼 때 백제인들이 보다 절제되고 간결함을 추구했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한성기부터 사비기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용 토기가 고분 부장용 토기보다 풍부하게 발견됨으로써 실용적인 면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자가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을 찾아 살펴본 백제의 토기는 위의 설명처럼 담백하고 꾸밈이 많지 않은 소박함으로 다가왔다. 어린 시절 시골 외가에서 봤던 그릇이나 항아리처럼 투박했지만 단아한 매력이 있었다는 이야기. 거기에 더해 연꽃무늬 수막새, 오수전무늬 벽돌, 귀면전, 암막새, 토제직구호처럼 신라와는 구별되는 백제만의 향기가 담긴 여러 생활용품을 볼 수 있었다는 것도 인상적인 체험으로 다가왔다. 패망한 왕국 백제를 다시 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지금의 청양 지역엔 청남면 왕진리 가마터, 장평면 관현리 가마터, 정산면 학암리 가마터, 목면 본의리 가마터 등에서 다양한 기와, 와당(瓦當), 토기 등이 대량으로 출토됐다. 이것들은 현재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 다수 전시돼 있다. ‘고고학사전’에 따르면 ‘백제 토기는 백제라는 특정 정치체의 시공적(時空的) 영역 안에서 제작·사용되었던 것으로 여타 토기와 식별할 수 있는 일정한 양식적인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토기군’을 지칭한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우리 땅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와 특정 토기의 양식이 가진 관련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일정 양식 토기의 성립이 반드시 국가의 형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나, 정치적 긴장 상황이 매우 증대되는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고구려나 신라 모두 그 시공적 영역 내에서 식별할 수 있는 토기양식이 등장하고 있어 이 무렵 국가와 특정 토기 양식의 성립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백제 토기의 형성은 곧 백제라는 국가 형성의 한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만약 청양군을 찾게 된다면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생활물품 가운데 하나였던 토기를 통해 백제의 실체와 그림자를 살펴보는 의미 있는 경험을 해보길 권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4-11-05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운전자는 계기판을 보고 속도를 조절한다. 여기서 계기판에 표시된 속도가 ‘계측’이라면, 속도를 내거나 줄이는 게 ‘제어’이다. 우리의 일상은 알고 보면 ‘계측과 제어’로 구성돼 있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살 때도 저울의 눈금을 보고, 주유소에서 주유할 때도 기름의 양을 숫자로 본다. 산업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일상보다 현장의 계측은 더욱 빈번하고 극도로 정밀하게 이뤄진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계측제어 전문가인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계장정비섹션 이경재(60) 포스코 명장을 만나 섬세함을 배워 본다. - 현재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맡고 있는 업무는. △포항제철소에는 계측기가 무려 4만5000여 대가 있다. 이 모든 계측기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해서 유량, 압력, 온도, 레벨, 무게 등을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측기는 사람이 정량화하지 못하는 많은 종류의 설비 상태를 숫자로 보여준다. 나는 이 계측기가 오차 없이 정확하게 측정하는지 진단하고, 교정하는 일을 한다. 계측기를 제어하는 DCS(분산제어시스템)에 대한 문제 해결 및 개선 방안 도출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또한 기술 검토 및 사양 설계, 후배 양성교육 등 기술 전수 활동에도 매진하고 있다. - 업무를 하면서 잊지 못하는 에피소드는. △제철 공정 중 연주설비는 용강을 천천히 흘려보내면서 냉각수를 분사해 고체 슬라브를 만들게 된다. 냉각수의 분사량에 따라 슬라브의 품질이 결정된다. 냉각수가 많으면 급격히 냉각돼 크랙이 발생하고, 적으면 블랙아웃이 발생하거나 강도가 약해진다. 2016년, 우리는 쇄빙선 선두의 철판이나 컨테이너선 갑판에 사용되는 후판 400㎜ 특수강 주편 생산을 해야 했다. 특수강 생산을 시도했지만, 냉각수의 미세 유량 제어 문제로 인해 품질 불량이 자주 발생했다. 이에 따라 수요자는 구매를 꺼리기 시작했고, 제조 원가 손실도 증가했다. 운전, 정비, 기술부서가 모여 대책을 검토한 결과, 84대의 제어밸브를 교체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기존 제어밸브는 15~80% 범위에서 사용됐지만, 특수강 조업에서는 5~10% 범위에서 제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주설비 구성상 모두 교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나는 제어밸브의 특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연주공정의 냉각 조업 패턴은 몰랐다. 그래서 기초부터 조업 기술을 파악하고 실적을 분석했다. 제어밸브 동작 특성을 5~60%로 바꾸고, 특수강 제어용 PID 제어 프로그램을 따로 만들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일반강 품질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50일간 밸브 특성을 개조하고 프로그램을 개선해 미세 유량 제어 문제를 해결했다. 그 결과, 크랙 발생 품질 불량을 0.8%로 낮추는 획기적인 개선을 이뤄냈다. 모두가 변화를 두려워할 때, 그간 쌓아온 밸브 특성과 제어 이론의 전문지식, 새롭게 습득한 조업 이론을 접목시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어떤 문제든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며, 모르는 것을 알아내려는 평소의 지론이 성과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 현장 관리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왜?”라는 질문을 통해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 것이다. 스위스 치즈 모델이라는 안전 이론이 있다. 이는 모든 현상이 하나의 원인에서 기인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깊이 숨어있는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케이블이 자주 끊어지는 고장이 발생할 때, 단순히 해당 부위의 환경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수리 방법을 찾기보다는, 그 환경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재질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이론부터 먼저 파고들어야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아기가 울 때 엄마는 배가 고픈지, 기저귀가 젖었는지 아이의 입장에서 알아차리고 돌보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소통이다. 직장은 학교나 군대와 달리 단기간에 관계가 끝나는 곳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관계를 이어가는 집단이다. 따라서 후배라면 선배의 입장에서, 선배라면 후배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먼저 다가가는 소통 방식이 중요하다. 이는 직장 생활의 보람을 배가시키는 요령이라고 확신한다. - 배드민턴 불모지 포항에 생활체육 클럽 31개를 만들었다고. △내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특기를 가지라고 권장하는 편이다. 나 역시 배드민턴을 취미이자 특기로 즐기고 있다. 처음에는 당구, 탁구, 테니스를 하다가 일본 유학 시절 학교 동아리 활동을 통해 배드민턴을 처음 알게 됐다. 그때 배드민턴이 대중적인 스포츠라는 것을 느끼고, 다른 운동을 모두 그만두고 배드민턴에만 몰두하게 됐다. 한국에 돌아온 뒤, 포항에서 배드민턴을 하려고 보니 중앙고등학교와 포항공대 체육관에서 소규모 인원으로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1997년 6월, 12명을 모아 포항시 첫 생활체육 클럽인 ‘포스피드’를 만들었고, 주변 학교를 설득해 생활체육 배드민턴 연합회까지 탄생시켰다. 지금은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을 합쳐 31개 클럽, 300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포항시 배드민턴협회 수석 부회장을 맡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정과 회사생활, 배드민턴 활성화까지 노력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첫째가 5살, 둘째가 100일 지난 시점부터 시작했으나, 아내와 수많은 갈등도 있었다. 심지어 애꿎은 라켓을 부러뜨리며 다시는 배드민턴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의 이해심 덕분에 지금의 큰 협회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아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배드민턴을 통해 남 앞에 서는 것을 꺼렸던 성격이 바뀌었고, 회사생활의 스트레스도 풀 수 있었다. 그래서 후배 숙련기술인에게도 자신의 특기를 가지라고 적극 추천하고 싶다. - ‘소프트웨어 개선’으로 전국 최초 자주관리대회 동상 수상 이야기를 들려달라. △1989년, 입사한 지 5년 정도 됐을 때였다. 당시 제강 탈가스 공정의 설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 공정은 쇳물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여러 종류의 합금철을 투입해 용강의 성분을 맞추는 작업이다. 매일 현장 설비 점검을 마치면 운전실에서 조업하시는 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조업 방법이나 불편사항, 설비 성능 개선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다 보니 운전과 조업에 대해 깊이 알게 됐다. 가끔 직접 조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어느 날 용강 성분을 조정하기 위해 3~8종류의 합금철을 한 종류씩 투입하는 것을 보고, 문득 ‘한꺼번에 투입하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한꺼번에 투입해도 성분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프로그램 개선을 시작했다. 운전부서의 협조를 받아 수차례 테스트를 거친 결과, 투입 횟수를 1~2회로 줄여 탈가스 공정의 경처리 조업시간을 20분대에서 10분대로 단축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단순히 제어 시스템의 프로그램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업 방법에 대한 이해도와 완벽한 제어의 균형을 통해 실질적인 기술 개선이 이뤄질 수 있다. 당시 경북도, 전국 대회를 거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 개선이었기 때문에 “진짜 개선된 것이 맞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에 “기계장치나 전기설비 등 눈에 보이는 개선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프로그램을 활용한 개선이 더 큰 성과를 가져오고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국내 최초로 설비 소프트웨어 개선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 인생철학과 비전이 있다면. △나만의 지침을 만들어 늘 체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포스코에 입사한 후, 나는 1제강 공장에서 계장정비 업무를 맡았다. 이때부터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라”, “작은 것도 소홀히 하지 마라”, “내가 하는 업무에 최고가 되어라”, “대인관계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후회하는 행동은 두 번 이상 하지 않겠다”라는 셀프 지침을 세우고 실천해 왔다. 명장이 된 후, 6년이 지난 지금도 “모르는 것을 묻지 않는 것이 창피한 것이다”라는 단순한 지침을 추가해 그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고 있다. - 앞으로의 포부는. △포항제철소는 스마트팩토리 구축, 4차 산업혁명 등 기술의 변화에 맞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계측제어는 안전, 품질, 생산, 에너지 등 모든 분야의 기초이다. 어떤 종류의 AI, 빅데이터라도 계측제어를 통해 기초 데이터의 신뢰성이 높고 정확해야 성공할 수 있다. 고급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집이라면, 건물의 기초가 바로 계측제어의 역할이다. 탄탄히 다진 기초 위에 새로운 집을 지을 수 있다. 오차가 크고 수시로 흔들리는 데이터로 집을 짓는다면 그 집은 쉽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특히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소홀해지기 쉽지만,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하고 있는 계측제어 분야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동시에 계측제어에 대한 인식의 저변을 넓히는 일에도 힘쓰고 싶다. 또한 이제 시작되는 수소환원제철 공법의 수소안전관리를 위한 기초를 다지는 데에도 앞장설 계획이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숙제이자 사명이다.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이경재 포스코 명장은 △포항제철공고 졸업(1984년) △전국자주관리대회 동상(1989년) △전사 제안왕(1990년) △일본 산업기술단기대 졸업(1997년) △포스코 명장(2018년) △위덕대학교 신재생에너지공학과 기업전문교수(2020년)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11-05

“유방암 수술 위해 포항을 찾아오도록 하는 것이 내 꿈이었다. 이제 그것이 실현돼 너무 기쁘다"

