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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청년과 여성에게 고용의 기회를

박은미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개발실장국제기구의 청년정책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장기 저성장 혹은 위기로 현재의 경제를 진단하고 이러한 경제 위기가 청년층에게 가장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판단해 2010년부터 ‘청년 전략(EU Youth Strategy)’을 제안하였다.제안 목적은 교육과 노동시장에서 청년들에게 좀 더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과 함께 청년들의 사회 참여활동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교육과 훈련, 고용과 창업, 건강과 웰빙 참여, 자발적 활동, 사회통합, 청년과 세계, 창조와 문화 등을 제안하였다.이 중 ‘창조와 문화’ 영역의 경우 문화와 창조적 수단에 대한 접근권을 높이고,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며 정책과 프로그램 간의 장기적 시너지를 고려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그리고 청년 조직과 청년 노동자 간의 협력관계, 청년의 역량과 기업적 기술, 문화와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을 증진 및 지원한다. 좀 더 세부적으로 UN의 ‘청년정책 11개 지표’는 청년을 문제적 접근이 아니라 ‘자원’으로 접근하는 것이 특징이다.‘자원’으로 접근하는 것은 다양한 반론에도 불구하고 청년 자체를 ‘사회문제’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 만드는 장기적인 내용이다.그 지표 내용은 비공식적 교육에 대한 관심, 청년 훈련 정책의 필요성, 청년을 위한 입법, 청년을 위한 예산, 청년을 위한 정보 제공, 다층적 정책의 수립, 청년을 위한 연구, 사회에 대한 참여 보장, 정부기관들을 관통하는 공동집행, 혁신, 청년을 위한 지원 기구이다.이처럼 EU와 UN 등 국제기구, 주요 국가는 청년정책이 단순히 여타 세대별 정책과 마찬가지로 분절적이고 특수한 정책이 아니라, 경제 위기 이후 보편적인 정책 의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였다.구체적으로 일본의 경우 고용대책법 개정을 통해 청년이 능력과 경험에 따라 정당한 평가를 받고, 고용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사업주의 노력 의무를 법률에 명시, 법 개정 외에 아르바이트와 봉사활동 경험을 기업 채용에 반영할 수 있도록 채용방식을 정비하였다.독일은 학교교육과 수습근로 활동을 병행하는 이원화제도(Dual Education System)를 채택하였다.이 제도의 장점은 현장 중심의 실무교육을 통해 직업생활에 필요한 조직의 운영방식, 업무지식 및 행동, 인간관계 등을 배울 수 있다는 점, 청년층이 직접 생산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경제적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사회적 파트너로서 기업의 입지가 구축된다는 부분이다.한편, 우리나라의 경우 단기적인 성과 측면에서 청년의 실업 해소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현실에서 국외 청년 고용정책들과는 대조적인 측면이 있다고 본다.특히 청년 및 여성 고용의 단기적 성과 달성만을 지양하고, 현재 청년 및 여성이 느끼고 있는 실업문제를 극복하려면 첫째, 기업의 채용수요를 발굴하고 취업으로 연계, 둘째, 청년의 중소기업 취업 및 근속을 위한 경제적 지원 확대, 셋째, 청년 눈높이에 맞는 진로교육 및 일자리 정보 제공, 넷째, 취업에 필요한 정보 발굴을 통한 수요자 맞춤형 전달, 다섯째, 경력단절 예방 및 직장복귀 지원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방향 검토가 필요하다.경북지역에서 당면하고 있는 청년 및 여성 실업을 해결하려면 무엇을 고민해야 할 것인가? 장기적 관점에서 단계별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채용 이전에는 현장중심의 직업교육·훈련 및 진로지도에 관해 촘촘하게 내실화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채용 시에는 능력 중심채용 확산 및 취업지원 강화, 채용 이후에는 근로환경 개선 및 근로조건에 초점을 두는 맞춤형 정책을 추진하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2019-04-17

삶이 고단하고 슬픔이 밀려올 때

스탠다드 오일 중역 컨더넬스는 직원들과 고전을 연구하던 중 “갈대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수가 갈대 사이에 두고(출 2:1-3)”라는 대목을 만납니다. 한 직원이 질문하지요. “역청(pitch)이라는 것은 원유를 증류하고 남은 찌꺼기 아닌가요?” 컨더넬스는 전율합니다. 인근에 틀림없이 유전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즉각 지질학자를 이집트로 급파합니다. 예상은 적중하지요. 거대한 유전을 발견합니다.갈대는 모진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풀입니다. 강변이나 호수변에 많이 자라지요. 척박한 땅에서 자라나는 대표적인 식물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갈대숲은 단연 순천만입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불과 15만평이었던 순천만 갈대숲은 현재 70만평으로 번식해 장관을 이룹니다.갈대는 예로부터 풍요로움을 안겨주었습니다. 뿌리가 항암작용을 한다고 해서 캐가는 사람도 있고, 골다공증을 치료하는 약품의 주요 성분이 갈대입니다. 추출물로 골대사 질환에 혁신적인 의약품을 만듭니다.순천만 갈대 숲이 번성하자 생태계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민물도요새가 떼를 지어 비행을 하고, 천연기념물 228호인 흑두루미 가족들이 개펄에 앉아 쉽니다. 천연기념물 199호인 황새도 나타나 생태학자들을 흥분시킵니다. 고니는 여덟 마리나 서식하고 저어새는 네 마리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철새와 텃새 400종 중 절반을 만날 수 있는 새들의 안식처입니다.신경림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 조용히 울고 있었다. /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 갈대는 / 그의 온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제 평생 더러운 물을 빨아들여 생명력 넘치는 맑은 물로 토해내는 일을 반복하는 삶. 뿌리까지 고스란히 항암제로 쓰임 받는 삶. 온갖 생명들의 품이 되어주는 넉넉하고 아름다운 숲. 인간들의 뼈까지 속속들이 챙겨주는 골다공증 치료제로 짓이겨져 녹아지는 갈대의 운명. 갈대는 알고 있는 거지요. 자신의 삶과 존재 그 자체가 눈물로 채워지지 않으면 주변을 맑게 할 수도, 누군가를 치료할 수도, 생명을 품는 숲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 삶이 고단하고 조용한 울음으로 흔들리는 것은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조신영 인문학365 대표

2019-04-17

“이제 징글징글해요!”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4월 16일 노란 ‘세월호 대참사’ 추모배지를 달고 거리에 나선다. 어언 5년 세월이 지나갔다. 5년 전 그날 저녁 구들방에 군불을 지피다가 뒷집 할머니에게 들은 참사는 차마 믿을 수 없는 전갈이었다.촌동네로 이사한 지 한 달 만에 들은 천붕(天崩) 같은 소식. 지금이나 그 시절이나 텔레비전이 없기에 세상의 크고 작은 사건사고는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로 확인한다.당시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보여주던 흉악무도함 때문에 세상사와 절연하고 살아가던 터라 참사소식은 상상을 절(絶)하는 것이었다. 열여덟살박이 고2 학생들만 250명을 수장시킨 희대의 참극. 내가 ‘세월호’ 유가족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의 목숨 건 단식에 2박 3일 동참한 일, 진도 팽목항을 찾아 304명 위폐에 분향하고 명복을 빈 일, 경북대 콜로키움에서 희생자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고작이다.강의실에서 “벌써 5년 전이로구나!” 했더니 학생들이 이내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올해 신입생들이 19학번이므로 당시 고2였던 단원고 학생이 대학생이 됐다면 16학번, 4학년이 됐을 것이다.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는 행악질과 패륜이 자행됐던 지난 5년의 세월. 그것을 묵묵히 견디며 유가족들은 지난 3월 18일 광화문에 설치됐던 ‘세월호’ 천막을 철거하기에 이른다.그리고 불과 1개월 지난 시점에 터져 나온 자유한국당 전·현직 의원들의 폭력적인 망언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 금하기 어렵다. 차명진은 4월 15일 페이스북에 “세월호 유가족들.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처먹고, 찜 쪄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 먹고 진짜 징하게 해처먹는다”는 글을 남겼다. 정진석은 “세월호 그만 좀 우려먹으라 하세요. 죽은 애들이 불쌍하면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거죠. 이제 징글징글해요”라는 동조(同調) 글을 올렸다.그들의 언어에 담긴 핵심은 ‘자식들과 세월호를 징하게 회 처먹고 우려먹는’ 유가족과 현 정권에 대한 조롱과 짜증과 분노다. 그들에 따르면 ‘세월호’ 유가족은 5년째 자식들의 시체장사를 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자식들의 시체를 ‘회로, 찜으로, 뼈까지 우려내먹는’ 희대의 악마로 단원고 학부모들을 몰고 가는 자유한국당 의원들! 그들의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대통령 권력과 집권여당의 정치·경제적 이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인간으로서 최소한도의 품격과 절제와 사유의 언어가 결석한 자들이 나라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자리에 있다니, 정녕 놀라운 일이다. 그들의 언사에서 일본 수상 아베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을까?! 한국정부가 툭하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정치 쟁점화 하여 한일관계를 왜곡한다는 그자의 언사. 식민지 조선의 여성을 성적으로 노예화한 자신들의 범죄행각에 대한 반성과 사죄는 고사하고 ‘또 위안부냐’ 하는 투의 신경질적이고 짜증스러운 반응!!우리가 역사를 거론하면서 과거를 반추함은 거기서 얻어내야 하는 교훈 때문이다. 패망한 나라의 유랑민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민초들의 처참한 형극(荊棘)의 길을 떠올려 재발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말하고, 그것을 돌이키는 것은 또 다른 참사를 미연에 예방하고자 함이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502명이 숨지는 참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대한민국 정부와 무소불위 최고권력. 언제까지 이런 대규모 참사를 되풀이할 것인가, 하고 국민들은 준엄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너무도 슬프고 괴로운 백발의 유가족들에게 ‘회 처먹고, 찜 쪄먹고, 뼈까지 발라먹는’다고, ‘이제 그만 우려먹으라고, 징글징글하다’고 말하는 자유한국당 의원들. 국민들의 안전과 생명보다 의원자리와 대통령이 더 소중한 그자들. 우리는 당신들이야말로 정말 징글징글하다!

2019-04-17

대기근을 함께 넘어온 동반자… 사람이 살아야 돼지도 산다

병자호란(丙子胡亂·Qing invasion of Joseon)은 1636년 12월28일(양력)부터 1637년 2월24일 사이에 있었다. 두 달간의 짧은 전쟁. 상처는 깊었다. ‘삼전도의 굴욕’을 넘어서는 참혹한 피해. 멀쩡한 조선사람 50만 명(추정)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대부분 노예로 팔리고, 평생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전쟁이 끝난 불과 예닐곱 달 후, 원수의 청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했던 국왕 인조다. 청나라 사신에게 잘 대할 수도, 소홀할 수도 없는 처지. 돼지고기 이야기가 나온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1637년) 8월28일(음력), 영접도감(迎接都監)의 대답이다. 그 전날인 8월27일, 인조가 “왜 돼지고기(저육) 대신 쇠고기(우육)를 마련했느냐?”고 물었다.“(전략) 청나라 사람들이 우육(牛肉) 먹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이번 칙사의 행차가 추운 계절을 당하였으므로 생선 따위의 물종을 구해 올 길이 없습니다. 매일 연향(宴享)에 저육(猪肉)을 쓰는 곳이 매우 많아 부족할까 걱정되어 전날 반선에 우육을 마련하였는데 저육 두 근이 너무 소략한 것 같아서 우육을 한 근 더 마련한 것입니다. 이렇게 마련하고 나서 때가 되어 혹 저육을 먹자고 청하거든 저육으로 바꾸어 주겠습니다. (후략)”승자의 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소홀할 수도 없다. 사신을 잘 대접하는 흉내라도 내야 한다.청나라, 중국 사람들이 쇠고기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궁중에서 의논하는 내용이 쇠고기 한 근, 돼지고기 두 근, 이런 식이다. 이날의 서글픈 대화 끝에는 인조의 최종적인 평가가 남아 있다.“이러한 때에 기르는 소를 허다하게 도살하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고, 음식물을 더 주는 것도 타당하지 못한 듯하다. 한결같이 예전 사신을 대했던 대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쇠고기는 예나 지금이나 귀했다. 농사의 도구이니 국가에서도 함부로 도축하는 일을 막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투정을 부리는 인조의 모습이 슬프다.◇ ‘음식디미방’의 야제육과 가제육‘음식디미방’은 1670년 무렵 출간되었다. 이 책에 여러 요리법이 있다. 그중 돼지고기 요리법은 단 두 꼭지. 야제육[野猪肉]과 가제육[家猪肉] 요리법 즉, 멧돼지 요리법과 집돼지(사육 돼지) 요리법이다. 개고기[狗肉] 요리법이 11가지나 있는 것에 비하면 돼지고기 요리법은 초라하다. 인조가 청나라 사신을 맞았던 시기에서 겨우 30년이 지났다. 왕실이나 반가 모두 돼지를 널리 사용하지 않았다.돼지는 17세기 후반부터 비교적 널리 나타나고, 사용된다. 15세기 중반, 세종대왕 때에도 돼지 기르는 법을 명나라에서 배웠다고 했다. 문종, 세조 때도 여전히 돼지사육법은 거칠다. 그로부터 불과 200년 후. 돼지가 흔해지고 친근해진 이유는 무엇일까?추정이다. 지구 전체가 겪었던 ‘소 빙하기(Little Ice Age·小氷河期)’ 탓이다. 지역마다 다르지만, 지구는 대부분 13~17세기 후반, 빙하기를 겪는다. 한반도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 숙종 시대까지다.빙하기에는 지구 전체의 기온이 떨어진다. 가뭄, 홍수, 장마, 한파, 한여름의 우박, 이상한 달무리 등이 지구 여기저기서 나타난다.조선의 17세기, 100년도 바로 대기근(大饑饉)의 시기다. 경신대기근에 인구의 10%인 100만 명이 기아 혹은 역병으로 죽었다. 오죽했으면 임진왜란을 겪은 사람 중에는 “기근이 왜란보다 더 무섭다”라는 이도 있었다.‘병정대기근(인조 4~5년, 1626~1627년)’ ‘계갑대기근(효종 4~5년, 1653~1654년)’ ‘경자-신축년의 대기근(현종 1~2년, 1660~1661년)’ ‘경신대기근(현종 11~12년, 1670~1671년)’ ‘을병대기근(숙종 21~22년, 1695~1696년)’이 줄을 이었다. 모두 17세기에 몰려 있다. 이중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이 특히 참혹했다.17세기를 지나면서 곡물 생산이 늘어난다. 돼지사육도 비교적 편해졌을 것이다. 숙종-경종-영조-정조의 시대는 18세기다. 빙하기도 끝나고 생산성이 올라간다. 100년을 넘기면서 병자호란의 상처도 얼마쯤 아문다.‘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은 정유재란 이듬해인 1598년에 태어나서 1680년에 죽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에 태어나서 정유재란(1597년),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의 고통과 생채기를 모두 겪었다. ‘음식디미방’을 저술할 무렵인 1670년대는 경신대기근이 진행되었다. 돼지는, 인간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를 먹고 자란다. 인간이 굶주리면 돼지사육은 불가능하다. ‘음식디미방’에 돼지고기가 귀한 이유다.◇ 순조의 달구경과 숨겨둔 돼지고기순조. 아버지 정조(1752~1800년)가 일찍 서거하지 않았다면, 이복형 문효세자(1782~1786년)가 어린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국왕으로 등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정조는 마흔아홉 살에, 이복형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순조는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국왕이 되었다. 증조모인 정순왕후가 살아 있었다. 수렴청정. 열한 살짜리 국왕은 할 일이 없었다. 즉위 원년의 어느 늦은 밤, 어린 국왕은 궁궐 안에서 달구경을 나선다.고종 시절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년)의 ‘임하필기_춘명일사(林下筆記_春明逸史)’ 편에 실린 이야기다.순묘(純廟)가 초년에 한가로운 밤이면 매번 군직(軍職)과 선전관(宣傳官)들을 불러 함께 달을 감상하곤 하셨다. 어느 날 밤 군직에게 명하여 문틈으로 면(麵)을 사 오게 하며 이르기를, “너희들과 함께 냉면을 먹고 싶다.” 하셨다. 한 사람이 스스로 돼지고기를 사 가지고 왔으므로 상(上)이 어디에 쓰려고 샀느냐고 묻자, 냉면에 넣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상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셨다. 냉면을 나누어 줄 때 돼지고기를 산 자만은 제쳐 두고 주지 않으며 이르기를, “그는 따로 먹을 물건이 있을 것이다.” 하셨다. (후략)‘순묘’는 순조다. 늦은 밤, 배가 출출하다. 궁궐 밖에서 냉면을 테이크아웃 하기로 한다. 냉면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돼지고기를 사 온다. 아마도 수육[熟肉]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순조의 냉면과 돼지고기 이야기’다.이유원은 어린 시절 들은 순조의 돼지고기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을 것이다. 국왕 곁에 시립한 이가 돼지고기 수육을 사 왔다. 원문에도 ‘貿猪肉(무저육)’이라고 했다. 늦은 밤에도 돼지고기를 살 수 있었다. 돼지고기가 어느 정도 일상적인 식재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왕 순조도 역시 준비한 음식이 수육임을 알고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상적이었다는 뜻이다.정조대왕 시절,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 등과 함께 ‘4검서(檢書)’라고 불렸던 영재 유득공(1748~1807년)도 ‘영재집_서경잡절(泠齋集_西京雜絶)’에서 “냉면과 찐 돼지고깃값이 오른다(冷麪蒸豚價始騰·냉면증돈가시등)”라고 했다. 서경은 평양이다. 18세기 후반에는 평양에서도 돼지고기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살 수 있었다. 순조의 초년과 영재의 말년은 비슷한 시기다. 대도시 평양과 한양에 모두 돼지고기가 비교적 흔했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돼지의 ‘정체성’이다.‘규합총서’는 1809년(순조 9년)에 발간된 책이다. 필자는 빙허각 이씨(1759~1824년). ‘임원십육지’를 쓴 실학자 서유구의 형수다. 순조 초년과 닿아 있고, 영재 유득공의 ‘서경잡절’과도 비슷한 시기다. 이 책에서는 돼지고기를 지극히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돼지고기는 본디 힘줄이 없으니 몹시 차고, 풍병을 일으키며 회충의 해를 끼치니, 풍병이 있는 사람과 어린아이는 많이 먹으면 못 쓴다”라고 했다.비슷한 시기인데 왜 순조, 영재 유득공, 빙허각 이씨의 돼지고기에 대한 인식이 다를까?이유는, 돼지의 ‘정체성’의 문제다. 돼지의 뜻을 지닌 한자는 여러 종류다. 저(猪), 저(豬), 돈(豚), 시(豕), 해(亥) 등이다.야생의 멧돼지가 있다. 야생의 멧돼지를 포획하여 집에서 기른 돼지가 있다.흔히 ‘가저(家猪)’라고 표현한다. ‘저(猪)’를 멧돼지로도 표기한다. 품종개량이 없었던 시절이다. 멧돼지를 포획하여 집에서 기른 후, 그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집에서 기른 돼지’가 된다. 그렇다고 돼지의 DNA가 달라질 리는 없다. 여전히 야생의 성질이 남아 있다. 이 모든 돼지에 대한 구분이 정확하지 않다. 비슷한 시대지만, 영재 유득공, 순조, 빙허각 이씨의 돼지, 돼지고기에 대한 인식이 다른 이유다. 어떤 돼지인지 알 수 없다. 뒤섞여 있다.실험(?) 삼아 돼지를 길러본 적이 있다. 흑돼지 새끼를 분양받아 쌀뜨물과 음식물 찌꺼기만 먹이고 11개월을 길렀다. 60㎏을 넘기지 않았다. 지금 도축하는 돼지는 120~125㎏이다. 두 배 이상이다. 종자, 사육법, 먹이가 모두 다르다. 돼지고기 이야기는, 그래서, 조심스럽다./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4-17

