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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국의 ‘신성장 산업’은 잘 크고 있나?

김학주 한동대 교수마이너스 금리의 국채가 늘고 있다. 과거에는 일본 및 독일 국채수익률이 마이너스에서 맴돌았는데 이제는 프랑스, 스웨덴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 만큼 석유기반의 구경제는 빠르게 위축되고 있고, 그 안에서 미국의 ‘밥그릇 싸움’도 우리를 걱정스럽게 한다. 해법은 빨리 산업구조를 신성장 분야로 바꾸는 것인데 한국은 제대로 길을 찾지 못하는 모습이라서 안타깝다.먼저 내년부터는 파리기후협약이 발효되며 친환경 움직임이 빨라질 것이고, 2차전지 수요도 크게 늘어 날 전망이다. 그런데 한국의 2차전지 부품업체들은 최근 실적이 악화되었다. 그 이유는 중국 전지업체들과의 경쟁 때문이다.사실 중국정부는 현지 업체들에 대한 보조금을 중단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한국업체들이 경쟁하기 유리한 환경이 될 것으로 전망했지만 다른 결과가 나왔다. 중국 정부가 보조금을 줄였다는 사실은 “낮은 제품단가에 생존 가능한 업체들로 구조조정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중국의 2차전지 업체들의 가격경쟁력 배경을 보면 첫째, 모든 부품을 100% 중국에서 조달하기 때문이다. 2차전지 핵심소재인 희귀금속의 경우 중국이 가장 풍부하니까 접근이 용이하다. 또 2차전지 제조 공정이 은근히 노동집약적이라서 중국이 인건비 경쟁력을 볼 수 있다. 둘째, 중국 정부의 도움이다. 그 동안 엄청난 보조금을 통해 인프라를 구축해줬고, 해외업체들에게 기술상납을 종용하여 현지업체들이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셋째, 중국의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신성장 산업으로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2011년경 중국 중심의 경제성장이 기대되며 건설중장비를 만드는 한국의 두산인프라코어가 각광받았었다. 그런데 중국의 싸니(SANY)가 두산을 능가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귀를 의심했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싸니로 입사한다는 설명을 듣고 두산인프라코어 주식을 모두 팔았던 기억이 난다.과거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국가들이 모두 1인당 GDP 3만불 이상의 국가들이었다. 오로지 한국만 2만불대에서 제대로 된 자동차를 만들 수 있어서 가격경쟁력을 주도하며 시장점유율 확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1인당 GDP가 1만불도 안 되는 중국이 침투하여 자리를 잡은 산업이라면 더 이상 볼 것 없지 않을까? 2차전지도 그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 같다. 내년부터 2차전지 수요가 늘어나겠지만 중국 업체들과 경쟁하지 않을 해법(solution)을 갖고 있는 글로벌 기업에 투자하는 편이 옳아 보인다.한편 친환경과 더불어 신성장의 또 다른 축은 바이오 산업이다. 그러나 한국의 바이오는 ‘인보사’ 사태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그 동안 너무 장밋빛으로만 접근하여 주가에도 거품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미국 나스닥 시장에서 가장 높은 프레미엄을 받는 바이오 업체들은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는 곳들이다. 만일 이런 새로운 시도들이 성과를 보이면 기존 치료법은 대체가 되는 셈이다. 즉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다.기존 바이오 업체들은 신약의 가치평가를 할 때 출시 이후 특허가 유지되는 10여년 시장을 독과점하는 것으로 가정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나올 대체 치료법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새로운 치료법 가운데 이미 오랜 기간 연구된 것들도 있다. 즉 10여년이 보장되지 않을 수도 있다.지금 세계 바이오 산업은 새로운 치료법에 주목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 바이오 업체 가운데는 이렇게 신기술을 주도하는 곳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주가가 할인되어야 하는데 한국 내 투자가능 바이오 기업들의 희소성 때문에 오히려 프레미엄을 받고 있는 바, 이것이 거품의 증거다.결국 한국의 신성장 산업은 중국에 치이고, 신기술에 대체될 수 있는 처지에 있다. 사회정의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한국의 신성장 관련 스타트업을 돌봐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2019-07-01

나를 덮고 있는 진흙에 대해 (1)

방콕 기차역인 후아 람퐁 주변은 개발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야오와랏 거리에는 가로 10m, 세로 10m쯤 되는 조그마한 사찰이 있습니다. 주지 승려는 근심이 가득합니다. 사찰을 관통하는 도로가 뚫린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이곳에는 거대한 진흙 불상이 있습니다. 높이가 3.5m, 무게가 5t이 넘는 커다랗고 우아한 예술품입니다. 석굴암 본존 불상과 비슷한 크기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옮길 수가 없어서 기중기를 동원합니다. 거대한 불상에 손상이 없도록 천으로 감싸고 그 위에 두터운 비닐로 포장한 후 나일론 끈으로 결박합니다. 지붕을 뜯어내고 크레인에서 내려온 고리에 불상을 걸어 올립니다. 조그만 충격에도 진흙 불상은 손상을 입을 수 있기에 작업은 세심하게 이뤄집니다.오랜 노력 끝에 트럭에 불상을 싣고 옮기는 데 성공하지요. 새로 이전해 안치할 곳에 불상을 옮겨 놓고 신축 사찰 지붕 공사를 완성할 예정입니다. 포장을 뜯는 순간 비명 소리가 들립니다. “아악!”그토록 조심스레 운반했건만 불상 중심부에 거대한 틈이 발생했습니다. 머리부터 가슴 배꼽에 이르기까지 크랙이 쫘악, 회복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손상이 심합니다. 긴급 대책 회의가 열립니다. 문화재 전문가들이 달려와 검토합니다. 사다리를 설치하고 안면 쪽 손상 부위를 살피던 문화재 전문가가 고개를 갸웃합니다. 랜턴을 비추며 크랙 사이를 살펴볼수록 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갈라진 진흙 틈에서 무언가를 본 것입니다. “반짝!”신축 사찰은 폐쇄 명령이 떨어집니다. 불상은 거대한 암막으로 전체 모습을 가립니다. 아무도 이 작업을 볼 수 없도록 하라는 정부의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수일 동안의 작업을 거친 후에 암막을 걷어냅니다. 허가를 받은 작업 담당자와 주지 승려, 정부의 문화재 담당관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눈앞에는 거대한 황금 불상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57년,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황금 불상의 가치를 평가한 결과 순금 5천500㎏으로 판정합니다. 전 세계 황금 불상으로는 최대 크기, 지구에 존재하는 금덩어리로는 가장 큰 것으로 드러납니다. 약 1억9천6백만 달러, 우리 돈으로 2천200억 원의 가치를 지닌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진상 조사를 시작하지요. 어떻게 이런 진귀한 보물이 진흙 불상인 채로 수백 년 동안 내려오게 되었는가? 모두가 궁금해합니다. (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01

사이코패스 스마트와 미래를 함께할 수는 없다

곽지영 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어느 일요일 저녁, 우리 집에는 근처 사는 일가가 모여 휴일식사를 마친 후 이야기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단란함도 잠시, 예고 없이 찾아온 응급 상황에 온 집이 발칵 뒤집혔다. 뇌혈관 수술 이력이 있는 이종사촌이 좀 체한 것 같다며 부산을 떠는가 싶더니 갑자기 쓰러져버린 것이다. 구급차에는 이모를 대신해 직전 전조증세부터 계속 지켜본 내가 동승하기로 했다.평소 위기에 잘 무너지지 않는 강한 ‘멘탈’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나는 정신력을 총동원하여, 환자의 상태와 쓰러지기 전 상황, 처음 증세가 시작된 후 개략적인 시간, 환자의 병력과 수술 시기, 최근 담당의사 진료 시점까지 찬찬히 설명하며, 이동 중 구급요원들의 처치를 도왔다. 그러나 나의 ‘강철 멘탈’과 인내심은 응급실에 도착한 직후부터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응급실에서 보호자는 제 정신이 아니다. 접수를 하려는데, 환자의 주민번호는커녕 생년월일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스템이 그렇게 친절하게 만들어져 있지 않을 것을 짐작하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언성이 높아졌다. 우여곡절 끝에 접수를 마치고 들어가자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는 나를 알아본 구급요원이 나를 사촌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환자는 응급실 내 깊숙이 자리한 ‘소생실’ 안에 누워 있었다. ‘소생’이라는 단어와 삽관까지 한 모습을 본 나는 거의 패닉 상태가 되었지만 응급실 의료진들의 질문공세는 계속됐다. 지금 되짚어보니 응급환자의 보호자는 처음 119에 전화할 때부터, 구급요원들, 응급실 접수 담당자, 그리고 응급실 내 의료진에 이르기까지, 기억하기도 끔찍한 그 상황을 곱씹으며 적어도 네다섯 차례 혹은 그 이상 설명을 되풀이해야 한다. 경황 중에도 나름 침착하게 같은 얘기를 네 번 다섯 번 반복해서 설명하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던 내 인내심은 ‘쓰러진 시간이 정확히 몇 시 몇 분이냐’는 당직의사의 질문 앞에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선생님, 가족이 쓰러져서 경황없는 마당에 어떻게 시분까지 정확히 기억하지요?”다행히 환자는 며칠 입원 후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고, 가족들에게 그날의 일은 트라우마가 아닌 하나의 해프닝으로 기억됐다. 그제야 고군분투하는 의사선생 앞에서 입 밖으로 내지 않고 혼자 삼킨 내 그 다음 말이 떠올랐다. ‘집안에 무슨 블랙박스라도 설치해 뒀어야 하나요? 내가 무슨 인공지능 로봇도 아니고…’그러고 보니 스마트폰과 우리집 홈 스피커 속 인공지능 ‘그녀’들은 그 순간 뭘 하고 있었을까? 평소에는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들려주거나 TV채널을 바꿔주겠다며 주인 비위를 맞추려하고, 간혹 가족들의 대화중에 자기를 부르는 줄 착각해 불쑥 나서 성가시기까지 한, ‘빅**’, ‘시*’, ‘지*’, ‘아*’라는 이름의 그녀들 말이다. 4차산업혁명시대의 기대주 인공지능은 정작 주인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바로 그 순간에는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다.작년 MIT에서 ‘사이코패스 인공지능’이 개발되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히치콕 감독의 영화 ‘사이코’의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이름을 딴 ‘노먼’ 이야기다. 노먼은 잘못된 정보를 흡수한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태어난 실험적 존재였다. 인공지능에게 어두운 데이터만 가르쳤더니 심리검사에서 ‘죽음·살인’만 떠올리고 반사회적 성향을 보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지켜보며 듣고 있었을 터인데도 못 본 척 못 들은 척 침묵을 지킨 인공지능 그녀들의 모습은 얼핏 그 사이코패스 인공지능을 연상케 한다.사이코패스 인공지능이 탄생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인간다운 행동요령과 기술을 열심히 가르쳐 주어 미래를 함께해도 좋을만한 제대로 된 파트너로 키워내어야 한다. 1인 가구 비율이 30%에 육박하는 지금, 어쩌면 그 인공지능이 쓰러진 환자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보호자가 되어줘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9-07-01

키코(kiko) 분쟁조정

키코는 환율이 일정 범위에서 변동하면 약정한 환율에 외화를 팔 수 있는 파생금융상품으로, 수출 중소기업들이 환 헤지 목적으로 가입했다가 2008년 금융위기 때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무려 732개 기업이 3조3천억원 상당의 피해를 보는 사태를 빚은 금융상품이다.당시 피해기업 상당수는 은행권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은 2013년에 키코 계약의 불공정성이나 사기성은 인정하지 않는 대신 상품 위험성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윤석헌 금융감독원장 취임 직후 키코 사건 재조사에 착수한 지 1년 만에 금융감독원은 이르면 오는 9일, 늦으면 16일에 분쟁조정위원회를 열어 재조사에 대한 결론을 내릴 예정이다.이번 분쟁조정 대상은 일성하이스코와 남화통상, 원글로벌미디어, 재영솔루텍 등 4개 업체로, 피해금액이 총 1천500억원에 달한다. 금감원은 이번 재조사 과정에서 상품의 위험성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은 부분, 즉 불완전판매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핀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의 키코 상품 판매를 불완전판매로 규정하고 피해액의 20∼30%를 배상하라는 권고안이 유력하다고 한다. 다만 은행의 불완전판매 책임이 큰 경우 배상비율이 50%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 경우 은행들이 부담할 배상액은 300억∼450억원선이 된다.문제는 은행들이 권고안을 수용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 손해배상에 대한 소멸시효(손해 발생일로부터 10년)가 완성된 상태여서 은행이 분쟁조정안을 거부하고, 피해기업들이 이후 소송을 걸어도 승산이 희박하기 때문이다.은행들은 분쟁조정을 신청한 4개 기업처럼 분쟁조정이나 소송 등 절차를 거치지 않은 기업이 150곳(피해금액 2천억∼4천억원 추산)에 달해 전선이 확대될 경우 피해 규모가 조 단위로 늘어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선무당 사람잡는다’더니 어설픈 금융상품 한 번 잘못 판매한 것이 뼈아프다. 국민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금융상품이나 경제정책은 파급효과가 큰 만큼 더욱 더 신중하게 수립·시행할 필요가 있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7-01