사실 암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이 서울의 ‘빅5 병원’을 떠올리는데, 포항세명기독병원은 이런 편견을 깬 흔치 않은 병원으로 손꼽힌다. 전국 각지의 환자들이 치료 잘하는 의사를 찾아 수도권 병원에서 지역 병원으로 U턴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는데, 실제로 많은 환자가 포항세명기독병원행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병원 백남선 원장은 유방암 분야의 세계적 명의로 정평이 나있다. 백 원장은 지난 2021년 인생 2막을 고향도, 오래 살아온 도시 서울도 아닌 ‘포항’에서 열기로 했다. 그가 포항에 내려온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다. 유방암 분야 최고 권위자 백남선 원장을 지난 1일 만나 ‘유방암 예방과 극복’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우리나라 여성암 1위인 유방암이 급증한 원인은 무엇이며, 어느 연령대의 발병률이 가장 높나.  -국가암정보센터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유방암 환자는 2만8000명으로 여성암 1위를 차지했다. 연령대별로 40대 발병율이 가장 높고 50대, 60대, 30대 순서로 많다.  특히 최근 들어선 30대 발병률이 높아지는 추세다.  직장생활 하는 여성이 늘면서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고 식습관이 서구화되면서 고칼로리 음식 섭취가 늘어난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또 피임약 복용이 늘고 첫째 아이 출산은 늦어지는데 반해 모유 수유 기간이 짧아진 것도 영향을 미친다. □ 백 원장은 전북 익산 출신으로 서울대 의대 입학을 시작으로 오랜 시간 서울에서 생활을 해왔다. 흔히 명의들이 은퇴를 고려하면 유명 병원에서 서로 모시려고 한다. 하지만 백 원장은 서울 지역 병원에서의 수많은 스카우트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돌연 ‘포항행’을 택했다. -포항은 한국 경제의 주춧돌인 포스코와 세계적인 대학인 포스텍이 있는 지역으로, 글로벌 의료 활동을 펼치기에 이상적이라고 판단했다.  2021년 9월 포항세명기독병원 유방갑상선암센터 원장으로 부임한 이후 지난달 14일까지 유방암 및 갑상선암 수술 500여 건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부분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이제 병원은 유방암과 갑상선암 전문 치료를 위해 환자 중심의 가치관을 갖춘 우수한 의료진과 최첨단 의료 장비, 암환자를 위한 입원실 등 두루 여건을 갖춘 상태가 만들어져 있다.  진료 프로세스도 진척됐다.  그간 진단된 암에 대해 다각적인 분야에서 환자의 상태를 진료하는 최신 치료법인 다학제 진료 시스템을 적용하고 빠른 진단검사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암환자의 기다림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세명기독병워에서도 당일 진단 후 일주일 이내에 수술과 시술을 시행해 빠르게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암환자의 불안감을 줄여줄 수 있다는 점이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진료를 해보면 지역 주민들이 보내주는 신뢰도를 느낄 수 있는데, 더 노력해 질 높은 의료서비스로 보답하겠다.  최근에는 수술 후에 항암제 치료가 꼭 필요할지를 알아보는 유전자분석법을 미국연구소와 협업해 실제 우리 환자들에게 응용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요즘 나의 특기인 환자들의 생존율과 외적 여성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고려한 ‘암수술 후 동시재건술’이 인기다.  포항뿐만 아니라 서울, 대구, 부산, 대전, 광주 등 전국에서 환자들이 찾아오고, 심지어 미국, 영국, 중국,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등 해외에서도 환자들이 래방한다. 그들로부터 서울의 어느 대학병원보다 못지않은 치료를 해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때는 뿌듯하기도 하다.    지금 우리나라 지방 의료체계를 두고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포항에 내려오면서 지방에서도 ‘최신의 기술로 암 수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이 내 목표가 잘 안착돼 그동안 서울의 대학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던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시간과 치료비용을 최소화시켜줬다고 자부한다.  □ 1986년 당시 유방 전 절제 없는 유방보존술을 연구한 계기와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다면.  -당시는 유방암에 걸리면 유방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도 암이 전이됐다. 마침 그때 방사선치료기가 구비돼 있던 원자력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던 터라 부분 절제를 하고 방사선 치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배 교수님들로부터 “위험하다. 조직을 살리면 암이 재발할 확률이 높아질 텐데 어린놈이 뭘 안다고 그러느냐”고 그 방식을 나무랐다. 오기가 생겨 더 연구를 거듭했고, 마침내 절제를 하지않고도 유방암을 퇴치하는 나만의 치료법을 개발해 냈다.   기억에 남는 환자는 많다. 결혼도 안 했는데 유방암 수술을 받게 된 약사가 유방을 다 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울었다. 또 수술 후에 이혼을 당하거나, 신체적 약점에 따른 자괴감으로 먼저 이혼을 제안한 여성, 극단적 선택을 하는 여성, 직장생활을 포기하거나, 산으로 들어간 여성도 있었다. 어떤 환자는 목욕탕을 못 간다고 하길래, ‘팔 없는 사람도 가는데 왜 못 가느냐’고 했지만 당사자는 그게 아니었다. 여성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았고, 그것이 나만의 길을 가게 한 동인을 만들었다.   최근 유방보존술은 유방 모양을 원래대로 갖추기 위해 수술 후 빈 공간에 팰릿 생체조직인 ADM을 채워넣는다. 쉽게 말해 사람 피부로 만든 알갱이다.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밥은 먹고살았을 거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지 못한 꽃을 보려면 다른 길을 개척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유방암 예방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식습관 영향이 가장 크다. 전체 암 원인의 35%가 잘못된 식습관이다.  암(癌) 자를 보면 입(口)이 산처럼 쌓여서 완성된다. 많이 먹고, 잘못 먹고, 맛있는 것만 먹어서 생기는 게 암이다. 여성호르몬도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는데 폐경 여성 중에 삶의 질을 높이겠단 이유로 여성호르몬을 인위적으로 주입하는 분들이 많은데 상당히 위험하다. 항상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웃으면 암을 예방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 □ 마지막 한 말씀 부탁 드린다. -우수한 의료진, 최첨단 방사선치료 장비와 시설시스템을 갖춘 지역 병원이 있다면 지역에서 암 수술받는 것이 환자에게 더 이득이다. 암 환자는 늘 불안감을 가지는데 굳이 대학병원을 찾아 한달, 두달 대기하면서 불안감을 키울 필요가 없다. 재수술 비율도 선진국에서는 20% 이상이나 우리 병원은 병리 의사가 진행하는 동결절편생검술을 수술 중 시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춴 놓아 재수술이 지금까지 없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지역 병원에서도 충분히 암 수술이 가능함을 우리 병원 암 수술 실적을 보면 알 수 있다.   백남선 원장 백남선 원장은 서울대 의과대학 입학을 시작으로 50년간 임상의사로서 서울의 원자력병원장, 건국대학교병원 병원장, 이화여자대학교 여성암병원 병원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또 학생과 수련의들의 교육, 연구, 진료는 물론, 세계학회에서 기조강연(keynote lecture)을 수차례 해 오는 등 한국의 의료 수준을 세계에 알려왔다. 이 업적을 평가받아 한국 및 아시아 유방암학회장도 역임했다. /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2024-11-04

“죽도시장 그리며 그림에 땀내가 나야 한다는 걸 깨달아”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문인화를 접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문인화는 현대인이 자주 접하는 예술 장르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문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렇다면 문인화가 지금 왜 필요한지, 그 가치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한 평자는 이런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문인화가 어디 있느냐고 다들 반문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필묵(筆墨)의 현대적 재해석은 차치하고라도 작품의 형식, 구도, 소재 자체가 구태의연하다. 그러니 수구나 매너리즘의 끝자락으로 간주한다. 오늘날 문인화의 현실을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그러나 문인과 문인화 이전에 인간과 예술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나의 실존의 노래 역사가 문인화의 역사고 예술의 역사다. 그런 만큼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가 문인화다. 오히려 그 중요성이 오늘날보다 더 큰 때도 없다. - 이동국, ‘역사와 실존·심관의 시서화 일체 언어’, ‘심관 이형수의 수묵편지’, 서예문인화, 2017, 13쪽. 그렇다면 이형수의 문인화는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어떻게 펼쳐 보이고 있을까? 그 ‘가치’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김도형(이하 김) : 선생님은 근래 죽도시장 그리고 동학과 관련된 작업을 꾸준히 하시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형수(이하 이) : 60대에 김지하, 박동진 같은 역사에서 굵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 위주로 그림을 그렸지요. 일흔을 바라보면서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방향을 두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멀리 갈 것 없이 내가 사는 바로 이곳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장소를 택해야 할 텐데, 그 장소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어야 하겠고요. 그래서 책과 자료를 찾아보며 고민하다가 두 군데를 떠올렸어요. 하나는 죽도시장이고, 또 하나는 해월(海月) 최시형이 살았던 신광면 마북리 검곡(劍谷, 검등골)입니다. 김 : 먼저 죽도시장 이야기부터 들어보고 싶군요. 죽도시장은 동해안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인데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습니까? 이 : 2005년부터입니다. 그 당시 거의 매일 아침 죽도시장에 갔어요. 사람들로 북적이는 죽도시장에 가면 꿈틀거리는 생명력 같은 걸 느끼게 됩니다. 그런 체험을 하면서 죽도시장이야말로 인문학의 보고(寶庫)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 : 어떤 의미에서 죽도시장을 인문학의 보고라고 생각하셨는지요? 이 : 인문학은 간단히 말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이지요. 죽도시장에서 수많은 사람을 지켜보면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삶은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도시장은 다양한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일 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 문인화에서 시장 풍경은 잘 다루지 않는 것 같은데, 작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이 : 죽도시장을 100점 정도 그렸습니다. 그림 그리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그림에 딸린 화제(畫題)를 쓰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잘 모르는 분야가 있으면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것은 물론, 상인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지요. 다루고자 하는 소재를 충분히 이해해야 비로소 붓을 들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으니까요.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일주일가량 걸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작업하면서 그림에 땀내가 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칼을 가는 여인 칼을 가는 여인의 삶은 평범하고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칼날을 세우는 여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기운은 날카롭다.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짧은 일상의 한순간이지만 삶의 굴레를 벗어버리려는 그녀의 손끝 칼날은 무섭다. 인생은 짧고 짧은 순간의 연속이지만 때가 되면 죽음은 칼같이 온다. - 2017년 6월, 죽도시장 어물전 옆 30년간 칼 가는 여인을 보며. 노점상 ‘규합총서’에는 “밥 먹기는 봄같이 하고 국 먹기는 여름같이 하고 장 먹기는 가을같이 하고 술 마시기는 겨울같이 하라”고 했다. 밥은 따뜻하게, 국은 뜨겁게, 장은 서늘하게, 술은 차게 들어야 제맛이 난다는 것이다. 시속 40킬로미터로 차가 다니는 노점상의 힘든 삶의 조그만 공간에서 맛난 점심, 삶의 엄숙함을 본다. 아쉬움이 많은 세상살이 할머니들에게서 꿈과 희망을 읽는다. - 2017년 6월. 아귀를 파는 여인 아귀는 방언으로 아구, 물 텀벙, 아구어라고도 한다. 아귀는 체형 탓인지 헤엄치는 속도가 느린 탓에 바닥에 엎드린 채 유인 돌기를 흔들어 먹잇감을 유혹해 잡아먹는다. ‘자산어보’에도 낚시하는 물고기 조사어(낚시조, 실사, 고기어)라고 했다. 한 번에 큰 입으로 큰 고기를 삼키는 먹성 때문에 탐욕과 욕심의 상징으로 통한다. - 2016년 6월, 어물전에서 본 아귀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두 아이와 부부를 그리다. 김 : 죽도시장을 오랫동안 다니셨으면 다양한 사연을 접했을 것 같습니다. 인상 깊은 사연이 있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이 : 밥 한 끼를 천 원에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한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너무 말을 안 들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한 스님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말 잘 듣는 아들이 될 수 있겠냐고 물었지요. 스님은 할머니가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말 잘 듣는 아들이 될 거라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할머니는 고민 끝에 시장에서 밥 한 끼를 천 원에 팔았더니 손님이 몰려들고 아들도 말을 잘 듣게 되었다고 해요. 김 : 한 편의 전설 같은 이야기군요. 인상 깊었던 장면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 한번은 식당에 들어갔는데 추사체를 흉내 낸 ‘淸淨(청정)’ 자가 벽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씨 밑에서 한 할아버지가 밥을 앞에 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겁니다. 아마 고된 일을 하고 힘이 들어서 졸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순간 ‘淸淨’과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묘한 울림이 느껴지더군요. 김 : 죽도시장을 그린 작품으로 전시회를 하셨지요? 이 : 2021년 10월에 포항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해도 도시 숲에서 30여 점을 전시했습니다. 죽도시장에서 전시를 더해 보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지요. 김 : 죽도시장을 100점 정도 그렸다고 하셨는데, 아직 제대로 된 전시가 이뤄지지 못했군요. 책자로 발간되지도 않았을 테고. 이 : 그런 셈이지요. 언젠가는 죽도시장을 주제로 한 좋은 전시가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김 : 혹시 포항의 풍경을 그린 작품 중에서 공개하지 못한 작품이 있는지요? 이 : 산수화를 제 나름대로 그리고 싶어서 2015년에 ‘청하골 12폭포’를 그렸어요. 그 후에도 다양한 크기의 ‘12폭포도’를 그렸습니다. 내연산 12폭포에 깃들어 있는 여러 이야기를 ‘12폭포도’에 화제로 썼지요. 아직 전시는 못 했습니다. 김 :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군요. 전시회를 통해서 한번 보고 싶습니다. 이 : 개인전을 여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한 번 여는데 적어도 2000만 원이 듭니다. 작가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지요.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03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되는 문인화를 지향해”

