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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망월지 두꺼비

우정구 논설위원 두꺼비는 개구리와 비슷하게 생긴 양서류다. 몸길이는 10∼12㎝ 정도 된다. 피부는 두껍고 등에는 불규칙한 돌기가 많이 나 있다. 앞다리는 짧고 뒷다리는 긴 등 생긴 모습이 얄궂다.낮에는 돌이나 풀 밑에 숨어있다가 저녁이 되면 지렁이와 파리, 모기 따위의 작은 곤충을 잡아먹는다. 적을 만나면 몸을 부풀려 등위에 돋아 있는 독샘에서 하얀 독액을 내보낸다. 아시아와 유렵 등지에 많이 서식한다.우리나라는 두꺼비를 주인공으로 만든 우화나 민담, 민요 등이 오래전부터 전해져 온다. 삼국사기 신라본에는 애장왕 10년 6월에 개구리와 두꺼비가 뱀을 잡아먹는 사건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민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두꺼비는 대체로 슬기롭고 의리있는 동물로 형상화된다. 은혜를 갚을 줄 아는 동물이며 신비한 능력의 동물로 묘사된다.대구시 수성구 욱수동 망월지는 1920년 자연적으로 조성된 전국 최대 두꺼비 산란지로 유명하다. 2007년 수십마리 두꺼비가 이곳에서 로드킬 당하면서 산란지로 알려졌고, 2010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꼭 지켜야 할 자연유산으로 선정하면서 전국적 관심을 모았다.이곳에는 매년 2월부터 3월 사이 두꺼비가 산란을 위한 이동을 시작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망월지를 향해 이동하는 두꺼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동한 두꺼비는 망월지에서 마리당 1만개의 알을 낳은 뒤 산으로 되돌아 간다.2∼3개월 뒤 망월지에서 부화된 두꺼비 새끼들은 서식지인 산으로 이동을 시작하는 데 그 수가 수백만마리에 이른다. 자연상태 그대로 노출된 그들의 이동 모습은 그야말로 자연이 준 장관이다. 올해도 봄 소식과 함께 찾아온 망월동 두꺼비 대이동 소식에 귀가 번쩍 뜨인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3-09

홍준표의 SNS정치

홍석봉 대구지사장 얼마 전 이문열 작가의 소설‘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주인공‘엄석대’가 정치판에서 화제가 됐다.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의 기자회견이 발단이다. 이 전 대표가 국민의힘 당권 경쟁 상황을 두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빗대 비판했다. 곧바로 홍준표 대구시장이 치받으면서 이준석 전 대표와 SNS 공방이 이어졌다. 뜨거운 논쟁이 오갔다.홍 시장은 천하람 후보와도 날선 공방을 벌였다. 홍 시장의 “무명의 정치인이 망언들을 쏟아내고 있다”는 비판에, 천 후보는 “대구 온돌방에 앉아 계시니 따뜻하시냐”며 되받아쳤다.전당대회 전날엔 안철수·황교안 후보와 이준석 전 대표가 타깃이 됐다. 홍 시장은 전당대회에서 분탕질을 친 정치인은 앞날이 없을 것이라고 힐난했다.정치권에선 위기에 빠져 허우적대는 여당 상황을 꾸짖는 홍 시장 특유의 사이다 화법에 시원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식’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 방안 옹호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미·일 동맹을 위한 고육지계라고 정부에 힘을 실어줬다.홍 시장은 아니라고 판단하면 상대를 혹독하게 몰아붙인다. 사정없이 깎아내리고 면박 준다. 국민의힘 당권 주자들이 수 차례 당했다. 준엄하게 꾸짖었다. 선배로서 적절한 훈계라는 평가와 ‘꼰대’의 헛소리쯤으로 치부하는 시각이 공존한다.홍 시장의 SNS 행보는 차기 대권을 꿈꾸는 그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방편이란 분석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찰떡 궁합을 과시하며 현 정부를 지원사격하고 있다. 차기 대권 주자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 있다.홍준표 시장의 SNS정치가 불을 뿜고 있다. 경지에 오른 느낌이다. 대구시장이 된 후 간헐적으로 올리던 SNS글이 최근엔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온다. SNS를 통해 시국과 대구시정에 관한 견해를 밝힌다. 시의적절한 평을 쏟아낸다. 짧은 코멘트는 촌철살인의 글로 상대방을 저격한다. 성역도 없다. SNS정치는 그의 전매특허가 됐다. 어느 정치인도 범접키 어려울 정도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홍 시장의 SNS정치는 정치 9단의 훈수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적절한 타이밍에 노련하고 거침없는 촌평을 한다. 숱한 정치평론가들의 평론을 압도한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국민들의 관심사를 캐치해 내놓는 촌평에 젊은층은 열광한다. 짧은 글과 촌철살인의 평은 젊은층의 취향에 딱 맞다. 반면 너무 잦은 글 게재에 식상해 하는 이들도 없잖다. 당 원로로서 기강을 잡고, 인생 선배로서 사랑의 매질도 필요하다. 하지만 자칫 개인의 정치 성향 및 신념을 바꾸라는 꼰대질이 되어선 곤란하다.대구시정은 신경쓰지 않고 중앙정치만 바라본다는 비판도 많다. 중앙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당 상임고문을 맡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관여 시간도 적고 그외 시간은 대구 시정에만 전념한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지역의 시각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본업에 충실하고 중앙정치에는 훈수 정도에 그치라고 한다. 대구시정을 등한시할 경우 시민들이 한순간에 등 돌릴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과유불급이다.

2023-03-09

철새는 떠나고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고니와 청둥오리들이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날이 풀리자 겨우살이를 끝내고 귀로에 오른 모양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경남 창원 주남저수지에서 겨울을 보내는 큰고니(천연기념물 제201-2호)의 경우 약 석 달에 걸쳐 북한과 중국 단동, 내몽골을 거쳐 러시아의 번식지로 이동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국내에서 개발된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위치추적기를 부착한 큰고니는 평균시속 51㎞ 정도로 약 923km를 비행하여 출발한 다음날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하천에 도착했다. 거기서 14일간 머물다가 다시 365km를 날아서 중국 내몽골자치구 퉁랴오 인근 습지에서 도착, 16일간 지낸 다음 다시 이동해서 내몽골자치구 후룬베이얼 습지와 러시아 부랴티야 지역의 호수 등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 예벤키스키군 습지에 도착했다.9월 29일까지 예벤키스키군 습지에 머물던 큰고니는 다시 긴 여정을 시작해서 러시아 부랴티야 지역의 바이칼호 인근 습지와 내몽골자치구 퉁랴오에서 머물다 11월10일 주남저수지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지난해 월동하던 곳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큰고니의 이동경로를 거리로 측정해보니 갈 때는 4천36㎞, 돌아올 때는 4천229㎞, 합해서 8천265㎞를 왕복한 것이었다.고니의 평균 수명이 30년쯤 된다고 하니, 20년 이상 이 들판을 찾아온 녀석들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니 아직도 회색빛이 남아 있는 어린 고니들 말고는 대부분 먼발치로 지나다니는 나를 알아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인간과 야생의 거리가 좁혀지는 건 아니다. 사계절을 함께 사는 참새나 까치 같은 텃새들도 사람을 경계하는데 하물며 철새들이겠는가. 나는 반려동물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야생동물들과의 그런 긴장관계를 좁혀보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다. 하지만 겨울마다 찾아와 주는 그들이 반가운 마음은 누구 못지않을 것이다.매년 찾아오는 겨울 손님인 고니들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를 알게 된 것이 여간 기쁘지 않다. 그들에 대한 이만한 정보라도 알아야 지나가는 객이 아니라 손님이 되는 게 아닌가. 여름에만 습지가 되는 시베리아 툰드라 지역에서 번식을 하지만 거기서 보내는 기간도 서너 달에 불과하다니 여기서 겨울을 나는 기간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 사이를 오가는 동안 몇 군데 머무는 기간이 한 해의 절반가량이어서 그야말로 노마드의 생태를 가진 철새들이다. 텃새인 참새나 까치처럼 토박이인 나에게 시베리아 툰드라의 한 자락을 끌고 오는 그들의 등장은 삭막한 겨울을 한결 풍성하고 웅장하게 한다고 할까.나는 평생 이 고장의 붙박이로 살아왔지만, 고니와 청둥오리를 이웃으로 두어서 저 광활한 내몽골 초원과 시베리아 툰드라까지 마음의 영역이 넓어진 것 같다. 올 때는 시베리아의 겨울을 끌고 왔지만 갈 때는 한반도 동남쪽의 바다와 들녘의 봄기운을 끌고 가는 셈이다. 그 들녘을 날마다 지나가던 촌부에 대한 기억도 지금쯤은 중국 단둥의 어느 벌판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2023-03-09

한민족 디아스포라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지난 3일 KBS가 공영방송 50주년 기념방송을 하며 되돌아본 많은 프로그램 중에서 유난히 나의 기억에 남아있던 것이 ‘남북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었다. 1983년 6·25 특집으로 시작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6월30일부터 시작하여 138일간이나 계속되어 1만189건의 상봉을 이루게 하여 서로 얼싸안고 통곡을 하는 눈물겨운 장면들이 아직도 가슴에 멍하다.‘이산가족’이란 ‘헤어져 만나지 못하고 있는 가족’이란 뜻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남북분단으로 흩어져 만날 수 없거나 소식을 모르는 북쪽 가족이란 의미가 깊다. ‘이산(離散)’이라는 말을 들으니 디아스포라(diaspora)가 언뜻 생각난다. ‘~너머(dia)’와 ‘씨를 흩뿌리다(spero)’라는 고대 그리스어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멀리 흩어지다’를 뜻한다. 원래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면서 그들만의 규범과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지칭하지만, 후에 그 의미가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또는 거주지’를 말한다. 그 원인으로 정치적 탄압에 의한 난민, 무역이나 노동 등에 의한 이민 등이 있으며 옛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으로 이집트 등으로 이주한 유대인이 원류이다.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생각해 본다. 현재 우리 재외동포는 약 750만 명이며, 1902년 12월 102명이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건너간 것이 한국이민사의 시작이고, 일제 강점기 식민지를 떠난 재일 조선인,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 등이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 역사이다. 1963년부터 15년간 독일로 간 약 8천 명의 광부와 1만여 명의 간호사가 정착하며 나라를 알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재외한인들은 정착지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일이 많이 발생하였고 폭력에 노출되었으며 1992년 LA폭동이 일어났을 때 경찰이 한인 거주지역 보호를 외면했던 일이 대표적 예이다.그러나 이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며 우리의 풍습과 언어를 전파하고 거주국 내의 권익 신장과 역량을 강화하는 등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높이고 있다.이산가족 찾기운동을 벌였던 40여 년 전, 한밤중까지 TV중계를 보면서 수많은 아픈 사연을 듣기도 했었다.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도 있었고 공연을 통해 교류하기도 했다. 5월에는 인천에서 제11회 디아스포라 영화제도 열린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난민, 이민, 실향, 추방 등 수많은 이주민의 희로애락을 다룬 영화들이다.우리에게는 특별한 디아스포라가 있다. 38선의 분단과 6·25전쟁으로 인해 헤어져야 했던 가족과 친척들이 한반도 내에서 철조망 하나로 인해 왕래하지 못하고 먼 해외보다 더 가기 어려운 현실에 민족적 비극을 안고 사는 것이다. 형제들을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하는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국가와 국민 모두 마음을 모아야 한다.이제부터 우리는 진정한 남북대화를 통하여 가깝고도 먼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서로 만나 껴안고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날들을 만들어 가야 한다.