거꾸로 태극기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국기다. 흰 바탕 위에 짙은 적색과 남색의 태극 문양을 가운데에 두고, 검은색의 건·곤·감·리 4괘가 네 귀에 둘러싸고 있다.태극기는 1882년 고종이 조선의 왕을 상징하는 어기(御旗)인 ‘태극 팔괘도’를 일부 변형해 만들었다. 고종은 백성을 뜻하는 흰색과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과 임금을 뜻하는 붉은 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기를 제작하게 했다.이는 고종이 계승코자 했던 정조의 군민일체(君民一體) 사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깃발은 일본 제국의 국기와 비슷해, 태극 무늬와 그 둘레에 조선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려 일본 국기와 구분이 되도록 했다.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 당시 김홍집은 고종의 명을 받들어 역관 이응준에게 지시하여 직접 배 안에서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도록 했고, 9월 박영효 등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에도 배 안에서 직접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했다. 1882년에 고종의 명을 받아 처음 제작되고 사용됐던 태극기는 1883년 3월 6일 정식으로 ‘조선국기’로 채택됐으며, 1897년 10월 12일 기존의 태극기를 그대로 대한제국의 국기로 사용했다.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발발하며 전국적인 만세 시위에 태극기가 사용돼 항일 운동의 상징으로 각인됐다.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했으며, 1942년부터 한국의 국기를 ‘태극기’라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태극기는 해방된 조선의 국기로 인식돼 1946년 1월 14일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에서도 태극기를 조선 국기로서 게양했고,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국기로 공식 제정됐다.대통령 전용기인 공군1호기에 태극기가 거꾸로 게양됐다고 해 말썽이다. 사실 태극기는 아래위를 쉽게 분별할 수 있다. 우선 건괘가 위쪽이며, 가운데 음양양의를 상징하는 태극마크에서 임금을 뜻하는 붉은색이 위쪽으로 가도록 게양한다는 것만 명심하면 된다. 어쩌랴. 역사를 모르면 국기 게양하는 법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법이니./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4-17

불!

장규열 한동대 교수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대성당이 타고 말았다. 불을 끄고 살펴보니 뼈대는 멀쩡하다지만, 쌓아올렸던 뾰족탑이 쓰러질 때에는 나라와 백성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린 듯 모든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유럽은 물론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도 같은 마음으로 불구경을 하고 말았다. 젊은 대통령이 이를 복원하겠다는 다짐을 발표하고 수다한 후원의 손길을 모은다지만 노트르담이 품었던 그간의 오랜 이야기는 이제 불꽃과 함께 영원히 사라졌다. 하룻밤 꿈처럼 그 모든 것을 지워버린 그 불길이 전쟁이나 테러의 결과였다면 차라리 덜 아쉬웠을까. 그 모습을 더욱 빛나게 하려고 보수작업을 하던 중에 속절없이 불태워 버렸다고 하니, 이를 가까이서 바라본 파리 시민들은 그 마음이 어땠을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릎꿇고 찬송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표하는 모습이 가슴에 와 박힌다.850년 역사라고 한다. 역사의 굴곡과 함께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기억을 담았을까. 프랑스혁명의 그늘을 견뎌 내었으며 2차 대전의 포화도 이겨냈을 터에 최첨단을 달리는 21세에 와서 그 치솟게 세워 올렸던 뾰족 첨탑이 스러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한숨과 탄식의 한순간으로만 기억할 것인가. 일년에 1천3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관광명소이기는 해도 노트르담대성당은 성당 즉 종교성을 가져야 하는 장소이다.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서있던 첨탐이 불길과 함께 스러지는 모습은 오늘 여러 모양으로 믿는 신앙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천국이든 극락이든 구원과 해탈을 기대하며 개인적인 신심을 갈고닦느라 세상과 이웃 그리고 주변과 우리들 곁에 존재하는 힘들고 어려운 모습에 눈을 감는 이들에게 던져진 경고가 혹 아닐까. 필자에게는 개인의 성취와 성공에 심취하여 무한경쟁가도를 달려가는 현대인의 바쁜 일상에 울리는 경종으로도 들린다. 세느강 건너로 불타오르는 노트르담대성당을 바라보면서 닥쳐올 위기를 실제로 만나면 함께 무릎꿇을 수 밖에 없음을 스스로 미리 보여준 일이 아니었을까. 미세먼지, 대기오염, 지구온난화, 핵위험 등 인류가 공유하는 큰 문제들 앞에는 결국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동체가 살아나지 않고는 이들 과제를 극복할 방법이 없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오해와 왜곡을 거듭해 가며 차별과 혐오를 무기삼아 내 편과 네 편을 끊임없이 가르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는 인간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한 자락 불길 앞에도 속절없을 것임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을까.한 가지 신통한 기억은 맹렬한 불길 앞에는 오른쪽과 왼쪽이 따로 보이지 않았다. 시답잖은 시빗거리가 많은 듯 하여도 정말로 중요하고 진실로 급한 일에는 이념이 다 무언가 싶게 떠오르지도 않는다. 이웃과 공동체, 사람과 사회를 정말로 세우고 살리는 일에는 보수도 필요하고 진보도 있어야 한다. 정말로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치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배워야 한다. 모두에게 잔인하였던 4월의 기억 앞에 오히려 겸허하게 ‘대한민국 공동체’를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깎아내리고 밀어내는 정치 대신에 격려하고 함께 더하는 정치를 만나고 싶다. 실수와 과오를 살펴 반복하지 않게 할 일이며, 성과와 성취는 더욱 살아나도록 부추겨야 할 터이다.밥도 짓고 쇠도 붙이는 불꽃이지만 한 숨 불길은 순간에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열정의 불꽃으로 세워 올리지만 무너뜨리는 불길도 분명히 보았다. 지어 올릴 때에 성실하게 열심히 해야 하지만 소중하게 지키는 일도 만만치 않음을 생생하게 보았다. 개인의 각성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필요와 할 일도 목격하였다. 잘 만들어야 하고 잘 지켜야 한다.

2019-04-17

마음만 먹으면 풀지 못할 문제는 없다

△블랙홀과학과 공학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만 먹으면 풀지 못할 문제는 없다.’ 정말 그런 걸까? 최근 블랙홀 사진을 관측했다는 뉴스가 연일 화제가 되었다.이게 뭐 대단한 뉴스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간단히 말해 블랙홀은 어마어마한 중력을 가지고 있어서 빛마저 빠져 나올 수 없는 거대한 구멍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진을 찍는다고 할 때 물체가 방출하는 빛을 찍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빛을 비롯한 모든 파동을 삼켜 버리는 블랙홀 그야말로 방출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흡수하는 것만 있는 블랙홀을 촬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포기하지 않고, 공학은 무너지는 과학을 세워 앉힌다. 하여 과학과 공학은 해결해내고야 만다.처음 블랙홀을 생각해낸 사람은 아인슈타인이었으며, 그의 유명한 논문인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이를 처음 언급했다. 아인슈타인이 생각하기에 시공간은 일종의 천으로, 네 귀퉁이에서 천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놓은 생태가 곧 시공간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 팽팽하게 당겨진 천 위에 탁구공을 올려놓으면 천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볼링공을 올려놓으면 천은 볼링공의 무게 때문에 움푹 패일 것이다. 이 둥글게 패인 자국이 중력이다.볼링공이 놓여 있는 곳 위에 구슬을 놓으면, 구슬은 움푹 패인 지점을 향해 빙글빙글 돌 것이다. 이러한 볼링공에 해당하는 것이 태양이며, 구슬에 해당하는 것이 태양계의 행성이다. 즉 중력이란 시공간의 일그러짐이고 그 일그러짐으로 인해 형성되는 것이 중력인 것이다. 그런데 볼링공보다 더 무거운 것을 천 위에 올려 놓는다면, 천이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의 무거운 물체를 올려놓으면 천은 찢어지고 말 것이다.바로 천의 찢어진 틈,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 틈, 이것을 생각해낸 아인슈타인조차 그런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부정해버린 이것, 블랙홀. 이것을 촬영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과학은 당당히 말한다. ‘마음만 먹으면 풀지 못할 문제는 없다’라고 말이다. 글쎄 그럴까? 과학도 포기해버린 것이 있다. 하나는 금을 만들어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태양이나 바람처럼 영원히 멈추지 않는 영구기관의 꿈이다.△연금술연금술은 고대 중국, 고대 그리스와 이슬람 문화권, 중세 유럽을 비롯하여 전 세계, 전 시대를 망라한 인간의 오랜 꿈이다. 이것은 납이나 구리와 같이 값이 싸고 흔한 금속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 금이나 귀금속으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이런 연금술이 성공한다면 막대한 돈을 들여 금을 캐지 않더라도 엄청난 돈 방석에 앉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 비법이 알려지면 너도 나도 금을 만들어 낼 것이 분명하니 금값이 폭락할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연금술사들은 자신의 연구내용을 숨기곤 했다.연금술사들이 중요하게 여긴 물질은 수은이었다. 왜냐하면 수은은 광석에서 금을 추출할 때 사용될 뿐만 아니라 다른 금속을 녹여서 아말감을 만들 때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수은을 이용하면 금속을 금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연금술사들은 수은의 위험성을 잘 몰랐기에 수은을 조심성 없이 다루었다. 그래서 수은 중독에 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은 중독조차도 연금술적인 변성의 과정으로 여기는 사람조차 있었다.우리가 잘 알고 있는 뉴턴도 이런 연금술에 뛰어든 사람 중 하나였다. 뉴턴은 위대한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괴팍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뉴턴은 로버트 훅에게 잔인할 정도로 모질게 굴었다. 왜냐하면 훅은 탄성력을 연구하여 ‘훅 법칙’을 만들었으며, 태엽 시계를 발명하기도 했다. 훅은 존경받는 과학자였으며, 영국 왕립협회의 창립 회원으로 초대 실험 주임을 역임했다. 뉴턴보다 먼저 중력의 기본법칙을 발견한 것이 훅이기도 하다.이런 훅을 미워한 뉴턴은 영국 왕립협회의 회장이 된 뒤 훅의 초상화를 떼어버렸다. 뉴턴의 저명한 어록 중 하나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뉴턴의 겸손함을 드러내는 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뉴턴의 것이 아니라 당대에 널리 떠돌던 말이었는데, 뉴턴이 훅에게 보낸 편지 속에 등장한다. 뉴턴은 등이 굽은 훅을 조롱하기 위해 이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뉴턴은 미적분을 발명한 라이프니츠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기뻐했으며, 천문학자 플램스티드와의 논쟁에서 지자 다양한 방법으로 복수했다고 한다. 이런 뉴턴의 괴팍한 성격은 연금술에서 사용하는 수은에 중독 됐기 때문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지금은 연금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금은 원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화학 반응을 통해 만들어낼 수는 없다. 즉 금은 빅뱅과 같은 현상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물질이다. 이것은 인간의 수준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무지해 보이고 무모했던 과학자들 덕분에 화학 지식이 축적되었다. 그리하여 황산, 왕수, 인산, 질산과 같은 물질이 발견되었으며 플라스크, 증류기, 스포이드와 같은 화학 기구가 만들어졌다. 연금술사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 꿈은 화학을 낳았고, 화학은 이 꿈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았다.△영구기관영구기관은 외부에서 한번 에너지를 주입하면 계속 일을 하는 가상의 장치다. 쉽게 말하자면 한번 힘을 주어 바퀴를 돌리면 영원히 돌아가는 기관이다. 이런 것이 가능할까? 12세기 인도의 천문학자인 바스카라(1114∼1185)는 부메랑 모양의 바퀴를 고안했으며, 15세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영구기관에 대해 깊이 고민한 바 있고, 16세기에는 아르키메데스의 나선 펌프를 응용하여 영구기관을 만들려고 했다.19세기에 줄(1818~1889), 헬름홀츠(1821~1894), 마이어(1814~1878) 등에 의해 열역학 법칙이 정립되면서 영구기관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열역학 제1법칙은 어떤 물체가 가진 에너지는 그 형태를 달리할 수 있으나, 에너지의 양은 없어지거나 생성되지 않고 그 양은 언제나 일정하게 보존된다는 법칙이다. 바꿔 말하면 에너지를 주면 준만큼의 에너지가 생긴다는 말이다.자동차의 엔진은 휘발유나 경유를 연소시켜 생긴 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꾼다. 그런데 ‘에너지의 양이 언제나 일정하다’면 왜 자동차마다 연비가 다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연소된 에너지가 전부 운동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전환과정에서 열·소리·진동 등의 형태로 바뀌면서 일부 에너지를 잃기 때문이다.현재의 공학기술로는 연소된 에너지를 모두 운동에너지로 바꿀 수 없다. 다시 말해 주입한 에너지만큼조차도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완전히 바꾸지 못하는 현실이다. 효율 100%도 달성하지 못하는 실정인데, 주입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양의 에너지를 산출하는 영구기관을 만드는 것은 어림도 없다. 열역학 법칙은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현상을 보편화한 것이다. 영구기관은 이러한 열역학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그런데도 영구기관을 발명했다는 주장은 끊이지 않고 있다.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유럽의 특허청은 영구기관과 관련된 무수한 특허신청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참다못한 프랑스 특허청은 1775년 영구기관과 관련한 특허신청을 아예 받지 않겠다고 못 박았고, 미국은 영구기관에 한해서 신청서뿐만 아니라 작동 가능한 발명품을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워낙 불가능한 일인데다 사람들을 현혹시켜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애초에 이런 특허신청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영구기관은 인간의 꿈이다. 이런 기계가 있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야말로 낙원이 열리게 된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추방시킨 이력이 있는 신이 이런 기계를 인간에게 허락할 리 없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던 저 태초의 어느 날부터 신을 거역해 왔다. 그런데 과학의 역사에서 보편적이라 굳건히 믿어온 법칙이 사실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는 것을 보곤 했다. 그런 이유로 영구기관에 대한 꿈을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2019-04-17

