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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등화가친지절(燈火可親之節)

중국 당나라 때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한유는 자식 교육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많았다. 자식에게 책 읽기를 권하는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문장 속에 등화가친(燈火可親)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등화가친은 등불을 가까이 하여 책 읽기 좋은 계절이라는 말로 보통 가을을 이른다. 가을이 되면 날씨가 서늘해지고 하늘이 맑고 풍성한 수확이 기다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계절이다. 공부하기 더 없이 좋아지는 계절이라는 뜻이다. 흔히 책을 마음의 양식이라 한다. 책을 통해 사고의 힘을 키우고 세상을 알게 하는 지식을 배운다. 특히 성장기에 있는 아이에게는 신체의 건강을 위해 좋은 음식이 필요하듯 마음과 정신의 건강을 위한 독서는 매우 유익하다.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가을이다. 독서의 계절을 맞아 책을 가까이 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일상이 바쁘다는 이유로 책을 멀리했던 현대인에게 독서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호기가 된다. 우리 국민의 독서율은 선진국에 비해 많이 뒤진다. 2017년 기준 독서율은 74.4%(전자책과 만화 포함)다. 스웨덴 85.7%, 핀란드 83.4%보다 크게 떨어진다. 연간 독서시간도 성인 기준으로 23분에 불과하다. 불행하게도 국민적 독서율이 갈수록 떨어져 심각성을 더해 주고 있다.이번 가을에는 등화가친의 의미를 새롭게 한번 되새겨보길 권한다. 책은 삶의 지혜를 밝히는 등불이라 했다. 독서는 우리에게 정보도 주지만 논리적 사고를 가르치고 합리와 비합리를 구분하는 지적 능력을 키워준다. 복잡한 세상이다. 가치의 중심이 이동해 판단키 어려울 때도 많다.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는 지혜가 갈망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번 가을에는 한 권의 책이라도 읽어보자./우정구(논설위원)

2019-10-27

‘공수처’ 법안의 암수(暗數)

안재휘 논설위원북한의 사법체계는 ‘인민재판’ 방식이다. 1946년 12월 1일부터 현재까지 북한 전역에서 시행되고 있는 ‘인민재판’은 ‘공개된 장소에서 일반 군중들을 모아놓고’ 한다는 차원에서 외견상 상당 부분 요건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판의 핵심인 재판부 구성이 문제다. 조선로동당이 지명한 재판부가 재판을 진행하기 때문에 도무지 문명사회가 추구하는 ‘공정한’ 재판이라고 인정하기 어렵다.문재인 정권이 시작되면서 악착같이 밀어붙인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의 교묘한 정치보복극은 소위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자행됐다. ‘진보 시민단체’가 장악한 공기관들의 ‘위원회’는 이미 태동에서부터 공정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온갖 기밀서류들을 다 까발리며 정적 연루자들의 적폐목록을 찾아내어 언론에 ‘죽일 놈’이라고 공표하며 검경에 넘겨 수사하게 하는 인민재판식 타작 놀음을 해왔다.‘조국 낙마’ 이후 집권세력은 ‘공수처(공직자비리수사처)’ 가속 페달을 힘껏 밟고 있다. 엊그제 친여세력 집회의 손팻말도 ‘설치하라 공수처’와 함께 황교안 한국당 대표를 겨냥한 ‘내란음모 계엄령 특검’이 새롭게 등장했다.이제 우리는 ‘검찰 개혁’이라는 흐드러진 구호와 함께 여권(與圈)이 조국 블랙홀을 넘어 외치고 있는 ‘공수처’에 대해서 깊이 따져보아야 할 때다.패스트트랙 급행열차에 올라가 있는 민주당의 법안은 어쨌든 공수처장을 대통령이 뽑도록 하고 있다. 추천위원 7명 중 최소 6명의 찬성으로 2명을 추천하도록 하는 등 꼼수 장치를 붙이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더욱이 공수처 검사의 절반 이상을 비(非)검사 출신으로 충원한다는 조항에 엄청난 마수(魔手)가 숨어 있다.‘적폐 청산’ 토끼몰이처럼 민변, 좌파 시민운동가들을 동원해 ‘민변 검찰청’ 혹은 ‘대통령 호위무사단’으로 만들자고 들면 식은 죽 먹기다. 더욱이 ‘수사권·기소권 분리’를 ‘검찰 개혁’의 본질로 부르대던 사람들이 공수처에는 다 주자고 하니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수상하다는 것이다. 잘라 말하면, 독립성이 확실히 보장되지 않는 한 대통령을 초헌법적인 최고의 사냥개들을 거느리는 황제로 만들려는 음모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무엇보다도 판사 3천 명, 검사 2천 명과 경찰 간부에 대한 기소권을 보장하는 ‘공수처’ 법안은 결코 허투루 다룰 일이 아니다. 나라 말아먹는 공직자들의 부패 비리를 발본색원한다는데 싫어할 국민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이렇게 추악한 ‘인민재판’을 획책해서는 안 된다. ‘검찰 개혁’이 문제의 본질이라면, 그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검찰의 정치적 독립’ 장치를 만들어 놓고, 수사권·기소권을 조정하면 된다. 모사꾼들의 철저한 기획 아래 지지자들을 길거리에 내세워 몰아붙이는 ‘공수처’는 중국 역사의 오욕으로 기록된 ‘홍위병’ 소동을 떠오르게 한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공수처’ 법안은 암수(暗數)가 다 제거될 때까지 더 연구되는 게 옳다.

2019-10-27

미소(1)

생텍쥐페리(Antoine Marie-Roger de Saint-Exupery)는 어린 왕자로 인류의 가슴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입니다. 원래 직업은 전투 비행사였습니다.2차 대전 중에 전투기를 몰고 나갔다가 실종되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난 영웅이기도 합니다.생텍쥐페리는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스페인 내란에 참전해 파시스트들과 싸운 경험도 있습니다. 그때 자신이 겪었던 체험을 단편소설로 써서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작품 제목은 미소(Le Sourire)입니다. 이렇게 시작하지요.내가 죽게 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했다. 나는 극도로 신경이 곤두섰으며 고통을 참을 길이 없었다. 담배를 찾아 주머니를 뒤졌다. 몸 수색 때 발각되지 않은 게 어디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였다. 손이 떨려서 그것을 입까지 가져가는 데도 힘이 들었다.하지만, 성냥이 없었다. 그들이 모두 빼앗아버린 것이다. 나는 창살 사이로 간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눈과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와 누가 눈을 마주치려 할 것인가?나는 그를 불러서 물었다. “혹시 불이 있으면 좀 빌려주겠소?”간수는 나를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 담배에 불을 붙여 주기 위해 걸어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성냥을 켜는 사이, 무심결에 그의 시선이 내 시선과 마주쳤다.바로 그 순간 나는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신경이 곤두서서 그랬을 수도 있고, 어쩌면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니까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아무튼,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우리 두 사람의 가슴속에, 두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의 불꽃이 점화되었다. 나는 그가 그런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의 미소는 창살을 넘어가 그의 입술에도 미소가 피어나게 했다.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0-27

나의 아름다운 선생님들

김현욱 시인고3 때, 대학 진학을 앞두고 내 선택지는 국어국문학과와 국어교육학과로 좁혀졌다. 아이들이 있는 학교에서 일하고 싶었고, 학교에서 일한다면,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고 싶었다.당시는 수능과 내신, 논술이 대학 입시의 당락을 좌우했다. 수능과 내신 성적은 곧잘 반비례했다. 내신은 좋은데 수능이 나쁘거나, 수능은 좋은데 내신이 별로인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후자였다. 내신은 형편없었지만, 수능은 기대 이상으로 잘 나왔다. 글쓰기를 좋아해서 논술도 별 부담이 없었다.존경하는 선생님을 몇 분 찾아뵙고 진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넌 교대를 가면 좋겠다.” 가정 형편, 성격, 특기, 전망 등을 종합한 선생님들의 애정 어린 조언이었다. 결국 나는 가까운 교대로 진학했다. 교대는 고등학교와 비슷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여학생이 많다는 것뿐. 한동안 적응을 못해서 학사경고를 받으며 방황했다.어찌어찌 졸업해서 고향으로 돌아와 교단에 섰다. 18년이 흘렀고, 그때 선생님들의 조언이 제자를 향한 깊은 애정에서 우러나왔음을 비로소 깨닫는다.교대 진학해서 놀랐던 것 중의 하나는 동기들이 그동안 만났던 교사들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점이었다. ‘인간’ 같지 않은 ‘선생’들이 많았다고 고백했다. 물론, 나도 그런 ‘선생’들을 만난 적이 있다. 촌지, 편애, 폭력, 권위, 방관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억울하게 심한 폭행을 당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아름다운 선생님들의 면면이 더 많다.심윤경의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에는 동구의 아픔을 다독여주는 박영은 선생님이 나온다. 가정사에서 비롯된 폭력과 억압 때문에 동구는 초등학교 3학년임에도 불구하고 글씨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난독증을 앓고 있다. 박영은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과 자상한 배려 덕분에 동구는 가족들 앞에서 선생님의 편지를 낭독하기에 이른다. 동구에게 박영은 선생님은 ‘영혼의 성장’을 이끄는 중요한 인물이다. 박영은 선생님이 없었다면 동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동구의 아름다운 영혼의 정원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으리라.교사는 아이들의 영혼에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다. 최근에 본 영화 ‘벌새’의 김영지 선생님, 그 유명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키팅 선생님, 하이타니 겐지로의 동화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에 고다니 선생님과 아다치 선생님. 그리고 심윤경의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에 박영은 선생님. 이들이 책과 영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이들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아름다운 선생님도 많을 것이다.입시철이다. 고3 조카는 최근에 면접을 열심히 보러 다닌다. 오로지 성적으로만 가늠해서 원서를 쓰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삶에서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한다. 의대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애니메이션 학과로 진로를 바꾼 학생이 그걸 증명한다. 자신을 잘 아는 아름다운 선생님들과 삶과 진로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으면 좋겠다. 좋은 스승을 만나려는 준비가 되어있다면, 김영지 선생님, 박영은 선생님, 키팅 선생님, 고다니 선생님, 아다치 선생님들은 바로 여러분 곁에 있다.

