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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지소미아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요즘 ‘지소미아’라는 생뚱맞은 단어가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필자도 처음 이 발음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기억이 있다. 지소미아는 GSOMIA(General Security of Military Information Agreement)로 국가 간에 군사기밀을 서로 공유할 수 있도록 맺는 협정을 말한다. 사실 이 발음에는 문제가 있다. G만 알파벳으로 부르고 나머지는 한 개의 단어로 부르는데, 이런 예는 법학전문대 시험인 LSAT(Law School Admission Test) 을 ‘엘샛’이라고 부르는데 근거하지만 이 경우 L은 독립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데 반하여 General은 독립적 의미가 약하기 때문에 사실상 ‘지소미아’는 발음상 문제가 있다.어쨌든 한일간에 맺어진 지소미아를 한국측이 일방적으로 폐기함으로서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지소미아는 한국은 주로 탈북자, 북중 접경 지역의 인적 정보를 일본에 공유하고 일본은 첩보위성 및 이지스함 등에서 확보한 시긴트(sigint) 등 정보자산을 한국에 제공해 왔다. 그런데 지소미아 폐기는 한일 뿐만이 아니라 한미 동맹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파악된다. 애초에 지소미아는 미국이 제안하여 북한을 감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일이 맺도록 한건데, 한국이 이에 반기를 드는 것은 미국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미국측이 이해할 가능성이 있다.트럼프 정부의 한 관계자는 최근 “한국의 지소미아 파기는 한·일 갈등에 대한 워싱턴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었다”고 주장했다.한국이 지소미아 파기로 미국을 일본 편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한국을 편들어주던 미 정부내 인사들도 문재인 정부가 지소미아를 파기해버리는 것을 보고는 돌아섰다고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이들은 “지소미아 파기는 미국 안보, 미국 국익을 정면으로 건드린다. 미국 안보를 위협하는 문제이다”라고 말한다.일본의 극우 언론이긴 하지만 일본 산케이 신문은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방침이 중국의 눈치를 보는 것이며 향후 한·미·일 3국 공조 체제에서 이탈하는 전조라는 주장을 했다. 이들은 극단적으로 “한국이 ‘자유진영’에 있는 시간이 앞으로 오래 남지 않았다”며 자유민주주의 동맹에서 빠져나갈 날이 가까워졌다고 주장했다.이러한 일본 극우의 주장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이들의 우려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한국은 한국-미국-일본의 삼각 동맹을 공고히 하고 안보에 관한한 한치의 의심도 없이 3개국 협력을 공고히 해야 한다. 지소미아는 북한과 중국이 싫어하는 협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협정이 더욱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워싱턴포스트는 최근 보도에서 “지소미아 폐기로 한국이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가 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이 보도에는 근거가 있다. 한국이 북한이 원하는대로 해주고 있지만 실제 북한은 한국 정부와 한국의 대통령을 경멸하고 깔보는 발언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북한에 얕보이지 않으려면 한미일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여야 한다. 북한이 칭찬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칭찬 뒤에는 깔보임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힘의 균형은 상대의 전술에 말려들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2019-08-29

넓고 깊은 생각을 키우려면

영화 ‘올드보이’에서 15년 동안 밀폐 공간에 갇혀 있던 최민식은 끝없이 묻습니다. “누가 나를 가둔 것일까? 유응삼? 이소영의 정부? 강창석? 김사송?” 유지태는 말합니다. “당신의 진짜 실수는 대답을 못 찾은 게 아니야. 틀린 질문만 하니까 맞는 대답이 나올 리가 없잖아?”“점심은 뭘 먹을까? 내일 누구를 만나야 하지? 아이 학원은 어디로 보내야 할까?” 생각은 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사람들은 오대수처럼 질문 자체가 맞는지, 틀렸는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답만 추구하니 틀에 박힌 결과만 경험합니다.질문이 변하면 생각이 확 달라집니다. 알파고와 바둑 두던 이세돌을 기억하십니까? 이긴 쪽 우승 상금은 100만달러. 행사비용은 100만 달러. 모두 200만 달러(22억원)를 들인 행사였습니다. 구글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사람들 머리 속에 인공지능 AI의 발전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남길 것인가?”인공지능, AI라는 난해한 개념을 한순간에 사람들에게 각인시킬 수는 없을까? 생각을 거듭합니다. 제대로 질문하자 찾아온 답은 놀라웠습니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바둑 승부’ 전 세계가 주목할 것은 뻔합니다.대국은 모두 다섯 판이 벌어집니다. 이 다섯 번의 바둑 시합이 벌어지는 일주일 동안 구글의 시가 총액은 무려 58조 원이나 상승합니다. 하루에 10조 원 이상 돈을 쓸어 담은 겁니다. 22억 원 투자 후 58조 원 거두기. 구글은 너무도 선명하게 인공지능 분야 미래를 전 세계에 보여줬고, 사람들 머릿속에 남은 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질문이 바뀌면 생각의 틀이 확 바뀝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습관적으로 질문하던 틀을 깨 보는 9월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질문을 의심치 않고 답만 찾으려 애쓰던 구습을 깨고 질문이 온당한가, 전제의 오류는 없는가를 깊이 숙고하는 멋진 가을 맞으시길!/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8-29

영양의 ‘통곡’

전국에서 손꼽히는 오지 마을은 경북의 봉화(B), 영양(Y), 청송(C)이다. 세 곳의 영어 머리말을 따서 속칭 BYC라 불렀다. 그중에서도 영양은 오지 중 오지다. 전국 도시가 다 있는 교통 신호등이 영양에만 없다. 지금은 인근의 교통량 증가로 2개의 신호등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전국에서 4차선 도로가 없는 유일한 자치단체로 남아 있다. 그나마 있는 도로는 낙석과 선형 불량으로 주민의 통행을 심각히 위협한다. 주민이 옷 한 벌 사고, 병원 한번 가기 위해 인근 지자체까지 1시간 이상 가야하는 불편을 겪는다. 못사는 남의 나랏일 같다.군민이 교통문제를 민원 삼아 최근 궐기에 나섰다고 한다. ‘영양군민 통곡위원회’라 이름을 정하고 정부에다 호소문을 올렸다. 온 세상이 천지개벽할 만큼 바뀌고 있는 데도 영양군만 제자리 걸음이라는 안타까운 호소다. 국토균형 발전은 그들과는 상관이 없는 얘기다. 통곡(痛哭)이란 이름이 실감이 난다.영양군의 인구는 1만7천명. 울릉군을 빼고 나면 국내서는 인구가 가장 적은 자치단체다. 면적의 93%가 임야와 농지다. 초중고 모두 합쳐 학생수는 도시의 한 학교 규모만 하다. 군의 재정자립도는 겨우 4%다. 영양군이 내세우는 자랑거리는 청정자연과 수려한 경관뿐이다. 군청 홈페이지나 홍보물에는 어김없이 맑은 공기, 시원한 바람, 강한 태양빛, 최상의 농산물 등이 소개된다. 이 덕에 영양군은 2015년 아시아 최초로 국제밤하늘협회로부터 국제밤하늘보호공원 지정을 받았다. 밤하늘의 투명도가 뛰어나 은하수나 유성 등을 육안으로 관측 가능하다는 말이다. 청정도 좋지만 주민의 편리성인 교통 문제도 중요하다. 군민의 통곡 소리에 정부가 답할 차례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8-29

머나먼 사법개혁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문재인 정부의 핵심실세로 꼽히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가 검찰의 수사대상에 오름으로써 인사청문 정국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검찰이 조국 후보에 대해 제기된 여러 의혹과 관련된 20여곳에 대해 동시다발로 압수수색을 벌였기 때문이다. 특히 조 후보자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과 관련해서는 ‘윤석열 검찰총장이 검찰개혁에 나설 조국 후보자를 낙마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수사하려는 것’이란 주장에서부터 ‘조 후보자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짜맞추기 수사’라는 추측까지 갖가지 해석이 난무하고 있다.치열한 논쟁끝에 9월 초 청문회 일정을 가까스로 합의한 여야 정치권도 그저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야당이 비록 조 후보자를 검찰에 고발하기는 했지만 인사청문회 전에 검찰이 갑자기 압수수색에 나설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한 듯 하다. 청와대는 물론 검찰에 대한 지휘권을 갖고 있는 법무부장관도 사전에 협의나 통보를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20년이 다된 국회청문회 역사에서 검찰이 청문회를 앞두고 후보자의 각종 의혹과 관련해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인 것 자체가 초유의 일이니 구구한 해석이 난무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이왕 이렇게 된 이상 조 후보자에 대해 제기된 의혹규명은 청문회가 아니라 검찰수사에서 밝혀지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된 것 아닌가 싶다. 국민의 관심도 청문회가 아니라 검찰 수사에 쏠리고 있다. 조국 후보자가 청문회가 아닌 검찰수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온 야권 입장도 당황스럽다.물론 검찰 수사를 주장해온 야권으로선 고소고발 사건에 대해 압수수색을 한 것을 탓할 수 없는 입장이다. 다만 하필이면 청문회를 앞둔 시점에 압수수색을 벌여 국회 인사청문회를 무력화시킨 검찰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실제로 조 후보자를 상대로 한 국회 청문회가 제대로 진행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게 됐다. 청문회까지 일주일도 안 남은 기간에 검찰이 각종 의혹과 관련한 진실을 수사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밝혀낼 리도 만무하다. 따라서 9월 초 청문회가 열리는 기간에도 조 후보자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계속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청문회에 출석한 후보자나 증인들이 각종 의혹에 대해 “검찰에서 수사중이기 때문에 밝힐 수 없다”고 버티어도 어쩔 수 없다.더 중요한 것은 조 국 후보자를 더 이상 고집하다가는 문 대통령이 임기 내에 꼭 이루고 싶어하는 사법개혁도 물 건너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검찰이 각종 의혹과 관련해 수사를 하고 있는 와중에 조 후보자가 법무장관에 취임한다해도 검찰개혁을 제대로 주도할 수 있을리 없고, 검찰개혁을 외쳐봐야 호응을 얻을 수도 없을 것이란 게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이러니 조 후보가 청문회를 무사히 마치든 못마치든 법무부장관으로서 맡은 소임을 제대로 추진하기 어려워보인다. 문재인 정부에는 조국 후보자 이외에 사법개혁을 추진할 인물이 전혀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 국민이 바라는 사법개혁, 그 길은 너무 멀고도 멀어 보인다.

2019-08-29

처세보민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세상 살아가는 일은 간단치 않다. 나와 너, 우리와 너희, 우리와 그들이 끓이는 섞어찌개가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흥미진진하고 포복절도할 일도 적잖다. 언어도단의 세계가 펼치고,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도저한 경지가 현현하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는 고수도 많고, 깊이를 측량하기 어려운 인물도 적잖다. 세상은 불가사의한 곳이다.로빈슨 크루소가 다시 인간이 될 수 있었던 소이는 ‘프라이데이’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혼자 걸머지는 인생은 단출하다. ‘격양가’의 주인공처럼 “해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 지면 들어와서 쉬고,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서 밥 먹으면” 그만이다. 일하기 싫으면 안하면 되고, 먹기 싫으면 굶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둘이 함께 있으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 그래서 나온 말이 ‘처세’다. 세상에 어떻게 거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개개인은 각자의 처소와 시간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판단할 것인지, 고민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위정자는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백성을 평안하고 넉넉하게 인도할 책무가 있는 까닭이다. 거기서 나온 말이 ‘보민’이다.예로부터 처세보민은 동양사상의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550년 전란이 지속된 춘추전국시대의 종요로운 개념 하나가 처세보민이었다. 처세보민은 당대 지식인들이 깊이 사유하고 실천해야 할 사회적 의무였다.요즘 정치판의 블랙홀은 조국 현상이다. 마치 대한민국에는 그와 그의 가족만 있고, 문제를 야기하는 것처럼 사방에 조국 이야기만 울려 퍼진다. 못내 우려스럽다. 장관 자질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인적사항을 현미경으로 살펴서 온갖 트집거리를 찾아낸다. 그런 과정에서 인격모독과 사생활침해와 연좌제와 인격살인마저 가능한 염량세태가 두렵다. 우리가 이뤄낸 인권과 민주주의의 쇠퇴가 염려스럽다.다른 편에서 보면 조국 현상은 이른바 86세대의 양면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한국사에서 선배를 가르친 유일무이한 세대가 그들이다. 7말8초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그들과 함께할 수 있었음은 축복이다. 진정 몰랐기 때문에 자연스레 ‘불치하문(不恥下問)’이 가능했던 아름다운 시절. 하지만 그들은 물질적 욕망에 포획된 첨단 자본주의 세대다. 돈이 돈을 벌고, 학벌마저 세습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세대이기도 하다. 80년대 대학평준화로 입학한 그들은 자유와 민주를 기반으로 하는 변혁과 혁명과 저항을 기치로 내건다. 그들의 이념과 경험이 바탕이 됐던 87년 평화대행진은 한국 민주주의의 정점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우리는 강남 8학군과 대치동의 발아를 목도한다. 오늘날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공교육의 진원지는 “나 이래봬도 이대 나온 여자예요!” 일갈한 타짜세대 아닌가 한다. 조국 현상에서 우리가 성찰할 대목은 ‘도덕경’ 44장에 있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오래 갈 수 있다.” 나의 욕망을 어디까지 몰고 갈 것인가, 하는 최종지점을 확실하게 설정해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 마음속에 ‘계영배 (戒盈杯)’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9-08-28

