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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국민의힘 차기 비대위원장 책임 막중하다

국민의힘이 차기 당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열 때까지 다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지난 15일 국민의힘 4선 이상 중진 당선자들이 모여 당 수습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전당대회를 하려면 비대위를 거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새 비대위에서 전당대회 절차를 주관해 22대국회 새 지도부를 선출하겠다는 것이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총선 참패 책임을 지고 사퇴한 마당이라 불가피하게 ‘관리형 지도부’를 구성해야겠지만, 집권 여당의 위상에 맞지 않게 비대위 체제가 너무 잦다. 국민의힘 비대위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2년 동안 벌써 네 번째 만들어지게 된다. 그만큼 여당이 바람 잘 날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내에서도 “지도부가 이렇게 자주 바뀌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느냐”는 반응이 나오는 상태다.이번에 구성될 여당 비대위는 전당대회 관리를 위한 지도부라고는 하지만 책임이 막중하다. 우선 총선 참패에 대한 수습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저께 열린 중진 당선자 모임에선 선거 참패 원인 분석이나 위기 수습 대책은 거의 논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진들이 돌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만 했을 뿐 토론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러니 보수정당 사상 최악의 패배에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총선에서 압승한 민주당은 이번 국회에서 ‘채 상병 특검법’(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수사방해 및 사건은폐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법)을 처리하고, 22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김건희 특별법 등을 재추진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여당 내에서도 이 법안들에 대해 조건부 찬성을 하는 당선자나 현역 의원들이 있는 만큼, 국민의힘으로선 유일한 저지수단인 대통령 거부권까지 무력화될 가능성이 있다. 22대 국회에선 여당에서 8명만 이탈해도 윤 대통령의 거부권은 무용지물이 된다. 이러한 현안을 고려해 보면, 국민의힘 새 비대위는 윤 대통령과 거대야당의 가교 역할, 그리고 당정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갖춘 비중 있는 인물이 선출돼야 한다.

2024-04-16

최악의 참패 분석할 ‘與총선백서’ 필요

심충택 논설위원 국민의힘 김재섭 당선자(서울 도봉갑)는 지난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총선 참패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요인으로 ‘이종섭·황상무’를 꼽지만 이건 기폭제일 뿐이다. 정권 심판론은 2년 동안 축적됐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36세 청년인 김 당선자는 민주당 텃밭에서 49.05%를 얻어 당선됐다. 차기 당 대표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래 보수정당의 리더로 평가받는 인물이다.김 당선자의 언급처럼, 윤석열 정부는 지난 2년간 민심이반을 가져올 많은 정책을 고집스럽게 시행했다. 대표적인 게 서민과 청년들의 분노를 자극한 ‘대기업·부자 감세’ 정책이다.안 그래도 우리사회는 부모자산과 관계없이 개인이 노력하면 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층이동 사다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는 각종 지표(주택이나 금융소득과 같은 자산불평등)에서 쉽게 확인된다.이러한 불평등 사회변화 속에서 현 정부는 대표적인 부자세금인 금투세(금융투자소득에 대한 양도소득세)를 비롯해 상속세, 다주택자 양도세, 주주친화기업 상속세 등에 대한 폐지 또는 감면 정책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서민과 청년들을 자극했다.총선이 임박해 ‘5년간 의대생 1만명 증원’ 정책을 발표한 것도 총선패배의 주요 원인이다. 의사나 의대생 가족들은 지금 “윤석열로 인해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할 정도로 분노심에 가득 차 있다.대규모 증원이 가져올 후폭풍을 뻔히 알면서도 선거철에 불쑥 ‘2천명 증원’ 카드를 꺼내 든 발상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제 의사들의 적대감 해소보다, 국가 의료 시스템이 더는 망가지기 전에 의정갈등의 해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가 됐다. 지난해 4월 27일 국회를 통과한 간호법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이 정부가 간호사들의 지지를 잃은 것은 오래됐다.공무원들도 윤석열 정부에 호의적이지 않다. 대기업이나 금융계 같은 타 직종에 비해 턱없이 급여가 낮은데다 현 정부 들어서는 연금개혁 움직임도 있어 특히 교사들이 반대세력으로 돌아섰다. 이 정부가 40~50대 노동계와 등을 진 지는 오래됐다.4·10총선 지역구 투표에서 국민의힘 득표수는 약 1천318만표(45.1%)다. 민주당과 대략 160만표 정도 차이가 난다.정부가 이번 총선에서 앞서 언급한 한두 가지 정책만 쓰지 않았어도 참패를 당하지 않았을 수 있다. 전통적인 보수지지 세력조차 적으로 만들었으니, 애초에 선거에서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앞으로도 윤 대통령이 이러한 스타일로 국정 운영을 할 경우 보수정당은 점점 지지세력을 잃어갈 수밖에 없다.정부·여당이 2026년 지방선거와 차기대선(2027년 3월)에서 권력을 되찾아 오려면 가장 먼저 윤 대통령이 바뀌어야 한다. 여당도 하루빨리 총선패배의 늪에서 벗어나 차기 선거 인재 발굴과 선거 전략 수립에 나서야겠지만, 윤 대통령의 ‘불통과 오만’ 통치 스타일이 변화하지 않으면 민심 회복이 어렵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백서가 필요하다”는 권성동 의원(강원 강릉)의 제안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2024-04-16

세컨드홈 세제 혜택, 농촌경제 활력소 되길

정부가 기존 1주택자가 인구감소지역에서 신규로 집을 구입하더라도 1주택 지위를 유지하도록 하는 특례 조치를 발표했다. 대상은 전국 인구감소지역 89곳 가운데 대구 남구·서구 등 서울과 광역시 일부 지역을 제외한 모두 83곳이다. 지난해 대구에 편입된 군위군은 특례지역에 포함된다고 밝혔다.정부는 또 인구감소지역에 지정 요건과 절차를 간소화한 소규모 관광단지를 도입해 지역 맞춤형 관광인프라를 확대한다고도 밝혔다. 그리고 외국인 산업인력 및 정주인구 확대를 위해 지역특화형 비자지역을 28곳에서 66곳으로 늘린다. 할당 인원도 현재 1천500명의 두배로 늘리기로 했다. 정부의 이번 조치는 농어촌지역의 경제활성화를 도모하고 이를 통해 지방의 인구소멸 문제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취지다. 특히 농촌지역으로 이동하는 생활인구(하루 동안 3시간 이상 머무는 시간이 월 1회 이상인 사람)와 방문인구, 정주인구 등을 늘려 농어촌지역에 생기를 불어넣겠다는 생각이다.알다시피 저출산과 청년층의 수도권 진출로 지방은 인구가 노령화되고 사람도 줄어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특히 농촌으로 갈수록 더 심각한 양상이다. 당장 인구를 늘릴 수 없으니 도시인구의 농촌 유입과 왕래를 통해 지방의 경제에 힘을 보태겠다는 궁여지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1주택자가 공시지가 4억원(시세 6억원 정도) 이하의 인구소멸지역 주택을 구입할 경우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 재산세 등에 세제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농촌지역의 부동산 거래를 활성화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장의 반응은 긍정적이다.특히 농촌 빈집 등의 활용 방안이 나오는 등 지역경제에 도움을 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것이 침체된 부동산 경기 전반에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다.저출산과 인구감소에 대응하는 노력이 전방위적으로 나오고 있으나 실효적 성과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정부의 이번 조치가 인구소멸 대응의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 사업의 성과를 내기 위해선 정부 조치를 뒷받침할 지방자치단체의 세심한 후속 조치도 매우 중요하다.

2024-04-16

22대 국회의 도덕성

우정구 논설위원 서양의 도덕성을 얘기할 때 반드시 나오는 용어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프랑스 말로 노블레스는 고귀한 신분을 뜻하고, 오블리주는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일컫는 표현이다. 프랑스 사전에는 “귀족계급이란 자신의 이름에 명예가 되는 의무를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일본 출신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제국 2천년을 지탱한 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철학이라 했다. 영국 최고 명문사학 이튼칼리지 교내에 세워진 건물에는 1,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해 전사한 졸업생 1천90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을 위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이다.법과 도덕은 결과적으로 구분되지만 원천적으로 보면 법적 의무란 도덕적 의무에서 출발한다. 우리 사회의 오랜 전통이나 규범, 관습, 도덕심 등이 기초가 돼 법을 만들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잘못됐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며 넘어가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지켜온 도덕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특히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라면 법과 도덕이 일치하는 엄격하고 모범적 행동을 보이는 것을 당연시 여겨야 한다. 그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다.한국 전통적 윤리관과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는 별로 다르지가 않다.총선에 출마한 후보 가운데 범법과 막말, 위선 등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이들이 대거 당선되자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 관례를 보면 공천과정에서 당연히 걸러져야 할 인물이 당선까지 됐으니 말이다. 22대 국회가 품격과 도덕성을 잘 유지할 지 지켜볼 일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04-16

소리문법으로 치유하는 아픔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경남 합천 율곡면에서 태어난 박태일 시인은 시인으로서나 현대문학사 연구에서나 뚜렷한 봉우리 위에 선 학자이기도 하다. 대학을 은퇴할 무렵 연변의 나그네가 되어 연길 안까이 시편들을 시집으로 묶더니 자신의 시선집으로 ‘용을 낚는 사람들’(소명충판, 2024)을 펴냈다. 이 시전집 전반에 경상남도의 산천을 흐르는 물소리와 산새소리가 듀엣으로 합창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박태일의 세 번째 시집 ‘가을 악견산’과 네 번째 시집인 ‘풀나라’에서는 시인이 유년의 회상공간으로 한 경상남도 일대의 경관이 소리문법으로 리듬을 타고 그리움과 만난다. 제3시집에서‘가을 악견산’,‘거창노래’,‘합천노래’와 제4시집 ‘용전사기골’, ‘황강’은 연작시이다. 봄이면 봄의 소리로 여름이면 소낙비 소리로 가을이면 낙엽지는 소리로 산천의 경관이 바뀌고 자낙자낙한 서정의 메아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가끔은 표준 언어에서 벗어난 소리문법인 방언이 툭툭 튀어나온다. 박태일의 시 세계가 이토록 경건하고 진실할 줄을 어이 알았으랴. 가난한 농촌 아이일 적에 체험한 삶의 고뇌를 회상과 기억의 방식으로 변주해 눈물을 정화수로 바꾸는 소리문법으로 쓴 시어들, 태백산맥의 마지막 가야산과 산청 산의 끝자락의 뻐꾹새 울음소리, 바람과 햇살 휩쓸려 내리는 송화가루의 휘날리는 적막, 갑자기 땅땅 총소리에 쓰러지는 숱한 바지저고리가 노란 초가집 지붕으로 날아가는 거창양민 학살의 아픔들…. 경남 사투리를 간간히 섞어 쓰는 노래는 치유의 정화수로 지난 역사의 끝자락에 뿌려놓는다.“피멍 들었제 동복이 아제/쪼그려 앉아 박하 잎만 찧게/저수지 못 미쳐 목이 죄인 물줄기/타닥타닥 옴개구리도 밟으며/애드럽게 집게칼로/손금이나 다듬게//제실 가는 흙담 위 붉은 감또개/고픈 날 숨어 씹던/짚가리 그늘//매호 높은 봉우리에는 속기 많은 산중과 아들과/그 아들이 지른 된똥에 잠자리 날고” -‘합천노래’에는 한국 현대사의 이념적 갈등의 슬픔이 잔잔하게 깔려 있다. 전쟁의 난리 통에 지리산 자락에 있는 합천과 거창지역이 좌우로 갈려 학살이 자행된 역사. 치유하기 힘든 아픔을 추궁하려면 끝이 없을 것이지만 시인은 그 아픔을 오롯이 정화로 깨끗이 씻어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격렬하지 않은 옛 기억을 그냥 그대로 호명하고 있다. 동복이 아제 어린 시절 홀로 소꿉놀이를 하는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잘근잘근 경남 사투리로 ‘옴개구리’, ‘애드럽게’, ‘된똥’이라는 지역어를 들춰내어 북바치는 슬픔을 지난 추억으로 묘사하여 슬픔을 잠재우고 있다.지리산 자락 의령으로 흘러내리는‘황강’연작시는 물길처럼 유유히 흐르는 고향의 어린 시절의 풍경화를 소리로 리듬으로 이끌어낸다. 진주로 시집가 혼자되었다는 ‘콩점이’의 설화같은 이야기를 민요자락처럼 펼쳐내고 있다.“두렁콩 배는 날에 해가 저물어/진주로 시집간 콩점이 생각/곡식도 씨 따는데/사람이 못 딸까/내리 딸 넷에 아들/남편 상났단 소식도 이어 들리고//콩점아콩점아 콩 보자/사타리에 점 보자/잔불 놓던 둑너머엔/첫날 첫 봄밤//달빛 홀로 다복다복 어디로 왔나”-‘황강 7’어린 시절 마을에 함께 살던 콩점이, 사타리(사타구니)에 까만 콩같은 점이 있어서 콩점이라 불린 아이. 진주로 시집간 첫날밤의 풍경과 어린 시절 둑너미에 옹기종이 모여 앉아 잔불 지르던 추억이 한 몸으로 엉켜 훤한 달빛으로 걸어오고 있다. 살짝 섞어 넣은 방언의 촉매작용은 그 그립고 안타까운 추억 속으로 회전한다.“콩점아콩점아 콩 보자/사타리에 점 보자” 동요의 리듬은 표준어문법으로 질주하는 시어를 경상도 가락으로 되일으켜 우리들의 감흥을 일깨워 준다. “황강 물 굴불굴불 황강 옥이와 귀엣말 즐겁습니다/황강 모래 엄지 검지 발가락 새 물꽃 되어 흐르듯이/간지러운 옛말이 들리는 봄/재첩 볼우물이 고운 옥이 마을”-‘황강 9’콩점이와 동명이인일 수도 있는 옥이에 대한 그리움이 황강 물줄기로 이어져 온다. 옥이와 고향마을의 추억은 간지러운 옛말, 방언으로 도란도란 울려와 봄을 불러온다. 붉은 진달래꽃빛이 물꽃이 되고 옥이가 속삭이던 귀엣말이 봄빛으로 물드는데 “혼자 사는 옥이 엄지 검지 손톱이 뭉개져 까”매져 세월의 무상함을 저토록 처연하게 나직한 소리로 속삭여 준다.

