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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3대 시장’ 부조장 명성 이어받아 연일지역 전통시장으로 우뚝

포항에서 고대사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가 ‘근기국’(勤耆國)의 실체다. 3~4세기 동해 소국들이 신라에 복속되기 전 포항에는 바로 근기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소국의 실체에 대해선 자료에 간헐적으로 등장하고, 체계화된 연구도 없어 각종 사료에 편린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철기시대를 막 벗어날 무렵 국가 단계는 아니지만 꽤 큰 정치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은 지역의 정체성과 관련해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 근기국의 위치에 대해서 학계에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연일설(延日說)’이 다수설로 인정받고 있다. 연일은 지금 포항 남부의 소도시로 큰 존재감이 없지만 연일이야말로 한때 일개 국가를 일군 터전, 왕경 터였다는 사실만으로 도시 자존심을 세우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오늘 방문할 포항의 전통시장은 바로 이 근기국의 전통을 이어받아 시민들에게 생활 경제를 펼치고 있는 연일시장이다. 옛 왕조의 터에 시장을 열어 서민 경제를 든든하게 지탱해주고 있는 연일시장으로 들어가 보자. ◆근기국 왕경 터는 오천, 연일읍 일대 다음은 연일 지역과 근기국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자. 사학계에서는 근기국의 왕경터를 옥성리고분군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왕족, 귀족의 대규모 장례시설이 있는 곳이면 그 일대가 수도 기능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견해도 있다. 대표적인 분이 향토 사학자 배용일 전 포항문화원장이다. 배 원장은 근기국의 읍터를 오천읍 고현리(현재 원리, 원동) 일대로 보고 있다. 이곳은 포항의 젖줄인 형산강과 냉천 사이 중심에 위치해 있고, 동해와 내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배 원장은 근기국이 바로 이 고현, 연일읍, 오천읍, 대송면 일대에 왕경을 형성했다고 보고 있다. 고현성 반경 5km 내 고분군, 지석묘, 건물 터 등이 집중 분포한 점도 소국의 존재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근기국은 기원전을 전후한 시기에 소국을 형성했다가 신라가 동해 남부 맹주로 부상하면서 주변의 약소국들을 병합할 때 압독국(경산), 골벌국(영천) 등과 함께 경주 세력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근기국 멸망 당시 신라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진 연오랑세오녀의 스토리는 다음 오천시장 편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조선 동해 3대시장 부조장 전통 계승 연일은 동쪽으로 포항시와 철강산업단지를, 서쪽으로는 경주시 강동면, 남쪽으로는 대송면 공수리, 북으로는 학전-달전리와 접하고 있다. 옛날부터 교통이 발달해 조선시대 역원(驛院)의 하나였던 대송역(大松驛)이 장기를 거쳐 경주와 연결되었고, 형산강의 옛 포구를 이용한 해운도 크게 성했다. 삼국시대부터 지금의 시군격인 현(縣)이 설치됐고 한말엔 8면(面) 102개 리(里)를 거느릴 정도로 읍세를 자랑했다. 근대 기록에도 ‘현청(縣廳) 북쪽에 큰 어시장이 있어 동해안의 관문 역할을 했다’고 나와 있다. 지금도 전체 지도를 보고 놓고 볼 때 지리적으로 포항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혹자들은 철도를 형산강 남쪽으로 유치했다면 연일이 포항시 중심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시청사가 있는 대이동, 포항공대가 있는 효곡동이 모두 연일의 관할이었을 정도다. 연일시장과 관련해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부조장’(扶助場)과 관계다. 조선시대 3대 시장으로 불리며 동해안 유통, 상업의 중심지였던 부조장은 현재 경주와 포항의 경계인 경주시 강동면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경상도 읍지에 의하면 ‘영일만, 형산강 지역엔 윗 부조장과 아래 부조장 두 곳의 장시(場市)가 개설되었다. 아랫 부조장은 연일읍 중명리 일대에서 1750~1905년까지 융성했다’고 기록돼 있다. 부조장터에서는 함경도 명태, 강원도 오징어, 포항의 청어·소금을 내륙에 팔고, 전라·경상도의 농산물을 교역하는 등 상거래의 요지 역할을 했다. 부조장의 상권과 전통은 연일시장으로 이어져 300년 가까이 그 상맥(商脈)을 이어가고 있으니 그 자체로도 포항 경제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셈이다. ◆1970~80년대 장꾼, 우마차, 리어카 북적 연일시장이 개장한 건 1968년으로 인근 죽도시장의 설립과 비슷한 시기다. 당시 연일읍의 인구가 20만 명이었으니 생필품 조달지로써 시장이 절실하던 때였다. 당시 형산강 이북 포항시의 인구가 6만 명에 불과했으니 유동인구는 오히려 연일시장이 많았던 셈인데, 당시 죽도시장은 신도시 개발붐을 타고 포항의 대표시장으로 발돋움하던 시기였다. 어쨌든 두 시장은 1960년대 포항의 신, 구도심을 양분하며 형산강의 남북에서 전통시장 상권을 주도해 갔다. 인구 팽창에 따른 사설(私設) 시장으로 영업을 계속 해오던 연일시장은 2011년에 들어와서야 포항시가 인정하는 관인(官認)시장으로 인정 받게 된다. 1905년까지 부조장의 상권과 전통을 이어받은 덕에 1970~90년대 연일시장은 여타 전통시장과 마찬가지로 전성기를 이뤘다. “당시 장날엔 나뭇짐, 장작부터 토끼, 닭, 오리, 한약재까지 모든 물산들이 시장에서 거래됐습니다. 농민들은 집에서 재배한 배추, 무 등 각종 채소와 참외, 수박, 복숭아 등 각종 과일을 광주리에 실고와 팔고는 옷, 농기구, 신발 등 공산품과 바꾸어 갔습니다.” 조영만 상인회장은 1970~90년대 시장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장날 지게꾼, 짐꾼, 리어카, 우마차가 몰려들어 난전을 통과하는데 큰 애를 먹었지만 당시엔 그게 시장 풍경이었고, 장터의 낙(樂)이었다. 한때 포항 상권을 양분할 만큼 큰 위세를 자랑했던 연일시장의 현재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우선 이농현상으로 인해 유동인구가 줄었고, 특히 젊은층의 전통시장 외면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4~5곳이나 들어선 대형마트, SSM, 연쇄점 등도 전통시장 상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엇보다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죽도시장이 위치해 주민들 상당수가 연일대교를 건너 큰 시장으로 향하고 있다. 조영만 상인회장은 “주민들이 지역 시장을 외면하고 타지로 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며 “이분들의 발길을 붙잡아 두는 것이 절실한 과제”라고 말한다. 이에 상인회에서는 3, 8일에 열리는 전통오일장에 큰 기대를 걸어 보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유동인구가 적으니 노점상들이 잘 오지 않고, 거래가 시원찮으니 한두 번 오던 행상들도 다른 곳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부추 먹거리 개발 등 특성화 사업 추진 현재 연일시장은 3만여㎡ 부지에 150여개 점포가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상인회는 2015년 ‘1시장 1특색’의 특화사업을 육성하는 ‘골목형 시장’에 선정돼 지역 특산물 먹거리 특성화 사업을 진행했다. 상인회는 연일의 특산품인 부추, 시금치와 연계한 음식, 식품을 개발해 먹거리 골목을 조성했다. “옛날 연일은 전국 부추시장의 20%를 점유할 정도로 막대한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이에 상인회에서는 부추전, 부추통닭, 부추국, 부추빵, 부추두부 등 먹거리를 개발해 관광객들에게 꽤 인기를 끌었습니다.” 조 회장은 시장 특성화 사업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또 매년 10월에 형산강 둔치에서 열리는 ‘연일 부조장터 축제’도 상인회가 역점을 두는 행사다. 연일시장 정체성의 근거, 상권의 뿌리가 되는 행사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시장을 대표하는 축제로 육성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일시장은 현재 주차장 편의시설 확충과 입간판 정비 등 시장 현대화 작업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 사업이 마무리되면 시민들이 쾌적한 공간에서 쇼핑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조 회장은 “고대에 근기국의 왕경 터를 이루고, 근대에 부조장 터의 상권을 이어받은 연일시장이 포항 남부의 유통, 상업 도시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 달라”고 강조했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10-24

고령군 中企 글로벌시장 향한 첫걸음… 새로운 기회 ‘활짝’

고령군 중소기업이 베트남·태국 판로 개척의 문을 열었다. 최근 고령군은 “관내 중소기업 베트남 태국 시장 판로 개척을 통한 글로벌 강소기업 육성을 위해 추진한 베트남·태국 수출상담회가 성황을 이뤘다”고 발표했다. 고령군에 따르면 지난 7일부터 5박6일간 해외무역사절단은 수출상담 87건, 상담금액 2284만7500달러(원화 약 307억원)의 성과를 거뒀다. MOU 체결건수도 22건, MOU 체결금액은 645만달러에 이른다. 베트남 해외투자청, 태국 투자청 방문을 통해 고령군 중소기업 해외 진출 네트워크 또한 구축했다는 평가다. KOCHAM(베트남 한국상공인연합회) 경제교류를 위한 업무협약도 체결됐다. 고령군 우수기업의 베트남 진출 지원과 지역 우수제품·농식품의 공동 컨설팅 등 협력의 길이 열린 것이다. 베트남 최대 한국 식품 유통업체 K-마켓과 수출 지원을 위한 업무협약 역시 이뤄졌다. 농특산물 및 가공식품의 베트남 시장 진출 지원방안이 마련됐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고령군 해외무역사절단은 aT한국농수산식품공사 태국지사와 KOTRA 방콕무역관도 찾았다. 이는 태국-한국간 수출입 동향 및 한국 농식품의 태국시장 수출 전략을 모색하고, 태국 내 유통채널과의 정보 교류를 위해서였다. 아래에서 고령군이 이번 방문을 통해 수확한 성과와 관련 세부 사항을 하나씩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베트남·태국 수출상담회 큰 성과 이뤄내 고령군은 지난 7일부터 12일까지 관내 중소기업 10개 업체와 함께 베트남, 태국 시장 판로 개척을 위해 해외무역사절단을 파견했다. 무역사절단에는 이남철 고령군수 등 공무원 8명과 고령군의회 김기창 성낙철 의원, 관내 중소기업 10개 업체 등 총 21명 참가했다. 7일엔 베트남 해외진출기업인 해원산업 현지공장인 해원비나를 방문해 견학을 시작으로 베트남 하노이, 태국 방콕에서 현지 상담회를 개최했다. 그 과정에서 참가기업과 해외 바이어간 수출 상담도 진행했다. 참가업체는 (주)지산타포린, 해원산업(주), 이엔비무역, 다산주철, 대림팜스, 엠스푸드, 밥달라스, 주식회사 에스디, (주)삼정특수고무, (주)나호테크 등 10개 기업이었고, 가공식품, 1차금속(자동차부품), 타포린 및 고무롤 등 종합품목 전반을 상담 대상으로 했다. 고령군은 베트남과 태국에서 개최된 2번의 수출상담회에서 수출상담 87건, 상담금액 2284만7500달러의 성과를 거뒀다. 기업간 MOU 체결건수는 22건이었고, MOU 체결금액은 645만달러였다. 해외무역사절단은 베트남 수출상담회에서 현지 바이어와 1대1 맞춤상담 등을 진행해 실적 내실화를 도모했다. ◇고령군 중소기업 해외 진출 네트워크 구축 고령군은 기업의 해외 진출 네트워크 구축과 신뢰 형성을 위해 베트남 해외투자청과 태국 투자청(BOI)을 방문했다. 베트남 해외투자청과의 미팅을 통해 한국기업 진출에 대한 인센티브 및 지원내용 등을 파악했고, 고령군 기업의 베트남 진출시 베트남 해외투자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로 했다. 태국 투자청 미팅을 통해서는 태국의 경제 현황과 대내외 투자 계획, 투자 인센티브 등의 정보 교류와 고령군 문화관광과 산업경제 현황을 홍보하는 유익한 만남을 가졌다. 향후 고령군 우수기업의 베트남 진출 지원 및 지역 우수제품과 농식품의 공동 컨설팅 분야에서도 적지 않은 성과를 이뤘다. 고령군은 주베트남 한국상공인연합회(KOCHAM·회장 홍선)와 경제교류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도 체결했다. 협약식에는 이남철 군수와 김기창, 성낙철 군의원, 김종태 고령군상공협의회장과 주베트남 한국상공인연합회 윤휘 부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고령군 우수기업의 베트남 진출 지원과 우수제품과 농식품의 공동 컨설팅, 인적자원 교류 등에 대해 앞으로 긴밀히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베트남 현지에서 136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베트남 최대 한국식품 유통업체인 K-마켓(회장 고상구)과 수출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K-마켓 본사 물류센터에서 진행된 협약식에는 이남철 군수, 김기창, 성낙철 의원, 김종태 고령군상공협의회장, K-마켓 신영화 총괄사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무역사절단 참가기업인 엠스푸드(냉동피자), 밥달라스(김), 이엔비무역(신선식품 등)은 제품 홍보 및 시식행사도 열었다. 참석자들은 이날 협약식에서 고령군 우수 농특산물과 가공식품의 베트남 수출 확대 및 유통 활성화를 위해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K-마켓은 2002년 설립돼 베트남 현지에 136개 매장을 운영 중이며, 임직원 수는 1800여명에 이른다. 베트남 최대 규모의 한국 식품 유통회사인 것이다. ◇글로벌 강소기업 육성을 위한 의미 있는 첫걸음 이번 고령군 무역사절단의 해외 방문에선 태국-한국간 수출입 동향 및 한국 농식품의 태국시장 수출 전략, 태국 내 유통채널 등에 대한 활발한 정보 교류도 있었다. “aT한국농수산식품공사 태국지사와 KOTRA 방콕무역관을 방문해 태국-한국간 수출입동향 및 한국 농식품의 태국시장 수출 전략과 태국 내 유통채널 등에 대한 폭넓은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이 고령군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향후 고령군은 태국 내 K-푸드의 인기에 힘입어 고령군 우수 농특산물과 가공식품의 태국시장 진출 또한 적극 모색할 계획이다. 해외무역사절단 파견을 통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뤄낸 고령군은 앞으로도 고령군 우수기업 및 제품의 해외시장 판로를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갈 계획이다. 이와 관련해 이남철 군수는 “고령군 중소기업이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발돋움하는데 의미 있는 첫걸음을 떼었다”며 “K-마켓과의 업무협약 등을 통해 고령군 농특산물과 가공식품의 베트남·태국 시장 진출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비전을 밝혔다. /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4-10-24

“인물이 역사고, 역사가 인물이다”

김일광 작가는 윤봉길, 윤선도, 링컨 등 역사적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꾸준히 써왔다. 그뿐 아니라 포항을 중심으로 한 주요 인물들, 이를테면 근대 한의학의 선구자인 석곡 이규준, 항일 의병부대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 동남제도 수호검 배상삼, 인간 상록수 재생 이명석 등에 관한 책을 펴냈다. 작가는 왜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꾸준히 다뤄왔는지, 그 이유와 배경을 들어보았다. 이희정(이하 이) : 선생님은 역사 속 인물, 특히 우리 지역의 인물 이야기를 계속 쓰셨습니다. 그중에는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도 있지요. 김일광(이하 김) :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 이야기는 아픈 손가락입니다. 2021년 현북스에서 출판되었는데 최세윤의병대장기념사업회가 있지만 이 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당시 의병들이 흥해 사람인데도 말이지요. 기념사업회 사업도 지지부진해서 안타까워요. 흥해 지진 복구 사업으로 주민종합시설을 건립하고 있는데, 여기에 최세윤기념관과 포항시 의병기념관을 세우면 좋겠습니다. 나라마다 나름대로 자랑거리를 갖고 있다. 나에게 우리나라 자랑거리를 들라면 가장 먼저 ‘시민사회’를 꼽고 싶다. 어떤 사람은 짧은 기간 안에 우리가 시민사회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우리 역사를 들여다보면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세우려는 노력을 쉼 없이 펼쳐왔음을 볼 수 있다. - 김일광, 「작가의 말」,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 현북스, 2021. 이 : 포항 장기면은 송시열과 정약용 등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는데요, 장기에 조선시대 군마 목장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김 : 2011년에 발간된 『조선의 마지막 군마』(내인생의책)도 공을 많이 들인 책이었습니다. 《고래가 숨 쉬는 도서관》이라는 잡지에서 권두 좌담으로 일제강점기 구룡포 장기목장이 폐목되는 과정과 구룡포와 호미곶 일대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아동문학 평론가 김혜원은 「치열하고 성실한 글이 주는 즐거움」라는 글에서 김일광의 작품세계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이야기의 한 축인 장기목장을 포함한 영일만, 포항, 구룡포 일대에 대한 일제 침략 과정은 작가의 성실함을 바탕으로 매우 견고하게 전달된다. 조선에 군마를 훈련시키는 장기목장이 있었고, 그곳에서 훈련받던 많은 말이 일본군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포항 토박이다. 그는 이미 발표한 『귀신고래』나 『강치야, 독도 강치야』 같은 책에서, 향토사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다. 이 책 『조선의 마지막 군마』도 그런 맥락에 기반을 두었다. 군마를 키우던 장기목장은 일제 침략 이후 황폐해져 말의 도망을 막기 위해 쌓아놓은 산성의 흔적만 남겨놓고, 시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작가는 이렇게 사라진 기록을 찾기 위해, 당시 생존자들을 만나 그들의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고금산에 말뚝이 박히며 피가 흘렀다는 이야기, 일본 배의 침몰과 등대 건설에 관한 이야기들이 그들의 기억에 의해 사실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자기가 있는 땅에 대한 애정, 사실에 기반을 둔 조사의 철저함, 그것을 남들에게 알리고 싶은 열정이 이 작가의 강점이다. 이 : 선생님의 작품에는 역사적 인물과 이야기 속 주인공이 공존하는데, 지역사의 자료로도 가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김 : 『바위에 새긴 삼봉이』(봄봄출판사, 2017)는 장한상 수토사(搜討使)의 행적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울릉도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며 사진 자료를 풍부하게 확보했지요. 동화에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는 기행문 형식으로 『독도 가는 길』(현암사, 2017)이라는 책에 담았습니다. 이 : 울릉도와 독도 이야기를 풀어낸 동화 중에 강치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김 : 2014년 일본의 전직 초등학교 교사인 스기하라 유미코(杉原由美子)가 『메치가 있던 섬』이라는 동화책을 냈어요. 이 책은 강치(‘메치’는 일본 지역 방언)와 일본 어린이들의 우정을 다뤘는데, 독도 인근의 강치가 한국 어부의 무분별한 포획으로 멸종되었다는 거짓말을 담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이 책의 전자도서를 전국의 초·중학교에 배포한 것은 물론,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지요. 제가 『강치야, 독도 강치야』(봄봄출판사)를 2010년에 냈는데, 2019년 우리 외교부에서 영문판 『Where are you, Gangchi』 3000부를 발행해서 외국 주재 한국어학당이나 교포 단체에 배포했습니다. 동화를 통해 독도 분쟁이 점화된 사례지요. 독도 강치는 독도를 중심으로 우리 동해에서 살았던 바다사자의 한 종류입니다. 독도 주변에는 오징어를 비롯하여 물고기들이 참 풍부합니다. 쉴 자리도 있어서 그야말로 강치가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지요. 그래서 강치는 오랜 옛날부터 독도에 자리를 잡고, 울릉도나 동해안 뭍에서 고기잡이하러 오는 어부들과 평화롭게 살아왔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겼던 20세기 초부터 일본 어업회사가 고기와 기름, 가죽을 얻으려고 강치를 무참히 죽였습니다. - 『강치야, 독도 강치야』, 봄봄출판사, 8쪽, 2010. 이 : 등단 40년을 맞은 소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김 : 가수 송창식은 매일 네 시간씩 기타를 잡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저도 매일 원고를 쓴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감일을 넘긴 적이 없어요. 항상 작품을 쓰고 있기에 언제든 보낼 수 있어요. 이오덕 선생한테서 정신적 자세를 배웠고, 손춘익 선생한테는 부지런함을 배웠어요. 두 분은 중앙지에 상금 사냥꾼처럼 응모하지 말고 창작에 전념해서 좋은 작가가 되라고 하셨지요. 호미반도의 산길은 달빛이 내리면 모두 바다로 향한다. 웅크리고 있던 바위들도 어둠 한 자락씩 감아들고 바다로 간다. 관목 숲 끝에는 키 낮은 곰솔들이 길 떠날 채비를 한다. 달빛이 그 옛날 목부들이 쌓아올린 석축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그 돌덩이들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면 수백 년 전 말을 기르던 목부들이 깨어나서 파도 소리에 몸을 뒤척인다. 달밤, 숲으로 들어선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달그림자를 늘어뜨린 한 그루 곰솔이 된다. 그렇게 모두 한마음으로 달빛 길을 걷는다. - 『호미곶 가는 길』, 단비, 140쪽, 2019. 다무포 해안에서는 ‘고래의 바다’라고 불릴 만큼 고래가 많았던 동해를 보았다. 바로 그곳에서 한국계 귀신고래의 멸종 연유도 들려주었다. 고래가 사라진 텅 빈 다무포 해안을 내려다보는 학생들의 표정은 안타까움 그대로였다. - 앞의 책, 137쪽. 이 :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호미곶으로 오는 길이 기쁨으로 벅찼습니다. 고래를 기다리는 집 서경와)의 잔상이 오래 남을 듯합니다. 김 : 한반도 끄트머리 호미곶의 청록빛 바다와 일렁이는 보리밭의 조화를 보노라면 생명의 신비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눈이 부시게 푸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는 서정주의 시구가 떠오르는군요. 인터뷰 내내 함께했던 인연들이 아슴아슴 떠오르면서 그리워질 만하지요. 소중하지 않은 인연이 어디 있으며, 귀하지 않은 생명이 따로 있을까요. 먼저 글을 쓴 선배로서 후학들에게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려고 합니다. 그들의 길을 열어주고 그들과 함께 고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요. 대담·정리 : 이희정(시인) 사진 : 김훈(작가) 끝

2024-10-23

연못 둘러싼 노거수들 순흥도호부 흥망성쇠 지켜본 산증인

긴 무더운 여름 날씨도 가을이라는 계절을 맞이하여 몽니를 부려 보지만, 끝내 힘을 잃고 꼬리를 내린다. 더위와 함께 하늘을 짓누른 무거운 뭉게구름도 걷히고 청명한 하늘에 가벼운 새털구름이 우리의 짓눌린 마음을 꿈틀거리게 한다. 시원한 갈바람이 불 때면 우리는 어디론지 떠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이를 이용한 각 지방자치 단체는 지역의 먹거리, 볼거리 행사를 개최하여 사람들로 욱적북적거린다.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이지만, 북적이는 사람들과 얄팍한 상혼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이럴 때 여름 더위에 쌓였던 심신의 피로를 풀고자 한다면 호젓한 자연에서 힐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영주 순흥면 옛 도호부 관아의 정원을 찾았다. 당시의 건물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그 유물과 산 증인 노거수만은 남아 나의 허전한 마음을 다잡아 주고 채워주었다. 오늘날 더위 못지않게 복잡다단한 사회의 고단한 삶에 새로운 에너지 창출을 위해 힐링은 필수이다. 옛날 우리 조상은 생활 터전의 가까운 장소에 연못을 조성하고 주변에 나무를 심어 정원을 조성했다. 그리고 그곳에 정자를 짓고 정신적 풍류를 즐겼다. 오늘날 힐링의 일종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소생태계, 즉 인공적인 작은 자연을 조성했다. 그곳엔 무더위와 강한 햇볕도 부드럽게 공손해지고 시원한 그늘은 덩달아 따라온다. 바람도 찾아와 솔가지와 나뭇잎을 흔들어 시원한 휘파람 소리를 낸다. 푸른 개울물이 봇도랑으로 물고기 가족을 데리고 들어오고 하늘의 빗물이 연못에 내려앉으면 나비, 개구리, 오리, 왜가리, 갈대, 수련 등 자연의 생명체들이 찾아든다. 정원의 녹색 나무와 숲이 우리의 이성을 찾아주고 정원 숲과 연못에 찾아오고 또 살아가는 생명체로 하여금 우리의 감성을 일깨워준다. 정자에 앉아 정원의 사계절 풍경을 보고 감상하는 것만으로 이성과 감성을 오가면서 오감을 느끼고 즐길 수 있다. 이 얼마나 한가하고 평화로운 힐링의 장소가 아닌가. 이뿐일까?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듯이 정원에 들어서면 문학과 음악, 예술적 영감이 우리의 단조로운 삶을 풍요롭게 살찌운다. 정원은 우리 삶을 살찌우는 화수분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지금은 영주시 순흥면사무소로 그 명칭이 순흥면 행정복지센터로 되어 있지만, 경내에는 연못, 숲, 봉도각 정자 등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우리 조상 삶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었다. 먼저 경내로 들어서니 우람한 느티나무 노거수가 맞이하고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내리니 또 다른 건장한 느티나무와 연리송(連理松)이 마중했다. 연리송은 만나기도 어렵지만, 그 나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상징성은 다른 어떤 물체보다 강렬하게 우리를 압도한다. 주민들도 연리송을 길수(吉樹)와 비파송(琵琶松)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연리지는 보통 동종 간, 이종 간에 가지가 서로 융합되어 있는 경우가 가끔 있으나, 이곳의 연리송은 두 수간이 용처럼 굽이치면서 연리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다. 주민들은 두 가지의 금실이 좋다 해서 ‘금송송(金松松)’이라고 불렀다. 그뿐만 아니라 소나무 수형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미적 감각에 놀랐다. 쭉 뻗어 올린 미인의 몸매에 아래로 처진 가지의 곡선미와 푸른 잎은 나에게 겸손의 미덕으로 다가왔다. 잘 다듬어진 담장 따라 머리와 양손이 떨어져나간 석불입상(石佛立像), 지방관 선덕비, 순흥도호부 초석, 순흥척화비 등 역사적 유물이 세워져 있었다. 지방관들의 선정비는 비가림막도 없이 가을비를 맞으며 서있었다. 부서진 모서리는 세월의 탓인지 아니면 비석치기 탓인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삼권을 손에 쥐고 주민들을 쥐락펴락했을 권력이 권력의 보검을 놓는 순간 하나의 돌비석이 되어 공적을 몇 자의 글로 전하고 있었다. 반면에 민초의 정려비는 비가림막의 정자를 세우고 매년 마을의 주민이나 집안의 후손이 경배하고 보살피고 있는 것을 볼 때면 권력의 무상함을 느꼈다. 순흥도호부 시절의 건물에 사용되었던 주초석과 비석좌대 그리고 누각석은 나를 슬프게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비 5백여 명이 국권 회복을 위해 항거하자 일본은 군사를 투입해 의병에 동조한 순흥부를 없애고 1907년 11월에 고을을 방화했다. 그로 인하여 관아와 석빙고, 고가 180여 호가 전소되고 고을의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이러한 지난 역사적 사실을 눈으로 보고 나이테에 기록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산증인으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얼마나 속이 상하고 분통이 터졌으면 텅 빈 속을 하늘로 까발려 놓았을까. 나이 420살의 증인 느티나무 노거수는 유비무환의 자세가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계단을 딛고 올라서니 정원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봉도각(鳳島閣)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뜻의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에 따라 둥근 모양의 연못에 단을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좌측의 연못은 사각형을 이루었고 북쪽에 돌다리를 놓아 정자로 출입하고 있었다. 조덕상(趙德常) 순흥부사가 건립하였다고 하는 봉도각의 ‘봉도(逢島)’란 신선이 산다는 봉래(逢萊)를 뜻한다. 당시 관원, 아전들의 휴식소로 삼았다고 한다. 정원의 주변에는 죽헌남정광기념비(竹軒南政廣記念碑), 애국지사 최봉환 선생 추모비(愛國志士崔鳳煥先生追慕碑)를 비롯하여 순흥 경로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경로소는 조선시대 때는 약국의 기능을 하며 ‘경로국(敬老局)’으로 불리다가 그 후 지역의 어르신들이 모여 각종 대소사, 가문의 다툼, 이웃의 분쟁 등을 해결하는 곳으로 이용되어 향촌 제도의 기능을 수행하며 400여 년을 이어 온 전국 유일의 ‘경로소(敬老所)’라고 한다. 정원의 주인은 왕버들이 아닌가 싶다. 왕버들 한 그루는 나이 400살, 키 20m, 가슴높이 둘레는 6m를 훨씬 넘었다. 또 다른 한 그루는 펑퍼짐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일어서지 못하는 장애인으로 보였다. 잘려 나간 줄기며 속이 텅 빈 모습에서 아픈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듯했다. 지금으로부터 270년 전 1754년 관아 뒤편의 정원을 조성할 때, 왕버들은 이미 130살이라는 나이를 먹었다 하니 왕버들을 그대로 둔 채 연못과 정자의 위치, 방향, 모양을 결정하고 다양한 수종의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얼마나 우리 조상들은 나무를 보호하고 사랑하였는지 그 슬기로움을 엿볼 수 있다. 연못 주변의 왕버들과 소나무, 느티나무 노거수들은 순흥도호부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산 증인으로서 지방행정의 관청에 서서, 지역 주민의 끈기와 정신, 역사와 문화를 전해주는 살아 숨 쉬는 문화재이다. 순흥 봉도각 연비어약(鳶飛魚躍) 내용은... 惡侯玉弩(슬피옥찬) 산뜻한 구슬 안엔黃流在中(황류재중) 황금 잎이 붙었네.豐弟君子(기제군자) 점잖은 군자 남게復寧協陵(복녕협릉) 복과 녹이 내리네.鳶飛戾天(연비려천) 솔개는 하늘을 날고魚躍于淵(어약우연) 고기는 연못에서 뛰네.豐弟君子(기제군자) 점잖은 군자 남게遹不作人(하부작인) 어찌 인재를 잘 쓰지 않으리. “솔개가 하늘에 날고 고기가 연못에서 뛴다”라는 성군(聖君)의 다스림으로 세상이 조화롭고 정도(正道)에 맞게 운행된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0-23

