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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다문화는 다른 문화인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세상이 바뀌었다. 시간이 그저 흐르는가 싶어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많은 것들이 변화해 간다. 한때 우리는 스스로 ‘단일민족’이라 여기며 하나의 뿌리를 가진 민족적 순수성을 우리 문화의 독특한 자랑거리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 우리에겐 자연스럽게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경계하고 차별적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배타적인 경향성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우리와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일 뿐인데, 왠지 모르게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21세기 글로벌화된 세상을 맞아 나라들 사이에 벽이 없는 교류가 많아지고 문화적 경제적으로 더불어 섞이며 살아가는 지구가 되었다. 다양한 배경과 출신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삶을 나누는 세상이 된 것이다. 다문화사회로 나아가는 새 지평이 이미 열렸다.대한민국 인구의 10% 정도를 이른바 다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앞으로는 모든 사람이 일상에서 다문화를 만나며 함께 호흡해야 할 터이다. 이미 펼쳐지고 있는 다문화사회에 우리가 적절하게 준비되어 있는지 살펴야 한다. 예멘 난민들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정치적 망명이 인정될 것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그들과 함께 같은 장소에 존재하는 일이 그리 편치 않았다. 어느 지방자치단체장은 다문화 가정을 비하하는 표현을 사용했다가 홍역을 치렀다. ‘잡종’이라든지 ‘튀기’라는 표현은 그가 가진 다문화인식의 낮은 수준을 보여준다. 베트남 출신 신부를 맞은 남편이 아이가 보는 앞에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러 조사를 받고 있다. 그가 저지른 행위가 공분을 자아내지만 우리는 과연 다문화 현상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야 하지 않을까.‘다문화’도 과제이지만 우리에겐 ‘지방색’도 있다. 영남과 호남, TK와 PK, 수도권과 비수도권, 이북과 이남…. 손바닥만한 나라에서 아마도 산과 강으로 나누었을 것으로 보이는 단절과 분단의 그림자. 조선의 임금들이 때때로 탕평과 대동을 시도했지만 그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세상의 지평이 탁 트이고 시야가 넓어져야 하는 세상에 이제는 인식도 새로워 져야 하지 않을까. 혹 다른 이들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이 거기 있었다면, 이제는 이해와 소통으로 영역과 지경을 넓혀가야 하지 않을까. 모든 지역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어느 인종이든 품을 수 있는 널푼수가 우리 문화와 습성에도 생겨야 하지 않을까. 글로벌환경을 시대가 허락한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서도 우리와 다른 이들이 이 땅을 찾는 일을 반겨야 하지 않을까.글로벌 환경이 저 멀리 있는 것 같아도, 다문화를 적극 포용하고 우리의 문화로 만들면 글로벌 환경이 우리 안에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단절과 차별로 반응하기 보다 환대와 화합으로 받아들이면 다문화사회의 모범사례를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익숙하지 않아 먼저 내밀어지지 않는 손길도 더욱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용기로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 더욱 열린 나라를 지향하고 보다 개방된 사회를 열어가기 위해서 국가도 다문화정책에 전향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터이다. 다문화 이웃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과 따뜻한 배려가 보통 사람들의 태도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다문화는 다른 문화가 아니다. 다문화는 우리 문화로 들어오고 있다. 보다 다양하고 풍성한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중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다채롭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배타적으로 물리쳐 무채색 문화에 만족할 것인지. 선택은 자명해 보인다. 다문화가 우리 문화의 또 하나의 힘이 되도록 환영하여야 한다. 다문화사회가 글로벌환경을 이끌어 내도록 적극 안아주어야 한다. 21세기 다문화사회는 나로부터 열려갈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다문화는 우리 문화이므로.

2019-07-10

영양군 민선7기 1년 - 소통으로 답하고, 화합으로 도약하다

오도창 영양군수우리에게 1년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시간적으로는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공전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말하며 일수로는 365일이 걸린다. 학생들에게는 학년이 오르면서 선생님과 친구들이 바뀌는 일련의 학습 과정이고, 농민들에게는 토양을 가꾸고 씨뿌려 수확을 거두는 농사 주기이기도 하다.그러나, 행정에게 요구되는 1년은 지구의 공전과 같이 매년 반복되는 일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주민들은 행정기관을 향해 그동안 무엇을 해왔느냐고 끊임없이 묻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요구한다. 1년 전 오늘이 지금의 오늘과 같다면, 더 나은 내일은 커녕 현재를 유지하기도 힘든 것이 요즘 세상에서 받아들여지는 이치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우리 영양군의 지난 1년은 어떠했을까?1년 전 민선7기의 출발을 알리는 6.13 지방선거가 있었다. 결과를 보면 딱 절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영양군의 민심은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선거 때문만은 아니다.과거 영양댐과 영양풍력발전 등 대규모 토목사업들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찬반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해소되기는 커녕 특정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위력적인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다. 인구가 1만 8천명이 채 되지 않는 영양군이 둘로 나뉘어져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임기 시작부터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를 인식하고 더 큰 각오를 다졌다. 민선7기 군정 목표인 ‘변화의 시작! 행복영양’이라는 구호 속에는 지역의 판을 바꾸어 분열의 시대를 종식시키겠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었다.취임사에서 꺼낸 화두 또한 당연히 화합이었다. 과정의 투명성 확립을 통해 화합과 통합의 영양군을 만들 것을 군민 앞에서 선포했다. 이를 필두로 장터에서도, 체육대회에서도, 심지어 출향인을 만난 자리에서도 지역 화합을 위해 힘을 모아줄 것을 외치고 다녔고 지역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자 노력했다.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주요 대로변마다 펄럭이던 시위 현수막은 현저히 수가 줄었고 군청 앞에서 수시로 울려 퍼지던 시위대의 목소리 또한 잦아들었다. 대신 각종 간담회 자리나 군민사랑방까지 찾아오신 군민들과 함께, 군정 현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많아졌다.그동안 대규모 토목사업에 밀려 있던 군민의 삶을 보살피는 일에는 더욱 정성을 기울였다. 각종 주민불편사항을 신속히 해결해주는 생활민원 바로처리반이 지난 3월부터 운영을 시작하면서 매월 100여건 이상의 민원을 처리하고 있고. 지역 어르신들은 군에서 지원된 목욕상품권을 들고 목욕탕에서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소상공인들은 영양군의 보증으로 손쉽게 경영 자금을 마련하게 되었고, 에너지 복지를 실현할 LPG 배관망 공사, 낙후지역 생활 여건을 개선시켜 줄 도시재생사업과 새뜰마을 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작지만 군민들이 직접 체감할 수 있는 생활밀착형 사업들이 하나둘 추진되는 과정에서 지역의 갈등은 점차 줄어드는 대신 군민들의 포용력은 자연스럽게 넓어졌다.지난 5월 개최된 산나물 축제를 통해 인식의 변화를 명백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축제에서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축제장을 평소 가장 붐비는 지역인 전통시장 주변으로 이전하는 결단을 했다. 당연히 주차된 차량 수백여 대를 이동시켜야 했고 멀쩡한 도로를 차단해야 했다. 전에 없던 주민 설명회를 개최하면서 주민 협조를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당연히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주민들은 기꺼이 성공적인 축제를 위해 생활의 불편을 인내했고, 특히, 축제 기간 내내 축제의 주인으로 참여하면서 축제방문객은 전년 대비 160% 증가(16만명)했고 경제효과는 56억원에 달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이러한 결과는 군민과 행정이 현안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좋은 결과를 위해 힘을 모으는 소통과 협치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음을 반증하는 좋은 사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화합의 결과가 지역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군민들이 직접 몸으로 체감했다는 사실이다.이렇게 다사다난했던 민선7기의 1년은 그렇게 한 순간처럼 지나갔다.그런데 한 순간이라고 표현하고 나니 뭔가 아쉽고 찜찜한 부분이 있다. 시간적인 느낌은 한 순간일지 모르나 그 1년을 이루기 위해 함께 고민하고 노력했던 우리 군민들과 공직자의 열정은 결코 한 순간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2019년 지금의 대한민국에는 여야, 남녀, 노사, 세대, 지역, 이념, 빈부 등 다양한 갈등이 존재한다. 이것은 때로 갈등을 넘어 불신과 혐오를 낳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쉽게 승자가 될 수 없다. 반대로 얘기하면 화합이 경쟁력이 될 수 있는 세상이다.영양군은 내륙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지역이지만, 한 목소리를 내는 데는 더 없이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누군가 영양군의 자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단합된 힘’ 이것이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펼쳐질 또 다른 1년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2019-07-09

개의 서열관계와 공격성은 별개문제

최근에 개가 아이를 공격한 사건 때문에 SNS에서 관련 토론이 뜨겁다. 우선은 개가 인식하는 사회에서의 지배와 우위, 서열에 대한 이해가 우선 있어야 하고 개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이 어떠한지, 서로 어떻게 다른 개체들과 관계를 맺는지, 리더가 되는 개는 어떻게 자기를 따르는 개들을 대하는지, 서열관계가 낮은 개들은 어떻게 서열 높은 개들을 대하는지, 공격성의 근본이유를 알지 못하면 개와 사람이 사회에서 평화롭게 공존하지 못하고 개에 물리는 사건이 반복될 수 밖에 없다. 개는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과 이미 서열이 형성되어 있지만 서열과 공격성은 별개 문제이다.우선 전제가 되는 중요한 핵심은 콜로라도 대학교 명예교수인 마크 베코프가 이야기한 것처럼 개들이 가진 지배, 주종관계 개념은 사람들이 대부분 생각하는 고통을 주고 조종하고 벌하는 방식으로 적용되는 지배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개 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은 서열을 가지고 지배행동을 보이는 개체가 있는데 에드워드 윌슨에 의하면 동물은 세가지 유형의 서열형태를 가진다. 첫째는 폭정이라는 개념의 형태다. 폭정은 한 개체가 집단의 모든 개체를 지배하며, 지배당하는 개체끼리는 위계의 차이가 없다. 즉 AB=C=D=E 이다. A가 모든 다른 개체들보다 우위에 있지만 BCDE는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두 번째는 선형적 서열인데, ABCDE로 표시할 수 있고 BD, BE, CE 관계가 보존된다. 즉 모든 구성 개체들이 서열상 높고 낮음이 순서대로 명확하게 정해진다. 비선형적 서열은 다른 모두를 지배하는 하나의 개체가 반드시 존재하지 않을 수 있고, 개체들의 관계가 선형적 순서를 따르지 않는 경우이다. AB, BC, CD, DE 이면서 EA, DB일수도 있는 경우이다. 누가 가장높은 서열인지 가장낮은 서열인지 알 수 없고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서열이 존재한다. 동물들은 이처험 크게 세가지의 유형의 서열형태를 가지는데,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개는 세가지 유형중 두 번째인 선형적 서열을 이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개들이 모이면 특별히 평등하지 않고, 거의 항상 지위 구분이 엄격해서 서열이 사다리를 닮았다. 개는 A가 B보다 높고 B가 C보다 높으면 반드시 A가 C보다 서열이 높다. C가 A보다 서열이 높기도 하는 복잡한 비선형적인 서열관계는 관찰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많은 훈련사들이 사람과 개가 조화롭게 살아가려면 사람이 개보다 서열이 높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실 개들은 서열이 결정된 상태에서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기 때문에 함께 지내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어린 강아지들은 자신의 부견 모견보다 서열이 더 위에 있는 손위 형제자매 개들에게 복종하지만 부모개와 손위 형제자매 개들은 어린 강아지들을 먼저 먹인다. 이것이 개 서열관계를 한마디로 보여주는 핵심이다. 부모개는 제일 큰 자식보다 서열이 높기 때문에 먹을 것이 부족하면 큰 자식들의 먹는 양을 줄이고 어린새끼들을 먹인다. 즉 개 세계에서의 서열의 진정한 의미는 먹을 것을 배당할 때 드러난다. 또한 서열이 높은 개는 잠재적 짝과 실질적 짝, 영역, 쉬는곳, 잠자는 곳 등 다양한 자원들에 대한 접근을 지배하고 통제하기도 한다. 개 세계에 실제 존재하는 이런 주종관계 개념은 사람과 조화롭게 잘 살아가기 위한 올바른 관계형성을 위해 정확히 이해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가혹한 훈련방식을 정당화하고 원치 않는 행동에 벌을 줄 때 개의 서열관계 특성을 구실로 삼는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개들의 세계에서 지배가 가지는 의미를 오해하면 개를 학대하게 된다. 사람이 개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훈련법은 사실 과학적이지는 않다. 꼭 알아야 할 사실은 서열관계에서의 지배개념과 공격적인 개는 별개문제인데, 공격적인 개들은 우위에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친숙하지 않은 성인이나 아이를 무는 개는 겁이 많은데, 대부분 이런 개들은 강아지 시절의 부적절한 사회화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의 개는 아이를 위협을 느끼는 대상으로 인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강아지 시절부터 사소한 행동에도 칭찬과 어루만짐을 받고, 두려움과 소심함을 가지게 되는 개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사람과 개의 공존, 동물권에 기반한 존중들을 유지할 수 없기에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강아지때부터 어떻게 개와 공존할 수 있는지 알게하는 교육시스템의 구축과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인재양성이 시급해 보인다./서라벌대 반려동물연구소 소장(마사과 교수)

