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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모국어가 그리울 때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동네 체육관이 있다. 이름하여 Mitchell Field Community Center이다. 오후 5시경, 걷기 운동을 하러 갔다. 초가을답지 않은 차가운 기온이라 실내에서 걷기로 하고 체육관에 간 것이다. 아래층 농구 코트에서는 고등학생 정도의 학생들이 무리 지어 농구 연습을 하고 있었다. 2층 워킹트렉에는 열심히 돌고 있는 여인들 대여섯 명이 보였다. 남자는 나 혼자였다. 전광판의 시계를 확인하고 걷기 시작했다.나보다 빨리 걷는 이들도 있고 나와 비슷한 속도로 걷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나이 많은 서양 할머니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내가 걷는 속도의 반도 안 되는 속도로 걷고 있었다. 몸이 무거워 걷기가 무척 힘들어 보였다. 살이 좀 많이 찐 편이었다.걷다가 운동기구의 의자에 앉아 쉬었다. 그 표정을 보니 삶에 지친 모습이 역력하였다. 팔순이 넘어 보였다. 그 나이쯤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그때 걷던 젊은 여자가 쉬고 있는 그 할머니와 한참이나 말을 하였다. 아마 모녀지간인 것 같았다. 젊은 여인 역시 몸이 꽤 살이 찌고 무거워 보였다. 그래도 나보다 더 빨리 열심히 걸었다.얼마 걷다 보니 거의 다 나가고 그 육중한 체구의 할머니와 나만 남았다. 할머니는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천천히 걷는다. 나는 그렇게 사십여 분을 걸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그때 그 할머니도 내려와 내가 앉은 의자 끝에 앉았다. 말을 걸어 볼까 하다가 말았다.40여 년을 토론토에 살았어도 영어로 하는 대화는 항상 긴장을 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늘 눈인사로 대신한다. 모국어를 사용한 시간보다 더 오래 외국살이를 했지만 나이 들어서 배운 언어는 늘 입안에서만 맴돈다. 잠시 후 젊은 여자가 와서 할머니를 모시고 밖으로 나간다. 그의 등에 대고 see you again 하고 눈으로만 인사를 했다./김용출(캐나다 토론토)

2020-11-02

그래도 꽃은 핀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겨울에 몸을 움츠리게 하던 찬바람과 함께 뜬금없이 찾아온 불청객은 봄이 지나고 여름을 거쳐 가을이 다 지나도록 떠나지 않고 지척에서 맴돈다. 듣지도 못했었고, 보지도 못했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고약한 그놈과의 불편한 동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 끝은 보이지도 않는다.떠나보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이유가 분명한 그놈이다. 가까이해서는 절대 안 되는 생존의 위기를 초래하는 그놈이다. 떠날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 참 끈질긴 그놈이다. 먹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일상마저 앗아간 몹쓸 그놈이다.학교에 가고 싶은 학생들, 직장에 가야만 하는 가장들, 수십 년 해온 점포를 닫아야 하는 소상공인들, 부모님을 찾아뵈어야 하는 자식들, 명절에도 오지 말라고 한 가슴 아픈 부모님들, 가까이 있어도 못 보는 친구들, 누구나 할 것 없이 일상을 잃어버렸다. 평범했던 일상이 귀하고 소중해진 지금이다.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서로 간에 거리를 두라고 강요하는 매정한 지금이다. 그래도 마음만은 가까이하라고 위안하는 안쓰럽고 안타까운 지금이다. 참으로 잔인한 2020년이다.황무지가 되어버린 일상에도 불구하고 먼 산엔 단풍이 물들었다. 낙엽은 그리움이 되어 떨어지고 얼어붙은 대지에 포근한 흰 눈이 내리고 나면 또다시 봄은 오겠지. 엘리엇(T. S Elliot)의 시 ‘황무지(荒無地)’에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은 피우고’처럼 그렇게 꽃은 피고 지고 또 피겠지. /윤현도(사진작가)

2020-11-02

일안이구(一顔二口)의 괴물

강희룡 서예가괴물은 인간의 내면에 드리운 욕망과 상상력의 산물이다.고대 로마의 문인이며 정치가였던 플리니우스의 ‘박물지’나 오비디우스의 ‘변신’은 유니콘, 그리핀 같은 괴물 이야기를 모은 책들이다.눈이 먼 현자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던 보르헤스(1899~1986)의 ‘상상 동물 이야기’는 서양 괴물 이야기의 집대성을 이루며 그리스 신화의 괴물에서 카프카의 소설 속 크루자에 이르기까지 약 140여 종이 등장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속의 기묘한 이 허구의 존재들은 어쩌면 실제 세계를 더욱 잘 이해하게 해 주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동양에도 이런 고전이 있으니 하(夏)나라의 우왕 또는 백익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산해경(山海經)’이다. 짐승의 몸에 사람 얼굴로 용을 타고 다니는 불의 신 축융(祝融), 뱀의 몸에 사람얼굴로 불꽃처럼 붉은 머리를 가진 물의 신 공공(共工), 범의 몸과 사람 얼굴에 머리 다리 꼬리가 각각 여덟인 천오(天吳), 발 하나에 뿔이 없는 푸른 소인 기(夔) 등 200여 종의 괴물 이야기가 실려 있다.2006년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로 ‘괴물’이 있다. 오늘날 기형괴물의 탄생은 환경오염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이 영화는 1천2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면서 역대 최대 기록을 세웠다.미 8군 영안실에서 근무하는 의사가 발암물질인 포름알데히드 약병에 먼지가 있단 이유로 수 백병이 넘는 이 약을 모두 하수구에 버리면서 버려진 독약으로 인해 한강의 물고기는 곧 상상을 초월하는 괴생물체로 변하여 평화로운 한강에 재앙을 불러온다는 내용이다.이명박 정부 시절 광우병 시위 때 지금의 이낙연 여당대표가 당시에는 야당으로 집회와 시위,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독재정권의 공권력 남용이라며 거리에서 앞장서서 강력히 규탄하더니 지난 개천절 보수단체 집회에 대해서는 여당대표로서 코로라 방역을 빌미로 설치한 버스 벽 뒤에서 공권력의 강경진압과 무관용 원칙을 경찰에 주문했다. 이 행태를 두고 시무7조로 화제를 모았던 조은산 논객이 그가 지은 ‘산성가’에서 ‘얼굴은 하나요, 입이 두 개인 기형생물’이라고 비판했다. 동물은 환경오염으로부터 기형괴물이 탄생하나 인간은 권력과 영욕으로 오염된 영혼 소유자가 정치판에서 정치를 오염시키고 주변인물과 자신도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바로 이들을 얼굴 하나에 입이 두 개인 일안이구(一顔二口)의 괴물들이라 일컫는다. 이들은 본인이나 가족 또는 같은 편의 비위사실이 드러날 경우를 우려해 권모술수는 물론 동질사안에 대해서도 아침저녁으로 말이 바뀌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기형생물체들이다. 내로남불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들은 국민이 임기동안 쥐어준 권력을 남용해 진영의 장기집권과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국가 탑을 쌓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110년 전 망국의 유령이 지금 이 땅에 떠돌고 있다.

2020-11-02

3AS 포항 공공미술 프로젝트

최미경동화작가지난 7월 8일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총 848억원 규모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밝힌 이후 공공미술프로젝트에 대한 지자체와 미술계, 그리고 일반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문화예술 분야의 지원 중 단일규모로는 최대 수준이기 때문이다.전국 228개 지자체에 총 948억원이 나누어질 예정이기에 각 지자체별로 4억원 정도가 배분된다.이번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코로나19로 침체된 미술계 작가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및 지역 공간문화 개선 등을 목표로 지자체별로 최소 18명에서 최대 38명까지의 작가들이 참여하며 예술작품 설치, 문화공간 조성, 도시재생, 미디어·온라인 전시, 주민 참여 프로그램 등 다양한 유형으로 진행되고 지역의 여건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영할 예정이라고 문체부에서는 밝혔다.하지만, 이같이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공공미술 사업에 대한 실효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많다.먼저 짧은 공모기간과 급한 진행이 첫 번째의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사업 공공기간이 짧게는 일주일부터 길게는 이주일, 접수 기간 또한 짧게는 하루 뿐인 곳도 있고 긴 곳은 15일 정도이다. 그래서 공공미술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연구기획기간이 짧기에 조악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더불어 실행 주체인 문화재단이나 담당공무원들의 이해 부족, 전문성 부족, 지자체별 차별성 부족, 유사 선생사업 모방 등의 우려도 드러났다. 그렇다보니 ‘과거 정권에서 실패한 정책의 우려먹기일 뿐’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또한 작가들의 공평한 참여가 배제된 채 협회와 단체들이 독점하는 양태에 대한 문제점도 드러났다.포항에서도 지난 9월 ‘2020 공공미술프로젝트-우리동네’사업 3AS 포항 공공미술 프로젝트라는 명칭으로 포항문화재단에 공고가 났다. 총 6개의 작가팀이 공모했고 먼저 그 중 1팀이 선정되었고 이후 포항문화재단은 10월 재공모를 거쳤다. 재공모에 선정된 팀은 1차 공모에서 떨어졌던 작가팀의 팀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자신들이 기획했던 프로젝트를 공유하며 수정-보완-반성해서 다시 하나로 만든 팀이었다. 팀원들의 성향과 활동영역은 달랐지만 그들이 하나로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지역의 작가가 지역의 공간을 지역주민들을 위해 만들어보자는 마음이 하나로 모였기 때문이었다.선정된 2팀 모두 아직 컨설팅 단계와 작품의 창작, 설치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하지만 두 팀 모두 제대로 된 과정을 통해 공공미술이 단지 공공 공간에 미적 가치가 있는 오브제를 들여다 놓는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고 그 장소가 가진 기억과 지역민의 의식을 담아 감성과 가치가 담긴 오브제를 만들 길 기대해 본다.또한 시간에 쫓게 지역의 특성과 여건, 주민을 고려하지 않고 프로젝트 결과물에만 집착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란다.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좋은 취지와 목적으로 시작된 만큼 3AS 포항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대한 포항 시민 모두의 관심이 필요하다.

2020-11-02

한미동맹, 격랑 속으로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한미동맹이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동맹의 불신과 균열이 매우 우려할만한 상황이다. 이슈(issue)에 따른 단순한 이해관계나 견해차이가 아니라 동맹의 성격과 목적에 대한 근본적 이견이 충돌하고 있다. 한미동맹 70년 역사상 처음으로 경험하는 최대의 위기다.동맹의 생명인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 무엇보다 한미동맹에 사활이 걸려 있는 한국의 안이한 인식과 비현실적 외교가 심각하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의 판문점선언 및 군사합의가 한미동맹에 영향을 미치는데도 미국과 사전협의가 없었고, 중국을 의식한 균형외교는 동맹국인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불신을 자초하였다. 또한 냉전적 군사동맹을 평화동맹으로 전환하자는 이인영 통일부장관의 주장은 한미동맹의 성격과 목적을 완전히 왜곡하였다. 한미동맹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억지력(deterrence)’이 그 핵심인데, 북한의 핵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핵확산억지력’ 밖에 없음을 왜 모르는가? 게다가 동맹외교의 최전선에 있는 이수혁 주미대사는 “70년 전에 미국을 선택했다고 앞으로도 미국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동맹의 신뢰를 스스로 훼손하였다.물론 동맹국인 미국의 책임도 적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우선주의’는 동맹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동맹국이 미국을 이용해왔다는 ‘편협한 동맹관’에 입각하여 무리한 방위비 인상을 압박함으로써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주한미군이 가져다주는 미국의 전략적 이익과 안보증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미국은 일방적으로 반중(反中) 쿼드(Quad) 및 5G 클린네트워크(Clean Network)에 한국이 동참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나아가 에스퍼(M. T. Esper) 국방장관은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동맹국들에게 아시아판 NATO를 제시함으로써 한·중 전략적 협력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양국의 동상이몽(同床異夢)도 심각하다. 한국은 선(先) 종전선언 후(後) 비핵화이지만, 미국은 선 비핵화 후 종전선언이다. 한국은 전시작전통제권 조기전환을 주장하나 미국은 조건충족이 먼저라고 본다. 정부가 추진하는 미·중 균형외교 및 북·미 중재외교는 한·미 동맹외교와 충돌하고 있다. 방위비협상이 길어질수록 동맹의 불신만 깊어질 것이며, 미·중 패권경쟁에서 동맹의 편에 서라는 미국의 요구는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갈등으로 최근의 한미안보협의회(SCM)는 예정된 공동기자회견마저 취소되었다.이처럼 현재의 한미동맹은 중병에 걸려 있다. 치료를 서두르면 동맹이 회생될 것이지만 방관하면 동맹이 와해될 수도 있다. 동맹의 치유는 양국의 신뢰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동맹은 같은 생각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신뢰관계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친중탈미(親中脫美)’나 ‘친북탈미(親北脫美)’는 동맹에 대한 배신이다. 동맹의 존립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가치와 이익의 공유’를 위한 전략소통과 정책조율이 시급한 시점이다.

