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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퀀텀 리프(quantum leap)

대나무는 외떡잎식물, 즉 풀에 속하지만, 그토록 곧고 푸르고 높게 성장하는 데는 한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보살펴도 대나무는 1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지요. 인내심을 갖고 2년 차 또 일편단심 정성껏 돌보지만, 결과는 무(無). 아무런 변화가 없고 싹조차 트지 않습니다. 또 한 해를 반복합니다. 3년 차. 드디어 결과가 보입니다. 30㎝ 죽순이 삐죽 땅 위로 솟아오르지만 거기서 스톱. 더 자라지 않습니다. 4년 한 해 동안 30㎝에서 끄떡하질 않습니다.이게 전부 다 인가, 초조하게 바라봅니다. 다시 1년을 기다리며 투자합니다. 5년째 되는 해. 대나무는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이른바 퀀텀 리프(quantum leap). 마디마다 생장점이 터지기 시작하면서 하루에 1m씩 자랍니다. 이 시기의 대나무는 1시간에 소나무가 30년 걸려 자라는 길이만큼 쭉쭉 위로 솟구칩니다. 필름을 고속으로 돌려 보면 마치 화살을 쏘아 올리는 것과 같은 속도일 테지요.비밀은 뿌리에 있습니다. 4년 동안 대나무 뿌리는 지반을 움켜쥐듯 서로 얽히며 보이지 않는 흙 속 깊은 곳으로 뻗어 내려갑니다. 이 뿌리가 4년 기초를 닦았기에 하루 1m의 폭풍 성장, 퀀텀 리프가 가능한 5년 차를 맞이하는 겁니다.기본을 죽어라 파고 포기하지 않았던 손정웅씨가 아들 손흥민을 교육한 방법이 대나무의 성장과 꼭 닮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신뢰. 인내. 폭풍 성장. 마침내 손흥민은 대한민국 축구의 선봉장으로 우뚝 서지요. 2010년 이래 손정웅에게 아이들을 맡겼던 많은 학부모가 언제까지 기본기만 가르치고 있을 거냐고 따지고 항의하면서 등을 돌렸지만 손정웅은 고집을 꺾지 않고 아들 손흥민으로 자신의 방법이 옳았음을 증명해 냅니다.우리 교육을 돌아봅니다. 눈앞의 진로, 성적, 높은 자리를 추구하며 효율적이고 빠른 방법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기본기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기본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교육이야말로 AI 시대에 흔들리지 않을 최고의 교육입니다. 교육의 기본은 ‘책’입니다. 손흥민이 ‘공’하나를 다루기 위해 8년을 투자한 것처럼, 진정한 배움의 길을 위해 ‘책’하나를 붙잡고 씨름하고 물고 뜯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야 퀀텀 리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먹구름 위 눈부신 세상을 만나기 위해서는 기본기를 충실하게 닦아야 합니다. 그대와 함께 일궈 나갈 울창한 대나무 숲을 상상합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23

죽창의 진실과 죽창가(竹槍歌)

강희룡 서예가며칠 전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그의 SNS에 ‘죽창가’를 언급했다. 이 메시지는 아마 한국을 압박하려고 부당한 무역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맞서 국론을 하나로 모으자고 하는 뜻일 것이다. 죽창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이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시 민초들의 삶의 배경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당시 구한말의 정치, 경제구조의 진실을 냉철히 파헤쳐볼 필요가 있다.조선은 정조시대 후기로 이어오면서 60여 년간 세도정치로 국고는 텅 비고 모든 산업은 위축되었다. 백성들은 심한 기아에 시달렸으며 나라가 순식간에 빚더미가 되자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폐해를 알고 고종의 비(妃)로 명문이면서도 몰락하여 일가가 없고 그 세력이 미미하며 부모가 일찍 죽어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민치록의 외동딸 민자영을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이 왕비가 바로 민비이다. 민자영이 왕비가 되자 갑자기 없던 친척이 수없이 몰려들었고, 이들에게 같은 민씨라는 이유로 요직에 등용하거나 벼슬을 내렸다. 당시 기록에는 뇌물을 바치고 지방의 사또가 되어 가는 사람이 미처 남대문을 나가기도 전에 더 많은 뇌물을 바친 다른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황현의 ‘매천야록’에 고종은 뇌물을 좋아했으며, 대신들을 임명하고 일주일도 채 안되어 자리를 바꾸게 하는 등의 졸속행정으로 관리들이 공문서를 들고 갈 곳을 모르더라는 기록도 있다. 전국의 큰 고을이면 대부분 민씨들이 수령자리를 꿰찼고, 평양감사와 통제사는 민씨가 아니면 할 수 없게 됐다고 쓰고 있다. 고종과 민비의 재물에 대한 탐욕은 끝이 없었고, 당시 뇌물 5만 냥으로 벼슬을 산 자가 바로 고부군수 조병갑이다. 탐관오리 중 으뜸이었던 조병갑은 만석보라는 대형 저수지를 축조하여 사용료를 부과하였고, 아버지의 공덕비 명목으로 백성들로부터 엄청난 세금을 걷고 노역을 시키는 등 민초들을 괴롭혔다. 이 폭정에 견디지 못한 고부군 사람들은 전봉준 아버지인 전창혁을 대표로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매질뿐이었다. 곤장으로 인해 전창혁은 거의 죽은 상태로 돌아와 며칠 안 되어 죽고 말았으니 이에 분개한 아들 전봉준이 1894년 1월 동학농민들을 주축으로 봉기했다.전주성 함락으로 크게 놀란 조정은 청나라에게 지원군을 요청하자 1894년 5월 5일 아산만에 청군이 상륙한다. 하지만 무능한 고종과 대신들의 이런 잘못된 결정은 바로 다음 날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톈진조약을 명분으로 일본군이 전격적으로 제물포에 상륙하게 하는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다. 내부의 분란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는 역사적 사실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공주에서 벌어진 ‘우금치전투’에서 야포와 개틀링 기관총, 스나이더 소총 등 신식 무기로 무장한 조선관군과 일본군에 비해 2만여 동학군은 대부분 조총과 죽창으로 무장하고 전투를 했으니, 이건 전투가 아닌 제노사이드(학살)였던 셈이다. 농민군이 대패하고 1895년 3월 전봉준이 처형될 때까지 그렇게 1년 만에 동학농민전투는 막을 내렸다.여기서 우리가 가장 기억해야할 것은 일본군이나 죽창이 아니라 상무정신이 없고 문약했던 관리들, 권력에 줄서서 백성의 고혈을 빠느라 정신이 없었던 당시 부패한 사회구조이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이 무능한 집권세력을 향해 죽창을 든 것이다. 민정수석이 올린 죽창가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라는 주사파 일원으로 스스로 전사라 칭하며 남조선 우익 200만은 학살해야 한다던 김남주가 작사했다. 민중해방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민비는 2000년대 ‘명성황후’라는 오페라에 의해 부패와 악질적인 이미지는 사라지고 ‘조선의 국모’로 변해버렸다. 동학농민운동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위정자들이 각자 입맛에 맞는 해석으로 국민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2019-07-22

기본기가 중요한 이유

손흥민은 독학으로 축구를 익힌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아버지의 혹독한 개인 지도가 그 배경에 있습니다. 여덟 살에 축구를 시작합니다. 키가 크지 않을까 봐 웨이트 트레이닝, 체력 훈련 부담을 지우지 않습니다. 강조하는 훈련 포인트는 딱 한 가지입니다. ‘기본기’.축구를 시작한 첫 6년 동안 다른 것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로지 공을 다루는 연습만 합니다. 톡톡 공을 발로 차올려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기술 ‘리프팅’을 하루에 4시간에서 6시간을 시킵니다. 패스도 슈팅도 연습하지 않습니다. 시합요? 꿈도 꾸지 못합니다. 4년이라는 긴 시간을 오로지 발끝에서 볼이 떨어지지 않는 기본만 죽어라 연습시킵니다. 주위에서는 미쳤다고 손가락질합니다.손정웅 씨는 춘천FC 유소년팀을 가르치는데 10명이 배우겠다고 오면 절반은 6개월 이내에 떨어져 나간다고 합니다.기본기를 배우다가 지쳐 포기하고 학교 축구부로 돌아가는 거지요. 손흥민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자 한 가지 훈련을 추가합니다. 슈팅 연습. 냉장고 박스에 공을 90개 담아와서 운동장에 풀어 놓고 매일 천 번씩 슈팅을 연습합니다.손흥민은 이 시절을 돌이켜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땅이 흔들리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힘들었어요.” 중학교 3학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시합에 출전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지독한 고집을 꺾을 사람이 없습니다. 16세가 되자 손흥민의 기본기와 가능성을 알아본 독일의 함부르크SV 유스팀에서 스카우트하지요. 독학에서 축구 유학으로 넘어갑니다.손정웅씨는 말합니다. “선수 시절 뼈아픈 경험을 통해 기본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습니다. 스피드는 빨랐지만 기본기가 약해 항상 성장의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아들에게 그 후회스러운 한계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어요. 선수 시절, 저 스스로가 너무 싫었습니다. 공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제 모습이 원망스러웠죠.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만큼은 나와 정반대의 시스템을 갖고 가르쳐야겠다 다짐했습니다. 축구는 ‘공’이 전부입니다. 공에 모든 비밀이 담겨 있는데 공을 못 다루고 어떻게 축구를 하겠어요? 공의 비밀을 아는 데는 기본기 연습밖에 없습니다.”손흥민은 고백합니다. 지겹도록 반복했던 기본기 훈련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8살 때 축구를 시작해, 첫 시합까지 8년 걸렸고 매일 볼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는 훈련을 거듭해 오던 어느 날, 날아드는 공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저를 보았습니다. (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22

인구감소지역을 거주강소지역으로

전상헌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委 정책협력관지난 3월 통계청은 오는 2067년 우리나라 인구가 1982년 수준인 3천929만 명, 2117년에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인구에도 미치지 못하는 2천80만 명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엔 미래포럼의 예측은 더 암울한데 2305년 대한민국의 인구는 고작 5만 명에 불과할 것이라고 한다.큰 요인은 한 여성이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인 합계출산율에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0.98명으로 OECD 평균 1.68명, 프랑스 1.89명, 영국 1.79명, 일본 1.44명 등과 비교해 심각한 수준이다. 합계출산율이 2.1명이 되어야 현재의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데 1 이하로 떨어졌으니,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주목할 만 한 점은 지역별 합계출산율이다. 가장 젊은 세종시(1.57명)를 제외하면, 전남 1.24명, 제주 1.22명, 충남 1.19명, 경북 1.17명, 강원 1.07명, 대구 0.99명, 광주 0.97명, 대전 0.95명, 부산 0.9명, 서울 0.76명으로 도(道)지역의 합계출산율이 수도권 및 광역시에 비해 높은데도, 정작 해당 지역의 인구는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더 좋은 일자리와 교육 환경을 위해 지역의 인구가 유출됨에 따라 발생하는 현상으로 보인다. 인구 감소가 초래할 국가적 위기는 인구구조 고령화로 인한 국가성장의 기반 약화와 사회보장비용의 증가, 세대 간의 연대 위협으로 나타난다. 또 병역자원과 노동력 부족, 학령인구 감소, 재정수지 악화 등 사회전반에 다양한 문제를 야기한다.한편 사회적 이동에 의한 지역인구 감소는 지역 격차 심화를 통한 사회적 갈등 양산과 과다비용으로 귀결된다. 대도시권 주민들은 주택난, 교통난, 환경오염으로 인해 막대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부담하는 반면 인구감소 지역에서는 행정서비스 비용 증가, 자립경제기반과 지역공동체 약화 등을 겪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고비용, 저효율의 국토구조가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결국 지역의 인구감소문제는 국가차원의 인구감소문제와는 또 다른 해법과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인구 감소의 경우 출생수당, 보육환경개선 등 출생률 제고 노력과 함께 복지제도의 개선, 군 인력 효율화, 학령인구 감소 대응, 지출 구조 개혁 등으로 대비할 수 있다면, 지역인구 감소위기는 조금 더 섬세하고 체감적이어야 한다. 일자리 활성화, 거주수당 지급 등 청년들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지역과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일자리, 교육, 주거 등 다양한 지원과 지역공동체 복원, 행정서비스 혁신 및 공급체계의 개선 등 자생적 지역발전의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이러한 이유로 지역의 인구 정책은 개별 부처나 지자체별 산발적 대처보다 국가적 차원의 정책 연계 및 통합조정을 필요로 한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를 중심으로 행안부, 산업부, 국토부, 농식품부, 기재부 등 관계부처 간 협력을 통해 범정부적 대응이 절실한 이유다. 특히 교육, 의료, 복지, 문화 등 인구감소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적정 수준(decent)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교통망, 물류망, 통신망 확충 등 기업 유치기반 위에 지역 특화산업의 발전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 청년창업을 위한 재정적, 행정적 지원 등 지역경제의 불쏘시개 역할을 할 종합대책도 마련해야 한다.인구문제 전문가 블룸(David E. Bloom) 교수는 “고령화는 당연한 시대적 흐름이며 직면해야 할 사실이지만, 정책적 수단에 의해 경제성장 둔화를 늦추거나 상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역인구감소 위기도 마찬가지다. 지역 특성에 맞는 중장기 대응전략, 미래 산업과 연계한 기업유치 및 인재양성을 통해 지속가능한 거주강소지역을 육성해 나간다면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다.

