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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을 만들기

조현태수필가 3월 10일 새벽 4시50분 경,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를 발표했다. ‘국민의힘 윤석열 당선’이란 그림이 텔레비전 화면을 채웠다. 누구 당선, 누구 낙선보다 어떻게 당선했는지에 관심이 모아졌다. 미세한 표 차이(0.73%)로 승패가 갈라진 결과가 그것이다. 그 결과는 국민 절반의 지지로 당선되고, 절반의 지지에도 낙선된 것이다.따라서 누가 당선되든 낙선된 쪽의 표심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면 모든 유권자는 새 대통령을 통하여 더 좋은 나라와 삶을 바라면서 투표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후보자들 역시 자신의 역량이 국가와 국민에게 좋은 영향력이 되려고 출마했을 터이니까.20대 대통령 선거가 양자구도로 당선이 확정되고 곧바로 당자와 낙자의 소감을 발표했다. 필자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바로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다.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 결과를 선거 부정이라 주장하며 불복하던 기억과 대조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미국보다 더 성숙한 자세를 보여줬다. 서로 다독이고 격려하는 모습이 필자를 매우 흡족하게 했다.그 아름다운 자세를 바라보며 교회 목사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떤 여행객이 한적한 마을을 지나다가 노인 한 분을 만났다. 여행객은 노인과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 마을이 어떤 환경인지 궁금하여 ‘이 마을은 사람들이 살기에 어떤지’물었다. 노인이 대답은 하지 않고 그대는 어디서 왔으며 그 마을은 살기에 어떠하냐고 여행객에게 되물었다. 좀 머쓱해진 여행객은 ‘제가 사는 마을에는 서로 헐뜯고 비판하며 나쁜 소문도 퍼뜨리고 협력하지 않아 거기서 떠나고 싶다’는 대답을 했다. 그 때 노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 마을도 자네가 사는 마을과 다를 바가 없지. 똑같다네.”잠시 후 차를 타고 지나가던 다른 여행객이 노인을 향해 ‘이 마을은 사람이 살기에 어떠한 마을’ 인지 물었고, 노인은 그에게도 아까처럼 같은 말로 되물었다. 그러자 차에서 내려 노인에게 인사하며 ‘저희 마을 사람들은 친절하게 지내며 서로 돕고 따뜻하게 인사도 잘 나누니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하자 노인은 반가운 표정으로 미소를 보내며 대답했다.“이 마을도 자네가 사는 마을과 다를 바가 없다네. 서로 따뜻한 정을 나누고 협력하며 사이좋게 지내니 사람 살기 좋은 마을이지.”남자는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며 떠났는데 곁에서 듣고 있던 노인의 손녀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노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왜 우리 마을이 살기에 고약한 곳이라고도 하시고 살기 좋은 곳이라고도 하시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노인은 그렇게 묻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자기 마음을 가지고 다니는 법이란다. 그 마음으로 인하여 살기에 좋은 마을을 만들기도 하고 고약한 마을을 만들기도 한단다.”이제 대한민국을 사람이 살기에 좋은 나라로 만들어가야 한다. 여행객이 걸어 왔든지 자동차를 타고 왔든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아름다운 마음으로.

2022-03-15

법이 예술이 되게 해주시길

이명균창원대 명예교수 여러해 전 어느 법과대학 졸업식에 참석했을 때 일이 기억난다. 대학장의 졸업축사 중에 “법은 예술입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필자는 깜짝 놀랐다. 추상같이 엄해야할 법이 어떻게 “아름다움”이 바탕인 “예술”이란 말인가? 그러나 조금 뒤에 나온 “법은 사회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라는 표현에서 “균형”이라는 말에 속으로 공감의 무릎을 쳤다. 여기서 균형은 사회질서의 균형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자연현상이든 인간사회의 질서든 균형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며 아름다움은 바로 예술이다.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정치보복’이니 ‘적폐청산’이니 하는 말들을 여러 번 들었다. 그중 정치보복이라는 말은 정치에 문외한인 필자가 듣기에 거북한 용어였다. ‘보복’은 앙갚음이란 뜻인데, 이는 개인이나 폭력조직 등이 사형(私刑)의 수단으로 삼는 행위는 될지언정 정부나 국가의 공인이 보복행위를 한다는 것은 법치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차기 대통령과 정권의 사전에는 ‘정치보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예 없으리라 믿는다. 한편 ‘적폐’란 오래 지속되는 폐단이라는 뜻으로 우리 사회에서 마땅히 청산되어야할 부분이다. 그러니 적폐청산이 특정 대통령이나 정권에만 주어지는 과제가 아니라 적폐가 생길 때마다 어느 정권에서든 마땅히 청산해야한다.그러나 적폐청산에 대해 대통령께서 직접 관심을 가진다면 그 자체가 정치보복으로 오해받을 수가 있다. 따라서 적폐청산에 대해 대통령께서는 지시도 보고받는 일도 일체 없이 해당부처와 담당기관에다 통상적 업무로 완전히 맡기시고 평소 주장처럼 “법과 원칙에 따른 공정과 상식의 사회를 만들자”는 통치이념이 전달되기만 하면 될 것이다. 다만 해당기관에서 적폐청산 수행 중에 만에 하나라도 앞 정권의 인사와 관련된 사건·사항들이 있다면, 특별히 신속철저하게 조사 처리하되, 사법부 판단까지 최대한 빨리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그런 다음엔, 뭘 잘 모르는 말을 감히 하자면, 해당 적폐청산 관련 건에 대해선 대통령 통치권 차원에서 사면 등의 특별조치를 통해서라도 국민화합과 대통합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소망해본다. 법과 원칙도 중요하지만 국민들 사이의 적대감과 갈등을 해소하여 화합과 통합의 사회를 만드는 과업이 지금으로선 무엇보다 절실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선(善)을 많이 폄으로써 악(惡)이 저절로 시들게 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필요악이란 말은 어쩔 수 없는 사회악이란 의미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서, 때로는 악이 어느 정도의 순기능 작용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뜻이 담겨있다. 지고의 선도 보통사람에게 지나치게 강요하면 그 자체가 악이 된다고 한다. 반면 악을 용서관용으로 대할 때 오히려 선이 더 돋보이면서 그 영향력이 더 커질 수도 있다. 정의원칙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불만을 다소 감수하더라도 차기 대통령께서는, 법이 예술이 되게 하면서, 젠더 사이와 세대 간 그리고 이념 간의 갈등을 하루바삐 해소하여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균형 잡힌 대통합의 사회로 이끌어주시길 간절히 빈다.

2022-03-15

김병준 지역균형발전 특위에 거는 기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집무실에서 진행된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과의 차담회 전 모두발언을 통해 “김병준 전 비대위원장(자유한국당)에게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을 드려서 본인의 허락을 받았고 이 일을 맡아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위원장은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정책실장, 대통령 정책특보 등을 맡아 지역균형발전정책을 추진한 경험이 있으며, 이번 대선기간 중 윤석열 당선인의 공약전반을 다듬었던 핵심 인물이다. 윤 당선인은 김 전 위원장 발탁배경에 대해 “자치분권에 대한 오랜 경륜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새 정부 지역균형 발전에 큰 그림을 그려주실 것”이라고 했다.김병준 위원장도 언급했지만, 지역균형 발전문제는 국가 생존과 직결돼 있다. 지역균형발전은 지방소멸이라는 국가적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출발점이다. 그렇지만 노무현 정부 이후 역대정부에서는 수도권 규제완화에만 집중했지 지역균형발전 정책에는 큰 공을 들인 사례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번에 인수위에 설치된 지역균형발전특위도 6·1지방선거를 의식해서 만든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특위가 선거용 기구가 돼서는 안 된다. 윤 당선인이 대통령 임기 내내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국정운영의 최대현안으로 다루도록 특위에서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일관된 지역균형발전정책 추진은 결국은 대통령의 의지문제다. 문재인 정부도 초기에는 노무현 정신을 이어받아 공공기관 추가이전 등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수립했지만 결국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대립 차원에서 다루었기 때문이다. 수도권에 있는 공공기관을 비수도권으로 옮긴다고 해서 지역균형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수도권 스스로가 수도권을 넘어 국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정부 역할이다. 리쇼어링 기업유치, 스타트업 환경조성, 대학의 인재육성 등은 해당 지역이 가진 기존의 잠재력에 국가의 지원을 더하면 얼마든지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지역균형발전문제를 정치권력이 집중된 수도권 규제완화와 연결시켜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2022-03-15

포항 컨벤션센터 지역산업의 플랫폼으로

포항시가 지난 14일 포항 국제전시컨벤션센터 육성을 위한 최종 용역보고회를 가짐으로써 포항 국제전시컨벤션센터 건립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게 됐다.경북 제1도시이자 인구 50만명의 도시로서 이제와 국제전시회의장을 갖춘다는 것이 늦은 감은 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내실 있고 경쟁력 있는 전시컨벤션센터를 운영한다면 환동해 중심도시를 지향하는 포항의 위상에 뒤처질 것도 없다.이날 보고회에서는 포항 국제전시컨벤션센터가 지속발전 가능하게 하려면 포항만의 차별화된 MICE산업 인프라 구축과 혁신적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했다.특히 4차산업혁명 등에 대응할 전시 전략을 잘 짜고 전시컨벤션센터와 연계한 각종 인프라 확충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가운데 전시컨벤션센터와 연계한 관광프로그램 개발은 지역산업의 특성을 살리고 진작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면에서 고려할 가치가 있다. 전국적 인기를 끄는 포항의 스페이스 워크나 해양케이블, 두호공원 개발과 영일대 장미원 등을 관광 자원화하는 것은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매우 바람직한 아이디어다.전시컨벤션산업은 박람회, 전시회, 국제회의, 컨벤션 등 각종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컨벤션센터 운영을 통해 각종 용역서비스가 발생하고 식음료 분야, 숙박, 관광 등 다양한 지역산업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전국적으로 전시장 건립이 경쟁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추세여서 전시컨벤션센터 운영이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수도권에 비해 지방은 더 어렵다. 포항 인근인 경주에 전시장이 있고, 울산도 대규모 컨벤션센터를 건립 했다. 대구와 구미 등에도 컨벤션센터가 운영돼 포항만이 가지는 경쟁력 있고 독특한 전략이 없으면 운영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늦게 출발한 포항 국제전시컨벤션센터가 지역산업의 플랫폼이 되게끔 더 많은 전략과 준비가 있어야 한다.

