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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아듀 2019! 새해에는 상생의 정치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2019년을 작별하는 마지막 날이다.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가 사생결단의 정쟁을 하다보니 벌써 한 해의 끝에 섰다. 통합과 협치를 약속했던 대통령은 어디로 갔는지 정치판은 쌈박질 뉴스뿐이다. 돌아보면 온 나라가 ‘내편 네편’으로 갈라져 원수처럼 싸운 적이 있었던가 싶다.조국 파문, 선거법 개정, 공수처 설치,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 등이 제기될 때마다 정치권은 입에 담기 힘든 진흙탕싸움을 벌였다. 정부 내에서도 청와대와 검찰은 서로 정의를 강변하고 대립하면서 국정불안을 증폭시켰다. 정치권의 갈등은 국민에게 비화되고 진영싸움으로 확산됨으로써 온 나라가 두 동강 났다. 양 진영에서 동원한 ‘광장정치가 의회정치를 겁박’하는가 하면, 정치적 성향이 다른 언론과 유튜브 방송들도 각자의 진영논리를 대변하고 있다. 심각한 이념적 분열과 내로남불의 정치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이다.이러한 참담한 현실을 교수들은 ‘공명지조(共命之鳥)’에 비유하였다. 최근 교수신문이 교수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선정한 올 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이다. 하나의 몸통에 두 개의 머리가 달린 이 새는 공동운명체이다. 두 마음이 서로 질투하던 어느 날, 한 머리가 다른 머리에게 복수하기 위해 독 있는 과일을 먹었고, 결국 독이 온 몸에 퍼져 둘 다 죽고 만다는 불교경전의 이야기다. 공명지조의 교훈은 ‘상생(相生)’, 즉 “너 죽고 나 살자”가 아니라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윈윈의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은 어디에 있는가?상생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치권은 물론이고 국민의 올바른 정치의식이 중요하다. 정치권은 민주주의의 상생정신, 즉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가 아니라 ‘조금 더 많거나 작게(more or less)’라는 타협정신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는 천사, 당신은 악마’라는 독선과 편견을 버리고 상대를 존중하면서 소통과 대화를 해야 한다.이 때 중요한 것은 권력을 가진 자, 즉 집권여당이 먼저 야당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며, 서로가 ‘다른 의견’을 ‘틀린 의견’으로 매도하지 않고 그 격차를 좁혀나가야 한다. 또한 정치권의 상생정치를 위해서는 ‘국민이 공정한 심판관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유권자가 권력게임의 어느 한 편에 가담하여 적대정치를 부추기는 한 상생의 정치는 뿌리내리기 어렵다. 물론 국민도 개인적 정치성향이 다를 수는 있지만, 정치게임에서 심판관 역할을 해야 할 유권자가 정치인처럼 플레이어(player)가 되어서는 안 된다.총선이 예정된 새해에는 정치권의 권력투쟁이 더욱 격화될 우려가 있다. 출마하는 후보들은 왜,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려는지, 정치인으로서 품격은 갖추었는지를 자신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또한 국민은 민주주의 원칙에 투철함으로써 상생정치의 적임자를 찾아내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한국정치가 ‘상극의 정치’로부터 ‘상생의 정치’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2019-12-30

성공한 ‘펭수’

특정한 인물을 상징하거나 동식물을 의인화해 소비자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가게 하는 상품을 캐릭터 상품이라 한다. 20세기에 등장한 캐릭터는 상상속의 인물이지만 소비 주체인 나와 접목되는 과정을 통해 마케팅의 도구로서 큰 인기를 모았다. 1930년대 디즈니사는 미키마우스를 필두로 도널드 덕, 구피와 같은 수많은 캐릭터를 만들고 캐릭터 시장을 오랫동안 독점한다. 디즈니 만화를 보지 않고 자란 아이가 얼마나 될까 상상해보면 캐릭터의 영향력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EBS 프로그램 ‘펭 TV’에 등장한 펭수의 인기가 절정이다. 방송 시작 7개월만에 유튜브 채녈의 구독자수가 100만명을 넘었다. 카카오톡 이모티콘이 출시되더니 상업광고에도 픽업됐다. 펭수 달력은 출시된 지 16시간만에 17만장 팔렸다. 펭수의 인기는 이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최근 한 조사에서 펭수는 K-POP 대표주자인 BTS를 제끼고 올해의 인물 1위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펭수는 펭귄의 펭과 빼어날 수(秀)가 합쳐진 이름이다. 원래 어린이 방송용으로 제작한 캐릭터지만 지금은 팬클럽이 만들어지고 어른까지 열광한다. 성인의 뽀통령(뽀로로 대통령), 직통령(직장인 대통령) 등의 애칭이 그의 인기를 대변한다.펭수의 인기 비결은 비록 인형의 탈을 썼지만 자기감정을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한 데서 비롯된다. “내가 내일 때 제일 좋은거다” 는 그의 말은 오롯이 나이길 바라는 젊은이의 감성을 건드리기에 충분하다. EBS 연습생 신분에도 사장 이름을 거침없이 불러댄다. 많은 직장인은 이를 보고 통쾌감을 느끼며 펭수가 마치 나인 것처럼 착각도 한다. 캐릭터가 이제는 마케팅 도구를 넘어 문화의 영역에 왔음을 보여준 사례다./우정구(논설위원)

2019-12-29

타락한 ‘다수결’

안재휘 논설위원‘왜 사람들은 다수에 복종하는가? 더 많은 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다. 더 많은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팡세’에 나오는 이 말은 민주주의가 채택하고 있는 ‘다수결(多數決)’ 의사결정 방식의 한계를 정확하게 짚어낸다. 다수결은 어디까지나 결정이 시급한 안건에 대해 만장일치 처리가 어려울 때 선택하는 ‘차선’의 방안임을 우리 정치권은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다사다난했던 2019년을 마무리하면서 대한민국 국회는 낯설고 해괴한 장면을 잇달아 연출하고 있다. 사상 최초로 게임의 룰인 선거법까지 여야 합의가 아닌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우격다짐으로 올린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 집권 더불어민주당은 ‘교섭단체’중심 국회운영 전통을 깨고, ‘4+1’이라는 얄궂은 짬짜미 ‘바꿔먹기’식 협잡 꼼수를 서슴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필리버스터에 부득부득 뛰어든 여당 의원들의 한심한 저질 코미디는 또 뭔가. 결과론적이지만 호남의 분열정치는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는 역설이 호남정치에 정확하게 먹혀들고 있다. 물론 보수정당이 전혀 대안이 못 되는 호남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호남에서는 민주당 싫으면 민주평화당 찍으면 되고, 그도 싫으면 대안신당 찍으면 된다. 그런데 영남에서는 한국당 싫은 사람은 민주당 찍는다. 그러니 정치공학적으로 볼 때 앞으로도 영남 보수정치는 성공할 개연성이 높지 않다.이래저래 영남의 보수정치는 퇴락해가고 있다. 민심의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 헤아리는 일에 무디기 짝이 없는 자유한국당이 문제다. 오랜 세월 기득권층이 되어 누리기만 한 탓에 돌발변수에 대응하는 능력마저 퇴화했다. 스스로 변화하는 일에도 서툴기 짝이 없다. 서푼 어치도 안 되는 패잔권력 부여잡고 연장하는 일에만 매달리는 이 모습대로라면 앞으로도 영 가망이 없을 조짐이다.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정치인들의 결사체라고 자부해온 더불어민주당이 앞장서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모습은 가슴이 아프다. 그들은 소수 야당 시절 그토록 눈물 콧물 흘리며 아니라고 외쳤던 꼴통 보수 독재세력의 횡포를 그대로 재연하고 있다. 아니, 긴 세월 서럽게 당하는 동안 배운 기법까지 총동원한 그들의 다수 독재는 훨씬 더 교묘하고 악랄하다.누더기를 넘어서 걸레가 된 선거법이 파생할 혼란에, ‘검찰 개혁’이라는 포퓰리즘으로 거짓 포장된 무소불위의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법이 빚어낼 파열음이 또 얼마나 많은 국론분열과 패싸움 난장을 펼쳐낼 것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타락한 다수결’의 몸쓸 관성이 ‘양보와 타협’의 덕목을 모조리 망가뜨리면서 이 나라 정치를 얼마나 더 피폐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대목이다. 파스칼의 말을 의역하면, 다수는 그저 ‘힘이 있다’는 뜻이지 ‘옳다’는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더라도 부디 ‘우리는 옳다’고 말하지는 마시라. 멀쩡한 정신으로 국민노릇하기 참으로 힘든 세모(歲暮) 풍경이다.

2019-12-29

어느 신부님의 성탄 메시지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다사다난하지 않았던 해가 있었으랴만 올해는 유달리 복잡다단한 한 해였다.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았던 남북관계는 다시 얼어붙었다. 여야의 정치적 갈등은 극한적 대립으로 증폭되고 있다. 우리 경제는 성장을 멈춘듯하여 불안하기 그지없다. 보편적인 복지를 지향하는 나라에서 자살자는 증가하고, 얼마 전 우유를 훔치다 잡힌 한국형 장발장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세상의 평화를 선도해야할 어느 목사는 광화문에서 정치적 갈등을 부추긴다. 크리스마스는 다시 찾아왔고 우리는 또다시 새해에 희망을 건다.크리스마스 전 어느 신부님의 강론은 듣는 이에게 경종을 울렸다. 고위 성직자도 아닌 우리 곁의 한 사제의 강론이 우리의 마음을 울렸다. 그의 강론 제목은 ‘성탄과 가난’이었다. 예수는 베들레헴의 마구간 구유 위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탄생하셨다(루, 2.7). 성자이신 예수는 방 한 칸 구하지 못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아기 예수 곁에는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만 있었고 목동들이 주위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세상은 아직도 크리스마스를 흥청거리는 날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라는 신부님의 성탄 메시지는 새롭게 다가왔다.신부님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16.23)를 통해 부자들의 삶의 각성을 촉구했다. 성서 상 라자로는 병들고 배고픈 비천한 인간이다. 그는 부자의 식탁 아래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로 살아가고 있다. 식탁 밑의 개는 라자로의 종기를 핥아 먹는다. 훗날 지옥에 간 부자는 천국에 있는 라자로에게 물 한 줌 달라고 호소한다. 결국 강론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돌보지 않았던 부자의 비극적 최후를 설파하였다. 며칠 전 언론에는 우리나라에서 집을 100채 이상 가진 사람이 259명, 최고 집 부자는 594채를 가졌다고 보도하였다. 신부님의 강론은 오늘날 가진 자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자선만이 구원의 길임을 되새겨 주었다.신부님은 마지막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신앙은 결국 실천임을 강조하였다. 여행길에 강도당한 사람(루,10.30)을 사제와 레위인들도 모른척하고 떠나 버렸다. 유태인들이 그렇게 천시하는 사마리아인이 이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 보호해준다. 우리 주변에도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지만 바쁜 세상 핑계로 모두가 외면해 버린다. 물질적 풍요가 더할수록 인정과 인심은 더욱 메마르다. 교회마저 세속이 들어와 가진 자와 높은 자들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신부님의 강론은 교회의 참된 책임을 일깨워 주었다.이 신부님은 젊은 시절 가톨릭정의구현사제단에서 활동하셨던 분이다. 세상이 온통 뒤범벅이고 정치가 탈선했을 시 정의 사회를 외쳤던 분이다. 오늘날 일부 개신 교회는 상속권 문제로 시끄럽고, 가톨릭에도 세속이 범람한다는 비판이 따른다. 마침 로마 교황은 바티칸의 성직자들이 역동적인 시대정신을 알아차리라고 강조했다. 오늘날 모든 크리스천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지극히 겸손한 보통 신부님의 비범성이 돋보이는 강론이었다.

