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유튜브 쓸데 없다

한 두어 주일 전부터 병이 또 도져 버렸다. 무슨 병이냐고? 물으신다면, 일명 검색병이라 해야겠다. 밤 늦게까지, 아니 새벽 가깝도록 휴대폰 속을 헤맨다. 다음, 네이버로는 성이 안 차 구글도 들어가고 줌도 들어간다. 목마름병, 타는 듯한 갈증, 갑갑증 같은 증세가, 소금물은 마셔봤자 더 목이 마르듯 숨통을 죄어온다. 아침에 눈뜨면 도로 또 검색이다. 왜 검색이냐? 하면 답답해서라고밖에 뭐라 말할 수도 없다. 아침부터 가슴에 뭐가 얹힌 듯 또 뭔가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사실, 이렇게까지 되기 전에는 유튜브를 들었다. 보았다기보다 들었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유튜브를 지난 시절 팟캐스트처럼 쓰기 때문이다. 눈이 아파 유튜브를 보고 있을 수가 없다. 휴대폰 푸른 빛이 안구를 마구 찔러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눈 뜨고 애써 보는 것보다 저절로 들리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근 1,2년을 이번에는 팟빵 대신 유튜브를 즐겨 들었다. 라디오처럼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는 휴대폰을 베개 삼아 베고 자며 지금, 여기와는 다른 세상을 꿈꾸었다. 뭔가, 이 숨막힐 듯한 갈증 씻어줄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고대했다.다른 시대가 오기는 왔다. 그것이 새로운이라는 말에 어울릴 만한 시대이기를 바라마지 않았는데, 마침 팟캐스트 시대가 종막을 고하고 유튜브 시대였다. 너도 나도 유튜브를 향해 내달렸다. ‘새날’ 같은 팟빵 프로도 유튜브로 변신했다. 참, 새롭기는 새로운 유튜브 시대였다. 이것저것 정치 이야기 아니어도 볼 것이 참 많았다. 하지만 내 감각으로는 아주 잠깐, 차 한 잔 마실 시간 정도였다.곧바로 무서운 갈증이 닥쳐오기 시작, 날이 갈수록 이 증세는 심해지기만 했다. 여기에도 예외없이 두 패가 있어 물어뜯고 물어뜯기기에 여념이 없다. 좀비 영화는 상영 시간 내내 마구 떼로 달려들어 물어 뜯고 물어 뜯기기가 ‘전부’던데, 바로 유튜브 속 세상이 ‘좀비장’이라면 심한 말이기는 하다. 뭔가 뷔페 식당의 갖가지 요리들을 한데 모아 엎어 놓은 형국이라고나 할까? 우주나 자연 다큐멘터리 빼놓고는 너무 거칠고 현란하고 막무가내고 공격 본능, 야수 본능들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찾는 것은 없다, 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어디에 진실이 있단 말인가? 어느 파당에, 분파에, 논리에 정의가 있단 말인가?지난 두어 주 동안 이 나라를 무섭도록 달군 메뉴가 있었으나 정작 진실은, 내막은 감춰진 채 비난과 화제 전환과 국면을 틈탄 괴물들의 싸움이 진흙탕 속에 펼쳐졌다. 이제 유튜브를 떠나면 또 무엇을 찾나? 누가 그러더라. 휴대폰 끄면 적막강산이라고. 맞다. 갈증도 함께 사라지리라 한다. 헌데, 이걸 꺼놓고는 살아갈 수도 없다. 기가 막힌 현실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7-30

포항과 의과대학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얼마전 백내장 수술을 하면서 만난 의사가 너무 인상적이었다.의대생들은 대학과 상관없이 모두 똑똑하다는 소문대로 갓 의대를 졸업했지만 너무 총명하고 친절하여 수술 전후 너무 믿음직스러웠다.그런 경험은 또 있다. 몇 해 전 아들아이가 미국유학 중 갑자기 급성 맹장염으로 수술을 하고 이후 장협착으로 재수술을 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의사들의 민첩성과 총명성은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너무도 믿음이 가는 의사들이었다. 미국도 의대생들의 수준이 아주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한국에서도 의대생의 실력은 대학을 막론하고 최상위권 대학의 실력과 맞먹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포항에 의과대학을 세우는 일이 다시 뜨겁게 떠오르고 있다. 경북지역은 전국 평균 의사 수가 서울의 50%, 대구의 70% 정도 수준에 그치고 있어서 포항에 의대를 설립하는 일은 시급한 것이고 포스텍이 설립된 30여 년 전부터 여러 차례 논의되었던 문제이다.경북지역 의대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가 유일할 뿐이다. 경북 인구 1천 명당 의사 수는 2017년 기준 1.34명으로 거의 전국 최하위라고 한다. 물론, 상급종합병원도 전무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경북 코로나19 중증환자는 전국 병원을 방랑자처럼 떠돌아야 했다.경북지역에 의과대학 신설이 간절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최근 포항의 김병욱 국회의원은 국회 교육위원회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방사광가속기 등 우수한 연구 인프라를 예로 들며 “포항이 연구중심 의대 설립 최적지”임을 강조했다.신종플루가 유행할 때 타미플루 백신을 개발한 곳이 방사광가속기를 보유한 스탠퍼드대학이다. 필자가 경험한 스탠퍼드의 방사광 가속기는 특히 메디컬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코로나바이러스 구조 보고·논문의 70∼80%가 방사광가속기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고 한다.바이오메디컬 분야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방사광가속기가 있는 포항에 의대를 설립하는 것이 매우 시기 적절해 보인다. 또한 포항에는 포스텍을 비롯해 생명공학연구센터, 나노융합기술원 등 10여 개 이상의 연구소가 운영 중이고 최근 국내 굴지의 제약사가 스마트헬스케어 인프라 구축 대규모 투자 협약을 맺었다. 이는 포항이 왜 신설 의대의 적절한 장소 인지를 보여준다. 포스텍은 의대 유치를 하는 경우 상급종합병원 설립에 나설 의지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포항은 대학, 연구소, 기업 등과 연계한 연구중심의과대학 설립이 지금 당장도 가능하다.포스텍은 정부가 할당한 정원을 모두 사용하고 있지 않다면 정원을 채우는 정도 또는 약간의 확대로 충분히 의대 설립이 가능하다. 포항에 의대 설립은 포스텍 만의 문제가 아니라 위에 언급하였듯이 포스텍, 포항시, 포항 지역사회의 시급한 과제이다. 그리고 경북 전체지역, 아니 나아가서는 한국 전체 의료부족을 해결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포항의 발전은 한국 지역 균형발전의 시금석이 되어 왔다. 포스코의 등장으로 산업화 분산, 포스텍으로 엘리트 대학의 지역 분산 등을 실천하였다.이제 의과대학 신설로 의료서비스의 지역 균형발전을 꾀할 때이다.

2020-07-30

바람이 분다

김병래시조시인바람을 쐬려고 들로 나간다. 들판을 가로질러 난 고가철로 밑에 그늘이 생겨 여름날 더위를 피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 그늘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볏잎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을 본다. 가까이 개망초꽃도 흔들리고 강아지풀도 흔들린다. 풀잎들은 대부분 바람에 잘 흔들리도록 디자인이 된 것 같다.어느 시인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으랴’고 했지만, 태풍이나 삭풍의 경우가 아니라면 바람에 흔들린다는 것은 아픔이거나 슬픔이기보다 환희의 몸짓으로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바람이 불면 초록물결이 이는 드넓은 들판은 생명의 환희로 가득해진다.우리 민족은 뿌리부터 바람과 관련이 깊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는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와 나라를 세울 때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함께 풍백(風伯)을 가져왔다는 전설이 있고, 신라의 최치원은 난랑비서문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 이 교(敎)를 베푼 근원에 대하여는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유불선 삼교를 내포한 것으로 모든 생명과 접촉하면 이들을 감화시킨다”고 했다.우리말에는 바람에 대한 명칭이 무척이나 많다.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서 하늬바람, 마파람, 샛바람, 된바람, 높새바람 등이 있고 세기에 따라서는 미풍, 태풍, 폭풍 등으로 불린다. 그 밖에도 여러 경우와 상태에 따라 훈풍, 열풍, 삭풍, 돌풍, 산들바람, 소슬바람, 갈바람 등과 사회현상을 나타내는 말로 치맛바람, 춤바람, 피바람 같은 말도 있다. 풍속, 풍기, 풍경, 풍치 등 사회나 자연 환경을 나타내는 말에도 바람이 들어 있고. 요즘은 잘 안 쓰이지만 거풍(擧風)과 즐풍(櫛風)이란 말도 있다. 거풍은 원래는 쌓아두었거나 바람이 안 통하는 곳에 있어 습기 찬 책이나 옷 등을 바람에 쐬어주고 햇볕에 말린다는 뜻인데 나중에 다른 의미로 변질이 되기도 했다. 햇볕 좋고 동남풍 부는 날 산 위에 올라가 상투를 풀고 햇볕과 바람을 쐬면서 머리를 빗는 걸 즐풍이라 하고, 바지춤을 내려 아랫도리를 내놓고 바람에 말리는 걸 거풍이라 했다. 무더위에도 옷을 벗거나 상투를 풀지 않았던 사대부들로서는 가히 파격적인 풍습이었다.우리는 바람이 많은 민족이다. 바람이 불기만 하면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식민지배와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단기간에 이루고 세계 십위 권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것은 남다른 신바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사이비 종교집단 같은 김일성 왕조도 바람이라면 바람이랄 수 있을 것이다.바람은 자주 방향이 바뀌게 마련이다. 계절과 기상변화에 따라 풍속과 풍향이 수시로 바뀌는 게 바람이다. 인간사회에 부는 바람도 마찬가지다. 전쟁이나 혁명과 같은 태풍이나 폭풍이 불 때도 있고 봄바람처럼 평온한 바람이 불 때도 있다. 촛불바람으로 오른쪽 바람이 꺾이자 그 여세를 몰아 왼쪽 바람이 광풍이 되어 행정부는 물론 입법부와 사법부에다 공영방송까지 장악하고 나라의 경제와 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다만 이제 조금씩 역풍의 조짐이 보이는 것에 희망을 가진다.

2020-07-30

노시보 효과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대한민국을 밑바닥부터 흔드는 정부정책이 있다면 바로 부동산정책이다.국회는 30일 오후 본회의에서 이른바 임대차 3법의 핵심인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재석 187인, 찬성 185인, 기권 2인으로 통과시켰다. 야당인 미래통합당 의원들은 이 법안들이 토론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본회의에 넘겨졌다는 이유로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는 여당 단독으로 법안을 통과시키면서“20대 국회에서 부동산 관련 법안의 충분한 논의와 협의가 있었으나 야당이 반대해 처리되지 못하면서 지금의 부동산 폭등이 나타났다”고 미래통합당에 책임을 돌렸다.통합당의 반응은 격앙 일색이다. 더불어민주당을 향해“청와대 청부입법 거수기”, “자충수”라고 비판했다. 이 법이 시행되면 전세제도가 소멸하고, 주택 임대인을 법의 보호 테두리 밖으로 밀어내고, 임대인은 적이고 임차인은 내 친구라는 선언을 하는 셈이라고 비판했다.언론에서도 여야 간 합의 없이 일사천리로 통과된 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우선 개정안에 따르면 집주인은 기존 세입자를 계속 두는 것보다, 한 차례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해 총 4년(2년+2년)을 거주한 세입자를 무조건 내보내는 것이 이득이 된다. 새로운 세입자를 들일 때에는 전·월세 상한제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이에 따라 오히려 전월세 폭등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당장의 전·월세 가격 급등은 피할 수 있지만, 그 대신 세입자들이 4년마다 쫓겨나게 만들고, 4년 주기로 전·월세 가격 급등이 벌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실제 과거 노태우 정부 때 비슷한 일이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 취임 1년 반이 지난 1989년 7월을 기준으로, 전국의 전셋값은 노 대통령 취임 이전과 비교해 28.3% 올랐다. 이에 대응해 정부는 1989년 12월 주택임대차보호법을 개정해 전세 계약 기간을 기존의 1년에서 2년으로 늘렸다. 그러나 집주인들이 2년 치 보증금을 한꺼번에 올리는 바람에 거리에 나앉은 가장들이 자살하는 등 커다란 사회 혼란이 빚어졌다. 앞으로 4년 마다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세입자 주거 안정 보장 기간을 4년이 아니라 한국의 학제가 6년 단위(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사이클로 돌아가는 상황을 고려, 6년의 거주가 보장돼야 한다는 주장이다.무엇보다 22차례에 걸친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잇따라 실패했다는 점에서 노시보(Noceobo)효과가 우려된다. 노시보 효과는 효과 없는 약도 환자가 약효를 믿으면 병세가 개선되는 현상인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의 반대말로,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 물질에 의해 병이 생기는 경우를 말한다. 섣부른 법 개정은 노시보 효과를 더욱 강화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이래저래 176석의 절대 다수를 앞세워 협치노력 없이 무작정 내달리는 국회가 걱정스럽다.

