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쪽팔리는 짓은 하지 말자

김진국 고문 영화 베테랑에서 형사역을 한 황정민이 이렇게 외친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가진 것이 없어도 자존심은 있다는 말이다. 형사로서 자존심은 무엇인가.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범죄자 잡는 책무를 잊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범죄자가 돈으로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는 게 자존심이다. 범죄자가 돈으로 형사를 우롱하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기다.다른 직업에도 끝까지 지켜야 하는 이런 자존심이 있다. 하찮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그런 자존심을 지키면 존경받는다. 장인(匠人)으로 높이 평가된다.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자존심을 버리는 순간 ‘쓰레기’가 된다. 그런 쓰레기는 지위가 높은 계층에 오히려 더 많다.‘가오’(顔)는 일본말로 얼굴이라는 뜻이다. 일종의 ‘체면’ 같은 건데, ‘자존심’이 가장 가까운 말일 듯하다. 속된 표현으로 ‘쪽팔린다’라는 말이 있다. 부끄러워 체면이 깎인다는 뜻이다. 이때 ‘쪽’도 얼굴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니, ‘쪽’을 파는 건 ‘가오’를 잃어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이 속된 표현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 건달이다. 건달조차 지키고 싶어 하는 마지막 자존심이 있다. 그런데 사회 지도층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불량배도 지키려는 그 선을 넘어 창피한 짓을 거리낌 없이 하고 다니는 걸 본다. 특히 우리 정치권이 그렇다.요즘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보면 낯이 뜨겁다. 부끄러워서 보수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오죽할까. 어디 가서 국민의힘 지지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당내 경쟁이라도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 당내 총질이라서 문제가 아니다. 공격하더라도 합리적이고,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억지 의혹을 막무가내로 쏟아낸다. 저 정치인이 저런 사람이었나, 실망과 개탄을 금할 수가 없다.평소 가졌던 좋은 이미지와 전혀 다른 언행에 보는 사람마저 ‘멘붕’에 빠지게 한다. 곧 비슷한 근거라도 내놓으려나. 나중에 경쟁 정당과 대결할 때를 대비한 예방주사인가. 온갖 상상을 다 해봐도, 그 사람에 대해 가졌던 기대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 악몽 같다. 더 힘있는 권력자가 꼼짝 못 할 약점을 쥐고 사주하나. 어떤 거절 못할 선물로 유혹했나…. 아무리 그래도 평생 쌓아온 ‘가오’, 자기 이름을 버려야 할 정도일까.야당으로 고개를 돌려도 다르지 않다. 국회 법사위는 정청래 위원장은 기상천외하게 독주한다. 대한민국을 지켜온 장군들을 불러놓고, 조롱하고, 모욕했다. 국민의힘이 무어라 하건 듣지 않는다. 간사도 필요 없고, 여당 추천 인사는 마음대로 잘라버린다. 저러고도 ‘법대로’를 외치면 대통령의 ‘법대로’를 무슨 낯으로 비난할까 싶다.민주당 강민구 최고위원은 “민주당의 아버지는 이재명 대표”라며, 90도 폴더인사를 했다. 최고위원으로 발탁해 줘 아무리 감읍했다 해도 그런 말이 나오나. 민주당 김준혁 의원은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과 퇴계 선생 등을 성적으로 모욕했다. 양문석 의원은 편법 대출 논란으로 선거 때 민주당 지도부조차 버린 카드 취급했다. 그런데도 당선됐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워낙 큰 탓이라고는 해도, 유권자도 ‘가오’가 있는 것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상당수 유권자가 ‘묻지마 지지’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잘해도, 못해도, 내 편만 든다. ‘가오’를 버린 유권자 탓에 정치인만 오만해진다.가수 김호중 씨가 음주 운전으로 논란을 빚었지만, 열성팬은 지지하고, 안타까워했다. 연예인은 예술적 재능이 ‘가오’다. 도덕적 결함이 있어도 응원하는 팬심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는 왜 하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인가. 거창하게 국민을 위한다고 떠들지 않나. 더러운 행동과 속임수를 써서라도 자리만 얻으면 명예는 저절로 굴러들어 오나. 얼굴에 철판을 깔고, 허공을 쳐다 보며, 성공을 위한 주문을 왼다. 체면을 내던지고, 눈을 질끈 감고, 부끄러운 말을 쏟아내는 정치인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든다. 그렇게까지 해서 무엇을 얻고 싶은가. 그게 영원히 갈 것 같은가. 아무리 욕심이 나도 쪽팔리는 짓은 하지마라.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7-14

성공해야 하는 농업대전환 운동

김하수 청도군수 인간하고 가장 밀접한 거리에 있는 것이 먹을거리다. 추위와 더위는 참을 수 있지만 배고픔은 참을 수 없는 이유로 인간은 수렵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변화를 시도했고 현대에는 인간에게 필요한 영양소를 적절하게 공급할 수 있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지구의 한쪽에서는 먹을거리가 넘치지만, 반대편에서는 먹을거리가 없어 아사자가 발생하는 불합리한 시대를 사는 것도 먹을거리가 주는 불편함이다.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보릿고개 등 먹을거리가 없어 풀뿌리 등으로 생명을 연명한 일들이 아주 오래전 기억에만 존재하는 일인 것처럼 망각의 늪에 빠져 음식물쓰레기가 넘치고 있다. 한때 대한민국을 신토불이(身土不二)가 도배했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으로 자기가 사는 땅에서 생산된 농산물이라야 몸에 잘 맞음을 이르는 말로 제철 음식만큼 중요한 것이 친환경으로 재배된 지역 농산물이다.이를 위해 청도군은 농업대전환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농업대전환 운동은 평생학습 행복 도시, 문화·예술·관광 허브 도시와 함께 청도군의 3대 미래 비전이다. 농업대전환은 4차 산업혁명 시대와 농업농촌의 위기에 대응하는 것으로 청도군의 농업대전환은 “농업인이 도시 근로자와 같이 열심히 일하고 땅도 있지만 도시 근로자의 소득의 60%대에 머물러 왜 더 잘살지 못하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농업에 첨단 과학을 접목하고 기계화할 수 있는 규모화, 친환경 유기농업으로 전환 등 청도 농업의 큰 틀을 바꾸어 농사만 지어도 잘 사는 농촌, 청년이 돌아오는 젊은 농촌, 농가소득의 보장 등으로 고령의 농업인이 힘들게 일하지 않고도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는 농촌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군은 2023년 7월 ‘농업대전환으로 청도농업을 새롭게 디자인하다’를 슬로건으로 한 농업대전환 비전을 선포하고 추진목표인 △공동영농(규모화) △친환경(유기농) △첨단화(스마트 팜) △미래 인재 양성 △가공 수출(부가가치 창출) 등의 성과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 일부가 경북도의 ‘혁신농업타운사업’에 선정되며 9억 원의 사업비를 확보하기도 했다. 혁신농업타운사업은 농촌 마을을 하나의 농업법인으로 구성해 개별 영농을 공동영농으로 기술과 인력 문제를 해결하고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새로운 농촌 마을 만들기 사업이다.청도군은 이 사업으로 친환경 벼와 이모작 감자, 양파, 마늘 등을 재배해 농가소득을 높인다.농업대전환을 추진함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이 미래 청년 농업인 유치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아열대 작물의 육성이다. 이를 위해 농어업단체와의 소통과 농어업인의 의식 전환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새마을운동인 발상지인 청도의 새로운 변화에는 농업대전환 같은 제2의 새마을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며,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아열대 작물 재배단지를 추진하고 바나나와 파파야, 애플 망고 등 아열대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를 지원하고 있다. 스마트 인재 양성을 위해 한국미래농업고와 업무협약으로 귀농과 청년 창업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지속으로 스마트농업의 기술을 보급하며 낡은 시설은 보완해 나갈 계획이다.이와 함께 가공산업 육성 지원사업과 농식품 수출 확대, 청정 청도 조사료 생산기반 구축, 반려동물 힐링센터 설치, 디지털 청년 농업 아카데미 운영, 미래 청년 농업인 육성 유치사업, 유기농산업 복합 서비스지원 단지 조성, 미래형 과원 조성, 특화형 농업 인력수급 활성화 등도 농업대전환의 하나로 추진한다. 농식품 수출 확대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우수 농특산물의 수출 확대를 통해 농가소득 증대와 가격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기존의 버섯류와 냉동 참치 중심의 수출구조에서 청도반시를 비롯한 채소류, 과실류, 임산물 등으로 수출 품목을 다양화한다.미국 내 주요 한인마켓인 한남체인 USA와 MOU를 체결하고 캐나다에서 농특산물 홍보 판촉 행사를 진행하는 등 품목 다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역에 들어서는 아이쿱소비자생협연합회의 ‘청도자연드림파크’는 영남권을 아우르는 친환경 유기농 생산의 최일선이 될 것이다.청도자연드림파크는 친환경 유기농 식품단지와 공방, 물류 시설, 영화관, 병원, 호텔 컨벤션센터 등이 입주한 대단위 친환경 유기농 식품클러스터로 소비자 인식을 높이고 친환경농산물 소비를 유도해 지역의 친환경농업 실천 농가의 소득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청도의 농업대전환은 지역에 맞는 미래를 준비하는 것으로 제2의 새마을운동으로 정착되기를 바란다.

2024-07-14

뒷산 둘레 길을 걷는다. 언덕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숨이 가빠진다. 잠시 앉아 숨을 깊이 들이켜고 뱉어낸다. 숲의 날숨은 언제 마셔도 상쾌하다. 푸른 기운이 몸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살아있음을 느낀다.집으로 오니 택배가 와 있다. 박스를 열었다. 울퉁불퉁한 돼지감자와 그 아이의 눈동자를 닮은 검은 콩이 들어 있다. 흙냄새와 쇠죽 끓이는 냄새도 함께 실려 왔다. 그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다. 편지를 열자 오래도록 봉인 되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결혼 후, 남편과 시외가에 갔다. 여느 마을과 다르지 않았다. 점심을 먹은 후 남편과 산책에 나섰다. 맑은 공기 푸른 하늘, 도시에서 느끼지 못한 것을 느끼면서 걷자니 숨이 탁 트였다. 둑을 따라 수양버드 나뭇가지가 ‘쏴 쏴’ 노래를 했다. 정미소의 발동기 소리가 시골마을의 심장 소리처럼 들렸다.정미소의 마당 옆에는 큰 웅덩이가 있었다. 참새들이 모여 입방아를 찧고 오리가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 옆에서 머리 하나가 쑥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사람 같기도 하고 오리 같기도 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꼬마 하나가 오리 옆에서 자맥질 하고 있었다. 아이는 물놀이에 익숙해 보였다.웅덩이를 스쳐 지날 때, 자맥질을 하던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오리만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웅덩이를 계속 바라보았다. 물결이 없었다. 아이는 어디 갔을까. 머리가 쭈뼛 서면서 불길한 예감이 몸을 휘감았다. 발만 동동거리는데 웅덩이 속으로 누군가 뛰어 들었다. 남편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물속만 쳐다보았다. 물은 아무 표정이 없다. 잠잠했다. 숨이 막혔다.잠시 후, 아이를 끌고 나왔다. 남편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이의 눈은 잠들어 있었다. 팔은 탈수 되지 않은 옷처럼 축 쳐져 있었다. 남편이 무릎 위에 아이를 거꾸로 올렸다. 물을 빼도 아이에겐 반응이 없었다. 남편이 아이를 눕혔다. 숨을 십 여 차례 불어 넣자,“으앙”소리가 났다. 내 숨도 터졌다. 남편은 아이 옆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 누구 없어요?’ 다시 고함을 쳤다. 건너편에서 할머니 한 분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할머니의 눈은 백 리는 들어 간 듯 퀭하였다. 할머니는 손자를 끌어안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남편의 손을 붙들고 연신 기역자로 고개를 숙였다.“이 놈이 3대 독잔데 오늘 씨를 말릴 뻔 했네요”다음 날 할머니는 아이와 함께 우리를 찾아 왔다. 삶은 감자가 담긴 소쿠리를 거친 손등으로 건네셨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팍팍한 삶이라 손자 목숨 사례가 이것 밖에 안 된다며 미안해 하셨다. 다음 날도 할머니는 고구마와 옥수수를 한 보따리 가져 오셨다. 돌아오는 길에는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도 함께 싸서 왔다. 김경아 작가 그러고는 잊고 살았다. 한 아이를 구하느라 목숨을 걸었던 남편도 응당 할 일을 했다는 듯 더는 말하지 않았다. 편지가 없었다면 아이는 우리 부부에게 잊힌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아이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시골 마을에서 친구들은 도시로 다 떠나고 혼자 남아 고향을 지킨다고 했다. 열심히 키워 낸 채소들이 자연 재해 등으로 말라 갈 때는 가슴이 찢어진다고, 채소를 쓸어버릴 때마다 어린 시절의 사건을 기억해 낸다고 했다. ‘목숨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할머니는 수년 전 돌아가셨고, 꼭 우리 부부를 찾아 감사의 마음을 전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했다.상자 속에 담긴 농산물은 이삼 만 원 정도다. 하지만 남편은 값비싼 선물을 받은 양 기뻐했다. 삭막함이 고무풍선처럼 가득 차 있던 일상에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건조한 부부 사이에 끼어든 아이의 숨소리에 오랜만에 남편과 나는 옛 이야기에 빠질 수 있었다. 아이가 보내 준 고향의 숨소리가 상자에 가득하다.

