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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유안진 시인의 안동 악센트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유안진 시인은 1941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65년 ‘현대문학’에서 박목월 추천으로 등단한 원로시인이다. 시집 ‘달하’,‘물로 바람으로’,‘날개옷’,‘달빛에 젖은 가락’,‘영원한 느낌표’등을 발간하면서 꾸준한 시작활동을 하였다. 목월문학상, 공초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이형기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숱한 문학상의 행운을 누렸다. 평생 서울대 생활과학대학 소비자아동학부 교수를 지낸 학자이기도 하다.14권 가까운 시집들의 작품을 일별해 보면 시인의 시작의 기품을 느낄 수가 있다. 서구문학은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을 통해 인간 구원을 언어예술로 풀어내었다면 오랜 세월 성리학의 세례를 받아온 우리나라 시문학은 자기 절제와 안존한 통제를 통한 인격 수련의 자세를 연마하였다. 그래서 문학의 지향성이 다른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았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한 이후 인간 중심의 존재 탐구 시대로 넘어왔지만 궁극적으로는 참 인간의 모습을 추구하는 일이 문예예술의 기본 바탕이 되었다.유안진 시인은 선비의 고향 안동 명문가 출신이다. 그래선지 전형적인 반가의 여인으로서 그가 직조한 시작의 내면 속에 그 그림자를 읽을 수가 있다. 자신의 삶의 태도와 방법과 같이 안존하고 자신을 치켜세우지 않는다.오양진이 ‘문학의 이유’(파란, 2023) 중 ‘숙맥노트’에서 유안진의 시작의 태도를 평한 바 있다. “말하는 시인이 아니라 귀로 듣는 시를 겸허한 자세로 제목처럼 숙맥같은 모습으로 인생을 조명하는 시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단히 정확한 평가라 아니할 수가 없다. 작가가 청자이면서 화자가 되기도 하지만 시인은 늘 낮은 자세로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심각하게 청취하는 양반가의 문화와 습속을 자신의 시속에 오롯이 담았다. 그는 조물주와 같은 창조자입네 하면서 잘난 체하며 머리를 쳐들고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는 시인이 아니라 기품을 유지하며 안존하게 소리를 듣는 시인이다.화자가 내는 그 소리는 비록 표준어로 발화하지만 안동의 악센트와 안동의 화법이 묻어있다. 유독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만연한 유년의 풍경화 속에는 안동방언이 묻어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지러지게 불러대는 말매미들의 합창을/귀로 먹고 자라는 여름 가족들이/사람 떠난 마을에 더 주민답다”, 유안진, ‘귀도 입이다’에서 유안진 시인의 세상을 조망하는 방식이 보인다. 즉 낮은 마음으로 화자의 소리를 듣는 겸손한 청자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다. 그리고 비록 화자가 사람이 아닌 말매미라도 고향을 지키니까 사람보다 중하다며 고향지킴이라는 명예를 부여해 준다. 참 신선하다. 오랜만에 시를 왜 읽어야 하는지, 시를 읽어보면서 인간 삶의 도리와 태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를 배울 기회를 얻는 것 같다.만년에 40년 가까이 함께 살았던 남편의 죽음은 시인에게 꽤나 충격적이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자신의 소리는 억누른다. 대신 퇴근하면서 현관에 들어서는 남편의 투박한 목소리 “나 와 쏘!”에 섞인 사투리 억양. 그래서 더욱 그립고 안타깝다.유안진의 ‘벌초, 하지 말 걸’에서는 들판 벌레들의 소리를 듣는 어머님의 혼령이 말한다. 표준어로 시를 썼지만 내 귀에는 마치 안동의 방언의 에코가 여운으로 날아든다. ‘모자’, ‘바늘에게 바치다’, ‘아버지의 마음’에서는 친정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화자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를 통하여 듣는다.유안진 시인의 시작이 기대는 곳은 고향이다. 안동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제 자매, 그리고 일가친척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할배요 오늘 장에 가시니껴?” 그리운 안동이 어느새 감익는 마을은 온통 고향으로 전환된다. “섶 다리로 냇물을 건너야 했던 마을/ …. / 까닭없이 눈시울 먼저 붉어지게 하는/ 아잇적 큰 세상이 고향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희망도 익고 익어 가느라고/ 감 따는 아이들 목소리도 옥타브가 높아가고/…./사람 떠난 빈 집을 붉게 익는 감나무 저 혼자서 지켜 섰다/ 가지마다 불 밝히고 귀 익은 발자욱소리 기다리고 섰다.//” 유안진, ‘감 익는 마을은 어디나 내 고향’에서는 시집을 가서 아이들을 낳고 시가 부모님과 조상을 모신 타향조차 내 고향으로 치환한다. 내 고향은 멀리 있어도 향기로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항상 함께 하는 곳이다.시인은 계절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하다. 봄과 가을 겨울의 흰 눈을 소재로 한 섬세한 서정일기도 고요하고 잔잔하게 울려온다.

2024-06-24

떠난 자들과 남은 자들

지난 번에는 니가타항을 떠나 북한으로 간 재일교포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10만여 명에 이르는 이들은 북한행 편도 표만을 가지고 니가타항을 떠난 사람들인데요. 일본에는 왕복표를 가지고 니가타항과 북한을 오고간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귀국 교포’의 가족이 그 주인공입니다. 양영희는 ‘귀국 교포’의 가족이라는 정체성을 창작 원천으로 삼아 활동해 온 영화감독입니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김일성주의자로서, 아버지 양공선은 조총련 오사카 본부의 부위원장과 오사카조선학원의 이사장까지 역임한 정치적 인물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제주 4.3의 처절한 비극을 피해 오사카로 밀항하여 조총련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양영희의 부모는 세 명의 아들 모두를 ‘귀국 교포’로 북한에 보냈는데요. 이 때 오빠들의 나이는 각각 만 열네 살(중학생), 열여섯 살(고등학생), 열여덟 살(대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양영희도 ‘조선인 부락’으로 유명한 오사카 이카이노(현 이쿠노구)에서 태어나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랐으며, 이후 도쿄에 있는 조선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양영희의 다큐멘터리 3부작(‘디어 평양’(2005), ‘굿바이, 평양’(2009),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극영화 ‘가족의 나라’(2012), 장편소설 ‘조선대학교 이야기’(2018), 산문집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2022)는 모두 이러한 자신의 가족사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그녀는 니가타항에서 북송선에 오른 오빠들을 배웅한 이후에도, 여러 번 만경봉호를 타고 니가타항과 북한의 원산항을 오고 가야만 했습니다. 그렇기에 ‘귀국 교포’와 그 가족의 삶에 대한 재현에 있어, ‘당사자 서사’에 가장 가까운 서사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양영희입니다.최근에 발표된 산문집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는 ‘귀국 교포’의 북한 생활이나 일본에 남겨진 가족들의 삶이 매우 밀도 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귀국 교포’의 삶은 결코 만만치 않았는데요. 이와 관련해 이 산문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북한에 간 아들들의 사진을 처음 받아보고 어머니가 보이는 반응입니다. 오빠들은 처음 평양과 원산에 위치한 ‘총련 간부 자녀 합숙소’에서 공동생활을 합니다. 오빠들은 처음부터 편지에 음식을 보내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했는데요, 정치적으로 신실한 어머니는 “되도록 현지인과 같은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라”며 음식 대신 약품이나 학용품 정도만을 보냅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한 오빠들의 빼빼 마른 사진을 본 엄마는, 너무나 놀라 그 사진을 찢어 버리고는 소리 죽여 흐느낍니다. 이후에는 음식이 될 만한 것은 뭐든지 가리지 않고 소포에 꾹꾹 눌러 담아서 보내기 시작하는군요.무엇보다 ‘귀국 교포’들의 안타까운 삶은 큰오빠의 삶에 가장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님의 환갑에 바치는 청년 축하단”의 일원으로 북한에 간 큰오빠는 클래식 음악과 해외 명작들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비판을 받고, 자기비판을 강요당하고, 감시당하고, 미행당했으며, 결국에는 우울증과 조울증에 시달리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죽고 맙니다.그런데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는 ‘귀국자’라는 신분이 북한 사회에서 반드시 핍박과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 드러나 흥미롭습니다. 둘째 오빠는 아들 둘을 낳은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곧 새로운 아내 정순과 결혼하여 딸 선화를 낳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내는 병으로 선화가 다섯 살일 때 죽고 맙니다. 둘째 오빠는 “당분간 재혼하고 싶지 않다. 정순이 같은 멋진 여자는 다시 없을 거다”라고 공언하지만, 오빠의 바람(?)과는 달리 정순이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혼담은 물밀 듯이 들어오는군요. 이러한 인기는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정기적으로 생활비와 애정이 가득 담긴 소포가 온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실제로 어머니의 평생 과업은 북한에 있는 세 아들과 그 가족들에게 온갖 방법으로 물건과 돈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정신이 온전치 않게 되어서야 비로소 “송금 걱정”에서 해방됩니다.또한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는 재일교포들이 북한에 갈 수밖에 없었던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드러나 있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양영희에게 몇 번이나 해준 이야기에는 젊은 시절 당한 테러의 경험도 있습니다. 젊은 어머니는 외할머니와 하얀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오사카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요. 이때 모르는 남자가 갑자기 다가와 잉크를 온몸에 뿌립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외할머니가 분노에 몸을 떨며 호통을 치지만 그 범인은, 오히려 “조선인이 건방지게!”라는 말을 내뱉고는 사라져버리는군요. ‘조선인’을 차별하는 이러한 분위기는 양영희 세대에도 여전한 것으로 그려집니다. 양영희의 아버지는 멀쩡한 교사일을 그만두고 예술가가 되겠다는 딸을 향해, “일본에서 조선인이 어떻게 예술을 하니. 라디오나 TV에 나갈 수나 있다니? 꿈같은 소리 마라. 동네 사람들, 우리 딸이 미쳤어요!”라고 소리치기도 합니다.이처럼 인간적인 대우도 받지 못하고, 사회적 성공도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수많은 재일교포들은 북송선을 탔던 것입니다. 영화감독 박찬욱은 어디에선가 양영희는 가족 이야기를 “계속 우려먹고 우리는 계속 곱씹어야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양영희의 가족 이야기에 식민지와 분단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의 현대사는 물론이고, 가족, 개인, 이데올로기, 국가 등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 모두 담겨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박찬욱의 ‘계속 우려먹고 계속 곱씹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양영희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무엇보다도 북에 남은 두 명의 오빠와 그 가족은 안녕한지, 그들의 후일담이 너무나 궁긍합니다.

2024-06-24

분노의 국가, 분노의 계절

날이 덥다. 그래서 주차 문제로 시비가 있었다. 날이 더운 것과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은 것 사이에 인과관계는 성립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가능하다. 날이 더우면 불쾌지수가 올라가고 자기 안에 내재된 어떠한 화가 치밀어 오를 수 있다. 그것을 참아내는 것은 이성인데 가끔 이성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성미를 가진 사람이 지나치게 높은 기온에 놓이게 되면 이성의 만류를 뿌리치고 덜컥 화부터 내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공동주택에 유난히 그런 사람이 한 명 살고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주민 단체 대화방에서도 공개적으로 누군가에게 마구 화를 쏟아내더니, 오늘은 주차를 다시 해달라는 나의 요청에 분노를 쏟아내었다. 누가 주차를 잘했고 잘 못했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같은 말이라도 화를 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자신의 불쾌함을 타인에게 무례하게 쏟아내는 태도이다. 장담컨대 그의 화의 원인이 전적으로 나였을 리가 없다. 일상에 내재된 어떤 화가 분명 그의 명치 언저리에서 들끓고 있었을 것이다.특정인에게 이러한 문제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분노가 지나치게 짙게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이미 화가 나 있고, 누군가 자신에게 불을 붙여주기만을 기다렸다가 뻥 하고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미처 안내문을 보지 못하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의 문고리를 붙잡았다고 상상해보자. 관계자가 달려와서 정중하게 ‘거기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라고 말하는 상황보다는 ‘어이! 거기 써놓은 것 안보여요? 출입금지라고요!’ 하며 성내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영화관에서 누군가의 휴대폰이 빛날 때도 ‘휴대폰 사용 좀 자제 부탁합니다.’ 하면 해결 될 문제를 화로 해결하는 경우를 빈번히 볼 수 있다. 그런 명백한 실수나 실책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분노는 너무나도 쉽게 표출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던가. 실제로 옷깃이 스쳤다는 이유로 서로 눈을 흘기는 상황, 아니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뭘 보냐며 성을 내는 상황이 우리 주변에는 분명히 존재한다.인터넷 뉴스의 댓글 창을 봐도 온통 분노 투성이. 물론 화가 날 만한 기사에 분노의 댓글이 달리는 것이야 자연스런 일이겠지만 나와 생각이 다른 이를 만났을 때, 내가 좋아하지 않는 연예인이 땅을 사고 집을 샀을 때, 응원하던 스포츠 팀이 원하는 만큼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할 때,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스포츠 팀이 좋은 성적을 낼 때, 그냥 뭔가 마음에 안 들 때 사람들은 손가락 끝으로 온갖 분노를 터뜨려대곤 한다.나는 이러한 현상이 우리나라의 현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가경제, 기업경제, 가정경제 어느 하나 잘 풀리고 있는 것이 없는 나라라는 것은 이미 온 국민이 짜증거리 하나를 끌어안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이 술술 풀리고 좋은 일만 가득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분명히 조금은 더 마음의 여유를 쓸 수 있고, 너그러운 태도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적인 우환이라 할 수 있는 경기침체 속의 우리 국민들의 여건상 모두의 가슴 속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도 할 수 있고 이해도 할 수 있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노를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조금 답답하고 짜증나더라도 이성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를 줄도 아는 존재들이다. 그게 불가능한 상태를 ‘분노조절장애’라고 한다. 자신이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사실은 선택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일 뿐일 것이라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면 배우 마동석 씨나 드웨인 존슨 같은 사람 앞에서도 조절되지 않는 분노여야 진정한 분노조절장애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자 앞에서는 조절되고 약자 앞에서는 조절되지 않는 분노는 분노조절장애의 증상이 아니라 단지 추태일 뿐이다.다시 날씨 이야기로 돌아와서, 참 무더운 요즘인데 앞으로는 장마와 함께 습도도 올라갈 것이라고 한다. 올 여름은 지난 어떤 여름보다 더울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들의 불쾌지수는 더 올라갈 것이고 더 많은 분노가 펑펑 터져 나올 것이다. 그 분노로 다치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꼭 그런 극단적 상황에 놓이지 않더라도 불필요한 분노가 우리의 삶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터질 것 같지만 터뜨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사실 그런 존재들이다.

