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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위대한 자연이 주는 ‘선물’

캐나다 로키산맥, 그 장엄함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미국 동부의 한 대학원에서 유학생들의 초대로 일주일 동안 강연과 세미나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며칠의 여유가 있어 귀국길에는 캐나다 로키산맥을 한 번 구경해 보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알프스를 본 적도, 히말라야를 본 적도 없습니다.네비게이션이 나오기 전입니다. 커다란 지도를 사서 출발하기 전에 도로를 충분히 숙지하고 떠나야 합니다. 느릿 느릿, 차창을 다 열고 캐나다의 하늘과 공기, 물소리를 즐기면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드라이브를 합니다. 얼마를 갔을까요? 밴프 국립공원까지 100마일 정도 남겨 놓은 어느 지점이었습니다. 커다란 고개 하나를 넘습니다.“아!”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내 평생에 처음 보는 거대한 산 하나가 눈 앞에 펼쳐집니다. 차에서 내려 숨막히는 자연의 위대함을 구석 구석 느껴보려 합니다. 디지털 카메라도 없었던 시절이라 가져간 니콘 필름 카메라로 여기 저기 사진을 찍습니다.숨이 막힌다, 눈부시다, 장엄하다, 압도적이다, 소름 돋는다, 무어라고 표현을 해야할지 알 길이 없습니다. 중학교 때 설악산으로 처음 수학여행을 가서 울산바위를 보았을 때의 감동의 천 배쯤 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밴프로 넘어가는 고개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난 그 장엄한 풍광, 압도적인 모습은 제 평생 처음 느껴본 자연의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순간을 맞이합니다.에드윈 마크햄은 말합니다. “그는 원을 그려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나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더 큰 원을 그리는 것이 지혜로운 관계의 비결입니다. 캐나다 로키의 그 산을 만났을 때, 아마도 제 마음의 원은 지름이 쑥 늘어났을 겁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위대함을 만날 때 그 위대함을 닮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큰 바위 얼굴을 매일 보고 자란 소년이 결국 스스로 큰 바위 얼굴이 되는 것처럼.자연과 마주할 때보다 더 위대한 만남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제대로 만나는 순간입니다. 삶의 정수를 제대로 마주하게 해 주는 지혜가 내 얼어붙은 삶에 도끼처럼 내리칠 때 느끼는 전율과 감동은 우리의 원을 백배, 천배로 크게 넓혀줍니다.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고전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들을 목소리 높여 외치는가 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09

버나드 쇼와 중학교 2학년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2019년도 보낸 날이 보내야 할 날을 앞질렀다. 자연은 요란하지 않게 짙은 녹음 속에서 2019년을 마무리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 준비는 다름 아닌 비움이다. 자연은 비움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다. 우유부단하지 않은 자연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뿌리까지 비우고 있다. 지금 자연이 보여주는 신록의 풍성함은 새로운 2020년을 맞이하는 자연의 자세이다. 분명 자연은 올해에 지난 10년을 정리하는 선 굵은 나이테를 그릴 것이다.신록의 자연과 달리 인간 사회는 온통 잿빛이다. 대표적인 모습이 이분법(二分法) 사회로 퇴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이다. 현 정부 들어 이분법이 더 공고해지고 있다. 양분화를 부추기는 사회답게 이 나라 사람들도 철저하게 둘로 나뉘어져 있다. 한쪽은 창을 들었고, 다른 한 쪽은 방패를 들었다. 기를 쓰고 무너뜨리려는 자들의 독기(毒氣)와 더 기를 쓰고 무조건 막으려는 자들의 살기(殺氣)가 이 나라 소통의 기운을 다 끊어버렸다. 모순(矛盾)도 이런 모순은 없다.그런데 정부는 삼척동자도 아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소통(疏通), 통합(統合) 등과 같은 말들을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무소불위 장군같다. 저돌적으로 무조건 밀어붙이고 보는 장군,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생각과 말만이 “무조건 맞다”고 하는 이상한 신념(信念)을 가지고 있다. 신념이 객관성을 잃으면 독단(獨斷)과 독선(獨善)이 되고, 이것마저도 넘어서면 속신(俗信)이 된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아 왔고, 또 지금 정치인들이나, 가까운 나라 정치 수장의 모습을 통해 보고 있다.다음은 니체의 말이다. “(무식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진실을 알 생각이 없다. 강한 신념이야말로 거짓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신념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다.”필자는 교사가 되기 전부터 잘못된 신념의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사의 잘못된 신념에 의한 평가와 판단은 학생은 물론 한 집안, 나아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사의 잘못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거나, 소중한 꿈을 접은 학생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무책임한 말인지 알지만 그래도 이 자리를 빌려 필자의 잘못된 신념 때문에 상처를 받은 학생들과 학부모님께 사죄의 말씀을 올린다.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해 더 노력할 것을 약속드린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오늘도 죠지 버나드 쇼의 유언을 필사(筆寫)한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나라 교육 관료들은 자신만의 정치 신념 감옥에 갇혀 ‘우물쭈물’을 넘어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것의 대표적인 모습이 정치 논리에 빠진 자사고 폐지와 자유학기(년)제 확산 등과 같은 교육 정책들이다. 전자는 이미 세간의 이슈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문제는 후자다. 자유학기(년)제! 이론적으로는 꽤 생각해볼만한 교육 정책이다. 그런데 우리 교육 현실을 대입해 보면 분명 재고(再考)되어야 할 교육 정책 중 하나이다.필자는 2020년 산자연중학교 전입학 전형을 위해 최근 몇 주 동안 정말 많은 학부모들과 상담을 하고 있다. 상담 중 80%가 중학교 2학년 학부모들이다. 학부모들의 하나같은 이야기는 학생들이 자유학기(년)제 다음 학년인 2학년의 완전 달라진 학교 분위기에 전혀 적응을 하지 못 한다는 것이었다. 미리 1학년 때 사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그나마 적응을 하지만, 정부만 믿고 자유학기(년)제의 취지에 따라 사교육을 멀리 한 자신들의 자녀들은 학교를 거부하고 있다고 울먹였다. 심지어 자유학기(년)제가 아니라 초등학교 7년이라고까지 말하는 학부모도 있었다. 필자는 올해도 올해지만 내년 중3과 중2가 걱정이다.곧 2020년이다. 우리 교육에 우물쭈물 할 시간이 없다.

2019-07-09

근대의 탄생을 알렸던 세 개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한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은 각국의 이해타산에 의한 계산기를 두드리기에 바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초유의 사태가 가져 온 충격적인 현실의 폐허 더미 속에서 인간들은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초인과 악당, 삶과 죽음, 자유와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며 ‘반성’과 ‘자책’의 시간을 가진다. 하지만 이 시간도 그리 깊고 길지 않았다. 승전국들이 두드린 계산기는 ‘패권’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들의 계산기를 의심하기보다는 결과치에 치중한 발빠른 각종 협정과 조약들이 체결되어 갔다. 이후 세계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냉전시대를 겪으며,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니었던 한국은 지금까지도 분단국가로 남아 전세계 뉴스의 중심에 등장하곤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반성이 충분하지 않았는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던졌던 수많은 질문과 철학적인 사고들이 깊지 않았기 때문이었던가. 혹은 인간이 가진 본성적인 악의 기운이 너무 강하여 반성과 질문이 그나마 지금의 평화로운(?) 상황을 지탱하고 있는 것인가.전지구적이지는 않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중심지였던 서유럽을 중심으로 ‘지나친 민족주의는 유럽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판단 하에 협력과 통합을 통한 ‘평화’를 구축하겠다는 시도가 일어난다.세계의 멸망이 아닌 유럽의 멸망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한 연설에서 “유럽도 UN과 같은 기구가 필요하다”고 언급함으로써 유럽 연합에 대한 최초의 언급을 하게 된다.1948년 헤이그 회의에서 약 800여명의 통합론자들이 본격적으로 유럽 통합의 구상을 시작하는데, 유럽의 경제, 사회,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통합까지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된다. 이후 1958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6개국이 모여 유럽경제공동체(ECC)를 설립하게 되고, 1967년 뜻을 공유하는 각종 기구들이 유럽공동체(EC)를 결성하게 된다. 가입국이 늘고 정치와 문화적인 통합이 성장하게 되면서 좀 더 견고한 공동체 설립의 희망이 커져갔고, 1991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의 타결과 1993년 발효로 경제공동체, 외교, 안보, 치안까지 하나로 묶는 유럽연합(EU)이 탄생하게 된다.… 유럽연합의 출범을 앞두고제작된 이 영화에서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감독의 의견은 ‘레드’의 마지막에집약된다.그래도 그 집약이 쉽게이해되는 것은 아니다.의미에 대한 여러 해석들 중에서 가장 지배적이고 근접한 것이‘사랑’이지만 이 역시모든 퍼즐을 완벽하게맞추지 못한다 …△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현대적 질문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평화’에 대한 열망과 반성의 토대 아래 결성된 유럽연합이 지금 ‘경제’라는 요인으로 흔들리고 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스폐인의 경제난과 영국의 브렉시트 모두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다시 돌아가서 우리는 폐허의 더미 속에서 던졌던 존재론적 질문보다 경제적인 질문을 먼저 던지고 깊게 사유해야만 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역사에 문화적·정치적·사회적·경제적 역사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의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키워드는 무엇인가. 인간의 잘못된 선택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지연장치로써의 정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선택되어져야할 것이다.1993년 유럽연합이 출범하기 직전에 만들어진 폴란드 출신 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의 ‘세가지 색 삼부작 : 블루, 화이트, 레드’는 프랑스 국기의 색깔이 상징하는 자유, 평등, 박애로 질문을 던진다.프랑스는 매년 7월이면 ‘프랑스 혁명 기념일’을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성대한 기념행사들이 열린다. 프랑스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이상과 전통을 이어 받았음을 선언하며, 전세계에 이 세 가지 이념을 전한 것을 확인하며 자랑스러워 한다. 200여 년 전에 일어나 프랑스 대혁명이 세계사에서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커다란 전환점이라는 막중한 위치를 가지기 때문이며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가진 나라에 대한 감격과 영광의 표현이기도 하다.전근대와 근대의 기점을 나누는 세계사적인 사건의 결과로 도출된 ‘자유·평등·박애’를 유럽통합을 앞 둔 시점에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는 ‘세 가지 색 삼부작’은 그리 주제를 표현하는 서사가 직접적이지 않다. 우선 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이 던지는 질문의 문항은 간명하지만 그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호락호락하지 않음은 영화의 줄거리는 간명하지만 그 안에 쉽게 해석되지 않는 수많은 은유들이 간단하게 연결되거나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 직접적이지 않고 에두른다. 이쯤이라고 생각했을 무렵에 한 발 더 들어가며 들어 온 길을 지워 버린다. 그리고 남는 것은 선명한 이미지 블루, 화이트, 레드와 세 명의 여주인공이다.먼저, 자유에 대한 영화 ‘블루’는 ‘기억’과 ‘관계‘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한적한 시골길을 가던 가족들은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줄리는 유명한 작곡가인 남편 파트리스와 다섯 살 난 딸 안나를 잃고 혼자 살아 남는다. 줄리를 둘러싸고 있던 가장 끈끈한 ‘관계’였던 가족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버리고, 떠나는 과정을 이행한다. 먼저 가족과 함께했던 공간인 집을 떠나고, 그 와중에 그들이 함께 공유했던 물건들을 버린다. ‘줄리 드 꾸시’라는 이름을 버리고 결혼 전의 이름인 ‘줄리 비용’으로 살아가지만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기억들과 고통스러운 사투를 벌인다. 유럽통합 기념곡을 만들던 남편의 악보까지 버리고 파리의 집까지 가져 온 유일한 물건인 샹들리에는 푸른색이다. 딸아이가 남긴 유품인 파란색 사탕을 마구 씹어먹거나 푸른 수영장으로 헤엄치며 잠기는 줄리의 모습을 담은 미장센들은 영화의 주제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과거의 기억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워지려는 과정에 몰랐던 사실(기억)과 또 다른 관계가 그녀의 도달하고자 하는 자유 속으로 파고든다.외로움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선택한 자유의 결정이 또 다른 요인들로 기억을 생산(재생산)하고 관계를 형성한다. 슬픔, 우울을 의미하는 ‘블루’는 영화 속에서 다양한 장면에 등장하고 삽입됨으로써 자유와 함께 내포한 의미 그대로 영상언어를 형성한다. 여기에 음악의 시각화를 웅장하고 멋지게 구현함으로써 영화는 블루라는 시각적 이미지와 음악이라는 청각적 이미지가 어울려 쉽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을 남긴다. 특히 악보를 펼쳐들고 손가락으로 짚어 나가는 장면에 울리는 음악은 강렬하다. 영화는 ‘자유란 기억과 관계의 어디에 위치하는가’를 묻는다.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고립되고, 당겨지면서 기억과 관계는 자유의 의미를 훑는다.△ 유럽통합 직전에 던진 질문, 아직도 유효하다.‘세 가지 색 삼부작’ 중에서 ‘평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화이트’는 에두르지 않고 정면으로 전개된다. 폴란드인 미용사 카롤은 프랑스인 도미니크와 결혼해서 프랑스에서 살지만 성적불화로 이혼당한다. 이혼으로 재산을 빼앗기고 방화범이란 누명까지 쓴 채 노숙을 하던 그는 길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폴란드인 미콜라이의 제안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가까스로 폴란드로 돌아 온다.프랑스에서 벌어졌던 법정 장면은 장소를 옮겨 폴란드에서 반복된다. 프랑스어와 폴란드어의 의사 소통과 정치·경제적으로 다른 길을 걸어왔던 두 나라의 차이가 형식을 통해 반복되는 것이다. ‘평등’은 ‘자유’와 대치되는 개념이다. 특히 완전한 자유를 이야기할 때 평등은 억압이라는, 자유와 반대되는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도덕적 자유, 정치적 자유 모두 평등과 타협(혹은 절충)한 용어일 뿐이다. 법정 장면의 형식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카롤과 도미니크의 결혼 장면도 반복된다. 그러나 그 반복은 동일한듯 하지만 다르다. 바로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평등의 차이(평등이라는 인식의 차이)와 층위를 말하는 것이다.구속, 괴롭힘, 억압과 자유, 죽음, 부활이 ‘평등’을 에워싸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구조가 선택의 문제에 있는가 인식의 문제에 있는가를 묻는다. ‘세 가지 색 삼부작’ 중에서 제법 쉽게 읽히는 영화가 ‘화이트’이지만 감독의 질문에 대한 답을 향해가는 순간 다른 연작들과 다르지 않은 난해함을 겪는다. 하지만 영화가 주는 시각적·청각적 영화언어는 유려하다.‘세 가지 색 : 레드’는 연작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레드는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 중에서 ‘박애’를 뜻하고 있으며, 영화 ‘세 가지 색 삼부작’의 총합을 어떻게 마무리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스위스 제네바 대학 학생이며 패션모델로 활동하는 발렌틴은 패션쇼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개를 치는 교통사고를 내게 된다. 개의 목에 달린 인식표를 보고 주인을 찾아가고, 개 주인은 은퇴한 법관이며 남의 집 전화를 도청하는 기벽이 있음을 알게 된다.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법정에 있을 때보다 세상 일이 더 잘 보여. 적어도 여기엔 진실이 있지”라고 자신의 기벽을 설명하는 은퇴한 판사. 법의 집행자였던 이의 탈법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그리고 일어나는 일련의 전개들이 도대체 ‘박애’와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연작 시리즈 중에서도 ‘레드’는 난해함의 강도가 강하다. 직접적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주제와 연관된 최소한의 장치를 쉽게 제공해주지 않는다. 다만 ‘자유’와 ‘평등’이 대치되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지만 ‘박애’ 안에서 포용될 수 있음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세 편의 영화는 법정이라는 장소에서 스치듯 서로 만난다. 그리고 유리병을 재활용하는 노인의 모습이 장소와 방향을 달리해 보여진다. 각각의 영화에서 특정한 기억들은 반복되고, 약간의 차이들을 가지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반복되는 지점이 있으며 결을 달리한다. 장소의 겹침과 특정 장면의 반복은 동시대성을 말한다.유럽연합의 출범을 앞두고 제작된 이 영화에서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감독의 의견은 ‘레드’의 마지막에 집약된다. 그래도 그 집약이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의미에 대한 여러 해석들 중에서 가장 지배적이고 근접한 것이 ‘사랑’이지만 이 역시 모든 퍼즐을 완벽하게 맞추지 못한다. 사람의 수만큼 많은 세 가지 정신의 층위를 유럽통합이라는 하나의 거대조직 안에서 얼만큼 녹여낼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1993년 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은 먼저 던져 보았다. 2019년, 그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며 해답은 요원하다./김규형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위에 소개된 세 편의 영화는 네이버영화와 구글플레이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2019-07-08