경산의 미래 먹거리 ‘임당 유니콘파크’ 젊은 인재 유혹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경산이 관광자원과 천혜의 자원이 부족함에도 경북 3대 도시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지역 산업을 견인한 산업단지와 지역에 산재한 기업들, 10개를 넘어선 대학들과 부설 연구소 등 젊은 피의 수혈에 지속적인 인구 증가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지역의 성장에는 젊은 층의 지역 거주와 일자리 창출이 필요하다. 경산에는 지역의 산업지도를 바꿀 것으로 기대되는 하양읍과 와촌면 일원에 조성 중인 경산지식산업지구, 유치 가능성이 구체화 된 대형 프리미엄 쇼핑몰, 여기에 압량읍 일원에 조성될 임당 유니콘파크 등은 지속으로 느는 상주인구처럼 젊은 인재들의 지역 거주를 가능하게 해 지역발전을 기대하게 한다. 이 중에서도 경산의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는 주요 자원인 임당 유니콘파크를 살펴본다. □ 지식산업센터와 창업 열린 공간 임당 유니콘파크는 임당역에서 영남대역을 연결하는 지식산업센터(1만 846㎡)와 창업 열린 공간(9417㎡) 등 창업벤처 기관의 집적공간으로 ICT 창업벤처와 기업 지원 기능이 특화된 미국의 실리콘밸리나 판교테크노밸리와 같은 벤처창업 활성화 지구를 조성해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애초의 ‘경산 미래융합타운’에서 브랜드 네이밍 공모를 통해 이름이 붙여졌다. 임당 유니콘파크라는 네이밍에는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스타트업 기업을 전설 속의 동물인 유니콘에 비유해 지역의 창업기업들이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의미가 있다. 임당 유니콘파크의 거점 역할을 할 경산 지식산업센터 사업이 지난 2020년에, 2021년 창업 열린 공간 사업이 이례적으로 잇달아 중소벤처기업부의 국가 공모사업으로 선정되며 지역을 견인할 사업이 되었다. 총사업비 995억 원(국비 286억 원)을 투입해 지하 2층, 지상 6층, 전체면적 2만 1720㎡ 규모로 2026년 완공 예정인 창업 열린 공간과 지식산업센터는 120여 개의 기업 입주 공간과 다양한 기업 편의시설을 마련해 쾌적한 업무 환경을 제공하며 160대를 주차할 수 있다. 설계 공모작을 바탕으로 건축 중인 창업 열린 공간과 지식산업센터는 건축물을 달리하지만, 중앙에 서로를 위한 공간이 배치되며 외부에서는 일체형이다. 지상 1층은 코위킹 스페이스, 이벤트홀, 카페 등의 입주기업 편의 공간이 조성되며 지상 2층은 입주기업의 성정을 돕는 다양한 창업지원 기관과 협업 기관의 사무공간이, 지상 3층부터 4층은 입주기업 전용공간이다. 지상 5층은 현재 대구대학교에 있는 42경산이 이전해 SW 고급 인력 양성과 기업협업의 공간으로 특화되고 6층은 여가와 문화가 공존하는 복합공간으로 조성된다. 창업 열린 공간(스타트업파크)에는 ICT 융합과 미디어, 자율주행, 모빌리티 등 디지털 융합 기술 기반 스터트기업이 우선 입주해 창업자의 꿈을 실현한다. 지식산업센터에는 유망중소기업 기업부설 연구소와 중견기업 사내 벤처기업이 우선 입주 대상이다. □ 창업 생태계 조성 경산시는 특성화 분야가 뚜렷한 12개의 대학과 다수의 (연구)출연 기관, 9개의 산업단지와 뿌리산업에 기반을 둔 3400여 개의 제조업이 있어 산업성장을 위한 풍부한 인적자원과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시는 지역 내 창업문화 확산과 벤처창업 붐 조성을 위해 경일대와 대경대, 대구대, 대구가톨릭대, 대구한의대, 영남대가 참여하는 ‘경산 벤처·창업 네트워크’를 구축해 창업 열린 공간을 구심점으로 지역 내 창업문화 확산과 지역 창업 생태계 활성화를 지원한다. 이를 통해 대학마다 2~3개 사의 유망 창업기업을 발굴·육성하고 지역의 창업보육공간과 지원사업의 정보를 공유하는 온라인 창업플랫폼도 구축한다. 또 11월에는 경산 창업포럼을 개최해 벤처·창업기업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지역 창업생태계 활성화 방안을 모색한다. 이를 통해 지역 창업 관계기관이 보유한 산재한 인프라와 창업지원 정보를 통합적으로 제공해 정보 활용을 효율화하고 창업 과정의 불필요한 낭비를 최소화한다. 유망기업의 발굴과 유치, 임당 유니콘파크 입주기업의 자금을 위한 경산 제1호 펀드(대성 투게더 청년창업 투자) 250억 원을 대성창업투자(주)를 통해 운용한다. 경산 제1호 펀드는 2022년 중소벤처기업부 모태펀드 출자사업에 선정돼 모태펀드 100억 원을 확보했다. 투자대상은 청년창업자(60% 이상 투자)와 지방기업(20% 이상 투자)이다. 경산시는 한발 더 나아가 경산 제2호 펀드(경사 챌린지 유니버스 창업펀드) 60억 원으로 경산의 3년 이내 초기창업기업과 연 매출액 30억 미만의 기업을 지원한다. 운용사는 (주)대경기술지주와 와이앤아처(주)로 2024년 중소벤처기업부 모태펀드 출자사업에 선정돼 모태펀드 30억 원을 확보했다. 또 경북도와 6개 시, 금융기관, 기업이 참여하는 ‘지스타 경북의 저력 펀드’로 170억 원의 자금을 조성해 지원할 예정이다. □ 경산 ICT 산업 활성화 미래산업 페러다임 변화에 따라 지역산업 생존을 위해 고부가가치 산업인 ICT 산업으로의 전환이 지역 산업에 절실하다. 경산시의 ICT 산업의 활성화 추진 전략은 지식산업센터와 창업 열린 공간 등의 창업벤처기관의 집적공간과 기업 지원 특화구역을 대상으로 한다. 창업 열린 공간에는 3년 이상 창업기업이 대상이고 AI, 의료, 바이오 등 디지털 융합 기술 기반의 스타업이 분산된 창업 기능을 집적화해 창업자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다양한 공간을 구축한다. 지식산업센터에서는 ICT 및 연구소 기업 등이 입주한다. 이를 통해 초기창업부터 성장기업 연계 시너지 효과로 유니콘 기업을 창출한다. 창업 열린 공간과 지식산업센터 5층에 입주할 42경산 이노베이션 아카데미의 역할은 임당 유니콘파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프트웨어 인재를 양성하고자 설립된 42경산 이노베이션 아카데미는 대구와 경북지역, 부산, 울산, 경남지역의 교육 수요를 감당하며 부산대와 유니스트 등을 전략 지역 전담 대학으로 지정해 연대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42경산은 청년 인재를 양성해 창업과 기업 유치의 선순환 체계를 구축할 중심에 있다. 이와 함께 위에서 거론한 펀드조성과 지역 창업 협력 네트워크 구축 등이 경산시의 ICT 산업 활성화의 바탕이다. 조현일 경산시장은 “임당 유니콘 파크는 경산 발전의 두 축이었던 대학과 자동차 부품산업을 살리는 최적화된 도시발전전략으로 기업들을 위한 세금과 규제 혁신을 위한 특구 도입과 혁신과 기업가 정신의 문화 조성을 위해 다양한 정책적 지원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조 시장은 또 “42경산에서 배출되는 인재가 임당 유니콘파크와 연계해 지역 기업에 취업하고 창업하는 선순환 생태계를 조성하고 청년의 정주 여건 개선과 투자생태계 구축, 창업문화 구축 등으로 기업을 경영하기 좋은 도시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4-10-22

통일 앞둔 신라의 거대 불사 이끈 무열왕

먼저 아주 먼 나라 이야기 한 토막. 현재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로 불리는 탈레반이 통치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그곳 바미안주(州)에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부처의 형상이 있었다. 이름하여 ‘바미안 석불’. 그 바위 불상이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고, 누가 폭탄을 터뜨려 파괴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 같다. 불상을 포함한 바미안 석굴사원은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 산맥의 암벽을 파서 만들어졌다. 절벽 양쪽 끝자락에 커다란 불상이 조각돼 있었다. 서쪽 불상은 높이 55m, 동쪽에 자리한 불상도 38m 높이로 크기부터가 사람들을 압도했다. 통상은 서쪽 불상이 대중적으로 더 인지도가 높았다. 각종 서적과 신문 기사에 의하면 바미안 불상은 아프가니스탄이 불교 문화권이었던 6세기에 만들어졌다. 그리스 조형미술에 영향 받은 간다라 양식의 불상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도 등장한다. 이는 유서 깊은 불교 유산이라는 의미. 그런데, 2001년 바로 이 바미안 석불이 먼지로 사라진다. 탈레반에 의해 폭파된 것이다. 1996년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통치하게 된 탈레반은 이슬람 교리를 이유로 ‘형상을 가진 우상의 숭배’를 일체 금지한다. 부처의 모습을 한 석상도 이 교조적 정책을 피해가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 내 불교 유적지의 대부분이 로켓포에 의해 형체도 없이 파괴됐다. KBS를 포함한 한국의 방송사는 바미안 석불이 탈레반의 포격으로 부서지는 장면을 TV 화면으로 가감 없이 보여줬다. 비단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류의 공동자산이라 할 유물이 역사 속으로 허망하게 사라지는 모습에 경악했다. 아직도 우리들 기억 속에 선명하다. ◆서라벌 서악의 불상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무열왕릉과 진흥왕릉 등 여러 기의 왕릉이 산재했고, 선도산 성모라는 신라의 태동을 알린 여신의 설화가 전하는 경주 선도산엔 신라가 불교왕국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유물이 우뚝 서 있다. 마애여래삼존불 혹은, 아미타삼존불입상 등으로 불리는 돌에 새긴 부처의 형상이다. 이와 관련된 문화재청의 요약된 설명을 읽어보자. “선도산 정상 가까이의 큰 암벽에 높이 7m나 되는 거구의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여, 왼쪽에 관음보살상을,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상을 조각한 7세기 중엽의 삼존불상(三尊佛像)이 서있다.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지닌 아미타여래입상은 손상을 많이 입고 있는데, 머리는 완전히 없어졌고 얼굴도 눈이 있는 부분까지 파손되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뺨, 턱, 쫑긋한 입의 표현은 부처의 자비와 의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취재를 위해 3~4차례 찾아간 경주 서악 선도산 일대. 마애여래삼존불의 미학적 완성도는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불을 뛰어넘는 것 같았다. 크기는 작지만 섬세함과 치밀한 바위 조각 기술은 신라 석공들의 빼어난 솜씨를 미루어 짐작하게 했다. 인터넷 공간을 떠도는 흑백사진 한 장도 눈길을 끌었다.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에 촬영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엔 아미타여래입상 앞에 선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보인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사진 속 사내는 현실 바깥 피안(彼岸)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화재청은 이 사진 속 석불들이 아름다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미타여래입상의 넓은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웅장한 체구는 신체의 굴곡을 표현하지 않고 있어 원통형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범할 수 없는 힘과 위엄이 넘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묵직해 보이며, 앞면에 U자형의 무늬만 성글게 표현하였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비의 관음보살은 내면의 법열(法悅)이 미소로 스며나오는 우아한 기풍을 엿보게 하는데,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다룬 데 없는 맵시 있는 솜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본존불에 비해 신체는 섬세하며 몸의 굴곡도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준다는 대세지보살은 얼굴과 손의 모양만 다를 뿐 모든 면에서 관음보살과 동일하다. 사각형의 얼굴에 눈을 바로 뜨고 있어서 남성적인 힘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마애여래삼존불이 가진 특징과 미학적 완성도 마애여래삼존불(아미타삼존불입상)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던 시기의 불상 조각으로 본존불은 높이 7m, 관음보살상은 높이 4.55m, 대세지보살은 높이 4.62m로 파악되고 있다. 크기와 규모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미안 석불에 밀리지만, 예술성 측면에선 결코 뒤지지 않는 이 불상은 특징이 적지 않다. 흥미로운 사실까지 섞여 있다. 아래는 명지대 미술사학과 최선아 교수의 논문 ‘신라 陵墓(능묘)와 추선 佛事(불사): 서악동 고분군과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의 한 대목이다.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마애여래삼존불)은 여러 면에서 이례적이며 특별한 존상이다. 우선 본존과 협시(夾侍·좌우의 보살상)를 안산암과 화강암이라는 서로 다른 석재로 조각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도 주목했듯 이처럼 別石(별석·각기 다른 돌)으로 삼존을 구성한 것은 거의 유례가 없다. 더욱이 본존을 이루는 안산암은 경도가 높아 가공하기 어려우며, 상의 현재 상태에서도 확인되듯 쉽게 균열이 생겨 불상 제작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석재다.” 본존불만이 아니다. 옆에 선 보살상은 재료가 된 석재가 인근에서 발견되지 않기에 ‘대체 어디에서 돌을 가져왔으며, 어떤 방법으로 산 정상부까지 무거운 석재를 옮겼을까’라는 의문을 부른다. 이에 관해 위의 논문은 이런 부연을 덧붙이고 있다. “보살상을 이루는 화강암은 한반도에서 석불을 제작한 이래 꾸준히 사용한 석재로, 신라에서도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의 제작 이전부터 화강암으로 불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안산암으로 이루어진 선도산 일대에서는 화강암이 전혀 산출되지 않기 때문에 두 보살상은 다른 곳에서 채석해 온 돌로 만든 것이다. 해발 약 390m에 달하는 선도산 정상까지 화강암 석재를 옮겨와 높이 4.5m에 달하는 보살상 두 구를 만들었다는 것은 상의 제작에 상당한 노동력과 기술이 수반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마애여래삼존불, 누가 무슨 이유로 세운 것인지… 그렇다면 이 세 불상은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만든 것일까? 이 의문에 ‘나무위키’는 “마애삼존불상은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통일신라 초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국보 제109호)의 본존,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의 본존과 매우 흡사하다”고 간략하게 답한다. 이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걸 알고 싶다면 ‘신라 陵墓(능묘)와 추선 佛事(불사): 서악동 고분군과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 논문은 7세기 전반과 650년 전후, 그리고 661~663년 등 그간 다양한 의견이 제시돼온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의 제작 시기를 능묘의 조영과 관련하여 쓴 글이다. 논문의 국문초록(國文抄錄)을 아래 인용한다. “불상의 지리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산의 정상에 6m가 넘는 대불을 조성할 당위성이 가장 높은 시기로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시기, 즉 무열왕 재위기(654~661)를 제시했다. 여기에는 선도산이 6세기 전반 법흥왕 이래 신라 중고기 왕의 능역으로 사용되었지만, 7세기 전반에는 왕릉의 입지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 그러나 654년 김춘추의 즉위 이후 다시금 왕의 능역으로 선택되었다는 점이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생전에 수릉을 축조하는 관례와 문흥대왕으로 추존된 김용춘의 묘를 이장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선도산을 다시 능역으로 선택한 것을 무열왕대로 추정했으며, 산의 정상에 그 아래 왕릉들을 조망하는 방향으로 대형의 아미타상을 세운 것 역시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았다…(후략)” 만약 이런 추정에 힘이 실린다면 무열왕 김춘추는 삼국통일의 주춧돌을 놓은 동시에 통일을 앞둔 신라의 거대 불사를 이끈 왕으로 다시 한 번 이름을 높이는 셈이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0-22

불가능을 가능으로… 제철산업 변화 이끈 팀워크의 힘

“우리 기술로, 2열연공장 RM 전동기 수리 기간을 6개월에서 나흘로 당겼습니다.” 제철 설비는 거대하고 정밀해 다양한 기술이 결합한 종합 예술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설비는 모두 전기 에너지로 움직이며, 신경망처럼 구성돼 있다. 이러한 거대하고 복잡한 설비를 구동하는 에너지원은 전력기반 설비이다. 우리의 기술을 정립했다는 자부심은 조직의 단결력을 높여 업무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했다. 성공 사례를 통해 제철소 내부에는 새로운 업무에 도전하는 조직 문화가 확산했다. ‘나’가 아닌 ‘우리’라는 이름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낸 손병락(65) 1호 포스코 명장의 인생길을 따라가 본다. -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맡은 업무는. △1977년 4월, 처음 포스코에 입사해 본격적인 철강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입사 후 전기수리과에 배치되자마자 제강공장 화재 사고 복구에 투입되면서 전기 설비와의 인연을 맺었다. 현재 전력기반설비 중 발전기, 전동기, 변압기 등 주요 전자기기의 투자 설치 관련 기술 검토, 설비 유지관리 및 설비, 정밀 절연 진단을 통한 잔존 수명 예측 및 수명 연장 기술 연구 개발 등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새로운 기술을 현장에 적용해 설비 경쟁력을 향상하고, 다양한 설비의 국산화 개발과 설비 표준화를 통한 경쟁력 확보에도 힘쓰고 있다. 이 외에도, 후배 양성을 위한 기술 전수 활동과 어렵게 취득한 기술의 사장 방지를 위해 기술 형식지화 작업도 진행 중이다. - 업무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2000년 어느 날, 포항제철소 2열연 공장의 RM 전동기가 소손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우리의 기술로는 수리가 어렵다고 판단해 일본 엔지니어에게 긴급 기술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엔지니어가 “한국에는 장비, 자재, 인력 등의 문제로 일본에서 수리를 진행해야 하고 6개월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당시 우리의 기술을 적용해 수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차피 6개월이 걸린다면 1~2일 늦게 출발해도 전체 공정에 큰 영향이 없으니 이틀만 우리에게 시간을 달라고 상사에게 요청했고, 팀원들을 설득하여 도전해 보기로 했다. 무모함이 통했는지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포스코가 가지고 있는 장비와 재료, 기술 인력의 부족함을 극복하며 수리 작업을 시작했다. 일본 엔지니어들도 우리의 방법과 기술에 가능성을 보았고, 회사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놀랍게도 6개월이 걸린다는 수리를 단 4일 만에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회사는 안정적으로 생산 계획을 유지할 수 있었고, 동일한 고장 복구 작업의 새로운 표준을 만들게 됐다. 수리품이 현장에 설치돼 정상적인 압연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보고 많은 격려와 칭찬을 받았다. 그날 퇴근길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뿌듯했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나를 웃음 짓게 한다. - 현장 관리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조직원의 건강과 안전이다. 가정과 직장에서 모든 일이 안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조직원이 안전하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안전기준을 준수하고 부족한 부분을 함께 채워주는 것이 관리자의 역할이다. 이 외에도 중요한 것들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렵지만, 내 기준에서 보면 첫째, 올바른 가치관을 통해 조직이 바르게 설 수 있도록 하는 윤리성이 중요하다. 둘째, 끊임없는 소통으로 조직을 하나로 뭉치는 화합의 기술도 필수적이다. 셋째, 조직원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더 큰 목표를 만들어내는 수용성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넷째, 지속적인 자기 계발을 통해 업무를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는 기술력과 다섯째,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기 위한 공동의 꿈을 제시하고 지속적인 혁신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건강 악화로 인생 최대 위기를 겪었다고 들었다. 어떻게 극복했는지. △47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하면서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겪었다. 때로는 질책과 시기도 있었고, 격려와 행복, 보람도 있었다. 항상 일에 대한 자부심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는 긍지를 가지고 업무에 임했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자면, 일이 아닌 건강 문제였다. 건강에 자신이 있었기에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날, 의사로부터 대장암이라는 진단 결과를 들었을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자녀가 학업과 국방의무 중이었고, 연로한 부모도 자립이 어려운 상황에서 한 집안의 장남이자 가장으로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던 일을 후배 직원들에게 나누어 맡기기는 했지만 걱정만 들었다.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정말 고맙게도 회사와 동료들은 내가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주었다. 수술을 마치고 퇴원하던 날, 건강 회복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당시 팀장은 “건강을 회복하고 자리를 지켜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어 달라”고 말해주었다. 그 순간, 나는 눈물이 쏟아지며 나를 믿어주는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낫고 말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됐다. 지금은 치료와 철저한 관리를 통해 행복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나를 살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포스코에서 근무하며 ‘자율권이 넘치는 일터’라고 생각했다고. △포스코의 일하는 방식이 대단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회사는 내가 제안하는 방법이나 새로운 기술의 적용에 대해 항상 실행할 기회를 주었다. 수많은 도전과 수많은 실패가 있었지만, 상사들은 그런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도전할 힘을 주곤 했다. 실패 뒤에도 질책보다는 항상 격려가 먼저였고, 질투보다는 협조가 있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나는 언제나 해보고 싶은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특히 힌남노 복구작업 당시 부소장에게 전동기 복구 방안을 보고했다. “인력, 예산 고민하지 말고 손 명장 계획대로 진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아무리 명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라도, 고졸 명장에게 사운이 걸린 일을 일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현장에서 일에 대한 자율권이 주어지는 신뢰를 만들어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현장 문화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스코를 이끌어준 자랑스러운 선배들이 있었고, 나도 자연스럽게 그런 선배가 됐다. - 명장으로서 후배 양성과 기술 전수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명장이 된 후, 철강기술대학 및 포스코 신입사원 교육 등 다양한 곳에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처음에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차세대 제철소의 기둥이 될 젊은 후배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자 나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후배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그들이 다음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과정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야 한다. - 인생철학과 비전이 있다면. △세상은 꿈꾸는 사람들이 만들어 간다. 누구에게나 꿈은 있다. 작게는 개인의 발전에서 크게는 인류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무한한 꿈을 꿀 수 있다. 혼자 꾸는 꿈은 달성하기 어렵지만, 함께 이루는 꿈이라면 달성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우리는 꿈꾸는 만큼 성장하기에 꿈이 커야 그 꿈이 깨지더라도 큰 조각이 남는다. 세상은 꿈꾸는 사람들이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우리 모두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 그러나 조금 늦었다고 포기하거나, 실패했다고 좌절하거나, 해봤는데 어렵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고 멈추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유에도 쉽게 포기하지 말고 끈기있게 추진해야 한다. 혁신하고자 하면 언제나 실패와 좌절은 뒤따른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실수를 무서워하거나 질책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혁신은 언제나 모험의 연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뒤에 숨어있는 협동, 격려, 칭찬, 배려 등을 찾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늦은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고 멈추는 것이야말로 진정 두려운 것”임을 잊지 말고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 끊임없이 다가오는 위기와 기회 속에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대하는 것이 좋을까. △인류 역사상 어렵지 않았던 시대는 그 어느 때도 없었다. 오늘날의 현실이 정말 어렵고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야 하지도 않고, 입을 것이 없어 벗고 살지도 않는다. 지금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 세월은 분명 지금보다 더 어려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것도 나와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련을 극복하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분명 우리는 지금보다 더 멋진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 손병락 설비담당 포스코 명장은 △포항공업고등학교 전기과 졸업△올해의 포스코인(2004년)△철의 날 철강기능인(2010년)△포스코 명장(2015년)△대한민국우수숙련기술인(2016년)△경북도 최고장인(2016년)△철의 날 동탑 산업훈장(2020년)△포스코 상무 신규 선임(2023년)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10-20