2024-07-14

밀양 여행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여행을 기획하면서 당신이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은 무엇인가?! 풍경, 고적, 역사, 먹을거리, 휴식, 문화와 예술. 이런 목록에서 눈길 가는 대상이 몇 가지는 있을 터! 지난주 초에 1박 2일 일정으로 밀양을 다녀왔다. 햇볕이 빽빽하게 내리쬐는 태양의 고장 밀양(密陽)은 흐리고 간간이 비를 뿌렸다. 장마철의 밀양은 여전히 매혹적이었다.광주와 대구, 청도에서 모인 8인의 중년 남녀가 함께하는 밀양 여행에서 내가 주안점을 둔 것은 문화와 역사였다. 1년에 두 번 정도 모여 만남의 기쁨을 나누고, 지나온 날들과 다가올 시간을 터놓는 것이 우리 ‘인문 여행’ 참가자들의 작은 목표기 때문이다. 나를 뺀 다른 사람들은 책상물림으로 밀양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에 나 홀로 미리 답사도 했더랬다.표충사에서 시작하여 케이블카를 타보고, 호박소 일대를 거닌 연후에 각종 전(煎)과 밀가루 음식으로 저녁을 할 심사였다. 이튿날에는 울주의 가지산 석남사와 위양지를 돌아보고 고깃집에서 점심을 들고 해어질 요량으로 일정을 세웠다. 그러나 세상일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는 법이 얼마나 있던가?! 뜻하지 않게 저녁 자리가 바뀌면서 일정이 흐트러진다.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에 기대어 중지(衆智)를 모아 일정 변경에 착수한다. 그 와중에 나는 밀양의 대표 인물 세 분을 꼽는다. 1270만 관객을 불러 모은 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에 나오는 대사의 주인공,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백범 김구와 잠시 조우(遭遇)하는 의열단장 김원봉은 1946년 여름에 표충사에서 안온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임진왜란 당시 승군(僧軍)을 지휘했던 사명대사(1544∼1610)도 밀양의 인물이다. ‘선가귀감’의 저자 서산대사 휴정의 뛰어난 제자였던 사명은 전란 중에 숱한 전공을 세운다. 그는 선조의 명으로 1604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여 명과 함께 귀국한다. 표충사에는 사명대사를 기리는 사당(祠堂)이 자리한다.두 분과 함께 내가 꼽은 인물은 불후의 작곡가 박시춘(1913∼1996)이다. 밀양초교 중퇴로 가방끈이 짧은 그는 1938년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으로 1000여 곡을 작곡한 그를 기리는 아담한 공간이 ‘영남루’ 옆에 위치한다.범종루의 범종(梵鐘)과 법고(法鼓), 목어(木魚)와 운판(雲版)에 담긴 이야기와 탑에 관한 기초적인 상식을 일러준다. 세상에 존재하는 뭇 중생과 축생, 어류와 조류를 위해 스님들이 아침저녁으로 두드리는 네 가지 기물은 얼마나 아름답고 뜻깊은가! 상륜부, 탑신부, 기단부로 이뤄진 탑의 구조로 우리는 어렵지 않게 탑의 층수도 알 수 있다.차로 이동하다가 만난 한여름의 강렬한 빗줄기를 보면서 살아있음의 축복을 새삼 실감하는 것이다. 크고 작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우리의 가치 있는 생은 익어가는 법 아닌가?! 가을에 광주에서 재회할 것을 다짐하는 따사로운 눈길이 교차하며 인문 여행은 마무리됐다.

2024-07-14

한국형 레이저 무기

우정구 논설위원 레이저란 유도 방출에 의한 빛의 증폭을 의미한다. 1960년 미국의 물리학자 메이먼이 세계 최초로 레이저 장치를 발명할 때만 해도 레이저는 죽음의 광선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았다.그러나 이후 레이저를 활용한 각종 기술이 발달하면서 레이저는 문명의 이기로 인식이 바뀌게 된다. 절단, 용접 등 산업용과 레이저 프린트, 레이저 디스크플레이어 등 일상의 편리함을 돕는 분야에서 많이 사용된다. 특히 제모와 여드름 치료의 의료기와 함께 특정 부위의 암세포를 죽이는 데에도 레이저 기술이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레이저를 활용한 무기 개발도 수년 전부터 진행됐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에서는 이미 개발에 착수했으며 영국은 최근 고출력 레이저 무기 ‘드레건 파이어’의 실험에 성공한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현존하는 최고의 대공방어 시스템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의 아이언돔이 99%의 요격 성공률에도 비싼 비용 때문에 이스라엘 정부가 레이저 대공무기 개발에 힘 쏟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아이언돔 한발을 발사할 경우 약5만달러(약7000만원)의 비용이 든다. 유사시 사용 횟수에 따라 천문학적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레이저 무기 개발에 나서고 있다는 것.한국형 레이저 대공무기가 개발돼 우리 군에 실전 배치될 예정이라 한다. 한화에어로가 개발한 블록-1은 초당 30km 속도로 무인기 요격이 가능하고 다중표적도 동시에 요격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한 발 쏘는데 드는 비용이 2000원 정도밖에 들지 않아 세계 각국이 탐낼 만한 무기다. 북한의 소형 무인기, 멀티콥터를 정밀타격하는데 최적이라 하니 북한의 쓰레기 풍선 도발 등에 우리 군의 대응이 주목된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7-14

세상을 변화시키는 지혜 : 파레토법칙

신일철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파레토의 법칙은 이탈리아의 경제학자인 비라토 파레토에 의해 제시된 경제학적 원리이다. 어느 날 파레토는 집 텃밭에 완두콩을 재배하다가 수확량의 80%가 20%의 콩깍지에 의한 것임을 우연히 발견하였고 이를 사회 현안의 다양한 해석으로 발전시켰다.이탈리아 전 국토의 80%를 20%의 소수가 소유하고 있고, 소수의 인구가 전체 국부의 80%를 차지하는 현상을 입증하였다. 기업 품질경영의 대가인 듀란박사가 품질 불량의 대부분은 20%의 소수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는 접근으로 가성비 높은 문제해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법칙은 20:80법칙이라고도 불리며 대표적인 품질분석기법과 개선 활동의 핵심 툴(Too)l로 오늘날에도 많은 기업과 연구소에서 활용되고 있다. 디지털과 인공지능의 시대에 빠르게 급변하는 기업환경과 증가하는 불확실성으로 부터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해 개인과 기업은 성장과 혁신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한다.이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본 법칙은 선택과 집중의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기업은 소수의 핵심고객으로부터 회사의 안정된 수익이 발생하는 경우 충성고객을 선별하여 지속적인 비즈니스 관계를 가져가기 위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파레토의 법칙을 활용하여 업무 우선순위를 지정하거나 문제의 해결과정에도 필수적으로 활용된다.이 법칙은 디지털시대의 다양한 사회현상에도 잘 들어 맞는다. 인터넷에서 상위 20%의 작곡가의 곡이 전체 재생 또는 조회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새로운 가치창출을 위해 80%의 조회되지 않는 작곡가의 곡을 대상으로 신규 온라인 마케팅을 강화하는 롱테일 비즈니스도 응용되었다. 따라서 기업들은 이를 활용하여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고 전략을 수립함으로써 경쟁력을 향상하고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법칙은 필연적이고 보편적으로 내재된 세상의 원리이므로 학습과 교육을 통하여 그 의미를 이해하고 현재의 상황에 맞게 제대로 적용되었으면 한다. 필자는 지난 20여 년간 많은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을 컨설팅 하고 수차례 변화관리 워크숍을 실행하면서 확인한 파레토법칙의 필요성은 다음과 같다.첫째 핵심에 집중하여야 한다. 파레토 법칙의 핵심은 의미 있는 결과를 창출하는 중요한 소수를 식별하는 것이다. 핵심적인 요소에 집중하여 최대한의 가치를 창출하고 비효율적인 부분을 최소화하여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둘째,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자원을 배분해서는 안 된다. 중요도가 낮은 대부분의 활동과 투입 자원은 성과에 기여하지 못하고 낭비되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파레토 원리는 변화에 역동적이고 반복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주기적인 분석을 통해 무엇이 변화하고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야 한다.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핵심 문제를 확인하고 소수의 근본원인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이를 해결하기 위한 근원적인 해결책을 도출하고 함께 유지해 나가야 한다. 변화하는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현명하게 선택하고 자원을 집중을 해야 성과를 도출할 수 있다.모든 것을잘하지는 것은 어느 하나도 잘할 수 없는 것과 동의어라고 생각한다.

2024-07-14

최저임금은 정말 최저임금이다

유영희 작가 60세가 넘은 지인이 남편 퇴직 후 생활비가 부족하다며 작년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서 노인 한 분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것으로는 조금 부족하던 차에 맞벌이 부부의 유치원생 자녀 한 명을 아침, 저녁 두 시간씩 등·하원시켜주게 되어 다행히 월 200만 원 정도 수입이 되었다고 한다. 노인과 유치원생의 시급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대략 시간당 1만3000원이니, 2024년도 최저임금 9860원보다 높다. 일이 특성 때문에 최저임금보다 높게 책정된 것이다.그런데 지난 2월 서울시 국민의힘 소속 윤기섭 등 38명의 시의원이 노인들의 구직이 어렵다면서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으로도 노인 채용이 가능하도록 하자며 ‘최저임금법 적용 제의의 인가 기준 및 범위를 노인층에게 확대할 수 있는 제도적 근거를 마련해달라’고 정부 측에 발의했다. 3월에는 서울시 오세훈 시장이 필리핀 등 외국인 돌봄 노동자에 대해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그 말이 있기 하루 전,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공동주최한 노동시장 세미나에서 ‘돌봄 서비스 인력난 및 비용부담 완화 방안’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활용하되,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사실 최저임금 업종별 차등 적용 요구는 올해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1986년 최저임금제를 도입할 때 최저임금법 제4조1항에서 ‘최저임금은 근로자의 생계비, 유사 근로자의 임금·노동생산성 및 소득분배율 등을 고려하여 정한다. 이 경우 사업의 종류별로 구분해 정할 수 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그동안 경영계는 업종별 차등 임금을 계속 요구해왔다. 이들의 요구는 특정 업종은 최저임금보다 더 낮게 정하자는 것이다. 이런 경영계의 집요한 요구가 있지만, 지난 7월 2일 열린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최저임금 차등안을 부결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어느 기사를 보니, 작년 148개의 2차 업종 중 상반기 시급 공고가 500건 이상 등록된 업종 93개 중 ‘베이비시터·가사도우미’ 업종의 공고 평균 시급이 2만9천 원 정도로 가장 높았다고 한다. 일이 그만큼 힘들고 그래서 인력난도 심하다는 뜻이다. 요양보호사는 국가 공인 파출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고강도 노동에 저임금을 호소하고 있다.그런데 이런 간병과 육아와 같은 돌봄 노동에 외국인이라고 해서 최저임금보다 더 적게 주자는 것은 ILO(국제노동기구) 협약 제111호(고용 및 직업상의 차별에 관한 협약)에 나오는 출신국에 근거한 차별 금지 조항을 어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도 한국에서 한국의 물가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노인에 대해 최저임금을 낮게 적용하자는 주장 역시,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에서 나이를 이유로 하는 고용차별을 금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법하다. 최저임금은 생활임금이 아니라, 말 그대로 최저임금이다. 최저임금은 저소득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게 하는 최소한의 임금으로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인건비로 인한 소상공인의 경영난 해법은 다른 방식으로 찾아야 한다.