경북형 마을학교 2 - 되돌아오는 학교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아침저녁으로 바람이 바뀌었다. 자연은 철이 바뀌기 전 중간지대를 운영 중이다. 급속한 변화에서 오는 혼돈을 최소화하기 위한 자연의 배려에 작렬하던 여름 태양도 가을로의 자리 넘김을 준비하고 있다. 철 바뀜은 자연의 소리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매미 소리로 가득하던 여름 공간에 알락귀뚜라미, 넓은날개철써기 등 가을 곤충들이 소리로 가을을 짓기 시작했다.비록 자연은 변하지만, 필자는 매주 일요일 오후 6시면 출근한다. 왜냐하면 기숙사 학교인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이 일요일 저녁에 귀교하기 때문이다. 산자연중학교는 네온사인 하나 없는 전형적인 면단위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밤이면 간헐적으로 의무를 다하는 개짓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이런 시골 마을이 일요일 저녁이면 길게 늘어 선 차들로 분주해진다. 차들은 서울, 경기, 전북 등 전국에서 학생들을 등교시키기 위해 학부모들이 운전해 온 차들이다. 산자연중학교는 전국단위 모집 학교이다. 지금 재학생들은 전국 10개 시도에 주소지를 두고 있다.학생들은 매주 금요일 오후에 귀가를 해서 일요일 저녁에 귀교를 한다. 귀교 방법은 대중교통, 개인차량 등 다양하다. 개인차량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19시에서 20시 사이에 집중해서 학교로 온다. 필자는 좁은 시골 길에 자칫 있을 교통 혼잡을 예방하기 위해 매주 일요일 19시부터 학교 앞 도로를 지킨다.이번 2학기에는 5명의 학생이 서울, 전북 등지에서 전학을 왔다. 좀 더 많은 학생들이 전학을 희망했지만, 학비 부담 등의 이유로 전학을 포기했다. 그래도 이번 전학생들은 학교와 마을 측면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한때 농산어촌 학생의 성공 기준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마을을 떠나 대도시로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농산어촌 지역의 학생들은 마을을 떠나기 위해 밤을 낮처럼 공부 하였다. 부모들은 그런 자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몸이 부셔지도록 일을 했다. 결국 많은 학생들이 공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고향을 떠났다. 필자는 고향을 떠난 이들이 자녀교육을 고향 학교에서 시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녀뿐만 아니라 이촌(離村) 한 사람들까지 고향으로 돌아오는 상상을 해보았다. 만약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 분명 지금과 같은 마을 소멸 현상은 없을 것이다. 필자의 상상 중 전자가 이번에 이루어졌다. 출향민(出鄕民)의 손주가 서울에서 이곳 영천으로 전학을 왔다. 전학 이유는 본교에서는 실시하고 있는 1인3기 교육, 몽골 해외이동수업 등과 같은 특성화 교육과 본교 특색 프로그램인 마을학교 수업을 받기 위해서이다.2015년부터 시작한 마을학교는 이름 그대로 마을이 학교가 되고, 학교가 마을이 되는 공동체 회복 교육 프로그램이다. 대표 활동으로는 학급 인성 전담 교사로 초빙된 마을 어르신들께서 매주 목요일 아침에 수업을 하시는 ‘인성전담 마을교사’ 제도이다.인구 절벽을 자초한 것도 교육이지만, 필자는 인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교육이라고 믿는다. 올해는 비록 한 명의 손주가 전학을 왔지만, 몇 년 안에 이촌 한 사람들이 가족들과 함께 고향으로 되돌아오리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2019-08-28

양초와 다이아몬드 (3)

패러데이가 기록한 노트를 보면 의미 있는 발견 순간을 기록한 페이지에 11, 894번 숫자가 있습니다. 한 페이지에 3번씩 실험한 결과를 필기했으니 패러데이는 4천 페이지째 이르러 전자기 유도 법칙을 발견한 것이지요.빅토리아 영국 여왕이 온갖 지위와 명예를 보장해 주겠노라, 제안하지만, 패러데이는 정중하게 거절하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사후 가장 명예로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할 것도 수락하지 않습니다. 끝내 평민들의 공동묘지에 자신의 시신을 묻어달라 유언하지요.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청소년을 위한 과학 특강을 개최해 다음 세대가 과학에 흥미를 갖도록 합니다. 패러데이가 시작한 왕립연구소의 크리스마스 강연은 오늘날에도 역사가 면면히 이어져 200년 넘는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리차드 도킨스, 칼 세이건 등 연사로 초대받은 사람은 과학계 전설들입니다.20파운드 지폐 뒷면에는 패러데이 초상과 그 크리스마스 특강에서 양초 하나로 6개의 실험을 보여주는 위대한 강연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패러데이는 양초 하나로 다양한 물리, 화학 개념들을 설명한 후에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양초의 불꽃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지만, 다이아몬드는 불꽃이 없으면 결코 빛날 수 없단다.”‘단 하루를 살더라도 이렇게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이다’ 얼마 전 칼럼에 소개한 황농문 서울대 교수의 ‘몰입’ 예찬이었습니다. 두뇌를 5%도 채 가동하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일침을 가하는 따끔한 충고였지요. 사람은 뇌를 풀가동하고 몰입의 상태에 들어갈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하지요? 마이클 패러데이처럼, 책 읽기와 노트쓰기, 편지쓰기, 강의 듣기로 행복한 하루하루를 몰입으로 열고 싶어 하는 그대를 존경합니다. 양초 불꽃처럼 눈부신 세계가 눈앞에 활짝 열리고 있습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8-28

흔들리는 수소경제

수소경제는 화석연료인 석유가 고갈되어, 새롭게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소가 주요 연료가 되는 미래의 경제를 말한다. 이 말은 미국의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워튼스쿨 교수인 제레미 리프킨의 저서 ‘수소경제(The Hydrogen Economy)’(2002)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리프킨에 따르면 2020년이면 전세계적으로 석유생산이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고, 이로 인해 가격과 공급체계가 불안정해짐으로써 석유확보를 위한 분쟁은 불가피하다. 이에 대비해 우주질량의 75%를 차지할 정도로 풍부하고, 지구상에서 가장 구하기 쉬우며, 고갈되지 않고 공해도 배출하지 않는 에너지원인 수소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에디슨 전력연구소는 현재의 소비 추세로 간다면 2040년경 석유가 고갈될 것으로 예측했는데, 수소경제가 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에서는 수소 에너지의 개발에 힘을 쏟고 있는데, 아이슬란드에서는 1999년부터 수소경제 프로젝트를 국책사업으로 채택했고, 미국에서도 수소 연료개발을 위한 사업에 착수했다.문재인 정부도 대통령전용차를 수소차로 선정하는 등 수소경제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현실은 만만치않다. 수소경제활성화를 위해 필수적인 인프라인 수소충전소 보급 확대를 위해 설립된 하이넷(HyNet·수소에너지네트워크)이 삐걱대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 출자사들이 출자 부담에 비해 정책지원이 미흡해 사업성이 떨어진다며 속속 이탈하고 있다. 수소경제기본법 등 수소경제 활성화를 위한 법안들의 국회 처리가 차일피일 늦어지고 있는 것도 불안요소다. 수소전기차를 비롯한 수소경제 활성화를 위해선 정부가 정책지원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8-28

이게 대학인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온 나라가 한 가지 사안에 묶여버렸다. 대통령의 인사가 중요하지만 이처럼 모든 다른 뉴스들을 묻어가며 국민의 마음이 힘들어야 하는지. 정부의 3권 밖에서 감시와 견제, 취재와 보도를 균형있게 해야 할 언론은 어디 갔는가. 이 와중에 급속도로 국민의 믿음을 잃어가는 집단이 있다. 대학. 사회에서 대학은 무엇인가. 전공지식의 심화를 위하여 연구하고 개발하여 발전의 토대와 가능성의 지평을 넓혀가는 곳이 아니었던가. 다음 세대와 함께 호흡하며 연구성과와 학습역량을 쌓아 학생들의 개인적인 발전에도 기여하는 곳이 대학이 아니었던가.젊은이들이 드넓은 학문의 세계와 치열한 담론의 지평을 만나며 학습과 연구로 견주고 연마하여 이전보다 성숙하고 독립적인 인격체로 성장하는 곳이 대학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자란 인격체는 성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너끈히 책임지고 주변을 돌아보며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여 가도록 이끌어 내는 곳이 대학이 아닌가. 그래야 할 대학은 그 소명을 다하고 있는가. 대학에 어떻게 등수가 매겨지며 더 나은 대학이 따로 있을 수 있는가. 우리 대학은 언제부터 취업준비의 마당이 되어버렸는가. 부정이라도 저지르며 들어가고 싶은 대학은 대학인가 아닌가. 그런 줄 온 나라가 아는 터에 대학은 이에 대하여 한마디 언급도 없으며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다짐도 보이지 않는다.누구보다 대학이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이 나라 교육을 누가 잘못하여 여기까지 왔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어도, ‘대학과 대학입시’가 지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철학자 게리거팅(Gary Gutting)은 “대학이 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지성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개발하며 전수하는 마당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지성적인 문화’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잘 읽고 바로 쓰며 발견하고 개발하며 나누고 표현하는 능력을 대학에서 배우고, 이를 기반으로 우리 사회가 능동적이며 민주적으로 움직여 가는 바탕을 대학이 만들어야 한다. 그런 결과, 학생들은 선택에 따라 취업을 할 수도 있고 창업을 할 수도 있으며 세상과 더불어 든든하게 이웃과 함께 살아내는 건강한 인격체로 태어날 터이다.대학은 각자의 정체성에 따라 다양한 교육과 연구 활동을 이어가야 한다. 교육부가 대학을 지원하겠다는 선의에 따라 대학의 운영과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일도 이제는 없어야 한다. 어려운 대학을 정부가 도울 수는 있어도 간섭과 제한이 적용되는 일은 사라져야 한다. 대학이 창의적이며 긍정적인 지향성을 가져 자율적으로 학풍을 만들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대학이 더 이상 입시부정과 같은 부끄러운 의혹과 혐의에 시달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대학의 이름을 간판삼는 허망한 기대도 사라져야 한다. 대학이 좋아도 개인은 노력해야 세상이 바뀐다. 나라와 나라의 교육을 살리기 위해서 대학이 그 본질부터 회복하여야 한다.대학이 세상을 바꿔야 하므로.