2020-07-30

탐정시대

탐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영국작가 코난 도일이 쓴 소설 ‘셜록 홈즈’ 시리즈의 주인공인 셜록 홈즈다. 사냥 모자와 망토 달린 코트, 굽은 파이프, 돋보기 등이 그를 상징하는 소품들이다. 현재까지 인간이 창조한 캐릭터 중 가장 성공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히며 탐정의 대명사로 통하는 인물이다.원작자의 사실 묘사가 매우 현실적이어서 이 시리즈를 연재한 스트랜드 매거진에는 사건을 의뢰해 달라는 사람의 편지가 수북히 쌓였을 정도라고 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는 출판된 지 130년 동안 지금까지 한번도 절판이 된 적이 없는 책이다.탐정은 의뢰자의 요청에 의해 사건, 사고 등의 정보를 조사해주는 민간조사원이다. 우리나라에는 사설 탐정업이 없고 상대 회사의 신용도나 재산실태 등을 비밀리 조사하여 의뢰자에게 알려주는 흥신소가 있다. 2016년 기준으로 전국에 4천여 곳이 있었으나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오히려 남의 뒷조사나 한다는 등 부정적 이미지가 더 컸다.지난 2월 국회는 그동안 탐정 명칭 사용을 금지해 왔던 신용정보법을 개정하면서 우리나라도 8월 5일부터 탐정업 사무실 개소가 가능하게 됐다. 정부기관에 판·검사가 있으면 민간에는 변호사가 있고 경찰의 형사가 있다면 민간에는 이제 탐정이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법적인 수사권은 없으나 법적 증거가 될 각종 정보수집에 그들의 역할이 기대된다.퇴직을 앞둔 경찰출신 공직자의 진출이 가장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탐정업의 시장 규모를 1조3천억원으로 보고 있으며 일자리도 1만5천 개가 더 생길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그러나 사생활 침해나 개인정보 유출 등의 부작용도 만만찮을 것으로 보여 탐정시대 개막에 관심이 모아진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7-30

광복이의 3+1 뽀뽀

강길수수필가광복이의 첫 거울 뽀뽀가 삼삼하다. 동영상 안 거울에 비친 녀석의 얼굴 모습이 마음을 종잡을 수 없게 한다. 콕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온갖 느낌이 한순간에 파도로 몰려오니 말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그 무엇이, 마음 밭에서 죽순처럼 돋아난다.동영상을 켜기 전 정지 화면은 이렇다. 녀석은 왼발을 쪼그리고 오른발은 주저앉은, 반 쪼그려 앉은 자세를 거울 앞에 취하고 있다. 얼굴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향하고 있다. 그 표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천진하면서도 진지하다는 말밖에 더할 수 없다. 왼손은 손가락을 펴서 거울에 대고 있다. 오른손은 엄지를 반쯤, 검지는 다 폈다. 나머지 세 손가락은 오므리고 검지가 거울에 비친 얼굴을 가리키고 있다.동영상을 켰다. 녀석은 얼굴을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로 가져가 조심스러운 첫 뽀뽀를 한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입맞춤이다. 첫 뽀뽀의 느낌이 어땠을까. 비주얼로는 자기 입술이었으나, 막상 입술에 닿은 것은 딱딱하고 찬 유리면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녀석. 그래선지 두 번째 뽀뽀는 다소 세게 거울에 다가간다. 이번에는 입술뿐만 아니라 코까지 거울 유리에 콕 부딪친다. 조금 놀랐는지, 일순 멈칫한다. 울지 않으니 안 아프나 보다. 의아한 듯 녀석이 두 눈을 한 번 껌뻑인다.곧이어 세 번째 뽀뽀를 ‘응.’ 소리와 함께한다. 마음 깊이 즐거운가 보다. 그리곤 오른손가락으로 무슨 표식을 하는 듯하며 거울 앞에 주저앉아, 거울의 자기를 향해 몸을 움직이며 옹알이를 한다. 다시 허리를 숙이며 오른손 검지를 펴 거울에 댄다. 중얼거리듯 낮은 소리를 내면서 두 이마를 마주 댄다. 이어 노래 부르듯 뭔가 속삭인다. 다시 주저앉아 허리를 들썩이며 노래 같은 옹알이를 한다. 거룩해 보인다. 녀석은 거울 속의 자기를 친구로 알까. 아니면 자신을 알아보는 걸까.녀석은 잠시 거울 속의 자기를 응시하며 무언가 중얼거리다가, 첫 뽀뽀 때와 같은 자세로 다시 예의 진중(珍重)한 뽀뽀를 한다. 뒤풀이 인가보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무슨 소리를 내며 엄마 앞으로 돌아선다. 동영상은 여기서 끝이다. 녀석은 이 거울 놀이에서, 어떤 비밀을 보여준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삼세번 뽀뽀하고, 잠시 즐거워하다가 다시 한 번 뽀뽀를 한 뒤 자리를 뜨는 행동 양식 곧, 3+1 방식의 자기 뽀뽀. 꼭, 무슨 메시지를 담아서 내게 보내는 것만 같다.녀석은 무슨 마음으로 거울에다 뽀뽀했을까. 그것도 3+1 뽀뽀를…. 제 엄마가 발달 단계상 거울 놀이의 시기이기에, 녀석 앞에 커다란 거울을 놓아주었단다. 한데, 거울 앞에 앉은 녀석의 얼굴 표정이나 몸, 손발의 행동, 동작이 어른인 내 눈에는 전혀 노는 것 같지 않다. 장난기도 안 보인다. 어느 신실(信實)한 구도자(求道者)가 거울을 대할 때의 모습이 저럴까. 내 상상과 언어 능력으로는 도저히 제대로 표현하거나 묘사할 수 없는 장면을 녀석은 연출하였다.태명이 광복이인 이 녀석은 둘째 손자다. 첫돌이 아직 한 달 반 정도 남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발달단계로 보더라도 유아기다. 그러니 녀석의 표정이나 동작, 행동, 소리 등은 거의 본능 곧, 천부적인 것들을 나타내는 시기이리라. 그렇다면 사람이 자신을 오롯이 만나는 일은, 원래 저렇듯 진지하고, 즐거운 일이란 말인가. 다 큰사람이 거울 앞에서 하는 양태(樣態)는 천태만상일 터. 어떤 성인이 거울을 두고 광복이와 비슷한 행위를 한다면, 그는 아마 나르시시즘에 빠졌으리라.두 살 위인 녀석의 사촌 형 태극이도, 영아 시절 삼세번 반응을 통해 내게 겨레의 삼세번 문화 메시지를 주었었다. 천지인 삼태극사상이 녹아든 삶, 하늘을 섬기고 자연과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온 우리네의 모습 말이다. 뒤이은 광복이 녀석의 삼세번 더하기 한 번의 메시지는, 한 번 더 확인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계약서를 쓰고, 서명날인으로 확인하듯이…. 그리고 ‘우리 겨레의 삼세번 문화의 근원은, 영유아들의 본능적 교감 반응과 옹알이 같은 놀이에서 왔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뒤따른다.마음 하늘에, 북극성이 유난히 밝다.

2020-07-29

사소한 따뜻함

도서관에서 잠시 상주작가로 일할 때였습니다. 일찌감치 집을 나서곤 했습니다. 주차 공간을 확보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침 시간을 마디게 활용하기 위해서였지요. 중앙 출입문을 통과하면 미화 담당 여사님이 가장 먼저 반겼습니다. 연두색 앞치마를 두른 채 대걸레 하나로 로비와 계단을 누비는 그녀는 누가 봐도 에너자이저였습니다. 밀대를 쥔 여사님 손끝, 붉은 메니큐어가 그 열정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고희 넘은 연세인데 환갑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젊고 유쾌한 분이었습니다. 언제 봐도 분양받고 싶은 기운이었습니다.여사님이 마지막 순서로 제 공간을 청소할 때면, 웬만하면 함께 차를 마셨습니다. 노고에 대한 제 나름의 소박한 소통법이었지요. 하루 십여 분도 되지 않는 티타임이었지만 여사님과 친구가 되는 그 순간이 좋았습니다. 동료 중 제일 나이가 많은 여사님은 다음해에 재계약이 되지 않을까봐 걱정하곤 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뻔한 말로 저는 여사님을 응원하곤 했습니다.그날도 변함없이 일찍 출근했습니다. 여사님은 아직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심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데 “안 돼!” 하는 여사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흠칫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밀려났습니다. 복도 바닥에 노란 테이프로 경계선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락스로 바닥 대청소를 한 뒤 말리는 중이었습니다.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하려면 아직 삼십 분 정도 남았기에 여사님은 안심하고 바닥에 락스를 뿌렸겠지요. 너무 일찍 나온 제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순간 바닥을 밟을까봐 본능적으로 막은 것이었지요.여사님의 적극적이고 친절한 경고 덕에 락스 자국을 남기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금세 그 사실을 잊은 채 찻물을 받기 위해 복도 한쪽 정수기로 향했습니다. 정수기 하얀 머리 위에 전에 없던 소품이 놓여 있었습니다. 피로회복제 음료를 등받이 삼아 단정한 글씨체의 메모지가 붙어 있습니다. 여사님 앞으로 배달된 쪽지입니다. 얼핏 봐도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습니다. 여사님 손에 들어가기 전, 얼른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급한 도둑 촬영이 말해주듯 엉성한 컷이지만 공유하고 싶은 장면입니다.열람실 공식 개방 시간 전에 도서관에 입장하는 성실 이용자가 있었습니다. 수험생인듯한 그녀는 매번 그렇게 일찍 눈에 띄었습니다. 복도 휴게자리에서 공부하다가 열람실 문이 열리면 곧장 들어가곤 했습니다. 메모지 내용을 보니 그녀가 남긴 것 같았습니다. 저보다 앞서 엘리베이터를 내리다가 여사님이 뿌려놓은 락스를 밟은 모양이었습니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다시 바닥을 닦아야 하는 여사님에게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을 전한 것이지요.저절로 미소가 나왔습니다. 세제를 밟아 바닥을 더럽힌 일은 아주 사소한 실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도 충분한 사과가 될 사안이지요. 한데 못내 아쉬웠는지 저렇게 마음 담은 메모까지 남겼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간 타인의 친절 시간, 그 순간을 상상하는 일이 곧 피로회복제였습니다.김살로메소설가뒤늦게 메모를 발견한 여사님이 소녀 얼굴을 한 채 달려왔습니다. 상기된 얼굴로 아침부터 감동이랍니다. 메모지를 가볍게 흔들며 새침한 표정으로 일할 맛 난다 하십니다. 처음 본 것처럼 저 역시 가슴 따뜻해지는 일이라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집에 가서 손녀에게 자랑하겠다는 여사님에게 저는 이 상황을 글로 써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사님을 배웅하면서 제 눈길은 복도 끝에 가닿았습니다. 아직 열람실 문이 열리기 전이고, 휴게용 간이 테이블, 책에 얼굴을 묻듯 열중한 그녀가 보였습니다. 모른 척 따뜻한 차 한 잔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종이컵에 담은 훈기지만 작은 응원이 되길 바랐습니다. 꼬부랑 원서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보아 전문직 공부를 하는 수험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해 될까 봐 말은 건네지 못했습니다. 공부에 앞서 온기를 먼저 간직한 그녀이기에 무조건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습니다.다음날에도 복도 그 자리, 그녀는 주위를 잊은 듯 책에 머리를 맞대고 있었습니다. 습관인 듯 저는 파이팅을 대신하는 차 한 잔을 놓고 돌아섰습니다. ‘사소한 맘 씀 덕에 일할 맛 난다‘는 여사님의 새침한 표정이 전달되기를 바랐습니다. 고맙다고 수줍게 말하던 그녀가 제 예상대로 수험생이었다면 좋은 소식이 있었기를 바랍니다. 섣부른 상상일지 모르지만, 전문인이 된 그녀가 소박하고 건실한 사람들 곁을 살피는 일을 오래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한결같은 여사님은 누구보다 먼저 나와 고요한 도서관 곳곳을 밀대로 닦았습니다. 수험생 그녀 역시 복도 구석진 자리에 붙박이로 있었지요. 열람실 문이 열릴 때까지 고개조차 들 마음 없이 책과 하나가 되어 있곤 했지요. 그들과 함께 조금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저는 묵묵히 찻물을 데우곤 했습니다. 사소하지만 훈훈한 기운이 도서관 전체로 퍼져나가던 시간이었습니다.