소외된 이웃들의 굴곡진 삶을 품어내

그래서 동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뿌리 뽑힌 사람들인데, 그 가난한 이웃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상살이입니다. 어두운 이야기가 많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의 삶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자리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포항 운하는 복원되었어도 물길과 함께 사람들의 삶이 복원되지 않아 아쉽습니다. 이 작품은 죽도 어시장과 섬안들, 칠성강의 판타지를 다루었지요. 표지 그림이 재미있고 독특합니다. 웹툰 작가가 그렸는데 판매로 이어지지는 못했어요. 한 권의 책을 내는 과정에는 못다 한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40권이 넘는 책을 낸 김일광 작가한테는 수많은 사연이 있을 터이고, 그 사연을 엮어도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바다』부터 『말더듬이 원식이』, 『엄마의 바다』, 『귀신고래』 등 작가의 주요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희정(이하 이) : 선생님의 첫 번째 동화집 『아버지의 바다』는 “열아홉 편의 그만그만한 길이와 그만그만한 가슴의 이야기들로 엮어진 동화집”이라고 임길택 시인은 말했지요. 김일광(이하 김) : 여기서 ‘그만그만하다’는 말은 진실한 삶에 깃든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시장통으로, 바다로, 산으로, 들길로 다니며 만난 많은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래서 동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뿌리 뽑힌 사람들인데, 그 가난한 이웃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상살이입니다. 어두운 이야기가 많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의 삶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자리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 : 『아, 여우다』의 주인공은 몸도 약하고 덩치도 작아서 동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외톨이입니다. 혹시 선생님의 어릴 적 이야기를 담은 작품인지요? 김 : 어린 시절 이야기를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으나 어릴 때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없어요. 몸이 약해서 혼자 놀 때가 많았지요. 그러면 혼자 놀았던 이야기도 좋다고 해서 쓰게 된 이야기입니다. 집 주위 뱀 이야기, 눈밭의 여우 이야기, 상념이 많았던 외로운 아이의 이야기가 내장되어 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만큼 그 심심한 시간에 나는 활자 속으로 빠져들어 그들과 어울렸다. 책 읽기는 몸을 부딪칠 염려도 없고, 달리기처럼 꼴찌에 대한 창피함도 없었다. 책 읽기는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놀이였다. - 『호미곶 가는 길』, 단비, 44쪽, 2019. 이 : 많은 작품 중에 아픈 손가락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 : 2010년 봄봄출판사에서 나온 『아기염소 별이』 라는 작품인데, 납북 어민들의 후손 이야기를 다루었어요. 군사정부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조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간첩으로 핍박을 받고 정치의 희생양이 되고 말지요. 그림이 아쉬워서 그림 작업을 다시 해서 개정판을 냈습니다. 이 : 책을 통해 만난 독자와의 인연이 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독자가 있는지요? 김 : 2007년 봄봄출판사에서 『순둥이』라는 동화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집에서 키우던 개 이야기인데, 태어난 새끼들을 하나씩 분양해 보내는 이야기가 담겼어요. 2010년에 개정판이 나왔지요. 볼로냐상을 받은 김재홍 화가가 포항에 와서 모델이 된 개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어 그림으로 형상화했습니다. 책이 나오고 몇 년 후 서울 답십리에 산다는 어떤 할머니가 어렵게 연락처를 수소문했다면서 전화를 했어요. 『순둥이』를 읽고 우울증을 극복했다고요. 젊어서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세 아이를 양육한 분이더군요. 당시 대문 바깥은 이리와 늑대가 우글거리는 밀림처럼 캄캄했다고 회상하며 그 험한 세월을 견디고 아이들을 출가시키고 나니 우울증이 왔다고 해요. 그런데 동화 속 강아지처럼 다시 본래의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이 자신을 일으켰다고 했어요. 그 할머니는 동화가 자신을 치유했으니 후속작을 써달라고 했는데 쓰지 못했지요. 내 동화가 누군가를 치유했다는 사실을 독자와 공유할 수 있어서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이 : 선생님은 일찍부터 소외된 이웃과 다문화 가정의 이야기에 주목해왔습니다. 김 : 『물새처럼』(우리교육, 2004)은 다문화 가정 이야기 세 편을 싣고 있는데, 이오덕 선생이 제 원고를 갖고 있다가 발간을 해주셨습니다. 『외로운 지미』(현암사, 2004)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을 그린 이야기고요. 『따뜻한 손』(낮은산, 2006)은 한 버스 운전기사의 하루를 통해 약하고 보잘것없는 생명을 사랑하며 사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일깨우는 내용입니다. 원제목은 ‘겨울밤 이야기’였는데 출판사에서 제목을 바꾸면서 표지 그림도 바뀌게 되었어요. 그림을 그린 유동훈 화가는 인천에서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는데, 판화도 잘하는 분입니다. 이 : 『말더듬이 원식이』는 30년 만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습니다. 김 : 전교조 해직 교사들이 모여서 우리교육이라는 출판사를 만들었지요. 김명수 시인이 원고를 보내달라고 해서 서광출판사에 보내고 남은 원고를 수정해 보냈어요. 『말더듬이 원식이』는 기존의 동화와 성격이 다릅니다. 일하는 사람들, 일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노동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동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조금은 무거운 의미를 탐색한 작품이지요. 이 : 『교실에서 사라진 악어』(우리나비, 2016)는 표지 그림이 기발해 보입니다. 선생님이 내신 기존 책들과는 이미지가 다르군요. 김 : 포항 운하는 복원되었어도 물길과 함께 사람들의 삶이 복원되지 않아 아쉽습니다. 이 작품은 죽도 어시장과 섬안들, 칠성강의 판타지를 다루었지요. 표지 그림이 재미있고 독특합니다. 웹툰 작가가 그렸는데 판매로 이어지지는 못했어요. 이 : 선생님의 작품은 거의 우리 지역의 사람들과 자연, 생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김 : 『산에서 피는 꽃』(통큰세상, 2014)은 수도산이 배경이고, 『아주 특별한 돌, 석탄』(교원, 2015)은 잠자리가 독수리만 하던 오래된 과거의 환상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사라진 산』(봄봄출판사, 2016)은 내연산 옆 샘재 지역을 배경으로 가족이 길을 잃었다가 다시 뭉치게 되는 이야기고요. 『울고 있는 숲』(단비, 2020)도 자연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지혜의 몸짓과 소리를 나누어보자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 : 구룡포 해녀 이야기가 눈길을 끕니다. 김 : 《포항문학》 편집장이었던 권선희 시인은 구룡포에 살고 있어서 그곳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지냈어요. 어느 날 권선희 시인이 구룡포 강사리의 해녀 할머니를 만나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할머니를 만나러 두부 두 판과 소주를 사 들고 경로당을 찾았습니다. 할머니 풍채가 건장했어요.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결혼했는데 소박을 맞고 강사리 어부를 만나 결혼했다더군요. 전처소생 넷과 자신이 낳은 자식 넷까지 모두 여덟 명을 키우며 살아온 할머니의 일생이 기구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뼈대로 쓴 작품이 『엄마의 바다』(우리교육, 2008)입니다. 이 : 선생님의 인생 책이라면 동화 『귀신고래』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 : 그렇지요. 권선희 시인이 포경선 용운호의 선장이었던 김준기 옹의 구술을 기록한 녹취문을 《포항문학》 23호(2003)에 실었어요. 이 녹취문을 토대로 쓴 작품이 『귀신고래』(내인생의책, 2008)입니다. 2021년에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이 : 『귀신고래』에 실린 그림이 독창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작업실 ‘서경와’에 있는 원화 작품들도 인상적입니다. 김 : 『귀신고래』에 실린 그림은 연필로 그린 세밀화가 백미입니다. 장호 화백이 초등학교 3학년 딸을 데리고 와서 호미곶의 풍광을 보고 느끼며 그린 작품이지요. 대전 한밭도서관, 포항 포은중앙도서관,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원화 전시회가 열렸어요. 동화책의 원화를 전시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하더군요. 이후 장호 화백이 연필화의 아쉬움이 남았던지 『아! 여우다』의 삽화를 유화로 그렸습니다. 『귀신고래』의 그림을 그릴 때는 유화 물감을 감당할 형편이 안 되었거든요. 이 : 동화책은 서사도 중요하지만 그림이 주는 효과도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의 바다』에 실린 강요배 화가의 그림이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김 : 제주도 그림으로 유명한 민중화가 강요배는 처가가 포항 오천이에요. 포항문협 회장을 역임한 최부식 시인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이 많습니다. 강요배 화가가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을 때 제 동화책을 최 시인이 갖고 가서 이야기를 잘한 덕분에 제주의 달이라는 대작을 최 시인이 사들였지요. 이 때문에 제주도가 술렁거렸다고 하더군요. 그림은 훗날 제주도 미술관에서 인수했습니다. 『어머니의 바다』를 그려준 화가가 『조선의 마지막 군마』의 표지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어요. 책을 통한 화가들과의 인연이 소중합니다. 대담·정리 : 이희정(시인) 사진 : 김훈(작가) 김일광은… 1952년 12월 포항 남구 섬안에서 태어나 포항고등학교와 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했다. 1984년 창주문학상 동화부문을 수상했고,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에 당선되었다. 40년 가까이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아버지의 바다’를 비롯해 동화와 청소년소설 등을 40여 권 발간했다. ‘귀신고래’는 스페인어로 번역되었고, ‘강치야, 독도 강치야’는 영어로 번역됐다.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장과 ‘포항시사’ 편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애린문화상(2018)과 경상북도 문화상(2014), MBC삼일문화대상(2008) 등을 수상했다.

2024-10-20

주한미군 지원사업 확대… 변화하는 성주로 ‘삶의 질 UP’

지난 2023년 6월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 특별법 시행령’이 개정됐다. 이에 따라 성주군 초전면에 위치한 사드기지에 의해 성주군 내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이 당초 1개면(선남면)에서 1개읍·4개면(성주읍, 선남면, 벽진면, 초전면, 월항면)으로 확대·변경됐다. 이에 성주군은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사업에 대한 발전종합계획을 변경했다. 총 13개 사업에 대한 사업비 4475억원을 확보해 사드 배치로 인해 상처받은 지역민심 회복을 위한 변화를 진행 중인 것이다. 변경된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사업 발전종합계획에는 좁고 노후화된 도로 보수 및 신설, 부족한 복지 시설 조성, 상·하수도 확충사업 등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에 포함된 읍·면민들이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사업이 포함돼 있다. 성주군은 향후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사업의 방향을 같이 만들며 낙후된 지역을 개선해 나갈 예정이다. 아래 그 구체적 계획을 요약한다. □ 초전면과 벽진면, 도시재생사업 추진 성주군은 성주읍 시가지에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총 4년간 도시재생 뉴딜사업 1단계 사업인 창의문화센터 건립과 스마트 보행환경개선사업, 성주시장 활성화사업 등을 추진해왔다. 창의문화센터는 남녀노소 모든 계층이 문화생활과 여가 시간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자 성주읍 도심의 랜드마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또한, 2021년부터 시행중인 2단계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통해 건강문화캠퍼스, 성주어울림복합타운, 별의별 문화마당이 조성돼 11월 준공식을 앞두고 있다.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성주읍 중심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으며,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사업을 통해 초전면과 벽진면에 각각 3·4단계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추진해 면 중심지를 개선해나갈 계획이다. 초전면에 추진 중인 3단계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총사업비 272억원을 확보해 어울림 복합타운·경관정비사업·역량강화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주민자치위원회 회의 및 주민 현장포럼, 선진지 견학 등으로 주민들과 지속적인 협의 중이라는 게 성주군의 설명. 행정기능 강화와 주변 상권 활성화를 위한 어울림 복합타운 건립을 통해 초전면의 랜드마크가 조성될 예정이며, 경관정비사업을 통해 주민 삶의 질 향상에 큰 역할을 할 예정이다. 4단계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벽진면에 추진될 예정이다. 2023년 9월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발전종합계획 변경 확정으로 총 사업비 200억원을 확보했다. 건강힐링센터·파크골프장조성·경관정비사업·도로선형개량사업·역량강화사업이 그 예산으로 추진된다. 발전협의회 회의를 통해 사업계획도 협의 중이다. 주민 여가활동과 건강증진을 위한 건강힐링센터를 건립하고, 오랜 숙원사업인 도로선형개량사업으로 주행차량 안전을 확보하며, 경관정비사업으로는 주민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게 된다. □ 온세대 플랫폼으로 모든 세대의 어울림 지향 성주읍 성산리 일원에 추진 중인 온세대 플랫폼 조성사업은 노인·장애인 등 취약세대를 위한 여가·교육·건강 및 일자리 복합거점공간 조성 사업이다. 총사업비 471억원을 확보했으며, 해당 사업비는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사업 및 지방소멸대응기금, 자활기금 등으로 조성된다. 온세대플랫폼이 위치할 사업지 주변에는 종합사회복지관과 국민체육센터, 청소년 문화의 집이 자리하고 있어 모든 세대가 함께할 수 있는 종합복지타운이 조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성주군에 없는 볼링장도 온세대플랫폼 내에 입주할 예정이다. 취약세대의 사회활동 지원과 일자리 창출 등 주민 삶의 질 향상뿐 아니라, 지역민의 정주여건과 문화·복지 측면에서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소성리 휴빌리지 조성사업도 주목된다. 사드기지 배치로 인해 상처받고 분열된 초전면 소성리 지역의 민심 회복과 힐링·치유가 목적인 사업이다. 2024년부터 연차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며, 총사업비는 150억원이다. 해당 사업은 주민숙원사업·주민역략강화사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민들과의 지속적인 소통 및 선진지견학·마을 조직화 등을 통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사업을 주민들과 함께 협의해 진행하고 있다. 현재 일부 주민숙원사업 및 주민역량강화 사업이 진행 중에 있고, 주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사업이기에 침체된 농촌마을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주민의 정주여건 개선으로 주민 만족도 역시 높일 전망이다. □ 성신원 정비사업 등 주민체감 중심사업으로 진행 성신원 정비사업은 초전면 용봉3리 일원에 시행 예정인 사업이다. 축산업을 주로 하는 마을인 용봉3리는 악취와 수질 오염으로 주변 주민들과의 갈등뿐 아니라 삶의 질도 문제가 되고 있어, 이를 개선하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은 총사업비 490억원을 확보했다. 2025년 설계 및 보상을 시작으로 2029년까지 5년에 걸쳐 추진될 예정이다. 축사와 빈집 등 유해시설 정비 및 생태공원 조성으로 사업이 구성돼 있다. 생태공원 내에는 잔디·분수광장과 휴양쉼터, 성신원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디에모의 집 등이 위치하게 된다. 이를 통해 쾌적한 생활환경 조성과 인근 관광자원과 연계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를 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외에도 농어촌도로 204호선(초전~벽진간) 도로 건설 150억원, 사드기지 진입 우회도로 개설 300억원, 지방도 905호선(성주~김천간) 4차로 확장 2100억원, 한개마을 저잣거리 전시 및 체험장 건립사업 42억원, 한개마을 저잣거리 조성사업 60억원, 소성리 휴빌리지 상·하수도 시설 확충사업 200억원, 월항 장산마을 하수도 정비사업 100억원까지 총 4475억원의 사업비로 13개의 사업이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지원사업으로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해당 사업들은 주민들과의 협의를 통해 방향성을 찾아 나가고 있다. 이런 소통을 통해 많은 주민들이 그 긍정적인 변화를 실질적으로 체감하며, 또 이 과정이 주민간 소통 활성화와 연대 강화도 이끌어 낼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추진 중인 사업에 관해 이병환 성주군수는 “사드 배치 과정에서 상처받고 고통받았던 군민들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라며 “군민과 함께 변화의 방향성을 찾아가며 지역에 생기를 불어 넣어 다양한 세대가 그 변화를 체감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4-10-20

도리마을·운곡서원·불국사… ‘울긋불긋’ 가을여행 떠나요

유난히 더웠던 폭염이 소리없이 물러나고 어느새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는 완연한 가을이다. 가을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풍경으로 단연 단풍이 꼽힌다. 가을이 성큼 다가오면서 본격적인 ‘단풍 여행’이 시작됐다. 산림청이 예상한 국내 단풍 절정은 오는 28~31일이다. 지역별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지역에서 예년보다 단풍 절정이 늦을 전망이다. 지난 6∼8월의 평균기온이 지난 10년(2009∼2023년) 평균보다 1.3도 정도 상승한 것이 주된 원인이다. 국내 대표적인 단풍 여행지로 경주를 빼놓을 수 없다. 신라천년 고도 경주에는 지천이 고적지와 사적지로 국내외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우리나라 관광 1번지이다. 경주는 사적지마다 고목이 울창한 단풍 명소이다. 경주에서 아름다운 단풍의 정취에 취해 보자. □ 경북산림환경연구원 연구원을 지나는 도로인 통일로를 기준으로 서쪽 영역과 동쪽 영역이 있는데 서쪽 영역에는 연구원 본관과 피크닉 쉼터, 숲 산책로 등이 자리한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동쪽 영역이다. 연구를 위한 목적으로 다양한 수목과 화초를 식재해 관리하면서 이를 일반에 공개하던 곳이었는데 이곳이 ‘천년 숲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입구로 들어서면 체험 정원과 가든 센터가 먼저 보이고, 이어서 테마가 있는 소정원과 숲길, 신라의 역사가 녹아든 쉼터 등을 다채롭게 만날 수 있다. 그중 포토스팟으로 유명한 외나무다리는 습지원, 일명 거울숲에서 찾을 수 있다. 가을에 특히 아름다운 포인트를 꼽으라면 메타세쿼이아 숲길과 마로니에라고도 부르는 칠엽수 숲길이다. □ 서면 도리마을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던 이곳이 어느덧 경주 가을 대표 명소가 됐다. 묘목 용도로 나무를 밀도 있게 식재한 덕에 은행나무가 양 옆으로 퍼지지 않고 마치 자작나무처럼 위로 쭉 뻗은 늘씬한 모양으로 자랐다. 그래서 도리마을 은행나무 숲으로 들어가면 외국의 어느 숲에 와 있는 듯 이국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 때 이곳의 풍경은 환상 그 자체다. 절정 시기를 살짝 지나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땅 위에 샛노란 양탄자가 깔린 모습 또한 절세비경이다. □ 통일전 은행나무길 이곳은 소담한 연못과 정자 화랑정이 있다. 또 갖가지 수목으로 아름답게 조경을 해 여유롭게 산책하며 둘러보기 좋다. 단풍나무가 많아 가을에 특히 아름답다. 통일전과 함께 은행나무 길도 꼭 감상해야 할 주요 포인트이다.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통일전 앞으로 쭉 뻗은 약 2㎞의 도로 양옆 은행나무가 아름답게 물들어 걷고 싶은 길, 드라이브하고 싶은 도로로 만들어 준다. □ 무장봉 억새군락 함월산, 운제산과 이웃하고 있는 무장봉은 억새 장관으로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이 일대는 1970년대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장이었다. 목장이 문을 닫으면서 초지에 억새가 자생하기 시작했다. 해발고도 624m의 산 정상부까지 올라야 만날 수 있는 장관이지만, 땀 흘린 뒤에 얻는 절경은 100% 이상의 만족으로 돌아온다. 탐방 안내소에서 정상의 억새군락까지 다녀오는 데 넉넉하게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계획하면 무리 없다. 올라가는 길에 삼국통일 후 문무왕이 무기를 묻었다고 전하는 무장사의 터가 있고 삼층석탑이 남아 있으니 함께 들러서 가자. □ 운곡서원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과 조선시대 참판을 지낸 권산해, 군수 권덕린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이곳의 가을 포토스팟은 서원 바깥에 있다. 서원 바깥 영역에 유연정이라는 별도의 정자가 있는데 그 앞에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령이 400년에 달하는 거대한 은행나무로 나무줄기에서 뻗어 나온 무수한 가지에 샛노란 은행잎이 춤을 춘다. 은행나무와 정자 유연정을 함께 담으면 황홀한 풍광을 남길 수 있다. □ 불국사 신라 경덕왕 때의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해 혜공왕 때에 완성한 사찰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의 우수한 건축 기술과 예술성을 보여 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불국사와 다보탑,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 금동비로자나불좌상 등 국보가 가득하니 구석구석 찬찬히 불국사를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 불국사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방법.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 불국사에 방문해 보는 것이다. 불국사 가람 외부와 내부의 정원에는 단풍나무가 많이 식재돼 있다. 새빨갛게 물드는 단풍과 세계문화유산을 함께 담아 보자. □ 계림 계림은 원래 성스러운 숲이란 뜻의 ‘시림’으로 불렸는데, 닭과 관련된 김알지의 탄생 설화 때문에 닭이 우는 숲이란 뜻의 계림으로 불리게 됐다. 이 천년의 숲에는 물푸레나무, 홰나무, 단풍나무 등 수령 지긋한 고목이 울창한 숲을 이룬다.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 특히 아름다움을 더한다. 숲 사이로 산책로가 내어져 있어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에서 사색의 가을 산책을 즐기기 좋다. □ 용담정 최제우 선생이 포교를 하고 용담유사를 쓴 정자로 정자와 함께 수도원 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용담정과 멀지 않은 곳에 최제우 유허비가 있고 그 자리에 선생의 생가가 복원돼 있으니 함께 둘러보기 좋다. 이 일대는 동학의 발상지로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기념관 건립이 완공돼 새롭게 문을 열기도 했다. 의미 깊은 동학 성지 용담정은 경주의 숨은 가을 명소이다. 용담정의 정문을 지나 정자인 용담정까지 오르는 길은 감탄을 자아내는 숲길이다.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곳곳에 있어 가을에 특히 아름답다. □ 포석정 경주 서남산 기슭에 포석정지가 있다. 물길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던 놀이 ‘유상곡수연’을 위한 석조 기물이다. 이곳에서 시작된 물은 구불구불 타원형의 물길을 따라 술잔을 움직인다. 신라인들의 풍류와 우수한 예술성을 동시에 보여 주는 유적이다. 이곳 포석정은 가을철이 되면 사진작가들의 인기 출사지로 변신한다. 유상곡수유적 주변으로 나이 지긋한 단풍나무가 소담한 숲을 이룬다. 깊은 가을에 들러서 포석정의 만추를 꼭 경험해 보자. /황성호기자 hsh@kbmaeil.com

2024-10-17

한 남자를 사랑한 자매 슬픈 사연 간직… ‘자매의 화신’ 별칭

청춘 남녀의 사랑은 무엇일까? 활활 타오르는 불같기도 하고 때로는 차가운 얼음 같기도 하여 우리의 감성과 이성을 드나들면서 이성을 마비시키곤 한다. 음식처럼 매콤달콤하여 그 맛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시고 짜서 멀리 도망치기도 한다. 도무지 그 한계랄까, 크기와 깊이를 짐작할 수도 없다. 느낌만 있고 형체도 냄새도 소리도 없는 것이 귀한 하나뿐인 목숨줄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니 참으로 신출귀몰하고 변화무상하다. 극과 극을 오가면서 하늘처럼 넓고 바다만큼 포용력이 있는가 하면 바늘처럼 좁고 손톱만큼도 이해력이 없기도 하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러하니 사랑을 누군가는 눈물의 씨앗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달콤한 솜사탕이라 하지 않았나 싶다. 인기 속에 방영되었던 모 방송국의 일일연속극 ‘우아한 모녀’를 즐겨 시청했다. 내용은 한 청년을 사랑하는 두 자매의 슬픈 이야기이다. 동생이 약혼까지 한 청년을 어릴 적 유괴당한 언니가 나타나면서 파혼이 되고 그로 인한 자매간의 갈등을 다룬 연속극이다. 한 남자를 두고 자매가 서로 사랑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벌어지는 미움과 증오의 사랑싸움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긴장감과 함께 전개되는 드라마에 분노하기도 하고 애를 태우면서 다음 회를 기다리면서 문득 천연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된 경주 오류리 등나무 노거수 가 떠올랐다.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527번지에 있는 등나무는 자매의 화신이라 불리기도 한다. 청춘남녀의 슬픈 사랑의 전설을 가지고 있다. 특히 드라마 속 자매 같은 갈등을 겪는 사람이라면 오류리 등나무를 탐방해 보면 어떨까. 2002년 생육 상태를 조사한 기록에 의하면 등나무 나이 300살, 키 17m, 몸 둘레 1.5m, 앉은 자리 폭이 20.4m로 되었다. 나이 300살이라 추정된다고 하였으나 콩과 식물이면서 덩굴식물인 등나무는 일반 수목처럼 수령, 키, 수관 폭을 적시할 수 없는 모듈 생물체이다. 키란 것도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간 높이를 말하는 것이고 그 나무가 고사하면 바로 땅으로 떨어져 버리기 때문에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수관 폭 역시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주 오류리 천연기념물 등나무 아래를 들어갔을 때 어둡고 깊은 숲속 같은 느낌을 받아 놀랐다. 슬픈 사랑을 간직한 자매의 화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애도의 마음을 가졌다. 전설대로 오류리의 등나무는 천년을 훌쩍 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청년을 연모한 자매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선택한 죽음이 갈등의 한 축인 등나무로 환생하였다니 아이러니하다. 칡도 등나무와 마찬가지로 콩과 식물로 덩굴나무이다. 지지대가 없으면 하늘 높이 올라갈 수 없다. 서로 타고 올라가는 방향이 달라 칡과 등나무가 만나면 뒤얽히어 도저히 풀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된다. 갈등(葛藤)이란 말은 칡의 갈(葛)과 등나무의 등(藤)을 합쳐서 만든 말이다. 칡과 등나무는 갈등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꽃은 아름답고 향기롭다. 칡의 뿌리는 식용으로 어린잎과 꽃은 약용으로 사용한다. 이에 못지않게 등나무 마찬가지로 꽃은 향기롭고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자주색 나비 모양의 꽃송이는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열매는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공원이나 정원에 칡은 볼 수 없지만, 등나무는 흔하게 볼 수 있다. 등나무의 짙은 그늘과 자주색 꽃의 향기와 아름다움에 반해 마을 계곡에 자라는 등나무 두 그루를 채취해 와 정원에 심었다. 지금까지 10여 년 넘게 반려목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봄에는 아름다운 꽃과 향기를 여름에는 녹음과 시원한 그늘을 해가 거듭될수록 더 많은 선물을 받고 있다. 먼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오류리 등나무의 슬픈 전설은 “옛날 서라벌 현곡에 한 농부가 홍화(紅花), 청화(靑花)라는 예쁜 두 딸을 데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사이좋은 두 자매는 지난해 추석날 젊은 낭도들의 말 달리는 경기장에 갔다. 그곳에서 많은 젊은이 중 특히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는 한 청년을 짝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자매는 속마음을 숨기고 혼자만 사랑을 키워 갔다. 당시 전쟁터로 나가는 애인에게 처녀들은 꽃다발을 던지는 풍습이 있었다. 어느 날 전쟁터로 나가는 짝사랑하는 청년에게 두 자매가 함께 ‘잘 다녀오세요!’라고 외치며 꽃다발을 던졌다. 서라벌 처녀들은 애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용사들에게 용기를 돋우어 주기 위해서 꽃다발을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로부터 두 자매가 서로 같은 청년을 사랑함을 알고 심한 갈등에 빠졌다. 다정하고 착한 자매였기에, 서로 양보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청년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에 두 자매는 함께 울었다. 남의 눈을 피해 자매는 언제나 같이 놀던 연못가에서 하늘을 원망했다. 그 청년이 없는 세상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두 자매는 꼭 껴안은 채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에 두 자매의 영혼이 등나무로 환생했다”는 것이다. 이런 슬픈 사연을 간직한 자매의 화신 등나무는 사랑의 묘약으로 둔갑했다. ‘등나무의 꽃잎을 말려서 신혼부부의 베개 속에 넣어두면 부부의 애정이 두터워진다.’라고 하거나 ‘사랑이 식어버린 부부들이 잎을 삶아 먹으면 사랑이 되살아난다.’라고 하는 이런저런 믿지 못할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사랑이란 역시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가 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거나 사랑하기 때문에 떠날 수 없다고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삶의 끈을 놓는가 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삶의 끝을 붙잡고 있다. 이렇게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에 따라 상반되는 말과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보면 사랑이란 청춘남녀에게 있어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가 아닐까 싶다. 사랑은 청춘남녀에게 국한되는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아니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에 최고 존엄의 가치이다. 따라서 철학과 종교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에서도 사랑은 영원한 주제이다. 사랑이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인가, 지고지순한 최고 존엄의 가치인가 오늘도 사랑에 웃고 울며, 기쁨과 슬픔에 희비가 엇갈린다. 2024 대한민국 산림박람회 제23회 산의 날 기념식 ▷일시: 10월 18일~21일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장소: 경주 엑스포 대공원(천마 광장, 선덕 광장) ▷주최·주관: 산림청, 경북도, 경주시 ▷주제: 모두가 누리는, 가치 있고 건강한 숲 ▷포레스트 빌리지: 기관 홍보부스, 관람객 휴게 쉼터, 숲속 마을 연상케 하는 특별한 공간 구성 ▷참여기관: 도·광역시. 한국산림문학회(이사장 김선길),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이사장 심상택), 한국산림과학고등학교(교장 윤정란) 외 6개교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0-16

이오덕, 손춘익을 만나며 동화를 쓰게 돼

김일광 작가는 2019년에 산문집 ‘호미곶 가는 길’(단비)을 내면서 ‘인연’의 소중함에 대해 말했다. “시간은 흘러가버리는 게 아니라 쌓이고 쌓여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하였다. 늘 그리운 인연들과 앞으로 만날 새로운 인연들에게 이 글을 전하고 싶다.”(작가의 말) 그렇다면 김일광 작가를 문학의 세계로 이끈 인연은 누구이며, 작가는 그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희정(이하 이) : 지역 원로인 박이득 선생의 동화책 출판기념회가 지난 8월에 있었습니다. 작가님께서 동화책 발간을 추진했다고 들었습니다. 김일광(이하 김) : 1981년에 창간된 ‘포항문학’에 박이득 선생이 동화를 발표했습니다. 그 동화를 43년 만에 책으로 낸 겁니다. 포항은 원래 아동문학의 뿌리가 깊은 곳인데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박이득 선생은 그 1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저서가 남지 않으면 후대에는 잊히기 마련이지요. 작품에서 몇 군데를 수정하고 내용을 줄여 포항의 동화 전문출판사에서 발간했어요. 박이득 선생의 첫 책이자 마지막 책이 될 듯하군요. 올해 ‘포항문학’ 51호 발간을 앞두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 선생님은 소설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셨는데, 동화를 쓰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김 : 이오덕, 손춘익 두 분과의 인연입니다. 이오덕 선생이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저에게 동화를 쓰면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하나 더 갖게 된다며 적극 추천했지요. 이오덕 선생이 주도한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무크지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창작보다 운동으로 기울어진 경향이 강했지요. 아동문학 무크지 ‘우리들이 뽑은 대장’, ‘지붕 없는 가게’ 등에도 참여했습니다. 이: 이오덕 선생님과의 인연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주세요. 김: 1982년 신춘문예에 소설을 응모했는데 최종심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때 심사를 맡았던 이오덕 선생이 저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주었어요. 2년 뒤 1984년에 ‘훈이의 손’으로 창주문학상을 받았고,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됩니다. 군사정권의 핍박을 받은 이오덕 선생은 과천으로 거주지를 옮기셨고, 대구·경북의 아동문학은 권정생 선생이 이끄셨지요. 이오덕 선생이 제 작품을 창작과비평사에 보냈는데 1990년에 단행본으로 발간되었습니다. 그 책이 ‘아버지의 바다’입니다. 사람보다 작품이 먼저 서울로 걸음을 해야 한다던 선생의 말씀대로 시골내기였던 저보다 작품이 먼저 인정받게 되었지요. 이오덕 선생이 디딤돌을 놓아준 겁니다. 이 : 포항의 문학을 얘기할 때 한흑구 선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한흑구 선생을 가까이서 모셨을 텐데 어떤 분이셨는지요? 김 : 인편으로 저를 부르시곤 했는데 항상 죽도시장에 있는 튀김집에 계셨어요.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식육점에서 간이나 천엽을 사 오게 해서 먹이셨죠. 평양과 도산 안창호 선생의 흥사단, 이광수 등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셨어요. 1960∼70년대 중앙 문단과 이어진 유일한 연결고리가 한흑구 선생이었고, 선생 덕분에 포항 문화예술의 격이 높아졌지요. 한흑구 선생을 정점으로 ‘흐름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져 지역 문화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선생은 누구를 흉보거나 싸운 적이 없었어요. 유신 시절에 한 후배 문인이 ‘이 참혹한 땅에서’라는 프린트판 시집을 냈을 때 다른 문인들이 “제목이 왜 그렇노”라며 나무랐지만, 선생만은 “왜 제목 탓을 하는가. 세상을 탓해야지…”라며 다독이셨죠. 포항 문인들은 여전히 그분을 아름답게 기억합니다. 한흑구가 작성한 ‘흐름회’ 결성 취지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향토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다음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지난 1968년 12월에 첫출발한 ‘흐름회’. 이름마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인생은 그림자같이 흘러간다”는 말이 나오는데, 거기에 연유한 것이며, 동해바다도 흐르고, 형산강도 흐르고, 구름도 흐르고, 인생도 흐르고 해서 항상 흘러서 새롭게 살고, 새롭게 성장하라는 뜻에서 문화예술인 5명이 주동이 되어 만든 모임. 예술을 애호하고 창작하는 사람끼리 오붓하게 모여서 표면에 나타내기보다 조용하게 숨어서 상호 연마하고, 친목을 도모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실질적인 일을 해나가려 하는 ‘흐름회’ 회원들. 이 : 포항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손춘익 선생과의 일화도 많을 것 같습니다. 김 : 그렇지요. 2000년에 손춘익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항상 함께했습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개풍약국 앞에서 만나 죽도시장으로 가 술잔을 기울였어요. 여름이면 구룡포 난전에 가서 고래고기를 놓고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고요. 구룡포는 포항 시내보다 2∼3도 기온이 낮아서 시원했어요. 1958년 박경용, 1966년 손춘익의 신춘문예 당선을 계기로 중앙 문단에 진출하는 문인들이 생겨났지요. 당시 박이득 선생은 문학에 뜻을 둔 시인이나 교사, 동화작가 등과 ‘청포도 문학동인’을 결성합니다. 이에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조직과 체계적인 운영이 필요해지면서 1968년 흐름회가 결성되고, 1979년에는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가 만들어집니다. 이 : 선생님은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장을 맡는 등 포항문인협회에서 많은 역할을 해오셨습니다. 김 : 성홍근 동지고등학교 교장과의 인연으로 포항문인협회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1985년 전국소년체전이 포항에서 열리면서 ‘포항문학’에 포항의 역사를 정리한 원고가 특집으로 실립니다. 그때 시 예산을 지원받으면서 ‘포항문학’의 격이 한층 높아졌지요. 그에 따라 회원 관리도 본격적으로 하고 제대로 된 문학인을 육성하자는 뜻에서 편집팀을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회원 대부분이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이기도 했고, 작품 경향이나 회원 성향이 민족작가회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어요. 이 시기는 노동운동이 활발해 ‘포항문학’ 8호에 노동운동을 특집으로 좌담과 관련 작품이 실렸습니다. ‘포항문학’ 10호까지 고은, 김지하, 이호철, 염무웅, 신경림 등의 글이 실렸고, 포항문인협회의 움직임이 주목받는 힘든 고비를 거쳤지요. 이 : 포항문인협회에서 지역 문화의 발전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해왔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게 있습니까? 김 : 1998년 포항문인협회 주관으로 수도산에 재생 이명석 선생의 문화공덕비를 세웠습니다. 재생 이명석 선생이 작사하고 장남 이진우 국회의원이 작곡한 ‘옛 포항시민의 노래’가 이 공덕비에 새겨 있지요. 이진우 의원은 법학 전공자인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어요. 이후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할 때 ‘시민의 노래’를 공모해서 새로 만들었는데 작품성이 떨어집니다. 그 밖에 한흑구 문학비, 청포도 시비, 노계 박인로 시비, 손춘익 문학비 등이 포항문인협회와 포항시의 어려운 조율 과정을 거쳐 세워졌습니다. /대담·정리 : 이희정(시인) 사진 : 김훈(작가)

2024-10-16

건국시조 박혁거세의 神母이자, 女山神은 중국 황제의 딸?