사월의 기도

강길수 수필가마음이 옴찔해졌다. 걷는 도로가 콘크리트 틈새에 시선이 저절로 머문 때문이다. 부슬부슬 단비 오는 사월 초순 한낮이다. 어제 이맘때는 저곳에서 황금빛 해님 셋이 활짝 웃으며 오가는 이를 반겼는데, 오늘은 웬일로 그 해님들이 기도 손으로 변신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 큰길 가로수 밑 잔디 새싹 사이에도, 같은 종의 쪼그만 기도 손이 여럿이다. 잔디 잎에 숨어있어, 잘 살펴야 보인다.‘황금빛 해님들이 사월의 기도를 바치다니! 사람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는구나.’그랬다. 도시에 살면서도 여기저기서 숱하게 보는 꽃이기에 늘 무심히 다녔었다. 한데, 그 꽃이 긴 밤 동안 올린 기도도 모자라 비 내리는 낮에 기도 손이 되어, 간절한 기도를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이월부터 십이월까지 끊이지 않고, 이 도시에서 저 꽃들은 만났었다. 물론 사월에 가장 많이 피었지만,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피고 지며, 씨앗 맺는 모습이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도 많았다.기도는 사람만이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알고 보면 그게 아니었다. 바닷가나 강둑, 시냇가 방천이나 논밭 둑, 산자락이나 산 오솔길 옆, 도시 가로수 밑이나 심지어 콘크리트 틈에서까지 억세게 살아내는 여러해살이 풀 민들레…. 그 민들레가 언제, 어디에, 어떻게 살든 일구월심 기도를 올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대체 민들레꽃은 무슨 기도를 바치기에, 하늘 향한 기도 손이 저리도 애절할까. 빗물 스며들 틈도 주지 않으려는 듯 옹골차게 오므린 기도 손이, 다부지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민들레는 일생을 기도하며 산다. 새싹 틀 때부터 잎은 하늘 향해 손 벌리고 기도한다. 꽃이 피면 낮엔 고개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손 벌린 기도를 한다. 밤엔 아예 꽃이 기도 손으로 변한다. 꽃 지고 씨앗 여무는 기간은 밤낮없이 손 모아 기도한다. 지난 이월, 놀라며 만났던 민들레꽃 한 송이와 관모(冠毛) 송이 하나. 그땐 기후변화란 시대 징표만 보았지, 민들레의 삶 전체에 스민 기도는 느끼지 못했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저지른 환경오염 카르마도 못 본체 살고 있으니, 저 민들레가 대신하여 기도하며 사는구나 싶다. 다가올 미증유의 시대를 대비하여, 철 가리지 않고 꽃 피우고 열매 맺어 자손을 퍼뜨리는 메시지가 오늘에야 마음에 와 닿았다. 학창 시절 제 발로 친구와 성당에 찾아가 영세하고, 기도생활을 한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내 기도는 거의 형식적이거나 이기적, 의무적으로 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성(理性) 있는 인간이라면, 민들레처럼 시대 징표를 읽고 대처하는 진정한 기도와, 그에 걸맞게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마땅할 터다. 이를테면 자연환경 보전을 위해 물 한 방울, 휴지 한 장 아껴 쓰며, 세제 한 방울이라도 덜 쓰고, 밥알 하나 소중하게 남김없이 먹는 그런 삶을 꾸려왔어야 했다. 그런데도 늘 타성에 젖어, 기도와 무관하게 적당히 세상살이에 타협하면서 살아왔다. 오늘, 삶이 곧 기도인 민들레 앞에서 나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누가 감히, 식물을 하찮게 여기고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지구 생태계 생명들 중에 어느 종이 가장 이타적으로 살고 있는가. 바로 식물이다. 미생물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그 삶의 기반을 식물에 두고 살고 있음은 모두가 아는 진실이다. 민들레만 하더라도 뿌리에서 잎, 꽃까지 식용이나 약용, 술과 마시는 차의 재료로 쓰이며 자기를 온전히 사람에게 바치고 있지 않은가. 혹자는 독초도 있고, 곤충을 잡아먹는 식물, 고등생물들에 해로운 식물도 있다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식물들도 나름대로 존재 이유가 있음이 분명할 것이다. 다만 인간이 아직 모를 뿐일 테니까.비록 늦었더라도, 민들레 따라 사월의 기도를 올리자. 기도가 삶으로 이어져,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와 열정을 닦자. 민들레꽃 관모가 바람 타고 높이 날아 번성하듯, 나도 희망의 관모를 하늘 높이 날려 보내자.

2019-04-17

임정 100주년, 민족사 정기(正氣) 바르게 세우자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지난 4월 11일은 상해 임정 수립 100주년 되는 날이다. 올해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임정 기념식을 거행했다.상해 임정은 1919년 3·1 독립운동의 연장선에서 출범해 자주 독립과 민족해방의 견인차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지난주 미국 상하원에서도 임정이 한국 민주발전의 토대가 되었음을 결의안을 통해 재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국내의 3·1 운동은 잘 기억하면서도 같은 해 설립된 임정의 역사는 망각하고 있었다. 다시 2019년, 임정 100주년을 맞이해 우리는 임정 26년의 민족사적 함의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우선 상해 임정은 1919년 3·1 운동의 연장선에서 항일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반만년 역사를 이어온 우리 민족은 한말 일제에 의해 허무하게 국권을 상실하였다. 일제의 조선 식민화과정에서 이 나라 총리대신 이완용 뿐 아니라 상당수 관료들이 일제에 협력하여 나라를 팔아먹었다.그러나 당시 지조있는 애국선혈들은 국내 의병 투쟁을 전개하다 상해 임시 정부까지 결성해 조국 해방 전선에 아낌없이 헌신했던 것이다. 해방 시까지 임정요인들은 중국 망명지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이들이 이국땅에서의 헌신적인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아직도 이들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또한 상해 임정이 국내외의 여러 독립단체를 통합해 단일 대오의 독립운동을 했음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상해 임정은 초기 지도자들 간 불화를 극복하고 한성과 연해주의 임정을 하나의 임정으로 통합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중국에서 중국 국민당의 상당한 지원을 받기도 하고, 일부는 중국공산당 팔로군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임정은 내부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1945년 8·15 해방 시까지 26년간 통합된 임정의 역할에 충실했다. 중국의 정부문헌과 학계에서도 임정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해방 후 임정 요인인 김구와 여운형, 송진우 등이 희생됐다. 정부 수립과정에서의 임정의 정치적 거목들이 희생시켰음은 안타까운 일이며, 민족사의 비극이다.상해 임정은 1919년 4월 11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출범해 여섯 차례나 임정 청사를 옮겨 가는 고초를 겪었다.이들은 1945년 8월 15일 중경에서 갑작스런 해방을 맞이했다. 지난해 필자는 상해에서 출발하여 항주, 소주, 장사를 거쳐 중경까지 임정의 피난길을 추적해 본적이 있다.특히 임정은 오늘의 국회에 해당되는 의정원을 갖추고, 오늘의 헌법격인 임시 헌장을 통해 민주 공화정이라는 정체와 국체를 분명히 했다. 당시 임정요인들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국내외 조직을 관리하고 광복군을 양성하면서 제한된 형태이지만 외교권까지 행사했음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대한민국 임정의 이러한 역사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대사에서는 이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해방 후 남한 이승만 정권은 반민족 행위자마저 척결하지 못했다. 특히 정부 수립 후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애국지사들이 친일 관료들에 의해 조사받는 역사적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의혈단 선봉인 김원봉이 친일 형사 노덕술에게 취조를 받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당시부터 ‘친일하면 삼대가 흥하고 반일하면 삼대가 망한다.’ 속설이 유포된 배경이다. 일본 아베 정권은 아직도 일제의 식민지배에 관한 진정한 사과는 없다. 이는 여태껏 민족의 자주성을 세우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다행히 문재인 정부가 임정의 역사를 바르게 살피고 민족의 정기를 다시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용두사미가 되지 않도록 그 과정을 지켜볼 뿐이다.

2019-04-16

백두산(白頭山)의 화산

백두산은 우리민족의 성산(聖山)이자 영산(靈山)이다. 단군 신화를 비롯해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설이 흐르는 신비의 산이다. 산의 규모가 워낙 크고 산세도 깊어 산중의 산으로 통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은 그 뿌리가 백두산에서 시작된다. 백두대간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 민간에 의한 신앙적 숭배도 유난히 많았던 전설적 산이다.조선시대 최고의 지도인 대동여지도 서문에서 백두산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조선 산맥의 조산(祖山)이니 3층으로 된 높이가 200리나 되고 가로로 퍼져 1천리에 걸쳐 있다”고 했다. 백두산의 웅대함에 대해서는 대동여지도 말고도 조선시대 만들어진 만기요람이나 택리지 등에도 소개가 돼 있다.백두산의 높이는 수준원점의 기준에 따라 남한과 북한, 중국에서의 높이가 서로 다르다. 북한의 원산 앞바다를 기준으로 측량한 높이가 2천750m다. 최고봉은 장군봉이다. 2천500m 이상 봉우리가 무려 16개나 된다.백두산은 또 전형적인 고산기후로 한반도에서 기후변화가 가장 심한 곳이다. 연평균 기온은 6~8도, 최고기온은 18~20도이다.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23도며 연중 겨울 날씨가 230일 정도 된다. 백두산에는 검은담비, 표범, 호랑이, 백두산 사슴, 큰곰 등 희귀동물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200여종의 조류와 2천700여종의 식물이 분포해 그야말로 자연 생태공원이나 다름없다. 지질학적으로 백두산은 약 200만 년 전부터 화산 활동이 약화되어 지금의 산세를 형성하였다 한다.기록에 의하면 1597년과 1668년, 1702년에 화산이 분출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지금도 백두산 주변 50km 내외에 진도 2~3의 약한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15일 국회 도서관 소회의실에서는 백두산 화산과 관련한 토론회가 열려 눈길을 끌었다. 특히 주제 발표에 나선 학자들이 백두산의 화산 폭발 가능성을 제기해 충격을 주었다.참석 학자들은 “지금 백두산은 심각한 화산분화 징후가 보이고 있다”고 말하며 만약을 대비해 정밀조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백두산의 폭발 가능성 과연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우정구(논설위원)

2019-04-16

여민동락(與民同樂)과 지역경제 회생

윤경희 청송군수필자는 지난해 7월 청송군수로 취임하면서 ‘여민동락(與民同樂)과 민본주의(民本主義)’를 가슴에 새겼다.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하라’는 맹자의 가르침과 ‘목(牧)이 민(民)을 위해 있는가, 민이 목을 위해 태어났는가, 목이 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牧爲民有也)이지, 민이 목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일갈한 다산 정약용의 민본정신은 오늘날 단체장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명제다.수도권을 제외한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은 ‘소멸’의 공포를 느낄 정도로 위기에 처해있다. 사람이 떠나고 ‘먹거리’는 줄어들고 있다. ‘공포’가 점차 ‘현실’로 다가서는 느낌이다.청송은 그나마 전국적인 브랜드 명성을 획득한 사과 산업이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주춧돌 역할을 하고 있어 타 시군보다는 상황이 좀 낫다고들 하지만 사과 산업이 언제까지 버텨줄 지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이 청송의 경쟁력을 키우는 훌륭한 대안이라고 판단했다. 사람이 모여야 돈이 돌고, 돈이 돌아야 주민들의 삶과 복지를 보다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지난 1월 필자의 눈에 들어온 뉴스가 있었다.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축제’를 찾은 관람객이 183만 명으로 집계됐다는 보도였다. 22일 동안 열린 축제에 하루 평균 8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축제를 즐겼다는 것이었다. 지역 상품권을 통한 농·특산물 판매액도 12억3천485만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지역 상품권 회수를 통한 공식적인 집계일 뿐 숙박, 음식, 서비스업 등에 관광객들이 쓰고 간 비공식적인 비용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실제로 축구장 24개 면적의 얼음벌판을 가득 메운 관광객들이 얼음낚시는 물론 시내로 이동해 실내얼음조각광장과 커피 박물관 등을 방문해 화천읍내는 온종일 북새통을 이뤘다고 대다수 언론들은 보도했다.화천군이 이 축제를 처음 개최한 2003년, 군민 인구정도인 2만 명을 목표로 한 축제가 이처럼 ‘히트상품’이 된 것을 보고 솔직히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방자치단체가 군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됐다.화천군이 ‘산천어’를 테마로 축제를 꾸렸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군민들에게 ‘먹고 살 거리’를 제공해야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다산선생도 말씀하셨듯이 목(牧)은 민(民)을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민이 행복하고 잘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은 행정기관과 단체장의 제1의 임무다.필자는 이를 위해 군에서 시행하는 모든 행사가 ‘행사를 위한 행사’가 아니라 군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판단했다.가장 먼저 시행한 것이 청송사과축제의 행사장소 변경과 야간축제 도입이었다.사과축제는 그동안 청송 읍내와 주왕산 중간 지점에서 열려 주민들과 관광객의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따라서 지난해부터 사과축제 행사장소를 청송 읍내에 있는 용전천으로 변경했다. 또한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한 야간축제장도 개설해 주민과 관광객이 쉽게 찾아와 함께 즐기는 축제로 변신을 시도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주)KT 및 고려대 빅데이터융합사업단에 의뢰해 조사한 ‘2018년도 청송군 관광 통계 조사 분석’ 결과 청송사과축제 방문객은 전년 대비 27% 가량 늘었다. 특히 지역 주민의 방문이 100% 이상 증가해 청송사과축제가 군민 모두가 함께하는 대동축제로 탈바꿈했다. 저녁 시간대 방문객도 전년 대비 115% 늘어 ‘밤이 아름다운 축제’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다.또한 전국단위, 시·도 단위의 다양한 체육행사 유치에 심혈을 쏟고 있다. 체육행사는 선수, 관계자뿐만 아니라 대회기간 중 선수 가족까지 오는 경우가 많아 지역경제 파급효과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대교눈높이 전국 고등 축구리그, 전국 가을철 중고배드민턴대회, 야구소프트볼협회장배 야구대회, 도 단위 탁구대회·족구대회·게이트볼대회, 산악자전거대회, 전국 드라이툴링대회, 청송트레일런 등을 개최했다. 올해도 전국 규모의 대회를 비롯한 크고 작은 각종 대회들을 계속해서 개최하고 있다. 많은 체육인과 체육가족들이 청송으로 오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클 뿐 아니라 이들이 앞으로 개인적으로 청송을 방문할 동기도 유발할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고 있다.이밖에 공직자들에게도 담당부서의 각종 연수나 간담회, 회의 등 업무와 관련된 행사 및 개인적인 경제활동도 가급적 지역에서 해결하라고 주문했다.청송이 살아야 지방이 살고, 지방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는 과제는 그저 구호로 그칠 것이 아니다. 지방행정기관의 뼈를 깎는 노력이 선행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과제인 것이다.