2019-08-28

영일신항만의 경제영토를 키우자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그동안 환동해 거점 도시, 국제 항만도시라는 슬로건에 어울리는 포항의 모습이 더딘 속도지만 이제야 이루어지고 있다. 10년 전 국가항만기본계획 발표 당시의 예정보다는 다소 지연된 느낌이지만 영일신항만 인입철도가 마무리 공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국제페리나 국제크루즈선을 맞이할 국제여객부두도 내년이면 완공된다고 한다. 동해안 유일의 국제 컨테이너항만이면서도 수도권 등의 물동량을 유치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던 최소 필요조건인 철도와 여객물류망이 항만 개장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갖추어지게 된 셈이다. 그동안 지역 경제계는 영일신항만 물동량에 고민이 많았다. 항만 물동량은 배후지역인 대구 경북지역에서 창출되어야 마땅하지만 인입철도의 부재가 최대의 약점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현재 영일신항만의 정기 운항경로에 미주지역이 없다거나 다른 지역으로도 확장되지 못하여 물동량 창출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국가항만전략상 환동해 거점항만으로 자리매김한 영일신항만은 일반적인 항만의 성장경로를 밟기보다는 오히려 기능과 전략적인 측면에서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 선택과 집중의 문제다. 영일신항만이 현재 기항하고 있는 지역·국가는 9개 지역(일본, 러시아, 중국, 홍콩, 태국, 필리핀,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이다. 이 지역을 시장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영일신항만은 지금까지 제대로 알짜배기의 지역과 항로를 개설하며 경제영토를 확장해온 셈이다.실제 국제통화기금(IMF)의 세계경제전망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시장성에 입각한 영일신항만과 관련된 9개 지역의 구매력평가GDP규모(2018년 기준)를 집계해 보면 총 42조6천22억 달러로 전 세계의 31.6%를 차지한다. 반면 그동안 항로가 없다며 아쉬워했던 선진 영어권 6개국(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의 비중은 20.2%에 불과하다. 게다가 2024년까지 9개 지역의 구매력평가GDP의 성장률전망치가 연평균 6.8%인 반면, 영어권 6개국은 3.9%성장에 그칠 것으로 전망되어 세계 시장에서의 비중은 더욱 낮아질 것이라는 점이다.결론적으로 영일신항만은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기항 지역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파이를 키워나가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국제물류와 여객을 맞이할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등에 능통한 우수인재만큼은 계속 양성해 나가야만 한다. 여기에 자체 항만물동량의 창출만 해결하면 된다. 다행히도 9개 지역 대부분 생활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지역임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과거가 된 80~90년대의 세탁기, 냉장고 등 가전용품들이 이들 지역 소비자에게는 통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이참에 국내 시장에서 퇴출된 이들 제품을 생산하던 중소기업들을 영일만항 배후산업단지로 모아 과거의 제품들을 다시 생산하는, 굳이 명명하자면 ‘복고경제’를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수출시장에 맞춘 복고제품들을 포항에서 직접 생산, 수출한다면 지역 내 철강생태계를 보완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영일신만항의 물동량까지 늘리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2019-08-27

약속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우편물 중 ‘○○경찰서’라 적힌 것이 보여 얼른 집어들었다. 경찰서 민원실로 와서 귀하의 교통법규 위반사항을 확인하라는 통보였다. 바로 갔더니, 내 차가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고 차선을 바꾸는 영상을 보여주며 안전운전 의무 위반이니 차후부터는 범칙금을 부과할 것이라며 조심하라 하였다.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을 화면으로 확인하니 세상이 두렵기도 하였고, 운전습관을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어 창구에 비치된 안전운전 서약서를 써서 제출하였다. 서약을 하고나면 교통규칙을 더 잘 지키게 될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인간이 지켜야 할 가치 중 약속은 대단히 중요한 덕목이다. 지키자고 하는 것이 약속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끝끝내 지켜냄으로써 진한 감동을 주거나 그렇지 못하여 비극적인 종말이 될지라도 약속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에 좋은 소재이다. 필자가 청소년이던 시절, 혼성 듀엣가수의 노래‘약속’이 크게 애창되었는데, 오늘날의 가요처럼 가사가 절절하거나 요란하지도 않고 ‘약속~ 약속~ 그 언젠가 만나자던 너와 나의 약속’이 가사의 대부분이었다. 이 단순한 가사와 느릿한 멜로디가 당대 청춘들의 가슴을 적셨으니 아마도 약속이라는 그 깊디깊은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어린아이 때부터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하고 이를 지키려 무진 애를 쓴다. 청춘남녀끼리 새끼손가락을 걸며 하는 약속, 부모와 자식 간의 약속이나 국가 간의 약속 등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약속은 없다. 사회 안전도 교통법규 등 사회적 약속의 이행으로 유지되며 약속을 위반함으로써 발생되는 위험은 매우 크다. 국제적인 약속의 위반은 커다란 분규를 불러 때로는 참혹한 전쟁의 비극을 맞기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약속이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스스로와의 약속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의 양심과 내면 깊은 곳에서 약속을 지켰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어떤 실패에도 의연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는 더러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오늘이 어머님 기일이다. 어머님은 생전에 “나 죽거든 제사는 너희 아버지 기일에 함께 지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저승에서도 삼종지도를 따르겠다는 당신다운 생각일 수도 있으나 아마도 하나 아들의 짐을 덜어주려던 마음이 더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어머님 떠나시고 몇 해 동안은 제사를 따로 지내다가 다섯 해가 지나고는 시속을 핑계로 아버님 제삿날에 함께 모시기로 하였다. 뭐가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세월은 뭔가를 자꾸 변하게 만든다. 아마도 변하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가짐이리라. 어머님 생전부터 약속된 것이기는 하나 어쩐지 세월따라 슬쩍 달라진 마음을 들키기라도 할까봐 영 편치가 않다.요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어수선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해 ‘나와 어떤 약속도 위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애써 자존심을 지키려 하고, 아베 총리는 ‘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억지로 그들의 조치가 타당함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더 이상 대국으로서의 존엄은 찾아볼 수 없다. 필요에 따라 궁색한 떼를 쓰더라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는 말자.

2019-08-27

양초와 다이아몬드(2)

패러데이는 책의 가르침을 따라 근면한 독서, 노트 쓰기, 강의 참석, 편지 교환을 인생 습관으로 삼습니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철학 문집’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메모 노트를 만들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꼼꼼하게 기록합니다. 열아홉 살부터는 소규모 과학 모임에도 정기적으로 참가하고, 회원들과 편지를 정기적으로 주고받는 일을 실천하죠.패러데이는 책을 읽거나 강연에 참석하면 철저하게 그 내용을 노트하고 자신의 생각을 수많은 페이지를 할애, 기록하고 또 기록합니다. 그리고 제본 기술을 이용해 노트를 멋들어진 책으로 만듭니다. 이 습관이 결국 인쇄소 제본공에서 위대한 과학자로 대전환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왕립연구소 회원이었던 서점의 고객 윌리엄 댄스가 패러데이의 노트를 보고 감동합니다. ‘험프리 데이비 강연’ 고액 입장권 4장을 선물합니다. 험프리 데이비는 영국에서 가장 저명한 과학자였습니다. 인기 스타였지요. 패러데이는 험프리 데이비의 강연에 참석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합니다.‘영국 왕실 기하학 수업’ 강연을 앞자리에 앉아 꼼꼼하게 메모하며 듣습니다. 네 차례의 강연 모두를 완벽하게 노트를 작성하고 멋들어지게 제본합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강연 노트 제본한 책 4권을 험프리 데이비에게 선물로 증정하지요. 평소 습관대로 마음을 움직이는 편지를 씁니다. 자신을 실험 기구 닦기로라도 써달라는 내용이지요. 감명을 받은 험프리 데이브는 패러데이를 기억합니다. 꼼꼼한 강연 노트 제본이 정말 인상적이었거든요.제본공 패러데이는 마침내 영국 왕립연구소 험프리 데이비의 조수로 들어가, 마음껏 노트하고 사색하며 책을 읽고 실험실의 장비를 장인의 솜씨로 매만집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패러데이는 험프리 데이브를 능가하는 과학자로 성장합니다.(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8-27

초대형 방사포

방사포는 다연장 로켓포의 북한식 명칭이다. 여러 개의 로켓탄을 한 번에 발사하여 특정지역을 제압하는데 쓰는 무기다. 로켓이나 제트엔진 등을 추진 동력으로 유도장치에 의해 날아가 목표물을 정확히 부수는 미사일과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북한의 방사포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사용한 신기전(神機箭)이 원조라 할만하다. 신기전 화차는 조선 문종 때 제작됐다. 직경 46㎜의 둥근 나무통 100개를 나무상자 속에 7층으로 쌓아 나무구멍에 신기전 100개를 꽂아 화약에 불을 붙여 동시에 화살을 날린 무기다. 우리보다 중국의 다발 화전이 앞섰다. 이를 더 발전시킨 것은 조선의 신기전이다. 신기전의 제작 설계도는 현존하는 것 중에 가장 오래라 한다. 북한의 방사포 이른바 다연장 로켓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본격 등장했다. 소련과 독일이 로켓탄을 개발하고 미국도 대규모 로켓탄을 제작 로켓 포병을 운용했다. 오키나와 전투나 인천상륙작전에 이를 사용,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고 한다.지난 24일 북한이 새로이 연구 개발한 초대형 방사포를 성공적으로 시험했다. 김정은 국방위원장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무기”라며 크게 기뻐했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이 초대형 방사포라고 이름 붙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미사일급 방사포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북한이 사거리와 고도를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단거리 타격 능력을 완성시킨 것 같다”고 분석했다.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 북한 등 국제사회 안보질서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미 대통령조차도 북한의 방사포 사격에 대해 남의 말 하듯 하니 세상이 달라진 것인지 어리둥절하다. 그런데도 정부의 반응은 유유자적이다. 정말로 이래도 되는 걸까./우정구(논설위원)

2019-08-27

저금리 시대 인프라 펀드 투자

김학주 한동대 교수최근 주가 하락을 둘러싸고 경기침체가 오는 것 아니냐는 공포감이 조성되고 있다. 장단기금리차가 다시 역전될 조짐을 보이자 그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경기침체는 이미 도래했다고 판단된다. 과거와 형태만 다를 뿐이다. 과거 성장기 때 침체가 오는 경로는 성장을 낙관해서 설비투자가 지나치게 이뤄진데 따른 공급과잉이며, 그 설비가 부실화되면 거기에 돈을 빌려준 은행이 부실해진다. 은행은 경제 시스템의 신경이므로 이것이 마비되면 쇼크에 빠진다.그렇게 부작용이 화끈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만성적 침체에 시달린다. 민간 소비 및 투자가 위축되므로 정부가 빚을 내서 대신 투자하는 국면이다. 즉 민간 부채가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 부채로 넘어가 부실이 터지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 증시에 충격이 발생해도 오래가지 않고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만성적 침체가 근본적으로 사라지려면 노인계층이 줄어들고, 인구구조가 젊게 바뀌어야 한다. 관건은 그때까지 다음 세대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안기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후에도 누적 부채로 인해 회복이 더딜 것이므로 저성장 저금리 시대는 매우 오래갈 것이고,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이렇게 참을 수 없이 낮은 수익률의 시대에 채권과 주식 사이의 중위험 중수익 상품으로 해외 인프라 펀드나 부동산 투자신탁회사(REIT)를 이용해 볼 필요가 있다.이들 상품의 장점은 첫째, 세계적으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증가하므로 인프라 수요가 안정 성장한다는 것이다. 둘째, 인프라나 상업용 부동산의 경우 단일 프로젝트이므로 추가 투자가 필요 없는 바, 벌어들인 이익의 대부분이 배당된다. 즉 배당성향이 높다. 요즘에는 실물의 증권화로 인해 유동성이 좋은 인프라 펀드나 REIT 상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심지어 다양한 인프라를 섞어 놓은 것도 있다.특히 인프라에 관심이 생기는 이유는 민간투자가 위축되어 정부가 빚을 내어 대신 투자하는 규모가 커질텐데 그 빚은 다음 세대가 갚아야 한다. 따라서 정부도 다음 세대에 유리한 분야에 투자를 할 수 밖에 없다. 즉 친환경이나 경제의 효율성 개선을 위한 인프라에 투자가 집중될 것이다.대표적인 예로 친환경을 위한 송전 인프라, 5G보급 관련 통신 인프라 등이 있다. 특히 미국같이 광활한 지역에는 기지국 역할을 하는 전파 송수신탑을 통신사에 임대하는 서비스 수요가 늘어날 것이다. 아메리칸 타워, 크라운 캐슬 등이 대표적 업체이며 장기적으로 3%대의 연간 배당수익률을 기대해 볼 수 있다.한편 셰일가스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어 이를 실어 나르기 위한 파이프 수요도 증가할 것이고, 인구노령화로 인한 병원 및 의료시설에도 투자가 집중될 것이다. 결국 이런 인프라 사업이 확대되며 시중 자금이 관련 펀드로 몰릴 것으로 보인다.일각에서는 메트로폴리탄이 더 확대될 것으로 예측하여 도로나 공항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판단하지만 5G 기반의 원격화상통신 기술이 발달할수록 도시는 점점 더 작아질 것이다. 이것이 스마트한 것 아닌가?