2024-07-14

먹사니즘

우정구 논설위원 1992년 미국 대선 때 빌 클린턴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말로 상대후보 조지 부시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대표 출마 선언문에서 밝힌 ‘먹사니즘’을 보면 빌 클린턴의 이 문구가 떠오른다. 대선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는 그의 출마 선언에서 밝힌 먹사니즘의 핵심은 한국경제의 난국 타개다.먹사니즘은 먹고 살다와 이념을 의미하는 영어 접미사 ism이 합쳐진 말. 생계 유지에 급급해 다른 것들에 대해 신경 쓸 틈이 없는 저소득 서민의 생활을 이르는 표현이다.2000년대 이후 경제가 팍팍해지면서 젊은이 사이에 유행한 말로 경제가 잘 돌아가야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누가 권력을 잡든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불만이 없다는 말이다. 공자가 백성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 정치도리라고 한 것과 통하는 말이다.최근 유럽에서 부는 극우 바람 역시 먹사니즘과 연관이 있다.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극우 정당은 이민정책과 같은 국익에 반하는 정책은 반대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자국 우선주의의 큰 흐름이다. 유럽연합의 창립을 주도한 독일, 프랑스 등에서도 극우 바람이 거센 것은 국민이 느끼는 경제가 그만큼 나쁘다는 뜻이다.이 전 대표는 “경제가 곧 민생”이라며 먹사니즘을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지목했다. 먹사니즘 해결로 민심을 얻겠다는 정치적 포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문제는 탄핵정국을 둘러싼 정부 여당과의 극심한 대립 상황에서 야당만이 경제를 살리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먹사니즘 해결을 위해선 정부 여당과의 협치는 필수다. 그렇지 않으면 먹사니즘도 공허한 말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7-11

나이 들면 약을 달고 산다

홍석봉 언론인 환자는 두려움 때문에 병원에 가고 의사는 두려움 때문에 약을 처방한다고 한다. 정부는 지난 1일부터 습관적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의 진료비 부담을 크게 늘렸다. 속칭 ‘의료 쇼핑’ 방지책으로 내놓았다. 의료 과소비 방지와 합리적 의료를 위해서다.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연간 외래 이용수는 15.7회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5.9회보다 높다. 지난해 기준 연 365회를 초과한 외래진료자가 2천448명이다. 필요 이상 병원을 찾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다.우리나라는 내년이면 65세 이상 노년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초고령사회에 접어든다. 2022년 기준,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평균 82.7세다. 건강수명은 그보다 훨씬 낮은 65.8세다. 무려 15년을 여러 가지 질병과 사고로 말미암은 부상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한다. 예전엔 비실비실 10년이라고 했는데 이젠 식생활 개선과 의료기술의 발달로 15년으로 늘어난 것이다. 장수가 축복이 아닌 세상이다.나이가 들면 여러 질환을 한꺼번에 앓는 경우가 많다. 만성 질환은 하나의 약으로 완치되지 않아 여러 가지 약을 먹어야 한다. 노인은 약을 해독하는 간 기능과 소변으로 배출하는 신장 기능이 약하다. 약 농도가 젊은 층보다 더 높아져 부작용이 많이 나타난다. 복용하는 약물 간의 상호작용도 한 요인이다.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1개 이상의 만성질환을 갖고 있고 10개 이상의 약을 60일 이상 복용하는 사람이 빠르게 늘고 있다. 2020년 91만 명, 2021년 108명으로 100만 명을 넘어선 이후 2022년엔 117만 5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의 고령화 추세라면 여러(다제) 약물 복용자는 더욱 늘 전망이다. 5개 이상 약을 처방받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입원 위험은 18%, 사망 위험은 25% 더 높다. 비슷한 약물이 중복처방 되거나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않다. 병 고치려다 병을 얻는 셈이다.불필요한 약물이나 노인 부적절 약물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잘못된 처방은 되레 노인 건강을 위협한다.노인들의 부적절 약물 복용은 장기적으로 신체 기능 저하를 촉진할 수도 있다. 투약 부작용이 더 많은 의료 이용과 또 다른 약의 처방을 부르는 도미노현상도 우려된다. 환자와 의료진의 인식개선이 필요하다.‘구구팔팔이삼사’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다. 병 없이 살다가 죽는 것은 만인의 소망이다. 하버드 대학 연구진은 영양가 있는 식단, 규칙적 운동, 건강한 신체 질량 지수 유지, 금연, 금주를 건강 백세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 다섯 가지 생활 방식을 실천하면 기대수명이 여성은 14년, 남성은 12.2년 증가한다고 했다. 식탁 위에 병원 약이 수북이 쌓여간다. 내과, 신경과, 안과, 정형외과, 종합 비타민까지. 얼마 전엔 눈 영양제가 추가됐다. 나이 들면 약을 달고 산다. 온갖 병치레를 하며 오래 살면 뭣하나. 늘어나는 약 봉지만큼 한숨도 높아진다.

2024-07-11

폭우 쏟는 장마전선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지겹게 비가 내리는 장마철이다. 흐리고 습하고 번개 치며 굵은 비를 뿌리는 우리 한반도의 특정 기후 현상이다. 보통 6월 중순에 시작하여 7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고온다습한 날씨 때문에 여름을 맞는 마음은 무겁다.이렇게 비 오는 날이 길어지는 이유는 북태평양의 따뜻하고 습한 남서풍과 오호츠크해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북동 기류가 만나서 한반도의 동서로 긴 장마전선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즉 고기압과 저기압 사이의 경계선에서 두 기단(氣團)의 힘겨루기가 시작되고 서로 밀고 당기며 한곳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집중호우를 퍼부어 강둑을 무너뜨리고 들과 마을을 침수시키며 산사태를 일으켜 우리의 마음을 짓뭉개고 있다. 참으로 계절의 악몽이 아닐 수 없다.장마, 한자어인 줄 알고 길 장(長)자에 ‘마’는 무슨 글자일까 찾아보았더니 순 우리 한글이라 한다. 500여 년 전 옛 문헌에 ‘오랜 비’라고 ‘댱마’라 했던 것이 ‘장마’로 변했다는 것이다. 한자로는 장우(長雨) 임우(霖雨), 일본은 매우(梅雨)라고 하고, 때맞추어 내려주면 산과 들을 씻어주고 논밭에 물을 뿌려주니 감우(甘雨)라는 말도 있다. 오뉴월의 보리장마, 초여름의 고치장마, 초가을의 건들장마도 있다는데….거의 일정한 장마철이 언제부턴가 들쭉날쭉하여 한반도 기상예보가 잘 맞지 않는다고 2009년부터 기상청에서는 장마 예보를 중단했으나, 올해는 작년보다 강수 기간이 길고 강수량도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어저께 이틀 동안 포항 오천에는 장마 기간 전체의 2/3인 250mm 이상의 폭우가 쏟아졌고 기계면에는 시간당 56.5mm라는 기록적인 장대비가 쏟아졌었다. 이제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다음 주에는 계속해서 장맛비 내리고 포항은 29도 이상으로 무덥겠다고 한다.태풍은 아직 소식이 없지만 대구·경북에 쏟아진 폭우로 금호강이 범람하고 오천 냉천에서 밀려온 황토물이 영일만을 누렇게 덮어버렸다. 멀리 군산은 시간당 131mm로 수백 년 만의 물 폭탄을 맞았고 세계적으로도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다.우리도 재해대책을 세워야 한다. 아열대 수증기가 집중적으로 지나가는 ‘대기의 강’은 군산 서천과 안동 상주를 잇는 장마 띠를 만들어 도로와 주택을 침수시켰고 토사 붕괴로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으며 수확을 앞둔 채소와 과일 등에도 피해를 입혔으니 당국은 피해복구와 농작물 시설 등의 안전 보호에도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또한 긴 장마로 불쾌지수와 우울감이 높아져 우리 일상을 파괴하고 있다.정치계를 보자. 특검이니 검사 탄핵이니 하며 여·야 기압골을 형성한 지가 벌써 수개월째, 대통령은 15번째 거부권을 행사했고 야당은 당대표 연임 도전을 의식하며 대통령 탄핵이라는 폭풍을 일으키려 하고 있으며 국힘당은 당대표 선출을 앞두고 후보 간 비방을 폭우처럼 퍼붓고 있으니 가뜩이나 무더운 장마철 피해에 정신이 아득한 국민에게는 억수장마가 쏟아지려 하고 있다. 다음 주에 다시 장맛비가 쏟아지고 나면 태풍이 몰려올지 모른다. 우리 모두 천재지변에 잘 대응하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2024-07-11

경고등이 켜진 대한민국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제 역할을 할 때 정상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경고등이 켜지기도 했다. 3부 모두를 좌파 세력들이 장악한 문재인 정권 때는 국가의 정체성은 물론 안위와 존망에 대한 경고등이 내내 켜졌었다. 천우신조로 자유우파가 다시 집권을 하게 되었지만, 국회는 여전히 압도적 다수의석을 차지한 좌파 정당이 전횡을 일삼고 있다.우리는 지금 과반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입법부의 권한을 마구 휘두를 때 어떤 현상을 초래하는지 기막히게 보고 있다. 특히나 온갖 범죄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는 인물의 사당이 되어 그의 사법리스크 방탄에 ‘올인’하는 작태는 경악을 넘어 공포스러울 지경이다. 행정부를 상대로 특검과 탄핵을 남발하여 삼권분립 균형의 파괴는 물론 국기를 문란케 하고 헌정질서를 무너뜨리는 짓도 서슴지 않고 있다.검찰을 무력화하고 사법부를 겁박하기 위한 입법폭주는 광기어린 팬덤까지 가세를 해서 나라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다. 지난 정권에서는 입법부와 행정부, 사법부가 한 통속이 되어 편파적이고 위헌적 소지가 있는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를 금지하는 법안, 검찰의 수사권을 박탈하는 법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를 설립하는 법안,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넘기는 등 국가정보원의 기능을 무력화 하는 법안 등을 졸속·강행 처리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김여정하명법’으로 일컬어지는 대북전단금지법까지 만들었다가 국제적 비난에 밀려 폐기하기도 했다.지난 정권의 잔재가 버티고 있던 사법부와 언론, 검찰에 켜진 경고등은 이제 하나씩 꺼지고 있다. 그러자 시시각각 다가오는 사법리스크에 대한 위기의식에 야당과 그 추종세력들은 거의 미쳐 날뛰는 형국이다. 저들이 쥔 유일한 칼자루인 입법권으로 할 수 있는 짓은 무엇이든 다 해보겠다는 각오인 것 같다. 오로지 대통령탄핵의 꼬투리를 잡기 위한 김건희특검법, 채해병특검법, 이재명 관련사건 수사검사들 탄핵안 발의, 이동관, 김홍일에 이어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까지 무조건적 탄핵 시도, 대통령탄핵청원에 관한 청문회를 열겠다는 등 일말의 이성도 염치도 팽개친 광분의 연속이다.하지만 대세는 조금씩 기울고 있다. 검찰독재란 누명이 무색하게 질질 끌기만 하던 검찰이 수사를 다잡고 있고, 공영방송도 머지않아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할 전망이다. 국회에 진입한 범법자들의 사법처리가 진척되고 공영방송이 정상화 되면 야당의 자중지란으로 입법독주도 상당히 기세가 꺾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피폐해진 국민들의 의식에 켜진 경고등이다. 온갖 범죄자들과 인성파탄자들을 국회로 보낸 국민들이 과반수라는 점이다. 주로 학·교육계, 문화·예술계, 언론계 등 지식인층에 만연해온 좌경화 바람이 이제는 대다수 국민을 잠식한 상태다.무도와 광기가 난무하는 시대에 법치확립 등 국가기능의 정상화야말로 국민들의 의식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이다.

2024-07-11

대서(大暑)와 명리 이야기

24절기 가운데 열두 번째가 대서(大暑)다. 태양의 황경이 120도에 위치하며, 2024년에는 7월 22일(음력 6월 17일)이다. 음력으로는 6월의 절기다. 대서는 소서와 입추(立秋) 사이에 있다.대서(大暑)는 ‘큰 더위’라는 뜻이다. 일 년 가운데 가장 더운 때다. 소위 찜통더위, 불볕더위라고 한다. 소서 때부터 장마전선이 우리나라에 동서로 걸쳐지기 때문에 큰 장마가 자주 발생한다. 장마가 끝날 무렵 고온다습한 무더위가 절정에 이르며, 밤에는 열대야 현상 때문에 잠을 청하기에 괴로움이 따르는 시기다.농촌에서는 장마철에 부쩍 자라난 잡초를 베어 퇴비를 장만하고, 논밭에 무성한 김매기에 여념이 없다. 가을보리를 베어낸 터에 콩이나 팥 등을 심어 이모작을 하기도 한다. 속담으로는 ‘염소 뿔도 녹는다’가 있다. 즉, 무더위 때문에 염소 뿔도 대서 더위에 녹는다는 이야기다. 또 농사일로 가장 바쁜 때기에 ‘소서, 대서 하루 놀면 동지섣달 열흘 굶는다’는 말이 있다.대서에는 햇밀과 보리를 먹게 되고, 채소가 풍족하다. 참외와 수박 등 과실이 풍성하며, 과일이 가장 맛있을 때다. 한여름 태양 아래 단맛이 차오르지만, 비가 자주 오면 단맛이 희석된다. 수박은 가뭄 뒤에 제 맛을 낸다고 해 대서의 수박을 가장 좋게 쳤다. 저녁 땅거미가 내리면 박꽃은 하얗게 피어나고, 새벽 햇살에 호박꽃과 나팔꽃도 핀다. 또한 대추, 밤, 호두도 영글어간다. 산에는 으름과 다래가, 산길에는 산딸기가 익어간다.명리학에서 대서는 미월(未月)에 해당하며, 소서와 대서를 포함하고 있다. 미(未)는 오행으로 토(土)이며 조토(燥土)다. 즉,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황량하고 메마른 땅이다. 미시(未時)는 화(火)기운이 정점에 달하고, 하루 중 가장 더운 때다. 양기가 왕성한 가운데, 음기도 서서히 일어나 만물을 생육하고 기르는 기간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떨치나 이미 가을을 향하고 있다. 음양의 극적인 대립으로 인해 장마와 태풍이라는 자연현상을 자주 보여준다.사주에 미(未)가 있는 사람은 화(火)의 불타오르는 성질로 인해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희생정신이 있다. 뒷끝이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기 방어적이고 민감한 성격으로 모성애가 남다르다. 자신과 가정을 위해 무엇이든 축적하려는 성향이 있다. 폭발력과 급한 성격으로 인한 자존심과 고집 때문에 피해를 입을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사교와 화술이 뛰어나 구설수가 따른다. 또한 남의 간섭을 싫어하는 성격 탓에 외톨이가 될 수 있으니 자중해야 한다.대서(大暑)를 전후해 민간에서는 햇볕에 옷을 말리고, 사찰에서는 경서를 꺼내어 습기를 제거하기도 했다. 무더운 낮에 갑자기 폭우가 내린 뒤에 미꾸라지들이 마당에 떨어지는 일이 종종 있다. 빗줄기를 타고 하늘로 치솟았다가 땅으로 떨어진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해먹으면 기운이 솟구친다는 속설이 있다.대서 때에는 흙이 습하고 뜨거워지며 종종 큰비가 내린다. 이때부터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니 구석진 곳에서 귀뚜라미가 보이고, 매가 후려치는 연습을 하며, 썩은 풀이 반딧불로 변한다고 한다. ‘태평어람’에서 허신은 ‘풀이 음기를 얻으면 죽는다. 음(陰)이 지극해지면 그 가운데서 오히려 양(陽)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썩은 풀이 반딧불로 변하는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즉, 한대(漢代) 사람들은 썩은 풀 주변에 반딧불이 모여드는 광경을 보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변한다고 생각한 것이다.대서 기간에 백중(百中·음력 7월 15일)이 있다. 백중은 불교에서는 우란분절이라고 하며, 스님이 수행하는 하안거가 끝나는 날이기도 하다. 이때 영가들을 위한 천도재를 봉행하기도 한다. 이 무렵에 갖가지 과일과 채소가 많아 100가지 곡식의 씨앗을 갖추어 놓았다고 해서 백종(百種)이라고도 칭한다. 또한 돌아가신 조상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음식, 과일, 술을 차려놓고 천신(薦新·철따라 새로 난 과일이나 곡식을 처음으로 신위에 올리는 일)을 하였으므로 ‘망혼일’이란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미(未)는 주역으로 보면 천산둔(天山遯)괘다. 위로는 양효가 4개 있으며, 아래로는 음효가 2개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다. 흔히 소인의 세력이 자라나는 괘로 풀이한다. 소인이 아래로부터 득세해 올라오니 군자가 그 세(勢)에 밀려 스스로 물려나는 은둔의 괘라는 것이다. 그래서 ‘둔(遯)’이란 괘명이 됐다.‘설문해자’에 의하면 둔(遯)은 착(辶)자와 돈(豚)자가 합쳐진 것이다. 집에서 기르는 돼지가 우리에서 뛰쳐나와 도망하는 것은 더 이상 갇혀 있다가는 굶어 죽게 생겼기 때문이다. 챙겨줄 주인이 없으니 스스로 살 길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원래 돼지는 가(家)의 상징이다.‘가(家)’란 글자는 돼지(豕)를 기르며 한 울타리(宀)에 모여 사는 혈연집단을 묘사하는 글자다. 둔(遯)은 국가가 허물어지는 모습을 돼지가 우리를 벗어나 도망하는 것으로 비유한 셈이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천산둔괘는 하늘 아래 산이 있는 형상이다. 산은 높고 낮음이 있다. 그러므로 함께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인간사로 말하면 지위가 다른 사람이 함께 서 있는 것과 같다. 낮은 산이 높은 산을 보고 욕심을 낼 리야 없지만, 인간사는 그렇지 않다. 어차피 산의 높이가 같을 수 없듯 사람의 지위도 같을 수 없는 일이고 보면,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 외는 다른 길이 없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망은 파멸에 이르러서야 깨닫는 법이다.주역은 인간사와 자연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다간 자칫 전체 맥락을 놓치기 쉽다. 인간사로 말하면 부부관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지만, 자연에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 자연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이 어렵다. 인간사에서도 시대의 부침에 따라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대서의 무더운 여름도 다가올 처서(處暑)에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는 이치를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2024-07-10