2019-04-16

외모보다 능력, 보더콜리

1990년대에 바텔 전화기의 광고 모델로 출연한 개가 있었다. 유명한 명견 래시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 개는 콜리(Collie)라는 품종이다. 콜리라는 이름은 고어(古語)로 ‘검정’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검은 털이 주류였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이 개를 남쪽으로 데리고 간 뒤 품종개량을 거듭하여 지금의 세이블(sable) 앤드 화이트 계통의 고급 이미지로 굳어졌다. 사람들이 흔히 연상하는 털이 길고 풍성한 모습의 콜리는 러프 콜리, 털이 짧은 콜리는 스무스 콜리라고 부른다. 보더 콜리(Border Collie)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국경에서 가축, 특히 양을 몰기 위해 콜리를 개량하였는데, 국경지역을 뜻하는 단어 보더(border)를 붙여 보더콜리라 불린다. 세이블(흑담비 모피와 같은 털발이 길고 실크같은 광택이 나는) 러프 콜리도 유명하지만 현재는 보더콜리가 세계에 더 널리 분포하게 되었다. 외모보다 능력 때문이다.견종의 개념이 생긴 것은 사실상 200년밖에 되지 않는데, 현대사회의 개 품종화 과정에서는 외모지상주의의 사회상을 반영하듯 외모를 중요시 여긴다. 사람이 개를 선택할 때도 멋지거나 귀여운 외모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행동적 특징이 좋더라도 외모가 다르거나 좋지 않으면 다음 번식에서 제외시킨다. 몰상식한 번식가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품종기준과 다른 털색이나 모양을 가진 개들이 나타나면 열등한 개체로 치부하거나 심지어 죽이기도 한다. 이렇게 대부분의 견종은 외모를 기준으로 하여 그 기준을 고착화 하면서 탄생하였지만 보더콜리는 전혀 다른 탄생 배경을 가지고 있다. 보더콜리는 양몰이를 해야하는 목동들에 의해 외모와 상관없이 몰이능력이 뛰어난 개체위주로 선택, 번식 되었다. 그 과정에서 견종에 상관없이 몰이능력이 뛰어나면 이종교배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심지어는 견종의 구분이 없는 잡종견이어도 능력이 뛰어나면 번식에 참여시켰다. 즉 외모라면 빠지지 않는 콜리끼리의 동종교배가 아닌 다른 견종이 번식에 사용된 이종교배를 통해 탄생한 견종이 보더콜리이다. 보더콜리는 이 때문에 매우 다양한 외모를 가지게 되었지만, 폭넓은 유전자 풀을 지니게 되었다.외모보다는 능력이 우수한 개체의 지속적 선별, 사람과 함께 일을 하며 호흡을 맞추는 과정에서 가지게 된 강인한 체력과 교감력 등 현재의 보더콜리 매력이 만들어지게 된 것인데, 보더콜리는 세계에서 가장 머리 좋은 개로 유명하며, 그 명성에 걸맞게 학습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기네스북에 등재된 ‘체이서’라는 보더콜리는 무려 1천22단어를 구분할줄 아는데 단어를 듣고 그 단어와 관련된 그림이나 행동을 선택할 줄 안다. 명사와 동사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어 조합된 명령을 구별해서 알아듣고, 모르는 장난감의 이름을 들었을 때 소거법으로 유추해 내는 능력까지 있다. 게다가 보더콜리는 지능만 좋은 것이 아니라 뛰어난 체력, 민첩성을 가져 이를 바탕으로 스포츠에서도 두각을 보인다. 프리스비, 어질리티(장애물 달리기), 복종훈련, 플라이볼(테니스 공을 가지고 하는 릴레이 경주) 등의 도그 스포츠에서 보더콜리는 다른 견종과 경쟁하여 대부분 결승전에 올라간다. 플라이볼 대회 같은 경우에 ‘ABC(Anything But Collies) 룰’이라는 것이 있어서 보더콜리만을 가지고서 팀을 짜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정도이다.현대사회에서 외모를 기준으로 품종기준을 만들고 그에 따른 번식을 하므로 유전적 문제는 해가 지날수록 커지고 있다. 보더콜리는 품종으로 공인되면 생김새의 표준에 따라 번식이 제한될 것을 우려하여 등록을 계속 거부해오다 1977년에야 공인된 품종으로 등록하였다. 현재에도 보더콜리의 표준형은 다른 품종들과는 달리 몸 전체에 반점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색이나 패턴을 전혀 따지지 않으며, 흉터나 부러진 이빨 또한 도그쇼에서 감점요인이 아니다. 영국 보더콜리단체인 ISDS는 여전히 보더콜리의 탄생배경을 기초로 하여 견종을 보호하고 있지만 순종혈통이 강조되고 부모 모두 같은 견종으로 등록되어야 다음 세대가 순종으로 인정받는 캔넬클럽의 견종 등록 규칙과 쇼독 비즈니스 논리에 보더콜리는 도전받고 있다. 공인등록 이후 대부분 동종교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최근의 보더콜리는 안구기형과 관련한 유전병 검사를 받을 필요가 있게 되었는데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외모가 다가 아니다./서라벌대 반려동물연구소 소장(마사과 교수)

2019-04-16

도심 재생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지방에 소재한 도시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들 지역경제 활성화에 목을 매고 있다. 당연히 야심찬 프로젝트가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많은 사례들의 공통된 성공요인은 단 하나다. 그것은 해당 지역 주민 내지는 프로젝트 대상의 진정한 참여다. 그것이 특정한 건축물일 수도 있고 지역의 무형의 자원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 그리고 그것이 지역에 의미하는 바가 정확하게 어떠한 것인지를 해당 지역 주민이나 프로젝트의 당사자들이 알고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즉, 어떠한 지역에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였는데 그것이 성공하였다고 해서 동일한 벤치마크를 통해 마치 외형적으로는 같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도입한 지역에서도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포항시도 최근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 중에 있다. 그중에서도 도심재생 내지는 상권 활성화는 수년에 걸친 현안과제다. 상권이라는 것은 사실 생물이나 마찬가지다. 시장 또는 상가라는 것은 지리적 공간적으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지만, 그곳에 소재하고 있는 상가에 드나드는 소비자나 외부에서 유입되는 방문관광객은 언제든지 밀물처럼 밀려오다가는 순식간에 썰물이 빠지듯이 빠져 나갈 수도 있는 항상 변화하는 존재다. 이와 같이 변덕이 심한 소비자들의 발길을 과거의 번화가를 떠올리며 활성화시킨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발길은 한번 되돌려지면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되돌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신중하게 살펴보아야하는 것은 상권의 본질이지 단순하게 노후화된 거리의 환경개선이나 건축물들 사이의 간판의 통일과 같은 외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그저 사업을 추진하는 사람에게는 뿌듯한 만족감을 줄지는 모르지만 상권의 핵심인 소비자의 발길을 돌리고 지갑을 열게 할 정도의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그렇다면 우리가 신경써야할 상권 활성화의 본질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추진해야할 것인가. 많은 조건들이 있겠지만 적어도 다음 네 가지는 반드시 필요하다. 첫째, 왜 그곳에 가야만 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온라인쇼핑 등에서 더 싸고 더 다양한 물건을 편하게 집에서 받을 수 있는 물품을 취급하는 상가는 아니어야만 할 것이다. 굳이 소비자들이 교통 불편을 감수하며 그곳에서 사고 싶은 이유를 해당 상가 스스로 만들어 내어야만 한다. 즉 유니크함을 갖추어야한다는 이야기다. 둘째, 건물주와 입주자 간 공동의 번영을 추구해야만 한다. 다소 낮은 임대료라도 모든 상가가 입주하면 건물주는 임대수입이 확보되고 입주상가는 그만큼 가격경쟁력이 높아져 상권회생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셋째, 네트워크의 연결성을 확보해야 한다. 가령 앞 상가에서 물건을 살 경우 적립된 포인트를 옆 상가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업종과 업태가 전혀 다름에도 상가들이 이러한 연결성을 확보하게 된다면 특정 지역상권 전체가 하나의 종합백화점과 같은 시너지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주차장에도 적용할 수 있는 문제다. 상가의 어느 가게를 찾더라도 소비자가 주차서비스를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다면 상가 활성화에는 플러스 요인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재생이나 활성화의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실제 당사자이자 주인공인 건물주나 상인들이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만 가능하다.

2019-04-16

교육을 짓는 마음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늦은 밤 라디오 프로그램의 오프닝 멘트를 듣고 필자는 순간 넋을 놓아버렸다. 아나운서는 “짓다”라는 단어에 대해 설명하였다. “무언가 각별한 것을 만들 때 우리는 만든다는 서술어 대신 짓는다는 표현을 쓸 때가 있습니다. 밥을 짓고, (중략) 집과 글 등을 지을 때가 그렇지요. 한 번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들에는 짓는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사람의 노력과 시간, 그리고 정성과 진심이 들어 간 것들에만 비로소 짓는다는 말을 붙이곤 하죠. (하략)”필자는 ‘교육’과 ‘짓다’를 연결해 보았다. “교육을 짓다!” 역시 어색했다. 어색함의 원인은 두 단어의 상반된 이미지 때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교육’의 차가움과 ‘짓다’의 따뜻함!교육은 한 때 개인과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부모들은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녀를 교육시켰다. 교사들 또한 사명감으로 교육에 매진했다. 부모의 희생과 교사의 헌신을 아는 학생들은 이들의 정성에 보답하고, 나아가 국가 발전에 공헌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비록 많은 것이 부족한 시절이었지만, 학생들의 마음속엔 꿈이 넘쳤다. 그 꿈은 현실이 되었다.아마 그 때는 ‘교육’과 ‘짓다’를 연결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 두 단어가 매개가 되어 “교육이 희망을 짓다!”와 같은 명문장이 만들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를 외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말하고, 쓰는 대로 이루어졌던 때가 우리 교육계에도 분명 있었다. 그 때의 사람들에겐 신명이 충만하였다.하지만 적폐청산의 덫에 걸린 이 사회 어디에서도 신명을 찾을 수 없다. 국민은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그 아우성에 봄꽃도 자세를 한껏 낮추어 피었다 진다. 그런데 적폐놀이의 재미에 빠진 양치기 정치인들만 좋아지고 있다고 히죽댄다. 이들의 현실인식 수준은 재난 수준이다.그런데 재난 수준의 재앙이 발생한 곳이 한 곳 더 있다. 바로 학교다. 봄꽃이 한창인 4월, 재난과 같은 시험이 학교를 휩쓸고 있다. 학생들은 유황불보다 더 뜨거운 시험에 마음은 물론 꿈과 희망을 데였다. 불에 덴 상처에는 좀처럼 새살이 돋지 않는다. 생명력 강한 산에도 산불이 지난 후에 다시 생명이 자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물며 우리 학생들은 어떨까?학교 붕괴, 교육 무용론 등 교육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설자리를 잃었다. 교육이 이 지경까지 온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시험에 대한 교사들의 오해와 부모의 시험 점수에 대한 욕심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많은 교육 전문가들이 평가방법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내놓고 있지만, 시험은 더 괴이한 모습으로 변해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내몰고 있다.“공부 없는 세상, 학교 없는 세상, 시험 없는 세상”을 “학생들의 천국”이라고 말하는 글을 보았다. 과연 이런 세상이 존재할까? 비록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이 나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즈음은 꿈꾸었을 세상이다. 사회는 예측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변화가 있다. 하지만 학교 시험은 요지부동이다.시험을 바꿀 수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시험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보자. 예전처럼 시험 기간이 되었으니까 무조건 공부를 해서 시험을 보라는 식이 아닌 학생들에게 시험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자, 그것도 시간을 두고 진심을 다해서! 그리고 교사들도 점수를 위한 시험이 아닌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변화 정도를 점검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의 학교생활을 스스로 개선해 나갈 수 있는 문제를 정성을 다해서 지어보자. 학부모들도 시험 결과에만 눈멀지 말고, 자녀들이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을 응원하자. 그리고 결과에 대해 격려하자. 이렇게만 된다면 이 나라 교육도 잃어버린 희망을 다시 지을 수 있지 않을까!

