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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을축(乙丑)

육십갑자의 두 번째 을축(乙丑), 하늘에는 을목(乙木)이라는 힘이 나타나는 시간이고, 땅에서는 소(축토·丑土)의 성질과 같은 기운일 때 하늘의 그 기운을 잘 소화하는 때다. ‘소 축(丑)’이 아직 간신히 동지(冬至)를 지닌 ‘을목(乙木)’을 만난 형태며, 을목(乙木)을 ‘겨울 들판의 풀 위에 소가 앉아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겨울 들판에 소가 나가면 먹을 것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고삐에 묶여서 뼈 빠지게 일하는 것도 아니고 팔자 좋게 외양간에서 김이 펄펄나는 ‘여물’을 오무작거리며 먹기만 하면 된다.소 축(丑)은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내고 갖가지 고난과 고초가 많지만 끈기와 생명력을 지녀서 기죽지 않고 봄의 농사일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해서 덕을 베풀며 근면 성실하고 집념이 강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삶을 특징으로 한다.소는 한번 삼킨 먹이를 다시 게워내어 씹는 특성을 가진 동물이다. 소의 입은 하루 종일 바쁘다. 낮에는 뜯은 풀을 씹느라 바쁘고, 밤에는 낮에 뜯어 먹었던 풀을 게워서 이를 다시 씹느라 바쁘다. 바로 되새김질을 하느라 바쁜 것이다. 그래서 축(丑) 소띠는 말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한다. 말을 많이 하게 되면 모든 화의 원인이 되며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백호 윤휴(尹鑴·1617∼1680)의 ‘백호집(白湖集)’ 언설(言說)에 따르면, 말을 잘하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지금은 말하는 기술을 가르치려 애쓸 시기가 아니다.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도록 하고, 천천히 말하게 하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일러주어야 할 때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말솜씨는 자연스럽게 체득된다. 외향적이라고 해서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며, 내성적이라 해서 말을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헛된 걱정을 버리자.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말은 간단하게 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다. 말은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간단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말할 만한 것을 말해야 하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과시하는 말은 말하지 않아야 하고, 남을 헐뜯는 말을 말하지 않아야 하며, 사실이 아닌 말을 말하지 않아야 하고, 바르지 못한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 말을 하는데 이 네 가지를 경계한다면 말을 적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적게 하게끔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사람이 말하기를 “군자의 말은 부득이한 경우에만 말한다”고 하였고, 또 “좋은 사람의 말은 적다고 하였는데 부득이한 경우에 말해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말을 적게 하게끔 되는 이유다.조선 숙종 6년(1680년) 서인이 남인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은 경신환국으로 말미암아 당대 최고의 유학자 윤휴(尹鑴)는 소주와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그 배경에는 ‘천하의 이치란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반주자적’ 입장 때문에 주자를 절대적 가치로 여긴 서인들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몰렸고, 개중에서 주자학을 통해 신분 질서를 강화하고 양반 사대부의 특권을 굳히고자 했던 송시열의 사주와 모략이 크게 작용했다.생각이 다르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해본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인정할 때 진정한 대화를 이룰 수 있다.대화는 독백과 달리 상대가 있다. 대화의 윤리가 필요한 이유다. 이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윤리가 필요하다. 의사소통도 능력이다. 말 잘하는 재능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능력이다. 위르겐 하바마스는 이상적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위한 네 가지 조건을 들고 있다. 첫째, 이해가능성이다. 서로가 상대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쉬울 것 같지만 이것조차도 쉽지 않다. 둘째, 진리성이다. 사실적으로 참인 말을 해야 한다. 너무 당연하다. 거짓으로 대화할 수는 없다. 셋째, 정확성이다.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정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진실성이다. 태도의 문제이다. 얼마만큼 신뢰성을 보여줄 수 있는가이다. (김영필 ‘우리 시대의 철학적 문제들’에서 인용) 류대창명리연구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겉모습을 다듬어 치장하고 말솜씨를 단련하여 나라에 자기의 재능과 기술을 아주 크게 부풀려서 팔고 있다. 알고 보면 그러한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는 경우가 생각 밖으로 많다. 나라가 안정되고 큰일이 없을 때에는 설사 삼 년이 넘도록 그러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어도 크게 잘못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라에 큰일이 일어나게 되는 경우에는 마치 속이 텅텅 비고 가죽이 이미 썩은 흙처럼 문드러진 채찍으로 말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어찌 그 사람 혼자만 몸을 망치고 부끄러운 이름을 후세에 남기게 되는 일에 그칠 것인가. 나라에까지도 그 환란이 미쳐서 나라의 질서와 기초를 흔들어 놓게 되는 것이다.소의 되새김질을 돌아보며 ‘말잔치’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 남이 하는 말을 꼼꼼히 되새겨보는 지혜가 필요하지는 않을지? ‘소에게 하는 말은 새어나가지 않지만, 아내에게 한 말은 새어나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2022-02-09

‘서울 포스코’에 대한 대선후보들 입장은?

포항시가 8일 시청에서 포스코 지주사(포스코 홀딩스) 서울설립과 관련해 ‘지역 경제·사회단체 간담회’를 갖고, 앞으로 범시민 대책기구를 구성해 강경대응을 이어가기로 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포항지역 정치권과 각계 주요기관장들은 회의를 마친 후 포스코 본사 앞에서 집회를 갖고 지주사본사 포항이전을 촉구했다. 범시민 대책기구는 △포스코 지주사 본사 포항이전 △미래기술연구원 포항설치 △지역상생대책 △철강부문 재투자·신사업에 대한 투자확대 등 4대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서명운동과 국민청원을 전개하기로 했다. 포항시민들이 현재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포스코의 지주회사 전환에 따라 지배구조가 바뀌게 되면 기존 포스코 본사 기능이 서울로 이전하는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의사결정 사령탑을 서울에 두고, 포항에는 생산공장만 남길 경우 철강사업보다 신규사업에 대한 우선투자로 포항지역 투자가 축소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이와 관련 김학동 포스코 부회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분할 전 포스코의 대부분 인력과 자산이 ‘철강회사 포스코’로 이전되고 본사도 변함없이 포항에 유지되기 때문에 지역생산, 세금, 고용, 투자 등 모든 측면에서 변화되는 것이 없다. 지주사 전환 후에도 그룹의 중추적인 역할은 철강사업”이라고 설명했다.그렇지만, 본사를 지방에 둔 유일한 대기업인 포스코가 지주사를 서울에 설립하는 것에 대해 포항시민들의 상실감은 엄청나다.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이강덕 포항시장이 누차 밝혔듯이 포스코의 이러한 의사결정은 국가균형발전에 대한 시대적 흐름을 역행하는 처사다. 비수도권의 모든 자산이 수도권으로 집중돼 농어촌지역 시·군이 소멸위기를 겪는 것에 대해서는 대선후보들도 크게 우려하는 부분이다. 포항시민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세계 굴지의 대기업이 된 포스코가 지주회사 전환을 이용해 사실상의 본사를 서울로 옮기는 것은 문제가 많다.대선후보들은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포스코의 지주사 서울설립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지방소멸문제는 차기 정권이 최대 현안으로 다루어야 할 의제다.

2022-02-09

면세점 구매한도 폐지

코로나 팬데믹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국내 면세점 업계 지원을 위해 5천달러로 설정된 국내 면세점 구매한도가 이르면 3월부터 폐지된다. 정부는 9일 다음달 중 5천달러로 설정된 국내 면세점 구매 한도를 폐지하는 내용 등을 담은 개정 세법 시행규칙을 발표했다.개정 시행규칙은 향후 입법예고와 법제처 심사 등을 거쳐 다음달 공포·시행될 예정이다. 면세점 구매 한도가 사라지는 것은 지난 1979년 제도 신설 이후 43년 만이다. 정부는 그동안 면세점 구매 한도를 1979년 500달러이었던 것을 1985년 1천달러, 1995년 2천달러, 2006년 3천달러, 2019년 5천달러로 늘려왔다.그랬던 것을 올해부터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면세업계를 지원하고 해외 소비를 국내로 돌리기 위해 한도를 아예 없애기로 했다. 실제로 국내 면세점 매출은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으면서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2019년 24조8천586억원에서 2020년 15조5천42억원으로 37.63% 감소했다.면세점 구매 한도가 폐지되면 그동안 내국인 여행객들이 면세한도 문제로 구매하지 않았던 1천만원 이상 고가의 가방이나 시계 등을 살 수 있게 된다. 다만 면세 한도는 600달러로 유지돼 한도를 초과하는 구매액에 대해서는 20~55%의 관세를 물어야 한다.국내면세점 업계는 최근 명품 브랜드의 면세점 철수까지 겹쳐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실제로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루이비통이 시내 면세점 매장 철수를 추진 중인 가운데 샤넬이 부산과 제주 면세점에서 운영을 중단할 것으로 알려졌다.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면세점 업계의 어려움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2-09