과일가게 아저씨

윤명희 수필가 효자동에 원두막이 있다. 원두막이라는 상호가 과수원을 연상케 한다. 가게 앞에는 이제 막 물건을 내렸는지 화물칸이 정리되지 않은 그의 차가 있었다. 미소가 젊은 그는 나를 보자 의자부터 당겼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과일 상자에서 싱싱한 달콤함이 팝콘 터지듯 했다. 손님이 들어서자, 그가 일어섰다. 서너 살쯤 보이는 남자 아이가 익숙한 듯이 진열대로 바로 간다. 아이의 엄마가 어제 아침에 사간 걸 벌써 다 먹었다며, 과일 값이 감당이 안 된다는 말을 툭 던졌다. 그녀의 말에 나는 그들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녀가 참외를 코에 대고 잘 익었는지 확인했다. 그는 참외 몇 개를 봉지에 담아 건네며 뜬금없는 말을 했다.“새댁, 둘째 낳으라니까”아니,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저런 말을? 결혼과 아이 낳으라는 말은 부모한테도 듣기 싫어하는 요즘 세대 아닌가. 내가 아들한테 결혼의 결자만 꺼내도 눈동자가 반은 돌아가는데 손님에게? 처음 듣는 게 아니라는 듯이 그녀는 아직 생각 중이라며 웃었다. 그는 방울토마토 몇 개를 씻어 아이의 양손에 쥐어주었다. 아이가 배꼽인사를 하고는 엄마보다 앞서 가게를 나선다. 그는 가게 밖까지 나가 손을 흔들었다.젊은 사람한테 무슨 소리 들으려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자, 단골손님들에게는 둘째 낳으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했다. 보는 이 마다 둘째 백일잔치 상을 최고 싱싱한 과일로 채워주겠다고 정치인이 유세 하듯이 해서, 이젠 아파트 주민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벌써 몇 집이나 과일 상을 차려주었다고 했다.“남의 자식에게 말 할 입장이 아닌 건 알지만….”그가 말끝을 흐렸다. 몇 해 전 봄에 결혼 한 그의 딸이 생각났다. 좋은 소식 없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는 딸이 공부 중이라 손자 이야기는 당최 입에 담지도 못 한다고 했다. 그나마 그 딸은 결혼이라도 했지, 항상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첫째는 아예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비혼주의라는 말로 자기에게까지 건너 올 눈총을 애초에 잘라버리는 막내까지 둔 마당에 무슨 말을 하겠냐며 손을 내저었다.애를 낳고 사는 내 딸의 일상을 얘기하려는데, TV에서 애 낳으면 1억 준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하려던 말을 삼킨 나는 1억 준다는 저 말을 젊은 애들에게 하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며 일어섰다.가게를 나서자, 전화벨이 울렸다. 딸은 유치원 가방을 메고 뛰어가는 아이들을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큰애가 걸음을 멈추고 폰 화면에 얼굴을 들이민다. 흔드는 작은 손이 보이더니, 화면이 작은애에게 간다. 개미를 발견했는지 녀석이 땅바닥에 코를 박을 듯이 내려다보고 있다. 방금 들은 1억 준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만지면 안 된다는 딸의 다급한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긴다.딸은 첫애를 가지면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아이 뒤치다꺼리에 잠 한 번 실컷 자 보는 게 소원이라던 딸에게 덜컥 연년생으로 둘째가 안겨졌다. 작은아이가 장염이 걸리면 큰아이도 따라 자리에 눕고, 한 녀석이 콧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또 한 녀석이 깔축없이 뒤따라 재채기를 해댔다. 먹고사는 일에 바쁜 나는 힘들어 하는 딸에게 자주 가보지도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볼 뿐이었다.큰손자가 폐렴으로 입원하고 며칠 후, 나는 모든 일을 제치고 서울 행 기차를 타야만했다. 딸은 나를 보자 대성통곡을 했다. 껌 딱지처럼 등에 업힌 작은 녀석도 따라 눈물바람이다. 나는 그저 안고 토닥여주는 게 전부였다. 병실바닥에는 기저귀와 장난감이 널브러져 있고,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는 먹다 만 배달음식이 있었다. 링거 줄에 붙잡힌 큰애가 폴대에 올라앉았다. 바깥에 나가자는 신호다. 나는 몇날 며칠 동안 병원복도에서 링거 폴대를 밀고 다녀야했다. 퇴근 후 병실을 찾은 사위는 병원에서 밤을 보내고 퀭한 눈으로 아침 일찍 출근했다.과일로 백일상 차려 준다는 약속 위에 나라에서 돈까지 준다는 말이 얹어지면, 조금 전 과일가게에서 본 새댁은 맛있는 말에 귀가 열리고 마음까지 열릴까. 경력단절에 속상한 딸에게 애는 내가 봐주겠다는 빈말도 못하면서도 과일가게 아저씨처럼 나는 아들의 결혼을 꿈꾼다.

2024-07-10

영국 귀족이 키가 작은 이유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먹는 게 고급이고 자라는 환경도 위생적이다. 게다가 유년기부터 폴로와 사냥으로 다져졌기에 체격이 크고 훤칠할 수밖에 없는 성장 조건.영국 귀족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상하다. 공작과 후작, 백작과 남작 작위를 가진 영국인 후손들의 키가 20세기 초반에 부쩍 작아졌다. 왜일까?세계 제1차대전. 영국 귀족들이 장교로 대거 입대한다. 기마병을 이끌던 경우가 흔했다. 전투에 나선 귀족 출신 장교들은 병사를 앞세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 명령만 내리는 걸 ‘비겁’이라 인식했다.총알 쏟아지는 전장에서 가장 먼저 돌격했고, 수많은 귀족 장교들이 전사했다. 모두 키 크고 허우대 좋은 청년들. 그들이 떼죽음을 했으니 유전 법칙에 따라 영국 귀족 후손들 키가 눈에 띄게 작아진 것이라고.군대 지휘관은 솔선하고 책임지는 자리다. 별을 달고 으스대는 자리가 아니다. 2차대전에서 영국과 맞붙었던 독일의 지휘부 중 다수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 선전부장관 요제프 괴벨스. ‘추악한 나치’라고 비난받아 마땅한 이들이지만, 그건 별개의 문제로 치고.군인다운 군인, 장교다운 장교가 드물어진 세상이다. 한국 60만 군인 중 장성은 겨우 400여 명. 최고위급 지휘관인 장성이 술에 취해 민간인과 불화를 일으키고, 부하의 손바닥에 담뱃재를 털고,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에서 일어난 사고의 책임을 피해가려는 태도로 시종하고….경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수해 현장에서 숨진 채모 상병 부대의 최고 지휘관 임성근 소장은 ‘혐의가 없다’고 한다. 해병대 출신 지인이 한숨을 쉰다. “이러니 영이 설 수 있겠어요?”/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7-10

대입제도를 어찌해야 하나

장규열 고문 대학입시 제도는 오랫동안 인생의 경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관문이 되었다. 최근 대입과 관련한 문제점들이 드러나면서 대입제도 전반에 대한 재검토와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특히, 의대정원의 급격한 확대로 인한 정부와의 갈등, 의대로의 집중현상, 문과와 이과의 전근대적인 분리와 차별인식은 심각한 문제로 드러난다.의대정원은 한정되었지만, 의대를 지망하는 학생들의 숫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의사라는 직업이 안정적인 고소득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의대집중현상은 입시 경쟁을 과열시키면서 학생들에게는 일반적인 이공계나 인문학 분야에 대한 관심을 잃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국가의 과학기술 경쟁력은 낮아지고 다양한 분야에서의 인재발굴과 육성이 어려워진다.의대에 대한 지나친 집중은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부정적 요인이 되었다. 문과와 이과를 분리하는 태도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직업 선택과 융합적 사고를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한다. 전통적으로 문과는 인문학, 사회과학, 법학 등으로, 이과는 자연과학, 공학, 의학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같은 분리는 학생들이 자신이 진정으로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선입견과 차별의식을 조장하도록 유도한다. 다학제적 접근과 융합적 사고가 점점 중요해져 가는데, 문과와 이과의 분리는 이러한 흐름에 역행하게 만드는 것이다.이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학입시 제도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할 필요가 있다. 의대정원을 현실적으로 조정하고 다양한 이공계와 인문사회 분야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 차원에서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바, 문과와 이과의 분리를 해소하고 학생들이 적성과 흥미에 따라 자유롭고 폭넓게 진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대학입시 제도를 보다 유연하고 포괄적으로 개편해야 한다.학생들의 다양한 잠재력을 적절하게 평가하는 종합적인 사정(査定)시스템을 도입하고, 특정 분야에 대한 편향된 지원경향을 줄이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교과 성적 외에도 창의적 문제해결 능력, 리더십 역량, 사회적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을 터이다. 대학과 기업, 관공서와 연구소 등이 협력하여 다양한 실습과 현장경험을 제공하여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실제로 실무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한국의 대학입시 제도는 현재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의대정원 문제와 문-이과 분리문제는 단순한 입시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과학 경쟁력과 사회 전반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학생들이 적성과 흥미를 따라 방향과 진로를 선택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한국교육의 미래와 국가사회의 나아갈 길을 밝게 하는 길이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협력하여 대학입시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대학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4-07-10

