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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허림 시인의 강원도 홍천 방언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세상의 온갖 사물과 사람들이 사물과 교감하는 정서들이 스멀스멀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이 손수 만들어 썼던 물건들이 모두 대량 생산으로 흔해졌다. 그것도 도가 넘어선 대량생산의 결과 옛것들은 모조리 우리 주변을 떠나고 있다. 사라져가는 물건들은 정보화 처리로 디지털 속으로 숨어들면서 우리는 빠른 속도로 잊어버리고 있다.삶의 격식과 엄숙함을 가르쳐주었던 제의(祭儀)도 사라져 버렸다. 동네 당산제, 성황당제에서부터 집안의 온갖 가신제와 부모와 조상의 제사마저 단촐해지더니 어느덧 사라져 가고 있다. 또 어린 시절의 구석구석에 도깨비나 귀신들이 숨어 있었다고 믿었던 성령이 어디로 다 숨어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페미니즘이 강화되면서 에로스 종말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리들의 우울한 삶을 물리치도록 힘과 용기를 주던 에로스의 증발로 신생아 출생률이 전 세계에서 최하위로 내려앉았다. 시간의 향기라고 할 수 있는 기다림의 미학을 상실한 시대이다.우리는 새로운 삶의 꼴이 만들어낸 디지털의 터널 속에서 점점 더 외로운 혼자가 되고 있다. 잃어버린 옛 물건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우리들의 정서와 삶의 품격, 시간의 향기 에로스의 환희를 어떻게 호명할 수 있을까? 사물의 소멸과 함께 덩달아 사라져 가는 언어, 변두리의 방언들을 시로 불러낸 아름다운 시인들이 여기에 있다. 허림 시인은 ‘봄날의 방언’에서 “그려 방언이며 헛것이 보이겠나”라며 넋두리를 한다.방언은 이젠 헛것처럼 눈에 들어오질 않는 세태가 되었다. 그의 시편에 올올이 박혀 있는 강원도 방언은 소리로 이어진다. “아리라앙 아리라앙 아라리이요오 아리라앙 고오개에르을 너머간다” 한글이 표음문자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유장한 강원도 아리랑이 봄이 되니 그리운 꽃이 피듯 목에 걸리는 강원도 사투리 가락을 옆에 끼고 터억 나타난다.시인 허림의 시각에는 흘러간 시간이 보이고 그 흘러간 시간 속에서는 잊혀진 사물들의 생김새와 소리와 모양과 맛의 느낌이 이미지로 전환한다. “다시 돌아올 것처럼 떠난 자리마다/나무들이 죄인처럼 서서 기다리고/나이테며 잎맥마다 숨겨둔 빛빛의 단풍이 붉었다/나무진골에 묻어둔 전설은 조금씩 잊혀져갔고/능이버섯이나 따라 갔다 따온 개복상 먹으며/벌거지처럼 기어나오는 기억을 잇대보다가/흘러간 신간들은 다 어디로 갈까/우두망찰 바라보는 눈시울 너머/잠행했던 이름들 흩어지고”-허림의 ‘흘러간 시간들은 무엇이 되었을까’시인은 ‘개복상’, ‘벌거지’를 방언으로 꽂아 넣으면서 그리운 시간 속으로 회전한다. ‘우두망찰’ 바라보는 그리움이다. ‘조풍냉이’라는 시에서는 메좁쌀로 빚은 강원도 떡을 불러온다. “보실보실 쪄진 조풍냉이/입안에서 몽글몽글 차지다//어른들 밤바치로 잔치 보러 간 눈먼 날들/젖멍이 도톱해지던 여서너 살 섣달 하순 날이 샌다/, ‘조풍냉이’처럼 잊혀진 젖망울이 도도롬해지던 열서넛 그 시절 여자아이들이 지금 다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 그립다. 외마디 지르듯 생뚱한 방언들을 흩어놓은 어설픈 방언시가 아니라 정겨운 고향의 소리다.가장 오밀조밀한 방언은 지명에 많이 담겨 있다. 허림 시인의 과거 회상법 가운데 고향의 사투리 지명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한 시편은 ‘골말 산지당골 대장간에서 제누리 먹다’라는 작품이다. ‘제누리’는 ‘곁두리’의 강원도 방언으로 농경문화시대 일하는 사이사이에 간식처럼 먹는 음식인데 방언 분화형이 매우 다양하다. “골말, 산지당골, 복골, 붉은데이, 버덩말, 섬터, 아랫비랑, 늘원”등의 지명에서부터 입에 착 달라붙는다. 엄씨 대장장이가 시골에 와서 낫이며 괭이며 벼름하는 대장간에서 제누리를 먹는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농경시대 대장장이를 찾아와 농기구 벼름하다 마을 노인들과 함께 나누어먹는 ‘제누리’의 입맛과 추억은 마치 한 폭의 김홍도의 그림같다. 그런데 이 시에 숨겨놓은 서사적 장치는 풀무질하는 풍구를 시루는 새각시와의 인연이다. 풀무질하다 불길에 붉게 익어 올라 볼이 붉어져 수줍어하는 색시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잊혀져가는 사물들과 정감들을 이렇게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잊혀진 사물들이 품었던 이름과 사물들이다. 방언은 그 오래 묵은 불씨를 일으켜준다.

2024-05-27

니가타의 손창섭

니가타현립대학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연구자들이, 본행사를 앞두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손창섭의 묘입니다. 손창섭(1922~2010)은 장용학과 더불어 대표적인 전후문학 작가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1950년대는 불구적 인물을 통해 전후의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를 탁월하게 형상화했다면, 1960년대에는 당대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세태소설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랬던 손창섭은 1973년 돌연 일본인 아내와 일본으로 떠난 뒤, 공식적으로는 한국사회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손창섭의 일본 내 행적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형편입니다.도쿄 인근에 살았던 손창섭의 묘가 니가타현에 있는 이유는, 유일한 혈육인 딸이 이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손창섭의 묘는 니가타현의 카쿠타산(角田山) 묘코우지(妙光寺)에 있는 묘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손창섭의 묘비에는 ‘손창섭’이라는 한국 이름도, ‘우에노 마사루(上野昌涉)’라는 일본 이름도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곳에는 한자로 ‘道’(도)라는 한 글자만이 새겨져 있었을 뿐인데요. 인기 작가의 온갖 명예를 거부하고, 타국에 가서 은둔자로 살다 죽은 손창섭의 수수께끼 같은 삶과 더불어, ‘道’라는 묘비명은 하나의 화두처럼 제게는 다가왔습니다.묘비에 한국 이름도 일본 이름도 아닌 ‘道’라는 글자만을 남긴, 손창섭의 내면 풍경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우리에게는 다행히 손창섭의 ‘유맹’(한국일보, 1976.1.1.-10.28.)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의 초점화자인 ‘나’는 손창섭이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해방 이후 북한 생활까지 경험하였으며, 현재는 남한에 본사를 둔 회사의 일본 연락사무소 소장으로 지냅니다. ‘나’의 관찰을 통해 보여지는 1970년대 ‘유맹’의 재일한국인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데요. 겉으로 보기에 물질적 풍족함을 누리는 다카무라 고이치(고광일)조차도 정신적으로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충분한 역사적 개연성을 가진 설정인데요. 식민지 시절 불평등한 다민족 국가였던 일본은 패전 후 새로운 국가를 만들 때, 단일민족 국가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때 과거에는 같은 ‘국민’이었던 다른 민족은 배제의 대상으로 규정되었으며, 이러한 일본의 태도로 인해 재일한국인은 “일본 사회에서 오랫동안 비가시적인(invisible) 소수자로 존재하기를 강요받아”(권숙인, ‘일본의 ‘다민족·다문화화’와 일본 연구’, 다문화사회 일본과 정체성 정치, 권숙인 엮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23면)왔다고 합니다.‘유맹’에서 손창섭의 내면풍경을 보여주는 인물은 ‘유맹’의 초점화자인 ‘나’입니다. ‘나’는 심층심리 차원에서는 한국을 무조건적으로 지향하지만, 표층심리 차원에서 한국을 비판적으로 생각합니다. 반대로 일본문화는 이성적인 차원에서는 긍정적으로 여기지만, 심층 심리나 본능적인 차원에서는 거부의 대상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한국과 일본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 주변화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나’의 모습에 자꾸만 손창섭이 어른거립니다. 실제로 일본에 건너간 손창섭은 별다른 사회적 활동 없이 그야말로 은둔자로 생을 마감했으니까요. 손창섭 역시 본능 차원에서는 ‘한민족적인 것’에 대한 열렬한 지향을 가졌으나 의식적인 차원에서는 ‘한국적인 것’에 비판적이었으며, 그 사이에서의 분열은 끝까지 해소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이경재 숭실대 교수 이러한 제 생각의 타당성 여부는 손창섭이 말년에 남긴 시조를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얼’(1995.3)이라는 시조에서 손창섭은 “나라꼴 어찌됐던 그 世情 어떠하든/내 비록 故國山川 등지고 살더라도/韓나라 얼이야말로 가실줄이 있으랴”라고 하여, 세태와 인정을 떠난 무조건적인 ‘韓나라 얼’에 대한 지향을 보여줍니다. 이에 반해 ‘은둔(隱遁)’(1993.10)에서는 “이몸은 약삭빠른 재간군이 아니어서/名利에 새고지는 俗世間이 지겨워서/사람과 因緣을 끊고 숨어서만 사옵네”라고 하여, 한국이라고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약삭빠른 재간군’과 ‘명리’를 앞세우는 세상에 대한 염오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조들은 손창섭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이면서도 끝내, “사람과 因緣을 끊고 숨어서만” 살았던 이유를 밝힌 것으로 보입니다.‘유맹’의 ‘나’에게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손창섭에게는 평생 ‘한민족적인 것’에 대한 본원적인 지향과 ‘한국적인 것’에 대한 조건적인 거부가 공존했습니다. 그렇기에 작가 손창섭은 끝내 어디에도 귀속될 수 없는 영원한 이방인으로 만리타국의 조용한 묘원에 묻힐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길’을 의미하기도 하는 ‘道’라는 묘비명은, 끝내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걷기만 해야 했던 손창섭의 ‘인생길’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5-27

어제와 오늘, 내일

강길수 수필가 활짝 웃는 장미꽃들이 금속 담장을 껴안고, 사람을 홀린다. 앞엔 맥주보리가 익는다. 듬성듬성 개보리도 뒤따른다. 5월 하순, 학교녹지의 한 모습이다.올 4월 1일 처음 보리 팬 이삭이 보였다. ‘벌써 보리가 패다니’하고 살펴보았다. 사는 면적도 더 넓어졌다. 보던 보리와 달라 웹을 검색했다. 맥주보리였다. 아마 나무에 거름 줄 때 씨앗이 따라왔겠지. 내 마음엔 맥주보리는 어제, 장미는 오늘, 둘이 함께하여 내일 같다. 문득 옛 고향의 ‘풋보리 디딜방아’가 떠올랐다.그 옛날, 아홉 집이 동기간같이 모여 사는 산골 동네에도 봄이면 어김없이 보릿고개가 닥쳐왔다. 보리가 반쯤 익을 무렵 저녁, 동네 아낙들은 허리춤에 풋보리 두세 됫박씩을 가지고 우리 집 디딜방앗간에 모였다. 저마다 고되게 사는 이야기들을 곡조로 살린 디딜방아 노랫소리는 밤이 이슥토록 흘러나왔다.배고픈 가족들이 보릿고개를 넘을 일용할 풋 보리쌀은 이렇게 마련되었다. 거친 디딜방아 풋 보리쌀로 꽁보리밥을 지어 먹으면, 그야말로 까끄라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밭 있는 집은 풋 꽁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집은 송기(松肌)죽, 나물죽 같은 것들로 연명해야 했다.사람은 오늘을 산다. 오늘은 바로 어제에서 왔고, 내일로 이어지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 사람들은 오늘만 있는 듯이 산다. 바보 질문이 저절로 속에서 나온다. ‘오늘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오늘이 어제와 닿았다는 진실을 내팽개치고 사는 우리네의 행태가 너무 슬프다.우리의 어제는 어땠는가. 바로, ‘보릿고개’가 온 나라를 짓누르는 때였다. 그 예로, 1961년은 국민소득 82달러란 보릿고개의 해였다. 보릿고개를 넘고야 말겠다는 어제 지도자들의 의지, 결기, 국민의 근면, 자조, 협동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이 있을까. 단연코 없을 터다. 산업화 시기를 학생, 근로자로 살아낸 필자는 감히 장담할 수 있다.저명한 역사가 토인비는 일찍이 ‘문명은 엘리트 지도자들 곧, 창조적 소수의 지도하에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등장한다’라고 했다. 나아가 ‘그들이 창조적 대응을 멈추었을 때 쇠퇴하며 민족주의, 군국주의, 전제적(專制的) 소수의 독재정치 등의 죄악에 의해 몰락한다’라고 경고했다.우리 정치꾼들은 나라 곳간 채울 마음은 쪼끔도 없이 퍼낼 궁리만 해 댄다. 권좌에 앉으려는 뻔한 속셈이다. 토인비의 창조적 대응을 훼손하는 소인배 행태다. 솔직히 명절 통행료 면제나 개인당 25만 원 지급 같은 포퓰리즘이 국민 삶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만일 정부가 세금으로 국민을 다 먹여 살린다면 세금은 누가 낼까. 소가 웃을 자가당착이다.우리는 토인비의 ‘창조적 대응’에 주목해야 한다. 어제 나라 엘리트들이 창조적 대응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루어 냈다는 사실을 뜻있는 국민은 다 안다. 기후위기와 전쟁 등 국제 정세 변화는 국민 특히, 정치인에게 어제를 반면교사로 ‘창조적 대응’을 하라고 요구한다. 맥주보리와 장미가 함께하여 아름다운 것처럼….