2023-03-09

‘대화형 챗봇’ 열풍

홍석봉 대구지사장 챗GPT 열풍이 거세다. 대구·경북 지자체들이 앞다퉈 행정업무에 활용 방안을 찾고 있다.챗GPT는 출시 2개월 만에 이용자 1억 명을 돌파했다. 이 정도 사용자를 확보하는 데 인스타그램은 2년 반, 틱톡은 9개월이나 걸렸다. 이 대화형 인공지능의 성장 속도가 엄청나다. 챗GPT가 가져올 변화와 충격은 발전 속도만큼이나 상상을 불허한다.챗GPT는 미국의 오픈AI사가 개발한 대화형 챗봇 인공지능(AI)이다. 사용자가 채팅창에 질문이나 요구사항을 적으면 AI가 답변하는 방식이다. 각종 문서 작성과 번역, 코딩 작업 등 광범위한 분야의 업무 수행이 가능하다. 컴퓨터나 인터넷 못지않다.경북도는 발 빠른 대응에 나섰다. 챗GPT 행정 활용 전담부서를 구성했다. AI 전문가를 초청, 강의도 들었다. 경북도는 정책 연구 용역 및 업무 계획, 통계 자료 등 활용방안을 찾고 있다. 정보통신 기업, 대학 등과 협력해 AI 기술을 행정에 접목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한다.기초지자체도 챗GPT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대구 수성구와 남구는 최근 챗GPT 행정 활용을 위한 직원 교육에 나섰다. 달서구는 챗 GPT 관련 정보 공유와 활용 사례 등을 발굴하고 있다. 경북 영천시는 챗GPT를 행정업무 기초자료와 시정 홍보자료 등 생성에 활용키로 했다. 관련 교육도 강화한다.챗GPT를 업무에 활용하면 공무원은 창의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등 활용 영역이 무궁무진하다.하지만 챗GPT가 만능 도우미가 될 수는 없다. 전문가들은 실시간 학습 불가, 논리력 부족, 기억력 한계, 저작권 침해 위험 등 한계를 지적한다.챗GPT를 과신하다가는 탈이 날 수 있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3-08

그걸 못하면 모두 죽는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벗꽃피는 순서로 죽는다’고 야단이다. 대학들, 특히 지방대학들이 남쪽으로부터 죽어나갈 판이라고 아우성이다. 인구감소로 학령인구가 줄어간단다. 그건 벌써 오래전부터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대학은 게을렀을 뿐이다. 스스로 일어설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정부의 재정지원에만 기대며 살아온 게 수십 년이 아닌가. 대학을 잘못 운영하면 재정지원을 중단하는 게 나라의 규정이었으니, 사고만 치지 않으면 학교는 그럭저럭 굴러갈 판이었다. 온 나라가 혁신과 개혁을 외쳐도 대학은 그냥 그렇게 서 있기만 했다. 그런데 이젠 힘들다는 거다. 학생숫자가 눈에 보이게 쪼그라들 판이니 나라가 도와주는 걸로만 버티기에 힘들어졌다는 게 아닌가. 아직도 홀로 일어나 보겠다는 대학은 보이지 않는다.대학은 그전에도 망해 있었다. 거의 모든 대학에 거의 모든 학과가 있다. 같은 종류의 청년들을 모든 대학이 만드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 달라도 달라야 하는 게 아닌가. 대학마다 바라보는 바가 다른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같은 무늬로만 존재하는 대학들은 이미 천천히 무너지고 있지 않았을까. 같은 전공은 같은 내용을 담는다. 교수가 다르고 깊이가 다르다는 건 핑계일뿐, 같은 껍데기가 같은 영역을 다루지 않겠는가. 모든 대학이 같은 전공학과들을 모두 가진다는 건, 대학마다 특성이 없다는 걸 증명할 뿐이다. 우리 대학은 그래서 이미 죽어있었다. 모두 같은 일을 하면서 오래도 버틴 셈이다. 이제는 대학이 달라져야 한다. 바뀌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순서대로랄 것도 없이 모두 사라지게 되어있다.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그간 모방하고 추격하며 달려왔다면 이제는 혁신하고 창조하며 달려야 한다. 대학은 더이상 무엇인가 많이 아는 사람을 기르는 게 아니라 작은 무엇이라도 새것을 만드는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 암기반복형 인재가 아니라 문제해결형 인성을 길러야 한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과목들도 강의 중심이 아니라 프로젝트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회의 거친 물결을 만나기 전에 학생들이 실전과 검증을 경험해야 한다. 성공의 짜릿함도 느껴봐야 하고 실패의 쓰라림도 일깨워야 한다.지방대학은 지역과 함께 살아내야 한다. 대학은 지역에서 문제를 탐색하고 지역담론에 참여하여 지역과 더불어 호흡해야 한다. 교수들이 지역에서 연구프로젝트를 발견하고 학생들이 지역에서 배운 것을 나누어야 한다. 몇 년을 보내며 가르치고 배운다면서 지역과 담을 쌓은 모습은 스스로 존재이유를 망각한 처사가 아닌가. 대학이 지역사회와 문화에 흠뻑 젖어야 하고 지역은 대학으로부터 무엇이든 배워야 한다. 지역과 대학은 운명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지역소멸의 위기는 지역과 대학이 함께 풀어야 한다. 대학이 있으면서도 지역의 역동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대학과 지역은 함께 부끄러워야 한다. 젊은이들로 넘치면서 젊은이가 없다는 불평이 말이 되는가. 지역이 대학을 품고 대학이 지역으로 나서는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그걸 못하면 지역도 대학과 함께 죽는다.

2023-03-08

사이에 빠진 날

양태순 수필가 신선이 쉬는 별장에 갔다. 도심을 벗어나 점점 좁아지는 도로를 지나 굽이지는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달렸다. 들길을 지나 산자락을 올라 가파르다 느낄 때쯤 이정표가 멈췄다. ‘사람과 산 사이에 선유산장’ 간판이 걸려 있다.입구가 예사롭지 않았다. 간판 아래 제주도의 정낭을 옮겨놓았다. 누구든 들어와도 좋으나 예의를 지키라는 무언의 안내처럼 보였다. 주위에는 나무를 이용한 귀여운 다람쥐인지 도깨비인지 모를 조각이 혓바닥을 살짝 내밀고 있다. 주인의 유머스런 감각이 느껴졌다. 산장은 길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어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은 건물 지붕이 산 앞에 살짝 엎드린 듯 안긴 듯 헷갈린다. 초록 지붕과 너와 지붕, 길옆에 피어 있는 청하국이 어울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호빗마을을 연상시켰다. 높이 솟은 솟대에 앉은 오리가 사람의 이야기를 하늘에 전하려는 듯 한껏 고아한 모습이다.이름만 산장이지 실상은 브런치카페에 가깝다. 차를 마시며 풍경을 음미했다. 통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피어날 것이었다. 찾아오는 이를 붙잡기 충분했다. 가을이 산을 떠나고 있는데 창밖에서 단맛을 키우는 곶감과 잎을 떨군 나무가 빚어내는 정취는 마음을 촉촉하게 했다. 멍때리기 좋은 장소였다.사람과 산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먼저 시간의 거리와 공간의 거리가 있을 듯하다. 산은 우리의 일상생활 반경에서 좀 멀리 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만나러 가야 한다. 그런 탓인지 산을 찾으려면 계획이 필요하고 준비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동행인이 있어야 안심이 되기도 한다.또 사람과 산 사이에 길이 있다. 사람이 산을 만나러 가는 일방통행이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한다. 사람이 산이 보일 때는 마음의 여유가 있거나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산을 오르며 다양한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바로 코앞에 펼쳐진 야생화나 나무 열매, 새 소리 정도다. 더듬는 발밑을 보거나 힘이 들어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다. 쉼터에 다다르거나 앞서 걸어간 이들이 와! 감탄사를 쏟을 때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핀다. 그리고 정상에 선 순간 올라오는 길의 험난했던 과정이 잊혀질 만큼 멋진 풍경을 맞이한다. 산이 우리에게 곁을 내주는 것은 정상을 보여주기 위함일까? 살면서 던지는 질문에서 답을 찾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다.마지막으로 상상의 공간이 존재한다. 너새니얼 호손의 ‘큰바위얼굴’ 같은 이야기가 있을 법하다. 산 깊은 곳에는 눈 맑은 이에게만 보이는 신성한 바위 혹은 그 산에만 있는 특별한 식물이 있을 것 같다. 눈앞에 있는 산이든 멀리 있는 산이든 가보지 않았을 때는 산길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상상한다. 봄이면 산비탈에서 화사하게 인사하는 진달래와 푸드득 날아오르는 꿩의 날갯짓 소리, 여름이면 쑥쑥 자라난 나뭇잎들의 재잘거림과 무성한 숲에 빛살을 뿌리는 태양의 넓은 씀씀이. 철마다 다른 모습을 마음에 그려 본다. 그리고 그 산을 찾아 묵힌 속을 토해내고 살아갈 이유를 찾은 이들의 이야기가 메아리로 숨어 있음직하다.선유산장의 주인은 무슨 뜻으로 이름을 붙였을까. 산장은 깊은 산에 위치한 것도 아니고 이제 본격적인 산에 오를까 신발끈을 점검하는 지점에 있다. 마당 끝에 서면 아래로 절벽이 있고 계곡이 있어 귀를 기울이면 바람을 타고 물소리가 안겨 온다. 슬그머니 시름을 내려놓으면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장소다. 통창을 통해 보이는 계절이 그리는 무늬도 한몫했지 싶다.무엇과 무엇 사이에는 서로의 삶이 얽혀 있다. 골목과 골목 사이에는 발 없는 소식에 놀이판이 더해지고, 도시와 시골 사이에는 사람이 오가고 문화가 따라오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이해와 관심과 애정을 주고받는다. 이처럼 사이와 사이를 이어주는 줄은 일방적이지 않다. 노력 정도에 따라 약해지기도 하고 튼튼해지기도 한다. 갖가지 사연과 시간이 베틀 위의 씨실 날실처럼 차곡차곡 쌓일수록 고와진다. 사이에는 보이는 것에 더해 보이지 않는 삶이 섞여 물살처럼 굽이치며 흘러간다.사이는 정서영역인 동시에 탐독영역이다.

2023-03-08

임진(壬辰)

육십갑자 중 스물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임진(壬辰)이다. 천간(天干)의 임수(壬水)는 지혜를 상징하고 총명하고 속이 깊다. 지지(地支)의 진토(辰土)은 음력 삼월이라 습기를 머금은 땅으로 초목을 잘 자라게 한다. 동물로는 변화가 다양한 흑룡이다.임진일주(壬辰日柱)는 이무기가 물을 만나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다. 늘 자신감이 넘치고, 지도자 기질이 있어 스케일도 크며, 성격에도 흔들림이 없다. 겉은 냉정해보여도 마음은 온정이 많고, 독창적 재능이 있다. 신체가 건장하며, 자유 분망하고, 언변도 좋아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할 능력이 있다.임진일주의 임수(壬水)는 깊은 강물이기에 드러내기보다는 비밀스럽게 행동하여 속을 알 수 없는 성격이다. 진토(辰土)는 물에 잠긴 땅이니, 조용하고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활동적이고 전진하는 성격이다. 진토는 권력 지향적이으로 명예를 중시하여 상, 하 관계가 분명한 조직에 잘 어울린다. 무슨 얘기를 들어도 꽁하니 감추고 있으니 뒤끝이 있다. 자기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질이 있어 손해 보거나 방해 받으면 공격적인 기질이 드러난다. 복잡한 감정의 조절이 잘 되지 않아 사고치는 경우가 생기고 다된 일을 망치기도 한다. 물 만난 용처럼 자신감이 가득하고, 자기주장을 관철시키려 한다.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흠이다.중국 공자의 6세대 자손인 공천이 지은 ‘난언’ 유복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노나라 사람 공자고가 한때 조(趙)나라에 가 있었다. 그는 조나라 임금인 평원군에 의지하여 손님으로 대접받고 있던 추문과 계절이라는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공자고가 노나라로 돌아갈 때가 되자 조나라에서 사귄 친구들이 송별을 하러 찾아왔다. 송별식을 마친 뒤에도 추문과 계절은 공자고와 사흘 동안이나 동행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은 맞잡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추문과 계절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울었다. 그러나 공자고는 단정하게 자기의 두 손을 맞잡고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헤어져서 각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자, 공자고의 제자가 “저 두 분들과 선생님은 너무나 친하셨습니다. 저분들이 깊은 정을 보이시는 것은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며, 그래서 눈물까지 흘리는군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아주 카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시고, 헤어질 때 그저 두 손을 맞잡고 흔들어 보이시고 마는군요. 혹시나 그렇게도 가깝고 서로 아끼시던 친구를 가볍게 보시는 것은 아닌지요?”공자고가 “처음에는 나도 저 두 사람이 진짜 훌륭한 사나이들인 줄로 알았으나, 지금 와서 보니 아녀자 같은 사람들이로구나. 사나이는 마땅히 뜻을 사방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지, 사슴이나 돼지들처럼 언제나 뭉쳐서 다녀야 한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제자가 또 다시 “그렇다면 저 두 분이 우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까?”라고 묻자, 공자고가 “저 두 사람은 착한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사람이 본래 타고난 성품인 인자함이 잘 남아 있다. 그러나 맺고 끊는 면에서 그들을 판단한다면 아직 좀 모자라는 구나”라고 대답하였다.사람은 서로의 공통점 때문에 친해지고, 차이점 때문에 성장한다. 타인이 베푸는 호의를 자기 잣대로 판단한다면 스스로 오류에 빠질 수가 있다.임진일주는 괴강살이 있다. 괴강(魁7F61)이란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이다. 우두머리 즉, 대장의 기질을 나타내는 말이다. 확고한 신념이 있어 타인이 사생활을 침범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한다. 자기 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다. 따라서 상대가 보기에는 보이지 않은 벽이 있을 수 있고, 약간 삐딱함까지 느낄 수 있다.과거에는 여성이 괴강살이 있으면 좋지 않게 보았다. 기본적으로 능력과 총명함을 가졌기 때문에 상대를 경시하고 스스로 자립하는 성향이 강했다. 괴강살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 있기에 무한경쟁사회에서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가 있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남녀가 많고, 여자의 경우는 미인이 많고 일처리 능력도 탁월해 현대사회에서 경쟁력 있게 활동할 여지가 많다. 결벽증이 있는 것이 흠이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12운성으로 묘(墓)에 해당된다. 묘(墓)는 생명이 다하고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는 기운이다. 감정표출이 적어 겉으로 봐선 표정을 알 수 없고 좋고 싫어하는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마음에 담아 두는 경향이 있다. 또한 괴강살이 있어 실현하기 어려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성향이 있다.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과 끈기가 있다.임진년인 1592년 4월 13일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역사다. 천민 출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주군 오다 노부다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갑작스레 죽자 정국이 혼란한 때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피비린내 나는 전국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시킨 뒤 조선과 명을 정벌한다는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후계자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두고 내분에 휩싸여 2년 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였다. 마침내 1603년에 에도막부시대가 시작되었다.명나라 황제 만력제(신종)는 조선에 원병을 보내 지원했다. 그 당시 명의 원군에 의한 조선의 피해도 심각했으나, 전쟁에 보탬이 된 것은 사실이다. 명나라 황제의 무능과 관료의 부패로 인해 결국 24년 만에 후금에 의해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졌다.조선왕조는 그대로 존속되었다. 혹자는 조선은 임진왜란 때 망했어야 할 나라라고 말한다. 역사에는 가정이 있을 수 없다.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반드시 몰락한다. 인간의 삶에는 반복이 없지만, 역사는 반복한다.

