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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구영신(送舊迎新)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태엽을 감는 벽시계가 하나 있다. 누가 버리는 걸 가져와서 내 방에 걸어놓은 것이다. 벌써 20년이 넘었지만 멈출 때마다 태엽을 감아주면 다시 살아나서 잘 돌아가곤 한다. 시계가 빨리 가면 나사를 풀어 추를 좀 늦추어 주고 늦으면 반대로 추 밑의 나사를 좀 죄어주면 빨리 간다. 전형적인 아날로그 방식인데 적어도 내가 죽을 때까지는 고장이 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가서 좋다.시계추가 좌우로 흔들리면서 똑딱똑딱 소리를 내는 데 평소에는 거의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다른 소음이 없는 고요한 시간에도 일부러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세월도 그렇게 의식을 못하다가 연말이 되어서야 한 해가 언제 다 지나가버렸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세월 가는 줄 모르게 바쁜 사람들도 가끔씩은 세월의 흐름에 귀를 기울여 볼 일이다.연말이면 송구영신이란 말을 많이 한다. 묵은 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으라는 말이니 분명 덕담이 될 것이다. 일부러 보내고 맞지 않아도 저절로 가고 오는 것이 세월일진대 굳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지난 것에는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빈 마음으로 새 날을 맞으라는 뜻일 것이다. 말은 쉽고 지당하지만 사실 이것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세상의 온갖 불화와 분쟁의 대다수가 바로 구습과 편견과 고정관념 따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된다’는 식의 꽉 막힌 옹고집 때문에 얼마나 많은 비극이 벌어지는가.새것을 맞는다는 것은 새로운 문물이나 유행을 쫓는다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 성서에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도 있지만 세월이 흐른다고 자연현상의 원리가 변하는 건 아니다. 다만 아무리 고목이라도 살아있는 한 봄이면 새 잎을 내듯이 산다는 건 시시각각 송구영신 하는 것이다. 그런 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하는 것이 바로 건강한 삶일 것이다. 자연은 저절로 그러한데 사람들은 탐진치(貪嗔痴)에 찌들고 막혀서 그게 잘 안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새것을 맞으려면 먼저 묵은 것을 보내야 한다. 재물이든 권세든 명예든 이념이든 기왕의 것을 다 버릴 수는 없을지라도 집착은 말아야 한다. 놓아야 할 것을 놓지 않고 보내야 할 것을 보내지 못해 아득바득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과거에 집착하는 자에겐 미래가 없고 이미 가진 것에 집착을 하면 새로움이 없다. 새롭지 않은 것에는 생명이 없으니, 송구영신을 잘 해야 하는 이유다.해가 다 가도록 꽉 막힌 정국은 뚫릴 줄을 모른다. 이 정권이 출발하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적어도 막히고 닫히고 고착된 정권은 아니겠지,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지금까지의 어느 정권보다도 지독한 편견과 아집과 과거에 집착하는 고집불통의 행태를 드러내었다. 눈과 귀를 틀어막은 것도 모자라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말 그대로 전대미문이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참으로 송구영신이 절실한 시국이다.

2019-12-26

관점을 바꾸는 일 (1)

뉴욕의 중심가에 시각 장애인이 처량한 모습으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건물 계단에 주저앉아 행인들이 적선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가 종이에 써 들고 있는 문구입니다. “저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I’m blind please help!)”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는 한 여성이 물끄러미 이 광경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바삐 계단을 오르내릴 뿐, 이 시각 장애인에게 동전 한 닢 던져 주지를 않습니다. 한참 지켜보던 그녀는 시각 장애인에게 다가갑니다. 한 푼 적선을 요청하는 낡은 하드보드지를 뒤집어 무어라 끼적입니다. 새로운 문구를 완성한 여인은 깡통에 지폐 한 장을 넣어 주고는 총총 떠나지요.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무심코 맹인 앞을 지나치던 행인들이 하나씩 둘씩 멈추어 섭니다. 그리고 시각장애인 깡통에 동전을 넣기도 하고 지폐를 두고 가기도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깡통은 사랑의 손길로 가득해지지요. 대체 그 여인은 어떤 마법을 부렸던 것일까요?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날이에요. 그리고 저는 이 광경을 볼 수 없답니다. (It’s a beautiful day and I can’t see it.)”보드에 쓴 단어가 4개에서 8개로 늘어났고 알파벳 철자가 몇 개 바뀌었을 뿐입니다. 도움을 호소하는 말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지 행인들이 시각장애인을 바라보는 ‘관점’을 살짝 바꿔주었을 뿐이지요.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만들어냅니다.언어는 이처럼 강력한 것이지요. 언어 배후에 있는 생각, 즉 관점을 바꾼다는 것은 우리 삶의 질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입니다.관점을 바꾸는 일. 틀에 박힌 낡은 고정관념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으로 신선하게 상황과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는 힘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계속)/(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2-26

엉터리 여론조사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젊은이의 거리 홍익대 앞에서 여론조사를 한다고 하자. 어떤 스타일의 옷을 좋아하느냐고 묻고 다수가 진바지를 좋아한다고 하면 우리 국민들은 진바지를 좋아한다고 여론조사 결론을 내리면 될까? 조사대상 표본의 오류이다. 65세 시니어 운전자의 교통사고가 증가한다는 보도를 종종 접한다. 시니어의 절대 숫자가 늘고 있다면 당연히 시니어의 교통사고가 느는건 인구 고령화 시대에 당연한 것 아닌가? 한걸음 나아가 전체 교통사고에 시니어 운전자의 비율이 매년 높아진다고 대서특필하는 언론도 있다. 인구 중 65세 시니어 비율이 늘고 있고 그 늘어가는 비율과 시니어 운전자의 비율이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분석의 오류가 있다.질문 방식도 문제가 있다. 최근 한 기관의 여론조사는 공수처 찬성이 반대보다 더 많다라고 발표했다. ‘고위 공직자 범죄를 수사하는 공수처 설치 법안’의 찬반을 물은 결과다. ‘고위 공직자 범죄’를 수사한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사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공수처를 만드는 건 권력 강화책에 불과하다는 야당의 반론이 질문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조사방식의 오류이다.표본의 오류, 분석의 오류, 조사방식의 오류가 ‘엉터리 여론조사’를 이끌고 있다. 정치적 이해집단들은 아전인수의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하여 자기네가 우세하다고 여론을 오도한다.특히 정치적인 여론조사는 샘플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여 엉터리 여론 조사를 부추긴다. 가령 1만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자. 그 중 1천명과 통화가 되었고 100명이 답을 했다고 하자. 그래서 51명이 여당의 후보나 여당을 지지하고 49명이 야당의 후보나 야당을 지지했다면 여당후보와 여당이 더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인가? 오차 범위라는 부칙을 단다고 해도 여전히 여론을 오도할 개연성이 충분하다.위의 전화 여론조사가 신빙성을 가지려면 다음 두가지의 통계분석이 따라야 한다. 첫째 전화를 잘 받는 사람과 잘 안받는 사람의 성향분석, 둘째 전화응답을 거부하는 사람과 거부하지 않는 사람의 성향분석이 필요한 것이다.완전 무작위라는 것이 있다. 시뮬레이션이라는 모의분석 예측에서 가장 중요한 가정이다. 위의 예에서 전화를 안받는 사람들과 응답을 거부한 사람들의 집단이 완전무작위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여론조사의 결과는 신뢰를 갖는다. 그러나 무작위가 아니라면 여론조사는 오도되는 것이다. 더구나 정치적인 조사에는 ‘역선택’논란도 있다. 야당 후보 중 누가 제일 좋은가라고 물으면 여당 지지자들은 야당후보를 약화시키기 가장 약한 후보를 지지 한다고 역선택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러한 다양한 오류로 인한 엉터리 여론조사는 이제 손을 볼 때가 된 것 같다.여론조사는 민주사회에서 필요한 하나의 정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종 오류로 점철된 여론 조사가 횡행한다면 그것도 공정성을 중요시하는 민주사회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제 엉터리 여론조사는 끝을 내자.

2019-12-26

2020년도의 (학)부모는?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끝은 때로는 뭔가를 강요한다. 그 강도는 끝으로 갈수록 더 세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지 않고는 안 될 불가항력의 순간을 만들기도 한다.끝을 얼마두지 않은 12월, 그것도 2010년대의 마지막 12월이 만든 절대 강요가 있다.그것은 관계에 대한 생각이다. 관계!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말이 있을까? 사람들은 관계를 위해 태어났고, 또 평생 관계를 맺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살다가, 관계 속에서 죽는다.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안타까운 것은 관계에 대한 지식은 많지만, 그 지식을 삶의 지혜로 이끌어낼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보여주는 것이 뉴스다. 뉴스는 관계에 실패한 사람들의 백과사전이다.2019년도의 뉴스를 책으로 엮는다면 그 규모는 역대 최고일 것이다. 정치, 경제, 교육 등 어느 하나 희망적인 것이 없다.국가 혼란의 중심에는 정치인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국민과의 관계를 저버리고 당리당락과 사리사욕에 빠졌다는 것이다. 말로만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그들에게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국민을 농락하던 그들이 파렴치하게 또 표를 달라고 우리 곁으로 오고 있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뽑아야 한다.그런데 정치인이야 다시 뽑으면 되지만 교육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정치 그 이상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이 교육계이다. 물론 그 이유도 관계 실패이다. 교육계의 관계 선(線)은 다른 어느 분야보다 복잡하다. 교사와 학생, 교사와 교사, 학생과 학생, 교사와 학부모, 학부모와 학부모, (학)부모와 학생, 학교와 지역, 학교와 시대 등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계 선으로 이루진 것이 교육이다.그런데 우리 교육계에서는 그 선들이 다 엉켜버렸다. 어떤 선은 복구가 불가능하게 끊겨버렸다. 그 이유는 불신(不信) 때문이다.지금과 같은 교육계의 모습으로는 우리는 그 어떤 희망도 이야기할 수 없다. 희망은커녕 조만간 공도동망(共倒同亡)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지금까지 수많은 연구자들이 희망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절망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정말 방법이 없을까?그 방법을 필자는 관계에서 찾았다. 기초가 허술한 모래성은 곧 무너진다. 우리 교육계가 무너진 이유는 불신으로 교육 요소들 간의 관계 선이 끊어졌거나 엉켰기 때문이다.그래서 필자는 관계의 가장 기본인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필자는 어떤 부모인지를 생각해보았다. 아이들에게 미안했다.2020년에는 덜 미안한 부모가 되기 위해, 또 교육 불신의 중심축이 된 끊겨버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선이 다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 글을 등대처럼 밝힌다.“부모에게는 세 가지 겸손이 필요합니다. 아이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겸손, 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겸손이지요. (중략) 부모가 겸손할 때 아이는 자신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서천석, 『하루 십 분, 내 아이를 생각하다』)