2019-10-27

김정은의 금강산 남측 시설 철거령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백두산에서 백말을 타고 달리던 김정은이 이번에는 금강산을 찾았다. 그는 금강산의 국제 관광지구 재건을 위해 ‘너절한 남쪽 시설물’을 제거하라고 지시하였다. 남북관계가 좋았던 시절 필자는 여러 차례 금강산을 다녀온바 있다. 대형 유람선을 개조한 장전항의 해금강호텔에서 개최된 전국 국립대교수협의회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금강산 호텔에서는 남북 학자들 50여 명이 참가한 ‘남북(북남)관계의 발전과 학자들의 역할’을 주제로 한 학술토론회에도 참여한바 있다. 그곳의 이산가족 면회소, 평양 서커스 공연장, 간이식당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현대아산이 7천800억 원을 들여 지은 시설물인데 김정은은 이 시설을 싹 들어내라고 지시했다.북미 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김정은의 이러한 돌출선언의 배경은 무엇일까. 김정은은 일찍부터 금강산 관광 특구개발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원산의 갈마반도에 5성급 호텔을 여러 채 짓고, 마식령 스키장과 연계하여 금강산 관광 특구 사업을 야심차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유엔의 대북 제재는 대북 관광 자체를 봉쇄했다. 북한은 이에 동조하는 남한의 소극적인 자세에 불만이 많았다. 이것이 김정은이 남한의 건축물 철거를 위한 협상 통지문을 보내온 배경이다. 개성과 금강산에 막대한 재산을 투자한 남한 기업인들의 타들어 가는 심정은 어떠할까 짐작하고도 남는다.김정은의 금강산 시설물 철거 관련 발언은 그의 개혁 개방의 의지를 드러낸 측면도 있다. 그의 이번 금강산 현지 지도에 국무위 설계국장 마원춘과 외무 담당 최선희 등이 수행하였다. 그는 4개월간 보이지 않던 리설주까지 대동하였다. 이는 김정은 시대의 관광 개발 특구 정책을 가속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는 “금강산의 자연경관에 어울리는 현대적인 시설들을 북한식으로 새로 건설해야 한다”고도 하였다. 북한당국이 금강산 등 관광 특구를 본격화하기 위해서는 외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유엔의 대북 제재는 이를 기본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이번 철거 협상 제의는 외교적 협상이라는 ‘협박성 애걸’이 포함되어 있다.김정은의 이번 발언에는 선대(先代)의 관광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점이 포함되어 있다.그는 “‘선임자들의 대남 의존 정책’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국력이 여릴 적에 남에게 의존하려 했던 선임자들의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지목한 선임자가 김정일을 말하는지 담당 책임자를 말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북한 세습 체제의 특성상 그들이 절대시하는 수령보다는 관광 책임자를 일컫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실은 김정일도 과거 중국 상해를 방문하여 그의 부친을 원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애매모호한 발언이지만 후계자가 선대를 비판하는 듯한 발언은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3대 세습체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김정은의 이러한 발언은 북한 체제 변화를 위한 하나의 몸짓이라고도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금강산 관광시설의 철거를 위한 남북의 협상 과정을 지켜볼 수 밖에 없다.

2019-10-27

공수처 논란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안이 여야간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공수처 설치는 20여년 전인 1998년 처음 추진됐다. 1997년 금융위기, 한보 사태 등으로 정경유착이 ‘사회악’으로 지탄받을 때였다. 당시 여당(새정치국민회의)은 공수처를 ‘부패방지법’의 일부로 여겼다. 공수처가 ‘검찰개혁’의 상징으로 바뀐 건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때부터다. 이때의 공수처는 기소권이 없었지만 정치적 중립성이 문제가 됐다. 당시 야당(한나라당) 의원 30명은 “행정·입법에 이어 사법까지 장악하려는 의도”라며 결사 반대하고,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도 반발하는 등 갈등 끝에 무산됐다. 이후 2000년대 들어 스폰서검사 논란, 100억원대 수임료 수수사건, 넥슨과의 유착 의혹 사건 등이 잇따르면서 ‘검찰개혁론’에 힘이 실렸다. “검찰의 권한이 과도해 생기는 구조적 부패”란 지적이었다. 하지만 “공수처가 검찰개혁에 최선이냐”는 질문엔 여야간 이견이 크다. 필자는 검사출신으로 검찰개혁을 주장하다 조직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 국회에 입성한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이 쓴 ‘공수처에 반대하는 이유 3가지’란 글에 공감한다. 그가 든 첫째 이유는 공수처 설치는 새로운 권력기관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사법과잉’ ‘검찰과잉’의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 사회에 또 다른 특별권력기관을 만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두번째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지 않다. 일정한 직급 이상의 고위 공직자를 수사 및 기소하는 공수처는 전세계 어느 국가에도 없는 기관이다. 글로벌 스탠다드는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다. 대한민국 검찰에서 수사권을 폐지하거나 축소하면 바로 개혁이 이뤄진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세번째 공수처가 일단 설치되면 악용될 위험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찬성하는 사람들은 검찰 외에 공수처가 있으면 서로 경쟁하면서 국민들에게 봉사할 것이기 때문에 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조직원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역대 정권은 검찰 하나만 가지고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해왔는 데, 공수처라는 권력기관이 하나 더 생기면 전횡을 일삼을 위험성이 커진다.특히 금 의원이 지적한 세가지 이유 중 필자 역시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보장이 어렵다는 점에서 악용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는 데 주목한다. 공수처법안에 따르면 공수처장 추천위원 7명은 법무부장관, 법원행정처장, 대한변호사협회장, 여당추천 2인, 야당추천 2인으로 돼 있다. 이러면 야당 추천 2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위원이 모두 살아있는 권력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로 봐야 한다. 더구나 요즘처럼 야당이 분열돼 있는 상황에서는 야당 추천위원 한명은 친여성향의 사람일 수 있다. 결국 공수처장은 대통령의 정치성향에 따라 맞춰 움직일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이러니 권력남용의 위험이 있는 새로운 권력기관을 만드는 것보다는 기존 권력기관(검찰)의 권한과 힘을 축소하고, 제한하는 방향으로 검찰개혁을 이뤄나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

2019-10-24

“소통이 답”

종교지도자는 시국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할까 가끔은 궁금할 때가 있다. 정치적 편향성이 없는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의 눈에는 지금 우리 시대의 갈등 상황을 어떻게 볼지가 궁금하다는 뜻이다.고인이 된 김수환 추기경은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대표적 성직자다. 강압적인 정권에 맞서 싸우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 했던 그의 종교적 순수성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를 방문한 우리나라 종교계 지도자들이 대통령과 나눈 대화의 일부가 언론에 보도됐다. 정확한 그곳 분위기는 알 수 없지만 단편적 보도 내용을 살펴보면 분열과 갈등으로 나눠진 민심을 잘 수습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들이 오간 것으로 짐작된다.불교계를 대표한 조계종 총무원장은 원효대사의 화쟁(和諍)사상을 화두로 꺼냈다고 한다. 화쟁은 다양한 불교이론들 사이의 다툼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 소통으로 승화시키는 사상이다. 국민 통합을 잘 이끌라는 주문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천주교를 대표한 주교회의 의장은 “나와 다른 것을 틀리다고 규정하지 말라”는 주문을 했다. 이기적이고 아전인수식으로 기울어진 국민의 분열된 마음을 잘 수습해달라는 주문으로 보인다. 또 함께 참석한 천도교 대표는 여우와 두루미의 동화에 빗대어 작금의 사태를 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를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존경하는 처지에서 문제를 풀자는 뜻이다.종교계 지도자의 생각이 남다른 영향력이 큰 것은 어느 누구의 이익에 치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날 만남에서는 소통이 공통의 분모로 모아졌다. 소통은 상대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더 낮은 자세의 소통이 지금의 난국을 풀 해법으로 본 것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19-10-24

서로의 눈을 바라볼 때

2017년 12월 캠브리지 대학에서 진행한 ‘눈 맞춤’ 연구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어린 아기와 성인의 눈 맞춤이 서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아기와 성인 머리에 전기자극을 측정하는 모자를 씌우고 두 가지 실험을 진행합니다.첫 번째는 비디오 시청. 자장가를 부르는 연구원이 다양한 각도에서 아기를 바라보는 장면을 화면에 담아 8개월 된 신생아 17명에게 비디오 테이프를 틀어 줍니다. 비록 영상으로 본 것이지만 아기들은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눈을 맞췄는지 아닌지에 따라 뇌파에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두 번째 실험은 19명의 신생아를 실제로 마주 보고 연구원이 자장가를 부르며 여러 동작을 수행합니다. 아이들은 연구원이 자신에게 눈을 맞추어 줄 때 뇌파가 동기화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눈을 맞출 때 아기들은 더 자주 목소리를 내는 것도 입증합니다.이때 아기들이 낸 목소리가 연구원에게도 영향을 끼쳐 아이와 뇌파 동기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실험을 진행한 빅토리아 레옹(Victoria Leong)교수는 말합니다. “성인과 아기가 이야기를 나누며 눈이 마주칠 때 서로 간의 소통 의사를 교환합니다. 동일한 파장의 뇌파가 오고 간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공동연구자인 워스 박사는 말합니다. “눈 맞춤이 상호 뇌파 패턴을 일치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아기를 상대할 때 부모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더 다정하게 아기를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대화 중 평균 4초 내외 상대방의 눈을 한 번씩 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로 호감을 가진 경우 눈 맞춤 시간 평균이 8.2초라고 합니다. 의지적으로 우리가 서로의 눈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며 대화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눈을 마주 보며 우리 딱딱한 마음이 풀어지고, 얼었던 마음이 녹아질 수 있다면 일상은 기적이 아닐까요?/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0-24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서정주 시인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했지만, 내게는 딱히 그럴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 워낙 시골에 묻혀 살기도 했지만, 어디 간들 올바른 정신과 맑고 고운 심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 쉽겠는가.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도 그렇다. 사람들이 주는 기쁨과 위로보다는 사람 때문에 받는 실망과 고통이 더 큰 것이 현실인 것 같다.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상처입고 좌절한 사람들이 사람이 없는 산속에 들어가서 치유와 활력을 얻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사람을 싫어하거나 멀리하자는 말이 아니라 사람에게만 집착을 하여 실망하고 좌절할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날 중에 가장 좋은 날이다. 어느 계절이든 좋은 날이 없지 않지만 나는 청명한 가을날이 그중 좋다. 그 가장 좋은 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도 좋겠지만, 온전히 나만의 날로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혼탁한 인간사를 저만치 제쳐놓고, 그 보석같이 찬란한 날 속으로 들어가서 이것저것 보이고 들리는 대로 해찰하며 하루를 보내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누리게 되는, 사계절이 뚜렷한 금수강산에서 산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일 년 삼백육십오일, 비바람 눈보라 몰아치는 날이든 고요하고 청명한 날이든 사실은 어느 하루 축복이 아닌 날이 없다.우리가 누리는 산과 들 하늘과 바다는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들이다. 인간사회의 부귀영화나 지위권세 따위로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라 그렇다. 이렇게 좋은 날들을 두고 비관하고 절망해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인가. 저 가을 들판에라도 나가보라. 눈부신 가을볕과 시원한 바람이 나를 감싸고 코스모스, 쑥부쟁이, 산국, 구절초…. 풀꽃들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긴다. 아무 것도 나를 따돌리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오히려 반기니 자괴감이나 박탈감 따위를 가질 이유가 없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는 비록 초라한 존재지만 이 가을날 속에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는 오로지 나다.한가롭게 하늘이라도 쳐다볼 여유도 없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 재물을 모으고 높은 지위에도 올라서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던 사람들이 졸지에 망신살이 뻗쳐 만인의 지탄과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본다.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자부심과 자존감이 하루아침에 수치와 오욕으로 바뀌지 않던가.그러므로 무엇을 위해서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는 것에 박수를 보낼 일만은 아닌 것이다. 온갖 편법 탈법 불법으로 스펙을 만들어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는 부모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못해 주어서 자식에게 미안해 할 게 아니라, 적어도 그런 식으로 자식 교육을 시키지는 않았다고 오히려 자부심을 가질 일이 아닌가.모든 존재가 그렇듯 인생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살아있는 그 자체로 이유이고 목적이고 충만이다. 어쩔 수 없이 각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 수밖에 없는 처지지만, 이렇게 좋은 날에는 하루쯤 저 가을꽃들처럼 자족의 모습으로 나를 놓아두자.