경주의 선도산은 아미타삼존상(仙桃山 阿彌陀三尊像)이라는 신라 불교예술의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주는 유적과 무열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등으로 추정되는 왕의 유택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더불어 신라 건국 신화와 관련된 ‘성스러운 어머니’의 스토리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건국 신화’란 한 나라를 만든 시조의 이야기 또는, 왕조가 시발점이 된 설화를 지칭한다. 풀어 쓰면 국가를 세우게 되는 계기와 그 이후의 역사를 다루는 이야기가 바로 건국 신화다. 인류사에서 유래가 드물게 1000년 가까이 존속되며, 찬란한 문화예술 전통을 이어간 신라왕조의 장구한 역사. 당연지사 그에 걸맞은 ‘드라마틱한 건국 신화’가 없을 리 없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을 포함한 고문헌에 기록된 신라의 건국 신화를 옛이야기 스타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라벌(신라)에는 6개의 촌락이 있었다. 이를 ‘육부촌’이라 불렀다. 각 촌락에는 촌장이 있어 크고 작은 마을 일을 결정했다. 6촌장들은 화백회의를 열어 민주적 만장일치제를 통해 마을의 대소사를 진행했다. 기원전 69년. 화백회의에선 왕을 추대해 백성들이 보다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여섯 촌락의 촌장들이 서라벌 남산에 올랐고, 거기서 내려다본 한 우물가에서 신비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했다. 우물가에 머물던 흰 말이 하늘로 올라간 후 주변을 살피니 커다한 알 하나가 있었다. 그 알에서 사내아이 하나가 나왔는데, 몸에서 빛이 나고, 짐승들도 아이를 경배하듯 고개를 숙였다. 여섯 마을 촌장들은 박혁거세라 아이의 이름을 짓고 왕으로 모셨다. 알에서 나온 아이는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고, 스스로 거서간(최고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 ◆고대 건국 신화 속 성스러운 여성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채미하의 논문 ‘한국 고대 신모(神母)와 국가제의(國家祭儀)’는 건국 신화가 가지는 특징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거기에선 ‘건국의 영웅’을 낳아 기른 ‘성스러운 어머니’가 언급된다. 신라와 백제, 고구려의 신모(神母·신의 영역에 있는 어머니)는 물론 멀리 고조선시대 신모까지. 이런 설명이다. “건국 신화는 초현실적·초자연적인 내용을 전함과 동시에 국가의 창업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포함하고 있다. 한국 고대 건국신화 역시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가 있다. 이러한 한국 고대 건국 신화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다양한 연구들이 있어 왔다. 이중 신모(神母)는 건국 영웅을 낳고 그들을 기르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 내지는 건설하기 위해 떠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거나 시조의 조력자로 나온다. 이와 같은 신모로는 고조선의 웅녀와 고구려의 유화, 백제의 소서노, 신라의 선도산 신모와 알영, 금관가야의 허왕후, 대가야의 정견모주가 있다. 그리고 이들 신모는 죽은 후 국가제의의 대상이기도 했다.” 까마득한 옛날 한 나라가 세워지는 데는 탁월한 힘과 빼어난 지략을 갖춘 영웅의 스토리가 필요했다. 고대국가의 ‘건국 주도자’는 대부분이 남성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상당수 설화나 전설이 그렇듯 건국 신화에도 여성은 반드시 등장한다. 신라라고 예외일 수 없다. 바로 그 여성이 ‘선도산 신모’와 ‘알영’ 등이다. 그렇다면 알영은 어떤 인물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펼쳐 본다. “박혁거세가 왕이 된 후 어느 날이다. 서라벌의 알영 우물가에 닭의 형상을 한 용이 나타난다. 그 신비한 짐승의 겨드랑이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으니 그녀가 바로 알영이다. 미모가 빼어났고, 피부는 백옥처럼 맑았다. 하지만, 흉측하게도 인간의 입술이 아닌 닭의 부리가 달려있었다. 놀란 사람들이 서둘러 북쪽 냇가로 데려가 깨끗하게 몸을 씻기니 마침내 닭의 부리가 떨어졌다. 이 여자아이가 자라 열세 살이 되자 박혁거세가 아내로 삼았다. 서라벌 백성들은 자신들의 왕과 더불어 왕비가 된 알영까지 성인(聖人)으로 받들며 기뻐했다.” ◆신라의 첫 번째 왕 박혁거세를 낳은 사람은… 신라 건국 신화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고대왕국 서라벌의 첫 번째 통치자 박혁거세다. 한양대 고운기 교수는 그의 책 ‘인물한국사’에서 박혁거세에 관해 “기원전 69년에 태어났다. 동해안의 한 바닷가에서 어진 사제 의선의 지도를 받아 성장해 우리나라 고대왕권국가의 문을 여는 신라를 세웠다”고 쓴다. 이는 “고구려의 동명왕보다 20년 먼저, 백제의 온조왕보다 40년이 앞선 시점이었다. 그는 어진 왕이었으며 지혜로운 왕이었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인 서기 3년, 혁거세는 하늘로 올라가고 7일 뒤에 몸만 땅으로 흩어 떨어졌다”는 것 역시 고 교수의 설명이다. 박혁거세의 아내는 앞서 쓴 것처럼 ‘닭의 부리를 가지고 태어난 여성’ 알영. 그렇다면 신라를 태동시킨 ‘지혜롭고 어진 왕’ 박혁거세의 어머니는 누구일까? 백마가 머물다 떠난 서라벌 어느 우물가에 놓인 알에서 박혁거세가 나왔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사람이 알에서 탄생했다는 이야기)에 기반한 신라 건국 신화의 또 다른 주요 등장인물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술돼 있다. “선도산 신모(仙桃山神母)·선도 성모(仙桃聖母)라고 불리는 전설 속 인물은 중국 황실의 딸로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海東)에 와서 머물렀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고 했다. 이에 솔개를 놓아 보내자 선도산으로 날아가 멈추므로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아 지선(地仙)이 됐다. 오랫동안 이 산에 웅거하면서 나라를 지켰는데 이상하고 신령스러운 일이 많았다. 그녀가 처음 진한(辰韓)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으니 반드시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을 낳았을 것이다.” ◆선도산 신모에 관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 사람이 알을 낳았다는 것 자체가 합리성과 이성을 갖춘 21세기 사람들의 과학 상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신라의 건국 신화는 자그마치 2000년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 과장과 허구가 배제될 수 없다. 현재 존재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직접 본 바 없으니,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의 어머니(선도산 신모)’는 풍문과 설화, 고문헌의 짤막한 기록에서만 그 모습을 희미하게 드러낸다. 그러니, 그녀의 삶과 죽음, 행적 역시 기록자에 따라 엇갈릴 수밖에 없다. 하나의 의미망 안에 포획하기가 어려운 걸 넘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 등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고운기의 ‘인물한국사’로 돌아간다. “고려 예종 11년(1116년). 김부식이 송나라 조정에 갔다. 일행을 접대하는 송나라 사람 왕보(王9EFC)가 사당에 걸린 선녀의 초상을 보여주며 ‘옛날 어느 제왕의 딸이 바다 건너 진한에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해동의 첫 임금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선도산에 살았는데 이것이 그 초상화’라고 말했다. 일연의 ‘삼국유사’ 감통편은 선도산 신모 이야기로 시작된다. 신모는 본디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신선의 술법을 익혀 동쪽 나라에서 살았다. 신선이 되어 집을 짓고 지낸 곳이 서연산(西鳶山)이었다. 그 신모가 진한에 왔을 때 성스러운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게 했다.” 이상이 두 고문헌의 기록을 풀어 쓴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선도산 신모를 둘러싼 비밀이 명쾌하게 풀렸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0-15

국가대표 ‘감홍 꿀사과’ 맛보고 문경새재 가을 단풍은 ‘덤’

초가을 단풍과 빨간 문경사과가 어우러져 문경의 가을은 더욱 깊어간다. 문경사과는 1930년대 선교사가 처음 재배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경 지역 특성상 밤낮의 일교차가 매우 크고, 비옥한 토질과 기후 덕분에 문경사과는 육질이 단단하고 향이 짙고 당노가 매우 높아 ‘꿀사과’라는 별칭까지 있을 정도다. 특히, 문경은 사과의 한 종류인 ‘감홍’사과의 주산지로 유명하다. 감홍 사과는 우리나라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에서 개발한 순수 토종 사과품종이다. 문경에서는 감홍사과 작목반이 만들어져 자랑스런 우리 품종인 감홍사과 재배에 정성을 쏟고 있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문경새재도립공원 일원에서 오는 19일부터 27일까지 9일간 제19회 문경사과축제가 열린다. 이번 축제는 감홍사과의 고장 문경을 알리고, 가족과 함께 풍성한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관광객을 맞이한다. 신현국 문경시장은“가을 풍경이 아름다운 문경새재에 오셔서 사과 중에 가장 맛있는 문경감홍사과 꼭 맛보시고 가족과 함께 즐거운 추억 만드시길 바란다”고 인사했다. □ 사과 주산지 문경 문경시는 일교차가 큰 백두대간 산간 분지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비옥한 토질과 기후, 기상재해가 없는 청정 자연환경에서 전국 최고 품질의 사과를 생산하고 있다. 주력으로 재배되는 감홍 품종은 높은 당도와 산미를 자랑한다. 식감까지 좋아 한번 먹어보면 다시 찾게 되는 사과로 알려져 있다. 감홍은 우리나라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에서 개발한 자랑스러운 우리 사과 품종이다. 문경시는 지난 1994년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의 권유로 지역 내 농원에서 전국 최초로 감홍사과를 심었다. 하지만 나무의 세력이 약하고, 고두병도 발생하는 등 일반적인 사과재배기술로는 재배가 어려워 포기하는 농가가 많았다. 그렇지만, 감홍사과재배연구회는 문경시농업기술센터와 전정기술을 확립하는 등 재배기술 연구해 재배 단지를 늘리는 등 국내 감홍사과 주산지로 발전시켰다. 문경 감홍 사과는 일본 품종 부사에 대적하는 우리나라 국가대표 사과로서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문경의 자연환경에 매우 적합한 ‘감홍’은 평균당도 18브릭스를 자랑하며 매년 열리고 있는 ‘문경사과축제’의 안방마님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다. 문경시는 올해 지역의 풍토에 적합한 특화품종인 감홍사과 재배면적 확대 지원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재배면적 증대 실적으로는 감홍사과 262농가에 79ha로 재배면적을 확대했으며, ha당 지원기준으로는 감홍사과 4000만원을 지원했다. 지원내용으로는 묘목, 지주 등 재배에 필요한 기자재를 지원했으며, 전년 대비 지원 단가를 2배 인상 지원해 농가 부담을 줄였다. 아울러, 2028년까지 재배면적을 감홍사과 800ha로 늘리고, 1000㎡(300평)당 생산량도 2300kg에서 3200kg까지 늘려 농가소득 증대에 기여하도록 할 방침이다. □ 문경사과축제 문경시는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문경새재도립공원 일원에서 오는 19일부터 27일까지 9일간 제19회 문경사과축제를 개최한다. 이번 축제는 감홍사과의 고장 문경을 알리고, 가족과 함께 풍성한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특히, 올해는 감홍사과가 익는 시기에 맞춰 축제가 열리기 때문에 가장 맛있는 감홍사과를 맛볼 수 있으며, 축제 기간 중 판매되는 감홍사과는 매일 당도 측정, 품질확인 절차를 거쳐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문경감홍사과를 5kg 한 박스에 특별할인해 7만원에 판매할 예정이다. 축제 개막은 감홍사과로 문경농업의 새 시대를 연다는 메시지를 담은 사과 열쇠 퍼포먼스와 이찬원, 박서진, 전유진 등 팬덤 있는 인기가수 축하공연을 시작으로 다양한 참여 프로그램과 만들기 체험, 포토존 및 쉼터 등을 운영해 축제장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즐거운 추억거리를 제공할 준비를 마쳤다. 아울러, 지난해와 다르게 사과축제장을 제1관문 잔디광장으로 옮겨 가족 단위 관광객들을 위한 어린이 놀이터(에어바운스, 시소 등), 대형 에어 그늘막에서 즐기는 사과낚시, 사과양궁, 럭키박스 체험, 파크골프 체험, 사과모자, 사과손수건 만들기 체험 등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장을 마련했으며, 축제 마지막 날에는 사과나눔 행사와 사과따기 체험 행사를 진행해 관광객들에게 특별한 체험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또한, 문경사과 홍보관에는 감홍사과 이야기, 감홍사과 터널, 포토존 및 쉼터, 사과 품종별 전시, 문경사과 품평회 출품작 전시 등으로 문경 감홍사과의 우수성을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리고, 감홍사과의 주산지로서 명성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강남진기자75kangnj@kbmaeil.com

2024-10-15

‘참’ 가치관 바탕 ‘원칙’ 생활화… 업무효율·안전한 현장 구축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치관은 단 한 글자, 바로 ‘참’입니다.” 반드시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야 비로서 문제가 온전히 해결된다. 만약 설비의 아주 작은 문제점을 적당히 넘기면, 그 문제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더 큰 설비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곧바로 원인을 제거하기 힘들다면, 쉬운 문제부터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면 된다. 그러다 어느새 문제의 근본 원인을 제거할 수 있게 된다. 현장에서 지키도록 약속된 모든 것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원칙은 당장 지키기에는 귀찮고 비효율적인 요소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원인을 따져보면 십중팔구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항제철소 압연설비부 서광일(60·사진) 명장에게 우직한 소처럼 한 발 한 발 내디뎌서 멀리 나아가는 ‘우보만리(牛步萬里)의 정신’을 최근 들어봤다. - 포스코에 입사하게 된 계기는. △포항시 북구 송라면 조사리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넉넉지 못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개인의 꿈보다는 가족을 위해 서둘러 생활 전선으로 뛰어 들어가야 했다. 어업에 종사하던 아버지는 원인 모를 병으로 고생하고 계셨고, ‘실질적 가장’이라는 책임감으로 일찌감치 대학의 꿈은 포기했다. 부모님께서는 대학에 가길 원하셨지만, 어려운 집안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나는 빨리 돈을 많이 벌어 아버지를 큰 병원에 모시고 가고 싶었다. 포철공고 모집 공고를 봤고 담임 교사의 추천을 받아 지원하게 됐다. 당시 포철공고 입학 요강에는 전원 학비 지원 및 숙식제공, 졸업 후에는 포항제철소에 취업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이러한 조건에 반해 부모님 몰래 원서를 내어 합격했고, 이 계기가 포스코와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된 순간이다. -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맡고 있는 업무는. △1982년 4월에 입사해 압연설비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현재 압연설비 1, 2부의 설비 강건화 작업과 함께 설비의 고질적 문제점 해결 및 설비 장애 원인분석 후 개선방안을 도출하는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 또한 광양제철소 전기강판 설비 안정화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후배 사원들의 기술력 향상을 위해 현장 중심 교육에도 주력하고 있다. - 압연설비 업무를 42년 간 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2001년 10월, 포스코의 1냉연공장에서는 DRM(Double Reversing Mill)라인 신설을 위한 TF팀이 발족됐다. 팀원들과 함께 설비 설계에서부터 설치 공사까지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시운전 단계에서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가장 얇은 박판인 0.05㎜ 압연이 설계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TFT 구성원들은 일주일 동안 밤을 지새우며 데이터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했지만, 쉽게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메이커의 설계 사상을 참고해 롤 갭(Roll Gap)을 활용한 압하 압연과 철판을 당겨 두께를 얇게 만드는 연신 압연 방식을 결합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 아이디어를 즉시 설비 프로그램에 반영한 결과, 성공적인 압연이 이뤄졌다. 이를 통해 포스코의 우수한 압연 기술력을 일본 등 철강 선진국에 알릴 수 있었고, 스스로에게도 큰 자신감을 주는 기회가 됐다. - 안전한 현장 만들기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원칙 준수’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켜야 할 원칙을 반복적으로 실천해 습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바늘허리에 실 매어 쓸 수 없듯, 원칙을 지키며 ‘업무 효율성’과 ‘안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 아울러 설비 강건화를 통해 불안전한 현장과 행동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해야 한다. 내가 조금 더 발로 뛰면 동료들이 더욱 안전하고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노력하고 있다. - ‘명장의 비결’은. △정비도 조업의 일원으로 운전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정비에만 신경 쓴다면 현상 유지는 가능하지만, 제품 고급화 및 다양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운전의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근본적인 기초 지식을 쌓아야한 응용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전기정비로 입사했지만 기계 설비도 함께 익혔다. 더 나아가 전기와 기계의 유기적 결함으로 탄생한 압연 조업을 알기 위해 압연 운전실 동료들에게 궁금한 점들을 물었다. 또한, 실시간 형상 모니터를 꼼꼼히 보면서 ‘왜?’라는 질문을 반복하며 압연 조업을 익혔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다양한 업무를 두루 맡을 수 있었고, 나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 특별한 인생 철학이나 업무 원칙이 있다면. △문제를 지혜롭게 다루기 위해서는 동료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운전과 정비, 기계와 전기의 총체적인 움직임 가운데 일어나는 만큼 동료들과의 적극적인 소통과 협업이 절실하다. 나는 ‘무엇 때문이 아닌 무엇 덕분에’라는 마음가짐을 항상 실천하려 했다. 동료들과의 협력과 소통이 나를 스스로 성장하게 하는 지름길이었다. 동료들을 통해 모르는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쉽고 빠르게 습득하고, 자신의 업무에 적용할 수 있었다.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최고의 공로자다. 힘든 일이 발생할 때마다 항상 앞장서서 도와주고 힘을 보태준 동료들이 있었기에 나 자신도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늘 참되게 살아라, 모임에 불려 나가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해 주시곤 했다. 그래서 나는 ‘참’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일할 때도, 친구들을 만날 때도, 심지어 놀 때도 진짜 나를 보여준다. 이런 면모는 호감을 이끌어 내고, 이 호감은 다시 나를 참으로 이끄는 힘으로 작용한다. 나의 주변에 사람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에 내가 일에 있어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적당히’, ‘대충대충’이다. 일을 적당히 처리하고 넘어가면 나중에 그 대가가 두세 배의 고통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설비를 알고자 일본어 공부를 하고, 그것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1냉연공장 합리화 TFT에서 일할 때, 우리는 모든 면에서 일본보다 미숙했다. 우리가 현장에서 우왕좌왕하는 동안, 일본 기술자들은 자기 분야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배울 점이 많았지만, 언어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일본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속성으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한 나를 보고 당시 월세방 주인이 성실한 청년으로 판단해 자신의 조카를 소개해 주었다. 그 조카가 지금 나의 아내가 됐으니, 공부가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힌남노 시 제철소에 근무한 직원이라면 모두가 그 순간을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인근 냉천이 범람하면서 포항제철소는 악몽 같은 상황을 맞았다. 정말 앞이 캄캄했다. 솔직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안 났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복구 대책을 고민하던 중, 일본의 쓰나미 피해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오던 일본 기술자들에게 문의하면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했을 때였다. 설비 제작 메이커에서 전부 교체를 주장했을 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나름의 방안을 세워 복구하기로 결정했다. ‘과연 올바른 결정일까’라는 고민이 가장 어려웠다. 현장을 신뢰하는 경영진의 끊임없는 소통과 지원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던 것 같다. - 포스코의 미래를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구성원 각자가 기술력을 조금 더 높여 기초 체력을 키우면, 제철소는 항상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 때문에’가 아닌 ‘누구 덕분에’라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 모두가 합심하여 노력하면, 더 행복하고 더 가치 있는 일터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후배들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노력을 했으면 한다. 나 자신도 지금까지 하루에 무엇인가를 한 개씩이라도 배우려 하고 있다. 일은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잘할 수 없다. 지식을 쌓아 놓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잘 대처할 수 있다. 내 경험으로 보면, 배움은 일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소중하다. 서광일 포항제철소 압연설비부 명장은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졸업(1982년) △올해의 정비명인(2011년) 포스코 명장(2017년)△포스코 기술대상(2021년)△24회 철의 날 장관표창(2023년)△포스코 상무보 신규 선임(2024년)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10-13

초등학생 때 쓴 시 한 편이 문학의 길로 이끌어

안데르센은 환상이 들어 있는 놀라운 이야기가 동화라고 했다. 드넓은 바다를 향해 청보리가 출렁이는 호미곶에는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이한 김일광 작가의 이야기가 있다. 김일광 작가의 작업실 ‘서경와’에서 그의 삶과 문학세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동해를 굽이치던 한국 귀신고래를 다시 발견한다면, 그것은 한국 귀신고래의 본래 이름을 되찾는 큰 전환점이 될 것이며, 아울러 ‘동해’라는 우리 바다의 이름도 함께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 김일광, 「작가의 말」, 『귀신고래』, 내인생의책, 2008. 이희정(이하 이) : 등단하신 지 40년이 되었고 40권이 넘는 책을 내셨습니다.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실 텐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김일광(이하 김) : 코로나 이후 1년에 한 번 이오덕 제자 1기 문우들(서정오 외 7인)과 주제 없이 독후 감상과 근황, 일상의 안부를 나눕니다. 그리고 ‘햇살 동화문학회’에서 지역 동화작가들과 합평 만남을 갖습니다. 20여 년이 된 문우들이라 몸에 맞는 옷처럼 편안합니다. 종종 손자들을 돌보기 위해 서울을 오가며 출판 담당자와 만나기도 합니다. 일상의 대부분은 호미곶의 작업실과 송도에서 보냅니다. 걷고, 읽고, 쓰며 시간을 보내지요. 이 :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줄곧 송도에서 사셨는지요? 김 : 1952년 12월 저녁 예배 종소리를 들으며 태어났습니다. 당시 선친께서는 6·25 전쟁에 징집되어 보급물자인 탄환을 수송했습니다. 전쟁 중이라 난방이 안 되어 어머니, 할머니, 외할머니 세 분의 체온으로 언 몸을 녹이며 자랐지요. 어릴 적 내 놀이터는 형산강과 섬안, 들녘 곳곳에 흩어져 있던 둠벙이었어요. 그중 하나가 옛강이라는 뜻의 구강이었는데 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커다란 못으로 남아 있습니다. 요즘도 그 강 자락에 자주 가곤 해요. 지금은 남의 땅이 되었지만, 거기에는 아버지가 분가루처럼 매만지던 흙이 남아 있어요. 물론 강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지만 내 기억 속에 강은 여전히 맑고 곱기만 합니다. 빛 고운 모래로 다져진 외가로 가던 오솔길, 달을 떠받치듯 서 있던 키 큰 미루나무, 물풀 사이에서 지지대던 개개비, 뜸부기 등 이제는 다 사라지고 나만 남은 것 같군요. 이: 부친을 비롯한 가족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김 : 아버지는 농사일을 하셨고, 어머니도 농사꾼의 딸이었습니다. 선대는 경주 양남면 나아리 마을의 유서 깊은 유학자 집안이었지요. 1883년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을 맺기 전부터 일본이 우리 바다에 와서 어로작업을 했습니다. 그때 바닷가에 움막을 만들고 반일 저항운동을 펼치다가 집안이 몰락했어요. 그 바람에 양남 고개를 넘어 장기에서 오천으로 와서 자리를 잡게 되지요. 증조부 때부터 쫓겨 다니게 되지만, 6·25 전쟁 피난길에도 1800년대 조상들의 문집은 잃어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작고하시면서 부친은 공부를 할 수 없었고 여덟 살에 가장이 되어 농사일을 하셨지요. 이 : 선생님의 성함인 ‘일광(日光)’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김 : 원래 집안 족보에 올린 이름이 따로 있었어요. 항렬대로 진환(鎭煥)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전쟁 후에 돌아와 보니 체격이 미숙해서 족보대로 하자면 아이가 이름에 눌려 죽을 것 같은 염려가 들었던 게지요. 그래서 태양처럼 살아나라는 의지를 담아 일광(日光)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 호적에 올렸답니다. 이후 문학의 인연으로 몇 개의 호를 받았지요. 은사이신 손춘익 선생이 일광이 산야에 가득하라는 뜻을 한글로 풀어 ‘들뫼’를, 아촌 이삼우 선생이 동촌(童村)을, 진촌 배용일 교수가 동진(童津)이라는 호를 주었습니다. 후배 시인이 “나이 들수록 귀는 높이 매달아두고 입은 나무 아래에 묻어야 한다”는 이스라엘의 속담을 빌어 ‘이수(耳樹)’라고 지어 낙관에 새겨주기도 했습니다. 이: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문학적 DNA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듯하군요. 문학을 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김 :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 집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봤어요. 1960년대 우리 동네에 책이 많은 목사님 집이 있었는데 그 목사님 손자가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 덕분에 목사님 집에서 책을 빌려볼 수 있었지요. 큰 기쁨이었습니다. 당시 편은범 목사님께 선물 받은 책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 연극 어린이 대본이었어요. 1930년에 발행된 번역본이었죠. 부산 곰곰이서점에 어린이 책 박물관 건립 계획이 있어 기증했습니다. 4학년 때 특활반을 구성했는데 고학년으로 구성된 혼합 축구부가 유명했습니다. 축구부에 들지 못한 학생들 중에서 글쓰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을 모아 반 칸짜리 교실에서 문예반을 만들었어요. 그때 「소나기」라는 시를 썼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보리타작 중에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허둥지둥 거둬들이는 내용이었어요. 문예반 선생님이 다음 시간에 그 시를 판서해놓으셨더군요. 내 시 한 편으로 한 시간 동안 수업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시를 경험하고 감상했던 것이 동기부여가 되었어요. 자신감이나 재능보다는 책과 친해지게 되고, 글쓰기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지요. 이: 선생님의 청년기는 어땠나요? 김 : 우리 세대는 청소년기는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진학률이 낮았지요. 집안을 도와 사회로 나오는 예가 많았으니까요. 다행스럽게도 우리 아버지는 자식 교육열이 높았던 덕분에 대학 준비를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비 부담이 없었던 대구교대로 진학했습니다. 이 : 그러면 문학과의 인연은 대학 시절에서 시작되었나요? 김 : 대구교대에 다닐 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경북고등학교 출신 친구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시월유신이 발표될 무렵, 야학 활동을 했는데 문학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지요. 시와 산문을 습작하고 막걸리집에서 그 친구와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야학이 불량 서클로 찍혀서 중단되고 말았어요. 그 후 지산교회 장로님이 양계장 한 동을 빌려서 야학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버려진 책상과 의자를 수거해 교실을 만들었지요. 화가였던 유병우가 교감, 유익종 씨가 교무 그리고 나는 학생과 일을 맡았습니다. 이 : 선생님의 문청 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김 : 포항의 박수철 화백과 김원택 등이 모여서 ‘형상회’라는 동인 활동을 했어요. 시내 백양식당에서 500원 하던 빈대떡을 놓고 소주를 마시며 시와 산문 습작을 읽고 토론했지요. 글과 그림과 음악을 혼합해 시화전도 세 차례 열었습니다. 김원택은 신춘문예 최종심에 오르는 등 그 시절 작가 지망생들의 열정이 아주 뜨거웠습니다. 문학 등단 플랫폼이 넘쳐나는 요즘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지요. 김일광은… 1952년 12월 포항 남구 섬안에서 태어나 포항고등학교와 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했다. 1984년 창주문학상 동화부문을 수상했고,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에 당선되었다. 40년 가까이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아버지의 바다’를 비롯해 동화와 청소년소설 등을 40여 권 발간했다. ‘귀신고래’는 스페인어로 번역되었고, ‘강치야, 독도 강치야’는 영어로 번역됐다.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장과 ‘포항시사’ 편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애린문화상(2018)과 경상북도 문화상(2014), MBC삼일문화대상(2008) 등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이희정(시인) 사진 : 김훈(작가)

