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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보리야 보리밥 먹자

분황사 앞마당에 보리가 누렇다. 작물이 자라서 약간의 곡식이 여무는 때인 소만이다. 낮에는 뻐꾸기 울음소리를 듣고 줄기마다 꽃을 준비하고, 밤에는 소쩍새가 ‘너그 집에는 모내기했나?’하고 인사를 건넨다. 논에 물이 그득하고 어린 모가 바람에 허리를 흔들며 여름이 오는지 내다본다.소만은 24절기의 여덟 번째 절기로 입하와 망종 사이다. 양력 5월 21일께부터 보름간으로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뜻이다. 이 무렵에는 모내기 준비에 바빠진다. 보리 베기에 이어 밭농사의 김매기들이 줄을 잇는다. 초후에는 씀바귀가 뻗어 오르고, 중후에는 냉이가 누렇게 죽어 가며, 말후에는 보리가 익는다고 했다.진아씨와 점심 먹기로 하고 죽도시장에서 만났다. 이밥 반 보리밥 반 섞어서, 딸려 나온 나물 반찬 넣고 된장찌개 두어 숟갈 흩뿌려 비벼 먹는 집이다. 비빈 밥을 상추에 싸서 입안 가득 우물거리다 보면 요 며칠 시름 정도는 잊기도 한다. 속이 허할 때 늘 찾아가는 단골 식당이다.골목이 헷갈려서 내 나름의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 우회전을 하다 보면 나타난다. 정오 즈음엔 줄을 서는 집이니 아점을 먹으면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예전엔 가자미를 껍질이 바싹하게 구워 주더니 최근엔 고등어가 자주 상에 오른다. 집안에 비린내 베는 게 싫어서 생선을 거의 굽지 않는 나에게 주는 과자 선물 같기도 하다. 밥 인심이 좋아 대접에 가득 나와 우리는 늘 조금만 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그래도 넉넉히 담아 내온다. 철 따라 반찬이 바뀐다. 오늘은 쪄서 양념을 입힌 꽈리고추 무침이 맛있어서 한 접시 더 달라고 하니 처음 보다 두 배로 담았다. 성의가 고마워 꼭꼭 씹어 비우고 풋고추도 리필 했다.나와 친구들은 보릿고개를 넘어보지 않은 세대다. 쌀 한 톨 섞이지 않은 꽁보리밥만 먹어서 질릴 일도 없었다. 부모님 세대까지는 보리를 추수하기 전까지 소나무 속껍질 벗겨서 만든 송기떡과 개떡으로 배고픈 봄을 이어갔다. 보리등겨를 섞으면 보리개떡, 곤드레를 추가하면 곤드레개떡, 쑥을 넣으면 쑥개떡이었다. 지금은 건강식이자 별미 음식이다.초등학교 다니던 때, 4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면 매일은 아니어도 가끔 선생님은 도시락 검사를 했다. 혼분식을 장려하던 시절이었다. 하얀 쌀밥 사이에 콩이나 배에 줄이 선명한 보리가 뜨문뜨문 섞여야 통과였다. 깜빡하고 이밥만 싸 온 날엔 친구에게 보리 알 몇 개 빌려 박아넣었다. 분단과 분단 사이를 오가며 살피거나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열어 들게 한 후 앞에 서서 휙 둘러보기도 했다. 장려라기보다 강요였다.그땐 도시락 검사만 한 게 아니다. 용의 검사라고 손등에 때가 있는지 손톱은 짧게 깎았는지 보고 혼을 내고 까마귀가 형님 하겠다고 놀리기도 했다. 월요일에 할 거라고 예고를 하면, 주말에 가마솥에 군불 지펴 데워서 커다란 다라이에 찬물 섞어서 씻었다. 오래 묵은 때를 한참이나 불려 돌로 문질러 때를 억지로 벗겨내야만 했다. 참, 여러 검사가 우리의 학창 시절을 지나갔다.학교에서 집까지 한 시간이 더 걸리는 친구들은 도시락을 반만 먹었다고 한다. 반은 남겨서 중간에 고추장 한 숟갈 넣어 도시락을 흔들면, 서로 달라붙어서 섞이지 않는 쌀밥과 달리 보리는 미끌미끌해서 금방 빨갛게 간이 스며 먹기 좋았다. 먹거리가 귀한 시절 주식이자 간식이었던 보리밥이었다. 지금은 압력밥솥으로 간단하게 익히지만, 예전에는 보리를 먼저 삶아 시렁 위에 두었다가 쌀 위에 앉혔다. 번거로운 과정을 매일 했을 어머니들의 수고가 우리 도시락을 채웠었다.그제 친정에 갔더니 엄마가 보리 순을 키우고 계셨다. 가위로 슥슥 잘라 주며 가져가서 샐러드나 전을 부쳐 먹으란다. 엄마는 보리 순을 키우고 나는 보리를 키운다. 종일 노란 털을 고르느라 바쁜 우리 집 막둥이다. 2년 전 보리누름에 우연히 찾아온 녀석이라 보리라고 불렀다. 코로나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올 때 문 앞에 마중 나오는 보리가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보리 덕분에 보릿고개를 넘는다. /김순희(수필가)끝

2022-05-29

‘바다나다’

이원만 맏뫼골놀이마당 한터울 대표 5월 31일은 바다의 날이다. 21세기 신해양시대를 맞아 세계적인 해양 강국으로 부상하기 위해 1996년 제정한 법정 기념일이다.매년 5월 31일을 바다의 날로 정한 것은 통일신라시대 장보고(張保皐) 대사(大使)가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 날을 기념하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바다의 날이 가까워지면 ‘표면의 73%가 바다인 지구는 ‘땅으로 된 구슬’ 地球가 아니라 ‘바다로 된 구슬’ 海球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는 생각을 하며 ‘구글어스’를 통해서라도 지구 곳곳의 바다를 찾아본다.달에서 지구의 사진을 찍었을 때에도 인류는 바다에 사는 고래의 온전한 사진 한 장 가지지 못했다.우주에 대해 아는 정보보다 바다에 대해 아는 정보는 그 정도로 보잘 것 없다. 인류에게 바다는 아직도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있다.우리가 사는 지구행성의 모든 생물체(물속 생물은 물론이고 육지 생물들까지)들은 몸속에 바다를 지니고 있다.혈액, 알, 세포를 감싸는 액체는 모두 바닷물과 비슷한 비율을 가진 염분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인간을 포함한 많은 생물들이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왔다. 지구의 기획자인 바다를 기념하는 날의 취지와 여러 행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여전히 바다를 수산자원을 제공하는 산업의 관점으로만 바라본다.바다의 무수한 생물들과 함께 사용하는 공동의 삶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우리가 늘 우리 땅으로 주장하는 독도의 강치들은 학살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단기간에 잔인하게 멸종되었다.역사적인 자료를 보면 일본어부들의 만행도 있었지만 한국의 어민들도 강치학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독도를 우리 땅이라 주장하기 전에 ‘강치멸종사’를 통해 우리 인간성의 멸종을 성찰해야한다.그리고 인간성의 멸종으로 인해 훼손된 바다를 돌아봐야한다. 바다가 자꾸만 텅텅 비어간다고 전 세계의 바닷가 사람들이 아우성이다.포크로 젓가락으로 고래를, 바다생물을 먹어치우는 우리 인간의 일생은 ‘아름다운 바다를 망치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닐까!바다는 벽이 없음을, 바다는 누구의 것도 아니며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의 삶터임을, 우리가 바다를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다.바다는 세상의 모든 물을 받아들인다.그래서 바다다.그런 바다이기에 우리가 함부로 버린 플라스틱도 받아들이고 지구온난화의 열기도 탄소도 다 받아들이며 지금까지 인류의 삶을 지탱해왔다.그런 바다는 인간의 무분별할 해양생물 남획과 폐플라스틱, 폐비닐, 폐어구 등 각종 쓰레기의 해양 무단 투기,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온 상승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바다에 많은 것으로 의존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바다의 고통은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열을 머금은 바다의 변화가 예측불허다.죽은 고래의 뱃속에서 플라스틱이 쏟아져 나오고 고래 고기를 먹은 알래스카 원주민의 모유에서 플라스틱성분이 검출되고 있다. 덩치가 큰 고래는 해양오염물들의 축적장소인 것이다.해양에 대한 교육이 학교의 정규교육과정에 포함되고 해양교육센터와 해양문화관련 부서들이 생겨나고 있다. 차츰 해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포항지역의 예술가들도 ‘바다나다’라는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계획 중이다.‘내가 바다다’는 뜻의 ‘바다나다’를 주제로 얼마 전 쓰레기 매립장에 묻힌 참고래의 죽음을 애도하고 고래의 바다, 경해(鯨海)로 불린 동해바다에 다시 고래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을 염원하는 콘서트와 퍼포먼스행사를 벌일 계획이라고 한다.‘개발과 훼손’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가 가득한 삶의 영역’으로, 공생의 바다로 동해를 호출하고자 하는 것이다.용왕의 사신 거북이에게 쓰레기를 대접해서는 안 된다.참고래에게 플라스틱쓰레기를 먹게 해놓고 보호한답시고 죽은 시체를 쓰레기 매립장에 묻는 것으로는 부족하다.제돌이라는 돌고래가 있다.제돌이는 제주 바다에서 불법으로 포획된 뒤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돌고래 쇼를 하다가 야생 방류된 남방 큰 돌고래다.7년이 지난 지금 제주 앞바다에서 무리들과 헤엄치는 모습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사람들은 제돌이의 활발한 모습에서 ‘우리가 바다와 저렇게 만나야 한다’라는 희망을 본다.바다의 날을 맞아 바다는 ‘우리가 사는 곳이다’는 생각을 가지는 이들이 많아져 동해바다가 아니, 세상의 모든 바다가 인간과 바다생물들이 평화롭게 사는 공생의 삶터가 되었으면 한다.바다는 영원히 바다의 것이고 우리는 잠시 빌려 쓸 수 있을 뿐이다.

2022-05-29

왜 선진국형 절전이 어려울까

위현복(사)한국혁신연구원 이사장 지난 3월 14일 자 시사포커스에서 우리나라의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 대해 설명을 했었다. NDC는 2018년 기준 7억 2천210만 t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오는 2030년까지 40% 줄인다는 계획이다. 특히 이산화탄소 배출의 37%(2억6천717만 t)를 차지하는 에너지의 경우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리는 방식으로 44.4%까지 줄여 1억 5천여만 t을 배출한다는 것이다.신·재생에너지만으로 대체해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어려움이 따른다는 의견에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또 지난 4월 18일 자 글에서 전기의 경우 30%까지 절감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에너지 절감사업이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세계적인 에너지 석학들도 현실적으로 가장 최선의 대안은 에너지의 효율을 높이고 전기를 아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에너지 절감은 5천만 국민 누구나 할 수 있다. 최첨단 기업에서부터 가장 낙후된 산업분야까지 어디서든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절감이 왜 쉽지 않을까?첫째는 대부분 국민이 전기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이다. 일반 시민들은 전기에 대해 긍정적인 기능보다 감전, 누전, 사고 위험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훨씬 많이 가지고 있다. 전기를 전기 전공자 또는 전기 관련 산업 종사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전기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에너지 절감, 효율성 제고, 다양한 전기 생산 방법 등에 대해 아예 생각하는 것조차 꺼리는 것이다.둘째는 전기가 가계 생활비, 기업 운영비, 사무실 유지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기 때문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버드 공중보건대학원에서 ‘건강한 건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조지프 앨런 교수에 따르면, 많은 기업의 운영비에서 전기, 가스, 수도요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0.5%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지난해 우리나라 국민 총소득은 1조 8천200만 달러인데 전기 요금(한전 매출)은 2.7%인 60조 원 정도였다. 이산화탄소 급증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라는 문제에서 보면 에너지 절감, 에너지 전환이 아주 중요한 문제이지만 많은 기업의 지출에서는 에너지 비중이 단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에너지 절약이라는 어젠다가 시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조지프 앨런 교수는 그의 저서 ‘건강한 건물’에서 냉·난방기를 가동하면서, 1시간에 10분씩 환기를 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생산성 측면에서 자주 환기를 하는 것이 전기세 아끼는 것보다 3배 이상 생산성이 높다는 것이다. 에너지 절감과 효율화를 단순히 금전적인 절약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얘기다.대신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전 세계적 과업에 개인적인 차원에서 전기절약이라는 방법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가치 부여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오래전 필자가 경영하던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점심 식사 때는 가급적 컴퓨터를 끄고 가라고 했더니 직원들이 엄청 싫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 뒤로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월요일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을 둘러보면 꺼지지 않은 컴퓨터, 복사기, 전열기, 전등이 쉽게 눈에 띄었다.이 때문에 퀼컴과 같은 IT 다국적 기업은 본사에 7천500여개의 센서를 설치해서 일정 기간 사용하지 않는 사무기기(컴퓨터, 전자기기, 전열기)에 대해 자동 차단되도록 했다. 필자는 일반 시민의 전기절약에 대한 인식 전환 없이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셋째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미비해 절전이 어렵다는 것이다. 몇 년 전 기회가 있어 국방부 기획조정실장과 에너지 절감에 대한 의견을 나눈 적이 있는데, 국방부의 1년 전기 요금이 1조 원 이상이라는 말을 들었다.한국도로공사의 경우도 전기 요금이 한해 1조 원 정도 된다. 고속철도와 모든 도시의 전철(지하철)에 사용되는 전기 요금은 7천억 원 정도 된다.당시 국방부 기획조정실장은 “어느 한 공공기관에서라도 전기 요금 30% 절감된 사례를 가져오면 당장 국방부에서 채택해서 국방부 예산 3천억 원을 절감하겠다”라고 말했다.그 후 지방정부 고위공직자와 도시철도공사 등 공공기관 관계자들을 만나 전기절약 방안에 대해 협의를 했지만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법적, 제도적인 장치가 정비되지 않아 공공기관에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에너지 절감 대책을 추진하기는 아직 시기 상조라는 점을 절감했다.미국과 유럽 각국의 경우, 에너지 절감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업이 많다. 이 기업들이 다양한 방식을 통해 특정 기관의 에너지 사용량을 절감해 주면, 그 성과 부분의 일정 비율을 기업에서 가져가는 ‘성과배분 방식’이라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성과배분 방식’이 우리나라에서는 제도적으로 마련돼 있지 않아 공적 영역에서는 에너지 절감 사업이 발붙일 여지가 없는 것이다.