이형수 선생은 20대 중반인 1976년 포항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 나간다. 1979년 포항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연 후로 국내외에서 개인전과 초대전을 꾸준히 열었다. 일기처럼 그린 작품을 모아 2015년과 2017년에 ‘심관(心觀) 이형수의 수묵 편지’를 엮어내기도 했다. 이형수 선생이 이런 활동을 펼치며 어떤 작품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는지 들었다. 김도형(이하 김) : 옥산 선생의 주변에도 유명한 예술인이 많았겠습니다. 이형수(이하 이) : 옥산 선생과 가까운 분으로 이상재, 문장호, 김춘, 최범술, 김범부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옥산 선생이 전라남도 진도 출신이다 보니 선생 주변에는 호남 사람이 많았어요. 호남 수묵화의 저변이 굉장히 넓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지요. 김 : 옥산 선생 문하에서는 언제까지 계셨는지요? 이 : 1973년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문하에 있었습니다. 김 : 당시 생활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힘들었지요. 집사처럼 온갖 일을 다 하면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이따금 그림을 팔아서 생기는 돈과 선생님이 간혹 주시는 용돈이 수입의 전부였어요. 군대 가니까 오히려 편할 정도였습니다. 김 : 옥산 선생 문하에 있을 때 기억에 남은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이 : 옥산 선생이 차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의제(毅薺) 허백련 선생이 만든 춘설차를 좋아했어요. 그 덕분에 저도 차 맛을 좀 알게 되어 다인(茶人)이 되었습니다. 김 : 선생님은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않고 대가들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셨습니다. 혹시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않은 걸 후회하신 적은 없는지요? 이 : 대광고등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진학했더라면 좋은 대학에도 가고 좀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었겠지요. 그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하지만 문인화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선택한 길이니까요. 다만 당시 큰 스승 밑에서 더 열심히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 많습니다. 김 : 포항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이 : 군에 입대하면서 서울 생활은 마무리되었지요. 충북 조치원에 있는 32사단에서 군수처에 근무했습니다. 군에서 제대하고 1976년에 포항으로 왔어요. 영덕에 계시던 부모님이 거주지를 포항으로 옮기셨거든요. 김 : 당시 포항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이 : 그때는 해도가 늪지대였습니다. 포항제철소가 들어서면서 도시에 활력이 넘쳤지요. 포항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고 보면 됩니다. 김 : 포항에서 작품 활동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해도동 집에서 작업했습니다. 1979년 육거리 근처에 있던 용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지요. 산수 여덟 폭과 기러기 병풍을 전시했습니다. 작품이 팔리긴 했는데 전시 경비를 제하고 나니 남는 게 없더군요. 당시에는 그림 전시회 등 웬만한 문화예술 행사를 다방에서 했어요. 그런 행사를 소화할 만한 문화 공간이 없었거든요. 김 : 사모님(효원(曉園) 최영란)이 서예가이시죠? 이 : 포항에서 금강연묵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1982년에 결혼했어요. 제가 아내가 쓴 금강경에 반했지요. 결혼 1년 후에 아내가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덕분에 건강의 중요성을 깨달았지요. 김 : 서실도 열었을 것 같습니다만. 이 : 1990년에 두호동 해변가 상가에서 서실을 열었습니다. 뒤늦게 대학에도 갔지요. 검정고시를 거쳐 경주 동국대 조경학과를 1992년에 졸업했습니다. 김 : 선생님의 이력을 살펴보니 문인화의 저변을 넓히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셨더군요. 이 : 1996년에 사단법인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가 되었습니다. 2000년에 경북문인화협회가 창립되었는데, 협회 회장을 10년 동안 맡았지요. 사단법인 한국서가협회 경북지회가 창립되면서 역시 10년 동안 지회장을 맡았고요. 그리고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간 한국서가협회 수석 부이사장을 맡았는데, 그 후로는 두문불출하며 작품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문인화와 서예 쪽에서 심부름을 많이 한 셈이지요. 김 : 전시도 꾸준히 하셨지요? 이 : 1995년 포항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할 때, 그리고 2007년 포항시 신청사가 개청할 때 초대전을 했습니다. 두 번 모두 전통 문인화를 소재로 전시했지요. 지금도 포항문화예술회관 1층에 ‘청매도’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2008년에는 대구 동아미술관에서 ‘먹빛이 마음빛’이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했어요. 성타 스님이 낸 생활법문집 ‘모래 한 알에 우주를 담다’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김 : 해외에서도 전시하셨지요? 이 : 2010년 12월 9일부터 이듬해 1월 19일까지 독일 베를린 스판다우 문화의 집 갤러리에서 ‘까치는 호랑이의 외로움을 안다(鵲知孤虎)’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했습니다. 독일에 있는 동포들이 환대해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동포들을 위해 빨랫방망이에 까치와 호랑이 그림을 그려서 갖고 갔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그 이듬해 함부르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닷새 동안 ‘모든 사람은 꽃이다’를 주제로 초대전도 했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묵죽(墨竹)을 좋아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김 : ‘까치는 호랑이의 외로움을 안다’에 출품된 작품들을 보면 까치와 호랑이가 천진난만하게 어울려 있습니다. 무슨 뜻을 담은 것인지요? 이 :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호랑이는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지요. 알고 보면 까치도 호랑이도 외로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호랑이와 까치는 서로의 속마음을 아는 친구 사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김 : 유럽에서 전시하면서 문화 체험을 폭넓게 하셨겠군요. 이 : 독일 베를린에서 한 달 동안 민박하면서 독일에 대한 이해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함부르크에서 한밤중에 버스를 타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 미술관을 찾아갔지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페기 구겐하임미술관에도 갔는데, 벽면에 새겨진 “장소의 변화에 따라 시간이 변하고, 그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면 미래가 변한다”는 영어 네온사인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프랑스 파리, 벨기에 브뤼셀도 둘러봤습니다. 아주 유익한 경험이었어요. 김 : 선생님이 낸 책 중에 ‘수묵 편지’ 두 권이 눈에 띕니다. 이 : 2015년에 낸 ‘수묵 편지’는 일기 형식으로 그린 작품의 일부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능소화, 대나무, 백합, 복숭아, 나팔꽃, 토마토, 참외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지요. 그림에 딸린 화제(畫題)는 제가 쓴 것도 있고 정희성 시인, 마종기 시인, 이해인 수녀 등 다른 사람의 글을 옮겨 적기도 했습니다. 2017년에 낸 ‘수묵 편지’는 영덕 출신의 역사적 인물인 장계향, 나옹선사, 목은(牧隱) 이색 세 분을 다룬 것입니다. 장계향은 조선 최초로 여중군자(女中君子, 풍모와 도량이 큰 여인)의 칭호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한글로 쓴 조리서인 ‘음식디미방’ 저자이기도 합니다. 나옹선사와 목은은 워낙 유명해서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지요. 세 분은 송천강과 인연이 있는 큰 인물입니다. 송천강은 영해평야를 가로지르며 흐르다가 동해로 빠져나갑니다. 송천강 상류에 나옹선사가 태어난 곳이 있고, 중류에는 장계향의 시댁인 충효당이 있으며, 하류에서 목은이 태어났습니다. 김 : 시(詩), 서(書), 화(畵)가 하나의 작품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되는 작품을 그리려 합니다. 시서화가 혼융일체가 되려면 쉼 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사진 : 김훈(작가)