2023-03-08

모두의 집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모두의 집에 봄채비를 착실히 하고 있다. 남편은 홍매실, 청매실, 자두, 사과, 샤인머스켓, 블루베리 등의 과일나무를 잔뜩 사서 집안 곳곳에 심었다. 난 올망졸망한 다육이를 30개나 들였다. 화분에 옮겨 심었으나 밤이면 영하로 내려가는 추위를 못 이길까 염려되어 방안에 모셔두고 있다. 엔간히 따뜻해지면 댓돌 옆에 가지런히 내놓을 참이다. 마당 뜨락 한켠에 심을 꽃은 무엇으로 할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 꽃잔디, 채송화, 패랭이와 같이 땅에 납작 엎드려 피는 잘디잔 꽃이 이쁜 걸로 구상 중이다. 우물이 있는 경사진 너른 터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쉽게 심고 가꾸기 좋은 종류를 폭풍검색. 처음엔 청보리를 심으려 했다. 다 자란 후의 뒷처리가 힘들다니 패스. 유채꽃은 비교적 수월하고, 3월 초에 씨 뿌리면 5월초부터 노란 꽃을 즐길 수 있단다. 바로 꽃씨를 주문하고 심는 법을 찾아 숙지했다. 심기 1~2주 전 미리 땅을 한 번 갈아엎은 뒤 퇴비를 뿌려 주란다. 지난주 이틀을 잡초 뿌리를 뽑고, 돌을 가려내었다. 제대로 할지 걱정이지만 일단 씨는 뿌려봐야지.작년 6월, 육신사가 있는 달성 하빈의 이 집을 얻었다. 삼성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부인 박두을 여사의 생가였다. 처음 소개받았을 땐, 순천박씨 집성촌인 이곳에 타성받이로 와 사는 것에 주저했다. 높은 기와담장이 있는 주위의 다른 집과는 달리 울타리도 대문도 없는 한데집이라 다소 휑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마루에 걸터앉아 앞의 산을 바라보는 탁 트인 시야가 시원했다. 비 오는 날, 기와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 패는 마당이 예뻤다. 아파트살이가 슬슬 싫증나던 참이기도 하고, 한창 흙장난하며 놀고 싶어할 손주들을 위해서도 좋을 듯 싶었다.며칠 뒤 손자를 데리고 왔다. 무작정 들어온 집이 누구집이냐고 묻길래 네 집이라고 했다. 내 집 아닌데 하더니 그럼 ‘모두의 집’이라고 하면 어때요? 제안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나와 동생의 집. 그리하여 이 집은 ‘모두의 집’이 되었고 이름 대로 정말 우리 가족 포함한 모두의 집이 되었다. 서울의 손녀들도 하루를 묵더니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모두의 집이니 언제든 올 수 있다며 겨우 달랬다.울도 담도 대문도 없으니 지나가는 사람 누구나 들어와도 되니 모두의 집이기도 했다. 모두의 집이니 누구든지 와서 묵어도 좋다고 지인들에게 광고했다. 육신사의 내력과 동네 자랑도 했다. 내친김에 육신사와 남평문씨본리세거지, 상화기념관을 엮어 ‘대구명문가기행’이라는 프로그램도 짜서 뿌렸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며칠을 묵었다. 또 아름다운 동행이라 이름한 성인학습자동기들도 다녀가고, 기업체모임도 가졌다. 함께 여행지산책을 하는 지인들, 코로나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외가쪽 동기간 모임도 밤새워했다. 손주 친구도 초대하여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이제 모두의 집에 봄꽃이 환하게 피면 모두가 와서 즐겼으면 좋겠다. 육신사를 찾는 관광객들의 포토존이 되어도 좋겠다는 야심찬 바램으로 열심히 봄단장을 할 일이다.

2023-03-08

이 꽃은 먹을 수 있나요?

나선택 포항 행복한의원장 ‘이 꽃은 뭐예요? 이건 먹을 수 있어요? 이건 어디에 좋아요?’산과 들에 허드러지게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다. 함께 산행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는 한의사이지 식물학자가 아닌데도 말이다. 건조되어 있는 한약재를 구분하고 각 약재의 효능은 잘 알지만, 산에 피는 작은 꽃의 이름까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봄에 피는 꽃들 중에서 누구나 이름을 아는 몇몇은 오래전부터 훌륭한 약재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안다.양지바른 곳에서 자라는 개나리는 진달래와 함께 봄을 알리는 꽃이다.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나리 꽃과 비슷하지만 나리 꽃은 ‘아니다’는 의미로 ‘개’를 붙여 개나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개나리는 암술이 긴 꽃과 짧은 꽃 두 가지가 있는데, 이 둘 사이에 수분이 이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 도시에서는 꽃이 크고 이쁜 암술이 긴 꽃만 주로 심기 때문에 개나리 열매를 잘 볼 수가 없다. 개나리 열매는 ‘연교’라고 하며, 한의학에서는 여드름을 포함한 피부 염증 치료의 핵심적인 약재로 쓰인다.매화를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매실 액기스나 매실주를 안 먹어 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매화의 열매인 매실은 한약재로는 ‘오매’라고 부르며 신맛이 아주 강하다. 중국 삼국지에서 조조가 길을 잃어 해매다가 갈증으로 탈진하는 군사들을 보고 저 산을 넘으면 매실나무가 많다고 하였다. 군사들이 그 말을 듣고 매실의 신맛을 떠올리자 입에서 침이 돌아 갈증을 이겨내고 산을 넘었다는 ‘매림지갈-매화 숲이 갈증을 멈춘다’의 고사가 있다. 실제로는 장내유산균을 안정화 시켜 설사를 멈추고 술로 인한 주독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봄이 되면 이천, 구례, 의성 일대에서는 산수유 축제가 열린다. 산수유는 우리나라 자생종 식물이라고 한다. 신라 경문왕의 귀가 당나귀 귀 같았는데, 이 비밀을 안 모자장인이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이후 바람이 불 때마다 숲에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났다. 왕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대나무를 모두 배어내고 그 자리에 산수유를 심었다고 한다. 산수유는 씨앗을 제거한 과육을 한약재로 쓴다. 산수유는 성기능 향상에 도움이 되고, 허리와 무릎을 튼튼하게 해주고, 염증은 없는데 소변을 자주 보는 증상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목련은 나무에 피는 연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목련이 활짝 피면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그러나 목련 꽃이 떨어지면 왠만한 쓰레기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지저분하다.꽃이 피기 전 꽃봉우리는 ‘신이’라는 약재로 쓰인다. 코 점막의 혈관을 수축시키고 항알러지 작용을 해서 봄철에 알레르기 비염 등으로 콧물과 재채기가 많은 증상에 아주 효과가 좋다.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꽃도 많고 약초도 많다. 다만, 병증에 맞게 적절한 양을 옳은 방법으로 먹어야 약이 된다. 모든 약은 약효와 부작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인터넷의 어설픈 상식이나 소문으로 먹다가는 건강을 망치는 일이 생기기 쉽다.

2023-03-08

우리는 왜 게임을 하는가

그런 시절이 있었다. TV 프로그램에서 프로게이머를 불러다 면박을 주는 일들. 게임 속에서 사람을 죽이면 실제로도 사람을 죽이고 싶으냐고 묻고, 게임 머니를 얼마나 가지고 있냐 묻고,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냐고 묻고. 물론 그때엔 사회 전반적으로 게임에 대한 이해도 없었고,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생소했던 시기였긴 하다. 하지만 무례한 질문들을 던져댄 패널들의 모습이란, 무지가 얼마나 사람을 무례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그런 질문들은 흡사 도박 중독자에게 묻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지금은 사람들의 게임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긴 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나 배틀 그라운드 같은 게임의 흥행과 맞물려 한국 게이머들이 세계무대에서 선전하면서, 그들의 문화적 가치에 대해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 이제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싶냐는 등의 무례한 질문에 시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의 문화를 대변하는 사람들이면서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 잡게 됐다. 많은 것이 변한 것이다.하지만 정말 그럴까? 게임 시장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종종 복잡한 심경에 휩싸인다. 얼마 전 문제가 됐었던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 조작 문제나, 과도한 과금 유도, 사행성 논란뿐만 아니라, 블록체인이나 NFT를 융합하여 게임을 통한 수익 모델을 홍보하는 경우들을 보라. 이런 게임 시장의 세부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들이 게임을 통해 원하는 것은 문화의 융성이나 즐거움의 추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일부 게임이라 하기엔 대다수의 한국 개발 게임들이 비슷한 루트를 걷고 있기에 우리가 게임을 바라보는 인식은 어딘가 잘못됐다는 느낌이다.게임은 문화인 동시에 산업이다. 더불어 하나의 게임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영화 한 편을 제작하는 것 이상의 비용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수익 모델을 구성하고 이를 중요시하는 것이 마냥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돈이 벌려야 다음 게임도 만들고 할 테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것이다. 왜 게임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하는가. 게임으로 돈을 벌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흔히 캐시 카우로 불리는 일부 게임을 통해 게임사는 과연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물론 모든 게임사가 그렇다는 건 일반화의 오류다. 분명 적지 않은 회사들이 더 나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회사들은 게임을 단지 돈으로 밖에 바라보지 않는다. 익명 게시판에 달린 수많은 게임회사 직원들이 게임 소비자를 바라보는 관점을 보라. 그들은 게이머들을 단지 호구로만 바라볼 뿐, 자신들이 이끌어가는 문화의 향유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대개의 게임 회사들이 이런 관점으로 유저들을 바라본다면, 그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10년대만 해도 동아시아 게임 산업을 이끌어간다고 평가받던 한국 게임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가. 이제 한국 게임은 더 이상 동아시아 게임 업계의 강자가 아니며, 단지 뽑기를 비롯한 사행성 게임과 과도한 과금 유도에 주력할 뿐인 도박성 게임만이 판치는 국가란 인상이 강하다. 그 10년 사이, 중국과 일본이 자신들만의 문화를 가꾸고 스타일을 만들어갔던 것과 대조된다.그와 같은 국가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게임 회사가 유저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한국 게임 회사는 좀처럼 유저들이 왜 게임을 하는가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단지 유저들이 비교 우위를 통한 우월감을 원해 게임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근 10년 사이에 변화한 탓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단지 그것만이라기 보단, 게임 회사가 자신들의 상품의 목적과 판매 방식에 대한 고려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유저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밌으니까. 그건 단지 비교 우위에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사적, 시각적, 청각적 재미나 손맛이라 불리는 컨트롤의 재미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게임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 유저들이 원하는 건 그처럼 다양한 재미지, 단순히 내가 남들보다 강하다는 느낌이 아니다.그래서 한국 게이머들은 점점 한국 게임을 떠난다. 재미의 요소는 보강하지 않으면서 돈을 투자하라고 요구하는 한국 게임 회사들에 지쳐서. 유저를 단지 돈주머니로 바라보는 게임회사들에 정이 떨어져서. 이게 단순히 게임의 문제뿐인 것은 아니다. 문화를 하나의 시장으로 바라볼 때는 문화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한국 게임 업계의 몰락은 이런 태도의 부재가 어떻게 시장을 망가뜨리는가에 대한 선례가 될 것이다.

