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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너의 이름은?

박근영 회사원“용왕에게 잘 보이려 토끼를 유인했던 동물은? 이적과 유재석이 결성한 듀엣 이름은?” 정답은 거북이와 처진 달팽이다. 누군가를 이렇게 부르면 동작이나 판단이 느릴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름은 이런 연상 작용을 한다. 밥을 짓고 집을 짓는 것처럼 이름도 공을 들여 ‘지어서’ 아기에게 붙여준다. 아이 인생이 이름대로 펼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누군가의 이름을 들으면 그 의미를 해석해서 성격이나 삶까지 유추한다.살면서 나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거나 이름이 특정인을 떠올려 일상이 불편할 때 운을 바꾸기 위해 이름을 새로 짓기도 한다. 이름이 내포하는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개명을 할까? 개명의 역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길다.10여년 전 고용센터에 경험한 일이다. 미국발 금융위기 때문에 실업급여를 지급하는 곳이 대기자들로 가득했다. 직원들은 민원인 이름을 일일이 육성으로 불러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대기자들 웅성거림은 커졌고 직원들은 그 소리에 호명하는 이름이 묻힐세라 더 크게 소리쳤다. 한참을 그렇게 일을 처리하던 어느 직원이 누군가의 이름을 힘차게 부르더니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어 부르는 것이 아닌가.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후다닥 창구에 가서 앉는다. 그만 그 순간만큼 나는 1만5천㎐를 듣는 돌고래 청력으로 그 이름을 똑똑히 듣고야 말았다. 그 이름은 ‘○백수’. 속뜻이야 참 좋으련만(아마도 만물의 우두머리 정도가 아닐까?) 그 자리에서 불린 이름은 누구나 생각하는 바로 그 의미로 동시에 해석됐다. 하필 이곳이 ‘누구나 생각하는 바로 그 의미’에 해당하는 사람이 오는 장소인지라 난감한 상황이었다. 모인 사람들 처지가 다 같은데도 하필이면 이름 때문에 머쓱해진 것이다. 그 신사분은 나중에 개명했을까?S는 자기 이름을 참 사랑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지어주었는데 의미도 좋아서 어디든 이름을 내놓길 좋아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역술인들이 풀이를 해주거나 인터넷으로 풀이를 할 때마다 점수가 낮게 나왔다. 그 이름을 가지고서는 크게 성공을 하지도 못할뿐더러 파도 위 돛단배처럼 언제 좌초될지 모르는 위험한 이름이라는 풀이까지도 나왔다. S는 자신의 이름이 의미도 좋고 부르기도 좋은데 이렇게 근거 없는 미신에 휘둘려 바꿀 생각은 없다고 했다. S는 집이 좀 가난하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 외엔 특별히 인생이 힘들거나 어려운 일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S는 30대 중반 항암치료를 받았다. 세 사람당 한 명꼴로 암이 흔한 세상이니 자기가 걸렸다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고 했다.1년여 투병을 한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씩씩하게 일을 했다. 그 후에는 이렇다 할 일이 없었는데 40대 초반 외국에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대한항공 프레스티지석에 누워 이송되어 올 때도 비싼 자리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게 아쉬웠다고 천진스럽게 얘기했다. S는 다행히 다리만 동강 났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보면 그의 삶이 결코 쉬웠던 게 아닌데 당사자는 괜찮다고 하니 결국 인생은 자기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생각도 든다.그랬던 S가 얼마 전 암이 재발해 치료를 받고 재수술을 했다. 살면서 암과 교통사고를 몇 차례씩 겪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다. 물론 S보다 더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작은 고난도 연거푸 들이닥치면 힘에 부쳐 무릎을 접게 된다. S는 마음 한쪽에서 인내하며 기다리던 개명의 유혹과 손을 잡았다. 이제는 아름다웠던 옛 이름을 미련 없이 털어낼 수 있다며 고통의 과거는 추억 속으로 내보내겠다고 했다.개명이 좋다, 나쁘다를 논할 대상은 아니다. 개명을 의지박약의 결과물로 매도할 필요도, 그것에 초연한 것을 대단하다 추켜세울 필요도 없다. 최소한 개명은 이전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름을 바꾸는 행위 하나가 마음에 희망의 씨앗으로 자리 잡아 오늘을 살아낼 힘을 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S도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예전의 그 웃음을 찾았다. 남은 것은 건강을 마저 회복하고 새로 시작한 인생을 행복하게 즐기는 것뿐이다.

2019-09-22

김구 선생의 삭발

이 현재의 삶에서 훌륭한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어딘가에 그런 분들 계시겠지만 텔레비전, 인터넷에 오르내리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가히 모래밭에서 겨자씨 찾기다.이광수에서 안창호로 옮겨가고, 다시 안창호에서 신채호로 옮겨간 끝에 이번에는 백범 김구에 이르렀다. ‘민족의 죄인’ 이광수가 해방 직후에 백범의 일지를 정리하여 ‘백범일지’로 남겼는데, 여기에 얼마나 어떻게 그의 생각이나 판단이 개입해 있는지가 따져볼 일이다.김구는 해주 사람, 김자겸의 후손으로 양반이 몇 대를 내려온 끝에 상민이 된 집안에서 났다.‘백범일지’에 상민의 자식으로 나서 동학당이 되었다가 명성황후 원수 갚는다 하여 왜인을 처단하고 사형수가 된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여 천신만고 끝에 살아날 수 있었는데 그 연유가 흥미롭다. 도스토예프스키만 사형 집행 직전에 살아난 게 아니요 바로 김구 선생이 교수형 집행 직전에 살아날 수 있었던 ‘산’장본인이다. 그때 마침 서울에서 인천까지 장거리 전화가 개통되었다고 한다. 이미 김구 교수형이 결정되어 신문에까지 났다. 고종 황제께옵서 어전회의를 열어 김창수가 왜인을 살해한 것은 국제관계이니 나중에야 어찌 되었든 우선 사람부터 살려놓고 보자고 하셨다. 황제가 직접 전화를 걸어 집행 정지를 명령하였다고 한다. ‘백범일지’에서 김구 선생이 술회한다. 만약 이 장거리 전화가 개통되지 않았던들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이른바 신문명의 참 희한한 혜택도 다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목숨 살아난 김구가 파옥을 하고 무주로 도망쳐 세상 방랑에 들어서는데 어찌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지, 아하, 큰 사람이 되려면 그렇게 먼 곳을 떠돌아야 하나보다 생각하게 된다.그런 김구 선생이 공주 갑사쯤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나 마곡사에 스님 되러 간다고, 같이 가서 승려가 되자는 권유를 받고 동행을 하게 된다. 신분을 감추고 이리저리 떠돌아야 하는 신세, 예나 지금이나 절집은 숨어 사는 사람들이 의지하기 좋은 곳이다.“시간이 지나서 사제 호덕삼이가 머리털 깎는 칼을 가지고 냇가로 나가서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나의 상투가 모래 위에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지지난 해에 학생들과 함께 공주 마곡사에 답사를 갔는데, 거기 김구 선생 사진이 크게 붙어 있고 그 옆에 어딘가에 앉았는 사람은 분명 이광수였다. 영웅과 ‘민족의 죄인’이 함께 동석한 희귀한 사진을 오래 쳐다 봤었다.요즘 삭발이 유행이지만, 그 많은 삭발 가운데 김구 선생의 삭발 같은 삭발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9-19

충신(忠臣)과 충언(忠言)

중국 고사에 잘 등장하는 충신으로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들 수 있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토벌하자 “천자를 공격한 신하는 섬길 수 없다”며 두 사람은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만 먹다 굶어 죽는다. 굶어 죽어도 신하된 도리는 다해야 하는 것이 충신이다.역사 속의 충신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바른말을 할 줄 안다. 임금이 올바른 정치를 하지 못할 때는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하여 정사가 옳게 돌아가게 한다. 자신의 안위는 물론 돌보지 않는다.특히 충신은 한 나라가 망할 때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개를 지킨다. 고려 말 정몽주가 대표적이다. 또 충신은 검소하고 청렴하다. 조선조의 최장수 재상인 황희 정승은 소신과 원칙을 견지한 인물로도 유명하지만 청백리로서도 더 잘 알려져 있다.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를 끝까지 반대하다 유배를 당했지만 그는 오히려 세종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24년간 재상의 자리를 유지한다. 그의 탁월한 식견과 사리분별력 있는 충언 그리고 청렴성 등이 그를 명재상으로 있게 했다.충신과 간신(奸臣)은 항상 대립적 관계다. 한쪽은 국가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지만 한쪽은 자신의 이익이 먼저다. 공자는 마음이 음험하고 혜택만 누리는 사람 등 간신의 유형을 다섯 가지 언급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시각이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충신을 등용한 임금은 성군(聖君)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의 대통령은 옛날의 임금과 같다. 대통령이 올바르게 국사를 하도록 목숨을 걸고 충언하는 신하가 많아야 나라가 잘 된다. 조국 장관 임명으로 바깥 민심이 소란한데도 대통령의 귀를 열어 줄 충신은 없는지 궁금하다. 몸에 좋은 약은 원래 쓴 법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9-19

삭발투쟁 뒷담화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자유한국당이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조국 장관의 파면을 촉구하며 릴레이 삭발투쟁을 벌여 정치권의 핫이슈가 되고 있다. 19일에도 김석기·송석준·이만희·장석춘·최교일 의원 등 자유한국당 현역 의원 5명이 조국 법무장관 사퇴를 요구하며 삭발했다. 황교안 대표가 16일 청와대 앞에서 삭발한 이후 현역 의원만 8명이 릴레이 삭발했다. 이로써 릴레이 삭발에 동참한 의원은 이주영·심재철·박인숙·강효상 의원을 비롯해 9명이 됐다. 원외에서도 17일 김문수 전 경기지사, 송영선 전 의원이, 18일 차명진 전 의원, 19일 김기현 전 울산시장이 삭발했다. 황 대표보다 먼저 삭발을 한 박인숙 의원과 전직 의원까지 포함하면 한국당에서 이날까지 총 14명이 삭발했다.하지만 며칠째 삭발이 이어지면서 아이스버킷챌린지 같은 이벤트로 희화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특히 원내투쟁을 이끄는 나경원 원내대표가 삭발을 않고 있는 것을 겨냥, “언제 삭발하는지 두고보겠다”며 릴레이 삭발을 ‘조롱’하는 글마저 올라오고 있다. 또 정치권 일각에서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삭발을 ‘공천용 쇼’로 치부하는 시각도 있다. 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은 “한국당의 길거리‘쇼 정치’”라고 비판했고, 박찬대 원내대변인은 “(당 지도부에)‘공천 눈도장’을 찍기 위한 행위 아닌가”라고 대놓고 야유를 퍼부었다. 가장 적나라한 비판을 내놓은 것은 바로 민주당 정청래 전 의원. 정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황교안 대표가 삭발한 이유를 세가지로 들었다. 우선 조국 대전으로 얻은 게 없는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오르지 않자 당대표로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작동됐을 것이고, 국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정기국회가 다가옴에 따라 삭발이라는 극단적인 투쟁을 통해 마이크를 잡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는 게 두번째다. 세번째 이유로 이미 몇몇 여성의원들이 감행한 삭발이지만 “따라쟁이”라는 오명을 쓰더라도 별달리 뾰족한 투쟁방법이 없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삭발은 패착이라고 평가절하했다.‘삭발(Tonsure)’은 ‘큰 가위’라는 뜻의 라틴어‘Tonsura’에서 유래됐으며, 중세에 성직자와 세속인을 구별하는 기준이었다. 사제가 세속적인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오늘날에도 승려로 입문하는 의식을 치를 때 삭발을 하며, 그 후에 자격을 제대로 갖춘 승려가 될 때 다시 삭발식을 거행한다. 불교의 출가 수행자가 머리를 깎는 것에는 하나는 다른 종교의 출가 수행자와 모습을 다르게 하기 위함이요, 또 하나는 세속적 번뇌를 단절함을 뜻한다.그런 면에서 보면 정치권에 부는 삭발열풍은 종교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주변사람들에게 자신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한 의식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어떻든 삭발투쟁은 야당답지않게 뜨뜻미지근한 대여투쟁으로 맥빠져 있던 자유한국당이 그나마 결의에 찬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만들어준, 또 하나의 정치투쟁 방식으로 자리잡게 된 듯 싶다.