2022-03-15

초심(初心)

우정구 논설위원 마부작침(磨斧作針)은 “도끼를 갈아 침을 만든다”는 뜻이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이 공부에 염증을 느껴 산에서 내려오다 한 할머니가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겠다며 열심히 작업하는 광경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다시 산으로 공부하러 갔다는 고사에서 나온 사자성어다.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도끼도 바늘로 만들 수 있다는 뜻과 우리 속담의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것과는 비슷한 의미다.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잊고 행동하는 사람을 나무라는 속담이지만 초심을 잊지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처음에는 어려웠던 일도 반복되는 일상이 되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이다. 이런 매너리즘이 초심을 잃게 하는 중요 이유다. 작심삼일은 초심을 지키기가 힘들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다.“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다”는 뜻의 시종일관(始終一貫)이나 초지일관(初志一貫)도 초심을 지키라는 뜻이다. 사람이란 대체로 어떤 분야에서 정상에 오르거나 신분 상승이 되면 교만과 아집에 빠지기 쉽다. 처음의 어려웠던 환경을 잃고 오만방자해지거나 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초심을 지키자”는 말을 교훈으로 삼겠다는 것은 일이 성공하고 나서 달라지는 자기 모습을 경계하겠다는 각오다.공자는 설원(說苑) 정간편에서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고 충언은 듣기가 싫지만 행실에 이롭다”는 말을 했다. 지위가 높아지면 주위에서 하는 충언을 잘 듣지 않아 끝내는 낭패를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甘呑苦吐)는 말처럼 사람은 쉽고 편한 쪽을 택하는 본성이 있다. 공자는 멈추지 않으면 천천히 가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고 했다.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는 새 대통령의 초심을 지켜보자. /우정구(논설위원)

2022-03-15

말하지 않음과 말할 수 없음

언어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언스플래쉬 고등학교에서 수업을 하다 보면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가 있다.수업종이 울리면 마흔 명의 학생이 기다리는 교실로 향한다. 말간 얼굴의 학생들이 반듯한 자세로 앉아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면서 준비한 강의록을 꺼내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은 집중력을 잃는다. 노트에 낙서를 끼적이거나 하품을 흘리고 책상에 엎어져서 자는 경우까지 속출한다. 이윽고 교실에서 떠드는 사람은 나 하나가 된다.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겪으며 자란 나는 이 친구들이 질 높은 수업을 경험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토론 주제를 꺼내놓으면 그에 관해 논의하고 생각을 모아서 놀라운 결론으로 도출해내는 방식을 꿈꿨다. 서로가 서로의 선생이 되어주는 것.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내어놓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학생이었던 내가 꿈꿔오던 수업이었으며 이상적인 교육 활동의 모습이었다.그러나 현실은 가혹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던 학생들은 계속해서 묵묵부답이다. 우리가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각자의 발화를 강제하지 않으면 입을 꾹 다문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다. 나는 과거에 그렇게도 싫어했던 선생님들의 표정을 지으면서 교탁을 탕탕 내리쳤다.“너희는 왜 말을 안 하는 거야?”또 다시 침묵. 잠시 뒤 한 학생이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말할 수 없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란 말인가. 그 의아함을 학생은 단 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해결했다.“몰라서요.”문학은 수학 공식처럼 정확한 답을 내어놓을 수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자신 안에 있는 언어가 미진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럴듯한 대답 대신에 모자람을 내어놓을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두려움에 가까운 마음일 것이다. 학생들은 자신이 말할 수 없다고 여기면서 말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다.나라고 무엇이 다를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의식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선택하지 않는 것을 택한다. 무언가를 발화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보다 기성의 문법을 따른다. 나 자신이 세계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맞는가하는 의구심이 입을 막는다. 경솔한 언행으로 스스로의 얕음을 들켰던 경험이 있다. 여기저기 흘린 말과 글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는 내가 감히 세상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에 관해서 쉽게 믿을 수가 없다.침묵을 지키는 사람은 신중하다. 그러나 침묵을 깨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자는 비겁하다. 나는 신중함보다 비겁함의 위치에서 용기를 내지 못했던 적이 더 많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불편한 상황들을 피했고 안온한 상태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의 침묵은 분명한 혐의를 가진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날카로운 화살처럼 가닿았을지도 모른다. 소통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파괴했을 수 있다.입을 다물어버리는 것과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두 지점을 제대로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현명함이다. 말과 침묵의 간극에서 헤매지 않으며 적확한 언어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누구도 그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 그러한 불가능성을 바라는 작가들은 지치지도 않고 새로운 글을 써내려간다. 실패하고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여전히 발화하는 것이 두렵다. 이렇게나 겁이 많은 사람인데 글을 쓰는 일을 택했다. 스스로 고통 받기를 자처했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자람을 들키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어리석음을 보이는 것보다 쓰는 상태를 포기하는 일이 더욱 괴롭기 때문에 결국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오늘도 모니터 속의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망설이는 중이다. 교실의 맨 앞자리에 앉아 손을 번쩍 들고 답하는 모범생이 되고 싶지만 “잘 모르겠는데요.”하고 중얼거리는 학생에 더 가깝다. 이런 이야기는 세련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저런 이야기는 너무 정치적이지 않나. 경계하고 의심하면서 한 글자씩 써내려간다. 조금씩 채워지는 종이를 보면서 생각한다. 말할 수 없음의 영역을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 않음의 태도를 줄여나가는 용기를 얻고 싶다고.

2022-03-15

안녕, ‘요섹남’

유행어는 한 사회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다. 멸시에 가까운 혐오적인 표현인 ‘~충’과 같은 표현은 우리 사회가 어떤 요소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밥을 소리 내면서 먹는다 해서 붙여진 ‘쩝쩝충’, 상대가 무슨 말만 하면 훈수부터 두고 본다 해서 붙여진 ‘훈수충’과 같은 귀여운(?) 수준에서부터 한때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까지 했던 ‘일베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유행어의 흐름은 우리 사회가 무엇을 앓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그러한 표현 가운데에는 ‘~녀’, ‘~남’과 같은 표현도 있다. 흔히 부정적 속성을 덧붙여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를 덧붙여 의미화 시키기도 한다. ‘개념녀’나 ‘뇌섹남’과 같은 표현들이 그렇다. 재밌는 건, 이와 같은 ‘~남’, ‘~녀’와 같은 표현에서 엿보이는 불균형감이다. ‘개념녀’가 군 문제를 비롯한 한국 남성의 사정에 친화적인 발언을 한 여성을 지칭한다면, ‘뇌섹남’을 비롯한 표현들은 여성에 대한 태도가 아닌 사회적 능력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처럼 긍정적 의미에서의 ‘~녀’와 ‘~남’ 사이에 존재하는 성적 불균형감은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 사회가 해당 성별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했던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잠시 이야기를 돌려보자. ‘뇌섹남’이라는 표현이 유행하고, 그 뒤를 이어 무수히 많은 ‘~남’이 우리 곁을 스쳐갔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가운데 ‘요섹남’이라는 표현을 기억할 것이다. ‘요리를 잘해서 섹시해 보이는 남자’라는 의미의 이 말은 주로 잘생긴 남성 연예인을 향해 주로 사용되었다. 이런 말이 만들어진 까닭에는 요리를 하는 남자가 그만큼 적기도 했거니와 남자가 요리를 해야 하는 상황을 어색하게 느끼는 사회적 분위기 또한 반영되었으리라. ‘요리’라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대중 문화적 요소로 자리 잡게 된 것 또한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요섹남’이 될 수 있는 남성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잘생기고 충분히 매력적인 남성을 향해 사용되지, 보편적이고 평범한 남성을 향해서나 혹은 직업으로서의 요리인을 향해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요리를 잘 할 필요가 없는 능력 좋은 남성’을 향해서만 사용된다. 더불어 이 말에는 대칭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녀’, ‘~남’의 표현들이 그렇듯, ‘요섹녀’라는 표현은 사용되지 않는데, 이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여성은 요리를 잘해야 한다’라는 고정관념과 남성이 요리를 하는 것은 ‘옵션’이라는 고정관념 탓이 아닐까 싶다.그러나 이 말도 이제는 옛말이다. ‘뇌섹남’이라는 표현이 뒤안길로 사라진 것처럼, 어느 순간부턴가 ‘요섹남’이라는 표현도 사라지고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요섹남’과 같이 젠더 불균형적인 표현의 소멸은 우리 사회가 성적 평등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지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섣부른 단정이 아닐까 싶다. 아마, ‘요섹남’이라는 표현의 소멸은 1인 가구 비율의 급증과 그에 따라 요리를 해야 하는 남성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일어난 자연스런 변화가 아닐까 싶다. 작년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1인 가구의 비중은 전체 가구 가운데 약 30%를 웃돌고 있으며, 1인 가구의 형태는 매년 유의미한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2016년 대비 약 5% 가까운 상승률로 집계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요리를 비롯한 집안일들이 자연스레 자신의 몫이 되었다는 의미이겠다. 즉, 요리하는 남자가 늘어남에 따라 그건 더 이상 ‘섹시함’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이제 우리는 또다른 ‘~~녀’, ‘~~남’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게 ‘이대남’, ‘이대녀’와 같이 정치적이며 세대론적인 멸시의 표현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다른 종류의, 우리가 이제껏 생각 못해본 또 다른 젠더 문제가 뭉뚱그려진 표현이 될 수도 있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와 같은 표현에는 우리 사회에 내재한 문제가 젠더의 외관을 덮어쓴 채 잠재되어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그러한 표현의 생성과 소멸은 결코 문제의 해결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겠다. 새로운 단어가 생겨나고 사라지듯, 우리 사회 또한 변하고 달라질 것은 자명하다. 문제는, 그게 좋은 방향일지 혹은 잔잔한 호수 밑에 썩은 흙이 잠들어가는 것처럼 기묘한 평온의 상태가 될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2022-03-15