2024-04-15

목숨 걸고 쓰다 그리고 죽다

마쓰야마에는 나쓰메 소세끼의 흔적도 곳곳에 있지만, 마쓰야마에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문인은 단연 마쓰야마에서 나고 자란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1867-1902)입니다. 마쓰야마 시립 시키기념박물관에는 마사오카 시키의 생애와 문학에 관한 온갖 자료들이 알뜰하게 모아져 있었는데요. 대충 훑어보는 데만 한나절이 걸릴 정도였습니다. 마사오카 시키는 언론인, 수필가, 평론가 등으로도 활약했지만, 그의 가장 큰 활약은 단연 일본의 전통 시가인 하이쿠를 혁신한 겁니다. 심지어 시키의 하이쿠 혁신 운동이 없었다면, 일본이 자랑하는 하이쿠는 이미 사라졌을 거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니까요.시키는 당시 유행하던 하이쿠가 발상이 신선하지 않고, 사용하는 언어가 상투적인 것 등을 비판하며, 새로운 하이쿠를 주장했는데요. 새로운 하이쿠가 갖춰야 할 요소로 시키는 당시 일본에 들어온 서양화에서 비롯된 ‘사생(寫生)’이라는 개념을 내세웠습니다. 사생이란 “실제로 있는 그대로를 그린다”는 의미인데요. 시키는 자연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하이쿠야말로 새로운 세상에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 믿었던 겁니다. 그러한 시키의 생각은 그대로 적중하여 하이쿠는 오늘날에도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 시가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습니다.시키기념박물관을 둘러볼 때, 저의 시선을 잡아끄는 강렬한 모형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듯 초췌해 보이는 시키가, 한 여성이 들고 있는 화판에다 붓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는 모형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시키의 죽음을 기다리는 듯 조용히 시키의 창작을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모형 옆에 놓여 있는 안내판에는, 시키가 죽기 하루 전날 가족과 지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절필삼구(絶筆三句)’를 쓰는 장면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절필삼구’는 시키가 병상에서 보이는 수세미외를 읊은 세 편의 시가인데요. 시키는 목숨이 경각에 걸린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키기념관을 나온 후에도, 기괴하게까지 느껴지던 이 모형은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도대체 무엇이 한 인간으로 하여금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것인지 너무나 궁금했던 것입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저는 시키가 보여준 ‘목숨을 건 글쓰기’가 일본의 무사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나라에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간상과 정신이 있는데요. 일본인이 내세우는 이상적인 인간형과 정신은 말할 것도 없이 무사(사무라이)와 무사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사도의 핵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사도의 고전으로 꼽히는 ‘하가쿠레(葉隱)’(1716년)에서 야마모토 쓰네토모는 반복해서 무사란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은 “무사도란 ‘죽음’을 깨닫는 것이다. 생과 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죽음을 선택하면 된다”로 시작합니다. 또 하나의 무사도에 대한 고전인 다이도지 유잔의 ‘부도쇼신슈(武道初心集)’(1720년)도 “무사는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생활해야 하는 것이 숙명”임을 반복해서 강조하는데요. 오늘날 세계인들에게 일본의 무사도를 알린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Bushido)’(1899) 역시 사무라이의 제1계율을 “죽음을 각오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말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무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던 것이죠. 이경재 숭실대 교수 문인과 무인을 구분하는 문화에 익숙한 우리는 일본의 사무라이를 ‘칼을 찬 무인’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요. 우리와 달리 일본의 사무라이는 기본적으로 ‘칼을 찬 무인’이지만, 동시에 ‘붓을 든 문인’이기도 했습니다. 사무라이는 전쟁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에 필요한 일체의 활동을 담당했으니까요. 일본 문화에서는 애당초 문인과 무인은 일체화된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붓을 든 자’ 역시 ‘칼을 찬 자’와 마찬가지로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내면화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는, 조금은 기괴하게까지 느껴지는 시키의 최후 모습은 아마도 이러한 전통 속에서 가능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마쓰야마시에는 시키기념박물관 이에에도 시 중심부에는 시키가 살던 집을 본떠 지은 시키도(子規堂)가 있고, 도고 온천역 근처에는 야구 배트를 든 시키상이 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문인이 야구 배트를 들고 있다는 것에 의아해 할 분도 있으실 텐데요. 시키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야구용어, 일테면 1루수, 2루수, 우익수, 포수와 같은 말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안다면, 붓 대신 야구 배트를 든 시키도 그렇게 어색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2024-04-15

진실이란 어려운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요즈음 학생들과 함께 1980년대 소설 읽기를 하는데, 지난주에는 마침 박태순 소설 편이다.‘어머니’라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주변의 여러 일들을 사실적으로 엮어 놓은 작품이다. 무크지 시절의 ‘실천문학’ 1985년경에 실렸다.이 이야기를 읽자니, 여러 해 전, 박태순 선생이 살아계셨을 때, 충북 수안보로 선생을 찾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다.그 무렵 나는 소설집 ‘정든 땅 언덕 위’(민음사, 1973)를 헌책방에서 얻어 읽은 후였다.수안보는 선생이 어머니를 돌보려고 가서 정착하게 된 곳이라 하였다. 그때 만난 선생의 마지막 인상이 참으로 처연했다. 수안보 연립주택 맨 윗층, 걸어서야 올라갈 수 있는 5층인가에 홀로 거주하고 계시던 선생은 내가 찾아간 것을 몹시 반겨 주셨다. 같이 들어간 음식점에서 선생은 잘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시고, 오로지 띄엄띄엄 말씀만을 하셨다.사람은 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살아 있을 때는 며칠이라도, 몇 달이라도, 아니 몇 년이라도 늘 그렇게 살아있을 것 같다. 운명을 달리하고 보면, 아하, 그것이 그분 생의 마지막 국면이었다고 깨닫게 된다.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 꼭 그러했다.‘실화소설’ 딱지가 붙은 ‘어머니’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박태순 자신이 직접 겪고,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들만으로 썼다. 그래서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한다.진실이란 어려운 것이다. 리얼리스트들은, ‘사실’ 뒤에 웅크리고 있는 진실에 육박하고 있노라 자신하는 경우가 많다. 그 많은 경우에 있어 망상인 경우가 많다.1980년대는 더욱 그러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이니, 노동자니 하는 말이 그런 망상을 잔뜩 품고 있었다. 박태순이 말하는 민중이며 노동자는 사회과학 지식으로 얻은 것이 아니요, 스스로 겪고 생각한 것을 일인칭의 시점으로 말한 것이었다.오늘은 세월호 참사가 난 지 십 년이 된다. 벌써 십 년이었나? 채만식은 해방이 되고 나서, 여승,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했다.세월호를 둘러싼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 말해 왔다 할 수 있는가? 정부가 바뀌고 나서 밝혀질 줄 알았던 진실이 오히려 꽁꽁 숨어 버린 것을, 나는 깊은 환멸 속에서 경험했다. 그러고 나서 정부가 한 번 더 바뀌었다. 이번에도 큰 참사가 났다. 이를 둘러싼 진실은 수면아래 먼 깊은 곳에 잠겨 있다.나는 지금 정치 세력의 어느 한 쪽을 편들어 주려고 진실 운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입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처절히 깨달았음을 말한다.바로 며칠 전 나라의 큰 일이 있었다. 이 큰 일을 둘러싼 진실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작금의 현실에 비추어 아마도 영영 모르고 지나갈 가능성이 크다.모두들 자신이 믿는 바가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런 미망(迷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이것이 우리네 인생의 비극이요, 희극이다.그렇다고 생각하기라도 할 수 있다면, 그래도 한 발자국은 나아간 것일까? 무엇을 향해서?