2019-08-27

변화를 강요당한다는 것-푸레이의 죽음에 대해

푸레이(傅雷)는 1908년 상하이에서 태어났다.프랑스 유학 후 대학에서 미술사와 프랑스어를 강의했다. 이러한 푸레이는 부인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길지 않은 그의 유서에는 그가 자살한 이유와 함께 자잘한 당부가 담겨 있다.소위 반당죄의 물증(작은 거울과 퇴색한 옛 화보 한 장)이 우리 집에서 발견된 물증 때문에 입이 백 개라도 변명할 길이 없으나, 우리는 죽어도 우리 물건이란 걸 인정할 수 없네(정말 맡긴 상자 안에서 발견된 것이네). 우리에게 다른 죄가 있다면 몰라도 지금껏 반당적 사상이 없었네. 우리도 발견된 물증 때문에 입이 있어도 변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영명한 공산당의 영도와 위대한 모(毛)주석의 영도 아래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은 결코 그것 때문에 중형을 판결하지는 않을 거라 믿네. 다만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사는 시간은 감옥에 있는 것보다 더 힘드네. …략… 부탁하는 몇 가지 일은 아래에 적었네.1) 9월분 집세 55.29원을 대신 납부하여 주게(현금이 있네). …략…11) 현금 53.30원은 우리 화장 비용으로 써주게. …략…13) 기타 가구는 자네가 처리하게. 책과 글씨, 그림은 관련 부서의 결정에 따라 처리하게.자네에게 수고를 끼치게 되어 정말 마음이 편치 않지만 달리 부탁할 사람이 없으니 이해해 주기 바라네.1966년 9월 2일 밤공산주의 국가로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직전 동양에서 가장 코스모폴리탄이었던 상하이, 그곳에서 주로 프랑스 문학을 번역했던 국제인 푸레이의 유서는 단호하지만, 어떤 비장함도 슬픔도 없다. 일상적이고 사무적인 일을 부탁하는 듯한 이 유서는 그래서 더욱 더 슬프다.1966년, 중국 내에 잔존하는 부르주아 세력을 타도한다는 명목 아래 실시된 문화대혁명의 열기로 뜨거웠다. 회의주의자이자 비판적 지식분자로 낙인 찍혔던 푸레이는 가택수색을 당하게 되고 ‘작은 거울과 퇴색한 옛 화보 한 장’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모택동과 대척점에 있었던 장개석과 관련된 물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자는 푸레이의 고모가 맡긴 상자였고, 그 상자에 원래부터 저러한 물건이 들어 있었는지 푸레이는 알 길이 없었다. 푸레이는 끝까지 그 상자의 주인을 말하지 않았고 대우파분자(大右派分子)로 몰려 사형은 아니더라도 감옥에 가야할 신세였다.그는 감옥에 가는 것보다 죄를 뒤집어쓰고 사는 시간이 더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죄를 뒤집어쓰고 사는 시간’이란 개인에 국한된 시간이 아니라 중국 전체에 대한 이야기로 들린다. 실제로 문화혁명 동안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모두 재갈이 물린 채 살아가게 된다. 말하는 것을 멈추게 하는 일, 당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사회, 이러한 사회에서 지식인은 죄가 있든 없든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삶을 푸레이는 단호히 거부했다.그랬다. 푸레이는 프랑스에서 4년 동안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서구의 자유로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등을 깊이 체화하였을 것이다. 그가 살아온 삶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50년 이후의 삶의 방식과는 너무도 격차가 컸을 것이다. 1957년 반우파 투쟁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그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인격’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내려놓지 않았다. 1958년, 푸레이의 아들이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부총이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자 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자 즉 우파분자로 낙인찍히게 된다.이후 재갈이 물린 비판적 지식인은 허무와 비관주의에 휩싸였다. 그가 죽은 것은 1966년이나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이 영국으로 망명한 1958년부터 그의 죽음은 시작됐다. 그 죽음의 완성이 1966년일 뿐 그가 죽은 해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죽은 채로 살아온 자의 유서라고 해도 그의 유서에는 덧붙일 말이 있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푸레이는 유서에 자신의 억울함을 적극적으로 호소하거나 해명하지 않았다. 다만 유서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여 자신의 물건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가 명시하고 있는 것은 예금, 현금가구, 시계 등 사소한 것들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것들은 이미 그의 일부가 되어버린 물건, 자신의 과거가 기입된 물건들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부르주아의 사적 소유에 대한 집착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전에 이미 그의 일부가 되어 있었던 물건이다. 그런 점에서 이 유서를 하나의 알레고리로도 읽을 수 있다. 공산화되기 이전에 형성된 자신의 가치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자유에 대한 신념, 이것은 바꾸거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이미 자신의 몸이 되어버린 사유와 사상들, 영국으로 망명한 아들까지 버려야 하는 사회, 결코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것들마저 버리게 하는 사회에서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주의 이전 사회에서 흘러 들어온 찌꺼기”였고, 홍위병 입장에서 보면 그는 구제불능이었을 것이다.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변화를 강요하는 변화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그러한 변화 앞이라면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2019-08-27

개를 진정시키는 신호, 카밍시그널(上)

행동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바디랭귀지라 불리는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은 표정, 몸짓, 신체접촉, 움직임, 자세, 신체장식(옷, 액세서리, 머리모양, 문신 등) 등을 통해 이뤄지는 정보전달 방법이다. 행동은 사람의 진정한 마음상태를 보여주기 때문에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꾸미지 않은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의도의 표출이다.개들이 다른 개들과 소통할 때 사용하는 몸짓 언어를 카밍시그널(calming signal)이라 하는데 상대를 온화하게 하고 진정시키며 조용하게 만드는 반려견들의 신호를 의미한다. 개들은 공포를 느끼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불안할 때 다양한 카밍시그널을 통해 자신과 주위의 동료들을 진정시킨다.대표적인 카밍시그널은 고개돌리기이다. 개가 고개를 돌리는 것은 상대에게 불안해하지 마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인데, 적대감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고개를 돌리는 시그널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으며 아주 살짝 돌리는 것부터 고개를 돌리고 몇초간 가만히 있는 것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을 응용하여 사람이 개와 마주칠 때 가볍게 고개를 돌려주거나 눈을 감거나 다른 곳을 살짝 보고 다시 보는 행동을 해준다면 개들이 조금은 편하게 느낄 수 있다.개가 사람을 무서워해서 짖거나 으르렁거릴 때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얼굴을 돌려주면 좋고,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치는 것을 개들은 싫어하므로 눈을 감거나 시선을 피해주면 “나는 너에게 적대감이 없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개들끼리 서로 쳐다볼 때 상대 개가 자신의 눈빛에서 위협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눈을 작게 뜨거나 게슴츠레하게 떠서 위협적이지 않은 눈길로 부드럽게 쳐다보는 행동을 하는데 개들에게 사람보호자와 눈마주치기를 가르치고 싶을 때는 부드럽고 친근한 눈빛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개가 등을 옆이나 뒤로 돌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상대의 흥분된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함이다. 다른 개가 자신을 향해 으르렁 거리거나 너무 빨리 다가와 불안한 상태를 느끼거나 위협을 느끼면 개들은 등을 돌린다. 사람이 화난 표정을 짓거나 짜증을 낼 때, 신경질적으로 목줄을 당길때에도 개들은 등을 돌리곤 하는데 어린강아지들이 귀찮게 할 때에 나이많은 개들이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등을 돌리는 경우를 많이 볼수 있다. 개들이 뛰어오르거나 귀찮게 할 때 등을 돌리면 개들은 이것을 아주 강한 시그널로 받아들일 것이다.코를 핥는 개는 자신이 불편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인데, 가까운 곳에서 여러사람이 만지려한다거나 너무 직선적으로 접근하거나 손을 벌리는 행동 등은 개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고 이럴 때 개들은 코를 핥는다.이동훈카밍시그널과 일상의 보통 행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의 행동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사실 개의 행동을 관찰하여 카밍시그널을 구분하는 것은 꾸준한 연습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개의 몸짓 관찰을 통해 카밍시그널을 이해할 수 있다면, 반려견과 보다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고 행복한 삶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것이다.개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운전을 배우는 것과 비슷한데, 귀에 이어폰을 꽂고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단순히 개의 행동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은 관찰을 할 수 있을 때 개의 카밍시그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서라벌대 반려동물연구소장·마사과 교수

2019-08-27

공간은 삶의 실체다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학내 청소노동자도 엄연한 학교의 구성원이다.” 서울대 청소노동자가 휴게실에서 숨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보도되었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옆 구석에 청소노동자들의 휴게실이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폭염에 창문도 없는 벽에 선풍기 한 대만 매달려 있었다. 청소노동자들은 손 선풍기를 목에 걸고 폭염을 견디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열악한 휴게실 환경은 서울대학교만의 일은 아니다. 캠퍼스 곳곳에서 수고로운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청소노동자들의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공간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보여준다. 로널드 아들러는 우리가 공간을 이용하는 방식은 힘과 계급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일터, 방, 집, 우리가 권리를 갖는 물리적 공간은 모두 우리의 영역이다. 영역은 고정되어 있다.” 권력이 클수록 공간은 넓어지고 성역화된다. 군대만 보더라도 일반 병사는 한 막사에서 자고, 장교는 개인 방을 갖고, 장군은 정부가 제공하는 집을 배정받는다. 이처럼 더 큰 영역과 사생활을 허용하는 공간은 위상에 비례한다. 공간을 통해 권력과 지위를 드러내고 구분짓는다.대학 캠퍼스도 예외가 아니다. 대학 내 위계구조에 따라 공간 격차는 당연시된다. 교수 연구실조차 정년과 비정년에 따라 다르다. 학생들을 더 많이 만나는 교육교수지만 비정년인 경우 공동연구실을 배정받는다. 학생들이 오면 장소를 찾아 이동해야 하고, 방학에는 상담실이 비어도 공동으로 비좁은 연구실을 감수해야 한다. 대학내 공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구분 짓기’에 따라 공간이 있어도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쪽방 같았던 청소노동자들의 쉼터는 이러한 구조를 반영한 것이다.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은 대학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다. 학교 본부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투명인간처럼 존재한다. 어디에 이들의 휴게실이 있는지 대부분의 대학 구성원들은 알지 못한다. 문패도 없는 허접하고 불편한 공간에 잠시 몸을 내려놓을 뿐이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서울대 청소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며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노회찬의 연설이 떠오르는 이유다.“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다.” 스테판 에셀은 최상위와 극빈층 사이의 커져가는 격차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일들에 ‘분노하라’고 외친다. 이번 서울대 사태를 계기로 대학 사회는 모든 구성원이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데 관심이 있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무엇보다 새벽부터 일터로 나와 고된 노동으로 지친 몸을 잠시나마 쉴 수 있게 제대로 된 휴게실부터 마련해 주어야 한다. 청소노동자를 지하 휴게실 폭염에 노출되도록 방치한 것은 우리의 무관심이 낳은 폭력이다. 미화노동자를 비롯해 대학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따스한 관심은, 공간 변화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공간은 우리 삶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2019-08-26

인싸문화

인사이더의 줄임말인 ‘인싸’는 유행을 이끌고 친구가 많은 사람을 뜻하는 말로, 유행에 민감한 세대로 꼽히는 초등학생들이 학교 울타리를 넘어 유튜브를 통해 ‘인싸춤’, ‘인싸템’ 같은 유행을 확산시킨다는 점에서 이들의 문화를 이른바 ‘인싸문화’라고 한다. 인싸문화의 대표적인 실례는 눈알젤리, 먹는 색종이같이 이름조차 난감한 군것질거리들이 초등학생들의 ‘인싸 간식’으로 떠오른 것이나, 15초짜리 동영상 편집 앱이 10대들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 등이다.실제로 여자 아이돌이 착용해 유행하기 시작한 ‘반짝이 붙임 머리’를 해 달라고 조르는 여학생이나 ‘인스’(인쇄소 스티커·가위로 하나씩 오려 사용하는 스티커)가 유행하자 예쁜 스티커들을 한가득 사다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눠주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초등학교 여학생들 사이에 궁극의 ‘인싸템’(유행 아이템)으로 꼽히는 건 ‘구관(구체관절) 인형’이다. 관절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며, 머리와 옷, 신발, 화장까지 원하는 대로 꾸밀 수 있는 구관 인형은 키즈 유튜버들의 체험 영상 조회수가 100만건을 넘어선다. 특히 요즘 초등학생의 ‘인싸 문화’는 학교 울타리를 넘어 유튜브를 통해 급속도로 퍼져 파급력이 훨씬 크다. 대중문화계가 인싸문화에 반응해 마케팅에 활용하게 된 것도 전파속도가 빨라지는 이유다.또래와 부대낄 기회조차 없는 어린이들이 서로 짧은 말과 영상으로 자극하는 문화에 갇히다보니 자연스레 유튜브에 몰입하고, 유행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부모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소중히 여길 수 있도록 대화로써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 줘야 한다는 게 전문가의 조언이다. 자녀교육만큼 어려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8-26