자사고의 문제점

홍택정문명중·고등학교 이사장 자사고의 원조는 1993년 설립된 민사고다. 민족사관학교의 줄임말이지만 멋진 이름이다. 파스퇴르 우유의 창업자이기도 한 최명재 이사장의 한과 포부와 땀이 베인 말 그대로 민족의 사관학교다.교복도 한복이다. 얼마나 감동적인 이름인가?민사고는 설립의 취지에 맞는 교육을 했고, 결과도 대단했다. 몇몇 우수한 아이들 선선발 해 SKY에 합격시키는 게 목적인 입시학원 자사고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그간 해외 유수 대학으로 진학한 학생들이 상당수다. 예고는 예대로, 외고는 외대로, 과고는 이공계로 진학해야 하는데 모두 SKY 아니면 의대, 법대로 간다.어찌 보면 고액 과외에 비한다면 경제적일 수도 있다. 숙식과 생활이 안정되는 확실한 입시학원이기도 하다.일반고보다 전국단위 모집에다 선(先)선발을 하다 보니 지역에서 내 노라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은 스펀지에 물 빨려 들듯 자사고로 간다.옛날에는 자연발생적인 지역의 명문고들이 있었다. 자긍심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명성과 영광을 누렸다.자사고처럼 선(先)선발도 아니고, 고액의 등록금도 없어, 누구나 실력만 있으면 입학이 가능했다.지금의 자사고 운영 형태는 설립 목적과는 정반대의 입시학원이 되어 지역의 일반계 학교를 황폐화 시키고 있다.자사고 아니라도 다들 SKY에 갈 수 있는 아이들인데 한데 모아, 고액의 등록금을 받고 기숙사를 운영해 한꺼번에 몇십 명씩 합격시켜 스스로 ‘명문’이라 자위한다.교육만큼은 기회가 공평하고, 공정해야 한다. 물론 특출한 아이들 소위 극소수의 영재들은 현행 제도로 수용이 가능하다.그럼에도 많은 특전과 특혜가 주어지는 자사고로 진학을 유도하고 있다. 설립목적을 망각하는 입시 학원식 운영은 시정되어야 한다.공정한 룰을 적용하는 교육이 아닌, 특혜적인 교육이 현행 자사고 운영이다. 선(先)선발도 없애고, 예고에서 60명이 S대에 진학했다고 보도되는 비상식이 더이상 계속되어서는 안된다.설립목적에 맞게 운영되는 자사고는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을 것이다. 자사고 폐지를 두고 당국과의 존속 여부를 두고 벌이고 있는 법적인 다툼은 문제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다.원칙을 벗어나는 파행적 운영이 시정되지 않는다면 자사고의 존폐를 재검토해야 한다.자사고에 입학한 아이들은 지방의 학교에 진학했더라도 대부분 일류대로 진학했을 아이들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022-03-14

사랑이냐, 돈이냐, 그 물음의 원점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하는 작은 선택부터 자신의 삶을 결정할 중요한 선택까지. 그런 의미에서 선택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선택에는 언제나 그에 따른 결과가 기다리고 있고, 그 결과는 타인이 대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선택에는 언제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에 대한 미련과 환상이 해묵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처럼 남겨져 있게 마련이다. 죽음이냐, 복수냐 하는 운명적인 선택을 두고 고민했던 햄릿의 고민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살아가며 언제나 치명적인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게 되고, 역설적으로 그 선택의 순간이야말로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마주치는 운명적 선택과 그 뒤에 남겨지게 마련인 잔잔하지만 끈질긴 삶의 여파가 문학적인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사람이 죽고 사는 것만큼의 선택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사랑이냐, 돈이냐 하는 오래된 선택의 문제 역시 중요한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제도가 번성하기 시작한 이후에 등장한 근대소설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이 선택이 가시화되었던 가장 중요한 시작점은 1913년 신문에 등장했던 일재(一齋) 조중환(趙重桓·1884~1947)의 소설 ‘장한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일본 작가인 오자키 고요(尾崎紅葉·1868~1903)가 1897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했던 소설 ‘곤지키야샤(金色夜叉)’의 번안이었는데, 이 고요의 소설 역시 또 다른 영국 소설의 번안이어서, 이 주제가 얼마나 연쇄적인 파급을 일으킬 만큼 충격적이었는가 하는 것을 가늠할 수 있는 사례가 된다.아마 ‘장한몽’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실 독자도 있겠지만, 그나마 ‘이수일과 심순애’라고 하면 조금은 기억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있는 집 자식인 김중배가 내놓은 찬란한 다이아몬드 반지와 천애 고아로 심순애의 아버지 심택에게 얹혀살며 미래에 대해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는 사랑 밖에 줄 것이 없는 이수일의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심순애의 선택을 다룬 이야기가 바로 이 ‘장한몽’이다.당시 심순애가 마주칠 수밖에 없었던 그 선택이 그토록 선명하고 날카로운 것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바로 그 이전에는 사랑이냐 돈이냐 하는 각각의 가치가 결코 동등한 것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 혹은 그 이전 시대라고 해서 돈 때문에 사랑을 배신하는 사람이 왜 없었겠는가, 근대적인 개념의 ‘낭만적 사랑’은 아니었다고 하더라고, 정(情)에서 비롯되거나 윤리에 바탕을 둔 사랑을 저버리는 사람이 또한 왜 없었겠는가, 그 당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존재했고, 소설에 등장했지만, 대개는 악인이었고, 대개는 그 사랑을 배신한 대가로 죽음을 맞이하거나 운 좋게 회개하는 운명을 맞이하곤 했다.요컨대, ‘장한몽’과 ‘곤지키야샤’이전에, 사랑이냐 돈이냐라는 선택지는 전혀 동등한 것이 아니었다. 돈과 바꿀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가치가 존재한다는 근거는 없지만 강렬한 믿음이 모두의 의식 아래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돈이 사랑을 위협할 수는 있겠지만, 교환하거나 대체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소설 ‘장한몽’은 과연 그러한가, 하고 질문했던 것이다. 심순애는 그러면서 그 사이에서 진심으로 고민했던 것이다. 억눌려 있던 것이 터져 나오는 통쾌함도, 그래도 어딘가에 사랑은 존재한다는 바람도 모두 이러한 담론 속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는 여전히 끈질기게 이어지는 인간이 떨칠 수 없는 물음에 해당한다. 사회가 변해가면서 무작정의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2-03-14

노송(老松) 아래 아무것도 없었다 (Ⅳ)