2022-05-29

의병의 날

김규종 경북대 교수 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 국가의 위기에 자발적으로 일어선 백성들의 조직을 가리켜 의병이라 한다. 누란지위(累卵之危)의 국가와 민중을 위해 궐기한 의병을 기리는 날이 의병의 날이다. 임진왜란과 구한말에 거병(擧兵)한 의병이 가장 많았다고 역사는 전한다. 의병 하면 암군(暗君) 선조가 때려죽인 김덕령과 수도 진공 작전의 총대장 이인영이 떠오른다.김덕령(1568∼1596)은 광주 출신 의병장이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4살의 나이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다. 그는 호남과 영남 곳곳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공을 세우지만, 1596년 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는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김덕령이 선조에게 국문(鞫問)을 당한 끝에 장형(杖刑) 130대를 맞고 순절한 장면을 그려낸다.용렬한 선조는 자리를 보존하고자 김덕령을 희생제물로 삼는다. 파스테르나크가 ‘지바고 의사’에서 그려낸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암군 선조는 닮은 꼴이다. 소심함과 연약함으로 신료들을 처형하고 구속하며 용서하는 전제군주들의 양상은 어찌 그리 똑같은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김덕령은 허망하게 세상과 작별한다. 광주의 충장사와 충장로가 그를 기리는 공간이며, 그가 지은 시조 ‘춘산곡(春山曲)’이 오늘까지 전한다.“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은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이런 서정과 춘심을 가진 장수 김덕령을 때려죽이고도 오랜 세월 옥좌에 앉아 자리보전한 암군을 찬양하는 일부 사학자들은 광대놀음의 주역이다.이인영(1867∼1909)은 색다른 교훈을 주는 인물이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궐기한 그는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일어난 정미의병에 합류한다. 같은 해 11월 전국에서 모여든 13도 창의군 총대장이 된 이인영은 수도 진공 작전을 기획하다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다. 동료와 부하들의 만류에도 그는 삼년상(三年喪)을 고집하다가 1909년 일본군에 잡혀 경성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일본군의 눈에 이인영은 아주 기인한 인물로 보였다. 국가를 위해 일어난 의병 총대장이 삼년상을 위해 자리를 내놓고 돌아갔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과 청나라에서 강조한 ‘충경(忠經)’ 대신 조선에서는 ‘효경(孝經)’만 읽게 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충효가 본디 다르지 않지만, 충의 뿌리를 효에서 본 조선 사대부의 생각이 이인영에서 구현된 것이다.이것은 일본과 청나라가 국가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면, 조선 지배층은 가문을 중시(重視)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자세는 뿌리 깊게 남아서 우리 사회를 어둡게 한다. 나라의 운명과 민중의 삶이 어찌 되든 나와 집안만 생각하는 자들이 적잖다.의병의 날을 맞아 가족과 가문만을 생각하는 전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한다.

2022-05-29

미친 물가

런치(lunch)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친 런치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코로나19 이후 나타난 물가상승으로 직장인의 점심값 부담이 크게 늘어난 상황을 빗댄 표현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폭등한 점심값 부담을 호소하는 직장인의 글들이 속출하고 있다. 편의점 가는 직장인이 늘어나는가 하면 일부 직장인은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한다고도 한다.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물가 현상이 각 나라 경제를 괴롭히고 있다. 미국과 영국의 물가상승률이 40년만에 최고로 치솟았고 주요국의 물가 상승률이 무려 8∼9%에 이른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통계청은 4월중 우리나라 물가상승률이 글로벌금융위기인 2008년 이후 13년 반만에 4.8%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특히 서민층의 생활필수품인 쌀, 라면, 달걀 등으로 구성된 생활물가지수는 전년보다 5.7%가 올랐다.지난주 한국은행은 수정경제 전망을 하면서 올해 소비자 물가상승률을 4.5%로 잡았다. 실질적으로 5%대 상승을 정부가 공식화한 것이다. 물가는 그 사회의 상품가치를 총체적으로 평가한 수치다.경제학자들은 물가가 서서히 올라가는 것은 경제가 상승세를 탄다는 긍정적 신호로 본다. 반면에 물가가 급등하면 돈의 가치가 떨어져 국민 모두가 힘들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물가가 지속적으로 내려가면 올라가는 것보다 경제가 더 나빠 지옥 상태에 이른다고 한다. 나라 경제가 잘되려면 물가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다.냉면값이 1만원을 넘었다. 삼겹살은 값이 너무 올라 금겹살이라 부른다. 미친듯 오르는 물가를 잡아야 서민경제가 살고 국민이 편하다. 새 정부 경제팀의 역량 평가가 미친 물가 손에 달렸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5-29

꺼삐딴 리는 악덕인가

유영희 작가 선거철이 되면 공직 후보자들의 재산이 공개된다. 수십억, 수백 억대의 재산을 가진 후보자들을 보면 감정이 복잡해진다. 내각에 추천된 인물들 역시 흠결이 넘쳐나다 보니,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좋을 수가 없다. 이런 현실을 보고 있자니 꺼삐딴 리가 떠오른다.전광용의 1962년 작품 ‘꺼삐딴 리’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모르는 이가 별로 없다. 학교에서는 이 작품을 이인국을 교활한 처세술을 가진 기회주의자라고 가르친다. 왠지 이인국의 삶은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정치인들의 처세술과 겹쳐 보인다.이인국은 동경제국대학 의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능력자다. 창씨개명 등 일제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돈 있는 사람만 치료해주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독립군으로 보이는 남자의 입원을 거절한다. 해방이 돼 친일파로 체포되었을 때는 소련 장교의 얼굴 혹을 제거해주어 최고라는 의미의 ‘꺼삐딴 리’라는 별명도 얻게 되고, 아들을 소련으로 유학 보낼 만큼 신임도 얻는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가방 하나 들고 월남해서 수술도 잘하고 병원 운영도 잘해서 곧 큰 병원을 내고 잘산다. 어떤 세상이 와도 이인국은 안전한 삶을 누린다.이 작품이, 어떤 세상이 와도 이인국이 잘사는 삶을 풍자하면서 소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인지, 그 당시는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 생존만을 추구했다는 시대상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어느 쪽이든 학교에서는 이인국의 삶을 부정적으로 가르친다. 하지만 교육 당국의 기대와는 다르게 요즘 학생들은 이인국을 비판하기는커녕 부러워한다.따지고 보면, 이인국의 악덕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창씨개명에 적극 협조했지만 그것은 당시 거의 모든 조선 사람이 따랐던 일이다. 독립군의 입원은 거절했지만 응급치료는 해주었고, 해방 후 공산군에게 체포되었을 때도 감옥 안에서 이질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해주었다. 그렇다고 감방에 버려져 있는 러시아 어 교본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소련군과 대화를 나눌 정도가 된 것을 ‘교활한’ 처세술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미국 다녀온 젊은 의사들에게 밀리자 자기도 미국에서 경력을 만들어 오려고 떠날 준비를 하는 모습은, 거짓 이력으로 행세하는 유명인들에 비하면 차라리 정직해 보이기까지 한다.이렇게 이인국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으로 변한 데는 지금 상황이 한몫했을 것이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를 넘어서 집과 경력까지 포기해야 하는 세대에게, 어떤 세상에서도 안전하게 살아간 이인국의 생존력은 젊은이들에게 롤모델로 다가왔을 것이다. 물론 이시영 이회영 가족처럼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도 있으니, 이인국의 삶이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지도층의 편법과 불법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다 보니, 학생들이 이인국을 부러워한다고 나무라기도 어렵다. 교육자들이 교과서에서만 이인국을 비판하는 것이 무책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냥 이인국만큼이라도 하라고 말하고 싶다.

2022-05-29

빼앗긴 넥타이

오낙률시인·국악인 어느새 오월도 며칠 남지 않았다. 그렇게도 현란한 꽃 잔치가 끝나고 시골 길가나 한적한 밭둑에서는 찔레꽃이 봄을 마무리하고 있다. 바야흐로 신록의 유월이 싱그럽고도 신선한 호흡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는 것이다.몇 년에 한 번씩 선거가 있는 해이면 동네 담장이며 도롯가 전봇대에도 푸른 잎이 나고 희고 붉고 노란 꽃이 핀다. 평소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얼굴과 이름들이 전봇대며 담장에 꽃처럼 나 붓고 그 꽃들의 당당함에 밀린 탓일까? 찔레꽃이며 아카시아꽃, 층층나무꽃, 인동꽃 등은 봄꽃의 마지막 주자로 피었다가 소문 없이 떠난다. 그리고 오직 신록만이 우리네 산천에 남아 인간의 마음을 희망의 빛으로 물들이는 것이다.유월의 신록은 애써 가꾸지 않아도 충분하게 싱그럽다. 그러나 자연이 아름다운 시기는 늘 농번기에 해당하는 시기라서, 안타깝게도 농촌에서의 생활은 자연의 풍광을 즐길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내게 오는 유월은 해마다 특별히 설레며 다가온다. 아마도 농사일의 분주함에서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시기라서 그런지 그렇게 유월의 신록은 해마다 촌부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 같다.세상 모든 자연물의 모습은 저마다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 주역의 오행론으로 생각하면 목, 화, 토, 금, 수, 에 해당하는 청, 홍, 황, 백, 흑의 다섯 가지 기본 색깔이 있는데 그 다섯 가지 색깔은 자연이라는 화가가 즐겨 사용하는 기본색이 아닐까 싶다. 그 다섯 가지 색깔 중에서 모든 자연물은 저마다 에게 알맞은 색깔을 골라 입고서 그 존재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색깔이라는 것은, 지상 모든 자연물이 각자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갈아입고 그 존재감을 표현하는 대자연의 공유물에 해당하는 것이다.인간이 자신의 몸치장에 이용하는 색깔 중에 가장 다양하고 호화로운 색으로 표현되는 부분은 넥타이가 아닌가 싶다. 넥타이의 배색은 가히 수꿩의 모가지에 그려진 깃털처럼 그 색상이 다양하고 호화롭다. 수꿩이란 놈은 그의 볼품없이 밋밋하고 기다란 모가지에다 알록달록한 색상의 넥타이를 매고서부터 그 조그만 대가리 하며 까만 눈동자가 더욱 빛나고 돋보였을 것이다. 한갓 날짐승도 제 몸치장에 자연이 준 색상을 최대한 이용 하는데, 우리나라 국민은 넥타이를 정치권에 빼앗겼다. 우리는 그 다섯 가지 색상 중에서 세 가지의 색상을 정치권에 빼앗기고 이웃집 잔치라도 갈라치면 넥타이 색 고르기가 만만치 않다. 어느 특정 정당인으로 오해받지 않으려면 흰색이나 검정 넥타이를 매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도 흰색은 무소속출마자께서 이용하신다.며칠 전 출범한 새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가 ‘국민 통합’으로 알고 있다. 넥타이 색깔만으로도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적 성향을 뚜렷이 구분할 수 있는 현금의 우리나라 정치사회에서 정치인의 목에 상징물처럼 매고 있는 특정 색깔의 넥타이를 풀게 하는 입법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해서, 붉은색, 푸른색 넥타이를 국민에게 되돌려준다면 그것 또한 국민 통합이라는 국정과제를 완수하는데 한 걸음 다가서는 일이 되지 않을까도 싶다.