양초와 다이아몬드(1)

지금 시각 새벽 4시 7분. 책을 읽으러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밤새 책을 읽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저도 새벽 일찍 필사와 쓰기를 끝내고 랩톱을 켜고 칼럼 쓸 준비를 합니다. 클북 새벽 천장과 책상 스탠드에 달린 수많은 LED 전구들. 노트북의 전원, 이 모든 것이 전기라는 에너지를 우리가 자유롭게 쓸 수 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전기를 발명한 고마운 과학자를 아시지요.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입니다.런던 근교 뉴잉턴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패러데이는 흙수저 출신입니다. 끔찍하게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냅니다. 학교 따위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친구들이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인 열두 살에 가난을 피해 런던으로 이사합니다. 이때부터 패러데이는 알바를 시작하지요. 조지 리보가 운영하는 서점에서 사환으로 첫 일을 맡습니다. 신문을 배달하고 사람들이 읽고 버린 신문을 수집하는 보잘것없는 일들입니다.서점 주인 리보의 마음에 쏙 들지요. 성실하고 총명한데다 맡긴 일은 완벽하게 해 내는 책임감까지 갖추고 있는 아이를, 서점에서 직영하는 책 제본소에 투입합니다. 제본공이 되는 도제 과정을 수업료까지 면제해 주면서 7년을 가르칩니다. 패러데이는 프로 제본가로 성장하며 다락방에서 생활합니다.패러데이가 서점과 제본소에서 생활한 것은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주위에 책이 가득했으니까요. 주인 허락으로 제본한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낮에는 책을 정성스레 만들고 밤에는 책 내용에 푹 빠져듭니다. 닥치는 대로 읽었던 수많은 책이 무학자 패러데이를 세계 최고 지성인으로 성장하게 만듭니다. 패러데이는 1809년 아이작 와츠가 쓴 ‘정신의 개선-The Improvement of the Mind’ 책을 우연히 만납니다. (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8-26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변명

강희룡 서예가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최한기 선생은 ‘인정, 측인문(人政, 測人門)’에서 공직으로 나아가는 인재감별의 다섯 가지 대원칙을 언급했다. 이 덕목들의 출처는 사기(史記) ‘위세가(魏世家)’로 본래는 나라의 재상을 뽑는 덕목이었는데, 최한기는 모든 인사에 적용할 수 있는 광범위한 덕목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다섯 가지 덕목은 ‘첫째, 평소에 그가 어떤 사람과 친했는지 살펴보고, 둘째, 가난할 때에 그가 어떤 것을 취하지 않았는지 살펴보며, 셋째, 처지가 궁할 때에 그가 어떤 일을 하지 않는지 살펴보고, 넷째, 현달(賢達)할 때에 그가 어떤 사람을 추천하는지 살펴보며, 끝으로 부유할 때에 얼마나 남에게 베푸는지 살펴보는 것이 실로 사람을 감별하는 대원칙이다’라고 하였다.전국시대 위(魏)나라의 기틀을 잡은 명군 문후(文侯)는 위성자와 적황 중 누구를 재상으로 삼을지 고민하다가 이극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이때 이극이 재상을 감별하는 기준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위 5가지 덕목이었다. 결과는 위성자가 재상이 되자 적황은 이극에게 따졌다. 그러자 이극이 ‘위성자는 자신의 봉록 중 9할을 남에게 베풀어서 복자하, 전자방, 단간목의 세 현인을 초빙하여 임금께서 이 세 사람을 모두 스승으로 삼았다. 반면 그대가 추천한 사람들은 모두 신하로 삼았다. 그러니 그대가 어찌 위성자와 비교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적황도 승복하고 말았다. 사람이 지닌 인의예지의 덕성에 대한 신뢰는 공자와 맹자를 정점으로 지속적으로 내려온 유학(儒學)의 불문율이다. 이번 정부의 증폭 개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조국 전 민정수석이 서울대에 복직 후 한 달 만에 다시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됐기에 ‘조국개각’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의 검증과정에서 드러난 ‘사노맹’활동으로부터 대학복직의 ‘폴리페서’로 지탄을 받더니 강의 없는 방학기간인 8월 교수월급으로 수백 만원을 받아 챙김으로써 ‘무노동 유임금’ 논란에 휩싸였다. 후보자의 국회 재산 신고액은 무려 56억원으로 이 중 예금만 16억원이 넘는다. 더 큰 의혹은 후보자 가족이 운영하는 웅동학원을 둘러싼 채권채무의 소송관계, 사모펀드의 75억원 투자 경위, 증여세 미납부, 동생가족의 위장이혼, 후보자의 낙제한 딸이 받은 황제 장학금 논란과 논문 1저자 파문 등 수많은 의혹이 일고 있다. 이를 두고 ‘역시 가진 자들의 대입 준비는 다르다’라며 범죄형 특혜논란을 국민은 비웃고 있다.국민의 분노를 자아냈던 정유라 사건이나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은 차라리 그 반칙 정도가 이 사건에 비해 약해 보인다. 청와대 공직인사 배제원칙인 5대 비리 이외에도 매일 새로운 의혹이 추가되고 일부 의혹에 대해서는 고발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었다. 청와대의 이번 인사 기준은 도덕성을 기본으로 하고, 해당 분야 전문성을 우선 고려했다고 밝혔다. 만약에 인사청문회 결과를 무시하고 물욕과 권력의 탐욕에 찌든 이런 부적격자가 그것도 법무장관에 임명이 강행된다면 검찰 수사를 받는 현직 법무부 장관이라는 희대(稀代)의 기록이 불가피해진다. 결자해지의 정신으로 청와대가 지명을 거둬들임으로써 국민 앞에 스스로 밝힌 최소한의 인사원칙이라도 지키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2019-08-26

포항의 광복축구

이순영수필가올해는 광복이 된 지 74년이 되는 해이다. 나라 잃은 서러움과 그로 인한 숱한 고통들에서 해방이 된 날이다. 삼십여 년 동안 참고 참았던 함성을 마음껏 터뜨렸던 바로 그날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으니 바닷물도 춤을 추고 산천초목도 춤을 추었으리라. 내 나라 내 땅에서 내 뜻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찾았으니 그 감격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었으랴.70여 년 전, 포항 신광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울분을 토한 날을 잊지 않기 위하여, 또 다시 그런 억압의 시대를 당하지 않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단결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1947년 8월 15일, 영일군(포항시 통합 전)을 대표하는 신광의 축구선수들이 중심이 되어 광복절을 기념하는 축구를 했다. 짚으로 새끼를 꼬아 공을 만들고 골네트도 새끼줄을 엮어서 만들었다. 선수들은 흰색바지·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땀을 쏟아내며 공을 차기 시작했다.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축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8월15일 축구는 다시 시작되었다. 어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축구를 중심으로 지역민들은 한마음으로 뭉쳤던 것이다. 이후 25년 동안 그 맥을 이어왔으나 1980년과 1981년에 극심한 가뭄과 냉해로 축구를 개최하지 못했다. 이후 1982년부터 오늘날까지 해마다 광복절이면 운동장에 모여서 축구를 한다. 2019년, 광복 제74주년·신광면민 친선축구 제68주년을 기념하는 ‘광복 축구’가 성황리에 열렸다.8월13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3일 동안 22개 마을에서 출전한 선수들이 경기를 거쳐 8월15일 결승전을 했다. 개막식을 한 날은 30도가 넘는 무더위에 내리쬐는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뜨거운 운동장에서 공을 찼다. 결승전을 한 날은 태풍 크로사의 영향으로 강풍을 동반한 비가 내렸지만 선수들은 비를 흠뻑 맞으며 빗물이 흥건한 운동장에서 공을 쫓아 힘껏 뛰었다. 더 놀라운 일은 각 마을마다 응원을 하러 나온 연로하신 분들이 운동장에 마련된 천막 아래에 가득히 앉아서 자리를 떠나지 않는 모습이었다.타지에서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은 마을사람들의 손을 잡고 안부를 물으며 정을 나누었다. 축구경기에서 승패는 문제 삼지 않았다. 져도 좋았다. 잘 했다고 마을사람들은 칭찬이 자자했다. 축구를 중심으로 팔씨름과 윷놀이를 하여 순위에 따라 상장과 트로피 및 부상이 수여되었다. 부상은 돼지고기다. 해마다 이 행사를 할 때 돼지 서른 마리 쯤을 잡는단다. 수상을 못한 동네는 상을 받은 마을에서 고기를 나누어 주기도 하여 신광면민 모두가 잔치를 연다.시상식이 끝난 운동장에서는 신명난 축제가 열렸다. 신광면에서 태어난 가수나 개그맨들이 고향에서 한바탕 신나는 마당을 펼쳤다. 풍물단을 앞세우고 난타·색소폰 공연에 이어 초대가수와 마을사람들의 노래자랑으로 운동장은 아주 흥겨웠다. 행운권을 추첨하여 자전거와 다양한 전자제품들이 선물로 그득했다. 남녀노소 모두 빗물에 젖고 땀에 젖어도 함께 즐거웠다.폭염주의보가 발표된 날에도, 태풍이 지나가는 날에도 음식을 장만하고 행사진행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관계자들의 표정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포항시 북구 신광면에서 개최하는 대한민국 ‘광복축구’. 면면히 이어왔으며 또한 대대로 이어갈 것을 응원한다.