대구·경북 미래차기업 육성 거점 거듭나야

정부의 2030 미래차 산업발전 전략에 맞춰 대구시와 경북도도 미래차 기업 육성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정부의 미래차 산업 발전전략은 2030년까지 친환경차 국내 신차 비중과 세계시장 점유율을 대폭 끌어올리고 2027년에는 완전자율차 수준의 미래차를 상용화한다는 계획이다. 최첨단 기술을 융합화해 만든 미래차 시장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본격 대응책이다. 이에 맞춰 1천여 자동차 부품업체가 산재해 있는 대구시와 경북도도 대구와 경북에 각각 200개 부품사를 미래차 기업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각종 지원 사업에 나선다. 대구시는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의 구조혁신지원센터를 통해 기업의 구조 전환을 돕고, 경북은 경북테크노파크를 거점으로 미래차 전환 종합지원 플랫폼을 구축키로 했다. 시도는 이들 단체를 통해 기업진단과 RD 사업화, 기술과 자금, 인력양성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지원 사업을 펼쳐나갈 계획이다.지금 세계는 전기차 기반의 미래차 산업구조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그 중 자율차시장은 2035년까지 세계시장 규모가 약 1조달러에 이르고, 연평균 성장률도 40%정도로 전망한다. 지역의 자동차 부품업계로서는 미래차 전환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고 있는 것이다.대구경북의 주요 신성장 산업으로 손꼽히는 자동차 부품산업이 이런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은 중차대한 과제다. 하기에 따라 지역의 산업구조와 성장동력을 크게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첨단산업을 기반으로 한 미래차 산업에 대한 도시별 경쟁도 점차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구와 경북이 전국 최고의 미래차 선도도시로 일어서기 위해서는 남다른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구시와 경북도가 힘을 모아 좋은 기업을 유치하고 유망한 기업을 잘 양성할 때 미래차 선도도시로서 길도 열린다. 대구시와 경북도의 각별한 각오가 필요하다. 전국 최고의 미래차 선도도시로서 우뚝서기 위한 도전장을 이제 지역의 지도자들은 과감하게 내밀어야 한다.

2022-02-09

잠자코 기다리는 일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밥을 만들 때엔, 몇 가지 조심해야 하는 게 있다. 우선 요리하기 전 바깥에서 있었던 일은 깡그리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칼을 이용해 식재료를 다듬을 때엔 달팽이의 속도로 아주 느리게 썰어야 하고, 무언가 볶거나 구울 땐 반드시 약한 불로 해야 한다.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로 요리를 하면 반드시 다치기 마련이다. 빠르고 거칠게 칼질을 하면 손가락을 깊게 베어버리기 쉽고 잡생각에 빠져 들다간 눈 깜짝할 사이에 손을 데이고 만다.저녁 식사를 만드는 동시에 다음날 먹을 점심 도시락까지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요리 시간이 은근 긴데다 어느 때엔 고된 노동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고 대충 끼니를 때우다 보면 빈혈이 더 심해질 게 뻔하니, 무슨 수를 쓰던 건강한 밥을 만들어 먹기 위해 부던히 노력중이다. 물론 그만큼 두 손과 팔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날이 늘고 있지만.언제부터였을까. 학창시절 별명이 고구마일 정도로 답답할 만큼 행동도 느리고 만사태평하던 내가, 지금은 모든 상황에 쫓겨 ‘빨리 빨리’를 외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다음 열차를 타도 되지만 굳이 떠나려는 열차에 몸을 구겨 넣는다거나, 빠르게 오가는 환승 구역에서 천천히 걷는 사람을 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만다.씻는 것도 빨리, 먹는 것도 빨리, 업무조차 빠르게 끝내기 위해 점심시간마저 쪼개어 일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과다한 업무량과 무의미한 결과물뿐이라 현재는 나 몰라라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대체 무엇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나는 자꾸 화가 나 있었다. 장소불문 누군가 말만 걸어도 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어서, 내 꼴이 약간 우스워 보였을 지도 모른다.게다가 짧고 자극적인 미디어를 소비하는 일이 유일한 취미가 되는 동안 날카롭고도 생소한 문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을 너무 쉽게 잊어 버렸다. 이젠 문장을 읽어내는 일이 외로운 해독처럼 느껴지는데다, 읽고 쓰는 행위에 있어 떠오르는 의문이나 생각을 저 멀리 던져버리는 요령이 생겼다. 내 생활 패턴과 생각은 나날이 심플해지고 단순해지는데 어느 때엔 이게 좋다가도 어느 때엔 아득히 암울해진다.아주 가끔 글 쓰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특히 또래의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이들을 마주하면 피해갈 수 없는 몇몇 질문들이 있는데, 그럴 때면 정말 아무 구멍이든 파고선 들어가고 싶다. 그 어떤 물음에도 명확히 대답할 수 없는데다가 이 모든 게 정말 알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아무리 조심히 요리한다 한들, 예기치 못하게 생겨버리는 몇몇 개의 물집이 있다. 모두 나의 조급함에서 생겨나버린 크고 작은 상처들. 약간의 힘만 주어도 뜨거운 물을 흘리며 터질 물집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지기 마련이니 일단 그대로 둔다. 시간이 약이라는 간단명료한 막연함을 믿으며.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2018년 나는 원인모를 피부 알레르기를 얻었다. 단순한 자극이나 마찰이 생겼을 때 두드러기가 올라오는데, 요즘은 별 다른 이유 없이 작고 빨간 수포가 피부 위로 일어나고 있다.돌연 생긴 수포는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을 유발하는데 이럴 때에 처방 받은 약을 먹기도 하고, 스테로이드 연고도 발라보고, 세라마이드가 함유된 차가운 로션을 듬뿍 발라 온 몸을 도배해보지만 사실 그리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이럴 때 필요한 건 기다림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얄밉게 쏙 사라지고 마니까.지금 내 손에 맺혀 있는 물집들도 그렇다. 다른 일을 하다 문득 물집을 보면 이미 터져버리고선 반투명한 막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것이다. 웅크려 있던 뱀이 허물을 벗고 홀연 사라진 듯이.불청객 같은 상처가 사라지고 불그스름한 새 살이 돋아난다는 건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간단하게 일어나는 건지도 모른다. 그게 아무리 식상하고 단촐한 물집 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잠자코 기다려보기로 한다.

2022-02-08

세상의 모든 불빛

배달 대행 아르바이트를 한 지 벌써 5개월이 됐다. 일은 익숙하지만 날씨는 적응하기 힘들다. 종일 겨울비가 내린다. 우비도 챙겨 입어야 하고, 빗길 안전에도 유의해야 한다. 비 오는 날 신경 써야할 것은 또 있다. 고급 아파트 단지는 배달 오토바이의 지상 출입을 막는다. 이런 날 지하 주차장은 위험하다. 에폭시로 마감된 바닥면에 물기가 생기면 몹시 미끄럽기 때문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갑자기 중심을 잃고 넘어질 수 있다. 그러면 다치는 것도 문제지만 손님이 주문한 음식이 엉망이 된다. 특히 국물 음식은 더 조심해야 한다.절대 넘어져선 안 돼. 천천히, 두 발을 땅에 디디면서,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자전거를 배울 때처럼, 엉금엉금 오토바이를 몬다. 땀인지 빗물인지 몇 방울의 물이 눈썹을 타고 뺨으로 흐른다. 차가운 겨울비와 우비 안의 열기가 섞이면서 하얀 김이 오른다. 107동 지하 현관 앞에 간신히 오토바이를 세운다. 40층에서부터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나도 40층에 가야 하는데, 아마 음식을 주문한 손님이 조금 전 귀가한 모양이다.신축 고급 아파트여선지 지하까지 엘리베이터가 금방 내려온다. 40층 버튼을 누른다. 문이 닫힌다. 40층은 처음이다. 이렇게 높은 아파트가 있는 줄 몰랐다. 아기가 자고 있으니 초인종을 누르지 말아달라는 요청에 조심스레 음식을 문 앞에다 내려놓는다. ‘배달완료’ 버튼을 누르고 돌아서는 등 뒤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감사합니다” 마음 환해지는 한 마디. “맛있게 드세요” 속삭이듯 말하고 다시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지하 2층에 내려간 엘리베이터가 40층까지 올라오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복도 끝에 창문 하나가 열려 있다. 창문 밖 야경을 바라본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다는 건 이 일의 기쁨 중 하나다. 40층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의 모든 불빛들이 물기를 머금어 보석처럼 빛난다. 상자에서 마구 쏟아진 사탕 같고, 엉킨 채로 콘센트 꽂은 크리스마스 전구 같고…. 글씨가 됐다가 얼굴이 됐다가 어느 한 시절 혹은 잃어버려 그리운 무엇이 되는 저 불빛들이 애틋하기만 하다.현재 우리나라 자가보유율은 61퍼센트다. 얼마 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한 후보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자가보유율을 80퍼센트까지 올리겠다고 말했다. 자가보유율이 80퍼센트가 되어도, 90퍼센트가 되어도, 아니 99퍼센트가 되어도 내 집은 없을 것만 같다. 10명 중에 6명이나 집을 갖고 있다는데, 왜 내 주변엔 집 없는 사람들뿐인가. 나도, 아버지도, 엄마도, 동생도 자기 집이 없다. 고철 주워 월세 보태던 할아버지는 12년 전 돌아가셨는데, 저세상에 ‘내 집’을 구하셨을까?화장한 분골더미 속에 철심 몇 개가 녹지도 않고 널브러진 걸 보며 ‘저세상에서도 방세 치를 걱정에 쇳덩어리를 지니고 가시려 했구나’ 안쓰러웠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수없이 많은 불빛들 중 내 것은 하나도 없구나. 나는 문득 내가 데이빗 보위의 노래 ‘Space Oddity’에 등장하는 우주비행사 ‘톰 소령’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톰 소령은 비행선이 고장 나 캄캄한 우주를 끝없이 표류한다. 지구는 점점 멀어져 희미한 한 점 불빛이 되고, 그는 지구와의 교신이 끊어지기 직전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제 톰 소령은 망망한 암흑을 영원히 떠도는 우주 먼지, 나도 “Can you hear me, Major Tom?”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저 무수한 불빛들 중 내가 돌아갈 별이 어디 있을까 찾아본다. 불빛들이 한꺼번에 뭉치면서 윤곽 없는 색채의 덩어리가 되고 만다.어느새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지하 2층으로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안은 중력 없는 우주공간의 깡통우주선 같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다음 배달 콜이 울린다. 짧은 공상, 그리고 긴 감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갈 때다.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자 세상의 모든 불빛들이 내게로 한꺼번에 쏟아진다. 세상 어딘가에 환하게 빛나고 있을 내 불빛을 찾아서, 나도 쏟아지듯 달려가야지. 비에 젖은 채 뭉개지는 저 불빛들을 보면서 시구 하나를 외운다. “이제 불 켜진 집에 돌아가게 허락해주십시오. 고통이신, 그리고 사랑이신 적막한 황혼의 하나님이여”(장석주, ‘완전주의자의 꿈’)

