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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꼼수 없는 정치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꼼수는 쩨쩨한 수단이나 방법으로 정의된다. 바둑에서 꼼수는 정수와는 달리 상대가 욕심을 내는 것을 노려 함정에 빠뜨리는 수를 말한다. 최근 정치판에서 꼼수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바로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된 뒤 자유한국당이 반발하며 창당준비를 하고 있는 ‘비례자유한국당’이 꼼수의 대표적 사례로 등장한다. 자유한국당의 위성 정당인‘비례자유한국당’의 창당준비위원회 결성 신고가 지난 8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공고됐다. 사무소 소재지는 ‘서울 영등포구 버드나루로 73번지 우성빌딩 3층’이니 한국당 중앙당사와 같은 주소다. 창준위는 발기 취지문을 통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과 연동형 선거제가 많은 독소조항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야욕에 눈먼 자들의 야합으로 졸속 날치기로 처리된바, 꼼수는 묘수로, 졸속 날치기에는 정정당당과 준법으로 맞서 반드시 다음 총선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당의 선거법 개정을 꼼수로, 비례정당 창당을 묘수로 재해석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비례정당 창당 자체에 대해 한국당 스스로도 꼼수라는 비판을 의식한 듯 하다. 비례자유한국당이 출범하면 4·15 총선에서 한국당은 지역구 후보만, 비례자유한국당은 비례대표 후보만 낼 가능성이 높다. 한국당 의원 30여명을 비례자유한국당에 배치해 원내 3당으로 만드는 방안도 거론된다. 한국당은 지역구 투표용지에서 ‘기호 2번’을, 비례자유한국당은 비례대표 투표용지에서 ‘두 번째 칸’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정세균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도 청문보고서 채택을 않겠다는 자유한국당 때문에 난항이다. 자유한국당은 정 후보자를 상대로 동탄 개발과정에서의 개입 의혹이나 채무 관계, 기부금 등을 쟁점화하며 전방위적으로 추궁했으나 ‘결정적 한 방’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데도 자유한국당 심재철 원내대표는 9일 “입법부 수장을 한 분이 총리가 되는 것은 삼권분립을 훼손한 것이라 처음부터 부적격이었고, 도덕성 등 관련 의혹이 여러 개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소명되지 않았다”며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을 거부했다. 사실 정세균 후보자는 1년에 한 번 기자들의 투표로 당마다 1명씩 가장 신사적인 의원에게 수여하는 백봉신사상을 12번이나 탄 기록을 갖고 있을 정도로 신사적인 의원으로 유명하다. 보수성향 야당의원들과도 친하고, ‘스마일 정’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온화한 성품에다 6선 관록에 입법부의 수장인 국회의장을 지냈으니 국무총리 후보로는 오히려 분에 넘친다고 해야할 인물이다. 이런데도 전직 국회의장이 국무총리를 맡는다고 삼권분립 훼손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정치권에서는 자유한국당의 이같은 행보에 대해 오는 16일 이전까지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나 총선에 출마할 이낙연 국무총리의 행보에 흠집을 내기 위한 꼼수로 해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이 나라 정치가 어려운 것은 정정당당한 정수가 아닌 꼼수의 횡행 때문은 아닌가. 꼼수 없는 정치가 못내 아쉽다.

2020-01-09

자연으로 돌아가면 살 수 있을까?

나이 때마다 인생에 대한 느낌이나 인상은 아주 달라지는 것 같다.스무살 때 같으면 사람은 결코 죽음에 순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될 때가 많다. 젊음이, 생의 기운이 몸과 마음 안에 가득차 흐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으랴.삼십대때야말로 한국인들로서는 가장 의미심장한 시절이라고 생각된다. 십대 때까지는 학교에서 철학조차 가르치지 않으니 이십대 들어서 겨우 인생에 눈뜨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삼십대 되어야 이제부터 진짜 인생을 살기 시작하는 때문이다.꿈과 욕망은 큰데 자신의 현실적 위치가 그에 상응하지 않아서 괴롭디 괴로운 인생을 곱씹는 때가 바로 삼십대요, 사십대는 어떻게든 자신의 사회적 위치며 인생의 의미 같은 것, 사명이나 운명 같은 것에 눈떠 조금씩 내면화하고 그 의식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그러니 결실을 이루려면 사십 대에 열심히 어느 한 방향으로 내달리지 않으면 안되는 때일 것이다.그렇게 해서 오십대에 이르는데, 이제는 마음도 몸도 평온을 찾을 때가 왔다고 봐야 한다. 철모르는 몽상도, 미친 듯 내달리는 꿈도, 현실에 착근시키려는 실행도 이쯤 되면 가라앉을 것은 가라앉고 인생의 자기 몫이 어느 정도쯤 되는지 스스로 파악할 수도 있는, 바로 그 나이가 오십대라고 할 것이다.이것은 내 생각이지만 이쯤 되면 삶을 삶답게, 그 의미에 치중해서 천천히, 조용히, 차근차근 살아야 할 때이건만, 아뿔싸, 이때처럼 또 다른 인생의 고비가 없다. 이름하여 삶의, 생명의 위기가 뜻하지 않게 불어닥치는 때도 대체로 이 오십대인 것이다.텔레비전이라면 뉴스조차 담 쌓은지 오래인데, 요즘 때아니게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며, 이것저것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다.자연으로 돌아가면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들, 생명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마지막 찾아든 산 속에서 새로운 삶을 얻는 경우를 자주 본다. 과연 자연은 인공적 치료 대신에 진짜 회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자연으로 돌아가라고들 한다. 그러나 정작 무서운 병에 걸리면 자연이, 산속이, 피톤치드가, 높은 지대의 공기가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 의심을 품게 된다.서양의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현대의 암 치료법은 세균학적인 시각에서 출발한 한계 탓에 사람을 ‘살리려고 죽이는’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자연 치료만이 살길이라는 말도 들린다.비단 암의 문제만이 아니라, 요즘 들어 이대로는 더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위기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세속의 오염된 공기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 깨끗한 공기로 숨쉬며 기름때를 벗겨내야 할 것 같다고나 할까. 올 만큼 왔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야 살 것 같기도 하다.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겨울 나날들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20-01-09

스와니 강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머나먼 저곳 스와니 강물 그리워라”로 시작하는 ‘스와니 강’은 우리에게도 애창곡으로 불리는 미국 노래이다. 스와니강은 미국의 역사깊은 강의 이름이다. 이번 겨울방학동안 가족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는 미국 동부 지역을 차를 몰고 다니고 있다. 그러던 중 그 유서깊은 스와니 강을 우연히 만났다.워싱턴에서 조지아주 애틀란타 그리고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는 알라바마주 몽고메리를 거쳐 차를 몰고 플로리다주로 들어서는데 “역사적인 강, 스와니강입니다”라는 팻말을 고속도로에서 보게 되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차를 모는 기분은 상쾌했다. 스와니강의 자태는 노래만큼 고요하고 정겨웠다.스와니강은 미국 조지아 주 남동부 늪지대에서 발원하는 강인데 원래 이름은 ‘산후아니’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초창기 원주민 인디언들의 말로 “갈대가 우거진 강”이라는 뜻의 구아사카에스키라고 불렀는데, 이후에‘작은 성 요한’이라는 뜻의 ‘산후아니(San Juanee)’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이것이 흑인들에 의해 와전되어, 지금의 ‘스와니’가 되었다고 한다.미국의 작곡가 스티븐 포스터가 1851년에 작곡한 노래로 원래 제목은 ‘고향 사람들’이었다. “멀리 스와니강을 따라 내려가면 그리운 고향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애수가 깃든 망향의 노래인데, 포스터는 이 노래의 가사를 즉석에서 거의 완성하였으나 강 이름을 정하지 못하였다고 한다.포스터는 그의 형과 함께 미국 지도를 펼쳐 놓고 적절한 강을 살펴보다가 플로리다주의 스와니강을 찾아냈고, 포스터는 2음절에 맞추기 위하여 ‘Suwannee’를 ‘Swannee’로 줄여 가사에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노래는 발표 후 큰 인기를 끌었으며, 1935년에는 플로리다주의 주가가 되었다고 한다.머나먼 저곳 스와니 강물 그리워라. 이 노래를 부르면 어릴적 옛고향에서 복숭아밭에서 복숭아를 따먹으며 뛰놀던 생각도 나지만 또 주위의 이산가족의 아픔도 생각난다. 날 사랑하는 부모형제 이몸을 기다려. 그들의 부모형제는 떨어져 있고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둘 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언제나 나에게 고향을 찾아 가볼까.150년 전 흑인들의 마음을 그린 이 가사는 아마도 지금 많은 한국의 이산가족들의 마음이리라. 남북 이산 가족상봉은 정권에 따라 희비가 갈려왔다. 그러나 지금은 남북이 경직상태로 또 언제 이들이 부모형제를 만날지 기약이 없다.상봉가족의 문제가 정치적 쇼가 아닌 진정한 상봉이 되려면 현재의 남북접근 방식으로는 안된다. 현 정부의 접근 방식으로는 북한의 오만만 키워주고 남북의 문제는 한국의 치욕적인 상황속에 점점 안개속으로 멀어져 가고 있다.북한은 한국을 무시하고 점점 오만해 져 가고 있다. 그래서, 이산가족 이들의 스와니강은 점점 멀어져 간다.전 세계 단 하나의 분단국가, 한국.스와니강의 노래는 오늘도 이산국가 한국에서 구슬프게 흐른다. “머나먼 저곳 스와니 강물 그리워라”

2020-01-09

후안무치(厚顔無恥)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일찍이 맹자(孟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측은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더불어 사람의 착한 본성인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단초가 되는 마음의 하나인 수오지심은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이 옳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을 일컫는다. 자신의 과오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남의 잘못을 모른 척 하는 것도 의(義)가 아니라는 것이다.지금 정권의 관계자들과 추종하고 비호하는 세력들의 행태를 볼진대 후안무치란 말이 오히려 모자랄 지경이다. 저들의 비리와 부정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악담과 조롱을 퍼붓고 수사하는 검찰까지 겁박하는 짓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들의 뻔뻔함이 국민들의 도덕적 불감증까지 확산시키는 폐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다. 신년 벽두부터 쓴 소리를 하는 것은 정치권에서 멀리 떨어진 일개 서민이 보기에도 현 시국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난 70여년 온갖 간난신고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땀 흘려 이룩한 나라를 파탄지경으로 몰아넣는 정권에 대해서 방관하고 침묵한다면 그 어찌 사람의 도리라 하겠는가.이 정권은 시작부터 적폐청산을 기치로 내걸고, 전 대통령을 비롯해서 대법원장, 비서실장, 장관, 국정원장 등 지난 정권 관련 인사들을 탈탈 털어 100여 명이나 사법처리했다. 그리고 그 적폐청산의 선봉장이었던 중앙지검장을 야권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우리 총장이라고 추켜세우며 살아있는 권력의 눈치도 보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를 않았다. 그런데 막상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리가 불거져 수사가 시작되자 태도를 돌변해서 검찰개혁을 들고 나왔다. 비리 혐의자인 민정수석을 내치기는커녕 오히려 법무장관에 임명하여 검찰을 압박하려는 무리수를 자행하였으나 빗발치는 반대여론에 밀려 취임 35일 만에 사퇴를 하는 촌극을 연출했다.검찰개혁이 필요한 이유는, 검찰이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편향된 법집행을 하거나 수사권의 남용으로 인권을 침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고 있는 지금의 검찰은 검찰개혁의 취지대로 잘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도 정권이 노골적으로 검찰을 압박하는 한편 여당은 국회의장까지 가세를 해서 제1야당을 제외한 군소정당들과 야합하는 꼼수와 편법을 동원해서 선거법과 공수처법을 통과시키기에 급급한 것은 너무나 속보이는 처사가 아닌가. 조금이라도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둘러 공수처법을 통과시킨 것은 검찰은 물론 사법부까지 손아귀에 넣어 정권의 방어막과 안전장치로 삼으려는 속셈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반대 하는 목소리엔 귀를 막고 동조하는 세력들만 국민이라는 이 정권의 도를 넘는 오만과 후안무치를 막을 길은 오로지 선거를 통한 심판밖에 없다. 다가오는 4월의 총선에도 견제할 힘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정국은 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