2019-12-25

2019 기해년을 보내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어허! 하는 소리가 내면에서 울려 퍼진다. 한 해가 잠깐이었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게 되는 연말이다. 황금돼지띠라 해서 요란스레 시작된 기해년이 시나브로 저물어가는 시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커다란 바람과 꿈을 가지고 맞이한 대망의 2019년이 작별을 고하고 있다. 자기 나이만큼의 속도로 세월을 체감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1월 달력부터 돌아보니 신년벽두부터 분망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부친기일과 중고차 매매, 근대문화동아리와 설날일정까지 달력에 빼곡하다.그렇게 문을 연 기해년 1년을 광주에서 보내고 어느덧 대구로 귀환할 날짜가 임박해 있다. 조금은 낯설고 설레던 광주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이것저것 배우고 익히느라 발품 팔았던 기억이 훈훈하다. 5월 17일에는 망월동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구 전남도청과 금남로를 누비고 다녔다.돌이켜보면 지난 5월 3일 오후 5시 무렵 시간대가 기억에 삼삼하다. 전남대 인문대학 1호관에서 ‘김남주 기념홀’ 개관식이 있었다.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그날, 시인의 짧았지만 강렬한 삶의 자취를 돌아보았다. 한쪽 손에 담배를 든 채 환하게 웃는 흑백사진 속의 김남주 시인. 그날 모여든 사람들과 주고받은 시인을 향한 추모의 마음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시인과 문사(文士)를 추모하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다. 나라와 민족과 역사를 성찰하고 미래를 기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정주를 별로 내켜하지 않는 까닭은 그가 지닌 얄팍한 자존심과 턱없이 부족한 역사의식 때문이다. “나는 일제가 4-500년은 갈 줄 알았어!” 어째서 친일시를 썼느냐는 질문에 그가 답한 내용이다.시 잘 쓰는 기술자이자 장인이기는 했으되, 되돌아선 예언자이자 사가(史家)의 구실을 담당하지 못한 자의 어눌한 변명이니.김남주는 1960년대 김수영과 70년대 김지하와 더불어 한국 현대시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행동하는 전사(戰士)이자 지식인으로 평생을 살았던 김남주. 그를 영면하게 하는 일은 소박한 가족주의와 부박한 정파주의, 날카로운 이해관계와 권력을 향한 추악한 열망을 내려놓는 일이다. 작은 범주의 나와 우리에서 벗어나 대동의 한마당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라 믿는다. ‘동이불화’와 ‘화이부동’의 선연한 차이를 새기는 일이 긴요한 시점이다. “남의 작은 허물을 마음에 두지 말고, 내가 가진 작은 지혜라도 나누는” 자세를 강조한 수운 최제우 선생의 가르침이 새삼스럽다. 21세기 각박한 현실주의의 수인(囚人)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은 타자의 작은 허물에는 눈이 밝지만, 자신의 큰 잘못에는 아주 관대하다. 다들 ‘내로남불’의 방책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기에 하루도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다.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철저한 자세를 가진다면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될지도 모르겠다.올해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은 막힌 셈이다. 그러니 잠시 쉬면서 돌아온 길 살피고, 2020년에 밟을 새로운 길, 생각해봄이 어떠한가?! 독자 여러분의 건승과 행운을 기원한다.

2019-12-25

한 여인이 책을 쓴 이야기 (3)

사장은 트렁크에 눈길 한번 던지고 메모와 전보를 번갈아 쳐다봤을 뿐, 이내 관심을 꺼버립니다. 다음 역에 도착했을 때 차장이 다시 똑같은 내용이 담긴 새로운 한 통의 전보를 가져옵니다. 사장은 잠시 놀라지만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세 번째 정차 역에서 또 한통 전보를 받자, 그녀의 끈질김에 레이슨 사장은 트렁크 뚜껑을 엽니다. 트렁크 안에 가득한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보고 사장은 기가 막힙니다.무료했던 여행길에 생각 없이 집어든 원고의 첫 페이지를 읽는 사장의 눈동자가 점점 커집니다. 뉴욕에 도착할 때까지 원고를 끝까지 다 읽습니다. 감동한 사장은 손님들이 모두 하차했음에도 원고를 붙든 채 내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사장은 즉시 출판을 지시했고 10년 동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던 원고는 미국 전역을 뒤집어 놓습니다. 마가렛 미첼 여사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출간에 얽힌 이야기입니다.이 소설은 곧 27개 언어로 번역,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약 3천만 이상 팔렸습니다.지금도 해마다 25만 부가 계속 팔려나가고 있는 중이지요. 오늘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열심히 읽고 있는 그대 안에 잠든 ‘작가 본능’을 깨워 보는 것은 어떨까요?책을 읽고 감동하며 영감을 받는 일도 필요한 일이지만, 세상에는 그대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지한 질문을 던져 봅니다.“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 (그도 하고 그녀도 하는데 나라고 왜?)” 내 안에 이미 싹트고 영글어 가는 멋진 컨텐츠를 글로 꺼내 세상과 나누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부름이자 요청입니다.한 권의 책을 쓰는 일은 가장 멋진 배움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마가렛 미첼의 스토리가 그대와 나의 이야기로 흘러들기를 바라며 2020년을 준비합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2-25

사라진 크리스마스캐럴

크리스마스 캐럴은 14세기 영국에서 종교 가곡의 한 형식으로 시작됐으나, 나중에는 성탄절을 축하하는 노래를 가리키게 됐다.연말 성탄절 분위기를 한껏 돋워온 크리스마스 캐럴이 길거리에서 사라진 이유는 저작권법상 막대한 음악 공연보상금을 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과거 한 백화점이 2년간 디지털 음원을 전송받아 스트리밍 방식으로 매장에 틀었다가 한국음반산업협회 등으로부터 소송을 당한 끝에 백화점은 2억3500만원을 배상해야 했다. 이로 인해 자영업자들 사이에선 “캐럴송을 틀면 공연보상금 폭탄을 맞는다”는 소문이 확산했고, 이후 크리스마스에 길거리에서 캐럴을 들을 수 없게 됐다.현행 저작권법은 원칙적으로 청중에게 돈을 받지 않고 상업용 음반을 공공연하게 트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단서조항을 통해 커피 전문점이나 생맥주 전문점, 전문체육시설과 골프장, 무도학원 및 무도장, 스키장, 에어로빅장 등의 업종은 2018년 8월부터 매장에서 음악을 재생하려면 공연권료를 내야한다. 그렇다해도 영업허가면적이 50㎡(약 15평)를 넘지 않는 영세자영업자들은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소규모 옷집, 밥집, 제과점, 생활용품점 등도 저작권법 시행령에 포함돼 있지 않기에 공연권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홍보 부족으로 소상공인들은 저작권료 폭탄을 걱정해 캐럴을 틀지 않고 있다.‘소음진동·관리법’에 따른 생활소음 규제로 가게 밖에 스피커를 설치할 수 없게 된 것이나, 지난 2014년부터 시행된 ‘문 열고 난방’하는 것을 금지한 에너지 규제 정책도 길거리 캐럴을 사라지게 만든 원인이다. 연말연시의 밤거리가 애꿎은 저작권료 오해로 허전하고 썰렁하기만 하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12-25

제발 그만들 좀 하시라

장규열 한동대 교수365일이 언제 다 갔을까. 새해 벽두에 꿈꾸고 다짐하였던 소망과 약속들은 어디에 있을까. 겨우 며칠 남은 이 한 해를 보내며 돌아보는 마음과 다시 바라보는 기대가 가득한 날들이다. 조용하고 뜻있는 시간이 필요한데 나라는 어찌 이렇게 시끄러울까. 소용돌이는 누가 만들었는가.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 것인지. 맨 앞에 선 이들이 저렇듯 싸움판이니 국민의 생각이 편할 날이 없다. 불편한 심사는 누가 잠재울 수 있을까. 누구 좋으라고 저러는 것이며 누가 평화롭게 만들 수 있을까. 저런 끝에 정말로 국민이 좋을 것인지. 저게 지나가면 나라가 평안할 것인지. 당신들이 위한다는 국민은 어지럽기만 하다. 당신들이 바란다는 나라의 평화는 누구 책임인가.놀랍게도 책임이 모두 그들에게 있다. 소란을 만들어 북적이는 것도 저들 때문이며, 잠재우고 평온하게 만들 사람도 바로 저들이다. 정치는 바로 그걸 해내야 한다. 정의상 정치는, 협상과 토론 그리고 법과 제도를 통하여 나라와 국민에게 안정과 질서, 평화와 복지를 가져와야 한다. 국민을 어지럽게 하고 실망스럽게 하면, 정치가 아니다. 정치에 나서면서 다짐하였던 첫 생각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언론. 취재와 보도가 없었으면 어둠 속이었을 국민들에게 전해주는 소식들이 참으로 귀하다. 그런 언론이 진영논리에 휘둘려 누군가의 심부름꾼을 자청한다면, 스스로를 죽이는 꼴이 아닌가. 사실을 토대로 진실을 전하며 국민들이 믿고 찾을 언론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가짜뉴스와 편파보도에 붙들리기보다 양심과 시대정신을 바로 세우는 언론이 되어야 한다. 국민의 마음을 어렵게 하는 또 하나 집단이 있다. 종교. 평화와 화합이 아닌 분열과 다툼을 앞서 외친다면 이는 종교가 아니라 선동이 아닌가. 그만들 좀 하시라.올해의 사자성어가 공명지조(共命之鳥)라 한다. 함께 살아야 하는 운명공동체인 줄 깨닫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해친 나머지 모두 죽어 사라지고 마는 운명을 뜻한다는 게 아닌가. ‘이러다 다 모두 죽는다’는 각성이 있어야 한다. 생각이 같은 사람은 없다. 방법이 동일한 집단도 없다. 다른 것을 놓고 싸우는 틈에 본래 꿈꾸던 방향을 잃어버리기 일쑤가 아닌가. 공명지조(共命之鳥)를 경계하며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이루어야 한다. 다르지만 평화롭게 해결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다투면서도 서로 ‘국민’을 위한다는 게 아니었는가. 길게 보아 어차피 국민을 위한 ‘한 편’이 되어야 한다.김민기가 부른 오래된 노래 ‘작은연못’이 남과 북이 갈라져 다투었던 기억만 아파하는 줄 알았더니, 오늘 들어도 찔리는 구석이 더러 보인다. 남은 며칠, 묵은해를 돌아보면서 마음을 가다듬었으면 한다. 정치는 초심으로 돌아가고, 언론은 본질을 생각하며, 종교는 해야 할 일을 생각하시라. 실망만 거듭해 온 국민을 좀 돌아보시라. 빼어난 국민이 지쳤을 때 보여주었던 무서운 손길을 기억하는가. 다르지만 하나일 수 밖에 없는 모두의 운명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한 팀이 아닌가. 평화로운 세모(歲暮)를 만나고 싶다.

2019-12-25

진화하는 한국 음식 ‘짬뽕’