2022-02-08

코로나 빈곤층 폭증, 사회 안전망 위협한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최저 생활마저 어려운 빈곤층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경북도내서만 작년말 기준으로 기초생활수급자가 사상 가장 많은 14만명을 넘어섰다. 전년 대비 12.8%가 증가했다. 코로나 발생 이전 해인 2019년말 보다는 24%가 늘었다. 지역별로는 포항시가 2만8천여명으로 가장 많고 경산시, 구미시 등 도내 전역에서 빈곤층이 증가하는 추세다. 포항시는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대비 무려 30.6%가 증가했다.코로나 사태로 노동시장이 위축되고 경제난까지 겹쳐 실업률이 높아진 탓으로 분석된다. 알다시피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등의 퇴출이 늘면서 식당이나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었다.코로나 사태가 아직은 언제 끝날지 몰라 앞으로 실업으로 인한 빈곤층이 얼마나 더 늘지도 알 수 없다. 문재인 정부 들어 최저임금이 급격히 오르고 근로시간이 단축됐지만 취약한 구조의 임시직이나 비정규직은 되레 고용시장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것 또한 빈곤층 양산의 원인으로 손꼽힌다.국회 자료에 의하면 문 정부 출범 이후 사회 빈곤층이 3년6개월 동안 무려 55만명이 늘었다고 한다. 경북도내 빈곤층 증가 추세로 볼 때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빈곤층은 더 늘어난 것으로 짐작이 간다.빈곤층 증가는 양극화를 심화시켜 사회적 갈등의 요소가 된다. 코로나 장발장 같은 생계형 범죄도 늘고 극단적으로는 2014년 생활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송파 세모녀와 같은 비극적 사건이 재발할 수도 있다. 기초생활수급 제도는 어려운 생계자의 최저 생활 보장과 자립을 돕기 위한 우리 사회의 최후 보루 안전망이다. 이런 기초수급 대상자가 늘면 소요비용도 늘어날 수밖에 없어 사회적 비용의 국가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근본적으로 정부가 앞장서 빈곤층 해소를 위한 일자리를 많이 창출해야 한다. 자치단체도 늘어나는 빈곤층의 실태를 파악해 적기에 적절한 대응을 해나가야 사회적 안전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코로나 대응과 함께 빈곤층 증가에 대한 범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때다.

2022-02-08

일찍 ‘예산전쟁’ 준비하는 포항시 돋보인다

포항시가 지난 7일 ‘2023년 국가예산확보 보고회’를 갖고 내년도 국비확보에 전 공무원의 역량을 결집시키기로 했다. 포항시 예산은 민선 6기 이강덕 시장이 취임했던 지난 2014년 1조3천343억원 규모였지만 그 후 2018년 2조원을 넘어선 후, 3년 만인 지난해 3조원 시대를 열었다. 7년 만에 예산이 두 배 이상 증가한 놀라운 성과다. 일찌감치 국비확보를 준비하는 포항시의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대응이 이러한 성과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장식 부시장 주재로 열린 보고회에서는 주요 국비확보 대상사업에 대한 설명과 기관 간 협력방안, 정부부처 대응을 위한 논리개발 등이 집중 논의됐다. 포항시는 우선 부시장을 중심으로 한 TF를 구성해 신규 사업을 발굴하고, 중앙부처를 설득할 각 사업의 타당성과 당위성 등 대응논리를 개발해 중앙부처를 설득하는 데 총력을 쏟기로 했다. 현재 계획하고 있는 신규사업은 수소연료전지 발전클러스터 구축사업, 모빌리티 부품용 그래핀 첨단소재 상용화 실증지원 플랫폼 구축사업, 형산강 도시바람길숲 조성사업, 다목적 생활체육센터 건립 사업 등 27건이다.이와 함께 지난해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사업 타당성 조사비용 20억원을 확보해 가까스로 사업의 연속성을 살린 ‘포항~영덕고속도로 (영일만횡단구간) 건설’ 사업도 계속 추진한다. 정부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경제성이 낮은 것으로 평가됐던 영일만횡단구간 건설 사업은 올해 나오는 타당성 조사 결과에 따라 사업의 존폐여부가 결정된다. 포항의 물류허브 기능 강화를 위해서는 영일만대교 건설은 반드시 성사돼야 한다.‘예산전쟁’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방자치단체의 국비확보 경쟁은 늘 치열하다. 지역경제를 성장시키고 다양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권과 공무원이 일심동체가 돼 일년 내내 정부와 국회, 상급자치단체를 상대로 설득작업을 벌여야 한다. 특히 중앙부처의 정책방향을 사전에 파악해서 이와 연계한 신규사업을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려면 공무원들이 경북도와 중앙부처를 내집 드나들 듯해야 하고, 사업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

2022-02-08

중국의 적반하장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면 당시 복식과 풍속을 나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독특한 화법으로 그려진 풍속화 하나로 당시 생활상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전통 복식이란 그 민족이 가진 오랜 정체성의 표현이다. 김홍도의 그림에서처럼 옷 하나로 그 민족이 가진 고유한 사상과 관습 등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입는 옷이지만 민족정신이 깃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한국의 한복을 비롯 일본의 기모노, 베트남의 아오자이, 만주족의 치파오 등이 이런 종류의 옷으로 다른 나라에선 베낄 수 없는 독자적 민족문화의 하나다.복식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전통 한복의 유래를 고구려 고분벽화(4∼6세기)에 나타난 그림에서 찾는다. 남성과 여성이 모두 저고리에 해당하는 긴 상의를 입고 바지 차림이다. 신라와 백제 유물에서도 동일한 유형의 유물이 나와 시기적으로 보면 우리 민족의 한복 역사는 1천600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2022 중국 베이징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 중국 소수민족 대표가 한복을 입고 등장해 논란을 빚었다. 중국이 김치와 삼계탕에 이어 이번에는 한복까지 문화공정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국민적 비판이 크다. 중국의 문화 침탈이 이젠 도를 넘었다는 여론이다.한복은 영국의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한국의 전통의상으로 소개된다. 누가 뭐래도 우리 고유 의복임이 틀림없다. ‘대장금’ 등 우리나라 사극(史劇)이 외국에서 인기를 끈 배경에도 우리 고유 한복의 아름다움이 한 몫한 탓이다.중국의 역사 왜곡이 한두 번 아니지만 한복(韓服)을 중국의 한복(漢服)에서 유래했다는 그들의 주장이야말로 적반하장이다. 중국의 문화공정에 대한 국민적 경계심 더 높여야겠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2-08