2020-07-29

열악해지는 생존환경

탄탄 스님 포항 운제산자장암 감원중앙승가대 강사우리가 손쉽게 마시는 물에는 사실 질이 있다. 좀 더 맑고 깨끗한 물을 마시는데 우리는 아낌없이 지갑을 열고 있다. 휘발유 1리터에 평균 가격이 약 1천550원이라면 생수 0.5 리터에 800원쯤 한다고 하니 이미 기름보다 물값이 비싼 시대를 살고 있다.물처럼 공기도 당연히 공짜라고 여겼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더구나 숨 좀 제대로 쉬려면 만만치 않은 대가를 내야 한다.코로나19가 창궐한 이후로는 더욱 숨 한번 내쉬기에도 불안하다. 어쩔 땐 마스크 품귀현상이 일어나 약국마다 새벽부터 길게 줄을 서야 했다. 마스크 배급이 일상이 되었고 마스크는 집밖에 나갈 때는 필수품이 되었다.노인들과 어린이들에게 치명적인 전염병과 65살 이상 남성의 3분의 1이 만성기관지 질환을 앓고 있다는 통계가 있는 세상에서 마스크는 이제 필수품이 된 듯하다. 아이들 역시 성인에 비해 호흡기가 약할 수밖에 없으니 마스크 착용이 필수이고 물론 성인들도 마스크 없이 외출하기 힘든 상황이다. 입자가 더 작은 미세먼지까지 걸러낼 수 있느냐에 따라 KF80서 KF94까지 번호가 정해진 보건용 마스크가 유통되고 있다. 개당 가격이 2천500원이면 4인 가족 기준으로 계산하면 1만원 가량에 구매한다. 문제는 이 마스크가 사실상 ‘일회용’이라는 거다. 한 사람이 매일 2천500원꼴의 돈이 든다.성인 한 명이 하루 2리터의 물을 마실 경우 이만큼 생수를 사려면 2천400원이 필요하다. 결국 제대로 숨 쉬는 비용과 하루 종일 생수를 사서 마시는 비용과 맞먹는다.경제학의 출발점은 자원의 희소성에서 시작한다. 그 희소성의 정도에 따라 가격이 정해진다. 한마디로 돈 주고 사야 하는 물건과 세상에 널리고 널려서 공짜로 쓸 수 있는 물건의 대표 상품이 바로 ‘공기’였다. 이쯤되면 공기도 사서 마셔야 하는 요즘의 학교 선생들은 자유재, 즉, 공짜의 대표 상품으로 어떤 걸 예로 들지 궁금해진다.정부는 더이상 숨 쉬는 게 공짜가 아니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보건용 마스크 판매량이 수 백배는 늘었다. 대다수 국민이 마스크를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고통을 받는 건 역시 저소득층과 취약계층이다. 공과금 내는 것도 빠듯하고 숨 쉬는데도 돈이 들어가다보니 생활이 더 어려울 수밖에. 갈수록 숨 쉬는 데도 빈부격차가 생기는 상황이 되고 있는데 수도 서울의 집값은 수 십억을 이미 호가한다고 하니 인간의 생존환경이 더욱 열악해 지고 있다. 편히 물 마시고, 편히 숨 내쉬고 편히 거주할 수 있는 삶이 대부분 민초들의 염원이 된 세상이다.

2020-07-29

무엇을 바꿀 것인가?!

김규종 경북대 교수고교 시절 내 마음을 움푹 패게 한 구절이 있다. “만상의 본질은 부패에 있다.” 팍스 로마나를 구현한 5현제 가운데 한 사람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의 말이다. ‘페이터의 산문’이란 제목으로 국어책에 실린 이양하 선생의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지극한 권력을 누렸으나, 세상만사 덧없음과 금욕주의를 설파한 아우렐리우스. 그가 만상에 담긴 허망과 사멸의 본질을 논하면서 구체화한 어휘가 ‘부패’다. 부패는 생로병사의 순환을 만들어내는 자연의 방편(方便)이다. 부패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자연계의 사멸과 생성은 불가능하다. 백골이 진토(塵土) 되는 일이 없어, 시신이 세상을 하염없이 떠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생명 탄생을 헤살 놓거나, 원천 봉쇄할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세상에 현현(顯現)한 모든 것이 짧은 시간에 퇴락하여 부패로 귀결됨을 지적한 황제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우리는 영생불사의 존재로 자신을 사유한다. 나에게는 죽음이나 소멸이 닥치지 않으리라는 미망(迷妄)을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치열하고 당당하며 아등바등 이를 악문다. 한 걸음 물러서면 벼랑 끝이라는 생각에 하나같이 앙앙불락(怏怏不樂)이다. 거기서 온갖 소음과 원망과 아귀다툼과 갈등과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발원한다.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것처럼 ‘호모 데우스’가 창궐하는 21세기다. 사멸할 운명의 호모사피엔스가 종언을 고하고, 영생불사하는 ‘데우스’로 인간이 탈바꿈하리라는 불길한 예언. 분명코 인간은 ‘길가메시 프로젝트’로 500세 인생의 도전에 성공할 것이다. 불멸하는 신의 반열에 오르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의미 있고 행복할 것인지는 다른 문제다. 하지만 부패하지 않는, 변하지 않는, 언제나 똑같은 인간이란 얼마나 큰 재앙일 것인가?!‘세상을 바꾸는 문필가’로 평생을 살고자 했던 패기만만한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은 점은 내가 언제나 옳은 것도, 진실한 것도, 선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너무도 많은 허점과 오류, 극복 불가능한 탐욕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삶을 돌이키면서 그런 미망을 던져버렸다.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세상을 바꾸려면, 사람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 외려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자명한 이치. 사람을 잃고 나서, 관계가 파탄 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우치게 된 명징한 사실이 그것이다. 누구도 타인을 바꿀 수 없다. 타인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의 표정 하나하나 살피고, 그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얼마나 소중한지 너무도 늦게 깨달은 것이다. 잃어야 얻는다는 단순한 이치 하나를 깨닫는 대가(代價)가 자못 컸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사람은 고쳐 쓸 수도, 바꿀 수도 없다.” 아직도 세상을 아름답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러하되, 세상은 나름의 법칙으로 돌아간다. 더디고 꾸물거리는 느림보의 법칙으로!

2020-07-29

방학 사전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이라는 류시화 시인의 시가 입에서 계속 메아리치는 7월 마지막 주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사태에 사람들은 최선의 지혜로 대처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그 지혜들이 모여 사회와 경제가 조금씩 돌아간다.그런데 오히려 퇴보하는 곳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정치와 교육이다. 둘의 공통점은 문제투성이라는 것, 해결책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뻔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것은 위선(僞善) 덩어리라는 것이다.이 둘은 거짓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표 거짓말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 “학생이 주인이 되는 교육”이다. 더 이상 이 말에 속을 국민과 학생은 없지만, 위선 정치인과 정치로 교육하는 사람들은 디지털의 힘을 빌려 이 말을 무한 재생하고 있다. 그들의 뻔뻔한 거짓말 놀이에 이 나라 정치와 교육은 회복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 나라에서 국민과 학생이 단 한 번이라도 주인이었던 적이 있을까?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고, 위선 정치인과 교육인들이 멸종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나라엔 희망의 불이 꺼졌다. 허균이 지금 시대를 산다면 분명 ‘신호민론(新豪民論)’을 섰을 것이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백성을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으로 나누고, 호민을 “사회의 부조리를 냉철히 파악하여 때가 되면 백성들을 조직, 동원하여 사회변혁을 도모하는 백성”이라고 하였다.선거 결과에 도취 된 정치인들은 못 느끼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허균 시대의 호민보다 더 강력한 이성과 힘을 가진 신호민(新豪民)이 늘고 있다. 그 속에는 학생도 많다. 그들이 떨치고 일어설 사회적 명분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온라인 수업과 상벌점 제도에 상처받고 있는 학생을 위해 류시화 시인의 시를 인용한다.“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필자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패러디 욕망을 강하게 느낀다. 시인은 사전의 새로운 집필을 꿈꾼다. 그 이유는 사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새 집필진으로 시인을 추천한다. 그가 제시한 예를 읽다 보면 우리가 놓치고 있던 단어 본연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이것이 교육의 본질을 찾고 있는 필자의 마음에 닿았다.만일 학생이 방학(교육)을 만든다면, 방학(교육)은 어떤 모습일까? 학생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이다. 그들의 가슴에 미래에 대한 불로 가득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입시 위주의 교육 제도가 그 불을 꺼버렸다. 하지만 이제 그 불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필자는 그 불이 학교와 공교육을 모두 태우는 꿈을 요즘 계속 꾼다. 학생들이 묻는다, “2주 연속 과제형 온라인 수업이 학교 수업입니까? 방학은 왜 있습니까?”코로나19 예방을 위해 학교는 오지 말라고 하면서 학원에 가는 것은 묵인하는 게 이 나라 학교이다. 그리고 교사들은 상점과 벌점으로 학생들을 통제하고 있다. 학생들은 2020 학년도 하계 방학을 어떻게 정의할까?

