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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소만(小滿)과 명리 이야기

24절기 가운데 여덟 번째가 소만(小滿)이다. 태양의 황경이 60도에 위치하며, 2024년에는 5월 20일(음력 4월 13일)이다. 음력으로는 4월의 절기다. 소만은 입하와 망종(芒種) 사이다.소만(小滿)은 한자로 ‘작은 것이 가득찬다’라는 뜻이다. 글자 그대로 조금씩 여름 기운이 차올라온다는 뜻으로 지난 겨울에 심었던 밀, 보리, 마늘, 양파 등의 열매가 영그는 때다.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성장하여 가득찬다는 의미가 있다. 지난번에 뿌려놓은 싹이 이제 나기 시작함과 동시에 벼농사를 위한 모내기를 시작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소만이라는 말은 모든 만물이 자라나서 세상을 가득 채운다라는 의미인데, 소만은 식물이 잘 자라는 시기다. 햇볕이 가득하고 모든 식물의 색깔이 연초록으로 변한다. 가을에 심어놓은 보리를 베고 잡초를 제거하는 등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준비를 하는 때다. 따라서 이 무렵에는 모내기 준비에 바빠진다. 밭농사는 김매기를 하고, 벼농사는 모판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농사 준비에 분주한 시간을 보낸다.예전에는 이 시기가 가장 불행했던 때다. 바로 보릿고개의 아픈 추억이 있었다. 작년에 수확한 밭작물도 다 먹었고, 들나물과 산나물도 씨앗을 맺으니 먹을 것 없고, 보리 수확은 아직 더 기다려야 했으니 모진 생명을 이어가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지금은 먹을 것이 차고 넘친다. 추수한 보리, 밀, 죽순, 봄나물인 씀바귀, 냉이, 시금치가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는 시대로 바뀌었다.이 시기에 봉선화가 피면 잎과 꽃을 찧어내고 백반을 넣어 손톱에 물을 들였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 손톱에 봉숭아물이 남아있으면 첫사랑과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래 이 풍속은 오행설에 붉은색(赤)이 사귀(邪鬼)를 물리친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또 풋보리를 몰래 베어 그슬리고 밤이슬을 맞힌 다음 먹으면 병이 없어진다는 속설도 있다.속담으로는 ‘소만(小滿) 바람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가 있다. 계절상으로 봤을 때 여름이라 따뜻한 시기이지만, 이따금씩 차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 노쇠한 사람이 감기에 걸려 고생하는 경우가 있기에 경고의 의미가 있다.소만은 사월(巳月)의 중앙에 해당하는 절기이다. 사월은 양기가 힘차게 활동하는 시기로 만물이 힘찬 에너지를 뿜어내며 정열적으로 성장하고, 자기 자신을 표출하는 시기다. 사월은 모내기철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여서 같이 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집 나간 사람도 사월에는 들어온다는 말도 있다.동물로는 뱀이다. 뱀은 징그러우면서도 끌리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다. 꺼림과 끌림의 이중성으로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은 사화(巳火)의 특성이다. 그 매력에 가까이 가서 친하게 지내려고 하고 마음을 놓고 지내다가 갑자기 변덕으로 상대를 곤경에 빠지게 하는 성질이 있다.하지만 단정하고 잘 다듬어진 용모를 갖고 있다. 겉으로는 화끈해 보일 수 있지만, 일을 추진할 때는 세밀하고 침착하고 논리적이고 예의가 바르다. 주어진 환경 변화에 따라 업무를 파악하고 전체를 장악하며, 업무환경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꿔 놓는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장애물을 거침없이 통과하는 유연성을 보이기도 한다. 뱀은 앞으로만 가지 뒤로 물러서는 점이 없는 것처럼 이런 기운이 넘치는 달이 사월이다.사월의 뱀은 양기의 상징이다. 성질이 급하고 화(火)의 기운이 강한 사람들은 분노를 잘 다스려야 한다.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활동적인 일을 하는 것이 성향에 어울린다. 주역으로 보면 중천건(重天乾)괘에 해당한다. 여섯 효(爻)가 모두 양(陽)으로 64괘 가운데 가장 강하고 튼튼한 괘다. 주역을 대표하는 괘다. 초구(初九)는 물에 잠긴 잠룡(潛龍)에서 시작하여 상구(上九)는 항룡유회(亢龍有悔)다.‘문언전’에서는 항(亢)자를 ‘나아가는 것만 알고 물러서는 것을 모르며, 존속하는 것만 알고 멸망하는 것을 모르며, 얻는 것만 알고 잃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사실 나아감과 물러섬을 항상 잊지 않고 동시에 살필 수 있다면, 분명 보통사람이 아니다. 더욱이 한창 잘나갈 때 앞으로 닥칠 어려움을 미리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뛰어난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문언전’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성인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진퇴와 존망을 알고서 그 바름을 잃지 않을 사람이라면 아마도 성인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래서 신분은 귀하나 지위가 없고, 높이 있어도 다스릴 백성이 없으며, 어진 이가 아래에 있어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움직이면 후회가 뒤따른다. 다시 말해 ‘지극히 융성할 때 그 지나침을 살핀다’라는 말이 주역의 큰 뜻이다.초구 잠용은 물에 잠긴 용은 배우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상태다. 상구 항룡은 존귀한 지위에 올라간 자가 겸손히 은퇴할 줄 모르면 반드시 패가망신(敗家亡身)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구부득고(求不得苦)는 원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이다. 부족한 것이 충족되면 얼마 있지 않아서 권태에 빠진다. 권태를 벗어나고자 다른 무엇을 욕망하면서 다시 고통에 빠지게 되니, 인간의 삶이란 고통과 권태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인간은 맹목적인 애욕이 있어 부족한 것을 취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욕망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같이 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024-05-08

효도문화가 왜 ‘올드한 가치’로 취급받나

심충택 논설위원 1970년대 한국의 효도문화에 대해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에게 가장 훌륭한 사상”이라고 했다. 토인비는 1973년 런던을 방문한 한국 정치인에게 “만약 인류가 새로운 별로 이주해야 한다면 꼭 가져가야 할 제1의 문화가 한국의 효 문화”라며, 우리나라 가족제도를 극찬했다. 당시 서구사회는 보수주의에 대한 청년들의 급진적인 저항으로 히피문화와 무정부주의가 활개를 치던 시기였다. 서구 지식인의 눈으로 봤을 때, 자식이 늙은 부모를 봉양하고, 콩 한 쪽도 이웃끼리 나눠 먹은 한국문화가 신기하고 부럽게 느껴졌을 것이다.극심한 불경기로 인해 이번 어버이날(8일)에는 꽃시장에도 찬바람이 분다고 한다. 가정의 달 성수기 임에도 ‘카네이션 특수’가 사라지면서 화훼농가와 꽃집들이 어려움을 겪는 모양이다. 부모에게 꽃 한 송이를 선물하는 어버이날 문화를 ‘낡은 유교가치’로 여기는 경향이 보편화되는 추세가 아닌지 우려된다.부모세대를 경시하는 풍조는 우리나라 정치권이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7월말 민주당 혁신위를 이끌었던 김은경 위원장은 “자기 나이로부터 여명(남은 생명)까지 비례적으로 투표해야 한다. 왜 미래가 짧은 분들이 1대1로 표결해야 하느냐”는 기막힌 말을 했다. 20세 유권자 표는 60세 유권자의 세 배에 해당하는 표를 비례 행사해야 한다는 기상천외한 사고방식이다. 지난 2004년 총선 당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60세 이상은 투표하지 말고 집에서 쉬시라”고 했고,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은 “50대에 접어들면 뇌세포가 변해 사람이 멍청해진다”는 발언을 해 비난을 받았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이번 총선에서 65세 이상 노인의 도시철도 무임승차 제도 폐지 공약을 내놨다.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어버이날 기념행사에 참석해 “부모님들께 효도하는 정부가 되겠다”고 했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사이에서 우리나라 노인들의 빈곤율과 자살률이 가장 높다는 통계는 수년째 변하질 않는다. 간병과 가난에 대한 고통으로 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들을 살해하는 비극이 줄이어 발생하는 나라는 아마 한국뿐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인구는 올해 약 950만명으로, 내년에는 1천만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100세를 넘기는 노인들 역시 해마다 늘어 올해는 10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해 노인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인터넷을 보니, 요즘에는 여러가지 ‘효도대행’ 상품도 나온다. 부모에게 단순하게 주기적인 문자를 보내주는 것부터 손 편지 쓰기, 함께 술 마시기, 같이 산책하기 등 상품내용이 다양하다. 1주일에 2~3번 안부문자 보내는 데는 5만 원, 선물 대리발송 옵션이 붙는 경우에는 5만 원이 추가되는 식이다. 토인비가 부러워했던 우리나라 효도문화가 점점 퇴색돼 가는 세태를 겪으면서 마음이 씁쓸해진다. 아무런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부모세대들의 희생과 가족문화가 바탕이 됐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2024-05-07

알박기로 논란된 청송군 골프장 조성사업

청송군이 공영개발로 추진하는 27홀 규모 골프장 조성 사업이 이번엔 공정성 시비로 논란이다. 청송군은 지난달 25일 교보증권 컨소시엄을 청송군 골프장 조성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그러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컨소시엄 업체 가운데 일부 업체가 골프장 조성 예정부지 내 핵심 자리에 2만9000여 평의 땅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고 있는 것. 특히 청송군 골프장 조성과 관련해 설계용역을 맡은 업체도 컨소시엄에 참여한 것으로 밝혀져 공정성 논란을 더 키우고 있다.청송군 골프장 조성 사업은 청송군 산림레포츠 휴양단지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2018년부터 시작했다. 교보증권 컨소시엄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기 전 2022년 6월 한림건설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으나 석연치 않은 사유로 포기하면서 이 사업은 2년간 표류해 왔다.한림건설은 국내 상위권 건설사로 수도권에 2개의 골프장을 보유한 업체. 한림건설은 우선협상대상자 계약 후 50억원의 사업이행보증서를 제출해야 하나 이를 이행치 않아 계약이 해지됐다. 당시 한림건설이 계약을 하지 않은 이유도 부지 매입 문제인 것으로 전해진다고 한다.이번 재공모 과정에서도 3개 업체가 참여 의향서를 제출했으나 2개 업체가 중도에 포기한 것 역시 알박기 부지 때문이라 하니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했어도 뒤끝이 개운치 않은 분위기다. 포기한 업체 관계자가 “시험출제자가 시험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니 공정성에 대한 군의 해명이 있어야 한다.산림레포츠 휴양단지 조성사업은 전국 최고 청정휴양지를 자랑하는 청송군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사업이다. 군민들도 조기에 마무리돼 지역경제가 활성화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고 있다.사업 절차 과정에 법률적 문제는 별개로 하더라도 공정성 문제로 사업의 취지가 훼손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공정성은 공기관의 업무 집행에 있어 행정의 균형을 이르는 말이다. 시대적 흐름으로도 공정성은 법률적 문제 못지않게 민감한 문제다.2년만에 다시 시작하는 골프장 조성 사업의 순항을 위해 군의 명쾌한 해명이 먼저 있어야겠다.

2024-05-07

정부는 ‘저출생 해법’ 경북도에서 배워라

심각한 저출생 현상이 현실적 위기로 다가오면서 경북도가 본격적인 ‘저출생과의 전쟁’에 들어갔다. 경북도는 이달부터 1천100억원 규모의 추경예산을 편성해 저출생 극복 정책을 시행한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필요한 곳에 빠르게 자금을 투입해 저출생 문제를 경북도에서 해결해 보겠다”고 했다. 이번에 편성된 추경예산은 완전돌봄을 비롯해 미혼남녀 커플 매칭 사업, 출산지원, 신혼부부 월세 지원, 육아기 부모 단축 근무 급여 보전, 돌봄 아빠 교실 운영 등에 투입된다.이철우 지사는 지난 3월 저출생대책 회의를 주재하면서 경북도가 가장 먼저 0세부터 초등학생까지 완전돌봄 정책을 펴겠다고 선언했었다. 지방자치단체가 공동주택 1층을 사들여서 아이들이 집에 오면 돌봄방에서 마음껏 놀고 공부하도록 하겠다는 구상이었다. 0세부터 2세까지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그 이후는 공동체(전업주부나 봉사단체 등) 구성원에게 수당을 주고 맡기는 구체적인 돌봄방식도 제시했다.경북도가 저출생 문제 해법을 찾는데 전 행정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그만큼 인구소멸 위기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경북도는 지난 2월 20일 22개 시·군 단체장과 각급 기관장 등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대적인 ‘저출생과의 전쟁’ 선포식을 했다. 그리고 지난 3월부터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저출생극복을 위한 모금운동도 펼치고 있으며, 상당한 성과도 내고 있다.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2024 인구 보고서’에 따르면, 저출생으로 인해 우리나라 9년 뒤 초등학교 입학생(7세)은 지금(작년 43만명)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정부가 경북도처럼 저출생 현안에 대해 그렇게 다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올해 신년사에서 우리사회 저출생의 중요한 원인을 ‘불필요한 과잉 경쟁’ 때문이라고 진단했듯이, 저출생현상의 근본원인은 뭐니뭐니해도 ‘수도권 일극주의’ 탓이 크다. 수도권에 집중된 자원을 비수도권으로 분산시키지 않으면 저출생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2024-05-07

