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과거를 잊은 자는 악을 저지른다

유영희 작가 지난 일주일 간 뉴스를 장식한 굵직굵직한 사건 중에 내가 꼽은 가장 큰 사건은 한기호 국회의원과 신원식 안보실장의 문자 대화다. 지난 24일 한기호 국민의힘 의원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된 북한군을 공격해 피해를 발생시켜서 대북 심리전에 활용하자고 신원식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에게 문자를 보냈고, 신원식 실장은 긴급대책회의를 했다며 이에 응수하는 내용이다. 국가정보원이 이미 지난 18일 북한군이 러시아에 현재까지 약 3000명 파병됐고 오는 12월까지 1만여 명 파병할 것이라고 밝혔고 22일에는 대통령실은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협력 진전 상황에 따라 우크라이나에 ‘공격용 무기’를 지원하는 것도 고려 중이라고 발표했으니 이들 대화는 단순한 사적 대화로 치부될 수 없다. 거기에 26일 뉴스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5일에 ‘러시아와 북한은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오면 결정할 것’이라고 발표하고 이것은 러시아도 유사시 한반도에 파병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을 남한과 북한의 대치 상황으로 유도하는 정치인들의 머리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는지 들여다보고 싶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는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벨라루스 작가다.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43년간 구 소련인으로 살면서 전쟁의 고통을 잘 아는 작가이기도 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와 한강 작가의 공통점은 여성 작가라는 점과 전쟁과 폭력의 참상을 강렬한 언어로 표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알렉시에비치는 넌픽션 다큐멘터리를 소설처럼 써서 ‘목소리 소설’이라는 장르를 만들었다. 그는 전쟁에 참전했던 여자들,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어린이들 같은 약자의 목소리를 인터뷰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소련 여성 200명을 인터뷰한 기록이고, ‘마지막 목격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현재 벨라루스 지역에 살던 0∼14세 어린이들 101명의 전쟁 목격담이다. 벨라루스는 1941∼1945년 사이 인구의 4분의 1이 죽을 정도로 전쟁의 피해가 극심했던 곳이다.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어린이의 눈이라면,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오는 꼬마 죠슈아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목격자들’에는 죠슈아만큼, 아니 죠슈아보다 더 무기력했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인터뷰는 40여 년이 지나 그 아이들이 42∼58세일 때 한 것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것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독일군이 엄마 얼굴에 총을 쏜 순간, 독일군이 주민을 생매장하면서 울음소리도 내지 말라고 윽박지르던 모습,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고아들이 죽을 때까지 피를 뽑던 장면을 목격한 아이들의 기억은 생생하다. 북한이 보내는 소음을 견디지 못한 강화도민이 국감장에 와서 무릎 꿇고 울부짖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난다. 북한이 러시아에 파병한다고 우리도 우크라이나에 군인을 보내 북한군을 무찌르자는 발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마지막 목격자들’ 옮긴이의 말처럼, 과거를 잊은 자는 악을 저지른다.

2024-10-27

현지에서 현지인이 현지어로, 3현 주의

장광일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본래 ‘3현(現) 주의’라 하면 현장(現場)에서 현물(現物)을 관찰하고 현실(現實)을 인식한 이후에 문제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경영원칙을 일컫는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3현(現) 주의’는 현지(現地)에서, 현지인(現地人)이, 현지어(現地語)로 혁신을 전파하는 해외 혁신 활동의 신념(信念)을 말한다. 10여 년 전 필자가 P사 해외법인에 전파한 혁신 활동을 되돌아보면서 ‘3현(現) 주의’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다. 현지에서 현지인이 현지어로 혁신을 직접 리딩(Leading)한 법인은 ‘일과 혁신이 하나’로 성공적인 혁신이 정착된 것을, 경영층이 시켜서 마지못해 추진했던 법인은 ‘일 따로 혁신 따로’로 무의미한 혁신이 추진되는 것을 보았다. 어느 해외법인에서 혁신을 컨설팅할 때의 일이다. 법인장의 혁신에 대한 의지와 관심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3개월도 안되어 현장은 놀랍게 변모해 갔다. 그러나 어느 날, 혁신팀 직원 한 명이 다른 부서로 옮겨가고 리더 역할을 하던 직원이 개인 사정으로 회사를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법인장은 바로 인력을 보충해 주었지만 혁신은 내리막길로 향하였다. 새로 부임한 혁신 담당자들이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럴까? 라는 의문이 생겼었다. 필자는 이전팀과 현재팀의 일하는 방식을 비교해보았는데 특징이 아주 다르다는 사실이 파악되었다. 전임 혁신팀장은 시간만 되면 현장의 반장, 주임들과 소통을 많이 하며 공감대를 쌓는 데 초점을 두었고 덕분에 중간 관리자들의 힘을 빌어 순조롭게 혁신 추진을 할 수 있었고, 추진 속도 역시 빠를 수밖에 없었다. 후임 혁신팀장은 현장에서 해야 할 개선 활동을 혁신팀에서 다 하느라 매일 바쁘다 보니 현장과 소통할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혁신은 혁신팀 혼자서 다 하는 것이 아니다. 혁신팀은 혁신 방법론을 가르치고 방향을 설정하고 운영하는 것이며 현장개선은 현장에서 스스로 해야 한다. 현장직원을 움직이려면 현장 관리자의 마음부터 움직여야 한다. 혁신을 시작하여 첫해에 혁신의 단맛을 보고 지금까지 지속해서 혁신을 잘 이어나가는 법인들을 보면, 꾸준히 하나하나 해가면서 그 회사만의 고유한 혁신체계를 만들어 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체계가 잘 표준화되어 있고, 훈련이 잘되어 있으면 경영층 또는 혁신팀이 바뀌어도 절대로 혁신이 무너지지 않는다. 여러 법인을 지도하면서 실패도 해보고 성공의 맛도 보면서 느낀 것은 ‘혁신은 전문가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만 성공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30개가 넘는 P사의 해외법인은 현재 10년이 넘게 QSS혁신을 추진 중이다. 그 중에서 자체 법인만의 체계를 갖추고 혁신 문화가 정착된 법인이 있고, 그렇지 못한 법인이 있다. 혁신의 성공으로 이끌려면 누가 시켜서 하는 혁신이 아니라, 항상 자체 법인에 맞는 혁신의 표준과 체계를 만들어 가야 하며, 자력추진 역량을 가속화 해야 한다. ‘혁신의 성패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달려있다’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2024-10-27

‘제18회 청송사과축제’ 가족 중심 프로그램으로 새롭게 도약

윤경희 청송군수 사과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다. 청송군에서 사과는 지역 경제의 중심이며, 그 이상의 상징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청송사과는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사과부문에서 12년 연속 대상을 받으며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사과로 자리매김했다. 이런한 성공은 오랜 노력과 정성의 결실이며, 이를 기념하고 더 큰 도약을 위해 올해도 ‘제18회 청송사과축제’가 개최된다. 오는 30일부터 11월 3일까지 청송읍 용전천 현비암 일원에서 열리는 이번 축제는 ‘청송사과, 끝없는 비상’을 주제로, 청송사과의 미래 가능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다. 청송사과는 맛과 품질만 뛰어난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기후 변화와 농업의 어려움, 그리고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청송군의 열정과 도전이 담겨 있다. 청송군은 기후에 적합한 시나노골드 등 신품종개발, 미래형 과원 조성 등을 통해 기후 변화와 노동력 부족 문제를 극복했고, 이를 통해 사과의 품질을 한층 더 높였다. 이러한 노력이 청송사과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과로 만들었으며, 이제는 글로벌 브랜드로의 도약을 앞두고 있다. 이번 축제는 그 도약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변화된 사회 환경을 반영해 축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형식으로 기획되었다. 이는 이번 축제의 핵심 중 하나로, 청송사과의 매력을 다양한 세대에 알리고자 한다. 특히 20~30대 젊은 층을 겨냥한 온라인 콘텐츠가 강화되었고, 대표 킬러 콘테츠인 ‘꿀잼-사과난타’, ‘도전-사과선별로또’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층의 참여를 유도하며 SNS를 통해 축제의 인지도를 높일 계획이다. 또한 청송사과축제 전용 홈페이지가 새롭게 구축되어, 이를 통해 축제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축제 기간뿐만 아니라 연중 상시 방문객과의 소통을 이어갈 계획이다. 오프라인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청송사과 퍼레이드와 청송사과 꽃줄엮기 전국대회 등 주민들과 관광객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행사들이 열리며, 청송 골든벨, 사과방망이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또한, 축제 기간 동안 청송사과로 만든 요리와 가공품이 전시 및 판매되어 방문객들은 청송사과의 깊은 맛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올해 축제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변화는 가족 중심 콘텐츠의 강화다. 청송군은 저출생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자 가족 단위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하였다. 가족사진 인화 서비스, 가족 요리 체험, 가족 마사지법 강의 등 가족이 함께 즐기고 참여할 수 있는 콘텐츠들이 추가되어, 축제를 방문한 가족들에게 더욱 특별한 경험을 제공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청송사과축제는 단순한 축제 이상의 가치를 지닌, 가족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축제의 성공을 위해 청송군은 방문객들의 편의도 크게 신경 썼다. 지난해 불편했던 화장실과 주차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동식 화장실을 추가하고, 주차 공간을 확장했다. 또한, 부스 운영의 질을 높이기 위해 작년에 좋은 평가를 받았던 평가 시스템을 올해도 도입, 운영의 전반적인 수준을 끌어올려 방문객들의 만족도를 높일 예정이다. 이러한 변화들은 방문객들이 더욱 쾌적한 환경에서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축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공연이다. 연계행사로는 장민호, 김연자 등 인기 가수들이 출연하는 ‘헬로콘서트 좋은날’ 개막 공연 및 박지현, 박서진, 박미경 등이 출연하는 ‘세계유교문화축전’이 개최되며, 이밖에도 이찬원, 진해성, 송실장 등이 출연하는 ‘청송문화제 축하공연’과 손태진, 정서주, 우연이 등이 출연하는 ‘사과축제공연’과 김희재, 김다현 등이 초대가수로 출연하는 ‘청송군민 노래자랑’도 개최된다. 이 공연들은 축제의 즐거움을 더욱 배가시켜, 관광객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할 것이다. 청송사과축제는 지역 경제 활성화와 함께 청송사과의 명성을 알리는 중요한 행사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다. 이 축제는 청송군이 지역 농업 발전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사이며, 이번 축제도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다. 올해 청송사과축제는 작년에 비해 많은 혁신적인 변화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특히, 온라인 프로그램 확대와 가족 중심 콘텐츠 강화를 통해 방문객들이 더욱 즐겁게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정성을 쏟았다. 청송사과축제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했으니, 군민, 출향인, 관광객 등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기를 바란다.

2024-10-27

블랙박스

퇴근을 하던 남편이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저녁상은 본 척 만 척하고 노트북을 찾았다. 회사에 주차해 놓은 차의 앞 범퍼를 누군가 세게 긁어 놓고 갔다며 범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밥도 먹지 않고 메모리 칩을 넣은 노트북에 눈을 주었다. 차에도 남편의 마음에도 꽤나 흠집이 났나보다. 며칠 전 내 차에 문제가 있어 수리를 맡기면서 남편 차를 며칠 타고 다녔다. 혹이나 내가 긁은 건 아닌지 괜히 조마했다. 남편은 회사에 있었던 시간부터 전 날 주차장 영상까지 찾기 시작했다. 범인은 생각보다 쉽게 찾아지지 않는지 그 전 영상까지 뒤지고 있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기다리던 나는 배가 고파 먼저 밥을 몇 숟갈 떴다. 그 순간 노트북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목소리였다. 주차 되어 있던 영상만 보던 남편이 주행하면서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나의 목소리를 틀어 놓고 듣고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꿀맛 같던 밥알이 돌처럼 딱딱해져 왔다. 까먹고 있었던 전화 내용이 기억났던 것이다. 친구와의 수다는 운전 중 계속 이어졌다. 내 귀에도 들리는 내용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남편의 표정은 조금씩 굳어져 갔다. 얼마 전 시아버님이 쓸개 수술을 했다. 공직에 계셨던 아버님은 평소에도 말이 없으셨고 편찮아도 자식들 걱정할까봐 표현도 안 하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갑자기 새벽부터 배가 아파 감당을 못하셨고 응급실을 갔는데 보호자를 데려오라고 했단다. 겁이 났는지 장남인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과 새벽에 병원에 가보니 아버님은 혼자 계셨다. 당연히 같이 계실 줄 알았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님이 그렇게 아파 병원을 가는 걸 알았으면서 그 새벽에 혼자 응급실을 보냈다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못마땅했던 나는 친구와의 통화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열심히 주고받았다. 남편은 그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성대모사까지 해가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미 이야기 말했던 내용을 다시 듣게 되니 내가 들어도 좀 불편한 부분이 많았다. 전화 내용을 듣고 있는 우리의 표정은 굳어 있는데 전화 속은 남의 이야기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대고 있었다. 블루투스로 통화를 하다 보니 함께 공감해주며 장단을 쳐 준 친구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불편한 드라마 한 편을 라디오로 듣고 있는 듯 했다. “아줌마들 모이면 늘 시어머니 욕이구나” 김경아 작가 처음에는 남편도 이해하는 듯 웃으며 넘기는 듯 했다. 하지만 자기 어머니 뿐 아니라 자기 집의 흑역사까지 끄집어내어 하나하나 일러바치듯 끝까지 말하고 있는 아내를 이해해 주기는 힘들었나보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범인도 찾지 못했는데 노트북을 덮어 버렸다. 저녁도 먹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괜히 눈치가 보였다. 사과를 하든 변명을 하든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평소에는 거의 보지도 않던 블랙박스를 갑자기 들고 오리란 걸 상상하지 못했다. 또한 남편의 차라는 생각을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를 한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런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남편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친구와 나누었던 뒷이야기들이 다 옳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유쾌하지 않을 터인데 어머니 흉내까지 내 가면서 깔깔대는 소리를 직접 다 들었으니 배신감마저 들었을 것 같다. 남편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적절한 추임새를 넣어가며 함께 동참한 친구는 또한 무슨 죄란 말인가. 나의 머릿속은 하얗게 안개가 낀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온 과거의 잘못까지 다 드러나는 요즘이다. 비밀이란 수줍은 소녀의 얼굴처럼 숨길 수 없는 단어인 것 같다. 시기는 언제일지 모르나 결국에는 다 드러나고 곤욕을 치르게 된다. 하고 싶은 말을 안 하고 살려니 어딘가가 간지러워 비밀스럽게 나눈 우리들의 대화 덕분에 나는 며칠을 남편 비위를 맞추느라 몸과 마음이 분주했다. 남편이 진짜 찾고 싶었던 범인은 나였을까.