2020-01-09

1천8번째 거절

커널샌더스를 아십니까? 치킨 사업으로 유명한 흰 수염에 흰 양복 입은 할아버지.샌더스는 대공황을 겪으며 사업이 쫄딱 망하는 경험을 합니다. 지인의 도움으로 작은 주유소를 차려 영업을 시작하지요. 이때 여행자들이 배고파 하는 모습을 보고 한쪽에 테이블을 놓고 닭튀김, 햄 등을 판매합니다. 5년 후에는 작은 식당이 유명해져 켄터키 주지사로부터 명예 대령인 ‘커널’ 호칭을 받습니다.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식당 앞 도로를 우회하는 큰 길이 생기면서 샌더스는 1955년 다시 파산합니다. 이때 샌더스의 나이 65세. 샌더스는 남은 차 한 대를 지렛대 삼아 새 출발을 결심합니다. 집집마다 찾아가 직접 부딪치고 수없이 많은 음식점을 찾아 자신의 레시피와 아이디어를 설득합니다. “제가 닭튀김을 맛있게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이 이 아이디어를 채택해 매출이 증가하면 그 증가한 금액의 아주 일부만 제게 나눠 주시면 됩니다.”모두 그를 비웃습니다. 샌더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지난 거절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세심하게 말투를 고치고, 설득을 위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냅니다.샌더스는 그렇게 2년을 반복하지요. 무려 1천8번이나 거절을 당한 후 1천9번째 음식점 주인에게 “당신의 제안에 동의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2년 동안 자동차에서 먹고 자며 뜻을 이루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닌 샌더스. 말이 천 번이지, 우리는 대개 무엇을 시도할 때 열 번만 거절을 당해도 당장 그만두고 싶지 않을까요? 그것도 나이 65세라니!실패에서 우리는 가장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실패가 아니라 실패를 다루는 방식이지요. 승자는 실패를 통해 ‘성공에 다가서는 법’을 배우고, 패자는 실패를 통해 ‘성공에서 멀어지는 법’을 배웁니다./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20-01-09

마술과 기술

사실 많은 혁신적인 기술들은 처음엔 마치 ‘오즈의 마법사’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 ‘마술’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우리를 매혹시키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쥐고 있는듯 우리 위에 군림한다. 그러다가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그 원리가 폭로, 혹은 이해되어 모두가 알만한 모습이 되면서 그 기술의 자리가 점차 낮아지다가 결국엔 모든 이들의 손에 들어가 그들 삶의 일부가 된다.‘오즈의 마법사’라는 동화에서 주인공 도로시는 오즈의 마법사가 가진 위대한 능력이 자신을 그리운 고향 캔사스 집에 데려다 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험난한 모험을 감행하여 오즈의 마법사가 있는 성에 다다른다. 그러나 오즈의 마법사는 연약한 늙은이이며, 그의 모든 능력은 마법이 아니라는 사실에 도로시는 크게 실망한다. 하지만 오즈의 착한 마녀는 도로시에게 스스로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도로시 자신 안에 언제나 있었음을 알려주게 된다. 결국,“내 집같이 좋은 곳은 없어(There’s no place like home.)”라고 스스로 주문을 외운 덕에 도로시는 그리운 집과 가족들에게 무사히 귀환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오즈의 백성들과 도로시가 거짓말쟁이 사기꾼 오즈의 마법사가 펼쳐내던 재주를 위대한 마법이라 생각했던 것은 그들만이 유난히 어리석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누구에게든 기술과 마술을 구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상과학 영화의 효시로 불리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쓴 영국의 유명한 공상과학소설 작가 아서 C. 클라크는 “극도로 앞서가는 기술은 마술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라 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인터넷, 고속열차, 드론, 스마트폰, 일기예보, 영상통화 등 지금은 우리 일상적인 삶의 일부가 된 기술들을 100년 전 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기술들을 마술이라 생각할지는 너무나 자명하다.사실 많은 혁신적인 기술들은 처음엔 마치 ‘오즈의 마법사’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 ‘마술’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우리를 매혹시키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쥐고 있는듯 우리 위에 군림한다. 그러다가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그 원리가 폭로, 혹은 이해되어 모두가 알만한 모습이 되면서 그 기술의 자리가 점차 낮아지다가 결국엔 모든 이들의 손에 들어가 그들 삶의 일부가 된다. 기술의 혁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기술의 민주화라 부른다.대형 발전소를 건설하고 대규모 송전 시설을 갖추어야만 개개인이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발전과 송전은 국가가 나서야만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의 규모까지는 소규모 수력, 풍력 혹은 태양광 발전기를 이용하여 개개인이 어렵지 않게 전기를 만들어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전기의 민주화’라고도 불리운다. 또한, 은행 같은 금융 기관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금융서비스가 이젠 크라우드펀딩과 P2P 기반의 예금, 대출 및 송금 등을 통해 가능하게된 것을 ‘금융의 민주화’라 부르기도 한다.이런 민주화의 추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형건물을 짓고 다수의 점원을 고용하지 않아도 알리바바와 같은 세계 최대의 쇼핑몰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큰 규모의 숙박시설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에어비엔비와 같은 세계 최대 규모의 숙박업을 만들어 모든 개개인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집 한 칸을 이용하여 숙박업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산간 벽지에 사는 농부가 인터넷을 통해 중간 유통업자 모두를 넘어 도시의 수요자와 직거래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국가와 조폐공사와 같은 엄청난 기반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화폐 발행이 이젠 컴퓨터를 소유한 개개인들이 모여 간단한 문자나,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여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피아 만시니라는 여성 운동가는 인터넷 정당을 만들어 아무런 정치 자금을 쓰지 않고도 전국 유권자 4%의 지지를 받아내었다. 이렇듯 개개인의 손에 들어가 개개인의 역량이 된 현대 기술은 개개인 모두를 생산과 유통, 화폐 금융 등의 경제적 분야는 물론 언론과 정치에 이르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집중된 힘과 주도권을 대중의 손에 나누어 주는 민주화를 이루어내고 있다.하지만, 민주화 자체가 우리 앞에 놓인 문제 해결의 종착역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우리가 늘 배우는 바이다. 꽁꽁 얼어 붙어 암울하기만 했던 우리나라의 과거 정치 상황에서는 오직 민주화의 봄바람만 불어 온다면 모든 정치적 문제는 눈 녹아 내리듯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는 정치적 혼란과 위기의 정치 현실을 보면, 민주화의 봄바람이 불던 그때는 목적지에 도달하던 때가 아니라, 비로소 진정 의미 있는 새로운 여정의 첫 발자국을 내딛고 있었던 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민주화의 봄이 우리 앞에 열리고 있던 그 시절에 우리는, 우리 손에 잡혀진 역량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역량에 따라 요구되는 책임의 무게도 함께 커진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고 무거운 책임감으로 신중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했었다. 스파이더맨에서 여러 번 등장했던 대사처럼 “큰 능력에는 큰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With great power, comes with great responsibility)”정치적 민주화와는 다르지만 현대 과학기술의 민주화도 우리 앞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고 있다. 소수의 전유물이기에 소수만이 구사할 수 있었던, 마술사의 마술과 같은 과학기술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뻗기만 하면 잡히는 가까운 곳에 놓여 개개인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개인의 역량이되었다. 하지만, 우리 손에 잡혀진 현대 과학기술은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만큼 혼란과 자멸의 가능성을 함께 열어 줄 수도 있기에, 기술민주화가 제공하는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박스럽지 않은 무겁고 신중한 걸음이 되어야 한다.100년전을 살았던 사람들의 눈에, 오늘날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모두, 신령한 능력을 가진 위대한 마술사와 같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손에 들린 것은 현대 기술이 만들어 낸 신통한 ‘재주’들일 뿐이다. 이런 ‘재주’들로 강화된 우리 개개인의 역량이 열어내는 민주화된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유무선 통신 기술로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어 온갖 지식과 정보를 널리 나누어 서로 배우고 가르치게 될 우리는 새로운 친구를 갖게 되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며, 새롭고 혁신적인 경제를 건설하고, 효율적인 정치적 의사 결정 구조를 창출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새로운 모습의 국가를 형성할 수도 있게 될지 모른다.요컨대 민주화된 현대 과학기술은 개개인의 역량을 강화시켜 우리의 보폭을 더욱 넓게 해줄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보다 빨리 그리고 멀리 달릴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가능성에 도취되어 그저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저런 일을 감행하는 경박스러움은 경계해야 한다. 민주화된 현대과학기술이 열어주는 가능성의 크기가 크고 놀라운 만큼, 우리는 “이 모든 역량을 이용하여 어떤 내일로 향해 나갈 것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고 답하려 노력하며, 신중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내일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하지만 이런 질문에 어찌 쉬운 답이 있겠는가? 그저 도로시의 소망처럼 오랫동안 잃어 버리고 잊고 있었던 것들을 그리워하는 마음, “내 집같은 곳은 없어(There is no place like home.)”라는 주문이 어쩌면 그 소중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뿐이다./장수영 포스텍 교수(산업경영공학)장수영 연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미시간대학교 산업공학 박사를 마친 뒤 귀국, 포스텍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나눔과기술 공동대표, 크리스천과학기술인포럼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2020-01-08

서향재에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겨울비가 촉촉하게 내리던 1월 6일 월요일 저녁. 광주 동명동에 자리한 ‘서향재(書香齋)’에 도착한다. 서책의 훈향이 퍼져 나가는 집, 서향재. 이곳에서 30년 넘도록 시민들이 모여 책을 읽고 소감을 나누고 토론해왔다고 한다. 한 세대에 이르는 긴 세월, 세 번째 월요일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향재 독서모임 이름이 ‘세월회’라고 말한다.그날 모임에서 나는 ‘유라시아와 격동의 20세기’라는 주제로 강연했다.유라시아를 횡단하는 포괄적인 인문학 서책을 기획하고 있던 터라, 그 일부를 파워포인트로 정리해 선보인 것이다. 20세기 전체를 어찌 90분 남짓한 시간에 다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19세기에 강연 일부를 할애하였기로 시간은 더욱 짧아지고 말았으니.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20세기의 고갱이는 얼추 전달한 듯하다. 서향재에 빼곡하게 놓인 의자가 모자라 몇 사람은 마룻바닥에 앉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된다. 듣는 이들은 불편했겠으나, 말하는 자로서는 퍽이나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유명하지도 대단한 인간도 아닌 자의 강연을 함께 해준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따스하게 다가온다. 청도의 농가주택에 살면서 붙인 당호가 ‘파안재(破顔齋)’이니, 파안재 주인이 서향재로 마실 나가서 한 마디 전한 셈이다. 그 말은 하지 않았으나 속은 훈훈한 저녁이었다. 돌이켜보면 2차 대전 후에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이 20세기 한복판의 일이다. 우리로서는 잊을 수 없는 숱한 사건과 사변이 꼬리에 꼬리를 문 20세기 후반기지만, 세계사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물론 1-2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커다란 전쟁은 없었으나, 한국동란을 필두로 베트남전쟁과 걸프전이 뒤를 이었다. 중국에서는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천안문사태로 숱한 인명이 살상되었다.20세기를 두 가지 말로 요약한다면 필시 문명과 야만이 되리라. 한편으로는 과학과 기술이 불러온 물질문명과 의약과 보건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삶의 질이 풍요로워진다.다른 한편으로는 1917년 사회주의 10월 혁명과 내전, 1-2차 세계대전과 국지전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참화가 벌어진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중동의 전운은 전쟁의 참화를 예고한다. 1월 3일 있은 미군의 카셈 솔레이마니 이란 군사령관 폭살(爆殺)이 좋은 본보기다.이라크를 방문 중인 이란의 전쟁영웅 솔레이마니를 처단해버린 미국의 처사에 국제사회가 분노하고 있다. 남의 나라 한복판에서 은밀하고 야비하게 군사작전을 실행하는 나라가 어찌 인권과 민주주의를 운운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2차 대전 이후 세계의 패권국가로 등장한 미국의 악행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21세기 스무 번째 벽두에 자행한 행악질은 실로 경악스럽기 그지없다.서향재에 모인 시민들과 함께 차분하게 돌아본 20세기의 교훈은 단출하다. 야만을 경계하면서 문명을 유지-발전시키는 것이다. 묵묵히 자신과 사회와 세계와 역사를 돌이키고 사색하는 시민들의 서향재는 오래도록 환하게 빛나리라.