2019-04-16

열 두 명이 테이블에 둘러앉을 때

왜 학교는 변하지 않는가? 교실은 수십년째 같은 모양, 같은 방식을 왜 고수하고 있는가? 의문을 가진 부호가 있었습니다.1930년 보스톤 북부에 있는 150년 전통의 유명 사립 고등학교를 찾아가 루이스 페리 교장에게 제안하지요. “틀에 박힌 주입식 교육 방법을 바꿀 수 있는 완전히 혁신적인 교육 시스템을 제시할 수 있다면 거액을 기부하겠소.”석유 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에드워드 하크니스(Edward Harkness)는 현재 가치로 약 800억원의 금액을 이 학교의 교육 실험에 선뜻 투자하기로 제안합니다.교장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교사들과 고심 끝에 상담교사의 충원이나 노벨상 수상자를 초빙, 영감을 불어넣는 강연을 확충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습니다. 하크니스는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는 뜻입니다. 학교 시스템 자체를 완전히 뒤 바꿀 수 있는 혁신적인 안을 다시 내놓으라 요구하지요. 교장과 교사들은 다시 6개월 밤샘 작업을 합니다. 비로소 하크니스의 입가에 웃음이 번져 나지요.정원을 12명 단위 모든 수업은 토론으로 진행한다. 1년을 3학기로 나누고, 1학기에 10주 수업을 한다. 역사나 문학 뿐만 아니라 수학, 과학, 음악, 미술까지 교과서를 없애고 책을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수업한다. 학생들은 원탁에 둘러 앉아 서로를 마주보고 질문하고 응답하며 서로를 가르친다. 교사는 이 토론을 진행하되 가르치지 않는다.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Phillips Exter Academy). 미국 최고의 사립고등학교입니다. 학생들은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 토론할 내용을 철저하게 공부해 옵니다. 졸업생들은 대부분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하지요. 하버드, 예일, 브라운, 콜럼비아 등. 하크니스의 기부 이래 80년 동안 최고의 인재를 키워내는 탄탄한 시스템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학생들은 경쟁하지 않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서로에게 배웁니다. 타원형 책상에 하크니스 테이블(Harkness Table)이라는 이름을 붙이지요. 신입생들이 읽는 학교 규칙이 바로 ‘Facebook’입니다. 졸업생 중 한 아이가 세운 회사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마크 주커버그의 페이스북입니다.자그마한 방 한 칸, 빼곡하게 고전으로 가득한 책장이 둘러 있고 큼직한 타원형 테이블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이 새로운 방식의 교육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교육이 들불처럼 퍼져 나갈 수 있기를 꿈꾸어 봅니다. /조신영 인문학365 대표

2019-04-16

채권이 투자의 기본

김학주 한동대 교수많은 이들이 투자라고 하면 위험한 주식을 떠올린다. 위험하다는 것은 나중에 수익률이 어떻게 변할지 불확실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채권은 수익률의 변동 폭이 작다. 그래서 안전자산이라고 불린다. 결국 투자는 채권부터 시작해야 하고, 그 위에 위험자산인 주식을 더해가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투자자들은 채권에 대해 생소하다. 과거에는 한국 채권시장의 유동성이 작아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증권시장에서 채권관련 상품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채권은 장기채권과 단기채권으로 나누어 투자할 수 있다. 장기채권의 경우 만기까지 보유하는 투자자는 거의 없다. 즉 차익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잔존 만기(duration)가 길수록 시중금리 변동시 채권가격도 크게 움직이므로 시세차익을 얻기에 적합하다.장기채권으로는 한국의 국고채를 추천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의 인구노령화가 가파르게 진행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익 확보 수요가 증가했다. 그런데 보험사나 연기금이 이러한 수익자들의 장기채권 수요를 외면하고 투자자산에 주식이나 파생상품과 같은 단기 위험자산을 많이 섞어 놓았다. 3년 임기의 대표이사들이 자신의 임기 내에 성과를 내려는 의도였다.그런데 우리나라도 2022년 엄격해진 국제회계기준(IFRS 17)이 도입되면 이런 변칙적 자산운용이 어려워진다. 즉 이를 대비하기 위해 지금부터 장기채권 수요가 증가할 것이다. 물론 한국의 보험사나 연기금이 해외채권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한국 정부가 환위험 헤지(hedge)를 엄격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비용부담을 감안하면 한국채권 매수 쪽으로 기울 것이다. 그만큼 시세차익을 기대할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채권의 차익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물론 국고채는 이표(coupon)가 주어져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세금이 부과되지만 장기채권의 경우 이표 수익보다 시세 차익이 훨씬 크기 때문에 세금에 예민한 투자자들에게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반면 단기채권의 특징은 시장에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해당 채권을 만기까지 보유하면 구입시 시장수익률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장 높은 수익률을 약속하고 있는 미국 국채가 매력적이다. 특히 단기적으로 세계경제가 불안해 자금이 미국에서 이탈하기를 꺼려하고 있고, 그 결과 달러가 강세기조를 보이고 있으므로 환차익 측면에서도 미국 채권은 단기적으로 좋다.한편 세계적으로 금리가 하락하고 있다. 그만큼 채권가격의 상승을 의미하므로 채권투자에 나쁘지 않은 환경이다. 미국의 주택시장도 금리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미국은 금리 하락시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사람들이 만기 이전에 낮은 금리로 대출을 갱신할 수 있는 옵션(prepayment option)이 있다. 이 경우 대출은행들은 피해를 보기 때문에 더 금리가 하락하기 전에 채권을 사서 미래 이자수입을 확정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채권 가격이 오르고 금리가 추가 하락하는 관성을 갖게 된다.금리가 내리는 상황에서는 채권가격 상승에 따른 시세차익을 얻지만 그 이후에 투자하는 분들은 낮아진 수익률의 고통을 안게 된다. 채권뿐 아니라 모든 자산의 투자수익률이 낮아진 상태다. 참을 수 없이 낮아진 수익률을 극복하기 위해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에 대출을 해 주는 고금리 상품이 늘고 있다. 대출받은 기업은 정기적으로 영업성과나 재무상태를 보고해야 하는데 이런 상품들의 약관을 보면 그런 조건이 느슨하다. 그래서 대출받은 기업이 부실해져도 초기에는 파악되지 않는다.리만사태 이전에는 자산가격 상승세를 더 즐기기 위해 이런 상품들이 유행했다면 지금은 낮아진 수익률을 참지 못해 여기에 손을 댄다. 동기는 다르지만 결과는 같을 것이다. 채권을 주식처럼 투자하지는 말자.

2019-04-15

태양을 만져라(Touch the Sun)

“너무 높이 날지 말거라. 태양의 열기 때문에 날개 밀랍이 녹는다.”고대 그리스의 장인 다이달로스와 아들 이카루스는 마치 아이언맨이 수트를 입고 날아다니는 것처럼 에게해 상공을 훨훨 날아 크레타 섬을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비행에 심취한 이카루스는 충고를 잊어버립니다. 자신의 한계를 잊어버린 채 더 높은 곳으로 비행하며 환희와 절정을 맛봅니다. 결국 이카루스의 날개는 녹아내리고 바다를 향해 추락하고 말지요.21세기 인류는 태양을 향해 비행하는 새로운 도전에 나섭니다. 터치 더 선(Touch the Sun) “태양을 만져라” 프로젝트입니다. 2018년 8월 12일 새벽 3시 31분. 인류 최초의 태양 탐사선 파커 솔라 프로브가 태양의 신비를 풀기 위한 임무를 받고 발사에 성공했지요.태양은 도대체 얼마나 뜨거울까요? 포스코 용광로의 쇳물이 약 1천500℃를 넘는다고 합니다. 금속 중 가장 녹는 점이 높은 물질이 텅스텐은 3천410℃가 돼야 녹는다죠. 태양 표면의 온도는 무려 6천℃입니다. 코로나 온도는 무려 150만℃.현대판 이카루스인 파커는 섭씨 150만℃의 태양 코로나를 뚫고 태양 표면에 도달하는 게 임무입니다. 나사(NASA)는 두께 11㎝의 탄소복합체 열보호 시스템(TPS)을 외부에 둘렀습니다. 놀라운 신물질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태양의 코로나를 뚫고 들어가는데도, 내부 온도는 섭씨 27℃를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태양의 중력에 빨려들지 않으려면 탐사선의 속도는 초속 190㎞ 이상을 유지해야 합니다. 1초만에 포항에서 대구를 거쳐 대전 근처까지 날아가는 속도입니다.파커는 지금 태양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중입니다. 2025년까지 7년 동안 24차례 태양에 근접 비행하면서 태양 궤도를 돌고 마지막으로 코로나 속으로 급강하해 최후의 임무를 다 한 뒤 태양 속으로 빨려 들어가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하네요.하늘을 날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은 비행기를 만들어 냈고, 다이달로스의 후손들은 우주선을 뚝딱 뚝딱 지었으며 결국 태양을 향해 녹지 않을 탄소복합섬유로 몸을 감싼 작품을 날려보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꿈을 향해 날개 짓하는 우리의 인생. 추락할 수도 있고 크게 다칠 수도 있으며 불행하게도 목숨을 잃는 수도 있겠지만 도전하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견적 나오는 플랜을 적당히 세우며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 소명을 따라 한계를 계속 돌파하며 현실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삶을 꿈꾸는 그대를 응원합니다. /조신영 인문학365 대표

2019-04-15

참된 삶의 가치

강희룡 서예가사람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삶의 형식은 개인이 처한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현대인의 생각에는 대개 부모 잘 만나 큰 고생 없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면 복된 삶이라고 여긴다. 이렇듯 복은 우리의 삶 속 깊숙이 들어와 작은 복에 만족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남의 복을 부러워하며 복 없는 팔자를 원망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요즘 우리가 말하는 복이 있고 없고는 대체로 자기 당대에서 사회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얼마나 누리고 사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또 결과로서만 부각돼 있다.지난 전통사회에서도 사람의 삶에 작용하는 복은 매우 중시됐다. ‘서경(書經)’에 오복이 나오는데, 첫 번째의 복으로 장수를 들었다. 오래 살아야만 여러 복을 누릴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두 번째로 부(富)를 들었는데, 이것은 사회적 성공을 의미하며 연봉이 높고 명망 있는 직업을 말한다. 세 번째는 강녕(康寧)으로 큰 병과 재난을 겪지 않는 건강하고 편안한 삶을 의미한다. 네 번째는 덕을 좋아하는 삶으로 도를 즐기는 삶을 들었는데 이 경우는 자신을 늘 반성하며 의미 있고 건전하게 살고자 하는 종교적인 삶을 의미한다. 끝으로 제 명에 죽는 것으로 곧 자신의 할 바를 다하고 죽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잘 죽는 것’이다.조선후기 문신인 성대중(1732~1809)은 그의 저서 ‘청성잡기(靑城雜記), 성언(醒言)’에서 복은 다섯 등급이 있으니 각자가 택하기 나름이라며 ‘덕을 많이 닦고 재물이 아예 없는 것이 첫째로 가장 좋은 복이고, 재물이 넉넉하지는 않아도 조금 있는 경우가 둘째이며, 덕도 많이 닦고 재물도 많은 경우가 셋째, 덕은 그럭저럭한데 재물은 넉넉한 경우가 넷째, 덕은 형편없는데 재물만 많은 경우가 가장 안 좋은 복이다’라고 정리했다. 세 번째에 이미 화의 조짐이 보이니 건괘(乾卦)가 처음 음이 생기는 구괘(59E4卦)로 가는 것과 같고, 네 번째는 음이 많아진 비괘(否卦)와 같으며, 다섯 번째는 평상이 다리부터 깎이기 시작해 살갗까지 미친 아주 위태로운 박괘(剝卦)와 같아 목숨이 위태로움을 가리킨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완벽한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늘 네 번째와 다섯 번째에 있다.성대중은 최고의 복을 받은 사람으로 중국 주나라의 고공단보(古公亶甫)를 예로 들었다. 고공단보는 주나라의 왕업을 일으킨 문왕의 할아버지이다. 강대국인 적인(狄人)이 나라를 탐내 압박하자 땅을 내주고 떠났다. 대대로 이룬 지위와 재물을 지켜내자고 백성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니 이 결정이야말로 고공단보가 덕을 많이 닦았다는 증좌일 것이다. 백성들 역시 이 어진 마음에 감복해 그동안 이뤄놓은 물질적 안락을 버리고 험난한 피난길을 함께 따랐다. 이것이 밑거름되어 마침내 기산 아래에 새로운 터전을 일구고 그곳에서 문왕을 거쳐 무왕(武王)에 이르러 천하를 소유하는 주나라의 왕업을 이뤘던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복이 있다는 것은 주로 물질적이고 현세에 국한되며 남보다 좀 더 많이 누리는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대중은 이와는 상반된 관점에서 물질이 아닌 덕을 닦는 것과 현재가 아닌 미래에 초점을 맞춰 오히려 당대에 굶주리고 어려운 것을 최고의 복으로 여기고, 물질적 풍요가 가장 성할 때를 반대로 최하의 복이라고 한 것이다. 실제로 물질의 풍요로움이 당장의 복일 수는 있으나 내면으로 경계하지 않는 한 나태와 사치와 자만과 갑질로 이어지고 끝내 화를 부르기에 이것이 복의 겉모습에 숨겨진 재앙이 아니겠는가. 가족들의 갑질로 국민의 지탄을 받는 등 부정적인 요인들이 잠잠해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대한항공 사내 이사직마저 잃어 주총에서 밀려난 한진그룹 회장이 최근 별세했다. 이 부고소식을 놓고 보수와 진보의 언론과 정치권에서 설왕설래하지만, ‘오너리스크’ 해소로 한진그룹 주가가 동반강세를 보였다니 덧없고 씁쓸한 소식으로 들린다. 소유가 아닌 향유하는 삶으로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는 삶이 참된 것임을 시사하는 바 크다.