2022-05-29

대구근대골목길

우정구 논설위원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 규정했듯이 역사란 항상 과거와의 연결점에 있다. 우리가 지금 이 시간 만나는 역사의 현장이 신비롭기도 하고 흥미로운 것은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대구근대골목은 대구시 중구 일대에 조성된 테마 골목길이자 관광코스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대구시내에 세워졌던 건물과 흔적 등을 관광 상품화한 것이다. 서문시장과 약전골목, 계산성당, 제일교회, 3·1 만세운동길, 대구 최초의 근대백화점인 무영당 등을 중심으로 골목골목마다 숨겨져 있던 당시의 모습과 이야기들을 들춰내 재미있게 엮은 관광코스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2008년부터 시작해 지금은 다섯가지 코스로 역사 탐방길을 만들었다. 한국관광 100선에도 여러 번 선정됐다.특히 투어 길마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거쳐갔던 장소와 그들의 정신과 흔적을 볼 수 있게 꾸민 것도 재미를 더해준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선생의 고택도 만날 수 있다. 대구가 낳은 천재화가 이인성이 계산성당을 배경으로 그린 100년 된 이인성 나무(감나무)도 현장에서 마주한다.‘동무생각’을 작곡한 박태준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있는 청라언덕과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이 살던 고택과 그가 설립한 삼성상회의 옛터도 관광 중에 만난다.‘세계가스총회’에 참석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일정에 없던 대구근대골목길을 찾았다. 옛 추억이 있던 대구에서의 향수를 느끼며 다녀간 그 길은 현직 대통령의 발길이 닿음으로써 또 하나의 역사적 의미가 더해졌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5-26

빅브라더 논란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여의도 정치판에 빅브라더가 소환됐다. 빅브라더는 1949년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등장하는 ‘감시자’를 지칭하는 용어에서 비롯된 말로, 일반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사회를 감시·통제하는 관리권력 또는 사회체계를 일컫는 말이다.이 소설에서 빅브라더는 텔레스크린, 도청장치를 이용해 대중에게 이데올로기를 강요한다. 소설은 빅브라더에 의해 자행되는 감시와 통제의 위험성을 극단적으로 잘 묘사했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빅브라더가 활개칠 위험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우리 정치판에서 빅브라더 논란을 전격 소환한 주인공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다. 박 원내대표는 법무부가 ‘인사정보관리단’을 신설하고 공직자 인사 검증을 하겠다고 밝히자 “한동훈 법무부가 21세기 빅브라더가 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검찰의 직접수사권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인사검증까지 하게 되면 정보가 법무부로 집중되고, 이렇게 되면 윤석열 정부 인사는 복두규 인사기획관이 추천하고 한동훈 장관의 검증을 거쳐 이시원 공직기강비서관을 통해 검찰출신 대통령에게 보고될 것이라고 지적했다.즉, 검찰에서 손발이 닳도록 합을 맞춘 인사들이 (윤석열 정부의 인사를) 좌우하는 것이라고 우려한 것이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인재 추천→세평→검증’으로 이어지는 인사시스템에서 세평 수집과 검증의 상당 역할을 내각으로 이전해 다각도로 검증하고, 최종적으로는 대통령실 인사기획관이 검증 자료를 토대로 종합 자료를 만들어 대통령에게 보고해 최종 낙점이 이뤄지는 인사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입장이다.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 가장 큰 관심사가 바로 인사문제다. ‘인사가 만사’란 말처럼 정권의 성공과 실패를 담보하는 것도 어떤 인사를 등용하느냐에 달렸다.야당의 지적처럼 윤 대통령의 최측근인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검찰 인사권과 정부 공직자 인사 검증 권한을 모두 갖게 되면 사실상 민정수석 역할까지 맡게돼 ‘국가 사정 컨트롤타워’역할을 하게 될 수 있다는 우려에도 일리는 있다.하지만 이번 인사검증시스템이 미국의 선진적인 인사 검증 시스템을 따른 것이란 대통령실의 설명에 무게가 실린다. 미국의 경우 백악관 법률고문실에서 공직 후보자에 대한 검증을 개시한 후 미 법무부 산하 FBI(연방수사국)에 1차 검증을 의뢰한다. 이후 FBI가 1차 검증 결과를 통보하면 이를 토대로 법률고문실이 다시 종합 판단을 내리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이 설명대로라면 법무부에 신설될 인사정보관리단은 대통령실과 독립된 위치에서 공직 후보자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1차 검증을 담당하는 FBI의 역할을 맡게 된다.더구나 법무부는 인사정보관리단의 객관적·중립적 업무 수행을 위해 장관은 검증 결과만을 보고받고, 인사정보관리단 사무실도 외부에 별도로 설치해 법무부내 타 부서와는 철저히 분리·운영할 계획이라니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야당이 무작정 ‘비판을 위한 비판’에만 매몰돼 있을 경우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할 수 밖에 없다.

2022-05-26

선거 홍보용 폐기물

윤영대 수필가 6월 1일 실시되는 전국동시 지방선거 투표안내문과 선거공보물이 불룩하게 넣어진 우편 봉투가 배달되어 왔다. 봉투 겉면에 ‘은닉·훼손하거나 무단으로 가지고 갈 경우 공직선거법 또는 관련 법률에 따라 처벌 받게 된다’고 되어 있다. 뜯어보니 고급 용지에 후보자들의 얼굴과 이름, 공약 등이 인쇄된 책자형 선거공보물이다.선거구마다 후보가 다르겠지만 우리 선거구에는 도지사 2명, 시장 2명, 교육감 3명과 함께 도의원 2명, 시의원 5명이다. 그리고 도의원과 시의원 비례대표 홍보물 8건도 있어 전체 78장이나 된다. 칼라 인쇄된 책 한 권인 셈인데 이번 선거에는 2천324개 선거구에 4천132명을 선출해야 하니 가정마다 1개씩 보내면 그 수량도 엄청나서 5억 부가 넘는다고 한다. 첫 장을 넘기면 ‘후보자 정보공개 자료’가 있어 읽어 보았다. 인적사항, 재산 및 병력, 세금납부 현황이 있지만 그 작은 글씨를 다 읽어 볼 마음도 없다. 인터넷 ‘정책·공약 마당(policy.nec.go.kr)’에서도 확인 가능하다고 한다.인쇄물은 재활용도 어렵고, 올해에는 두 번의 선거로 그 폐기물만으로 약 2만8천여 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할 거라고 녹색연합 등 환경단체에서 예측하는데, 이들 종이 1t 생산에 30년생 나무 17그루가 베어져야 한다며 온라인 홍보, 재생 종이 사용, 규격과 수량 제한 등을 주장하고 있다.어디 이뿐이랴. 길거리마다 어지럽게 걸린 선거용 현수막은 문제가 더 심각하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만 약 13만8천여 장의 현수막이 걸릴 것이라는데 1장 크기를 10㎡ 이하로 제한하고 있으나 재질 또한 천이 아니고 폴리에스터 성분의 화학섬유이며 소각 시 1급 발암물질인 다이옥신과 미세 플라스틱을 발생시킨다.더구나 2018년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읍면동 당 현수막도 1개에서 2개로 변경되었고, 선거 후 지체 없이 철거해야 하니 이 막대한 선거폐기물을 처리할 방안도 강구돼야 한다. 행정안전부에서는 ‘폐현수막 재활용 지원사업’을 실시해 각 지자체는 사업체를 선정하고 친환경 가방(에코백), 시멘트 소성용 연료, 우산 등을 만들어 ‘새활용’이라는 업사이클링(up-cycling)을 시도하고 있으나 환경단체 조사로는 약 24% 정도 재활용하고 나머지는 소각 처리되고 있다는 것이다. 환경부 자료에는 21대 총선 후 발생한 전국 1천739t의 폐현수막 재활용율을 보면 경북은 4.8%로 최하위권이다.이 밖에 선거운동원들의 선거복과 어깨띠는 선거 후 입게 되면 정당명과 후보 번호가 있어 선거법 위반이라고 한다. 또 코로나 방역을 위해 투표 시 사용된 비닐장갑을 쌓으면 63빌딩 7개 높이라니 폐기물 없애자는 ‘제로웨이스트(zero waste)’가 거론될 만하다.나라를 위해 일하려는 사람의 홍보를 위해 선거축제를 하듯 현수막은 필요하겠지만 한번 쓰고 버려질 종이나 천의 사용은 막대한 경비와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대책이 필요하다. 온라인 매체를 이용하여 홍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2022-05-26

청와대 개방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에 새 집무실을 마련하고 청와대를 국민들에게 개방했다. 멀쩡한 청와대를 두고 왜 돈과 수고를 들여가며 집무실을 옮기려고 하느냐는 반대여론이 많았음에도 후보시절의 공약을 관철한 것이다. 오랜 세월 권위의 상징이자 금단의 성역이었던 곳이 활짝 열려 일반 시민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휴식공간이 된 것은 실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내부를 공개하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니 그 규모나 시설이 과연 현대판 구중궁궐이라는 말이 나올 만했다.윤 대통령이 청와대 입주를 한사코 거부한 것은, ‘제왕적 대통령’의 권위를 내려놓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한다. 그게 집무실을 바꾼다고 될 일이냐는 부정적 시각도 있지만, 청와대라는 상당한 혜택을 포기하는 단호한 결단력에서 그 가능성을 보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취임한 지 2주일 남짓 된 지금까지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은 날마다 사가(私家)에서 집무실로 출퇴근을 하면서 대통령의 거동이 수시로 노출된다는 점이다. 출근길에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하는 모습도 전에는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윤 대통령이 인용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도 있지만, 청와대라는 구중심처로 들어가 버렸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우리나라는 집권자에게 많은 권력이 부여된 대통령중심제이다. 대통령이 그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면 삼권분립을 무력화하고 법치를 파괴하는 독재도 가능하다는 걸 지난 정권이 잘 보여주었다. 더구나 편향된 이념에 사로잡혀 그릇된 방향으로 가게 되면 나라를 망칠 수 있다는 것도 실감했다. 지도자가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관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오만이나 권위의식에 빠지는 것도 못지않게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요인이 된다. 온갖 국정과제를 대할 때마다 겸허하게 눈과 귀와 마음을 열어놓고 사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최선책을 찾아야 과오를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높은 자리에 오르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말을 흔하게 듣는다. 그것을 인지상정이라고 당연시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실지로 심리학적인 실험이나 생리학적인 측면에서도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승자의 뇌’라는 책을 쓴 뇌신경 심리학자 이안 로버트슨은 “성공하면 사람이 변한다고들 하는데 맞는 말이다. 권력을 잡게 되면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 분출을 촉진해 보상 네트워크를 움직인다. 그래서 사람을 더 과감하고, 모든 일에 긍정적이며, 심한 스트레스를 견디게 한다. 또한, 권력은 코카인과 같은 작용을 한다. 중독된다는 얘기다.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지 않고 오만하게 만든다. 권력은 시야를 좁게 만든다. 권력은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나를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고 했다.사람은 권력이 많아지면 오만해지고 공감능력이 떨어지며 타인을 자신과 차별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거기다가 구중궁궐 같은 곳에 거주하다보면 점점 더 민심과는 괴리될 수밖에 없을 터이다. 아무튼 일제 때부터 100여 년간 권력의 상징이었던 곳이 개방되는 것을 계기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한다.