선비들의 여름나기

강희룡 서예가계절은 장마로 접어들었다. 장마가 끝나면 곧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열대 기후로 변하여 겨울은 짧고 여름은 길어지며 기온 또한 예전에는 30℃ 안팎이던 것이 이제는 40℃정도까지 오르내린다. 여름은 원래 덥다. 지난해 여름도 더웠고 100년 전 여름도 더웠다. 여름이 덥지 않으면 천재지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름에는 피서를 즐긴다.전통사회에서 더위를 이길 수 있는 피서방법에는 여러 가지 있으나 특별히 계곡을 찾거나 벽오동 아래서 더위를 씻곤 했다. 이러한 자연을 이용한 방법 외에도 글이나 시를 통해 더위를 이기곤 했다. 대표적인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 문인인 정내교(1681~1759) 선생의 문집 완안집에 ‘수운정피서( 水雲亭避暑)’라는 시가 있다. 정내교가 수운정이라는 곳에 피서를 하며 지은 시이다. 그는 중인 출신이라 높은 벼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시의 재능은 당대에 최고로 인정받아 많은 이들이 그에게 시를 배우기도 하였다. 정조 때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낸 김종수와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며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도 그에게 시를 배웠다고 한다.시 내용은 이렇다. ‘붉은 해 중천이라 새들도 울지 않고/ 산인은 말을 타고 천천히 지나는데/ 골짜기 산속 길로 어느덧 접어드니/ 반갑게 솔바람에 물소리 들려오네.’ 이 시는 특별한 기교나 묘사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한여름의 뜨거움과 산중의 시원함을 잘 전달하고 있다. 제1구의 ‘중천에 걸린 붉은 태양[赤日中天]’은 더운 이 여름날 생각만으로도 덥다. 얼마나 더운지 새들도 모두 자리를 피해 보이지 않는다. 제2구에서는 이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피해 산길로 향하는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옮겨야 하겠지만 무더위로 인해 최대한 천천히[閑] 내딛고 있다. 배경은 어느 순간 깊은 산중으로 바뀌어있다. 무언가 느낌이 다르다. 숲 속에선 솔내음 가득 실은 솔바람[松風] 불어오고 길옆 계곡에선 물소리[間水] 들려온다. 제3구에서 지친 우리 몸의 감각을 집중시키다가, 제4구에서 더위를 식힐 솔바람과 물소리를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또 한 예는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1713∼1791)의 표암유고(豹菴遺稿)에 실려 있는 ‘해암이 고맙게 보여준 석전의 그림에 차운하다.’라는 시다. ‘구름이 앞산을 가리더니 소나기 쏟아지고/ 바람이 초목에 불어와 기이한 향기 풍기네/ 북창에서 책상 대해 긴 여름날을 보내노니/ 청량한 이 기분 아낌없이 그대와 나누리라.’ 무더운 여름철 소나기가 지나가자 기온이 뚝 떨어지고 집 주위의 풀이며 나무에 바람이 불어와 신록의 향기가 코끝에 스친다. 서늘한 북쪽 창문 아래서 책을 읽으며 긴 여름날을 보내노라니 이 청량한 기분을 혼자 누리기 아까운 생각이 든다. 3구에서 북창은 도연명의 고사를 썼다. 도연명이 오뉴월에 북창 아래에 누워 서늘한 바람의 감촉을 즐길 때면 내가 복희씨 이전의 태고적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해 질 녘 바람과 저녁노을은 원래 주인이 없으니 이 청량한 기분을 그대와 나누는 것을 아끼지 않으리’라고 한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강세황의 처남 유경종이 명나라의 유명한 화가인 심주(沈周)의 그림을 표암에게 보여주었는데 이 시는 그 그림에 있는 제화시의 운자를 따라 지은 작품이다.오늘날에도 다양한 피서법이 있다. 캠핑장을 이용하는 방법과 오수(午睡)체험, 차가운 물에 발을 씻는 탁족, 죽부인과 함께 대청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는 체험도 유행이다. 여름 더위는 열매를 영글게 한다. 더위에 비록 몸은 시달려도 영혼 역시 더 단단히 여물 수 있다. 세종 때 일에 지치고 소진된 집현전 학자들에게 수개월에서 수년 동안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독서휴가를 주어 재충전하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했다. 앞으로 기승을 부릴 올 여름 무더위를 우리도 독서삼매를 통해 자아를 찾아 영글게 하는 법을 피서로 이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9-07-01

저, 반짝거렸던 취향의 상징에 기생해온 것들

얼마 전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이제 거의 극장에서 내려가 상영하는 곳을 찾기 쉽지 않지만, 아직 사람들의 입에서는 내려가지 않고 있다. 단지 한국에서 처음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이 영화가 던지고 있는 사회적 이슈나, 그것을 다루고 있는 방식이 의미 있었던 것이리라.이 영화에 대해서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던 관객에서부터 고개를 갸웃거렸거나 심지어 불편함을 느낀 관객까지 있었겠지만, 적어도 이 ‘기생충’은 한국 영화에서는 이제 몇몇 예술영화라는 장르 속에밖에 존재하지 않게 된 ‘상징’의 힘을 보여주었던 영화로 정의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서사가 주는 불편함이란 단지 그것의 약점 내지는 결여만은 아닐 것이다. 그 불편함은 바로 우리가 매혹되어 온 상징의 실체를 직시하게 될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인정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 상태에서 비롯된다.사실, ‘기생충’이 드러내고 있는 ‘상징’의 세계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폭로된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문화적 산물로서의 ‘상징’은 현대 사회가 적어도 백 년 이상 계속해서 유지해왔던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신념과 그것을 가능케 했던 계급적 취향의 문제, 그리고 그러한 취향에 기생하여 형체를 유지해왔던 지식과 문화 담론이 갖고 있는 실체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상징’은 소설이나 영화의 언어적 층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 저변에 널려 있는 상품의 표면과 그 배후로부터 도래하여 그것을 알아보는 이들을 이끄는 힘을 갖는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자본의 상징이 갖는 힘에 대해 얼마나 무기력한가. 저 반짝거리며 나의 눈길을 끄는 브랜드의 로고가 갖는 힘에,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외국어 단어 몇 자에, 너무나 확고해 보이는 취향이 갖는 힘에 마주하는 인간은 언제나 그것에 매혹될 수밖에 없다. 전혀 실체를 갖지 않는 예술이 차가운 자본의 사회에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사실은 삶에 있어서 어떠한 유용성을 갖지 않는 지식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매혹적인 까닭은 어쩌면 그 때문일 것이다.영화 속에서 가난한 ‘기택’의 집은 아무런 실체를 갖지 않는 ‘상징’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질적인 경제 주체가 되지 못하는 ‘기택’이 가족들을 모아 놓고 전통을 내세우며, 가족의 가치를 말하는 대목이라든가, 수능에서 수도 없이 실패했던 아들 ‘기우’가 ‘교육’의 이상에 대해서 말하는 대목, 딸인 ‘기정’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해외 대학이나 미술가들의 이름은 모두 실체를 갖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힘을 갖는 상징이다. 허영과 기대감이 교차할 때, 실체 없는 상징은 반짝거리기 시작한다.반면, 스타트업이 성공하여 벼락부자가 된 ‘동익’과 ‘연교’의 집은 상징이 결여된 실체로 가득 차 있다. 유명 건축가가 지었다는 집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집의 예술적 가치가 아니라 자본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바로 ‘동익’과 ‘연교’가 매혹된 상징과 그 상징의 연쇄로서의 구성된 세계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연교’는 자신과 오래 인연을 맺어왔다는 과외선생 ‘민혁’으로부터 ‘기우’를 소개받고, 소개라는 인간의 관계에 의한 보증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보증이나 신용 등은 ‘기우’ 등이 거창하게 늘어놓는 상징에는 무력하다. 하긴 누구라고 매혹되지 않을 재간이 없다.역사적으로 이야기해본다면, 자본의 힘을 가지고 귀족의 신분적 정통성을 누르고자 했던 부르주아 계급이 자기를 구별 짓기 위한 방편으로 구성한 계급적 취향이 바로 이러한 예술이나 지식의 상징에 대한 매혹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귀족 사회에도 이러한 취향은 없지 않았으되, 자본이라는 양적 기준이 신분이라는 질적 기준으로 옮겨가는 부르주아 계급의 특수성이 바로 이처럼 상징에 취약한 문화적 경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에 놓여 있는 한국 사회에서 학벌이나 지식, 예술에 대한 태도 등은 여전히 과시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그것은 자기 취향을 보여주는 상징 형식에 무기력한 인간들을 만들어낸다. ‘동익’과 ‘연교’의 집은 바로 그러한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오랜만에 자본주의의 문화적 상징을 읽어낼 수 있는 영화(물론 그 영화 자체도 하나의 상징이며, 그것을 읽어내는 것도 지식적 상징을 구축하는 행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를 보면서 내가 떠올린 작가는 다름 아니라 미국의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F. Fitzgerald·1896~1940)였다. 이 대목에서 다름 아니라 무려 백 년 전의 소설가의 소설을 떠올린 것에 대해 다소 의아하실 분도 있겠지만, 이 영화 ‘기생충’과 스콧 피츠제럴드의 예를 들어 ‘위대한 개츠비’같은 작품은 분명 백 년의 시대적 차이를 걸쳐 두고 있으면서도 비슷한 예술적 전형을 공유하고 있다. 분명 앞선 시대 부르주아 자본주의계급의 천박한 문화를 비판했던 에두아르 마네(00C9douard Manet·1832~1883)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자본주의 문화적 상징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서 시작된 것이면서, 부르주아의 문화적 소비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소비를 강화한다는 이중적 양식을 보여준다는 동일한 예술적 이상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1920년대 초반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닉 캐러웨이’는 예일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인물이고, 이제 주식과 채권을 공부하여 자본주의 경제로 편승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이웃에 사는 ‘제이 개츠비’를 알게 되는데, 그는 엄청난 부자로 매일 파티를 열고 있으며, 아무도 그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는 비밀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개츠비’의 파티 속에서 미술작품이나 음악, 책을 매개로 한 지식 등은 모두 진지함이 아니라 ‘개츠비’라는 부르주아의 이상을 실현한 가장 완전무결한 취향을 가진 대상을 의심하기 위한 계기로 활용된다. 파티에서 ‘개츠비’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이 모두 진짜라고 놀라워하는 대목이나 ‘개츠비’의 재즈에 대한 취향을 보여주는 ‘블라디미르 토스토프’의 최신작을 연주하는 대목 역시 마찬가지이다.말하자면, ‘개츠비’는 기대와 의심, 그리고 취향과 감식안이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자본주의적 상징이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그 상징에 매혹되어 그의 비밀스러운 삶을 끊임없이 되풀이해 말하고, 어떤 이들은 그가 갖고 있는 엄청난 자본의 근원이 불법적인 밀수에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자 시도한다. 결국 이 ‘위대한 개츠비’의 서사는 바로 실체 없는 상징과 상징 없는 실체 사이에서 일어난 욕망과 다툼이 초래한 개츠비의 비극 위에 조립되어 있는 셈이었다.이 ‘위대한 개츠비’와 달리 영화 ‘기생충’에는 닉 캐러웨이 같은 ‘진실한 친구’ 혹은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는 관찰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작가의 서사에 대한 관점 내지는 미학의 차이이며, 사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존재가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마치 ‘개츠비’에게 집약되어 있던 자본주의적 취향과 자본력은 각각 나뉘어 그 사이의 물고 물림으로 표현된다. 사실 백 년 사이가 만들어낸 서사의 변화라고 한다면 약소하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우리의 의식 속 어떤 부분은 결코 쉽게 변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이처럼 이 백 년의 시간을 걸쳐 연결된 소설과 영화 속에서 겉으로는 반짝반짝 거리는 상징의 세계는 사실 엄청나게 매혹적이지만, 또한 엄청나게 허약하다. 쉽게 균열을 일으킨다. 이는 ‘자의식’ 같은 것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오랫동안 가져왔던 버리기 어려운 삶의 습관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은 그것을 감각적으로, ‘냄새’로 표현한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개츠비가 남긴 수첩 속에 빼곡하게 적혀 있던 계획표로 표현했던 것과 꽤 달라 보이지만 사실 같은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나 반짝반짝 빛나는 상품의 상징이 호명하는 취향에 매혹되면서도 살아나가는 절박감에 의해 균열과 파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 상징이라는 거미줄에 걸려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07-01

달성공원

대구 달성공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성이면서 보존 상태도 가장 좋다. 삼한시대 부족국가인 달구벌의 옛 성읍 중심지다. 신라시대 때 달구화(達句火) 혹은 달불성 등으로 불린 것은 달구벌에서 유래한 탓이다. 신라시대 경덕왕 때 달벌을 한자명으로 고치면서 대구(大丘)로 바뀌었다. 지금의 대구(大邱)는 조선시대 와서 사용된 명칭이다.1천800년 전 토성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달성공원은 대구의 뿌리이자 본류라 할 수 있다. 고대 시대부터 우리 선조들의 생활 중심지며 터전이다. 달구벌이란 명칭이 지금까지 어어져 온 것만으로 대구의 정체성 등이 집약된 장소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고려 이후 달성 서씨가 대대로 살아 왔으며 조선 세종 때 서씨 문중이 이 땅을 국가에 헌납하였다.1905년 고종 때 공원으로 처음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에 대구신사가 이곳에 들어섰으나 해방 후 곧 철거되었다. 1967년 대구시가 이곳에 새로운 공원조성 계획을 세워 만든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대구의 최초의 공원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시설이 낡아 젊은이들도부터는 비교적 큰 인기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대구의 본류답게 대구를 상징하는 문화와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어 달성공원의 가치성은 높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토성이란 의미와 함께 상주에 있던 경상감영이 대구로 이전하면서 처음 자리를 잡았던 역사성도 간직한 곳이다. 대구읍성이 헐리면서 정문인 관풍루가 이곳으로 옮겨져 와 있다. 달성 서씨 유허비, 동학혁명의 최제우상, 일제시대 순종이 다녀간 비운의 길과 이야기, 키다리 문지기 아저씨, 동물원 등 숱한 사연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곳이다.세계적 명성의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중 두 명이 대구 출신이다. 뷔와 슈가가 바로 그들이다. 그 중 뷔의 고향이 대구 달성공원 인근 동네이며, 그는 유년시절을 보냈던 달성공원에서의 추억들을 SNS에 소개해 화제가 됐다. 최근 일본의 모 잡지는 ‘한국에 가면 꼭 봐야할 BTS성지 순례지’를 소개하면서 대구 달성공원과 영덕군 축산면 경정리 해안 등 우리지역 두 곳을 포함시켰다. 방탄소년단의 인기를 감안한다면 달성공원 등이 관광지로서 대박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같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6-30