2019-07-09

삼성전자의 싸움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정부

김학주 한동대 교수‘Made in China 2025’는 중국이 첨단 기술에서 미국을 추격하기 위한 전략이지만 1차 목표는 삼성전자다. 일본 정부가 최근 반도체, 디스플레이 소재를 비롯한 IT 부품 및 장비의 한국 수출을 금지할 수 있다고 위협하지만 일본 기업들은 마케팅 중심이므로 구매업체를 기술로 위협할 수 있는 형편은 못 된다. 지금 삼성전자의 상대는 일본이 아니라 중국정부다.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얼마큼 비상식적인 지원을 통해 삼성전자를 괴롭힐지 우려된다.중국은 우선 반도체보다 디스플레이에 집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디스플레이는 미국과 직접 경쟁하지 않는다. 반도체의 경우 미국에 ‘마이크론’이라는 업체가 자리잡고 있지만 디스플레이는 통상마찰의 우려가 없다는 이야기다. 둘째, 화웨이, 샤오미, 오포 등 중국 스마트폰 업체들이 양적으로는 이미 삼성, 애플과 경쟁하는 수준으로 성장했으므로 이들에 대한 패널 납품 수요를 자체적으로 확보한 상태다. 셋째, 반도체는 미세화 기술이 넘기 어려운 진입장벽이지만 디스플레이의 대면적화 기술은 시행착오를 거쳐 해결할 수 있는 만큼 후발주자들이 쉽게 따라 잡을 수 있는 산업이기 때문이다.2018년부터 2022년까지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주목을 받고 있는 OLED 수요는 34%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생산능력은 중국의 집중투자로 인해 두 배로 늘어날 것이다. 자연이 공급과잉이 생길 수 밖에 없고, 수익성도 기대 이하일 것이다. 삼성SDI가 현재 플렉서블(flexible) OLED의 95%를 생산하지만 2022년경 점유율이 32%로 하락할 전망이다. 특히 중국정부의 민간기업에 대한 지원은 상상을 초월한다. 주 정부가 민간기업과 합작을 한다. 즉 중국정부가 삼성전자의 직접적인 경쟁 상대방이 된다는 것이다. 사업 초기 손실을 정부가 감내할 수 있고 다양한 보조금을 통해 현지 업체를 키울 수 있다. 중국 화웨이가 이미 미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은 마당에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과거 삼성전자가 정부와 경쟁했던 사례가 떠오른다. 삼성전자는 높은 생산성을 바탕으로 반도체 가격을 내리며 일본 엘피다를 압박했다. 결국 엘피다가 적자로 돌아서자 일본 정부가 일본 은행들을 불러 이야기했다. “일본의 기간산업인 반도체의 엘피다가 힘들어하고 있으니 지원 부탁드립니다”라고 요청하자 은행들은 말없이 돈을 놓고 갔다고 한다. 삼성전자가 엘피다와 싸운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와 싸운 셈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반도체 산업이 ‘지저분하다’고 느꼈는데 중국 정부는 더 지저분할 수 있다.최근 일본정부는 IT부품 및 소재의 수출대상에서 한국을 제외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일본은 물건을 사 주는 나라가 아니라 파는 나라다. 따라서 기술 이전에 관대하다. 이번에 제재한 품목들도 이미 한국에 합작사를 설립하여 기술 이전을 한 상태다. 그 동안 우리가 현지화를 서두르지 않았던 이유는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생산공정이 예민하여 갑작스런 소재 변경을 꺼렸기 때문이다. 일본이 정말 소재를 공급하지 않는다면 국산화가 빨라질 뿐이다. 그러나 단기적인 생산차질은 불가피하다. 기업 실적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생산공정이 예민한 만큼 소재를 대체하는데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생산량은 줄 수 있으나 판매단가가 올라서 부정적인 부분이 상쇄될 수 있다고 주장하나 잘못된 판단이다. 석유의 경우 수요가 비탄력적이라서 감산을 하면 가격이 오를 수 있으나 IT제품은 그렇지 않다. 정부가 역사와 외교를 분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튼 이렇게 디스플레이 생산능력이 늘어날 때는 소재나 장비 수요가 급증하게 되어 있다. OLED의 소재인 유기물질의 경우 미국의 유니버설 디스플레이(Universal Display)가 세계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2019-07-09

반일(反日) 감정

한국과 일본 국민 간의 나쁜 감정은 케케묵은 숙제처럼 오래된 일이다. 나라와 나라 간 국민적 나쁜 감정은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한 국가 안에서 지역감정이 심각한 대립을 보이는 것을 보면 국가 간 감정 대립은 그냥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일이다. 반일 감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에 있던 국가나 대립관계에 있던 국가 사이에 생겨난 현상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미국, 러시아 사람들에게도 이런 감정은 있다.우리나라 국민의 반일 감정은 주로 역사적 요인에 의해 해석된다. 임진왜란이나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왜구의 습격과 침탈로 인한 인명 및 재산상 피해, 36년의 일제 강점기 통치, 독도 영유권 주장, 역사교과서 왜곡 등 꽤 많은 분야에서 문제가 야기된다. 특히 일제 강점기 중 일본이 보인 한국인에 대한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 등 약탈적 식민지 정책들은 아직까지 일본에 대한 나쁜 감정으로 우리 국민에게 작용하고 있다. 쪽바리, 왜구, 왜놈 등 일본에 대한 멸시적 표현도 이런 연유로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국민여론 조사에서도 일본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주변국 중에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나라로 응답자의 60%가 일본을 꼽는다.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부른다.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 경제적이나 안보적으로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러나 오랜 반일 감정에 얽힌 국민적 정서 때문에 가깝게 느끼기엔 여전히 먼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일본의 보복성 무역 조치가 시작되면서 나라 안팎이 시끌하다. 정부의 대응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으나 반일을 둘러싼 대응책을 두고 갑론을박도 많이 나온다. 분명한 것은 불매운동과 같은 민간 차원의 대응으로는 양국민의 감정만 상하게 할 뿐 실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얼마나 냉정하고 지혜로운 묘방을 내놓느냐가 관건이다. 손자병법에 이르길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이라 했다. 국민들은 우리 정부의 대응만 주목할 뿐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7-09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기에, 그 꽃이 아름답고 그 열매 성하도다.”라는 용비어천가가 구가했던 조선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 시구가 담고 있는 깊은 통찰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다. 우리 경제의 전체 모습을 수풀이 무성한 삼림으로 비유해보면 숲속에서 생장하는 나무들 가운데 뿌리 깊은 나무는 과연 얼마나 될까. 1998년 외환위기를 겪을 당시 수백에서 수 천 퍼센트에 이르는 과도한 부채비율을 가지면서도 외형 확장에만 혈안이 되어 ‘대마불사’를 맹신하며 오만이 극에 달하였던 기업집단들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만큼 기업을 나무로 비유할 때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인 기술개발, 인재 육성, 재무건전성을 튼튼하게 하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고 외형적인 모습인 이파리에 해당하는 멋진 사옥을 건설하거나 손쉬운 광합성을 위해 가지를 쉽게 뻗기 위해 정관계와의 로비에만 신경을 쓰던 기업들은 외환위기라는 비바람에 손쉽게 뿌리째 뽑히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오늘 나라 경제 숲의 큰 나무인 대기업들 가운데 과연 가뭄에도 견디고, 태풍에도 끄떡없는 깊은 뿌리를 지닌 곳은 얼마나 될까.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다. 게다가 제조 대기업인 경우라면 더욱 많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기업의 우선 가치가 수익극대화이고 가장 좋은 달성 수단이 원가절감이기 때문이다. 직접 소재·부품을 생산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조달하는 것이 손쉽게 수익을 창출할 수 있으면 굳이 막대한 자금과 시간을 들여 개발할 유인이 없기 때문이다. 소재·부품을 중소기업들과 협업하여 직접 개발하면 나라경제인 숲이 매우 무성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자기만 햇볕을 쉽게 받고 손쉽게 물가를 차지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고용직 최고경영자들이라면 주주나 재벌일가에게 성과를 보여야만 연임도 가능할 것이기에 자신의 임기동안 굳이 장기적으로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자하여 핵심 소재부품을 개발, 생산하려는 프로젝트는 그 중요성을 알더라도 외면하고 당장의 성과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에 먼저 이익을 내는 방안들을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최근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핵심 소재 내지는 원자재 수출을 제한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 수십 년간 학계나 정부에서 수입원자재 다변화, 수입대체산업 육성, 소재부품 연구투자 강화 등을 부르짖었지만 큰 소용은 없었다. 점차 세계는 무한경쟁의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희토류, 석유, 식량 등은 국가차원에서 이미 국가안보수준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자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오랫동안 휘두르고 싶었던 칼을 이번에 한번 뽑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그동안 자사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인재육성이나 연구개발투자보다는 외적 디자인이나 주요 기능개선 등을 통한 매출 확대로 이익창출을 이끌었던 기업들이 뿌리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수출제한이 확대되기 시작한다면 어쩌면 앞으로 국내에서 폴더형 핸드폰을 구입하지 못하거나, 자동차 사이드미러를 수동으로 접게 될지도 모른다.물론 일본 기업도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영원히 수출제한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세계경제가 어려운 지금이라면 한국을 제외한 여타 시장에 대한 수출만으로도 충분히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번에 한번 휘두른 칼은 앞으로는 수시로 뽑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일본산 소재부품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최대한 조기에 낮추지 않는 한 한국 경제 숲에 뿌려지는 일본산 씨앗이나 비료가 언제든지 우리 나무의 뿌리를 고사시킬 수 있는 독약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2019-07-09

위대한 자연이 주는 ‘선물’

캐나다 로키산맥, 그 장엄함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미국 동부의 한 대학원에서 유학생들의 초대로 일주일 동안 강연과 세미나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며칠의 여유가 있어 귀국길에는 캐나다 로키산맥을 한 번 구경해 보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알프스를 본 적도, 히말라야를 본 적도 없습니다.네비게이션이 나오기 전입니다. 커다란 지도를 사서 출발하기 전에 도로를 충분히 숙지하고 떠나야 합니다. 느릿 느릿, 차창을 다 열고 캐나다의 하늘과 공기, 물소리를 즐기면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드라이브를 합니다. 얼마를 갔을까요? 밴프 국립공원까지 100마일 정도 남겨 놓은 어느 지점이었습니다. 커다란 고개 하나를 넘습니다.“아!”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내 평생에 처음 보는 거대한 산 하나가 눈 앞에 펼쳐집니다. 차에서 내려 숨막히는 자연의 위대함을 구석 구석 느껴보려 합니다. 디지털 카메라도 없었던 시절이라 가져간 니콘 필름 카메라로 여기 저기 사진을 찍습니다.숨이 막힌다, 눈부시다, 장엄하다, 압도적이다, 소름 돋는다, 무어라고 표현을 해야할지 알 길이 없습니다. 중학교 때 설악산으로 처음 수학여행을 가서 울산바위를 보았을 때의 감동의 천 배쯤 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밴프로 넘어가는 고개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난 그 장엄한 풍광, 압도적인 모습은 제 평생 처음 느껴본 자연의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순간을 맞이합니다.에드윈 마크햄은 말합니다. “그는 원을 그려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나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더 큰 원을 그리는 것이 지혜로운 관계의 비결입니다. 캐나다 로키의 그 산을 만났을 때, 아마도 제 마음의 원은 지름이 쑥 늘어났을 겁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위대함을 만날 때 그 위대함을 닮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큰 바위 얼굴을 매일 보고 자란 소년이 결국 스스로 큰 바위 얼굴이 되는 것처럼.자연과 마주할 때보다 더 위대한 만남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제대로 만나는 순간입니다. 삶의 정수를 제대로 마주하게 해 주는 지혜가 내 얼어붙은 삶에 도끼처럼 내리칠 때 느끼는 전율과 감동은 우리의 원을 백배, 천배로 크게 넓혀줍니다.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고전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들을 목소리 높여 외치는가 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09