2024-10-13

1970∼80년대 시장 인파로 북적, 명절 땐 밤샘 장사도 예사

죽도시장과 함께 포항 전통시장의 ‘빅2’를 형성하고 있는 큰동해시장.(물론 외형, 규모 면에서는 큰 차이가 나지만) 전통시장으로서 포항시 정식 인증을 받은 게 2008년이니까 역사도 그리 길지 않다. 죽도시장이 1500개 점포의 매머드급 상권을 자랑하는 데 비해 큰동해시장은 150여 개 점포에 하루 유동 인구도 2000여 명 남짓하다. 포항시 남부 조그만 근린시장으로 그다지 주목할 요소가 크게 없어 보이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뜻밖의 내공(內功)에 놀라게 된다. 송도, 해도동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소금을 생산, 유통하던 동해안 제염(製鹽)의 전초 기지였고, 1960~70년대 포항종합제철 태동시기 근로자들의 애환이 깃든 삶의 터전이었다. 또 바로 옆 지역 최대 물류거점 죽도시장과 함께 포항의 상권을 양분하며, 서민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생활경제 현장이기도 하다. 포항에 상업을 일으키고, 물류 전통을 세웠던 큰동해시장으로 들어가 보자. ◆해도동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소금 생산 기지 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실세였던 이의민(李義旼)의 부친은 경주의 소금 갑부였다고 한다. 경주에 염전이 있을 일은 없고, 그렇다면 이 소금은 포항 송도, 해도동 일대에서 생산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생산된 소금들은 형산강-부조장(扶助場)을 거쳐 경주를 거쳐 영남의 내륙으로 유통된 것이다. 역사가들은 포항 해도동 일대 소금 생산 기원을 신라시대까지 소급하고 있다. 해도동 일대의 미네랄이 풍부한 염수(鹽水), 풍부한 일조량에 형산강 교역루트까지 소금 생산의 최적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진흥왕 조(條)’에서도 형산강과 서형산성(西兄山城)에 ‘염고’(鹽庫)가 있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 소금은 단순 생산을 넘어 집하(集荷)-도매-유통을 망라하는 산업 단계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생산된 소금은 주로 형산강 뱃길과 보부상을 거쳐 내륙으로 팔려 나갔고 일부 상등품은 왕실에까지 진상됐다고 한다. 과거 해도동의 지명은 ‘염동골’(鹽東谷). 1961년까지 이 지역엔 8만평(26만4462㎡) 정도 소금밭이 경영되었고 100여 명의 염부(鹽夫)가 연간 2000가마를 생산 했다고 한다. 해도동 소금은 전통 방식으로 생산된 자염(煮鹽)으로 염도를 높인 함수를 가마솥에 끓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영양소가 풍부해 서민들의 반찬, 양념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자염은 일제강점기 이후 천일염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송도해수욕장 배후이자, 형산강 하류에 위치한 해도동은 1960년대만 해도 갈대밭, 연밭, 염전으로 이뤄진 저습지대였다. 1968년 포항종합제철이 들어서면서 짧은 기간 내에 주거지역으로 변모했다. 지반이 약한 늪지대라는 핸디캡 때문에 그 흔한 대단지 아파트 하나 들어서지 못했지만, 철강공단과 시가지를 연결하던 길목이라는 입지를 배경으로 해도동은 포항 남부의 대표 주택단지로 부상했다. ◆1980년도 본격 상가 건물 들어서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고 포항제철과 철강단지 근로자들이 해도동으로 몰려들면서 1970년대 주택가 공터, 대로변에 노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 남짓 거리에 죽도시장이 있었지만 당장 급한 생필품 조달처가 따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설 장옥(場屋)이나 비닐하우스가 얼기설기 노점 형태로 이어져 오던 시장은 1980년에 들어와 본격 상가 건물을 짓고 전통시장 외형을 갖추게 됐다. 현재 시장 안쪽에 좌우로 늘어선 복합건물이 그 당시 완공된 상가다. 시장은 들어서자마자 꽤 큰 상권을 형성했다. 1980년 당시 해도동 인구만 4만여 명에 이르렀고, 무엇보다 포항제철, 철강단지 근로자들이 대거 몰려 살면서 시장은 성장을 거듭했다. 1980년대 들어 인근에 갑자기 들어선 아파트도 상권 형성에 큰 도움이 됐다. 1979년 ‘동아아파트’를 시작으로 ‘코스모스빌라’ ‘동부타운’ ‘점보맨션’ ‘명성 송도타운’ 등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유동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뭐니뭐니해도 큰동해시장의 상권에 큰 영향을 끼친 건 포항제철, 철강공단 근로자들이었다. 고(高)임금군에 속했던 이들은 구매력을 바탕으로 시장의 주 고객이자, 소비자로 부상했다. 근로자들은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삼삼오오 모여 소주 한잔으로 하루 피로를 풀었고, 귀갓길엔 가족들을 위해 간식이나 선물 꾸러미를 사들고 가는 것이 당시 흔한 풍경이었다. 제철소와 공단 근로자들이 들락거렸던 술집, 칼국숫집, 분식집 등 몇몇 가게들은 지금도 시장을 대표하는 맛집으로 남아있다. ◆1980년대 밤샘 장사 예사, IMF 이후 쇠퇴 큰동해시장의 전성기는 1970~80년대였다. 당시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외식이나 쇼핑을 나온 시민들로 넘쳐났다. 발이 밟히고 어깨가 부딪혀 교행이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산업화 시기 막강한 배후 인구와 구매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어린이날이나 명절 전날에는 새벽까지 손님들이 몰려들어 가족들이 돌아가며 밤새 영업을 하는 것도 당시엔 흔한 풍경이었다고 한다. 시장에서 자전거 점포를 했다는 한 어르신은 “어린이날엔 자전거를 사러 온 손님들이 새벽까지 문을 두드려, 밤새 자전거를 수십대씩 팔았다”며 “그 때는 송도해수욕장 자갈을 가져다 팔아도 장사가 된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고 기억 했다. 40년간 떡집을 운영했다는 한 어르신도 “그땐 정말 명절을 전후해서는 밤새도록 쌀 불리고, 가루 내서, 찌고, 썰고 포장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가족들은 물론 멀리서 친척들 일손까지 불러들여야 겨우 주문을 맞춰 냈다고 한다. 한때 짐자전거를 몇 대씩 둘 정도로 번창했던 전통시장의 위세는 예전 같지 않다. 우선 4만여 명에 달하던 해도동 인구는 1만6000여 명으로 줄면서 유동인구가 급감했고, 공장의 설비 자동화로 많은 근로자들이 해도동을 떠났다. 시장 상권, 외형의 뚜렷한 변화는 1997년 IMF 이후부터였다. 신자유주의가 부상하며 유통업계도 무한경쟁 시대가 열렸다. 마을마다 대형마트, SSM들이 생겼고 홈쇼핑 등 온라인 업체들이 들어서며 전통시장 등 오프라인 상권은 급속히 쇠락했다. ◆‘문광형 시장’ 등 선정되며 상권 활성화 갈수록 위축되는 전통시장의 위상, 상인들도 대안 모색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상인회에서는 먼저 전통시장 정부 지원사업에 주목했다. 우선 예산과 행정지원이 있어야 상인회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큰동해시장은 정부 지원사업 첫 번째 단추인 ‘특성화 첫걸음’(2018년)에 선정되면서 상인들은 큰 자신감을 얻었다. 내친 김에 2019년엔 ‘도약 단계’인 ‘문화관광형 시장’에 응모했다. 까다로운 심사 조건 때문에 선정이 힘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철의 기상, 운하의 낭만’을 컨셉으로 한 스토리텔링이 평가를 받아 문광형 시장에 선정돼 예산(10억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상인회는 2021년 ‘문화관광형 시장’에 또다시 선정되면서 상인회 활동에 연속성을 갖고 활발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상인회의 저력을 보여주는 쾌보(快報)는 계속 이어졌다. 전국에 5곳만 지정해 지원한다는 ‘카카오 전통시장’에 선정되는가 하면, 상거래 IT 정책을 지원하는 ‘디지털 전통시장’에도 뽑혔다. 이런 예산 지원과 정부 지원을 배경으로 상인회는 많은 활성화 작업을 펼치고 있다. 전국 최초로 ‘고객회원제’를 실시했고, 모바일 장보기 앱 ‘달려라 큰동해’ 사업을 펼쳤다. 매주 토요일엔 ‘세일거리’가 열리고 매주 마지막 주는 ‘고객 회원 할인 주간’이 운영된다. 또 큰동해시장 만의 특산품, 밀키트 등을 개발하고 지역 대표상품인 과메기, 대게 전국배송을 통해 상인들의 수입을 늘린다는 계획도 진행하고 있다. 김병석 상인회장은 “각종 시장 활성화 사업을 통해 시장의 매출이 30~40% 이상 상승했고 상인, 소비자들의 만족도도 높은 편” 이라며 “이 모든 성과는 삶의 터전인 시장을 살려 보자고 팔을 걷어붙인 상인들의 노력, 희생, 협조 덕”이라고 강조했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10-10

‘청년이 찾아오는 도시 고령’ 지방 소멸 위기 극복한다

지난달 22일 고령군 대가야문화누리 우륵홀에서는 600여 명의 청년이 참석한 제2회 고령군 청년의 날 기념공연이 열렸다. ‘청년의 꿈을 더 크게’라는 부제로 기획된 그날 공연처럼 고령군은 청년들의 열정과 꿈을 응원하는 적극적인 정책을 입안해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군정 슬로건부터 “젊은 고령, 힘있는 고령”이다. 고령군은 인구 감소에 따른 지방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인구정책도 청년인구 활성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투자 역시 아끼지 않는다. 청년인구 활성화 정책이 인구의 주요 이탈층인 청년을 붙잡고, 이를 통해 미래 출산율도 끌어올려 장기적으로 안정된 지역의 인구 구성을 이끌어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청년’과 ‘인구’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령군의 지방소멸 위기극복 정책을 점검해본다. □ 인구 감소 막아줄 ‘천년건축 시범마을 조성’ 청년층의 주거 안정을 위한 사업은 고령군의 핵심 정책 중 하나다. 지난 9월 말에는 다산면 벌지리에서 ‘천년건축 시범마을 조성 기공식’을 도지사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하고, 사업의 성공적 추진을 다짐했다. ‘천년건축 시범마을 조성사업’은 경북도가 인구 감소로 쇠퇴하는 지역의 위기 앞에서 모범적이고 자랑스러운 전통인 하회마을처럼 세상의 변화와 무관하게 흔들림 없이 지속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이는 새로운 도시 모델 구축을 목표로 8개 시·군을 선정해 동시에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기도 하다. 그중 고령군이 가장 먼저 시작을 알린 것이다. 고령군의 천년건축 시범마을 조성사업은 지역 특성에 맞는 지속가능한 주거단지를 조성함으로써 인재와 청년들이 찾아오는 지방시대 전환의 상징적인 장소로 거듭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앞으로 사업비 230억 원을 들여 면적 2만5370㎡ 부지에 임대주택 25동 70호(공동주택 8동 44호, 단독주택 17동 26호), 커뮤니티센터, 테라피농장, 체육시설, 돌봄시설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 사업은 올해 9월 착공해 2027년 준공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국토부 공모사업인 청년복합귀농타운과 일자리 연계형 주택지원사업 등에 선정돼 국도비를 확보했고, 현재 사업을 적극 추진 중”이라고 고령군은 알려왔다. □ 돌봄시설 포함된 청년·신혼부부 임대주택도 고령군은 노후된 다가구주택을 매입한 후 리모델링을 진행해 저렴하게 임대공급 하는 ‘청년행복 임대주택 사업’도 진행해 지난 8월 첫 입주를 시작했다. 이 임대주택은 월 1만원의 파격적인 임대 조건으로 최장 4년 동안 거주가 가능하다. 9세대의 입주자 모집에 44명이 신청해 세간의 높은 관심을 증명했다. 이런 관심을 바탕으로 향후 사업 확대도 검토하고 있다. 또한 경북개발공사와 함께 하는 임대주택사업도 추진 중이다. 청년과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50호 정도를 공급할 예정이라는 게 고령군의 부연. 2026년 하반기가 되면 1차사업으로 지어질 20호에 사람들이 입주할 예정이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경북도의 저출생 대응사업과 연계해 돌봄시설을 포함하는 공동주택으로 공급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주거 안정을 위한 다양하고 차별화된 지원정책도 발굴해 시행하고 있다. 최대 10개월간 월 10만 원을 지원하는 청년 월세주거비 지원사업은 소득기준을 완화해 호응을 얻었다. 2023년부터 시행된 주택대출 이자지원 사업도 연간 최대 400만원을 지원해, 2024년 6월 말까지 28세대가 혜택을 받았다. 이는 고령군으로 이주하는 세대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또한, 이 정책은 경상북도 공모사업에 선정돼 이주를 목적으로 하는 신규 주택건축에 필요한 도로, 상하수도 등의 생활SOC 시설을 가구당 최대 1500만원 내에서 지원하기도 한다. 청년층의 주거 안정과 함께 일자리 창출 사업도 지방소멸대응기금을 활용해 하나씩 진행중에 있다. 먼저 임대형 스마트팜을 조성하고 지난 7월부터 임대를 시작해 청년농부들의 지역 정착을 돕고 있다. ‘고령군 임대형 스마트팜’은 다산면 좌학리 1007번지 일원에 6500㎡ 크기의 경량철골 비닐온실 2동과 복합환경 제어설비를 갖춘 시설이다. 이는 창업농의 안정적인 농촌 정착형 모델을 정립하고, 인구 유입을 촉진하기 위해 추진된 사업. 스마트팜 보육사업을 수료하는 등 영농동기가 확실하고 준비가 된 농업인 6명을 선발해 7월 1일부터 최대 3년간 임대 형태로 운영을 시작했다. 고령군은 “향후 계속적인 임대를 통해 새로운 농업인을 발굴하고, 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반시설로 운영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더해 청년창업공간 ‘들썩거리’를 조성하고 7월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전통시장 내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전통시장의 오랜 역사와 청년들의 젊은 감성이 하나돼 큰 시너지를 만들어갈 목적으로 조성된 청년창업공간 들썩거리는 2023년 부지 매입을 시작해 2024년 6월에 조성이 완료됐다. 열정적인 청년이 창업교육을 수료하는 등 철저한 준비기간을 거쳐 돈가스 전문점 갈돈, 브런치 식당 시장브런치, 일본카레와 덮밥 전문점 코메야, 베이커리 전문점 희한한제과점 등 총 4곳이 창업됐다. 앞으로도 고령군은 행정력을 집중해 지역경제의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도록 전통시장을 성장시켜 나갈 각종 정책을 펼칠 계획이다. □ 청년 정책으로 ‘한국지방자치경영대상’ 수상 위와 같은 직접사업 외에도 일자리·청년창업지원센터 운영, 자격증 취득 지원, 청년 근로자 교통비 지원, 청년 창업자 임차료 및 리모델링 지원, 예비창업가 육성사업 등 적극적 청년일자리 정책을 추진하는 고령군은 7월 9일 제29회 한국지방자치경영대상에서 ‘일자리 창출부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거와 일자리 관련 정책과 함께 청년층 이탈의 주요 원인인 자녀의 양육과 교육환경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시책도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추진 중이다. 원어민 영어교실, 창의력 증진 프로그램 등 수요는 높으나 지역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교육과정을 개설해 제공하고 있으며, 4월에는 고령 어린이과학체험관을 개관해 부족한 교육 인프라를 확충했다. 다자녀가정의 양육부담을 경감해 출산과 양육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노력도 멈춤 없이 진행됐고, 3월부터 다자녀가정 양육장려금과 학자금 지급사업을 시작했다. 양육장려금은 고령군에 사는 3자녀 이상 가구 중 1~6세 셋째 이상 자녀에게는 매월 20만원, 7~18세 셋째 이상 자녀에게는 매월 15만원을 고령사랑상품권 등으로 지급한다. 다자녀가정 학자금은 고령에 사는 3자녀 이상 가구 중 34세 이하의 자녀가 국내 대학에 재학 중인 경우 학기당 15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출산 지원을 위한 고령군의 시책인 ‘산모 산후조리비 지원사업’도 시행 중이다. 고령군 거주 산모에게 출산 1회당 100만원, 쌍생아는 150만원을 지원한다. 고령군 관내에는 산후조리 시설이 없으나, 인접한 대구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어 산모들의 관심과 호응도가 높다. 올해 6월부터는 지역 내 소아청소년과 부재로 인한 의료 불균형 해소를 위해 고령군 보건소 1층 출산통합지원센터에서 소아청소년과 진료도 시작했다. 앞에서 언급된 정책들이 적극적인 소통의 장을 통해 발굴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고령군은 다자녀가정, 청년농업인, 청년창업가 등과 수시로 소통간담회를 가지고 있다. “이 자리엔 군수가 참여해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는 것이 고령군의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이남철 고령군수는 “젊은 고령, 힘있는 고령이라는 군정 목표로 2년을 달려왔다”며 “지금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향후 관련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고 약속했다. 저출생과 인구 감소로 인한 지역소멸 위기는 어느 지자체 할 것 없이 주요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다. 미래를 바라보며 청년들을 지역에 불러들여 활기찬 도시를 만들겠다는 고령군의 정책이 어떤 구체적 결실을 맺을지 주목된다. /전병휴 기자 kr5853@kbmaeil.com

2024-10-10

‘부부의 연’ 맺은 팽나무와 말채나무

경산시 자인면 서부리 72-1번지 나즐로(나홀로 즐겁게) 자인 계정숲을 찾았다. 작은 구릉지로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로 구성된 혼효림의 도시 숲으로 보기 드문 자연 원림이다. 이팝나무, 말채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참느릅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원림으로 과거 경산 자인지역에 자생한 나무를 알 수 있어 앞으로 산림을 복구할 때 중요한 사료적 가치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태적, 학문적인 것과는 별개로 한 장군과 관련된 무형유산과 지방 수령의 선덕비를 소장하고 있는 노천 역사박물관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산책 중 재미있는 스토리를 전해주는 혼인목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팽나무와 말채나무가 한 몸이 되어 혼인목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두 나무가 한 몸으로 서로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나무 앞에 산신 제단을 설치하여 고단한 삶을 나무에 의지하면서 소원을 빌고 위로를 받고 있었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하늘의 천신과 땅의 지신, 또는 인간과 연결해 주는 것이 나무라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마을 나무나 특별한 나무를 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어 신목으로 귀하게 여기며 정성껏 제사를 드리고 보호했다. 이러다 보니 그러한 나무가 있는 곳을 신성한 땅, 숲으로 여겼다. 지금까지 숲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산 자인 계정숲도 그러한 곳이 아닐까 싶다. 계정숲에는 이곳 출신 한 장군 묘와 시중당, 진충묘, 한 장군 오누이와 여원화상 등 시설물과 조선 왕조 시대 사또라 부르는 고을 수령 공덕비, 선정비가 31기나 있었다. 팽나무는 느릅나무과로 수피는 회색이다. 꽃은 4~5월에 피며 열매는 10월에 적갈색으로 익는다. 경북은 동해안 지역에 많이 분포하며 내염성과 병충해에도 강하다.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 정자목, 방풍림으로 할머니처럼 오지랖이 넓다고 할 수 있는 나무이다. 이에 비해 말채나무는 층층나무과로 수피는 검은색으로 그물처럼 갈라진다. 꽃은 취산화서로 6월에 피고 열매는 9~10월에 흑색으로 익는다. 다른 나무에 비해 왜소해 보이지만, 나뭇가지는 말을 부리는 말채로 할아버지처럼 작은 거인의 인격자 나무이다. 팽나무와 말채나무의 혼인목은 바로 우리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혼인목으로 부부의 연을 맺어 사랑목으로 주민들에게 삶의 모범이 되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잘 다듬어진 산책길에는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무릎 높이나 가슴높이에 보기 흉한 혹부리를 달고 있는 참나무를 볼 때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는 아마 주민들이 도토리를 줍기 위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두들겨 패던 흔적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매년 얻어맞다 보니 혹부리가 되어 아픈 고통의 역사를 몸에 세겨두지 않았나 싶다. 우리가 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고 기념탑을 세우거나 역사를 기술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싶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우리의 가난한 시절,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하여 고육지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제는 하나의 전설로 남아 우리의 과거를 뒤돌아보게 하는 역사적 산물로 교훈이 되고 있다. 한 장군 묘 앞에서 그 옛날 역사적 사실을 더듬어 보았다. 산책길에 세워둔 안내 표지판에는 ‘경산자인단오제’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오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민속축제란다. 단오절에 한 장군 묘 대제를 올리고 여원무, 자인팔광대, 자인단오굿 등 각종 민속 연희를 연다고 한다. 이러한 제례 의식과 충의 정신 그리고 다채로운 민속놀이는 독특한 양식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여원무는 자인 도천산에 기거하면서 주민들을 괴롭히던 왜적을 버들못으로 유인하기 위해 한 장군이 그의 누이와 함께 꾸민 춤으로 화려한 꽃관을 쓰고 장정들이 여자로 가장하여 추었던 화관무라고 한다. 이 외에도 단오제 때에는 자인면 계정숲을 중심으로 주로 농사철에 부르던 들소리로 11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자인계정들소리’로는 들지신밟기, 망깨소리, 모찌기소리, 논매기소리, 메타작소리, 방아타령, 칭칭이, 목도소리, 보억사소리, 모내기소리, 어사잉어가 있다고 한다. 이 모두 어릴 적에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들이었다. 경산 자인 계정숲은 이제 이 지역의 지난 유무형의 역사를 한데 묶은 역사박물관과 자연 생태적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숲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여 새들의 천국이 되고 많은 생명체가 찾아드는 생태계로 거듭나도록 모두가 보호에 앞장서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바로 우리 건강을 지키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숲의 가장자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수령의 공덕비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비석이 깨끗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깨지고 흠이 간 부분을 이어 붙인 흔적이 있는 것도 있었다. 이는 과한 공적의 자랑으로 아이들의 비석치기 놀이가 어른들의 비석치기 대상이 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어쨌든 지방 수령의 선덕비는 역사적 유물임이 분명한데 그동안 방치하다시피 한 것을 이제 한데 모아 계정숲에 줄 세워 놓았다. 세월에 이길 장사가 없는 것처럼 선정비도 비바람에 두들겨 맞아 비문 해석도 어렵게 하고 있었다. 무덤 속의 생활 도구나 몸의 장신구는 문화재라 하여 박물관에 온도, 습도까지 맞추어 영구히 보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형평성에 맞추어서라도 선정비는 최소한 비바람이라도 막을 수 있는 보호 장치라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계정숲이 품어 온기라도 불어넣어 주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황처사학유공비 (黃處士鶴有功碑) 내용은 무릇 사람에게 공덕이 있는데도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 잊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며 선행을 행하도록 장려하는 뜻을 펼칠 수가 없다. 저 처사 황학은 외촌에 사는 사람이다. 그가 단을 세우고 성인께 임금의 장수를 비는 것은 타고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며, 가산을 기우려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사람으로 행해야 할 도리와 연관된 것이다. 우리 자인 고을은 가장 고질적인 병폐가 가산의 환곡이었다. 처사 황학께서 몹시 분해하며 그 병폐를 혁파할 마음을 가지셨다. 임신년으로부터 시작하여 밭과 농막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여 열일곱 번이나 상경하였다. 여러 번 새 당상관에게 청을 넣고, 자주 여섯 판서에게 호소하였다. 또 비변사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일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폐를 혁파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 나가 호소하다가 의금부에 체포되었다. 그래서 석 달 동안이나 지루하게 갇혀 있다가 풀려나 다행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임오년에 이르러 다시 순영에 환곡의 콩 구백 석을 다른 진에서 옮겨오는 것에 대해 글을 올리니, 이때가 정상국께서 절제사로 계실 때이다. 이어서 다시 환곡 쌀 사백 석을 본진에 귀속시켜 달라는 글을 올리니, 이때가 김상국께서 절제사로 계실 때이다. 또 김 어사께서 남쪽으로 오시는 날을 맞이하여 산역인 박송학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권면하여 이끌고서 남아 있는 환곡 칠백 석을 혁파하였다. 처사께서 스스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세분 대신의 두터운 은혜이다. 어찌 그 공을 노래하지 않으며, 그 덕을 기리지 않겠는가.“ 이에 자인 고을의 백성들에게 말을 꺼내 환기시켜 비석에다 새겨 그 덕을 찬양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위대한 업적이 어찌 세상에 드물지 않겠는가? 오직 이 고을의 어른아이 할것 없이 모든 사람이 그 공을 잊거나 그 사적을 민멸하게 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여 이 짧은 비석을 길가에 세워서 잊지 못하는 뜻을 보이노라. -1842년 8월 기록함·처사 황학·건립연대 1842년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0-09