2024-10-30

2024 포항철강산업대전·스틸에세이 수상자 및 수상 소감

제 12회 철강산업대상 수상자 박태한 대표이사 철강 히어로 상-박태한, 직원과 회사 동반성장 기업가치 실현 “지역 사회의 책임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박태한 애경특수도료(주) 대표이사는 업계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다양한 분야에 경영 능력을 발휘해 직원과 회사가 동반성장하는 기업가치를 실현했다. 신규 생산공장 설립으로 고용 창출에 앞장서고 있으며 안전한 사업장 조성을 위해 다양한 업무 개선,직원복지 증진을 위한 적극적이 투자,상생 노사문화 정착,사회공헌활동을 통한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김태연 대표이사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김태연, 근로자 복지·안전 정착 기여 “산업 재해 예방에 공헌하겠습니다” 김태연 (주)그린바이로 대표이사는 안정적인 노사 관계를 원동력으로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근로자 복지 및 안전 보건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 인근 지역 주민들과 잦은 대화와 교류를 통해 주민들의 불편함과 어려움을 해소해 주는 등 상생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봉사하는 자세로 직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석진 대표이사 철강 프런티어상-석진, 기술·제품 개발과 업무시스템 개선 “철강, 배터리 등 산업 분야에 기여하겠습니다” 석진 (주)동연중공업 대표이사는 지속적인 신기술, 신제품 개발과 업무 시스템 개선을 통해 회사를 성장시키고 있다. 특히 산업 현장의 안전과 작업 공정 개선을 통한 원가 절감, 신규 직원을 채용하는 등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고 있다. 온화하고 차분한 성품으로 직원들과의 유대 관계가 좋으며 대·내외적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김주석 책임 경북도지사상-김주석, 무사고·무재해 사업장 달성 공헌 “회사 발전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겠습니다” 김주석 현대종합금속(주) 책임은 투철한 직업관과 주인 의식을 바탕으로 사업장 생산성을 개선하고 무사고,무재해 사업장 달성에 공헌했다. 생산성 향상과 품질 개선을 바탕으로 직원들의 모범이 됐다. 기업의 매출 증진에 중요한 역할을 주도적으로 수행해 지역 사회 발전에 이바지 했다. 사내 구성원 간 화합만이 기업과 근로자가 함께 살 길임을 인식하고 이를 실천했다. 박현규 공장장 동반성장상-박현규, 대·중소기업 간 동반 성장 촉진 유도 “상생 협력 사업을 통해 동반 성장하겠습니다” 박현규 OCI(주) 포항공장 공장장은 투철한 직업관과 상생의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산업 평화 정착과 대·중소기업 간 동반 성장 촉진을 유도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실천으로 지역 사회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데 노력했다. 포항지역 화학 안전공동체 주관사로 활동하며 지역내 중소기업들의 화학물질 안전관리 지원 및 비상 상황 시 공동 대응했다. 양진우 차장 포항시장상-양진우, 근면 성실한 자세로 맡은 업무 수행 “업무 효율화로 생산성을 높이겠습니다” 양진우 밸프(주) 차장은 구매, 생산, 총무 업무 등 사내 모든 업무를 경험해 본 이력으로 동료 및 부서 간 원활한 소통을 유지하고 항상 근면 성실한 자세로 맡은 업무를 수행했다. 여성,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차별 금지 및 처우 개선을 회사에 요청 후 실행했다. 2공장 가동 안정화 및 신규 외주업체 확보로 회사의 매출 안정화와 증대에도 기여하고 있다. 제 8회 스틸에세이 공모전 건축물 철제 부속물 지네철 소재로 한 김동식 씨 ‘지네철’ 대상 전국에서 모인 스틸과 관련한 추억이 담긴 수필 작품 400여 편 출품일반 엄경애 ‘호미’·청소년 박민주 ‘밥 한 숟가락과 어머니’ 금상 영예 경북매일신문이 주최·주관하고 경북도, 포항시, 포항철강산업단지관리공단이 후원하는, 철(스틸·steel)을 소재로 한 창작 문학작품 공모전 ‘스틸에세이 공모전’ 제8회 수상자들이 결정됐다. 제8회 스틸에세이 공모전 심사위원회는 지난 25일 심사를 진행, 김동식(65·경북 포항시)씨가 응모한 수필 ‘지네철’을 대상작으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일반 부문 대상 작품 ‘지네철’은 목조 건축물의 지붕을 고정하는 작은 철제 부속물인 지네철을 사물과 사물, 관계와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로 해석하는 깊이 있는 통찰을 담아낸 작품이다. 대상 수상자 김동식 씨는 개인적인 경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비록 눈에 띄지 않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네철처럼 사람의 삶이 관계를 견고하게 지탱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세이 소재로 지네철을 발견한 김씨의 밝은 시선과 함께 작품을 이끌어가는 문장이 일관되게 안정적인 점이 호평 받았다. 금상은 엄경애(서울특별시 강서구)씨의 ‘호미’, 은상은 양은경(서울시 중랑구)씨의 ‘클립, 클립’, 동상은 정재우(서울특별시 관악구)씨의 ‘아버지와 철반지’, 이현기(광주광역시 남구)씨의 ‘이제라도 당신의 덴 손을 잡아드리고 싶습니다.’등이 최종 수상작으로 각각 결정됐다. 가작은 김주태(인천광역시 서구)·이병언(경기도 김포시)씨가 뽑혔다. 청소년 부문 금상의 영예를 안은 박민주(구미오상고 2년) 학생의 ‘밥 한 숟가락과 어머니’는 ‘철-숟가락-밥=어머니의 아낌없는 사랑과 응원, 격려’로 이어지는 뚜렷한 주제와 구성의 안정감은 물론 문장 표현력이 뛰어난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은상은 이율찬(경기도 김포 푸른솔중학교 2년) 학생의 ‘기분 좋은 쇠 비린내’, 동상은 최서인(전북 익산 원광여고 3년) 학생의 ‘철은 날카롭기만 하지 않는다’, 박신후(포항 대동중학교 1년) 학생의 ‘철로 발달한 AI 기술’ 등이 최종 수상작으로 각각 결정됐다. 가작은 박진영(대구 천내중학교 1년), 박시원(포항 대동중학교 2년), 김지훈(포항 대동중학교 2년) 학생이 뽑혔다. 포항스틸에세이 공모전은 현대문명의 상징이자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돼온 철강산업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고 재도약을 기원하기 위해 마련한 전국 유일의 철(鐵·Steel)을 소재로 한 수필 작품 공모전이다. 포항시·경북도 주최, 경북매일신문 주관으로 치러진 공모전은 올해가 여덟 번째다. 지난 8월 19일부터 10월 20일까지 국내외 거주자(기성문인 제외)를 대상으로 미발표된 순수 창작품을 접수한 올해 공모전에는 경북을 비롯 서울, 강원 등 전국에서 스틸과 관련한 추억이 담긴 수필 작품 400여 편이 출품돼 △일반부 대상 1점, 금상 1점, 은상 1점, 동상 2점, 가작 2점 △청소년부 금상 1점, 은상 1점, 동상 2점, 가작 3점 등 모두 14점이 입상의 영예를 안았다. 심사위원회는 “철이라는 공통된 주제였기에 결국 같은 주제로 얼마나 색다른 구성을 하고 창의성 있는 문장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느냐에 초점을 두어 심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며 “‘제8회 스틸에세이 공모전’ 수상작들은 철이라는 소재를 매개로 사람의 삶을 새롭게 해석하고 창의적으로 바라본 애씀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들이었다”고 평가했다. 대상 수상 소감 김동식 김동식(65·포항시) “본향으로 가신 부모님께 이 소식을 전해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수필 한 편을 다듬어 쓰면서 모양이 이루어져 갈 때 그 과정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아직 부족한 저에게 큰 상으로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공학 교육에만 전념하다 문학의 길이 가능할까, 글쓰기에 문외한인 공학도가 흥미를 가지고 글 공부를 할 수 있을까. 망설이고 주저하며 몇 해 동안 문학 강좌를 귀동냥했습니다. 퇴직 무렵부터 관심을 가졌던 수필은 쓸수록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걸핏하면 문장이 실타래처럼 꼬이고 생각은 엉켜 긴 밤을 헤매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시간들이 밑거름 되어 한 줄씩 조심스레 나아갔습니다. 문화해설사 봉사활동을 하다가 어느날 우연히 지네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벌어지고 찢어진 곳을 꿰매어 안전하고 튼튼하게 연결하는 역할이 신선하게 와 닿았습니다. 주로 목조건물에 사용되는 쇳조각 편린을 찾아 먼저 경주, 포항 지역의 사찰을 둘러 보았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어떤 형태를 가지는지 확인하기 위해 방문한 장흥의 보림사에서 물고기 모양의 지네철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건물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 지네철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벌어지고 틈이 생긴 자리에 덧대어야 할 매개체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 사회, 국가에 벌어지는 갈등을 봉합해 줄 지네철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습니다. 저 또한 드러나지 않는 구석에서 아주 작은 지네철이라도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스틸에세이 공모전에 글을 보내고 곧바로 떠난 여행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만났습니다. 배를 타고 폭포 곁을 지날 때 쌍무지개가 뒤따라왔습니다. 그때의 기분과 지금의 기쁨이 섞여 가슴이 사뭇 두근거립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또 다른 시작을 향해 정진하겠습니다. 문학의 토양을 넓혀주신 우리 수필 선생님과 같이 공부하는 문우들, 평생을 함께 한 사랑하는 아내, 두 딸 가족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스틸에세이 공모 기회를 주신 경북매일신문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환갑을 겨우 넘기고 본향으로 가신 부모님께 이 소식을 전해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제 8회 스틸에세이 대상 수상 작품 나무와 나무를, 사람과 사람을 아우르는 묵묵한 지네철 처럼… 김동식씨 ‘지네철’ 여름휴가를 온 딸 가족과 경주에 갔다. 손자가 궁금해하는 첨성대를 먼저 보고 계림 숲에 들른 다음 곧바로 불국사로 향했다. 사찰 입구 소나무 숲이 우리를 시원하게 맞이했다. 청운교, 백운교 다리를 넘어 부처님 나라에 들어섰다. 석등 불구멍 창을 통해 본 대웅전 큰 어른은 나에게 손자들과 같이 왔냐며 염화시중의 미소로 반겼다. 아이들은 다보탑 앞으로 달려갔다.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이 신기한지 다보탑과 석가탑을 번갈아 오가며 한참 감상했다. 나도 느긋하게 절을 둘러보았다.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끈 것은 지네철이었다. 불국사 극락전 맞배집 지붕널 사이를 지네철이 연결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 문화해설 봉사활동을 하면서 전통문화재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는데 지네철을 가까이 보기는 처음이었다. 지네철은 건축물의 지붕널 벌어짐을 잡아주는 쇠 장식이다. 지네 모양이지만 언뜻 물고기의 뼈와 꼬리를 닮기도 했다. 꺽쇠 기능에 예술성이 가미된 독특한 장식이다. 철강 도시 포항에 살지만 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은 철조각이 박공널을 연결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철물은 삼국시대부터 요긴하게 쓰였다. 실제로 동궁월지에서 자물쇠, 가위, 문고리 등 철재류가 출토되었다. 관정 꺽쇠 쇠못은 흔한 편이고, 불국사 극락전 지네철이 말해주듯 목조건물에도 사용하였다. 건물에 어긋남이 생기거나 보수할 때 필요했을 텐데 다른 것들과 달리 지네철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궁전과 사찰에 지네철이 부착되어 있는 자료를 본 적이 있다. 그 모양이 지네에서 맵시 있게 변형하여 다양했다. 경복궁 사정전과 수덕사 대웅전은 꽃잎 모양, 운현궁 이로당은 둥근 지네 발 모양으로 형상화하였다. 또한 봉정사 대웅전은 날개를 편 새 모양에 복과 장수를 바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렇듯 다양한 문양으로 장인의 미적 욕구를 표현한 것이 놀라웠다. 포항 보경사 여러 목조건물 널에도 지네철이 붙어있다. 꽁치 뼈 모양은 물론이고 뼈가 많은 청어 닮은 형상도 있다. 일찍이 관목어를 과메기로 만들어 먹은 해변 도시에 철강회사가 자리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현대는 목조건물뿐 아니라 시멘트벽에도 강철 볼트 너트로 꿰맨다. 국가기간산업인 철강생산뿐만 아니라 하찮아 보이는 지네철같이 나무와 나무를 아우르는데 사용하는 철을 생산하는 포항시민 자부심을 가진다. 지네철.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내 몸에도 지네철 모양의 자국이 있다. 오른쪽 다리에 남아있는 상처의 흔적이다. 어릴 때 고향 뒷산에서 같이 놀던 친구가 낫으로 나무를 베다 내 다리를 쳤다. 피가 펑펑 쏟아지는 상처를 수건으로 동여맨 채 자전거에 실려 20리 밖 경주병원으로 갔다. 울며불며 꿰맨 상처가 60년이 지난 지금도 다리에 지네처럼 선명하게 붙어있다. 그 후 난 흉터 때문에 반바지 입기를 꺼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또한 내 살과 살을 연결하여 아물게 해 준 지네철이었다. 그런가 하면 보이지 않는 지네철이 있다. 곳곳에 필요하고 또 존재한다. 가정, 직장, 사회에서 어긋나거나 벌어져 덧대야 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형제간 우애에 보강대가 필요하고 집안 행사에서 의견 충돌로 널이 서로 뻗대면 바로 잡아야 한다. 세대 간 관점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지네철의 역할이 필요하다. 건축물의 그것처럼 사람 사이의 지네철도 드러나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으스대며 힘자랑하거나 뽐내고 튀는 자세는 지네철 역할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강철이면서도 서로 뻗대는 양쪽을 끈끈하게 하나로 아우르는 쇠 장식처럼 야무지면서도 인정 있게 양쪽을 보듬는 지혜와 공감력이 필요하다. 우리 집에는 두 딸이 지네철 역할을 한다. 나는 아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지만 아내는 양육을 힘들어하며 딸 둘만으로 만족하였다. 난 그것이 야속하였고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 부부는 한동안 말 없는 평행선 속에서 살았다. 나는 직장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고 집안일과 아이들 교육은 온통 아내 몫이었다. 아내도 직장이 있어 힘들었을 텐데 모른 척했다. 감정이 격해져 충돌이 있을 때는 꼬마 아가씨들이 나섰다. 안마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며 애교로 분위기를 풀어주었다. 돌이켜보면 두 딸이 우리 부부를 다정하게 이어주었다. 경복궁 꽃망울 쇠 장식보다 몇 배나 더 곱고 사랑스러운 지네철이었다. 자라서도 그 역할은 계속되었다. 집안일에 솔선수범하고 일가붙이 사이에서도 아들 못지않게 의견 조율과 교통 정리를 잘하여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곤 하였다. 특히 큰딸은 때맞춰 결혼하여 늠름한 사위와 두 손자를 안겨주었으며, 이제 3대를 돈독하게 엮는 일에 애쓰고 있다. 딸들의 지네철 역할은 현재 진행형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다독이며 봉사하는 사람이 많다. 장애인을 돕거나 요양보호사로 활동하는 친구들도 가교역할을 잘하고 있다. 불협화음과 문제성이 있는 단체는 그곳에 몸담았거나 그 분야를 아는 사람이 지네철 역할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퇴직 교사인 친구가 대안학교에서 학교생활 적응력을 높여주고 사회 진출을 위한 기본 소양 교육을 기꺼이 담당하였다. 나는 학창 시절 야학에서 학생들과 검정고시 준비를 해 준 경험이 있다. 직장 퇴근 후 오는 학생들과 공부한 시간이 보람찬 지네철 같은 역할이었으리라. 지네철은 쇠의 숨겨진 미덕이다. 쇠란 완강하고 무거운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작지만 섬세한 모양으로 물체와 물체를 다잡아 하나로 묶는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강하면서 부드러운 드러나지 않는 일꾼이다. 그것이 있어 건물과 건물이 제대로 서고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살아간다. 지네철이 삶을 지탱한다. 모양은 별로 없지만 나도 보이지 않는 한구석에서 한 조각 지네철이 되고 싶다. 청소년부 금상 수상 작품 ‘밥 한 숟가락과 어머니’ 아침이면 내 잠결을 깨우는 익숙한 소리가 있다. 누군가 나보다 먼저 일어나 하루를 먼저 시작하는 부지런한 소리다. 그 소리는 대부분 무언가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다. 나는 얼른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고 그 소리가 더 경쾌하고 요란해질 때, 쇠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때, 천천히 일어나곤 한다. 숟가락과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 그릇과 접시 부딪히는 소리. 밥 짓는 냄새가 방 안까지 스며든다. 나는 세수를 하고 칫솔을 물고 이리저리 오가며 학교 갈 준비를 서두른다. ‘5분만 더 일찍 일어날 걸….’ 아침은 늘 분주하다. 어머니는 늘 같은 시간에 나를 부르신다. “00야 밥 먹어라.” 형광등 불빛에 숟가락이 반짝인다. ‘뭐야? 쇠붙이가 언제부터 저렇게 반짝였어?’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거리는 숟가락을 새삼 멍하니 바라본다. “00야, 뭐 하니? 퍼뜩 밥 안 먹고. 밥 다 식는다. 어서 먹어” 내 그릇에 밥 한 주걱 담으며 어머니께서 재촉하신다. 어머니의 이런 모습은 내가 어릴 때부터 한결같다. 나는 항상 숟가락을 보며 생각한다. 차갑고 무거운 쇠붙이가 어떻게 이리도 고급스런 숟가락으로 태어나 세상의 모든 인류에게 밥을 먹이는 것일까. 언젠가 TV에서 본 것 같다. 거칠고 둔탁한 쇠가 고온에 달궈진 채 수백 번의 연마 과정을 거치며 악기나 의료용, 그릇이나 수저, 또는 공구나 기계, 부품 등 세상 어떤 것이든 필요한 용도로 탈바꿈한다. 내가 지금 빠져 있는 것은 이 반짝이는 숟가락이다. 어렸을 때는 작은 숟가락을 썼지만, 언제부턴가 내게도 어른용 수저가 주어졌다. 무겁게 느껴졌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숟가락의 무게라고 여겼다. 숟가락이 어른용으로 바뀌면서 어머니가 주시는 밥의 양도 늘었다. 어머니가 준비한 밥과 수저 앞에 앉을 때면 왠지 모를 대접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매일 반복 되면서 나는 오만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아침이면 더 그랬다. 잠도 덜 깬 상태에서 학교에 갈 스트레스까지 더해졌기 때문일까. 밥을 먹는 일이 점점 귀찮았다. 아니 짜증이 났다. 이부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싫었지만,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서둘러야 하니 심적인 부담이 컸다.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은 고스란히 내 일상에서 밀쳐버리곤 했다. “나중에 먹을게요.” 밥을 준비한 어머니에 대한 예의는 묵살한 채 오로지 내 입장의 대답은 단답의 거절이었다. 기껏해야 쇠붙이였다. 숟가락은 항상 차가웠다. 새벽 공기처럼 서늘했다. 입술에 닿을 때의 불쾌감처럼 내 싸늘한 거절이 그렇게 어머니의 가슴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먹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매일 식탁에 아침밥과 수저를 올려놓고 나를 기다리셨다. 그 차가운 쇠붙이로 나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싫어 애써 외면했다. 아니 피하고 싶었고, 도망치고 싶었다. 어느 차디찬 겨울이었다. 심한 몸살로 내가 사경을 헤맬 때였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을 때 입술을 타고 따뜻한 무언가가 조금씩 조금씩 흘러들었다. “00야, 삼켜. 이러다가 큰일 나. 어서 삼켜” 어머니의 바람도 무색하게 나는 다 게워 냈다. 며칠이 흘렀는지 모른다. 내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을 때,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나고 얼굴은 한껏 야위어 있었다. “엄마~” 그제야 알았다. 내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어머니는 밤낮으로 내 곁에서 먹지도 자지도 않고 나를 지키셨다는 걸. 어머니가 내미는 숟가락의 의미가 조금씩 달리 느껴진 건 그때부터였다. 매일 아침, 어머니는 여전히 그 차가운 숟가락에 따뜻한 밥을 떠서 내게 내미신다. 그 거대한 숟가락에 담긴 밥 한술은 그저 한 끼 식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내게 전하는 최선의 정성이요, 밥 굶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다. “밥 먹고 힘내.” 밥 한 숟가락에 담긴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응원과 보살핌이었다. 어머니가 건네는 그 한 술의 밥은 무겁지도 크지도 않다. 그렇다고 가볍지도 작지도 않다. 그 밥엔 어머니의 모든 바람이 담겨 있다. 걱정과 연민, 배려와 사랑,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힘의 원동력까지 말이다. “밥 먹어”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정성과 사랑이 그 작은 한 숟가락에 다 담겨 있다. 내가 바쁘고 지쳐 있을 때, 어머니는 항상 밥 한 숟가락으로 나를 감싸안는다. 내가 학교에서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방에 들어가려던 나를 어머니가 조용히 불러 세우셨다. “밥 먹고 들어가.” 어머니는 이번에도 숟가락에 밥을 떠서 내게 내미셨다. 그러고 보니 종일 굶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 밥 한 숟가락의 무게를 실감했다. 쇠붙이 숟가락이 주는 차가운 감촉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 차가움 너머에 있는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숨겨진 사랑을 깨닫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조용히 나를 위해 그 자리에 계셨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고등학교 1학기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다음날의 시험을 위해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잠에 들었던 새벽, 어머니는 평소처럼 일어나셔서 아침을 준비하셨다.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겨우 눈을 떴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밥 먹어라” 어머니는 여전히 숟가락에 밥을 얹어 내미셨다. 시험 준비로 지치고 힘들었지만, 순간 어머니의 숟가락이 위로가 되었다. 숟가락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이제 나는 차가운 숟가락에 담긴 따뜻한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고, 나에게 있어 그 철 숟가락은 이제 어머니의 사랑을 상징하는 작은 의식이 되었다. 어머니의 손에서 건네지는 그 한 숟가락의 밥은 이제 내 삶에서 더없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쇠붙이 숟가락은 단순한 식사용 목적이 다가 아니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새벽부터 준비한 하루의 정성, 그리고 나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이다. 언젠가는 나도 어머니처럼 누군가를 위해 매일 아침 따뜻한 밥 한 숟가락을 떠줄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내게 주신 그 차가운 숟가락에 담긴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며, 그 사랑을 전하리라. 오늘도 계속되는 어머니의 집요한 밥 한 숟가락은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사랑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아침이다. 금상 수상 소감  박민주 (구미 오상고등학교 2년) 박민주 (구미 오상고등학교 2년) 나를 되돌아보는 귀한 시간… 성장 발판으로진정성 있는 글로 또 다른 이야기 시작 어릴 적, 제가 쓴 첫 번째 글을 기억합니다. 그때의 순수한 열망과 진정한 감정이 담겼던 그 글은 지금의 저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글쓰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지면서, 저는 그 안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대회는 저에게 단순한 공모전을 넘어, 제 자신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되기를 바라며 열심히 준비했기에 이번 수상이 더욱 뜻깊습니다. 이 대회를 통해 제 이야기가 다른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제게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 수상은 저에게 새로운 시각과 깨달음을 선사한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깊이 있는 성찰의 기회를 마련해주신 경북매일신문사와 포항스틸에세이 공모전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이번 대회를 통해 아직 보지 못한 세계와 마주하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소중한 경험을 발판 삼아 저 자신을 더욱 단단히 다지며, 진정성 있는 글로 또 다른 이야기를 써나가고자 합니다. 심사평 ‘스틸에세이공모전’은 ‘철의 숨은 이야기: 일상에서 만나는 철의 다양한 모습’이라는 뚜렷한 주제를 제시한다.‘철(鐵)’이라는 물질이 어떻게 변화하여 인간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가 재해석되는지를 요구하는 공모전이다. 철과 연관된 소재와 주제로, 삶을 어떻게 문학 작품으로 건져 올리는지의 과정은 심사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제8회 스틸에세이공모전’에 작품을 투고한 분들은 평소 읽기와 쓰기의 중요성을 깊게 터득하고 계실 것으로 보여진다. 투고된 작품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무엇보다 철을 사람의 삶에 견주어 재해석하는 관점을 주목하며 읽었다. 일반부 대상 수상작인 ‘지네철’을 쓴 김동식 님은 사물을 창의적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작품의 소재인 지네철과 주제에 어울리는 어휘와 문체 사용, 작품을 이끌어가는 안정적인 문장 등이 에세이의 품격을 높여줬다. 청소년부에서는 결국 같은 주제로 얼마나 색다른 구성을 하고 창의성 있는 문장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느냐에 초점을 두어 심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철’이라는 주제에 몰입하면서도 자신의 경험과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담아낸 글을 우선으로 우수작품으로 선정했다. 청소년부에서 지나친 문학성이나 예술성을 요구하기는 어렵다. 다만 틀에 박힌 소재로도 삶에 대한 변화가 일어난 글에는 점수를 더했음을 밝혀둔다. /심사위원 양진오(대구대 문화예술교양학부 교수) 김경민(경상대 국문과 교수) 박시윤(수필가) /윤희정기자·이부용기자