길 잃은 ‘황포돛배’

안재휘 논설위원지난 1992년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이면우 교수가 내놓은 ‘W이론’은 반향이 대단했다. ‘W이론’은 한국인의 전통적 기질인 신바람과 흥을 산업현장과 우리 생활에서 불러일으켜 어려운 상황을 획기적으로 돌파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 교수의 저서 ‘생존의 W이론’에 나오는 ‘황포돛대 이론’은 어디로 가는 배인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노만 젓고 있는 어리석은 행태를 통렬히 비판한다.집권 3년 차에 들어선 문재인 정권의 실정 행태가 심각하다. 거의 전 분야에 있어서 난정(亂政)이 확산하고 있다. 문 정권이 핵심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북한 비핵화’를 통한 안보 추구부터 여의치 않다. 북한과 미국 틈바구니에서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지만, 하노이 북미회담 결렬 이후 한국외교는 한마디로 ‘개밥에 도토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미국은 미국대로 흔쾌한 모습이 아니고, 북한은 또 나름대로 서운한 표정이 역력하다. 문 대통령이 자처했던 조정자 역할에서 한계를 드러내면서 모종의 오해를 사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미군 철수’를 포함하는 김정은의 ‘조선반도 비핵화’ 개념을 문 대통령이 미국과 우리 국민에게 ‘북한 비핵화’로 잘못 의역(?)한 업보로 읽힌다.정치 분야는 끊임없는 보복 논란으로 점철되고 있다. ‘적폐청산’의 탈을 쓴 조직적이고 악착같은 정치보복은 이 나라 정치력 진화의 발목을 잡는 참담한 족쇄다. 야당과 유례없는 소통을 통해 새로운 정치문화를 일궈가리라 기대했던 문 대통령의 정치력은 금세 바닥을 드러내고, 70%가 넘는 국민지지율에 만취해 적대 정치의 적폐만 산처럼 쌓아 놓았다.경제는 또 어떤가. 아무런 검증도 안 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희한한 경제정책을 들고나와 최저임금을 왕창 올리는 바람에 근근이 중산층의 꿈을 일궈가던 수많은 뒷골목 영세상인들을 거지로 만들었다. 아르바이트비 인상으로 대한민국 경제 활성화를 꾀한다는 만화에도 안 나올 얄궂은 논리로 나라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고도 반성조차 없이 직진이다.이쯤 되면 야당이 떠야 맞다. 집권당이 연달아 죽을 쑤고 있는 동안 이 나라의 제1야당 자유한국당은 한술 더 떠서 개죽을 쑤고 있다. 수십 년 독과점 지역주의의 뜨뜻한 청백전 정치의 관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듯한 자유한국당의 지리멸렬은 차라리 고질병이다. 서 푼어치 가치도 없어진 극우 꼴통의 논리로 제자리 땅따먹기나 하자는 치들의 악센트만 높아지고 있다.그리 멀리 갈 것도 없다. 섣부른 인적청산에 앞서 ‘가치논쟁’부터 시작하겠다던 김병준 자유한국당 혁신비대위원장 시절의 밑그림을 다시 묻는다. 자유한국당은 지금 ‘수구꼴통’·‘반평화 세력’·‘부패집단’·‘부자들만 편드는 정치인’·‘기득권 수호세력’·‘패거리 정치의 화신’ 따위의 부정적 이미지를 청산했는가.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였던 황교안의 등장은 화려한 변수였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황교안의 안착은 90%가 문재인 정부의 실정에 대한 반사작용에 불과하다. 집권세력의 행태가 싫어서 욕하고 돌아서면 그래도 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긴 했다. 그런데 잠시만 더 바라보면 도대체 뭐 하자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여야를 불문하고 다들 부지런하다. 정부 여당은 포장만 그럴싸한 서툰 정책 속으로 애꿎은 국민만 숱하게 욱여넣어 울리고 있다. 혹시나 하고 돌아보면 제1야당 자유한국당은 더 한심하다. ‘가치논쟁’은 결론을 냈는지 말았는지, 시대정신은 깨달았는지 말았는지 권력 연장에만 혈안이 된 구닥다리 정치꾼들의 욕심 사나운 궤변만 난무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노를 저어대고 있는, 어리석은 지도자들이 이끄는 한심한 ‘황포돛배’ 위에서 대한민국 민초들은 지금 덧없이 표류 중이다.

2019-06-30

먹구름 너머 눈부신 세상을 만나려면

그 해가 반쯤 지나갔을 때, 페스트에 휩싸인 그 도시에 여러 날 동안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오랑 시민들이 특히 두려워하는 것인데 그 이유인즉, 이 도시가 세워진 곳이 고원 위인지라 바람은 아무런 자연적 장애도 만나지 않아 더할 나위 없이 거칠게 거리로 불어치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3부’.알제리 북부 항구 도시 오랑에 페스트가 출몰합니다. 쥐들이 피를 토하며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도시는 페스트의 창궐로 폐쇄됩니다. 도시 안에 갇혀버린 사람들. 카뮈는 이들이 페스트를 겪으며 무기력해지는 참상을 그립니다. 고원 위로 불어와 도시를 관통하는 칼바람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듭니다. 페스트균이 바람을 타고 도심 한복판까지 파고들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지요. 날씨는 삶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맑고 햇볕 따스한 날은 왠지 넉넉하고 기분 좋고 습한 날씨에는 괜히 짜증 납니다.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날씨에 바람이 거칠게 몰아치면 오랑시 사람들은 죽음이 내 차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사회적 날씨(social weather)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물리적 날씨와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좁게는 가정으로부터 직장, 학교, 지역사회, 넓게는 국가, 민족, 인류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내가 속한 사회의 분위기가 끼치는 영향을 날씨에 빗댄 표현입니다. 폭우가 몰아쳐도 번개가 번쩍여도 비행기는 이륙을 강행합니다. 안전하게 이륙만 할 수 있다면, 그래서 먹구름을 뚫고 올라갈 수 있으면 그 위에 눈부신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먹구름 아래는 천둥이 요란하고 비가 쏟아진다 해도 구름 위에는 찬란한 태양, 짙푸른 하늘, 내려다보면 아름다운 뭉게구름이 끝없이 펼쳐지기 때문이지요.사회적 날씨에 휘둘리지 않는 주도적인 삶의 비결은 먹구름 위로 뚫고 올라갈 수 있는 내면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이 내면의 힘을 엘리베이션 파워(Elevation Power)라고 합니다. Elevation에는 ‘위로 올라가다’라는 뜻 이외에도 ‘고결한’이란 뜻도 있습니다. 부단히 내면의 정원을 가꾸는 정성이 이런 고결한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날씨는 변화무쌍하게 계속될 것입니다. 날씨에 영향을 받는 반사적 삶이 아닌, 내면의 가치에 이끌려 살아가는 주도적 삶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먹구름 위 눈부신 삶은 내 선택으로 결정할 수 있는 목적지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6-30

아리,랑

김현욱 시인“조선인들에게 아리랑은 쌀과 같은 존재로 언제 어딜 가도 들을 수 있습니다. 조선인들은 즉흥곡의 명수입니다. 완성된 곡이나 음계 없이도 노래를 아주 잘 합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푸른 눈의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의 말이다. 헐버트는 1896년 2월,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에 문경아리랑을 서양음계로 처음 채보해 공개했다.아리랑은 출처도 기원도 어원도 불분명하지만, 남과 북을 통틀어 모두 60여 종 3천600수가 전한다. 그중에 정선아리랑과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을 3대 아리랑으로 친다. 정선아리랑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오.”, 밀양아리랑은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진도아리랑은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 응 응 아라리가 났네.” 후렴구가 반복된다.정선아리랑은 강원도 대표 민요로 ‘아라리’라고도 불리며, 메나리조 가락의 애잔한 후렴구가 특징이다. 밀양아리랑은 경상남도 지방에서 전승되며 빠르고 경쾌한 세마치 장단이 특징이다. 진도아리랑은 전라남도 일원에서 불리며 육자배기 토리로 기교성이 뛰어나다. 이처럼 아리랑은 각 지역마다 장단과 구성음이 다르지만, 후렴구는 기억하기 쉽다. 아리랑은 두 줄 시에 두 줄 후렴만 붙이면 어떤 가사든 아리랑이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아리랑과 관련된 해프닝 하나. 대학 시절 국악 수업 중에 장구 치면서 정선아리랑을 부르는 실기평가가 있었다. 학점 F를 서슴없이 날리는 괴짜 국악 교수라 다들 긴장했는데 나 역시도 마른 침을 삼키며 장구채를 집어 들고 정선아리랑을 부르려 했다. 그런데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어이없게도 밀양아리랑이었다. 교수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매천야록’에 따르면 고종 때 궁궐에서 아리랑을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각 지역의 아리랑은 경복궁 중수 작업 동안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전국 각지에서 부역하러 온 민초들이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아리랑을 불렀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영화감독이자 배우였던 나운규(1902∼1937)는 영화 ‘아리랑’을 제작했다. 1926년 단성사에서 첫 상영을 했는데,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항일정신과 민족의 애환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리랑’의 주제가로 쓰였던 아리랑은 본조아리랑이었다. 강원도 지역의 ‘자진아라리’의 곡조를 경기도식 ‘경토리’로 바꿔 표현한 것이다. 서양 음악을 공부했던 김영환이 서양식 오음계로 아리랑의 곡조를 편곡했다. 오늘날 가장 대중적으로 불리는 아리랑이다. 아리랑의 ‘아리’는 과연 무슨 뜻일까? 성기완 시인이 한겨레 신문(2016년 5월 21일)에 발표한 아리랑의 ‘아리’ 해석 시도가 이채롭다. 성기완 시인은 러시아 바이칼 호수의 알혼 섬, 몽골 초원, 백두대간 등지에 발견된 여러 문헌에서 ‘아리’의 기원을 찾았다. 광개토대왕릉비에 한강은 ‘아리수(阿利水)’라고 적혀 있다. ‘아리’는 ‘크다’는 뜻의 옛 우리말이라고 한다. 몽골어로 ‘아리’는 ‘깨끗하고 성스러운’이라는 뜻이란다. 성기완 시인은 ‘아리땁다’, ‘아리다’, ‘아름다움’도 ‘아리’의 파생적 쓰임이라고 봤다. 아리랑의 ‘아리’는 ‘깨끗하고, 성스럽고, 존재하고, 아름답고, 아프고(스리고), 알고, 깨닫고, 느낀다’라는 뜻을 지닌 실로 어마어마한 말이다. 오늘날 아리랑은 응원가부터 합창, 관현악 등으로 다양하게 연주되고 있다. 아리랑은 ‘아리’가 가진 넓고 깊은 뜻처럼 변화무쌍한 변주와 편곡이 가능한 열린 노래이다.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수는 약 250만 명, 2028년에는 5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한다. 단일이 아닌 다문화 대한민국에서 ‘아리랑’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아우르고 달래줄까?

2019-06-30

북미 3차 정상회담이 성공하려면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한 노딜(no deal)회담으로 끝나버렸다. 트럼프보다는 김정은의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트럼프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프로그램을, 김정은은 영변핵시설의 폐기만으로 대북 제재 해제를 요구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북미는 종래와 달리 상대에 대한 비난이나 책임전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양 정상은 언론을 통해 상대에 관한 호의적 입장을 표출하며 대화의 모멘텀을 이어갔다.트럼프는 지난달 29일 G20정상회의에서 트위터를 통해 29~30일 방한 기간 중 방문하는 비무장지대(DMZ)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고 싶다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30일 비무장지대(DMZ)에서 극적인 만남을 가졌다. 트럼프는 이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남쪽에서 김정은에게 워싱턴을 방문해달라고 말했다.물밑에선 북미 실무회담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3차 북미 회담이 성공하려면 북미는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여야 한다. 그것이 3차 북미회담을 풀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하노이 회담은 기본적으로 비핵화에 관한 실무적 합의 없이 정상 간의 합의에 맡긴 회담이다. 북한의 다급한 제재해제 요구와 미국의 완전 비핵화 요구가 합의를 구하지 못한 것이다.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폐기만으로 대북 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미국은 영변 핵시설 폐기외의 소위 플러스 알파(+α)를 요구한 결과이다. 이 회담은 실무진의 합의 없는 톱다운(top down) 방식의 정상회담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트럼프가 북한의 요구를 거부한 배경에는 미국 내 강경 보수층의 반대 압력이 크게 작용했다. 김정은 역시 정상 간의 ‘통 큰 일괄 타결’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그러나 북미 간 3차 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내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트럼프의 초미의 관심은 내년 대선 승리에 있다. 그는 공화당 내의 대북 강경 매파뿐 아니라 보수성향의 군산복합체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트럼프가 임기 중 완전하고 불가역의 북핵문제를 해결한다면 대선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것이다. 이것이 트럼프가 3차 정상회담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북한 김정은 역시 북미 회담 재개를 바라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김정은이 선포한 ‘경제 발전 노선’은 미국의 강력한 대북 제재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 과정이 지속될수록 김정은은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미국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제재라는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트럼프가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을 향해 북의 완전한 비핵화만이 북한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고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던지는 이유이기도 하다.우리 정부는 양측의 입장을 조율하는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 북·중 회담에서 중국도 휴전 협정의 당사자로 핵 문제 해결의 중재자로 나섰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 모양새이며 북미 타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돌발 변수이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조치를 전제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확고한 안전부터 담보해주어야 한다. 이번 회담이 성사되면 북한이 주장하는 톱다운 방식보다는 실무회담 중심의 바텀업(bottom up)방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북미는 ‘북한의 비핵화 실질 조치→국제사회 제재 해제·남북 경제협력 활성화→동북아 공동번영’이라는 이정표에 합의하여야 한다. 북미회담의 합의는 여전히 어려운 과정이며 당사국의 인내가 요구된다. 북미 정상 회담이 성공하려면 양국의 신뢰부터 확실히 담보되어야 한다.