2023-03-07

우연과 필연 사이

필립 로스의 소설 ‘울분’. 책장을 덮은 후에도 꼼짝할 수 없는 작품이 있다. 그 순간만큼은 뭔가를 손에 쥐었다는 감각인데 그건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실이라고 해야 할까. 본질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에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어쩌면 그런 것들이 나를 읽고 쓰는 길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필립 로스의 소설을 처음 읽던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대던 스무 살이었고 도서관의 책장을 뒤적거리면서 시간을 죽이는 중이었다. 나는 젊은 날을 휘발시키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어떤 우울, 무기력,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에 발붙이고 서 있다는 죄책감과 세상을 향한 묘한 분노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그날 책장에서 꺼내든 책이 필립 로스의 ‘울분’이었던 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울분’의 주인공인 마커스는 신중하고 책임감 있으며 부지런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마커스에게 말한다. “너는 창창한 미래를 앞에 둔 청년이야. 네가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곳에 가지 않는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그것은 어쩌면 자식을 둔 흔한 부모의 염려일지도 모르고 시대적인 필연성이었는지도 모른다.아버지는 마커스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집착을 멈추지 않았다. 마커스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기 위해선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는 일밖에 없다고 여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버지?” 마커스의 발악에 아버지는 대답한다. “인생이 그래서 그래.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으니까.”마커스는 집을 떠나 대학에 입학한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고자 하고 어떤 규정도 위반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그의 목표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전쟁에 끌려가지 않고 법대에 진학해 법률가가 되는 것이다. 그는 신중했고 조심했다. 어떤 부분은 미성숙하기도 했고 또 어느 부분은 놀라우리만치 자기중심적이기도 했다.그런 마커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단 하나의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채플 수업에서의 대리 출석이 발각되었을 때, 반성문과 매주 수업을 듣는 것으로 대신하자는 학생과장의 말을 수용할 수 없던 것 역시 일순간의 치기가 아니다. 삶의 이면에 고요히 잠복하던 어떤 울분이 그의 마지막 선택을 추동하게끔 했던 것이다. 마커스는 퇴학당하고 징병되어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그 결과 마커스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작가는 말한다. ‘이러기만 했다면 또 저러기만 했다면, 모두 함께 모여 오랫동안 살고, 모든 일이 잘 풀렸을 텐데.’그렇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의 룸메이트나 애인이 아니었다면, 채플 수업이 아니었다면, 마커스는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과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비극으로 향하지 않는 길은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는 것, 감정을 억누른 채 어떤 것도 분출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커스는 주먹으로 학생과장의 책상을 내리치면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좆까, 씨발.”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만약 마커스가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아버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지도 모른다. 학생과장의 뜻대로 하여 무탈하게 대학을 졸업했다면 그는 윤택한 삶의 법률가가 되었을 수 있다. 여러 선택의 끝에는 무수한 마커스의 미래가 있고 그것이 희극이 될지 비극이 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어떤 삶을 살든 그의 끝은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을 마주한 아버지가 외쳤듯이. “내가 옳았잖냐, 마커스. 내 눈에는 그게 오는 게 보였단 말이다.”위대한 작품 속의 등장인물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전혀 다른 결과로 가고자 한다. 그러나 아주 사소하게 벌어지는 우연적 사건으로 인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운명으로 향하게 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가 그러했듯이.미국의 작가가 써 내려간 이야기는 도서관을 두리번거리던 스무 살의 청년에게 닿게 된다. 청년은 작품을 읽으며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매우 평범한 어느 날의 사건이 삶의 어느 곳에 잠복해 있다가 어떠한 결과를 이끌게 될지는 끝내 두고 볼 일이다.

2023-03-07

‘퇴근후 카톡금지법’

우정구 논설위원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연결차단권’은 2016년 6월 ‘퇴근후 카톡금지법’이란 이름으로 국회에서 발의된 적이 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신경민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이 법은 노동자의 사생활 보장을 위해 노동시간 이외 시간에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전화, 문자메시지, SNS 등 각종 통신수단을 이용해 업무지시를 내리는 행위를 규제하는 법안이다.실제로 법제화까지는 가지 않았으나 이후 대기업 등을 중심으로 퇴근 후나 주말, 심야에 디지털기기를 통한 업무지시를 금지토록 하는 조치나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했다.최근 정부가 근로자에게 근무시간 외 시간에 회사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지 않을 권리인 이른바 연결차단권 보장을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한다는 소식이다. 유럽 등에서 시작한 이 법이 드디어 국내에도 상륙할 것 같다는 이야기다.프랑스는 연결차단권에 관한 법률을 최초로 입법해 2017년부터 시행해왔다. 노동자의 휴식 보장과 사생활 보호가 목적이다. 디지털시대라는 시대적 환경에 맞춘 입법이라는 점에서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시대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국내에서 이 법이 처음 논의될 무렵,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직장인 10명 중 9명이 이 법안에 찬성했다. 그러나 제도의 정착에 대해선 6명이 부정적 의견을 표시했다. 이유는 카톡상 직장과 가정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을 들었다.정부가 관련 법안을 준비하자 벌금까지 부과하면서 이를 규제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회사 일이 바쁘면 주말이라도 연락을 해야 하는데 이를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여론이다. 법이 능사일까 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 사회가 너무 각박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03-07

‘이데올로기전의 도구’가 된 도심거리

심충택 논설위원 정치권의 진지전(陣地戰)이 갈수록 가관이다. 국회와 언론을 넘어 이제는 도심거리도 이데올로기전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최근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도심 주요교차로와 가로수, 전봇대를 가리지 않고 걸려있는 정치현수막 때문에 출퇴근길 스트레스가 대단하다.경쟁하듯 자극적인 문구를 동원해 상대편을 비방하는 내용이 주류여서, 원치 않아도 봐야하는 시민들로선 피로감이 쌓일 수밖에 없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과 검사들을 향해 “깡패”라고 한 말들도 길거리 현수막에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초등학교 근처 현수막에 적힌 적대감이 가득한 문구 때문에 학부모들의 민원도 쇄도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정당이나 정치인이 외연을 확장하고 표를 얻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마치 선거철처럼, 현수막이 도심을 뒤덮은 것은 작년 연말, 정당이나 정치인의 현수막은 별도의 신고·허가 없이 최장 보름 동안 아무 데나 설치할 수 있도록 ‘옥외광고물법’이 슬쩍 개정됐기 때문이다. 정당현수막은 15일이라는 기간만 지키면 신고 의무, 위치나 내용에 대한 제한이 없다. 국회가 도심 길거리를 무법천지로 만든 것이다. 일반 시민의 경우 합법적으로 현수막을 걸려면 자치구 지침에 따라 약 한달 전에 접수하고, 당첨이 되면 일정 금액을 지불한 후 ‘지정게시대’에 약 10일정도 설치할 수 있다. 국회의원들이 총선을 의식해 또 다른 ‘자기특혜’를 만든 것이다.현수막 공해를 차단하기 위해 인천시는 정당 현수막과의 전쟁을 선포했다.조례 개정을 통해 현수막 게재 기간과 전화번호를 크게 명시하도록 하고, 자치구의 현수막 게시시설도 대폭 늘리기로 했다.서울시와 창원시는 정부에 시행령 개정을 정식 건의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지난 1월 설 명절을 앞두고 “과시성 현수막은 도시 미관만 해칠 뿐이니 바로 철거하겠다”고 말했다가, 민주당 대구시당으로부터 “대구시가 홍준표 시장의 것이냐”는 비판을 받았다.장소 제한 없이 난립하는 현수막은 안전사고 발생요인이 되기도 한다. 지난달 대구 달서구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한 시민이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정당 현수막 끈에 목이 걸려 상처를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달 인천 송도에서도 전동킥보드를 타던 20대 여성이 현수막 끈에 목이 걸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현수막 줄은 어두운 밤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현수막을 이용한 이데올로기전은 총선이 다가올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지금까지는 공직선거법이 선거일 6개월(180일) 전부터 현수막이나 인쇄물을 통한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도록 규정했지만,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7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리면서 오는 7월 31일까지 법 개정을 요구했기 때문이다.8월부터는 해당 법 조항은 효력을 잃으며, 누구나 자유롭게 ‘선거 현수막’을 내걸 수 있다. 예비후보가 범람하는 총선일이 다가오면 아마 전국이 현수막으로 도배될 것이고, 시민들은 이에 비례해 정치환멸을 느낄 것이다.

2023-03-07

봄 마중 춤사위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봄날의 서막이 펼쳐지고 있다. 황량하던 무채색의 대지엔 매화와 산수유 꽃망울이 봄의 길목을 단장하고, 양지 바른 둔덕엔 가녀린 새싹들이 음표마냥 돋아나며 때 이른봄을 알리고 있다. 슬그머니 꼬리 감추며 멀어져가는 겨울의 뒷자락으로 피어나는 아지랑이의 아른거림 속에 인동(忍冬)의 시간을 숨죽이며 지내온 만물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며 생동의 봄 채비를 하는 듯하다.약동하는 봄날은 색깔과 움직임으로부터 온다. 봄의 초입에 피어나는 복수초나 산수유는 노란 몸짓을 일찌감치 내세우는가 하면, 앙상하던 가지에 희거나 붉은 매화꽃이 등(燈)처럼 달리기도 한다. 또한 가볍게 불어오는 남풍 결에 겨울잠을 자던 벌레가 꿈틀거리고,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듯 개구리가 깨어나 땅 위로 나온다는 경칩을 즈음해 온갖 생물들은 스프링(Spring)같이 조금씩 톡톡 튀는 생장의 기운을 받기도 한다.‘줄기차게/뿜어대는 해의 입김/굿거리장단에//파아란 춤사위판/땅김의 너름새로//수액을/두레박질하는/간지러운 마파람’ -拙시조 ‘춘신(春信)’ 중(1995)자연만이 봄을 맞는 움직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생동과 리듬에 맞추기라도 하듯이 지난 2일 포항시청 대잠홀에서는 봄 마중 같이 설레고 활달한 춤자리가 의미있게 열렸다. 경북도 지정 전문예술단체 전통연희컴퍼니 예심과 포항향토무형유산원이 전통춤의 명인 스승과 제자, 문하생이 3대를 잇는 춤사위로 활기찬 봄을 알리는 ‘2023 춤, 세대를 잇다’의 정기 발표회가 신명나고 멋스럽게 펼쳐진 것이다. 수준 높은 전통춤으로 지역 간의 문화교류와 전통문화의 계승을 알리고, 당대 최고의 세 명무가 직접 무대에서 ‘태평무’ ‘손소고춤’ ‘버꾸춤’ 등의 춤판을 벌이는, 그야말로 시대를 넘나들며 세대를 아우르는 장단과 추임으로 깊은 울림과 몸짓의 숨결을 고스란히 전하는 귀하고 보기 드문 공연이 아닐 수 없었다.가녀린 듯 거침없이 가락을 타는 나비의 분방한 나풀거림 같고, 뻗었다가 휘감듯 접으며 휘영청 두드림 결에 유유히 날갯짓하는 학의 비상 같은 춤사위는, 과연 율려(律呂)의 응축과 침잠, 분출과 절제의 미학 같은 그윽하고 유장한 몸짓 언어로 다가왔다. 어쩌면 격정의 소용돌이 같고 바람 속의 회오리 같이 날렵하고 교태있는 몸동작 하나하나에 몰입하고 경탄하는 내내 심금이 울려지고 액운은 얼씬조차 못했으리라.생명의 춤판이 벌어지는 봄날은 모두 부지런한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된다. 기운과 움직임이 있어야 새싹이 돋고 물이 오르듯이, 아름다운 움직임은 춤의 본질이자 궁극적인 예술이다. 가무(歌舞)의 민족은 흥이 일게 되면 저절로 어깨가 들썩이고 덩실덩실 팔 다리가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른봄 마중하듯이 신바람 나게 펼쳐진 전통춤의 무대는, 변화무쌍한 율동성이 생명인 ‘춤’이 역동성을 강조해서 쓴 붓글씨 서체의 생동감과 어우러져 한결 묘미를 더했다. 대지 위에서 솟구치는 생명의 잔치를 추임새 삼아 저마다의 삶을 춤추듯이 살아보면 어떨까?

2023-03-07

챗GPT, 어디까지 할 수 있니?

이상산 한동대 교수·AI융합교육원장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챗GPT 이야기 말이다. 작년 11월 말에 오픈AI라는 회사에서 공개한 인공지능 채팅 프로그램이다. 어지간한 보고서쯤은 뚝딱 써낸다. 이런 질문을 챗GPT에 던져보았다. 한국의 한반도 통일전략을 단계적으로 제시하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600자 정도로 단계에 대한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1. 상호 연락과 문화 교류 강화, 2. 경제적 통합, 3. 제도 및 법률 통합, 4. 정치 및 안보 통합, 5. 문화, 사회, 교육 통합. 고등학교 학생의 과제 보고서로는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이뿐 아니다. 챗GPT에게 코딩을 시키기도 한다. 나아가 코딩의 오류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교육 기관들이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보편적인 지식이나 규정화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주 내용인 교육과정은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특정 주에서는 챗GPT 사용을 전면금지하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챗GPT를 활용한 과제에 0점을 부여한 학교도 나왔다. 전자계산기가 나왔다고 해서 수학교육이 없어지지 않았고, 컴퓨터가 나왔다고 단순업무가 현장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검색 포털이 나왔다고 컨설턴트 직업이 없어지지도 않았다.그러나 우리가 통찰하고 인정해야 할 것은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컴퓨터 없는 세상, 인터넷 없는 세상, 휴대폰 없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앞에 인공지능의 세상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단언컨대 이제 인공지능 없는 세상은 없다. 우리가 모두 컴퓨터를 만들고 프로그래머가 되지 않아도, 각자의 수준에 맞게 인터넷을 잘 활용하고 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이런 일들을 참 잘하고 있다. 인터넷 인프라와 서비스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 수준에 있다.챗GPT, 참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많은 정보를 모으고 조합하고 정리하는 세상 친절한 개인비서다. 문제는 이 비서에게 무슨 일을 시키느냐에 따라서, 그 비서의 능력이 다르게 발현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에서 ‘반복적인 것 잘하기’는 좀 덜어내고, ‘새로운 생각 다듬어가기’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면 좋겠다. 우리의 교육은 개념 이해에 집중하고 반복되는 일은 컴퓨터와 인공지능에 맡기면 좋겠다.챗GPT, 만능처럼 보이지만 아직은 편견도 있고 오류도 있으며, 상황을 반영할 만큼 구체적이지도 못하다. 개인적으로는 영원히 인간을 다 담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우리의 길이 있다. 챗GPT는 모른다. 통일의 단계는 언급했지만, 언제 어떤 단계의 일을 어떤 수준으로 해야 할 것인지, 여러 단계의 일을 어느 정도로 동시에 추진해야 할지, 정부가 바뀔 때는 어떤 조정이 필요한지. 챗GPT는 못한다.일의 성공을 위해서는 반드시 디테일이 필요하다. 우리 각자는 개인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전문가이며, 의도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다. 챗GPT 두려워하지 말고, 재미있게 유익하게 사용해 보자. 좋은 질문을 하자, 그러면 우리도 오늘 비서로 요술램프의 지니를 가질 수 있다.