2024-10-30

자작나무 숲 길 위에서 인생 여정의 교훈과 위안을 얻다

시골 전원생활이라는 것이 나름대로 정원을 가꾸는 등 일을 하려고 하면 끝이 없다. 정원의 일이라는 것이 그만 덮어 두면 또 그렇게 지나간다. 그러나 시골집은 사람의 손길이 가야 깨끗하다 할까, 사람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정겹다. 가만히 놓아두면 풀들이 마구 자라고 거미가 집을 짓는 등 자연성은 있어 보이되 특히, 가을이 되면 낙엽 등으로 뒤엉켜 을씨년스럽다. 주변이 아름다운 산이고 넓은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면 사계절이 스스로 찾아올 텐데, 굳이 계절이 바뀐다고 힘들게 다른 곳을 찾아다니면서 계절의 변화를 만끽할 필요는 있겠는가 하면서 입버릇처럼 아내에게 말했다. 여태 아내가 원하는 곳을 차일피일 미루어 오늘날까지 왔다. 아내의 별호는 자작나무이다. 자작나무를 좋아하고 늘 그 숲을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 집 정원에도 자작나무 묘목 8그루를 심었으나 4그루는 죽고 겨우 반타작에 만족했다. 더 이상 미룬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싶어 오늘 아내와 함께 영양 자작나무 숲을 탐방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지름길인 영덕군 창수면 삼계리와 울진군 온정면 조금리 경계를 이루는 낙동정맥의 칠보산 고갯길을 택하였다. 비가 오면 도로가 물길로 변하는 고갯길은 이곳저곳 파이고 훼손되어 그야말로 오지 탐험에 나선 일종의 어드벤쳐이었다. 오르고 내려가는 구불구불한 고갯길 바닥은 울퉁불퉁하여 아이들 놀이기구 디스코 팡팡을 연상했다. 아내는 자칫 허리를 다칠까 봐 자동차의 손잡이를 꼭 잡았다. 나는 한술 더 떠서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자작나무 숲을 보러 가는 길은 또 다른 체험과 이야깃거리를 선물했다. 그래서 여행은 목적지보다 목적지로 가는 과정이 때론 의미 있음을 깨달았다. 마침내 영양 죽파리에 도착하여 1시 30분 차를 타고 자작나무숲으로 향했다. 얼마 가지 못해 전기차가 고장이 났다. 좁은 편도 차선이라 차를 치우고 다른 차가 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일행과 함께 오솔길 같은 계곡 따라 난 도로를 걸었다. 울창한 숲으로 우거진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은 그 자체의 풍광으로도 우리의 심신은 힐링 되었다. 계곡의 이곳저곳을 들추어 훔쳐보며 자연의 묘미와 신비감에 넋을 잃었다. 그런데 일반 상식을 벗어난 형태의 소나무를 보고 놀랐다. 완벽한 ㄴ자로 꺾여 자라고 있지 않은가. 인간 사회에서도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특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보면 식물사회라고 해서 그러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만, 어쨌든 우리의 이목을 끌기에 범상하고 귀한 소나무였다. 차가 고장나서 걸었던 것이 오히려 행운으로 이어졌다면서 웃으니 기분 또한 좋았다. 과정은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보태어 주었다. 목적지인 자작나무숲에 도착했다. “와!” 하는 감탄사가 나와 아내의 입에서 동시에 나왔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웃었다. 아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아내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자작나무 수피는 종이처럼 하얗게 벗겨지고 얇아서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사랑의 글귀를 쓰기도 하는 낭만적인 나무라며 나무 자랑을 늘어놓았다. 사람은 좋아하는 풍광이 있으면 사진으로 추억을 남겨놓고 싶은가 보다. 얼마 동안 나무 감상보다는 사진 찍기에 모두가 여념이 없었다. 모두 산책 코스를 택하여 아늑한 자작나무숲 품속에 안겼다. 아내는 얼마 가지 않아 이곳이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장소라며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나무를 바라보면서 가을 자연의 정취를 만끽하고 싶어 했다. 아내를 남겨두고 숲 전체를 관망하고 싶은 욕망에 혼자 오솔길을 따라 정상의 전망대로 향했다. 눈앞에 펼쳐진 오솔길은 흰색의 피부를 가진 날씬한 몸매의 여인이 줄지어 서서 반겨 주는 기분이었다. 경험해 보지 않고는 이 순간의 기쁨과 즐거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혼자 두고 온 아내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오르다 보니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어 빗방울처럼 땅에 뚝뚝 떨어졌다. 큰 들숨과 날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전망대에 올라섰다. 자작나무숲은 계곡 품에 숨어들어 보이지 않고 산자락 경사면을 기어오르는 일부 숲이 구름 사이로 뚫고 나온 한 줄기 빛에 노랗게 물들어 가는 잎들이 물결치며 물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흰 구름과 푸른 산들이 겹치면서 불룩하게 솟은 산마루, 하늘과 맞닿은 스카이라인이 눈앞에 펼쳐졌다. 풀벌레 소리, 새들의 소리 등 자연의 소리가 들렸다. 시원한 한 줄기 갈바람이 이마와 등줄기 땀을 식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은 떨어지고 있었다. 나무로부터 떠나감의 슬픈 이별이 아닌 나풀나풀 춤을 추며 님의 만남의 발걸음만 같았다. 아내는 자작나무숲 품속에 취하여 잠들고 나는 가을 하늘의 흰 구름과 푸른 산이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풍경에 취해 잠들었다. 함께 늙어가는 평생 반려자로서 서로 다름을 알았다. 오를 때는 발걸음 옮기는 데 몸이 집중했다면 내려갈 때는 쫓는 눈에 마음이 집중되었다. 오를 때는 보지 못한 것을 내려갈 때는 눈에 보였다. 숲길은 조명등을 비추는 것처럼 어둠과 밝음이 교차 되었다. 가을을 맞이하여 오솔길에는 노란 자작 나뭇잎으로 방문객의 발걸음 앞에 뿌려 놓았다. 즈려밟고 가란다. 나무의 배려심에 발걸음은 가볍다. 만지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미안한 마음 가지면서 살며시 몸을 만져본다. 살결은 너무나 희다. 손끝에 닿는 느낌이 매끄럽다. 손을 떼어 보니 흰 가루가 묻었다. 숲속 벤치에 앉아 편안히 눈을 감고 이제 내가 자작나무를 품어본다. 정원에 자작나무를 심고 자라는 모습을 그려 본다. 자작나무는 형태와 살아 가는 모습에서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가장 먼저 새싹을 틔우는 나무로 새로운 시작과 재생, 회복의 상징으로 여긴다. 특히 북유럽에서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나무로 여겨지며, 생명의 순환과 재탄생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무껍질의 하얀색은 여러 신화와 전설,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며, 정화와 깨끗한 에너지, 지혜와 영적인 보호를 상징하기도 한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며, 불리한 조건에서도 강한 생명력을 발휘하여 끈기, 사랑, 희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자작나무가 여성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자작나무는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내면적 성장을 연결하는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한다. 우리 부부는 자작나무숲 길 위에서 인생 삶의 여정에 교훈을 얻고 심신을 위로받는 시간이 되었다. 자작나무 숲 자작나무 가지 위로 하얀 구름의 숨결이 내려앉네. 갈바람이 스친 자작나무숲 노란 잎새가 나풀나풀 춤추며 내려앉네. 가을빛 속에 잠긴 하얀 피부 쓸쓸함과 고요함을 품은 채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순간 노란 가을옷 입고 미소 지으며 춤추네. 가을이 되고 자작나무숲이 되어 나도 따라 웃고 춤을 추네. 영양 죽파리 자작나무숲은... 1993년 산림청과 영양군이 조림한 것으로 국내 최대 규모인 30.6ha다. 가을철 평일 하루 300명, 주말 600명 정도가 방문한다. 주차료와 전기차 이용은 무료다. 전기차는 22명이 정원, 첫 출발은 아침 9시 30분이고 마지막 출발은 오후 3시 30분. 1시간 간격으로 왕복 운행한다. 예약은 불가하고 선착순 탑승이다. 우천시 전기차는 다니지 않는다. 이동 거리는 4.7km, 15분에서 20분이 소요된다. 자작나무 숲길 길이는 1.52km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0-30

