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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국전쟁과 종군화가단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6월은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한 호국보훈의 달이다.1950년 6월 25일 남한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이 자행됨으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군인 26만 명과 민간인 100여 만 명의 희생자가 생겨난 민족의 대참사로 기록되고 있다. 3년 동안 치열하게 펼쳐진 전투와 고단했던 피난민들의 삶은 현대사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민족 간 아픔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의 화가들은 좌·우익으로 구분되어지는 이념적 분쟁에서 오는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다채로운 이념 활동과 종군활동을 통해 나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하지만 한국전쟁 60여 년이 지나도록 정부는 종군화가단의 규모와 활동, 그리고 명단에 대해 정확한 자료를 아직까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종군화가들의 주 활동 무대였던 대구의 행적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필자는 한국전쟁 중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종군화가들의 활동을 부분적으로 살펴본다.전쟁 중 그림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군인과 민간인 사기앙양을 담당했던 ‘종군화가단’ 창설에 관한 논의는 1950년 9·28 수복 후 대한미술협회 위원장 고희동과 부위원장 장발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때 정훈국 미술대 소속 화가들이 이미 전쟁에서 활발한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종군화가단은 1951년 1·4 후퇴 때 대구에서 본격적으로 결성되기 시작했다. 1951년 2월 국방부 정훈 국장이었던 이선근과 육군대위였던 최일에 의해 결성되어, 중진급 화가 10여 명이 참가했다.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는 1951년 5월경 대구 아담다방에서 육군 정훈감 박영준 중령의 주선으로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육군 ‘종군작가단’을 발족했으며, 단장 최상범과 부단장 김송을 비롯해 정비석, 방기환 등 수십 명이 참가했다. 그런데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 펴낸 자료에서는 동양화, 서양화, 조각, 선전미술 부분에 속했던 미술가들의 인명을 열거하였다. 이들 명단은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과 겹쳐지는 내용이다. ‘공군미술대’는 공군본부 작전부 소속으로 1950년 11월 서울에서 창설하여 초대 대장으로 장발을 선임했지만, 1·4후퇴 때 그가 미국으로 가버리자 백문기가 대장 역할을 맡았다고 전한다. 당시 공군본부는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연극분야도 같은 성격의 조직을 결성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하며 공군을 따라 대구로 내려온 미술가들은 백문기를 비롯해 부대장인 정창섭과 대원으로는 장운상, 권영우 등이 서울미대 재학생으로 구성되었다.한편 대구에서 1950년 5월 문총경북지부결성준비위원회가 발족되어 이윤수가 위원장이 되어 지부결성을 추진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이내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7월 문총구국대 경북총조직위원회가 구성되고 대구문화극장(한일극장)에서 문총구국대경북지대를 결성해 지대장에 이효상을 추대하고 이윤수, 김진태, 최계복, 백락종 등이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8월에는 중앙문총구국대와 문총구국대경북지대가 합류해 경북지대 주최로 8·15 기념행사를 만경관에서 개최하기도 했다.대구는 한국미술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곳이기도 하며, 한국전쟁 중 한시적이었지만 임시수도와 피난지로서 우리나라의 주요 작가들이 삶을 영위했던 터전이었다. 더불어 피난 온 미술인들과 지역 화가들은 백척간두에 놓인 조국을 지키기 위한 구국정신으로 종군과 선전활동을 활발히 펼치기도 했다. 호국의 달을 맞아 조국을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2019-06-06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 (1)

많은 관중들이 침을 꼴깍 삼키면서 한 사나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합니다. 배낭에서 프라이팬을 꺼내 계란을 톡 깨뜨려 오믈릿을 만들어 먹습니다.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옵니다. 저 남자는 길이 338m의 쇠 밧줄 위에 서 있거든요. 48m 아래로는 어마어마한 물 기둥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내는 나이아가라 폭포 위 48m 지점에 설치한 강철 밧줄 위에서 오믈릿을 먹는 중입니다.식사를 마친 이 남자. 입맛을 다시면서 눈을 가립니다. 밧줄 위를 걸어 반대편 목적지에 닿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하지만 이벤트는 이게 다가 아닙니다. 이 남자는 다시 원래 출발지점으로 물구나무서기로 밧줄 위를 걷습니다. 걷다가 도중에 밧줄 위에 누워서 잠깐 쉬기도 하고, 자전거 타고 건너기, 뒤로 걸어 건너기 등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으로 외줄 타기의 신공을 보여줍니다. 중심을 잡아주는 쇠 막대기는 폭포 아래로 오래 전에 던져버렸습니다. 구름 떼처럼 모인 관람객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벤트를 바라봅니다. 160년 전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찰스 블론딘(Charles Blondin, 1829~1897)은 별다른 볼거리가 없던 미국 사회에서 당대 최고의 엔터테이너였습니다. 곡예사은 요즘으로 치면 프로야구 선수나 영화 배우, 연예인을 능가하는 고소득을 올리던 최고의 스타였던 셈이지요.이벤트가 끝나갈 무렵 모여 있는 그는 관중들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내가 사람을 등에 업고 이 폭포를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 관중들은 한 목소리로 합창합니다. “네! 우리는 믿어요!” 블론딘은 다시 묻습니다. “내 등에 업혀 이 폭포를 건너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 지원해 주실 분 있으십니까?” 열광적으로 성원을 보내던 관중들의 눈길이 바닥으로 향합니다. 누구도 선뜻 나서는 자가 없습니다.찰스 블론딘은 관중석 맨 앞 줄에 있는 한 남자를 지목합니다. “당신은 날 믿습니까?” 남자는 일초도 망설임없이 대답하지요. 벌떡 일어나 찰스 블론딘 앞으로 나옵니다. “난 당신을 믿습니다. 기꺼이 당신 등에 업혀 폭포를 건너보겠습니다.”남자를 들쳐 업은 찰스 블론딘은 심각한 표정으로 38피트짜리 보조 쇠 막대기까지 챙겨 최대한 안전하게 로프를 건너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사람들은 감탄하지요. 블론딘의 배짱과 등에 업힌 남자의 용기에 대해 박수를 보냅니다. 몇 십m 전진해 나갈 때 등에 업힌 남자가 움찔합니다. (다음 회 계속)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6-06

새로운 지역 기업과 정치행정의 관계 설정

김진홍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정치행정과 경제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시장경제가 충분한 성장경로와 기회를 가지고 있더라도 기업이 속한 지역·국가의 정치행정과 배타적이면 기업 활동이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다. 이와 반대로 특정 기업이 정치행정과 밀월관계를 가지면 시장경제는 교란되고 비효율적인 자원배분과 더불어 다른 기업들은 아예 투자결정을 보류하거나 철회하기도 한다. 이는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인 기업들이 특정 팀이나 선수를 옹호하는 심판인 정치행정으로 인해 반칙을 하지도 않은 자신이 시장인 경기장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과 시장에 대한 불신만 커지기 때문이다.결국 이러한 분위기가 확산되면 시장에는 연구개발과 기술혁신을 통한 공정경쟁 대신 규칙을 무시하고 정치행정과의 밀월관계 형성에만 몰두하는 기업들만 늘어나게 된다. 기술혁신과 시장변화에 주목해야할 기업들이 특정 정치행정의 향방에만 안테나를 세우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해당 기업들은 자연 세계경쟁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사실 각종 선거 때마다 이른바 테마주라는 것이 나타나 급등락을 거듭하는 현상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주식시장에서 이러한 밀월관계가 아직도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정치행정이 굳이 기업에만 신경쓸 필요는 없다. 사회, 복지, 환경, 교육, 문화 등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경제문제는 투표권을 가진 주민들에게 가장 민감한 분야인데다, 기업 경영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보다 예측 가능한 정치행정일수록 시장의 불확실한 위험이 줄어들기 때문에 경제의 최일선에 있는 기업과 정치행정이 좀 더 의식될 뿐이다. 때문에 정치행정의 ‘깜짝쇼’는 경제 분야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과거 고도성장단계에서는 대통령제가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흔히 ‘즉각적인’, 그리고 ‘단호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정책결정이 일사불란하게 집행될 때 하나의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일부 부작용이 있더라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그러나 세계경제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지금, 그때와 같은 ‘단호한’ 정책결정은 선진국들처럼 수년에 걸친 다양한 공청회와 전문가의 견해를 수렴하여 이루어지는 ‘느긋한’ 정책들에 비해 실패에 따른 기회비용이 상대적으로 클 가능성도 있다. 최근 지역 기업의 오염물질 배출과 관련한 지역 정치행정의 ‘단호한 조치’가 있었다고 한다. 반드시 필요한 행정조치는 지역경제가 어려운 것과 무관하게 이루어져야만 불확실성이 해소된다는 점에서 전혀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오염물질이 배출되었다면 그것이 과연 관련 산업의 특성상 기술적, 물리적으로 완전한 차단이 불가능한 태생적 한계인지 여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가장 합리적인 접근방법은 어떠한 사안이 발생하였을 때 상황을 파악한 후, 오염물질 배출이 불가피하다면 선진국의 사례도 참고하면서 해당 기업과 같이 대책을 논의하고, 단계별로 실행 가능한 감축계획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행정과 기업 간의 약속을 정치행정이 위반하면 기업은 ‘행정소송’으로, 기업이 위반하면 정치행정은 그때서야 법률에 의거한 ‘단호한 조치’를 발휘하는 것이 순리다.지역행정과 지역기업의 관계가 배타적이거나 친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세계경제가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경쟁으로 흔들리는 이때 지역경제의 흥망성쇠는 정치행정과 기업과의 관계가 바람직한 관계로 설정되었는지 여부에 좌우되기 쉽다. 때문에 적어도 앞으로의 지역 기업과 정치행정과의 관계설정에서는 어느 쪽이건 일방통행이 아니라 적어도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상호 배척도 상호 유착도 아닌 상호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2019-06-04

교육과 나눔, 그리고 지구 Ⅳ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작년 겨울에 눈이 거의 안 왔어요. 그러다 보니 땅이 매우 메말라졌고, 물을 준다고 줬지만 한계가 있었어요. 겨울 가뭄을 이기지 못한 나무들은 결국 말라죽었어요. 기후변화가 너무 심해요. 정말 이대로 가다간 학생들이 애써 가꾸고 있는 사막화 방지 숲 조성 작업이 헛수고가 될 수 있어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 지구는 되돌릴 수 없는 환경재앙에 빠질 거예요.”2019년 5월 사전 답사 때 작년까지 심은 나무들의 발육상태를 살피는 필자에게 NGO 단원이 해 준 말이다. 한 눈에 봐도 2017년과 2018년에 심은 나무들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1년이라는 시간 차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2017년에 심은 나무들의 발육상태가 확실히 좋았다. 하지만 2018년에 심은 나무들 중에는 아직 땅의 허락을 받지 못한 나무들이 꽤 있었다. 그래도 학생들의 땀과 정성을 기억하는 상당수의 나무들은 끝까지 뿌리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필자는 2018년 1월 답사 때를 기억한다, 눈이 나무를 덮을 정도로 왔던 그 때를. 그 때는 나무가 동해(凍害)를 입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필자의 생각이 짧았다. 많은 눈 때문인지 2017년에 심은 나무들 중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무는 불과 4그루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2019년 5월 답사 때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메마른 대지, 그리고 쉼 없이 휘몰아치는 모래 폭풍! 결국 2018년에 심은 나무들 중에서 15%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필자는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다른 조림 지역에는 나무 생존율이 50%도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뿌리가 안착한 나무들은 본격적으로 하늘을 향해 길을 내기 시작함은 물론 녹색의 푸른 잎들을 가지마다 풍성히 달았다. 나무들이 만들어 낸 건 외형적인 성장만이 아니었다. 학생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나무들은 혹한(酷寒)과 혹서(酷暑), 그리고 한해(旱害)를 모두 이겨내고 학생들을 기다렸다. 기다린 건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은 서로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5월 27일, 드디어 학생들과 나무들의 1년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생명 사랑 나눔의 숲’조성 장소로 이동할 때만 하더라도 모래 바람이 엄청 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도착하기 얼마 전부터 모래 바람도 숨을 죽이고 학생들과 나무들의 만남을 지켜보았다. 학생들의 연이은 탄성 소리! 그 소리는 열악한 조건을 너무도 잘 이기고 자신들을 기다려 준 나무들에 대한 감사함의 인사였다. 나무들 또한 매년 오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자신들을 찾아 온 학생들에게 푸른 웃음으로 답하였다. 나무를 향해 달려가는 학생들과 그 학생들을 푸른 품으로 맞이하는 나무들의 모습은 그대로가 한 편의 영화였다. 영화 제목은 ‘교육과 나눔과 지구 Ⅳ!’기후 변화와 지구 온난화 등으로 땅은 점점 딱딱해지고 있어 나무를 심기 위한 구덩이 파기가 매년 어려워지고 있다. 가끔씩 바로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는 모래바람은 학생들의 사기를 꺾어 놓기도 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지구를 푸르게 가꾸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만발의 준비를 하고 올해도 예정된 700그루의 나루를 다 심었다.(총 식재 수 1천800그루) 그리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다음의 표지판을 사막화 방지 조림 사업장에 설치하였다.“이 숲은 대한민국 산자연중학교 학생들과 울란바토르 쎈뽈 초등학교, 존모드 쎈뽈 초등학교 학생들이 몽골 사막화 방지를 위해 2017년부터 조성하고 있는 숲입니다. 학생들의 푸른 땀이 사막에 생명의 물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샘이 큰 생명의 강줄기를 만들어 세계를 푸른 생명이 넘치는 대자연의 공간으로 만들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이어 갈 푸른 지구에서 지구인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2019-06-04