짬뽕? 중식당에서 내놓는다. 도시 대형 중식당이든 시골 자그마한 화상노포(華商老鋪)든 짬뽕은, 당연히, 중식당이다.짬뽕은 중식(中食)인가? 아니다. 한식(韓食)이다. 뭐라고? ‘중국집 짬뽕’이 한식이라고?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 라고 항변하는 이들이 많겠다.한 발짝 더 나간다. 짬뽕의 발전, 진화는 한식의 특질이다. 짬뽕의 출발은 중국 남부지역이다. 중국어 사전에도 짬뽕은 등장한다. 이름은 ‘초마면(炒碼麵)’이다.중국어 사이트 ‘大紀元(www.epochtimes.com)’에서는 ‘초마(炒碼)’를 ‘湖南小吃, 炒碼麵, 韓國(호남소흘, 초마면, 한국)’이라고 설명한다. ‘초마는 (중국)호남지방의 향토음식이자 간식, 초마면, 한국’이라는 뜻이다. 초마면의 시작은 초마로, 중국 호남지방이나 현재는 한국 음식이다. ’小吃[소흘]’은 소박한 지방 음식, 스낵 정도의 의미다.초마면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 있다. “초마면은 볶음면[炒麪, 초면]과는 다르다. 초마면은 매운 볶음의 해산물 탕면(湯麵)이다”. ‘초(炒)’는 ‘볶는다’이다. ‘초면(炒麪, 챠오미엔)’은 단순 볶음면이다. 초마면(炒碼麪)의 ‘마(碼)’는 식재료다.초면과 초마면은 세 가지가 다르다. 하나는 ‘맵다’는 점이다. 초면은 특별히 맵지 않다. 후추, 산초, 소량의 고추를 사용한다. 두 번째는 해산물이다. 초면은 채소 위주의 볶음면이다. 초마면은 해산물[海鮮, 해선], 돼지고기 위주다. 초마면, 한국식 짬뽕은 여러 종류의 해산물, 돼지고기를 사용한다. 굴짬뽕, 홍합짬뽕, 돼지고기 등을 쓴다. 세 번째는 국물이다. 초면은 볶음이다. 초마면은 국물이 있다. 다르다.웹 사이트의 설명은 이어진다. “한국의 화교들이 발전시킨 음식으로,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중식이다”. 초마면은, ‘원래 중국 음식으로 출발했으나, 오늘날에는 한국 화교들이 발전시켜서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이게 초마면의 진화 모델, 짬뽕이다.초마면은 중국 남방, 푸젠성[福建省]음식이다. 호적은 중국이다. 중국의 일상적인 가정식이었다. 푸젠성은 대만과 마주 보는 중국의 바닷가 지역이다. 해산물이 비교적 흔하다. 쉽게 구할 수 있는 해산물과 채소를 볶는다. 여기에 국수를 넣고 먹는다. 간단한 서민의 음식이다. 길거리 행상에서 팔다가 식당의 메뉴가 되었다. 해산물을 구하기 힘든 내륙에서는 비교적 흔한 돼지고기를 넣었다. 중국의 서쪽, 회교 지역으로 가면 양고기도 넣는다. 양고기, 돼지고기, 해산물을 가리지 않는다. 레시피랄 것도 없다. 간단하게 만들고 편하게 먹는다.초마면은, 19세기 후반 한반도로 들어왔다. 인천, 제물포는 19세기 말, 문을 연다. 초마면은 한반도로 들어온다. 19세기 후반, 한반도를 침략한 세력은 둘이다. 일본과 청나라. 청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했다. 일본은 한반도에 새롭게 진출했다.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가 부딪혔다. 임오군란(1882년)과 청일전쟁(1894년), 두 번의 전쟁과 난을 통하여 일본과 청나라는 한반도에 발을 디딘다. ‘인천의 개항’은 개항을 빙자한 침략이다.침략의 몸체는 군대다. 청나라, 일본 군대가 한반도로 몰려든다. 군인을 따라서 민간인들도 한반도에 발을 디딘다. 곤궁했던 중국대륙의 서민들이 군인으로, 상인으로, 민간인으로 한반도에 들어온다. 이들이 한국 화교의 시작이다. 고리대금업, 수출입 보따리 장사를 하거나, 농사를 짓고, 장사를 했다. 힘든 일을 하는 일용노동자[苦力, 쿠리]도 많았다. 상당수는 음식점을 열었다. 청요릿집의 시작이다.음식도 사람을 따라 들어왔다. 중국 남부 지방 사람은 초마면을 일상적으로 먹었다. 한반도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 밀가루가 귀했던 한반도에 중국대륙의 밀이 들어온다.서민 화교들은 짜장면[炸醬麵, 작장면], 짬뽕(炒碼麵)을 일상적으로 먹었다. 임오군란, 청일전쟁 시기, 군인, 화교들이 대규모로 들어왔다. 이들을 따라 음식도 들어왔고, 짜장면, 짬뽕은 개항 거리의 서민 음식이었다. 길거리 음식은 곧 음식점의 메뉴가 되었다.‘한국 짬뽕’은 몇 차례의 변신을 거친다. 변형, 발전, 진화한 음식이 등장한다. 이름도 혼란스럽다. 경북의 시골 작은 중식당에는 재미있는 메뉴가 있다. ‘야키우동(焼きうどん)’이다. 희한한 음식이지만, 아무도 이상하다 여기지 않는다. 위키백과에는 “야키우동은 일본의 향토음식의 하나로, 우동을 고기와 채소와 함께 볶아 간장과 우스터 소스 등으로 맛을 낸 것을 말한다”라고 설명한다. 야키우동은 볶음 우동이다. 굵은 국수를 볶은 것이다. 일본의 향토음식? 아니다.국수의 시작은 일본이 아니다. 중국이 국수를 처음 만들었다는 ‘주장’도 ‘소수설’이다. 국수는 터키, 중동, 이집트 등에서 시작된 것이다. ‘다수설’이다. 볶음국수, 야키우동이 섬나라 일본의 향토음식? 일본에서 시작했다? 틀렸다. 야키우동은 볶음 우동의 일종이다. 여느 나라에도 있지만, 일본에서는 ‘야키우동’이다.우스터 소스는, 영국 우스터셔(Worcestersh ire) 시의 이름을 따서 ‘우스터셔 소스’ 혹은 우스터셔 내의 우스터 시 이름을 따서 ‘우스터 소스(Worcester sauce)’라고 부른다는 게 다수설이다. 우스터 소스는 영국 것이다. 우스터 소스가 들어오기 전에는 야키우동이 없었을까? 영국제 소스를 받아들여 만든 일본의 향토음식? 우스꽝스럽다. 야키우동은 중식인가, 아니면 일본식인가? 경북 산골의 중식당에서 파는 일본 우동? 이상하지 않은가?야키우동은, 초마면이 오늘날 짬뽕으로 진화하는 중간 단계의 음식이다. 야키우동에 육수를 부으면 짬뽕이 된다. 경북 시골 중식당의 야키우동은 특이하다. 맵다. 태국식 볶음국수, 일본 야키우동, 야키소바, 중국 볶음국수는 맵지 않다. 매운 메뉴도 있지만, 우리의 야키우동처럼 일상적으로 맵지 않다. 경북 칠곡에는 매운 야키우동으로 널리 알려진 집이 있다. 가게 메뉴판에 ‘쿨피스 大’를 넣었다. 매운 것을 먹은 다음, 쿨피스를 마시고 식히라는 뜻이다. 태국의 매운 고추나 사천 고추, 청양고추 매운 맛을 훨씬 넘어선다. 대부분 시골 작은 중식당의 야키우동도 모두 맵다. 매운맛은 한반도 야키우동의 특징이다.한때 ‘중화우동(中華うどん)’도 중식당 메뉴에 있었다. 중화우동은 ‘중국식 일본 우동’이다. 역시 한반도의 중식당에 있었다. 지금도 일본의 중식당 중에는 중화우동을 내놓는 곳이 있다. ‘주카우동’이다. 중화우동은, 한, 중, 일의 합작품이다. 한반도의 식당에서 한국 사람들이 먹었다. 중식당 메뉴인데, 마치 일본 우동 같다. 맵지 않다. 국물이 흥건하다. 일본 우동 같다. 중화우동과 야키우동의 차이는 매운맛, 그리고 국물이다. 중화우동은 맵지 않고, 국물이 있다. 야키우동의 ‘매운맛’과 중화우동의 ‘국물’은 한국 짬뽕의 뿌리다.‘웍(WOK)질’도 주요 포인트다. 일본식 우동은 볶지 않는다. 웍질은 속어다. 중화 냄비인 웍에 넣고 복는다. 초마면과 야키우동은 채소와 면을 볶는다. 웍질한다. 원형 일본 우동은 볶지 않는다. 볶으면 일본식 야키우동이다.중국 초마면, 일본 나가사키 짬뽕은 모두 웍질을 한다. 한국 짬뽕도 마찬가지. 중화요리 웍을 써서 채소, 고기, 해물, 국수를 볶는다. 볶은 채로, 국물 없이 내놓으면 초마면이다. 매운 것은 한반도식 야키우동이다. ‘웍질’ ‘매운맛’ ‘국물’을 더하면 한국 짬뽕이다. 한국 짬뽕은 여러 종류 음식을 거치며 탄생했다.짬뽕은, 초마면, 야키우동, 중화우동과 다르다. 여러 종류 음식의 몇몇 포인트를 받아들였다. 바꾸고, 발전시켰다. 진화하여 한식이 된다. 짬뽕이다. ‘짬뽕’이라는 이름은 일본 나가사키 ‘찬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일본 나가사키 항구에 있는 ‘시카이로[西海褸, 사해루]’가 일본 ‘나가사키 찬폰’의 시작이다. ‘시카이로’는 일본 화교 진평순이 시작한 음식점이다. 가난한 유학생, 나가사키 거주 화교들을 대상으로 문을 열었다. 해산물, 돼지고기, 채소 등을 섞어서 볶는다. 이리저리 뒤섞은 ‘챤폰’이다. ‘짬뽕’이라는 이름은 ‘찬폰’에서 왔을 것이다. 내용물은 물론 전혀 다르다. 1970년대를 거치며, 한국에는 맵고 붉은색의 짬뽕이 유행한다. 그 이전에는? 오늘날 짬뽕의 뿌리가 되는 중화우동, 야키우동, 초마면, 우육탕면(牛肉湯麪) 등이 중식당의 메뉴였다. 한식의 특질은 다양함, 끊임없는 변화, 진화다.초마면에서 시작, 우리는 다양한 짬뽕을 만들었다. 해산물 짬뽕도 여러 가지다. 굴짬뽕이 있는가 하면, 홍합짬뽕, 주꾸미 짬뽕도 등장했다. 버섯짬뽕, 돼지고기짬뽕이 있고, 김치짬뽕도 있다. 짬뽕의 종류는 무수하다. 경북 시골의 중식당들은 여전히 야키우동을 내놓는다. 밥도 등장한다. 한반도식 변형이다. 짜장밥, 짬뽕밥이다. 야키우동도 마찬가지. 칠곡의 매운 짬뽕 가게에서는 ‘야키밥’이라는 희한한 음식도 내놓는다. 한식 짬뽕의 끊임없는 진화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12-23

4+1과 위성정당의 꼼수

강희룡 서예가춘추시대 위나라 혜왕은 백성 수 증가를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했으나 별 효과가 없자 맹자한테 그 원인을 물었다. 이에 맹자는‘전장에서 전쟁이 한창일 때 한 병사가 갑옷과 투구를 던져 버리고 도망을 쳐서 백 보쯤 가서 멈추었습니다. 또 다른 병사는 오십 보쯤 도망치다가 멈추어서 백 보 도망친 사람을 겁쟁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혜왕은 ‘오십보나 백보나 도망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니요?’이에 맹자는 ‘그것을 아신다면 이웃 나라보다 백성이 많아지지 않는다고 한탄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결국 혜왕이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을 도운 것은 전쟁을 위한 목적이었기에 위나라는 인구가 더 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자성어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이다.백성을 많이 잘 보살핀다는 이 보살핌의 뜻은 평소에 백성을 위한 지도력과 백성들의 생활안정, 예의와 도덕국가, 교육이 널리 보급된 문화국가를 실현하는 것으로 이외에는 사적으로 아무것도 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결국 혜왕이 바라는 백성 수 증가는 이웃나라와 전쟁을 목적으로 하였기에 다른 목적을 둔 꼼수정치라 인구수가 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정치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존재할 수도 없다고 할 만큼 그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행정부 우위와 관료 지배적 특성으로 권위주의와 전제적이며, 중앙집권적인 체제 속에 여, 야의 극심한 대립현상은 타협의 정치가 정착되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국회 또한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이합집산으로 모였다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철새정치인들이 정치판을 휘젓고 다니는 행태가 만연되어 국민들의 정치의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금의 ‘4+1협의체’는 여야합의체라고는 하나 실제는 범여권기구로, 세간에서는 군소정당 대표들이 금배지를 달기 위해 이해하기 힘든 단어들을 나열하며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선거법개혁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거대 양당에 의석이 집중되는 기득권 체제가 해체되고 다당제 체제가 자리잡을 것이라고 해왔다. 그러나 ‘석패율 당선’을 노린 소수정당 후보들이 선거개혁과는 거리가 먼 범여권 중진 인사가 지역구 출마를 해 낙선해도 당선이 가능하다는 꼼수를 노린 것이다. 결국은 개혁으로 포장된 여당과 범여 군소정당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누더기가 된 선거법 개정안은 꼼수정치의 본질을 드러냈다. 이 꼼수에 반발한 제1야당은 바로 ‘비례한국당’이라는 비례대표 의석확보를 위해 위성정당을 차릴 수 있다고 발표했으니 어찌보면 ‘신의한수’아닌가. 민주당이 정치개혁이라는 포장으로 선거제 개혁보다는 의석수확보에만 혈안이 되어 의회 민주주의에서 찾아볼 수 없는 4+1이라는 범여협의체를 만들어 제1야당을 배제시킨 후 국회농단을 하는 마당에 위성정당 구상은 유권자의 표심을 왜곡하는 결과도 있겠으나 야당의 입장에서 보면 어쩔 수 없다. 꼼수정치를 집어치우라고 서로 삿대질하며 싸우는 현 시국은 국민들 눈에는 파렴치정치, 꼼수정치의 끝판왕으로 밖에 안 보인다.