2019-09-19

가을의 길목에서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추석이 지난 산천초목에 가을빛이 깊어간다. 지난 여름의 열기와 격정을 가라앉히고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다. 나무와 풀들에게도 가을은 사색의 계절인가 보다. 높푸른 하늘 아래 갈대와 억새가 패고 드넓은 들판 가득 벼들이 영글어간다. 한결 시원해진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흰 구름 떠가는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도 따라서 청명해진다.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 한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사고능력은 있는 것 같으니, ‘자기 존재에 대해 생각할 줄 아는 동물’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인간의 정의가 될 것이다.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성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필요로 하는 것은 문명화된 사회란 단순한 본능만으로는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에 대한 인식과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갖추어져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지나친 이기주의나 독선은 사회에 해악을 끼치게 마련이고 그만큼 인격적 결함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우여곡절 끝에 법무장관으로 임명된 조국이란 사람을 둘러싼 의혹과 논란이 날로 확산되는 형국이다.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검찰과 그것에 제동을 걸려는 정권이 존망을 건 힘겨루기를 하고, 그 양자를 비호하고 지원하는 세력들도 편을 갈라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조국사태’로 일컬어지는 이 난국은 한 고위층 가족의 일탈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도덕적 불감증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하는 사례인 것 같아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학벌이든 지위든 최고의 위치에 있는, 소위 지도층 인사들의 사리사욕을 위한 곡학아세에다 지식을 악용한 편법과 탈법도 서슴지 않는 일탈행위는 많은 사람들에게 분노와 허탈감을 안겨 준다. 모쪼록 이번 사태가 사필귀정으로 끝이 나서 우리나라가 새로워지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부부가 다 일류대학을 나와서 유학을 하고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가 될 정도면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학벌을 갖춘 집안이다. 그런 지위에까지 올랐다면 학자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우리 사회의 가장도 정의롭고 덕망 있는 지성이요 사표로 존경을 받아야 마땅한 일 아닌가. 교육제도에 모순이 있으면 당연히 내 아이에게는 그 길을 걷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이고, 더 이상 재물이나 권세 따위 기웃거리지 말고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을 한다면 오죽이나 좋은가.그들 가족이 야기한 사태로 학계와 사회에 끼친 해악이 얼마인데, 장관까지 되어서도 교수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욕심도 그악스럽다. 도대체 학생들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고 배우라는 것이며 사회에 나가서는 어떤 역할을 하길 바란다는 것인가.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토록 자기성찰도 반성도 없는 후안무치일 수가 있는가. 이미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다. 남은 것이라고는 갈 데까지 가보자는 오기 하나 뿐이라면 인생이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다 놓아버리고, 국민들 앞에 참회하기 바란다. 그래야 사람이고 그것이 사는 길이다.

2019-09-19

트위터(Twitter) 정치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 대통령’이라고 불린다. 정책을 발표할 때 트위터를 종종 이용하기 때문이다. 참모진이나 장관들과 이야기되지 않은 것도 먼저 트위터로 발표하기도 한다. 심지어 장관의 해임이나 임명도 트위터로 하는 경우도 있어 정말 트위터광이라고 불릴만하다. 한국에서도 요즘 화제의 조국 법무부 장관이 과거 교수 시절 그 당시 정부나 여당을 공격하면서 주로 사용한 무기가 트위터였다. 그래서 수만개의 그의 메시지가 트위터에 남아있다고 한다. 트위터는 폐쇄하거나 트윗을 지워도 이미 리트윗된 메시지가 퍼져있어 주워 담기가 힘든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조국 교수가 조국 장관과 다투고 있다”라는 조크도 나온다. 과거 정부나 여당을 공격하기 위해 트위터에 올렸던 많은 글들이 지금 조국 장관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트위터의 전신은 2005년 설립된 팟캐스트 서비스업체인 ‘오데오(Odeo)’다. 오데오는 초기 시장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했지만 애플이 팟캐스트 분야에 진출하면서 당시 CEO였던 에번 윌리엄스는 다른 프로젝트들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임직원들이 내놓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트위터였다. 공원 어린이용 미끄럼틀에 앉아 멕시코 음식을 먹다가 ‘소그룹 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려주는 단문 문자메시지’ 서비스를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한다.트위터는 2006년 본격적으로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는 매년 대중음악과 영화 웹 등의 해당 분야에서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상을 수상해주는 SXSW(South by southwest Web)가 열리는데, 이듬해인 2007년 트위터가 웹부문에서 수상을 하게 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기존 서비스를 시작한 페이스북과 함께 사회연결망 서비스의 쌍두마차를 이루게 된다.근대 산업혁명을 1차에서 4차까지 분류하듯이 인간이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도 1차에서 4차까지 분류해 볼 수 있다. 1차는 광장이나 카페에 모여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2차는 벽보를 붙이거나 신문에 의견을 내던 방식이다. 3차는 방송이나 TV 등을 활용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4차는 트위터, 페이스북같은 SNS를 이용하는 방식일 것이다.그런데 트위터 정치는 던지는 트윗과 비야냥거리는 트윗으로, 어지롭고 매정하다. 인간미를 찾기가 쉽지 않다. 어떤 합의점을 찾기보다는 자기 주장만을 툭툭 내 던지는 그런 형태이다.광장이나 카페에 모여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하던 1차 의사표현 시대가 그리워지는 건 필자만의 생각일까?트위터 등 SNS 정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건 길거리에서나 전철 안에서도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고 SNS만 읽고 있는 ‘독선과 단절의 시대’의 상징일듯하다. 댓글들은 독설로 가득하다.조국 사태를 맞이하여 트위터 정치의 매정함을 보면서 또 하나의 옛것이 그리워지는건 웬 일일까? 가끔씩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2019-09-19

빛과 그림자

캔디 챙은 동네 빈집 담벼락을 빌려 지나가는 사람이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소망을 적는 것 일종의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는 칠판을 만듭니다.뉴욕 한복판에서는 ‘살아가면서 가장 후회스러운 일을 적는 코너’도 있었습니다. 여기 적힌 수많은 대답의 공통점은 무언가를 시도하지 않았던 자신을 자책하는 내용이었습니다.의학 공부를 시도하지 않은 것, 꿈을 좇아 따라가지 않은 것, 그녀에게 사랑 고백을 하지 않은 것, 내 안의 예술가적 기질을 무시한 것, 더 나은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한 것. 무언가 시도하지 못하고 훗날 큰 후회로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아닐까요?의학 공부에 도전했다가 실패할 것을, 꿈을 따라가면 생계가 어려울 것을, 사랑을 고백했다가 버림받을 것을, 예술가로 살려 했다가 영감이 고갈돼 실패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선뜻 심장이 뛰는 삶에 도전장을 내밀기 어려워합니다.오래전 도올 김용옥의 미학 강의를 우연히 EBS에서 듣다가 무릎을 친 경험이 있습니다. 인간이 극한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아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지고의 예술품이나 감탄을 자아내는 풍광을 만나면 누구나 감동하고 전율하고 힘을 얻습니다. 그런데 10분만 지나면 대부분 지루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지요.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같은 말을 합니다. “인생의 변화, 인생의 매력, 인생의 아름다움, 그 모든 것은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기 마련이야.”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낮이 지나 밤이 오는 것을 어색하지 않게 여기는 것. 이 과정이 삶의 진리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무언가 시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카뮈는 말합니다. “깊디깊은 겨울에 결국 내 안에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여름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9-19

경험과 기억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얼마 전 ‘무등공부방’에서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1990)을 쓴 정지아 작가의 강연을 들었다. ‘기억’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단출하되 선명하다. 빨치산이었던 어머니가 올해로 94세가 되었는데, 그이의 기억에 자리한 장면은 200개 남짓이라 한다. 9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그것도 한반도 남단의 피어린 상처를 경험한 인간이 체화한 기억의 총량이 그것뿐이라니.“여러분도 살아온 날들의 기억을 헤아려 보세요!” 작가의 말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대단한 기억력은 아니지만, 나는 세 살적부터 경험한 기억에서 출발할 것이다. 문제는 기억이 반드시 정확하지 않으며, 기억이 경험의 총량을 보존하지도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단편소설 ‘덤불 속’에서 인간의 선택적 기억과 경험의 왜곡을 적나라하게 들춰낸다. 그것을 바탕으로 구로사와 아키라는 영화 ‘라쇼몽’을 만들 수 있었다.그럼에도 기억의 힘은 단단하고 강력하다. 설령 왜곡되고 굴절된 기억이라 하더라도 기억이 가지는 힘은 대단하다. 어쩌면 그래서 아흐마토바는 “태양에 관한 기억이 흐려져 간다”고 아쉬워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남자와 엮이지 않은 청춘의 아쉬움과 미련을 감상과 낭만의 영탄으로 교직(交織)한 아흐마토바. 사랑의 올가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20대의 지독하게 아름다운 슬픔과 기억을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 사이로 퍼져 나가는 햇살에 의지한 그녀.무상한 자연이 늦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 무렵 페테르부르크의 운하를 서성대면서 아련하도록 애틋한 지난 일을 추억하는 아흐마토바. 그녀를 둘러싼 자연과 사물의 변화에 눈길을 주면서 자신의 헛헛한 내면세계를 돌이키는 시인. ‘그의 아내가 되지 않았음’을 그녀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지만, 한여름을 시뻘겋게 달구던 태양에 관한 기억은 점차 시들어간다. 암흑과 겨울이 하룻밤 사이에도 닥칠 것을 예감하는 우울하고 고적(孤寂)한 아흐마토바. 그녀는 어떤 경험을 ‘그’와 공유하고 있을까?! 언제 어디서 그와 만나고, 어떤 과정을 거쳐 그와 작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일까. 그녀가 기억하는 경험의 무게와 색깔은 그가 경험한 사랑의 색깔과 무게와 동일한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녀처럼 그 역시 선택적 기억과 그에 따른 독자적인 경험의 세계에 자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기억의 세계에 빠져드는 순간,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은 각자도생의 길을 걷기 마련이다.‘나한테는 얼마나 많은 기억이 내재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찾아든다. 언젠가 나 또한 켜켜이 쌓여있는 기억의 씨줄과 날줄을 찬찬히 엮고, 상상력과 통찰에 기초하여 기나긴 이야기를 풀어볼 요량이다. 문학은 기억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기억이 배제된 문학은 없다. 그런 까닭에 공상과학소설과 무협은 아직도 문학의 범주 밖에서 맴돌고 있다.기억을 배제하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죽어도 잊히지 않을 경험과 기억이 있다. 그것의 색깔과 무게가 어떠하든 우리는 최후의 그날까지 기억과 함께한다. 그래서다. 우리가 과거를 물어야 하는 까닭은.