2020-07-29

인공태양 프로젝트

인공태양 프로젝트는 핵융합을 이용해 미래에너지원인 ‘인공태양’을 만드는‘국제핵융합실험로’(ITER) 프로젝트를 가리킨다. 핵융합 실험로는 중수소와 삼중수소를 연료로 사용해 초고온의 플라스마를 생성해 자기장을 활용해 가두는 장치로, 태양처럼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는 환경을 재현한다. 한국, 미국, 러시아, 유럽연합(EU), 일본, 중국, 인도 등 세계 7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최근 한국이 핵융합 장치의 주요 부품 중 하나인 진공 용기를 참가국 최초로 제작하는데 성공해 화제다.지난 4월 ‘ITER 한국 사업단’은 핵융합의 연료인 플라즈마를 가두는 진공 용기 본체를 담당국 최초로 제작했고, 완성된 진공 용기는 6월 프랑스로 운송됐다.ITER 국제공동 프로젝트는 1985년 미국과 당시 소련이 핵융합 분야 협력을 선언하면서 비롯됐다. 자원 고갈과 환경 오염에서 자유로운 에너지를 개발하기 위해 핵융합에너지의 실용화 가능성을 검증하는 초대형 국제협력 연구개발(RD) 프로젝트로, 한국은 2003년부터 가세했다. 이번 조립착수 5년 후인 2025년 시험 가동이 목표다.인공 태양은 핵융합을 통해 바닷물 1리터로 휘발유 300리터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생산한다. 인공태양 프로젝트는 우주의 핵융합을 지구에서 실현하려는 것으로, 태양이 1초 동안 만들어 내는 에너지는 지구의 모든 발전 용량보다 무려 1조 배나 많은 양이다.핵융합이 이뤄지면 바닷물에 들어 있는 중수소 연료 1그램으로 석유 8톤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더구나 환경 오염 물질을 전혀 배출하지 않는 청정에너지원이다. 인공태양 프로젝트가 에너지고갈 사태에 직면한 인류에게 희망이 되길 기원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7-29

뒤집어 걸고 낯설게 본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세계지도 아래위를 거꾸로 걸고 한반도를 다시 바라보라.’ 해양산업을 일으켰던 어느 기업인이 젊은이들에게 권하는 한 줄이었다. 왠지 모르게 대륙과 큰 나라들에 눌린 형세였던 나라의 위치가 새롭게 보인다. 중국과 러시아에 갇히고 일본으로 막혀서 답답했던 자리가 바다를 향하여 열리고 창문이 열린 듯 펼쳐진 느낌이다. 여기는 반도를 가둔 좁은 구석이 아니라 큰 마당을 향해 나아갈 너른 대문이 아닌가.바다를 기회로 보았을까. 대한민국은 세계 해양산업 구도에 있어 나름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선박건조, 해양물류, 수산식품 등에서 강세를 보이며 달려왔었다. 세계경기의 부침과 경영구조 악화로 어려움도 겪은 우리의 해양산업은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정부의 관심과 업계의 노력을 배경으로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으로 여러 여건이 좋지 않은 가운데에서도 해양산업은 가능성과 도약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해운재건 5개년계획’의 절반을 지나면서 전성기의 80% 수준을 회복하였다고 한다.위기는 과연 기회인가. 코로나19 상황이 세계적으로 악화일로에 선 가운데, 우리는 차츰 안정기로 접어들고 있다. 아직 마음을 놓을 수는 없어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방역에 임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몇 달 전만 해도 가장 위험한 나라로까지 지목되지 않았던가. ‘위기극복유전자 보유국’이라는 별명까지 획득하였다. 선진국 반열에 회자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마저 솟아오른다. 남으로부터 배우면서 도움을 받기만 하던 대한민국이 이제는 누구보다 앞서서 상황을 이겨나가는 중이다. 코로나19 백신개발에도 선두에 서 있다는 걸 빌 게이츠(Bill Gates)가 확인하지 않았는가.경제가 어렵고 정치도 어지럽다. 일상이 버겁고 생계가 힘들다. 함께 헤쳐가기도 쉽지 않은데 편가르기만 부추기고 있다. 오늘 만난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힘들고 버거운 것만 바라보고 있으면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갈등과 편가르기에 몰두하느라 변화와 돌파구의 햇살을 발견하지 못한다.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침몰되어 밖으로 솟아오를 사다리가 보이지 않는다. 마이너스 성장에 낙망하느라 남들이 우리보다 어렵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세계지도를 거꾸로 걸어 보듯이 낯설게 바라보아야 한다. 익숙한 일만 상대하다가는 새로운 시도를 지나치기 십상이다.위기에서 찾아낸 기회가 정말 기회가 아닐까. 낯설게 바라보며 발견한 돌파구가 진짜 해결의 열쇠를 가져다주지 않을까. 코로나19 위기의 복판에서 만들어낸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가. 거꾸로 바라보며 생각하여 지어낸 해양강국의 꿈이야말로 우리를 선진국으로 데려가지 않을까. 어려울수록 집중하고 낯선 상황도 두려워 말아야 한다. 새로운 시각과 참신한 돌파구는 평소에도 버릇처럼 훈련하듯 접근해야 한다. 따라가며 익히는 습관서 벗어나 나로부터 시작되는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모두 어렵다. 어려움의 강도는 짙어만 간다. 다르게 생각하는 습관과 저 밖을 바라보는 시선을 길러야 한다.

2020-07-29

북한의 대남 비난 ‘아이러니 현상’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남북관계 경색 후 북한의 대남 비난 강도는 높아지고 있다. 하기야 분단 이후 북한 당국은 남한을 한 번도 칭찬한 적은 없다.2007년 개최된 금강산 남북학술회의에서 남한의 진보적 어느 경제학자가 ‘식량문제도 해결치 못하는 북한’이라는 발언으로 학술회의가 중단된 적이 있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국가 존엄’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8·15 경축사에서 ‘평화 경제’를 주창한 문 대통령을 향해 그들은 ‘삶은 소대가리가 웃을 일’ ‘오지랖 넓은 중재자’라고 비난했다.북한의 최근 비난 발언도 이해하기 힘들다. 북한당국은 개성 연락사무소 폭파하기 전 삐라를 북으로 날린 탈북단체를 ‘인간쓰레기’들이라고 비난하였다. 노동신문의 이 같은 기고문은 공식적으로 탈북자가 없다던 북한이 이를 자인하는 꼴이 된다. 북한은 ‘한미워킹그룹’을 남한의‘친미 사대주의 굴종외교’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종래 ‘미 제국주의 앞잡이 남한 괴로 도당’에서 다소 완화된 표현이다. 이는 북한 당국의 대미·대남 협상용임이며 남한의 진보적 그룹을 겨냥한 전술적인 발언일 것이다.북한은 오랜만에 남한 국회를 향해 ‘깽판 국회, 난장판 동물국회’가 개원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남한 언론을 통해 남한의 ‘식물국회’나 ‘동물 국회’라는 신조어를 접했던 모양이다. 그들의 이러한 비판은 남한 국회의 비생산적인 국회 모습만 보고 의회 민주주의의 본질을 간과한 결과이다. 사실 우리 남한의 국회도 그들 지적대로 고칠 점은 많다. 그러나 남한의 국회는 북한 최고회의보다는 훨씬 대의 민주주의를 잘 구현한다.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14기 대의원 687명은 당 중앙이 지명하여 형식적 선거만 치른다. 남한 의회가 비생산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의 노동당, 사회민주당, 천도교 청우당이라는 우(友)당 거수기와는 완전히 다르다.북한의 이러한 유치하고 거친 비난발언은 상대에 대한 불만과 선전용이지만 때로는 협상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 여러 분단국이 통일된 마당에 우리 동족만이 분단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유럽 여행길에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흔히 그들은 남쪽이냐 북쪽이냐고 되묻는다. 한번은 독일에서 필자도 장난기가 발동하여 북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들의 큰 눈이 동그래졌다. 그것은 북한의 테러와 폭력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한의 이미지도 좋은 것만 아니며 코리아를 모르는 유럽인이 상당수다.북한이 대남 비방이나 비난의 소리를 높일수록 그들의 체제모순을 노출하는 역설에 직면한다. 북한도 이제 상당한 정도의 정보화 사회에 진입했다. 시장경제가 확산되면서 북한 주민들은 남한의 경제사정의 정확한 정보까지 접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대남 비난에 앞서 자신들의 모순된 현실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북한이 대남비난을 강화하고 주민을 통제해도 탈북 행렬이 이어지는 이유부터 알아야 한다. 북한 당국에서도 ‘미워하면서도 닮는다’는 아이러니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2020-07-28

80세 정년

정년제도는 근로자가 일정한 연령에 이르면 노사 당사자의 의견에 관계없이 근로관계가 종료되는 제도다. 직무 능력이 떨어지는 노령인구를 퇴출시키고 조직의 능률성 확보와 인건비 부담을 경감하는데 목적이 있다.정년제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대부분 나라가 일반적인 은퇴연령을 제시하지만 의무적인 정년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소방관, 파일럿 같은 특정 직종을 제외하고는 정년 규정은 불법이다. 한국도 2000년대 들면서 정년연장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해 2016년부터 단계적으로 정년연장이 실시되고 있다. 일본은 우리보다 앞선 1990년대부터 정년 연장론이 사회적 이슈가 됐다.정년 연장론은 인간 수명이 늘고 노령화 사회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노인들의 사회활동 참여가 이슈화 되면서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2019년 우리나라 대법원은 30년 만에 육체노동자의 근로가능 정년기준을 65세로 높여 판단한 바 있다.우리보다 노령화가 일찍 시작된 일본의 경우 정년연장을 위한 사회적 논의는 지금도 활발하다. 내년 4월 개시될 고령자 고용안정법은 70세 현역사회 실현을 위한 제도다. 후생노동성 조사에 의하면 정년을 65세 이상으로 정한 일본기업은 전체의 17%에 이른다.최근 일본에서는 80세 정년회사가 등장해 화제다. 일본 증시 상장사인 노지마 회사는 고용계약 연령을 65세에서 80세로 15년 더 높였다고 한다. 가전제품 판매업체인 이 회사는 본사직원과 매장판매직원 등 직종에 관계없이 정년을 연장해 주목을 끌었다.정년 연장의 문제가 우리 사회에도 핫 이슈로 등장하는 날이 머지않다. 정년의 의미가 퇴색하고 건강과 능력이 평가받는 사회로의 전환이 시작될 것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7-28

탁월한 형식·놀라운 기법의 제1차 세계대전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두 번의 전쟁이 모두 유럽에서 촉발되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부딪쳤던 양대 진영의 성격은 전쟁의 내재적 원인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으며, 정체성이 달랐다.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가 한창 팽창하던 시기 잠재되었던 그들의 욕망이 부딪치면서 발발한다.이권에 의해 영국과 프랑스를 필두로 한 ‘협상국’과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필두로 한 ‘동맹국’인 제국주의 진영이 맞서는 형국이었다.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뿌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처리에 있지만, 패망한 국가의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전쟁이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국’과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이탈리아를 주축으로 하는 ‘주축국’이 맞서는 형국이었다.전쟁의 원인과 진영의 양태뿐만 아니라 전쟁의 형태(?)도 달랐다. 단순하게 제1차 세계대전은 평행으로 그어진 두 선을 두고 벌어진 전쟁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점점이 분산되어 그 점에서 확산되는 다양한 형태의 방사형으로 이루어진 전쟁이었다.19세기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의 양상이 땅 위에 국경을 긋는 작업이었듯이, 제1차 세계대전의 양상이 이와 흡사하다.1914년 시작된 전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착상태로 돌입한다. 협상국과 동맹국은 그들의 주둔지마다 횡으로 길게 참호를 파고 대치상태에 돌입한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은 전선마다 횡으로 형성된 참호 속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뺏고 뺏기는 형태가 된다.샘 멘데스 감독의 영화 ‘1917’은 바로 이러한 제1차 세계대전의 형태를 기반으로 한 영화다. 참호라는 횡(가로)의 형태에서 종(세로)을 향한 시도가 이어질 때 삶과 죽음이 갈리고, 전진과 후퇴의 반복이 이어진다.모든 병사는 횡의 형태에서 휴식과 안정을 취하고 전쟁을 준비한다. 종의 형태에 돌입하는 순간, 머리라도 내미는 순간조차도 위험에 놓이고 죽음과 맞서게 되는 형태다.‘1917’은 초원에서 시작된다. 초원에 누워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는 풍경에서 시작해 횡으로 이동한다. 임무를 하달받은 두 병사는 횡을 이탈해 종으로 향한다. 임무를 위해 이동하는 모든 순간에 횡단의 형태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했으며, 전진을 위한 종단의 여정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위험에 처했다.이를 위해 샘 멘데스 감독은 ‘원 컨티뉴어스 숏’이라는 기법을 사용했다. 원테이크와는 다르지만 최대한 길게 촬영한 롱테이크를 모아 편집점을 쉽게 눈치 채지 못하게 찍고 편집한 것이다.이 기법으로 인해 우리는 두 병사의 뒤에서 혹은 앞에서 함께 종과 횡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현장성도 현장성이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 형태에 대한 놀라운 기법의 사용이라고 하겠다.관객의 현장 동참이라는 1인칭 시점을 통해 생생한 체험과 단순하게 도식화시킨 전쟁 형태의 영화적 체험을 위한 기법이다.영화의 종반부 쉼없이 종단과 횡단했던 카메라는 고요히 숲속에 머문다. 나즈막히 들려오는 병사의 노랫소리와 함께 이제 횡을 지나 종의 지역으로 들어갈 이들의 숙연하면서도 죽음을 마주해야하는 두려움의 얼굴들을 훑는다.이 장면 이후 영화는 마지막 장면으로 향한다.종단의 극단, 종단이라는 개념의 상징과도 같은 마지막 장면이 펼쳐진다. 참호 속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신호에 따라 참호 밖으로 종으로 내달릴 때 유일한 한 명의 병사가 종의 행렬을 피해 횡으로 달린다. 달리며 부딪치고 쓰러지면서 거대한 종의 흐름을 비집고 횡의 족적을 남기며 임무를 성공한다.영화 ‘1917’은 참호로 대변되는 횡의 공간(가로, 삶, 휴식, 충전)과 참호 밖 종의 공간(세로, 죽음, 혼돈, 상처)의 대비를 통해 ‘임무(두 병사)’의 종단(전달 과정)을 그렸다고 하겠다.‘1917’을 통해 놀라운 형식 속에 전쟁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스펙터클과 감동, 전율과 섬뜩함까지 담았다. 기술적으로도 내용적으로 탄탄한 한 편의 전쟁 영화를 만나게 될 것이다./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0-07-27