2022-05-26

열섬현상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지구온난화가 전 세계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5월 대구의 한낮 기온이 33℃까지 올라가는 열섬현상이 화제다.열섬 현상은 인구의 증가·각종 인공 시설물의 증가·콘크리트 피복의 증가·자동차 통행의 증가·인공열의 방출·온실 효과 등의 영향으로 도시 중심부의 기온이 주변 지역보다 현저하게 높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도심의 기후가 주변지역과 다른 독특한 현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1927년 오스트리아의 기상학자 W. 슈미트가 수도 빈의 기온분포를 조사해 도심으로 갈수록 온도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후부터다. 도심을 중심으로 동심원상의 기온 분포를 나타내며, 열섬의 강도는 여름보다 겨울에, 낮보다는 밤에 현저하게 나타난다.기상청에 따르면 올여름 한반도에서는 4가지 요인에 따라 열섬현상이 더욱 강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첫째 평년보다 강력한 티베트 고기압이다. 티베트 고원의 눈이 많이 녹아서 땅이 가열되고 있는데, 이 열기가 열돔을 강화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두번째는 동태평양의 수온이 평년보다 차가워지는 라니냐현상이다. 라니냐는 서태평양 아열대 지역에 비구름을 집중시키는 반면, 우리나라 주변에서는 북태평양 고기압을 강화해 열기를 더한다.세번째와 네번째 요인은 인도를 강타하고 있는 강력한 폭우구름과 북대서양에 나타난 변칙적인 수온이다. 현재 인도 북동부에는 강력한 폭우구름이 발달하고 있으며, 수천Km 떨어진 한반도의 폭염을 강화하고 있다.열섬현상을 유발하는 지구온난화 문제는 한반도뿐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공동대처해야 할 과제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명심해야 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5-25

정치와 욕망

최병구경상국립대 교수 다시, 선거철이 돌아왔다. 지난 대선에서 승리를 거머쥔 여당은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뒷받침하기 위해, 패배한 야당은 칼날을 갈며 재기를 모색하기 위해 지방 선거에 임하고 있다. 대선 패배 이후 ‘검수완박’ 법안 통과에 열을 올린 민주당과 대한민국에서 특권 계급 세습의 도구로 전락한 교육 시스템의 모습을 확인시켜 준 국민의힘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현실 정치가 과연 평범한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와 닿을 수 있을지 의구심만 가득하다.우리는 누구나 정치를 하며 살고 있다. 어느 집단에나 정치를 잘해서 탄탄대로를 걷는 사람이 존재하는 반면, 정치를 못해서 고립된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보통의 사람은 처세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나의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꼭 사람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정치가 아니라도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더 좋은 직장을 얻으려는 욕망도 현실 정치와 경제로부터 형성된다는 점에서, 삶 자체가 정치·경제적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겠다.우리는 어떤 정치·경제적 욕망을 품고 있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인적·물적 네트워크가 부족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는 특권 계급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비판은 일견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현실 정치는 대중들의 욕망을 대리한다. 더 높은 계급을 향한 대중들의 공통된 욕망을 현실 정치는 외면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양당 정치 체제에서 두 정당이 품고 있는 전략과 시각의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다. 올해 5월을 계기로 광주는 더이상 이른바 진보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으며, 자기 계급의 영속성을 위해 교육 시스템을 악용한 사례는 두 정당이 공유하는 욕망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투자’와 ‘투기’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명확히 알고 있다. 뉴스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비난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런 사람에 대한 부러움이 존재하지 않나? 바로 이런 양가성은 특권 계급만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도 21세기 신 계급사회의 출현에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현실 정치가 우리 삶을 변화시켜줄 수 있을까? 대중들의 욕망이 변해야 현실 정치도 변한다. 뉴스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의 자식 사랑을 비난하면서 나는 그런 욕망과 거리가 먼 사람이란 인식을 하고 있지는 않나? 나의 양가성을 직시하고 응시할 때 변화를 만들 가능성이 생겨난다. 나아가 익숙한 생각의 패턴을 바꾸어야 한다. 얼마 전 연세대학교에서 청소 노동자의 파업에 재학생이 수업권 침해를 이유로 노동자를 고소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청소 노동자의 외침을 수업권 침해로 사고할 것이 아니라 학내 구성원이 고통 받는 이유를 질문하는 계기로 삼을 수는 없을까.지방 선거에서는 당이나 특정 정치인의 이미지가 아니라 익숙한 생각의 패턴을 낯설게 만드는 후보에 투표하려고 한다.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되지는 못하겠지만, 새로운 생각의 패턴이 양가적 현실 인식의 간극을 좁힐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2022-05-25

다람쥐, 간이 커지다

양태순수필가 산에서 다람쥐를 만났다. 대부분의 다람쥐는 사람의 인기척이 들리면 부리나케 숨거나 달아난다. 그런데 도망가지 않고 뒷다리로 서서 입을 오물거리며 나와 눈을 맞추고 있다. 황당하기도 하고 어찌 나올지 궁금하기도 해서 땅에 앉아 지켜본다. 다람쥐는 나와의 눈싸움에서 결코 피하지 않고 볼록한 볼을 움직이며 태연하다. 마치 너는 나를 잡을 수 없다는 당당한 눈빛이다. 내가 어이가 없어 발을 쿵 굴리며 잡을 듯한 자세를 취하자 그제야 나무 사이로 사라진다.다람쥐의 간 큰 행동이 하루아침에 나오지는 않는다. 처음 낯선 소리를 들었을 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숨기에 바빴을 것이다. 숨이 팔딱거려서 기절할 정도였지 싶다. 몇 번을 경험하고 나서는 호기심에 숨어서 콩닥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주위를 살폈고, 그런 행동을 반복하다 보니 저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가 보다. 발소리에 서서히 적응하여 환경을 받아들인 반응이다.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무엇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렵다. 변화하는 환경에 나름 적응을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 키우는 문제만큼은 쉽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자라주지 않는 자식 때문에 골머리를 앓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서로에게 적응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내가 아이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아이들이 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았다. 눈 앞에서 아이의 방문이 수없이 닫히고 내 입에서 독이 든 말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씩씩거리며 냉수를 마신 뒤에도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부족한 부분만 도드라져 보인 적이 많았다. 밤이 깊어 혼자만의 시간이 되면 아이의 자는 모습을 몰래 들여다보며 공부가 뭐라고 이리 안달복달하는지 반성을 하곤 했다. 아이의 좋은 점만 봐야지, 굳게 마음을 먹었다.사람마다 환겅의 적응 방법이 다르다. 내가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성적보다 인간성, 사교성을 우선이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아이는 엄마의 잔소리에 토를 달기보다 “알았어요, 알았어.”하며 반성하는 척 했다. 그렇게 나는 나대로 성적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아이는 아이대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산에서 만난 다람쥐도 이런 과정을 겪었기에 저리 태평한가 보다. 그러나 아직 사람 가까이 다가와서 재롱을 부리지 않는 것을 보니 조금의 경계심은 있다. 만에 하나 저를 해치려는 의도가 보이면 단숨에 사라지겠다는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듯해서 안심이다. 환경에 백 프로 적응보다는 나만의 색깔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듯해서 대견하다.간이 큰 다람쥐를 만나고 온 나는 자꾸 입꼬리가 실룩거린다. 사람을 보고 도망가지 않은 것이 기특해서다. 다람쥐 세계에서 반항아로 찍힐 만큼 용기 있는 행동이다. 그의 산경험이 친구들에게 틀림없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것이든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지 않은가.주변의 환경은 늘 변화한다. 아침이면 새로운 소식이 쌓여있고 지구촌 어디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이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세계가 놀란 가슴이 되기도 하는, 속도의 경쟁이기도 하다. 또 어제 멀쩡하던 전화기가 고장이 나서 연락처가 다 날아가서 당황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크고 작은 사건들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많은 영향을 준다.그러나 변화의 중심은 늘 사람이라고 믿는다.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내가 살아갈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무작정 두려워하는 것보다 개개인의 소중한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다람쥐는 자신의 영역만 고집하지 않았다. 조금씩 사람과의 거리를 좁히려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는 노력을 했다. 가끔 발소리를 듣고 놀라기는 하지만 무작정 도망가지 않고 서로 눈짓을 교환할 정도가 된 것이다. 그 작은 생명체가 덩치가 큰 사람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배울 점이기도 하다.서로를 향한 조금의 배려와 존중이 삶의 가치를 향상시킨다. 다람쥐는 조금 더 간이 커지고 사람은 더 큰 품으로 안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 부족한 대로 어울려서 채워가는 세상, 큰 그림을 꿈꾼다.

2022-05-25

류대창의 명리인문학… 임신(壬申)

육십갑자 중 아홉 번째 임신(壬申)이다. 천간(天干)은 임수(壬水), 지지(地支)는 신금(申金)이다.임수(壬水)는 넓은 호수, 바다로 표현한다. 넓은 호수와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은 자세 덕분에 속이 깊어 내면의 심리를 알기 어렵고, 바다와 같이 넓은 까닭에 모든 것을 수용하는 덕이 있다. 물처럼 유연하고 총명함을 타고 났기에 박식함이 넘쳐 언변이 청산유수인 자가 많다.사주에 임수가 있으면 모든 것을 수용하는 능력이 있어 재물이 마르지 않는 것과 같아 대체적으로 부자가 많다.인간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돈’으로 해결 되지 않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다.어떤 마을에 매우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아침을 먹으면서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먹을 것이 생기기나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어느 날 우연히 달걀을 하나 얻게 되었다. 뛸 듯이 기뻐하며 집에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 “나는 오늘 큰 재산을 얻었네”라고 말했다, 아내가 “큰 재산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달걀을 아내에게 내어 보이며 “이거지. 그렇지만 십 년쯤 기다려야 될 걸세”라고 말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셈을 해보게 되었다.“내가 옆집 주인에게 부탁하여, 그 집의 어미 닭에게 이 달걀을 함께 품도록 하여 병아리로 만들고 좀 클 때까지 기다렸다가 찾아와야지. 그 병아리는 곧 닭이 되어 알을 낳게 되고, 한 달에 열다섯 개는 낳겠지. 그것들을 다시 품게 해서 알을 까면 병아리가 열다섯 마리가 되지. 그렇게 두 해만 지나면 닭이 알을 낳고, 알이 닭으로 되어서 닭이 삼백 마리는 족히 될 것이고, 그것을 팔면 은 덩어리 열 개는 될 거야. 그 은 덩어리 열 개를 가지고 암소 다섯 마리는 살 수 있지. 암소가 또 암소를 낳으면서 삼년만 지나면 암소가 스물다섯 마리가 되지. 또 송아지가 크면서 새끼를 낳을 것까지 계산하면 삼년 만에 일백오십 마리는 될 거야. 그것을 팔면 은 덩어리 삼백 개는 되지 않겠소. 그 은 삼백 개를 가지고 빚 놀이를 하면, 또 삼 년 이내에 오백 개로 늘어나겠지. 그 가운데에서 삼분의 이는 밭을 사고 집을 짓고, 삼분의 일로는 집안일을 잘 할 아주머니를 두도록 하지. 나와 자네는 행복하게 늘그막을 살아가지.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아내는 집안일을 하는 아주머니를 둔다는 말을 듣자, “이 화근 덩어리를 남겨 두어서는 안 되겠군”하며 그 달걀을 땅에 던져 버렸다. ‘설도소설(雪濤小說)’ (중국 명나라 신종 때 강영과가 지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다.먹고 살기 힘든 서민은 그 날 그 날 살기 위해 재물에 매달린다. 만약 부(富)를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말채찍을 잡는 마부가 될지라도 나 또한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구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을 것이다.신금(申金)은 초가을처럼 맑고 결실을 맺는 시기며, 동물로는 원숭이다. 원숭이 원(猿)이 아니고, 원숭이 신(申)이다. 원숭이는 경계심이 강하고, 이해타산이 심하며 잔꾀가 많다. 자기 재주만 믿고 행동하다가 낭패를 보기도 한다. 그만큼 똑똑하고 재주가 많다.진요자(‘송사’(宋史)에 실려 있는 강숙공)는 활을 매우 잘 쏘았다. 그와 겨룰 만한 사람이라곤 없었다. 그는 스스로 언제나 자기가 활을 제일 잘 쏜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가 활을 쏘고 있는데 참기름을 파는 노인이 어깨에 메었던 짐을 내려놓고 활 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 노인은 진요자가 쏘는 화살 열 개 가운데 아홉 개가 과녁의 한가운데에 맞는 것을 보고서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요자가 “당신도 활을 쏠 줄 아십니까? 나의 솜씨가 참으로 훌륭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노인이 “뭐 별로 특별한 비결이 있지는 않군요. 그저 손에 푹 익었을 뿐이군요!”라고 대답하였다. 진요자가 화가 나서 “어찌 겁도 없이 나의 활 쏘는 실력을 가볍게 본단 말이오!”라고 말했다.노인이 “내가 참기름을 병에 부어 본 경험이 있어 그러한 이치를 알지요”라고 대답하였다. 말을 마치더니 호리병처럼 생긴 참기름병을 하나 꺼내서 땅 위에 내려놓고, 엽전으로 병 아가리를 덮더니 국자로 참기름을 떠서 병 속에 넣었다. 참기름이 엽전의 가운데에 뚫려 있는 조그만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데, 엽전에는 조금도 참기름이 묻지 않았다.그러고는 노인이 “나도 뭐 별난 비결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손에 푹 익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했다. 진요자가 웃으면서 참기름을 파는 노인에게 “많이 파시오”라고 말하며 배웅해 주었다. ‘귀전록(歸田錄)’(북송 때 구양수가 쓴 산문집)에 나온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참기름 파는 노인과 장자에 나오는 소를 잡아서 고기를 발라내는 포정(庖丁)이라는 사람이나 수레바퀴를 쪼아 만드는 윤편(輪扁)이라는 사람이 무엇이 다를 바가 있는가?한 분야에 달인이라며 지나치게 재주를 과시하면 상대방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 있다. 자랑보다 겸손의 미덕도 필요하다.‘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말이 있다. 원숭이를 일명 ‘잔나비’라고 하는데, 하는 짓이 경망스러워 붙여진 이름이다.임신(壬申)은 뜻이 다르지만 임신(妊娠)과 음(音)은 같다. 임신(妊娠)은 ‘아이를 배다’이다. 즉, 지상의 모든 생명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한다. 임신일주(壬申日柱)는 성욕이 왕성한 대표적인 일주(日柱)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사에 추진력이 있고, 다재다능하여 자기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사회에 기여하여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때로는 너무 잘난척하는 행동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2022-05-25

