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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소하고 수월한 행복

걷기 좋은 봄이다. 서늘한 밤 목련 주우며 거니는 산책로도 좋고, 얇은 경량 패딩 하나 입고 가벼운 걸음으로 걷는 것도 즐겁다. 겨울 길거리에서 만나는 녹차호떡이나 크림 붕어빵을 파는 트럭은 보기 어려워져서 아쉽지만, 그럼에도 주머니 안쪽에 3천 원씩 품고 다녀야 하는 이유가 하나 있다.퇴사를 한 뒤 시간 여유가 많아지면서 그간 못 갔던 병원도 다니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만났지만 어쩐지 금방 시들해졌다. 여유 시간엔 새로운 취미생활을 갖기 위해 양말에 꽃 자수 놓는 법도 배워보고, 펀칭니들이나 썬캐쳐 만들기 등 손으로 집중할 수 있는 취미에 몰두해 보려 했지만 이 또한 쉽게 질리고 말았다.그러다 우연히 집 근처 마트 안에 있는 토이 샵에서 뽑기 기계를 발견했다. 기계 앞에 내 또래로 보이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지 순간 장난감 샵에 들어온 게 맞는지 다시금 확인 했다. 대부분 팔에 플라스틱 바구니를 끼고선 한창 뽑기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인기 캐릭터를 뽑을 수 있는 기계 앞에선 줄이 길게 늘어서 있을 정도로 진귀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직원분께 여쭈어보니 인기 캐릭터인 경우엔 매장에 입고된 지 4시간 만에 뽑기 상품이 동날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했다.호기심에 친구 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뽑기에 시도해보았다. 동전을 차곡차곡 넣어 레버를 돌릴 때 묵직하면서도 경쾌하게 돌아가는 움직임이 어찌나 짜릿하던지! 동그랗고 매끄러운 플라스틱 케이스가 배출구로 떨어지는 소리도 유쾌한데다 형형색색의 캡슐을 쥐고 있으니, 어린 시절 문방구 앞에서 납작이 수그려 뽑곤 했던 해맑은 열정이 단숨에 기억나고 말았다.레고나 인형, 스티커나 다이어리 등 키덜트족들의 취향을 겨냥한 제품이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다. 어른(adult)이지만 아이(kid)시절 좋아하던 감성과 취향을 추구하고 즐기는 키덜트 족은 이미 식음료, 뷰티, 패션 업계 아울러 놀라울 만큼 커다란 시장 규모를 이루고 있었다.한국 콘텐츠진흥원의 자료를 참고해보자면 국내 키덜트 시장 규모는 지난 2014년 5000억원대에서 지난해 1조6000억원까지 성장했고 추후 최대 약 11조원까지 성장할 것이라 예측했다. 특히 뷰티나 패션 쪽에서도 큰 확장세를 보이고 있는데 뷰티 브랜드 이니스프리는 찰스 M. 슐츠의 만화 피너츠(스누피) 캐릭터와 협업하여 한정 에디션을 출시했고 의류 브랜드인 빈폴 또한 스누피 캐릭터와 콜라보한 제품을 내놓았다. 이탈리아 대표 명품 브랜드인 구찌는 2020년 쥐띠 해를 맞이하여 미키마우스X구찌 컬렉션을 선보였었으며 출시 후 완판될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또한 밀레니얼 세대의 어린 시절 즐겨 먹던 먹거리를 다시금 재현한 포켓몬 빵 시리즈, 초등학교 문방구에서 팔던 간식 세트 등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 먹거리들이 뉴트로 트랜드 흐름에 발맞추어 반가운 모습으로 재등장 하고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어린 시절 소풍 필수품이었던 뿌요 소다 또한 24년 만에 재출시 되었는데, 집 근처 편의점에서 나의 첫 탄산 음료였던 뿌요소다를 발견하자마자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언제 찍혔는지도 모를 만큼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사진 한 장을 우연히 발견한 느낌이었달까.물론 강렬한 추억 여행을 하게 해준 건 뽑기였다. 뽑기 기계가 있는 마트 주위만 가도 기분이 절로 상기되는데다, 어느새 뽑기를 하러 가기 위해 산책을 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뽑기에 한참 빠져들 때쯤 느낀점이 하나 있다. 원하는 걸 뽑기 위해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 너무나 당연하지만 막연히 심취해 있다 보면 갖고 싶은 제품을 뽑기 위해 잔뜩 욕심이 올라 무작정 돈을 밀어 넣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 필요 없는 제품만 실컷 뽑다가 덩그러니 남은 씁쓸한 욕심을 마주했을 때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이렇게 자제력을 잃고 낭비를 저지른 날엔 바다 깊숙이 머무르고 있는 해녀를 생각한다. 딱 자신의 숨만큼만 있다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는 해녀처럼 내게 딱 주어진 몫만을 고려하여 행동할 것. 열정과 중독은 비슷한 듯 싶으면서도 분명한 한 끗 차이를 지니고 있다. 뽑기로 다시금 지혜로움을 배운다.

2022-04-05

자신의 진실을 ‘제대로’ 마주해야 하는 이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 절망을 극복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상실’의 깊이에 대해서 탐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상실’은 거의 모든 작품들의 기저에 흐르는 중심이다. 부재에서 오는 혹은 결핍에서 오는 상실은 고독을 동반한다. 고독하게 상실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방황하고 스스로를 괴롭힌다. 또는 고독과 상실을 잊기 위해서 특정한 것에 몰입한다. 몰입은 해소되지 않는 갈증과도 같다.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영화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같은 지점에서 같은 이야기로 출발했지만 과정과 결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하루키의 소설이 현상을 통해 질문을 던지는데 반해 류스케 감독은 질문에 이어 해소된 결과로 향한다. 소설 속 행간의 의미를 되살리고 이유를 유추하며 질문을 반복한다.‘상실’의 근원으로 들어가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하루키의 소설이 여기까지라면 류스케의 영화는 그 이유를 개인의 태도에서 답을 찾는다. 20년 전 4살된 딸을 폐렴으로 잃었던 연극 연출가이며 배우인 가후쿠는 사랑하는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다.러닝타임이 3시간이나 되는 영화는 프롤로그에 40여 분이 넘는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40여 분의 프롤로그는 상실과 죄책감, 두려움의 과거다. 이후 오프닝 타이틀이 나오며 2년 후 현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떠나왔다고,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애써 외면해 온 과거의 진실이 다시 되살아 온다. 그냥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던,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거나 해결될 줄 알았던 날카로운 진실이 마음을 핥퀸다.프롤로그에서 남았던 후회의 원인은 상처가 된다. 그 상처의 치유를 위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직시하여야 한다. 하지만 가후쿠는 또 다른 상실이 두려워 현상유지를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을 했던 그의 ‘태도’에 대한 반성에 이르는 여정을 보여준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크게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연극무대로 영화 속 연극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로 시작해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로 끝난다. 영화의 이야기는 주인공 가후쿠가 ‘바냐 아저씨’를 위해 배우들 오디션을 보고 완성해서 무대에 올리는 과정이다. 연극 무대에서 시작된 영화는 연극 무대에서 끝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심 공간은 영화의 제목처럼 자동차 내부다. 연극 무대가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표현해가는 열린 공간이라면 자동차 안은 온전히 자신과 마주하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다. 히로시마 예술문화극장에서 기획한 연극제의 연출직을 제안받은 가후쿠는 상주 예술가는 반드시 운전기사를 고용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내키지 않았지만 주최 측이 추천한 운전사 미사키에게 운전대를 넘긴다. 가후쿠의 사적인 공간에 동승하게 된 미사키. 이후 영화는 연극 무대와 자동차 내부를 오간다. 연극 무대에 누가 어느 배역으로 오르는가의 문제와 가후쿠의 자동차에 어느 좌석에 누가 동승하게 되는가에 따라 ‘상실’의 두려움을 회피했던 개인의 태도라는 문제에 접근해 간다.연습이 거듭되면서 배우는 맡은 배역의 대사를 읽고 또 읽으며 그 너머의 있는 의미들을 좇는다. 자동차 안에서는 프롤로그에서부터 이어진 사건의 진실과 마주해야하는 고통의 시간이 흐른다. 그 고통은 서서히 자동차 좌석의 자리를 옮겨 다니며 다가와서 깊고 아프게 마주해야할 용기를 요구한다. 그렇게 고통을 직시할 때 상처는 아물고 삶의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진실로 타인이 보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깊이 똑바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대사처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줄 알았던 것들에게 ‘제대로’ 안부를 묻고 스스로의 내면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세세한 장면들로 전달하고 있다. 아픔을 딛고, 봉인된 상처 뒤에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살아가야하고,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견뎌야 하는 삶이 연속될 것이라 말한다. 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할지라도 ‘제대로’ 마주해야하는 태도를 통해 삶은 이어지고 있음을 영화는 말한다. /(주)Engine42 대표