2019-07-22

페미니즘과 펜스룰

펜스 룰은 지난 2002년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인터뷰에서 “아내 외의 여자와는 절대로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발언에서 유래된 용어다. 미국 부통령인 마이크 펜스가 2002년 당시 미국 의회 전문지 ‘더 힐’ 인터뷰에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과는 단둘이 식사하지 않고, 아내 없이는 술자리에 참석하지도 않는다고 말한 발언에서 비롯된 용어다. 이는 성추행 등 문제가 될 수 있는 행동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아내 외의 여성들과는 교류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펜스 룰은 페미니즘으로 인한 미투운동이 크게 활성화하면서 나타난 사회현상이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와 성차별을 타파하고, 여성의 성적 자율권과 주체성 확보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 정치적 운동을 뜻한다.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최근 숙명여대 강사 ‘펜스룰’ 논란이 있었다. 숙명여대에 출강했던 한 남성 A강사는 지난달 9일 자신의 SNS에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다리 사진과 함께 “짧은 치마나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은 사람이 지나가면 고개를 돌린다”며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서다. 더욱이 여대에 가면 바닥만 보고 걷는 편”이라는 내용의 글을 게재했다. 숙명여대 학생회는 A강사에게 입장문을 요구했다. A강사는 “불필요한 오해를 안 사게 주의하는 행동으로 바닥을 보고 다닌다는 내용이었다. 오해를 사서 안타깝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학부는 교수회의를 열고, 지난 15일 A강사의 2019년도 계약은 유지하되 2학기 강의에서 배제하기로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과도한 처사’란 의견과 ‘펜스 룰’이란 보도가 뒤따르면서 논란을 빚었다. 여기서 펜스룰은 남성들이 여성과의 자리 자체를 피하는 것으로 여성을 사회에서 배제시키는 또 다른 차별이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학생들은 A강사의 발언은 펜스룰이 아닌 여성을 향한 성적대상화이므로 강단에서 내려오는 것이 맞다고 비판했다. 페미니즘이 미투운동을 낳고, 거기에서 빚어진 펜스 룰이 또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걸 보면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일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다가오는 건 아닌가 걱정스럽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7-22

정치인의 소명(召命)은 무엇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정치인(statesman)’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왜 정치를 시작하였으며 무엇을 위하여 정치를 하고 있는가? 당신들의 정치철학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보기 흉한 진흙탕 싸움만 계속하고 있는가? 혹시 당신은 정치에 입문할 때의 초심을 잃어버리고 ‘권력이라는 마약’에 도취되어 권력 자체가 목적인 ‘정치꾼(politician)’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막스 베버(Max Weber)는 이미 100년 전에 ‘소명으로서의 정치’라는 저서를 통하여 정치인들이 명심해야 할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는 정치를 직업 또는 소명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의 자질로서 ‘열정, 책임의식, 균형감각’을 들었다. 열정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대의(大義)에 대한 헌신을 말하는 것이고, 책임의식은 위험할 수 있는 권력의 통제와 조절에 필요하며, 균형감각은 열정과 책임감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주는 능력을 의미한다. 정치인이 대의에 헌신하지 않고 권력에 취하여 책임감과 균형감을 상실하게 되면 정치적 타락이 발생하기 때문이다.나아가 베버는 정치인이 가져야 할 두 가지 윤리, 즉 ‘신념윤리’와 ‘책임윤리’가 정치와는 어떠한 상관관계에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신념윤리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추구하는 태도이고, 책임윤리는 행위로부터 예견되는 결과와 그에 따른 책임을 질 줄 아는 태도이다. 그는 이 두 가지 윤리를 겸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만약 그것이 어려울 경우에는 ‘책임윤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정치인의 올바른 자세’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정치인의 개인적 신념이나 가치보다는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현함으로써 국민을 위하여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우리의 정치인들은 이러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한국정치에서 만연하고 있는 ‘내로남불’의 적폐는 베버가 강조하였던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책임성과 객관성을 상실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정치인들은 보수나 진보가 지니고 있는 장단점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정치적 쟁점을 아전인수(我田引水)로 해석함으로써 합리적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더욱이 우리의 정당정치에서는 각 정파들이 신념윤리를 앞세우고 이분법적 흑백논리를 전개함으로써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어렵게 한다. 신념윤리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지만, 책임윤리는 사실에 근거한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이 결여되면 구현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인들에게는 책임윤리가 더욱 중요하다. 정치인의 소명은 개인의 신념윤리를 구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임윤리로서 공동체의 대의에 헌신하는데 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치현실에서는 베버가 지적한 두 가지의 치명적 죄악, 즉 ‘객관성의 결여와 책임성의 결여’라는 폐단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권력투쟁이 격화됨으로써 더욱 심화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권력의 획득과 유지에만 급급하는 현상은 정치인으로서의 소명의식과 정치철학의 결핍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정치인들은 초심으로 돌아가서 ‘나는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는가?’를 다시 한 번 자문함으로써 정치인으로서 올바른 소명의식을 재정립하여야 할 것이다.이러한 정치인들의 소명의식에는 그들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는 유권자들의 책임이 무겁다. ‘정치인’은 소명으로서의 정치에 충실하지만, ‘정치꾼’은 오직 권력 그 자체가 목적이다. 누가 정치인이고 누가 정치꾼인지를 식별할 줄 아는 혜안을 가져야 하는 것은 유권자들의 몫이다.

2019-07-22

고전파 시대의 진정한 음악의 하인-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1732∼1809)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타이어와 브레이크라고 한다. 타이어는 어딘가로 잘 달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브레이크는 그것이 지나치지 않도록 느려지거나 멈추게 하는 것이니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서로 대조되는 기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겠다.필자는 ‘보수’와 ‘진보’의 개념도 이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진보는 사회가 변화하여 발전할 수 있도록 추진력을 부여한다면 보수는 변화가 지나치지 않도록 과거로부터의 소중한 것을 지키고 중요한 것이 제외되지 않도록 충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진보와 보수의 절충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면 그 날이 올 수 있을지 요원하기만 하다.필자는 음악의 역사에서 보수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음악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요제프 하이든(F.J.Haydn·1732∼1809)이다. 하이든은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이 고전파 작곡가이자, 비엔나 3인조로 불리지만 생애는 그들과는 매우 달랐다. 하이든의 아버지는 목수이며 어머니는 요리사인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29세가 되던 1790년부터 약 30년간 헝가리의 명문 귀족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궁정악장으로 일하게 되며 자신의 천부적인 창의력과 근면함을 바탕으로 바로크가 물려준 기악형식의 가능성을 실험하게 된다.하이든은 100곡이 넘는 교향곡을 써서 ‘교향곡의 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교향곡은 명실상부하게 클래식 음악이 이룩해낸 최고의 성과이자 인류에게 주어진 축복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루아침에 누군가가 발명해 낸 것이 아니었다. ‘심포니(Symphony)’의 어원이 ‘동시에 울리는 음’ 또는 ‘완전 협화음’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으며 이탈리아어 ‘신포니아(Sinfornia)’는 초기 오페라의 서곡에서 연주되는 짧은 기악 합주곡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이든의 교향곡작품을 모두 살펴보면, 누군가의 일생을 어린 시절 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앨범을 보고 그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교향곡의 발전 과정이 요약되어 있다.하이든의 교향곡 작품은 순전히 그의 창작의지로만 작곡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신분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하인’ 이었다. 그가 궁정악장으로 봉직하던 시절 하이든이 등장하는 회화 작품들을 보면 하인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주인의 요구대로 곡을 써야 했음을 의미한다. 에스테르하지 공작이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하이든의 음악과 자유의지를 존중해 줬다고는 전해지나 고용인의 음악경향을 따라야 했을 것이다.하이든이 궁정악단에 고용된 뒤 에스테르하지 공작에게 하루를 음악으로 표현해 달라는 명령을 받고 교향곡 6번(아침), 7번(점심), 8번(저녁)을 작곡하게 된다. 귀족이라는 계급이 태생적으로 안정적이며, 급진적인 변화를 거부하기에 음악성향을 베토벤처럼 작품 하나를 기점으로 명확히 진보적, 급진적으로 작곡하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테르하지의 궁정악단을 사임하고 난 뒤인 1791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흥행을 위한 교향곡을 쓰게 되는데 93번에서 104번까지의 총 12개의 교향곡이며 하이든을 영국으로 초청한 잘로몬의 이름을 따 ‘잘로몬 세트’ 라고도 불린다. 이 12개의 교향곡은 ‘94번 놀람’, ‘100번 군대’, ‘101번 시계’, ‘103번 큰북연타’ 등 대부분이 자신이 붙인 표제가 아니라 후세사람들이 붙이긴 하였지만, 하이든 특유의 유머와 재치가 듬뿍 들어간 개성 있는 명곡들이 즐비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하이든의 잘로몬세트 교향곡이 나온 시점이 모차르트가 이미 세상을 떠난 이후라는 것이다.우리는 고전파 음악가라고 하면 습관적으로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이라는 출생 순서를 떠올리며 음악양식도 순서대로 변화하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이든의 후기 교향곡이 모차르트의 후기 교향곡보다 늦게 발표된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은 드물다. 주목할 것은 모차르트의 작품이 하이든보다 파격적으로 달라진 부분이 많이 있지만, 그런 작품이 발표되고 난 후에도 하이든은 자신의 교향곡 스타일을 고수하였다는 점이다.하이든과 모차르트는 24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서로 존경하였으며 상대의 음악에 깊은 경의를 표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모차르트와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현악 4중주의 창시자라고도 볼 수 있는 하이든을 위해 1785년 현악4중주를 위한 연주회를 열어 6곡의 작품을 하이든에게 헌정하였다. 이 연주회는 역사에 남을 만한 연주회였는데(당시에 사진이 없는 것이 아쉬울 만큼)연주자를 살펴보자면 제 1바이올린에 하이든, 제 2바이올린에 디터스도로프(K.D.V.Dittersdorf·1739∼1799), 비올라에 모차르트, 첼로에 반할(J.B.Wanhal 1739-1813) 등으로 구성되어 음악사에 기념비적인 현악4중주 연주회였다. 모차르트는 헌정사를 남겨 하이든에 대한 존경을 표현했는데 소개하자면 “당신이 저의 작품을 친절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결함이 있다면 너그럽게 보아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제 눈은 그런 결함을 못 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연주가 끝난 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말하길 “신 앞에서 그리고 정직한 인간으로서 말하는데 당신의 아들 모차르트는 지금까지 내가 겪어봤거나 이름으로 아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작곡가입니다.”라고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존경을 표하였다. 그리고 어디에서든 모차르트를 폄하하는 말을 들으면 그를 지지하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하이든의 음악사적인 공헌은 앞서 소개한 교향곡 형식의 확립 이외에 현악 4중주를 기악장르로 정립한 것인데 “심포니로 시작해서 현악 4중주로 마무리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대문호 괴테(J.W.V.Goethe·1749∼1832)는 현악 4중주를 “4명의 현자들이 나누는 훌륭한 대화”라고 표현했고, 저명한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Einstein·1880∼1952)은 하이든의 현악 4중주를 “하이든 생애의 뛰어난 업적일 뿐만 아니라 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으뜸가는 업적”이라고 하였다. 현악 4중주는 단순히 악기 4대가 이루어 내는 합주일 뿐 아니라 악기 제각각 개성 있는 소리와 완성된 테크닉으로 자신의 음악을 표현해야만 효과적인 울림을 낼 수 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은 구성원이 자신의 소리를 자제하고 하나된 울림을 위해서 최소한의 ‘자기희생’이 필요한 것과는 다른 성격이다.하이든은 70곡이 넘는 현악 4중주를 작곡하였으나 그 중 53번 ‘종달새’의 1악장과 지금 독일의 국가로 사용되고 있는 ‘오스트리아 찬가’ 77번 ‘황제’의 2악장을 추천하고 싶다.하이든의 별명은 아버지라는 뜻의 ‘파파’라고 불렸다. 이것은 그의 성격이 넉넉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아버지처럼 편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파파’라는 그의 애칭처럼 그는 자신보다 진보적인 작곡가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았으며 1793년에는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그의 스승을 자처하는 등 지지자의 역할을 하였다. 필자는 이것을 천성적으로 타고난 하이든의 성격도 있지만 그의 살아온 과정 속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이든은 신분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에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 ‘포르포라(N.G.Porpora·1686∼1768)’에게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웠는데 그에게 레슨비를 지불할 사정이 되지 않아 각종 심부름을 하는 등 몸종의 일을 자처하여 비용을 대신했으며 에스테르하지 공작에게 고용이 될 때까지 돈이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하였다. 이런 힘든 배경으로 인해 다른 사람과 친분을 쌓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주의하였을 것이다. 하이든이 유언장을 작성할 때 옛 연인과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많은 지인들에게 골고루 유산을 배분한 장면을 봐도 그가 사람을 소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이든의 성격은 그의 음악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나며, 그에게 도움을 준 모든 사람들과 평생 동안 음악을 할 수 있는 운명을 부여한 신에게 진정으로 감사하였던 것 같다.그가 작곡한 마지막 교향곡인 104번 ‘런던’은 그를 초청하고 음악에 환호해 준 영국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담겨 있으며 69세가 되던 1801년에 발표한 오라토리오 ‘사계’에서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기 보다는 수확물을 내리신 신에 대한 농민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였다.하이든이 인생에서 행한 유일한 실수는 ‘결혼’이었다. 모차르트의 음악 어법을 따라가진 않았지만 결혼한 과정은 모차르트가 사랑했던 여인의 동생이었던 콘스탄체와 결혼했던 것과 비슷했는데, 하이든도 그가 매우 사랑했었던 여인 ‘테레제’와 결혼하지 못하고 그의 언니였던 ‘마리아 안나 켈러’와 결혼하였다. 하이든의 자필 악보를 냄비 받침대나 머리를 마는데 사용할 만큼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동생을 하이든이 사랑하였던 사실을 평생 동안 분하게 여겼다고 하니 하이든과는 어울리는 여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하이든은 ‘파파’라는 별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자식이 없었다. 하지만 하이든은 인류에게 ‘심포니’와 ‘현악4중주’라는 최고의 선물을 주었다. 에스테르하지의 하인이 아니라 진정한 ‘음악의 하인’이었으며 거장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 준 고전파 시대의 진정한 거인이었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

2019-07-22

공시생의 범람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15∼29세)을 의미하는 취준생이 2006년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많았다. 그 숫자가 무려 71만4천 명에 달했다.놀라운 것은 그 중 30%인 21만9천 명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이라 한다. 일반 기업체 입시 준비생(16만9천 명)보다 무려 5만 명이 더 많다는 통계다. 경기 침체로 인한 왜곡된 고용시장의 한 단면으로 보아기에는 문제의 심각성이 꽤 있어 보인다.공무원을 하겠다는 젊은이를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왜 공시생의 길을 집요하게 선택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지도자라면 그 까닭을 한번쯤 따져 보는 것이 옳다.특히 젊은이가 세상을 향해 품어야 할 원대한 뜻이 고작 공무원 정도라면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미래의 길을 잘못 가르쳐 준 거나 다름없다. 시대정신이나 가치관에 대한 고뇌보다는 직장인으로서 자녀의 안정성만 내다본 부모들의 생각에도 분명 문제가 있다.전통 유교문화권에서 가장 후진적 병폐라 하면 대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관존민비(官尊民卑)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상이다. 관리를 높게 보고 백성을 낮게 보는 사회적 풍토와 남녀 불평등의 오랜 고정 관념이 이 것이다. 두 가지 사상은 사실상 조선시대를 지배해 왔으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의 멸망을 재촉한 낡은 시대적 유물이라는 비판을 떨칠 수가 없다. 지금 우리 시대의 공시생 양산현상이 혹시나 관존민비의 잔재적 사고에 기초한 것은 아닌지 괜스레 걱정이 된다. 물론 국민의 공복(公僕)으로서 국가를 위해 봉사의 길을 걷겠다는 생각을 가진 건전한 젊은이도 많이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도전보다 안주를 선택하는 젊은이가 늘어난다면 국가의 장래를 봐선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태산처럼 많은 지금이다. “한국에서 공무원이 되는 것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외국인의 비아냥을 따갑게 들어야 한다.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의 도전 정신은 이 시대를 살릴 유일한 기백(氣魄)이다.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데 정부가 심각히 고민하고 앞장서야 할 것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7-21