2019-06-30

‘기생충’의 상징물

내 봉준호 감독 첫 영화는‘괴물’이었다. 아니었나?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살인의 추억‘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향숙이 이뻤다.”가 재밌기는 했지만 무엇을 겨냥한 것인지가 썩 명료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마더’는 어땠던가? 지인들 중에는 주인공의 연기 때문에 너무나 몰입했다는 의견들이 있었지만, 나는 왜? 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모성애의 덫을 그린다고 보면 되지만 이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정곡을 찌른 듯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나친’ 그로테스크 때문일까?‘괴물’에서는 한강에 괴물을 살게 하는 원인 물질에 관한 서두 부분이 썩 마음에 편치 않았다. 미군 부대에서 어떤 용액을 한강으로 통하는 하수구에 흘려 넣는데, 이것이 괴물을 낳았다면, 미군이나 미국이 한반도를 주름잡는 ‘괴물’의 실체라는 의미일까? 아니, 그냥 유머로 넣은 것이다? 원인이야 어쨌듯 그 후가 중요한 것 아니냐? 상황 설정을 위한 고심책이었다?봉준호 감독의 알레고리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점이 있다. 래디컬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한국 사회의 실체로부터 약간 비껴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으로 거장을 비판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황금종려상 ‘기생충’에서 기택의 아들 기우는 과외를 소개시켜 주는 친구로부터 수석 하나를 얻는다. 무거운 돌이다. 영화 앞부분에 엉뚱하게 수석이 나오니 이건 분명 알레고리나 상징으로 해석해야 할 물건이다. 나중에 수해가 나서 반지하방이 전부 물에 잠길 때 기택의 식구들은 저마다 자기한테 중요한 걸 하나씩 들고 나오는데, 기우는 다른 것 아니라 이 무거운 수석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수석은 어떤 의미일까. 탐스러운 돌인가? 아름다운 돌인가? 물에 잠긴 반지하방에서 기우는 이 수석을 들고 나와 그것으로 동익의 비밀 지하실에 숨어살던 사내와 그를 남편으로 여겨 살던 전직 가정부를 살해하려 한다. 그러면 자기 식구들의 ‘기생충’ 생활이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일까?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왜 그러한 무모한 계획을 감행했던 것일까? 이 영화는 하루낮의 난장판 살해극이 벌어진 이후에도 엔딩이 내려지지 않는다. 기우는 어쩐 일인지 집행유예로 나오고 아버지 기택이 다시 동익 집의 지하실에 숨어 살며 아들을 향해 모스 부호를 띄우고 그것을 기우가 받아낸다. 살해극 이후의 스토리 전개는 현실성 전혀 없지만 그것을 탓할 여유는 없다. 또 알레고리, 상징 영화에서 무슨 현실성을 찾나? 좀더 그럴싸 했다면 더 좋아겠지만 말이다.그보다 결국 무슨 수단, 방법을 썼는지 돈을 벌어 그 집을 사 아버지와 해후하는 마지막 장면은 일종의 원한 감정, ‘르상티망’의 ‘완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럼으로써, 기묘한 수석은 이 원한감정의 상징물의 위상을 확인하게 된다.나는 2018년 10월에 ‘한국의 물질주의에 관하여’라는 글을 쓰면서 물이 차오르는 반지하방의 책장에서 파스칼의 ‘서한집’한 권을 들고 나왔다는 어느 시인의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도 숨겨 놓은 금덩이를 가지고 나와야 하지 않았을까? 대신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금욕적으로, 책 한 권을 들고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기생충’의 엔딩보다 이 시인의 장면이 더 좋다.한국의 예술은 지금 젊은 작가들의 소설도 거장들의 영화도 물질주의적 상상력에서 충분히 자유롭지 못한 것도 같다. 물론 이 말은 ‘기생충’의 성취를 부당히 낮춰 보겠다는 뜻은 아니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6-27

기초연금제도 시행 5주년에 즈음하여

정경화 국민연금공단 포항지사장OECD가 발간한 ‘한눈에 보는 연금 2017(pensions at a Glance 2017)’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45.7%로 2위 라트비아(26.5%)와 전체 OECD 회원국 평균 14% 수준을 상회하는 독보적인 1위이다.노인 자살률 또한 10만명당 54.8명으로 OECD 1위를 기록 중으로 급속한 노령화와 함께 노인문제 역시 심각해지고 있는 셈이다.지금의 어르신들은 우리나라가 어렵게 살던 시절 고도성장을 이끌며 젊음을 바쳤으나, 가족 부양과 자녀 교육 등으로 정작 자신의 노후에는 신경 쓰지 못한 세대이다. 핵가족화에 따른 사회 환경의 변화와 시간·경제적으로 어려운 젊은 세대에 과거와 같은 부모 봉양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안정된 노후보장을 위해 1988년부터 국민연금제도가 시행됐지만 제도가 시행된 지 오래되지 않아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못한 경우가 많고 국민연금을 받더라도 가입기간이 짧아 충분한 연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다행히 국가에서 2008년 1월부터 시행해 온 기초노령연금제도를 대폭 손질해 2014년 7월부터 기초연금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기초연금제도 도입 당시 424만명이던 수급자는 지난해 연말 512만여명으로 크게 늘어났고, 지급금액도 2019년 4월부터 일반수급자는 최대 25만3천750원, 소득 하위 20%인 저소득수급자는 30만원으로 인상됐다.현재 국민연금공단에서는 기초연금제도에 대한 홍보와 신청을 안내하고 있다.만 65세가 도래한 어르신에 대한 서면과 전화 안내 및 모바일 안내를 신청했으나 탈락한 분에 대한 맞춤형 개별상담, 거동불편이나 생계 등으로 신청이 어려운 어르신들에 대한 찾아뵙는 서비스를 실시하고, 단전·단수 가구, 거주불명등록자 등 기초연금이 꼭 필요한 어르신을 발굴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기초연금 시행 5주년을 맞이해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공단의 일원으로서 기초연금이 국민연금과 함께 노후소득보장의 근간이 될 수 있도록 찾아가는 국민연금, 함께하는 국민연금으로 국민의 복지증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2019-06-27

망전필경(忘戰必傾)

영국은 우리의 현충일을 포피 데이(Poppy Day)라 부른다. 포피란 길고 가느다란 줄기 끝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개양귀비 꽃을 말한다. 개양귀비는 중국에서는 항우의 애첩 우미인의 무덤에서 피었다 하여 우미인초라 한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수많은 젊은이의 목숨이 사라져간 플랜더스 벌판에 핀 개양귀비의 꽃에서 이름을 따와 기념일에 새겼다. 이 날은 모두가 꽃을 가슴에 달고 전쟁 영웅의 정신을 추모한다.나라마다 현충일을 정해 엄숙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는 것은 국민에게 나라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 있는 공동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조선시대도 공신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로 공훈부를 두었다. 시대에 따라 나라마다 공훈의 의미는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6.25전쟁이 끝난 후 전사한 전몰장병 합동 추도식을 거행하다 1956년부터 국가 기념일을 지정했다. 이날만큼은 모두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던졌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호국정신을 추모하고 기리자는 뜻이다.예로부터 우리의 조상은 24절기 중 9번째 절기인 망종(芒種)일을 곡식의 종자를 뿌리기에 가장 좋은 날로 꼽았다. 좋은 날이라 하여 이때쯤 제사를 지내는 풍습도 많았다. 망종은 음력 5월로, 양력으로는 대체로 6월 6일 무렵이다. 현충일이 제정된 것도 망종날을 기준으로 삼았다.호국보훈의 달인 6월도 다 지나간다. 이 달은 현충일과 6·25 한국전쟁, 6·29 제2연평해전 등이 있은 달로 우리가 이런 일로 희생된 많은 이들의 호국정신을 깊이 새겨야 하는 달이다. 그러나 이러함에도 올 호국보훈의 달은 유난히 안보를 우려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해 국민의 걱정을 키웠다. 김일성 훈장을 받은 김원봉 논란이나 최근 일어난 북한 어선의 삼척항 접안 사태에 대한 불안감이 이런 것들이다.북한과 중국은 시진핑의 방북을 계기로 새로운 밀월시대를 선언했다. 안보 불안을 두고 논란을 벌일 만큼 우리의 처지가 여유롭지 않은 때다. 전쟁을 망각하면 나라가 위태롭다(忘戰必傾)는 말 되새겨야 할 때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6-27

합종연횡, 비방(秘方)아니다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합종연횡(合從連衡)은 중국 전국시대의 최강국인 진(秦)과 군소국가인 연(燕)·제(齊)·초(楚)·한(韓)·위(魏)·조(趙)의 6국 사이에 쓰였던 외교 전술이다. 합종과 연횡의 두 외교정책을 합한 말이다. 이 말을 처음 쓴 것은 귀곡자의 제자인 소진과 장의였다. 소진은 우선 연을 비롯한 5개국에 남북으로 합작해서 방위동맹을 맺어 진나라에 대항하는 것이 공존공영의 길이라는 ‘합종책’을 들고 나왔다. 소진은 ‘진 밑에서 쇠꼬리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닭의 머리가 되자’고 설득, 6국을 종적으로 연합시켜 서쪽의 강대한 진나라와 대결할 공수동맹을 맺도록 했다. 이것을 합종이라 한다. 그는 육국의 군사동맹을 성공시킨 다음, 그 공로로 육국의 재상직을 한 몸에 겸하고, 자신은 육국의 왕들이 모인 자리에서 의장 노릇을 하게됐다.위나라 장의는 합종은 일시적 허식에 지나지 않으며, 진나라와의 연합책만이 안전한 길이라고 강조하며, 6국을 돌며 연합을 설득, 진이 6국과 개별로 횡적 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장의의 책략이 소진의 합종책을 사실상 깨뜨린 셈이다. 이것을 연횡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은 합종을 깬 뒤 6국을 차례로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했으니 힘이 약한 국가가 강대국에 맞서려면 힘을 모으는 게 순리임을 보여준다.우리의 정치상황을 옛 춘추전국시대에 빗대보면 무척 흥미롭다. 더불어민주당이 집권여당이니 당시의 강대국인 진나라에 해당할 것이고, 자유한국당이 제1야당이니 군소나라로서 합종책을 통해 나라를 보전하려는 연나라로 볼 수 있겠다, 그외 정당들은 이리저리 휩쓸리는 여러나라에 해당한다. 다만 지금 형국은 군소국들이 힘을 합쳐 강대국에 대항하는 합종의 형세가 아니라 강대국과 몇몇 군소국가간 연횡이 먼저 이뤄진 모양새다. 따라서 한국당 입장에서는 하루빨리 다른 소수정당과 손을 잡고 합종책을 성사시켜야 할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여야4당이 패스트트랙을 위해 먼저 연합해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을 왕따시키면서 지금의 국회파행사태가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돌이켜보면 자유한국당은 지금도 얼마든지 국회에서 야당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데, 자꾸만 장외로 치닫고 있는 건 아닌가. 우리는 삶을 살면서 대륙을 가로지르는 긴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인생의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차창밖으로 건널목에서 손을 흔드는 아이들, 멀리 보이는 언덕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 소떼들, 발전소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줄지어 늘어선 옥수수밭과 밀밭, 평지와 계곡 등을 감상에 젖어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온통 쏠려있는 것은 바로 종착역이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역에 도착하기만 하면~” “내가 열여덟이 되기만 하면~” “은행에서 빌린 돈을 다 갚기만 하면~” 그리고 “직장에서 은퇴하기만 하면, 그때부터 난 멋지고 행복한 삶을 살거야!”라고 다짐한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그런 장소는 없다. 삶은 매 순간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 자유한국당 역시 마찬가지다. “보수대통합만 되면~” “총선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만 하면~” 그리고 “우리가 정권을 잡기만 하면 이 나라를 더 잘 살 수 있도록 만들수 있어!”라고 외친다. 과연 그럴까. 누가 그말을 믿겠나. 오히려 현재 제1야당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쉽다. 파행국회를 접고, 국회안에서 국민의 뜻을 전해야 한다. 정부여당이 자기 환상에 빠져 독주하거나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지 않도록 견제해야한다. 앞뒤 맞지않는 경제정책에는 새로운 대안을 내놓으며 권고하는 모습도 보고싶다. 그런 야당이 되길 바란다.정국구도를 바꾸는 합종연횡이 하나의 수단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결코 이 나라, 이 국민에게 비방이 될 수는 없다.