2020-11-02

암호화화폐 스캠 주의보

본래 스캠이란 ‘도박판에서 상대방을 속이는 행위’로 경제사기수법 용어로 통용된다. 암호화폐 시장에선 투자자를 현혹해 투자금을 가로채고 잠적하는 행위를 말한다. 스캠 일당이 온라인 메신저나 SNS로 피해자에게 접근해 특정 계좌번호나 지갑 주소에 자산을 이체하도록 유도한다. 신종스캠은 기존 스캠에서 한단계 진일보한 사기유횽이다. 피해자의 이성적 호감을 이용한 로맨스 스탬에 피해자에게 실제 수익이 나는 것처럼 위장하며 경계심을 풀게하는 수법이 고도화 됐기 때문이다.먼저 일당은 데이트앱에서 범죄대상을 물색한 뒤 이성적 호감을 사 경계심을 누그러뜨린다. 처음에는 호감으로 접근한 것처럼 속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암호화화폐 투자를 권유하기 시작한다.실제 사례를 보면 A씨는 사회관계망 서비스에서 이성 B씨를 알게됐다. 어느날 B씨는 쏠쏠한 수익을 올렸다는 해외소재 암호화화폐 투자사 홈페이지를 소개했다. A씨는 B씨가 소개한 투자사 가상지갑으로 비트코인을 전송했다. 처음 걱정과 다르게 상당한 수익이 나왔다. A씨는 수익금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투자사는 해외세금 등을 이유로 고액의 추가 입금을 요구했다. 문제는 추가 입금에도 수익금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 B씨는 잠적했고, 해당 홈페이지도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한마디로 신종 스캠수법이다.국내 암호화폐거래소 고팍스의 자금세탁방지팀에 지난 10월말부터 4건의 동일한 유형의 스캠 사기신고가 접수됐다. 4건 가운데 3건은 거래소 차원에서 사전에 암호화폐 인출을 막아 금전피해를 막았지만 금융당국은 수면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피해사례가 더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어떤 경우든 낯선 이의 투자권유와 접근은 경계하고 볼일이다.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11-02

이번 미국 대통령선거를 보는 눈

11월 3일 미국에서 제46대 대통령선거와 더불어 상원과 하원 의원선거, 주요 주지사선거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민주당의 조 바이든 후보가 신임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이라는 예측이 높은 가운데, 민주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상원과 하원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차지한다면 최소한 앞으로 2년간은 민주당의 색채가 짙은 과감한 정책이 추진될 가능성이 크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거나, 민주당 정권이 탄생하더라도 상원에서 다수당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미국의 앞으로 대내외 정책의 불확실성은 커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지역 업계도 이번 미국 선거를 주의 깊게 관찰하여 미국발 정책 리스크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에 참여할 권리인 참정권, 다시 말해 투표할 수 있는 시민권을 가졌다고 해서 한 나라의 정책 수립과 집행 과정에 직접 개입할 틈은 사실상 거의 없다. 그저 자기 생각과 대체로 비슷한 성향을 지녔다고 착각한 정치인이나 특정 정당의 공약을 보고 한 표 찍는 것으로 지금보다는 내 입맛에 가까워지기를 막연히 바랄 뿐이다. 하지만 일단 선거가 끝난 다음부터는 소득, 고용, 소비, 교육과 같은 개인과 가정에 직접 연결되는 모든 영역에서 즉시 영향이 나타난다. 싫든 좋든 그러한 영향에서 벗어나려면 다시 새롭게 그 나라의 정계 구도가 재편되기 전까지는 감내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평생 자기가 원했던 정치인을 뽑고 예상대로 국가 정책이 집행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행운을 얻는 시민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자기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중요한 선거인데도, 우리는 인간이기에 매번 선거철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 사고의 영향을 받거나 분위기에 휩싸여 순간적으로 지지 대상을 바꾸는 경우도 많다. 때에 따라서는 투표를 하지 않거나, 반대로 한 번도 투표하지 않았던 사람까지 투표권을 행사하기도 한다.이번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그런 모습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선거결과 미국 정계가 앞으로 어떻게 재편될 것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그동안 불거진 인종차별 문제, 민주당이 정권을 잡게 되면 총기 보유 규제가 강화되리라는 전망과 겹치면서 미국 사람들이 혼란에 빠진 모습이다. 심지어 아예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올해 생전 처음으로 총을 산 사람만 500만 명을 넘겼다고 한다. 게다가 이번 대선은 코로나19의 대책으로 우편투표가 많이 늘어나 평소보다 선거결과가 집계되는 시일이 늦어지기 쉬워 개표결과를 의심하는 사태까지 일어날 위험도 있어 안심하기 힘든 상황이다. 11월 3일에 이루어지는 대통령선거를 8일 앞둔 시점인 10월 26일까지 사전투표를 마친 유권자가 6천만 명을 넘겼다. 플로리다 대학에서 ‘미국 선거 프로젝트’를 주관하고 있는 마이클 맥도날드 정치학 교수는 이번 선거의 예상 투표자는 총 유권자의 65% 수준인 약 1억5천만 명에 달해 1908년 대선 이래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할지도 모른다고 예측하였다. 당시 남부에 지지 기반을 둔 민주당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후보가 17개 주에서 승리하였으나, 공화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후보가 북부를 중심으로 29개 주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제27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적이 있다. 이번 선거가 당시처럼 미국 유권자에게 높은 관심을 받으며 예측불허의 승부가 예상된다고는 하나 정치 관련 전문기관 대다수는 그때와는 달리 조 바이든 후보를 낸 민주당이 승리할 것으로 보고 있다.이번 선거는 마침 대통령선거에 더해 상원과 하원 선거, 일부 주지사선거까지 겹쳐 더욱 열기가 높다. 당연히 이번 선거결과는 우리나라도 정치, 경제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크든 작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발표된 지지율 분석결과를 종합해보면 일단 대통령선거에서는 조 바이든 후보가 신임 대통령으로 당선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다른 선거에서는 과연 어떠한 결과로 예측되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11월 3일 대통령선거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연방 하원과 상원의 선거결과는 내년 1월 20일 취임할 제46대 미국 대통령의 정책운영에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하원 선거는 과연 어떻게 될까. 현재 미국 하원의 전체 의석수는 435개다. 하원 의석은 각 지역 인구수에 비례 배정되는데 의석이 1개인 주는 7개 주(알래스카, 몬태나, 델라웨어, 노스다코다, 사우스 다코다, 버몬트, 와이오밍), 20개가 넘는 주는 4개 주(캘리포니아 53개, 텍사스 36개, 플로리다 27개, 뉴욕 27개)다. 하원 임기는 2년이기 때문에 모든 의석이 이번 선거에서 새로 결정된다. 선거 직전인 현재 의석 분포는 결원이 있어 민주당 232개, 공화당 197개지만 이번에도 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의 정치 전문채널 538은 민주당 239석, 공화당 196석으로 예측하였다.만약 상원까지 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하면서 조 바이든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새로 출범할 민주당 정권의 주요 정책들은 아무런 걸림돌도 없이 신속하고 강력하게 추진되기 쉽다. 마치 버락 오바마 제1기 정권의 전반기(2009년부터 2010년)처럼 대담한 정책을 시도할 가능성이 커진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말할 것도 없고, 설사 재선에 실패하더라도 공화당이 지금처럼 상원에서 다수당을 차지하게 되면 바이든 정권이 탄생하더라도 의회에서 발목이 잡혀 획기적인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거나 집행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이렇듯 관심이 높은 미국 상원 의석수는 인구수와 상관없이 50개 주마다 상원의원 2명이 배정되기 때문에 총 의석수는 100개뿐이다. 상원 임기는 6년인데 2년마다 전체 의석의 3분의 1씩 교체하기 위한 선거를 한다. 올해 상원 의석 가운데 선거대상 주는 34개지만 조지아주에는 결원에 따른 보궐선거 1개가 있어 새로 선출되는 의석수는 35개다. 지금의 35개 의석 분포는 공화당 23개, 민주당 12개로 공화당이 민주당보다 우세하나 상황은 전혀 다르다. 현재 전체 상원 의석 분포는 공화당 53개, 민주당 45개, 무소속 2개지만 무소속 의원이 민주당과 투표 행동을 같이하고 있어 공화당 53개와 사실상의 민주당 47개로 의석 차는 6개다. 하지만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2021년 1월 3일 개회되는 상원에서 민주당이 현재 의석에서 3석만 늘리면 사실상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다. 상원의장을 부대통령이 겸직하기 때문이다. 만약 공화당 정권이 이어진다면 상원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려면 의석을 4개 늘려야만 한다. 미묘한 상황이지만, 10월 22일 현재 주요 예측기관들의 11월 3일 선거를 하는 34개 주에 대한 분석결과는 민주당이 현직 상원의원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12개 주 가운데 재선에 불리하다고 예상되는 주는 3개 주(알라바마, 미시건, 미네소타)뿐이다. 반면, 공화당의 경우에는 현직 23명 가운데 낙선이 우려되는 주가 8개 주(아리조나, 콜로라도, 조지아(보궐선거 포함 2명), 아이오와, 메인, 몬태나,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9명에 이른다. 공화당 의원이 의석을 잃을 것이라 예상하는 의석수가 민주당보다 3배나 많다. 전문 예측기관들은 선거결과 상원 의석 예상분포를 민주당 52~53개, 공화당 47~48개로 보면서 민주당이 상원에서 다수당을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만약 미국의 제46대 대통령으로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가 당선되고, 상원과 하원에서도 민주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게 된다면 적어도 2년 동안은 민주당 색채가 강한 대내외 정책을 비교적 수월하게 추진할 수 있을 전망이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더라도 상원과 하원에서 예측대로 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게 되거나, 반대로 민주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상원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탈환하지 못하게 된다면 미국의 향후 정책 방향에 대한 불확실성은 더욱 커지기 쉽다. 앞으로 지역 업계는 이번 미국의 선거결과에 대해 지금까지 이상으로 세세하게 살펴 경영전략을 조정해 나가야만 미국발 정책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2020-11-01