2019-08-26

솥이 점점 뜨거워지면 미꾸라지들이 두부 속으로 파고 든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다. 어설프게 아는 게 차라리 모르니만 못하다. “추어탕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말한다. 정작 마지막에는 ‘나만의 추어탕’을 설명한다. ‘서울식 추어탕’ ‘호남식 추어탕’에 느닷없는 ‘원주 추어탕’도 나온다. 추어탕(鰌魚湯)과 추탕(鰍湯), 미꾸라지 튀김과 숙회(熟鱠)가 나오고, ‘통추’ ‘갈추’ ‘산초’ ‘초피’ ‘제피’가 등장하다가 마지막에는 “국산이 어딨어? 전부 중국산 양식이잖아!”로 허망하게 끝난다.추어탕은 두 종류다. ‘한양, 서울식’이 있고, ‘농촌형 지방 추어탕’이 있다. 한양식은 붉고 화려하다. 원래는 ‘통추’였다. 농촌형은 소박하다. 붉지 않고 맑다. ‘갈추’가 원칙이다. ‘통추’는 통미꾸라지, ‘갈추’는 갈아서 쓴 것이다.‘미꾸라지로 만든 음식’에 대한 가장 정확한 자료는 오주 이규경(1788~1856년)의 ‘오주연문장전산고’다. ‘인사편_복식류_제선(諸膳)’의 내용이다.추두부탕(鰍豆腐湯). 계곡의 진흙, 모래가 있는 물에서 미꾸라지를 잡는다. 많이 잡으면, 물을 담은 항아리에 넣어둔다. 하루 세 번 정도 물을 갈아준다. 5~6일 정도, 미꾸라지는 진흙을 토해낸다. 토해내는 진흙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후, 솥에 물을 붓고 크게 썬 두부 몇 덩어리를 넣는다. 솥의 물속에 미꾸라지 50~60마리를 넣는다. 솥 아래에 불을 때면 솥은 점점 뜨거워진다. 미꾸라지 무리는 열을 피해 두부 속으로 들어간다. 계속 불을 때면 솥이 끓으면서 미꾸라지도 익는다. 끄집어내서 썬다. 미꾸라지는 개개의 두부 속에 콕 박혀 있다. 참기름으로 지진다. 두부 전을 먼저 끓이고 메밀가루를 섞는다. 달걀 전(지단)을 얹는다. 이렇게 탕을 끓인다. 기름기가 넉넉하고 맛이 좋다. 이 탕을 요즘 한양의 반인(泮人)들이 즐겨 먹는다.흔히 이 내용을 추어탕에 대한 가장 상세한 자료로 이야기한다. 상세하다는 표현은 맞다. 오주가 기록한 ‘추두부탕’은 추어탕과 다르다. 추어탕은 오주의 시대에 처음 나타난 음식일까? 그렇지도 않다. 추어탕, 미꾸라지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길다.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고려도경)_제23권_잡속2’에 이미 미꾸라지가 등장한다.고려 풍속에 (중략)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 미꾸라지[鰌], 전복[鰒], 조개[蚌], 진주조개[珠母], 왕새우[蝦王], 문합(文蛤), 붉은게[紫蟹], 굴[蠣房], 거북이다리[龜脚], 해조(海藻), 다시마[昆布]는 귀천 없이 잘 먹는데, 구미는 돋구어 주나 냄새가 나고 비리고 맛이 짜 오래 먹으면 싫어진다.‘고려도경’은 1123년에 편찬한 책이다. 오주의 시대보다 700년 이상 앞선다. 위 내용에 나오는 식재료들은 대부분이 해산물이다. 바다에서 나오는 것들은 채취가 힘들다. 굴이나 다시마, 작은 게 등을 많이 먹은 것은 이런 식재료를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다.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미꾸라지도 마찬가지다. 바다 생선, 해조류보다 더 구하기 쉬운 것은 미꾸라지 같은 민물 생선이다. 가난한 백성들은 강, 하천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민물 생선을 오래전부터 먹었다.우리는 미꾸라지를 오래전부터 먹었다. 음식으로,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다.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_율기6조_칙궁’ 편에 나오는 내용이다.“(전략) 유관현(柳觀鉉)은 성품이 검약(儉約)하였다. 그는 벼슬살이할 때 성대한 음식상을 받고는, “시골의 미꾸라지찜만 못하다” 하였고, 기생의 노래를 듣고는, “논두렁의 농부 노래만도 못하다” 하였다.양파 유관현(1692~1764년)은 경북 안동 출신이다. 양파가 지은 ‘정재종택’이 안동시 임동면에 남아 있다. 양파가 비유로 든 것이 바로 ‘성대한 음식상’과 ‘시골 미꾸라지찜’이다. ‘시골 미꾸라지찜’은 가장 소박한 음식이었다. 양파의 미꾸라지찜은 경북 안동 산일 가능성이 크다. 미꾸라지 음식은 한반도에 흔하게 있었다.양파 유관현 뒤 시대 사람인 풍석 서유구(1764∼1845년)는 ‘난호어목지’에서 “(미꾸라지)살은 기름이 많고 살찌고 맛이 있으며 시골 사람은 이를 잡아 맑은 물에 넣어두고 진흙을 다 토하기를 기다려 죽을 끓이는데 별미”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풍석은 미꾸라지를 이추(泥鰍)라고 표기했고 한글로는 ‘밋구리’라 한다고 적었다.오주 이규경은 ‘추두부탕’을 그렸지만, 풍석은 농촌의 미꾸라지탕 혹은 미꾸라지 죽을 언급한다. 오주와 풍석은 같은 시대 사람이다. 풍석 서유구가 약 20여 년 앞선다. 두 사람 모두 실학자였고, 서민들의 풍습을 구체적으로 기술했다.오주가 설명한 ‘추두부탕’은 오늘날 서울식 추탕으로 진화한다. 풍석이 설명한 ‘밋구리 죽’은 오늘날 지방의 추어탕과 비슷하다. 오주는 당시 한양의 풍습을, 풍석은 시골 농촌의 추어탕을 그렸다.오주 이규경의 ‘추두부탕’은 상당히 화려하다. 이른바 ‘서울식 추어탕’의 모습이다.‘반인’들이 즐겨 먹는다고 했다. 반인(伴人)은, 성균관에서 일하는 천민 노비다. 신분은 노비지만 조선 말기 쇠고기 독점권 등을 확보하여 막대한 부를 손에 쥔다. 반인들은 성균관 부근의 폐쇄적인 ‘반촌(泮村)’에 살며,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커뮤니티를 만든다.성균관의 주요 기능은 교육과 공자 제사다. 공자 제사에는 반드시 귀한 쇠고기를 사용한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일정량의 쇠고기를 공급했다. 과거를 통하여 언젠가는 국가를 경영할 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반인 중에는 천민 백정도 있다. 이들은 대성전 제사와 성균관 유생을 위한 쇠고기 준비 등을 도맡는다. 조선 후기, 이들은 한양의 쇠고기 유통에 참여한다. 반인들은 재물을 모았다. 재료가 넉넉한 ‘추두부탕’을 즐겨 먹었던 이유다. 두부, 메밀가루, 달걀 전 등은 귀한 식재료다. 오늘날 서울의 추어탕 그중에서도 ‘통추 추어탕’이 남은 이유다. 뿌리는 역시 오주의 기록에 나오는 ‘반인들의 추두부탕’이다.‘오주연문장전산고’가 발간된 100년 후. 일제강점기 경성에는 몇몇 추어탕 집이 문을 연다. ‘용금옥’ ‘형제추탕’ ‘곰보추탕’ ‘희망의집’ 등이다. ‘희망의집’은 오래전에 문을 닫았고, ‘곰보추탕’도 서너 해 전, 문을 닫았다. 1920년대 문을 연 ‘형제추탕’은 장소를 옮겨 운영 중이다. ‘용금옥’은 한 번 이사한 후, 꾸준히 영업 중이다. 1930년대 문을 연 서울의 추어탕 집들은 이제 80년의 업력을 넘겼다.서울 추어탕은 고명이 화려하다. 문을 닫은 ‘곰보추탕’의 조명숙 대표를 만난 적이 있다. “추어탕에 뭐를 넣느냐?”는 질문에 조 대표는 열여섯 가지의 고명, 재료 목록을 보여줬다. 쇠고기 양지로 국물을 내고, 두부, 유부 등을 사용한다. 나물 종류도 다양했다. 달걀과 버섯 등 귀한 식재료도 넉넉하게 넣는다. 두부나 유부 등을 사용하는 것은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추두부탕’과 비슷하다.농촌 지역인 영, 호남의 추어탕은 서울식과 전혀 다르다.대구 ‘상주식당’의 추어탕은 단순하다. 얼갈이배추 등이 고명의 전부다. 간장으로 간을 잡는다. 대부분의 농촌형 추어탕은 된장을 풀어서 사용한다. 고춧가루를 쓰는 경우도 드물다. 서울식 추어탕이 고춧가루를 넣은 붉은색의 국물이라면 농촌형 추어탕은 우거지 등 채소잎 위주의 비교적 맑은 국물이다. 반드시 초피(산초, 제피)가루를 사용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비린내를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식 추어탕은 국을 끓일 때 산초 혹은 생강 등을 사용한다. 더하여 고추의 매운맛으로 비린내를 잡는다.서울식 추어탕, ‘프리미엄 급 추어탕’은 한양의 반인들이 즐겨 먹었다. 농촌에서 미꾸라지 죽을 끓이면서 두부, 메밀가루, 달걀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준비하기는 힘들다. 육수를 내는 것도 힘들다. 논배미에서 간단하게 먹는 것은 역시 ‘미꾸라지+간단한 채소+된장’ 정도다. ‘통추’가 아니라 ‘갈추’를 선택한 것도 이유가 있다. 고명, 재료가 빈약한데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고 음식을 만들 수는 없다. 미꾸라지를 한번 삶은 다음, 부수면 살이 뼈에서 떨어진다. 곱게 부순 살을 모아서 국물에 넣는다. 대구 ‘상주식당’의 추어탕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이게 추어탕이야? 추어탕에 미꾸라지가 없네”라고 하는 이유다.경북 예천의 ‘유정식당’은 변형된 농촌 추어탕이다. 색깔이 붉다. 추어탕이 아니라 미꾸라지 전골이다. 자연산 미꾸라지, 깻잎 등 채소를 넣고 푹 끓인다. ‘통추 전골’이다. ‘농촌형 추어탕’이 얼마간의 재료를 더한 ‘변형 미꾸라지 전골’로 진화했다. /맛칼럼니스트

2019-08-26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본 순수의 음악 - 펠릭스 멘델스존

대문호 괴테(1749∼1832)는 “음악은 모든 예술 장르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라고 했다.하지만 음악가들에게는 음악이라는 예술의 형태에 늘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음악에는 구체적인 형태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음향을 저장하는 매체가 있어 음악을 재생하는데 문제가 없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음악은 연주가 끝나면 실체 없이 증발하는 존재였다. 지금은 주로 생략되어 연주되지만 소나타형식의 제시부가 반복되어 연주되는 것도 1주제와 2주제를 기억해 달라는 작곡가의 소망이었다. 생텍쥐페리(1900∼1944)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꽃이 아름다운 것은 지기 때문이다” 라고 했듯이 음악은 화려하게 피었다가 청중들의 마음속에만 남아있는 꽃과 같았다.음악에 구체적인 이미지를 도입하고 싶어 하는 소망은 ‘표제음악’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지만 그 이전 ‘무지카 레세르바타’, ‘뮤직 페인팅’, ‘라이트 모티브’ 등 다양한 시도로 나타났으며 19세기 말에 와서는 ‘인상파 음악’으로 그 정점을 찍는다. 인상파 음악이란 쉽게 말해서 순간적인 영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려는 시도인데 19세기 말 영화가 발명되고 20세기에 유성영화로 발전하며, 구체적인 영상을 위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서부터 음악의 형상화를 위한 노력들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작곡자는 펠릭스 멘델스존(J.L.F.Mendelsshon·1809∼1947)이다. 필자가 유년 시절 처음 접했던 멘델스존의 음악은 서곡‘헤브리데스(Die Hebridenop.26)’였다. 이 곡은 ‘핑갈의 동굴’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음악은 구체적인 이미지가 느껴지는 곡이다. 거친 바람이 부는 푸른 바닷가에 물새가 날고 있으며, 안개 낀 해안으로 외로운 배를 타고 황량한 섬으로 다가서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멘델스존은 실제 그림 실력이 뛰어나 훌륭한 풍경 수채화 작품들을 남기고 있으며 그 그림은 풍경의 어떤 특징을 나타내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선과 색의 조화를 추구한 작품들이다.그의 교향곡 제3번 ‘스코틀랜드(Scottish) op.56’도 이러한 회화적인 기법이 잘 표현된 곡인데 그의 나이 20세 때인 1829년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며 에딘 버러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오래된 예배당에 들러 “나는 믿는다. 내 스코틀랜드 교향곡의 시작 부분을 발견했다….”라고 했다. 이 부분을 보면 멘델스존은 시각적인 느낌으로 악상의 영감을 받은 듯 하며 이 곡의 첫 부분을 들어 보면 그 예배당이 어떤 모습을 하였을지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무리가 없다.멘델스존의 음악은 고정적인 음형이나 화음으로 이미지를 표현하려는 시도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으며 관현악에서 여러 악기의 조화로운 음색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멘델스존의 어린 시절은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고달프지 않았다. 전 유럽을 상대하는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오케스트라를 운영할 정도로 부유하였고 가정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 철학가 헤겔, 시인 하이네, 작곡가 시포어, 훔멜 등 당대 예술의 거장들이 집에 자주 왕래하여 그들과 교류하며 당대 최고의 학문과 교양을 쌓았으며, 10살 무렵에 이미 정치가 케이사르나 시인 오비디우스의 책을 원어로 읽었으며 인문학뿐만 아니라 기하학, 수학, 지리학 등에서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멘델스존은 좋은 환경 뿐만 아니라 다양한 천재적인 지능과 재능을 타고 났으며,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과 멘델스존의 어린 시절을 모두 겪은 괴테는 그 둘을 비교하며 “멘델스존에 비하면 모차르트는 혀 짧은 어린애에 불과하다”라며 그의 천재성을 극찬했으며 이러한 특징은 그의 극음악 ‘한여름밤의 꿈(Sommernachtstraum op.21,61-5)’에도 나타난다. 멘델스존은 17세에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읽고 깊게 감명을 받아 관현악 서곡을 작곡하는데 지금도 결혼식의 마지막 행진에 쓰이는 ‘결혼 행진곡(Wedding march)’이 포함된 전곡을 완성한 것은 17년 후인 그의 나이 34세 때이다.특이한 점은 극음악 ‘한여름밤의 꿈’ 전곡을 감상해 보면 다른 곡들과 서곡의 작곡 연차가 17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부분은 모차르트와 비교해 보면 매우 특이하다. 모차르트는 그의 17세 때의 음악과 30세 이후의 음악을 비교해보면 음악적인 내용이 매우 큰 차이가 난다. 음악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천재 작곡가로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을 꼽는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신동’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멘델스존도 ‘19세기의 모차르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청소년기 이후 경험했던 세월의 격랑이 달랐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과 좌절을 되풀이했으나 멘델스존은 이미 태생적으로만 귀족이 아닐 뿐 최고의 신분에 있었기 때문에 둘의 음악은 확연히 다른 것이다.멘델스존이 겪은 최고의 고난은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4살 위 누이인 파니 멘델스존을 잃은 것이었다. 둘은 수려한 외모도 닮았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재능도 나눠 가졌다. 아니 오히려 누이인 파니 멘델스존이 더 나은 음악적 재능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훗날 펠릭스 멘델스존은 “누이가 자신보다 더 훌륭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고 고백했으며, 나의 ‘칸토르(음악선생님)’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파니는 평생 400곡에 이르는 작품을 썼다고 전해지는데, 당시의 사회 풍조는 여성은 음악을 취미로만 즐길 뿐 전문적인 작곡가가 될 수 없는 풍토였다.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여자가 있을 자리는 살롱”이라며 음악의 길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파니는 작곡가의 길을 포기해야 했으며 그녀가 썼던 6개의 가곡들은 동생의 이름으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이 가곡집에 실린 작품 중 동생의 작품보다 누이의 작품이 더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멘델스존 남매는 음악의 동지이자 서로를 가장 잘 이해 해주는 친구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파니 멘델스존은 1847년 5월 피아노를 연습하다가 손에 감각이 사라지는 걸 느꼈고 그 날 저녁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누나가 죽은 6일 뒤 소식을 들은 멘델스존은 실신했으며 장례식과 추도식에도 참가하지 못하였다. 순탄하기만 했던 멘델스존에게는 큰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내성이 없었는지, 이후 얼굴이 검게 변하는 등 늙고 등이 굽은 구부정한 모습으로 그의 모습이 추하게 변해 버렸다고 한다.사랑하던 누이가 죽은 6개월 후 그의 동생 펠릭스 멘델스존도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38세였다.멘델스존의 요절은 많은 안타까움을 준다. 작품도 뛰어났지만 음악사의 발전에 남긴 업적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는 바흐(1685∼1750)의 ‘마태 수난곡’을 이름 모를 푸줏간에서 누렇게 변색된 채로 발견해 많은 준비를 거쳐 완성된 연주를 함으로써 잊혀졌던 바흐의 음악을 소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20세의 이른 나이에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면서 그 특유의 호기심과 도전정신으로 베토벤과 슈베르트 등의 숨겨진 작품들을 찾아내어 연주하였다.그리고 다른 작곡가와는 달리 그만이 물려받은 경제적인 능력으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학교인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설립한 음악 교육자이기도 한데 이곳은 쿠르트 마주어(1927∼2015), 레오시 야냐첵(1854∼1928) 등의 뛰어난 졸업생들을 배출해 낸 명문 학교이다. 또 환경이 좋지 않은 많은 음악가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모차르트가 35세에 일찍 죽지 않고 더 오래 살았더라면 더 많은 걸작을 남겼으리라 아쉬워하지만, 멘델스존의 죽음은 개인을 넘어서 음악계 전체에 큰 손실이었으며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잊혀졌던 더 많은 곡들을 발굴하고 외면당했을 음악가들이 빛을 보았을 것이다.멘델스존은 어렸을 때부터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아야 한다”는 가문의 율법을 몸에 익혔으며 평생토록 습관처럼 그렇게 살아간 사람이다. 그의 인생은 여러 가지 풍요로 가득 했지만 자만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음악을 위하여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자 짧은 생이었지만 평생 동안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음악에는 순수한 시선으로 신이 창조한 위대한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경외의 정신이 있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