2019-09-18

진보 386세대 그들은 누구인가

박준섭 변호사386세대는 60년대에 태어나서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을 일컫는다.386세대는 20대 때 독재에 대항하면서 목숨을 걸고 지하활동과 야학, 학회활동을 통하여 조직력을 키웠고, 이를 바탕으로 시민들과 연대해 마침내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했다.어떤 사람들은 과거에는 6·3세대와 민청학련, 긴급조치 세대가 민주화 선배세대로 있었고, 같은 시대에는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비로소 87년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으므로 민주화의 영광의 열매를 386세대가 독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기도 한다.그러나 386세대는 도시 빈민 및 노동자계층과 중산층의 연대를 통해 민주화를 주도적으로 이끈 세대만은 분명하다. 그들 가운데 진보진영은 집단적으로 공장으로 진출해 스스로를 ‘하방’ 시키면서 평등을 몸소 실천한 세대이다. 이들은 산업화 과정에서 독재화된 권력에 대항하면서 러시아와 중국, 북한으로부터 들여온 혁명적 사회주의를 이념적 도구로 사용했다. 이 세대는 90년대 구 소련이 몰락하자 집단적으로 전향하거나 전환했다.1997년 IMF를 통하여 대한민국이 신자유주의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선배들은 주류에서 탈락됐고, 그들의 후배들은 아직 주류로 진입하지 못하면서 생긴 공백 상태가 오랫동안 계속됐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 가장 강력한 비판자들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IMF사태 이후의 신자유주의 97경제체제가 그들을 일찍 사회의 주류에 올려놓았고 이후로도 20년 동안이나 기득권을 유지시켜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진보 386세대는 노무현 행정부 때 국가정책의 결정권을 행사했으나, 정책적으로 무능하다고 의심받았고 패권적 권력을 추구하다가 몰락해 스스로 ‘폐족’선언을 하면서 사라졌다가 10년만에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사건 때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국민들은 산업화, 민주화가 성취된 이후에 이명박, 박근혜 행정부의 10년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기에는 너무 수구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며, 무능하고 욕심 많은 집단의 정체나 퇴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이후에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진보 386세대를 다시 소환했다.이제 국민들은 광복 된지 70년이 지난 우리나라가 산업화·민주화를 거치는 동안에 왜곡된 국가구조를 그들이 새롭게 혁신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국민들은 이번 조국 장관의 임명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뒤에 있는 그림자를 슬쩍 보았다.니체의 말처럼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 버린 386세대라는 괴물의 그림자를. 평등과 기회균등을 외치면서도 자신이 가진 모든 기득권을 사용하여 자신의 권리로 만드는 탐욕을 부렸으며 어쩌면 이제는 낡은 사상과 방법일 지도 모르는 것을 옳다며 자신들의 장기인 조직과 프로파간다를 통해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반대하는 사람들과 싸움만 일삼는 괴물 말이다.국민들은 이제 자신들이 기득권자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윤리를 통해 절제하고 희생하는 법을 모르는 괴물을 통제하고 다스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19-09-18

꿈의 나라, 몽상가의 땅

2017년 할리우드 최대 화제작은 ‘라라랜드’ 였습니다.골든 글로브 7개 부문, 아카데미상 6개 부문을 석권한 수작입니다. 3천만 달러 저 예산 영화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습니다.라라랜드(La La Land)는 ‘꿈의 나라’로 사전에 나오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비현실적 세계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몽상가의 땅 정도 뜻이겠지요.영화는 불가능한 꿈을 위해 분투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여줍니다.LA는 4월 어느 날 ‘라라랜드 데이’를 선포하고 시장이 피아노로 영화 OST를 연주할 만큼 반향을 일으켰죠. 재즈 음악도 환상적이고 화면 구성이나 카메라 앵글, 의상, 색상 등을 유심히 보면 재밌습니다.배우를 꿈꾸며 LA에 온 미아. 마음껏 재즈를 연주할 수 있는 바(Bar)를 꿈꾸는 세바스찬. 두 사람의 꿈과 사랑 이야기입니다. 미아가 오디션 보는 장면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지요.“제 이모는 파리에서 산 적이 있어요/ 여행 중 일을 얘기해 주었죠/ 맨발로 강에 뛰어든 적이 있대요. (중략) 그 열정을 기억해요/ 그녀는 말했어요/ 그런 정신 나감이 세상을 보게 해 준다고/ 세상과 거꾸로 간다 해도/ 그 작은 조약돌이, 화가가, 시인이, 배우들이 말이죠./ 꿈을 꾸는 그댈 위해/ 비록 바보 같다 해도/ 상처 입은 가슴을 위해/ 우리의 시행착오를 위해…이모는 꿈꾸는 바보의 삶을 미아에게 보여줍니다.라라랜드는 이 영토 문법과 논리로 해석할 수 없는 저 영토 세상을 꿈꾸는 자들의 나라죠. 안전과 안정, 움켜잡은 것을 지키기 위해 꿈을 잃어버린 삭막한 세상에서 이해받을 수 없는 몽상가의 삶입니다.세상은 이런 정신 나간 라라랜드 시민들이 있기에 한 뼘씩 앞으로 전진합니다. 삶에 지쳐 꿈을 놓아버리고 먹고사는 일에 지쳐 방향과 기력을 잃었다면, 라라랜드 돈키호테 삶이 작은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9-18

새 공보준칙의 허실

공보준칙은 공적으로 보도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되는 규칙을 말한다. 조국 장관 인사청문회를 계기로 피의사실 공표가 논란을 불러일으킴에 따라 공보준칙 개정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새 공보준칙인‘형사사건 공개 금지 등에 관한 규정(안)’은 검찰 수사과정에서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을 계기로 2010년 마련된‘인권 보호를 위한 수사공보 준칙’을 대체하는 새로운 법무부 훈령이다. 이는 피의자에게 불리한 일방적 혐의사실 등이 언론을 통해 무분별하게 유포돼 피의자가 재판도 받기 전에 수사과정에서 이미 범죄자로 확정되고마는 폐해를 근절하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다만 새 훈령은 국민의 알권리보다 무죄추정의 원칙 등에 기반해 공소제기 전 수사상황이나 혐의사실 등 피의사실 공표를 최대한 금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검찰도 피의사실 공표에 대해 엄격하게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최근 울산지검이 울산지방경찰청 소속 경찰관 2명을 피의사실 공표죄로 입건한 바 있다. 당시 울산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약사면허증 위조 혐의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면서 수사 결과를 보도 자료로 언론에 배포했는데, 검찰이 이를 두고 재판에 넘기기에 앞서 피의사실을 알렸다며 문제삼은 것이다. 경찰이 사건을 마무리하고 송치하는 단계에서 수사 결과를 브리핑하고 보도 자료를 배포하던 일반 관행에 제동을 건 셈이다.문제는 이로 인해 일반에 알려야 예방 가능한 보이스피싱·이웃간 범죄·부동산 사기·인터넷 물품 사기 등 생활밀착형 범죄 정보마저 묻힐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새 공보준칙이 인권을 보호한다니 부작용을 없애는 방향으로 바뀌면 좋겠다. 또 누군가에게 특혜가 되지도 않는다니 반대할 일도 아니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9-18

확인했어?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사람은 이기적이다.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바빠서 그렇다. 내 주변만 걱정하고 살아도 시간이 모자란다. 생각거리가 많고 걱정거리도 많다. 청년은 입시와 취업에 목이 마르고, 어른은 가계와 생업에 목숨걸고 산다. 하루하루가 전쟁같은 판에 남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나와 내 가족 챙기기도 만만치 않은 세상에 남들과 사회를 염려할 여유가 있을 턱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남북대화가 궁금하고 한일관계가 걱정이며 북미관계도 안타깝다. 나아가 4대강사업에도 관심이 있고 지구온난화도 띄엄띄엄 알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투가 마음에 거슬리고 아베 총리의 망언에 핏대가 선다. 온갖 사건사고에 마음이 쏠리고 사회적 거대담론에도 제법 호기심이 발동된다. 어떻게 그렇게 됐을까?매우 이기적이긴 하지만 또 한편 끊임없이 무엇이라도 알아야 하는 우리는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까. 언론(言論). 언론의 유익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언론이 있어 나라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고, 언론이 있어 이웃과 세상이 사는 모습을 알게 된다. 언론이 전하지 않았으면 알 길이 없었을 뉴스가 하루에도 온갖 미디어에 한가득 실린다. 권력을 감시하고 정보를 전달하여 시민이 적절하게 판단하도록 돕는 언론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버팀목이 아닐 수 없다. 알아야 결정할 것이므로. 미디어환경이 급격하게 변해 가지만, 언론의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시민으로 알게 하라’.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지 본사 복도에 현수막이 붙었다. 그것도 대문자로만. ‘엄마가 널 사랑한다 말한다면, 그거 확인해! (WHEN YOUR MOM SAYS SHE LOVES YOU, CHECK IT OUT!)’ 취재와 보도에 나선 기자들이 분명히 해야 할 일은 ‘확인하고 확인하는’ 일이라는 의미. 당연한 사안이라도 기자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한 줄도 쓰지 말라는 간곡한 당부. 취재원으로부터 보내오는 보도자료는 그들 입장에서 적혔을 게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보도자료는 기사가치를 결정하고 취재에 나설 시발점이기는 해도, 그 자체로 기사는 될 수가 없다. 기자의 이름을 걸며 적어 내릴 기사는 기자가 손수 확인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어야 한다. 검찰이 던져주는 단서가 기사의 줄거리가 되거나 포토라인에 선 피의자에게 묻는 일로 취재를 대신하는 일은 일선기자라 불리기에 아직 흡족하지 못하다.언론인 빌 코바크(Bill Kovach)와 톰 로젠스틸(Tom Rosenstiel)은 ‘저널리즘의 본질은 확인(verification)에 있다’고 하였다. 사실을 일어난 그대로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는 생각. 팩트가 기사의 토대가 될 때에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팩트는 정확해야 하고 충분해야 하며 공정해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 누군가 던져준 사실과 문건은 기자가 확인하기 전에는 아직 취재를 위한 재료일 뿐이다. 시민의 민주역량은 ‘언론의 확인’에서 시작한다.언론이 민주주의를 완성한다.언론이 민주주의를 그르친다.

2019-09-18

제1차 산업혁명과 안젤루이스의 종

제1차 산업혁명, 이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채 일곱 글자 밖에 되지 않는 이 단어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먼저 ‘제1차’란 산업혁명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이란 기존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쓸어 가버리는 쓰나미와도 같은 거대한 변혁이다. 산업 혁명이라는 용어는 프랑스의 학자들이 가장 먼저 사용했다고 하지만 일반화된 것은 영국의 경제사가인 아널드 토인비가 영국경제발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였다고 한다. 이후 이 용어는 보다 광범위하게 적용되어왔다. 이러한 산업혁명은 ‘농경’ 중심의 사회를 ‘산업’ 중심의 사회로 바꾸어 놓았다.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는 삶의 중심에는 농업이 있었다. 땅에 작물을 심고 그것을 가꾸어 수확하는 삶, 이것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삶의 방식이었다. 농업 중심의 사회에 산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 즉 삶의 방식 역시 여기에 맞춘다는 것이다. 문학, 예술, 음악 등은 농업과 그러한 농업을 가능케 하는 자연을 중심소재로 삼았다. 릴케의 ‘가을’, 드뷔시의 ‘목신에의 오후’와 같은 시와 음악들이 그것이다.또한 이것은 우리의 사고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침에 해가 뜨면 들에 나가서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집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자연환경에 인간의 삶을 맞춘다. 변화하는 자연에 맞춰 옷을 입고, 제철 음식을 먹으며 자연의 순환을 인식하게 된다. 나아가 자연을 순환시키는 정체 모를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인간의 삶 역시 그러한 순환적임을 인식하게 된다. 자연의 순환이 이미 정해진 것처럼 거부할 수 없는 숙명과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다.감자를 심으면 감자가 자라고, 보리를 심으면 보리가 자라는 것을 보게 된다. 콩 심은 데 팥이 나는 일은 없고 불을 때지 않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일은 없다. 콩을 심으면 그에 비례해서 콩이 나는 것이지 이의없을 만큼 적거나 터무니없이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없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것, 원인에는 그에 합당한 결과가 따른다는 인과론적 세계관이 자리잡게 된다. 운명론, 인과론은 농경중심사회에서 경험하고 배운 것들에서 기반한 지식이며, 이것이 당대의 종교와 윤리로 자리 잡았다.산업혁명과 함께 농업이 이룩한 삶의 방식 역시 사라진다. 사람들은 들에 나가서 일을 하지 않고 공장에서 일을 한다. 낮에도 일을 하지만 밤에도 일을 하기도 한다. 밤에도 일을 하려면 어둠을 극복해야 했다. 전기와 전구는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출현한다.자신이 일하는 논과 밭을 중심으로 농촌에 드문드문 집을 짓고 살았던 사람들은 공장 근처로 몰려 거대한 규모의 집성지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집성지에 새로운 공장이 들어선다. 왜냐하면 인력을 구하기 쉽기 때문이다. 다시 여기로 사람이 모이고, 또 그런 사람을 따라 공장이 지어진다. 공장들이 대규모로 들어서고 인간의 규모도 커져 거대한 도시를 이루게 된다.조용하고 따분한 농촌과 달리 도시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시끌벅적하고 야단스러운 일들이 매일 같이 일어난다. 인간보다 자연을 중심으로 삼았던 예술은 이제 도시와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집중하게 된다. 도시의 사람들은 공장에서 스스로 물건을 만들어 낸다. 운명보다는 개인의 역량을 중시하게 된다. 개인은 노력에 비례하여 결과를 얻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우연히 성공을 이룩하기도 한다. 우연히 사람을 만나 우연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이제 사람들은 필연보다는 우연을 더 믿게 된다.산업은 농업의 자리를 차지하고 군림하며 인간을 산업에 맞게 개조한다. 인간은 더 이상 운명과 필연에 매달리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의 섭리에 저항하며 스스로의 운명은 스스로 헤쳐 나가고자 한다. 프론티어 정신! 산업사회는 이것을 종교처럼 섬기고 윤리규범처럼 따르고자 한다. 산업혁명은 대륙의 한 구석에서 시작하여 이제 전 세계로 들불처럼 번져나간다.‘만종’으로 널리 알려진 밀레의 ‘안젤루이스의 종’이라는 그림이 있다. 넓은 들판, 어둠이 서서히 다가오는 시간, 멀리 교회에서 종이 울려 퍼지면 일을 마친 농부 부부가 기도를 드린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들 가운데 놓인 감자바구니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하는 것이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엑스레이로 촬영해 본 결과 밀레가 처음부터 감자바구니를 그린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저들 사이에는 감자가 담긴 바구니가 아니라 강보에 싸인 아기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농부 부부는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를 묻기 위해 들판으로 나왔던 것이다. 아기를 묻기 전 그들은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들이 경건하고 한편으로는 슬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인지 모르겠다.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사실 1857년 즈음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물이 파문을 일으키듯 유럽대륙으로 번져나갔다. 이 그림과 산업혁명의 전파시점이 유사한다는 것은 공교롭게 느껴진다. ‘안젤루이스 종’에서 보인 농부와 그의 아내의 애도는 이제 저물어가는 농경 사회에 대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019-09-17