2019-12-23

청년의 니즈, 현장에서 찾는다

박은미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실장정부에서 가장 중요하게 추진되고 있는 청년정책은 저출산·고령화 정책과 맞물려 있다. 아동가족수당, 무상교육 확대, 사교육비 경감, 신혼부부 주거 마련 부담 완화 등을 통한 다양한 정책이 함께 추진되고 있다.산업화 주역인 제1차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은퇴하기 시작하면서 사회는 다양한 세대가 공존하게 되었다. 이후 제2차 베이비붐 세대(1968~1974년생)는 현재 사회 중추를 이루는 세대이며, 급격한 사회 변화와 과도기를 경험하고 있다.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는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의사소통 속에서 성장했으며,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다.현재 청년은 이들 세대들과는 달리 삶의 다양성과 여유와 같은 가치관을 중요시한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고, 지식과 정보가 넘쳐는 나지만 과거에 비해 청년의 사회 진입 기회는 오히려 위축됐다. 무조건 아끼고 저축하기보다 의미 있는 경험과 소비를 지향하며, 일방적으로 기업을 권유하거나 단편적인 지원으로 취업을 유인하는 정책은 이들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된다. 청년의 가치관이 다른 세대에 비해 다른 니즈가 있으므로 눈높이에 맞은 대응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청년에게 일자리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들의 가치관을 이해해야만 하는 고민이 제기되고 있다. 단순히 각 영역별 분절적인 이해가 아닌 현장의 목소리가 담길 수 있는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첫째, 취업지원 네트워크를 마련하여 맞춤형 취업알선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세분화한 맞춤형 취·창업알선 특화프로그램을 지원하여 2030 타깃으로 취업을 적극 지원하는 기업경영 및 행정지원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둘째, 소통과 공감의 어려움이 단순한 자존감 상실, 우울·불안 등 개인의 문제가 심각한 수준의 정신질환으로 확대될 수 있고, 이러한 정신질환이 은둔형 외톨이, 묻지마 범죄 등으로 이어짐에 따라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때문에 정신건강 온라인 자가검진 사이트 개설 및 운영, 자살 위기자 및 고위험자 조기발견을 위한 찾아가는 서비스 확대해야 할 것이다. 학교, 직장 등으로 찾아가는 정신건강 예방교육 실시, 박람회, 축제 등에 찾아가는 블라인드 정신건강 상담 서비스 강화, 자살 시도자나 사망자의 유가족이나 친구 등을 중심으로 집중관리할 필요가 있다.셋째, 문화에 소외된 청년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여가문화 참여 독려와 문화체험기회 확대가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위해 생활체육 프로그램의 이용료 할인 혜택과 문화바우처제도를 확대 적용하여 여가문화 참여활성화를 지원한다.그리고 문화 형성에 필요한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문화 채널 플랫폼(UCC, SNS, 공모전 등을 실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특히, 문화정보 공간을 청년에게 공유 및 제공할 필요가 있다. 기존에 존재하는 빈 공간을 대여하여 청년이 직접 공간을 구성하고 계획을 마련하는 기회 제공도 필요하다.

2019-12-23

한 여인이 책을 쓴 이야기 (2)

다시 힘을 낸 그녀는 옷장에서 원고 뭉치를 꺼냅니다. 1년 동안 타자기 앞에서 쓰고 고치기를 반복합니다. 마침내 1929년 원고를 완성합니다.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지만, 무명 신인의 원고를, 그것도 트렁크에 가득한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읽어보겠다고 나서는 출판사는 없습니다.하나 둘 거절당하던 그녀는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13번째 출판사에서 거절 통보를 받은 후 미첼은 포기합니다. 원고는 다시 옷장 속에 틀어박혀 7년이 흐릅니다.미첼은 어느새 30대 중반이 되었지요. 1935년 4월, 뉴욕 최대의 출판사인 맥밀란의 편집자 헤럴드 레이텀이 애틀란타를 방문합니다.조지아 출신 캐롤라인 밀러 여사가 퓰리처상을 수상했기에 맥밀란에서는 남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지요. 조지아 주의 저명한 작가와 언론계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레이텀은 미첼에게도 좋은 원고가 있느냐 물었습니다.미첼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면서도 딱 잘라 말하죠. “그런 것 없어요!” 그때 옆에 있던 한 친구가 농담을 던집니다. “미첼은 소설을 쓸 만큼 진지하지 않아요!” 미첼은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결심하지요. 자신의 원고를 반드시 출판하고 말 거라고요.얼마 후 맥밀란 출판사의 레이슨 사장이 애틀란타를 방문하고 몇 시 기차로 뉴욕에 돌아간다는 짧은 소식이 애틀랜타 신문에 실립니다.미첼은 옷장 속에 있던 원고 뭉치를 커다란 트렁크에 담아 역으로 향합니다. 맥밀란 사장이 예약한 객실 좌석 아래 트렁크를 넣어 두고 메모를 써 붙입니다. “뉴욕까지 먼 여행길, 이 원고를 꼭 읽어 주세요.”기차가 출발하는 모습을 본 그녀는 곧장 우체국으로 달려가 전보를 칩니다. 다음 역에 기차가 정차할 때 전보를 차장이 레이슨 사장에게 전달합니다. “사장님. 트렁크에 넣어 둔 제 원고를 읽기 시작하셨나요?”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2-23

배고픈 예술가가 먹은 1.5억 짜리 ‘바나나’

1억5천만 원은 꽤나 큰돈이다. 바나나는 꽤나 맛있는 과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맛있다 손 치더라도 바나나 한 개의 가격이 1억 5천만 원은 기가 막힐 정도로 비싸다. 인플레이션이 극심해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리어커 가득 돈을 싣고 가야하는 어느 나라의 웃픈 이야기도 아니고 꾸며낸 허구는 더더욱 아니다.며칠 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린 ‘아트 바젤 마이애미’에서 세계적인 갤러리 페로탱(Perrotin)은 덕트 테이프로 벽에 고정된 바나나 하나를 12만 달러에 판매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바나나는 그냥 바나나가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의 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설치작품이다. 그런데 그 바나나를 행위 예술가 데이비드 다투나가 먹어 치워버린 것이다.이유가 가관이다. 배가 고파 먹었다는 것이다. 바나나가 1억이 넘는다는 것도 코미디이고, 그것이 고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먹어 버린 것도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카텔란의 바나나에는 ‘코미디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행위예술가가 바나나를 먹은 행위는 ‘헝그리 아티스트 퍼포먼스’로 둔갑했다.미술가나 갤러리 혹은 작품을 구매한 소장자는 1억 5천만 원을 삼켜버린 배고픈 행위 예술가를 고발은커녕 비판하지도 않았다. 이들이 서로 짜고 이 같은 해프닝을 벌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카텔란이라는 미술가는 원래부터 괴짜로 정평이 나 있다. 작가나 갤러리 입장에서도 어차피 바나나는 썩어 버려질 것이니 누가 그것을 조금 일찍 먹어 버렸다고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한다. 카텔란의 바나나는 뒤샹의 유명한 남성용 변기 작품 ‘샘’(1917년)처럼 예술적 본질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 혹은 도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고액으로 작품을 산 구매자는 한 순간 돈을 날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개념미술에서는 이른바 ‘진품증서’가 중요하다. 전통미술과 달리 증서의 소유가 작품의 소유를 의미한다. 개념미술은 말 그대로 개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작품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매개적 역할을 하는 물질은 큰 의미가 없다. 따라서 배고픈 행위 예술가가 바나나를 먹었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가 먹은 것은 작품이 아니라 그냥 바나나일 뿐이고, 그 바나나를 먹어 치웠다고 작품의 본질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꼭 말장난 같다.카텔란은 규칙과 규범을 깨트리는 ‘말썽꾼’으로 유명하다. 1992년 밀라노에서 개최된 그룹전에 출품할 작품이 떠오르지 않자 경찰서에 작품이 도난됐다고 신고를 하고 접수증을 액자에 넣어 전시했다.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히틀러나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의 모습 등 카텔란의 작품들은 기꺼이 상식에서 벗어난 내용을 묘사한다.2016년에는 103㎏의 진짜 황금으로 만든 변기를 만들었다. 몸통부터 손잡이까지 모두 황금이다. 사용된 금값만 47억원, 작품가는 70억 원이 넘는다. 올해 황금변기는 전시를 위해 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생가 블레넘궁에 설치됐고, 관람객들은 3분 동안 황금변기에서 볼일을 볼 수 있도록 허락됐다. 부에 대한 탐닉과 집착을 표현한 황금변기에는 ‘아메리카’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런데 어느 주말 새벽 누군가 저택에 침입해 황금변기를 떼어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작가의 화려한 전력 때문에 작품이 정말 도난당한 것인지 의심되지만 아직 황금 변기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하다.권력과 권위, 관습 따위를 서슴없이 하찮은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카텔란은 스스로를 “태생부터 멍청하다”고 소개한다. 멍청한 존재로 위장해 권위와 권력을 엎어버리면 폭소를 유발한다. 지극히 카텔란 다운 수사학이다. 그의 작품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언어로 관람객들에게 유쾌하게 말을 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또 다시 관객들을 바보로 만들어 버릴지 은근히 기다려진다./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2019-12-23

나무, 중심에 서다… 경흥사(經興寺)