“웅진·사비 탈환” 기치 내건 백제 부흥군의 최전방 요새

신라에 선도산이 있었다면, 백제엔 칠갑산이 있었다. 무열왕과 진흥왕 등 여러 명 신라 왕의 유택이 자리했고, 역사적 의미는 물론, 미학적 완결성까지 빼어난 마애여래삼존불이 아래를 굽어보며, 신라의 태동을 알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선도산 성모(聖母)의 설화가 떠도는 곳이 선도산 일대다. 신라, 고구려와 함께 이 땅에서 명멸했던 고대왕국 중 하나인 백제에도 선도산에 필적하는 성스러운 산이 없을 까닭이 없다. 백제 또한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며, 한때 한반도의 절반 가까이를 통치했던 국가였으니. 백제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왜 칠갑산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칠갑산이 있는 충청남도 청양을 향했다. 포항에서 KTX 기차를 타고 대전까지, 대전에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청양군까지. 청양 시내에서 장곡사와 백제문화체험박물관 등이 있는 칠갑산 입구까지는 하루에 6번 운행한다는 시내버스를 이용했다. ◆칠갑산은 백제의 얼이 담긴 천년사적지 사실 칠갑산에 얽힌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가수 주병선의 노래는 귀에 익숙하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베적삼이 흠뻑 젖는다”로 시작하는 유행가다. 산간을 태워 힘겹게 농사를 지었던 화전민의 애달픈 삶이 담긴 가사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불려졌다. 애잔한 곡조로. 하지만, 이번 취재는 노랫말 속 칠갑산이 아닌 백제 역사 속에 스며든 칠갑산의 정체성과 그림자를 찾아가는 길. 먼저 ‘위키백과’를 찾아봤다. 칠갑산에 관한 짤막한 설명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것이다. “칠갑산(七甲山)은 충청남도 청양군에 있는 산이다. 1973년 3월 6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백제는 이 산을 사비성 정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그래서 산 이름을 만물생성의 7대 근원 칠(七)자와 싹이 난다는 뜻의 갑(甲)자로 생명의 시원(始源) 칠갑산(七甲山)이라 경칭해 왔다. 또 일곱 장수가 나올 명당이 있는 산이라고도 전한다. 충청남도의 중앙에 자리 잡은 이 산 동쪽의 두솔성지(자비성)와 도림사지, 남쪽의 금강사지와 천장대, 남서쪽의 정혜사, 서쪽의 장곡사가 모두 연대된 백제의 얼이 담긴 천년사적지다.” 백제 도읍지의 주된 산이며, 나라에서 직접 제사를 올린 산. 거기에 세상 만물이 생겨난 공간으로 여겨 이름을 지은 칠갑산은 멸망한 나라를 되살리려 한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백제부흥운동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역사 속에서 사라진 660년부터 663년까지 왕족과 병사 등이 중심이 돼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던 부흥운동을 뜻한다. 청양 시내에서 점심을 먹은 후 버스를 타고 칠갑산 초입에 도착해 먼 곳을 바라봤다. 가까이 완만한 능선 너머 웅장한 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1400여 년 전 국가를 잃은 백제의 왕과 귀족, 백성들의 슬픈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백제부흥운동의 역사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660년 신라 김유신의 5만 군대는 육로로,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10여 만 군사는 바닷길을 통해 각각 백제를 공격해 왔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충남 부여)으로 쳐들어오자, 백제 의자왕(641∼660)은 태자 효(孝)와 함께 웅진성(지금의 충남 공주)으로 피난하고, 제2왕자 태(泰)가 남아 사비성을 고수했으나 전사자 1만여 명을 내고 패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복신·흑치상지·도침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은 661년 1월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을 옹립하고, 백제부흥운동을 꾀하였다.” 여기까지가 백제가 신라에 병합된 과정과 백제인의 부활 의지를 요약한 것이다. 위의 과정을 거쳐 백제는 700년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다가 온전히 사라졌다. ◆청양은 사라진 백제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 지역 공주대학교 이효원의 논문 ‘청양 지역 백제부흥운동 연구’는 각종 고고학 자료를 검토해 현재의 청양군 일대가 사라진 백제를 되살리기 위한 부흥운동의 본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백제부흥운동 발호 당시 두시원악이라는 이름으로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청양 지역은 부흥운동의 핵심적인 활동이 웅진·사비 지역의 탈환이라는 기치 아래 진행되는 동안 최전선으로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특히 열기현은 직접적인 전장이 된다는 점에서, 고량부리현과 사시량현은 임존성의 배후성이 되면서도 한티·대치 같은 육로나 무한천·지천 같은 수로를 통해 전장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로 쓰인다는 점에서 활약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선도산이 한 고대왕국의 시작을 알리고, 전성기가 어떠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면, 백제의 칠갑산은 침몰하는 배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또 다른 고대왕국을 되살리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던 곳이었다. 가뭇없이 흘러버린 기나긴 세월. 칠갑산에 남아 있는 백제의 흔적을 찾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닐 듯했다. 웅진·사비시대 배후도시였던 청양지역 출토 유물 전시 청양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은 청양 시내에서 자동차로 10분, 버스를 이용해도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깔끔하게 꾸며진 전시실과 각종 문화체험을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거기에 더해 한때 한국 금 생산량의 70% 이상을 채굴한 청양군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금광체험관 등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한국관광공사는 다음과 같이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을 소개하고 있다. “백제시대 토기를 굽는 가마를 형상화하여 만들어졌다. 1500년 전 백제 가마터, 청기와, 최익현 유배도, 공자상 탁본, 황금복 거북이와 같은 5대 명품과 금광체험관, 농경문화체험관, 1960년대 추억의 옛거리 전시관, 한상돈 기념관, 유상옥 기증실, 정승공원으로 구성돼있는 박물관이다. 주말에는 토기 만들기, 나만의 컵 만들기, 백제의복 체험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부여족 계통의 온조 집단이 현재의 서울 지역으로 내려와 세운 나라다. 웅진과 사비는 백제의 수도였던 도시.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의 청양역사실엔 웅진과 사비 시대 왕도 인접 지역인 청양에서 발굴된 도성 내 건축물인 궁궐, 사찰, 관공서에 사용된 기와와 전돌, 토기 등이 다수 전시돼 눈길을 끈다. “백제의 문화가 가장 화려하고 왕성했던 웅진·사비 시기의 수도 배후 도시로서 도성의 건축물에 사용된 기와와 전돌, 왕실과 수도에 거주하는 이들의 사용한 토기 등을 생산해 공급한 장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던 곳이 청양군”이라는 부연도 이어진다. 이외에도 백제문화체험박물관 특별기획 전시실에선 등짐을 지고 조선 팔도를 오갔던 보부상의 유래와 흔적을 살펴볼 수 있고, 과거 1960~70년대 우리의 생활 모습을 재현한 공간과도 만날 수 있다. 부모와 자녀 세대가 함께 보며 이야기 나눌 소재로 그저 그만이다. 농경문화전시관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우리 땅에 존재했던 고대왕국의 하나인 백제의 역사가 궁금한 여행자라면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서의 시간이 즐거울 수밖에 없을 듯하다. /글·사진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4-10-29

'끝없는 비상'으로 만나는 ‘제18회 청송사과축제’