2023-03-07

수출하는 해양암반수

홍석봉 대구지사장 먹는 물의 진화가 놀랍다. 생수에서 해양심층수를 거쳐 해양암반수까지 나왔다. 해양암반수는 개발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이런 해양암반수가 해외에 수출된다.경북도는 최근 울진 환동해산업연구원에서 연구원과 아리바이오가 공동 개발한 동해안 해양암반수(염지하수)의 인도네시아 수출 선적식을 가졌다. 해양암반수는 2013년부터 동해안(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바닷가 땅속 1천50m 깊이에서 취수해 개발한 음용수다. 그동안 국내에서만 유통되다가 첫 해외수출이 이뤄졌다.이번에 초도 수출하는 물량은 500㎖ 4만 병이다. 인도네시아 현지 판매가는 병당 5천 원 내외로 전체 2억 원 정도 규모다. 1인당 GDP가 4천300달러에 불과한 나라에서 1병에 5천 원을 주고 사먹겠다고 하니 놀랍다.해양암반수는 물속에 녹아있는 칼슘, 마그네슘 등 미네랄 함량이 2천mg/ℓ 이상인 암반대수층 안의 지하수다. 제조업, 바이오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된다.염지하수는 일반 물과 달리 귀한 지하수다. 업체 측은 몇 년 동안 동해안을 샅샅이 뒤져 최적의 장소인 울진의 죽변 바닷가를 찾았다. 우리나라에 염지하수 취수 지역은 여러 곳 있지만 식수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은 제주와 울진뿐이다. 전문가들은 미네랄 함량이나 원수의 안전성 측면에서 울진의 염지하수를 더 높이 평가한다. 아토피 치료제로도 사용된다. 미네랄을 포함했지만 환경영향을 많이 받는 해양심층수와 달리 해양암반수는 암반에서 용해된 미네랄을 포함한 100% 무공해 청정수라는 차이가 있다.해양암반수는 뷰티, 식품 등 연관 산업으로 확대될 여지가 많다. 에비앙 못잖은 명품 생수의 탄생을 기대한다. /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3-06

‘에너지 그린버튼’

남광현 대구경북연구원 연구본부장 어느덧 따뜻한 봄의 시작을 알리는 3월이다. 예년에 비해 반가운 마음이 더 큰 것은 그만큼 지난 겨울이 유난히 춥고 힘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아마 급등한 난방비도 우리를 무척 힘들게 하는데 크게 한몫을 한 것 같다. 그런데 다가올 봄은 잠시이고 우리를 무더운 폭염과 열대야로 시달리게 할 긴 여름이 이내 올 것이다. 지난 겨울 난방비만큼 엄청나게 커진 냉방비로 인한 큰 고통이 또 예견된다. 앞으로 더 악화할 기후변화 문제와 이에 대응하기 위한 2050 탄소중립 체제 강화로 인해 이런 에너지발 경제적 고통은 일상화될 것이다.2011년 이후 연평균 최종 에너지 소비량은 대구광역시가 1.12% 감소하였으나, 전국은 0.79% 증가하였다. 특·광역시 중에서는 울산시가 1.62%로 가장 높고, 인천시, 광주시, 대전시 순으로 증가율이 높게 나타났다. 최근 10년 동안 1인당 최종 에너지 소비량의 연평균증가율은 대구광역시가 ·0.74%로 전국의 0.56%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타 도시에 비해 산업 분야의 에너지소비 비중이 낮은 것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결국 대구광역시는 산업을 제외한 수송과 가정·상업 분야의 에너지소비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데, 이 분야가 냉·난방비 상승의 직격탄을 받는 취약한 분야이다.2020년 기준 대구광역시 최종 에너지 원별 소비량 비중은 석유제품 36.0%, 전력 31.2%, 천연 및 도시가스 23.4%, 석탄 4.0%, 신재생에너지 3.1%, 열에너지 2.2% 순이다. 지역의 에너지 자립을 위해 필요한 신재생에너지의 소비량 비중은 너무 낮고, 대외 의존적이고 에너지 경제적으로 취약한 석유제품, 전력 그리고 천연·도시가스의 비중은 여전히 너무 높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를 순차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2011년 이후 대구광역시 최종 에너지 원별 소비량의 연평균증가율이 천연 및 도시가스는 증가하지만, 전력, 석유제품은 감소 추세인 것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지난 겨울 난방비 폭탄이라 표현되는 큰 충격은 역설적으로 매우 다양한 에너지소비 관련 정책의 도입을 촉진하게 됐다. 특히 대구광역시 최종 에너지 소비량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정·상업부문에서의 에너지수요관리 대책이 주목받고 있으며, 이는 건물의 에너지 효율화와 직결된다. 건물의 에너지 효율화는 건축물 에너지 효율인증 등급 최상위와 최하위 등급의 에너지 소비량 차이가 무려 최대 7배 이상 나는 것에서도 그 효과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건축물 주거 유형과 준공 연도별 단위면적당 난방에너지 사용량 통계에서 단독주택이고 건축물이 노후될수록 난방에너지사용량이 급격하게 증가한다는 것에서도 에너지 효율화의 필요성이 드러난다.건물에서 에너지 효율화를 위한 가장 첫 번째 단계는 소비자가 전기·가스·수도 등 자신의 에너지 사용량을 손쉽게 온라인을 통해 확인하고, 자신의 데이터를 신뢰할 수 있는 제3자와 공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에서 효과가 이미 검증된 쌍방향 정보공유 앱인 ‘에너지 그린버튼’의 도입이 시급하다.

2023-03-06

지금이 필수 의료 붕괴 막을 적기다

이시라 사회부 ‘의료’가 곧 ‘국력’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우수 의료진, 최첨단 장비, 선진화된 진료시스템까지 k-의료의 우수성은 해외에서도 인정한다. 개도국뿐만 아니라 미국 등 의료 선진국에서도 국내 의료진의 수술 기법을 배우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이제 의료는 한국의 성장을 이끌 신산업 성장동력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기 어렵다.그러나 과연 k-의료는 그 실상까지 자랑스러운 수준에 도달해 있을까. 부끄럽게도 그 대답은 ‘NO’다. 자만했던 k-의료의 민낯을 보여주는 일련의 사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지난해 국내에서 실력으로 손꼽히는 ‘빅5 병원’에서 근무 중 쓰러진 간호사가 골든타임을 놓쳐 사망한 사건은 큰 충격을 줬다. 놀라운 것은 당시 그 큰 병원에 수술을 집도할 뇌혈관 전문의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최근에는 소아과 전공의 부족 문제도 이슈다. 전국적으로 소아과 의사 수가 부족해 아침부터 ‘오픈 런’을 하는 등 소아과 대란이 심화하고 있다. 저출생 여파로 소아의료 수요가 감소하고 의사들의 소아청소년과 전공 기피와 수도권 쏠림이 심해진 게 원인이다.올해 상반기 대학병원 전공의 모집 결과 50곳 중 38곳에서 소아청소년과 지원자가 0명이었다. 수도권 일부 대학병원마저도 주말 소아청소년과의 응급 진료를 중단하는 사태도 발생하고 있다.의료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사실 한국의 필수 의료에 허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소아청소년과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외과, 산부인과 등 필수 진료과 모두가 위기다. 지방은 물론 서울의 주요 상급종합병원도 소아청소년과를 비롯한 이들 진료과의 전공의 모집에 실패하는 등 필수 의료체계 전반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정부는 이들 사건 발생 이후 지난 1월 ‘필수 의료 지원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시민단체는 “근본적인 수가 체계 개선 없이 당장 상황만 모면하려는 실효성 낮은 정책”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위기는 곧 기회다. 의료위기는 지금이 대한민국 의료 개혁의 적기임을 뜻한다. 만일 이번 기회마저 놓친다면 필수 의료 기반이 약해져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치료 적기를 놓친 환자가 다른 지역으로 진료를 받으려고 달려가다가 골든타임을 놓쳐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가 더욱 늘어날 수 있다.이제는 정부와 정치권이 문제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 사건이 터질 적마다 나오는 땜질식 처방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확실한 제도 구축과 관련법 제정이 시급하다. 정부가 이번만큼은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제대로 된 대책을 만들어서 대한민국의 필수 의료를 명성에 걸맞은 수준으로 반드시 혁신해주기를 소망한다. /sira115@kbmaeil.com

2023-03-06

1587년 어느 대구 부사의 ‘금쪽같은 내 새끼’

자식을 키운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낳으면 그냥 자랄 것 같은 아니 잘 자라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는 것이 곧 자식이다. 남보다 뛰어났으면 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크게 문제없이 자라주면 좋겠는데, 어디서 어떻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아이의 문제 행동을 맞닥뜨리게 되면 더욱 당황스럽고 속상하기만 한 게 부모의 마음이다. 몇 년 전까지 한참 유행했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이렇게 어렵기만 한 육아를 도와주고자 만들어진 육아 코치 프로그램이었다. 생각보다 도움을 원하는 부모가 많았기에 사회적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근래 인기리에 방영 중인 ‘금쪽같은 내 새끼’도 비슷한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TV프로가 인기가 높다는 것은 소중한 내 자식이 행복하게 성장하길 바라는 부모 마음이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이이기에 내가 달라져서 아이가 행복할 수 있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권문해(權文海·1534~1591)는 1587년(선조20) 8월 28일의 일기에서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당시 그는 대구부사에 재직 중이었는데, 마침 경남 안음에서 열린 감시도회(監試都會)의 시험관으로 출장 갔다가 서둘러 돌아온 길이었다. 동생이 부종(浮腫)을 앓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동생뿐만 아니라 어린 여식까지 아픈 상태였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때 대구부(大邱府)에 도착하였다. 달아(達兒)가 머리 위에 종기가 나서 약을 발랐다. 딱지가 앉은 뒤에는 종기가 아래로 내려와 목에 부기가 생겨 목과 얼굴이 분간되지 않았다. 치료가 어려운 지경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침으로 종기를 터트려 피를 낸 뒤에야 부기가 조금 가라앉았으니 다시 살길이 보이는 듯했다.”-권문해의 ‘초간일기’ 1587년(선조20, 정해년) 8월 28일 일기 중에서권문해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식이 없어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30년을 함께 살았던 첫 번째 부인 현풍곽씨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아내의 죽음에 자식 없는 서글픔까지 겹쳐 한참 동안을 슬퍼하고 또 슬퍼했다. 권문해는 이러한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 ‘죽은 아내 숙인 곽씨에 대한 만사(挽亡室淑人郭氏)’를 지었고, 1582년 10월 20일의 일기에 이 글이 온전하게 기록되어 있다. 약 2년 후 함양박씨와 혼인했는데, 권문해의 나이는 51세였다. 일기에 보이는 달아는 두 번째 부인 함양박씨와 혼인한 직후 얻은 딸로 추측되며, 이 당시 겨우 2~3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딸아이였다. 작은 머리에 난 종기가 목으로 내려와 목과 얼굴이 분간되지 않은 모습을 지켜보던 권문해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치료가 어려운 게 눈에도 확연히 보이지만, 종기를 터뜨려 부기가 다소 가라앉는 모습을 보고 혹시나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 부모의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온다.이날부터 달아의 병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권문해는 아이의 종기가 가라앉아 살 수 있다 생각하고 안심했던 것 같다. 일기에서 달아가 다시 등장한 것은 10월 7일로 20일쯤 지났을 때였다. 저녁부터 기운이 고르지 않더니 밤에는 통증이 그치지 않는다고 적었다. 짧고 간략한 기록이지만, 그 속에 울며 보채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이 묻어나오는 느낌이다. 다음 날의 일기에서는 공무로 바깥에 나온 일과 함께 달아의 증세를 중간중간 섞어 적었다. 감기 정도의 가볍고 우연한 병증이라 생각했는데, 이날 저녁까지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들었다고 했다. 다음 날에는 달아의 병이 수그러지지 않아 아침 일찍 복귀했다고만 기록했다. 다음 날은 아예 출근하지 않고 아이를 지켜보았다. 아이의 증세가 여전한 것을 보며 혹시 관아 북쪽 담장 내에 토우(土偶)를 만들어 묻은 것이 동티난 게 아닐까 의심하고 또 걱정했다. 천연두인지 모르겠다면서도 확실하지 않다고 적고 있으니, 이것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이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달아가 아픈 것은 결국 천연두때문이었다. 10월 11일, “병든 아이에게 역신(疫神)이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해 얼굴 위에는 마치 좁쌀을 흩뿌려 놓은 듯하였고, 온몸에는 마치 물을 뿌려 놓은 듯하였다”고 기록했다. 더 이상의 일기는 없었지만, 이날 달아는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날 권문해는 달아를 병장기를 보관하는 곳에 옮겨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는데 그 이유를 다시 다음 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역병으로 갑자기 죽었던 사람이 혹 깨어나는 경우도 있기에 종을 시켜 계속해서 열어보도록 하였으나 가망 없는 일이다”라고. 죽은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 부정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달아가 아프기 시작한 7일부터 권문해는 온통 달아 생각뿐이었다. 어린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일까. 권문해는 이후 며칠간 출근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88년 10월 12일의 일기에서 “이날은 달아가 역병으로 죽은 날이다. 종일 출근하지 않았다. 온 집안이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채소만 먹고 고기는 먹지 않았다”라고 기록하며 달아를 그리워했다. 이것은 1589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식이 성장하면서 부모와 자식 간에도 소통과 공감이 쉽지 않아진다. 이 때문에 숱한 갈등에 부딪치며 부모도 자식도 속상한 날을 보낼 때가 많다. 건강하게만 자라주는 것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리는 것들이 사실 나에게 주어진 특별한 행복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할 것이다.