방치농법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3주 정도 비웠던 모두의 집에 들어간 순간, 와…. 말문이 턱 막혔다. 우물 부근엔 내 키보다 더 자란 뽀얀 개망초꽃이 뒤덮었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마당도 마치 풀밭 같아 주인없는 폐가 느낌이었다. 작년 백일홍이 찬란했던 꽃밭터도 개망초꽃밭이 되어 있었다. 이를 어쩌나. 풀밭을 그대로 두나, 꽃밭을 만들기엔 너무 힘들고 시간도 늦었지 않을까 머릿속을 굴렸지만 답이 안 나왔다.그러나 텃밭은 그렇지 않았다. 3월과 4월에 흙을 일구고 풀을 뽑고 퇴비를 섞어 찰진 텃밭을 일구었다. 작년 기승부리며 자란 풀 때문에 채소 재미가 적었기에 미리 대비한다고 검은 비닐을 사서 멀칭도 해두었다. 오일장 서는 곳마다 가서 사와 심은 채소 모종들은 키높이를 맞추어 심었다. 가장자리엔 키가 높이 클 토마토와 방울토마토, 그 앞줄엔 쑥갓과 고추모종을 나란히 심었다.양배추, 오이와 콜라비는 앞쪽으로 몇 포기씩 줄을 맞추어 깔아주었다. 호박과 옥수수와 들깨는 담장 저켠으로 좀더 멀찍이 심었다. 자주 물 주러 가서 오목조목 자라는 모습을 즐기고, 하얀 고추꽃, 노란 오이꽃과 호박꽃을 흐뭇하게 보면서 왠지 큰 수확을 할 것 같은 기분좋은 예감도 있었다. 양배춧잎, 콜라비잎, 들깻잎과 쑥갓을 따서 쌈 싸먹는 재미를 누리다가 5월 중순부터 거의 3주를 못 갔다. 미처 세우지 못한 고춧대를 아들에게 부탁했고 아들은 약속을 지켰고 사진까지 보내줬다. 그 덕분에 조롱조롱 맺혀있는 연두색 고추가 감탄스러울 정도로 많이 열렸다. 누렇게 달린 늙은 오이와 꼬부라진 오이가 여럿 뒹굴고, 그 옆엔 새끼손가락만한 오이가 꽃까지 단 채 여럿 맺혀있었다.애기 머리통만큼 큰 자색 콜라비도 실하게 자라있었다. 자라다 무게를 못 이겨 흙 위에서 뒹굴고 있는 토마토는 잎 속에 붉고 푸른 열매를 감추고 있고, 익어 터져버린 열매가 땅 위에 그득했다. 마치 하얀 마가렛꽃처럼 앙증맞고 예쁘게 꽃 핀 쑥갓은 해맑게 생글거리고 있었다. 양배추는 넓고 푸른 잎마다 벌레들이 구멍을 내어 멀쩡한 게 없었다. 양배추에 농약을 심하게 친다더니 과연 그렇겠구나.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땅을 덮은 검은 비닐의 작은 틈을 비집고 나온 풀들과 엉겨있었다. 풀을 뽑아주지 못한 터에 이 사달이 난 거였다.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잎 사이를 비집고 방울토마토를 땄다. 다 자란 고추를 골라 따고, 늙은 오이와 젊은 오이도 비틀어 따고, 콜라비도 그 중 큰 놈을 하나 골라 뿌리째 뽑았다. 호박더미를 뒤지니 애호박도 숨어있어 두어 개 건졌다. 향기로운 들깻잎도 잎 넓은 것으로 몇 장 땄다. 순식간에 바구니 두 개가 그득했다. 고마워라 고마워라 감탄하면서 미안해하면서 수확한 채소들이 엄청났다.방치농법이란 말을 듣고 옳다구나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수확물이 생기니 딱이다 싶은 말이었다. 더 알아보니 자연농법이란 게 있다. 자연이 짓고 인간은 시중드는 농법이라고 한다. 게으른 농법이 아니라 예사농사보다 품이 더 많이 들 것 같았다. 난 그저 방치를 최소화해서 싱싱한 밥상을 차려준 채소들에게 고마움의 예를 갖출 정도의 위인일 뿐이다.

2024-07-10

건강의 처음과 끝은 음식조절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모든 동물의 인생은 단순화 시키면 태어나서 먹고 자고 죽는다. 태어나면 그때부터 생존을 위해 외부의 에너지를 섭취한다. 외부 에너지 섭취 없인 모든 생명은 죽는다. 우주의 법칙이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생물은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에너지의 섭취이다. 음식물의 섭취가 내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음식은 입에 들어와서 잘게 쪼개진 후 식도를 통해서 위장으로 내려가고 음식물의 종류에 따라 1시간에서 5시간 정도 머물면서 분해된다. 십이지장을 지나 소장에 도달한다.십이지장에서 여러 소화를 도와주는 이자액과 담즙액이 더해지고 소장에서 융털을 통해 영양분이 흡수된다. 그 후 남은 찌꺼기는 대장을 통해 대변으로 배출된다.소화가 잘되는 음식들은 위장에서 빨리 분해되고 기름기가 많은 튀김류는 오랫동안 분해되지 않고 위장에 머문다. 위장에 머무는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위장과 주변 장기들이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위장의 자극도 심해진다. 고춧가루나 자극성이 강한 음식들은 위벽과 주변장기들까지도 자극을 줘서 염증이나 궤양을 발생시킬 수 있다.내 눈에 고춧가루를 뿌리면 눈이 따갑듯이 내 몸속의 장기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튀김이나 기름진 음식과 함께 범벅된 고춧가루와 자극성 있는 음식들은 위장에 5시간 이상 정도 머물면서 위장을 망가뜨리고 파괴한다. 위장만이 아니라 십이지장 소장 대장을 지나가면서 모든 장기들에 자극을 주고 염증을 발생시킨다. 수년, 수십년이 반복되면 영구적인 기능 이상이 일어난다. 암이나 당뇨 같은 성인병 등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다.내 몸속 장기를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쉽다. 음식을 깨끗한 것으로 바꿔야 한다. 현미나 잡곡밥을 입에서 100번 씹어 죽으로 만든 후 위장으로 보낸다. 반찬은 최대한 간이 덜된 것으로 하고 싱거울수록, 양념이 덜 될수록 좋다. 반찬 역시 100번 씹어 죽으로 만든 후 삼킨다. 이렇게 하면 위장에서 하는 일이 줄어들어 위장의 부담이 거의 없어지고 소화 기관이 튼튼해진다. 튀김 같은 식물성 기름의 섭취는 최대한 제한을 하고 고기도 살코기 위주로 먹되 양을 줄이고 역시 100번 씹어 죽으로 만든 후 삼킨다. 조리가 덜된 야채를 먹고 나물을 짜지 않게 조리한 뒤 다양하게 먹는다. 채소는 섬유질이 많은데 특히 많이 씹어 삼키면 채소에 있는 우리 몸에 좋은 피토케미컬을 섭취할 수 있다. 국은 먹지 않는다. 고춧가루 설탕 물엿 등의 양념도 하지 않고 넣더라도 아주 조금만 넣는다.처음엔 힘들더라도 먹다 보면 적응이 되고 1주 2주 한달 해 보면 건강이 좋아지는 걸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덤으로 살도 엄청나게 빠진다. 아주 간단하나 가장 하기 힘든 방법이며 이 방법은 암이나 난치질환 같은 모든 질환에 적용이 가능하다. 극단적으로는 고기도 먹지 않는 것이 좋으나 그렇게 하면 너무 힘드니 살코기는 소량을 먹으면 된다. 한 달, 두 달, 세 달이 지나면 내 몸이 봄에 피어나는 새싹처럼 살아나는 것이 느껴지고 평생 하면 질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

2024-07-10

무표정한 전시공간 ‘화이트 큐브’

미술관을 찾아 작품을 보고 즐기는 것은 중요한 문화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지난 20년 사이 한국에도 많은 미술관들이 지어졌고 지금도 여러 지역에서 미술관 설립을 추진하거나 개관을 앞두고 있다. 대도시는 물론이고 작은 마을 곳곳에 미술관이 있는 서유럽 국가들이나 일본처럼 우리도 생활공간 가까운 곳에서 어렵지 않게 미술을 접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미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고 그에 반비례해 높게만 느껴졌던 심리적 장벽은 한 층 낮아지고 있다.미술관은 소장한 다양한 미술작품을 소개하거나 작품들을 하나의 주제나 특정한 맥락으로 묶어 전시의 형태로 보여준다. 이렇게 우리에게 미술은 미술관이라고 하는 장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은 비교적 현대에와서 생겨난 것인데 그 뿌리는 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16세기 이후 독일어권 귀족사회에서 유행한 이른바 ‘분더캄머(Wunderkammer)’에서 찾을 수 있다. 분더캄머는 개인이 수집한 진귀한 물건들을 모아 놓은 방으로 영미지역에서는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이라고 불렀다. 모으고 수집한 물건들을 진열하고 보여주는 분더캄머가 박물관으로 진화했고 소장품을 미술작품으로 한정지어 보여주는 곳이 미술관인 셈이다.우리가 미술작품 감상을 위해 미술관을 찾듯이 미술작품을 창작하는 미술가들 역시 전시를 목적으로 작품을 창작한다. 19세기 무렵 공공 미술관이 활성화된 것과 맞물려 미술가들은 전시를 위해 미술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현대미술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종종 전통미술에 맞선 진취적인 미술가들의 과감한 실험이 관찰되기는 하지만 현대미술의 태동을 가속화한 주요 사회적 변화는 무엇보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다. 현대미술은 전통미술이 고수해온 거의 모든 부분에 변화를 가져왔다. 작품의 주제와 표현방식, 미술의 목적과 감상 그리고 소비되는 방에 이르기 까지 미술 전 영역에서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현대미술과 함께 나타나는 여러 변화들 중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전시를 통해 소개된 미술작품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등 사회적으로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현대미술 이전 시대의 미술작품은 전시를 위해 제작되지 않았다. 미술작품은 성격에 따라 크게 종교미술과 세속미술로 분류되는데 어느 경우에 속하든 개별작품에는 분명한 기능과 목적이 있었다. 종교적 목적으로 제작된 작품은 교회를 비롯해 종교적 장소에 설치되어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세속적인 목적의 작품은 권력과 관계된 장소 혹은 누군가의 사적공간 어딘가를 장식했을 것이다. 이렇듯 미술작품은 장소와 공간, 기능과 목적으로 부터 분리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작품은 장소와, 장소는 작품과 연결되어 밀접하게 있었고, 작품과 장소는 하나의 전체를 구성했다. 미술관이 나타나고 작품이 미술관에 전시되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미술관의 전시공간은 중성적이고 중립적이다. 가급적 드러나지 않도록 흰색으로 칠해진 벽면은 무표정한 큐브형태의 공간을 만든다. 그래서 정형화된 전시공간을 ‘화이트 큐브(White Cube)’라 부르기도 한다. 배경이 되는 흰색벽에 작품이 걸리게 되면 어떤 작품이라도 그것이 지녔던 원래의 맥락은 공간에 희석되고 만다. 모든 작품은 창작의 과정 속에서, 그리고 완성되고 소장자의 손에 넘어간 이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맥락과 관계하며 그 의미를 확장시켜나간다. 그런데 미술작품이 미술관의 벽에 걸리는 순간 그러한 개별적 맥락성이 희미해 진다. 또한 작품이 지나온 개별적 시간성 역시 흐려진다. 대신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전시라는 새로운 맥락 속에서 이웃하는 다른 작품들과 복잡다단한 미학적 관계를 맺으며 생명을 이어간다./김석모 미술사학자

2024-07-09

지구에는 나무가 있어서

“지구에는 산이 있어서 아름답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지만, 나는 지구에는 나무가 있어서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하느님이 만드신 만물 가운데 나무만큼 아름답고 착하고 성스럽기까지 한 목숨이 또 있겠는가? 이 세상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하고 모든 목숨을 살아 숨 쉬게 하는 나무들, 그 나무들은 저마다 모양과 빛깔과 크기와 생태가 다르지만 서로 어울리고 도와주고 채워준다. 그래서 모든 나무들이 다 제자리에 있어 제 할 일을 하면서 빛을 뿌린다.”‘이오덕의 자연과 사람이야기- 나무처럼 산처럼’에 나오는 말이다. 청송이 고향인 이오덕 선생님은 아동 문학가이며 교육자로 평생을 우리말 살리기 운동에 앞장섰던 분이다. 교단에서 퇴직하는 그날까지 시골 학교만을 두루 다니며 아이들과 함께 자연을 벗하며 사셨다. 내가 선생님을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까닭은 전 국민이 표준말을 강요받던 시대에 아이들에게 부모님이 쓰던 입말 그대로 글쓰기를 하라고 가르쳤던 점이다. 선생님은 그렇게 해야 아이들이 부모님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고 여기셨다.이오덕 선생님은 많은 나무들 중에서 특히 감나무를 좋아하셨다. 선생님 기억 속 감꽃은 보릿고개의 허기를 달래주는 고마운 꽃이었다. 푸른 잎을 매단 감나무의 노래는 참새들을 불러서 안아주고, 발밑으로 내려가 개미들이 가는 길을 밝혀주고, 지렁이와 다람쥐들이 한 식구가 되게 한다고 했다.감나무 가지만큼 너그럽고 자유롭게 뻗어가는 나무는 없다고도 했다. 뻗어 나가던 가지가 다른 가지와 부딪칠 성싶으면 곧장 방향을 틀어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다시 뻗는다. 아름답게 하늘을 채운 겨울 감나무를 쳐다보고 있으면 나무의 성자란 생각이 든다고 하셨다. 실제로 그러한 특성 덕분에 다른 과일나무와 달리 감나무는 가지치기를 하지 않는다.선생님의 동시에는 감나무 못지않게 포플러나무를 예찬한 것들이 많다.“눈부신 수만의 비늘을 단/ 물고기/ 호수에 잉어가 꼬리 치듯/ 하늘에는 포플러가 살아간다./ 파도 소리보다 더 찬란한 호흡으로/ 흐느끼며 헤엄치는/ 그 곁에 내가 서면/ 구부러진 허리가 죽 펴지고/ 겨드랑이에 푸른 날개가 돋는다.”- ‘포플러 1 전문’이오덕 선생님이 교사 시절 잠시 머물렀던 화목초등학교 앞 넓은 신작로 양쪽으로는 키 큰 포플러 나무가 많았다. 아이들과 함께 그 길을 오가며 행복에 겨운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는 걸 선생님 펴내신 책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포플러라는 이름은 라틴어 민중(Populus)에서 왔다고 한다. 가지를 옆으로 뻗지 않아 햇볕을 가리지 않음으로써 다른 나무들과 더불어 사는 것도 포플러가 가진 특성이다. 나비나 나방의 애벌레가 포플러에 기대 살면서 작은 생태계가 형성되는데 어떤 나무보다 애벌레를 많이 키워낸다.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으면서 으깨지면 특유한 향을 발산해 더 많은 애벌레와 곤충이 모여드는 것이다. 하늘 높이 키가 자라서 새가 안정감을 느끼고 둥지도 많이 짓는다.그러고 보면 포플러는 평생을 아이들과 함께하며 아이들을 위해 사셨던 이오덕 선생님을 많이 닮은 나무다. 하지만 포플러에서 나온 꽃가루가 알레르기를 일으킨다는 엉뚱한 오해를 받고 나무는 가차 없이 베어졌다.나는 이런저런 일로 선생님의 생가가 있던 현서면 덕계리를 자주 지난다. 사라진 생가 부근엔 소박하기 그지없는 이오덕 작은 문학관이 있어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무처럼 사셨던 선생님을 떠올리고 고개가 숙여지곤 한다. 그런데 올해는 예년과 달리 선생님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 길을 지나기 힘이 든다.누구보다 나무를 사랑하고 자연을 노래했던 선생님의 고향에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까닭이다. 덕계리 주변 도로엔 그 옛날의 포플러 대신 은행나무 가로수가 눈부시게 펼쳐져 있다. 하지만 봄이 지나 녹음 우거진 계절이 되어도 몇몇 나무에서는 초록빛을 볼 수 없었다. 주변 과수원에서 빛이 들지 않아 농사에 방해가 된다며 나무에 몹쓸 짓을 한 것이다. 푸른 잎 하나 달지 못하고 맨 둥치로 서 있는 나무가 언제까지 버텨줄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그 길을 차들이 씽씽 내달린다. 볼수록 참담한 풍경이다. 박월수 수필가 나무는 지구별에 사는 생명체에게 베풀기만 하는 존재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하므로 대기를 맑게 하는데 이는 지구 가열화를 늦추는데 크나큰 도움을 준다. 뿌리로는 토양을 고정시켜 바람과 물로 인한 침식을 막는다. 또한 토양 흡수를 통해 오염 물질을 제거하기도 한다. 그뿐인가 많은 생물들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생태계의 안정성과 다양성을 유지하는데 기여한다. 이오덕 선생님은 오래전, 감나무 아래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푸른 잎들 속에 숨어 어린 새소리를 듣고 감 잎사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파란 하늘을 본 이는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의 세계에 와서 숨 쉬고 있다는 행복감에 젖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구에는 나무가 있어서 시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산다. 바라보기만 해도 위안이 되는 나무를 헤치는 사람은 마음에 병이든 사람이다.◇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박월수 수필가