2019-08-26

찬란하게 빛나는 분천역 산타마을

엄태항 봉화군수산타클로스는 아이에서 어른까지 전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전설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다. 산타클로스는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한 성 니콜라스의 미담을 17세기 아메리카 신대륙에 이주한 네덜란드인들이 산테 클라스라 불러 자선을 베푸는 전형으로 삼았다. 이 발음이 그대로 미국어화했고, 19세기 크리스마스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하는 상상의 인물인 산타클로스로 변하게 된 것이다.산타클로스가 사는 마을은 노르웨이 오슬로를 비롯해서 전세계 여러 곳에 있으나 핀란드 로바니에미의 산타마을이 가장 인정받고 있다. 여기는 전 세계 어린이들이 보내온 편지를 12개 국어를 구사하는 비서들이 산타클로스를 도와 일일이 답장을 해주며 동심의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를 기억하게 하는 서비스를 실시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우리나라에도 매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가 되면 산타클로스를 떠올린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전후 며칠만 기억되고 다시 잊혀지고 있다. 봉화는 잊혀진 산타클로스를 되살려 지난 2014년 봉화군, 경북도, 코레일이 같이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산타마을 조성했다.분천 산타마을은 이름에 걸맞게 산타와 연상되는 다양한 인프라를 시설을 갖추고 있다. 눈썰매장, 산타레일바이크, 산타풍차방, 이글루터널 산타소원지, 루돌프 포토존, 산타 시네마 등의 특색 있는 시설과 2018년에는 산타우체국, 풍차놀이터를 새롭게 운영하면서 관광객들에게 동화 속 산타클로스 마을에 온 것 같은 신비스러운 광경을 선사한다. 산타마을 주변 향토음식점에는 곤드레밥, 산채비빔밥, 수수부꾸미, 메밀전, 봉화 전통막걸리 등 전통음식과 대추, 수수, 차조, 녹두, 호두, 산나물 등 지역주민이 직접 재배한 청정농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지난 2015년부터는 한여름 산타마을도 운영해 무더위에 지친 관광객들에게 특색 있는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한여름 산타마을은 기존 산타마을에 싼타 슬라이드, 레일썰매, 안개분수 등 여름에 어울리는 각종 시설로 관광객들에게 한여름의 무더위를 날려버리는 색다른 기회를 제공했다. 봉화의 산타마을 시리즈는 총 414일간 78만5천명(1일 평균 1천896명)이 방문하며 수십억원의 파급효과를 거뒀다.관광봉화의 성공은 비단 산타마을에 국한되지 않는다. 먼저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된 백두대간협곡열차가 있다. 2013년 4월 처음 개통한 백두대간협곡열차는 국내 최초 개방형 관광열차로 운행구간은 분천역을 시작으로 강원도 철암까지 오가고 있다.봄, 여름, 가을에는 백두대간협곡열차로 운행되지만 겨울에는 산타마을과 연계해 산타열차로 운행된다. 산타열차 내부에는 크리스마스와 겨울을 연상케 하는 각종 장신구들로 꾸며지고 승무원 역시 산타클로스 복장하고 손님을 맞이한다. 분천역∼승부역간 12km로 낙동강과 협곡, 철로를 따라 낙동강의 숨은 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힐링 트레킹 코스인 낙동강세평하늘길도 각광 받으며 매년 2만5천여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이렇듯 예전에는 오지마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던 봉화는 최근 들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관광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특히 분천 산타마을은 국내 겨울여행지 선호도 조사에서 매년 상위권을 유지했으며 지난 2016년 12월에는 한국관광 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국내 최고 권위의 2016년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되며 관광명소로 발돋움하고 있다.봉화지역 주민들은 이같은 성과를 관광객 여러분들의 큰 애정과 관심이 만들어낸 결과라 받아들이고 있으며 앞으로도 분천 산타마을의 대폭적인 인프라 확충과 특색 있는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해 국제적인 겨울 관광지인 겨울왕국 체험랜드로 변모시켜 나가도록 힘을 모을 계획이다.아울러 봉화만의 특색 있는 관광자원을 잘 개발하고 발전시켜 제2, 제3의 한국관광의 별이 선정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전국을 넘어 전 세계가 인정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2019-08-25

멧돼지가 안긴 딜레마

강길수 수필가그놈만 아니었더라면, 오늘같이 무더운 날은 집에서 찬 수박이라도 나누며 티브이 보는 게 제격이다. 한데 사는 게 무엇인지 아내도, 나도 의기투합이라도 한 듯 주섬주섬 도구들을 챙긴다. 지난 주말, 텃밭에서 만난 처참한 광경이 눈앞에 아른거려 현관을 나설 수밖에 없다.차를 굴다리 밑에 세우고, 필요한 것들을 챙겨 텃밭으로 간다. 많이 궁금했던 고구마 이랑으로 먼저 가 본다. 지난번 왔을 때, 멧돼지가 다 파 해쳐 잎은 마르고 샅샅이 젖혀진 뿌리에는 새알 고구마 하나도 달린 게 없었다. 사람이 팠던 땅을 어찌 아는지, 고구마 줄기나 파뿌리를 심었던 자리는 모두 패여 있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심어 물까지 주었었다. 새로 심은 고구마를 또 옹골지게 모두 파 뒤집었다. 비록 늦을지라도, 줄기와 잎은 따 먹을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심었던 고구마다.너무 무참히 유린당한 모습이, 보기 싫었던 아래쪽 옥수수 이랑으로 발길을 돌린다. 혹시 작은 옥수수 한통이라도 화를 면했나 싶어, 자세히 살펴봐도 깡그리 아무것도 없다. 옥수수 알 뿐 아니라, 이삭도 통째 몽땅 먹어 치웠다. 대는 다 부러지고, 찢어지고, 넘어지고, 뽑히고, 짓이겨져 폭삭 내려앉았다.먹이사슬의 잔인함이 여지없이 드러난 텃밭의 모습이 내 초심을 흔들었다. 재작년과 작년에는 고라니만 출몰했었다. 고라니는 어린 옥수수를 뜯어먹는 데 그쳤었다. 그때만 해도 ‘그래. 우리가 농사 전업도 아니고, 시간 소일거리로 작게 시작한 텃밭 가꾸기이니 노지재배를 고수하자. 삭막하고 각박하게 울타리 치지 말고, 자연에 맡기자. 명색이 환경 분야에 오래 일했지 않은가. 생태계 먹거리는 모든 생명이 나누어 먹으라고 주어지는 것이니까’라고 마음먹었다. 이런 뜻에 아내도 암묵적 동의를 했었다.가끔 고향에 가면 동생은 야생동물 특히, 멧돼지의 횡포로 농사짓기가 정말 어렵다고 토로한다. 고구마 같은 작물은 한해 농사를 폐농(廢農)하는 농가도 많단다. 피해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나는, 그 걱정을 피상적으로 듣곤 했다. 하여, 농민들이 자구책으로 공기총이나 올가미, 덫을 써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였다. 반면, 작은 우리 텃밭의 수난현장을 겪는 마음이 착잡하고 헷갈린다. 사람의 입장과 멧돼지의 상반된 입장이 가슴속에서 충돌하기 때문이다.사람들은 논밭에 울타리나 망을 치거나 과도한 농약을 쓰는 등, 자기들만 먹으려 섭리에 도전하고 있다. 때문에 동물들도 살기 위해, 인간에게 응전(應戰)이라도 하여 예전보다 더 깡그리 농작물을 해하는 걸까. 나무만 무성하여, 산야의 먹이 환경이 예전만 못해 야생 먹이가 부족해졌단 말인가. 아니면, 멧돼지를 포함한 야생동물들의 개체 수가 늘어났기 때문일까.야생 짐승들로 부터 농작물 피해를 보는 농민들은, 동물 보호론자나 환경운동 단체들의 행태나 당국의 탁상행정에 분개한다. 현장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농촌 출신으로 도회에 살며 환경 분야에서 오래 일한 나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기후변화로 지구촌 모든 생명의 지속성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인간과 다른 생명과의 먹을거리 쟁탈 갈등은 어떻게 수습해야 할 것인가. 딜레마다.웰빙 붐과 로하스 운동, 슬로시티 운동 같은 움직임들이 구미(歐美)를 중심으로 있지만, 아직 지구환경 전체의 개선을 이끌어 나가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인간은 역지사지(易地思之) 정신이 있기나 한 것일까. 그린란드의 빙하가 삼십 년 만에 거의 다 녹았다는 미국 나사(NASA)의 발표를 뉴스에서 보았다. 북극얼음이 곧 다 녹아, 선박의 북극항로도 열릴 것이란 보도도 있다. 열린 북극항로가 인간과 지구촌에 축복이 될지, 재앙으로 닥칠 것인지는 가히 짐작이 가는 문제다.인간과 함께 살아가야 할 생태계의 많은 생명이 하나, 둘 멸종의 길로 가고 있음도 이미 밝혀진 바다. 멧돼지와 야생생물들은 이 미증유의 사태를 본능으로 느끼고, 우리 인간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생태계에 점철된 먹이 갈등 딜레마를 풀어낼, 솔로몬의 지혜는 정녕 없는 것인가.