2019-10-24

대통령의 한마디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헌법이고 법률인가? 과거 왕권시대나 독재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대통령의 한마디에 정책들이 수시로 바뀌는 모습을 보고 있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무슨 말을 또 할지 몰라 불안해하고 있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정책이 수시로 바뀐다.일관성이 결여된 정책들, 특히 교육정책이 그렇다. 대통령이 꺼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교육정책이 출렁거리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교육정책의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단편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내일이면 어떤 메시지가 나올지 몰라 교육 현장의 혼란은 극에 달하고 있다.대통령이 “대입제도 전반검토”하니까 대입제도를 다 뜯어고칠 듯이 북새통을 떨다가 “고교서열화 금지”하니까 당장 자사고, 외고, 국제고 등 특성화고교 모두를 일괄 없앤다는 발표가 있었다. 당초 단계적 폐지 정책은 대통령 한마디로 판이 뒤집혔다. 다시 정권이 바뀌면 폐지된 특성화 고교를 다시 부활시킬지도 모른다.특성화고와 자사고를 만들 때는 그만한 타당성이 있어 만든 것인데 그런 타당성을 외면한채 대통령 말 한마디로 고교의 폐지를 무슨 나무하나 베는 것으로 생각하니 참으로 개탄할 노릇이다. 또 “정시모집 확대”하니까 정시모집을 마지노선인 30% 이상으로 올리겠다는 정책이 발표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교육공정성 강화특위’를 만들어 11월께 ‘대입제도 개편안’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한다.도대체 이런 식의 조령모개식 교육정책이 있을 수 있는가? 내일이면 어찌될지도 모르는 정책을 그저 대통령의 한마디에 이리저리 좌우되는 형국은 정말로 개탄스럽다.교육정책만이 아니다. 과거 편의점 출점 규제도 대통령 지시로 뒤집혔다. 공정위는 새 편의점을 차릴 때 다른 편의점과 50∼100m 이상 거리를 두게 하는 ‘자율규약’을 승인해달라는 편의점산업협회 요청을 ‘담합’이라는 이유로 거절했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편의점 과밀 문제를 해소하라”고 지시하자 갑자기 입장을 180도 바꿔 업계 요구를 받아들였다.원전정책도 그러했다. 대통령의 “원전폐기” 공약은 우리나라와 같이 자원이 없는 나라는 산업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원전이 필수적인 데, 나라를 혼란으로 몰고 있다. 우리가 발전시켜온 원전기술은 세계 원전수출이라는 블루오션을 맞을 수 있고 대체에너지의 현실적 타당성이 부족한데도 대통령 한마디가 원전정책을 좌우하고 있다. 말썽 많은 한전공대 설립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의 공약사업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외에는 아무런 정당성을 찾을 수가 없다.정부 정책은 무엇보다 공정하고 예측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국민생활의 근간을 흔드는 정책이 언제 뒤집힐지 모르면 국민은 혼란스럽다. 이제 우리도 대통령 말 한마디로 주요 정책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그런 수준의 국가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정 발전된 국민의 의견이 수렴되고 국민을 안심시키는 그런 안정된 국가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정부는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롭다”는 참 멋진 말을 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과정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이고 결과는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2019-10-24

어떤 지식을 습득할 것인가?

현대 지식 상황의 특징 하나는 지식의 범람일 것이다. 어느 쪽으로도 찾기만 하면 얼마든지 충분한 양의 지식 정보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자본주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할 때 자본 쪽을 옹호하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지식들을 찾아 나설 수도 있고, 반대로 노동 쪽을 강조하는 지식들을 선호할 수도 있다.두 방향 다 지식은 넘쳐난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공부하든 그 선택을 위한 공부거리는 널려 있다. 어느 방향이든 상당한 수준까지는 논리를 구축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은 제공되는 것이다.같은 이야기를 식민지 근대화 문제를 논의하는 데도 적용할 수 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가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했고, 때문에 일제에 의한 지배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을 위한 지식은 그 시대의 통계자료들이나 지금 시대의 연구논문들 가운데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이 사람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부정할 만한 통계자료는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사실은 꼭 그렇지는 않다.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인의 인간됨을 부정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지, 그 시대에 한국의 물자와 노동력이 얼마나 많이 유린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자료들도 적지 않다.근대화 과정은 수량중심적으로 계산되곤 하기 때문에 식민지근대화론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더 많고 또 더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외형적, 가시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측정가능한 근대과학, 근대경제학의 약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이 근대과학, 경제학이 아직 측정하지 못한 인간고통의 양적, 질적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면, 아니 거기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식민지근대화론의 논리를 반박할 만한 사실적 자료들을 보다 성실하게 모아놓을 수만 있다면 일제에 의한 폭력적 지배를 부정할 수 있는 논리는 얼마든지 치밀하게 재조립할 수 있다.진짜 문제는, 따라서, 어느 방향으로 자신의 지식을 쌓아 나가고 무엇을 위해 논리를 정당화 할 것인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 그 자신의 선택이다. 만약 폭력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근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길을 따라가면 된다. 그러나 그는 이 근대화가 완숙단계에 접어든 오늘도 여전히 비민주적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기 쉽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그와는 다른 길이 열려있음을 고려하지 않는다.나는 지배와 폭력을 당연시하거나 정당화하는 논리는 생리적으로 싫다. 나의 이 생리가 학문적으로도 더 많은 올바름을 향해 열려있기를 말할 뿐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0-24

영호남 교류 학술대회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지난 10월 18일 전남대 ‘김남주 기념홀’에서 ‘영호남 지역담론과 대학의 역할’을 주제로 ‘제1회 영호남 교류 학술대회’가 열렸다. 전남대 박구용 교수,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황지우 시인과 필자가 발제를 맡았다. 오후 1시 반부터 시작한 학술대회는 5시 20분까지 이어지면서 지역감정과 지역갈등에 대한 다채로운 논의가 오갔다.남북이 분단된지 70여 년이 흘렀고, 동서분열까지 더해지니 더욱 고약한 노릇이다. 학술대회에서 지역감정을 논의하게 된 원인 제공자는 여러분도 익히 아시는 한국 제1야당 원내대표다. “문재인 정권은 광주일고 정권이고, 서울 구청장 24인 가운데 20명이 광주, 전남북 출신입니다. 우리 부울경 주민들이 뭉쳐서 심판합시다, 여러분!” 이것이 8월 30일 부산에서 열린 자한당 장외집회에서 서울법대 출신 원내대표가 내뱉은 말이다. ‘광주일고, 전라도, 부산, 울산, 경남’으로 요약되는 지역주의 망령이 선거철도 아닌 시점에 발화(發話)된 것이다.경북대와 전남대는 올해부터 교환교수제를 실행하고 있다. 학생교류에 교수교류를 더해 영호남 교류를 일상화-내실화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 일환으로 필자는 지난 2월 말부터 전남대에 머물고 있다. 5월 초에 이용섭 광주시장의 경북대 강연이, 9월 19일에 권영진 대구시장의 전남대 강연이 있었다. 양교 모두에게 소중한 자산이 되었으리라 믿는다.이와 같은 의미 깊은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부울경 주민이 뭉쳐서 심판하자!”는 원색적이고 망국적인 지역갈등 선동발언이 터져 나온 것이다.4차 산업혁명이 눈부시게 현현하는 21세기에 원시적인 지역갈등을 조장하는 제1야당 원내대표라니. “우리가 남이가?!” 발언은 1992년 12월 11일 대선 직전에 나왔으나, 그들은 꼬리 내리고 어둔 곳에 숨어서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낮 장외집회에서 야당 2인자가 대놓고 지역갈등을 선동한 것이다.지역갈등 조장과 선동이 분명 이득이 있는 모양이다. 아니고서야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이며 반국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지역감정을 부추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992년 대선에서 자한당의 선배격인 민자당의 김영삼은 그렇게 우울하게 승리했다.대선승리의 따뜻하고 화사한 기억이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가장 큰 동인(動因)이자 원동력이 아닌가 한다.‘도덕의 계보학’에서 프리드리히 니체는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을 설파한다. “고귀하고 행복한 자들의 주인도덕은 자신과 외부세계의 긍정에서 생기고, 무력하고 악의적이며 비천한 자들의 노예도덕은 타자와 외부세계의 부정에서 생긴다.” 호남을 ‘타자화’하고, “우리 부울경”의 적대적인 외부세력으로 만든 원내대표의 발언은 문자 그대로 노예도덕의 전형이다.한국정치는 분단극복에 정진해야 한다. 고착화된 남북분단과 고질적인 동서갈등의 해결이야말로 우리의 시대사적 소명이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정치와 정치인들에게 맡겨져 있다. 주어진 소명을 외면하고, 정반대 행보를 보이는 저들을 어찌하랴?! 영호남의 진정한 교류로 노예도덕에 오염된 자들부터 구해내야 할 판국이다.

2019-10-23

학교, 수행평가 함정에 빠지다!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10월 안개는 어느 달보다 진하고 무겁다. 눈으로는 한발조차 내딛기 힘들다. 안개에 쌓인 세상에서 생각한다, 안개는 너무도 빠른 10월 시간을 조금이라도 잡기 위한 자연의 벽이라고!시간은 나이의 속도(㎞/h)로 흐른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달 또한 예외가 아니다. 10월 달의 빠르기는 1월의 10배 이상이다. 옆 한 번 돌아볼 겨를 없이 벌써 10월 말이다. 그 어떤 상실감이 이보다 더 클까! 필자를 위로하는 것은 역시 시(오세영, ‘시월’)이다.“무언가 잃어 간다는 것은/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돌아보면 문득/나 홀로 남아 있다.//(중략)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 번의 만남인 것을//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오늘도 잃어 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시인의 말대로 지금 필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잃어가는 연습이다. 하지만 늘 생각뿐이다. 놓고 살아야지 하면서도 현실에서는 뜻대로 안 되는 게 삶이라고 하면 너무 구차한 변명일까? 분명 필자는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데, 성숙은 늘 남의 일이다. 그런데 고등학교 학생들을 생각하면 필자의 이런 생각은 너무 사치이다. “중간고사 끝난 지 언제라고 11월 중순까지 매일 몇 과목씩 수행평가입니다! 정말 숨 한번 제대로 쉴 수조차 없습니다!” 누렇게 뜬 얼굴로 필자에게 하소연 하던 학생들의 모습이 비수가 되어 꽂혔다.교육 정상화를 위해 도입한 수행평가,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교육부 지침을 잠시 보자!“수행평가는 교과 담당교사가 학습자들의 학습과제 수행 과정 및 결과를 직접 관찰하고, 그 관찰 결과를 전문적으로 판단하는 평가 방법이다. 학생의 수행과정과 결과를 평가해야 하며, 과제형(숙제형) 평가를 지양하고 다양한 학교교육활동 내에서 평가가 이루어지도록 한다.”정말 말로만 보면 이보다 더 완벽한 평가는 없다. 그런데 정말 말처럼 시행될까? 어느 방송사의 “새벽 4시까지 수행평가 ‘허덕’, 학생들 혼수상태” 라는 보도에 대해 교육부는 “과제형 수행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관리·점검하겠습니다.”라고 교육 현장과 너무도 동떨어진 답변을 내놓았다. 과제형 수행평가라고 해서 과제를 해가는 것도 있지만, 모양만 과제형이고 사실은 암기형 서술 평가가 대부분이다. 학생들은 이런 구태 한 수행평가를 준비하느라 잠을 설치고 있는데, 교육부는 이런 현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이 나라 교육을 암흑의 터널로 몰아넣은 것은 분명 평가이다.과정 중심 평가는 물론 그 어떤 평가가 되었던 이 나라 평가의 궁극적 목적은 ‘한줄 세우기’다. 평가 목적이 오류인데, 방법을 아무리 바꾼다고 해도 오류가 참이 될 수는 없다.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 우선 그 오류를 인정해야 하는데, 교육 당국은 그걸 계속 외면만 하고 있다.교사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낸 수행평가를 학생들보다 더 잘 볼 자신이 있는가?평가를 위한 무의미한 평가 대신 결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는 자연을 학생들에게 마음껏 보게 하는 10월이면 어떨까!