2024-10-27

감을 깎으며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상강(霜降)을 지났건만 한낮 기온은 20도를 훌쩍 넘어선다. 그나마 새벽 최저기온이 5도 내외를 넘나드는 것을 위로의 하나로 삼을 뿐이다. 서리 내릴 무렵에 아침이슬이 뻑뻑하게 내리는 시절이니 무엇을 더할 것인가?! 그래도 시절이 변해가는지 동네 안팎의 감나무에 붉은 물감이 짙어지고, 마른 잎이 앞다투어 산들바람 따라 지상으로 하강한다. 엊그제 뒤뜰에 있는 감나무에 달린 홍시를 따러 나섰다가 감나무처럼 늙은 뒷집 할머니와 마주친다. 요즘 귀가 어둡고 눈이 침침하여 심사가 아주 고단한 얼굴이다. 평소 활달하고 성미도 괄괄한 분인데, 말수도 줄고 활동량도 많이 적어진 듯하다. 생로병사의 하나인 노화를 할머니 역시 피하지 못하는 지경이다. 2045년까지 버틴다면 특이점과 대면할 수 있다는데!…. 청도(淸道)를 뒤덮고 있는 다수의 감나무는 쟁반을 닮았다는 이른바 반시(盤67FF)지만, 우리 집 감나무는 종자가 다르다. 탱글탱글하고 미끈한 생김새가 둥글넓적한 반시와는 전연 닮지 않았다. 그래선지 맛도 상당히 다르다. 반시는 달긴 하지만, 깊이가 얕은 달착지근한 맛이다. 하지만 우리 감나무는 맛의 끈기와 깊이가 반시와 천양지차(天壤之差)로 다르다. 이사 온 첫해 가을 나는 처음으로 감을 제대로 먹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잘 익은 홍시를 아무리 많이 보아도 한 번도 먹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터였다. 하지만 울안에 감나무가 있고 보니 환경 때문에 감을 먹게 되었고, 급기야 감을 깎아서 말리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언젠가는 1500개 정도의 곶감을 마련한 일도 있었다. 거의 일주일 내내 감을 따서 마루로 옮기고, 등 뒤로 햇볕을 맞으며 온종일 감을 깎고, 베란다에 내걸고 하는 중노동을 솔선했으니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노릇이었다. 손 통증으로 병원에 가야 하는 불상사가 생겼지만, 그 뒤부터 나는 감 전도사가 되었다. 그것이 홍시든 반시든 단감이든 말랭이든 곶감이든 간에 감을 예찬하기 시작한 것이다. 농약을 치지 않고, 거름도 주지 않기에 울안의 늙은 감나무의 수확은 해마다 줄어들었다. 탄저(炭疽)가 달려들거나, 가을장마가 들라치면 수확 자체가 아예 없는 해도 있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100여 알의 굵은 열매가 달렸기로, 올해는 오랜만에 곶감을 만들 수 있겠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누군가 감을 몽땅 훔쳐 가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담장도 없는 촌집에서 주인이 출타 중임을 확인하고 단박에 감서리를 감행한 것이었다. 허탈한 기분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런데 올해는 감이 제법 많이 달린 데다가 병충해도 많지 않다. 상강도 지났으니, 일단 감을 깎아보리라 작심한다. 줄기를 잡아채는 감 따개로 오랜만에 흐뭇한 수확을 하고, 마루에 퍼질러 앉아 감을 깎기 시작한다. 염치없는 모기가 덤벼들어 피를 요구하고, 눈치 없는 파리가 잘 깎은 감에 올라앉아 주인행세를 한다. 저쪽에선 초록색의 사마귀가 위풍당당하게 갈지자걸음이요, 공중에선 노랑나비가 비행 솜씨를 한껏 자랑한다. 푸른 하늘 높이 비행기의 날개 은색으로 빛난다. 가을이 깊어간다!

2024-10-27

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 대구

우정구 논설위원 유네스코는 2004년부터 문학, 음악, 민속공예, 디자인, 영화, 미디어, 음식 등 7개 분야에서 뛰어난 창의성으로 인류문화 발전에 기여한 도시를 유네스코 지정 창의도시 네트워크에 가입시키고 있다. 국내서는 서울(디자인), 부산(영화), 전주(미식) 등 7개 도시가 가입돼 있다. 대구는 음악 창의도시로 2017년 가입했다. 대구가 음악 창의도시로 지정된 배경은 대구가 보유하고 있는 음악적 역사성과 자산의 우수성 때문이다. 대구는 날뫼북춤과 고산농악과 같은 전통음악이 잘 보존돼 내려오고 있고 근대음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피아노가 낙동강 사문진을 통해 대구에 처음 들어온 역사적 배경이 있다.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작곡가 현제명과 박태준이 이곳을 무대로 활동했다. 1946년에는 클래식 음악 감상실인 녹향이 이곳에서 문을 열었고 또 6·25 전쟁으로 혼란한 시기에는 전국의 많은 예술인들이 대구로 피난 와 창작활동을 벌인 역사가 있다. 지금도 대구에서는 오페라축제와 뮤지컬 페스티벌이 매년 열리는 등 오페라의 도시, 뮤지컬의 도시로서 국제적 명성을 착실히 쌓아가고 있다. 대구 명소 중 하나로 손꼽히는 수성못에 이색 수상 공연장이 조성될 예정이라 한다. 대구시가 추진하는 수상 공연장은 수성못을 배경으로 이색적이고 특별한 모습으로 지어질 예정이라는데, 객석 1200석 규모로 오페라와 클래식 등 다양한 유형의 공연도 가능하다고 한다. 독특하고 스페셜한 명품 공연장이 수성못에 들어선다면 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의 위상에도 잘 맞을 것 같아 기대감이 크다. 음악 창의도시 대구시민의 자부심도 덩달아 높아질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0-27

사실과 소설, 그리고 진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사실(fact)이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나 현재 진행 중인 일을 말한다. 객관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현상이나 사건으로 논쟁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항상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편향된 저널리즘이 그렇듯, 부분적으로는 사실일지라도 순서나 빈도수, 취사선택 등에 따라서 얼마든지 왜곡이나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허구(fiction)라고 한다. 사실이 아닌,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란 뜻이다. 사실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도 캐릭터들의 구체적인 언행이나 사건의 디테일 등은 작가가 상상으로 꾸며낸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 가진 진실을 보다 절실하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실체적 진실에 배치되는 이야기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해서 한국문학의 체면을 살렸다. 세계 10위권의 국력과 문화·전통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여태껏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적잖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노벨문학상은 문학을 통해서 정치·사회·문화적 문제를 조명하거나 인간의 보편적 진실을 탐구한 점과 특정지역에 국한되지 않은 세계적인 공감을 얻거나 영향을 미친 성과 등을 감안해서 주어지는 상이라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도 노벨상 수상에 손색이 없는 문학인들을 여럿 꼽을 수 있다. 다만 그동안은 국력이 약한데다 언어적 한계 때문에 세계적인 공감을 얻을 통로가 제한되어 있었다. 한강이란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기뻐할 일이지만, 그의 작품세계나 언행에 대해서는 유감을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역사적인 사건을 보는 시각이 다분히 편향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민족의 최대 비극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이은 분단과 6·25전쟁이다. 동족상잔으로 수백만의 희생자를 낸 6·25전쟁은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이 일으킨 참극이었다. 그것을 남의 대리전이라고 하는 것은 민족 살상의 원흉인 김일성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제주도 4·3사건이나 광주 5·18사태를 소재로 한 소설도 이념적인 편향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작가가 목격을 했거나 검증이 되지 않은 유언비어성 소문들을 집중 부각해서 증오와 적개심을 극대화하는 식의 표현은 소설적 픽션을 넘어 사실과 진실의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제주도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의 반정부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참사였고, 광주 5·18사태도 무장시위대와 진압군의 대치에서 벌어진 비극이었지 양민을 무차별 살육했다는 건 진실이 아니다. 노벨상 수상 작가의 작품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것은 좋지만, 그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반쪽이나마 나라를 지켜내고, 한강의 기적을 이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대한민국이 걸핏하면 양민이나 학살하는 야만적인 나라로 인식될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기아와 폭정에 허덕이고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이야말로 민족 최대 비극의 현주소다. 올바른 역사관과 인간애를 가진 작가라면 무엇보다 우선 그것에 남다른 관심과 아픔을 가져야 할 것이다.

2024-10-24

금배추 금상추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한 차례 가을비가 세찬 바람과 함께 다녀갔다. 기온은 뚝 떨어져 겨울의 기운을 불러오고 온 들판엔 첫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의 절기가 되니 낮과 밤의 온도 차가 크게 벌어지고 동식물들은 서서히 겨울잠 준비를 하는데 우리도 집집마다 겨우내 먹을 갖가지 김장을 담글 준비를 해야겠다. 그런데 올해는 채소값이 폭등하여 농림수산품 물가지수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밥상에서 신선한 맛을 풍겨주는 상추는 삼겹살 가격보다 높다고 하니 채소작황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최근 한국은행에서 발표한 생산자 물가지수는 14개월 연속 상승 중이며 농축산물은 5~9% 선이고 그중에서 배추 시금치 상추 등 채소는 전월 대비 60~80% 가까이 상승할 것으로 예측되어 시민들의 장바구니가 불안해진다. 이는 지난 여름의 긴 폭염과 폭우로 인하여 엽채류(葉菜類)가 피해를 많이 입은 탓이고 가뭄과 병충해 확산의 영향도 클 것으로 보여 중장기 측면의 신선식품 수급 방안이 필요하다. 배추는 생육 적정온도가 섭씨18~20도인데 고랭지 채소의 생산량 감소와 재배면적 감소로 배추 한 포기 값이 김장철을 앞두고 1만원 이상으로 급증하여 금(金) 배추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생육 여건이 양호해지고 정부의 비축 및 공급 확대 등으로 가격이 안정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채소값 폭등의 이유는 기후변화로 인한 농업생산의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소비 형태와 유통구조의 변화에도 관련 있고 농촌인구 고령화로 인력 부족도 한몫한다는 것이다. 정부도 곡물과 채소 재배에 대한 지원을 하는 등 농산물 가격 안정에 힘쓰겠다고 한다. 나는 싱싱한 채소를 쌈을 사서 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시골집 텃밭에 상추와 배추, 쑥갓, 고추 등을 조금 심어 틈만 나면 뜯어와서 알싸한 쌈장에 찍어 먹으며 자연의 맛을 즐긴다. 올해는 더위와 가뭄 탓인지 마음껏 먹지도 못하고 뽑아버린 탓에 마트에서 구입하여 먹는데, 작은 비닐 포장의 상추 2천 원짜리를 사서 재미 삼아 세어보니 싱싱한 잎이 15장 정도, 1장에 백원이 넘는 꼴이다. 또 심지도 않은 들깨가 수돗가에 무성하게 자라서 눈 건강에 좋은 비타민 A가 많고 뼈에 좋은 칼슘이 많다기에 한 주먹씩 잎을 따다 먹었는데 싱싱하지도 않고 벌레가 먹은 듯하여 모두 뽑아버리고 2천원짜리 한 묶음을 사서 보니 깨끗하게 씻은 손바닥만한 깻잎이 40장, 그러니까 한 잎에 50원이다. 생각해 보니 무릎 높이의 들깨 1포기에 동전 20개 정도가 열려있었구나. 주렁주렁 달렸던 청양고추도 100원짜리 동전인 셈이었네…. 요즘 어느 국수 파는 집에는 깻잎찜을 당분간 얹어주지 못한다 하고, 토마토 공급이 반 정도 줄어들어 맥도날드 햄버그에는 토마토를 빼고 무료 음료 쿠폰을 준다고 한다. 여기에 올가을 배추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니 ‘김포족’-김치 담는 것을 포기한 가족이 늘어날 것 같고 어느 마트에서는 ‘1인 하루 1통’으로 한정 판매한다고 하니 채소 대란이 오는 것은 아닌지…. 이제 베란다에도 취미 삼아 손바닥만한 작은 텃밭을 만들어 알뜰하게 채소를 가꾸어 금배추 금상추를 뜯어 먹으려는 도시인의 꿈도 늘어나겠다.