가장 뜨거운 것을 담는 가장 차가운 그릇

인위적으로 낮출 수 있는 극저온이 몇 도인지 아시나요? 뜨겁게 가열하는 것은 한계가 없습니다만 낮추는 것은 영하 273도까지가 한계입니다. 절대온도 0도인 영하 273도에서 모든 분자 활동은 정지합니다. 움직임이 없어지는 절대 고요의 세계가 되는 거지요.1911년 네덜란드의 카멜링(Kamerlingh-Onnes, 1853~1926)은 극저온으로 내려가면 전기 저항이 제로가 되는 현상을 찾아냅니다. 초전도체의 발견이지요. 둥근 통을 만들고 그 안에 초전도체 구리선을 돌돌 말아 넣습니다. 통 안에 사람을 넣으면 저항이 제로인 자기장에 사람 몸의 물 분자 저항을 포착해 단층으로 촬영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MRI가 초전도 현상의 응용입니다.핵융합은 인류의 에너지 문제를 단 번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바닷물을 한 바가지 퍼서 핵융합 장치에 부어넣고 돌리면 도시 하나가 몇 달 쓸 에너지가 나올 수도 있는 겁니다. 이때 초전도체가 필요하지요. 핵융합 현상 때 나타나는 화염인 플라즈마를 가두어 에너지로 변환시킬 거대한 도넛 모양의 원통을 초전도체로 감싸게 되지요. 1억도 넘는 온도를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물질로 감싸는 방식입니다.유발 하라리가 떠올랐습니다. 혜성같이 나타나 전 인류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며 40대 중반에 세계를 뒤흔든 이 학자는 얼마나 바쁠까요? 유발 하라리는 새벽 한 시간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홀로 명상하며 사색하는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밤에도 한 시간 모든 활동을 차단하고 조용히 명상에 잠기는 시간을 갖습니다. 하루 두 시간, 분자 활동이 정지하는 극저온의 세계와 같은 고요함이 플라즈마처럼 뜨거운 그의 지성과 학문적 성취, 영향력을 지켜주는 비밀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1년에 최소 45일 최대 60일까지 세상과 단절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심지어는 책조차 읽지 않습니다. 오롯이 육체로 세상을 느끼고 호흡하는 단절의 시간입니다.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모든 성취는 그 고요한 시간에 잉태한 것이라 말합니다. 가장 뜨거운 삶을 살아 내기 위해서는 가장 차가운 단절의 상태, 즉 세상과 완전히 분리해 자신을 돌아보는 절대 고요의 시간이 필요한 것임을 생각하게 합니다.점점 날씨가 뜨거워집니다. 2019년이 정점을 향해 무르익어가지요. 이 여름을 불태울 우리의 열정 또한 플라즈마처럼 활활 타오릅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새벽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6-04

쇠제비갈매기의 눈물

황영우기획취재부쇠제비갈매기는 지난 2009년까지만 하더라도 낙동강 하구 삼각주 모래톱에서 대규모로 산란과 서식을 번갈아 하던 그리 희귀하지는 않은 새였다.많을 때는 6천여 마리에 보금자리를 틀고 번식했던 것으로 전해진다.10년이 흐른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서서히 개체 수가 감소하더니, 현재는 겨우 6마리 정도가 배회만 하고 산란조차 하지 않은 채 일시적으로 머물다가 떠나버리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돼 있다.4대강 사업으로 낙동강 물흐름이 바뀌었고, 터전이던 삼각주 일대가 물에 잠기며 산란환경이 사라졌기 때문이다.부산시는 5억원을 들여 삼각주에 쇠제비모형 190개를 꽂고 음향장치까지 설치하는 정성을 기울였지만, 돌아선 새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없었다.새로운 번식지를 찾아나선 쇠제비갈매기들이 이례적으로 내륙인 안동호를 선택했고 나머지 개체들도 제각기 흩어져 최근에는 동해안 해안가에서도 새 둥지를 만들고 있는 것으로 관측됐다.포항시 북구 흥해읍 칠포리의 해안 모래사장도 쇠제비갈매기가 가까스로 찾은 새로운 보금자리다.4~5월께 산란을 하는 쇠제비갈매기는 부성애와 모성애가 특히 강한 것으로 알려진 조류다.주 서식지가 햇볕이 잘 드는 모래톱인데 낮에는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막으려고 부모새들이 번갈아 가며 그늘을 만들고, 시원한 바닷물을 가슴에 머금고 알에 직접 뿌려준다.온도가 떨어지는 밤에는 부모 새들이 교대로 둥지에 알을 직접 품어 체온으로 온기를 보전한다.이 같은 부모새들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가족을 지키려는 애절함이 느껴진다. 인간과 천적들에게 가족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다.이제는 우리가 화답할 때다.최근 학계에서는 부산시와 안동시 등 지자체와 협력해 쇠제비갈매기의 멸종위기종 지정을 위한 청원서 제출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종의 위기 현장을 지켜보며 보호의 필요성에 대한 논리를 준비하고 있는 학계가 발을 벗고 나선 것이다.많은 단체와 지자체가 동참해 학계의 근거있는 움직임을 도와야 한다.여기 저기 보금자리를 옮겨 다니며 ‘외면받는 쇠제비갈매기’를 지켜주기 위해 정부차원의 대책이 마련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hyw@kbmaeil.com

2019-06-04

지진특별법 제정을 통한 도시재건

이강덕 포항시장포항시는 올해로 시(市)로 승격한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1949년 포항시로 승격해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으로 많은 변화와 성장을 거듭해 왔던 만큼 포항시와 시민들에게는 경사스러운 해임에 틀림없다.하지만, 지난 2017년 11월 15일에 발생한 규모 5.4 지진의 여파는 시 승격 70년이 된 올해까지도 영향을 미치면서 시민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이에 포항시는 중앙정부와 국회 등 정치권을 찾아 ‘지진 특별법’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서고 있다. 포항시는 정부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 발표 이후 줄곧 “11·15지진은 자연재난이 아니라 국책사업인 지열발전사업 추진과정에 일어난 중대한 인재인 만큼 특별법의 조속한 재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이에 따라 시민들의 의견이 최대한 반영된 특별법의 제정을 통해 피해 지역민에 대한 배상과 지역재건을 위한 범정부적인 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달라며 백방으로 뛰고 있다.포항시는 신속한 보상과 지역재건을 위한 종합적인 지원방안을 강구하기 위해서는 정부차원의 법적근거가 될 특별법의 제정은 꼭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따라서 앞으로 제정되어야 할 특별법에는 무엇보다도 피해를 입은 주민에 대한 신속한 피해구제와 이재민의 주거안정, 파손된 건물 복구와 피해지역의 완전한 도시재건을 위해 범정부적으로 주도하는 특별도시재생 사업을 시행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아직까지 공포감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지열발전소의 완전한 폐쇄와 안전성 확보 계획을 비롯해 포항형 일자리 등 지역경제 활성화 대책, 추락한 도시브랜드를 높이고 안전한 이미지를 위한 지진방재인프라 조성 등도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특히, 포항시가 제안한 특별법(안) 가운데 피해주민들이 개별소송을 하지 않더라도 국무총리 소속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서 배상 및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부분도 주목해야 한다.포항시가 피해를 입은 주민에 대한 신속한 피해구제와 이재민의 주거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도 이유가 있다. 11·15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주택은 전파 671, 반파 285, 소파 5만4천139 등 전체 5만5천95 가구에 이른다.자연재해 기준으로 국가재난정보관리시스템(NDMS) 상 846억 원이 지원됐다. 이는 전파주택 900만원, 반파주택 450만원, 소파주택 100만원씩 지원된 것으로 현실과는 맞지 않게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아직까지도 2천여 명의 이재민들이 시에서 마련한 임시주택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이다.지진 이후 한국은행은 포항지진 분석을 통해 직·간접적 피해가 3천323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소상공인 4천285건(12%) 및 중소기업 263건(24%) 피해, 부동산 가치 하락, 인구유출과 관광객 감소, 시민 41.8%가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등 유·무형의 피해를 포함한다면 14조원이 훌쩍 넘는 것으로 분석했다.일본 고베는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자연재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지진 이전보다 인구가 늘고, 더 안전한 도시로 거듭났다는 점을 깊이 살펴봐야 한다.포항시는 특히 11·15지진은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임 있는 관계자들의 안일함에 의해 발생한 인재(人災)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직까지 많은 시민들이 트라우마를 호소하며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피해를 입은 시민들의 경제적, 신체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현실적인 배·보상과 피해지역을 재건하기 위한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이 절실하다.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최 일선의 단체장으로서 지열발전 실증사업이 국책사업이라는 이유로 사업추진을 깊이 고려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시민들께 송구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지금껏 아픔을 겪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우리 피해지역 주민들과 시민들께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간절한 마음과 피해를 드린 부분에 대한 반성, 그리고 시민안전을 더욱 책임지겠다는 다짐을 드리며, 앞으로 이 같은 일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시장으로서 각오를 다시 한번 다진다.최근 포항시는 무엇보다 시민들이 받은 경제적, 신체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피해주민들의 주거안정, 피해지역과 도시의 재건·부흥을 위해서는 이러한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 특별법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인재(人災)로 발생한 촉발지진에 대한 체계적인 배·보상과 피해지역의 재건을 위해 국회와 정부가 책임지고 나서야 한다. 그동안 시의회 의장과 함께 국회의장을 비롯한 여야 5당 대표를 직접 만났고, 청와대를 찾아가 강력하게 요청하기도 했다.앞으로도 공청회 등을 통해서 시민의견을 수렴해 피해에 대한 배·보상은 물론 피해주민의 주거안정과 지역재건, 도시 발전을 위한 내용 등을 특별법에 담아 내야 한다. 정치적 이익을 떠나 시민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거듭 다짐한다.포항시는 또한 특별법의 조속한 제정 촉구와 함께 향후 매년 11월 15일을 ‘포항 안전의 날’로 정하는 조례를 제정해 안전하고 건강한 도시를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일본 고베 대지진 복구계획을 교훈삼아서 국내·외 전문가가 참여하는 ‘도시재건자문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인구감소와 도시브랜드 가치 하락 등을 회복하기 위한 대책은 지방자치단체의 힘으로만은 불가능한 만큼 범정부적인 특단의 대책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겠다.

2019-06-04

반려동물 경제, 펫코노미(1)

반려동물 시장이 커지면서 새로운 직업들이 출현하고 있다. 반려견을 산책시켜주는 도그워커, 반려동물 장의사, 반려동물 식품코디네이터 등 주인을 대신해서 반려견과 반려묘를 관리해 주는 전문직업인이 등장한 것이다. 한국고용정보원에서 선정한 4차산업혁명 유망직업에 동물매개 치유사가 보인다.미래유망직업을 21개 선정한 자료에도 동물매개치료사와 도그워커가 선정되어 있는데,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로봇, 드론분야 등의 직업과 함께 반려동물 관련 직업이 선정된 이유는 기술과 기계분야가 줄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감정 영역을 다루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1인가구의 증가, 딩크족(맞벌이를 하며 아이를 갖지 않는다)의 출현, 노인가구의 증가로 인한 사회구조의 변화 속에서 미래학자들은 앞으로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반려동물의 수는 증가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으며, 사람이 태어나는 것보다 2배 빠른 속도로 반려동물이 증가하고 있다. 미국의 반려동물 사육 가구는 전체가구의 68%에 달하고 시장규모는 67조원에 이른다.반려동물 산업은 선진국형 산업인데, 미국의 반려동물 시장규모는 GDP기준 0.3% 이상으로 형성되어 있고, 대부분의 선진국의 GDP 중에 차지하는 반려동물 관련 산업 비중이 한국의 4∼5배에 이른다. 이것은 한국의 반려동물 시장이 성장잠재력을 4배 정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2018년 기준 우리나라도 4가구 중 1가구가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는데 600만 가구, 반려동물 900만 마리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펫과 패밀리의 합성어인 펫펨족은 반려동물을 가족구성원으로 여긴다는 뜻이고, 반려동물을 자기 자신처럼 아끼는 펫미족(Pet+Me)도 등장했다. 펫관련 시장을 일컫는 펫코노미(Pet+Ecomomy)라는 용어는 이미 친숙하다. 우리나라 펫코노미는 최근 급성장 중인데, 반려동물은 최근 외로움을 해소하고 친밀함을 얻을 수 있는 대안관계를 위해 선택되고 있기 때문이다.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부담된다는 것이 요즘 세대의 생각인데 이 때문에 랜선동물로 불리는 SNS상에서의 가상돌봄현상이 증가하고 있다.고양이의 일상과 돌봄을 방송하는 유튜브 채널은 160만명 이상이 구독하고 있으며, 유기견에서 SNS스타가 된 개가 인천공항 명예홍보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다.랜선동물 열풍은 강아지, 고양이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동물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가상돌봄현상이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치며 심화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반려동물 시장에 IT기술이 접목되면서 반려로봇 시장도 성장을 눈여겨 볼만하다. 최근 반려로봇은 눈귀 등에 탑재된 센서를 이용해 사람과 교감하는데 등을 쓰다듬으면 꼬리를 흔들고, 공을 던지면 그 방향으로 걸어간다. 음성과 공간을 식별하기 때문에 자신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의 목소리를 우선 인지해서 우선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이 진짜 반려견과 비슷하다.개가 줄 수 있는 감성을 전달해 주진 못하겠지만 개를 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해소하고 가성비를 따지는 사람들에게 선택받을 가능성이 크다.최근 세계적으로 반려동물 용품과 서비스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가운데 반려동물 전용우유, 반려동물 전용생수를 비롯해서 사람에게 좋다는 것을 넣어 만든 반려동물 전용 식음료 브랜드가 계속 출현하고 있다.반려동물의 곡물 알레르기를 최소화하기 위한 그레인프리 제품, 유기농 사료는 이미 일반화가 되어 있고 유전자검사를 통해 반려견에 맞는 처방식 사료를 제공하는 단계에까지 와있다.사람에게 쓰이는 제품을 응용한 강아지 카시트, 원목침대 등 대기업에 의한 프리미엄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다.이는 반려동물의 인격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서비스 시장도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이동훈펫시터 연결서비스, 동물전문 체외진단 등은 매출이 급상승 중이고, 반려동물 카드는 물론 반려인의 사망시 반려동물을 돌봐줄 새 양육자에게 양육자금을 지급하는 유산상속 신탁상품까지 출시되고 있다.반려동물 시장은 더욱 다변화되고 규모 또한 크게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반려동물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더 활발해지고 있다.2014년부터 의무화된 동물등록제가 있음에도 해마다 늘어나는 유기동물에 대한 대책이 시급히 필요하다. 유기견을 관리하고 안락사 시키는데 쓰는 공적자금만 112억원이 넘었다. 더 늦기전에 새로운 기술들을 접목한 효율적이고 경쟁력 있는 방안을 함께 고민하고 실행해 나가야 한다./서라벌대 반려동물연구소 소장(마사과 교수)