2024-07-09

일본기업의 혁신문화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기업의 미래가 있는 것은 혁신적인 사고와 개선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초경쟁시대에 혁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일반적인 생각으로 미래 경쟁력의 중심에 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경제 선진국 일본 기업이 고객의 사랑을 받고 지속 가능한 경영이 되는 것은 품질우선주의로 고객의 신뢰를 얻는 것에서 시작된다. 일본 기업의 혁신 문화는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서구 기술과 문화를 수용하며 품질관리와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경영기법으로 발전해 왔다.1901년 야하다제철소(현재 일본제철)가 탄생하며 강재 생산이 시작되었고 초기 미국 품질관리 전문가 데밍의 영향을 받아 전사적 품질관리(TQC: Total Quality Control)로 양질의 제품을 고객에게 공급하는 경영 방식이다. 일본 기업의 혁신 문화와 특징은 무엇이 있을까.일본 기업 혁신 문화와 특징은 개선(改善), 일본어로 카이젠(Kaizen)이다. 최고의 품질을 고객에게 공급하기 위해 전 직원이 참여하는 ‘끊임없는 개선’이 기업의 혁신 문화로 자리매김 했다. 필자가 일본을 여러 해 컨설팅 하면서 느낀 것은 일본 기업 혁신을 이해하려면 사회문화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문화는 오랫동안 내려온 정치, 종교, 사회 전반의 변화에서 형성 된 국민성이다. 일본 기업의 혁신 문화 형성의 근간은 국민성과 직결됨을 알 수 있다. 전원 참여 ‘끊임없는 개선’의 카이젠 문화는 사무라이 정신에서 시작된다.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60개 성 싸움을 하는 과정에 무사의 룰을 만들어 지키지 않으면 목에 칼이 들어 온다. 첩자와 간자가 있으면 한 순간 전쟁에서 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과정에서 보면, 10개 작업의 순서가 있으면 무조건 지킨다. 10개 작업 과정에 낭비를 찾아 끊임없이 개선하기에 후퇴하는 것이 없고 계단식 전진 문화만 있을 뿐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선진 기업이 되는 것은 이러한 개선 문화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일본 기업의 혁신 문화는 크게 다음 내용으로 형성된다. 첫째, 낭비 없는 린(Lean) 생산방식이다. 사회적 필요에 따라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싸게 생산해서 필요한 때에 공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생산 프로세스 내에 미래 강재를 포함하는 생산 조건의 불합리를 찾고 한 발 앞 선 AI기술 등을 적용하며 끊임없는 개선으로 스마트 한 생산 요건을 갖추어 간다. 둘째, 강종 개발이다. 미래 사회에 필요로 하는 강재를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해 RD 투자를 지속하고 새로운 강재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다. 셋째, 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기업이다. 지역 시민 발전과 기업 문화를 공유하고 지구환경을 위해 탄소중립 친환경 공법의 제철소를 구축해나가는 것이다.훌륭한 기업 혁신 문화는 직원들이 공감하는 현실적이고 미래가 있는 경영 방향에서 시작된다. 오랜 시간 흘러온 국민성과 자사의 조직문화를 이해하고 기업의 성장 비전과 목표 달성에 맞는 혁신 기법, 운영시스템을 체계화 해야 가치 있고 흔들리지 않은 선진기업 혁신 문화로 갈 수 있다.

2024-07-09

동서공감 시낭송의 향기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어디선가 치자꽃 향기가 날려 올 듯한 7월이다. 제주에서는 치자꽃이 피면 장마가 시작된다는 말이 있는데, 보름 전쯤부터 장마가 시작됐으니 아마도 제주의 치자꽃은 꽃망울을 활짝 터트렸으리라 여겨진다. 유난히 진하고 멀리 간다는 치자꽃 향기가 들판을 채우면 세상은 한바탕 뜨거운 신열을 앓듯 후끈한 여름의 열기 속으로 빠져들 태세다. 땡볕과 폭염, 장마에 지쳐갈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바람 결에 날려오는 치자꽃 은은한 향기는 여름날의 청량제 같은 시원함이 있지 않을까 싶다.7월이 치자꽃 향기를 몰고 오듯이 여름을 맞이하는 가슴을 시낭송의 향기로 채워가는 사람들이 있다. 시의 행간을 목소리의 예술로 채우면서 시낭송의 꿈과 상상의 나래 속에 감성과 재능의 여울로 물들이고 익어가며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역과 지방 사람들이 오가며 만나 시와 낭송의 향기를 피우고 어우러지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이들은 ‘시낭송 포럼 동서공감’을 해마다 열면서 화합과 우정을 다지고 있다.시를 통해 영·호남이 하나가 되는 자리, 문화와 예술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대구와 경북의 시인·시낭송가들과 전북에서 활동하는 시인·시낭송가들이 동서의 벽을 허물고 경계의 선을 넘어서 오롯이 시와 시낭송을 매개로 만나서 문학과 예술의 세계에 빠져드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1년에 한, 두 차례씩 전라도와 경상도를 오고 가며 시를 전하고 시를 닮아가는 고운 눈빛으로 영호남의 시낭송가들이 교류하고 공감하는 일은 지역화합과 상생협력 차원에서도 바람직하고 가상한 일로 여겨진다. 그렇게 교감하고 우정을 나눠온지 올해 10년째를 맞았다.올해는 ‘너의 하늘을 봐’라는 주제에 ‘다시금 새롭게, 다함께 더 멀리, 함께 가요 우리!’라는 부제로 전북재능시낭송협회가 주최·주관하여 지난 주 전주교육대학교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밤하늘의 별을 다채로운 시낭송과 시극의 변주로 노래하고, 꽃과 달빛에 스며드는 애틋한 시를 품으며 절망이 희망을 낳던 밤에도 별을 만지듯 기다리다가 민들레 꽃으로 피어나는 시의 울림과 떨림은, 강물을 터놓는 기쁨으로 감동을 물결치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그러한 자리에 본인들의 시가 어떻게 목소리의 예술로 그려지고 음향과 영상을 결들인 새로운 콘텐츠로 재탄생해 세상에 다가가는지 시인 자신들이 직접 참석해 한결 자리가 빛났던 것 같다.‘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내가 모든 사람들을/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그가 지닌 향기를/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레일 수 있다면/어쩌면 마지막으로/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우리의 삶 자체가/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이해인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중에서시낭송이란 생명의 언어로 만들어진 시를 우아한 육성으로 전함으로써 시 본연의 의미와 가치를 더해 주는 소리 표현의 미학이자 예술이다. 향기로운 시를 더욱 맛깔스럽게 하는 시낭송의 전파로 동서가 교감하고 남북이 더불어 공감하는 계기가 된다면 동질감 회복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시낭송으로 더욱 행복해지는 동서공감의 융성을 기대해본다.

2024-07-09

‘부자감세’ 정부…양극화 그늘 안보이나

심충택 논설위원 정부가 내년부터 ‘기업주가 밸류업’과 법인·소득·상속세 감면을 추진한다고 최근 밝혔다. 모두 재계의 오래된 민원이다. 기업주가 밸류업은 배당과 자사주 소각으로 주주환원을 늘린 기업에 대해 법인세를 깎아주고, 해당 기업 주주에게도 세금 감면 혜택을 주는 제도다.결국은 ‘부(富)의 집중’을 인정하자는 정책이다. 우리나라의 부의 집중도는 증시 시가총액을 보면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우리 증시에서 4대 대기업 가문(삼성, SK, LG, 현대자동차)이 보유한 주식의 시가총액은 전체의 70% 정도를 차지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에드워드 로이스가 “정치권력이 부의 불평등을 만든다”고 한 말에 실감이 가는 감세정책이다. 로이스는 권력층에서 자본이 있는 쪽으로 자본을 더 쏠리게 하는 제도를 만든다고 했다. 로이스가 언급한 제도는 세금과 부동산, 상속, 교육제도다. 그는 ‘가난이 조종되고 있다’는 책도 냈다. 그는 자본만큼이나 불평등하게 분배된 권력을 바로잡지 않고는 양극화를 몰아낼 수 없다고 했다.우리사회는 전 분야에서 양극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우선 소득이 상위 20%에게 집중되고 있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2024년 1·4분기 ‘소득 5분위별 가계수지 조사’ 내용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월 평균소득이 1분위(하위 20%)가구는 115만7000원인데 비해 5분위(상위 20%)가구는 1125만 8000원이다. 부자와 빈곤가구의 소득이 평균 10배 정도 차이가 난다.교육양극화도 충격적인 수준이다. 교육부가 발표한 ‘2023년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중3·고2대상)’를 보면, 부유층 아이들이 고가의 사교육 시장으로 몰려갈 동안 공교육에 의존해야 하는 가난한 아이들은 기초학력마저 무너지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고2 수학 과목 기초미달 비율은 계속 상승세를 타다 2022년에는 15.0%까지 올라갔다. 한글을 읽고 쓸 수는 있지만 해석력이 떨어지는 중·고생들도 증가하고 있다. 교육양극화는 졸업 후 직업과 소득의 격차로 이어진다.수도권·비수도권 간의 주택가격 양극화도 심각하다. 최근 수도권은 아파트 거래량이 늘어나고 일부 단지에서는 신고가(新高價)가 속출하고 있다. 그러나 대구경북을 비롯한 비수도권에서는 여전히 청약이 미달되고 ‘악성 미분양’ 물량이 쌓이고 있다. 빈부(貧富)를 가르는 주택가격 양극화는 앞으로 더 심화할 것이다.정부가 양극화의 심각성을 무시한 채 부자감세 정책에 몰두하는 모습은 국민 눈에 ‘민심은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비친다. 부자감세 정책은 결국 ‘계층이동 사다리’를 차버리겠다는 발상이다. 권력의 주축을 이루는 정부 고위 정책입안자나 정치인이 재계의 민원에 종속되면, 한국사회는 희망이 없다. 양극화가 이대로 지속되면 결혼도, 자녀도 포기하는 청년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민심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 그러려면 권력자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재산을 형성하고, 권력을 재생산하는지를 잘 감시해야 한다.