2022-04-04

찰 영(盈)에 돌아볼 권(眷) 길 영(永)에 권세 권(權) <Ⅰ>

허 형사가 메모지에 그림을 그려가며 박 팀장에게 설명을 했다.-만약에 출발부터 다른 차를 타고 갔다면? 그럴 가능성은 없어?허 형사가 컴퓨터에 영상 하나를 띄웠다.-이게 병원 지상, 지하 주차장 CCTV 전체 영상입니다. 살펴봤는데 지상, 지하 주차장 그 많은 자리를 두고 CCTV 사각지대에 주차가 되어 있었나 봅니다.피해자 차량이 어디에 있었는지 보이지가 않아요. 여기 보시면 피해자가 보입니다. 피해자도 자기 차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한참 동안 지하 2층 주차장을 돌아다니더라고요. 그러다가 여기서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이 구역에는 CCTV가 없다 하네요. 피해자가 보이지 않은 시점 후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량을 살폈는데 이십 분 정도 있다가 피해자 차량이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이십 분이면 좀 길지 않아?-길죠. 무슨 일을 한 건지 알 수도 없고. 주차하러 들어오고 나가는 차량이 워낙 많은 곳이라 시간대를 맞추어서 살피기는 애초에 불가능하고. 큰 회사의 회장이나 되는데 혼자 퇴원하게 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일이 그렇게 되려고 하니 그렇게 된 건가 싶기도 하고.-왜 혼자 퇴원했다는데? 마우스가 왜 이래?박 팀장이 마우스로 영상을 확대하려 했으나 마우스가 말을 듣지 않았다.-아까부터 이상하더니. 건전지가 다 되었나 봅니다. 갈아놓겠습니다. 왜 혼자 퇴원하게 두었는지 물어봤지요. 인공 폐 이식 수술을 받은 후 한참 동안 입원을 했답니다.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상태가 되어 퇴원을 했는데 피해자가 다른 사람에게 운전대를 안 맡기는 성격이라네요. 나이가 팔십 일곱인데도 자기가 운전할 수 있다고 아무도 나오지 말라고 했답니다.담당 교수가 그러는데 마지막 회진을 돌 때 그랬답니다.혼자 퇴원해서 회사에 깜짝 출근을 할 거라고. 그래야 평소에 직원들이 어찌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고.하나 있는 아들은 해외 출장을 갔고 사실혼 관계이던 여자는 산전 진찰을 갔었답니다. 하필 그날.-산전 진찰? 무슨 말이야? 손주 며느리도 아니고 사실혼 관계? 팔십 일곱이라 안 했어? 내가 잘못 들은 거지?-그게, 마이걸이랍니다. 마이걸. 나 같은 홀아비는 피해자 가족이나 용의자들 쫓아다니고 구십이 다 되어가는 노인은 어린 여자하고 그러고 있고. 세상이 그런 거지요, 뭐. 임신까지 시켜가면서. 임신이 가능하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사건 별로 재미없습니다. 나는 왜 사나 싶기도 하구요.의자에서 일어난 박 팀장은 허 형사의 등을 토닥였다.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가자며 허 형사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하여튼 이거 빨리 끝내자. 위에서 말 나왔다. 빨리 그리고 반드시 범인을 잡아내라고.허 형사는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빨았다가 뱉어냈다.-그게 재촉한다고 됩니까?박 팀장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서장님한테 전화가 온 모양이야. 김영권이라고. 국회의원. 있잖아, 지난번 전 국민 기본 소득 국민 투표 부결시킨 그 국회의원. 피해자와 관계가 깊었던 모양이야. 범인을 반드시, 빨리 잡아내라고 서장님에게 닦달을 했나 봐. 그 국회의원이 지금 여당 실세라며?허 형사는 담배꽁초를 종이컵 바닥에 문질렀다.-김영권요? 국민 기본 소득 부결시키고 노인 기본 소득으로 바꿔 통과 시킨 그 사람이지요? 거기도 나이가 팔십이 다 되었을 겁니다.팔십이 다 되어가는 정치가와 구십이 다 되어가는 부자라. 친할 수밖에 없겠네요. 지들이 다 해 처먹고 있으니.혼자 먹으면 심심했을 거고. 니미, 젊은 나는 똥이나 닦고 있고. 아, 갑자기 이 사건 수사하기 싫어지네. 팀장님, 이 사건 다른 팀 주면 안 됩니까? 아니면 뭉개다가 미제사건으로 처리해버리든지.박 팀장은 두 손으로 허 형사의 양쪽 어깨를 주물렀다.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그렇지. 그래도 어쩌겠냐. 우리 일인 것을. 그러니까 빨리 끝내고 다른 사건 해결하러 가야지.허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 팀장의 손을 어깨에서 내리며 대답했다.-네, 압니다. 알지요. 그냥 기분이 그렇습니다.둘은 경찰서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박 팀장이 앞서서 계단을 걸어 올라갔고 허 형사가 뒤를 따랐다.-팀장님, 이상한 게 또 있습니다. 굳이 왜 시신이 발견되도록 두었냐는 겁니다. 어디에 묻어버리거나, 물속에 던져버려도 될 것을 굳이 옷을 다시 입혀 차에 태웠냐는 거지요. 일부러 발견되기를 원했던 거잖아요.-그러네. 단순한 사건이 아닐 수도 있겠어. 범인을 잡으면 꼭 물어보자고.-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왜 그랬는지 추측이라도 해야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아들이….

2022-04-04

나무를 심는 마음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일제히 꽃망울을 터트리는 찬란한 봄이다. 길섶에 다소곳이 알거나 모르게 들꽃이 웃음짓고, 언덕이나 길가에 벚꽃이 팝콘처럼 피어나는 개화의 절정이다. 앞서거나 뒤서며 시시때때로 피어나는 꽃들은, 어쩌면 밤하늘의 별들이 땅으로 쏟아져내려 꽃의 화신으로 새롭게 빛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꽃을 보면 마음이 환해지고 별을 보듯 밝아지는 걸까? 대지에 새 옷을 입히는 풀과 별빛같이 총총한 꽃과 가지마다 연둣빛 잎새가 손짓하며 바야흐로 봄날이 깊어 가고 있다.차분하게 또는 현란하게 꽃잔치를 벌이고 나면 산과 들은 온통 잎새 잔치로 이어진다. 꽃이 피기 전부터 이미 실눈처럼 연한 움을 틔우거나, 꽃이 지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앙증맞은 연초록 잎새들이 동시다발로 생명의 손을 내민다. 하루가 다르게 봉긋봉긋 돋아나며 잎차례를 벌이는 나무들은 힘찬 기지개라도 켜듯이 줄기와 가지 마디마디 연둣빛 촉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쪽저쪽 새순이 나무마다 가지마다 어김없이 돋아나기에 4월을 ‘잎새달’이라 하는 걸까?“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빛나는 꿈의 계절아/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목련꽃 그늘 아래서/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 박목월 시 ‘4월의 노래’ 중피어나는 꽃들과 잎새들이 부쩍 돋아나는 4월은 그야말로 빛나는 생명과 약동의 계절이다. 봄 기운이 충만하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잎새달은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튼다’는 말처럼, 강인한 생장을 멈추지 않고 줄기와 이파리를 줄기차게 늘려 나간다. 그래서 나무심기 좋은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해 조림(造林)정책과 산림녹화사업을 강화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나무와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산림육성과 보호를 실천했었기에 녹화사업의 세계적인 모범사례로 기록되기도 했었다.나무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기만 한다. 꽃과 잎새를 드리워 향기와 신선함을 주고, 맑은 공기와 시원한 그늘로 건강과 편안한 쉼을 누리게 해준다. 또한 양식(良識)의 보고(寶庫)인 책 종이를 만들어 주고 세찬 바람을 막아주는가 하면 팍팍한 삶의 터전을 굳건히 지켜주기도 한다. 그러한 나무에는 켜켜이 애환이 스며 있고 나이테마다 역사가 점철돼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식 같고 이웃 같으며 친구 같고 스승 같은 나무와 숲을 잘 가꾸고 보전해야 한다.옛날에는 딸이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심어 시집갈 때 장롱을 만들어 보냈듯이 나무는 재산의 밑천이기도 했었다. 요즘도 관공서나 기업체에서 기념식수를 하는 것은 단순히 기념식의 요식행위가 아니라, 어쩌면 봉황을 기다리는 벽오동을 심은 뜻처럼 태평성대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는 염원이 아닐까 싶다. 최근의 울진 산불로 송이 주산지의 소나무 70%가 소실됐다 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예년 같은 송이 생산을 하기까지는 최소한 50년이 걸린다니, 삶의 터전을 잃고 망연자실해하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녹화와 조림, 산림보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청명(淸明)이자 식목일인 오늘, 저마다의 반려나무를 심으며 국토와 마음의 밭을 푸르게 일궈보자.

2022-04-04

윤석열 당선인에게 드리는 고언(苦言)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둘러싼 신(新)·구(舊)권력의 충돌은 윤석열 당선인의 앞날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협치를 통해서 통합에 노력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벌써 잊어버렸는지 ‘떠오르는 별’이 ‘지는 별’과 힘겨루기 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윤 당선인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무엇보다 ‘열린 마음’으로 협치와 통합에 나서야 한다. ‘닫힌 마음’은 협치의 가능성을 외면하는 ‘적대적 사고방식’이다. 협치는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원칙이며,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요구하는 현실적 조건이다. 이 원칙과 조건을 무시하고 일방통행 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식물대통령이 되고 말 것이다. 더욱이 빈부·이념·정당·학력·성별·세대 등의 갈등, 즉 ‘문화전쟁(culture war)’이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나라이니 협치와 통합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다.협치를 위해서는 패자를 포용할 수 있는 승자의 넓은 도량이 필요하다. 협치는 힘을 가진 자가 먼저 손을 내밀고 양보할 때 시작된다. 협치의 전제는 ‘다름에 대한 존중’이다. 야당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협치 할 수 있다. 독일은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준 메르켈(Angela D. Merkel) 수상의 성공적인 협치 16년을 통하여 세계의 중심국이 됐다. 야당의 이념과 가치를 존중하고 그들의 합리적 주장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윤 당선인은 두 동강 난 나라의 현실과 ‘승자독식(勝者獨食)’ 정치제도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통섭(統攝)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측근과 공신(功臣)만 챙기는 보은인사는 결국 자신에게 독이 되어 돌아온다. 협치를 위해서는 여야를 가리지 말고 널리 인재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통합의 정치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가 통합을 역설했고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체적 행동이 뒷받침되지 못함으로써 분열만 심화시켰다. 통합을 위한 실천행동의 첫 단계는 ‘소통’이다. 대통령 집무실을 옮긴다고 해서 소통이 잘 된다는 보장은 없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소통에 필요한 대통령의 인식과 의지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검찰조직 총수가 지녔던 권위적 태도로서는 소통이 어렵다. 소통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며,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대선 결과 0.73% 득표율 차이는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았던 절반의 국민소리도 경청하라는 의미이다.이를 위해서는 당선인의 오만과 독선을 막아줄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이 필요하다. 권력 주변에는 언제나 ‘권력 불나방’들이 우굴 거린다. 당선인이 ‘예스맨(yes man)들’의 감언이설과 집단사고에 휘둘리는 순간, 교만과 독선의 늪에 빠진다. 이 늪에서 그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충성스런 비판자’ 밖에 없다. 당선인의 성공 여부는 ‘내로남불’이 아니라 ‘춘풍추상(春風秋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2022-04-04