2024-06-24

독서의 기쁨과 슬픔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일종의 안부 인사라 할 수 있겠으나 가끔은 난감하다. 뭔가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 같아서다. ‘그 작가의 작품을 읽어봤느냐’는 질문에 ‘당연하지’라는 답을 내놓고 싶다는 허영심 때문에 괴로울 때도 있다. 간단한 문제를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는가 싶지만, 이를 통해 내밀한 부분을 들키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설령 질문한 상대는 별생각 없더라도 말이다.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요즘의 나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고 있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고전을 읽는 건 어쩐지 멋이 없어 보인다. 특히 톨스토이 같은 작가가 그렇다. 크롭티와 마이크로쇼츠가 유행하는 와중에 체크무늬 셔츠를 목 끝까지 잠그고 홍대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랄까.한국 사회는 트렌드에 민감하다. 동시대적 감각을 기민하게 따라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가올 유행을 분석하고 한발 앞서 가는 것을 훌륭한 역량으로 평가한다. 그것은 독서의 영역도 마찬가지라서 어떤 상을 받았다든가 화제의 인물이 적극 추천했다는 작품을 읽지 않으면 어떤 흐름에 뒤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나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지만, 최근엔 그다지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고전 작품을 꺼내 드는 빈도가 잦아진다.‘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의 러시아를 무대로 삼기 때문에 기본적인 역사 지식이 필요하다. 덕분에 나는 그와 관련된 역사 서적부터 찾아 읽었다. 본 여행을 위한 준비 과정이 꽤 길었으나 지평을 넓히는 것 또한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이윽고 페이지를 펼치자 톨스토이다운 유려한 진행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인물의 이름이 헷갈려 스토리 라인을 놓치는 그야말로 고전적인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2024년에 사는 문명인답게 유튜브를 켜고 톨스토이를 검색했다. ‘10분 안에 톨스토이 끝내기’ 혹은 ‘톨스토이 작품 읽은 척하는 법’과 같은 영상이 우르르 쏟아졌다. 벽돌처럼 두꺼운 4권의 책을 완독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유튜브에선 클릭 한 번으로 작품의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유튜브 영상을 통해서 체험을 대리하는 것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독서의 영역까지 넘어오다니.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나는 같은 책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는 것을 좋아한다. ‘파우스트’와 ‘싯다르타’는 내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읽는다. 몇 번을 읽었는지 손가락으로 꼽지 못할 정도다.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이해하고 싶거든 꺼낸다. 특히 레빈의 풀베기 장면을 자주 찾아보는데 읽을 때마다 늘 비슷한 감동이 밀려온다. 나는 왜 이런 식의 독서를 하는 것일까. 어쩌면 두뇌 회전이 느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명석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해 에둘러 돌아가고 하나의 현상을 미련할 정도로 진득하게 바라본다.누군가에겐 굉장한 시간 낭비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러한 독서 습관을 교정할 생각이 없다. 같은 텍스트를 반복하면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불편함이 없고 좋은 문장을 찬찬히 곱씹을 수 있다. 어제는 분노로 읽혔던 것이 오늘은 슬픔으로 읽히기도 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무엇보다 작가가 자신만의 삶을 살며 구축한 생각이 내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몸을 직접 통과하지 않은 것들은 쉽게 휘발되기 마련이다. 어떤 슬픔을 직접 겪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말이다.독서는 대단할 필요가 없는 활동이다. 글자를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특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독서는 쇼츠를 넘기는 것보다 지루하다. 깨알 같은 글자 안에서 인생의 답을 찾아보려 노력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 순간이 더 많다.그런 면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독서에 접근하는 순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읽는 것을 통해 뭔가를 체화했다면, 그것은 독서 이후에 생기는 것이지 이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낯선 곳을 여행하며 생겨나는 일들을 떠올려도 좋겠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좌절과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기쁨 같은 것들. 직접 경험하면서 생기는 실감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은 개인의 고유한 영역이며 타인의 침입이 불가하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독서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일 것이다.

2024-06-24

품격 있게 첨단산업화 시대에 앞장서자

김진국 고문 왜 TK인가. TK는 어떻게 한국 정치의 중심에 섰는가. 도덕성을 지켜왔고 선구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사림의 전통은 충(忠)과 효(孝), 선공후사(先公後私)다. 퇴계(退溪), 서애(西厓), 학봉(鶴峯)을 받들고, 학문을 사랑했다.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했다. 국난 때는 붓 대신 창검을 들고 의병으로 나서, 강산을 지켰다. 이러한 TK전통이 대한민국을 받쳐온 정신이다.윤석열 대통령은 20일 대구·경북을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성지(聖地)”라고 말했다. 정신적 숭고함에 그치지 않았다는 말이다. TK는 산업화의 기관차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보릿고개를 넘는 기적을 이끌었다.윤 대통령의 표현대로 “우리나라를 근본에서부터 바꿔놓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도 청도에서 시작됐다. 포항은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의 획기적인 도약을 견인했다.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정신이 우리 산업 발전의 토대가 돼 한강의 기적까지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수많은 신생 독립국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많은 나라 가운데, 산업화에 성공해, 원조받는 나라에서원조하는 나라로 변신한 것은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그 주역이 박 전 대통령과 TK다. 조상의 영광을 자존심으로만 간직한다면 비극이다. 본지가 창간한 지 34년. 노태우 정부 이후 대구·경북(TK)의 정치적 위상이 크게 흔들렸다. 이명박·박근혜, 두 분의 대통령을 배출했지만, 과거의 리더십은 빛이 바랬다.TK가 한국 정치의 중심을 차지하던 시대는 이제 역사가 됐다. 다른 지역에서는‘TK’를 ‘권력 지향’과 동의어라고 생각한다. 90도 큰절을 하고, 동갑내기 동료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남인의 예법, 겸양이 된 지금이다. ‘TK의 시각’이라는 말은 강경 보수 세력 편협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추락했다. 김경율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은 김건희 여사 ‘명품백’ 문제와 관련해 ‘TK의 시각’이라고 표현했다가 결국 사과했다. 어쩌다가 TK가 이 모양까지 왔을까.국민의힘이 한 달 뒤 전당대회를 연다. 그런데 TK에는 대표 경선에 나설 사람이 없다. 중앙당이 공천하면 무조건 찍어주는 게 ‘텃밭’이다. TK와 호남에 붙은 불명예다. 호남은 ‘전략적 투표’라며 지극히 실리를 챙긴다. TK는 생각이 오그라들어 도계(道界)를 넘지 못한다. TK의 전통과 정신을 다시 수립할 때가 됐다. 그걸 이어가려면 당당해야 한다. 또 어른스럽고,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출세를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게 아니라, 국익을 위해 손해 볼 줄도 알아야 한다.윤 대통령은 “경북이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산업구조 혁신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동북아 첨단 제조 혁신 허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이차전지 메카, 수소 산업의 허브, 경주 소형모듈원자로 국가산업단지, 경산 스타트업 파크, 구미 시스템반도체 설계 검증을 위한 RD 실증센터 등 청사진도 나왔다.박정희 전 대통령은 맨손으로 산업화를 이뤘다. 민둥산을 울창하게 만들고, 맨땅에 제철소와 조선소와 중화학공업단지를 일궈냈다. 미래를 향한 고속도로를 깔았으며, 나라를 위해서는 미국에 맞서기도 했다.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결코 수구(守舊)가 아니었다. 개혁과 실용을 추구했다. 애민(愛民)은 국민이 배곯지 않게 하는 게 기본이다. 그의 시대에 맞춰 TK가 우뚝 섰다. 영광뿐 아니라 그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 대구역 광장과 경북도청 공원에 박정희 동상이 건립된다. TK 전통과 정신에 다시 불을 붙였으면 한다.21세기가 벌써 4분의 1이 지났다. 밀레니엄의 꿈은 어디로 갔나. 인공지능시대에 고급 인력을 미국으로, 중국으로 빼앗기고 있다. 정치는 허구한 날 정쟁이다. 부(富)를 혐오하며, 첨단산업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 경부고속도로와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서 한발도 못 나갔다. 다양한 의견과 토론은 발전의 자양분이다. 하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 정적을 죽이기 위한 반대는 국력만 소모할 뿐이다.경북의 시·군들이 소멸 위험지역이다. 경북도는 ‘저출생과 전쟁본부’까지 만들어 대결을 벌인다. 대구·경북 통합도 ‘잘살아 보자’는 몸부림이다. 유습만 고집하면 역사의 퇴행이다. 품격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곰방대만 두드려서는 안된다. 미래 한국을 키워갈 첨단산업의 불씨를 살리자. 그게 TK의 정신이자 전통이다. (본사 고문)

2024-06-23

다시 하지(夏至)를 보내며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해마다 6월 20일이면 어김없이 서울로 방향을 잡는다. 벌서 3년째 그렇다. 어머니 기일이 6월 20일이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기일은 음력으로 정했으나, 날짜가 들쭉날쭉해서 어머니 기일은 양력으로 하기로 했다. 왕복 640km의 여정을 1박 2일에 진행해야 하기에 어느 땐 다소 고단하기도 하다. 무더위가 일찍 찾아든 올해가 그런 형국이다.21일 오후 햇살이 뜨겁게 내리비치는 마당에 들어오려니 잔디와 텃밭의 채소가 물을 갈구하는 듯하다. 이틀 전에 1시간 넘게 물을 듬뿍 주었으나, 땡볕과 바람으로 모두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일기예보가 내일 오전부터 강우를 알리고 있어서 물 주기는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이른 저녁을 마치고 부엌 창문 너머 동녘 하늘을 보노라니 붉은 보름달이 떠오른다.달력을 보다가 아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기일이 보름이었다. 그러니까 6월 21일은 2024년 하지이며 동시에 열엿샛날인 셈이다. 여름의 절정인 하지와 둥근 달이 떠오르는 시기가 교묘하게 겹치는 현상이 일어난 게다. 평상시와 달리 상당히 붉게 떠오른 달에서 어떤 상서로움과 기이한 천문현상을 확인함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언제부턴가 인간은 경이(驚異)로움과 경탄(驚歎)의 마음을 상실했다. 자연과학과 기술의 현저한 발달이 불러온 심각한 부작용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일상에 견고하게 자리하기 시작한 무한반복의 타성은 생의 건조함과 무의미성을 강화했다. 낯선 풍경과 사람과 인연이 매개하는 경탄과 경이의 순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계화된 회색의 일상이 들어선 것이다.살아가면서 무엇엔가에 놀라고 흥분하고 가슴 설레는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기막힌 순간들이 현대인들과 영원히 작별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날이 그날처럼 여겨지는, 따라서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나날들이 꾸역꾸역 채워져 1년 365일의 시간이 사라지는 양상이 아닌가 말이다.그런 인간들에게 작은 축복처럼 다가온 것이 이번 하짓날에 떠오른 붉은 달이다. 한두 시간 지나면 평상시처럼 하얀색으로 변모할 것이지만, 하늘을 올려다본 사람에게는 신비로움을 선사하기 충분하다. 하지만 현대인은 하늘을 보지 않으며, 특히 도회에 사는 사람은 24시간 환한 환경 때문에 달과 별을 마주할 계기가 없지 않은가?!잠시 담장 밖으로 나가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포장된 거리를 걷다가 하루살이와 모기 등쌀에 쫓기듯 돌아온다. 긴 한숨을 내쉬면서 ‘하짓날인데, 어떤 정취(情趣)도 없다니….’ 하며 혼자 혀를 끌끌 찬다. 1년의 절반 이상이 사라지는 시점에 앞으로 남은 시간을 생각한다. 지난 6개월을 뭣하며 살아온 것일까, 돌이키니 웃음과 함께 아쉬움도 손짓한다.작년 하짓날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돌이키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때도 분명 무엇인가 아쉽고 그립고 안타까운 것이 있었을 터! 이런 소소한 삶을 풍성하게 해줄 경이로움과 경탄의 순간들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작은 다짐을 하면서 2024년 붉은 달의 하짓날을 보낸다.

2024-06-23

항공모함 보유국의 꿈

우정구 논설위원 항공모함의 등장은 해군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 항공기를 탑재하고 이착륙시키는 항공모함은 이동성과 확장성 면에서 과거 해군의 전투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하기 때문이다.세계 어느 곳이든 투입이 가능하고 항공기, 헬기 등 다양한 군사적 자원을 탑재할 수 있어 항모 보유 수만으로 그 나라 군사력은 높게 평가받는다. 떠다니는 군사기지라 부르는 이유다.세계는 8개국이 22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다. 그 중 절반인 11척은 미국 소유다. 2022년 중국이 세 번째 항공모함을 취역함으로써 세계에서 두 번째 많은 항공모함 보유국이 됐다. 중국은 2035년까지 6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할 계획이라 한다.항공모함의 건조 비용은 대략 7조원 정도 든다. 국가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항공모함 보유는 사실상 힘들다.1986년 만들어진 미국 해군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스벨트호가 22일 부산항에 입항했다. 이달 말 열릴 예정인 한국, 미국, 일본의 첫 다영역 군사훈련인 프리덤 에지에 참여할 목적이라 한다.10만t급 핵추진 잠수함인 루스벨트호는 축구장 3배 크기의 비행갑판을 갖추고 있다. 미 해군 전투기 FA-18 슈퍼호넷, 공중 조기경보기, 헬기 등 총 80여 대의 항공기를 탑재할 수 있다. 승조원 수만 6000명에 달하니 웬만한 나라의 공군력과 맞먹는 규모다.최근 북한은 핵위협과 함께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계기로 북러간 결속력을 과시하고 있다. 군사 합동훈련으로 한미일간의 결속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세계 6위의 한국군사력을 보강할 항공모함이 없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6-23

기업의 위기극복은 공감과 소통으로

신일철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GE(General Electric)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로, 전구와 기관차, 그리고 항공기 엔진 등으로 산업화 시대를 이끈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GE는 경영상태가 나빠져 참담한 몰락을 겪고 있다. 주력 사업들은 매각되었고 주가는 크게 하락하고 있다. 급기야 세계경제의 흐름을 알려주는 대표 지수인 다우지수에서 GE는 2018년 6월에 사라졌다. 이로써 111년만에 다우지수에서 퇴출된 것이다.1990년대 GE는 21세기형 기업혁신모델로 인정받았으며, CEO인 잭웰치의 리더십을 전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앞다투어 벤치마킹하였다. 국내에서도 삼성과 LG 그리고 포스코와 수많은 중견기업들이 GE형 6시그마 혁신모델을 도입하고 혁신을 추진하여 성과를 올렸다.워크아웃 타운 홀 미팅으로도 유명하다. 구성원들이 회사를 떠나 별도의 장소에서 전원참가하여 브레인스토밍방식으로 자유분방하게 토론하고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도출하였다. 홀 미팅 최종단계에서 리더가 의사결정하여 즉각 실행할 사항과 중요 프로젝트로 구분하고 조직 내 문제를 즉시 해결하였다. 중요한 프로젝트에는 문제해결역량을 갖춘 직원들의 참여와 지혜를 발휘하고 개선하였다. 위대한 기업의 롤모델로써, 이렇게 차별화된 일하는 방식으로 무장했던 GE가 오늘날 역사 속에서 잊혀지는 이유는 무엇인가?먼저 지속 가능한 기업을 지향하면서 혁신활동을 도입하고 추진했던 기업이 초심을 잃어버렸다. 에디슨의 발명품인 백열전구사업으로 1882년 창립된 GE는 제조업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룹의 모태인 제조업보다는 금융업에 집중하면서 눈앞의 성과에 집중하였다. 주주가치의 극대화를 목표로 1등이 아닌 기업은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기업을 매각하고 인력을 해고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조 중심의 기업가 정신과 그 DNA를 상실하였다.다음으로는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가능성보다 성과 추구와 사업부 간 경쟁심을 촉진하였다. 지속 가능한 경영시스템 보다 수익창출을 위한 단기적 성과를 추구한 것이다. 특히 제조업 기반성장은 중단되거나 후퇴하였다. 고객지향적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재무적 성과와 인재양성을 추진하지 못한 채 지속가능성과 위기극복의 역량을 상실한 것이다.변화 관리의 대가로 알려진 짐 콜린스는 수많은 기업들 가운데 지속성장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기업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특징을 역설했다. 기업이 지속적인 성장을 해나가기 위하여 창의성과 혁신성을 존중하는 기업문화를 만드는 것, 고객과의 지속적인 소통으로 고객 요구를 비즈니스에 반영하는 것, 그리고 기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개선 노력과 이를 위한 인재의 육성을 강조하고 있다.기업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고 있는 삶의 터전, 곧 일터이다. 한 사람의 천재적인 발상보다 협의하고 토론해서 합의된 집단지성에 의한 결정이 휠씬 효과적인 것으로 여러 연구논문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조직은 이를 얼마나 잘 이끌어내는지가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지름길이다. 기업은 위기의식을 가지고 경영층과 직원이 공감하고 소통하면서 성장과 혁신을 도모해야 한다.