동학산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평범한 마을을 지나 산세조차 평범한 낮은 골짜기 얼마쯤을 가다보면 자태와 눈빛이 다른 나무들이 절이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좌측 모퉁이를 돌아 오르자 주차장 너머 절의 풍경이 들어온다.학의 부리에 해당한다는 명당터, 신라 태종 무열왕 6년(659년) 혜공이 창건한 경흥사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이 머물렀으며 승병들이 이곳에서 처음 훈련을 해 전장에 나가 싸운,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사찰이다. 사찰의 규모 역시 대단했음을 고승의 부도들과 동학산 곳곳에서 발견되는 초석과 석축들이 반증하고 있다.상서로운 기운을 막아주는 병풍산이 건너편을 막고 있어 세월의 풍파조차 비켜갔을 법한 절이지만 승병을 훈련시켰다는 이유로 일제강점기 때 탄압을 받았으며, 6·25 전쟁 전후 극심한 도굴로 사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절은 차안의 세계를 돌아앉아 아늑한 길 하나 내며 상흔을 잠재우고 있었다.예상하지 못했던 절 풍경에 낮은 감탄사로 첫인사를 건넨다. 여느 절과는 다른 전각의 배치들, 어깨를 다닥다닥 붙이고 모여 앉아 가족적인 다정함이 느껴진다. 집의 가장 격인 대웅전은 한 단 높은 뒤쪽으로 물러앉아 위엄을 더하면서도 앞의 전각들을 품에 안은 듯 온화함을 배가시킨다. 가장 오래 되었다는 지장전은 경흥사의 품격을 더해주는 안주인 같았으며, 좀 더 높은 곳에 아담한 산령각이 조부모처럼 한발 물러나 인자하게 내려다보고 있다.은행나무 한 그루 나를 호명하듯 시선 속으로 들어온다. 세상을 관조하는 고령의 은행나무와는 달리 젊은 나무에게서 중심을 벗어나지 않은 정직함이 보인다. 분분히 떨어지는 스산한 슬픔이나 사색을 즐기는 길손의 모습이 환상처럼 잡히고, 나무 아래 벤치에는 그의 나이보다 더 깊고 오랜 침묵이 앉아 있다. 한 폭의 그림처럼 단정한 겨울 풍경 속으로 카이로스의 압축된 시간이 흐를 것만 같다.빈 벤치의 정갈한 기도를 뒤로 하고 대웅전 법당의 차가운 마룻바닥에 좌복을 깔고 앉는다. 보물 제 1750 호의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보다 수미단 좌측 편에 모셔진 낯선 영가 두 분의 위패 앞에서 낮과 밤의 저린 기억들이 모여든다. 마음이 시리다.생과의 단절이 아닌, 사후의 세계와 접속하는 매개점인 죽음 앞에서 무엇을 떠올렸을까? 행여 무성한 풀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새들조차 지저귀지 않는 폐허의 처마 같은 곳이 떠올라 두렵지는 않았을까? 대웅전을 나서는 발걸음이 지극히 낮아진다.나무의 시선은 해의 각도와 관계없이 가는 곳마다 따라온다. 아름다운 노을이 되어 내 안에 걸려 있다 내 안에서 질 것 같다. 절은 비어 있지만 결코 빈 절이 아니다. 한눈을 팔지 않는 은행나무 눈길이 길손의 젖은 발걸음을 기도로 이어지게 만들고 감로수 물줄기도 홀로 청정하다. 싸늘하던 법당에도 머지않아 저녁 예불 소리로 밝아 오리라.어마어마한 폭설이 내려 산의 허리가 잠기고 법당의 부처님이 눈에 갇혀 숲의 나무들이 죄다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되어도 젊은 은행나무는 과거와 미래를 홀연히 드나들 것만 같다. 중심에 선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뜻하며 고요함을 말한다. 염불 소리 듣고 자란 은행나무의 평온한 숨결, 나는 법당이 아닌 나무 아래 서서 나를 점검한다.중심으로 향해야 할 눈길이 자꾸만 가장자리로 향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바깥으로 무게 중심이 쏠릴 때마다 스스로를 휴머니스트로 만들거라 착각하지만 결국 나를 놓치고 내가 가야할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날들만 남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의 중심에 서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조낭희 수필가내 안에 있는 티끌을 부지런히 털고 닦아내기에도 주어진 시간은 부족하다. 신은 나에게 은행나무처럼 수백 년의 시간을 허락해주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만 내생의 선택권이 주어졌다는 게 참으로 부담스럽다. 젊은 은행나무 한 그루 곧게 귀를 세우고 손을 내민다. 도반처럼 든든하다.중심에 서면 고요하다.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입구도 출구도 없이 오로지 빛과 같은 길이 있을 뿐이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폭설이 내려도 마을로 가는 길이 열려 있다.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피안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안다. 게으름과 헛된 관계들의 달콤한 유혹 앞에서 결코 흔들리지만 않는다면….오늘은 모처럼 저녁 송년 모임이 있다. 무엇을 입고 갈지의 고민 따위는 사라졌다. 약간의 설렘과 분위기에 들떠 술에 취하듯 구업(口業)이나 쌓지 않을까 걱정이다. 캐롤송 울려 퍼지는 번화가에서도 중심을 향해 뿌리 내리는 숭고한 나무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뿌리 없이 연말만 밝히는 트리가 아닌.어느 어두운 밤/ 사랑의 강렬한 갈망으로 불붙은 채/ 나는 보이지 않게 집에서 빠져 나왔다/ 내 집은 아직도 그저 고요할 뿐.- 성 요한 ‘카르멜의 산길’ 중-

2019-12-23

대통령과 ‘악마의 대변인’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은 원래 가톨릭교회의 성인 추대 심사에서 유래된 용어로서 논의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선의(善意)의 비판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악마의 대변인은 조직 내부에 형성된 기류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관계없이 조직 의견에 동조하는 ‘집단사고(groupthink)’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역할을 한다. 반대 의견을 제시하여 토론을 활성화시킴으로써 보다 나은 대안을 찾도록 유도하는 것이다.민주주의와 독재체제의 차이점은 통치자의 생각과 다른 의견이 허용되는가의 여부이다. 북한에서는 김정은 위원장과 다른 의견은 ‘반동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죽음을 각오해야하지만,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다른 생각을 얼마든지 피력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다른 생각이 오히려 더 나은 대안이나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권장되기까지 한다.우리에게 잘 알려진 애플(Apple)의 광고,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스티브 잡스(S. Jobs)가 인습적 사고에 갇힌 보통사람들에게 ‘악마의 대변인’이었음을 말해준다. 애플의 성공이 무엇에 토대를 두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시사점이다. 또한 1962년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당시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에 대처하기 위하여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맡도록 하였는데, 강경파들이 주장했던 당초의 ‘공습전략’은 논의과정에서 핵전쟁으로 확산될 우려가 제기되어 온건한 ‘해안봉쇄전략’으로 수정됨으로써 평화적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우리 역사에도 ‘악마의 대변인’의 가치를 잘 인식한 성군(聖君)이 있었다. 세종은 어전회의(御前會議)인 경연(經筵)에서 지나칠 정도로 계속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고약해(高若海)’를 대사헌(현재의 감사원장)에 중용하여 ‘악마의 대변인’으로 삼았다. 절대왕조시대에도 목숨을 걸고 ‘왕과 시비를 다투는 대간(臺諫)’들의 직언이 있었기 때문에 왕의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혜로운 정치지도자는 자신의 독선을 경계하고 집단사고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악마의 대변인’을 두었다. 물론 그의 의견을 수용하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통치자의 몫이다. 우리 헌정사가 보여주듯이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은 권력에 눈먼 예스맨(yes man)들에게 둘러싸여 충성스런 비판과 고언(苦言)을 단지 ‘고약한 의견’으로 무시해버렸기 때문이다.특히 지금처럼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첨예화된 상황에서는 청와대 참모들의 이념적 동질성이 강하기 때문에 ‘집단사고의 덫’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도 ‘외눈박이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악마의 대변인’을 곁에 두고 비판적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소신은 강하나 포용력이 없다면 그에게 참된 조언을 하는 충신들은 점점 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2019-12-23

12·16부동산대책

23일부터 적용된 12·16부동산대책의 골자는 15억원 초과 아파트에 대해서는 주택담보대출을 금지하는 한편 모든 차주의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 주택담보대출에 대해 LTV(담보인정비율)를 40%에서 20%로 강화한다는 것.예를 들면 이 지역에서 14억원 주택을 매입시 14억원×40%=5억6천만원의 주택담보대출 한도가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9억원×40%+5억원×20%=4억6천만원으로 줄어든다.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관리도 강화된다. DSR는 주담대를 포함한 각종 금융 대출심사 시 차주의 모든 대출에 대해 원리금 상환 부담을 계산하는 지표다. 현재는 각 시중은행이 DSR 시행 이후 신규취급한 가계대출을 평균 DSR 40% 내로 관리하더라도 개별 대출에 대한 DSR가 40%를 초과하는 것 역시 대출취급이 가능했다. 앞으로는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에서 시가 9억원 초과 주택 담보대출 차주에 대해 차주 단위로 DSR규제가 적용되며, 은행권엔 40%, 비은행권에선 60%가 한도다.또 고가주택의 기준이 공시가격 9억원에서 시가 9억원으로 변경되고,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에서 1주택세대는 1년 내 기존주택을 처분하거나 전입해야하며, 9억원 초과의 고가주택을 구입하는 무주택 세대의 경우 기존 2년에서 1년내 전입해야 한다.이번 대책으로 집값 상승의 주범인 서울 강남권 일부 아파트 가격이 내렸다는 보도가 있지만 일단 청신호로 보인다.다만 이주비 대출규제에다 분양가상한제로 직격탄을 맞은 재개발·재건축아파트의 공급이 줄어들면 오히려 가격이 오를 우려도 있다는 주택전문가들의 전망도 있어 이래저래 앞길을 점치기 어려운 게 부동산대책이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12-23

한 여인이 책을 쓴 이야기 (1)

애틀랜타 저널의 젊은 여기자 미첼은 일요일 판 ‘선데이 매거진’에 인터뷰, 라이프 스케치, 칼럼 등을 썼는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하루는 말에서 떨어져 발목이 부러집니다. 오랜 치료를 받느라 결국 기자 생활을 내려놓게 되지요.남편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미첼에게 읽을 것이 떨어지지 않도록 배려합니다. 그녀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 치웁니다. 어느 날 남편이 책 한 보따리를 내려놓으며 말합니다. “이제 도서관에는 따분한 과학 책 외에 빌릴 책이 없어요. 읽을 책이 더 필요하다면 당신이 직접 책을 쓰는 수밖에 없겠는걸.”큰 용기를 얻은 미첼은 타자기 앞에 앉습니다. 1926년부터 2년 동안 타자기 앞을 떠나지 않고 소설을 씁니다. 그녀의 타자기는 매일 글을 뿜어내지요. 70개 챕터, 1천100페이지에 가까운 대작을 완성합니다.소설이 절정을 치닫던 어느 날, 소포가 날아옵니다. 기자 시절 친구 스티븐 베넷이 쓴 ‘존 브라운의 시신’ 초판본이었지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의 운율과 어휘, 감동적인 시구에 전율하지요. 2년간 써 오던 자신의 원고가 갑자기 쓰레기처럼 느껴집니다. ‘이따위 알량한 소설을 누가 읽기나 하겠어? 차라리 시작하지 말아야 했어!’원고 뭉치를 불태워 버릴 생각을 합니다. 남편의 만류로 태우지는 않았지만, 옷장에 처박아 버리고 기나긴 고통과 침묵의 시간을 갖습니다. 활활 타오르던 창작의 불꽃은 이내 싸늘하게 식고 무기력과 좌절감이 그녀를 덮칩니다.6개월 동안 열등감에 시달리며 한 글자도 써내려가지 못하던 미첼은 어느 날 사교 모임에 나갔다가 우연히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람은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불행에 빠집니다. 행복은 비교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최대한 발휘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비교 따위는 잊어버리세요.”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2-22

북한은 ‘새로운 길’을 갈 것인가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북한은 미국이 ‘새로운 셈법’을 제시하지 않으면 ‘새로운 길’을 간다고 선포한지 오래다. 하노이 회담 결렬 후 북한은 유엔의 대북 제재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북미 실무 회담마저 결렬된 후 북한은 더욱 상황이 어렵게 되었다. 북한은 연말까지 북미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다는 엄포성 발언까지 하는 상황이다. 이에 미국은 북미 협상의 목표는 분명하지만 협상의 시한은 없다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비건은 서울에서 공개적으로 북미 협상을 제안했지만 북한은 아직 아무런 응답이 없다.북한은 연말까지 5차 당 전원회의나 신년사를 통해 그들의 ‘새로운 길’을 밝힐 것이다. 그 길은 과연 어떤 길일까. 북한 당국의 최근 동향을 통해 보면 하나는 북한당국이 미국의 대북 제재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곧 핵실험과 장거리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겠다고 선언하는 수준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부터 강행한 후 미국에 핵 군축 협상을 요구하는 방안일 것이다. 북한은 이미 동창리 엔진 시험가동을 마쳤으며 그 연장선에서 탄도 미사일을 발사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북미 마찰은 더욱 고도화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이다.북한이 이러한 노선을 선택하는 배경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핵협상을 통해 제재해제도 체제의 안전 보장도 얻지 못했다. 북한은 이제 ‘연내 중대 결심’을 통한 ‘새로운 길’을 선포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은 대북 제재의 굴레에서 탈피하지 못하면 그들의 경제적 외교적 위기를 해결할 길이 없다. 북한의 유일한 외화벌이 수단인 해외 노동자들마저 완전 철수 시한을 코앞에 두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핵무장 강화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이다.그러나 북한이 이러한 강경책을 선택할 때 그 후폭풍은 만만치 않다. 미국은 이미 북한에 대한 선제 타격이라는 군사적 옵션을 발표한바 있다. 미국은 이미 북한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정보 정찰기까지 시험한바 있고 최신형 B-1B의 NNL 침투 훈련도 마쳤다. 동해안에는 항모전단을 파견할 준비까지 마쳤다. 미국은 소위 코피 작전을 통해 동창리와 영변 등 핵시설부터 타격할 준비도 되어 있다. 북한 당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최고 지휘부에 대한 폭격 도상 훈련도 마친 상태이다. 유엔 안보리는 즉각 소집되어 북에 대한 압박수위를 높일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북한 당국은 탄도 미사일이나 핵실험을 강행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그러나 북한은 대내외적인 발언의 강도는 높일지라도 실제적인 행동은 유보할 가능성이 높다. 후견인 중국마저 북미간의 정치적 타결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당분간 핵능력을 과시하는 선전전을 통해 대미 압박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공조를 얻기 위해 6자 회담의 재개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북한의 ‘새로운 길’이 무엇인지 연말을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2019-12-22