요즈음의 이웃사촌

윤영대수필가이웃사촌이란, 옛날 집성촌이 많을 때 이웃에는 사촌들이 많아 길흉사에 서로를 도우며 의존하며 정답게 살아가던 시절의 풍경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가족 수도 줄고 또 도시로 흩어지면서 이웃에는 남들이 많아지게 되었고 친족들은 명절에나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가깝게 사는 이웃이 오히려 혈육처럼 허물없고 매우 가까운 관계가 된다는 말인데, 이제는 이웃사촌이란 말도 옛말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회적 현실이다.80년대를 지나면서 지방에도 아파트 붐이 일었고 인간미가 정겹던 골목길이 사라져갔다. 아파트가 20층이라면 한 통로만 하더라도 좁은 골목길에 40여 채 이상의 집이 모여있는 큰 마을인 셈이다. 동네 마을은 골목길 오가며 인사도 나누고 담장 너머로 집안 사정도 볼 수 있지만, 밀폐된 아파트 마을은 앞집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현관문은 꼭꼭 잠기고 문패도 없어 성도 이름도 모른다. 아기들을 키우며 집을 지키고 이웃과 웃음을 나누던 집안의 여성들도 맞벌이 등으로 집을 비우면 옆집 이웃은 없는 것과 같다. 얼굴을 보는 것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수십 초간, 서로 인사도 말도 없이 내려버린다.한 아파트에서 20년 가까이 살았어도 이사가 빈번하여 주민들이 바뀌니 대부분 낯설다. 다행히 오래 살다 보니 터줏대감이 되었고 나와 비슷한 나이의 분들이 몇 집이 있어 정답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제는 허물없이 대화하며 짐도 들어주고 가끔 바로 아래 선술집에서 한잔하기도 하는 참으로 좋은 이웃사촌이 되었다.어린아이들을 볼 때면 귀엽고 사랑스러워 말을 붙여보고 싶어도 옆의 아빠 엄마가 이상한 눈초리로 볼 것 같고, 아침저녁 밝은 얼굴로 만나는 학생들에게 무언가 묻고 칭찬하고 싶어도 두렵다. 특히 여학생이 경우 성희롱이 아닌지 의심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나는 교직에 있었다는 배짱으로 한 마디씩 물음을 던지다 보니 학생들도 이제는 먼저 인사를 하곤 한다.요즘 층간소음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밀폐된 아파트 문화가 낳은 이웃에 대한 서로의 배려 부족이리라. 1970년대 아파트는 주로 5층짜리였지만 그때 친구 집에 갔다가 그의 아내에게 들은 얘기가 아직도 귀에 남아있다. 타지에서 온 신혼부부라 이웃도 없어 남편 귀가 시간만 기다리고 있을 때, 윗층에서 아이들이 뛰고 웃는 소리에 이웃이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 마음 푸근히 고마웠단다.이웃이 사라진 도시의 아파트 문화, 그나마 있던 반상회도 없어져 이제는 같은 통로의 이웃 사정도 쉽게 듣지 못한다. 옛날은 수평 이웃이었지만 이제는 수직 이웃이라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다. 근래 어느 도시마을생활 인식조사에서 ‘인사 나누는 이웃-5명 이하’가 51.3%로 절반을 넘는다니….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국가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가까운 이웃은 일본과 중국인데 사이좋게 동아시아의 번영을 같이 이루어 가면 좋으련만 서로가 층간소음을 내며 신경을 날카롭게 하니 안타깝다.‘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라는 속담을 되새겨본다.

2020-11-01

詩가 흐르는 뜨락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스치는 바람 결에 풍경소리 맑고 풍금소리 정겹게 들리는 풍경이다. 바람소리 새소리가 간간이 울리는 서옥(書屋)의 뒤뜰에서 잔잔한 배경음을 바탕으로 시 낭송하는 소리와 문학 얘기를 나누며 공감하고 담소하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도심의 한 켠에서 시와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시를 읽고 시 이야기를 나누는 이른바 ‘시가 흐르는 뜨락(詩뜨락)’의 행사 장면이다.‘도심 속 작은 쉼터 아늑한 정원에는/이따금 풀꽃의 속삭임이 들려오고/새들의 지저귐 같은 낭랑함이 퍼진다//시(詩)의 행간에 목소리가 스며들어/그림을 그리듯 날개를 달아주니/비로소 시의 꿈이 피고 맵시마저 곱구나//별빛처럼 타는 운율 영롱함을 더하고/도란도란 엮는 시담(詩談) 달빛에 젖어 드네/뭉클한 감미로움이 새록새록 아리네//꿈결같은 시가 흐르는 뜨락에는/바람의 몸짓으로 시흥(詩興)이 어우러져/새로운 문화의 요람 향기 짙게 울리네’ -拙시조 ‘ 시(詩)가 흐르는 뜨락’ 전문.‘詩뜨락’ 행사는 일종의 시낭송 콘서트다. 경향의 저명한 시인이나 문인을 우거에 초빙해서 시낭송가들의 낭랑한 음성으로 음악을 곁들여 시를 낭송하고 시인의 시작(詩作) 배경과 삶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누는 시 누림이다. 즉, 저자와 독자가 같은 공간에서 가까이 만나 소통하고 문학적으로 교감하는 시 나눔 마당이다. 이러한 행사는 포항시낭송협회와 필자가 공동으로 작년부터 열기 시작하여 지난 주말에 네 번째로 열리면서 세간에 회자되어 시 감상과 시 낭송 콘서트의 대중성을 지향하는 새로운 문화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한 편의 시에는 소설같은 스토리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시에는 응축된 시간과 함축된 생각, 농축된 경험과 절절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는 가장 짧은 문장으로 가장 긴 울림을 준다고 했던가. 때로는 연분홍 편지 같고 아스라한 절해고도 같으며 한편으론 뇌성벽력처럼 일갈하는 시를 진지하게 또는 애절하게 낭송하는 것은 시의 행간에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활자화된 시에 어울리는 멋진 옷을 입혀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에게서 떠난 시는 독자의 몫이라지만, 시에 걸맞는 음색으로 옷을 입혀서 행과 연의 율격에 따라 목소리의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며 표정과 몸짓으로 다시 우려냄은 시를 애틋하고 살갑게 가슴에 품는 일이다.표현하는 사랑이 아름답듯이 시낭송은 또 다른 색조의 감동을 전해준다. 저마다의 목소리와 특유의 표정, 몸짓으로 연출해내는 시낭송은, 시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가슴을 열게 하여 손으로 만져질 것만 같은 느낌과 운치를 더해준다. 시의 행간에 목소리가 스며들어 고운 음색과 조화로운 음률로 시를 단풍처럼 물들게 하는 것이다.시의 날(11월 1일)이 있는 계절에 별빛처럼 시가 흐르고 꿈결처럼 시 얘기가 피어나는 뜨락에서 시의 맛과 멋을 음미하며 교감하고 담소하는 아름답고 귀한 자리가 많아지고 계속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이러한 시 울림은 코로나19로 인해 소침해져가는 마음을 위무하고 활기를 더해주는 감성의 활력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020-11-01

오만(傲慢) 증후군

증후군(症候群)이란 질병의 몇가지 징후가 늘 함께 나타나지만 그 원인이 명확하지 아니할 때 쓰는 용어다. 영어로 신드롬이라 한다.권력이란 남을 합법적으로 지배하는 수단이다. 정부가 국민에게 강제하는 공권력 같은 것을 권력이라 한다. 권력이 꼭 정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이나 사회적 관계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권력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정치권력만큼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은 없다.권력이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합법적 수단이라는 점에서 신중히 사용돼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권력을 남용해서 빚어진 불행한 일은 역사적으로 얼마든지 있다. 독재자의 말로 등이 그런 것이다.미국의 심리학자 대커 켄트너 교수는 “견제 없이 권력을 누린 자는 뇌 손상을 당한 사람처럼 공감 능력을 상실한다”고 말했다. 타인을 생각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실패에 대한 걱정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권력자의 공감능력 부족 등의 현상을 오만 증후군이라 부른다.상당 시간 견제 없이 권력을 누리게 되면 이런 증상은 더 심각해진다. 권력자는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자신에 대한 비판적 의견은 외면한다. 권력 집단의 판단에 대해 언제나 자신감이 넘쳐난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국정을 1인 운영체제로 만들고 그에게 견제와 균형을 요구했던 참모 다수를 해고한 것을 두고 미국 내에서는 오만한 권력의 행태로 보는 시각이 많다.오만 증후군은 일종의 권력이 낳은 부작용이다. 권력을 남용하거나 국민의 뜻을 외면한 권력자의 독주가 빚은 잘못된 결과물이다. 집권당인 더불어 민주당이 5년 전 국민과 약속했던 당헌 규정을 내팽개치고 서울·부산시장 후보를 내기로 내부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여당의 오만 증후군이 또 하나 추가되는 순간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11-01

‘팬덤(Fandom) 정치’ 망국론

안재휘 논설위원지구상에 광신정치(狂信政治)가 처음 나타난 게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21세기 대명천지에도 여전히 치밀한 선동전략에 의해 지도자를 신격화하여 미친 듯이 지지하는 나라가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긴 왕조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는 백성의 섬김이란 충효(忠孝) 사상을 중심으로 강요된 복종이었다. 나라는 온전히 왕의 소유물이고 백성은 오로지 얻어먹는 비렁뱅이 취급을 당했다.북한은 그 인민들이 동족이라는 사실을 빼고 나면 완전히 다른 행성의 나라다. 그 독재구조를 보면 왕조시대에서 오히려 퇴보한 국가체제라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선택하고 발전해온 우리나라에서도 양태는 조금 다를지언정 결과는 마찬가지인 전체주의의 비극적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대한민국 건국 이래 팬덤(Fandom) 정치는 늘 있었다. 8·15광복 이후 나타났던 팬덤 정치는 교육받지 못한 국민이 일부 명망가를 중심으로 한정된 정보를 갖고 극소수가 따로 뭉치는 정도였다. 전혀 새로운 양상의 선진적 팬덤 정치를 만들어낸 사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노무현이 무명에 가까운 정치인에서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나타난 팬덤 현상은 우리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독창적인 정치모델이었다. 투신자살이라는 비극적 종말을 맞았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팬덤 정치의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그 가능성을 상속받아 더욱 정교해진 선동기술에 의해 정치를 만들어갔다. 작게는 25%에 이르는 범(凡)친문계열 골수 지지층의 정서는 독특하다.친문계열은 친노가 그 핵심이다. 하지만 친노와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친노의 핵심인 노사모는 ‘노무현이 그저 좋은’ 사람들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친문은 다르다. 특히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의 준말)으로 불리는 핵심은 노사모와는 달리 이익 집단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진중권 같은, 한때 진보 논객이었던 사람들은 그 변질에 치를 떤다.조국 사태 때는 물론이고, 작금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해괴한 권력 힘자랑 현상에서 나타나는 그 자신감의 저변에는 바로 그 팬덤 정치에 대한 확신이 존재한다. ‘대깨문’들의 행태에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이성 따위는 전혀 작동되지 않는다. 오로지 확증편향으로 굳어진 아적(我敵) 개념만이 그들의 언행 양식 일체를 결정한다. 누군가 좌표를 찍어주기만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몰려가 때려 부수는 원초적 복종만이 작동할 따름이다.더불어민주당이 당헌을 뒤집고 내년 4월 서울·부산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래도 이기고, 저래도 이긴다는 팬덤·광신정치에 물든 자신감이 그들의 행태를 뒷받침한다. 이제 이 문제는 온전히 국민의 판단력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되었다. 괴물처럼 변해버린 팬덤 정치가 이 나라의 또 다른 치유 불능의 고질병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중우정치(衆愚政治)의 망령이 어른거리는 우울한 11월이다.