2024-06-23

늘봄교실 확대가 저출생 대책이어서는 안 된다

유영희 작가 2024년 한국의 출생률이 0.68을 기록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3대가 지나면 인구가 소멸할 것이라고도 한다. 어느 보고서를 보니, 2023년 남한의 0-4세 아이 비율이 북한의 절반이라고 한다. 북한의 0-4세는 1천763만 명이고 남한의 0-4세는 1천611만 명이라 숫자는 비슷하지만, 남한 인구가 북한의 두 배이기 때문이다.그래서인지 지난 6월 9일 윤석열 대통령은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을 주재하는 자리에서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공식 선언하고, 이미 신설하기로 한 ‘저출생대응기획부’의 이름을 ‘인구전략기획부’로 변경하겠다고 발표했다. 최근 출산 장려 정책으로 쪼이기 댄스 장려나 정관 복원 수술비 지원들이 비웃음을 샀고, 여자의 발달이 빠르니 결혼 적령기에 남녀가 성적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여학생을 1년 일찍 입학시키는 방법을 언급한 재정포럼 5월호의 연구 논문 역시 조롱을 받은 상황이라 이번에는 효과적인 정책이 나올까 기대했지만, 19일 발표한 내용을 보면 전혀 기대에 못 미친다.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결혼 기피와 저출생의 가장 큰 이유는 주거 불안과 경력 단절 걱정이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일자리 확보만이 답이라는 연구도 많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정부 정책을 보면,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소득 보장이 안 된 상태에서 대출을 확대하는 것은 신혼부부를 빚더미에 올려놓거나 그림의 떡인 발상일 뿐이고, 주택을 보유한 남녀가 결혼하면 세금 깎아주는 기간을 늘린다는 정책은 청년 대다수가 무주택자라는 현실을 간과하고 빈부 격차만 심화시킬 수 있는 대책이다. 학·석·박사 과정 통합하여 일찍 사회에 나가게 한다는 방안도 어처구니 없지만, 늘봄교실 보육시간을 오후 8시까지로 늘린다는 정책은 무자비하기까지 하다.지금까지 초등생이 이용하는 돌봄교실은 오후 5시까지만 운영하기 때문에 맞벌이 부부가 이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서 앞으로는 오후 8시까지 맡아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늘봄 정책이 나왔을 때도 부모와 자식이 ‘늘못봄’이 되는 정책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는데, 한술 더 떠서 초등 1, 2학년생을, 점차 6학년까지 오후 8시까지 교실에서 지내게 한다는 정책이 어떻게 나왔는지 의문이다. 저녁 늦게까지 교실에서만 지내면 그 아이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각을 가질 수 있게 될지 눈앞이 캄캄해진다. 늘봄교실에 오후 8시까지 맡기면서 마음 편할 부모도 없을 것이다. 이번 저출생 대책 어디에도 부모가 자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교실에 보관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아이는 부모가 늘 대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야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다. 부모 역시 그런 시간이 확보되어야 마음 놓고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아무리 한국의 인구밀도가 높아서 저출생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도 지금의 출생률 저하 속도는 한국 사회의 위기다. 부모가 자녀를 제대로 보호하면서 키울 수 있는 장기적인 정책 제안이 시급하다.

2024-06-23

깨어진다는 말

파란 유리병은 ‘퍽’하며 깨어진다 한낮에 깨어진유리 조각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이다 노란 유리병은깨어질 때 ‘퍽’하는 소리를 낸다 한밤중 평상심이높은 별빛 소리를 다독이는 낮은 달빛 소리이다빨간 유리병은 ‘퍽’하는 소리를 내며 깨어진다그것은 아닌 밤중에 새벽 구병산이 벌떡 일어나 제가슴을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6·25가 터지자 대포소리가 자주 구병산을 흔들곤하였다 놀란 가슴이 자주 ‘퍽’하고 깨어졌다부슬비에 부슬부슬 부서지는 모래밭저 여린 유리병 깨어지는 소리가 ‘퍽’하며 제 고향 먼 바다를 엎지르다니!―강현국,‘퍽, 하며 깨어진다’ 전문(‘구병산 저 너머’, 시와반시)‘깨어진다’를 생각한다. 깨어진다는 동사 하나로 수렴되는 모든 것을 생각한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괴물 중 목신 판(pan)이 있다. 헤르메스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판을 올림포스산으로 데려갔고, 모든 신이 판을 환대했다. 여기서 그리스어 판에는 ‘모든’이라는 뜻이 생겨났다고 한다.판은 물의 요정 님프를 사랑했는데 그녀는 판을 보자마자 도망치고 말았다. 숲에 살던 판은 기분이 나빠지면 괴성을 질렀고 이 소리를 들은 인간이나 짐승은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극심한 공포’나‘ 공황 상태’를 의미하는 영어의 패닉(Panic)이 바로 판이 지른 괴성이다.강현국 시인의‘깨어진다’에는 판의 공포가 숨어 있다. ‘퍽’소리를 내며 깨어진 경험은 시인이 기억하는 모든 것의 그늘이고 구석일지도 모르겠다. 깨어지는 유리병에는 평화가, 사람이, 넘어진 무릎이, 못 지킨 의자가 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유용하거나 무용하거나 채우거나 비우거나 모두 ‘깨어진다’하나로 통성한다. 무엇보다 깨어진다는 말은 고통이 낳은 상처의 언어라는 사실이다.강현국 시인에게 깨어짐의 경험은 패닉이다. “파란 유리병이 깨어진 소리” ‘퍽’의 유리 조각은 한낮의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시인의 한낮을 뒤흔들고만‘퍽’에는 은닉된 패턴이 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하나의 습성일 수도 있고 잔인한 플롯일 수도 있다. 색을 보고 놀란 가슴은 붉은 것만 보아도 놀라고, 이름 한 글자에도 놀란다. 거기에 잔혹한 가시마저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어쩌면 아우렐리우스의 말처럼 그 아픔은 그 일 자체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에서 온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시인은 누구나 한 생을 살면서 지옥의 한 철을 만난다고 했다. 세월이 흐른다 해도 망각이란 이름으로 지워지거나 추억이란 말로 쉬이 봉합될 수 없는 아픈 상처의 한 철을 만나다고. 상처의 출처는 실존의 번뇌로부터일 수도 있고, 이념과 진영의 대립으로부터일 수도 있고, 안팎 현실과의 불화로부터일 수도 있다고. (강현국, ‘먼 곳으로부터 먼 곳까지’) 이희정 시인 그런 시인에게 올림포스산이 있다. 아홉 폭 병풍이 첩첩 에워싸인 밤이면 노란 치자꽃 향기 번지는 그리움의 거처 구병산은 늘 거기 그렇게 있다고. 어머니 매달려 석 달 열흘 기도하던. 머리 위로 포성이 지나도 은하수 흘러가고 별똥별이 져도, 어느 날 궁금해서 찾아간 뒤에도.그런 구병산에 “빨간 유리병은 ‘퍽’하는 소리를 내며 깨어진다 / 그것은 아닌 밤중에 새벽 구병산이 벌떡 일어나 제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노란 유리병은 깨어질 때‘퍽’하는 소리” “한밤중 평상심이 높은 별빛 소리를 다독이는 낮은 달빛 소리” 먼 곳은 먼 곳이어서 닿을 수 없다고 했다.해서 시인은 그리움을 노래한다. 마치 목신 판이 사랑하는 연인 갈대가 된 님프를 악기 팬플루트로 만들어 불렀듯이 말이다. 좋은 시가 그렇듯이 “부슬비에 부슬부슬 부서지는 모래밭” 시인 속에는 넘칠 듯 말 듯 조용한 그리움이 천리를 가듯 지극한 마음을 엎지르며 간다. “저 여린 유리병 깨어지는 소리가‘퍽’하며 제 고향 먼 바다를 엎지르다니!

2024-06-23

포항 발전의 새로운 도약대, POEX 건립

이강덕 포항시장 마이스(MICE)산업은 큰 규모의 회의장과 전시장 등 전문시설을 갖추고 국제적인 회의나 기업의 포상관광, 전시회 등을 유치해 지역과 국가 경제에 도움을 주는 고부가가치의 신산업을 뜻한다.숙박과 관광, 쇼핑과 교통 등 연관 산업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발생하는 파급 효과로 인해 ‘굴뚝 없는 황금산업’으로 불리며 미래 신성장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스위스의 작은 도시 다보스는 세계 유수의 경제·정치·기업인들이 참여하는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을 매년 개최하면서 국제적인 도시로 명성을 얻었다.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는 150여 개국에서 4천개가 넘는 기업과 기관, 10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세계 최대 기술전시회 CES(세계가전박람회)등이 열리며 ‘컨벤션도시’로 위상을 높이고 있다.국제 규모의 회의·전시회가 지역을 넘어 국가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고 지역 경제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 넣는 등 긍정적인 효과 거둔 이들 사례는 마이스산업의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로 평가받는다.우리시도 마이스산업이 커 나갈 충분한 잠재력과 경쟁력을 갖고 있다. 아름다운 바다를 활용해 환동해 중심 해양관광도시로 발돋움하고 있고, 주력 철강 산업에 이은 이차전지와 수소·바이오 등 신산업이 기업혁신파크, 기회발전특구 지정 등을 계기로 성장에 탄력을 받으면서 산업 박람회와 같은 국제 규모 행사 수요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포스코, 에코프로 등 글로벌 기업과 포스텍, 가속기연구소 등 세계 수준의 산학연 인프라에서 매년 200회 이상의 컨퍼런스와 심포지엄이 개최되고 있지만 이를 수용할 전문적인 시설은 그동안 없었다.체계적인 준비와 노력 끝에 지역 마이스산업의 구심점이자 비약적인 도시 발전의 도약대가 될 포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POEX)가 장성동 옛 캠프리비 부지에 내달 드디어 착공한다.도심 해변인 영일대해수욕장에 인접해 시원한 바다뷰를 조망할 수 있고, 방문객 이동이 편리하다는 입지적 장점까지 갖춘 곳이다.POEX는 오는 2026년 말 1단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연면적 6만3818㎡, 전시면적 7183㎡ 공간에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로 지어지며 컨벤션홀, 중·소회의실, 주차장, 2개의 키테넌트를 비롯해 다양한 부대시설로 구성된다.이어 비슷한 규모로 추진되는 2단계 시설에는 오디토리움, 다목적 홀, 숙박·상업·레저시설이 자리하며, 2단계 확장까지 완료되면 부산 벡스코(BEXCO)에 버금가는 규모를 갖춰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컨벤션센터로 우뚝 서게 된다.POEX건립에 발맞춰 포항만의 마이스산업 생태계 육성과 안정적인 센터 운영이 중요한 만큼, 전담 조직을 확대 개편해 컨벤션 건립과 지역에 특화된 마이스 행사 및 관광콘텐츠 개발 등 빈틈없는 준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특히 철강과 이차전지 등 지역 특화 산업과 연계한 융·복합 전시회를 개발해 지역과 기업이 동반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형 다보스포럼’을 꿈꾸며 탄소중립 등 글로벌 아젠다를 선도하고 도시를 대표하는 브랜드로써 포항의 위상을 드높일 국제 규모의 행사가 개최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POEX는 시민들이 평소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민 친화적인’ 커뮤니티 공간으로 조성해 또 다른 차별성을 두고자한다. 시민, 관광객이 가족 단위로 방문해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부대시설과 행사를 마련해 문턱을 낮출 계획이다.아울러 해양레저와 쇼핑, 숙박과 연계해 국제행사 개최 시 파급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POEX 일대를 ‘국제회의 복합지구’로 지정을 추진하는 등 포항을 다시 찾고 머무를 수 있는 여건을 계속 마련해 가고자 한다.이같은 노력들이 하나 둘 쌓여 건립될 포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가 지속 발전이 가능한 환동해 중심도시라 우리의 꿈이 구현되는 새로운 랜드마크이자 미래 신산업 활성화의 장, 시민들의 화합의 장으로 소중하게 자리매김하길 희망한다.