-백주 대낮에,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노인을 상대로 한 범죄라는 것도 치가 떨리는 일이지만, 그 목적이 인공 장기를 탈취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에 놀라고 더욱 화가 납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슬픔 그리고 큰 분노를 느낍니다. 약속하건데 반드시 범인들을 찾아낼 것입니다. 지구, 아니 우주 끝까지라도 쫓아가야지요. 잡아와서 법정 최고형으로 죗값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슬픕니다. 정말 슬픕니다. 오늘 우리는 큰 어른을 잃었습니다. 이제 누가 있어 우리 어르신들을 위한 배려와 봉사의 길을 보여주겠습니까?카메라 플래쉬의 불빛이 사방에서 터졌다. 불빛을 배경으로 영권이 필립에게 다가왔다. 필립은 고개를 숙였고 영권은 두 팔로 필립을 안았다. 필립의 등을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들은 병원과 경찰서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삼십 분 후 영권은 급한 일정이 남아 있다며 장례식장을 떠났다. 영권을 배웅하고 돌아온 필립에게 아내가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만식의 얼굴이었다. ‘노인을 위한 기업, 올더앤베러의 창업주 최만식 회장 영원히 잠들다.’라는 메인 기사 아래 여러 개의 기사들이 달리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만식의 일생과 애도의 기사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차츰 만식의 사인에 대한 보도들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어 만식이 이식받은 인공 장기까지, 이런 일이 없었다면 백삼십 살은 거뜬했을 것이라는 주치의의 인터뷰까지. 급기야 인공 장기가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필립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내에게 핸드폰을 돌려주고 눈을 감았다. 엄지손가락으로 귀 뒤를 누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아내가 필립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눈을 뜬 필립에게 아내가 보여준 것은 기사 아래에 달린 댓글이었다.얼마나 오래 살려고 한 거야? 도대체.영원히 살려고 했구만.완전 인조인간이네 인조인간.그러면 아들은 몇 살인거야? 아버지가 계속 살았으면 회사는 언제 물려받게 되는 거야? 찰스 황태자야?필립은 아내의 핸드폰을 빼앗아 바닥으로 던져버렸다.-지금 뭐 하자는 거야? 지금 꼭 이런 것 봐야겠어?당황한 필립의 아내는 핸드폰을 줍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아버지 앞이다. 큰 소리 내지 말거라.작은아버지가 말했다.-이 사람은 항상 이런 식이에요.필립의 아내는 작은아버지와 친지들에게 하소연을 했다. 필립은 빈소에서 나와 신을 신었다. 몇몇 기자들이 질문을 하며 마이크를 들이밀었지만 손사래를 치며 밖으로 나왔다.필립은 주차장을 빙 둘러 걸었다. 선선한 저녁 바람이 낮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필립의 마음도 가라앉았다. 아내에게 화를 낸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영권을 먼저 말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도 했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어. 필립은 큰 숨을 내쉬고 걸음을 돌렸다. 인기척이 있었다. 안나였다. 장례식장 안에만 있자니 그녀도 답답했을 것이다.-힘드시죠?목례를 하고 지나치는 필립에게 안나가 말을 걸었다.-…….-앞으로 사십 년은 더 사실 것 같았어요. 건강하게. 그 정도면 저와 뱃속의 아이가 스스로 사는 법을 배울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제게 다른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필립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나가 말하는 동안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하현달이 초승달로 바뀌고 있었다. 곧 그믐이겠군.-예정일이 십일월 이십이 일이라고 했던가요?필립이 물었다.-제가 말씀 드린 적 있었나요? 어떻게 아시고.-몸조리 잘하세요. 지난번 말씀드린 대로, 아버님께서 당부하신 대로 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면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필립은 빈소로 돌아왔다. 아내는 돌아앉아 있었다. 바닥으로 내팽개쳤던 핸드폰도 그대로였다. 필립은 핸드폰을 가지고 와 아내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내는 눈을 흘겼고 필립은 미안하다 말했다.검색어 1위가 바뀌어 있었다. 인공 장기는 세 번째로 밀려났고 1위는 최만식 회장 2위는 올더앤베러였다. 생전 만식이 했던 인터뷰가 모 방송에서 방영되고 있었다. 올더앤베러, 부르기 좋아서 만든 이름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삶은 나아져야 합니다. 그들이 만든 세상에서 그들이 누리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티브이 속 만식은 티브이 화면 바깥을 응시하며 오른 주먹을 들어 보였다. 티브이 방송을 보던 조문객들이 박수를 쳤다. 그들을 둘러보던 필립은 문득 조문객들이 모두 노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들이 아니었다면 제법 쓸쓸한 장례식장이 되었겠어. 필립은 피식 웃었다.

2022-03-14

‘안전의식 지표’

남광현대구경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지난달 27일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고 나서 불과 한 달이 지난 현재 벌써 8건이나 이 법의 적용이 가능한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하였다.‘중대재해처벌법’상 종사자가 사망하면 사업주에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 법인은 50억원 이하의 벌금을 선고할 수 있다. 이렇게 처벌이 강력하다 보니 경영계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실시한 기업 규제 부담지수 조사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 ‘법인세’, ‘주52시간제’, ‘최저임금’보다 높게 나타났다고 한다.‘중대재해처벌법’에는 주로 사업주에 적용되는 ‘중대산업재해’ 뿐만 아니라 ‘중대시민재해’ 규정을 두고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하거나 동일한 사고로 2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10명 이상 발생하면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가 처벌된다. 이때 경영책임자는 실질적으로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이면서 사업 전반의 안전 및 보건 확보 이행에 관한 최종적 의사 결정권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여기에는 중앙행정기관, 지방자치단체, 지방공기업 그리고 공공기관의 장도 해당하게 된다.시민재해는 특정 원료·제조물·공중이용시설·공중교통수단의 설계·제조·설치·관리상 결함이 원인인 재해를 의미하고 있다. 사실상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재해 대부분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지난해 12월 행정안전부는 2020년 통계를 기준으로 교통사고, 화재, 범죄, 생활안전, 자살 및 감염병 등 6개 분야별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안전수준을 나타내는 2021년 ‘지역안전지수’를 공표했다. 이 자료를 살펴보면 특별·광역시 8개소 중에서 대구시는 6개 분야 등급 평균으로 최하위권인 6위에 자리매김했으며, 경상북도는 9개소 도중에서 간신히 중위권인 5위를 유지했다. 이 결과로 미루어보면 대구시와 경상북도는 ‘중대재해처벌법’상 ‘중대시민재해’의 발생 가능성도 매우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지역안전지수는 위해지표, 취약지표 및 경감지표로 산출하게 되는데 교통사고의 경우를 보면 위해지표는 교통사고 사망자수를 적용한다.취약지표는 재난약자수(고령인구, 유치원생수, 초등학생수), 의료보장 사업장수 그리고 자동차 등록대수를 적용한다.경감지표는 도로면적, 교통단속 CCTV대수, 지역교통환경개선사업예산액 및 응급의료기관수를 적용한다. 지역안전지수를 높이려면 당연히 위해지표와 취약지표는 낮추고 경감지표는 높여야 한다.가령 교통사고의 경우 자동차 등록대수를 줄이거나 교통단속 CCTV대수를 늘이는 등 물리적인 대책 추진이 필요하지만 분명히 한계가 있다. 그래서 최근 행정안전부는 현행 ‘지역안전지수’에 ‘안전의식지표’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안전의식지표’에는 운전자 안전벨트 착용률, 고위험음주율, 건강검진 수검비율 등이 포함될 예정으로 우리 대구·경북 시도민의 높은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가 없이는 절대 개선할 수 없는 지표들이다.

2022-03-14

새 정부의 대출규제 정책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5월 출범할 새 정부의 대출규제 정책은 완화기조다.현행 대출규제 정책은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두 가지로 작동한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은 윤 당선인이 공약을 통해 LTV 상한을 기존 20~40%에서 70~80%로 늘리기로 했다. 현재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 내 LTV는 집값이 9억원 이하일 경우 40%, 9억원 초과분에 대해서는 20%가 적용되며, 집값이 15억원 이상이면 아예 대출이 금지된다.이 LTV 상한을 70%로 일률 인상하기로 했고, 청년층과 신혼부부 등 생애최초 주택 구매 가구에는 LTV 상한을 80%로 완화하는 것이 골자다.다주택 보유자에 대해서는 보유 주택 수에 따라 LTV를 차등적용한다. 다만 차주의 연간 원리금 상환액을 연 소득으로 나눈 비율을 가리키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완화여부는 불투명하다.현재 총대출액 2억원을 초과할 경우 은행 대출 원리금액이 연 소득의 40%를 넘지 못하도록 돼 있다. 따라서 LTV가 완화되더라도 DSR 규제가 현행대로 유지된다면, 대출규제는 여전히 지속된다.DSR 규제는 소득이 높을수록 대출 여력이 생기고, 소득이 낮을수록 대출받기가 어려워지는 구조다. 서울의 경우 소득은 낮지만 자산가격은 비싸, 상환 기간을 최장으로 설정해도 DSR 40%를 지키기 어렵다.지난해 기준 서울 아파트 중간값이 10억원을 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DSR 규제를 무작정 풀면 부실 여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어떻든 내집마련을 꿈꾸는 청년이나 서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대출규제 완화조치는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3-14

6·1지방선거, 정당의 혁신공천 기대한다

그동안 대통령선거에 가려졌던 6·1 지방선거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국민의힘은 대선승리의 기세를 살려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예비후보 등록을 하거나 출마를 선언하는 인물이 늘어나고 있다. 대구시장 선거는 이미 권영진 현 시장이 3선 도전을 선언했지만, 홍준표 의원이 지난 10일 사실상 대구시장 출마를 선언하면서 선거전이 불붙는 양상이다. 홍 의원은 대구시장선거 출마를 자신의 ‘정치적 하방’에 비유해 대구를 중국의 일개 지방으로 비하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권 시장은 수성구 범어네거리 인근에 이미 선거사무실을 계약했고, 홍 의원도 곧 대구시청 부근에 선거사무실을 마련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진숙 전 MBC 워싱턴특파원도 이번 주 예비등록과 함께 오는 19일에는 중구 반월당 인근에 선거사무실을 열고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들어간다. 대구시장 선거에는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과 윤재옥 의원의 출마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경북도지사 선거는 국민의힘 내에서는 이철우 현 도지사의 단독출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다양한 사회·경제적 통계를 보면, 대구·경북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 올해 대선에 이어 치러지는 지방선거는 이 지역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코로나 확산과 4차산업혁명, 심화되는 수도권집중이라는 격변기에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이 지역 미래는 암담하다.대구·경북은 국민의힘 텃밭이라는 사실이 이번 대선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국민의힘에서 어떤 인물을 공천하느냐에 따라 이 지역 미래가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지난 주말 페이스북을 통해 “6월 1일 열리는 지방선거에서 돈 공천의 가능성을 끊어내겠다”고 밝힌 것은 의미가 크다. 이 대표는 지난해 당 대표에 취임할 당시 정당 사상 처음으로 지방선거 공천에서 공직 후보자 역량을 검증하는 자격시험을 도입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여야 정당 모두 광역단체장선거 만이라도 기존의 공천방식에서 탈피해서 참신하고 국제적인 감각이 있는 정치신인이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는 공천개혁을 단행했으면 한다.