2024-10-24

지방 홀대

우정구 논설위원 매년 국정감사 때가 되면 지방 홀대 문제는 주요 이슈의 하나로 등장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최근 5년간 17개 광역시도에서 집행된 RD 예산은 수도권이 34.7%다. 연구단지가 있는 대전을 포함하면 62.4%다. 대구 2.9%, 경북 3.4%였고, 비수도권에서 10%가 넘는 곳은 없다.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국회교통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서 진행 중이거나 예정인 1조원 이상 규모 신도시 조성사업은 53군데로 사업비만 214조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수도권 사업이 41개, 182조원이다. 비수도권은 12개 사업 32조원에 그쳤다. 국정감사에 지방 홀대 정책이 매년 문제로 제기되고 있지만 개선된 적은 거의 없다. 과거의 어느 정부든 국토균형발전을 주요 시책으로 삼지 않은 적은 없으나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는 오히려 더 커졌다. 인구분포만 보더라도 그렇다. 1960년대 우리나라 인구의 20%에 불과하던 수도권 인구가 지금은 절반을 넘었다. 국토면적의 겨우 12%인 수도권에 인구가 쏠리면서 이곳은 주택난, 교통난 등 도시화에 따른 문제로 몸살을 앓는다. 이런 문제가 왜 생겼는지 국회가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매번 국감 때마다 지방 홀대 정책을 비판하고 꾸짖고 있으나 말뿐이다. 우리나라 시군구의 46%가 30년 내 사라지고 그중 92%가 비수도권에서 이뤄질 것이란 보고가 새삼 충격으로 다가온다. 지방 홀대가 여전한 줄 알면서도 매번 반복하고 생색만 내는 국회 국감이 올해도 이렇게 막을 내린다고 생각하니 답답할 뿐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0-24

교통 SOC 확충은 지방 생존의 문제

임종득 국회의원(국민의힘, 영주·영양·봉화) 지난 20대 대선 이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경북지역 15대 정책과제를 설정했다. 국가 新발전전략 SOC망을 확충하고, 20년 넘게 멈추어 있던 ‘남북9축 고속도로 건설사업’을 반영했다. 인구소멸 위기에 처한 경북 북부지역과 강원 남부에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별다른 진척이 없다. 비수도권 지역 대부분이 인구소멸 위기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열악한 교통망 개선 사업을 통한 국토균형발전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통과하지 못해 답보 상태에 빠져있는 프로젝트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비수도권의 경우 예타를 조건으로 내걸면 계속해서 후순위로 밀릴 수 밖에 없다. 철도, 도로 등 교통 기간시설은 공급이 수요를 견인하는 특성이 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이 계획되던 당시, 강남 구간은 개발되지 않은 논밭이었다. 개통 초기에는 당연히 수요부족에 시달렸지만, 2호선 역 주변 개발이 진행되며 수요가 증가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기반이 된 경부고속도로 건설 역시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혔는가. 지금의 예비타당성조사를 그때도 적용했다면, 아마도 경부고속도로는 결코 건설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구가 적고 경제가 활성화되지 못한 지역은 현실적으로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하기 힘들다. 사회자본 유입이 어려우면 인프라 부족으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이 지역을 떠나게 되고, 그래서 배후인구가 줄어들면 또 그만큼 예타 통과는 더욱 힘들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지금 국회에는 특정 SOC 건설에서 예타를 면제하자는 특별법이 여러 개 발의되어 있다. 법안이 통과된다면 수많은 재정 소요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에 재정 당국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법을 비판하기 전에 왜 이런 특별법이 나오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SOC 특별법안은 비수도권 지역이 생존을 위해 울부짖는 소리다. 저출산 고령화 가속화로 지방거주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마당이라 현재 예타 제도에서 평가하는 B/C값 중 B가 늘어나는 일은 갈수록 요원해질 것이다. 특히 철도나 고속도로는 초창기부터 막대한 돈을 들여야 하는 사업이라 애초에 B/C값을 높게 받기 어렵다. 하지만 B/C 0.11이었으나 지금은 연간 500만명이 이용하는 KTX 강릉선, B/C 0.39였으나 현재는 역사(驛舍)증축까지 하고 있는 호남고속철도, 양양을 중심으로 동해안 관광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서울-양양고속도로 등 경제성 평가만으로는 시작될 수 없었던 사업들이 많다. 예비타당성조사 제도가 도입되던 1999년과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수도권 집중화, 양극화는 더 극심해졌고 지방소멸 극복은 국가적 과제가 되어 있다. 지방의 교통 SOC 만큼은 지역이 직면한 현실을 고려해야만 하고, 스스로 발전 의지를 가지고 비전을 제시하는 지역은 정부와 정치권에서 힘을 실어줘야 한다. ‘남북9축 고속도로 건설사업’과 관련해 영천~양구 10개 지방자치단체장이 협의회를 구성했고, 1만5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국토교통부에 전달했다. 관련 부처는 애타게 부르짖는 지역주민들의 간절한 바람을 더이상 외면하지 말았으면 한다.

2024-10-24

나의 삼국유사와 선덕여왕릉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대학원에 다닐 때였으니까 45년 전, 1979년이다. 햇수를 꼽아보니 아득한 세월이다. 한문원전강독 교재가 삼국유사였다. 삼국유사(5권 9편)에는 짧거나 긴 139개의 이야기가 있다. 5명의 학생이 매 주 두 명씩 돌아가면서 원문을 해석해서 읽고 발표하는 식의 수업이었는데 한 사람 당 4~5개 정도의 기사를 선택했는데 나는 주로 여성이 주인공인 기사들을 골랐다. 그 중 하나인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機三事)’는 당에서 보낸 모란꽃씨가 향기가 없으리라는 것, 영묘사의 개구리 우는 것으로 백제군의 침입을 알아차린 일,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낭산 남쪽 도리천에 묻으라는 이 세 가지 얘기로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을 찬탄하는 이야기이다. 선덕여왕과의 첫 인연이었다. 한 학기 수업이 끝날 즈음, 삼국유사를 들고 경주 가서 그 현장을 찾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으나 그때뿐, 삼국유사는 잊혀졌다. 표지가 너덜거리는 낡은 책은 서가 한구석에 틀어박혔다. 석사 후 바로 결혼했고, 몇 년 늦게 박사과정을 했다. 육아와 집안일에 출강에 박사과정은 무척 벅찼다. 박사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자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쳤다. 그저 ‘먹고 자고’가 소망일뿐이었다. 논문 쓰느라 소홀했던 아이들에게 온전히 나를 쏟기로 했으나 무위도식했던 나날이었다. 무료하게 방바닥을 뒹굴던 어느 날 책장 속 낡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삼국유사였다. 벌떡 일어나 책을 꺼내드니 깨알같이 주석을 달아놓은 부분이 펼쳐졌다. 동시에 그 옛날 꿈꾸었던 욕망이 떠올랐다. 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네…. 대강 옷 걸쳐입고 그 낡은 책 하나만 달랑 들고 차에 시동 걸어 무작정 경주로 달렸다. 경주에 들어서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대학교 때 답사, 그 후론 온 적이 없었고, 게다가 지금은 혼자다. 막막해서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조수석에 얹혀 같이 온 삼국유사를 펼치니 딱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機三事)’. 그래 여기부터 시작하자. 표지판이 제대로 있었던지 모르겠다. 어찌어찌 사천왕사지 부근까지 갔다. 풀숲을 헤치고 기찻길을 가로 건넜다. 제멋대로 자란 풀이 우거진 조붓한 길옆으로는 키 큰 소나무가 완강히 버티고 있는 무덤들이 으스스했다. 무서움을 이기며 한참을 오르자 저 위 커다랗게 빛나는 왕릉이 보였다. 좁고 컴컴한 소나무숲을 지나서였는지 유난히 밝은 빛이 능 위에 쏟아졌다. 내 기억 속의 선덕여왕릉은 언제나 형광색 연둣빛으로 눈부시다. 선덕여왕릉을 시작으로 2년 넘게 경주에서 삼국유사 현장을 누볐다. 책을 쓰신 일연스님의 걸음걸음에 내 발자국이 닿아서였을까 1996년 경주에 개교하는 위덕대 교수가 되었다. 삼국유사 덕분이라 했더니 남편이 그 낡은 책에 하드양장의 표지를 입혀 삼국유사라고 금박으로 새겨 선물해 주었다. 25년 동안 위덕대에선 ‘경주의 삼국유사 현장기행’ 개발에 매진했다. 선덕여왕을 주제로 한 ‘여왕 코스’를 넣어 숱한 답사객들을 안내했다. 그 옛날 대학원생으로 선덕여왕님을 만났던 내가 지금은 선덕여왕경모회장이 되어 능제를 모시는 초헌관으로 뵙는다. 오는 10월 27일, 17번째 선덕여왕릉제의례가 선덕여왕릉에서 거행된다.

2024-10-23

천장관절의 구조와 허리통증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천장관절은 천골과 장골이 닿는 부분으로 우리가 흔히 골반이 아프다고 표현을 하면 천장관절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위치상으로 봐도 허리뼈 5번 부근이라서 통증이 심한 경우는 디스크로 오인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디스크가 원인인 경우일 수도 있으나 MRI상 디스크가 조금 보인다고 전부 디스크 원인성 요통은 아니다. 영상장비의 발달이 일부 환자에겐 오히려 독이 되는 케이스로 허리 통증의 원인은 다각도로 판단하여 치료를 하는 것이 환자에게 좀 더 유리하다. 허리와 골반은 엄청나게 많은 인대들과 뼈가 얼기설기 엮여 있고 허리뼈에서부터 나온 신경이 다양하게 분지하면서 이곳저곳을 지나간다. 그곳을 다시 근육이 덮는데 이런 복잡한 구조에서 발생하는 통증을 단지 영상 진단에서 약한 디스크진단이 나왔다고 모든 통증을 디스크 원인성으로 판단하기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최근 미국에선 허리통증의 30% 가량이 천장관절이 원인이라는 논문이 다량 발표 되고 있는 것만 봐도 허리 통증을 단순히 디스크가 원인이라고 보긴 쉽지 않다. 무리 몸을 뼈로만 봤을 때는 머리뼈와 이를 받쳐주는 목뼈 그리고 흉추를 지나 허리뼈와 천골로 오게 되고 말단인 허리뼈와 천골을 지지하는 구조가 흔히 골반이라고 한다. 허리뼈와 골반뼈를 붙여서 지지하는 곳이 허리뼈 밑의 천골과 장골이다, 천골과 장골은 두 뼈만으로는 절대 인체를 지지할 수 없는 구조다. 이 부분을 붙여 놓기 위해 인체는 아주 많은 인대들로 결합시켜 놓았고 이 천장관절의 인대로 인한 결합은 인체에서 가장 강력한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강한 천장관절의 인대 자체의 손상은 거의 없다고 보고 만약 손상이 생긴다면 치료도 어렵다고 본다. 실제로 천장관절의 인대는 직접적인 심한 타박으로 손상이 생기지 않으면 심한 손상은 없다고 보면 되지만 부분적으로 약한 손상은 항시 발생하고 이렇게 되면 허리를 지지하는 힘이 약해져 허리의 통증이 발생한다. 약해진 천장관절의 문제는 30대 이후엔 대부분 아픈 쪽의 장골이 후방 회전을 하게 되면서 통증을 유발하는데 이때 앉아 있는 자세는 장골을 후방회전 시키기 때문에 좋지 않은 자세가 된다. 치료는 천장관절인대 부분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틀어진 허리뼈와 신경뿌리가 나오는 곳 그리고 후관절의 협착이 있는 부위 등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허리와 골반의 구조는 아주 복잡하기 때문에 보자마자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환자의 나이와 통증의 양상 등을 따져서 치료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치료를 하게 된다. 치료를 해 나가면서 마무리가 되지 않는 통증들은 그동안 하지 않았던 구조물을 치료를 하게 되면 대부분은 좋아진다. 천장관절을 튼튼히 하기 위해선 앉아 있을 때는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닌 정자세를 취해 주어야 하고 서 있을 때도 장골이 전방회전 될 수 있게 허리에 힘을 주고 척추를 세운 후 턱을 당긴다. 바른 자세로 걷는 연습을 하고 이게 힘들다 싶으면 관련 근육들을 강화하는 운동을 해주는 것이 좋다.