2020-11-01

진일보하고 있는 평생학습도시 청도

이승율청도군수우린 교육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공교육에 각종 사교육, 인터넷에 흘려 넘치는 정보 속에 사는 것이다. 사교육으로 부모의 허리가 휘지만, 우리 부모세대와 우리는 자식을 공부시키는 것이 큰 목표 중의 하나였다.지금은 누구나 대학진학을 꿈꾸지만, 자식을 대학에 보낸 것이 부모의 자랑거리인 시기도 있었다.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먹는 것조차 아끼며 오직 자식이 잘되기만 고대하던 아픈 추억이 있다.청도는 자식 뒷바라지에 청춘을 바친 많은 군민이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농촌도시다.군은 교육을 받고는 싶었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교육과 동떨어진 삶에 평생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해야만 했던 군민을 위해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평생학습교육을 군정목표로 삼아 평생교육진흥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전담부서 설치, 전문가를 채용해 평생교육 중장기 종합계획을 수립하는 등 지역민의 행복한 삶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그 결과 2014년 10월 교육부로부터 평생학습도시 지정을 받았다.평생학습도시 지정을 받은 이후 행복학습센터 공모사업과 평생학습도시 특화 프로그램, 성인문해교육지원 사업, 지역 특성화 평생교육프로그램 운영 등 지역민의 평생교육에 전력투구했다. 이러한 청도군의 노력은 많은 국비와 도비를 확보하며 2017년 경북도 평생교육시책평가 대상을 받고 2018년에는 최우수상을 받는 결과로 나타났다.또, 경북도민 평생학습을 통한 행복지수 2016년 조사에서 도내 5위와 군부 2위를 차지하고 2017년 10월에는 인구 5만 명에 상대적으로 부족한 인프라에도 제5회 경북도 평생학습박람회를 개최해 32만 명이 관람하는 성과를 거두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지난해에는 중소벤처기업부 지역특구 평가에서 ‘청도우리정신글로벌화 교육특구’가 전국 197개 지역특구 중 10위 안에 들어 시상금을 받았다. 평생학습을 통한 행복지수는 학습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부정적인 정서가 감소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평생교육이 군민에게 끼친 영향력을 알 수 있다.평생학습은 연속성과 지역밀착, 수요에 따른 공급이 우선되어야 한다. 군은 제2차 평생학습 중장기 계획을 세워 연도별 전략적 특성화 프로그램 아이템 발굴, 주민요구조사를 통한 주민 맞춤형 교육 등 전략적이고 수준 높은 평생학습문화를 선도해 나갈 것이다. 올해 문학자판기를 민원실에 운영해 기다리는 민원인이 다양한 수필과 시, 문학, 명언 등을 제공하고 있다.평생교육은 시대상을 반영해야 한다.청도군은 평생교육을 온라인까지로 확대하는 교육환경체질개선에 나서 온라인 평생학습센터가 평생학습의 귀중한 자료와 지역의 학습자료를 축적해 지역의 평생학습 플랫폼으로 자리 잡도록 할 것이다. 생애단계별과 연령별, 성별, 환경별 다양한 잠재적 교육집단의 발굴을 통한 평생교육프로그램도 개발한다.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교육과 글로벌 시민교육, 환경교육 등으로 국제교육연합도시나 유네스코 글로벌 평생학습도시네트워크의 가입을 추진한다. 청도군의 이러한 노력과 결과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군민들이 있을 것이다.앞으로 마을단위의 평생교육 전폭 확대, 평생학습센터 확장, 지역개발사업과 도시재생 등에 필요한 주민교육, 두 가지 이상의 학습방법을 결합하는 블랜디드 러닝(blended learnig)과 비대면 교육 등 시대적·환경적 변화를 반영한 평생교육에 나설 것이다. 또 지역사회의 소외계층을 위한 사업을 확대하고 여성의 취·창업교육으로 일자리 마련, 청소년의 인성교육 등 평생교육에서 소외되는 군민이 없도록 할 것이다.청도군은 지역의 평생교육에서 나아가 세계평생학습포럼과 전국단위 평생교육 행사를 지역에 유치하는 꿈을 갖고 있다. 꿈이 꿈으로 그치지 않고 현실로 실현될 때 그 가치가 있다.청도군은 지역민의 행복지수가 점점 높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청도군을 거론하면 청정자연에 소싸움과 운문사 등 지역명소를 떠올리는 것과 함께 평생학습도시 청도를 말하게 할 것이다. 무분별한 교육의 홍수 속에서 지역민에게 꼭 필요한 평생학습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다른 지자체가 부러워하는 평생학습도시로 청도는 진일보해 나갈 것이다.

2020-11-01

기차와 향나무

경주 불국사역에는 무궁화호만 지난다. 멀리서 바라보면 전통 기와를 얌전히 이고 있어서 새로 만들어진 역에서 느낄 수 없는 세월이 느껴진다. 가을 햇살이 그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조그마한 역이지만 100년의 역사를 품고 있어서인지 작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함께 간 친구는 불국사란 이름이 붙은 역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불국사 근처에는 시장 이름도 불국사시장, 밀면집도 불국사를 앞에 달고 장사를 하고, 길 이름도 불국로라 붙였다. 불국사의 그늘이 넓게 펼쳐져 있다.고려말 조선 초의 문인 ‘이행’은 소를 타고 여행을 했다. 그는 달 밝은 밤이면 술 한 병 옆에 차고 소 등에 걸터앉아 느릿느릿 산수를 거닐었다. 소보다는 말이 빠르지만 모든 것은 천천히 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법이라고 읊조렸다. 빠르기로 치면 KTX 열차가 제일이지만 달빛에 비친 아름다운 자연을 찬찬히 보기엔 소를 탄 것처럼 무궁화 열차만 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옛날에 사라진 비둘기호의 전설은 뒤로 미뤄두고 말이다. 느림의 미학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며 천천히 자연을 감상하는 둘레길이 만들어지고 스스로를 슬로우시티라고 이름 붙이는 곳이 늘어났다.경주는 이런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느리게 여행하기에 좋은 곳이다. 그 처음 시작이 불국사역이다. 몇 해 전 포항에서 기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갔었다. 부산 구포역을 거쳐 순천까지 가는 열차였다. 새벽에 출발해서 해운대를 지날 때쯤 바다에서 해가 떠오른다. 그 장면을 보려고 일부러 무궁화호를 탔었다. 그해를 마지막으로 해운대 노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져서 지금은 그 레일 위로 관광열차가 다닌다.불국사역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졌지만, 조선 시대 전통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1918년 11월 기차 운행이 시작된 불국사역은 올해로 102년을 맞았다. 오랜 역사와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코레일이 2013년 철도기념물로 지정하기도 했다. 불국사역은 부산~울산~경주~포항을 잇는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36차례 운행 중이며, 피서철과 여행 성수기에는 2000여 명이 불국사역을 찾는다. 기차를 타려고 역사를 나가니 레일 앞에 향나무 몇 그루가 우리를 반긴다. 기차가 처음 달리던 날 심었다고 이름표를 달았다. 5~10년 된 것을 심었다고 하니 불국사역보다 나이가 많다. 우둘투둘한 몸피에 이곳을 지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득 품고 있어서 함부로 말을 놓지 못하는 위엄이 느껴졌다.“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 키 작은 소나무 하나…”, 이규석의 ‘기차와 소나무’라는 곡이다. 노래 속에 소나무는 휙 지나치는 기차라도 볼 텐데 불국사역에 향나무는 곧 기차를 보지 못하게 된다. 동해남부선(총 142㎞·경주구간 52.4㎞) 복선화와 철도 이설사업으로 2021년 말이면 지금의 철도가 폐쇄돼 불국사역의 역할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열차 여행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불국사역을 살리자(불사조-불국사를 사수하는 조직모임)는 취지의 서명운동이 지난해 5월부터 진행 중이라고 한다.김순희수필가거기에 이름을 올려 힘을 보태야겠다. 나도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경주로 왔었다. 느리게 역마다 서는 비둘기호를 타고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이렇게 부르는 노랫말을 “독사 껍질 벗겨 그녀에 목에 걸면 그녀는 깜짝 놀라…”로 바꿔 돌림노래로 부르며.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까르르 웃게 되는 기차의 추억이다.향나무가 들려주는 100년의 이야기에 취해 있자니 기차가 들어온다. 호계역에서 달려온 기차는 젊은 연인들을 내려놓고 경주역을 향해 뒷모습을 남기며 가을 속으로 사라져 간다.향나무 아래 코스모스 꽃밭을 배경으로 기차의 꼬리를 넣어 한 컷의 사진을 남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불국사역의 무궁화호 모습도 역사 속의 한 장면으로 남을 테니. 기차역에는 사람과 기차가 드나드는 게 제모습이다. 향나무가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그 자리를 지키길 기도하며 역을 빠져나왔다.

2020-11-01

들국화 가을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코스모스가 지고나면 들국화가 제철을 맞는다. 여름의 열기가 덜 가신 초가을에 어울리는 꽃이 코스모스라면 들국화는 그보다 더 깊어진 가을에 어울리는 꽃이다. 그런데 들국화란 이름은 흔히 쓰이지만 막상 식물도감에는 나오지 않는다. 가을의 산과 들에 자생하는 쑥부쟁이나 구절초, 산국 같은 국화과 꽃들을 총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산야에 자생하는 꽃들을 통틀어 야생화라 하는 것처럼.“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絶交)다!” 안도현 시인의 ‘무식한 놈’이란 시 전문이다. 명색이 시인이면서 그것도 몰랐던 자신을 자책하는 시이다. 사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지 않고서는 구별이 잘 안 되게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바쁜 세상에 그따위 풀꽃이나 구별한다고 무슨 득이 되겠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인이 아니라도 그 정도는 아는 것이 교양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세상의 어떤 지식보다도 종요로운 것이 자연에 대한 지식이다. 인류의 문명은 물론 생명까지도 자연에서 비롯된 것일진대, 자연을 모르는 사람은 그야말로 ‘무식한 놈’인 것이다. 하루 세 끼 제 입으로 들어가 목숨을 연장하는 음식의 출처도 모르면서 다른 무슨 대단한 걸 안다고 잘난 체 할 것인가. 그런즉 이 가을에는 들국화에 대한 공부라도 제대로 해서 무식을 면해 보시기 바란다.들국화를 대표하는 꽃으로는 아무래도 쑥부쟁이를 꼽아야 할 것이다, 가을 들녘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개화기간도 길어서 초가을부터 늦가을까지 줄곧 피고진다. 비슷하게 생긴 벌개미취나 구절초가 있지만 쑥부쟁이만큼 흔하지는 않다. 그 중에서 쑥부쟁이와 벌개미취는 연한 자주색 꽃만으로는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쑥부쟁이보다 잎이 훨씬 크고 줄기가 튼튼한 것이 벌개미취인데 요즘은 원예용으로 개량해서 화단에 심기도 한다. 구절초는 쑥부쟁이에 비해 흔치가 않은데다 주로 산자락에 핀다. 꽃잎은 희거나 엷은 분홍색인데 쑥부쟁이보다 넓다. 줄기도 곧고 단순한 편이어서 관심과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금방 알 수가 있다.가을 야생화로는 산국을 빼놓을 수 없다. 쑥부쟁이만큼이나 흔하지만 꽃이 노랗고 자잘하기 때문에 혼동할 여지는 없다. 들과 산의 경계쯤에 흔하게 피는 꽃인데 향기가 진해서 국화차로도 많이 쓰인다. 요즘은 산국과 꽃의 크기와 모양이 비슷하지만 색깔이 하얀 미국쑥부쟁이가 무서운 속도로 들녘을 잠식하고 있어 생태계 교란을 우려할 정도다. 북미 원산으로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미군 군수물자에 섞여 들어온 신귀화식물이라는데, 가을의 정취마저 바꾸어 놓을 것 같은 서슬이 자연스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산에 들에 들국화가 피어서 이 가을날이 얼마나 향기롭고 정겨운가. 이렇게 고운 꽃들로 장식한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다행한 일인가. 누가 뭐라 하는가. 우리 모두는 자연이 정성껏 차려놓은 연회장에 초대받은 손님들이다.