기업의 존재이유, 미션과 비전

장광일​​​​​​​​​​​​​​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2022년 설날을 맞이하여 지인들로부터 “임인년 검은 호랑이의 해를 맞이하여 뜻하시는 일들 두루 성취하시길 기원합니다.”, “ 계획한 모든 것을 이루시고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라는 문자와 서예가인 지인으로부터 붓글씨를 선물 받았다글은 ‘비도진세(備跳進世)’라는 단어로 “도약을 준비하여 세상에 힘차게 나아가다”라는 내용이다.안부 인사와 글을 선물 받고 필자는 ‘올해 내가 뜻하는 일이 무엇이었지’라고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그냥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는 계획을 잘 수립하고, 실천하는 인생이 훨씬 알찬 인생이 될 것이며, 직장 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그냥 주어진 일을 하는 것 보다는 지금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필자는 ‘세명의 석공 이야기’를 좋아한다. 1666년 성바오로성당 건축 현장에서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이 인부들에게 물어봤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건축가는 세명의 석공에게 물어본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라고 질문하자, 첫번째 석공은 주인이 시킨 돌을 깎고 있습니다. 두번째 석공은 돈을 벌기 위해 돌을 깎고 있습니다. 세번째 석공은 후대에 남길 위대한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라고 답을 한다. 똑 같은 일을 하는데 가치관은 달랐다는 것이다.기업에서 일을 하면서 아무 생각없이 일을 하는 사람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의 결과(Out-Put)는 확연한 차이를 가져온다.우리는 세번째 석공의 대답에 주목해야 한다.지금하고 있는 일의 목적을 알고 그것을 추구함으로써 일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힘든 일임에도 즐겁게 일을 하였다는 것이다.훌륭한 기업에는 경영 미션과 비전이 존재한다.미션은 우리 기업 또는 조직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조직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미션은 개인의 철학, 불변의 가치, 내가 살고자 하는 방향으로 인생의 철학과 가치를 담는 것이다. 즉 미션을 통해 왜 존재하는지 아는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비전은 우리 조직이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 모습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조직의 목표를 나타낸다. 막연한 꿈이나 희망이 아닌 비전을 통하여 미래의 이상과 목표가 명확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즉 비전을 통해 무엇이 될지 아는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삼성을 예를 들어 보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지속 가능한 미래에 도전하는 혁신적 기술, 제품, 그리고 디자인을 통해 미래 사회에 대한 영감 고취”라는 미션이며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잘 나타내고 있다. “미래 사회에 대한 영감, 새로운 미래 창조”라는 비전으로 간결하면서도 열망하는 바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필자는 속도보다는 방향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기업의 미션과 비전을 잘 수립하고 구성원 모두에게 알려서 같은 곳을 바라보게 하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2022-02-07

봄빛 희망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봄이 선다는 입춘은 예고편으로 아직은 봄날이 한참 있어야 온다. 설 연휴가 끝나기 무섭게 코로나19 오미크론의 확진자가 하루가 다르게 폭증세를 보이고 있으니, 예상과 우려를 넘어 걷잡을 수 없는 역병의 딜레마에 속수무책으로 빨려드는 것 같다. 3년째 계속되는 지리멸렬한 바이러스의 변이에 몸서리만 쳐지는데, 계절과 세상의 봄날은 허공의 그물에 갇혀버린 듯 싸한 바람이 여전히 빈 가슴을 후비고 있다. 코로나에 빼앗긴 일상에도 과연 봄이 오기는 오는 걸까?그러나 얼음장 밑에서도 봄물은 흐르고 눈 덮인 산야에서도 복수초가 피어나듯이, 봄은 분명 더딘 걸음으로나마 조금씩 오고 있다. 차디찬 땅 속에서도 뿌리는 물긷기를 멈추지 않고 새움을 준비하는 여린 풀들은 단단해진 흙을 하나씩 밀어내고 있다. 비록 비닐하우스 작물이긴 하지만 미나리나 부추 등의 채소는 파릇하고 싱싱하게 싹을 키워 벌써부터 봄의 향과 입맛을 한껏 돋우고 있다. 무채색 겨울빛이라 하지만, 대지는 이처럼 알게 모르게 동면 속에서도 봄빛 생동과 희망을 품으며 만물을 다독이고 채비하고 있다.“솔숲 다한 곳에 물소리 새롭고(松林盡處水聲新) 한적한 개울녘엔 미나리 싹 돋아나네(閒溪濕地芹芽發)” - 강성위 한시 ‘次送元二使安西’ 중봄은 색깔과 향기로 온다. 파릇한 새싹이며 향기로운 꽃에서 새봄의 빛깔이 반짝거리면서 눈과 코를 자극할 때 비로소 봄날임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봄은 결코 쉽사리 호락호락하게 오지 않는다. 얼었던 강물이 풀리고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비가 내리면서 두어 차례 봄샘추위가 지나가야 미상불 봄처녀의 발길이 살포시 닿게 되는 것이다. 새 풀 옷을 입고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찾아오는 봄처녀를 맞이하기 위해 봄의 전령인 달래와 냉이가 서둘러 여린 싹을 내밀고 양지 바른 개울 가에는 미나리 싹이 돋아나는 것이리라. 얼음이 녹고 쌓인 눈도 녹아 개울에 보태기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한결 새롭고 맑은 것이리라.이렇게 봄이 다가오면 자연은 저절로 풀리고 녹고 새롭게 돋아나며 더불어 흐르는데, 사람 사는 세상에는 결코 그렇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 숱하고 흔하기만 하다. 끝없는 질시와 반목, 불신과 배신이 팽배하고, 갈등과 대립의 긴장 속에 배타와 독선이 판을 치는 형세이니, 어느 날에야 얼음장 같은 냉랭함이 녹고 칼날 같은 빗장이 풀릴 수 있을런지 요원하기만 하다. 개인적인 해묵은 감정이나 견해차도 그렇지만,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 즈음해 그러한 기류가 더욱 가세되고 증폭되는 듯해 안쓰러움을 넘어 안절부절하기만 하다.미증유의 블랙홀 같은 코로나19의 난마에 구멍 난 가슴인데, 난무하는 가담항설에 시달리는 민초들의 시선은 고뇌일까 고소(苦笑)일까?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역병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좀 더 편하고 나은 삶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봄빛 가득한 희망의 새싹이 풋풋하게 피어나길 기대해본다.

2022-02-07

추리소설 사상 가장 독특했던 ‘브라운 신부’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미스터리’란 어쩌면 아무 트릭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하나의 그럴 듯한 역설에 불과하다.추리소설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건도, 그 사건을 일으킨 범죄자도, 범죄에 얽혀 있는 흥미로운 트릭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미스터리라고 불러야 할 이유가 어디에 존재하는가. 요즘 한국에서도 추리소설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추리소설이란 언제나 사건의 발생과 해결 사이에서 일어나는 서사를 담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 장르적 정체성을 구성한다. 아마도 추리소설만큼 이 반복적 규칙성에 고집스러운 장르란 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추리소설의 역사에서 바로 이러한 반복적 규칙성에 대해 가장 강력한 대안이 되었던 가장 독특했던 추리소설이라면, 바로 영국 작가 체스터턴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들 수 있다.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은 1911년에 자신이 이전까지 써왔던 ‘브라운 신부(Father Brown)’ 단편들을 처음으로 엮어 ‘브라운 신부의 결백(The Innocence of Father Brown)’이라는 단행본을 냈고, 이후 이 독특한 탐정은 인기를 얻어 36년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5권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가 나왔다.에드가 앨런 포우의 탐정 ‘오귀스트 뒤팽’으로부터 아서 코난 도일의 탐정 ‘셜록 홈즈’로 이어지는 추리문학의 계보에 익숙한 독자라면, 그들이 확립했던 범죄현장의 무질서로부터 과학적 방법을 동원한 추리라는 일련의 방법을 통해 질서를 추구해가는 현대에는 일반화된 추리기법에도 이미 익숙해 있을 터이다. 독자는 책장을 펼치고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나버린 사건을 만나게 되고, 아직은 동기도 단서도 불명확한 혼란 자체인 사건을 탐정은 단서를 모으고, 이들을 조합하여 추리를 하고, 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는 사건 발생 이전의 시간을 재구성해서 독자에게 들려준다. 이것이 바로 현대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도식이다.이런 추리소설의 전형성에 익숙한 독자들이 체스터턴의 ‘브라운 신부’를 보게 된다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될 당혹감은 일반적인 추리소설에서는 낯설기 짝이 없는 무질서와 비도식성, 그리고 비일관성일 것이다. 겉보기에는 전혀 탐정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않는 브라운 신부는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무질서한 사건 현장의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로서 뛰어든다.관찰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이론을 만들어내는 근대의 과학자 타입의 탐정이 아니라, 기꺼이 무질서에 참여하면서 그 사건과 영향을 주고받는 새로운 타입의 탐정에 해당한다.이에 앞서, 1908년에 쓴 ‘목요일이었던 남자(The Man Who Was Thursday)’에서 체스터턴은 무질서가 갖는 창조성을 논했던 바 있다.이 브라운신부는 범죄 사건의 현장을 ‘베이커 스트리트 221b’의 실험실로 옮겨오는 근대 과학자 타입의 탐정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나 널려 있는 무질서 속에 존재하는 질서를 간파해내고 그 속에 참여해서 그 질서를 폭로해내는 타입의 탐정이다. 그러니, 어눌해 보이는 브라운신부의 눈이 반짝이기 전까지 그 사건의 트릭은 트릭조차 아니었던 셈이다.브라운신부는 현명한 사람이라면 조약돌을 어디에 숨길까 질문하고, 그것을 듣고 있던 플랑보라는 인물은 ‘해변’이라고 답한다. 잎사귀를 숨기기 좋은 곳이라는 질문에는 ‘숲속’이라고 답한다. 이것은 누구나 인용하기 좋아하는 그 유명한 체스터턴의 역설이다.하지만 이어 브라운 신부는 잎사귀를 숨길 ‘숲’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묻고 있다. 우리는 잎사귀를 숨기고자 숲을 만드는 식으로, 자기의 발견을 정당화하기 위해 규칙 자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미 백 년 전에 체스터턴은 그렇게 질문했던 것이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2-02-07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을 가질 것이다 (Ⅴ)