신숙주의 유비무환(有備無患) 국가관

강희룡 서예가조선시대 외교를 흔히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 한다. 사대는 대중국 외교를 말하고 교린은 중국을 제외한 주변 여러 나라와의 외교를 가리키지만 주로 일본과의 외교를 말한다. 대일본 외교는 대중국에 비해 첫 번째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그 중요성은 컸다. 대일본 외교에서 조선후기까지 기본지침서가 된 책이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이다. 이 ‘해동제국기서’에 ‘신이 듣건대, 이적(夷狄)을 대하는 방법은 외정(外征)에 있지 않고 내치(內治)에 있으며, 변어(邊禦)에 있지 않고 조정에 있으며, 전쟁하는 데 있지 않고 기강을 바로잡는 데 있다.’ 라는 대목이 있다. 즉 국가의 외부 적을 대하는 방법은 외정에 있지 않고 내치에 있다는 것이다.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 되던 해, 선조시대는 내치에서는 실질을 좇아 현실에 변용하기보다는 과거를 인습하는 풍조로 현실 대응의 한계가 드러났다. 조정은 동인과 서인의 당파로 사분오열돼 권력 다툼의 장이 됐고, 인재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일본 통신사로 갔다 1591년 3월 귀국한 서인출신 정사 황윤길은 풍신수길에 대해 지략가로 보고 전쟁의 위험을 보고한 반면, 동인출신 부사 김성일은 쥐에 비유하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했다. 이런 상반된 보고는 당시 동·서인으로 갈린 정치상황에서 객관적인 보고가 가능했을지 여부도 불확실한 것이었다. 조선은 1555년에 일어난 을묘왜변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꾸준히 대비책을 마련해오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이어진 평화로 대규모 전쟁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고, 일본의 군대규모를 과소평가했다.성벽보수와 축성의 토목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반발과 신중론을 펼치던 신하들의 반대로 국방은 큰 차질을 빚고 있었다. ‘징비록’에 임진왜란 발발 직전 신립을 만난 류성룡은 ‘태평세월이 너무 길었소, 그래서 병사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급변이 일어날 때 그에 항거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요.’라는 기록을 남겼다. 선조는 김성일의 보고를 따랐고, 류성룡의 전쟁대비책에 대해 한정된 국방 예산을 이유로 수군까지 없애자 일본 침략에 대한 마지막 보루까지 무너졌다. 임금이 전쟁위협을 애써 외면하며 일상의 삶을 유지하려 했으나 조총으로 무장한 20여 만명의 왜적이 전면전을 일으키자 조선은 순식간에 초토화되고 백성들은 도륙당했다.조정에서 급히 동원령을 내렸으나 이미 군역과 조세제도의 부패와 난맥상으로 국방시스템은 붕괴되어 있었고 전쟁 대비에 적극적이었던 서인세력마저 조정에서 축출되면서 전쟁위험은 더욱 커졌다. 임금과 조정을 장악한 동인세력은 막연한 낙관론에 기대어 근본적인 대책에 미온적이었다. 항전할 의사가 없는 선조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처음부터 요동으로의 망명을 목적에 두고 정치적 술수를 발휘하여 신하들의 반대에도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파천하여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신했으나, 망명은 명나라로부터 거부당했다. 이 무렵 육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해상권을 이순신이 장악하며 전세가 서서히 역전되자 선조는 의병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나간 김성일은 ‘만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며 병란 중에 덮친 전염병을 구제하다가 병에 전염되어 56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15년 후 백성을 버린 임금도 치세를 마감했다. 조선사에서 가장 큰 외세와의 전쟁인 임진왜란이라는 7년 전쟁은 큰 시련을 예고하며 시작됐고 끝났다. 이 역사적인 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군경의 경계망을 뚫고 동해 삼척항을 통해 귀순한 ‘북한 목선 사태’는 군의 해상경계작전에서 실패했다. 투철한 군 정신에는 ‘공은 부하에게, 책임은 나에게’란 말이 있다. 이 구멍 뚫린 경계실패를 놓고 책임져야 할 국방장관의 어정쩡한 태도는 ‘공은 나에게, 책임은 부하에게’로 해석된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초병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맥아더의 명언이 떠오른다. 400년 전 조선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클로즈업되는 것이 나만의 기우이길 바랄뿐이다.

2019-07-08

어린이를 위한 성교육

이수원계명대 교수·유아교육과어릴 적 필자가 병원놀이를 할 때 주로 맡던 역할은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였다. 돌이켜 보면 필자가 성장하던 지역은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곳이었기 때문에 의사 역할을 하는 남아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잔소리하고 놀이 상황을 이끌어 나가면서도 결코 의사 역할을 맡지 않고 간호사 역할을 했던 것 같다.성 고정관념에 따라 어떤 장난감으로 어떤 놀이를 할 것인지를 선택한다. 성 고정관념은 만 2세부터 부분적으로 나타나며 만 4세 이후에 정점에 달한다. 때문에 아이가 걸음마를 하는 순간부터 유연한 성역할 관념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남아가 주로 사용하는 놀잇감과 여아가 주로 사용하는 놀잇감을 함께 제공하여 성별에 의해 놀이가 구별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유연한 성역할 관념을 지원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남아에게는 독립성, 성취, 경쟁을 기대하고 여아에게는 나눔과 배려, 순응을 기대하는 부모의 태도도 아이에게 성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한편, 취학전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성별에 따라 신체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호기심을 갖는다. 대부분의 경우, 또래 이성의 신체가 자신의 신체와 다르기 때문에 갖는 단순한 호기심이다. 하지만 아이가 초등학교 재학 중인 형으로부터 이성 또래를 성적으로 괴롭히는 방법이나 음란한 이야기를 배운 경우 유치원에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동안 화장실에서 남아가 여아를 성적으로 놀리는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 성 교육이 학교나 유치원에서만 할 수 없고 학부모의 협조가 필요하여 남아의 성적인 놀림을 학부모에게 알렸더니 여아의 학부모는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지만 남아의 학부모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회에서 성 피해자는 여성만이 아니며, 성별을 넘어서서 누구도 성 범죄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남아든 여아든 모두 성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어린이를 위한 성 교육 방향을 두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성 교육의 핵심은 생명의 소중함이다. 생식기를 함부로 남에게 보이거나 만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생식기는 아기를 출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잉태하는 기능이 있는 만큼 생식기를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이에게 전달할 성교육의 핵심 메시지이다. 둘째, 성 교육의 내용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무엇이며 어떻게 도움을 구하는가이다. 아이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여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모를 수도 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껴도 어떻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를 모를 수도 있다. 때문에 낯선 사람뿐만 아니라 친척이나 친구가 내 몸의 일부를 보여 달라는 요구는 잘못된 것이며 이 때 단호하게 “안돼!”라고 거절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곧바로 가까운 경찰서나 담임교사, 부모에게 이 일을 알리도록 지도하자. 내가 베푸는 호의나 도움을 상대가 원치 않을 때에는 더 이상 호의도 도움도 아니다. 성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원치 않는 성적인 놀림을 멈춰야 하며 상대가 멈출 수 있도록 단호하게 말하는 것 또한 익힐 필요가 있다. 아이가 성에 호기심을 가질 때 아이를 꾸짖거나 수치심을 주기 보다는 궁금증이나 고민을 표현할 수 있도록 수용적인 분위기가 필요하다. “나 어떻게 태어났어?”라는 아이의 질문에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단다.”라는 대답은 성 문제를 덮고 감추는 일일 것이다. 대신, 있는 그대로 대화할 것을 권한다. 아이가 어리다면 출생 과정을 단순하게 설명하며 아이가 성장할수록 출생과 관련된 과학 정보를 첨언할 수 있다. 평소 부모가 아이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 아이가 성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려움 없이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때 성별을 넘어서서 존엄한 인격체로 보기를 연습한다면 아이 세대의 사회는 지금보다 더 건전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9-07-08

마음(heart)을 다 하는 일

다산은 소년에게 대답합니다. “마음을 다 하는데 있다.” 삼근계(三勤械)로 널리 알려진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가슴에 담은 소년은 부지런히 노력해 학문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황상. 다산이 가장 아낀 제자입니다.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어떻게 동기를 부여할 것인가에 대해 깊고 넓은 성찰과 연구가 끊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제대로 동기를 부여 받아 마음을 다하는 상태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다산의 시 애절양(哀絶陽)에 그 힌트가 숨어 있습니다.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 길게 우는 소리 /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중략)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 부자집들 일 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 이네들 한 톨 쌀 한 치 베 내다 바치는 일 없네 /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읊노라.”관가의 수탈이 극에 달해 죽은 시아버지에게서 세금을 뜯어내는 백골징포, 입가에 젖이 마르지 않은 갓난 아기도 장정으로 취급해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의 실상을 고발하는 시입니다. “이것은 1803년 강진에 있으면서 지은 시이다. 갈대밭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만에 군적에 등록되고 이정이 소를 빼앗아가니 그 사람이 칼을 뽑아 생식기를 스스로 베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 하였다. 그 아내가 생식기를 관가에 가지고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울며 하소연했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시대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끌어안을 때 터져 나오는 비통함의 눈물이 심장을 적실 때 마음을 다하는 일은 가능한 것입니다. 마음(heart)을 다하는 일은 하늘의 천명을 깨달았을 때, 내면에 천둥처럼 울리는 부름을 듣게 되었을 때 싹트기 시작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바꾸지 않을 진짜 나다운 삶을 마주했을 때 불붙어 어찌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다하는 일은 순간적인 호기심에 의해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는 얄팍한 동기부여로부터 움직여지는 삶이 아닙니다. 집어등의 환한 불빛처럼,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여기저기 화려하게 반짝이는 빛에 휘둘리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비통함’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다산의 애절양 그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고 세상을 응시할 때 비로소 내 안에 불붙는 마음입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08

비정규직의 중규직화

최근 공공부문(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사상 처음으로 서울 광화문에서 대규모 시위에 나섬에 따라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정책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공공부문 노동자 중에는 교육기관부터 자치단체, 공공기관, 지방공기업 등에서 일을 하지만 반쪽 짜리 정규직이란 뜻에서 이른바 ‘중규직’으로 불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일자리 질보다 실적 달성 위주로 추진되면서 임금과 신분차별이 여전한 데 대해 노동자들의 분노가 시위로 표출되고 있다는 분석이다.문재인 정부는 출범직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를 목표로 2020년까지 공공부문 비정규직 20만5천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달 말 기준 18만여 명이 정규직으로 전환결정됐고, 이중 14만여 명이 실제 전환작업을 마쳤다. 하지만 전체 공공부문 비정규직 40여 만명 중 절반이상이 정규직 전환대상에 빠졌다. 일례로 학교 비정규직의 경우 기간제교사, 영어회화전문강사 등은 아예 정규직 전환대상에서 배제됐다. 또 정부가 제시한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에 공기업 등은 파견·용역 근로자 정규직 전환시 직접 고용 혹은 자회사 설립에 따른 간접고용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화근이 되고 있다. 조직규모·업무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실상 직접고용 대신 자회사를 선호하는 게 현실이니 이 역시 중규직의 양산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정부가 약속한 정규직으로 실제 전환했지만 정규직과 처우가 다른 점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만을 샀다. 정부는 무기계약직이나 자회사 소속으로 노동조건이 일반적인 정규직에 비해 다소 부족하지만 예산이나 재원의 한정속에 일단 고용안정은 보장됐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정부의 이같은 안이한 태도가 일선 기관에는 비정규직을 ‘무늬만 정규직화’로 해도 괜찮다는 시그널로 받아들여져 비정규직의 중규직화가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정부의 비정규직 전환정책에 대한 면밀한 재검토와 보완책이 필요한 시점이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7-08