버나드 쇼와 중학교 2학년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2019년도 보낸 날이 보내야 할 날을 앞질렀다. 자연은 요란하지 않게 짙은 녹음 속에서 2019년을 마무리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 준비는 다름 아닌 비움이다. 자연은 비움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다. 우유부단하지 않은 자연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뿌리까지 비우고 있다. 지금 자연이 보여주는 신록의 풍성함은 새로운 2020년을 맞이하는 자연의 자세이다. 분명 자연은 올해에 지난 10년을 정리하는 선 굵은 나이테를 그릴 것이다.신록의 자연과 달리 인간 사회는 온통 잿빛이다. 대표적인 모습이 이분법(二分法) 사회로 퇴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이다. 현 정부 들어 이분법이 더 공고해지고 있다. 양분화를 부추기는 사회답게 이 나라 사람들도 철저하게 둘로 나뉘어져 있다. 한쪽은 창을 들었고, 다른 한 쪽은 방패를 들었다. 기를 쓰고 무너뜨리려는 자들의 독기(毒氣)와 더 기를 쓰고 무조건 막으려는 자들의 살기(殺氣)가 이 나라 소통의 기운을 다 끊어버렸다. 모순(矛盾)도 이런 모순은 없다.그런데 정부는 삼척동자도 아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소통(疏通), 통합(統合) 등과 같은 말들을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무소불위 장군같다. 저돌적으로 무조건 밀어붙이고 보는 장군,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생각과 말만이 “무조건 맞다”고 하는 이상한 신념(信念)을 가지고 있다. 신념이 객관성을 잃으면 독단(獨斷)과 독선(獨善)이 되고, 이것마저도 넘어서면 속신(俗信)이 된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아 왔고, 또 지금 정치인들이나, 가까운 나라 정치 수장의 모습을 통해 보고 있다.다음은 니체의 말이다. “(무식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진실을 알 생각이 없다. 강한 신념이야말로 거짓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신념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다.”필자는 교사가 되기 전부터 잘못된 신념의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사의 잘못된 신념에 의한 평가와 판단은 학생은 물론 한 집안, 나아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사의 잘못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거나, 소중한 꿈을 접은 학생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무책임한 말인지 알지만 그래도 이 자리를 빌려 필자의 잘못된 신념 때문에 상처를 받은 학생들과 학부모님께 사죄의 말씀을 올린다.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해 더 노력할 것을 약속드린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오늘도 죠지 버나드 쇼의 유언을 필사(筆寫)한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나라 교육 관료들은 자신만의 정치 신념 감옥에 갇혀 ‘우물쭈물’을 넘어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것의 대표적인 모습이 정치 논리에 빠진 자사고 폐지와 자유학기(년)제 확산 등과 같은 교육 정책들이다. 전자는 이미 세간의 이슈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문제는 후자다. 자유학기(년)제! 이론적으로는 꽤 생각해볼만한 교육 정책이다. 그런데 우리 교육 현실을 대입해 보면 분명 재고(再考)되어야 할 교육 정책 중 하나이다.필자는 2020년 산자연중학교 전입학 전형을 위해 최근 몇 주 동안 정말 많은 학부모들과 상담을 하고 있다. 상담 중 80%가 중학교 2학년 학부모들이다. 학부모들의 하나같은 이야기는 학생들이 자유학기(년)제 다음 학년인 2학년의 완전 달라진 학교 분위기에 전혀 적응을 하지 못 한다는 것이었다. 미리 1학년 때 사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그나마 적응을 하지만, 정부만 믿고 자유학기(년)제의 취지에 따라 사교육을 멀리 한 자신들의 자녀들은 학교를 거부하고 있다고 울먹였다. 심지어 자유학기(년)제가 아니라 초등학교 7년이라고까지 말하는 학부모도 있었다. 필자는 올해도 올해지만 내년 중3과 중2가 걱정이다.곧 2020년이다. 우리 교육에 우물쭈물 할 시간이 없다.

2019-07-09

근대의 탄생을 알렸던 세 개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한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은 각국의 이해타산에 의한 계산기를 두드리기에 바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초유의 사태가 가져 온 충격적인 현실의 폐허 더미 속에서 인간들은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초인과 악당, 삶과 죽음, 자유와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며 ‘반성’과 ‘자책’의 시간을 가진다. 하지만 이 시간도 그리 깊고 길지 않았다. 승전국들이 두드린 계산기는 ‘패권’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들의 계산기를 의심하기보다는 결과치에 치중한 발빠른 각종 협정과 조약들이 체결되어 갔다. 이후 세계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냉전시대를 겪으며,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니었던 한국은 지금까지도 분단국가로 남아 전세계 뉴스의 중심에 등장하곤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반성이 충분하지 않았는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던졌던 수많은 질문과 철학적인 사고들이 깊지 않았기 때문이었던가. 혹은 인간이 가진 본성적인 악의 기운이 너무 강하여 반성과 질문이 그나마 지금의 평화로운(?) 상황을 지탱하고 있는 것인가.전지구적이지는 않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중심지였던 서유럽을 중심으로 ‘지나친 민족주의는 유럽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판단 하에 협력과 통합을 통한 ‘평화’를 구축하겠다는 시도가 일어난다.세계의 멸망이 아닌 유럽의 멸망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한 연설에서 “유럽도 UN과 같은 기구가 필요하다”고 언급함으로써 유럽 연합에 대한 최초의 언급을 하게 된다.1948년 헤이그 회의에서 약 800여명의 통합론자들이 본격적으로 유럽 통합의 구상을 시작하는데, 유럽의 경제, 사회,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통합까지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된다. 이후 1958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6개국이 모여 유럽경제공동체(ECC)를 설립하게 되고, 1967년 뜻을 공유하는 각종 기구들이 유럽공동체(EC)를 결성하게 된다. 가입국이 늘고 정치와 문화적인 통합이 성장하게 되면서 좀 더 견고한 공동체 설립의 희망이 커져갔고, 1991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의 타결과 1993년 발효로 경제공동체, 외교, 안보, 치안까지 하나로 묶는 유럽연합(EU)이 탄생하게 된다.… 유럽연합의 출범을 앞두고제작된 이 영화에서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감독의 의견은 ‘레드’의 마지막에집약된다.그래도 그 집약이 쉽게이해되는 것은 아니다.의미에 대한 여러 해석들 중에서 가장 지배적이고 근접한 것이‘사랑’이지만 이 역시모든 퍼즐을 완벽하게맞추지 못한다 …△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현대적 질문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평화’에 대한 열망과 반성의 토대 아래 결성된 유럽연합이 지금 ‘경제’라는 요인으로 흔들리고 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스폐인의 경제난과 영국의 브렉시트 모두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다시 돌아가서 우리는 폐허의 더미 속에서 던졌던 존재론적 질문보다 경제적인 질문을 먼저 던지고 깊게 사유해야만 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역사에 문화적·정치적·사회적·경제적 역사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의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키워드는 무엇인가. 인간의 잘못된 선택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지연장치로써의 정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선택되어져야할 것이다.1993년 유럽연합이 출범하기 직전에 만들어진 폴란드 출신 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의 ‘세가지 색 삼부작 : 블루, 화이트, 레드’는 프랑스 국기의 색깔이 상징하는 자유, 평등, 박애로 질문을 던진다.프랑스는 매년 7월이면 ‘프랑스 혁명 기념일’을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성대한 기념행사들이 열린다. 프랑스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이상과 전통을 이어 받았음을 선언하며, 전세계에 이 세 가지 이념을 전한 것을 확인하며 자랑스러워 한다. 200여 년 전에 일어나 프랑스 대혁명이 세계사에서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커다란 전환점이라는 막중한 위치를 가지기 때문이며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가진 나라에 대한 감격과 영광의 표현이기도 하다.전근대와 근대의 기점을 나누는 세계사적인 사건의 결과로 도출된 ‘자유·평등·박애’를 유럽통합을 앞 둔 시점에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는 ‘세 가지 색 삼부작’은 그리 주제를 표현하는 서사가 직접적이지 않다. 우선 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이 던지는 질문의 문항은 간명하지만 그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호락호락하지 않음은 영화의 줄거리는 간명하지만 그 안에 쉽게 해석되지 않는 수많은 은유들이 간단하게 연결되거나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 직접적이지 않고 에두른다. 이쯤이라고 생각했을 무렵에 한 발 더 들어가며 들어 온 길을 지워 버린다. 그리고 남는 것은 선명한 이미지 블루, 화이트, 레드와 세 명의 여주인공이다.먼저, 자유에 대한 영화 ‘블루’는 ‘기억’과 ‘관계‘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한적한 시골길을 가던 가족들은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줄리는 유명한 작곡가인 남편 파트리스와 다섯 살 난 딸 안나를 잃고 혼자 살아 남는다. 줄리를 둘러싸고 있던 가장 끈끈한 ‘관계’였던 가족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버리고, 떠나는 과정을 이행한다. 먼저 가족과 함께했던 공간인 집을 떠나고, 그 와중에 그들이 함께 공유했던 물건들을 버린다. ‘줄리 드 꾸시’라는 이름을 버리고 결혼 전의 이름인 ‘줄리 비용’으로 살아가지만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기억들과 고통스러운 사투를 벌인다. 유럽통합 기념곡을 만들던 남편의 악보까지 버리고 파리의 집까지 가져 온 유일한 물건인 샹들리에는 푸른색이다. 딸아이가 남긴 유품인 파란색 사탕을 마구 씹어먹거나 푸른 수영장으로 헤엄치며 잠기는 줄리의 모습을 담은 미장센들은 영화의 주제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과거의 기억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워지려는 과정에 몰랐던 사실(기억)과 또 다른 관계가 그녀의 도달하고자 하는 자유 속으로 파고든다.외로움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선택한 자유의 결정이 또 다른 요인들로 기억을 생산(재생산)하고 관계를 형성한다. 슬픔, 우울을 의미하는 ‘블루’는 영화 속에서 다양한 장면에 등장하고 삽입됨으로써 자유와 함께 내포한 의미 그대로 영상언어를 형성한다. 여기에 음악의 시각화를 웅장하고 멋지게 구현함으로써 영화는 블루라는 시각적 이미지와 음악이라는 청각적 이미지가 어울려 쉽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을 남긴다. 특히 악보를 펼쳐들고 손가락으로 짚어 나가는 장면에 울리는 음악은 강렬하다. 영화는 ‘자유란 기억과 관계의 어디에 위치하는가’를 묻는다.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고립되고, 당겨지면서 기억과 관계는 자유의 의미를 훑는다.△ 유럽통합 직전에 던진 질문, 아직도 유효하다.‘세 가지 색 삼부작’ 중에서 ‘평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화이트’는 에두르지 않고 정면으로 전개된다. 폴란드인 미용사 카롤은 프랑스인 도미니크와 결혼해서 프랑스에서 살지만 성적불화로 이혼당한다. 이혼으로 재산을 빼앗기고 방화범이란 누명까지 쓴 채 노숙을 하던 그는 길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폴란드인 미콜라이의 제안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가까스로 폴란드로 돌아 온다.프랑스에서 벌어졌던 법정 장면은 장소를 옮겨 폴란드에서 반복된다. 프랑스어와 폴란드어의 의사 소통과 정치·경제적으로 다른 길을 걸어왔던 두 나라의 차이가 형식을 통해 반복되는 것이다. ‘평등’은 ‘자유’와 대치되는 개념이다. 특히 완전한 자유를 이야기할 때 평등은 억압이라는, 자유와 반대되는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도덕적 자유, 정치적 자유 모두 평등과 타협(혹은 절충)한 용어일 뿐이다. 법정 장면의 형식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카롤과 도미니크의 결혼 장면도 반복된다. 그러나 그 반복은 동일한듯 하지만 다르다. 바로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평등의 차이(평등이라는 인식의 차이)와 층위를 말하는 것이다.구속, 괴롭힘, 억압과 자유, 죽음, 부활이 ‘평등’을 에워싸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구조가 선택의 문제에 있는가 인식의 문제에 있는가를 묻는다. ‘세 가지 색 삼부작’ 중에서 제법 쉽게 읽히는 영화가 ‘화이트’이지만 감독의 질문에 대한 답을 향해가는 순간 다른 연작들과 다르지 않은 난해함을 겪는다. 하지만 영화가 주는 시각적·청각적 영화언어는 유려하다.‘세 가지 색 : 레드’는 연작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레드는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 중에서 ‘박애’를 뜻하고 있으며, 영화 ‘세 가지 색 삼부작’의 총합을 어떻게 마무리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스위스 제네바 대학 학생이며 패션모델로 활동하는 발렌틴은 패션쇼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개를 치는 교통사고를 내게 된다. 개의 목에 달린 인식표를 보고 주인을 찾아가고, 개 주인은 은퇴한 법관이며 남의 집 전화를 도청하는 기벽이 있음을 알게 된다.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법정에 있을 때보다 세상 일이 더 잘 보여. 적어도 여기엔 진실이 있지”라고 자신의 기벽을 설명하는 은퇴한 판사. 법의 집행자였던 이의 탈법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그리고 일어나는 일련의 전개들이 도대체 ‘박애’와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연작 시리즈 중에서도 ‘레드’는 난해함의 강도가 강하다. 직접적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주제와 연관된 최소한의 장치를 쉽게 제공해주지 않는다. 다만 ‘자유’와 ‘평등’이 대치되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지만 ‘박애’ 안에서 포용될 수 있음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세 편의 영화는 법정이라는 장소에서 스치듯 서로 만난다. 그리고 유리병을 재활용하는 노인의 모습이 장소와 방향을 달리해 보여진다. 각각의 영화에서 특정한 기억들은 반복되고, 약간의 차이들을 가지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반복되는 지점이 있으며 결을 달리한다. 장소의 겹침과 특정 장면의 반복은 동시대성을 말한다.유럽연합의 출범을 앞두고 제작된 이 영화에서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감독의 의견은 ‘레드’의 마지막에 집약된다. 그래도 그 집약이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의미에 대한 여러 해석들 중에서 가장 지배적이고 근접한 것이 ‘사랑’이지만 이 역시 모든 퍼즐을 완벽하게 맞추지 못한다. 사람의 수만큼 많은 세 가지 정신의 층위를 유럽통합이라는 하나의 거대조직 안에서 얼만큼 녹여낼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1993년 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은 먼저 던져 보았다. 2019년, 그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며 해답은 요원하다./김규형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위에 소개된 세 편의 영화는 네이버영화와 구글플레이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2019-07-08