인생은 하나의 긴 인용문

김현욱 시인올해 읽은 책들의 목록을 살펴본다. 부지런히 읽는다고 읽었는데 성에 차진 않는다. 허생처럼 두문불출 7년 동안 책만 읽고 싶다. 과연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냥 행복할까? 솔직히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뭔가 또 다른 것을 바라겠지. 1년 동안 딸에게 읽어준 그림책, 동화책을 포함하여 참으로 다양한 분야의 책에 밑줄을 그었다. 밑줄 친 낱말이나 문장, 문단은 워드로 작성해서 갈래별로 모아둔다. 월동 준비를 하듯 차곡차곡 마음에 모아둔다. 겨우내 어쩌면 사는 내내 두고두고 꺼내어 쓴다. 마음의 양식이란 말은 헛말이 아니다. 좋은 문장은 좋은 음식과 같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몸에 피와 살이 되듯 좋은 문장을 읽으면 영혼에 빛과 온기가 돈다. 올 한 해 만난 좋은 문장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에서 만난 불편한 진실이다. “현대 정신의학은 삶에서 예상되는 많은 문제는 알고 보면 화학적 불균형으로 인한 정신 장애이므로 약을 먹어서 해결하라고 세뇌하는 쪽으로 너무 많이 나갔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어째서 우울증인가.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아이의 우울과 불안을 뇌신경 전달 물질의 불균형이 초래한 우울증 탓으로 돌리는 전문가는 비정하고 무책임하다.”메리 파이퍼의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란 책은 읽고 또 읽은 책이다. 다독(多讀)보다 더 좋은 것은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재독(再讀), 삼독(三讀)이다. 책이 너무 좋아 아끼는 지인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선물했다. 고 장영희 교수의 스테디셀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처럼 서재에 두고 오래 읽을 책이다.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은 읽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큰 비극은 아름다운 어떤 존재가 성장하고 싶어 하는데 다른 어떤 존재가 그것을 저지할 때입니다.”흐로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대담을 정리한 보르헤스의 말이라는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은 ‘지옥’에 관한 보르헤스의 관점이다. “지옥에 관해 말하자면, 난 지옥이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지옥을 장소라고 여기는 이유는 단테를 읽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난 지옥을 상태라고 생각해요. 영혼은 스스로 지옥이나 천국에 이르게 되죠.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혼은 그 스스로를 거치면서 지옥이나 천국이 되는 거예요.” 언젠가부터 나도 천국이나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생각해왔다. 논어 위정편에서 ‘불혹(不惑)’은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 마흔을 이르는 말이라고 했지만, 그것 또한 특정 나이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여긴다. 보르헤스의 영웅 에머슨은 “인생은 하나의 긴 인용문”이라고 말했다. 남의 글과 말에서 인생의 지혜를 배운다. 12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맵찬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다. 두문불출, 책 읽기 참 좋은 계절이다. 밑줄 긋기 딱 좋은 계절이다.

2019-12-22

‘꼼수’냐, ‘묘수’냐

안재휘 논설위원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50년 집권론’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이 대표가 처음 그 말을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뜬금없는 희망가이거나 오만한 발언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지난해 울산시장선거를 앞두고 청와대가 나서서 야당 후보의 공약사업을 물 카드로 만들고, 경찰을 동원해 파렴치범으로 몬 정황이 드러나면서 얘기가 달라지고 있다. 최근 뜨거운 뉴스로 떠오른 이 논란의 ‘협잡’ 의혹은 이해찬이 무슨 자신감에서 그런 장담을 해왔는지를 짐작하게 한다.작년 울산시장선거에서 당시 시장이던 한국당 김기현 후보와 현 시장인 민주당 송철호 후보는 각각 ‘산업재해 모(母)병원’과 ‘공공병원’ 건립 공약을 내걸고 경쟁했다. 선거일을 불과 보름 앞두고 정부는 ‘산재 모병원’에 예비타당성 조사 불합격 판정을 내렸고, 송철호가 시장으로 당선된 후 올 1월 ‘공공병원’을 예타 면제사업으로 선정한 데 이어 지난달 KDI의 사업 적정성 검토까지 완료했다. 도대체 무슨 뒷구멍 꼼수 장난질이 펼쳐지고 있는 것인가.경찰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으로 시작된 이 사안은 수사의 단초가 된 첩보가 청와대발이라는 사실이 본질이다. 송병기 울산시 경제부시장의 메모에 따르면, 송철호는 후보가 되기 전부터 청와대 인사들을 만나 선거 관련 논의를 한 정황이 뚜렷하다. 당내경선 상대였던 임동호를 주저앉히고 송철호를 단독 전략공천하기 위해 청와대 참모들을 비롯한 정권 실세들이 합동작전이 펼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도 역력하다.선거법 개정과 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법을 둘러싼 여야의 정쟁은 비상식의 난장(亂場)이다. 집권당은 교섭단체 중심이 아닌 마음에 맞는 초록 동색들을 아울러 ‘4+1’이라는 희한한 협의체를 앞세워 입법을 강행하고자 들이밀고 있다. 친여 군소정당들이 비례대표 의석을 더 확보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주는 대가로 대통령 친위부대 공수처를 바꿔먹는 뒷거래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공수처는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장악할 수상한 옥상옥 사법기관이다.그런데 한국당이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비례 한국당’이라는 위성정당 맞대응 반전 카드다. 이미 외국에도 사례가 있다는 이 기습반격에 그동안 의기양양하던 여권(與圈)은 허를 찔린 듯 당황한 기색이 완연하다. 민주당·정의당 할 것 없이 차례로 나서서 ‘꼼수’라며 바짝 흥분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객관적으로 보면, ‘4+1’ 꼼수를 되받아친 자유한국당의 꼼수는 역설적이게도 절묘한 ‘묘수’로 작용하고 있는 형국으로 읽힌다.‘꼼수 공화국’의 냄새 나는 시궁창 드라마에 청와대가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얄궂은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청와대 모든 비서관실에 붙어 있다는 ‘춘풍추상(春風秋霜)’ 액자를 모조리 뒤집어 달아야 할 판이다. 거룩한 본뜻은 산산조각이 나고 ‘남을 대할 때에는 서릿발처럼, 자신을 대할 때에는 가을 봄바람처럼’으로 의미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민주주의가 점점 더 위태로워지고 있다.

2019-12-22

타산지석(他山之石)

미국의 45대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는 미 공화당 내에서도 비주류 정치인으로 통했다. 과거 대권에 도전했던 정치인과는 딴판의 길을 걸었다. 하원과 상원의원, 주지사 등의 이력과 인지도를 발판으로 삼아 대권에 도전했던 기성의 정치인과는 경로가 달랐다는 뜻이다. 그를 아웃사이더 대통령이라 부른 이유다.아버지의 재산을 물러 받은 막강한 재력과 사교계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특히 TV쇼에 출연해 “넌 해고야”라 하는 유행어를 만들면서 그는 일약 명사가 됐던 것이다. 그가 민주당 힐러리 후보를 제끼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두고 당시 여론은 기성정치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 대폭발한 것이라 해석했다. 그의 미국 제일주의와 보호무역 정책은 세계를 충격과 혼란에 빠뜨렸다. 여성비하와 인종차별 발언 등 각종 논란의 중심에 선 그를 두고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천박한 대통령이란 고약한 평가도 받았다.권력 남용과 의회 방해라는 두 가지 의혹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미 하원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는 불명예를 썼다. 평소의 변덕과 즉흥적이고 돌발적이며 대통령으로서는 매우 부적절한 언행을 본다면 그에 대한 탄핵은 예측된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정작 탄핵안 통과에 대한 미국 내 반응은 오히려 차분하다. 상원의 탄핵안 가결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주요 이유지만 핫 이슈임에도 국민적 공감대가 별로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지금의 미국 경제는 너무 잘 돌아가고 있다. 미국 내 실업률 등 각종 경제 지표는 전례 없는 호황세다. 탄핵이 되레 야당인 민주당의 짐이 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예부터 정치는 백성이 잘 먹고 사는데 기본을 두고 있다. 우리의 정치가 타산지석으로 살펴볼 대목이 많은 트럼프 탄핵 사태다./우정구(논설위원)

2019-12-22

대역사문화 재조명을 통한 영덕의 희망

이희진 영덕군수돌아보면 어떤 기대와 흥분으로 기해년 벽두를 맞았던 것 같다. 민선7기를 맞아 2천만 관광시대를 실현하려면 첫 단추를 어떻게 꿰어야 할지 고민이 컸다. 지역 고유의 자원을 활용한 문화관광 콘텐츠가 관건이라 여겼기에 영덕의 면면을 찬찬히 톺아봤다.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독립운동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영해 3·18만세운동과 그 유산을 대구의 김광석거리처럼 특화시킨다면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생각했다.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라 정부도 10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우선 호국의 고장으로서 영덕의 정체성을 새롭게 다지는 게 중요했다. 한국 근대사의 암흑기였던 일제강점기는 민족 불굴의 투지를 증명한 긍정의 역사로 일깨워져야 했다. 영덕에서는 항일시위의 영웅들을 자랑스러운 역사의 주체로 재정립하는 작업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후손들은 역사적 긍지를 다시금 품게 될 것이었다.100주년 기념 3·18독립만세문화제를 준비하면서 만세운동을 처음으로 모의했던 지품면 낙평리에 발상지 기념비를 세우고 영해 3·18의거탑에는 대형 태극기 게양대를 설치해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행사를 열었다. 문화제에서 지역주민들은 플래시몹 공연에 대거 참여하며 대동단결의 축제를 만들고 횃불행진을 하며 선대의 숭고한 희생을 기렸다. 이런 노력들이 높게 평가받아 ‘제9회 대한민국 의병의 날’행사도 신돌석 평민의병장 유적지에서 개최할 수 있었다. 축산면의 작은 유적지에서 1천명이 넘는 인파가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을 외쳤고 돌아가는 군민의 손엔 영덕 의병의 역사를 새로 집대성한 책자가 들려있었다.군민의 역사적 자부심을 북돋우는 작업과 동시에 추진한 사업이 문화재청의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활성화공모사업에 영해장터거리를 신청하는 것이었다. 근대역사문화공간은 근대 시기에 형성된 거리, 마을경관 등 역사문화자원이 집적된 지역을 의미한다. 문화재청에서 그동안 개별 건축물 등 점(點) 단위로만 지정했던 등록문화재를 선(線)과 면(面) 단위로 확장해 근대문화유산을 입체적으로 보존·활용하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현 정부의 국정과제로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추진되면서 활성화됐다. 지난 11월 영덕과 익산 두 곳만이 선정됐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11개의 역사문화도시가 자웅을 겨룬 심사에서 영덕이 두각을 나타낸 이유는 영해장터거리 주민의 역사의식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선 보존하고 활용할 가치가 있는 건축물을 보유한 주민들의 동의가 필수다. 이 문턱을 넘지 못한 시군이 많았는데, 우리 만세운동의 후예들은 기꺼이 사업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적극 동참했다. 매년 만세운동을 재현하며 숭고한 희생을 기려온 후손들이어서 가능했던, 선대를 향한 헌정의 예(禮)라 하겠다. 실로 감사한 일이다.현재 영해장터거리의 건물 10개소가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됐다. 문화재들은 근대가옥 갤러리, 의상대여점, 박물관, 주막체험 양조장, 사진관, 인력거 정류소,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활용되며 이와 연계해 다양한 먹거리와 문화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근대역사문화공간이 조성되면 매년 개최하는 3·18독립만세문화제의 장이 더욱 다양해지고 콘텐츠도 풍부해질 것이다. 인근의 전통시장인 영해만세시장도 더욱 활력이 넘칠 것이다. 영해장터거리는 영덕군을 상징하는 역사문화공간이 되리라 믿는다. 영해장터거리는 지난 11월 정부공모사업에 선정된 축산 블루시티 조성사업과 현재 입소문을 타고 방문객이 늘고 있는 창수면 인문힐링센터 여명과 함께 영덕군 북부의 관광거점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매년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돼 겨울과 봄철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남부의 강구대게거리와 조응하는, 균형개발의 효과도 기대된다. 영덕대게와 복숭아, 송이, 해수욕장은 모두 특정 계절의 영향 아래 있지만 문화재를 보존하고 활용하는 근대역사문화공간은 사계절 관광명소로서, 지역경제에 한 몫을 제대로 담당할 것이다.문화관광과의 근대역사문화공간사업 사업담당자는 요즘 밥 먹듯이 야근을 한다. 원래의 업무에 영해장터거리 활성화사업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민선6기 중반부터 열악한 군 재정의 대안으로 정부공모사업을 직원들에게 많이 주문했다. 그동안 역량이 늘고 선정되는 사업도 많아졌는데 그에 비례해 직원들 피로감도 커졌다. 올해는 유별나게 태풍도 많아 비상근무도 잦았다. 걱정이다. 12월에 특별휴가를 챙겨봤지만 충분할지 모르겠다. 문화재 등록에 기꺼이 동참한 영해장터거리의 주민들, 사업추진과 잦은 비상근무에 헌신한 공무원들 모두가 3·18만세운동의 자랑스러운 후예들이다. 바로 이들이 영덕의 2천만 관광시대의 여명을 밝히고 있다.