개의 위협에 대한 대처와 예방방법

개에게 위협을 받았을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난 칼럼에서 카밍시그널(calming signal)을 이야기 했는데, 적용해 보도록 하자.개가 당신을 위협하고 있다면 개에게 어떻게든 진정시키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개가 위협신호를 보내고 있을 때 등을 보이고 달리면 안 된다. 등을 보이고 달려서 도망갈 경우 개의 추적본능을 자극할 수 있다.우선 가장 좋은 방법은 개의 눈을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시선을 약간 옆으로 돌려 밑을 보고 한두번 눈을 깜박인다. 눈을 깜박이는 것은 개들이 이해할 수 있는 카밍시그널로, 화해를 청하는 반응이다.그래도 개가 공격할 것으로 보이면 천천히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나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때도 절대 개와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된다. 호흡을 정돈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얼굴을 약간 옆으로 돌려 하품을 하는 것이 좋다. 개들을 진정시키는 카밍시그널 중 하품하기를 적용하는 것이다. 개와의 사이에 충분한 거리가 있다면 몸을 돌려 옆모습을 개에게 보인다.개에게 옆모습을 보였을 때 개의 흥분이나 위협의 정도에 변화가 없으면 천천히 물러나야 한다.평소에 개를 다루는 방법을 알면 개가 사람을 위협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데, 당신이 개의 확실한 리더가 되는 것이다. 개들 세계에서 무리의 리더를 결정하는 법칙은 무리의 리더인 개가 먹을 것이나 놀이도구 등 재산을 관리한다는 것이다. 즉, 개 주인이 개에게 뭐든 공짜로 그냥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개가 바라는 것을 주기 전에 뭔가를 반드시 개에게 요구해야 한다. 먹을 것을 주거나 쓰다듬어주기 전에 “앉아” 나 “엎드려”정도의 명령을 따르게 하는 것이 좋다. 평소에 이렇게 하는 것은 특별히 개에게 위협이나 공격의 신호를 보내지 않아도 개보다 주인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전달할 수 있게 한다.개가 배워야 할 것은 개 주인의 이야기에 꼭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인데, 당신의 이야기를 잘 따르는 것에 대한 대가로 리더인 당신이 개에게 바라는 것을 주는 것을 이해시켜야 한다.개를 당신 옆에 세우든가 앉혀서 당신의 손이나 팔을 개의 어깨에 얹어보라. 이것은 개들 세계에서 머리나 앞발을 다른 개의 어깨에 얹어 우위성을 확립하는 것과 같다. 만약 당신이 손이나 팔을 개의 어깨에 올렸는데 이것에 개가 저항한다면 개가 당신을 아직 리더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이동훈동물행동학자 로렌츠는 강아지를 길들이는 방법으로 목덜미를 쥐고 흔들어 돌리는 방법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이 방법은 말을 듣지 않는 강아지에게 어미개가 취하는 행동을 근거로 한 것인데, 훈련사들이 다 큰 성견이 주인에게 거스르는 행동을 할 경우에도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대형견의 경우 목 양쪽의 피부를 쥐고 노려보며 격하게 흔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렇게 하면 폭력적 강압방법을 개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개를 복종시키기 위해 개를 드러눕게 하여 배를 보이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두 방법 모두 해석은 맞는 이야기 일 수 있지만 방법은 잘못된 것이다. 개들끼리는 우위에 있는 개가 열위에 있는 개를 힘으로 눕게 하지 않는다. 열위의 개는 상대 개의 우위를 인정한 후에 스스로 드러눕는 것이다. 개를 힘으로 드러눕게 하는 것은 훗날 개의 분노를 더욱 부추겨 더 큰 공격을 유발시킬 수도 있는데 개를 무리하게 드러눕히거나 개의 목덜미를 쥐고 흔드는 육체에 공격을 가하는 행동은 향후 더 큰 문제를 일으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서라벌대 교수·반려동물학과 학과장

2019-09-17

자녀와의 친목도 포항을 살리는 길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최근 포항의 부동산시장이 여전히 약세인 것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절대적인 가격수준만 보면 최근 몇 년간 최고점에 비해 낮아진 것이지 장기적인 추세로는 상승세를 이어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2000년대 이후 지역 주민소득이 제자리걸음을 한 것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포항은 가장 조용히 그리고 안전하게 부동산시장에서 가격조정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할지도 모른다. 지역의 인구가 유출되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지 못한 채 일정기간이 경과하게 되면 부동산시장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기 쉽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선제적인 시장의 가격조정은 매우 긍정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문제는 포항의 부동산시장이 아직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부산, 대구와 같이 한국전쟁의 피해가 적었던 지방 대도시에서는 세대 간 부동산 상속시장이 형성된 지 오래다. 반면 포항은 부모에서 자녀로 이어지는 부동산 상속시장이 이제부터다. 타지에 거주하는 자녀세대들은 부모가 생존했던 도시와의 유일한 끈은 상속부동산뿐이다. 결국 이것을 급매로 시장에서 처분하고 나면 그 끈도 끊어진다. 포항에서 분가해 거주하던 자녀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녀세대가 상속으로 추가보유하게 된 부동산은 결국 포항의 상속시장으로 들어가 지역 부동산가격을 하락시키는 계기로 작동할 우려가 있다.결국 이를 억제하려면 부모와 자녀의 연결고리를 최대한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부모세대들은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을 쓸쓸하고 외롭게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일이 우선, 힘들면 다음기회에 등으로 타지에서 생활하는 자녀들을 배려해 인내하며 고향방문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녀에 대한 배려는 결국 지금 부모세대가 지키고자 애쓰는 지방도시 포항을 소멸도시로 이끄는 최대의 원인으로 작용하기 쉽다. 실제 지금 포항을 고향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조차 과거 70, 80년대에 포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왔던 자녀세대들이 아니었는가.다행히 다른 지방도시와는 달리 포항에는 부동산시장에 긍정적인 재료도 적지 않다. 그동안 국제항만이라고는 하지만 약점이었던 인입철도, 국제여객부두 등도 내년이면 해결된다. 적기에 영일만관광특구도 생겨났다. 이를 통해 유동인구가 증가하고 국내외 방문객들이 넘쳐나면서 지역경기가 호전되면 자연스럽게 국내외 관련 기업의 진출, 새로운 주거지를 찾는 부동산투자자들은 생겨나기 마련이다.지금 포항에서 살고 있는 부모세대들이 할 일은 하나다. 틈만 나면 자녀들을 포항으로 부르기만 하면 된다. 추석, 설날과 같은 명절에 자녀들을 굳이 배려하고 싶다면 명절을 피해 오도록 시기만 조절해주자. 그래야만 부모가 살고 있는 포항이 변화하는 모습, 부모들과의 추억거리가 많아질수록 포항과 타 지역 자녀들과의 끈은 단단하게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가족 간의 친화라는 최대의 행복을 맛보겠지만 그와 더불어 지역 부동산 상속시장의 약점을 최대한 보완하는 것이기도, 그로인한 자신들의 재산 가치를 보호하는 최고의 수단도 되기 때문이다.

2019-09-17

‘학교 내 대안교실’의 가능성은? (上)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민족 최대 명절인 한가위라고 하지만 시끄러운 조국은 국민의 흥을 꺾어버렸다. 필자 또한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한가위를 보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가족들로 고향집이 보름달보다 더 꽉 찼고, 달빛보다 더 따뜻한 웃음이 집 안에 넘쳤다. 그런데 올해는 필자 가족과 어머니만 고향집을 지켰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너무 컸다. 아버지의 자리는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는 한가위였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이들이 부단한 노력을 했지만 허사였다.추석 당일 필자의 식구들은 이른 차례를 지내고 병원으로 향했다. 비록 병원일망정 한가위를 가족과 보내려는 사람들로 병원은 떠들썩했다. 오랜만에 병원 냄새가 아닌 사람 향기에 아프신 모든 분들의 병이 치유되는 듯 했다. 꼭 그렇게 되길 필자는 기원했다.그런데 진상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필자는 한가위 병원에서 확인했다. 필자가 본 진상의 모습은 환자도 아니면서 복도와 쉼터를 돌아다니며 양치를 하는 사람들과 마치 놀이동산이라도 온 것처럼 아이들과 고성방가에 가까운 소리로 떠드는 젊은 아버지들이다. 필자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을 생각했다. 어린 손주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병상을 내어주는 환자복의 할아버지, 그 병상 위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를 훈육하기보다는 더 신이 나서 더 큰 목소리로 아이의 버릇없는 행동을 부추기는 젊은 아버지들! 과연 이렇게 자란 아이들의 초중학교 모습은 어떨까? 이 아이들이 예의 바르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면 얼마나 좋을까? 꼭 그렇게 되길 필자는 빌고 빌었다.왜냐하면 최근 교사들의 명예퇴직 사유 중 부동의 1위가 교권추락과 생활지도의 어려움이고, 이것의 근본적인 원인이 ‘예의를 상실한 학생’들이기 때문이다. 자기 통제와 절제가 안 되는 학생들, 그들에게 학교는 자신들의 원초적 감정을 발산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학교에는 이런 학생들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그 속도보다 더 빠르게 학교도, 교실도, 교육도 무너지고 있다.교육 당국에서는 ‘학교 내 대안교실’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무너져가는 교육을 살려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어느 지자체에서는 ‘한 아이도 놓치지 않는 학교 내 대안교실’이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대안교실을 홍보 중이다. 뭔가를 해보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응원을 보낸다. 이 노력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안교실 운영 목적 몇 가지를 인용한다.“학생들의 꿈과 끼를 살리는 다양한 교육 기회 제공, 학교부적응 학생에게 유의미한 학교생활이 되도록 지원, 다양한 교육을 원하는 학생들에게 대안적 교육 기회 제공, 위기 학생들을 포함한 모든 학생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중하고 협력하는 교육기회 제공”정말 좋은 말이고, 대안교실이 아닌 우리 교육이 해내야 할 교육 목적들이다. 그런데 필자는 지금과 같은 대안교실 프로그램으로는 목적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필자가 교육부 컨설턴트로 대안교실 프로그램을 컨설팅하던 3년 전과 바뀐 것이 별반 없기 때문이다.