2024-04-15

지명 변경 ‘몸부림’

홍석봉 대구지사장 대구 수성구가 매호동 소재 농업용 저수지인 ‘구천지(狗泉池)’의 명칭을 ‘매호지’로 변경을 추진 중이다. 이름이 죽은 뒤에 넋이 돌아가는 곳을 이르는 구천(九泉)을 연상시키는 부정적 어감때문이다. 경북 성주군 금수면은 최근 ‘금수강산’면으로 명칭변경을 시도하고 있다. 주민들이 한번만 들어도 평생 기억되고 꼭 가보고 싶은 지역 이름으로 바꾸길 원했다. 대구도시철도 2호선 대공원역도 최근 이름을 수성알파시티역으로 변경을 추진 중이다. 대공원 조성이 장기화되면서 역 명칭 변경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대공원 조성 예정지가 역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배경이다.경산시는 2007년 일제강점기 때 붙여진 ‘쟁광리’를 옛 마을 이름인 ‘일광리’로 바꿨다. 포항시는 2010년 ‘대보면’을 일출 명소 호미곶 이름을 따 ‘호미곶면’으로 바꿨다. 울진군은 2015년 금강송이 많은 ‘서면’을 ‘금강송면’으로, 매화나무가 많은 ‘원남면’을 ‘매화면’으로 바꿨다. 고령군도 2015년 대가야국 도읍지로서 위상을 높이고 브랜드화 하기 위해 ‘고령읍’을 ‘대가야읍’으로 변경했다.군위군은 2021년 ‘고로면’을 ‘삼국유사면’으로 변경했다. 승려 일연이 고로면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고 입적한 인각사가 위치한 점이 고려됐다.경주시는 2021년 100년 이상 써오던 ‘양북면’ 명칭을 관내 문무대왕릉의 인지도를 앞세워 ‘문무대왕면’으로 변경했다.이름은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으면 된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도 촌스럽다는 이유로 바꾸는 요즘이다. 좋은 이름을 갖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지역 정체성도 살리고 브랜드 가치도 높이려는 지자체의 지명 변경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지자체의 처절한 생존 몸부림이다. /홍석봉(대구지사장)

2024-04-15

중동 리스크, 지역경제계도 비상경계 나서야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해 심야 대규모 공습을 감행하면서 중동에서의 전쟁 공포감이 확산되고 있다. 50년만에 중동전쟁이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 속에 전 세계가 중동발 글로벌 경제위기에 긴장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내 경제계도 비상이 걸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14일 중동사태에 따른 긴급 경제안보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다.이스라엘과 하마스간 전쟁이 6개월 넘게 장기화하고 있는 가운데 중동에서의 전쟁 확전은 세계 안보와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수입 원유의 70% 가량을 중동산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으로선 악재 중 악재를 만난 꼴이다. 현재 브렌트 유가가 장중 92달러를 넘어섰고, 호르무즈해협이 봉쇄가 되면 국제유가 100달러 돌파는 시간 문제로 경제계는 보고 있다. 원달러 환율도 17개월만에 가장 높은 1천370원을 기록하고 있어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1천400원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고유가, 고환율로 수입 물가가 오르면 가뜩이나 불안한 국내 물가를 자극할 우려가 크다. 모처럼 되살아나고 있는 국내 수출회복세에 찬물을 끼얹게 되고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도 멀어질 수 있다.기업들은 원유가격 상승으로 원가부담이 올라가 수출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심리적 불안감이 경제를 더 어렵게 할까봐 걱정이다. 지역업계서는 벌써 중동으로부터 주문이 줄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대구시와 경북도, 상공단체 등이 나서 중동발 리스크에 대한 상황을 면밀히 관찰해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정부 차원의 대책이 당연히 나오겠지만 지방자치단체와 지역경제단체가 할 일도 많다. 중소기업이 많은 지역의 사정을 고려 기업의 일시적 자금난 해소를 위한 지원책과 수출지원을 위한 선제적 대응책을 서둘러 준비해야 한다.물가가 오르고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의 어려움도 가중된다. 서민들의 어려움을 보살필 따뜻한 정책도 필요하다. 선거 후유증으로 뒤숭숭한 분위기까지 겹쳐 있다. 당국은 민생의 어려움이 최소화되도록 만반의 대책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2024-04-15

난국 타개하려면 ‘쓴소리 총리·비서실장’ 필요

국민의힘의 총선 참패 후 사의를 표명한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관섭 대통령실 비서실장 후임 인선이 늦어지고 있다. 현재 후보로 거론되는 대부분 인물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것이 주된 원인이다. 이번 인사는 여당의 총선 패배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에게 국정 쇄신 의지를 보여주는 첫 시험대이기 때문에 대통령실도 여론동향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 하마평에 오르는 총리 후보는 대구 수성갑에서 6선에 오른 주호영 의원을 비롯해 권영세 의원,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 이정현 전 의원 등이며, 비서실장 후보는 인천 계양을에서 낙선한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과 충청 출신 정진석 의원 등이다. 그러나 야당은 물론 여권 내부에서조차 거론되는 인물들에 대한 비판기류가 워낙 강해 대통령실이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결격사유는 ‘TK 출신이라서, 서울 용산이 지역구이기 때문에,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맞대결을 해서, 민주당 대표 출신이라서’ 등등 다양하다.정부 요직에 대한 조기 인적쇄신론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긴 하지만, 이번 인사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맞다. 인사를 서둘렀다가 검증이 허술해 청문회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날 경우, 야당의 집중포화로 국정이 표류할 소지가 다분하다. 무엇보다 총리 후보자는 야당의 추인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민주당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을 찾아야 한다.윤 대통령이 이번 인사에서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는 언제든 서슴없이 쓴소리와 직언을 할 수 있는 인물을 골라야 한다는 점이다.야권은 이번 선거기간 중 ‘대통령 탄핵’을 거론할 정도로 윤 대통령에게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야권을 상대로 국정과제를 수행하려면 지금과 같은 독단적인 업무 스타일로는 하루를 견디기 어렵다.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다양한 국정현안을 타개하려면, 우선 매일 얼굴을 대하며 국정을 논의하는 인사들이 대통령과 격의없이 대화하고, 야당과도 쉽게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2024-04-15

가볍게 정치 얘기 좀 해볼까요?

최근 열린 22대 총선 개표소 풍경. /경북매일 자료사진 지난 4·10 총선 기간 내내 나는 한 번도 SNS에 나의 정치적 의견을 피력한 적이 없다. 그것은 내게 특별한 정치적 의견이 없어서도 아니고 내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사람이어서도 아니다. 나는 대중예술인이기 때문에 정치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중예술인은 말 그대로 대중들을 상대로 예술 활동을 펼치는 사람이고 대중들이 외면하면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다수의 대중들은 자신과 다른 정치색을 가진 예술인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한 결론이다. 비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누군가가 보수 지지자이건 진보 지지자이건 관계없이 사랑받고 싶다. 지금 나와 나의 작품을 좋아해주시는 분들 중에 누구도 잃고 싶지 않다. 그가 몇 번을 찍었건 간에.그렇다고 내가 ‘대중예술인은 정치적 발언을 삼가야 한다.’라는 명제에 찬성하는 입장인 것은 아니다. 그것이 대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누구든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입장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그를 상종조차 하지 않는 문화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민의힘 원희룡 후보를 지지하고 나섰던 한국인 1호 프리메라리가 플레이어이자 2002년의 영웅인 이천수 선수는 여전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축구선수이다.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지지발언으로 화제가 되었던 ‘구마적’ 이원종 배우 역시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배우이다. 이천수 선수와 이원종 배우를 동시에 좋아하는 것이 불가능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정치색은 정치색이고 사람은 사람이고 그의 업적은 업적이다. 모든 국민은 어떤 정당이건 지지할 권리가 있고 그것은 나도 이천수 선수도 이원종 배우도 마찬가지이다.실제로 내 주변에는 다양한 정당에서 일하는 벗들이 있다. 국민의힘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도 있고, 민주당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도 있다. 한 선배는 녹색정의당에서 일하고 있고, 또 어떤 후배는 진보당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 중 누구와도 나는 즐겁게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있고 그렇게 해 본 경험이 있다. 어떤 이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즐거웠고, 또 어떤 이들은 나와 다른 철학으로 정치활동을 하고 있어서 새로웠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때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의견이 단단해지기도 하고, 몰랐던 사실을 발견하기도 하며, 어떤 때는 납득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납득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건 생각이 자라는 일인 것은 분명하고 그 결과 나는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우리 가족 안에서도 다양한 정치색들이 있다. 우리는 식사를 하거나 술을 한 잔 곁들이며 가끔 정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가끔 의견 대립이 팽팽해지는 경우는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 인해 마음을 다치지 않는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비난하지도 않고 단지 서로의 의견을 이야기할 뿐이다. 우리 아버지가 삼성라이온즈의 팬이고 내가 롯데자이언츠의 팬인 것이 우리 부자의 사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처럼 누가 어떤 당을 지지하는지는 우리 가족들의 유대감을 전혀 해치지 않는다. 강백수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상대에게 밉보일까봐, 또는 상대를 미워하게 될까봐 우리는 가급적 정치 이야기는 친구끼리라도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정치 얘기만 나오면 화가 나고 흥분하는 이상한 조건반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어째서 토론이 자꾸만 싸움이 되곤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현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치 이야기는 금지라며 말도 못 꺼내게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정치적 견해 같은 건 들어볼 기회가 없어진다. 서로 간에 정보 교류와 의견 교환이 없다는 것은 물이 한 곳에 고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고인 물이 썩듯이 정체된 정보는 왜곡되기 쉽고 올바른 선택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다.모두가 자유롭게 서로의 정치적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좋겠다. 그로부터 뻗어 나온 다양한 생각들이 대한민국 정치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한다. 그러나, 당신의 말할 권리를 죽음을 각오하고 지킬 것이다.” 프랑스 작가 볼테르가 말했다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거나 생각해 볼만한 말이다.

2024-04-15

우리 못된 일을 하자

아기는 조그만 생명이 주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 /언스플래쉬 최근 내 삶에 생긴 몇 가지 변화가 있다. 그중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건 단연 조카의 탄생이다. 조카가 태어난 날을 기점으로 우리 가족의 결속력은 단단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주고받고 조카의 집에 다함께 모여 시간을 갖는 일도 잦다. 처음에는 아이를 안아 드는 것도 버거웠지만 이젠 여러 일에 제법 능숙해졌다. 밥을 먹이고 옷을 갈아입히는 건 기본. 쏟아지는 졸음에 칭얼대는 것과 먹을 것을 요구하는 소리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 팔이 떨어질 것같이 아프다가도 내 품에서 잠든 아기의 체온에 마음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아, 이토록 조그만 생명이 주는 기쁨이란!세게 움켜쥐면 바스러질 것같이 조그만 아기였다. 언제부턴가 몸을 뒤집더니 배밀이를 하고 이젠 네 발로 온 집안을 헤집는다. 목도 가누지 못하던 날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듯 꼿꼿하게 앉아 무거운 물건을 쥐고 흔들기도 한다. 한 생명의 뼈가 단단해지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노라면 시간이 흐른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이 실감 난다. 자란 것은 육체뿐만이 아니다. 우리 아기 어디 있지? 장난을 치면 몸을 배배 꼬면서 자기 몸 위에 손을 얹는다. 어찌나 영특하고 귀여운지. 바라보고만 있어도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고모인 내가 봐도 이렇게 예쁜데 부모는 오죽하겠는가. 자신들의 아이를 누구보다 잘 키우고 싶다는 부모의 열정이란 실로 대단해서 옆에서 보고 있자면 머리가 아득할 지경이다. 숙지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할 것과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도 무궁무진하다. 나 때는 그런 거 없었는데,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면 혀를 꾹 깨문다. 나도 모르게 기성의 문법이 불쑥 솟아오르는 나날이다. 오지랖 넓은 우려가 들 때도 있다. 서울 한복판의 높다란 건물에서 태어난 아이가 지겹도록 볼 것들과 끝내 보지 못할 것에 관해 생각하다 보면 더욱 그렇다. 창의성을 길러준다는 태블릿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 또한 낭만적인 감상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이를 향한 부모의 열렬한 사랑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어느 주말, 아빠에게서 연락 한 통이 왔다. ‘우리 못된 일을 할 거야.’ 연이어 조카의 사진이 도착했다. 노란 옷을 입고 지하철을 탄 모습이었다. 늘 그랬듯 집 근처의 대형 쇼핑몰로 산책을 가려다가 인천으로 노선을 틀었다고 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갈매기 때문. 수족관 앞에 놓인 모형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진짜 갈매기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오빠와 새언니의 눈을 피해 조카를 데리고 지하철에 올라타는 아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니 웃음이 났다. 그야말로 불량 할아버지와 손자가 아닌가. 주먹을 꾹 쥔 채 앉아 있는 사진 속 조카가 너무나 의젓하고 결연함까지 느껴지는 바람에 나도 그 일탈에 기꺼이 동참하기로 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렇게 도착한 포구는 꽤 부산스러웠다. 흥성거리는 불빛과 색소폰 연주가 어지럽게 뒤엉킨 저녁이었다. 조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갈매기가 하늘 높이 날아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수산시장에 들러 도다리회를 떴다. 노래미와 멍게까지 서비스로 받았다. 우리는 회에 소주를, 조카는 이유식을 먹었다. 조카의 오동통한 볼을 꼬집으면서 말했다. “너희 엄마 아빠가 알면 엄청나게 혼날걸? 위생적이지 못하다거나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랬느냐고 한참 잔소리 들을 거야.” 키득거리면서 내가 했던 많은 못된 일을 떠올렸다. 어른들이 절대 가지 말라던 위험한 동네를 배회하던 일이나 엄마 몰래 불량식품을 숨겨 놓고 야금야금 까먹던 일. 조마조마하고 무서우면서도 얼마나 신났던가. 나의 조카 역시 무수하게 많은 못된 일을 행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잠든 아기의 뒤통수는 동그란 행성 같다. 망망한 우주를 떠돌다 우연히 발견된 어떤 별. 부지불식간에 나타난 이 존재는 내 삶을 대차게 뒤흔들었다. 아이는 걷고 뛰고 말하고 생각하며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테다. 그러다 거꾸로 걷고 싶은 날도 있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춰있을 때도 있을 것이고. 그게 나쁘다면 가끔은 나쁜 아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조만간 우리 또 못된 일을 하자. 잠든 조카의 귓속에 속삭인다. 언젠가 반드시 혼날지언정,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밀스러운 일을 도모하는 친구가 되겠노라고 다짐하면서.