2020-10-29

이건희 그리고 삼성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Samsung is proud of being a part of Boston” (삼성은 보스턴 가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미국 보스턴공항 내 천장에 플래카드에 쓰여있는 문구이다. 하버드, MIT 대학이 있는 세계 학문의 중심이고 미국 개척의 시발점인 도시 보스턴시에 삼성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는 것은 한국민에게 큰 자부심을 심어준다.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3남 이건희 회장이 세상을 떠났다. 선대를 이어 1987년 회장에 취임한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호언하였다.그리고 그 약속은 지켜졌다. 한국의 삼성을 세계 초일류기업 삼성으로 성장시킨 변화의 중심에는 항상 단호한 승부사인 이건희 회장의 강한 의욕이 있었다. 이 회장이 취임한 1987년 10조원이 채 못되던 삼성그룹의 매출은 30여 년 후 400조에 가까운 40배 성장을 보이면서 한국정부의 총 수입보다 많아졌다.삼성이 IT 산업의 모태인 반도체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무도 삼성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 기업들도 한국은 할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그러나 이건희는 외쳤다. “언제까지 일본의 기술 속국으로 남을 수는 없으며,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에 삼성이 나서야 한다”고 했다. 1986년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이후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 반도체가 메모리 강국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하며 세계 1위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이에 고취된 이 회장은 품질에 눈을 돌리며 90년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유명한 선언과 함께 역사적인 신경영 선언을 내놓기에 이른다.그는 “일류가 아니면 생산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키며 품질에 문제가 있는 휴대폰 애니콜 500억어치를 불태우는 강수를 둔 끝에 애니콜은 1995년 8월 전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가 됐다.80년대 미국 대학 경영대학원 교수들은 소니만을 칭찬하고 삼성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으로 생산했던 삼성은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삼성전자 TV라든가 특히 삼성 스마트폰 이런 것들이 미국 가전제품 상가의 전시대 맨 앞에 전시되어 있다.“우리의 목표는 초일류이며, 방향은 하나로, 눈은 세계로, 그리고 꿈은 미래에 두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갑시다”이건희가 생전에 남긴 이 한 마디는 이제 삼성의 또다른 도약의 깃발을 품고 있다. 삼성은 온갖 고난 속에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을 전세계에 한국을 알렸다. 일부 국민의 삼성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하여도 삼성이 한국민들에게 자긍심을 갖게해 주고 한국을 세계화 시킨 그 성과는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2020-10-29

수불석권(手不釋卷)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면서 책을 가까이하기에 적합한 기온이어서 여름내 잊고 지냈던 책을 한번쯤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예로부터 가을을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라 부른 것도 책 읽기에 좋은 환경이라는 뜻이다.가을은 오곡백과 등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책을 가까이한다면 이것도 힐링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 한다.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쌓게 한다. 또 눈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체득하는 과정에서 어느새 삶의 지혜도 발견하게 된다. “책은 사람이 만들지만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그 말이 옳은 것이다.공자도 논어 첫머리에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이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고 했다. 공부를 하고 책을 읽는 것이 군자의 으뜸가는 일이라 했다. 맹자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의 하나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라 말했다.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 되는 것보다 세상에서 영재를 만나 그를 가르치는 것이 훨씬 즐거운 일이라 했다.세종대왕은 한 권의 책을 100번 읽는 백독백습으로 유명하다. 그의 책 읽는 습관이 이름난 성군으로 만든 계기가 됐는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정약용은 집안을 일으키는 데는 책 읽는 것 만한 것이 없다고도 했다. 빌 게이츠는 그의 저택에 무려 2만여 권의 장서를 보유한 개인도서관을 두고 매일 책을 가까이하는 것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코로나 바이러스로 집콕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코로나로 불편해진 우리 마음을 책으로 달래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가을이 깊어가는 지금, 책 읽는 기쁨으로 울적했던 마음을 떨쳐 보는 것도 지혜로운 생각이다. 수불석권을 실천해 보자./우정구(논설위원)

2020-10-29

정치의 이상향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현대에서 정치의 이상향은 어떤 것일까.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고, 우물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먹으니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 있으랴.” 태평성대의 대명사 격인 ‘요순시대’의 격양가에는 좋은 나라, 좋은 지도자란 서민들이 나랏일 신경 안 쓰고 자기 일만 하게 하는 존재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 인류역사상 정치가 있는 듯 없는 듯 여겨졌던 날이 며칠이나 있었을까. 인류 역사는 권력투쟁의 역사로 이어져왔기 때문이다.이 나라 민주주의 역사도 피와 땀으로 얼룩져있다. 일제로부터 광복이후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겪었고, 자유당 정부의 방종과 혼선에 이어 5·16혁명을 거친 군부정권의 경제개발, 그 이면에 독버섯처럼 피어난 독재, 문민정부 시대로 바뀐 이후에는 지역과 지역, 보수와 진보진영으로 나뉘어 격돌해온 정치판이다. 문제는 국민의 힘으로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한 이후다. 어찌된 일인지 이 나라는 아직도 한마음 한뜻으로 국론을 모으지 못하고 정쟁을 거듭하고 있다.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람사는 세상 홈페이지에 ‘정치, 하지 마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무척 진솔한 성품의 노 전 대통령은 그 글을 통해 정치인으로서 살아온 자신의 고뇌와 고통을 가감없이 털어놨다.그는 “이웃과 공동체, 그리고 역사를 위해 가치있는 뭔가를 이루고자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한참을 지나고 나서 그가 이룬 결과가 생각보다 보잘것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 이라고 진단했다. 바로 노 전 대통령 자신이 정치를 시작하게 된 이유와 그 결과를 촌평한 것 처럼 느껴진다. 특히 그는 “정치인이 가는 길에는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거짓말의 수렁, 정치자금의 수렁, 사생활 검증의 수렁, 이전투구의 수렁 등의 난관과 부담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이 가운데 ‘이전투구의 수렁’ 에 대한 설명에서 그는 “정치인은 왜 그렇게 싸우는가? 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민주주의 정치구조가 본시 싸우도록 돼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 이라고 말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독재시절에는 여야의 싸움을 전쟁처럼 감시하고, 조사하고, 죄를 씌우고, 감옥에 보냈다.패자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으니 전쟁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는 싸움이 전쟁에서 게임으로 바뀌어 패자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게 됐다. 물론 민주주의라고 해도 정쟁을 전쟁으로 하던 적대적 정치문화의 전통이 남아있고, 사회적 대립과 갈등이 큰 나라에서는 싸움이 거칠어지고 패자에 대한 공격도 가혹해지기 마련이라는 설명도 덧붙었다. 어쩌면 자신의 운명마저도 예측한 듯한 내용이어서 마음 짠했던 대목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구이자 동지로서 평소 “정치하지 마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을 법한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국회 시정연설에 나섰다가 야당의원들로부터 냉대와 야유를 받았다. 민주주의가 원래 비효율적이고, 시끄러운 정치시스템이라 했던가. 이상적인 정치를 꿈꿔온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구인 문 대통령의 소회가 새삼 궁금해진다.

2020-10-29

핑크빛 주유권

강길수수필가여직원이 불렀다. 친구의 사무실 문을 나서는 참이다. 뒤돌아서니 명함크기만한 봉투를 내밀었다. 뭐냐고 묻자, 사장님이 드리라고 한다는 말만 남기고 여직원은 총총 안으로 가버렸다. 조금 의아한 기분으로 봉투를 주머니에 넣으며 하늘을 바라본다. 벌써 때 이른 가을 저녁노을이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다.차에 돌아와 봉투를 열었다. 핑크색 주유권 한 장이 들어있다. 보너스 카드 포인트로 주유권을 받은 적은 있지만, 손으로 내용을 적은 주유권을 받기는 처음이다. 사무실에서 직접 주면, 내가 곤란해 할까 봐 배려하는 친구의 마음이 느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이다. 하지만, 마음 한편이 편치만은 않았다. 만나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동정(同情)이라도 바라는 태도를 그에게 보이지는 않았나 하는 염려 때문이다.친구 사무실에서의 상황을 되돌아본다. 내 차림이 종전과 다른 것은 없다. 방문목적도 내가 활동하고 있는 문학단체의 동인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대화도 내 문학 활동에 관한 이야기와 친구의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짧은 시간 나누었을 뿐이다. 오가는 말 중에 경제적 어려움을 말하거나, 평소와는 다른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러니 친구는 내 태도를 보고 주유권을 선물한 것 같지는 않다.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는 호의를 베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정리되니 고맙고 즐겁다.친구의 사무실엔 이런저런 일로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들르게 되었다. 갈 때마다 그는 비서를 시켜 주유권을 선물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이 교차하기도 했다. 그러나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마음이 두 갈래로 갈리는 현상을 자각해 갔다. 한마음은 ‘그래. 전에 내가 친구 회사와 거래할 때, 주유권에 비교되지 않을 이익을 안겨주었는데 뭐 대수이랴’하는 마음이다. 다른 마음은 ‘아니야. 그건 정당한 거래였으니, 주유권과는 무관한 거야. 그러니 주유권에 담은 친구의 따사한 마음은 참 고마운 일이지.’하는 마음이다.지난봄 코로나19 사태로, 소위 재난지원금이란 공짜 돈을 정부로부터 덥석 받았다. 우리 부부 두 사람 몫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나랏빚을 늘려서 국민에게 지급한 것 같다. 우리 집의 경우, 늦은 나이에도 일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빠듯하게 살아도 그 돈이 가계에 큰 보탬이 되지는 않았다. 공짜라 꼭 필요치도 않은 것 몇 가지 사니 금방 다 없어졌다. 그 때문에 우리 집은 공짜심리로 과소비가 되었지 싶다. 어쩌면 정부의 숨은 의도도, 돈을 돌리기 위한 과소비 조장이 아니었을까.주유권 선물을 받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시나브로 생각도 않던 바람(望)이 마음에 자리 잡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친구 사무실에 가려고 마음먹으면, ‘오늘도 주유권을 주려나’라고 속으로 은근히 바라고 있는 자신을 만나곤 했다. 기실 그 무렵은, 조기퇴직 후 시작했던 1인 사업이 신통치 않아 휴업 상태였다. 자연히 차를 쓸 일도 줄어, 친구가 준 주유권이 거의 수요를 맞추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가계에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친구에게 주유권을 받을 때마다, 고마우면서도 찝찝한 무언가가 마음 바닥에 하나씩 가라앉는 것 같은 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짐이 아닌데도, 짐같이 느껴지는 아이러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란 속담이 떠오르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무언가 출구전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짙어갔다.신통치 않던 사업수익마저 끊어졌다. 그때 기술 자격으로 취업하라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취업사이트에 한동안 부지런히 이력서를 냈다. 제법 시일이 흐른 후 다행히 취업하였다.친구 사무실에 갈 일이 생기자, 우선 생각나는 것이 핑크색 주유권이었다. 재취업하였으니 고마운 주유권은 그만 받겠다고 정중히 사양하여, 마음의 짐을 덜었다. 핑크색 주유권이 핑크빛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정부의 공짜 돈은, 국민의 세금으로 의타심도 얹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친구의 주유권은 자기 것을 나누어주는 사랑의 핑크빛 징표로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다.오늘 저녁에도 핑크빛 하늘이 열리겠지.