2019-12-29

시울림이 있는 학교

김현욱 시인요즘 학생들이 가장 자주 접하는 매체는 책보다는 스마트폰 동영상과 모바일 게임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유튜브, 틱톡과 같은 동영상 전문 앱과 범람하는 수많은 모바일 역할수행게임(RPG)들이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정보통신기술 시대에 우리 학생들은 무분별한 동영상과 현란하고 잔인한 게임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 이밖에도 영화, 텔레비전, 광고와 같은 휘황찬란한 동영상 매체가 우리 학생들의 삶과 영혼을 사로잡고 있다. 이로 인한 폐해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긴 글을 읽지 못하고, 짧은 글이라도 맥락을 알지 못하며, 평소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고, 교묘하고 영악한 방법으로 친구를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은따, SNS를 이용해 비방하고 험담하는 카따까지 우리 학생들의 영혼은 심각한 수준으로 병들고 있다.유년시절부터 청소년시절에 이르기까지 우리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영혼을 고양시키는 재미있고 아름다운 시와의 만남이다. 시를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고, 시의 아름다움을 통해 언어의 고귀함을 느끼며, 따뜻한 인성과 상상력, 창의력을 기를 수 있다. 무엇보다 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인류 문화의 정수다. 오늘날의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선행되고 바탕이 되어야 할 교육은 코딩이나 정보통신, 5G같은 기술이 아니다. 우리 학생들이 시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고 내면에 숨어있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끄집어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토대이다. 신헌재 교수는 “시를 감상하는 것은 낱말, 소리, 그리고 독특한 방식의 리듬, 창조적 언어 사용 방법들을 발견하게 하여 학생들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고 하였다. 시는 늘 우리 삶을 노래한다. 시를 통해 학생들은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통찰하며 경험을 확장시킨다. 시를 만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 낭송(암송)과 시 쓰기이다. 윤여탁 교수는 “시는 시다워야 하며, 시는 읽혀야 한다. 또 시를 설명하면, 시는 다친다”고 하였다. 학생들은 대부분 시를 재미없고 지루해한다. 잘못된 시 교육 때문이다. 신비평과 구조주의에 바탕을 둔 시 교육은 시의 비유, 상징, 운율, 함축된 의미를 설명하려고 하고, 학생들에게 그것을 찾아내게 한다. 학생들이 시로부터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시는 분석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자전거처럼 타고 달리는 것이다. 자전거를 칠판에 걸어놓고 분석하고 설명하고 문제풀이까지 하면 자전거를 좋아할 학생들은 단 한 명도 없다. 활동 중심의 시 낭송(암송) 활동을 통해 시에 흥미와 호감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는 그 자체로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다. 즐거운 시 낭송(암송)과 삶을 가꾸는 시 쓰기를 ‘시울림’이라고 한다. 시를 낭송하면 몸이 떨린다. 시를 외면 영혼이 떨린다. 시를 쓰면 삶이 떨린다. 그리하여 떨림은 울림이 된다. 임종식 경상북도교육감이 ‘시울림 학교’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2019-12-29

관점을 바꾸는 일 (2)

일본의 석학 다치바나 다카시는 ‘사색기행’이라는 책에서 유대인 성공 비결을 관점의 탁월함으로 묘사한 바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0.2% 밖에 안 되는 유대인들이 세계 경제의 70%를 좌우하고 노벨상의 22%를 독점하며 미국의 언론과 영화계, 예술계, 법조계를 지배하는가, 어떻게 전 세계 초우량 기업은 대부분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 일 수 있습니다만, 다치바나 다카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그들은 보이지 않는 유일신을 섬기고 있다. 그 유일신은 자신의 형상을 어떤 형태로도 만들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한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율이다.”유대인들이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신입니다. 그리스나 동양 종교만 해도 신의 형상을 온갖 형태로 만들어 사당이나 신전을 만들어 장식하고, 눈에 보이는 신(神)으로 숭배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온통 지배하는 신의 모습을 오로지 ‘상상력’에 의지해 보이지 않는 내면에 자리 잡도록 했습니다. 이런 관습이 유대 민족 전체의 상상하는 힘을 자연스럽게 길러주었다는 거죠.“둘째 거의 2천년에 걸친 핍박으로 유대인들은 항상 방랑할 수밖에 없었다. 방랑은 말 그대로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고 이는 숱한 이동 즉 여행을 수반한다.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움직이는 삶은 자연스럽게 ‘관점’을 다양하게 가질 수 있는 유연함을 길러준다.”끊임없이 상상하는 일, 익숙한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을 움직여 유연한 관점을 갖도록 하는 것. 이 두가지 능력은 자연스럽게 호기심을 유발하고 호기심은 결국 ‘질문하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핍박을 많이 받아서, 다음 세대를 가르칠 교사들이 늘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온 교육 방식이 있습니다. (계속)/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2-29

2020년을 지역발전과 시민행복·복지증진의 해로

장욱현 영주시장2020년은 영주의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참 많다. 새로운 지역 현안 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하는 한 해를 만들어갈 계획이다. 영주시는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 조성, 중부권 동서내륙철도 건설 등 지역경제 활성화를 통해 지역발전을 극대화하는 것이 첫째다. 시민복지를 증진하는데에도 시정을 집중할 방침이다. 올해 대내외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소재부품 국산화를 위한 기술개발과 투자 등 국가베어링 산업 육성정책을 발판삼아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 최종 승인에 한 발 더 다가선 것은 큰 성과다.이와 함께 중앙선 복선전철 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하고 중부권 동서횡단철도가 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포함되도록 힘쓰는 등 철도 기반의 물류중심지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고 기업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제 46회 LA한인축제에서 영주의 우수 농특산물이 전량 매진되는 성과를 거두며 풍기인삼농협은 50만 달러 수출협약을 체결했고, 울타리USA사와 5년간 300만 달러 수출 협약을 맺는 등 지역 농·특산물의 해외시장 개척 가능성도 재확인했다.문화관광 분야에서도 눈에 띄는 성과를 달성했다. 지난해 부석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데 이어 올해 소수서원이 등재되면서 영주시는 2개의 세계유산을 보유한 도시가 됐다. 세계인성포럼 개최, 선비대상 시상 등 선비도시 영주의 정체성을 알리는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다. 이밖에 2019 대한민국 공공건축상에서 3년 연속 최우수상 수상의 영예를 안는 등 지역 공공건축의 성공모델로 주목받고 있다.영주시는 올해 성과를 발판삼아 2020년에는 일자리가 있는 경제도시, 혁신적 농업정책, 힐링관광도시, 사람 중심의 도시, 아동과 청소년이 바르게 자라는 도시, 시민이 편안한 도시 등 시정운영 방침을 토대로 지속가능한 영주발전을 실현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특히 첨단베어링클러스터 조성사업이 영주의 국가산업단지 최종승인이라는 결과로 이어져 나갈 수 있도록 힘쓰겠다. 베어링아트 3천억원 유치에 힘입어 농공단지 확장 사업을 신속히 추진해 첨단산업의 중심지를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를 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포함시키고 중앙선 복선전철 사업을 조기에 완공해 물류거점도시, 철도 중심도시로 다시 도약한다는 방침이다. 더불어 국립산림치유원, 국립 산림약용자원연구소, 국립 백두대간수목원, 산양산삼·산약초 홍보교육관 등을 연계해 백두대간 산림과학벨트를 구축하고 힐링산업진흥원 유치, 백두대간 산림ICT융합센터 구축 등 자연자원에서 새로운 경제소득을 창출할 수 있도록 경쟁력을 키워 나가게 된다.지역 경제의 또 다른 축인 농업정책에도 변화가 생긴다. 영주의 지역브랜드 가치를 높일 새로운 기회가 될 2021풍기세계인삼 EXPO를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지역 농산물의 생산·유통·소비를 통합 관리하는 푸드플랜 종합계획 마련, 국제콩연구소 유치, 해외 농특산물 전시판매장 등 혁신적 농업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칠 계획이다.복지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의 정주여건 조성, 공공의료 서비스 지원 확대, 아이돌봄 서비스와 저출생 정책 추진 등 복지 서비스도 강화한다. 노인종합복지관, 장애인복지관, 치매안심센터 등 사회적 약자도 차별없이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복지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고 치매전담형 노인요양시설, 주간보호센터 구축 등 생활밀착형 복지정책을 실현할 계획이다. 특히, 기업·학회 회의, 인센티브 관광, 국제회의, 전시회를 유치해 머무르는 문화·관광 도시를 조성한다.영주댐 정비사업과 복합 어드벤처 공간조성, 선비세상, 전통사상체험관, 전통문화체험단지 등 지역의 특징을 살린 차별화된 관광지를 조성해 나갈 계획이다.이밖에 세계인성포럼 개최, 국립인성교육 진흥원 유치를 추진하는 등 선비도시 자리매김할수 있는 정책도 계속해서 적극 추진한다.내년 예산은 일자리 창출과 복지강화, 농업·문화관광·지역개발 등 시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올해보다 11.7% 늘어난 7천926억원 규모로 편성했다. 예산이 지역의 발전과 시민의 행복을 위해 소중히 쓰일 수 있도록 공정하고 올바르게 시정을 추진해 2020년은 영주시가 더 높이 뛰어오르도록 하겠다.

2019-12-29

새해 결심을 이루려면

박근영 공무원예년과 다른 새해를 맞이하려는 의욕이 충만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패가 불 보듯 뻔한 탓에 새해 각오 자체를 아예 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나도 그저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 지난 2018년 말, 실로 오랜만에 ‘새해 결심’이라는 것을 써 보았다. 리스트에는 일회성도 있고 꾸준히 습관을 만들어 삶 자체를 변화시키려는 중대 결심도 있었다. 이대로 실천하면 삶은 충만해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우려대로 연초 다짐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일상의 반복만 거듭하며 또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다.그때 작성한 새해 결심을 펴보지도 않다가 1년이 끝나가는 시점에 열어본다. 무려 스물다섯 가지나 적혀 있다. 한 줄 한 줄마다 포부가 엿보인다.첫 번째 목표는 서울 예술의 전당에 올라가 오케스트라 공연 관람하기로 적혀 있다. 못 갔다. 대신 2월에 롯데 콘서트홀에서 열린 빈 첼로 앙상블 공연을 보고 왔다. 공연, 콘서트, 전시회 같은 유희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기에 이런 활동은 내 정신적 제약을 뛰어넘는 행동이다. 보통 사람은 고민 없이 실행하는 이런 간단한 일도 내게는 거창한 이유가 달린다. 어쨌거나 첫 번째 목표는 달성으로 친다. 두 번째 목록에는 문장 중간에 ‘꾸준히’라는 낱말이 있다. 신문에서 유용한 자료를 골라 스크랩을 한단다. 꾸준히. 이미 내 습성을 간파하고 나름 굳은 결심으로 꾹꾹 눌러쓴 결심이었을 거다. 몇 번 실천했는데 과연 이를 목표 달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 번째부터는 차마 적지도 못하겠다.새해가 되면 빠지지 않는 외국어 공부에 관한 것도 몇 개나 적혀 있다. 이건 몇 번 했고, 저건 절반쯤 했고, 아예 손 안 댄 것도 있다. 목록을 넘기다 보니 마지막에 파주 출판단지에서 북캉스 체험하기가 있다. 이 항목에선 슬며시 웃음이 났다. 참여 중인 생각학교 여름 컨퍼런스가 파주 출판단지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당일치기 일정이었지만 나는 지혜의 숲에서 따로 하루를 더 묵으며 책이 뿜어내는 지향(紙香)을 맘껏 쐬었다. 그 행사 아니었으면 북캉스도 틀림없이 미뤘을 게 뻔하다. 습관을 형성하기 위한 항목은 하나를 빼고 대부분 미완성이라 결국 2020년 새해 결심으로 옮길 판이다. ‘작심삼일’로 씁쓸하게 마무리한 수많은 목록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백발의 미국 안무가 트와일라 사프(Twyla Tharp)는 새벽 5시 30분이면 침대에서 일어나 바로 택시를 불러 헬스장으로 간다. 눈뜨자마자 택시를 타는 행동 사이에 불필요한 동작은 없다. 이 작은 습관은 나이 70이 넘기까지 현역 무용가로 활동할 수 있는 원천이었다. 이 일화는 리추얼(ritual) 즉 의식(儀式)이 단단한 습관을 구축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사례로 종종 인용한다. 그녀는 기상과 운동 사이에 ‘택시 타기’라는 의식을 연결 고리로 넣었다.내가 올 한 해 습관 형성에 성공한 그 하나는 새벽 4시 기상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해 새벽 시간을 선택했다. 알람을 끄고 다시 곯아떨어지거나 겨우 일어나 졸다가 우왕좌왕 출근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포기하고 다시 시도하기를 무수히 반복하며 수면의 질만 나빠지던 차에 나만의 리추얼을 찾았다. ‘샤워하기’였다. 침대에서 알람을 끄고 일어나서 곧장 욕실로 간다. 잡생각은 금물이다. 10분 가량 샤워를 마치면 책상에 앉아 조는 일 없이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기상과 독서 사이에 샤워라는 고리를 찾아낸 것이다. 새해 결심은 대부분 이렇게 작은 고리가 없어 습관으로 정착하지 못했다는 점을 발견했다. 유레카!2020년 하얀 쥐의 해를 바라보면서 내가 도달하고 싶은 곳의 모습을 리스트로 정리한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나는 무엇을 연결 고리 삼을지도 생각한다. 이루지 못한 것들, 하다가 만 것들을 다시 손질해서 내년엔 쥐처럼 부지런하게 움직일 수 있길 기원하며 새 다이어리에 조심스럽게 옮겨 적는다. 연초, 가슴을 뛰게 했던 수많은 계획이 지금 초라하게 구겨져 있다면 실행을 어렵게 했던 요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분명 둘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고리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자! 겁내지 말고 새해 결심을 작성해 보자.