사막의 낙타처럼 묵묵히… 군위 법주사(法住寺)

법주사를 찾아가는 길은 후덥지근한 여름 홀로 적적하다. 인적 없는 들길을 개망초가 하얗게 무리지어 밝힐 뿐 모든 게 나른하다. 버려진 땅을 악착스럽게 지켜낸 숱한 고독들이 있어, 귀화식물이란 꼬리표가 결코 밉지 않은, 소박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꽃이다.청화산 남쪽자락에 있는 법주사는 은해사 말사로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심지왕사 또는 은점조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주석하고 일연이 총림을 세웠다고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조선 중기 화재로 법당이 소실되자 1623년 보광명전을 중건하고, 15년 전 지금의 주지 육문 스님이 중창불사하였다.넓은 주차장과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당우들의 당당함 앞에서 잠시 당황스럽다. 불이문과도 같은 보광루를 통과하자 너른 마당 건너편에 위압적일 만큼 거대한 보광명전이 시선을 끈다. 1만여 평의 넓은 대지가 옛 사세를 짐작케 하지만 오랜 역사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다.저 멀리 보광명전 앞 너른 계단을 스님 두 분이 내려오신다.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장엄한 경관과 달리 다소곳한 젊은 비구니 스님이 친절하게 절을 소개해 주신다. 법주사 주지는 전국 비구니 회장 육문 스님, 평생을 올곧게 살아오셨는지 젊은 스님의 얼굴에는 존경과 자긍심이 가득하다. 스님들이 하안거 수행 중이니 보광명전 우측 뒤로 보이는 청화선원 쪽은 피하기를 당부하신다.남성적인 느낌이 드는 보광명전은 선뜻 들어서기가 부담스럽다. 보광명전을 짓기 전에는 영산전이 주법당으로 쓰였다는 스님의 말씀이 떠올라 발길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한다. 영산전은 별채처럼 시선을 피해 다소곳하게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질곡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오층석탑과 내면을 키우며 살아가는 향나무가 영산전을 지킨다.법당 안은 고색창연한 역사의 깊이가 그대로 남아 있다. 단청이 벗겨진 천장과 오래된 마룻바닥이 주는 편안함,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도량이라 그런지 아늑하다. 석가모니 삼존불을 향해 천천히 백팔 배를 시작한다. 무심과 무심의 연속, 어떤 사념이나 청원도 없이 백팔 배를 끝내고, 텅 빈 마음으로 가부좌를 하고 앉는다.시간을 잊은 채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공간이다. 내 안에도 지혜를 모을 수 있는 법당 같은 내면의 공간이 있다면 좋겠다. 석가모니 삼존불 뒤로 보이는 후불탱화에 유난히 마음이 끌린다.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하는 영산불국, 사바세계의 불국토가 단순하면서도 차분한 색감으로 표현되어 있다. 법당을 독차지하고 앉아 국보도 보물도 아닌 후불탱화를 감상하는 이 시간이 좋다.법당을 나서는데 청화선원 앞마당에 스님들이 줄을 서서 돌고 계신다. 수행을 하다 잠시 포행 중인 듯하다. 가슴 서늘하도록 아름다운 광경 앞에서 나는 물푸레나무를 떠올린다. 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물이 푸르게 변한다하여 이름 붙여진 나무다. 가까이 있으면 나도 푸르게 물이 들 것만 같다. 나는 무슨 의식을 치르듯 포행이 끝날 때까지 멀리서 지켜보았다.그 사람을 제대로 알고 싶으면 주변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모든 욕망의 고리를 끊고 맑은 정신세계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머무는 공간과 대화, 고독을 껴안고 행해졌을 수많은 날들의 기도를 떠올리며 나를 돌아본다. 나의 한 주는 늘 그렇듯 어수선하고 분주했다. 보광명전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잠긴 문고리를 풀고 법당으로 들어서는데 커다란 괘불함이 아미타삼존불보다 먼저 반긴다. 짐작컨대 보물 제 2005호로 지정된 법주사 괘불도가 보관되어 있는 함이리라. 1714년 숙종 40년 아홉 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완성한 대형괘불이다. 찬란했을 한 때의 영광이 영겁의 세월 속에서도 끄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조낭희 수필가넓은 법당에는 조금 전까지 기도를 한 흔적이 남아 있다. 반으로 접혀진 좌복을 펴자 누군가 외우다가 만 경(經)이 염불이 되어 흘러나온다. 아미타삼존불을 향해 삼배를 하고 나서는데 하얀 피부에 가녀린 체구의 스님 한 분이 다리를 절며 들어오신다. 봉침을 맞았다는 발이 슬프도록 희다. 상냥한 말투와 미소조차 애잔해진다. 독백처럼 걷는 스님의 길이 마냥 꽃그늘일 수만은 없으리. 누군가와 함께 걷는 내 길도 외롭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육체적인 아픔에서 벗어나 수행에 전념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어둡지 않은 그림자 하나 남겨두고 법당을 빠져 나왔다. 너무 웅장해서 정이 가지 않던 첫 느낌의 보광명전이 제법 든든해 보인다. 오늘 마주친 스님들의 위태롭지 않은 시간들이 법주사의 넉넉한 미래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절을 나서는 내 발걸음에도 정갈한 기운이 실린다.국내에서 가장 큰 왕맷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볍게 찾아갔던 법주사, 맷돌 위에 소탈한 웃음을 띠고 앉아 있는 동자승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곳에는 사막의 낙타처럼 묵묵히, 힘들고 고단한 외길을 고집하는 비구니 스님들의 푸른 기도가 사시사철 자라고 있다. 삼천 년만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 같은, 그 깨달음을 만나기 위해 지금도 정진 중이다.

2020-07-27

국가흥망은 필부유책(匹夫有責)이다

강희룡 서예가구한말 유학자 박수는 17세에 학문을 시작하여 초기에는 과거에, 후에는 문장공부에 매진하였으나 모두 소용없음을 깨닫고 도학공부를 시작해 35세에 간재 전우의 문하에 들어갔다. 왕조도 기울고 지탱하던 유학의 도(道)도 스러져갔지만 형세가 한창 굽혀지는 시대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민족정신의 고취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박수가 스승인 전우에게 올린 편지에서 당시 유명 인사인 홍승헌의 논설에 대해 변론한 내용을 보면, 새로운 사상과 문물이 내리막길 왕조에 물밀듯이 들이닥쳐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 흔들리고 있다. 향교와 서원의 자리에 일본식 학교와 교회당이 들어서고, 세계열강은 자립, 계몽 등 명분을 내세워 선동하며 조선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다. 지식인들은 흥학(興學)의 구호에 휩쓸리고 공학(孔學)과 공교(孔敎)를 표방하며 자립의 권한을 내세우지만 힘없는 나라의 공허한 울림뿐이다. ‘자립 두 글자는 망국의 장본이다.’ 입만 열면 명분뿐인 구호들만 현란했던 당시 지도층의 상황을 바라본 박수의 근심어린 한마디이다.누구나 자립은 원한다. 하지만 일찍이 파스칼도 말했듯이 ‘힘없는 정의는 무력할 뿐이다.’ 힘이 없으면 자립을 아무리 외쳐도 의미가 없다는 진실을 박수는 꿰뚫어 본 것이다. 무기력한 조선은 그들이 의도하고 조종하는 대로 국론이 분열되어 위아래가 반목하고 결국 망국의 길을 걷게 되리라는 것도 간파하였다. 아울러 그는 강한 외세에 비해 나약한 조선의 상황을 인식하고, 격동하는 정세에 순응하며 민족의 맥을 유지하고 이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바람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 훗날 나라를 회복할 근간이 되기를 소망하였다. 한창 굽혀지고 있는 형세인데 펴려고 한다면 그 형세를 면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꺾일 것이다.그러니 난무하는 위험한 구호에 현혹되지 말고 은인자중하며 나라의 위태로움 속에서도 민족의 정신을 부지해 나갈 것을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권하였다. 이 방법이 소극적인 저항으로 보이지만 목숨을 끊거나,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저항하던 의혈지사 못지않게 지금의 우리나라를 일구는 원초적 힘이었음을 우리는 그의 국가관에서 읽을 수 있다.인권, 자주 등을 정의라고 할 수 있으나 그 시행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박수는 때가 중요하니 때를 알지 못하면 아무리 정의를 행하더라도 중도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구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때와 형세를 아는 것이 중함을 꿰뚫어 본 박수의 통찰력은 지금 시대에 시사하는 바 크다.광복되고 7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100여 년 전 시골선비 박수가 살던 시대와 다르지만 위정자들의 궤변이 진실을 묻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정의와 공정, 민주를 앞세워 교묘히 패악을 조장하는 세력도 여전히 활개 친다. 인권이라는 구호 아래 사회악이 필요 이상으로 보호받기도 하고, 자주국방을 내세워 국가안보를 위험에 빠뜨리려는 세력도 여전히 설치고 있다.이런 불확실한 요인들을 제거할 수 있는 주체는 오로지 국민뿐이다. 국가흥망은 필부유책(國家興亡 匹夫有責)이다. 나라의 흥망은 결국 필부(국민)들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다.