2024-04-15

인기가 무엇이길래

김규인 수필가 새끼 판다 푸바오가 중국으로 떠났다. 에버랜드에서 태어나 자란 지 1,354일 만이다.이른 새벽부터 사람들이 푸바오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취재하러 나온 방송국의 카메라와 팬들의 카메라가 뒤섞였다. 이송하는 동안에 불안한 마음을 줄이기 위해 여러 번의 적응 훈련도 했다. 편안한 이송을 위해 무진동 차량을 준비하고 모친상을 당한 사육사가 중국까지 함께했다. 사육사 어머니의 마지막 길에도 불구하고 푸바오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모여든 사람들의 수가 푸바오가 누리는 인기를 말해준다. 인기에 비하면 이토록 많은 혜택도 오히려 부족하게 느껴진다. 관계자들이 무엇을 더 해줄 게 없는지 자꾸만 주위를 돌아보게 만든다. 푸바오는 그저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행동해도 곱게 보아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더 그러하다.사람들의 관심 뒤편에는 쓸개즙을 뺀 사육 곰이 아픈 배를 잡고 웅크린다. 넓은 땅을 활보하며 다니던 본능은 이미 상실한 지 오래고 별다른 움직임도 없이 눈은 늘 아래를 향한다. 어쩌면 곰의 사육이 금지되는 2026년 이후의 삶을 걱정하는 주인의 불안한 눈길을 피하는지도 모른다.생사를 좌우하는 절박한 문제에도 인기 없는 곰에 사람들은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어디 곰만 그러할까. 인기 없는 건 다 그러하다. 창문 하나 없는 방에서 인기를 갈구하는 무명 가수, 신춘문예만을 쳐다보며 젊은 시간을 다 보내버린 무명작가, 라면 한 개로 하루를 때우는 무명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은 오늘도 인기를 찾아 나선다.거리를 떠돌며 한 표를 얻으려는 국회의원 선거도 끝났다. 2주간의 절박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패자에게는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역대급의 여당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는 고작 5.4% 정도다. 단지 5.4% 차이에 모든 게 바뀐다. 승자는 많은 걸 가지지만 패자는 다시 긴 시간을 어두운 곳에서 재기를 모색해야 한다.인기는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인 게 아니다. 푸바오처럼 단지 귀엽다는 감정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다. 인기가 많은 제품이 성능이 좋거나 더 많은 인기로 당선되었다고 하여 반드시 선량이 아니다. 법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개인이나 당이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는 것만 보아도 우리 인간이 얼마나 감정에 휘둘리는지 안다.사람은 언제나 이성적인 판단만을 하지 못한다. 때로는 감정에 쓸려 비이성적인 생각에 빠져버리고 만다. 푸바오에서 나타난 ‘베이비 스키마’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낳지 않는 경향은 여전하고 사육 곰에는 관심조차 없다. 단지 사람들이 제대로 보지 않아 감정이 내키지 않고 인기가 없다는 것 때문에 말이다.그렇다고 불공정한 사회라며 나무라고 싶지도 않다. 사회는 늘 그렇게 돌아간다. 한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반대쪽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기에 그나마 우리 사회는 제대로 돌아간다. 인기를 누리는 푸바오도 언젠가는 잊힐 것이고 또 다른 무엇이 우리의 관심을 끌 것이다. 다만 인기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동물들이 더 많다는 걸 알고,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두기를 바랄 뿐이다.

2024-04-15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추모하며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2024년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2014년 당시 학계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고 기억하기 위한 세미나와 토론회 등 각종 학술행사가 개최되고 다양한 기록물이 연이어 발간되었다. 이후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비유한 일부의 방해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게 두 가지 입장이 소모전을 벌이며 1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다시 물어본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했을까? 당장 떠오르는 것이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다. 하나의 사건은 커다란 배가 서서히 침몰하는 과정에서 대다수 학생을 구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다른 하나의 사건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압사’라는 믿기 어려운 방식으로 수많은 청년이 생명을 잃었다는 점에서 판박이다. 한 마디로 두 참사는 평범한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점에서 근원적 동일성을 갖는다.그렇다면 대체 왜 있을 수 없는 일이 반복해서 생겨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책임 있는 기관의 조사로 밝혀져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앞선 두 번의 사례가 증명하듯 사회적 참사를 조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어떤 세력의 조직적 방해가 제대로 된 조사를 막았고, 조사가 안 되니 책임자의 처벌도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 시스템이 반복적으로 오작동하게 된 원인을 추적해서 개선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 지점에서 그간 오작동이라고 생각했던 시스템이 원래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 정상인 것 아닌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정확히 말해 이런 학습의 결과 대다수 국민이 국가 시스템에 별로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유례없는 합계 출산율과 투자 열풍이 국가 시스템을 신뢰하지 못한 결과라고 판단하는 것이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나의 삶과 미래를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현실이 되었다.세월호 참사는 오작동하는 사회가 정상이 아니라는 인식을 다시 새기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오작동을 멈추는 일은 국가의 몫이지만 여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지난주 국회의원 선거에서 시민들은 정부 여당을 심판하는 투표를 했다. 국가 권력이 투표로 드러난 다수 시민의 마음을 잘 받들기를 희망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기대가 크면 절망도 크다는 사실을 과거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 우리 스스로 작은 변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10년 전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해진 나의 신체를 뒤바꾸고자 써 내려간 메모를 다시 꺼내 읽었다. 그 뒤로 뭐 하나 1년 넘게 꾸준히 실천한 항목이 없었다. 10년이란 시간이 흐른 만큼 나와 내 주위의 많은 것이 변했다. 다시 메모를 작성하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해봐야겠다. 이것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최소한의 애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24-04-15

보수가 살려면 좀 더 참을 줄 알아야 한다

김진국 고문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어 동인이라 하고,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 서인이라 했다. 남인도 서애 류성룡의 집이 남산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이렇게 쪼개진 붕당은 권력과 자리를 둘러싸고 분열과 갈등을 반복했다. 이름은 여러 가지여도 결국 두 개의 큰 당파 사이의 갈등이 이어졌다.1천 명이 넘는 동인을 학살한 ‘동인 백정’이 ‘사미인곡(思美人曲)’을 아름답게 불렀지만, 결국 임금이 다시 불러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심(邪心)이라 비난받지 않았는가.기축옥사 이후 당쟁은 서로 죽고 죽이는 혈전으로 치달았다. 당파가 다르면 혼인은 물론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 우리 정치가 꼭 그 짝이다.이번 선거 결과를 표시한 지도를 보면 동쪽은 빨간색, 서쪽은 파란색이다. 동서 분열이 선명하다.한동안 경상도에 기반한 정권은 영원할 줄 알았다. 대구·경북 인구가 호남 전체 인구와 비슷하다. 부산·울산·경남은 호남 전체 인구의 1.5배다. 영남 전체 인구는 호남의 2배 반이라는 말이다.그러니 대통령 선거에서 영호남 대결이 벌어지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영남 후보가 이긴다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김대중 정부 때부터 영남 출신 대통령 후보를 양자로 들이는 전통까지 생겼겠는가. 그렇게 해서 노무현·문재인 정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제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지원하고,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도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는 게 이번 투표에서 보인다. 심지어 전남지사까지 지낸 함평 출신 이낙연 후보의 날개를 꺾어버렸다.계산에서 빠진 게 수도권이다. 서울(48)·인천(14)·경기(60)를 합쳐 122석이다. 전체 지역구 의석 254석의 절반에 가깝다. 인구는 50.8%다. 이곳을 장악하면 정권을 차지한다. 수도권도 선거구마다 특색이 있다. 국민의힘이 유리한 선거구도 있고, 민주당이 유리한 지역도 있다. 그렇지만 영호남과는 분명히 다르다. 양대 정당의 경합이 박빙이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대부분 지역이 한꺼번에 영향을 받아 쏠림 현상을 보인다.민주당은 이번 총선의 서울 지역구 투표에서 52.2%를 얻었다. 그런데 의석은 77.1%(37석)를 가져갔다. 국민의힘은 지역구 유효투표의 46.3%를 받았지만, 의석은 절반도 안 되는 22.9%(11석)를 가져갔다. 가장 많은 의석 60석이 걸린 경기도에서는 민주당은 54.7%를 득표해 88.3%(53석)의 의석을, 국민의힘은 42.8%의 득표로 10%의 의석(6석)을 차지했다.민주당 위성정당과 관계없이 의석을 차지한 군소정당은 개혁신당(3석), 새로운미래(1석), 진보당(1석)이다. 이 5석을 제외하고 지역구에서 얻은 득표대로 전체의석을 나누면 민주당(50.5%)에 156석, 국민의힘(45.1%)에 139석이 돌아간다. 민의(民意)라고 할 수 있는 투표를 같은 가치로 환산한 의석이다.사실 이것은 정치공학적 분석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새겨보아야 할 수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다. 무엇보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조선시대 당쟁에서는 반대 당파를 완전히 밀어내고,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다. 북한 같은 전체주의 독재 국가도 유일사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게 정치하면 민주주의는 죽는다. 자기와 다른 의견을 품는 관용(톨레랑스) 없이 정당정치는 불가능하다.배타적인 당파주의로는 정권을 잡을 수 없다. ‘권력을 탐하지 않는다’라고 오기 부릴 거라면 중앙정치에 관심은 왜 두나. 이제 수도권이 민주당 우세로 고정돼 간다. 산업화 이전에는 영호남 인구가 큰 차이가 없었다. 지금 호남 인구가 영남의 절반 이하인 건 수도권으로, 영남 산업도시로 이동한 인구가 더 많기 때문이다. 반대편 같아도 끌어안으면 내 편이다. 내 목소리가 클수록 상대정당 지지자는 더 똘똘 뭉친다.노론과는 결혼도 하지 않는다는 고집보다 함께 잘 사는 나라를 고민하는 세력이 국정을 맡아야 한다. 낯선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경계하는 것이 인간 본능이다. 위험을 피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지나치면 차별과 편견과 혐오주의자가 된다. 나치도 그렇게 등장했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4-14