-안나는 나와 함께 하는 동안만 우리 집안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약속하마. 하지만 안나와 안나 뱃속의 아이는 다르다. 이제 네가 약속해다오. 안나 뱃속에 있는 아이를 너의 동생으로 인정해다오. 그리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내가 죽은 뒤에도 그 아이를 경쟁자라 여기지 말거라.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느냐. 내가 저 세상으로 갈 무렵이면 너도 이미 제법 나이가 들었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는 그저 그 아이가 건강하게 바르게 자라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커 준다면 그때 가서 그 아이가 할 일이 있겠지.-알겠습니다.필립이 대답했다. 만식은 무릎과 허벅지를 손으로 움켜쥐며 필립을 보았다. 억울하다, 서운하다, 그럴 수 없다. 왜 그렇게 말하지 않는 거지? 알겠습니다, 라니. 필립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그 여자를 사랑하십니까?필립이 만식에게 물었다.-사랑이 무엇이냐?만식이 대답했다.-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부끄럽지 않으십니까?필립이 다시 만식에게 물었다.-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내가 신경을 써야 하느냐? 젊고 건강한 여자를 가질 수 있다면 너는 거부할 수 있느냐? 내가 칠십 먹은 여자와 함께 있으면 아름다운 것이냐? 돈 있고 건강이 있는데, 욕망이 있는데 왜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 도덕, 다른 사람들의 시선, 순리 따위 말하지 마라. 그것들에 신경 쓸 것이었으면 애초에 인공 장기 따위 이식받지 않았다. 나는 벌써 죽었지. 나는 안나의 피부, 가슴, 엉덩이를 보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게 사랑이라면 안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게 징그러운 노욕이라면 노욕이겠지. 노욕이면 또 어때. 나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을 가진 것뿐이다. 안나도 내게서 받고 싶은 것을 받을 것이고. 우리는 서로 주고받은 거다. 너는 다를 줄 아느냐?만식은 이렇게 대답했다.짐을 다 챙긴 만식이 병동의 수간호사를 불렀다. 짐을 집으로 보내 달라 부탁했다.수간호사는 당황했지만 이내 네, 하고 대답했다. 굳이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원래는 안 해드리는 건데.수간호사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흘렸지만 만식은 대답 없이 병실을 나섰다. 확실히 이전보다 숨쉬기 편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것이 맞기는 한데, 어디에 세웠더라? 차를 어디에 세워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하 2층이 맞는데. 만식은 천천히 지하 주차장 벽을 따라 걸었다. 왼쪽 기둥 뒤쪽 낯익은 차가 보였다. 저렇게 먼 곳에 세워두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 문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 만식의 손을 잡았다. 만식이 고개를 들었다.-자네가 여기 어쩐 일인가?-회장님 혼자 퇴원하신다고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요.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제 차를 타시지요. 바로 옆에 세워두었습니다.만식은 차 뒷좌석으로 들어가 앉았다.-내 차는 어쩌지?안전띠를 매며 만식이 물었다.-옮겨다 놓겠습니다.-열쇠는?-저희에게 비상키가 있습니다. 지금 옮기도록 하겠습니다.-저희라니?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제가 오면서 한 명 더 데리고 왔습니다. 회장님을 모시는 것, 회장님 차를 옮겨 놓는 것 두 가지를 혼자 할 수 없어서.만식을 태운 차는 병원을 빠져나갔다. 십 분 정도 지난 뒤 만식의 차도 뒤따랐다. 만식은 운전석 뒷자리에 앉아 등을 기댔다. 걱정을 했단 말이지. 기특했다.-회장님 드실 음료를 챙겨왔습니다. 직접 달인 것이라고, 직접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고, 꼭 다 드시라 하더군요. 콘솔박스에 있습니다. 만식은 콘솔박스에서 텀블러를 꺼내 텀블러의 뚜껑을 열었다. 하얀 김이 올라왔다. 약간은 쓴, 하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만식은 차창을 내리고 가슴 깊숙이 숨을 들이쉬었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이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아서 걸러질 것입니다. 만식은 이 교수의 말을 떠올렸다.잠시 후 만식은 잠이 들었다. 만식을 태운 차는 경부고속도로로 향했고 만식의 차는 서울양양고속도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두 시간쯤 지나 만식이 탄 차가 금강 휴게소에 들어섰다. 푸드 코트 앞쪽에 정차를 하자 푸른색 티셔츠를 입은 사내가 올라탔다. 사내와 만식을 태운 차는 다시 출발했다.푸른색 티셔츠는 운전석에 앉은 사내와 몇 마디 나누고는 만식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만식이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운전을 하던 사내가 앞좌석에 놓여 있던 가방을 건넸고 푸른색 티셔츠는 가방에서 주사기를 꺼내 만식의 어깨에 꽂았다.

2022-02-07

이제 와서 군위 대구편입 반대하는 정치인

경북지역 일부 국회의원의 반대로 7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 소위에 상정돼야 할 군위군 대구편입안이 난항을 겪고 있다.법안소위 상정은 만장일치가 원칙인데, 현재 제1법안 심사소위위원인 국민의힘 김형동 의원(안동 예천)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의원이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여곡절을 겪어온 신공항 사업은 좌절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이와 관련해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권영진 대구시장이 긴급히 김 의원을 만나 협조를 구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있으나 지역 정치권내 원만한 합의가 도출되지 않으면 숱한 난관을 뚫고 국회까지 온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사업이 물 건너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7일 국회 상정이 불발됐지만 9일 다시 지역 의원들이 논의키로 해 여지를 남겼다.군위군 대구편입에 반대하는 김 의원은 “경북도민 의사를 충분히 경청하고 내린 결단인지 도민 물음이 많다. 통합 신공항 사업이 중요하나 경북이 제 살을 떼어 주는 것보다 큰 가치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군위군 신공항 추진위 등은 군위군의 대구편입은 “신공항 건립의 전제 조건”이라며 강한 반발을 보여 통합 신공항 사업이 또다시 논란의 장으로 빠져들까 걱정이다.지금은 논란을 벌일 시간이 별로 없다. 대선후보들이 통힙신공항 건립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정치권이 힘을 보태 사업의 속도나 사업의 완전성을 높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사업은 비록 진통은 겪었지만 여러 차례 합의 과정을 거친 경북민의 합의된 약속이다.또 이 문제는 지난해 10월 경북도민의 대의기관인 도의회의 의결을 거쳐 법적으로도 정당성이 확보된 사안이다. 특히 통합신공항은 정부 차원의 지원과 더불어 상당 분야에서 기정 사실을 전제로 행정적 절차가 진행 중이다.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문제를 선거구를 지키려는 일부 정치권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보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일부 정치권이 이 문제를 반대한다면 합당한 명분 제시와 함께 이보다 나은 대안 제시부터 먼저 해야 수긍이 갈 것이다.

2022-02-07

RE 100

RE100은 ‘재생에너지(Renewable Energy) 100%’의 약자로,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량의 100%를 2050년까지 풍력·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전력으로 충당하겠다는 목표의 국제 캠페인이다.2014년 영국 런던의 다국적 비영리기구인 ‘더 클라이밋 그룹’이 처음 시작한 것으로, 여기서 재생에너지는 석유화석연료를 대체하는 태양열, 태양광, 바이오, 풍력, 수력, 지열 등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말한다.RE100은 정부가 강제한 것이 아닌 글로벌 기업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진행되는 일종의 캠페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RE100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크게 태양광 발전 시설 등 설비를 직접 만들거나 재생에너지 발전소에서 전기를 사서 쓰는 방식이 있다. RE100 가입을 위해 신청서를 제출하면 본부인 더 클라이밋 그룹의 검토를 거친 후 가입이 최종 확정되며, 가입 후 1년 안에 이행계획을 제출하고 매년 이행상황을 점검받게 된다.국내 기업 중에서는 SK그룹 계열사 8곳(SK(주), SK텔레콤, SK하이닉스, SKC, SK실트론, SK머티리얼즈, SK브로드밴드, SK아이이테크놀로지)이 2020년 11월 초 한국 RE100위원회에 가입신청서를 제출한 바 있다. 국내 제도는 재생에너지 100% 사용 선언 없이도 참여가 가능하나,산업부는 참여자에게 글로벌 RE100 캠페인 기준과 동일한 2050년 100% 재생에너지 사용을 권고한다. 다만, 2050년까지 중간 목표는 참여자의 자율에 맡겨진다.RE100은 에너지 정책분야에서 쓰이는 전문용어인데, 최근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게 이와 관련한 질문을 던져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2-07