2019-06-27

포스코의 기업정신과 조선화인열전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오늘부터 장마가 시작될 것이라는 예보가 진작부터 있기는 하였으나 장맛비는 예상보다 일찍 시작되었고, 포스코갤러리를 향하여 형산대교를 건너 갈 즈음에는 운전이 불편할 정도로 많은 양의 비가 쏟아졌다.그래도 마음은 조선의 명작들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도 정겹게 느껴졌다.포스코 창립 51주년을 기념하여 서울 포스코미술관에서 고미술특별전을 열었는데, 창립 반세기를 지나 미래 백년기업을 향한 재도약의 원년을 기념하고자 마련한 것이다.기업시민을 표방한 포스코의 어젠다와 청렴과 여민(與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조선의 선비정신이 서로 맞닿아 있음을 기획의 축으로 심혈을 기울인 전시였다.이 특별전에 출품된 80여점의 작품 중 백미 45점이 ‘조선화인열전’ 이란 타이틀로 재구성되어 포항에서 전시된다.포항의 시 승격 70주년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아 포스코갤러리에서 포항시민을 위하여 전시를 마련하였으니, 조선시대의 진품명작을 우리고장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경북에서는 처음 열리는 귀한 전시에 설레는 마음으로 빗속을 달려 개막식에 참석한 것이다.우리역사에서 미술문화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조선후기의 대가 겸재, 현재, 관아재 등 삼재와 단원, 혜원, 오원의 삼원, 그리고 추사, 호생관, 석파에 이르기까지 거장들의 진품명작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이 포스코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실현되었다.지방에서는 처음 열리는 이 전시의 성사를 위하여 포스코갤러리 담당자들이 소장자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였고, 효과적인 전시를 위하여 벽면을 보강, 재구성하였음은 물론 보안을 위한 CCTV 20개를 추가로 설치하였고, 인력을 보강하여 휴일에도 경비원을 배치하기로 하였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가입하는 보험료만도 엄청난 수준이다.이 작품들은 주로 개인소장인데, 소장자들은 임대료보다는 포스코의 기업정신과 공신력, 그리고 담당자들의 정성에 동의하여 흔쾌히 임대에 응했다고 한다.전시장을 한 바퀴 돌아본 감동은 애초의 큰 기대보다도 훨씬 더 컸다.중심에 자리 잡은 추사의 ‘연호사만물지종’이라 쓴 작품은 추사체 특유의 힘과 창의적 구성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걸작이었으며, 중국그림의 임·모에서 벗어나 조선의 그림을 창시한 겸재의 ‘계산서옥도’ 진품이 발길을 오래 붙잡았고, 당대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불리던 강세황의 담백한 ‘산수’와 ‘포도’그림은 만나기 어려운 귀한 작품이었다.석파의 예술성 넘치는 편액 ‘취은산방’은 대원군이 정치인이기 이전에 분방한 예인이었음을 웅변해주었고, 다산의 놀라운 작품은 당대의 대학자일 뿐 아니라 뛰어난 명필이었음에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어 작품 하나하나마다 발길을 떼기가 어려웠다.추사의 걸작 ‘부작란’을 연상케 하는 아들 상우에게 시범을 보인 난(蘭) ‘시우란(示佑蘭)’이 중국 특별전에 출품되어 볼 수 없게 된 아쉬움도 이 전시의 스토리를 더욱 풍성하게 한 요소가 되었다.이 전시는 7월 30일까지 이어지며, 이 기간 동안 ‘옛 그림 이야기’ 등의 내용으로 시민강좌도 개최할 예정이라 하니 문화도시를 지향하는 포항시민 모두가 감상하여 ‘법고창신’하는 문화시민의 소양을 갖추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2019-06-27

졸업식 날 비가 안 오는 이유

1979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페어(PEAR)연구소에서는 사람의 의식이 물질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하는 주제에 대해 흥미로운 연구를 시작합니다. 연구는 프린스턴 대학의 로저 넬슨(Roger Nelson) 박사의 호기심에서 비롯합니다.로저 넬슨 박사는 대학 졸업식날만 되면 흐렸던 날씨도 이상하게 갑자기 맑아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이런 현상에 호기심을 품고 넬슨 박사는 최근 30년 동안 프린스턴 대학교의 졸업식 당일과 전날, 졸업식 다음 날의 날씨 통계치를 조사합니다.30년 동안 프린스턴 대학의 졸업식 당일에 대학과 인접한 6개 타 도시의 강우 확률은 33%였습니다. 하지만 지역의 중심에 있는 프린스턴 대학 교정에 비가 내린 경우는 28%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더 이상한 것은 졸업식 전날에는 비가 왔더라도 졸업식 당일에는 돌연 비가 그친 경우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한 예로 1962년에는 졸업식을 마치자 마자 그 순간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졸업식이 끝날 때까지 참고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지요. 연구소가 내린 결론은 수천 명의 학부모와 학생들이 “날씨가 좋기를 진심으로 바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소망을 품으면 실제로 그것이 현실로 나타날 확률이 높아집니다. 우리가 행하고 표현하는 감사나 긍정의 언어들은 실제로 파동(wave)이고 에너지(energy)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프린스턴 대학 PEAR연구소의 해석입니다.80세가 넘은 한 소설가는 닭에게 실험을 했습니다. 이유는 어느 날부터 닭들이 알을 잘 낳지 않기 때문이었지요. 금순이라고 이름 붙인 닭에게 매일 “감사해요. 금순씨” 이렇게 말합니다. 진심을 담아 미소를 머금은 채 말입니다. 그러자 금세 변화가 찾아옵니다. 하루 건너 알을 낳던 금순씨가 매일 알을 낳기 시작한 겁니다. 오순이라 이름 붙인 닭은 3일에 하나 낳던 것이 점점 주기가 짧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소설가는 말합니다. “예쁜 이름을 붙인 닭들이 더 큰 알을 낳아요!”2100년 전, 로마의 키케로는 프린스턴 대학교 실험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모든 미덕 중 최고이며 다른 모든 미덕의 뿌리이다.”우리가 사는 세상은 경이롭습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감사. 내 마음이 스치는 곳마다 감사. 손길이 닿는 곳마다 따스한 감사. 오늘 하루는 감사라는 에너지로 충만한 멋진 날로 만들면 어떨까요?/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6-27

21세기 대중과 지식인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이분법은 단순하되 힘이 세다. 나와 너, 친구와 적, 이익과 손해로 극명하게 갈리는 이항대립은 선택장애를 일소한다. 기원전 6세기 무렵 낮과 밤의 주기적인 교체에 기초하여 광명과 암흑, 선과 악,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를 창안한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가 배화교(拜火敎)를 창시한다. 배화교에서 구원은 선신과 악신의 대결로 실현된다.1만2천년 후에 선신(善神) 아후라 마즈다와 악신 앙그라 마이뉴가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 선신이 승리한다. 아후라 마즈다를 따르는 사람은 구원받아 천국에 태어나고, 악신의 추종자는 버림받는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는 훗날 성서에서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대결로 변신한다. 이분법이 종교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다.이분법은 선택지를 둘로 제한함으로써 양자택일의 난제(難題)를 전제한다. 양극단의 충돌과 대결이 발생하면 하나뿐인 출구 때문에 극한의 대립과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 점에서 제3의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놓는 변증법이 매력적이다. 테제를 설정하고, 그것에 반하는 안티테제를 충돌시켜 양자를 지양(止揚)하는 진테제를 만들어내는 사고방식. 세계를 이렇게 이해하면 세상 모든 것은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것으로 다가온다.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민중주의(民衆主義) 내지 민중사관이 추동해왔다. 특정한 개인이나 엘리트집단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가 사회발전과 변화를 주도한다는 이념지향이 민중주의 내지 민중사관이다. 1987년 6월 항쟁에 등장한 넥타이부대가 본보기다. 어떤 이념이나 지도자에게 인도된 사람들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으로 모여든 30, 40대 회사원들이 주축이 된 넥타이부대. 그들이 6.29를 이끌어낸 장본인일 것이다.그들이 출현하기 전에 숱한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투쟁과 희생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독재정권을 타도하려는 열망으로 경찰력과 맞선 넥타이부대의 위력도 잊어서는 안 된다. 불과 30년 전에 일어난 극적이며 감동적인 현장을 추억하는 이가 아직도 적잖을 것이다. 사회학자와 정치학자들은 그런 무명(無名)의 다수를 ‘민중’으로 규정한다.요즘에는 민중이라는 표현이 흔치 않다. 특정 이념이나 정치적인 지향으로 굳어진 사람들을 가리킬 때 민중이라는 말을 쓰는 것 같다. 이념이나 정파에 얽매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킬 때는 대중(mass)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대중은 특별한 형체를 가지지 않은, 특정(特定)하기 곤란한 다수의 사람을 의미한다. 21세기 대중은 20세기의 대중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의무보다 권리를, 역사의식보다 편의주의를, 영원보다 지금과 여기를 추구한다. 목전의 욕망과 목표에 충실하지만, 각자에게 부여된 책임과 공동체 의식은 희박하다. 독서와 사색에 인색하되 물질적 쾌락추구에 몰두한다. 문명의 발생과 진화원리에 무지하고 둔감하지만, 문명이 가져다준 결과물에 환호작약한다. 21세기 대중에게 스마트폰을 제거해보라. 곧바로 폭동이 발생할 것이다. 세계 전역에서!!문제는 21세기 한국의 대중이 지식인의 세계에 자유자재로 틈입(闖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정분야의 전문가를 자임하는 판검사와 정치인 같은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대중의 길을 걸으면서 여타 지식인 집단과 스스로 격절(隔絶)되고 있다. 격절이 일상화하면서 분야별, 부문별로 단절과 간극(間隙)이 생겨나고, 그 빈자리를 대중이 점령하는 형국이다.지식인이 대중을 추종하고, 대중이 지식인을 조종하는 나라의 미래는 없다. 대중추수주의와 포퓰리즘에 사로잡힌 일군의 어리석은 대중 정치인들의 뼈아픈 성찰이 절실한 시점이다.

2019-06-26

한반도 미래를 위한 한국 기독교의 소명은

박준섭 변호사필자는 지금부터 10여 년 전에 영국이 낳은 세계적 신학자 니콜라스 토마스 라이트의 ‘역사적 예수의 도전’이라는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책의 결론부에서 근·현대가 끝이 나고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는데 이미 세속화된 세상은 더 이상 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하지만 종교개혁시대에 루터와 캘빈 등 개신교도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 아래 새롭게 성경을 해석하면서 근대세계를 설계하고 만들어 가는데 기여했던 것처럼 자신은 앞으로 곧 다가올 미래의 새로운 세상에 기독교인이 다시 기여하기 위해 ‘1세기 기독교’로 돌아가 성경을 다시 읽는다고 했다.필자는 그때 새로운 문명사적 전환이 오고 있다는 것과 기독교가 그것을 준비한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일상어처럼 돼 버렸고 4차 산업혁명이 가지고 올 문명사적 변화, 곧 근·현대가 끝이 나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것이 이제는 당연하게 들리는 시절이 됐다. 최근에 그는 바울신학을 다룬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두 권의 대저서를 세상에 내놓았다.필자는 그가 1세기 기독교로 돌아가 새로 성경을 읽으면서 얻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독교적 비전을 무엇인지 알려고 기다려오던 중이었다. 그는 미래를 위한 바울의 의도들을 헬라어로 카탈라게, 즉 화해라는 단어로 제시했다. 그는 고린도후서 5장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기독인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하고 서로, 그리고 피조세계와 화해하라고 하는 임무를 맡겼다고 했다.종교개혁 이후에 기독교는 인본주의와 협력과 경쟁을 하면서 근·현대를 만들어 왔다. 그들이 만든 세상은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개인의 발견이었고 이를 근거로 주체인 자신들을 넘어 세계로 확장하는 역사를 만들어 왔다. 이 과정에서 서구는 계몽주의·자본주의를 확장하기 위해 식민지 경쟁을 하다가 1,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자본주의, 사회주의가 냉전의 대립 속에서 경쟁했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에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도 민족과 종교갈등으로 여전히 세계는 곳곳에서 전쟁 중이다. 세계는 이제 다가올 문명이 타자를 배제하면서 자기를 확장해 나가는 문명은 아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과연 한국기독교 교회는 다가올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대한민국과 세계에 어떤 기여를 하여야 할까? 한국 기독교는 먼저 어떠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화해의 정신으로 남한의 좌우대립, 진보·보수의 분열과 갈등을 멈추게 하는데 헌신해야 한다. 나아가 반드시 남북한이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것을 성취해 냄으로써 다음 문명의 비전이 화해라는 것을 세계에 분명히 제시하는 선도국가가 돼야 한다.이는 한반도가 지난 세기에 식민지였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경험을 동시에 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남한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대표되는 근대화를 이뤄낸 곳이다). 또 그 이념갈등으로 전쟁까지 하고 이념의 대립이 끝이 난 시대에 아직도 한반도 이념으로 분단돼 근대의 이상과 모순과 미래의 가능성을 모두 품고 있는 용광로와도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북한이 평화적 통일을 이루는 사건이 과거가 지나가고 새로운 미래가 도래했다는 하나의 문명사적 사건이 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는 새로워진 기독교 정신으로 여기에 기여해야 한다.한기총의 전광훈 목사에 대한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기독교가 이 미래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아주 많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근대 초기에 한국의 기독교는 민족의 희망 공간이었다. 그 곳에서 민족의 지도자들이 키워졌고 그들이 우리 근대를 만드는 중심축들이 됐다. 한국 기독교가 가진 모든 누추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배세대들이 그들 시대에 기여한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위해 한국 기독교가 더 위대한 기여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2019-06-26