미·중 무역전쟁의 국제정치적 함의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국제정치학자의 시각에서 볼 때 미중 무역전쟁(trade war)은 단순한 관세문제가 아니라 세계정치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강대국 간 패권전쟁(hegemonic war)의 일환이다. G2의 무역전쟁은 오직 경제논리만으로는 해석될 수 없는 다양한 요인들이 개입하고 있다. 패권전쟁에서 패권국의 지위를 받치고 있는 것은 경제력이고, 패권의 승부를 가리는 것은 정치력과 군사력인데, 미중 무역전쟁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기술 굴기’를 통해 2050년까지 미국을 추월하여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즉 ‘중국몽(中國夢)’을 실현하고자 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의 기술 굴기는 단순히 첨단산업에 대한 기술혁신이 아니라 자신과의 패권경쟁의 일환으로 인식된다. 미국은 2015년 중국의 리커창 총리가 발표한 ‘중국제조 2025’는 단순히 2025년까지 제조업 강국이 되겠다는 산업정책 슬로건이 아니라 경제력을 패권국 부상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는 전략이라고 본다.최근 미국의 펜스(M. Pence) 부통령이 “중국이 정부차원에서 미국 안에 영향력을 심어 중국 이익을 도모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그리고 선전수단을 총동원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도 바로 그러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미중 무역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중국의 최대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華爲)’의 경우 미국은 “신뢰할 수 없는 공급자를 선택하면 장기적인 리스크가 크며, 안보 면에서는 사용자 정보가 수집되어 중국에 이용될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에게 반(反)화웨이 전선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해리스(Harry B. Harris) 주한 미국대사는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고 있는 LG유플러스를 콕 집어서 직접적으로 안보위협을 거론하였다.반면에 중국도 “미국이 바라니까 동참할 게 아니라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해야 한다”면서 반화웨이 전선에 동참할 경우 한국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이처럼 미중 무역전쟁은 단순히 경제적 요인만이 아니라 정치적·안보적 요인들도 개입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자의 동맹국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패권전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패권전쟁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양국의 경제성장과 교역에 수반하는 갈등의 부침과정을 겪으면서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미중 무역전쟁의 와중에 샌드위치가 되어 있는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중 패권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해 원칙을 세우고 일관성 있는 외교 전략을 수립, 추진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양 강대국이 서로 자기편에 서라는 압력과 협박이 격화된다면 한국의 전략적 유연성은 축소되어 더 이상 ‘줄타기외교’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따라서 패권전쟁의 다양한 상황전개에 따라 그때마다 임시방편적으로 대처할 것이 아니라 국익의 관점에서 원칙 있는 외교를 모색해야 한다. 미중 무역전쟁에서 안보위협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한미동맹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미국에 협조하고,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순수한 경제적 거래에 대해서는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이러한 원칙 있는 대응전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지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미중 전략경쟁을 둘러싸고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사이에 분열된 국론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힘의 열세에 있는 한국이 강대국들의 패권전쟁에 대처하는 어려운 전략적 선택이므로 더욱 더 국민적 중지를 모아야 한다. 강자에 대항하는 약자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2019-07-08

식견(食犬) 문화

여름철이면 보신용으로 각광받았던 보신탕 먹기가 시들하다. 보신탕은 원래 개고기를 넣어 끓였다하여 개장국으로 불렸으나 혐오식품으로 눈총을 받기 시작하자 보신, 보양, 영양탕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 개고기를 파는 보신탕집은 이제 어림잡아 봐도 절반 이상은 없어졌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개고기를 찾는 사람이 줄어든 게 가장 큰 이유다. 물론 반려견 1천만 마리 시대에 역행하는 음식문화란 점에서 식견문화의 퇴조는 예견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보신탕은 조선시대 평민들이 즐겨 먹던 고기였다고 한다. 먹거리가 풍부하지 못했던 시절 서민이 몸을 보신하기 위해 개고기로 요리한 개장국은 보양 음식으로서는 최고였다. 특히 체력 소모가 많았던 여름철이면 개고기를 잡아먹는 풍속이 있었다. 삼복날 보신탕집을 찾아가는 것은 이런 풍속에서 유래한 것이다.한자어로 개는 두 가지가 있다. 견(犬)과 구(狗)다. 견은 개의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다. 구는 글자 왼편에 있는 개사슴록 변에 (句)라는 발음이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다. 같은 개를 뜻하지만 쓰임새는 많이 다르다. 견은 긍정적일 때 사용된다. 충견(忠犬), 애완견(愛玩犬) 그리고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미의 견마지로(犬馬之勞) 등에서 알 수 있다. 반면에 구는 주구(走狗)와 ‘양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양두구육(羊頭狗肉), ‘교활한 토끼를 잡고나면 충실했던 사냥개가 쓸모없게 돼 잡아 먹는다’는 뜻의 토사구팽(兎死狗烹) 등에 사용된다. 특히 먹는다는 말을 할 때는 구탕이나 양두구육처럼 구가 들어간다.오는 12일은 초복(初伏) 날이다. 1년 중 가장 더운 시기가 시작된다는 날이다. 우리의 조상은 삼복에는 복달임이라 하여 이 날은 몸을 보하는 음식을 먹고 시원한 곳을 찾아가 더위를 이겨내곤 했다고 한다. 복날의 복(伏)자는 사람이 개 옆에 있는 모양을 형상화하고 있다. 더운 날에는 개처럼 엎드려 더위를 피하라는 뜻인지 알 수 없으나 복날과 개는 상관관계가 꽤 깊어 보인다. 그러나 개고기를 먹는 식견(食犬) 문화도 이젠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든다. 시대의 흐름은 막을 수 없는가 보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7-07

‘기해왜란(己亥倭亂)’의 이면

안재휘 논설위원일본이 벼르던 대로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실행에 옮겼다. 이른바 우리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국가 차원의 ‘경제보복’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의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와 TV, 스마트폰 등에 사용되는 3개 아킬레스건 같은 품목을 걸었다. 일본의 조치를 놓고 이 나라는 또 진영별로 쫙 갈려서 볼썽사납게 맞서는 중이다.정부·여당과 진보 쪽의 용감무쌍한 견해는 언제나 그렇듯 이념과 ‘명분론’이 앞선다. 강제징용 배상판결은 어디까지나 사법부의 영역이기 때문에 3권분립을 지키고 있는 나라에서 행정부나 정치권의 소관이 아니라는 논리부터 편다. 일본 아사히신문과 도쿄신문도 자국 정부의 조치를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판했다고 알려준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등도 한결같이 일본이 부당하다고 평가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일본의 속 좁은 조치는 부메랑이 될 것이기 때문에 전쟁을 오래 끌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낙관론까지 읊어댄다.그러나 다수의 경제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한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의 경우 일본의 소재 공급이 끊겨도 4개월은 버틸 수 있지만, 그 이상 끌면 우리 기업뿐 아니라 전 세계 공급망에 큰 피해가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벌써 자동차 및 화학 업계까지 긴장하고 있는 판이다.보수를 중심으로 한 야권은 문재인 정부의 무대응 무대책을 물어뜯는 일에만 여념이 없다. 자유한국당은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대한 정부 대응을 ‘외교 참사’로 규정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총체적 국정 실패에 대해 국민께 사죄하라”고 부르댄다. 이미 불이 붙었는데, 불 끄려고 대드는 사람이 아무도 안 보이는 한심한 꼴이다.문재인 정권 들어서 악화 일로를 걸어온 한일관계의 이면에는 어떤 요소들이 작용했을까. 그 시발점은 쇼 정치와 포퓰리즘을 탐닉하는 이 정권의 정치전략에서 비롯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선 지난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협상하여 최종적 종결을 약속한 ‘한일일본군위안부 합의’를 뒤집어엎어 지지층 결집에 활용했다.집권세력은 지난 1965년 6월 22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체결한 ‘한일국교정상화 조약 (한일기본조약)’까지 선동의 먹잇감으로 삼았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한일기본조약을 뒤집어엎어 강제징용에 대해 일본 기업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판결을 존중하며, 행정부나 입법부도 이 판결에 승복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취했다.한일관계에 있어서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는 말보다 더 적나라한 표현은 없다. 일본은 역사적으로는 가까워지기가 어렵지만, 경제적으로는 밀접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이웃임에 틀림이 없다. 상당 기간 우리 정치인들이 인기영합 목적으로 일본의 귀싸대기를 때려도 그러구러 경제교류가 끊어지지 않았던 까닭은 분명했다. 이번 경제보복 사태는 일본이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는 신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전후 피폐한 이 나라 재건을 위해서는 일본과 화해해 도움을 받는 길뿐이었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고,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한없이 꼬여가는 위안부 문제를 서둘러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 결과물이 ‘한일협정’이고 ‘한일일본군위안부 합의’였다.임진왜란 직전 일본을 다녀온 뒤 서로 딴소리로 팔도강산을 전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파당정치꾼 황윤길과 김성일의 후예들이 지금 이 나라 안에 수두룩하다. 정치적 의도로 외교합의를 뒤집어엎었으면 상황을 반전시킬 책임도 확실히 져야 한다. 한일 정상외교밖에 돌파구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진짜 능력을 보고 싶다. 전투에서 이기더라도 전쟁에서 지기 십상인 이 게임은 위험하다. ‘기해왜란(己亥倭亂)’을 각오한 사람들의 비책은 뭔가.

2019-07-07

비경쟁 독서교육

김현욱 시인독서 교육의 목표는 평생 독자를 기르는 것이다. 한 학기 한 권 읽기의 목표도 학생들이 독서를 즐기는 평생 독자로 자라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독서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평생 독자를 기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짐작하게 된다. 초등 저학년은 문턱이 닳도록 도서관을 드나들지만, 고학년이 되면 발길은 뚝 끊긴다. 중·고등학교를 거쳐 성인이 되면 독서율은 급격하게 감소한다. 입시 지옥을 거치며 책은 거들떠보기도 싫어지는 것이다.2018년 기준, 세계 독서율 1위인 핀란드의 대표적인 독서교육은 자녀가 어릴 때부터 부모가 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교사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다. 공공 도서관에는 연령별, 주제별 다양한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이 쉴 새 없이 열린다. 이는 핀란드가 독서와 독서 동기를 촉진하는 내재적 동기 부여를 성인과 아이들에게 잘하고 있다는 뜻이다.캠번은 언어 학습의 조건 중에 학생들을 독서에 참여시키는 필수 요소로 ‘몰입’과 ‘시범’을 들었다. ‘기대, 책임, 사용, 유사성, 반응’도 간접 조건에 속한다.이는 ‘보상’, ‘경쟁’, ‘효용’ 등과 같은 외적 동기 부여가 아니라 내재적 동기이기 때문에 훨씬 더 효과적이고 지속적이다. ‘몰입’, ‘시범’ 같은 내재적 동기 부여는 독서에 대한 학생들의 긍정적인 태도를 고양시킨다. 무엇보다 독서교육의 궁극적인 목표인 ‘평생 독자’ 양성에 가장 효과적이다.안타깝게도 수많은 한국의 교사들은 새 학년이 되면 어김없이 교실 환경판에 독서오름길이나 독서인증제, 독서사다리 같은 ‘경쟁’과 ‘보상’의 외적 동기를 이용한다. 독서 지도를 위해 외적 동기인 ‘보상’, 다른 학생과의 ‘경쟁’, 독서의 ‘효용성’을 강조하는 것이다.굿과 브로피(Good, Brophy·1987)는 “보상은 수행의 질보다는 노력의 수준을 자극한 데 더욱 효과적”이라며, “보상은 매력적이거나 흥미로운 과업보다는 지루하거나 불쾌한 작업에 더 사용된다”고 지적했다.지루하거나 불쾌한 작업에 효과적인 것이 바로 보상이다. 아울러, ‘보상’은 학생들의 개인차를 고려해야 한다.‘경쟁’은 학교에서 널리, 오랫동안, 강력하게 쓰였다. 경쟁 요소를 도입한 독서 프로그램, 이를테면, 독서 골든벨, 독서 토론대회 같은 프로그램은 ‘평생 독자’를 기르려는 독서교육의 목표와는 방향이 다르다. 보여주기 행사, 보도 자료용 행사로 남을 가능성이 많고 사실 그래왔다. 경쟁은 반드시 승자와 패자를 만든다. 입시 경쟁으로 학교가 지옥이라는 학생들에게 독서마저도 경쟁하게 만드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고 비인간적인 짓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는 학교 안팎에서 비경쟁 독서교육이 회자되고 있다.‘보상’, ‘경쟁’보다는 책 읽는 교실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독서 동기를 높이는 첫 걸음이다. 교사는 인내심을 가지고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교실 분위기 조성에 힘써야 한다.핀란드의 독서교육은 교육부나 독서단체에서 주도하지 않는다. 핀란드의 부모는 자녀가 어릴 때부터 불문율처럼 책을 읽어주고 책과 가까이 지내도록 배려한다. 교사는 교실에서 활발하게 책을 읽어주고 편안하게 책을 읽을 시간과 환경을 제공한다. 공공 도서관은 부모와 아이들이 다양한 독서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지원한다.올 초 OO 공공도서관에서 모집한 저학년 독서회(책 읽어주기 프로그램) 모집 정원은 15명이었다. 인터넷 접수 10초 만에 15명 접수가 완료됐다. 대기자가 속출했고 인터넷이 다운됐다. 그만큼 독서프로그램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뜻이다. 일회성, 보여주기 식 행사가 아닌 학부모와 아이들이 상호 소통하는 유기적인 독서 프로그램이 더 많아져야 한다. 학교 도서관은 매년 가을 무렵에 독서행사(독서주간)를 연다. 17년 동안 봐 왔지만, 시기나 내용이 천편일률이다. 공공도서관이든 학교 도서관이든 이제 변해야 할 때다.