2024-10-23

갑과 을은 가짜가 아닌가

장규열 고문 누가 갑(甲)이고 누가 을(乙)인가.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만들어 갈 때, 우리에게는 늘 만나는 과제가 있다. 업무적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의 관계를 규정할 때는 특별히 그렇다. 갑의 위치에 서면 늘 앞자리에서 명령하고 주장한다. 을로 판명된 이는 늘 뒷자리에서 끌려다니면서 복종한다. 업무의 우선순위나 전문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갑과 을의 관계에 따라 모든 업무의 흐름이 결정된다. 갑을관계는 대개 조직 내외에서 직위, 연령, 경력, 사회적 지위 등에 따라 형성되며,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여겨진다. 갑을로 표현되는 위계 중심의 관계는 전문성과 성실성보다 직위나 명목상의 위치를 우선시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자아낸다. 업무의 전문성보다 갑을관계가 우선시되는 조직에서는 의사결정의 흐름이 비효율적일 수 있다. 갑의 지시나 요구는 을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할 때가 많아 비판적 사고와 업무적 창의성을 억압한다. 을의 입장에서 전문적인 판단이나 실질적인 지식이 있더라도 갑의 의견에 반대하기가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된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질 높은 논의와 폭넓은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어 비합리적인 결정을 초래할 가능성이 생긴다. 갑을관계에 의존하는 업무 문화는 개인의 역량과 전문성을 무시하고 오직 외형적인 권력관계만을 우선시한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주며 각자의 성과가 적절히 평가되지 못하는 문제를 낳는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판단보다 직위나 명령에 의해 일이 진행되는 경우 결과적으로 회사나 조직 전체의 경쟁력을 저하시키게 된다. 직위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갑의 입장만 존중받는다면 을의 실질적 경험이나 전문적 소견은 무시되기 쉽다. 갑을관계는 조직의 안과 밖에서 스트레스를 증대시키고, 건강한 협력문화를 저해한다. 을의 위치에 서면 상급자의 권위에 의해 자신들의 의견이 쉽게 무시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건강한 소통과 발전적인 표현의 단절을 가져온다. 서로 존중하기보다 상하관계에서 오는 불균형적인 교류가 일상화되면 조직 내에서 갈등과 긴장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업무의 성격이 위계질서에 의해서만 규정될 때 조직에서 성과와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갑만 언제나 의사결정의 중심에 있다면 공정한 성과 평가나 승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업무적 능력과 실질적 성과보다 갑의 눈에 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문화에서 성실하고 유능한 구성원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된다. 조직 내에서 진정한 리더십의 부재를 초래하고, 구성원들 사이에서 불신과 불만이 커지게 된다. 관습적인 갑을관계에 의존하는 우리의 전통적 업무문화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비즈니스 환경이 더욱 복잡해지고 전문화되어 가면서 신속하고 유연한 의사결정이 요구된다. 탄탄한 업무역량과 든든한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는 수평적 관계가 요청된다. 성실성과 전문성에 기반한 업무환경은 건강한 업무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직 전체의 성과와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게 한다. 전근대적인 갑을문화를 극복하고 젊고 싱싱한 조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2024-10-23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클럽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영국을 포함한 유럽에서 축구의 인기는 재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사실 축구와 유명 축구선수는 유럽만이 아닌 남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도 사람들 열광의 대상이란 게 주지의 사실.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영국 사람들은 축구를 즐기고, 팀을 만들어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지금으로부터 167년 전인 1857년 10월 24일. 잉글랜드에선 아마추어 축구클럽 ‘셰필드 FC’가 만들어진다. 단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클럽’이다. 셰필드 FC가 창단된 해에 우리나라는 조선의 왕 철종이 다스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영국에선 축구클럽이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까지 축구팀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셰필드 FC는 국제 축구연맹 창립 100주년이던 2004년 FIFA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클럽 부문에서 훈장을 받은 건 레알 마드리드와 그 팀이 전부였다. ‘지구 위 최고(最古) 축구클럽’이란 상징성을 외부에서도 인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창단 후 독립적 활동을 이어가던 셰필드 FC는 셰필드 지역 리그, 요크셔 리그를 거쳐 1982년 노던 카운티 이스트 리그에 편입돼 잉글랜드 축구 리그 내부로 들어간 역사가 있다. 성적은 기대만큼 좋지 못했다. 하지만, 팀에 대한 지역민의 사랑과 관심은 어떤 명문 축구클럽 못지않다고 한다. 팬들의 애정을 얻지 못하는 축구팀은 그 존립을 위협받는다. 감독 선임에 얽힌 불협화음으로 한국 축구와 국가대표 축구팀이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 최근 상황이 위태로워 보인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셰필드 FC처럼 167년 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개선책이 시급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10-23

어두워질 때

배문경 수필가 단조로운 하루다. 밤을 견딘 그들의 하루가 시작되면 어제와 같은 오늘, 큰 변화 없는 하루가 이어진다. 아침에 출근하면, 한 톤 올려 인사를 하고 혈압 맥박 체온을 재며 활력 징후를 확인한다. 식사를 위해 그들은 식당으로 이동한다. 걸어오거나 휠체어를 타거나 침상에 누운 어르신도 있고, 워커바를 밀고 오는 이도 있다. 걷는 것 하나로 삶의 질이 달라진다. 식사가 오면 요양보호사들이 배식을 돕는다. 식사 후 약 드시는 것을 챙기는 것은 내 임무다. 식후 하루 세 번. 아프면 병원에 모시고 가고 다치면 연고를 바르고 드레싱을 해주며 불편한 부분을 살피며 타온 약을 드시게 하는 모든 일이 내 일과이다. 절반은 휠체어가 있어야 이동하고, 걸어도 건강한 걸음은 소수이다. 무엇엔가 의지하고 걷거나 그마저도 못 해 누운 채 하루가 가고 새날이 오기도 한다. 물리치료사와 재활치료를 하기도 하고, 일주일 두세 번 오락으로 즐겁게 해주는 분들이 와서 활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노래하고 악기로 재밌게 멈춰있던 그들의 공간에 시간의 흐름을 만든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 정해진 시간에 제공되는 식사, 반복되는 요양보호사의 발걸음. 그 속에서 노인들은 깊은 침묵과 마주하며, 시끄러운 음악과 큰 율동으로 즐거움을 주고자 애를 쓰는 그들을 통해 신나게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한다. 요양원은 어쩌면 죽음에 가까이 다가선 이들이 머무는 마지막 정거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살아있는 시간이 있다. 노인들은 그 시간 속에서 추억을 떠올리고, 남은 인생을 잃어버리지 않길 기도한다. 그나마 기억창고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좋으련만 입원환자의 90%가 치매다. 삶이란 고통과 기쁨이 엮인 직조물 같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고, 기쁨 속에서도 삶의 무게를 느낀다던 톨스토이의 말이 떠오르는 공간이다. 요양원의 노인들은 그 직조물의 한 가닥을 마무리 중이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작은 기쁨을 찾고 병마로 인해 몸은 쇠약해지고, 아픈 기억들이 종종 그들을 찾아오지만, 그 속에서도 그들은 아직 살아 있음을 느낀다. 통증 속에서라도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가족의 방문이거나 삶이 끝날 때 찾아오는 평온일 수도 있다. 요양원의 한구석, 작은 창가에 앉아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음미하며, 소리 없는 기도를 드린다. 그녀의 기도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며 남은 가족을 위해, 그리고 이제 곧 만나게 될 형제들을 위한 기도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고요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와 감정이 깃들어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모든 생명은 끝을 맞이하지만, 그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불경 구절이 생각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노인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어쩌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다가오는 끝을 받아들이며, 남은 시간을 차분히 준비한다. 삶의 끝은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며 그들에게 죽음은 하나의 전환점이며, 다음 세계로 향하는 문이기도 하다. 요양원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창문을 바라보며 긴 숨을 내쉰다. 그의 얼굴에는 지난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그 무게는 이제 그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평온함이다. 그는 죽음을 준비하면서도 그 사이사이에 놓인 순간들을 살아간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세상을 향한 작은 빛이 남아 있으며 그 빛은 죽음이 아닌, 지금에 대한 감사다. 지금을 노래하는 마음, 지금을 살라는 말이다. 그것은 요양원에서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노인들에게는 진정한 진리다. 그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를 느끼며, 그 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찾는다. 기도로 남은 인생을 살아간다. 한 할아버지는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조용히 손을 모은다. 그의 기도는 길지 않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기도는 그의 남은 시간을 더욱 값지게 만드는 힘이다. 하루를 마친 그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다.

2024-10-23

경찰관의 수신호에 잘 호응해주시길

나은호 영천署 동부지구대 경위 자동차전용도로를 주행하던 5톤 화물차량 운전석 쪽 앞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자칫 대형 교통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 한 경우가 있었다. 다행히 화물차량 운전자의 현명한 대처로 다른 차량과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고, 사고 차량은 2차선 도로 갓길에 정차하게 되었다. 당시 화물차량 적재함에는 약 4톤 정도의 액체비료가 들어 있는 상태여서 사고 차량 이동을 위해서는 보다 큰 견인 차량이 필요했다. 견인 차량이 사고 현장으로 올 때까지 순찰차를 사고 화물차량과 적당한 거리에 정차시켜 경광등 리프트를 작동하고, 경찰관 2명은 신호봉(경광봉)을 위ㆍ아래로 수신호를 하여 사고지점을 통과하는 후행 차량에 도로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음을 미리 알렸다. 2시간 남짓 수신호를 하는 동안 대부분 차량운전자는 경찰관의 수신호에 차량 속도를 낮추어 사고 장소를 안전하게 운행하였지만, 일부 차량운전자는 사고지점에 이르러 더 속도를 내어서 사고 장소를 지나치는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분명 신호봉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감속 지시를 하는 경찰관을 충분히 보았을 것이다. 한편, 주취자가 주택가 이면도로 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신고를 접수하고 현장에 가서 마침 그곳을 지나는 차량 운전자에게 다른 길로 갈 것을 안내하니 ‘돌아가면 길이 멀다’며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주취자 보호조치는 인적사항, 주거지, 다친 곳이 있는지, 단순히 주취로 인하여 넘어진 것인지 등을 조사하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려서 다른 길로 갈 것을 당부했지만 요지부동 이었다. 나에게는 당장 불편함이 있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경찰관은 공공의 안녕과 질서 유지 활동을 하므로 경찰관의 수신호에 주의를 기울이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수신호에 잘 호응해주기를 기대해본다.

2024-10-22

올해의 혁신상, 글로벌로 통하는 혁신문화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포스코가 제15회 월드스틸어워즈(WSA·World Steel Awards)에서 ‘올해의 혁신상’, ‘교육과 훈련’, ‘커뮤니케이션프로그램’ 등 3개 부문 수상자가 됐다. 금년 10월, 세계철강협회는 저탄소철강생산, 지속가능성, 전 과정 평가 등 포함 6개 부문으로 나누어 벨기에 브뤼셀에서 시상식이 진행됐다. ‘교육 훈련’ 부문에서‘QSS(Quick Six Sigma) 트레이닝 프로그램이 인정 받았다. 신입사원에서 경영진까지 모든 사원을 대상으로 비능률, 설비, 품질 등의 주제를 다루며, 생산성과 근무 환경의 문제를 찾아 개선할 수 있는 방식을 배운다. 학습 모듈은 철강 생산프로세스의 낭비 제거를 위해 낭비발굴능력과 개선 능력향상을 통한 생산성, 경쟁력 확보가 가능하여 세계철강협회 다른 회원사들도 적용할 수 있는 점이 높이 평가 되었다. 불황에도 흑자를 내는 기업 일본 토요타자동차의 생산방식이 전세계에 통하여 지금도 TPS(Toyota Production System)가 벤치마킹 대상이 되는 것처럼, 포스코의 QSS(제조현장 낭비제거)활동도 전 세계 철강사는 물론 일반 제조업에도 혁신 방법으로 적용할 수 있다. 국내 철강, 건설, 에너지 등에 적용하여 성공한 기업들이 많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세계철강협회가 인증 했듯이, 토요타자동차 생산방식에 웨이를 붙이는 것처럼 포스코 혁신도 웨이를 붙일 수 있도록 노력 할 필요가 있다. 생산 프로세스의 낭비를 발굴하고 개선하는 것이 일상화 되고 습관을 넘어 체질화 되어 일상 개선이 문화가 되는 것이 포스코웨이로 가는 길이다. 경영자의 비전 제시와 현재의 모습과 차이를 경영 목표로 세우고 전략과 전술로 비전이 실현되는 기업을 문화로 가는 혁신이라 할 수 있다. 문화 혁신은 조직 내 기존의 가치, 행동 방식, 규범, 관습 등을 개선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문화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기업의 성과와 지속 가능한 성장을 지원하며, 직원들의 동기부여, 창의성, 협력 등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업 혁신 문화로 가기 위해서는 첫째, 리더의 강력한 의지다. 변화는 리더십에서 시작되며, 경영진이 먼저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고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둘째, 명확한 비전이다. 조직 전체가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변화의 비전이 필요하다. 변화가 왜 필요한지 어떤 목표를 달성할 것인지 명확히 해야한다. 셋째, 구성원의 참여다. 직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동의가 필수다. 변화는 위에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넷째,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혼란을 최소화하고 구성원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개방적이고 투명한 소통이 필요하다. 다섯째, 인센티브시스템이다. 변화된 문화를 실현하는 직원들에게 적절한 보상과 인센티브를 제공해 동기부여 해야 한다. 조직 내 모든 구성원이 변화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리더의 의지와 체계적인 운영, 지속적으로 진화될 때 문화혁신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2024-10-22