2022-03-14

대형 산불 막을 항구적 산림대책 세워야

역대급 피해를 낸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지역 산불이 10일 만에 가까스로 진화됐다. 불에 탄 산림면적이 2만4천여ha로 2000년 동해안 산불 때보다도 크다. 피해면적이 서울 면적의 41%, 축구장 3만4천여개 규모에 주택 388채를 포함 900여개의 각종 시설이 화마로 불타고 7천여 주민이 대피를 했다. 연인원 3만6천여명이 동원됐고 소방차만 2천422대, 헬기 679대가 동원됐다.때마침 비가 내려 산불 진화에 도움을 주었지만 주민과 소방대원, 공무원 등 진화요원들의 헌신적 노력이 없었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이번 산불이 크게 확산된 데는 50여일 이어져온 겨울 가뭄과 강풍이 주요 원인이다. 심한 가뭄으로 야산의 낙엽과 풀 등은 불쏘시개 역할을 했고, 최초 발화지점인 울진 북면 일대는 당시 순간 초속 25m의 강풍이 불어 산불을 순식간에 확산시켰던 것이다.문제는 가뭄과 강풍 등의 기후변화가 갈수록 강도를 더하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고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우, 폭염, 가뭄 등의 이상기후 변화를 우리도 함께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보다 근본적이고 항구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경북과 강원도 일대 산림은 불에 타기 쉬운 침엽수 계통의 소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소나무는 송진의 기름 성분 때문에 불에 쉽게 타 산불에 취약하다.소나무 중간중간에 활엽수 계통의 수목을 심는 산림구조를 혁신적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또 산불 예방을 위한 CCTV 확대 설치와 소방차가 다닐 수 있는 임도를 확충하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 야간에도 진화작업을 할 수 있는 야간헬기 도입과 산불진화 전문인력 양성 등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매번 반복되는 산불이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울진 삼척 산불을 계기로 기후변화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우리나라 산림구조에 대한 혁신적 변화도 구해야 할 것이다.

2022-03-14

긍정과 비판 사이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려 열흘째 애태우던 울진산불이 진화돼 천만다행이다. 50년만의 최악인 겨울가뭄에 봄의 초입부터 잇따르던 크고 작은 산불로 많은 피해가 나고, 농어촌의 용수부족과 일부 섬마을의 식수부족 비상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건조한 겨울을 지나면서 빈발하는 전국 산불의 70%가 봄철에 집중되고, 1/3 이상이 사람의 실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니 안타깝기만 하다. 어쩌면 기후변화의 역습에 인재(人災)가 갈수록 더해지는 양상이랄까?자연의 흐름은 구름이 움직이다가 비를 내리고(雲行雨施), 만물이 두루 은택을 받아 큰 조화로운 기운을 보전하여 이롭고 곧게 된다(保合大和 乃利貞)는 것인데, 이러한 천지자연의 변화에 균형이 무너지고 조화가 어긋나게 되면 결국 운행과 순환에 차질을 빚게 된다. 그래서 간혹 기상이변이니 천재지변 같은 불가항력적인 재앙이 닥치는지도 모른다. 작은 우주라 하는 사람도 자연과 같은 원리로 구성되어 자연과 같이 변화하고 상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자연의 이치와 변화에 따르고 순응하는 것이 자신의 삶과 사회적인 관계에서도 순조로움과 평정을 지켜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평안과 고요함을 의미하는 평정(平靜)은 곧,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를 의미하는 중용(中庸)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중용은 동양철학의 기본개념인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지나치거나 모자람없이 도리에 맞는 것이 ‘중(中)’이며, 평상적이고 불변적인 것을 ‘용(庸)’이라 하여, 중용에서 말하는 이른바 ‘도덕론’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중용은 극단 혹은 충돌하는 모든 결정에서 중간의 도(道)를 택하는 일종의 소신과 지혜라 할 수 있다.지난 주에 제20대 대통령 선거의 향배가 결정돼 민심이 술렁이고 있다. 0.73% 차이라는 역대 대선치고는 유례없이 근소한 차이의 당락이었지만, 어쨌든 결판이 났기에 희비의 쌍곡선이 제각기 그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국민의 준엄한 심판에 겸허하게 더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하거나, 일각에서는 이념이나 진영, 지역이나 세대를 아우르는 민의를 존중하고 당면과제에 충실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여론이다. 거의 국민 절반이 찬반을 보인 것이기에 충분히 일리 있어 보이는 대목이다.이러한 국면일수록 중용과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본다. 비등비등한 상황일수록 상대편의 주장이나 논점을 받아들여 여타의 쟁점을 중화 (中和)하고 융합하는 ‘협치의 모멘트’가 묘책이 될 것이다. 절반의 근사점에서는 갈등의 소지도 많고 공감의 여지도 많기에, 긍정과 비판의 사이에서 배려와 존중의 포용력으로 조율하고 합일점을 꾸준히 찾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그 바탕에 어느 한쪽으로도 쏠림 없는 중용의 도를 견지하고 실천하는 것이 관건이 아닐까 싶다.비를 내리는 것은 하늘의 몫이지만, 융화(融和)는 오직 사람에게 달려있다. 모든 일에 중용의 자세로 굳건히 중심을 잡아 두루두루 살피고 보듬어, 견제와 균형으로 평안하고 화애로운 날들이 열리길 기대해본다.

2022-03-14

생산성의 비밀, 모랄(Morale)

김종찬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세상은 발견의 시대에서 실행의 시대로, 전문가의 시대에서 인공지능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4차산업혁명 이전의 평범의 시대에는 시장지배적 기술 한 두개가 생산성을 주도하였고 모범사례 대로 생산하면 큰 위기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그러나 시대는 그야말로 급변하고 있다. 체류하는 순간 이 시대는 냉정하고 단호하다. 그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며, 그리하여 기업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대를 향해서 변화해 가고 있다.이토록 빠르게 돌진하는 시대 속에서 변화의 거센 물결이 불가항력일 수 밖에 없어 변화에 적응 하지 못하는 기업은 사라져 가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문제의 발견 보다 실행이 중요해지고 전문가 보다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시대에는 의외로 기본적인 것이 지속 가능한 기업의 경쟁력이 된다.인천 남동공단의 모기업을 컨설팅 할 때의 일화이다. 컨설팅 로드맵에 따라 전 직원 대상으로 ‘변화관리’ 교육을 실시하고 현장 개선활동을 막 시작한 초기에 C조에서 갑자기 생산성이 30%가 향상 되었는데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동일한 표준과 설비를 사용하고 조별 근속 연수도 비슷하고 제품의 규격도 특이점이 없었으니 C조 생산성의 비밀은 영원히 묻히나 싶었다.이 때 필자는 생산성 향상의 비밀을 찾아 내고자 생산현장을 관찰하던 중 사소한데서 그 답을 찾아내고 사장과 얘기를 나누었는데 사장은 말없이 웃는 것으로 답이 아님을 세련되게 부인하고 있었다.필자가 찾아낸 답은 C조는 ‘변화관리’ 교육 후 리더인 주임의 솔선으로 사기와 의욕인 ‘모랄(Morale)’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모랄은 실행력을 향상 시키는 열쇠이자 긍정적인 문화를 만드는 에너지다.모랄은 정해진 규칙을 지키게 하고, 정해진 점검을 완벽하게 이행하며 이상은 즉시 조치 하게 하는 마음의 소양이다.무슨 거창한 이유를 제시해야 되는데, 이렇게 평범한 모랄이라는 것을 생산성 향상의 답이라고 내 놨으니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모랄에는 우리가 모르는 아주 중요한 비밀이 숨어있다. 표준은 지식의 영역이며, 지식을 실행하게 하는 힘은 모랄의 영역이다. 모랄이 낮은 조직은 우수한 표준이 있어도, 최고의 기술이 있어도, 실행되지 않은 액자 속의 비전에 지나지 않는다.지식은 근속연수와 함께 쌓이는 특성이 있으나, 모랄은 관리자의 꾸지람이나 공정하지 않은 평가에 쉽게 무너지는 특성이 있다.백과사전 몇 권 분량의 지식이 있어도 실행에 이르게 하는 모랄이 없으면 아무런 변화도 끌어낼 수 없다.양치컵을 사용하면 4.8리터의 물이 절약되고, 샤워 시간을 1분 줄이면 12리터의 물이 절약되며, 비누칠 할 때 수도꼭지를 잠그는 것 만으로 6리터의 물이 절약된다는 것을 아는 것 만으론 결코 물을 절약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다”는 실행을 강조한 속담이 4차산업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기업에 여전히 유효한 말이 아닐까.