2019-10-23

외로움에 대하여

키가 152㎝ 밖에 안 되는 남자. 안경을 벗으면 장님과 다름이 없어 형편없는 시력의 소유자. 등은 곱추처럼 구부정하고 매력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외모. 몇몇 여인들을 사랑했지만, 부모의 반대, 신분의 차이 등으로 번번이 열렬한 사랑은 차가운 냉대와 거절로 끝나버립니다.그리고 그는 음악에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날마다 곡을 쓰고 싶은 주체할 수 없는 창작의 충동을 느낍니다. 오선지를 살 돈이 부족해 늘 전전긍긍하죠. 수시로 떠오르는 악상을 옮겨야 하는데, 노트를 살 돈이 부족한 청년. 돈이 떨어지면 물로 배를 채우기 일쑤입니다. 길게는 28일 동안 물만 마시며 굶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견디다 못하면 부디 돈을 좀 빌려 달라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구차하고 궁핍한 삶.그래도 이 남자는 미친 듯이 곡을 씁니다. 무려 700편 가까운 가곡을 쓰고 13편의 교향곡, 헤아릴 수도 없는 피아노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합니다.프란츠 슈베르트. 오스트리아가 낳은 불멸의 작곡가. 가곡의 왕입니다.외롭고 불행했던 이 남자. 프란츠 슈베르트.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곡을 쓰고 또 쓰는 것이었습니다.세상이 인정해 주지 않아도, 아무도 자신의 가치를 몰라줘도, 존경해 마지 않는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고 깎아내려도, 음악이 팔리지 않고 연주회는 흥행에 실패해도. 눈앞에 보이는 결과에 굴하지 않고 자기 작품을 꿋꿋이 써 내려갑니다.고독과 슬픔 가운데서 홀로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베토벤은 말합니다. “음악이란 흙과 같다. 그 안에서 영혼과 생명이 창조된다.”슈베르트의 삶은 고독과 슬픔이었지만, 그의 음악은 불멸로 남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마음의 흙 밭에 스며듭니다. 마음의 토양이 점점 비옥해집니다. 새로운 영혼의 힘을 느끼게 되고 반짝이는 아이디어들이 태동합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0-23

이철우 지사,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이창훈경북도청본사 취재본부장지방의회 자치입법권 실현의 윤곽이 어느 정도 나타나면서 의회사무처도 변화의 바람이 불 전망이다. 사무처의 인사독립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이 남아있지만 직원 거취와 직결되기 때문이다.그동안 의회 사무처는 본청과 의회 사이의 어정쩡한 중간자적인 상태로 정체성이 혼란을 빚은 게 사실이다. 도 본청은 의회 사무처 근무를 본청보다 많이 쉽고 편하게 생각해, 좀 쉬러 간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 것이 공공연하다. 의회의 최고기능이 본청 집행부를 견제하는 기능이다 보니 의원들에게 집행부의 잘못된 부분을 고자질하는 일면 세작(細作)기능을 한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사무처 직원은 본청에 비해 좀 기가 꺾인게 사실이고 특히 고위직의 경우 심적으로 편하지 못하다.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취임 이후 이러한 사무처직원들의 심리적 위축감은 더 한 듯하다.우선 취임 이후 실국장 최초 업무보고 때 당시 사무처의 업무보고를 받지않았다. 새로운 지사이고 당선 이후 첫 업무보고인 만큼 사무처는 준비를 갖고 대비했지만 대면보고가 무산돼 아쉬워했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지사가 의욕적으로 소통중인 본청 실국과장의 카톡방에 사무처 직원은 배제됐다. 이 경우 지사는 본청 업무가 주력이다 보니 사무처 직원의 배제가 이해되는 부분이긴 하나 그래도 사무처 직원들은 뭔가 소외된듯한 느낌이라고 한다. 각종 주요 행사에 사무처가 배제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최근 경부회(경북도 부지사 출신 모임) 행사 때도 본청 주요 실국장은 배석한 반면, 사무처의 경우 초청도 받지 못해 나름대로 준비한 사무처 고위직이 머쓱해했다고 전해진다.요즘 도청 내외부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일명 천년숲산책조에도 사무처 직원들은 배제됐다. 천년숲산책조는 이 지사가 중심이 돼 매일 새벽 도청 간부들과 천년숲을 걸으며 건강도 다지고, 그날의 일과 향후의 업무 등을 논의하는 형식파괴 모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 산책조에 도의 일부 간부들에게는 전화로 참석을 권유하는 등 적극성을 띠지만 또 다른 간부와 사무처는 배제돼 뒷말이 나오고 있다.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사소한 것으로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으나 조직 내부의 일부가 소외감을 느낀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는 이철우 지사가 도청에서 최고의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태양의 주위에는 해바라기가 자라나기 마련이고 온갖 억측들이 생성되는 게 세상사의 이치다. 본청 일부 간부들은 천년숲모임에 가기를 원하나 “불러주지 않아서 못간다”는 말들도 새나오는 반면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일부 고위직이 천년숲산책조에 우연을 가장하고 참여했다는 말도 들린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천년숲산책모임이 새로운 ‘이너서클’에 진입하기 위한 징검다리로도 볼 수 있는 만큼 세심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혹시 천년숲을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이 생겨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다. 지사는 경북도의 최고 수장으로 힘없고 약한 직원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좀 더 귀를 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9-10-23

분양가상한제

분양가 상한제는 아파트 분양가를 일정 가격 이하로 낮추도록 강제하는 제도를 말한다. 새 아파트의 분양가는 택지비(땅값)와 건축비로 결정되는데, 이것을 일정 가격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땅값은 분양가의 70% 가량을 차지하는데, 분양가 상한제가 시행되면 시세의 65% 수준인 표준지공시지가가 적용돼 땅값이 싸져서 분양가가 크게 떨어지게 된다. 분양가의 70%를 차지하는 땅값이 시세의 2/3 수준으로 떨어지니 분양가가 하락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다 표준형 건축비가 적용돼 거품이 빠져서 분양가가 더욱 하락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파트 분양가가 떨어지면 기존에 인근 주택가격도 내려가게 돼 무주택 서민들이 쉽게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분양가 상한제가 부동산가격 정책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분양가상한제는 지난 1977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민간 아파트를 대상으로 처음 도입됐다. 이후 부동산 경기에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가장 최근에는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 시행하다가 2015년부터 민간에 대해서는 분양가 상한제를 없애고, 공공택지에 대해서만 분양가 상한제를 시행해왔다.민간주택에도 분양가 상한제를 적용하는 주택법 시행령 개정안이 22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로써 투기과열지구인 서울시 25개 자치구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와 과천시, 광명시, 하남시를 비롯해 대구 수성구와 세종시 등 전국 31곳에 적용된다. 부동산 가격 폭주를 막겠다는 정부 정책의 의도, 방향성은 좋지만 효과는 학계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 단기적 효과는 있으나 인위적 가격조절로 공급량이 떨어져 역효과가 난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분양가 상한제의 득실이 궁금할 따름이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10-23

맹탕 국감

국회의원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일 년에 한번 열리는 국정감사다. 국감을 통해 국회의원은 자신의 권한을 강력하게 행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도 확실하게 확인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을 보좌하는 보좌관도 마찬가지다. 각 부처와 산하기관의 문제점을 찾아내 자신이 모시고 있는 국회의원의 역할을 돋보이게 하여야만 능력 있는 보좌관으로 인정된다. 잘만 하면 스카우트도 가능하다.국정감사는 국회가 전 행정부서가 한 일을 감사하고 감독하는 일이다. 특히 야당 국회의원은 국정감사를 잘해야 유권자로부터 칭찬받고 다음 선거에서도 유리하다. 유권자의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해선 국감장에 톡톡 튀는 소품을 들고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 국감에서 김진태 의원은 프랜차이즈 업체의 떡볶이를 들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국정감사를 잘하기란 쉽지가 않다. 300명 가까운 국회의원이 20여일 동안 800여개에 달하는 공공기관을 감사하면서 국민의 관심을 끌만한 일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렵다.올 20대 국회 국감은 이런 측면에서 성과가 별로 없다. 맹탕 국회라는 비판이 나온다. 조국 사태로 각 상임위별 국감이 조국 장관 문제에만 매달리다 보니 민생과 정책국감이 실종됐다는 평가다.지난해 경우 사립유치원 회계 비리나 서울교통공사의 친인척 채용 특혜 등이 국감의 핫이슈로 다뤄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조국사태가 올 국감의 이슈를 삼켜 버렸다. 덕분에 각 부처 공무원들은 모처럼 편안한 국감을 치렀다며 기뻐했다는 후문이다. 국정감사가 조국 사태에 가려지면서 결과적으로 국민의 알 권리가 그만큼 묵살되고 만 셈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19-10-22

고3과 경주시민

황성호 경주취재본부장한낮의 뙤약볕은 아직도 따가운데 설악산에 올해 가을 들어 첫 얼음이 얼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제 한창 추수 중인 풍성한 가을 들판을 뒤로 하고 대구·경북지역 북동산지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 춥겠다는 예보가 있다.수학능력시험이 채 한달도 남지 않은 지금 공부에 열중하는 고3수험생들과 묵묵히 힘든 과정을 함께 견디며 자식들 뒷바라지하는 학부모들에게 목표하는 대학 입학이라는 풍성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과정이라 생각된다.중장년 세대들의 학창시절과 달리 요즘은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교실 또는 독서실에서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공부하는 요즘 학생들이 뭐가 힘드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힘듦의 잣대는 항상 같을 수 없고 시대마다 사람마다 다 다른 인생의 무게를 지니고 있으니 어른들의 눈으로 가늠하기에도 요새 학생들의 몸과 마음이 우리 때와 많이 다르다. 휴일에도 학업에 매진하는 수험생들을 보면서 쉬엄쉬엄 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모든 것이 때가 있기에 그런 어설픈 위로는 목 뒤로 넘기고 연말에 웃으려면 조금만 더 고생하자고 한다. 어설프게 노력했다가 쓰라린 결과를 얻으면 나이 먹어서도 대학입학시험에 낙방하는 헛꿈을 꾼다고 겁을 주기도 한다.고3수험생과 같이 경주시민 전체가 올해 연말의 결실을 맺기 위해 매진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맥스터(사용후핵연료 건식저장시설) 추가건설 문제이다. 경주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나라 전체가 관심을 가져야 될 문제이지만 우리 경주는 시기적으로 좀 더 급박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치 다른 지역은 고2지만 우리는 고3인 것처럼 말이다.지금 원자력발전소에는 사용후 핵연료가 2021년 11월 월성원전을 시작으로 포화상태에 이르며 월성원전은 올해 2분기를 기준으로 임시저장시설의 포화율은 건식 96%, 습식 83.13%에 달해 한수원은 월성원전 내 사용후 핵연료 16만8천다발을 임시 저장할 수 있는 맥스터 7기를 건립할수 있는 6천300㎡ 규모의 부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공사착공을 위한 행정절차는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이에 맥스터 7기 건립을 위해 지난 5월 재검토위원회가 발족되었으나 아직 경주시민들의 관심과 중지(衆智)를 모으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면이 많아 보인다. 정부의 사용후 핵연료 공론화 정책에 따르면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의 확충 관련 사항은 지역 실행기구를 구성해 주민 토론회 등 시민 참여형 조사를 거쳐 지역의견을 수렴해 정부에 전달한다.하지만 첫 단추인 경주시의 지역실행기구 위원 선정에서부터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니 이제라도 각계각층의 지역 인사들이 좀 더 열심히 활동해 경주시민들에게 많은 정보를 주고 의견을 모으는 노력들을 좀 더 보여주어야 한다. 결론 내려야 할 때를 놓쳐서 재수생처럼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경주시와 시민들, 사업자가 모두 상생하는 방향으로 적기(適期)에 결론이 날 수 있도록 당사자인 한수원은 물론이고 경주시와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좀 더 관심을 가져 주길 바란다.