2024-05-27

교육과 양육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나는 대학 선생이면서 두 딸의 아빠다. 그렇다 보니 아직 아이들이 어리지만, 우리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두 딸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한다. 내 자식의 10년 뒤 모습을 마주하며 어떻게 아이를 양육해야 좋을지 따져보는 식이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아이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요즘 아이들과 소통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망도 포함되어 있다.우리 대학에 와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에 입학한 학생을 종종 만났다. 우리 대학에 오기 전까지 나에게 고등학교 자퇴는 공부와 담을 쌓고 술·담배에 익숙한 학생들이나 하는 행동이었다. 몇 년 전 무표정한 얼굴의 자퇴생을 처음 만나던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자기가 왜 고등학교를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았는지, 또 고등학교 자퇴 후 여행을 다니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등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이후에도 수업 시간에 그 어떤 학생보다 멋지기 발표하는 학생의 모습을 보면서 자퇴생에 대한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2024학번에도 고등학교 자퇴생이 있었다. 이 학생은 글쓰기 수업의 에세이 쓰기 시간에 자신의 자퇴 경험을 적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어떤 열정을 가지고 학교에 가는 모습과 그저 급식을 먹으러 학교에 가는 자기의 모습을 비교하며 자퇴를 결심했다고 썼다. 학교생활에 별다른 의욕을 느끼지 못하자, 고등학교 3년이 아깝게 느껴지고, 이는 다시 빨리 대학에 가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간의 시간 동안 몰입했던 그림 그리기가 유일한 즐거움으로 남은 학생이었다.몇 년 사이 별다른 꿈이나 열정이 없는 학생들을 자주 만난다. 어린 시절 자신이 품었던 꿈은 학창 시절을 지나며 각자의 이유로 사라지고 내가 어떤 꿈을 꾸었다는 사실은 아득해진 채 무기력한 상태로 대학에 입학한다. 그렇다고 취업이란 당위명제가 선명한 대학에서 꿈을 발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학생에게 꿈은 직업이 아니라는 간단한 명제를 이해시키는 것에도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반면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조금 다른 경험을 한 친구들은 꿈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아마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고등학생 시절을 자신의 의지로 거부한 경험이 만든 결과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평범한 학생들이 목표와 열의를 가지고 대학에 입학하기 어려운 과정이 문제이다. 여기에는 국가와 가정의 분위기가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요즘 초등학교 2학년인 첫째가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자주 한다. 평소 국·영·수 과목에 집중하지 못하고 체육과 미술을 좋아하는 성격이 영향을 미친 탓이다. 그럼에도 일단 국어와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아이가 크면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학교가 바뀌지 않는다면 의지를 가진 아이로 만들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게 키워줄 생각이다.

2024-05-27

꼰대학 개론

어도어 민희진 대표의 기자회견이 한동안 이슈였다. 인터뷰의 내용부터 그가 입었던 의상까지 화제가 되었지만 단연 화제의 중심에 있었던 것들은 그가 사용한 자유분방한 어휘였다. 비어와 속어를 넘나들며 등장시킨 단어들은 하나하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지만 그 중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단어는 바로 ‘개저씨’ 였다.그것은 나의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나는 어느덧 30대 후반이 되었고, 곧 아이 아빠도 된다. 이제 형, 오빠 소리 들을 나이는 지났다는 이야기이다. 누군가 “아저씨!”하고 외치면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봐야 할 나이. 그 아저씨라는 호칭에 적응을 해야 하는 나이이기 때문에 아저씨와 연관된 단어가 더 인상깊게 남아있는 것이다.개저씨. 개와 아저씨의 합성어로 중장년층 남성 중 무례하고 꽉 막힌 이들을 속되게 칭하는 말이다. 사실 해묵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수년 전부터 국민들 상호간에 온갖 혐오들이 난무하며 생겨난 혐오 표현 중 하나이다. 한동안 유행을 타다가 시들해진 말인데, 민희진 대표의 입을 통해 다시 화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무례하고 꽉 막힌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 그 대상을 반드시 남성만으로 한정시킬 의도가 없으며, 다소 거친 표현이기에 이 글에서는 기성세대를 지칭하는 오래된 은어인 ‘꼰대’정도로 바꾸어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꼰대란 무엇일까. 이와 같은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다. 몇 해 전,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처음 뵙는 자리에서였다. 처음 만나는 예비 사위와의 대화가 서먹할 것을 우려하신 장인어른께서는 나름 대화를 나눌 만 한 토픽을 하나 생각해 오셨다. “자네는 꼰대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나는 대답했다. “꼰대는 자신이 꼰대일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장인어른께서 ‘내가 꼰대는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것은 이미 장인어른께서 꼰대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장인어른께서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주셨다.꼰대는 이와 같이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사람이다. 이 두 가지 특성이 절묘하게 버무려져 권위의식이라는 결과물을 도출해내기도 한다. 자신이 젊은 세대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므로 젊은 세대에 대해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들이 바로 꼰대이다.꼰대들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 모두가 그때부터 꼰대였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꼰대는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꼰대의 기질은 사실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가 옳다는 아집이 있고, 때로 무례해지는 순간도 있다. 그렇지만 그 정도에 차이가 있고, 그것을 얼마나 잘 억누르고 사느냐의 차이도 있다. 젊어서는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꼰대 기질이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레 발현된다. 계기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은 ‘그래도 된다’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꼰대 기질 폭발의 시발점이 된다. 무조건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이야기를 쏟아냈는데, 그리고 무례한 행동을 했는데 내게 돌아오는 불이익이 없었던 경험들. 그것이 반복되며 ‘아, 나는 이래도 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이런 것들이 몸에 배며 한 사람의 꼰대가 탄생하는 것이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그렇다면 이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유전적으로 질병 인자를 갖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이른 나이부터 그 질병으로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앞으로 발현될 질병을 미리부터 검진을 통해 예방하려 노력하고, 또 누군가는 이 질병이 고개를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미리 다스리며 질병이 생활을 지배하지 않도록 조치하곤 한다. 우리는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미리 스스로에게 ‘내가 혹시 꼰대는 아닐까?’ 하는 질문을 때때로 던져야 한다. 혹시 스스로의 언행을 돌이켜봤을 때, 권위적이었거나 무례했다는 것이 생각난다면 빠르게 사과하고 반성해야 한다.20대와 30대 시절에는 각기 그 시절에 가지게 되는 특성을 지니며 살아가게 된다. 사람들마다 편차는 있지만 대부분 그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데 40대 이후로는 사람들의 성격이나 라이프스타일이 천차만별이 된다. 누군가는 여전히 20대 못지않게 ‘힙’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30대 못지않게 세련된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또 누군가는 40대에 벌써 꼰대, 개저씨가 되기도 한다. 어떤 삶을 살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2024-05-27

좋은 어른에 대하여

스승의 날을 맞아 학생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애틋한 마음으로 함께 문학을 공부했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득 한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개인적인 상황 때문에 힘들었는데, 그때 내가 좋은 어른의 역할을 해주어서 고마웠다는 것이었다.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오랫동안 좋은 어른을 만나기를 바라왔으나 그것이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보다 크고 본질적인 영역이었다. 연기처럼 피어나는 의문을 곱씹어보았다. 정말 나는 좋은 어른일까. 그러니까 좋은 어른이란 대체 무엇일까.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어른이다. 친구들은 각자 배우자를 찾았고 한 생명의 부모가 되었으며 자기 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나는 중이다. 그러나 그건 삶의 모든 부분을 유려하게 운영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고 내 안의 어떤 부분은 너무나 유치하고 저열해서 차마 글로 쓰지 못할 정도다. 학생들이 보았던 내 모습은 모두 꾸며낸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을 쓰고 어른의 언어를 흉내 내고 있던 것일 수도 있다.돌이켜보면 나는 꽤 요란스러운 사춘기를 보냈다. 내가 어디에 발을 디디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끊임없이 시스템에 의문을 품었다. 그런 내게 만족스러운 답을 건네주는 어른은 없었다. 부모님은 늘 바빴으며 선생님은 돌발적인 질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교실에 앉은 아이들은 모두 같은 자세로 앉아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러면 나는 비뚤어진 마음이 들어 교실을 박차고 나와 버리곤 했다. 교무실 한복판에서 벌을 받고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다. 주먹을 꾹 쥐고 생각했다. 학교를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가면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이십 대의 내가 들떠있던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당시의 나는 나를 옥죄고 있는 모든 형태의 억압에서 벗어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날이 밝도록 술을 마셨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을 흥청망청 썼다. 그런 행동이 즐겁기는커녕 우울하고 불쾌한 감정이 더 자주 찾아왔다. 둘러보면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술집에 둘러앉아 세상의 부조리함에 관해 한참 토로하다 보면 날이 밝았고 나는 패배한 장수처럼 어깨를 늘어뜨리고 집에 돌아와야 했다. 문학하는 선생님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문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날도 잦았다. 그 안에 삶의 거대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너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어. 이곳으로 넘어오면 너도 답을 알게 될 거야.시간이 흐르며 나는 내가 제대로 질문하는 법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단 걸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 자신 있게 정답이라고 외쳤던 것이 그의 오만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고 억지로 움켜쥔다고 해서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이해하는 순간도 찾아왔다. 기성세대와 대화하면 경험할 수 있는 묘한 장벽 같은 것이 이런 식으로 생성되는 것일까. 정신 차려보니 나는 삶의 한복판에 놓여있었고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교실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당차게 삶을 박차고 나오고 싶지만 고개를 젓고 자리에 앉게 된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이젠 내가 안다. 도망치는 게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너무 쉽게 타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요즘이다. 규칙적인 운동과 철저한 식단으로 건강을 관리하는 이들과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이들, 괴로운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만든 이들의 이야기를 클릭 한 번이면 무한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것들은 너무나 매끈하게 빚어져 있어서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은 인생의 답을 찾은 듯하고 그를 토대로 젊은이들에게 ‘인생 조언’을 내놓기도 한다. 그토록 원하던 어른들의 이야기가 우르르 쏟아지는 데도 마음이 채워지기는커녕 헛헛하게만 느껴진다.시간은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 모두가 어른이 되지만 모두가 좋은 어른이 되진 않는다. 어쩌면 좋은 어른이라는 건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좋은 어른은 꼭 필요하다. 정신적으로 기댈 곳이 없는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이다. 믿음은 타인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어른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관해 상상하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2024-05-27

진실은 진실이고, 거짓은 거짓이다

김진국 고문 여의도에서는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다. 옳고, 그르고, 잘잘못을 칼로 가르듯 나누는 서초동과는 다르다. 정치에서는 완승이 아니라 타협과 상생을 도모하고, 지향한다. 그런데 타협과 상생은 사라지고, 진실을 감추는 탈진실만 남았다.고(故) 장자연 씨의 동료로 알려진 윤지오 씨는 거액을 모금해 캐나다로 달아났다. 윤 씨의 말에 권위와 신뢰를 얹어준 건 안민석 민주당 의원이다. 재판 중인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총선을 압승으로 이끌고,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가 최대의 승리를 거뒀다. 민주당의 양문석·김준혁 당선인은 당에서 거들어 줄 수 없을 정도로 논란에 휩싸였지만 너끈하게 당선됐다. 유권자에게도 진실보다 정치적으로 누구 편이냐가 중요하다.정보가 전달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이런 변화가 가속됐다. 숙고하고, 사실을 확인해 전달하는 전통 미디어는 상대적으로 느리다. 인터넷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만큼 영향력이 줄었다. 사실을 확인하지도, 책임을 지지도 않는 일인 미디어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오죽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기자회견이나, KBS나 MBC 같은 공영 방송도 아니고, 유튜브 개인 방송을 불러 인터뷰하고, 억울함을 호소했겠는가.현직 대통령이 공영 방송보다 유튜브를 찾은 것은 일대 사건이다. 대통령이 국정 장악력을 잃었다는 간접증거고, 전통 미디어가 신뢰는 물론 영향력도 잃어버렸다는 선언이다. 이미 팩트 체크는 의미가 없고, 미디어도 우리 편이냐, 아니냐부터 따진다는 말이다.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8년 전 후보로 나왔을 때 뉴욕타임스나 CNN 같은 전통적인 대표 미디어들을 ‘가짜 뉴스’라고 낙인찍었다. 그러고는 트위터(현재 X)를 통해 자기주장을 공개했다. 트럼프의 복잡한 사생활은 지금도 시빗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모두 가짜 뉴스(fake news)라고 몰아세웠다. 성공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됐다.지지자들은 열광했다. 심지어 2021년 1월에는 트럼프가 대통령 연임에 실패한 뒤, 의회가 이를 인증하지 못하도록 의회를 점령하는 난동까지 부렸다. 미국 같은 민주주의 선진국에서. 군중을 자제시키기는커녕 자극한 트럼프 책임이 크다.진실은 묻혔다. ‘트럼피언’(트럼프 지지자)의 진실과 일반 미국인의 진실이 달랐다. 트럼프의 극렬 지지자들인 ‘MAGA’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는 노골적인 거짓말이 난무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진실도, 거짓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사회로 변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2016년 올해의 단어로 ‘post-truth(탈진실)’를 선정했다.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사람들은 추측을 쏟아내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책임은 지지 않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제 다시 재선을 노린다.민주주의 선진국인 미국의 탈진실 상황은 세계 시민을 경악하게 했다. 미국이 저 지경인데, 우리는…. 그해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겪었다. 사드 배치와 관련해 민주당 의원들은 “강력한 전자파 밑에서 내 몸이 튀겨질 것 같아, 싫어”라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 후쿠시마 오염수 괴담으로 수산물시장이 된서리를 맞았다.조국 대표의 법무부 장관 임명 검증을 계기로 불거진 갈등은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각각 촛불 군중집회로 세 대결을 벌였다. 대한민국이 서로 다른 세상으로 쪼개졌음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 분열의 틈바구니에서 ‘공정’이라는 시대 정신이 선택한 사람이다. 그 역시 부인 문제에서는 진실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정치는 억지를 부린다. 결코 승복하는 법이 없다. 정치권이 논란을 벌이면 끝까지 평행선이다. 언론도 정리하지 못한다. 진실을 알아도 반론권을 줘야 한다. 정치적 적대자들에게 기계적으로 공평한 기회를 준다. 진실이나 거짓이나 꼭 같은 시간과 지면을 준다. 심지어 스스로 어느 한 진영에 서는 미디어도 있다. 이런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허상을 깬다는 게 명분이다. 정말 혼돈의 시대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5-26