2024-06-23

대구의 퐁네프

우정구 논설위원 1991년 제작된 프랑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은 파리의 센강을 가로지르는 퐁네프 다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두 남녀의 치열한 사랑 이야기가 주제다. 세계적 흥행을 이끌며 이듬해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다. 우리나라서도 뜨거운 흥행을 기록하며 프랑스 영화의 붐을 일으킨다.파리의 남쪽에서 북쪽을 연결하는 퐁네프 다리가 세계적 유명 명소로 알려진 것은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덕분이다. 퐁(Pont)은 프랑스어로 다리고 네프(Neuf)는 새롭다는 뜻이다.1570년 프랑스 앙리 3세 때 다리를 짓기 시작해 1607년 앙리 4세 때 완성된 다리다. 새로운 다리라는 뜻의 이름과는 달리 프랑스 센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다리는 흰색 돌을 주로 사용해 만들었고 아치 형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다리 중간에는 말을 타고 있는 앙리 4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영화 속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들이 세계인들의 뇌리에 박히면서 파리에서는 젊은 연인들이 즐겨 찾는 최고의 데이터 코스로 등장했다. 또 다리 중간 중간에 설치된 둥근 석조 테라스에 앉아 바라보는 석양의 아름다움 때문에 이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로도 유명해졌다.대구시가 작년부터 신천을 고품격 수변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상당한 고심 속 투자를 하고 있다. 특히 홍준표 대구시장은 파리 센강의 퐁네프 다리처럼 젊은이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프러포즈 명소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프러포즈 명소의 대략적인 디자인도 나왔다.대외적으로 내세울 게 크게 없는 대구에 퐁네프같은 명소가 생긴다면 대구시민의 자부심 고취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대구의 명소 퐁네프 탄생을 기대한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6-20

사드 엔딩

홍석봉 언론인 경북 성주 초전면 소성리 마을에서 ‘사드 반대’ 집회를 주도하던 상징이 자취를 감췄다. 주민들이 시위 지휘부가 사용하던 천막을 자진 철거한 것. 사실상 사드 반대 운동의 종언을 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 7년 동안 소성리 마을엔 사드반대 구호가 넘치고 플래카드와 깃발이 넘실대며 살풍경했다. 전자파 괴담은 괴물이 되어 성주와 김천을 휘저었다. 진압 경찰과 시위대의 함성과 몸싸움으로 치열했던 시골 마을 회관 앞 도로가 이제 일상을 되찾았다. 2017년 4월 소성리 마을 인근 골프장 부지에 사드(고고도미사일)가 배치된 지 7년 만이다.2016년 정부는 성주에 사드를 배치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소성리 마을 회관 앞은 사드 반대 집회의 중심지가 됐다. 이곳에서 성주투쟁위, 사드반대 김천시민대책위 등이 수시로 반대 집회를 열었다. 초기에는 집회참가자만 수천 명에 달하는 등 위세가 대단했다. 인구 4만2000명의 조그마한 농촌 마을 성주가 한순간 언론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다.민주당과 좌파 단체들은 “사드 전자파가 참외까지 오염시킨다”며 전자파 괴담을 퍼뜨렸다. 주민들은 사드 장비와 물품 반입을 막았다. 주민과 반대단체들은 거의 매일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시위에 나섰다. 최근엔 반대 집회도 잦아들고 참석자가 10여 명 수준에 그치는 등 열기가 식었다고 한다. 규모는 줄었지만, 시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까지 600회 이상 집회를 했다. 지친 주민들은 하나 둘 시위에서 빠져나왔다. 반대 단체들은 시위를 멈출 생각이 없다. 진보의 집요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사드 반대시위는 이젠 힘을 잃었다. 지난해 사드 전자파가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는 환경영향평가 결과가 나왔다. 지난 3월엔 헌법재판소에 낸 헌법소원도 각하됐다. 반대 명분이 없어졌다.사드 사태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사드 배치의 본질은 국가 방위였다. 하지만, 우리는 전자파 괴담으로 안보는 뒷전인 채 자중지란을 일으켰다. 국론은 분열되고 지역 민심은 찢어졌다. 주민과 반대 단체의 집회 및 시위가 장기간 이어졌다. 대규모 경찰력이 동원됐고 시위대와 충돌, 인적·물적 손실을 끼쳤다. 주민과 시위주동자는 전과자가 됐다. 철석같았던 한미 동맹에도 금이 갔다. 우리 사회가 듣도 보도 못한 전자파라는 괴물과의 싸움에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출해야 했다. 얻은 것이라곤 진보의 선동과 악한 영향력을 재확인했다는 점이다. 진보의 선동은 나라를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래놓고도 진보는 사과 한마디 없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희생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성의 계기가 됐다.우리 사회는 그간 ‘광우병 파동’, ‘세월호 사고’, ‘이태원 참사’ 등 심한 성장통을 앓았다. 사드앓이는 또 하나의 성장통이었다. 쉬 아물지 못할 상처를 안은 소성리가 하루빨리 평온과 안정을 되찾길 바란다. 국가와 지방정부가 도와야 한다. 북한 김정은의 도발이 자못 심각하다. 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우리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느슨해진 안보의식을 다잡아야 할 때다.

2024-06-20

6월의 이른 폭염

윤영대전 포항대 교수 하지(夏至),‘여름에 이르다’는 절기다. 태양은 가장 높이 떠서 그림자가 가장 짧고, 낮의 길이가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아서 태양의 에너지를 길게 받아 본격적으로 농작물이 성장하는 시기이다. 이 열기가 쌓여 한 달 후에는 가장 덥다는 대서(大暑)가 오는데, 19일 오전, 기상청은 66년 만에 가장 무더운 6월이 될 것이라고 폭염주의보를 발표했다. 체감온도 33도 이상이 이틀 이상 이어질 것이 예상될 때 내리는 주의보인데, 벌써 92개 지역에 폭염특보가 내려진 상태다.서울은 35.8도로 75년 만에 6월 최고 온도를 기록했고 가까운 경주도 37.7도를 넘었으며 경산 하양읍은 자동 기상관측장비(AWS)가 39도를 찍었다. 우리나라 전국의 한낮 기온이 35도 안팎으로 기온분포 영상을 보면 거의 붉은 색이다. 청명한 날씨에 남서풍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인체 온도보다 높은 날씨에는 온열질환을 조심하는 것이 중요하며, 오후 2~4시 사이에는 야외 작업을 중단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장맛비가 시작되었다. ‘하지에 비 오면 풍년 든다’하였으니 농촌에는 조금은 기다리는 마음으로 모내기를 마쳤을 것이다.이번 6월 폭염은 전 지구적인 기후 현상이라고 소식통은 전하고 있다. 미국은 중서부와 북동부에 열돔(Heat Dome) 현상이 발생하여 38도 이상 치솟아 대부분 지역에 주의보를 발령했고, 중국은 지표면이 75도가 넘는 곳도 발생하였으며, 인도는 폭염 사망자가 160명 이상이 된다고 한다. 사우디에서는 성지순례기간 동안 52도의 열기 속에 550여 명이 사망했고 40도가 넘는 그리스에서는 1주일 사이에 관광객 3명이 현지에서 죽었다는 것이다.엘니뇨와 라니냐의 영향으로 해수면 온도가 상승하여 근래 세계 온도는 산업혁명 전보다 1.3도 상승했다는데 앞으로의 지구환경이 심히 걱정된다. 이러한 열파(熱波)로 올해 7월에 치러질 파리 올림픽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가뭄, 산불, 홍수 등의 기상이변도 심해지고 있으니 지구 곳곳이 난리다.그러나 이른 폭염에 너무 겁내지 말고 주변을 정리하고 마음을 시원하게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6월에 모심기가 끝나면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 풍습이 있다. 땀내 나는 머리카락을 잘 다듬고 제철 음식인 감자와 옥수수, 참외를 먹는 즐거움도 가져보자. 감자는 열을 내려주는 효능이 있고 옥수수는 이뇨 작용이 탁월하다 하니 잘 삶아서 닭백숙과 같이 먹으면 뜨거운 하짓날 열기를 식힐 수도 있겠다. 그리고 민물 장어와 다슬기로 단백질을 보충하여 6월 찜통더위를 잘 이겨 나가보자.그런데 국회는 자기들만의 열기에 막혀있다. 22대 국회가 개원한 지 20여 일이 지나고 있는데도 전반기 원구성도 못한 채 여·야 대치 국면이 장기화하고 있으니 국민은 찜통 같은 답답함에 온몸에 땀이 흐를 지경이다.답답한 마음에 반바지 차림으로 밤바다로 나가 모래밭을 맨발로 걸으며 영일만을 멀리 바라보니, 머릿속에 무언가 빤짝이는 영상이 떠오르는 듯하다. 석유 시추탑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발표한 140억 배럴의 석유와 가스, 매장 가능성이 10%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꿈 ‘산유국’이 현실이 되길 빌어본다.

2024-06-20

입법독재(立法獨裁)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며, 국가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국회의원의 직무를 양심에 따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선거에 당선되어 임기를 시작하는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하는 선서다.국회의원들은 국민의 대표로서 각계각층의 의견을 반영해야 하고,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되 소수 의견도 충분히 존중하고 반영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모든 의사결정 과정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며, 모든 법안과 의제는 공평하게 심의되어야 하고,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해서는 안 된다. 국회는 정당이나 외부 세력의 부당한 압력을 배제하고 독립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입법부로서 행정부와 사법부의 권력분립을 지키고,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헌법에 명시된 국회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요약이다.다수의석을 차지한 야당이 입법독재를 하고 있다는 원성이 높다. 삼권분립 제도를 채택한 국가에서 야당이 입법독재를 자행한다는 것은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것은 위에 열거한 국회의 임무와 역할에 위배되는 일일 뿐 아니라 헌정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만행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입법 폭주를 일삼는 것은 오로지 저들이 안고 있는 사법리스크를 모면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걸 대다수 국민들은 알고 있다.국회 다수당의 폭주가 시작된 것은 문재인 정권 후기부터다. 적폐청산을 명목으로 특검을 발족해서 박근혜 정권 관련 인사들을 대거 사법처리할 때까지는 박수를 보내다가, 막상 검찰의 칼끝이 자신들을 향하자 토사구팽으로 검찰해체에 나서면서 국회가 폭거에 나섰다. 검찰무력화의 일환으로 소위 ‘검수완박’법을 제정한 것도 모자라 옥상옥으로 일컬어지는 ‘공수처법’까지 편법을 써가면서 밀어붙였다. 그래놓고 이제는 공수처도 못 믿으니 특검을 하자고 한다.하지만 대선에 패배해 정권이 바뀌자 야당이 된 다수당은 어떻게든 정권에 흠집을 내고 타격을 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일단은 국회의장을 비롯해 주요 상임위원장을 독식하고, 그 무소불위의 힘으로 특검과 탄핵 결의를 남발해 정권의 발목을 잡고 검찰과 사법부와 언론을 겁박하고 장악하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는다. 단독으로 ‘방송3법’을 통과시켜 언론장악을 노골화하고, 사법리스크 모면책으로 검사와 판사를 탄핵하겠다는 것도 모자라 아예 검찰청을 없애버리는 법안을 발의하자는 말도 나오고 있다.국회는 민의를 대변하는 기관이다. 국회의원 각자는 개인이 아니라 지역주민과 지지자들의 대리인 자격을 갖는다. 그래서 국회는 가장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하고 소수의 의견도 충분히 고려하고 반영해야 한다. 그런데도 다수의석을 앞세운 야당의 파행과 폭주는 반민주적이고 반법치적인 만행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입법독재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우선 행정부와 사법부가 제 구실을 해야 하고 민심이 선거로 심판하는 수밖에 없다.

2024-06-20

탄탄이 만난 두 거장, 이문열과 박명재

얼마 전 남천주(南川州 옛 이천의 지명) 설봉산자락 마장면 장암리의 ‘부악문원’으로 발길을 향했던 적이 있다.  문원은 우리시대의 대 문호이시며 서울장안의 지대를 '황금종이'로 탈바꿈 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하시고, 이 시대의 진정한 이야기꾼, 초명(初名)은 이열(李烈)이신 이문열 대문호(작가)께서 인세로 장만하여 자신의 집필실부터 창작인을 위한 객사까지 겸비한 곳이다. 후학도 양성하고 있어 일명 ‘이문열 학숙(學塾)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말엔 고속도로가 늘 저속도로 되어 대형 주차장이 된 듯 한 도로에서 거의 긴급한 시간을 초조하게 허비하다가 약속시간 보다 30분을 넘게 지체하여 도착을 했으니, 도로 탓으로 돌리기에도 영 체면이 서지를 않았지만, 몇 달 전부터 굳게 한 약속을 속수무책으로 준비성이 없었음에 안면이 제대로 서질 않았다. 도를 넘는 실례를 범한 것이니 멋쩍었다.  여하튼, 정원에는 참 붕어 몇 마리가 노니는 아담한 연못이며 그림 같은 낙락장송 몇 구루가 우뚝하니 서 있었고, 이미 문장으로 일가를 크게 이룬 자타공인하고 남은 두 대가이신 이문열 선생님과 영일만이 낳은 수재 동천東天 박명재 대감을 30분 넘도록 기다리게 한 위인이 바로 이 몸이었다.  동천 선생과의 지중한 인연은 예전 포항 영일만 최고봉의 암자로 소원 한 가지는 꼭 들어준다는 '기도 영험처'로 경향 각지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원효성사와 자장율사께서 머물던 천 년 전의 초막인 자장암에서였다. 이곳에서 잠시 머물던 때에 전례 없던 전염병이 창궐하여 지구촌에 돌았던 근자의 지난시절, 일기도 고르지 않던 날 한 치의 앞도 구분키 어려워 가랑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가물가물 물안개가 자욱했던 그날, 예측불허의 인생길속 같은 운제산 자락 구비구비 벼랑 끝의 암자에, 급작스럽게 지나간 한 시절엔 이름 꽤 높은 고관으로 명예롭게 예편하시고 늘 나랏일에 바쁜 현직 국회의원께서 간당간당 떨어지기 직전 제비집처럼 매어달려 아슬아슬하고 험했던 험한 길을 방문하겠다니, 그 때의 순간 부족한 이 사람은 하필 그 좋은 날 제치시고 이런 시기에 이곳을 오시어야하나 하는 오지랖 염려도 없지를 않았으나, 예전 같으면 당상관인 이조판서(제9대 행정자치부 장관)를 지내고 대제학(대학총장)까지 역임한, 일흔에 다다른 현역 국회의원이 지나는 길에 들르겠다는데, 이를 마다하는 것도 크게 예의를 벗어나는 것 같아 엉거주춤하며 맞이했던 분이 동천東天 박명재 대감이었다. 그 때의 쉼 없는 폭포수 같은 지혜의 명철대오를 각인케 해주는 감로설법에 매료되어 지금까지도 그 인연이 이어져오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 시대의 거두들인 두 어르신의 당당한 존재감을 보여주듯이 문원 푸른 정원 앞마당에는 그 사계절 푸르른 낙락송이 마치 두 분 인 양 우뚝 서있었고, 한때 박 대감이 행정자치부 장관시절 인사과장직의 중요 요직에 발탁한 여장부로 현 이천시통령이 지불한 쌀 맛, 밥맛의 질이 전국에서 내놔라하는 널리 알려진 집에서 이문열 대문호와 박명재 대감을 모시고 이밥에 질긴 나물(?)로 배를 불렸던 그럭저럭 행복한 하루였다. 또 젊은 시절 만나 평생을 교류하고 있는 두 분의 대화 속에서 진정한 우정이 어떤가를 되새겨 본 시간이기도 했다.   다시 부악문원 수 만권의 서책 앞에 눈이 휘둥그레하여 있던 찰나에 이 선생 댁 여사님께서 지나는 말씀으로 "아끼고 귀중한 물건, 그러니 이보다 양질의 책은 경상도 땅인 영양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 광산문학관에 내려 보냈는데 근자에 이르러 화마에 모두 다 타버렸다"고 하셨다. 관련 인사들의 용심부족 탓이든, 관리 소홀 탓이든 간에 이를 듣고 있으려니 울화가 치밀어 올라 터지는 듯 했다.   문원을 한 바퀴 돈 후 이문열 선생님으로부터 이런저런 내심을 들었는데 그 중 하나는 낙향이었다. 이 대문호께서야 고향으로 내려가 말년을 유유자적하며 인생을 마무리하심도 한 생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수도권 인구에게는 아직도 이문열 선생의 고전적이고 인문주의적이며 그가 발간한 오랜 책의 그 향내가 그저 그립다. 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윽하기만 한 문체를 만나고 싶고, 일필휘지 그의 글을 통해 이 퍽퍽하기만 한 디지털 세상에선 볼 수 없는 인간 속마음을 통찰해 봤으면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아직 그의 글을 바라고 기다리는 이들이 적잖다. 그러니 이 대문호께서 심호흡 한 번 크게 하시고 우리 속 심금을 시원하게 울려주길 빌고 또 빌어본다.    수도권 과밀화는,'재화가 수도권으로만 집중한 현상'도 있겠지만, 서울이 '문화공화국'이라는 것에도 기인한다. 기실, 정책의 부족함과 소홀히 만든 결과일터다. 그 문화공화국도 지금 진보 진영이 죄다 장악했다. 그들의 일방적이고 배타적 편견과 곡해로 인해 이 시대의 진정한 이야기꾼으로 자리매김한, 이미 대가 중에 대가인 선생도 수시로 상처가 났다.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이 세상, 그리고 평가받지도 못하는 이 사회가 지랄 같다. 사람은 누구든 일생을 통해 꼭 하고 싶은 얘기, 그러니까 평소에는 오히려 더 가슴 깊이 묻어 두게 되는 하나의 얘기를 지니고 있다고 하던데, 좀 어눌한 듯 하지만서도 이 선생께서 내뱉은 속내 한마디가 또박또박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감각적이고 즉흥적이고 일도양단 식으로 우리 편 네 편 나누어 이전투구 하듯 흑백논리만 무성한 그 ‘SNS 문체’로 어찌 우리시대의 진정한 이야기꾼의 '웅장미학'을 당해낼 재간이 있을까. 1980년대 우리 세대는 책은 좀 덜 읽고 데모만 해 인문학적 사고가 다소 부족했었음을 자인한다. 근데 그 모자람은 평생 갔다. 그렇다면, 2024년 지금은 어떤가. 책은 온데간데없고 여길 보나 저길 보나 온통 SNS 광풍이 휩쓸고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 나불거리기만을 거듭하며 편이나 가르는 인간들이 사는 세상, 그리고 어느 새 그들이 주인공이 되가는 시대가 됐다.  이 사람이 구닥다리여서일까. 근래 들어 인문학적 사고를 사회에 접목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간혹 생각한다. 인문학이 좀 더 밝고 건전한 세상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하나 더 욕심낸다면, 그 인문학의 영역 확장 역할을 수고스럽지만 이 대문호께서 좀 해주시면 더없이 좋으련만.  아 참, 솔직히 국보 같은 아니 국보 그자체인 국민작가에게 그에 걸 맞는 대접도 좀 해주라. 우리 시절에 그이 덕분에 사색의 위대함을 이토록 깨닫지를 않았는가. 이문열 선생님께서 그날 부악문원을 떠나는 이 사람에게 들려주신 천둥소리가 지금도 쟁쟁하게 들린다. "죽으면 죽으리라". /탄탄 (전)불교중앙박물관장·현 동국대(와이즈캠퍼스) 출강