10년 세월이 흘렀건만!…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이 있다. 유구하되 무상(無常)한 것이 자연이니 10년 세월에 변화가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요즘처럼 과학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대에 10년은 참으로 장구(長久)한 세월처럼 느껴진다.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이 불러온 변화를 생각할라치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경천동지도 유만부동 아닌가?!내일이면 2024년 4월 16일이다. 그렇다! ‘세월호 대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많은 사람은 잊고 살아왔겠으나, 참사의 희생양이 된 가족을 둔 분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특히 단원고교 2학년생 250명 부모님이 그러하리라. 만일 그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올해 28세 나이의 꽃다운 청춘남녀로 성장했을 것이다.나는 내일도 조기(弔旗)를 걸어 그날 희생된 310명의 영령을 위로할 생각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고 답답하다. 다른 한편으로 돌이키면 2009년 일어난 ‘용산 참사’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했다. 재작년인 2022년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로 159명이 죽고, 195명이 다쳤다. 이 무슨 참괴(慙愧)한 일인가?!2차 대전 끝나고 독립한 나라들 가운데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쟁취한 유일한 국가로 자부하던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연이어 터져 나온 대형사고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무리한 공권력 남용으로 죽어야 했던 철거민들과 진도 팽목항 인근 해역에서 차가운 바닷물에 수장(水葬)되어야 했던 어린 고교생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저린다.그런 안타까운 죽음도 모자라서 다시 수백 명이 죽고 상하는 이태원 참사가 이어지는 재난 공화국이라니! 만일 우리가 사람의 생명을 가장 존귀하고 고귀한 대상으로 여긴다면, 이런 참사는 되풀이되지 않았을 것이다. 참사가 일어나면 잠시 경각심을 가지도록 인도하는 행사가 열리지만, 우리는 시간과 더불어 참사를 까맣게 잊어버린다.역사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 오직 그것이 아닐까 하는 참담한 생각마저 든다. 인간은 성공한 사례와 경험에서 배우는 것보다 실패한 사람과 이야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 마련이다. 우리가 위인전을 읽는 까닭은 그들이 숱한 패배와 좌절을 어떻게 극복하고 부도옹(不倒翁)처럼 일어설 수 있었는지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많은 돈과 넓은 평수의 아파트와 주식과 코인과 땅에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다. 차고 넘치는 재화와 풍요의 물결 속에서 허우적대며 욕망의 노예로 살아간다.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준 고귀한 영성(靈性)은 내팽개치고 저급한 물성(物性)의 하수인이 되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쳇바퀴를 열렬하게 돌리고 있는 형국이다.참다운 반성과 처절한 자기 혁신 그리고 따뜻한 미래기획과 젊은 세대를 위한 장쾌한 일정 마련이 시급하다. 이 나라 젊은이들을 더는 사지(死地)로 몰지 말고 그들에게 빛과 꿈과 웃음을 선사해야 할 역사적 책무가 나이 든 자들의 몫이라는 뼈아픈 인식이 새삼스러운 아침이다.

2024-04-14

민심의 바다

우정구 논설위원 22대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참패를 했다. 국민의힘은 지역구와 비례를 합쳐 108석을 겨우 확보함으로써 가까스로 개헌 저지선을 고수하는 데 그쳤다. 집권 여당이 야당에게 이처럼 크게 패한 것은 역대총선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여당의 총선 패배로 임기 5년 내내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정을 이끌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특히 선거 참패 후 여당 내 터져 나오는 자성과 비판의 목소리가 국민의힘을 환골탈태의 경지로 이끌지 주목된다.국내외 언론들은 여당이 이번 총선에서 패배한 원인에 대해 제 나름의 분석들을 내놓았다. 이를 종합해 보면 한마디로 민심(民心)으로 귀결된다. 민심에 귀 기울이지 않은 여당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라는 것이다.특히 작년 10월 치러진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에서 이미 민심의 흐름이 감지되었음에도 이에 대비하지 않고 무심했던 것이 결정적 패배 요인으로 꼽았다.야당의 승리에 대해서는 그들이 잘해 얻은 것이 아닌만큼 “오판 말라”는 경고를 했다. 민심의 수렴보다 정권심판론의 반사이익이 컸을 뿐이라는 것이다.정치는 민심을 위해 존재한다. 모든 정치인이 입만 열면 민심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다. “민심은 바다와 같아 배를 띄우기도 하고 배를 뒤집기도 한다”는 말은 정치인에게 상식과 같은 금언이다.실패를 교훈삼아 나의 가르침으로 삼는다는 반면교사(反面敎師)는 큰 의미로 보면 시행착오와 유사한 말이다. 시행착오 과정에서 빨리 벗어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개인뿐 아니라 집단도 마찬가지다.이번 총선은 정치와 민심이 한몸인 것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확인시켜준 셈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4-14

저출생과 전쟁 벌이는 경북도의 분발 기대한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국가적 어젠다의 하나인 저출생 극복에 남다른 소신과 의지가 있다. 경북도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예산과 정책을 펴는 것도 그의 의지가 반영된 탓이다. 그동안 이 지사가 밝힌 생각과 발언들을 살펴보면 그 내용을 더 잘 알 수 있다. 저출생 문제만큼 우리 세대가 시급히 극복해야 할 과제가 없다는 점에서 경북도의 정책 방향에 동의한다. 지난 2월 경북도는 도내 23개 기초단체와 기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최초로 ‘저출생과의 전쟁’선포식을 가졌다. 이 자리서 이 지사는 “경북도가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돌봄, 주거 등을 초단기로 실시하고 저출산 극복을 제2의 새마을 운동으로 확산시키겠다”고 했다.국가와 전국 자치단체들이 저마다 저출생 문제에 대응하고 있지만 경북도만큼 광범위하고 세밀한 정책을 펴는 곳은 드물다.최근 경북도는 규제개선 총괄부처인 국무조정실을 찾아 저출생 극복을 위한 각종 규제 혁파와 사회보장제도 신설·변경 등 12개 과제의 개선을 건의하는 등 적극적 행보도 보였다. 이와 관련 이 지사는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규제만 과감히 풀어도 저출생 문제 해결에 속도감 있는 정책 추진이 가능하다”고 했다.저출생 문제에 경북도가 사활을 거는 이유에 대해 이 지사는 “목마른 사람이 샘물 파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경북도는 1970년도까지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살던 곳이다. 이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수도권으로 인구가 쏠리면서 지금은 경북이 전국에서 가장 노령화되고 출생률도 가장 낮은 지역으로 변했다.경북도가 2024년 추경을 편성하면서 경북 자체예산 1천600억원의 40%가량을 저출생 극복 관련 분야 예산으로 편성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안전돌봄, 안심주거, 일 생활균형, 양성평등 등에 예산이 투입된다. 경북도의 예산이 생활현장으로 흘러들어 저출생 극복의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국가적 어젠다인 저출생 문제가 국가 차원에서 할 일도 있지만 지자체의 노력도 필수다. 경북도의 저출산 극복 노력은 이런 점에서 더 돋보인다.

2024-04-14

50일 넘은 의료공백, 이제 국회가 나서야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시작된 의료 공백이 지난 주말 50일을 훌쩍 넘겼다. 곳곳에서 응급환자들이 수술병원을 찾지 못해 목숨을 잃고 있지만, 정부와 의료계 모두 해법을 찾지 못한 채 혼란을 겪고 있어 안타깝다. 현재 대구시내 대부분 수련병원은 신규 인턴 수급이 끊겨 병원에 남아있는 소수 전문의들이 중환자실에 입원한 여러 과(科) 환자들을 동시에 보고 있다. 야간이나 휴일 당직 근무도 의사 두세 명에 의존하고 있어 매일 아찔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이번 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을 재개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총선 직후 총리와 대통령실 참모진이 사의 표명을 한 후 개각 분위기까지 형성되면서, 의정(醫政) 갈등 해소를 기대할 만한 입장 표명은 나올 것 같지 않다. 의대 증원 추진동력을 상실한 정부가 의료계와 적극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추측이 있지만, ‘2천명 증원’이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강경 입장이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의료 개혁에서 성과 없이 물러날 경우, ‘레임덕’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의료계가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도 의정 갈등을 더 꼬이게 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현 비대위와 차기 회장간의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 최근에는 전공의 대표가 의대교수를 강도 높게 비판하는 글을 SNS에 올리면서 사태는 더 악화하고 있다.이제는 국회가 중재에 나서 의정간 대화테이블을 만들어 줘야 한다. 이번 선거과정에서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각계가 참여하는 공론화 특위를 만들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자. 증원 규모는 400∼500명이 적당하다”며 의료 공백 해법을 제시했다.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정부가 무리하게 2천명 증원을 밀어붙여 선거 패배를 자초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대학별로 다음 달까지 수시 모집 요강을 발표해야 하는데 그 이후 정원을 조정하면 극심한 혼란이 발생한다. 국회가 의료시스템이 더 이상 망가지기 전에 임시회를 소집해서 초당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2024-04-14

똑똑한 지능형 공장, 스마트 팩토리

장광일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3월 말 스마트 팩토리(Smart Factory), 자동화 산업전 전시회가 서울 코엑스에서 열렸다. 내년에도 개최할 이 전시회는 최신 제조 기술과 솔루션을 선보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스마트 팩토리, 자동화 산업 전시회이다. 필자는 작년에 다녀와서 올해는 스마트 팩토리를 구현한 현대엘리베이터 충주 공장을 벤치마킹하고 왔다. 이 회사는 로봇을 활용한 공장 자동화율이 78%에 달하고 있었으며, 자재 입고부터 출하까지 통합관리는 물론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Big Data),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명실공히 스마트 팩토리 등대 공장이라 할 수 있었다.특히 비접촉 홀로그램 버튼, 안면·음성 인식 장치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적용된 스마트 엘리베이터 구현 모습은 감동적이었다.그러나 현실적으로 중소기업에서 스마트 팩토리를 추진하는 기업은 많지 않다. 미래를 준비하는 경영자 관점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지향점은 맞지만, 초기 투자 자본이 많이 들고,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모르는 불투명한 방법론이라 바로 추진하기는 쉽지 않다.경영의 대가 피터 드러커는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다. 관리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경영의 본질은 회사가 돌아가는 흐름을 잘 보고 잘 관찰하여 잘 측정하는 데 있다. 또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경제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당신에게 보이는 것이 전부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보는 행위보다는 얼마나 제대로 보는가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다.경영자가 공장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바로 대상에 대한 관찰능력, 분석 능력, 제어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산업혁명 3.0시대까지는 작업자에 의존하여 공장을 관찰, 분석, 제어를 실시하였다면 산업혁명 4.0시대에는 관찰은 사물인터넷, 분석은 빅데이터, 제어는 AI가 주로 담당한다. 필자는 이를 융합한 것이 스마트(Smart)이고, 이런 공장을 스마트 팩토리(Smart Factory)라고 생각한다.스마트 팩토리로 유명한 회사가 바로 지멘스이다. 이 회사는 독일 암베르크 공장에서 스마트 팩토리를 구현하고 있다. 이 공장은 매일 5000만건, 연간 182억건의 데이터를 분석을 수행하여 제품 불량률은 100만개 가운데 11.5개, 즉 0.001% 수준으로 낮췄으며, 생산성은 800% 이상 증가하였다.이 방법을 응용하여 Smart X로 추진하여도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산업현장의 스마트 안전모, 코웨이 스마트 정수기, 나이키의 스마트 운동화, 낭비를 없앤 스마트 빌딩, 센서를 활용한 스마트 에너지 등 다양한 사례가 있다.이처럼 산업혁명 4.0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마트 팩토리에 앞선 기업이 되거나, 여건이 어렵다면 스마트 X처럼 스마트 개념을 현장에 하나하나 접목해 나아가면서 현장을 제대로 보고,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하나씩 적용해 나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2024-04-14