지속가능한 아름다운 삶의 지혜

신일철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매년 식용으로 생산되는 모든 식품의 약 3분의 1이 처리과정에서 손실되거나 제대로 활용되지 않고 낭비된다. 특히 음식물 쓰레기는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8%를 차지한다. 세계적으로 음식물 쓰레기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비용은 연간 약 1조 달러에 달한다. 이런 낭비가 왜 발생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이제는 던져 보아야 한다. 의식주는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것으로 생존을 위해 먹거리가 특히 중요하다.그러나 이를 만들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인류의 생존에 오히려 위협을 주는 자원의 낭비와 각종 폐기물이 발생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환경이 심각하게 오염되는 모순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위협에 정면으로 맞서는 지혜를 발현하고 상응하는 해결책을 만들어야 한다. 낭비는 도대체 왜 발생하는가? 낭비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과 이를 줄이거나 없애는 아이디어에 대한 접근을 해야 할 시점이다.쌀이 따뜻한 한 그릇의 밥으로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모내기에서부터 도정 그리고 도소매유통과정 등 약 15단계를 거친다. 농부의 정성과 자연의 배려가 함께 하고 어머니의 정성으로 식탁에 오르는 것이다. 다른 곡류나 채소도 유사한 생산 제조와 보관 및 유통의 단계를 거친다고 판단된다. 낭비는 이러한 전 단계를 세부적으로 구분하고 관찰해야 도출이 가능하며 다양한 해법을 연구하여 사회적 협의와 합의과정을 거쳐 개선방안을 시행하여야 한다. 식당에서도 반찬 류는 적당한 종류와 필요량으로 변화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버리는 음식물의 양에 따라 처리비용을 부과하고 가정에서도 버리는 양을 줄이는 노력이 한창이다. 모든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필자는 만들기 전과 만드는 과정 그리고 만들고 난 후로 시점을 구분하고자 한다. 만들기 전에 꼭 필요한 것인가? 고객은 누구인가를 생각해보는 습관이 주효하다. 만드는 과정에서는 필요한 때에 필요한 양만큼 낭비없이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만들고 난 후에는 필요로 하는 고객에게 납품하거나 판매한 후 잔여분을 처분하거나 버릴 때 3R활동 즉 Reuse(재사용), Recycle(재활용), Remove(폐기)를 철저하게 실시하여야 한다. 재사용할 때 효율적 방법과 자원으로 재활용할 때 아이디어를 최대한 발현하고 최후의 방법으로 폐기처분하여야한다.개인과 가정 그리고 기업과 국가적 차원에서 ‘올바른 것을 제대로 하자’의 원칙을 지켜나가야 겠다. 처음부터 불필요한 것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한다. 만드는 과정에서 오류와 실수를 제거해서 불필요한 것이 발생되지 않도록 한다. 부득불 발생하는 잉여품과 부산물 그리고 폐기물은 최대한 재활용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폐기하여야 한다.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에서 낭비가 발생하지 않도록 고민하고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상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1:10:100의 원칙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일을 시작부터 올바르게 하면 과정에서 발생하는 10배의 비용과 결과에서 발생하는 100배의 비용을 아낄 수 있다. 낭비로 인한 막대한 처리비용을 후손에게 전가하지 말고 지속 가능한 아름다운 삶의 환경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2024-05-26

문제는 바로 팩트야

유영희 작가 한 달 전,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시민팩트체커 활동을 권유하는 메일이었다. 알아보니, 한국팩트체커커뮤니티(Korean Factcheckers’ Commu nity·K.F.C.)라는 단체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미 2015년 미국에서 국제팩트체킹네트워크(International Fact Checking Network, IFCN)가 창설되어 국제적으로 많은 팩트체커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IFCN은 매년 글로벌 팩트(Global Fact)를 여는데, 작년에는 서울대언론정보연구소 SNU팩트체크센터가 공동주관하여 한국에서 열렸다고 한다. 2014년 50명에서 시작했던 글로벌 팩트가 작년에는 대면 506명, 온라인 1,032명이 참여했다고 하니, 그만큼 팩트체크의 필요성이 절실해진다는 증거일 것이다.K.F.C.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최다선 의원이 국회의장이 된다는 관례에 대해서도 팩트체크되어 있었다.역대 국회의장의 국회의원 당선 횟수를 보면, 6선 의원이 11번으로 가장 많았고, 초선 의원이 맡은 적도 4번 있다. 다수당 최다선 의원이 국회의장을 역임한 사례는 의회 역사를 통틀어서 6번이었다. 이런 검증 결과, 관례적으로 최다선 의원이 국회의장을 맡았다는 진술은 사실이 아니었다.이 사례를 보면서 나도 국회의장이 권력 서열 2위라는 우상호 의원의 말을 검증해보았다. 찾아보니, 권력 서열이라는 용어는 없고 의전 서열만 있다. 다만, 아쉽게도 이미 4년 전에 YTN에서 팩트체크해놓은 것이 있었다. 의전 서열은 관례로만 있을 뿐 문서화된 공식적 의전 서열은 없다고 한다. 이렇게 확인하고 나니 의문이 풀렸다.IFCN에서는 팩트체크를 할 때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준칙을 만들었는데, 첫째가 비정파성과 공정성이다. 어느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을 알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야 한다. 둘째는 취재원을 밝혀야 하고, 셋째는 팩트체크하는 기관의 재정과 조직이 투명해야 한다. 넷째 검증 방법도 투명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팩트체크는 한 번에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이고 정직하게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잘 수행하면 팩트체크 인증기관이 된다고 한다.팩트 인식의 중요성은 몇 년 전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던 한스 로슬링 등의 저서 ‘팩트풀니스’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의 서문에는 저자가 출제한 문제 13개가 있는데, 맞히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나도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이렇게 잘못 알고 있는 이유는 사람들은 ‘사실이 아닌 느낌’과 ‘현실이 아닌 환상’에 근거하여 세상을 보기 때문이라면서, 사실에 근거하면 스트레스와 절망감이 줄어든다고 저자는 강조한다.정치 경제뿐 아니라 일반 사회 분야에서도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거짓 정보가 너무 많다. 한쪽 입장만 듣고 쉽게 격앙하지 말고, 정보의 진위를 검증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다양한 미디어를 검색하는 것만으로도 거짓 정보에 휩쓸릴 가능성은 많이 줄어든다. 스트레스와 절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시민의 팩트체크 활동은 정말 필요하다.

2024-05-26

대구서 판다를 본다?

우정구 논설위원 판다는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동물이다. 멸종 위기에 놓여있는 만큼 국가서도 국보급 대접을 한다. 최근 청두시를 방문한 홍준표 대구시장이 최고급 빌라에서 먹고 자는 판다의 모습을 보고 “사람 팔자보다 더 낫다”고 한 말은 판다에 대한 중국 정부의 예우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중국은 과거부터 다른 나라와 우호관계를 표시할 때 판다를 선물로 했다. 귀엽고 친근한 이미지를 이용한다고 해 판다외교라 부른다. 당 태종 때는 판다 2마리를 일본에 기증했다는 설도 있다.2000년 전 한 문제 무덤에서는 순장한 것으로 보이는 대왕판다의 뼈가 출토돼 고대부터 중국은 판다를 특별한 동물로 여겨왔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중국 쓰촨성과 산시성, 허난성에 걸쳐 있는 진령산맥은 판다의 주 서식처다. 고대에는 중국 남부지역과 베트남 등지에도 자생했으나 기후변화와 서식지 파괴로 지금은 개체가 크게 줄었다.판다의 수명은 야생에서는 약 14∼20년 정도이나 동물원에서는 30년 정도 산다고 한다. 지능은 약 60∼70 정도로 다른 동물에 비해 우수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람을 부릴 줄 안다.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으면 구르거나 나무들을 파헤치는 등 떼를 부린다.다만 사육비가 한해 수십억원이 들고 중국 정부가 허용해야 데려올 수 있는 등 까다로운 조건이 문제다.판다가 대구에 올 수 있을지 많은 시민이 궁금해한다. 청두시를 다녀온 홍 시장이 “중국 정부와 협의해 대구에 판다를 데려오도록 하겠다”고 말한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이달 말 홍 시장이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를 대구청사에서 만난다. 판다 관련해 어떤 얘기가 오갈지 관심이 쏠린다. 과연 판다는 대구와 연을 맺을까?/우정구(논설위원)

2024-05-26

어떤 화면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컴퓨터를 켤 때마다 바탕화면에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근경에 초록색으로 빛나는 텐트가 자리하고, 멀지 않은 곳에 침엽수 한 그루 삐죽이 솟아 있다. 날카로운 선(線)으로 무장한 산맥이 흐르고, 원경에는 한결 부드러워진 산이 붉은색 아래 침묵한다. 하늘에는 우유를 쏟아부은 것처럼 별들이 무리 지어 하얗게 빛난다. 은하수가 고요를 지배한다.게오르크 루카치(1885∼1971)가 ‘소설의 이론’(1916)에서 묘사한 고대의 나그네 행장을 밝히는 그 은하수일 것이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로 시작하는 ‘소설의 이론’ 첫 번째 문장은 압권이다. 고대의 나그네는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을 것이었다.하지만 초록색 텐트 안에 누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가 단수인지 복수인지, 복수라면 몇인지, 단수라면 성별은 어찌 되는지 알 수 없다. 더욱이 그나 그녀 혹은 그들의 행선지(行先地)에 관한 정보도 전연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텐트 안에는 불빛이 환하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흔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등장인물에 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21세기 현재의 차고 넘치는 인위적인 조명 하나 존재하지 않는 태곳적의 어둠을 밝히는 저녁놀과 일찍 떠올라 지상을 비추는 별들의 무리. 일몰로 검게 어두워진 근경의 사위와 여전히 붉은색을 유지하는 원경의 서녘 하늘이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하늘을 하얗게 뒤덮고 있는 수많은 별의 군집 아래 홀로 빛나는 초록색 텐트!나그네는 거기서 어떤 상념에 젖어 있을까. 지나온 길을 반추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일이나 모레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윤동주 ‘참회록’에서 인용) 가야 할 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만 24년 1개월을 살아온 청춘의 참회는 역시 낯설고 희유(稀有)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에게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원동력으로 작용해야 했기 때문이다.그런 까닭에 바탕화면을 보는 나는 양가감정에 빠져든다. 나고 자란 시간대를 생각하면 분명 지나온 길을 돌아봐야 할 텐데, 실상 내다보는 사유에도 인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특이점’의 원년이 2045년으로 앞당겨져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왕가위(王家衛)가 연출한 ‘2046’(2004)이 구현될 해가 20년 남짓 남았기 때문이리라.“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고 박인환(1926∼1956)은 ‘목마와 숙녀’(1955)에서 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인환을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그는 세월이 오고 간다고 썼을까?! 시간이 직선운동이 아니라 왕복 운동한다는 것일까?! 시간의 화살 대신 시계추의 진자운동을 세월로 치환한 까닭은 무엇인가?!글을 쓰는 동안 사위가 어둡고 무거워지고 있다. 어둠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간다. 인간의 시간이 천상의 시간을 앞지르기 때문이다. 하늘보다 먼저 희망하고 하늘보다 먼저 절망하는 인간의 시간이 깊어가는 봄날 저녁이다.