2019-07-07

연해주 항일 독립운동 유적 보호가 절실하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며 상해 임정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연해주의 임시 정부인 대한국민의회는 상해임정보다 한 달 앞서 설립되었다. 그래서 올해는 연해주 항일 운동 발자취를 찾는 사람도 많다. 독립운동 정신계승 사업회 소속인 우리 일행은 3박4일 일정으로 지난달 28일 연해주로 학술 탐방을 떠났다. 대구 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3시간도 안되어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했다.우리나라는 러시아 입국 비자가 면제되었고 입국신고도 자동으로 처리되었다. 내가 자주 다녔던 10년 전보다 입국 수속이 훨씬 간편해진 것이다. 당시 우리는 2시간 동안 짐을 조사받는 등 입국수속이 까다로웠다. 우리의 국력이 향상된 탓인지 공항에서부터 기분이 매우 좋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시가지 모습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한국에서 수입된 중고차가 그대로 한글 표시를 지우지 않고 다녔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밀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다. 해삼이 많아 해삼위(海蔘威)라고 불리운다. 이곳 일대는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으며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대를 이어 살아왔던 낯설지 않는 땅이다. 우리나라 함경도와 두만강을 사이에 둔 이 지역은 선조들이 내왕이 잦았던 지역이다. 한말 1863년 함경도에서 13가구가 포시에트 부근 연추(크라스키노)에 처음으로 이주하였다. 연해주는 1937년 스탈린이 강제 이주시키기 전에는 고려인 17만 명이 거주했던 곳이다. 이곳은 일제를 피해 이주한 조선인들이 다시 멀리 중앙아시아로 유배된 비운의 원한의 땅이다. 아직 중앙아시아 일대에 약 50만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우리 팀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에서 항일 운동 관련 학술대회를 가졌다.뒤이어 우리는 선조들의 항일 운동의 현장을 찾아 나섰다. 조선인들 최초의 거주지 지신허(知新墟)에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거쳐 우수리스크까지 둘러보았다. 불행히도 연해주 어디를 가나 고려인들의 삶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유물과 유적은 온데간데없고 근년에 마련된 기념비와 표지판 몇 개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디를 가나 우리말을 하는 고려인 동포를 찾아보기 어렵고 그들의 생활은 대체로 어려웠다. 민족의 해방은 남북 분단으로 이어지고,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은 우리와 국교를 단절했다.소연방이 해체된 후 1990년 한국과 러시아는 정식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번 학술 탐방은 연해주에서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과제를 안겨주었다. 무엇보다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조들의 유물 유적부터 보존하는 일이다. 특히 연해주에는 일생을 항일과 독립 투쟁을 하다 순국하신 분들이 의외로 많다. 유인석, 이상설, 최재형, 안중근, 문창범, 이동휘, 장지연, 신채호 등이 그들이다.이 밖에도 김알렉산드라 등 사회주의 항일 혁명운동가들도 수 없이 많다. 다행히 안중근 의사가 결의한 단지 동맹비가 건립되어 있다. 조국이 해방되지 않으면 이곳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긴 이상설 지사의 유허비도 이곳 사이펀 강가를 지키고 있다. 최재형 선생의 생가도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어 무척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항일 애국지사들의 족적은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우선 상해 임정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선생의 생가부터 보존하여야 한다. 신한촌의 그의 생가는 이미 슈퍼마켓이 되어 표지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조선인 최초의 이주마을인 지신허는 러시아 군인들이 길을 막아 가수 서태지가 세운 마을 표지석도 볼 수 없었다. 임시 정부의 모태가 된 전로한민족 중앙회 총회가 열린 장소는 러시아인들의 전문학교로 변해 버렸다. 신한촌의 한민학교 역시 러시아인의 학교로 변신되었다.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는 그 내용이 빈약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러시아 항일운동의 발자취를 하루 빨리 발굴·보존토록 해야 한다. 그것이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이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교훈이다.

2019-07-07

세가지 문제를 뛰어 넘은 소년

위대한 지혜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왕에게 미움을 받아 긴 유배 생활을 떠납니다.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촌 동네에 틀어박혀 가끔씩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18년 동안 수십명 제자를 길러내지요. 그런데 그가 길러내는 제자들마다 마지막에는 스승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버립니다.왜냐구요? 깐깐한 이 스승은 제자들이 쉽게 버텨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출세를 위해 제자들의 뒤를 돌봐주는 일도 없습니다. 심지어 창을 들고 스승의 방에 뛰어들어 욕하고 헐뜯으며 등을 돌린 제자도 있었습니다.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산 정약용 이야기입니다.유배지 전남 강진의 바닷가 마을에 정착, 다산이 작은 방 하나를 얻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까까머리 15세 소년 하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산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저 같은 아이도 과연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까요?” “네가 어때서 그런 말을 하느냐?”소년은 말합니다. “선생님. 저에게는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머리가 둔한 것이요, 둘째는 앞 뒤가 꽉 막힌 것이며, 셋째는 분별력이 없어 답답한 것입니다. 이런 제가 과연 문사를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다산은 답합니다. “배움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보통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는데, 들어보니 너에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는 외우는데 민첩한 것이요, 둘째는 글짓기에 날렵한 것이요, 셋째는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하지만, 외우는데 민첩한 아이들은 금세 공부가 쉬워 보여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글을 날렵하게 짓는 아이들은 자기 재주만 믿고 글이 가벼이 들 떠 허황한 데로 흐르지. 이해력이 빠른 아이들은 투철하게 알지 못한 고로 그 지식이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다. 머리가 둔하다고 했지? 너처럼 머리가 둔한 데도 공부를 파고 드는 사람은 식견이 넓어진다. 앞 뒤가 막혔다고 했지? 그러나 그 막힌 것을 한 번 뚫게 되면 그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답답하여 분별력이 없다 했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연마하는 사람은 결국 지혜의 빛이 반짝 반짝 빛나게 된다. 그러면, 파고드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방법은 무엇일까? 역시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역시 부지런히 해야 한다.”소년이 묻습니다. “스승님. 이 세가지를 부지런히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부지런함을 지속할 수 있을까요?” 다산이 대답합니다. (내일 편지에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07

여행에서 돌아오면

여행에서 돌아오는 건 좋은 일이다. 모든 게 달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옛날에 한여름의 일본 도쿄에 가서 주택가 골목을 걷다 절망 같은 것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곳에 가득한 정적은 일본은 한국과는 다른 사회라는 것을 실감케 한 것이다. 말하자면 NHK 밤 뉴스 앵커의 전언이 한국 앵커들과 달리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도 같았다. 상황은 그러나 상대적이다.이번에는 여행에서 돌아오자 한국의 서울은 정적의 도시 같다. 차들은 경적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내가 신호 없이 차선을 바꾸자 뒤에서 속력을 내며 달려오던 자동차가 긴 경적 소리를 내기는 했다.휴일의 한의원은 여는 곳도 다섯 시까지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몹시 아픈 목디스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다. 하지만 배낭을 들고 다니며 그렇게 아프던 몸도 갑자기 나아진 것 같다.왜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 걸까? 한의원은 전통 시장통 입구에 있는데 파라솔을 편 행상 아주머니들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 같다. 날마다 북적이며 젊은이들이 오가던 골목도 오늘만은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장마라고 했는데, 잔뜩 흐린 하늘에선 아직 아무 소식도 없고 어디서 남들과 다른 매미 한 마리 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기는 한다.나는 내가 늘 오가는 학교 운동장 앞 벤치에 앉아 급하디 급한 박미하일 소설 ‘개미도시’를 읽는다. 일종의 우화다.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하는.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서울의 한 벤치에서 바라보이는 세상은 마치 물속처럼 고요하게 느껴진다. 지금 무슨 소설을 쓴다면 하나의 우화가 탄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이 사회 한국도 지난 삼십 년 전, 이십 년 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나는 이 세계를 이번에는 다시 내가 금방 여행 갔다 돌아온 세상과 견주어 본다. 일본도, 한국도, 금방 다녀온 세상도 다 ‘상대성 원리’의 지배를 받는 어떤 그릇들에 지나지 않는다.그릇은 더 큰 것 앞에서는 작고 더 작은 것 앞에서는 크다. 소리들에 대해서도 그릇들은 모두 상대적이다. 나는 이 상대적인 사회 속으로 돌아와 소리 없는 것 같은 티비에서 펼쳐지는 어떤 ‘연기’ 행위들을 본다. 한국과 북한, 미국의 정상들이 판문점에 모였다.그것은 한 상대적인 크기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뿐이다. 내가 찾아갔던 그 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은 아무런 관심도 끌 수 없을 사건이다.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것, 여행이 주는 효능이다. 내가 이 차원에 놓일 수도 있고 저 차원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지금 이 차원에 속해 있을 뿐이라는 것, 여행이 선사하는 또 한 번의 인식이다.나는 여러 차원에 속해야 하고 이 차원에 매이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아무 차원에도 있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는 깊은 자유가 필요할 때가 있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7-04

청송군과 ‘지오 투어리즘’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면서 관광도 분야별로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일부 유명 관광지는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바람에 관광혐오증(투어리즘 포비아)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다. 인구 5만 명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는 연간 2천50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소음, 물가, 쓰레기 등의 문제가 야기돼 주민들이 관광객 유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이를 오버 투어리즘(Over Tourism)이라고도 부른다.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은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현장을 둘러보는 여행으로 비극적 역사를 교훈으로 삼는 관광이다. 지오 투어리즘은 지형 지질을 관광상품으로 활용해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으로 지형 지질을 뜻하는 Geo와 관광의 Tourism이 결합한 용어다. 관광객에게는 지형 지질에 대한 교육과 학습의 장을 제공하고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농촌 체류형 관광으로 그린 투어리즘이란 표현도 생겨났다.청송군이 최근 국가지질공원으로 재인증받았다. 국가지질공원은 지질학적 중요성뿐 아니라 생태학적, 고고학적,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 지역을 국가가 인증해 주는 제도다.이 지역은 지질학적으로 보존가치가 높고 교육 및 관광을 통해 지속 발전 가능성이 있는 곳임을 국가가 인정한 것이다. 청송군은 2014년 국가지질공원 인증을 받은데 이어 2017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와 청송군, 무등산권 3곳만이 유네스코 인증의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돼 있다. 청송군의 주산지 등 전체 24곳이 지질명소로 지정돼 있다.청송군은 과학적 중요성은 물론 고고학적, 문화적, 역사적, 생태학적 가치와 미적 가치까지 국제적 명성을 가진 곳이라는 의미다. 우리지역 최대 명승지로 손꼽아도 손색이 전혀 없다. 우리나라 내륙지에서는 가장 지오 투어리즘의 개념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다만 아직 청송이 지닌 가치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쉽다. 이제 청송군은 군의 내재적 가치를 잘 알려 지오 투어리즘을 통한 명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19-07-04

‘은폐’보다 나은 ‘실패’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의혹투성이에다 앞뒤 안맞는 해명의 연속이다. 북한 소형목선이 삼척항에 정박한 사건과 관련한 국방부의 브리핑은 국민을 속이려는 의도가 분명히 엿보였고, 이 브리핑에 청와대가 개입한 것이 확연해보이는데도 청와대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해명하고 있다.우선 정부 합동조사 결과에 따르면, 군 당국이 레이더에 포착된 표적을 판독하고 식별하는 작업과 경계근무 과정에서 문제점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북한 목선이 삼척항으로 입항하는 장면은 인근 소초에서 운영하는 지능형영상감시장비(IVS)와 해경 CCTV 1대, 해수청 CCTV 2대 중 1대, 삼척수협 CCTV 16대 중 1대의 영상에 촬영됐다. 그런데도 해안경계작전에 투입된 병사가 레이더와 지능형영상감시시스템에 포착된 소형 목선을 주의 깊게 식별하지 못했고, 주간·야간 감시 성능이 우수한 열상감시장비(TOD)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지 못해 해안감시에 공백이 발생한 것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경계작전은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진행됐지만, 운용 미흡 등으로 경계작전 실패 상황이 발생했다는 취지다. 허위보고·은폐 의혹은 합참이 지난 달 17일 국방부 브리핑에서 북한 목선 발견 장소인 ‘삼척항 방파제’를 ‘삼척항 인근’으로 바꿔 발표하면서 불거졌다. 정부는 “초기 상황관리 과정에서 대북 군사 보안상 통상적으로 쓰는 용어인 ‘삼척항 인근’으로 발견장소를 표현했다”며 “이 표현은 군이 군사보안적 측면만 고려하여 국민 눈높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깊이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 해명했다. 또 “(군 당국이 초기 브리핑에서)‘경계에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고 안이했음을 국방부와 합참의 관계기관들이 조사과정에서 인정했다”고 설명했다.이 사건을 대한 청와대의 반응도 이해하기 어렵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북한 소형 목선 사건과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이 김유근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에게 엄중 경고 조치를 내렸다고 밝히면서 문책의 사유에 관해서는 상세히 밝히지 않았다. 다만 최병환 국무조종실 1차장이 ‘북한 소형목선 상황 관련 정부 합동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안보실은 국민이 불안하거나 의혹을 받지 않게 소상히 설명했어야 함에도 경계에 관한 지난 17일 군의 발표 결과가 ‘해상 경계태세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뉘앙스로 이해될 수 있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안이하게 판단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고 “대통령도 이 점을 질책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즉, 청와대가 은폐하도록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국민의 오해를 살 수 있도록 방치한 데 대해 문책했다는 얘기다.청와대나 정부가 앞뒤 안맞는 조사결과를 발표하자 야당은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바른미래당 오신환 원내대표는 “합동조사단에 따르면 군 수뇌부 내부 협의 아래 경계작전이 정상적으로 진행됐다고 거짓브리핑을 결정했고,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이를 묵과했다”며 “말장난과 책임회피로 가득한 국민우롱”이라고 비판했다. 국방부가 남의 돈은 훔쳤지만 절도는 없었다는 말과 같은 결론을 내린 것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오 원내대표는 청와대에 대해서도 “일관성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가담한 적은 없다’면서 ‘청와대의 자체 조사를 통해 국가안보실 1차장을 엄중 경고했다’고 하니 청와대와 국방부가 짜고 치는 개그콘서트를 벌이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북한 목선 사건과 관련, 국정조사를 미뤄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특히 야당은 이번 북한 목선 삼척항 귀순 과정에서 빚어진 경계 실패가 작년 9·19 남북군사합의에 따른 군 경계태세 이완에서 비롯된 것이란 심증을 굳히고 있다. 오히려 국민들은 이번 사건이 우리 군의 단순한 경계실패이기를 바란다.그게 아니라 은폐·허위보고가 진실이라면 우리 군과 정부는 경계실패란 무능에다 도덕성까지 의심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019-07-04