2024-06-20

대통령과 술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유대인들의 지혜를 담은 책 ‘탈무드’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술을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땐 양같이 온순하지만, 조금 더 마시면 사자처럼 사납게 되고, 거기서 더 마시며 원숭이처럼 춤을 추고, 폭주하면 토하고 뒹구는 돼지가 된다.”술에 관한 비유 중 이처럼 적절한 걸 찾아보기 쉽지 않다. 선현들은 술을 마실 때도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오죽하면 주도(酒道)란 말까지 있을까. 과하면 도리를 벗어나게 만드는 게 술이다.한국인의 ‘술 사랑’은 유명하다. 필부필부부터 대통령까지 신분에 상관없이 많은 양이건 적은 양이건 술을 즐겨왔다. 김영삼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은 비교적 나이가 많아 집권했으니, 술을 크게 즐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반면 40대에 대통령이 된 박정희와 전두환은 주량이 상당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경우 촌로들과 막걸리를 즐겨 마셨고, 동시에 청와대 인근 안가에선 위스키 시바스 리갈을 즐겼다.보스 기질 다분했던 전두환은 부하 장교들과 호방한 술판을 벌이는 게 여러 영화에서 묘사된 바 있다. 1980년대 청와대에서 가족 행사를 끝낸 전두환이 취한 모습으로 동생의 부축을 받는 영상도 남아있다.현직 윤석열 대통령 또한 애주가의 면모를 드러내는 경우가 흔했다. 막걸리병 뚜껑을 여는 방법을 알려주는 모습이 방송을 통해 보여졌고, 전통시장을 찾았을 땐 해산물을 가리키며 “이런 안주엔 소주 한잔이…”라며 웃기도 했다.다 좋다. 대통령이건 회사원이건 기호품으로서의 술을 즐기는 걸 누가 탓하랴. 다만 ‘유주무량 불급난’(唯酒無量 不及亂·마시는 양에 한정을 두지 않되 정신이 혼미해져서는 안 된다)이란 ‘논어’ 구절을 먼저 새겨야 할 터다./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6-19

거짓과 진심

장규열 고문 6·25가 다가온다. 74년 전 대한민국은 꺼져가는 등불이었다. 북의 기습남침 이틀 만에 대통령은 힘차게 방송하였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소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 용감무쌍한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 이겨 마침내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믿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거짓말이었다. 이를 듣고 안심했던 피난민들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필자의 선친 삼남매는 그렇게 서울에 갇혔다고 했다. 대통령과 각료들은 이미 서울 이남으로 피신한 후였던 데다, 한강 다리마저 폭격으로 끊어진 서울에서 시민들은 독 안의 쥐가 되었다. 서울 수복까지 지옥같았을 서울 생활을 상상할 수 있는가.정치인들에게서 진심을 읽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그들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나라와 국민을 마음으로 생각하는 정치가 보이는가. 술수와 정략으로 겨우 피하기만 하는 말싸움의 아수라가 아닌가. 그만하면 보일만도 한데, 국민이 만난 어려운 상황과 고단한 일상은 누구도 헤아리지 않는다. 물가가 뛰고 이자가 천정에 닿으며 환율이 고공행진을 해도 정치판은 오히려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판에 자기들끼리 치고받는 일이 무에 그리 급한지 알 길이 없다. 어려운 고개를 넘으며 하루하루를 사는 국민은 답답하다. 누구도 돕지 않는 막막한 날들을 2024년에도 만나고 있다니! 도대체 무엇으로 어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인지, 누구를 위하여 그들은 정치를 하고 있는지. 최소한 당신 자신의 영달을 위함이 아니었음은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역사는 앞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때때로는 거꾸로 흐르는가. 국민을 말로만 주워담는 정치는 신물이 난다. 당신들이 ‘국민’을 들먹여도 눈치빠른 국민은 그 마음을 이미 읽는다. 공천과 당선에만 관심이 있으며 자신의 안위에만 전전긍긍한다는 걸. 아니라면 당신들 하는 일에 공감과 배려가 보여야 한다. 국민의 어깨가 한 치라도 가벼워져야 한다. 국민은 억장이 무너지는데, 이제는 사이다 발언에도 한숨만 나온다. 국회는 무엇 하는가. 한껏 기대하며 표를 모아 국회로 보냈더니 문도 다 못 열었다. 학생과 회사원에게 교실과 사무실이 제 자리이듯 국회의원에게는 국회가 자신의 자리가 아닌가. 수많은 나라의 법과 제도, 그리고 쉽지 않은 과제들에 지혜를 모아 만들고 풀어내라며 국민이 쉽지 않은 표심을 보태어 보내주지 않았는가. 경제가 어렵고 공동체에 병이 깊은데 나랏일은 뒷전이란 말인가. 논의든 투쟁이든 국회 안에서 실력과 기량을 발휘해 주시라.레이건(Ronald Reagan)은 ‘의회 의원에게 가장 무거운 책임은 국민을 보호하는 일’이라 하였다. 그 국민이 어렵다. 어려움을 만난 국민을 돌아보아 주시라. 명분과 실리도 국민을 놓고 보면 실마리가 보인다. 국민을 위하는 명분 말고 당신에게 더 급한 명분은 없으며, 국민이 행복해지는 실리 외에 당신에게 다른 실리는 없어야 한다. 정치가 거짓을 지워야 한다. 정치가 진심을 세워야 한다.

2024-06-19

자율신경 실조증과 치료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자율신경 실조증이란 교감 신경의 균형이 깨져 인체의 항상성 유지 기능이 떨어지게 되어 여러 가지 질병이 발생되는 경우를 말한다. 사실 많은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질환이고 병원에서도 특정한 병이다라고 할 수 없는 증상이다. 그러나 환자는 다양한 증상으로 인해서 고통 받고 있는 질환이다.예를 들면 사람들 앞에 서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거나 가슴이 답답하고 두근거린다. 잠들기 힘들고 꿈이 많다. 잠을 자주 깨는데 깨고 나면 더 못잔다. 잠을 자도 피로하다. 몸이 항상 피로하고 힘이 없다. 눈이 피곤하고 시력저하가 있다. 어지럽고 갑자기 일어날 때 현기증이 온다. 매년 환절기마다 감기에 걸리고 오래 간다. 몸이 차거나 더위를 남보다 많이 탄다. 기분이 우울하고 짜증이 난다. 머리가 무겁고 두통이 자주 발생한다. 속이 미식거리고 식욕이 없고 구역질과 트림이 잘나고 배에 가스가 차는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최근엔 양방에서는 이러한 증상들을 통칭하여 자율신경 실조증이라고 부르고 다양한 치료를 하고 있다. 한방에선 예전부터 이런 증상들을 화병이나 비기허증 등으로 부르며 치료를 해왔다. 자율신경 관련 질환은 예전부터 한방이 큰 강점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런 증상들은 대부분 신체 기능이상이라 한약으로 치료를 한다. 한약치료의 원칙은 현재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에 맞춰 원인을 파악하고 거기 맞는 약재를 조합하여 처방을 하게 된다. 갱년기나 화병 증상이 많으면 치자 황련 시호 등의 약물을 조합하고 위장쪽 질환을 주로 호소하면 반하 당삼 건강 등의 약재를 조합하여 처방을 한다. 특별한 원인이 없이 몸이 피로하고 다양한 증상으로 고통 받는 경우는 이렇게 한약 치료를 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첫 번째는 운동이다. 하루 40분 정도 걷거나 가볍게 뛰어주고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운동을 해주면 된다. 두 번째는 음식조절이다. 적게 먹는 것이 기본이고 맵고 짠 것은 먹지 않는다. 천천히 100번씩 음식을 씹어서 섭취한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익숙해지면 그렇게 힘들지 않다. 세 번째는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거울을 보고 웃는다던지 쉬는 시간에 눈을 감고 5분 정도 가만히 있는 것도 좋다. 자율신경 실조증은 말 그대로 교감 부교감 신경 조절이 잘 안 되는 것이고 이는 내가 만든 생활습관이 만든 것이니 열심히 운동하고 적게 꼭꼭 오래 씹어 먹고 맘을 편하게 하면 도움이 된다.최근 과학의 발달로 좀 더 정확한 치료를 할 수도 있다. 교감신경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성상신경절에 약침을 놓는 것이다. 이 신경은 경동맥 밑에 위치를 해 그동안은 직접적으로 치료가 힘든 부위였다. 그러나 성상신경절에 정확히 약침을 주입만 하면 교감신경 항진이나 자율신경 실조로 인한 다양한 증상들이 좋아진다. 초음파로 정확하게 성상신경을 찾아서 직접 보면서 안전하게 시술을 할 수 있다.본인의 노력과 적합한 치료를 하면 그동안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2024-06-19

걷고 보고 듣다 독일 여행기(上)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퇴직하자마자 곧바로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여행을 계획했으나 코로나가 발목을 잡았다. 코로나 끝날 무렵엔 2년간 유치원을 다니는 연년생 손자와 손녀의 등하원을 돕느라 또 미뤘다. 지난 3월로 막내 린이가 학교에 가게 되자 이젠 나의 ‘은퇴 후 버킷리스트’ 제일 위쪽에 있는 이 여행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독일에 외사촌 동생이 살고 있었다. 20년도 훨씬 전에 음악공부를 위해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음악치료를 더 공부해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동생이다. 휴가 때마다 귀국하면 반드시 만나서 웃음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친동생 같이 살가운 사이다. ‘네가 있을 때 독일살이 하고 싶다.’며 만날 때마다 버릇처럼 말했더니, 반색을 하며 오라고 했는데, 앞서의 사정으로 미뤄진 지 4년이나 지났다. 동생은 해마다 휴가계획을 잡으면서 나의 독일행을 먼저 확인하곤 했다. 이번 여행은 작년 11월에 동생이 2024년 휴가 계획을 세우며 잡은 일정이었다. 더는 미룰 수가 없다에 합의하면서 우리는 신나게 여행계획을 잡기 시작했다. 여러 곳을 점찍듯 둘러보는 패키지여행은 싫다. 대신 며칠씩 한곳에 머물기. 이왕지사 먼 길 가는데 독일만 가기는 좀 아까우니, 주변국가의 도시도 몇 군데 둘러보기. 우리 내외 나이가 있으니 너무 많이 걷지는 말자. 이상이 나의 요구 조건. 남편은 독일의 시인과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고 관련 책을 사서 탐독하더니, 그들의 흔적들을 찾고 싶단다. 동생은 음악 전공자다운 이벤트를 제안했고 나도 대찬성. 두 편의 오페라와 한 번의 연주회가 추가되었다. 우리의 요구와 동생의 제안으로 세상에 둘도 없을 멋진 일정이 되었다. 2주를 훌쩍 넘는 비교적 긴 일정이었다.동생이 사는 독일 남부의 작은 도시 튀빙겐에서 며칠을 머물며 독일살이를 하는 것으로 우리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동생은 아파트를 빌려놓았고,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나와 남편의 교통카드까지 발급해 두었다.걷지 말기는 애시당초 제외였다. 또한 걸어야 보였다. 우리는 하루 평균 1만5000보 이상 걸었다. 2만6000보까지 걸었던 날도 있었다. 매일 만보기의 기록개신을 확인하면서 놀라고 대견해 했다. 밤이면 잠에 골아 떨어졌고 이튿날 또 멀쩡해졌다. 스스로 회복탄력성이 있다고 믿었던 나는 즐겁게 걸었다. 남편은 좀 힘들어했지만 잘 참아주었다. 덕분에 우린 도착한 날 밤에 딱 한 번만 택시를 탔을 뿐이었고, 모두 뿌듯해했다.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대부분의 도시는 고풍스러운 언덕 위의 성, 서양 미술양식의 성당과 교회, 그리고 아름다운 마을 풍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자세히 보고 즐기며 만끽했다.또 하나, 동생이 추천한 음악 프로그램은 충만했고, 여운은 길었다. 뮌헨오케스트라의 ‘토스카’와 비엔나오케스트라의 ‘투란토트’, 비엔나모차르트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내가 직접 보고 듣게 되다니, 기대 이상 상상 이상의 귀호강이었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생각난다. 나의 이번 여행은 ‘걷고 보고 들어라’였다.