그렇게 어른이 된다

나에게는 중학교 때부터 항상 붙어 다닌 세 명의 친구가 있다. 좋은 일도 슬픈 일도, 바보같은 짓도 함께 하며 울고 웃었던 친구들. 서로의 경조사를 항상 함께하며 힘들 땐 위로가, 기쁠 땐 함께 웃어준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웃기다고, 우리도 서로 얼굴만 봐도 자꾸 웃게 된다. 다들 밖에서는 존중받고 또 신뢰받으며 살아가는 친구들이지만, 왜인지 모르게 우리끼리 있을 때면 한없이 바보 같고 실없어진다. 나는 친구들의 그런 모습이 서로에 대한 신뢰처럼 느껴지곤 해,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며 농담 따먹기를 하는 순간들이 더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우리는 모두 서울 은평구에 살았었다. 둘씩 둘씩 아주 어려서부터 친구였다가, 중학교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우린 마치 그보다 훨씬 전부터 넷이 하나였던 것처럼 붙어 다녔고, 서로 싸우기도 하고 한없이 의지하기도 하며 20년을 함께 지내왔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교대로 군대를 다녀오고, 이사를 가고 하면서, 이제는 모두 은평구를 떠나고 말았다. 같은 동네를 살 땐 몰랐다. 가까운 거리에 네가, 밤이면 우리가 함께 모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축복이었는지 말이다. 이렇게 다들 다른 지역에서 살아가게 되니, 그와 같은 인연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이었는지 새삼 느낀다.그렇게 우리는 30대가 되었고, 하나 둘 결혼을 하며 가정을 이뤄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철없는 아이가 아니라, 누군가의 동반자로서, 누군가의 아빠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제는 마냥 실없는 짓만 할 수는 없게 된 친구들의 모습에 때로는 서운하기도 하고 때로는 질투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그렇게 변해가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기쁘다.저번 토요일의 일이다. 우리는 넷 중 가장 일찍 결혼해 어느새 한 아이의 아빠가 된 친구의 집에 모였다. 보다 일찍 아이도 보고, 녀석의 사는 모습도 보고 싶었지만, 코로나 시국에 갓난아기를 보러 간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아 미뤄진 자리였다. 그 사이 아이는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 걷고, 뛰고, 토끼나 아빠, 속닥, 똑딱 같은 간단한 단어를 말할 정도로 커 있었다. 나는 그게 신기해 한참을 보고만 있었다. 너무나 작고, 너무나 부드럽고, 그래서 금방이라도 부서지거나 사라질 것만 같아 조금은 슬퍼지는 행복한 기분이었다.사실 나는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가 어떻게 행동해 주는 게 옳은 건지 알 수 없어 불안하고 무서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녀석의 딸을 보는 건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아마 나에게 소중한 사람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기에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신기하다는 말 말고는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느낌. 하지만 보다 신기했던 건, 그런 아이의 모습보다도 더 신기했던 건, 아이를 시종일관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하는 내 친구의 모습이었다. 어느새 녀석은 함께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밤새 함께 술을 먹고는 부스스한 얼굴로 인사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아이를 지켜주겠다고 각오한, 이 세상이 위험하고 험한 곳이지만 그곳에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각오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녀석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사실 난 좀 건방지고 오만한 구석이 있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생각이 깊고 마음이 넓다고 생각할 때가 자주 있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성숙한 아이인 것처럼 굴었고, 세상 모든 슬픔과 고통을 미리 경험한 사람인 것처럼, 혹은 전생의 슬픔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어렸고, 어리석었다. 단지 어리고 어리석어 타인은커녕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 단지 한없이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커녕, 스스로의 마음도 감당하지 못하는 어른아이.그렇게 어른이 된 친구의 집을 나오며 나도 모르게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것을, 너는 알까. 네가 이미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졌으며, 세상을 향해 인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내가 너를 얼마나 자랑스럽다 생각했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너와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진심으로 존경하는, 너와 같은 어른이. 아마 너는 아직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주길. 너에게는 너의 힘듦을 함께하고 너의 아이를 함께 지켜줄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너의 행복을 지켜줄 친구들이 너의 곁에 항상 함께 있다는 사실 말이다.

2022-05-24

복수, 그 수상함에 관한 단상

얼마 전 학생들과 함께 권여선 작가의 ‘친구’라는 작품을 읽었다. 해옥이라는 여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소설은 짧은 분량이지만 우리의 현실을 완벽하게 그려내며 문학으로 획득할 수 있는 강렬한 페이소스를 보여준다.해옥은 “하루하루에 기쁨이랄 것”이 없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에게는 아무도 모를 두 가지의 기쁨이 있는데 하나는 매일 새벽마다 감사기도를 드리는 신이며 또 다른 하나는 보물과도 같은 아들 민수다. 평소와 다름없이 지난한 일상을 살던 해옥은 담임에게서 아들인 민수가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간 해옥이 민수의 친구라고 알고 있던 아이들이 민수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폭력까지 휘두른 것이었다. 무엇보다 소설에서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부분은 해옥과 민수가 폭력을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며 더 나아가 아들인 민수는 자신을 괴롭힌 가해자들을 친구라는 미명으로 감싸는 모습까지 보인다.텍스트를 읽은 학생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내어놓았다. 우리와 맞닿은 현실을 언어적으로 구현했다는 놀라움과 인물의 심리를 날카롭게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에 감탄했으며 소설 속 인물인 해옥에 완전히 이입하다 못해 더 나아가 이토록 답답한 상황에 분개하는 학생도 있었다. ‘사이다’ 없이 ‘고구마’로만 끝났다는 것이었다. 해옥과 민수가 받은 폭력을 갚아주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도적 장치로서 문제를 해결했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이야기의 막을 내린 것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허구의 상황을 보여주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뤄볼 수도 있겠다. 해옥의 내면에서 부글거리는 분노의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면 선하게 살아가는 모자에게 닥친 위기 상황이 종국에는 복수극으로 전환되어 독자로 하여금 일종의 만족감을 선사했을지도 모른다.사실상 ‘복수’라는 키워드는 유구한 역사 동안 다양하게 소비되어 왔다. 서양 최초의 서사시라 일컬어지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역시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아가멤논을 향한 복수심으로 시작된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작품이 복수의 서사를 사용하면서 법과 규제의 테두리 안에서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의 내밀한 감정적 지점을 건드린다.그러나 이러한 복수극의 플롯이 어쩐지 수상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솟아오르는 감정에 사로잡혀 자기 인생을 내걸고 타인을 파멸시키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며 결국 자신의 존엄까지 해치는 인물에게 공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못해 당연해진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피해 보는 인생을 살 바엔 차라리 추악함을 택하겠다는 마음도 만연하다. 복수의 무서운 점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잘 살아라. 그것이 최고의 복수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자기 삶의 정확성을 가지는 일조차 누군가를 향한 분노로 추동하고 있지 않은가.그렇다고 해서 사랑과 용서를 설파하기엔 결코 아름답지 않은 세상이다. 세상에 만연한 추악함을 덮을 수 있는 것이 막연한 사랑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서도 드러나는 문제의식이다. 용서하는 행동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종교적 믿음을 붙잡았지만 전지전능하고 공평한 신은 살인자의 마음마저 어루만지며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살인자의 목을 조르는 편이 낫겠다고 소리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런 지점에서 ‘친구’의 해옥은 얼마나 답답한가. 자신의 별 볼 일 없는 삶을 신의 뜻이라고 치부하며 폭력에 노출된 아들을 보면서도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우리는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이 획득하게 되는 어떠한 지점에 관해 알아야 한다. 올바르고 완벽한 정답을 인지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일상을 지탱하는 큰 힘이다. 세계의 끔찍함을 완벽하게 응시하는 순간 분노할 수밖에 없고 그 감정에 잡아먹히는 것은 오히려 더 큰 불행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상황이 오히려 전지전능한 누군가의 뜻이라고 믿으면서 살아갈 뿐이다.이런 인물들을 그저 답답하다고 치부하기엔 마음 한편이 아려오는 것이다. 어떠한 일의 판단과 결정은 오롯이 그들의 몫이며 무엇도 정답이 될 순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 작품을 읽는다. 불합리한 상황에 분노하는 일. 타인의 감정까지 지평을 넓히는 일. 그렇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가게 두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는 인물 또한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일로 나아가기 위함인 것이다.

2022-05-24

대통령이 직접 ‘지방시대’ 주도하라

심충택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내일(26일) 정부 세종청사에서 첫 정식 국무회의를 개최한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첫 국무회의를 세종청사에서 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새 정부는 올 연말 입주 예정인 세종청사 중앙동 내에 대통령 집무실도 마련한다. 윤 대통령의 이러한 ‘탈(脫) 서울’ 행보는 비수도권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 신선감을 준다. 대통령의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사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 지역 간 갈등, 저출산 문제 등은 수도권 일극주의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수도권에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의 자산, 권력, 인재가 몰려 있기 때문에 국가기능이 균형 있게 작동할 수가 없는 것이다.수도권에 국가 주요사업과 예산이 집중돼 있으니까 6·1 지방선거도 서울, 경기, 인천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듯하다. 전 국민적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경기도지사 선거와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는 1기 신도시 건설과 재건축, 광역급행철도(GTX) 신설·연장, 군 공항 이전 및 국제공항 건설 등 후보들의 굵직한 개발 공약이 넘쳐나고 있다. 이 공약에 따라 해당 지역의 부동산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이에 비례해 비수도권지역 주민들의 박탈감은 커지기만 한다.비수도권 모든 지자체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는 기업 하나라도 유치하기 위해 올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경기도지사 후보들은 ‘수도권 공장 총량제 규제 완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국민의힘 김은혜 경기도지사 후보는 수도권 공장총량제를 ‘대못 규제’라고 비난하면서 경기도 이전 기업에 대해 과감한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다닌다.지역균형발전이 제대로 되려면 수도권에 집중되는 국가자산(일자리·교육·의료·교통·문화)을 규제하지 않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출산유도를 위해 아이 낳는 가정에 현금을 지급하고, 여기저기 도로를 넓히는 식의 대증적 요법으로는 지역균형발전은 요원하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를 균형적으로 배분하는 종합 대책이 필요하다. 수도권규제를 완화하면서 비수도권 균형발전을 도모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하다.이런 측면에서 새 정부가 현재 대통령 직속으로 있는 국가균형발전위원회와는 별도로 윤 대통령의 지역균형발전 공약을 챙길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기로 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는 문재인 정부 출신 인사들이 대거 남아있어 새 정부의 ‘지방시대 국정과제’를 적극적으로 챙기기는 어려울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관련, 김병준 전 인수위 균형발전특위 위원장은 “윤 대통령이 자신도 적극적으로 참여할테니 지역균형발전이 국민의 관심사가 될 수 있도록 외부포럼이나 학회가 적극적으로 연계해서 활동하라고 했다”며 대통령의 말을 전했다.지역균형발전을 범정부적 현안으로 추진하려면 특정기구에 맡길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공론화작업을 하는 것이 맞다. 지방소멸 어젠다는 청년들의 취업과 결혼·출산 문제에 직결돼 있기 때문에 새 정부는 반드시 이 문제를 국정과제 1순위로 삼아야 한다.