2019-12-22

선물은 내 마음속에 있다

허진욱 회사원가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뜨거운 햇볕은 얼굴과 몸을 태우는 듯하다. 더 이상 달릴 수 없다. 온몸은 땀 범벅이고 젖은 옷이 묵직하다. 힘들다. 청소년 시절 내 모습이다. 고된 훈련을 하는 이유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기 때문이었다.88서울올림픽을 TV로 보면서 꿈이 생겼다. 복싱 문성길 선수가 시상대 제일 높은 곳에 올랐다. 그의 목에 금메달이 걸리는 순간 감전된 듯한 전율을 느꼈다. 멋있었다. 나도 저 시상대 제일 높은 곳에 오르겠다고 다짐했다. 그 순간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목표를 내 가슴에 새겼다. 심장은 뛰었고, 아무리 힘든 훈련도 내 꿈을 꺾을 수 없었다.고등학교 1학년이던 필자는 시합에서 고등부 최연소, 최우수 선수상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전직 권투선수인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아버지도 기대가 컸다. 당신의 꿈을 아들이 대신 이루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합마다 우리는 함께 했고, 우승할 때마다 아버지는 나보다 더 기뻐했다.어느 날 사고가 났다. 훈련 중 왼손을 다쳤다. 수술을 받았지만, 신경이 끊어진 탓에 복싱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졌다. 꿈과 희망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밥도 먹기 싫었고 학교도 가기 싫었다. 그렇게 내 인생은 끝났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가출을 밥 먹듯이 하고, 술에 취했다. 학교에서도 문제아로 전락했다. 담임도 내 방황을 이해했지만, 방황은 더 심해졌다. 많이 울면서 답도 없는 질문만 던졌다. “왜 내게만 이런 시련이 닥친 걸까?” 친구들도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꿈을 잃은 내 마음을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긴 방황은 아버지의 설득과 어머니가 흘린 눈물,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묵묵히 들어준 형들 덕분에 끝났다. 마치 차가운 얼음이 따뜻함에 스르르 녹아내리듯 마음이 풀렸다. 그 지점에서 새 희망이 보였다. 다시 심장이 뛰었다.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는 법일까? 문제 속에 답이 있다는 깨달음이 왔고 위기 속에 기회가 숨어 있음을 알았다.“후회한다고 해서 이미 늦은 것은 아니다.”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깨달으면서 후회의 진정한 뜻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후회하며 지나간 일에 대한 아쉬움이나 슬픔에 빠질 게 아니라 내 연약함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시간을 보냈다. 철학자의 말처럼 이미 늦은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나는 또 다른 희망을 품은 것이다. 내가 스스로 어떤 마음을 품는가에 따라 절망에 빠질 수도 희망으로 마음 설렐 수 있음을 알았다먼 여행을 떠난 주인공은 파랑새를 찾아 헤맨다. 결국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파랑새가 바로 내 집에 살고 있었음을 깨닫는 이야기처럼, 고등학교 시절 시련을 통해 희망이 저 멀리 밖에 있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있음을 배웠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인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새 희망이 생겨나는 법이다.그 깨달음은 내게 큰 선물이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이 생기면서 직장 생활을 하는 데 있어 큰 경쟁력을 갖추는 계기였다. 남들이 힘들어하는 일도 오히려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마음을 품었다. 누가 불만을 터뜨리면 나는 그 시간에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하려 노력했다. 그런 태도 덕분에 입사 첫해, 우수사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희망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절망하는 때도 모두 내 안에서 시작하는 법이고 내 마음이 만드는 결과임을 배워갔다.희망은 이미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을 키워 활활 타오르게도 할 수 있고 얼음처럼 차갑게도 할 수 있다. 시련은 사람을 단단하게 한다. 어린 나이에 깨달은 이 선물 덕분에 세상을 넓고, 깊게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보다 더 큰 선물이 있었을까?이틀 후면 즐거운 크리스마스다. 2020년도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성탄과 새해, 나를 위해 준비해 둔 가장 귀한 선물을 받기 위해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2020년 한 해 동안 내게 펼쳐질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내 안으로 탐험을 떠나는 연말이다.

2019-12-22

하루 분의 좋은 세상

내가 알고 있는 단 한 가지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그러니까 내가 아는 것을 믿고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데 있지 않겠지요. 모르고도 따라할 수 있고 따라갈 줄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것이겠지요.궤변일까요? 하지만 저는 요즘 갈증이 심합니다. 무엇을, 어느 분을 믿고 따라야 할지 모릅니다오늘은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집에는 나와 내 고양이밖에 없습니다. 캄캄할 때 집을 나설 때는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제 삶은 늘 길 위에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집에는 괭이가 혼자서라도 기다려 주겠지요. 전철을 타고 있는 시간처럼 한가로울 때가 있을까요. 아무리 바빠도 전철 안에서는 뛰어갈 재주가 없습니다.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고나 할까요. 전철 맨 앞칸까지 뛰어가야 무엇하겠습니까. 갈아타는 곳은 뒤에 앉아 있을 때. 더 빠를지도 모르는 것을요.오늘은 앉아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잘못한 일들, 초조한 일들, 미운 일, 급한 일들 때문에 마음이 고단하지 않아서 좋으니까요. 옛날에는 사람들이 왜 마인드 콘트롤을 배우나 했습니다. 그런 것까지 배워야 하느냐고요. 그런데 이 미련한 소 같은 놈이 어디로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는지요.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앞에 걸음이 좋지 않은 사람이 하나 비척비척 걸어갑니다. 저 분도 오늘의 저처럼 걸음걸이가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저도 요즘은 지팡이 신세를 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 증세가 꽤 오래 되었지만 차차 나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제가 나가는 전철역 입구 쪽으로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에스컬레이터가 반갑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제 역마다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천천히 올라가는 입구 쪽으로 날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이런 때를 미명이라고 하던가요. 지금 빛이 작고 흐리지만 차츰 주위가 환해질 테지요. 새벽에 일찍 길을 떠나면 날이 완전히 밝을 때까지 시간이 길다고 느껴집니다.드디어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세상입니다. 오늘 분의 세상을 일찍 맞았습니다.오늘은 깨끗한 공기만 마시고 싶습니다. 맑은 사람들만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안부를 묻지 못하는 것처럼 슬픈 일이 없습니다. 오늘 저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좋은 인삿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요.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2-19

고가 주택

돈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되는 것이 정당할까.10년 전에 내가 가졌던 1억원의 가치가 올해 와서는 분명 다를 수 있다. 이렇듯 돈의 가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느끼는 무게가 달라진다.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물가상승이나 인플레이션 등의 경제현상에 따라 돈의 가치가 변동되는 것을 의미한다. 100억원 가진 사람과 100만원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치자. 만약 두 사람이 내일 죽는다고 가정했을 때 누가 더 억울할 것인지 생각해 보면 돈의 가치는 또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옳을까. 돈은 사람의 형편과 장소, 여건에 따라 그 가치 평가가 천차만별이라 하겠다.대한민국에서는 얼마만큼 있어야 부자로 평가 받을 것인지 한 취업 포털에서 조사를 했다. 4천여명의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물어보았더니 39억원을 부자의 기준점으로 보았다. 우라나라 가구당 평균 자산인 4억원을 기준하면 10배쯤 되는 금액이다. 연봉 5천만원을 버는 직장인은 한 푼도 안 쓰고 78년을 모아야 할 돈이다.정부가 치솟는 아파트 값을 잡는다고 부동산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15억원 이상을 고가주택이라 칭했다. 왜 15억원 이상이 고가주택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은 없다. 주택 보유자 입장에서는 14억원은 되고 15억원은 안 된다고 하니 그 기준점이 궁금할 뿐이다.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해 당국의 규제 의지는 이해되나 내 재산을 담보로 내 마음대로 돈을 빌려 쓸 수 없다고 하니 그것 또한 답답한 노릇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부의 부동산 규제조치 후 하룻만에 “대출금지는 위헌”이라는 헌법 소원이 제기됐다. 정부 정책이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국민을 설득하는 법리가 분명해야 한다. 헌법소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진다. /우정구(논설위원)

2019-12-19

제4의 길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역대 국회의장이 퇴임을 하면 흔히 세가지 길이 있다고 한다. 첫째가 정계원로의 길을 걷는 경우다. 황낙주·박관용·임채정·김형오·박희태·강창희 전 의장 등이 이 길을 걸었다. 둘째는 퇴임후 다시 총선에 출마해 선수를 더한 경우다. 박준규·이만섭·김원기 전 의장이 그랬다. 셋째는 국회의장을 지낸 뒤 대권에 도전한 경우다. 초대의장인 이승만 전 대통령과 신익희 전 의장이 그랬다. 이번에 총리후보자로 지명된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모 중앙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세가지 길 중 어느 길을 걷고 싶으냐”는 질문에“제4의 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말이 씨가 됐을까. 정 전 의장은 자신이 한 답변 그대로‘제4의 길’을 걷고 있다. “정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이 변화무쌍한 생물”이란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19일까지 나흘째 패스트트랙 규탄대회를 열고, 여당의 공수처법과 선거법 날치기를 저지하겠다는 결기를 보이고 있다. 며칠 전에는 국회내에 한국당 지지자들이 대거 몰려 들어와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최근의 한국당 집회에는‘태극기 부대’로 상징되는 극우단체까지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한국당과 황교안 대표가 국회 로텐더홀 밤샘농성에 이어 국회앞 규탄대회 개최 등 장외투쟁으로 번져가면서 급속히 극우성향으로 치닫는 데 대한 우려다.여당이 새해 예산을 일방적으로 날치기 통과시킨 후 다수의 횡포를 막기 위해 장외투쟁으로 치달은 한국당의 입장을 이해못할 바 아니지만 정치권의 우려는 깊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야당으로서 집권여당과 싸우는 방법이 빗나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한국당이 패스트트랙 저지에 올인하면서 장외투쟁으로 뛰쳐나가는 것은 오히려 논점을 흐리는 것이란 비판이다. 사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군소야당의 협의체인 ‘4+1협의체’가 힘을 합쳐 선거법과 공수처법을 통과시키겠다고 나서면 한국당이 물리적으로 막을 수 없다. 협의체가 과반수를 확보해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법을 통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당이 며칠째 전국의 당협위원장들을 동원해 규탄대회를 여는 이유가 뭘까. 추측컨대 여당과 협의할 명분, 즉 출구전략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공수처 법안만 해도 한국당 일각에선 일부 독소조항을 바꾸면 통과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목소리가 있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골자인 선거법 개편안은 거대정당인 민주당과 한국당의 이해관계가 거의 일치한다. 그러니 이제라도 여당과의 물밑대화로 꼬인 정국을 푸는 게 옳다. 그런 연후 청와대 하명수사,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무마사건, 우리들병원 특혜 부정사건 등 ‘친문3대 게이트’를 대여공세의 지렛대로 하고, 민생경제 침체를 강도높게 비판하며 이를 극복할 대안을 제시하는 대안정당의 모양새를 갖춰야 한다. 아울러 참신한 인물을 적극 영입해 쇄신바람을 일으키고, 보수의 목소리를 한데 모아 보수통합을 이뤄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한국당이 가야할 제4의 길이다.