2019-04-15

타인의 연애편지를 훔쳐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한 시대를 빛냈던 한국의 근대문학, 예를 들어 김동인이나 염상섭, 이상이나 정지용, 박태원 등의 작품들은 이제는 중고등학생들의 국어나 문학 교과서에만 남겨져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덧없는 걱정이 생길 때가 있다.물론 교과서에나마 남겨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교육과정의 담당자들에 의해 여전히 남기고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하지만 문학 작품들이 뒷 세대들에게 다시 읽히고 그 새로운 해석을 매개로 또 새로운 의미를 획득해가는 과정이 이른바 문화적 생산력 내지는 해석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면, 한국 근현대문학은 이제는 새로운 시대의 문화를 생산할 힘을 잃어버리고 교육과정의 일부에 머물러, 닫혀 있고 명확한 해석만을 재생산하는 것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긴다.현진건의 사진.분명 문학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독자들 자신의 몫이다. 이미 공인된 해석이 갖는 힘을 지나치게 절대화하지 않는다면, 어떤 문학작품이든 독자 자신이 갖는 개개인의 이상과 가치에 맞게, 그리고 변화하는 동시대의 문화적 함의를 통해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학 작품에 대한 열린 해석의 가능성은 그 사회가 얼마나 열린 가치를 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서가를 뒤지다가 오랜만에 현진건의 소설집을 꺼낸다. 현진건(玄鎭健·1900~1943)이라고 하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바로 ‘운수 좋은 날’(1924)의 ‘김첨지’를 떠올릴 것이다.“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이라는, 인력거꾼 김첨지에게 가장 운수가 좋았던 날이 바로 병에 걸린 아내가 죽은 가장 운수가 나쁜 날이었다는 역설이 자본주의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어 크게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그 때문인지 어지간한 문학 교과서들에는 대부분 수록이 되어 있어서, 현진건이라는 이름을 바로 기억해내지 못하시는 분이라도, 아마 이 ‘운수 좋은 날’이라는 제목이나 그 마지막 상황이 자아내는 독특한 페이소스만큼은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사실, 현진건은 1920년대 무렵 일제 식민지하에서 기형적으로 자본주의화하는 도시 서울의 풍속도를 가장 예리하게 파헤쳤던 작가였다. 비록 ‘운수 좋은 날’로 대표되기는 하였으나, 도시노동자의 피폐한 현실을 그려내는 것만이 작가 현진건의 주제는 아니었던 셈이다. 에두아르 마네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들이 갖고 있던 속물적 취미를 자기 작품의 풍자적 대상으로 삼았던 것처럼, 현진건은 가장 예리한 시선으로 자기 주변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삶의 양상을 소설 속에 옮겨와 일종의 풍자적 대상으로 삼았다.현진건이 초창기부터 꽤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랑의 열병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1920년 무렵 조선 사회의 예술적 아이콘과도 같았던 나혜석과 김우영의 화려한 결혼식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자유연애’라는 사상이자 풍속이 널리 퍼지게 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근대적 사랑의 열정이 일종의 풍속이자 정신으로 체현되었던 것이다. 현진건은 이러한 상황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냈다.그가 최초로 발표한 소설인 ‘희생화’(1920)에서 근대적 사랑의 열기에 들떠 바뀌어 가는 누님을 바라보는 남동생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창경원에 벚꽃이 한창일 무렵, 나는 누님과 함께 식물원에 간다. 누님은 공부를 썩 잘하고 재주가 비범하다는 같은 학교 4학년 급장과 시선을 마주치고 얼굴이 붉어졌던 것이다.이후 같은 학교 지육부(智育部)의 간사로 활동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감정을 갖게 되지만, 두 집안 사이의 반대로 그들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하게 된다. 집안의 반대로 사랑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주제는, 이미 고전소설에서부터 신소설에 이르기까지 오래되어 낡고 뻔한 문학적 클리셰이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하지만 현진건은 그 둘의 상투적인 운명이 아니라 열병과 같은 사랑 뒤에 누이에게 남은 감정적 불길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자리에 주목한다.사랑을 잃은 누님은 격정과도 같은 감정에 휩싸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 역시 동정(同情)의 정서가 가득하다. 작가 현진건은 새로운 시대, 도래한 근대적 사랑의 열병과 그것이 담고 있는 힘에 대해서 주목했던 것이다.이후 2년 뒤쯤에 쓴 ‘타락자’(1922)에서 현진건은 다시, 사랑이라는 주제를 꺼낸다. 부모의 뜻에 의해 결혼한 ‘나’는 신문사(현진건은 1921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가 시대일보로 옮겼고, 이어 1927년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했다)의 신입 환영 모임으로 요리집 명월관 지점에 갔다가 그곳에서 춘심(春心)이라는 기생을 만난다. 처음에는 아무런 마음도 없었던 나는 말수작을 몇 번 나누다가 술을 더 마시고 그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술에 잔뜩 취하여 집으로 돌아와 잠들었다가 깬 나를 본 아내는 의미 있는 웃음을 지으며, 어젯밤 술에 취한 내가 춘심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을 잡아당기더라고 말하며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는다.이 작품의 이 대목은 퍽 의아하다. 자신의 남편이 명월관 지점에 가서 기생과 놀음을 하다가 집에 돌아와 아내를 보고서 기생으로 착각하여 그 이름을 부르는데, 아내는 그 상황을 재밌어 하며 웃는다. 일반적인 감각에서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해보면 어떨까. 집안의 뜻에 의해 결혼한 아내는 아마도 자신의 남편이 사랑의 열병에 들떠 있는 장면을 아마도 처음 봤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기생이든, 누구든 일단은 신기하고 재미있었을 터이다.이어, 나는 춘심이 보낸 편지를 받는다. 몇 줄 적지 않은, 사소하다면 사소할 그 편지를 받고서 나는 하늘이 떠나갈 듯 기뻐하면서 아내에게 그 편지를 자랑한다. 나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있지만, 작품 속에서 아내의 반응은 나오지 않는다. 아내가 신기해했던 연애에 빠진 남편의 상황은 딱 여기까지였을 것이다.사랑에 빠진 이들이 늘 그러하듯, 그 남편은 열병에 빠져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인 아내의 심리를 간과해버린다. 결국, 아내는 화를 내고, 집안의 반대까지 더해, 나는 춘심과 헤어진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춘심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고 슬퍼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성병인 임질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아내의 장면이다. 사실 여기에서 임질이란 실제의 병이기도 하고, 감염되는 근대적 사랑의 열정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현진건의 작품 중에서 ‘근대적인 사랑’을 다룬 것 중 가장 짧은 것이지만, 가장 강렬한 작품은 바로 ‘B사감과 러브레터’(1925)이다. 아마 이 소설의 세부까지 기억나지는 않으셔도, 아마 독신주의자이자 노처녀인 B사감의 기괴한 형상만큼은 기억하며 질겁하실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여학교에서 근무하는 B여사는 학생들에게 오는 ‘러브레터’를 싫어한다. 하루에도 몇 장씩 죽느니 사느니 하는 사랑 타령이 들어 있는 편지들이 들어오면, 해당 여학생들을 호출하여 닦아세우기 일쑤다. 그러면서 그는 ‘사내란 믿지 못할 것, 우리 여성을 잡아먹으려는 마귀인 것, 연애가 자유이니 신성이니 하는 것도 모두 악마가 지어낸 소리’라며 학생들에게 일장연설을 올린다.그러던 B여사가 밤에는 학생들의 ‘러브레터’를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절절한 사랑의 글귀들을 보면서 그 속 감정에 푹 빠져 일종의 연기를 하듯이 그 상황을 재연하는 것을 3명의 학생들이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 이 짧은 소설의 대강이다. 이렇게만 보면 마치 이 소설은 겉과 속이 다른 엄숙주의자의 행태를 풍자적으로 다루면서 그 기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생각해보자. 연애소설을 읽는 우리의 마음 속 풍경이 B여사의 그것과 과연 많이 다를까. 비슷한 시기 노자영(盧子泳·1896~1940)이 펴낸 연애서간집 ‘사랑의 불꽃’(1923)는 시대적인 베스트셀러였다. 그 책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누군가의 편지를 훔쳐보면서, 독자들은 ‘사랑’의 열정을 되새겼던 것이다.누군가의 절절한 연애편지를 훔쳐보는 독자가 나의 일도 아닌데 가슴이 뛰는 것, 그것이 바로 연애소설의 기본 도식이었던 것이다. 현진건은 이 작품을 통해 근대적인 사랑의 풍속도뿐만 아니라 연애소설의 독자들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사랑에 대한 동정과 공감의 문제를 다뤘던 것이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04-15

제3지대론

제3지대론은 정치권에서 기존 여야를 제외하고, 제3의 지대에서 정치세력을 결집해 정권을 창출하자는 주장이다. 흔히 총선발 정계개편을 앞둔 시점에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정치용어다. 실제로 2020년 4월 21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야권을 중심으로 한‘제3지대론’으로 술렁이고 있다.논의의 핵심에는 바른미래당이 자리잡고 있다. 바른미래당은 4·3 보궐선거 참패 후 불거진 손학규 대표 책임론으로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다. 일각에서는 분당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제3지대론’이 시작된다.손 대표 책임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하태경·이준석·권은희 최고위원 등 바른미래계는 당 대표 재신임을 묻는 전 당원 투표를 제안하고 손 대표에게 거취를 정리하라고 요구한 상태다. 그러나 손 대표는‘사퇴 불가’입장이다.지난 11일에는“극좌·극우를 표방하는 사람들, 그쪽으로 가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당 안팎에서는 손 대표가 끝내 퇴진을 거부할 경우 강경파가 탈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특히 바른미래당이 흔들리는 사이 민주평화당이 제3지대론에 힘을 실으며 공개 구애에 나섰다. 박지원 평화당 의원은 최근 라디오 방송 등에서 손 대표를 향해“험한 꼴 다 보고 있는데 이 꼴 저 꼴 보지 말고 빨리 나와 집을 새로 짓자”며 탈당을 권유했다.바른미래계가 당을 떠날 생각이 없으니 손 대표를 비롯한 국민의당계가 당을 나오라는 취지다. 박 의원은“진보와 보수, 한 지붕 두 가족 속에서 손 대표의 길이 무엇인가”라며“손 대표가 다시 보수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렇다고 하면 합의이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박 의원을 비롯한 평화당 내 일부가 정의당과의 공동교섭단체 구성에 반대하는 이유도 내년 총선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향후 손 대표 측과‘제3지대 신당’을 모색하는 게 이득이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평화당 최경환의원 역시 최근 광주에서 열린 민주평화당 개편대회에서 광주시당 위원장에 선출된 뒤“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변화에 앞장서서 건강한 제3지대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주장해 총선발 정계개편이 제3지대론으로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4-15

청와대의 ‘춘풍추상(春風秋霜)’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청와대의 모든 비서관실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선물한 ‘춘풍추상’이라고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춘풍추상은 채근담(菜根譚)의 ‘대인춘풍(待人春風) 지기추상(持己秋霜)’에서 나온 말로서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관대하고, 자기를 지키는 데는 가을서리처럼 엄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통령이 비서관들에게 이 액자를 선물한 이유는 자신을 비롯한 모든 청와대 공직자들이 업무수행에 있어서 그러한 자세를 가지자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그런데 최근 국회 인사청문회는 대통령이 주문한 ‘춘풍추상’과는 전혀 다른 ‘말과 행동의 이율배반(二律背反)’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국토교통부장관 후보자는 부동산 투기는 물론 아파트를 딸에게 증여한 후 다시 월세로 살고 있는 사실이 드러나 낙마하게 되었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 후보자는 자녀유학자금 문제, 인턴채용 비리, 연구비 부정사용, 부동산 투기 등이 문제되어 역시 낙마하게 되었다. 게다가 헌법재판관이 되겠다는 판사는 자신이 맡은 재판과 관련 있는 기업의 주식에 거액을 투자한 사실이 문제되자 “남편이 한 일로서 나는 몰랐으며, 재판관에 임명되면 매각하겠다”고 했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본인과 남편 명의의 주식을 매각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의(義)가 아니라 이(利)’를 위해 살아온 사람들이 공직에 취임한다고 해서 ‘춘풍추상’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더욱이 통일부장관 후보자는 전현직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저질 발언과 막말 욕설을 일삼았던 사실이 드러나자 청문회를 통과할 목적으로 “깊이 반성한다.…해당자에게 사과한다.…앞으로 주의하겠다”고 머리를 숙였다.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이 지경이니 강단에서 학생들에 대한 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삼천리다. 야당이 자질부족이라고 강력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장관 임명을 강행하였다. 전형적인 코드정치이자 불통정치의 사례이다.이처럼 청와대는 법적·도덕적 정당성이 결여된 사람들을 장관과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하여 큰 파장을 불러일으켜 놓고도 인사검증에 실패한 수석의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현 정부에서 청문회에 나온 장관 후보자들은 ‘위장전입과 부동산투기, 다주택은 기본조건’이라는 야당과 국민들의 비판을 청와대는 왜 계속 외면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대통령은 ‘춘풍추상’이라는 액자를 비서관실에 장식용으로 선물하였다는 말인가? 청와대 사람들은 ‘춘풍추상’을 걸어놓고 행동은 거꾸로 ‘대인추상(待人秋霜) 지기춘풍(持己春風)’, 즉 요즈음 표현으로 말한다면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청와대의 이율배반이 반복되고 있으니 지난 정부의 사례들과 비교해 보아도 ‘역대급’이다.‘대통령의 입’이라고 하는 청와대의 김의겸 전 대변인은 고가부동산 투기의혹으로 결국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기자 시절 “재개발은 가난한 자들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강력히 비난하였는데, 청와대에 들어와 권력을 가지면서 전혀 다른 행태를 보였다. 그는 야당이 “당신의 흑석지구 건물구입은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는 착한 재개발이었기 때문이었는가?”라는 비난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의 행위는 ‘내가 하면 정상 매입’이고 ‘남이 하면 부동산 투기’라는 ‘내로남불’의 전형이었다.보통사람들도 언행이 불일치되면 신뢰를 잃게 되는데 하물며 고위공직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대통령의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으면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고, 그러한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날처럼 ‘내로남불’이 만연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지도자에게 특히 요구되는 덕목은 바로 법적·도덕적 정당성의 토대가 되는‘춘풍추상에 대한 언행일치(言行一致)’이다.

2019-04-15

후쿠시마 수산물

지난해 말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은 여론조사를 통해 일본사람이 최근 30년 이래 가장 큰 사건으로 ‘동일본지진’을 손꼽았다고 보도했다.동일본지진은 2011년 3월11일 일본 동북부지방을 관통한 리히터 규모 9.0의 대지진이다. 지진 후 초대형 쓰나미가 센다이시 등 해변도시를 덮쳤으며 도쿄를 비롯 수도권 일대도 건물 붕괴와 대형 화재로 대혼란을 겪어야 했다. 후쿠시마현에 위치한 원전의 가동이 중단되고, 급기야 방사능이 누출되는 일이 벌어졌다.동일본지진은 일본 지진 관측사상 최대 규모다. 1995년 6천여 명의 희생자를 낸 한신 대지진(규모 7.3)의 180배 위력을 보였다. 1960년 발생한 칠레 지진(9.5)과 알래스카지진(9.2), 수마트라지진(9.1)에 이어 1900년 이후 발생한 세계 4번째의 강력한 지진이었다. 사망 및 실종자 수가 2만여 명에 이르렀다. 일본 당국은 피해 규모로 15조~25조 엔대로 추정했다.20m의 쓰나미가 덮친 후쿠시마 원전은 핵원료가 녹아내려 1호기에서 수소폭발이 일어났고, 이어 2·3·4호기에서도 수소폭발이 이어져 방사능 물질이 누출되는 최악의 사고가 발생했다.일본 당국은 그해 4월12일 후쿠시마 원전의 사고 수준을 레벨 7로 격상했다고 발표했다. 레벨 7은 국제원자력기구가 만든 0~7까지의 국제원자력 사고 등급 중 최고 위험 단계다. 1986년 발생한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와 동일한 등급이다. 당시 후쿠시마 토양에서는 골수암을 일으키는 스트론튬이 검출됐다. 이 방사성 물질은 바다 건너 한국은 물론 중국과 미국 등지에도 영향을 미쳤다.우리나라는 지난 2013년 9월부터 후쿠시마현을 포함 인근 8개 현에서 잡히는 28개 어종 수산물에 대해 수입금지 조치를 내렸다. 방사능 누출에 대한 식품의 안전성을 우려한 조치다. 그러나 일본이 반발, WTO에 제소하면서 이 문제는 양국 간에 미묘한 무역 분쟁으로 번졌다. 그러나 최근 WTO가 최종적으로 한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식품 안전에 대한 개별 국가의 권리를 폭넓게 해석해 준 판결이다. 식품의 안전은 지나치게 까다로워도 나쁘지 않다는 교훈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19-04-14

‘조선반도’와 ‘북한’의 차이

안재휘 논설위원1년 9개월여 기간 통일부 수장으로서 대북정책을 수행했던 조명균 장관이 이임식도 없이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장관실을 훌쩍 떠났다는 소식은 여운이 남는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과 3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모두 지켜보며 대응책을 궁구했던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지난 1월 9일 조명균은 국회 답변 중에 “북한이 계속해서 주장하는 ‘조선반도(한반도) 비핵화’와 우리가 목표로 하는 ‘북한 비핵화’와는 차이가 있다”고 시인했었다.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차 북미정상회담에 나설 의지가 있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대화 시한’을 올해 연말로 한정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은 조건에서 제3차 조미(북미)수뇌(정상)회담을 하자고 한다면 한 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김 위원장이 시정연설에서 남측을 향해 던진 메시지는 강했다. 그는 우리 정부에 대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시니컬한 충고를 던졌다.북한 선전매체는 지난달 스텔스 전투기 F-35A 2대가 국내에 도착한 것을 두고 날을 세웠다. 대남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F-35A의 공군 청주기지 도착을 거론하며 “박근혜 역도가 대결시대에 계획하였던 전쟁장비 반입 놀음을 고스란히 실행하고 있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배신적 망동”이라고 을러댔다.문재인 대통령의 1박 3일 미국 방문을 놓고 말이 많다. 청와대는 이번 회담에 대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허심탄회한 논의’라는 용어는 ‘진전이 없었음’을 말하는 외교적 수사라는 측면에서 한미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평가는 후하게 매겨질 여지가 없다.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온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마저 회의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그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서 “지난번의 하노이 회담에 이어 이번 한미정상회담도 ‘워싱턴 노딜’”이라며 “전혀 한미 간에 접점을 만들지 못했다”고 평했다.청와대 언론보도문에는 남북 정상회담 추진 계획, 추가 북미 정상회담 의지, 톱다운 방식 대화 지속 등의 표현이 있지만, 백악관 자료에는 이런 내용이 하나도 담기지 않았다. 비핵화 문제와 관련해 공통된 문장은 “대화의 문이 항상 열려 있다” 하나뿐이었다. 정치권 안팎의 반응이 대통령의 방미에 대해 ‘가서 뭘 했나’ 수준을 넘어서 ‘이럴 바엔 왜 갔나’는 차원으로 번지고 있다.김정은 위원장이 문 대통령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하지 말라”고 퉁을 놓기까지 한 마당에 우리 정부의 처지는 참으로 딱하게 됐다. 이렇게 된 데는 역시 북한 김정은은 ‘미군 철수’를 노림수로 둔 ‘조선반도 비핵화’를 변함없이 부르대는데, 문재인 정부가 이를 ‘북한 비핵화’로 의역하여 우리 국민과 미국에 전달해온 패착에 기인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맞을 것이다.문재인 정부의 개념 비틀기가 실수였는지, 아니면 의도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 부분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한 발짝도 진전되기 어렵다. 더욱이 무구한 우리 국민이 더 이상 흐리멍덩한 개념에 현혹돼 금방이라도 영구평화가 정착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살게 해서는 안 된다.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조선반도 비핵화’와 ‘북한 비핵화’ 사이의 끔찍한 비밀이 밝혀질 것이다. 그 은밀한 열쇠를 쥐고 있을 조명균에게 더 물어보고 싶지만, 그는 퇴임 후 당분간 야인(野人)으로 지내겠다며 뒤안길로 꽁꽁 숨어버렸다.