2019-12-29

옥상옥 권력기관, 공수처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내세운 공수처는 검찰이 독점하고 있는 기소권·공소유지권을 공수처에 넘겨 검찰의 정치권력화를 막고, 독립성을 제고하고자 하는 취지다.공수처가 설립 취지대로만 운영된다는 보장이 있다면 무슨 이견이 있으랴. 보수야당의 반대는 더할 나위없이 거세다. 야당으로선 검찰로도 충분히 공직사회 기강을 잡을 수 있는 데, 새로 공수처를 세우는 것은 옥상옥이자 야당정치인을 탄압하고, 영구집권을 위한 방편이 아니냐며 반대해왔다.더구나 지금껏 공수처 설치를 묵인하는 듯 했던 검찰이 공개적으로 반대입장을 표명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듯 하다. 검찰은 여야‘4+1’협의체가 합의한 공수처 설치 법안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당초 법안에 없던 독소조항이 협의과정에서 슬며시 추가됐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조항은‘다른 수사기관이 범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고위공직자범죄 등을 인지한 경우 그 사실을 즉시 수사처에 통보하여야 한다’는 제24조 제2항 규정이다.설령 공수처의 필요성을 백번 인정한다해도 압수수색 전 단계인 수사착수부터 검경이 공수처에 사전보고하도록 규정한 것은 사실 지나친 처사다. 공수처가 검경으로부터 입맛에 맞는 사건을 이첩해 과잉수사를 하거나, 반대로 사건을 가로채 뭉개거나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올 수 밖에 없다. 통상 검찰은 수사착수 단계에서는 법무부나 청와대에도 사전보고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수처에 사건의 수사착수 통보 의무화 규정은 수사검열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법조계에서는 헌법에 근거가 없는 공수처가 헌법기관인 검찰에 대해 상위기관으로서 지휘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은 위헌성이 짙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더 큰 문제는 공수처와 검찰간 갈등이 수사를 통해 표면화할 경우 사회적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검찰이 공수처 검사를 직권남용 등 혐의로, 반대로 공수처가 해당검사를 비리혐의로 수사하는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나아가 공수처법이 현실이 되면 현재 검찰에서 진행하고 있는 유재수 감찰 무마 의혹, 청와대 하명수사·선거개입 의혹 등 정권을 겨냥한 수사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수사와 재판 경력 없이 ‘조사업무 실무’ 5년 이상 경력으로 가능한 공수처 수사관 자격조항도 의심스럽다는 반응이다. 이는 세월호특조위 등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출신 변호사들을 합류시키기 위한 규정이라는 비판이 많다.야당이 검찰을 권력의 주구로 만들기 위헤 공수처를 만들려고 한다며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야당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듯한 독소조항을 슬쩍 끼워넣은 여당의 처사는 한마디로 안하무인격이다. 여당은 이합집산을 통해 국회운영을 독재적으로 끌고가선 안된다. 공수처법을 두고 벌어진, 민심을 두려워않는 여당의 행태는 국민적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2019-12-26

시민의 날

도시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그 도시마다 가진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게 마련이다. 그를 기념하는 날이 바로 시민의 날이다. 시민의 날은 그 도시민이 자랑하는 역사며 문화며 자긍심이다. 그래서 시민의 날 제정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일이다. 서울시는 조선이 건국되고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날인 10월 28일을 시민의 날로 정했다. 1394년(태조 3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지 600년이 되던 해인 1994년에 제정했다. 서울시로서는 한 나라의 수도로 정해져 600년을 이어 왔으니 이날만큼은 감개무량한 날이다.부산시는 이순신 장관이 왜군의 대전단을 대파한 부산포해전 승전일인 10월 5일을 시민의 날로 정했다. 부산시민은 지금도 임진왜란 항전과 6·25 당시 임시수도를 지킨 도시의 자긍심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광주시는 직할시 승격에 맞춰 시민의 날을 운영하다 5·18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바꾼다. 5·18 당시 시민이 힘을 모아 계엄군을 철수시키고 자율적 자치를 회복한 5월 21일을 시민의 날로 정했다.대구시가 시민의 날을 내년부터 국채보상 기념일이자 대구시민 주간의 첫날인 2월 21일로 바꾼다고 한다. 대구시는 그동안 직할시로 승격된 날로부터 100일째 되는 날을 시민의 날로 정해 왔다. 그러나 직할시 승격이라는 단순 방식보다는 대구의 상징성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의미 있는 날로 정하자는 여론에 따라 바꾸기로 한 것이다. 대구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권회복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또 4·19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된 2·28 민주화 운동도 일어난 곳이다. 이제 새롭게 시작할 대구 시민의 날을 계기로 대구시민의 애국·애향정신도 더 빛을 발하도록 노력해야겠다./우정구(논설위원)

2019-12-26

전철 속 휴대폰 풍경

후배가 2년 뒤로 하나 있어 어제는 베트남 가기 전에 한번 만나기로 했다. 요즘 베트남 특수라고 거기 일이 많다는 것이었다. 대학생 시절 이후 그와 나는 오래 못 만났다. 말수 적기는 옛날 그대로, 그때는 ‘노선’이 달라 같이 얘기하기도 힘들었건만 지금은 옛날 정이 새로 돋는 듯하다. 한번은 일 삼아 나를 만나러 학교에 오기도 했다.ㅡ학교 올라가느라 마을버스 탔는데 왜 그렇게 조용한지 정나미가 떨어지드만요.정 많은 사람은 버스도 시골 할머니들 왁자지껄버스가 맘에 드는 격이다. 둘러보니 모두들 핸드폰에 코를 박고들 있었다 한다.ㅡ어디 마을버스뿐? 전철 안에서도 다들 그렇지.후배한테는 이 휴대폰 ‘열정’이 차가운 인정세태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했다.ㅡ그렇게 사회성이 없어서야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요?후배는 아직도 먼 후배들의 차가운 인정세태가 못 미더운 듯하다. 80년대에 대학 다닌 사람들에게는 사회성 콤플렉스가 있다.우리 사이에는 막걸리가 있어 견해 차이는 필요없다. 나는 속으로 이 휴대폰 몰입 풍경을 생각한다.혹시 그건 사적인 삶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해 보려는 안간힘 같은 것은 아닐까.요즘 세상은 ‘자기만의 방’이 없다. 집은 아파트, 모든 문이 거실을 향해 ‘열려 있다’. 직장에 가면 파티션만 쳐졌을 뿐 숨소리조차 골라야 할 ‘사회적’ 공간이다. 버스도, 전철도 모두 타인에게 개방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자기만의 공간’은 없는 세상이다.ㅡ베트남은 인구가 얼마나 되나? 한 8천만 되나?ㅡ근 1억이죠. 한국어 배우려는 사람은 3백만쯤 되고. 앞으로 1천만은 되잖을까요?나는 후배의 ‘장밋빛’ 전망을 들으며 한국에서는 나날이 사람 숫자가 줄어들 것을 생각한다.전철 안은 출퇴근 시간이면 발 디딜 틈도 없다. 한낮에 전철을 타면 마음대로 발을 뻗을 수 있어 좋건만.비엔나에 갔더니 그곳 사람들은 서 있는 사람들 잔뜩 있어도 혼자 두 자리씩 차지하고 다리를 쭉 뻗고들 앉는다.배려심들 없는 건가? 아니, 앉은 김에 어디 맘껏 앉으라고, 서 있는 사람들이 앉은 사람들 배려해 주는 중이다.서울에서는 어림도 없다. 공간의 민주주의가 어찌나 드센지 조금이라도‘일인분’을 넘어서면 가차없다. 그러니 모두들 자기한테 몰두하고들 싶다. 이어폰 끼고 화면만 보고 있으면 일인분 세상을 충만히 즐기고도 남을 수 있는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2-26

송구영신(送舊迎新)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태엽을 감는 벽시계가 하나 있다. 누가 버리는 걸 가져와서 내 방에 걸어놓은 것이다. 벌써 20년이 넘었지만 멈출 때마다 태엽을 감아주면 다시 살아나서 잘 돌아가곤 한다. 시계가 빨리 가면 나사를 풀어 추를 좀 늦추어 주고 늦으면 반대로 추 밑의 나사를 좀 죄어주면 빨리 간다. 전형적인 아날로그 방식인데 적어도 내가 죽을 때까지는 고장이 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가서 좋다.시계추가 좌우로 흔들리면서 똑딱똑딱 소리를 내는 데 평소에는 거의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다른 소음이 없는 고요한 시간에도 일부러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세월도 그렇게 의식을 못하다가 연말이 되어서야 한 해가 언제 다 지나가버렸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세월 가는 줄 모르게 바쁜 사람들도 가끔씩은 세월의 흐름에 귀를 기울여 볼 일이다.연말이면 송구영신이란 말을 많이 한다. 묵은 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으라는 말이니 분명 덕담이 될 것이다. 일부러 보내고 맞지 않아도 저절로 가고 오는 것이 세월일진대 굳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지난 것에는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빈 마음으로 새 날을 맞으라는 뜻일 것이다. 말은 쉽고 지당하지만 사실 이것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세상의 온갖 불화와 분쟁의 대다수가 바로 구습과 편견과 고정관념 따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된다’는 식의 꽉 막힌 옹고집 때문에 얼마나 많은 비극이 벌어지는가.새것을 맞는다는 것은 새로운 문물이나 유행을 쫓는다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 성서에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도 있지만 세월이 흐른다고 자연현상의 원리가 변하는 건 아니다. 다만 아무리 고목이라도 살아있는 한 봄이면 새 잎을 내듯이 산다는 건 시시각각 송구영신 하는 것이다. 그런 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하는 것이 바로 건강한 삶일 것이다. 자연은 저절로 그러한데 사람들은 탐진치(貪嗔痴)에 찌들고 막혀서 그게 잘 안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새것을 맞으려면 먼저 묵은 것을 보내야 한다. 재물이든 권세든 명예든 이념이든 기왕의 것을 다 버릴 수는 없을지라도 집착은 말아야 한다. 놓아야 할 것을 놓지 않고 보내야 할 것을 보내지 못해 아득바득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과거에 집착하는 자에겐 미래가 없고 이미 가진 것에 집착을 하면 새로움이 없다. 새롭지 않은 것에는 생명이 없으니, 송구영신을 잘 해야 하는 이유다.해가 다 가도록 꽉 막힌 정국은 뚫릴 줄을 모른다. 이 정권이 출발하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적어도 막히고 닫히고 고착된 정권은 아니겠지,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지금까지의 어느 정권보다도 지독한 편견과 아집과 과거에 집착하는 고집불통의 행태를 드러내었다. 눈과 귀를 틀어막은 것도 모자라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말 그대로 전대미문이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참으로 송구영신이 절실한 시국이다.