2019-06-04

21세기 양생법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공부 싫어하는 대학생을 위해 장자 ‘내편(內篇)’의 ‘양생주 (養生主)’ 첫머리를 인용한다. “우리 인생은 끝이 있지만,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따름은 위태롭다. 그럼에도 앎을 추구함은 더욱 위태로울 따름이다.” 유한한 인생에서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는 한계와 무의미를 지적한 대목이다. 태상노군(太上老君)과 달리 장주(莊周)가 백성의 무지를 주장하지 않은 사상가라는 점에서 이 구절은 낯설게 다가온다.끝없는 살육과 전쟁 그리고 백성의 피폐한 삶의 근원을 장주는 지식인의 탐욕에서 본다. 각종 방편과 책략을 가지고 제왕들에게 유세해 권력을 쟁취하려는 부박(浮薄)한 자들의 아수라판 전국시대. 전국 7웅이 투기장의 투사들처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했던 암울한 투쟁의 시대. 그 시대에는 부국강병을 설파하는 지식인 무리 제자백가가 포진하고 있다.그들이 말하는 부국강병의 요체는 제도(帝道)나 왕도(王道)가 아니라 패도(覇道)였다. 요순시대의 태곳적 평화와 안빈낙도(安貧樂道)나 격양가(擊壤歌)의 방도가 아니라, 타방(他邦)의 궤멸을 전제로 아방(我邦)의 번영을 주장하는 투쟁이 패도다. 나라 곳간을 풍족하게 하고, 강성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면 즉시 출병하여 이웃 나라를 병탄하는 전쟁에 돌입하는 부국강병. 그 와중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당연히 평민계층, 즉 백성이었다.백성이 고종명(考終命) 하려면 전쟁이 없어져야 한다. 전쟁이 없으려면 글줄깨나 읽은 지식인 집단의 선동과 책략이 사라져야 한다. 여기서 발원하는 것이 앎의 무한지평과 인생의 유한성 인식이다. 지식의 세계는 난바다처럼 그 폭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하되 몇 줌 안 되는 앎으로 혹세무민하는 식자(識者)들에게 날카로운 비난의 화살을 날린 장자.장주가 이런 결론을 내린 데에는 사기열전의 ‘상앙’ 같은 인물의 인생역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나라 효공(孝公)이 천하인재를 등용한다는 소문을 듣고 변법(變法)을 통한 부국강병책을 간하여 권력을 장악한 상앙. 전국 7웅 가운데 가장 취약했던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으로 일약 강성대국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효공의 죽음과 함께 갑작스레 상앙을 찾아오는 ‘법가(法家)’의 몰인정과 비인정(非人情)의 결과는 거열형으로 종결된다.숱한 인민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도 능지처참으로 막을 내린 가혹한 드라마. 모든 것의 시발점은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인의 욕망과 약소국 군주의 정치적 야망이었다.그들의 의기투합이 거대제국 진나라의 초석이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 상앙과 대진제국 사이참에 저잣거리에서 은둔했던 장주는 행복과 평안의 요체로 지식의 폐절, 지혜의 유폐를 주장한 것이다. 장주 자신도 ‘예미도중(曳尾塗中)’ 고사처럼 평생 출사하지 않는다.도보(徒步)로 세상사가 알려졌던 고대의 시간대와 광속으로 지구촌 일상이 전해지는 21세기는 질적으로 판이하다. 차고 넘치는 지식과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갈피를 잡기도 버겁다. 욕망과 목표가 갈등과 파국을 낳고, 그것은 언어폭력과 막말의 무한반복을 잉태한다. 거기서 정치혐오와 정치인 기피증이 만들어진다. 반갑고 푸근한 소식은 끝내 찾기 어렵고, 처절한 절규와 투쟁의 저열한 목소리만 높아간다.이러매 조용히 눈 감고 생각해 볼밖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선지자들이 온 곳을 모르고, 그들이 간 곳 또한 알지 못한다. 언젠가 우리도 그리로 떠나야 한다. 이런 자명한 이치를 눈감아버리고 오늘도 헛헛한 투쟁으로 허우적댄다.잠시 눈감아보자. 나의 지금과 여기, 과거와 미래의 시공간을 돌이키자. 그리고 깊게 숨 쉬어보자. 21세기 양생법이다!

2019-06-04

금수저 세상

사회 양극화 현상이 커지면서 우리사회 상류층을 빗댄 거지부자의 이야기가 한 때 유행한 적이 있다. 다리 밑에서 잠을 자던 거지 부자는 다리 위로 윙윙 거리며 달려가는 소방차 소리에 잠을 깼다. 아들이 먼저 말했다. “아버지, 우리는 집이 없고 가진 것도 없으니 불이 나도 위험하지 않지요” 아버지가 답하길 “그게 다 아버지 덕이다”.우스개 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돈 없고 빽 없는 아버지들의 푸념으로 오랫동안 유행했다.우리나라에 금수저론이 사회이론으로 등장한 것은 불과 4∼5년 전 일이다.수저 계급론이란 이름으로 많은 공감을 얻은 이론이다. 큰 공감을 얻었다는 것은 처지가 비슷한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는 설명이다. 외국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 영어 표현의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말이 있다. 유럽의 귀족층은 은식기를 사용하고 태어나자마자 유모가 젖을 은수저로 먹이는 풍습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가난하고 배고픈 서민들의 이야기야 지구상 어디 간들 없겠는가.모차르트가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나 금수저를 물고 나온 재력가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천부적 기회를 제공받았다는 면에서 비슷하다.그러나 천부적이라고 해도 그들이 살면서 일궈놓은 평생의 과업에 따라서는 평가가 달라진다. 다른 사람을 위한 공헌도가 중요한 잣대의 하나라 볼 수 있다.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조사한 ‘사회활동 인식조사’ 결과가 눈길이 간다. 여론조사에서 “한국은 출세를 하려면 부유한 집안 출신이어야 한다”는 물음에 85%가 긍정적 답변을 했다고 한다. “한국은 높은 지위에 오르려면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물음에도 응답자의 66%가 긍정적 답변을 했다. 우리 사회의 평등성과 공정성이 흔들리고 있음을 반증한 조사다. 대다수 국민은 금수저 이론에 대해 여전히 공감한다는 결과여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이고 있는 것과 가장 낮은 출산율을 보유하고 있는 것 등이 우연한 결과가 아닌 것 같아 씁쓸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6-04

1905년 대한제국에서 일어난 멕시코 이민사기 사건의 전말

과거로부터 우리의 삶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이 언제나 합리적인 관점에서 설명될 수는 없다. 단지 우연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는, 불합리와 비합리로 점철된 사건들이 버젓이 발생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인 욕망이나 비규칙적인 충동이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재이므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물론 역사로 기록된 사실들은 역사가가 갖는 일련의 역사적 관점에 의해 취사선택되기 마련이므로, 역사 속 기록들이 일견 합리적이고, 그럴 법한 것들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한참이나 지난 시간 이후에 과거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익숙한 질서나 문법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정리하기 마련이기 때문일 것이다.역사에 등장하는 광인조차 전형적인 광인의 문법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러한 사실이 비교적 명확하지 않은가. 광인은 전형화될 수 없는 대상임에도 우리는 우리가 규정한 전형적인 광인의 모델 속에서 영조와 사도세자라든가 연산군 등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작 우리의 삶 속에서 겪는 사건들이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다만, 우리가 역사책을 읽는 이유는 기록된 문장 속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 자체와 그것이 도래하게 된 합리적인 발생적 근거에 대해 배우고자 함일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지금 현재를 살아갈 방향성을 얻는다거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일련의 관계에 대해서 확인한다는 감각은 바로 그것에서 온다.한편, 우리는 늘 역사의 행간 사이에서 아직 기록되지 않은 사실을 욕망하기도 한다. 기록된 역사의 행간에 존재하는 여백을 상상하면서 기록된 역사라는 문자에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 바로 역사의 독자의 태도가 아닐까. 역사 속에 숨겨졌던 이야기를 찾아내고 상상하는 행위의 즐거움은 확실히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에서 비롯되는 감정적이면서 또한 지적인 유희다.지금까지의 우리 역사 속 많은 장면들이 소설이나 영화로 다뤄졌지만, 그 중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 중에서 백 년에 걸쳐 계속해서 회자되는 사건이 있다. 바로 1905년에 일어났던 묵서가(墨西哥·멕시코의 한자음역어) 이민 사건이 그것이다. 아마 이렇게 말하면 잘 모르실 분이라고 하더라도 ‘애니깽’ 사건이라고 하면, 소설이나 영화로 접한 경험이 있는 독자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1905년 4월 초에 한인 1천33명이 영국 상선인 일포드 호에 실려 제물포항을 떠나 한 달에 걸친 항해 끝에 멕시코 유카탄반도 메리다 지역에 도착했다. 그들은 모두 처음에는 멕시코의 거대한 땅에서 부농이 될 것을 꿈꾸고 배에 탑승하였지만, 처음에 광고되었던 것과 달리 그들은 모두 농장에 노예로 팔려나갔다. 노예로 팔려간 그들은 40도가 넘는 멕시코의 더위 속에서 에네켄(Hen equen)이라는 선인장 농장에서 가시에 찔려가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고, 고된 노동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견디다 못해 탈출을 시도하거나 병을 얻어 죽은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당시 그들이 팔려갔던 농장에서 기르던 선인장 에네켄이 바로 ‘애니깽’으로 나중에는 그렇게 팔려간 한인들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던 것이다.사실 이 사건은 지금 생각하더라도 터무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속아서 배를 타고, 게다가 노예로 팔려나갔다는 일은 아무리 백 년 이전의 사건이라고 해도 쉽게 믿기는 어렵다. 어쩌면, 이 사건이 그토록 여러 번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졌던 것의 배경에는 바로 이 사건이 갖고 있는 이해되지 않는 비합리성이 그 원천이 된 것은 아닐까.이 사건에 대해서는 작가 김선영이 이미 1992년에 ‘애니깽’이라는 6권짜리 소설을 썼고, 1997년에는 김호선 감독이 장미희, 임성민 배우와 함께 동명의 영화를 멕시코 현지 로케이션으로 제작했다. 사실 97년의 영화는 배우 임성민이 촬영 중간에 간질환으로 사망하여, 미완성으로 남아버렸다. 가장 최근에 작가 김영하는 ‘검은 꽃’(2004)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사실, 기존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이미 1911년에 소설로 쓰였다. 가장 인기 있던 신소설 작가였던 이해조는 이 이야기를 신소설 ‘월하가인’에서 이 사건을 다뤘던 것이다.소설에 등장하는 ‘심진사’라는 주인공은 ‘윤조’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묵서가로 떠나는 배를 탄다. 그는 농장에 노예로 팔려나가 갖은 고생을 하게 되고, 그 와중에 친구 ‘윤조’는 죽고 만다. 이후 ‘심진사’는 묵서가에서 고된 노동을 견디다 중국인 ‘왕대춘’을 만나 탈출하게 되고, 미국 화성돈(워싱턴)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고 무사히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다.천리 바깥 멕시코에 노예로 팔려 간 인물이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는 어이없는 전개나, 이 이야기에 ‘월하가인’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제목을 붙였던 것은 빈약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작가의 시공간적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당시 한국 정부에 멕시코에 노예로 팔려간 이들의 참상이 알려진 것도 청년회원인 정순만이라는 사람이 중국인 하혜(河惠)라는 사람의 편지를 전하면서 알려진 것이라, 이해조가 여기에서 창작적 모티프를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그는 이 작품에서 멕시코에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는 심진사의 고된 노동 환경이나 의사소통이 거의 되지 않는 어려움 등을 소설을 통해 생생하게 옮겼다.이후 이 사건을 배경으로 쓰인 소설들은 대부분 일제 통감부가 수립되고 정부가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시기에 부당한 노동이민 사기를 당한 이들의 고통을 부각시키고,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는 관점을 보여준다. 당시의 역사를 들춰보면, 그들이 스스로 노예가 되는 노동이민을 선택했던 배경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면도 있다.1904년 12월 17일부터 무려 한 달여 동안 황성신문에는 “농부모집광고”라는 제목으로 2면에 3단으로 광고가 계속 되었다. 그 광고 속에는 멕시코는 미국과 함께 문명부강국이고 물과 토양이 좋고 기후가 따뜻하여 질병이 없어, 일본과 중국인들이 이미 멕시코에 건너가서 이득을 보고 있다는 찬사가 가득하다. 이번에, 한국과 멕시코가 협의하여 최빈국대우를 받게 되어 이번에 대륙식민합자회사라는 곳에서 농부를 모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럴 듯한 이 광고 속에는 받게 될 월급이나 토지 같은 장밋빛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가장 유력한 신문에 실렸던 광고이니 누구라고 믿지 않을 재간은 없었을 것이다.한편, 가장 최근에 쓰인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은 이 사건에 다소 다른 시각으로 접근한다. 당시 천 명이 넘는 한인들을 태우고 멕시코로 향한 일포드호는 이전까지 존재했던 계층, 성별, 권위 등 모든 허위의식들이 뒤섞이는 멜팅팟(melting pot, 재료들이 끓으면서 섞이는 냄비로 문화혼합을 가리키는 용어)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유민이면서,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나아간 일종의 문화적 ‘메스티소’였다.그래서 김영하의 ‘검은 꽃’을 찬찬히 읽으면, 일포드호 안에서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나 남성과 여성의 구분 같은 차이에서 비롯되는 권위의 위계가 어떻게 한 달이라는 배 생활 속에서 깨지게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묘사가 굉장하다. 어쩌면 그러한 감각은 단일민족에 대한 환상으로 둘러싸여 있던 한국이 처음으로 대면한 문화적 혼합의 경험이다.이렇게 보면, 이해조는 그 나름대로, 그리고 김영하는 김영하 다운 방식으로 어쩌면 또 다른 유례가 없을 역사적 사건에 다가가 소설로 썼던 셈이다. 앞의 것은 한 인간이 겪는 모험담, 그리고 성장하여 돌아오는 귀환을 담아낸 드라마가 되었고, 뒤의 것은 우리가 처음 겪었던 문화적 혼합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되었다. 물론 백 년 정도 되는 그 둘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처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즐기는 것 역시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얻는 재미가 아닐까.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06-03

혼자 조용히 읽기(SSR)