2019-04-14

임시정부 100주년… ‘분열’을 끝내자

윤희정 문화부장1920~30년대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의 선조들은 하나로 뭉쳐 침략자들에 맞서 싸웠었다. 각자의 생각과 이념에 따라 중국 대륙에서 따로 활동하던 독립군 상당수는 100여 년 전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중심으로 ‘일제 타도’라는 한 깃발 아래 한마음 한뜻을 모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대한민국은 끊임없이 ‘이념전쟁’ 중이다. 진보-보수로 나뉘어 태극기-촛불 집회로 국민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20세기 전반기 한민족은 35년에 걸친 긴 일제식민지지배와 3년 동안의 미 군정 시기를 거쳤다. 이 과정에서 우리 민족은 스스로 운명을 헤쳐나가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임시정부는 그 대표적인 역사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민족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 중심기관으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일제가 패망하는 1945년 8월까지 27년여 동안 부여된 책임과 소임을 수행했다. 임시정부의 민족국가 수립 방안은 1919년 4월 11일 제정된 ‘대한민국임시정부헌장’에 담겨 있다. 임시헌장 제1조에 제시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는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전제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바뀌는 역사적인 대전환이었다. 독립쟁취 이후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대원칙이 천명된 것이었다.일제 강점기 경북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국내외에서 일제에 맞서 독립투쟁을 펼쳤다. 독립 열망의 뜨거운 중심에 경북의 민초들이 있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따르면 임시정부에 참여한 경북인이 120명이 넘는다. 이들이 대한민국 탄생과 정부수립에 크게 기여했음은 자명하다.김동삼·남형우는 첫 임시의정원 회의(1919년 4월10∼11일)부터 함께했다. 같은 해 9월17일까지 열린 제2∼6회 의정원 회의에도 김동삼·김응섭, 김창숙, 김정묵, 손진형 등이 참여했다. 경북인은 임시정부 국내 연락 행정망인 연통제·교통국과 연계해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자금지원 활동을 했다. 임시정부 활동이 약화한 시기에는 김동삼이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활약했고, 안동 임청각 주인 이상룡 형제들은 전 재산을 처분한 뒤 중국으로 망명해 광복군관학교 건립 자금을 충당했다. 이상룡은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임시정부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1940년 긴 장정 끝에 중경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좌우세력을 한데 묶어 통합정부를 꾸렸다. 이 시기 권준, 김상덕, 류림 등이 정부와 의정원에서 활약했다. 3·1 만세운동 때는 경북 여성들도 큰 역할을 했다. 남자현, 김락, 임봉선, 김정희, 윤악이, 신분금 등이 3·1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발발한 국채보상운동은 2천만 국민이 석 달간 담배를 끊어 모은 돈으로 일본에 진 국채 1천300만 원을 갚고 독립을 이룩하자는 운동이었다. 여성들은 한 끼에 한 숟가락씩 쌀을 모아 빚을 갚았다. 여러 독립운동가가 나고 자란 대구는 독립운동의 성지로 불렸다. 시민들은 대구의 독립운동가로 이상정, 이육사, 이시영 등을 많이 떠올린다. 이들 외에도 조명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대구 곳곳에 존재한다.선조들이 술선수범한 불굴의 저항정신과 의리, 혼을 오롯이 제대로 이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자유와 행복 그리고 풍요로움이 가득한, 지속 가능한 나라를 자자손손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이후 갈린 좌-우파 대결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계기로 첨예한 이념 갈등을 지혜롭게 풀어나가야 한다. 극심한 이념 분쟁과 반목이 혼재하는 나라가 이렇게 계속돼선 안 된다. 진정한 광복과 부끄럽지 않은 독립을 추구해야 할 때다.

2019-04-14

어떤 필기도구를 쓰고 계신가요?

“이 빌어먹을 만년필!” 헝가리의 기자 라즐로가 고함을 칩니다. 열심히 작성한 기사에 만년필에서 흐른 잉크가 번진 거지요. 펜에 잉크를 찍는 것에 비하면 만년필의 발명이 대단한 진보였습니다만, 주머니 속에 보관한 만년필에서 잉크가 흘러 옷을 버리게 된다든지, 가방 속 노트를 망치는 일이 종종 있었지요. 라즐로는 신문사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다가 홀린 듯 영감을 얻습니다. “신문 인쇄용 잉크는 금방 마르잖아!” 만년필에 윤전기 잉크를 넣어보려는 발상을 합니다. 하지만 신문용 잉크는 너무 끈적거려서 만년필의 펜촉이 금새 막혀버립니다.“게오르그. 좋은 해결책이 없을까?“ 라즐로의 동생 게오르그는 연구에 골몰합니다. 온갖 실험 끝에 펜촉 끝에 작은 금속 공(Ball)을 끼워 넣고 그 공이 종이와 마찰하면서 회전할 때 잉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분사 시스템을 완성합니다. 만년필의 시대가 저물고 바야흐로 볼펜(Ball point Pen)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입니다. 유럽에서 2차 대전이 격렬해지자 유대인이던 이들 형제는 나치의 핍박을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볼펜 사업을 시작합니다. 볼펜은 전쟁 덕분에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계기를 맞습니다. 영국 공군 때문이지요.높은 고도에서는 잉크가 솟구치거나 만년필이 터지는 등 무용지물인 까닭에 영국 곡군은 라즐로 볼펜을 도입했고 연필보다는 빠르고 선명하게 지도에 표기할 수 있어서 전투에 유리했습니다. 영국 공군이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보이지 않는 이유가 볼펜 때문이라고 말하는 전쟁학자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한 토론 모임에서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여러분, 무인도에 한 권의 책을 들고 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책을 갖고 가시겠습니까?” 논어, 성경, 기타 자신의 인생 책을 말합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저는 제 방식대로 대답하기로 맘 먹었지요. “저는 볼펜 한 자루와 두꺼운 노트를 갖고 가겠어요.” 무인도에 어차피 혼자서, 무척이나 긴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남의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내 안의 생각들을 길어내고 그 생각들을 정리해 보는 글을 쓰는 게 재밌을 것 같았습니다.볼펜 한 자루의 수명은 600m입니다. 20시간 정도 연속 쓸 수 있습니다. 새벽 편지를 쓰기 전 항상 노트 두 페이지를 볼펜으로 쓰면서 워밍업을 하는데 예상보다 빨리 닳아 없어지는데 놀랐습니다. 다음에 비슷한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볼펜 100자루와 두꺼운 노트 한 권.”/조신영 인문학365 대표

2019-04-14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홍인자 시인바다를 향해 넓은 창이 난 우리 집은 일출의 장관을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오늘도 나는 일출 시간에 맞추어 일찍 기상했다. 일출은 웅장한 파노라마를 보는 것 같다. 어두운 빛이 점점 소멸되고 수평선 위로 붉은 빛이 시나브로 번지면서 일출이 시작된다. 분도기 모양을 하며 떠오르기 시작한 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둥근 모양이 된다. 마치 바다가 해를 밀어 올리기라도 하듯 둥근 해는 일시에 하늘로 솟아오른다. 선명하게 떠오른 해는 그 환한 빛으로 물살을 은빛으로 빛나게 한다. 참으로 경이로운 순간이다. 매번 일출을 보면서 이 집에 이사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오랜 가수의 노래를 블루투스로 연결해서 듣는다. 아침에 어울리는 나나 무스쿠리의 ‘오버앤오버’ 라는 곡이다.‘당신의 투명한 눈 속에서 저는 사랑의 빛을 발견합니다. 더 이상 헤어짐이 아닌, 사랑은 영원합니다’라는 아름다운 가사를 생각하며 스윙하듯 춤추는 리듬을 타노라면 어느새 우리 집 거실 안에 일렁이는 바다가 들어와 있다.행복해지는 노랫말을 음미하면서 모닝커피를 준비한다. 어제 갈아 놓은 원두가루를 필터에 넣는 순간 커피의 진한 향이 기분 좋게 퍼진다. 티폿에 끓인 물을 잠깐 식혀서 커피 드리퍼에 붓는다. 물을 머금은 원두가루에서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낙숫물처럼 커피 방울이 뚝 뚝 떨어진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반복되는 아침 일상이지만 한 번도 지루하다고 여긴 적이 없다. 이런 아침의 소소한 일상은 확실하게 행복하다. 이른바 ‘소확행’이다.작년부터 소확행이라는 말이 많이 회자되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이 말은 소소한 일상 속에서 행복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으며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로 각광을 받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랑겔한스섬의 오후’ 라는 수필집에서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만 깨끗한 팬티가 잔뜩 쌓여 있다는 것은 작기는 하지만 확고한 행복의 하나가 아닐까’라는 표현을 하면서 소확행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전했다. 또한 그는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거나, 새로 산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 행복하다는 진솔한 고백들을 한다. 어찌 보면 참으로 유치한 일 같지만 작가가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그 순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이렇게 작고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매순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작은 것에도 행복을 누리려고 하는 여유나 의지, 그리고 삶의 철학 같은 것이 있으면 말이다. 그러나 대개는 통속적인 삶에 묻혀 지내다가 그 소소한 행복의 순간을 놓치기 일쑤다. 특히 소비적이고 분주한 도시의 삶은 행복의 걸림돌이 되기고 한다. 바쁜 일상과 물질의 결핍이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다.그러나 행복은 물질에 비례하지 않는다. 행복에 관한 보고서를 낸 미국의 경제사학자 이스털린은 GDP와 복지간의 관계를 조사하였다. 그는 GDP가 급속 증가한 부유국 국민이 반드시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료를 통해 알아냈다. 즉, 돈이 실제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분석한 것으로 이스털린의 역설로 알려져 있다.요즘 유튜브에 한창 뜨고 있는 콘텐츠가 있다. 서울 신촌 거리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일명 신촌 명물고양이다. 귀여운 고양이 탈을 쓴 아르바이트생이 거리 곳곳에서 다양한 이벤트를 하는데 재치 있는 몸짓과 춤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익살스런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느새 나도 명물고양이 팬이 되고 만다.그냥 스쳐가도 될 순간이지만 그 광경을 보고 웃음을 짓는 사람들의 모습에 행복이 묻어난다. 소소한 재미들이 행복한 거리로 만들고 있다.소소한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하다. 물질을 행복의 척도로 두지 않아야 하고, 행복을 추구하려는 확실한 자기 철학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 탐욕과 욕구의 자리를 비워야 비로소 그 자리에 소소한 행복이 깃들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2019-04-14