신숙주의 유비무환(有備無患) 국가관

강희룡 서예가조선시대 외교를 흔히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 한다. 사대는 대중국 외교를 말하고 교린은 중국을 제외한 주변 여러 나라와의 외교를 가리키지만 주로 일본과의 외교를 말한다. 대일본 외교는 대중국에 비해 첫 번째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그 중요성은 컸다. 대일본 외교에서 조선후기까지 기본지침서가 된 책이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이다. 이 ‘해동제국기서’에 ‘신이 듣건대, 이적(夷狄)을 대하는 방법은 외정(外征)에 있지 않고 내치(內治)에 있으며, 변어(邊禦)에 있지 않고 조정에 있으며, 전쟁하는 데 있지 않고 기강을 바로잡는 데 있다.’ 라는 대목이 있다. 즉 국가의 외부 적을 대하는 방법은 외정에 있지 않고 내치에 있다는 것이다.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 되던 해, 선조시대는 내치에서는 실질을 좇아 현실에 변용하기보다는 과거를 인습하는 풍조로 현실 대응의 한계가 드러났다. 조정은 동인과 서인의 당파로 사분오열돼 권력 다툼의 장이 됐고, 인재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일본 통신사로 갔다 1591년 3월 귀국한 서인출신 정사 황윤길은 풍신수길에 대해 지략가로 보고 전쟁의 위험을 보고한 반면, 동인출신 부사 김성일은 쥐에 비유하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했다. 이런 상반된 보고는 당시 동·서인으로 갈린 정치상황에서 객관적인 보고가 가능했을지 여부도 불확실한 것이었다. 조선은 1555년에 일어난 을묘왜변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꾸준히 대비책을 마련해오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이어진 평화로 대규모 전쟁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고, 일본의 군대규모를 과소평가했다.성벽보수와 축성의 토목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반발과 신중론을 펼치던 신하들의 반대로 국방은 큰 차질을 빚고 있었다. ‘징비록’에 임진왜란 발발 직전 신립을 만난 류성룡은 ‘태평세월이 너무 길었소, 그래서 병사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급변이 일어날 때 그에 항거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요.’라는 기록을 남겼다. 선조는 김성일의 보고를 따랐고, 류성룡의 전쟁대비책에 대해 한정된 국방 예산을 이유로 수군까지 없애자 일본 침략에 대한 마지막 보루까지 무너졌다. 임금이 전쟁위협을 애써 외면하며 일상의 삶을 유지하려 했으나 조총으로 무장한 20여 만명의 왜적이 전면전을 일으키자 조선은 순식간에 초토화되고 백성들은 도륙당했다.조정에서 급히 동원령을 내렸으나 이미 군역과 조세제도의 부패와 난맥상으로 국방시스템은 붕괴되어 있었고 전쟁 대비에 적극적이었던 서인세력마저 조정에서 축출되면서 전쟁위험은 더욱 커졌다. 임금과 조정을 장악한 동인세력은 막연한 낙관론에 기대어 근본적인 대책에 미온적이었다. 항전할 의사가 없는 선조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처음부터 요동으로의 망명을 목적에 두고 정치적 술수를 발휘하여 신하들의 반대에도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파천하여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신했으나, 망명은 명나라로부터 거부당했다. 이 무렵 육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해상권을 이순신이 장악하며 전세가 서서히 역전되자 선조는 의병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나간 김성일은 ‘만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며 병란 중에 덮친 전염병을 구제하다가 병에 전염되어 56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15년 후 백성을 버린 임금도 치세를 마감했다. 조선사에서 가장 큰 외세와의 전쟁인 임진왜란이라는 7년 전쟁은 큰 시련을 예고하며 시작됐고 끝났다. 이 역사적인 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군경의 경계망을 뚫고 동해 삼척항을 통해 귀순한 ‘북한 목선 사태’는 군의 해상경계작전에서 실패했다. 투철한 군 정신에는 ‘공은 부하에게, 책임은 나에게’란 말이 있다. 이 구멍 뚫린 경계실패를 놓고 책임져야 할 국방장관의 어정쩡한 태도는 ‘공은 나에게, 책임은 부하에게’로 해석된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초병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맥아더의 명언이 떠오른다. 400년 전 조선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클로즈업되는 것이 나만의 기우이길 바랄뿐이다.

2019-07-08

어린이를 위한 성교육

이수원계명대 교수·유아교육과어릴 적 필자가 병원놀이를 할 때 주로 맡던 역할은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였다. 돌이켜 보면 필자가 성장하던 지역은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곳이었기 때문에 의사 역할을 하는 남아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잔소리하고 놀이 상황을 이끌어 나가면서도 결코 의사 역할을 맡지 않고 간호사 역할을 했던 것 같다.성 고정관념에 따라 어떤 장난감으로 어떤 놀이를 할 것인지를 선택한다. 성 고정관념은 만 2세부터 부분적으로 나타나며 만 4세 이후에 정점에 달한다. 때문에 아이가 걸음마를 하는 순간부터 유연한 성역할 관념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남아가 주로 사용하는 놀잇감과 여아가 주로 사용하는 놀잇감을 함께 제공하여 성별에 의해 놀이가 구별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유연한 성역할 관념을 지원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남아에게는 독립성, 성취, 경쟁을 기대하고 여아에게는 나눔과 배려, 순응을 기대하는 부모의 태도도 아이에게 성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한편, 취학전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성별에 따라 신체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호기심을 갖는다. 대부분의 경우, 또래 이성의 신체가 자신의 신체와 다르기 때문에 갖는 단순한 호기심이다. 하지만 아이가 초등학교 재학 중인 형으로부터 이성 또래를 성적으로 괴롭히는 방법이나 음란한 이야기를 배운 경우 유치원에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동안 화장실에서 남아가 여아를 성적으로 놀리는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 성 교육이 학교나 유치원에서만 할 수 없고 학부모의 협조가 필요하여 남아의 성적인 놀림을 학부모에게 알렸더니 여아의 학부모는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지만 남아의 학부모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회에서 성 피해자는 여성만이 아니며, 성별을 넘어서서 누구도 성 범죄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남아든 여아든 모두 성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어린이를 위한 성 교육 방향을 두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성 교육의 핵심은 생명의 소중함이다. 생식기를 함부로 남에게 보이거나 만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생식기는 아기를 출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잉태하는 기능이 있는 만큼 생식기를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이에게 전달할 성교육의 핵심 메시지이다. 둘째, 성 교육의 내용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무엇이며 어떻게 도움을 구하는가이다. 아이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여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모를 수도 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껴도 어떻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를 모를 수도 있다. 때문에 낯선 사람뿐만 아니라 친척이나 친구가 내 몸의 일부를 보여 달라는 요구는 잘못된 것이며 이 때 단호하게 “안돼!”라고 거절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곧바로 가까운 경찰서나 담임교사, 부모에게 이 일을 알리도록 지도하자. 내가 베푸는 호의나 도움을 상대가 원치 않을 때에는 더 이상 호의도 도움도 아니다. 성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원치 않는 성적인 놀림을 멈춰야 하며 상대가 멈출 수 있도록 단호하게 말하는 것 또한 익힐 필요가 있다. 아이가 성에 호기심을 가질 때 아이를 꾸짖거나 수치심을 주기 보다는 궁금증이나 고민을 표현할 수 있도록 수용적인 분위기가 필요하다. “나 어떻게 태어났어?”라는 아이의 질문에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단다.”라는 대답은 성 문제를 덮고 감추는 일일 것이다. 대신, 있는 그대로 대화할 것을 권한다. 아이가 어리다면 출생 과정을 단순하게 설명하며 아이가 성장할수록 출생과 관련된 과학 정보를 첨언할 수 있다. 평소 부모가 아이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 아이가 성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려움 없이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때 성별을 넘어서서 존엄한 인격체로 보기를 연습한다면 아이 세대의 사회는 지금보다 더 건전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9-07-08

마음(heart)을 다 하는 일

다산은 소년에게 대답합니다. “마음을 다 하는데 있다.” 삼근계(三勤械)로 널리 알려진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가슴에 담은 소년은 부지런히 노력해 학문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황상. 다산이 가장 아낀 제자입니다.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어떻게 동기를 부여할 것인가에 대해 깊고 넓은 성찰과 연구가 끊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제대로 동기를 부여 받아 마음을 다하는 상태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다산의 시 애절양(哀絶陽)에 그 힌트가 숨어 있습니다.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 길게 우는 소리 /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중략)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 부자집들 일 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 이네들 한 톨 쌀 한 치 베 내다 바치는 일 없네 /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읊노라.”관가의 수탈이 극에 달해 죽은 시아버지에게서 세금을 뜯어내는 백골징포, 입가에 젖이 마르지 않은 갓난 아기도 장정으로 취급해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의 실상을 고발하는 시입니다. “이것은 1803년 강진에 있으면서 지은 시이다. 갈대밭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만에 군적에 등록되고 이정이 소를 빼앗아가니 그 사람이 칼을 뽑아 생식기를 스스로 베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 하였다. 그 아내가 생식기를 관가에 가지고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울며 하소연했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시대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끌어안을 때 터져 나오는 비통함의 눈물이 심장을 적실 때 마음을 다하는 일은 가능한 것입니다. 마음(heart)을 다하는 일은 하늘의 천명을 깨달았을 때, 내면에 천둥처럼 울리는 부름을 듣게 되었을 때 싹트기 시작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바꾸지 않을 진짜 나다운 삶을 마주했을 때 불붙어 어찌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다하는 일은 순간적인 호기심에 의해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는 얄팍한 동기부여로부터 움직여지는 삶이 아닙니다. 집어등의 환한 불빛처럼,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여기저기 화려하게 반짝이는 빛에 휘둘리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비통함’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다산의 애절양 그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고 세상을 응시할 때 비로소 내 안에 불붙는 마음입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08

비정규직의 중규직화

최근 공공부문(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사상 처음으로 서울 광화문에서 대규모 시위에 나섬에 따라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정책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공공부문 노동자 중에는 교육기관부터 자치단체, 공공기관, 지방공기업 등에서 일을 하지만 반쪽 짜리 정규직이란 뜻에서 이른바 ‘중규직’으로 불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일자리 질보다 실적 달성 위주로 추진되면서 임금과 신분차별이 여전한 데 대해 노동자들의 분노가 시위로 표출되고 있다는 분석이다.문재인 정부는 출범직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를 목표로 2020년까지 공공부문 비정규직 20만5천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달 말 기준 18만여 명이 정규직으로 전환결정됐고, 이중 14만여 명이 실제 전환작업을 마쳤다. 하지만 전체 공공부문 비정규직 40여 만명 중 절반이상이 정규직 전환대상에 빠졌다. 일례로 학교 비정규직의 경우 기간제교사, 영어회화전문강사 등은 아예 정규직 전환대상에서 배제됐다. 또 정부가 제시한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에 공기업 등은 파견·용역 근로자 정규직 전환시 직접 고용 혹은 자회사 설립에 따른 간접고용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화근이 되고 있다. 조직규모·업무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실상 직접고용 대신 자회사를 선호하는 게 현실이니 이 역시 중규직의 양산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정부가 약속한 정규직으로 실제 전환했지만 정규직과 처우가 다른 점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만을 샀다. 정부는 무기계약직이나 자회사 소속으로 노동조건이 일반적인 정규직에 비해 다소 부족하지만 예산이나 재원의 한정속에 일단 고용안정은 보장됐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정부의 이같은 안이한 태도가 일선 기관에는 비정규직을 ‘무늬만 정규직화’로 해도 괜찮다는 시그널로 받아들여져 비정규직의 중규직화가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정부의 비정규직 전환정책에 대한 면밀한 재검토와 보완책이 필요한 시점이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7-08

미·중 무역전쟁의 국제정치적 함의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국제정치학자의 시각에서 볼 때 미중 무역전쟁(trade war)은 단순한 관세문제가 아니라 세계정치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강대국 간 패권전쟁(hegemonic war)의 일환이다. G2의 무역전쟁은 오직 경제논리만으로는 해석될 수 없는 다양한 요인들이 개입하고 있다. 패권전쟁에서 패권국의 지위를 받치고 있는 것은 경제력이고, 패권의 승부를 가리는 것은 정치력과 군사력인데, 미중 무역전쟁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기술 굴기’를 통해 2050년까지 미국을 추월하여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즉 ‘중국몽(中國夢)’을 실현하고자 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의 기술 굴기는 단순히 첨단산업에 대한 기술혁신이 아니라 자신과의 패권경쟁의 일환으로 인식된다. 미국은 2015년 중국의 리커창 총리가 발표한 ‘중국제조 2025’는 단순히 2025년까지 제조업 강국이 되겠다는 산업정책 슬로건이 아니라 경제력을 패권국 부상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는 전략이라고 본다.최근 미국의 펜스(M. Pence) 부통령이 “중국이 정부차원에서 미국 안에 영향력을 심어 중국 이익을 도모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그리고 선전수단을 총동원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도 바로 그러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미중 무역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중국의 최대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華爲)’의 경우 미국은 “신뢰할 수 없는 공급자를 선택하면 장기적인 리스크가 크며, 안보 면에서는 사용자 정보가 수집되어 중국에 이용될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에게 반(反)화웨이 전선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해리스(Harry B. Harris) 주한 미국대사는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고 있는 LG유플러스를 콕 집어서 직접적으로 안보위협을 거론하였다.반면에 중국도 “미국이 바라니까 동참할 게 아니라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해야 한다”면서 반화웨이 전선에 동참할 경우 한국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이처럼 미중 무역전쟁은 단순히 경제적 요인만이 아니라 정치적·안보적 요인들도 개입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자의 동맹국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패권전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패권전쟁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양국의 경제성장과 교역에 수반하는 갈등의 부침과정을 겪으면서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미중 무역전쟁의 와중에 샌드위치가 되어 있는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중 패권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해 원칙을 세우고 일관성 있는 외교 전략을 수립, 추진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양 강대국이 서로 자기편에 서라는 압력과 협박이 격화된다면 한국의 전략적 유연성은 축소되어 더 이상 ‘줄타기외교’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따라서 패권전쟁의 다양한 상황전개에 따라 그때마다 임시방편적으로 대처할 것이 아니라 국익의 관점에서 원칙 있는 외교를 모색해야 한다. 미중 무역전쟁에서 안보위협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한미동맹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미국에 협조하고,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순수한 경제적 거래에 대해서는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이러한 원칙 있는 대응전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지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미중 전략경쟁을 둘러싸고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사이에 분열된 국론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힘의 열세에 있는 한국이 강대국들의 패권전쟁에 대처하는 어려운 전략적 선택이므로 더욱 더 국민적 중지를 모아야 한다. 강자에 대항하는 약자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2019-07-08