김현욱 시인“당신이 아무리 큰 부자일지라도 그래서 금은보화가 넘쳐날지라도 결코 나보다 부자가 될 수는 없어요. 내겐 책 읽어 주는 어머니가 있으니까요.” 스트릭랜드 길리언의 ‘책 읽어 주는 어머니’에 나오는 구절이다. 책 읽어 주는 어머니를 가졌다는 건 아이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저절로 책을 좋아하게 되는 아이는 거의 없다. 누군가는 아이를 매혹적인 이야기의 세계로 끌어들여야 한다. 누군가는 아이에게 그 길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오빌 프레스콧의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아버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책 읽어주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가졌다는 건 이 세상을 다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다.흑인 학자이며 하버드에서 강의하고 있는 로날드 페르구손은 ‘학교 내에서 볼 수 있는 인종 간의 성취도의 차이’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페르구손은 연구 결과를 이렇게 정리했다. “진짜 문제는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진 부모 역할의 차이에 있다.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실력의 차이를 만드는 근본 원인인 것은 분명하다.” 페르구손에 따르면, 흑인 가정에서는 전통적으로 학업을 교사의 몫으로 보는 반면, 백인 가정에서는 부모가 아이의 학업에 좀 더 깊이 개입한다.연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학교에 진학하기 훨씬 전에 이미 가정에서 읽기를 포함한 학업 성적의 씨앗이 뿌려진다는 말이다. 부모가 텔레비전보다 책을 가까이하고, 도서관에 아이를 데려가며, 책을 자주 읽어 줄수록 아이의 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 모든 조사 자료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을 확인시켜 주는 결과일 뿐이었다.1979년 ‘하루 15분, 책 읽어 주기의 힘’을 출간한 짐 트렐리즈에게는 어린 시절 책을 읽어 준 아버지가 있었다. 그때의 느낌과 추억을 아련하게 간직하고 있던 그는 마찬가지로 아버지처럼 자녀에게 매일 밤 책을 읽어 줬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많은 아이들이 책 읽기를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이유가 부모와 교사에게 있음을 깨달은 트렐리즈는 자비로 이 책을 냈다. 그 후 트렐리즈의 책은 스테디셀러에 올랐고, 전 세계의 교실 풍경까지 바꿔 놓았다. 특히, 일본에서는 지금도 2만여 개가 넘는 학교가 매일 아침을 책 읽기로 시작하고 있다.많은 부모들이 자녀교육에 대해 노심초사하지만 어릴 때부터 침대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사실, 읽기는 모든 학습의 기초요 주춧돌이다. 책 읽기와 학업 성취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수많은 통계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읽기가 교육의 중심이고, 읽기가 최우선이다. 읽지 못하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책 읽기를 싫어하는 아이에게도 책 읽어주기는 맞춤 처방이다.책 읽어주기를 통해 책 읽기에 흥미를 느낀 아이들에게는 혼자 조용히 책 읽을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한다. SSR(sustained silent reading)이 바로 그것이다. 책 읽어주기에서 자연스럽게 혼자 조용히 읽기(SSR)로 가면 아이의 독서지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다.독서교육 전문가 맥크라켄의 연구에 따르면 혼자 조용히 읽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교실이나 가정에서는 15분 정도가 적당하다. 물론, 아이의 상태나 상황에 따라 교사나 부모가 적절하게 조정한다. 둘째, 아이가 스스로 읽을 책을 선택한다. SSR 시간 전에 읽을거리를 고르고, SSR 시간에는 다른 책으로 바꾸지 못한다. 교사나 부모가 아이의 성향이나 흥미를 파악해 재미있는 책을 권할 수도 있다. 셋째, 아이가 SSR를 할 때 교사나 부모도 반드시! 책을 읽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넷째, 일체의 독후감, 독후 활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SSR을 절차나 결과물, 성적에 연관시키지 않는다. 책 읽어주기의 최종 도착지가 바로 SSR이다.

2019-06-03

네 단어 짧은 문장으로 60명을 살린 남자 (2)

공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따스한 감정이 심장에서 혈관을 타고 그의 뇌까지 전달됩니다. 래리는 입술을 열어 그에게 묻습니다.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을까요? (CAN I HELP YOU?)”네 단어로 이뤄진 질문을 던집니다. 시선을 교환하던 사내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방아쇠에서 뺍니다. 오랜 침묵이 흐르지요. 서서히 두려움에서 평온함으로 실내의 공기가 바뀝니다. 사내가 말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겠소?”래리는 조용히 괴한을 껴안고 등을 토닥입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사내를 위해 래리는 속삭이듯 기도합니다. 맨 앞 좌석에 앉힌 다음 새해 맞이 모임을 계속 진행하지요. 밤 11시 50분. 10분만 지나면 새해입니다.이라크 파병 군인 출신인 남자는 전역 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던 중입니다. 부인이 불치 병에 걸려 경제적으로도 극심한 곤경에 빠져 있었던 것이지요. 세상에 대한 분노, 치료되지 않은 정신적 상처들이 궁핍과 맞물려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겁니다. 그 싸늘하고 강퍅한 마음이 한 마디 질문에 녹아내렸습니다. “CAN I HELP YOU?”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배가 고픈데 밥을 먹을 때마다 요리사에게 음식을 만들어 달라 요청하고 줄 서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면 얼마나 힘들고 팍팍한 세상일까요? 집 밥이라는 게 있어서 다행이에요. 요리사가 해 주는 식사보다 균형도 덜하고 맛도 부족할 수 있지만 우리는 집 밥을 먹고 든든한 일상을 살아가는 거지요.”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습니다. 팍팍하고 힘겨운 세상에서 영혼이 힘들고 어려울 때, 굳이 전문가를 찾아가 상담 받고 문제를 해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의 영혼에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집 밥을 따스하게 끓여주는 것처럼 너와 내가 서로에게 상처를 감싸 주고 다독여 줄 수 있는 법입니다. 서툴고 미흡하지만 든든한 집 밥처럼 마음을 따스하게 만져줄 힘이 우리에겐 있습니다.주위를 살펴보면 언제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돌출 행동이 크고 강할 수록 내면에는 감추어진 아픔과 상처, 고통과 슬픔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래리 라이트가 긴박한 상황에서 던졌던 네 단어 질문이 그래서 위대한 것 아닐까요? 요즘 무언가 거리감이 느껴지거나, 돌출 행동을 하거나 거슬리는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다가가 이렇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을까요?”/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6-03

촌스럽게 무슨 역사냐?

김학주한동대 교수역사학자들은 ‘일본’ 이야기만 나와도 예민해진다. 그런데 한국을 대표하는 전자와 자동차 기술을 일본에 머리 숙여 배웠다. 그 고달팠던 과정을 역사학자들은 모를 것이다. 오늘날 삼성전자는 일본업체들을 제쳤다. 현대차의 품질은 도요타에 뒤지지 않게 됐다. 이것이 제대로 된 복수 아닐까?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 민족은 남들에게 못할 짓 안 했을까?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말이다. 사람은 모두가 그렇게 부족한 존재다. 그 사실을 인정했으면 좋겠다. 역사는 학자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후손들이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것이다. 어쩌면 그럴 필요도 없이 ‘민족’이라는 개념이 모호해질지도 모르겠다.최근 페이스북은 달러와 1:1로 교환할 수 디지털 현금을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플랫폼 안에서 온라인 쇼핑을 제도권 화폐로도 할 수 있는데 굳이 자체적인 가상화폐를 쓰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환위험이나 거래수수료 없이 글로벌 고객들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다. 즉 사업을 세계적 규모로 키우는데 용이하다는 것이다.둘째, 생태계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즉 플랫폼이 먹이사슬의 가장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체적인 통화 덕분에 많은 소비자들을 모아 빅데이터를 얻을수록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실시간으로 가장 잘 알 수 있으므로 모든 주문이 여기서 생성된다. 지금의 제조업체나 서비스 제공업체들은 그 밑으로 들어가서 주문을 받게 된다. 즉 플랫폼의 시녀가 된다는 것이다.셋째, 화폐의 가치는 사용자가 많아질수록 상승한다. 1970년대 금 본위제가 깨진 이후 화폐의 가치를 금으로 완벽히 보증하지 않는다. 달러도 그냥 ‘종이’고 정부가 보증해 편하게 쓸 수 있는 ‘무이자 국채’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인터넷 플랫폼이 커져 디지털현금이 더 많이, 그리고 편하게 사용될수록 그 가상화폐의 가치는 상승할 것이고, 그럴수록 생태계의 매력도가 높아져 더 크게 발전하는 선순환이 가능하다.넷째, 결제를 위해 돈이 저장돼 있으면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금융 및 투자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중국 알리페이는 ‘위어바오’라는 결제대기 자금을 활용한 단기 금융상퓸을 출시했는데, 이 뿐 아니라 플랫폼 생태계 안에 매력적인 스타트업(start-up) 등 괜찮은 투자대상이 많아질수록 본격적인 투자를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 수 있다.트럼프가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은 시진핑이 아니라 아마존의 대표인 제프 베조스(Jeff Bezos)다. 그 생각은 시진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제 먹이사슬의 가장 위에 군림할 인터넷 플랫폼은 속성상 독과점이 불가피하다. 특히 동질화된 서비스로 수렴할 것이므로 거대업체간 MA의 가능성도 높다. 이렇게 플랫폼이 대형화되면 정부 말을 듣지 않는다. 대항할만한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제도권이 인터넷 플랫폼 업체들을 개인정보 보호 등의 이유로 심하게 규제하며 성장을 방해하고 있지만 민심은 제도권을 떠나고 있다.제도권의 탑 다운(top down) 방식의 규제는 이미 실망스러운 결과와 함께 한계를 드러냈다. 화폐는 경제의 혈액과 같은 것인데 민간경제를 대표하는 플랫폼이 자체적인 화폐를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는 곳에 보내어 경제 구석구석으로 산소를 배달할 수 있다면 플랫폼은 더욱 대형화될 것이다.궁극적으로 세계경제는 몇 개의 유력한 플랫폼 생태계로 구분될 것이다. 그리고 환율이란 그 생태계들의 자체적인 화폐 가치의 경쟁비율을 의미할 것 같다. 국가란 함께 오래 살아 온 사람들의 관습과 문화, 질서를 정의하는 조직 정도로만 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세상은 이렇게 진화하고 있는데 포퓰리즘에 빠져있는 세계 정치인들이나 민족에 집착하는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순진한 푸념처럼 들린다. 우리는 지구 이웃 아닌가?

2019-06-03

대학 교양교육과 ‘코딩’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21세기 문맹자는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학습(learn)하지 않고 폐기(un-learn)하지 않고 재학습(re-learn)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말이다. 그는 한국교육에 대해 경고했다. “한국 학생들은 하루 15시간 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 않을 지식을 배우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I(IoT), C(Cloud), B(Big Data), M(Mobile)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지식을 주입하고 정답을 암기하게 하는 현실이다. 이처럼 입시공부에 매달리다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게 할 것인가?‘교육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대학교육의 변화가 모색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해 산학공동연구, 캡스톤, 디자인싱킹이 강조되고 창의융합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소프트웨어(SW) 중심대학’을 선정하면서 대학의 질적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각 대학은 ‘SW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코딩 관련 교과목을 확대하고 있다.코딩교육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대학 교양교육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코딩을 반드시 배워야 하고 컴퓨팅적 사고를 키워야 한다는 가정하에 교양필수 교과가 개편되고 있다. 대학의 헤게모니는 전공에 있다. 그러다보니 정부와 시장의 요구에 먼저 반응하게 되는 영역은 교양교육 분야다. 특정 교과가 교양 필수로 강조되기도 하고 또 가장 먼저 폐기되기도 한다. 강사법이 시행되어 대학 재정 부담이 커지는 상황에서 코딩교육 필수화는 다른 교양교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글쓰기, 토론 등 기존의 교양필수 교과가 교육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밀리거나 ‘창의융합설계’와 같은 과목으로 바뀌고 있다.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에서 매년 개최하고 있는 토론대회 올해 주제는 ‘4차 산업혁명 시대, 코딩교육을 생각한다’였다. 학생들은 찬반토론을 하며 ‘코딩교육, 대학 교양필수 교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제를 두고 생각을 나누었다.찬성측은 코딩은 이제 세계 공통의 언어로 전공과 관계없이 알아야 하는 필수요소이고 융합형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코딩교육이 필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반대측은 학생들의 관심과 필요가 다르기에 코딩을 의무화하는 것은 교육적 효과가 없으며 선택교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토론과정을 통해 시대의 변화와 대학 교양교육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자리였다.존 카우치는 ‘공부의 미래’에서 “21세기 학습 ABC의 마지막 퍼즐 조각은 코딩”이라고 강조한다. 디지털 시대, 교육의 회로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영어를 필수로 배웠듯이 디지털 리터러시의 기초인 코딩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고 있다. 학생들에게 코딩을 배울 기회를 제공하고 접근권을 강화하는 교육 방향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그러나 이로 인해 대학 교양교육의 근본이 흔들려서는 안될 것이다. 디지털 네이티브인 학생들에게도 사고와 표현교육은 여전히 중요하다.4차 산업혁명은 창의적 사고를 지닌 융합형 인재를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 문제를 생각해 보게 하는 의사소통교육이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입시에 찌들어 교육다운 교육을 받지 못했던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배우는 교양필수 교과로 글쓰기와 토론 수업은 교육적 의미가 크다. 학습의 주체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탐구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통하는 자세를 익히기 때문이다. ‘본립도생(本立道生)’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 대학 교육의 근본은 교양교육이고 교양교육이 본질에 충실할 때 대학 사회가 바로 설 수 있다. ICBM 시대 코딩공부는 필요하다. 동시에 대학 교양핵심인 사고와 표현교육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

2019-06-03

아프리카 돼지열병

아프리카 돼지열병은 주로 감염된 돼지의 분비물인 눈물, 침, 분변 등에 의해 직접 전파되는 돼지전염병이다.돼지과(Suidae)에 속하는 동물에만 감염되며 치사율이 거의 100%에 이르기 때문에, 한번 발생할 경우 양돈 산업에 엄청난 피해를 끼친다.잠복 기간은 약 4∼19일로, 이 병에 걸린 돼지는 고열(40.5~42℃), 식욕부진, 기립불능, 구토, 피부 출혈 증상을 보이다가 보통 10일 이내에 폐사한다.이 질병이 발생하면 세계동물보건기구(OIE)에 발생 사실을 즉시 보고해야 하며, 돼지와 관련된 국제교역도 즉시 중단된다.바이러스는 병원성에 따라 보통 고병원성, 중병원성 및 저병원성으로 분류된다. 고병원성은 보통 감염 1~4일 후 돼지가 죽는 심급성과 감염 3~8일 후 돼지가 죽는 급성형 질병을, 중병원성 균주는 감염 11~15일 후 돼지가 죽는 급성이나 감염 20일 후 돼지가 죽는 아급성형 질병을 일으킨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한 적이 없으며, 현재 가축전염병예방법상 제1종 법정전염병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무엇보다 아직 이 질병에 대한 치료제나 백신이 개발돼 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국 여행 자제 및 양돈장 출입 금지, 돼지 잔반 급여 금지, 야생동물 접근 차단 등 국내에 유입되지 않도록 하는 대책이 해당 병의 확산을 막는 데 필수적이다.주로 1920년대부터 아프리카에서 발생해 왔으며, 유럽의 경우 1960년대에 처음 발생했다가 포르투갈은 1993년, 스페인은 1995년에 박멸됐다. 그 이후 2007년에 조지아에서 다시 발병하면서 현재 동유럽과 러시아 등지에 풍토병으로 남아 있다.최근에는 2018년 8월 중국 랴오닝성 선양에서 아시아 최초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 중국 전 지역으로 확대됐다. 지난달 30일 북한이 압록강 인접 지역인 자강도 우시군에 있는 한 협동농장에서 돼지열병이 발생했다고 세계동물보건기구(OIE)에 보고했다.정부는 경기·강원도 접경지역 10개 시·군을 특별관리지역으로 정하고, 긴급 방역에 나섰지만 양돈농가의 걱정은 깊어만 간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6-03