2023-03-06

아름답고 처연하게, 두껍고 무겁게 소멸하는 이야기

영화는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유령이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일반적인 요소들을 태연하게 펼쳐 놓는다. 특히 침대보를 뒤집어 쓴 유령이 등장하는 장면은 노골적이다. 눈구멍 뚫린 침대보를 뒤집어 쓴 유령이 그가 살던 집으로 걸어가는 장면에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교통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C는 유령이 되어 그가 살던 집에 남은 사랑하는 M의 곁에 머문다. 그리고 M의 슬퍼하는 모습과 극복의 과정을 목격한다.죽음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영화는 죽은 자의 몫으로 그린다. 살아남은 자의 시선이 아니라 철저히 죽은 자의 시선, 곧 유령의 시선을 따른다. 직선적인 세계관을 살다가 순환하고 종횡무진하는 세계로 들어온 유령의 시선으로 시간은 흐르거나 역전되고, 늘어지거나 축약된다. 표현할 수 없고, 전달할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가 집이라는 공간을 떠돈다.우스꽝스럽게 시작한 유령의 모습은 이내 처연하게 다가온다. 눈구멍 두 개만 뚫린 침대보를 뒤집어 쓴 유령의 변화없는 표정 속에서 무겁게 내려앉는 상실의 얼굴이 읽힌다. 홀로 남은 집, 집은 거대한 쓸쓸함이 되어 슬픔과 함께 뭉쳐져 집안을 떠다닌다. 그 시간 속에서 집은 또 다른 주인을 맞이하고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유령 C와 남는다. 귀엽고 소탈하게 등장한 유령은 이제 세상 그 어느 곳, 누구 보다도 외롭고 쓸쓸한 존재가 되어 집에 남는다. M이 상처 받고 괴로워 하는 모습과 점차 일상을 회복하고 마침내 극복하고 새 삶을 찾아 떠나간 이후에도 유령은 그 집에 머문다.모든 시선은 유령의 시선과 또 다른 유령과도 같은 관객의 시선으로 이어진다. 알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표현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는 감정들이 오간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속에 남겨진 자(혹은 그 무엇의 존재)가 되어 관객도 함께 빈집에 머문다. C가 그렇듯 우리는 그저 가늠되지 않는 시간을 지켜볼 뿐이다.가늠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공허와 상실, 쓸쓸함과 외로움과 애틋함, 아름다우면서도 텅 빈 감정들이 뒤섞인다. 유령 C가 머무는 집과 함께 무언지 딱히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로 가득 채워진 집의 어느 곳에서 추억을 더듬는다. 이제 ‘유령 이야기’는 C가 머물며 추억하고 목격한 ‘집’의 시간, ‘집의 이야기’가 된다.그래서 화면은 일상의 공간, 일상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작은 집 어딘가에 카메라를 놓고서 복도를 비추거나 빈벽을 비추거나, 텅 빈 공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속에 정물처럼 남은 유령 C가 놓이기도 한다. 빈집이 헐리고 거대한 건축물이 세워질 때 유령은 다시 시간을 거슬러 그곳에 처음 정착했던 이들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C와 M이 함께 살던 때까지 목격자로 관객과 함께 묵묵히 시간을 보낸다. 먼지가 쌓이듯 기억의 공간은 두껍고 무겁게,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메운다.언제까지건 그곳에 머물러 있을 것 같은 존재(유령)가 사라지는 순간은 허무하다. 건너편 집의 또 다른 유령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에서 존재의 이유를 가지던 유령도 “안 올건가봐요”라고 체념하는 순간 무너져 내린다.영화는 짧지만 흐름은 느리고 길게 흘러간다. C와 M의 시간, 유령의 시간, 유령이 머물던 집의 시간, 그 집이 들어서기 이전의 시간이 한편의 시처럼 함께 흐른다. 기형도 시인의 시 ‘빈집’의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에서 시작해 사랑과 연민, 쓸쓸함과 공허함, 기억까지 소멸시켜 버리는 마지막 장면은 끝까지 움켜쥐고 있던 실낱같은 희망까지 놓아 버리게 만든다. 소리없이 사라지는 유령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묵직한 아름답고 처연한 무언가가 내려앉으며 영화가 끝난다. 그 무게만큼 여운이 오래 남는다. /김규형 (주)Engine42 대표

2023-03-06

‘피지컬 100’이 남긴 것들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최고의 피지컬(physical·신체 능력)을 갖춘 몸을 찾는다.’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 ‘피지컬 100’의 슬로건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했다. 슬로건에 걸맞게 보디빌더, 격투기 선수, 올림픽 메달리스트, 경찰, 전직 군인, 산악구조대원, 댄서 등 소위 ‘몸을 쓰는’ 다양한 분야의 참가자들이 모였고, 완력, 지구력, 순발력 등의 신체 능력을 테스트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모든 과제는 성별에 상관없이 동등한 조건으로 진행됐으며, 남성과 여성이 직접적으로 맞대결하는 과제도 있었다. 이 프로그램이 한국 뿐 아니라 해외 시청자들의 눈길마저 사로잡을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이 ‘기계적 공정성’일 것이다.참가자들의 신체 능력을 겨루는 ‘스포츠 버라이어티’는 그 역사가 제법 오래됐다. 미국에서는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몸싸움을 벌이는 ‘롤러 더비’나 각종 장애물을 ‘닌자’처럼 통과해야 하는 ‘아메리칸 닌자 워리어’같은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었고, 한국에서도 ‘열전! 달리는 일요일’이나 ‘출발 드림팀’ 등이 있었다. 스포츠 버라이어티의 미덕은 참가자들이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거나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뛰어난 운동 능력과 잘 단련된 육체를 전시하는 것이다. ‘피지컬 100’ 역시 이러한 공식을 충실히 따랐다.그런데 ‘피지컬 100’이 기존 스포츠 버라이어티와 차별화되는 점은 참가자들을 성별에 따라 나누지 않고, 남녀 간의 맞대결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기존에도 남녀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프로그램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코스를 빨리 돌파하는 경쟁이었지 맞대결을 펼치는 방식은 아니었다. 첫 번째 과제였던 ‘일대일 데스매치’에서는 남녀 간의 맞대결이 두 차례나 벌어졌고, 여성 보디빌더 춘리는 남성 못지않은 완력과 투지를 보여주며 큰 성원을 이끌어냈다. 경기 도중 상대 남성이 무릎으로 춘리의 가슴 부위를 강하게 누른 것에 대해 다른 여성 참가자들의 항의가 있기는 했지만, 이는 경기 운영 방식에 대한 항의였지 ‘신체적 특성이 다른 남녀를 맞대결시켜도 좋은가?’라는 문제제기는 아니었다.이 장면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실제적 지위가 상승했다는 방증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제 한국 여성들은 제도적 어드밴티지(advantage·유리함) 없이 남성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해도 될 만큼 자신감에 차 있다. 피지컬 100을 보라”라고. 하지만 그런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최근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국가대표 출신 남성 운동선수가 여자친구를 흉기로 폭행해 구속됐다. 이 사건은 여성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물리적·사회문화적 약자임을 잘 보여준다.2단계 과제 ‘모래 나르기’에서 장은실 참가자와 팀원들이 잘 보여주었듯, 반드시 완력으로 상대를 제압해야만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피지컬 100’이 보여준 남녀 간의 맞대결, 그리고 ‘최고의 피지컬을 갖춘 단 하나의 몸을 찾는다’라는 슬로건은 어디까지나 방송의 재미를 위한 ‘설정’에 불과하다.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생물학적으로 다르며, 따라서 ‘최고의 몸’ 또한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2023-03-06

따뜻한 눈빛이 그리운 시간이다

김규인 수필가 1만 년 전에 빙하기가 완전히 종식된 후 폭력은 자연 선택적 변이가 완료된 상태로 인간의 유전자에 남아 우리에게 전한다. 문명사회인 오늘도 아들의 학교폭력으로 공직을 내놓은 변호사와 자신의 폭력으로 중도하차한 가수의 이야기가 연일 기사로 뜬다.인류가 삶을 시작할 때, 야생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폭력을 사용했다.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돌도끼와 돌칼을 만들어 싸우며 자신들을 지켰다. 이동하며 사냥해 먹을 것을 구하던 유목민 생활에서 농경 생활로 정착한 이후에도 폭력을 사용했다. 옆의 나라를 침공하여 영토를 넓히고 이런 가운데 폭력은 어김없이 쓰였고 문명화된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계속된다. 인류의 역사는 폭력으로 물든 역사다.학교폭력 피해자는 신체적인 손상과 정신적인 압박감을 받는다. 이러한 영향으로 정상적인 학업 생활의 어려움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 불안해 매사에 의욕을 잃고 심한 경우에 자살로 이어지는 일도 자주 발생한다. 학교폭력으로 인한 자살이 일어나면 학교와 교육청은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을 약속하지만,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폭력의 긴 뿌리를 생각하면 인간이 있는 한 폭력이 계속될 것 같다.사냥해야 살아갈 수 있는 원시 유목 사회에서 생존의 도구인 폭력이었지만, 이제는 필요 없는 현대 문명사회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쩌면 먹이를 사냥해야만 살아남는 야생의 본능이 아직 인간에게는 남아있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약한 상대를 찾고 뒤를 쫓아 사냥 기회를 엿보는 야생 사회 말이다.학교폭력을 걱정하는 사이에 아줌마라는 말에 격분해 흉기를 휘두르는 일이 발생한다. 조금만 참으면 될 일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이 비극 앞에 뚜렷한 대책 없이 바라보아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자전거를 타고 대구 신천을 달리는 일이 잦다. 유모차에 반려견을 태우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자식처럼 개를 데리고 산책하고 뒷바라지하는 사람들을 보며 같은 종족끼리 이보다 더 열악한 대접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왜 이런 지경까지 됐는지.돈을 사냥하기 위해 부모와 형제를 죽이고 우정을 나누어야 할 친구를 폭행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왜 이리 자주 발생하는지. 폭력으로 무너진 인간의 존엄성을 언제쯤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모든 폭력 앞에 언제쯤 사람들은 당당할 수 있을까.폭력의 피해는 언제나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이 늘어나는 사회를 보면서 다시 교육에 기댈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이제는 가정과 학교와 언론과 사회가 모든 분야서 교육의 주체가 돼야 한다.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교육해야 한다. 그나마 희망을 갖는 것은 어린 나이일수록 교육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하고 상담해 사람이 살만한 세상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2023-03-06