대통령 후보들, 문화전쟁에 응답하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국제여론조사기관 입소스(Ipsos)와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정책연구소가 세계 28개국을 대상으로 한 최근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은 총 12개 항목 중 빈부·이념·정당·학력·성별·세대·종교 등 7개 영역에서의 갈등이 1위를 기록하여 ‘문화전쟁(culture war)이 가장 심각한 나라’로 분석되었다.문화전쟁의 핵심으로 지적되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갈등은 전체 국민의 87%가 인정했고, 빈부갈등(91%), 계층갈등(87%), 성별·세대·종교 갈등(80%)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매우 높게 인식되었다. 이 같은 국제비교는 우리사회가 당면한 ‘갈등의 심각성’을 말해주는 동시에 ‘통합의 시급성’을 일깨워주고 있다.물론 현대사회에서 각 집단의 가치와 이익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다면적 차원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집단갈등이 적정수준에서 조절되지 못하고 폭발할 경우,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연대의식이 사라짐으로써 국가적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 특히 대선과정에서 경쟁후보들이 득표율 제고를 위해 ‘갈라치기’전략을 구사할 경우 문화전쟁은 더욱 치열해진다.따라서 대통령 후보들은 문화전쟁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한다. 대선에서 표를 얻기 위해 온갖 포퓰리즘 공약들을 남발하면서도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문화전쟁에 대해서는 표를 잃을까봐 모른 체하는 ‘비겁한 정치인들’이 대통령 되겠다고 난리다.중병에 걸려 있는 나라의 갈등은 외면하고 선거의 이해득실만 계산하는 후보는 지도자 자격이 없다. 국정을 책임지겠다는 대통령 후보는 당면한 문화전쟁에 분명히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대통령은 ‘진영의 보스가 아니라 국가의 원수’이다. 국민의 대통령이기 때문에 진영논리나 확증편향의 태도를 버려야 한다. 대통령은 ‘자신의 신념윤리’와 ‘국민에 대한 책임윤리’가 충돌할 때 당연히 후자를 우선해야 한다. ‘국가통합의 상징으로서 대통령’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문화전쟁을 극복할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차기 대통령에게 요구되고 있는 시대적 소명이다.이를 위하여 대통령 후보들은 문화전쟁의 원인이 되고 있는 각종 불평등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 후, 토론을 통하여 국민의 동의를 구하고, 집권하면 정책으로 추진해야 한다. 후보들은 각자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고 상호 토론함으로써 국민의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특히 이 공론의 장에서는 문화전쟁의 ‘핵심원인이 되고 있는 승자독식(勝者獨食)’으로 인한 이념 및 정당 간의 갈등해소를 위한 정치제도 개혁, 빈부·학력·성별·세대·계층 간의 긴장을 완화시킬 수 있는 경제·사회정책들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문화전쟁이 극심한 상황에서 선출되는 새 대통령은 집단갈등을 경계하고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후보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진영논리와 편 가르기, 선택적 공정과 내로남불 정치로 우리사회의 문화전쟁을 최악으로 몰고 왔다는 사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기 바란다.

2022-02-07

‘ESG 스타트업’요람으로 떠오르는 포항

포항시가 9일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ESG를 기반으로 하는 스타트업을 돕기 위해 300억원 규모의 ‘ESG 포항 펀드’ 투자제안 설명회를 연다. 최근 기업가치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ESG는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의 첫글자를 딴 용어다. ‘ESG 포항 펀드’ 설명회는 국제적인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로 평가받는 스파크랩의 김호민 대표가 진행한다. 김 대표는 지난 10년간 200여 개의 스타트업을 발굴한 창업기획자이며, 앞으로 포항 펀드 운용도 책임진다. 포항시는 포항 펀드 투자 제안대상을 지역 내 기업으로 한정하지 않고, 전국기업과 해외투자자로 확대할 계획이다. 포항시는 지난해 11월 포항펀드 조성을 위해 포항을 ‘ESG 도시’로 선포한 바 있다.최근 들어 ESG를 기반으로 하는 스타트업들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은 사례는 많다. 리하베스트는 맥주 부산물을 대체 밀가루로 만들어 화제가 된 스타트업이다. 오비맥주에서 맥주 부산물을 제공받아 생산된 리너지 가루로 에너지바, 냉동피자, 피자도우 등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그리고 청년에게 취약한 금융 신용점수 대신 비금융 정보를 바탕으로 신용을 평가해 금융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크레파스솔루션, 와상 환자들이 누워서 대소변을 볼 수 있는 자동처리기를 생산하고 있는 메디엔비테크, 못난이 유기농 과일을 원재료로 ‘어글리시크(UGLYCHIC) 화장품’을 만드는 브로콜리컴퍼니가 대표적인 스타트업이다.포항은 국내 어느 도시보다 스타트업을 양성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도시다. 포항시가 지난달 21일 국내 벤처·스타트업 권위자 20여 명을 초청해 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간담회를 연 자리에서 이강덕 포항시장은 “수도권에서 오히려 포항으로 찾아오는 벤처창업 생태계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내일 출발하는 ‘ESG 포항 펀드’가 앞으로 성과를 내서, 이 시장의 말처럼 포항이 스타트업 꿈을 실현하려는 청년들이 모여드는 기회의 땅이 되길 기대한다.

2022-02-07

상식과 진실에 승복하는 후보를 보고 싶다

김진국 고문 이재명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나는 문재인 정권 후계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는 “매우 잘못되고 부족한 정책”이라고 혹평했다. 문 대통령이나 ‘문빠’들이야 섭섭하겠지만 그러지 않고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무엇이 그렇게 잘못된 걸까? 지난달 한국갤럽 조사를 보면 ‘정권교체’ 의견(56.0%)이 ‘정권 유지’ 의견(36.7%)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현 정권에 대한 민심의 불만이다. 문재인 정부가 잘못한 일을 꼽자면 한도 없다. 그중에서도 사법 신뢰의 붕괴가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법원은 힘없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이다. 돈 있고, 권력 가진 사람이 많다. 주먹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마지막엔 법이 옳고 그름을 가려주리라 믿는다. 그 믿음마저 없다면 힘없는 사람이 어떻게 살겠나.그런데 그게 무너졌다. 민감한 재판이 있을 때마다 판사 성향부터 따지는 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 비슷한 사건이 판사에 따라 유죄도 되고, 무죄도 되는 일이 벌어진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나 윤미향 의원 사건에서 범죄는 진영 대결의 축이 되어 진실은 사라져버렸다. 대통령까지 ‘마음의 빚’을 얹었다. 서울·부산시장, 충남지사가 줄줄이 성폭행 사건을 일으킨 것도 기이한 일인데, 여성 인권을 외치던 사람들이 ‘피해 호소인’이란 희한한 조어로 감싸는 데는 탄식만 나온다. 치외법권 특권층인 셈이다.조국 전 장관의 부인 정경심 씨는 유죄 확정됐지만, 사법 저울을 믿기에는 신뢰가 너무 바닥이다.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줄줄이 사표를 냈다. 법원이 ‘제왕적 대통령’을 받드는 부속기관쯤으로 인식된다. 경찰은 원래 상명하복의 조직이지만, ‘검찰 개혁’은 검찰과 공수처까지 정권의 하청기관으로 몰았다.진실을 가리는 또 하나의 보루는 언론이다. 그런데 지상파 방송, 통신… 정부 힘이 미치는 매체들은 ‘어용’이란 딱지가 낯설지 않다. ‘공정’은 언론계에서 추억이 되어간다. ‘선전 선동’을 언론의 소명처럼 주장한다. 진실은 숨어버렸다.“거짓말도 반복하면 사람들이 믿게 된다”는 요설을 거부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북한은 아직도 ‘북침’이라고 주장한다. 천안함도, 대한항공 858기 공중폭파, 아웅산 폭탄테러, 김정남 살해도 모두 뒤집는다. 그게 북한만의 일이 아니다. 정치권에서 불리한 것은 무조건 뒤집는다. 진실을 뒤집는 기술자들이 방송을 장악하고 있다. 선거는 진실과 거짓을 마구 섞어 야바위판이 됐다. 궤변가들이 전문가 행세다.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것은 ‘도청’보다 ‘거짓말’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 없는 일이다. 닉슨의 거짓말을 드러낸 것은 언론과 엄정한 사법 체계다.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는 집요한 수사로 닉슨을 궁지에 몰았다. 닉슨이 콕스 해임을 요구했다. 하지만 임명권자인 법무부 장관과 차관 모두 이를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 범죄를 감추어주면서까지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문재인 정부에서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 많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이 1년이 넘도록 다투고, 지청장이 사건 수사를 방해한다. 주요 사건 증인이 줄줄이 자살하는데, 진실은 정권이 끝나도록 감춰진다. 범죄자가 큰소리치고, 고발한 사람은 두려움에 떤다. 경험은커녕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나라다.이게 차기 대통령 선거에까지 이어진다. 투자금의 1000배가 넘는 이익을 몰아줬지만 “너는 깨끗하냐”라며 덮어버린다. 정부 공금으로 가족 부식을 사고, 공무원이 민간인의 수행비서, 살림 비서 역할을 한 녹음과 사진이 나와도 아랫사람 탓만 한다. 개인 왕국 같다.사실을 시인하지도, 잘못을 사과하지도 않았다. 반성 없이 고쳐지지 않는다. 시의회에서 지적당한 일이 10년간 이어졌다. 수시로 뒤집는 공약이 어떻게 바뀔지 믿을 수 없다. 진심 어린 시인과 사과가 먼저다. 가뜩이나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는 한계에 이르렀다. 상식이 통하고, 진실에는 승복하는 사회가 정말 그립다./본사고문