2019-09-17

구름으로 살아가는 법

무협지를 보면 흔히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온 가족이 원수들에게 몰살당하고 목숨만 건진 소년이 스승을 찾아 산으로 들어갑니다. 스승은 한동안 물 길어오고, 청소만 시키죠. 그러다가 됐다 싶은 시점이면 체력 단련을 시작합니다. 어린 묘목 하나를 심고 매일 그 작은 나무를 뛰어넘는 연습을 합니다. 나무가 자라고 소년의 점프 실력도 점점 높아지고 마침내 무술을 배울 때가 오는 겁니다.최근 밝혀진바, 무언가 성취하는 데 있어 재능이란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상당한 기간을 의식적인 연습(deliberate practice)을 반복할 때 위대한 성취가 가능하다고 하지요. 새로운 이론같지만, 무협지에는 뻔한 스토리였지요. 작은 것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쌓아가는 일이 훗날 공중을 펄펄 나는 무림의 고수를 만들어 내는 비결입니다.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루에 한 뼘씩 전진해 나가는 일이 그래서 위력적입니다. 습관이 되기 때문이지요. 물론 시간만 투자한다고 해서 위대한 결과를 이룰 수 없습니다. 정확한 방법과 전문가의 피드백이 필수입니다. 홀로서기는 그래서 위험합니다. 나만의 독단에 빠지기 쉽고, 피드백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나를 1%씩 꾸준히 향상시키는 공동체적 노력이 필요합니다.프리드리히 니체는 디오니소스 찬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젠가 많은 것을 알려야 할 사람은 많은 것을 자신 속에 숨겨 둔다. 언젠가 번개에 불을 켜야 할 사람은 오랫동안 구름으로 살아야 한다.”조금 깨달음이 있다고 교만하지 않고, 내 안으로 꼭꼭 숨겨 두는 일. 번개가 번쩍일 순간을 기다리면서 오랫동안 구름으로 회색 지대를 견뎌 내는 일. 그 묵묵한 인내의 시간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두려움을 희망으로 인내하며 매 순간을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는 자세. 오늘 하루 곰곰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9-17

스마트 세상, 컵케이크로부터

곽지영 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최근 글로벌 IT 리더 기업들의 신제품 발표가 이어지고 있다. 10, 11, 버전 숫자가 두 자릿수까지 올라가면서, ‘혁신’ 그 자체보다는 자연스러운 진화와 가성비를 통한 저변 확대에 방점을 두는 기업들. 발표회가 채 끝나기도 전, 리뷰어들은 ‘혁신은 없었다’, ‘특별함은 없었다’ 등의 싸늘한 반응들을 약속이나 한 듯 쏟아낸다.IT 업계에서 흔히 쓰이는 용어 중에 기술 수용 주기(Technology Adoption Lifecycle)라는 것이 있다.혁신 기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시간차를 두고 확산돼 가는 것을 그래프로 표현하면 볼록한 종 모양의 곡선이 된다는 마케팅 이론으로, 제안한 사람의 이름을 붙여 로저스의 종(Rogers’ Bell Curve)으로도 불린다.이 ‘로저스의 종’에는 캐즘(Chasm)이라는 작은 ‘틈’이 있다. 혁신적인 기술이나 제품이 출시 초기 시장에서는 어느 정도의 시장 반응을 보이지만, 그 후 수요가 일시적으로 멈추거나 후퇴하는 단절현상을 말한다. 호기심이 발동해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에 관심을 보이며 무조건 구매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용성이 확인될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구매를 시작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바로 이 ‘틈’에서 IT 업계 리더 기업들의 딜레마가 생긴다. 소위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들의 주목과 호응을 얻으려면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혁신적인 제품을 남보다 먼저 내놓아야 한다. 경쟁자보다 한발 늦으면 초기 시장에서의 입지를 빼앗긴다는 위기감에, ‘실용성’은커녕, 사용자의 기대치를 살필 겨를도 없이 쫓기듯 제품을 내놓아야 할 때도 있다. ‘실용’을 원하는 대다수 사용자의 마음을 제대로 못 읽고 결국 대중화에 실패하게 되는 ‘캐즘’. 출시가 늦어져 혁신에 실패하는 경우나, 서둘러 제품을 내놓느라 대다수의 기대치를 제대로 충족 못한 두 경우 모두, 제품개발 과정의 막대한 투자가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기업은 혁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선택상황에 놓이는 것이다.그런 시행착오를 거친 후 IT업계가 터득한 것이 바로 ‘린(Lean=군더더기 없이 가벼운) 접근법’이다. 예를 들어, 시장에 내놓고 싶은 제품이 화려한 3단 웨딩 케이크라고 하자. 청사진은 3단 웨딩 케이크를 멋지게 그려 두되, 파티셰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작은 ‘컵케이크’부터 만들어(Make), 먼저 손님들의 반응을 확인해보고(Check), 아니다 싶을 때는 보완책을 모색하여 고치는 것(Think)이 린 접근법의 핵심이다.스마트 세상을 만드는 일은 비유하자면 3단 웨딩 케이크 만큼이나 복잡하고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든다. 컵케이크부터 차근차근 키워 나가는 IT업계의 린 접근법이 스마트 세상을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안내해 줄 것이다.

2019-09-17

명절 설거지

설거지는 표기 방법부터 헷갈릴 때가 많다. ‘설거지’가 맞는지 ‘설겆이’가 맞는지 아리송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음식을 먹고 난 뒤의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일로 ‘설거지’라 표기하고 있다.설거지의 어원은 ‘설겆다’ 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지만 설거지로 표현한다고 한다. 1988년 이전까지는 설겆이가 표준어였다.우리의 전통적 관습으로 볼 때 설거지는 아랫사람이 맡아 하는 일이다. 남성보다는 여성이 맡기에 적합하다. 빨래 빨기와 비슷하다. 이런 이미지 때문에 설거지는 여성이 하는 험한 일로 여겨져 왔다. 사회 관습적 용어에서도 “설거지 한다”는 말은 아랫사람이 나서서 수습한다는 말로도 통용된다. 군 생활과 같이 단체가 생활할 때는 반드시 식기를 치우는 설거지 당번을 별도로 정하는데, 이도 하찮은 일로서 서로 기피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추석 명절날 돌아오는 설거지는 항상 개운치 않은 뒷맛을 많이 남겼다. 전통적 유교방식에 의해 지내는 명절문화 속에 설거지는 늘 며느리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남의 집 제사에 며느리가 왜 이런 덤터기를 써야 하는지 그녀들의 불만이 명절의 뒤끝을 늘 씁쓸하게 해주었다. 명절 후유증의 하나다.경북도가 “명절 설거지는 남자가”라는 릴레이 캠페인을 벌였다. 이철우 경북도지사의 제안으로 시작된 설거지 릴레이 캠페인은 이강덕 포항시장, 윤종진 경북도 부지사, 이상길 대구시 부시장 등으로 이어지면서 1천여명에게 전파되었다고 한다.설거지가 여성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가족 공동체가 함께하는 일이라는 인식을 심기 위한 의도다. 이 지사는 “남자의 설거지가 비록 작은 일에 불과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작은 변화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달았다. 세상은 바뀌어 가고 있다. /우정구(논설위원)

2019-09-17

도시, 젠더 이슈에서 분석한다

박은미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개발실장2012년 성별영향평가법 시행 이후 도시기반 및 공공시설과 같은 지역개발에 대한 평가가 활성화되고 있고 있다. 이를 정책개선으로 연계하려면 도시기반 및 공공시설 젠더 이슈에 따른 모니터링 운영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때문에 도시기반 및 공공시설의 젠더 이슈는 여성과 남성의 생활특성 차이와 요구를 고려한다고 본다. 즉 돌봄, 접근성, 편의성, 안정성, 체감도 다섯가지 영역을 도시기반 및 공공시설의 젠더 이슈로 살펴본다.돌봄은 전통적인 성역할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환경을 촉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남녀 모두 가정과 사회의 공적인 일이 조화롭게 도모할 수 있도록 돌봄 기능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안전하고 편리한 양질의 돌봄 시설이 제공돼야 한다. 편의성은 중요한 젠더 이슈 이며, 여성의 돌봄이나 여성 친화공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사회적 약자를 고려한 문화·복지·체육시설 배치 및 설계, 공공기관 내 유·아동 보호 및 편의시설 설치, 휴식 공간 제공 등을 검토해야 한다. 안전성은 필수적인 요인이며, 장소와 시간대에 따른 범죄로부터의 여성 안전 확보, 여성의 보행환경을 고려한 도로 포장, 여성의 보행속도를 고려한 신호체계 구축,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 주택 및 도심시설 설계, 생활체육 시설 및 공원 등을 고려해야 한다. 체감도는 정책 및 계획의 수행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는지, 즉 어떤 항목이 반영 되었고 반영하지 못한 항목은 무엇인지 살펴본다.이처럼 도시기반 및 공공시설의 젠더 이슈와 함께 모니터링에서 검토할 부분을 제시한다. 첫째, 기획에서는 법령 및 지침 등의 성인지적 관점 반영 여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익증진을 위한 시설 설치 규정 여부, 도시기반 및 공공시설 관련 성별 통계 생산 여부를 점검해야 한다. 정책의 성별 관련성에서는 성별 간 서로 다른 요구 파악, 도시기반 및 공공시설 관련 의견수렴 과정(주민 설명회 등) 실시 여부, 정보 접근성의 용이성을 살펴본다. 또한, 위원회의 성별 형평성을 고려한 여성위원비율 및 위원들의 성인지 감수성, 사업추진 주체의 성별 구성 및 성평등 의식을 점검한다. 둘째, 과정에서는 성인지 예산 연계, 시설 및 장소의 접근 용의성과 안전성, 서비스 및 프로그램의 접근 용이성을 확인해야 한다. 임산부 및 영유아 동승자를 배려한 일정 크기의 주차공간이나 공원 및 체육시설 내 여성 및 노인, 어린이의 신체적 차이를 고려한 시설물 배치 등을 살펴본다. 그리고 거주 공간의 안전성 뿐만 아니라 야간보행 안전성을 위한 조명시설도 검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평가에서는 성별 요구에 따른 시설 및 환경만족도, 복지 만족도, 여가 및 커뮤니케이션 시설, 평가결과의 수행정도 및 실효성 파악, 성인지 예산 반영 및 집행결과를 논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도시기반 및 공공시설 관련하여 성인지 예·결산서 작성이 수행되었는가를 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부분이 체계화되려면, 단편적인 조사와 분석이 아닌, 상시적인 점검과 합리적인 개선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2019-09-16

내 마음 중심에 있는 것 (2)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빠진 크리스틴 스페인(Christine Spain)은 54세 여성입니다. 어느 겨울날, 이웃에서 모임을 갖고 늦은 밤 애완견 릴리와 함께 귀가하던 중 갑자기 쓰러집니다. 알코올이 문제였습니다. 릴리는 갑자기 쓰러진 주인 주위를 빙빙 돌며 어쩔 줄 몰라 합니다. 멀리서 화물 열차 불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대로 두면 크리스틴은 그대로 열차에 깔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지요. 릴리는 미친 듯이 주인을 선로에서 끌어내려 애씁니다.기관사가 멀리서 목격하고 급브레이크를 밟습니다만 열차는 제동거리 때문에 서서히 크리스틴과 릴리를 향해 접근합니다. 릴리는 필사의 힘을 다해 주인을 선로 밖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하지요. 그러나 릴리는 오른쪽 앞발이 빠져나오지 못한 채 열차 바퀴에 깔리고 맙니다.동물 병원으로 가족들이 달려옵니다. 옛 주인을 알아본 릴리는 부끄러운 눈빛으로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듭니다. 앞 다리를 절단하고 내장이 파열된 심각한 몸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흔히 충견(忠犬)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충성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한자의 충(忠)은 가운데 중(中) 아래에 마음 심(心)이 놓여 있습니다. 내 마음 중심에 놓여 있는 것. 우리는 그것에 충성을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그 중심에 놓인 것이 돈이면 우리는 돈의 충실한 노예입니다. 그 중심에 놓인 것이 명성이면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몸값과 명성을 높이기 위해 충성을 다 합니다. 그 중심에 놓인 것이 권력이라면, 우리는 파워를 획득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붓겠지요. 결국, 지금 현재의 내 모습은 내가 무엇에 중심을 두고 충성을 바쳐왔는가, 하는 것의 최종적인 결과물입니다.“강아지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 조쉬 빌링스의 말이 뜨끔합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9-16