2024-06-19

번데기, 추억을 소환하다

정미영 수필가 햇살이 씨줄날줄 엮여 고르게 쏟아지는 화창한 날이었다. 경주시 전통명주전시관에 다녀왔다. 우리 일행은 명주 제조 과정을 직접 보기 위해 일부러 일정을 맞췄다. 시연은 매주 화, 목, 토, 일요일 오전 10시에 한다.솥에 고치를 넣고 삶아 실을 빼내었다. 누에가 성충이 되려면 고치를 뚫고 나와야 하는데, 우화시킨 뒤에 남은 고치로 실을 얻으면 중간에 계속 끊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우수한 품질의 견직물을 얻기 위해 번데기째 삶는단다.점심때가 되어 식당에 갔다. 일행 중 한 분이 학창 시절 추억담을 풀어놓으셨다. 산에 가서 뽕잎을 따다가 누에를 기르는 것은 본인의 몫이었고, 명주실을 뽑아 베틀에서 베를 짜 옷을 만드는 것은 어머님의 몫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히셨다.모두가 경험담에 몰입해 있던 순간, 밑반찬으로 번데기가 나왔다. 스스럼없이 먹는 내 모습을 보고, 번데기를 먹을 줄 아느냐며 몇몇 일행이 깜짝 놀라셨다. 평소 나의 식성을 아는 분들이라 의외였던 것이다. 번데기를 입에 넣으니 입 안 가득 짭짤한 맛이 나며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그 냄새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던 낯익은 것이었다. 그리움이었다. 나에게 있어 추억이 그리움이 되려면 내면의 심상이 따뜻해야 한다. 번데기를 보는 순간, 내 그리움의 심연 깊이 드리워져 있던 아버지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 윤슬처럼 반짝였다.나는 대여섯 살 무렵부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시내 영화관에 다녔다. 영화 광고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은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영화관이 우뚝 서 있었다. 주위 건물에 비해 컸으므로 그것이 영화관이라는 것은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시각이 아닌 후각으로 먼저 느꼈다. 골목길에 흠씬 배어 풍겨오는 번데기 삶는 냄새 때문에 영화관에 도착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내가 어렸을 적에는 영화관 앞 노점상에서 번데기를 팔았다. 찌그러진 양푼에 수북이 담긴 번데기는 모락모락 김을 내며 간식거리를 찾는 이들의 군침을 돌게 했다. 번데기는 그 어떤 그릇에 담아 먹는 것보다 돌돌 말린 소라 모양의 신문지에 먹는 맛이 최고였다. 종이 속 가득 담겨 있던 번데기는 신문지 냄새와 섞여 내 코를 자극했던 것 같다. 아니, 모처럼 함께 한 아버지와의 나들이 길에 꼬깃꼬깃 접혀진 비상금으로 사주신 군것질감이라 더 감칠맛 났던 것이리라.요즘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듯 그 시절에는 번데기를 먹었다. 불 꺼진 영화관에 앉아 모두가 화면을 응시할 때, 조심스럽게 번데기를 먹었던 그 맛을 아직도 나는 잊을 수 없다. 꿀꺽 소리가 옆 사람에게 들릴까 봐 눈치를 보며 천천히 삼켰던 일은 나에게 영화의 긴장감 못지않았다.성룡의 ‘취권’과 숀 코넬리, 로저 무어의 ‘007 시리즈’를 보면서도 번데기를 먹었고, 시한부 인생을 그린 ‘스잔나’를 보면서 울고 웃는 가운데에서도 내 손은 번데기를 집어 입 안에 넣고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 영화를 더 재미나게 볼 수 있는 조미료가 되어 주었던 것 같다.프루스트 효과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특정한 냄새, 소리, 이미지 또는 다른 감각적 자극을 통해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현상을 뜻한다. 번데기를 보고 어린 시절에 갔던 영화관과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올랐으니, 나에게도 프루스트 효과가 적용된 셈이다.지금, 누에의 한살이를 생각해 본다. 누에는 자기의 모든 것을 내주는 존재다. 고치 속에서 날고 싶다는 꿈을 꾸었을 텐데도 사람들에게 실을 주고 식용이 된다. 나는 왠지 누에가 아낌없이 나눠 준다는 점에서 부성애가 강한 내 주변의 아버지들과 닮은 것 같다. 자식을 위해 늘 헌신하는 아버지들. 내 아버지도, 아버지의 꿈이 있었을 텐데 나를 위해 매순간 가슴으로 삭혔을 것이다.아버지가 무던히도 그리운 날이다.

2024-06-19

악성 우륵의 악기, 가야금

음악은 다양한 사람들이 어떠한 제약도 없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옛 가야국에서 만든 가야금(伽倻琴)은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에 통합되지 못하던 가야를 아우르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가야국의 금(琴), 가야금은 옛 문헌에서는 한글 표기로 ‘가얏고’라 불리던 현악기였다. 주로 긴 오동나무로 만든 공명판 위에 명주실로 꼬아 만든 12개의 줄을 걸고 줄마다 그 줄을 받치는 작은 안족을 두었다. 가야금의 둥근 윗판은 하늘을, 평평한 아랫판은 땅을, 공명통인 가운데가 빈 것은 천지와 사방을, 12줄과 12개의 안족은 12개월을 상징한다. 또한 악기의 몸체는 천지음양을, 3치 높이의 안족은 천지인을 나타내어 동양의 우주관과 자연의 운행 원리를 담아내었다.가야금은 대체로 수령이 30년 이상인 오동나무를 5~7년 통풍이 잘되고 그늘진 곳에서 자연건조하여 만든다. 대개의 악기가 그렇듯 둥근 형태로 깎아서 모양을 잡고, 앞판과 뒷판을 이어 붙여 울림통을 만든다. 습기를 제거하고 오랫동안 변질이 되지 않도록 불에 달군 인두로 울림통을 지지는 것도 중요한 과정 중 하나다. 안족 중앙에 줄의 굵기에 맞는 홈을 파고, 가야금에 실을 걸면 완성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야금은 공명판의 오른쪽 끝을 연주자의 무릎에 얹고 오른손으로는 줄을 뜯거나 튕기며 왼손으로는 줄을 떨거나 누르면서 연주한다. 곧 청명한 음색이 들려온다.대가야 가실왕(嘉實王)은 우륵(于勒)에게 가야금을 제작하고, 지역에 따라 다른 가야의 특색을 모아 작곡하도록 하였다. ‘신라고기(新羅古記)’의 기록을 보면, “가실왕은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각 다른데 그 성음(聲音)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악사 성열현(省熱縣) 출신 우륵에게 명하여 12곡을 만들게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우륵이 지은 12곡에는 당시 가야의 지명이 담겨 있다. ‘삼국사기’에는 12곡으로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달기(達已)·사물(思勿)·물혜(勿慧)·하기물(下奇物)·상기물(上奇物)·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사(爾赦)·보기(寶伎)·사자기(師子伎)를 언급한다. 이 중 10곡의 곡명이 당시 낙동강 주변의 옛 가야 지방의 명칭이다. 하가라도는 신라 법흥왕 때의 아라가야(아시랑국) 지역으로 현재의 경남 함안이며, 상가라도는 신라 진흥왕 때 멸망하여 대가야군이 되었던 지역으로 현재의 경북 고령군이다.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고 익힌 성열현은 고령에 있다. 달기는 경북 예천 다인현으로 본래는 달기현 또는 다기라 불리던 곳이고, 사물은 사수현 또는 사물현으로 지금의 경남 사천이다. 물혜는 경남 함양군 이안으로 이안현 또는 마리현이었던 곳이고, 하기물은 옛 감문소국이 있던 곳으로 금물현 또는 음달이라 불렸으며, 지금의 경북 금릉 아랫개경에 해당된다. 상기물은 경북 금릉의 웃개령이고, 거열은 거열군이라 불리던 경남 거창이다. 사팔혜는 팔혜현·초팔혜현·초혜현으로 불리던 경남 합천군 초계 지방의 옛 지명이고, 이사는 지금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일대이다. 보기와 사자기는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이렇게 널리 분포되어 있던 가야는 지역마다 전통과 문화가 달랐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성했다. 그러나 신라의 영역 확장은 가야의 존폐 위기를 초래했으며, 대가야의 가실왕은 가야가 통합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음악을 선택했다. 우륵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만들고, 각 지역색을 담은 곡을 작곡하게 한 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고령현 고적조 금곡(琴谷)에서 가야국 가실왕의 악사 우륵이 중국의 진쟁(秦箏)을 본떠서 거문고를 만들어 가야금이라고 불렀다. 우륵이 공인(工人)을 거느리고 거문고를 익힌 곳”이라 전한다. 현재 고령 대가야읍 쾌빈리 일대로 보는데, 가야금 연주 소리가 산골에 정정하게 울렸다고 하여 예전에는 정정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또한 동구뱅이라 지칭되기도 했다. ‘환상’이란 뜻의 고령 방언 동구와 ‘방’이란 뜻의 뱅이가 만나 ‘환상이 보이는 곳’이란 뜻이다. 가야금의 골짜기라 하여 금곡(琴谷)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우륵이 이곳에서 연주하면 그 소리를 듣고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고기(古記)에 따르면, 우륵은 평생 185곡이나 만들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이 정정골에서 12곡을 작곡했다는 기록뿐이다. 가야국이 망하자 우륵은 제자 이문과 같이 신라에 투항했고, 가야금은 신라에 전수되었다. 우륵은 신라 진흥왕에게 가야금의 예술성을 인정받고 신임받았다. 계고, 법지, 만덕이란 세 명의 제자를 두어 가야금과 노래, 춤을 전수하고자 했으나 가야의 음악을 망국지음(亡國之音)으로 치부한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진흥왕은 음악에는 죄가 없다며, 세 제자를 설득했고, 우륵은 비로소 전수할 수 있었다. 이후 가야금 음악은 신라의 대악으로 채택된다. 신라의 대악은 아정한 음악, 바른 음악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국음악의 근본이 된다.정정골의 동산 위에 우뚝 솟은 우륵기념탑은 우륵의 업적을 기리고 지역문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대가야축제 추모행사가 이뤄지는 장소이다. 우륵의 집은 아담하고 소박한 곳으로 2009년 건립되었다. 우륵박물관은 가야금과 우륵에 대한 세계를 5개의 테마로 나눠 설명한다. 시원한 산책로를 따라 가얏고 마을을 걷고, 가야금을 만들어 보고, 작은 연주도 할 수 있는 가얏고 마을을 둘러보며 옛 우륵의 자취와 우리 악기의 소중함을 느껴본다. 가야금의 아름다운 선율이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4-06-19

이준석과 ‘보수 정체성’

심충택 논설위원 3권분립을 뿌리째 흔드는 민주당의 각종 특검법안이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재의결 될지가 22대 국회 최대 관심사다. 민주당은 지난주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된 ‘김건희 특검법’과 ‘방송 3법’ 등 22개 법안을 이번 국회에서 중점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현재 사분오열된 국민의힘 상황으로 봤을 땐 ‘정쟁(政爭) 대상’인 법안 상당수는 재의결 될 소지가 다분하다.여권은 다음달 전당대회를 앞두고 주류인 친한(친한동훈)계를 비롯해 친윤(윤석열)·비윤·반윤계, 중진모임, 소장파모임(첫목회) 등으로 분열돼 있다. 일부 의원이 당론과는 달리 쟁점법안에 찬성표를 던지거나 아예 본회의에 불참하면 재의결에 필요한 정족수(재석의원 3분의 2)가 채워질 수 있다. 이미 조경태·안철수·김재섭·한지아(비례대표) 의원 등은 ‘채상병 특검법’에 찬성한다는 견해를 밝혔고, 당권도전이 유력한 김재섭 의원은 ‘김건희 특검법’에도 찬성하고 있다.최근에는 야권 6개 정당이 공동교섭단체 구성을 추진하고 있어 국민의힘으로선 상황이 더 나빠졌다. 6개 정당 의석수는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진보당 각각 3석, 새로운미래·새진보연합·사회민주당이 각각 1석이다. 의석수가 20석을 넘으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다. 교섭단체를 구성하면 국회 의사일정 조정·상임위원회 구성 등 국회 전반의 활동에 관여할 수 있게 돼 의사 개진이 한층 폭넓어진다. 공동교섭단체 구성과 관련해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의 선택이다. 이 의원이 만약 교섭단체라는 눈앞의 이익에 매몰돼 조국혁신당과 손을 잡을 경우 그의 정치적 기반인 보수 지지세력과는 영원히 같이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이 의원이 앞으로 폭넓은 국민지지를 받으려면 어떤 정체성을 가지느냐가 중요하다. 1차 시험대는 지방선거다. 그가 언급한 대로 개혁신당이 정치적 소수자인 청년인재, 경력단절 여성 등을 중심으로 공천해서 광역·기초단체장을 배출할 경우, 정치적 위상이 한순간에 올라갈 수 있다. 이 의원은 지난 2021년 6·11 전당대회 당시 30대에 당대표에 당선된 성공경험도 있기 때문에 좋은 성적표를 낼 가능성이 있다. 다만, 공천과정에서 드러날 그의 정체성이 주요변수가 될 것이다. 이준석의 정치적 후견자인 김종인씨는 총선 당시 ‘이준석 대구 출마론’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의원이 보수텃밭인 TK(대구경북)의 정체성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개혁신당은 지난달 25일 야권이 서울도심에서 연 ‘채상병 특검 촉구 장외집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수석대변인 논평을 통해 ‘이재명 대표가 너무 착하다’고 했던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에게 “악질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는 사람에 대해 눈살 찌푸리는 아첨을 그만두라”고 질타하기도 했다. 나는 이런 일련의 개혁신당 언행이 이준석의 ‘보수정체성 콘텐츠’를 채워나간다고 본다. 이 의원은 4·10총선 과정에서 이낙연의 새로운미래 정당과 ‘빅텐트’를 쳤다가 실패한 악몽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2024-06-18

경북 총각이 결혼하기 불리한 이유

우정구 논설위원 인구학에서 사람의 성비(性比)는 여성 100당 남성 수로 계산한다. 성비가 높다는 것은 남성의 수가 여성의 수보다 더 많다는 뜻이다.자연적인 출생 성비는 보통 105대 100 정도로 본다. 출생시만 보면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보다 더 많이 태어난다. 하지만 남자의 사망률이 높고 여자보다 평균 수명이 짧아 고령에 이르면 여초 현상이 생긴다.세계적으로 보아도 남성의 성비가 높다. 대륙별로는 아시아는 남성의 성비가 높으나 유럽과 중남미는 여성의 성비가 높은 편이다.남녀 성비 구성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사건으로는 전쟁을 들 수 있다. 전쟁에서 희생된 남성이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성비의 불균형도 세대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100대 100으로 맞춰진다.동물의 암수 성비가 1:1에 근접하고 있는 것을 진화생물학에서는 피셔의 원리라 부른다. 성 생식을 통해 자손을 번식하는 인간의 성비도 자연의 법칙과 다르지 않다.최근 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우리나라 남녀 성비에 관한 연구결과가 흥미롭다. 결혼 연령층에 든 미혼남자와 미혼여성의 성비 불균형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다.전국적으로 미혼남자가 미혼여자보다 19.6%가 더 많다고 한다. 이는 남아선호 사상이 존재한 시대적 배경과 남녀 성별 구분이 가능한 의료기술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분석이 된다.더 큰 문제는 지역별 차이가 훨씬 크다는 사실이다. 서울은 미혼남녀의 성비 차이가 2.5%에 불과하다. 그러나 경북(34.95), 경남(33.2%), 충북(31.7%) 등 지방도시는 30%가 넘는다. 중앙과 지방의 격차가 하나 둘이 아님이 또 한번 드러난 셈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6-18