식견(食犬) 문화

여름철이면 보신용으로 각광받았던 보신탕 먹기가 시들하다. 보신탕은 원래 개고기를 넣어 끓였다하여 개장국으로 불렸으나 혐오식품으로 눈총을 받기 시작하자 보신, 보양, 영양탕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 개고기를 파는 보신탕집은 이제 어림잡아 봐도 절반 이상은 없어졌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개고기를 찾는 사람이 줄어든 게 가장 큰 이유다. 물론 반려견 1천만 마리 시대에 역행하는 음식문화란 점에서 식견문화의 퇴조는 예견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보신탕은 조선시대 평민들이 즐겨 먹던 고기였다고 한다. 먹거리가 풍부하지 못했던 시절 서민이 몸을 보신하기 위해 개고기로 요리한 개장국은 보양 음식으로서는 최고였다. 특히 체력 소모가 많았던 여름철이면 개고기를 잡아먹는 풍속이 있었다. 삼복날 보신탕집을 찾아가는 것은 이런 풍속에서 유래한 것이다.한자어로 개는 두 가지가 있다. 견(犬)과 구(狗)다. 견은 개의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다. 구는 글자 왼편에 있는 개사슴록 변에 (句)라는 발음이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다. 같은 개를 뜻하지만 쓰임새는 많이 다르다. 견은 긍정적일 때 사용된다. 충견(忠犬), 애완견(愛玩犬) 그리고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미의 견마지로(犬馬之勞) 등에서 알 수 있다. 반면에 구는 주구(走狗)와 ‘양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양두구육(羊頭狗肉), ‘교활한 토끼를 잡고나면 충실했던 사냥개가 쓸모없게 돼 잡아 먹는다’는 뜻의 토사구팽(兎死狗烹) 등에 사용된다. 특히 먹는다는 말을 할 때는 구탕이나 양두구육처럼 구가 들어간다.오는 12일은 초복(初伏) 날이다. 1년 중 가장 더운 시기가 시작된다는 날이다. 우리의 조상은 삼복에는 복달임이라 하여 이 날은 몸을 보하는 음식을 먹고 시원한 곳을 찾아가 더위를 이겨내곤 했다고 한다. 복날의 복(伏)자는 사람이 개 옆에 있는 모양을 형상화하고 있다. 더운 날에는 개처럼 엎드려 더위를 피하라는 뜻인지 알 수 없으나 복날과 개는 상관관계가 꽤 깊어 보인다. 그러나 개고기를 먹는 식견(食犬) 문화도 이젠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든다. 시대의 흐름은 막을 수 없는가 보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7-07

‘기해왜란(己亥倭亂)’의 이면

안재휘 논설위원일본이 벼르던 대로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실행에 옮겼다. 이른바 우리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국가 차원의 ‘경제보복’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의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와 TV, 스마트폰 등에 사용되는 3개 아킬레스건 같은 품목을 걸었다. 일본의 조치를 놓고 이 나라는 또 진영별로 쫙 갈려서 볼썽사납게 맞서는 중이다.정부·여당과 진보 쪽의 용감무쌍한 견해는 언제나 그렇듯 이념과 ‘명분론’이 앞선다. 강제징용 배상판결은 어디까지나 사법부의 영역이기 때문에 3권분립을 지키고 있는 나라에서 행정부나 정치권의 소관이 아니라는 논리부터 편다. 일본 아사히신문과 도쿄신문도 자국 정부의 조치를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판했다고 알려준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등도 한결같이 일본이 부당하다고 평가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일본의 속 좁은 조치는 부메랑이 될 것이기 때문에 전쟁을 오래 끌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낙관론까지 읊어댄다.그러나 다수의 경제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한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의 경우 일본의 소재 공급이 끊겨도 4개월은 버틸 수 있지만, 그 이상 끌면 우리 기업뿐 아니라 전 세계 공급망에 큰 피해가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벌써 자동차 및 화학 업계까지 긴장하고 있는 판이다.보수를 중심으로 한 야권은 문재인 정부의 무대응 무대책을 물어뜯는 일에만 여념이 없다. 자유한국당은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대한 정부 대응을 ‘외교 참사’로 규정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총체적 국정 실패에 대해 국민께 사죄하라”고 부르댄다. 이미 불이 붙었는데, 불 끄려고 대드는 사람이 아무도 안 보이는 한심한 꼴이다.문재인 정권 들어서 악화 일로를 걸어온 한일관계의 이면에는 어떤 요소들이 작용했을까. 그 시발점은 쇼 정치와 포퓰리즘을 탐닉하는 이 정권의 정치전략에서 비롯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선 지난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협상하여 최종적 종결을 약속한 ‘한일일본군위안부 합의’를 뒤집어엎어 지지층 결집에 활용했다.집권세력은 지난 1965년 6월 22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체결한 ‘한일국교정상화 조약 (한일기본조약)’까지 선동의 먹잇감으로 삼았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한일기본조약을 뒤집어엎어 강제징용에 대해 일본 기업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판결을 존중하며, 행정부나 입법부도 이 판결에 승복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취했다.한일관계에 있어서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는 말보다 더 적나라한 표현은 없다. 일본은 역사적으로는 가까워지기가 어렵지만, 경제적으로는 밀접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이웃임에 틀림이 없다. 상당 기간 우리 정치인들이 인기영합 목적으로 일본의 귀싸대기를 때려도 그러구러 경제교류가 끊어지지 않았던 까닭은 분명했다. 이번 경제보복 사태는 일본이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는 신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전후 피폐한 이 나라 재건을 위해서는 일본과 화해해 도움을 받는 길뿐이었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고,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한없이 꼬여가는 위안부 문제를 서둘러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 결과물이 ‘한일협정’이고 ‘한일일본군위안부 합의’였다.임진왜란 직전 일본을 다녀온 뒤 서로 딴소리로 팔도강산을 전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파당정치꾼 황윤길과 김성일의 후예들이 지금 이 나라 안에 수두룩하다. 정치적 의도로 외교합의를 뒤집어엎었으면 상황을 반전시킬 책임도 확실히 져야 한다. 한일 정상외교밖에 돌파구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진짜 능력을 보고 싶다. 전투에서 이기더라도 전쟁에서 지기 십상인 이 게임은 위험하다. ‘기해왜란(己亥倭亂)’을 각오한 사람들의 비책은 뭔가.

2019-07-07

비경쟁 독서교육

김현욱 시인독서 교육의 목표는 평생 독자를 기르는 것이다. 한 학기 한 권 읽기의 목표도 학생들이 독서를 즐기는 평생 독자로 자라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독서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평생 독자를 기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짐작하게 된다. 초등 저학년은 문턱이 닳도록 도서관을 드나들지만, 고학년이 되면 발길은 뚝 끊긴다. 중·고등학교를 거쳐 성인이 되면 독서율은 급격하게 감소한다. 입시 지옥을 거치며 책은 거들떠보기도 싫어지는 것이다.2018년 기준, 세계 독서율 1위인 핀란드의 대표적인 독서교육은 자녀가 어릴 때부터 부모가 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교사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다. 공공 도서관에는 연령별, 주제별 다양한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이 쉴 새 없이 열린다. 이는 핀란드가 독서와 독서 동기를 촉진하는 내재적 동기 부여를 성인과 아이들에게 잘하고 있다는 뜻이다.캠번은 언어 학습의 조건 중에 학생들을 독서에 참여시키는 필수 요소로 ‘몰입’과 ‘시범’을 들었다. ‘기대, 책임, 사용, 유사성, 반응’도 간접 조건에 속한다.이는 ‘보상’, ‘경쟁’, ‘효용’ 등과 같은 외적 동기 부여가 아니라 내재적 동기이기 때문에 훨씬 더 효과적이고 지속적이다. ‘몰입’, ‘시범’ 같은 내재적 동기 부여는 독서에 대한 학생들의 긍정적인 태도를 고양시킨다. 무엇보다 독서교육의 궁극적인 목표인 ‘평생 독자’ 양성에 가장 효과적이다.안타깝게도 수많은 한국의 교사들은 새 학년이 되면 어김없이 교실 환경판에 독서오름길이나 독서인증제, 독서사다리 같은 ‘경쟁’과 ‘보상’의 외적 동기를 이용한다. 독서 지도를 위해 외적 동기인 ‘보상’, 다른 학생과의 ‘경쟁’, 독서의 ‘효용성’을 강조하는 것이다.굿과 브로피(Good, Brophy·1987)는 “보상은 수행의 질보다는 노력의 수준을 자극한 데 더욱 효과적”이라며, “보상은 매력적이거나 흥미로운 과업보다는 지루하거나 불쾌한 작업에 더 사용된다”고 지적했다.지루하거나 불쾌한 작업에 효과적인 것이 바로 보상이다. 아울러, ‘보상’은 학생들의 개인차를 고려해야 한다.‘경쟁’은 학교에서 널리, 오랫동안, 강력하게 쓰였다. 경쟁 요소를 도입한 독서 프로그램, 이를테면, 독서 골든벨, 독서 토론대회 같은 프로그램은 ‘평생 독자’를 기르려는 독서교육의 목표와는 방향이 다르다. 보여주기 행사, 보도 자료용 행사로 남을 가능성이 많고 사실 그래왔다. 경쟁은 반드시 승자와 패자를 만든다. 입시 경쟁으로 학교가 지옥이라는 학생들에게 독서마저도 경쟁하게 만드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고 비인간적인 짓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는 학교 안팎에서 비경쟁 독서교육이 회자되고 있다.‘보상’, ‘경쟁’보다는 책 읽는 교실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독서 동기를 높이는 첫 걸음이다. 교사는 인내심을 가지고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교실 분위기 조성에 힘써야 한다.핀란드의 독서교육은 교육부나 독서단체에서 주도하지 않는다. 핀란드의 부모는 자녀가 어릴 때부터 불문율처럼 책을 읽어주고 책과 가까이 지내도록 배려한다. 교사는 교실에서 활발하게 책을 읽어주고 편안하게 책을 읽을 시간과 환경을 제공한다. 공공 도서관은 부모와 아이들이 다양한 독서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지원한다.올 초 OO 공공도서관에서 모집한 저학년 독서회(책 읽어주기 프로그램) 모집 정원은 15명이었다. 인터넷 접수 10초 만에 15명 접수가 완료됐다. 대기자가 속출했고 인터넷이 다운됐다. 그만큼 독서프로그램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뜻이다. 일회성, 보여주기 식 행사가 아닌 학부모와 아이들이 상호 소통하는 유기적인 독서 프로그램이 더 많아져야 한다. 학교 도서관은 매년 가을 무렵에 독서행사(독서주간)를 연다. 17년 동안 봐 왔지만, 시기나 내용이 천편일률이다. 공공도서관이든 학교 도서관이든 이제 변해야 할 때다.