보름달이 떴을 때 ‘월월이청청’을 함께 추고 싶어

마지막 대담은 장소가 바뀌었다. 그동안 동빈내항 인근에 있는 포항예총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눴는데 마지막 대담은 남구 연일읍 자명리에서 하자고 했다. 그곳에 특별히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서. 자명리의 폐교된 자명초등학교는 예술촌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일을 김동은 회장이 벌인 것이다. 비옷을 입고 옮겨 심었다던 백일홍이 주인보다 먼저 반겨주었다. 전은주(이하 전) : 자주 지나다니던 길인데 여기에 예술촌이 있다는 걸 전혀 몰랐습니다. 김동은(이하 김) : 다들 그러더군요. 4차선 도로 공사한다고 문패까지 떼버려 더 그럴 겁니다. 전 : 넓은 운동장과 야외 데크가 인상적이군요. 김 : 이 운동장 때문에 여기 들어왔습니다. 아늑한 운동장에서 아이와 어른들이 다 함께 어울려 춤을 추고 싶어서요. 전 : 지난번에 들려주신 포항의 노래를 자꾸 흥얼거리게 됩니다. 김 : 그 노래가 중독성이 있지요. 한번은 어머니들과 평생학습원에서 수업하다가 야외 수업으로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에 갔어요. 광장에서 연습복 치마를 입고 ‘포항의 노래’에 맞춰 ‘월월이청청’ 춤을 추었습니다. 그때 귀비고에 현장학습을 온 초등학생들이 함께해도 되냐고 해서 다 함께 춤을 추었지요. 아이들이 아주 재미있어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음악 좀 구할 수 없냐”고 묻더군요. “연락처를 주시면 보내드리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 연락처가 적힌 쪽지가 없어진 거예요. 전 :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봤을 때 어떠셨나요. 김 : 그때 새삼 느꼈지요.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춤을 출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전 : 그래서 ‘자명예술촌’을 만든 건가요. 김 : 원래 환여동에 있는 폐교된 대양초등학교 부지를 생각했습니다. 바다와 가깝고, 보름달이 떴을 때 ‘월월이청청’을 추면 끝내줄 것 같더군요. 밤만 되면 그 학교 앞에 가서 서성거렸어요. 그런데 그 학교는 교육청에서 유아교육체험센터로 운영하면서 물거품이 됐지요. 대안으로 폐교된 자명초등학교를 자명예술촌으로 바꿔 2022년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올 때 쑥이 제 키만큼 자라 있었어요. 2년에 걸쳐 그 풀을 제거했는데 저 교실 뒤편에는 아직 손도 못 댔습니다. 사실 관리하기가 아주 힘든데 기분은 정말 좋습니다. 여기 와서 새벽형 인간이 되었지요. 온갖 새소리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면 호미를 들고 나가 풀을 맵니다. 새까맣게 탄 거친 손을 보고 무용가의 손이 왜 그러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내 손이 자랑스러워요. 요즘 매일 운동장에서 궁리합니다. 별이 쏟아지는 밤에 일인용 매트 하나씩 깔고 다 함께 요가를 하면 얼마나 근사할까, 운동장 가득 원터치 모기장 속에 앉아 별과 달을 보며 우리 노래를 함께 듣고 부르면 얼마나 황홀할까, 하고요. 전 : 보름달이 떴을 때 ‘월월이청청’을 추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월월이청청’은 어떤 춤인가요. 김 : 전라도에는 ‘강강술래’가 있습니다. 목포 등지에서 불렸으니까 전라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전라도 ‘강강술래’라고 하지는 않지요. ‘월월이청청’은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면서 부르던 노래인데, 소리하며 춤을 춘다 해서 ‘소리춤’이라고도 합니다. 석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월월이청청’에 대한 연구를 했지요. 민속무용 전문위원인 중앙대 정병호 교수님께 “‘강강술래’가 지역 문화재로 등록돼 세계적으로 알려졌는데 ‘월월이청청’도 지방문화재로 등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면 될까요?” 하고 여쭤봤더니 이슈로 만들어 널리 알려야 도움이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2000년 경주 엑스포 폐막공연을 비롯해 행사만 있으면 ‘월월이청청’을 공연했습니다. 포항, 경주 등에서 ‘월월이청청’ 공연을 했다는 뉴스가 나가니까 영덕에서 갑자기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더군요. “문화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냐”고 반문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우리 모두의 ‘월월이청청’이 되어야 하는데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전 : ‘월월이청청’에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김 : ‘강강술래’는 엄청 체계화되어 있습니다. 가사마다 동작을 예술적으로 만들어놓았지요. ‘월월이청청’도 재 밟기, 대문 열기 등 대목마다 동작이 있어요. 여성들이 춤을 추면서 한풀이를 한 것이라고 봅니다. 처음부터 여기서 이렇게 하고 저기서 저렇게 하고, 이런 것은 하나도 없었지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누군가 한 사람이 일어서서 흥얼거리면 또 한 사람이 일어나서 흥얼거리고요. 옛날에 시골에 가면 “모둠 떡 해 먹는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보름달 밤에 누구는 뭘 가져오고, 또 누구는 다른 걸 가져오고, 이런 식으로 하나씩 가져와서 먹고 놀다가 우리 춤 한번 춰 볼래, 그랬겠지요. 걷고 돌다 보니까 더 크게 한번 돌아보자 했을 테고, 인원이 점점 많아지니까 안으로 한 사람 손 놓고 들어가다 보니 골뱅이, 실꾸리 감기가 되고요. 그리고 실꾸리 감았으니 풀어야 하겠지요. 그러면 실꾸리 풀기가 되고요. 그런 놀이가 춤으로 된 것이 ‘강강술래’고 ‘월월이청청’인 겁니다. 전 : ‘강강술래’와 ‘월월이청청’의 원리가 그렇게 되는 것이군요. 회장님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퍼블릭 프로그램이나 시니어 수업을 많이 하시던데 이유가 있습니까. 김 : 학생들을 가르쳐 전문가로 키워내는 일은 다했으니 일반인들과 같이 놀 수 있는 게 뭘까, 그런 궁리를 합니다. 나도 내 나이에 맞게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자연과 어우러지는 무용을 하면 좋지 않을까 하지요. 그래서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에 관심이 많아요. 포항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만든 ‘사철춤’도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씨뿌리기, 모내기, 추수하기…, 이런 동작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 동작만으로도 굴신운동이 됩니다. 평생학습법이 시행되면서 예전에는 문턱이 높던 문화예술교육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지요. 양만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우수한 프로그램으로 대상자들을 만나고자 늘 공부하고 있습니다. 전 : 아직도 춤에 대해 공부하실 게 있습니까. 김 :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겠지요. 새로운 것도 접해야 하고요. 그래야 제대로 가르칠 수 있어요. 코로나가 유행할 때는 한국댄스테라피협회 류분순 이사장님한테서 동작 치유에 대해 배웠습니다. 1년 동안 꾸준히 수업을 받았고, 2급 자격증도 취득했지요. 내가 해온 춤은 주입식으로 배우고 가르쳤다면, 동작 치유는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내게 해야 합니다. 류분순 이사장은 현대무용을 전공하셨는데 내가 한국무용 동작을 하면 그게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우곤 했어요. 한국무용이 가장 자연스럽다면서요. 전 : ‘김동은 무용단’은 연오랑세오녀를 바탕으로 한 ‘Sun Moon-별이 된 연인’, ‘충비 단향, 대를 잇다’를 비롯해 포항의 문화유산을 콘텐츠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 : 지역의 오래된 이야기는 지역 예술가가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승화해야 하는 주제가 아닐까요? 춤으로 좀 더 친근하게 포항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일월문화제 때 길쌈놀이를 접목해 세오녀의 비단 짜기를 기획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길쌈놀이를 민속놀이로 많이 하는데 다양한 색깔을 사용하곤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줄을 만들어서 포항의 노래에 맞춰 공연했습니다. 관객이 동참해서 다 함께 줄을 잡고 춤을 추었는데 반응이 참 좋았어요. 전 : 혹시 포항에서 살면서 후회되는 일은 없었는지요. 김 : 시립무용단을 해체한 일입니다. 사소한 오해로 빚어진 일이지요. 그때 억울하더라도 좀 참을 걸, 시립무용단이 있으면 후배나 제자들이 돌아올 자리도 있었을 텐데……. 아주 아쉽습니다. 전 :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김 : 포항에서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 포항예총 회장으로 봉사하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래전에 예술의 경계는 무너졌지요. 길가의 백일홍도 색색이 피어 있으니 보기에 더 좋지 않아요? 어머니의 품으로 보듬어 포항의 예술가들이 더불어 더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대담·정리 : 전은주(동화작가) 사진 : 김훈(작가) 끝

2024-10-09

포스코·포스코이앤씨 “중소협력사와 함께 나아간다”

포스코와 포스코이앤씨가 동반성장위원회에서 선정하는 2023 동반성장지수 평가에서 최고 등급인 ‘최우수’ 등급을 받았다. 이번 평가 결과로 포스코는 5년 연속 최우수 등급을 획득하게 됐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 2021년부터 3년 연속 최우수 등급을 획득해 신규 최우수 명예기업에 선정됐다. 지난 8일 개최된 제80차 동반성장위원회에서는 대·중견기업 218개사를 대상으로 2023년 동반성장지수 평가 결과를 확정 공표했다. 이번에 발표한 동반성장지수 평가에서 포스코를 포함해 상위 44개사가 최우수 등급으로 결정됐다. 이 기업들에게는 공정위 직권조사 면제, 공공입찰 사전심사 가점 등 정부차원의 인센티브가 제공된다. ◆ 동반성장지수 동반성장지수는 대·중소기업 간 동반성장 촉진을 목적으로 대·중견기업의 동반성장 수준을 평가해 계량화한 지표다. 동반성장위원회에서 주관하는 ‘동반성장 종합평가’와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주관하는 ‘공정거래협약 이행평가’를 합산해 산정하고 있으며, 평가에 따라 최우수, 우수, 양호, 보통, 미흡 총 5개 등급으로 나눈다. 포스코는 공정하고 투명한 거래 문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비즈니스 파트너와의 상생협력을 적극 실천한 점을 인정받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포스코는 강건한 공급망 구축을 위해 성과공유제, 동반성장지원단 등 8대 대표 동반성장 프로그램을 운영해 중소기업과의 지속적인 동반성장을 추진하고 있다. 포스코 동반성장 8대 대표 프로그램으로 △성과공유제 △스마트화 역량강화 △1~2차 대금직불체계 △철강ESG상생펀드 △PHP봉사단 △포유드림 잡매칭 △동반성장지원단 △벤처육성이 있다. ◆ 포스코 성과공유제 도입 20주년 성과공유제는 2004년 포스코가 국내 최초로 도입한 제도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동으로 개선 과제를 수행하고 그 성과를 공유하는 것이다. 개선 과제 수행을 통해 중소기업은 기술력 확보와 동시에 수익성을 높이고, 포스코는 전문성과 역량있는 중소기업을 통해 우수한 제품을 공급받는다. 장기적으로 포스코와 중소기업의 상호 경쟁력을 동시에 강화한다는 점에서 산업계 동반성장을 대표하는 표준 모델로 자리매김했다. 포스코는 지난해까지 2316개사와 국산화, 원가절감, 안전환경, 매출확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총 5521건의 개선 과제를 수행해 누적 8031억 원을 중소기업 성과보상으로 지급했다. ◆ 스마트공장 구축 통한 생산성 향상 지원 중소기업의 생산성 혁신을 지원하는 ‘스마트화 역량강화’는 포스코 고유의 혁신 기법인 QSS(Quick Six Sigma)를 통해 중소기업 임직원들의 혁신 마인드를 배양하고, 그 토대 위에 스마트공장 구축을 지원함으로써 개선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포스코는 2013년도부터 지난해까지 총 393억 원을 출연해 2234개의 거래·미거래사를 지원했다. 매출액 증대, 생산 리드타임 감소와 같은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며 수혜 기업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 ‘중소기업 고민 해결사’ 동반성장지원단 올해 출범 4년 차를 맞이하는 ‘동반성장지원단’은 각 분야에서 오랜 근무 경력과 전문성을 갖춘 포스코 직원들로 구성된 중소기업 지원 조직이다. △스마트공장 구축 △설비·공정 개선 △품질·기술 혁신 △ESG 현안 해결 등 총 4개 분야에서 맞춤형 컨설팅을 실시해 중소기업의 혁신을 돕고 있다. 2021년 출범 이후 지난해까지 약 100여 곳의 중소기업이 참여해 300여 건의 과제를 수행해 약 339억 원의 재무효과를 거뒀다. 포스코는 지속가능한 공급망 구축이 곧 대한민국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와 직결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중소기업의 경영역량, 제품 품질, 생산성 향상을 도모해 포스코와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도록 동반성장 활동을 지속해 나갈 계획이다. ◆ 포스코이앤씨, 3년 연속 최우수로 ‘최우수 명예기업’ 포스코이앤씨는 2020년부터 자체적으로 △공정 △공존 △공감 △공유 △공생 등 동반성장 5대 브랜드를 도입했다. 중소협력사를 위한 실질적인 동반성장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며, 지속적으로 소통활동을 전개한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특히 ‘성과공유제’ 운영으로 협력사의 기술력 제고는 물론 장기공급권, 단가계약 등의 성과보상을 통해 다양한 판로를 지원하고 있다. 포스코이앤씨는 중소협력사와 2008년부터 지금까지 총 115건의 기술협약을 체결했고, 1605억원의 성과보상으로 협력사의 수주 경쟁력 및 매출 증대에 기여해 오고 있다. 또한 ‘동반성장지원단’을 통해 안전, 품질, 리모델링 교육 및 안전, ESG 컨설팅 등 포스코이앤씨가 보유한 역량 및 인프라를 활용해 협력사를 지원한다. 원자력, 해상풍력, 이차전지 등 회사가 추진하는 신사업 분야의 공동기술개발을 통해 중소협력사의 기술역량 향상에 앞장서고 있다. 이외에도 포스코이앤씨는 2020년부터 협력사의 적정이윤 보장을 위한 저가제한 낙찰제를 도입해 운영해 오고 있다. 협력사의 안전사고 예방 및 탄소 감축 실천을 위한 태양광 이동식 근로자 휴게실 지원, 협력사 유동성 제고를 위한 금융지원 등 중소협력사와 상생협력을 위한 다양한 동반성장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포스코이앤씨 관계자는 “앞으로도 비지니스파트너인 중소협력사와 지속적인 상생협력을 통해 강건한 공급망 생태계를 조성하고 친환경 미래사회 건설을 위해 업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10-09

대박 난 ‘구미푸드페스티벌’… 성숙한 시민의식 빛났다

첨단산업도시인 구미의 대표 음식은 무엇일까. 대표적인 음식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 사실상 없음에도 구미에서는 푸드페스티벌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구미는 1969년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기위해 많이 사람들이 찾아 온 곳이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전국 각 지역의 음식이 존재하게 됐다. 구미 토박이인 김장호 시장은 전국의 음식이 모여있는 구미만의 특색을 살려 ‘구미푸드페스티벌’을 만들었다. 올해 3회째를 맞은 구미푸드페스티벌은 시민들과 함께 성장하면서 말그대로 대박이 났다. 구미푸드페스티벌이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현장에서 찾아봤다. □ 음식에 트렌드를 담다 지난 5일부터 6일까지 구미시 송정맛길(복개천)에서 열린 제3회 구미푸드페스티벌에는 지역 60개 음식점이 참여했다. 대부분의 음식축제에서는 대표 음식을 판매하는데 그치지만, 구미푸드페스티벌은 다르다. 음식에 트렌드를 담았다. 삼겹살을 구우며 도심 속 캠핑 낭만을 즐길 수 있는 ‘삼겹굽굽존’이 대표적이다. 인조잔디가 깔린 이곳에서 조리해 먹는 삼결살은 가족단위 방문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또 요즘 젊은 세대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정호영 셰프와 함께하는 구미 미식존’을 만들어 운영했다. 구미 미식존에는 푸드페스티벌에 참가하는 60개 업소 중 정호영 셰프팀에서 선정한 10개 업소가 ‘구미의 맛’을 현대적인 트렌드로 해석한 음식들을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다른 참가 음식점들도 각양각색의 다양한 음식들을 선보이면서 방문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밖에도 한식대가 7명, 일본 젠다마요리연구회 7명이 참여한 한·일 음식교류전도 눈길을 끌었다. 한·일 음식교류전에서는 한국의 도토리 쇠고기말이와 일본의 타코야끼, 화과자(스하마)를 체험할 수도 있어 큰 관심을 받았다. □ 한 자리에서 다양한 음식을 맛보다 구미푸드페스티벌의 가장 큰 장점을 바로 한 곳에서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전에 구미지역 음식점 중 엄격한 심사를 거쳐 맛집 60곳을 선정해 참여시켰다. 선정된 60곳 맛집의 음식도 다양하다. 복어요리를 비롯해 백숙, 떡볶이, 닭갈비, 통닭, 국수, 칼국수, 쌀국수, 알탕, 버거, 닭발, 삼결살, 냉삼겹, 막창, 추어탕, 케밥, 회, 찜요리, 초밥 등 다양한 메뉴를 한 자리에서 즐길 수 있다. 특히, 가격도 저렴하게 판매해 방문객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또 우리밀로 만든 베이커리와 베이쿠미, 지역 농산물도 선보여 관심을 끌었다. 대구에서 연인과 함께 행사장을 찾은 노정욱(26)씨는 “여러 축제장을 가봤지만 구미처럼 한 곳에서 다양한 음식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면서 “음식의 맛, 가격, 위생과 더불어 친절함도 모두 만족한다. 내년 축제도 기대가 된다”고 말했다. □ 눈과 귀가 즐거운 푸드페스티벌 이번 구미푸드페스티벌은 ‘맛남, 그 이상의 즐거움을 만나다’라는 주제답게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로 넘쳐났다. ‘포크페스티벌’에서는 유리상자, 동물원, 여행스케치, 마로니에 등 국내 대표 포크 뮤지션들이 가을 감성을 더했고, 행사장 중간지점에 마련된 이벤트 존에서는 버스킹 공연과 ‘쉿!(무소음) EDM파티 가면무도회’로 축제의 열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또 ‘구미어울림마당극큰잔치’와 ‘구미전국가요제’도 함께 열려 축제에 풍미를 더했다. 또 구미 수제맥주 마시기 대회, 구미빵 먹고 휘파람 불기 등 지역 특화 먹거리를 이용한 다양한 이벤트도 마련돼 호응을 이끌었다. 가족단위의 방문객을 위한 ‘키즈랜드’도 큰 인기를 얻었다. 이 곳에서는 에어바운스, 과학 체험, 쿠킹 체험 등 다양한 활동이 마련돼 온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밤에는 복개천 주차장 가로수길에 조성된 은하수 점등이 도심 야경과 어우러지면서 야외 음식축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성숙한 시민의식이 축제를 빛내다 구미푸드페스티벌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성숙한 시민의식이다. 축제장이 송정 복개천 주차장이다보니 접근성은 뛰어나지만, 축제장을 찾는 인파를 감안하면 주차시설이 부족하다. 지난해도 15만여 명이 축제장을 찾으면서 인근 도로는 심각한 정체현상을 빚었다. 구미시민들도 1회, 2회 페스티벌을 거치면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교통이 원할하게 소통했다. 특히 지난해 15만여 명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렸음에도 축제장에서도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였다. 야외 축제임에도 흡연자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구미푸드페스티벌에는 가족단위의 방문객이 많아서인지 야외 축제임에도 흡연자의 모습은 없었다. 흡연실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음에도 흡연자들은 축제장을 빠져나가 흡연하면서 비흡연자, 특히 어린이들을 배려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또 축제장이 주거지역이라 소음 등의 민원요소가 있지만, 지역 주민들과 상인들이 서로 이해하고 상생하자는 마음으로 축제가 준비되면서 민원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을 받고 있다. 상인들도 인근 주민들의 이러한 배려에 보답하고자 축제를 오후 8시에 마감해 저녁시간 소음을 없앴다. 축제에 참여한 시민들은 자신들이 먹고 남은 음식물을 직접 프레시존에서 분리수거를 하고 테이블과 주변을 정리하는 등 성숙된 시민의식을 보여주면서 구미푸드페스티벌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구미시와 관계자들의 노력도 한몫을 했다. 친환경 청결 축제를 위해 프레쉬존을 설치해 음식물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보관하도록 이끌었다. 또 시간별로 쓰레기를 수거해 축제 기간 냄새와 거리미관에 소홀함이 없도록 했다. 김장호 구미시장은 “구미 음식의 자부심을 높이고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구미푸드페스티벌을 시민이 주인공이 되는 구미 대표 축제로 만들어 나갈 계획”이라며 “다음달 1일 열리는 라면 축제도 즐길 거리와 낭만이 가득한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4-10-06

관객들 눈물바람 난 국립무용단 초청공연

무용은 전용 공연장 없이는 관객들과 만나는 데 어려움이 있다. 1980년대 무용 공연은 육거리에 있는 시공관에서 열렸다. 하지만 시공관은 수준 있는 무용을 정상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무용 공연이 열리면 웃지 못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도 김동은은 지역 무용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1987년에 포항무용협회를 발족한다. 전은주(이하 전) : 이매방 선생의 포항 공연 이후로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김동은(이하 김) : 그 공연을 계기로 포항에서 무용의 저변을 넓히려면 하루빨리 무용협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87년에 포항무용협회를 발족했지요. 지금 열리는 전국무용제를 그때는 대한민국 무용제라고 했어요.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대상을 받은 팀은 3개 지방을 다니면서 순회공연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포항무용협회를 발족한 후 한 해도 빼먹지 않고 그 순회공연을 유치했어요. 시민들이 공연을 많이 봐야 무용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생기고 무용에 대한 수준도 높아진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전 : 특히 인상 깊었던 공연이 있습니까. 김 : 국립무용단 초청공연 ‘그 하늘 그 북소리’입니다. 정말 이 이야기만 해도 책 몇 권은 될 거예요. 당시에 전기 사정이 안 좋아서 조명을 비출 수가 없었습니다. 시공관 앞마당에 발전차를 불렀는데 주변 상가에서 시끄러워서 장사가 안된다며 시에다 진정을 넣어 공연을 못 할 뻔했지요. 그때 무용단이 20∼30명 정도 내려왔는데, 시공관 안에 분장실이 없어서 남자들은 바깥 골목에서 빗방울을 맞으며 화장하고 분장하고 그랬습니다. 전 : 믿기지 않는 얘기입니다. 김 : 돌이켜보면 힘들었지만, 가슴 벅찬 일이기도 했지요. 국립무용단을 초청해놓고 제가 학교마다 표를 팔러 다녔습니다. 교장 선생님들께 문화교실 때 무용 공연을 봐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객석 수는 생각하지 않고 표를 너무 많이 팔아버렸어요. 사실 표가 그렇게 많이 나가는지도 몰랐지요. 공연 당일 국립무용단 단장님이 관객을 더 입장시키면 너무 복잡해서 공연이 안 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밀려드는 관객을 보면서 저도 대책이 없었습니다. 통로는 물론이고 무대 바로 앞에까지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지요. 그런데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어요. 다들 몰입하니까 숨소리만 나고 잡음 하나 없었습니다. ‘그 하늘 그 북소리’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무용 극화한 공연입니다. 호동왕자가 낙랑공주한테 너희 북을 찢으라고 시키잖아요. 그걸 두루마리 편지로 연출해서 낙랑공주가 그 편지를 펼쳐 읽는데 무용수가 눈물을 흘리니 객석에서도 훌쩍거리면서 난리가 난 거예요. 공연이 끝나고 감사 전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전 : 많은 학생을 지도하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는지요. 김 : 제자들은 하나같이 다 기억에 남지요. 무용가로 남아 있든 아니든 스쳐 간 인연이든 다 소중합니다. 1994년에 전국무용제가 대구에서 열렸을 때였습니다. 대회에 참가하고 싶은데 남자 무용수가 없어서 무용학원 1층에 있던 합기도 도장에 가서 남학생 몇 명만 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관장은 아이들이 말을 듣겠냐며 난색을 보였는데 다행스럽게 남학생 7∼8명이 하겠다고 나섰지요. 그중 한 명이 경찰이 되었는데 오늘 전화가 왔어요. 스승의 날이라고 꽃을 보내주면서 제가 포항예총 회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며 축하해주더군요. 전국무용제가 열렸을 때 저 멋있는 남자 무용수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어서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해병대 군인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들이 연습실에 오면 늘 배고프다고 했어요. 전기밥솥 세 개에 밥을 하고 찜통에 닭을 몇 마리씩 삶아서 닭개장을 끓여놓으면 순식간에 먹어치웠지요. 과일도 한 상자씩 넣어놓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다 사라졌고요. 그래도 그때가 정말 행복했습니다. 전 : 훈훈한 정이 느껴지는군요. 김 : 그 남학생들 중에 무용을 전공한 친구도 있습니다. 말을 좀 더듬는 친구였어요. 이따금 짜장면을 시켜줬는데 먹고 나면 다른 아이들은 그냥 나가버렸지요. 그런데 그 친구는 뒷정리를 깔끔하게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선생님, 저 무용 전공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똑같이 동작을 가르쳤지만, 그 친구는 감정이 탁 나왔어요. 딱 무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전공을 하겠다고 나서니 가슴이 덜컹 내려앉더군요. 그때도 무용을 하겠다는 남학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극히 드물었지요. 그래서 그 친구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무용은 바깥에서 보는 것과 현장에 들어와서 하는 것이 정말 다르다. 결코 화려하지 않으며 자신과 끊임없이 싸움을 해야 한다. 많이 힘든 일이라 권하고 싶지 않다.” 전 : 그 학생이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김 : 이미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았다는 거예요. 말을 더듬으니 말을 해야 하는 직업은 가지기 힘들 테지만, 춤은 몸으로 하는 것이니 충분히 잘할 자신이 있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답니다. 그래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가정도 이루어야 하는데 무용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 하고요. 그래서 여름방학 동안 레슨비를 받지 않고 그냥 한번 해보고 그래도 할 수 있겠으면 하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정말 열심히 하는 거예요. 무용하는 사람은 몸이 악기니까 안경을 끼면 얼굴형이 변할 수 있으니 렌즈를 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바로 실행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렌즈 끼우는 게 적응되지 않아서 나뿐만 아니라 학원의 여학생들도 다 같이 들여다보며 렌즈를 끼워주곤 했지요. 그 친구는 결국 서울로 진학했고 무용수로 성공했습니다. 우연히 접한 무용이 인생을 바꿔놓은 거죠. 전 : 이야기를 들으니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생각납니다. 김 : 그렇지요. 저도 영화 수십 편을 찍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특히 그 남학생들과 전국무용제를 준비하면서 희열을 느끼곤 했답니다. 무대 세트를 밤새도록 만들어서 트럭에 싣고 대구까지 갔지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그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혼자서 감격해하곤 합니다. 전 : 혹시 무용교육을 하면서 회의를 느낀 적이 있나요. 김 : 예전에는 학부모와 진로 상담할 때 아이가 학교 무용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국립무용단이나 시립무용단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했어요. 무용학원 원장이 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문을 닫을 거라고 합니다만, 무용과는 그보다 빨리 문을 닫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춤은 더 그래요. 아이들이 전공하겠다고 하면 오히려 제가 말렸어요. “전공은 안 된다, 춤이 좋으면 그저 춤만 추러 와라, 밥벌이도 안되는 게 무용이다” 하고요. 기존에 전공하려고 연습하던 애들은 가르쳐서 진학시켰지만, 그 후로 전공하려는 학생들은 아예 받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기수 중 한 명은 경기도립무용단에 들어갔지요. 예쁜 제자들이 참 많았어요. 여제자들이 결혼해서 다른 지역에 살다가 친정에 와서 무용학원 간판을 볼 때면 “우리 선생님 아직 저기 계시구나”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학원 운영이 진짜 힘들 때도 학원 간판을 못 내렸습니다. 전 : 무용교육의 현실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김 :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춤에는 ‘강강술래’, ‘월월이청청’이 있습니다. 호흡하고 몸을 움직이며 걷기만 해도 춤이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춤이라고 하면 “나는 춤을 못 춰” 하며 거부 반응부터 보여요. 왜냐하면 요즘 무용이 너무 정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만들어서 하다 보니 무용 인구가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무대라는 공간에 가둔다고나 할까요. 그러니 무용이 극소수의 사치스러운 취미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거죠. 전 : 그렇다면 무용교육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 : 우리 춤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움직임이 곧 춤이다!’ 특히 우리 춤은 자연과 닮았습니다. 아주 자연스럽지요. 돌담체가 뭔지 아시나요? 길을 가다 돌담이 가로막혀 있으면 돌아서야 하지요? 그래서 우리 춤에서 이 동작을 돌담체라고 부릅니다. 또 날아가는 기러기를 형상화해서 기러기체, 성주신을 받드는 모양이라고 성주체라고 하고요. 일상에서 우리 자세나 자연의 형상을 모방해서 박금슬 선생님이 우리 춤 동작에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생활, 자연과 닮았습니까? (김 회장은 이 대목에서 직접 춤사위를 보여주었다.) 전 : 직접 보여주시니 바로 이해가 되는군요. 김 : 이 동작에 음악만 틀면 저절로 춤이 되지요. 음악은 ‘김동은 무용단’이 포항 대잠홀 상주단체로 활동할 때 만든 ‘포항의 노래’입니다. “파란 동해 바다 너머 너머∼” 전 : 노래를 들으니 저절로 몸이 들썩이네요. 김 : 그게 바로 춤이지요. 춤이 별거 있나요. 대담·정리 : 전은주(동화작가) 사진 : 김훈(작가)