제복입은 불멸의 호국영웅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때이른 더위가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수년 전부터 봄과 여름의 경계가 모호해져서, 꽃들이 일제히 피면서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여름날인가 싶을 정도로 무더위가 찾아들어 계절의 구분을 다시 책정해야 할듯하다. 그만큼 지구온난화나 기후변화에 따른 현상이겠지만, 갈수록 한반도도 차츰 열대성기후로 바뀌면서 기상이변과 자연재난에 노출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기만 하다. 기후와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겠지만,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달라져도 잊혀지거나 변해서는 안 될 불멸의 가치가 있다. 바로 호국보훈의 의식과 예우이다.해마다 찾아오는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지만, 호국의 일념과 보훈의 마음이 어찌 6월에만 국한되랴. 지정학적인 측면도 있었겠지만 유난히 외세침입이 많았고, 한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6·25한국전쟁이 근·현대 들어 가장 뼈저린 상처와 엄청난 피해를 가져와 현재까지도 분단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호국보훈은 전쟁의 비극을 잊지 않고, 국가와 국민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기리고,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며 숭고한 뜻과 훈공에 보답한다는 측면에서 깊이 되새기고 이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본다.보훈 없는 호국은 없듯이, 공로와 은혜에 보답하는 보훈의 정신이 무너지면 나라를 지키는 호국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한 관점에서 2023년 7월 6·25 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참전유공자에게 국민적 존경과 감사를 담은 새로운 제복과 넥타이를 국가보훈처에서 맞춰드린 것은 의미있는 일로 여겨진다. 이른바 ‘제복의 영웅들’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국민들이 6·25 참전용사를 대할 때 인식개선이 필요한 기존 조끼형태의 여름 약복의 디자인을 새롭게 해서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를 표하고 영웅을 존경하는 사회적 인식을 증진시키고자 참전용사를 위한 제복을 제작한 것이다.그렇게 제작된 베이지색의 산뜻한 제복은 전국의 생존 참전유공자 5만8000여 분께 단계적으로 지급됐다. 포항지역에는 300여 분께 지급됐으며, 그 중 30여 분께는 최근 포스코 사진봉사단이 포항시보훈회관을 찾아 6·25전쟁 참전 유공자의 늠름한 모습의 제복영웅사진과 편안한 장수사진, 노병들의 단체사진 등을 촬영해 드려서 의의를 더했다. 그러한 광경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헌신한 호국영웅들을 예우하며 존경과 숭고한 뜻을 기리는 봉사자들의 낯빛이 진지하고 역력했었다고나 할까?기억은 기록이나 사진을 통해서 더 또렷해지고 오래 남게 된다. 영웅을 기억하며 새로운 제복을 만들어준 정부도 감사하고, 참전용사들의 영예로운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봉사단의 활동도 고무적이다. 제복을 입고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을 촬영하면서 호국영웅들이 6·25전쟁 때부터 겪었을 험난한 삶의 여정과 희생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 된 것 같아 뭉클할 정도였다.나라를 지켜낸 6·25전쟁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일상을 편안히 살아갈 수 있다. 6·25전쟁 영웅 뿐 아니라 국가유공자 분들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 명예를 드높이며 호국영웅들을 예우하는 많은 노력과 지원이 있어야 진정한 보훈의 의미가 빛날 것이다.

2024-06-18

삶과 자기경영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자기경영(Self-Management)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관리하는 능력을 말한다.자신의 꿈을 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목표를 설정하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분배하여 원하는 결과를 이루기 위한 체계적인 방법과 전략을 포함한다. 자기경영은 개인의 자기인식, 자기통제, 자기동기부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자기경영의 6가지 조건은 첫째, 자기인식(Self-Awareness)이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가치와 신념을 명확히 이해하는 능력이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어떤 방식으로 일할 때 가장 효율적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 목표 설정(Goal Setting)이다.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다. 예컨대, 마음의 양식을 얻기 위한 매년 12권의 책 읽기 등 목표 설정이다. 셋째, 시간 관리(Time-Management)이다. 평소 나쁜 습관이나 단점을 찾아서 과감하게 버리는 일을 먼저 하고,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구분하고 효율적으로 시간을 분배하여 활용하는 능력이다. 넷째, 자기통제(Self-Control)이다. 감정이나 충동을 통제하고 지속적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능력이다. 주변 유혹을 이겨내고 필요한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섯째, 동기부여(Motivation)이다. 스스로 격려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꿈을 벽에 걸고 되뇌이며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여섯째, 자기계발(Self-Developm ent)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새로운 기술이나 지식을 습득하는 노력이다. 예를 들면, 세계여행이 꿈이면 해당 언어를 매일 30분씩 공부하는 것이다.필자가 기업 혁신 컨설팅 하는 것은 개인의 성장과 조직의 발전을 위해 지속적인 변화관리를 하는 일이다. 직원 교육시 직책자, 중견 사원이나 신입 사원도 개인의 꿈을 먼저 물어보곤 한다. 개인의 성장과 변화의 단초는 미래의 꿈 설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포스코 Top이 생산 현장의 개선활동에 대한 포상과 격려 방문 때 대화의 장에서 신입 사원의 꿈을 물어 본다. 꿈이 없거나 구체적이지 않으면 기술명장에 도전하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개인이 선택하고 도전하는 것이지만 행복하게 산다는 바람보다 시간이 걸린 꿈 설정이 자기경영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자기경영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은 스티브 잡스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비전과 목표를 명확히 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인물로 유명하다. 자신의 강점을 활용하여 미래를 설계하고 신제품을 개발하여 경쟁력을 확보하고 오늘날 애플을 만든 것이다.인생에서 보면, 100세 시대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영위해 나가는 길은 자기인식, 자기통제, 자기 동기부여 등의 자기경영이다. 자신의 생명인 시간의 소중함을 인지하고 목표 달성을 위한 시간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 목표를 향한 인생 시간을 잘 운영하면 꿈은 이루어지며, 더 만족스럽고 성취감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2024-06-18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사람들은 그저 무심했다

K가 A의 의도를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한 결과를 예측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판단해야 했다. 참고인으로 소환했으나 수사기관에서는 K를 어떤 방식으로 대할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한쪽에서는 굳이 수사 대상을 확대하여 일을 번거롭게 만들 필요가 없지 않느냐, K는 단순히 사익을 취한 판매자일 뿐 A의 행위와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쪽에서는 K가 A의 행위에 관련된 제반 상황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고 자신이 A에게 제공한 도구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될 지와 그 결과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책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가 문제이지 책임의 유무는 이미 판단 대상이 아니라는 태도를 견지했다.참고인으로 소환된 K가 A4용지 10매에 달하는 진술서를 제출했으나 그 내용은 대부분 사건과는 관련이 적은 K 과거에 대한 회상이었다. 진술서 중간 중간에 A와 피해자들 사이에 전개되었던 저간의 사정들을 써놓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미 수사기관이 확보한 내용과 다르지 않은 ‘사실’을 서술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K의 과거에 대한 회상 부분은 이번 사건에서 K의 위치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단지 진술서의 페이지를 늘리려는 얄팍한 수로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K가 이번 사건과 관련한 법적 책임을 져야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면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K 스스로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과거를 돌아본 기록은 다른 사람은 공감할 수 없고 진위 여부를 따질 수 없는 그저 개인의 회상이었으니.일부에서는 진술서에 서술된 내용만으로도 K가 이번 사건의 전개와 결과에 대해 예측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했지만 그 주장은 반대측을 설득하지 못했다. 다만 진술서 끝부분, K가 그날 취한 이득으로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취했던 행동들에 대해서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수사기관 대부분의 구성원이 동의했다. 하지만 도덕적인 비난이 법적 책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도덕적인 비난마저도 할 수 없다는 의견을 견지하는 일부의 구성원도 있었다.사실 K에 관한 것은 그저 지나갈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범죄자가 범행에 사용한 도구를 어디서 구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기술 몇 문장이면 충분한 것이었다. 문제를 확대시킨 것은 수사관 김이었다. 그는 범죄의 발생을 사전에 막았을 수 있는 몇 가지 단계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다. 그가 평소 일상의 모든 측면을 문장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문장들 사이의 관계와 앞 문장이 뒤 문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반복적으로 사고 실험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이라면 당연히 수사관 김은 그렇게 할 사람이라고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대부분의 동료들은 그가 하루를 마무리하며 노트에 정리하는 문장들을 보며 단순히 일기 같은 것이라 생각했고, 일기 같은 귀찮은 작업을 해내는 수사관 김을 좋게 보면 독특하고 나쁘게 보면 정상적이지 않은 별종이라 취급했기 때문에 수사관 김의 문제 제기에 대해 짜증을 냈다. 쉽게 말해 빨리 정리하고 다른 사건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을 이상한 놈이 이상한 방식으로 건드려 모호하고 덩치가 큰 사건, 상황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수사기관 상부에서도 그렇게 생각했다면 수사관 김의 문제 제기는 없던 일,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수사기관 상부는 이 문제 제기에 흥미를 보였다. 수사관 김의 문제 제기에 대한 결론이 자신들의 평판과 행보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수사관 김이 문제 제기를 한 다음날 바로 어느 정도 입증되었는데 김과 친한 기자 한 명이 김의 문제 제기에 대한 기사를 썼고 무척 지루해 보이는 내용이었음에도 대중의 호응이 제법 있었다. 김이 제기한 문제는 댓글의 수와 공유의 횟수가 평소 범죄 기사의 서너 배를 넘었고, SNS상에서 주요한 토론 주제가 되었다. 토론의 제목은 이랬다.‘범죄행위에 사용된 도구의 제조 및 판매자의 법적, 도덕적 책임에 관하여.’인기 있는 토론 주제 순위를 매기는 한 사이트에서는 ‘K방산, 경제를 살리는 또 하나의 효자 종목,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누르고 9위에 랭크되었다. 실수와 무능으로 관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문제 제기와 그 해결의 방향으로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이 수사기관 상부의 의식과 의지를 고양시켰다. 수사기관 상부는 특별히 이 문제에 대한 팀을 구성했고 수사관 김을 전권을 가진 책임자로 지명했다. 김은 사전에 자신이 작성했던 노트를 팀원들과 공유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수사를 진행했다.범죄의 발생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던 몇 가지 단계에 대한 수사관 김의 기술은 아래와 같았다.1. 주차장에서 발생한 사건·세발자전거를 타던 아이를 시야에서 놓쳐버린 피해자의 실수와 그에 대한 A의 반응.2. 이후 발생한 A와 피해자 가족들 사이의 사소한(아파트 동 현관 입구에 자전거 따위의 물건을 놓아두는 것에서부터 잘못 배달된 택배의 소재를 따지는 것, 현관 청소를 한 물이 서로에게 흘러들어오는 등등) 다툼과 이를 둘러싼 이웃들의 자세.3. A가 아파트 동 현관 앞 잔디밭에 조성한 텃밭과 이에 대한 피해자 가족의 이의 제기, 관리사무소의 해결 방안과 그에 대한 A의 대응.4. A가 K의 가게로 와 얇고 뾰족한, 비교적 긴 칼을 요구했을 때 K의 판단과 행동.김은 각 번호의 문장 뒤에 볼펜으로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놓았다.1. 주차장에서 발생한 사건·세발자전거를 타던 아이를 시야에서 놓쳐버린 피해자의 실수와 그에 대한 A의 반응.-작은 그러나 위험했던 해프닝에 대한 당사자들 각각의 대응에 아쉬움이 많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발생한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각각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감당한 것으로 판단한다.2. A와 피해자 가족들 사이의 사소한(아파트 동 현관 입구에 자전거 따위의 물건을 놓아두는 것에서부터 잘못 배달된 택배의 소재를 따지는 것, 현관 청소를 한 물이 서로에게 흘러들어오는 등등) 다툼과 이를 둘러싼 이웃들의 자세.-사소해 보이지만 당사자들의 감정의 악화를 불러일으킨 사안들이다. 여타의 정황과 이웃들의 진술을 종합할 때 이웃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합리적인 중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도 핵심은 당사자들인데 당사자 간 묵은 감정을 점진적 혹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아닌 이웃들에게 법적,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3. A가 아파트 동 현관 앞 잔디밭에 조성한 텃밭과 이에 대한 피해자 가족의 이의 제기, 관리사무소의 해결 방안과 그에 대한 A의 대응.-당사자들, 특히 A의 분노발작을 유도한, 가해자로서 A를 있게 한 사건이다. 통념으로 보았을 때 이것은 전적으로 A의 잘못이다. 그러나 이의 제기를 당사자 중 한 쪽인 피해자가 했다는 점이 아쉽다. 피해자가 아닌 제3자 혹은 관리사무소에서 선제적인 제지, 혹은 해결 방안을 강구했다면 A의 분노가 피해자를 향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이것을 가해자가 아닌 누군가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4. A가 K의 가게로 와 얇고 뾰족한, 비교적 긴 칼을 요구했을 때 K의 판단과 행동.-수사관이 보았을 때 이번 사건의 가장 결정적인 지점이다. K는 A와 피해자 사이에 있었던 저간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다. 또한 K의 진술서를 참고하자면 K는 어렴풋이 혹은 명확하게 A의 의도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안이한 판단, 사적인 이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범죄에 사용된 결정적인 도구를 A에게 제공했다. 판매를 거부했다거나 혹은 판매 후 피해자와 경찰에 연락을 취했더라면 끔찍한 결과를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K는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판매 대금을 사용하여 자신의 가족과 여유로운 일상을 즐겼다. 도덕적인 책임은 당연히 면할 수 없으며 법적인 책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수사관 김의 확고한 의지에 의해 K는 주요한 조력자 혹은 방관자로 지목되었고 그에 따라 법적인 검토의 대상이 되어갔다. 다시 한 번 수사기관으로 불려가 이전에는 받지 않았던 심문 과정을 거쳤고 두 번째 진술서를 작성했다. 과거의 이야기는 쓰지 말 것과 이번 사건에 대해서만 기술할 것을 요구 받았고 K는 충실히 따랐다. 그는 자신의 무고함을 설명하게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김과 그의 논리에 따라 심문하는 수사관들의 추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물론 구속 수사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김의 팀이 결론을 내고 K에 대한 기소 의견을 정리할 즈음 여론의 변화가 있었다. 조력자 혹은 방관자로서 K를 향했던 비난 여론은 주요 일간지 중 한 신문에 실린 사설-그렇다면 K방산은 칼이고 대한민국은 A인가, 미래 먹을거리 이렇게 날려버리나-이 나온 이후 방향을 바꿨다. 김강 소설가·내과의 ‘수사기관의 논리에 따른다면 지구 각지의 현실적, 잠재적 분쟁지역을 중심으로 판매 대상을 넓혀가고 있는, 가격과 성능 면에서 다른 나라를 압도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출 효자 K방산은 전쟁으로 인한 살인과 피해의 조력자, 방관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도덕적인 잣대로 모든 문제를 바라본다면 죄인이 아닌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중략-별개의 문제라 말하지 말라. 이것은 우리 사회의 가치에 대한 문제다. 자영업자의 합법적 행위, 생계와 부의 축적을 위해 물건을 파는 행위는 우리 사회의 근본이 아닌가? 그 결과까지 책임지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자유대한을 부정하는 행위와 같다. 무리하고 부당한 수사를 멈추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수사기관 상부는 대통령실과 국회로부터 전화가 오기 전 이미 방침을 바꿨다. 그저 일개 범죄 수사로 생각했던 사안이 국가의 가치관에 대한 문제로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 관심은 자신들의 행보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결국 김의 수사팀은 해체되었다. 김이 끝까지 항변해 보았지만 조직 내의 결정을 바꾸지는 못했다. K는 혐의 없음이라는 통보를 받았고 수사기관 상부는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날 K방산은 모 국가와 1조5천억 원 상당의 판매 계약을 했고 언론들은 일제히 대서특필을 했다. 정치권은 앞다투어 환영의 논평을 내어놓았고 사람들은 그저 무심했다.    끝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06-18