2020-10-28

타자기를 추억함

노트북 키보드가 흠집투성이입니다. 자주 누른 글쇠는 보호막 비닐이 너덜거리는데다 글자 표식마저 벗겨져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닳은 정도에 따라 어떤 글쇠가 혹사를 당했는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각각 왼손 검지와 중지가 맞닿은 ‘ㄹ’과 ‘ㅇ’의 윗면은 허옇게 까졌고, 오른손 중지가 관장하는 ‘ㅏ’ 글쇠자리는 영어 자판 ‘K’ 안내 글자가 사라지고 없을 지경입니다.오래된 노트북도 아닌데 키보드가 이렇게 너저분하게 된 것은 오래된 습관 때문입니다. 저는 손바닥을 키 판에 대지 않고 허공에 띄운 채, 손가락을 세워 자판을 내리찍는 편입니다. 자연스럽지 못한 이런 타격법은 손목에 힘이 들어가 타이핑 소리도 시끄럽습니다. 손톱에도 힘이 실려 글쇠판이 쉽게 긁힙니다. 이런 방식은 수동식 두벌 타자기를 칠 때 유용합니다.제 이십대의 글자 생활은 두벌 타자기의 나날이었습니다. 대학시절 한때 한글 운동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모임의 취지는 순우리말을 아끼고 퍼뜨리는 데에 있었습니다. 한자어가 칠십 퍼센트 이상인 게 우리 모국어의 현실인데, 순우리말을 고집한다는 것은 코미디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청춘의 열정과 우정으로 그 활동을 즐겼습니다. 지금은 생각조차 나지 않는, 한글 운동의 여러 행동강령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글자 생활을 기계화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또한 미적 감각을 지닌 문자인가를 기계화를 통해 널리 알리자는 취지였지요.개인용 컴퓨터가 일반화되기 전인 그때 글자 생활의 기계화란, 타자기를 활용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도 거창한 슬로건이었지요. 하지만 실제 글자 생활을 기계화하는 회원은 흔치 않았습니다. 절실하게 와 닿지 않은 면도 있었고, 무엇보다 주머니 사정이 타자기를 구할 만큼 넉넉지 않았지요. 그럴수록 그 모토가 제겐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행동강령을 실천하는 차원이라기보다 타자기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댔던 것 같습니다. 이미 서구 작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타자기가 선사하는 경쾌한 터치감의 글 너울을 맘껏 타보고 싶었습니다. 자판 위에 손끝을 올리는 상상만으로도 얽힌 상념들이 흰 종이 위에서 사유의 길을 내는 것만 같았습니다.학교 정보센터 타자 교실에 등록을 했습니다. 수업이 없는 시간마다 들러 자판을 익혔습니다. 낱개였던 자모음이 유의미한 문장이 되어 꼬리를 잇는 게 신기하고 뿌듯했습니다. 창가 자리에 앉아 더듬더듬 자판을 익히는 그 짬 속으로 희망이라는 빛이 스며드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럴수록 타자기를 갖고 싶다는 열망은 더했습니다. 지금처럼 아르바이트 거리가 쉽게 나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주머니 사정은 늘 빈궁했습니다. 타자기를 산다는 건 제 깜냥으론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을 읽은 큰오빠가 크로바 두벌식 중고 타자기를 사들고 왔습니다. ‘열심히 써봐라.’ 타자기 케이스를 열어 주던 큰오빠의 무심한 듯 따스한 눈길.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지요. 그렇게 타자기는 제 보물 1호가 됐습니다.종이를 롤러에 끼우고 원하는 자판을 두드립니다. 글자쇠막대가 잉크 묻은 리본 위를 건반처럼 때립니다. 촬촬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자를 만들어내는 해머의 타격감은 지금 생각해도 무척 낭만적입니다. 종성용 자음을 칠 때는 왼쪽 아래에 있는 ‘받침’이란 누름쇠를 누른 뒤 해당 자판을 눌러야 합니다. 초성에 쓰였던 글자가 받침자리로 옮겨져 타이핑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받침 글자가 중앙으로 쏠려 묘한 듯 매력적인 두벌식 타자 특유의 서체가 나옵니다. 한 줄 글이 다 써지면 왼쪽에 달린 레버를 밀어 종이 위치를 중앙으로 옮겨 주면 됩니다. 오타가 나면 타자용 흰 물감지우개를 글자 위에다 덧씌우고 다시 타건하곤 했지요. 청아한 쾌감을 지나 숙연한 의지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그 정신적 사치를 꽤 즐겼습니다. 저만의 보물인 크로바 타자기로 우리말을 갈고닦거나(?) 리포트를 작성했으며 단상도 끼적였습니다.김살로메소설가타자기의 자판을 두드리려면 손가락 각도를 가파르게 한 채 손끝에다 힘을 실어야 했습니다. 지금의 키보드처럼 평면이 아니라 계단식 글쇠판이라 글자를 누르는 동안 손바닥은 항시 허공에 떠있어야 했지요. 오래된 이 습관이 타자기 시대를 접은 지금까지 이어져 키보드에다 생채기를 내는 것이지요.버리기 좋아하는 저는 이사를 핑계로 많은 물건을 버렸습니다. 크로바 타자기도 예외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버린 것에 대해 좀처럼 후회하지 않는 편이지만 가끔은 그것이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타자기의 나날과 함께 했던 소박한 열정이라는 연결고리가 쉽게 버려질 수 있는 건 아니겠지요.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그때를 떠올리며 뒤늦은 마음의 자판을 눌러 봅니다. ‘추억추억’하며 글자가 종이에 박히는 동안, 공중에 뜬 두 손바닥 사이로 파노라마처럼 한 시절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2020-10-28

미워하여 행복할 수 있을까?

장규열 한동대 교수당신은 잘살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잘사는 것일까. 부귀영화를 누리며 만수무강하는 삶, 모두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까. 1975년에 62세였던 기대수명이 오늘은 83세가 되었다. 일인당 국민소득은 1975년에 600불을 겨우 넘겼었는데 오늘은 3만불에 육박하고 있다. 스무 해도 더 오래 살게 되었으며 오십 배나 더 많이 버는 셈이 아닌가. 그 어떤 잣대로 견주어 보아도 손색이 없는 국격을 지니게 된 오늘, 우리는 행복한가 다시 물어야 한다. 겉으로 보아 모자람이 없는 조건 속에서 어째서 우리는 아직껏 만족하지 못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어느 산사(山寺)에 큰불이 났다. 까닭을 찾고 보니 어느 여인의 방화였다고 한다. 다른 종교를 믿는 그는 우상을 섬기는 절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게 아닌가. 미움으로 가득한 그 마음으로 남의 종교를 말살할 작정이었는가 보다. 사회 규범과 법적 통제가 있어 제어할 수는 있겠으나, 우리 종교계는 이런 혐오범죄에 어떤 의견을 가지는지 궁금하다. 종교는 미움을 가르치는가 아니면 사랑을 가르치는가. 종교가 혐오를 바로잡지 않는다. 미워하고 배척하는 태도를 종교만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진영을 갈라 싸우는 일에 능한 정치는 백성들을 자기편에 세우기에만 최선을 던진다. 날마다 지지율을 확인하며 세를 불리기에 집중하느라 나라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정치도 혐오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다.미움은 자란다. 시간이 지나며 혐오의 수렁은 깊어가고 표현의 강도는 짙어진다. 미워할 까닭을 배우고 익히며 다지고 훈련하여 행동에까지 이른다. 진행 중인 미국의 대선판에도 혐오와 테러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급기야 해외 공관들에게 선거 전후에 있을지도 모를 폭력사태에 대비하라는 훈령이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미국 사회가 어떻게 치유와 회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혐오의 늪에 빠진 개인은 위태롭고 미움에 물든 사회는 위험하다.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 전에 사회적 각성이 있어야 한다.국민은 피곤하다. 정치와 종교가 만들고 퍼붓는 사회적 혐오에 지친다. 정치가 편안한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가 부끄럽다. 종교가 평온한 개인을 회복해 주리라는 희망도 허망하다. 남 탓에만 익숙한 ‘내로남불’이 식상하고 자신은 돌아보지 않는 ‘후안무치’에도 기가 질린다. 부귀영화와 만수무강을 누리면서 선진국에 살아도 행복하지 않은 까닭이 혹 ‘미움’ 탓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좀 부드러운 시선과 따듯한 마음이 필요한 게 아닐까. 각자의 부족함과 허술함에 겸허하며 남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그동안 부수고 깨뜨려 정복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면, 이제는 보듬고 다독이며 함께 쌓아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완전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며 완벽한 사회는 지구상에 없다. 주어진 환경에 오늘의 최선을 함께 던져야 한다. 미워하여 행복할 방법은 없다.

2020-10-28

주식리딩방 주의보

주식리딩방은 자칭 투자전문가가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 등을 통해 투자자문을 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곳을 말한다.문제는 주식리딩방이 금융감독원의 엄격한 규제를 받는 투자자문업자와는 달리 불특정 다수인을 대상으로 간행물, 출판물, 통신물, 방송 등을 통해 대가를 받고 단순한 투자조언을 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유사투자자문업자’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이들은 ‘고수익 보장’ ‘연간300% 수익’ 등과 같이 소비자들이 혹할만한 문구를 내세워 유혹하거나 연예인이나 유명인을 광고모델로 내세우기 때문에 외관만을 믿고 유료회원으로 가입했다가 큰 손실을 입고 계약을 해지하는 사례가 많다.주식리딩방을 이용할 때는 우선 금융감독원에 신고된 유사투자자문업체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금융감독원 소비자정보포털 ‘파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금융감독원에 신고된 유사투자자문업체라고 하더라도 금융에 대한 전문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유사투자자문업자의 경우 전문인력을 보유해야하는 요건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위 ‘주식리딩방’을 운영하는 운영자가 일반 개인인 경우 전혀 전문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유사투자자문업자는 법적으로 일대일투자자문을 할 수 없고, 오직 불특정 다수인을 대상으로 금융상품에 대한 투자조언만 가능하다. 상담게시판이나 카카오톡 등 대화방을 통해 특정 주식에 대한 추천을 하거나, 전화를 이용한 매수·매도 권유는 모두 불법이다.수수료의 환불조건, 환불방법 등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피해를 입었다면 금융감독원 유사투자자문피해신고센터에 신고하면된다. 금융감독원 홈페이지를 통해 신고하면 연2회 심사를 통해 건당 최고 200만원의 포상금을 받을 수 있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10-28

포스트 자유학년제 준비를!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아빠,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 학교에서는 1분이 1시간보다 더 길던데 ….!”월요일 아침 일찍 깨워달라고 한 중학교 1학년 아이가 일어나면서 한 첫마디다! 알람 소리를 사이렌 소리로 할 정도로 등교에 대한 의지가 강한 아이지만, 잠에는 장사가 없었다. 그래도 잠시 뒤척이더니 벌떡 일어나서 2주 만의 등교 준비를 하였다.출근 준비를 하다 달력을 보았다. 한 주밖에 남지 않은 10월이 필자를 처연하게 보고 있었다. 달력에서 제일 먼저 마음에 들어온 것은 “상강(霜降)”이었다. 출근길에 상강을 생각했다.상강은 가을의 마지막 절기이다.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라는 속담처럼 차창 너머 들판에는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멀리서도 농부의 콧노래가 들리는 것 같아 손장단을 쳤다. 내년을 위해 숨 고르기에 들어간 추수를 끝낸 들판을 지날 때는 손이 더 경쾌하게 움직였다. 자연과 함께 하는 출근길은 늘 즐겁다. 끝은 시작이라는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하는 자연이 필자에게 화두를 던졌다. 핵심은 “준비”였다.“아빠, 내년부터 시험 보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정말 많아.”코로나 19 때문에 모두가 힘들지만, 가장 큰 혼돈을 겪는, 또 겪을 층은 현 중학교 1학년이다. 중학교 1학년은 자유학년제에 해당하는 학년이다. 하지만 등교일 자체가 얼마 되지 않기에 중학교 1학년들은 자유학년제 프로그램은커녕 중학교 생활 자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 경험 부족은 당연히 이해 부족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해 부족은 부적응을 낳을 것이 뻔하다.자유학년제를 지낸 학생들은 자유학년제 전후 학교생활은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자유학년제는 취지만 보면 교육계의 문명(文明)과도 같은 제도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자유학년제 해당 학년은 문명 이후의 삶이라면, 자유학년제가 끝난 학년의 삶은 문명 이전의 혼돈의 삶이다.교육 수요자는 자유학년제 때문에 힘들다고 하는데, 교육 당국은 연계학기(년)제라는 말도 안 되는 제도를 예로 들면서 괜찮다고만 한다. 과연 학교 현장에서 자유학년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시행할 수 있는 교사가 몇이나 될까? 필자는 오래전부터 서열경쟁 중심의 교육과정 속에서는 자유학년제는 절대 불가능한 제도라고 계속해서 외치고 있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그래도 또 제안한다. 자유학년제를 지속하려면 학생들이 자유학년제 이후의 중학교 생활을 준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학생들이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바로 학교 정규 시험이다. 그러니 중학교 1학년 11월부터는 자유학년제의 이상을 거둬내고 학생들이 대한민국 학교 현실에 적응할 수 있도록 1학년 정규 시험 기간을 두자. 이런 준비도 없이 그냥 학생들을 중학교 2학년으로 진급시키는 것은 무책임을 넘어 범법 행위이다.사교육 현장에서는 “수학은 대학을 결정하고, 영어는 직업을 결정한다.”라고 학생들을 세뇌하고 있다. 이 말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초등학교 8학년인 내년 중학교 2학년이 걱정이다.