감빛 회상에 젖어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모처럼 여유로운 휴일 오후, 한가로이 고무신을 끌며 뒤뜰과 텃밭 주변을 거닐다가 문득 들려오고 눈길 가는 곳을 응시하게 됐다. 새들의 밀어 같은 재잘거림이 사방에서 들리고, 아직은 푸릇한 감나무 잎새 사이로 조금씩 익어가는 주홍빛 감이 보일 듯 말 듯한 곳에서 몇 마리의 새들이 포르릉 날갯짓하다가 나뭇가지에 앉아서 홍시가 된 감들을 쪼아대고 있었다. 수년 전부터 그렇게 찾아온 새들이 올해도 용케 찾아와서 먹이활동을 하고 있으니, 반갑기도 하고 기특하게만(?) 여겨졌다. 넌지시 그러한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폰카메라에 담기도 하는 등 내심 회상에 젖어 들기도 했었다. 새들이 날아들며 감홍시를 쪼아대고 들판에서 모이를 찾는 걸 보니 정녕 가을이 깊어 가는가 보다. 불과 한 달 전쯤만 해도 청청하기만 하던 산야의 초목이 누렇게 바래고 들판에서는 황금물결이 일렁이니, 농사력(農事曆)으로는 이 시기에 추수를 마무리하고 겨울맞이를 준비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즉, 단풍이 절정에 이르고 국화도 활짝 피는 늦가을로 접어들어, 낮으로는 가을의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지만 밤의 기온이 낮아져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 무렵이다. 유년시절의 가을은 언제나 감나무에서 시작됐던 것 같다. 고향집과 불과 50여미터 떨어진 할아버지 집 뒤로는 아름드리 감나무 10여 그루가 키재기 하듯 우람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불그스레하게 감나무 잎이 물들어 떨어지면 뒤란에 수북하게 쌓여서 마치 ‘낙엽 이불’처럼 푹신하고 매끄럽기도 했었다. 땔감이 넉넉하지 않으면 감잎을 쓸어 모아 불쏘시개로 쓰기도 하고, 부러진 감나무 가지는 한데 모아 쇠죽을 끓일 때 지피기도 했었다. 그리고 감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따는 일은 거의 다 필자가 도맡아 했었는데, 10여미터 감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마을 풍경을 내려다보며 거의 새들만 쪼아먹던 말랑말랑한 주홍빛 홍시를 통째로 입에 삼키는 그 맛은 그 어디에도 비길 수 없었던 것 같다. ‘별처럼 뜬 감꽃이 뒤란에 떨어지면/실에 꿴 감꽃 목걸이 걸고 으쓱이며 들썩이다/어느새 배고파지면 입에 넣던 꽃잎들//암록(暗綠)의 잎새 바람 간간이 불어와도/감꽃은 푸르탱탱 땡감으로 자라나/떫어도 움켜잡으며 비바람을 견뎠지//청록의 감잎들의 불그스레 수런대고/하늘빛 닮아가며 별빛 꿈을 꾸다가/마침내 가지마다 켜지는 주홍빛 선물인가’ ㅡ拙시조 ‘감빛 서정’ 전문 모든 것이 서툴고 어설퍼 야단 맞고 초조해하며 떨떠름하던 땡감 같은 시절이 지나면, 비바람 모진 서리 맞으며 잉태해온 주홍빛 속살이 말랑해져서 연시가 되거나 더욱 단단해져서 건시(곶감)가 되어 특유의 단맛과 빛깔을 띄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땡감마냥 푸르탱탱한 패기와 의욕으로 청년시절을 보내고, 하나씩 털고 버릴 것은 거두고 내면을 채워 숙성의 농밀함으로 익어가는 중장년의 여울에서 감빛 마냥 은은하게 빛나며 먼 하늘을 응시하지 않을까 싶다. 연신 홍시를 쪼아대며 사이좋게 나눠 먹는 새들이 정겹기만 하다.

2024-10-22

포항수소제철소 내년 착공, ‘주민동의’가 관건

심충택 논설위원 지난주 최상목 경제부총리 일행이 포항 포스코 본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향후 포스코그룹의 포항지역 투자규모, 그리고 수소환원제철 프로젝트에 대한 정부지원 내용이 공개됐다. 포항시민들로선 수소환원제철소 건설과 관련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포스코는 이날 포항지역 주력산업인 철강과 이차전지 계열사에 대한 투자내용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2030년까지 철강 산업(수소환원제철 기술개발 등)에 29조원, 이차전지·수소 분야(포항 양극재 생산설비 증설 등)에 28조원, 인프라 분야(에너지사업 강화 등)에 16조원을 투입하겠다는 내용이다. 향후 5년간 진행될 매머드급 투자규모다. 최 부총리는 이에 대해 “포스코는 신기술을 통해 제철산업을 친환경산업으로 전환하면서 우리나라 산업구조 전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정부 범부처 투자지원체계를 본격 가동하겠다고 약속했다. 포스코로선 향후 국제경쟁력을 높이는데 날개를 단 셈이다. 최 부총리는 이날 포스코의 신기술을 지원하기 위해 녹색국채 발행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녹색국채는 탄소중립 사업에 들어가는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하는 국채이며,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정부는 그동안 제도적으로도 수소환원제철 프로젝트 추진을 지원해왔다. 해상교통안전진단 면제, 환경영향평가 신속 추진, 매립 기본계획 반영절차 신속 추진을 통해 행정절차 기간을 11개월 단축했다. 이로 인해 수소환원제철소 착공 시기가 내년 6월로 앞당겨지게 됐다. 현재 남은 행정절차는 공유수면 매립허가와 산업단지 계획심의뿐이다. 정부는 지난 2월에는 포스코의 독자기술인 수소환원제철 기술(하이렉스)을 국가전략기술로 지정했었다. 하이렉스는 탄소 대신 수소를 환원제로 사용해 철을 제조하는 공법이다. 포스코는 지난 1월 26일 포항제철소에 하이렉스 사업을 총괄하는 ‘수소환원제철 개발센터’를 신설했다. 센터는 수소환원제철 기술을 연구하고, 설비 구축과 시험을 담당한다. 오는 2027년까지 시험설비를 준공한 후 기술 상용화 가능성을 검증할 계획이다. 포스코는 현재 고로 8기(포항 3기, 광양 5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탄소중립을 위해서는 하루빨리 고로를 수소환원제철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금 유럽연합(EU)과 미국 주도로 탄소배출 규제안을 강화하고 있어, 포스코가 고로를 탈피하지 못하면 결국은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수출길이 막히게 된다. 수소환원제철소 건설과 관련해 남은 현안은 부지로 사용될 영일만 공유수면 매립(135만㎡)에 대한 주민동의를 얻는 절차다. 포항지역 사회에서는 현재 세계에서 처음으로 건설되는 수소환원제철소에 대한 기대가 크지만 우려하는 점도 많다. 바다를 매립할 경우 해양환경 생태계가 파괴돼 어민을 비롯한 주민피해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포스코가 마련한 ‘공유수면 매립 주민설명회’도 어민들과 시민단체 등의 반발로 무산된 적이 있었다. 정부와 포스코는 공유수면매립 허가에 앞서 포항지역사회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해법을 찾아나가야 한다.

2024-10-22

불효자 방지법

우정구 논설위원 불효자 방지법이란 부모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이 부양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부모를 상대로 패륜적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재산을 돌려줘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법이다. 2015년 우리 국회에서 처음 발의됐지만 아직까지 법 제정에 이르지 못했다. 싱가포르에서는 경제력이 있는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지 않으면 부모나 국가가 고소할 수 있고, 위반한 자식에게는 징역형과 벌금형을 주는 불효자처벌법이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이와 같은 법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재산 증여와 관련해 로펌을 찾는 부모들 가운데 상당수가 효도계약서 작성을 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효도계약서란 재산을 증여할 때 효도 관련 조항을 문서화하는 것을 뜻한다. 상속에 대한 부모들의 가치관이 달라지면서 나타난 사회 현상이다.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한 뒤 노후에 돌아올 경제적 불안감을 미리 대비하겠다는 의미다. 최근 보건복지부의 2023년 노인실태 조사에 의하면 “재산을 상속하기 보다 재산을 자신과 배우자를 위해 사용하겠다”는 여론이 24.2%가 나왔다. 복지부가 노인실태 조사를 처음 시작한 2008년 같은 질문과 비교할 때 보다 15% 포인트가 더 높아졌다. 상속에 관한 부모세대의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 결과다. 불효자 방지법 제정이 시대 흐름에 따른 대세로 가고 있으나 효와 불효를 법으로 강제하는 것에 반대하는 여론도 없지 않다. 효자의 효(孝)는 노인(老)을 자식(子)이 섬긴다는 뜻을 가진 한자 글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부모 공경의 정신을 견지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도덕적 책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0-22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요즘 나온 것 중 제일 긴 영화