독일과 일본의 역사관

강희룡 서예가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지난 1일 폴란드 중부 비엘룬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80주년 행사에 참석해 과거사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그는 이날 당시 독일군에게 희생된 폴란드인들을 애도했다. 독일의 압제에 희생된 폴란드인들을 기리며 용서를 구한다.1939년 9월 1일 오전 4시 40분 독일이 폴란드의 비엘룬을 기습적으로 침공함으로 인해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방어력이 없던 소도시 비엘룬은 순식간에 도심 전체가 파괴됐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 1천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후에도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후 5년 넘게 이어진 전쟁으로 폴란드에선 유대인 300만 명을 포함해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600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바르샤바를 비롯한 주요 도시는 폐허가 됐다.비엘룬에서의 행사는 8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전 4시40분에 시작됐다. 두다 폴란드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린 비엘룬 공습은 ‘민간인을 겨냥한 테러이자 전쟁범죄였다’고 말했다. 두다 대통령은 독일 대통령의 비엘룬 방문을 일종의 도덕적 배상으로 규정하면서 ‘힘겨운 역사의 진실을 직시하는 행동에는 용서하고 우정을 쌓을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독일은 그동안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폴란드, 프랑스, 영국 등을 비롯한 전쟁 피해국들에 많은 배상을 해왔고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를 계속하고 있다. 올해만 해도 독일 하이코 마스 외교장관은 지난달 1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봉기 75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추모하고 용서를 구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지난 7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식에 참석해 ‘우리가 방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억을 보존하고 이어가야 하며,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시아지역에서 1차 세계대전으로 최대의 호황을 누렸던 일본은 지역적 한계와 서방국가들에 비해 조선 이외 다른 식민지를 보유하지 않았기에 경제침체에 빠졌다. 도조 히데키와 일본 군벌은 이 대공황을 타개하고 제국의 세력 확장을 위해 만주를 침략하여 만주국(1932)을 세우고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2차세계대전에 뛰어든다.일본은 10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을 강제징용 또는 징병해서 죽음으로 내몰았다. 전쟁 가해국으로 오늘날까지 사죄는커녕 오히려 한국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차원에서 한국에 경제전쟁을 선포해 압박을 가하고 있다. 아베의 야망은 ‘전범국가에서 전쟁국가’ 즉 군국주의 부활이 주 목표다. 이번 개각에서 호전(好戰)적 사관을 가진 반한(反韓)인물들을 중심으로 ‘초우향우’ 개각을 단행했다. 이 개각으로 역사인식 문제를 놓고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한일관계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독일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피해 입은 모든 나라에 사죄를 해왔다. 사죄 없는 일본과 과거사를 대하는 역사인식이 서로 상반되는 것을 보여주는 현실이다. 우리는 지난 비극의 역사를 잊지 말고 반드시 미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19-09-16

우리가 알고 있는 주막은 근래 100년 사이의 일이다

주막은 사라졌다. 바쁜 세상이다. 사라진 것은, 아름답지만, 잊힌다.사극 드라마에는 늘 주막이 등장한다. 주막은 생생하다. 초가집 마당 한가운데 평상(平床)이 있다. 건장한 사내 몇몇이 술잔을 기울인다. 장국밥을 먹는다. 멀찌막이 떨어진 곳에 수상한 남자가 혼자서 술잔을 기울인다. 포졸도 고정배역이다. 활극도 펼쳐진다. 미행도 한다. 주모는 트레머리다. 주모를 흠모하는 중노미도 있다. 가끔 봉놋방의 나그네들도 등장한다.불행하게도 엉터리다. 드라마의 주막은 드라마일 뿐이다.주막은 ‘酒幕’이다. 주점(酒店)과 다르다. ‘술 파는 막(幕)’이다. ‘막’은 집이 아니다. 천막 등으로 덮은 ‘임시 가 건물’이다. 건물이라고 부르기 옹색하다. 비를 긋거나 햇빛을 가릴 정도의 천 쪼가리를 덮었다. ‘임시’다. 드라마의 주막은,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 이후의 모습이다. 초가집, 주모, 평상, 봉놋방, 포졸은 상상이다.잠도 자는 공간을 왜 ‘술 파는’ 주막이라고 불렀을까? 주막의 시작이 ‘간단하게 목을 축일 수 있는 임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주막은, 간단하게 목을 축이는 임시 공간이었다. ‘임시, 탈법, 불법적으로’ 세운 것이다. 주막은, 끊임없이 변했다. 허술한, 겨우 하늘을 가린 ‘가 건물’ 형태에서 잠도 자고, 술과 밥을 내놓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술, 밥, 잠이 모두 가능한, 우리가 그리는, 주막은 근래 100년 사이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역원(驛院), 역참(驛站), 참(站), 점(店) 주점(酒店), 탄막(炭幕), 주막(酒幕)이 뒤섞여 있었다.역원, 역참, 참, 주점은 공식 합법의 공간이다. 탄막, 주막은 탈법적인 민간의 공간이다.조선은 역원(驛院)의 나라다조선 시대, 움직이는 사람은 한정적이었다. 공식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관리들이다. 이들을 위한 장소가 역과 원, 역원이다. 각 지역 도로에 촘촘히 역과 원을 만들고, 공식적인 이동 시에는 반드시 역원을 이용했다. 조선 초, 중기에는 이동 인구가 한정적이었다. 공무로 출장을 가는 관리, 지방으로 부임하거나 한양 도성으로 향하는 관리 정도가 이동 인구의 대부분이었다. 농경사회다. 상업은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인근 동리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이동은 제한적이었다. 더러 움직이는 사람들도 ‘아는 집’에서 하룻밤 기식(寄食)했다.민간의 여행자는 과거 보러 한양 가는 수험생 정도였다. ‘과거 수험생’들도 민간의 집에서 유숙했다. 동문수학한 이들도 있었고, 혈연, 지연으로 얽힌 이들의 집에서 하룻밤 유숙했다. 동리에서 가장 번듯한 반가나 더러는 깊은 산속 외딴집에서 묵기도 했다. 드라마 ‘전설 따라 삼천리’에서는 깊은 산속에서 아리따운 처녀로 변신한 여우를 만나기도 했다.‘역’은 잠을 자지 않는 곳이다. 전해야 할 문서를 챙기거나 물을 마시고, 말을 바꿔 타는 공간이었다. 파발마로 급하게 달리는 관리들이 이용했다. 서울 ‘양재역’은 전철역에서 시작된 이름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 이미 ‘양재역’이 있었다. ‘역원제도’의 ‘역’이다. 양재역 부근에 말죽거리가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말은 기차가 아니다. 때때로 갈아야 한다. 양재역은 말을 갈아탔던 ‘역’이다.1795년(정조 19년) 가을, 다산 정약용은 외직인 ‘금정찰방’으로 부임한다. 찰방은 역에 근무하는 종6품이었다. 역에는 9품직의 역승도 있었고, 역을 운영하는 역원(驛員)들도 있었다. 국가는 역원(驛院)에 농사지을 땅[驛田, 역전]과 노비 등을 제공했다. 역원의 책임자는 땅, 노비, 책임 구역의 도로 등을 관리했다. 역원에 들르는 관리들에게 음식, 잠자리, 말 등을 제공했다. 마패는 역원에서 말을 제공받을 때 사용하는 표식이었다. 관리, 암행어사는 역원에 마패를 제시하고 말을 구했다.조선 후기, 주막이 역원을 대신하다‘원’은 숙박, 식사가 가능한 공간이다. 말에게 사료를 주고 잠을 재웠다. ‘원’은 국가의 공식적인 시설이다. 근무자는 주모가 아니다. 관리들이 정식으로 운영했다. 한때는 전국에 1천여 개의 원이 있었다. 원은 30리마다 하나씩 세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오늘날도 남아 있는 ‘조치원’ ‘이태원’ ‘사리원’ ‘인덕원’ 등이 모두 조선 시대 역원제도의 ‘원’이다.공식적인 역원과 달리 민간에서는 탄막(炭幕), 주막(酒幕) 등이 발달한다. 숙종 조 이후 잉여농산물이 생기기 시작한다. 잉여생산물은 민간의 ‘탈법적인’ 상업행위로 이어진다. 움직이는 사람, 상인들이 생긴다. 이들이 주막을 이용한다. 민간의 ‘탈법적인 주막’도 늘어난다.‘조선왕조실록’ 영조 4년(1728년) 4월 2일의 기사다.“경기감사(京畿監司) 이정제가 장계하여 말하기를, (중략) 지금의 이른바 주막[今之所謂酒幕]은 곧 옛날의 관정[卽古之關亭也]으로서, 적도가 밤에는 주막에서 자고[賊徒夜宿酒幕] 낮에는 장터에서 모이니, 착실하게 형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략)”영조 4년 3월 15일(음력),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다. 소론 준론계(강경파)의 반란이다. 청주 이인좌를 중심으로 반란이 시작되었고 영남과 호남 일부까지 난에 합세했다.반란 초기, 한양으로 건너오는 배도 철저하게 검문하고 긴요하지 않은 경우가 아니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글 중에 “적도들이 밤에는 주막에서 잠을 잔다”라는 표현이 있다. 18세기 초반, 이미 ‘잠자는 주막’이 있었다. 주막을 ‘예전의 관정’이라고 설명한 것은, 주막이 아직 보편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주막은, 탈법적인 민간의 공간이다‘잠자는 곳’의 역사는 짧지 않다. 미암 유희춘(1513~1577년)의 ‘미암집’은 선조 7년(1574년) 무렵에도 잠자는 곳, ‘탄막’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막이 아니다.“(전략) (유희춘이) 또 진술하기를, “근래에 도둑이 점점 불어나 경기도의 탄막(炭幕)은 나그네가 숙박하는 곳인데 도둑들이 엄습하여 그 집을 불태웠다고 하고, 서울 안에도 저녁이나 밤사이에 노략질하는 수가 많다고 합니다.(후략)”이글에서 ‘나그네들이 숙박하는 곳’은 탄막이다. 탄막은 숯이나 건초, 나무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16세기에 이미 탄막은 주막이 된다. 주모, 평상, 국밥은 없어도 잠자는 곳이었다.탄막은 오랫동안 나타난다. 200여 년 후다. 정조 13년(1789년) 2월 ‘일성록’의 기록.황해도 신계에 살던 한조이가 억울함을 호소한다. “남편 이귀복과 저는 길가에 살면서 탄막으로 업을 삼고 있었습니다. 재작년(1787) 5월, 나그네가 저희 탄막에 와서 아침을 사 먹고 있는데 (황해도) 곡산의 기찰 장교가 그를 잡아가고, 남편도 잡아가서 유배 보냈습니다.”관의 주장은 다르다. 남편 이귀복이 범인 두 명을 탄막에 재우면서, 숨겨주었다는 것이다. 18세기 후반에도 탄막이 있었다. 탄막에서는 아침밥을 팔았고, 잠도 잘 수 있었다. 우리가 상상하는 주막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조이는 주모와 닮았다.주막과 탄막은 혼란스럽게 나타난다. 주막과 탄막,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청장관 이덕무(1741~1793년)의 ‘청장관전서_62권_서해여언’의 내용이다.(전략) 점(店)은 주막(酒幕)인데, 술[酒]과 숯[炭]의 발음이 비슷하여 그대로 탄막(炭幕)이 되어버렸고 심지어 관문(官文)까지도 탄막으로 쓰고 있다.(후략)‘관문’은 관청 문서다. 청장관의 주장은, 주막이 술막으로 그리고 발음이 비슷한 숯막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숯’은 곧 ‘탄(炭)’이니 탄막이 되고 결국 주막이 탄막이다.‘점’이 주막은 아니다.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송도에 처음으로 ‘주점’이 생겼다. 공식적인 주점이다. 사설 주막과는 다르다. 중국에도 한나라 이후, 독점, 공식적인 술 파는 제도가 있었다. 술을 전매하는 ‘각고(榷酤)’다. 주막은 사설, 탈법적 존재다. 공식적으로 금주령이 잦았던 조선이다. 민간의 주막에서 술을 내놓고 팔기는 힘들었다.조선 시대 기록에는 주점, 주막, 탄막, 참, 역원, 역참 등이 어수선하게 나타난다. 조선 말기, 국가 관리의 역원은 서서히 무너진다. 부패와 재정의 어려움 때문이다. 주막, 주막의 변형이 역원을 대신한다. 가볍게 목을 축이던 탈법 공간이 잠, 밥, 술이 모두 가능한 주막으로 발전한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9-16