2019-10-22

배움과 학문

△배움과 학문의 차이배움과 학문의 차이는 뭘까? 하나는 한자, 하나는 한글? 그런 재미없는 농담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학문과 배움은 둘 다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을 말한다. 사전적으로 보면 학문은 새로운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운다는 의미가 덧붙어 있다.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과연 그럴까?배움은 필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걷는 법, 밥 먹는 법, 글을 읽는 것, 자전거를 타는 것, 수영을 하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배움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들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체화된다. 결국 체화된다는 것은 몸의 일부가 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예를 들어 컴퓨터를 배울 때는 자판부터 익힌다. 처음 배울 때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하고 키를 누르지만 다 배우고 나면 정작 키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해도 글을 쓸 수 있다. 자판으로 문서를 작성하거나 글을 쓸 때 특정 자음이나 모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인다.몸과 완전히 일체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한 번 배운 것은 잊어버릴 수 없다. 글을 배운 사람은 다시 글을 배울 수 없으며,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 사람은 다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수 없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은 우리의 삶의 일부로 자리잡는다. 그래서 처음 배울 때가 가장 중요하다.학문은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체계적이란 일정한 순서와 규칙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수학을 배우려면 수학의 기호를 알아야 하고, 그러한 기호들이 사용되는 규칙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기초적인 것을 배운 후에 이를 활용한 더 복잡하고 더 많은 사고를 필요로 하는 영역으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지식이 깊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젓가락질을 아무리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배워봐야 젓가락질은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수학이나 물리학을 깊이 있게 배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너무도 크다. 수학이나 물리학을 깊이 있게 배운 사람은 바람의 특징을 토대로 하늘을 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낼 수 있으며, 태양의 고도와 그림자를 활용하여 산의 높이를 측정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학문은 깊이를 지향한다.그런데 이런 학문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배움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옛날에는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학문은 경험만으로 구축되지는 않는다. 학문은 기본적으로 현상이라는 경험에서 비롯하지만,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는 일은 지적 능력과 관련이 있다. 아무리 경험이 많다고 하더라도 산의 그림자의 길이를 통해 산의 높이를 구할 수는 없다. 학문을 하는 사람, 즉 학자는 경험을 종합하고 정리해 하나의 이론을 구축한다. 학문은 현상의 종합이며, 다양한 현상들 속에 존재하는 공통점을 추출해 내는 일이다. 이것을 이론이라 부르고 이런 이론을 학문이라고 부르며, 이런 이론을 만들어낸 사람을 학자라 부른다.즉 학자는 현상을 탐구해 이론을 구축한다. 이렇게 정립된 이론은 실제 생활에 유용하게 활용된다. 산의 높이를 구할 수 있다면 피라미드나 나무의 높이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물론 그런 것을 몰라도 사는 데는 지장은 없다. 하지만 산의 높이를 알면, 다른 산을 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얼마나 힘이 들지, 산 정상이 날씨는 어떨지를 예측할 수 있다. 이런 예측을 바탕으로 산을 넘을 때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이러한 지식은 살면서 좋든 싫든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작정을 하고 익혀야 한다. 젓가락질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아도 포크처럼이라도 사용하면 그만이지만, 수학이나 물리적 지식은 배우려고 마음먹지 않으면 결코 이 지식을 익힐 수 없다. 그래서 학문은 자발적으로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며,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수준으로 거듭하여 도약한다.△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교육학문은 의식적인 체계화다. 그래서 학문을 개척한 최초의 사람이 존재한다. 학문은 새로운 배움의 길을 만들고 그 길을 열어가는 일과 같다. 이런 학문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지만 무수히 새롭게 생겨나고 필요가 다하면 소멸되기도 한다.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수백만 년 동안 사냥과 채집을 잘 할 수 있는 지식이면 충분했고, 농경사회에서는 농경과 관련된 지식이면 충분했다.고대의 그리스, 중국, 이집트 등과 문명권에서는 철학과 자연과학, 수사학, 군사학 등이 필수과목이었고, 그 경계가 따로 없었다. 고대 사회에서 군사학이 중요했던 것은 그만큼 전쟁이 잦았기 때문이다. 즉 교육은 필수 학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꼭 배워야만 하는 것들은 시대마다 달라지고 그럴 때마다 교육의 필수과목도 달라진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지금의 교육은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어 가기에는 낡은 감이 있다. 지금 교육의 변화가 필요하다.우리는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지식을 배우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미래에 대한 준비는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몫이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 미래를 준비해 나가야 한다. 미래는 미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있다. 예견된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준비할 때만 우리가 바라는 미래로 다가올 것이다. 이제는 대학이 지식 플랫폼으로 거듭나 투명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사회와 소통하며, 국민과 함께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2019-10-22

터칭과 홀드 스틸

개는 주인과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산책을 하거나 공놀이를 함께 하는 것도 개가 좋아하지만 가장 좋은 놀이는 주인과 접촉하는 스킨십, 터칭(touching)이다. 터칭은 시간을 따로 내지 않아도 되고, TV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도 언제든지 할 수 있다.개는 몸의 끝부분을 만지면 싫어하는데, 특히 주인과의 접촉이 별로 없던 개에게 갑자기 터칭을 시도하면 개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회화를 배우는 강아지 때부터 사람의 손길에 익숙해진 경우는 주인의 터칭을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주인을 물거나 난폭하게 돌변할 수 있다. 이때는 맛있는 먹이를 이용해서 터칭에 익숙하게 할 수 있다.우선 개를 옆으로 눕히고 귀, 입, 손발, 꼬리를 만진다. 이때 먹이는 몸을 만져도 개가 가만히 있을 때에만 준다. 조금이라도 싫은 기색을 보이면 먹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이때 먹이를 주면 역효과가 나타난다. 옆으로 눕혀두고 몸을 만져도 싫어하지 않으면 개의 배를 드러낸 자세로 눕혀서 터칭을 반복한다. 개에게 가장 취약한 부위는 아랫배와 접한 넓적다리 주변인데 개들은 항문 주위부터 뒷다리로 이어지는 서혜부를 만지면 민감하게 반응하며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정성을 가지고 반복해서 터칭을 시도할 경우 서혜부를 만져도 가만히 있는다. 개가 주인 앞에서 배와 서혜부를 모두 드러내고 눕는 것은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한다. 이것은 개를 길들일 수 있는 가장 좋은 자세다. 강압적인 드러눕힘이 아니라 시간과 정성을 다해 터칭을 해보라. 터칭은 개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이자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좋은 활동이 된다. 터칭에서 나아간 방법은 홀드 스틸(hold still)이다. 훈련을 잘 받은 개들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어느 정도 훈련에 익숙해진 영리한 개들은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게 되면 성취감 때문인지 심하게 흥분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때 훈련사들은 구부린 자세로 개의 등을 훈련사의 허벅지 사이에 끼우고 꽉 껴안아 주는데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홀드 스틸이라 부른다. 홀드 스틸의 포인트는 개와 밀착한 자세로 껴안는 것이다. 훈련사는 무릎을 꿇고 개를 단단히 껴안아 개를 안정시킨다. 개가 저항하고 움직이면 힘을 주어 꽉 껴안고, 얌전해지면 풀어준다. 개가 안심하고 주인에게 몸을 맡기면 홀드 스틸을 성공한 것이다. 개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실시하는 홀드 스틸은 개의 정신적·육체적인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줄여주는 좋은 방법이다. 다만 개의 입장에서 볼 때는 처음에는 느닷없이 뒤에서 껴안게 되면 당황하게 되고 당황하면 진정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강아지 때부터 홀드 스틸에 익숙해지게 하는 것인데, 주인이 등 뒤에서 껴안아주면 긴장이 풀린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개 스스로 알고 있게 하는 것이 좋다.이동훈연습이 필요할 때는 한 사람이 개를 껴안고, 다른 한 사람은 개가 저항하지 않을 때 먹이를 주는 방법을 사용한다. 계속 버둥거리고 싫어하면 개의 아래턱을 손으로 잡는 머즐 컨트롤(Muzzle control)을 사용한다. 안정을 되찾으면 다시 먹이를 주는 방법을 반복한다.홀드 스틸은 놀이의 일환으로 만지는 터칭보다 버릇을 고치거나 마음을 진정시키고 긴장을 푸는 목적이 강하다. 개의 등 뒤에서 귀, 손발, 꼬리를 만져나가는 홀드 스틸을 성공하게 되면 사람이 만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개도 긴장이 풀리면서 얌전해지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산책을 할 때 낯선 사람이 다가와 개를 쓰다듬을 때 주인이 홀드 스틸을 하면 개는 긴장을 풀고 안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터칭과 홀드 스틸을 통해 개가 주인에게 복종하고 사회에서도 개가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다./서라벌대 반려동물학과 학과장

2019-10-22

일학습병행 지원 법률제정과 금속특구지원센터의 역할

최원삼일학습병행 금속특구지원센터장경북동부경영자협회 상근부회장정부가 2014년에 법률안을 제출한 지 6년 만인 지난 8월 27일 ‘산업현장 일학습병행 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됨에 따라 학습기업 인재육성지원·학습근로자 보호·일학습병행 자격 부여 등 제도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기반이 마련됐다.일학습병행법이 통과됨으로써 기업과 학습근로자 간 책임과 권리·보호 내용이 명확해지고, 일학습병행 자격 발급이 가능해지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이번 법의 통과는 학교교육과 기업 현장훈련을 결합한 독일식 이원화 제도, 학습근로자 보호 및 일학습병행자격(국가자격) 등에 대한 법률상의 근거도 명확히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우리나라는 산업현장 직무와 학교 교육의 불일치로 특성화고, 대학에서 전공 과목을 배웠다고 해도 현장에서는 다시 배워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기업에서는 막대한 재교육 비용이 필요했다. 이러한 문제 해소를 위해서는 기업들이 일학습병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새로운 제도가 우리나라 교육훈련 분야에서 성공리에 정착되기 위해서는 학교·훈련기관은 물론 대기업과 중소기업, 산업별 단체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경북동부경영자협회는 2016년부터 특화업종(특구)지원센터로 선정, 금속특구지원센터를 운영하는 운영기관이다. 특화업종(특구)지원센터는 일학습병행 도입에 적합한 업종이나 동종업종 기업이 밀집돼 효율적 인력양성이 가능한 지역·산업계 특성을 고려한 기업 발굴·선정, 채용·확산모델 개발, 프로그램개발·운영지원, 학습근로자 평가 지원, 훈련질관리 등 주요역할을 수행하는 전담 기관으로서 일학습병행의 확산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금속특구지원센터는 매년 학습기업을 26개사 내외로 선정, 훈련실시함으로써 우수운영기관으로 선정되는 등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고 2019년 현재 30개사를 선정해 학습근로자 198명이 훈련중에 있다.부정훈련방지와 제도의 공공성 전파, 사후관리 모니터링을 강화해 현장에 실질적인 훈련이 되도록 관리함으로써 제도의 무분별한 확산이 아닌 질 관리에 힘쓰고 있다.정부나 운영기관 모두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일학습병행을 한국 현실에 맞게 이론과 실무를 병행하는, 즉 기업이 학생 또는 구직자를 채용해 업무를 담당하며 보완적으로 현장에서 활용되는 기술과 지식을 담은 NCS(국가직무능력표준) 기반의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가르치는 선순환 구조의 인재양성에 힘써야 할 것이다.또한 법제정으로 근거를 명확하게 구축했다는데 의의가 있고, 일선 현장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학습기업, 훈련기관은 물론 금속특구지원센터 등과 같은 일학습병행 지원기관들의 역할과 협업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2019-10-22