슬픔에 잠긴 다뉴브

왈츠의 왕 요한 스트라우스 2세가 만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은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를 관통하는 다뉴브 강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곡이다.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가 실의에 빠진 비엔나 시민을 위로키 위해 요한 스트라우트에게 요청해 만든 곡이다. 다뉴브 강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희망찬 가사와 흥겨운 왈츠 리듬으로 조합된 이 곡은 오래전부터 유명세를 탄 세계적 명곡이다,우리 국민에게도 일찍부터 친숙한 음악이다. 오스트리아인인 요한 스트라우스 2세가 만든 곡이지만 다뉴브하면 대개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먼저 떠올린다. 부다페스트는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으로 유럽 3대 야경의 하나다. 아름다운 다뉴브 강이 흐르고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다. 우리나라에서 동유럽 여행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가장 핫한 도시로 떠오른 곳이기도 하다. 동유럽지역 대표적 여행지인 부다페스트는 밤마다 황금빛으로 물드는 도시의 모습이 파리나 프라하와는 다른 화려함과 강렬함이 있다고 한다. 당연히 다뉴브 강의 야경은 필수 코스다. 다뉴브 강의 총 길이는 2천850km다. 유럽의 10개 나라를 통과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찬란한 순간을 만나는 곳이 부다페스트라 할 수 있다. 부다페스트는 강을 기점으로 부다 지역과 페스트 지역으로 나누어 별개의 도시로 발전해 왔다. 부다 지역은 왕과 귀족이 거주하는 상류층의 구역이었고, 페스트는 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1849년 다뉴브 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현수교인 세체니 다리가 건설되면서 두 지역을 양분했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1873년 하나의 도시로 통합, 지금에 이른다.낭만과 역사적 격랑이 꿈틀였던 도시 부다페스트에서 한국인 관광객 26명이 실종되거나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졌다. 당국의 계속된 노력에도 아직 실종자에 대한 수색작업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낭만과 아름다운 추억으로 넘쳐야 할 다뉴브 강이 지금 슬픔으로 잠겼다. 해외여행 자유화에 매달려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달려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안전한 해외여행에 경각심을 일깨운 가슴 아픈 사건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6-02

수상한 ‘국가채무비율’ 전쟁

안재휘 논설위원‘외상이라면 사돈집 소도 잡아먹는다’는 옛말이 있다. 뒷일은 어떻게 되든지 생각하지 않고 우선 당장 좋으면 그만인 것처럼 무턱대고 행동함을 비유하는 속담이다. 문재인 정부가 재정을 크게 확대하기로 작정한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 속담이 떠올랐다. 문 대통령은 본인이 불과 4년 전에 했던 말을 뒤집고 국가채무비율 한도를 높여서라도 도무지 안 돌아가는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벼랑 끝 전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문 대통령은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 2016년도 예산안을 놓고 “재정건전성을 지키는 마지노선인 40%가 깨졌다. 재정건전성 회복 없는 예산안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맹비난한 바가 있다. 그랬던 분이 최근 홍남기 경제부총리에게 “국가채무비율이 미국은 100%, 일본은 200%가 넘는데 우리 정부는 40% 안팎에서 관리하겠다는 근거가 뭐냐”고 물었단다. 그러자마자 집권당과 정부 쪽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확대재정의 필요성을 부르대기 시작했다. 지난달 30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국회의원 워크숍에서는 확장적 재정정책 토론이 무성하게 쏟아진 것으로 전해진다. 한 정부 관계자도 “대부분의 나라가 100% 안팎이고, 일본은 무려 250%에 달한다”며 “확장속도가 오히려 더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이 같은 움직임에 대한 정치권의 공방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야당에서는 후세에 부담을 지우는 ‘나랏빚’ 증가를 조심해야 한다고 강력히 비판한다. 확장 재정 기조는 내년 총선을 의식한 ‘선심성 돈 풀기’이며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를 덮으려는 방만한 국정이라는 게 야당의 시각이다.4조 원대의 적자 국채 발행 시도와 ‘박근혜 정부 마지막 해의 국가채무비율을 39.4% 이상으로 높이라’는 부총리의 지시를 폭로했던 신재민 전 기재부 사무관 생각이 난다. 범법자 취급을 서슴지 않던 기재부는 얼마 전 고발을 취하했고, 검찰도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이렇게 되면 신재민의 폭로처럼 문재인 정부는 애초부터 국가부채 확대 카드는 진작부터 만지작거렸다는 얘기가 되는 거 아닌가 싶다.대통령의 판단 기준이 바뀐 것을 ‘상황변경’의 논리에 대입한다면 일견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생산성만 보장된다면 부채비율을 높이는 일을 무조건 터부시할 일은 아닌 것도 맞다. 더욱이 저출산 고령화 시대의 가속화, 생산인구의 급격한 감소가 진행되는 마당에 소요예산이 일정 부분 늘어나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정부·여당의 재정확대 정책이 품고 있는 위험요소는 심각하다.재정확대 찬성론자들의 논리는 OECD의 평균 국가채무비율이 110%가 넘기 때문에 국가채무비율 40%를 넘겨도 국제 수준으로 보면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국가가 처한 상황과 경제의 질을 무시하고 단순하게 채무비율만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 경제의 경우 워낙 자생 기반이 취약하고 대외의존도가 높은 까닭에 국가부채 수준이 낮아도 부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무엇보다도 문재인 정부가 늘리려고 하는 재정의 ‘지출 소모성’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단순하게 민생을 지원하는 시혜성 지출이 많아 예산 낭비 성향이 높다는 점이 가장 큰 걱정거리다. 복지예산이란 한 번 지출되기 시작하면 다시는 절감할 수 없다는 특성이 있다. 예산을 필요한 곳에만 쓰는 재정개혁을 서두르고 재정지출의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먼저다.정부가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인한 경제실패를 덮기 위해 국가재정을 허물어 쓰기로 아예 작정한 것인가. 총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온갖 행태가 수상하다. ‘재정확대’가 ‘경제 회생’으로 이어지고, 다시 ‘세수증가’를 불러와 ‘재정안정’을 구축하는 선순환 체제가 구축되면 좀 좋을까. ‘외상’ 준다고 마구 때려 잡아먹은 사돈네 소값 ‘외상’은 대체 누가 갚나.

2019-06-02

네 단어 짧은 문장으로 60명을 살린 남자 (1)

2015년 12월 31일. 새해를 맞기 위해 사람들 마음이 들떠 있는 밤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페이옛빌시. 래리 라이트는 가족처럼 지내는 60명의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진행 중입니다. 한 해를 잘 마무리했다는 뿌듯함과 감사와 소망으로 설레는 눈빛입니다. 곧 새해 카운트 다운에 들어갈 차례가 되지요.그때였습니다. 뒤쪽 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립니다. 찬 바람이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실내에 스며듭니다. 현관 문이 바람에 쿵, 쿵 소리를 내며 흔들립니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보지요. 모두 가슴이 쿵, 내려 앉습니다. 누군가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지릅니다. 의자 밑으로 숨는 사람, 벽에 바짝 붙어 출입문 쪽으로 슬금슬금 뒷걸음 치는 사람. 하얗게 질린 채 상황을 얼어붙은 사람.한 남자가 차가운 바람을 등에 업고 걸음을 단상 쪽으로 뚜벅뚜벅 옮깁니다. 눈동자는 풀려 있고,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오른 손에는 반 자동 소총이 왼손에는 수백 발의 탄약을 장전한 탄창이 있습니다. 괴한은 총구를 위로 향한 채 흔들리는 눈빛으로 단상으로 접근합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단상에서 지켜보던 래리 라이트는 침을 꿀꺽 삼킵니다. 체구가 작은 이 남자를 기회를 타서 덮칠 수는 없을까, 한 사람도 피해를 입으면 안되는데…. 수만 가지 생각이 스칩니다. 일촉즉발. 건드리면 폭발할 것만 같은 팽팽한 긴장으로 실내는 가득합니다. 몇몇 사람은 흐느껴 울기 시작하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도망칠 생각도 못한 채 꽁꽁 얼어붙어 있습니다. 사내가 단상으로 가까이 올수록 래리의 심장은 타 들어가는 듯합니다. 잘못 대처하면 이 공간은 몇 초 이내로 끔찍한 살육의 현장으로 바뀔 것입니다. 다행히 사내는 왜소한 체구입니다. 육군 중사 출신 래리는 사내를 덮칠 순간을 노립니다. 래리는 심호흡을 하며 침착하고 대범하게 행동하고자 애를 씁니다. 5m, 4m….조명에 비친 총구가 번쩍입니다. 잠금 장치는 풀려 있고 사내가 손가락만 하나 까딱하면 순식간에 불바다를 만들 수 있습니다. 3m.. 2m.. 괴한이 단상 앞에 섭니다. 래리 라이트는 그 순간 괴한과 눈이 마주칩니다. 사내의 눈빛을 보자 래리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낍니다. 무언가 뜨거운 기운이 내면을 휘어잡습니다. 공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따스한 감정이 심장에서 혈관을 타고 그의 뇌까지 전달됩니다. 래리는 입술을 열어 그에게 묻습니다. (내일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6-02

항일 독립 운동의 성지, 연해주를 다시 보자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우리가 흔히 연해주(沿海州)라고 부르는 곳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Primorskii)지역이다.연해주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에 접하고 중국과는 방천에서부터 맞붙어 있다. 우리 선조들은 1863년부터 이 지역으로 13가구가 처음으로 이주하였다.하산에서 가까운 지신허(地新墟)가 함경도인들이 처음으로 정착한 마을이다. 일제의 침탈 전후 애국지사들은 나라 잃은 설움을 이곳에서 달래면서 항일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곳이다.남북관계가 비교적 좋았던 시절 필자는 이곳을 자주 찾은 적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동북 쪽 아르촘에는 진기한 체육대회가 열렸다. 러시아, 중국, 한반도 남북으로 흩어져 살았던 우리 한민족이 친선 체육대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게 된 것이다.이날 행사에는 까레이스키로 불리는 고려인, 중국의 조선족, 북한의 일용 노동자, 남한의 현지 회사원 등이 참여하였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의 남북한 영사도 참여하였지만 손은 잡지 않고 눈인사만 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 두 영사가 손을 마주 잡도록 하여 참석자들이 모두 함께 사진을 찍게 하였다. 그 화합의 상징인 사진이 필자가 가장 아끼는 귀중한 사진 한 장이 되었다.오는 6월 말 독립운동계승사업회는 임정 100주년 기념으로 연해주 일대를 다시 탐방하려고 한다. 우리는 대부분 임시 정부하면 상해임정만 떠올리고 연해주의 항일 활동을 잊고 지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1919년 4월 11일의 상해 통합 임정은 연해주의 항일 운동이 토대가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상해 임정은 문창범 등이 중심이 되어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한 대한국민의회가 참여한 결과이다. 우리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크라스키노 일대의 애국 선혈들의 족적을 다시 찾는 것은 독립운동사의 대의를 살리기 위함이다. 과거 구소련과 국교마저 수립되지 못해 연해주 애국지사들의 족적을 찾기는 무척 힘든 과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1990년 9월 러시아와 정식 국교가 체결됨으로써 이곳 항일 투쟁의 역사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무척 다행한 일이다.과거에 비해 우리 선조들의 연해주 항일 독립 투쟁의 역사는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유인석을 중심으로 의병 조직인 13도의 군이 편성된 곳이 이곳 연해주이다.홍범도, 이상설은 이곳에서 군사조직을 통해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 바친 분들이다. 일제하에서도 이곳 조선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중심으로 학교를 세우고 성명회와 권업회 등을 통해 조국의 독립운동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안중근의사가 동지 11명과 단지 동맹을 결성한 곳도 이곳의 크라스키노이다. 우수리스크에서는 전로 한민족 중앙회가 조직되고 그것이 연해주 임정인 대한국민의회로 발전하였다. 이곳에는 일제의 침탈에 맞서 순절한 사람도 수없이 많다. 조국의 해방이 되지 않으면 이곳 사이펀 강에 유해를 뿌려 달라는 유언과 함께 사라진 이상설 선생, 강가의 그의 유허비는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일찍이 함경도 고향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재력을 모아 독립운동을 지원한 최재형 선생도 이곳에서 순절하였다.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도 이곳 우수리스크가 그의 활동 무대였지만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상해 임정의 군무총장을 지낸 이동휘 선생도 시베리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수리스크의 고려문화센터는 이들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우리 학계가 연해주 항일 운동에 관한 역사를 보완하고 재평가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19-06-02

고르디우스의 매듭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고대 소아시아의 프리지아라는 도시국가에는 왕이 없었는데, 이륜마차를 타고 오는 첫 번째 사람이 왕이 될 거라는 신탁이 있었다. 어느 날 농부의 아들이었던 고르디우스가 이륜마차를 타고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가 바로 신탁이 말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왕으로 추대했다. 왕이 된 고르디우스는 자신이 타고 온 마차를 신전에 바치고 복잡하게 매듭을 지어 신전기둥에 묶어두었다. 그것을 본 사제가 신탁을 받아,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 전역을 통치하는 지배자가 되리라”고 예언을 했다. 나중에 알렉산더 대왕이 아시아 원정길에 그곳을 지나다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관한 얘기를 듣고는 자신이 풀어보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단칼에 매듭을 베어버렸다. 중국에도 이와 비슷한 고사가 있다. 남북조(南北朝)시대 북제(北齊)의 창시자 고환(高歡)은 아들을 여럿 두고 있었는데, 이 아들들의 재주를 시험해 보고자 한 자리에 불러서 뒤얽힌 삼실 한 뭉치씩을 나눠주고 풀어보라고 하였다. 다른 아들들은 모두 엉킨 실타래를 풀어보려고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양(洋)이라는 아들은 잘 드는 칼 한 자루를 들고 와서는 헝클어진 삼실을 싹둑 잘라버렸다. 쾌도난마(快刀亂麻)란 고사성어가 생겨난 유래다.두 이야기가 다 힘의 논리로 문제를 해결한 예가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발상의 전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엉클어진 실타래를 풀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풀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엉클어지기 마련이어서 더 이상 풀리지 않는 곳에서는 과감하게 잘라버리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세계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북핵문제도 마찬가지다. 그 매듭을 풀어보겠다고 제법 호기롭게 출발한 트럼프와 문제인 정권이 뭔가 실마리를 찾는 듯하더니, 하노이회담 결렬과 최근의 미사일 도발로 다시 원점으로 돌려진 형국이다. 이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된다. 북한의 김정은이 과연 핵을 포기할 것인지, 아니라면 그가 핵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우선되지 않고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만약 김정은이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하기만 한다면, 미국과 유엔의 대북제재가 풀릴 것이고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원조와 지원이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간다면 머지않아 세계 최빈국의 굴레를 벗어나고 기아에 허덕이는 인민들의 삶은 풍족해질 것이다. 그런데 왜 김정은 한사코 그것을 가로막는가. 그 까닭을 먼저 알고, 그 사실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대화든 협상이든 다 속임수이고 부질없는 짓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북조선 70년 역사는 철저하게 김일성 일족의, 김일성 일족에 의한, 김일성 일족을 위한 역사였다. 유엔에도 가입을 한 국가의 형식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내용상으로는 김일성 일족을 신격화한 사이비종교집단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것을 공고히 하려고 전 인민을 유아기 때부터 철저하고도 집요한 세뇌교육으로 모조리 꼭두각시 맹신도로 만들어 놓았다. 북조선의 인민이란 오로지 당과 수령을 위해 목숨 바쳐 충성하는 것만이 존재 이유가 되는 것이다.김정은이 죽어도 핵을 포기하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신격화된 백두혈통의 절대존엄에 대한 회의나 불신은 곧 세습독재체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시에 햇빛정책이니 달빛정책이니 하는 우호적인 정책이 먹혀들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핵무기의 폐기는 물론 남북통일 문제도 김정은 체제가 건재하는 한 엉클어진 삼실뭉치요 고르디우스의 매듭일 수밖에 없다. 대화니 타협이니 하는 상식적인 방법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기아에 허덕이는 북녘 동포들을 구하고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김일성 일족의 세습체제를 무너뜨릴 쾌도난마의 해결책은 과연 무엇일까.