‘반일(反日)’로는 ‘극일(克日)’ 못한다

안재휘 논설위원30년쯤 전 이야기다. 장기 해외취재 일정으로 일본 도쿄에 갔다가 만난 어떤 외교관(공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흥미로웠다.그는 “한국은 일본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대로라면 한국이 일본을 이기는 것은 영원히 기대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심각하게 말했다.그가 밝힌 견해의 매듭은 이랬다. 당시 일본에는 ‘한국’을 연구하는 전문가가 8천 명쯤 되는데,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일본 전문가가 없다는 것이었다.말하자면,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에 대한 분심(憤心)이 깊어 매사 감정이 앞서고 일본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대비하는 일에 서툴다는 얘기였다. 이웃하고 있는 두 집 중에 옆집에 대한 악감정에 휩싸여 비난하기에만 바쁜 집과 이웃집을 유리알처럼 샅샅이 들여다보고 연구하는 집 중에서 유리한 쪽이 어디겠는가 하는 부연설명이었다.일본의 야비한 무역보복으로 한국이 흔들리고 있다. 가뜩이나 나빠진 경제가 걱정인데, ‘침략’으로까지 묘사되는 일본의 경제공격이 또 얼마나 큰 피해를 몰고 오게 될 것인가 조바심마저 치솟는 중이다. 이 판국에 ‘죽창가’를 들먹거려서 비난을 샀던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이번에는 “2018년 대법원판결을 부정, 비난, 왜곡, 매도하는 한국 사람을 마땅히 ‘친일파’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선동 글을 또 올렸다.지난 18일에도 그는 페이스북에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가 아닌 ‘애국(愛國)이냐 이적(利敵)이냐’”라고 적었었다. 일본의 무역보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놓고 상황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끊임없이 천박한 진영논리의 오물통 속으로 우겨넣으려는 조국 수석의 어리석은 행위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도대체 그가 꿈꾸는 이 나라의 미래는 무엇인가.집권 3년 차에 접어들어 나라 형편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집권세력이 일본의 무역보복을 ‘옳거니!’ 하고 정략적 차원에서 주물럭거리고 있는 모습이 얼비치면서 많은 국민이 분노를 키우고 있다. ‘토착 왜구’, ‘매국’, ‘친일’이라는 자극적인 ‘편 가르기’용 분열용어들이 난장을 치며 날아다닌다. 일본의 무역보복을 규탄하는 시위·집회가 일본대사관 부근에서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우리는 또다시 ‘닥치고 반일(反日)’의 광풍을 부채질하는 세력의 준동을 목도한다. 이성적인 해법을 촉구하는 이 나라의 민심을 모조리 ‘토착 왜구’의 감옥에 처넣으려는 비열한 흉계가 진행되고 있음이 틀림없다. 지난해 11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확정판결 이후 무려 8개월 동안 정부가 아무런 외교적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 의혹의 단서가 있다. 국민들은 지금 매국(賣國)과 만용(蠻勇)의 어둑한 골짜기로 무참히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한일 양국의 견해차가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테니 이를 해소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은 필수적이었다. 일본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오리라는 것을 몰랐다면 ‘치명적인 무능(無能)’이다. 만약 알고도 정략적으로 악용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면 이는 직무유기를 넘어서 사악한 역적 범죄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향해서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할 것인가.아마도 지금쯤 일본에는 ‘한국’을 연구하는 전문가가 기만 명을 헤아릴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정치외교 영역은 물론 대한민국의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풍부한 이웃집에서 걸어온 간단찮은 경제 전쟁이다. 길거리에 촛불 들고 나가 시위를 하고 혈서를 쓰고 분신을 해서 찾을 수 있는 해법은 없다.우물 안 개구리식 사대 명분에 갇혀 병자호란을 불러들임으로써 백성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380여 년 전 인조(仁祖)의 조정이 떠오른다.

2019-07-21

정치 평론가 정두언의 자살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정치평론가 정두언이 자살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우리나라는 1년에 1만4천명이 자살하고, 인구 10만명 당 자살률이 26.5명으로 세계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자살자 중에는 노인, 인기 연예인, 유명 정치인도 포함된다. 검찰의 조사 과정에 있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성완종 전 의원, 노회찬 전 의원의 자살은 우리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번 정두언 전 의원의 자살은 검찰 조사와는 상관없는 일이어서 그의 자살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고 있다. 인기 정치평론가로 신망을 받아온 그가 당일 오전 방송에 출연하고, 오후에 유서 한 장만 남기고 자살한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그는 운전기사 아버지와 공사장 잡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1956년 3월6일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무척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공부를 잘하여 경기고, 서울대를 나와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20년 공직생활을 하였다. 2000년대 초 이회창의 권고로 정치에 입문하고,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 서울시 정무부시장도 역임하였다. 서대문을에서 17대에서 19대까지 내리 3선하고 20대 총선에서 패하였다. 그는 이명박 선거 캠프 기획본부장으로 활동한 결과 한 때 ‘왕의 남자’로 불리며 대통령을 보좌하였다. 그는 한 때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여 음반까지 낸 적도 있다. 그는 자살 직전까지 시사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일식집도 경영한다고 밝힌 바 있다.정두언은 ‘정치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여러 해 동안 정치평론가로 활동하였다. 필자가 자주 시청하는 CBS의 ‘월간 정두언’이나 MBN ‘판도라’에서도 그의 직설적인 논평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는 ‘만사형통’이라던 시절 권부의 핵심 이상득을 비판하다 권좌에서 밀려나기도 하였다. 그는 보수적 입장에 있으면서도 극우보수를 비판하고, 합리적인 보수의 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는 진보 정치의 허구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두언은 좌우 양측 어느 측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여 정치인으로서의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그가 자초한 고난의 길을 걸은 셈이다. 이번 정두언의 비극은 참된 보수를 지향하던 정치인의 말로를 보는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을 지울 수 없다. 한국의 정당 정치를 빙자한 패거리 정치에 적당히 야합하면 생명은 부지할 수 있는데 그는 이를 거부하여 정치적 실패자가 된 사람이다. 그를 감싸고 있었던 현실 정치에 대한 혜안과 비판이 그의 용기 있는 발언으로 비춰지기도 하였다. 물론 그는 뇌물혐의로 구속되기도 하고, 20대 대선의 쓰라린 실패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의 수차례의 정치적 실패, 이혼과 재혼 등이 인간에 대한 환멸로 연결되어 그의 지병인 우울증을 더욱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는 늘 밖으로 도셨고 수시로 어머니를 구타했다”고 정신적 상처를 진솔하게 고백한 적도 있다. 그가 자살 당일 오전 명쾌한 정치 평론을 끝내고, 오후 스스로 선택한 자살은 우울증이라는 무서운 병리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우리는 노회찬에 이은 그의 자살을 계기로 우리의 혼탁한 정치 풍토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국리민복이라는 정치의 대의를 상실하고 정쟁으로 치닫는 한국의 정당 정치,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서로 ‘내로남불’을 외치면서 당리당략에만 치중하는 패거리 정치, 이러한 왜곡된 정치 풍토가 존립하는 한 양심적인 정치인은 생존하기 어렵다. 정두언은 한국 정치의 왜곡된 현실을 직설적인 비판을 통해 대리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우울증이라는 정신적인 질병관리에는 실패하였다. 우리 주변에는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고 있고 유명 정치인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정두언의 자살을 계기로 우리 정치 풍토와 정치인의 정신건강을 체크해볼 시점이다. 정치평론가 정두언의 비극 앞에 그의 명복을 빌 뿐이다.

2019-07-21

앞선 출발(head start)

김현욱 시인지난주 포항교육청 영재교육원 초언어반 학생들과 ‘내가 뽑은 신문 기사 원! 투! 쓰리!’ 활동을 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30분 동안 각자 구해 온 신문을 꼼꼼하게 읽는다. 읽다가 끌리는 기사가 있으면 체크를 해둔다. 신문을 다 읽은 후 체크해 둔 기사를 가위로 오린다. 스크랩한 신문 기사 중 내 성향과 관심사를 충족하는 기사 3개를 고른다. 4절지에 ‘내가 뽑은 신문 기사 원! 투! 쓰리!’라고 제목을 쓰고, 그 아래 보기 좋게 기사를 배치하고 풀로 붙인다. 그 기사를 뽑은 이유나 소감을 빈 곳에 간략하게 적는다. 돌아가면서 ‘내가 뽑은 신문 기사 원! 투! 쓰리!’를 친구들에게 발표한다.학생들이 가져온 신문은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신문, 한겨레신문, 경북매일신문, 경북일보, 어린이동아 등으로 다양했다. 그중에 가장 많았던 것은 보수 성향의 조선일보였다.학생들에게 손석춘 선생의 ‘신문 읽기의 혁명’(2015)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말했다.“보수성향의 신문만을, 진보성향의 신문만을 오랫동안 구독한 사람은 각각의 신문이 제시하는 사고의 틀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갇히게 된다.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내는 이치다. 일례로, 우리는 이스라엘과 아랍 중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친이스라엘 성향을 갖고 있다.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유태인과 서방의 언론은 아랍권에 비해 서로 친화적이다. 서방의 언론이 제공하는 친이스라엘 성향의 기사들이 국내에 그대로 소개되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뇌가 된 것이다.”‘내가 뽑은 신문 기사 원! 투! 쓰리!’ 활동을 하고 난 후 학생들에게 소감을 물었다.학생들은 신문 읽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고 했다. 교과서와 문제집, 학습지에 익숙한 학생들에게 신문은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한다. 서양에서는 신문 읽기 능력을 ‘앞선 출발(head start)’이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신문 읽기 습관을 들이면 다양한 배경지식과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를 수 있다.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서 11년간 ‘신문 독서 읽기와 학업 성취도 및 취업’을 조사했다.2004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일반계 및 전문계) 4천 명을 대상으로 벌인 결과다. 신문을 구독하는 가정의 고등학생이 구독하지 않은 가정의 학생들보다 수능에서 과목별로 6∼8점이나 높았다. ‘300인 이상의 대기업과 공기업·외국계 기업의 정규직’의 취업률도 신문을 구독한 고등학생이 32.2%, 구독하지 않은 고등학생은 26.5%였다. 월평균 임금도 신문을 구독하는 고등학생이 10만 원 많았다. 고전·문학과 같은 인문학 서적을 많이 읽은 고등학생의 수능 점수가 높았고, 독서량이 같을 때는 신문 구독 고등학생의 수능 점수가 더 높은 것으로 나왔다.신문 활용 교육(NIE)이 학교 현장에서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내가 뽑은 신문 기사 원! 투! 쓰리!’ 신문 활용 수업을 주 2∼3회 정도는 지속해야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신문 읽기를 재미있어 해야 한다. 몰입은 ‘재미’를 딛고 일어선다. 신문 읽기가 재미있고 습관이 되기 시작하면 신문의 편집과 성향, 이면(裏面)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 비로소 비판적, 입체적 신문 읽기를 할 수 있다. 특정 신문의 편집을 읽을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국제 정세의 관계와 이면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 볼 수 있다.신문 읽기는 학생들의 학업성취도 향상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로 보고, 더 나은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튼튼한 토대가 된다. 투자 대비 수익률이 가장 높은 인생의 주식은 바로 ‘신문 구독’이다. 2만원도 채 안 되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인생 공부가 바로 ‘신문 읽기’인 것이다.

2019-07-21

뒤통수만 바라봐도

체력이 천하장사로 강건하기 이를 데 없고, 곧은 성격과 날카로운 외모 때문에 별명이 ‘양칼’이던 교사가 있습니다. 가르쳤던 과목은 지리학. 양칼이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선생님은 수업 중 걸핏하면 눈물을 흘리는 따스한 분입니다. 일본 유학을 통해 지식을 쌓은 교양인이었고 대작가 우치무라 간조의 사상에 깊이 감동을 받은 탁월한 영성(靈性)의 소유자였습니다. 유학 시절 교류하던 함석헌 등과 함께 박봉을 털어 민족을 깨우기 위한 잡지를 창간하고 제작과 보급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붓습니다.낮에는 민족 학교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글로 시대정신과 투쟁하며 삶을 불태운 젊은이였습니다. 선생의 이름은 김교신.가르치던 학생 중에 체력이 강철같은 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장사를 하던 친구였죠. 참외 장사, 각설탕 장사, 군밤 장수 등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이 학생은 약간의 돈을 모으자 다시 학업에 뛰어듭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2㎞의 자갈밭을 매일 뛰어서 등·하교를 하죠.김교신 선생은 그를 발탁해 달리기 선수로 육성합니다. 예상대로 학생은 출전하는 마라톤 대회마다 우승을 따냅니다. 13번 출전해 10번을 우승하지요. 김교신 선생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소년은 성장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민족의 영웅 손기정입니다. 손기정 선수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달리기 연습을 할 때면 김교신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한 발짝 앞서가면서 이끌어 주셨습니다. 지치고 힘들어 그만 달리고 싶을 때 저는 항상 고개를 똑바로 들고 김교신 선생님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뛰었습니다. 그분 뒤통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헬렌 켈러는 당당한 삶의 비결을 두 문장으로 말합니다. “나는 폭풍이 두렵지 않다. 나의 배로 항해하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까.” 평생 한 사람을 위해 헌신한 앤 설리번의 수고가 있었기에 헬렌 켈러는 지구촌 사람들의 마음속 등불로 빛날 수 있었습니다.뒤통수만 보아도 힘이 날 수 있는 스승. 배움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스승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이끌어 줄 참 스승들이 그 안에 아직 살아 계시니까요. 세상의 폭풍과 한파에 얼어 버린 굳은 마음들을 도끼로 깨 주실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한 권의 책에 손을 뻗습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21