“영원히 네 곁에 있을 거야.” I가 명주의 단발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지만 명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주는 소파 반대편 벽면을 차지한 스크린을 쳐다보며 가만히 누워있었다. I도 명주를 따라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넓고 황량한 땅과 그 땅을 가로지르는 길과 그 길을 걷는 사내가 스크린 속에 있었다. 사내는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길 위에 돌아서 서 있었다. I는 사내가 가야할 길을 가늠하는 것인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명주에게 묻지 않았다. 명주가 DVD방 주인에게 말했다. 요즘 나온 것 중 제일 긴 영화를 틀어주세요. 명주는 앞장서 방으로 들어갔고 I는 그런 명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방에서 나온 명주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DVD방 주인이 음료수와 재떨이를 가져다주고 나가자 명주는 I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대고 좌우로 돌리며 비볐다. I는 모든 상황이 낯설고 당황스러웠으며 명주가 왜 이러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명주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둘은 서로의 숨결을 잡아당겼다 불어 넣었다. 숨결은 체온 그대로를 서로에게 전했고 전해진 체온은 몸과 마음을 덥혔다. I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이 빨아 당겨 담배 끝이 빨갛게, 회색으로 타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명주의 입에 담배를 물리고 새 담배를 꺼내어 다시 불을 붙였다. 영사기에서 나오는 불빛이 연기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사내의 모자와 얼굴만이 흔들리는 연기 사이로 나왔다 들어갔다 반복했다. 사내는 아직 길 위에 서 있었다. 명주는 A 그리고 B와 함께 술을 마시고 오는 길이라 했다. 이것저것 말을 하다 보니 I이야기가 나왔다고. 명주, 네가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해야 해. B가 말했고 A가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그건 맞는 말이야. A가 다시 한 번 강조했고 A와 B는 I를 위해서 그리고 그들 모두를 위해 명주가 마음을 정해야 한다고 명주를 몰아붙였다고 했다. 아니 니들이 왜 그래? 명주가 다시 물었고 A와 B가 우리는 동기니까, 명주 너를 아니까, 하고 대답했다. 지들이 나에 대해,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좀 웃기지 않아? 넌 어떻게 생각해? DVD방에 가기 전 I와 만났던 찻집에서 명주는 A와 B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전하며 I에게 물었다. I는 명주가 동의를 구하는 것인지,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전하는 것인지, 아니면 A와 B가 했던 충고를 받아들여 마음을 정했고 그 마음을 지금 말하겠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너와 나는 아닌 것 같아. 이미 2주 전, I가 명주에게 고백을 한 그날 명주는 I에게 답을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말인 건지,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I는 글쎄, 하고 대답을 했고, 명주는 I의 컵에 담긴 물을 자신의 컵에 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내 말만으론 네가 그 상황을 다 알 수 없겠지. 어두운 찻집 안이었지만 명주는 얼굴이 붉었다. 그런데 나 왜 불렀어? I는 애써 차분한 척 명주에게 물었다. 아니 걔들이 그러니까 살짝 화가 나는 거야. 이상하게. 그런데 걔들한테 화를 내지는 못하겠고. 그냥 니 생각이 나더라고. 우리는 뭘까 싶기도 하고. 명주는 I의 얼굴을 지나쳐 I 뒤로 보이는 창밖을 살피며 대답을 했다. 명주는 자기 입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두 번째 나왔다는 사실을 알까? I는 자신의 얼굴 옆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두고 있는 명주의 눈을 바라보았다. I는 들뜬 마음으로 나왔다. 명주가 먼저 연락을 해왔고, 찻집에서 만나자 했으니까.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너랑 나는 아닌 것 같다, 말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학생 회관 옆 벤치에서 나누었던 입맞춤이, 딱딱거리며 부딪혔던 앞니와 달고 따듯했던 명주의 타액이, 너 처음이구나 하고 웃으며 I의 뺨을 꼬집던 명주의 손이,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던 그날 밤이 I의 구애에 대한 명주의 성의 표시와 I의 객기가 만들어낸 한 차례 우연한 밤이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영화보고 싶어.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놓으며 명주가 말했다. 영화? 지금 시내로 나가자고? I가 물었고 아니 그냥 DVD방에나 가자, 하고 명주가 대답을 했다. 좀 전에 마신 술이 깨버렸어. I, 네가 한 잔하고 싶다면 옆에 앉아 있어주기는 할게. 내가 나오라고 했으니까 그 정도는 해야겠지. 그런데 술이 깨고 나니 머리가 아프네. 어디든 들어가서 쉬고 싶어서 그래. I와 명주는 찻집을 나와 DVD방으로 올라갔다. 카운터 좌우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DVD와 영화 포스터를 번갈아 살피고, 인기 대여순위 1위부터 30위까지 제목을 읽어 내려가던 I 뒤에 서 있던 명주가 주인에게 말했다. “요즘 나온 것 중 제일 긴 영화를 틀어주세요” 시작은 I가 집을 나오면서부터였다. 축제가 한창인 봄이었다. 학교 후문 가까이 방을 구했다. 시장에 가서 싸구려 레이온 이불을 샀다. 가스버너와 양은 냄비, 수저를 구했고, 라면 박스에 포장지를 입혀 책상과 밥상을 대신했다. 축제는 끝났지만 축제와 같은 밤은 계속되었다. I는 낮에는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학회실에서 시간을 보냈고, 저녁에는 기웃거리며 사람들을 만났고 술을 마셨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들, 새벽까지 이어지는 모든 이야기들을 듣고 끼어들고 목소리를 높이고 그러다 흩어지는 모든 자리에 I가 있었다. 미처 하지 못한 말들,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말들이 남아 있는 밤이면 자취방을 지나쳐 후문으로 들어갔다. 학회실로 들어가 책상위에 놓인 모둠일기에 그 말들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갔다. 괜한 짓을 했어, 다음 날이면 후회를 하곤 했지만 써놓았던 글을 지우거나 일기장을 찢지는 않았다. 뭐, 어쩌라고.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모둠일기가 네 일기장이냐? 선배들이 가끔 I에게 던지듯 말을 했다. 그렇게 많은 답 글이 달리는 일기장 보셨습니까? I는 선배들이 던지는 말을 그렇게 받아쳤다. I가 써놓은 글 아래로 여러 말들이 달렸다. 밤새 써놓고 방으로 내려간 뒤 아침에 등교를 하면 답 글이 쓰여 있었고, 거기에 답 글을 쓰고 수업을 듣고 오면 다시 답이 달려 있었다. 몇 번을 그렇게 주고받다 보면 격한 단어가 오고 가기도 했고, 때로는 동지를 만난 듯 서로를 향한 밝은 마음이 전해지기도 했다. 어떤 경우든 마무리는 술자리였다. I는 하루하루가 좋았다. 그 하루들 중 하루였다. 학생회관 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 I 앞에 명주가 와 섰다. 앉아도 돼? 명주가 물었고 I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와 크림빵 하나를 들고 앉은 명주가 무국에 말은 밥을 떠먹는 I를 바라보다 말했다. “참 단아해.” 하마터면 I의 입안에 있던 밥이 밖으로 튀어나올 뻔 했다. 네 글들 말이야. 글들이 단아하다고. 우연히 들른 학회실에서 책상에 놓인 I의 글들을 읽었다고 했다. 지난 1년간의 모둠일기를 모두 꺼내어 I 글만 찾아 읽었다고 명주가 말했다. I는 무어라 대답을 할지 고민했고 그러다 시간이 지났고 결국은 답을 하지 못했다. 크림빵을 다 먹은 명주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갔다. 명주는 약간은 허술해 보이는 듯한 행동들-이를 테면 강의실에 들어오다 강의실 문턱에 걸려 넘어지거나, 시험시간을 잘못 알고 들어와 앉아 있다든지, 종종 백팩의 지퍼를 열고 돌아다녀 동기들이 장난삼아 휴지나 빈 종이컵을 넣어도 모른 채 깡총거리며 달린다든지·로 인해 간혹 화젯거리가 되는 동기였다. 나사가 하나 정도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명주는 비웃음이나 비아냥보다는 재밌다는 이야기, 유쾌하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 아이였다. 그녀의 호탕한 웃음과 무슨 일이든 개의치 않는 시원한 대답들이 어우러진 탓이었다. 모두들 명주와 함께 있는 시간들을 즐거워했다. I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학생 회관에서 만난 이후로 I는 명주와 이전보다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복도를 지나치다 우연히 만나 인사를 하거나, 강의실에서 마주쳐 간단한 안부를 묻는 것은 이전과 같았지만 어감도 표정도 달랐다. 학회실 모둠일기에 글을 쓸 때에도 최대한 단아하게 쓰기 위해 노력했다. 잘 읽었어, 역시, 하고 명주가 답 글이라도 달아 놓는 날이면 I는 자신이 쓴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그해 초여름, 햇볕 쨍쨍 내리쬐는 안동에 가본 적 있니? 라고 명주가 물었다. I는 대답 없이 명주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명주는 I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우리 내일 안동 가자. 내가 도시락 싸올게. 다음날 둘은 기차를 타고 안동에 갔고, 버스를 갈아타고 햇볕 쨍쨍 내리쬐는 하회마을에 들렀다. 조용했다. 낮은 담을 양쪽으로 한 좁은 골목길에서 둘은 어깨를 스치며 걸었다. I는 명주의 손을 잡아볼까 잠깐 고민을 했지만 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명주에게 들키기 싫었다. 마을을 돌아 흐르는 강의 하얀 모래밭에 ‘명주와 I, 20세기가 끝나가는 더운 여름날 안동에 왔다 가다.’라는 글귀를 남겨둔 채 둘은 돌아왔다. 뒤풀이를 해야 한다고 명주가 고집을 부렸다. 이미 시간이 늦었다 말해야 했지만 I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명주와 I가 들어간 곳은 I가 즐겨 들르던 호프집이었다. 여기 계란말이가 정말 푸짐해. I는 먼저 나온 생맥주잔을 명주의 잔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명주는 그래? 하하핫, 하며 특유의 웃음을 보였다. 학과 이야기, 책 이야기, 안동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동아리 이야기도 했다. 명주의 동아리는 봉사 동아리였다. 봉사라는 것이 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아주 세련되거나 아주 지독한 자기애의 산물이 아닌가 하고. 물론 애초에 동기가 무엇이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살기 좋게 만드는,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이지.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야. 그냥 그 근원에는 자기애가 숨겨져 있다는 말이지. 누군가에게 알리지 않고 숨어서 하는 봉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자기만족, 뭐 그런 것이 근원적인 욕구가 아닐까. I는 뭔가 심오한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했고, 명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I의 이야기를 들었고 I는 명주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이건 서비스. 마른안주를 가지고 나온 호프집 사장이 보기 참 좋다, 라는 말을 테이블위에 남기고 돌아갔다. 그리고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I였다. 우리 사귈까? 명주는 생맥주잔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생맥주잔 바깥에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다 이내 무거워져 아래로 흘렀다. 달싹거리는 명주의 입술을 쳐다보던 I의 이마에서도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명주가 입을 열었다. 하하핫, 너 긴장하는 구나. 땀 좀 봐. 명주는 냅킨으로 I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생맥주잔을 들어 I의 잔에 부딪히고는 맥주를 마셨다. 너와 나는 아닌 것 같아. 친구지. 좋은 친구. “웃기네.” 그날, 명주는 수박씨를 뱉어 내듯 말을 뱉었다. 그때 I는 고개를 숙여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있는 명주의 얼굴을 내려 보았다. I는 무엇이라 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했고, 고민을 하는 동안 시간이 제법 지나가버렸고 어떤 답을 하든지 우습게 되어버렸다. 결국 I는 답을 하지 못했다. 한동안 둘은 그렇게 있었다. 지하철 끊긴다며 명주가 일어났고 둘은 영화가 계속 비춰지는 스크린을 둔 채 그냥 나왔다. 둘이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었다. 김강 소설가·내과의 그해 가을 I는 휴학을 했다. 겨울에 입대를 했고, 제대를 하고 학교에 돌아왔을 때 명주는 학교에 없었다. I는 명주와 함께 갔던 DVD방을 찾아가 그해 가장 길었던 영화를 찾아 달라 말했다. 주인은 알 수 없다는 말과 거기에 딱 맞는 표정을 지었다. I가 영화 속 한 장면을 주인에게 설명했다. 넓고 황량한 땅과 그 땅을 가로지르는 길과 그 길을 걷는 사내가 한 명 있어요. 그 사내는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길 위에 돌아서 서 있는데, 사내가 가야할 길을 가늠하는 것인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았어요. 아니에요. 지금 생각하니 그 사내가 서 있는 곳은 길의 끝이었던 것 같아요. 지나간 길을 뒤돌아보고 있었네요. 맞아요. 그랬어요. 끝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10-22

“제주의 새들은 제주어로 울까”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최근 아르코에서 방언시 웹진을 만드는 ‘미디어 TEAT’을 지원하여 방언으로 작품을 쓰는 작가나 시인들에게 예산을 대폭 지원해 주고 있다. 지역 문인협회에서도 방언 시 공모와 시화전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2019년 제주도의 시인이자 작가인 현택훈이 쓴 ‘제주어 마음사전’(걷는사람)이 ‘아르코 문학나눔(2019)’에 선정되었다. 진솔한 제주어를 소재로 한 산문과 제주어를 소재로 한 시를 간곡히 담아낸 ‘제주어 마음사전’은 총 4부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 ‘우리는 가매기 새끼들이었다’에는 “가매기(까마귀), 간세등이(게르름뱅이), 강셍이(강아지), 고장(꽃), 곤밥(흰밥), 곰세기/곰수기(돌고래), 곱을락(숨바꼭질), 구젱기(소라), 귓것(쉬신), 굴룬각시(내연여), 궨당(친척), 깅이(게), ㄱ·대(조릿대), 내창(하천), 넉둥베기(윷놀이)”와 같은 뭍의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제주어를 섞어 시와 산문을 소개하고 있다. 제2부 ‘엄마는 한라산 용강에 묻혔다’에서는 “뉭끼리다(미끌어지다), 도댓불(등댓불), 돌킹이(부채게), 동카름(동쪽 마을), 두리다(어리다), ㄸㆍㄹ르다(따돌리다), 랑마랑(~하기는커녕), 막은창(막다른 골목), 모살(모래), 몰멩지다(숫기가 없다), 물보라(서귀포시 지역 지명), 물웨(물외), 버렝이(벌레)”와 같은 자연과 지명 이름 등을 소개한다. 제3부 ‘제주의 새들은 제주어로 울까’에서는 “베지근ㅎㆍ다(궁물이 맛있다), 보그락이(잘 부풀러 오름), 본치(상처가 낫은 흔적), 부에(화), 벤줄(벤귤), 생이(새), 솔라니(옥돔), 숙대낭(삼나무), 숨비소리(해녀들의 가쁘게 물속에서 쉬는 숨소리), 아ㄲㆍㅂ다(귀엽다), 아시아시날(그끄저께), 얼다(춥다), 엥그리다(낙서하다), 오몽ㅎㆍ다(열심히 몸을 움직이다), 오소록ㅎㆍ다(으슥하다)”와 같이 제주사람들의 심성과 마음의 울림이 담긴 제주어를 소개한다. 제4부 ‘오늘 밤에 나는 또 누군가의 꿈에 가서’에서는 “요자기(요전), 우치다(흐리고 비가 내리다), 웨삼춘(외삼촌), 이루후제(이후에), 조케(조카), 창도름(막창자), 출람생이(총랑거리는 이), 카다(붕이 붙어 타다), ㅋㆍ찡ㅎㆍ다(가지른히 고르다), 타글락타글락(터덜터덜), 퉤끼(토끼), 폭낭(팽나무), 할락산(한라산), 할망바당(수심이 얕은 바다), 허운데기(머리털), ㅎㆍ끌락(아주 작다)”과 같이 제주 토박이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제주어를 소개한다. 이 책의 방언 자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물웨(물외), 퉤끼(토끼), 할락산(한라산)”과 같은 음운론적 변이형들은 제주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뜻의 짐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환산 이윤재 선생은 예측 가능한 음운론적 변이형인 전등어는 사전에 싣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그렇지만 “허운데기(머리털), ㅎㆍ끌락(아주 작다)”과 같이 표준어와 형태나 조어 자체가 다른 형태론적 병인형인 각립어는 가능한 한 큰사전에 실어 표준어를 풍성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표준어가 아닌 방언이지만 지역의 정서나 삶의 체험과 경험의 무늬가 남아 있는 방언은 매우 중요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특히 AI 시대, 대형 클라우드 정보 저장과 처리가 가능한 시대인 지금이야말로 이처럼 소중한 문화유산을 일일이 조사하여 저장해 두어야 할 뿐만 아니라 유용하게 활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택훈의 제주 지명을 소재로 한 ‘솜반천길’이라는 시를 한편 보자.“물은 바다로 흘러가는데 길은 어디로 흘러갈까요 솜반천으로 가는 솜반천길 길도 물 따라 흘러 바다로 흘러가지요 아무리 힘들게 오르막길 오르더라도 결국엔 내리막길로 흘러가죠 솜반천길 걸으면 작은 교회 문 닫은 슈퍼 평수 넓지 않은 빌라 솜반천으로 흘러가네요 폐지 줍는 리어카 바퀴 옆모여드는 참새 몇 마리 송사리 같은 아이들 슬리퍼 신고 내달리다 한 짝이 벗겨져도 좋은 길 흘러가요 종남소, 고냉이소, 도고리소, 나꿈소, 괴야소, 막은소…. 이렇게 작은 물웅덩이에게 하나하나 이름 붙인 솜반천 마을 사람들 흘러가요” 제주도 내창(內川)은 대부분 건천인데 흘러가는 내가 아닌 중간 중간 물이 고인 소(沼)도 있다. 제주 특유의 자연환경에 이름 붙인 “종남소, 고냉이소, 도고리소, 나꿈소, 괴야소, 막은소”는 제주 자연이 남기고 제주 사람들이 명명한 제주어다. 제주사람들의 깊은 애정과 심성이 맑게 흐르는 물처럼 담겨 있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지역 방언은 독특한 지역의 지식정보와 사람들의 마음이 새겨진 디지털 정보뭉치이다.