행복한 어린이

우정구 논설위원 어린이날을 맞아 각 교육기관 등이 어린이와 관련한 설문을 조사해 보면 그 내용에 공통점이 있다. ‘가족과 사랑’이 공통의 단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예컨대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대해 질문했을 때 어린이들은 ‘가족과 함께 있을 때’를 가장 많이 대답한다.또 ‘어린이날 가장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질문에는 ‘가족과 함께 나들이 가기’. 부모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사랑’이란 단어가 제일 많다.어린이들은 각종 설문조사에서 행복의 조건을 손꼽으라 하면 ‘화목한 가정’을 가장 먼저 말한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 했다. 천진난만하고 깨끗한 동심에서 어른들은 배울 게 많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어른을 닮아가니 어른들이 솔선해 모범적 생활을 하라는 의미로도 풀이한다.최근 교직원노동조합이 어린이날을 맞아 초등학생 20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초등생 10명 중 6명이 거의 놀지 않거나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 논다고 대답했다. 그 외 시간은 학원과 학습지, 온라인 학습으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우리나라는 사교육비 지출은 GDP 대비 압도적 세계 1위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학생의 사교육 참여율은 78.3%다. 주당 사교육 참여시간은 7.2시간, 특히 초등생의 경우 사교육 참여율은 85.2%로 10명 중 약 9명이 사교육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OECD 국가 중 우리 어린이의 행복지수가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는 수치다. 1년 365일을 어린이날처럼 보낼 수 있는 우리사회의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5-07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① 영양제와 매미 애벌레

◆연재를 시작하며=스토리가 아닌 이미지가 중심이 되는 단편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말한다. “한정된 짤막한 시간 안에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선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소설이란 문학 장르 중 가장 짧은 형식인 ‘엽편소설’ 역시 그렇다. 원고지 25매 안팎의 문장으로 세상과 사람,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꿈과 환멸을 드러내기 위해선 본질을 보여주기 위한 ‘긴장’과 ‘에너지’가 필수. 문학을 통한 세계 해석과 심미적 위안이 사라진 21세기. 경북 포항에서 내과의사로 일하며 괜찮은 소설을 쓰기 위해 악전고투 중인 작가 김강(52)이 ‘엽편소설 연재’라는 간단찮은 도전을 본지를 베이스캠프 삼아 진행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향후 격주로 게재될 김강의 엽편소설이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을 것인지 궁금하다. 아직 문학과 소설이 가진 사회적 힘을 신뢰하는 독자들의 관심과 질책을 더불어 기대한다. - 편집자 주 맥주캔 꺼내 한 모금 마신 그녀가 이번에는 찻장을 열었다.“자. 이거.”영양제다. 25가지 비타민과 미네랄의 과학적 처방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어드밴스’라는 단어가 덧붙여진 영양제. 살색 영양제 한 알은 25가지의 비타민과 미네랄의 단순한 복합체가 아니다. 이것은 격려와 칭찬이다. 그녀가 순신에게 영양제를 챙겨주는 날은 순신이 하는 짓이 그녀의 마음에 든 날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영양제는 없다. 처음에는 그녀가 영양제를 주지 않으면 오늘은 왜 안 주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에게서 영양제를 받지 못한 날이면 순신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해야 할 일을 안 한 것이 있는지 먼저 생각하고 반성하기 시작했다. 영양제는 순신에게 평화와 안도의 상징이다. 긍정과 부정의 되먹임 기전의 매개다. 예외적으로 영양제를 주는 경우가 있다. 그녀가 순신에게 최후의 부탁을 하는 경우다. 이번에도 하지 않는다면 내일은 없다.순신의 손바닥에 영양제를 올려놓으며 그녀가 말했다.“내일 별일 없으면 아이들 데리고 가서 매미를 잡아줘. 아니면 잡는 시늉이라도 해. 애들이 매미 잡고 싶다고 말한 게 언제야? 저번 주부터 매미, 매미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데 어째 그렇게 꼼짝을 안 해? 부탁이야.”그를 처음 만났을 때, 미경은 이미 몇 번의 선과 연애를 해 본 뒤였다. 학창 시절 몇몇의 연애를 제외한다면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은 제법 그럴싸한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번듯한 직장이 있거나, 집안의 재산이 대단하거나, 둘 다였다. 그럼에도 미경이 그들 중 하나와 결혼 하지 않은 것은 굳이 그들에게 기댈 이유가 없어서였다. 이미 많은 것을 갖춘 그들에게 미경은 갖추어야 할 또 하나의 무언가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했다. ‘부인은?’ 이라는 질문에 ‘네, 약사인데, 집에서 쉬고 있어요. 굳이 와이프까지 밖에서 일하는 것 원치 않거든요.’라고 대답하며, ‘멋져요.’라는 반응을 기다리는 그들의 허영에 보탬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그는 달랐다. 어렴풋이 속이 비치는 번데기 같았다. 껍데기 속에서는 뭔가 계속해서 움직였다. 미경은 그를 만날 때마다 껍데기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어떤 때는 찰랑거리는 동전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날은 호령하듯, 가다듬듯 ‘아, 아’하고 마이크 테스트를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와 일곱 번째 만나던 날 미경은 카페의 조명에 비친 껍데기 속에서 날개 같은 것을 보았다. 형광의 푸른색, 곧 껍질을 찢고 튀어나와 하늘로 날아 오늘 것 같은. 어릴 적 보았던 청띠제비나비의 날개.“미경 씨, 나는 말이지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요. 글도 쓰고 싶고요, 기회가 된다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좋을 것 같아요. 나무와 꽃을 기르는 일도 해야겠어요. 물론 돈도 많이 벌어야겠지요.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다 보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겠어요? 인생이 길지 않으니 그 중 어느 하나만 정해서 깊이 파고 들어가라고 다들 이야기하는데, 내 생각은 달라요. 길지 않은 인생에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들을 해보고 싶어요. 능력만 된다면. 함께.”‘능력만 된다면’ 이라는 전제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미경 씨랑 함께.’라는 말에 가슴이 흔들렸다. 청띠제비나비의 날개를 붙잡아 곁에 두고 싶었다.번데기에서 나오면 나비가 될 줄 알았는데, 매미였던 건가. 아니면 아직 번데기 속에 있는 걸까. 영양제를 받아먹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식기를 정리하는 그를 보며 미경은 생각했다.영양제는 정확히 오 년 전 등장했다. 그 해 순신은 회사를 그만뒀다. 순신은 작은 책방을 열고 싶었다.“정치와 철학, 예술에 관한 책들만 취급하는 책방. 아이들 문제집이나 입시 혹은 수험서들, 처세에 관한 책, 사전 등은 취급하지 않는 ‘말 그대로’ 책방을 가지고 싶어. 한편에는 작은 강의실을 두고 매주 작은 강의를 열거야. 벽에는 스크린을 달아놓고 매일 저녁 혹은 정해진 시간마다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 거야. 언제부터 언제까지는 찰리 채플린 주간입니다. 이렇게 미리 공지하는 거지. EBS 다큐 프라임 중에서 좋은 것들을 다시 틀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사람들이 그 시간에 맞춰서,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드는 거지.”순신이 미경에게 말했을 때, 사업자금은 충분한지, 퇴직금으로 가능한 것인지, 운영비는 어떻게 할 것인지 미경이 물었고 순신은 대답하지 못했다.“자기 보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을게. 이유가 있겠지. 이미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 돈 벌어오라고 말하지도 않을게. 내가 벌고 있으니 그 정도면 우리 가족이 사는데, 풍족하지는 않아도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대신 앞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계획을 세웠으면 좋겠어. 빠른 시간 내에 말해줘. 가능하면 문서로.”다음 날 저녁, 자기 전 미경은 순신에게 영양제 한 알을 건넸다.“뭐야?”“영양제.”“무슨 뜻이냐고?”“뜻은 무슨 뜻. 이제 우리도 몸을 챙기면서 살아야 할 것 같아서 퇴근할 때 하나 가지고 나왔어. 사람들은 열심히 사 먹는데, 정작 약사인 나는 영양제 한 알도 못 먹고 있네 싶어서 들고 나왔지. 하루 한 알씩 챙겨 먹자.”이후로 오 년이 지났고, 순신은 아직 계획서를 제출하지 못했다. 미경은 재촉하지 않았고, 순신은 전업주부 역할을 맡았다. 순신은 어쩌면 가사노동이 자신의 찾던 직업일 수 있다 여기기 시작했고 미경 또한 순신이 많지 않은 월급을 벌기 위해 직장에 다니는 것 대신 집에서 아이들을 보살피며 집안일을 해주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을 쓰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다.오전 10시 아이 둘을 데리고 순신은 아파트 뒤 소운동장으로 향했다. 더 더워지기 전에 빨리 잡고 돌아와야 했다. 느티나무, 감나무, 벚나무들에 둘러싸인 소운동장 사방에서 ‘메엠맴’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과 실눈을 하고 소리가 나는 곳을 올려보며 매미를 찾았다.“저기요, 저쪽 매미 소리가 제일 커요.”제법 밑동이 굵은 감나무를 가리키며 아이들이 달려갔다. 순신은 느린 걸음으로 따라가 나무 아래에 섰다. 아이들은 감나무 잎 사이로 내리는 햇빛에 눈부셔하면서도 매미를 찾아 감나무를 빙빙 돌았다. 순신은 아이들을 따라 나무를 올려보다 눈이 부셔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땅이다. 저 흙 아래에서 매미 애벌레는 7년을 기다렸을 것이다. 긴 세월을 기다리다 땅속에서 나왔겠지. 망설임 없이 나무를 타고 올라갔겠지. 드디어 짝을 만나고, 길어야 2주 남짓한 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을 텐데.“아빠. 찾았어요. 저기. 저기 있어요.”잠시 아래를 보고 있는 사이에 큰 아이가 매미를 찾아냈다. 아래에서 2.5m정도 높이에 감나무에 바짝 붙어있었다.“빨리요. 아빠. 날아가기 전에 빨리 잡아요.”그러고 보니 매미가 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저 녀석들은 날 수 있기는 하는 걸까. 날개는 멋으로 혹은 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해놓고, 사실은 나무에 기어올라 바짝 붙은 채 그저 소리만, 소리만 우렁차게 울어대는 것은 아닐까.감나무는 두 팔로 감싸 안을 수 있을 정도였다. 두 팔과 두 다리로 나무를 감싸 안았다. 아기가 배밀이를 하듯 팔로 한 번 당겨 오르고 다리로 한 번 밀어서 오르고, 반복하면서 나무를 올랐다. 쉽지 않았다. 해 본 적 없었으니. 아이들은 ‘아빠, 빨리요.’를 재촉했지만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많이 올라가지도 못했다. 내가 무슨 매미도 아니고 이게 뭐람. 이럴 줄 알았으면 긴소매 옷을 입고 오는 건데, 바지마저 반바지에 이게, 이게 뭐야. 팔과 다리에 묻은 땀이 더 힘들게 만들었고 아팠다. 지면에서 2m 정도 올라갔을까. 나무 아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뭐하는 겁니까?”경비 아저씨였다.“매미 잡으려고요.”작은 아이가 대답했다.“매미를 잡는다고?”“네.”“그 불쌍한 것을 잡아서 뭐하려고. 이 동네 매미는 다 똑같아. 참매미야. 참매미. 잘 들어봐. ‘매엠 매엠 매엠 매에에에에’ 이렇게 울잖아. 이렇게 우는 것은 백 프로 참매미야. 확인할 것도 없어,”순신은 난감했다. 거의 다 왔는데, 조금만 더 오르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쳐다보고 있다. 이대로 내려간다면 실망할 텐데. 오늘 저녁, 아니 내일까지 영양제를 못 얻어먹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올라가는 거다. 순신은 경비 아저씨의 말을 못들은 채 하며 두 다리로 몸을 밀어 올렸다. 눈앞에 매미가 있다. 이제 손만. 손만 뻗으면 된다. 그때 경비 아저씨가 소리를 쳤다.“거기 아저씨 내려오소. 불쌍한 아이들 괴롭히지 말고 내려오소. 빨리.” 매미가 울음을 멈췄다. 왼손의 힘이 빠졌고, 하필이면 불어온 바람에 잎이 흔들려 햇살이 눈으로 들어왔다.이 모든 것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매미의 울음이 멈춘 것과 바람이 불어온 것과 눈부신 햇살과 이리 내려오라는 주문 같은 경비 아저씨의 말이. 본지에 엽편소설을 격주 연재할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끝