2024-07-09

찜통차 안전사고 예방법

우정구 논설위원 지난달 미국 텍사스에서 벌어진 일이다.바깥 온도가 37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던 날. 쇼핑몰 주차장에 세 자녀가 탄 차량을 놔두고 쇼핑을 즐기던 엄마가 아동 유기등의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뜨겁게 내리쬐는 더위로 차량안은 찜통을 방불케 했다. 어린아이 3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울고 있는 것을 지나가던 주민이 목격하고 경찰에 신고한 것. 다행히 어린이들은 무사히 구조됐으나 자칫 큰일 날뻔한 일이었다. 경찰은 50도가 넘는 차량안에서 세 자녀가 50분가량 갇혀 있었다고 말했다.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최근 미국에서는 올들어 벌써 7명의 어린아이가 찜통차 안에서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작년에도 30명의 어린아이가 부모의 무관심 등으로 찜통차 안에서 숨지는 일이 벌어졌다. 매년 비슷한 사고가 일어나고 있지만 당국의 홍보에도 사고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최근 일본에서 생긴 일. 한 유튜버 부부가 무더위 속에 차에 갇혀 울고 있는 두 살 딸아이를 곧바로 구하지 않고 반응을 지켜보는 영상을 올렸다가 많은 지탄을 받자 영상을 삭제한 일이 벌어졌다.우리나라에서도 간혹 찜통차에 아이를 두고 잠시 볼일을 보러갔다가 어린이가 열사병으로 숨지는 불행한 사고가 일어나고 있다. 잠깐이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조차 매우 위험하다.미국에서는 매년 같은 종류의 사고가 반복되자 ‘잠그기 전에 다시보기’(Look Before You Lock)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를 붙이는 캠페인도 벌인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이다. 찜통차 안전사고 예방법 정도는 알아야겠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7-09

이중기 시인의 회상하는 시의 궤도 “우야겠노. 그래도 우야겠노”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10년 전 고향의 후배이기도 한 이중기 시인에게서 자신의 시집 ‘시월’(삶창)을 전해 받으면서 늦은 시간까지 고향 영천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잠시 백신애문학기념사업회 대표를 맡아 달라고 하여 1여 년 소통한 인연이 있다. 그는 참 아름다운 시인이라는 생각에는 늘 변함이 없다.지난 시간과 공간을 기억하거나 회상하는 과정에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그 공간에 유통되던 방언이 출연한다. 영천 농민 시인인 이중기의 시에는 유독 역사성, 특히 10월 항쟁의 이야기를 재해석하면서 방언이 낯선 얼굴을 내민다. 10월 항쟁의 증언과 진혼의 시편들이 역사적 궤적과 일치하느냐의 문제는 별개로 삼더라도 그의 시편 속에는 영천의 숲속에 살던 분노한 사람들의 영혼을 불러내는 제의성을 띄고 있다. 마치 공수하는 언어의 모습으로 방언들이 빛을 드러낸다. 시인이 민란이냐 항쟁이냐를 평가하거나 재단할 만한 이유를 찾는다거나 화북에서 150여 명이 죽고 이직골에서 300여 명이 처분되었다는 풍문인지 사실인지의 문제를 뛰어넘은 한 시인의 회상적 상상력은 독자들을 환기하기에 충분하다. 예술의 프로파간다적 미묘한 힘이 사회비판적 기능과 엮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시문학은 직접적인 이데올로기가 될 수는 없다. 시는 깨끗하게 처리된 역사도 아니고 이념도 아니다.‘높게더기’, ‘한털뱅이’(서시), ‘깐깐오월’(가죽풍구), ‘생량머리’(밀수출), ‘질금’, ‘더꺼머리’(하곡수집령), ‘보쌀치기’, ‘쪼매만’, ‘쯔그렁’, ‘작달비’(도정 금지령), ‘노굿이’, ‘힘아리’, ‘가무살이’, ‘가치배미’, ‘전나귀’, ‘찔끔’, ‘아갈잡이’(공출량조사), ‘참지름’(영천아리랑), ‘중뜸’(옥장이 아버지), ‘성걸어’(배내기 소), ‘살결박’(새벽 북소리), ‘되직’(면죄부 장사), ‘살결박당한’(입산)과 같은 신선하고 아름다운 토속어가 시 곳곳에 묻혀있다. 그러나 시인의 작품은 대구, 경주, 포항으로 확대된 10월 항쟁이라는 사건을 친일파와 미군정이 빨갱이를 단죄하는 과정에 피를 흘렸던 민중들의 시각을 대변하기 때문에 다소 격렬하고 견강부회의 장면들이 나타나 작품의 예술적 심미의 충격을 줄인다. 역사를 주관적 차원에서 해석한 것이어서 객관적 차원의 사회과학적 진실과는 격리될 수도 있다.“성질대로 한다면 그 새끼들 다 때려죽인 뒤/ 나는 그만 칼을 물고 팍 엎어지고 싶지만 그러나 우짜겠는기요, 성님/아 새끼들이 배고프다고 징징거릴 때마다/ 죽은 어무이 생각보다 먼저 성님 얼굴 떠오르니더/ 그러이 이 판국에 우짜겠는기요/ 배급은 두당 두 홉 네 작으로 즈그들이 정해놓고/ 다섯 식구 목구녕으로 곡기 넣어본 지가 언젠데/ 아나 여깄다. 쌀 한 동가리 안 주니더/ 씨팔, 이게 무신 나란기요.”(이중기의 ‘두형제’) 10월 혁명의 배경을 설명하는 대목과 연결된다. 작자의 상상이 감정을 폭발시켜 시 정신을 멈추게 한다. 너무 배가 고프다고 할 때나, 너무 추워도 옷을 헐벗어 분노할 때, 시는 사라진다. 잔인한 당시를 간접 체험으로 상상력을 자극할 경우 더욱 격렬해져 보편성의 한계를 좁히고 있다. 그 사이에 향토 방언이 섞여들면서 예술적인 소재주의의 한계를 좀 뛰어넘도록 도와주고 있다. 정경묘사를 위해 방언이 토속의 일부가 되고 오리무중으로 엷어진 시인의 의식을 이데올로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굴절시켜주기도 한다. 이렇듯 방언은 저항적 시작품에서 사회성에서 일탈하여 심미성으로 물줄기를 돌려주는 효과를 발한다.이중기 시인의 ‘시월’(‘삶창’, 2014)은 고향을 지켜온 농민이자 시인으로서 듣고 보아온 10월 항쟁의 생채기를 시의 힘으로 폭로하고 싶다는 목적의식이 다분하다. 역사의 리얼리티 문제와 해석의 문제 이상으로 문학의 예술성의 깊이가 더 중요하다. 사회성의 문제나 정치적 이데올로기 문제보다 더 강력한 충격을 전달하기 위해 그가 동원한 것은 현장의 시어다. 이중기 시인이 질서의 붕괴를 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회비평의 일부로 시의 예술적 지위와 질서를 붕괴시키지 않는 유효한 장치가 되었다. 그의 시에 일관하는 서사적 구조와 사투리의 토속적 분위기는 사실성 문제의 시비를 줄여주는 장치가 되었다. 다만 이런 고발적 문학 작품의 사실성과 시적 정직의 문제는 별도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2024-07-08

기억의 나누어 갖기

2024년 4월 25일부터 4월 28일까지 제가 근무하는 대학의 HK+사업단에서는, 근대 일본을 이해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기획의 일환으로 히로시마 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히로시마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우리에게 가장 먼저 원자폭탄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 ‘리틀 보이(little boy)’는 무려 20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대미문의 비극이었습니다. 히로시마에 도착한 우리 일행이 가장 먼저 찾은 곳도, 그 날의 ‘원폭’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이었는데요, 평화기념자료관, 원폭돔, 추도기념관, 그리고 각종 위령비로 이루어진 평화공원은 무려 12만㎡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초대형 시설이었습니다.수많은 구미(歐美) 관광객들과 곳곳에 설치된 위령비로 가득한 평화공원을 조금만 걸어도, 누구나 핵의 비극과 평화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텐데요. 그럼에도 저에게는 이 공간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원폭으로 인한 피해와 고통이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어 충분히 공유되고 있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찜찜함은 얼마 전 장혜령의 ‘당신의 히로시마’(문학과사회, 2021년 겨울호)를 읽으며 느꼈던 것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히로시마’는 히로시마를 방문한 아흔 살의 김정순(金貞順, 일본명 가네모토 테이준)이 자신의 첫사랑인 하라 다미키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 서간체 소설인데요. 하라 다미키는 히로시마에서 나고 자랐으며, 원폭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도쿄로 건너온 소설가입니다. 정순은 하라 다미키와 “평생에 한 번뿐일 사랑”을 나누었는데요. 그러나 그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며, 존재의 벽을 뛰어넘지도 못했습니다. 이유는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 때문에, “당신은 이제 죽어도 되잖아요. 뭘 더 머뭇거리는 거죠”라는 냉소의 말을 스스로에게 던지고는 했던 하라 다미키가 원폭의 기억에 갇힌 수인(囚人)이기 때문입니다. 하라 다미키는 ‘나’와 대화를 나눌 때면, 늘 “당신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야”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죠. 결국 히로시마의 상처로 혼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던 하라 다미키는 자살하고 맙니다.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던 정순은 비록 연인이기는 했지만, 하라 다미키를 괴롭힌 원폭의 기억으로부터는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정순은 귀국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원폭의 기억과 관련하여 정순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하라 다미키의 모습은, 히로시마의 원폭을 다루는 일본의 태도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일본은 원폭 피해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한순간에 수만 명의 삶이 사라진 원폭 피해는 일본만이 경험했으며, 그 때의 끔찍함과 잔인함은 그 어떤 폭력과도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인 거죠. 이처럼 ‘원폭의 피해’를 유일한 것으로 절대화하게 되면, 원폭을 둘러싼 수많은 맥락과 사람들이 배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테면 원폭 이전의 침략전쟁으로 수많은 인류가 사망했다는 사실이나, 일본인 이외에도 20개국에 이르는 사람들이 히로시마에서 피폭되었다는 점 등이 충분히 사유될 수 없는 것이죠.이와 관련해 ‘당신의 히로시마’에 등장하는 “조선인 박화자”의 존재는 참으로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박화자는 히로시마에 살다가 피폭되었으며, 이후 ‘원폭병’을 얻고 귀환하여 다른 피폭자들과 함께 합천의 요양소에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삶의 끝자락에 이른 박화자는 “히로시마를 한 번은 다시 보고 싶다”며, 아픈 자기 대신 정순을 히로시마에 보낸 것입니다. 히로시마의 원폭은 하라 다미키와 같은 일본인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히로시마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도 향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히로시마는 결코 하라 다미키, ‘당신의 히로시마’일 수만은 없는 거겠죠. 그런데 ‘당신의 히로시마’는 또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가 원폭이 남긴 고통의 기억을 ‘일본인의 것’으로만 독점하는 것을 의미했다면, 두 번째 의미는 원폭에 담긴 응보의 의미를 ‘일본인의 것’으로만 되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평생 일본을 미워했던 정순의 아버지가, 히로시마 원폭 소식을 듣고서는 “몹쓸 인간들이 천벌을 받은 게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드러나죠. 그러나 이 말은 “그 몹쓸 인간들 속에 우리와 같은 조선인들이 있었음”을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실제로 히로시마 전체 희생자 중 10%가 재일조선인이었으며, 그들의 후손이 여전히 고통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히로시마는 결코, ‘당신의 히로시마’일 수는 없으며 히로시마에 살았던 ‘모든 이들의 히로시마’일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당신의 히로시마’를 넘어 ‘우리의 히로시마’가 될 때, ‘히로시마의 기억’은 망각의 어둠 속에 사라지지 않고, 모두의 가슴에 남아 세계평화의 등불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이런 맥락에서 평화기념공원 안에 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데요. 높이 5미터에 이르는 이 한국식 위령비는 1970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에는 평화공원 바깥에 놓여 있다가 1999년에 이르러서야 재일한인과 여러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평화공원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원의 중심에서는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한 이 위령비는 역사적 기억을 나누어 갖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없이 웅변하는 듯 보였습니다.

2024-07-08

누군가의 시선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지난 주말 넷플릭스에서 ‘THE 8 SHOW’를 보았다. 드라마는 사회에서 각기 다른 실패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여덟 명이 비밀스러운 초대를 받아서 한 공간에 모이며 시작된다. 이들은 1부터 8까지의 숫자를 뽑고 해당 숫자의 층에서 살게 된다. 그들이 뽑은 층수는 매분 벌 수 있는 돈의 숫자와 비례했다. 8층은 1층의 여덟 배를 벌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1층도 사회와 비교하면 엄청난 돈을 벌지만, 그들이 머무는 공간에는 일반 물가의 백 배를 주고 필요한 물건을 구매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THE 8 SHOW’는 직업별 연봉의 차이가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부모의 직업이 자식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회에서 계급의 고착화가 이루어지는 모습이나 코로나19 바이러스 이후 경제 살리기를 위한 현금 유동성이 증가하고, ‘파이어(FIRE) 족’에 대한 욕망이 널리 공유되는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현실의 어떤 장면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은 이유는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이야기가 그만큼 구체적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이러한 현실과의 연결고리 속에서 CCTV로 여덟 명의 행동을 응시하고 있는 누군가를 생각했다. 드라마에서 여덟 명은 자신들의 행동에 CCTV 바깥의 누군가가 만족하면 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시간이 곧 돈이기에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더욱 폭력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구조이다. 드라마의 마지막에 1층이 죽고 나머지 사람들은 CCTV를 전부 파괴하고서야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CCTV를 통해 여덟 명의 행동을 관찰하며 웃고 떠들며 돈을 지급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1998년 개봉한 ‘트루먼 쇼’와 ‘THE 8 SHOW’는 자신의 일상을 누군가 들여다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만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는 자기의 삶이 생중계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갔지만, ‘THE 8 SHOW’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일상이 생중계된다는 점을 인지하고도 돈을 위해 기꺼이 게임이 참여한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단 중요한 점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을 전시(展示)하는 삶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트루먼 쇼’가 변화의 시작을 알렸다면 ‘THE 8 SHOW’는 그 결과를 보여준다. 가난이란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한 ‘THE 8 SHOW’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폭력적 행동이 익숙한 까닭은 바로 그 내면을 가진 주체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다시 묻자. 바로 이런 우리의 모습을 감상하며 즐기는 자들은 누구일까? 사람이거나 제도, 그 자체일 수 있다. 소수 권력자에 의해 법과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사람의 모습을 자주 본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이해타산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나의 감정과 행동을 보며 즐거워할 사람은 누구일까? 우리는 ‘THE 8 SHOW’처럼 누군가 죽기 전에 이 게임을 끝낼 수 있을까?