취리히에서 저상버스를 타고 눈물을 쏟은 이유

유영희 작가 여행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고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여유도 많지 않아서 국내 여행도 잘 하지 않는 편인데, 며칠 전 멀고도 먼 스위스로 여행을 다녀왔다. 딸이 취리히로 떠난 지 3년이 되도록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위스 하면 아름다운 자연과 부자 나라라는 이미지만 있었는데, 직접 가보니 검색으로 깨닫기 어려운 것을 알게 되었다. 딸이 사는 동네는 물론, 취리히 시내에서도 한두 명의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부모들이 정말 많았다. 알고 보니 스위스 출산율도 아주 높은 편은 아니어서 한동안 1.5를 유지하다가 2022년에는 1.3으로 내려갔다는데도, 정말 아기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못지 않게 대중교통도 놀라웠다.취리히 시내는 모두 버스, 트롤리 버스, 트램 등 대중교통으로 이동했는데, 출입문이 두 사람이 동시에 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거기에다 차가 정차할 때 튀어나오는 발판이 승강장과 수평이 되어 승차할 때 계단을 오를 필요가 없었다. 한국도 저상 버스가 일부 있기는 하지만, 취리히의 모든 버스는 저상이었고 승강장과 발판 간격이 거의 맞붙을 만큼 좁아서 더욱 안전했다. 스위스 경계 내 기차도 같은 방식이었다.출입문이 충분히 넓은 데다 단차도 없고 틈도 없으니,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나 유아차를 끌고 다니는 부모들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버스를 탈 수 있다. 게다가 휠체어를 탄 사람이 승강장에 있으면 버스 기사가 내려서 휠체어가 타기 좋게 더 넓은 발판을 펼쳐주고 휠체어를 밀어준다. 버스 정류장의 전광판에는 장애인 승차 가능 여부가 표시되는데 거의 모든 버스가 장애인 승차가 가능하다.한층 더 놀라운 것은 버스나 열차를 탈 때 매번 카드를 태그하지 않고 그냥 타고 내린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료는 아니고, 여행객은 프리패스권을 사고, 취리히에 살고 있는 사람은 정기권을 결제하거나 앱이나 정류장에서 구매하는데, 버스 안에 태그하는 기계가 없는 것이다. 아주 가끔 불시에 승차권을 검사는 하고, 걸리면 요금의 20배정도 벌금을 물린단다. 벌금이 무서워서인지 명예를 중시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스템이 취리히에서는 잘 운영된다고 한다. 이렇게 매번 카드를 태그하지 않는 편리함은 상상을 넘는다. 짐이 많거나 어린아이를 동반하거나 몸 균형을 잡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승하차 때 카드를 꺼내는 일은 정말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딸에게 스위스의 풍경보다 취리히 대중교통의 편리함에 감동받았다고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나는 장애도 없고, 나이가 들면서 승하차 불편감을 조금 느끼는 정도인데도 이 편리함이 이렇게 크게 다가오는데, 실제로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은 얼마나 소외감을 느낄지 사무쳐왔기 때문이다. 전장연 시위 때 그들의 불편에 더 공감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들었다.며칠 전 22대 국회가 구성되었다. 물가는 물론이고, 더 많은 민생의 삶을 구석구석 세심하게 살피는 정책 입안에 여야 모두 마음을 모아 노력해주기 바란다.

2024-04-14

성난 총선 민심을 겸허히 수용해야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선거의 광풍이 한 달 이상 몰아쳤다. 결과는 집권여당 108석, 범야권 192석이다. 집권 여당의 패배와 야권의 압승으로 끝나버렸다. 윤석열 정부의 임기 3년은 무척 어려울 것이다. 집권당은 선거의 처절한 패배의 원인부터 살펴야 한다. 사실 총선 전에도 정치 평론가들은 대체로 여당의 패배를 예상했었다. 강서 보선 이후 민심은 국정쇄신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대통령도 여당도 이를 적극 수용치 않았다. 대통령은 ‘국민은 언제나 옳다’라는 말만 남겼지 실천은 따르지 않았다. 선거 패인은 윤 대통령의 지난 2년간의 부진한 업적, 소통 부재의 리더십, 선거 전략의 부재 등 복합적 총체적 실정 결과이다. 이번에는 집권 여당이나 용산 대통령실의 철저한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흠결 많은 야당 대표나 야당 탓만 해서는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시대는 저만큼 앞서가는데 대통령과 집권당은 구태를 탈피하지 못한데 근원이 있다.윤석열 정부는 0.73% 차이의 짜릿한 대선 승리에 도취하여 거부와 오만의 정치로 치닫게 되었다. 윤석열 정부가 공약으로 내세운 ‘공정과 상식’의 정치는 어디론지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검찰 총장 출신 참신한(?) 대통령에 걸었던 기대는 실망으로 반추하였다. 정권 초반의 이태원 참사 등 대형 사건에는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여소야대 정국 하에서 이태원 특별법이나 김건희 특별법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었다. 인사 청문회 보고서 없는 장관의 무리한 인사 강행은 불만을 키웠다. 대선 시의 교육, 노동, 연금 3대 개혁 공약은 밑그림조차 그리지 못했다. 갑작스런 의사 2천명 증원발표는 의정 갈등만 초래했을 뿐이다. 정부의 부자 감세는 60조원의 세수 손실마저 초래하였다. 미일 편중의 외교는 남북관계를 교착시키고 안보 불안을 더욱 조성하였다. 정부의 이러한 누적된 실정이 총선에서 정권 심판에 가세하였다.여기에는 대통령의 불통의 리더십까지 한몫 하였다. 용산 대통령실과 여당은 상하 수직관계로 고착되어 버렸다. ‘윤심’에 의한 여당 대표의 잦은 교체는 당내 민주주의마저 소멸케 하였다. 집권 여당관계도 경직된 일방적 구조가 정착되어 버렸다. 더구나 개방화 시대의 대통령의 직접적 언론 기피 현상은 소통 부재의 리더십으로 각인되었다. 집권 3년차인 올 초에도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마저 없애고 특정 보수 언론과의 대담방식을 채택하였다.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 시의 명분으로 삼았던 도어 스테핑도 사라진 지 오래다. 집권당의 방통위 구성과 언론사주의 교체는 권위주의시대 언론관으로 후퇴했다는 비판도 따랐다.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의 대통령의 20여 회의 전국 민심 투어는 ‘관권 선거’라는 비판마저 따라다녔다. 이처럼 대통령의 소통 부재의 리더십은 관행처럼 굳어졌고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30% 중반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해외의 연구기관마저 한국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했지만 대통령 실이나 여당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총선의 성난 민심의 역행 배경이다.집권 여당의 총선 전략은 선거패배를 자초하였다. 야당의 ‘정권 심판’에 대한 한동훈 비대 위원장의 ‘이·조 심판’은 언어적 유희일 뿐 여당의 정치 프레임은 될 수 없다. 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는 만성화되어 대증적인 설득력을 잃어 버렸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전격 등장은 선거 초반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정치 경험이 부족한 한동훈 일인 선거 사령탑은 갈수록 한계를 노출시켰다. 민주당의 3명의 선거 트로이카 체제에 비해 상대적 취약성을 빈번히 노출시켰다. 여의도 문법을 그렇게 질타하던 한동훈의 정치 어법은 저질 정치인들의 구태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의 야당 대표를 향한 ‘쓰레기 같은 말’등 저속한 언술은 그에 대한 실망만 키웠다. 더구나 대통령의 고착된 이미지 극복용 젊은 당 대표의 기용은 대통령과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총선 승리를 위해 윤 대통령을 밟고 지나가야한다는 당심과 민심에도 부응치 못한 결과이다.집권 여당과 대통령은 총선의 민심을 말이 아닌 가슴으로 적극 수용해야 한다. 대통령이나 여당 지도부의 총선을 통한 야당의 응징 프레임이 오히려 선거 패배의 원인임을 알아야 한다. 필자는 본 란을 통해서도 대통령의 이재명 대표와의 회동을 여러 번 제안한 바 있다. 이재명 당 대표도 기회 있을 때마다 회동을 제안했지만 대통령은 이를 철저히 무시하고 거부하였다. 대통령은 피의자와는 만날 수 없다는 검사식의 고정된 인식 틀을 탈피하지 못한 결과이다. 야당 대표와 조건 없이 만나 협조를 구해야 한다. 망국적인 상호 부정과 갈등의 정치를 푸는 방식에 합의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협치의 방식일 것이다. 차제에 대통령은 초연한 입장에서 진정어린 대국민 사과도 필요할 것이다. 야당도 지도부도 대통령의 이러한 결단을 수용할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은 소통 부재의 리더십,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탈피해야 한다. 그리하여 ‘공정과 상식’의 정치가 회복될 때 총선의 성난 민심은 수구려 들고 대통령은 국민적 지지를 회복할 것이다.

2024-04-14

뉴스 접하기가 겁난다

위현복(사)한국혁신연구원 이사장 연합뉴스 2월 8일자 기사에 “마지노선 넘었다… ‘속수무책’”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최근 1년간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이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처음으로 1.5℃를 넘어선 것으로 관측됐다고 영국 BBC 방송이 2월 8일 보도했다. 1.5℃는 국제사회가 기후재앙을 막기 위해 약속한 마지노선이다. BBC는 EU(유럽연합) 기후감시기구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연구소 (C3S)의 데이터를 인용해 지난해 2월부터 올해 1월까지 1년간 지구 평균 기온 상승폭이 산업화 이전 대비 1.52℃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전 세계는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 폭을 2050년까지 1.5℃ 이내로 유지하기로 195개국이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COP21)을 통해 목표로 정한바 있다.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연구소의 서맨사 버지스 부소장도 “온실가스 배출량을 급격히 줄이는 것만이 지구 온도상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2월 2일자 SBS 기사에서는 “탄소 중립만으론 지구온난화 못 막는다… 바다의 역습”이라는 기사를 올렸다. 대기 중의 온실효과로 발생하는 열의 90% 이상이 해양에 저장된다는 것이다. 즉 현재는 바다가 열을 흡수해 지구 온난화 속도를 늦추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열을 저장하고 있던 바다가 다시 대기 중으로 열을 방출하는데 현재 기후변화 상황이 그러한 되돌릴 수 없는 터닝포인트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탄소배출 감소를 넘어 지구의 열을 종합적으로 낮출 수 있는 추가적인 방안을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이 경고하고 있다는 것이다.2월 15일자 전기신문에는 “글로벌 태양광 성장세 무서운데… 한국만 뒷걸음질”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지난해 글로벌 태양광 설치량이 400GW를 돌파했으며 올해 사상 첫 500GW를 넘어설 것이라는 내용이다. 중국과 미국이 이끌어 나가는 태양광 설치량의 엄청난 글로벌 성장세에 비해 한국은 지난해보다 15% 감소해 2.5GW 안팎이라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태양광설치가 증가세를 보이고 있지만 한국은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것이다.2월 27일자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한국에 경고장 날린 ‘슈퍼 을’ 기업이 탈 원전 선언”이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세계 1위 반도체 장비 기업인 네덜란드의 ASML이 2040년까지 자사와 고객업체를 포함한 기업의 모든 생산, 유통 과정에서 넷제로를 달성하겠다고 선언 했다는 것이다. 고객사도 2040년까지 재생에너지를 100% 사용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불이익을 줄 가능성을 내비추었다.3월 2일자 CBS 노컷뉴스에서는 “원전으로 만든 전기는 안된다? 기업들 전전긍긍”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글로벌 기업, 친환경 목표 달성에 고객·납품사 동참 요구 원전 생산 전력 배제한 RE100 요구. 불응엔 불이익 우려 국내 100% 재생에너지 전력 10% 수준. 용어 혼재에 혼란도’ 이런 부제와 함께.2월 6일 전기신문(기자의 눈)에 “기업 생사 달린 RE100 실종된 산업부 업무계획”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부제는 ‘원전 24 재생 17 무탄소 15 태양광 4 풍력 3 RE100 0’. ‘한국이 우리만의 기준(CFE)을 외치는 사이 중국은 재생에너지 세계 선두의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쓰고 있다.2월 27일 경향신문 기사엔 “한동훈 ‘RE100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떤가’”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기후위기 관련 총선 정책을 발표하면서 한 말로 “RE100은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탄소를 낮추는 것을 중심으로 가겠다”고 말했다고 했다.간단히 살펴본 근래 기사들이다. 정부의 재생에너지 정책에 대해 온통 걱정이 앞서고 EU, 미국, 중국 이제 더 나아가서 중동 산유국들조차도 재생에너지 기반 에너지 전환 경쟁에 뛰어드는 형국인데 우리나라만 무대책이라는 것이다.지난 수 백 년 간 에너지 패권을 쥔 나라가 세계 질서를 주도했다. 산업화 초기엔 석탄에너지 기반 산업혁명을 주도한 영국과 유럽이, 그리고 석유에너지 기반 산업혁명을 주도한 미국이 오늘날까지 세계 질서를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재생에너지라고 부르는 햇빛과 바람과 빗물을 바탕으로 하는 ‘자연에너지’는 지구상의 어느 나라든지 에너지를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주어져 있고, 값없이 무한 재생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우리 국토를 지혜롭게 활용하면 에너지 자립이 충분히 가능하다.2022년 우리나라 무역적자가 472억 달러인데 그해 에너지 수입에 쓴 돈이 1천908억 달러다. 우리나라는 자원도 부족한데다가 수출에 목매다시피 하는데 에너지 자립을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할 것인가.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에너지자립이 힘들다”, “우리나라는 RE100이 힘들다”는 말을 아무나, 아무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내 뱉는다.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일어선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우리나라는 안된다”는 의식이 팽배한 나라가 되었을까?대통령은 대통령경선 TV 토론에서 “RE100, 현실적으로 가능하겠어요?”라고 하더니 여당 비상대책위원장 또한 “RE100은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어렵다” 라고 말한다. 정치인들로부터 “해낼 수 있다”는 긍정적, 진취적인 말을 듣고 싶다. 뉴스에서 재생에너지를 선도해 가는 한국을 이야기하는 기사로 넘쳐나는 날을 보고 싶다.