詩의 향기 속으로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구름이 유유자적 시를 쓰고, 산으로 들로 번져가는 단풍 잎새가 말을 걸어오는 계절.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가을하늘에 제 나름의 감성의 촉수로 시의 감흥을 펼쳐보면 어떨까?시는 인간의 순수한 감정의 발로(發露)이다. 시는 말로 그리는 그림이며 마음의 소리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이게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한 언어실천이다. 또한 시는 그리움의 소산이기도 하고 깨달음과 깨침의 통찰이자 지혜이기도 하다. 결국 시는 충만한 생명과 무한한 정신을 드러내어 사람의 가슴에 울림을 주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언어적 구성물이라 할 수 있다.시를 쓰는 일은 축복이다. 상처가 조개 속에서 진주를 키우듯이, 삶의 자극이나 어느 순간의 감동이 시의 씨앗이 되고 한편의 시를 싹트게 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하는 것이며,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시를 만나러 가는 길은 항상 가슴이 설레고 조금쯤은 흥분되거나 긴장하기 마련이다. 시인의 정신세계는 무한대여서 어느 선현의 말씀처럼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세상을 보면서’ 산다. 그래서 시인들은 시를 쓰면서 부단히 고민하고 감성을 연마하여 삶의 행복을 정련(精鍊)하는지도 모른다.시를 읊거나 낭독하는 것은 시의 행간에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다. 시가 지닌 사회성과 역사성, 교훈성과 계몽성을 차치하고라도, 시를 음미하며 감정을 살려 낭송하는 것은 시에서 묻어나는 감동의 향기를 세상에 널리 피워내는 것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꽃자리를 옮겨가며 나풀대는 나비의 날갯짓 같기도 하고, 들풀을 쓰다듬으며 잎새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의 몸짓 같기도 하다. 이른바 시 낭송이란 생명의 언어로 만들어진 시를 우아한 육성으로 전함으로써 시 본연의 울림과 스밈을 더해 주는 표현의 미학이 아닐까 싶다.포항지역에는 8,9년 전부터 시의 몸에 목소리의 옷을 입히며 정갈함과 향긋함을 전해온 분들의 노력으로 지역의 특색있는 시낭송 문화가 자리매김해가고 있다. 그들은 해마다 시낭송 발표회를 가지면서 경북교육청문화원에서 개최하는 ‘찾아가는 행복콘서트’와 포항시 주관의 ‘향교서원 문화재 활용사업’ 등에 동참하거나 재능기부를 하면서 문화사업 활성화에 일조하고 있다.특히 최근에는 도심 속의 휴식처 같은 서옥(書屋)의 뒤뜰에서 서울과 지방의 저명한 시인들을 초청해 시담(詩談)을 나누고 시낭송회를 열어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또한 전국규모의 시낭송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실로 왕성한 활동과 내실있는 행보가 참으로 고무적으로 여겨진다.하늘빛 그리움으로 잔잔히 여울지는 시와 그윽한 목소리를 타고 흐르는 향기나는 시낭송의 삼매에 빠져, 가슴 붉게 물드는 낭만으로 이 가을이 익어갔으면 좋겠다.

2019-10-22

전통시장이 살아남는 법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각 지역의 전통시장은 해당 지방의 발전사와 동고동락해왔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정치인들이 시민들과 만나기 위해 시장으로 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곳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데다 가장 민감한 정치 문제부터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해 주부나 상인들의 여과 없는 이야기가 오가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는데도 최적의 장소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장날에만 열리는 시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 장소의 전통시장들도 처음에는 장날에만 상거래를 하였지만 수요가 늘어나면서 고정된 장소에 자리잡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이 장날의 상인에서 고정형 상인으로 변신하기까지는 많은 혁신과 생존의 노력이 뒤따랐다고 할 수 있다.이제 또 전통시장이 지금의 방식만으로는 결코 살아남기 힘든 상황을 맞이했다. 1인 가구라도 부담 없이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깨끗하고 소량 단위로 포장된 것, 굳이 바쁜 상인에게 일일이 물어볼 필요도 없이 중량과 원산지 그리고 가격까지 인쇄된 식품, 야근하고 퇴근이 늦어도 구매 가능한 영업시간, 차량도 없고 깔끔한 옷차림에 약속장소로 가기 전이라도 마음껏 필요한 물품을 구매한 후 주소만 대면 택배가 가능한 곳이 대형유통점포다. 이들과 전통시장이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동안 상품권 발행 등 전통시장 살리기 정책과 시장 근처 일정거리 범위 내에는 대형유통점이 아예 입점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까지 마련하면서 어찌어찌 생존해왔다. 하지만, 그마저도 골목마다 작고 깔끔한 소매형태의 프랜차이즈 유통업체들이 진출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졌다.포항의 전통시장들은 그동안 교통오지였던 만큼 물류비용까지 가미된 다소 비싼 가격이었어도 고도 성장기에 힘입어 무리 없이 성장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교통망이 확충되어 시민들의 선택의 폭도 넓어졌다. 게다가 도시외곽으로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굳이 구도심의 전통시장까지 찾아올 특별한 유인책까지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제 전통시장 상인들은 과거 장날 상인에서 붙박이 상인으로 변신하였던 것처럼 또 다른 변혁을 통해 생존해야만 하는 기로에 섰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전통시장이 모든 부분에서 대형마트와 동등한 여건을 갖추고 경쟁하라고 하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시장 손님의 생활패턴이나 환경이 바뀐 부분에 대해서는 전통시장도 수용해 나갈 필요가 있다.그런 의미에서 최소한 두 문제만큼은 해결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시민들이 전통시장을 이용할 수는 있어야만 한다. 직장인들이 퇴근해 시장을 가려면 빨라도 오후 7시는 넘어야한다. 그러나 그때쯤이면 식당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문을 닫아 어둠만 반기고 있어 이용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둘째, 전통시장 전체를 아우르는 일괄 결제시스템은 무리라도 시장에서 구입한 물품들을 가정까지 배달해주는 통합택배시스템은 갖춰야만 한다. 자동차가 없어도, 장바구니가 없어도, 편하게 전통시장을 이용하려면 택배서비스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주차장 부족문제가 전통시장 활성화를 저해하는 절대적인 원인은 결코 아니다.

2019-10-22

듣는 법을 가르치는 청각 장애인

에벌린 글레니는 맨발의 연주자입니다. 세계 최고의 퍼커셔니스트입니다. 런던올림픽에서는 1천명의 타악기 연주자들을 총지휘하는 독주자로 활약했고 그래미상을 두 번 수상한 경력도 있습니다.어릴 적 앓은 후유증으로 두 귀의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여인입니다. 귀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온몸으로 사람들의 목소리와 세상의 모든 음을 다 흡수하는 법을 터득하지요. 맨발로 무대에 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그래미상 수상 직후 희망을 묻는 기자들에게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합니다.“듣는 것을 가르치는 센터를 세우고 싶습니다. 단지 듣는 법(how to listen)이 아니라 듣는 것 그 자체를 가르치는 곳이지요. 제대로 듣는 일은 절대로 대충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듣는다는 것은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내가 지금 이 순간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컴퓨터나 휴대전화, 시계 따위에 관심을 뺏기지 않는 거지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신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거지요. 경청이 어려운 이유는 귀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역설이죠. 당신의 말은 내가 잘 들리는 두 귀로 모두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의도로 듣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주장을 들려주기 위해, 그 목적으로 듣기 일쑤입니다.CNN 래리킹 쇼를 수십 년 진행하며 세계 최고의 달변가로 알려진 래리 킹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고 있을 때 나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귀 기울여 들을 때 비로소 배운다.”내 청력이 완전히 소실되었다는 상상으로 상대방 입술 모양과 눈빛에 온전히 집중하며 듣는 연습을 해보고 싶습니다. 평소 들으려 노력하지 않은 심장 소리,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여 보는 순간을 만나보면 어떨까요?/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0-22

삼사일언(三思一言)의 교훈

강희룡 서예가조선후기 문신이며 학자인 윤기(1741∼1826)는 그의 ‘무명자집(無名子集)’에서 ‘사람에게 있어 말은 물이나 불과 같다. 사람은 물과 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수재(水災)나 화재(火災)를 당하면 참혹하기 그지없으니, 조심하여 사용해야 그 폐해가 없다.’라고 경고했다. 윤기는 남인(南人)출신 학자로 33세라는 늦은 나이에 소과(小科)에 합격한 뒤 20년을 성균관 유생으로 있었다. 52세에 겨우 대과(大科)에 합격했지만, 86세로 죽을 때까지 미관말직을 전전했다. 극도로 문란했던 당시 과거제도 아래에서는 권문세가에 연줄을 대거나 뇌물을 쓰지 않고는 과거에 합격하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호(號)를 무명자 곧 ‘이름 없는 사람’으로 불렀는데, 거기에는 개인의 실력과 노력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도 절망하지 않고 의연하고도 초연하게 살고자 한 그의 정신이 담겨 있다. 당시의 과거제도나 많은 사회문제의 한 요인으로, 윤기는 ‘긴속(緊俗)’ 즉 자기에게만 긴요한 일을 좇는 세태에 주목하고, 천하 사람들의 미혹함이 모두 이 ‘긴’이라는 한 글자에서 연유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성의 존재이므로 자기만을 위한 긴요함을 좇다 보면 자칫 자신의 의도와는 반대로 실패와 치욕을 맛보게 되는 것이 하늘의 떳떳한 이치라고 했다. 윤기는 서문에도 말조심에 대해 ‘입은 화(禍)를 부르고, 행동은 흔단(91C1端·틈이 생기는 실마리)을 여니 경계하고 조심하라.’ 적고 있다.유시민 노무현재단이사장이 진행하는 ‘알릴레오’라는 유튜브방송에서 15일 오후 패널로 출연한 한 경제지 기자가 KBS의 여성 법조기자와 검찰 간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며 ‘검사들이 이 여기자를 좋아해서 조국수사 내용을 흘렸다.’는 망언을 해서 문제가 됐다. 조국 장관이 검찰 장난으로 인해 사퇴했다는 가짜뉴스를 방송으로 퍼뜨리려다 이런 재앙이 생긴 것으로 풀이된다. 다급해진 유 이사장이 사과했으나 평소에 그의 신뢰 없는 말 몇 마디로 얼버무릴 일이 아니다. 유 이사장 본인도 조국 전 법무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검찰 압수수색 전 자신의 컴퓨터를 빼돌린 행위에 대해 검찰이 압수수색해 장난칠 경우를 대비한 것이라며 PC 반출행위를 ‘증거인멸이 아니라 증거보존을 위한 것’이라는 해괴한 궤변을 늘어놓았다. 방송에 출연하여 마구 내뱉는 그의 궤변에 대해 국민들은 크게 신뢰를 두지 않는다. 그의 상식파괴적인 ‘요설(妖說)’을 대하면 고려 말 요승(妖僧)으로 기록된 신돈(?∼1371)이 떠오른다. 이런 행태는 결국 국민을 선동하여 이 사회를 교란시켜 병들게 한다. 세치 혀로 자신이나 패거리의 이익을 위해 정제되지 않고 진실을 왜곡하여 쏟아낸 말의 결과는 그의 자신을 향해 설화(舌禍)로 돌아갈 것이다. 말에 대한 경계는 어느 시대 누구나 언급하고 있다. 말을 조심하지 못하면 크게는 패가망신하고 작게는 창피나 미움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화근이 말에서부터 비롯되니 한 번 입에서 나오면 되돌릴 수도, 손으로 가릴 수도 없다. 이렇듯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기에, 삼사일언(三思一言)의 교훈을 새겨야 하지 않겠는가.