2024-05-07

혁신으로 단단해지는 중국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1990년대 중국은 ‘마차 타고 로켓 쏘는 나라’라는 말이 있었다. 한국과 국교 수립이 얼마 되지 않은 1996년 북경을 갔을 때 첫 인상은 후진국 사회주의 국가 정도의 이미지였다. 북경 시내를 벗어나 골목길로 들어서면 주거 환경이 열악하고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동남아 수준의 거리였다.북경 올림픽을 전후로 대내외 투자가 크게 일어나고 경제 발전과 함께 유명 기업도 탄생했다. 한국 기업 진출이 본격화 되고 무역 규모도 커지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중국인의 마인드와 사회주의 사상은 우리가 이해 못하는 것이 많았다. 공산 정부의 방침 아래 움직이는 수동적인 국민성이 혁신이 들어가면서 변화가 일어났다.필자가 2008년 1월, 한국 기업이 가장 많이 진출한 청도의 포스코 법인을 갔을 때 일이다. 혁신 전문가 주재원이 투입되면서 중국 현지인의 마인드와 조직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스스로 문제를 찾고 개선하는 문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혁신 담당 주재원에게 ‘많이 가르쳐 주지 마시오’했던 기억이 난다. 시키면 하는 수동적 사회주의 사상으로 매월 급여에 직접 연계해서 인사 평가하지 않으면 근태 관리가 안 될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포스코 혁신이 도입되면서 스스로 개선하고 자랑하는 모습을 보고 이곳 공산주의 국가에도 혁신이 들어가면 변화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포스코가 베트남에 제철소를 지을 때 현지 채용인을 어떻게 교육할까 고민이 된다는 CEO의 말씀에 중국에 답이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이후 3개월 뒤에 청도 법인은 관둥성 혁신 대상을 받고 중국 신문에 게재되면서 포스코 혁신이 부각되었고 전국에서 벤치마킹 러시가 일어났다. 3년 뒤에 중앙 공산당 혁신우수상을 수상하며 새로운 시각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필자가 2009년 상해의 소주시에 위치한 포스코아 법인을 컨설팅 할 때 중국인의 마인드 변화는 쉽지 않았다.현채인과 주재원의 관점이 달라 이를 해결하는 데 밤 늦게 술 한 잔을 나누며 경청하고 해결책을 찾아가기도 하고, 중국 직원의 사고 변화와 스스로 움직이는 조직 분위기 형성에 시간이 걸렸다. 오늘날 중국의 발전 된 모습을 보면 14억 인구의 1인당 GNP가 만 불을 넘어서는 경제성장국이 되었고 여기에 사회주의 사고를 변화시키는 데 혁신이 역할을 하지 않았나 사료된다.혁신은 종교, 사회문화, 국민성을 넘어서는 힘이 있다. 어떤 교육을 통해도 다른 나라의 국민성을 바꾸기는 어렵다. 혁신을 통해서 마인드의 변화와 관점을 바꾸는 계기가 되고 개인의 성장과 기업의 발전은 물론 부강한 나라로 가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우수한 민족성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유태인들도 개선해야 할 맹점이 있기 마련인 데 종교 마인드에 변화가 오면 평화로운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한다. 사람은 교육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한다. 교육과 실행을 통해서 변화된 내 주변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변한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도 가치를 창조하는 혁신이 들어가니 건강한 조직, 경쟁력 있는 기업과 부강한 나라로 변화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2024-05-07

비 내리는 고향집 마당에서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신록의 초목 위에 비가 내리니 푸르름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봄비 치고는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대지를 촉촉히 적시면서 생동의 기운이 한껏 왕성해지는 듯하다. 파릇한 잎사귀에 은구슬 같은 빗방울이 자분자분 내려앉으며 은밀한 밀어를 속삭이는 듯한데, 연두와 초록의 물결 위에 빗금 치며 내리는 비는 싱그럽고 산뜻한 오월의 수채화를 그리는 듯 온종일 쉼없이 녹파(綠波)를 더하고 있다.모처럼 고향에서 비를 맞으니 차분한 감회가 산허리에 걸린 실안개마냥 몽실몽실 피어난다. 아카시아 흰꽃을 적신 비에서는 상큼한 향기가 전해지는 것 같고, 연록의 숲에서 내리는 빗줄기에서는 초록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하다. 이십 수년째 빈집으로 남아있는 폐허 같은 고향집의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넓직한 풀잎에 닿으면서 내는 소리가 맑고 정겹지만 더없이 애잔하게 들린다. 불현듯 빗소리가 들려주는 맴돌이 소리에 유년의 울림 같은 회억이 아스라해진 가슴을 적셔주는 듯하다.상수도시설이 미비했던 시절, 오늘같이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으레 처마끝의 물받이에서 떨어지는 지점에 양동이나 큰 단지를 옮겨와 빗물을 받곤 했는데, 초반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가관이었다. 양동이나 알루미늄 세숫대야 떨어지는 낙수소리는 ‘타다다닥~’ 하며 자지러질 듯 요란하게 들리다가 이내 줄어들고, 단지나 옹기 같은 곳에 떨어지는 낙숫물은 마치 마이크 소리를 내는 듯 깊고 굵직한 울림으로 다가왔었다. 그렇게 몇 개의 용기에 빗물을 받으면서 내는 소리는 음계도 없고 음정도 제각각이었지만, 산만한 듯 정겹고 또렷하게 들리는 빗물의 이색적인(?) 연주가 아닐 수 없었다.또한 어떤 때는 또래들과 어울려 빗 속을 헤치며 호박순을 잘라서 만든 대롱을 몇 개 이어 빗물의 흐름을 유도하면서 낙수소리를 듣는 재미에(?) 빠지곤 했었다. 그러다 보면 옷이며 양말까지 담방 비에 젖게 되는 일명 ‘노배기’가 돼서 집엘 오게 되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께선 부엌 아궁이 앞에서 불을 쬐게 하시며 벙드레죽(수제비)을 쑤어 주시거나 배추전을 부쳐 주시곤 했었다. 요즘도 비 오는 날의 날궂이 음식으로 파전이나 부추전 따위가 단연 구미를 당기게 하지만, 아주 오래 전에 들었었던 낙숫물의 리듬에 맞춰 전 부치는 소리가 그렇게 맛있게 피어나던 기억이 갈수록 생생해지며 차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그렇게 빗물을 받아 머리를 감으면 머릿결이 좋아진다고 하시면서 비 내리는 날에 수제비나 부침개를 해주시던 어머니께선 초록이 우거진 북망산천에서 땅으로 스미는 빗물을 맞고 계시니 애절하기만 하다. 아카시아나무가 고향집 마당까지 침범하고 담쟁이 넝쿨이 옛집을 에워싸며 스산함과 황폐화를 더해도, 문득 기억 속에 낯익은 낙숫물소리와 정재(부엌) 칸에서 들리던 전 부치는 소리가 엷은 감미로움으로 다가오니 어찌할까나?엷은 안개 속에 하염없이 내리는 초록비가 음률인 듯 리듬인 듯 귓전을 스치는 고향집 마당 한 켠에는 그나마 활짝 핀 불두화가 위무인 듯 환하게 반기고 있었다.

2024-05-07

‘특검=민의’로 보는 野…22대 국회 격랑 예고

‘해병대 채상병 특검법’을 둘러싼 여야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민주당이 지난주 본회의에서 특검법을 통과시켰지만, 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거부권행사를 건의하겠고 밝혀 여야 충돌이 불가피해 보인다. 윤 대통령과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 4월 29일 영수회담을 열고 협치정치를 공언했지만 불과 열흘도 안돼 정국은 다시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채상병 특검법은 지난해 7월 집중호우 실종자 수색 과정에서 사망한 채상병 사건에 대한 초동 수사·경찰 이첩 과정에서 대통령실·국방부가 개입한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특검을 도입하자는 게 핵심이다. 특검 규모는 파견 검사 20명을 포함해 최대 104명이다.윤 대통령은 오는 9일쯤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을 열고 채상병 특검법에 대한 입장을 직접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최근 “특검은 행정권에 속하는 수사권을 사실상 입법부에서 가져가는 것이어서 반드시 여야가 합의 처리해야 한다”는 뜻을 참모들에게 밝혔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민주당의 해병대원 특검법 일방 처리를 사법 질서와 삼권 분립을 교란시키는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민주당은 현재 대통령실이 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오는 27~28일 재의결을 통해 21대 국회에서 특검법을 마무리하겠다는 생각이다. 민주당은 재의결 과정에서 국민의힘 ‘이탈표’가 예상외로 많이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여야 의원이 모두 본회의에 참석한다고 가정했을 때, 여권에서 최소 18명이 이탈하면 특검법이 재의결된다. 이미 안철수·조경태·김웅 의원 등은 ‘이탈표 예약자’로 분류되고 있고, 공천탈락자나 낙선자 중에서도 본회의 불참자가 다수 있을 것으로 보여 국민의힘으로선 특검법 ‘부결’을 자신할 수 없는 처지다. 민주당은 현재 특검을 거부하는 것은 민의를 거부하는 것이라며 여당을 압박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를 사실상의 ‘식물정부’로 보고, 정국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하겠다는 의지가 여실히 읽힌다. 앞으로 ‘특검정국’이 끊임없이 전개될 22대 국회가 걱정이다.

2024-05-06

술까지 끊게한 모정(母情)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최근 할리우드발 흥미로운 가십 하나가 영화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신부들의 전쟁’ 등의 작품에서 호연을 펼쳐 한국 영화 관객에게도 잘 알려진 앤 해서웨이(42)가 5년째 금주 중이고, 여덟 살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술잔 들 일이 없을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뉴욕타임스와 ABC 등 미국 유수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미 고백한 바 있다. 과거 앤 해서웨이는 술 탓에 일상생활이 지장을 받을 정도의 주당(酒黨)이었다. 대학 때부터 본격적으로 마신 술. 배우 생활을 하면서 주량은 더 늘어났고, 그 음주 습관은 전도유망한 여배우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그랬던 앤 해서웨이가 “아직은 아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나이다. 아들이 대학에 가면 다시 술을 마시겠다”고 했다니 모정이 술을 이긴 것이다.‘모정’이란 단어가 나왔으니 떠오르는 또 다른 한 장면. 케이트 윈슬렛(49)은 영화 ‘타이타닉’을 통해 세계적 스타의 반열에 오른 영국 여배우. 수십 만 파운드짜리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시상식장을 드나들던 그녀가 아들을 등에 업은 꾀죄죄한 모습으로 파파라치의 카메라에 찍혔다. 화장도 하지 않은 맨얼굴에 낡고 헐렁한 면바지를 입었음에도 등에 업힌 아들 조 알피를 돌아보며 세상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의 행복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같은 무게의 황금을 준다 해도 아들을 금과 바꿀 어머니는 없다”. 중국 속담이다. 가정의 달로 불리는 5월. 가정의 일상이 행복하게 유지되는데 모정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새삼 거론하는 건 바보짓이다. 부엌에서 아침 짓는 어머니의 손이라도 한 번 잡아주면 좋을 날이 내일이다./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5-06

누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한국 민주주의가 중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병의 원인은 ‘제도’에도 있지만 ‘사람’이 더 큰 문제다. 확증편향과 선택적 정의에 갇힌 중환자들이 자신은 병이 없다고 하니 ‘웃픈’ 현실이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분노와 적대가 만연해서 독선과 편견, 오만과 아집이 온 나라를 흔들고 있다.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레비츠키(S. Levitsky)와 지블랫(D. Ziblatt)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의 핵심규범은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인데, 이것이 무너지면 민주주의도 무너진다고 했다.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이 서로의 견해 차이를 존중하고 자기의 절대성을 고집하지 않아야 유지되기 때문이다.그럼에도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일방적으로 법안을 통과시키고, 집행권을 가진 대통령은 주저 없이 거부권을 행사한다. 외관상 각자의 권한을 행사한 것이니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대화·관용·타협이라는 절차규범을 어긴 것이다. 입법 권력과 집행 권력의 ‘힘의 대결은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다. 정치가 전쟁과 다른 점은 상대를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협력해야 할 경쟁자’로 인식하는데 있다.민주주의는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를 토대로 한다. 하지만 견리망의(見利忘義)하는 정치인들의 적반하장(賊反荷杖)은 한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이기적이며 부족적인가를 말해준다. 부족주의 정치는 국가이익보다 당파이익을 중시한다. 철학의 빈곤과 이기심으로 확증편향에 갇힌 정치인들의 선동과 매도의 정치가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있는 것이다.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두 기둥은 공정과 정의다. 롤즈(J. Rawls)가 말한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절차적 공정’을 통한 ‘결과적 정의’를 의미한다. ‘정의가 힘’이 되어야지 ‘힘이 정의’가 되는 정치로서는 정의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재명과 조국의 경우처럼 힘으로 공당을 사당화하거나 범죄혐의를 정치적으로 덮으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의 지배’를 부정하고, 권력으로 ‘법에 의한 지배’를 기도하는 것은 정의에 대한 배신이다.언론자유는 민주주의의 처음이자 끝이다. 모든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에 언론의 비판기능이 죽으면 민주주의도 죽는다.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는 ‘민주주의 리포트 2024’에서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언론통제와 사정기관을 통한 공포정치로 “한국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다”고 했다. 법을 적용하는 공권력의 남용이 민주주의를 위기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는 시민의 주권을, 그리고 ‘공화’는 공공선을 말한다. 우리의 미래는 ‘너와 내가 만나서 우리’가 되는 ‘공화정(共和政) 정신’에 달려 있다.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서 너와 내가 함께하려면 관용·대화·타협의 정신이 필수다. 우리가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진정한 공화주의자로 거듭날 때 비로소 한국 민주주의는 회생될 수 있다.