2020-07-27

포항의 아들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사태로 마치 일상이 멈추어 버린 것 같은 이상한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최근 들어 다소 상황이 호전되는가 싶었으나, 재유행의 조짐을 경고하는 방역당국의 안내에 따라 다시 움츠러든 상황이다. 대면활동이 어려우니 예술 활동도 어렵고, 특히 공연예술은 무대를 여는 일 자체가 어렵다. 자구책으로 등장한 언택트 문화가 자리를 잡을 기세다.얼마 전 ‘방방콘’(방에서 즐기는 방탄소년단 콘서트)이 세계의 유료관객 75만 명을 동원하여 250억 원의 수익을 창출했다. 이를 문체부 장관은 ‘신 한류의 새로운 형태’라며 높이 평하였다.아무리 그래도 공연예술은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 제 맛이다. 마당놀이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얼마전 몇 차례 연기하는 우여곡절 끝에 마당극 ‘하얀찔레꽃’을 철길 숲 공원에서 공연하였다. 의외라고 할 만큼 많은 관객이 찾았다. 야외공연이라 코로나의 감염위험이 높지 않았으나 모든 관객들은 마스크 착용 등 방역수칙에 유의하며 출연자들의 소리와 재담, 몸짓에 환호했다.우리 시민들의 문화예술 감상 수준을 알려주는 방증이며, 공연무대의 갈증이 심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포항의 이야기를 토속민요에 담았으니 이것이 바로 지역문화 콘텐츠가 아니겠는가. 선선한 날씨와 배우들의 열연, 수준 높은 관객들이 잘 어우러진 광경을 보면서 문화예술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기제가 됨을 새삼 깨우치게 되었다.요즘 트롯 열풍이 대단하다.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막을 내린 ‘미스터 트롯’에서 포천의 아들임을 자부하는 청년이 진(眞)으로 선정됐다.포천시내 곳곳에는 축하 현수막이 내걸렸고 포천시는 시청사에 대형 현수막을 걸었다. 포천시는 진작부터 그를 홍보대사로 위촉했고, 그가 미스터 트롯 경연에 출연하자 시청 내부 게시판에 응원을 부탁하는 글을 올렸고, 포천시의 공무원들이 자원매니저가 되어 기자들에게 그의 홍보를 부탁했다. 시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약 1천여 명이 똘똘 뭉쳐 지원사격에 나선 것이다. 시장은 회의 때마다 “홍보대사가 잘돼야 포천이 잘된다”며 지원을 독려했다고 한다.대한민국 최고의 남성 4중창 그룹을 뽑는 ‘팬텀싱어’는 성악, 국악,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의 실력파 보컬리스트들이 경연을 펼치는 수준 높은 음악경연 프로그램이다. 지난 4월부터 7월까지 장장 3개월에 걸쳐 방영된 ‘팬텀싱어 시즌3’에서 ‘라포엠’이 최종 우승을 차지했다.라포엠의 리더인 유채훈은 자랑스런 포항의 아들이다. 포항예고를 졸업하고 한양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훤칠한 청년이다.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하였던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힘든 시절, 우리의 귀한 아들이 더욱 큰 나무로 자라고 시민들의 삶에 활력과 자긍심을 높여 지속발전 가능의 에너지가 되기를 바란다. 훈훈한 외모와 빼어난 실력으로 ‘전설의 테너’라 불리는 팬텀싱어 우승자가 포항의 아들임을 널리 자랑하자.

2020-07-27

지극히 높은 놈

“와~~아 뱀이다.”“아~악~악 뱀, 뱀이다.뱀을 봤을 때 당신의 반응은 어디에 속합니까?첫 번째는 우리 아들 친구들이 집에서 키우는 도마뱀을 봤을 때의 반응이라면 그 다음은 누구인지 알 수 있겠죠?우리 집에는 너무 작아서 성별을 알 수 없는 레오와 에드라는 도마뱀이 있다.처음에 작은 아들이 도마뱀을 키우고 싶다고 했을 때 식구 모두가 반대했다. 더욱이 육십갑자를 코앞에 두고있는 아빠의 반대가 심했지만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손에 넣고 마는 우리 아들의 집요하고 뱀같이 영리한 꾀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다.키우게만 해 주면 모든 것을 책임지기로 하고 레오와의 동거가 작년 추석부터 시작되었다.레오는 우리 아들의 예절 선생님이기도 하다, 사육통을 조금만 건드려도 “레오야, 미안해. 스트레스 많이 받았지.”하며 최상의 공손함으로 다가간다. 엄마, 아빠에게는 반말 왕자님인 우리 아들 가장 작은 자를 지극히 높게 대접해야 된다고 하면서 우리 집에서 자기가 제일 높다고 하더니 이제는 더 높은 놈이 생겼다. 레오가 허물벗기를 반복하던 어느날 우리 아들은 희귀동물 수입업자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도마뱀을 한 마리 더 사달라고 했다.그래서 전교 남부회장 선거에 출마하는 조건으로 에드를 샀다.내 돈으로 산 레오와 에드를 1살 많은 형에게 엄청난 힘이 되어 형을 마음대로 부려 먹는다.예상 문제를 주고 테스트를 해서 1개 틀리면 1급, 2개 틀리면 2급이라는 엄격한 잣대로 회장 직인 찍은 자격증도 발행했다. 레오와 에드의 교육에도 열정적이다.“혀 낼름” 하고는 혀 내밀어서 먹이를 먹으면 “잘 했어” 하고 먹이를 준다. 그리고는 뿌듯해 하며 아빠미소로 바라본다.또 하나의 가족이 된 레오와 에드.그 애들의 수명이 25년이나 된다고 하니 어쩌면 엄마, 아빠보다 더 오래 우리 아들 곁을 지켜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효선(포항시 북구 흥해읍 한동로 )

2020-07-27

우편물은 현대슈퍼로

이순혜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해맞이길에 작은 문학관이 있다. 영일만과 청보리를 소재로 많은 수필을 남긴 흑구 한세광 선생님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평소에 찾는 이가 없는 듯 문학관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헛걸음인가 싶어 발길을 돌리는데 출입문에 붙은 종이 하나가 바람에 나풀거린다. 하얀 종이에 한 획 한 획 꾹꾹 눌러쓴 내용은 휴관을 알리며 우편물과 택배는 건너편‘현대슈퍼’에 갖다 달라는 내용이었다. 길 건너를 바라보았다. 지붕은 한 귀퉁이를 바다에 내어주었는지 떨어져 나갔고, 군데군데 칠이 벗겨졌다. 나직이 앉은 담은 어제도 오늘처럼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길 건너 슈퍼는 낡고 허름했지만, 간판은 늘 ‘현대슈퍼’였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현대슈퍼에 배달되었다. 누런 밀가루 포대에다‘콩밭’이라고 꾹꾹 눌러쓴 편지였다. 부모님은 콩밭에 있으니 학교 마치면 미숫가루를 타고 막걸리를 받아 오라는 메시지다. 미숫가루는 집에 있는데 막걸리가 문제였다. 매번 외상으로 달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마루에 놓인 편지는 다양했다.‘구판장에’라는 편지도 있었다. 가방을 마루에 냅다 던져 놓고 구판장으로 달려갔다. 가게에 들어서면 아버지는 막걸리에 취해 불콰한 얼굴로 노랫가락 한 곡조 뽑고, 어머니는 고추장 그릇 옆에서 멸치 대가리를 떼어내고 있었다. 과자 한 봉지를 얻어 가슴에 안고 가게 문을 나설 때, 또 외상일지라도 기분이 좋았다.산골 마을의 뒷산 그림자는 성큼성큼 마을로 내려왔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은 흙 묻은 옷을 털며 대문에 들어섰다. 툇마루에 앉아 날마다 부모님을 기다렸던 내 유년의 시절이었다.호미곶에서 서성이던 바람은 청보리밭으로 가고, 우편물은 현대슈퍼로 가는데, 과거로 보낸 그리움의 우편물은 고향 하늘 어디쯤에서 떠돌까./이순혜(포항시 남구 효성로)

2020-07-27

여우의 아침식사

요즘은 아침 일찍 걷기 운동을 한다. 반환지점에서 다시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여우를 만났다. 캐나다 토론토 시내에서는 흔한 일이다. 허리는 길고 빼빼하게 생겼다. 하기야 살찐 여우를 본 일은 없다. 언제인가 골프장에서 여우를 두세 번 본 것 외에는 보지 못했다. 그랬는데 오늘은 동네 안에서 여우를 만난 것이다. 동네 안에서 여우를 만나기는 처음이다. 의외였다. 마침 주위에 걷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여우와 나밖에 없었다. 내가 일부러 여우를 쫓는 척 하면서 뛰어서 가까이 갔다. 그러나 그 놈은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롭게 살살 도망을 갔다. 계속 따라갔다. 그랬더니 그놈은 얼른 길을 건너서 다른 집 방향으로 갔다. 나는 여우가 간 그 집 앞뜰을 유심히 보았다.그러는 사이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다람쥐 한 마리와 작은 토끼 한 마리가 쏜살같이 길을 건너 도망을 쳤다. 그 뒤를 여우가 따라가고 있었다. 토끼는 멀리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람쥐는 길을 건너 계속 도망가지 않고 땅을 뒤지고 있었다. 어느 사이 여우가 다람쥐를 물었다. 나는 다시 여우를 쫓아갔다. 그놈은 잡은 다람쥐를 입에 물고 여유 있게 길을 건너 어느 집 뜰 앞에 갔다. 입에 물었던 다람쥐를 한두 번 더 물었다 놓았다. 그 사이 다람쥐는 죽은 것 같았다.내가 얼른 휴대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면서 내손에 폰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이때 새총이라도 있었으면 저 여우놈을 향해 쏠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하면 여우는 지금 아침식사를 준비를 잘하고 있는데 잘못하면 내가 방해꾼이 되는 셈이었다. 이른 아침에 여우가 나타난 것은 그 놈도 아침에 일어나 배가 고프니까 아침거리를 장만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이곳은 널려있는 것이 다람쥐다. 약육강식, 다람쥐는 결국 여우나 코요테 같은 짐승의 밥이 된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김용출(캐나다 토론토)

2020-07-27

나는 꽃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인생의 아픈 기억보다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남기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기에 순간의 찰나와 같이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이 느껴질 때면 나는 자동, 반사적으로 셔터를 누르곤 합니다.돌이켜보면 그것도 다 사랑이더라라고 회상되는 순간들이 그리운 향수로 아름다운 향기 가득한 꽃내음으로 사진 안에 남겨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깊은 산속 옹달샘의 맑고 깨끗한 영원의 물같이 우리의 깊은 곳에 간직한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신을 사랑해보세요. 기나긴 추운 겨울 지나 따뜻한 봄을 하염없이 기다린 꽃처럼 참고 인내한 나에게 한마디 해주세요.‘난 참 행복하다’ ‘지금까지 참 잘했어’라고, 진심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토닥여 주고 안아주세요.남들이 볼 때 안 괜찮아도 내가 괜찮으면 다 괜찮은 겁니다.누구보다 더 잘 나고 더 아름답고 싶고, 더 행복하고 싶은 마음들. 우리가 상대와 비교하며 살아가는 잣대를 잠시 멈추고 얼음 속에서 순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꽃을 보며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면 어떨까요?남들과 비교해 내가 가진 게 더 많아 상대적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 혼자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꽃도 사진 속에 그저 꽃인 것처럼, 나는 그냥 남들과 비교한 나의 모습이 아닌 나 자신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무엇을 남들과 비교해 더 못 가져서 부러워하고 잘 나가는 누구를 애써 닮을 필요도 없이 자신이 가진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참 행복한 삶을 살아가세요. /유소피아(사진작가)

2020-07-27

카카오스러움

카카오는 중국기업 텐센트가 3대주주로 있는 포털 사이트 Daum과 메신저 카카오톡을 비롯해 카카오내비,카카오스토리, 카카오택시, 카카오뱅크 등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국내 모바일플랫폼의 갑(甲)이다. 카카오는 2006년 벤처기업으로 시작해 2010년 3월 18일과 8월 24일 카카오톡을 내놓으며 2011년 ~ 2012년에 국민 메신저로 자리매김했다. 자회사로는 카카오내비(구 김기사)를 서비스 중인 주식회사 카카오모빌리티와, 음반·음원 유통사이자 연예매니지먼트 사업을 하는 카카오M 등이 있다.2020년 들어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현상의 증가로 카카오는 그동안 부진했던 각종 지표의 상승세를 맞게됐다. 집에서도 쉽게 이용 할 수 있는 인터넷서비스 기업에 대한 수요증가가 예측되고, 카카오뱅크의 최대주주 지분 획득, 카카오톡 광고 사업 호조에 따라 실적이 나아졌다. 이에 따라 2020년 1분기 창사이래 1분기 최대 매출 및 최고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그 결과 지난 5월 23일, 자산총액기준 재계2위인 현대자동차를 제치고 코스피 시가총액 10위에 등극했다.‘카카오스러움’은 웹 서비스 기업인 카카오가 지향하는 가치를 가리킨다. 여민수 카카오 공동대표가 27일 카카오톡 출시 10주년을 맞아 공개한 영상 메시지에서‘카카오스러운’태도를 몇가지로 정의해 화제를 모았다. 카카오스러움은 바로 △가보지 않은 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본질만 남기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본다 △나보다 동료의 생각이 더 옳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스스로 몰입하고 주도적으로 일한다 △세상을 선하게 바꾸려고 노력한다 등 5가지로 요약됐다. 카카오스러운 기업이라면 벤처기업으로서 어쩌면 성공이 당연해보인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7-27