2020-01-08

브루스 왕과 거미

로버트 브루스 스코틀랜드 왕은 용맹하고 현명했으나 영국과 전쟁에서 여섯 번이나 패해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숲 속에 몸을 숨기는 처지였습니다.비 오는 날, 브루스는 초라한 오두막에 누워 비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이제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생각에 젖어 모두 내려놓고 투항할 마음을 먹습니다.그때 브루스 왕은 우연히 거미가 줄을 치는 것을 목격하지요. 거미는 한 기둥에서 다른 기둥으로 거미줄을 보내려고 했지만 여섯 번이나 거미줄이 짧아 실패합니다.지켜만 보던 브루스는 말합니다.“쯧쯧, 여섯 번이나 싸움에 지고 이렇게 도망쳐 온 내 처지나 여섯 번 실패한 네 처지나 다를 바가 없구나…”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거미는 브루스의 푸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가느다란 줄을 뽑아 내어 일곱 번째 도전할 준비를 합니다. 브루스는 본인의 처지는 까맣게 잊은 채 거미가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다 마침내 줄을 건너편 기둥에 걸쳐 놓은 것을 보고 “바로 저거다!” 소리 지르며 용기를 얻습니다.“여섯 번 해서 안 되면 일곱 번하고, 일곱 번 해서 안 되면 여덟 번, 아홉 번 계속해서 하는 거다. 그러면 언젠가는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브루스는 그 길로 산을 내려가 스코틀랜드 군사들을 다시 모았습니다.“나의 병사들이여! 지금 영국군은 승리에 도취해 긴장을 풀고 있다. 이때 쳐들어가면 승리할 것이다.” 그들은 무서운 기세로 영국군을 무찔렀습니다. 마침내 스코틀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지요.혹독한 시련을 겪으면 대개 사람들은 남 탓을 하거나 합리적인 핑계를 대며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록 사방이 캄캄한 어둠에 잠겨 있어도 브루스 왕에게 거미가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소망의 빛을 놓치지 않는 2020년이기를 기도합니다.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20-01-08

선생님의 용기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처럼 물리적 시간으로는 새해이지만 정치를 비롯해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새해는 한참 멀었다. 분명 보신각종은 울렸는데, 그 효험이 예전 같지 않다. 한때 사람들은 보신각종 소리에 절망적인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희망을 노래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희망의 결심 대신 절망의 복수에 중독되어버렸다.성난 군중의 모습은 홍콩만의 일이 아니다. 오만과 독선에 빠진 정치인들의 작태에 이 나라 국민도 단단히 성이 났다. 촛불이라도 들고 싶지만, 이념으로 변질된 촛불은 오히려 국민의 눈과 마음을 멀게 하기에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고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이념에 갇혀 도로를 오염시키는 무리가 될 수는 더 없다. 자정 능력을 잃은 사회를 사는 방법에 대한 경우의 수는 많지 않다. 그 사회를 떠나거나, 아니면 외면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정말 죽을 각오로 싸우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방법은 희망 고문에 불과하다. 답이 없는 사회에 오로지 내 답만이 정답이라고 외치는 무리 때문에 우리 사회의 혼돈은 단군 이래 최고다.네거리를 지나다 어느 정당에서 내건 “국민의 힘”이라는 문구가 적힌 불법 가로펼침막을 보았다. 특정 정당의 홍보 수단이 되어버린 “국민”이라는 단어가 참 아팠다. 국민을, 그것도 국민의 힘을 저렇게 함부로 써도 될까는 생각에 화가 났다. 지정된 장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불법으로 내걸린 특정 정당 홍보물의 도구로 전락한 것이 이 나라 국민의 실정이다.도대체 이 나라엔 국민(國民)이 있을까? 교과서에서는, 그리고 지금 대통령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들은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했다. 진정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교과서도 그렇고 대통령도 그렇고 국민을 기만(欺瞞)한 것이 확실하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과 국민은 정치의 도구요 수단, 더 정확하게 말해서는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국민 정치 로봇이라는 용어가 역사에 기록되기 전에 더 이상 이념 정치인들에게 농락되어서는 안 된다.그것은 교육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도, 교사도 아니다. 지금 학교의 주인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교육 관료들이다. 그들의 말 한마디면 학교 정책들은 하루아침에 바뀐다. ‘SKY 캐슬’에 이어 최근 ‘블랙독’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다. 거기서 어느 기간제 선생님의 말씀이 필자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애들 보기에 쪽팔리지 않습니까!”과연 지금처럼 간다면 2020학년도의 학교 모습은 어떨까? 달라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학생들은 의미도 없는 줄세우기식 시험에 갇혀 하늘 한 번 못 볼 것이다. 또 공시생이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어른들의 편견에 떠밀려 명문대학교 진학을 위해 밤을 낮으로 삼을 것이다.정말 학생들 보기에 쪽팔린다. 더 이상 우리는 학생들을 명문대라는 말로 유혹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초에 교사들이 용기를 내어 교육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그 첫걸음은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다.“학생 여러분, 교실에, 교과서에, 시험에 가두어서 정말 미안합니다.”

2020-01-08

말 많은 마일리지 개편안

마일리지는 고정 고객 확보를 위한 기업의 판매 촉진 프로그램으로, 고객은 이용 실적에 따라 점수를 획득하는데, 누적된 점수는 항공권을 구입하는 화폐의 기능을 한다. 마일리지는 항공사에서 시작돼 근래에는 신용카드사, 통신회사 등에서도 고객 유치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최근 대한항공이 내놓은 마일리지 개편안에 대해 소비자들이 연대해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할 움직임을 보이는 등 논란이 많다. 대한항공은 이번 개편안에서 보너스 항공권과 좌석 승급 마일리지 공제기준을 대륙별 ‘지역’에서 ‘운항거리’로 바꿨다. 이에 따라 일반석 기준으로 전체 125개 대한항공 국제선 운항노선 중 64개 노선의 보너스 마일리지가 인하되고, 49개 노선이 인상됐다. 12개 노선은 종전과 같다. 소비자들의 불만은 장거리 노선에서다. 예를 들어 인천∼뉴욕(미국) 구간의 프레스티지석을 보너스 항공권으로 구입하려면 종전에는 평수기 편도 6만 2천500마일이 필요했지만 개편안 기준으로는 9만마일이 적용된다. 같은 구간을 일등석으로 사려면 종전 8만마일에서 13만5천마일로 늘어난다. 항공사측은 공제 마일리지의 합리적 기준 마련이 목적이며, 중국, 미국 등의 경우 동일 지역 내에서 2천마일 이상 운항거리 차이가 나는 데, 그동안 운항거리 차이를 반영하지 못해 비합리적이었다는 주장이다. 탑승 마일리지 적립률을 바꿔 일등석과 프레스티지석은 적립률을 최대 300%까지로 대폭 높이고, 일반석 가운데 여행사 프로모션 등으로 할인이 적용되는 등급의 적립률은 최하 25%까지로 낮춘 데 대한 불만도 크다. 마일리지 산정방식이 ‘빈익빈 부익부’ 방식으로 바뀌었으니 논란이 쉽게 사그라들지는 않을 듯 하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1-08

그 한 마디의 치명적 약점

장규열 한동대 교수말들이 거칠다. 생각을 나누고 소통을 이어가려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지면을 채우는 언사가 투박하고 공격적이다. 부드럽고 유연한 언어를 사용하면 뜻을 충분하게 전하지 못하기라도 할 것처럼, 언중(言衆)이 만나는 표현들은 날카롭고 뾰족하다. 촌철살인(寸鐵殺人). 여러 생각을 짧은 한마디로 정리해 줬을 때 이렇게 부른다. 통쾌하기도 하고 속이 시원하겠지만, 그 한마디가 어떤 결과를 빚는지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감동하여 마음을 움직이기보다 칼날이 되어 마음을 다치게 했다면. 생각을 바꿔 새롭게 다짐하기보다 마음 문을 영영 닫아걸게 했다면. 대화와 소통의 문이 열리기보다 그 한 마디로 다시는 마주 대하지 않게 된다면.말로 겨뤄야 한다. 생각은 견주어야 하고 의견은 개진되어야 한다. 특히 나라의 앞길을 가늠하고 조정하는 일은 사리에 맞아야 하고 논리가 닿아야 한다. 부족한 이치를 막말로 이기고 모자라는 논리를 혐오와 단절의 표현으로 차단하면, 생각이 더는 나아갈 수가 없고 현실은 점점 힘들어만 간다. 속이 시원한 끝에, 속만 시원하고 말았다면 이는 소통이었을까 배설이었을까. 말로 한 펀치 먹이는 게 필요한 게 아니라, 생각을 모아 더 나은 소통의 장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말재주 좋은 그가 뱉어낸 한 마디가 상대에게 깊은 절망을 안긴다면, 말이 오히려 벽을 만들지 않았을까. 벽, 그것도 소통의 절벽이 생겨나지 않을까. 단절과 반목, 질시와 냉대는 그렇게 생겨나지 않았을까.칼처럼 깊이 박히는 표현을 고대하기보다 생각깊은 논변을 기대했으면 한다. 말을 하는 이도 촌철살인에 ‘속깊은 지혜’를 담기로 하고, 언론은 더 이상 ‘그 한 마디’에 기대지 않았으면 한다. 속이 시원해 이기는 게 아니라 소통을 이어가야 공동체가 일어날 수 있다. 촌철살인격 한 마디를 찾느라, 감정과 편견에 치우치면 이내 막말이 되고 공격적 언사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언론이 제목장사를 하고 종교가 폭압적 언사로 어지러우면 국민은 누구를 믿고 세상을 접할 것인가. 속 시원할 그 한 마디에는 전달효과도 물론 있겠지만, 치명적 약점이 도사리고 있다. 촌철이 살인으로 끝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 되고 말 것인가. 말을 하려거든 누구를 이겨 올라서는 걸 넘어, 공동체에 유익한 뜻이 담기도록 유의할 일이다. 그 말을 받아 살피고 새기면 더욱 슬기로운 지혜가 솟아오르게 담론을 이어갈 일이다.‘주홍글씨’를 지었던 작가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은 ‘단어와 문장은 쓰는 사람에 따라서 선이든 악이든 피어나므로, 문제와 희망을 함께 담는다’고 하였다. 조선의 한 시조는 ‘말로써 말많으니 말말을까 하노라’고 하였던가. 변화와 개혁을 실천해 가려면, 겨루고 벼룰 것은 결국 생각의 힘이다. 그 힘을 바르게 표출하기 위하여 심사를 가다듬어야 한다. 새 해, 정치의 계절에는 특별히 힘과 뜻을 담은 무게있는 말들이 잔치를 벌여야 한다.