2022-03-14

전임 대통령을 반면교사로 삼으라

김진국 고문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5월 10일 취임한다. 두 달 정도 남았다. 대통령 임기를 통틀어도 이때만큼 희망에 부풀고, 기세가 오를 때가 없다. 후임 대통령이 정해지고, 퇴임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면 아쉬움과 후회가 파도처럼 몰려온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다.윤 당선인의 10일 기자회견은 그런 희망과 의욕이 넘쳤다. 과거 대통령들도 취임할 때는 다 좋은 말만 했다. 취임사만 보면 어떤 대통령이 한 말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좋은 말은 다 가져다 쓰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심보다 국민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했다. 그러고는 잉크보다 빠르게 취임사를 머리에서 지워버렸다.대통령들의 취임사는 국민이 원하지만, 대통령이 하기 싫거나, 할 수 없었던 일들의 집합이다. ‘ABM’(A nything But Moon, 문재인 지우기)은 아니라도 일종의 반면교사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가장 먼저 “(오늘은) 진정한 국민통합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진영 갈등이 어느 때보다 극심했다.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은 소외감을 느꼈다.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나누어 군중 집회를 열었다.윤 당선인도 당선 배경을 “국민을 편 가르지 말고 통합의 정치를 하라는 국민의 간절한 호소”라고 말했다. 또 “오로지 국익만이 국정의 기준이 되면 우리 앞에 보수와 진보의 대한민국도 영호남도 따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말은 쉽다. 실천하려면 힘들고 고통스럽다.윤 당선인이 마주한 정치 환경은 훨씬 열악하다. 진영 갈등에 세대 갈등, 젠더 갈등이 더하고, 사라질 것 같던 지역 갈등도 아직 남았다. 국회는 여소야대(與小野大)다. 국민의당과 합당해도 113석이다. 5분의 3 의석(180석)이면 개헌을 제외하고는 뭐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선 득표 차이도 역대 가장 적은 24만7천77표다. 취임하고 한 달도 안 돼 지방선거가 닥친다. 허니문 없이 바로 대결로 치닫는다.윤 당선인은 “여소야대 상황을 통해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정치가 훨씬 성숙해 나갈 기회”라고 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1988년 여소야대 국회는 4당 체제였다. 야당도 어느 한 당이 독주할 수 없었다. 보수당인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이 캐스팅보트 역할도 했다. 지금은 민주당이 독주하는 국회다. 선거 도중 민주당이 약속한 다당제로 갈 수 있다면 협치가 쉬워진다.문 대통령은 “야당은 국정운영의 동반자”라며 “대통령이 나서서 직접 대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거대 야당을 마주한 윤 당선인의 대화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민주당을 쪼개는 인위적인 정계 개편을 거론하는 사람도 있다. 경선 과정의 갈등으로 민주당이 스스로 갈라설 수는 있다. 권력이 개입하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다. 민주당 인사를 발탁하더라도 와해 공작으로 접근하면 곤란하다. 13대 국회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보여준 인내의 협치가 필요하다.“공이 있으면 상을 주고, 능력이 있으면 자리를 주라”고 했다. 문 대통령도 “저에 대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쓰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코드 인사’로 일관했다. 윤 당선인이 정치를 오래 하지 않아 빚이 적다는 건 오히려 장점이다. 과감한 결단이 가능하다.윤 당선인은 “기자 여러분과 간담회를 자주 갖겠다”고 약속했다. “퇴근길 시장에 들러 시민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약속은 빈말이 됐다. 기자회견도 10번이 안 된다. 정부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정직한 정부가 되겠다는 윤 당선인의 약속도 문 대통령 말과 같다. 말보다 실천이다. ‘내로남불’이 정권교체의 가장 큰 동력이 된 걸 잊어선 안 된다.윤 당선인은 공정의 상징으로 소환됐다. 문 대통령도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국민이 원하는 말을 하면 박수받는다. 문제는 실천이다. 더 좋은 지도자는 박수받지 못해도 힘든 일을 해내자는 주문을 하는 사람이다./본사 고문

2022-03-13

“기후 대응·탄소중립, 피할 수 없는 국가현안”

위현복(사)한국혁신연구원 이사장 ‘RE100’은 지난 2월 3일 대선후보 TV토론회에서 거론되면서 갑자기 유명해진 단어다.당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질문했고, 지금은 대통령 당선인 신분인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대답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논란이 됐었다.RE100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전부(100%)를 신재생에너지(Renewable Energy)로 충당하겠다는 캠페인이다. 구체적으로는 2050년까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만 충당하겠다는 다국적 기업들의 자발적인 약속이다. 2월 현재 구글, 애플, GM, 이케아 등 349곳이 참여해있고, 국내에서는 SK그룹 계열사 8곳과 LG에너지솔루션, 한화큐셀, 고려아연 등 14곳이 참여를 선언했다.대선 토론회 당시 윤석열 후보가 RE100에 이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 ‘EU택소노미(EU Taxonomy)’는 원자력발전과 관련된 민감한 문제다. 어떤 에너지원이 친환경·녹색 사업인지 아닌지를 알려주는 기준으로, 유럽연합(EU)의 ‘녹색분류체계’라고 보면 된다.택소노미에 포함된 에너지업종에 대해서는 각종 금융 및 세제 지원을 제공해 투자를 유인한다. EU가 세계최초로 2020년 6월 EU판 그린 택소노미 가이드를 발표했다.확정안에 따르면 신규 원전 투자가 친환경 활동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투자 대상이 될 신규 원전은 2045년 전에 건축 허가를 받아야 한다. 기존 원전의 수명 연장은 2040년까지 승인이 필요하다. 신규 원전을 짓는 EU 회원국은 2050년까지 방사성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세부 계획을 세워야 한다.우리나라는 2020년부터 한국형 녹색분류체계인 K-택소노미를 준비해왔다. 2021년 5월 초안공개에 이어 2021년 12월 말에는 최종안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원전이 아예 제외되었다.신재생 에너지만으로 100% 전력을 생산하면 더없이 좋으나 2050년까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벅찬 게 현실이다.그래서 프랑스 등 탈원전을 추진했던 나라들로부터 다시 원전이 각광을 받는데, 문재인 정부는 대선공약이라며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경쟁력 있는 한국의 원전을 5년간 사장시키고 폐기하다시피 했다.이명박 정부 때 UAE에 원전 4기 공사를 수주했으나, 이제는 이집트 원전건설 하청업체로 전락한 걸 자랑할 지경으로 원전 산업도 뒤처지고 말았다.지금까지의 정책적 흐름을 살펴보면, 이명박 정부는 ‘녹색성장(Green Growth)’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기막힌 용어까지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신재생에너지 정책을 펼쳤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모든 정책을 거꾸로 갔기 때문에 ‘기후정책이 멈춰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원전을 폐기하고 동시에 전국 산야를 태양광 투기판으로 변질시켜 기후정책과 탄소중립이 오히려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상황으로 치달았다.이제 탄소중립은 국가도 기업도 피할 수 없는 당면 과제가 됐다.문재인 정부도 지난해 2018년 배출량 대비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40%를 절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세계는 1988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를 설립하여 차근차근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최근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부 11년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갈지자 행보를 하여 세계적인 추세에 한참 뒤처지는 엉뚱한 정책을 시행하였다.내년부터 EU에서는 제품 수입 시 탄소세를 부과할 계획이고, 이제 탄소중립은 우리 기업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다.특히 철강산업, 자동차산업, 조선산업 등 탄소중립에 취약한 제조업이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이고 가장 타격을 많이 입을 것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해진다.새 정부는 모든 선입견과 감상적 판단을 떠나 냉철히 세계적인 추세와 현실을 직시하여 ‘기후변화대응·탄소중립’이라는 도전을 새로운 성장의 기회로 삼고 기업과 국가경쟁력 향상의 계기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문재인 정권이 지난 5년간 하지 말아야 할 정책을 추진하다 나라를 어떤 지경으로 만들었는지를 냉정하게 되돌아보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새 정부는 혁신하고 또 혁신해야 한다.기후변화에 대한 대응과 탄소중립은 정부만의 역할로는 안된다. 당장 피해는 기업으로 오고 부담은 국민 모두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작든 크든 가릴 것 없이 정부는 정부대로, 기업은 기업들대로, 국민 모두가 각자 적극적으로 역할을 찾아서 감당해야 선진국 추세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항상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만들었던 한민족 DNA를 살려서 지금이라도 정신 바짝 차려 기후변화 선도국으로 나갈 수 있도록 국민 모두가 나서야 할 때다. RE100!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다.