권순우 선수가 주는 교훈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금년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 비교적 생소한 이름의 한국선수 한 명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영국의 윔블던 대회의 예선전은 본선에 들어가고픈 선수들의 전쟁터 같은 곳이다. 예선 통과는 사실상 본선보다 더 힘들 수도 있다. 여기서 예선에서 압도적인 스코어로 3승을 거두고 본선에 진출한 21살 권순우라는 선수의 과거 역정이 주목을 끈다.권 선수는 메이저 테니스 대회에서 지금까지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선수였다. 그런 권 선수가 예선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이고 본선에서 세계 9위의 선수에게 한 세트를 따내는 등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매 세트 접전이었다. 그가 비록 패하긴 했으나 세계 10위권 선수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탁월한 경기로 테니스 팬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전설의 스타 존매켄로 선수가 경기 후 권 선수에게 박수를 치며 앞으로 크게 될 선수라고 치켜세웠다는 소식이 들린다.여기서 필자의 흥미를 끄는 것은 그가 주니어 시절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선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공격적 플레이가 완성되고 한국선수로는 드물게 강한 서브로 무장한 그의 플레이는 테니스 팬인 필자에겐 정말 감동적이었다. 창의적이고 공격적인 주니어 시절을 보내야 체육이든 예술이든 학문이든 어떤 분야이든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증명했다.권 선수의 갑작스런 부각을 보면서 체육뿐 아니라 학문의 세계에서는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세계 학문의 각축장인 미국의 최고 명문대학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인 교수들은 과거 주니어 때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과연 한국에서 대학예비고사 또는 수학능력시험에서 전국 1위를 하고 대학의 수석합격자가 유학 후 미국의 명문대의 교수가 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은 참으로 흥미로운 질문이다.미국의 일류대학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채찍이론이라는 재고관리 이론으로 유명한 경영학과 황승진 교수는 로체스터라는 비교적 생소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한 후 30년 전 스탠퍼드 대학 조교수로 시작하여 종신직까지 받은 스탠퍼드 석좌교수이다.아이비리그 대학인 브라운 대학의 기계공학 김경석 교수는 브라운 대학에서 공학박사를 받은 후 일리노이대학교 조교수 재직 중 국가젊은과학자상에 선발되면서 명문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칼텍, 브라운대학에서 정교수 제안을 받고 모교인 브라운 대학을 선택 정교수직에 오른 전설적 교수이다.이 두 사람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 두 분의 교수가 모두 대학 예비고사 수석이나 대학 수석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들이 공부는 잘했어도 그들의 창의적 사고가 암기식 공부 방식에는 방해가 되었을지 모른다. 이는 권순우 선수가 주니어 시절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것과도 같은 맥락일 것으로 생각된다.필자의 관찰로는 이 두 분의 교수는 꽤 머리가 좋긴 했지만 상당히 엉뚱한 곳이 있는 분들이었다. 유머가 풍부하면서도 날카로운 예지력과 창의력, 판단력을 소유하고 있는 교수들이었다. 엉뚱한 토론을 즐겨하며 창의적인 생각을 끊임없이 하는 분들이었다.또 한 분 최근 화제가 된 미국 MIT 대학의 김상배 교수가 있다. 김 교수는 연세대 기계과 출신이다. 그 역시 수능 최고 점수하고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의 창의력은 스탠퍼드 박사과정 학생 때 만든 스티키봇(Stickybot)이 타임즈 최대 발명품으로 꼽힐 정도였고 당연히 MIT 같은 초일류대학의 교수가 되었다.권 선수의 경우도 그리고 열거한 미국 명문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교수들을 예로 볼 때, 어려서 주니어 시절 좀 더 창의적이고 과감한 사고방식이 큰일을 낼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한국의 초중등 교육에 참으로 소중한 교훈이다.

2019-07-04

포항철길숲을 거닐며

강성태 서예가·시조시인장마가 주춤한 지난 휴일 새벽, 모처럼 포항철길숲을 찾았다. 새들의 지저귐 속에 심호흡하듯 아침 공기를 들이키며, 효자동에서 옛 포항역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포항철길숲은 2015년 4월 KTX포항역이 흥해읍 이인리로 이전됨에 따라 남게된 철도 유휴부지를 시민친화공간으로 만드는 도시숲 조성사업으로 생겨났다. 지난 5월초, 옛 포항역에서 효자교회까지 4.3㎞ 구간의 철길숲이 준공됨에 따라 그 이전에 도시숲으로 조성된 서산터널 북측의 2.3㎞ 구간과 함께 6.6㎞의 도심 내 폐선부지가 아름다운 숲길로 태어나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이러한 철길숲은 산책로와 자전거도로를 기반으로 어울누리길, 활력의 길, 여유가 있는 띠앗길, 추억의 길, 엄마랑 아가랑 태교의 길 등 5개의 테마로 이뤄져 있다. 군데군데 옛 철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곳곳에 다양한 시설물, 조형물, 스틸 아트작품 등을 조경과 어우러지게 설치해서, 역사, 문화, 자연이 살아 숨쉬고 여가와 휴식, 유희와 운동을 즐길 수 있는 복합적인 시민 소통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포항철길숲은 숲(Forest)과 철길(Rail)의 합성어로 ‘포레일(Forail)’이라고도 부른다. 철길숲이 만나는 효곡동, 대잠동, 양학동, 용흥동, 덕수동, 우현동, 우창동까지 길게 이어지는 옛 철길 주변에 풀과 꽃, 나무를 심어 띄엄띄엄 작은 숲을 이루고 벤치나 정자, 그늘막 등의 쉼터와 운동기구를 중간중간에 설치해 걷고 뛰고 뒹굴거나 쉬다가 가볍게 운동도 하고 얘기도 나누는 등 시민들이 마실 나가듯이 철길숲을 즐겨 찾고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조성돼 있다.철길숲에는 이색적인 테마와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그 중에 2017년 3월 8일부터 현재까지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은, 철길숲 조성공사 당시 200m 지하 굴착 중 분출된 천연가스에 불꽃이 옮겨 붙어 24시간 계속 타오르고 있어 불과 빛의 도시 이미지에 다채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리고 음악분수, 댄싱프로미너드, 효자갤러리, 한터마당(버스킹 공연장), 오크정원, 유아놀이숲, 기억의 숲, 기다림의 정원, 벽천, 계류, 장미원 등이 나들이객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음악분수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으로, 여름철 하루 10여회 가동하는 음악분수, 스크린분수의 물줄기 사이를 신나게 오가며 즐기는 아이들로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방장산 산자락을 휘돌아가는 활력의 길 중간쯤에는 시민들이 경작하는 그린웨이 도시텃밭이 있고, 양학건널목을 지나면 옛 간이역의 자취인양 막사 모양의 회랑이 오른쪽으로 길게 설치돼 있다. 40여 년 전 통학길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애환서린 양학간이역이 이렇게 변모되다니 감회가 새롭기만 했다.서산터널에서 충혼탑과 수도산으로 연결되는 덕수공원을 지나 유성여고까지는 2011년 1단계로 조성된 도시숲길답게 무성해진 숲과 가로수가 시원하게 펼쳐져있다. 산비탈 언덕진 곳에는 벽천(壁泉)이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완만한 풀밭에서는 계류(溪流)가 황토길과 데크로드 사이로 잔잔하게 흐른다. 전나무와 벚나무 가로수 한 켠에 장미원이 있고 새소리와 솔내음이 맑게 깔리는 그곳은 엄마랑 아가랑 태교의 길로 철길숲 북쪽 끝자락이다.보물찾기 하듯 철길숲 이곳저곳을 살피며 쉬엄쉬엄 거닐다 보니 어느새 두어 시간이 흘렀다. 100여 년 동안 기차가 주택가를 달리던 철길이, 이제는 자연과 도시를 잇고 소통과 문화가 피어나는 희망의 길로 거듭났다. 도심공원이 부족한 포항으로서는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연을 품은 도시는 사람을 모이게 하고, 문화가 바탕이 된 도시는 꿈을 꾸게 된다. 철길숲을 잘 가꾸고 보듬어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고 지진 여파로 지친 마음을 달래며, 위락과 치유의 시간을 갖는 쾌적하고 행복한 숲길이 됐으면 좋겠다.

2019-07-04

세상에서 가장 키 작은 남자의 노래

의학 역사상 최악의 사건 중 하나인 탈리노마이드 기형아 출산 사건 피해자로 1959년 11월 독일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팔 없이 어깨에 손이 달려있습니다. 손가락은 왼손 4개, 오른손 3개뿐입니다. 어른이 되어도 키가 134cm 밖에 자라지 않습니다.심성이 유난히 고왔던 이 아이는 목소리 또한 빼어나게 아름다워 노래를 부르면 주위 사람들의 영혼이 맑아집니다. “토미, 너는 할 수 있어. 네가 원하는 음악을 계속하렴!”토마스 크바스토프는 음악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 18세 되는 해 하노버 음대에 지원하지요. 손가락이 일곱 개 뿐이라 오디션을 볼 기회도 받지 못하고 입학을 거절당합니다. 굴하지 않고 독학으로 성악을 공부하지요. 법학을 전공해 하노버 대학에 들어간 후 학교 앞 재즈 바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수많은 스승들로부터 성악 기법들을 전수받습니다. 스승은 CD음반입니다. 졸업한 후에는 은행원으로 취직합니다.1988년. 토마스 크바스토프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단 한 번도 받지도 않은 채 열악한 신체 조건을 넘어 뮌헨 ARD국제콩쿠르에 도전한 겁니다. 세계적인 음악 콩쿠르입니다. 이 대회 성악 부문에서 경쟁자들을 압도하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를 세상에서 가장 잘 부르는 최고의 성악가 디트리히트 피셔디스카우의 찬사를 받으며 혜성같이 무대에 데뷔하지요.토마스 크바스토프는 이후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쇼스타코비치 음악상, 에든버러 국제 음악 페스티벌 음악상, 파리 성악 음반 아카데미 최우수상 등 남들은 하나도 받기 힘든 최고 권위의 상들을 휩쓸며 바리톤 분야에서 최고의 반열에 오릅니다. 2012년 은퇴하기 전까지 20년 동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전 세계에 감동의 무대를 선물합니다.어깨에 붙은 그의 손. 작은 키에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지닌 그가 무대에 올라 슈베르트의 데어 린덴바움(보리수)를 노래하면 청중들은 꿈길 속으로 빠져듭니다. “성문 앞 우물가 서 있는 보리수 한 그루. 나 보리수 그늘 아래 단 꿈을 보았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겨 놓고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온 보리수나무 밑. (중략) 그곳을 떠나 오랫동안 이곳저곳 헤매도 아직도 들리는 가지의 속삭임. 여기로 와서 안식을 찾으라.”독학으로 성악을 마스터하고 세계를 울린 크바스토프, 그 작은 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보리수 가사 속에서 우리 꿈을 더듬거리며 찾아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04

투키디데스의 함정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용어는 급부상한 신흥 강대국이 기존의 세력 판도를 흔들면 결국 양측의 무력충돌로 이어지게 된다는 뜻이다.아테네 출신의 역사가이자 장군이었던 투키디데스가 역사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처음 언급했다. 기원전 5세기 맹주였던 스파르타는 급격히 성장한 아테네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됐고, 결국 양 국가는 지중해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게 됐다. 투키디데스는 이같은 전쟁의 원인이 아테네의 부상과 이에 대한 스파르타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여기에서 유래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용어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미국 하버드대 벨퍼 국제문제연구소장을 지낸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이 2017년에 낸 저서 ‘불가피한 전쟁(Destined for War)’에서 미국과 중국이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져, 서로 원치 않는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고 분석하면서부터다. 앨리슨은 지난 500년간 지구에서 발생한 투키디데스 함정은 16차례였고, 이 중 12차례가 전면전으로 이어졌다고 집계했다. 경제적으로는 2014년 이미 미국보다 몸집이 커진 중국의 도전, 헤게모니를 포기할 수 없는 미국, 그리고 두 거대국가를 이끌고 있는 시진핑과 도널드 트럼프, 둘 모두 ‘위대한 국가’를 외치며 충돌하고 있어 17번째 전면전 가능성이 ‘심각(grim)’해졌다고 진단했다. 중국이 야망을 축소하거나 아니면 미국이 중국에 1등 앞자리를 내주고 2등 뒷자리에 만족하겠다고 물러서지 않는 한 무역분쟁, 사이버공격, 해상에서의 충돌 등은 곧바로 전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최근에는 일본이 한국에 대해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조치를 취한 것 역시 한일판 미니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강제징용 판결을 빌미로 경제제재에 나선 일본이 괘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본이 이렇게 견제구를 던지고 나올만큼 우리 국력도 많이 커졌다고 생각하면 뿌듯한 마음도 갖게된다. 다만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진 나라들의 끝이 패망이었다는 해묵은 교훈을 생각해 한시빨리 한일 관계를 복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7-03

메멘토모리

장규열 한동대 교수큰 별이 졌다. 한동대학교 초대총장이었던 김영길 박사가 돌아가셨다. 불꽃같이 걸어온 발자취를 뒤로 하고, 수많은 제자들과 동지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기면서 이 땅에서의 소중하고 값진 삶을 마감하였다. 수다한 고난과 역경을 지치지 않는 믿음과 소망으로 뛰어넘으면서, 대학을 세우고 제자를 길러내었다. 대학이 지역과 나라,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든든한 자리를 잡도록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나라의 대학교육이 보다 높은 지표를 향하도록 그 길을 닦아 놓았다. 자신이 그러했듯이, 제자들을 향하여 ‘배워서 남주라’고 때마다 강조하였다. 가르치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일’임을 몸으로 보여 주었으며, 배우는 일이 ‘Why not change the world?’를 지향하도록 북돋웠다.그를 보내는 자리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제자들과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그가 바꾸어 내라고 가르쳤던 그 세상에서 오늘도 땀흘려 일하다가, 그가 떠나셨다는 소식에는 세상이 무너져 내린 마음이 되어 모여 들었다. 그가 가르친 대로, 나 하나 잘 살기 위하여 살 것이 아니라 병들고 힘든 세상을 바꾸고 구하기 위하여 살아낼 것을 다짐하면서 스승을 보내드렸다. 생각을 같이 하였던 동지들과 교수들은 대학을 열면서 함께 하였던 다짐을 새롭게 하면서 그를 보내드렸다. 황량한 벌판에 학교를 세우면서 바르게 가르쳐 세상을 바꾸리라는 그 날의 각오를 그를 보내면서 다시 세웠다. 또 하나의 대학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대학’을 일으킨다는 그 처음 생각을 그의 영정을 마주하며 일깨우고 있었다.높은 뜻을 세우고 실천하였을 뿐 아니라, 그는 더할 나위없이 따뜻한 스승이었다. 시험 때면, 몰래 도서관을 돌며 학생들의 힘든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어려운 학생들의 이야기를 낱낱이 들어주며 손을 붙들고 기도하여 주었다. 학생들과 만나는 일을 가장 즐기는 총장이었으며 학생들의 하루하루가 늘 안타까운 선생이었다. 병든 세상을 향한 관심이 깊었던 만큼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세심함도 한 가득이었다. 누구보다 우수한 과학자였지만 마음에는 역사와 사회 걱정을 담고 살았다. 지역과 끊임없이 함께 호흡하고자 하였으며 세계의 맥박도 놓치지 않았다. 유엔과 유네스코 등 국제기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글로벌교육’의 새 지평을 열었다. 경쟁에 몰두해 있는 대학들 간에도 협력과 연합을 강조하여 함께 만들어 가는 대학교육을 꿈꾸기도 하였다.‘메멘토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이 생각은 누구나 죽을 운명임을 명심하고 살아야 함을 이야기했을 터.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 어떤 의미를 남길 것인지, 무엇을 뒤로 하고 사라질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인생을 꽉 채워 산 사람은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가신 어른 만큼 평생을 꾹꾹 채우며 살아낼 수 있을까. 당신은 오늘을 충분히 채우며 살아가고 있는가. 죽음을 기억하라는 저 생각과 함께 오늘을 채우며 살아가라는 지혜를 담은 ‘카르페디엠(Carpe Diem).’ 이 순간을 잡아라, 즉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인 바, 메멘토모리와 카르페디엠을 묶으면 죽음이 찾아올 것임을 잊지 말고 오늘을 채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인 아닌가. 작가 오그만디노(Og Mandino)는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하고, 오늘 죽을 것처럼 살라’고 하였다. 즉, 최선을 던지며 일하되 마음을 다하여 살아낼 것을 권한 게 아닌가. 한동대는 복받은 학교다. 저렇듯 뛰어난 지도자가 이끌었으며 그 뜻을 또 선명히 남기었으니, 앞으로도 무궁한 가능성을 담고 있을 터이다. 남기신 의미를 교육에 담아 세상을 바꾸어 내는 모두가 되길 기대해본다.