엎질러진 한 통의 발효액… 김천 수도암(修道庵)

포장된 외길을 오르다보면 은둔하듯 숲속에 터를 잡은 김천 수도암을 만난다. 가파르게 이어지는 길이 울창한 초록숲의 유일한 출구이다. 본사인 청암사가 수도산을 지키는 여신(女神)같다면 해발 1000m 쯤에 자리 잡은 수도암은 남신(男神)이라 할 만하다.신라 헌안왕 3년(859년) 절을 창건한 도선국사가 터를 발견하고 만대에 수도인이 나올 곳이라 기뻐했다는 천하 명당, 풍수적으로 여인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형국이다. 대적광전 앞에는 베틀의 기둥을 상징하는 동탑과 서탑이 늠름하고, 실 감는 도토마리석이 발견되어 전설 같은 이야기에 힘을 더한다.경내는 세 단으로 나뉘어져 높고 웅장하다. 관음전에 들러 백팔 배를 하고 가파른 계단을 천천히 오르면 오래된 대적광전을 만난다. 대적광전에 봉안된 보물 307호 석조비로자나불은 석굴암 본존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풍만하고 장대하다. 게다가 천년의 세월을 이겨낸 불상답지 않게 보존상태도 양호하다.운무도 고요한 골짜기를 유빙처럼 떠다니며 기도 중인가. 절은 참선에 든 듯 고요하고 까마귀 한 마리 죽은 나뭇가지에 앉아 간헐적으로 울어댄다. 수행하는 스님들은 굳게 닫힌 선방문 안에서, 나는 까마득한 옛날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걷는다. 꾹꾹 눌러 밟는 시간 속에 그리움이 피어난다. 오늘처럼 안개 냄새가 나는 천 년 전 어느 구월의 하루를.왕희지의 재림이라 일컫던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로 추정된다는 도선국사비 앞에 마주 선다. 선명하던 눈빛이 꺼져가던 순간 빛나던 말씀은 얼룩으로 남고, 옛사람이 남긴 지문은 바람이 지워 버렸다. 수많은 날들이 통증을 일으키며 손을 내민다. 무심히 지나쳤던 별 특징 없던 비(碑)가 새로운 의미가 되어 내게로 온다.내 안에 깊게 뿌리내린 이 알 수 없는 뜨거움, 결코 만질 수 없는 아득한 그리움 같은 이것을 누군가는 얼이라 했다. 큼지막하게 음각해 놓은 (개)창주도선국사(開5231主道詵國師)라는 글자만 뚜렷이 들어온다. 그 등판에 흐르는 유일한 김생의 친필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이제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가 없다. 대부분 마모되고 10여 자만 낡은 무늬로 남아 자유를 꿈꾼다. 이름을 남긴다는 건 빛나는 존엄 뒤에 깊고 여윈 빈 의자 하나 만드는 일인지 모른다.약사전 툇마루에 앉아 잠시 사색에 잠긴다. 절 살림을 맡아하는 실장님이 차 한 잔을 권한다. 종무소에 앉아 보이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내 눈은 높다란 계단 위에 앉은 비로전으로 향한다. 자유롭게 자라는 풀숲에는 이른 가을이 일렁이고 공양주 보살은 텃밭에서 막 따온 고수를 다듬는다. 목청을 낮추지 않고 울어대는 까마귀 소리마저 평화롭게 들리는 산사의 오후다.스스로 빛을 낸다는 수도암의 비로자나불상, 그 위신력(威神力)에 관한 신비성보다 세속의 삶을 뒤로 하고 산중에서 봉사하며 살아가는 두 분의 이야기가 더 감동적이다. 어떤 깨달음이 있어 평생을 열망하며 이루어놓은 화려한 이력들을 버릴 수 있었을까.향이 강한 고수 같은 분들이다. 피를 맑게 하고 심신을 안정시켜주어 예로부터 스님들이 애용했다는, 호불호가 뚜렷이 갈리는 채소다. 절집에서 맛보는 고수의 맛이 궁금해 한 잎 따서 베어 문다. 내 몸은 낯선 이국의 향기를 거부한다. 천천히 보이차로 입가심을 한다. 발효된 차가 은은하게 온몸을 돌아 나를 안정시킨다.미생물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 친환경 농법 EM(Effective Micro-organisms)으로 채소를 키운다는 소식은 얼마나 겸손한가. 이랑마다 촘촘한 망들을 씌워 유해한 벌레를 차단하고 주지 스님이 손수 풀을 깎는다. 수행과 울력을 기도처럼 하시는 스님은 뵙지 않아도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선지식 같은 분이리라.조낭희 수필가산사를 나서는데 공양주보살이 커다란 통 하나를 건넨다. 주지 스님이 손수 만들고 희석시켜 놓은 발효액이다. 친환경적인 삶에 욕심이 생겨 반가운 마음으로 넙죽 받고 말았다. 발효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유익함을 준다는 말이며, 앎이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커다란 EM 한 통을 트렁크에 싣는다. 묵직하다. 기도하고 실천하는 삶 그리고 무심으로 베푼 정성이 덤으로 실린 까닭이다. 하지만 기쁨은 짧았다. 밤늦게 집에 도착한 후 트렁크에 있는 발효액을 꺼낸다는 걸 잊고 말았다. 다음 날 시큼한 냄새가 진동하여 살펴보니 엎질러져 깨진 통 틈새로 발효액이 죄다 흘러나와 차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참담하다. 바빠서 종종걸음을 치던 내게 일거리 하나가 보태졌다.텃밭이며 정원에서 향기를 피워야 할 발효액이 쓰임을 다하지 못하고 오물로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몸의 수고로움 없이 좋은 결과를 원했던 나의 아둔함과 설익은 동경이 불러온 참사였다. 향이 강한 고수처럼 혹은 눅진눅진한 발효액처럼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고수는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림 없이 자기 고유의 향을 지키며, 발효가 된다는 것은 내가 없어지고 또 다른 나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수도암에는 고수 같은 보살과 발효액 닮은 스님이 계신다. 그 곳을 다녀온 후 쓸쓸한 삼귀례(三歸禮)의 고백 하나, 지금까지 내 가슴에서 그렁거린다.

2019-09-16

로마네스크 건축의 완성 佛 클뤼니 수도원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의 흔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프랑스 중동부에 위치한 부르고뉴 지방의 시골마을 클뤼니(Cluny)를 찾아가야만 한다. 오늘날 인구가 채 오 천명이 되지 않는 이 시골 마을이 과거 한때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 혹은 ‘제2의 로마’로 불렸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클뤼니의 모습에서 과거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이곳이 한때 세계 기독교의 중심지였다는 것과 제2의 로마로 불렸다는 것은 모두 사실이다.때는 카롤링거 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서유럽사회의 새로운 정치적 지형이 형성되던 시기였고, 사회는 전반적으로 불안정 하였다. 이 시기 교회와 성직자의 타락상 또한 극에 달해 있었다. 성직을 돈으로 사고 파는 행위는 너무나 공공연한 일이었고,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싸고 왕과 교황은 서로 첨예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910년 열두 명의 수도자들이 마콩강에서 멀지 않은 경건공 기욤(875∼918)의 땅 클뤼니에 들어왔다. 이들은 성인 베네딕트의 규율에 따라 살기위해 수도원을 짓기 위해 이곳으로 이주한 것이다. ‘Ora et Labora’(일하고 기도하라)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규범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부터 그 위대한 수도원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910년 처음 문을 연 클뤼니 수도원은 개혁의 여파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요에 맞춰 수도원 교회를 증축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개축공사가 이루어졌다. 건축사에서는 원래의 교회와 훗날 개축된 부분을 구별하기 위해 클뤼니I, II 그리고 III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클뤼니I은 910년 수도원이 처음 설립되었을 때의 모습을 가리킨다. 981년 마이올루스(Maiolus) 수도원장 하에 개축된 건물을 클루니II, 위고(Hugo)가 수도원장을 지내던 1089년에 완성된 모습을 클뤼니III이라고 부른다.클뤼니 II는 상하로 긴 라틴식 십자가형의 기본 구조를 지니는 3랑식 바실리카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제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좌우로 가로지르는 익랑을 마주한다. 익랑에는 외부로 출입이 가능한 문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제단방향으로 밀폐된 느낌의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이곳을 통하여 제단이 있는 내진으로 접근할 수 있다.클뤼니 III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교회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이다. 크기가 커짐에 따라 내부구조에도 큰 변화를 보이는데, 우선 3랑이었던 클뤼니 II에 두 개의 측랑이 더 붙으면서 5랑이 되었다. 천장의 구조에도 변화가 있다. 원래는 신랑 측랑 모두에 평평한 나무 패널이 천장을 덮고 있었는데, 이제 측랑에는 ‘교차형 궁륭’이 나타난다. 클뤼니 II는 하나의 익랑을 가졌지만 클뤼니III에서는 익랑 하나가 더 설치되어 십자가에 팔이 모두 넷으로 늘어났다. 구조적으로 가장 혁신적인 변화는 후진의 외벽에 모두 다섯 개의 소예배당이 마련되었다는 것과 내진과 후진사이를 지나다닐 수 있는 ‘주보랑’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클뤼니 수도원은 종교적 쇄신으로 유럽 곳곳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클뤼니 III이 보여주는 건축구조는 프랑스의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 그리고 더 나아가 일 드 프랑스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고딕건축의 근간을 마련해 주었다. 클뤼니 교회는 1790년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과거의 위용과 웅장하고 장엄했던 모습은 폐허로 변해버렸고 지금은 그 흔적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을 뿐이다./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19-09-16