레퍼럴 마케팅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레퍼럴 마케팅’은 실시간 가상화폐 투자를 주제로 하는 인터넷 방송에서 주로 활용되고 있는 마케팅기법(Referral Marketing)으로, 제3자가 추천인 코드를 입력하고 가상화폐 거래소에 가입해 투자를 시작할 경우 코드 소유주에게 보상 명목으로 가상화폐나 수수료를 지급하는 방식을 말한다.신규 가상화폐 거래소가 유명 인터넷 방송인에게 코드를 생성해주면 방송인은 해당 거래소로 투자 방송을 진행하며, 코드를 배너 광고로 띄운다. 이때 시청자가 해당 추천인 코드를 입력하면 거래 수수료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레퍼럴 마케팅을 하는 인터넷 방송은 손실 위험이 매우 큰 ‘가상화폐 선물·마진거래’등 자극적인 거래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즉, 시청자에게 위험한 투자를 과도하게 부추길 위험이 크다는 것. 예를 들어 향후 코인 가격을 예측해 베팅하는 ‘가상화폐 선물·마진거래’의 경우 100배가 넘는 ‘레버리지’를 투입할 수 있는데, 가상화폐 가치가 상승하는 데 베팅하면서 125배 레버리지를 투입할 경우 1% 가치 상승 시 125%의 수익을 낼 수 있다. 반면에 만약 가치가 1% 하락하면 손실액에도 역시 125%가 반영돼 막대한 손해를 떠안게 된다. 코드 소유주인 인터넷 방송인은 별도의 수수료를 받기 때문에 방송인은 자극적인 투자 방송을 하면서도 위험성을 숨기고, 최대한 많은 시청자가 거래에 나서도록 부추긴다. 또 레퍼럴 마케팅을 하는 인터넷 방송은 가상화폐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투자금이 넉넉지 않은 비교적 낮은 연령대의 시청자들이 많이 본다.명심해야 할 것은 어떤 투자든 결국 본인의 판단이 가장 중요한 만큼 장·단점을 명확히 알고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4-04

석곡기념관 건립 의미와 과제

윤희정종합취재부장(부국장대우) 포항시가 석곡기념관 건립 계획을 발표한 지난달 20일은 시민들에게 무척 뜻깊은 날이었다.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수년간 역점을 두고 추진해온 석곡기념관의 청사진을 드디어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석곡(石谷) 이규준(1855~1923)은 포항이 낳은 근대 한의학의 선구자이자 실학자인 조선 후기의 대표적 유의(儒醫)다. 석곡기념관은 그의 역사적 업적과 남긴 모든 발자취를 조명하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교육·문화·체험·관광자원으로의 창출을 목적으로 건립이 추진돼왔다. 하지만 지역을 바라보는 시선이 글로벌화하고 있는 변화추세에 비추어보면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다.내년 5월경 시민들에게 선보일 기념관은 이규준의 생애와 학문, 업적을 담은 전시공간으로서 석곡 생가가 있는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 주민과 향토사학자, 석곡 제자들의 모임인 소문학회 등이 소원해온 20여 년 염원의 결실이다. 기념관은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548호로 지정된 이규준의 저술 목판 364장을 보관할 수장고, 선생의 각종 유품을 전시할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실을 구비한다. 또 영상관과 휴게공간인 카페테리아도 마련한다.이 같은 문화재는 지역주민에게 문화적으로 예술문화 정체성·문화생활에 도움을 주고, 사회적으로 공동체·사회통합·사회자본 형성에 기여해야 한다. 또 교육적으로 전통문화·인문정신문화·지역사회를 이해시킬 뿐 아니라 나아가 경제적으로 관광·문화경제·지역 활성화에 도움을 주면서 지역 문화진흥의 핵심 동력으로서 기능해야 한다. 특히 최근 지역 문화산업은 창조산업의 영역 확대 등 지속적, 근본적인 변화과정을 맞고 있다. 가히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번 석곡기념관 건립을 지역 문화산업의 패러다임 변화에 적용해 보자. 50여억 원으로 지어지는 제1종 박물관인 기념관이 과연 지역 문화산업의 글로벌화를 염두에 두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더 많은 예산을 확보해 기념관의 글로벌화의 확장 모드를 고려해 건립했어야 마땅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최근 지역을 바라보는 시각은 또다시 달라지고 있다. 지역의 경쟁자는 인근이 아니라 세계 어딘가에 있는 지역과 문화 콘텐츠들이다. 이에 따라 지역의 산업정책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로 방향성이 바뀌어 가고 있다.소중한 유물을 체계적으로 보전·전시하고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이 한 곳도 없는 포항에서 접근성이 좋은 석곡기념관은 민족의 앞날과 민생을 염려한 유학자의 신념을 면면히 기억하고 계승하는 또 다른 문화 콘텐츠이자 미래 세대를 위한 산 교육장이 되리라 믿는다.이제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 우선, 예산 추가확보를 통한 체험실 등 공간의 확충 노력과 함께 인근에 있는 석곡서당 및 생가 등과 연계한 석곡 문화벨트를 조성해 더 많은 콘텐츠를 제공해야 한다. 전시물을 더 발굴해 볼거리를 늘리고, 즐길 거리도 함께 제공해 유익한 교육의 산실로 만들어야 한다. 국민이 선조들의 발자취를 체험하고 문화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인들이 의미 있게 찾는 글로벌 메카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2022-04-04

정치인은 얼굴이 두꺼운 게 미덕인가

김진국 고문 잘못을 인정하기는 참 어렵다. 제 눈의 들보는 보기 힘들다고 성경은 말한다. 자기 잘못을 아는 것이 어려우니 인정하는 게 더 힘들 수밖에 없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게 자기 잘못을 알면서 고백하는 일이다. 자존심이 상하고, 모욕감을 감수해야 한다. 일상에서는 자기 잘못을 몰라 우기는 이보다는 알면서도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인다. 몰라서 생긴 갈등이야 이야기하면 합리적으로 풀 수 있다. 알면서 우기는 사람은 대책이 없다. 풀어야 할 숙제는 제쳐놓고 엉뚱한 문제로 시비를 벌인다. 시시비비는 이미 알고 있으니 새로운 문제로 돌려 말꼬리를 잡고, 모욕한다.김정숙 여사의 옷 문제도 그렇다. 사실 대통령 부인은 공식 행사가 많다. 공무원이 아니면서도 공무를 수행한다. 옷으로 국격을 대변하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일정 정도 예산 지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국민이 받아들일 수준 안에서다.우리 사회가 점점 더 투명해진다. 이제까지 청와대 살림이 비공개로 이루어졌다면 그것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발전이다. 모욕을 주고, 수치심을 느끼고, 국정에 지장을 줄 정도로 소란을 피울 일은 아니다. 지나친 부분이 있다면 솔직히 털어놓고 사과하고 넘어가는 게 옳다.답답한 건 문재인 정부는 무조건 부인만 한다는 점이다. 안보를 저해하지 않고도 의전비용을 공개할 방법은 많다. 개인 비용으로 쓴 부분을 밝혀도 저절로 확인된다. 대통령 기록물로 밀봉해 법원 판결을 무효로 만드는 건 대통령이 선택할 방법이 아니다. 사실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특별감찰관 제도를 만들었지만 문 대통령은 임기 내내 임명하지 않았다.20년 집권, 50년 집권을 외치던 민주당이 5년 만에 정권을 내놨다. 10년 주기도 못 채웠다. 사실 경쟁자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수많은 여론조사에서 확인됐지만, 민주당이 싫어서다. 믿지 못해서다. 가장 큰 원인이 ‘내로남불’이다. 핵심이 조국 사건이다. 조국 사건으로 민주당의 ‘내로남불’이 비난받고, 윤석열 후보도 만들었다. 국민이 그 사건의 희생자로 그 사건을 바로잡은 것이다.문재인 정부는 임기 내내 비슷한 행태를 보였다. 조국 사건이 불거졌다. 대선 과정에 민주당 이재명 후보도 사과했던 일이다. 배경이니, 의도니,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사건만 보자. 분명히 잘못한 점이 있다.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는 엄두도 못 낼 일을 했다. 상류층 모두 하던 일인지, 상류층 일부만 한 일인지 몰라도 일반 국민은 피해를 봤다. 특권층이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자기 자식을 대신 올려보낸 사실이 확인됐다. 그것도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외친 정부에서, 수없이 트위터로 ‘특권층의 부도덕’을 폭로해온 ‘정의의 상징’이.그때 사과하고 끝냈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철저히 부인했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히스테리를 보였다. 임기 내내 질 수밖에 없는 진실게임을 벌였다. 오히려 조국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상대를 공격하고, 진영 결집의 계기로 삼았다. 법질서도, 상식도 부인했다. 맞는 말도 못 믿게 신뢰를 잃었다.윤미향 사건, 박원순 사건…. 돌이켜 보면 하나 같이 어이가 없다. 개인의 일탈을 진영의 도덕성으로 감쌌다. 우리 편에겐 티끌만한 잘못도 없다는 신화를 만들었다. ‘우리 ○○이는 화장실도 안 가’ 식으로 아이돌 놀이를 벌였다. ‘개딸놀이’, ‘개준스기’ 덕질로 발전했다. 정치에 즐겁게 참여하는 데는 희망이 보이지만, 나라 운명을 놀이로만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논두렁 시계를 소환하기도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모르는 사이 벌어진 일이고, 노발대발 바로 잡으려 했다. 그렇다고 시계가 없었던 것도, 기업인의 돈을 받지 않은 것도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이 몰랐을 뿐이다. 이제 와 없었던 일처럼 말하는 건 노 전 대통령을 욕보일 뿐이다.정치인은 얼굴이 두꺼운 게 미덕인가. 반성 없이는 발전이 없다. 그런 태도로는 극렬지지자만 뭉친다. 결국 지방선거에서도 국민의 판단을 받게 돼 있다. /김진국 본사고문

2022-04-03

유튜브 예찬론

김규종 경북대 교수 새로운 옷이나 물품이 유행하기 전에 남보다 빨리 사거나 시험해보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가장 늦게 어쩔 수 없는 얼굴로 따라오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부유(浮遊)하며 살아간다. 물질적인 부나 정신적인 여유 또는 대담성이 완비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최후의 모히칸이 되기도 싫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중간자로 살아가는 일은 가장 평안하고 안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나도 언제부턴가 유튜브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오래전에 텔레비전을 두지 않았기로 저녁 시간을 넉넉하게 보낼 수 있다. 책을 읽거나 기타를 치며 노래하거나 상념에 잠기거나 명상하거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우연히 얻어걸린 유튜브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기계를 잘 알거나, 적극적으로 알고 싶은 기질도 없어서 최소한으로 유튜브를 만나면서도 기실 놀라운 바가 적잖다.나한테 유튜브는 명탐정 ‘셜록 홈스’ 연작이나 중단편 소설을 듣는 수단이다. 따로 시간을 내서 읽겠다는 강박증 없이 다른 일 하면서 귀만 열어두면 가능한 노릇 아닌가?! 일석이조(一石二鳥)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한밤의 적요(寂寥)를 나직하게 깨뜨리며 들려오는 낭송자들의 정감 어린 목소리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해준다. 아하, 참 멋진 신세계로군! 혼잣말한다.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다가 돌연 알게 된 사실이 유튜브의 세력 확장이다. 정말로 많은 사람이 유튜브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던 터였다. 나만 모르고 있었군, 하는 자탄이 절로 나온다. 그들도 나처럼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혹은 신문과 작별하고 유튜브에 의지하여 많은 걸 얻고 있었다. 사람마다 취향과 필요에 따라서 접하는 내용만 다를 뿐, 매체 활용도와 충성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음이 드러난다.얼마 전 피천득 선생의 유명한 수필 ‘인연’을 들으며 감회에 젖는다. 꼬마 아사코와 처녀 아사코를 거쳐 일본인 2세의 아내가 된 주부 아사코와 세 번 만남으로써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수필가. 마치 단편소설의 장면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를 듣다가 불쑥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우리 이다음에 이런 집에서 살아요!” 하고 아사코가 속삭였을 때, 연두색이 고왔던 아사코의 우산을 보았을 때, 왜 그는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더욱이 결론적으로 하는 말이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했다는 넋두리다. 그러니까 달착지근한 추억은 가슴에 간직하되, 쓰라린 작별 장면은 불요불급(不要不急)한 것이라 결론 내린 셈이다. 저런 이기주의자의 사무치는 회한과 그리움의 잠꼬대에 오랜 세월 붙들려 살았군, 하는 자책 아닌 자책이 소리 없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강렬하게 아사코를 마음에 두었다면 어째서 말하지 못했을까?!식민지 조선의 유약한 서생 수필가가 인생의 황혼 무렵에 느닷없이 도달한 깨우침이란 게 저런 것이었나, 하는 걸 새삼 알려준 유튜브를 예찬하고 싶은 게다. 인연은 함부로 맺어서도, 함부로 걷어차도 아니 되는 것 아닌가?! ‘불수자성수연성’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리라.