오일장

송귀연 수필가“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엿장수가위소리와 함께 각설이가 빙 둘러선 인파속에서 몸을 흔들고 있다. 발가락이 삐져나온 양말에 빨갛게 볼연지 바른 여장남자는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만물장수, 포목전, 옹기전이 저마다의 보따리를 풀고 전을 펼쳐놓았다. 솥뚜껑을 뒤집어놓고 파전을 부치는 아주머니, 말린 고사리와 취나물, 각종 채소며 과일들을 좌판에 놓고 쪼그려 앉은 아낙들로 장터는 시끌벅적하다. 그 사이로 흥정하는 사람들과 물건을 실어 나르는 차량들이 뒤섞여 그야말로 난장판이다.장터골목엔 소머리국밥냄새가 구수하게 피어났다. 술집에선 육자배기 젓가락 장단에 막걸리 잔이 돌고 주모의 노래가 구성졌다. 약장수는 북을 치고 하모니카를 불며 마술도 보여줬다. 야바위꾼들이 주사위놀이와 화투 패를 재빠르게 섞어 팔광, 똥광 찾기 하는 놀이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라.” 유랑극단에선 회충약이며 오줌발이 세어진다는 약을 팔았다.엄마를 졸라 장 구경을 갔다. 특히 호박엿은 군침이 돌았다. 붙박이처럼 들여다보다 그만 엄마를 놓쳐버렸다. 엄마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 달려갔지만 매번 허탕이었다. 해는 금세 서산으로 떨어져 어둑해졌다. 두려움이 엄습해 무작정 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아랫마을 상여집 앞을 지날 때는 머리가 쭈뼛 섰다. 시커먼 손아귀가 뒷덜미를 덥석 잡아챌 것만 같았다.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뛰어 사립문을 밀치자 “아이구! 아가 용케 왔데이.” 하는 엄마 목소리를 꿈결처럼 들으며 자지러지듯 품에 안겼다.장날이면 농사일을 접고 엄마는 우아한 여인으로 둔갑했다. 옥색 한복을 차려 입고 나서면 지나던 이가 곱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북적이는 골목을 비집고 찬찬하 둘러보며 익숙한 솜씨로 흥정을 하였다. 허드레 작업복을 벗고 변신을 한 엄마는 딴 세상 사람이 되었다. 한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치켜 올리고 사뿐사뿐 걷는 자태는 마치 한 마리 학 같았다.삼바우라 불리는 떠돌이거지가 있었다. 아저씨는 비오는 날 짚으로 엮은 도롱이를 걸치고 다녔다. 한여름에도 얼룩무늬 국방색야상을 입었다. 마을의 잔치나 상가 집이 생기면 어김없이 출몰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나타나면 으레 맛난 음식들을 내주었다. 걸쭉한 노래며 춤사위로 사람을 불러 모았던 그는 각설이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다. 식당은 덩달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삼바우가 등장함으로써 장날은 비로소 흥이 돋워졌고 장날다워졌다. 엄마는 아버지 걱정으로 안절부절 하였다. 남동생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송아지 한 마리를 몰고 장에 간 아버지는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아버진 평소 술버릇이 좀 과한 이력이 있었다. 엄마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어디를 헤맸는지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아버지는 날이 희끄무레 밝아서야 돌아왔다. 다그치는 엄마를 향해 횡설수설하며 나동그라졌다. 엄마는 아버지 생채기를 살피는 대신 주머니를 뒤지고 몸을 더듬었다. “어딨노? 어딨능교 말이다!” 몸부림에 가까운 절규였다. “아이구, 이일을 우짜노!” 풀썩 주저앉으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메밀꽃 필 무렵’의 주인공 허생원은 떠돌이 장돌뱅이다. 어느 날, 다른 장으로 옮겨가던 중 동이를 만나 함께 가게 된다. 동이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게 되는 것도 장날을 통해서이다. 신경림의 ‘파장’도 장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장날엔 못난 사람들이 서로 얼굴만 봐도 정겨운 장소인 것이다. 김홍도의 ‘풍속화’도 시장을 배경으로 한 것들이 많다.사람들의 체온이 물씬 느껴지던 장터는 산업화로 사라지거나 쇠퇴했다. 요즘은 대형마트에 마저 밀려나 그 존재감을 상실하고 있다. 잘 포장되고 획일화된 상품, 편리함 때문에 자꾸만 시장을 외면한다. 오일장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잡다한 물건들과 땀 냄새와 악다구니와 신명들을 날것으로 만날 수 있는 오일장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각설이는 엿 판돈을 허리에 꽂고 연신 몸을 좌우로 흔들며 구경꾼들을 즐겁게 한다. 답례처럼 둘러선 사람들은 주머니에서 흔쾌히 지폐를 꺼낸다. 시래기 한 단과 무, 배추 등을 담은 장바구니가 꽤 무겁다. 각설이타령을 뒤로 하며 오일장을 나선다. 언뜻 골목길 모퉁이를 도롱이 걸친 삼바우 아저씨가 돌아나가고 있다.

2019-07-21

시민들과 함께, 영천의 새 역사를 만들고 싶다

최기문 영천시장영천시장으로 취임한 후 지금까지 매일 운동화를 신고 출근하고 있다. 언제든 시민이 있고 민원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가기 위해서 구두는 아무래도 불편하다.아침 일찍 우로지생태공원, 인력시장, 공설시장, 영천시스포츠센터 등을 방문하고 시민들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데는 나만의 시정 방침이 있기 때문이다.2019년도 영천시 신년화두를‘등고자비(登高自卑)’로 정했다.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뜻으로 시민 행복이라는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겪는 작은 일부터 차근차근 개선하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각오를 다시 다짐했다.실제로 2018년 7월 취임 당시를 떠올려보면 영천은 영천경마공원, 야사택지지구, 화랑설화마을 등 대형 사업들이 진전 없이 지지부진하고 영천시 인구는 역대 최저치인 10만186명을 기록해 10만 인구 붕괴의 여론이 지배적인 상황으로, 고향 영천발전에 대한 열의는 강했으나 여러모로 어려운 현실이었다.△ 시민과의 소통과 스킨십, 시민 편에 서기‘우문현답’이 사자성어 우문현답(愚問賢答·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대답) 외에 요즘 줄인 말로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시민들과 소통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시민들의 가려운 곳을 알 수 있기에 여러 단체와 간담회를 가지고 지역현안과 생활민원, 안전문제 등 시민들의 가감 없는 의견을 들었다.농촌지역의 대부분이 그렇듯 영천에도 마을까지 버스가 운행되지 않는 오지마을이 있어 어르신들이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 마을에 최단시간에 마을버스 운행이 가능케 추진했고 단돈 1천원으로 택시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행복택시를 운행했다.겨울 한파에 시민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 버스 승강장에 바람막이와 온열의자를 설치했다. 또 영천이 전국에서 가장 핫(Hot)한 지역이기에 버스 승강장에 에어커튼과 스마트 그늘막을 설치해 시민들이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도로를 식혀줄 살수차를 운행하고 있다.△ 공약사업 이행, 시민과의 약속 지키기지난해 11월 영천시는‘시민을 행복하게, 영천을 위대하게’라는 시정목표를 토대로 8개분야 54개 사업을 공약사업으로 정하고 분야별로 균형있게 구성해 추진 중이다.지난 1년간 가장 큰 성과는 우리시가 인구 10만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던 인구가 기업체와 단체,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노력한 결과 연말 10만1천500여 명이 넘었고 올 7월 현재 10만2천명을 넘어서게 됐다. 인구의 외부 유출과 지속적인 인구증가를 위해서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하고 정주여건을 개선해나갈 계획이다.출생률을 높이기 위해 출산양육지원금도 첫째 300만원, 둘째 500만원, 셋째 1천만원, 넷째 1천300만원으로 대폭 확대하고 다문화가정에 대한 지원도 마련 중이다. 초·중·고등학교 무상급식을 제공하고 각종 장학 사업을 확대해 학부모의 교육비 부담을 덜고 소외계층 없는 교육환경을 조성하고 있다.영천은 사통팔달 광역교통 인프라가 잘 구축된 강점이 있다. 반면 산업부지가 매우 부족해 기업들의 투자유치를 이끌어내기 무척 힘들었다. 강소기업 유치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뛰어 다닌 결과 1년 만에 10개사 767억원의 투자협약을 이끌어냈다. 부족한 산업단지의 공급을 위해 10만 평 규모의 산업단지를 공영개발하고 있어 앞으로의 투자유치는 더 밝을 전망이다.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고용률 67.6%(전국 3위, 도내 1위)를 기록해 고용노동부 주관 2019 전국지방자치단체 일자리 대상에서 장관상 수상의 쾌거를 거뒀다. 최근 국토부에서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있던 남부동 일원을 ‘투자선도지구’로 최종 결정해 영천이 군사도시의 이미지를 벗고 첨단복합도시로 거듭날 예정이다.영천경마공원은 지난해 10월 설계 계약을 체결하고 44만 평 규모로 경마공원 조성용 구역 지정과 실시 계획 승인을 신청할 예정이다. 지난 4월 행안부와 지방세 감면문제를 잘 협의해 영천경마공원은 원안 수준으로 사업이 추진 될 것이다.우수한 농축산물이 다양하게 생산되지만 특화된 브랜드와 세련된 포장재 등이 없어 소비자에게 홍보와 판매를 위한 마케팅에 어려움이 많았다. 가장 먼저 과일포장재와 영천별빛한우 브랜드 개발로 농축산물의 브랜드 가치를 높였다.농가를 위해 농촌인력지원센터를 마련하고 서부권, 남부권에 이어 동부권에도 농기계 임대사업소를 구축할 계획이다.△ 앞으로의 시정방향, 시민과 함께 발전하기시민들이 체감하는 작은 것부터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큰 사업까지 시민과 약속한 공약사업을 하나하나 챙기고 추진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해 나가겠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시민이 있고 민원발생 현장이 있다면 어디든 가장 먼저 달려가 시민 편에 설 것이다. ‘등고자비’의 정신을 새기고 시민과 함께 소통과 화합해 아이 낳기 좋은 도시,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 시민 모두가 행복한 영천시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2019-07-21

사람 사는 방법도

한 나흘 걸려 창고 치우는 일을 하다 보니 일하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자기랑 삶이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아주 좋은 일이다.첫날 만난 일하는 분은 연세가 일흔은 족히 넘어 보이는데, 몇 살처럼 보이느냐 하기에, 글쎄요, 육십은 넘어 보이십니다, 했더니 기분 좋아 하신다.하루 일이면 오전 여덟시부터 저녁 대여섯 시까지인데, 이런 일에는 손에 익지 않으신지 유리를 조각내 자루에 담는데 오전 내내 보내고도 아직도 다 못 끝냈다. 나중에 자원 처리 사장님이, 바닥에 유리가루를 잔뜩 남겨 놓았다고 흉을 보기도 했다.쉬는 시간에 담배를 깊이 빠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 옆에 앉아 얘기를 붙여 본다. 팔뚝에 문신도 있으신 이 분은 젊으셨을 적 이력이 적잖이 화려하셨을 법하다.운전을 했다신다. 무학이라 직업 구하는 게 어려웠을 땐데, 신촌을 무대로 주름잡고 지내다 지프 차 조수가 되어 운전을 배웠단다. 신촌 로터리 옆에 강화버스 정류장이라고 있었는데, 그 길 건너편이 삼표 연탄 공장이 있었다는데, 거기 삼륜차를 운전을 하셨단다. 그 전이었다든가, 그 후였다든가 군대를 갔는데, 최전방 부대로 가 고생을 ‘엄청’ 하셨단다. 한여름에 연병장에 웃통 전부 벗고 두 팔 벌리고 서 있게 하면 모기가 얼마나 극성을 부리는지 온통 가려워 난리가 난단다. 한참을 그렇게 세워 놨다가 포복훈련을 시키는데 그러면 살갗이 다 터져 나가도록 박박 기어도 그렇게 시원스러울 수가 없다던가.사흘째 되자 이 왕년의 운전수 어르신은 나오지 않으시고 아주 바싹 마른 중노의 아저씨가 대신 일을 하셨다. 그분은 워낙 말씀이 없으셔서 말조차 붙이기 어렵고, 대신에 나는 사흘째 함께 부대끼는 자원 회사 사장님께 말을 붙여본다.젊으셨을 때는 무슨 일을 하셨어요? 사실, 자원회사라고 하지만 쉽게 말하면 고물상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꼭 쉬운 일만은 아니다. 여기까지 온 사연이 없을 수 없을 테다.젊으셔서는 우체부 일을 하셨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으셨단다. 갑갑한 터에 뭔가 새로운 일을 찾다가 원양 어선을 타셨단다. 참치 잡는 배를 타셨다는데 배가 인도양에도 가고 남태평양에도 갔다나. 삼 년을 계약해서 먼 배를 타는데 군대보다 어려운 게 원양 어선 생활이란다. 개중에는 학생운동 하다 배 타러 온 사람도 있고 그 밖의 학생 출신들도 더러 있는데 두고 보면 그렇게 딱할 수가 없단다. 참치 잡는 배에서 물이 바로 앞에서 찰랑찰랑 대는데 한 발자국만 떨어지면 곧바로 저세상 가기 쉽단다. 조류가 없는 것 같아도 한 번 배에서 떨어지면 순식간에 저멀리 밀려나 버린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제 일 제가 찾아서 하지 않고는 무서워 못 배기는 곳이 원양어선 일이라고도 한다.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는 다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하다.어떻게 하다 ‘자원’ 일을 하게 됐는지 당신 생각에도 참 딱할 때가 많단다. 나 하기 싫으면 남 하기도 싫다고 자원 일이라는 게 보통 어렵지 않단다.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은 있는 것대로, 없는 것은 폐기물로, 폐기물도 다 같은 게 아니라 까다롭게 분류해야 하는 게 한둘 아니고, 쇠붙이에 비철 금속도 그 무거운 것을 나중에 다 분해하고 자르고 분류해야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란다.아내한테 참 미안하다 하시는 자원 사장님, 그런데 정말 그 사모님이 일을 남들의 두 갑절은 하는 것 같다. 남일 아니기 때문이리라.사람 사는 일 결코 쉽지 않다. 직업이란 크게 보면 다 살아가기 위한 방편들일 뿐이다. 귀하고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는 일에, 사는 방법에 겸허해져야 한다고, 다시 한 번 되새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7-18