2020-01-08

가정부 한 사람의 힘

페스탈로치가 어렸을 때 스위스는 정치가들의 싸움으로 몹시 어지러웠습니다. 농촌은 피폐했고 도시는 타락해 있었지요. 아버지는 정직한 의사로 돈보다 고통스러운 환자를 치료하느라 바빴습니다. 그러다 그만 병을 얻어 죽음에 이릅니다.죽기 직전 아버지는 가정부 바아베리에게 말합니다. “바아베리, 내 가족들을 지난날처럼 앞으로도 잘 돌봐 주면 좋겠네.”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에 그녀는 “네, 그렇게 하고 말고요. 약속하겠습니다.” 말하고 눈물을 닦았습니다. 페스탈로치의 나이 다섯 살 때,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형편이 넉넉지 않은 이 집에 남아 궂은 일을 하겠어요?” 모두 수군거렸지만 바아베리는 묵묵히 일했고, 어린 페스탈로치를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었습니다.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바아베리를 가족처럼 여기며 생활하던 페스탈로치는 자라면서 가슴에 소중한 꿈을 키워 갑니다. “사회는 타락했지만 바아베리처럼 훌륭한 사람은 얼마든지 많을 거야. 나도 어려운 사람을 위해 일생을 바쳐야지.”어른이 된 그는 타락한 사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길은 정치, 경제도 아닌 교육에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당시 억압적인 교육 환경 가운데서 아이들은 체벌과 봉건적 체제 아래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교육 철학이 달랐던 학부모와 교장들로부터 배척당했지만, 뜻을 함께하는 동료와 함께 일절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고, 실물교육과 체험을 통한 진정한 교육을 실천했습니다.페스탈로치는 사상 최초로 교육 가치를 지키기 위해 단체를 조직하고 투쟁했던 선한 목자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올바른 교육에 헌신할 수 있었던 비결은 가정부 한 사람의 숭고하고도 희생적인 모습을 보며 자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누구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에 남을지 고뇌하며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2020년이길 소망합니다./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20-01-07

무명가수 K형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2020년 경자년 새해가 밝았지만 지난해 송년회 기억을 떠올려 본다. 그날은 대낮부터 송년모임이 있었다. 연협(연예협회) 회원들의 송년회였다. 예총의 9개 예술단체 중 가장 힘겨운 한 해를 보냈을 협회가 바로 연협이다. 지자체의 보조금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사정이라 모든 행사를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회비로 운영하였으니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례행사를 빠뜨리지 않았으며, 송년파티는 알차게 준비하였다. 행사를 시작하면서 먼저 ‘가요발전을 위하여 열정적으로 노력하다 안타깝게 갑자기 먼 길을 떠난 K형에게 묵념’을 드렸는데, 그에 대한 추억으로 가슴 한켠이 아릿하였다.구랍 20일 경, 이른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고 K형이 타계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다. 불과 며칠 전, 예총이 주관한 ‘예술인한마당’에서 특유의 활발한 무대매너로 ‘시골총각’을 멋지게 부르던 모습이 생생한데, 그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돌아보면 아쉽지 않은 이별이 어디 있을까마는 K형과의 이별이 특히 안타까운 것은 그와의 추억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한, 두 살 위인 그는 누구보다 웃음이 많았고 긍정적인 성정을 가진 인정 많은 이웃이었다. 그는 평생을 밝은 얼굴로 웃고 노래하며 봉사하는 무명가수의 삶을 살았다. 40여 년간 대중음악의 한 길을 걸으며 무대 위에서나 현실의 삶에서 언제나 웃는 모습이었고, 불귀의 길을 떠나기 전날에는 모친상을 당한 후배의 문상을 위하여 먼 길을 마다않고 다녀온 정 많은 시골총각이었다.아침 일찍 빈소에 도착하니 망자임을 알리는 모니터 안에서 가족이라고는 딸 둘의 이름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그의 대표곡인 ‘시골총각’이 나직하게 들리는 분향소에서 연협의 지인들에게 들은 그의 삶은 평생을 혼자서 외롭게 노래하며 살아온 외길이었다. 핑크색셔츠를 즐겨 입었고, 돋보기안경 너머의 큰 쌍꺼풀, 구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뒤에 웅크린 고독의 무게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심장에 지병이 있었으나 경제력 부족으로 고가인 심장박동 보조기를 착용하지 못하여 위험요소를 늘 지니고 있었으니, 40년을 한결같이 무대 위에서 노래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였으나, 정작 자신은 심장의 고통을 안고 고독과 빈손으로 맞서왔다 생각하니 대중예술인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한가를 짐작할 수 있는 단면을 본 것 같았다. 밤늦도록 쓴 소줏잔을 기울이며 그를 추억한 동지들은 예술과 현실의 삶이라는 엄혹한 경계에서 고뇌하는 연예예술인들의 삶에 좀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간절히 소망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그의 품을 떠나 서른을 넘긴 두 딸은 어렵게 연락이 닿아 장례식에 겨우 참석하였고, 연협 동료들이 곁을 지키던 외로운 유해는 고인의 평소 바람대로 화진해수욕장 앞바다에 뿌려졌다. 부디 저승에서는 튼튼한 심장으로 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기를.함께했던 대만여행에서 입었던 귀여운 빨간조끼, 그 모습이 새삼 그립다. 이제 우리는 멜빵바지에 핑크색 넥타이를 매고 돋보기안경 너머로 큰 쌍꺼풀의 맑은 눈으로 환하게 웃으며 부르는 무명가수의 ‘시골총각’을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인가.

2020-01-07

스마트세상은 누가 만드는가?

곽지영 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얼마 전 영국의 브리스톨이라는 도시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회의장소인 브리스톨 대학으로 이동하는 중 택시기사님께 인사치레로 ‘브리스톨은 참 흥미로운 도시 같다’고 한마디 건네자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우리 브리스톨은 지금 런던을 능가하는 혁신적인 도시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브리스톨의 혁신을 위해 시의회와 브리스톨 대학이 시민들과 함께 정말 많은 일을 하고 있거든요. 예를 들어….”기사님의 이야기는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십 수분 간 길게 이어졌다. 브리스톨 시의회와 브리스톨 대학이 진행하고 있는 대표적인 스마트화 노력에 대한 기사님의 해박한 지식과 자긍심은 그저 우연이라기에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혹시 브리스톨 대학 관계자가 아닌지 묻고 싶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계시는지 조심스레 물었다.“운전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많이 들으니까요. 게다가 곳곳에서 도시 혁신을 위한 활동들이 수시로 진행되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지요….” 기사님의 당연하다는 듯한 답변에 우리는 말문이 막혔다.‘영국을 비롯한 유럽 스마트시티의 성공 비결은 시민 참여를 통해 도출된 일상 속 해법이라는 점이다.’ 여느 보고서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이 구절은 이번 영국 방문을 계기로 우리에게 새로운 발견의 대상이 되었다.영국인들에게 스마트시티란 국가나 지자체가 ‘알아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들에게 스마트시티는 이제 구성원들이 직접 나서서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도시 혁신활동 그 자체로 시민들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 그것을 택시기사님의 증언을 통해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영국인에게 있어 과학기술은 그 역사를 자신들이 이끌어 왔다는 특별한 자긍심의 대상인 동시에, 누구나 쉽고 친근하게 대하는 대중문화의 일부’라는 요지의 논설을 읽은 것이 떠올라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예술에 대한 그들의 시각과 태도 역시 무관하지 않다. 대부분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무료로 이용 가능한 영국. 그들에게 예술은 높은 곳에 걸어 두거나 유리 상자 안에 고이 모셔두고 멀찍이서 감상하는 경외의 대상이 아니다. 바로 가까이에서, 언제고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일상 속에 녹아든 생활 그 자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과학기술과 예술을 일상생활 그 자체로 만들어 버린 그들이기에,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누군가 일방적으로 창조하도록 허용하지도, 유리상자 속 전시용 스마트 세상이 되게 내버려두고 뒤로 물러나 있지도 않았다. 스마트 세상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손수 한번 만들어 보겠다며 직접 나서고 있는 것이다.소위 ‘엄친아’와 비교 당하는 언짢은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 글을 통해서나마 우리 지역 시민들께도 슬쩍 한 번 부추겨 보고 싶다. 우리 모두가 실생활에서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진짜 스마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이다.

2020-01-07

트로트 열풍

국악이란 한국 음악의 준말이다.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거나 한국적 토양에서 나온 음악이란 뜻이다. 시대적으로 보면 일제 강점기보다 앞선 19세기 이전부터 있었던 우리 음악이다. 선조의 생활 속에서 계승 발전된 음악이다. 요즘 종편 TV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 트로트는 국악과 현대 대중가요와 구분되는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음악 장르다. 국어사전에서는 “정형화된 리듬에 일본 엔카(演歌)에서 들어온 음계를 사용하여 구성지고 애상적인 느낌을 주는 음악”이라 정의하고 있다. 트로트는 1930년대 중반 정착되면서 우리국민 사이에는 신민요와 더불어 대중가요의 양대산맥이었다. 당시 이미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음악이다. 황성 옛터,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등이 당시 인기곡이다.트로트(trot)는 영어로 “빠르게 걷다” 는 뜻이다. 서양음악 폭스 트로트에서 나왔지만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본다면 일본 가요인 엔카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한 때는 왜색이라는 이유로 외면도 받았고 금지곡이 되는 수난도 겪었다. 하지만 1960년대 ‘동백 아가씨’를 계기로 인기가 회복되며 점차 국민의 가요로 자리를 잡았다.최근 종편 방송에서 방영한 트로트 경연이 지상파 방송을 크게 압도하는 시청률로 화제를 모았다. ‘뽕짝’으로 통하던 트로트가 세상의 이목을 갑자기 확 끌어들였다. 트로트가 갖는 꺽기 창법의 매력과 오락적 요소가 우리 국민정서와 잘 맞아 떨어졌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트로트의 인기는 구태를 벗어던지고 자유분방한 시대적 흐름을 잘 잡아낸 기획이라는 평가가 오히려 더 적합하다. 과거에 매달린 그리고 고정관념에 빠진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적 현상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1-07

고래와 쥐구멍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니는 평~생 미용해서 먹고살 팔자 같다.”칭찬처럼 들리는가? 어떤 이에게는 심드렁하니 들릴 수도 있는 이 말 한 마디가 경북 구미의 열일곱 살 고1 중퇴생의 삶을 바꿔 놓았다. 어쩌면 칭찬 같지도 않은 미용실 원장의 칭찬이 아버지의 매질에 소매치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소녀를, 척박한 삶을 살아가는 청소년 100여 명의 어머니이자 걸그룹 멤버의 ‘금수저’ 엄마로 만든 것이다. 유명 아이돌그룹 AOA의 멤버 찬미의 어머니 임천숙씨의 이야기이다. 열흘 전 쯤 어느 일간지 실린 임천숙씨의 인터뷰 기사는 팍팍한 연말연시를 환하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2002년에 미국에서 ‘Whale Done!’이라는 책이 출판됐다. ‘Whale Done!’을 우리말로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well done’(잘 했어)과 비슷하게 발음되는 이 책제목을 굳이 직역하면 ‘고래가 해냈어!’쯤 될까? 이 책은 2003년 1월에 한국에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니! 참 잘 지은 번역 제목이다. 이 문장은 마치 오래전부터 있던 속담처럼 퍼져나갔다. 책은 읽지 않았어도 이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우리는 칭찬에 목말라 한다. 나는 아니라고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땅에 칭찬이 귀하디 귀하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 오랜 달리기 끝에 물 한 모금을 구하듯, 칭찬을 찾아 헤매지만 나남 없이 칭찬을 듣기 어렵다. 반면에 갈등과 질시와 반목과 비방은 곳곳에 널려 있다. 건전한 비판을 잃어서는 안 되지만 내 편과 남의 편을 너무도 확연히 가르고, 있는 잘못 없는 죄 찾아 상대방을 발가벗기기에 애쓰는 것이 이즈음 대한민국의 세태요 현실이다. 여와 야가, 진보와 보수가, 경영진과 노동자가, 경상도와 전라도가, 남과 여가 칼날을 벼리고 주먹을 겨누고 등을 돌리고 있지 않은가. 잘잘못을 가리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은 밝히고 죄는 벌하되, 거기까지이다. 이제는 참회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경자년 쥐의 해가 밝았다. 하느님의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의 머리 위에 올라타 있다가 문 앞에 이르러 냉큼 뛰어내려 1등을 훔친 쥐의 행위를 약삭빠르다고 욕하고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쥐해가 되면 이것이 슬기로운 행동으로 해석된다. 쥐해가 되면 양식을 축내며 구멍 속으로 도망 다니는 쥐를 부지런하다고 칭찬하고, 그 번식력을 칭송한다. 뚱뚱하다고 게걸스럽다고 돼지를 욕하다가도 돼지해가 되면 다산의 상징으로 풍요의 모델로 추켜세워 주는 것이 해를 이어 열두 동물을 맞이하는 우리들 칭찬과 긍정의 모습 아닌가. 지난해도 그랬고 내년도 그럴 것이다.이 칼럼 집필 제의를 오랫동안 고사했다. 그러다 추천하시는 분의 칭찬과 격려에 결국은 손을 들면서 말했다. “저는 고래가 아니라 쥐과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칭찬에 숨을 구멍을 먼저 찾습니다.”상대방이 쥐구멍을 찾을지언정 올해는 열심히 칭찬거리를 찾아서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세워보면 어떨까.