2024-04-14

꽃은 꺾어도 봄은 온다

이희정 시인 뒤돌아서서 사진을 태워야미련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얼굴이 흐려질 동안두 눈에 담았던 풍경이재가 될 동안입술에 감추었던 고백과지상의 영광과 모욕이애월 봄볕이진언이 될 동안나는우리의 모든 죄를용서해 달라고등으로봄 햇살을 할퀴며표범처럼 울었다― 서안나 ‘재의 풍경’ 전문 (애월, 여우난골)아름다운 것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아픈 쪽으로 향한다. 시인은 뒤돌아서서 사진을 태운다고 했다. 시인이 태우는 얼굴은 흐려지고 재가 되어간다. 흐려져 가는 그 얼굴을 애월(涯月)이라 쓰고 애절(哀切)이라 불러봄직하다. 서안나 시인에게 봄은 달려들어 햇살을 할퀴어야 할 만큼의 아픈 봄이고, 표범처럼 울어야 할 만큼의 잔인한 봄이다.누구에게나 몸의 거주지, 마음이 거하는 본적지가 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서안나 시인의 애월은 어디로든 애월이어서 손이 시리고 마음이 시리다. 애월은 한자로 풀면 물가(涯)와 달(月)이 합쳐진 말로, 물가에 얼비친 달이다. 달빛의 젖은 풍경이 재가 되는 풍경이라니. 이 얼마나 애잔한 당신인가. 애월이 주는 정감은 언어의 음성과 잔상만으로도 그 수심이 깊다.이 시에는 제의적 고백이 담겨 있다. ‘재의 풍경’에는 T.S 엘리엇(Eliot)의 전언처럼 잔인한 4월이 서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시인이 두 눈에 담았던 풍경은 “재가 될 동안” “진언이 될 동안”의 표현처럼 상태가 아니라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태(動態)의 순간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에서 ‘재’가 주는 심상과 현재진행형으로서의‘동안’이라는 시어에 천착해 보자. 시인이 미련을 갖지 않겠다고 하는 다짐은 지나온 생의 풍경을 산화시킴으로써 그 선업을 잊지 않겠다는 회향의 염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태운다는 것, 회향의 행위를 살펴보면. 범어로 ‘회향’은 “우리의 모든 죄를 / 용서해 달라”는 기도의 의식과 같다. 애월의 봄볕은 “입술에 감추었던 고백과 / 지상의 영광과 모욕”을 모두 태우는 진언의 주문과 다르지 않다.우리가 아는 진언이란 상실이 다시 시작이 되고, 잃음이 새 세상의 문이 되는 간절한 기도처럼 폐허의 재 위에 한 세계가 얹어지는 모습이다. 태우는 것으로 시작한 이 시는 선근의 업을 평화롭게 나누기 위한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다, 시인의 애월은 잃은 것을 찾고 있는 그 재의 풍경 중에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한 풍경을 잊지 않으려는 참혹한 몸짓이다.당신의 얼굴이 흐려질 동안 ‘재의 풍경’은 상실의 존재에서 빚어졌지만 더 이상 무력하지 않다. 봄이 형체가 아닌 움직이는 동체인 것은 시인의 의지를 생성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은 재의 풍경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재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까. 시인이 마음에 담고, 눈에 담고 시에 담았던 존재들이 바로 이 고결한 진언에 닿아 있음이리라. 대개 아름다운 것들이 지극한 슬픔에서 오는 것처럼 아픈 곳에서 꽃은 핀다.“애월 봄볕이 진언이 될 동안”

2024-04-14

포스텍 의대 설립, 결코 포기 해서는 안 된다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서울대는 되고 포스텍은 왜 안되는가?최근 25년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37%가 의사과학자이고, 세계적인 제약회사의 대표 과학책임자 70%도 의사과학자인 것으로 알려졌다.미국 의과대학의 경우 한해 졸업생 4만5천명 중 3.7% 가량이 의사과학자의 길을 걷는다. 매년 1천700명가량의 의사과학자가 배출된다.미국은 연구중심 의대를 별도로 운영한다. 이런 의대들은 공과대와 협업하거나 아예 공과대가 의대를 설치해서 신약개발이나 바이오산업을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이에 비해 한국은 의대 졸업생 중 의사과학자가 되는 이들이 1% 미만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해 모집정원이 3천58명이므로 30명에 불과하다는 얘기다.이는 미국, 유럽 등 선진국과 우리나라의 바이오산업, 첨단의학 기술의 격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그런데 충격적인 뉴스가 연일 들린다.정부가 추진하는 의대 증원 신청 대상에서 의대 신설은 제외되면서 의사과학자 육성을 위한 포스텍의 의대 설립도 미뤄지고 있다.기존 의대를 중심으로 증원이 이뤄지면서 의대가 없는 대학은 정원 확보 기회조차 얻지 못한 것이다.의료계의 반발도 크다. 의료계는 “의대 가운데 연구중심의대를 지정해야 한다”며 포스텍의 계획에도 반대하고 있다.과기정통부가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해 과기의전원 설립을 본격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지지부진하다.정부는 의대 증원 논의를 마친 뒤 의대 신설을 차례대로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그러나 서울대는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에 따라 15명 증원을 신청했다.이와 별개로 의과학과 신설을 전제로 한 학부 정원 50명을 별도 요청했다. 서울대 요청이 받아들여지면 서울대는 65명을 추가로 육성할 수 있게 된다.서울대는 되고 포스텍은 왜 안되는가?이런 와중에 포스텍이 이제는 의과학대학 설립에 소극적이라는 어리둥절한 소식이 언론에 보도 되고 있다.포항시에서도 크게 당황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의대 정원 증원과 신설 의과학과 배정받기, 이사회의 인준받기, 연차적 재원 확보 등 문제가 많이 앞에 놓여 있긴 하다.의대 증원이 이뤄져도 교육부에 의과학대 설립과 정원 배당을 신청하자면 그보다 먼저 포스텍 이사회의 승인을 받고 재원 계획을 확립해야 하는 것이 필요한건 다 안다.그러나 의과학자 양성, 의대 설립의 목표를 놓아서는 안 된다. 더 고삐를 당겨야 한다.축구에 run-and-kick(뛰고 공차기)도 있지만 kick-and-run(일단 공을 차고 뛰기)도 있다, 공을 차고 뛰는 것이다. 먼저 목표를 설정하고 달리는 것도 중요한 전략 중에 하나이다.포스텍 리더십은 의과학자 양성과 의과학대학 설립의 목표에서 한걸음도 물러 나서는 안 된다.포스텍은 생명과학이 아주 강하며 인프라도 한국 최고 수준이고, 의과학은 의학·공학·기초과학을 융합하니, 그것이야말로 포스텍 전체에 재도약의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폭발점이 될 것이다.의사과학자는 의사 면허를 가진 과학자다. 진료보다는 임상에서 나타난 여러 문제를 연구하고, 이러한 연구 성과가 환자 치료나 의약품, 의료기기 개발에 활용될 수 있도록 돕는다.줄기세포 치료제, 인공장기, 유전자검사, 면역항암제 등 바이오산업과 의료 분야의 최신 연구와 기술 개발을 맡고 있어 국가경쟁력을 끌어올릴 핵심 인력이 의사과학자이다.최근 포항시장은 포스텍에 협력을 촉구하였고, 이에 최근 시장과 총장 두 분이 만났다고 한다.이날 비공식 만남에서 정확한 대화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대 설립에 대한 공동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만은 확인되었고 서로 협력하기로 했다는 소문은 다행이다.지금은 의대 설립 인가를 받는 것에 집중해야지 다시 수억원을 들여 의대를 설립할지 말지를 물어보는 용역은 시간과 비용 낭비이다. 그런 용역을 하면서 시간낭비나 이미 수렴되고 지역민들이 서울까지 올라가 데모까지 한 사항을 검토할 시간과 여유가 우리에게 있지 않다고 본다.포항시와 포스텍은 우선 소통창구 정비부터 들어갈 계획이고 기존에 어긋났던 소통 조직을 재구성해 보다 활발한 대화를 이어가겠다는 것인데 마치 시계를 거꾸로 돌려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든다.포스텍은 어떤 대학인가?지역에서 사립대가 전국과 세계적인 명성을 갖는 신설대학 세계 1위의 신화를 쓴 대학이 포스텍 말고 또 있는가?포스텍이 걸어온 개척자 정신을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포스텍은 그저 하나의 대학이 아니다.누군가 한국의 미래를 묻거든 관악이 아닌 형산강을 바라보도록 포스텍은 그러한 시대를 끌어가고 있다는 걸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

2024-04-14

마음에도 없는 후보 찍었다고?