2019-07-07

연해주 항일 독립운동 유적 보호가 절실하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며 상해 임정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연해주의 임시 정부인 대한국민의회는 상해임정보다 한 달 앞서 설립되었다. 그래서 올해는 연해주 항일 운동 발자취를 찾는 사람도 많다. 독립운동 정신계승 사업회 소속인 우리 일행은 3박4일 일정으로 지난달 28일 연해주로 학술 탐방을 떠났다. 대구 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3시간도 안되어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했다.우리나라는 러시아 입국 비자가 면제되었고 입국신고도 자동으로 처리되었다. 내가 자주 다녔던 10년 전보다 입국 수속이 훨씬 간편해진 것이다. 당시 우리는 2시간 동안 짐을 조사받는 등 입국수속이 까다로웠다. 우리의 국력이 향상된 탓인지 공항에서부터 기분이 매우 좋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시가지 모습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한국에서 수입된 중고차가 그대로 한글 표시를 지우지 않고 다녔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밀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다. 해삼이 많아 해삼위(海蔘威)라고 불리운다. 이곳 일대는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으며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대를 이어 살아왔던 낯설지 않는 땅이다. 우리나라 함경도와 두만강을 사이에 둔 이 지역은 선조들이 내왕이 잦았던 지역이다. 한말 1863년 함경도에서 13가구가 포시에트 부근 연추(크라스키노)에 처음으로 이주하였다. 연해주는 1937년 스탈린이 강제 이주시키기 전에는 고려인 17만 명이 거주했던 곳이다. 이곳은 일제를 피해 이주한 조선인들이 다시 멀리 중앙아시아로 유배된 비운의 원한의 땅이다. 아직 중앙아시아 일대에 약 50만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우리 팀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에서 항일 운동 관련 학술대회를 가졌다.뒤이어 우리는 선조들의 항일 운동의 현장을 찾아 나섰다. 조선인들 최초의 거주지 지신허(知新墟)에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거쳐 우수리스크까지 둘러보았다. 불행히도 연해주 어디를 가나 고려인들의 삶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유물과 유적은 온데간데없고 근년에 마련된 기념비와 표지판 몇 개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디를 가나 우리말을 하는 고려인 동포를 찾아보기 어렵고 그들의 생활은 대체로 어려웠다. 민족의 해방은 남북 분단으로 이어지고,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은 우리와 국교를 단절했다.소연방이 해체된 후 1990년 한국과 러시아는 정식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번 학술 탐방은 연해주에서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과제를 안겨주었다. 무엇보다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조들의 유물 유적부터 보존하는 일이다. 특히 연해주에는 일생을 항일과 독립 투쟁을 하다 순국하신 분들이 의외로 많다. 유인석, 이상설, 최재형, 안중근, 문창범, 이동휘, 장지연, 신채호 등이 그들이다.이 밖에도 김알렉산드라 등 사회주의 항일 혁명운동가들도 수 없이 많다. 다행히 안중근 의사가 결의한 단지 동맹비가 건립되어 있다. 조국이 해방되지 않으면 이곳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긴 이상설 지사의 유허비도 이곳 사이펀 강가를 지키고 있다. 최재형 선생의 생가도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어 무척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항일 애국지사들의 족적은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우선 상해 임정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선생의 생가부터 보존하여야 한다. 신한촌의 그의 생가는 이미 슈퍼마켓이 되어 표지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조선인 최초의 이주마을인 지신허는 러시아 군인들이 길을 막아 가수 서태지가 세운 마을 표지석도 볼 수 없었다. 임시 정부의 모태가 된 전로한민족 중앙회 총회가 열린 장소는 러시아인들의 전문학교로 변해 버렸다. 신한촌의 한민학교 역시 러시아인의 학교로 변신되었다.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는 그 내용이 빈약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러시아 항일운동의 발자취를 하루 빨리 발굴·보존토록 해야 한다. 그것이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이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교훈이다.

2019-07-07

세가지 문제를 뛰어 넘은 소년

위대한 지혜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왕에게 미움을 받아 긴 유배 생활을 떠납니다.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촌 동네에 틀어박혀 가끔씩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18년 동안 수십명 제자를 길러내지요. 그런데 그가 길러내는 제자들마다 마지막에는 스승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버립니다.왜냐구요? 깐깐한 이 스승은 제자들이 쉽게 버텨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출세를 위해 제자들의 뒤를 돌봐주는 일도 없습니다. 심지어 창을 들고 스승의 방에 뛰어들어 욕하고 헐뜯으며 등을 돌린 제자도 있었습니다.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산 정약용 이야기입니다.유배지 전남 강진의 바닷가 마을에 정착, 다산이 작은 방 하나를 얻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까까머리 15세 소년 하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산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저 같은 아이도 과연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까요?” “네가 어때서 그런 말을 하느냐?”소년은 말합니다. “선생님. 저에게는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머리가 둔한 것이요, 둘째는 앞 뒤가 꽉 막힌 것이며, 셋째는 분별력이 없어 답답한 것입니다. 이런 제가 과연 문사를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다산은 답합니다. “배움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보통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는데, 들어보니 너에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는 외우는데 민첩한 것이요, 둘째는 글짓기에 날렵한 것이요, 셋째는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하지만, 외우는데 민첩한 아이들은 금세 공부가 쉬워 보여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글을 날렵하게 짓는 아이들은 자기 재주만 믿고 글이 가벼이 들 떠 허황한 데로 흐르지. 이해력이 빠른 아이들은 투철하게 알지 못한 고로 그 지식이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다. 머리가 둔하다고 했지? 너처럼 머리가 둔한 데도 공부를 파고 드는 사람은 식견이 넓어진다. 앞 뒤가 막혔다고 했지? 그러나 그 막힌 것을 한 번 뚫게 되면 그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답답하여 분별력이 없다 했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연마하는 사람은 결국 지혜의 빛이 반짝 반짝 빛나게 된다. 그러면, 파고드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방법은 무엇일까? 역시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역시 부지런히 해야 한다.”소년이 묻습니다. “스승님. 이 세가지를 부지런히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부지런함을 지속할 수 있을까요?” 다산이 대답합니다. (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07

여행에서 돌아오면

여행에서 돌아오는 건 좋은 일이다. 모든 게 달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옛날에 한여름의 일본 도쿄에 가서 주택가 골목을 걷다 절망 같은 것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곳에 가득한 정적은 일본은 한국과는 다른 사회라는 것을 실감케 한 것이다. 말하자면 NHK 밤 뉴스 앵커의 전언이 한국 앵커들과 달리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도 같았다. 상황은 그러나 상대적이다.이번에는 여행에서 돌아오자 한국의 서울은 정적의 도시 같다. 차들은 경적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내가 신호 없이 차선을 바꾸자 뒤에서 속력을 내며 달려오던 자동차가 긴 경적 소리를 내기는 했다.휴일의 한의원은 여는 곳도 다섯 시까지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몹시 아픈 목디스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다. 하지만 배낭을 들고 다니며 그렇게 아프던 몸도 갑자기 나아진 것 같다.왜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 걸까? 한의원은 전통 시장통 입구에 있는데 파라솔을 편 행상 아주머니들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 같다. 날마다 북적이며 젊은이들이 오가던 골목도 오늘만은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장마라고 했는데, 잔뜩 흐린 하늘에선 아직 아무 소식도 없고 어디서 남들과 다른 매미 한 마리 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기는 한다.나는 내가 늘 오가는 학교 운동장 앞 벤치에 앉아 급하디 급한 박미하일 소설 ‘개미도시’를 읽는다. 일종의 우화다.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하는.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서울의 한 벤치에서 바라보이는 세상은 마치 물속처럼 고요하게 느껴진다. 지금 무슨 소설을 쓴다면 하나의 우화가 탄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이 사회 한국도 지난 삼십 년 전, 이십 년 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나는 이 세계를 이번에는 다시 내가 금방 여행 갔다 돌아온 세상과 견주어 본다. 일본도, 한국도, 금방 다녀온 세상도 다 ‘상대성 원리’의 지배를 받는 어떤 그릇들에 지나지 않는다.그릇은 더 큰 것 앞에서는 작고 더 작은 것 앞에서는 크다. 소리들에 대해서도 그릇들은 모두 상대적이다. 나는 이 상대적인 사회 속으로 돌아와 소리 없는 것 같은 티비에서 펼쳐지는 어떤 ‘연기’ 행위들을 본다. 한국과 북한, 미국의 정상들이 판문점에 모였다.그것은 한 상대적인 크기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뿐이다. 내가 찾아갔던 그 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은 아무런 관심도 끌 수 없을 사건이다.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것, 여행이 주는 효능이다. 내가 이 차원에 놓일 수도 있고 저 차원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지금 이 차원에 속해 있을 뿐이라는 것, 여행이 선사하는 또 한 번의 인식이다.나는 여러 차원에 속해야 하고 이 차원에 매이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아무 차원에도 있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는 깊은 자유가 필요할 때가 있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7-04

청송군과 ‘지오 투어리즘’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면서 관광도 분야별로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일부 유명 관광지는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바람에 관광혐오증(투어리즘 포비아)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다. 인구 5만 명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는 연간 2천50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소음, 물가, 쓰레기 등의 문제가 야기돼 주민들이 관광객 유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이를 오버 투어리즘(Over Tourism)이라고도 부른다.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은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현장을 둘러보는 여행으로 비극적 역사를 교훈으로 삼는 관광이다. 지오 투어리즘은 지형 지질을 관광상품으로 활용해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으로 지형 지질을 뜻하는 Geo와 관광의 Tourism이 결합한 용어다. 관광객에게는 지형 지질에 대한 교육과 학습의 장을 제공하고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농촌 체류형 관광으로 그린 투어리즘이란 표현도 생겨났다.청송군이 최근 국가지질공원으로 재인증받았다. 국가지질공원은 지질학적 중요성뿐 아니라 생태학적, 고고학적,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 지역을 국가가 인증해 주는 제도다.이 지역은 지질학적으로 보존가치가 높고 교육 및 관광을 통해 지속 발전 가능성이 있는 곳임을 국가가 인정한 것이다. 청송군은 2014년 국가지질공원 인증을 받은데 이어 2017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와 청송군, 무등산권 3곳만이 유네스코 인증의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돼 있다. 청송군의 주산지 등 전체 24곳이 지질명소로 지정돼 있다.청송군은 과학적 중요성은 물론 고고학적, 문화적, 역사적, 생태학적 가치와 미적 가치까지 국제적 명성을 가진 곳이라는 의미다. 우리지역 최대 명승지로 손꼽아도 손색이 전혀 없다. 우리나라 내륙지에서는 가장 지오 투어리즘의 개념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다만 아직 청송이 지닌 가치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쉽다. 이제 청송군은 군의 내재적 가치를 잘 알려 지오 투어리즘을 통한 명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19-07-04

‘은폐’보다 나은 ‘실패’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의혹투성이에다 앞뒤 안맞는 해명의 연속이다. 북한 소형목선이 삼척항에 정박한 사건과 관련한 국방부의 브리핑은 국민을 속이려는 의도가 분명히 엿보였고, 이 브리핑에 청와대가 개입한 것이 확연해보이는데도 청와대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해명하고 있다.우선 정부 합동조사 결과에 따르면, 군 당국이 레이더에 포착된 표적을 판독하고 식별하는 작업과 경계근무 과정에서 문제점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북한 목선이 삼척항으로 입항하는 장면은 인근 소초에서 운영하는 지능형영상감시장비(IVS)와 해경 CCTV 1대, 해수청 CCTV 2대 중 1대, 삼척수협 CCTV 16대 중 1대의 영상에 촬영됐다. 그런데도 해안경계작전에 투입된 병사가 레이더와 지능형영상감시시스템에 포착된 소형 목선을 주의 깊게 식별하지 못했고, 주간·야간 감시 성능이 우수한 열상감시장비(TOD)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지 못해 해안감시에 공백이 발생한 것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경계작전은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진행됐지만, 운용 미흡 등으로 경계작전 실패 상황이 발생했다는 취지다. 허위보고·은폐 의혹은 합참이 지난 달 17일 국방부 브리핑에서 북한 목선 발견 장소인 ‘삼척항 방파제’를 ‘삼척항 인근’으로 바꿔 발표하면서 불거졌다. 정부는 “초기 상황관리 과정에서 대북 군사 보안상 통상적으로 쓰는 용어인 ‘삼척항 인근’으로 발견장소를 표현했다”며 “이 표현은 군이 군사보안적 측면만 고려하여 국민 눈높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깊이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 해명했다. 또 “(군 당국이 초기 브리핑에서)‘경계에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고 안이했음을 국방부와 합참의 관계기관들이 조사과정에서 인정했다”고 설명했다.이 사건을 대한 청와대의 반응도 이해하기 어렵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북한 소형 목선 사건과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이 김유근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에게 엄중 경고 조치를 내렸다고 밝히면서 문책의 사유에 관해서는 상세히 밝히지 않았다. 다만 최병환 국무조종실 1차장이 ‘북한 소형목선 상황 관련 정부 합동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안보실은 국민이 불안하거나 의혹을 받지 않게 소상히 설명했어야 함에도 경계에 관한 지난 17일 군의 발표 결과가 ‘해상 경계태세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뉘앙스로 이해될 수 있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안이하게 판단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고 “대통령도 이 점을 질책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즉, 청와대가 은폐하도록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국민의 오해를 살 수 있도록 방치한 데 대해 문책했다는 얘기다.청와대나 정부가 앞뒤 안맞는 조사결과를 발표하자 야당은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바른미래당 오신환 원내대표는 “합동조사단에 따르면 군 수뇌부 내부 협의 아래 경계작전이 정상적으로 진행됐다고 거짓브리핑을 결정했고,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이를 묵과했다”며 “말장난과 책임회피로 가득한 국민우롱”이라고 비판했다. 국방부가 남의 돈은 훔쳤지만 절도는 없었다는 말과 같은 결론을 내린 것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오 원내대표는 청와대에 대해서도 “일관성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가담한 적은 없다’면서 ‘청와대의 자체 조사를 통해 국가안보실 1차장을 엄중 경고했다’고 하니 청와대와 국방부가 짜고 치는 개그콘서트를 벌이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북한 목선 사건과 관련, 국정조사를 미뤄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특히 야당은 이번 북한 목선 삼척항 귀순 과정에서 빚어진 경계 실패가 작년 9·19 남북군사합의에 따른 군 경계태세 이완에서 비롯된 것이란 심증을 굳히고 있다. 오히려 국민들은 이번 사건이 우리 군의 단순한 경계실패이기를 바란다.그게 아니라 은폐·허위보고가 진실이라면 우리 군과 정부는 경계실패란 무능에다 도덕성까지 의심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019-07-04