봉화군에 베트남 왕족이 살았다

박현국 봉화군수 봉화군이 베트남 마을 조성이라는 이색 사업을 펼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베트남은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과 삼성 핸드폰 베트남 공장 설립,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감독으로 우리와 매우 친근한 국가이다.봉화군 봉성면 창평리마을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베트남 선조의 흔적이 남아있는 한국 속의 베트남으로 통한다.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장기 집권 왕조였던 리 왕조의 후손 이용상이 고려에 귀화해 한국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됐고, 그의 둘째 아들인 이일청이 안동부사로 부임하면서 후손들이 봉화 일원에서 세거지를 이루고 살았다.이후 이용상의 13세손인 이장발이 임진왜란에 참전해 장렬하게 전사하자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봉성면 창평리에 충효당과 유허비를 건립했다.이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베트남 리 왕조 관련 유적이며 이 마을에는 아직도 그 직계 종손 및 후손들이 살고 있어 베트남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리 왕조는 베트남 최초의 독립왕조로서 베트남의 정신적 지주인 호치민 주석이 생전에 리 왕조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표할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이다.봉화군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유구한 역사의 발자취를 발전시켜 국내 유일의 리 왕조 유적지의 관광명소화를 통해 한국-베트남 간의 우호를 증진하고 다문화인들의 교류장으로 활용하고자 한다.현재 추진하고 있는 봉화 베트남마을 조성사업은 오는 2027년까지 총사업비 294억 원을 들여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 일원 부지 3만8350㎡에 베트남 전통 마을, 문화공연장, 연수·숙박 시설 등을 조성하는 것이다.베트남마을이 조성되면 연간 10만 명의 관광객 유치는 물론 연평균 37억 원의 경제적 파급효과와 482명의 직·간접적 취업유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특히 최근 베트남 국가주석 면담과 베트남 뜨선시와 우호 강화 협약 체결로 봉화 베트남마을 조성사업 추진이 탄력을 받고 있다.지난해 12월 화산 이씨 종친 회장단과 함께 베트남 대사관을 방문해 국빈 방한한 응우옌 쑤언 푹 주석을 만나 베트남마을 조성사업 설명과 함께 국가 정책사업화 추진을 제의했다.특히 베트남 주석과의 만남은 윤석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보다도 앞서 진행될 만큼 베트남 측에서도 적극적이었으며 사업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베트남에서도 각 부처에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답했다.또 베트남 박린성 뜨선시와 우호협력 강화 협약서를 체결해 봉화군 베트남마을 조성사업에 대해 양 도시의 협력과 협조를 약속했다.최근에는 베트남마을 조성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한 전문가 워크숍을 열어 베트남 전문가들과 함께 베트남 리 왕조 후손 유적지인 충효당과 재실, 창평저수지 등 베트남마을 조성 사업대상지를 둘러봤다.전문가들은 대구경북 신공항시대와 맞물려 추진되는 베트남마을 사업에서 한-베 문화교류 기능을 강화하면 양국 간 우호 증진과 국내 베트남 다문화인들의 교류공간으로 활용성이 높다며 사업 필요성에 적극적으로 공감했다.앞으로 워크숍에서 논의된 사항과 기존 사업계획을 바탕으로 한-베 양국 간의 든든한 가교가 될 마스터플랜을 수립하는 용역을 실시해 봉화 베트남 마을이 성공적으로 조성될 수 있도록 힘쓸 계획이다.올해에는 베트남과의 지속적인 문화교류를 더욱 추진하고 베트남마을 조성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협력을 이어가려고 한다.한국과 베트남 양국의 관심과 지원을 통해 베트남마을이 조성된다면 베트남의 역사가 살아 있는 봉화군에 새로운 국제적 관광명소가 탄생할 것으로 기대된다.더불어 양 국가의 발전과 우의를 더 깊이 다지는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국내 유일 베트남과의 경제·문화 교류중심지가 될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베트남마을 조성사업이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베트남 국민도 양국의 역사적 뿌리를 공감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며 이번 사업이 성공적으로 조성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협력해 나갈 것이다.사업의 성숙기에 터진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됐던 사업을 재개해 사업의 속도를 내려 하는 만큼 군민들의 많은 관심과 지원을 바란다.

2023-03-05

세상의 모든 아들에게

이희정 시인 부모에게 자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끝이 없는 A/S 대상이다.“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 네 뒷모습에 대고 /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더러는 부모가 부실하면 아이들이 먼저 철이 들기도 하는 경우도 있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훈련소 상사가 문자로 보내온 아들의 모습은 긴장된 가운데 늠름하다. 발가락 재해로 일 년 가까이 입대 시기를 늦춰야 했던 어느 집 아들의 이야기다.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겨우 나아갈 때 즈음 서둘러 급행을 신청해 입대했다. 전날까지 일언도 없이 문을 나섰던 아들이 훈련소 입소 직전 사진과 함께 “잘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를 보내왔다. 입대를 보류할 부모를 견제한 판단이었으리라 짐작한다.예전과 달리 복무기간도 단축되고 핸드폰 사용도 가능하다지만 여전히 어머니들에게 입대는 간절한 기도로 신을 부르는 일이다. 총에 맞아 죽기보다는 총소리를 듣고 먼저 쓰러진다는 시구도 있지 않은가.아들아너와 나 사이에는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네 뒷모습에 대고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네가 어렸을 때우리 사이에 다만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사랑 한 알에도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이제 쳐다보기만 해도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너와 나 사이에는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문정희 ‘어린 사랑에게’(1992, 미래사) 중 ‘아들에게’ 전문그런데 어머니와 아들을 대하는 간절함의 인식은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없던 질병도 만들어 군 면제를 받았으면 하는 힘센 부모도 있다. 과거와 달리 너나 할 것 없이 자식이 한 둘인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군에서 맞는 생일에 공산품 초코파이 케이크는 거부하고 특별히 만든 케이크를 보내고, 군대 상사에게 사소한 것들까지 수시로 주문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풍토 속에서 부모의 배웅 없이 홀로 기차를 타고 가벼운 여행길 나서듯 그렇게 홀연히 떠나는 아들의 태도는 약한 부모를 부끄럽게도, 마음 저리게도 한다.서울 양재동 숲길을 걷다 보면 청년 윤봉길을 만날 수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사가 되어야 했던 그의 나이는 약관이었다. 고향에는 살아 있는 부모가 있었고 앳된 아내가 있었고 무엇보다 완두콩 같은 발가락을 고물거리는 어린 자식들이 있었다. 그는 아들이었고, 가장이었고, 아버지였다. 현대 시점으로 보자면 저 어린 나이에 어찌 저리 큰마음으로 나설 수 있었을까 믿기지 않는다. 혼인 연령이 늦어지면서 아이들의 성장도 늦되어지는 것인가. 바뀐 세상이 성장의 키를 조율하는 것인가. 지금의 아이들에게 대자면 상상할 수도 없는 신화에 가까운 실화다. 훈련 중 부상보다 상사나 동기의 괴롭힘 등 정신적인 이유로 어머니들의 ‘간절’을 소환하는 예가 많은 것을 보면 더욱 실감이 나지 않는다.시대가 바뀌고 풍족한 환경에도 세상은 여전히 평온하지 않다. 저 먼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으로 실시간 대치 중인 우리나라를 보더라도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모든 어머니에게 귀하지 않은 발가락이 있으랴. 문정희 시인(1947~)은 말한다. “네가 어렸을 때 / 우리 사이에 다만 /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 사랑 한 알에도 / 온 우주가 다 녹아들곤 했는데 /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이 되어 있다고.세상의 어머니들에게 전하고 싶다. 내 아이들은 생각하는 것보다 어리거나 유약하지 않다고. 어머니의 간절함 속에는 강물처럼 흐르는 신이 한 분 살아 계셔서 결코 그 마음의 키가 작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아들을 믿고 모두를 위한 간절함으로 두 손 모을 수 있어야 한다고.내 아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들들’에게.

2023-03-05

땃벌떼에 포위당한 국회

김진국 고문 1995년 7월 1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계 복귀와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92년 12월 정계 은퇴를 선언한 지 2년 7개월 만이다. 민주당 의원 95명 가운데 65명이 탈당했다. 은밀한 작업 끝에 신당 창당이 공개되자 민주당은 어수선했다.다수 의원이 빠져나간 국회 민주당 의원실 소파에서 노무현 최고위원과 유인태·원혜영 의원이 바둑을 두며 개탄하는 말을 들었다. 정당이 한 사람에 좌지우지되는 꼴에 한숨을 쉬었다. 이들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만들어 독자적 길을 모색했지만 실패했다.그때만 해도 그들은 3김 정치 타파를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3김의 대권욕이 민주화운동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집권 야망 탓에 지역할거 정치를 주도해, 민주화를 왜곡한다고 생각했다. 조순형·제정구·유인태·원혜영·김부겸 등이 88년 한겨레민주당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다. 양김씨(김영삼·김대중)가 후보단일화에 실패해 정권 교체를 실패한 직후다. 대권욕에 사로잡힌 한 사람의 정당 장악을 저지하려던 이들이 만든 민주당에 민주주의는 남아 있는가.요즘 민주당을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의 개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과 관련해 ‘배신자’ 색출이 거세다. 이낙연 전 대표 영구 제명 청원은 게시 나흘째인 3일 오후 동의자가 6만 명이 넘었다. 민주당혁신위원회는 총선과 전당대회 등 당내 경선에서 ‘개딸’(개혁의 딸이란 이름의 이재명 친위세력)들의 목소리를 크게 반영하도록 규정들을 고치려 한다. 이 대표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는 현역의원들을 물갈이하겠다는 것이다.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이 ‘개××’라느니 ‘수박(겉과 속이 다른 배신자라는 뜻) 깨기’라는 말로 공공연히 선동한다. 이상민 민주당 의원은 “나치 시대에 기독교 신자를 색출하려고 십자가 밟기를 강요”한 것과 같은 짓이라고 개탄했다.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도 갈등이 심한 정당을 버리고 나간 적이 있다. 신민당을 버리고 나가 민추협과 통일민주당을 만들었다. 그때는 독재정권의 공작정치에 맞서기 위해 야권 세력을 결집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지금은 당이 가진 재산이 아깝고, 선거에서 거저먹기인 제1야당의 간판이 아까워 나갈 생각은 못 한다. 그때는 민주화라는 명분이 있었다. 지금은 사법 심판 회피 이외에 무슨 명분이 있나. 정치는 명분이다. 명분이 없으면 양아치나 다름없다.1971년 10월 2일 공화당의 4인 체제는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통과시켰다. 화가 난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정보부장을 시켜 김성곤 의원의 코털을 뽑고, 의원직에서 쫓아냈다. 민주당이 50년 전의 공화당처럼 절대자 1인의 정당인가.이승만 전 대통령은 2대 국회를 야당이 압도해 간선제로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국회에서는 의원 내각제 개헌을 시도했다. 그러자 이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 의원들을 의사당에서 연행했다. 백골단, 땃벌떼 등 정치 깡패집단, 마차·우마차에 마의(馬意)·우의(牛意)를 실어 날라 국회를 포위하고, 공개투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수박 깨기’ 한다며 투표 내용을 공개하라고 압박한다. 또 체포동의안이 오면 불참하는 방식으로 의사 표시를 드러나게 만들려 한다. 문자 폭탄을 날리고, 청원압력을 가하는 ‘개딸’은 ‘땃벌떼’와 다를 게 없다.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보이고,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일부 과격분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만 과잉 대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험한 적이다. 소수파였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는 선동정치 과정이 그러했다.국민의힘이 흘러가는 꼴도 비슷하다. ‘친윤’을 선언하지 않으면 모두 배신자로 낙인찍는다. 물갈이가 거론된다. 통신 기술의 발달로, 정제된 소식만 전달하던 시대와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누구나 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 가짜뉴스가 범람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보다 자극적인 선동이 더 잘 먹히는 시대다. 민주주의가 위태롭다. 당 대표와 다른 의견에는 침묵을 강요하는 것도 명백한 민주주의 파괴다.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3-05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김규종 경북대 교수 봄이 오고 있다. 작년보다 월등히 추웠던 겨울이 지난주 금요일 오후를 기점으로 봄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갔다. 목요일 오전 영하 7℃, 금요일 오전 영하 5℃를 끝으로 청도는 앞으로 영하의 아침을 만나기 힘들어질 모양이다. 하지만 겨울의 여파는 곳곳에 남아있다. 작년 이맘때에는 홍매가 졌을 터인데, 올해는 아직도 봉오리 상태로 몸을 닫아걸고 있다. 봄의 첫 번째 전령인 영춘화(迎春化)가 이제야 노란 꽃송이를 선보이기 시작한다.대구 동촌 유원지 전봇대 아래 하얀 냉이꽃이 앙증맞게 피어났다. 도심의 소음과 매연과 인총(人叢)들의 무관심을 이겨내고 청정하게 피어난 냉이꽃에 마음이 짠해진다. 대구 문화방송국 주변 욱수천에 뿌리내리고 서 있는 버드나무에도 도톰하게 꽃눈이 올라오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선화 꽃대가 시나브로 키 자람을 하고, 원추리와 루드베키아, 봄까치꽃도 여기저기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바야흐로 봄이 흐드러질 참이다.길을 걷다가 나무에 손을 대본다. 겨우내 차가웠던 나무에도 조금씩 온기가 느껴진다. 창천(蒼天)의 구름도 살이 붙어 통통하다. 저녁 7시나 되어야 캄캄해지는 사위(四圍)를 뚫고 금성과 목성이 천상에서 유희하는 장면은 경이롭다. 그것을 지켜보며 증인 구실을 하는 하얀 반달이 어느 참엔가 노랗게 색깔을 바꾼다. 겨우내 고요했던 지붕에 참새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조류의 소음과 추함은 여전하다.밤하늘의 별들이 찬란하게 빛났던 차고 아름다운 시절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떠나가고 있다. 모든 떠나는 것에 동반하는 만가(輓歌)에는 슬픔과 아쉬움이 깃들기 마련이지만, 겨울과 봄의 교체에는 그런 징후가 없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생명의 약동과 환희가 대지와 하늘과 인간들의 아수라판에 범람할 것이기 때문이다. 10월 말까지 이어질 뭇 생명의 환호작약과 괄목상대와 욱일승천의 기세에 미소(微小)한 인간의 개입이 불가능하다.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문자 조합은 자연보호(自然保護)다!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겠다니! 마치 세 살짜리 천둥벌거숭이가 부모를 부양하고 보호하겠다고 나선 것과 다를 바 없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과 지난 2월 6일 터키와 시리아를 덮친 지진을 생각해보라. 인간은 자연을 보호할 수도 없고, 자연은 인간의 보호를 바라지 않는다. 인간은 수많은 생명과 어울려 살아가는 미미한 존재일 따름이다.자본주의와 과학주의가 낳은 기형적인 괴물인 근대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자연 정복이다. 과학에 터를 둔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오만에 빠진 인간은 ‘계몽’이란 허울 아래 자연을 인간의 하위에 자리하도록 했다. 그것이 불러온 파괴적인 양상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기고만장(氣高萬丈)해진 일부 괴짜 사내들은 화성 탐사와 인간의 달 이주 계획을 서둘러야 한다고 너스레를 떤다. 정말로 희화적인 지구의 풍경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환경부가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에 동의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개발이익과 업적을 챙기려는 시커먼 욕망의 무리가 거악을 만들어낼 태세다. 우리의 봄과 자연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2023-03-05