2019-06-02

‘그들’이 있었기에 존재한 신라와 월성

지금 월성은 없다. 흔적과 터만 남아있을 뿐 실체는 시간의 안개 저편에 있다. 월성의 최후에 대해서도 견훤이 불을 놓았다는 기록과 몽골 기병이 황룡사를 태웠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아무래도 신라 패망 후 방치되다가 화재로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그런데 전화위복이요 새옹지마라 할 만하다. 추정대로 월성이 몽골이 침입했을 때 화재에 의해 일시에 사라진 것이라면 오히려 현재까지 땅속에 상당한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1970년대 말 월성 내부 시험 발굴에 나섰다가 지하에 너무 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어 당시 기술로는 도저히 발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대로 덮어버렸다”는 말이 경주 지역 문화재 관계자들 사이에 전설처럼 내려왔다니. 월성은 이제부터 차근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비밀과 신비도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을지니, 마음의 눈을 뜨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할 테다.매일 짐을 풀고 싸는 대신 한곳에서 머물며 여행하다 보면 시나브로 그 동네의 특성을 파악하고 ‘로컬’의 분위기에 젖게 된다. 경주에서 유식하며 월성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닥치는 쫓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유물과 유적보다는 사람, 지난 시간 속의 사람들과 현재의 사람들이 궁금해졌다.월성은 결국 사람이 지은 성이고, 사람이 살았던 성이다. 월성의 주인이 누구보다 중요하지만 그들과 어우러져 살았던 월성 바깥의 사람들도 무시할 수 없다. 신분과 처지는 달랐을지언정 그들 모두 자기의 운명을 힘껏 살았던 사람들이다. 너무 땅속만 들여다보고 지난날만 더듬으면 허무감이 깃들기 마련이다. 어제로부터 오늘까지, 어떤 환란에도 영영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의 향기를 쫓아본다.21세기에 들어 처음 실시한 2000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본관별 인구 순위 1위는 김해(가락) 김씨, 2위는 밀양(밀성) 박씨, 3위는 전주 이씨라고 한다. 그리고 4위부터 6위까지가 바로 경주를 본관으로 한 김씨, 이씨, 최씨의 순이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시조이고 김유신이 중시조인 김해 김씨까지 포함하면 인구수 상위 성씨의 절반 이상이 신라를 뿌리로 하는 셈이다.물론 지금의 본관이며 성씨가 삼국시대를 비롯한 과거와 같은 의미일 수는 없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성씨 자체가 없었다가 이후 일부 계급에게만 주어졌다. 포상이거나 표식의 의미가 더 강했던 본관과 성씨는 계급 사회의 변동에 따라 ‘만인의 것’이 되었지만, 그 또한 부계의 전승으로서 핏줄로만 따지면 절반의 징표에 불과하다.1990년대 후반부터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이 시작되었을 뿐더러 법제까지도 부계 성씨 계승 대신 부모의 성씨 중의 선택으로 변화하려는 즈음에, 새삼 본관 따지고 성씨 따지는 것이 고리탑탑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뿌리 찾기’에 흥미를 느끼는 편이다. 고구마줄기처럼 혈연으로 이어진 나의 뿌리가 과연 어디에 닿아있는지 궁금하다. 그것은 지나간 일로만 여기는 과거를 현재의 일부로 인식하고 회복하는 작업이다. 내가 흘러왔고 흘러갈 물에 가만히 손을 넣어보는 일이라 할까.‘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안 호수가 178,936호(戶)에 1,360방(坊)이요, 주위가 55리(里)였다”고 했다. ‘17만 호’에 대해서는 이를 호구수로 보고 5(명)을 곱하면 85만여 명이 되는데 경주의 면적을 감안하면 이 인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호구수로 보지 않고 인구수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이병도,1959).그러나 ‘당평백제비(唐平百濟碑)’에서 백제 멸망 당시 인구가 620만이라고 언급한 점을 감안하면, 신라 왕경의 인구를 85만명 정도로 추측하는 것이 결코 타당성 없는 주장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이기봉,2002).족보 전문사이트 ‘뿌리를 찾아서’에서 검색되는 경주(혹은 안강, 월성, 계림)를 본관으로 한 성씨는 89개에 이른다. 그중 ‘월성의 시대’에 있었던 성씨는 9개쯤으로 짐작된다. 우선은 왕을 배출한 박·석·김씨가 있고, 고조선 유민으로 진한 땅에 자리 잡은 6부 촌장들을 원조로 하는 알천 양산촌 이씨, 돌산 고허촌 최씨, 취산 진지촌 정(鄭)씨, 무산 대수촌 손씨, 금산 가리촌 배씨, 명활산 고야촌 설씨 등이 있다.경주시 탑동 양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양산재’는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1970년에 6촌장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는데, 가보니 문이 잠겨 있고 주변은 썰렁하다. 대문 틈으로 빼꼼 들여다보니 깔끔하게 정비된 모습에서 후손들의 손길을 느껴진다.양산재에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을 바로 아래 나정에서 달랜다. 나정과 양산재가 이어지다시피 자리한 것이 당연하지만 흐뭇하다.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를 신라의 왕으로 추대한 이들이 바로 6부 촌장이다. 원래 이들은 각자 자식들을 데리고 알천언덕에 모였다. 자기 자식을 왕으로 세우고픈 마음이(본능이) 없지 않았으련만, 그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꾹 누르고 혁거세를 지도자로 옹립한다. 마음 맑고 눈 밝은 이들이 알아보지 못한다면 영웅이고 위인이고 없는 것이다. 6부 촌장 중에서도 두 사람의 이야기가 도드라진다. 촌장들의 리더 역할을 했던 고허촌장 소벌도리와, 그 또한 하늘에서 바위로 내려왔다는 표암(瓢-) 전설의 주인공 양산촌장 알평이다. 경주 최씨와 경주 이씨의 성을 가진 그들의 자손은 호부견자 없다는 말을 증명하듯 명문가를 일구어왔다.월성의 서편, 월정교를 보러 온 관광객들과 주차장을 같이 쓰는 교동마을은 경주 최씨 후손들의 삶터다. 일명 ‘최부잣집’으로 알려진 고택을 중심으로 한옥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달걀이 가득 든 ‘교리김밥’도 유명하다. 고택 사랑채의 주춧돌이 월성에서 나온 돌이라는데, 이 돌이 그 돌 같고 그 돌이 이 돌 같아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시간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진정은 마을 한편 향교에서도 느껴진다. 경북에서 가장 큰 향교라는 것 외에도 원래 신문왕이 ‘국학’을 지은 바로 그 자리에 세웠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학교의 자리에 학교가 생겨나는 건 그곳이 가장 공부하기 좋은, 조용하고 안정적인 터라는 뜻이렷다.경주 이씨가 이씨의 대종(大宗)으로서 수많은 공신과 학자를 배출한 것을 자랑삼는다면, 경주 최씨는 ‘최부잣집’으로 대표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단순히 돈만 많은 게 아니라 세계관과 인생관이 함께했기에 경주 최씨는 일제강점기에 지사들을 배출하며 진정한 명문가로 거듭난다. 벌써 몇 번째 방문했지만 최씨 집안의 가훈은 볼 때마다 깊은 울림을 준다.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는 분쟁에 휘말려 화를 집안으로 불러올 수 있다.2.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마라.-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1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에 돌려 사회에 환원한다.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낸다.4.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 흉년에 먹을 게 없어서 남들이 싼값에 내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케 해서는 안 된다.5.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6.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라.그 땅의 지기(地氣)는 결국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운이다. 땅이 사람을 닮고, 사람이 땅을 닮는다. 경주에 머물며 여행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연구자와 작업자 등 월성 발굴조사에 참여하는 분들과의 인터뷰도 그랬지만, 일상적으로 길이나 유적지나 식당이나 택시에서 만나는 ‘경주 사람’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내 고향도 관광지라면 관광지라 할 수 있는 해변 도시인데, 우리 동네 사람들은 아무래도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편이다. 고향사람들끼리야 거친 말투와 태도 이면의 정서를 이해하지만, 타지 사람들이 보기에는 불친절하고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다.경주는 오래된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친절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물론 내가 운이 좋았을 수도 있지만, 자신들의 터전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뜨내기’이거나 ‘호구’로 여겨서는 보일 수 없는 태도다. 시장의 상인부터 게스트하우스의 주인까지 물으면 정성껏 답해주고 무어라도 도와주려고 애를 쓴다.무엇보다 놀랍고 감동적인 부분은, 고도(古都)의 주인답게 품격과 지성을 지닌 분들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주에서는 흥미가 있고 마음만 먹으면 무료이거나 최소한의 경비만으로 참여할 수 있는 탐방과 체험 프로그램이 연일 이어진다. 단체를 운영하는 데는 지자체의 보조를 받겠지만, 거의 자원봉사나 다름없이 활동하며 경주와 신라를 알리는 문화 해설사들도 많이 만날 수 있다.남산 삼릉코스를 이끌며 구석구석 숨은 보물들을 가려보여준 ‘경주남산연구소’의 김원자님은, 견훤에 의해 즉위해 마침내 고려에 투항한 ‘경순왕’을 신라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꼬박꼬박 ‘김부’라고 부르는 자존심과 결기가 인상적이었다. 쪽샘 유적 발굴관에서 신라 고분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신 ‘신라문화원’의 박근자님은, 황룡사지에서 태어났다는 내력으로 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조근조근 작은 목소리와 반짝반짝 빛나는 눈은 참으로 ‘신라인’다웠다. 자원봉사도 시간과 건강이 허락되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문화재 해설은 그에 더한 열정이 없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폐허에서 폐허 너머를 보는 상상력이 아니고서야 공허한 일일 수밖에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당연한 이치에 하나를 더 얹는다. ‘상상한 만큼 느낀다.’ 그리고 ‘사랑하는 만큼 기억한다’고.월성을 걷는 시간은 신라를 기억하며 경주를 여행하는 시간인 동시에 ‘신라의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들이 있어 서라벌, 그리고 월성이 있다.끝

2019-06-02

스탈린의 죽음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칸 영화제 감독상을 탔다 하니, 한동안 잃어버렸던 영화열이 되살아나는 것같다.뭐, 좋은 것 없나? 옛날 옛적에 홍콩 느와르를 좋아했고, 조금 더 돼서는 전쟁영화, 그중에서도 베트남 전쟁 영화 광이었다, 이창동, 박찬욱으로 와 끝이었다. 웬만한 영화는 십 분, 이십 분을 끌어가기 어렵다. 지친 사람의 인내력을 말이다. 얼마 전에는 괜찮다 해서‘극한직업’이라는 걸 봤다가 나는 벌써 완전 가버렸구나 했다.좋은 걸 좋게 볼 수 없게 됐단 말인가? 그래도 얼마 전에는 ‘프리 솔로’라는 것을 꽤나 진지하게 지켜 봤지 않았던가? 좋은 영화였다. 요즘에 나는 다큐멘터리, 르포 같은 것, 사실적인 것이 좋다. 상상력이 메말라서일까? 꿈꾸는 법을 잃어버린 걸까? 아, 나는 지난 몇 년 간 진흙탕 속에서, 악몽 속에서, 어둠 속에서 살았댔다.무슨 영화를 봐야 하나? 볼 수 있는 게 있을까? 이리저리 괜찮을 것 같은 작품을 좀처럼 스톱을 걸 수 없다. 스릴, 추리를 좋아하기도 하건만 이조차도 시간을 따라 흐르기가 쉽지 않다.스탈린의 죽음? 코미디라고? ‘Death of Stalin’이라는데 어떻게 코미디?이 독재자가 1953년에 세상 떠난 것은 안다. 참 지독한 인간이었다 했다. 원래 근엄한 인간, 절대를 추구하는 인간들은 위험천만 일쑤다. 도덕주의자처럼 남을 잘 해하는 족속들도 없다.결코 간단한 코미디는 아니었다.스탈린은 어느 날 밤 심장마비, 아니 뇌출혈로 세상을 하직했다. 한 인간만 없어져 주면 세상은 개벽처럼 달라지는 것이건만.스탈린 다음엔 후루쇼프였고, 그래서 잠시 해빙기가 왔었는데, 경위는 전연 알지 못하던 나다. 영화에 베리야라고, 내무장관인지 비밀경찰총수인지가 등장하고 몰로토프니, 주코프니, 후루쇼프니, 스탈린의 아들이며 딸들이 등장한다. 스탈린의 뒷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최고 위원회에서 다수파가 되어야 한다. 베리야의 비밀 동원력이 장례 준비까지는 힘을 발휘한다. 스탈린이 살았을 때 그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 살육극과 감금, 강제노동의 화신이었다. 주코프는 2차대전의 영웅, 그가 후루쇼프를 도와 스탈린의 장례 기간을 틈타 전세를 역전시킨다. 모스크바로 몰려든 군중들에 대한 학살 책임을 베리야에게 돌려 수뇌부들의 심리를 바꿔놓는데 성공한 것이다. 사실, 당시 공산당 지도부들은 스탈린 체제 하에서 저질러온 온갖 악행들에 대해 책임을 물릴 자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높은 데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베리야가 적격이었을 것이다.이 며칠 동안의 드라마를 보며 깨달은 것 하나. 술수와 속임수로 권력을 수중에 넣으려는 집요함과 야비함은 어느 사회나 다를 바 없다는 것. 무장이라도 그 실력으로 술수를 성공으로 밀어부칠 만하면 안 그러는 세력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음모를 모른 채 권력을믿고 따르고 움직이는 민중들은 늘 착한, 어리석은 사람들로 영문도 모르고 왔다 간다.앗. 이런 시각은, 나는 한번도 수긍한 바 없건만. 난제, 난제라 아니할 수 없다. 어떻게 이 술수 앞의 무기력에서 빠져나갈 수 있나./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5-30