2019-12-26

관점을 바꾸는 일 (1)

뉴욕의 중심가에 시각 장애인이 처량한 모습으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건물 계단에 주저앉아 행인들이 적선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가 종이에 써 들고 있는 문구입니다. “저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I’m blind please help!)”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는 한 여성이 물끄러미 이 광경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바삐 계단을 오르내릴 뿐, 이 시각 장애인에게 동전 한 닢 던져 주지를 않습니다. 한참 지켜보던 그녀는 시각 장애인에게 다가갑니다. 한 푼 적선을 요청하는 낡은 하드보드지를 뒤집어 무어라 끼적입니다. 새로운 문구를 완성한 여인은 깡통에 지폐 한 장을 넣어 주고는 총총 떠나지요.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무심코 맹인 앞을 지나치던 행인들이 하나씩 둘씩 멈추어 섭니다. 그리고 시각장애인 깡통에 동전을 넣기도 하고 지폐를 두고 가기도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깡통은 사랑의 손길로 가득해지지요. 대체 그 여인은 어떤 마법을 부렸던 것일까요?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날이에요. 그리고 저는 이 광경을 볼 수 없답니다. (It’s a beautiful day and I can’t see it.)”보드에 쓴 단어가 4개에서 8개로 늘어났고 알파벳 철자가 몇 개 바뀌었을 뿐입니다. 도움을 호소하는 말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지 행인들이 시각장애인을 바라보는 ‘관점’을 살짝 바꿔주었을 뿐이지요.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만들어냅니다.언어는 이처럼 강력한 것이지요. 언어 배후에 있는 생각, 즉 관점을 바꾼다는 것은 우리 삶의 질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입니다.관점을 바꾸는 일. 틀에 박힌 낡은 고정관념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으로 신선하게 상황과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는 힘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계속)/(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2-26

엉터리 여론조사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젊은이의 거리 홍익대 앞에서 여론조사를 한다고 하자. 어떤 스타일의 옷을 좋아하느냐고 묻고 다수가 진바지를 좋아한다고 하면 우리 국민들은 진바지를 좋아한다고 여론조사 결론을 내리면 될까? 조사대상 표본의 오류이다. 65세 시니어 운전자의 교통사고가 증가한다는 보도를 종종 접한다. 시니어의 절대 숫자가 늘고 있다면 당연히 시니어의 교통사고가 느는건 인구 고령화 시대에 당연한 것 아닌가? 한걸음 나아가 전체 교통사고에 시니어 운전자의 비율이 매년 높아진다고 대서특필하는 언론도 있다. 인구 중 65세 시니어 비율이 늘고 있고 그 늘어가는 비율과 시니어 운전자의 비율이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분석의 오류가 있다.질문 방식도 문제가 있다. 최근 한 기관의 여론조사는 공수처 찬성이 반대보다 더 많다라고 발표했다. ‘고위 공직자 범죄를 수사하는 공수처 설치 법안’의 찬반을 물은 결과다. ‘고위 공직자 범죄’를 수사한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사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공수처를 만드는 건 권력 강화책에 불과하다는 야당의 반론이 질문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조사방식의 오류이다.표본의 오류, 분석의 오류, 조사방식의 오류가 ‘엉터리 여론조사’를 이끌고 있다. 정치적 이해집단들은 아전인수의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하여 자기네가 우세하다고 여론을 오도한다.특히 정치적인 여론조사는 샘플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여 엉터리 여론 조사를 부추긴다. 가령 1만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자. 그 중 1천명과 통화가 되었고 100명이 답을 했다고 하자. 그래서 51명이 여당의 후보나 여당을 지지하고 49명이 야당의 후보나 야당을 지지했다면 여당후보와 여당이 더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인가? 오차 범위라는 부칙을 단다고 해도 여전히 여론을 오도할 개연성이 충분하다.위의 전화 여론조사가 신빙성을 가지려면 다음 두가지의 통계분석이 따라야 한다. 첫째 전화를 잘 받는 사람과 잘 안받는 사람의 성향분석, 둘째 전화응답을 거부하는 사람과 거부하지 않는 사람의 성향분석이 필요한 것이다.완전 무작위라는 것이 있다. 시뮬레이션이라는 모의분석 예측에서 가장 중요한 가정이다. 위의 예에서 전화를 안받는 사람들과 응답을 거부한 사람들의 집단이 완전무작위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여론조사의 결과는 신뢰를 갖는다. 그러나 무작위가 아니라면 여론조사는 오도되는 것이다. 더구나 정치적인 조사에는 ‘역선택’논란도 있다. 야당 후보 중 누가 제일 좋은가라고 물으면 여당 지지자들은 야당후보를 약화시키기 가장 약한 후보를 지지 한다고 역선택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러한 다양한 오류로 인한 엉터리 여론조사는 이제 손을 볼 때가 된 것 같다.여론조사는 민주사회에서 필요한 하나의 정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종 오류로 점철된 여론 조사가 횡행한다면 그것도 공정성을 중요시하는 민주사회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제 엉터리 여론조사는 끝을 내자.

2019-12-26

2020년도의 (학)부모는?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끝은 때로는 뭔가를 강요한다. 그 강도는 끝으로 갈수록 더 세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지 않고는 안 될 불가항력의 순간을 만들기도 한다.끝을 얼마두지 않은 12월, 그것도 2010년대의 마지막 12월이 만든 절대 강요가 있다.그것은 관계에 대한 생각이다. 관계!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말이 있을까? 사람들은 관계를 위해 태어났고, 또 평생 관계를 맺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살다가, 관계 속에서 죽는다.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안타까운 것은 관계에 대한 지식은 많지만, 그 지식을 삶의 지혜로 이끌어낼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보여주는 것이 뉴스다. 뉴스는 관계에 실패한 사람들의 백과사전이다.2019년도의 뉴스를 책으로 엮는다면 그 규모는 역대 최고일 것이다. 정치, 경제, 교육 등 어느 하나 희망적인 것이 없다.국가 혼란의 중심에는 정치인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국민과의 관계를 저버리고 당리당락과 사리사욕에 빠졌다는 것이다. 말로만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그들에게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국민을 농락하던 그들이 파렴치하게 또 표를 달라고 우리 곁으로 오고 있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뽑아야 한다.그런데 정치인이야 다시 뽑으면 되지만 교육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정치 그 이상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이 교육계이다. 물론 그 이유도 관계 실패이다. 교육계의 관계 선(線)은 다른 어느 분야보다 복잡하다. 교사와 학생, 교사와 교사, 학생과 학생, 교사와 학부모, 학부모와 학부모, (학)부모와 학생, 학교와 지역, 학교와 시대 등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계 선으로 이루진 것이 교육이다.그런데 우리 교육계에서는 그 선들이 다 엉켜버렸다. 어떤 선은 복구가 불가능하게 끊겨버렸다. 그 이유는 불신(不信) 때문이다.지금과 같은 교육계의 모습으로는 우리는 그 어떤 희망도 이야기할 수 없다. 희망은커녕 조만간 공도동망(共倒同亡)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지금까지 수많은 연구자들이 희망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절망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정말 방법이 없을까?그 방법을 필자는 관계에서 찾았다. 기초가 허술한 모래성은 곧 무너진다. 우리 교육계가 무너진 이유는 불신으로 교육 요소들 간의 관계 선이 끊어졌거나 엉켰기 때문이다.그래서 필자는 관계의 가장 기본인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필자는 어떤 부모인지를 생각해보았다. 아이들에게 미안했다.2020년에는 덜 미안한 부모가 되기 위해, 또 교육 불신의 중심축이 된 끊겨버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선이 다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 글을 등대처럼 밝힌다.“부모에게는 세 가지 겸손이 필요합니다. 아이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겸손, 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겸손이지요. (중략) 부모가 겸손할 때 아이는 자신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서천석, 『하루 십 분, 내 아이를 생각하다』)

2019-12-25

2019 기해년을 보내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어허! 하는 소리가 내면에서 울려 퍼진다. 한 해가 잠깐이었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게 되는 연말이다. 황금돼지띠라 해서 요란스레 시작된 기해년이 시나브로 저물어가는 시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커다란 바람과 꿈을 가지고 맞이한 대망의 2019년이 작별을 고하고 있다. 자기 나이만큼의 속도로 세월을 체감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1월 달력부터 돌아보니 신년벽두부터 분망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부친기일과 중고차 매매, 근대문화동아리와 설날일정까지 달력에 빼곡하다.그렇게 문을 연 기해년 1년을 광주에서 보내고 어느덧 대구로 귀환할 날짜가 임박해 있다. 조금은 낯설고 설레던 광주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이것저것 배우고 익히느라 발품 팔았던 기억이 훈훈하다. 5월 17일에는 망월동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구 전남도청과 금남로를 누비고 다녔다.돌이켜보면 지난 5월 3일 오후 5시 무렵 시간대가 기억에 삼삼하다. 전남대 인문대학 1호관에서 ‘김남주 기념홀’ 개관식이 있었다.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그날, 시인의 짧았지만 강렬한 삶의 자취를 돌아보았다. 한쪽 손에 담배를 든 채 환하게 웃는 흑백사진 속의 김남주 시인. 그날 모여든 사람들과 주고받은 시인을 향한 추모의 마음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시인과 문사(文士)를 추모하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다. 나라와 민족과 역사를 성찰하고 미래를 기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정주를 별로 내켜하지 않는 까닭은 그가 지닌 얄팍한 자존심과 턱없이 부족한 역사의식 때문이다. “나는 일제가 4-500년은 갈 줄 알았어!” 어째서 친일시를 썼느냐는 질문에 그가 답한 내용이다.시 잘 쓰는 기술자이자 장인이기는 했으되, 되돌아선 예언자이자 사가(史家)의 구실을 담당하지 못한 자의 어눌한 변명이니.김남주는 1960년대 김수영과 70년대 김지하와 더불어 한국 현대시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행동하는 전사(戰士)이자 지식인으로 평생을 살았던 김남주. 그를 영면하게 하는 일은 소박한 가족주의와 부박한 정파주의, 날카로운 이해관계와 권력을 향한 추악한 열망을 내려놓는 일이다. 작은 범주의 나와 우리에서 벗어나 대동의 한마당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라 믿는다. ‘동이불화’와 ‘화이부동’의 선연한 차이를 새기는 일이 긴요한 시점이다. “남의 작은 허물을 마음에 두지 말고, 내가 가진 작은 지혜라도 나누는” 자세를 강조한 수운 최제우 선생의 가르침이 새삼스럽다. 21세기 각박한 현실주의의 수인(囚人)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은 타자의 작은 허물에는 눈이 밝지만, 자신의 큰 잘못에는 아주 관대하다. 다들 ‘내로남불’의 방책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기에 하루도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다.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철저한 자세를 가진다면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될지도 모르겠다.올해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은 막힌 셈이다. 그러니 잠시 쉬면서 돌아온 길 살피고, 2020년에 밟을 새로운 길, 생각해봄이 어떠한가?! 독자 여러분의 건승과 행운을 기원한다.