2024-05-26

나의 월든은 어디에

이희정 시인 고속도로로 가면 아주 멀진 않아.그곳의 거친 소나무들과 돌들, 맑은 물을 보고해 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거야.친구들은 그러면 내가 더 현명해질 거라고 말하지.그들은 머나먼 양키의 속삭임을 듣지 않아여기저기 바삐 뛰어다니다 보면 우리는 얼마나 둔해지는가!많은 사람이 떠났고, 시원한 시골에서의 하루를그리워만 하는 나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소중히 여기는 책에서월든에 가는 건 단순한 초록 나들이처럼 간단한 일은아니지. 그건 느리고 힘든 삶의 비결이고,자신이 있는 곳에서 월든을 발견하는 것이지.―메리 올리버, ‘월든에 가기’ 전문 (‘기러기’, 마음산책) 여기 두 개의 월든이 있다. 최초의 녹색 서적으로 일컬어지는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는 숲과 호수가, 메리 올리버 시인에게는 숲과 바다가, 그들 사이에는 “거친 소나무들과 돌들, 맑은 물”과 같은 자연의 선물이 있다. 메리 올리버 이전의 내가 아는 월든은 세련되고 까다로운 사상가 에머슨(1803년~1882)과 투박한 고집불통의 자연주의자 소로(1817~1862)의 불멸의 우정이었지만, 그들과 더불어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Mary Oliver·1935~2019)가 있다.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시인은 자연 속에서 자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의 친화적이고 동반적인 관계 형성이 가능했다. 자연 속을 산책하고, 세밀히 관찰하고 동식물과 교감하며 그 경험과 자신의 지혜를 언어로 재현하는 이른바 생태 시인이다. 그녀의 시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 심지어 무생물인 돌도 살아 있다고 사유하며 소로가 다루고 있는 월든의 의미를 삶으로 체득하고 있다.지혜란 어디에서 오는가. 근원적인 아름다움이 자연에 있듯 우리가 만들지 않은 생명의 순수한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녀는 자연을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겸허하게 한다. 시적인 마음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녀의 관점은 오래 남을 자연과 인간의 공감어린 우애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시 ‘월든에 가기’에서 양키의 속삭임은 무엇이고, 월든은 어디일까?양키(Yankee)는 과거 영국인들이 미국인들을 촌뜨기로 조롱하는 표현이었지만 시인이 말하는 양키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내면의 소리, 이를테면 반짝이는 공기나 나무의 이끼 등 고요가 들려주는 깊은 속삭임일 것이다. 친구들은 고속도로를 권한다. 그들은 월든을 “초록 나들이처럼”간단히 인식하지만 숲은 그런 곳이 아니다. 풍경이 아름답다는 건 환경이 열악하다는 뜻이기도 할테니까. 귀농하지 않아도 자연인이 되지 않아도 도시 속에서도 세상의 명령에 길들지 않을 수 있다. 단 한 평만이라도 내면의 월든을 만난다면 말이다.철학교수가 될 것인가. 철학자가 될 것인가. 많은 책에서 ‘나’라는 제일인칭은 생략하지만, 소로는 월든에서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에 관해 말했다. 시인 메리 올리버 또한 ‘사람들’이란 말에 힘을 주지 않고 진정한 ‘나 자신’에 대해 말한다.“많은 사람이 떠났고, 시원한 시골에서의 하루를/ 그리워만 하는 나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 대개의 문명인들이 조롱하듯 월든에 가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단순한 초록 나들이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지.” 그것은 “느리고 힘든 삶의 비결이고,/ 자신이 있는 곳에서 월든을 발견하는 것”이라고.우리 옛글에도 월든이 있다. “연못, 늪에서 물고기를 잡아먹는 도하는 물속의 찌꺼기를 쪼고 마름풀 속에 물고기 잡는 데만 신경을 쓰느라 깃털과 부리에까지 오물을 뒤집어 쓰고 하루종일 허둥대어도 물고기 한 마리를 잡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청장이라는 새는 맑고 시원한 연못에 서서 편한 자세로 날개를 접고 장소를 옮기지 않는다. 그 고요한 것은 노래를 듣는 듯 편하게 지내면서도 항상 배가 부르고, 도하는 수고롭지만 항상 굶주린다. 세상의 부유함과 귀함,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사람에 비유하여 청장을 신천옹이라고 불렀다.”(‘맑은 바람이 그대를 깨우거든’ 중 박지원 ‘담연정의 기문’, 이덕무 지음, 이강엽 편역)진정한 월든은 어디에 있을까. 하루종일 허둥대는 도하인가. 고요한 청장인가.“여기저기 바삐 뛰어다니다 보면 우리는 얼마나 둔해지는가!”

2024-05-26

안동시 소멸 위기 맞아 새로운 도전과 혁신

권기창 안동시장 최근 가장 큰 이슈라고 한다면 인구소멸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출산율이 0.72명으로 떨어졌고, 20년 후에는 모든 도시가 소멸 위기에 직면한다고 한다. 안동시 또한 소멸 위기를 맞은 도시 중 하나다.안동시는 1974년 27만 명을 정점으로 1976년 안동댐, 1992년 임하댐이 건설되며 매년 2000여 명씩 감소하던 인구가, 2008년 경북도청이 안동·예천으로 결정되며 7년 연속 상승곡선을 이어갔다.그러나 2014년부터 시작된 데드크로스와 2016년 경북도청 이전에 따른 예천지역 1단계 주거지역 조성, 수도권으로의 청년인구 유출로 지난 8년간 1만6000여 명이 감소했다. 더욱이 장래인구 추계결과, 2040년 13만 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다행인 점은 계속 감소하던 안동시 인구가 2016년 이후 8년 만에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4월 말 기준 안동시 인구는 15만2981명으로 지난 3월 76명이 증가한 데 이어 4월에는 248명이 증가했다.인구증가의 배경에는 올해부터 시행되는 지역대학생에 대한 지원정책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4월에만 409명의 청년인구가 증가했고, 누적 858명의 청년인구가 늘어났다.그동안 안동시는 전입한 지역 내 대학생에게 주택임차료(기숙사비)를 연간 60만 원 지원했으며, 올해부터는 학비 부담을 덜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학년당 100만 원의 ‘학업장려금’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지원사업으로 청년 이탈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여기에 지난해 ‘안동 바이오생명 국가산업단지’가 신규 국가산업단지 후보에 선정되며, 기업유치와 일자리 창출, 인구 유입 등 현안을 한 번에 해결할 기회를 만들었다.풍산읍 노리 일대에 2030년까지 3579억 원을 투자해 132만㎡ 규모로 건설하는 ‘안동 바이오생명 국가산업단지’에는 76개 기업이 입주해 4조2800억 원이 투자되고, 8조6200억 원의 생산유발효과와 3만 명의 고용유발효과가 기대된다.이는 일자리부족으로 발생하는 지역 청년들의 이탈을 막고 오히려 청년들의 유입을 늘일 수 있는 기회다. 이에 안동시는 기업 유치와 일자리 창출에 집중하고 있다.올해로 4년 차를 맞이하는 안동형일자리사업은 지자체와 기업, 대학이 협력해 지역 산업을 육성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인재를 양성하는 일자리 창출 사업이다.지난해에는 지역 일자리 창출 대책 수립을 통해 7995개의 일자리를 창출, 이를 통해 안동시의 고용률은 63.2%, 실업률은 1.7%로 전국 시 지역 평균 고용률 62.5%, 실업률 2.7%에 비해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안동시는 투자유치자문회 운영 등을 통해 앞으로도 우량기업 유치와 일자리 창출에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또한 안동시는 결혼, 출산, 양육이 행복한 선택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저출생 대응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안동시는 행정안전부가 실시한 지방소멸대응 투자 기금을 확보해 ‘안동시 공공산후조리원 건립’을 본격 추진한다. 2023년 안동시 민간산후조리원을 이용한 산모 수는 114명으로, 산후조리원이 부족해 타지역 시설을 이용한 경우가 30% 이상이다.이에 안동시는 공공산후조리원과 육아거점인 은하수랜드 건립에 박차를 가해 출산가정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키고 안정적인 산후조리를 지원한다.이외에도 첫만남이용권 지원 상향, 어린이집 교사 대 아동 비율 축소, 경로당 연계 아동돌봄터 설치, 다함께돌봄센터 운영 등을 통해 지역사회가 함께 아이를 키우고 보살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는 등 끊임없이 창의와 혁신의 자세로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고 있다.여기에다 지역발전의 주춧돌이 될 공약사업과 역점사업의 결실을 하나하나 거둬 시민의 열망과 기대에 부응하는 최선의 노력으로, 위대한 시민과 함께 도전과 혁신의 안동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2024-05-26

사라지는 것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날마다 산책을 하는 이 들판은 지금 모내기가 한창이지만, 예전 같으면 보릿고개의 막바지인 보리누름이다.녹음이 시작되는 초여름에 삼베를 널어놓은 것처럼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은 이제 보기 드문 풍경이 되었다. 부족한 식량을 채우려고 논에도 이모작으로 보리나 밀을 갈았다. 그것을 베어서 타작을 하고 벼를 심어야 하기 때문에 연중 가장 바쁜 농번기가 바로 이맘때였다. 학교마다 가정실습이란 명목으로 휴교를 해서 아이들까지 일손을 돕게 했다.겨울을 나고 봄을 거쳐 초여름에 이르는 보리밭 풍경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그와 함께 아낙네들이 보리밭의 김을 매는 모습, 보리를 베고 타작하는 광경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절구통을 뉘어놓고 보릿단을 태질해서 떨어낸 낱알을 도리께로 몽글리던 보리타작도 사라진 풍습이 되었다. 그 때 불렀던 ‘옹헤야’ 같은 농요는 문화유산으로나 남았다. 우물물에 만 보리밥에다 풋고추나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던 점심도 옛날이 되었다.한 술의 쌀밥이 입에 들어오기까지 여든여덟 번의 손이 간다는 벼농사도 금석지감을 금할 수 없다. 소를 몰아 쟁기질과 써레질을 하고, 일일이 손으로 모를 심고 김을 매고, 낫으로 베어서 탈곡을 하던 모든 과정이 기계화 되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모를 심던 풍경 대신 이앙기 몇 대가 두어 주일이면 드넓은 들판의 모내기를 다 해치운다.들판에 울려 퍼지던 모심기노래도 사라지고, 많은 사람들이 논둑에 둘러앉아서 참이나 점심을 먹던 풍경도 없어졌다. 여남은 살 누이가 젖먹이 동생을 업고 들판까지 젖을 먹이러 오던 것도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이다.농사일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매기였다. 보리밭 콩밭 김매기가 주로 아낙네들의 일이라면 벼논의 김매기는 남자들의 일이었다. 그만큼 힘이 들기 때문이다. 보통 세 벌은 매어야 하는데, 한여름에 뙤약볕에 열손가락으로 논바닥을 긁어서 김을 매노라면 볏잎에 온통 얼굴이 긁히고 베적삼을 땀으로 적시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참 편리하게도 모를 심기 전에 제초제를 뿌려서 아예 잡초가 나지 않으니 벼논의 김매기도 사라진 풍경이 되었다.벼논에서 사라진 것은 잡초만이 아니다. 그 흔하던 물방개, 소금쟁이, 장구애비, 물자라, 게아재비, 물장군 같은 물벌레들이 사라지고 종아리에 달라붙던 거머리도 사라졌다. 밤 들판의 반딧불이가 사라진 건 벌써 옛날이고 미꾸라지와 개구리도 드문 존재가 되었다.시멘트로 된 수로에는 미꾸라지가 살 수 없고 땅속에서 월동을 하는 개구리도 트랙터 로타리작업 등으로 멸종 위기에 놓인 것이다. 여름 들판을 부지런히 날아다니던 제비도 보이지 않고 메뚜기나 여치 같은 풀벌레도 눈에 띄게 줄었다.현대화된 기계영농으로 사람의 손이 거의 안 갈 정도로 벼농사가 수월해지고 쌀이 남아돌 정도로 풍족해진 것은 좋지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은 없지 않다.

2024-05-23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외교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최근 문재인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언급된 김정숙 여사의 인도 방문에 대해 ‘대통령 배우자의 첫 단독 외교’라는 말이 비난의 불똥이 튀어 외교(外交)의 의미를 되내어 본다.외교는 주로 군사적 또는 정부 간 협상을 다루는 정무 외교와 경제 외교가 주된 것이지만 근래에는 역사와 전통, 문화, 예술 등의 가치를 내걸고 국가 이미지와 브랜드를 높여 국가 간 공감대를 엮어나가는 공공 외교(Public Diplomacy)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본다. 즉 다른 나라의 국민 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이해와 신뢰를 높여나가는 보이지 않는 외교도 중요하다. K-팝이나 K-드라마 같은 인기가 국격을 높여주고 방산 무기와 AI 산업 특화도 우리나라를 세계적 관심으로 ‘힘 있는 나라’의 반열에 올려놓아 많은 국가가 우리와 좋은 관계 맺기를 희망한다.22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 리더십 컨퍼런스’에서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의 딸, 게바라 마치 박사가 “미국의 반대에도 쿠바와 수교를 맺어준 한국을 쿠바 국민은 환영하며 앞으로 한국의 선진 기술이 쿠바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과 쿠바는 지난 2월에 전격 수교했었다.우리의 외교가 미·중·일·러시아의 4강에 편중되어 온 것은 지정학적 이유가 컸지마는 이제는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까지 우호를 쌓아가고 있다. 따라서 강대국의 논리에 맞추어 나가는 약한 나라에서 한 단계씩 우리의 길을 개척하는 힘을 보여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국격(國格)이 외유내강(外柔內剛)이다. 이 말은 중국의 당서(唐書)인 노탄전(盧坦傳)에 나오는 말이며, 평소에는 만만하게 보여도 내면의 강인함, 즉 타인에게 겸손하고 예의 있게 행동하면 존경받는다는 뜻이다.이제 우리나라도 힘을 갖고 평화와 안정을 누리며 국제기구에도 적극 참여하여 여태 한국 외교의 고질병이었던,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의 눈치 보는 것에서 벗어나 주의 깊게 정세를 읽고 정확한 판단으로 이겨나가야 한다.얼마 전 푸틴 대통령의 5번째 취임식에 미·영·EU는 불참했으나 우리는 러시아 대사를 보냈고, 타이완의 라이칭더 총통의 취임식에는 정부 측 인사를 보내지 않았다. 한·중·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는 중국을 염두에 두었을 테다.외교의 임무는 국가 이익 즉, 자유 독립과 안정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니만큼 줄타기 외교도 해야 한다. 그러나 내유(內柔)까지 되면 곤란하다. 특히 내분은 패망의 지름길이다. 내강(內剛) 즉, 겉으로는 부드러우나 마음속으로는 꿋꿋하여 결코 약하지 않아야 된다. 우리는 형제라고 하는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위협도 받고 대법원까지 해킹당했는데, 정치권의 분열과 민심의 이반까지도 일어나고 있으니 너무 몰랑하게 보이는가? 7년 전 중국을 국빈 방문한 대통령이 ‘혼밥’을 먹고, 한국 기자들이 중국 경호원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것도 속이 강건하지 못한 탓일까…. 부끄럽다.앞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따라 미군 철수나 감축이 행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으니 국가 안보를 위한 외교 역량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기다.