2022-04-03

코시국 벚꽃맞이

우정구 논설위원 온통 벚꽃 천지다. 발걸음 내딛는 곳마다 봄이 왔음을 알리는 벚꽃 만개로 즐거움이 넘친다. 지난 주말 남부지방 일대는 벚꽃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곳곳이 붐볐다. 경주 보문단지와 대구 팔공산 등 대구와 경북지역 벚꽃 군락지도 북새통이긴 마찬가지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오랫동안 짓눌렸던 나들이객의 얼굴도 만발한 벚꽃마냥 환한 웃음꽃으로 활짝 피었다.벚꽃은 보통 3월 하순에 개화해 4월 상순 꽃잎이 진다. 제주 서귀포에서 시작한 벚꽃의 개화는 4월 중순 인천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인다. 짧고 화려하게 피었다가 잠시 눈 돌리는 사이 사라져버리는 벚꽃의 개화는 늘 아쉬움이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보고 “우리의 삶과 무척 닮았다”고 표현했다. 새싹이 나서 꽃이 되어 떨어지는 자연의 섭리가 인생의 흐름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벚꽃은 짧고 화려하게 피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질 때 모습이 더 아름답다고 한다. 꽃잎이 얇아 하나하나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꽃비가 내리는 듯한 모습이어서 장관이다. 낭만적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아주 적합해 영화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한다.지금은 벚꽃이 볼거리로 기쁨을 주지만 옛날에는 벚나무가 인쇄용 목판이나 활을 만드는 재료로도 많이 사용됐다. 고려시대 만든 팔만대장경 판의 재질 60% 이상이 산벚나무다. 조선시대 때는 활을 만드는 재료로 벚나무 껍질을 사용했다. 화피라 불렀다.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3년째 접어든 올해도 전국의 벚꽃축제는 열리지 못했다. 축제는 열리지 않았으나 벚꽃은 이와 무관하게 그 화려함을 뽐내며 꽃잎을 피웠다. 자연의 순리 앞에 그 무엇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코시국’에 즐기는 벚꽃놀이가 이번이 마지막이면 좋겠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4-03

일본은 우리의 적인가

이정희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일본은 우리의 적인가’, 이 도발적인 제목에 끌려 책을 사고 말았다. 물론 필자는 일본을 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는 과연 일본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글을 썼을까가 궁금해서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한일 간의 갈등의 핵심에 대해서 저자는 일본의 무가(武家)사회의 칼의 윤리와 한국의 유교사회의 붓의 윤리를 비교하였다. 일본의 무가사회와 한국의 유교사회에 착목해서 차이점을 논한 연구자는 저자 이덕훈씨가 처음은 아니다. 지난 2월에 세상을 달리한 이어령씨 역시 한일문화의 이질성에 대해서 무가사회와 선비사회의 차이를 지적한 바 있다. 필자 역시 일본, 일본인, 일본문화를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일본의 무가사회의 특징, 사무라이 정신 등이라고 생각한다.일본에는 사람은 사무라이, 꽃은 벚꽃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무라이가 되어야 하고, 꽃 중에서는 벚꽃이 으뜸이라는 이야기다. 사무라이와 벚꽃이 지니는 상징성만 연구해도 일본인들의 사고형태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그럼, 사무라이의 칼의 윤리를 살펴보기로 한다. 칼의 윤리에서 최고의 악은 지는 것이다. 이기고 지는 승패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기면 힘이 있고, 떳떳한 것이고, 지면 약하고 창피한 것이다. 사무라이들은 싸움에서 지면 반성하고 참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불명예를 극복하고자 할복자살을 한다. 할복자살을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운다. 아니 죽기 위해서 싸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죽음은 때로는 모든 것을 용서받는 경우도 있다. 또한, 무가사회에서 특이한 점은 배신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실리를 위해서는 배신이 통용되는 것이다.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유교사회의 붓의 윤리에서는 승패도 중요하나 선악을 중심 가치관으로 본다. 즉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따진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겼을 경우 우리는 그 승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배신은 더더욱 허용하지 않는 사회다. 우리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이와 같이 칼의 윤리와 붓의 윤리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상태라면 합일점을 찾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나 선악의 기준은 인류 보편적인 가치 기준이다. 이 보편적인 진리를 일본인들이 깨우친다면 새로운 변화가 일 것이다.유학시절, 같은 외국인 유학생 중에 타이에서 온 친구와 필리핀에서 온 친구들과 한일관계에 대해서 논한 적이 있다. 이때 그 친구들이 “한국과 일본은 형제들끼 리 싸우는 것 같다”고 말을 해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들 눈에는 생김새도 비슷하고 문화도 비슷하다고 본 모양이다. 정말 형제가 지독하게 싸우면 어떻게 될까. 좀처럼 화해하지 못하고, 의절을 하고 평생 안 보고 지내기도 할 것이다. 조금도 화해할 분위기가 아닐 경우 제3자가 개입을 해서 좋아질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우리는 선악의 논리에서 대의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려고 하고, 전략적으로 제3자를 이롭게 활용하면 일본이 수그러들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2022-04-03

삶의 균형을 잡는 법

유영희 작가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톨스토이의 말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사람도 가까이서 보면 상처투성이인 경우가 많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상처 때문에 균형을 잃고 괴로워한다.청소년 성장 소설 ‘불균형’에 나오는 두 등장인물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왕따를 당하던 중학생 소녀는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여자를 초록아줌마로 착각하고 도움을 청한다. 초록아줌마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초록색인데, 그 아줌마의 머리와 옷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아이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상상 속 존재다. 하지만 그 여자는 젊고 노란 옷을 입고 있었으며,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해서 회사에 몰래 해를 끼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기우뚱거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균형을 잡는 데 서로 도움을 준다.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도 균형을 잃은 인물이 나온다. 남자 주인공 가후쿠는 유명한 배우이자 연극연출가다. 아내 오토와의 결혼 생활도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 부부 사이에는 두꺼운 벽이 있었다. 아내가 결연한 태도로 할 말이 있다고 한 어느 날 가후쿠는 두려운 마음에 일부러 늦게 귀가했다가 쓰러져 있는 아내를 발견한다. 일찍 발견했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아내와 추억이 많이 담긴 무대에 다시는 서지 못한다.2년 후 가후쿠는 안톤 체홉의 작품을 연출하게 되었는데, 그때 운전기사 미사키를 알게 된다. 미사키 역시 집에 불이 났을 때 평소 자신을 학대하던 엄마를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으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그러던 중 연극 주인공 바냐 아저씨 역할을 맡은 배우에게 문제가 생겨 부득이 가후쿠가 바냐 아저씨 역을 해야 할 상황이 된다. 가후쿠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미사키의 고향 홋카이도로 가면서 두 사람은 각자의 상처를 말하게 되고 그 후 가후쿠는 무대에 설 수 있게 된다.여기서 영화 속 두 주인공의 대화 방식이 특이하다. 상대의 감정에 대놓고 공감하지도 않고 위로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연극 속 소냐가 수어로 연기하고 대사는 자막으로 나오게 한 것도 인위적인 감정 표현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런 방식이 발휘하는 치유 효과는 상상을 넘는다. 그러나 이런 문학과 영화 속의 드라마틱한 해피엔딩이 일상에서 일어나기는 쉽지 않다.우리가 노란 옷을 입었더라도 문학작품을 읽고 경험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은 치유되며 균형을 찾아갈 수 있다. 며칠 전 산문집 ‘여행하는 나무’를 같이 읽으며 알래스카의 자연 묘사에 뇌파가 안정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우리는 여기까지 너무 빨리 걸어왔소. 마음이 우리를 찾아 여기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오.’라는 한 문장에 감당하기 어려웠던 스트레스가 슬그머니 놓여나기도 했다. 이렇게 굳이 조언을 하거나 위로하지 않고 좋은 문학작품을 천천히 읽기만 해도 삶의 균형은 슬그머니 맞춰질 수 있다.