2024-10-06

“성모사에서 고백을 하면 사랑도 쉽게 잉태되겠지”

선도산과 서악마을 일대는 신라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수많은 설화와 흥미로운 전설이 깃들어있다. 그 이야기들은 소설의 소재로도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할 터. 부침을 거듭했던 한 국가의 역사 이상으로 개인의 기억도 귀하고 소중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김도일 작가의 단편소설을 2회에 걸쳐 분재(分載)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선도산과 서악마을이다. /편집자주 책방은 열한 시에 문을 열어 여섯 시에 닫는다. 영업시간을 가급적 지키는 편이지만 상황에 따라 조금 빨라지기도 하고 반대가 되기도 한다. 오늘도 마당 가장자리에 심어 놓은 봉선화와 백일홍에 물을 주고 호두가 헤집어놓은 잔디를 손보느라 십 분 정도 늦게 문을 열었다. 책방을 방문하려면 마을 중간에 있는 경로당 마당에 주차를 하고 안쪽으로 이삼 분쯤 더 걸어야 한다. 대문을 열고 잔디 마당을 가로질러 한옥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화를 갈아 신어야 들어올 수 있는 책방은 주로 독립 출판사에서 낸 소설과 에세이, 그리고 경주에 관련된 엽서와 기념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책방의 식구는 나와 엄마 그리고 열두 살 강아지 호두까지 셋이다. 커다란 무덤들을 품고 있는 마을 한가운데 있는 책방은 원래 아빠가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던 집이었다. 요양원에 계시던 할머니가 삼 년 전에 돌아가시면서 집의 상속인이 독자였던 아빠의 외동딸인 내가 되었다. 아빠는 내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시절부터 살던 집은 낡기도 했거니와 할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면서는 사람이 살지 않아 폐가나 다름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일본으로 가 살던 엄마와 나는 처음에 집을 처분하려 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코로나에 걸린 내가 제때 치료받지 못해 패혈증으로 진행되어 죽기 직전까지 간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왠지 고국이 그리워졌다고 할까. 거기에다 이국에서 딸을 잃을 뻔했던 엄마가 외국살이에 대한 염증이 깊어져 계획이 바뀌게 된 것이다. 할머니와 아빠의 유산과 엄마가 모은 돈으로 집을 새로 짓다시피 고친 후 카페와 책방 중 뭘 할까 고민을 했는데 큰 병을 앓은 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카페 일은 무리일 것 같아 책방으로 결정했다.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일했던 엄마의 영향도 컸다. 책방 옆에 딸린 조그만 밭은 엄마를 위한 것이다. 지금도 엄마는 꽤 유명한 소설 전문 번역가이다. 부모님은 일본에서 처음 만났다. 엄마가 그곳에 산 지 일 년 정도 지났을 때쯤 아빠는 막 유학을 와 한인 학생들 모임에 처음으로 나갔는데 고향 사투리가 정겨워 둘이 자연스럽게 친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가 외국살이 선배로서 도움이 되는 정보도 주고 이것저것 챙겨주다 보니 아빠가 엄마에게 빠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 엄마는 아빠에게 언제 관심이 갔던 거야?” “이성으로? 음, 글쎄? 아빠 고향을 들었을 때?” “같은 경상도인 것은 처음부터 알았다며?” “그땐 그냥 고향 사람이라 반가웠던 거고. 아빠 집이 어딘지 알았을 때,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곳곳에 널린 커다란 무덤들, 높이 올라 하늘을 가리는 나이 많은 소나무, 아주 옛날엔 글 읽는 소리가 담 밖으로 들렸을 서원과 이것들을 아우르는 마을, 그리고 마을을 안고 있는 뒷산까지… 아빠를 보면 모든 것들이 뚜렷하게 떠올랐어. 그러다 보니 아빠를 한 번 더 보게 되고, 그러면서 또 정이 들고.” “뭐야? 뭔 말인지 도통 모르겠네.” “그러니까 아빠가 살던 동네가…. 엄마가 첫사랑과 처음으로 데이트를 한 곳이거든.” 엄마의 첫사랑이라는 남자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책장 서랍 속에서 종이봉투 안에 있는 사진 뭉치들을 발견했었다. 요즘 유행과는 많이 다른 머리 모양과 화장들이 신기하고 재밌는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들이었다. 지금의 나보다 서너 살이나 어린 엄마와 친구들은 하나같이 앞머리를 봉긋하게 말아 고정했고 진한 자주색 립스틱으로 입술을 굵게 칠했었다. 우리는 정리를 잠시 멈추고 사진을 앞에 두고 웃었는데 엄마의 웃음에는 반가움과 회상이, 내 웃음에는 신기함과 촌스러움에 대한 놀림이 들어있었다. 한 장씩 넘기던 사진 중간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있는 엄마가 있었다. “어머나, 이게 여기 있었네. 잃어버리거나 버린 줄 알았는데.” 사진마다 언제 찍었고 옆에는 누구누구라는 걸 어린애처럼 알려주던 엄마가 여기에서는 말을 잊은 채 한참을 사진 속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어릴 때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 듯한 표정으로. “엄마, 엄마? 누구야? 누구냐니까?”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골판지박스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오랜만에 엄마와 한 이불을 덮고 누웠다. 온전치 않은 몸으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움직이고 자정이 넘어 겨우 몸을 누였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옛날얘기 해줘.” “엄마도 옛날얘기 잘 몰라.” “아니, 엄마 첫사랑 이야기 말이야. 언제 만났어? 얼마나 사귄 거야? 왜 헤어진 건데?” “야, 헤어지긴… 시작도 안 했는데.” 짝사랑이었던 것이다. 학교와 과를 정해 원서를 내고 시험을 쳐서 대학을 가던 시절, 시험장에서 앞뒤로 앉았던 엄마와 Y는 오리엔테이션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금세 친해졌다. 마치 오래된 친구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엄마의 눈에 누가 봐도 낯선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불편해 보이는 옆자리의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누가 봐도’라고는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감정을 알아채고 먼저 다가가 챙기는 것은 엄마의 타고난 능력이다. 엄마가 그 남자에게 말을 붙인 것을 계기로 엄마와 Y, 그와 옆에 J까지 네 사람은 친해져 한동안 붙어 다녔다. 사랑의 감정을 우정으로 덮은 채로. “근데 왜 그 남자한테 마음이 갔던 거야? 잘 생기지도 않았고, 엄마 스타일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왜 끌렸을까? 그 친구가 좀 어두운 구석이 있었거든. ‘나 우울한 사람이요’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게 아니라, 평소에 농담도 하고 웃기도 잘하다가 긴장이 살짝 풀릴 때 보이는 어둠 같은 거 이해해?”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아 저 사람의 어둠은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저 사람의 어둠을 없애줘야겠다, 그런 연민 같은 거였어?”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어둠까지는 맞아. 근데 연민은 아니었어. 그냥 그 어둠에 공감한 거지. 일종의 동질감이랄까?” 남들 앞에서는 언제나 밝은 얼굴의 엄마였다. 엄마의 마음 안에 어둠이 없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엄마한테 직접 얘기를 들으니 이상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두 달쯤 지났을까, 한밤중에 목이 말라 방문을 열었다가 식탁에 엎드려 있는 엄마를 보고는 문을 다시 닫았던 때가 있었다. 일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든 건지, 울고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엄마가 안고 있는 슬픔에 대해 자각하는, 처음으로 엄마가 불쌍하다고 생각되는 시간이었다. 아빠는 엄마의 어둠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 이해를 표현하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아빠는, 무덤덤하고 푸근한 모습으로 엄마 옆에 가만히 있어 주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비바람에 떨어진 벚꽃잎이 거리에 떨어져 대책 없이 젖던 날, 엄마는 무슨 이유인지 우울해하는 Y를 데리고 술을 마셨다. 시장 안 분식집에서 막걸리를 평소보다 많이 마신 둘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한 엄마가 숨겨 왔던 짝사랑에 관해 Y에게 털어놓았다. 다음 날 술이 깬 엄마는 부끄러움에 잠시 몸부림을 쳤지만 한 편으로는 후련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기회를 봐서 직접 고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Y에게는 남자에 대한 이런저런 감정들을 솔직하게 얘기를 했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는데 신통할 정도로 상대방의 감정을 읽을 수 있던 엄마의 능력이 그때 왜 Y에게는 통하지 않았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 엄마의 적절한 고백 기회는 곧 찾아왔다. 전공수업의 조별 과제를 구실로 둘이서 유적지로 답사를 가게 된 것이다. 남자의 불성실한 학업 태도로 인해 대부분 그와 같은 조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기에 둘이 한 조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과제는 여러 유적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무열왕릉과 선도산으로 정한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거기에 성모사라는 사당이 있는데 신라를 세운 이의 어머니를 모신 곳이거든. 한 나라를 세운 아이를 잉태한 분의 사당이라는데, 거기서 고백을 하면 사랑의 감정쯤은 쉽게 잉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지만 사랑을 앓고 있는 스무 살의 간절한 바람이라 생각한다. 첫 데이트 날(물론 엄마만의 생각이다), 점심을 먹은 후 두근거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써가며 고백의 장소를 향해 올랐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는 중에 사람들이 오며 가며 하나씩 쌓은 돌이 탑을 이루고 있었다. 엄마는 뒤따라오던 남자가 거기에 돌을 하나 보태는 것을 보았다. “정상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 앞에서 걔가 그러더라. 자기랑 Y가 사귀다가 헤어졌는데 자기가 모난 구석이 많은 게 이유였다고. 자기는 앞으로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타이밍 참 기가 참 기가 막히지 않냐? 고백도 못 해보고 차인 거지,” 그 후 엄마는 두 사람과 마주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Y에게 떠들어 댄 것이 너무 부끄러웠고 두 사람 이별의 이유가 엄마에게 있는 것 같아 미안해 미칠 지경이었다. 매일 학교에 가는 것이 고통이었고 그러다 보니 전공에 대한 회의도 들었기에 다음 해에 휴학을 하고 큰이모가 있는 일본으로 갔다. “그 후로는 그 아저씨랑 Y를 본 적이 없었던 거야?” “걔가 군인일 때 누구 결혼식에서 얼굴을 본 것 같고… 아, 자퇴서를 내러 갔을 때가 마지막이었구나. 아빠를 만나고 있었을 땐데 그래도 마음이 좀 이상하더라. 헤어지고 나서 눈물도 좀 흘렸던 것 같고. Y는 한 번도 못 봤어. 연락이 닿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 “그 돌탑 말이야. 거기 가면 아직 그 아저씨의 마음이 있을 수 있겠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쌓인 탑이니까. 비바람에 무너지지 않았으면 돌무더기 아래에서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받치고 있지 않을까? 시시하지?” “그러게…. 흔한 삼각관계네. 본인들은 심각했겠지만…. 이제 잠 온다.” 한국에 오면 뒷산에 꼭 가 봐야지 생각했는데 지금껏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산을 오를 체력이 될지 겁이 나기도 했고 책방 문을 열고 운영하는 게 예상했건 것 보다 일이 많았다. 엄마는 올라가 봤을까? 오늘도 아침부터 무척 더운 날씨다. 물기를 못 빨아들인 텃밭의 콩과 들깨가 창백해진 이파리들을 땅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엄마는 밭 전체가 충분히 젖을 정도로 물을 준 다음 책방으로 올 것이다. 호두는 잔디 속에서 무얼 봤는지 앞발로 흙을 한 무더기 파헤쳐 놓고 지금은 마루 밑에서 혀를 쑥 내밀고 엎드려 있다. 방금 튼 에어컨이 책방 안을 식히기도 전에 첫 손님이 들어왔다. 귀밑머리가 하얘지기 시작한, 50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큰 눈이 왠지 익숙한 남자였다. 책방을 둘러보는 남자를 신경 쓰며 전날 매출을 정리하고 있는데, “아이고 무슨 날씨가 이렇게 덥대? 호두야!” 마당을 들어서는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 끝) 김도일 소설가 소설가 김도일(49)은 2017년 ‘포항 소재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생활 터전인 포항과 경주 등 경상북도 일대를 소설의 무대로 삼는 경우가 많다. 명료한 문장과 곡진한 세계 인식으로 주목받는 그는 소설집 ‘어룡이 놀던 자리’를 썼고, 공동창작집 ‘당신의 가장 중심’ ‘작은 것들’ ‘쓰는 사람’ ‘최소한의 나’ 등에 필자로 참여했다.

2024-10-01

“건강·웰빙축제도 즐기고 ‘풍기 보약’ 인삼요리도 맛보세요”

500여 년 소백산 기슭 골골마다 인삼향이 감도는 고장 영주시. 조선 중종 36년인 1541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에 의해 재배삼의 시배지가 된 풍기, 500여 년을 이어오며 인삼의 생명력, 인류 행복, 미래 산업으로 성장을 거듭하며 발전해 오고 있다. 영주풍기인삼축제는 고려인삼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알려 인삼 종주국으로서의 위상 회복과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인삼이 먹을거리로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산업으로 나갈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자 매년 개최되고 있다. 올해 축제는 영주시 풍기읍 남원천 및 인삼문화팝업공원 일원에서 5일부터 13일까지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 ‘명예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된 풍기인삼축제는 매년 인삼채굴 시기에 맞춰 품질 좋은 인삼을 저렴한 가격에 만날 기회 제공과 지역 특징을 살린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대한민국 대표 건강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한국 인삼 자존심, 천년건강 풍기인삼 영주시 풍기읍은 예로부터 기후가 서늘하고 배수가 잘되는 마사토를 지녀 품질 좋은 삼이 나기로 명성이 높았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를 지낸 주세붕은 백성으로 하여금 소백산에서 자생하는 산삼 종자를 이곳에 심어 재배인삼의 시배지가 됐다. 영주는 북위 36.5도에 위치해 평균 7시간이 넘는 일조량과 11.9도의 높은 일교차가 특징인 지역으로 이곳에서 생산된 인삼은 조직이 치밀하고 저장성 또한 우수해 가공에도 적합한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면역증진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유효사포닌 함량이 36종으로 미국산 19종, 중국산 15종에 비해 월등히 높아 인삼 가운데서도 최고로 손꼽힌다. 영주 풍기인삼으로 만든 가공식품은 산지에서 직접 가공해 신선도가 높고 오랜 시간 재배해 온 역사를 바탕으로 가공 기술이 뛰어나다. 영주에서는 삼포에서 캔 수삼과 캐낸 수삼을 쪄서 말린 홍삼, 6년근 홍삼에서 추출한 홍삼농축액, 홍삼을 벌꿀에 당침해 원형을 살린 홍삼 정과와 홍삼절편, 홍삼엑기스, 홍삼 뿌리제품 등 다양한 가공식품을 생산하고 있다. □ 2024 경북영주 풍기인삼축제 올해로 27회째를 맞는 경북영주 풍기인삼축제는 16세기부터 오늘날까지 풍기의 문화와 역사를 일군 인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지역 대표행사다. 인삼 수확기에 맞춰 열리는 축제는 품질 좋은 인삼을 저렴한 가격에 만날 기회 제공과 인삼 축제라는 명성에 걸맞게 다채로운 기획전시와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축제 첫날 고을의 번영과 인삼의 풍년을 기원하는 풍기인삼 개삼터 고유제, 이색 볼거리인 풍기군수 주세붕 행차 행렬 퍼레이드를 시작으로 풍기인삼 대제와 전국 우량인삼 선발대회, 인삼깎기 경연대회, 소백산 영주풍기인삼가요제, 마당놀이 덴동어미전 등 공연이 펼쳐진다. 체험 행사로 인삼병주 만들기와 인삼요리 전시 및 체험, 인삼 경매 등이 열린다. 무대공연에는 퓨전 국악공연, 덴동어미 화전놀이, 인삼인형극, 주민자치 동아리와 지역 문화 예술인 공연, 개·폐막식 축하공연이 이어진다. 축제장에서는 인삼을 통째 튀겨낸 인삼 튀김, 마삼족발보쌈, 인삼정과, 인삼차, 인삼으로 만든 다양한 웰빙 인삼요리를 맛볼 수 있어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특히, 올해 풍기인삼축제는 한국관광공사 2024 지역축제 수용태세 개선사업에 선정돼 새로운 인삼먹거리 개발과 홍보도 진행된다. 풍기인삼축제장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위해 코레일과 연계한 반값으로 즐기는 풍기인삼축제 상품을 코레일앱 등에서 구매하면 최대 50%의 운임 할인과 영주사랑상품권 1만원이 지급된다. 연계행사도 다양하게 펼쳐진다. 인삼축제 개막일인 5일에는 문수면 무섬마을에서 2024영주 무섬외나무다리축제, 영주 원도심 야행 ‘관사골에 비친 달빛’이 함께 열려 영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동의보감에는 “인삼은 오장의 부족한 기를 채워주고 정신과 혼백을 안정시켜 눈을 밝게 하며 허약하고 기운이 약함을 보한다” 는 인삼의 효험을 기록하고 있다. 박남서 영주시장 인터뷰- 박남서 영주시장 500년 인삼 재배 역사 바탕으로 국민에게 신뢰 쌓는 축제로 육성 -영주풍기인삼축제의 성격은. △경북영주풍기인삼축제는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의 명성에 걸맞게 판매 위주의 행사가 아니라 풍기인삼에 대한 역사를 스토리텔링 하고 있다. 풍기인삼의 역사와 풍기인삼 재배 농가, 상인들의 애환을 느낄 수 있는 공연을 비롯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영주 지역이 가진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알리고 해마다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기대되는 축제를 만들어 가는 것이 목표다. 500여년의 인삼재배의 긴 역사를 바탕으로 집약된 기법과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 그리고 국민들에게 신뢰를 쌓아가는 축제로 성장시켜 나갈 것이다. 풍기인삼의 경쟁력은. △영주시는 풍기인삼 품질향상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삼생산 기반 조성과 산업화와 마케팅을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 풍기인삼 시험장에서는 유기농 인삼을 생산, 공급해 농가소득을 증대시키고 있다. 매년 개최되는 영주풍기인삼축제는 풍기인삼을 널리 알리고 판매하는 것은 물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파급 효과를 가져와 지역경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영주시의 이 같은 노력은 문화체육관광부 명예문화관광축제 선정, 한국관광공사 2024 지역축제 수용태세 개선사업 선정으로 이어져 발전 토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영주풍기인삼의 품질이 좋은 이유가 있다면. △영주는 지리적으로 소백산 줄기를 따라 이어진다. 위도 36.5도의 위치. 온대와 한 대의 경계로 하루 15℃ 이상 일교차가 나는 소백산 산기슭에서 생산되는 영주의 농특산물은 조직이 단단해 빨리 상하지 않고 당도도 뛰어나다. 영주는 소백 산록의 풍부한 유기질을 함유한 토질과 고산 분지형의 지형, 높은 일교차 등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품질 좋은 인삼을 생산하는 고장이다. 이러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영주 풍기인삼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하며 국내의 명성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인삼 산업발전을 위한 계획은. △영주 풍기인삼은 사과, 한우와 더불어 영주 지역을 대표하는 주요 소득원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인삼을 이용한 가공식품의 메카로 풍기인삼의 해외수출이 급신장하면서 글로벌 특산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풍기인삼이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역사성에서 비롯된 집약된 기술과 현대적인 농법을 접목하기 위한 농업인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현장체험, 관광, 가공 등 다한 분야에 접목시켜 6차 산업으로 부가가치를 증대시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풍기인삼의 명성을 갖겠다는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해 나갈 것이다.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4-10-01

무용 불모지에서 고군분투하며 무용의 저변 넓혀

개척자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운 영역, 운명, 진로를 처음으로 열어나가는 사람”이다. 그런 맥락에서 무용가 김동은이 포항 무용을 개척했다고 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개척은 남모를 아픔과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포항에 무용을 뿌리내리고 그 저변을 넓혀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전은주(이하 전) : 회장님은 포항에 무용이라는 예술 영역을 개척하셨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김동은(이하 김) : 남들보다 조금 일찍 하다 보니 그런 얘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내가 우겨서 한 무용이니 아무리 힘들어도 말을 못 했지요. 진짜 힘들 때는 눈물이 날 것 같아 집에 전화도 안 했어요. 전 : 그 시대에는 예술을 폄훼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무용은 어땠나요. 김 : 무용학원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지요. ‘딴따라’라며 대놓고 비하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무용도 열심히 가르쳤지만 몸가짐, 말투 등 어느 것 하나 허투루 가르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전 : 회장님은 어떤 무용 선생님이셨습니까. 김 : 제자들이나 수강생들은 내가 그렇게 무서웠다고 합니다. 잘 가르쳐야겠다, 반듯하게 키워내야겠다, 얼른 그 목표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에 억척스럽게, 혹독하게 가르쳤지요. 대학입시에는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 등을 다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본기부터 확실하게 가르쳤지요. 한 동작 한 동작, 완성될 때까지 붙잡고 시켰어요. 팔꿈치를 교정해야 한다면 팔꿈치에 멍이 들 정도로 내 손아귀에 꽉 힘을 주고 교정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폭력으로 신고당하겠지요. 전 : 열정이 대단하셨군요. 김 : 그럼요. 무용은 물론 악기도 가르쳤습니다. 음악을 알아야 무용 동작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가르쳐서 대학에 보냈더니 기본이 잘된 학생들을 보내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대학교수들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콩쿠르에 나갈 때는 다리미를 들고 다니며 학생들 무대의상을 구김 하나 없이 다려 입혔어요. 무대 위에 세워놓으면 인형같이 예뻤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말만 하면 사람들이 확 깨는 거예요. 아이들한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퐝서 왔는데예”라고 대답하는 겁니다. 그러면 “퐝? 퐝이 어디야?”라고 사람들이 되묻곤 했지요. 지금은 나도 포항 사투리를 많이 씁니다만 그때는 그게 참 못마땅했어요. 그래서 아이들 말투를 고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전 : 제자들이 원하는 대학으로 진학할 때 참 뿌듯했겠습니다. 김 : 말할 수 없이 뿌듯했지요. 하지만 온 힘을 다해 가르쳐 원하는 대학으로 떠나보내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았습니다. 첫 제자 둘(경북무용협회 지회장을 지낸 손현, 조은정)이 대학에 갔을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딸을 시집보내면 그런 기분이 들까 싶었지요. 허전함과 허탈함에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입시를 한두 해 치르는 것도 아닌데 늘 적응이 안 됐어요. 한번은 너무 힘들어하니 어머니가 말씀하시더군요. “물이 함지박 같은 큰 그릇에 담기는 속도와 종지처럼 작은 그릇에 담기는 속도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 채워진다.” 에너지를 많이 쓴 만큼 채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픈 시간이 반복되어 제자들이 많이 생겨났고 포항무용협회, 포항시립무용단도 만들어지게 되었지요. 전 : 학원을 운영할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김 : 지금도 인간관계가 어렵습니다만 젊어서는 더 그랬어요. 지금 같으면 학부모들과 좀 더 잘 지낼 수 있었겠지요. 그때는 나무 사이에도 간격이 필요하듯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적당함이 얼마만큼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학부모와 저와의 관계는 아이들이 없으면 남이라고 여겼지요. 그래서 저는 일종의 신비주의를 선택했어요. 전 : 묘령의 무용 선생님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학부모들이 더 좋아했겠는데요. 김 :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2층 학원에서 내려다보면 길 하나만 건너 바로 제자인 혜승이네 집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누구네 집, 또 그 옆에는……. 그 동네 원생들이 많았지요. 누구 집에 제사를 지내거나 큰일이 있으면 음식을 가득 차려 보내주시곤 했어요. 전 : 무용의 불모지에서 어떻게 단시간에 학원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는지요. 김 : 지금처럼 홍보 수단도 없었고 할 생각도 없었어요. 그저 열심히 가르치면 알아줄 거라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표회를 했지요. 1979년 3월 11일. 그 날짜는 잊을 수가 없어요. ‘김동은 무용학원’의 1회 발표회 날입니다. 1978년 6월에 정식으로 학원을 열었는데 채 1년도 안 된 시점이었지요. 전 : 발표회 준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김 : 무용은 종합예술이잖아요. 그런데 미술, 음악, 무용, 의상 등 포항에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말 음악 녹음 편집도 매번 서울 가서 해야 했지요. 서울에 갔다가 타이밍이 안 맞으면 날밤을 새워 직접 음악 편집을 해야 했어요. 의상도 작품마다 다르게 맞춰 입혔지요. 학부모님들이 많이 협조해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열정적으로 할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아요. 그저 아이들이 예뻤습니다. 1회 발표회의 첫 무대는 꼬마 신랑이었는데 내가 무용학원 1호 등록생인 여섯 살 초슬이를 업고 춤을 췄지요. 힘들었지만 그 시절이 참 인간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 : 첫 공연 후 반응은 어땠나요. 김 : 첫 공연을 시공관에서 했습니다. 공연할 때마다 포항 KBS 김순명 아나운서가 사회를 봐주셨어요. 반응이 뜨거웠지요. 발표회를 마치고 나오면 온 시내가 시끌벅적했습니다. 무용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장구를 배우러 오시는 분도 있었고 며느리 하자는 분도 많았어요. 공연했던 학생들은 학교에 가서 또래의 우상이 되었고, 공연을 본 아이들은 집에 가서 무용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지요. 그 후 해마다 발표회를 했습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어요. IMF를 겪으면서 2년에 한 번씩 하게 되었죠. 전 : 황당한 일도 겪으셨다면서요. 김 : 세무조사를 받았습니다. 첫 무용학원은 죽도성당 골목 안에 있는 2층집이었어요. 그 일대의 유일한 2층 건물이었지요. 1층은 합기도 학원이었고 2층이 무용학원이었습니다. 그 골목은 비만 오면 장화 없이 못 지나다닐 정도로 진창이었어요. 그런 골목에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면 검정 세단이 줄을 지어 대기하곤 했습니다. 자가용이 귀할 때였으니 도대체 저기가 뭐 하는 곳인지, 세간의 주목을 많이 받았지요. 그러다 보니 세무조사 리스트에 올랐나 봅니다. 전 :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무용 공연을 접하기가 어렵지 않았나요. 김 : 늘 아쉽고 안타까운 점은 무용에 대한 이해도가 연극이나 뮤지컬보다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대사가 있어 쉽게 이해되고 빨리 공감할 수 있어요. 반면에 무용 공연을 본 관객 중에는 “뭐, 나와서 뺑뺑 돌기만 하다 들어가는구먼”이라고 하는 분도 있지요. 1986년인가 강선영 선생님이 무용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매방 선생님 순회공연을 포항에서도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려 성사된 일이 있습니다. 공연 당일 관객들 줄이 동빈동까지 이어질 정도로 성황을 이뤘지요. 사진 섭외를 미처 못 해서 그 귀한 자료 사진을 한 장도 남기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쉽더군요. 전 :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김 : “야, 실컷 졸다가 봐도 아직도 북을 두드리고 있네.” 이매방 선생님이 공연하는데 객석에서 그런 말이 오가는 거예요. 내용을 모르면서 앉아 있으려니 얼마나 지겨웠겠어요? 무용인들에게는 주옥같은 시간인데 말입니다. 또 박재근 선생님이 조승미 선생님하고 파드되(pas de deux, 남녀 2인무)를 공연하려고 발레복을 입고 등장했을 때는 “민망하게 꼬락서니가 저게 뭐꼬?” 하며 객석에서 쑤군댔습니다. 공연 후 박재근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발레리나를 리프트 한 상태로 퇴장해야 하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순간 몸에 힘이 다 빠져 상대를 들어올릴 힘이 없어서 간신히 들어왔다고. 정말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대담·정리 : 전은주(동화작가) 사진 : 김훈(작가)