2020-10-28

가짜편지

김규종 경북대 교수며칠 전 삼성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다. 숱한 화제를 뿌리며 한국 사회를 쥐락펴락했던 인물. 언젠가 노무현 대통령이 “이제 권력은 시장(市場)으로 넘어갔다”고 일갈했을 때, 시장이 뜻하던 바는 삼성. 삼성 총수가 6년 넘도록 투병하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이 10·26과 하루 차이라는 우연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절대권력도 엄청난 돈도 결국에는 죽음 앞에 무의미해진다는 자명한 사실.그들도 사랑 때문에 밤을 새우거나 가슴이 아파 몇 날 며칠 두문불출 괴로워한 일이 있는지, 궁금하다. 18년 권력을 휘둘렀던 전직 대통령과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면서 이 나라 삼척동자도 아는 재벌총수. 그들이 사랑하는 여인으로 번민의 밤을 하얗게 밝혔을지, 그것이 알고 싶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김수영 시인처럼 나는 왜 사소한 일에 관심이 있는지 모를 일이다.그의 죽음에 즈음해서 가짜편지가 시중에 떠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가 손수 썼다는 편지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아프지 않아도 해마다 건강검진 받아보고, 목마르지 않아도 물을 많이 마시며”로 시작하는 장문의 편지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양보하고 베푸는 삶을 설교하는 대목도 이채롭다.사람의 가치가 비싼 옷과 자동차와 집이 아니라, 건강한 몸이라고 설파하면서 만족할 줄 알라고 편지는 충고한다. 중간 이후는 스스로 자책하면서 늙고 젊은 사람들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무한한 재물추구는 나를 그저 탐욕스러운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어요. 내가 한때 누렸던 돈, 권력, 직위가 이젠 그저 쓰레기에 불과할 뿐….”자신의 성취와 소유를 이토록 강렬하게 부정할 줄 아는 비판능력의 소유자! 편지를 읽으면서 곳곳에서 나는 전율했다. 그리고 ‘좋아요’를 눌렀다. 젊은이들은 너무 황망히 서둘러 살지 말기를, 나이든 축들은 행복한 만년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라는 가르침. 내가 알던 재벌총수 이건희와 너무도 다른 모습에 당혹스럽기도 했다.삼성은 편지가 가짜라고 확인한다. ‘에휴, 그러면 그렇지!’ 하는 아쉬움과 허망함이 동시에 몰려온다. 숱한 불법 탈법 무법 초법(超法) 위법을 감행하면서 거대재벌 총수로 등극한 사람이 저리 자상하고 따뜻한 인물이었다니, 하는 희열의 순간은 아주 짧았다. 만일 우리나라 유수의 재벌 가운데 누군가 저런 편지를 유훈으로 남기면서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빌 게이츠 같은 사람 말이다.가짜로 드러났지만, 많은 사람이 감동과 기쁨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도록 한 편지는 오래도록 인구에 회자(膾炙)될 듯하다. 우리의 확증편향과 선택적 기억을 단박에 날려버리는 청량한 한줄기 소낙비 같은 편지였으므로! 가짜도 이런 가짜는 닦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나뭇잎처럼 말이다. 하나의 시대가 조용히 저물고 있다. 21세기가 흘러간다, 붉게 물든 단풍잎처럼!

2020-10-28

인재경영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가 선정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 10인 중 한 명이다.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인재로 그는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의사, 천문학자 등 수많은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가 남긴 대표작 ‘모나리자’ 하나만으로 그의 천재성은 충분히 입증된다.보통 천재라 함은 “선천적으로 남보다 월등히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하지만 심리학계는 이를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하나는 표준화한 지능검사 결과, 보유능력이 뛰어난 인물을 가리킨다. 미국의 심리학자 터먼은 지능지수 140 이상을 잠재적 천재로 보았다. 그 숫자는 전체 인구의 0.4%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또 하나는 실제 업적에서 나타난 높은 수준의 창조적 능력을 말한다. 천재는 독창성과 창조력, 사고력을 필수적으로 지녀야 하며 미개척분야를 개척함으로써 그 속에서 가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본 것이다.‘네이처’지가 선정한 역사상 세계 최고의 천재로 꼽힌 인물치고 빛나는 업적이 없는 이는 없다. 독일 문학 최고봉을 상징하는 괴테나 영국이 낳은 극작가 셰익스피어, 상대성 이론의 아인슈타인, 미켈란젤로, 뉴턴 등등 그 어느 누구도 천재라 불러도 어색지 않는 인물이다.한 사람의 천재성이 지구와 인류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에 반론할 이유는 없다. 지난 25일 타계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인재경영론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천재 1명이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그의 철학은 지금 삼성을 세계 최고 기업으로 만든 원동력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도 사람이 하듯 인재중시 경영의 가치는 앞으로도 존중돼야 할 경영지표다./우정구(논설위원)

2020-10-27

고종 황제의 친일 행각을 다시 본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아직도 이 땅에는 친일 문제가 청산되지 못했다. 과거 친일을 논할 때 한일합방에 앞장선 소위 박제순, 이완용 등 매국에 앞장선 을사오적을 혹독히 비난했다. 친일 인명사전 발표 후 친일의 범위는 대폭 확대됐다. 백선엽이 등장하고 ‘토착왜구’가 회자되는 오늘의 현실이다. 을사조약 전야의 고종의 무능과 친일 행적이 드러나고 있다. 한말 고종의 일본정부의 뇌물 수뢰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말의 고종의 친일 행적을 찬찬히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국정 최고 책임자 왕의 책무를 되새겨 보기 위함이다.한일합방 전후의 고종의 정세 판단 능력이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임란 시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워 조선을 침공한 일본을 막지 못한 선조보다 못한 그의 처신이다.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에 이어 러일전쟁 초 일본군의 창덕궁 진입까지 허락했다. 일본의 노일 전쟁의 승리는 미일간의 소위 ‘가쓰라-테프트 밀약’으로 이어졌다. 고종은 이 밀약대로 필리핀은 미국이, 조선은 일본이 분할 통치하는 사실도 몰랐다. 고종은 당시 일본과 미국이 조선을 보호한다고 믿었으니 정말 무능의 극치다. 고종은 당시 밀약의 추진자 미 대통령 루즈벨트의 딸의 조선 방문 시 극진히 대접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고종이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 일주일 전 일본 공사로부터 뇌물 2만원을 받았다. 현재 우리 돈 25억원에 이르는 거금이다. 수뢰 명목은 대사 이토오 히로부미 접대비로 되어 있다. 대표적인 친일 관료 박제순 1만5천원, 이완용은 1만원, 관료들도 친일 행적에 따라 3천원에서 5천원 씩 받았다. 일본 왕실의 주한영사 기록 24권(1905년 12월11일)에 기록된 내용이다. 고종은 그해 3월 31일 일본 특사로부터 당시 경부선 철도 지분과 함께 뇌물 30만 엔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1904년 당시 영국 외무부 자료) 모두가 충격적인 사실이다. 당시 왕실의 뜻있는 관료들은 고종의 친일적 행위를 반대했다. 당시 의정 참정 한규설은 고종의 을사조약 체결을 적극 반대하다 파면됐다. 고종은 매국노 박제순을 그의 자리에 앉혔다. 당시 의정부 참찬 이상설은 박제순의 의정 서리 임명에 울분을 참지 못해 연해주 망명길을 택하였다. 원로대신 조병세는 왕에게 읍소하다 파직되고 민영환 역시 울분을 참지 못해 자결했다. 고종은 갑신개혁의 김옥균의 시신까지 찾아 응징했다. 매국관료들은 승승장구하고 이를 상소한 충신들이 파직되는 상황에서 나라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우리 역사는 을사오적은 비난하면서도 이들을 비호한 고종만은 비판하지 않았다. 조선의 마지막 왕에 대한 동정의 발로였을 것이다. 해외의 애국지사들은 멀리 망명지까지 고종을 모셔오기로 결심했다. 해외 연해주에서도 상해 임정에서도 고종의 구출 작전까지 세웠다. 일본 총독부의 엄격한 감시로 모두 좌절됐다.고종 장례 일에는 한성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성통곡하는 행렬이 이어져 3·1 만세 시위로 변했다. 고종의 친일 행적을 모르는 순진한 민초들의 눈물이었다. 무정한 역사는 숨겨진 비밀만은 감추지 못하는 법이다.

2020-10-27

깡 신드롬과 환불원정대를 탄생시킨, 댓글 ‘판’ 짜는 MZ세대

사회적 거리 두기의 영향으로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플랫폼의 시장이 더욱이 급성장하고 있다. 나 또한 하루에도 적지 않은 시간을 스트리밍 플랫폼에 사용하고 있는데, ‘넷플릭스’의 시리즈물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는 이미 본 것이라도 습관적으로 틀어 놓는 편이다. 영화가 보고 싶을 땐 ‘왓챠’ 서비스를 애용하고, 연재 중인 만화를 다시 보고 싶을 땐 ‘라프텔’을 이용하고 있다.OTT 플랫폼인 ‘디즈니 플러스’는 최근 ‘그룹 스트리밍 서비스’를 공개했다. 그룹 스트리밍 서비스란 각기 다른 곳에 있는 이용자들이 같은 영상을 보며 실시간으로 댓글을 나눌 수 있는 서비스다. 가까운 지인이나 연인과 함께 장소나 시간의 구애 없이 영화와 TV쇼를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실제로 한 공간에서 수다를 떠는 듯 흥미롭고 생각보다 영화의 몰입도 또한 나쁘지 않다. 최대 7명까지 시청할 수 있으며 PC나 모바일, 스마트 TV에서 사용할 수 있고, 영화의 몰입감에 방해된다면 이모티콘을 사용해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다.‘넷플릭스’와 ‘왓챠’도 그룹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한다. ‘넷플릭스 파티’는 크롬 기반의 웹브라우저를 통해 URL을 생성하고, 공유 링크를 통해 이용자가 접속해 같은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다. 채팅방에 입장한 모든 이들이 동영상을 멈추거나 돌려볼 수 있으며 실시간 채팅도 가능하다. 각자의 공간에서 함께 보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 새롭고도 안정된 시청 환경을 느낄 수 있다.‘왓챠 파티’ 또한 공유 링크를 통해 이용자들이 입장할 수 있다. 왓챠에서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를 왓챠 파티로 감상할 수 있어 영화 감상 모임을 꾸리거나 아이돌 영상을 찾아보는 특정 팬덤이 만나 작은 콘서트를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언택트 시대에 걸맞은 색다른 소통법이자 함께 콘텐츠를 공유하고 교감하며 늘 플랫폼으로 연결되어 있는 MZ세대의 소통법과도 무척 닮았다.그룹 스트리밍 서비스는 게임 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인 ‘트위치’가 앞서 시작했다. 게이머는 스트리머(Streamer)로 불리며, 스트리머가 게임을 하면 실시간으로 시청자들은 댓글을 달며 소통에 참여한다. 게임을 이기는 조건으로 후원금을 걸거나 특정 행동을 주도하는 등 흥미 요소를 일으키고 분위기를 이끈다.댓글 달기는 혼자가 아니라 다 함께 즐기고 교류하며 MZ세대 사이에서 하나의 놀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콘텐츠를 그저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댓글 문화의 영향력은 상상이상으로 크다. 가수 비는 지난 2017년 미니 앨범 ‘MY LIFE愛’의 타이틀 곡 ‘깡’을 발표했다. 음원을 발표한 당시 일관성 없는 가사와 독특한 안무로 혹평을 들으며 빠르게 묻혔지만 호박진서연이란 유튜버가 1일 1깡 챌린지(하루에 한 번씩 춤을 추는 )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이후에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다. 비의 춤을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우스꽝스럽게 춘 것인데 의외로 이 동영상에 많은 이들이 몰렸다.그들은 오히려 역대급 혹평에 관심을 가지며 댓글을 달았고, 댓글에 대댓글을 달아 동조하며 또 하나의 재미를 만들어 냈다.비의 노래 제목인 ‘깡’에 걸맞게 ‘깡’으로 끝나는 과자 제품 광고를 찍어야 한다는 댓글에는 실제로 의견이 반영되어 과자 회사의 마케팅으로 활용됐다. 가수 비에게 제2의 전성기라 불릴 만큼 새로운 밈(meme)을 일으켰다.MZ세대는 센스 있고 재미있는 댓글을 발견하는 ‘댓글 맛집’ 영상을 찾아다닌다.올해 초 ‘숨듣명’이라는 유행어를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숨듣명이란 ‘숨어 듣는 명곡’이라는 뜻으로 나에게는 명곡이지만 밖에 나가 듣기에는 꺼려지는 노래를 일컫는다.주로 2010년대 발표작이며 독특한 음과 난해하고 모순적인 가사로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노래가 주를 이룬다. 비의 ‘깡’을 시작으로 제국의 아이들의 ‘마젤토브’, 틴탑의 ‘향수 뿌리지마’, 유키스의 ‘만만하니’ 등 발표된 당시 잠잠했던 곡들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해당 영상뿐만 아니라 반응이 좋은 동영상의 댓글을 모은 ‘댓글 모음’ 콘텐츠는 현재까지도 성행하고 있다.숨듣명은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문명특급’은 숨듣명 콘텐츠로 MZ세대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2010년 전후 당시 괴작 취급을 받았던 가요를 재발굴해 새롭고도 신선한 콘텐츠를 이끌어 냈다는 평을 받았다.MZ세대는 2010년 전후에 즐겨 들었던 가요를 중심으로 추억 여행을 한다. 노래가 출시되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노래 가사와 얽힌 웃긴 일화를 댓글로 공유한다.여기에 B급 정서의 노랫말과 일반인은 소화하지 못 할 가수의 의상, 한때 유행이었던 패션 소품을 보는 재미를 나눈다. 그간 완벽한 발라드곡에 지친 이들이 심플한 댄스곡이나 B급 감성이 느껴지는 단순한 곡을 선호하는 것 같다는 의견도 있다.그렇게 MZ세대는 콘텐츠를 소비하며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그들만의 ‘판’을 짠다. MBC ‘놀면 뭐하니?’의 회심작 그룹 ‘환불원정대’는 SNS의 댓글에서 시작되었다. 한 댓글인은 한 때 가요계를 대표했던 여성 가수와 현재 강한 인상으로 트렌드를 이끄는 가수를 모아 환불원정대의 데뷔를 제안했다.댓글을 본 가수 이효리의 긍정적인 반응으로 인해 엄정화, 이효리, 제시, 화사 등 4명의 가수가 빠르게 모여 그룹이 탄생했다. 환불원정대는 데뷔 과정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관심과 주목 속에서 화려하게 데뷔했다.MZ세대는 어디에서나 그들만의 판을 다양한 콘텐츠로 이끌어 가고 있다. ‘에브리타임’은 전국 대학생의 휴대폰에 하나씩은 꼭 깔려 있는 애플리케이션이다. 대학교 시간표 스케줄을 보기 쉽게 정리할 수 있으며, 여기에 대학교 커뮤니티의 역할을 겸하고 있어 대학생들 사이에서 이용률이 매우 높다.앱을 사용하여 휴대폰 배경화면에 시간표를 띄울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학점 계산기, 강의평 열람도 가능하다. 주로 사용하는 건 커뮤니티인데 그들만의 강의 후기를 공유하거나 취업 이야기, 편입 상담, 스터디 모집, 중고 서적 거래, 드라마 추천, 물건 나눔 등 고루 이루어진다.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익명성이 보장되는 댓글 문화 덕분에 자신만의 경험이나 노하우 등을 빠르게 공유한다. 학교별 커뮤니티의 경우 이메일로 재학생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정보를 나누는 댓글은 신뢰도가 높다.콘텐츠를 소비하는 이들이 만드는 문화의 비중이 중요해졌다. 참신하고 독특한 문화의 새로운 방향성은 환영이지만 익명성에 기대어 차별과 혐오의 장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도 하지 못할 말은 아무에게도 아무 곳에서도 하지 말자.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가는 문화가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2020-10-27