2020-01-07

하루 16시간의 독학

그는 극빈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는 친구들이 돈을 모아 관을 사 줄 형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우산공장에서 하루 10시간씩 일을 하고서도 밤늦게까지 다시 삯일을 해야만 생계를 겨우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소년은 근처 교회의 연극에 출연하며 웅변을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30세 때 뉴욕 주의원으로 선출됩니다. 하지만, 그는 의원직을 수행할 만한 기초가 없었습니다. 길고 복잡한 법안은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고, 숲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가운데 산림법 위원에 뽑혔습니다. 은행과 거래한 적도 없으면서 주립 은행법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번뇌에서 헤어날 수 없었습니다.그는 결심합니다. 하루에 16시간씩 공부하며 무지(無知)를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의 이름은 알 스미드. 독학으로 정치 연구를 시작해 10년 후 뉴욕 주의 최고의 정치 권위자가 되었으며 4번 주지사로 뽑힙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까지 올랐으며 콜롬비아, 하버드 등의 6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습니다.독학은 학습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독학은 스승 없이, 학교에 다니지 않고 혼자 하는 공부를 뜻합니다. 만약 책을 우리의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면, 독학이야말로 최고의 스승에게 최고의 가르침을 전수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 방식입니다.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해결책을 책을 통해 찾는 과정은 진정한 지식을 선물합니다. 그래서 독학으로 얻은 지식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왜(why) 공부해야 하는가를 알고 시작하는 목적 있는 공부. 이런 독학은 게임보다 훨씬 재밌습니다. 공부가 재미없다고 하는 이유는 단지 자격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스스로 유발한 호기심이 없이 결과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인생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며 목적을 품는 공부. 최고의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독학의 매력에 풍덩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요?/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20-01-06

사자성어 수난시대

강희룡 서예가공자는 제자들과 일찍부터 춘추오패의 하나였던 제나라 환공의 묘당을 찾았다. 묘당 안에 들어서자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쓸모없는 술독이 바로 눈에 띄었다. 이 술독을 반기는 공자를 보고 그의 제자들이 의아해하자 제자들에게 술독에 물을 채우도록 시켰다. 물이 반쯤 이상 차오르자 신기하게도 비스듬했던 술독은 바로 섰고, 물이 점점 더 가득 차자 다시 비스듬히 기울기 시작하더니 이내 엎어지고 말았다. 이 독이 제나라 환공이 항상 의자 오른쪽에 두고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며 나라를 다스렸다는 술독이다. 일명 좌우명(座右銘)이라고도 한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배웠다고 교만하게 군다면 반드시 넘어진다는 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이다.현대인들도 해가 바뀔 때마다 스스로 경계하는 격언이나 좋은 문장을 마음의 거울로 삼아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려고 마음에 새긴다. 개인 말고도 정부 또는 정당, 지자체 등 공공기관에서도 한해 목표를 설계하고 달성을 위해 정진할 것을 다짐하는 교훈이나 사자성어를 쏟아낸다. 지난 2019년 새해를 맞아 경북도는 냉재야화(冷齋夜話)에 실려 있는 황정견이 주장한 환골탈태(換骨奪胎)로 정했고, 포항시는 조선 후기 학자인 유도원의 노애집에 실려 있는 사당잠(四當箴)에서 인용된 동필유성(動必有成)으로, 포항시의회는 ‘후한서’ 주목전에 나타나 있는 동주공제(同舟共濟)로 정하여 한해를 마무리했다. 개인들이 각자가 스스로의 삶이 풀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정하는 좌우명이 ‘작심삼일’로 끝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없으나 공기관에서 정하는 이러한 사자성어가 도정이나 시정에서 조직의 목표에 대한 실천의지가 일 년 동안 반영되어 시민들을 위해 목표를 완성하였다면 다행이나 그렇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감언이설로 시민들을 속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한해가 바뀌어 경자년을 맞았다. 2020년 역시 경북도·주요 시군에서는 서로 뒤질새라 경쟁하듯 사자성어에 정책 비전을 담아 마구 쏟아냈다. 푸른 새바람으로 경북에 좋은 일들을 많이 만들겠다는 의미를 담은 도청의 녹풍다경(綠風多慶), 마음을 합쳐 힘써 나아가자는 뜻의 포항시의 합심진력(合心進力)을 비롯해 경북도내 전 기관단체들과 기초자치단체가 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를 보면 새해 비전과 정책 방향을 엿볼 수 있을지 모르나 일 년 후 그 결과에 대해서는 거울 속에서 냉철하게 분석하여 비춰보아야 한다. 역사에 대한 분별 기준이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아닌 상대적인 이해관계가 되어버린다면 언젠가 우리는 무엇이 옳은 역사인지도 그른 역사인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역사는 거울이다. 지난 일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지 못하고서는 현재의 일이 옳은지 그른지는 알기가 어렵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변화에 속도를 내고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성과를 더욱 많이 만들겠다는 의지로 인용되는 사자성어들이 역사의 거울 앞에서 성찰적이지 않으면 매년 그렇듯이 그 빛을 잃고 말잔치로 끝날 것이다.

2020-01-06

베트남의 박항서, 그리고 한국의 정치 리더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번역학 전공인천공항에서 베트남 하노이의 노바이 공항까지 비행기로 대략 5시간이 걸린다. 베트남은 우리에게 멀고도 가까운 나라이다.2019 동남아시아게임 축구 결승전에서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팀이 인도네시아 축구팀을 3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베트남이 60년 만에 동남아시아 축구게임에서 우승한 것이라고 한다. 우승으로 들뜬 베트남에서는 시민들이 수백 대의 오토바이들이 떼를 지어 베트남 국기를 달고 경적을 울리며 시내를 달린다.작년 2018년 8월 필자는 호치민 벤탄시장 앞에서 거대한 오토바이 물결에 휩쓸린 적이 있다. 2018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경기 4강전 경기가 있던 날로 기억되는데,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이 인상적이었다.베트남은 한국에게 비즈니스의 나라, 사돈의 나라, 한국은 베트남에게 축구 스승의 나라가 되었다.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팀의 승리비결은 선수들의 체력과 기량, 정신력, 그리고 지역감정의 극복이라고 한다.베트남은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긴 나라이다. 남북으로 길이가 1천650㎞에 달한다. 베트남에도 북부, 중부, 남부 사이에 지역감정이 존재한다고 한다. 박항서 감독 이전의 베트남 국가대표 축구 감독은 선수의 선발과 기용에 있어 출신 지역에 따른 편중이 심했고, 심지어 선수들도 다른 지역의 선수들에게는 경기 중 패스도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박항서 감독은 고질적인 관행으로 이어온 지연을 뛰어넘어 실력 위주로 선수를 선발하고 기용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선수들의 체력과 기량은 하드웨어적인 속성이다. 정신력과 지역감정의 극복은 소프트웨어적인 속성이다. 하드웨어적인 속성과 소프트웨어적인 속성을 박항서 감독은 리더십으로 조화롭게 융합하였다.바야흐로 시대는 소프트웨어적인 사고를 필요로 한다. 7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는 하드웨어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공단지역 여기저기 높게 솟은 공장 굴뚝에는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남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와 같은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산업화 시대에는 그것이 맞았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 시대에는 소프트웨어적인 사고가 지배한다.‘소프트(soft)’는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부드럽고 조화로운 사고, 함께 어울리는 사고가 바로 소프트웨어적인 사고이다.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정치 리더는 지금 베트남의 박항서 감독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동서의 지역감정을 넘어 화합과 조화 속에서 남북통일의 대업을 이룩할 리더는 부드러운 사고와 혜안의 암묵지, 그리고 포용력을 지닌 자이어야 할 것이다.바로 ‘소프트 파워(soft power)’‘소프트 거버넌스(soft governance)’ 내지 ‘소프트 카리스마(soft charisma)’이다.

2020-01-06

보헤미안의 음악정서를 세계화 하다

예술은 과학이나 수학 같은 이공 계열과는 다른 점이 있다. 맞고 틀리다의 정답이 없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술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많은 대립과 논쟁이 있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은 에너지의 낭비로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조의 음악을 등장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예를 들면 음악사 백년전쟁이라고 불리는 브람스의 절대음악파와 바그너의 극음악파의 대립은 말러와 부르크너와 같은 새로운 음악형태를 출현시켰으며 러시아의 민족음악을 고수하던 ‘러시아 5인조’와 차이콥스키를 위시한 ‘러시아 서방파’의 대립은 프로코피에프와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사회주의와 러시아의 냄새가 강한 음악경향들을 만들어 냈다.19세기에서 20세기의 초기까지 외세의 지배를 받던 많은 약소민족의 작곡가들은 민족에서 음악의 소재를 찾아내고자 했으며 민요 등 민속음악의 연구를 통해 그 해답을 찾고자 했다. 우리는 그것을 국민주의 음악이라고 부른다.작곡가들의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성향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과 성장배경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작품에 자연스럽게 배어든 순수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오늘 소개할 드보르작은 후자에 속한 경우이며 그 음악적 힘은 순수함을 등에 업고 있기에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어린 시절 학교의 음악시간에 드보르작을 처음 접하였는데 그 국적으로 되어 있는 ‘보헤미아’라는 지역은 너무나 생소했다. 드보르작은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30㎞ 떨어진 ‘네라호제베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룹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나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이 ‘보헤미안’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명칭은 사회적인 관습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방랑적이며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하거나, 가난하고 하루하루 벌어 사는 노동자나 외국 이민자들을 지칭하기도 하였다.드보르작은 성장기에 다른 작곡가와는 다른 특이한 경험을 한다. 그는 작은 여인숙을 겸한 정육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정육점의 가업을 잇게 하려고 하였다. 그는 음악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뜻을 묵살하지 않고 순응하여 정육점을 경영할 수 있는 ‘정육면허’를 가지게 된다. 드보르작의 부모는 그의 아들을 음악가로 키울 생각이 없었지만 장사를 위한 독일어 교육을 위해 집안에 들인 교사가 음악가였다. 드보르작은 다양한 국적의 손님들이 오가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여인숙에서 자주 연주를 하였으며, 이것은 드보르작 자신도 오가는 여행객들의 음악을 자주 들을 기회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양한 음악을 소화하여 자신의 프리즘으로 흡수하는 것은 이후 드보르작의 음악이 세계화될 수 있는 원천이 된다.16살이 되어 프라하의 음악학교에 진학하며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게 되지만 졸업 후 34살이 될 때까지는 카페와 술집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등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에게 작곡가로서의 커리어가 시작된 것은 ‘오스트리아 정부 주최의 공모전’에 자신의 작품을 지원한 일이다. 이 공모전에서 당시 유럽 음악계의 보증수표였던 브람스는 드보르작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으며 브람스는 드보르작의 작품을 자신이 잘 알던 출판업자인 짐 로크에게 적극적으로 출판을 추천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주는 연금도 추천하여 이후 안정되게 자신의 작품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드보르작은 쇼팽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의 작곡가였다. 첫 출판된 그의 작품에 작곡가명이 ‘안토닌 드보르작’이 아닌 독일식인 ‘안톤 드보르작’으로 표기되었는데 이것은 악보를 많이 팔기 위한 출판업자의 꼼수(?)였다고 생각된다. 드보르작은 강하게 항의하여 결국은 원래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정정하였다. 이후 1884년 영국을 방문하였을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빈으로 이주하여 살도록 많은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한 것도 조국에 대한 사랑과 오스트리아 정부에 대해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동포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일제 강점기 말엽, 우리가 알고 있던 많은 작곡가들이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의 강제적인 징병과 차출을 찬양하는 곡을 쓰며 친일행적을 한 것과 애국가의 작곡가마저 친일 논쟁에 휘말려 있는 것을 본다면 드보르작이 한 행동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

2020-01-06

나를 세우는 첫걸음은… 경주 함월사(含月寺)