현대차 생산직에 쏠린 시선

우정구 논설위원 최근 산업연구원이 MZ세대의 직업 가치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지난 12년에 걸쳐 10만명 대졸자를 대상으로 소득, 근로시간, 적성, 업무난이도 등 16개 직업 가치요소에 대한 인식조사를 벌였더니 직업 가치 순위에 변동이 생겼다는 것이다.과거 직업 가치로 가장 소중히 여겼던 ‘개인 발전가능성’이 뒤로 밀리고 소득과 업무시간 등이 앞쪽으로 당겨졌다. 1순위였던 ‘개인 발전가능성’은 6위로 떨어졌고 소득이 3위에서 1위로, 근로시간이 6위에서 2위로 올라섰다.이와 달리 다른 한 여론조사에서도 MZ세대는 가장 싫어하는 기업으로 ‘주말 출근 등 초과근무가 많은 기업’을 1순위로 꼽았다. 고액 연봉과 워라밸이 잘 돼야 그들에게는 신의 직장으로 평가받는다는 뜻이다.현대자동차가 10년만에 생산직 모집에 나서면서 많은 화제를 뿌렸다. 올해 뽑을 400명 생산직에 지원자가 폭주해 채용 홈페이지가 마비되고 최종 지원자가 10만명은 족히 될 것 같다는 관측이다.현대자동차 생산직을 킹산직(king+생산직)이라 부르고, ‘현차 고시’니 ‘전국민 오디션’이란 말도 나왔다. 또 놀라운 것은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 사무직까지 현대차 생산직 모집에 들썩이고 있다는 소식이다.현대차의 작년 임직원 평균 연봉은 9천600만 원. 생산직 초봉도 5천∼6천만 원이다. 높은 연봉과 정년보장, 다양한 복지혜택 등 현대차 생산직 자리가 로또에 비견될 만큼 부러운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기성세대에는 자기발전보다 연봉에 무게를 둔 그들의 직업관이 낯설어 보이기도 한다. 조직에 충성하고 개인보다 업무에 더 열중했던 전통적 직업 가치가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03-05

새 학기가 두려운 아이

사공정규 동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학박사 새로운 학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새 학기가 되면 유치원이나 학교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아이들이 있다. 처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갈 때 어느 정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흔히 있는 현상이다. 대개 1주 정도 다니다 보면 적응을 하게 되지만, 일부 아이들은 학교 가는 것에 대해 과도한 불안 증세를 나타낸다. 심한 경우는 아이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가는 것을 너무 싫어하고 어머니와 떨어지지 않으려 울고 떼쓰고 이런 일이 계속돼 해결 방법을 찾기 난감할 수가 있다. 그런데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으면 증상은 씻은 듯 사라진다. 부모들은 흔히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으려 하는 것이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혼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못살게 구는 친구가 있거나, 선생님이 무서워서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그러나 원인은 애착 대상(주로 어머니)과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처럼 불안으로 등교를 회피하는 것을 과거에는 학교 공포증(school phobia) 또는 등교 거부증(school refusal)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공식 정신의학적 진단명은 분리불안장애(separation anxiety disorder)이고 최근에는 ‘장애’라는 우리말 표현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고 ‘새 학기 증후군’이라는 완화된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분리불안장애는 12세 미만의 소아에서 가장 흔한 불안장애로 일종의 정신의학적 병이며 유아기나 초등학교 저학년에 흔하다. 아동에서의 유병률은 4% 정도로 추정되고 환자의 경우 남녀 차이를 보이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여아가 좀 더 흔하다.하여튼 극심한 불안감이나 신체증상은 학교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떨어져서 집을 떠난다는데 있다.다시 말해 학교에 대한 공포나 거부가 아니라 어머니와의 분리에 대한 불안이다. 분리불안장애의 원인은 아동의 기질적 특성뿐만 아니라 부모의 양육태도도 영향을 끼친다. 치료하며 목도한 점은 성장과정에서 어머니가 과잉보호를 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마음이 ‘알 두고 온 새의 마음’처럼 불안한 경우 분리불안장애의 위험이 증가한다. 사실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를 어떻게 키울까 하는 불안과 고민을 가지고 있다.특히 요즈음 평균 자녀수가 한두 명으로 줄어들면서 부모의 과도한 애정과 과보호의 경향이 더 많아지고 있다.그러나 과잉보호를 하게 되면 아이의 새로운 적응에 대한 시도를 단념시켜서 아이의 발전 능력이 저해되고 정서적으로 나약하게 만들며 자신감이 형성되지 않게 된다.자율성이나 주도성, 독립심이 형성되지 못하게 된다. 아이를 위한다는 것이 오히려 아이의 정신적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다.부모가 아이를 너무 끼고 돌면 아이는 스스로 난관을 극복할 기회를 얻을 수가 없다. 부모가 아이 혼자 설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지 않으면 아이들이 갑자기 부모를 떠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는 더 힘이 들 수밖에 없다.심하면 어른이 되어도 그 정신연령은 ‘어린아이’에 머물러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모든 일을 어머니에게 물어봐야 하는 ‘마마보이’가 된다.아이를 잘 키우려면 앞질러 해주지 말아야 한다.우리 부모들이 아이가 할 일을 앞질러 해주는 것은 ‘혼자서 못할까봐’ 또는 ‘다칠까봐’ 하는 마음에서라는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공감한다.하지만, 부모가 진정 아이의 교육을 생각한다면, 아이 스스로 활동하도록 허용해야 하고 아이가 자기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능력 밖의 어려움이 있을 때, 위험한 환경일 때에만 돕거나 보호해 주어야 한다, 아이에게 혼자 고민하고 혼자 해결할 기회를 주자. 관심은 가지되 간섭하지 말자.아이의 신체적인 발육과 정신적인 성숙 정도에 따라서 적당한 시기에 욕구를 적절히 좌절시키는 것을 점진적으로 해야 하는데 이러한 훈련은 장차 험한 세파에 저항력을 기르기 위한 정신적 예방주사가 된다.아이는 좌절에 따르는 감정과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처리하고 ‘나도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율성과 주도성, 독립심은 그런 과정을 거치며 형성된다.자녀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자기 스스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어 그들이 주도적이고 독립적이고 행복한 성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부모가 언제까지나 아이를 알로 생각해서 보호하려고 한다면 아이는 영원히 부화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깃털과 품속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아이가 알을 깨고 나오도록 해주어야 한다.어미 새가 껍질을 깨어 주기보다,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부리 끝이 터지고 힘겨워도 제 힘으로 알을 깨고 나온 새는, 마침내 창공을 향해 힘찬 날개짓을 시작할 것이다. 새 학기 새로운 도전에 나선 아이와 부모를 응원한다.

2023-03-05

전기는 공공재… 펑펑쓰면 안된다

위현복(사)한국혁신연구원 이사장 에너지 절감운동을 거창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실제 에너지 절감은 우리 생활에서 가장 가까이 있고,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전기는 ‘kWh’(킬로와트시)로 표시한다. ‘KW’(킬로와트)는 전기의 양이고 ‘H’(시)는 전기를 쓰는 시간을 뜻한다. 그러니까 에너지 절감은 ‘KW’나 ‘H’를 줄이는 것이다. 기존의 백열등, 형광등, 할로겐 조명등을 LED 조명등으로 바꾸는 것이 대표적이다. 전자제품, 전기제품을 고효율 절전 제품으로 바꾸는 것 또한 ‘KW’를 줄이는 것이다.‘H’를 줄이는 것은 전기를 사용하지 않을 때 스위치를 끄거나 플러그를 뽑는 것이 대표적이다.출근하면서 혹은 잠들면서 스위치를 켜 놓으면 사용 시간의 4배 정도를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스위치만 끄면 H는 줄일 수 있는데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글로벌 IT기업 퀄컴은 본사에 7천500여개의 센서를 설치하여 직원들이 일정 시간 이상 자리를 비우면 컴퓨터부터 각종 전자기기, 냉·난방기, 조명까지 자동으로 꺼지게 하여 연간 100만 달러를 절감한다고 한국의 주요 일간지에 홍보한 적이 있다.알고 보면 전기를 절감하는 방법은 엄청 많다. 우리나라 전기요금 제도에는 ‘피크’라는 게 있다. 15분 이상 연속해서 연중 최대치로 사용하는 전기량을 1년간의 기본요금으로 정하는 제도로써 일상적으로 쓰는 전기량보다 피크치는 훨씬 높다. 대체로 1년 중 10~20시간만 보강하게 관리하면 최소한 수십 KW의 피크치를 낮출 수가 있다.냉·난방기 사용 시에도 항상 전기절감을 명심해야 한다. 대부분의 피크치는 냉방기, 난방기 사용 때 나타난다. 냉방기를 사용할 때는 실내 온도를 25~28℃에 맞춰놓고 선풍기를 겸해서 사용하면 전기 사용량을 30~40% 줄일 수 있다. 난방기 또한 근무시간 30분 전에 22~23℃에 맞춰 놓았다가 근무시간에 1~2℃ 높이고, 겨울철에도 목 티셔츠를 입거나 내의를 입는다면 쉽게 30~40% 절감할 수 있다.모든 전기는 한국전력과 사용량에 대해 계약이 되어 있는데 기업의 오너나 임직원 중 전기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기업이나 대부분의 IT 회사에서는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부분은 과도하거나 부족하게 계약해서 쓴다.오래된 상가나 사무실, 교회, 성당 등에서는 한국전력과 부족하게 전력량을 계약해서 1년에 6~7개월씩 계약전력 초과로 과태료를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몇 년 전 사설 테니스장 에너지 컨설팅을 한 적이 있는데, 처음 설비할 때는 야간 경기가 별로 없어서 70kWh를 계약했었는데 최근 야간 사용이 많아서 250kWh를 넘겨쓰고 있었다. 메탈 투광등을 LED등으로 교체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비싸서 한 달 한 달을 과태료를 내며 지탱하고 있었다.7~8년 전 대구지역 한 대학과 에너지 컨설팅을 한 적이 있다. 그 대학은 9천kWh를 한전과 계약했는데 피크는 1천700kWh에 불과했다. 너무 과다하게 전기 계약을 하여서 한국전력 규약상 계약전력의 30%인 2천700kWh를 기본요금으로 내고 있었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피크치 보다 매달 1천kWh 더 많은 기본요금(698만 원)을 한국전력에 납부하고 있었다.한국전력에 신고해서 합리적으로 조정하면 되는데, 아는 사람도 없고 관심도 없어서 그냥 매월 698만 원씩을 한전에 납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그 대학 전기 컨설팅을 다시 하였는데 아직도 그대로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서울, 지방 할 것 없이 대부분 대학이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이다.아파트도 대부분 계약전력이 과도하게 되어 있어 불필요한 요금을 한전에 납부하고 있으며, 한전은 쓰지 않는 과도한 계약전력으로 인해 불필요한 예비전력을 준비해야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계약전력의 과도한 설정은 공공기관도 마찬가지다. 대구에 있는 A공공기관의 경우 계약전력을 낮추면서 요금체계를 ‘일반용 을 고압A-Ⅱ’에서 ‘일반용 갑 고압A-Ⅱ’로 바꾸니 요금이 23% 줄어들었다.단순히 스위치를 끄거나 센서 부착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전기 관리가 복잡하다면 에너지 컨설팅 회사 컨설팅을 통해 불필요한 낭비를 줄임과 동시에 ‘한전의 불필요한 전기 준비’도 줄여줘야 한다.계약전력을 과도하게 설정하면, 이유도 모르고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한전에 납부하며 전기세가 많다고 불평들을 한다.우크라이나 전쟁 후 석유, 가스값 상승으로 전기요금도 30% 가까이 오르고 가스 요금은 100% 이상 오르니 모두들 충격을 받고 있다. 전기는 관심만 가지고, 또 세심하게 관찰하면 절약할 요소가 많다. 전기요금 고지서가 나오면 자세히 살펴보고, 컨설팅을 통해 불필요한 지출은 줄여나가는 지혜도 필요하다. 재산이 많다고 해서 전기세 정도는 아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전기는 공공재다. 전기사용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필요하다.

2023-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