2019-10-21

검찰개혁도 역사의 질서 안에 있음을…

서정목 대구가톨릭대 교수필자는 통번역학을 전공하였다. 그래서 통번역 업계와 업무를 잘 안다. 통역업무가 필요한 업체에서는 통역사를 부른다. 모신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대신 통역을 붙인다는 말을 쓴다. 과외 선생도 모신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과외선생도 붙인다. 변호사는 붙인다거나 댄다는 말을 쓴다. 존경받는 직업에는 아마 이런 말을 쓰지 않는 듯하다. 과거 변호사를 보고 칼 안든 강도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요즘이야 변호사를 비롯한 사짜 직업들의 수난시대이니 옛말이려니 한다. 그러나 대체로 검사, 판사, 변호사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는 않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검사와 재벌, 검사와 조폭, 그리고 이들을 돕는 변호사는 막장드라마 못지않게 단골 소재가 되었다. 이처럼 법조계는 대중들에게 그다지 호의적이고 친근하게 느끼는 직업군이 아니다. 이들이 대중들의 불신을 받는 것은 공정하게 법의 잣대가 적용되지 않은 때문이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정의의 여신은 디케(Dike)이며, 로마신화에서는 유스티시아(Justitia)이다. 유스티시아의 조각상은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저울, 그리고 눈에는 눈가리개를 하고 있다. 법을 심판하는데 있어 칼같이 저울질하되, 눈가리개로 눈을 가리는 것은 편견없이 공정하게 재판하라는 의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법에 관한한 최고의 가치는 공정함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이를 잘 대변해 준다.며칠 전 저녁, 한 TV 드라마에 놀라운 대사가 쏟아져 나왔다. “이 세상은 수많은 혁명을 통해 인간의 삶은 개선되어 왔고 앞으로는 더 좋아진다. 부딪히고 깨지고 엎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하는 것이 역사의 질서”라는 것이다. 그저 드라마 대사로 받아들이기로는 너무나 감동적이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말이다. 권위주의 체제의 몰락과 민주화도 이러한 역사의 질서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나라도 그렇다. 서구에서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민주화를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수많은 시민의 피와 땀을 바탕으로 민주화 투쟁을 통해 이루었다. 우리의 민주화는 시민들이 부딪히고, 깨지고, 엎어져도 다시 일어서면서 당면한 과제를 극복하여 온 역사의 질서인 것이다. 다만 경제적으로 압축 성장한 것처럼, 민주화도 압축해서 압축 민주화(!)를 이루다 보니 아직 덜 다듬어진 부분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검찰개혁, 사법개혁의 과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역사는 인간을 위주로 인간의 삶에 유용하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진보한다. 검찰개혁도 역사의 질서에서 보면 이루어져야 하는 수순이다.한국인들은 평등의식이 강하다. 평등의식이 강한 한국이 자본주의 사회가 되고, 부를 숭배하고 부자를 존경하는 중국이 사회주의 사회가 된 것이 아이러니하다고 누군가 한 말이 떠오른다. 공정하지 않은 법의 적용은 평등에 위배된다. 그래서 시민들은 무소불위의 검찰권을 거부하고,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를 외친다. 민주화는 별 볼일 없는 보통 사람이 많이 사는 사회가 되는 과정이다. 함께 더불어 사는 이런 사회는 온다.

2019-10-21

평화의 도구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성 프란체스코가 쓴 평화의 도구라는 시(詩)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경청에 익숙하지 못한 이유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의도로 대화를 하지 않고 나를 이해시키려는 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때문입니다.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일어나죠. 경청의 목적은 ‘이해’입니다.사람은 누구나 이해받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이해하고 인정해 줄 때 숨통이 트이고 심리적 산소를 공급받습니다. 이해받지 못한 삶, 인정받지 못하는 삶은 우울하고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지요.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 합니다. 이해받고 싶은 사람 99명이라면 내가 먼저 상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 1명에 불과합니다.어쩌면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해받고 싶은 사람 999명에 내가 먼저 상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1명일지도 모릅니다.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입니다.서로 자기를 이해시키려 몸부림치면 결과는 감정의 충돌, 분노, 절망입니다. 이 순서를 바꿀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가 먼저 상대를 이해하려 애쓰는 것입니다. 나를 이해시키는 노력은 다음 순서에 하면 됩니다.상대방이 한참을 떠들며 자신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에 귀 기울여 주면, 상대는 이해받았다는 안도감과 후련함을 느낍니다. 이때는 조금 마음의 여유를 갖지요. 그럴 때 나를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하면 상대도 쉽게 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지 순서만 잠깐 바꿀 뿐인데, 우리는 평화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나를 둘러싼 먹구름 아래 고단한 삶은 이해받고 싶어하는 마음의 외침으로 가득합니다. 귀 기울여 주위 신음을 포착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는 하루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대가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0-21

일제강점기·해방 이후를 거치며 오늘날의 천일염이 시작됐다

소금 ‘SALT’에서 월급 ‘SALARY’가 파생되었다는 말은 정설이다. 소금을 빼고 인류 역사를 설명할 수는 없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노동자에게 반드시 소금과 마늘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에이, 설마?”라고 하겠지만 한반도는 만성적인 소금 부족 지역이었다.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초기에 늘 소금이 부족했다. 1960년대까지 소금은 정부의 전매품(專賣品)이었다. 전매품은, 전매청 등 전매기관이 생산, 유통, 판매를 관리한다. 민간의 사사로운 소금 생산, 판매는 불법이었다.소금이 부족하니 정부가 직접 소금을 관리했다. 담배, 인삼, 소금 등이 예전에는 모두 전매품이었다. 1950년대, 천일염 주요 생산지인 목포시청에는 염업과(鹽業課)가 있었다. 염업과에서는 불법적인 소금의 유통을 철저히 막았다. 소금 불법 유통이 드러나면, 불법 유통 소금 몰수, 벌금 때로는 형사 처분도 했다.동아일보 1962년 3월13일자 2면의 기사 내용이다. 제목은 ‘상인 소금 사지 말라’다.상인 소금 사지말라/전매청서 요망전매청에서는 12일 鹽指定小賣所(염지정소매소)에서 배급하고 있는 소금 이외는 상인들로부터는 소금을 사지 말라고 전국의 수요자에게 요망하였다. 전국 소매소에 나가고 있는 소금은 118만여 가마니에 달하고 있다. 鹽田(염전)은 금년 5월부터 민영화되며 그때까지는 民間保有鹽(민간보유염)이 있을 수 없다.앞서 밝혔듯이, 소금은 전매품이었다. 전매청이 관리했다. 전매청에서 전국의 ‘염지정소매소’를 관리했다. 염지정관리소는, 소금을 취급하는 각 지역의 합법적인 소매점이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소금을 공급받아 소비자들에게 골고루 판매했다. 소금이 부족하니, 철저하게 관리하여, 골고루 나눠야 했다. 문제는 탈법적인 사설 판매상들이다. 생산지에서 관리가 되지 않으니 결국 소비지역으로 이런 불법, 탈법 소금들이 흘러 다닌다. ‘사설 소금 판매상’이다.내용 중에 ‘국가, 전매청’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국가가 전매청, 염지정소매소 등을 통하여 118만여 가마니의 소금을 넉넉하게 공급하고 있다고 말한다. 합법적인 소금이 넉넉하니 불법 소금을 사지 말라는 뜻이다.이해 5월 소금이 민영화된다. 민영화 직전이니 소금 전매 제도가 어수선하게 무너지고 있었을 것이다. 전매청이 나서서, 민영화는 5월부터, 그 이전에는 일체 “민간 보유 소금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소금 부족은 고질적이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9년 (1409년) 11월의 기사다.전지(傳旨)를 내려 구언(求言)하기를, (중략) 관중(管仲)은 소금을 굽는 이익을 계획하여 그 나라를 부강(富强)하게 하였고, 당(唐)나라 유안(劉晏)은 소금의 이익을 가지고 백성에게 무역하여 그 이익이 농사를 권하는 것보다 배나 되었으니, 그렇다면, 소금의 이익이 매우 중한 것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염장관(鹽場官)을 설치하여 소금을 구워 무역하니, 예전의 유법(遺法)입니다. 그러나, 포(布)라는 물건은 굶주린 사람이 먹을 수 없으니, 원컨대, 서울과 외방의 관염(官鹽)을 모두 쌀로 무역하여 군량(軍糧)을 보충하소서.중국도 만성적인 소금 부족국가였다.윗글에서, 소금과 관련하여 예로 든 사람이 2명이다. 관중(기원전 725?~기원전 645년)은 제나라 관리다.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 환공을 패자로 만든 명재상이었다. 그가 취한 정책이 ‘소금 굽는 이익을 계획하여 나라를 이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국가가 소금을 관리했다. 소금을 팔거나 염세(鹽稅)를 지혜롭게 거두었다.유안(716~780년)은 당나라 현종 등 4명의 황제를 모신 관리. 소금과 쇠를 관리하여 당나라의 재정을 튼튼하게 했다. 유안은 “백성들에게 소금을 팔아서(무역) 그 이익을 크게 취했는데 (그 이익이) 농사의 배나 되었다”고 했다.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지만, 그보다는 소금을 통한 이익이 훨씬 컸다. 글에는 ‘염장관(鹽場官)’이라는 직업도 등장한다. 염전을 관리하는 이다. ‘관염(官鹽)’은 관에 속한 ‘염전(鹽田)’에서 ‘구운’ 소금 혹은 관청에서 관리하는 소금이다. 이때도 민간에서 관리하는 소금 혹은 민간에서 사사로이 사고파는 소금이 있었다. 사염(私鹽)이다. 사염은 불법 혹은 탈법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소금은 국가, 관청에서 관리했다.소금을 사고파는데 포, 옷감을 사용하지 말고, 쌀을 사용하자고 말한다. 쌀은 먹을 수 있지만, 옷감을 먹고 살 수는 없다. 물물교환이 흔했던 시절이다. 염전에서 일하는 이들은 먹지 못하는 옷감보다는 바로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쌀을 원했을 것이다. 쌀이면 군량미로도 가능하다.소금 거래를 두고 많은 일이 벌어진다. 소금값으로 미리 옷감이나 쌀을 주었는데 미처 소금을 받지 못하는 일도 벌어진다. 지금으로 치자면, 사기에 해당하는 일이다.한때, “천일염(天日鹽)은 우리 고유의 소금이 아니다”는 주장이 있었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고려, 조선 시대 소금은 천일염이 아니라 자염(煮鹽)이었다. 윗글에서 “소금을 굽는다”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의 소금이 천일염이 아니라 자염이었음을 의미한다. 자염의 ‘자(煮)’는 삶고 끓이는 것이다. 자염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고 힘들었다. 바닷물을 퍼와서 농도를 높인 다음, 큰 솥에 넣는다. 장작불을 피워서 솥 안의 소금물을 끓인다. 오랫동안 소금물을 끓이면 수분이 증발, 소금 결정체가 나타난다. 자염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조선 시대 말까지도 우리는 자염을 먹었다.자염은 만들기 힘들었다. 바닷물을 퍼오고, 장작을 구해야 한다. 바닷물을 퍼오는 일도 힘들고, 장작을 구하고 운반하는 일도 힘들었다. 바닷물은 힘만 들이면 퍼올 수 있지만, 장작은 나무를 베고, 쪼개야 한다. 자염을 만드는 과정에 장작이 많이 들어간다. 나무를 구하는 일도 힘들었다.소금물, 장작을 구하면 소금을 구워야 한다.온종일, 장작불을 지펴야 한다. 이 과정도 힘들다. 여름이면 불가에 가기도 힘들다. 소금을 만든 다음, 운반, 관리하는 인원도 필요하다. 소금은 무겁다. 소금을 만든 다음, 배로 옮기고, 배를 운반하고, 다시 창고에 옮기는 모든 과정이 힘들었다. 특히 한여름, 한겨울에는 더 힘들었다.소금 굽는 일을 하는 이는 염부(鹽夫)다. 염부 일이 힘드니 이 일을 하려는 이들이 드물었다. 사염이 아닌 관염의 경우, 적은 급료를 받고 염부 일을 하겠다는 이들이 드물었다. 계급상으로 하층민인 승려, 관노(官奴)들을 동원한 이유다.자염이 지금의 천일염보다 편리한 점은 단 한 가지다. 지역과 관계없이 한반도의 모든 해안에서 소금을 생산했다. 바닷물, 장작, 가마솥, 염부만 있으면 자염을 만들 수 있었다.다산 정약용도 소금 세금, 염세에 대해서 상세한 이야기를 남겼다. ‘경세유표 제14권_균역사목추의(均役事目追議)_염세’의 영남 부분이다. “영남 해안에서 소금을 만들었을까?”라고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영남 남해안 일대에서 많은 자염을 만들었고, 상당수를 영남 내륙에서 운반, 소비했다. 통영에서 김해 앞바다에 이르는 섬, 바닷가에서 많은 소금을 만들었다.영남/“(전략) 동해(東海) 소금은 미치지 못하므로 황수(潢水, 낙동강) 좌우 연변 여러 고을은 모두 남쪽 소금을 먹는다./(중략) 나라 안 소금의 이익은 영남 같은 데가 없다. 명지도(鳴旨島, 부산 강서구 명지동)에만 매년 소금 여러 천만 섬을 구우며, 드디어 낙동포변(洛東浦邊, 경북 상주)에다 별도로 염창(鹽倉)을 설치하기까지 했다. 감사가 해마다 천만으로 계산하고 해평 고현(海平古縣, 구미시 선산군 해평면)에 해마다 소금 만 섬이 오니, 소금의 이[利]가 나라 안에서 첫째임은 이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영남 감사의 녹봉은 팔도에 첫째이다. 내 생각에는 영남 여러 해변에 관염전(官鹽田) 수십 곳을 두어서(후략)자염은 1907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천일염이 바뀐다. 일제가 일본과 대만에는,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소금 생산 공장을 세운다. 한반도에는 대만, 중국의 천일염 방식을 들여왔다. 인천의 주안염전이 시작이다. 주안염전의 천일염 제조 방법은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충청도 안면도, 전남 무안, 신안, 목포 일대의 염전이다.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를 거치며 오늘날의 천일염이 시작되었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10-21