2022-05-24

WHO의 경고

우정구 논설위원 팬데믹(Pandemic)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선언하는 감염병 최고 경고 등급이다. 세계보건기구는 감염병의 위험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6단계로 등급을 구분한다.1단계는 동물에 한정된 감염, 2단계는 동물간 전염을 넘어 소수 사람에게도 전염된 상태. 3단계는 사람들 사이에서 감염이 증가한 상태다. 4단계는 사람들 감염이 급속히 확산된 경우고 5단계는 감염이 2개국 이상에서 유행하는 상태며 6단계는 다른 대륙국가에서도 유행을 보이는 상태일 때를 말한다.인류 역사상 팬데믹에 속한 질병은 14세기 중엽 유럽을 휩쓴 흑사병과 스페인 독감, 홍콩독감 등이 있다.살이 썩어 검게 되는 흑사병은 당시 유럽 전체 인구의 30∼40%를 몰살시키는 등 중세 유럽을 초토화한 질병이다. 1918년 발생한 스페인 독감도 전 세계 인구의 5천만명 이상을 숨지게 했다. 1968년 발생한 홍콩독감으로는 10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세계보건기구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75차 세계보건총회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은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종식되지 않는 한 어떤 곳에서도 끝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그는 “거의 70개국에서 신규 확진자 수가 증가하고 있다”며 가장 큰 위험 요소로 저개발국의 코로나19 백신 예방접종률이 저조한 것이라 했다.거리두기 해제로 코로나 경계심을 풀고 있는 우리에게 그의 발언은 주의를 다시 한 번 촉구한다는 점에서 새겨들을 만하다. 국내 최근 코로나19 확진자가 1만명대 밑으로 떨어졌으나 재유행 우려의 목소리도 여전히 많다. 유비무환의 정신이 필요한 때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5-24

몰라서 죽을 수도 있다

조현태 수필가 헛간 지붕 사각파이프 속에 참새가 둥지를 만들더니 어느새 새끼참새가 부화하여 날아 나왔다. 아직 부리 부분이 노란빛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소한 지 얼마지 않아 보였다. 내가 가까이 가도 도망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둥지에서 나온 세상이라 뭐가 위험하고 어떤 것이 안전한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마당에는 자전거 튜브를 때우기 위해 마련해 둔 물통이 있었는데 물 깊이가 약 십 센티미터 정도였다. 그 물을 마시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는 중이었다. 혹시 내가 유심히 보면 불안할까봐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 피해 주었다. 잠시 후에는 세 마리나 물통에 앉아 놀기에 그러나보다 하고 내 용무 보러 나갔다.약 두 시간 가량 용무를 보고 집에 와 보니 물통 주변에는 참새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예닐곱 마리 참새가 가정용 정미기 주변에서 떨어진 곡식들을 주워 먹는데 정신을 팔고 있었다. 평소에도 미강이나 왕겨가 나가는 곳에 참새들이 많이 붐볐으므로 흩어진 곡식을 알뜰히 찾아먹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그냥 웃어넘기며 아까 그 물통 옆을 지나다가 깜짝 놀랐다. 새끼참새 한 마리가 물통에 빠져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얼른 건져보니 이미 죽어 있었다. 새들이 물을 먹기도 하고, 물에 들어앉아 깃털 씻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많이 봤으니까 얘들도 그런 줄 알았다.겨우 10cm에 빠져 죽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이런 사고가 나고 말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새끼참새에게는 키 높이에 두 배가 넘을 깊이가 아닌가. 더구나 아무런 경험도 없었으니 누군가 거들어주지 않으면 혼자 해결할 줄 몰랐을 수도 있다. 그저 어미가 물을 먹으니 따라서 먹어 보았고 목욕을 하니 흉내를 냈을 수도 있다. 아차! 싶었으나 새끼참새가 이미 익사하고 말았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감나무 밑에 묻어주는 일밖에 없었다.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어 실수하거나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부족한 상황을 미리 짐작했어야 했다. 또 다른 새끼들이 물 먹으러 올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두면 안 될 듯했다. 수면에 닿을 수 있을 정도의 높이에 안전장치를 해야겠다 싶었다. 그러면 물을 먹으러 왔다가 빠져 죽지는 않을 것이다. 얼른 생각나는 것이 석쇠와 같은 철망이었다. 철망에 10cm 정도 되는 다리를 만들어 물에 넣어두면 될 터이다.사람 사는 사회에도 마찬가지다. 사고는 언제나 터진 후에 수습하고 나서 왜 그랬을까 고민하게 된다. 겪어보지 못한 일이나 처음 접하는 상황 앞에는 누구나 당황할 수 있다. 혹시 위험에 처하더라도 크게 다치거나 생명을 잃지 않도록 세상을 먼저 살아 본 사람이 가르쳐줘야 한다. 그래서 교육과 실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작게는 어린이를 비롯하여 크게는 정치지도자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부분을 나무라기 전에 알고 있는 사람이 가르쳐주어야 할 일이다. 협력하여 문제를 극복하는 사회구조를 우리 인간이 장악하고 영위해 나가야 할 일이다.

2022-05-24

5월은 가도 식구는 남는다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매일 함께하는 식구들 얼굴에서 / 삼시 세끼 대하는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 때마다 비슷한 변변찮은 반찬에서 / 새로이 찾아내는 맛이 있다 // 간장에 절인 깻잎 젓가락으로 집는데 / 두 장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 다시금 놓자니 눈치가 보이고 / 한 번에 먹자 하니 입속이 먼저 짜고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 나머지 한 장을 떼 내어 주려고 / 젓가락 몇 쌍이 한꺼번에 달려든다”창비청소년시선의 특별판으로 나온 시집 ‘너를 만나는 시 1’에 실린 유병록 시인의 시 ‘식구’의 1연과 2연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는 이 시는 시인이 고등학생 때에 쓴 작품이라고 한다.사춘기를 지나고 대학입시에 매몰되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에게 제 식구들이 얼마나 대단히 사랑스럽고 정겹게 다가오겠는가. 관심을 가져 주면 귀찮게 생각되고, 무심한 듯 대하면 또 서운한 나의 식구들. 고등학생 시인의 시선은 이 관계를 놀랍게도 정확히 포착하였다. 별생각 없이 각자 밥을 먹는 듯이 보이지만 밥상머리의 식구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깻잎을 떼어 주기 위해 젓가락을 내미는 손들의 주인, 시인은 “이런 게 식구이겠거니 /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 내 식구들의 얼굴이겠거니” 하며 심드렁하니 시의 마지막 연을 끝맺는다.나는 ‘가족(家族)’이라는 말보다 ‘식구(食口)’라는 말이 더 좋다. 원래의 한자 풀이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집(宀-움집 면) 안에서 기르는 돼지(豕-돼지 시) 무리(族)’라는 뜻을 가진, 일본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가족’이라는 말을 왠지 쓰기가 꺼려진다. 그래서 같이 살며 함께 먹는 입(그리고 여기서 더해 함께 자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 정겨운 말 ‘식구’를 더 즐겨 쓴다.유럽과 미국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부부간, 부모자식간의 애정 표현이 참 깊고 짙어 보인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어떤가. 오죽하면 부부끼리 짙은 사랑의 표현을 하려 치면 식구끼리 그러면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겠는가. 특별하지 않지만 매일 먹는 밥과 같이 늘 함께 있는 존재, 데면데면 지내는 듯 보이지만 희로애락을 끊임없이 솟아오르게 하는 샘과 같은 존재가 식구이다. 그래서 면전에서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내 삶의 원천이 되는 아내와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5월의 시간이 흐른다. 5일 어린이날, 8일 어버이날, 21일 부부의 날, 셋째 월요일 성년의 날, 게다가 스승의 날까지. 얇은 지갑을 더 얇게 만들고 괜히 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게 만드는, 어쩌면 가장들에게는 여느 달보다 조금은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는 가정의 달 5월이 가고 있다.올 초에 한 연예인이 식구 앞에서 지인의 깻잎김치를 떼어 주는 친절에서 비롯된 이른바 ‘깻잎 논쟁’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과하지 않아도, 곰살맞지 않아도 좋다. 무심한 듯, 심드렁한 듯한 친절을 내 식구에게로 돌리자.시인 박인환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5월은 가지만 식구는 과거보다 더욱 진득하니 현재도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사랑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2022-05-24

정치참여의 첫걸음, ‘투표’로 시작합니다

신성완 봉화군선관위 부위원장 지난 3월에 치러진 제20대 대통령선거에서 역대 최고 사전투표율(36.93%)을 기록했다. 사전투표율만 보면 선거에 참여하는 국민들이 엄청 많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제20대 대통령선거(77.1%) 투표율은 제19대 대통령선거(77.2%) 와 별 차이가 없다.우리나라는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고, 일정한 자격을 갖춘 유권자들이 선거라는 과정을 거쳐 대표자를 선출한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는 선거 과정의 공정성을 바탕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민은 투표를 통하여 주권자로서 권리를 행사함과 동시에 정치에 대한 자기 생각을 피력하게 된다. 문제는 선거가 거듭될수록 투표 참여율이 저하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낮은 투표 참여율은 선출된 대표자의 정당성을 약화하고, 소수 지지자를 위한 정책만을 추진하게 되고, 결국 정치 수준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려말 원 간섭기‘국지불국(國之不國)’(나라이되 나라가 아니다)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최근 정치나 사회를 부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이게 나라냐’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는데 과거와 현재 사회현상을 표현하는 두 단어가 미묘하게 닮아 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헬조선’이라는 말도 앞의 두 단어와 같은 의미라고 하겠다. 이쯤에서‘과연 나라가 아닌 나라, 헬조선은 누가 만든 것일까?’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오로지 정치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위정자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주변에서 ‘나는 정치에는 관심 없다’, ‘나와 정치는 별 관계가 없다’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정말 정치와 우리들의 삶이 관계가 없을까?예를 하나 들어보자, 주거·일자리 등 청년 정책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청년층에 대한 청치참여 확대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증가되고 있음에도 국회나 지방의회에서 청년의 정치대표성은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들이 원하는 실질적인 요구사항이 어느정도 정책에 반영될 수 있을지 충분히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정치가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만큼 나를 위한 정책을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자. 나라가 아닌 나라, 헬조선을 만든 것은 결국 우리들 자신이다.정치참여하고 하면 엄청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정치에 가장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투표’다. 지난 공직선거 투표율을 살펴보면 대통령선거가 대체로 가장 높고, 국회의원선거·지방선거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율은 56.8%,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율은 60.2%에 불과했다. 유권자에게 주어진 1표는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행사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건전한 민주정치의 발전과정에 참여한다는 주권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책과 지역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최적의 방안을 제시하는 후보자가 누구인지 그들의 정책을 꼼꼼하게 비교해 보고 더 많은 유권자가 이번 선거에 참여하여 정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기를 바라본다.