인간 관계의 지혜

아기의 해맑은 미소를 떠올려 보세요.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을 보면서 왜 우리는 즐거운 감정을 느낄까요? 상대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기가 자라서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빛나게 할까 라는 기대감은 속으로 누구가 갖고 있겠지만, 당장에 이 아기가 어떤 행동으로 나를 만족시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서로 행복한 거지요. 아기도 방긋 웃고 나도 웃으며 화답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욕심이 끼어들지요.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수많은 비교와 기대가 매일 마음을 파고듭니다. 해맑은 미소와 행복감 대신 좌절과 비교를 맛보기 시작하지요.직장 생활에서도 정작 어려운 것은 일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과 벌어지는 관계가 대부분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관계’는 어려운 것일까요? ‘기대감’ 때문입니다. 관계가 어려울 때는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주위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높은 기대치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는 ‘상대가 내 기대를 충족시켜 줄 것이라는 심리적 계약’을 맺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기대가 충족이 되지 못할 때 관계 가운데 실망감이 스며들기 시작하고 더 이상 신선함도, 발전도 찾기 어렵습니다. 능력에 벗어나는 일을 장담하거나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함부로 꺼내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을 때 애매모호한 태도로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행동은 지혜롭지 못합니다.나 또한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관계가 악화되는 이유는 상대가 나에게 실망하거나 내가 상대에게 실망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원인은 각자의 기대치에 서로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상대에게 내가 무언가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가장 위험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순간 상대방 행동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게 마련이고 이는 곧 실망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기대치를 조금만 낮추면 어떨까요? 사소한 말과 행동에도 긍정적인 느낌을 받게 되고 좋은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득도의 경지에 이른 분들은 인간 관계에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겠지요. 우리도 이런 태도로 담담하게 살 수 있다면 작은 손길과 눈빛 하나에도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오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지혜는 아낌없이 베풀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깨끗한 마음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6-26

혼밥

강길수 수필가“응.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와!”잠자리에서 비몽사몽간에 아내에게 대답한 말이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미안하다. ‘일찍 일어나 함께 아침을 먹고, 현관에서 잘 다녀오라고 손짓이라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오늘부터 한 주에 두세 번 아침에 혼밥을 해야 된다는 것이 싫은 마음도 인다. 아내가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오늘따라 더 경쾌하다.지난달, 웬일인지 아내가 처음으로 시니어클럽에 아침 아르바이트를 신청했다. 신청자가 많아 선발될지 모르겠다고 걱정도 했다. 다행히, 걸어서 반시간 정도 걸리는 초등학교의 등교시간 횡단보도 안전도우미로 선발되었다. 오랜만에 얼마간의 용돈이라도 스스로 번다는 사실에, 그녀는 속으로 신이 난 모습이다. 좋은 기운이 향기처럼 퍼져 오는 것만 같아, 나도 덩달아 기분 좋았다.올봄 작은며느리가 오랜 기간 애쓰고, 기도하고, 기다린 끝에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낳았다. 온 가족에게 내려온 하늘의 은총이기에, 더할 수 없는 기쁨이 되었다. 이로써 우리 부부는, 곧 두 돌을 앞둔 큰며느리가 낳은 개구쟁이 손자까지 두 손주를 두게 되었다. 그러니 아내는 요즈음 더 기뻐 보인다. 자기가 번 돈으로, 손자들에게 무엇이라도 해줄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런가 보다. 아내는 아침형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단다. 반면 나는 학교나 군대, 직장의 사정에 따라 아침형, 저녁형 사람으로 변모하며 살아왔다. 요즈음은 출근이 늦어 저녁형 사람으로 산다. 인터넷 서핑이나 글 관련 자료들을 찾다 보면, 자정을 넘기기가 일쑤다. 늦는 날은 심야 두세 시경에 잘 때도 있다. 그러니 아내처럼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아침밥상을 식탁에 차려놓고 나서며, 아내는 내게 이것저것 어떻게 챙겨 먹으라고 당부한다. 주방 소리에 새벽마다 선잠을 자므로, 건성으로 대답한다. 습관이 되어 일어나는 시각은 거의 같다. 밥을 푸고, 국을 떠 혼밥을 시작한다. 아내가 추가로 챙겨 먹으라는 내용은 잊거나, 기억나도 개의치 않는다. 혼밥을 마치면 가능한 한 설거지를 하지만, 시간이 늦는 날은 싱크대에 그냥 둔다. 한 주간에 두세 번 혼밥을 하기에, 혼밥족(族)이나 혼밥러(er)라고 말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것도 차려놓은 밥상을 먹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돌아보면, 내 혼밥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오른다. 농번기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떤 날은 어른들이 다 들에 가고 없다. 할 수 없이 엄마가 차려놓은 밥을 혼자 먹었다. 바로 혼밥이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된 타향살이는 자주 혼밥을 하게 했다. 더구나 고등학교 때는 자취를 했으니, 친구와 함께 한 기간을 빼면 모두가 혼밥을 한 기간이 된다. 이때는 혼밥뿐 아니라 혼국수, 혼수제비도 한 적이 있다.‘혼자 밥을 먹거나, 혼자 먹는 밥’을 줄인 말이 ‘혼밥’이다. 인간의 혼밥 역사는 원시시대부터라 싶다. 공동체 생활 속에도, 혼자 밥을 먹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 이후 모든 세대에 혼밥은 있었을 테니, 새로운 일이 아니다. 한데, 왜 근년에 와서 우리 사회는 혼밥, 혼밥족, 혼밥러(er), 프로혼밥러(professional혼밥er) 등 그 파생어들이 유행, 이슈화되며 새 문화 트렌드라고 법석을 떨까. 물론, 혼자 사는 세대가 늘어난 탓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래도 언론 특히, 티브이 ‘먹방’의 영향이 커 보인다.약삭빠른 상혼(商魂)은 일본을 벤치마킹하여, 혼밥족을 모으고 나아가 더 양산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이 사회적인 동물임은 오랜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다. 함께 먹고, 자고, 공부하고, 일해야 할 운명을 타고난 존재란 뜻이다. 따라서 혼밥 문화가 남에 대한 무관심을 키워, 자칫 국가사회 공동체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정치, 경제, 교육, 언론 등 우리 사회 지도층은 이런 관점에서 혼밥 문화를 주시하고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내일 아침도 아내가 차려 놓은 밥상이, 내 혼밥을 기다릴 것이다.

2019-06-26

미메시스와 바이오미메틱

△문학과 예술에서의 모방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과 예술의 핵심을 ‘미메시스’ 즉 모방으로 보았다. 철학자의 말이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늘 모방하며 재현하고 있으니까.엘라 윌콕스(Ella Wheeler Wilcox ·1850~1919)의 시 ‘고독’은 “웃어라, 온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로 시작한다. 이 생소한 시인의 시는 영화 ‘올드 보이’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이렇게 멋진 대사는 따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미메시스는 곧 따라하기다.당황스럽거나 놀랄만한 사건을 경험했을 때 우리는 그 경험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려고 한다. 예컨대 버스에 두고 내린 지갑을 우여곡절 끝에 되찾았다면 친구에게 말하고 싶어한다. 어떡하다가 지갑을 버스에 두고 내렸는지, 버스에 두고 내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의 마음이 어땠는지, 그것을 어떻게 찾았는지, 지갑을 찾아준 사람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게 된다.인간은 삶의 한 부분을 압축하거나 확장하여 중요한 순간을 재현하려 한다. 이것이 이야기며, 이야기는 경험을 구성하고 배치함으로써 완성된다. 이야기는 삶을 미메시스한다.미메시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닮고자 하는 마음, 흉내내고 싶다는 생각은 유전자 속에 이미 각인되어 있다. 이러한 미메시스의 욕망이 예술로 이어진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자연의 소리를 흉내 내면 음악이 되고, 자연이 만들어내는 찬란한 색과 형태를 흉내 내면 그림이 되고,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기록하면 이야기가 된다.인간은 자연을 보면 따라하고 싶어하지만, 누구나 그런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자연을 흉내내려고 마음먹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재능이며 능력이다. 자연을 따라하지 않으면 결코 자연이 가진 능력을 가질 수 없다. 따라하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잠재력과 가능성이 응축되었다. 따라할 만한 것을 찾는 것, 그것을 실제로 따라해보는 것 역시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미메시스는 인류를 가장 높은 차원으로 이끄는 최고의 원동력이다.△바이오미메틱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능력을 모방하려는 생각속에서 공학이 싹튼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바이오미메틱이 그것이다. 생명체를 모방하는 이 기술은 오래 전부터 행해져왔는데, 앞에서 말한 거미줄을 모방하는 것은 물론 비행기가 새의 날개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스위스의 전기기술자 조르주 드 메스트랄(George de Mestral·1907∼1990)은 엉겅퀴 열매를 모방하여 일명 ‘찍찍이’라고 불리는 벨크로(Velcro)를 만들었다. 이것은 프랑스어로 ‘벨벳’을 뜻하는 ‘벨루(velour)’와 ‘고리’를 뜻하는 ‘크로셰(crochet)’의 합성어다. 이런 벨크로는 단추나 지퍼를 대신하여 옷, 신발, 가방 등에 사용된다.벨크로는 쉽게 붙이고 뗄 수 있지만 접착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 이보다 강한 접착력을 가지면서도 쉽게 떼는 것도 가능한 것이 있을까? 공학자들은 게코(Gecko) 도마뱀에 주목했다. 게코 도마뱀은 긴 발톱이나 갈고리가 없이도 나뭇가지나 천장에 안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는 놀라운 흡착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게코 도마뱀이 지닌 흡착력은 수십 킬로그램을 매달아도 될 정도다. 그렇게 강하게 붙을 수 있으며 또 쉽게 뗄 수도 있다. 그러니 게코 도마뱀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일까? 게코 도마뱀이 어떤 접착 물질도 분비되지 않는데도 놀라운 접지력을 발휘할 수 있는 비밀은 발바닥에 있다. 발바닥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 크기의 섬모 수십억 개가 촘촘하게 나 있다. 이렇게 미세한 나노구조의 물질은 주변의 물질과 전기적, 분자간의 인력으로 살짝 들러붙게 되는데 이것을 ‘반데르발스 힘(van der Waals force)’이라고 한다. 각각의 섬모에 작용하는 힘은 아주 작지만 그 수가 수십억 개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게코 도마뱀의 발바닥은 1c㎡당 약 1kg의 무게를 견딜 수 있다. 흡착력만 뛰어나다면 뗄 수가 없으니 아무 쓸모가 없다.하지만 섬모는 결을 이루고 있어 그 결을 이용하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뗄 수 있게 된다. 게코 도마뱀의 흡착력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인간 역시 벽이나 천장을 스파이더맨처럼 땅위를 걷듯 편안하게 걸을 수 있게 될 것이다.한 시인은 토란잎에 구르는 물방울을 보며 이런 시를 썼다.“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되나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나”-‘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같이는’(복효근) 전문시인이 토란잎에 영감을 받아 물방울처럼 둥근 리듬의 시를 쓰는 동안 공학자들은 토란이나 연잎에 어떻게 물방울이 궁글 수 있는지, 또 어떻게 스스로 물방울을 털어내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잎에 물이 묻으면 식물의 호흡기관인 기공이 닫혀 호흡을 할 수 없게 된다. 연잎은 표면에 무수한 나노 단위의 돌기들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한다. 이 미세한 돌기들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면, 물방울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표면적을 최소화한다. 그래서 물방울은 동글동글해지고 연잎의 표면을 구를 뿐 그 좁은 돌기의 틈새로 파고들지 못한다. 자연은 이토록 치밀하며 이토록 정교하다. 나노 돌기를 이용하여 물의 흡수를 막는 방법을 사용하는 식물로는 벼의 잎사귀가 있고, 곤충으로는 모포 나비가 있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공학자들은 셀프 클리닝(Self-Cleaning) 기술을 탄생시켰다. 연잎과 같이 나노돌기를 만들어 주면 물에 젖지 않는다. 또 먼지나 세균 같은 것도 물방울처럼 나노 돌기에 떠 있는 상태가 되므로 표면이 오염되지 않는다. 비가 올 경우 물방울이 굴러내리며 먼지나 세균 등을 씻어내게 되므로 자동세척이 이뤄진다.상암 월드컵 경기장을 덮고 있는 흰 천이 몇 년이 지나도 더럽혀지지 않는 것은 이 셀프 클리닝 기술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술을 우리가 입는 일상복에 사용하면 커피, 소스와 같이 다양한 액체에 의해 옷이 더럽혀 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자동차의 표면, 건물의 외벽이나 유리창에도 사용할 수 있다.미메시스는 문학의 전유물이 아니다. 미메시스는 일종의 본능이며, 이것은 어쩌면 문학보다 공학이 먼저인지도 모른다.