2024-10-21

중세 유럽의 풍운아 카를 5세

합스부르크 적통이자 오스트리아와 이베리아반도를 오롯이 손 안에 넣은 억세게 운 좋은 카를 5세지만 그는 전쟁으로 일생을 보내야 했다. 신대륙에서 끊임없이 들여오는 황금도 바닥을 드러내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석양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합스부르크와 에스파냐 제국은 지독한 가톨릭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예수회를 만들어 반개혁을 단행하면서 원론적 신앙에 깊게 파고들어 개신교에 대항하는 수단을 병행했다. 로마교황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매형이다. 어린 시절 카를과 폴로 경기를 함께한 친구이기도 했다. 카를 5세의 가톨릭 교권이 강성해지자 이를 우려한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프랑스를 지지하면서 카를 5세가 적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카를은 그를 지원하는 자들의 부(富)를 마음껏 활용했다. 아우크스부르크 금융가 큰손들과 고모 마르가레테의 힘을 이용해 제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카를 5세는 1520년 10월 22일, 그들의 지원을 받아 도이칠란트 황제 카를 5세로 아헨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마친다.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를 방어했고,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잡았다. 누나의 남편을 차마 죽이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의 적 프랑스를 도와준 로마는 그냥 둘 수 없었다. 오랜 전쟁으로 불만이 가득했던 3만명의 가톨릭 군사는 격렬한 기세로 로마로 진격했다. 스위스 교황 근위대 5000명이 하늘을 믿고 목숨을 건 방어에 임했으나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때 일부 근위병만이 교황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가톨릭 점령군은 3일간 로마를 약탈했다. 남자들은 닥치는 대로 죽였으며, 금은보화를 찾아 고문하고, 여자들은 강간했으며, 건물은 불태웠다.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하는 인간에 의해 로마가 폐허가 되는, 가톨릭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세계는 카를 5세의 기세를 꺾을 자가 없었다. 그는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전쟁에서 튀니지를 함락하고 서부 지중해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이슬람이 서구 유럽으로의 진출을 차단한다. 프랑수아 1세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선 역부족임을 실감해야 했다. 결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면서 두 앙숙 간의 오랜 갈등은 막을 내린다. 감수성이 남달랐던 프랑수아 1세는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찬사를 받는다. 그에 의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를 세상에 선보이게 했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작품들을 모아 지금의 프랑스 루브르 재산으로 만든, 문예부흥에 앞장선 왕으로 찬사가 따른다. 카를 5세는 유럽을 호령하는 전대미문의 제왕이 되었지만, 또 다른 도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한 두 제국의 황제답게 종교개혁의 물살을 타는 개신교의 확산을 막아야 하는 신성한 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톨릭이 신교를 탄압하면서 이에 맞서는 전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농민반란 등 크고 작은 전쟁이 수십 년 지속되면서 제국의 에너지는 소진되고 있었다. 긴 병에 효자 없듯, 오랜 전쟁에 애국자 없다. 결국 1555년 개신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휴전을 맺는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해’로 구교는 신교를 인정하면서 타협했다. 카를 5세, 매부리코에 길쭉한 턱과 아래턱이 튀어나온 합죽이인 까닭에 사람들로부터 그리 좋은 인상은 남기지 못했다. 입을 온전히 다물 수 없어 파리가 입속으로 들락거리자 콧수염을 길러야 했고, 턱으로 인해 늘 침을 흘려 소화기에 문제가 많았으며, 말년엔 통풍마저 찾아왔다. 그도 인간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삶에 회의가 일었고, 결국 56세가 되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용한 여생을 택한다. 아들 펠리페 2세(당시 식민지 필리핀은 펠리페에서 붙인 이름이다)에게 플랑드르 부르군트 공국과 에스파냐, 그리고 식민지 통치권을 넘기고,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를 넘겨준다. 그리고 2년 뒤 억세게 운이 좋은 카를 5세도 1558년 9월에 말라리아에 걸려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1세는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서쪽으로 끊임없이 진출을 노리는 오스만제국의 쉴레이만 1세와 치열하게 전쟁을 해야 했다. 헝가리로 진군하는 오스만제국군을 맞아 패하면서 도나우강 동쪽을 넘겨주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를 온전하게 가톨릭 국가로 만드는 데는 성공한다. 이로써 중부유럽의 기독교세계 수호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칸반도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지역에 그들의 정통 가톨릭을 굳건하게 뿌리내림으로써 훗날 갈등의 씨를 뿌려놓았다. 악을 행하면서 질서를 파괴하고, 스스로 파탄에 빠지면서 새로운 질서로 회복하는 악순환은 역사 이래 이어져왔다. 영혼의 부작용으로 태어나는 ‘악으로부터 도덕’이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스토리텔링 작가

2024-10-21

문학이 온다

21년 전 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문예창작과에 왔다. 원태연, 용혜원의 글과 판타지 소설 몇 권이 문학인줄 알았다. 첫 수업에서 교수님으로부터 시를 배웠다. 너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이런 세상이 있구나! 살면서 아무것도 되어본 적 없는 너는 시 안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너는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동기들이 술 마시러 가자고 해도 학교 옥상으로 도망가 노을과 별의 시간까지 홀로 시를 썼다. 그러면 교수님도 너를 기다렸다. 어둑한 복도에 홀로 불 밝힌 연구실에 가 시를 보여드리면 애써 쓴 문장들에 빨간 줄이 사정없이 그어졌다. 할퀸 상처처럼 아팠지만 너는 그 상처가 좋았다. 그렇게 찢어진 마음에서 돋은 새살이 시가 됐다. 매년 겨울이면 ‘신춘병’을 앓았다. 우체국도 믿을 수 없어 원고를 품에 안고 추운 광화문 거리를 돌아다니며 신문사에 직접 투고했다. 원고를 내고 나면 가슴에 품어 키우던 새가 날아간 것 같았다. 새의 온기가 사라진 자리엔 뼛속까지 아린 추위가 파고들었다. 심사평과 본심진출 명단에 이름이 없다는 건 너라는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불 뒤집어쓰고 있으면 눈물이 흘렀다. 너는 그걸 10년 넘게 했다. 너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갔다. 사랑하면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공부를 더 하면 혹시 시를 잘 쓸까봐,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 외롭게 쓰면 결국 손에서 시를 놓칠까봐. 그렇게 계속 쓰다 보니 재주가 없는데도 지방신문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문예지 신인상을 받아 등단했다. 시를 잘 쓰고 싶어 평론을 썼더니 운 좋게 평론으로도 등단했다. 이십대에는 시가 돈이 되지 않아도 행복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오솔길의 왕이 된 것만 같았으니까. 서른 살이 되자 너는 돈이 되지 않는 시를 계속 붙잡을 수 없어 달아났다. 달아날수록 시는 너를 더 잡아당겼다.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돈보다 시가 좋았다. 그래서 결국 돌아왔다. 집안 어른이 네게 말했다. 요리학원에 가서 음식을 배워 장사라도 하라고. 친구가 말했다. 문학이 돈이 되냐고, 너도 이제 네 앞가림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후배가 말했다. 형도 하상욱처럼 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 선배가 말했다. 시는 아무도 안 읽으니까 맛집 소개하는 글이나 쓰라고. 시인이라고 하니 모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환호하며 요청했다. 시 한 수 읊어달라고, 삼행시 좀 지어달라고. 그때마다 너는 문학을 한다는 게 괜히 죄스럽게 느껴졌다. 문학을 무용한 일이나 음풍농월쯤으로 여기는 세상의 무지와 폄하, 냉대와 오해에 마음을 다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너는 문학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졌다. 뭘 이룰 수 있는지도 모르면서 뭐라도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 너는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시집과 평론집 등 열 권의 책을 낸 너는 문학연구자이자 시인, 평론가로서 쌓은 나름의 경력보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문학을 향유하는 삶이 훨씬, 확실히 ‘이룬 것’이라고 믿는다. 비록 비전임 계약직 교원이지만 상관없다. 문학이라는 캄캄한 동굴 안에서 네가 더듬거리며 지나 온 시간들이 이제야 조금씩 환해진다. 저 멀리서 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들이 걸어 나갈 길을 밝히면서, 네가 걸어 온 길에도 빛을 비춰주는 까닭이다. 세대는 달라도 문학이라는 영원 안에서 모두 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수업 시간을 너는 사랑한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날, 오전에 너는 한 고등학교에서 윤동주의 시와 삶에 대해 강연했다. 수상 소식을 들은 저녁에 너는 네가 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한강 작가와 일면식도 없으면서 마음의 균형이 무너져 어쩔 줄 몰랐다. 왜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지 너도 모른다. 고작 삼류 시인이자 무명 평론가지만 지금껏 문학을 놓지 않고 해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붙들고 온몸으로 나아가리라는 것, 너보다 더 문학을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문학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뭉클했겠지. 감격에 겨운 너는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에서 구사한 독특한 2인칭 화법을 빌려 이 글을 쓴다. 너는 이제 더 이상 ‘문학’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 오해 받지 않고 무시당하지도 않는 문학이 온다. 이미 왔다.

2024-10-21

고단함을 잊는 법

현생의 고단함을 느낄 때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어릴 적 걱정 없이 즐거웠던 때로 잠시나마 돌아가 본다. 모래밭에 손을 묻고 두꺼비집 노래를 부를 때나 꽃이나 풀을 돌맹이로 짓이기며 소꿉놀이에 쓸 저녁 반찬을 만들 때, 나는 힘껏 내려가 있던 입꼬리를 다시금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옅게 웃어 보일 수 있다. 삭막한 사무실 책상에 앉아 현생이 괴로울 땐 이렇게 작은 구멍 하나를 만들어 잠시나마 어린 시절 추억 속으로 빠져본다. 그리고 퇴근 후나 주말이 되면 어린 시절 만끽했던 자유로운 일상을 꼭 즐기리라 다짐하며 다시금 타자기에 손을 올린다. 주말이 되면 어릴 적 즐겨 먹었던 불량식품들을 찾아 일부러 초등학교 앞 작은 문방구에 들린다거나, 계절마다 엄마가 조각조각 잘라주던 제철 과일들을 먹기 위해 마트로 장을 보러 간다. 어린 시절 사소한 습관부터 작은 기억까지 다 복기해보며 따라하다보면 삶의 지루함과 어려움에서 조금이나마 멀리 벗어나 볼 수 있다. 이렇게 나처럼 어린 시절의 향수로 물건을 구매하는 키덜트 족은 대략 십년 전부터 주요 소비자층으로 자리 잡았다. 키덜트족이란 키드(kid:아이)와 어덜트(adult:어른)의 합성어로 어른이 지만 여전히 어린 시절의 분위기와 감성을 추구하는 성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퇴근길에 뽑기 기계 앞에서 동전을 한 가득 손에 쥐고 인형 뽑기에 열중하다 집에 가는 길에 작은 인형 하나 손에 들려 있다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큰 기쁨과 만족감이 든다. 돈을 얼마를 썼거나 인형에 큰 의미가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이상하다고 여기거나 철이 없다고 느끼진 않는다. 그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늘 나의 현실적인 문제들로부터 벗어나 마음이 만족하다면 되는 것이다. 나와 같은 키덜트 족은 옷이나 특정 상품을 구매할 때에 물건의 사용 가치를 재고하는 것이 아닌 어린 시절 즐겨 보던 만화나 기억속 함께 커왔던 캐릭터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심리적 만족감을 채운다. 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인 가심비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상품의 가격이나 쓸모, 가치 보단 주관적 마음의 만족감을 더 중요시하게 여기는 것이다. 더 나아가 fun(재미)과 consumer(소비자)를 결합한 펀슈머는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닌, 물건을 구매할 때에 재미를 추구하는 소비자를 뜻한다. MZ세대 중심에서 시작된 펀슈머는 가격 대비 재미를 쫒는 이른바 ‘가잼비’를 추구하며 소비 과정에서 재미와 즐거움의 경험을 중시한다. SPC 삼립의 대표 스터디셀러 제품인 정통 크림빵은 60주년 기념으로 기존 사이즈 대비 약 7배 정도 큰 사이즈로 ‘크림대빵’을 출시한 바 있다. 성인 두명의 얼굴을 가릴 정도로 점보 사이즈로 출시되었던 대왕 크림빵은 보자마자 웃음을 자아낼 정도로 커다란 사이즈에 이색적이었고 처음 출시됐을 때엔 품귀 현상까지 생겨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출시가 대비 약 2배 넘는 가격으로 거래되었을 정도였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이어 대왕 시리즈라 불리는 8인분의 양이 담긴 세숫대야 냉면, 팔도 도시락 8인분이 합쳐진 대왕 팔도 점보 도시락, 공간춘 대왕 짬짜면 등이 출시되어 가잼비와 가심비를 더한 상품들을 마트나 편의점에 심심찮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상품들 모두 출시 전부터 화제성이 있었으며 출시되자마자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웃돈이 붙어 거래되었을 정도라니 익숙한 상품에 웃음 요소를 더한 상품이 현재까지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덕분에 나는 더욱 즐겁게 마트나 편의점, 문방구 등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재미를 찾고 추억에 젖어 현실의 고단함을 조금 잊어볼 수 있게 된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소비 습관을 보며 철없어 보인다고 고개를 저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이 단순한 행위로도 작은 기쁨을 맛볼 수 있고 생의 즐거운 면을 조금이나마 추구할 수 있다면 다시금 어린 시절 반짝였던 두 눈과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이곳 저곳 쏘다녀볼 수 있다. 오늘은 또 어떤 새롭고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고단함을 잊는 법은 이렇게 단순하고 쉽다. 덕분에 새로운 한 주를 다시금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시원해진 가을 바람을 맞으며 운동화 끈을 꽉 매고 다시금 뚜벅뚜벅 걸어가본다. 이렇게 걷다 보면 고단함보다는 일상이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2024-10-21