2024-05-06

대구·경북민 생활 판도 바꿀 광역환승제

2004년 KTX 고속철이 우리나라에 처음 개통 운행되면서 전국이 두 시간대 생활권에 놓이게 됐다.교통의 발달은 일반인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교통 인프라가 위치하는 장소에 따라 도시의 흥망도 갈리게 된다. 철도가 처음 놓이면서 역사가 생긴 장소가 그러했고, 고속도로가 뚫리는 곳에는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교통 인프라는 인류의 삶을 바꾸고 생활의 질을 더한층 높이기도 했다.대구시와 경북도내 8개 시·군이 동일생활권으로 연결하는 지자체간 대중교통 광역환승제 시행을 약속했다. 지난주 대구시와 경북 경산, 영천, 구미, 김천, 고령, 성주, 청도, 칠곡 등 8개 지자체가 대중교통 확대 시행을 위한 업무협약과 시스템 구축을 위한 용역착수 보고회를 대구에서 가졌다.오는 12월부터 대구시를 중심으로 9개 시군이 대중교통 광역환승제를 함께 실시함으로써 대구인접 도시간의 인적·물적 교류확대는 물론 시도민의 대중교통비 부담도 크게 줄이게 됐다.특히 연말 개통 예정인 구미∼대구∼경산간 대구권 광역철도망과 함께 대중교통 환승제가 연결됨으로써 350만명이 30분 생활권에 놓이게 된다. 비수도권 도시로서는 최초로 대중교통 광역환승제가 시행돼 관련 시·군 주민의 생활패턴 변화가 주목된다.대구와 인근 8개 시군이 대중교통체계를 같이함으로써 생기는 변화는 매우 다양할 것으로 예상이 된다. 대중교통 활성화로 시·도민의 교류가 활발하고 생활인구 증가로 인구소멸 대응 효과도 기대된다.또 350만 인구가 공동생활권에 놓이면서 대구를 중심으로 한 메가시티 형성도 가능해진다. 거대한 생활권을 바탕으로 경제에 새로운 활력이 생긴다. 특히 군위·의성에 세워지는 신공항과도 연계돼 대구·경북 경제 전반에 긍정적 효과를 줄 것으로 짐작이 된다.비수도권 최초 시행되는 대중교통 광역환승제가 시·도민의 교류 확대의 마중물이 될 수 있도록 최적의 교통환승체계를 구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대구와 경북 전체를 연결하는 미래의 교통망 구축도 준비해야 한다.

2024-05-06

핵개인 시대에 가족의 의미

유영희 작가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을 거쳐, 21일에는 부부의 날로 마무리된다. 그 중간에는 스승의날까지 있다. 여기저기서 가족 모임을 한다고 분주하다. 자식이 결혼하면 아무리 같은 도시, 같은 동네에 살더라도 분가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렇게 기념일이 있을 때면 모두 약속을 잡는다.그런데 이런 삶의 방식에 모두 잘 적응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배우 전원주 씨가 금쪽상담소에 나와서 돈은 있어도 외로워서 자식과 살고 싶은데 어느 자식도 자신과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전원주 씨처럼 나이도 많고 혼자 사는 사람이라면 이런 서운함에 많이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이 든 부모가 결혼한 자녀와 함께 살 수 있는 가능성은 많지 않다. 2022년 통계만 보아도 3세대 가구는 3% 정도뿐이다. 반면, 1인 가구는 34%를 넘었고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전원주 씨 사례 영상 댓글에도 혼자 사는 법을 배우라는 의견이 거의 전부다.이렇게 개인화되어 가는 세상에 대해 송길영은 ‘시대예보’에서 핵개인의 시대라고 표현하고 있다. 2세대 가구를 핵가족이라고 불렀다면, 1인으로 살아가는 시대는 핵개인 시대라면서, 사람들이 점점 똑똑해지고 오래 살게 되기 때문에 핵개인의 시대가 왔다고 한다. 인간의 적응력은 뛰어나니 이런 시대가 와도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 아닌 위로도 곁들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핵개인의 시대에 잘 적응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잘 적응한다고 하기도 어렵다. 며칠 전 기사를 보니, 직장을 다니는 젊은이도 1인 가구의 고립감에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연결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족 같은 강한 연결도 삶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인터넷에서 만나는 약한 연결도 사회적 소속감을 부여해주는 토대가 된다. 아즈마 히로키 역시 ‘약한 연결’이라는 책에서 전통 사회 가족 유대관계 같은 강한 연결도 필요하다고 한다. 다만, 세계화라는 세상의 변화 앞에서 강한 연결의 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대신, 약한 연결을 늘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는 인터넷도 검색을 잘하면 충분히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고, 현실 공간에서도 충분히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내 경우는, 어차피 5월에 생일이 있는 딸도 있어서 어버이날은 따로 신경 쓰지 말라고 진작에 다짐해두었다. 그 생일 기념도 일부는 온라인으로 한다. 유럽과 호주에 떨어져 사는 어떤 가족은 영상통화로 만난다고 한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상황이 변하니 새로운 방식을 찾게 된다. 핵개인 사회에 적응하기를 강조하다가 자칫 고립되는 위험이 생길 수 있다. 사람에게는 약한 연결은 물론이고, 가족 관계 같은 강한 연결도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연결의 방식과 형태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핵개인화되는 시대에서도 삶을 행복하게 영위하려면, 자신의 정서적 욕구를 잘 인식하고 가족이라는 강한 연결을 상황에 맞게 조화롭게 이어가야 한다.

2024-05-06

국회의원은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김규인 수필가 정부와 의료계의 강경 대치, 말끝마다 가시가 돋친 여야의 발언, 총선에서 패배한 여당 대선 유력 주자의 발언으로 선거가 끝났는데도 마음이 불편하다. 점령군처럼 행동하는 총선 승리자들과 국회의장 후보자들의 발언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여기에 하이브와 어도어의 대치까지 국민은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한다.국제정세의 불안으로 고환율, 고물가, 고금리는 오늘도 계속된다. 이를 부추기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경제적, 사회적 불안을 부채질한다.국내외 정세를 곰곰이 생각하면 모두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한다. 자기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정치인, 나아가 집단보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인들, 환자의 아픔보다 자신들의 이익이 우선인 의료인, 사람들을 위로해야 할 노래도 이권 앞에서는 멈춘다. 그들 눈에는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국민은 보이지 않는다.모두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국민을 보지 않는다. 말끝마다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인들, 국민의 건강을 책임져야 할 의료인들, 마음의 위로와 양식을 들려줄 예술인도 약속이나 한 듯이 국민은 뒷전이다. 그들의 볼썽사나운 이익 추구 싸움을 지켜보아야 하는 국민은 피곤하다. 국민은 단지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패막이에 불과하다.총선에서 대파를 들고나온 국회의원 당선자가 대파 가격을 걱정하는 걸 볼 수가 없다. 단지 총선용으로만 활용할 뿐이다. 사과값이 안정되니 다른 식재료값이 오르고, 직장인 평균 점심값이 일만 원을 넘는다. 텔레비전은 국내외 경제가 어렵다고 말한다. 매일 고물가에 시달리며 방송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서민의 삶이 팍팍하다는 방증이 아닐까.세계 경제는 불경기에 자국의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각종 정책을 내세우는데 정치권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한다. 심지어 수백조 원의 국가 채무와 집값을 크게 올려놓은 당에서 다시 모든 국민에게 25만 원을 주라고 정부를 압박한다. 국회에서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 머리를 맞대며 법을 만드는 모습을 언제나 볼 수 있으려는지.선장도 없는 배에서 배신자 타령만 하는 여당과 승리에 취해 변절자라 손가락질하는 야당이 자신들의 권력만 추구하는 한 우리나라의 정치는 후진성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정치가 4류라는 이건희 회장의 말씀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배신자와 변절자 타령보다 시급한 국가의 현안들이 쌓여있는데 말이다.나날이 줄어드는 출생률은 나라의 존립을 위협하고 언제 좋아질지 모르는 경제는 국민을 고통 속에 빠뜨린다. 백년대계의 교육은 학폭과 학생 인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교사들은 지쳐간다.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들은 늘어만 가는데 의사들은 병원을 떠난다. 나라를 위해 일하지 않는 국회의원이 왜 필요한가.나라 위해 일할 때는 서로 손을 내밀어야 한다. 사라진 협치를 이번에는 다시 살려내어야 한다. 국민에게 존중받는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 국민이 국회의원에게 주는 돈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국회의원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

2024-05-06

홍경나, 기억으로 호명하는 고령 방언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우리의 모국어가 단일하고 균질한 소리로만 전달되는 게 아니라 다성적인 방언으로 엮어져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울 일이 아니다. 홍경나 시인이 시의 언어로 발성하는 모어는 소통되는 장소를 확대하려는, 시로 된 씨앗을 푸른 하늘에 날린다. 시집 ‘초승밥’(현대시학, 2022)에 담아낸 모어의 우주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하릅강생이 복실일 후치다가/욜로졸로 서리병아릴 후치다가/개구멍바지 꿰찬 용남이는 가을볕 따신 마당귀/아물 따다 무더기 똥 내깔기고/똥 묻은 똥구녁을 하늘로 치켜든다.”(‘눈썹담’) 이 시에서 방언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하룻강아지가 천방지축 까불며 마당을 뛰어다니는 꼴이나 어린 용남이가 푸짐하게 똥을 싸고 그것도 모자라 궁둥이를 하늘로 치켜드는 해맑은 모습을 실감나게 살려내기는 어려웠으리라. ‘후치다(내쫓다)’, ‘욜로졸로(요리조리)’, ‘아물따나(아무데나)’처럼 토속적인 경상도 방언 낱말에 묻어있는 풍경화가 다정하다. 방언이 가진 시간성의 이중성이라고 할까 과거로 되돌려 주는 기억의 환기장치로서도 멋진 구실을 해내고 있다.시인은 자신의 모어를 최대한의 시속으로 투입한다. 기억의 언어와 현재의 언어 간의 호응을 통해 과거로의 기억력을 되살려내는 시적 확장을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주고 있다. 과거로의 회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성의 회귀인 동시에 장소에 대한 기억과 마주치며 완성된다. 방언이 호명해 주는 장소, 혹은 대상이나 사건과 관련된 모든 기억들을 품고 있다. “사창댁 우리 할매/콩지럼 내릴 오리알콩/소반다듬이 하시네/얽은 콩 쪼가리 콩 벌게이 슨 콩/밤결 내 고르시네//사창댁 우리 할매/콩지럼시루 쪼록쪼록 바가치물 치며/한 치 두 치 콩지럼 내리는 소리 들어라시네/오구구 오구구 뿌리 트는/긴 짓소리”(‘콩지럼’)이라는 시는 유년의 기억들을 불러온다. 할머니가 콩나물을 기르기 위해 콩을 고르는 일부터 시루에 물을 주며 애지중지 키워내는 기억 속의 풍경화에서는 그 풍경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 방언의 악센트와 리듬을 타고 있다. 시는 노래여야 한다. 리듬을 타며 흥얼거리며 화를 참아내는 할머니의 ‘몸짓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콩지럼’(콩나물)이나 ‘오리알콩’(토종 콩나물콩), ‘소반다듬이’(소반에 곡식을 놓고 고르는 일)라는 독특한 방언들이 배치되지 않고서는 도무지 그 풍경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 초가집 부엌에서 올라온 검은 검정이 천장에 스며들어 가무스럼한 방안에는 할머니의 냄새까지 배어있다.홍경나 시인의 경북 방언은 현재의 경상도의 모습이나 풍경화만 그리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과거로 되돌아가기 위한 회생 장치로서 방언을 이용하고 있다. 그 속에는 옛날 소리와 삶의 풍경들이 서사적인 구성을 가지며 때로는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삶의 풍경들을 조명해 주기도 한다. ‘개보름쇠기’는 우리 고유의 풍습 가운데 하나인 ‘개보름’에 얽힌 이야기다. “사대부 팔대부 하동 포수 앞세운 농악대 아제들이 대청지신 큰방성주 조왕지신 철용지신 우리 집 지신풀이 돌 땐 목줄을 닿는 데까지 끌고 나와 덧배기 반덧배기 별달거리 다드래기로 뜀질해쌓다가 싱둥겅둥 윷가치 노는 백구마당 모닥불 불똥 구경하다 백지로 불똥재 앉은 빈 밥그륵을 복실이캉 지캉 서리 연분홍 똥꼬녁을 핥는 거맹키 밝게 달강달강 딧설거지하는 거맹키 밝게 핥아쌓다가 둥두렷이 장뚝산을 돌아 중문 지붕만댕이께 넘쳐 오는 정월 보름달을 짖었다.”(‘개보름쇠기’) 경상도에서는 개가 너무 잘 자라서 살이 찌거나 파리가 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대보름이 뜨기 전까지 하루 종일 굶긴다. 시인은 이 서사 구조에 공동체적 무의식에서 소환한 농악놀이의 풍경과 풍물소리도 섞어 넣었다. 너무나 리얼하다.시인의 무의식에는 온갖 오래 묵은 기억들이 잠재해 있다. 방언의 음성으로 호명하는 순간 큰물 밀려들듯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시인을 과거로 호명해낸 방언의 미학이 여기에서 발화하기 시작한다. “불 간 자리엔/얼마나 두들겨 댔는지/생목 꺾인/새까맣게 그슨 청솔가지만 남았다//집집마다 오줌 싸는 꿈을 꾸었다”(‘쥐불’)에서 유년 시절의 풍경이 생생할 뿐이다. 시의 미학적 본질인 ‘낯설게 하기’는 과거의 기억을 방언으로 호명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경북 언어의 보고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의 살아있는 ‘말’들을 ‘시’로 재생했다.