2019-06-26

스몸비족

스몸비족은 ‘스마트폰(smartphone)’과 ‘좀비(zombie)’를 합성한‘스몸비(smombie)’라는 말에서 유래됐다. 이 말은 2015년 독일에서 처음 사용됐으며,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느라 길거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걷는 사람을 가리킨다.스몸비족은 특히 스마트폰 화면에 눈길을 빼앗긴 탓에 자동차에 치이는 사고가 잦아 문제가 되고있다. 실제로 삼성화재 교통안전문화연구소가 최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2014~2016년 보행 중 주의분산 보행사고로 접수된 사건은 모두 6천340건인데, 이 가운데 62%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걷다 차량과 충돌하는 등 휴대전화 사용 중에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행 중 사고뿐 아니라 뒷사람에 대한 배려 없이 길 한복판이나 지하철 환승통로 등에서 스마트폰을 보며 천천히 걷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겨울철에는 미끄러운 빙판길을 보지 못하고 넘어지는 등의 사고도 발생하고 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사용 연령이 낮아지며 ‘스몸비 키즈’까지 증가하고 있어 안전사고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이에 따라 서울시는 지난 3월 시 조례에 ‘모든 시민은 횡단보도 보행 중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스마트폰 등의 전자기기 사용에 주의해야 한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또한 곳곳에는 일명 ‘바닥 신호등’이 설치됐으며, 횡단보도에는 스마트폰 사용에 주의를 당부하는 표지판이 설치됐다. 서울시는 버스와 지하철에 공익광고를 게재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해외에서도 스몸비족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는 지난해 10월부터 도로를 건너는 보행자가 모바일기기를 사용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최초 적발 시 15~35달러, 위반 횟수에 따라 최대 75~99달러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미국 뉴저지주에서는 길을 걸으며 스마트폰 문자메시지를 전송할 경우 벌금을 물리기로 했다. 네덜란드와 독일 등에서는 바닥에도 신호등을 설치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아예 스마트폰 이용자를 위한 전용도로를 만들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스마트폰을 보며 걷다가 큰 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6-26

당신의 자리

장규열 한동대 교수69년 전 오늘, 대한민국은 꺼져가는 호롱불이었다. 북의 기습남침이 개시된 지 이틀 만에 대통령은 이렇게 방송하였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거짓말이었다. 이를 듣고 안심한 피난민들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대통령과 각료들은 이미 서울 이남으로 피신한 후였던 데다, 한강 다리마저 폭격으로 끊어진 서울에는 시민들이 독 안의 쥐가 되어 이후 힘든 석 달을 지냈다고 한다. ‘대통령은 자신의 자리를 그렇게 버려야 했을까?’떠올리고 싶지 않은 또 한 자락 기억이 있다. 사백도 훨씬 넘는 승객들을 태운 배가 기울어 침몰하고 있는 가운데, 속옷 바람으로 탈출하는 선장의 모습을 담았던 영상. 많은 승객들이 구조되지 못하고 스러져 간 세월호 침몰사고와 관련하여 수다한 문제와 어려움이 제기되었지만, 필자를 가장 힘들게 한 질문에는 아직도 그 답을 듣지 못하였다. ‘선장은 자신의 위치를 그렇게 버려야 했는가?’ 선장에게는 ‘여객의 승선이 개시될 때부터 여객의 하선이 완료될 때까지 그 선박에서 떠나지 못한다’는 재선의무가 있고, ‘급박한 위험이 닥치면 구조에 필요한 수단을 다하여야 한다’는 조치의무가 있다. 공직을 맡은 모든 이들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할 의무와 함께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수고해야 할 책임이 있다.국회는 노는 중인가. 한껏 기대하며 표를 모아 국회로 보냈더니 우리를 대신하여 국사를 맡은 이들이 국회에 없다. 학생들에게 제 자리가 교실이며 회사원들에게 사무실이 제 자리이듯이 국회의원에게는 국회가 자신의 자리가 아닌가. 수다하게 많은 나라의 법과 제도, 그리고 하나같이 어려운 과제들에 열심히 지혜를 모아서 만들고 풀어내라며 국민이 쉽지 않은 표심을 보태어 보내준 자리가 아닌가. 포항 지진과 속초 산불로 거처가 무너지고 생계가 위태롭다는데, 당신들은 당연히 있어야 할 그 자리를 그냥 저렇게 비워둘 심산인가. 경제가 어렵고 사회는 병이 깊은데 당신들은 고작 다음 공천에나 관심을 두고 오늘 나랏일은 뒷전이란 말인가. 투쟁을 하든 논의를 하든, 당신의 소중한 그 자리 국회로 돌아가 실력과 기량을 발휘해 주시라.사회학자이며 정치평론가인 스토크스 (DaShanne Stokes)는 ‘국민의 어려움을 돕지 않는 지도자는 국민이 퇴출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국회의원이 혹 권력에 취하여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해야 할 책임을 방기한다면 국민에게는 당연히 당신을 물러가게 해야 할 또 다른 책임이 있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레이건(Ronald Reagan)은 ‘(국회)의원들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그들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국민이 어렵다. 어려움에 처한 국민을 돌아보아 주시라. 당신들이 마음쓰는 명분과 실리도 국민을 생각하면 답이 보인다. 국민을 위하는 명분 말고 당신에게 더 어울리는 명분이 어디 있는가. 국민이 행복해지는 실리 외에 당신은 또 다른 어떤 실리를 꾀하는가.나라를 경영하는 대통령의 자리도, 여객선을 운항하는 선장의 자리도,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의 자리도 모두 있어야 할 오늘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섬길 때 빛이 나는 법이다. 나는 오늘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를 분명히 지키고 있는가. 내가 섬겨야 할 책임과 의무에 충실하게 복무하는가. 내일을 향한 꿈도 오늘 꾸어야 하겠지만, ‘당신의 자리’에서 오늘 기울이는 섬김과 성취가 그 내일도 열어줄 터이다.

2019-06-26

상산고의 눈물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자율형 사립고(자사고)의 아이콘인 상산고 학부모 수백명은 전북교육청 앞 광장에서 며칠째 농성을 벌이고 있다. 전북교육청의 상산고 자사고 재지정 취소 절차가 공정성과 절차적 정당성 등을 잃었다는 항의이다. 상산고는 대통령 공약인 자사고 폐지의 첫 희생양인 셈이다.전북교육청은 자사고 폐지를 밀어붙이기 위해서 올해 자사고 재지정 평가 커트라인을 전국 시·도 교육청의 기준점수 70점보다 10점이 높은 80점을 제시하고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이 예외로 인정하는 사회통합전형 대상자 선발의무를 평가 항목에 소급 적용하고 배점도 높여 부당하게 평가했다고 한다. 결국 80점 만점에 79.61점이라는 0.39점 차이로 상산고 재지정 취소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한마디로 대통령 공약 사업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아무 죄도 없는 학교를 상대로 교육청이 소위 ‘작전’을 편 것으로 보인다. 상산고를 설립한 홍성대 이사장은 필자가 고교를 다닐 때부터 유명했던 ‘수학의 정석’저자이며 국내 최고의 수학 학습서로 지금도 각광받는 책이다. 홍 이사장은 여기서 벌어들인 수백억의 재산을 모두 상산고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생 부담금도 최대한 줄이고 장학금을 확대하고 재단전입금을 늘려 모범적으로 자사고를 운영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가장 모범적인 자사고에 대하여 재지정의 취소 결정이 내려진 셈이다.홍 이사장은 획일성과 평등만을 강요해서 어떻게 4차 산업혁명시대의 핵심인 다양한 인재를 기를 수 있겠냐고 반문하고 자사고 재지정 취소에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 전북교육청 관계자들도 ‘자사고 폐지’가 대통령 공약 사항인데다 100대 국정 과제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번 사태가 벌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이번 사태는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논리로 결정된 것이 확실해 보인다. 경쟁이 있어야 생산성을 높인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경쟁 속에서 다양한 창조적 교육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종류의 고교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정부가 인정하고 과거에 자사고 제도를 만들었다. 고교의 다양성을 위해 만든 제도를 정부가 바뀌었다고 스스로 폐지하려는 발상은 잘못된 것이다. 자사고는 과거 정부가 다양한 교육수요를 수용하겠다며 2010년 도입한 학교 모델로 학교의 자율성을 더 확대·발전시킨 것이다. 자사고는 학생의 학교선택권을 다양화하기 위해 고교 정부 규정을 벗어난 교육과정, 교원 인사, 학생 선발 등 학사 운영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사고는 정부 지원 없이 등록금과 재단 전입금으로 운영되도록 되어 있다.정부와 진보성향 교육감들의 자사고 폐지의 명분은 ‘평등교육’이다. 그러나 ‘평등교육’의 정의는 올바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개인은 각각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다양한 능력에 맞는 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한 기회를 누구에게든 부여하는 것이 평등교육의 기본 정신일 것이다. 평등교육이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이지 교육수준의 평등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육수준은 각각의 수준과 다양한 능력에 맞게 제공돼야 한다. 상산고의 눈물은 정치적 논리로 휘청거리는 한국 중등교육의 눈물이다. 해방 후 지난 70여 년간 정치적 논리로 정부가 바뀔 때마다 바뀌는 교육정책은 “똑같은 제도하에서 졸업한 두 개의 세대는 없다”는 한국만의 이상한 교육의 모습을 만들고 있다. 한국은 교육정책에 관한한 후진국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교육정책을 그렇게 쉽게 바꾸지 않는다. 사립고, 공립고가 존재하고 특히 사립고들은 다양한 교육방식으로 경쟁하고 랭킹이 존재하며 우수한 학생들을 모으기 위한 자율적 경쟁을 한다. 중등교육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보장되어야 한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하는데 교육정책들이 정치적 논리로 자꾸 바뀌어서는 안된다. 지금 상산고의 눈물은 우리 자신의 눈물이다.

2019-06-25

스포츠 스타의 몸값

토트넘 소속 손흥민 선수의 몸값이 화제다. 박지성 선수 이후 한국 선수로서는 두 번째로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 무대를 밟았던 손 선수의 몸값이 한화로 1천억 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독일의 축구 이적 전문사이트 ‘트랜스퍼 마르크트’가 밝힌 손 선수의 시장가치(예상 이적료)는 8천만 유로(약 1천52억 원)로 집계됐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가치있는 축구선수 50명 중 33위다. 손 선수는 2018∼2019년 시즌대표팀과 소속팀 토트넘을 오가며 모두 20골을 터뜨리며 몸값을 높였다.운동선수의 몸값은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다.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만하다. 적정성에 대한 시비는 여전히 있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활약 중인 류현진 선수의 몸값도 1천억 원을 육박한다는 보도가 얼마 전 있었다.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매년 발표하는 스포츠 스타의 수입(연봉+광고수입) 현황에 따르면 올해는 축구선수 출신 3명이 나란히 1·2·3위를 차지했다. 바르셀로나 소속의 메시(31)가 한화로 1천500억 원의 수입을 올렸던 것으로 발표했다. 그동안 12번 수입 1위를 차지했던 프로골프 스타 ‘타이거 우즈’는 올해 11위에 머물렀다.구직난에 시달리는 한국의 젊은이한테 스포츠 스타들의 연봉 얘기는 별천지 사람 일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의 시장은 본인이 하기에 따라 그 대가는 상상을 불허할 만큼 지불되는 요지경 속이다. 한국의 한 취업포털 사이트가 조사한 한국의 구직 젊은이가 받고 싶은 희망 연봉이 평균 2천981만 원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어려운 구직난을 반영한 탓인지 우리 젊은이가 받고 싶은 연봉액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의 최고 연봉으로 받고 싶은 금액을 1억 원 정도라 했다. 전체 응답자의 51%는 실제로 꿈의 연봉인 1억 원을 평생 받아 보기가 어려울 것이라 대답했다.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도 경제적인 이유로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천정부지 치솟는 스포츠 스타들의 몸값 소식이 이들에게는 어떻게 비쳐질까. 세상은 여전히 공평치 않은 것일까?/우정구(논설위원)

2019-06-25

도시재생, 점촌 원도심을 새로운 지역발전의 동력으로

고윤환문경시장현대 도시개발의 패러다임은 인구 및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출산 감소 및 대도시권 중심의 지식서비스산업 집중 등 인구·산업 구조의 변화로 인해 대도시권의 집중성장과 광역화는 점차 확산되고 있다. 성장시대를 지나 쇠퇴시대에 부합하는 도시재생 패러다임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고 2040년까지 지방 중소도시의 30%가 소멸되는 시대에 걸맞은 도시정책의 변화도 요구되고 있다.문재인 정부 핵심 국책사업인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이러한 변화에 맞춰 낙후된 지역의 주거복지 실현과 일자리 창출, 구도심이 보유하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인 가치를 보존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문경시는 과거 대한민국 석탄의 10%를 공급하던 탄광도시로 1970∼80년대 성장의 절정기를 누리던 도시 중 하나였다. 석탄산업의 쇠락과 함께 급격한 인구감소를 겪었다. 1975년에 16만명을 넘던 인구가 이제는 8만여명을 채 넘기지 못하고 있고, 10년 전인 2007년에 65세 이상 인구가 20%가 넘어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특히 점촌 원도심은 도시의 산업기반 붕괴와 시청 이전에 따른 신시가지로의 인구유출 등으로 도심 공동화현상과 상권쇠퇴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필자는 문경시장이 된 2012년부터 구도심을 활성화하고자 863억원 규모의 ‘도심재창조 20대 프로젝트’를 기획해 진행해 왔다.또한 2017년 도시재생의 본바탕이 되는 도시재생 전략 및 활성화계획 수립 용역을 착수했고, 지난 4월 정부의 도시재생 뉴딜사업 대상지 전국 22곳 중 1곳으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뤘다. 이번에 선정된 점촌 원도심 활성화사업은 점촌 1·2동 일대 22만4천㎡에 올해부터 2023년까지 5년간 250억원 규모로 점촌 광부의 거리, 찻사발 공방, 세대 공감 어울림 센터, 문학 어울림 아카데미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점촌 원도심은 도시재생에 대한 주민들의 열망과 관심이 높은 지역이다. 또한 지역문화의 거점으로서 문경문화원, 노인복지관과 문화의 거리가 입지하고 있으며, 원도심으로서 중앙시장 등 상업기능이 집약되어 있고,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이와 같은 지역자원 등을 토대로 점촌의 문화자원을 활용하고, 원도심 활성화와 지역일자리 인프라 개선, 지역커뮤니티 강화 및 생활SOC확충을 위한 3가지 재생방향을 설정했다.1975년처럼 북적이던 점촌의 과거를 회상하며, 그때의 화려했던 시간을 이어나가 점촌 원도심의 활력을 되살리기 위해 ‘점촌 C!! RE:Mind 1975’란 주제로 총 14개 사업을 구성하였다. 특히 3개의 가로와 각 가로의 거점을 조성하고 대상지내 주요 공간들이 네트워크를 구축해 시너지를 내도록 하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다.또한 지역 일자리 창출 및 산업기반 구축을 위해 구 극동호텔부지에 세대공감어울림센터를 조성해 청년과 시니어 등 점촌에서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창업지원과 보육, 거주의 기능을 복합화하고, 코워킹스페이스를 조성해 스타트업과 예비창업자의 비즈니스 거점으로서 활용할 계획이다.마지막으로 지역커뮤니티 활성화와 생활SOC확충를 위해 시에서 추진하는 문학의 거리사업과 연계하고 주차장으로만 쓰고 있는 점촌역 광장을 시민에게 환원하는 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이러한 도시재생사업의 성공적인 실행을 위해서는 주민협의체, 중앙시장 상인회 등 지역주민 조직체계와 도시재생지원센터, 기업, 대학교 등 다수의 이해관계자들이 서로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추진 중인 점촌 원도심 도시재생사업과는 별개로 현재 문경시의 가장 큰 화두는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산업발전을 주도했으나 6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사라진 국내 최초의 내륙형 시멘트 공장 문경 쌍용양회의 활용 방안이다. 문경 쌍용양회는 UN이 한국전쟁 후 대한민국의 구호와 경제 재건을 목적으로 설립한 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가 건립한 근대산업유산이다. 당시의 시대상과 기술력이 반영된 역사적 의미가 매우 깊은 유산인 UNKRA는 쌍용양회 외에도 서울 국립중앙의료원, 충주 비료공장, 인천 판유리공장 등이 있으나, 문경 시멘트공장은 이 중 유일하게 원형의 80% 이상이 보존되어 있어 활용가치가 매우 높다.석탄산업으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독일 졸페라인 탄광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대신 도시재생을 통해 관광명소로 다시 태어났다. 문경 쌍용양회도 경제기반형 도시재생사업을 계획하고 있으며 재정 부담과 열악한 재정여건이 극복된다면, 국가재건의 상징에서 도시재생의 성공모델이 되어, 보존과 재활용의 가치를 일깨우는 국가적 큰 자산이 될 것이다.7만1천874명. 2018년 말 기준 문경시의 인구이다. 이 수치는 지난 2월을 기점으로 증가세로 돌아섰다. 6월 21일자 기준으로 문경시의 인구는 지난해 대비 272명이 증가한 7만2천146명이다. 문경시의 인구가 늘고 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특별한 지역적, 환경적 증가요인이 없음에 더욱 주목받고 있다. 900여 공직자가 아이디어를 모아 파격적인 출산·양육·교육정책과 차별화된 귀농·귀촌·귀향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또한 앞으로 진행되는 도시재생을 통한 점촌 원도심의 변화를 통해 지역경제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나갈 준비에 분주한 문경은 지금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2019-06-25