아무것도 없이 텅 빈 황룡사지서 느끼는 꽉 찬 완전함

경주에 다녀온 뒤 만나는 사람마다 잡고 말했다.“경주에 갈 일이 있다면, 황룡사지는 꼭 가 보세요!”겨울이고, 저물녘이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고, 새벽이나 한낮이라도 나름의 정취는 고스란했을 것이다. 예술품에 ‘완벽하다’는 말이 쓰일 수 있다면 석굴암에 그러할 것이라 했는데, 폐허에 ‘완벽하다’는 말을 쓸 수 있다면 황룡사지에 그럴 것이다. 폐허가 완벽하다니, 짐짓 ‘형용모순’ 같기도 하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황폐한 터,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음과 텅 비어있음이 결함 없이 완전하다는 느낌을 준다. 나처럼 웬만한 풍광이나 경치에 눈도 꿈쩍 않는 시큰둥이 목석에게 이 정도의 감흥을 준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텅 비어있는데 가득 찬 느낌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무언가를 보고 만 기분이다. 막막하면서 먹먹하다. 문득 가슴이 뻐개지듯 저려와 눈물이 왈칵 솟을 듯했다. 천년의 시간이 천년의 공간과 만난다. 세계와 인간의 명멸과 왕조와 문화의 흥망성쇠가 한꺼번에 물밀어든다. 온갖 호들갑스러운 표현을 총동원해도 그곳의 그 느낌은 붓과 혀로 다할 수 없다.그냥, 가 보시라. 황룡사지, 그토록 완벽한 폐허.“(진흥왕)14년 봄 2월에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月城)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서 (계획을) 바꾸어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皇龍)이라고 하였다.”(‘삼국사기’)“신라 제24대 진흥왕 즉위 14년 계유 2월 장차 궁궐을 용궁(龍宮:신라의 궁궐 이름으로 추정)의 남쪽에 지으려 하는데 황룡(黃龍)이 그 땅에 나타나서 이에 고쳐서 절을 짓고 황룡사(黃龍寺)라고 하였다. 기축년(569년)에 이르러 담을 두르고 17년 만에 바야흐로 완성하였다.”(‘삼국유사’)처음부터 절을 지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월성이 좁았거나 다른 필요가 생겨 새 궁궐을 짓기로 결정했던 게다. 그런데 막상 궁궐을 짓기 위해 터를 닦으려던 차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문득 황룡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몸은 뱀, 뿔은 사슴, 귀는 소 같고 비늘과 네 개의 발을 가진다. 용은 오방(五方) 오색(五色)의 다섯 형태로 나타난다. 동의 청룡(靑龍), 남의 적룡(赤龍), 서의 백룡(白龍), 북의 흑룡(黑龍), 그리고 중앙에 황룡(黃龍)이 있어 모두 오룡(五龍)이다. 한국에서는 오룡 가운데 청룡이 가장 많이 그려지는데, 청룡은 봄을 관장하며 기우제에 상징물이기에 농경 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용일 수밖에 없다.그런데 어쩌다 황룡이 나타났을까? 왜 하필이면 청룡도 백룡도 흑룡도 적룡도 아닌 황룡일까?황룡은 동서남북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앙을 의미한다. 왕조시대의 중앙, 세상의 중심은 왕이다. 따라서 황룡은 임금, 군주에게만 사용되는 특권적인 용이다. 진흥왕이 짓고자 했던 신궁은 왕궁이니 황룡이 나타남직하다. 또한 불교의 수호신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용들 가운데 석가모니는 반드시 황룡으로 상징하기에, 불교를 국교로 삼은 신라에서 황룡은 특히 신성시되었을 것 이다.계획도시 건설 시기에 대한 이견은 있지만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천도가 없었던 신라는 황룡사를 지은 5세기 중후반부터 도성의 확장을 시도한다. 문제는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궁궐을 지을 자리에 절을 짓게 된 것이다. 신궁 건설 계획이 무산된 이유로는, 용이 깊은 못이나 늪, 호수, 바다 등 물속에서 사는 동물이라는 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황룡사지를 조사한 결과 일대의 저습지가 대대적으로 매립된 흔적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도 수맥이 지나가네 마네 하는 터에 물이 고인 연못 위에 왕궁을 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황룡사지의 규모는 8만여㎡에 달한다. 신궁을 만들기 위한 지반 매립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지만 빈 터로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월성의 주인들은 그 위에 신라 최대의 사찰, 국찰 황룡사는 짓는다. 13년 혹은 16년 동안 공사하여 완공하고, 아육왕(아소카왕)이 보낸 금과 철로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만들고, 금당(金堂)과 9층 목탑을 조성한다.황룡사는 신라 왕실의 상징이 된다. 변괴가 있으면 장육존이 눈물을 흘리고, 커다란 별이 황룡사와 월성 사이에 떨어지고, 큰 바람이 황룡사의 불전을 무너뜨리고, 벼락이 쳐 탑이 흔들린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황룡사는 단순한 사찰이 아니라 신라 그 자체다. 927년 3월, 황룡사 탑이 흔들려 북쪽으로 기운다. 927년 후백제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죽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견훤에 의해 즉위한다.황룡사지 한 귀퉁이에 있는 ‘황룡사 역사문화관’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3천 원짜리 입장권을 내고 들어가자마자 안내원이 건네주는 안경을 끼고 영상관에 들어가 3D 영상부터 본다. 황룡사의 건립부터 화재로 소실되기까지의 과정을 내용으로 한 영상이다. 나름 정성을 들여 만들었는데 아무래도 비장미가 과한 느낌이다. 몽골군이 황룡사를 공격해 불태우는 장면에서 승려들이 마치 소림사 무예승처럼 싸움을 벌이는데, 내 안의 민족주의가 자극되어 순간 울컥했지만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다.삼국시대부터 승병의 역사가 있으니 무예를 하는 승려도 있었겠지만, 때는 신라 폐망 이후의 고려시대로 황룡사의 위상도 많이 퇴색했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몽골군이다. 그들은 지배하지 않는다. 다만 약탈하고 유린하고 떠난다. 저항하는 자가 있으면 그 지역의 사람 전부를 죽여 버린다. 전 세계를 휩쓴 몽골군의 용맹 혹은 야만은 그들이 지나간 자리를 전부 폐허로 만들 정도였다. 아마도 황룡사는 조용히, 빠르게,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거짓말처럼.영상관에서 나와 잘 꾸며진 목탑실과 역사실, 고건축실 등을 둘러본다. 전시물들은 황룡사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그간의 연구와 복원계획까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황룡사는 여러 면에서 대단한 절이었다. 황룡사 지붕을 장식했던 치미를 복원한 모형만 보아도 그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황룡사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9층 목탑인데, 문화관 1층 전시장에 10분의 1로 축소 복원되어 있다. 이 모형의 10배가 되는 목탑이 저 들판 한가운데 서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아득하다. 탑의 높이는 약 80m, 아파트 30층에 가깝다. 1969년 서울 서소문동에 83m의 한진빌딩(KAL빌딩)이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 역사상 최고 높이 건물이었다니 할 말 다했다.이 탑이 월성에서 덩두렷이 보였을 것이다. 불교의 탑은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 예배의 대상이니, 아무 때나 마음이 내키면 동쪽으로 몸을 돌려 기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남산에서도 보였던 게 분명하다. 일명 부처바위로 불리는 남산의 탑곡 마애조상군에는 부처와 보살, 승려와 비천(飛天)과 사자 등과 더불어 황룡사 목탑으로 짐작되는 거대한 탑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니 서라벌 어디에서도 보였을 것이다. 새벽에 눈뜰 때부터 밤에 눈 감을 때까지 보이고, 서라벌 사람들이 길 떠났다 돌아올 때 식구보다 먼저 맞아주는 게 황룡사 목탑이었을 것이다.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운 사람은 신라, 그리고 삼한의 첫 번째 여왕인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이 목탑을 세운 것은 종교와 예술을 떠나 사뭇 절박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고승 안홍이 편찬한 ‘동도성립기’를 인용해 말한다.“신라 제27대에 여왕이 왕이 되니 도(道)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九韓)이 침략하였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곧 이웃나라의 침입이 진압될 수 있다.”자장이 중국에서 신인(神人)을 만나 들었다는 조언도 크게 다르지 않다.“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가 왕이 되어 덕은 있으나 위엄은 없다. 그러므로 이웃나라가 꾀하는 것이다. 마땅히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라 (중략) 본국으로 귀국하여 절 안에 9층탑을 조성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영원히 평안할 것이다.(하략)”우뚝 솟은 탑은 남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하나가 없어 폄하되고 모욕당한 선덕여왕은 그보다 더 웅장한 탑으로 신라의 자존심을 지킨다. 선덕여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가 가장 높은 것을 우뚝 세웠으니, 모두 우러러 보라!”화려했던 과거를 되짚을수록 현재의 폐허는 허무로 깊어진다. 신라 최대 사찰이자 최고 건축물이었던 황룡사는 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탑과 전각이 모두 불탔다. 장육존상과 금당 벽에 그려졌다는 솔거의 ‘노송도’도 모두 녹아내렸다.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다.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 허공을 꽉 채워 있음과 없음의, 과거와 현재의,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지운다. 역사문화관을 나와 다시 황룡사지를 걷는다. 강당지, 금당지, 서금당지, 동금당지, 목탑지, 경루지, 종루지, 중문지. 모두 사라지고 자리뿐이다. 거대한 초석들 위에 세워졌을 거대한 기둥은 온데간데없다. 사라진 영화, 사라진 신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필요는 없다. 젊은 날 찾았던 이방의 유적지에서 문득 손을 모으는 내게 안내원이 말했다.“폐허는 숭배하지 않는 것입니다.”황룡사와 9층 목탑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었다. 앞서 2035년까지 2천900억 원을 투자해 목탑을 복원하고 금당과 회랑과 승방 등 13개 동을 차례로 건립하겠다는 계획이 수립된 바 있고, 경주시는 2019년 주요업무계획에 1천200억 원이 소요되는 황룡사 9층 목탑 복원 계획을 포함시켰다.하지만 “지구의 복원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복원은 완전하고 상세한 기록에 근거할 때만 수용될 수 있으며, 절대 추측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협약 이행을 위한 운영지침’(86조)에 따라 황룡사 복원 계획은 무산될 가능성이 커졌다. 자세한 그림과 문헌이 없어 고증이 어려우니 애당초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9층 목탑을 세우면 황금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찍어 SNS로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어쨌거나 관광객 유치에는 확실한 효과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폐허는, 그 완벽한 텅 빈 듯 가득함은 사라질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으로 보는 심안(心眼)의 복원은 불가능할까?몇날며칠 황룡사지 노래를 했더니 친구가 시를 만들어 보내왔다.너는내가 폐허처럼 드러누울 때마다황룡사지를 가보라 한다절이 앉았던 곳적록 단청이 색을 벗고 공즉시색 하는 곳9층 목각의 목을 부러뜨리고붕새는 어디로 날아갔을까건너편 산자락에끝이 찢어진 날개를 내려놓고우리가 익힐 수 없는 비천이 우리를 에워싸는가- 함태숙 시 ‘황룡사지를 청하다’ 중에서.

2019-04-14

동북항일운동 현장 탐방기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한국기자협회와 한국언론재단이 공동주최한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체험연수’로 중국 하얼빈과 대련을 찾았다. 3박4일간 조린공원(구 하얼빈공원), 하얼빈역, 안중근 기념관, 동북열사기념관, 731부대, 여순감옥,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이어진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은 체험은 우리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하는 시간들이었다.우선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이후 인체실험을 자행했던 731부대를 복원해놓은 현장을 둘러보면서 일제가 저지른 전쟁범죄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를 목도했다. 전시장 입구의 ‘비인도적 잔학행위’란 말 그대로였다. 일본 731부대원들은 임산부와 어린아이들의 배를 갈라 장기샘플을 만들고, 조선족과 중국인들을 무차별로 붙잡아서 세균이 생체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했으며, 이같은 참혹한 만행이 사진과 자료등으로 증언되고 있었다. 식민지 조국의 참상을 여실히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조국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또 하나는 일본 초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한국통감으로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앞장선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저격한 안중근(1879-1910)의사의 행적을 되짚어보면서 가슴깊은 감동을 다시 한번 새기게 됐다. 안중근 의사는 우리 독립운동 역사에서 최초로, 가장 큰 쾌거를 거둔 독립운동가다. 조선이 일제의 부당한 침략을 받았으며, 조선은 일본의 통치를 반대한다는 주장을 전세계에 처음으로 직접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 직후 ‘코레아 후라(대한민국만세)’를 외치며 러시아군에 체포돼 일본군에 넘겨졌으며,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의 6차 공판끝에 사형을 언도받고 31세의 나이에 순국했다. 여순일본관동법원 전시관에서 해설을 자청한 조선족 출신 정춘매 부관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장렬한 안 의사의 행적을 이렇게 전했다. 그는 법정에서 이토가 조선반도를 침략하고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상을 15가지로 조목조목 설명했으며, 사형판결후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상소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도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너는 나라를 위해,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죽으라”는 말을 안 의사에게 전했다고 한다.마지막으로 중국은 우리와는 또 다른 시각에서 조선독립운동을 바라본다는 점을 알게됐다. 실제로 일제에 맞서 조선독립운동을 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중국내 50여 민족중 하나인 조선족으로 분류돼 항일열사로 추앙받고 있었다. 한 예를 들면 중국의 항일열사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경북 선산출신 허형식(1909-1942)은 동북인민혁명군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친 항일열사다. 중국에서는 그를 조선족출신 항일열사로 이름을 올려놓고 추앙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독립운동가로 서훈하지 않고 있어 최근에 포상서훈을 신청중이다. 이는 흑룡강성·길림성·요녕성 등 중국 동북3성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친 이들이 대부분 공산당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과 중국이 똑같이 일본으로부터 제국주의적 침략을 받았으면서도 좌우이념에 따라 항일독립운동가들을 차별대우하는 것은 통일한국을 지향하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동북항일운동과 북한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정창현 평화연구소장은 “1945년 해방이전에 항일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조선족 독립운동가들은 좌우이념과 상관없이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편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북삼성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치다 해방 이전에 숨진 이들은 해방 이후 북한정권 수립을 도왔던 좌파 항일운동가들과는 달리 평가해야 한다는 논지를 펴고 있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수탈 아래 신음하다 강대국의 신탁통치, 그리고 이념에 의해 남북분단이 됐다면 동북항일운동은 분단 이전에 일제의 침탈에 맞서 싸운 역사다. 이런 동질감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지 않고서 통일시대를 맞이하기란 참으로 요원하다.

2019-04-11

포항의 강원도 돕기

보원이덕(報怨以德)은 노자(老子)편에 나오는 말이다.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는 뜻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것이 일반적인데 원한을 덕으로 갚으려하니 얼마나 힘든 과정일까 싶다. 그러나 이것이 선비의 참 다운 길이라고 고전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원한지간에 있는 두 집안 자녀들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희곡이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두 사람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지만 한편으로는 화해와 용서를 배우게 했다.배은망덕(背恩忘德)은 보원이덕의 반대말 쯤 된다.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배신의 의미다. 우리나라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었더니 내 보따리 내놓아라 한다”는 말처럼 황당하기도 하지만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괘씸한 행동을 할 때 쓰는 말이다. 또 큰 은혜나 덕을 입었을 때 사용하는 말로 백골난망(白骨難忘)이라는 독특한 표현이 있다. 요즘은 잘 쓰이지 않지만 죽어서 백골이 되어도 은혜를 잊을 수 없다는 뜻이다. 다소 과장한 표현이나 고마움에 대한 절절함이 묻어나는 사자성어다.“풀을 묶어 은혜를 갚는다”는 뜻의 결초보은(結草報恩)도 은혜를 갚는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중국 춘추좌씨전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딸의 목숨을 건져 준 은인에게 꿈에 나타나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갚았다는 유래를 갖고 있다. 사람이 해야 할 도리로서 은혜의 의미는 참으로 다양하다 싶다.포항시가 강원도 산불로 큰 피해를 입은 이재민 돕기 성금모금운동에 나섰다. 포항시는 포항지진 발생으로 겪은 아픔과 그때 받은 도움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강원도 산불 피해주민 돕기에 나선다고 밝혔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포항이 지진으로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보내준 온정의 손길이 큰 힘이 됐다”고 말하며 고통과 아픔을 나누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했다. 포항시의 강원도 산불 피해주민 돕기 성금모금운동이 보여준 보은의 마음이 아름다워 보인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4-11

어느 교수의 은퇴식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요즘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65세 교수 정년이 너무 이르다는 의견이 학계에 있다.기업들이 60세 전후 은퇴를 볼 때 65세도 충분하다는 의견과 미국대학들처럼 교수는 정년을 없애고 교수 스스로가 정년을 결정하도록 하자는 의견도 있다.사실 65세 은퇴하는 교수들은 미국교수들이 부럽기까지 할 정도로 건강도 좋고 연구활동도 여전한 교수들도 많다.오랫동안 대학에서 수 십 년을 후학을 가르치시고 은퇴하신 교수님의 생활은 어떨까?계속 학교에 남아 가르치기도 하고 다른 대학으로 가기도 하고 또 개인 연구소를 경영하는 분도 있고 책을 쓰기도 하고 그냥 여가를 즐기시는 분까지 정말 백인백색이다.어떤 은퇴 목사님이 쓰신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은퇴목사의 노래가 있다는 것이다. 그 목사님이 소개한 노래는 현제명 작곡의 ‘고향생각’이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내 동무 어디두고 이 홀로 앉아서/이일 저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는 가사가 지금 은퇴 목사님들의 마음을 표현한다고 한다.그 목사님은 개사를 해서 이렇게 불렀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교인 없고.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네. 교인은 어디 가고 나 홀로 앉아서 이일 저일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교인을 제자로 바꾸면 아마도 은퇴교수님들의 외로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찾아오는 제자가 없고 밝은 달을 쳐다보면서 제자는 어디가고 나홀로 앉아있나라는 생각을 하시는 원로 교수님들을 생각해본다.그래도 그분들에게는 큰 보람이 있을 것이다. 연락은 많이 없어도 뻗어나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리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은퇴교수님들은 충분히 보람있고 즐거울 수 있을 것이다. 또 베품을 보여주었던 은퇴교수님의 모습은 오래 기억된다. 언젠가 베풂을 남겼던 한 은퇴교수님의 은퇴식을 생각해 본다.그 교수님의 은퇴식에 초대된 손님들의 구성이 특이했기 때문이다. 보통 은퇴식의 초대 손님은 가족, 친지, 동료교수, 제자들이 주를 이룬다. 가끔 친한 대학 직원을 초청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그런데 이 원로교수의 은퇴식에는 대학의 환경미화원, 근로직 복지회 직원 등 일반적으로 교수 은퇴식에 초대되지 않는 분들이 여러 명 초대되어 눈길을 끌었다. 일반 직원들도 그 숫자가 꽤 많았다.좌석 배치도 이런 분들과 교수 및 일반 직원들이 함께 어울려 앉도록 한 것도 매우 이채로웠다. 어색한 분위기를 감내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정겨웠다. 그리고 은퇴식 다음날 학교게시판에는 그 은퇴교수님을 칭송하는 글이 올라왔다. 여러 사람들은 그 원로교수의 숨은 선행을 알게 되었다.명절 때나 특별한 날이면 수시로 어려운 분들을 도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모두 익명으로 처리해 달라고 부탁하셨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 교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주 검소한 삶을 꾸려가기로 유명하신 분이었다. 낡은 차를 몰고 다니시는 그런 삶 속에서 남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그날의 모습은 감동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이런 베풂의 교수와 더불어 우리 주변엔 제자들의 장학금을 많이 기부하고 떠나는 교수님들도 종종 볼 수 있다. 그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얼마나 그 교수님을 기억할지는 모르지만 장학금을 마련한 교수의 마음은 진정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리라.아마도 “찾아오는 제자가 없고 밝은달을 쳐다 보면서 제자는 어디가고 나홀로 앉아있다”라고 상념에 잠길 은퇴교수도 베풂을 통한 구성원에 대한 사랑과 장학금을 통한 제자 사랑에 그런 외로운 마음을 흔쾌히 씻어낼 수 있으리라. 이제 은퇴교수님들에게, 스승님들에게 한번 연락을 드릴때도 된 것 같다. 우선 나부터 말이다.

2019-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