2024-05-06

지중해 새로운 패자, 오스만튀르크 세계사 등장

영어의 표현은 오토만, 이슬람 언어인 아랍어로 오스만이다. 우마이야 왕조 이후 750년부터 1258년에 걸쳐 이슬람을 지배한 압바시야 제국이 막을 내리고 이슬람 주도권은 튀르크인 중심의 오스만제국으로 이동된다.13세기 말, 소아시아와 그 주변은 튀르크족의 소부족 군웅할거 시대를 맞는다. 셀주크 튀르크는 당시 이즈니크(니케아)에서 남쪽 소아시아 작은 도시 수구트 등 하나의 공국을 거느리고 있던 오스만 베이(Osman Bey)로부터 시작된다. 1299년부터 비잔틴 영토 잠식으로 시작된 정복 사업은 아들 오르한 시대에 와서 유럽의 발칸반도까지 진출했다. 1361년 발칸의 아드리아노플의 정복,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발칸반도의 공략이 마무리된다.이들은 지리적 여건상 아나톨리아 부르사와 마르마라해로 진출할 수 있었고, 과거 유목민 피를 이어받은 튀르크 전사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셀주크 시대 술탄의 기병으로 활약할 만큼 강한 기동력을 보유했던 이들이다. 정확하게 623년이란 역사를 자랑할 수 있었던 오스만제국은 우연이 아니다. 튀르크족이 몽골군의 침탈을 피해 아나톨리아로 밀려들던 때다. 이때 오스만은 피난민을 성심으로 품어 튀르크족을 규합해 세력을 불리기 시작하면서 영토를 서쪽으로 넓히는 데 성공하자, 응당 유럽의 관문 비잔티움과의 한판 대결을 가져왔다.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제4차 십자군에 의해 풍비박산 나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채였다. 더구나 제국의 말기적 현상인 민심 이반이 심각했다. 허리를 졸라야 맞출 수 있는 세금과 부역은 늘 하층민을 괴롭혔다. 이때 오스만이 나타나 세금을 대폭 줄여주었고, 점령지 주민에게도 이슬람의 형제로 취급해 똑같이 대접했다. 이슬람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종교의 자유는 물론, 사유재산을 인정했고, 언어와 문화 역시 관대했다. 오스만을 지지하는 소리가 하늘에 퍼졌고 백성의 찬사가 이어지며 더 광대한 영토가 흡수되기 시작했다.다양한 민족이 혼재된 상태에서 무리한 포교와 강요는 역효과를 낼 수 있었다. 믿음을 인정함으로써 세수 확보와 징병 등 제국의 안정을 꾀했다. 즉 파괴와 살육보다 회유와 평화 정책을 펼치면서 민심을 얻었다.물론 타 종교에 관대했다곤 하나 세금은 더 내야 했고, 교회도 화려하게 짓지 못하게 했다. 출입구도 지상에서 1m를 넘지 못했다. 개처럼 기어서 드나들게 한 것은 이들 최소한 폭력의 도출이었다. 그리스 아테네의 초라한 정교회 건물이 지면에서 1m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어서 드나들 수 없어서 땅을 아래로 낮춰 교회를 올렸던 까닭이다. 오스만제국을 본 주변 토후국들은 스스로 오스만 깃발 아래 몰려들었다. 여기에 죽음을 두려워 않는 튀르크 전사들의 집결도 이어졌다. 급작스레 소아시아 세력균형이 무너지면서 튀르크족은 자신들의 이상인 무슬림의 의무 ‘지하드’를 성취할 조건을 갖춘 나라를 선호했다. 물질적 보상은 덤이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국은 1인 지배체제보다 가족 지배체제에 의존했다. 남을 믿기보다 형제간의 믿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래로 이어온 체제 방식이다. 단점도 있었다. 왕이 죽으면 아들들에게 똑같은 영토를 분배했는데, 이는 가족 간 내분으로 이어져 형제간 피 흘리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그러나 오스만 1세는 유언으로 장자상속을 정해버렸고, 남은 아들들은 죽거나 혹은 감금 상태로 살아야 했으며, 일체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다. 태생적 불행은 어린 시절부터 포기라는 절망의 멍에를 짊어진 채 살아야 했다. 이나마도 대부분 죽음을 면치 못했다. 비정한 선택, 이슬람의 교리 뒤에 감추어진 번영을 위한 살기(殺氣)를 보는 듯하다.오스만 1세는 장자상속과 함께 미래를 위한 나름 지혜로운 유언을 남겼다.“종교를 가장 중심에 두고 조심해 다루라. 지혜롭지 못한 자에게 권력을 나누지 말라. 학자와 기술자, 예술가, 문필가들이 힘의 원천이니 명예롭게 대하라!” 박필우 작가 20대 초반의 나이에 부족장이 된 이래 30여 년을 정복 전쟁으로 날밤을 지새웠던 인물다운 유언이다. 학자와 기술자, 예술가들이 힘의 원천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이 제국을 존재케 하는 에너지원이었다.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가지스(Ghazis)’, 즉 튀르크 말로 전사의 원정대이자 약탈원정대가 발전해 주군을 모시는 구성원으로 탄탄한 결속력을 자랑했다. 전쟁이 곧 생업인 이들에게 종교적 동기가 작용하면서 더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가지스는 비잔티움 제국은 물론 발칸반도와 지중해 기독교도와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종교적 의무를 다한다는 초기 정신으로 무장해 흔들림이 없이 전쟁을 수행했다. ‘성전’을 수행하는 데 있어 생계와 생활공간이 따로 없었다. 밥 먹다가 싸우고, 싸우다가 잠들곤 했던 당시의 청춘들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2대 오르한(Orhan) 1세(1281~1362)에 이르러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그의 발아래 두고, 발칸반도를 침략해 유럽으로 제국의 영토를 넓히는 세력을 완성한다. /스토리텔링 작가 박필우

2024-05-06

자본의 영화화, ‘범죄도시 4’

영화 ‘범죄도시 4’의 포스터. /영화 홈페이지 ‘범죄도시4’가 개봉 일주일만에 600만 관객을 모았다. 한국영화는 곧 상반기에만 두 편의 천만 영화를 보유하게 된다. 인구 5000만 나라에서 천만 영화가 몇 편씩 나오는 건 기현상이다.‘파묘’는 최소한 상도의라도 있었다. 전국 상영관 점유율이 50퍼센트였다. ‘범죄도시4’는 해도 너무하다. 개봉일부터 일주일 동안 하루 평균 약 2861개 스크린에서 1만 5851회 상영하며 상영점유율 82퍼센트, 좌석점유율 85.9퍼센트를 찍었다. 관객들은 선택권을 잃었다. 비슷한 시기 개봉한 ‘정순’은 전국 3개 스크린에서 총 관객 3438명, ‘땅에 쓰는 시’는 7개 스크린에서 8549명, ‘여행자의 편지’는 13개 스크린에서 5260명이 봤다.한국에선 영화가 자본주의의 꽃이다. 시장의 영업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다양성 없는 독과점은 전체주의다. ‘범죄도시4’는 재밌는 영화일지언정 좋은 영화는 아니다. 한 편의 재밌는 영화를 띄우려고 여러 편의 좋은 영화를 가라앉히는 것은 폭력이다.‘범죄도시’의 알파와 오메가인 마동석은 한국에 ‘리썰 웨폰’이나 ‘다이하드’ 같은 액션 프랜차이즈를 정착시키고 싶다고 했다. 그 영화들도 황소개구리처럼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 영화 생태계를 말살시켰을까? ‘리썰 웨폰2’와 ‘다이하드2’가 개봉한 1989년과 1990년엔 ‘레인맨’, ‘나의 왼발’,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죽은 시인의 사회’, ‘7월 4일생’이, ‘리썰 웨폰3’가 나온 1992년엔 ‘용서받지 못한 자’, ‘여인의 향기’, ‘라스트 모히칸’, ‘흐르는 강물처럼’이, ‘다이하드3’가 개봉한 1995년엔 ‘데드 맨 워킹’, ‘가을의 전설’, ‘브레이브 하트’, ‘유주얼 서스펙트’가 있었다. 영화 산업의 중심인 할리우드에서도 작품 다양성과 관객들의 선택권은 지켜진다. 소수의 대형 영화사와 다수의 독립 영화사들이 협업관계를 이루며 분리와 평형을 유지하는 게 할리우드의 힘이다.마동석의, 마동석에 의한, 마동석을 위한 시리즈다. “자기 복제를 안 하려고 한다. 재미있다고 계속 하는 건 지양한다”고 했지만 그의 액션 연기와 스토리라인은 진부한 클리셰가 돼 버렸다. 1편은 꽤 신선했고, 2편은 손석구와 박지환의 연기라도 보는 맛이 있었다. 3편부터는 조악한 스토리와 방방 뛰는 활극만 남았다. 4편은 안 봐도 뻔하다. 이 시리즈는 현재 5, 6, 7, 8편의 대본을 한꺼번에 집필 중이라고 한다. 영화라는 예술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진다. 막장드라마 쪽대본도, 다작과 속작으로 B급 무비를 마구 찍어댄 70~80년대 남기남, 고영남 감독도 그렇게는 안했다. 돈에 혈안이 된 제작사와 배급사, 감독과 배우, 그리고 군중심리가 결합해 ‘범죄도시 8부작’이라는 괴물을 낳았다.‘심야의 FM’이나 ‘범죄와의 전쟁’, ‘부당거래’ 때까지만 해도 마동석은 제법 진지한 배우로 보였지만 이젠 배우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다. 스스로를 공장에서 천만 개 찍어낸 근육인형으로 팔고 있다. 출연하는 영화, 드라마, 광고가 다 똑같은 주먹 자랑이다. ‘대중이 원하지 않느냐’는 반문은 너무 쉬운 출구전략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범죄도시4’의 독과점을 비판한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다. “재미만 있으면 늘리지 말라고 해도 극장에서 알아서 늘린다. 억지로 규제 좀 하지마라”, “맛집이라 줄 서 있는 가게 있고 맛없어서 텅텅 비어 있는 가게 있다. 보고 싶은데 스크린 몇 개 없어서 빡빡하게 앉아 봐야 하나?”, “언제까지 이런 구닥다리 기사를 쓸 건지. 다 계산기 두드리고 하는 일인데. 창의적인 기사 좀 보고 싶다”… 지금 박스오피스에서 자본을 앞세워 다른 영화들을 규제하는 것도, 보고 싶은데 스크린 없어 못 보게 하는 것도, 창의적인 영화 안 나오게 하는 것도 다 “재미만 있”고 예술은 없는, 오직 저속한 상품성만 남은 ‘구닥다리 액션 맛집’ 그 시리즈다.김수영은 참여 문학을 내세우면서 민중의 참여가 불가능할 만큼 난해한 시를 쓴다는 비판에 “읽기 쉬운 글만 읽으면 민중은 성장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발터 벤야민은 나치의 파시즘이 예술을 정치 선전의 도구로 악용하는 ‘정치의 예술화’에 맞서 ‘예술의 정치화’를 실현할 장르로 영화를 제시했다. 김수영도 벤야민도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대중을 믿었다. ‘범죄도시’ 시리즈는 자본의 영화화다. 나는 자본의 영화화를 부끄럽게 만드는 개성, 예술, 양심, 자유, 사랑의 영화화를 기다린다. 그것은 분별력 있는 대중과 함께 나타난다.