오만한 권력의 비극적 종말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대통령·국회의원·자치단체장 등 힘 있는 정치인들의 비극적 종말이 반복되고 있다. 권력형 비리나 성범죄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가 하면, 교도소에 수감되어 권력무상을 실감하면서 회한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권력에 취해서 권력의 야만(野蠻)과 비정(非情)을 진즉 깨닫지 못하고 오만(傲慢)했으니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권력의 오만은 어디에서 오는가? 신경심리학자인 로버트슨(Ian Robertson)은 그의 저서 ‘승자의 뇌’에서 “권력을 가지면 뇌가 변한다.”고 했다. 공감능력은 떨어지고 자기중심주의가 강해지면서 합리성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권력을 잡으면 ‘목에 힘이 들어가고’ 권력에 취하면 ‘이성을 상실’하는 이유다.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은 최초로 성희롱변호에 승소한 자칭 페미니스트였지만, 권력을 갖게 되자 ‘성추행’으로 피소되었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가톨릭신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교회의 가르침인 ‘내 탓’은 인정하지 않고 ‘네 탓’만 한다. 취임식에서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다.”고 약속해 놓고서는 잘못이 드러나면 전 정권 탓이고 야당 탓이라고 한다. 게다가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대통령이 성추행 가해자에게는 조화를 보내고 피해자에게는 위로의 말 한마디가 없다. 전형적인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Janus)’의 이중성이다.권력은 마약처럼 중독성 강한 ‘도파민(dopamine)’을 상승시킨다. 정치인이 도파민에 중독되면 이성을 잃고 괴물이 된다. 괴물의 출현은 비극의 시작이다. 때문에 정치인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국속담에 “오만이 앞장서면, 치욕이 뒤따른다.”고 했다. 정치인은 ‘권력에 내재하는 악마적 속성’을 항상 경계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권력이 클수록 그 주변에 모여드는 예스맨(yes man)들이 부르는 용비어천가는 정치인의 이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에 반드시 ‘악마의 대변인’을 곁에 두고 그의 고언(苦言)을 경청해야 한다.하지만 인간은 나약해서 언제든지 마약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아부꾼들에 둘러싸여 도파민에 중독된 권력은 스스로 마약을 끊기 어렵다. 때문에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만이 괴물의 출현을 막을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야당과 지식인의 무거운 책임이 있다. 야당은 수적 열세만 탓하지 말고 정부여당을 제대로 견제해야 미래가 있다. 정의로운 정도(正道)정치는 ‘양이 아니라 질’이다.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권력’과 사회중심적인 ‘이타적 권력’이 충돌할 때 유권자의 선택은 자명하다.또한 여론형성자로서 ‘지식인의 비판적 민감성’이 살아있어야 권력의 오만을 통제할 수 있다. 권력과 야합한 어용언론인, 권력해바라기가 된 어용교수는 무늬만 지식인이지 권력의 시녀일 뿐이다. 지식인의 사회참여는 스스로 권력이 되기보다는 ‘권력과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때 더욱 빛난다. 지식인이 권력이라는 마약을 즐기면서 이를 ‘앙가주망(engagement)’이라고 한다면 ‘소가 웃을 일’이다.

2020-07-27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의 비밀

안재휘논설위원로마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는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에 살던 무시무시한 악당이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해 쇠침대에 눕히고는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서 죽였다.자기가 세운 일방적인 기준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억지로 맞추려는 아집과 편견을 비유하는 관용구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Procrustean bed)’ 연원이다.국회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한 집권 여당의 정치행태를 보면 로마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 이야기가 절로 떠오른다. 더불어민주당과 범여권은 4·15총선 결과 절대다수 의석을 준 민의(民意)를 아전인수로 침소봉대하고 있음이 확연하다.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주문 외우듯 하지만, 행태는 점점 비민주적이다.21대 국회 시작부터 민주당은 법제사법위원장 자리를 야당에 배려함으로써 국회의 견제기능을 보장하던 전통과 관행을 무시하고 점령해버렸다. 국회의 발목을 잡아 온 구태(舊態)를 핑계대지만, 상대적으로 야당을 오래 해온 자신들 발등을 찍는 소리에 불과하다. 집권 4년 차에도 기억에 남을 만한 잘된 정책도 없다. 난장판이 된 부동산 시장은 그 대표적인 실패의 상징이다.문재인 정권 초반의 특징은 ‘전 정부 탓’이었다. ‘적폐청산’이라는 운동권적 선동 광풍으로 입법·사법·행정부를 야금야금 장악했다. 야당의 무기력에 힘입어 총선압승을 일궈낸 뒤에는 의회독주 쓰나미가 점입가경이다. 권력이 ‘준법의식(遵法意識)’을 포기한 나라의 미래는 어찌 될까. 이 정권은 자기들 뜻대로 안 되면 곧바로 ‘법 개정’을 말한다.자기들끼리 만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으로도 야당의 협조를 기대하지 못하게 되자 대뜸 법을 바꾸겠단다. 내년 4월 재보선에 서울·부산시장 후보를 내기 위해 ‘당원투표’ 꼼수를 동원해서 당헌도 바꾸겠단다. 사나워진 민심을 일순 잡아 돌릴 요량으로 꺼낸 ‘행정수도 이전’ 꽃놀이패를 위해서는 ‘개헌하면 된다’고 간단히 말한다. 삼권(三權)을 다 거머쥔 정권답게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소위 ‘검언유착’이라는 이름으로 벌이고 있는 전 채널A 기자와 한동훈 검사장과의 공모 의혹사건에서도 정부·여당의 불순한 권력 행태는 판을 친다. 청와대와 법무부 장관을 뒷배로 놓은 중앙지검장은 직속 상관 검찰총장에 반기를 들고 싸운다. 수사심의위원회가 한 검사장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중단하라고 결정하자, 자기들이 만든 심의위가 잘못됐다며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다. 모두가 끔찍한 반민주적 횡포들이다.‘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에서 정말 치를 떨게 하는 대목은 그 침대에 침대 길이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비밀 장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나그네도 모두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음험한 계략이었다. 야비한 살인자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러나 아테네 최고의 영웅 테세우스(Theseus)에게 걸려들어 자신의 악행과 똑같은 수법으로 쇠침대에서 죽임을 당했다.

2020-07-26

국가의 침묵

‘침묵의 세계’ 저자인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은 상대방에게 말하지 않는 공백상태가 아니며 그 이상의 의미가 존재 한다”고 했다. 침묵 자체가 하나의 독립적 현상이자 존재의 실체라는 설명이다. 그는 두 사람이 대화를 할 때 침묵이라는 제3자가 있으며 그 침묵은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상대에게 전한다고 말했다.말하지 않는 침묵도 언어이며 언어보다 훨씬 더 강력한 메시지로서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본업이 의사였던 작가는 침묵의 가치와 침묵의 존재론적 성격 등을 나름의 이론으로 규명했지만 침묵의 중요성은 이미 고전을 통해 충분히 인식돼 왔다.서양의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이 대표적이다. 동양에서는 삼사일언(三思一言)이라는 말이 있다. 세 번 생각하고 한번 말하라는 것이다. 말에 신중을 기하라는 의미지만 침묵만큼 말의 절제가 중요하다는 가르침이다.불교에서는 묵언수행이란 것이 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참선을 하는 것으로 말을 함으로써 짓는 죄업을 스스로 정화하고자 하는 수행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했다. 착한 말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복덕을 짓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말을 절제하며 살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다.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말할 기회가 늘어나고 말을 잘해야 출세 길도 열린다. 침묵을 덕목으로 알고 침묵만 열심히 하다가는 되레 손해를 볼지 모르는 세상이다. 그래서인지 독설가가 설치고 유언비어나 감언이설이 판을 친다.박원순 성추행 의혹에 대한 침묵이 흐르고 있다. 국가는 정책에 불리한 경우에도 대답을 해야 한다. 침묵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국가나 대통령의 침묵은 국민의 신뢰만 떨어뜨릴 뿐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07-26

그대, 안녕하신가

최미경동화작가지금 이 순간에도 이젤 앞에서 붓을 들고 있는 그대와 지금 이 순간에도 노트북 앞에서 깜빡거리는 커서를 바라보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그대와 지금 이 순간에도 대본을 쥐고 여러 톤의 감정으로 대사를 뱉어내고 있을 그대여.재료비를 벌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배달을 하고 있는 그대와 공연에 올릴 안무를 구상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손님이 고른 메뉴를 적고 있을 그대와 악기를 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전전하고 있을 그대여.그대, 젊은 예술가여. 안녕하신가.그림 그만둘까 합니다. 애들 분유 값도 못 버는데 가장은 무슨 가장인가요…. 무대에 서는 일은 나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요. 아직 어머니 용돈 한번 제대로 드린 적 없어요. 이런 제가 무대에서 관객에게 박수받을 자격이 있나요…. 한 문장에 얼마씩 쳐주면 글 쓰겠어요. 그런데 쓰면 뭐하나요. 아무리 열심히 써 대도 발표할 지면 하나 마땅한 곳이 없는데요…. 좋은 작품요? 아니요, 잘 팔리는 작품이 필요해요. 내 작업요? 내 예술관이요? 아니요, 잘 팔아주는 루트가 필요해요. 그래야 작품 팔아서 재료비라도 벌죠….지금 당장 그만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이 불운한 시대를 버티고 있는 그대, 젊은 예술가여.그대의 작업과 삶을 잇는 전선(電線)은 튼튼한가, 그대 삶과 작업 전선(前線)에 전력을 밀어 넣어줄 동력은 충분한가.이렇게 안부를 전하는 나는, 안녕한가. 사는 일에 급급해 쓰는 일은 뒤로 미룬다는 핑계를 아직 입에 달고 사는가. 좀 더 나이 들면 좀 더 안정되면 그때 쓸 수 있겠지, 라는 믿지 못할 약속에 아직 기대고 있는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고 순간순간 나를 설득하며 아직 견디는가. 그래서 정작 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건 아닌가.그대, 나여. 나, 그대여.이 전선(戰線)에서 오늘 우리가 안녕하길 바라는 건 가혹한 희망인가, 정직한 절망인가. 점점 누추해지는 그대 인생의 봇짐을 단지 그대 한 사람의 잘못으로 내칠 것인가. 아니면 그대와 나, 우리의 봇짐을 모두 풀어내 하나의 목소리를 낼 것인가.그대여, 그대 예술가여!하나의 목소리로 날을 세우자. 한 사람의 목소리는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수 있지만 열 명, 백 명, 천 명의 목소리는 허공을 뚫는 피뢰침이 될 수 있다. 지역의 예술 환경에 대해 지역작가로서 받는 예술복지에 대해 작품을 판매하는 지역 판로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함께 목소리를 내자.숨지 말고 나와서 귀를 열고 눈을 뜨자. 곪은 것은 터뜨리고 해진 것은 기우고 싸워야 할 때는 맞서자. 그렇게 그대의 빵과 그대의 영혼이 예술 전선(電線)으로 튼튼하게 이어갈 수 있도록, 그대의 작품활동이 그대 가족과 같이 나눌 빵이 될 수 있도록. 그대 전선(前線)에서 예술은 하나의 삶이 되도록.그대 젊은 예술가여. 우리 이제 안녕, 하자. 우리가 이제 안녕, 해야 할 때이다.