2019-08-25

‘후흑학’

청나라 말 이종오가 쓴 ‘후흑학(厚黑學)’은 지금도 중국에서는 잘 팔리는 책 중 하나다. 후흑은 면후심흑(面厚心黑)의 줄인 말이다. 얼굴은 철면피처럼 두껍게, 마음은 음흉하게 하여 철저히 자신을 숨겨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계산되지 않은 감정 노출은 하수의 짓이다.후흑은 난세를 극복하는 일종의 처세술이다. 법치나 순리를 숭상한 중국의 전통 사상과는 배치되는 생각이지만 실용적 측면에서 공감대가 적지 않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조직이나 사람을 바꿔도 배신이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라고 한다. 승자의 역사를 만드는 것은 뻔뻔함과 음흉함에 있다고 가르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비굴해도 상관이 없고, 욕을 먹어도 상관이 없다. 대의명분을 쫓다 패가망신하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상이다. 삼국지의 조조와 유비가 대표적으로 후흑한 인물이며 손권과 사마의, 모택동도 그러하다고 했다. 중국 역사 속의 영웅호걸 치고 후흑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설명이다.날로 치열해지는 경쟁 사회 속에서 ‘후흑학’은 현실적 실천 방법으로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다. “천하를 알려면 ‘삼국지’를 읽고 천하를 얻으려면 ‘후흑학’을 읽으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 한다.그러나 난세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후흑의 기술만 잘 익힌다고 성공의 열쇠를 거머쥐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순리라는 자연의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좋은 수단이 된다고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면 결과는 불행해진다.각종 의혹 제기로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에 대한 국민의 비난 여론이 비등하다. ‘후흑학’에서는 역사의 승자는 사리사욕이 없어야 선한 결과를 얻는다고 했다. 청문회를 떠나 조 후보자의 정의롭지 못한 삶이 논란의 핵심이다. 덩달아 그의 정치 생명이 달렸기에 더 관심이 간다. /우정구(논설위원)

2019-08-25

‘가짜뉴스’의 두 얼굴

안재휘 논설위원‘뇌송송 구멍탁’이라는 조어(造語)는 2005년 제작된 ‘파송송 계란탁’이라는 오상훈 감독의 코미디영화의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조어는 지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타결 이후 퍼진 핵폭탄급 선동 구호였다. MBC ‘피디수첩’의 잇따른 보도로 촉발된 논란과 이 선동 구호에 현혹된 뭇 시민들이 ‘100만 촛불대행진’ 등 반정부 시위에 동원됐었다.대법원은 ‘언론자유’ 영역을 침범하는 과도한 기소를 일축하면서도 MBC로 하여금 지나친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공개사과하도록 징벌을 내렸다. ‘가짜뉴스’에 휘둘린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무력함에 대한 비판도 있다. 무엇보다도 의아한 것은 지금껏 광우병 발병이 없다는 사실이다.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는 또 어땠는가. 무자비하게 양산됐다가 확인이 여전히 안 된 채 묻혀가고 있는 ‘가짜뉴스’들은 가늠조차 어렵다.두말할 필요도 없이 ‘가짜뉴스’는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될 병폐다. 단 한 번의 그 음흉한 장난질로 누군가 일생을 망치기 일쑤요, 때로는 한 나라가 치명적인 혼돈에 빠지거나 퇴행할 수도 있다. 세계 각국은 ‘가짜뉴스’에 대응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다. 싱가포르는 ‘가짜뉴스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운용한다. 독일에서는 ‘가짜뉴스’방치 소셜 미디어 기업에 최고 5천만 유로(669억여 원)의 벌금을 물리는 법안이 시행 중이다.그런데 ‘가짜뉴스’라는 말을 전혀 다른 개념으로 써먹는 지도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대표주자는 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자신에게 불리한 뉴스를 모조리 ‘가짜뉴스(Fake news)’라고 몰아친다. 미국의 정치학자 조셉 나이는 최근 자신의 칼럼에서 올들어 6월 1일까지 트럼프 대통령은 3천259건의 거짓을 말했다고 썼다. 참으로 흥미로운 기록이다. 그의 인식체계에 있어서 ‘가짜뉴스’의 정의는 ‘마음에 안 드는 비판’ 정도로 변질된 게 아닐까 싶다.우리나라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 언론들의 공격에 맞서 언론을 ‘불량상품’으로 규정하고, 불매운동 등 정부 부처의 적극 대응을 독려했다. 스스로 언론을 고소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작금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논란이 가히 쓰나미 수준이다. 그와 그 가족에 대한 의혹이 보편적인 국민 정서와 정면충돌하는 양상이다. 그러나 조 후보는 물론, 청와대와 민주당은 모든 의혹 제기를 ‘가짜뉴스’로 몰아 때린다.법무부는 ‘가짜뉴스’ 제작 및 유통 행위를 강력 단속할 방침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이 정부에 과연 순정한 의미의 ‘가짜뉴스’를 정의롭게 가려낼 신뢰성이 있느냐 하는 부분이다.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를 매국행위로 매도하는 한 또 다른 통제 시도는 위험하다. 느리고 힘들더라도 제대로 된 ‘진짜 뉴스’로 ‘가짜뉴스’를 밀어내는 게 맞다. 불편한 뉴스를 ‘가짜뉴스’라고 모함하는 ‘가짜뉴스’가 더 사악한 범죄다.

2019-08-25

다산(茶山)의 독서법, 초서(抄書)

김현욱 시인여름휴가 동안 정독(精讀)하고, 초서(抄書)한 책 목록은 다음과 같다. 염은열 교수의 유배, 그 무섭고도 특별한 여행, 정민 교수의 한밤중에 잠이 깨어, 김윤규 교수의 다산, 장기 유배 문학 산책, 이상준 향토사학자의 영일 유배 문학 산책, 김옥애 작가의 봉놋방 손님의 선물, 정찬주 작가의 다산의 사랑, 박석무 교수의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이소정 작가의 우리 조상의 유배 이야기 등이다.염은열 교수의 유배, 그 무섭고도 특별한 여행에 나오는 조선판 오렌지족, 대전별감 안도환의 유배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한양의 밤(?)을 주무르던 안도환이 조선의 3대 유배 섬 중 한 곳인 추자도로 유배되어 온갖 고초를 겪는 모습에 몇 번이나 웃음을 터뜨렸는지 모른다. 안도환이 지은 유배가사 만언사는 요즘으로 치면 베스트셀러였다. 안도환의 유배 이야기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제법 인기가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김옥애 작가의 봉놋방 손님의 선물은 다산이 강진 주막 봉놋방에서 중국 주흥사가 지은 천자문 대신에 아학편이라는 교재를 손수 만들어 제자들을 가르친 이야기다.책을 읽다가 모르는 것이 나오면 밑바닥까지 다 캐내는 독서법이 정독이라면, 필요한 것을 가려 뽑아 따로 정리하는 독서법을 초서라고 한다. 다산은, “책을 초록(抄錄: 글이나 문장 따위에서, 필요한 대목만을 가려 뽑아 적음. 또는 그 기록)해 적는 것은 한 모서리를 들어 세 귀퉁이를 뒤집는 방법”이라면서, 아들 학유에게, “기왕 닭을 기른다면 모름지기 백가(百家)의 책 속에서 닭에 관한 글들을 베껴 모아 차례를 매겨 계경(鷄經)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라고 당부했다.여름휴가 동안 읽은 책들의 공통점은 ‘다산’과 ‘유배’, ‘경상도 장기’였다. 다산이 경상도 장기에 220일 동안 유배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801년 3월 9일, 다산은 경상도 장기에 도착한다. 장기에 머물던 220일 동안 다산은 130수의 시와 이아술, 기해방례변, 촌병혹치 등의 책을 남긴다. 특히, 인간 정약용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130수의 시는 경상도 장기만의 소중한 자산이다.다산이 아들 학유에게 시켰던 것처럼, ‘다산’과 ‘유배’, ‘경상도 장기’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여러 책에서 필요한 문장과 구절, 낱말, 유배 정보 등을 220일이라는 공책을 만들어 따로 정리했다. 시간과 공간으로 목차를 만들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보니 “한 모서리를 들어 세 귀퉁이를 뒤집는 방법”이라는 다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사람은 누구나 ‘첫-’을 잊지 못한다. 다산에게 경상도 장기는 첫 유배지였다.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하다가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어 유배를 온 신세였다. 다산의 인간적인 모습을 경상도 장기에서 만날 수 있다. 그 옆에 한 소년이 있었을 것이다. 다산의 경상도 장기 유배 동화 220일은 다산의 독서법, 초서 덕분에 그 뼈대를 점차 잡아가고 있다.

2019-08-25

와다 하루키의 한일 문제의 참된 해법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와다 하루키(和田春樹)는 1938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1960년 도쿄(東京)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했다. 1966년부터 도쿄대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998년에 정년퇴임했다. 러시아사와 북한 현대사 연구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학자로서의 활동뿐 아니라 베트남전 반대 운동, 한국 민주화운동과의 연대 등 행동하는 진보 지식인이다. 2010년 제4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 2012년 DMZ 평화상을, 이번에는 만해평화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북조선: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러일전쟁과 대한제국’등이 있다.그는 지난주 ‘한국은 일본의 적인가?’라는 화두를 통해 일본 아베 정권의 한국에 대한 무역 보복 조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벌써 일본인 8천명 이상이나 서명을 받았는데 그중 3천500명이 그 사유까지 밝히면서 서명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하여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반길만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아베의 횡포에 대해 노 재팬(No Japan)이 아닌 노 아베(No Abe)를 외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에는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양식 있는 국민이 상당히 많다. 아베 정권이 극우 정치와 헌법 개정을 통한 패권 국가 지향을 반대하는 국민이 많다는 뜻이다.이런 상황에서 하루키 교수의 주장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 그는 1965년 한일 협정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그 정당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협정 체결 시 일본 정부는 1910년 한일 병합을 정상적 합의로 보았지만 우리 한국은 부당한 강제 병합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일본이나 한국 학자들의 ‘식민지 근대화론’에는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일제 시 일본의 교육이나 산업 투자는 조선 근대화의 촉진제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은 조선의 동화, 말살 정책이며 한국인들에게 큰 문화적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다.그는 1993년 위안부 문제에 관한 고노(河野)담화나 1995년 식민지 지배를 사과한 전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담화를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다. 최근 일본의 경제 제재의 빌미가 된 강제 징용의 개인의 청구권 요구도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는 종군 위안부가 1명도 없었다는 일본의 주장은 일본 보수층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전시 종군위안부는 다양한 경로로 모집되었으며 일본군의 강제성은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당시 군 위안소는 강간 센터의 역할을 했으며 군의 강제성 인정은 상식이라는 것이다.그는 경색된 한일 관계의 해결책으로 아베의 대한(對韓)정책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양식 있는 양국 국민 사이의 유대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양식 있는 양국의 시민단체의 연대와 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인 강제 징용자 보상 문제도 일본의 양식 있는 변호사들이 동참하여 한국 대법원의 승소를 이끌었다. 와다 하루키 교수는 ‘정권은 일시적이지만 국민관계는 영원하다’는 말을 남겼다. 우리도 한일관계의 경색된 국면을 풀기 위한 양국 시민 연대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2019-08-25

종(Bell)을 울리는 종(Servant)의 삶

이문재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땅바닥이라고 말하는 곳은 사실 하늘의 바닥이다. 땅바닥은 없다. 땅바닥은 땅의 머리다.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인간 중심주의가 땅의 정수리를 땅의 바닥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우리는 땅바닥이 아니라 땅의 정수리를 함부로 밟고 있다.”그의 대표작 ‘농담’을 아시지요?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 /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서 / 종은 더 아파야 한다.강하거나 외로운 사람은 많은 것을 움켜쥐기 위해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나다움을 포기하고 세상의 각본에 휘둘려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인 것이지요. 3연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듭니다. 왜 갑자기 종이 나오는 것일까? 산뜻한 내용 전개에 감탄하며 고개 끄덕이다가 눈동자를 커지게 만드는 것이 3연입니다. 속도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충만한 삶으로 회복을 위해서는 아픔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시인은 일깨웁니다.몸을 붓 삼아 언어를 남기는 사람들은 땅바닥이라 부르지 않고 지구의 정수리라 여기며 생태계를 지켜내려 안간힘 쓰는 반항아들입니다. 종메가 자신을 힘껏 내리쳐 아름다운 울림을 만들어 낼 때, 그 아픔을 견디는 이들입니다.시인 정현종은 종메를 생각합니다. 종의 아픔보다 더 진한 종메의 아픔을 매일 같이 견대내며 삿된 생각들을 아침마다 잘라내고 밀어낼 때 비로소 우리 몸은 붓이 되는 모양입니다.종이 되어 아름다운 울림을 세상에 보내기 위해, 더 깊고 충만한 소리를 내기 위해 하늘 바닥 저 아래 종(servant)의 자리까지 낮아져야 함을 깨닫습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