2024-05-06

5월의 토마토

집 냉장고엔 토마토가 가득 쌓여 있다. 후덥지근한 한낮, 창문을 열어두고 커튼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토마토를 먹는 건, 내게 초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토마토는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설탕과 물을 넣어 간 토마토 주스도 좋고, 알룰로스 시럽과 설탕을 토마토 위에 솔솔 뿌린 토마토 무침, 또는 사이다에 토마토와 바질을 넣어 숙성 시켜 마시는 토마토바질 에이드를 만들어 먹어도 좋다. 간식은 물론 계란과 토마토, 약간의 소금 후추를 넣어 금세 만들어 내는 토마토 계란 볶음, 발사믹 소스로 절여 만드는 토마토 마리네이드까지 근사한 식사로도 활용해 먹을 수 있으니 이맘때의 토마토는 냉장고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초여름이 되면 어쩐지 어린 이파리가 몸속에 자라는 듯 파릇한 기운이 돈다. 연두빛을 띄던 식물들이 점점 초록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왠지 나도 따라 마음이 짙어 진달까. 마음의 여린 부분을 쥐고 하늘하늘 흔들리다 외부 충격에 휘청일 때면 달콤한 토마토로 기분을 달랜다.초여름의 토마토의 맛은 달콤하기보단 새콤함에 가깝다. 토마토를 반달 모양으로 조각내어 한 입에 넣고, 단단한 과육이 물러질 때까지 꼭꼭 씹으면 토마토의 새콤한 향이 입 안에 퍼진다. 달콤함과 약간의 짠 맛이 혀에 감도며 감칠맛을 이끌어 낸다. 연한 속살은 씹을수록 시큼함과 함께 풀내음이 난다. 연하게 맴도는 풀내음 덕에 더욱 초여름과 어울린달까.토마토를 더 맛있게 먹기 위한 방법으로는 하루 1시간씩은 달리기를 꼭 하는 것이다. 사실 겨울 내내 추위를 핑계로 운동을 미뤄왔지만 근래 들어선 주에 4번씩은 기본으로 하고 있다. 운동이라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무작정 런닝 머신에 올라가 뛰는 게 전부지만, 외투가 젖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뜀박질을 하고 나면 토마토가 맛은 더욱 배가 된다.한 시간 내내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동력 또한 토마토에서 나온다. 미운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분노의 질주를 택하기보단, 십오분 뒤 차가운 토마토 먹는 것을 떠올리며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달리는 편이 효과가 좋다. 화끈화끈해진 얼굴을 감싸 안으며 집에 돌아와 찬물로 씻고 먹는 토마토의 맛이란! 이제 막 냉장고에서 꺼낸 달콤한 토마토의 맛은 다시금 세상을 너그럽게 살아갈 수 있는 동글동글한 마음가짐을 갖게 한다.요즘 루틴 중 하나는 자기 전, 감사 일기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하루를 돌아보면 작고 소소한 감사한 것들이 많은데, 자꾸만 부정적인 몇몇 가지의 이유에 치여 감사함을 잊고 지낸다. 부정적인 이유를 커다랗게 생각하여 하루의 끝에 침울해 있기 보다는, 전력 질주 후 토마토를 먹는 것과 같이 소소하게 이루어 내는 작은 행복들에 집중하며 일기를 쓴다.일기를 쓰면서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잘 흘러가고 있고, 무례한 사람에게는 무례함을 똑같이 되갚아 주지 않아도 되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있다. 의외로 생각 정리가 잘 되어서 요즘 기록하는 습관의 힘에 대해 다시금 놀라고 있다.지금은 해가 들어오는 시간, 식물을 황급히 창문 앞에 두어 빛을 받게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잎을 슬쩍 본다. 지금 집 안엔 그리 시끄럽지 않은 음악이 떠다니고, 바깥은 간간이 들려오는 차 소리 이외에 큰 소음이 없어 적적한 기분이 든다. 이 시간 불쑥 찾아오는 외로움은 늘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그래도 그 외로움 끝에 단단한 힘이 있음을 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불현듯 성경책의 등을 쓰다듬다 윤동주 시인의 ‘팔복’을 떠올린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문장의 행이 8번 반복되고,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라는 문장으로 마무리 되는 시. 외로움은 슬픔을 동반하고 슬픔을 멀리 하려 할수록 그림자와 같이 더는 도망갈 수 없다. 피부 깊이 새겨진 외로움을 속옷처럼 입혀진 상태로, 더 내밀해진 영원의 슬픔으로 향한다. 영원의 슬픔 끝엔 정말 복이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내게 누군가는 기도를 해보라고, 또다른 누군가는 나를 측연하게 여기며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나를 알 수 없는 허공의 눈동자로 물끄러미 보기도 한다. 그 누구도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지만, 생과 외로움이라는 거대함에 대해 더 생각하기보단 지금 당장 일어서서 생생한 감각으로 달리고, 기록하고, 토마토를 먹으며 순간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것이 지금 내게 큰 도움이 되는 일임을 안다.짙은 초록과 열기로 들끓는 계절, 여름이 와도 붉게 익은 한 알의 토마토처럼 단단해지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얗고 깨끗한 집,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먹는 토마토의 맛, 식물과 함께 나란히 광합성을 하며 오월의 시간을 느리게 느리게 되감고 있다.

2024-05-06

로마의 교훈

홍석봉 언론인 지난 4·10총선 때 대구시 신청사 건립 문제가 달서구병 공천 과정에서 뜨거운 이슈가 됐었다. 현역 의원과 전 대구시장이 신청사 건립 책임 공방을 벌였다.이에 대구시 경제부시장이 2022년 말까지 청사건립기금으로 조성한 1850억원 중 1368억원을 기금 목적과 전혀 상관없는 사업에 전용했다고 밝혔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대구시가 독자적으로 1인당 10만원씩 지급한 대구희망지원금 때문에 2020년 말 사실상 청사건립기금이 고갈 상황에 이르렀다고 해명했다. 코로나 재난지원금으로 청사 건립 기금을 유용한 탓에 돈이 없어 신청사 건립이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구시가 성서 및 칠곡행정타운 등 공유재산을 매각, 신청사 건립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구시의회가 공유재산 매각을 반대하는 등 제동을 걸고 나섰다. 결국, 신청사 건립은 다시 재원 암초에 부딪혀 표류하고 있다. 코로나 지원금만 아니었더라면 벌써 착공할 수 있었던 것이 이젠 언제 건립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다. 개인에게 10만원은 있으나 없으나 큰 의미가 없다. 그러나 250만 명, 1368억원은 큰돈이다. 결국, 잠시 고난을 면해보자고 한 것이 대구시민에게는 다시 세금 부담으로 돌아오게 됐다.더불어민주당이 4·10총선 때 전 국민에게 1인당 25만원씩 풀어 민생을 지원하겠다고 공약했다. 무려 13조원이 필요하다. 선거 과정에서도 논란이 뜨거웠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 간의 첫 회동에서도 25만원 지원이 다시 의제에 올랐다. 이 대표는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지원금은 꼭 수용해달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국가재정에 부담되고 인플레이션이 우려되기 때문에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25만원 지원은 현금 살포로 명백한 포퓰리즘이다. 선거 공약은 매표행위나 다름없다는 지적을 받는다.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유행병처럼 번진 현금 살포가 민생 어려움을 이유로 다시 등장했다. 미국 등은 현금 살포 후유증을 앓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고물가와 고금리로 경제가 홍역을 치르고 있다. 민생을 외치는 민주당의 구호는 거창하지만 1인당 25만원을 받는다고 해서 살이 되고 생활에 큰 보탬이 되지는 않는다. 민생은 항상 고달프고 어려웠다. 국가부채가 1100조원을 넘어섰다. 나와 자식들이 갚아야 한다. 인구소멸위기의 나라에서 미래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는 것이다.코로나19 당시 재난지원금의 효과를 분석한 결과 정작 소비 진작 효과는 약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헛돈을 쓴 셈이 됐다.집단의 이익이 국익보다 우선시 되고 우선 먹기에 달콤한 눈앞의 이익에 목을 매고 달려드는 현실이 안타깝다. 돌아서면 날아들 청구서는 생각지도 않는다. ‘월 300만원을 무상지급하겠다’는 정부안을 거부한 스위스 국민에게서 배워야 한다. 공짜 빵과 서커스에 빠져 나라를 망친 로마의 교훈을 잊어선 안 된다. 국민이 작은 이익만 좇고 지배 계층이 대중과 영합할 때 국가는 쇠망한다는 준열한 가르침이다.

2024-05-02

선관위 채용비리

우정구 논설위원 동양에 복마전(伏魔殿)이라는 고사가 있다면 서양에는 ‘판도라의 상자’라는 전설의 이야기가 있다. 출처는 다르지만 악(惡)을 담아놓은 전각이나 상자의 문을 열면서 인류의 비극이 시작됐다는 내용은 비슷하다.수호지에 등장하는 복마전은 마귀가 숨어 있는 전각이다. 열지 말아야 할 전각의 문을 열면서 마귀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세상에는 불길한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나쁜 일이나 음모가 끊임없이 행해지는 악의 근거지라는 뜻으로 부정부패, 비리의 온상을 부를 때 보통 복마전이라 한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 상자는 인류의 모든 악과 재앙을 담은 상자다. 그 상징성 때문에 비리나 부정, 음모가 있는 곳을 가리킬 때 보통 판도라 상자라고 부른다. 복마전과 비슷하게 부정부패가 상징되는 곳에 사용되는 말이다.중앙선관위와 전국선관위의 채용비리를 보면서 많은 국민이 공분을 하고 있다. 10년 동안 1200건이나 되는 채용비리가 저질러졌음에도 단 한차례 문제도 삼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특히 선관위 고위직 자녀를 세자로 호칭하는 등 특혜채용 사실이 내부적으로 공공연한 비밀이었을텐데도 묵과돼온 사실은 이해할 수가 없다.전문가들은 부정부패 원인을 몇 가지 차원에서 접근한다. 도덕적 접근법, 사회적 관습의 결과, 또는 제도적 결함 등으로 분석한다. 여기서 선관위의 채용비리는 도덕적 규범의 붕괴에 가깝다. 공무원이 국민의 봉사자라는 사실을 잊고 권한이 자신의 것인양 착각하고 남용하는 윤리적 가치관의 몰락을 뜻한다. 부정부패의 분위기가 조직 내에 스며들면서 끝내는 본인 스스로도 물들어 가는 과정이다. 복마전의 선관위 비리에는 일벌백계가 답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5-02

금값사과 파동, 올해는 재현되지 말아야

기후변화가 농산물 공급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다. 지구온난화로 기온이 상승하고 그런 가운데 갑작스런 기상이변을 만나면 농산물 가격은 폭등을 한다.가격 폭등 파동을 치른 사과도 겨울이 짧아진데다 4월에 찾아온 갑작스런 한파가 개화기 사과생육에 영향을 미쳐 생산량이 줄어든 탓이 크다. 물론 전체 사과 재배면적이 줄어든 것도 원인이나 기후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 원인이다.올해도 사과나무 개화량이 예년보다 적어 생산량 감소가 우려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농업진흥청 사과연구센터에 의하면 지난해 후지품종 꽃눈 분화율이 평균 54%로 전년 61%보다 7%포인트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꽃눈 분화율이 60% 이하면 수확량 확보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후지품종이 전체 재배면적의 40%를 차지하는 상주의 경우 지난 여름 강수량이 증가했고, 일조량 부족과 질소과다 공급 등으로 사과나무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요망되는 상황이라고 한다지난해 사과는 생산량이 30% 정도 줄면서 사과값은 두배 가까이 폭등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1년 전 4만1060원(후지 10kg)하던 사과값이 9만170원으로 올랐다. 사과값뿐 아니라 기상이변으로 과일류와 채소류 등도 많이 올라 물가상승을 자극하는 부작용이 일어났다.지난 3월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1%였으나 농산물은 20%가 올랐다. 농산물이 전체 물가지수를 끌어올린 셈이다.농업연구소 관계자는 일조량이 부족한 농가에서는 측화를 유도하되 과일을 달아 착과량을 확보하고 유인·적심 등을 통해 지금부터 꽃눈 분화를 잘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지난해 있었던 사과값 폭등은 농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농산물은 공급과 가격이 안정될 때 농민에게도 안정된 수입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정부는 농업기술센터 등을 통해 사과재배에 대한 기술적 지원과 함께 유통단계를 줄여 농민들이 안정적으로 농산물 생산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금값 사과 파동 생기지 않게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

2024-05-02

야권 무서워 ‘기피직’ 되어버린 與원내대표

국민의힘이 차기 원내대표 경선을 앞두고 심각한 구인난에 빠졌다. 마땅한 경선출마 후보자가 없어 내일 예정됐던 선거가 9일로 미뤄졌지만, 현 정부 경제부총리를 지낸 추경호(대구 달성) 의원의 하마평만 나오는 정도다. 당내에서는 총선 참패 수습을 위해 ‘수도권 원내대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수도권 출신 중진들은 비상대책위원장에 이어 원내대표에 대해서도 손사래를 치고 있다. 이 때문에 “여당 중진들이 무책임하다”, 또는 “웰빙족이다”는 비판이 나온다. 일찌감치 출마가 거론된 ‘친윤석열계’ 이철규 의원에 대해서는 당 내외부에서 불가론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당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친윤 그룹이 이 의원 원내대표론을 고집하는 것은 22대 국회에서 원내대표가 앞장서 야당의 윤 대통령 공격을 막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친윤그룹이 예상하는 대로 여당 차기 원내대표는 독배를 드는 자리다. 22대 국회 개원직후부터 민주당 주도의 첨예한 이슈들을 몸으로 막아내야 한다. 민주당은 영수회담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공 모드에 들어갔다. 차기 원내대표로 사실상 추대된 박찬대 의원은 “22대 국회가 시작되면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바로 발의하겠다. 법사위와 운영위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폐기된 9개 법안을 22대 국회 개원 즉시 조국혁신당과 손잡고 재추진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모든 이슈가 국정을 표류시킬 정도로 폭발력이 커 여당 원내대표로서는 엄청난 부담이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리를 내놔야 할 수 있다.총선 참패 이후 지금처럼 당이 풍비박산 난 상황에서 여당 지도부 역할은 막중하다. 특히 원내대표는 입법권력을 휘두르는 야당과 협치를 모색하면서 국회운영을 정상화할 책임이 있다. 주도적으로 야권과의 대화·타협을 통해 정치복원을 해야 하는 자리다. 다음 주 치러지는 원내대표 경선에 수도권 중진들이 많이 출마해서 당이 영남·친윤계 일색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2024-05-02

어린이날 즈음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어린이를 보면 미래가 보인다. 어린이들이 밝고 건강하면 그들이 만들어갈 세상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은 그다지 건강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은 곧 나라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우울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2023년에 조사한 우리나라 아동행복지수는 4점 만점에 1.66점으로 조사 대상인 OECD 22개국 중 꼴찌를 기록했다. 해당 조사에서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돈·성적 향상·자격증 등의 ‘물질적 가치’를 언급한 아이들이 38.6%로 가장 많았다. 가족·친구 등의 ‘관계적 가치’는 33.5%, 건강·자유·종교 등의 ‘개인적 가치’는 27.9%에 그쳤다. 관계적 가치를 꼽은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행복점수가 높게 나타났는데, 2009년 대비 관계적 가치를 꼽은 비율이 10.8%포인트 줄어든 반면 물질적 가치는 9.5%포인트 증가했다.어려서부터 가족이나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사교육 등으로 내몰리는 학업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더구나 건강보험 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0년 국내 5~14세 우울증 환자는 9621명에 달했다. 2017년에는 6421명이었는데 불과 3년 만에 49.8% 급증한 셈이다. 같은 기간 전 연령대의 우울증 환자가 68만169명에서 83만7808명으로 23.2%가량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어린이·청소년의 정신건강 문제가 훨씬 빠르게 악화되는 양상이다.어린이를 상대로 하는 범죄도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아동학대 사례는 2016년 1만8700건에서 2020년 3만905건으로 대폭 증가했다. 아동 성착취물 유포 등의 범죄 피의자 역시 2018년 1143명에서 2020년 2851명으로 2배 이상 늘어나기도 했다. 국제아동권리기구 세이브더칠드런과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가 수행한 ‘국제 아동 삶의 질 조사’에서도 한국 어린이들은 35개국 중 최하위권이었다.어린이들의 교육환경에 대한 문제점으로는 우선 공교육의 위기적 징후가 갈수록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교육의 만족도와 교사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가운데 공교육이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경제적 양극화로 인한 교육격차의 문제도 심각하고, 교육현장에서 아이들과 선생님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교육환경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이는 경쟁을 부추기는 성적위주의 교육, 지식의 도구화에서 오는 폐해이다.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교육환경의 기술적 변화에 대한 대책마련이다. 학교교육의 디지털화로 ‘신기술들이 간편함과 효용성을 제공하지만 교육내용과 운영 시스템 자체를 기술과 그 시장에 점점 더 의존케 한다는 문제를 갖고 있으며, 직접 경험이 최소화된 학습활동이 증가하고 교사와 학생 사이의 전인적 상호작용도 제한되는 단점이 나타날 우려가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물질적으로는 풍족해졌음에도 어린이들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일이다. 나라의 장래를 위한 무엇보다 우선의 과제가 바로 어린이들의 행복이다.