2019-12-25

한 여인이 책을 쓴 이야기 (3)

사장은 트렁크에 눈길 한번 던지고 메모와 전보를 번갈아 쳐다봤을 뿐, 이내 관심을 꺼버립니다. 다음 역에 도착했을 때 차장이 다시 똑같은 내용이 담긴 새로운 한 통의 전보를 가져옵니다. 사장은 잠시 놀라지만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세 번째 정차 역에서 또 한통 전보를 받자, 그녀의 끈질김에 레이슨 사장은 트렁크 뚜껑을 엽니다. 트렁크 안에 가득한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보고 사장은 기가 막힙니다.무료했던 여행길에 생각 없이 집어든 원고의 첫 페이지를 읽는 사장의 눈동자가 점점 커집니다. 뉴욕에 도착할 때까지 원고를 끝까지 다 읽습니다. 감동한 사장은 손님들이 모두 하차했음에도 원고를 붙든 채 내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사장은 즉시 출판을 지시했고 10년 동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던 원고는 미국 전역을 뒤집어 놓습니다. 마가렛 미첼 여사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출간에 얽힌 이야기입니다.이 소설은 곧 27개 언어로 번역,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약 3천만 이상 팔렸습니다.지금도 해마다 25만 부가 계속 팔려나가고 있는 중이지요. 오늘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열심히 읽고 있는 그대 안에 잠든 ‘작가 본능’을 깨워 보는 것은 어떨까요?책을 읽고 감동하며 영감을 받는 일도 필요한 일이지만, 세상에는 그대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지한 질문을 던져 봅니다.“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 (그도 하고 그녀도 하는데 나라고 왜?)” 내 안에 이미 싹트고 영글어 가는 멋진 컨텐츠를 글로 꺼내 세상과 나누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부름이자 요청입니다.한 권의 책을 쓰는 일은 가장 멋진 배움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마가렛 미첼의 스토리가 그대와 나의 이야기로 흘러들기를 바라며 2020년을 준비합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2-25

사라진 크리스마스캐럴

크리스마스 캐럴은 14세기 영국에서 종교 가곡의 한 형식으로 시작됐으나, 나중에는 성탄절을 축하하는 노래를 가리키게 됐다.연말 성탄절 분위기를 한껏 돋워온 크리스마스 캐럴이 길거리에서 사라진 이유는 저작권법상 막대한 음악 공연보상금을 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과거 한 백화점이 2년간 디지털 음원을 전송받아 스트리밍 방식으로 매장에 틀었다가 한국음반산업협회 등으로부터 소송을 당한 끝에 백화점은 2억3500만원을 배상해야 했다. 이로 인해 자영업자들 사이에선 “캐럴송을 틀면 공연보상금 폭탄을 맞는다”는 소문이 확산했고, 이후 크리스마스에 길거리에서 캐럴을 들을 수 없게 됐다.현행 저작권법은 원칙적으로 청중에게 돈을 받지 않고 상업용 음반을 공공연하게 트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단서조항을 통해 커피 전문점이나 생맥주 전문점, 전문체육시설과 골프장, 무도학원 및 무도장, 스키장, 에어로빅장 등의 업종은 2018년 8월부터 매장에서 음악을 재생하려면 공연권료를 내야한다. 그렇다해도 영업허가면적이 50㎡(약 15평)를 넘지 않는 영세자영업자들은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소규모 옷집, 밥집, 제과점, 생활용품점 등도 저작권법 시행령에 포함돼 있지 않기에 공연권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홍보 부족으로 소상공인들은 저작권료 폭탄을 걱정해 캐럴을 틀지 않고 있다.‘소음진동·관리법’에 따른 생활소음 규제로 가게 밖에 스피커를 설치할 수 없게 된 것이나, 지난 2014년부터 시행된 ‘문 열고 난방’하는 것을 금지한 에너지 규제 정책도 길거리 캐럴을 사라지게 만든 원인이다. 연말연시의 밤거리가 애꿎은 저작권료 오해로 허전하고 썰렁하기만 하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12-25

제발 그만들 좀 하시라

장규열 한동대 교수365일이 언제 다 갔을까. 새해 벽두에 꿈꾸고 다짐하였던 소망과 약속들은 어디에 있을까. 겨우 며칠 남은 이 한 해를 보내며 돌아보는 마음과 다시 바라보는 기대가 가득한 날들이다. 조용하고 뜻있는 시간이 필요한데 나라는 어찌 이렇게 시끄러울까. 소용돌이는 누가 만들었는가.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 것인지. 맨 앞에 선 이들이 저렇듯 싸움판이니 국민의 생각이 편할 날이 없다. 불편한 심사는 누가 잠재울 수 있을까. 누구 좋으라고 저러는 것이며 누가 평화롭게 만들 수 있을까. 저런 끝에 정말로 국민이 좋을 것인지. 저게 지나가면 나라가 평안할 것인지. 당신들이 위한다는 국민은 어지럽기만 하다. 당신들이 바란다는 나라의 평화는 누구 책임인가.놀랍게도 책임이 모두 그들에게 있다. 소란을 만들어 북적이는 것도 저들 때문이며, 잠재우고 평온하게 만들 사람도 바로 저들이다. 정치는 바로 그걸 해내야 한다. 정의상 정치는, 협상과 토론 그리고 법과 제도를 통하여 나라와 국민에게 안정과 질서, 평화와 복지를 가져와야 한다. 국민을 어지럽게 하고 실망스럽게 하면, 정치가 아니다. 정치에 나서면서 다짐하였던 첫 생각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언론. 취재와 보도가 없었으면 어둠 속이었을 국민들에게 전해주는 소식들이 참으로 귀하다. 그런 언론이 진영논리에 휘둘려 누군가의 심부름꾼을 자청한다면, 스스로를 죽이는 꼴이 아닌가. 사실을 토대로 진실을 전하며 국민들이 믿고 찾을 언론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가짜뉴스와 편파보도에 붙들리기보다 양심과 시대정신을 바로 세우는 언론이 되어야 한다. 국민의 마음을 어렵게 하는 또 하나 집단이 있다. 종교. 평화와 화합이 아닌 분열과 다툼을 앞서 외친다면 이는 종교가 아니라 선동이 아닌가. 그만들 좀 하시라.올해의 사자성어가 공명지조(共命之鳥)라 한다. 함께 살아야 하는 운명공동체인 줄 깨닫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해친 나머지 모두 죽어 사라지고 마는 운명을 뜻한다는 게 아닌가. ‘이러다 다 모두 죽는다’는 각성이 있어야 한다. 생각이 같은 사람은 없다. 방법이 동일한 집단도 없다. 다른 것을 놓고 싸우는 틈에 본래 꿈꾸던 방향을 잃어버리기 일쑤가 아닌가. 공명지조(共命之鳥)를 경계하며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이루어야 한다. 다르지만 평화롭게 해결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다투면서도 서로 ‘국민’을 위한다는 게 아니었는가. 길게 보아 어차피 국민을 위한 ‘한 편’이 되어야 한다.김민기가 부른 오래된 노래 ‘작은연못’이 남과 북이 갈라져 다투었던 기억만 아파하는 줄 알았더니, 오늘 들어도 찔리는 구석이 더러 보인다. 남은 며칠, 묵은해를 돌아보면서 마음을 가다듬었으면 한다. 정치는 초심으로 돌아가고, 언론은 본질을 생각하며, 종교는 해야 할 일을 생각하시라. 실망만 거듭해 온 국민을 좀 돌아보시라. 빼어난 국민이 지쳤을 때 보여주었던 무서운 손길을 기억하는가. 다르지만 하나일 수 밖에 없는 모두의 운명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한 팀이 아닌가. 평화로운 세모(歲暮)를 만나고 싶다.

2019-12-25

진화하는 한국 음식 ‘짬뽕’