2024-05-23

대구의 개방성

우정구 논설위원 대구는 오래전부터 분지형 도시로 소문나 있는 곳이다. 분지란 산지로 둘러싸인 평평한 지형을 두고 하는 말인데 대구는 분지형 도시의 대표적 도시로 손꼽힌다.그러면서 분지형 도시에 덧붙여 대구를 폐쇄성이 강한 도시라고 얘기하는 이가 많다. 분지형 지형과 도시 폐쇄성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들을 수 없다.지리학자들은 70%가 산지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도시가 형성된 상당수 지역이 분지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대표적 도시로 서울을 꼽는다. 도시의 폐쇄성과 분지라는 지형과는 이론적으로 상관관계가 없다는 뜻이다.그런데도 여전히 대구를 정치성향 등과 비교해 폐쇄성이 강하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도시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좀 더 개방적 도시로 바뀌어야 대구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대구시가 내년부터 신규 공무원 임용시험 시 적용하던 거주 조건을 폐지했다. 지금까지 대구시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려면 응시자가 시험일 현재 대구시에 거주하거나 과거에 3년 이상 대구에 거주해야 하는 조건이 붙었다. 전국 광역시도가 공통으로 적용하던 거주 조건인데 대구시가 가장 먼저 이를 폐지한 것이다.이에 대해 대구시는 지역의 폐쇄성 극복과 공직사회의 개방성 강화를 위한 조치라 설명했다. 이번 조치로 전국 각지에서 인재가 유입되고 공직사회의 다양성과 경쟁력이 확보되는 계기가 될 거라고도 했다.홍준표 대구시장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대구굴기(大邱5D1B起)다. “대구가 다시 힘차게 우뚝 일어난다”는 뜻이다. 전국 3대 도시 명성을 되찾는 굴기에는 개방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조치는 그런 점에서 잘한 일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5-23

일그러진 영웅, 김호중

홍석봉 언론인 김천이 낳은 인기 트로트 가수 김호중이 음주 교통사고로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교통사고를 낸 뒤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음주운전 의혹을 완강히 부인했다. 매니저는 자신이 운전대를 잡았다고 허위 자백했다. 그러나 사고 발생 열흘 만에 음주 사실을 시인했다. 형사 처벌이 불가피해 보인다. 비판 여론이 쏟아졌다.김호중은 음주 운전을 후회하고 반성한다고 밝혔다. 자숙의 시간을 갖겠다고도 했다. 소속사도 거짓말 해명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후폭풍은 거셌다. 미스터트롯 갤러리는 김호중의 엄정한 수사를 요청하는 입장문을 냈다. 누리꾼들은 “너무 뻔뻔하다” “구속돼야 마땅하다” 등 반응을 보이며 질책했다. 검찰총장까지 나섰다. ‘운전자 바꿔치기, 허위진술 교사·종용 등은 사법방해 행위’라며 구속사유 반영을 지시했다. 경찰은 음주, 뺑소니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여론이 나빠지자 15만명의 회원을 보유한 김호중 팬카페도 ‘책임을 통감하며, 사죄의 말씀과 용서를 구한다’며 고개 숙였다.김호중은 그동안 “술잔에 입은 댔지만 마시진 않았다”며 누가 봐도 구차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을 했다. 음주 운전 사실을 끝까지 숨기려 했다. 차량 블랙박스 메모리 칩은 소속사 직원이 제거했다. 이 와중에 경남 창원에서 대형 콘서트까지 열었다. 그러면서 “모든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국민과 법과 공권력을 기만했다.범죄를 저지르고도 부인하는 정치인 등 지도자들의 그릇된 행태를 떠올리게 했다. 뒤틀린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잘못을 잡아떼고 은폐 및 조작하려다 결국 더 깊은 수렁에 빠졌다. 사고 후의 대형 콘서트와 거물급 변호사 선임까지 입방아에 올랐다. 대중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다. 가수 생활에 치명상을 입었다.잘못을 저지르고도 발뺌하려 한 대가치곤 혹독하다. 물론 콘서트 등의 막대한 취소 위약금을 고려, 부인했을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더라도 잘못됐다. 사고 후에도 바로 피해자와 국민에게 사죄와 용서를 구했더라면 이만큼 사태가 확산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부적절한 대응이 사태를 키웠다.일그러진 영웅이 됐다. 김호중은 어려운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주위의 도움으로 성악을 하고 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트롯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 스타가 됐다. ‘개천 용’으로 성공신화를 써가던 중이었다. 김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김천시와 시민들은 ‘김호중 소리길’을 조성할 정도로 각별한 사랑을 보였다. 그런 그가 지역민과 팬들의 사랑과 기대를 외면했다. 그의 빗나간 처신과 행보에 일부 누리꾼들은 사생활까지 파헤치며 인간 까뭉개기에 나서고 있다. 도를 지나쳤다는 지적이 일었다. 사회 일각에선 전도양양한 가수의 추락을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적지않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이들은 그만큼 자기관리에 엄격해야 한다. 김호중이 법적 처벌을 받고 잘못을 뉘우치며 다시 무대에 설 수 있길 기대한다. 사랑받는 트롯 가수로 돌아와 국민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길 바란다.

2024-05-23

손목터널 증후군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손을 많이 사용하는 직업군 중 많이 걸리는 질환 중 하나가 손목터널 증후군이다. 정중신경은 목에서 나온 신경이 합쳐지고 분리되면서 나오는 가지가 팔의 오금 쪽을 지나 아래팔 가운데 부분을 타고 손바닥을 지나간다. 다시 그 가지는 엄지 검지 중지와 약지 반을 지나간다. 정중신경이 손목 손바닥 근위부에서 다양한 이유로 눌리면 증상이 생긴다.기본적으로 손바닥 쪽에 통증이 발생하고 저리거나 시린 증상이 나타난다. 잘 때 혈액순환이 안되어 손이 아파서 깰 수도 있고 저리거나 시린 증상이 더 심해진다. 오래되면 엄지 두덩 쪽의 살이 빠지는 위축이 생길 수도 있고 손가락의 근육 위축으로 손가락 사용이 뻑뻑해지고 힘들어진다. 검사는 간단하게 할 수 있는데 손바닥 쪽 손목주름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어느 정도 강도로 두드리면 손바닥이 저리거나 불편한 증상이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팔렌검사라고 하는데 양 손목을 구부린 채로 서로 맞닿게 두고 1분간 기다릴 경우 정중신경의 경로에 따라 마비가 나타난다. 그리고 추나 기법을 할 때 환자를 눕힌 뒤 경추를 반대쪽으로 돌려 신경을 팽팽하게 만들고 손바닥을 지나가는 정중신경을 압박하면 증상이 나타난다.진단은 그리 어렵지 않으며 대부분은 손을 과사용하는 직업에서 나타난다.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는 사무직이나 컴퓨터 관련 직종들, 미용업을 하시는 분들 식당에서 물건을 많이 나르는 일을 하는 여성들에게도 많이 생긴다. 요즘은 스마트폰을 많이 사용해서 정중신경이 압박되기도 한다.손바닥을 지나가는 힘줄과 건초에 염증이 생겨 부으면 손바닥을 가로로 지나가는 횡 인대막에 눌려서 증상이 발생하기도 하고 갱글리온이나 시스트 같은 것이 내부에서 생겨서 신경을 압박하기도 한다. 이유야 어떻든 정중신경이 압박되어 생기는 증상으로 구조적인 문제와 더불어 직업도 원인이 되어 쉽게 낫지 않는다. 심한 사람은 잠을 못잘 정도로 고통을 받는 질환으로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치료는 추나 치료와 초음파로 직접 보면서 환부 근처에 바로 약침을 주사하는 방법이 가장 빠르다. 추나는 경추와 어깨 팔꿈치까지 교정을 하는 것으로 틀어져 있던 관절들이 제자리를 찾으면 정중신경의 주행경로가 정상이 되어 불편한 증상이 감소한다. 그리고 초음파로 정중신경을 직접 확인을 화면서 눌려 있는 곳에 약침을 주입해 눌려 있는 곳의 공간을 확보하고 씻어줘 눌리는 것을 줄이고 염증을 빨리 제거하면 일반 치료보다 몇 배 빨리 좋아진다. 그 외 부항과 침 치료가 같이 병행 되어야 하고 잘 때 저림이 너무 심한 사람은 혈액순환을 개선시키는 한약을 복용하면 훨씬 빨리 치료가 된다.사람에 따라 다르나 심하지 않은 경우는 추나와 초음파로 치료하면 5회, 10회 안쪽으로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심한 경우라도 신경손상이 없다면 10회 정도의 치료로 많이 좋아진다. 너무 오래 되면 손가락 근육의 위축이 오게 되고 신경 손상도 동반되어 치료가 오래 걸리고 심하면 손을 사용하기가 힘드니 너무 오래 방치하는 것은 좋지 않다.

2024-05-22

뿌리와 날개1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오랜만에 간 모두의 집에는 텃밭과 꽃밭엔 물론, 마당에도 풀이 잔뜩 자라있었다. 모자를 챙겨쓰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신발을 장화로 바꿔 입을 겨를 없이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대로 풀을 뽑는다.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몸을 구부려 풀을 뽑다가 억세지도 않은 것 같은 풀줄기에 스친 손바닥이 아렸다. 그제야 장갑을 찾으러 툇마루에 올라 걸터앉았다. 한 10여분이나 되었을까. 잠깐 사이에 이마며 뒷덜미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며 잠시 숨을 몰아본다. 연장을 쓰지 않고 손으로 쥐어뜯으니 풀은 뿌리째 뽑히지 않았다. 이제껏 한 일은 도로아미타불. 다시 호미를 찾아 본격적으로 마당으로 나선다. 사람 사는 집이라면 최소한 마당에만은 풀이 없어야 한다. 몇 주 동안 집을 돌보지 못한 부끄러움을 삼키며 개망초 줄기를 움켜쥐어 뽑고, 뿌리를 캐낸다. 주저앉은 채 온 마당을 돌아가며 크게 자란 풀을 대강 감추었다. 댓돌 아래 꽃밭엔 연분홍 메꽃이 보라색 초롱이 무더기져 피어 있다. 지난 달 꽃씨를 뿌린 자리엔 연한 떡잎들이 오종종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꽃모종 가까이의 풀까지 없애고서야 허리를 폈다.텃밭은 그나마 풀이 덜 자랐다. 채소 모종을 심으면서 비닐을 꼼꼼히 깔아준 덕분이다. 대신 채소들은 무성히 자랐다. 오롱조롱 빨간 딸기를 맺고 있는 딸기 모종을 뒤져 딸기를 따 입에 넣으니 달다. 다시 하나 더 따려고 보니 벌레가 주위에 가득하니 있다가 부산스럽게 흩어진다. 달디단 딸기향에 모여들었나 보다. 그래 익은 딸기는 너희들 먹어라. 그 옆자리에 심은 토마토는 지지대를 세워주지 않아선지 옆으로 넓게 퍼져 있다. 줄기 아래엔 토마토가 제법 달려 있다. 내일 꼭 다시 와서 토마토와 고추에 지지대를 세워주어 하늘 보고 쑥쑥 커서 맘껏 열매 맺도록 해야겠다.자주색 콜라비의 단단하고 둥근 줄기가 땅 위에 솟아 있는 걸 봤다. 우리가 먹는 부위가 뿌리가 아니라 줄기임을 알았다. 며칠 전 남편이 케일잎이 많이 컸더라며 따오길래 그런 줄 알았더니 실은 콜라비잎이었다. 꽤 큰 콜라비 하나를 뽑았더니 둥근 줄기 아래에 무뿌리같이 생긴 뿌리가 있다. 그 옆에 심은 오이 무더기도 뒤적여보니 제법 굵은 오이도 두어 개 달려 땄다.마당과 텃밭을 대강 돌보고서야 집 앞 우물가 꽃밭을 둘러본다. 토끼풀이 무성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며 포기한 곳에 어디서 꽃씨가 날아와서 자리를 잡았나 노란 코스모스가 한창이고 고혹적으로 붉은 꽃양귀비도 적당히 섞여있어 돌보지 않은 주인장을 무색케 한다. 고맙기도 해라. 작년 심은 장미 두 그루는 담장을 기어올라 바싹 붙어 꽤나 많은 붉은 꽃을 매달고 있다. 보리수나무엔 빨간 열매가 튼실하다. 블루베리도 열매를 맺었고, 손자의 석류도 꽃망울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올해는 꼭 석류를 보여주고 싶다.무심히 풀을 뽑는다. 가끔은 도 닦듯이 풀 뽑는다는 옛 친구의 말을 새기면서 그렇게 무념무상으로 풀을 뽑는다. 보기 싫고 성가시니, 텃밭의 채소를 방해하므로 뽑을 뿐이다. 성찰할 틈도 겨를도 없다. 그러나 천재적 사상가는 달랐다.