‘산소카페’ 청송군이 사과 수확철을 맞아 풍성하고 다채로운 청송사과축제를 개최한다. 올해 제18회 청송사과축제는 ‘청송사과 끝없는 비상’이란 주제로 오는 30일 청송읍 월막리 용전천(현비암 앞)에서 화려한 막을 올려 11월 3일까지 5일 동안 열린다. 청송군은 이번 축제의 주제에 걸맞게 12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을 수상한 청송사과의 진면목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청송사과 가공품, 사과를 활용한 요리 등을 통해 청송사과의 다양한 모습을 선보일 계획이다. 또한 다양한 연령층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과 용전천 현비암 자연경관을 활용한 야간 경관조성사업이 연계돼 그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축제장을 조성했다. □온·오프라인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축제 축제는 엔데믹 이후 높아진 비대면 프로그램 수요를 반영해 온·오프라인을 병행한 하이브리드 축제로 진행된다. 온라인축제는 지난 1일부터 11월 3일까지 포털사이트 다음(daum)을 통해 청송사과축제 대표 체험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한 게임 4종(청송투어, 도전-사과 선별 로또, 꿀잼-사과난타, 청송퍼즐)을 온라인 게임으로 선보여 축제 형태를 다양화하고 축제 사전 체험을 통해 현장 축제 방문을 유도하고 있다. 또한 새롭게 구축된 축제 전용 홈페이지에서는 축제 관련 다양한 정보와 소통을 연중 이어나갈 계획이다. □저출생극복을 위한 가족 중심의 콘텐츠 대폭 강화 이번 축제에서는 가족 중심의 콘텐츠도 대폭 강화됐다. 경북도와 함께 ‘가족이 행복한 축제한마당’을 개최한다. 이는 저출생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가족 단위 방문객에 맞춰진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가족사진 인화 서비스, 사과 와플 만들기체험 등 가족이 함께 즐기고 참여할 수 있는 콘텐츠들이 추가되어 축제를 방문한 가족들에게 더욱 특별한 경험을 제공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청송사과축제는 단순한 축제 이상의 가치를 지닌,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는 행사로 자리매김할 예정이다. □대표 프로그램 ‘청송사과 꽃줄엮기 전국대회’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청송사과 꽃줄엮기 경연대회’를 전국대회로 확대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시상 훈격 또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확보함으로써 ‘청송사과꽃줄엮기’를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하는 데 한걸음 다가가는 기회를 마련했다. □제18회 청송사과축제 홍보관 운영 210평 규모의 청송사과와 사과 요리, 사과 가공품 등을 전시하는 사과축제 홍보관을 구축했다. 역대 사과왕 화판과 올해의 황금진·사과왕 입상작을 전시하고 스마트 재배 시설 설치를 통해 청송사과의 역사와 선진화된 사과재배 기술은 물론 사과재배 최적지의 자연환경을 동시에 홍보한다. 홍보와 더불어 사과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청송군 우리음식연구회에서 개발한 사과요리를 전시하고 사과바싹불고기, 사과푸딩 등 청송사과와 지역특산물을 활용한 6~8종의 요리 및 디저트도 시식·판매한다. 특히 올해는 특별히 사과존을 조성해 사과탄산주스, 사과식초, 사과마스크팩, 사과 굿즈, 그리고 사과를 활용한 간식류 등을 시식·판매하는 공간을 꾸며 사과축제의 다채로움과 다변화를 추구했다. □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하는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 구성 올해 축제는 청송사과축제의 킬러 콘텐츠인 도전-사과 선별 로또, 꿀잼-사과난타와 만유인력-황금사과를찾아라 등 전 연령이 참여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과 8개 읍·면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호흡하는 ‘청송사과 퍼레이드’를 통해 군민과 관광객 모두가 하나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외에도 축제 기간 동안 제27회 청송문화제, 시니어 한마당, 건강체조 경연대회, 내고장 청송 알기 퀴즈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 또한 소공연장 프로그램으로는 사과 올림픽 3종, 청송 골든벨, 청송군민이 구성하는 재능기부공연 등이 있다. 원산지 표시 위반자 의금부 압송 시연, 제3회 청송황금사과배 전국고교장사씨름대회, 제23회 경상북도지사기 생활체육 보디빌딩대회 등 특별 행사와 더불어 사과·사과즙·사과떡 시식·판매와 무료 차 시음 등의 상설 행사도 마련되어 있어 청송사과축제를 찾은 관광객에게 볼거리와 즐길거리, 차별화된 경험을 선사할 예정이다. □축제장 및 주차장 편의시설 확충으로 관람객 편의 증진 올해는 축제장 편의시설도 크게 개선됐다. 작년 축제에서 관람객들이 많이 몰리면서 화장실과 주차장 시설이 부족하였던 점을 보완해 이동식 화장실 설치와 주차장 확충을 통해 방문객들의 편의를 도모한다. 더불어 축제 입점 부스에 대한 평가 시스템도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시행함으로써 부스 운영의 질을 높이고 고객 만족도를 제고할 예정이다. 윤경희 청송군수는 “올해 청송사과축제는 작년과 비교했을 때 여러 면에서 혁신적인 변화와 발전을 도모했다. 온라인 프로그램 확대와 가족 중심 콘텐츠 강화는 물론, 방문객들이 불편함 없이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편의시설도 대폭 개선했다”며 “청송사과축제가 대한민국을 넘어 글로벌 축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방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김종철기자 kjc2476@kbmaeil.com

2024-10-28

AR 게임으로 즐기는 보물찾기… 미션 속 흥미로운 정보 ‘쏙쏙’

“대구의 진산(鎭山)인 국립공원 팔공산의 가을을 증강현실 게임과 함께 만끽하는 보물 찾기 행사가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경북매일신문이 주최·주관하고 대구시가 후원하는 ‘AR증강현실로 떠나는 팔공산 둘레길 보물찾기’ 행사가 27일 팔공산 갓바위 보은사 입구에서 개최됐다. 1000여 명이나 되는 참여객들로 대성황을 이뤘다. 이번 행사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팔공산의 문화유산과 희귀 동식물, 자연환경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마련됐다. 팔공산 둘레길 방문객은 이번 행사에 참여함으로써 환경과 자연의 소중함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팔공산 둘레길의 가치를 깨닫게 됐다. 행사는 시작부터 열기로 가득찼다. 팔공산 방문객과 등산객들은 둘레길 초입에 있는 안내배너의 QR코드를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 웹앱에 접속한 뒤 둘레길 어플을 설치해 신나는 보물찾기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행사 시작 전부터 갓바위를 오르는 시민들이 안내판을 통해 어플을 직접 다운로드하거나 자원봉사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등산객들은 AR 기술을 활용한 보물찾기 미션에 도전하면서 팔공산의 역사 유적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도 배우며 자연을 탐방했다. 이번 행사에서는 홍보 부스가 한층 더 활기를 띠었다. 팔공산 둘레길 어플을 활용한 다양한 게임 미션들이 등산객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며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특히 링 던지기 게임은 큰 인기를 끌었다. 참가자들은 정해진 목표를 향해 링을 던지며 선물에 도전했다. 이 게임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 성공한 참가자들에게는 멋진 기념품이 제공돼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게임을 즐기는 등산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길게 늘어선 줄은 게임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민들의 표정은 신나고 기대에 찼다. 한 참가자가 링을 던져 성공하는 순간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실패한 사람은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다음 사람에게 차례를 넘겼다. 갓바위 보은사 입구에서는 방문객과 등산객들이 자연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무대 공연이 마련됐다. 사회자의 화려한 입담으로 문을 연 다양한 문화 예술 공연은 참석자들의 기대감을 한껏 높이며 시작됐다. 첫 무대에서는 오카리나와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하모니가 이어졌고, 색소폰과 통기타 연주로 분위기가 한층 더 고조됐다. 특히 지역에서 활동하는 소프라노와 테너의 공연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며 자연 속에서의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색소폰과 장구난타 연주에는 시민들의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무대의 대미를 장식한 트로트 가수 태윤과 차연의 신나는 공연이 펼쳐지며 관객들은 흥겨운 분위기에 푹 빠졌다. 이어 단순하게 둘레길만 탐방하는 것이 아니라 산 곳곳에 흩어진 쓰레기를 담아 봉투에 가득채워오는 참여자들의 모습을 통해 이번 행사는 힐링 걷기는 물론 지구를 살리는 작은 실천에 동참하는 ‘친환경 축제’로 진행돼 호평을 받았다. 행사에 참여한 최정윤(39·경산시 중방동)씨는 “아이들과 함께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신개념 둘레길 체험을 하며 숨겨진 보물과 역사문화 공간을 발견하는 재미를 느꼈다”면서 “위치 기반 서비스를 활용해 구간별 거리와 코스를 설명받으며 안전하게 등산을 할 수 있어서 유익했다”며 엄지를 들어올렸다. 강시원(57·대구 달서구 송현동)씨는 “행사를 통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과 탐험의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며 “앞으로도 이러한 즐거운 행사들이 계속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팔공산은 화강암으로 이뤄진 해발 1192.8m의 산으로 전체 능선 길이가 20㎞에 이르는 산이다. 신라시대부터 기록이 있는 역사·문화적인 곳으로 지금의 팔공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부터 불렸다. 현재 멸종위기동물 15종이 서식하며 그 중 천연기념물로 13종이 지정되는 등 5295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자연생태공원이다. 팔공산 둘레길은 대구 동구와 군위군, 경북 경산시, 영천시, 칠곡군 등을 잇는 16개 구간으로 조성돼 있으며 총 길이 108㎞에 달한다. 팔공산 둘레길 16 구간은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문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갓바위를 비롯한 1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동화사, 초조대장경경을 봉인했던 부인사, 수려한 경관의 수태골 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있다. /장은희기자 jangeh@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0-27