권순우 선수가 주는 교훈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금년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 비교적 생소한 이름의 한국선수 한 명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영국의 윔블던 대회의 예선전은 본선에 들어가고픈 선수들의 전쟁터 같은 곳이다. 예선 통과는 사실상 본선보다 더 힘들 수도 있다. 여기서 예선에서 압도적인 스코어로 3승을 거두고 본선에 진출한 21살 권순우라는 선수의 과거 역정이 주목을 끈다.권 선수는 메이저 테니스 대회에서 지금까지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선수였다. 그런 권 선수가 예선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이고 본선에서 세계 9위의 선수에게 한 세트를 따내는 등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매 세트 접전이었다. 그가 비록 패하긴 했으나 세계 10위권 선수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탁월한 경기로 테니스 팬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전설의 스타 존매켄로 선수가 경기 후 권 선수에게 박수를 치며 앞으로 크게 될 선수라고 치켜세웠다는 소식이 들린다.여기서 필자의 흥미를 끄는 것은 그가 주니어 시절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선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공격적 플레이가 완성되고 한국선수로는 드물게 강한 서브로 무장한 그의 플레이는 테니스 팬인 필자에겐 정말 감동적이었다. 창의적이고 공격적인 주니어 시절을 보내야 체육이든 예술이든 학문이든 어떤 분야이든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증명했다.권 선수의 갑작스런 부각을 보면서 체육뿐 아니라 학문의 세계에서는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세계 학문의 각축장인 미국의 최고 명문대학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인 교수들은 과거 주니어 때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과연 한국에서 대학예비고사 또는 수학능력시험에서 전국 1위를 하고 대학의 수석합격자가 유학 후 미국의 명문대의 교수가 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은 참으로 흥미로운 질문이다.미국의 일류대학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채찍이론이라는 재고관리 이론으로 유명한 경영학과 황승진 교수는 로체스터라는 비교적 생소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한 후 30년 전 스탠퍼드 대학 조교수로 시작하여 종신직까지 받은 스탠퍼드 석좌교수이다.아이비리그 대학인 브라운 대학의 기계공학 김경석 교수는 브라운 대학에서 공학박사를 받은 후 일리노이대학교 조교수 재직 중 국가젊은과학자상에 선발되면서 명문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칼텍, 브라운대학에서 정교수 제안을 받고 모교인 브라운 대학을 선택 정교수직에 오른 전설적 교수이다.이 두 사람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 두 분의 교수가 모두 대학 예비고사 수석이나 대학 수석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들이 공부는 잘했어도 그들의 창의적 사고가 암기식 공부 방식에는 방해가 되었을지 모른다. 이는 권순우 선수가 주니어 시절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것과도 같은 맥락일 것으로 생각된다.필자의 관찰로는 이 두 분의 교수는 꽤 머리가 좋긴 했지만 상당히 엉뚱한 곳이 있는 분들이었다. 유머가 풍부하면서도 날카로운 예지력과 창의력, 판단력을 소유하고 있는 교수들이었다. 엉뚱한 토론을 즐겨하며 창의적인 생각을 끊임없이 하는 분들이었다.또 한 분 최근 화제가 된 미국 MIT 대학의 김상배 교수가 있다. 김 교수는 연세대 기계과 출신이다. 그 역시 수능 최고 점수하고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의 창의력은 스탠퍼드 박사과정 학생 때 만든 스티키봇(Stickybot)이 타임즈 최대 발명품으로 꼽힐 정도였고 당연히 MIT 같은 초일류대학의 교수가 되었다.권 선수의 경우도 그리고 열거한 미국 명문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교수들을 예로 볼 때, 어려서 주니어 시절 좀 더 창의적이고 과감한 사고방식이 큰일을 낼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한국의 초중등 교육에 참으로 소중한 교훈이다.

2019-07-04

포항철길숲을 거닐며

강성태 서예가·시조시인장마가 주춤한 지난 휴일 새벽, 모처럼 포항철길숲을 찾았다. 새들의 지저귐 속에 심호흡하듯 아침 공기를 들이키며, 효자동에서 옛 포항역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포항철길숲은 2015년 4월 KTX포항역이 흥해읍 이인리로 이전됨에 따라 남게된 철도 유휴부지를 시민친화공간으로 만드는 도시숲 조성사업으로 생겨났다. 지난 5월초, 옛 포항역에서 효자교회까지 4.3㎞ 구간의 철길숲이 준공됨에 따라 그 이전에 도시숲으로 조성된 서산터널 북측의 2.3㎞ 구간과 함께 6.6㎞의 도심 내 폐선부지가 아름다운 숲길로 태어나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이러한 철길숲은 산책로와 자전거도로를 기반으로 어울누리길, 활력의 길, 여유가 있는 띠앗길, 추억의 길, 엄마랑 아가랑 태교의 길 등 5개의 테마로 이뤄져 있다. 군데군데 옛 철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곳곳에 다양한 시설물, 조형물, 스틸 아트작품 등을 조경과 어우러지게 설치해서, 역사, 문화, 자연이 살아 숨쉬고 여가와 휴식, 유희와 운동을 즐길 수 있는 복합적인 시민 소통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포항철길숲은 숲(Forest)과 철길(Rail)의 합성어로 ‘포레일(Forail)’이라고도 부른다. 철길숲이 만나는 효곡동, 대잠동, 양학동, 용흥동, 덕수동, 우현동, 우창동까지 길게 이어지는 옛 철길 주변에 풀과 꽃, 나무를 심어 띄엄띄엄 작은 숲을 이루고 벤치나 정자, 그늘막 등의 쉼터와 운동기구를 중간중간에 설치해 걷고 뛰고 뒹굴거나 쉬다가 가볍게 운동도 하고 얘기도 나누는 등 시민들이 마실 나가듯이 철길숲을 즐겨 찾고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조성돼 있다.철길숲에는 이색적인 테마와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그 중에 2017년 3월 8일부터 현재까지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은, 철길숲 조성공사 당시 200m 지하 굴착 중 분출된 천연가스에 불꽃이 옮겨 붙어 24시간 계속 타오르고 있어 불과 빛의 도시 이미지에 다채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리고 음악분수, 댄싱프로미너드, 효자갤러리, 한터마당(버스킹 공연장), 오크정원, 유아놀이숲, 기억의 숲, 기다림의 정원, 벽천, 계류, 장미원 등이 나들이객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음악분수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으로, 여름철 하루 10여회 가동하는 음악분수, 스크린분수의 물줄기 사이를 신나게 오가며 즐기는 아이들로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방장산 산자락을 휘돌아가는 활력의 길 중간쯤에는 시민들이 경작하는 그린웨이 도시텃밭이 있고, 양학건널목을 지나면 옛 간이역의 자취인양 막사 모양의 회랑이 오른쪽으로 길게 설치돼 있다. 40여 년 전 통학길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애환서린 양학간이역이 이렇게 변모되다니 감회가 새롭기만 했다.서산터널에서 충혼탑과 수도산으로 연결되는 덕수공원을 지나 유성여고까지는 2011년 1단계로 조성된 도시숲길답게 무성해진 숲과 가로수가 시원하게 펼쳐져있다. 산비탈 언덕진 곳에는 벽천(壁泉)이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완만한 풀밭에서는 계류(溪流)가 황토길과 데크로드 사이로 잔잔하게 흐른다. 전나무와 벚나무 가로수 한 켠에 장미원이 있고 새소리와 솔내음이 맑게 깔리는 그곳은 엄마랑 아가랑 태교의 길로 철길숲 북쪽 끝자락이다.보물찾기 하듯 철길숲 이곳저곳을 살피며 쉬엄쉬엄 거닐다 보니 어느새 두어 시간이 흘렀다. 100여 년 동안 기차가 주택가를 달리던 철길이, 이제는 자연과 도시를 잇고 소통과 문화가 피어나는 희망의 길로 거듭났다. 도심공원이 부족한 포항으로서는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연을 품은 도시는 사람을 모이게 하고, 문화가 바탕이 된 도시는 꿈을 꾸게 된다. 철길숲을 잘 가꾸고 보듬어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고 지진 여파로 지친 마음을 달래며, 위락과 치유의 시간을 갖는 쾌적하고 행복한 숲길이 됐으면 좋겠다.

2019-07-04

세상에서 가장 키 작은 남자의 노래

의학 역사상 최악의 사건 중 하나인 탈리노마이드 기형아 출산 사건 피해자로 1959년 11월 독일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팔 없이 어깨에 손이 달려있습니다. 손가락은 왼손 4개, 오른손 3개뿐입니다. 어른이 되어도 키가 134cm 밖에 자라지 않습니다.심성이 유난히 고왔던 이 아이는 목소리 또한 빼어나게 아름다워 노래를 부르면 주위 사람들의 영혼이 맑아집니다. “토미, 너는 할 수 있어. 네가 원하는 음악을 계속하렴!”토마스 크바스토프는 음악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 18세 되는 해 하노버 음대에 지원하지요. 손가락이 일곱 개 뿐이라 오디션을 볼 기회도 받지 못하고 입학을 거절당합니다. 굴하지 않고 독학으로 성악을 공부하지요. 법학을 전공해 하노버 대학에 들어간 후 학교 앞 재즈 바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수많은 스승들로부터 성악 기법들을 전수받습니다. 스승은 CD음반입니다. 졸업한 후에는 은행원으로 취직합니다.1988년. 토마스 크바스토프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단 한 번도 받지도 않은 채 열악한 신체 조건을 넘어 뮌헨 ARD국제콩쿠르에 도전한 겁니다. 세계적인 음악 콩쿠르입니다. 이 대회 성악 부문에서 경쟁자들을 압도하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를 세상에서 가장 잘 부르는 최고의 성악가 디트리히트 피셔디스카우의 찬사를 받으며 혜성같이 무대에 데뷔하지요.토마스 크바스토프는 이후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쇼스타코비치 음악상, 에든버러 국제 음악 페스티벌 음악상, 파리 성악 음반 아카데미 최우수상 등 남들은 하나도 받기 힘든 최고 권위의 상들을 휩쓸며 바리톤 분야에서 최고의 반열에 오릅니다. 2012년 은퇴하기 전까지 20년 동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전 세계에 감동의 무대를 선물합니다.어깨에 붙은 그의 손. 작은 키에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지닌 그가 무대에 올라 슈베르트의 데어 린덴바움(보리수)를 노래하면 청중들은 꿈길 속으로 빠져듭니다. “성문 앞 우물가 서 있는 보리수 한 그루. 나 보리수 그늘 아래 단 꿈을 보았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겨 놓고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온 보리수나무 밑. (중략) 그곳을 떠나 오랫동안 이곳저곳 헤매도 아직도 들리는 가지의 속삭임. 여기로 와서 안식을 찾으라.”독학으로 성악을 마스터하고 세계를 울린 크바스토프, 그 작은 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보리수 가사 속에서 우리 꿈을 더듬거리며 찾아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04

투키디데스의 함정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용어는 급부상한 신흥 강대국이 기존의 세력 판도를 흔들면 결국 양측의 무력충돌로 이어지게 된다는 뜻이다.아테네 출신의 역사가이자 장군이었던 투키디데스가 역사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처음 언급했다. 기원전 5세기 맹주였던 스파르타는 급격히 성장한 아테네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됐고, 결국 양 국가는 지중해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게 됐다. 투키디데스는 이같은 전쟁의 원인이 아테네의 부상과 이에 대한 스파르타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여기에서 유래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용어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미국 하버드대 벨퍼 국제문제연구소장을 지낸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이 2017년에 낸 저서 ‘불가피한 전쟁(Destined for War)’에서 미국과 중국이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져, 서로 원치 않는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고 분석하면서부터다. 앨리슨은 지난 500년간 지구에서 발생한 투키디데스 함정은 16차례였고, 이 중 12차례가 전면전으로 이어졌다고 집계했다. 경제적으로는 2014년 이미 미국보다 몸집이 커진 중국의 도전, 헤게모니를 포기할 수 없는 미국, 그리고 두 거대국가를 이끌고 있는 시진핑과 도널드 트럼프, 둘 모두 ‘위대한 국가’를 외치며 충돌하고 있어 17번째 전면전 가능성이 ‘심각(grim)’해졌다고 진단했다. 중국이 야망을 축소하거나 아니면 미국이 중국에 1등 앞자리를 내주고 2등 뒷자리에 만족하겠다고 물러서지 않는 한 무역분쟁, 사이버공격, 해상에서의 충돌 등은 곧바로 전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최근에는 일본이 한국에 대해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조치를 취한 것 역시 한일판 미니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강제징용 판결을 빌미로 경제제재에 나선 일본이 괘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본이 이렇게 견제구를 던지고 나올만큼 우리 국력도 많이 커졌다고 생각하면 뿌듯한 마음도 갖게된다. 다만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진 나라들의 끝이 패망이었다는 해묵은 교훈을 생각해 한시빨리 한일 관계를 복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7-03