2024-09-29

대구 유일 ‘더블 초역세권’ 품은 도심 속 자연친화 아파트

DL이앤씨는 지난 27일 대구 남구 대명동 2017-2번지 일원 대명2동 명덕지구 주택재개발정비사업을 통해 선보이는 ‘e편한세상 명덕역 퍼스트마크’의 주택전시관을 개관하고 본격 분양에 나선다. 대구에서 유일한 1·3호선 더블 초역세권에 들어서는 데다 브랜드 가치에 맞춰 차별화된 상품 설계가 적용돼 수요자들의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e편한세상 명덕역 퍼스트마크는 지하 2층∼지상 35층, 17개 동, 전용면적 39∼110㎡ 총 1758가구의 대단지로, 이중 전용 59∼84㎡ 1112가구를 일반 분양으로 공급한다. 일반분양 물량은 △59㎡ 482가구 △84㎡A 223가구 △84㎡B 400가구 △84㎡C 7가구 등 수요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중소형 위주로 이뤄진다. 단지의 청약 일정은 오는 10월 7일 특별공급을 시작으로 8일 1순위, 10일 2순위 접수로 진행된다. 당첨자 발표는 10월 17일, 정당 계약은 10월 28일∼30일 3일간 진행된다. 일반공급의 경우 대구 또는 경북에 거주하는 만 19세 이상, 청약통장 가입 기간 6개월 경과, 지역별·면적별 예치금액을 충족한 경우 주택 소유 여부와 관계없이 1순위 청약이 가능하다. 앞의 요건을 충족했다면 유주택자나 세대원 모두 1순위 청약접수가 가능하고, 재당첨 여부 및 과거 당첨사실과도 상관없이 청약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전 주택형 시스템 에어컨, 발코니 확장이 무상으로 제공되며, 중도금 60% 전액 무이자 혜택을 통해 수요자들의 자금마련 부담을 덜었다. 주택전시관 운영시간 및 청약 방법의 자세한 내용은 e편한세상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대구도시철도 1·3호선 명덕역 더블 초역세권…초·중·고도 가까워 e편한세상 명덕역 퍼스트마크는 대구에서 유일한 대구도시철도 1·3호선 더블 초역세권 단지다. 대구도시철도 1·3호선 명덕역 바로 앞에 들어서며, 단지 북측에 진출입로가 계획돼 있어 역으로의 접근성이 더욱 높아질 예정이다. 2호선 환승역인 반월당역도 반경 1㎞ 내에 위치해 대구 전역을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 단지 주변 북대구IC와 이어지는 신천대로, 신천동로가 인접하며, 파동IC와 이어지는 앞산순환로, 앞산터널로의 이동도 편리한 사통팔달 교통망을 갖추고 있다. e편한세상 명덕역 퍼스트마크는 교육 환경도 우수하다. 단지 내 어린이집을 비롯해 직선거리 300m 거리에 대구영선초가 위치한다. 또 반경 1㎞ 내에 경상중, 대구제일중, 경구중, 경북예고, 경북여고, 대구고 등 다수의 중·고교가 밀집해 있다. 대구교육대, 계명대 대명캠퍼스, 영남대 대구캠퍼스, 영남이공대 등 주요 대학도 가깝다. 올해 완공 예정인 ‘대구 대표 도서관’을 비롯해 구립 도서관인 ‘이천어울림도서관’과 ‘남구 스마트도서관’ 등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주변으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 대구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반월당역 상권과 지하상가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인근에 더현대 대구, 동아백화점 쇼핑점, 탑마트 대구점 등이 자리해 있고 중앙로, 동성로, 교동 거리 등이 가까워 다양한 편의·문화시설을 누릴 수 있다. 영남대학교병원, 경북대학교병원 등 대형 병원도 가깝다. 쾌적한 주거환경도 돋보인다. 단지 동쪽 대봉교를 통해 신천 진입이 용이해 산책, 조깅, 자전거 타기 등을 즐길 수 있다. 대봉교 부근에는 파도풀과 유수풀 등을 갖춘 ‘신천 사계절 물놀이장’이 올해 개장해 사계절 내내 다양한 여가 생활을 누릴 수 있다. △ e편한세상 조경 브랜드 ‘드포엠(dePoem)’ 적용, 쾌적한 주거환경 조성 DL이앤씨의 주택 브랜드인 ‘e편한세상’은 비즈빅데이터연구소에서 발표한 4년 연속 스마트 아파트 브랜드 1위 달성과 더불어, 소비자가 뽑은 가장 신뢰하는 브랜드 대상 총 12회 수상, 소비자가 선정한 품질만족대상 7년 지속 수상,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대상 총 10회 수상 등으로 대한민국 대표 주거 브랜드로서의 가치와 위상을 인정받고 있다. e편한세상 명덕역 퍼스트마크는 이러한 브랜드 가치에 걸맞게 차별화된 상품을 적용해 입주민들의 주거 만족도를 극대화할 계획이다. 우선, 동간 거리를 최대한 확보하고 지상 공간에 조경 공간을 크게 늘려 쾌적한 주거환경은 물론 사생활 침해를 최소화했다. 특히 조경의 경우 e편한세상의 프리미엄 조경 브랜드인 ‘드포엠(dePoem)’을 적용한다. 드포엠의 대표 공간인 ‘드포엠파크’는 잔디마당과 수경시설이 있는 공간으로 단지 중심에 조성할 예정이다. ‘로비계절정원’은 동 출입 시 풍성한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특화 정원으로 꾸민다. ‘미스티포레’는 미스트분사시설, 휴게시설 등이 미세먼지 저감 식재와 어우러진 상쾌한 숲으로 조성한다. 또 어린이 놀이터인 ‘드포엠플레이’는 조합놀이대와 놀이시설물, 파고라 등 시설과 식재가 조화를 이루는 자연친화적인 복합놀이정원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라이프스타일 맞춤 주거 플랫폼 ‘C2 하우스’ 및 넉넉한 수납공간 적용 세대 내부에는 e편한세상만의 라이프스타일 맞춤 주거 플랫폼인 ‘C2 하우스’를 적용한다. C2 하우스는 최소한의 내력벽 구조만 남겨둔 가변형 구조로 설계해 고객의 취향에 따라 자유로운 구조 변경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넉넉한 수납공간과 효율적인 가사 동선을 고려한 설계로 소비자들의 높은 선호도를 자랑한다. 전용 84㎡A, C타입의 경우 4베이(Bay) 판상형 구조를 적용해 맞통풍이 가능하며, 전용 84㎡ 전 주택형에 현관 팬트리, 안방 파우더룸, 드레스룸 등 넉넉한 수납공간을 마련한다. 현관 팬트리의 경우 유아차, 자전거, 각종 레저 용품을 충분히 보관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공간으로 설계한다. 주방의 경우 전 주택형(임대 세대 제외)에 일반 창문보다 넓은 ‘와이드 주방 창호’를 적용해 개방감을 더했다. △실내골프연습장, 게스트하우스 등 차별화된 커뮤니티 공간 조성 단지 규모에 걸맞은 커뮤니티센터도 눈길을 끈다. 입주민의 쉼터인 라운지카페(작은도서관)와 입주민 건강을 위한 스크린이 적용된 실내골프연습장, 피트니스, 스포츠코트, 건식사우나, 스터디룸, 키즈라운지 등 가족 모두가 누리는 최신 커뮤니티 시설이 마련된다. 아울러 게스트하우스와 같이 차별화한 공간도 조성해 입주민의 주거 만족도를 한층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일반 아파트보다 2배 두꺼운 ‘60T 바닥 차음재’를 적용해 층간 소음을 최소화했으며, 미세먼지 저감 시스템인 ‘스마트 클린케어 솔루션’을 도입한다. 지하 주차장은 세대당 1.3대의 넉넉한 주차 대수로 설계하며, 충분한 전기차 충전기를 마련한다. 아울러 각 동의 지하 1층은 택배 차량이 진입할 수 있는 주차장 높이를 확보해 안전한 단지 내 환경을 갖출 예정이다. 분양 관계자는 “e편한세상 명덕역 퍼스트마트는 대구에서 희소성 높은 더블 역세권 입지에 위치해 편리한 생활 환경을 누릴 수 있는 데다 주변에 예정된 다양한 개발호재로 높은 미래가치를 기대할 수 있다”며 “대규모 조경 특화 설계 등 수준 높은 상품들을 선보일 예정인 만큼 수요자들의 많은 관심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편 e편한세상 명덕역 퍼스트마크의 주택전시관은 대구시 수성구 동대구로 283 일원(범어네거리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2026년 1월 입주 예정이다.

2024-09-29

시민 누구나 일상 속 문화예술 누리도록… 품 넓히는 포항

포항은 철강 산업 도시와 법정 문화도시의 이미지가 공존하는 독특한 도시다. 포항문화재단은 시민들의 인식 변화를 촉진하며, 시민 누구나 일상 가까이에서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힘쓰고 있다. 또 사회계층 간 문화 격차를 해소하며 시민들이 문화예술 경험을 통해 함께 창조하는 문화 공동체 구축으로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포항문화재단이 추진하고 있는 ‘문화 예술의 접근성 향상을 통한 함께 행복한 문화도시 정책’을 살펴본다. △ 누구나 누리고 즐길 문화권리, 문화 접근성 문화 접근성은 모든 시민이 사회적, 경제적, 물리적 제약 없이 문화예술을 누리고 즐길 수 있도록 보장하는 권리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문화예술 행사에 대한 접근성을 넘어, 문화적 소외를 겪는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다양한 문화를 공유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현대사회에서 문화 접근성의 필요성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저소득층, 장애인, 노인, 청소년, 이주민, 다문화가정, 여성 가장 등 사회적 약자층은 경제적 불균형, 물리적 장애, 사회적 고립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평등하게 문화예술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부는 문화기본법 제4조를 통해 모든 국민이 문화적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특히, 포항과 같은 중소도시의 경우 경제적 제약, 사회적 인식 부족, 충분하지 못한 인프라 등의 차별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지역 사회가 문화적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사회적 포용을 증진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지방 소도시에서도 누구나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적 통합과 포용성을 증진하며 함께 성장하는 사회를 만드는 과정일 것이다. △ 문화로 더 가까이, 포항문화재단 문화 접근성 사업 문화 접근성을 확대하는 것은 시민이 단순히 문화예술을 즐기는 것을 넘어 사회적 통합과 포용성을 증진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가 부족하면 문화적 이해와 교육 부족으로 인한 여러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요인을 제공하게 된다. 따라서 최근 많은 국가와 지역에서 문화 접근성을 확대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1차 법정 문화도시로 지정된 포항시는 최근 지역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문화 접근성 사업을 통해 시민의 문화향유 기회를 확대해 오고 있다. 문화 접근성 사업을 주관하는 포항문화재단은 지역 간, 계층 간 문화적 불균형을 해소하고 누구나 차별 없이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문화시설 등의 서비스 접근성을 개선하고 문화적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도시 외곽 지역에 생활권 문화거점 연결망을 구축해 주민들의 문화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 누구나 접근 가능한 객석으로의 초대, ‘무장애 문화향유 활성화 지원사업’ 포항문화재단은 올해 처음으로 지역에서 물리적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불편함 없이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무장애 문화향유 활성화 지원사업’을 추진했다. 포항문화예술회관 세미나실에서 개최한 무장애 활성화 접근성 ‘배리어 프리’ 공연장 접근성 서비스 활성화 교육에 이어 ‘배리어 프리 공연’도 개최했다. ‘배리어 프리(barrier-free)’란 영문 그대로 직역하면 장벽(barrier)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자는 의미다. 매년 60여 회의 공연을 기획·선보이고 있는 포항문화재단은 특히 지역을 대표하는 공연문화거점인 문화예술회관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기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발전시켜나갈 계획이다. 지난 8월에는 안동문화예술의 전당, (재)달서문화재단 달서아트센터와 공동기획으로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연과 객석을 열고 운영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지역 장애인들의 문화향유권 보장을 위한 협력체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배리어 프리 연극 ‘하늘, 바람, 바다’를 공동 기획해 안동, 대구 달서에 이어 지난 8월 29일 포항시청 대잠홀에서 무료관람 행사를 연 바도 있다. △ 10분 생활문화권역, 동네 문화놀이터 ‘삼세판’ 시민문화거점 조성 및 커뮤니티 활성화 사업 ‘삼세판’은 포항의 골목골목에 다양한 문화거점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삼삼오오 모여 세상을 바꾸는 문화판’이라는 의미를 지닌 삼세판은 이름 그대로 서너 명의 시민만 모여도 자신의 동네 공간에서 하고 싶은 문화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지역주민이 거주하는 생활권 내 동네 카페, 책방, 도서관, 마을 숲, 빈 점포 등의 공간을 다양한 주민이 운영 주체가 된 일상적 문화거점으로 활용하는 ‘10분 생활문화권역’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삼세판 동네 거점으로 선정되면 일부 시설비와 동네 주민들이 원하는 문화활동 프로그램비를 지원받는다. 삼삼오오 모여 함께 책을 읽거나, 도예, 그림, 자수 등 취미를 함께 배우거나, 공통의 문화활동을 통해 새로운 관계 주민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삼세판 사업은 2024년 9월 현재 총 55개의 문화거점을 운영·지원하고 있으며, 연간 600개 이상의 프로그램을 통해 그동안 6500여 명의 시민들이 문화 혜택을 누렸다. △차별 없는 문화권 보장, ‘포항형 문화안전망 특화사업·문화로 사회연대’ 포항문화재단은 지역 사회의 특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항형 문화안전망’을 구축하고 있다. 이 사업은 지진과 코로나19 등의 재난을 겪으며 무너진 지역 사회의 일상회복을 위한 문화프로젝트로 시작했다. 사업의 코어그룹인 ‘문화재생활동가 F5’를 매년 선발·교육해 사회적 재난 연구 및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다양한 그룹이 연계해 지역 이슈에 대한 솔루션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감을 느끼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인문 활용 심리지원과 다양한 지역자원과의 연결을 통해 문화적 치유와 연대를 추구하는 ‘문화로 사회연대’ 지역거점센터 사업이 선정돼 맞춤형 처방 문화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등 실효성 있는 보편적 문화안전망 구축에 박차를 가한다. 포항문화재단은 ‘문화로 사회연대’ 지역거점센터 선정을 계기로 지역사회 자원과의 연결·협력·매개를 통한 시민의 관계회복을 지원하는 지역문화안전‘망’으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계획이다. △ 상상력·창의력의 장벽을 뛰어넘다… ‘예술 놀이터 만지작만지작’ 여름방학 기간이었던 지난 8월 포항문화예술팩토리 아트갤러리는 웃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움직임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포항문화재단 문화예술팩토리가 마련한 기획전시 ‘예술 놀이터 만지작만지작’에 하루평균 400여 명의 어린이가 전시체험에 참여하는, 이른바 ‘대박’을 쳤기 때문이다. ‘예술 놀이터 만지작만지작’은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다’라는 파블로 피카소의 명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어린이들이 물리적·심리적 장애물 없이 자유롭게 작품을 만지며,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울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실과 바늘, 천조각 등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해 아이들이 직접 작가가 돼 작품을 만들어가는 참여형 놀이작품을 구현한다. 이는 ‘예술작품은 만지면 안 된다’는 전통적인 관람형 전시를 넘어 지역의 어린이들이 창의적인 예술활동에 직접 경험하게 하는 새로운 접근이다. △ 지역 아동과 청소년들의 꿈의 향연, ‘꿈의 오케스트라 포항’ 포항문화재단은 음악을 통해 지역 아동과 청소년들이 협력과 자존감을 키울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2013년 첫 운영을 시작한 꿈의 오케스트라 포항은 취약계층 아동을 우선적으로 선발해 음악 교육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배려 대상자들이 문화적 소외를 겪지 않도록 지원하고 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등 8개 파트에 청소년 단원 등 20여 명으로 구성돼 활동 중이다. 단원에게는 교육 기간 악기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예술 강사로부터 역기 연주법과 다양한 앙상블 교육을 통해 정기연주회까지 이뤄진다. 지역의 다양한 곳에 찾아가는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 아동과 청소년의 건강한 성장은 물론 지역사회와의 연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문화, 다양성의 사회를 품다 문화 접근성 사업은 단순히 특정 계층을 위한 복지가 아닌,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사회적 가치 창출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를 통해 지역 사회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게 된다. 포항문화재단이 추진하는 다양한 문화 접근성 사업은 지역 특성에 맞춘 맞춤형 프로그램을 통해 포항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을 증진시키고, 문화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포용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시민이 차별 없이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고민과 과제연구가 필요하다. 다양한 사회적 약자층에 맞는 맞춤형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확대 개발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행정·제도적 뒷받침도 수반돼야 한다. 지역 사회와의 협력, 정부의 정책적 지원, 그리고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통해 문화로부터 소외된 시민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회의 문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4-09-29

역사강사 최태성, 경주박물관을 안내하다

“세계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다. 여행을 하다보면 그 도시가 궁금해진다. 그럴 때 나는 박물관을 찾는다. 박물관은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예술이 응축돼 모여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28일 오전 10시 40분. 경주화백컨벤션센터 3층에서 열린 역사강사 최태성사진의 강연회엔 간간히 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임에도 1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멀리 경기도 용인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한 가족들부터 울산, 안동, 구미, 포항, 경주에서 최 강사의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여든 청중들은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강연에 쫑긋 귀를 기울였다. ‘경주의 재발견-국립경주박물관 속 경주’라는 타이틀의 강연회엔 주낙영 경주시장과 이동협 경주시의회 의장, 배진석 경상북도의회 부의장, 최영기 경주시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 등도 자리를 함께 했다. 주낙영 시장은 환영사를 통해 “해마다 역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이끌어내는 이런 자리를 가질 수 있어 더없이 즐겁다”며 “신라 역사의 대중화를 이끄는 최태성 강사에게 감사드린다”는 말을 전했다. 이동협 의장과 배진석 부의장 또한 “가족들이 함께 경주의 아름다운 유적과 유물을 즐기시길 바란다”고 했고, 이번 강연을 주최한 경북매일신문의 최윤채 대표는 “에이팩 (APEC) 개최지인 경주가 더 큰 역사문화도시로 도약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태성 강사의 강연은 제목 그대로 경주박물관의 핵심 유물을 효과적으로 관람하는 방법이 주된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경주박물관 100% 즐기기’. 경주박물관엔 자그마치 27만여 점의 신라 관련 유물이 전시돼 있다. 제대로 꼼꼼히 살펴보려면 며칠이 걸려도 모자랄 터. 하지만, 박물관 견학에 그만한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니, 경주박물관의 핵심 유물을알기 쉽게 설명하고, 그 유물이 전시된 공간을 알려준 최 강사의 이번 강연은 향후 경주박물관을 찾을 이들에게 유용한 ‘가이드북’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경주박물관 초입에 자리한 성덕대왕신종과 신라역사관의 ‘토우를 붙인 항아리’ 황남대총과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 등의 유물, 신라 청년들의 다짐과 각오를 돌에 새긴 ‘임신서기석’, 불교왕국 신라의 주춧돌을 놓았다고 평가받는 이차돈의 순교비, 얼굴무늬 수막새 등이 최태성 강사가 ‘빼놓을 수 없는 경주박물관의 핵심 유물’이라고 지적한 것들이다. ‘경주의 재발견-국립경주박물관 속 경주’ 강연회엔 적지 않은 초등학생들이 참석했다. 최 강사는 부모와 함께 강연장을 찾은 아이들에게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를 들려주고, 간단한 역사 상식 문제도 출제함으로써 어린 학생들의 역사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당연지사 아이들은 이런 시간을 즐거워했다. 최 강사는 구미에서 온 한 가족 앞에서 “이분들은 벌써 5년 가까이, 30번 이상 내 강연회를 찾아다니며 한국 곳곳의 역사를 공부하고, 그 지역을 여행하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 말에 참석자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1시간 넘게 이어진 강연회는 ‘웃음 속에서 역사 지식을 담아가는 자리’가 됐다는 평가를 받을만했다. 어른과 아이들 모두가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최태성 강사를 좋아하는 아들과 함께 포항에서 왔다는 아버지는 “경주박물관에 몇 번 갔지만, 갈 때마다 어디서 무엇부터 봐야하는지 막막했는데 앞으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이야기 잘 들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4-09-28

39세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 온갖 역경 딛고 ‘석경 화법’ 완성

먹을 듬뿍 머금은 큰붓이 한지에 마찰음을 내며거친 사선(斜線)으로 뻗쳐 내려간다.발묵(發墨)한 먹이 종이에 스며들자붓을 곧게 세워 허공으로 뻗친 가지를 그리기 시작한다.두어 번 큰 붓질에 고목의 태점(苔點)들이 뚜렷하고,세필(細筆)이 가해지면서한 그루 고매(古梅) 모습이 완연하다.아교로 갠 붉은 물감을 점점이 입히는 홍매 채색,흑과 홍의 극적인 대비에보는 이들은 절로 감탄이다.나뭇가지들은 화점(花點)으로 이어지고,고목은 태점으로 연결되며홍매화 가지의 암향(暗香)이허공중으로 스민다. 대대로 유학 가문에서 성장한 석경(石鏡) 이원동에게 서예는 일상이요, 한학은 생활이었다. 어른들 손엔 언제나 경전이 들려 있었고, 집안엔 늘 묵향이 배 있었다. “기억하기를, 연필보다 붓을 먼저 쥐었고, 동화책보다 천자문을 먼저 읽었습니다.” 어릴 적 석경은 희미하게나마 서예와 한학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고 한다. 소질도 있었지만 워낙 글쓰기와 한문을 즐겼기 때문에 이 일이 평생 업(業)이 될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청년 시절 석경이 서예가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인데, 뜻밖의 한 사건이 그를 묵연(墨硯)의 세계로 이끌었다. “고등학교 때 미술교사가 천석(千石) 박근술 선생님이었어요. 어느 날 호출을 받고 작업실로 뛰어갔는데 선생님은 대나무 그림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그때가 5월로 꽤 쌀쌀한 날씨였는데, 러닝셔츠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하시는 겁니다. 그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글씨를 좀 쓰네’라는 주위의 칭찬에 들떠 손재주만 믿고 있었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화선(畵禪)일치’의 경지를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박근술은 석재(石齋) 서병오에 이어, 죽농(竹農) 서동균을 사사해 대구 서화계의 도도한 맥을 잇는 우뚝한 봉우리였다. 그길로 석경은 반(半) 학생, 반 제자가 돼 천석으로부터 서예와 문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그의 서예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고, 마침내 그는 간절히 원하던 동국대 불교미술과에 진학하게 됐다. ◆ 대나무 화법 깨버린 대상작 오랫동안 회자 대학 졸업 후에도 석경은 대구를 떠나지 않고 서예와 문인화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런 한편, 그는 무애자재한 ‘붓의 길’을 얻기 위한 구도(求道)의 방편으로 세상을 주유하기도 했다. 대가들의 작품 세계를 알기 위해 유명 작가, 예술인들을 찾아다녔고, 한때는 지리산 한 암자에서 외부와 문을 걸어닫은 채 좌선(坐禪)에 들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석경 화업 인생에 큰 획을 긋는 1998년이 다가왔다. 그해 석경은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 부문에서 영광의 대상(大賞)을 거머쥐었다. 그 당시 서예와 문인화가 통합 운영되던 시절이어서 예술계 관심은 미술대전에 집중됐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 공모전에서, 석경은 서화계 내로라는 3000여 명 고수들을 제치고 대상을 차지했다. 그의 나이 39세, 본격 붓을 잡은 지 20년 만이었다. 그의 수상은 영남지역 서예를 일으킨 석재 서병오 문중의 경사요, 전국대회의 대상은 죽농 서동균 타계 이후 반세기 만에 이뤄낸 ‘사건’이었다. 당시 서예대전 출품작은 대나무(竹)였는데, 그 화법이 너무 독톡해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이때부터 석경에게 ‘대나무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기존의 대나무 그림이 줄기(竿)-가지(枝)-잎(葉)-마디(節)로 이어지는 패턴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석경은 이 틀을 과감히 깨버렸다. 석경의 대나무는 잎이 먼저 그려진다. 잎은 구도(構圖)의 소품이자 작가의 화의(畵意)를 드러내는 수단이다. 석경의 댓잎 배열은 구도상 공간배치를 잡아주는 소품이 아니라, 그가 지향하는 정신세계의 표현, 즉 화격을 보여주는 언어가 됐다. 가로, 세로 한지에 죽엽이 자리를 잡으면, 잎 사이를 뚫고 줄기가 순식간에 댓잎들을 관통하며 그림이 완성된다. 줄기는 이상과 관념들을, 번뇌와 고뇌들을 한 흐름으로 꿰뚫으며 작가의 지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거침없이 뻗어나간 줄기는 수도자의 게송(偈頌)이요, 선승의 깨달음의 일갈(一喝)인 것이다. 평론가 이인숙은 “초기 필획과 여백의 이중주에 머무르던 석경의 묵죽이 후기에 이르러 담묵(淡墨), 선염(渲染)의 죽영(竹影)이 들어가 공간이 깊어지고 여백의 밀도가 높아진 삼중주로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역 서단의 한 작가도 “석경의 죽(竹)에는 석재(石齋)의 웅장하고 호방함, 죽농의 아름답고 세련됨, 천석의 깔끔하고 간결함이 잘 녹아있다”고 평했다. 석경은 이 모든 것에 아울러 꼿꼿함과 소쇄함을 더해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 냈다. ◆ 한때 생활고 시달리며 노동판에서 노역도 불혹(不惑)도 안 된 나이에 미술대전 대상을 받으며 석경은 순식간에 화단의 블루칩으로 부상했다. 전화통이 불이 날 정도로 하루 종일 전화를 받았다. 축하 전화가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서울 문화계 쪽이나, 주류 서예단체의 러브콜도 상당수였다. 그들은 목돈을 제시하며 기획전, 초대전으로 그를 유혹했다. 수도권 주류 문화계에서는 ‘명망가’로 향하는 급행티켓을 제시했다. 그러나 ‘맹수는 무리지어 다니지 않는다’는 스승의 유훈에 따라 그는 시류와 타협을 거부했다. 오히려 은둔을 자처해, 세상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이후 10년 동안 두문불출 작업에만 전념했다.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세상의 ‘주류’를 외면한 후유증은 너무 컸다. 세상이 보내온 환대를 거절한 것은, 사실상 세상을 적으로 돌린 것이어서, 모든 공적인 활동, 전시의 길이 막혀버렸다. 스스로 자처한 궁핍과 고립은 오로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도저히 가족을 건사할 길이 없어 막노동판에 나갔다. 공사판 생활 그 몇 년 동안 몸은 고되고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 영혼이 투명하고 맑아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제자들과 지인들이 ‘대상 작가가 막노동을 하느냐’며 우려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당시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중에는 그것 역시 근육이 돼, 오히려 주변의 제약이나 화단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마음껏 자신의 서화 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는 힘이 됐다. ◆ 도전, 또 도전… 해마다 새로운 화풍 선보여 화가들은 쉴 새 없이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작업 경지를 넓혀가고, 피아니스트들도 끊임없이 새 주법을 시도하면서 마스터로 성장해 간다. 서예가들도 작품의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자기의 작업 세계를 확장해 간다. 대나무 작품으로 대상을 받은 후, 석경에게 따라다니는 ‘대나무 작가’ 꼬리표는, 그에게는 되레 굴레였다. ‘그림이나 화풍에 어떤 작가가 떠오르면 그 작가는 이미 죽은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석경은 철저하게 자신을 객관화했다.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한 그는 대나무 장르 한 분야에서만 4, 5번의 변주(變奏) 과정을 거쳤다. 서법에서도 전서, 예서에 편식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끊임없는 변신을 시도했다. 매난국죽 문인화 가운데서도 다수가 외면하는 ‘국화’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능소화, 장미, 포도 등 다양한 소재를 발굴하여 문인화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석경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정형화된 문인화의 틀에서 과감히 탈피했다. 패기 넘치던 시절 화두로 삼았던 ‘서화(書畵)일치’를 되새겨, 서예에 회화적인 요소를 도입한 것이다. 한때 동양화에도 소질을 보였던 그였기에, 이런 그의 재능이 징검다리가 되어 글과 그림의 접목이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이런 그의 작풍(作風)은 보랏빛 담묵을 배경으로 그린 국화나, 천연색 녹색 죽영(竹影)을 과감하게 도입한 죽엽도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화선일치 반세기 맞아 작품에만 몰두 많은 예술가들이 ‘장르 외도’를 하고 끊임없이 변신을 모색한다. 그 과정에서 ‘버려지고 취하는 것들’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확립해나가는 것이다. 그런 수많은 취사(取捨)의 갈림길에서 석경은 끊임없이 장르를 파괴하고 구도를 깨뜨리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한때 그는 전통 문인화의 틀을 깨보려고 힘썼다. 그러나 그는 지금 크게 의미 없었던 것이 아닌가 회의한다. 다시금 정통 문인화법으로 회귀했지만 그는 아직도 정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화업(畵業) 50년을 맞은 석경, 그는 오늘도 대구 대봉동 서실에서 조용히 먹을 갈아 붓을 세우고 있다. 20여 년 전 대상 작가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을 때, 그 역시 세속의 영화에 관심이 없기야 했겠나. 그러나 지금은 에둘러온 지난날 길을 되짚어보며 ‘그냥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할 뿐이다. “아마 제가 서울로 갔더라면 시류(時流)와 영합해 대중이 원하는 그림만 그리는 장사꾼이 되었을 겁니다. 아니면 대중매체, 매스컴의 화려한 조명 밑에서 위선(僞善)의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랬다면 돈과 명예는 얻었겠지만 지금과 같은 평안이나 잘살았다는 자부(自負)는 없겠지요.”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