2022-04-03

산불 속에서도 봄은 오고 있다

김성준 울진문화원장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앗아갔다. 연일 수십만명의 확진자가 발생하다 보니 위기감도 둔화되었고 오히려 감염되지 않은 사람이 희귀할 정도다. 더구나 울진은 3월 4일부터 발생한 산불이 코로나와 겹쳐 엄청난 피해와 함께 모든 군민들이 경황이 없다.그렇다고 계속 한숨만 짓고 있을 수는 없다. 다시 용기를 내어 조속히 복구하고 농사일도 시작 해야한다. 울진 사람들은 어려울수록 강해지며 위기를 호기로 삼는 저력이 있다. 다 같이 힘을 합쳐 이 고난을 극복해야 한다.사실 울진은 최근 들어 발전할 소재들이 많김으로써 상당한 지각변동을 이루고 있다.우선 36번 국도의 개통으로 영주, 풍기 등 내륙지방 관광객들의 왕래가 엄청나게 불었다. 왕피천 공원에서 망양정 까지의 케이블 카는 짧은 거리이지만 의외로 인기가 높아 평일에도 많은 인파가 몰려온다. 또한 후포 등기산 스카이 워크는 동해안의 명소가 되어 주말이면 대게를 찾는 관광객과 함께 어깨가 닿을 만큼 많은 인파로 북적인다. 요즘은 죽변항에도 새로운 시설이 개통되면서 죽변항을 찾는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작년에 개통된 죽변 스카이 레일은 주말이면 주차할 공간이 없을 정도다. 매표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과 매표후 승차까지 두 서너 시간을 기다려야 겨우 스카이 레일 차량에 오를 수 있다. 참으로 울진은 최근 몇해동안 많은 볼거리, 즐길거리가 생겼다.이번 3월9일 대통령 선거이후 그간 중단되었던 신 울진 원자력 3,4호기가 다시 재개될 전망이다. 여러 언론에서 연일 발전소 건설 재개의 청신호들을 쏟아내고 있어 그동안 침체되었던 울진의 건설 경기나 경제 사정도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비록 유례없는 산불의 발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실의에 빠져 있지만 주변 여건들을 보면 분명히 희망의 봄은 오고 있다.이제 두어달 후면 6월 지방 선거가 있다. 광역, 기초 자치단체의 장과 의원 지망자들이 저마다 장밋빛 공약을 내세우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지금도 많은 후보 지망자들이 유권자들을 찾아 얼굴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군민의 복지향상과 울진의 미래를 책임질 앞으로의 일꾼은 과연 어떤 사람들어야 하는가?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 볼 것이다. 필자도 군민의 지도자 중 한사람으로써 많은 생각을 하면서 출마 희망자들에게 어줍잖은 주문을 하고 싶다.중국 남송때 허당 (虛堂) 지우(智愚)가 쓴 법어(法語)에 「逐鹿者不見山(축록자 불견산)」이라는 말이 있다. ‘사슴을 쫒는 자는 산을 보지 않는다’는 말로 명예나 이욕에 미혹된 사람은 주변을 잘 돌아보지 않는다‘ 라는 말인데 실지 좋지 않는 쪽으로 많이 인용된다.지역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출마하는 분들은 모두 저마다 포부가 있겠지만 위의 고사와 같이 군민을 위해 어떤 일들을 해 나가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한다. 막연하게 확실한 계획도 없이 명예를 탐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선거철 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필자는 울진의 미래 지도자상을 이렇게 그려본다.청렴이나, 친절이나 이런 것은 기본이고 무엇보다 선진화된 열린 마인드가 중요하다고 본다.또한 서두의 언급처럼 울진은 발전요소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 여기다 신 울진 원자력 3.4호기 공사가 재개되고, 곧 동해 중부선 철도까지 개통되면 울진은 완전히 전국에서 이름난 고장으로 탈바꿈 되리라 예상된다.이러한 호재를 최대한 살려 영구히 울진군민이 잘살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리는 인재가 필요하다.사족 같지만 개인적 의견을 한가지 덧붙인다면 울진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원자력 발전소가 있어, 타 지역에 없는 재원을 갖고 있다. 지난 40년동안 원자력에서 지원된 군민 협력기금은 천문학적 금액이지만 군민의 피부에 닿는 지원이었느냐 하는 데는 의문이다.원자력에서 지원되는 돈은 군민의 목숨을 담보로 한 돈이다. 즉 돈의 주인은 군민이다. 법령에 문제가 있다면 법을 고쳐서라도 앞으로는 지방 자치단체장이 돈을 쓸 수 있도록 해야하며 단체장은 이 재원을 활용하여 군민이 영구히 잘살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어쨋던 울진은 이번 유례없는 산불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분명 봄은 오고 있다. 위기를 호기로 삼고 다시 한번 힘차게 도약하는 군민이 되기 바란다.

2022-04-03

칠포로 가는 길

포항에 산다는 것만으로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걸어서 10분이면 반짝이는 윤슬이 펼쳐지니 출근할 때마다 눈이 환해지고, 파도 소리 배경으로 소나무 숲을 거닐며 눈 호강 귀 호강을 겸할 수 있다.오늘 걸어볼 길은 영일만 북파랑길의 한 구간으로 해파랑길 18코스로 칠포해수욕장에서 오도리까지다. 길 가다 발견한 안내도에 이곳은 “동해안 연안 녹색길” 이라고 한다. 바다를 끼고 연결한 데크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물멍을 때리다 보면 칠포항에 다다른다. 칠포리 해안로 1546번길이다.독서회 회원인 문숙씨가 세컨 하우스를 지은 동네이다. 회원들과 하루를 같이 밤을 보내기로 한 날, 도시와는 달리 고요한 밤에 항구까지 밤마실을 나갔다. 편의점에서 뜨거운 커피 한 잔 사서 밤일하는 등대를 향해 걸었다. 코끝이 기분 좋게 시린 밤이었다. 우리 발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 목소리를 낮춰가며 웃었다. 한두 시간 먼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붙이고 다시 항구로 일출을 보러 가는데도 5분이면 충분했다.날이 풀리기 시작하는 날에 칠포항을 또 찾았다. 밤 산책을 하던 항구를 돌아서자제주도 어느 바닷가인가 싶은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검고 큰 바위가 듬성듬성 물에 몸을 담그고 파도를 온몸으로 맞고 있다. 바위에 낚시꾼들이 미리 와 찌를 드리우고 무언가를 열심히 낚는다. 아이들도 돌 틈 사이에 머리를 박고 친구를 불렀다.가까이 가서 보려고 바닷가로 내려가니 굵은 모래에 몽돌이 뽀작뽀작 소리를 낸다. 돌 하나하나가 다 어여쁘다. 함께 걷던 남편이 하트모양의 돌을 손에 올려주며 자기 마음이라고 해서 웃었다. 우리 소리를 듣고 파도가 잽싸게 몽돌 사이를 빠져나가며 까르르 웃었다.칠포성이라 불린 이곳 칠포리는 포항에서 수군만호진이 있던 곳으로 바다를 지키는 군사기지였다. 고종 8년(1870)에 동래로 옮겨 가기 전까지 7개의 포대가 있는 성이라서 ‘칠포성’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칠포(七浦)라고도 부르는데 절골에 옻나무가 많아서, 또는 해안의 바위와 바다색이 옻칠한 듯 검은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더니 제주 여행 중이냐고 답장이 왔다. 칠포항이라 하니 ‘이렇게 좋은 곳을 왜 몰랐지?’ 한다. 과거 군사 보호 구역으로 해안경비 이동로로 사용되었던 길을 동해안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탐방할 수 있는 트레킹 로드로 만들어 이제는 단절되었던 칠포리와 오도리 두 마을을 잇는 상생로가 됐다.몽돌해변에서 나무 데크를 따라 5분 오르면 해오름 전망대다. 해오름은 포항-울산 간 고속도로 완전개통을 계기로 포항, 울산, 경주 3개 도시가 함께하는 동맹의 이름이다. 위 3개 도시 모두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지역이면서 대한민국에 산업화를 일으킨 ‘산업의 해오름’지역이라는 점과 대한민국 경제 재도약의 ‘해오름’이 되겠다는 의미다.걷다 말고 발아래 바다를 바라본다. 물빛이 하도 좋아 눈에 한참 담았다. 앞에서 보면 타이타닉호를 연상케 하는 배 모습이고 계단을 내려서면 돛대가 높이 솟았다. 뱃머리 쪽으로 걷다 보면 구멍 뚫린 발판 사이로 바람이 스스럼없이 드나들고 구멍을 통해서 속이 훤히 보이는 동해의 속살은 더 깊고 푸르다. 사실 이 표현은 남편의 시선일 뿐 고소공포증이 중증인 나는 멀리서 사진만 찍어 주었다.전망대에서 오도리 간이해수욕장까지 1km 거리다. 가는 길에 갈매기의 까만 눈동자도 보고 주상절리도 찾으며, 드라마에서 치과로 나왔던 곳이 손님이 가득 찬 카페로 변신한 것을 확인하다 보면 오토캠핑장이 나온다. 주말엔 빈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인기다.북파랑길을 자세히 더듬으니 보물상자처럼 숨은 명소를 발견한다. 차를 타고 수도 없이 그곳을 지나쳤어도 알지 못했지만, 속도를 늦추니 눈에 들어왔다. 아직은 여러 사람 눈에 뜨이지 않아 조용히 산책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곧 드러날 일, 인파가 몰리기 전에 자주 영역표시를 해야겠다. /김순희(수필가)