달을 품은 절, 함월사는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있는 비구니 사찰로 삼릉 근처에 있다. 함월사가 달을 품고 있어서일까? 삼릉 숲에서는 낮달이 보이지 않는다.하지만 천 년의 시간을 품은 삼릉이 달처럼 다사롭고 은은하게 소나무 숲을 지킨다. 소나무 아래로 난 길은 참선하듯 조심스럽고, 그 가운데 깊고 예스러운 숨결들이 늘 그렇듯 먼저 안부를 물어온다. 육신의 피로와 정신의 때가 녹아내린다.솔숲을 배경으로 식당과 카페들이 늘고 있다.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는 거대한 자본의 유혹들, 함월사가 깊은 산중을 두고 이곳에 자리잡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금자라가 달을 먹으면 캄캄하여 어두운 쪽으로 기울어지고, 달을 먹지 않고 그대로 내 보내면 밝은 쪽으로 기울어지니,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조실 우룡 스님이 이름을 지었다는 함월사다.절은 정갈하다. 향기 강한 수종의 나무들이 눈길을 끈다. 설법당 앞마당에는 커다란 은목서들이 겨울에도 눈길을 끌고, 봄을 기다리는 목련의 순결한 꽃눈은 차고 건조한 허공에 몸을 맡기고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여름이 오면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해 농염함을 뿌려댈 치자나무의 아찔한 눈빛과 그에 질새라 은목서들의 향기가 존재감을 드러낼 늦가을을 상상하니 턱턱 숨이 막힌다.철마다 각기 다른 향기로 부처님을 맞을 함월사의 나무들이 앞마당을 거니는 내 안에 하나의 말씀이 되어 머문다. 지금은 향기 없는 피라칸타의 붉은 열매들이 꽃처럼 익어 차가운 계절을 견디고 있다. 어느 한곳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스스로를 틀에 가두지 않고 탐욕도 근심도 모두 내려놓고 중도의 길을 걷듯 함월사의 겨울은 편안하다.차가운 땅을 밟고 선 나무들의 짧고도 긴 휴식, 제 각각의 향기를 품고 때를 기다리는 나무들의 눈빛이 아름답다. 침묵의 시간이 길수록 향기도 강한 법, 언젠가부터 어둠을 견디는 흐느낌과도 같은 고요가 좋다. 차고 썰렁한 법당과 달리 요사채는 훈기가 돌고 안온하다.올해 아흔을 맞는다는 우룡 스님은 향기 강한 나무처럼 정정하시다. 어쩌면 반가부좌의 자세가 저토록 편안할 수 있을까? 스님의 살아오신 긴 세월이 보인다. 뿌리 깊은 나무를 연상케 하면서도 미소는 아이처럼 천진스럽다. 힘이 담긴 목소리보다 깊은 연륜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이 더 큰 말씀으로 다가온다.앉기가 무섭게 음식 앞에서 감사 기도를 하느냐고 물으신다.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내심 깊고 감동적인 말씀을 기대했었는데 스님은 자꾸 그 말씀만 되풀이 하신다. 쪼그리고 앉은 다리는 눈치도 없이 저려오는데 스님은 몇 번이나 하신 말씀을 되풀이 하신다.“가족 간에 함부로 던진 말 한 마디가 원수 원결(怨結)을 낳게 돼요. 그 원결은 쉽게 녹아내리지 않아요. 깊은 참회나 수행, 크나큰 선업을 닦아야 맺힌 원한을 풀 수가 있어요. 허물없는 사이라고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돼요. 명심하세요.”스님은 가족 간이나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마음자리를 돌아보게 하신다. 말씀은 쉽고 평범하면서도 명료하다. 그 실천의 길은 평생이 걸릴 수도 있지만. 듣고 들을수록 말씀들이 살아서 콕콕 나를 찌른다. 풀풀 바람처럼 날리던 눈 속을 걷다 폭설에 갇힌 기분이다.삶의 기본이 되어야 할 언행을 뒤늦은 나이에 귀 기울인다는 게 부끄럽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현학적인 지식을 좇으며 지적 호기심을 채우거나 끝없이 물질의 노예가 되어 달려왔던 오랜 시간들, 그 만족감은 오래 가지 못하고 늘 뒤가 허전했다. 늦었지만 내게 필요한 공부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절을 나서며 받아든 우룡 스님의 법어집 두 권,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삼배를 한 후 책장을 펼쳤다. 커다란 활자들이 주는 가벼움, 그 고정관념을 없애고 싶었다. 아상의 불길을 끄는데 도움이 될 활자들은 곧 나의 부처님이다. 책장을 넘길수록 마음은 가벼워지고 지혜의 눈이 밝아오는 것 같다.조낭희 수필가입문단계에 서 있는 내게 불교와 선(禪)은 한없이 깊고도 어렵다. 잡힐 듯 하면서도 까마득히 멀다. 머리로 아는 것도 아니고 맹목적인 기도가 지름길도 아닌 것 같다. 아직은 좌충우돌 안간힘을 쓰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딜 뿐이다. 지혜와 덕을 갖춘 불성이 내 안에도 있다는 그 말씀 하나만 믿고서.사람들이 함월사를 좋아하는 건 향기 강한 수종의 나무들 때문이 아니다. 지혜가 담긴 부처님 말씀을 우룡 스님은 머리가 아닌 몸과 마음으로 행해야 할 과제임을 일러주신다.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또 다른 길이 보인다. 아주 작은 오솔길도 언젠가는 큰길로 통한다는 것을 안다.타인의 불성은 참 잘 보이는데 왜 내 안의 불성은 보이지 않는 걸까? 끝없이 솟아오르는 의문을 안고 오늘도 식탁 앞에서 공양의 기도를 드린다. 작지만 신심을 바로 세우는 길, 그것이 첫걸음이다.

2020-01-06

“나는 어디서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월든’이 묻다”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나의 하루하루는 24시간으로 쪼개져 시계의 재깍재깍하는 소리에 먹혀들어가는 그런 하루가 아니었다.”‘월든’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호화로운 가구, 맛있는 요리, 고급 주택 등을 살 돈을 마련하는 데 자신의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월든 호숫가 근처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소로우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얽매임이 없는 ‘자유’라며, 자신이 숲으로 들어간 이유도 죽음을 맞이했을 때 자신이 헛된 삶을 살았구나 깨닫지 않도록 삶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소로우가 ‘월든’에서 던진 질문을 통해 2019년을 지나 온 시간들을 돌아본다. “나는 어디서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소로우는 ‘지금 여기’의 중요성을 말한다. 시간에 쫓기듯이 분주하게 사는 삶은 결국 우리의 생을 낭비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만 하고 더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병들 때를 대비해 돈을 벌려고 애쓴 나머지 무리한 결과로 결국 병이 들고 마는 우리의 현실을 꼬집는다. 그는 ‘운명을 개선해보려는 노력은 보류한 채 가난하게 타고난 자신의 신세만을 한탄하는 사람들과, 찌꺼기 같은 부를 축적하여 겉으로는 부유하지만 스스로 금과 은으로 된 족쇄를 찬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월든에서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여 그 어느 시대도 ‘지금’보다 더 거룩하지는 않다”며 깨어 있는 삶을 강조한다. 인간의 영혼과 오늘이라는 시점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임을 보여준다.소로우는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는 “거리의 천박함을 넘어서서 영원한 암시와 자극을 주는” 고전 독서의 가치를 강조한다. 심심풀이로 하는 가벼운 읽을거리를 찾는 독서는 참다운 독서가 아니라고 하며, “발돋움하고 서듯이 하는 독서, 우리가 가장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시간들을 바치는 독서”가 진정한 의미의 독서라고 하였다. 독서는 그가 머물었던 콩코드 지역의 인물들보다 더 현명한 사람들과 사귀며 그들의 예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자, 고대의 위인들만큼 훌륭해지려면 그들이 얼마나 훌륭했던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생계를 유지하는데 바빠 책읽기를 등한시해 왔던 성인들을 위해 마을 하나하나가 대학이 되어야 한다며, 배움은 평생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하였다.소로우는 “당신 내부에 있는 신대륙과 신세계를 발견하는 콜럼버스가 되라”고 역설하였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탐험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만들어가라고 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의 삶을 표현하기를 “선실에 편히 묵으면서 손님으로 항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인생의 돛대 앞에, 갑판 위에 있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렇듯 2019년에 다시 읽은 소로우의 ‘월든’은 여전히 빛나는 구절들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1845년 소로우가 던진 질문은 2020년을 맞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나는 어디서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그 화두로 경자년(庚子年) 새해를 시작할 일이다.

2020-01-06

현금 없는 사회

현금없는 사회란 정보화 사회로의 발전 및 각종 금융 기관 업무의 전산화에 따라 지폐·동전 등 현금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말한다.우리나라는 현재 현금 없는 사회로 진입을 앞두고 있다. 특히 1990년대 후반 IMF를 겪고 난 뒤 조세확보 차원에서 신용카드 보급을 촉진했고, 여기에 소득공제 등의 혜택까지 더해지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2015년 일본 경제산업성이 세계 각국의 현금 없는 결제 비율을 조사한 결과, 한국의 비현금 결제 비율은 무려 90%에 달했다. 한국은행은 지난 해 11월 잔돈 계좌적립서비스 시행을 위해 시범 유통사업자를 모집한다고 밝혔고, 올해 초부터 현금거래후에 생긴 잔돈을 계좌로 직접 적립하는 서비스를 실시할 예정이다.현금없는 사회의 도래는 모든 금융 거래가 전산화해 투명성이 높아지고, 지폐·동전을 사용하면서 일어나는 보관·휴대의 불편함들이 한 번에 해결된다. 휴대하고 다니지 않으니 강도에 의한 도난·분실 우려가 없고, 지폐·동전 제조비용이 절감된다.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100원짜리 동전 2억5천만개 등 동전 6억 개를 제조하는 데 든 비용만 539억원이다. 홍수나 화재 등 자연재해로 돈이 타거나 사라지는 등의 물리적 손상에 대해 매우 안전하다는 장점이 크다. 반면에 현금 대신 사용하게 될 거래수단은 모두 기록이 남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의 추적이 가능해 사생활 침해 논란이 있고, 지진이나 태풍같은 자연재해나 화재와 같은 재해로 통신망 마비 사태가 발생할 때는 결제기능이 멈춰버릴 우려가 있다.노약자나 장애인,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들의 이용하기에 불편한 것도 단점이다. 세상만사 어디에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게 자연의 섭리인가 보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1-06

100세 건강, 김형석 교수와 송해 선생의 장수비결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신년교례회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어제도 두 곳이나 다녀왔다. 선거의 해인지라 참석자도 많고 열기도 뜨겁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십시오’라는 덕담이 오가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가 건강 상식 때문인지 의료보험 덕인지 주변에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 주변 지인의 모친은 105세를 넘기고 있다. 1920년 생 김형석 교수는 올해 100세, 송해 선생은 93세이다. 단순히 연세만 많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두 분 다 열심히 뛰는 현역이다.김형석 교수님, 아직도 그는 신문 글을 쓸 뿐 아니라 전국을 누비며 특강을 하신다. 나도 매주 그의 100세 일기를 읽고 있다. 아직도 젊은이 못지 않은 의욕이 넘쳐나 부럽기까지 하다. 내가 김형석 선생을 처음 뵌 지는 50여 년이 훨씬 지났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우리는 학교 대강당에 모여 그의 특강을 들었다. 당시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연세대 철학 교수 김형석 교수 강의를 직접 들은 것이다. 카랑 카랑한 목소리와 유머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나는 후일 그의 수필집 여러 권을 구해 밤새워 읽은 적이 있다. 며칠 전 그가 강원도 양구에서 지난해 마지막 특강을 했다는 기사도 보았다.송해 선생의 대중적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일요일의 남자 송해의 ‘전국노래자랑’은 시청률이 매우 높은 프로이다. 지난해 대구의 송해 공원을 아내와 함께 찾은 적이 있다. 옥연지를 가로 지르는 다리 위 팔각정 아래 송해의 빛바랜 사진들을 보았다. 송해 공원 인근 마을이 그의 처가 곳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는 불행히도 사랑하는 아들과 아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냈다. 인간적인 불행을 딛고 그는 아직도 유쾌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가 쾌유하여 다시 전국을 누비기를 바란다.새해 아침 이 분들의 장수 비결을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도 두 분 다 90넘어까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한다는 점이다. 김형석 교수는 평생의 업인 강의를 통해, 송해 선생은 노래자랑을 통해 하시고 있다. 요즘은 건강에 관한 정보가 지나치게 넘쳐나고 있다. 한 가지 공통점은 스트레스가 건강의 적이라는 점이다. 두 분 다 자신의 일을 통해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고 있다. 김형석 선생의 글에는 항상 위트와 유머가 넘쳐난다. 송해 선생의 말에는 아직도 유머가 곳곳에 배어 있다.두 분 다 고향을 떠난 실향민이다. 김형석은 평양 대동 출신이고 송해는 해주 출신이다. 실향민으로 이 땅에 정착키 위해 산전수전 다 겪은 분이다. 두 분 다 고난 속에서도 도전적인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그것 역시 장수의 또 다른 비결인지 모른다.내 친구 중에는 나이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체면을 중시여기는 분이 많다. 어딜 가나 노인 행세를 하려고 한다. 내가 존경하는 K선생은 94세인데도 아직도 학술 강연에 열심히 참여한다. 지난해 주변 만류를 뿌리치고 연해주 항일 탐방까지 다녀왔다. 어느 분이 더 장수할 것인가. 독자 여러분의 건강을 기원드린다.