긍정과 감사

강성태 서예가·시조시인눈부시게 푸르고 아름다운 오월이다. 날씨가 화창하고 계절이 아름다워서일까? 가정의 달 오월에는 유난히 기념일도 많고 테마적인 행사가 흔하다. 그러한 기념일이나 행사의 대부분은 사랑과 감사, 은혜와 존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한 날에 살가운 인사를 건네거나 감사의 선물을 주고 받는 등 소소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사람 사이를 한결 친밀하게 하고 세상을 더욱 밝고 향기롭게 만들고 있다.긍정과 배려, 사랑과 감사의 마음에서 싹트게 되는 따스하고 감동적인 사연들. 긍정과 감사는 행복의 원천이다. 또한 배려와 사랑은 나눔과 실천을 통해 더 큰 긍정과 행복을 안겨준다.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알고 쏟아준 사랑에 감사를 전하며 존중과 보은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얼마나 뭉클하고 정겨운 일인가! 진정한 나눔은 타인에게서 비롯되듯이, 누군가를 위해 나의 가진 것을 나누고 봉사하다 보면 나눔으로 인해 얻게 되는 나의 기쁨이 더 커지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배려하며 나눔을 실천했을 때 진정한 보람과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따뜻한 나눔은 세상을 밝고 넉넉하게 만들며 더욱 활기차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어지게 한다.감사는 너그러운 부드러움으로 잔잔하게 파동을 일으키는 미덕의 어머니이다. 긍정과 감사, 사랑의 마음으로 대한 밥은 썩지도 않았다는 실험결과가 말해주듯이, 사람에 대한 관심과 칭찬, 감사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기쁨과 감사가 많아지고 사랑이 가득해지면 그 자체가 곧 행복이고 만족이며 보람인 것이다. 그래서 감사를 나누면 행복이 되고 행복을 나누면 감사가 오는 것이다.이 모든 것은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매사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매사에 적극적이다. 2002년 미국의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낙관주의자가 비관주의자에 비해 심신건강도 양호하고 긍정적인 태도가 신경계와 면역계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조절시켜 건강과 장수에 도움을 줬다고 한다. 또 스트레스를 덜 받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릴 확률도 낮았다고 한다. 이처럼 매사에 긍정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크고 많은 긍정과 감사를 불러일으켜 성취와 만족감을 느끼게 해준다. 결국 긍정적인 정서와 자신감, 감사의 마음은 호기심과 창의성을 일깨워 잠재능력을 발달시키고, 일과 건강에 있어서 긍정의 에너지가 작용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인생의 변화란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주위의 작은 것부터 살피고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심했던 가족들, 고맙다고 표현 못한 동료들, 내 얘기만 전하려 했지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 삶의 작지만 소중한 가치들을 인식하며 무관심했던 사람들과의 진정성 있는 소통을 통해 긍정과 감사, 사랑의 마음을 나눈다면 이 세상이 한결 밝아지지 않을까?내가 소중하면 남도 소중한 법이다. 이념이나 견해의 대립 속에 나의 관념이나 주장만 고수하고 선과 악, 득과 실만 따지는 편중된 사고와 배타적인 논리는 시민사회 전반에 갈등과 퇴보의 해악만 끼칠 따름이다. 시대의 가치와 변화의 격랑이 심해져도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인정하고, 상호이해와 배려로 다름과 틀림 속에 ‘차이’를 존중하며, 상생으로 협력해나가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 바탕에 긍정의 습관과 감사의 마음을 깔아야 함이 중차대하겠지만.지금 가지고 있는 것, 지금 누리고 있는 것에 감사할 때 우리는 보다 행복한 삶에 다가갈 수 있다. 긍정과 배려로 사랑을 실천하고 베풂과 나눔 속에 함께 누리는 감사의 온기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2019-05-30

지역신문이 가야 할 길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지난주 감사패를 하나 받았다. 경북매일신문의 독자권익위원회 위원장을 6년간 역임한 것에 경북매일 대표께서 전달해 주셨다. 감사한 마음이다. 세월이 빨리도 흘렀다. 지난 2013년 위원장을 맡은 이후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간 많은 지역의 유지분들을 위원으로 초빙하여 교류하면서 그들과 지역발전을 위한 의견을 나눈 것이 큰 보람이고 성과였다. 그동안 신문도 그 내용의 충실도에 있어서나 양적으로 모두 성장하였다.신문칼럼도 그 시절 시작했는데 벌써 300회가 넘었다. 지역신문과 지난 10년 가까운 세월을 같이 하면서 지역신문이 가야 할길을 생각해 보았다. 보통 지방신문이라고도 하는데, 필자는 “지방”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우선 지역신문은 지방신문이란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방정부, 지방공무원, 지방대학…. 지방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무척 익숙한 단어이다. 서울이라는 중앙에 대응하는 단어로서의 지방이란 단어는 한국에서 중앙에 대한 대등한 개념이 아닌, 열등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지방대’란 단어다. 정부가 연구비 지원을 할 때는 몇 개의 지방에 있는 우수대학은 지방에 있으면서도 지방대학이 아닌 것으로 분류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교수들이 유학 후 귀국해 국내학회에 참석했을 때 가장 당황하는 것은 지회(支會)라는 단어의 해석이다. 한국에서 지회란 중앙에 대한 지점(branch)의 개념으로 쓰이고 있고, 각 지역이 동등한 자격을 갖는 지역학회(chapter)의 개념은 아니다. 반면 미국은 학회가 결성되면 전 지역을 모두 평등하게 나누어 지회를 설치한다. 각 지회는 동등한 자격을 갖는다.따라서 지역신문은 이런 관점에서 그저 중앙에 대응한 지방신문이 아닌 지역의 권익과 발전을 도모하면서 전 국토의 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고, 세계로 뻗어가는 각개약진의 기반이 된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포스텍 재임시 고교생 입학설명회에 가면 학부모들의 질문 중의 하나가 바로 지방에 위치한 대학의 장·단점이다. 필자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세계지도를 들여다보면 한반도는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점 왼쪽에 있으면 어떻고, 점의 오른쪽에 있으면 어떤가? 우리는 한국의 어느 지역에 위치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그러한 관점에서 지역신문은 지역에 대한 뉴스 동향과 함께 지역과 전국을 잇는 분석적 기사가 많아져야 한다. 또한 포항공항 국제화, 세계적 테크노폴리스 구축, 철강산업의 경쟁력, 같은 글로벌 이슈에 좀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은 더 이상 서울과 지방으로 나눠져야 할 필요가 없는 나라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차를 몰고가면 거의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전 국토에 걸쳐 사람들이 퍼져 살고 있다. 그만큼 좁은 나라다. 좁은 나라의 미래의 번영은 세계화에 있다.반면 지역의 뉴스나 과제도 잘 챙겨야 한다. ‘Think Globally Act Locally’라는 교훈대로 지역신문은 지역의 발전을 통한 전국화, 세계화가 하나의 중요한 미션이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전제하에서 각 지역은 각 지역에 대한 강한 긍지를 가지고 지역별 특성을 강조하고, 자부심을 가지는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역신문은 지역민들에게 이러한 점을 계도하고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또한 지역의 자치체가 이러한 역할과 사명을 인식해야 하도록 지역신문이 역할을 해야 한다. 지역신문의 역할은 그래서 전국지 보다도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지역과 전국, 그리고 세계를 한꺼번에 아우르는 뉴스와 화제를 항상 다루어야 하고 문제 해결을 제시하고 관심을 촉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역신문들의 분발과 발전을 빌어본다.

2019-05-30

매미의 울음소리를 기다리며

어느 새 오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2019년을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섯 번째 달을 마무리하고 한 여름 6월을 맞이합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온 천지가 매미의 울음으로 뒤덮이는 본격적인 한 여름의 태양 속을 거닐겠지요? 매미의 삶은 독특합니다. 애벌레로 땅 속에서 보내는 기간이 무척 깁니다. 짧은 매미 종은 5년, 미국의 어느 매미 종족은 무려 17년의 기간을 애벌레로 지하에서 숨어 지낸다고 합니다. 성충이 되어 매미 형상을 제대로 입은 채 보내는 시기, 즉 우리가 보고 듣게 되는 한 여름의 매미는 불과 한 달 가량을 지상에서 눈물짓다 사라집니다. 그토록 울어 대는 매미는 수컷이랍니다. 죽기 전에 짝을 지어 후손을 퍼뜨리려고 암컷을 유혹하는 울음인 것이랍니다. 17년 기나 긴 기다림 끝에 지상에서의 마지막 절규를, 후손을 남겨 종족을 보존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겠지요.매미의 신비로운 점은 또 있습니다. 생명주기가 5년, 7년, 13년, 17년으로 모두 소수(素數)라는 점입니다. 자연수 중에서 1과 자신 만으로 나누어지는 수입니다. 생명 주기가 소수인 이유를 ‘천적으로부터 종족 보존을 위해서’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새, 다람쥐, 거미, 거북이 등의 천적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수명주기를 천적의 수명주기와 달리해야 하는 법이랍니다.시인 안도현은 ‘사랑’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 우는 것이 아니라 / 매미가 울어서 /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 매미는 아는 것이다 / 사랑이란 이렇게 / 한사코 너의 옆에 / 뜨겁게 우는 것임을 /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 매미는 우는 것이다.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어떤 신념을 갖는 다는 것은, 목적과 소명을 품에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통곡, 즉 비통함(anguish)을 전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임을 시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관심을 갖는 정도로는 세상의 아픈 곳들을 치유할 힘이 없다는 것을 호소하지요.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오감으로 감각하는 세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 주위에서 들려오는 지극히 당연한 소리에도 혹시나 어떤 아픔이 깃들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조심스러운 마음을 품습니다. 매미의 생명력 넘치는 아리아가 세상에 울려 퍼질 때. 그대와 나 그들 17년 침묵에 대해 한 번쯤 생각이 머무는 날들이기를, 마침내 사랑으로 귀 기울이는 여름이기를.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5-30

경제와 심리

같은 물건을 하나 더 사면 그 상품은 50% 할인해 주는 판매 행위를 ‘로스 리더 마케팅’(loss leader marketing)이라 부른다. ‘로스 리더’란 원가보다 싸게 팔거나 일반 판매가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판매하는 상품을 말한다. 우리 말로는 미끼 상품이라 표현한다. 고객은 미끼 상품을 사러 왔다가 다른 물건도 사고 가기 때문에 매장으로 봐서는 싸게 판다고 해도 손해볼 게 별로 없는 마케팅 전략이다.경제는 심리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잘 될거 라고 소문나면 잘 되고 잘 안될 것 같다고 소문이 나면 부진해지는 것이 경제다. 어떤 야채가 “건강에 좋다”고 TV에 소개되고 나면 그 다음날 그 야채는 시중에서 품귀현상을 빚는다. 식품 값이 인상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면 가수요가 발생하는 것 역시 소비자의 심리가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다.TV에 등장하는 간접 광고도 소비자의 심리적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효과를 노린 기획 광고물이다.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이는 미국에서 주가가 연속 상승하는 현상은 결국 미국이 무역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있는 심리가 작용한 때문이다.특히 심리적 경제 현상은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에서 잘 두드러진다. 정부가 무조건 규제를 하고 억누른다 해서 폭등하는 집값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일시적 하락은 있으나 규제에 의한 가격 하락은 언제나 반등의 기회를 노린다. 정부의 역할은 시장 개입이 아니라 시장을 교란하는 행위에 대한 방어 전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전쟁에서도 심리전은 매우 중요하다.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전략으로 고도의 심리전술이 많이 활용된다. 한나라 유방이 칼 한번 쓰지 않고, 화살 한번 쏘지 않고 적장 항우를 굴복시킨 것이 바로 심리전 때문이다.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왔다.최근 한국의 기업경기와 소비심리가 급격히 얼어붙고 있다고 한다. 우리경제를 불안해하고 비관적으로 보는 국민도 부쩍 많아졌다. 잘 될거라는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가 잘 돌아가게 하려면 정부가 희망적 메시지를 많이 주어야 한다. 경제는 심리이기 때문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5-30