2022-04-03

산불 원인은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

이재혁대구경북녹색연합 대표 지난달 순식간에 불이 붙어 손 쓸 틈도 없이 번진 동해안 산불은 최장 시간 산불 213시간, 산림피해 24.940㏊를 기록했다. 울진 1만8천463ha, 삼척 2천369ha, 강릉 1천900ha, 동해 2천100ha의 산림피해에다 4643세대, 7천279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산림청이 산불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1986년부터 지금까지 가장 큰 산불 피해라고 한다.이러한 최악의 산불이 발생한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산림의 건조함을 가져오는 가뭄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는 폭우, 한파, 가뭄 등 다양하다. 산림청 발표에 의하면 2021년 12월 1일부터 2022년 2월 28일까지의 평균 강수량은 13.3㎜다. 평년 강수량인 89.0㎜의 14.7%에 그치는 수준의 적은 강수량으로 더욱 건조해진 겨울 날씨를 산불의 배경으로 지목한다.우리나라는 산불 발생 원인이 자연발화로 인한 산불보다 입산자 실화나 농경지와 산림주변의 소각산불이 전체의 63%를 차지하고 있고, 그동안 축적된 산불 진압기술과 산불방지정책들을 바탕으로 점진적 감소추세에 있다.하지만 최근 연중 고온현상, 낮은 강수량, 건조일수 증가 등 기후변화와 우리 숲의 연료물질인 낙엽과 마른 가지들은 매년 증가하여 산불에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동해안 일대의 경우 강한 계절풍으로 인해 대형산불을 진화하는 것에 더욱 어려움이 있다.대형산불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호주 등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몇 달 동안 지속되는 안타까운 소식들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특히 호주의 경우 2019년 9월 발생한 산불이 6개월간 이어지며 대한민국 면적보다 더 넓은 면적이 소실됐다.시드니 대학의 생태학자들은 산불로 약 10억 마리의 동물이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불 피해는 호주에만 국한되지 않고 2,000㎞ 떨어진 뉴질랜드에서는 빙하가 산불로 인한 대기오염물질로 뒤덮여 누렇게 변해 햇빛 반사가 힘든 빙하는 더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다.유럽산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21년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 남부유럽에 집중된 산불로 인해 평년 수준의 8배인 12만8천㏊가 불탔으며, 다른 지역도 산불이 더 자주, 더 대형화되고 있다.유럽연합(EU)의 ‘코페르니쿠스 대기감시 서비스’(CAMS)는 2021년 전 세계 산불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이 유럽연합의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배출량보다 148% 많은 총 64억5천만t이 배출되었다고 발표하였다.IPCC 워킹그룹 II 6차 보고서에서는 이미 산불위험이 증가했으며 ‘지구평균 온도가 2℃까지 상승하게 되면 산불 피해 면적이 최대 35% 늘어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유엔 환경계획(UNEP)이 공개한 산불 보고서 ‘Spreading like Wildfire: The Rising Threat of Extraordinary Landscape Fires’에서 대형 산불로 피해를 보는 면적이 2030년까지 14%, 2050년까지 30%, 21세기 말까지 50% 증가하는 등 산불이 더 빈번하고 대형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국립산림과학원 발표에 따르면 기온이 1.5도 높아지면 산불 기상지수가 8.6% 상승하고 2.0도 오르면 상승 폭이 13.5%로 커진다. 이러한 기후변화는 다양한 영역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지역별 차이는 있지만 강우량과 가뭄 빈도는 증가하였고, 폭우는 점점 강해지고 한파, 온난화 현상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지구 온난화 현상이 대형산불을 가중시킨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산림청의 산불방지 종합대책에서는 자연 산불 방화선 및 산불진화 차량 진·출입 역할을 하는 산불방지 임도를 설치를 확대하고, 내화수림대 조성으로 산불에 강한 숲으로 개선하는 방안이 제시되어 있다. 그중에 산림 피해 복원 시 소나무만 심을 게 아니라 함께 다른 활엽수림과 섞어 피해를 줄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은 전문가들의 지속적인 의견이다. 하지만 이런 대책과 지적은 한계가 있다.척박한 산림토양과 강한 햇빛에도 잘 자라는 소나무와 같은 양수림의 특성을 이해 못한 지적이다. 양수림이 산림토양을 복원시키고 그 아래에서 음수림인 참나무류가 자라면 산림은 활엽수로 자연스럽게 천이된다. 이를 위해 조림지에 대해 숲 가꾸기 사업도 필요하지만 다른 사업에 늘 밀려 체계적인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불쏘시개 산림이 된 것이다.산불진화에 유용한 임도의 경우 지역균형특별회계로 다른 예산과 묶어 편성되어 선심성 사업에 쓰이는 경우가 많아 큰 문제이다.이제부터라도 산림전문가 의견을 수렴하여 실효성 있는 대책을 수립하였으면 한다. 산불피해지역이 산사태 등 또 다른 재해로 이어지지 않게 사방사업을 진행하고 산림복구사업에도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숲은 생명의 근본이며 잘 지키고 가꾸어야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를 막을 수 있다.

2022-04-03

전략정보시스템(SIS)과 선거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다.이번 대통령선거 결과를 보고 승리한 측이나 패한 측이나 “국민이 얼마나 냉철하고 무섭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은 압도적이었지만 선거결과는 박빙이었다. 정권교체의 열망과 함께 후보자에 대한 냉엄한 판단도 동반된 결과이다. 얼마나 국민의 판단이 준엄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국민은 현 정권의 실정을 간파하고 실망하고 그리고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를 위한 대안이 되기엔 부족한 야당에 대한 좌절감도 동시에 표현된 절묘한 결과이었다. 과연 정치인들은 국민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경제는 어려운데 서로 헐뜯기에만 몰두하는 건 반세기가 지나도 마찬가지이고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을 하는 정당과 정치인들의 모습은 정말 부끄럽다.이러한 한국 정치인들의 모습은 최근 러시아의 침략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는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정부관료들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다. 젤렌스키는 도피하라는 미국의 권유에 “Give ammunition, not ride”(“무기를 달라, 도피용 차는 필요 없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한국 정치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한국정치에 대한 생각은 밤을 새워도 끝이 없을 테니 이 정도로 접고 다가오는 지방선거에 대한 각 정당 전략가들에게 도움이 될 경영이론 하나를 소개해 본다.정보 시스템(Information System: IS)은 기업의 업무를 컴퓨터로 처리하여 업무의 생산성과 효율향상, 자원절감 등을 위하여 개발해 오던 것이 종래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IS가 단순히 기업의 효율을 높이는데 그치지 않고 기업의 전략을 실현하여 경쟁사나 경쟁제품에 비하여 경쟁우위를 확보하는 목적으로 정보 시스템을 활용하자는 이러한 개념의 정보시스템이 전략정보 시스템(Strategic Information System: SIS)이다.기업 경영 전략과 국가 경쟁력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유진 포터(Michael Eugene Porter)가 주창한 ‘5개의 경쟁세력 모형(5 Computing Forces Model)’이 큰 주목을 끌며 SIS의 기초를 제공하였다.포터는 1979년 발표된 하버드경영연구(Harvard Business Review: HBR) 논문(1979)을 통해 산업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다섯 가지 요소(5 forces)로 잠재적 진입자, 대체재, 기존 사업자와의 세 가지 요소와 공급자, 구매자 두 가지 요소를 합한 5개의 요소, 즉 경쟁세력을 제시하였다.잠재적 진입자와 대체재에 대하여는 진입장벽을 높이고 기존 사업자에게는 경쟁우위를 지키는 전략을 구사해야 하고 이러한 전략을 IS 구축을 통해 구현할 수 있다는 이론이 SIS에 근간이다.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나머지 2개의 요소, 즉, 공급자와 구매자이다. 공급자와 구매자도 잘 다스려야 하며 이를 IS를 통해서 구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협상력을 높인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사실상 그들이 함께 갈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논리이다.구매자의 협상력은 구매자가 구매선을 바꿀 경우 전환비용이 높도록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고 제품의 질이나 제품의 공급편이 및 애프터서비스를 높여서 이를 달성할 수 있다. 결국 구매자는 해당 업체의 제품이나 서비스에 환호하고 따르게 된다.공급자의 협상력도 공급자들이 공평과 정의로운 방식의 공급을 할 수 있도록 편의와 혜택을 주어 공급자들이 해당 기업이나 제품에 충성하도록 하는 것이다.이번 대통령 선거를 뒤돌아볼 때, 정당들과 후보들은 잠재적 후보자나 대체적 후보자의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 온갖 네거티브를 구사했고 기존 후보에 대하여는 흠집 내기로 일관했다.막상 중요한 공급자인 후보군과 구매자인 국민들에 대하여 얼마나 설득력 있게 이들을 대했는지 의문이다.이번 지방선거에서도 현역이나 과거 탈당 경력 등에 큰 페널티를 주는 것도 공급자에 대한 협상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그것은 공평과 정의로 여기기 힘들다. 사실상 공천에서 탈락하여 탈당한 후 당선된 후보는 오히려 경쟁력을 증명하고 공천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한 경우가 되기 때문이다.또한 대선에서는 구매자인 국민에게 설득력 있게 대하지 못했다. 구매자에 대한 협상력은 높지 않았지만, “투표하긴 싫지만 할 수 없이 한다”는 논리로 간신히 승리했다. 정권교체 열망보다 훨씬 적은 득표수가 이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다가오는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포터의 마지막 두 개의 요소 공급자와 소비자 특히 소비자인 국민을 생각하는 국민이 설득되는 그러한 정책과 캠페인을 펼치길 후보들에게 부탁해 본다.국민이 할 수 없이 선택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국민이 기꺼이 선택하는 그런 ‘협상력’을 가져야 한다.

2022-04-03

만우절

우정구 논설위원 오늘은 만우절이다. 대놓고 거짓말을 해도 용서가 되는 날이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속아주고 서로 웃는 날인만큼 지나치지 않은 거짓말이어야 서로가 즐거울 수 있다.이날은 영어로 4월 바보 날(April Foolday)로 부른다. 이날 속은 사람을 바보라고도 한다. 중세시대 프랑스 지방에서 유래한 날이라 한다. 지금까지 전해진 에피소드도 무수히 많다.1957년 영국 BBC방송은 “스위스에서 이상기온으로 나무에 스파게티가 주렁주렁 열렸다”며 스파게티면을 수확하는 사진까지 내보냈다. 만우절 기획기사로 밝혀졌지만 거짓말 정도가 심했다는 뒷날 평가다.1985년 미국 한 스포츠 잡지는 미국 프로야구단에 입단 예정인 시드핀치라는 신인선수가 시속 270km의 강속구를 던진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이 선수가 티베트 라마승 밑에서 신비한 수련을 했다고도 소개했다. 그러나 이 선수는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네덜란드 공영방송이 만우절을 맞아 이탈리아 피사의 탑이 무너졌다는 거짓 보도를 해 시청자들이 방송사로 확인하는 소동이 벌어졌다.우리나라에서는 설악산 건들바위가 떨어졌다는 내용이 인터넷에서 실시간 검색어로 떠 확인소동이 벌어진 경우가 있다. 만우절이 되면서 불이 났다는 거짓 전화가 소방서나 방송국 등으로 종종 걸려와 실제 긴급상황에 대처하는 데 지장을 준다는 당국의 발표가 나오기도 했다.거짓말은 상대를 속이거나 공격수단으로 삼는 정의롭지 못한 심리행위에서 나온다. 법률적으로 범죄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만우절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각박하지 않는 세상 민심을 바라서일 것이다. 선의의 작은 거짓말로 서로가 웃고 기쁨을 나눌 수 있다면 만우절도 괜찮은 날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3-31