2019-07-03

무엇을 버릴 것인가?

2011년 일본 센다이. 유루이 마이 씨는 낡은 집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들에 파묻혀 살고 있습니다. 회사 일이 바쁜 그녀 역시 자기 방조차 정리할 여유 없이 정신없이 사는 중입니다.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낡은 집안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물건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며 가족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흉기로 돌변합니다. 무너져버린 집에서 손전등과 비상식량을 찾으려 해도 물건이 너무 많아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는 경험을 하지요. 집 밖으로 몸을 피해 빠져나오는데 그 순간 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립니다. 그녀는 결심하지요. “이런 집에서 두 번 다시 살고 싶지 않다.” 최소한의 필요한 물건만 엄선해 집에 두기로 합니다.“최종 목표는 트렁크 하나에 다 담을 수 있는 정도의 물건만 남기고 사는 것이에요.” 그녀는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대지진의 경험 이후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다’ 4단 만화 시리즈를 연재해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남편과 어머니, 두 살배기 아들,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지내는 마이 씨의 집은 책 제목처럼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실에는 테이블 하나 의자 네 개. 수납공간 밖으로는 일체 물건이 보이지 않는 주방, 밥솥과 전자레인지, 냄비 3개, 프라이팬 2개, 12개의 식기와 컵이 전부입니다. 욕실에는 비누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삶의 본질을 제대로 누리고 찾기 위해 물건을 버리기 시작하는 사람들. 뺄셈의 미학을 누리는 삶입니다. 덧셈만이 삶의 지름길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과잉 소비 조장 풍조에 속지 않고 불필요한 것들을 일절 소유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소박한 행복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음은 반가운 현상입니다.삶의 뺄셈에 있어 세계 챔피언은 세속의 삶을 모두 버리고 숲으로 들어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아닐까요?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가르치는 일에 잠시 종사하기도 했습니다만, 물욕과 탐심으로 치닫던 미국 초기 자본주의 모습에 염증을 느낀 그는 숲속에 오두막 한 채를 짓고 단순한 삶을 시작합니다. 1845년. 그가 숲으로 들어가면서 남긴 말입니다. “삶이란 너무도 소중한 것. 나는 삶을 깊게 살아보고 싶었고 삶의 정수를 끝까지 마시고 싶었고 삶이 아닌 것은 모두 없애 버리기 위해 강인하고도 엄격하게 살고 싶었습니다.”먹구름 너머 눈부신 삶을 만나기 위해서는 깃털처럼 가벼워야 힙니다. 아름다운 인생 소풍을 위해 무엇을 버릴 수 있을까요?/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7-03

섬과 바다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열 가구로 이루어진 마을에도 나처럼 진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자는 반드시 있겠지만, 나처럼 배움을 좋아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논어 ‘공야장’에 나오는 말이다. 평생 ‘학인(學人)’을 자처한 공구(孔丘)는 스스로를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니라, 배워서 알게 된 자로 규정한다. 그래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명언을 남길 수 있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매일 쏟아지는 신간(新刊)을 읽고 싶은 마음에 죽음이 두렵다는 소회를 피력한 적도 있다.지난주 ‘무등공부방’에서 광주의 향토사 전문가 김정호 선생의 강연이 있었다. 60년 가까이 전남과 광주의 인문지리와 역사, 인물을 두루 섭렵한 선생의 앎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광산 성씨 본관 이야기’가 주제였으나, 종횡으로 달리는 이야기의 향연은 특정분야에 한정되지 않는 것이었다. 혈연과 지연, 학연에 내재한 뿌리 깊은 공동체성에 대한 견해는 인상적이었다. 그러하되 섬과 바다에 대한 소략한 말씀이 가슴에 닿았다.선생이 내세우는 명제는 간명하다. “한국의 미래자원은 바다와 섬이다!” 그 말씀을 듣자니 익숙한 구절이 생각난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島嶼)로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다. 여기서 ‘도서’라는 말이 낯설다. ‘도’는 섬, ‘서’는 작은 섬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한반도와 그에 딸린 크고 작은 섬이 우리나라 영토라는 얘기다. 해양영토 바다가 빠져있다.선생에 따르면, 대한민국 육지영토 면적의 8배에 이르는 바다가 한반도에 부속돼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발전하려면 바다와 섬을 도외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에는 3천358개의 섬이 있는데, 유인도가 482개, 무인도가 2천876개에 이른다. 섬과 바다를 개발하는 것이 ‘국토균형발전’의 첫걸음이라고 선생은 목소리를 높인다.1952년에 ‘낙도중흥법’을 제정한 일본은 모든 섬을 육지의 지자체와 결합시켰다고 한다. 본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을 동경(東京)과 결합하여 섬을 발전시키는 정책을 70년 가까이 실행해온 일본. 우리는 1980년대에 비로소 섬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으나, 일본을 따라잡기는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정부주도로 섬이란 잡지를 간행하고, 해마다 5만여 섬 주민이 동경 한복판을 시위한다니 그럴 법하지 않은가?!우리나라의 모든 것은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런 까닭에 수도권과 지방이라는 요상한 분류마저 생겨났다. 일기예보 하는 사람들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는”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서울과 경기도에서는….” 이런 표현이 적절함에도 ‘수도권’이란 말을 반드시 발화(發話)한다. 그렇다보니 대한민국은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나뉘어져 있다.이런 현상은 ‘비수도권’에서 되풀이된다. 광역시권역과 여타 지역으로 나뉘는 것이다. 대구나 광주, 부산과 대전을 중심으로 사건과 사고, 일기예보가 나오고 난 다음에야 여타지역이 거명된다. 그러기에 육지가 아닌 바다와 섬 이야기는 ‘딴나라’ 이야기처럼 아득하다. 하지만 거기에도 사람이 살고, 문화와 예술이 흐르고, 추억과 역사가 있다. 섬과 바다는 ‘그 섬에 가고 싶다’ 따위의 가벼운 오락과 유희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근대를 열어젖힌 유럽제국의 출발은 바다였다. 작은 돛단배를 타고 그들은 오대양 육대주를 넘나들었고, 급기야 육상제국 청나라와 러시아를 능가하는 세계제국을 성립시켰다. 가뜩이나 넘쳐나는 사람들로 아우성치는 지구촌의 미래는 바다와 섬에 있을 듯하다. 해수욕장 개장시점에 잠시 섬과 바다를 생각해본다.

2019-07-03

삶의 질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한 재벌가 사람들의 ‘갑질’ 논란이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었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도 있듯이 그렇게 엄청난 부를 가졌으면 마냥 여유롭고 자적(自適)하게 살아갈 수 있을 터인데, 사실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분노조절장애라 할 수밖에 없을 만큼 남들에게 패악질을 해대는 모습을 TV화면으로 보면서 자못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불만과 분노의 화신이 되게 하였는지.재벌회장 집안이면 많은 사람들이 선망의 눈길로 바라볼 만큼 경제적 풍요나 사회적 지위가 최상류층이다. 그런데 그것이 삶의 질이나 만족도에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어서 세간에 적지 않은 충격파(?)를 일으켰다. 재물도 지위도 아니라면 무엇이 만족도 높은 양질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가.삶의 질을 말할 때는 흔히들 물질적 조건을 우선으로 꼽는다. 헐벗고 굶주리는 삶이라면 질을 따질 여유조차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삶의 질에 비례하는 조건도 아니고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넘치도록 많이 가졌음에도 만족을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소박한 것으로도 만족한 사람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사회적 지위나 명예도 삶의 질을 결정하는 조건으로 들 수 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만족감이 덜한 것이 보통의 인심이다. 그래서 돈을 주고 사서라도 지위와 명성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도 물질적 부와 마찬가지로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높은 지위나 만인이 환호하는 스타덤에 오른 사람도 우울증에 걸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이다.결국 자존감의 문제인 것 같다. 부의 축적이나 지위나 명예를 얻으려는 것도 자존감을 높이려는 수단이 아닐까. 자존감이란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을 줄인 말로,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재물과 지위, 명예가 자존감을 높여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곧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재벌이나 고관대작들 모두가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는 아니지 않는가.경쟁에 이겨서 남보다 많이 차지하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것만으로는 자부심을 가질지언정 자존감을 높일 수는 없다. 진정한 자존감이란 나누고 배품에서 오기 때문이다. 많은 재물이나 높은 지위는 그만큼 나누고 베풀었을 때 비로소 가치와 보람을 갖는 것이다. 오로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재물과 남에게 군림하기 위한 지위는 손가락질이나 받기 마련이지 자존감을 높여 주지 않는다. 재물과 지위를 내세워 갑질이나 일삼는 자들을 누가 존중하겠는가. 남에게 존중 받지 못하는 자존감은 자만심일 뿐이다.앞의 그 재벌가 가족은 자존감이 별로 없는 사람들인 것 같다.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남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 남에게 지탄받을 짓을 한다는 건 자신을 천대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것에 걸맞게 아랫사람들에게 너그러이 베풀고 살았더라면 진심어린 감사와 존경을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보람과 자존감도 한층 높아졌을 것이다. 남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었을 때 느끼는 뿌듯한 존재감이야말로 자존감의 바탕이 되는 것이므로.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것도 삶의 질을 높이는 요소가 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도 있지만, 사람에게는 물질적인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인문학적 교양의 바탕이 되는 지성과 감성의 향상을 위한 공부가 필요한 까닭이다. 그것은 또한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2019-07-03