2024-05-02

이번 5월에는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5월이 왔다. 생동감이 넘치고 산뜻한 바람 속에 살아 숨 쉬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계절이다. 이해인 수녀는 -찔레꽃 아카시아꽃 탱자꽃 안개꽃이/ 모두 흰빛으로 향기로운 5월-이라 노래했다. 여기에 하나 더, 늦봄에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듯한 이팝나무도 5월의 신부 모습이다. 포항의 거리에 언제부턴가 심어졌던 이팝나무는 이제는 봄의 도심을 하얀 띠로 두르고 있다. 또한 장미의 계절이기도 하여 그 화사함으로 시인과 수필가 등 문학인들에게는 좋은 글쓰기 감이다.4월의 끄트머리에서 송도와 영일대 해안 길 따라 해변 마라톤대회가 열렸고 오천 해병부대에서는 해병문화축제가 시민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우창동 마장지에서 생태환경 바꾸기 문화행사인 마장지 축제가, 산림조합 잔디밭에서는 임산물 축제가 있었다. 5월은 전국적으로 많고 다양한 봄꽃 축제와 문화축제가 준비되어있는 달이다.5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달력을 넘겨 보니 행사일이 무척 많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이 있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처님 오신 날도 있고 입양자의 날, 세계인의 날이 있는 5월은 인간관계의 따스함을 느끼게 하는 달이다. 그런데 ‘공포의 달’이라는 걱정도 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에 선물은 무엇을 하면 좋을까?’라는 설문에 ‘용돈’이 가장 많은 대답을 얻었으며, 또 가족끼리 식사를 하려면 요즈음 물가가 올라서 주머니 사정이 녹록하지 않다는 반응이다. 그래도 어버이날에는 어버이 은혜에 감사드리며 어른과 노인을 공경하는 경로효친 마음을 가져야 하며, 스승의 날 또한 요즈음 사회적 기류를 보아 오해받기 쉬울지 모르지만 자기를 가르쳐준 선생님께 카네이션 한 송이를 달아드리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도 삭막해져가는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해 줄 수 있을 텐데 아쉽다.1일은 ‘근로자의 날’인데 달력에 빨간 글씨가 아니기에 은행에 갔다가 문이 잠겨있는 것을 보고 ‘아! 오늘이 노는 날이구나’하고 돌아섰는데 관청과 학교는 정상 근무였다. 5일은 입하(立夏), 여름에 접어드는 날. 그래도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함이 느껴지기도 하니 야외활동하려면 가벼운 윗옷이나 긴팔 셔츠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아침마다 차 유리창에 내려앉은 꽃가루를 털어내며 봄철의 성가심도 느낀다. 시골집 마루에도 송홧가루가 노랗게 쌓여있어 소나무 순을 따야 한다. 노랗게 솟아나는 것 중에서 2~3개를 남기고 따버리고 한 달 후쯤에 3~4㎝ 길이로 잘라주라고 한다. 작은 텃밭에는 상추와 고추 모종도 심었다. 잘 가꾸면 여름 한 철은 상추쌈에 풋고추 된장 찍어 맛있게 먹을 수 있겠지….최근 대통령과 야당 대표의 소위 ‘영수 회담’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이루어졌다. 영수(領袖)란 옷깃과 소매라는 뜻인데 남의 눈에 잘 띈다는 데서 비롯된 표현으로 특출한 사람 즉,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윤 대통령 취임 2년 만의 첫 대면으로 여러 현안에서 양측은 이견을 보였지만 5월의 끝에는 22대 국회가 시작되니만큼 새 국회가 나라를 위하는 협치의 정치를 보여주어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따뜻한 5월의 바람을 날려주었으면 한다.

2024-05-02

이모

윤명희 수필가 점심시간의 국숫집이 분주하다. 나지막한 기와지붕의 식당은 벗어놓은 신발들이 제 짝을 찾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겨우 빈자리를 차지한 우리는 식당아주머니를 대신해 컵과 물병을 가져왔다. ‘이모!’ 걸쭉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다. 머리 희끗한 남자는 자기보다 나이가 적어보이는 아주머니를 이모라 부른다. 친구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녀는 젓가락으로 뜨거운 국수 가락을 휘휘 저으며 한마디 했다.“왜 이모를 식당에서 찾는대?”나는 혹시나 누가 들었을까봐 곁눈질로 돌아보았다. 다행히 입으로 들어가는 국수의 뜨거운 열기로 친구의 목소리는 멀리가지 않았다. 여전히 이모를 찾는 다른 사람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식당종업원을 이모라는 호칭으로 불러 기분 나쁘다는 친구에게 나는 얼마 전에 아들이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모처럼 집에 온 아들이 대학동기 모임에 다녀왔다고 했다. 일찍 결혼한 친구가 아기를 안고 왔다. 여자 친구들이 목련꽃 봉우리 같은 아기의 볼을 부비며 서로 안으려 했다. 겨우 옹알이 하는 아기에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모’라 불러보라고 야단이었다. 옆에 있었던 아들이 ‘고모’라 불러야 한다고 거들었다. 우리는 아기아빠의 친구니까 고모가 맞지 않으냐는 말에 그래도 이모가 좋다고 했다.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불멍을 하던 친구들이 낮에 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모는 편한데 고모는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자기도 그런 느낌이라면서 ‘왜 그렇지?’ 라는 주제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친한 건 고모인데 편한 건 이모라는 말에 모두 동의를 했다. 이해가 안 된다고 하자, 평소 별로 말이 없던 한 친구가 캔 맥주를 하나씩 던져주며 말했다.“왜긴 왜야, 내 엄마가 고모보다 이모가 편하니까 그렇지.”잠시, 자기 집안을 돌아보는지 조용했다. 자식들은 엄마의 지나온 길을 기억한다. 자기한테 잘 해 줘도 내 엄마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에 아무도 반기를 내지 않더란다. 맥주를 단숨에 마신 그는 아빠와 엄마 사이가 좋지 않을 때도 아빠가 싫지 않더냐고 되물었다. 여기저기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아이들이 엄마가 편해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살아온 세월의 깊은 내면에 쌓인 감정이다.나의 지난 시간, 할아버지 할머니 제삿날이면 고모가 왔다. 제사음식 준비만으로도 바쁜 엄마는 평소에는 보기 힘든 생선구이를 밥상에 올렸고, 새로운 나물반찬 하나라도 더 준비했다. 행여 우리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도 할까봐 주의를 준 터에 우리는 고모가 반가우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우리 형제들의 손에 용돈을 쥐어주었던 고모는 엄마가 모셔야 하는 형님이었다.이모가 오는 날도 먹을 게 많았다. 엄마는 당신이 동생이라는 위치를 한껏 이용하는 것 같았다. 이모가 오는 날은 김칫거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다듬지 않은 푸성귀가 있었다. 우리는 제비새끼마냥 엄마 곁에 앉아, 이모 손에서 김치쪼가리를 받아먹곤 했다. 남은 양념에 밥을 비벼 입을 호호 불어가며 퍼 먹었던 기억은 푸근함이었다. 엄마는 자식들이 나이만 먹었지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둥 흉을 보고, 이모는 자기 집 딸년들도 마찬가지라며 받아주었다.엄마가 아픈 날이었다. 이모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비닐봉지 속의 장어가 작은 체구의 이모를 휘청거리게 했다. 가스 불에 들통을 얹고, 참기름을 두른 이모는 장어를 집어넣었다. 이모와 내가 누르고 있던 뚜껑을 젖히고 튀어나온 장어가 온 주방을 휘저었던 그날, 우리는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국숫집을 나오며 나는 친구에게 저 남자들도 고모보다 이모가 편한가보다라고 했다. 그러자 친구는 요즘은 이모, 고모 없는 애들이 많은데, 이모가 식당아줌마인 줄 알게 될까봐 겁난다고 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돌아가신 이모가 보고 싶은 날이다.

2024-05-01

정견모주와 가야산

촛대처럼 하늘을 향해 솟은 바위들 사이로 넓적한 바위가 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곧 떨어져 내릴 듯 비스듬히 걸쳐져 있는 이 바위는 가야산에서 꼭 둘러봐야 할 장소로 알려진 ‘상아덤(서장대)’이다. 이곳은 성주 백운동에서 칠불봉으로 향할 때, 끝없는 계단과 사투를 벌이다 잠시 쉴 수 있는 서성재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만나볼 수 있다.상아덤은 성주 방면의 가야산 전경을 한 폭에 담을 수 있는 장소다. 동북쪽으로는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이 즐비한 만물상이 눈길 아래로 시원하게 펼쳐지고, 북쪽으로는 등산의 목적지인 칠불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남서쪽으로는 출발할 때 확인했던 심원사가 있는 심원골과 길게 이어진 능선이 늘어져 있다. 해인사가 있는 합천 방향의 전경을 눈에 담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게 느껴진다.상아덤은 가야의 ‘정견모주’의 신화가 깃든 장소이기도 하다. 상아덤의 ‘상아’는 여신을 뜻하는 말이고, ‘덤’은 바위라는 뜻으로, 직역하면 ‘여신 바위’라는 말이 된다. ‘가야산의 산신인 정견모주가 백성을 위해 하늘에 치성을 드렸고, 그에 감복한 천신 이비가지가 오색 꽃구름 가마를 타고 내려와 감응을 맺은 신성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높이 솟은 바위 위로 비스듬히 누운 상아덤은 혼례를 상징하는 가마를 따 ‘가마바위’라고도 부른다.이후 산신 정견모주는 알을 두 개 낳는다. 하나는 고령 양전동에서 알을 깨고 태어나고, 나머지 하나는 회천을 타고 낙동강으로 흘러 김해에 이르러 깨어난다. 첫째 아들 ‘뇌질주일’은 머리가 해와 같이 빛난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대가야의 이진아시왕이 된다. 그의 이름은 또한 세상을 다스리는 귀한 사람이란 뜻이다. 둘째 아들 ‘뇌질청예’는 어머니를 닮아 얼굴이 하늘색과 같이 푸르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김해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된다. 이러한 정견모주 신화의 내용에 의하면, 대가야와 금관가야는 형제지간이며 대가야가 형의 위치에 있다고 여겨진다.그러나 지금껏 발굴된 유적이나 유물을 보면, 금관가야가 대가야보다 한 세기 앞선다는 걸 알 수 있다. 4세기 이전에 발굴된 가야 유적은 김해 쪽이 크고 부장품도 화려한 반면에 고령 쪽은 거의 발굴되지 않았다. 5세기 이후의 가야 유적은 고령 쪽이 크고 김해 쪽은 작은 규모만 발굴된다. 금관가야가 4세기 말까지 김해를 중심으로 번성하다가 왜와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했으며, 고구려가 신라를 도와 금관가야를 토벌하면서 쇠퇴하였다. 그 후 대가야가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초까지 고령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다 가야를 통일하지 못하고 562년 신라에 병합된다. 대가야를 형의 위치에 놓았던 정견모주 신화는 적어도 5세기 이후가 되어서야 산신 설화에 불교식 명칭과 개념이 덧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견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8가지 자세 중 하나인 ‘바로 본다’는 뜻이고, ‘주일’이나 ‘청예’도 중국의 옛 전설에서 윤색된 흔적이기 때문이다. 대가야와 금관가야를 형제로 묶은 내용도 대가야의 세력이 구축되던 5세기 중엽 이후로 추측한다. 이는 대가야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또한 대가야의 마지막 왕자 월광태자가 자신을 ‘정견의 10세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산신을 믿던 토착세력의 위상도 높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체계적인 신화의 정립은 요원해진다. 이후 9세기쯤 신라의 중앙 정치에서 가야계 인물들이 몰락하는데, 그들에 의해 신화가 윤색된 것으로 보인다. 해인사를 창건한 승려 석순응과 석이정은 대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치원이 기록한 두 사람의 전기에는 정견모주 신화가 담겨 있다.가야산에 내려오는 산신 신화는 아마도 청동기시대의 샤머니즘적 성격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대가야가 성장하면서 불교를 받아들여도 가야산은 건국의 성소로서 신성시되었고, 정견모주는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도 국가 제의나 기우제의 주체가 되었으며, 불교 성소 안에서도 따로 모셔졌다. 본래 해인사 경내에는 정견모주를 모시던 정견천왕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국사단(산신각)에 그 흔적이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정견모주에게 평안을 비는 산신제는 제법 현대까지 지냈다고 한다.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뒷산에 잣나무 두 그루와 커다란 바위가 있는 장소가 산신제를 지내던 제단이었다. 지금은 가야산 입구에 마련된 가야산역사신화테마관 안에 소원을 비는 종이를 달 수 있는 장소가 체험 형태로 마련되어 있다.오랫동안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던 가야산, 그중에서도 빼어난 상아덤은 가야산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다. 또한 대가야의 고분들이 산등성이를 따라 만들어지며 하늘에 닿기를 기원했던 것처럼 하늘에 가깝기도 하다. 촛대처럼 높게 솟은 바위 위로 아슬하게 걸쳐진 상아덤을 보며, 꽃구름 가마를 타고 혼례를 치르던 산신 정견모주를 떠올려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4-05-01