홍준표, 대구시장 출마에 부쳐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지난 해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서 윤석열 당선인과 막상막하의 공천경쟁을 벌었던 홍준표 의원이 대구시장 출마를 공식선언했다. 그의 대구시장 선거출마는 보기드문 해프닝을 불러일으켰다.대표적인 게 바로 국민의힘 공천감정규정 파동이다. 지난 21일 국민의힘 최고위원회는 현역 의원이 지방선거 공천 신청을 할 경우 심사 과정에서 10%, 5년 이내 무소속으로 출마한 경우 15%를 감점하는 조항을 신설했다.홍준표 의원을 겨냥한 듯한 이 감점조항이 그대로 적용될 경우 총 25% 감점을 받게 될 상황이었다. 홍 의원은 즉각 반발했다.결국 경기에 뛸 선수가 심판의 역할까지 했다는 날선 비판에 못이긴 최고위원회와 공천관리위원회는 최고 10% 감산으로 후퇴했다. 여느 의원이었다면 최고위가 결정한 공천규정을 재검토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돌려놓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홍 의원이 5선 국회의원이자 2차례 대선주자로 나섰던 정치경륜 내지 정치력을 여실히 발휘한 셈이다.홍 의원의 대구시장 출마에 대한 비판여론도 있다. 가장 도드라진 주장이 대구시장 선거를 다음 대통령 선거를 위한 징검다리로 활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대구시는 오랫동안 1인당 지역총생산이 꼴찌를 기록하고, 산업은 쇠퇴해 인구가 줄고있는 상황이다. 설령 홍 의원이 대권도전을 위해 대구시장으로서 재기를 하려한다고 치자.그렇다고 그게 대구시민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올 리 없다. 그가 침체된 대구시정을 맡아 획기적인 변화나 발전을 보이지 못한다면 대권도전은 물 건너갈 것이 뻔하다.그러니 못다 이룬 큰 꿈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대구시의 발전을 위해 뛸 것이기 때문이다.현역 국회의원이 광역단체장에 출마했다는 이유로 지역구민에 대한 배신이라는 주장을 펴는 이도 있다.역시 적절치 않다. 6·1 지방선거 광역단체장 선거에는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현역 중진의원들의 이름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유독 대구시장 선거만 문제될 일은 아니다. 아울러 대구가 TK의 본산이면서도 역차별받은 것은 대구시장의 정치적 역량이 낮았기 때문이란 지적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민선 대구시장으로 문희갑 시장 이래 조해녕, 김범일 시장은 정치권보다는 행정고시 합격 행정관료 출신으로 정치권에서 큰 비중을 가지지 못했고, 권영진 시장은 정치권 인사이지만 비경북고 출신으로 중앙정치무대에서 비중이 그리 높지 못했다.이러니 대구발전을 위한 획기적인 변화나 개혁이 어려웠다는 지적이다. 그런 점에서 홍 의원은 대구시장 후보로서 자격이 차고 넘친다. 다만 정치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인데,‘독고다이’ 정치스타일은 문제다. 지역 국회의원들과의 원활한 소통도 숙제다.천하경영의 포부를 대구 시정에서 먼저 시작하겠다고 선언한 홍준표 의원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구시장 선거를 과연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하다.

2022-03-31

잔인한 달, 4월

윤영대수필가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는 4월이 왔다. 살살 부는 봄바람에도 벚꽃잎이 눈발처럼 흩날리는 길을 걷노라면 꽃내음 짙어가는 화창한 계절의 시작이 가슴을 뛰게 한다. 생명의 계절, 환희의 봄날, 사랑의 4월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봄의 시작, 4월이 왜 ‘잔인한 달’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을까? 100년 전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이 발표한 433행이나 되는 긴 시 ‘황무지’ 첫 줄에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라고 쓴 글귀가 사람들의 입으로 회자(膾炙)되면서 우리의 뇌리에 박혀버린 탓일까.4월 달력을 넘겨 보니 4·3 제주항쟁, 4·16 세월호 참사, 4·19 혁명 등 큼지막한 정치적 사건과 와우아파트 붕괴, 대구 상인동 지하철 도시가스 폭발 사고 등 가슴 아픈 기록이 있다. 불행하고 잔인한 달이 맞는 건지….그런데 엘리엇은 이어서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따뜻했다’고 오히려 겨울이 좋았다는데, 이는 1차 대전 후 삶의 방향과 의욕을 잃은 채 정신적 황폐를 겪고 있는 서구 문명의 상실감을 표현한 듯하지만, 그 모더니즘의 시구를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따뜻해져 오는 대지에서 편안히 잠자고 있는데 봄비로 흔들어 깨워 힘들게 새싹을 키우는 것은 라일락에게는 잔인할지도 모르지만 줄기 뻗어 잎과 꽃을 피우는 것은 자연의 임무이자 즐거움이 아닐까.‘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No pain, no gain)’ ‘쓴 것이 다하면 달콤함이 온다(苦盡甘來)’는 말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것이다. 이번 4월에는 고통을 이겨내어 즐거움을 얻어야겠다.올해도 어느새 1/4이 지나갔고 따뜻한 4월이 되었다. 춘곤에 겨우면 몸이 나른하고 정신도 몽롱해지고 마음이 흐트러지기 쉽다. 그래서 성폭력과 음주 운전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달이기도 하다. 마음을 맑게 먹고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할 때는 자칫 잔인한 달이 될 수도 있다. 아직도 코로나19는 각종 변형을 만들어 내며 우리 삶에 고통을 주고 있고, 우크라이나 전쟁도 2개월째 접어들어 처참하게 파괴되고 생명이 죽어가고 있지만, 인류의 염원이니 잔인한 달의 누명을 벗었으면 좋겠다.4월엔 많은 기념일이 있다. 1일 향토예비군의 날, 5일 식목일, 7일 보건의 날, 15일 민방위의 날, 20일 장애인의 날, 21일 과학의 날, 22일 새마을의 날, 25일 법의 날 등 봄의 기운이 넘치는 이달에는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사회, 정치, 문화 전반에 희망의 꽃을 피우자. 또 4월 17일은 부활절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3일 만에 되살아나심을 찬양하는 날, 그 부활을 예찬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갖자. 잠든 마음의 뿌리에도 봄비를 내려 혹시 각자의 상실감이 있었다면 다시 깨치고 일어나 잔인한 날들을 이겨나갔으면 한다.4월의 탄생석은 다이아몬드. 승리와 고귀함, 변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하니 마음속에 조그마한 보석 하나씩을 간직하는 4월이 되자.

2022-03-31

할리우드가 던진 두 가닥 생각거리

장규열 한동대 교수 장애인인권, 특별히 교통이동권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교통약자들이 겪는 불편함을 참다못한 인권단체들이 행동에 나섰다. 시위방식에 대하여 논란이 뜨겁다. 시민에게 불편을 끼치는 행태는 공익에 반할 뿐 아니라 사회 일반에 불편을 끼치므로 멈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한편, 해묵은 인권문제에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고 장애인들의 기본적인 교통인권을 확보하기 위함이므로 정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 일방의 의견에 편을 드는 표현이 있어 갈등은 증폭되었다. 집회와 시위가 합법적인 테두리를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지 생각거리를 던지기도 하였다. 선진국 문턱에 섰다면서도 기본적인 장애인 교통인권에 사회적 배려와 구체적 설비가 부족한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은가.올해도 할리우드의 아카데미시상식은 여러 가닥에서 세계인의 관심을 모았다. 영화 ‘CODA(Child of Deaf Adults·듣지 못하는 어른들의 아이)’가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가족 구성원들 가운데 단 한 사람 ‘듣고 말할 수 있는’ 소녀는 사랑하는 가족을 보살펴야 하는 처지와 음악적 재능을 키워가고 싶은 꿈 사이에서 일상을 이어가며 갈등을 겪는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겪는 어려움과 평범함이 자연스럽게 영상을 채운다. 무엇보다 그런 모습을 담은 영화가 최고의 영화로 선정되었다. 장애인들을 보통사람으로 이해하고 ‘우리들’ 가운데 품고자 하는 사회적 배려와 공감, 태도와 노력이 부럽다. 우리는 언제쯤 그런 열린 마음을 허용하는 사회로 진화할 수 있을까. 그들의 불편을 공감하면서, 함께 이겨내고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할 터이다.폭력은 가라. 유명배우 윌 스미스가 사고를 쳤다. 시상후보자들을 소개하는 가운데 사회자의 표현에 격분한 그가 단상으로 올라가 주먹질을 하였다. 전세계의 눈길을 모으며 TV중계 중에 그가 날린 귀싸대기는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그는 시상식의 뒷부분에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쥐며 화려한 무대에 연이어 등장하였다. 사회자가 던진 농담이 아내의 심기를 힘들게 하였음도 이해하였다. 그래도 그의 폭력은 도를 넘었다. 입은 상처를 오로지 폭력으로만 갚아야 한다면 일상의 주변은 모조리 정글로 변하지 않을까. 정신적 아픔을 물리적 힘으로만 이겨내야 한다면 윤리와 도덕은 설 자리를 잃는다. 말로 입은 상흔을 주먹으로 지우려 했던 그는 관객의 신뢰를 잃었을 것이며 사회는 폭력의 위험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가 날린 폭력은 시청자들의 건강한 판단에 따른 심판에 직면할 것이고 공적인 결정에 따라 적절한 징계에 이르러야 한다.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교육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나와 다른 조건들을 가지고 날마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시선이 보다 따뜻해 져야 한다. 갈등과 분열, 상처와 혼돈을 극복하는 방법들이 많지만, 폭력은 그 가운데 설 자리가 없다. 미움과 차별, 혐오와 폭력으로는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 오늘도 할리우드는 세상을 향하여 무엇인가 던진다.

2022-03-30

임대사업자 등록제의 부활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민간 임대사업자 등록제는 지난 2017년 임대주택 등록 활성화 방안을 통해 민간 임대인이 주택 임대사업자로서 지방자치단체에 등록하면 양도소득세나 종합부동산세, 재산세, 취득세 등의 부담을 줄여 주는 제도를 말한다. 그 대신 임대인은 임대료 증액 제도(5%) 등의 의무를 지켜야 했다.정부는 지난 2017년 임대주택 등록 활성화 방안을 발표해 다주택자에게 임대사업자 등록을 독려했지만 과도한 혜택이라는 비판이 일자 2020년 7월 시행 2년 만에 사실상 폐지했다. 이 제도로 인해 다주택자가 집을 팔 유인이 적어져 매물 잠김 현상이 나타났고 주택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이유였다. 매물잠김 현상이 주택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데 대해서 반론도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임대주택 활성화 방안이 나온 2017년 10월 전국아파트 매매가격지수는 87.6에서 2020년 6월 88.9로 1.5% 올랐다. 2020년 7월에는 89.7에서 2022년 2월 106.3으로 18%나 올라 상승폭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임대차3법 시행 2년 차인 오는 8월 이후 전·월세시장이 불안해질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주택시장 안정 방안으로 등록제 부활 카드를 꺼냈다. 임대차시장 안정과 임차인 보호를 위해 필요한 제도라는 인식이다. 다주택자들이 임대사업자로 등록하면 4년 또는 8년간 주택을 매도할 수 없다. 대신 세제 혜택을 받는다.시장에 임대 물건이 안정적으로 공급되면 임차인의 주거 안정도 꾀할 수 있다. 민간임대사업자 등록제의 부활은 적정 임대수익률 보장이나 세제 인센티브 확대로 이어져 장기 임대가 늘어나고, 결국 주택가격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3-30