낙조, 그 아름다움을 위해… 칠곡 도덕암(道德庵)

미모사를 아는가?살짝만 건드려도 잎이 밑으로 처지고 싸늘하게 오므라드는 풀꽃이다. 뜬금없이 날아든 시끄러운 소리에 마음이 불같이 달아올라, 결국은 부족한 스스로에게 상처받아 의기소침해진 나는 한 포기 미모사가 되어 집을 나선다.능엄경에 ‘반문문성(反聞聞性)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 나를 다시 들여다 본다는 말이다. 나의 반문문성은 늘 한 발 늦게 행해져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든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감정의 노예가 되어 허둥대는 마음을 또 다른 내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은 쉽지가 않다.무작정 절을 찾아 팔공산 순환도로를 달린다. 리기다소나무와 적송들이 어울려 있는 초입을 지나자 적송 우거진 숲이 이어진다. 호젓한 평화에 마음이 즐겁다.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임산물 체취를 막는 커다란 가로펼침막과 길가에 쳐진 줄이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세상 모든 사물에는 눈과 입이 있다. 남이 가지지 않은 무언가를 내세울 수 있다는 것은 자칫 교만함으로 이어지기 쉽다. 불필요한 오해는 사고 싶지 않아 경사 심한 비탈길을 용을 쓰며 오른다. 도시의 소음과 불협화음을 피해 왔지만 삶은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따라 온다.높다란 콘크리트 기단 위에서 도덕암(道德庵)이 나를 지켜본다. 팔공산 자락에 있는 사찰이지만 절 이름을 따서 도덕산 도덕암이라 부른다는 독자적인 자존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컹컹 개 짖는 소리에 팔공산이 떨리고 공양주 보살이 반긴다. 위협적으로 보이던 덩치 큰 두 마리 개가 법당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서야 이내 온순해진다. 낯선 이를 식별하는 그들만의 지혜조차 크게 보인다.435년(눌지왕 18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도덕암은 968년(광종 19년)에 혜거국사가 대대적으로 중수하여 칠성암이라 칭하다 1854년 선의대사가 중수하여 도덕암으로 부른 후 영남 3대 나한기도 도량으로 알려진 암자다. 스님은 저녁 무렵에나 돌아오실 거라는 귀띔에 홀로 햇살 따가운 경내를 산책한다.800년의 풍파를 견뎌온 모과나무나 고려 광종이 혜거 국사를 왕사로 모시기 위해 이곳에서 사흘간 머물며 속병을 고쳤다는 어정수도 건성으로 지나친다. 자연석 축대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나한전과 산신각, 응진전 사이에 나도 전각처럼 서서 서쪽을 바라본다. 저 멀리 물결을 이루는 산들을 넘고 넘으면 피안의 세계에 이를 것만 같다. 내 안에 느닷없이 들어온 껄끄러움을 피해다니느라 지쳐 있던 나를 가만히 다독여 주는 이는 누구일까?경내는 적막할 만큼 고요하다. 보살님들은 기척이 없고 덩치 큰 개들도 나른한 오후에 취해 졸고 있다. 요사채 돌담 위에 핀 꽃들을 카메라에 담는데 가파른 경사길을 차 한 대가 올라온다. 부리나케 공양주 보살이 마중나가는 모습이 잡힌다. 그 종종걸음을 따라 내 눈도 호기심 가득 안고 비탈길을 따라나선다. 저녁 무렵에나 오신다던 주지 스님이 일찍 돌아오신 듯하다. 스님의 가방을 받아 들고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며 올라오는 보살님의 환한 표정에서 잊고 있었던 옛날을 떠올린다.내 어린 날, 출타하신 할아버지가 돌아오면 어머니는 언제나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나가곤 했다. 조부의 손에 들려 있던 가방이나 짐을 받아들며 웃는 얼굴로 맞는 것은 집안의 질서와 공경의 표현이었다. 적당한 거리와 적당히 예가 우러나던, 그 그립고 따뜻한 풍경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소소한 풍경에서 도덕암의 숨결이 읽힌다.나를 키워준 아름다운 기억들과 흔들리며 사라져간 그리운 것들로 가슴 한켠이 허전하다. 햇살도 한껏 자세를 낮추고 휘어질 무렵, 스님은 모과나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올라오신다. 퍼뜩 정신이 든다. 하필이면 나는 주지 스님의 방 앞을 서성거렸던 모양이다.조낭희 수필가운이 좋게 스님과 차담을 나눈다. 임종을 앞둔 환자처럼 누워 있는 겹겹의 산들과 피곤한 하루가 너울거리며 사라지는 서쪽 풍경이 커다란 유리문으로 들어온다. 깔끔한 이미지를 풍기는 법광 주지스님, 산사에서 마시는 캡슐커피조차 낯설지가 않다. 모과나무, 어정수, 낙조, 도덕암의 세 가지 자랑거리와 대를 이어 찾아오는 불자들이 많아 가족처럼 화목하다는 스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어느 새 도덕암이 내 안에 자리잡는다.커피를 마시면서 내 눈길이 자꾸 서쪽풍경을 향해서였을까? 스님은 내면을 바라보고 성찰하기를 바라시며 회광반조(回光返照)에 대해 말씀하신다. 사람이나 사물이 쇠멸하기 직전에 잠시 왕성한 기운을 되찾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자의 일생 중 세 번의 아름다운 때를 언급하시며, 스스로를 돌아보며 중후함을 갖춰야 할 마지막 시기의 아름다움을 당부하신다.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돌이켜 볼 줄 안다면, 그것이 부처님 자리에 들어서는 순간이리라. 멀고도 먼 길이지만 가는 길은 뿌듯하다. 중후한 아름다움, 커다란 과제 하나 안고 도덕암을 나서는데 저녁 공양하고 가라는 보살님의 따뜻한 미소가 암자를 밝힌다. 덩치 큰 개도 더 이상 짖지 않았다. 도덕암의 낙조는 결국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보다 아름다울까.

2019-10-21

인간이기 때문에 갖지 않을 수 없는 한계

인간은 살아가며 수많은 한계와 마주한다. 어쩌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 ‘삶’이 아닐까. 태어남에서 죽음 사이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결정하거나 결정하지 못한 채로, 또는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살아가게 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있었다면 좋으련만, 언제나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으면 그 한계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아서 충격을 받는 일도 있고, 때로는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아예 하지 않는 일도 빈번하다.인간이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한계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위대한 문학의 주제로 다뤄져 왔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늘 마주치게 되는 한계들이 언제나 명확한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일 터. 인간에게 있어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 뿐인 것인 까닭이리라. 타인의 삶을 다룬 소설을 읽고 문학을 읽으며, 삶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정작 자신의 삶에서 도래하게 되는 한계라는 것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위대한 문학은 언제나 인간이 자신에게 도래한 한계에 대해 인식할 수 없다는 아픈 진실을 건드린다.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52년 쿠바에서 쓴 노인과 바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 ‘산티아고’는 ‘늙음’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지 않을 수 없을 시간적인 한계에 직면해 있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시간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쇠약해가는 힘과 정신, 그리고 그로부터 초래되는 자기 확신의 문제와 관련된다. 분명 예전에는 전설적인 어부였을 테지만, 이제는 늙고 쇠약한 산티아고에게 사람들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서 여전히 신화적 환상을 보고 있는, 또 인간으로서 그를 동정하고 있는 아이 하나만이 그를 챙겨준다.하지만, 산티아고는 여전히 사자의 꿈을 꾸고 있다.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이 성장하는 단계를 세 가지로 나누어, 낙타와 사자, 어린아이로 나누고 있다. 자신이 정한 길만을 열심히 나아가는 낙타와, 그 단계를 넘어 누군가와의 인정 투쟁을 거쳐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사자,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한 어린아이의 단계가 그것이다. 산티아고는 자신의 늙음에 대해 받아들이기보다는 아직 사자의 꿈을 꾸며 자기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에 어느 누가 그의 바람을 헛된 것이라 비난할 수 있을까.산티아고는 바람대로 커다란 청새치를 낚고 그와의 사투를 겪고 돌아온다. 그가 낚은 물고기는 돌아오는 길의 고난으로 인해 형체만 남았다. 그는 청새치의 뿔은 아직도 신화적 환상에 빠져 있는 아이에게, 머리는 지금까지 자신을 무시했던 어시장의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사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삶이, 하고자 하는 욕망과 한계 사이에서 결정되는 것처럼. 아무 것도 남지 않아도 그 곳에 무언가 의미가 남는 것처럼, 말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