꽃다발처럼 향기롭고 보자기처럼 풍성하다 입 안 가득, 그 천가지의 맛

상추쌈을 좋아한다. 돼지 불고기 얹은 상추쌈, 마늘, 된장과 더불어 먹는 고등어구이 상추쌈, 맨밥에 강된장만 얹은 상추쌈도 좋다. 세상의 모든 상추쌈을 좋아한다.상추쌈은 슬프다. 아린다. 쓰라리다. ‘경북매일’ 2015년 6월 8일 기사다. 제목은 ‘6월의 울림, 명예로운 보훈을 기대하며(필자 이칠구 전 포항시의회 의장)’다.“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쓰겠습니다.”고 이우근 학도병.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재학 중. 편지를 다시 쓰지 못했다.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 전사한 학도병의 상의 윗주머니에 남아 있었던, 부치지 못한 편지. 책으로 소개되었고, 영화 ‘포화 속으로’의 소재가 되었다.궁금했다. 별 것 아닌 상추쌈. 전쟁터 학도병의 마지막 편지에서 콕 집어 이야기했다. 왜 수많은 음식을 두고 하필이면 상추쌈일까? 의문을 풀 수 없었다.“그까짓 상추쌈”이라고 가볍게 내칠 것은 아니다. 상추는 ‘싸서’ 먹는다. ‘넣어서’ 먹지 않는다.‘싸서’는 열린 문화다. 넓게 펼친 상추 위에 무엇이든 얹는다. 돼지고기, 고등어, 마늘, 쪽파, 된장, 강된장, 고추장, 된장찌개…. 쇠고기를 얹어도 되고, 닭볶음을 얹어도 된다. 모양도 양도 정해지지 않았다. ‘열려 있는 상추’에 아무것을 얹더라도 탓하는 이는 없다. 상추쌈은 한식을 제대로 보여준다.석학 이어령 선생의 ‘보자기 인문학’을 소개하는 서평의 한 부분이다. 긴 내용을 인용한다. 제목은 ‘보자기로 쌀 것인가, 가방에 넣을 것인가!’이다.“(전략) 일상의 소재들 가운데 ‘보자기’를 통해 동·서양의 문화의 차이점을 읽어냈다. (중략) 전통문화 속의 보자기를 무엇이든 감쌀 수 있는 융통성 있고 포용적인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시킨 것이다./저자는 어린 시절 책보로 사용하던 보자기와 네모난 책가방을, 또 한복과 양복을 비교한다. 전자는 물체(사람)를 ‘싸는’ 반면, 후자는 미리 모양이 잡혀 있어 물체(사람)를 ‘넣는’ 특성을 갖고 있다. (중략) 한국인은 ‘싸는’ 민족으로 ‘보자기형’ 문화를 갖고 있는 것인데, 저자는 이런 특성이 현대의 양극적 사고 체계와 사회 시스템을 극복할 문화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중략) 아이를 요람과 같은 상자가 아니라 포대기로 감싸 업어주는 한국의 보자기 형 문화를 통해 싸고 통합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도시 역시 획이 나뉜 계획도시가 아닌, 모든 것을 감싸는 도시가 미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모든 정형성을 넘어서 융통성을 주어 수시로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할 때 비로소 미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후략)”상추쌈은 보자기 문화다. 베트남, 중국 등의 춘권(춘취안, 春卷)이 우리 상추쌈과 비슷하지 않으냐고 묻는 이도 있다. 그렇지는 않다. 춘권은, 얇은 피에 여러 채소를 넣고 싸서 먹는다. 땅콩가루 등이 들어간 소스도 정형화되어 있다. 내용물을 선택할 수 있는 상추쌈의 유연성을 흉내내지 못한다.한국인의 상추쌈은 삼겹살 구이에서도 빛을 발한다. 상추를 홑겹으로 먹는 이도 있고, 반드시 두 장을 겹치는 이도 있다. 들깻잎, 쪽파, 마늘, 쑥갓 등은 필수 식재료지만 선택사항이다. 3명이 앉으면 3종류의 상추쌈이, 4명이 모이면 4종류의 상추쌈이 있다. 정형화된 춘권은 상추쌈의 다양함을 따르지 못한다.남자든 여자든 상추쌈을 만나면 자연스레 입을 가능한 한 크게, 한껏 벌린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상추쌈 먹는 법을 따로 배웠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우리 시대에만 그렇게 먹는다고? 그렇지도 않다.옥담 이응희(1579∼1651년)는 왕족 출신으로 경기도 안산 수리산 기슭에서 서민으로 살았다. 옥담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시도 많이 남겼다. ‘옥담사집_만물편_어물류’ 중 밴댕이[蘇魚, 소어]에 대한 내용 중 상추쌈, 보리밥이 등장한다.“(전략) 밴댕이가 어시장에 가득 나와/은빛 모습이 촌락에 깔렸네/상추쌈으로 먹으면 맛이 으뜸이고/보리밥에 먹어도 맛이 좋아라 (후략)”밴댕이, 상추쌈, 보리밥의 세 박자가 잘 맞는다. 오늘날 상추쌈에 고등어구이 얹는 걸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옥담이 살았던 17세기 초반에 이미 보리밥, 밴댕이를 얹는 상추쌈이 흔했다.갈암 이현일(1627∼1704년)은 조선 후기 거유(巨儒)다. 퇴계 학통을 이었다. 외조부는 경당 장흥효, 아버지는 석계 이시명이다. ‘음식디미방’을 쓴 장계향이 어머니다. 상추에 대해서 시를 남겼다. 제목부터 ‘상추쌈 먹는 걸 희롱하는 글’이다. 근엄한 유학자가 한낱 상추쌈을 소재로 시를 남겼다.“(전략) 푸른 광주리를 통째로 삼켜 뱃속에 넣고 싶지만, 목구멍은 밴댕이 구운 걸 좋아한다네. 더불어 먹을 좋은 장이 없음은 한스럽지만(후략)”다산 정약용(1762∼1836년)은 평생 세 번의 유배 생활을 겪는다. 첫 번째가 짧았던 서산 해미의 유배, 세 번째가 전남 강진으로 떠났던 17년간의 유배다. 두 번째는, 1801년 신유사옥으로 시작된 포항 구룡포(영일현 장기)의 220일간 유배다. 이때 다산은 여러 편의 시를 남겼고, 그중 하나가 ‘다산시문집 제4권_시(詩)_장기농가(長鬐農歌) 10장(章)’이다.“(전략) 일찍 자는 첨지를 발로 차 일으키며/풍로에 불 지피고 물레도 고치라네/상추[萵葉]쌈에 보리밥을 둘둘 싸서 삼키고는/고추장[椒醬]에 파 뿌리를 곁들여서 먹는다/금년에는 넙치[比目]마저 구하기가 어려운데/잡는 족족 말려서 관가에다 바친다네 (후략)”‘첨지’는 벼슬을 하든 않든, 남편을 부르는 ‘애칭’이라고 적었다. 당시에도 상추쌈과 보리밥, 고추장, 파 뿌리 등을 더불어 먹었다.‘넙치[比目, 비목)’는 광어인지 가자미인지 불분명하다. 눈이 한쪽에 붙어 있는 생선들은 모두 ‘비목’이라고 했다. 광어, 가자미를, 옥담 이응희처럼, ‘밴댕이+상추쌈’의 형태로 먹었는지도 불분명하다.조선 말기 양명학자 경재 이건승(1858∼1924)도 상추쌈을 이야기한다.“상춧잎은 손바닥 같고, 된 고추장은 엿과 비슷하네. 여기에 현미밥 쌈을 싸 급하게 열 몇 쌈을 삼키니, 이미 그릇이 다 비었네. 이것은 입을 속이는 법. 부른 배를 만지고 누웠으니,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라고 했다.‘입을 속인다’는 표현은 ‘고기를 먹고 싶으나 채소로 입을 속여 맛있다고 여긴다’라는 뜻이다. 점잖은 유학자가 현미밥 상추쌈을 ‘열 몇 쌈’이나 허겁지겁 먹는 모습이 정겹다.옥담과 갈암, 다산, 경재 사이에는 약 300년쯤의 시차가 있다. 긴 세월 동안 상추쌈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상추쌈이 우리 고유의 것은 아니다. 상추도 우리 고유의 품종은 아니다. 외래종이다.조선 말기, 운양 김윤식(1835∼1922)은 ‘운양집’에서 “중국에서는 4월에 상추로 밥을 싸 먹는 것을 타채포(打菜包)라고 한다. 우리나라 풍속에도 상추쌈을 싸 먹는 일이 있다”고 했다.우리 고유의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현재 중국인들은 우리처럼 다양하게 상추쌈을 먹지 않는다. 먹는 이가 재료를 선택하고, 모든 재료를 섞어서 싸 먹는 상추쌈은 이제 우리만의 음식, 한식이 되었다.상추는 지중해, 북아프리카, 중동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한반도에 전해진 상추는 고구려 시대 빛을 발한다.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에 상추의 역사가 등장한다.“고려국의 사신이 오면 수(隋)나라 사람들이 채소의 종자를 구하면서 대가를 몹시 후하게 주었다. 그래서 이름을 천금채(千金菜)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상추다. 살펴보건대, 와거(萵苣)는 지금 속명이 ‘부로’이다.”한치윤은 청나라 문신 고사기(高士奇, 1645∼1704년)가 쓴 ‘천록지여(天祿識餘)’를 인용하여 상추를 설명한다. 수나라와 거래를 한 나라는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다. ‘와거’는 상추의 옛 이름이다. 민간에서는 ‘부로’ 혹은 ‘부루’라 불렀다. ‘부루’라는 이름은 지금도 사용한다.송나라 팽승(彭乘, 985∼1049년)은 ‘묵객휘서(墨客揮犀)’에서 “와채(萵菜)는 와국(萵國)에서 왔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라고 했다. ‘상추 와(萵)’는 ‘높을 고(高)’와 비슷하다. ‘와국’은 없다. 북송 때 사람인 도곡(?∼970)이 쓴 ‘청이록(淸異錄)’에는 상추를 두고, “고국(高國)으로부터 왔다”고 분명히 적었다. ‘와국’은 ‘고국’이고 바로 고구려다.‘이우근 학도병의 상추쌈’은 우연이 아니다. 상추, 상추쌈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상추, 상추쌈의 뿌리는 깊고 넓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7-03

수국, 변심하다

김순희 수필가이윽고 노란색이다. 베란다로 나가니 아침 햇살이 수국의 뺨을 어루만진다. 꽃은 평생 동안 한 색깔을 고집하는데, 필 때부터 지기까지 수국은 햇살과 숱한 밀어를 주고받으며 색깔을 바꾸었다.삼촌은 수국을 즐겨 그렸다. 거실 벽은 늘 삼촌의 화랑이었고 요즘에는 수국이 한가득 피어 있다. 내가 감탄하자 삼촌은 일 년 전에 그렸지만, 아쉽게도 실패한 작품이라고 했다. 아니 화사하게 벙싯거리는 수국이 화면 가득 피어있어서 보는 내가 다 환해지는데 왜 실패작이냐고 물었다. 말 수가 많지 않은 삼촌은 작품의 제목은 ‘변심’이라며 그동안 그림 속에서 일어난 일을 조곤조곤 들려주었다.수국이 한창인 여름에 그리기 시작했다. 수채화를 그릴 때, 먼저 꽃송이를 그릴 부분에 마스킹 고무액을 칠하는데, 그래야 물감색이 종이에 곱게 먹는다. 그 해 여름이 어찌나 뜨겁던지 잠시 그림을 손에서 놓은 사이에 마스킹 액이 굳었다. 늦어도 한 달 안에 벗겨내야 하는데,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채 수국의 꽃 색을 입혀 그림을 완성했다. 벽에 걸린 지 6개월이 지나자 수국은 살아있는 것처럼 절정의 보랏빛에서 꽃이 질 때처럼 노랗게 변해가더란다. 마치 그림 제목에 맞추려는 듯.쪽지를 수십 개 접어 소복이 뭉쳐놓은듯한 봉오리, 나는 쪽지에 곱게 접힌 비밀을 하나씩 펴 보고 싶어졌다. 거기에는 ‘풀’이 아니라 ‘나무’라고 불리는 이유와 수국의 내력이 꽃들의 알파벳으로 적혀있는 것 같다. 사람이 알지 못하는, 그래서 더 궁금한 꽃들만의 정서가 ‘내 속마음을 읽어보라’며 나를 애타게 할지 모른다. 그런 이끌림에 나는 시장에 나가 참하게 보이는 수국 한 그루를 데려왔다.아침에 눈을 뜨면 무엇보다 먼저 베란다로 나가 안부를 살피게 되고, 밤새 오종종 붙어 자다가 햇빛을 향해 기지개를 켜는 소리에도 귀 기울인다. 한 치씩 커갈 때마다 그동안 보지 못한 식물의 새로운 변화를 발견하게 된다. 땅의 소리에 오래 귀 기울이느라 수국은 아직 풀에 가깝다. 흙의 양분을 한 모금이라도 더 찾으려고 뿌리를 잘게 뻗는다. 발끝에서부터 색을 흠뻑 빨아올려 연둣빛 꽃을 부풀린다. 좁쌀 알갱이 같은 모습으로 입을 앙다문 채 한 달을 버틴다. 연륜을 쌓고 생각이 깊어지면 풀도 나이테를 품을 수 있다고 믿기에 수국은 피어나기를 거듭하는지도 모른다. 나이테가 늘어나면서 우리도 무르익는 것처럼 말이다.창밖에 여름 기운이 완연해지자 수국이 속내를 토해냈다. 연두 알갱이에서 어린 고양이의 귀 같은 꽃잎을 내밀었다. 수줍은듯 하나를 펴는가 싶더니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 ‘퐁퐁’ 소리가 났다. 네 귀를 다 열었나싶던 날부터 연둣빛 꽃잎 끝이 파리해졌다. 끝에서부터 시작한 푸름이 서서히 스며들어 봉오리 전체에 번졌다. 곧 푸른 꽃불이 인다. 꽃불을 진화하려는 듯 보슬비가 더해지자, 이 때 비로소 수국은 촉촉해지며 진정한 수국이 된다.한 계절 마주하며 수국을 알았다. 수국은 빛깔로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토양이 중성이면 백색 꽃이 피고, 산성이면 청색 꽃이 피고, 알칼리성이면 분홍색이 핀다. 흰 꽃의 수국에 백반을 녹인 물을 뿌려주면 청색으로 변하고, 잿물이나 석회를 뿌려주면 분홍색으로 변한다. 이는 식물학자의 말이지만, 오래도록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수국의 표정과 내면을 이해한다면 실험 결과만으로 그 이유를 단정하지 못할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빛이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어느새 나도 나이테가 겹겹이다. 연둣빛 나이 십대에는 비 오는 날이 싫었다. 하지만 갈맷빛 더욱 짙어가는 요즘에는 나무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러 수목원을 찾아가기까지 한다. 설익은 나이에는 변심이 부끄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이 되자 사람도 나이가 들면서 나타내고 싶은 색깔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변심은 사물을 보는 마음의 눈이 무르익는 과정이다.

2019-07-03

너의 목소리가 들려 - 희곡 읽기에 대해

희곡이나 시나리오를 읽을 땐 배우들의 목소리를 상상적으로 떠올려 보면 좋다. 내가 연출가가 되어서 이 장면은 이렇게 연출하면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훨씬 재미있다. 얼마 전엔 사람들과 모여서 이런 희곡 읽기를 했다. 사람들과 같이 책을 읽는 일은 참 좋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많은 희곡을 읽었지만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몰리에르의 ‘상상병 환자’이다.‘상상병 환자’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이 희곡을 번역한 정연복 선생님이 우리의 책 읽기를 풍문으로 듣고 우리의 독서 모임에 참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번역을 하면서 겪은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다. 한 번 번역을 쫘악 해놓고 당신이 직접 소리 내어 대사를 읽어봤더니 도저히 공연이 불가능한 번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독성은 물론 발성까지 고려해서 싹 뜯어고쳤다고 한다. 참 훌륭한 번역가란 생각을 했다.전문가네 합시고, 이 작품의 원제가 ‘Le Malade imaginaire’이니까 제목은 ‘상상으로 앓는 환자’라고 번역해야 옳아! 라고 말하는, ‘내가 옳아병’에 걸린 전문가들도 많다. 그런데 정연복 선생님은 원제가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많이 알려준 제목을 선택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상상으로 앓는 환자’가 아무리 정확한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상상병 환자’보다 주인공의 의미가 더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생님의 그런 가치관도 좋았고, 번역은 유려했다.‘상상병 환자’는 1600년대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주인공은 아르강이다.아르강은 아무 병도 없지만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아르강의 주치의는 아르강의 그런 상상을 부추겨 비싼 약을 먹여 돈을 번다.이러한 아르강은 아내가 죽고 재혼하였는데, 두 번째 아내의 이름은 벨린느다. 벨린느도 의사처럼 사악해서 아르강이 죽으면 모든 유산을 자신이 독차지 하기 위해 아르강의 두 딸을 수녀로 만들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프랑스 상속법에 따르면, 자식이 죽거나 수녀가 되면, 남편이 죽은 후 유산을 딸들에게 주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아르강의 두 딸은 모두 착한 데 첫째 딸인 안젤리끄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하지만 아르강은 자신의 주치의의 아들인 또마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고 싶어 한다. 그래야 주치의로부터 무료처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또마는 의사가 될 예정이지만, 아주 멍청한 인물로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말하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물이다. 몰리에르가 의사를 유독 사악하게 그린 이유는 몰리에르가 의사를 혐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시대의 프랑스의 의사들은 충분히 혐오를 받을 만한 짓을 했다. 실제로 모든 병의 원인이 치아라고 여겨 태양왕 루이 14세의 주치의는 루이의 이를 전부 뽑아버리도 했다. 또 의사들은 목욕이 해롭다는 이야기를 퍼트려 사람들은 목욕을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프랑스 향수 발전에 많은 이바지를 했다고 한다.그리고 아주 중요한 등장인물 두 명이 더 남았다. 한 명은 아주 똑똑한 하녀인 뜨와네뜨이고 다른 한명은 아르강의 친동생인 베랄드다. 이들은 아르강이 계획한 멍청한 짓을 슬기롭게 막아낸다. 아르강의 멍청한 계획이란 안젤리끄를 또마와 결혼시키고, 벨린느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는 유서를 작성하려는 것이다. 뜨와네뜨와 베랄드는 아르강에게 죽은 척을 해보라고 한다. 그러자 벨린느는 아르강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그의 유산을 모두 차지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었다 보기 좋게 아르강에게 들킨다. 하지만 안젤리끄는 아르강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는데 이를 통해 아르강은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안젤리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이 연극은 전형적인 희극으로 실제로 연극을 보면 재밌는 부분이 정말 많다. 정연복 선생님은 아주 재미난 해석을 해주셨는데, ‘상상병 환자’에서 일을 꾸미고 계획하는 사람은 아르강의 똑똑한 동생 베랄드 혹은 매우 명민한 하녀 뚜아네뜨가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을 했다. 정연복 선생님은 어쩌면 이 모든 해프닝의 중심에 아르강이 있고, 아르강이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계획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주치의나 벨린느가 자신을 기만하고 자신의 돈을 축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아내 벨린느의 시커먼 속을 이미 모두 알고 있으면서 눈감아 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르강은 벨린느의 악행과 악덕은 물론 안젤리끄의 선량함과 뚜아네뜨의 충성심까지 모두 뒤죽박죽으로 섞는 ‘한바탕 소동’이 되도록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뒤죽박죽된 상태 이것이 삶의 진실이라는 것을 아르강이 선포하는 것이다.‘오이디푸스 왕’은 함께 책을 읽은 분들의 통찰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수업을 들으러 오시는 A는 희곡이 처음이라고,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그 독법이 치명적이었다. A는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자신의 잘못을 잘못으로 받아들이는 자, 오이디푸스! 그러나 그런 오이디푸스와 달리 치부를 끝끝내 거부하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B는 공감대장이었다. 모든 작품에 자신의 주위 분들을 대입해서 읽는 아주 독특한 독법을 보여주었다.이를 테면 오이디푸스를 읽으면 남편이 생각난다고 했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혼자 알고, 혼자 고통스러워하면 되는데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을 알리고 또 자신의 고통까지 공유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A의 남편 역시 자신이 힘들면 혼자 이겨내지 못하고 꼭 주위 사람들이 자신이 힘든 걸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맨날 몸이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는 상상병 환자인 ‘아르강’은 또 A의 시어머니를 닮았다고 한다.그리고 무척 많은 비밀을 간직한, 목소리가 마치 성우 같았던 C도 있다. C는 ‘인간 본성에 대해서’(에드워드 윌슨)을 언급하면서 ‘벌의 행동의 가짓수가 인간의 범주에서 얼마 되지 않듯이 인간 행동의 가짓수도 더 큰 능력을 가진 자가 볼 땐 벌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오이디푸스 고통이라는 것도 자기 인식이 감당해야 할 정도의 크기 밖에 되지 않는다는….’나는 책 읽기를 진행하면서 특별히 한 것이 없다. 그냥 사람들과 책을 함께 읽고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그런 사람도 필요하니까 말이다.델리스파이스라는 가수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의 가사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 외에 다른 가사는 없고 이 말만 주구장창 반복한다.이 노래를 들어본 사람들은 이 무한히 반복되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말에서 ‘나’의 애절함을 떠올리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에 짜증 가득한 ‘나’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가수가 무엇을 의도하고 이 노래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작품이든 창작자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을 읽는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가를 찾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작품은 창작자가 아무리 열심히 책을 써도 그것을 읽는 독자가 없으면, 창작자가 작품을 쓰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듣는 것과 말하는 것. 나는 이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함께 독서 토론을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을 잘 들어주는 일일 것이다.왜냐하면 세상에는 좋은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이고, 정말 문제는 그 좋은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더 큰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19-07-03