메멘토모리

장규열 한동대 교수큰 별이 졌다. 한동대학교 초대총장이었던 김영길 박사가 돌아가셨다. 불꽃같이 걸어온 발자취를 뒤로 하고, 수많은 제자들과 동지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기면서 이 땅에서의 소중하고 값진 삶을 마감하였다. 수다한 고난과 역경을 지치지 않는 믿음과 소망으로 뛰어넘으면서, 대학을 세우고 제자를 길러내었다. 대학이 지역과 나라,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든든한 자리를 잡도록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나라의 대학교육이 보다 높은 지표를 향하도록 그 길을 닦아 놓았다. 자신이 그러했듯이, 제자들을 향하여 ‘배워서 남주라’고 때마다 강조하였다. 가르치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일’임을 몸으로 보여 주었으며, 배우는 일이 ‘Why not change the world?’를 지향하도록 북돋웠다.그를 보내는 자리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제자들과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그가 바꾸어 내라고 가르쳤던 그 세상에서 오늘도 땀흘려 일하다가, 그가 떠나셨다는 소식에는 세상이 무너져 내린 마음이 되어 모여 들었다. 그가 가르친 대로, 나 하나 잘 살기 위하여 살 것이 아니라 병들고 힘든 세상을 바꾸고 구하기 위하여 살아낼 것을 다짐하면서 스승을 보내드렸다. 생각을 같이 하였던 동지들과 교수들은 대학을 열면서 함께 하였던 다짐을 새롭게 하면서 그를 보내드렸다. 황량한 벌판에 학교를 세우면서 바르게 가르쳐 세상을 바꾸리라는 그 날의 각오를 그를 보내면서 다시 세웠다. 또 하나의 대학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대학’을 일으킨다는 그 처음 생각을 그의 영정을 마주하며 일깨우고 있었다.높은 뜻을 세우고 실천하였을 뿐 아니라, 그는 더할 나위없이 따뜻한 스승이었다. 시험 때면, 몰래 도서관을 돌며 학생들의 힘든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어려운 학생들의 이야기를 낱낱이 들어주며 손을 붙들고 기도하여 주었다. 학생들과 만나는 일을 가장 즐기는 총장이었으며 학생들의 하루하루가 늘 안타까운 선생이었다. 병든 세상을 향한 관심이 깊었던 만큼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세심함도 한 가득이었다. 누구보다 우수한 과학자였지만 마음에는 역사와 사회 걱정을 담고 살았다. 지역과 끊임없이 함께 호흡하고자 하였으며 세계의 맥박도 놓치지 않았다. 유엔과 유네스코 등 국제기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글로벌교육’의 새 지평을 열었다. 경쟁에 몰두해 있는 대학들 간에도 협력과 연합을 강조하여 함께 만들어 가는 대학교육을 꿈꾸기도 하였다.‘메멘토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이 생각은 누구나 죽을 운명임을 명심하고 살아야 함을 이야기했을 터.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 어떤 의미를 남길 것인지, 무엇을 뒤로 하고 사라질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인생을 꽉 채워 산 사람은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가신 어른 만큼 평생을 꾹꾹 채우며 살아낼 수 있을까. 당신은 오늘을 충분히 채우며 살아가고 있는가. 죽음을 기억하라는 저 생각과 함께 오늘을 채우며 살아가라는 지혜를 담은 ‘카르페디엠(Carpe Diem).’ 이 순간을 잡아라, 즉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인 바, 메멘토모리와 카르페디엠을 묶으면 죽음이 찾아올 것임을 잊지 말고 오늘을 채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인 아닌가. 작가 오그만디노(Og Mandino)는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하고, 오늘 죽을 것처럼 살라’고 하였다. 즉, 최선을 던지며 일하되 마음을 다하여 살아낼 것을 권한 게 아닌가. 한동대는 복받은 학교다. 저렇듯 뛰어난 지도자가 이끌었으며 그 뜻을 또 선명히 남기었으니, 앞으로도 무궁한 가능성을 담고 있을 터이다. 남기신 의미를 교육에 담아 세상을 바꾸어 내는 모두가 되길 기대해본다.

2019-07-03

무엇을 버릴 것인가?

2011년 일본 센다이. 유루이 마이 씨는 낡은 집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들에 파묻혀 살고 있습니다. 회사 일이 바쁜 그녀 역시 자기 방조차 정리할 여유 없이 정신없이 사는 중입니다.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낡은 집안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물건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며 가족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흉기로 돌변합니다. 무너져버린 집에서 손전등과 비상식량을 찾으려 해도 물건이 너무 많아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는 경험을 하지요. 집 밖으로 몸을 피해 빠져나오는데 그 순간 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립니다. 그녀는 결심하지요. “이런 집에서 두 번 다시 살고 싶지 않다.” 최소한의 필요한 물건만 엄선해 집에 두기로 합니다.“최종 목표는 트렁크 하나에 다 담을 수 있는 정도의 물건만 남기고 사는 것이에요.” 그녀는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대지진의 경험 이후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다’ 4단 만화 시리즈를 연재해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남편과 어머니, 두 살배기 아들,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지내는 마이 씨의 집은 책 제목처럼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실에는 테이블 하나 의자 네 개. 수납공간 밖으로는 일체 물건이 보이지 않는 주방, 밥솥과 전자레인지, 냄비 3개, 프라이팬 2개, 12개의 식기와 컵이 전부입니다. 욕실에는 비누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삶의 본질을 제대로 누리고 찾기 위해 물건을 버리기 시작하는 사람들. 뺄셈의 미학을 누리는 삶입니다. 덧셈만이 삶의 지름길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과잉 소비 조장 풍조에 속지 않고 불필요한 것들을 일절 소유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소박한 행복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음은 반가운 현상입니다.삶의 뺄셈에 있어 세계 챔피언은 세속의 삶을 모두 버리고 숲으로 들어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아닐까요?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가르치는 일에 잠시 종사하기도 했습니다만, 물욕과 탐심으로 치닫던 미국 초기 자본주의 모습에 염증을 느낀 그는 숲속에 오두막 한 채를 짓고 단순한 삶을 시작합니다. 1845년. 그가 숲으로 들어가면서 남긴 말입니다. “삶이란 너무도 소중한 것. 나는 삶을 깊게 살아보고 싶었고 삶의 정수를 끝까지 마시고 싶었고 삶이 아닌 것은 모두 없애 버리기 위해 강인하고도 엄격하게 살고 싶었습니다.”먹구름 너머 눈부신 삶을 만나기 위해서는 깃털처럼 가벼워야 힙니다. 아름다운 인생 소풍을 위해 무엇을 버릴 수 있을까요?/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03

섬과 바다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열 가구로 이루어진 마을에도 나처럼 진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자는 반드시 있겠지만, 나처럼 배움을 좋아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논어 ‘공야장’에 나오는 말이다. 평생 ‘학인(學人)’을 자처한 공구(孔丘)는 스스로를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니라, 배워서 알게 된 자로 규정한다. 그래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명언을 남길 수 있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매일 쏟아지는 신간(新刊)을 읽고 싶은 마음에 죽음이 두렵다는 소회를 피력한 적도 있다.지난주 ‘무등공부방’에서 광주의 향토사 전문가 김정호 선생의 강연이 있었다. 60년 가까이 전남과 광주의 인문지리와 역사, 인물을 두루 섭렵한 선생의 앎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광산 성씨 본관 이야기’가 주제였으나, 종횡으로 달리는 이야기의 향연은 특정분야에 한정되지 않는 것이었다. 혈연과 지연, 학연에 내재한 뿌리 깊은 공동체성에 대한 견해는 인상적이었다. 그러하되 섬과 바다에 대한 소략한 말씀이 가슴에 닿았다.선생이 내세우는 명제는 간명하다. “한국의 미래자원은 바다와 섬이다!” 그 말씀을 듣자니 익숙한 구절이 생각난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島嶼)로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다. 여기서 ‘도서’라는 말이 낯설다. ‘도’는 섬, ‘서’는 작은 섬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한반도와 그에 딸린 크고 작은 섬이 우리나라 영토라는 얘기다. 해양영토 바다가 빠져있다.선생에 따르면, 대한민국 육지영토 면적의 8배에 이르는 바다가 한반도에 부속돼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발전하려면 바다와 섬을 도외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에는 3천358개의 섬이 있는데, 유인도가 482개, 무인도가 2천876개에 이른다. 섬과 바다를 개발하는 것이 ‘국토균형발전’의 첫걸음이라고 선생은 목소리를 높인다.1952년에 ‘낙도중흥법’을 제정한 일본은 모든 섬을 육지의 지자체와 결합시켰다고 한다. 본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을 동경(東京)과 결합하여 섬을 발전시키는 정책을 70년 가까이 실행해온 일본. 우리는 1980년대에 비로소 섬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으나, 일본을 따라잡기는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정부주도로 섬이란 잡지를 간행하고, 해마다 5만여 섬 주민이 동경 한복판을 시위한다니 그럴 법하지 않은가?!우리나라의 모든 것은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런 까닭에 수도권과 지방이라는 요상한 분류마저 생겨났다. 일기예보 하는 사람들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는”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서울과 경기도에서는….” 이런 표현이 적절함에도 ‘수도권’이란 말을 반드시 발화(發話)한다. 그렇다보니 대한민국은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나뉘어져 있다.이런 현상은 ‘비수도권’에서 되풀이된다. 광역시권역과 여타 지역으로 나뉘는 것이다. 대구나 광주, 부산과 대전을 중심으로 사건과 사고, 일기예보가 나오고 난 다음에야 여타지역이 거명된다. 그러기에 육지가 아닌 바다와 섬 이야기는 ‘딴나라’ 이야기처럼 아득하다. 하지만 거기에도 사람이 살고, 문화와 예술이 흐르고, 추억과 역사가 있다. 섬과 바다는 ‘그 섬에 가고 싶다’ 따위의 가벼운 오락과 유희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근대를 열어젖힌 유럽제국의 출발은 바다였다. 작은 돛단배를 타고 그들은 오대양 육대주를 넘나들었고, 급기야 육상제국 청나라와 러시아를 능가하는 세계제국을 성립시켰다. 가뜩이나 넘쳐나는 사람들로 아우성치는 지구촌의 미래는 바다와 섬에 있을 듯하다. 해수욕장 개장시점에 잠시 섬과 바다를 생각해본다.

2019-07-03

삶의 질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한 재벌가 사람들의 ‘갑질’ 논란이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었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도 있듯이 그렇게 엄청난 부를 가졌으면 마냥 여유롭고 자적(自適)하게 살아갈 수 있을 터인데, 사실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분노조절장애라 할 수밖에 없을 만큼 남들에게 패악질을 해대는 모습을 TV화면으로 보면서 자못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불만과 분노의 화신이 되게 하였는지.재벌회장 집안이면 많은 사람들이 선망의 눈길로 바라볼 만큼 경제적 풍요나 사회적 지위가 최상류층이다. 그런데 그것이 삶의 질이나 만족도에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어서 세간에 적지 않은 충격파(?)를 일으켰다. 재물도 지위도 아니라면 무엇이 만족도 높은 양질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가.삶의 질을 말할 때는 흔히들 물질적 조건을 우선으로 꼽는다. 헐벗고 굶주리는 삶이라면 질을 따질 여유조차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삶의 질에 비례하는 조건도 아니고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넘치도록 많이 가졌음에도 만족을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소박한 것으로도 만족한 사람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사회적 지위나 명예도 삶의 질을 결정하는 조건으로 들 수 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만족감이 덜한 것이 보통의 인심이다. 그래서 돈을 주고 사서라도 지위와 명성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도 물질적 부와 마찬가지로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높은 지위나 만인이 환호하는 스타덤에 오른 사람도 우울증에 걸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이다.결국 자존감의 문제인 것 같다. 부의 축적이나 지위나 명예를 얻으려는 것도 자존감을 높이려는 수단이 아닐까. 자존감이란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을 줄인 말로,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재물과 지위, 명예가 자존감을 높여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곧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재벌이나 고관대작들 모두가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는 아니지 않는가.경쟁에 이겨서 남보다 많이 차지하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것만으로는 자부심을 가질지언정 자존감을 높일 수는 없다. 진정한 자존감이란 나누고 배품에서 오기 때문이다. 많은 재물이나 높은 지위는 그만큼 나누고 베풀었을 때 비로소 가치와 보람을 갖는 것이다. 오로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재물과 남에게 군림하기 위한 지위는 손가락질이나 받기 마련이지 자존감을 높여 주지 않는다. 재물과 지위를 내세워 갑질이나 일삼는 자들을 누가 존중하겠는가. 남에게 존중 받지 못하는 자존감은 자만심일 뿐이다.앞의 그 재벌가 가족은 자존감이 별로 없는 사람들인 것 같다.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남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 남에게 지탄받을 짓을 한다는 건 자신을 천대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것에 걸맞게 아랫사람들에게 너그러이 베풀고 살았더라면 진심어린 감사와 존경을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보람과 자존감도 한층 높아졌을 것이다. 남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었을 때 느끼는 뿌듯한 존재감이야말로 자존감의 바탕이 되는 것이므로.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것도 삶의 질을 높이는 요소가 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도 있지만, 사람에게는 물질적인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인문학적 교양의 바탕이 되는 지성과 감성의 향상을 위한 공부가 필요한 까닭이다. 그것은 또한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2019-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