2022-03-13

슬도

화면 가득 노란색이 손짓한다. 저기가 어딜까 하고 클릭해보니 ‘슬도’라고 했다. 처음 듣는 이름의 섬에 우리 동네에는 아직 고개를 내밀지 못한 유채꽃이 환하게 피었다. 파도 소리 들으며 해풍에 몸을 맡기고 노랑노랑 흔들리고 있었다. 얼른 간식 바구니를 챙겨 집을 나섰다.달려가니 울산 대왕암 근처였다. 소문을 나만 들은 게 아닌지 주차장이 꽉 찼다. 마침 빠지는 차가 있어서 차를 내려놓고 섬을 향해 걸었다. 이제는 섬이라 불러도 되나 싶게 작은 슬도까지 방파제가 연결되어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오갔다.울산 동구 방어진항 끝에 있는 슬도는 바위에 구멍 투성이라고 곰보섬, 또 항으로 들어오는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바위섬에 갯바람과 파도가 부딪칠 때마다 거문고 소리가 난다 하여 슬도(瑟島)라 불려 이름이 여러 개이다. 슬도의 본래 이름은 시루섬이었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음이 비슷한 슬도가 됐다. 퇴적된 사암이 켜켜이 층리를 이룬 슬도의 모습은 여지없는 시루떡 모양새다. 떡 찌는 시루에 구멍이 숭숭 난 점을 보면 시루섬이란 이름이 안성맞춤이다.바위가 백 만개가 넘는 구멍으로 뒤덮였다. 모두 돌맛조개가 판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슬도 인근에서 돌맛조개가 발견된 적은 없다고 한다. 구멍들은 표면에만 있는 게 아니다. 수면에 잠긴 부분에서도 수없이 발견된다. 수면 아래로 내려갈수록 둥근 형태가 뚜렷하다. 어떤 구멍에는 따개비나 덩굴 생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돌맛조개가 버린 ‘집’을 자신의 집으로 삼은 것이다.지금까지 슬도에 대한 공식적인 학술조사는 없었다. 최근 슬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방파제(150m가량)가 설치된 뒤부터 관심이 늘었다. 사람들도 많이 찾는다. 슬도 인근 주민들은 바위의 구멍이 파도에 의해 뚫렸을 것으로 짐작했단다. 섬 꼭대기에도 구멍이 있는 것을 보면 해저 암반이 융기해 섬이 생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물속에 잠겨 있을 때 조개가 구멍을 팠을 것이란 얘기다. 슬도의 퇴적암층에 꼬막 화석이 발견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바위에 난 큰 구멍이 하얗다. 파도가 들어와 말라 소금으로 변했다. 섬 위에 우뚝 선 하얀 등대에 푸른 고래가 휘감고 헤엄쳐 오른다. 그 앞에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 한 마리를 등대 높이만큼 세웠다. 슬도의 거문고 소리에 맞춰 푸른 고래들이 유유히 바다로 향할 듯하다.대왕암까지 오솔길이 나 있다. ‘슬도 바다길’이라고 해파랑길의 한 구간이다. 등대에서 걸어 나와 소리박물관을 지나다 보면 말 한 마리 키우는 카페가 있다. 성끝마을이다. 동네 이름이 성끝마을인 이유는 조선 시대 이곳에 말을 키우려고 울타리를 쳤는데 마성이라 불렀고 그 끝자락에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마을 담장에 벽화를 감상하며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노랑의 물결이 눈을 환하게 하고, 쐬아아 밀고 들어오는 파도가 귀를 시원하게 만든다. 왼쪽은 유채꽃 바다(키가 유난히 작다 했더니 알고 보니 청경채 꽃이라고 했다), 오른편은 동해다. 두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한꺼번에 입에 머금는 순간처럼 몸이 화하다.슬도의 가장 매력은 또 있다. 동해에서 드물게 노을을 볼 수 있다는 것. 말간 하늘보다 수평선 위로 바삐 귀가를 서두르는 듯 자리를 정리하는 해를 뭉싯거리는 구름이 가리기라도 하면 더 멋진 풍경화가 그려진다. 물이 빠져나갈 때면 등대가 물끄러미 바닷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기다렸다는 듯 등대 뒤편으로 붉은 기운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노을의 부름에 대답하듯 산책로에 불빛이 들어오고 등대도 빛을 쏟아낸다.내항에 불빛이 길게 일렁인다. 밤의 방파제를 산책하노라면 고흐가 그린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다. 낮보다 깊어진 파랑의 하늘에 노란 별이 점점이 박히고, 물 위로 불빛이 흔들리는 그림이 방어진항의 밤 풍경 그대로였다.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이 모여든 등대 주위로 슬도가 연주하는 밤의 소나타가 그윽하다./김순희(수필가)

2022-03-13

파랑새를 찾아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 벨기에 시인이자 극작가인 모리스 마테를링크(1862∼1949)가 쓴 ‘파랑새’가 떠오르는 시점이다.1908년 출간된 ‘파랑새’를 러시아 연출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가 ‘모스크바 예술극장’ 무대에서 곧바로 상연한다. 외견상 ‘파랑새’는 어린이를 위한 작품 같지만, 그 내면에는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기나긴 여로가 자리한다.크리스마스 전날 밤 가난한 남매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선물을 받지 못해 의기소침해 있다. 그때 옆집 할머니가 들어와서 앓고 있는 딸을 위해 파랑새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건네준 요술 모자를 쓰고 길을 떠난다. 아이들은 ‘추억의 나라’와 ‘밤의 궁전’을 지나 ‘행복의 궁전’과 ‘미래의 나라’를 떠돌다가 돌아온다.아이들이 돌아왔다기보다 엄마가 깨우는 소리에 꿈에서 깨어났다는 말이 더 맞겠다. 아이들이 돌아다닌 세계는 꿈의 환영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옆집 할머니가 들어오자 아이들은 파랑새 대신 비둘기라도 가져가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집에서는 비둘기를 기르고 있었다.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긴다. 아이들의 비둘기 날개가 파란색으로 변하여 그들이 찾아다녔던 파랑새가 집 안에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할머니는 파랑새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고, 딸은 기력을 회복한다. 아이들이 먹이를 주려고 새장 문을 열자 파랑새는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파랑새는 행복의 상징이다. 요즘 한국인들은 행복의 노예처럼 보인다. 누구나 삶의 가장 큰 원인을 행복에서 찾는다. 행복하지 않으면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행복 강박증에 중독된 사람들 같다.그런데 그들이 바라는 행복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변이 별로 없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한다.행복의 조건을 숙고하지 않은 채 행복을 추구함은 허전하고 이상하다. 왜 부자가 되려는지, 왜 결혼하려는지, 왜 대학에 들어가려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들이 행복을 찾고, 부자가 되려 하고, 결혼과 진학은 누구나 하는 거니까 거기 맞춰 살아가려는 게다. 오랜 세월 독재자들의 병영국가, 군사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서 그런지 우리는 전체주의와 획일주의에 익숙하며 그것에 순치(馴致)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마주하고 보고 듣고 먹고 마시는 온갖 것을 돌이켜보면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이토록 차고 넘치는 물질과 재화와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때로 격절(隔絶)된 작은 섬들을 본다. 난바다에 둥둥 떠서 서로를 목청껏 부르지만, 누구도 그 목소리에 호응하지 않는 차갑고 비정한 세상.3월 9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선이 끝났다. 홀가분하다. 북새통처럼 시끌벅적하던 사위(四圍)가 고요해지니 이제야 사람 살아가는 세상처럼 보인다. 사람 하나 바뀐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전혀 없다. 그러니 다투고 시비하던 사람들이여, 이제는 제자리로 돌아가 차분하게 일상과 대면하시라. 당신이 기다리던 진정한 파랑새는 거기 있을지 모르니까.

2022-03-13

대구·경북 대선공약, 지역발전 전기 삼아야

20대 대통령으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면서 대구와 경북은 지역발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다. 지역이 소외당했던 문재인 정부와는 달리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 각종 지역현안을 논의할 소통 채널이 많아지고 현안 해결의 길도 그만큼 넓어질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대구(75.1%)와 경북(72.7%)은 전국에서 가장 압도적 지지로 윤석열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 공헌했다.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보수지지층 기반이 두터운 지역의 여론이 반영된 결과기도 하지만 국민의힘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는 누가 뭐래도 지역이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대구시와 경북도는 당선자의 공약이 새 정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세부적인 대응책 마련에 나선다고 한다. 대구시는 오는 22일 대선공약 이행계획보고회를 갖는 등 지역 현안의 국정과제 채택에 민감하게 움직이고 있다.대구시와 경북도의 대선공약은 대구경북통합신공항 조속 추진, 달빛고속철도 조기 착공, 낙동강취수원 다변화, 신한울3·4호기 건설 재개, 경북광역교통망 확충, 영일만횡단대교 건설 등 굵직한 사업만 손꼽아도 적지 않다. 대구와 경북의 기민한 대응이 필요하다. 대응전략에 따라 공약이행 속도나 규모 등이 달라질 수도 있다. 치밀하고 계획적이어야 한다. 이는 자치단체 혼자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역 정치권이 힘을 모아 지역의 대선공약이 정부 정책에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국민의힘이 야당이라서 어렵다는 소리는 더는 할 수 없다. 지역현안을 잘 챙겨 지역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 시간이다. 특히 대구와 경북의 최대 현안인 신공항 건설은 지금부터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한다. 중남부권 거점공항이자 경제물류공항으로 명실상부한 명품공항으로 조성해야 한다. 공항을 중심으로 공단이 활성화되고 신도시가 생겨나 지역경제가 활기를 찾는 날을 앞당겨야 한다. 2028년 통합신공항이 제때 개항하는 데는 지역 정치권의 노력이 얼마나 투입됐느냐에 달렸다.