2020-07-26

시간 살리기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죽일까요?, 살릴까요?” 청부살인업자의 말이 아니다. 머리손질을 하면서 부풀릴지, 눌러 놓을지 손님에게 물어보는 미용사들이 잘 쓰는 말이다. 다른 장소에서 이런 대화를 엿듣게 된다면 ‘혹시 살인을….’하고 한 번 더 대화자들을 살펴봤을 것이다.오랫동안 직업인으로서 죽이는 사람들을 상대했던 것 같다. 남의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범에서부터 남의 재물을 죽이는 강도나 사기꾼은 죽이는 일을 하는 자들이다. 밝고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죽이는 일보다는 살리는 일이 많은 것이 좋다. 그래서 경제 살리기, 4대강 살리기 같은 말들은 희망의 메시지를 담게 되는 것이다. 킬링타임이라고 한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거나 짬이 나는 시간을 때우는 것을 말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시간 죽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 있다. 엘리베이터 탑승시간이다. 거주하는 아파트, 회사, 식당 등 어디를 가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게 된다. 짧은 시간이지만 좁고 폐쇄된 공간에서 무료하고 어색한 시간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간을 죽이는 일이 만만치 않다.짧은 시간이 길게 느껴지고 그 시간을 잘 죽이지 못한다. 벽에 붙은 거울을 보거나 광고물에 눈길을 주거나 층계표시 등을 멀뚱히 바라보게 된다.낯선 장소의 엘리베이터는 그렇다 쳐도 언제부턴가 아파트 같은 동 엘리베이터 시간 죽이기도 마찬가지가 된 것 같다. 이웃집 밥숟가락 숫자까지 알고 지내는 정답던 우리 이웃들의 모습들이 아파트 생활에 뺏긴 지 오래다. 같은 동 통로에 거주하는 사람조차도 서로 알고 지내려 하지 않는 분위기가 되고 있다. 세상이 팍팍할수록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아쉽고 안타깝다. 얼마 전 이사를 하고 이웃집에 인사를 해야겠다고 떡을 좀 장만하려는데 주변에서 말렸다. 요즘 그런 일은 이웃이 싫어할 수 있다고 했다. 이웃에 일종의 신고식 같은 미풍양속인데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같은 통로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게 된다. 시간 죽이기가 시작된다. 여성 동승자라도 탑승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혹시나 제3자가 없는 좁은 공간에서 예기치 않은 오해를 살까싶어 벽면으로 몸을 돌리고 양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꼭 긴 채 고슴도치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게 된다. 물끄러미 천장을 보거나 감시하는 폐쇄회로를 힐끔힐끔 보다가 목적지에 도착해 내릴 때면 동승자의 레이저 눈빛이 뒤통수를 치는 것 같다. 몇 년을 살아도 누구인지 모르고 살게 되는 경우도 많다.며칠 전 엘리베이터 안 시간 살리는 법을 배우게 됐다.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녀석이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안녕하세요?”라고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를 했다. “어으응, 안녕” 누구인지를 몰라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았다. 녀석의 선(先)인사와 몇 호에 사느냐, 몇 학년이냐 등 등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목적 층에 도착했다. 평소 지루하게 느껴졌던 엘리베이터 안 시간 죽이기는 없었다. 죽어가는 이웃 간 정 나누기도 간단한 인사하나로 해결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환한 웃음과 함께 다정한 인사로 엘리베이터 안 시간 살리기를 했으면 좋겠다. “좋은 아침입니다!”

2020-07-26

때묻지 않은 청정영양의 명품 숲, 영양 자작나무 숲!!

오도창 영양군수자작나무는 새하얀 몸체에 녹색의 푸른 잎이 살랑거리는 이국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는 나무다. 나무를 태울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내면서 탄다고 해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나무의 몸체가 희고 얇게 잘 벗겨져서 예전에 종이 대용으로 많이 사용되어져 왔고 기름기가 많아서 불도 잘 붙는 나무여서 정말 다재다능한 나무라 할 수 있다.영양군 수비면 죽파리 깊은 산자락에는 온통 새하얀 자작나무들로 빼곡하다. 내륙지방에서 보기 드문 축구장 40여 개의 면적보다 넓은 규모의 자작나무 숲 단지다. 영양 자작나무 숲은 지난 1993년에 약 30ha의 면적으로 조성되어 30년 가까이 무럭무럭 자라온 결과 지난달 산림청으로부터 국유림 명품 숲으로 선정되는 성과도 있었다.영양의 자작나무는 인제 자작나무 숲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고 줄기 굵기 또한 60cm가 넘으며 어느 누가 봐도 인위적으로 가꾸지 않고 청정공간에서 자란 티가 많이 난다. 자작나무 숲은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없어 자연 고스란히 지켜져 오고 있다. 그야말로 30여년 동안 사람의 손길을 벗어나 오롯이 자연 그대로 자라난 자작나무들은 뽀얀 속살 같은 하얀 껍질을 고스란히 간직해 눈이 시릴 정도다. 숲 속을 걷는 것만으로도 지친 심신의 피로를 그대로 풀어 낼만하다.죽파리 자작나무숲은 속칭 아는 사람만 안다는 베일에 싸인 곳이다. 최근 들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이 자작나무 숲은 우리나라 최고의 산림 휴양지로 가꿔질 계획인데 벌써부터 웰니스 산림관광지, 언택트 여행지 등 다양한 수식어기 붙기 시작했다. 생태경관이 매우 우수해 올해 남부지방산림청 영덕국유림관리소에서 지역특화사업으로 자작나무 숲길 2km 신규 조성을 시작으로 점차 주변 숲을 정비해 기존 검마산과 백암산 등산로, 신선계곡 탐방로 등을 연계하는 것이 목표다. 앞으로 영양 가볼 만한 곳뿐만 아니라 경북에서도 손꼽히는 명소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자작나무 숲은 그야말로 우리 군만의 차별화된 고유자원이다. 우리 군 고유의 관광자원으로 개발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산림청과 경상북도와 긴밀히 협의를 통해 지난해 11월에 ‘영양 자작나무 숲 권역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의 주요 내용은 ‘영양 자작나무 숲 권역 활성화’를 위한 기관 간 역할과 임무를 분담해서 남부지방산림청은 영양 자작나무 숲을 산림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숲길 조성하고 경북도는 인근관광지 연계방안과 산림관광 활성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영양군은 진입도로와 주차장 등 편의시설 조성과 접근성을 개선하고 지속가능한 산림관광자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이번 업무협약은 국유림을 산림관광자원으로 활용함으로써 지역주민 소득증대에 기여하는 등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산림청과 지방자치단체 간 소통체계를 강화해 상생협력하기 위한 사업이다.영양 자작나무 숲은 ‘영양 자작나무 숲 힐링허브 조성사업’이라는 타이틀로 국토교통부가 주관하는 2020년 지역수요 맞춤지원 공모사업에 최종 선정됐다. 이 공모 사업은 최대 20억원의 국비를 포함해 사업비 28억원을 확보해 자작나무 숲 힐링센터, 자작나무 숲 체험원, 에코로드 전기차 운영기반 조성 등이 포함된다. 아울러 우리군은 안내동 신축 예산 4억원, 주차장 부지매입 9억원 확보했으며 현재 종합개발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 죽파리 마을회관에서 약4.7km, 도보로 1시간, 차량으로 15분이 소요된다. 숲 입구까지는 임도로 아직 정비가 되지않아 향후 임도 확ㆍ포장, 주차장 설치 등 숲길 조성 사업을 완료해 숲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할 계획이다.이밖에도 주변 관광자원인 국제밤하늘보호공원, 본신리 금강송 생태 경영림과 연계해 국내 최대 산림휴양자원으로 키워 연간 수십만 명이 찾아오는 지역관광 명소로 만들 생각이다.영양 자작나무 숲은 지역을 대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넘어서 대한미국을 대표하는 산림휴양 관광 거점으로 조성될 것으로 기대한다.

2020-07-26

고디국

비님이 오신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눈도 비도 ‘오시네’하며 대접했다. 내 고향에서는 여름 비 오는 날에는 골부리를 주우러 갔다. 맑은 날에는 해거름에 나오기 시작하는 터라 밤에 심지에 불을 켜서 잡아야 하지만 하늘이 흐린 오늘 같은 날엔 낮부터 골부리도 마실을 나온다. 친구들과 비를 맞으며 물이 무릎까지 오는 마을 앞 냇가로 가서 돌을 들춰가며 잡았더랬다.경상도라도 안동에서는 골부리라 하고 포항 가까운 지역에서는 고디라 한다. 충청도는 올갱이, 강원도에서는 달팽이라 부르는 지역도 있고 전라도는 대사리, 표준말은 다슬기라 한다. 부르는 이름이 많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다.여름에 들어서면서 포항 오천장이 서는 날이면 늘 고디국을 사러 갔다. 특별히 맛있게 끓여서 파는 곳이 있어서 꼭 들렀다. 들깨와 푸성귀를 넣고 끓인다며 별다른 레시피가 없다는 사장님의 말이지만 우리 가족 모두 그 집 고디국의 팬이다.충청도가 고향인 친구가 자랑삼아 올갱이국 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줬다. 5월에 고추를 심고나면 중순부터 모내기를 하고나면 소농들은 고추 따기 전까지 크게 할 일이 없어져서 6∼7월은 올갱이를 줍는 시기였단다. 냇가 중에도 햇빛이 뜨듯이 잘 받는 그런 곳에 씨알이 굵은 올갱이가 산다. 물은 너무 깊지도 않아 천렵하기 좋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 곳의 호박돌(아이들도 들춰 볼만한 수박보다 작은 크기의 돌)에 특히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서 그런 돌을 넘기면 올갱이들이 많이 붙어 있다. 손으로 건들기만 해도 떨어져서 잡기 쉽다. 큰 양파망과 세숫대야 하나씩 들고 간다. 물에 엎드려 양파망에 주워 담은 올갱이를 집까지 살려오려면 대야에 담아 와야 하기 때문이다.온가족이 나들이하듯 밥도 싸서 갔단다. 도시락이래야 맨밥을 주먹만 하게 뭉치고 열무김치와 고추장만 싸서 갔다. 줍다 지치면 나와서 새참 먹다 멱도 감으며 추스르다 양파망 가득 올갱이가 차면 돌아왔단다. 해감한 올갱이는 낡은 옷가지를 함께 넣어 바락바락 문질러서 윤이 나게 씻었다. 채반에 물기를 빼면 안테나 달린 얼굴을 빠끔히 내민다. 아는 맛은 항상 미안함을 누르고 솥에 넣고 삶아졌다.온 식구가 둘러앉아 바느질하던 바늘을 소독해서 까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눈이 침침해 안 보인다고 물러앉고, 아이들은 쏟아지는 졸음과 싸우다 쓰러졌는데도 아침이면 엄마가 만든 올갱이국이 상위에 올랐다. 별 양념없이 된장만 풀어서 집에 있는 푸성귀로 슬렁슬렁 끓인 국이지만 식구들에게는 여름내 보양식이었고, 아버지에게는 특별히 시원한 해장국이었다. 냉장고가 없으니 세끼정도 먹을만치만 끓였고 또 며칠 뒤 나가서 잡아오는 식으로 여름내 올갱이국을 먹었다고 한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다슬기에 대하여 성질이 차고, 맛이 달며, 독이 없는 식품이라 하였다. 초록을 띠는 엽록소에는 식물 10배의 클로로필이 있다. 간에 좋고 눈을 밝게 한다니 만병통치이다.김순희 수필가포항에서는 고디를 삶은 물에다가 들깨국물을 넣고 특히 정구지(부추)를 많이 넣는다. 음력 정월부터 구월까지 김치를 담서 우리네 밥상을 채워준다 하는 정구지와 밭에서 나는 배추시래기·양파줄기·파 등을 더 넣고 끓이다가 고디 살을 넣으면 국이 완성된다. 여름철에 보리밥과 함께 겻들이면 더욱 별미이다.먼저 내온 버섯무침을 맛보며/ 올갱이 잘 줍던 평복이 누나 영숙이 누나,/ 푸근하던 웃음과 눈매 떠오르고, 올갱이 줍던 그 희고 통통하던 종아리들 생각나고,/ 저녁상 물린 뒤 삶은 올갱이 옷핀으로 빼먹던 생각 나고/ 이빨로 올갱이 꽁지 뚝 땐 다음 단번에 쪽 빨아 먹던 형님들 생각나고/ 나도 따라 해보다가 이 아파 쩔쩔매던 생각도 나다가/ ‘영동에서’ 일부(김사인)영양군 청기면에서는 골부리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코로나가 끝나면 영양으로 달려가 종아리 걷고 골부리 잡는 체험을 해볼 작정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도 불러서 말이다.

2020-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