2024-05-22

망종(芒種)과 명리 이야기

24절기 가운데 아홉 번째가 망종(芒種)이다. 태양의 황경이 75도에 위치하며, 2024년에는 6월 5일(음력 4월 29일)이다. 음력으로는 5월의 절기다. 망종은 소만(小滿)과 하지(夏至) 사이다.망종(芒種)은 바야흐로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보리가 익어가고 매화가 열매 맺기를 시작하는 때다. 산에는 뻐꾸기가 울기 시작한다. 밭 근처에서는 오동나무꽃, 이팝나무꽃,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또한 감나무에 꽃이 핀다. 인동꽃, 다래꽃, 달래꽃도 피어난다. 사마귀나 반딧불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뜨거운 기운이 하늘로 올라가서 가뭄이 지속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망종(芒種)이란 벼나 보리처럼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종자를 뿌려야 할 적합한 시기라는 의미다. 여기서 ‘망(芒)’은 벼나 보리처럼 까끄라기를 말하며 ‘종(種)’은 그러한 작물을 뜻하는 바, 곧 밀과 보리를 수확하고 벼를 심을 때라는 것이다. 망종은 고생스럽고 힘든 농번기이지만, 지난날 높고 험난한 보릿고개로부터 해방되는 날이기도 했다. 또한 ‘발등에 오줌 싼다’고 할 정도로 일 년 중 가장 바쁜 때다. ‘보리는 망종 삼일 전까지 베라’라는 말이 있는데, 망종을 넘기면 보리가 바람에 쓰러지는 수가 많으니 이를 경계하는 뜻을 담고 있다. 보리는 익어서 늦기 전에 거두어 들어야 하고, 미처 모내기를 못했다면 마무리해야 했다. 조, 기장, 콩, 옥수수, 고구마 등을 심고 양파, 마늘, 감자를 수확하는 것도 이 시기다.우리 속담에 ‘망종 넘은 보리, 스물 넘은 비바리’는 시기가 지난 것은 값어치가 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망종 보리와 여자의 나이를 빗대 속되게 표현한 것이다. ‘망종 날씨가 궂거나 비가 오면 그해 풍년이 든다’ 또는 ‘망종 날에 우박 내리면 시절이 좋다’라는 말이 있어 한 해 농사가 풍년일까 흉년일까를 날씨로 점을 쳐 보았다.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6월 6일이 현충일인 이유는 망종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옛 기록에 따르면 고려 현종 5년(1014년), 당시 거란과의 여요전쟁(麗遼戰爭)으로 수많은 장병들이 사망하자, 망종 날이면 유해를 집으로 돌려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던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날 병사들의 유해를 매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들은 망종을 가장 좋은 날로 여기고, 조상들의 보살핌에 감사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나라를 위해 죽은 장병들의 제사를 주로 이 시기에 지냈던 것은 전사한 장병들의 제사를 망종(芒種)에 지낸 전통을 고려한 것이었다. 1956년 6·25전쟁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현충일을 제정할 당시의 6월 6일이 망종이었다. 6·25전쟁을 상기하며 옛 풍습에 따라 호국영령의 합동 위령제를 올리기로 한 날인 6월 6을 현충일로 정하고 1956년부터 시행했다.망종은 오월(午月)이 시작하는 절기다. 오(午)는 명리에서 화(火) 기운이 있어 오화(午火)라고 부른다. 오화(午火)는 망종의 뜨거운 여름 햇살을 의미하는 지지(地支)다. 사주에 오화가 있으면 망종의 날씨처럼 뜨겁고 화끈한 기운이 있다고 본다.오(午)는 오화(午火) 또는 도화(桃花)라고 불린다. 본래 복숭아꽃, 복사꽃을 지칭하므로 도화살(桃花殺)이라 한다. 예전에는 도화살이 있으면 끼가 많고 음란하고 색정이 강하다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도화살은 대중에게 어필하는 개성과 끼를 발산하는 재주 많은 모습 때문에 방송이나 연예계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요즘은 긍정적인 시각으로 해석한다. 오월생은 대체로 활동적인 사람이 많지만, 자신이 불공평한 대접을 받고 있고 삶의 질이 낮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외형은 부드러워 보이지만, 내면은 까다롭고 알 수 없는 자신 만의 생각에 늘 젖어 있다. 공동체 생활보다는 독신주의가 많다. 그래서 내면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하염없이 겉도는 단점도 있다.그러나 세상의 모순된 현실을 변화시키고, 소외되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도 있다. 자신 만의 이념을 가지고 겉으로는 사회와 잘 어우러져 살고 있는 듯해도 속으로는 항상 외로움이 많은 것이 흠이다. 때로는 감당하지 못하는 지위나 감투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기도 한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전한(前漢)의 회남왕 유안(劉安·기원전 179~122)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 권5 ‘시칙(時則)’에 보면 중하(中夏)의 달, 즉 5월(음력)에는 초요(招搖·북두칠성 자루 끝에 있는 별)가 오(午) 방향을 가리킨다. 이 달의 방위는 남쪽이며, 수는 7이다. 맛은 쓴맛이며, 냄새는 그을린 내다.천자는 붉은 옷을 입고 붉은 말을 타며 햇병아리 고기에 곁들인 기장을 맛보고 복숭아를 먹는데, 이를 먼저 종묘에 올린 다음 먹는다. 백성이 쪽풀을 베어 옷감에 물들이거나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드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한다. 이때는 초목이 아직 완전히 다 자라지 않았기에 한창 자라고 있는 초목을 상하게 하지 못하려는 조치였다.예로부터 통치자는 백성의 삶을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정령(政令)을 시행하였다. 계절에 맞지 않는 정령을 시행하면 오곡이 익지 않고 온갖 해충이 발생하여 나라에 기근이 들기 때문이다. 백성은 물과 같아서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한다. 정치를 사사로움이 없게 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다. 군자는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자신의 가난함을 잊는다. 그러므로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다.

2024-05-22

밥 할 줄 아나

정미영 수필가 만개한 포항 흥해 이팝나무 군락지에 들어선다. 우리 조상들은 이팝나무 아래에서 정성껏 치성을 드리면 그해에 풍년이 든다고 하여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었다. 꽃이 만발하면 풍년이 들고, 드문드문 피면 가뭄의 피해가 있으며, 꽃이 잘 피지 않으면 흉년이 온다고 믿었다. 밥은 우리네 삶의 축이다. 생명 유지를 위한 기반으로 식량은 중요했기에,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했던 것이리라.고봉처럼 피어난 이팝꽃에서 밥에 대한 추억을 읽는다. 눈보다 마음이 먼저 쉼 없이 훑어내려 간다. 먹먹하게 뭉쳐져 있던 기억이 머뭇거림 없이 시나브로 풀어헤쳐진다. 첫눈 내리던 날, 외할머니 장례식을 치렀다. 돌아가시기 두 주일 전쯤 할머니를 뵈러 갔다. 보름째 곡기를 끊고 마실 것만 겨우 드신다고 했다. 친정어머니가 내 이름을 말하며 할머니에게 알아보겠느냐고 물었다. 노환으로 고생하던 중에 눈까지 침침한데도 나를 알아보고는 말씀을 드문드문 건네셨다.“니, 밥 할 줄 아나?”느닷없는 말에 한순간 긴장이 풀렸다.“할매는, 내 결혼한지가 언젠데…. 밥 굶고 살까봐 걱정하노.”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뼈만 앙상한 할머니의 두 손을 맞잡고 말끝을 흐렸다.사람은 일생을 정리하는 순간에 어떤 생각을 가질까. 아마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일이나 마음 아팠던 일이 생각날 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밥 먹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생의 소실점을 앞에 두고서도 밥 생각을 하셨나 보다.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거친 고단한 세대였다. 너도나도 배곯던 시절, 식구들과 하얀 쌀밥을 배부르게 먹어보는 것이 할머니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궁핍한 살림에 밥은커녕 굶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당신 자녀 사남매와 고만고만한 친척아이까지 키웠으니, 먹거리는 늘 부족했다. 할머니의 꿈은 손수 마련한 몇 뙈기의 논에 벼농사를 지어 김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고봉으로 퍼 담아 자식들에게 먹여 보는 것이었다.할머니는 끝내 논을 소유해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평생 밭에서 일하시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텃밭에 묻히셨다. 논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으니 손수 거둬들인 쌀로 밥을 짓는 것은 애당초 포기했을 수 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삶의 끄트머리에서조차 쌀밥에 대한 생각의 끈을 놓지 않으셨나 보다.나는 어릴 적 외가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할머니 집에 잠시 맡겨졌다. 처음 얼마 동안은 엄마를 찾으며 울었지만 생활에 차츰 적응하면서부터는 분주했다. 고양이를 쫓아다니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장독대 옆의 무궁화 꽃 그림자가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콩밭 매는 할머니 옆에서 실컷 흙장난을 하다 보면 금세 시간이 흘러 밥때가 되었다.할머니는 가마솥에 밥을 지으셨다. 향나무 아래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다가 솥에 붓고, 청솔가지를 아궁이 속에 넣어 불을 지피셨다. 밥상이 차려지기를 기다리다 지쳐 허기진 배를 매캐한 연기로 가득 채우고 마당으로 나와 놀고 다시 부엌으로 가기를 두세 번 하면, “이제 밥 다 됐데이.”할머니의 밥 먹으라는 소리가 무척이나 반가웠다.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서 있던 할머니! 나를 키웠던 그 무렵 생각이 나셨던 것일까. 손녀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셨지만, 가난했던 시절에 제대로 챙겨 먹이지 못했다고 가슴 한편에 항상 애처로움으로 묻어두고 계셨는지도 모를 일이다.삼오날 할머니 산소에 갔다. 옷가지를 태우고 외가 터를 둘러보다가 찌그러진 부엌문을 조심스럽게 밀쳤다. 검게 그을린 아궁이는 제 할 일을 잊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괜스레 사금파리 한 조각을 집어 그 속에 던져 넣었다. 아궁이는 놀란 듯 먼지를 풀풀 날렸다.바람이 불자, 이팝나무가 하얀 꽃비를 흩뿌린다. 그 모습이 꼭,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뽀얀 쌀밥을 내게 보내는 것 같아 두 손 가득 받아본다.

2024-05-22

5월 23일은 일본의 ‘키스 데이’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키스(Kiss)란 상대의 신체 일부에 입을 맞춤으로써 사랑, 존경, 우애를 표현하는 행위다.가톨릭 최고 성직자 교황은 자신이 거주하는 바티칸 시국을 떠나 외국을 방문할 때면 비행기에서 내려 땅에 입을 맞추기도 한다. 이는 방문국 사람들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는 성스러운 입맞춤으로 이해된다.유명한 키스는 또 있다. 2차대전이 끝난 1945년 여름. 미국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서 남성 해군과 여성 간호사가 키스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은 전쟁의 공포에서 해방된 인간의 희열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20세기 사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일 터.비단 교황의 키스와 종전(終戰)의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키스만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엄마와 아기의 뽀뽀, 막 연애를 시작한 젊은 커플의 정열적 키스, 존경의 뜻을 담아 스승의 손등에 하는 입맞춤 모두 나름의 숭고한 의미를 담고 있을 게 분명하다.5월 23일은 일본의 키스 데이다. 유래가 재밌다. 1946년 5월 23일. 영화 한 편이 개봉된다. 제목은 ‘20살의 청춘(はたちの9752春)’. 거기 일본 영화 최초의 키스신이 촬영돼 담긴다. 당시는 일본인들이 적극적 애정 표현에 서툴던 시대. 그렇기에 영화 속 키스 장면을 보며 가슴 설렌 관객이 적지 않았고, 그날을 기념까지 하게 된 것이라고.1년 중 특정한 하루를 지정해 ‘무슨무슨 데이’라고 칭하는 게 익숙한 시대다. 키스 데이 역시 그런 차원에서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한국에는 키스 데이가 없냐고? 물론 있다. 오는 6월 14일이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려 키스를 아낄 필요가 있을까. 애정 표현은 자주, 그리고 많이 할수록 좋다./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5-22

흘려보낸 부부의 날

장규열 고문 함께 오래도 살았다. 달콤하게 찾아왔던 사랑을 지키기로 다짐하며 둘이서 건너온 날들은 어디로 다 가버렸을까. 만나고 헤어진 수다한 얼굴들 가운데 아직도 곁을 지키고 있는 당신과 나는 어쩐 영문일까. 헤아릴 수도 없을 이야기들 가운데 늘상 등장하는 당신은 내게 누구란 말인가. 살을 부비고 살아도 속속들이 다 안다고 할 수도 없는 당신은 누구인가. 사람이 생겨난 것도 신기한 일이었는데, 생각할수록 신통한 것이 부부라는 사람들이 아닐까. 아이들마저 있고 보면 둘이서 만들어온 세상이 신묘막측하다. 울고 웃으며 놀라고 화도 내지만, 얽히고설킨 이야기들 가운데 빚어온 시간의 흔적은 부정할 방법이 없다. 내 탓이고 당신 덕이며 함께 걸어온 발자욱이 고맙고도 미안하다.둘이서 만들지만 하나인 듯 살아야 하는 게 부부라 한다. 부부의 날이 21일인 것도 둘이서 하나를 만들라는 뜻이라는데, 그게 정말 가능한가. 박자가 맞기는커녕 갈수록 엇나가기만 하는 당신과 내가 아닌가. 하나가 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게 아니었을까. 하나는 어차피 못 이룰 것이니 참고 견디며 살아가겠노라는 소박한 다짐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적당히 포기하고 이제는 거울 앞에 돌아와 선 심정으로 체념하고 그냥 일상을 대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공연히 부딪히지 않고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며 남도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듯 그렇게 그렇게 지내는 게 서로에게 이롭지 않을까. 다그치지 말고 침범하지도 않으며. 사랑은 꺼져버리고 관심도 전혀 주지 않으며 한 울타리에 사는 당신과 나는 부부인가 아닌가.‘부부’인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아이들 탓에 산다는 건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다. 함께 사는 김에 뭐라도 만들어가는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도 끈끈한 마음이 있지 않은가. 넘치는 열정이야 식었겠지만 샘솟는 호기심은 그래도 있지 않은가. 치열한 시샘은 잊었더라도 잔잔히 흐르는 관심은 살려 두었겠지. 핏대어린 싸움을 이제는 못하겠지만 마음에 담지못할 미움도 이제는 없다. 부부가 되어 함께 바라보며 불쌍히 여길 이웃이 저기 있지 않은가. 부부가 되어 마음모아 일으켜 세울 다음 세대가 거기 있지 않은가. 뜨겁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정겹게 나누어줄 넓은 아량이 이제는 생겨야 한다.서로만 바라보기보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마음이 되어. 부부의 날을 한 번쯤 기억했으면 한다.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 이제 서로에게 무엇을 선사할 것인지 새겨보았으면 싶다. 받으려고만 하며 살아오지 않았는지, 나누기에는 인색하지 않았는지. 당신의 목소리를 이제는 들어주는 내가 될 수는 없겠는지. 세상에 완벽한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음을 어째서 애써 모르는 척하며 살아왔는지. 어차피 부족하여 도우며 살아야 했음을 왜 이제야 깨닫게 되는지. 격려하고 북돋우며 응원하고 일으키는 당신이 되고 부부가 되시길. 늦었지만, 부부의 날을 축하합니다!