짬뽕? 중식당에서 내놓는다. 도시 대형 중식당이든 시골 자그마한 화상노포(華商老鋪)든 짬뽕은, 당연히, 중식당이다.짬뽕은 중식(中食)인가? 아니다. 한식(韓食)이다. 뭐라고? ‘중국집 짬뽕’이 한식이라고?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 라고 항변하는 이들이 많겠다.한 발짝 더 나간다. 짬뽕의 발전, 진화는 한식의 특질이다. 짬뽕의 출발은 중국 남부지역이다. 중국어 사전에도 짬뽕은 등장한다. 이름은 ‘초마면(炒碼麵)’이다.중국어 사이트 ‘大紀元(www.epochtimes.com)’에서는 ‘초마(炒碼)’를 ‘湖南小吃, 炒碼麵, 韓國(호남소흘, 초마면, 한국)’이라고 설명한다. ‘초마는 (중국)호남지방의 향토음식이자 간식, 초마면, 한국’이라는 뜻이다. 초마면의 시작은 초마로, 중국 호남지방이나 현재는 한국 음식이다. ’小吃[소흘]’은 소박한 지방 음식, 스낵 정도의 의미다.초마면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 있다. “초마면은 볶음면[炒麪, 초면]과는 다르다. 초마면은 매운 볶음의 해산물 탕면(湯麵)이다”. ‘초(炒)’는 ‘볶는다’이다. ‘초면(炒麪, 챠오미엔)’은 단순 볶음면이다. 초마면(炒碼麪)의 ‘마(碼)’는 식재료다.초면과 초마면은 세 가지가 다르다. 하나는 ‘맵다’는 점이다. 초면은 특별히 맵지 않다. 후추, 산초, 소량의 고추를 사용한다. 두 번째는 해산물이다. 초면은 채소 위주의 볶음면이다. 초마면은 해산물[海鮮, 해선], 돼지고기 위주다. 초마면, 한국식 짬뽕은 여러 종류의 해산물, 돼지고기를 사용한다. 굴짬뽕, 홍합짬뽕, 돼지고기 등을 쓴다. 세 번째는 국물이다. 초면은 볶음이다. 초마면은 국물이 있다. 다르다.웹 사이트의 설명은 이어진다. “한국의 화교들이 발전시킨 음식으로,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중식이다”. 초마면은, ‘원래 중국 음식으로 출발했으나, 오늘날에는 한국 화교들이 발전시켜서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이게 초마면의 진화 모델, 짬뽕이다.초마면은 중국 남방, 푸젠성[福建省]음식이다. 호적은 중국이다. 중국의 일상적인 가정식이었다. 푸젠성은 대만과 마주 보는 중국의 바닷가 지역이다. 해산물이 비교적 흔하다. 쉽게 구할 수 있는 해산물과 채소를 볶는다. 여기에 국수를 넣고 먹는다. 간단한 서민의 음식이다. 길거리 행상에서 팔다가 식당의 메뉴가 되었다. 해산물을 구하기 힘든 내륙에서는 비교적 흔한 돼지고기를 넣었다. 중국의 서쪽, 회교 지역으로 가면 양고기도 넣는다. 양고기, 돼지고기, 해산물을 가리지 않는다. 레시피랄 것도 없다. 간단하게 만들고 편하게 먹는다.초마면은, 19세기 후반 한반도로 들어왔다. 인천, 제물포는 19세기 말, 문을 연다. 초마면은 한반도로 들어온다. 19세기 후반, 한반도를 침략한 세력은 둘이다. 일본과 청나라. 청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했다. 일본은 한반도에 새롭게 진출했다.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가 부딪혔다. 임오군란(1882년)과 청일전쟁(1894년), 두 번의 전쟁과 난을 통하여 일본과 청나라는 한반도에 발을 디딘다. ‘인천의 개항’은 개항을 빙자한 침략이다.침략의 몸체는 군대다. 청나라, 일본 군대가 한반도로 몰려든다. 군인을 따라서 민간인들도 한반도에 발을 디딘다. 곤궁했던 중국대륙의 서민들이 군인으로, 상인으로, 민간인으로 한반도에 들어온다. 이들이 한국 화교의 시작이다. 고리대금업, 수출입 보따리 장사를 하거나, 농사를 짓고, 장사를 했다. 힘든 일을 하는 일용노동자[苦力, 쿠리]도 많았다. 상당수는 음식점을 열었다. 청요릿집의 시작이다.음식도 사람을 따라 들어왔다. 중국 남부 지방 사람은 초마면을 일상적으로 먹었다. 한반도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 밀가루가 귀했던 한반도에 중국대륙의 밀이 들어온다.서민 화교들은 짜장면[炸醬麵, 작장면], 짬뽕(炒碼麵)을 일상적으로 먹었다. 임오군란, 청일전쟁 시기, 군인, 화교들이 대규모로 들어왔다. 이들을 따라 음식도 들어왔고, 짜장면, 짬뽕은 개항 거리의 서민 음식이었다. 길거리 음식은 곧 음식점의 메뉴가 되었다.‘한국 짬뽕’은 몇 차례의 변신을 거친다. 변형, 발전, 진화한 음식이 등장한다. 이름도 혼란스럽다. 경북의 시골 작은 중식당에는 재미있는 메뉴가 있다. ‘야키우동(焼きうどん)’이다. 희한한 음식이지만, 아무도 이상하다 여기지 않는다. 위키백과에는 “야키우동은 일본의 향토음식의 하나로, 우동을 고기와 채소와 함께 볶아 간장과 우스터 소스 등으로 맛을 낸 것을 말한다”라고 설명한다. 야키우동은 볶음 우동이다. 굵은 국수를 볶은 것이다. 일본의 향토음식? 아니다.국수의 시작은 일본이 아니다. 중국이 국수를 처음 만들었다는 ‘주장’도 ‘소수설’이다. 국수는 터키, 중동, 이집트 등에서 시작된 것이다. ‘다수설’이다. 볶음국수, 야키우동이 섬나라 일본의 향토음식? 일본에서 시작했다? 틀렸다. 야키우동은 볶음 우동의 일종이다. 여느 나라에도 있지만, 일본에서는 ‘야키우동’이다.우스터 소스는, 영국 우스터셔(Worcestersh ire) 시의 이름을 따서 ‘우스터셔 소스’ 혹은 우스터셔 내의 우스터 시 이름을 따서 ‘우스터 소스(Worcester sauce)’라고 부른다는 게 다수설이다. 우스터 소스는 영국 것이다. 우스터 소스가 들어오기 전에는 야키우동이 없었을까? 영국제 소스를 받아들여 만든 일본의 향토음식? 우스꽝스럽다. 야키우동은 중식인가, 아니면 일본식인가? 경북 산골의 중식당에서 파는 일본 우동? 이상하지 않은가?야키우동은, 초마면이 오늘날 짬뽕으로 진화하는 중간 단계의 음식이다. 야키우동에 육수를 부으면 짬뽕이 된다. 경북 시골 중식당의 야키우동은 특이하다. 맵다. 태국식 볶음국수, 일본 야키우동, 야키소바, 중국 볶음국수는 맵지 않다. 매운 메뉴도 있지만, 우리의 야키우동처럼 일상적으로 맵지 않다. 경북 칠곡에는 매운 야키우동으로 널리 알려진 집이 있다. 가게 메뉴판에 ‘쿨피스 大’를 넣었다. 매운 것을 먹은 다음, 쿨피스를 마시고 식히라는 뜻이다. 태국의 매운 고추나 사천 고추, 청양고추 매운 맛을 훨씬 넘어선다. 대부분 시골 작은 중식당의 야키우동도 모두 맵다. 매운맛은 한반도 야키우동의 특징이다.한때 ‘중화우동(中華うどん)’도 중식당 메뉴에 있었다. 중화우동은 ‘중국식 일본 우동’이다. 역시 한반도의 중식당에 있었다. 지금도 일본의 중식당 중에는 중화우동을 내놓는 곳이 있다. ‘주카우동’이다. 중화우동은, 한, 중, 일의 합작품이다. 한반도의 식당에서 한국 사람들이 먹었다. 중식당 메뉴인데, 마치 일본 우동 같다. 맵지 않다. 국물이 흥건하다. 일본 우동 같다. 중화우동과 야키우동의 차이는 매운맛, 그리고 국물이다. 중화우동은 맵지 않고, 국물이 있다. 야키우동의 ‘매운맛’과 중화우동의 ‘국물’은 한국 짬뽕의 뿌리다.‘웍(WOK)질’도 주요 포인트다. 일본식 우동은 볶지 않는다. 웍질은 속어다. 중화 냄비인 웍에 넣고 복는다. 초마면과 야키우동은 채소와 면을 볶는다. 웍질한다. 원형 일본 우동은 볶지 않는다. 볶으면 일본식 야키우동이다.중국 초마면, 일본 나가사키 짬뽕은 모두 웍질을 한다. 한국 짬뽕도 마찬가지. 중화요리 웍을 써서 채소, 고기, 해물, 국수를 볶는다. 볶은 채로, 국물 없이 내놓으면 초마면이다. 매운 것은 한반도식 야키우동이다. ‘웍질’ ‘매운맛’ ‘국물’을 더하면 한국 짬뽕이다. 한국 짬뽕은 여러 종류 음식을 거치며 탄생했다.짬뽕은, 초마면, 야키우동, 중화우동과 다르다. 여러 종류 음식의 몇몇 포인트를 받아들였다. 바꾸고, 발전시켰다. 진화하여 한식이 된다. 짬뽕이다. ‘짬뽕’이라는 이름은 일본 나가사키 ‘찬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일본 나가사키 항구에 있는 ‘시카이로[西海褸, 사해루]’가 일본 ‘나가사키 찬폰’의 시작이다. ‘시카이로’는 일본 화교 진평순이 시작한 음식점이다. 가난한 유학생, 나가사키 거주 화교들을 대상으로 문을 열었다. 해산물, 돼지고기, 채소 등을 섞어서 볶는다. 이리저리 뒤섞은 ‘챤폰’이다. ‘짬뽕’이라는 이름은 ‘찬폰’에서 왔을 것이다. 내용물은 물론 전혀 다르다. 1970년대를 거치며, 한국에는 맵고 붉은색의 짬뽕이 유행한다. 그 이전에는? 오늘날 짬뽕의 뿌리가 되는 중화우동, 야키우동, 초마면, 우육탕면(牛肉湯麪) 등이 중식당의 메뉴였다. 한식의 특질은 다양함, 끊임없는 변화, 진화다.초마면에서 시작, 우리는 다양한 짬뽕을 만들었다. 해산물 짬뽕도 여러 가지다. 굴짬뽕이 있는가 하면, 홍합짬뽕, 주꾸미 짬뽕도 등장했다. 버섯짬뽕, 돼지고기짬뽕이 있고, 김치짬뽕도 있다. 짬뽕의 종류는 무수하다. 경북 시골의 중식당들은 여전히 야키우동을 내놓는다. 밥도 등장한다. 한반도식 변형이다. 짜장밥, 짬뽕밥이다. 야키우동도 마찬가지. 칠곡의 매운 짬뽕 가게에서는 ‘야키밥’이라는 희한한 음식도 내놓는다. 한식 짬뽕의 끊임없는 진화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12-23

4+1과 위성정당의 꼼수

강희룡 서예가춘추시대 위나라 혜왕은 백성 수 증가를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했으나 별 효과가 없자 맹자한테 그 원인을 물었다. 이에 맹자는‘전장에서 전쟁이 한창일 때 한 병사가 갑옷과 투구를 던져 버리고 도망을 쳐서 백 보쯤 가서 멈추었습니다. 또 다른 병사는 오십 보쯤 도망치다가 멈추어서 백 보 도망친 사람을 겁쟁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혜왕은 ‘오십보나 백보나 도망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니요?’이에 맹자는 ‘그것을 아신다면 이웃 나라보다 백성이 많아지지 않는다고 한탄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결국 혜왕이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을 도운 것은 전쟁을 위한 목적이었기에 위나라는 인구가 더 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자성어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이다.백성을 많이 잘 보살핀다는 이 보살핌의 뜻은 평소에 백성을 위한 지도력과 백성들의 생활안정, 예의와 도덕국가, 교육이 널리 보급된 문화국가를 실현하는 것으로 이외에는 사적으로 아무것도 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결국 혜왕이 바라는 백성 수 증가는 이웃나라와 전쟁을 목적으로 하였기에 다른 목적을 둔 꼼수정치라 인구수가 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정치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존재할 수도 없다고 할 만큼 그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행정부 우위와 관료 지배적 특성으로 권위주의와 전제적이며, 중앙집권적인 체제 속에 여, 야의 극심한 대립현상은 타협의 정치가 정착되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국회 또한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이합집산으로 모였다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철새정치인들이 정치판을 휘젓고 다니는 행태가 만연되어 국민들의 정치의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금의 ‘4+1협의체’는 여야합의체라고는 하나 실제는 범여권기구로, 세간에서는 군소정당 대표들이 금배지를 달기 위해 이해하기 힘든 단어들을 나열하며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선거법개혁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거대 양당에 의석이 집중되는 기득권 체제가 해체되고 다당제 체제가 자리잡을 것이라고 해왔다. 그러나 ‘석패율 당선’을 노린 소수정당 후보들이 선거개혁과는 거리가 먼 범여권 중진 인사가 지역구 출마를 해 낙선해도 당선이 가능하다는 꼼수를 노린 것이다. 결국은 개혁으로 포장된 여당과 범여 군소정당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누더기가 된 선거법 개정안은 꼼수정치의 본질을 드러냈다. 이 꼼수에 반발한 제1야당은 바로 ‘비례한국당’이라는 비례대표 의석확보를 위해 위성정당을 차릴 수 있다고 발표했으니 어찌보면 ‘신의한수’아닌가. 민주당이 정치개혁이라는 포장으로 선거제 개혁보다는 의석수확보에만 혈안이 되어 의회 민주주의에서 찾아볼 수 없는 4+1이라는 범여협의체를 만들어 제1야당을 배제시킨 후 국회농단을 하는 마당에 위성정당 구상은 유권자의 표심을 왜곡하는 결과도 있겠으나 야당의 입장에서 보면 어쩔 수 없다. 꼼수정치를 집어치우라고 서로 삿대질하며 싸우는 현 시국은 국민들 눈에는 파렴치정치, 꼼수정치의 끝판왕으로 밖에 안 보인다.

2019-12-23

청년의 니즈, 현장에서 찾는다

박은미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실장정부에서 가장 중요하게 추진되고 있는 청년정책은 저출산·고령화 정책과 맞물려 있다. 아동가족수당, 무상교육 확대, 사교육비 경감, 신혼부부 주거 마련 부담 완화 등을 통한 다양한 정책이 함께 추진되고 있다.산업화 주역인 제1차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은퇴하기 시작하면서 사회는 다양한 세대가 공존하게 되었다. 이후 제2차 베이비붐 세대(1968~1974년생)는 현재 사회 중추를 이루는 세대이며, 급격한 사회 변화와 과도기를 경험하고 있다.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는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의사소통 속에서 성장했으며,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다.현재 청년은 이들 세대들과는 달리 삶의 다양성과 여유와 같은 가치관을 중요시한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고, 지식과 정보가 넘쳐는 나지만 과거에 비해 청년의 사회 진입 기회는 오히려 위축됐다. 무조건 아끼고 저축하기보다 의미 있는 경험과 소비를 지향하며, 일방적으로 기업을 권유하거나 단편적인 지원으로 취업을 유인하는 정책은 이들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된다. 청년의 가치관이 다른 세대에 비해 다른 니즈가 있으므로 눈높이에 맞은 대응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청년에게 일자리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들의 가치관을 이해해야만 하는 고민이 제기되고 있다. 단순히 각 영역별 분절적인 이해가 아닌 현장의 목소리가 담길 수 있는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첫째, 취업지원 네트워크를 마련하여 맞춤형 취업알선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세분화한 맞춤형 취·창업알선 특화프로그램을 지원하여 2030 타깃으로 취업을 적극 지원하는 기업경영 및 행정지원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둘째, 소통과 공감의 어려움이 단순한 자존감 상실, 우울·불안 등 개인의 문제가 심각한 수준의 정신질환으로 확대될 수 있고, 이러한 정신질환이 은둔형 외톨이, 묻지마 범죄 등으로 이어짐에 따라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때문에 정신건강 온라인 자가검진 사이트 개설 및 운영, 자살 위기자 및 고위험자 조기발견을 위한 찾아가는 서비스 확대해야 할 것이다. 학교, 직장 등으로 찾아가는 정신건강 예방교육 실시, 박람회, 축제 등에 찾아가는 블라인드 정신건강 상담 서비스 강화, 자살 시도자나 사망자의 유가족이나 친구 등을 중심으로 집중관리할 필요가 있다.셋째, 문화에 소외된 청년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여가문화 참여 독려와 문화체험기회 확대가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위해 생활체육 프로그램의 이용료 할인 혜택과 문화바우처제도를 확대 적용하여 여가문화 참여활성화를 지원한다.그리고 문화 형성에 필요한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문화 채널 플랫폼(UCC, SNS, 공모전 등을 실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특히, 문화정보 공간을 청년에게 공유 및 제공할 필요가 있다. 기존에 존재하는 빈 공간을 대여하여 청년이 직접 공간을 구성하고 계획을 마련하는 기회 제공도 필요하다.