군인 정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전쟁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군인이기에 또는 군인으로서 지켜야 할 본분의 문제들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유야 어쨌든 국민의 안위를 수호해야 하는 군인으로서 상명하복의 군인정신으로 목숨을 걸고 충실히 임무를 수행한 그들의 희생에서 국방에 대한 국민의 믿음은 존재하는 것이다.많은 사람이 보았을법한 영화지만, 이야기는 라이언가 4형제가 전쟁에 참전하면서 시작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라이언가 4명의 형제 중 3명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한꺼번에 세 아들이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한 어머니는 실의에 빠져들고 그러면서 하나 남은 막내아들의 생사를 걱정하게 된다.이 소식을 전해 들은 미 육군 참모총장은 마지막 남은 막내아들을 살려서 집에 보내자고 판단하고 8명의 라이언 일병 구출팀을 전쟁터로 보낸다.라이언 일병 한명의 목숨이 여덟 명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는지 혼란스럽기도 한 영화이지만 전쟁이라는 예외적 상황에서 발생한 극적 분위기를 잘 소화해 내고 있다. 전쟁이 부른 비극적 현실과 전쟁을 통한 인간애, 군인정신이어서 가능했던 임무 그리고 애국심 등의 모습을 잘 보여준 영화다.나라와 국민의 안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오로지 그들의 희생정신에서 나온다. 군이 오합지졸(烏合之卒)이니 당나라 군대같다는 비난을 들으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최근 북한 어선의 해상 노크 귀순 등으로 경계에 실패한 우리 군의 모습을 본 국민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해군 2함대 경계병 이탈사건과 사건 조작을 둘러싼 군의 막장 드라마 같은 모습에서 국민이 느끼는 감정은 개탄스럽고 착찹했다. 오죽했으면 군의 기강 해이를 이솝우화 양치기 소년에 비견하는 글들이 나왔을까 안타까울 뿐이다.정경두 국방장관의 해임을 둘러싸고 여야가 기 싸움이다. 야당은 해임을 촉구하고 여당은 해임 사안은 아니라고 한다. 논란을 더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 군인정신 살려 장관 스스로가 물러나는 것이 뒤늦었지만 당당한 모습일 것같은데 말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19-07-18

죽음에 이르는 병, 우울증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파란만장한 정계의 풍운아 정두언 전 의원의 죽음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정 전 의원은 이명박 정부 당시 ‘왕의 남자’란 칭호를 받을 만큼 이 대통령의 최측근이었으나, 권력 언저리로 밀려난 이후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돼 10개월간 수감됐다가 무죄로 풀려났다. 무죄확정 후 받은 6천여만원의 형사보상금을 전액기부하고, 여의도에 다시 입성했지만 20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그 와중에 이혼의 아픔도 겪었다. 이후 정 전 의원은 방송활동에 전념하며 보수논객으로 자리잡았고, 지난 해에는 재혼한 뒤 올해 초 일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이 있는 아내와 함께 퓨전 일식집을 개업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랬던 그가 돌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는 파란만장한 삶속에서 앓게 된 우울증 때문으로 보인다. 정 전 의원은 지난 해 2월 모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치, 가정에서 모두 실패했을 때 목을 맸지만 가죽벨트가 끊어져 실패했다”고 밝혀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당시 그는 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느냐는 물음에 대해 “인간이 본디 욕심덩어리인데, 그 모든 바람이 수포로 돌아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겠구나’생각이 들때 삶의 의미도 사라진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의미없는 존재가 되는 거다. 급성 우울증이 온거지.”라며 자신의 우울증을 털어놨다.서울대 상대를 나와 행정고시를 합격한 정두언 전 의원은 지난 2000년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 17·18·19대 국회의원을 지낸 3선 국회의원이자 4장의 앨범을 낸 대중가수로도 유명하다. 필자는 정 전 의원이 재선 국회의원이던 지난 2009년 4집앨범을 낸 뒤 국회 기자실에서 직접 기자들에게 앨범을 돌리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가 기자들을 대하는 소탈한 모습과 특유의 직설적 화법이 서울 토박이임에도 불구하고 경상도 동향같은 친근함을 느꼈고, 그의 올곧은 정치이념에 공감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이명박 정부 당시 ‘만사형통’으로 불리던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의원에 대해 “권력사유화”라며 비판해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졌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는 내게 선물한 4집 앨범 타이틀곡 ‘희망’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하는 일이 마음처럼 되질 않니/힘들고 지칠 때 나는 안돼 라고 하니/용기를 잃어버린 사자처럼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이제 두 팔을 뻗어 하늘 높이 기지개를 펴/훌훌 털고 멋지게 일어나봐/그래 할 수 있어 그래 날 수 있어/온 세상을 비춰 그대가 희망/바로 당신은 우리의 희망/상처뿐인 거친 가슴과/두 발로 설 수 없는 약한 용기도/희망이라는 이름 앞에 강한 용기로 태어나고/눈물뿐인 거친 가슴과/어두운 하늘 아래 상한 인생도/희망이라는 이름 앞에 강한 용기로 태어나리”겉으로 밝고 화려해 보였던 정 전 의원에게 이 세상 어디에도 희망이란 없어 보였나 싶어 안쓰러운 마음뿐이다.우울증은 죽음에 이르는 심각한 병이다. 이것을 병으로 보지 않고 방치하다가는 극단적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고, 그때 후회해봐야 때늦게 된다. 따라서 가족이나 친구중에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응대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지를 알아두는 게 좋다. 우선 우울증으로 환자가 짜증, 무기력, 약속을 지키지 않는 태도를 보이더라도 비난하지 않고 차분히 대화를 나눠보고, 그의 어려움을 충분히 들어주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격려해주는 게 좋다. 중요한 것은 섣부른 충고보다는 경청하는 자세로 친구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좋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울증 치료를 받도록 적극 권유하고, 전문의의 처방에 따라 항우울제를 복용하도록 도와야 한다. 무엇보다 자살의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면 즉각 정신과의사의 치료와 도움을 받도록 해야한다. 육신의 병보다 더 무서운, 죽음에 이르는 병이 우울증이란 사실을 다시한번 새기게 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19-07-18

포스텍 총장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포스텍 이사회가 새로운 총장을 선임했다. 포스텍의 8대 총장으로 김무환 첨단원자력공학부 교수가 선임되었다. 8년간 외부초빙 총장에 의해 운영된 포스텍이 다시 내부교수를 총장으로 선임하는 전환점이란 의미도 갖는다. 김무환 총장 내정자는 30년 넘게 원자력안전기술 분야를 연구해 온 원자력 전문가로 꼽힌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원장을 역임하였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의 자문기구인 국제원자력안전위원회의 한국 대표 위원으로도 활약했다. 교내에서는 기획처장, 학생처장 등 다양한 보직을 맡아왔다.상당한 진통을 겪었던 총장선임 과정이기에 새로운 총장이 교수 직원 학생 등 구성원들의 힘을 모아 포스텍의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는 노력과 사명감은 그 어느때보다 중요해 보인다. 포스텍은 어떤 대학인가? 포스텍은 한국을 세계로 리드하는 대학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30여 년 전 1986년 한국 최초의 연구중심 대학으로 출발하여 첫해부터 초일류대학으로 인정받아 1994년 시작된 중앙일보 랭킹에서 국내1위를 차지했다. 또한 2010년 영국의 평가기관 타임즈(THE)가 실시한 첫해 랭킹에서 한국 1위, 세계 28위를 차지하고 2012년 ‘창립 50년 이하 대학’에서 세계 유수의 대학들에 앞서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3년 연속 그 위치를 지켰던 한국 대학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대학이다.30년 전 박태준 포스코 회장의 결단과 김호길 초대 총장의 배짱으로 만들어진 포스텍은 한국의 서울 아닌 지역에서도 초일류 대학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포스텍은 창립 이후 줄곧 내부교수가 총장을 하는 전통을 가졌었다. 그러나 2011년 6대 총장 이후 8년간 두 분의 외부총장을 영입하였다. 과거를 돌아보면 캠퍼스를 격동으로 몰아넣었던 이슈가 있었고 그 기간 동안 역동력을 상실하여 학생들의 포스텍 선택이 줄어드는 현상을 입시에서 경험했다. 포스텍이 혼돈의 세월을 겪었기 때문이다. 국가과학자를 비롯해 교수들이 포스텍을 떠나기도 했다. 대학이 여러모로 최선을 다하긴 하였지만, 상대적 평가 하락도 이어졌다. 이후 대학을 다시 재건하려는 노력이 있어왔다. 외부활동과 강연을 통하여 창의력과 창업을 바탕으로 하는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어 대학을 다시 재건해 나갔다. 대학의 사명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신선했다.그러나 한번 내려가기 시작한 대학평가를 세우기는 쉽지 않았고 경쟁대학과의 학생선택권에서 위축되어 온 것을 되돌리기도 쉽지는 않았다. 대학을 선택하는 기준은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정성적인 요소로는 대학의 명성이 있고, 정량적으로는 입학생의 성적과 국내외 대학평가 등이 있다. 물론 포스텍이 자랑하는 대학의 연구능력은 위의 세 요소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그 영향은 장기간에 걸치고 또한 전략적인 접근 없이는 쉽게 반영되지 않는다. 그 연구능력마저 경쟁대학들이 빠르게 따라오고 있다. 이제 신임 총장에게 주문하고 싶은 것은 포스텍의 발전을 위한 여러가지 전략은 국내외 높은 평가를 바탕으로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간의 선의의 경쟁은 스피드만을 기준으로 하는 달리기가 아니며 오히려 종합적인 면을 평가하는 피겨스케이팅에 가깝다. 대학에서 연구는 매우 중요하지만, “연구만 잘하면 된다”는 단순논리를 떠나 연구, 인프라, 명성, 네트워크 등이 함께 가야 한다.김 신임총장 내정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규모가 작지만 그렇기 때문에 혁신이 필요한 시대에 누구보다 빨리 대응하면서 앞서나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포스텍은 작고 강한 대학이기 때문에 탄력성과 유연성을 갖고 있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대학이다. 신임총장에게 큰 기대를 걸어본다.

2019-07-18

반일감정과 과거청산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인류의 역사는 전쟁사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지배해온 역사다. 그리고 역사는 늘 승자의 편이었다. 전쟁에서 많이 이긴 자가 영웅이고 위대한 정복자였다. 그들이 건설한 대제국이 인류의 찬란한 유산이 되었다. 하지만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이어서 흥망성쇠의 부침이 또한 역사였다.고조선이나 고구려가 융성했던 때를 제외하면 우리는 늘 약소국이었다. 오랜 세월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왕의 책봉을 받는 등의 굴욕을 당했다. 일곱 차례나 몽골의 침탈을 당했고 청나라에는 항복까지 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래도 나라가 아주 없어지지는 않고 이어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고 민족의 저력이었다.일본의 침략을 받은 것도 약육강식의 하나였다. 임진왜란은 일본을 통일하고 서양으로부터 신식무기인 조총을 들여와서 전투력이 강력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듭되는 사화(士禍) 등으로 부패하고 나약해진 조선에 대해 상대적으로 힘의 우위에 놓이게 되자 침략의 야심을 드러낸 거였다. 1910년 한일합방에 따른 식민통치 역시 조선의 국력이 쇠약해 일본과의 힘의 균형이 깨어진 때문이었다.침략전쟁과 식민통치 기간 중에 일본이 저지른 살상과 파괴와 약탈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원한으로 치자면 불구대천의 원수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강대국이 되어 받은 만큼 되돌려 준다 한들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힘으로는 독립을 할 수 없었음에도 미국의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을 하는 바람에 식민지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1965년에 열린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의 타결은 박정희 대통령의 우국충정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야당과 재야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인 것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미래에 대한 강한 의지와 비전이 없이는 결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정을 당시에 발표한 특별담화문에서 이렇게 밝혔다.“지난 수십 년간 아니 수백 년간 우리는 일본과 깊은 원한 속에 살아 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독립을 말살하였고, 그들은 우리의 부모형제를 살상했고, 그들은 우리의 재산을 착취했습니다. 과거만을 따진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어느 모로 보나 불구대천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그렇다고 우리는 이 각박한 국제사회의 경쟁 속에서 지난날의 감정에만 집착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습니까,”당시 한일국교정상화의 조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제시한 것은 과거청산, 호혜평등의 기본관계 설정과 청구권 문제, 어업협정 문제, 60만 재일교포 처우 문제, 문화재 반환 등이었다. 물론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굴욕외교라는 반대가 거세었지만 그때 받아낸 유무상의 8억 달러로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등의 국가기간산업에 투입하여 산업화의 기반을 다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의 우리나라 수출의 총액이 고작 1억 달러 남짓이었으니 그것이 얼마나 요긴한 종자돈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요즘 한일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위안부 문제의 재(再)거론과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위자료지급 판결에 노골적인 경제보복으로 맞서는 일본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이 영 불안하다. 가뜩이나 불황인 나라살림에 얼마나 큰 타격이 있을까 걱정들인데, 나라 경제는 아랑곳없이 반일감정이나 부추겨 대결구도로 가려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이런 결과를 고의로 자초한 게 아니라면 감정보다는 국익을 앞세우는 현명한 판단과 대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2019-07-18

초등학교도 못 가본 남자가 만드는 세상

평생 독서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자기만의 세상에 감금당한 꼴이다. 그 사람이 접하고 사귀는 사람은 극히 소수의 사람으로 보고 듣는 것이 신변의 잡사를 넘지 못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바로 별세계에 출입을 시작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좋은 책이면 독자는 세계 인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물리적으로 먼 별세계를 갈 수도 있고 사라진 그 옛날에도 갈 수 있다. 또 여태까지 알 수 없었던 미지의 여러 가지 일을 알게 되고 숱한 처지에서 상황에 패하지 않고 이겨가는 과정도 깨달을 수 있다.-린위탕생활의 발견 중린위탕의 문장을 만난 소년의 눈이 반짝입니다. 혼자서 1,000일 독서를 결단합니다. 도서관이나 친구, 하숙생들에게 빌린 책들을 미친 듯 읽기 시작하지요. 1958년 8월 7일. 그의 나이 마흔하나. 회사를 창업합니다. 직원들을 모아 놓고 선언합니다. “저는 25년 이내에 세계적인 회사를 만들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땅에 가장 좋은 사옥을 짓겠습니다.”1980년. 비전을 선포한 지 꼭 23년째 되는 해, 종로구 광화문 1번지. 이곳에 지하 4층, 지상 23층의 사옥을 짓습니다. 금싸라기 땅에 사옥을 짓고 지하 1층에 세계 최대 규모의 교보문고를 세울 때 극심한 반대에 부딪칩니다. “그 금싸라기 땅에다 서점이요? 상가를 지어 분양해야 합니다.” 임원들은 반대하지만 대산은 젊은 시절 책이 자신에게 베푼 혜택을 잊지 않습니다.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대산 신용호 선생이 남긴 위대한 문장입니다. 회의할 때 직원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매사에 따뜻한, 땀내 나는 잔정을 베풀어라. 그러면 상대방이 오래 머물게 된다.” 대산의 이런 마음은 교보빌딩 주위를 지나는 서울 시민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겠다는 뜻으로 이어집니다. 빌딩 외벽에 펼쳐진 가로 20m, 세로 8m의 대형 글판이지요. 오늘도 교보문고에는 4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종종걸음으로 찾아옵니다.학력(學歷)이라고는 없는 무학의 사나이는 책을 통한 진정한 학력(學力)으로 대한민국을 남부럽지 않은 나라로 변화시킵니다. 2003년. 대산이라는 큰 별은 아름다운 궤적을 남긴 채 저물었지만 그의 유산은 오늘도 우리 가슴에 남아 두근거리고 있습니다.먹구름 위 눈부신 세상이 곧 린위탕이 말하는 별세계입니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펼치기만 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먹구름 위로 순식간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18