2022-03-13

전면개편 앞둔 K방역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K방역이 머지않아 전면개편될 전망이다. 제20대 대통령선거 투표가 진행된 지난 9일 0시 기준 국내 신규 확진자는 34만2천446명으로 국내 유행 이후 처음으로 30만명을 넘어섰다. 이후 연일 20만∼30만명대 신규 확진자가 쏟아져 누적 확진자 수는 620만6천291명에 이르렀다.이에 따라 제20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국민의힘 윤석열 당선인의 코로나19 방역정책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집권 100일 이내 코로나19 대응체계를 전면 개편하겠다고 공언해왔기 때문이다. 윤 당선인은 문재인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으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에 집중된 피해가 장기화하고 있다고 보고, 과학과 빅데이터에 기반한 방역 조치를 시행하기 위해 ‘과학 기반 사회적 거리두기 기구’를 설치하겠다고 했다.또 대통령 직속 코로나 긴급구조 특별본부 설치와 소상공인·자영업자 등 피해 업종 지원 방안 등도 약속했다. 장기적으로는 중증환자를 돌볼 수 있는 의료 자원과 인력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공공정책수가를 도입하고, 대규모 감염병 사태가 벌어졌을 때는 평소보다 가산된 수가를 적용해 의사나 간호사 등 의료인력의 이탈을 막겠다고 약속했다.이에 더해 윤 당선인은 코로나19 백신 접종 후 이상반응으로 의심되는 사망·중증 사례에 대해서는 정부가 직접 인과관계 증명에 나서고, 충분한 치료와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피해 회복에 대한 국가 책임제를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 방역 컨트롤타워도 대거 교체될 것으로 보인다. 윤 당선인은 전 세계에 자랑한 K방역이 실상 자영업자 희생시키는 주먹구구식 방역, 거리두기라고 비판했다.어떻든 결과적으로 국민을 고통에 빠뜨린 K방역의 폐해가 하루빨리 시정되길 기대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3-13

인수위의 지역균형발전 TF, 민심 잘 듣길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12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산하에 지역균형발전 태스크포스(TF)를 설치하기로 했다.김은혜 당선인 대변인은 “윤 당선인이 우리 당 소속 광역단체장들과 통화하는 과정에서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진지한 접근과 해법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받고 결단했다”고 밝혔다. 인수위는 전국 광역자치단체로부터 국가균형발전과 관련한 의견을 수렴해서 국정에 반영할 예정이다. 비수도권 시장·도지사들은 이번 기회에 지방소멸문제가 국가현안으로 다뤄져 획기적인 해결책이 나올 수 있도록 총력을 쏟아야 한다.윤 당선인은 대선운동 기간 중 누차 “지역균형발전은 국가생존의 문제다. 이 문제는 양극화를 해결하는 문제와 똑같이 생각한다”고 말해왔다. 당선인 말처럼, 우리나라는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는 수도권 집중도를 보이고 있다. 수도권 공화국에 따라오는 부작용은 당연히 비수도권 소멸이다.비수도권 소멸을 막는 유일한 해법은 양질의 청년 일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우수한 기업을 유치하고 인재들이 찾는 대학을 비수도권에 육성하면 청년들이 가족을 등지고 수도권으로 떠날 이유가 없다. 최근에는 외국에 차렸던 공장을 국내로 다시 들여오는 리쇼어링 기업이 꾸준히 늘고 있다. 대구·경북에도 지난해 6개의 리쇼어링 기업을 유치했다.인수위원장으로 선임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대선후보 TV 토론회에서 “리쇼어링이 가장 효과가 좋은 일자리 정책”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중국 등 현지에서도 공급망 불안이 커지고 인건비가 많이 올라 국내 복귀를 고려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고 한다. 정부와 비수도권 지자체가 인센티브를 확대해 적극적인 유치전을 펴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부분이다.인재육성을 위해서는 지난달 경북대를 비롯한 국가거점국립대총장협의회가 국회에서 가진 기자회견 내용을 받아들이면 된다. 회견 내용의 요점은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굳이 수도권으로 가지 않아도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을 정부가 시행해 달라는 것이다. 인수위 지역균형발전 TF가 얼마나 민심을 잘 경청해서 좋은 정책을 내놓을지 기대가 된다.

2022-03-13

‘살얼음 당선’ 잊지 않으면 좋은 대통령 된다

윤석열 제20대 대통령 당선인은 10일 새벽 피말리는 개표전에서 승리한 후 “당선인 신분에서 새 정부를 준비하고 대통령직을 정식으로 맡게 되면 헌법 정신과 의회를 존중하고 야당과 협치하면서 국민을 잘 모시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대선기간 내내 동력으로 삼았던 ‘헌법정신’을 강조하면서, 더불어민주당과의 협치를 당선인의 최대 현안으로 밝힌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윤 당선인은 민주당 이재명 후보에게 사상 유례없는 근소한 표차(24만7천여 표)로 이겼다. 이러한 초박빙 득표차는 통합과 협치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라는 민심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윤 당선인은 정권 인수단계에서부터 180석 안팎의 의석을 가지고 있는 민주당의 집요한 태클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민주당의 도움 없이는 첫 내각 구성부터 벽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윤 당선인이 ‘민주당의 훌륭한 분들’이라고 언급하면서 협치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선거 이후의 국민 통합과 화해는 거의 전적으로 대통령 당선인에게 달렸다. 지금 당선인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자신을 지지한 유권자와 함께, 낙선 후보자들에게 던진 유권자들의 마음도 정확히 읽고 그들을 진정으로 끌어안는 것이다.윤 당선인이 또 한가지 풀어야 할 현안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비수도권지역의 소멸위기를 막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대구·경북 유권자들이 윤 당선인에게 몰표를 던지다시피 한 것은 지방의 소멸위기를 국가생존차원에서 대처해 달라는 요구와 다름없다. 대구·경북은 문재인 정부 5년동안 국책사업과 예산배정에서 엄청난 박탈감을 느껴왔다. 지난 2020년에는 코로나 대유행 사태를 겪으며 많은 조롱까지 받았다. 이 지역민들은 역대 정부에 특별대접해 달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타지역과 같이 공정하게 대해달라는 것이다.윤 당선인은 이번 선거운동과정에서 대구경북지역민에게 약속한 공약을 다시한번 꼼꼼히 살펴보고 반드시 실천해주길 바란다. 지역정치권도 당선인 눈치나 보며 사익을 추구하지말고 이 지역 공약이 이행되도록 총력을 쏟아야 한다.

2022-03-10

고삐 풀린 방역… 선거 후폭풍 비상한 대비를

코로나19 확진자가 이틀 연속 30만명을 넘어서는 등 걷잡을 수 없는 폭증세다. 10일 하루 신규 확진자는 32만7천549명으로 전날에 이어 또다시 30만명을 넘어섰고 누적 확진자도 550만명을 넘어섰다. 정부가 오미크론을 감기처럼 관리하겠다며 방역패스를 중단하고 확진자를 재택방치한 것이 화를 키웠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방역조치가 느슨해지면서 코로나 검사를 기피하는 샤이 오미크론 환자도 늘고 있다고 한다. 자가검사키트에서 양성 반응이 나와도 코로나 유전자증폭(PCR)검사를 받지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7일간 의무격리가 불편하거나 생업이 바쁘다는 이유에서다. 그 수를 감안하면 하루 확진자는 지금의 두배 이상 될 것이란 예측이다.문제는 아직 오미크론 변이가 정점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확진자가 나올지 심히 걱정스럽다. 깜깜이 환자를 줄일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신규 확진자가 늘면 사망자와 위중증환자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10일 위중증 환자는 1천113명이며 하루 사망자도 206명을 기록했다. 누적 사망자가 1만명에 육박한다. 위중증 환자 증가에 대비한 의료체제 정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대구와 경북도 마찬가지다. 대구에서 1만1천601명, 경북에서 1만1천960명 등 하루 확진자 수가 나날이 증가세다. 걱정이 아닐 수 없다. 학교에서는 확진자 발생으로 등교를 하지 않은 학생이 수천명에 이르고 학교수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확진자와 비확진자의 동선이 겹치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선거후 닥칠 후폭풍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당국은 선거 후 지금보다 방역조치를 더 완화하겠다고 이미 밝힌바 있다. 좀 더 신중하고 준비된 방역체계 구축이 먼저 있어야 한다.오미크론 정점 이후 방역을 완화한 외국의 사례를 잘 살펴 방역시스템의 보완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확진자가 각자도생토록 놔두는 것은 정부의 무책임이다. 선거가 끝났으니 느슨해진 방역 경각심을 다시 일깨우고 새로운 각오로 방역시스템도 다잡아 가야할 것이다.

2022-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