2024-05-22

독서경영과 성장하는 기업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손에 책을 놓지 않은 민족은 역사적 생존과 강한 나라로 간다. 전쟁영웅 나폴레옹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전 등 전기를 즐겨 읽고 리더십과 전략에 대한 영감을 얻고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우리는 한 달에 몇 권의 책을 읽는가. 일 년에 한 권 읽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휘호를 남겼다. 글이란 읽을수록 사리를 판단하는 눈이 밝아진다. 두 권 읽은 사람이 한 권 읽은 사람을 지배한다. 억만 장자 빌게이츠도 유년시절부터 책이 친구였고 책과 함께 하며 하버드 대학 1년 중퇴 후 기적의 역사를 썼다. 책 속에 지식을 얻고 지식에 생각을 더하면 지혜가 되고 가치 있는 기업문화로 간다.한 때 기업이 독서경영으로 바람 불은 시기가 있었다. 포스코에 독서를 중시하는 CEO가 부임하면서 독서경영이 시작되었다. 한국독서경영연구원장 H씨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코칭을 받으면서 체계적인 독서활동을 하게 되었다. 인문학에 경영을 잇는 직책보임자의 인문학강좌와 부서에 독서 도우미도 생겼다. 이어령 교수의 자문을 받아 뭔가 깨달았다는 의미의 ‘유레카’를 응용한 포레카를 만들었고 첫 문을 열 때 ‘사람은 아기가 엄마 배 속에 잉태 할 때 본능적으로 웅크리는 자세의 혼자 생각하는 공간이 필요하다’며 생각하는 공간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했다. 이후 지역마다 포레카를 만들고 다양한 책을 비치하여 직원들이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며 책을 읽고 생각을 넣은 지식과 지혜를 업무에 녹여 일의 효율성을 높여 나갔다.직장인이 읽는 추천도서 20권이 권장되고 부서마다 독서 디자이너가 도우미 역할을 했다. 적절한 책을 선정하여 읽고 토론하며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통해 창의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향상시켜 나간다. 책을 통해 개인의 성장뿐만 아니라 조직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친다. 부서마다 도서를 정하고 읽은 내용을 발표하고 독서 디자이너가 요약 정리한다. 정리된 지식을 어떻게 현업에 접목 할 것인지 토론하고 운영방안을 정립한다. 현업에 적용 후 다양한 반응에 대한 성공사례를 공유하고 요약된 지식과 지혜를 지식경영시스템에 등록하여 누구든 쉽게 활용하고 일에 접목한다.기업에서 독서경영의 필요한 조건은 경영진의 관심과 리더십, 독서를 장려하고 독서문화를 조성하는 일이다. 또한 적절한 도서 선택과 독서 활동을 지원하는 인프라가 필요하다. 성공한 기업은 독서를 통해 직원들의 지식과 역량을 향상시키며 일에 접목하여 효율을 높이거나 문제해결에 활용하기도 한다. 독서를 일상적인 업무의 일부로 통합하고 지식공유를 장려하여 조직 전체의 성과를 향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책을 놓지 않는 기업이 망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삼성전자가 성공하는 것도 직원들의 손에 책을 놓지 않는 기업문화가 토양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독서에서 지식을 얻고 생각을 넣어 지혜를 만들고 일에 접목하는 기업은 성장하는 기업이 된다.

2024-05-21

한국 시조문학의 산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강과 어우러진 풍경은 정겨움을 자아내게 한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쉼과 여유를 보여주는 듯하고, 멈춘 듯 흐르는 강물따라 수면에 비춰지는 정경은 한가롭기만 하다. 하늘과 산이 내려앉고 건물이나 사람의 모습까지 얼비치는 강물은 고요히 흐르면서 한 편의 시나 수필을 쓰는 듯하다. 강물을 바라보면 물결따라 마음이 흐르는 것 같고, 깊은 강이 소리 없이(深江無聲) 흐르는 것처럼 한결같이 깊어지며 소리 없이 살아가는 삶의 깊이가 강물 속에서 들리는 듯하다.경남 진주시를 관통하는 남강이 휘돌아가는 가좌산 기슭에는 마치 강물이 소리 없이 깊어진 듯한 문향이 한옥의 아취 속에서 창연하게 피어나고 있다. 강물이 쌓이고 쌓여 깊이를 얻듯이, 수많은 근현대의 서책과 시조집, 문예지, 문인들의 육필, 편지, 서화작품 등이 모이고 더해져 마치 문학의 유장한 강줄기를 이룬 듯하다. 그것도 700여년 면면히 이어진, 우리 겨레의 얼과 숨결이 오롯이 담긴 시조 장르의 다양하고 방대한 작품과 유물이 깔끔하고 가지런하게 정리돼 있으니, 가히 시조문학의 산실(産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그곳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전문 문학관인 ‘한국시조문학관’이다. 고려말~조선시대에 간결하게 다듬어져 성행된 고유의 정형시-시조를 새롭게 부흥하고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시조시인인 김정희 선생이 11년 전 남편과 함께 사비를 들여 건립됐다. 울창한 수풀에 둘러싸여 금계국이 피어나는 자연 속에 모두 한옥 4채로 구성된 한국시조문학관은, 시조의 역사와 변천·홍보·다양한 문학행사를 열면서 시조문학의 발전과 깊이를 더해가는 곳이다.즉, 시조의 근현대의 사료적 가치를 집대성해 놓은 주시설인 시경루(詩境樓), 신라의 향가에 연원을 둔 고시조와 별곡, 무곡, 가사 등 시조의 근본과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수류화개(水流花開), 진주와 경남지역의 향토문학 근대 문인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숙소로도 이용되는 보문산방(寶文山房) 등의 공간이 전시·열람·체험·교육·세미나 등으로 시조세계의 지평을 넓히고 전통문학을 지키고 가꿔가는 ‘한민족 시의 보고(寶庫)’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과연 빼곡하게 들어찬 시조집과 문예지를 비롯 김소월의 필적과 미당선생의 빛 바랜 편지, 엽서 등과 문인들의 시서작품을 직접 보니, 오랜 세월 자료를 모으고 보관하며 준비와 구상, 정리해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내공과 안목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다. 한국문학의 종가라 할 수 있는 시조가 외래문화에 떠밀리고 일반인들에게 멀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구순이 지났음에도 시조문학의 융성에 온 힘을 쏟고 계시는 김 관장님을 직접 뵈니 경외심마저 들었다고나 할까?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이나 유럽 등지의 문화대국에는 겨레시가 있기 마련이지만, 대대로 이어온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문인들과 지자체의 몫일 것이다. 짧고도 명확한 서사구조를 가진 시조를 일상 속에서 즐겨 지으면서 현대인의 감성을 표현하고, 시조 백일장·시화전·낭송대회 등 창의적인 전환의 모색으로 타 장르와의 융합을 통한 다양한 콘텐츠를 창출하여 시조의 대중화, 세계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2024-05-21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② 규동의 기도

스토리가 아닌 이미지가 중심이 되는 단편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말한다. “한정된 짤막한 시간 안에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선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소설이란 문학 장르 중 가장 짧은 형식인 ‘엽편소설’ 역시 그렇다. 원고지 25매 안팎의 문장으로 세상과 사람,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꿈과 환멸을 드러내기 위해선 본질을 보여주기 위한 ‘긴장’과 ‘에너지’가 필수. 문학을 통한 세계 해석과 심미적 위안이 사라진 21세기. 경북 포항에서 내과의사로 일하며 괜찮은 소설을 쓰기 위해 악전고투 중인 작가 김강(52)이 ‘엽편소설 연재’라는 간단찮은 도전을 본지를 베이스캠프 삼아 진행한다. 격주로 게재될 김강의 엽편소설이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을 것인지 궁금하다. 아직 문학과 소설이 가진 사회적 힘을 신뢰하는 독자들의 관심과 질책을 더불어 기대한다. - 편집자 주 그날 신(神)이 규동의 기도를 들었다.수십 억 명으로부터 올라오는 기도들 중 어느 하나를 콕 집어서 들을 수 없어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공평하다 여겼다. 간혹 제사장들이 골라낸 기도를 듣기도 하고 답을 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일, 드문 일이었다.아니, 지들이 기도를 하면 내가 들어야 하는 거야? 내가 언제 지들한테 기도하라 그랬어? 찬양하라 그랬지, 숭배하라 그랬지. 내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것도 의미 없지. 내 뜻을 이해하든 말든, 내가 신경 쓸 것은 아니지. 내가 행하는 모든 것 그 중 어느 하나 지들의 생각에, 지들의 기준에 부합하는가 안 하는가에 나는 관심이 없단 말이지. 나는 행하고 지들은 받아들이고 그런 거잖아. 그런데 쟤들은 왜 그러는 걸까?평소 주위 몇몇이 인간들의 기도에, 인간들의 세상에 관심을 가져주십사 청하면 신은 이렇게 답했었다. 예전에는 그들의 기도를 즐기지 않으셨습니까? 누군가 물었다.그때야 인간들이 몇 명 되지 않았잖아. 그러니 들을만 했지. 한꺼번에 다 들을 수는 없어도 찬찬히 살펴보고 듣고 또 답을 주고 하는 것이 나름 재미있기도 했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재미가 없어졌어. 일단 시끄러워. 인간들이 많아지니까 그렇겠지. 그렇다고 예전처럼 엎을 수도 없고. 지금 하는 꼴을 봐서는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지들끼리 숫자를 조절할 것 같기도 하니 말이야. 게다가 누구한테 하는 기도인지 알 수가 없어. 나는 하나고 주소도 하나인데 수신자명이 다 달라. 그리고 기도가 너무 길어. 이건 뭘 바라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데,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뭐,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아. 안 들으면 되니까. 그런데 답을 안 준다고 욕하는 놈들도 있단 말이지. 아니, 내가 답을 주겠다 약속한 적 있나? 아아, 자꾸 묻지마. 짜증나니까.이랬던 신이 그날 규동의 기도를 들었다.기도에도 일정한 패턴이 있다. 계절의 변화, 낮과 밤, 인구 연령의 변화, 인구의 이동, 남반구와 북반구, 기술의 변화 등의 여러 요인이 기도의 양과 흐름에 영향을 준다. 이런 요인들이 얽혀 최고 지점과 최저 지점을 반복하는 유형의 파동을 만든다. 인류의 수가 어느 정도에 이른 후부터는 기도의 파동은 일정한 유형을 유지해 왔다.그런데 그날은 모든 인자들이 파동의 아래쪽으로 향했다. 지구를 뒤덮은 전염성 질환에다 북반구는 최악의 한파로, 남반구는 겪어보지 못한 고온으로 제법 많은 인간들이 생명을 잃었고, 그들 대부분이 기도에 익숙한 연령이었고, 가장 규칙적이고 열렬한 기도를 하던 두 그룹은 서로 싸우느라 신을 잊어버렸고, 가상공간의 기도들은 SNS 계정이 없는 신에게 닿지 못했다. 기도의 파동은 아래로 향해갔다.그날은 북반구 인구가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지역의 깊은 밤이 일 년 중 가장 오래도록 지속되는 날이었다. 그 중 가장 깊은 시각 새벽 세 시 반에 규동이 소리 내어 기도를 했다. 신의 유일한 이름으로, 네 개의 음절만으로. 3차까지 이어진 회식 후 돌아오는 길, 하늘을 올려다보며.“신이시여, 행복하게 해 주소서.”신은 그날 규동의 기도를 들었다.다음날 신의 사자 A가 규동의 직장으로 규동을 찾아왔다. 유리 칸막이 넘어 면역화학검사기에 혈액 샘플을 넣고 있는 규동을 발견하고는 곧장 규동에게로 향했다. 칸막이를 돌아 규동의 앞에 서려던 순간 사자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에게 제지를 당했고 그는 사자를 데리고 데스크 앞으로 갔다. 사자는 엉겁결에 누군가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대야만했다.“대기실에 앉아 기다리시면 이름을 부를 겁니다.”사자는 한동안 대기실에 앉아있었어야 했고 유니폼을 입은 이가 이끄는 대로 진료실에 들어갔고 우물쭈물 앉아 있는 사자의 얼굴을 보던 의사가 사자의 결막을 확인했다.“빈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검사하고 결과 나오면 다시 뵐게요.”의사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사자는 규동과 대면할 수 있었다.“음, 오른쪽 팔을 이리 내밀어 이 쿠션 위에 편하게 놓으십시오.”“어떻게 하면 행복해 지겠느냐?”규동은 사자의 말에 사자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사자의 윗팔에 고무줄을 감았다.“자, 주먹을 쥐시구요.”사자는 규동의 말에 따라 주먹을 쥐었다. 소독솜으로 사자의 팔을 몇 번 문지른 규동이 채혈바늘로 사자의 팔을 찌르려던 순간이었다. 사자는 팔을 빼며 일어섰다.“뭐하는 것이냐?”“검사를 하려면 피를 뽑아야지요, 어르신.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시 앉으세요. 최대한 안 아프게 해드릴게요.”“어젯밤 행복을 빌지 않았더냐? 나는 신이 보낸 사자다. 네게 행복을 물으러 왔다. 누구의 행복이냐? 너의 행복은 무엇이냐?”규동의 기도를 들은 그날 신은 급하게 사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규동의 기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인간의 기도를 들었고 웬만하면 들어주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규동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 사자들에게 물었다. 신의 무관심을 충실히 따르던 사자들이었다. 최근의 인간들에 대해 알지 못했던 그들은, 그러나 최근이나 옛날이나 혹은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시절이나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항상 그래왔으니까.부를 가져다주면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황금을 쏟아주면 되는 것이냐? 안 됩니다. 황금은 바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횡재는 시기와 다툼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세금도 많이 내야 할 겁니다. 그러면 행복이 사라질 것입니다. 차라리 그에게 신선한 생각과 가능한 상상력을 주십시오. 요즘 인간 세계에서는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물건이 곧 부를 뜻합니다. 안 됩니다. 어느 세월에 상상하고 생각하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낸단 말입니까? 차라리 마음대로 세상을 주무를 수 있는 권력을 주시지요. 권력이라,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이냐? 저 헤라클래스처럼. 아닙니다. 지금 세상은 헤라클래스의 힘을 가진 자가 힘을 쓸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 자는 권력을 가진 자의 종이 될 뿐입니다. 요즘 세상은 부가 곧 권력이고 기술이 곤 권력입니다. 부와 기술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더냐? 이 녀석들이!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냐?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그때 사자 A가 앞으로 나섰다.먼저 다시 인간에게 관심을 가져 주신 신께 감사와 존경의 말씀을 드립니다.그나마 가끔씩 인간 세상을 둘러보던 사자 A였다.신께 한 말씀 올리려합니다. 살펴보건데 이 기도의 해법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첫째, 행복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저희는 명확한 기준 혹은 예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준 혹은 예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도를 올린 그자의 행복과 같은 것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어찌어찌 신께서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더라도 그 행복의 유지 보수까지 책임을 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신께서 넓고 깊은 사랑으로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으나 그가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찌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제는 그의 행복이 다른 인간의 불행을 전제로 한다면 그 또한 안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는 그 인간의 기도가 구체적이지 못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심지어 목적어도 없습니다. 누구를 행복하게 만들어 달라는 건지.말을 마친 사자 A는 약간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오오, 다른 사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긴 소매 끝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한동안 물끄러미 사자 A를 바라보던 신이 입을 열었다.그래서? 그래서 어쩌자고? 가만 보면 넌 말은 많은데 답이 없더라. 어쩌란 말이냐. 하지 말자는 말이야?사자들은 치켜세운 엄지손가락을 소매 안으로 숨기고 고개를 숙였다. 약간의 미소와 함께.제 말씀은….아, 필요 없고, 너, 내려가 봐. 내려가서 물어. 뭘 바라는지, 뭘 해주면 행복할 건지. 그 인간에게 행복이란 것이 무엇인지.규동은 채혈 주사기를 들고 사자 A를 쳐다보았다.“어허, 이놈이 빨리 말하지 못하느냐? 너, 이 녀석, 행복이 뭔지는 아는 것이냐?”“잠시만요.”규동은 한참 동안 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전자 의무 기록지를 살폈다.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키보드에 손을 얹었고 자판을 두드려 진료실로 메모를 보냈다.‘아무개 환자, 채혈 거부, 횡설수설. 7층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요망.’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05-21