마이크로 모빌리티 시대

마이크로 모빌리티는 자동차보다 크기가 작고, 전기를 동력으로 하는 1인용 이동수단을 가리킨다. 젊은 직장인이 많은 경기 성남시 분당, 판교지역이나 서울 서대문구·마포구 대학가 일대에서 볼 수 있는 전동킥보드, 전동휠, 전기자전거 등이 대표적이다.대형차량과는 달리 구매 또는 관리비용이 저렴한 데다 이용자가 빠른 속도로 늘면서 스타트업 창업과 성장이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교통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마이크로 모빌리티 시장은 연평균 20% 이상 고속성장해 2022년에는 시장규모도 약 6천억원 수준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현재 국내에서 마이크로 모빌리티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만 해도 15곳에 이른다. 특히 올해 정부가 마이크로 모빌리티 시장에 얽혀 있는 규제를 풀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후발주자들이 시장에 빠른 속도로 들어오고 있다. 카카오모빌리티가 마이크로 모빌리티 서비스에 뛰어들었고, PUMP는 최근 ‘씽씽’이라는 마이크로 모빌리티 서비스를 개시했다. 매스아시아의 ‘고고씽’도 올해 초 투자유치를 받아 지난 4월 서비스를 시작했다. 지난해 말부터 울룰로가 서비스하기 시작한 전동킥보드 공유 서비스 ‘킥고잉’의 경우 3월만 해도 3만명이었던 가입자 수가 지난 달 15만명을 돌파했다. 국내 최초 전기자전거 공유시장을 연 일레클은 올해 4월 서비스 시작 3주만에 재사용률 70%를 달성했다. 카카오 모빌리티는 인천 연수구와 경기 성남시에 분포돼 있는 1천대의 전기자전거를 연내 3천대까지 늘릴 계획이다. 마이크로 모빌리티는 새로운 형태의 이동수단이지만 카풀 등 차량공유 서비스와 달리 기존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지 않은 만큼 시장을 형성해나가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다만 관련 법제 등이 아직 미비한 상황이다. 현행법상 불법인 인도주행이 잦고, 헬멧 등 안전장치가 부족하고, 인도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전동 킥보드나 전기자전거 때문에 보행자들이 불편을 겪는 경우도 잦다.제도 개선이나 제안을 하려해도 정부 어느 부처에 얘기해야 할 지 모르는 점도 개선돼야 한다. 바야흐로 마이크로 모빌리티 시대가 코앞에 다가온 듯 하다.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7-17

중도가 살아야

장규열 한동대 교수아까운 정치인이 떠났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지만, 그가 보여주었던 열정과 치열함에 비해 너무나 빨리 끝나버린 삶이었다. 정치뿐 아니라 가수와 요식업 등 여러 색다른 시도를 함께 하였던 그의 다채로운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애석할 터이다.세상을 살아가는 모습들은 실로 다양하다. 그 가운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모습들을 경험하는 것일까. 한 가지 일에만 매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 우물을 파서 전문가가 되는 일이 물론 귀하지만, 누구나 그 외의 일들에 대하여 궁금하고 도전하고픈 마음이 일기도 한다. 21세기는 송곳같은 전문인 보다는 두루두루 섭렵하는 인간이 성공에 이를 확률이 높다고도 한다. 더 넓게 보다 다채로운 삶을 열어보았으면 한다.일찍 떠난 그는 생각의 폭이 넓었다고 한다. 보수 정권에 참여했고 보수 논객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의 시선과 담론은 언제나 보수와 진보 두 진영 모두의 관심을 끌었다. 양 켠 모두 그의 비판적 논평의 대상이 되었으며 함께 긴장하며 그의 평가를 들어야 했다. 이름하여 중도보수. 오늘 우리 정치에는 그와 같은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있어야 한다. 대상이 누구이든 치우치지 않으면서 상식적으로 판단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주저함 없이 그 생각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진영의 깃발에 휘둘려 당신의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느라, 우리 정치는 아직도 큰 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게 아닌가. 정치인이 케케묵은 이념과 진영논리를 벗고 상식을 기준으로 이성으로 판단하며 담론과 토론을 이어갈 때 국민의 박수를 받을 것이다. 생각의 틀을 넓게 펼쳐 주시라.국민은 정치를 언론을 통해 바라보면서, 배우고 나누며 생각하고 판단한다. 정치권이 사용하는 언어에 물들고 당신이 구사하는 행위에 동화된다. 품격 잃은 정치인의 막말은 시민들의 사고방식마저 치졸하게 만들고, 감정에 휘둘린 정치권의 행태는 시민들의 일상을 병들게 한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변해 국민은 정치에 휘둘리기만 하지는 않는다.이 땅의 민주화는 보통사람들이 불러오지 않았는가. 불러온 민주적 토대를 정치권이 잘 유지하지 못한 기억은 혹 있어도, 보통 사람들이 이 땅의 정치를 망친 기록은 한 줄도 없다.오바마(Barack Obama) 전 미국 대통령은 ‘진정한 변화는 보통 사람들이 특별한 일들을 해 낼 때 찾아온다’고 했으며, ‘정치권의 변화는 안으로부터가 아니라 밖에서부터 만들어진다’고 했다.자각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만들 것이라는 믿음이 아닐까.정치가 정치를 바꿀 수 있을까. 나라와 국민이 잘 되는 일보다 정당의 욕심에 머무르는 한, 우리 정치는 바뀌지 않는다. 밖으로부터의 변화가 밀려들기 전에 우리 정치는 안을 잘 살펴야 한다. 당신들보다 국민들이 먼저 깨어 있음을 우리 정치는 알아야 한다. 혹 아까운 정치인들이 남들보다 빨리 생을 마감하지만, 그들이 남긴 기억 속에 이 모든 것을 한 계단 높이는 무언가가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 나라가 더 나은 자리로 나아가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의 폭을 넓혀 주시라. 이념과 진영을 넘는 당신의 시도와 도전을 기대한다. 막말과 일탈은 일하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여 상식에 맞고 균형잡힌 결정을 이끌어 주시라.보다 나은 정치가 펼쳐지기를 기대하면서 그를 기억해야 한다. 생각의 폭이 그보다 넓은 사람이 더 많이 나타나야 한다. 중도가 넓어지는 정치가 살아나야 한다. 사심없이 공익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안에서도 바꾸고 밖에서 살피는 정치가 피어올라야 한다.정치가 나라를 살려야 하므로.국민이 정치를 살필 것이므로.

2019-07-17

그림의 떡, 백년 교육정책!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너무 뻔뻔한 어느 교육자의 이야기이다. “이번 자사고 운영평가가 경쟁 위주의 고교교육과 서열화된 고교체제의 정상화를 위한 새로운 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이런 뻔뻔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 말을 한 사람들은 그래도 교육 관료라고 하는 사람들인데, 그 누구보다 이 나라 고등학교 교육 현실을 잘 아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런 뻔뻔한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필자는 교사라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거짓말 대신 차라리 좀 솔직해지면 안 될까? 대통령 공약(公約) 사항 중 하나이고, 자신들 또한 정치 이념을 가지고 교육 수장이 된 만큼 자신의 정치 이념에 맞지 않기 때문에 폐지한다고. 차라리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국민들의 충격이 좀 덜 하지 않을까!자사고 폐지를 두고 녹음한 것처럼 똑같은 논리를 펴고 있는 정치 교육자들의 말에서 군내가 나는 것 같다. 대한민국 자체가 서열화 된 학력에 의해 만들어진 신(新)계급주의 사회인데, 자사고를 폐지한다고 해서 정말 “경쟁 위주의 고교교육과 서열화 된 고교체제”가 정상화 될까. 정말 이렇게 믿는 것일까? 만약 자사고를 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교 교육이 정상화가 안 된다면 그 때는 지금 상처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는 누구 보상 해 주나?왜 자사고 폐지가 교육을 위한 순수한 정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누군가를 위한 정치적 수단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드는 이유는 또 왜일까?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분명 자사고 폐지에 대한 이상한 논리 때문이다. 경쟁 위주의 고교교육, 서열화 된 고교체제! 이 두 가지가 자사고를 폐지하는 가장 큰 이유이라는데, 이 문제는 자사고만의 문제일까?지난 주 대부분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1학기말 고사가 치러졌다. 교사들은 부단한 연구를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학생들을 줄 세우기 위한 함정(陷穽) 문제들을 만들었다. 아마도 교사들은 함정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뿌듯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학교 선생님들의 열정을 아는 학생들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교육 현장에서 몇날 며칠 밤을 하얗게 불살랐다.여기까지만 보면 우리 교육이 참 이상(理想)적인 것처럼 보인다. 좋은(?) 문제를 만들기 위해 연구하는 교사와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교육의 속사정은 이상과는 전혀 다르다. 이상(理想)도 이상(異常)이 되는 것이 한국 교육 현실이다.시험이 전부인 대한민국 교육! 시험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이 나라 시험은 분명 나쁘다. 왜냐하면 학생들을 줄 세우기 위한 경쟁시험이니까! 줄 세우기가 왜 나쁘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나라의 줄 세우기 시험은 오로지 상위 학교 입시 자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에 잘 못 된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은 시험이 끝나는 순간 그토록 고생해서 공부했던 시험을 보기 위한 지식들을 깔끔하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그럼 시험이 끝난 이후의 학교 모습은 어떨까. 물론 모든 학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많은 학교들에서 교사와 학생들은 수업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업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잘 해야 시험 점수를 확인하는 정도에서 수업은 끝날 것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두꺼운 체육복 등을 입고 추울 정도로 시원한 교실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하교 이후에는 학원에서 밤늦도록 공부 할 것이다.고교 교육 정상화를 위해 자사고를 폐지한 교육 정치 관료들도 분명 이런 고등학교 현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 나라 고등학교 교육에서 대학교 입시를 위한 경쟁을 제외하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교육백년지대계교(敎育百年之大計),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다.

2019-07-17

‘애절양’과 ‘녹두꽃’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2002년 ‘대망’을 끝으로 드라마와 작별했다. 1995년 ‘모래시계’로 선풍을 일으킨 송지나 작가와 김종학 연출이 만든 작품이었다. 우리로 하여금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다시 생각하도록 인도한 ‘모래시계’. ‘모래시계’전에 좋아한 드라마는 ‘서울의 달’이다. 출세를 위해 부나방처럼 떠돌던 촌놈의 허망한 삶을 아프게 그려낸 사회드라마.‘대망’ 이후에는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희곡과 연극 연구자가 드라마와 연을 끊는다는 것은 곡절이 있을 터. 혁명과 변혁의 80년대를 불처럼 바람처럼 파도처럼 산 자들은 1988년 대선패배와 군부독재의 연장을 잊지 못할 것이다. 문단(文壇)에서는 처절하고 응어리진 ‘자기고백’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투쟁의 전선은 하나둘씩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 전선이 1991년 “경대를 살려내라!”는 피어린 항쟁이었음은 재언을 요치 않는다.사회-정치 드라마나 역사 드라마에는 당대인들의 역사의식과 정치적인 견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들어있다. 세상이 너무 엄청나면, 상상을 절할 정도로 극악하고 폭력적이면 사람들은 유희와 오락으로 도피한다. 칼라일은 ‘프랑스 혁명사’에서 기요틴과 오락이 공존하던 1793년 12월의 파리에 23개 극장과 60개 무도장이 성업했다고 기록한다. 연극과 가면무도회에 도취한 한밤의 축제와 백주대낮에 벌어지는 기요틴의 살육이 어우러진 혁명의 나날들.‘대망’의 누군가가 연극으로 세상을 뒤엎겠다는 포부를 말하는 장면에서 허망해진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는 헛헛함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드라마와 작별한 까닭은. 얼마 전에 원광대 박맹수 총장의 동학관련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2014년 가을 동학농민전쟁 12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경북대 인문대학에서 개최했을 때 박 총장은 발표자로, 나는 사회자로 만난 일이 있다. 이번에는 연사와 청중으로 반갑게 재회했다.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은 왕과 귀족, 성직자계급의 과도한 특권과 제3신분 및 제4계급의 수탈과 억압이었다. 그것을 대표한 인물이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였음은 불문가지. 위고는‘레미제라블’에서 그들을 단두대로 보내고도 전혀 나아지지 않은 민초의 삶을 다각도로 그려낸다. 새로운 통치자와 지배집단이 등장했음에도 왜 민중의 삶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는 것일까?!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혁명이며 기요틴이었을까?!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이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준거로 작용했다면, 동학혁명을 이해하는 데에는 다산의 ‘애절양(哀絶陽)’이 필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강진에 유배된 다산이 1803년에 쓴 7언 22행시 ‘애절양’. 강진 갈밭마을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았는데 사흘 만에 군적에 오르게 되자 관리가 군포 명목으로 소를 끌고 가버린다. 절망한 백성이 그만 자신의 양경을 잘랐다는 얘기를 들은 다산이 쓴 뼈아픈 시가 ‘애절양’이다.다산은 백성의 고통과 조선의 문란한 군정을 보여준다. 남편의 양경을 들고 관아에 호소하는 아낙의 정경이 처절하다. 시아비상 마친 것도 얼마 전이고, 갓난아이 배냇물도 마르기 전이다. 그런데 아전은 군보에 시아비와 남편, 어린것의 이름을 올려놓고 소를 끌고 가버린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면서 고관대작들은 낱알 한 톨 비단 한 치 내는 법이 없다고 다산은 쓴다.동학농민전쟁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드라마 ‘녹두꽃’이 종영되었다. 박 총장에 따르면 1894년 당시 조선 인구는 1천50만 정도, 동학교도는 250만∼300만에 이르렀다 한다. 얼마나 많은 민초가 동학에 귀의하여 후천개벽을 열망했는지 가늠할 만한 수치다. 농민전쟁으로 30만∼50만 동학교도가 죽임을 당했는데, 그 가운데 3만∼5만이 고종의 비 민자영이 불러들인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 한다. 2019년 여름 아베의 고약한 행악질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고심할 시점이다.