2022-02-06

나는 실존주의자다

이정희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나는 종종 주위 사람들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실존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반응은 “어머, 그래요”, 또는 “그런데, 실존주의가 뭐에요”라고 묻는다.지금 이 시대야말로 실존주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양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3인방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궁극적인 질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였다. 이 질문이야말로 철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에 끌리는 사람은 분명 실존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물론 실존주의자는 실존주의 철학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지 않고서는 실존주의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존주의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해서 실존주의자인 것도 아니다.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 사르트르는 우리들이 언제 무엇을 하든지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가 최고의 실존주의자로 추앙받는 이유는 진정으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철학자였기 때문이다.며칠 전 오랜만에 서점에 들렸다가 ‘실존주의자로 사는 법’이라는 책을 발견하고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신나게 사가지고 나왔다. 실존주의는 자유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철학이며, 성실과 용기를 무기로 삼아 현실을 직시하고 사물을 철저하게 통찰하는 법을 이야기 하는 철학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그동안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실존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간단하고 단호하게 정의한 책은 없었다. 나는 진정한 실존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먼저,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철저히 파헤쳐 봐야겠다. 현재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 코로나는 어떻게 발생했으며, 코로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으며, 코로나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 분석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진지하고 치열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우리가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 안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잠재력 발견이야말로 실존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계획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항목이다.실존주의자를 정리하면, 무슨 일이든 해낼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어떠한 상황이든 변명을 하지 않는 사람, 결코 나약하지 않으며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 인간의 존엄과 자존심과 위엄을 당당히 지키는 사람, 정의롭지 않은 일에 의연히 맞서는 사람, 자신과 적당히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 다른 사람이 원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기를 거부하는 사람, 인생의 역경 속에서도 부단한 노력을 통해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실존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우리가 사는 사회는 끔찍하게 불공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주의자적인 자세로 올바른 삶을 목표로 살고자 한다면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2022-02-06

토끼가 한숨 잔 이유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토끼는 거북이가 느리다고 자꾸 놀렸어요. 그러자 거북이가 토끼에게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했어요. 토끼는 바로 승낙하고 시합에 나섰지만 한숨 자다가 거북이에게 지고 말았어요.”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다. 거북이의 꾸준함과 토끼의 어리석음이 한눈에 대비되어 보인다. 실제로 이 우화는 거북이의 우직함을 칭찬하거나 토끼의 자만을 나무라는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다. 간단한 이야기 같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아리송하다. 토끼의 잘못을 나무라는 것은 자기보다 많이 느린 거북이와 달리기 시합을 할 때 기를 쓰고 달렸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정말 토끼에게 거북이를 이기기 위해 열심히 달리라고 해야 하나? 한숨 잔 토끼를 게으르다고, 어리석다고 탓하는 것은 약자와 경쟁하는 기득권자를 채찍질하는 셈이다.그렇다고 거북이의 성실함을 칭찬하는 교훈으로 받아들이기에도 문제는 있다. 태생적인 약점을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이 되기 때문이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 특이하거나 영웅적인 사례를 일반화하여 약자를 다그치는 것은 가혹하다. 한때는 잠자는 토끼를 깨우지 않고 혼자 갔다고 거북이를 나무라는 논리가 인기 있었다. 그러나 이미 불공정한 게임에서 약자에게 강자를 도우라는 요구는 연대나 배려의 의미를 오남용한 것이다.진호(가명)는 느린 학습자라고 불리우는 소년이다.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해 두려움이 많다. 며칠 전 진호와 ‘토끼와 거북이’를 읽으며 거북이는 왜 토끼에게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했을까, 토끼는 왜 한숨 잤을까 물어보았다. 진호는 먼저 이런 말을 한다. 왜 이기는 것만 말해요? 체력이 좋아진 걸로 말하면 안 돼요? 아하, 정말 그렇구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어도 체력이 늘었을 테니 지더라도 의미가 있네. 그러자 뒤이어 이렇게 말한다. 토끼는 일부러 낮잠을 잤어요. 거북이에게 힘을 주고 싶어서요. 거북이는 이기고 지는 것과 상관없이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어서 시합을 한 거예요.학식 높은 어른들도 생각하지 못한 진호의 해석에 머리가 띵했다. 도대체 왜 우리는 토끼를 교만한 게으름뱅이로만 해석했을까? 왜 토끼가 거북이를 이기기 위해 열심히 달렸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거북이는 잠자는 토끼를 깨워 같이 갔어야 한다는 논리에 왜 동조했을까? 경쟁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어른들, 공정의 프레임에 갇힌 어른들, ‘함께’를 오용하는 어른들을 진호는 멋지게 한 방 먹였다. 진호가 이런 말을 하기까지 혼자 겪었을 고통의 시간을 조금은 짐작하기에 울림은 더 컸다.그런데 진호 친구들은 진호를 위해서 낮잠을 자줄 수는 없을 텐데, 거북이처럼 달릴 수 있겠어? 네.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네. 저는 할 거예요. 진호, 참 장하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츤데레 토끼와 우직한 거북이가 많아지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리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2022-02-06

수(藪)를 듣다

북송리 북천수의 사계절을 들었다. 다들 숲이라 이름 붙일 때 이곳은 수(藪)라 불렀다. 수풀, 덤불이라는 뜻의 수이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게 느껴져 매일 한 시간 이상 걷자고 마음먹고 찾아간 곳이다.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한 해였다.북송리 북천수, 소나무 숲의 이름이 특별하다. 다른 고장에도 있을 테지만 포항은 동네 숲을 많이 간직한 도시다. 선비가 지와 예를 갖추듯 푸른 동해와 깊은 계곡까지 겸비했다. 해안선이 길어서 바람을 막고자 방풍림으로 해송을 길게 심었고, 동네마다 둘레에 나무를 심어 가꿨다. 내 어릴 적 학교 소풍 장소였던 송도 솔밭과 기계 서숲, 여인의 숲, 청하 관송전, 덕동숲, 언뜻 기억나는 곳만도 이만치이다.두내, 양촌, 천방, 큰동네, 건너각단 등으로 불리던 자연마을들은 1914년에 통합되어 북송리가 되었다. 북송리에 북천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북천수가 있어서 북송리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결국, 솔숲이 행정구역 통합을 이루어낸 셈이다. 정월 대보름날 마을 사람들은 이 숲의 제당에서 동제를 지낸 후 마을 앞산에서 산제를 지낸다. 이때 전년도에 묻어둔 간수의 상태를 보고 그해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풍습이 있다. 이처럼 북천수는 수해방지림인 동시에 방풍림의 역할을 해 왔으며, 오랜 기간 마을 주민들의 신앙적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문화적·역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큰 마을 숲으로 인정받아 2006년 3월 28일 천연기념물 제46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흥해현지도’와 1938년 조사된 ‘조선의 임수’에 이 숲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조선 철종 때 흥해 군수 이득강이 북천에 제방을 쌓고 4리에 걸쳐 숲을 조성하였는데 현재는 그 일부만 남아 있다. 숲의 길이가 2천400m, 너비는 150m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광복 직전에 일본인들이 크게 훼손하여 대부분의 노송이 잘리는 운명에 처한다. 그 이후로도 수십 년 동안 무단벌목, 방치에 따른 주민 생활오물 투여, 농경지 개발 등으로 인하여 북천수는 숲으로서의 고유한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5년에 전통마을 숲 복원사업으로 일대 정비를 거치면서 오늘날의 형태로나마 남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 규모는 길이 1천870m, 너비 70m(천연기념물 지정구역 면적은 21만1천923㎡)로 조성 당시 규모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상당 정도 회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송림은 4곳으로 하동 송림, 예천 금당실 송림,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 그리고 북천수이다.이 숲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숲 가운데 세 번째로 긴 숲으로 알려져 있다. 수종은 소나무와 곰솔이다. 소나무는 뿌리가 깊게 자라기 때문에 방풍림으로 제격이라고 한다. 소나무의 줄기는 붉은색을 띠고 곰솔은 검은색이다. 검은 솔이라 부르다 곰솔이 되었다 한다. 두 나무를 정확히 구분하는 방법은 새순을 보는 것이다. 소나무의 새순은 줄기와 같이 적갈색이나 곰솔은 회백색을 띤다.숲 가장자리에 서부초등학교가 자리했다. 학교 둘레에 소나무가 가득한 걸 보니, 오래전에는 이곳도 북천수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양덕동에 사는 민영 선생님은 아이들을 숲에서 뛰놀게 하려고 이 학교에 보낸다. 자신의 차가 없어서 아이 둘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포은도서관 앞에서 흥해로 가는 차로 갈아탄다. 서부초는 1, 2교시 합쳐서 수업하고 쉬는 시간이 30분이다. 점심시간에도 얼른 밥을 먹어치우고 밖에 나가려고 한다. 아이들은 숲에서 곤충도 관찰하고 솔방울도 주우며 산책을 즐긴다. 민영 선생님이 매일의 수고로움을 겪으면서도 이 학교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북천수라고 했다.숲 옆을 흐르는 곡강천을 옛날에는 북천이라 불렀다. 북천변에 심은 나무 북천수는 이제 거대한 마을 숲이 되어 주민들의 휴식 공간이다. 서부초에서 아이들을 키우듯, 숲에는 자연 발아유도지 4곳을 설정하여 유목들이 자랄 수 있도록 하였다. 아름드리 둥치가 숲의 과거라면 솔방울이 뿌리내려 서로 키가 다른 어린 소나무들이 숲의 미래다./김순희(수필가)