개와 산책하는 올바른 방법(下)

개는 산책에서 만나는 다른 개들을 잠깐 만날 때 외에는 대부분 다른 개들과 떨어져서 지낸다. 개들은 어떻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얻을까? 결국에는 곁에 있는 반려자 즉 사람에게서 배운다. 사람이 개와 올바른 방법으로 산책하면 개와 더 친해질 수 있지만 잘못하면 개의 문제행동을 만들 수도 있다.개와의 산책에 대하여 매우 상반된 두가지 견해가 있는데, 사람이 산책시 주도권을 가져야 개가 서열관계를 바르게 인식하여 평상시에도 사람을 잘 따른다는 견해가 있고, 정반대로 서열 가르치기는 나쁜 방법이고 개들에게는 지배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개들에게 지배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완력을 쓰지않는 훈련법을 강조하고, 지배에 근거한 방법을 비난하기도 한다.사람이 우두머리임을 개에게 각인시킬 필요가 없고, 친절과 사랑만으로 충분하다는 주장도 있다.과학적으로 밝혀진 동물행동학 연구결과들은 개들의 세계에는 분명 서열관계와 지배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개들에게 적용되는 지배, 주종관계 개념은 사람들이 사람사회를 떠올려 대부분 생각하는 고통을 주고 조종하고 벌하는 방식으로 적용되는 지배개념과는 분명히 다르긴 하다.개 세계에 실제 존재하는 서열과 주종관계 개념은 사람과 개가 조화롭게 잘 살아가기 위한 올바른 관계형성을 위해 정확히 이해되고 적용되어야 한다.개들이 산책시 자유롭게 냄새를 맡게 해주기 위해 목줄을 풀어 주거나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개들을 위해 좋은 일이긴 하다. 하루종일 실내에서 개를 가두어 키우기 때문에 산책을 나가는 시간만큼이라도 자유롭게 개들 특유의 감각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자유롭게 마킹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개들 입장을 배려하는 개 주인의 사랑이라 생각한다.하지만 산책에서 이런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으려면 최소한 주인이 불렀을 때 개가 주인에게 돌아오는 관계는 먼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개가 산책 시 야외에서 주인이 불러도 올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라면 자유롭게 풀어주어서는 안된다. 개를 산책할 때 “하지마”, “그만해”, “안돼”라고 주인들이 자주 말하는 것을 듣게 되는데, 산책할 때 “옳지”, “착하지”, “잘했어”등의 칭찬을 통한 긍정강화법을 사용할 수 있는 관계라면 매우 훌륭한 상황이다. 개 주인이 개를 지배할 수 있는 지위획득을 위해 개에게 강압적 방법을 꼭 사용할 필요가 없긴 하지만 이미 개가 주인보다 서열상 위에 있다면 좋은말과 칭찬만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 주인이 자신의 개들을 통제하고 사회에서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산책시 낯선 사람들이 개를 귀엽다고 만지려고 하면 “그러지 마세요”라고 거부하는 것이 좋다.주인은 개를 귀여워해주어 자랑스러울지 몰라도 개는 큰 스트레스를 느낀다.산책과 배변은 할 수 있다면 분리해서 길들이는 것이 좋은데 산책할 때만 배변하도록 습관을 들이면 비가 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아 산책을 갈 수 없을 경우에 배변장애가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풀숲을 산책하다 개가 진드기에 물리게 되면 기구를 이용해서 피부 속에 박힌 침까지 다 제거한 후 피부 상처 소독제로 소독해주어야 하는데 직접 하기 힘들다면 바로 동물병원을 찾아 진드기 제거와 함께 정도에 따라 연고 및 내복약을 처방받아야 한다.진드기에 물린 부위는 수일 동안 발작, 부종과 가려움증이 동반될 수 있고 드물지만 진드기에게 물리면서 감염되는 진드기 매개 질환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진드기 매개 질환에 감염되면 빈혈이 생기거나, 혈소판 감소증 또는 백혈구 감소증이 흔히 발생하므로 진드기에 물린 후 또는 풀밭을 산책한 후에 피부 여러 부위에 피멍이 든다거나, 식욕과 활력이 저하되고, 체중감소 또는 열이 나는 등의 증상이 보인다면 즉시 동물병원으로 가야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산책할 때 목줄을 착용하여 개가 풀숲으로 마구 뛰어드는 것을 막아서 노출을 최소화하고, 동물병원에서 판매되는 진드기 기피제나 진드기 구제약물을 정기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이 있다.하지만 진드기 구제약물 등은 간혹 개의 신경계에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데 약물 적용 후 경련 혹은 기면과 같은 증상을 보인다면 수의사와 상담하여 적절한 약물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서라벌대 반려동물연구소 소장(마사과 교수)

2019-06-25

만약 ‘감사’를 잊고 살았다면 (2)

고장률이 0.44%였던 기계가 실험 이후 0.29%로 낮아집니다. 부공장장의 호기심이 회사 전체를 움직입니다. 전사적으로 실험을 확대하지요. 기계에 감사 스티커를 붙입니다. “고장나지 않아 고마워”라는 식의 감사 메시지를 전합니다. 한 직원은 말합니다. “기계가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지요. 고장률이 낮아질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거짓말처럼 고장률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2010년 0.23%였던 고장률이 실험 1년 만에 0.17%로 뚝 떨어진 것입니다. 2012년에는 다시 0.12%로 줄어듭니다. 2년 동안 52%가 감소한 수치입니다. 야간 돌발 호출 건수도 2010년 899건에서 2012년 320건으로 줄었습니다. 과연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요? 자체 조사결과 비결은 따로 있었던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설비를 관리하는 직원들이 이 운동을 시작한 이후에 전보다 기계에 더 관심을 보인 것이지요. 기름칠도 신경 써서 하고 설비 체크도 예전과는 다른 태도로 임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반도체 부품을 제조하는 N사에는 스퍼터(sputter)라는 50억원짜리 장비가 있습니다. 365일 24시간 풀 가동해야 하는 이 기계가 에러로 멈추면 손실이 큽니다. 월 평균 10건 정도가 에러가 발생합니다. 손실액은 약 1억7천만원입니다. 직원들은 스퍼터에 이렇게 써 붙입니다. ‘고장 ZERO 감사합니다.’ ‘가동 100% 감사합니다’ 간절한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요? 이 운동을 시작한 이후 스퍼터의 고장 횟수가 90% 감소합니다. 월 평균 10회의 고장이 단 1회로 줄어든 것이지요. 금액으로 환산하면 연 18억원을 절감한 셈입니다.산업체에 감사 운동이 퍼지면서 여러 부작용도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이익과 효율에 관심이 많은 탐욕적인 사장이 설비 고장율이 낮아지고, 이익이 증가한다는 것에 착안해 직원들의 내적 동기유발 없이 강제적으로 감사를 시킨다고 해서 과연 성과가 나올 수 있을까요? 오히려 반발심과 부정적인 마음이 더욱 커져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 뻔한 이치입니다. 감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비슷합니다. 강요된 감사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과 다름없지요. 중요한 것은 거위의 충만한 상태입니다.강요가 아닌, 표정과 눈빛으로부터 마음 가득 담은 진정 어린 감사가 내 안에서 우러나올 수 있다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조금씩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바뀌어 갈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감사한 새벽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6-25

이제부터는 주변을 자세히 살피자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최근 포항은 연구개발특구, 첨단과학비즈니스벨트 등 그동안 유치에 실패했던 사업들 대신 ‘강소연구개발특구’ 지정에 성공하였다. 포스텍과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을 중심으로 ‘첨단신소재’ 분야의 혁신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포항은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철강’을 오래 전부터 공급해온 가장 원천적인 ‘소재’의 생산기지였던 만큼 ‘소재’라는 말이 붙은 특구를 가볍게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항은 보다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소재가 최종제품으로 탈바꿈하기까지 단계별로 부품, 반제품, 최종제품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생산 공정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모든 제품의 생명주기와 재고관리의 시간만큼은 크게 단축되었다. 과거처럼 단일 소재가 더 이상 단일 제품군에만 쓰이지 않게 되었고 유일무이한 핵심소재가 아닌 한 시장지배력도 완성품업체가 소재업체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결국 어떠한 소재기업이라도 종전과 같이 시장의 변화와 다양화에 무관심해서는 생존하기 힘든 시대가 왔다.포항은 그동안 ‘철강’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았다. 지금까지 소재 생산업체들은 시장 즉, 소비자 기호와 감성 변화 등은 완성품 제조업체의 몫이라 여기고 그저 자신의 입맛대로 소재를 공급하면 그뿐이었다. 그러니 부품이나 반제품, 부분품을 만드는 중간재업체가 소재를 가공, 조립할 때 어떠한 불만이 있는지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자동차, 조선, 건설자재 등 최종 공급업체들만이 극심한 시장의 변화를 조기에 감지하며 현실적인 전략적 대응체계를 구축했을 뿐이다.그러는 동안 전 세계는 하나의 네트워크로 이어지고, 소비자들의 감성과 기호는 매우 다양해졌다. 가격이 싼 것만으로 통하는 시대는 지났다. 우리는 매일같이 신제품이 쏟아지고 그에 적합한 신소재도 실시간으로 진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동차산업이 환경규제에 대응하여 초경량 소재로 철강을 대체하는 가운데 가전부터 항공우주분야까지 아우르는 고기능성과 범용성을 지닌 첨단신소재 시장의 수요는 폭발적인 성장을 거두고 있다. 이 치열한 경쟁분야인 첨단신소재를 연구 개발하고 이를 통한 혁신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한 최적의 특구로 포항이 선정된 것이다.그런 맥락에서 포항은 지금까지의 연구개발론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의 신소재는 단지 개발만 하고 활용방안을 전방산업에 맡겼던 종전 소재분야의 방식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들다. 연구 개발단계부터 그 신소재가 어떤 시장과 제품에 사용될 것인지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 소재사용기업의 필요나 소비자시장의 수요를 면밀히 파악하고 이에 부합하는 최적의 첨단신소재를 개발해야만 한다. 즉 무엇을 연구할까가 아니라 어디에 어떻게 쓰일 연구인가를 고민해야만 한다. 음식점의 소재라고 할 수 있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가조차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무농약 채소라며 흙이 묻은 채로 식당에 넘겼지만, 이제는 식당에 따라 필요한 규격대로 세척하고 다듬어 납품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깨달아야만 한다.모처럼 강소특구로 지정되어 기회를 잡게 된 포항이 첨단신소재를 개발하고 이를 이용한 완성품을 지역에서 생산하여 팔아야만 지역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6개 강소특구 가운데 반제품이나 부품분야의 특구들에 대해서는 더욱 자세히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다른 특구가 필요로 하는 맞춤형 소재까지 포항에서 생산하는 확장성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소재수요처에 대한 면밀한 관심과 소통을 통해 그들이 요구하는 맞춤형 첨단신소재를 연구 개발하고 그것을 포항이 생산하여 공급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이미 포항에는 혁신생태계가 구축되어 있을 것이다.

2019-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