홍석봉 대구지사장 #1. 투표지를 받아들고 기표소 안에 들어서면서부터 한참을 망설였다. 지역구 선거 출마 후보는 단 두 명뿐이었다. 대구·경북 상당수 지역이 비슷한 실정이다. 1번과 2번 중에서 골라야 했다.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 명은 보수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온 인물이다. 지역과는 별 연고가 없다. 지역에는 그동안 수차례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략공천이라는 이름으로 낙하산 공천이 관례화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후보 개인은 명망 있고 능력도 있는 인물일 터이다. 그래도 못 미덥다.진보 후보는 애초에 마음이 가지 않았다. 보수 텃밭인 지역 탓에 통상적으로 진보 쪽 후보는 전국적인 인지도가 있거나 중량감 있는 인물은 좀체 보기 힘들다.진보 후보는 인물 됨됨이는 둘째 치고, 지역에서 수차례 선거에 나서 낙선한 전력의 인물이다. 무엇보다 민주당에 대한 거부감이 앞섰다. 당 대표부터 잡범 수준의 전과자에 막말 등 품격없는 언행으로 눈밖에 났다. 여러 명의 후보들이 막말과 사기대출, 위선 등으로 지탄받았다. 이런 이들이 금배지를 달면 국회가 어떻게 돌아갈지 불보듯 뻔했다. 아니 아예 국회의원 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탁월한 정치력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고민 끝에 기표를 했지만 마음에도 없는 후보를 찍고 말았다. 투표소를 나오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2. 현 정부와 각을 세우고 있는 의사 집단은 윤석열 정부와 완전히 등을 진 모양새다. 지역의 한 개업의는 “윤석열 대통령이 멸문지화를 초래했다”며 “의사들은 무조건 2번 후보는 안 찍기로 했다”고 발끈했다. 의대 증원을 둘러싼 의사집단과 정부와의 정면 대치는 선거판에도 영향을 미치는 형국이다. 의사집단은 보수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반대다.#3. 대구 북구갑에 출마한 한 후보는 “16년째 국민의힘은 낙하산 후보만 내려 보내고 있다”며 “선거는 스타가 탄생해야 한다. 이변이 생기고 균열도 생겨야 대구경북도 발전하고 변화한다. 이번에 이변을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다. 이 후보는 자신의 당선 가능성은 낮지만 지역에 필요한 인물론을 설파했다.선거 결과는 민주당 압승과 국민의힘 참패로 나타났다. 국민은 정권 심판을 택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불통이 문제였다. 정부여당은 앞으로 험난한 파고와 맞부딪힐 일만 남았다.이번 총선에서 지역 유권자 중에 정치적 허무주의에 빠진 이들이 적지 않다. 정치인 꼴보기 싫어 투표를 않았다는 이들도 꽤 있다. 찍을 만한 후보가 없다고 했다. 대구·경북의 낮은 투표율이 이를 반증하는 듯 하다. 유권자들의 가슴만 더욱 공허하게 만들었다.‘합리적이면서도 모두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민주적인 투표나 선거제도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서 차악이라도 택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상황이었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의사결정 방법이 선거 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한다.이번에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제발 국민과 나라를 먼저 생각해 주길 바란다.

2024-04-11

염색산단 악취관리지역 지정에 거는 기대

대구시가 서구 평리동 일대에 풍기는 고질적 악취의 원인으로 지목된 염색산업단지를 악취관리지역으로 지정하기로 했다. 시는 지정을 위한 착수 조치로 11일부터 26일까지 시군구 홈페이지에 의견수렴 공고를 제시하고 지역주민과 이해관계인의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다. 이후 검토과정을 거쳐 다음 달 중으로 염색산단을 악취관리지역으로 확정, 고시하게 된다.악취관리지역으로 지정되면 염색산업단지 내 악취 배출시설을 운영하는 사업장은 지정 고시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악취 배출시설 설치 신고를 하고 1년 내 악취방지에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또 악취 배출기준을 초과하면 조업정지 등 강력한 행정처분도 받게 된다.1980년 설립 인가가 난 염색공단에는 현재 127개의 섬유염색업체가 입주해 있다. 염색공단에서의 악취 문제는 공단 설립 이후 꾸준히 제기돼온 민원이다. 기업부담과 예산 등의 여러 문제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온 것이 사실이다.2020년 한국환경공단이 실시한 악취실태 조사에 따르면 염색산업단지의 악취가 주거지역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는 것으로 밝혀졌고, 서구청 조사에서도 매년 사업장의 8∼15% 정도가 악취 배출기준을 초과한 것으로 확인됐다.대구시가 이번에 악취관리지역으로 지정하기로 한 것은 서대구역사 개통과 역세권 개발로 서구지역의 인구유입이 대거 늘면서 악취관련 민원이 폭증한 때문이다. 2022년 173건이던 악취 민원이 지난해는 1만3천여 건으로 급등했다.대구시 관계자는 “이번 조치로 효과적인 사업장 관리가 이뤄져 시민들의 정주환경 개선에 기여할 것”이라 밝혔다. 하지만, 서·북부지역에는 하·폐수처리장, 음식물처리시설, 환경자원시설 등이 산재해 있어 염색산단 관리만으로 악취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대구시는 서구지역 일대 악취문제가 주민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주민들이 만족할 때까지 악취관리에 엄격하고 지속적인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번 조치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감도 그만큼 크다.

2024-04-11

대가족에서 1인 가구 시대로

우정구 논설위원 한 가족의 구성원이 삼대(三代) 이상으로 구성되고 결혼한 자녀들이 분가하지 않고 함께 사는 가족 형태를 대가족이라 한다. 가족 구성원의 수가 많고 엄격한 가부장적 권위가 있다. 조선시대 양반의 가족 형태가 주로 이러했다.대가족제의 기원은 농사를 짓고 살았던 농경시대로 본다. 혈연을 중심으로 뭉쳐 살면서 공동으로 농사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족애가 좋으나 가부장적 권위로 독립성이나 자율성이 없다.반대 개념으로 핵가족제가 있다. 부부와 그들의 미혼 자녀들로 구성된 가족 형태다. 사회가 분업화 도시화되면서 부부 중심으로 변화한 가족 구조다. 결혼한 자녀들이 독립하여 생활을 할 수 있어 부모 등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아 자유롭다. 그러나 가족간 결속보다 이기적 성향으로 흐르는 단점도 있다.가족은 우리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다.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 필수적인 삶의 터전이다. 영국의 소설가 웰스는 “가정이야말로 고달픈 인생의 안식처요 모든 싸움이 자취를 감추며 사랑이 싹트는 곳”이라고 말했다. 가정을 행복의 안식처로 표현하는 이유다.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 통계에 따르면 혼자 사는 1인 세대수가 지난달을 기점으로 1천만명을 돌파했다. 전체 세대수에 차지하는 비중이 41.8%다. 불과 20년 사이 1인 세대수가 두배 늘었다.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인구 구조변화로 핵가족보다 더 분화된 1인 가구가 대세가 됐다.전문가들은 1인 세대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혼자 사는 청년도 늘지만 혼자 사는 노인의 증가가 더 가파르다고 한다. 나 홀로 가구를 위한 정부 차원의 선진복지 대책 수립이 시급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4-11

여당 ‘TK석권’, 지역발전에는 걸림돌 된다

4·10총선에서 야권이 압승을 거두었지만, TK(대구·경북)지역에선 여당이 25개 선거구 모두를 싹쓸이했다. 선거막판 야권이 개헌가능 의석인 200석을 확보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동하면서 국민의힘 지지자들이 투표장에 몰린 결과다.민주당과 무소속 후보 강세지역으로 주목을 받은 대구 중남구에서는 공천번복으로 뒤늦게 여당후보로 출마한 김기웅 전 대통령실 통일비서관이 60%에 가까운 득표율을 보이며 민주당 허소 후보와 무소속 도태우 후보를 따돌렸다. TV3사 출구 조사에서 경합지역으로 분류됐던 경산 선거구도 대통령실 행정관을 지낸 여당 조지연 후보가 4선 출신 무소속 최경환 후보를 이겼다. 사실상의 전략공천인 국민추천제로 여당후보 티켓을 따낸 대구 동구군위갑 최은석 전 CJ제일제당 대표와 북구갑 우재준 변호사도 높은 득표율로 당선됐다.대구 수성갑에서는 주호영 후보가 당선돼 당내 최다선인 6선 국회의원이 됐다. 대구 정치권에서는 6선이 처음 나왔다. 지역에서는 ‘TK 국무총리’에 대한 기대감이 나온다. 4선고지에 오른 윤재옥(대구 달서구을) 원내대표와 김상훈(대구 서구) 의원의 활약도 기대된다. 포항북구 김정재 후보와 상주문경 임이자 후보는 TK지역 최초로 여성 3선의원이 돼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다.TK지역의 경우, 지난 21대 총선에서는 무소속으로 대구수성을에 출마한 홍준표 대구시장이 당선돼 그나마 ‘특정정당 싹쓸이’를 피했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국민의힘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이번 선거캠페인 과정에서 TK지역 상당수 선거구에서는 여당후보의 유세차량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선거분위기가 냉랭했다. 그 흔한 정부·여당의 지역공약조차 사라졌다는 비판이 나왔다. 대구·경북 투표율이 전국 평균보다 낮은 이유도 유권자들이 투표 자체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인물이 썩듯이, 묻지마 투표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민심의 무서움을 알 수가 없다. 지역발전과 정치적 다양성은 함수관계에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2024-04-11

혁명의 봄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혁명군처럼 봄이 진군해왔다. 그처럼 기세등등하던 동장군이 퇴각하고 음지로 숨어든 겨울의 잔병들도 봄볕에 소탕되었다. 대지에는 바야흐로 찬란한 혁명의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어둡고 냉혹하던 구악과 폐습을 말끔히 청산하고 눈부신 신생의 기운이 폭죽처럼 터져 나온다.혁명(revolution)이란, 정치사회학이나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급격한 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정치사회학적 혁명의 경우, 대중 또는 군을 동원해서 정치권력을 가진 체제를 강제적으로 전복하여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미국의 사회과학자인 허버트 사이먼이 정의한 정치적 혁명의 개념은 정치권력의 교체 후 정치사회제도에 일관된 변화·계획이 추진된 경우로 그 의미를 한정한다. 미국 조지 메이슨 대학교의 잭 골드스톤 교수는 기존 권력의 붕괴를 목적으로 기성 정치구조와 사회 내 정치적 권위의 정당성을 합법적·비합법적인 대중 동원 및 제도권에서 벗어난 행동 따위로 변혁하려는 시도라고 정의 했다.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이론철학가 중 한 사람인 한나 아렌트는 혁명과 반란의 차이를 엄격하게 구분했는데, 그녀의 관점에 의하면 혁명은 자유(freedom)를 목적으로 하는 반면에 반란은 해방(liberty)을 목적으로 한다. 혁명이란 단지 폭정을 뒤집었다고 해서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폭정의 종결 이후 자유를 체제에 성공적으로 반영함으로써 완료된다고 했다. 그러나 모두가 한나 아렌트처럼 혁명과 반란을 이질적인 개념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며, 혁명을 반란의 한 형태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경우 반란(rebellion)은 혁명보다 더 넓은 의미의 총체적인 반정부활동 개념을 지칭하며, 혁명은 정의 그 자체로 반란의 일종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대체로 실패하면 반란, 성공하면 혁명으로 구분된다.대한민국 대법원 판결에는 ‘어떤 국가의 헌법 내지 기본적 법질서가 자연법에 어긋나는 부당한 것이라는 인식이 그 사회에 팽배하여 마침내 그 불일치를 힘에 의하여 극복하려는 급격한 투쟁이 전개될 때 이것을 혁명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혁명으로 불리는 사태는 ‘4·19혁명’이 유일하다. 5·16 군사정변도 당시에는 ‘5·16 군사혁명’이라 했으나 지금은 쿠데타로 통용되고 있다. 대중의 동원이 없이 군대만을 활용한 강제적인 정권교체는 쿠데타로 규정하지만, 지배계층의 교체를 넘어서 정치 사회 전반에 있어 체제의 급격한 변화가 뒤따른다면 혁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아간 대규모 촛불시위를 ‘촛불혁명’으로 부르는 세력도 있지만 국민 모두가 인정하는 공식 명칭은 아니다.혁명이든 쿠데타든 대한민국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런 급격한 변화가 밑거름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혁신적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만연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들을 일소하는 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이고 시대정신이다.

2024-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