2019-07-17

글 쓰기를 두려워하는 이유

글의 배후에 흉악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권위와 거짓, 독점과 폭력이 스며 있습니다. 잘 짜인 글, 삶에서 우러나지 않고 포장한 미사여구들이 권위를 갖습니다. 신문의 사설, 서점에 진열된 책. 글이 활자가 되어 시선을 사로잡는 순간 힘을 갖는 거지요.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는 솔직하고 유창하던 아이들을 교실 앞으로 불러내 발표를 시키면 이내 얼어붙습니다. 평소와 달라집니다. 말이 글에 지배를 당하는 순간입니다. 자연스러운 대화가 아닌 딱딱한 발표가 되어 버리지요. 앞에 서는 순간 권위와 거짓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삶이 자연스럽지 않고 주눅드는 악순환입니다. 내 고유한 삶이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자꾸만 덮고 숨기고 멸시하고 싶습니다.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이 글보다 먼저다. 글을 쓸 때도 말하듯 쓰는 것이 좋다. 나는 ‘말이 글보다 먼저’라는 이오덕 선생의 이론을 충실히 따랐다.”사람들이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말과 글이 다르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이란 책에서 본 것처럼 그럴듯한 멋진 문장으로 써야만 하는 것이라고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글을 짓는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오덕 선생은 말합니다.“글짓기가 아닌 글쓰기로 그 가슴속에 쌓인 답답함을 털어놓는 것은 마치 숨을 쉬는 것과 같다. 생명은 이렇게 해서 자기표현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잘것없다 생각해 숨기고 멸시해 온 내 것, 우리 것을 다시 찾아내 그 가난하고 조그마한 것들을 귀하게 아끼고 드러내 보이고 고이 키워가야 한다. 눈부신 황금으로 빛나는 글의 보물 창고는 먼 어느 나라의 화려한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걸린 무지개 너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걱정과 한숨과 눈물과 고뇌로 얼룩진 우리들 나날의 삶, 나 자신의 삶 속에 있는 것이다.”삶이 말이 되고 말이 글로 흘러드는 진정한 쓰기를 그대와 함께 춤추듯 해 보고 싶습니다. 매일 새벽 두시부터 한 편씩 쓴 새벽 편지를 모아 이번에 엘리베이션 파워라는 책을 세상에 선보입니다. 부족한 제 편지를 읽어주신그대 덕분입니다. 처음 얼마 동안 무엇을 쓸까 노심초사하던 날들도 있었지만 100일을 넘기면서부터 글로 그대를 만나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에 미리 대사를 외우고 나갈 필요가 없듯, 그대와 글로 만나는 새벽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귀 기울여 주시는 그대가 있음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17

풍작 걱정 않는 농정을

손병현 경북도청본사상고(上古)시대부터 진작된 농경사회에선 풍년(豊年)은 모두의 염원이었다.이 때문에 풍년을 바라며 하늘에 제를 올리는 다양한 풍습들이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하지만 최근에는 풍년으로 농산물이 과잉 공급돼 가격이 폭락하는 일명 ‘풍년의 역설’로 농가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작황이 좋아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열심히 일해 땀 흘려 키운 농산물은 제값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게다가 매년 오르는 인건비에 생산원가가 치솟아 수익을 기대하기는 더 어렵다. 이러한 상황이 최근 몇 년간 지속해서 발생해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지난해와 올해 전국 평균 양파 20㎏ 도매가격이 9천원을 넘지 못하고 있다. 2년 전 1만7천원 정도하던 가격에 크게 못 미치는 값이다.상황이 이러한 데도 경북도는 정부의 정책만 바라보면서 해결책을 스스로 발굴하지 않고 정부 정책에 끌려가는 모습이다.그렇다고 정부의 정책이라고 해야 가격이 급등하면 가격안정의 이유로 수입량을 늘리고, 가격이 폭락하면 산지 폐기같은 ‘언 발에 오줌 누기 식’ 단기 미봉책에 급급하다. 그런 대책은 농민들도 내놓을 수 있다.매년 정기적으로 주무 부처가 내놓는 농산물 수급 예측은 기상예보만큼이나 예상치를 크게 벗어나기 일쑤고, 문제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실행할 때는 이미 늦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으로 돌아간다.언제까지 세금을 들여 애써 키운 작물을 갈아엎고 지역 단체와 공무원들에 떠넘기기 판매를 할 것인가. 산지 폐기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엔 한계에 다다른 지 이미 오래다.전문가들은 단순히 재배면적 의향만 조사하는 것이 아닌 농산물 소비추세까지 함께 파악해 수급예측의 정확도를 높이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초과 생산된 물량은 선매입해 시장 격리하고, 가격이 안정되면 시장에 내놓는 공공수급제와 전체 작물의 10% 정도에만 적용 중인 채소가격 안정 제도를 농민 눈높이에 맞추고 기금화도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그러기 위해선 우선 정부와 자치단체 중심의 수급조정 정책을 생산자 단체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산지 폐기와 긴급수입 등으로 시장가격에 직접적인 개입은 자제하고 정책면적을 한정해 농협 등 생산자단체가 자율적으로 담당토록 해야 한다.이를 통해 자치단체들은 농산물을 이용한 수출 가공 등 6차 산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을 마련할 수 있다.지난해 말 경북도는 전직 농정 책임자인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경북도 농촌살리기 정책자문관으로 임명했다.당시 이 전 장관은 “농업 정책을 지휘하던 수장으로서 그동안 뭘 했는지 반성했고 앞으로의 책임감도 느꼈다”고 털어놨다.이철우 경북도지사는 그와 함께 농도(農都) 경북의 농정 목표인 ‘제값 받고 판매 걱정 없는 농업 실현’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 풍작이 농민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경북 농촌을 만들어 주길 희망해 본다./why@kbmaeil.com

2019-07-16

약재와 과자를 만들때 반드시 필요했던 귀한 ‘꿀’

옥담 이응희(1579∼1651년)의 시 한 편으로 ‘꿀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의 제목은 ‘심 직강 인시가 편지와 함께 꿀을 보냈기에 사례로 보내주다[謝贈沈直講姻侍致簡遺蜜]’이다.고맙게도 그대 늙은 나를 불쌍히 여겨/그동안 끊임없이 안부를 물어주었지/한 폭 편지는 천금처럼 귀하고/항아리 가득 꿀은 백화(百花)의 정화/봉투를 뜯으니 정이 가득 담겼고/ 꿀을 삼키니 묵은 병이 낫는 듯/보답하고 싶으나 경거(瓊琚)가 부족해/송료(松醪)를 만안으로 담아 보내노라옥담은 비록 왕손에서는 멀어졌지만, 왕족 신분이다. 시에 나오는 직강(直講)은 정5품직 벼슬아치다. 안산 수리산 기슭에서 전원생활을 했지만, 왕족이니 꿀 선물이 있었을 것이다. 선물은 꿀과 편지다. 답으로는 편지와 답례품을 보내야 한다. 대신 이 시구를 보냈을 것이다. 문장이 짧아서(‘경거’가 부족해) 그럴 듯한 답장을 보내지 못한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꿀 대신의 답례품은 ‘송료’다. 송료는 ‘소나무 술’이다. 중국에서는 송방(松肪, 송진) 혹은 송화(松花)로 빚는 술이라고 설명한다. 송방주 혹은 송화주라고 부른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솔향이 좋은 술이었을 것이다.세종대왕은 양녕대군의 동생이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다. 세종은 마지막까지 양녕을 챙긴다. 술고래이면서 ‘문제적 인간’이지만 ‘조선왕조실록’ 군데군데 형을 향한 세종의 따뜻한 마음씨가 드러난다. 세종 6년(1424년) 3월 7일의 짧은 기사다. ‘약주 10병과 청밀(淸蜜) 한 그릇을 양녕 대군에게 내려 주었다.’꿀은 ‘청밀(淸蜜)’이라고 불렀다. ‘밀’이 꿀이다. 청밀은 맑은 꿀이다. 봉밀(蜂蜜)은 벌꿀이 만든 것이라서 붙인 이름이다. 색깔이 누렇다고 황밀(黃蜜), 상품(上品)으로 흰 색깔을 띤 맑은 것이라서 백청밀(白淸蜜)이다.조선 시대에도 양봉을 했지만 꿀은 자연산이 대부분이었다. 귀한 것은 아니지만, 채취가 불안정하니 수급이 고르지 않았다. 가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꿀을 둘러싸고 사건, 사고가 잦았던 이유다.중종 24년(1529년) 5월, 홍문관의 유여림이 민간에서 발생한 살인 미수사건을 보고한다. ‘계동’은 떠돌이 꿀 장사다. 꿀 장사 계동을 유인, 자기 집에 재운 사람은 어리금이다. 계동은 이미 꿀 장사를 통하여 말도 한 필 마련했고 무명도 지니고 있었다. 어리금은 계동의 말과 무명이 탐났다. 어리금은 계동을 죽이려 했지만 다행히도 실패한다.유여림은 이 사건을 보고하면서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라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소문을 전한다”고 말한다.16세기 초반에 이미 ‘민간의 꿀 장사’가 있었다. 주막도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꿀 장사는 전국을 떠돌고 있었고, 민간에서 숙박을 미끼로 꿀 장사를 유인하는 일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듬해인 중종 25년(1530년) 이행(1478∼1534년), 윤은보(1468∼1544년) 등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편에 꿀을 파는 가게가 등장한다. ‘청밀전(淸蜜廛)’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청밀전 도가는 하피마병문(下避馬屛門) 동쪽 가에 있다”라고 했다. ‘하피마’는 ‘아래 피맛골’이다. 서울 종로구 장사동 일대다. ‘전(廛)’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가게다. 당시 공식적인 전의 주 고객은 궁중과 세금을 대납하는 공납업자들 혹은 권문세가, 부호들이었을 것이다.꿀은 궁중에서도 귀하게 사용했다. 궁중 내부에서 사용하기도 하고, 중국, 일본 규슈, 오키나와 등과의 조공무역에도 사용했다.‘승정원일기’ 인조 17년(1639년) 12월 3일의 기사다. 제목은 ‘세 사신이 요구한 청밀 등의 숫자를 줄여서 주고 정 역관에게도 약간 지급하겠다는 호조의 계’다.김육이 호조의 말로 아뢰기를, “정 역관(譯官)이 세 사신이 청구한 청밀(淸蜜) 각 10두(斗), 호도(胡桃) 각 15두를 얻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숫자대로 주지는 못하나 각각 1, 2두를 줄여서 주되, 정 역관이 으레 세 사신이 청구할 때 또한 바라는 바가 있었으니 약간을 아울러 구해 지급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사신들이 원하는 것은 호두 각 15두와 청밀 각 10두다. 그대로 줄 수는 없다. 양이 부족하다. 더 큰 문제는 꾸짖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다. 통역관들이 늘 문제다. 중간에 이간질도 하고 사신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한다. ‘정 역관이 으레 바라는 바가 있다’는 표현은 이제까지 대부분 역관이 부정부패, 추가 뇌물 요구에 능했음을 보여준다. 굴욕적인 병자호란(1636∼1637년)이 끝난 지 겨우 2∼3년이 지났다. 국가 재정도 엉망이다. 처절하게 당한 패전국이다. 힘센 나라가 억지로 요구하는 공물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조의 태도가 눈에 보인다.꿀을 구해서 세금으로 올리는 지방의 문제는 더 심각했다. 꿀 공납을 빌미로 각종 부정부패가 일어났다.‘승정원일기’ 영조 3년(1727년)11월 24일의 기사 제목은 ‘품질이 좋지 않은 청밀(淸蜜)을 진상한 영광(靈光) 등의 해당 봉진관을 엄하게 추고할 것 등을 청하는 사옹원 감선 제조의 계’다.박필철이 (중략) 아뢰기를, “전라도에서 12월에 각 전에 진상하는 물품이 (중략) 청밀(淸蜜)의 품질이 몹시 좋지 않아 색과 맛이 모두 나쁩니다. (중략) 부득이 퇴짜를 놓아 보내고 (중략) 봉진관이 신중을 기하지 못했으니 일이 몹시 놀랍습니다. 그러나 허다한 수령을 일시에 모두 파직할 수는 없으니 영광(靈光) 등 37개 읍의 해당 봉진관을 모두 엄하게 추고하고, 감사도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역시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놀랍게도 꿀 문제를 일으킨 지방 관청의 숫자가 무려 37개 읍이다. 인근의 모든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일어났다. 추고(推考)는 사건의 경과를 따져본다는 뜻이다. 당장 벌을 내리는 것은 아니되, 일의 경과와 잘못 여부를 따져보는 일이다. 지방 관청의 벼슬아치로서는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다. 이유는? 꿀의 색과 맛이 나쁘기 때문이다.꿀은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문제를 일으킨다.세종 5년(1423년)2월 14일,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다. 제목은 ‘사헌부에서 김득상을 탄핵하다’이다.사헌부에서 계하기를, “김득상(金得祥)이 사천 병마사(泗川兵馬使)가 되었을 때에, 관청의 물건으로 집정(執政)과 모든 친한 이에게 뇌물을 주고, 화살촉과 청밀(淸蜜) 등을 거두어들이고, 탐오(貪汚)하여 법을 어기면서 백성의 재물을 손해 보였으니, 죄를 주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으나, 일이 사죄(赦罪) 전에 있었다고 하여 죄를 주지 말도록 하고, 다만 장물(贓物)만 징수하도록 명하였다.다행히 사면령 이전에 죄를 지어서 장물만 징수 당하고 끝난다.비슷한 시기인 세종 11년(1429년) 1월, 형조의 보고다. 내이포(乃而浦, 경남 창원 진해)의 천호 조안중이 크고 작은 죄를 저질렀다. 보고 중에 “선군(船軍) 2인의 역을 면제하여 주고 대신 꿀(淸蜜, 청밀) 4그릇을 거둬들였다”는 내용이 있다. 꿀 4그릇을 뇌물로 받고 배를 젓는 등 힘든 일에서 빼주었다는 것이다. 사천병마사 김득상에 비하면, 그리 큰 죄가 아닐 듯한데 조안중은 곤장 80대를 맞았다. 곤장 80대는 중벌에 속한다.꿀을 귀하게 다룬 이유는 간단하다. 약재나 과자를 만들 때 반드시 꿀이 필요했다.의학 서적인 ‘의방유취 권1_총론_원약(圓藥) 만드는 방법[員藥法]’에 “꿀[蜜]이 들어간 약제에는 약물 1근(斤)당 꿀 1근을 사용한다”는 내용이 있다. ‘의방유취’는 1445년(세종 27년) 편찬했다. 원전은 중국 송(宋)나라 주좌(朱佐)가 편찬한 ‘주씨집험방(朱氏集驗方)’이다.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일찍부터 꿀을 약재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꿀은 민간의 문서에서도 나타난다. 경북 성주의 ‘성산 이 씨 문중_이해진가(李海鎭家)’ 고문서 중 간찰(簡札, 편지)에 꿀이 나타난다. 1771년(영조 47년), 이 집안 이정언(李正言)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편지를 바란다. 객병(客病)이 남아있으니 한탄스럽다. 석어와 민어, 꿀 등을 보낸다.”는 내용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새해 인사와 안부를 묻는 것이다. 석어(石魚)는 석수어(石首魚)로 조기다. 민어와는 사촌지간이다. 둘 다 말려서 유통했다. 제사 필수품이다. 꿀도 마찬가지. 제사를 모시려면 조과(造菓), 과자가 필요하다. 과자를 만들려면 꿀이 필수적이다. 이외에는 나이든 노인들이 ‘약으로 여기고 한, 두 숟가락’ 먹는 정도였다.사족이다. 경북 북부 일대는 꿀의 명산지다. 사람 발길이 드문, 태백산 깊은 산속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벌꿀도 있다. ‘안상규 벌꿀’이다. 꿀에 양봉하는 이의 이름을 붙인 경우다. 경북 경산의 ‘안상규 벌꿀’은 대추나무 벌꿀이 특이하다. 경북 안동 예안의 ‘박영근 벌꿀’도 마찬가지. 농장주 이름을 걸었다. 속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박영근벌꿀’은 ‘숙성 벌꿀’이다./맛칼럼니스트