담벼락

공간을 둘러막기 위해 흙이나 돌, 벽돌 등으로 쌓아 올린 것을 담이나 벽이라 한다. 영역을 보호하고 표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벽을 만들기도 하고 독립된 공간에서 외부와 단절의 안식을 갖고자 하는 목적도 있다. 종종 아주 미련하여 어떤 사물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하여 담벼락이라 하기도 한다. 담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꽉 막히고 답답하니 그렇게 비유된다. 이렇듯 담벼락은 자신을 보호하기도 하고 영역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자의에 의한 단절과 고립의 용도이기도 하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본능을 최대한 잘 나타내는 것이 담벼락이라고 할 수 있다.현대의 담벼락은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었다. 예전과 달라진 특징 중에 두드러지는 것은 소통을 배려한 형태의 담벼락이다. 수많은 정보와 간접 경험의 기회가 풍부해진 현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 조건 중의 하나가 소통이기 때문이다. 소통에 적극적이어야 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적절히 편승하는 것이며, 소통을 통해 신속하게 정보를 습득하는 것은 존재감과 사회적 위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인간은 소통과 자의적 고립의 양립 선상에서 숱한 고뇌와 번민에 빠지게 된다.나는 담벼락의 형상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통해 소통과 자의적 고립 사이에서 고뇌하는 현대인의 다양한 본능을 탐색하고 기록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의 외적 형상이 무엇을 표현하려 하는지 무엇을 감추려 하는지 어렴풋이라도 알게 되리라 기대해본다. /박의희(사진작가)

2020-10-26

지는 노을 바라보며

얼마 전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편과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멋진 노을을 보았다고. 그 자리에서 차를 세우고 노을을 보고 싶었지만, 배고픈 남편이 차를 세우지 않고 통과해버려 아름다운 노을을 놓치고 말았다고.문득 호주에서 살 때가 생각났다. 아침에는 학교에 다니느라 도시락 싸서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다녔었고, 주말에는 나를 먹여 살리느라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다. 그래도 평일 오후에 집 근처 달링하버에서 산책을 할 때면 노을 지는 풍경을 가끔 바라보곤 했었다. 붉은 해가 뒷걸음칠 때면 그리운 가족들, 보고픈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울음을 삼키곤 했었다. 어린 마음에도 엉엉 우는 건 남들에게 보이고 싶진 않았던 거 같다. 주말마다 가족들과 통화를 할 때면 그저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했었다. 여행할 때마다 해넘이를 보며 넋을 놓았던 것도 그때의 어린 내가 생각나서였다.며칠 후, 아침부터 흐린 하늘이 나를 우울하고 멍하게 만들었다. 지인과 함께 노을을 보러 떠났다. 포항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칠포해수욕장 입구였다. 주말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나다니던 바닷가였는데, 지인의 놀라운 관찰력과 세심함에 한 번 더 놀랐다. 지나가던 나이든 남자도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역시 무덤덤한 아저씨조차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노을 명소 인가보다.칠포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강에 노을이 내려앉았다. 하루 일을 마치고 서산으로 귀가하는 태양의 모습만으로도 우리들의 발길을 사로잡고도 남는데, 그 모습이 강물에 반영돼 노을의 모습이 두 배가 되었으니 감동이 두 배였다. 바람 한 점 없어서 더 풍경이 아름다웠다. 강물이 바다에 진입하기 전에 또 하나의 임무를 완수하고서 강이라는 이름을 반납하고 바다가 되었다. 오랫동안 말없이 노을을 바라보았다. 20대의 내가 40대를 준비하는 나에게 그동안 잘살았노라고 붉을 노을로 토닥여주고 있었다./엄민재(포항시 북구 삼호로)

2020-10-26

꽃에게서 배운다

꽃을 키우다 보면 항상 먼저 꽃망울을 터트려 기쁨을 주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른 애들이 한창 필 때쯤엔 처음에 핀 꽃들은 시든다. 당연한 결과이리라. 처음 보여준 고마움에, 미련에 시들어 가는 꽃대를 그냥 두면 꽃나무도, 시든 꽃도 피우려고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도 모두 힘들어진다. 그래서 부지런히 시든 꽃을 잘라줘야 한다.사람 관계도 마찬가지이리라. 친구 H의 아들이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1년 넘게 슬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들은 나도 가슴 아픈데, 지켜보는 엄마는 얼마나 속이 시릴까?살다 보면 꽃 피지 못 하고 사그라든 인연도 많다. 한때 꽃 피웠으면 그걸로 됐다. 토닥토닥 시절 인연이 다 했으니 힘들어하는 그 인연을 놓아 줘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인연의 꽃이 필 테니.나의 말을 듣던 K가 새 인연을 위해 놓아주어야 한다는 그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며 자신의 꽃을 떠나보낸 마음을 털어놓았다. 꽃나무 드라코를 기르다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죽어버렸다고. 나는 꽃을 죽인 게 아니라 화훼 농가를 살린 거라고 위로했다. 화훼 농장하는 언니가 해준 말이었다. 많이 죽여봐야 그다음에 잘 키운다는 덕담도 해주었더니 경제적 마인드로 자신을 위로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다.우리 집 옥상에 가을꽃이 한창이다. 소국이 퐁퐁 꽃을 피워 향기를 가득 내뿜고 키 낮은 채송화도 색색이 피어 존재감을 드러낸다. 힘든 일이 있으면 허리를 숙여 자신을 보고 웃으라는 듯 생글거린다. 이른 봄을 준비하는 동백은 몽오리를 한껏 만들고 있다. 백작약은 마른 잎을 더 말며 5월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인사를 한다. 목이 말라도 주인의 손길이 오기만 기다릴 뿐 생떼를 쓰지 않는다. 하지만 말 없는 꽃을 기른다는 것은 쉬운 듯 보여도 언제 목이 마른 지 추위를 타는지 자주 들여다보는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 온몸으로 알려준다. 말수 적은 꽃에게서 오늘도 배운다./이홍숙(경주시 안강읍 갑산2리)

2020-10-26

할머니의 숟가락 사과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이가 몇 개 없으셨다. 내 기억에 할머니는 입술 밖으로 살짝 튀어나온 아래 송곳니 하나와 그와 비껴 달려 있는 윗니 두 개가 잇몸에 남아 있으셨다. 그런데 나는 모든 이가 멀쩡한데도 애늙은이란 별명처럼 딱딱한 음식은 잘 씹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내게 할머니는 사과를 깨끗하게 씻은 후 껍질째 사과를 반 쪼개서 할머니의 왼손바닥에 사과를 얹어 쥐시고는 밥숟가락으로 사과를 긁어주셨다.그렇게 숟가락으로 긁어주셨던 사과는 어찌나 달고 잘도 넘어가던지, 사과 반쪽이 순식간에 내 입속으로 꿀떡꿀떡 들어왔다. 과육이 숟가락에 반 정도 차면 입안에 침이 고이며 빨리 사과가 갈아지길 기다렸고, 그렇게 가운데 씨를 중심으로 사과는 위아래 꼭지를 빼고 껍질만 남아 그릇처럼 비워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쉬지 않고 사과를 갈아내셨던 할머니는 얼마나 손목이 아프셨을까 싶다. 그때의 내 모습은 마치 맛난 간식 앞에서 빨리 그걸 넘겨주길 바라는 댕댕이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할머니는 머리숱이 많이 남아 있지 않으셨는데도 정갈하게 쪽 머리를 하셨고 할머니의 물건 꾸러미에는 참빗이 있었다. 그리고 꽤나 오래 사용하신 듯한 낡은 은비녀를 쓰셨다.나는 아침에 할머니께서 쪽 머리를 하시기 전 풀어 내려진 할머니의 긴 머리 길이를 보고 놀랐고, 그 머리를 가지런히 참빗으로 빗으신 후 말아 올려 쪽지시는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봤었다. 우리와 늘 함께 사셨던 게 아니라 어쩌다 다니러 오시면 내게 사과를 갈아주셨던 할머니. 다 비워졌던 사과 껍질처럼 할머니의 몸무게가 가벼워지셨을 그 언젠가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가끔 사과를 보면 한번 숟가락으로 갈아 먹어볼까 하는 생각과 할머니께서 갈아주신 사과즙의 달콤함과 너무 어려서 뭔가 제대로 해드리지 못한 아릿함이 겹쳐진다./권현주(포항시 북구 장성동)

2020-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