2019-12-23

한 여인이 책을 쓴 이야기 (2)

다시 힘을 낸 그녀는 옷장에서 원고 뭉치를 꺼냅니다. 1년 동안 타자기 앞에서 쓰고 고치기를 반복합니다. 마침내 1929년 원고를 완성합니다.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지만, 무명 신인의 원고를, 그것도 트렁크에 가득한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읽어보겠다고 나서는 출판사는 없습니다.하나 둘 거절당하던 그녀는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13번째 출판사에서 거절 통보를 받은 후 미첼은 포기합니다. 원고는 다시 옷장 속에 틀어박혀 7년이 흐릅니다.미첼은 어느새 30대 중반이 되었지요. 1935년 4월, 뉴욕 최대의 출판사인 맥밀란의 편집자 헤럴드 레이텀이 애틀란타를 방문합니다.조지아 출신 캐롤라인 밀러 여사가 퓰리처상을 수상했기에 맥밀란에서는 남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지요. 조지아 주의 저명한 작가와 언론계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레이텀은 미첼에게도 좋은 원고가 있느냐 물었습니다.미첼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면서도 딱 잘라 말하죠. “그런 것 없어요!” 그때 옆에 있던 한 친구가 농담을 던집니다. “미첼은 소설을 쓸 만큼 진지하지 않아요!” 미첼은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결심하지요. 자신의 원고를 반드시 출판하고 말 거라고요.얼마 후 맥밀란 출판사의 레이슨 사장이 애틀란타를 방문하고 몇 시 기차로 뉴욕에 돌아간다는 짧은 소식이 애틀랜타 신문에 실립니다.미첼은 옷장 속에 있던 원고 뭉치를 커다란 트렁크에 담아 역으로 향합니다. 맥밀란 사장이 예약한 객실 좌석 아래 트렁크를 넣어 두고 메모를 써 붙입니다. “뉴욕까지 먼 여행길, 이 원고를 꼭 읽어 주세요.”기차가 출발하는 모습을 본 그녀는 곧장 우체국으로 달려가 전보를 칩니다. 다음 역에 기차가 정차할 때 전보를 차장이 레이슨 사장에게 전달합니다. “사장님. 트렁크에 넣어 둔 제 원고를 읽기 시작하셨나요?”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2-23

배고픈 예술가가 먹은 1.5억 짜리 ‘바나나’

1억5천만 원은 꽤나 큰돈이다. 바나나는 꽤나 맛있는 과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맛있다 손 치더라도 바나나 한 개의 가격이 1억 5천만 원은 기가 막힐 정도로 비싸다. 인플레이션이 극심해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리어커 가득 돈을 싣고 가야하는 어느 나라의 웃픈 이야기도 아니고 꾸며낸 허구는 더더욱 아니다.며칠 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린 ‘아트 바젤 마이애미’에서 세계적인 갤러리 페로탱(Perrotin)은 덕트 테이프로 벽에 고정된 바나나 하나를 12만 달러에 판매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바나나는 그냥 바나나가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의 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설치작품이다. 그런데 그 바나나를 행위 예술가 데이비드 다투나가 먹어 치워버린 것이다.이유가 가관이다. 배가 고파 먹었다는 것이다. 바나나가 1억이 넘는다는 것도 코미디이고, 그것이 고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먹어 버린 것도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카텔란의 바나나에는 ‘코미디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행위예술가가 바나나를 먹은 행위는 ‘헝그리 아티스트 퍼포먼스’로 둔갑했다.미술가나 갤러리 혹은 작품을 구매한 소장자는 1억 5천만 원을 삼켜버린 배고픈 행위 예술가를 고발은커녕 비판하지도 않았다. 이들이 서로 짜고 이 같은 해프닝을 벌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카텔란이라는 미술가는 원래부터 괴짜로 정평이 나 있다. 작가나 갤러리 입장에서도 어차피 바나나는 썩어 버려질 것이니 누가 그것을 조금 일찍 먹어 버렸다고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한다. 카텔란의 바나나는 뒤샹의 유명한 남성용 변기 작품 ‘샘’(1917년)처럼 예술적 본질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 혹은 도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고액으로 작품을 산 구매자는 한 순간 돈을 날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개념미술에서는 이른바 ‘진품증서’가 중요하다. 전통미술과 달리 증서의 소유가 작품의 소유를 의미한다. 개념미술은 말 그대로 개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작품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매개적 역할을 하는 물질은 큰 의미가 없다. 따라서 배고픈 행위 예술가가 바나나를 먹었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가 먹은 것은 작품이 아니라 그냥 바나나일 뿐이고, 그 바나나를 먹어 치웠다고 작품의 본질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꼭 말장난 같다.카텔란은 규칙과 규범을 깨트리는 ‘말썽꾼’으로 유명하다. 1992년 밀라노에서 개최된 그룹전에 출품할 작품이 떠오르지 않자 경찰서에 작품이 도난됐다고 신고를 하고 접수증을 액자에 넣어 전시했다.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히틀러나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의 모습 등 카텔란의 작품들은 기꺼이 상식에서 벗어난 내용을 묘사한다.2016년에는 103㎏의 진짜 황금으로 만든 변기를 만들었다. 몸통부터 손잡이까지 모두 황금이다. 사용된 금값만 47억원, 작품가는 70억 원이 넘는다. 올해 황금변기는 전시를 위해 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생가 블레넘궁에 설치됐고, 관람객들은 3분 동안 황금변기에서 볼일을 볼 수 있도록 허락됐다. 부에 대한 탐닉과 집착을 표현한 황금변기에는 ‘아메리카’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런데 어느 주말 새벽 누군가 저택에 침입해 황금변기를 떼어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작가의 화려한 전력 때문에 작품이 정말 도난당한 것인지 의심되지만 아직 황금 변기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하다.권력과 권위, 관습 따위를 서슴없이 하찮은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카텔란은 스스로를 “태생부터 멍청하다”고 소개한다. 멍청한 존재로 위장해 권위와 권력을 엎어버리면 폭소를 유발한다. 지극히 카텔란 다운 수사학이다. 그의 작품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언어로 관람객들에게 유쾌하게 말을 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또 다시 관객들을 바보로 만들어 버릴지 은근히 기다려진다./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2019-12-23

나무, 중심에 서다… 경흥사(經興寺)

동학산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평범한 마을을 지나 산세조차 평범한 낮은 골짜기 얼마쯤을 가다보면 자태와 눈빛이 다른 나무들이 절이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좌측 모퉁이를 돌아 오르자 주차장 너머 절의 풍경이 들어온다.학의 부리에 해당한다는 명당터, 신라 태종 무열왕 6년(659년) 혜공이 창건한 경흥사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이 머물렀으며 승병들이 이곳에서 처음 훈련을 해 전장에 나가 싸운,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사찰이다. 사찰의 규모 역시 대단했음을 고승의 부도들과 동학산 곳곳에서 발견되는 초석과 석축들이 반증하고 있다.상서로운 기운을 막아주는 병풍산이 건너편을 막고 있어 세월의 풍파조차 비켜갔을 법한 절이지만 승병을 훈련시켰다는 이유로 일제강점기 때 탄압을 받았으며, 6·25 전쟁 전후 극심한 도굴로 사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절은 차안의 세계를 돌아앉아 아늑한 길 하나 내며 상흔을 잠재우고 있었다.예상하지 못했던 절 풍경에 낮은 감탄사로 첫인사를 건넨다. 여느 절과는 다른 전각의 배치들, 어깨를 다닥다닥 붙이고 모여 앉아 가족적인 다정함이 느껴진다. 집의 가장 격인 대웅전은 한 단 높은 뒤쪽으로 물러앉아 위엄을 더하면서도 앞의 전각들을 품에 안은 듯 온화함을 배가시킨다. 가장 오래 되었다는 지장전은 경흥사의 품격을 더해주는 안주인 같았으며, 좀 더 높은 곳에 아담한 산령각이 조부모처럼 한발 물러나 인자하게 내려다보고 있다.은행나무 한 그루 나를 호명하듯 시선 속으로 들어온다. 세상을 관조하는 고령의 은행나무와는 달리 젊은 나무에게서 중심을 벗어나지 않은 정직함이 보인다. 분분히 떨어지는 스산한 슬픔이나 사색을 즐기는 길손의 모습이 환상처럼 잡히고, 나무 아래 벤치에는 그의 나이보다 더 깊고 오랜 침묵이 앉아 있다. 한 폭의 그림처럼 단정한 겨울 풍경 속으로 카이로스의 압축된 시간이 흐를 것만 같다.빈 벤치의 정갈한 기도를 뒤로 하고 대웅전 법당의 차가운 마룻바닥에 좌복을 깔고 앉는다. 보물 제 1750 호의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보다 수미단 좌측 편에 모셔진 낯선 영가 두 분의 위패 앞에서 낮과 밤의 저린 기억들이 모여든다. 마음이 시리다.생과의 단절이 아닌, 사후의 세계와 접속하는 매개점인 죽음 앞에서 무엇을 떠올렸을까? 행여 무성한 풀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새들조차 지저귀지 않는 폐허의 처마 같은 곳이 떠올라 두렵지는 않았을까? 대웅전을 나서는 발걸음이 지극히 낮아진다.나무의 시선은 해의 각도와 관계없이 가는 곳마다 따라온다. 아름다운 노을이 되어 내 안에 걸려 있다 내 안에서 질 것 같다. 절은 비어 있지만 결코 빈 절이 아니다. 한눈을 팔지 않는 은행나무 눈길이 길손의 젖은 발걸음을 기도로 이어지게 만들고 감로수 물줄기도 홀로 청정하다. 싸늘하던 법당에도 머지않아 저녁 예불 소리로 밝아 오리라.어마어마한 폭설이 내려 산의 허리가 잠기고 법당의 부처님이 눈에 갇혀 숲의 나무들이 죄다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되어도 젊은 은행나무는 과거와 미래를 홀연히 드나들 것만 같다. 중심에 선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뜻하며 고요함을 말한다. 염불 소리 듣고 자란 은행나무의 평온한 숨결, 나는 법당이 아닌 나무 아래 서서 나를 점검한다.중심으로 향해야 할 눈길이 자꾸만 가장자리로 향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바깥으로 무게 중심이 쏠릴 때마다 스스로를 휴머니스트로 만들거라 착각하지만 결국 나를 놓치고 내가 가야할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날들만 남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의 중심에 서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조낭희 수필가내 안에 있는 티끌을 부지런히 털고 닦아내기에도 주어진 시간은 부족하다. 신은 나에게 은행나무처럼 수백 년의 시간을 허락해주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만 내생의 선택권이 주어졌다는 게 참으로 부담스럽다. 젊은 은행나무 한 그루 곧게 귀를 세우고 손을 내민다. 도반처럼 든든하다.중심에 서면 고요하다.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입구도 출구도 없이 오로지 빛과 같은 길이 있을 뿐이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폭설이 내려도 마을로 가는 길이 열려 있다.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피안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안다. 게으름과 헛된 관계들의 달콤한 유혹 앞에서 결코 흔들리지만 않는다면….오늘은 모처럼 저녁 송년 모임이 있다. 무엇을 입고 갈지의 고민 따위는 사라졌다. 약간의 설렘과 분위기에 들떠 술에 취하듯 구업(口業)이나 쌓지 않을까 걱정이다. 캐롤송 울려 퍼지는 번화가에서도 중심을 향해 뿌리 내리는 숭고한 나무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뿌리 없이 연말만 밝히는 트리가 아닌.어느 어두운 밤/ 사랑의 강렬한 갈망으로 불붙은 채/ 나는 보이지 않게 집에서 빠져 나왔다/ 내 집은 아직도 그저 고요할 뿐.- 성 요한 ‘카르멜의 산길’ 중-