경북도민행복대학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경북도민행복대학은 경북인재평생교육진흥원의 사업 중 하나다. 나이, 학력, 직업에 상관없이 경북도민이면 누구나 사는 지역 가까운 캠퍼스에서 평생학습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2021년, 경북인재평생교육원이 출발하던 해부터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경북도민의 학습력을 높이고 행복한 학습공동체 문화 조성을 위한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명예도민학사, 명예도민석사 및 명예도민박사과정까지 있는데, 그 중 명예도민학사는 경북도내 19개 시·군의 대학이나 평생학습원 등에서 운영되고 있다.교육내용도 매우 다채롭다. 지역학으로서의 경북학을 중심으로 한 공통영역과 인문학, 사회·경제, 생활·환경, 문화·예술의 4대 특화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주 1회 2시간, 30주를 수업하며 출석 70% 이상에 사회참여활동 5시간을 수료하면 명예도민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명예도민석사과정 입학 자격을 얻는 시스템이다.4년 전, 은퇴하던 해, 경북인재평생교육진흥원으로부터 강사풀 등록지원 요청을 받았고, 그 후 여러 시·군의 캠퍼스에서 강의 요청이 있었다. 내게 성인학습자 대상 강의는 낯설지 않다. 위덕대는 학령기 학생의 입학생 부족 상황을 대비해 2014년부터 성인학습자 학생을 대대적으로 모집했다. 내가 은퇴한 이후 현재도 활발하게 평생학습사업을 하고 있다. 위덕대는 일찍이 성인학습자를 위한 기본 제도를 마련, 평생학습처를 만들었고 국가지원사업인 평생학습사업단에 선정되어 3년간 추진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평생교육원장, 평생학습처장과 평생학습사업단장을 수행하기도 했다. 평생학습에 대한 나의 관심과 열정은 재직 중 한국복지사이버대에서 평생교육사 자격증을 취득할 정도였다.성인학습자들은 학령기 학생과 똑같은 학사일정을 소화하고 법정 학점을 이수해야 졸업이 가능한 만큼 처음 14명 정도의 입학생 중 4년 후 학사모를 쓴 분들은 그 절반도 안 될 정도였다. 입학 당시 60세가 훨씬 넘은 분들이 햇수로 4년 총 8학기를 무사히 마쳐 졸업식날 학사모를 쓸 때의 광경은 지금도 눈물날 정도로 벅찬 감격이었다. 그들 중 학교생활을 정말 보람있게 하셨던 세 분은 졸업 후에도 해마다 스승의 날 즈음 연락하시고 함께 식사자리를 만드신다.며칠 전 김천의 경북보건대학교의 도민행복대학에 출강했다. 이 대학엔 4년째 출강 중이다. 해마다 다른 얼굴들을 만나지만 강의에 대한 열의나 태도는 다르지 않다. 30여 명 되는 수강생들은 한결같이 진지하고 꼿꼿한 자세로 경청하신다. 2시간의 강의에 조는 분이 한 분도 없을 정도다. 남성 수강생도 더러 계시지만 여성분들이 압도적으로 많기에 ‘경북 내방가사’ 강의는 특히 보람있다. 강의 도중 잠시 쉬는 시간에는 반장이 이런저런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토론을 하는 모습이 여느 대학의 강의실과 다를 바 없다. 동아리 활동도 하고 봉사일정도 공유하는 것 같았다. 만학의 즐거움을 누리는 어르신들이 보기에 좋고, 나는 그들에게 강의하는 것이 즐겁다. 무엇보다 도민들에게 이런 기회를 펼쳐 준 기관과 대학에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2024-05-01

손과 팔의 문제는 전부 디스크인가?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팔이 저리거나 아픈 경우나 팔이나 손목에 힘이 없거나 들기가 힘들어 내원 하는 환자들이 하는 말의 공통점이 있다. 전부 다 디스크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문진을 하면 디스크 끼가 조금 있다 혹은 일자목이라 목에서 신경이 눌리는 것 같다는 애매한 답을 하는 경우가 있다. 병원 검사에서도 정확하게 디스크가 눌리는 것이 아닌 경우인데 실제 목과 어깨 치료를 많이 받아도 크게 호전이 없어서 내원을 한다.요골신경이 윗팔 즉 상완골에서 눌리면 손목을 들 수가 없고 팔이 저린 증상이 나타난다.미국에선 토요일 밤에 술을 먹은 후 팔이 눌린 형태로 잠을 자서 생겼다고 ‘토요일 밤의 마비(Saturday night palsy)’라고도 한다. 팔을 과사용 하거나 팔이 오랫동안 눌린 경우 또 상완골 골절에서도 나타난다. 요골신경은 윗팔뼈에 붙어서 주행하는 구간이 있는데 이곳의 근육이 붓거나 눌리면 증상이 생긴다.증상은 손목을 위로 들어올릴 수가 없고 감각이상으로 나타난다. 특히 1·2·3지 쪽으로 증상이 나타난다. 대부분은 2~4주가 지나면 자연 회복 된다고 알려져 있으나 제때 치료를 받지 않으면 오래 고생하는 경우가 있다. 만성으로 진행되면 근육 위축으로 지방이 끼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근육이 약해진다. 당연히 빨리 치료를 받는 것이 좋으며 제대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요골신경이 아래팔 부근에서 눌리는 경우도 있다. 요골 신경은 팔꿈치 아래로 주행을 하는데 팔꿈치에서 신경이 두 갈래로 분지 되어 운동신경인 하나는 회외근 깊이 들어가는데 여기서 신경이 눌리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신경이 눌려도 윗팔에서 신경이 눌리는 것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는데 특이점은 감각의 이상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팔에 힘이 빠지고 손목이 들리지 않는 경우 목이 불편하더라도 디스크에서만 원인을 찾아선 안 된다. 하나하나 따져서 진료를 해야 한다.만약 요골신경 포착 증상이 보인다면 정확한 지점을 찾아서 그 눌리는 부분을 해결 해주는 것이 빠른 치료 방법이다. 신경이 눌리는 주변은 압진 시 반대편보다 통증이 심하고 독특한 통증 양상을 보인다.이 부분을 찾아서 부항으로 피를 뽑아 압력을 줄여 주고 침과 약침 등으로 치료를 한다면 더 빠른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초음파로 직접 신경을 보면서 대용량 약침으로 신경 주변을 누르는 부분을 분리 해준다면 더욱더 빠른 효과를 볼 수 있다. 첫째는 윗팔 뼈에 붙어 주행하는 요골 신경을 직접 보면서 뼈와 근육 사이에 있는 요골신경에 약침을 주입하면 눌린 신경이 분리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둘째, 아래팔도 같은 방법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만약 그 부분이 원인이라면 일반적인 치료보다 빠른 속도로 회복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병은 오래 될수록 치료가 어렵고 특히 신경의 압박이 오래되면 신경 주행경로의 근육에 위축이 오고 지방이 끼게 된다. 오래 될수록 치료가 더뎌지니 빨리 치료를 하는 것이 좋다.

2024-05-01

어린이날을 생각한다

장규열 고문 그런 생각을 어떻게 떠올렸을까. 나라를 잃었던 시절에 소파 방정환은 ‘우리의 미래는 어린 꼬맹이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작고 어린 아이들을 부르는 이름이 따로 없다고 생각해 ‘어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와 생각을 같이 했던 어른들이 모여 어린이를 위한 활동을 한 끝에 우리 정부는 1957년에 ‘어린이헌장’을 제정했다. 7개 조로 만들어진 헌장은 전문에 ‘모든 어린이가 차별없이 인간성을 지니고, 나라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 사람으로 존중되며 바르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함을 길잡이’로 삼겠다고 했다. 1922년에 처음 생겼던 5월 5일 어린이날이 다가온다. 정치가 혼탁하고 환경이 무너지며 사회가 어지러운 오늘, 우리는 어린이날을 어떻게 맞고 있는가. 세상만사에 묻힌 나머지, 어린이가 우리의 내일임을 잊은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필자는 한때, 우리에게 ‘어린이날’이 따로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한 미국인 친구의 한 마디에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한국은 일 년에 단 하루를 정해 어린이날로 삼는가, 우리는 날마다 어린이날인데….’ 우리에게 어린이는 정말로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사람’인가. 어린이헌장은 ‘어린이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악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된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그들의 안전을 놓고 흥정하는 꼴을 보지 않았는가. 어린이가 안심하고 즐겁게 자라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잃었던 나라를 찾기 위해서도, ‘어린이가 잘 자라야 한다’고 했던 그 어른들의 간절한 마음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사회가 달라지고 문화도 달라졌다. 어린이날을 맞으며 드는 아쉬움은 ‘동요’가 사라진 안타까움에 있다.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밝고 맑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배우면서 자라야 한다. 그 많던 어린이들만의 노래들은 어디로 사라지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음악을 함께 들으며 지낸다. 올해는 한국의 첫 동요로 인정받는 윤극영의 ‘반달’이 탄생한지 100년 되는 해라고 한다.‘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 마리/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쓰인 낱말들과 표현방식이 옛스럽기는 해도 아이들만 가지는 상상의 날개를 한껏 달아주었던 동요가 아닌가. 2절 가사는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고 불러 어린이들이 가슴에 희망을 품고 자라나기를 기대하고 있다.어른의 삶이 팍팍할수록 어린이의 내일을 기억하는 일상이었으면 한다. 어린이들의 처지와 나날을 배려깊게 살피면서 나라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놀며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충분히 마련해 주어야’ 하고 어린이는 ‘위협으로부터 먼저 보호되어야 하고 안전을 지켜주어야’한다. 미래를 향한 확실한 투자로서 어린이들을 잘 가르쳐야 하며, 경쟁과 다툼보다 상생과 협력의 묘미를 일깨워 내일의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린이헌장은 놀랍게도 어린이를 ‘세계인’으로 키워야 한다고 적고 있다.

2024-05-01

TK떠나는 청년, 한해 1만4천명이나 된다니

대구·경북을 떠나 수도권으로 가는 청년 숫자가 해마다 늘고 있어 걱정이다. 동북지방통계청이 그저께 발표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대구와 경북 청년 인구(19~39세)는 각각 58만5천명, 52만9천명으로 2015년 대비 23.7%, 17.1%씩 줄었다. 지난해에만 이 지역을 떠난 청년이 1만4천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청년들이 너도나도 수도권으로 향하는 이유는 치열한 생존경쟁에도 고임금 일자리가 많은데다 사회적 인프라가 탄탄하기 때문이다. 각종 통계자료에서도 회사급여와 고용률, 교육·의료 서비스 격차가 청년들의 수도권유입 요인으로 나타나고 있다.문제는 비수도권 청년층 유출이 다른 연령대보다 성장 잠재력에 타격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청년층 중에서도 고학력자일수록 수도권으로 향하는 경향이 뚜렷한 점은 비수도권으로선 비관적이다. 이번 통계청조사에서도 고임금이 보장된 일자리와 관련된 대구·경북 순유출 인구 비율이 2015년보다 3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우리나라 출산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원인 중의 하나도 청년층 수도권 집중 현상 때문이다. 서울시 출산율이 전국 시·도 중 가장 낮은 것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주거비와 사교육비 등으로 자녀를 키우는 비용이 높아 청년들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출산을 줄인다는 것이다.비수도권 지자체 모두는 오래전부터 청년인구 유출을 막기 위해 전 행정력을 동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상황은 악화일로다. 전국 시·군·구 가운데 절반이 이미 소멸위험지역에 들어섰고, 2047년에는 모든 시·군·구로 확대될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역대 정권과 지자체 모두 왜 청년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수도권으로 향하는지, 매우 잘 알면서도 악순환을 막지 못하고 있다. 국토균형발전 정책은 정부가 수도권 국회의원 눈치를 보지 말고, 최우선정책으로 밀고 나가지 않으면 성과를 내기 어렵다. 이번 총선에서 드러났듯이, 여야 모두 의석이 몰린 수도권에 선심공약을 집중시키는 한 국토균형발전은 요원하다.

2024-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