2022-05-24

올림퍼스의 노예들 <Ⅱ>

아비의 말을 어미가 가로막았다.-당신은 그런 허풍 좀 떨지 말아요. 당신이 그만한 돈이 있은 적 있어요? 돈은 쥐꼬리만큼 밖에 없는 사람이 일만 크게 벌여서는. 그거 감당한다고 당신은 몸으로 때우고 우리는 안 입고 안 먹어서 때우고.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지. 그건 그렇고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요?아비는 어미를 슬쩍 쳐다보고는 안나의 부은 손 등에 왼손을 얹었다.-안나 네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은 아니다. 사는데 정답이 있나. 네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는 건가 보다. 그 정도 되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너를 그리 대하지는 않았겠지. 자기 관리도 잘할 것이고.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 있으니 바람을 피우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어떤 방식이든 네 인생에 도움이 되겠지. 최 회장 정도 되면 꼬리치는 여자도 많았을 테고 어떤 여자든 만날 수 있을 텐데, 그게 너라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어쨌든 잘 모셔라.-지금 아버지가 되어서 딸에게 할 소리에요?어미가 아비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아비는 안나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덕분에 우리 집 형편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그건 정말 아니야. 나나 너의 엄마나 지금이 딱 좋다. 모자란 것도 더 가지고 싶은 것도 없다. 그저 너의 인생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너의 오빠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으면 더 좋을 것이고.아비가 말을 덧붙였고 안나는 손등에서 아비의 손을 들어 내렸다. 어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양반아, 가슴에 손을 얹고 이야기하소. 아이고, 이 미친 것아, 어디 할 일이 없어서.어미는 안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안나는 꼿꼿이 앉아있었다. 안나가 몸을 세워 버틴 탓이기도 했지만 어깨를 잡은 엄마의 힘 또한 밥주걱으로 손 등을 내리치던 그 힘이 아니었다. 아비가 안나의 손 등에 다시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안나야, 뭐라 말을 해 보거라, 네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아니라니까.노마는 안나의 뺨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우리 집 왜 이래요? 아빠가 그렇게 말하면 제가 고마워요, 하고 말할 줄 알았어요? 저 친딸 아니에요? 제가 부자 늙은이의 마이걸이 되어서 우리 집에 뭘 가져오면 되는 건데요? 지금 미리 말하세요.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노마는 안나가 왜 우는지 궁금했다. 아비가 손바닥으로 안나의 뺨을 올려붙였으면 안나는 웃었을까? 노마는 안나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딸을 부자 늙은이에게 팔아넘겨야 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힘든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안나가 마이걸이 된 것은 아니라 믿었다. 그럴 안나도 아니었다.다음 날 어미가 안나를 불렀다.-이왕 그렇게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잘해라.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으로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안나는 어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성실한 노동이 정당한 결과와 함께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안나의 아비는 ‘언젠가’에 가족들의 미래를 걸었다. 언젠가 개발될 것들, 언젠가 이용될 것들, 그리고 언젠가 대박이 날 것들을 찾아다녔다. ‘지금 당장 여기’가 중요하다고 가족들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지금 당장 조금의 이익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간다면 원하는 미래는 오지 않아. 다른 사람과 똑같은 미래를 가질 뿐이지. 우리는 달라야 해. 안나의 아비는 고집했다. 아비는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들고 ‘언젠가’를 쫓아다녔다. 심해의 광물 자원 개발, 성층권에서의 태양광 개발, 아프리카의 부동산 개발 등. 아비가 가진 재산은 ‘언젠가’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투자자들의 모임 어느 한 구석에라도 앉을 수 있으면 감사한 일이었다. ‘언젠가’는 번번이 아비를 배신했다. ‘언젠가’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것을 아비가 깨닫게 될 즈음 그의 호주머니에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지금 당장 여기’의 세계로 돌아온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참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가지겠다, 무언가를 이루겠다, 무언가를 물려주겠다를 버리니 마음도 몸도 편안해졌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탐하지 않는 한 다달이 들어오는 노년 기본 소득이면 충분했다. 이게 말이야. 투자한다고 돌아다닐 때는 푼돈처럼 보였는데 말이야. 나쁘지 않아. 아주 요긴해. 좋은 제도야. ‘언젠가’를 찾아 돌아다니지만 않는다면 개인용 차량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언제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공공교통수단들이 도처에 있었다. 그것도 공짜로.나이가 곧 돈이었다. 괜한 욕심을 내었어. 이렇게 편한 세상을 그저 살기만 하면 될 것을. 안나의 어미가 법적으로 노인이 되는 해를 손꼽아 기다릴 뿐이었다./ 김강 소설가

2022-05-23

깃발인가? 아니면 깃발을 그린 그림인가?

재스퍼 존스(Jasper Johns)의 작품 ‘깃발’은 1950년대 중반에 제작되었다. 작품에서 읽혀지는 이미지는 누가 보더라도 미국의 국기 성조기이다. 붉은 색과 흰색의 얇은 띠가 서로 교차하며 화면을 가로로 나누고 좌측 상단 짙은 파란색 배경의 사각형 위로 미국의 주를 상징하는 별들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다.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성조기의 별들은 모두 쉰 개이지만 재스퍼 존스의 작품에는 두 개가 빠진 마흔 여덟 개의 별들이 그려져 있다. 그 이유는 그림이 제작된 1950년대 중반에는 알래스카와 하와이가 아직 독립된 주로 편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재스퍼 존스의 깃발이 그려질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미술사조는 추상표현주의이다. 추상표현주의는 1940년대 중반 이후 뉴욕을 중심으로 확산된 미국 최초의 현대미술 움직임이다.대표적인 미술가로는 재스퍼와 운동감 넘치는 액션 페인팅의 잭슨 폴록, 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 정적이며 명상적인 화면을 보여준 색면추상의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 애드 라인하르트 등이 있다.추상표현주의를 통해 미국 미술가들은 유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새로운 추상형식을 선보이며 드디어 서구 미술의 흐름을 주도했다. 추상표현주의는 외부 세계를 모방하거나 재현하지 않기 때문에 비관계적, 비대상적, 반환영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회화가 철저하게 추상이기 위해서는 회화라는 매체의 순수성을 고수해야 하고 추상표현주의를 이론적으로 정립했던 그린버그와 같은 비평가들은 회화의 매체적 순수성을 평면성에서 찾았다.재스퍼 존스의 작품 ‘깃발’은 1950년대 중반 추상표현주의가 미국 미술의 주된 흐름으로 유행하고 있을 때 제작되었다. 존스의 작품은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추상표현주의에 내재된 수많은 미학적 담론들을 동시적으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에 순식간에 미국 미술계 중심 화두로 떠오르게 된다.재스퍼 존스의 ‘깃발’은 추상이면서 추상이 아닌 작품이며, 환영적이면서 동시에 비환영적인 평면 작품이다. 작품 ‘깃발’이 추상이 아닌 이유는 미국의 국기 성조기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것이 추상인 이유는 ‘깃발’을 구성하는 희고 붉은 색의 선과 별 그리고 사각형은 모두 기하학적인 도형이기 때문이다. 작품 깃발이 환영적인 까닭은 그림이 성조기를 떠올리고 성조기는 수많은 의미를 품고 있어서이다.하지만 동시에 이 그림이 비환영적인 이유는 이것이 실제 성조기가 아니라 원래부터 평면적인 성조기의 이미지를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재스퍼 존스는 자신의 작품이 하늘을 펄럭이는 실제 성조기가 아니라 성조기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그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파라핀을 녹여 그림을 그리는 납화법이라는 번거로운 제작 방법을 선택해 화면에 거친 질감과 얼룩이 그대로 드러나게 했다. 그림을 자세히 관찰하다 보면 화면 바탕에 신문의 글자들이 읽혀진다. 이 또한 화가가 자신의 작품이 성조기를 재현하거나 모방한 것이 아니라 성조기 이미지를 통해 추상표현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추상미술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는 신호로 이해된다.재스퍼 존스의 대표작으로는 과녁이나 지도, 숫자, 알파벳 등이 있다. 미술가가 소재로 취하는 대상들은 그 자체로 평면적이거나 추상적이라는 점에서 깃발에서 논의된 맥락들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추상과 재현의 경계에 위치한 존스의 이미지들은 주로 일상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미술사는 그의 작품에서 대중적 이미지를 수용한 팝아트의 출현을 예감하기도 한다./미술사학자 김석모

2022-05-23

사라지는 꿀벌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 꿀벌 실종 현상은 21세기에 들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군집 붕괴 현상의 하나로,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월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시작돼 3월까지 전라남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충청북도까지 북상하며 발생했고, 4월 들어 경기도 고양시에서도 관찰되는 등 전국적 사건이 됐다.전국적으로 77억여 마리의 꿀벌이 사라지면서 양봉업계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21세기에 들어 양봉 농가는 등검은말벌과 같은 외래 천적의 침입, 낭충봉아부패병과 같은 질병, 폭염과 집중호우가 반복되는 여름과 점점 더 더워지는 겨울의 특징을 보이는 기후 변화 등으로 꿀벌 개체 감소와 꿀 생산량 급감을 겪어왔다. 올해 꿀벌 개체 감소는 유례없이 큰 규모로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이런 가운데 일부 국내 기업들이 꿀벌 생태계 복원 사업에 나섰다. 한화그룹은 태양광 전력을 활용한 탄소저감벌집,‘솔라비하이브’를 개발해 꿀벌 4만 마리를 관리하기로 했다. 태양광으로 생산한 전력을 통해 벌통 안의 온도와 습도, 먹이 현황을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꿀벌의 천적이 나타나면 이를 감지해 침입을 차단하는‘보호 기능’까지 탑재했다. KB금융그룹도 사회적기업과 손잡고 꿀벌에게 먹이를 주는‘밀원숲’을 조성하기 위해 강원 지역에 헛개나무, 백합나무 등 10만 그루를 심기로 했다.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멸종하면 인류도 4년 안에 사라진다”고 경고했다. 농작물의 꽃가루를 옮겨주는 꿀벌이 없으면 식량도 사라진다는 의미로, 꿀벌이 생태계에 갖는 의미를 강조한 말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꿀벌의 실종은 궁극적으로 인류에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심각한 일이다. 국가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5-23

‘택소노미’

남광현 대구경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택소노미’는 그리스어로 ‘분류하다’라는 뜻의 ‘tassein’과 법·과학을 가리키는 ‘nomos’의 합성어인데, 우리말로는 ‘분류체계’라고 할 수 있다.‘택소노미’는 지난 2월 열린 대선후보 첫 TV토론회에서 이재명과 윤석열 대선후보간의 토론에서 RE100(재생에너지 100%사용캠페인)과 함께 크게 화제가 된 용어이다.대선토론에서 다루어질 만큼 앞으로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중요한 용어로 인식될 것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전문가만이 사용하는 난해한 은어라고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지난해 12월 환경부는 과연 무엇이 진정한 녹색경제활동인가를 판단하는 명확한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Taxonomy)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인해 여러 국가가 녹색회복을 위한 그린뉴딜정책 등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게 될 것인데 이 과정에서 녹색위장행위(Green Washing)를 걸러내기 위한 일환이다.녹색경제활동은 온실가스 감축, 기후변화 적응, 물, 순환경제, 오염, 생물다양성 등 6대 환경목표 달성에 기여하여야 한다. 6대 환경목표 달성과정에서 다른 환경목표에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며, 인권, 노동, 안전, 반부패, 문화재 파괴관련 법규를 위반하지 않아야 한다.지난 5월 초 발표된 윤석열정부의 국정비전과 목표, 110대 ‘국정과제’ 중 17번째 과제인 ‘성장지향형 산업전략 추진’에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소셜 택소노미’의 마련이 있다.‘소셜(Social) 택소노미’는 앞서 이야기한 녹색분류체계 즉 ‘그린(Green) 택소노미’라는 환경적 녹색 분류에서 나아가 인권을 포함하고 이해관계자를 고려한 사회적 목표로 확장하여 사회적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경제 활동이 무엇인지 분류하는 것이다. 양질의 일자리 제공, 최종 사용자에게 적절한 생활수준 및 복지 제공,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지역사회 조성이라는 세 가지 사회목표로 구성되어 있다.산업화와 도시화라는 인류문명의 변화과정에서 기후위기와 양극화 등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방해하는 위장행위(그린워싱, 소셜워싱)를 ‘택소노미’를 이용하여 걸러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윤석열 정부는 ‘K-택소노미’에서 제외된 원전을 다시 포함할 계획이다. 금년 2월에 유럽연합(EU)이 그들의 녹색 분류체계에 수많은 찬반격론을 거쳐 2050탄소중립을 위해서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 원전을 포함시킨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정부가 바뀌어도 2050년까지 탄소중립이라는 국제적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원전과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가 조화를 이룬 ‘에너지믹스(mix·전원 구성) 정책’을 성공적으로 펼쳐야 한다.지난 4월 말 발표된 ‘어디에 살든 균등한 기회를 누리는 지방시대’라는 윤석열정부 지역균형발전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15대 국정과제가 대구·경북에 실현되는 과정에서도 ‘택소노미’ 기준은 제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2022-05-23