‘아르헨 염수리튬 1단계 준공’ 포스코 홀딩스, 소재보국 실현

포스코홀딩스가 국내 기업 최초로 해외 리튬 염호에서 이차전지소재용 수산화리튬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준공했다. 포스코홀딩스는 24일(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살타주 구에메스(Guemes)시에서 연산 2만 5000t 규모의 수산화리튬 공장 준공식을 열었다. 이는 포스코홀딩스가 계획중인 총 3단계 프로젝트 중 첫 단계로, 100% 광권을 보유한 아르헨티나 리튬 염호의 염수를 활용하며, 고유의 리튬 추출 기술을 적용했다. 원료 분야에 대한 꾸준한 투자 속 국내 공급망 안정화와 소재 분야 글로벌 초일류 기업 도약을 향한 결실을 거뒀다. ◇ 아르헨티나 염수리튬 1단계 준공 이날 준공식에는 포스코홀딩스 김준형 이차전지소재총괄, 황창환 투자엔지니어링팀장, 김광복 포스코아르헨티나 법인장 등 포스코그룹 관계자와, 구스타보 사엔즈 살타 주지사, 라울 하릴 카타마르카 주지사, 카를로스 사디르 후후이 주지사, 루이스 루세로 아르헨티나 광업 차관, 이용수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 등이 참석했다. 수산화리튬은 전기차 등에 탑재되는 이차전지소재의 핵심인 양극재의 주원료로 ‘리튬-양극재-리사이클’로 이어지는 포스코그룹 이차전지소재사업 풀밸류체인의 시작점이자 사업 경쟁력의 한 축이다. 포스코그룹은 해외 염호와 광산에 대한 소유권과 지분을 통해 염수·광석리튬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국내·외 사업장에서 수산화리튬을 생산해 국내 핵심광물 공급망 안정화에 기여한다. 또한 미국의 IRA 등 다양한 조건의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이차전지소재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글로벌 리튬 공급사로서의 입지를 강화해 나갈 방침이다. 포스코홀딩스는 이번 아르헨티나 현지 염수리튬 공장 준공으로 전남 광양 율촌산단에 가동중인 포스코필바라리튬솔루션의 2만 1500t 규모 광석리튬 기반 수산화리튬 공장을 포함해 염수와 광석자원 모두에서 이차전지소재용 수산화리튬 총 4만 6500t 생산 체제를 갖추게 됐다. 김준형 총괄은 기념사에서 “이번 리튬 공장 준공은 포스코그룹이 아르헨티나에서 고부가가치 리튬을 생산하는 중요한 첫 걸음으로, 후속 프로젝트들을 통해 포스코그룹은 글로벌 리튬 산업의 리더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말했다. ◇ 아르헨티나 정부와 리튬 사업 세제 혜택 등 정부 지원 협의 포스코홀딩스 정기섭 전략기획총괄(대표이사 사장)은 지난 6월 12일 아르헨티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루이스 카푸토(Luis Caputo) 경제부 장관을 만나 포스코그룹의 아르헨티나 이차전지용 리튬 사업 협력을 논의했다. 정 사장은 아르헨티나 정부가 추진 중인 ‘대규모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 지원 대상에 포스코그룹의 리튬 사업이 포함될 수 있도록 현지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루이스 카푸토 장관은 인프라 및 인허가 지원을 비롯해, 우호적인 투자 및 사업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포스코홀딩스는 지난 2018년 아르헨티나 살타주 옴브레 무에르토 염호의 광권을 인수하며 100% 자회사인 ‘포스코아르헨티나’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염호 광권 인수 직후에는 추가 탐사를 통해 인수 당시 추산한 220만 t의 약 6배인 탄산리튬 기준 1350만 t의 리튬 매장량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후 염호 탐사와 데모플랜트 운영를 거쳐 지난 2022년 약 8억 3000만달러를 투자해 ‘염수리튬 1단계’ 상·하공정을 착공했다. ◇ 단일 기업 생산능력 기준 최대 규모 염수리튬 1단계 상공정은 살타주 해발 4000m 고지대 염호에 위치해 염수에서 인산리튬을 생산하고, 살타주 구에메스시 저지대에 위치한 하공정에서 인산리튬을 수산화리튬으로 전환한다. 염수리튬 1단계 공장은 포스코그룹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리튬 추출 기술을 적용, 생산에 필요한 부원료의 회수, 재이용이 가능해 유지관리비가 낮은 장점이 있다. 포스코홀딩스의 염수리튬 1단계 공장이 연간 생산할 수 있는 수산화리튬 2만 5000t은 전기차 약 60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양으로 아르헨티나 최초의 상업용 수산화리튬 생산공장이면서 남미 전체를 통틀어 단일 기업 생산능력 기준 최대 규모다. 또한 건설 과정에서는 약 4800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했고, 60개 이상의 지역 협력 업체를 참여시키는 등 현지 지역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포스코홀딩스는 염수 리튬 1단계 준공에 이어 현재 약 1조원을 투자해 2025년 하반기 준공을 목표로 아르헨티나에 연산 2만 5000t 규모의 염수 리튬 2단계 상공정을 건설 중이다. 또한 연산 5만t 규모의 염수리튬 3단계 공장도 적시에 투자해 염수리튬 생산능력 총 10만t을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 칠레 정부와 리튬 염호 신규 개발 의논 포스코그룹은 리튬 매장량 세계 1위인 칠레에서도 리튬 자원 확보에 나섰다. 정기섭 사장은 아르헨티나에 이어 6월 14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광업부 고위 인사와 면담하고 칠레 리튬 염호 개발 관련 협의를 했다. 정 사장은 면담에서 포스코그룹이 리튬자원 개발 등 대규모 투자가 가능한 재무건전성을 갖추고 있고, 아르헨티나 염수 리튬 및 호주 광석 리튬 사업 등을 통해 검증된 리튬 생산공장 건설 및 운영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친환경·고효율 리튬 추출 기술역량에 강점이 있어 칠레 염호 개발에 있어 성공적인 사업 추진의 최적 사업 파트너임을 강조했다. 칠레 광업부 인사는 칠레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해 칠레에서 생산한 리튬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혜택을 볼 수 있다고 설명하며 포스코그룹의 리튬 사업 역량에 관심을 표하고, 현재 입찰이 진행 중인 마리쿤가(Maricunga) 염호와 알토안디노스(Altoandinos) 염호에 대한 포스코그룹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했다. 또한 칠레 광업부는 마리쿤가, 알토안디노스 염호 외에도 칠레 정부가 추진할 예정인 신규 리튬 염호 개발 사업에 포스코그룹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고 강조하고, 포스코그룹에 칠레 내 이차전지소재사업 공급망 확장 투자를 제안하며 정부 차원의 지원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칠레는 2023년 4월 가브리엘 보리치(Gabriel Boric) 대통령이 ‘국가 리튬 전략’을 발표한 이래 국가 주도의 리튬 자원 개발을 추진 중이다. 핵심 전략염호 개발 프로젝트는 정부가 대지분을 갖는 민관협력 방식으로 진행하며, 개발 과정에서 환경 피해를 최소화하는 조치가 주요 내용이다. ◇ 해외 리튬사업 강화 위한 글로벌 행보 가속 포스코홀딩스는 2023년 11월 준공 후 가동중인 연산 2만 1500t 규모의 포스코필바라리튬솔루션 광석 리튬 1공장에 이어, 2024년 내 같은 규모의 2공장 준공을 앞두고 있어, 광석리튬 기반 수산화리튬 4만 3000t 체제를 눈 앞에 두고 있다. 또한 아르헨티나 리튬 염호 인수, 호주 필바라 미네랄스(Pilbara Minerals)사 지분 투자를 통해 염수 및 광석 리튬의 안정적인 수급체계를 갖추고 있다. 특히 포스코그룹은 장인화 회장 취임 이후 이차전지소재사업에 흔들림 없이 투자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7대 미래혁신 과제 중 ‘이차전지소재사업 본원경쟁력 확보’의 일환으로 캐즘(Chasm, 일시적 수요 정체기)에 따른 전기차 시장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성장시장 선점을 위해 리튬 등 원료 부문의 투자는 계획대로 추진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칠레 등 남미의 염호 개발 참여를 검토 중이다. 북미·호주의 광산·자원회사와 협업 등 우량 자원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로 이차전지소재사업 핵심광물 공급망을 더욱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이차전지소재사업의 풀 밸류 체인을 완성해 미래 지속 성장을 위한 기반을 강화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박형남·이부용기자

2024-10-27

“붓 한 자루가 내 삶의 깊은 뿌리”

어린 나이에 고향 영덕을 떠나 서울로 갔고, 동양화 대가의 문하생이 되어 그림을 배웠다. 20대 중반 포항에 정착한 후로 작품 활동에 정진했으며 환갑이 넘어서는 죽도시장과 동학에 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일흔이 넘어서도 풍경 좋은 곳을 오래도록 걸으며 작품 구상을 한다. 문인화가 심관(心觀) 이형수 선생의 이야기다. 창포동에 있는 선생의 작업실과 근처 카페에서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해 들었다. 김도형(이하 김) :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이형수(이하 이) :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고 제자들 가르치는 일로 소일합니다. 시간 나는 대로 포항 이곳저곳을 걷기도 하지요. 김 : 영덕이 고향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 영덕 오십천(五十川)에서 가까운 남석동에서 태어났습니다. 7남매 중 넷째였지요. 부친은 농산물검사소에 다니다가 엽연초 조합에서 퇴직하셨고,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 있는 편이었어요. 김 : 영덕에서 태어난 분들은 오십천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이 : 오십천은 영덕 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입니다. 어릴 때 소쿠리를 들고 오십천에 고기 잡으러 가는 게 큰 즐거움이었어요. 참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뛰놀았지요.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오십천이 범람해 우리 집 과수원이 물에 잠겼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일제강점기에 만든 강구대교가 물에 잠길 정도로 큰 태풍이었습니다. 온 나라에 물난리가 났지요. 이형수 선생은 유년의 기억이 자신의 삶과 작품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유년의 살갗에 새겨진 고향 오십천의 맑은 물과 바람, 모래벌판의 풀잎과 나뭇잎, 종달새의 영롱한 소리가 내 몸과 마음속에 늘 남아 있습니다. 살다 보니 기쁨보다는 어렵고 바람 부는 날이 많았습니다. 힘든 삶을 아름답고 영롱한 유년의 추억으로 위안을 삼기도 했습니다. 나무가 뿌리의 힘으로 거센 바람을 견디듯이 붓 한 자루가 내 삶의 깊은 뿌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 이형수 ‘심관 이형수의 수묵편지’, 서예문인화, 2015, 3쪽. 김 :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이 : 1958년에 영덕초등학교(현 영덕야성초등학교, 1911년 개교)에 입학했고 2학년 때 서울 신설동에 있는 안암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큰형(1939년생)이 경희대 한의대 전신인 동양의과대학에 다녔는데, 큰형을 따라 서울로 간 것이지요. 김 : 어린 나이에 서울로 가셨군요.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 : 큰형 덕분에 어릴 때부터 한문을 익힐 수 있었지요.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 한문 공부를 하면서 인문학의 기본적인 소양을 기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큰형은 내가 그림에 재주가 있어 보였는지 나를 한국일보 주최 미술대회에 데리고 갔어요. 그 덕분에 그림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습니다. 김 : 중학교 시절이 궁금합니다. 이 : 1964년에 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광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평안남도 출신 한경직 목사가 세운 대광중학교는 미션스쿨이었습니다. 대광중학교에서 『성경』을 접한 것도 인문적 소양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공부는 꽤 잘하는 축에 들었습니다. 정치인 김한길이 2학년 때 같은 반에 다녔어요. 그런데 중2 때 큰형이 갑자기 병에 걸려 충격을 받았고, 그러면서 사춘기에 접어들었지요. 그때 운명처럼 그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제운이 운영하는 성균서예학원에서 이철주 화백한테 수묵화 중 난초 그리기의 기초를 배우면서 그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김 : 일반적으로 어릴 때 그림을 배우면 수채화나 유화를 접하게 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문인화를 접하게 되었습니까? 이 : 그 이유를 딱히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 왠지 수묵의 세계에 끌렸습니다. 김 : 그 후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 중3 때 이당 김은호 선생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선생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지요. 편지에 매화 소품 한 점을 동봉했습니다. 김 :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이당 김은호 같은 대가에게 편지를 보낼 생각을 했는지 놀랍군요. 이 : 대광고등학교에서 3년 전액 장학생으로 오라고 했지만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규 교육과정을 접고 대가의 문하생이 되어 그림을 배우고 싶었지요. 동양화를 접하면서 이당 선생의 명성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용기를 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김 : 답신이 왔던가요? 이 : 얼마 지나지 않아 답신을 받았습니다. 한번 찾아오라고 하시더군요. 종로3가 비원 쪽(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선생 댁을 찾아가 큰절을 했더니 그날부터 당신의 수발을 들면서 그림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김 : 정규 교육과정을 포기하고 도제식 공부를 하게 된 거군요. 큰 결단이었을 텐데 집에서 반대하지는 않던가요? 이 : 반대는 안 했지만 밥벌이가 되겠느냐며 걱정하셨지요. 김 : 이당 문하에 들어가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이 : 선생이 바깥나들이 할 때 모시고 나가고 잔심부름도 했어요. 선생이 작품 구상에 필요해 고등어를 사 오라 하면 시장에 가서 고등어를 사 왔지요. 김 : 이당 주변에 유명한 화가가 많았겠습니다. 이 : 오죽 많았겠습니까. 이당 선생 문하에 있으면서 운보(雲甫) 김기창, 혜촌(惠村) 김학수, 오당(吾堂) 안동숙, 유천(柳泉) 김화경 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을 만날 수 있었지요. 김 :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었겠습니다. 이 : 이당 선생의 작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작품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선생에게 감정을 의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가짜가 많았어요. 선생의 작품을 비싸게 매입한 사업가가 사업이 어려워져서 작품을 팔려고 감정을 부탁했는데 작품이 가짜여서 낭패를 보기도 했습니다. 김 : 이당의 작품은 고가였겠지요? 이 : 메이란팡(梅蘭芳)이라는 중국의 유명한 경극 배우가 있었는데, 이당 선생의 작품 중 메이란팡을 그린 큰 작품이 있었어요. 가로 3미터, 세로 4미터 정도 되었을 겁니다. 그 작품을 삼성 이병철 회장이 갖고 가면서 백지수표를 건넨 기억이 납니다. 김 : 이당 문하에서 공부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서화의 세계에 ‘체본(體本)’이라는 게 있어요. 배우는 사람이 따라 쓰거나 그리게 하려고 가르치는 사람이 써 준 글씨나 그림을 말하지요. 이당 선생은 세밀함이 특징인 북종화(北宗畵)의 대가였습니다. 이당 선생에게 처음 받은 체본이 참새였는데, 참새를 정밀하게 그리려고 애썼지요. 그런데 내가 어려서인지 그 화풍이 갑갑하게 느껴지더군요. 김 :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이당 선생 문하에서 1년이 지날 무렵에 더는 안 되겠다 싶더군요. 방향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종화(南宗畵)에서 명성이 높은 옥산(沃山) 김옥진 선생을 찾아가기로 했지요. 옥산 선생의 작품은 먹색과 운무가 좋았거든요. 김 : 이번에도 편지를 보냈나요? 이 :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북가좌동 32번 버스 종점 앞에 댁이 있었지요. 인사를 드리고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이당 선생에게 허락을 받고 오라고 하셨어요. 김 : 이당 선생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이 : 뜻대로 하라고 선선히 말씀하시더군요. 이형수는… 1952년 경북 영덕군 남석동에서 태어나 영덕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해 안암초등학교와 대광중학교를 졸업했다. 마 지막 어진(御眞) 화가인 이당(以堂) 김은호와 남종화의 대가인 옥산(沃山) 김옥진 문하에서 동양화를 배웠다. 1976년 포항에 정착한 후 네 번의 개인전과 세 번의 초대전을 국내외에서 가졌으며, 2015년과 2017년에 ‘심관(心觀) 이형수의 수묵 편지’를 냈다. 뒤늦게 검정고시를 거쳐 동국대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한국서가(書家)협회 초대작가가 되었고, 한국서가협회 수석 부이사장과 경북지회 초대 지회장을 지냈다. 경북문인화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871 영해동학혁명 기념사업회 고문으로 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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