2019-12-19

흐르는 물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고 한다. 학문의 흐름은 흐르는 물처럼 변화무쌍하다. 특히 정보분야는 그 정도가 속도나 양상에 있어서 타 분야를 앞서고 있다. 포스텍이 내년 3월 개원을 앞둔 인공지능(AI)전문대학원의 첫 입시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AI전문대학원 내 석사과정·박사과정·석박사 통합과정 등 3개 과정 전체 합격률이 18.5%였다고 17일 밝혔다. 이 가운데 석박사 통합과정의 경우 합격률은 9%에 불과했다고 한다.경영정보시스템(MIS)은 필자가 학위공부를 하던 30여년 전에는 의사결정시스템이 크게 유행하여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필자도 그 분야로 학위를 받았다. 당시 인공지능(AI)은 아주 초보적 단계였고 상상의 세계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AI 주요 분야를 알지 않고는 MIS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AI가 크게 부상하고 있다.포스텍은 AI분야에서 국내 최고 수준의 역량은 물론 관련 분야 교육 경험이 풍부한 교원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입시에서는 AI 분야에 대한 선풍적인 사회적 관심을 반영하듯 국내 유수대학은 물론 해외 대학 출신자까지 지원을 해와 많은 고민이 있었다고 하고 실제로 해외대학에서 지원한 학생 중 1명밖에 선발을 못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였다고 한다.필자는 금년 봄부터 수원에 있는 아주대학교에서 대학원 강의를 하고 있다. 주변에 있는 삼성 등 유수기업에서 많은 학생들이 대학원 강의를 듣고 있는데 AI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아주대는 최근 지역사회 청소년을 대상으로 AI 인재양성을 위해 수원시와 업무협약을 맺고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라고 한다. 4차 산업혁명 핵심기술인 인공지능에 대한 이해와 체험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청소년 인공지능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되는 언어가 인공지능 프로그래밍으로 각광을 받는 파이선(Python)이다. 파이선으로 기계학습 기초·응용 3D프린팅 디자인 체험 등의 교육을 제공한다고 한다.포스텍 AI 대학원 설립과 아주대의 AI 청소년 아카데미에서 사용될 주요 언어가 파이선이 될 전망이다. 필자가 70년대 대학을 다닐 때는 과학은 포트란(Fortran), 상업용으로는 코볼(Cobol)이 대세였고 그걸 배우느라 동분서주하였다. 그런데 80년대 미국유학을 가서는 파스칼(Pascal)이란 언어를 배워야 했다. 모든 과목이 파스칼로 진행되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느라 고생하던 생각이 난다. MIS의 트렌드가 변하고 프로그래밍 언어가 변하듯 이렇게 학문도 변하고 그걸 따라잡지 못하면 뒤처진다.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고 한다. 학문도 흐르고 학자도 흘러야 한다.그런데 왜 우리 정치만은 흐르는 물을 따르잡지 못하는 것일까? 고집과 대립으로 얼룩지고 고함과 비아냥으로 가득찬 청문회와 정치판도는 여전하다. 아전인수의 정치 판도는 흐르지 않는 물이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게 마련이다. 우리 정치도 흐르는 물이 되어야 한다.

2019-12-19

몽롱한 글쓰기 (3)

문장이 꼭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마치 배설하듯, 내면에서 들리는 그 어떤 소리라도 마구 종이에 토해 내는 거죠. 재밌습니다.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후에는 가급적이면 그 페이지를 밀봉합니다. 두 번 다시 보지 않는 거죠.몽롱 쓰기는 암묵지, 즉 내 무의식 안에 스며 있는 경험과 정보, 느낌의 보물 창고를 활짝 열어줍니다.꾸준히 반복하다 보면, 외부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감추어 있는 보물이 얼마나 많은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고약한 이성의 검열관에 가로막혀 발현되지 않던 내 안의 빛나는 보석과 맑은 샘물이 조금씩 밖으로 꺼내지는 경험을 선사하죠.이렇게 쓴 글은 8주 동안 읽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두 달 묵힌 후에 봉인을 해제할 수 있지요. 깜짝 놀랄 만한 내용들이 그 안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맑은 샘물은 퍼내면 퍼낼수록 더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나게 마련이지요. 누구나 자신만의 암묵지 안에는 어마어마하게 맑고 시원한 수맥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길어 올릴 생각을 못하거나, 방법을 모를 뿐이지요.아침에 눈 뜨자마자 15분. 몽롱한 상태로 노트 한 페이지 정도를 채우는 분량의 무의식 쓰기 방법은 우리 안에 딱딱하게 잠자고 있는 창조성을 깨워주는 강력한 도구입니다.수많은 점으로 가득한 우리의 내면. 그 안에 보석이 가득합니다. 독서를 통해 우리 내면을 비옥하게 만드는 행위만으로는 창조적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쌓인 점들을 하나씩 둘씩 이어 나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내 안의 소중한 콘텐츠를 꺼내 타인과 나눌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막 그대 안에서 꿈틀거리며 솟구치는 배움에의 욕구가 있으신가요?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일상의 쳇바퀴에 가로막혀 내 안의 창조성이 억눌려 있지는 않은지 멈추어 생각할 때입니다.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2019-12-19

통일로 가는 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목숨 바쳐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우리가 이 노래를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배울 당시에는 남북통일이 상당히 절실한 과제였다. 남북의 분단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한 천만 이산가족의 생살을 찢은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 겨레가 둘로 갈라져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벌였다는 건 천추의 한으로 남을 비극이었다. 노랫말처럼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루어야 할 민족의 숙원이 통일이었다.분단이 된지 70년이 지나도록 줄곧‘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했지만 아직도 통일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동안 다방면으로 통일을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확인된 것은 북쪽의 김일성 왕조가 건재하는한 통일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으로선 김정은 일당의 체제가 무너지지 않고는 통일에 대한 온갖 논의와 수고가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통일은 물론 핵무기의 포기조차 절대로 허용할 수 없는 것이 김정은의 처지다. 김정은에게 핵을 포기하라는 것은 무장 강도에게 흉기를 내놓으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무장 강도가 흉기를 내려놓는 순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쇠고랑과 교수대뿐인데 어찌 쉽사리 항복을 하겠는가. 북한 주민을 다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버티는 데까지 버텨보는 수밖에 다른 대책이 없을 것이다.북의 김정은은 결코 핵을 포기하거나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곧 자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김정은이 적화통일을 노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언감생심이다. 완전히 꼭두각시가 된 2천 5백만 북한 인민들도 감당하기 벅찬데, 민주화투쟁의 역사를 자랑하고 전직 대통령들도 감방으로 보내는 대한민국 5천만 국민까지 통치하겠다는 꿈을 꿀 수가 있겠는가. 그런즉 김정은이 말하는 통일이란 위장술일 뿐이다. 따라서 남북정상회담이니 남북공동선언이니 하는 것도 시간과 돈을 벌기 위한 사기극에 지나지 않는다.순진한(?) 국민들의 감성을 자극했던 김정은과 문 대통령의 판문점 도보다리의 만남도 그렇다. 문 대통령이 김정은의 속셈을 모른 채 그런 기획을 했다면 완전히 농락을 당한 것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사기극의 공모자인 것이다. 그 때는 몰랐더라도 지금쯤은 눈치를 챘을 것이다. 아직도 사태파악을 못했다면 그것은 무지몽매의 차원이 아니라 정신상태를 의심해야 할 일이다. 무엇에 홀린 듯 이 정권은 임기의 절반이 지나도록 오로지 김정은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는 데만 집착을 해왔다. 그 결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무리수를 남발하여 정치, 경제, 외교, 안보를 파탄지경에 빠트렸다.통일로 가는 길에 무엇이 가장 걸림돌인지는 자명하다. 외부의 힘에 의한 제거가 어렵다면 내부의 봉기를 기대해 보는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대화와 협상의 문을 열어 놓더라도, 암암리에 북한의 인민들이 김일성 일족의 주술에서 풀려나 세습독재에 저항하는 세력을 형성할 수 있도록 전력 지원하는 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최선일 것이다.

2019-12-19

여성은 강하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탈출을 꿈꾼다고 한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 80%가 ‘한국을 떠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여성이 가지는 지위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그들에게 억울함, 우울감, 상실감, 자괴감을 가지게 하여 다른 나라로 떠났으면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범죄피해에 대한 불안과 불공정성에 대해 느끼는 정도도 여성이 남성에 비해 크다고 한다. 어느 다른 곳들과 비교하기도 전에 우리 여성들에게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일이 버거운 게 아닐까. 이제는 누구도 무엇이든 숨길 수가 없다. 나라의 울타리 안에서 그저 우리의 문화려니 하고 받아들이던 일들이 이제는 나라들 간의 비교가 얼마든지 가능하여 누구나 알게 되었다.둘러보니, 정반대도 있다. 핀란드의 수상으로 선출된 산나 마린(Sanna Marin)은 34세 청년이다. 여성이면서 젊다. 그가 만든 내각은 구성원 19명 가운데 여성이 열둘이다. 나라의 미래와 정책을 펼쳐가는 분위기와 방향이 느껴지지 않는가. 최근 구성된 영국 하원도 총원 650명 가운데 220명이 여성이라고 한다. 3분의 1을 넘는 숫자가 아닌가. 그 가운데 노동당 소속 의원들 가운데에는 여성이 절반을 넘는다고 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여성이라는 까닭에 정부가 펼치는 정책과 관련하여 공연히 우울하거나 자괴감에 빠지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어떻게 이처럼 다른 것일까, 이 나라와 저 세상은. 여성들에게 이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자고 주장할 재간이 우리에게 있는가. 최근에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전 대통령도 한몫 거든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어느 모임에서 ‘모든 나라에서 여성들이 지도자가 된다면, 우리는 참으로 멋진 세상을 만날’게 아니냐고 물었다. ‘여성이라고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남성보다는 여성이 분명히 낫다’고 단언한 그는 ‘세상이 겪는 문제들은 남성이 권력을 너무 오래 잡고 있어 생겨난다’고까지 하였다. 저런 고백을 하는 남성지도자들이 늘어가면 세상이 더 빠르게 변하지 않을까.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리더십이 검증되면 세상에는 더 많은 여성지도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준비되어 있는가. 우리 사회는 여성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나아갈 것인가.우리 사회가 거칠다. 막말과 다툼은 일상이 되어버렸고 극한 대립과 양보불가의 구호로 멍들어간다. 불공대천이며 타도필승이다. 이게 정상인가 싶은 대치와 성벽이 늘어만 간다. 나라와 사회가 진정으로 소통하고 화합하며 회복하고 일어서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걱정이 앞선다. 화합의 정치와 소통의 언론은 보이지 않으며, 선동과 편가르는 일에만 열중할 뿐이다.여성의 섬세함과 치밀함에 다음 기대를 걸어보면 어떨까. 전통과 문화에 사로잡힌 여성상을 벗고 새로운 지도력으로 옹골차게 다진 여성들을 만나고 싶다. 정책과 소통이 유연해지고 상식과 논리가 통하는 사회가 되려면 여성이 분발하여 나서야 한다.

2019-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