2019-07-16

시인으로 살아가기 - 최승자의 자서에 대해

시인 최승자는 1952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나 고려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79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활동을 했다.‘이 시대의 사랑’(1981), ‘즐거운 일기’(1984), ‘기억의 집’(1989) 등의 시집을 발표했고 이 시집들은 모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그녀는 많은 시인들에게 영감과 영향을 주었다. 진은영 시인은 언젠가 최승자를 ‘우리들의 시인’이라고 칭한 바 있다(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시인의 말’ 중).그녀는 1994년 국제작가회의(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에 참가하였다. 주최 측에서는 참가자의 시 열 편 정도의 영어 번역시를 요구했다. 최승자는 첫 시집 중 번역하기 쉬운 시들을 우선 번역했는데 그것이 열 편이 넘었다고 한다.하지만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두 번째 시집을 번역했고,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세 번째 시집을, 다시 네 번째 시집을 번역했다.결국 마흔네 편의 시를 번역했다.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쓰고 있다.“생각해보라, 올 여름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방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완전히 발가벗다시피 한 채 머리가 뜨끈뜨끈해져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어 30분에 한 번씩 샤워를 하면서 번역을 했는데, 그밖에 달리 무슨 일을 또 할 수가 있겠는가.”(최승자, ‘어떤 나무들은―아이오와 일기’, 세계사, 1995, 12~13면) 그리고 이렇게 번역된 시에서 다시 17편의 시를 골라냈다.그녀가 고른 시들은 하나 같이 자신을 학대하며, 자기모멸적이고 위악적이며, 비속한 언어를 거침없이 쏟아내는, 아리고 쓰린 시들이다. 이 시들을 시집별로 정리하면 ‘이 시대의 사랑’에서 네 작품, ‘즐거운 일기’에서 가장 많은 시가 뽑혔는데 여덟 작품이다.그리고 ‘기억의 집’에서 세 작품, ‘내 무덤, 푸르고’에서 두 작품을 골랐다. 시가 ‘4→8→3→2’의 순서로 줄어들고 있다.피학, 가학, 위악, 자기모멸, 비관, 절망, 허무가 최승자의 본령이라면 시집이 상재될수록 그러한 것들의 강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새로운 것들은 낡기 마련이며, 모든 강렬한 것들은 식기 마련이다. 최승자 역시 스스로 이런 사실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1993년에 출간된 ‘내 무덤, 푸르고’의 자서에 이런 위기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시집을 엮으면서 다시 읽어보자니, 이 시들이 너무도 뒤늦고 뒤처진, 그리고 너무도 낡고 늙은 시들이라는 느낌이 든다. 뒤늦게, 뒤처져 길 떠나는 이 낡고 늙은 시들이 제 힘으로 제 갈 길을 만들어낼 수 있을는지 걱정스럽다.”열 편으로 충분한 데도 마흔네 편이나 번역했던 것은, 더 강렬한 시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더운 여름을 자신의 시를 번역하면서 견뎌냈던 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은 자신의 시를 찾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을까.아이오와를 다녀온 후 최승자는 번역도 못하고 시도 못 쓰게 된다.그 이유에 대해 “언제부터인가 노장(老莊)·명리학·사상의학·점성술 등과 같은 신비주의 공부에 빠졌던 겁니다.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의 세계가 아닌, 현상을 뛰어넘는 세계로 좇아갔어요. 답이 있을 듯하면서 손에는 답을 쥐기 어려운 공부였어요. 그 공부에 빠지면서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최보식이 만난 사람: 정신분열증…. 11년 만에 시집을 낸 시인 최승자’, 조선일보, 2010.11.22.)라고 말했다. 언제부턴가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고, 서울의 친척집에 머물던 그녀는 1999년부터 고시원과 여관방을 떠돈다. 최승자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어느 해에는 여섯 달쯤 잠을 못 잤어요. 아무런 음식도 먹지 못했고. 잠을 못 자면 소주를 마시고 쓰러져 잤는데, 나중에 심해지면서 술을 마시는 것조차 생각나지 않았어요. 정신이 휑했지요.”최승자는 시에 매달려 살아갔다. 시가 “밥벌이를 할 수도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배고파 울 때에 같이 운다든가, 다른 사람들이 울지 않을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울어 버릴 수 있다는 것뿐이다.”(‘이 시대의 사랑’, 뒷면의 글)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시와 더불어 살았다.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에 몰입하여 그 캐릭터와 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듯 최승자는 어느 순간부터 시를 쓰지 못하고 자신의 시속에 매몰되어 자신의 시처럼 살게 된다. 자신의 시처럼 비관적이고, 자신의 시처럼 혹독한 그런 삶을 살았던 것 같다.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다. 시인이 시가 되어버릴 때 시인의 생은 끝나고, 시인은 시인이 아니라 전설이 된다.이미 그녀가 알고 있었듯 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녀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시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길 바랐다.‘내 무덤, 푸르고’의 시집 뒤편에 “시 혹은 시 쓰기에 대해 이제까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도 믿지도 않았지만, 이제 비로소 나는 바라고, 믿고 싶다. 시 혹은 시 쓰기가 내 마음을 병석에서 일으켜 세워줄 것을”이라고 썼다.그녀는 한편으로 시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시가 자신을 일으켜 세우길 바랐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던 것은 아닐까.그녀의 말처럼 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게 될 때 그것은 시일 수 없다. 오랜 세월을 떠돌았던 최승자는 다시 아무것도 아닌 시에게로 돌아와 있다. 이제 안도해도 좋다, 그럴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나는 지금 최승자의 시집들을 늘어놓고 그녀의 자서들을 읽고 있다. 그녀의 자서는 하나같이 짧아서 채 백 글자를 넘지 않는다. 이 짧은 자서에는, 글이 아니라 시로만 말하려고 했던 그녀의 의지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이제 나는 시를 읽는 대신 ‘이 시대의 사랑’을 펴놓고 시어들을 만지고 있다. 나의 지문이 시집 위를 지나갈 때 글자를 느낄 수 있다.그 글자들 덕분에 내 지문의 위치를 알게 되고 이런 지문을 가진 나를 실감하게 된다. 지문을 가진 나와 나를 휘감고 있는 대기와 빛과 소리, 그런 세계를 느낄 수 있다. 언젠가 나의 언어로 이 세계의 삶고, 이 세계에 없는 이들을 만질 수 있길 바란다.

2019-07-16

이름을 지어 불러주는 특별한 동물

몇 년간 직장인, 학생들에게 의사소통능력과 관련한 특강이나 교양수업을 진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깨달은 것이 있다.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데, 사회생활에서 언어는 개인이 사회에서 얼마나 적응하였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핵심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언어와 관련된 장애아동과 가족의 관계성 연구의 결과를 보면, 아무리 심한 장애가 있는 아이라도 그 아이에게 실제적인 언어이해 능력만 있으면 가족간 애정 정도가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가벼운 장애가 있더라도 언어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인간관계나 사회적응이 매우 어렵고, 가족은 심한 좌절감을 느끼고 아이에 대한 애정도 매우 적었다. 최근 다문화가정 아이들과 교육에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데, 가장 먼저 학내 한국어 어학당 운영을 추진한 이유는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이주자나 망명자들이 새로운 사회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언어를 배우는 속도와 숙달 정도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이해와 사용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개가 인간사회에서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개의 언어를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기본이라 할 수 있다. 개의 언어를 잘 이해한 사람은 개에게 사랑을 줄 수 있고, 개도 사람에게 잘 적응할 수 있게 되어 사람과 개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우선 알아야 할 사실은 개는 사람이 말하는 단어의 미묘한 뉘앙스까지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세 살 아이가 말은 하지 못하지만 어른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을 경험한적 있는가? 외국어를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유창하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말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을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이다. 언어능력은 말을 알아듣는 수용언어와 말을 하는 생산언어로 구분할 수 있다. 개는 수용언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지시에 따르거나 사람의 단어에 반응하여 현명하게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구강구조 등의 해부학적 특징으로 언어를 사람처럼 생산할 수 없을 뿐 수용언어는 발달해 있다. 한집에 여러 마리의 개를 기르고 있다면 개들이 자신의 이름에 정확히 반응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제 자볼까?” 라고 말했을 때 개들이 침실과 침대로 향하고 “배고파?”라는 말에 개는 자신의 밥그릇으로 다가가기도 한다.“산책하러 가자”라는 말에 개는 현관문에 가서 기다리기도 하고, “앉아”, “손”, “엎드려”, “붙어”, “점프”등의 다양한 명령어에도 정확히 반응한다. 이외에도 개체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개의 언어수용능력 때문에 정식으로 가르치지 않은 단어에도 개들은 반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와 의사소통을 잘 하기 위해서 개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집에서 다른 가족을 향해 “이리와, 앉아서 같이 TV보자”라고 이야기 했을 때 사실개의 입장에서는 크게 당황할지도 모른다. 개들이 흔히 알고 있는 “이리와”, “앉아”라는 명령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개는 사람이 말하는 수많은 단어 중에서 어느것이 자신에게 향한 것인지를 사람의 몸짓(눈짓)을 보고 판단한다. 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주의를 끌면서 “이리와”, “앉아”라고 했다면 개는 당황하거나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일상생활에서 몸짓이나 시선 없이도 개에게 혼란을 주지 않는 방법은 개 이름을 먼저 불러주는 것이다. 그러면 개는 자신과 관계있는 사람의 단어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주목해! 다음에 말하는 메시지는 너에게 향하는 거야”를 의미하게 된다. 개에게 말을 걸때는 명확하게 해야 하는데, 개에게 뭔가를 시키고 싶을때는 반드시 먼저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 “자몽, 이리와”, “자몽, 앉아” 라고 하면 된다. “이리와, 자몽”, “앉아, 자몽” 하는 것은 좋지 않은데 개의 이름이 불린 후에 의미를 가진 단어가 지속되지 않으면 개는 뭘할까요? 라는 표정으로 당신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번 더 “앉으라고”라고 이야기 하면 앉겠지만 개는 이름이 불리는 순간 사람의 요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름을 먼저 불러주고, 원하는 행동을 이야기 하는 것이 개와의 의사소통에서 기본이며 간단하지만 중요한 일이다.개 이름은 어떤 이름이 좋을까? 개는 두 음절 정도의 이름이 부르기 쉽고 반응을 이끌어 내기 좋다. 개의 이름이 주변사람들에게 개를 인식하게 하는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강한 이름, 혐오스러운 이름은 개가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 개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수 있으므로, 밝고 부르기 좋은 이름으로 주변 사람들이 내 개에게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서라벌대 반려동물연구소 소장(마사과 교수)

2019-07-16

불국사역

역(驛)은 고대부터 동서양의 중요한 교통수단을 담당하던 장소다. 교통수단이라고 하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이곳에서는 역마를 갈아타기도 했고, 인마(人馬)와 마차(馬車)가 머무는 여관의 역할도 했다. 또 통신을 전달하는 일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조선 후기 공무로 급히 가는 사람이 타는 말을 파발마라 했는데, 역은 지친 파발마를 바꿔 타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우리나라에 기차가 들어오자 철마(鐵馬)라 불렀다. 옛날부터 말이 사람을 태어 나른다는 데서 유래한 탓이다. 나라의 재정에 관한 내용을 수록한 조선시대 ‘만기요람’에는 전국의 역마 수가 504군데 5천380필에 달한다고 했다. 교통수단으로서 역의 중요성을 잘 대변해주는 수치라 하겠다.지금은 철도역으로 의미가 대폭 축소됐지만 60대에 접어든 기성세대한테는 그래도 기차역은 추억이 서린 정겨운 장소로 기억된다. 대중교통이 원활치 못하던 그 시절 우리지역의 역은 내 고장의 모든 관문 역할을 맡았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역과 고속터미널, 소규모 공항의 역할을 몽땅 담당한 장소다. 그 시절의 모든 만남과 이별은 이곳에서 이뤄졌다.철도가 고속화되면서 우리 주변의 수많은 간이역들이 사라지고 있다. 중앙선 이설로 간신히 남았던 불국사역도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야 할 운명에 처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18년 11월 1일 영업을 시작한 불국사역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조선시대 건축물로 지어져 코레일은 이를 철도기념물로 지정하고 있다.2020년 신노선이 개통되면 철로 폐선으로 불가피하게 불국사역도 인적이 끊어질 위기에 놓였다. 불국사역은 인근에 위치한 불국사와 석굴암 등을 찾는 관광객과 수학여행 학생들로 많이 붐벼 한 때는 전국 최고의 관광명소라고 이름을 날렸다. 관광도시 경주의 상징인 불국사역을 살리자는 2천여 주민의 건의서가 관계기관에 전달됐다고 한다. 많은 이들은 아직도 수학여행, 추억여행하면 경주 불국사를 손꼽는다. 낭만과 향수, 추억과 역사가 뒤엉킨 불국사역을 테마로 한 콘텐츠를 만드는 것도 좋을듯 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