2020-01-05

당신의 첫 기억

김현욱 시인어머니에게 듣기론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두호동, 오천읍에서 살았다고 한다. 기억은 없다. 내 최초의 기억은 포항시 청하면 서정1리에서 시작된다. 서정1리 마을회관, 약방과 슈퍼를 겸했던 옆집, 포도, 돼지 농장, 안심저수지가 떠오른다. 그러니까, 내 유년의 고향은 서정리다. 그곳에서부터 내 첫 기억이 메모리에 저장되었다. 가을이면 지천에 갈대와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던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당(돌무더기가 많은 하천)과 안심저수지에서 자주 놀았고, 포도와 참외, 수박 서리를 하다가 붙잡혀 혼나기도 했다. 친구들과 북한으로 가겠다고(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가방에 간식을 챙겨 산을 넘다 하늘에 헬리콥터가 지나가자 여기가 북한이구나, 화들짝 놀랐던 장면도 떠오른다. 마당이 넓은 집에 살았는데 아버지랑 평상에 마주 앉아 구구단을 잘 외운다고 칭찬을 받았던 일, 여동생이 변소에 빠졌던 일, 숨바꼭질하다가 넘어져 눈가가 크게 찢어진 일, 일요일 아침마다 마을회관에 청소하러 나가야하는데 그게 싫어 숨었던 일,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고 포대기에 갈비(소나무 이파리)를 가득 담아 메고 내려왔던 일 등이 떠오른다.주저리주저리 유년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내 인생의 첫 기억이 궁금해서다. 뇌 과학자들은 대부분의 첫 기억이 재구성된다고 한다. 기억의 속성이 그러하듯 끊임없이 편집,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렬했던 내 인생의 첫 기억은 메모리카드에 쓰기 금지를 해놓은 것처럼 잘 보존되었다.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친구들과 안심저수지에서 실컷 놀다 저녁 어스름, 갈대밭 사잇길을 돌아 집으로 오는데, 바람에 한들거리는 갈대와 코스모스와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우리 마을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합일감, 자연의 충만함을 느꼈다. ‘나’라는 경계가 지워지고 사라지면서 이상한 기쁨과 행복을 느꼈다. 그 기억은 오랫동안 내 삶에 환기되었다.작년부터 아나빠나사띠(들숨날숨에 대한 마음 챙김) 명상을 꾸준히 하면서, ‘나’가 사라졌던 내 인생의 첫 기억을 자주 마주친다. 여태 살면서 나는 ‘나’가 너무 진해지고 강해지고 딱딱해졌음을 느낀다. 콘크리트 같은 아집과 망상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내가 참 불쌍하고 안쓰럽다. 콘크리트를 깨부수려면 강력한 압쇄기가 필요하다. 명상이 그것이다. 나는 명상이 아집과 망상이라는 콘크리트를 깨부수는 압쇄기라고 생각한다. 깨부수고 나오고 싶다. 그때의 어린 나에게로. 자연과의 충만한 합일로.전현수 박사는 ‘생각 사용 설명서’에서 “첫 기억은 그 사람 인생의 중요한 일면을 보여준다. (중략) 일반 사람의 경우에도 첫 기억은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의 삶의 중요한 면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첫 기억도 내가 진정으로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첫 기억과 지금의 내 모습과의 연관성을 찾아보는 것도 나를 있는 그대로 아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2020년에 벽두에 묻는다. 당신의 첫 기억은 무엇인가?

2020-01-05

나눔의 신비

어느 날 스승이 제자들을 모두 불러모았습니다. 요즘 들어 제자들끼리 다투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젊은 스승은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작은 솥에 떡을 쪘다. 그런데 세 명이 먹기엔 모자라지만 천 명이 먹으면 떡이 남는다. 너희 중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대답해보아라.”어느 제자도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밖에서 이것을 듣고 있던 늙은 스승이 들어오더니 무심히 한 마디 툭 던졌습니다. “쯧쯧…, 자기 배를 채우는 것에만 급급하면 언제나 음식이 부족한 법이지.”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노 스승님 말씀을 잘 들었느냐? 세 명이 먹더라도 서로 다투면 부족하고 천 명이 먹더라도 양보하면 남는 것이 이치다.”시인 박노해는 나눔의 신비를 이렇게 노래합니다.“촛불 하나가 다른 촛불에 불을 옮겨 준다고 그 불빛이 사그라지는 건 아니다. 벌들이 꽃에 앉아 꿀을 따간다고 그 꽃이 시들어가는 건 아니다. 내 미소를 너의 입술에 옮겨준다고 내 기쁨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빛은 나누어줄수록 더 밝아지고 꽃은 꿀을 내줄수록 결실을 맺어가고 미소는 번질수록 더 아름답다. 자신의 것을 잃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나누어 줄 수 없고 자신을 나누지 않는 사람은 시간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션과 정혜영 부부는 자녀가 넷입니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했는데, 첫 아이를 키우며 둘째도 낳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지요. 이렇게 하나 둘 늘어나 넷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같은 마음으로 시작한 후원도, 하나 둘 늘어나 이제 800명의 아이로 퍼졌습니다. 내 식구 챙기기만 급급한 이 시대와 정반대로 살아가는 이들 모습이 빛납니다. 행복은 우리가 자신을 남에게 주느라 여념 없는 순간에 소리없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20-01-05

유승민·안철수, ‘비워야’ 보인다

안재휘 논설위원지난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사는 유망정치인들의 사욕이 민심을 어떻게 난도질하는지를 드러내는 아픈 교훈을 남긴다. 외유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김대중(DJ)과 군사독재정권 치하 국내에서 반독재 투쟁을 지속해온 김영삼(YS) 두 사람의 욕심 충돌은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구렁텅이에 빠트렸었다. 당권·대권을 다 거머쥐려는 YS와 당권을 확보하려는 DJ는 결국 민의를 배신하고 대선에 모두 출마해 군사정권 연장을 헌납하는 참담한 결과를 빚고 말았다. 그날의 역사에는 ‘죽 쒀서 개 주었다’는 비탄 딱지가 따라붙어 있다.4·15 총선을 저만큼 앞두고 정치권에 폭풍주의보가 떴다. 여야 정당들은 일찌감치 총선체제로 전환되고 있고, 100일 전쟁을 채비하는 이합집산이 분주히 모색되고 있다. 유승민을 비롯한 바른미래당 위원들은 탈당을 결행하여 ‘새로운보수당’ 창당에 몸을 실었다. 때마침 유럽을 거쳐 미국에 가 있던 안철수가 정치 복귀를 선언해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정권의 무능과 야권의 무기력이 또다시 정치권 한복판에 ‘중도(中道)’ 화두를 불러세우는 중이다.20대 총선의 결과는 분명히 여소야대(與小野大)였다. 그러나 임기 말로 다가오면서 국회 구성은 ‘4+1’ 등장으로 여대야소(與大野小)로 뒤집혔다. 국민이 만들어준 세력 판도를 정략에 빠진 정치꾼들이 임의로 뒤집어버린 셈이다. 이는 분명히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뒷거래다. 선거에서 내린 국민의 명령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바꾼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중도’ 민심의 씨앗을 말살한 횡포는 용서 못 할 중대범죄다.설 전에 돌아올 예정인 안철수의 행보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손학규의 ‘뻐꾸기 알’ 놀음에 만신창이가 된 유승민은 ‘새로운보수당’이라는 새 간판을 장만했다. 2년 전 유승민과 안철수가 야심 차게 추구했던 ‘개혁적 보수, 합리적 진보’라는 중도실험은 일단 실패했다. 유승민이 굳이 당명에다가 ‘보수’라는 개념을 넣은 것도 어정쩡한 ‘중도’의 위험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경험의 산물로 읽힌다.문제는 안철수가 ‘보수’라는 단어를 극도로 싫어했었다는 증언이다. 안철수에게 변화가 있지 않다면, 선택지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전히 진보 민심을 등에 업고 중도영역을 개척하는 것이 정치행로 이정표라면, 안철수의 귀국은 보수정치에 또 다른 위협이 될 따름이다. 더욱 강력한 4+1 또는 5+1이 보수정치의 말살을 넘어 민주주의를 통째로 위협할 개연성마저 있다.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누군가 들어올 자리를 먼저 비워주는 게 지혜다. 유승민은 비워놓고 있는가. 안철수는 얼마나 비우고 돌아오나. 우리 정치사가 명료하게 알려주는 교훈은 뚜렷하다. 비우는 자에게 길이 보인다. YS와 DJ처럼 또다시 스스로를 비우지 못해 역사에 죄를 짓는 길을 갈 것인가. 참다운 ‘중도’ 민심을 개척해 양극화의 지옥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이 나라 정치를 선진화해줄 시대의 참 리더는 과연 누구인가.

2020-01-05

경세제민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아직은 통용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여전히 지배한다. 자식에게 “행복은 성적순이 아냐”고 가르치고 있지만 물질적 가치가 주는 행복의 무게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KBS가 행복을 화두로 신년 여론조사를 했다. 국민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하느냐는 물음에 전체의 46%가 만족으로 답했다. 이를 계층별로 구분해 다시 질문했다. 자신을 상위 80% 이상이라 생각하는 쪽은 무려 82.4%가 만족으로 답했다. 반면에 자신을 소득하위 20% 이하라 생각하는 사람은 19.5%만 만족으로 답했다. 소득계층별로 느끼는 삶의 만족도가 극명하게 갈라졌다. 물질만이 행복이 아니라고 말하기에 궁색한 결과다. 여론 조사 결과는 우리 국민이 느끼는 행복은 소득 순이다. 소득이 높으면 반드시는 아니지만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결과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은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고난에서 구한다는 뜻이다. 경제(經濟)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은 지금의 정치와 같은 의미다. 위정자가 가장 근본으로 여겨야 할 부분은 백성을 배부르게 잘 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가 정치의 근본이 돼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올 한해 한국의 경제전망은 여전히 밝지가 않다. 미중갈등과 한일갈등 그리고 불안전한 한반도 비핵화 문제 등 우리의 경제를 둘러싼 환경이 녹록지가 않다. 한국의 석학 43인이 2020년 한국경제의 키워드를 오리무중(五里霧中) 속 고군분투(孤軍奮鬪)라 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위기속 외로운 싸움이란 뜻이다. 경세제민의 지혜가 더 절실해지는 한해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1-05