베이비부머의 위력

출생률이 다른 시기에 비해 현저히 상승한 시대에 태어난 사람을 베이비부머라 한다. 한국의 베이비부머는 6·25전쟁 이후인 1955년생부터 1963년생 사이에 태어난 사람을 말한다. 나라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있다. 그들은 막강한 인구수로 국가 성장의 기둥이자 동시대 사회를 주도한 세력이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미국의 베이비부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이후부터 1965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이며 미국 전체 인구의 26%를 차지한다. 그들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세대라 평한다. 이전 세대와는 다르게 경제성장의 과실을 누리며 사회 및 문화운동에 앞장 선 사람들이다. 히피문화와 록 음악이 그들을 대표하고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반전운동에도 앞장 선 사람들이다. 일본은 단카이 세대라 부르며 1947년부터 1949년 사이 출생한 사람들을 일컫는다.한국 베이비부머 세대도 이제 대거 은퇴 길로 접어들었다. 올해만해도 연간 80만 명이 넘는 사람이 60세 정년을 맞는다고 한다. 일하는 인력이 줄어들고 복지비용은 증가하게 된다는 뜻이다. 한국의 베이비부머 인구는 총인구의 14%다. 인구수로 700만 명을 상회한다. 막강한 인구로 우리사회와 경제에 미친 영향력도 매우 컸다. 그들에게는 가난이란 기억이 있다. 한국전쟁 이후 겪어야 했던 피폐한 삶을 아직 기억하는 세대다. 1958년생이 초등학생일 때는 콩나물 교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교실이 꽉 차 오전반 오후반으로 쪼개어 수업을 받았다. 부모를 마지막으로 모시는 세대이면서 자식에게 부양받기를 포기한 세대다. 그러면서 자신의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세대다. 부포족, 낀 세대라 부른다. 베이비부머의 대거 은퇴가 귀농 귀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소식이다. 2017년 51만 명에 달했던 귀농 귀촌인구가 지난해부터 50만 명대가 무너지는 등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귀농 인구가 줄어든 것도 베이비부머의 이동과 유관하다는 분석이다. 올 초 한국의 베이비부머 은퇴로 60세 정년 연장 논의가 시작됐다. 한국의 베이비부머의 위력이다. 당분간 그들의 영향력은 지속될 전망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19-07-02

가치 있는 삶의 공통분모는?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재산을 잘 쓸 줄 알아야 진정한 부자다. 부자가 되는 것은 단지 돈을 버는 것만이 아니라 돈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안다는 의미였다.”시어도어 젤딘은 ‘우리 삶을 가치 있고 위대하게 만드는 28가지 질문’이라는 부제가 달린 ‘인생의 발견’에서 “돈이 인간을 선한 삶으로 이끌어주지 않으면 무가치하다”는 크세노폰의 말을 인용한다. 돈이 모든 가치를 압도하고 있는 현 시대에 어떻게 돈을 의미 있게 쓰는지를 보여준 두 분이 있다. 세계 1위 참치기업을 만든 김재철 동원그룹 전회장과 파주출판도시를 만든 이기웅 열화당 대표가 그들이다.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첫 원양어선을 이끈 김재철 전회장은 독서가 생활화된 분으로 유명하다. 1961년 1월 25일 그의 일기는 이렇게 쓰여졌다. “선원들은 갑판 위에 차양막을 쳐놓고 바둑, 장기에 열중이다. 나는 출항 이래 독서에 취미를 붙여 일본에서 구입한 책들을 읽는데 시간을 보냈다.” 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습관으로 그는 “사업을 체계화하거나 체계적으로 사고하고 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창업 10주년이 되던 1979년 ‘동원육영재단’을 설립하여 인재육성을 실천해 온 그는 ‘라이프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만들어 대학생들의 전인교육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다.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이기웅 열화당 대표는 할아버지께서 지은 선교장 사랑채 ‘열화당’의 이름을 따서 1971년 출판사를 설립했다. 책은 ‘영혼의 지도’라고 생각하며 출판인으로서의 소명을 묵묵히 실천해 왔다. 미술, 사진, 전통문화 등 문화예술 관련 출판을 하며 대중의 입맛에 맞는 시장성에 코드를 맞추기보다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책다운 책’을 만드는 일에 주력하였다. 출판사옆에 책박물관을 만들고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고서와 양서를 공유하는 열린 공간을 만들어, “열화당은 전인적 인간상에 주목하는 인문주의적 예술출판”의 외길을 걸어왔다는 평판을 얻고 있다. 또한 ‘선량한 책, 값어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출판인들의 환경 개선이 필요는 생각을 갖고 파주출판도시 계획을 추진하였다. ‘세계 유일의 책문화도시’를 표방할 만큼 매년 파주북페스티벌이 열리고, 독특하고 멋진 출판사 건물들 사이로 자연 풍경을 느끼며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성해지는 아름다운 공간이 되었다.“우리 시대의 위대한 모험은 지상에 사는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다.” 시어도어 젤딘은 ‘인생의 발견’에서 어떤 개인을 ‘평균적인 인간’과 구별해주는 것은 고유한 경험과 미세한 태도의 차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삶의 본질이자 그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김재철, 이기웅 두 분은 책이라는 공통분모로 만난다. 스스로 책을 찾아 읽으며 성장했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미쳤다. 파주출판단지로 떠났던 ‘숙명라이프아카데미’ 여름캠프 덕분에 두 분을 통해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새삼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지난 주는 ‘서울국제도서전 2019’이 열렸다. 매년 대한출판문화협회 주최로 개최되고 있는 큰 행사로 어느새 25회가 되었다. ‘다가올 책의 미래, 그리고 우리가 마주하게 될 책 너머의 세계’를 주제로 올해는 41개국, 431개 출판사가 참여하였다. 대규모 도서축제가 된 이유가 국내외 출판사들이 만든 다양한 책을 접할 수 있는 자리인 점도 있겠지만 책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향기와 책을 읽고 쓰고 만드는 사람들이 주는 감동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사람이 책을 만들지만 결국 우리는 책을 읽으며 제대로 된 사람이 된다. 다가오는 여름, 책과 함께 당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기억되길 기대한다.

2019-07-02

새로운 변화와 도전! 봉화발전의 전기를 마련하다

엄태항 봉화군수봉화퍼스트는 봉화발전의 기본바탕으로 모든 군정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지역자본의 외부 유출을 최소화하고 지역경제를 선순환시켜 군민이 풍요로운 봉화를 만들자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봉화군은 봉화퍼스트 조기 확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이제 지역에 차츰차츰 스며들고 있다.특히, 재래시장 시장애 불금축제는 봉화퍼스트 정책의 가장 성공적이자 대표적인 사례로 많은 군민의 호응을 얻고 있으며, 매주 금요일이면 많은 군민과 인근 지역 방문객들이 전통시장에 모여들고 있어, 지역 상경기 활성화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또한, 봉화지역상품권 50억원이 곧 발행될 예정에 있어, 지역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이 된다. 이외에도 봉화군은 봉화퍼스트가 일회성 행사가 아닌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정책이 될 수 있도록 군 전체 직원이 참여하는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해 지역경제를 뒷받침한다는 방침이다.정부는 탈 석탄, 탈 원전을 표방하며 신재생에너지 3020 정책을 국정 핵심과제로 추진 중에 있다. 초고령화에 따른 생산인구 감소와 이농현상 심화 등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농촌에 가장 적합한 사업이 재생에너지, 즉 태양광사업일 것이다. 봉화군 또한 군민 직접 참여형 분양형 태양광발전사업을 추진해 군민 340세대 34MW 발전사업 허가를 완료하는 성과를 거둔 바 있다. 그 결과 에너지 전환포럼에서 지방자치 부문 에너지 전환상을 수상하며 봉화군 재생에너지 사업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렸다. 이외에도 유휴 국공유지를 활용한 협동조합형 태양광발전사업을 추진하여 공공자원을 지역주민의 소득으로 연결되도록 할 계획에 있으며 축사, 버섯재배사 등과 연계한 영농복합형 태양광발전사업도 사전 행정절차를 준비 중에 있어 토지영농과 더불어 1+1의 소득창출을 유도한다. 또한, 일반산업단지의 개념을 재생에너지에 도입하여 태양광 산업단지(계획입지형) 구축을 위해 중앙에 수차례 건의하는 등 타 지자체보다 훨씬 앞선 재생에너지 정책을 펼치고 있다.아울러 농업인 경영 안정자금은 지역 농민들의 충분한 의견수렵을 통해 조례 제정 등 하반기 지급 절차를 밟아나가고 있다.세계 최장 현수교인 모험의 다리 조성사업은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관계기관과 긴밀히 협의 중에 있고, 루지체험장 조성사업은 부지매입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MTB코스와 트레킹길 조성도 용역 중에 있어 청량산 주변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문화체육관광부 5년 연속 우수축제인 봉화은어축제는 야간 중심 축제로 새 단장해 관광객들을 맞을 준비에 한창이고, 분천 산타마을은 매년 관광객이 증가하며 겨울철 대표 관광지로 명성을 높이고 있다.국립백두간수목원 주변개발 또한 애당리 일원에 리조트, 캠핑장 기반구축을 위한 기본구상 용역을 추진하여 수목원 시너지 효과를 높인다. 아울러, 국립백두대간수목원~분천 산타마을~청량산 등 지역주요 명소 관광벨트화와 안동, 영주를 연계한 광역 관광 인프라 구축에도 힘쓰고 있다.레저시설, 노인전문병원 등 각종 편의시설이 완비된 전원형 친환경 실버타운 유치를 위해 우수사례 벤치마킹과 기본구상 등 사전 건립계획을 토대로 민자 유치활동에 본격 나섰다. 어르신들의 건강한 노후생활을 위해 군 전체 경로당에 공기청정기 설치를 완료하였으며,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에 대한 실버카 배치도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물야, 춘양, 석포면에 공립형 지역아동센터와 농어촌 놀이터를 건립해 안심 보육환경을 조성하고, 어린이집 공립화와 청소년센터 리모델링 국비 신청, 국립청소년산림생태체험센터 착공, 그리고 봉화군 가족센터 건립 추진 등 미래의 꿈나무들에 대한 지원에도 뚜렷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또한, 여성 역량강화 등 사회참여 확대와 장애인들의 돌봄 기능 확충은 물론 200여 세대의 다문화가정에 대한 교육과 일자리 지원 등 전 계층을 아우르는 선진 복지정책을 추진하고 있다.신구시장 연결 스윙교가 완공을 눈앞에 두며 시장 이용과 축제 등 다방면 활용에 기대가 되고 있고, 지역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내성천 경관타워 조성사업은 내년 연말 완공을 목표로 사전절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한, 지역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인 내성지구 신도시 조성사업과 도시재생 뉴딜사업 등 봉화읍 원 도심의 모습을 새롭게 할 대규모 사업들 역시 경북도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공모 신청 등 준비에 철저를 기하고 있다. 농식품부 주관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도 봉화읍을 대상으로 추진할 예정에 있어 도시재생사업이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필자는 지난해 대구·경북 최초 4선 군수의 영광을 안았다. 지난 10여년간 봉화를 이끌면서 많은 성과를 내며 지역발전을 견인해 왔다. 현재 봉화군은 도전, 변화, 혁신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유치, 은어축제 창안, 하늘다리 조성, 군 청사 이전 등 지역발전의 튼튼한 기반을 구축했다. 침체되어 있던 지역의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모든 군민이 다함께 잘사는 봉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봉화발전의 백년대계를 다시 바로잡아 누구나 살고 싶고, 찾아오고 싶은 전원생활 대표도시 봉화가 되길 기대해 본다.

2019-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