2019-12-23

대통령과 ‘악마의 대변인’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은 원래 가톨릭교회의 성인 추대 심사에서 유래된 용어로서 논의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선의(善意)의 비판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악마의 대변인은 조직 내부에 형성된 기류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관계없이 조직 의견에 동조하는 ‘집단사고(groupthink)’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역할을 한다. 반대 의견을 제시하여 토론을 활성화시킴으로써 보다 나은 대안을 찾도록 유도하는 것이다.민주주의와 독재체제의 차이점은 통치자의 생각과 다른 의견이 허용되는가의 여부이다. 북한에서는 김정은 위원장과 다른 의견은 ‘반동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죽음을 각오해야하지만,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다른 생각을 얼마든지 피력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다른 생각이 오히려 더 나은 대안이나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권장되기까지 한다.우리에게 잘 알려진 애플(Apple)의 광고,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스티브 잡스(S. Jobs)가 인습적 사고에 갇힌 보통사람들에게 ‘악마의 대변인’이었음을 말해준다. 애플의 성공이 무엇에 토대를 두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시사점이다. 또한 1962년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당시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에 대처하기 위하여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맡도록 하였는데, 강경파들이 주장했던 당초의 ‘공습전략’은 논의과정에서 핵전쟁으로 확산될 우려가 제기되어 온건한 ‘해안봉쇄전략’으로 수정됨으로써 평화적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우리 역사에도 ‘악마의 대변인’의 가치를 잘 인식한 성군(聖君)이 있었다. 세종은 어전회의(御前會議)인 경연(經筵)에서 지나칠 정도로 계속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고약해(高若海)’를 대사헌(현재의 감사원장)에 중용하여 ‘악마의 대변인’으로 삼았다. 절대왕조시대에도 목숨을 걸고 ‘왕과 시비를 다투는 대간(臺諫)’들의 직언이 있었기 때문에 왕의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혜로운 정치지도자는 자신의 독선을 경계하고 집단사고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악마의 대변인’을 두었다. 물론 그의 의견을 수용하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통치자의 몫이다. 우리 헌정사가 보여주듯이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은 권력에 눈먼 예스맨(yes man)들에게 둘러싸여 충성스런 비판과 고언(苦言)을 단지 ‘고약한 의견’으로 무시해버렸기 때문이다.특히 지금처럼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첨예화된 상황에서는 청와대 참모들의 이념적 동질성이 강하기 때문에 ‘집단사고의 덫’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도 ‘외눈박이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악마의 대변인’을 곁에 두고 비판적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소신은 강하나 포용력이 없다면 그에게 참된 조언을 하는 충신들은 점점 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2019-12-23

12·16부동산대책

23일부터 적용된 12·16부동산대책의 골자는 15억원 초과 아파트에 대해서는 주택담보대출을 금지하는 한편 모든 차주의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 주택담보대출에 대해 LTV(담보인정비율)를 40%에서 20%로 강화한다는 것.예를 들면 이 지역에서 14억원 주택을 매입시 14억원×40%=5억6천만원의 주택담보대출 한도가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9억원×40%+5억원×20%=4억6천만원으로 줄어든다.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관리도 강화된다. DSR는 주담대를 포함한 각종 금융 대출심사 시 차주의 모든 대출에 대해 원리금 상환 부담을 계산하는 지표다. 현재는 각 시중은행이 DSR 시행 이후 신규취급한 가계대출을 평균 DSR 40% 내로 관리하더라도 개별 대출에 대한 DSR가 40%를 초과하는 것 역시 대출취급이 가능했다. 앞으로는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에서 시가 9억원 초과 주택 담보대출 차주에 대해 차주 단위로 DSR규제가 적용되며, 은행권엔 40%, 비은행권에선 60%가 한도다.또 고가주택의 기준이 공시가격 9억원에서 시가 9억원으로 변경되고,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에서 1주택세대는 1년 내 기존주택을 처분하거나 전입해야하며, 9억원 초과의 고가주택을 구입하는 무주택 세대의 경우 기존 2년에서 1년내 전입해야 한다.이번 대책으로 집값 상승의 주범인 서울 강남권 일부 아파트 가격이 내렸다는 보도가 있지만 일단 청신호로 보인다.다만 이주비 대출규제에다 분양가상한제로 직격탄을 맞은 재개발·재건축아파트의 공급이 줄어들면 오히려 가격이 오를 우려도 있다는 주택전문가들의 전망도 있어 이래저래 앞길을 점치기 어려운 게 부동산대책이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12-23

한 여인이 책을 쓴 이야기 (1)

애틀랜타 저널의 젊은 여기자 미첼은 일요일 판 ‘선데이 매거진’에 인터뷰, 라이프 스케치, 칼럼 등을 썼는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하루는 말에서 떨어져 발목이 부러집니다. 오랜 치료를 받느라 결국 기자 생활을 내려놓게 되지요.남편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미첼에게 읽을 것이 떨어지지 않도록 배려합니다. 그녀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 치웁니다. 어느 날 남편이 책 한 보따리를 내려놓으며 말합니다. “이제 도서관에는 따분한 과학 책 외에 빌릴 책이 없어요. 읽을 책이 더 필요하다면 당신이 직접 책을 쓰는 수밖에 없겠는걸.”큰 용기를 얻은 미첼은 타자기 앞에 앉습니다. 1926년부터 2년 동안 타자기 앞을 떠나지 않고 소설을 씁니다. 그녀의 타자기는 매일 글을 뿜어내지요. 70개 챕터, 1천100페이지에 가까운 대작을 완성합니다.소설이 절정을 치닫던 어느 날, 소포가 날아옵니다. 기자 시절 친구 스티븐 베넷이 쓴 ‘존 브라운의 시신’ 초판본이었지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의 운율과 어휘, 감동적인 시구에 전율하지요. 2년간 써 오던 자신의 원고가 갑자기 쓰레기처럼 느껴집니다. ‘이따위 알량한 소설을 누가 읽기나 하겠어? 차라리 시작하지 말아야 했어!’원고 뭉치를 불태워 버릴 생각을 합니다. 남편의 만류로 태우지는 않았지만, 옷장에 처박아 버리고 기나긴 고통과 침묵의 시간을 갖습니다. 활활 타오르던 창작의 불꽃은 이내 싸늘하게 식고 무기력과 좌절감이 그녀를 덮칩니다.6개월 동안 열등감에 시달리며 한 글자도 써내려가지 못하던 미첼은 어느 날 사교 모임에 나갔다가 우연히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람은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불행에 빠집니다. 행복은 비교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최대한 발휘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비교 따위는 잊어버리세요.”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2-22

북한은 ‘새로운 길’을 갈 것인가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북한은 미국이 ‘새로운 셈법’을 제시하지 않으면 ‘새로운 길’을 간다고 선포한지 오래다. 하노이 회담 결렬 후 북한은 유엔의 대북 제재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북미 실무 회담마저 결렬된 후 북한은 더욱 상황이 어렵게 되었다. 북한은 연말까지 북미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다는 엄포성 발언까지 하는 상황이다. 이에 미국은 북미 협상의 목표는 분명하지만 협상의 시한은 없다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비건은 서울에서 공개적으로 북미 협상을 제안했지만 북한은 아직 아무런 응답이 없다.북한은 연말까지 5차 당 전원회의나 신년사를 통해 그들의 ‘새로운 길’을 밝힐 것이다. 그 길은 과연 어떤 길일까. 북한 당국의 최근 동향을 통해 보면 하나는 북한당국이 미국의 대북 제재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곧 핵실험과 장거리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겠다고 선언하는 수준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부터 강행한 후 미국에 핵 군축 협상을 요구하는 방안일 것이다. 북한은 이미 동창리 엔진 시험가동을 마쳤으며 그 연장선에서 탄도 미사일을 발사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북미 마찰은 더욱 고도화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이다.북한이 이러한 노선을 선택하는 배경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핵협상을 통해 제재해제도 체제의 안전 보장도 얻지 못했다. 북한은 이제 ‘연내 중대 결심’을 통한 ‘새로운 길’을 선포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은 대북 제재의 굴레에서 탈피하지 못하면 그들의 경제적 외교적 위기를 해결할 길이 없다. 북한의 유일한 외화벌이 수단인 해외 노동자들마저 완전 철수 시한을 코앞에 두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핵무장 강화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이다.그러나 북한이 이러한 강경책을 선택할 때 그 후폭풍은 만만치 않다. 미국은 이미 북한에 대한 선제 타격이라는 군사적 옵션을 발표한바 있다. 미국은 이미 북한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정보 정찰기까지 시험한바 있고 최신형 B-1B의 NNL 침투 훈련도 마쳤다. 동해안에는 항모전단을 파견할 준비까지 마쳤다. 미국은 소위 코피 작전을 통해 동창리와 영변 등 핵시설부터 타격할 준비도 되어 있다. 북한 당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최고 지휘부에 대한 폭격 도상 훈련도 마친 상태이다. 유엔 안보리는 즉각 소집되어 북에 대한 압박수위를 높일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북한 당국은 탄도 미사일이나 핵실험을 강행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그러나 북한은 대내외적인 발언의 강도는 높일지라도 실제적인 행동은 유보할 가능성이 높다. 후견인 중국마저 북미간의 정치적 타결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당분간 핵능력을 과시하는 선전전을 통해 대미 압박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공조를 얻기 위해 6자 회담의 재개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북한의 ‘새로운 길’이 무엇인지 연말을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2019-12-22

인생은 하나의 긴 인용문

김현욱 시인올해 읽은 책들의 목록을 살펴본다. 부지런히 읽는다고 읽었는데 성에 차진 않는다. 허생처럼 두문불출 7년 동안 책만 읽고 싶다. 과연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냥 행복할까? 솔직히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뭔가 또 다른 것을 바라겠지. 1년 동안 딸에게 읽어준 그림책, 동화책을 포함하여 참으로 다양한 분야의 책에 밑줄을 그었다. 밑줄 친 낱말이나 문장, 문단은 워드로 작성해서 갈래별로 모아둔다. 월동 준비를 하듯 차곡차곡 마음에 모아둔다. 겨우내 어쩌면 사는 내내 두고두고 꺼내어 쓴다. 마음의 양식이란 말은 헛말이 아니다. 좋은 문장은 좋은 음식과 같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몸에 피와 살이 되듯 좋은 문장을 읽으면 영혼에 빛과 온기가 돈다. 올 한 해 만난 좋은 문장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에서 만난 불편한 진실이다. “현대 정신의학은 삶에서 예상되는 많은 문제는 알고 보면 화학적 불균형으로 인한 정신 장애이므로 약을 먹어서 해결하라고 세뇌하는 쪽으로 너무 많이 나갔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어째서 우울증인가.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아이의 우울과 불안을 뇌신경 전달 물질의 불균형이 초래한 우울증 탓으로 돌리는 전문가는 비정하고 무책임하다.”메리 파이퍼의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란 책은 읽고 또 읽은 책이다. 다독(多讀)보다 더 좋은 것은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재독(再讀), 삼독(三讀)이다. 책이 너무 좋아 아끼는 지인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선물했다. 고 장영희 교수의 스테디셀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처럼 서재에 두고 오래 읽을 책이다.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은 읽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큰 비극은 아름다운 어떤 존재가 성장하고 싶어 하는데 다른 어떤 존재가 그것을 저지할 때입니다.”흐로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대담을 정리한 보르헤스의 말이라는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은 ‘지옥’에 관한 보르헤스의 관점이다. “지옥에 관해 말하자면, 난 지옥이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지옥을 장소라고 여기는 이유는 단테를 읽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난 지옥을 상태라고 생각해요. 영혼은 스스로 지옥이나 천국에 이르게 되죠.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혼은 그 스스로를 거치면서 지옥이나 천국이 되는 거예요.” 언젠가부터 나도 천국이나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생각해왔다. 논어 위정편에서 ‘불혹(不惑)’은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 마흔을 이르는 말이라고 했지만, 그것 또한 특정 나이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여긴다. 보르헤스의 영웅 에머슨은 “인생은 하나의 긴 인용문”이라고 말했다. 남의 글과 말에서 인생의 지혜를 배운다. 12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맵찬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다. 두문불출, 책 읽기 참 좋은 계절이다. 밑줄 긋기 딱 좋은 계절이다.

2019-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