전윤호의 기억 속의 고향 정선 방언시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전윤호 시인은 강원도 정선에서 출생했다. 1991년 현대문학에 시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2002년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한 후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현대시인협회에서 간행한 방언시집 ‘요엄창큰비바리야냉바리야’(서정시학, 2007)에는 강원도 정선 방언으로 쓴 시‘마바리’를 발표하였다. “머이 우태 내게 사랑이란 건/ 마카 뺑때에 걸린 골낭구처럼/ 춥고 적적해서/ 단최 가까이하기 어렵드라/ 니는 당장에야 나가 좋다고/ 착착 달라붙지만/ 까마구 얼어 죽는 겨울이 지나면 / 갱물도 풀려 흘러가는 법/”(전윤호‘마바리’)와 같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 정선방언이 쏟아진다. ‘마바리(멍청이)’, ‘마이 우태(결국)’, ‘뺑때(절벽)’와 같은 방언 낱말의 맛깔은 강원도 사람이면 다들 머리 끄덕이며 발화하고 싶은 강원도 토박이말이다. 뿐만 아니라 “등신처럼 울어 쳐대는 나를 떠나”와 같은 구절에는 정선아리랑의 가락이 실려 있다. 그의 9번째 시집‘정선’에는 오직 시인의 고향인 정선만을 을 주제로 한 60여 편의 시가 고향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의 고향 정선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과 사랑이 오롯하게 녹아 있다.시에서 방언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고향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을 비롯, 모든 이들이 꿈꾸는 이상향이요, 모두가 그리워하는 기억 속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과 공간의 교점에 남아있는 존재들은 이미 사라졌거나 아니면 희미한 기억 속에 묻혀버린다. 객체의 소멸과 함께 주체 역시 그리움을 남겨두고 사라지고 있다. 지난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호명하는 열쇠는 그 시공간에 유통하던 언어 곧 방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삶은 시간과 공간 속에 이루어지는 만남으로 구성되나 그 삶은 유한하다.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과거로 향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관계를 희미한 기억 속에서 꺼내고 반추하면서 영원히 간직하려 한다.전윤호 시인은 ‘고향’이라는 시로 시작해 ‘정선을 떠나며’라는 시로 마무리한다. 그 공간과 시간 속에 나누었던 기억들의 별빛이 바로 향토색 짙은 언어들이다. ‘아우라지, 곤드레, 아라리, 여량, 동강할미꽃, 정암사, 구절리, 운탄고도, 민둥산, 화암약수, 만항재, 정선시장, 용마소, 수리취떡, 용소’ 등 고향 주변의 장소와 사물과 음식들은 시인의 기억 속에 간직되었다가 시라는 배경으로, 그림으로, 냄새로 그대로 그려져 나온다. 전 시인의 문학의 산실은 바로 고향인 정선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시인의 동료이자 선배인 최준 시인은 시집의 발문을 통해 “이 시집은 이별과 서러움과 같은 전통적인 정한(情恨)의 정서가 전편을 누비지만, 들풀처럼 무성한 그의 고향 사랑이 행간마다 절절하게 녹아들어 있다”고 평가했다.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더 넓은 장소로 그리고 다 빠른 시간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지난 시간 속에 잠겨 있는 고향의 전경은 더욱 그리워진다. 문명의 빛이 더디게 쪼이는 미명의 두메산골이지만 그 삶의 공간이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남이야 뭐라고 하든 ‘마바리’같이 일에만 죽자고 매달린 삶인 ‘일바보’이자 ‘밥장군’인 초부의 삶에 매달린 이유는 자유다. 세상의 끄나풀에 엮이지 않고 어느 누구가 관심을 두지 않아도 그냥 내버려둬도 오순도순 잘 살 이상향이다. “정선은 사람 수보다 산봉우리 수가 많은 곳”이라고 했지만 그곳은 귀한 사람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영하 십칠 도의 아침/ 29억 톤짜리 악모에서 깨어/ 서리꽃 핀 산을 바라본다/ 123미터도 부족한가/ 평생을 가둬놓기엔 자갈과 모래로 다진 530미터 벽 아래/ 여전히 얼지 않는 저 거대한 슬픔/ 강으로 흘리는 눈물 천 리를 가는데/ 후회로 묶여 흔들리는 배 한 척/ 이제는 알겠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평생을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전윤호 ‘소양댐’) 고립된 정선의 경관 속에서는 외로우니까 더욱 슬퍼지고 슬퍼지니 더욱 힘이 세어진다는 역설의 시편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윤호 시인은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라는 시집을 출간하고 또 그 시집으로 제30회 조병화 문학상도 수상하였다.고향 정선을 떠나 대처인 춘천으로 떠난 시절에 쓴 시이다. 거주 장소의 이동은 추억어린 감성을 그 근원적인 장소로 쏠리게 한다.

2024-06-17

‘검은 새의 들녘’ 세르비아 민족 성지 코소보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세기의 화약고라 불리던 발칸반도다. 그만큼 민족과 종교와 역사가 뒤엉킨 땅이란 뜻이다. 그 중심에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있다. 특히 세르비아의 성지 코소보에 이민족이 나라를 세운다니? 세르비아로서는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중세의 걸출한 영웅이자, 세르비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스테판 듀산, 그는 지금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는 물론 코소보까지 넓은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1331년에는 발칸을 넘어 유럽 전역의 강자로 거듭났다. 후세 역사가들은 스테판 듀산 앞에 ‘강자(强者)’라는 별칭을 붙여 이미지를 상승시켰다.듀산의 공포에 동로마 비잔티움제국은 호시탐탐 발칸반도를 노리고 있던 오스만제국에 SOS를 타전하고 말았다. 이 잘못된 판단이 세르비아 네만야 왕조의 멸망과 함께 천년을 이어오던 비잔티움제국의 종말을 앞당기게 된다. 오스만으로선 기다렸던 바였다.1386년에 불가리아를 함락한 이슬람은 1389년 6월 28일, 오늘날 세르비아 민족 성지인 ‘검은 새의 들녘’으로 불리는 코소보 대평원에서 세르비아 군대와 마주했다. 세르비아 수호신이자 성자 성 비투스의 날,(1914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그날도 성 비투스의 날이었다) 운명을 건 결전이 시작된다.세르비아 군을 중심으로 자칭 십자연합군 10만, 오스만 6만이 진을 쳤다. 세르비아 농민들까지 동원된, 그야말로 세르비아인의 신화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날이 시작된 것이다.세르비아에서는 라자르가 선두에서 지휘를 맡았다. 오스만은 중앙군에 무라트 1세가 지휘봉을 휘둘렀고, 오른쪽에는 큰아들이자 ‘번개왕’으로 등극하는 바예지드가, 왼쪽 날개는 작은아들 야쿠브가 지휘했다.라자르 신호와 함께 세르비아군 선공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전투는 밀고 밀리기를 반복하며 꼬박 하루를 넘기며 이어졌다. 세르비아 역사상 이토록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는 일찍이 없었다. 점차 세르비아 왼쪽 진영이 무너지면서 전세가 이슬람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세르비아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세르비아군 최후의 한 명까지 영웅적인 죽음을 맞았고 오스만튀르크제국이 승리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오스만 무라트 1세도 목숨을 잃어야 했다. 후세에 와서 이 전투가 세르비아 민족주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세르비아인 가슴에 화석처럼 각인된다. 누구의 도움 없이 발칸반도에서 이슬람 제국에 마지막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항전했던 역사적 사실은 전무후무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의 영원한 영웅 밀로슈 오빌리치의 신화가 탄생되면서 세르비아인 가슴을 덥혔다. 세르비아 선봉대장 오빌리치는 짐짓 거짓 항복을 해 무라트 1세의 환심을 산다. 그리고 품속에 무기를 숨기고 들어가 무라트 1세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는데 성공하고, 그 역시 오스만 군사들에 의해 장렬하게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진실은 무라트 1세가 전장을 돌아보다 전사자 속에 누워있던 오빌리치가 일어나 심장에 칼을 꽂았다는 것이 팩트다.아들 바예지드는 군사를 물리기는커녕 슬픔을 뒤로 한 채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고 전술을 가다듬었다. 결국 농민군까지 끌어모아 항전했던 라자르는 바예지드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만다. 바예지드는 라자르의 목을 자르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그리고 1453년 메메트 2세에 의해 비잔티움제국마저 멸망하면서 발칸반도는 무려 400년 동안 오스만트루크제국 압제 아래 들어가야 했다. ‘검은 새의 들녘-코소보 전투’는 ‘코소보의 처녀’라는 또 하나의 사연을 탄생시켰다.“오 불쌍한 이여, 악마가 그대의 운명이구려! 불쌍한 당신이 푸른 소나무를 잡는다면 그 마저 시들어 버릴 것이니!”세르비아 사람들은 오스만제국의 압제 아래서 이 노래를 부르며 살았다. 가슴에는 의기가 충만하고, 민족혼이 가슴을 쿵쿵 쳤다. 그렇게 코소보는 세르비아인 민족의 성지로 굳어지고 있었다.훗날 세르비아 희대의 살인마 밀로셰비치가 길들인 민간 무장단체 ‘아르칸의 호랑이’에 의해 코소보는 20세기 가장 추악한 전쟁터로 변했다. 자신들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민족의 성지 ‘검은새의 들녘’에 알바니아 무슬림들이 몰려와 살면서 나라를 세우겠다니? 어쩌면 세르비아로서는 도무지 묵과할 수 없는 사연인지도 모른다.그러나 6세기 이전 로마제국의 발칸반도 진출에 끝까지 애를 먹였던 민족, 마지막까지 로마제국과 발칸반도에서 전쟁을 이어갔던 민족이 알바니아 조상 격인 일리리안이었다.돌고 도는 것이 역사다. 어느 한 부분을 뚝 잘라 내 것이라 주장한다면, 폭력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호령했던 땅이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면 중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스토리텔링 작가

2024-06-17

새로운 시작 앞에서

오랜 기간 골치 아팠던 문제에서 드디어 벗어났다. 이럴 때 생각나는 두터운 책 한 권이 있다. 2년 만에 펼쳐들어 3번째 완독을 마친 소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다.스토너는 독서에도 시차가 있음을 알려준 책이다.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약 2년 전, 그 전에는 약 4년 전에 읽었다. 처음 읽은 스토너는 그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심심한 인간의 생애가 있는 건지? 특별한 사건 없이 밋밋하게 흘러가는 스토너의 생애 이야기를 몇 장 읽고 덮어두었다가 다시금 꺼내어 꾸역꾸역 읽어 내려갔었다. 어쩐지 심심한 그 감각이 계속 맴돌다가 2년이 지난 후, 두 번째로 꺼내 읽은 스토너는 어쩐지 새로웠다. 너무나 지루했던 그의 인생에서도 사건이라는 흐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중략)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략)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스토너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단순한 인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잊히는, 지극히 존재감 없는 사람.스토너는 1891년 미주리주 중부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고작 스물다섯 살, 어머니는 스무 살이었다. 스토너에게 부모는 늘 늙은 사람이었고, 고된 노동으로 삶을 버티고 인내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떠한 열망도 없이 살아가던 스토너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별 생각 없이 대학에 입학하지만 그 이후에도 어떠한 즐거움이나 괴로움도 없이, 삶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순간이라 여기며 지낸다.얼마 지나지 않아 스토너는 이디스와의 결혼을 하지만, 곧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디스는 계속해서 아픈 몸, 무기력함, 목적 없는 생의 지루함 때문에 자신의 딸아이인 그레이스를 방치한다. 대부분의 육아와 집안일을 스토너가 맡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부성애를 가지게 된다.스토너와 그레이스간의 사이가 친밀해질수록, 이디스는 질투에 사로잡히면서 히스테릭함이 더욱 극에 달한다. 그러나 스토너는 관조와 무조건적인 이해로만 그녀를 대하고 그녀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 폭풍 같은 현실 속에서 세 인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슬픔의 굴레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슬픔을 부정하거나 떠미지 않고, 괴로움을 안고 버티며 모든 것을 인내 한다. 처음에는 이 세 인물이 서로 원치 않는 방향으로 향하는 결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느릿느릿 문장을 읽다보면 세 인물은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당시 어떠한 시대적 혼란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모든 것을 인내하는 스토너로 보이지만, 그는 강단에 서서 문학을 가르칠 때만큼은 열정적이었고 자신의 수업을 듣던 ‘캐서린’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적절한 관계를 대학 내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 결국, 그들은 사랑을 포기하게 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스토너는 캐서린과의 이별 이후 빠른 속도로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그는 죽음 끝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다.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 결혼 생활, 캐서린과의 이별을 겪고 죽음을 앞둔 스토너. 얼핏 보면 그의 삶은 실패로 보일 수 있으나 실은 그의 생은 너무나 평범하다는 걸 알 수 있다.스토너의 죽음은 인간의 삶은 ‘성공’ 또는 ‘실패’라는 결과보다는 그가 얼마나 생을 살아보려 애썼는지, 어떤 시도를 했는지가 더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그는 죽음 앞에 서서 평온하다. 삶을 인내했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하루를 마무리 하며 나의 일상을 돌아볼 때에 나의 생은 왜 이렇게 지루하고 건조해 보이는 건지 고민될 때가 있다. 하지만 이 단조로움 또한 생의 불행과 운을 온 힘으로 버텨내는 안간힘임이 내재되어 있음을 안다. 성공 또는 실패라는 결과보다는 ‘삶을 살아보려는 시도’, 스토너라는 한 사람의 진득한 생애는 내게 새로운 시도의 힘을 갖게 한다.

2024-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