‘원전+재생e’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기상청 기후통계분석 결과를 보면 지난 8월에 이어 9월도 기상 관측이래 가장 무더웠던 9월로 기록되었다. 1973년 기상관측망이 전국적으로 확충된 이후 올해 9월이 가장 높은 월 평균기온(24.7℃), 폭염일수(6일), 열대야 일수(4.3일)로 기록된 것이다. 더욱이 1973년 이후 9월에 폭염일수 자체가 기록된 연도는 올해가 유일하다. 이런 최악의 폭염을 겪고도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말보다는 ‘올해가 어쩌면 앞으로의 여름 중 가장 시원했던 때였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말이 더 와닿는다. 폭염이 한창이던 8월 29일 헌법재판소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약칭, 탄소중립기본법)’ 제8조 제1항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 조항에서 2030년까지만 감축목표(2018년 대비 35% 이상 감축)를 규정하고 이후 2050년 탄소중립 목표 시점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감축목표가 없어 미래세대에 과중한 부담을 이전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11.4% 감축율로 타 전환(45.9%), 건물(32.8%), 수송(37.8%), 농축수산(27.1%), 폐기물(46.8%) 부문보다 매우 낮았던 ‘산업부문’도 이제 급격히 높여야 한다. 이에 정부는 기존의 주력 에너지인 석유, 석탄 등 화석연료를 급격히 줄이면서도 안정적 에너지 공급을 위해 원자력발전과 재생에너지의 혼합을 약칭한 ‘원전+재생e’ 전략을 전환(발전)분야 핵심 감축대책으로 제시했다. 전환분야의 ‘원전+재생e’ 대책은 산업분야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격한 온실가스 감축으로 글로벌 경쟁력이 저하되는 것을 막고 새로운 감축기술을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상당한 시간을 벌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로봇, 미래모빌리티, 디지털헬스케어, 반도체, ABB 등 전력 수요량이 매우 높은 5대 미래신산업을 집중 육성하고자 하는 대구시도 ‘원전+재생e’ 대책은 필수불가결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2030년까지 전력의 50%를 신재생에너지로 생산하는 목표를 세우고 태양광 발전을 대폭 확대해 왔다. 2020년 여름, 캘리포니아는 극심한 폭염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했지만, 태양광 발전이 저녁 시간대가 되면서 급격히 감소했고 ‘캘리포니아 롤링 블랙아웃’이라는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했다. 태양광 발전의 변동성 때문에 전력 수요를 충족하지 못했고, 예비 전력이 부족해 일부 지역에서 계획적인 정전을 해야만 했다. 이후 이런 대규모 정전 사태를 막기 위해 태양광 발전에서 잉여 전력을 배터리에 저장해 부족 시 공급하고 원자력으로 전력수급의 변동성을 보완하고 있다. 이렇게 원자력이 기저부하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신재생에너지가 추가적으로 탄소 배출 감소와 에너지 다각화에 기여하는 효율적인 ‘에너지 믹스 모델’ 즉 ‘원전+재생e’ 대책은 프랑스, 캐나다, 일본 등 많은 선진국이 채택하고 있다. TK신공항조성과 반도체, ABB 등 첨단기업을 유치하여 ‘미래신산업 혁신’을 이루면서 ‘2050 탄소중립’이라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대구는 ‘원전+재생e’라는 ‘에너지 믹스 모델’이 필요하다.

2024-10-21

비정상 소리

강길수 수필가 차의 타이어나 하체에 무엇이 끼었는지 살펴본다. 이상 없다. 엔진룸에도 달라진 건 없다. 한데, 달릴 때 뒤쪽에서 ‘웅….’하고 나던 비정상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주유 램프가 들어와 주유하고 나니 상태가 나아진 듯했다. 집에 와 주차하려 후진하며 브레이크를 밟을 때, 왠지 뒤에서 뭔가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도 났다. 평지여서 사이드 브레이크는 안 채웠다. 다시 차 쓸 날이 왔다. 불안해 뒤 트렁크를 또 열어, 차가 서면 관성으로 부딪힐 게 있는지 살폈다. 없다. 보닛을 열고 엔진룸을 더 자세히 보아도 정상이다. 부족해 보이는 부동액만 보충했다. 나갈 시간이 되어 시동 걸려고 키 1단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계기판에 빨간 사이드 브레이크 등이 들어왔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저께 텃밭에서 돌아오는 길 십여 킬로를, 그걸 건 채 차를 몰았다는 결론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출발할 때, 빨간 표시등을 본 기억이 없다. 운행 중 노란 주유등이 들어오는 건 보면서도, 옆 빨간등은 못 봤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조수석에 앉았던 아내에게 물어도 못 본 것 같다 했다. 추론을 해본다. 만약 표시등이 출발 때나 운행 시 안 들어왔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덜 푼 것이다. 뒷바퀴에 브레이크가 약하게 걸리니까, 주행 시 뒤쪽에서 ‘웅….’ 소리가 났을 테고. 또, 달리면서 마찰열로 브레이크 디스크와 패드 온도가 오르니 밀착도가 높아져 사이드 브레이크 등이 들어온 것이 된다. 그러고 보니, 그제 집으로 출발하려 사이드 브레이크를 왼발로 풀 때 뭔가 달랐던 느낌이 떠올랐다. ‘맞아. 그랬어! 덜 푼 거야’하고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귀납적, 연역적으로도 내 추론이 어긋나 보이지 않으니,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에서 찜찜함이 다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헷갈린다. 지금, 우리나라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치지 않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미국의 대선 같은 국제정세와 북한의 한반도 2국 선언과 대남 전쟁 위협, 러시아 파병 등 시시각각 나라 상황이 변하고 있다. 따라서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국가의 살길과 나아갈 길을 찾아내야 할 정치권은 ‘방탄 국회’와 ‘대통령 탄핵’이란 비정상 소리만 붕붕거린다. 정상 국민이면 누가 봐도 ‘야당 대표 방탄 국회’가 국정을 볼모 잡고 있다. 또, 터무니없는 ‘대통령 탄핵’이란 괴질에 걸려 혹세무민하는 정치판이다. 부정선거란 망국적 괴물이 나라를 삼켜가도, 해결에 나서는 현역 정치인은 거의 없다. 이달 4곳 보궐선거 역시, 대수의 법칙을 부순 부정선거란 통계적 증거를 G 박사는 제시하고 있다. 도대체 정치꾼들에게 나라, 국민, 정의, 진실, 사랑 같은 개념들이 있기나 한가. 국민은 부정 당선된 가짜일지도 모르는 정치꾼들의 거들먹거림에 헷갈리고, 분노하며, 절망한다. 부디 정치권이 스스로 나라 문제를 찾아 해결해 나가는 길, 진실과 정의가 바로 서는 길로 회심(回心)하여 제 몫을 다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4-10-21

누구를 위한 ‘방탄 정치’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여야의 ‘방탄 정치’가 격돌하고 있다. 여당은 야당의 ‘이재명 방탄’을 비판하고, 야당은 여당의 ‘윤석열·김건희 방탄’을 공격한다. 양자의 공통점은 상대의 잘못을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는데 있다. “자기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든 티끌은 잘 본다.”는 점에서 똑같은 ‘바보들의 행진’이다. 방탄 정치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입법권력을, 그리고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은 집행권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상대를 비판,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오류를 덮으려고 한다.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방탄이 아니라, 권력자의 개인적·당파적 이익을 위한 방탄이라는 점에서 후진적 정치의 전형이다. 이재명 방탄을 위한 민주당의 정치행태는 민주주의와 법치를 위협한다. 수사 검사에 대한 탄핵소추와 재판담당 판사에 대한 탄핵겁박은 보통이고, 대통령 탄핵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청문회까지 열었다. 검찰수사 조작방지법·표적수사금지법·법 왜곡죄법 등을 입법하겠다면서 판·검사들을 협박한다. 특히 이른바 ‘쌍특검법’(김건희 특검법 및 채 상병 특검법)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관계없이 계속 밀어붙여서 탄핵분위기를 고조시키고자 한다. 민생을 챙겨야 할 국정감사까지도 이재명 방탄과 대통령 부부에 대한 정치적 공격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편 정부·여당의 방탄 정치는 검찰의 수사·기소권과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이 그 핵심수단이다. 야당의 ‘쌍특검법’에 대한 여당의 방탄 정치는 국민여론과 배치된다. 영부인의 명품백 수수, 주가조작 및 공천개입 의혹 등을 수사하기 위한 특검법에 대한 국민여론(전국지표조사, 9월 25일)은 찬성 65%, 반대 24%이며, 특히 보수의 텃밭인 TK에서도 찬성 58%, 반대 36%이다. 또한 채 상병 특검도 찬성 69%, 반대 21%(엠브레인퍼블릭, 7월 8일)로서 찬성여론이 압도적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부인의 방탄을 위해 검찰수사팀을 교체하고 김건희 특검법에 두 차례 거부권을 행사했으며, 자신이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서도 세 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게다가 검찰은 영부인의 명품백 수수와 주가조작 의혹에 무혐의처분 함으로써 공정성을 의심받고 있고, 청탁금지법은 있으나마나하는 법이 되었다. 공정과 상식을 역설한 대통령이 자신과 부인의 방탄을 위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이해충돌’이 아닌가. YS와 DJ는 정치9단이었음에도 대통령 재임 중 권력으로 자녀들을 방탄하지 않고 모두 구속시켰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정치지도자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으로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한다. 이미 지은 죄가 방탄한다고 해서 없어지지는 않는다. 죄가 없다면 무죄판결을 받을 것이요, 죄가 있다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이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니 쪽팔리게 방탄하지 말고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여라.

2024-10-21

‘우주 패권’ 향해 달리는 중국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2028년에 시작해 7년간 우주정거장 운영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사람을 태운 탐사선을 달에 보낼 것이다. 이 프로젝트와 더불어 국제 달 연구기지도 건설할 계획이다.” 중국과학원 부원장 딩치뱌오의 호언장담이다. 미국과 ‘우주 패권’을 다투는 중국의 천문학적 투자와 인력 집중이 주목된다. 중국은 다가올 2050년엔 미국에 앞서는 우주 강국을 만들겠다는 장기 계획을 공공연히 말한다. 실제로 중국은 1주일에 한 번씩 우주를 향해 위성을 발사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런 상황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효율적인 위성 통신망 구축을 위해 추진 중인 ‘천범성좌 계획’에 의하면 중국은 올해 108개의 위성을 쏘아 올린다. 향후 2025년에는 648개, 2030년까지는 총 1만5000개 위성을 궤도에 안착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G60 성좌계획으로도 지칭되는 이 프로젝트는 전 세계 광대역 네트워크 범위를 제공하고, 6G 연결로 전환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지구를 넘어 우주로까지 확대되는 양상은 두 나라의 미래 경쟁력에 주목하는 여타 국가들의 주요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태양과 지구의 상호 역학작용을 풀고, 외계 생물체 탐색에 나설 예정이다. 10년 안에 세계 최고의 우주 망원경을 궤도로 내보낼 것”이라는 중국의 발표는 당연지사 우주 패권을 두고 다투는 미국을 긴장시킬 듯하다. 현재 미국은 차기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트럼프건, 해리스건 미국 최고 지도자 자리에 설 사람은 ‘누가 우주의 주인인가?’를 놓고 중국과 다퉈야 하는 숙제까지 안을 게 분명해 보인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