2022-02-06

관직은 손님처럼

백선기 칠곡군수 ‘재세여려 재관여빈(在世如旅 在官如賓)’이라는 경구(警句)가 있다. 세상살이는 나그네처럼 하고 관직 생활은 손님처럼 하라는 뜻이다.조선 후기 문인 성대중은 규장각에서 교서관 교리의 벼슬에 있을 때 이 글을 좌우명으로 삼아 벽에 써 붙여놓고 공직에 임하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는 관직을 자신의 특권이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익을 버리고 미래를 내다보며 청렴하게 업무를 처리했다.돌이켜 보면 필자도 모든 혼과 열정을 군정에 쏟아붓고 칠곡군 최초의 3선 군수라는 영광을 얻었지만 결국 손님처럼 왔다가 오는 7월 후임 군수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손님처럼 떠나야 한다.개인 백선기는 자연인으로 돌아가지만, 칠곡군수 자리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리더의 선택은 조직과 지역의 운명을 좌우하기에 후임 군수에게 몇 가지를 당부하고자 한다.첫째, 현재보다 미래를 내다보며 기본과 원칙을 지켜나갔으면 한다.2011년 취임 당시 칠곡군은 전국 82개 군(郡) 단위 자치단체 중 예산 대비 채무 비율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한 해 이자로만 30억원 이상을 지출했다.심지어 시중 금리보다 훨씬 높은 6% 이상의 고이율 지방채도 떠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재정 불건전단체’로 낙인이 찍혀 군민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필자는 일부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눈앞의 인기보다 미래를 내다봤다. 2012년부터 ‘재정건전화 로드맵’을 마련해 채무 청산 작업에 본격적인 속도를 냈다. 채무상환을 위한 재원은 고질 체납세 징수, 낭비성 예산 감축, 행사 경비 절감, 선심성 보조금 관리강화 등을 통해 마련했다.또 군수 관사를 매각하고 부채상환을 위해 각종 ‘경상경비 10% 절감’을 실천해 매년 8억원의 비용을 아꼈다.이를 통해 재정 건전성이 향상되자 지역의 명운을 결정할 대형 국·도비 사업을 본격적으로 유치할 수 있었고, 2018년 군비 부담 일반채무를 전액 상환해 국·도비 사업과 코로나19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군의 재정 건전성 확보로 차기 군수의 어깨가 가벼워지고 더 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둘째, 포퓰리즘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선거를 앞두고 정부에 이어 지방자치단체장들도 경쟁적으로 선심성 정책을 펼치고 있다. 농민수당, 출산장려금, 육아 수당 등 지자체의 현금복지 경쟁은 우려스러울 정도다. 2017년 지자체 전국 평균 재정자립도는 53.7%를 기록했으나 지자체가 앞 다퉈 무상복지에 뛰어들면서 지난해에는 48.7%로 50%대를 밑돌았다. 포퓰리즘의 망령에 사로잡힌 현금복지로 인해 재정난이 심화되어 정작 필요한 사업에 재정을 투입하기 어렵게 됐다. 차기 군수는 미래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포퓰리즘을 멀리했으면 한다.셋째, 지도자는 청렴해야 한다.다산 정약용 선생은 청렴은 백성을 이끄는 자의 본질적 임무로 모든 덕행의 근본이라며 청렴하지 못하면 관리의 자격이 없다고 했다. 지도자는 본인뿐만 아니라 조직의 청렴도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2011년 취임 당시 칠곡군이 국민권익위원회 청렴도 평가에서 최하위인 5등급에 이름이 올라 충격을 받았다. 강력한 자구책을 통해 청렴도가 점진적으로 상승해 현재는 경북도 최상위권인 2등급을 기록하고 있다.넷째,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리더십을 갖추어야 한다.과거에는 절차를 무시하고라도 목적 달성을 위해 밀어붙이는 강한 추진력이 주효했다면, 지금은 주민들의 다양한 욕구와 이해집단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설득할 수 있는 민주적 리더십이 요구된다. 필자는 지역민의 다양성에서 오는 불협화음을 군민 대통합 위원회를 통해 하나의 목소리로 순화 시켜 계층 간 화합을 이끌어냈다.끝으로, 군수는 벼슬이 아닌 공복으로 봉사자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군민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군수를 군민들은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주도하고 민간부문에 일일이 간섭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지금은 자율, 경쟁, 책임의 원칙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중시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읽고 군정을 꾸려나가야 한다.손님은 잠시 머물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빈손으로 떠난다. 후임 군수는 다음 손님을 생각하며 행정을 펼치는 아름다운 손님이길 기대해 본다.

2022-02-06

상부상조 정신

좀도리라는 말이 있다. 전라도 지방의 방언으로 절미(節米)란 뜻이다. 경상도에서는 종도리라고도 부른다. 아낙네들이 밥을 준비할 때 쌀이나 보리를 한줌 씩 덜어 항아리에 담아두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부엌의 한쪽에다 좀도리 항아리를 놓아둔다.좀도리 항아리에 어느 정도 곡식이 쌓이면 제사를 지낼 때나 집안에 갑자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이를 꺼내 사용한다.경우에 따라서는 시장에 내다 팔아 딸아이의 꽃신발이나 양말을 사기도 하고 또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도 썼다. 식량이 넉넉하지 못했던 옛 시절 우리의 주부들은 이런 방법으로 근검절약 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또 이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전해져 왔다.십시일반(十匙一飯)의 시(匙)는 숟가락이고 반(飯)은 밥이다. 열 사람이 자기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씩 덜어 다른 사람을 위해 밥 한 그릇을 만든다는 사자성어다. 어려운 일을 해결하기 위해 다수가 힘을 모은다는 뜻으로 쓰인다.과거 조선시대 향약은 마을 단위의 자치규약이다. 이 규약에는 마을주민이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의지하며 함께 살아가자고 한 약속을 담아 두었다. 나라의 개입 없이 주민들 스스로가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상부상조 정신을 담은 규약인 것이다.지난해 연말에 시작한 이웃돕기 성금이 1월 말로서 초과 달성했다. 법인보다는 개인이 더 많은 이웃돕기 행렬에 동참해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대구는 112억원, 경북은 169억원을 이웃돕기 성금으로 쓰일 예정이다.특히 이웃돕기 성금 모금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불경기를 뚫고 목표달성을 무난히 했다는 것이 뿌듯하다. 지역민들의 상부상조 정신이 빛나 보이는 결과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2-06

“독감처럼 관리” 동네 의료기관 참여가 관건

정부가 3일부터 코로나19 진단과 치료역량을 고위험군 환자에 집중하는 새로운 방역체계로 전환해 시행에 들어갔다. 60세 미만 저위험군은 동네 병의원에서 진단검사를 받도록 하고 자가격리 기준도 완화했다.오미크론 변이가 우세종이 되면서 코로나 확진자가 하루 4만명 가까이 치솟고 있는데도 정부가 방역체계를 완화한 것은 오미크론의 치명률이 델타 변이의 5분의 1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 때 1천명을 넘던 위중증 환자가 현재는 200명대에 머물러 있고, 중증 병상가동률도 16%선에서 여유가 있다.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관계자는 “확진자가 증가하더라도 위중증 환자 수나 치명률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며 “의료계 준비상황 등을 종합 검토해 확진자를 계절독감 환자처럼 관리하는 의료체계로의 전환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설연휴 이후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하루 1만명 가량씩 늘어나는 지금 추세라면 이달 중 하루 10만명 발생도 가능해 정부가 말하는 ‘위드 오미크론’ 계획이 순조로울지 알 수 없다. 아직은 코로나 확진자 수의 정점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완벽한 준비만이 코로나를 독감처럼 관리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시작한 위드 코로나가 실패로 끝난 상황을 반면교사 삼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그동안 정부의 코로나 대응은 늘 뒷북이거나 안일했다는 지적이다. 지난 3일 동네병의원의 진단검사 참여도 명단 공개부터 늦어진 데다 의료현장의 준비 부족으로 첫날부터 대혼란을 초래했다.주말인 5일과 6일 이틀 동안 코로나19 신규 확진자는 하루 4만명 가까이 발생, 국내 누적 확진자가 이제 100만명을 넘었다. 재택 치료자도 12만여명에 이른다.‘위드 오미크론’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간절하다. 하지만 정부의 완벽한 방역체계 준비가 먼저다. 또다시 시행착오를 겪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독감처럼 관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네 병의원의 적극적 참여가 관건이다. 동네 의료기관들이 믿고 참여할 수 있는 의료시스템부터 정부가 먼저 내놔야 한다.

2022-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