2019년 포항의 분야별 성적표

2020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궁금한 것은 지난해 포항의 각 분야별 활동상황이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성과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올해의 흐름도 짚어 볼 수 있기에 나름의 기준으로 성적을 매겨봤다. 어디까지나 필자의 판단인바 사전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포항은 철강업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에 예나 앞으로도 국내 산업과의 연관 관계를 넘어 글로벌경제와 맥을 같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선 나라 밖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2019년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각 국가 지역 할 것 없이 국익 우선주의, 지역 이기주의가 극명하게 표출되었던 한 해였다. 그중의 백미는 미국과 중국. 양국 간 무역전쟁은 단순하게 두 나라 사이에 경제적 이해관계로 인한 충돌을 넘어섰다. 새로운 세계정치 질서가 양강 체제(G2)로 재편되는 패권쟁탈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불거진 국지전이었다. 그렇기에 양국 간 분쟁은 언제든지 어떤 분야에서든 전면전으로 확대될 여지를 남기고 있다. 당연히 그 여파는 직간접적으로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불과 1년 뒤인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둔 미묘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대해 수출규제조치라는 선택을 했다. 이는 그동안 북미, 남북정상회담 등 남북관계개선에 자국이 소외되었던 것에 대한 불편함, 양국 간 위안부, 전범 기업처리 문제와 더불어 실패한 아베노믹스 등 자국 내 정치기반의 흔들림 등 복합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은 극한 갈등 양상으로 보였으나 연말부터 다소나마 해결점을 찾아가는 모양새다.아직 결과를 예단키는 어렵지만 일본의 이번 조치는 적어도 우리경제에 효과가 큰 백신을 주사해 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동안 우리는 산업계 전반에 나타나고 있던 ‘불편한 진실’을 사실상 외면해왔다. 그저 외형적인 매출액 부풀리기에만 주목하여 소재에서 부품, 최종 완성재에 이르는 공급사슬(supply chain) 전반에 걸친 부가가치율은 국제분업 진전이라는 말로 무시해왔던 것이다. 과도한 일본에 대한 소재부품 의존도에 무뎌지던 감각은 재벌, 기업체 사장, 정책당국자를 가리지 않았다. 일본의 이번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조치는 그런 면에서 ‘극약처방’이었다. 우리 모두 정신을 차리도록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그 경제적 효과는 매우 컸다고 평가한다. 만약 세월이 더욱 흘러 일본이라는 깊은 수렁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시점에 일본이 같은 한 수를 두었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아마도 경제 우선이라는 말로 일본에 모든 것을 내주었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일본은 이번 한 수를 너무 쉽게 쓴 셈이고, 우리는 그나마 다행이었던 순간이다. 유로 지역도 미국을 따라 수입제한조치 등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고 있고, 영국은 엄청난 눈치작전 끝에 결국은 예정대로 브렉시트를 위한 절차를 착실히 밟고 있다. 이처럼 2019년 세계는 ‘국익’ 우선주의로 인한 거친 파도로 인해 국내경제도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포항경제도 그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었다. 각국의 이익 우선 다툼에서 직간접적인 타격을 많이 입었다. 2019년 포항의 철강산업은 적어도 상반기까지는 외부요인에 의한 충격으로 감소하였던 수출물량을 철강재 시황이 보완하는 모습이었지만 하반기까지 이어진 원자재가격 상승이 발목을 잡았다. 특히, 3/4분기부터는 글로벌 경기 하강으로 수출마저 주춤, 재고가 엄청 쌓였다. 이 문제가 포항 경제를 크게 억눌렸다 할 수 있다.즉각적인 효과로 나타난 건 아니지만 포항경제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도약을 위한 투자는 나쁘지 않았다. 영일만항 인입 철도가 완공되었고, 국제크루즈여객부두와 여객터미널 완공을 앞두고 포항-블라디보스토크 간 국제 크루즈 시범 운항, 도심철길 숲 조성과 도심 재생 사업 등은 향 후 다양한 먹거리 창출을 유도할 수 있는 기반으로 평가받을만하다.포항지역 경제 주축인 철강산업과 미래 먹거리를 위한 투자 등을 종합한 실물경제에 있어 지난해 성적표를 매긴다면 ‘B+’ 정도는 주고 싶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선방하였다는 격려성 학점이다. 물론 포항경제가 지닌 약점과 어려움은 성적표에 매기지 않았다. 일례로 여전히 산업인력 고령화에 따른 고임금 급여자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가운데 기초임금상승 등으로 기업 고정비용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내부요인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지역 금융은 ‘B’ 정도에 그쳤다고 본다. 포항시 소재 제1, 2금융권을 합한 총수신잔액은 2018년 말 15조9천352억 원에서 2019년 10월 말 15조8천379억 원으로 973억 원 정도 줄었다. 같은 기준 총여신잔액은 지역 내 아파트경기 부진, 공장 등 투자위축 등으로 16조7천59억 원에서 15조3천566억 원으로 1조3천493억 원이 줄어들었다. 금융권의 통합 예대율(대출/예금x100)은 같은 기간 99.4에서 91.9로 상당 폭 감소하였는데 이는 새마을금고, 신협 등 제2금융권 예대율이 같은 기간 70.8에서 62.3으로 부진했던 것이 이유다. 제1금융권인 예금은행도 감소하기는 하였으나 2019년 10월 말 현재 133.9를 기록하였다. 예금은행은 지역예금보다 33.9%가 넘는 자금을 다른 지역에서 끌어와 지역에 대출한 셈이다. 문제는 높은 금리로 예금은 받아들이면서도 지역 서민이나 예금은행을 이용하지 못하는 영세소상공인들이 지역 경기 부진의 영향으로 대출자금 수요가 많지 않아 제2금융권은 금융중개실적을 높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지역에서 자금을 운용하기도 쉽지 않아 이들 제2금융권이 지역 사업에 활발하게 참여, 투자할 방안을 앞으로 모두 고민해 나가야만 한다.지역 정치부문은 ‘C+’ 정도로 판단한다. 지난해 연초부터 20만 명이 넘는 지역민들이 포항지진특별법 제정에 대한 국민청원으로 바랐던 갈증은 거의 자포자기 시점인 연말에야 겨우 통과되었다. 그래서 시행령과 행정규칙을 마련하고 또 예산 확보까지는 적어도 6개월 늦으면 거의 1년 가까이 시간적 지연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커졌다. 게다가 숙원사업인 영일만대교 건설사업에 대한 예타 면제 탈락과 생활폐기물에너지화시설(SRF)을 둘러싼 오천읍 주민들에 의한 주민소환문제도 있었다.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는 나름의 의미 있는 정치적 사건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정치적 논의와 화합으로 민의를 수렴하는 것보다는 지역 사회의 이견이 상호교류로 융화되지 못하고 거기에서 멈춘 것은 앞으로도 불씨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아쉽다.포항시의 지난해 가장 눈부신 성과 중 하나는 강소연구개발특구를 시작으로 배터리규제자유특구, 영일만관광특구 등 ‘3대 국가전략특구’ 지정으로 평가되고 있다.국악가족 뮤지컬 ‘강치전’ 포스터.최고학점을 주고 싶은 분야도 있다. 문화예술 쪽이다. ‘A+’를 줬다. 어느 지역이고 연중 문화예술 행사는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특정 지역이 지닌 문화역사자원을 콘텐츠화하고 이를 스토리텔링으로 엮어 하나의 뮤지컬, 연극, 테마파크 등으로 승화시킨 것은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이러한 콘텐츠의 개발이야말로 언제든 확대재생산이 가능한 포항지역만이 지닌 토종 종자(seed)로서 높은 점수를 매기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지역 보물인 암각화를 학술적으로 정리하고 특별전으로 역사문화유산을 재조명함으로써 포항인의 자존감을 끌어올렸다. 장기유배문화체험촌의 조성,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 등은 가점 항목이었다.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한 행정도 같은 학점을 줘도 될 듯하다.포항의 과거, 현재, 미래는 포항인의 몫이다. 어떠한 사업이라도 최우선 순위는 포항에 소재하는 학자, 기업, 단체이기를 바란다. 특히 포항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상, 철학, 인문학적인 연구일수록 유명도는 낮더라도 포항을 더 잘 아는 포항 출신 문화예술인, 포항에 자리한 대학교수, 포항에서 활동하는 전문가에게 맡길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포항에 부족한 전문 인력이 향후 양성될 수 있다. 2020년부터는 지역 행정, 기업 등이 발주하는 주요 용역사업에서 포항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다른 지역 전문가가 함부로 재단하고 결론을 지은 어설픈 보고서만은 없었으면 한다. 당연히 본인도 ‘지익(地益)’ 우선주의자다./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2020-01-05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정은숙 프리랜서연초에 빠뜨리지 않는 활동 한 가지가 있다. 지난해 바인더에 꼬박 작성한 플래너를 보며, 머물렀던 시간의 흔적을 되짚어 보는 일이다. 이를 토대로 새로운 한 해 계획을 짠다. 당시에는 상황에 함몰되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던 부분을 이때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 순간을 잘 이겨냈구나. 포기했으면 후회할 뻔했지?’ 이런 아찔함을 느끼기는 일도 있다. 무언가 쉽게 포기하면서 얻는 안락함보다 고비를 넘겨 쟁취한 승리의 달콤함이 수십, 수백 배 더 가치 있음을 알아간다.한때 자기계발서를 부지런히 읽으며 목표를 세운 적이 있었다.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반드시 한 가지를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책에서는 꿈을 이루는 공식을 와닿게 설명했다. R(꿈의 현실화)=V(생생한 vivid) D(꿈꾸기·dream), 즉 생생하게 꿈을 꾸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였다.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들지 않고 이루고 싶은 바를 생생하게 실체를 보듯 꿈꾸라는 뜻이다. 실천하려 애썼지만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의식 속에 있는 부정적 생각을 없애는 방법으로 내 소망을 가족 앞에서 말로 선포하기로 했다. 1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엄마가 2009년 12월에 새 자동차를 살 건데 차종은 어떤 게 좋을까?” 모두 피식 웃음을 터뜨리면서 비아냥거렸다. “엄마, 이번에는 대체 무슨 책을 읽은 거야?” “그때쯤 YF 쏘나타가 나온다고 하던데.” 가족들이 농담처럼 말했다. 이런 반응은 너무도 당연했는데 당시 내게는 돈도 계획도 그렇다고 희망이 있었던 상황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또를 맞지 않고서 3천만 원이 넘는 새 차를 장만하기란 꿈도 꿀 수 없음을 가족만 아니라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선포하고 행동으로 옮겼다.아직 정식 배포도 안 된 신차 카탈로그를 어렵게 구해 주방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놓고 매일 마음속에 새기려고 애썼다. 의심이 스며들 때마다 스스로를 타일렀다. “확신을 가져라. 의심은 금물이다.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당신의 내부의 부정적 자아가 어떤 소리를 하든 상관하지 마라. 오직 믿음에 믿음만 더하라.”결론을 말하자면 가족에게 선포한 예정일보다 한 달 앞당겨 차를 탈 수 있었다. 신기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차단하고 긍정의 소리를 들려주는 단순한 행위가 힘이 있다는 걸 경험해 보았다. 자신이 생겼다.이 일을 계기로 작은 꿈을 하나씩 이뤄가는 성취감이 벽돌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생각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지, 또 얼마나 강렬한지 경험을 통해서 깨닫고 용기를 더해 다른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왜 해야 하는지 이유를 정확히 알면 행동이 쉬워진다. 한 가지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천해 이루어 보는 경험을 해 보는 것이다. 가끔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오거나, 내 앞에 나타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보이진 않지만, 에너지 파장으로 전해지는 힘일 것이다.말이 미치는 영향을 실험한 적이 있다. 프로그램을 보다가 신기해서 직접 해 보았는데. ‘사랑해’라고 말한 밥은 하얀색 곰팡이가, ‘짜증 나’라고 말한 밥은 검고 고약한 냄새까지 풍기는 곰팡이로 변하는 것을 경험했다.한 해를 돌아보며 내가 맺은 긍정의 열매와 부정의 열매를 돌아보았다.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은 실상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좋은 말은 긍정적 상황을 만들어 가는 씨앗이다. 좋은 말, 좋은 생각으로 시작하는 기운은 꿈을 이루는 초석이다.무심코 던지는 말 한마디, 생각 한 자락이 나의 몸에 기록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예쁘고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힘쓰고 싶다. 2020년을 맞으면서 “내가 할 수 있을까?”“난 이렇게 못난 모습일까?” 의기소침했던 마음, 아쉬웠던 마음을 “난 괜찮은 사람이다“ “나는 꿈을 이룬다”라는 긍정의 소리로 바꾸어 보자. 실험 삼아 조금 큰 도전일 수도 있는 꿈 하나를 선택하고 즐겁게 상상해 보면 어떨까? 작은 점 하나를 찍는 것으로 무엇이든 시작하는 법이니까. 2020년 우리 모두 긍정의 꿈을 꾸는 한 해이기를 소망한다.

2020-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