기업에서 필요한 리더의 능력

김종찬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투자의 귀재라 불리며,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포함된 워런 버핏은 ‘독서를 이기는 건 없다’고 했다. 독서를 통해 실패든 성공이든 미리 간접경험을 하면서 가야할 미래의 어느 지점에 위험이 있는지 알 수 있으니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효과적인 작용을 할 것이다. 정보를 바탕으로 필요한 결정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 책을 먼저 읽고 소개해 주는 사람들 그들 모두는 소중한 선생이다.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지치기 된 맞춤형 책 소개를 통해 시간의 낭비없이 효율적으로 정보를 습득하는 것처럼 기업에서도 이렇게 가지치기 된 문제를 명확하게 정의해 어디에 시간과 돈과 노력을 써야 하는지 알려 주는 리더의 역할은 중요하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리더의 자질이자 능력에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하나는 문제가 발생되었을 때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다. 완성품 위주의 ‘고치는 품질 시대’에서 필요로 했던 능력이며, 드러난 문제만 해결하는 구조로 재발방지가 되지 않아 무결점 공장을 만드는데는 한계가 있다.나머지 하나는 ‘지키는 품질 시대’에 맞는 ‘문제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완성품이 아닌 그 원인을 제공하는 ‘공정 중의 품질관리’를 통해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며 사람이 아닌 시스템적인 것이다. 문제만 만들어져 있다면 그것을 해결해 줄 수단은 그리 어렵지 않다.바둑에서 알파고가 인간을 능가하는 모습을 생중계로 보면서 인간의 역할은 어디에 위치하게 될지 고민이 깊어진다. 인간은 점차 고립된다는 가설에 근접하고 있는 형국이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고, 성공스토리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시류에 편승하지 않으면 불안해 지는 시대에 살아가면서 리더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기업에서 리더는 조직이 나아가야 할 나침반 역할을 하는 지표를 설정하는 능력을 갖춰야한다. 어떤 업무를 하든 사실 일에는 두 가지 전혀 다른 성과지표가 필요한데 기업들은 지나치게 한 가지에만 치중한다는 것이다.하나는 ‘기술적 성과’로 표준과 전략에 맞추어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다. 식당에서 조리사가 칼로리와 염도를 정확하게 맞춰 조리하여 언제나 같은 맛으로 만들어 주는 성과가 여기에 속한다.다른 하나는 ‘임기응변적 성과’로 표준을 벗어나서 상황에 따라 적응하는 성과다. 조리사가 손님의 기호와 건강상태에 따라 다르게 응대하고 손님이 원하는 것을 읽고 대응하는 것이다. 신시장을 개척하거나 신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에 필요하며 직원의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한다.그런데 많은 기업의 리더들이 전자에 지나치게 편중된 훈련과 가치를 두면서 목표는 달성하는데 목적달성에 실패하게 되는 이유다. 경영학자들은 일본기업이 디지털 시대에 적응 못하는 이유도 비슷하게 설명한다. 아날로그 기술 시대의 품질관리와 개발 절차에서 변화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공공부문이 절차와 규정에 집착하는 것은 바로 ‘적응적 성과’에 우리 사회가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2022-05-23

스침과 스밈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연초록 수채화 같은 5월이 벌써 하순으로 접어들어 초목의 두터움 속에 어느새 초여름으로 치닫고 있다. 경쾌한 새소리가 새벽을 깨워주고, 정갈한 햇살과 훈향의 바람이 푸른 오월을 구가하고 있으니, 어디를 가거나 무엇을 해도 좋을, 그야말로 네 가지의 아름다움(四美)이 꿈결처럼 찾아드는 때가 아닐 듯싶다. 이른바 좋은 시절(良辰)에 아름다운 경치(美景)를 감상하고 마음껏 즐기며(賞心), 즐거운 일(樂事)을 더불어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언제부턴가/자명종 같은 새소리가 두드리면//깃 터는 아침이/선물처럼 다가와//샘솟는/환희의 빛살/온누리에 뿌리네//터질 듯한 음조로/하루를 탄주(彈奏)하느니//초목의 푸르싱싱/새들의 무정설법(無情說法)//오롯이/추임새 삼는/꿈을 향한 날갯짓” -拙시조 ‘새소리로 여는 아침’ 전문야산과 인접한 우거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온갖 새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새벽부터 재잘거리는 새소리에 하루가 시작되고, 밤하늘에 퍼지는 밤새 소리에 그 날을 마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새소리라 하더라도 참새처럼 그냥 짧고 가볍게 스쳐가는 지저귐이 있는가 하면, 뻐꾸기나 소쩍새처럼 구슬픈 듯 애틋하게 깊이 들리는 새들의 울음도 있다. 새소리의 음절이나 음색, 음역이 각기 다르고 사람의 청각으로 받아들여지는 느낌과 마음의 울림 정도가 저마다 상이하기 때문이다.흔하게 듣는 새소리가 이럴진대, 사람사는 세상에는 오죽이나 복잡미묘한 소리와 별의별 울림들이 난무할까? 자신의 주관에 따라 자기본위로 제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제 각각의 목소리를 내거나 들으며 살다 보면 자신의 음색과 비슷하거나 편안하게 어울리는 음률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즐겨 부르는 노래나 듣기를 좋아하는 곡을 선호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마음이 통하고 뜻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정을 나누며 공생가치를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같은 무리끼리 어울리며 서로 사귄다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은 결국 물이유취(物以類聚)나 초록동색(草綠同色)처럼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생각이나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스스럼없이 어울리게 된다는 뜻이다.시절인연(時節因緣)처럼 인생행로에는 인연에서 비롯되는 온갖 현상과 만남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부지기수 나타나고 만나는 사물이나 사람들은 대부분 돌차간 스쳐 지나는가 하면, 찰나의 마주침 속에서 부침하며 절로 스며드는 경우도 더러 있다. 물체의 공명으로 울림이 커지듯이 사람은 공감으로 투합이 많아지게 된다. 소통과 공감으로 상호관계가 합치될 수 있음은 동조와 합심으로 한배를 탄다는 의미이다. 건성의 비위맞춤이 아닌 진솔한 이심전심으로 마음에 스며든다는 것이다.풍파가 그칠 날이 드문 세상살이는 자신의 이해타산에 따라 이합집산이 많은 곳이다. 위선자의 가식적인 행위나 위정자의 언행에는 무릇 새소리만큼의 무구함이나 명징한 울림이 있기라도 하는 걸까? 스치면 인연, 스며들면 사랑이 됨을 명심하여 관계의 소중한 가치를 함께 누렸으면 한다.

2022-05-23

검찰개혁, 말 잘 듣는 검찰 만들기 아니다

김진국 고문 검찰총장 임기제는 1988년 12월 만들어졌다. 그해 13대 총선 결과 출범한 첫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는 정치개혁에 많은 성과를 거뒀다. 그 가운데 하나가 검찰총장 임기제다. 그만큼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87년 6월 항쟁의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다. 이 사건이 폭로되고, 실상이 드러나는데 검찰의 역할이 컸다. 경찰이 곧바로 사체를 화장하고 은폐하려 했으나, 최환 부장검사가 중앙일보 기자에게 흘려 기사화했고, 사체를 보존해 부검토록 했다. 이런 배경 속에 평민당 등 야당과 대한변협이 임기제를 밀어붙였다.그때는 검찰총장이 바로 법무부 장관으로 가는 것도 비판받았다. 김태정 검찰총장은 김대중 정부에서 임기 3개월을 남겨놓고 장관으로 기용됐다. 대선 직전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수사를 중단한 데 대한 보은으로 비쳤다. 비판 논리의 하나는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을 상하관계로 본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검찰총장이 재임 시절 정권의 입맛에 맞게 수사하고, 영전을 노리게 만드는 나쁜 선례를 남긴다는 것이다.그러나 이제 이런 문제를 거론하기도 민망하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에 대한 노골적인 정치적 압력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을 만들어냈을 정도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 총장이) “내 지시의 절반을 잘라먹었다”, “(윤 총장이) 장관의 지휘를/ 겸허히/ 들으면/ 좋게/ 지나갈/ 일을/ 새삼 지휘랍시고/ 해가지고/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고 한 음절씩 조롱하듯 강조해 말했다. 검찰총장을 정권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 사람’으로 규정해버린 것이다.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이 없는 상태에서 취임 하루 만에 검찰 인사를 대대적으로 한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더군다나 윤 대통령과 가까웠던 사람들을 한꺼번에 요직으로 복귀시켰다. 문재인 정부에 가까웠던 검사들은 모두 한직으로 쫓겨났다. 물론 문재인 정부에서 정치적 충성을 강요하며 인사권을 휘두른 걸 생각하면 왜곡됐던 검찰을 정상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한 장관은 “정치검사가 출세한다”는 야당 의원의 지적에 “지난 3년이 가장 심했다”고 반박했다. 추 장관 시절 검찰 인사에 대해 언론은 ‘윤석열 사단 대학살’, ‘윤석열 사단 학살 넘어 전멸’이라는 제목들을 달았다. 박범계 법무 때도 ‘윤석열 사단 거리두기와 친정권 검사 요직 배치’라는 제목이 나왔다. 윤석열 총장도 “나는 식물총장”이라고 했다.원인은 문재인 정부가 제공했다 하더라도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서는 나쁜 선례를 쌓아가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검찰이 한꺼번에 냉탕과 온탕으로 보직을 바꾸게 되면, 검찰이 정권의 눈치를 보고, 보이지 않게 정치에 개입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매우 중요하다. 수사권을 박탈한다면 그것이 검찰이건 아니건 수사기관의 정치적 중립이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경찰의 성격상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기가 쉽지 않다. 또 통제되지 않으면 민주당이 검찰에 대해 우려하는 이상으로 위험하다.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는 오랫동안 지적됐다. 정치의 중심을 국회로 옮겨야 한다는 논의도 전문가들 사이에 많이 이뤄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통령의 힘을 수평적으로 국회에, 수직적으로 지방정부에 더 나눠야 한다는 공감대는 만들어져 있다. 의회 중심 정치에서 가장 우려하는 게 부패다. 가뜩이나 국회의원에 대한 불신이 크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위해 더 큰 권력을 넘기려면 정치인의 부패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장치가 필수적이다. 검찰과 경찰에 대한 정치권의 압력을 줄이지 못하면 부패를 막을 수 없다. ‘장관의 지휘를/ 겸허히/ 들으면/ 좋게/ 지나갈/ 일을/ 새삼 지휘랍시고…’라는 식으로 조롱을 듣는 한 정치보복을 반복할 위험도 있다.윤석열 정부는 검찰이나 수사기관을 잘 안다. 검찰 권력을 되찾는 작은 조직의 이익에 그쳐서는 안 된다. 부패를 막을 수사제도 전반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할 진정한 ‘검찰 개혁’, ‘경찰 개혁’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본사고문

2022-05-22

사전투표로 공명선거 한 걸음 더

신효원대구 달서구 선관위 사무보조원 불과 두 달여 전 실시된 제20대 대통령선거에 이어 곧바로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될 예정이다. 지방선거 역시 5월 27일과 28일 양일간 사전투표가 진행된다. 지방선거는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교육감 선거, 광역·기초의회의원선거 등을 동시에 치르기 때문에 대선과는 달리 투표용지가 7장으로 늘어난다. 많은 선거가 동시에 치러지는 까닭에 선거 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예를 들어 사전투표를 전후하여 쟁점으로 대두되는 관심 중 하나는 “과연 사전투표가 투명한 선거권 행사를 보장하고 있는가?”이다. 사전투표 절차 과정에서 공정성과 투명성이 과연 보장 되는지 여부가 논란의 주요 내용인데, 제20대 대통령선거를 치르며 필자가 직접 경험한바 선거 과정에서 ‘공정성’과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한 많은 절차들이 있다. 사전투표의 취지는 본 선거일에 투표 참여가 어려운 선거인을 위해 선거일에 앞서 전국 어디서나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사전투표는 유권자들의 투표 편의를 공정하게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 집약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선거관리위원회는 많은 변수를 염두에 두면서 국민에게 최대한의 투표 편의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투명성’ 역시 철저하게 보장된다. 사전투표 진행은 사전투표관리관이 보관하는 보안USB와 공인인증서를 통해 인터넷 등 외부망과 철저하게 분리된 사전투표 전용 통신망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는 외부 프로그램의 해킹과 같은 만일의 상황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또한 각 사전투표소는 전국의 유권자를 하나의 명부로 전산화하여 관리하는 통합선거인명부를 이용하기 때문에 선거인의 투표소 간 이중 투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투표소에는 정당·후보자별로 1명씩 선정된 투표참관인이 있고, 투표 시작 전 사전투표 운용장비의 봉인 해제, 기표소와 기표용구 확인까지 모든 과정은 투표참관인의 참관하에 실시된다. 투표가 종료되면 사전투표 운용장비는 투표참관인의 서명이 날인된 특수봉인지가 부착되며, 투표함을 자물쇠로 봉쇄한 뒤 서명된 특수봉인지를 붙여 최종적으로 봉인한다. 봉인을 마친 투표함은 경찰의 동행 하에 관할 선거관리위원회에 인계되며, 선거관리위원회는 개표 당일까지 방범시스템, 출입통제시스템을 통해 보안을 유지하고 CCTV를 통해 24시간 감시하는 등 철저하게 투표함을 보관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일련의 절차들은 선거 절차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한 절차라고 할 수 있다.제20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의 경우 진행 과정에서 다소 미흡한 측면이 있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선거를 거울삼아 다가올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국민의 투표권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보장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유권자분들도 이러한 노력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시어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개개인의 소중한 권리를 꼭 행사해 주시기를 당부드린다.

2022-05-22