대형산불 속에서도 불평등은 있었다

오낙률시인·국악인 삼월이 꽃망울이라면 사월은 만개한 꽃이라 할 수 있다. 계절은 그렇게 기후의 변화를 통해 형형의 색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만물의 생사를 관장한다. 해마다 사월이면 수많은 종의 꽃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흐드러져 핀다. 많은 종의 식물이 한 톨의 씨앗을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꽃들의 전쟁, 그 현장이 봄이 아닌가 싶다.봄이라는 계절은 조금의 편협함도 없어 마치 무슨 종목별 경기를 진행하듯 유사 종의 꽃들끼리 같은 시기에 피게 하여 수정을 경쟁하게 한다. 벌 나비의 도움으로 수정이 이루어지는 꽃이 있는가 하면 부드러운 봄바람에 의해 수정이 이뤄지는 꽃도 있고 그 수정의 방법 또한 다양하다. 수정이 잘 이뤄진 꽃은 예쁜 열매를 얻고, 그렇지 못한 꽃은 떨어져서 그냥 꽃이었던 기억으로 소멸하고, 그 사는 모습이 마치 우리네 인간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예년 같으면 벌도, 나비도, 산새도, 우리네 인간도, 한창 꽃 잔치에 어울려 분주히 행복을 만끽할 시기이다. 그러나 봄꽃은커녕 생명의 새싹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곳이 있다. 대형산불로 폐허가 되어버린 동해안의 봄은, 꽃처럼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검어,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에 충분하다.동해안 대형산불에서도 민초의 설움이 있었다. 울진 금강송 군락지를 지키느라 소방헬기와 진화 인력이 한곳으로 집중되었고, 덕분에 금강송 군락 주변의 잡목림은 버려진 잡목이 되어 서러운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순차적 진화에 희망을 걸었다가 귀족림 보호라는 명분에 진화 인력과 장비를 빼앗기고, 절망하며 사라진 잡목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많은 생각과 함께 가슴 한쪽이 먹먹하다. 인간의 이용 가치라는 잣대로 보면, 일부에 해당하는 금강송 군락지가 삼림 대부분을 차지하는 잡목 군락지보다 귀하고 값지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소수의 귀족림을 먼저 구하느라 차등의 순위로 밀려서 희생된, 그보다 몇 배나 더 넓은 서민림을 생각할 때, ‘불평등’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사람이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땔감이 귀하던 시절/많은 종의 나무들이 잡목으로 낙인찍혀/땔감으로 사라지던 시절이 있었다. //오직 소나무만이/산야에서 보호받으며 살던/그런 시절이 있었다…. 계절이 넘나드는 길목/성법령에 올라/발아래 산경(山景)을 보니/아서라/이제는 산천에도 봄이 들었다.//잡목이라 이름 지어져 핍박받던/오리나무, 물박달나무, 상수리나무, 층층나무,/자작나무, 때죽나무, 왕 버드나무. /수많은 종의 나무들이 아름드리 거목으로 자라/밀림을 이루고 있다//이제는 그들이/우리네 강산을 지키고 있다.” -오낙률 시 ‘이제는 산천에도 봄이 들었다’ 전문아름드리 금강송이 자라는데도 수십 년, 아름드리 참나무나 버드나무가 자라는 데도 수십 년, 금강송이거나 잡목이거나, 아무 탈 없이 삼림 그 자체로 존재할 때는 그 군락의 경계가 그리 명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산불이 나고 보니 확연히 그 신분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아마 인간의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하다.

2022-03-30

능력주의

최병구경상국립대 교수 나는 수도권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서울 소재 대학을 졸업했으며 강사 생활도 충청도 이남으로 내려온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2018년 포항에서 1년 정도 생활했지만, 1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지역을 배회했을 뿐이다. 그러다 현재 재직 중인 학교에 2019년 하반기에 부임했다.현재 근무하고 있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만나며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던 두 가지 기억이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코로나 19’로 비대면 동영상 수업을 진행하던 2020년 1학기에 벌어졌다. 부임 첫 학기에 내가 지도교수를 맡은 동아리에서 성실히 활동하며 서울 답사까지 함께 다녀온 남학생이 있었다. 다소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세미나 발제를 단 한 번도 대충한 적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런 학생이 1주일이 넘게 동영상 시청을 하지 않고 스마트 폰도 꺼져 있자 실망과 걱정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2주일 정도 되었을까, 내가 보낸 메일에 그 학생이 보내온 답장은 이랬다. 그동안 스마트 폰으로 동영상 강의를 시청했는데, 마침 스마트 폰이 망가져서 강의를 듣지 못했으며 수리비를 마련하느라 시간이 좀 걸려서 2주간이나 강의를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컴퓨터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순간도 하지 못하고, 학생의 불성실한 태도를 지적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두 번째 사건은 2021년 2학기에 벌어졌다. 앞의 남학생과 마찬가지로 부임 첫 학기 동아리부터 인연을 맺어 온 비평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다. 오랜만의 대면 수업에서 날카로운 질문과 수준 높은 글쓰기 실력을 보여주어 한 학기 동안 내심 흐뭇해하던 학생이었다. 기말과제를 앞두고 발표했던 소설에 대한 비평을 발전시켜서 완성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은 소설집을 도서관에 반납해서 그 글을 완성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소설집은 2만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이었다. 소장해도 좋은 소설이니 한 권 구매해도 괜찮다는 나의 조언에, 그 학생은 조그만 목소리로 죄송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고 했다.능력주의를 공정이란 이름으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 할당제도 지역 할당제도 불공정한 제도이고 오로지 그 사람의 ‘능력’만 시험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논리다. 이럴 때 능력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그 능력은 부모의 재력을 바탕으로 어려서부터 만들어진 것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처음부터 얻기 어려운 대상이다. 전자에 해당하는 소수와 그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 다수가 모여서 능력주의를 만든다.내가 만난 두 명의 학생이 지역에만 있는 특수한 경우인지 어느 지역에나 존재하는 일반적인 사례인지는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그 두 명의 학생에게는 노트북 한 대, 소설책 한 권을 살 여유만 있다면, 펼칠 수 있는 능력이 많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학생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능력을 빼앗는 사회야말로 불공정한 사회가 아닐까? 어쩌면 능력주의란 공정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엘리트를 위한 이념일 수 있다. 그 논리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2022-03-30

섬마을, 정주 공간을 벗어나다

캐나다 밴쿠버 인근의 스탠리 파크(Stanley Park). 밴쿠버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주민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로 항상 북적이는 공원이다.산책로가 섬마을의 둘레길과 비슷해 인라인 스케이트 등 취미활동을 즐기는 이들도 많다. 필자 역시 그 중 하나로 바닷가 풍광을 즐기곤 했다. 다만 오롯이 즐기는 데에는 적응 시간이 필요했다. 광활한 바다는 시선을 압도했고, 공원 내부의 조경 역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절경이었다. 더욱이 당시엔 그곳을 섬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공원은 잉글리시 만(English Bay)와 벤쿠버 항(Vancouver Harbour) 사이의 지역으로 엄밀히 말하면 섬이 아니었다. 항구와 만이 워낙 커 태평양 인근 섬이라고 착각한 것이다.생애 첫 둘레길을 캐나다에서 엿본지라 ‘섬 관광 활성화’라는 문구는 매번 스탠리 파크를 연상시켰다. 지형과 생태가 완전히 다른 곳을 막연히 한국의 섬도 저렇게 변하겠구나라고 상상했다. 무지의 소산이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엔 세계화(Globalization)가 대세였다. 국제적인 기준을 갖춘 ‘모방’이 최우선인 시대였고, 글로벌 산업 트렌드는 몇 년 후 한국에 그대로 전해졌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표어는 세계화와 현지화(Localization)가 만나 이뤄진,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현지화에 근간에 둔 세계화 전략) 이후의 변화이다. 산업의 경영전략이 현지 문화를 흡수하자 우리나라 섬 관광도 달라지기 시작했다.섬 관광을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하며 지역 특성을 반영한 연구·개발이 이뤄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외국의 관광 생태계를 그대로 가져와 이식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면서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정부는 지난해 섬 정책 연구기관인 ‘한국섬진흥원’을 출범시켰다. 섬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을 국가 정책에 반영하고, 이를 총괄·관리한다고 한다. 한국 섬 특성에 맞춰 관광·레저와 해양·수산, 생태·문화까지 섬 전반에 걸친 연구·개발에 나설 예정이다.정부가 국가주도의 ‘한국섬진흥원’을 개원하며 섬 개발에 나서는 이면에는 소멸해가는 섬마을에 대한 위기감이 깔려있다. 우리나라 3천383개의 점 중에 유인섬은 465개로 전체 섬의 13%를 차지한다. 그 중에 인구 25명 미만으로, 무인섬으로 바뀔 곳도 100여 개에 이른다. 전체 섬의 90% 가량이 무인섬이 되는 셈이다. 무인섬의 증가는 섬관광 뿐만 아니라 섬자원 개발 등 섬을 둘러싼 활동에 유·무형의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어가 인구가 줄어드는 것도 섬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 중 하나다. 2021년 우리나라 어가인구 수는 9만7천명으로 10년 전에 비해 43%가 줄었다. 귀어·귀촌을 활성화하고 어촌마을 사회기반시설(SOC) 확충에 나서고 있지만 인구 감소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노령화도 심각하다. 인구의 절반 가량이 만 65세 이상의 고령층이다.섬마을 소멸은 지방 소도시 소멸과 비슷한 양상이지만 그 속도가 훨씬 빠른 편이다. 어촌·어항을 갖춘 지역이 바다 축제에 필사적인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2026 세계 섬 박람회 유치에 성공한 여수도 시작은 여느 도시와 같았다. 다만 여수는 섬을 한국의 이야기로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섬을 알고자 하는, 그리고 바다로 나아가고자 하는 전 세계인들의 염원을 담아 박람회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각국의 섬 문화와 생태, 연육교 등의 주제를 모아 지구촌과 공유하고자 했고, 결국 국제행사 유치란 성과로 이어졌다.위기를 타개하려는 주체도 다변화 중이다. 제주 가파도에서 열리는 ‘청보리밭 축제’가 대표적이다. 지자체의 지원으로 열리는 축제와 달리 이곳은 여객선사가 청보리밭을 가꾼다. 선사가 육지와 섬을 잇고 섬 관광 사업까지 나서면서 가파도는 매년 상춘객들로 붐비는 관광명소가 됐다. 정현미작가 섬 접근성을 높이는 시도도 계속된다. 조만간 포항에서 울릉도까지 ‘1시간 비행 시대’가 열린다고 한다. 위그선 도입 덕분이다. 울릉도는 사실 관광 산업의 의미를 넘어서는 섬이다. 해양영토의 가치가 높아 자국민의 방문이 잦기 때문이다. 다만 악천후와 열악한 접안시설로 입도가 쉽지 않다. 수면 위를 비행하는 위그선이 본격적으로 출항하게 되면 울릉도와 독도를 찾는 방문객들이 훨씬 늘어날 전망이다.

2022-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