막걸리 중 으뜸은 투료다, 강물에 풀어 모두 함께 마시는…

봄날이었다. “병아리 손도 빌린다”라고 할 정도로 바쁜 모내기 철이었다.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도, 병아리 대신 들일에 ‘동원’되었다. 새참으로 내놓을 막걸리 배달. 대단한 양은 아니고 작은 양은 주전자 둘이었다. 양은 주전자 주둥이에 젓가락 네댓 벌을 꽂고 제법 먼 논둑길을 따라 우리 논으로 막걸리 배달을 갔다.저 멀리 모내기를 하는 우리 논이 보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랑찰랑 막걸리가 움직였다. 주전자 주둥이로, 뚜껑 사이로, 막걸리가 조금씩 흘렀다. 아깝다. 귀한 술이 쏟아지다니. 논둑 언저리에 주저앉아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셨다. 의외로 달싹했다. 몇 모금을 더 마셨다. 그 순간이 기억의 끝이었다. 막 모내기가 끝난 어느 논의 어린 벼들이 비스듬히 보였다.버드나무 그늘이었다. 겨우 실눈을 뜨다가 동네 아재와 눈이 마주쳤다. “쟈, 이제 술 깼는가 보다. 조선 천지 술은 니가 다 마셨제? 잘 잤나? 머리 안 아프나?”완패. ‘막걸리와의 첫 만남’은 처참했다.세상의 모든 술은 두 종류다. 발효주(醱酵酒)와 증류주(蒸溜酒)다. 발효주는 곡물이나 과일 등을 삭혀서 만든 술이다. 증류주는 발효주를 가열 처리하여 한차례 혹은 두어 차례 증류하여 얻는다.막걸리는 발효주다. 재료는 쌀이나 밀, 좁쌀 등이다. 굳이 곡물을 고집하지 않고 과일로 빚어도 된다. 도수는 대략 18~19도 정도다. 탁주, 청주, 막걸리, 전통주 등등은 세금을 매기는 표준이 된다.어느 칼럼에 “막걸리는 막 걸러서 편하게 마시는 술”이라고 했더니 반론이 있었다. “우리 술인 막걸리를 막 걸러서 편하게 마시는, 저질의 술로 깎아내리지 말라”는 반박이었다. “막 걸러서 편하게 마신다”라는 표현이 술을 깎아내리지는 않는다. 발효 과정을 거친 후, 반드시 숙성시킬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다. 숙성을 시키든 않든 모두 막걸리다.막걸리는 열린 술이다. 불확실성을 가진 술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막걸리는 늘 ‘불확실’하다.누룩을 미지근한 물에 풀어서 고두밥과 섞는다. 옹기 등에 술을 담근다.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술이 괴기 시작한다. 뽀글뽀글 술이 숨을 쉰다. 발효 과정에서 생긴 이산화탄소 거품이다. 막걸리는 불확실하다. 같은 날, 한 사람이, 같은 재료, 같은 방식으로 담근 술도 맛이 다르다. 이전에 담갔던 술과 오늘 담근 술의 맛, 색깔 등이 다른 경우도 흔하다. 술을 대량으로 담고, 유통, 판매하는 경우엔 견디기 힘들다. 일본식 입국(入麴)방식을 택한다. 정제된 효모(酵母)를 고두밥과 섞는다. 밑술이다. 밑술을 다시 고두밥과 섞는다. 일본 방식은 일정한 맛을 지닌 술을 보장한다. ‘과학적’이라고 부른다. 일본 유학한 사람들이 ‘과학적 방식’을 널리 퍼뜨렸다. 늘 같은 술을 대량생산하는 일본식 ‘닫힌 방식’이다.조선 중기의 명필 석봉 한호(1543~1605년)의 시조다.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솔 불 혀지 마라. 어제 진달 돋아 온다.아희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 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박주’는 막걸리다. 그중에서도 품질이 떨어지는 하급품이다.인위적으로 만든 짚방석 대신 낙엽이다. 인위적인 솔 불 대신 어제 진 달이다. 낙엽은 짚방석보다 불편하다. 달빛이 솔 불보다 밝을 리 없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자연’이다. 가지런히 줄을 맞춘 ‘과학적인 인위’가 아니다. 한석봉은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랐지만,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다. 유달리 가난하지는 않았다. ‘짚방석과 솔 불’ 정도는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주’ ‘낙엽’ ‘솔 불’은 자연스러운 자연이다. 마치 막걸리같이 자연스러운 ‘불확실함’이다.발효주를 만든 다음, 곱게 거른 것은 청주다. 오늘날 ‘일본 사케’는 대부분 청주(淸酒), 맑은 술이다. 곱게 걸렀을 뿐 물을 타지 않았으니 도수는 16~17도 정도다.‘전통주’의 이름을 달고 시판되는 우리 술 중에는 12도 언저리의 술도 있다. 발효 과정에서 발효를 멈춘다. 당화(糖化)된 부분들을 더는 알코올로 변하지 않게 한다. 흔히 발효를 ‘끊는다’라고 표현한다. 단맛이 그대로 술에 남는다. 도수는 낮지만, 단맛이 강하다. 술의 단맛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고, 단맛 때문에 이런 술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다.우리 선조들은 ‘좋은 막걸리’와 질이 낮은 막걸리를 굳이 가르지 않았다. 좋은 막걸리는 순료(醇醪)다.배송지(裴松之, 372~451년)가 주석을 단 ‘삼국지 오서 주유전(三國志 吳書 周瑜傳)’에 순료가 나타난다. 오나라 주유의 인간성을, 좋은 막걸리, 순료에 비유한다. 오(吳)나라 정보(程普)가 주유(周瑜)를 평한다. “주유와 사귀다 보면 마치 순료를 마신 것처럼 나도 모르게 절로 훈훈하게 취해 온다”고 했다. “마치 순료를 마신 것처럼 저절로 술에 취한다[若飮醇醪不覺自醉]”를 줄여서 ‘음순자취(飮醇自醉)’라고도 한다.순료는 ‘진땡이 술’ ‘전국 술’ ‘물 타지 않은 무회주(無灰酒)’다. 양조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술의 신맛을 막기 위하여 풀을 태운 재 등을 술에 넣었다. 시중 유통 막걸리는 6도다. 쌀로 빚은 원주(原酒)는 18도 전후다. 찹쌀을 사용하면 19도 술도 가능하다. 물을 섞어서 술의 알코올 농도를 6도 정도로 낮춘다. 시중에 유통되는 막걸리는 물 섞은 막걸리다. 오래전에는 재 등을 넣었고, 지금은 농도를 낮출 요량으로 물을 섞는다. 물이나 재를 넣지 않은 술이 무회주다. 순료, 전국 술이다. ‘순(醇)’은 ‘농주(濃酒)’ 즉, 엷지 않고, 짙은 술이다.한석봉은 박주도 좋다고 이야기했지만, 굳이 순료를 피하지는 않았다. 우리도 오래전부터 순료, 좋은 술을 알았고 또 마셨다.조선 성종 2년(1471년) 6월, 대사헌 한치형이 17개 항의 상소를 올린다. 그중 환관[宦者, 환자]을 경계하라는 내용이 있다(조선왕조실록).“대개 환자(宦者)는 무리가 모두 견식이나 성품이 영리하고, 말솜씨가 유창하여 밝혀주고, 안색(顔色)을 잘 살피고 엿보아 지취(志趣)를 받들고 비위를 낮추어 명을 받으면 어기고 거슬리는 근심이 없고, 일을 시키면 뜻에 맞고 만족스럽게 하는 능함이 있어, (중략) 누구인들 술수 속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중략) 순료(醇醪)를 마시면서 그 취(醉)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서(후략)”순료, 좋은 막걸리의 폐해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역시 ‘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1433년) 10월의 기록이다. 제목은 ‘술에 대한 폐해와 훈계를 담은 내용의 글을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다’이다.후위(後魏)의 하후사(夏候史)는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상중(喪中)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하며 좋은 막걸리를 입에서 떼지 않으니, 아우와 누이는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는데, 마침내 술에 취한 채 혼수상태로 죽었다.순료와 다른 술은 촌료(村醪), 박주(薄酒), 산료(山醪) 등으로 표기했다.시골의 막걸리, 엷고 가벼운 술, 산촌의 막걸리 등이다. 순료가 좋은 술이지만 촌료, 박주, 산료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갈암 이현일(1627~1704년)은 조선 후기 대유(大儒)다. 그의 시 ‘봄날 안국화 명하(命夏)와 시냇가에 노닐며’에 산료가 나타난다(갈암집 속집).한낮이라 들판엔 안개와 이슬 걷혀/벗들과 천천히 거닐며 한가히 노닌다/산촌 막걸리 기울이매 호기가 일어나/내 삶이 이미 백발인 줄도 몰라라큰 유학자도 막걸리를 한 잔 마시니 젊은 호기가 되살아난다. 산책을 하고, 산촌 막걸리를 나눠 마신 ‘벗’ 안명하(安命夏, 1682∼1752년)는 호가 송와, 갈암의 문인이다. 스승과 제자가 들길을 거닐며 거친 막걸리를 나눠 마신 것이다. 갈암 이현일은 고향이 영일(지금의 영덕)이다. 말년에 유배에서 돌아와 안동 임하, 영덕 등에서 지냈으니 막걸리를 나눠 먹은 장소도 이 부근일 가능성이 크다. 1700년, 안명하는 19세다. 술을 마셔도 될 나이였을 것이다.조선 후기 문신 농암 김창협(1651~1708년)의 막걸리는 애틋하다. ‘농암집’ 제5권에, 헤어지며 마시는 시골 막걸리가 나온다. 제목은 ‘이별을 앞두고 즉흥으로 짓다’이다.촌 막걸리[村醪] 사오니 병마개는 풀 뭉치/이별 술 따르는데 해 저문 산은 푸르네/그대도 봄 강 경치 좋아함을 알겠으니/미수(渼水) 정자에서 우리 다시 만나세막걸리는 가리지 않는 술이다. 그중 으뜸은 막걸리를 던지다, ‘투료(投醪)’다.‘여씨춘추 순민(呂氏春秋 順民)’에 전하는 이야기다. 전쟁터에서 장수가 막걸리를 한 병 선사 받았다. 차마 혼자서 먹기는 미안하다. 막걸리를 강물에 풀어서 병사들과 같이 마셨다. 막걸리는 ‘더불어 먹는’ 술이다. 하물며, 좋은 술, 나쁜 술로 가를 것도 아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5-29

“선생님이세요?”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몽골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지금은 기내 서비스로 저녁이 제공되고 있다. 비행기 후미에 앉은 필자의 순서가 되었고, 승무원이 필자에게 물었다.“선생님이세요?” 필자가 세상에서 제일 부끄러워하는 말이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여간해서는 티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학생들과 함께 앉아 있기에 조심스럽게 그렇다고 했다. 혹시나 학생들이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나 않았는지 여러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필자에게 돌아온 답은 전혜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너무 감사해요!” 승무원은 특유의 친절 미소로 필자를 놀라게 했다. 필자의 놀란 모습에 대한 답을 승무원은 바로 해주었다. “학생들이 너무 착해요. 인사를 너무 잘 해요. 기내식을 받는 학생들 모두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꼭 해요.”이 말을 듣는 순간 모든 힘듦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선생님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음을 필자는 처음으로 느꼈다. 승무원이 지나가고 필자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이어폰을 끼고 저마다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혹 학생들이 왜 비행기를 탔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실 분이 계실 것 같아 잠시 말씀을 드린다.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은 2016년부터 급속한 사막화로 환경 재앙 지역으로 변해가고 있는 몽골에서 생태계 복원을 위한 “생명 사랑 나눔의 숲”을 조성하고 있다. 작년까지 1천100그루의 나무를 사막화 방지 마지노선인 몽골 아르갈란트 솜 지역에 심었으며, 올해는 700그루를 심을 계획이다. 그리고 2021년까지 총 5천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을 예정이다.모두가 놀이동산으로 수학여행을 떠날 때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은 지구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몽골 사막으로 간다. 한 번 즈음은 불평도 할 법 하지만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가치를 아는 학생들은 밤 비행기의 피곤함 정도는 참을 줄 안다. 또 자신들을 위해 봉사해 주시는 많은 분들에게 기쁘게 감사 인사를 한다. 중학생! 중2병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때로는 방황의 정점에 있는 시기!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가 있다는 것을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이 보여주고 있다.그런데 필자는 몽골이 가까워질수록 걱정이 앞섰다. 왜냐하면 5월 사전답사 때 본 진상(進上) 한국인들 때문에! 필자는 매번 답사 때마다 술에 취한 대한민국 관광객들을 본다. 그들의 추태는 같은 나라 말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만든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호텔 복도에서의 고성방가는 기본이고, 격한 취중 싸움은 덤인 한국 관광객들!이들의 연령은 제한이 없다. 답사 중에도 필자는 진상 취객들 때문에 마음을 졸였지만, 답사를 마치고 출국 심사를 받을 때는 조바심에 속이 다 타버렸다. 왜냐하면 술에 취해 인사불성(人事不省) 된 한국 대학생들 때문에. 흘러내리는 체육복을 입고 몸도 못 가릴 정도로 취한 그들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유발했다. 직업병 때인지 출국 심사장을 통과한 필자는 심사장을 나와서 한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위태위태한 대학생들이 출국장을 모두 통과한 다음에야 그들을 따라 탑승구로 갔다. 비틀거리는 대학생들, 그들의 모습은 분명 정치 혼돈에 빠진 한국의 모습이었다. 그들을 보면서 필자는 교사로서의 무한 책임감을 느꼈다.도착을 알리는 기내 방송에 필자는 손을 모았다, 제발 이번만큼은 술에 취한 진상 한국 관광객들을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이 보지 않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역시 바람은 바람으로 끝났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시간은 5월 28일 02시! 장소는 몽골의 어느 호텔! 700그루의 나무를 심기 위해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힘들게 구덩이를 파고 돌아온 학생들, 그 학생들의 단잠을 깨우는 술에 취한 한국 관광객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몽골 전체를 흔들고 있다.

2019-05-29

그녀가 빗자루 들고 사막으로 간 까닭

페루 광활한 사막에 한 여인이 빗자루를 들고 나타납니다. 30대 후반 독일 초등학교 교사 출신. 쓸모없이 버려진 황량한 땅, 연 평균 강수량이 5밀리미터가 채 되지 않아 식물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저주받은 땅에서 이 여인은 빗자루 하나 들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1930년대 중반 페루 남부 지방에 비행기 노선이 처음 열리자 조정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사막에 거대한 그림들을 조종사가 발견한 거지요. 거미, 독수리, 벌새, 원숭이, 고래, 펠리컨 등. 뚜렷한 여러 생물체의 모양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놀라운 발견에 대해 먹고 살기 바쁜 후진국 페루 정부는 아무도 이 사실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나스카 라인을 만난 이후 마리아는 단 한 번도 사막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무도 연구를 지원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굶어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나스카 라인을 연구하는데 생을 불태웁니다. 서울의 두 배가 넘는 면적을 자동차도 없이 맨발로 홀로 오가며 라인이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빗자루질 합니다. 줄자를 들고 다니며 정밀 측량을 시작하지요. 보통은 100미터를 넘는 크기가 대부분이고 지금까지 발견된 그림만 대략 1천 점 가까이에 이릅니다. 측정 결과 약 2500년 전인 BC 500년 무렵의 작품으로 추정합니다.고독하게 연구를 이어간지 어언 17년. 마리아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페루 정부가 아마존 강에서 물을 끌어와 지역 전체를 수몰할 예정이라는 겁니다. 그녀는 온몸으로 저항합니다. 페루 정부의 관계자들을 찾아가 나스카 라인이 얼마나 소중한 인류의 보물인지, 페루의 보물인지를 설득해 냅니다. 마침내 페루 정부는 자신들의 계획을 철회하지요. 1998년 9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그녀. 나스카 사막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연구를 위한 줄자를 손에서 놓지 않은 마리아 라이헤.마녀, 도굴꾼, 정신병자라는 비난을 평생 숙명으로 짊어진 채 마리아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50년 동안 생계조차 위협받는 극빈의 고통을 견뎌내며 인류 전체의 보물을 건져낸 멋진 여인. ‘빗자루를 들고 사막을 쓸며 후회 없는 삶을 살았노라. 1903-1998’ 묘비에 적힌 글입니다.인문학을 넘어 리버럴아츠(Liberal Arts)나 고고학, 인류학 등 당장 돈이 되지 않는 분야로 문화의 관심사가 옮겨가야 선진 사회입니다. 보이지 않는 지혜를 추구하는 고급문화로 우리가 한 뼘 더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