MB의 포항방문에 대한 기자의 斷想

심충택 논설위원 이명박 전 대통령(MB)이 부인 김윤옥 여사와 함께 고향인 포항시 흥해읍 덕실마을을 1박 2일 일정으로 방문했다. 유년시절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추억이 그리워 찾았다고 한다. 그의 고향집은 초가집 두 채가 있는 전형적인 옛날 시골가옥이다. MB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지만, 대통령 재임 중에도 ‘낙서를 하다가 무의식적으로 포항을 쓸 정도’로 고향에 대한 애정은 늘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대통령 퇴임직후인 2013년 겨울 덕실마을을 찾은 후 11년 만의 고향 나들이다.MB의 고향방문에는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이강덕 포항시장, 백인규 포항시의회 의장, 김정재 국회의원, 이상휘·이달희 국회의원 당선인 등도 함께했다. 고향주민들은 덕실마을에 있는 경주이씨 재실(이상재) 기념식수와 풍물놀이 행사를 주최하면서 MB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MB도 주민들과 일일이 손을 잡고 안부를 물으면서 향수를 달랬다. 고향방문 이틀째인 17일에는 자신이 어린시절 다녔던 교회를 둘러보고, 지역 경제인들과 점심을 같이했다. 그 후 친구인 천신일 세중그룹 회장의 박사학위(포스텍 명예공학박사) 수여식에 참석한 후 KTX를 타고 서울로 갔다.언론이 MB의 고향방문에 관심을 쏟은 것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행보와 비교가 되는 탓도 있다. 그가 사면이후 공개석상에 모습을 비춘 것은 지난 4·10 총선일 서울의 한 투표장을 찾은 이후 한 달이 넘었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맡긴 채 한 명의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조용하게 지내는 것이다. 그는 이번 고향방문에서도 대통령 재임시절의 업적이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다만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이강덕 포항시장이 4대강 사업을 비롯해 원전 수출, G20정상회의 개최, 영일만항 개항, KTX포항 노선 개통, 블루밸리국가산단 조성 등을 예로들며 고마움을 표시한 정도다. MB 재임시절인 2009년 9월 첫삽을 뜬 블루밸리국가산단(포항시 남구 구룡포읍·동해면·장기면일대)의 경우, 철강산업에 의존했던 포항을 신산업의 국제무대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가 된 곳이다. 포항은 현재 이곳을 이차전지·수소산업 중심의 미래동력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이차전지 산업의 대명사인 에코프로그룹은 이곳에 2028년까지 2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MB와 관련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현대 정주영 회장이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정 회장은 당시 “(이명박은) 평사원 일을 시켰는데 과장 일을 했고, 과장 일을 시켰는데 부장 일을 했다. 부장을 시켰는데 사장 일을 해 내더라”고 했다. 팔순이 넘긴 했지만, ‘샐러리맨의 신화’를 만들었던 MB가 국민과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많다. 예를들어 이번 고향방문에서 “의과대학과 종합병원이 들어서야 포항이 발전한다”고 한 말은 포항시민들에게 큰 힘이 됐다. 전직 국가원수가 정치적인 현안이 있을 때마다 개입하는 것은 문제가 많지만, 이번 MB의 포항방문처럼 여생을 고향사랑과 국민통합을 위해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다.

2024-05-21

영부인(令夫人)

우정구 논설위원 퍼스트 레이디(First Lady)는 대통령이나 수상 등 국가 최고 실권자의 아내를 호칭하는 말이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영부인이다. 대통령의 아내가 유고 시에는 대통령의 딸이나 누이 등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는 것이 국제적 관례다.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부인과 결혼생활을 끝냈을 때 그의 딸이 영부인 역할을 맡았다. 우리나라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내 육영수 여사가 총상으로 사망하자 딸인 박근혜가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다.영부인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아내를 높여 호칭하는 말이다. 남의 자식을 높여 부를 때 우리는 영식, 영애라고도 부른다.대통령 부인에게는 특별히 주어진 권한은 없다. 그러나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대통령과 나란히 하는 존재로 인식되기에 국민의 관심이 항상 뒤따라 다닌다. 과거 영부인들을 살펴보면 역할도 제각각이다.박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는 내조형이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항상 앞장서면서 대통령에게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희호 김대중 전 대통령 영부인은 전략적 내조형으로 통한다. 2002년 유엔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기조연설도 했다.영부인에게는 권한은 없으나 그들의 역할에 따라 평가는 다양하게 나온다. 그들의 행동이 대통령의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 또한 크다.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의 인도 방문을 두고 외교냐 관광이냐를 두고 뒤늦게 정치권의 공방이 뜨겁다. 사실 여부를 떠나 대통령 영부인의 처신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과거 경험으로 보아 영부인의 내조는 몸을 낮추고 대통령이 미처 못하는 그늘진 곳을 찾는 봉사활동이 국민의 호응을 가장 많이 받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5-21

인간에게 지구만큼 너그러운 별은 없다

김규인 수필가 초속 36m의 강풍이 분다. 고층 건물의 창문이 산산조각 나고 거리엔 쓰러진 나무와 송전선이 어지럽게 널린다. 건물에서 떨어진 물건이 자동차를 때리고, 지붕이 뜯겨나간 호텔은 물에 잠긴다. 미국 텍사스는 90만, 루이지애나는 20만 가구의 정전이 발생하고 최대 900㎜의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된다. 인명 피해는 늘어나고 학교는 휴교한다.중국 허난성 일대에선 시속 100km를 넘는 강풍이 발생한다. 최대 시속 133km에 달하는 국지성 돌풍까지 일어난다. 허난성 정저우시의 노점에서 식사하던 사람들이 강풍에 밀려가고 넘어진 가로등에 깔려 행인이 숨진다. 중국 기상 당국은 기온이 35도까지 올라 대류가 불안정해서 강풍이 일어난 거라고 말한다.케냐와 브라질에선 홍수, 베트남에선 가뭄이, 동남아는 폭염이 일어난다. 지구 곳곳이 지구온난화로 인한 피해가 속출한다.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에서는 너무 더워서 학교는 휴교하고 각국은 발생한 재해를 복구하기에 바쁘다. 홍수와 가뭄과 폭염 등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기상현상이 자주 일어난다.우리나라에선 비가 내리는 것이 바뀐다. 2022년 서울에선 시간당 141.5mm의 많은 비가 내렸고, 2023년 청주에선 400년 만에 한 번 올 법한 큰비가 내렸다. 시간당 강수량이 72mm 이상인 극한호우가 내리는 날이 늘어난다. 올해 5월에 강원도에는 눈이 내리더니 다음날은 29도의 높은 기온을 나타낸다.지구온난화로 애써 지은 농작물이 물에 떠내려가고 가뭄이 든 곳은 말라 죽는다. 그나마 남은 것은 바람에 날려간다. 농산물 생산량이 감소하니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른다. 그런데도 우리가 버린 음식물 쓰레기는 산더미처럼 쌓인다. 음식물은 썩으면서 발생한 가스로 다시 지구를 뜨겁게 달군다.건물이 무너지고 농작물이 쓸려가고 사람들이 다치는 것만 신경 쓰는 사람들. 빙하는 빠른 속도로 녹고, 녹은 물은 그만큼 육지를 잠식한다. 지구 환경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데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는지. 서서히 데워지는 냄비 안의 개구리처럼 사람들은 이러한 지구의 아픔에 아직도 무감각하다.골프공 크기의 우박이 자동차의 유리창을 박살 내고 사람을 향해 달려든다. 이제는 제발 정신 차리라고 지구가 실력 행사를 한다. 더 이상 지구를 괴롭히지 말라고 몸으로 말하는데 한 치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아이처럼 사람들은 아직도 욕심을 채우기에 바쁘다. 얼마나 더 채워야 욕심을 멈추고 지속 가능한 삶을 살 수 있을까.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인류 공통의 문제에 머리를 맞대야 한다. 지구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포유류가 멸종하느냐 계속 번영을 누리는 가는 지금 우리의 손에 달렸다. 내 자식들이 계속 아름다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자. 우리는 이미 후손들의 터전을 불모지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을 지키자. 인류가 지구를 버리고 이사 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받기만 한 지구에 이제는 우리가 뭔가를 해야 한다. 인간에게 지구만큼 너그러운 별은 어디에도 없다.

2024-05-20

지속가능발전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통계청은 올해 3월 21일 ‘한국의 SDG(지속가능발전목표) 이행보고서 2024’를 발표하였다. 2022년 1월에 제정된 ‘지속가능발전 기본법’에서 ‘지속가능성’이란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미래 세대가 사용할 경제·사회·환경 등의 자원을 낭비하거나 여건을 저하(低下)시키지 아니하고 이들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이 법에서 ‘지속가능발전’이란 지속가능한 경제성장과 포용적 사회, 깨끗하고 안정적인 환경이 ‘지속가능성’에 기초하여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발전이라고 정의하였다.이렇게 ‘지속가능발전’이란 것이 매우 이상적이고 어려운 것이지만 우리가 반드시 추구해야만 한다. 그래서 지난 2015년 국제연합총회에서 203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지속가능발전’을 달성하기 위한 17개의 목표를 채택하였고, 이 목표 아래 총 169개 세부목표와 231개 지표를 도입하였다.17개 목표를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빈곤퇴치(목표1), 농업과 먹거리(목표2), 건강과 웰빙(목표3), 양질의 교육(목표4), 성평등(목표5), 물과 위생(목표6), 깨끗한 에너지(목표7), 양질의 일자리와 경제성장(목표8), 산업혁신과 사회기반시설(목표9), 불평등 완화(목표10), 지속가능한 도시와 공동체(목표11), 책임감있는 생산과 소비(목표12), 기후위기대응(목표13), 수생태계보전(목표14), 육상생태계 보전(목표15), 인권, 정의, 평화(목표16), SDG를 위한 파트너십(목표17) 등이다. 이들 17개 목표가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달성되지 못하면 ‘지속가능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그리고 17개 목표(SDGs)의 달성 정도를 측정하기 위한 도구로 ‘지속가능발전지표(SDIs)’를 도입하였다. 이 지표는 목표달성을 위한 진행상황을 모니터링할 수 있게 하고, 정책 결정자들이 어떤 분야에 더 많은 자원과 노력이 필요한지 알 수 있게 해준다.이해를 돕기 위해 ‘지속가능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목표(SDGs)에 대응한 지표(SDIs)를 예시로 들어보자. 빈곤퇴치(목표1)의 경우는 ‘앞으로 빈곤 상태에 처할 위험이 높은가?’, 성평등(목표5)의 경우는 ‘부부간 자녀간 남녀 차별이 없고 집안일을 공평하게 나눠서 하는가?’이다. 물과 위생(목표6)의 경우는 ‘마실 수 있는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있는가?’, 기후위기대응(목표13)의 경우는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실천하는가?’, SDG를 위한 파트너십(목표17)의 경우는 ‘가족 간 대화를 통해 여러 문제를 함께 알고 함께 풀어가는가?’ 등이다. 실제 이들 ‘지표’를 기준으로 ‘가정의 지속가능성’ 상태를 나쁨, 보통, 좋음 등 3단계로 평가해 보면 ‘보통’이나 ‘나쁨’이 대부분일 것이다. 더구나 비수도권으로 침체한 인구소멸지역이 많고, 맑은 물 확보가 어렵고,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과 산불 등의 피해가 높아지는 대구경북지역은 ‘지속가능성’ 상태가 ‘좋음’으로 평가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024-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