진영논리에 갇힌 궤변론자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온 나라가 진영논리의 광풍(狂風)에 휩싸여 있다. 보수 또는 진보라는 ‘이념’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정치인은 물론이고 언론인과 교육자도 진영논리에 갇혀서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특히 정치인들의 행태가 ‘조폭들의 집단 패싸움’을 닮아가고 있으니 나라가 걱정이다.문 대통령은 야당과 다수 국민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국 교수 법무장관 임명을 강행하였다. 국론분열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검찰 개혁’의 적임자라는 명분으로 밀어붙였다. “검찰은 검찰 일을 하고, 장관은 장관 일을 하면 권력기관의 개혁이 될 것”이라는 대통령의 변명은 너무나 궁색하다. 검찰 수사지휘권을 갖고 있는 법무장관 아내는 기소되었고, 장관 자신도 검찰의 내사를 받고 있는데도 개혁의 적임자라는 말인가?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보여준 진보진영의 궤변은 ‘정의의 편이 아니라 진보의 편’이었다. 검찰이 후보자 아내를 전격 기소하자 청와대 인사들은 “미쳐 날뛰는 늑대의 칼춤”이라고 거칠게 비난하였다. 이는 대통령이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청와대든 정부든 집권여당이든 권력형 비리가 있다면 엄정하게 임하라”고 당부했던 말과 완전히 모순된다.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검찰의 정당한 압수수색에 대해서 “사전에 협의 없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행위”라고 공격하였고, 유시민은 서울대 학생들의 순수한 촛불시위에 대해서 “한국당의 손길이 어른거린다.”고 폄훼하였다. 또한 이재정 경기교육감은 후보자 딸이 의학전문학술지의 제1저자가 된 것이 문제 되자 “에세이를 제출한 것인데 무엇이 문제냐”고 옹호하였다. 교육감이라는 사람이 에세이(essay)와 학술지 논문(treatise)을 구별하지 못하고 ‘내 편 살리기’에만 급급하였으니 참으로 한심하다.이처럼 진영논리에 갇힌 사람들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즉,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외눈박이 오류’를 범한다. 조국 사태의 본질이 부정·비리·도덕성 문제임에도 진영싸움으로 만들어 진실을 왜곡하였다. 강남좌파들이 사적 네트워크로 얽혀서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되고 있는 것이다.오죽하면 진보진영 내부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겠는가? 진보언론 ‘한겨레’의 일선기자 31명은 성명을 내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민주당 기관지라는 오명을 들을 정도로 한겨레의 칼날은 한없이 무뎌졌다.…정권에 따라 후보자의 검증 기준과 수위가 변하는 것이 한겨레의 논조인가”라고 비판하면서 편집국장단의 사퇴를 요구했다. 또한 진보원로 최장집 교수도 “과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촛불시위에 의해 권력을 위임받았다고 자임하는 정부가 보여주는 정치적 책임이라고 대통령이 말하는 것인가”라고 강력히 비판했다.따라서 이제 대통령은 진영논리를 버리고 국민통합을 약속했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과 같은 극심한 국론분열 상황에서 대통령이 진영논리에 매몰되면 ‘내란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진보진영의 대통령이 아니라 온 국민의 대통령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2019-09-16

탈코세대

탈코는‘탈코르셋’의 준말이다. 코르셋은 흉부를 압박하는 보정 속옷을 뜻하는데, 탈(脫)코르셋은 남의 시선을 의식해 억지로‘예쁘게’ 혹은‘여성스럽게’ 꾸미는 것을 거부하는 여성주의 운동을 말한다. 2015년을 전후해 메갈리아·미투운동 등 20대 여성 위주의 2세대 여성운동이 활발해지면서‘탈코운동’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졌다.특히 탈코세대의 등장으로 화장품·헤어샵·성형외과 등‘꾸밈’과 관련된 업종에서 소비성향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으로 조사됐다. 16일 통계청 빅데이터센터가 제공한 ‘현대카드 매출기록’분석 결과에 따르면 화장품·헤어샵·성형외과 등 ‘꾸밈’과 관련된 업종에서 20대 여성의 매출이 꾸준히 줄고 있는 반면, 그 대신 자동차 판매가 크게 증가했다.20대 여성의 소비 변화에서 ‘탈코’의 경향이 나타난 것으로, 기존의 여성상을 탈피하고 독립적인 삶을 추구함에 따라 점차 남성과의 연인·결혼 관계에서도 벗어나는 모습이다. 의류 등 배달이 가능한 제품 뿐 아니라 배달이 불가능한 여성 미용실 등에서도 거의 대부분 품목에서 일관된 소비 감소세가 보이고 있고, 또 성형·피부과 병원 등 미용 관련 의료 서비스 소비도 일관되게 감소했다는 점은 탈코세대의 특징적인 경향이 뚜렷하다.심지어 대학교 교실에서 탈코운동에 합류하는 여학생들이 늘면서 누군지 못 알아볼만큼 차림새가 바뀐 학생들이 많아졌다. 이런 경향은 지난해 ‘여성성을 강조하는 소비품을 하루라도 사지 말자’는 취지의 ‘여성 소비자 총파업 운동’이 있은 후부터 더욱 짙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탈코운동은 여성주의 운동에 실용적인 면이 접목되는 변화로도 해석될 수 있을 듯 싶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9-16

조국 법무장관의 검찰개혁은 성공할까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으로 여야 정치권의 갈등이 초래되고 있다. 그 파장이 곧 수습될지 오래갈지는 현재로서는 예측키 어렵다. 여권이 내세운 그의 법무장관 기용배경은 그를 통한 검찰개혁에 두었다. 청문회 전부터 제기된 조 장관 딸의 논문 1저자 등재, 동양대 총장상 의혹, 사모 펀드 의혹 등은 야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찬반양론이 비등한 가운데 대통령은 검찰 개혁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장관 임용을 강행해 버렸다. 조국 법무장관의 검찰 개혁은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상당한 진통이 따를 것임은 분명하다.이 나라 검찰 개혁의 당위성은 누구나 인정한다. 과거 군부 독재시절 보안사나 국정원처럼 특정 기관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검찰의 권력이 견제 장치 없이 행사되는 것은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검찰이 정권의 입맛대로 권력을 행사한다면 이는 ‘정치 검찰’로 비난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공수처를 신설하고 검경의 합리적 역할 분담은 검찰개혁의 핵심 사안이다. 그 개혁의 정당성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 절차와 방법에는 아직 쟁점이 많다.조국 장관의 기용은 검찰 개혁을 검찰 자체 개혁에만 맡길 수 없다는 대통령의 결심이 작용한 결과이다. 그간 검찰 출신 장관의 셀프 검찰 개혁에는 언제나 한계가 따랐다. 과거 노무현 정권에서도 대통령의 의욕적인 개혁 의지만으로 검찰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조정하려는 검찰 개혁안은 결국 검찰의 기득권 포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지난번 법무장관과 행정안전부 장관이 합의한 검찰 개혁안이 검찰개혁의 토대가 되었다. 대통령이 야당 등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장관으로 기용한 것은 검찰 개혁의 절박성 때문이다.문재인 정부와 조국 법무장관의 검찰개혁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검찰 개혁을 주도하는 조국 법무장관은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먼저 검찰 내부의 반대와 조직적 저항을 극복하는 문제이다. 조직에 충성한다는 윤석열 총장이 검찰 조직의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검찰은 이미 청문회 전부터 조 장관 임용을 거부하는 반응을 보였고, 장관 부인까지 전격적으로 기소해 버렸다. 조국 장관은 취임 직후 검찰개혁 추진단 구성을 지시하고, 법무검찰개혁위원회를 통해 강력한 개혁 의지를 밝혔다. 조국 장관이 검찰내부를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과제가 검찰 개혁의 성패가 달려 있다.다음으로 검찰개혁은 국회의 입법화 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청문회과정에서부터 자유한국당은 조국의 장관 임명을 결사반대했으며 불신임 결의안까지 제출할 전망이다. 공수처 신설과 검경의 수사권 조정을 골자로 하는 검찰 개혁 법안은 이미 패스트 트랙에 올려져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검찰 개혁에 대한 입법화는 야당의 엄청난 반발을 초래할 것이다. 조 법무 장관은 이러한 검찰 내부와 정치권의 합의라는 내외의 압력을 동시에 극복해야 할 과제 앞에 서 있다. 장관 부인이 기소되고 본인의 도덕적 신뢰까지 손상된 장관이 검찰개혁의 동력을 유지할 것인가. 현재는 검찰의 수사 등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2019-09-15

내 마음 중심에 있는 것 (1)

“쾅!”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갑자기 사무실 바닥이 요동칩니다. 건물이 좌우로 미친 듯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회의 중이던 마이클 힝슨 씨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집니다.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연달아 들립니다.‘지진이 난 걸까?’ ‘미사일에 건물이 파괴된 건가?’ ‘전쟁일까?’ 온갖 생각이 스칩니다. 시각 장애인으로 앞을 볼 수 없는 마이클 힝슨 씨는 본능적으로 안내견 로젤과 연결된 끈을 꽉 붙잡습니다. 911 테러 현장입니다.맨해튼의 세계 무역센터 78층에 위치한 컴퓨터 판매회사 뉴욕 지사장이었던 마이클 힝슨은 안내견 로젤의 침착한 인도에 따라 78층에서 탈출을 시도합니다. 선천적 시각 장애인인 마이클씨는 비상사태를 대비, 늘 건물의 구조나 주변 지형지물을 잘 익혀 두었던 터라 로젤의 도움을 따라 신속하게 건물 계단을 이용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원래 앞이 안 보이는 저로서는 타인을 보고 행동하거나 누군가를 따라 우왕좌왕할 필요가 없었어요. 늘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홀로 다니기 때문에 더 자유롭게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겨우 건물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대피하려는 순간 100미터 떨어진 쌍둥이 건물 북쪽 타워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사방이 건물이 무너지면서 쏟아진 먼지와 잔해 폭풍으로 휩싸입니다. 안내견 로젤이 당황하지 않도록 힝슨은 호흡을 맞춰 뛰기 시작합니다. 잿더미를 피해 코너를 도는 순간 갑자기 로젤이 멈춥니다. 위에서 파편 더미가 쏟아져 내렸던 겁니다. 힝슨은 로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그냥 달리다가 파편 더미에 묻혀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겁니다.힝슨은 눈에 재 가루가 들어가 앞을 볼 수 없는 한 여인을 구출해 함께 로젤의 안내로 탈출에 성공합니다.“제 생명의 은인은 로젤입니다.” 그녀는 그 순간을 회상하며 눈물짓습니다.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9-15

당신이 잘 있으면, 저도 잘 있습니다

김현욱 시인‘한 달에 한 권 읽기’ 책모임에서 8월의 책으로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을 읽기로 했다. 한동일 교수는 한국인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타(Rota Romana) 변호사다. 로타 로마나 변호사가 되려면 유럽의 역사와 교회법, 라틴어와 기타 유럽어까지 능통하고 합격률이 6∼7%에 불과한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한단다. 학교에 있으면서도 영어 울렁증 때문에 원어민과 마주치면 쭈뼛거리기 일쑤인 나 같은 범인은 상상조차하기 어렵다. 영어, 불어, 독일어도 아니고 까다롭고 복잡하기로 악명 높은 라틴어라니.라틴어, 하면 고등학교 때 읽은 스탕달의 적과 흑이 떠오른다. 치정(癡情) 소설이었지만, 아름다운 심리 묘사가 탁월했다. 주인공 쥘리앵 소렐은 가난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마을 신부에게 라틴어를 배우며 야망을 키운다. 1830년대 당시 프랑스에서 성직자가 되려면 라틴어는 필수였다. 쥘리앵은 뛰어난 라틴어 실력으로 베리에르 시장인 레날 씨의 라틴어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레날 부인과 운명적 사랑에 빠지지만, 신분 상승을 꿈꾸던 쥘리앵은 정략결혼을 선택하며 파국을 맞는다.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으면서 ‘라틴어’는 출세의 문을 열기 위한 열쇠로 내게 각인되었다.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한동일 교수는 어떤 출세(?)를 위해 라틴어를 공부했을까 색안경을 끼고 읽다가 점점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현대판 쥘리앵의 라틴어 성공담이 아니었다. 지혜로운 삶의 태도에 관한 책이었다. 서강대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타 학교 학생과 교수들, 일반인들까지 최고의 명강의라고 치켜세운 것은 그가 어려운 라틴어를 쉽게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라 라틴어를 통해 삶의 자세와 태도에 관해 조언했기 때문이다.이를테면, “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Si vales bene, valeo),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라는 로마인들이 편지를 쓸 때 애용하던 첫 인사말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조언한다.“타인의 안부가 먼저 중요한, 그래서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는 그들의 인사가 문득 마음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내가 만족할 수 있다면, 내가 잘 살 수 있다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요즘 우리의 삶이 위태롭고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중략) 내 작은 힘이나마 필요한 곳엔 더불어, 함께 하겠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주위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삶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더 나빠지지 않을 겁니다. 아니, 지금보다 조금은 좋아지지 않을까요?”태도나 마음가짐에 따라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 라는 뜻의 라틴어 ‘베아티투도(beatitudo)’처럼 한동일 교수는 라틴어 수업 내내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는 싶은 것을 하라!”라며 우리의 어깨를 다독인다. 라틴어 수업을 읽으며 손난로처럼 따뜻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은사님을 떠올렸다.“당신이 잘 있으면, 저도 잘 있습니다.”

2019-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