2024-07-08

탈리타 쿰

강길수 수필가 주일미사에 일찍 도착했다. 기다리는 동안 늘 해오던 대로, 휴대폰 매일 미사 앱을 열어 그날 미사 경문들을 읽는다. ‘복음’을 보는데, ‘탈리타 쿰’이란 말에서 시선이 멈췄다. 마음에 간절한 바람이 일어난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방금 죽은 12살 소녀는, 예수가 한 이 말로 되살아났다. ‘탈리타쿰’은 예수의 모어 아람어다. 이 이야기는, 야이로란 회당장(會堂長)의 믿음과 그에 응답하는 예수에 관한 신앙을 보여준다. 아버지 회당장은 죽어가는 딸을 위해 예수를 찾아가 위신, 체면 다 버리고 그 앞에 엎드려,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한다. 이에, 예수가 집으로 가는 도중에 딸은 죽고 만다.도착한 예수는,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하고 명령했다. 이 말에 소녀는 곧바로 일어나 걸어 다녔다. 굳게 믿는 아버지의 간청을 들어주는 예수의 권능으로, 죽었던 아이가 살아난 엄청난 신앙 사건이다.덧붙여 내 시선이 멈춘 것은, 이 이야기가 거울 되어 우리나라의 요즘 모습을 비췄기 때문이다. 내다 버린 진실, 정의, 공명에 목말라 답답한 가슴에 예수의 간단명료한 명령이 하늘 화살로 와 박혔다. 우리 사회가 꼭 죽은 소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일제 강점기, 일본을 방문했던 시성 타고르가 한국에 못 오게 되자,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담긴 짧은 시를 주었었다. 바로 ‘동방의 등불’이다.YS 정부의 국방장관, 안기부장이었던 권영해 님이 최근 5·18에 대해 충격적 증언을 했다. ‘스카이데일리’는 그가 안기부장 때, “북한의 5·18 개입을 우리 정부가 직접 확인했다”라고 6월 24일 인터뷰 기사로 보도 했다. 또, DJ 정부 대통령 밀사로 김경재 전 의원 일행이 방북했다. 그들은 “북한 노동당 간부들의 간곡한 요청과 안내에 따라 한국의 국립묘지 격인 평양의 애국열사릉을 방문, 5·18 개입 북한 특수요원의 가묘(묘비) 10여 기를 목격했다고 밝힌 바 있다”라고 ‘대한언론KNEWS’는 올 5월 2일 자 ‘오피니언’에 썼다.2020 총선 이후 많은 이들이 부정선거 규탄 대규모 집회, 수사 촉구, 고발, 소송, 강연, 유튜버 방송 등을 계속하고 있다. ‘2017대선부터 올 4·10 총선까지 모든 공직선거가 부정선거였다’라는 주장과 근거도 제시한다. 특히, 지난달 현직 여당 K 의원은 부정선거 조사 촉구 이후, 사전투표 폐지 법안 발의가 진행 중이다. 또, 여당 대표 후보 4인 중 3인이 직, 간접적으로 부정선거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5·18 및 부정선거와 관련, 경천동지할 내용이 드러나고 증언되어도 우리 주류언론은 망자의 침묵뿐이다. 죽은 야이로의 딸 같다. 진실을 아는 국민은 분통 터지고, 실망과 환멸을 느낀다.하여, 나라에 하늘의 ‘탈리타 쿰!’이 내리길 소망한다. ‘동방의 등불’이 다시 켜지게….

2024-07-08

결혼은 미친 짓인가?

지난 주 경북매일에 실린 이병철 시인·평론가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글을 잘 읽었다. 그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이자, 불과 몇 해 전까지 그의 의견에 동조하며 결혼 이후의 삶에 대해 상상조차 하려 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여러모로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며 읽어 내려갔다. 또한 아직 결혼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신혼으로서 그가 모르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이 글은 물론 결혼을 옹호하는 글이지만 결코 병철에게 결혼을 강권하는 글이 아니다. 그냥 이런 삶도 있으니 참고 정도 해 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적어보는 글이다.결혼은 미친 짓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부 맞는 말이다. 약간은 미쳐야 가능한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에 한 친구가 물었다. 결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인데, 정확히 말하면 돌이킬 수는 있지만 그러지 않기로 하는 것인데 그것을 감히 실행에 옮기는 용기는 어디서 나는 것이냐고. 나는 그냥 번지점프 같은 것이라 대답했다. 뛰어들어 보기 전에는 어떤 감각인지 알 수 없으니 눈 한 번 질끈 감고 생각하며 새로운 삶으로 뛰어드는 것이 결혼이라 생각한다고. 일시적으로 이성의 끈을 내려놓아야 이 어려운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이야기 해주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상대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그런 상대를 발견한 나의 안목에 대한 믿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큰마음을 먹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미치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미치건 조금은 미쳐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그래서 그 미친 결정에 대해 나는 후회하는가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물론 총각끼리 김삿갓 계곡에 가서 물놀이를 하는 모습과 시원하게 낮술을 하는 모습을 SNS를 통해 보며 부러움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결혼을 한 이후로 가정 밖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시간 나는 나대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집 앞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서 입에 무는 일, 집에 와서는 보드게임을 하며 아이스커피 타오기나 설거지 내기를 하는 일,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말도 안 되는 춤을 추며 깔깔대는 일, 우리에게 못나게 구는 사람들에 대해 시원하게 흉을 보는 일처럼 별 것도 아닌 것들이 전부 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소박하지만 신나는 일들이 된다.이런 일들은 꼭 결혼을 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배우자에게는 연인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나의 나약하거나 부족하거나 못난 모습들을 얼마든지 보여주고 그에 대해 위로도 받을 수 있다는 것. 가수 이적의 노랫말처럼 힘이 들 땐 눈물 흘릴 수가 있고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다는 것. 연인이란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는 님이지만, 배우자란 온전히 평생 내 편이 되기로 한 사람이기에.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결혼을 선택하고 나면 또 한 가지 선택지가 생긴다. 바로 출산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나의 아내는 만삭이고 며칠 내로 출산을 할 예정이다. 아직 육아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이를 갖고 낳기까지의 지난 10개월간 우리 부부가 느꼈던 경이와 감동은 한두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것이었다. 자식은 아기였던 시절 잘 자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평생의 효도를 다 한다고 했던가. 우리 아기 ‘코코’는 이미 어느 정도 효도를 해낸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이란 그래도 해 볼만 한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망설이는 마음도 이해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미혼, 비혼 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 중 28.7%가 결혼 자금 부족이고, 14.6%가 고용 상태 불안정이다. 12.8%를 차지하는 출산 및 양육 부담 역시 경제적인 부분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였을 때 56.1%정도가 경제적인 상황 때문에 결혼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경제적인 문제는 단지 개인의 잘못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사회의 구조를 설계하고 유지, 보수해 나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그렇지만 마음 맞는 사람이 생긴다면, 이처럼 결혼하기 어려운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상황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한 번 시작해 볼 마음이 있는 사람끼리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이병철을 응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가 나의 결혼식에서 멋들어지게 축시를 읽어준 것처럼 말이다.

2024-07-08

등장인물을 사랑하기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를 사랑하는 일은 영화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인물의 감정을 다채롭게 보여줄 수 있으며 얼마간의 사건을 만들어내기 적격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마음이 변화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동시에 삶은 우리를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두 가지 상반된 진실이 섞이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고 결말을 알면서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유쾌한 함정에 빠지게 된다.사실 누구에게나 이런 식의 경험이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드라마틱한 일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아이들이 앙앙 우는 소리가 지구상에서 가장 괴로운 소음이라던 친구는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놀랍도록 어른스럽고도 다정한 면모를 보여준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며 싸우던 단짝 친구와 결혼식을 올린 지인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내 경우엔 반려견을 들 수 있겠다. 내가 동물과 함께 산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 없었는데, 어느 순간 내 삶에 틈입한 이 존재는 나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강아지는 사랑하기에 너무 쉬운 존재가 아닌가. 동그란 코와 부드러운 털, 무엇보다 녀석은 먼저 마음을 주는 쪽에 가깝다. 온 힘을 다해 나를 사랑한다고 외치는 존재에게 냉담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곤히 잠든 강아지를 바라보고 있자면 이런 생각을 든다. 언젠가는 정말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게 정말 가능한 영역일까?최근 나는 의외의 인물을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했다. 미국 드라마 ‘오피스’를 보면서였다. 몇 번이나 보고 또 봤던 시리즈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건 아마 내가 일련의 사회생활을 경험하게 되면서 겪은 일들과 겹치는 지점이 많아서일 것이다. ‘오피스’는 던더 미플린이라는 제지회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화를 다룬다. 마치 실제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진행되는 것이 큰 특징인데 덕분에 카메라 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나 인물의 숨겨진 감정까지도 세세하게 드러나게 된다.나는 항상 지점장인 마이클 스콧이나 지점장 보조를 자처하는 드와이트 슈르트 같은 괴짜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로맨스를 담당하는 짐과 팸 커플의 서사도 꽤 좋아했다. 어쨌든 이들은 주인공 격에 속하고 카메라에 자주 비추어졌으니까. 이번에 다시 ‘오피스’를 시청하면서 의외의 인물이 내 마음 안에 들어왔으니, 다름 아닌 영업사원인 필리스다.필리스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후덕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다. 극 내부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기에 길게 들여다볼 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하는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더 많았다. 일을 처리할 때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성차별적인 발언을 내뱉으면서도 자기 잘못을 알지 못하는 여자. 타인의 소문에 쉽게 키득거리고 가끔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짓궂게 구는 사람. 그러나 새롭게 포착된 모습은 조금 달랐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누구보다 행복해하며 타인을 위해 손수 뜨개질을 하는 마음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술에 취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모습마저 귀엽게 느껴졌으니.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실제로 그녀가 나의 삶에 끼어든대도 이런 애틋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필리스를 같은 동료를 직장에서 만난다면 나는 그녀의 오지랖 넓은 태도에 기가 질려버릴 것이다. 아주 괴로운 사람으로 여기면서 누군가가 그녀를 두고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면 단박에 고개를 저을 것이 분명하다.그러나 그것은 내가 타인의 일면을 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가지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내가 든 카메라가 찍을 수 있는 건 세상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어떤 사람이 되는지, 절친한 친구들과 나누는 농담이 얼마나 유쾌한지 나는 알지 못한다. 카메라 밖에서 짓는 눈물의 의미나 긴 시간 혼자만이 품고 있던 비밀 같은 것도 모른다. 등장인물의 뒷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엉켜있던 오해도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순간 조금씩 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래서일까. 요즘 나는 내 주변의 인물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그저 지나쳤던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친구에게 오랜만의 연락을 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식의 마음에서 사랑이 시작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반가운 일이다. 내 삶에 등장하는 인물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아주 쉽게 해피엔딩으로 가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2024-07-08

팔열지옥 올여름 최고의 피서법은?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일찍 찾아온 더위의 기세가 무섭다. 거리를 걸을 때는 물론, 방에 가만히 있어도 목덜미로 땀이 흐른다.오죽하면 나이 지긋한 분들이 올해 초여름 무더위를 팔열지옥(八熱地獄)에 비교할까. 팔열지옥이란 등활지옥, 흑승지옥, 중합지옥, 규환지옥, 대규환지옥, 초열지옥, 대초열지옥, 무간지옥 등 뜨거운 불길에 고통 받는 여덟 가지 지옥을 지칭하는 단어. 지금 날씨가 벗어날 수 없는 수난의 공간처럼 무시무시하다는 이야기다.폭염이 이어지는 날이면 우리네 조상들은 여러 가지 피서법을 사용했다. 그중 한 방법이 이른바 ‘보양식 먹기’다. 닭을 인삼 등 각종 약재와 함께 푹 삶은 계삼탕이 흔했고, 세도가에선 큼직한 민어와 영지버섯을 복달임으로 먹었다. 서민들은 개를 잡아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기도 했고.현대인이 ‘여름휴가’를 통해 시원한 강변과 해변으로 여행을 떠나듯 수백 년 전 사람들도 풍광 수려한 산이나 골 깊어 서늘한 계곡으로 삼삼오오 원족(遠足)에 나서기도 했다.2년 전 세상을 등진 소설가 김성동(1947~2022)은 매우 점잖은(?) 피서 방식을 택한 것으로 문단에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여름엔 동즉손(動卽損)이니, 가만히 있어라”고 후배들에게 일렀다.동즉손?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손해’라는 뜻이다. 실제로 김성동은 여름이면 하루 종일 낡은 선풍기 돌아가는 서재에서 책을 읽곤 했다. 강이나 바다로 여행가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이를 ‘안동 김씨 양반다운 피서법’이라 불러야 할까.그런데 글 써서 생계를 해결하는 작가가 아닌 몸으로 벌어먹는 이들은 이 악랄한 더위에도 움직이지 않을 도리가 당최 없으니… 참으로 가혹한 여름이 아닐 수 없다./홍성식 (기획특집부장)

2024-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